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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1. 더욱 아름다운 이름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4)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주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10) 또 주여 !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 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히1:1-14)

정치 개혁, 부정부패 척결, 민생현안 등은 뒷전으로 하고 치졸한 정쟁을 일삼으며 세비를 축내고 있는 정치권 등으로 잔뜩이나 답답하고 어두워진 우리들 마음을 한꺼번에 활짝 펴게 만든 한 젊은 유학생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지난 26일 저녁 7시경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군이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희생당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취객(사카모토씨)이 떨어진 곳은 이수현씨의 건너편 철로였음에도 그곳까지 달려가 구조하려다 희생당하므로 전 일본 열도를 감동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한국 사람은 일본 사람에 대해 적대적이다.'라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고 수많은 일본 사람들의 조문이 줄을 있는 가운데 일본 총리까지 장례식에 참석하여 "이수현 군은 일본 젊은이의 표본"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는 30일자 신문에 "목숨바친 의거 기리며 반성하는 일본"이라는 도쿄발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리고 이수현군의 홈페이지에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일본인으로써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당신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떠났다." "당신같은 사람이 있어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수현님은 세상에 큰 사랑을 심어주고 갔다."라는 등등의 수많은 글들을 올렸습니다. 일본 주요 신문들도 연일 고 이수현군의 의로운 희생을 사회면 톱기사로 대서특필하며 그의 한없이 높은 희생을 추모했습니다. 혹자는 이수현군의 의로운 죽음은 수 백명의 외교관들도 할 수 없는 너무나 훌륭한 일들을 해냈다며 그의 희생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일본 관방장관도 빈소를 방문하여, "수현씨의 죽음이 한일 친선을 높이는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며 "일본 정부차원에서 이씨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는 표창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수현군은 그의 의로운 희생으로 죽었지만 그의 인격은 살아서 한일 양국의 수많은 사람을 감동케하며 많은 것을 깨우치며 삶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시므로 인류 사회를 변화시켜왔으며 온 인류를 구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시대적 상황에 따라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 자신의 말씀을 전하여 백성들을 깨우치고 변화시켜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불의하며 부정과 부패로 타락 시대에는 아모스라는 선지자를 세워 사회정의를 부르짖어 하나님의 정의를 깨닫게 했습니다. 우상숭배와 음란 등으로 더럽혀진 사회에는 이사야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백성들에게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영적 음란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호세아 선지자를 세워 그 자신의 쓰라린 가정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그 사랑의 기적을 경험하게 만들고 그 사랑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예언자들의 생활 체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와 인격 등을 일부 부분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선지자들의 경험과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인격 전체를 파악하거나 경험할 수는 없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들과 역사 기록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진리를 단편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편들을 모아 하나로 엮으면 바로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대학 교수가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영접하기 위해 함께 놀아주던 아들에게 조금 시간이 걸리는 숙제를 하나 내주었습니다. 그것은 수 백개의 조각 그림으로 구성되어있는 세계 지도가 그려진 모자이크였습니다. 그것을 전부 흩트려놓고 다시 맞추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열심히 세계지도 그림 조각들을 맞추다가 그 조각 그림 뒷면에 그림들을 발견했습니다. 언뜻 보니까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세계지도 조각 그림을 맞추는 것보다 사람의 얼굴을 맞추어나가는 것이 훨씬 쉬운 것이어서 사람의 얼굴을 모습을 찾아 쉽게 그림 조각 전부를 맞추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 그림 모자이크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과연 세계지도가 완벽하게 완성된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얼른 아버지에게 숙제를 다했노라고 가져가 보여 주었습니다. 대학 교수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 아들이 그렇게 빨리 맞추리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그 방법을 물었습니다. 아들은 세계지도를 맞추지 않고 뒷면의 사람 얼굴 그림을 맞추어 쉽게 빨리 해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뒷면의 사람 그림은 바로 예수님의 그림이었습니다. 교수 아버지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신구약의 모든 단편 성경들은 모두 하나로 엮어 그림을 만든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복잡한 문제들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으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진리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진리 자체이며 진리의 전체이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격의 일부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진리의 어느 일면만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모(全貌)를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자기가 맡은 바 하나님의 진리의 일부분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인간이 되시므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이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보이는데 있어서는 예수님은 그가 하신 말씀이나 행동보다도 바로 그 인격으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모습을 확실하게 보이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의 십자가, 그리고 부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탄생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정의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진리의 승리와 생명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예언자들의 계시는 훌륭하고 다면적이기는 하나 그것은 아주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들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던 방법도 인간이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하시며 완전한 하나님의 자신의 모습을 나타나셨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언자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벗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그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 마음의 일부분만을 이해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중심 그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인격과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예수 십자가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진리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해하고 깨달으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지식이나 노력, 경험 등으로 하나님을 알 수도 볼 수도 없으며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가리워서 하나님께 갈 수도 볼 수도 알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과 실체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 친히 죽으심으로 죄를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실체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시기마다 자신의 뜻을 전달하도록 하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소돔 고모라 성을 유황불로 심판하시고자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 둘을 롯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잘 영접한 롯에게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내라...여호와께서 우리로 이 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천사들의 말대로 가족들을 이끌고 소돔과 고모라를 떠났을 때 그 성은 유황불로 심판을 받았고 롯의 가족들은 구원함을 받았습니다.(창세기 18:1-8, 19:1-23, 사도행전 7:53) 이런 일들로 인해 유대인들은 천사를 영적 존재 중 하나님 다음의 경외 대상으로 인식하여 숭배하기까지 했습니다. 천사는 어디까지나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자(使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를 숭배하는 것은 명백히 이단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도 이같은 천사 숭배의 이단 무리들이 있었는데 바울은 이들 이단에 빠지지 말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골 2:18)

이제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계시의 절정이자 완성이시므로 더 이상 계시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천사는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천사를 신성시하여 숭배하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천사와 예수의 비교를 통해 천사의 존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 깨닫게 함과 더불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고 믿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천사를 비교하여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세상에 둘도 없이 착한 사람을 가리켜 흔히 '천사'라고 부르지만, 천사라는 말은 단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자(使者)에 대한 호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며 하나님과 본질상 동일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천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며, 이제 세상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깨달을 필요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4,5절) 둘째,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드리는 자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예배의 대상이 되십니다.(6절) 셋째, 천사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때로는 바람으로 때로는 불꽃으로 쓰임을 받는 종들이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7절). 넷째,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만왕의 왕이시며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를 경배하는 자들을 부활 생명으로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천사는 왕되시는 그리스도를 수종드는 존재에 불과합니다.(눅 22: 43).다섯째, 그리스도는 인간들과 함께 하사 인간을 위해 용감히 사셨고, 의를 사랑하사 불법을 미워하는 흠 없는 삶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9절).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즐거움을 아셨기 때문에(9절)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겸손하게 복종하시기를 기쁨으로 하셨습니다(12:2). 그러나 천사는 인간들의 생각처럼 도덕적, 윤리적 모범을 보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섯째, 천사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지만(7절),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에 함께 하신 분으로(시 102:25-27).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통해 세계를 지으셨습니다(2절). 일곱째,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비할 바 없는 계시, 그분의 특별한 인성, 이루신 사역, 영원한 신성 등을 깨닫고 그 분을 찬양하는 우리들 중에 포함될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사 모든 자들의 찬양과 존경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빌 2:10: 계5:11,12).

천사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할 때 천사숭배 등 이단의 교훈에 빠지지 않고 "더욱 아름다운 이름의 기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천사는 세상의 창조 전에(욥 38:6,7) 신성한 형태로(유 1:6)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골 1:16).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천사는 다음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천사도 인간과 같이 지(벧전 1:12), 정(눅 2:13), 의(유 1:6)를 지닌 인격적 존재입니다. 둘째, 인간은 영과 육을 지녔으나 천사는 영만을 가진 존재입니다(14절). 셋째, 천사는 육이 없으므로 결혼하지 않으며(마 22:30) 따라서 종족 번식의 능력이 없습니다(막 12:25). 넷째, 천사는 영이므로 죽지 않습니다(눅 20:36). 다섯째, 천사는 하나님과 같이 무한한 지식과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인간보다는 월등한 지식과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마 24:36, 벧후 2:11). 그리고 이같은 천사들은 그 종류에 따라 다음과 같은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천사장 "미가엘"은 악한 영계(靈界)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일을 합니다.(단 10:13,21; 유 1:9: 계 12:7). 둘째, "가브리엘" 천사는 계시를 전달하여 해석하는 천사입니다.(단 8:16: 눅 1:19). 셋째,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수호하는 천사들을 말합니다.(창 3:24, 출 25:18, 삼하 22:11) 넷째, "스랍"은 인간을 하나님께 접근시키며 예배를 수종드는 일을 행합니다.(사 6: 2,3,6). 다섯째, "수호 천사"는 성도들과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일을 합니다.(14절, 마 18:10). 이처럼 천사는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고 시중드는 일 외에 다음과 같은 일을 합니다. 천사는 첫째,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고 알리며(눅 1:26-33, 눅 2:13), 아기 예수를 보호하거나(마 2:13), 그리스도를 수종들며(마 4:11),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께 힘을 북돋아 주기도 하며(눅 22:43). 예수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을 위해 무덤의 돌을 굴려 내기도 하며(마 28:2), 부활을 알리기도 합니다.(마 28:6) 둘째, 성도들을 보호하고 위험가운데서 지켜주기도 하며(14절, 고전 4:9; 딤전 5:21), 성도의 기도 응답에 관여하기도 하며(행 12:15), 성도가 전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며(눅 15:10 행 8:26), 사망시 의인을 돌보기도 합니다.(눅 16:22; 유 1:9). 셋째, 불신자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기도 하며(창 19:13; 계 14:6,7), 형벌을 내리기도 하며(행 12:23), 세상의 마지막 심판 때에 추수꾼으로 일하기도 합니다.(마 13:39).

그런데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자신이 재림주를 자처하여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의 집단이 이 나라에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 기독교의 참모습을 흐리게 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미혹케 하는 일들이 얼마 전에 보도적이 있었습니다. 모 중앙 일간지는 지난 12일자로 타블로이드판 <영계 리포트>를 발표해 불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고 경향신문 25일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총 16 페이지에 달하는 <영계 리포트>는 불교신자들에게 "수행길을 빨리 정리하고 하나님을 부모로 모실 것"을 종용하는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 리포트 중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통일교 영매자 김모씨가 받아 적었다는 "석가님이 영계서 보낸 메시지." "석가 부처가 새로운 통일원리(통일교가 가르치는 교리)를 청강한 뒤 몹시 괴로워하며 하나님 앞에 면목없다,"는 내용으로 일관돼 있습니다. "석가님이 영계서 보낸 메시지." 라는 제목이 붙은 내용은 총 10 여페이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경전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는 위대한 진리인 통일원리는 세계 4대 성인들이 청강했던 것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진리다.

◇석가님은 불교의 교주로서 불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점에 대해 한없이 죄송해하며 괴로워했다.

◇석가님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의 모습으로 영원히 산다 할지라도 감사한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이 존재하기에 나 석가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존재 세계의 모든 현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란 사실을 캐내지 못했다.

◇석가가 대단히 잘못한 것은 자아 발견 이후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 바르게 가르쳐 주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제부터 석가를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길 바란다. 부처 대신 하나님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바꿔야 한다.

◇영계에서 석가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통일교회 OOO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불교인들의 구원 운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석가는 대우주의 큰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인 것처럼 살았다. 석가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석가의 삶은 하나님 앞에 외도한 자식 노릇인 것 같다. 그의 가르침은 헛된 것이었다.

이같은 <영계 리포트> 를 두고 조계종 산하 종교편향대책위는 "앞으로 불교계 종단협의회 차원에서 해당 일간지 항의방문은 물론 책임 있는 자의 사과 요구와 민·형사상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국내 종교계의 심각한 파장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영계 리포트>를 자세히 뜯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는 그들이 내세우는 <통일원리>가 위대한 진리라는 것을 석가가 영계에서 보냈다는 메시지를 통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단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영계에서 석가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통일교회 OOO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불교인들의 구원 운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므로 통일교 교주를 하나님으로 둔갑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천사를 가장하여 숭배를 받거나, 자신이 재림주라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칭하거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부인하거나, 신구약 성경 66권 이외의 것을 전하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가 다 이단의 무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예수의 탄생을 통해 우리 인류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예수의 생애를 통해 삶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을 섬김으로 구원하시는 겸손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정의를 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 진리의 승리와 영원한 생명을 전하고 계십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아름다운 이름 외에는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나시고 성경대로 사시고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의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 진정 예수 믿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인류가 구원받을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구원하며 아름답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아름답고 구원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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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음의 고난을 인하여

(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5)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6)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7)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18)

뜻밖에 실직당했다든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든가,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 사고를 당했다든가, 그토록 사랑했던 가족이 죽었다든가 하면 한 순간에 몸과 마음과 영혼, 그리고 삶의 기반마저 송두리째 무너지는 커다란 위기를 겪게 되는데 이러한 고통을 당하면 그간 살아왔던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혼란과 허무에 빠지게 됩니다. 고통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구약시대의 욥인데 그는 의인이며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약탈당하고 종들마저 피살당하거나 불에 타죽고 게다가 자녀들마저 대풍에 집이 무너져 깔려 모두 다 죽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에 걸려 피고름이 흘러 기왓장 조각으로 긁어내는 견디기 어려운 질병에 시달렸고, 사랑했던 아내마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저주를 퍼붓고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욥을 위로하고자 찾아왔던 친구 셋은 위로는커녕 욥이 남모르는 죄를 지어서 그렇다며 오히려 욥에 대해 인신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욥의 이같은 극심한 곤고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한 말도 위로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욥 1,2장) 욥은 그 고통이 너무나 힘들고 견디기 어려워서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고통의 원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종교학자는 몇 개의 종교에서 밝히는 그 고통의 원인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힌두교에서 고통은 인간이 지은 업(業, karma)의 대가, 즉 업보(業報)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현생의 고통은 전생의 업보이며, 현생의 업은 내생의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업을 짓는 한, 인간은 과거-현재-미래를 순환하는 윤회(samsara)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 인간은 근본적인 어리석음(avidya)에 빠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업을 짓기 마련입니다. 결국 인간은 업과 윤회의 영원한 순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힌두교는 이 악몽과도 같은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참된 지식을 얻어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이지요. 참된 지식이란 바로 인간의 자아와 우주의 이법이 본래 하나라는 것에 대한 앎입니다. 그리하여 철학적 사색, 선한 행동, 신들에 대한 봉헌, 명상 수련 등을 망라하는 요가의 실천이 바로 참된 지식을 통해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는 방법으로 제시됩니다.

다음으로 불교는 고통에 대한 힌두교의 해답 체계를 계승하면서 그것을 새롭게 재구성했습니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사성제에 있습니다. 사성제란 인생은 고통이며(苦), 고통은 온갖 번뇌를 낳는 집착에서 생기기 때문에(集), 집착을 끊어야만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滅), 여덟 가지 바른 길은 이렇게 번뇌를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참된 길이다(道)'는 것입니다. 불교는 생노병사를 비롯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인생은 고통의 바다일 뿐임'(인생은 고해,苦海)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힌두교가 '어리석음'에서 고통의 원인을 찾은 것과 달리, 불교는 고통을 잠재우려고 하는 모든 '집착'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라고 보고 '어리석음'은 물론 '탐욕'과 '질시'를 포함하는 세 가지 독이 바로 그 집착을 일으키는 기제라고 여깁니다. 세 가지 독의 뿌리는 바로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집착이며, 인간은 이 집착으로 인해 인연에 따라 굴러가는 윤회의 바퀴 안에 유폐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벗어나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라는 인식의 망상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혜, 계율, 명상의 세 가지 배움을 통해 세 가지 독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 세 가지 배움의 구체적인 방법을 팔정도(八正道) 부르며 바로 바른 견해(正見), 바른 의지(正思), 바른 언행(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삶(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正念), 바른 명상(正定)의 여덟 가지 바른 길입니다.》

결국 힌두교나 불교는 고통을 스스로 노력하고 배워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힌두교와 불교에서 고통이란 요가나 참선을 통해 해탈하지 못하면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던 욥이 받은 고통은 의인(義人)으로써 받은 것이지, 그의 '어리석음'이나 물질, 권력, 혹은 '나'라는 존재에 집착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성경 욥기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의 고통은 이 세상에서는 의인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받은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의인의 고난을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의인도 드물게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의 범죄에 근본적인 고통의 원인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동산의 모든 나무 실과는 임의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를 어겼을 경우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뱀으로 가장한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결국 선과 악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숨기기 위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서로 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형벌을 내렸습니다. 이들 모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뱀에게는 배로 기어다니는 형벌을, 그리고 아담에게는 수고의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자연은 이들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하면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고통당하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그 고통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18-25)"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온 인류와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며", 그리고 사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그 범죄로 인한 고통과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 구약시대의 속죄의 제사입니다. 그 법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씩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 희생된 동물의 피를 가지고 휘장으로 가려진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의 제사를 지냈던 대제사장도 자신의 죄를 속죄 받지 못했을 경우는 그 지성소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 대제사장은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제사법전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서 오늘 성경 본문 17절에서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비하고 충성되며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어 온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14은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한 마디로 구약시대에는 동물의 피로 죄를 정결케 했으나 이제 예수께서 온 인류의 대제사장이 되어 자기 피로 인류의 죄를 정결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년 지성소에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필요가 없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의로우신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갈라져 온 인류를 향하여 열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사함받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시는 방법은 그의 십자가 고난입니다. 인간의 고통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에덴 동산에서 불순종한 인간에게 있으나 인간은 그 고통을 스스로 벗어날 힘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대신하는 길 외에는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직접 내려오셔서 인간의 모든 고통을 친히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똑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비방하고 모독하지만 선한 사람은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사람이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당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똑같은 미풍이 불어오지만 오물은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거룩한 기름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깁니다." 고통이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지만 사람에 따라 동일한 고통을 크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작게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하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추하게 보이기도 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며, 동일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악취를 풍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에게 싱그러운 향기를 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같이 고통스런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도 "행악자 중 하나는 예수를 비방하여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했는가 하면, 다른 행악자는 예수를 비방하는 사람을 꾸짖기를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 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자신을 뉘우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한 행악자에 대해 똑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향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 고통의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인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9,10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9,10절)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으로, 다시 말해 영광의 선구자(알케고스, archegos)로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알케고스>(archegos)인데 이 단어의 뜻은 "개척자, 창립자", "남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처음으로 길을 열어 주는 사람", "뒤따르는 자들을 위해서 선도의 불을 치켜 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배가 좌초되었을 때 선객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밧줄을 가지고 해변가까지 헤엄쳐 가서 밧줄을 붙잡고 남들이 해안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맨 처음 헤엄쳐서 해안으로 건너간 자가 안전의 <알케고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서 예수님이 우리들의 구원의 <알케고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예수께서 우리들이 뒤따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비추이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인류가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의 고난을 통해서 온전케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절) 예수께서 우리 인류의 구원의 개척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온전히 이룰 수 있게 된 것은 고난을 통해서였으며 그가 남들의 구원의 길잡이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던 것은 인간과 하나, 곧 일체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고난받는 인류와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우리와 같이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고난받는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을 것이며, 그렇게 해서는 결코 우리 모든 인류의 구원의 개척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방법을 택하셨던 것입니다."(제레미 테일러)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그 분이 고난받는 우리의 형제가 되시므로 우리 인간의 생각과 형편을 너무나 잘 이해하시고 우리를 동정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슬픔이나 괴로움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남의 슬픔이나 괴로움 따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경이 무딘 사람은 신경쇠약의 고통을 알 수가 없습니다. 늘 몸이 건강한 사람은 몸이 약한 사람이나 늘 병에 시달리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머리가 영리해서 무엇이든지 쉽게 배우고 익히는 사람은 이해력이 둔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슬픔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비탄에 빠져 있는 사람의 마음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생각지 않았던 갑작스런 사랑의 기쁨이라든가 마음속으로부터 아프게 느껴지는 고독이라는 것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인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받는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슬퍼하고 있는지, 어떠한 유혹에 빠져 있는지, 무슨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알고 계시며 때문에 우리를 진실로 도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십자가 고난을 자취(自取)하신 이유는 바로 고난받는 인류를 도와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고난의 진리입니다.

영화를 보다가, 길을 가다가, 잠을 자다가,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문득 문득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저만치 멀리만 있을 것 같은 죽음, 내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 같은 죽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오지 말아야 할 죽음. 그러나 죽음은 말없이 우리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컴컴한 어둠 속에서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양쪽이 모두 절벽이었습니다. 조심스레 걸을 가고 있던 그는 그만 돌에 걸려 한쪽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떨어지다가 나무 뿌리를 손에 잡게 되었습니다. 그 뿌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그는 필사적으로 '사람 살려'를 외쳤으나 그 밤에 그 곳에 사람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얼마동안을 소리쳤을까. 이윽고 힘이 다 빠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그 나무뿌리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떨어진 걸이는 겨우 1미터 높이밖에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나무뿌리를 놓치면 죽을 줄 알고 그토록 두려워 떨며 발버둥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빨리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온갖 의약품에 매달립니다. 또한 자식이 아프면 점장이에게 찾아가 그 병을 물리치게 해달라고 하며 미신에 의지합니다. 그만큼 죽음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며 일생동안 여유와 안식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찬 복음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주이신 예수께서 이 죽음을 극복하시고 죽지 않을 영원한 몸을 입으신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분은 이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몸소 죽을 몸을 입으시고 죽음을 맞으셨고 급기야 죽음을 이겨내시어 우리에게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영광이요 갚을 길 없는 은혜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얻게 되면, 당하는 고통이 불행이 아니라 장차 누릴 축복과 행복의 시작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얻게 되면, 당하는 고통이 슬픔이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이 됩니다. 하늘의 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얻게 되면, 당하는 고통이 삶을 비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단련하여 정금같이 되게 하여 영광과 존귀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아 여러분의 삶의 모든 고통을 깨끗이 씻어내어 존귀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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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3:1-14)

인간은 본래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로 말미암아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고 하나님과는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인간이 꿈꾸어온 세상은 잃었던 낙원을 회복(유토피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낙원을 회복하거나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 율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율법을 잘 듣고 순종하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된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과 단절된 세계 모든 인류를 연결시켜주는 다리(pontifex)와 같은 역할의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율법)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선민이라는 의식 속에 배타적 민족주의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율법 자체도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온 인류를 위한 제사장(pontifex) 나라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을 가리켜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라고 하는데 이는 "교량(다리)를 세우는 자"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 나라가 되어 온 인류에게 낙원(유토피아)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다리 역할에 실패한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수여하시고 그 율법을 잘 지키게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대로 에덴 동산에서처럼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는 삶이 되게 하시겠다는 데 그만 그 율법에 불순종하여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세계 최고의 것입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며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생사화복을 율법에 두고 사는 민족이 유대인들입니다.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받은 모세이기 때문에 모세와 율법과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율법의 대표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특별한 위치에 있습니다. 모세만이 하나님과 대면해서 친구처럼 말을 주고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11)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처럼 온 인류를 하나님 나라에 인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 교회에 사환(종)으로 충성했을 뿐"이었지 교회(이스라엘)를 이끌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이끌어 온 인류를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충성을 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다리(폰티펙스,pontifex)가 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외에는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율법은 사실상 죄를 정하고 정해진 법에 따라 죽이는 법이지 살려내는 법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운 죄악을 덮어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신 것처럼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인간의 죄를 잠시 덮어두는 역할에 불과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범죄한 인간의 죄를 율법에 따라 정하고, 속죄함을 받기 위해 율법의 정한 바에 따라 동물의 희생제사를 드리게 함으로 그 죄악을 덮어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온 인류의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따라 죽이는 법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인간을 살려내시므로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하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죄 가운데서 살리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에 불과 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사는 자들은 의와 생명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 아래 사는 자들은 의와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다리들이 있다해도 그 다리들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생명에 이르게 못합니다. 세상에 위대한 인물들이 많다해도 그들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생명에 이르게 못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법들이 있다해도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생명에 이르게 못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국문이 열리자 사람들의 영혼이 일렬로 하늘 재판정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장 먼저 유대 랍비가 나왔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율법에 밝습니다. 저는 밤낮 하나님의 말씀을 팠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잠깐만"하고 기록하는 천사가 소리쳤습니다. "먼저 우리는 조사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말씀을 공부한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당신은 공부 그 자체를 위하여 몰두했나요? 아니면 명예나 돈을 위해서 했나요?" 다음에는 성인이 나왔습니다. "내가 세상에 살 때에는 얼마나 많은 금식을 했던가요? 나는 360가지 종교적 의무 사항을 꼼꼼히 다 지켰습니다.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목욕재계했고 쉬지 않고 신비를 공부했습니다." "잠깐만"하고 기록하는 천사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그렇게 한 동기를 먼저 조사해 봐야 합니다." 다음에는 여관 주인이 나왔습니다. 그는 단지 이렇게만 말했습니다. "나의 문은 집 없는 사람에게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려움에 처하고 굶주린 사람들은 누구든지 먹여주었습니다." 이 말은 들은 천사가 말했습니다. "천국문을 열어라. 이 사람에 대해서는 더 조사할 게 없다." 여기 여관 주인은 율법을 몰랐어도, 그리고 금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어도 그는 율법을 다 이루며 살았던 사람이었고 남을 위해 금식 이상 가는 고통을 감수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천국의 문은 율법이나 금식 등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고 예수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삶을 보여주신 것은 예수 믿고 예수처럼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이 예수를 믿지 않거나 거역하거나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아무도 의와 생명에 이르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고 애굽을 떠난 것을 후회하며 다음과 같이 원망 불평을 퍼부었습니다.

"(3)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 뻔 하였도다 (4)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 (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수기 20:3-5)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사람들을 모으고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우게 했습니다." 반석에 명하면 물이 솟아 나오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도 모세는 자신과 다투어 자신을 공박했던 백성들에 대하여 화가 치밀어 그만 반석에게 명령을 하지 않고 반석을 지팡이로 내리 쳤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반석에서 물은 솟아 나왔지만 모세와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불순종의 형벌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민수기 20:12,13)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역사적인 교훈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고 아직 생명이 있을 동안에 마음을 완악하고 강퍅하게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온 인류의 소망입니다. 이 가나안 땅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합니다.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소망을 두고 생명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 생활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해도 원망 불평하며 불순종하면 결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을 시간이 앞으로 넉넉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뒤로 미루어도 될 만큼 앞으로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종말이 자신과는 너무나 멀리 있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끊어지는 날이 종말입니다. 인생은 그 종말이 언제 올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쉽사리 내일에 대해서 말하고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내일이라는 것이 꼭 온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은 오늘, 바로 이 순간뿐인 것입니다. 어느 누군가는 "하루를 마치 일생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는데 예수 믿으라는 말씀을 뒤로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오늘 여기서 받아들여야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가나안 땅은 약속되어 있지만 내일은 약속되지 않았고 보장되지도 않았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그러나 예수 믿고 그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오늘 가나안 땅을 보장받게 됩니다.

어느 유명한 화가가 초대를 받아 한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마침 그 가정에 있는 어린 삶의 생일이었습니다. 저녁 식사가 차려지자 그 어린 딸은 얼굴에 기쁜 웃음을 함빡 머금고 그 날 생일 선물로 받은 조그맣고 예쁜 부채를 손님들에게 자랑하였습니다. 그 화가는 어린 소녀에게 줄 선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는데 그 어린 소녀가 하는 모양이 하도 귀여워 무언가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품에서 펜을 하나 꺼내서는 그 어린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이 아저씨가 네 부채에 예쁜 그림을 하나 그려 넣어 줄테니 그 부채 좀 이리 주지 않겠니?" 그러자 그 어린 소녀는 금새 웃음을 멈추고 부채를 등뒤로 감추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양이 귀여워 화가는 다시 한번 부채를 달라고 하였으나 그 소녀는 부채를 손에 꼭 쥔 채 자기 방으로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일 소녀가 이 화가의 정체를 알았더라면.... 그래서 그 부채를 이 화가의 손에 맡겼더라면 그 날 그 소녀는 큰 행운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만 거부하고 만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자기가 지니고 있던 어느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주님의 음성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비우고 주님의 음성을 받아들이며 마음을 강퍅케 하지 않을 때 그는 이전 것에 비교할 수 없는 크나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 믿으시고 가나안 땅,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경험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증거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시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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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 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4)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브리서 4:1-13)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던 조건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동산 숲나무 사이에 숨어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미 안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영원한 안식의 땅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 인간에게 주어진 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덴 동산에서와 같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출31:12-17)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늘에서 만나라는 양식이 매일 매일 내려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아침마다 그날에 필요한대로 만나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조금 편하자고 욕심내어 이틀 분을 거두어 보관해두면 여지없이 벌레가 생기고 지독한 냄새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육일 곧 안식일 전날에는 평소의 갑절을 거두어 보관했다가 다음날 먹어도 벌레도 생기지 않았고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안식일에는 양식을 거두러 나갔어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날은 여호와의 거룩한 안식일이어서 하늘에서 양식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이 조금 편하자고 욕심을 내어 거두어들인 것은 벌레가 생기고 지독한 냄새가 나서 결국 먹을 수 없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안식일 전날에 갑절을 거두어들인 것은 아무 탈없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출애굽기 16장) 이러한 광야생활을 해왔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것을 안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무려 430년간이나 노예 생활하다가 해방되어 자유인으로 새 출발했으나 광야 40년간의 방랑생활은 참으로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곳에서 정착해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안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달동네 사글세방을 전전하며 주인 눈치보느라 마음한번 편히 지내지 못하다가 수 십년만에 어렵사리 산동네라도 제집 하나 마련하게 되면 이제 더 이상 이사보따리 싸지 않아도 되고 주인 눈치볼 것도 없어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민 생활을 하는데 먹고 사는게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에 들어갔으나 주위의 대적들의 위협 가운데 있었으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생해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착은 진정한 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본서의 저자는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8절)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을 때 주어진다는 것이고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은 그에 대한 그림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에서의 70년 포로생활 끝에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그 땅은 황무하여 의식주 생활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가난을 벗기 위하여 안식일에 또 일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책망합니다.

"나의 거룩한 날에 돈벌이하느라고 안식일을 짓밟지 말라. 안식일은 '기쁜 날' 야훼께 바친 날은 '귀한 날'이라 불러라. 그날을 존중하여 여행도 하지 말고, 돈벌이도 말고, 상담 같은 것도 하지 말라."(이사야 58:13-14, 공동번역)

그 후 이스라엘 자손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데 대한 뼈아픈 징계를 교훈삼아 지나치리만큼 엄격한 안식일 규정을 만들고 철저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는 밥을 지어먹는 것도 일에 해당되므로 안식일에는 밥을 해먹어서는 안 된다, 안식일에는 가축이 구덩이 빠졌다해도 건지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된다는 등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안식일 논쟁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걸으면서 밀이삭을 손으로 따먹었다는 것이 시비가 되었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이 또한 시비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런 안식일 규례를 비판하셨습니다. 안식일 규례가 백성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기보다는 하나의 멍에와 굴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

예수님은 지적하신 중요한 점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겼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일이면서 그것은 동시에 사람을 위한 안식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그 날 자체보다도 일을 쉰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엿새 일하고 하루를 쉰다는 것의 의미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쉬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뜻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데 진정한 안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밀이삭도 따먹지 않고, 병자까지도 고치지 않으므로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으나 이들은 실제 하나님과 사람을 이용해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참 뜻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이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있음에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 바리새인들은 사람과 종교를 이용하여 자기 배를 채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보다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자기 욕심을 따라 쉬어야 할 때 쉬지 않고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하였음에도 '조금 더 편하고자, 남보다 더 잘살아보자고 안식일에도 일을 계속했습니다.(출애굽기 20장) "6년 동안은 땅을 다스려 농사를 짓되 제 7년에는 그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하라 이는 땅의 안식년이니라"(레위기 25장)고 말씀하셨음에도 '조금 더 편하고자, 남보다 더 잘살아보자고 땅을 갈아 먹고 안식년에도 일을 계속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해 벌어들인 돈으로 땅을 더 사들이고, 안식년까지 계속 일하여 이제 대지주가 되었습니다. 돈맛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본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너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해 즉 49년 다음해를 희년(喜年)으로 거룩하게 지켜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희년에는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은 물론 그간 사들였던 모든 땅을 아무런 조건없이 무상으로 원 주인에게 돌려주라 그리고 노예들까지도 무조건 자유를 주어 해방하라"(레위기 25장)고 하셨지만 이미 자본을 겁없이 축적한 거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돈 되는 것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안식년을 무시해버린 인간들로 인하여 자연과 환경은 형편없이 파괴되고, 경제적 평등 생활을 위한 희년제도는 자본주의의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날이 갈수록 빈익빈 부익부의 불균형 속에 인간의 기본권마저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이루어진 산업혁명은 노동착취의 산업사회를 형성했고, 이 산업사회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시대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환경은 오염되고 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하였으며, 휴식을 잃어버린 자연계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조금 더 편하자고 남보다 더 잘 살아보자고, 남보다 더 빨리 부자가 되고자' 안식일을 범하고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던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함께 오염되고 파괴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떠난 인류에게 진정한 안식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제정하신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제도는 지금도 유효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떠나서는 결코 안식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안식을 위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안식을 위해 광야시대의 안식일 제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출애굽기 16:16:18)

"각 사람의 식량대로 거두어 보니...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이같은 분배정의가 이루진 사회는 초대교회였습니다.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사도행전 2:44,45)

여기 주어진 말씀들을 보면 한 마디로 남보다 더 잘 살아보려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근본 정신은 경제적 평등, 분배정의에 있습니다. 또한 인간과 더불어 자연 모두가 다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부자가 되려는 마음,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성경 교훈은 이렇습니다.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까마귀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또 그들에게는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누가복음 12:24)

까마귀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나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중을 나는 까마귀는 곳간이나 창고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려는 욕심이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곳간이나 창고가 없다"는 것은 내일을 위한 자본의 축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까마귀보다 훨씬 더 귀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먹이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보다 부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곳간이나 창고를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곡식을 창고에 쌓아 두는 것은 남이 먹을 것까지 빼앗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곳간이나 창고를 없애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 말씀은 인간으로 하여금 곳간이나 창고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어떤 부자가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기존의 곡간을 헐고 더 크게 곡간을 지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누가복음 12:16-21) 곳간에 먹을 것을 잔득 쌓아 놓았던 사람들은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곳간은 헐고 하늘 나라에 곳간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돈벌이에 정신없이 살지 말고 인간의 영원한 안식처인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재물 축적을 통한 인간의 안식은 순간에 불과한 것이지 영원한 것이 못됩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안식을 위해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고 남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자신은 가난하게 되신 예수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남보다 높아지려 하지 말고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드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남보다 잘 살아 보려거나 남보다 높아지려는 것입니까? 예배와 기도생활을 통해 세례 요한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는 예수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내가 부자가 되어 네가 가난해지기보다 내가 가난해서 네가 부자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네가 높아지는 것이라면 나는 낮아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나는 망해도 너는 잘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마음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예수의 삶 속에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그 분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무한 속도 경쟁을 벌이는 현대는 속도를 장악한 사람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나온 인류 역사의 흐름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북방 초원 기마군단의 속도(보병의 5배)를 장악하여 느림보 농경민족 군대를 무찌르고 세계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 증기기관으로써 산업혁명을 일으켜 대제국을 건설한 영국, 내연기관(엔진)의 힘을 기갑군단의 돌파력으로 전환시켜 전격전을 일으킨 독일, 가장 빠른 비행기와 미사일로써 현대의 로마제국을 이룬 미국, 이제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펼쳐지는 정보처리의 속도전 등 가장 빠른 기마부대, 가장 빠른 함대, 가장 빠른 탱크부대, 가장 빠른 전투기를 만들어낸 나라는 예외없이 초강대국이 되었고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속도는 많은 힘과 일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물리법칙에 의하면 힘은 질량에는 비례하고 속도에는 그 제곱에 비례한다). 즉, 속도를 장악하면 많은 힘을 낼 수가 있고 그 힘으로써 주어진 시간 안에 많은 일들(건설 또는 파괴)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달리고 빨리 일하고 그리하여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시간을 늘리는 것이요, 오래 사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동성은 건설이요, 창조이며 장수(長壽)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문(自問)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왜 빨리 달리려고 하는가. 무엇을 향하여. 또 다른 분주함을 향해서인가, 향락과 소비를 위해서인가, 속도 그 자체의 짜릿한 쾌감을 위해서인가, 죽음을 향해서인가, 아니면 여유와 창조·안식을 위한 질주인가.(월간 조선 6월호) 이에 대한 기독교의 답은 인류 파멸을 향한 질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를 질풍노도처럼 초고속 질주하여 가나안을 점령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 길을 걷게 하시며 하늘에서 '만나'내려 먹게 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신명기 8:2-3) 남보다 빨리 부자가 되려는 마음, 남보다 한 발 앞서서 지배하려는 마음,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즐기려는 마음, 이를 위한 인간의 무한 속도경쟁은 결국 인류 파국을 불러 올 것입니다. 무한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생각을 버리면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면 우리는 다시 안식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편안하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버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의 진정한 은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쾌락을 누리며 살겠다는 마음을 버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의 기쁨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십시오. 오늘날의 안식일은 주일을 성수(聖守)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이 시대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밖에는 진정한 안식이 없습니다. 이제 분주하고 정신없는 삶에서 벗어나 예수 믿고 예수의 삶을 배우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의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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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브리서 4:14---5:1-10)

1.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아담(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고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아담, 가인과 아벨, 노아 그리고 아브람 등은 모두가 그 <자신이 제사장>이 되어 자신의 속죄함을 위해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출애굽 당시에는 가장(家長)이 그 <가족의 제사장>이 되어 가족전체를 위한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 이 어린 양을 취할찌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출12:3) 이것이 좀 더 발전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구별된 한 지파를 하나님께서 지명하시고 그 지파 중의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나라의 대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사람이 바로 아론이었습니다.

(1)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출28:1)

아론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이전까지의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했던 사람은 모두 8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대제사장을 세우신 목적은 모든 나라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려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중보자의 역할을 하도록 함이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세계 모든 인류를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 생명의 다리를 놓아야 했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을 "교량(다리)를 세우는 자"를 뜻하는 폰티펙스(pontifex)라고 불렀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배타적 민족주의적인 선민의식에 빠져 제사장 나라의 사명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80명이나 되는 대제사장이 있었지만 전 인류를 위한 제사장의 사명을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에 오셔서 온 인류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나라"(히브리서 7:23-25)

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끝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므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전 세계 모든 인류를 위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에 오셔서 온 인류 구원을 위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죽음을 인하여" 대제사장 직분을 물려주실 필요도 없고, 그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대제사장 직분을 사람으로부터 물려받으신 것도 아닙니다. 또한 구약시대처럼 인류의 속죄를 위해 수많은 동물의 희생제사를 드릴 필요도 없는 것이 예수 자신이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는 항상 살아서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을 위하여 대제사장으로서 속죄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7:25)

2. 대제사장의 직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단 한 차례 대속죄일에 휘장으로 가려진 지성소에 들어가 온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된 동물의 피를 시은소(施恩所, 언약의 법궤)위에 뿌렸습니다.(레위기 16장) 이러한 속죄 의식(儀式)을 행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할 일은 먼저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의식(儀式)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자신을 먼저 깨끗케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거룩한 직책을 맡은 자라 할지라도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롬 3:10; 요일 1:8,10).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필요가 없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는 죄된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으나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 없이 휘장을 열고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온 백성을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지성소에 가져간 피는 십자가에 흘리신 자신의 피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온 인류의 죄를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속죄하는 죄가 전혀 없으신 거룩한 피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드리워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온 인류에게 활짝 열려진 것입니다(마 23:51).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열려진 휘장을 통해 누구든지 은혜의 보좌(施恩所)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4:16). 다시 말해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희생당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단번에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3. 온 인류의 속죄를 위한 대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영원히 씻어낼 수 있는 희생의 제물은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예수는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대제사장이십니다. 어떠한 인간도 인류의 대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인류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되신 예수를 받아들이시고 거부하거나 거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세 당시 대제사장을 탐내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흔적도 없이 땅이 갈라져 삼킨 바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건의 주모자는 <고라>인데 모세의 친사촌으로서 성막(聖幕)을 봉사하고 관리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와 신분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제사장의 지위를 욕심내어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 똑같은 레위 지파 출신인데 아론만이 제사장이 되고 자신은 성막 관리와 각종 봉사의 일을 맡은 것에 불만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소 모세의 지도자 권한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다단, 아비람, 온 및 250명의 족장들과 결탁하여 반역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당대의 지도자가 된 것이나 아론이 대제사장이 된 것은 선거로 된 것도 아니고 인간적인 공로나 성품 때문에 된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위임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지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지도자가 된 사람이나 대제사장이 된 사람에 대한 불평불만과 반란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한 교만한 처사로서 신약성경은 이를 가리켜 '고라의 패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유 1:11). 고라 일당의 반역에 직면한 모세와 아론은 자신의 직분에 대해 변호하려 하지 않고 그 모든 상황과 결과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겼고, 하나님께서는 고라 일당에 대해 진노하셨습니다. 결국 고라 일당은 땅이 갈라져 산채로 매장되거나 불길에 삼켜지고 말았습니다.

(32)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속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33)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34)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35)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인을 소멸하였더라(민수기 16:1-50)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직임을 위임하십니다. 이에 대해 인간이 불만을 표시하거나 그 위임된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정면 배치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뿐입니다(롬 9:19-21).

암탉, 새앙쥐, 토끼가 한 집에서 사이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일을 서로 나누어했기 때문에 언제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토끼는 음식을 만들고, 암탉은 땔나무를 해오며, 새앙쥐는 가까운 시내에 가서 물을 떠오는 등, 그들은 모두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성의를 다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암탉이 나무를 구하러 숲 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어디선가 참견하기 좋아하는 까마귀가 날아왔습니다. "무얼 하려고 그러니?" 암탉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두 친구가 물을 긷고 음식 장만을 하는 동안 땔나무를 구해 가려고 해." 그러자 까마귀는 대뜸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넌 셋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을 말고 있구나? 그 두 친구는 네가 하는 일에 비한다면 정말 맘 편하게 먹고사는 거지" 까마귀의 말을 듣는 순간, 암탉의 마음에는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나뭇짐을 지고 돌아오는 길이 예전처럼 가볍고 즐겁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는 불평불만이 치밀어 올라 나뭇짐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참다 못한 암탉은 꼬꼬댁거리며 친구들에게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가장 힘든 일을 해왔어! 이제는 우리가 하는 일들을 서로 다 바꿔야 할 때라고 생각해!" 아시다시피 불만이란 전염되기 쉬운 병입니다. 곧 토끼와 새앙쥐도 자신들이 더 힘든 일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을 바꾸자는데 동의하여 요리는 새앙쥐가 하고, 토끼는 나뭇가지를 모으며, 암탉은 물을 떠오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겠습니까? 토끼가 숲 속으로 깡충깡충 뛰어가는 것을 커다란 여우 한 마리가 보고 그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끼는 여우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암탉은 양동이를 들고 시냇가로 갔습니다. '흥! 물을 떠오는 일쯤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양동이를 물에 집어넣는 순간 빠른 물살이 밀려와 양동이와 함께 암탉은 급류에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한편 새앙쥐는 식사 준비가 다 돼 가는데 친구들이 왜 안 돌아오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다리다가 배도 고프고 해서 펄펄 끓는 커다란 죽 남비 곁에 앉아 있던 새앙쥐는 깜박하는 사이에 그만 균형을 잃고 끓는 냄비 속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이 사람에 따라 크게 보이든 작게 보이든, 혹은 귀하게 보이든 천하게 보이는 하나님께 맡기신 것이기 때문에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맡겨진 일에 대하여 불평불만을 하고 맡겨진 일을 거스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권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오직 파멸만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으로부터 물려받은 대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대제사장이십니다(요일 4:9,10). 그러므로 예수는 인류 구원을 위해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뜻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그 험한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은 온 인류 구원을 위한 제사장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분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구약시대에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사람은 회막 문, 즉 성전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라고 했습니다.

"(4)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출29:4)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무엇보다 깨끗하게 함을 입어야만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물로 씻었지만 이 시대에 죄를 씻는 것은 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물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함을 입는 것을 말합니다.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15:3)

"(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편119:9)

다음으로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거룩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 거룩하게 하는 의식은 피로써 했습니다.

"(20) 너는 그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그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출29:20)

"귓부리에 피를 바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민감하게 들을 수 있도록 성별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엄지 손가락에 피를 바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살며 하나님의 뜻을 으뜸으로 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엄지 발가락에 피를 바른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걸으라는 것으로 자신의 유익보다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깨끗함과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했을 때 온 인류를 구원하는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예수 십자가의 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깨끗하게 씻겨졌습니다. 귓부리 뿐만 아니라 눈 코 입 등 이목구비 모두가 예수 십자가의 피로 깨끗하게 씻겨졌습니다. 손과 발뿐만 아니라 온 몸이 예수 십자가의 피로 씻겨졌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따라 삶으로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항상 깨끗하게 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잘 감당해야만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십자가의 피로 거룩해진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4. 우리 모든 인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본문에서는 "순종하는 큰 대제사장",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신 큰 대제사장"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종하는 큰 대제사장"이란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시기전 하나님의 본체(本體)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올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즐거이 종의 형체(形體)를 취하셨다는 것입니다.(빌 2:6,7) 대제사장으로 부르심으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부르심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참된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이 장차 겪어야만 할 십자가 죽음에서 할 수 만 있으면 벗어날 수 있기를 피와 땀을 쏟아가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눈물과 탄식으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내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내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 기도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철저히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지금 우리에게 겸손과 순종의 본을 배우게 하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받으신 고난을 통하여 완전케 되셨으며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구원하실 수 있는 구주가 되시었습니다(9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 또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하여 조금 알고 있다거나 신앙 고백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순종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난 중에도 순종함을 보여 십자가 복음을 전하므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인류 구원의 근원이 되셨고 영광스런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여전히 온 인류를 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야말로 온 인류를 위한 산 제사가 되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예수를 믿고 예수께 순종하는 사람만이 영생을 얻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리라 했습니다.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어 하나님과 단절되어 멸망에 이르게 되었지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의인이 되게 된 것입니다.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예수 믿고 의인이 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로 인류를 구원하는 제사장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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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혼의 닻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넘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브리서 6:1-20)

어느 무명 시인의 감동적인 시가 있습니다.

"연륜을 더 해 감에 따라서

아름다움을 더 해 가게 하여 주소서

훌륭한 것은 많이도 있답니다.

보석이랑 상아랑 금이나 은은

새 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늙은 나무, 오래된 거리, 낡은 빛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이와 같이 나는

늙어도 보다 아름다워지고 싶답니다."

기독교 신앙의 시작은 세례입니다. 처음 예수 믿고 지난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곧 세례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로마서 6:3-5)

세례는 초대 교회에서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형태(침례, 浸禮)로 베풀어졌습니다. 물 속에 잠기는 것은 곧 옛 사람의 죽음을 뜻하고 물 속에서 나오는 것은 새 사람으로 다시 사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잊혀지지 않는 단편소설, 오 헨리의 <소매치기>이야기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은 뻬어난 소매치기 기술로 크게 성공하여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솔로몬처럼 눈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은 가리지 아니하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여자의 지갑을 감쪽같이 훔쳤습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그 여자의 얼굴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쳐다보니 그녀는 고향 초등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짝꿍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참다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던 소매치기는 순진하고 정답던 옛 친구를 만나고서야 탈을 쓴 자신의 흉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차가운 가로등에 이마를 찧으며 뇌까립니다. "오 하나님, 나 자신이 싫어졌습니다." 옛 친구와의 만남이 이 소매치기의 생각과 가치관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성공이 아니며,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소매치기 인생이 제아무리 성공한들 얼마나 참담하고 죄악된 인생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만나 자신의 죄된 참 모습을 깨닫고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경험이 바로 세례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고 예수의 빛을 받아 하늘의 은사, 곧 죄 사함을 받아 마음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되는 경험을 하고, 세례받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삶에 그 성령의 힘과 능력을 맛보게 되었으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것과 같은 가라지 인생이 되지 말고,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듯이" 성령의 단비를 받아 열매를 맺는 성숙한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이제 한 해 두 해 해를 거듭할수록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그 마음과 인격이 보다 성숙해져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성숙이란 한 마디로 그 마음과 인격이 예수를 닮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으시고 예수를 닮아 가시는 성숙한 모습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 예수를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예수의 마음은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사람을 섬기되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인류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셨습니다.

현대는 자신의 의지들이 방해를 받으면 정확히 반격을 가하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자기가 하고 싶고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일들은 반드시 하고야 말며 하기 싫고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되도록 피하려 하는 것이 요즘의 추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고 누군가 오른 뺨을 치면 왼 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아들과 어머니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아들 준수가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피아노 연습을 꼭 해야 하나요?" "그럼, 이따가 레슨을 받으러 가니 미리 연습을 해두어야지" 준수는 하는 수 없이 피아노 앞에 앉긴 앉았으나 쿵쾅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연습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 저녁, 엄마는 이웃집에 무엇 좀 전해주라고 준수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러자 준수는 또다시 "엄마, 제가 꼭 갔다 와야만 하나요?"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렇다고 하자 준수는 입이 한 자나 나와 가지고 이웃 아주머니 집에 갔다가 왔습니다. 이튿날 아침, 엄마가 "준수야, 네 이부자리는 네가 개렴"하 말하자 준수는 또다시 싫은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엄마는 의외로 "그럼, 우리 오늘은 각자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지내기로 할까? 오늘은 네게 특별히 자유를 주겠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준수는 믿어지지 않았으나 '때는 이때다' 하고 밖으로 나가 자전거를 신나게 타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다가 제풀에 지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점심때가 되었어도 어머니는 점심 식사를 주시지 않고 뜨개질만 하고 계셨습니다. "엄마, 밥 주세요." "응, 나는 별로 생각이 없으니 네가 갖다가 먹으렴." 준수는 냉장고에서 과자와 우유만 꺼내다 먹고 다시금 놀러 나가기 위해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찾아도 보이지 않자 "엄마, 내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 어디 있죠? 좀 찾아주세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난 지금 찾고 싶지 않구나, 네가 찾으렴"하고 계속 책만 읽으셨습니다. 이윽고 준수는 풀이 꺾여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이제 우리 하고 싶은 대로만 하지 말고 서로를 위해 일하도록 해요." 그렇습니다. 기독교인 하나 하나가 자기 하고 싶은 일들만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냉담하고 악독하게 변해갈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뜻이나 축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인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기독교인의 참 모습입니다. 예수 믿고 세례받아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더 이상 "땅엣 것을 찾지 말고" "위엣 것을 찾는"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성숙한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1-3)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기를 낮추어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과 인류를 섬기셨던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 보좌" 곧 하늘 지성소(至聖所)에 계십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뜻대로 사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제사장으로서 성전 휘장을 온 인류에게 열어 놓으시고 들어가신 곳이 지성소입니다. 이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지성소 곧 하나님 나라는 예수 믿고 하나님 뜻대로 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항상 열려 있습니다. "영혼의 닻"을 하늘 지성소, 하나님 나라에 두라는 것은 폭풍의 바다 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닻을 내리게 되면 풍랑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듯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영혼의 닻"을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살면 세상의 어떤 유혹이나 핍박이나 고난을 당한다해도, 아니 십자가에 죽기까지 한다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 결국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닻"을 하나님 나라에 두지 않으면 여러분 신앙과 인생이 파선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영어에 '에서 신드롬(Esau Syndrome)'이란 말이 있습니다. 여기 '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형 '에서'를 말합니다. 아버지를 위해 사냥 나갔다가 늦게 돌아온 '에서'는 몹시도 배가 고팠습니다. 이런 기회를 노려 자신의 꿈을 이루려 했던 동생 야곱은 팥죽을 맛있게 끓여 놓고 형을 기다렸습니다. 야곱이 예상했던대로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한 형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그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장자의 권리는 장차 아버지로부터 가문을 이어받는 엄청난 축복을 말합니다. 이러한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고 아무리 배가 고팠다고 해도 팥죽 한 그릇에 동생에 넘겨버린 사람이 바로 '에서'였습니다. 에서는 현실을 위해 미래를 경시여기거나 무시해버린 어리석은 사람이었으며, 현실적 만족을 위해 꿈과 희망을 팔아먹은 대표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에서 신드롬(Esau Syndrome)'이란 말은 현실적인 인간으로서 미래와 꿈을 무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장자권을 물려받은 야곱의 후손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으나 에서의 후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성도가 가져야 할 세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고, 셋째는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를 닮아 가는 소망입니다. 대제사장으로 성소 휘장을 여시고 하늘 지성소에 계시는 예수께서는 자신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자신을 닮아 가는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에서 신드롬(Esau Syndrome)'에 걸려 썩어질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약속 받은 장자의 권리를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는 성도가 되시어 장차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처 없이 길을 가던 한 나그네가 마을에 이르러 나무가 드리워진 편편한 땅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막 드러누우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마을에 살던 어느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나그네에게 달려왔습니다. 나그네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자 마을 사람은 밑도 끝도 없이 "당신이 지니고 있는 보석을 나한테 주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석이요?" "예! 제가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는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 해질 무렵 이 나무 아래로 가서 잠을 자려는 사람에게 보석을 달라고 하면 그가 꼭 보석을 주리라고 했어요. 그 보석만 있으면 저는 돈걱정은 안 해도 된다더군요." "혹시 이것 말인가요. 며칠 전 숲에서 반짝거리길래 주워갔어요. 자, 가지십시오." 마을 사람은 꿈에서 본 환상이 현실로 나타나자 기이한 느낌이 들었고 게다가 그 나그네가 내미는 것은 정말로 값이 나가는 금덩이어서 앞뒤 생각할 여유도 없이 냉큼 받아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손에 쥐 게 된 금덩이가 오히려 부담스러웠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윽고 동이 터오자 그는 또다시 그 나무 아래의 나그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금덩이를 내밀며 "선생님, 이 금덩이를 선뜻 내어주신 그 보이지 않는 보석같은 마음을 제게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반짝이는 금덩이보다 더욱 귀하고 튼튼한 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인도하시리라는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이나 세상에 영혼의 닻을 내리는 소망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참된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합니다." 썩어질 세상에 연연하여 성전 마당만 밟고 다니는 성숙되지 못한 성도가 되지 말고 예수께서 십자가로 열어놓으신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자신의 영혼의 닻을 내리고 사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삶의 방식이요 삶의 내용이며 목적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지성소 휘장을 열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로마의 십자가 처형의 박해를 피해 아피아 거리를 도망쳤습니다. 그 때 갑자기 베드로 앞에 어떤 사람이 서있는데 올려다보니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묻습니다. "도미네 쿼바디스(Domine, 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시나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십자가를 피해 로마를 떠나기 때문에 내가 너 대신 로마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박히고자 한다." 베드로는 이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십자가를 회피했던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고 용기를 얻어 발길을 돌려 십자가가 기다리는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바로 못박혀 죽는 것조차 황송하게 생각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를 당했습니다. 여러분 영혼의 닻을 하나님 나라에 두시고 현실의 삶에 어떠한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해도 그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골고다로 가시기 바랍니다. 골고다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관문입니다. 영혼의 닻을 하나님 나라에 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기 위해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 닮기를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상속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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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더 좋은 소망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17)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브리서 7:1-19)

인류의 소망은 평화입니다. 구약 이사야 선지자는 인류가 꿈꾸는 평화의 시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11:6-10)

이러한 인류의 소망은 "이새의 줄기"에서 비롯된다고 했는데 이새의 줄기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류의 <더 좋은 소망>이 되시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멜기세덱'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멜기'는 왕, '세덱'은 의(義)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의의 왕'을 뜻합니다. 이 멜기세덱이 '살렘' 왕이라 했는데 여기 '살렘'은 평화(평강, 화평)를 의미하는 예루살렘을 가리키기 때문에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며,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란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사하시므로 의롭게 하시는 제사장이시며 의의 왕이고, 또한 인류에게 죄 사함을 통해 참된 평강을 주시는 평강의 왕(고전 1:30, 이사야9:6)이시라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아브람(아브라함의 전 이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아브람 당시 소돔 땅에 살던 아브람의 조카 롯이 대적에게 사로잡히고 재물까지 약탈을 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람은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을 데리고 대적들을 추격하여 대적을 쳐서 파하고 조카 롯과 재물을 다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아브람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 살렘 왕 멜기세덱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당시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는데 그가 아브람에게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이방인이었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축복했다는데서 멜기세덱은 의에 있어서 아브람보다 뛰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 역시 유대 민족의 시조로써 특별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던 사람이었고, 또한 축복이란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베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아브람은 그가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창세기14장)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율법의 정한 바에 따라 백성들로부터 십분 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유대인의 족장으로서 이방인 멜기세덱과는 혈통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분 일을 드린 것은 율법 이전의 일로 율법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 아브람으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았다는 것은 율법의 정한 바에 따라 십분의 일을 받는 제사장보다 훨씬 뛰어날 뿐만 아니라 율법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멜기세덱은 레위 제사장 자손들이나 율법을 능가하는 뛰어난 인격과 권위를 지닌 분이었습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은 반드시 아론의 혈통에 따른 자손이어야 할뿐만 아니라 외형적 신체적 결함 사항 중 어느 한 가지에라도 해당되면 제사장으로 자격이 상실되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몇 가지가 레위기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7)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18)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19)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20)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21)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22) 그는 하나님의 식물의 지성물이든지 성물이든지 먹을 것이나 (23) 장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못할지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라 이와 같이 그가 나의 성소를 더럽히지 못할 것은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레위기 21:16-23)

이렇게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에 따른 제사장의 자격은 단순히 혈통과 신체적인 자격 요소만을 따졌지 인격이나 성품, 능력 같은 것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의 율법 아래에서 제사장이 되는 사람은 반드시 아론의 족보에 들어야만 했고 제아무리 인품이 뛰어나고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아론의 족보에 들지 않으면 결코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된 것은 혈통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인품과 의로움으로 된 것이었기에 레위 제사장 자손들이나 율법보다 훨씬 뛰어난 것입니다. 원래 율법과 제사장 제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들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에 순종하여 잘 지키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관계를 이루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제사장 제도와 제물을 바치는 제사의식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제사장을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라고 하는데 이는 '다리를 놓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으로 그 방법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의식인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 그것이 죄가 되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다리가 끊어지게 되는데 이 다리를 이어주는 의식이 바로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제도입니다. 그런데 유대 백성이 포로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제사장 가계를 입증할 족보를 제출할 수 없게 되어 그 후로 지금까지 유대 종교는 남아있어도 제사장이 없는 무의미한 유대교가 되고만 것입니다.(느7:63-65) 이러한 사실은 제사장 제도가 이제 그 기능을 잃어버린 과거의 낡은 제도에 불과한 것이며 아울러 율법 역시 그 기능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아론의 족보에 따른 제사장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울러 제사 제도마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리를 놓아야 할 사람과 그 다리를 놓는 방법이 모두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들 가운데 세워진 제사장 제도와 제사 의식, 율법은 참으로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율법과 제사장으로서는 더 이상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율법과 제사장 제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으며 좋은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그 다리(pontifex)는 끊어졌지만 그로 인해 <더 좋은 소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3절) 멜기세덱,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불리우는 멜기세덱이 암시하는 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과거 율법과 낡은 제사 제도, 제사장들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성취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온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다리를 놓으신 것입니다.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도록 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다리를 끊어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입니다. 율법 앞에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율법은 그 인간의 죄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율법이 정한 어떠한 제사제도도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씻기시기 위해 흘리신 어린양과 같이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의 피밖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하는 소망은 율법과 제사장 제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불완전한 율법과 제사장 제도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더 좋은 소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인간의 죄를 영원히 씻어 다시는 하나님께 나가는 다리를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다리를 단절시키는 죄를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없애기 위해 자신이 친히 제사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희생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제물을 드려 지성소 휘장을 영원히 열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론의 제사장 혈통에 속하지 않으면서 아브람을 축복함으로 그가 율법과 아론의 혈통에 따른 제사장들보다 훨씬 뛰어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신 것처럼, 예수께서 율법이나 인간의 혈통에 따르지 아니하고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 대속(代贖) 제물이 되시므로 죄로 말미암아 끊어진 다리를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연결시키신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제 누구든지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으며 참된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 구원을 위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시며 의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이십니다. 멜기세덱이 율법과 제사장들보다 월등한 인격과 권위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완전하신 인간되심과 완전하신 하나님의 권위로 불완전한 율법과 제사장들을 능가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시며 의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규정한 율법과 제사 제도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일각에 공자 신드롬이 일고 있는데 공자의 사상은 과거 조선 500년 동안 숭상되어 왔습니다. 지금도 일부 공자 사상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 이 공자 사상에 따른 유교적 전통은 무시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조선 500년 동안 유교적 전통이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기는커녕 더욱 부패하게 만들었으며 가진 자들을 변호하는데 이용되어 결국 나라를 패망케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도 유대인들의 특권 계층에 의해 이용되어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는커녕 오히려 부정부패하고 타락하여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나라 자체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사상이나 율법도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완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과 성품, 그리고 능력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의 본질이 십자가에 나타나심으로 인간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성품과 인격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인간의 죄를 씻어 의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신도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함으로서 인간이 저지른 과거의 오점은 이미 영구히 지울 수 없는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과거를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음을 십자가를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된 과거를 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속죄양으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찬송가 184장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는 가사가 무려 열다섯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이 찬송가의 작사자인 로버트 로우리 목사는 필라델피아에서 자라나 주로 뉴욕에서 목회했습니다. 1876년 그가 부르클린 침례교회에서 목회할 때 남북전쟁이 몰아친 뒤에 전염병이 뉴욕에 만연되어 극악의 참상이 벌어졌었습니다. 그의 교인 중에서도 여럿이 병상에 누워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 환자를 방문하고 돌아와 지쳐서 잠깐 눈을 감았을 때 그는 하늘이 열리고 광채 속에 예수께서 피묻은 손바닥을 펴시며 나타나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잠이 깨어 감격에 차서 이 찬송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와 세상의 평화는 예수의 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찬송 속에 담겨 있습니다.

과거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인류의 소망이었던 율법과 제사장 제도로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였지만, 오직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케 하시는 피는 능히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예수 믿는 자의 죄를 영원히 없게 하시었습니다. 인류의 소망은 평화(평강)입니다. 이 평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씻겨져 의롭게 되어졌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십니다. 인류의 죄를 깨끗케 하시는 예수의 피밖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밖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된 다리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져야 할 참되고 <더 좋은 소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돈, 명예, 지식, 사상 등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의 피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십자가 피를 <더 좋은 소망>으로 삼는 이 나라 백성과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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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9)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히브리서 8:1-13)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있습니다.('성경'이란 해방 전부터 쓰여진 말이고 '성서'는 해방 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그 차이점은 없습니다.) 이 성서는 두 가지 책, 즉 구약서와 신약서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는 성서를 계약서(언약서, covenant)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신구약성서(The Old Covenant and The New Covenant) 가 다른 종교와는 달리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지으심을 받은 사람 사이에 맺어진 계약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서를 다른 종교에서처럼 경전이라 하지 않고 언약서(계약서)라고 합니다. 영어 성서를 "The Old Testament and The New Testament"로 표기하게 된 것은 계약(언약)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베리트"를 라틴어로 "테스타멘툼"으로 번역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약(The Old Testament)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어진 언약으로 이를 히브리서 오늘 본문에서 "첫 언약", 또는 "옛 언약"이라 부르고 있으며, 신약(The New Testament)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맺어진 언약으로 오늘 본문에서 "둘째 것", "더 좋은 약속(언약)"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언약을 맺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호렙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 사건이었습니다.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3-6)"

여기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5,6절)는 말씀에서 "내 언약"은 십계명과 율법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언약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확실히 하기 위해 언약식을 가졌습니다. 먼저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백성에게 언약서를 낭독하여 듣게 합니다. 언약서를 다 듣고 난 백성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며 언약을 하면 모세가 백성에게 짐승의 피를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선포합니다.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6-8)"

이렇게 짐승을 각을 떠서 피를 흘리고 그 피로 언약식을 갖게 한 이유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는 자는 짐승과 같이 피를 흘리는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상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해 너무나 불성실했으며 남편을 배신하고 간음한 여인처럼 언약을 파기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무효화하고 새 언약을 맺게 될 것을 예언하게 됩니다.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31-34)"

이 구약의 말씀을 오늘 본문 8절 이하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날이 이르리니'(8절), '그 날 후에'(10절) "새 언약을 세우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앞으로 도래할 메시야 시대, 곧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시는 신약 시대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란 메시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희생양으로 흘리신 피로서 맺어지는 <그리스도의 피의 언약>을 말합니다. "새 언약" 즉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에 대한 언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서는 예수의 삶 전체가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하신 "새 언약"을 맺기 위한 죽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베푸신 성만찬을 통해 이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14:24)"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파기되었기 때문에 온 인류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동시에 그 언약에 기록된 모든 조건을 십자가를 통하여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신약서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성취된 언약의 은총에 참여하여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다 지켜야만 했었는데 다 지키지 못하므로 그 언약이 파기되었고 그 언약이 무효화되었지만, 신약시대의 인류는 "첫 언약", 즉 "옛 언약"(구약)을 지킬 필요가 없고 다만 "새 언약"을 성취시키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로 인하여 나를 대신하여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에게 요구되는 모든 언약 내용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28-30)"

스위스에서 실제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느 날 관광버스가 손님을 싣고 돌아오는 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관광객들은 모두가 지쳐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고개를 막 넘어가려던 순간, 운전사는 브레이크에 이상이 생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로 내리막길에 접어든 버스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당황한 운전사의 떨리는 자동차에는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에 펼쳐진 다섯 개의 급커브 길이 보였습니다. 버스에 점점 가속이 붙자 눈을 뜬 관광객들은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을 눈치 채고는 소리를 지르며 이성을 잃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운전사는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커브길을 하나 둘 잘 운전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커브길을 통과하였고 모든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이젠 마을길을 지나 반대편 언덕으로 올라가 차가 자연히 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멀리 아이들이 길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란 운전사는 경적을 계속 울려 피하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그 소리를 듣고 피했지만 아직 한 아이가 그 자리에서 우물거리고 있었습니다. 순간 운전사는 관광객을 살려야 할지 저 어린아이를 살려야 할지 갈등하다가 결국 그 어린아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버스는 예상대로 건너편 언덕에 멈춰 섰습니다. 운전사는 차가 서자마자 그 아이에게로 뛰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살인자!", "살인자!"라고 하며 운전사에게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운전사는 아무 말 없이 아이의 품에 고개를 묻고는 아이를 안은 채 흐느끼며 옆의 오솔길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 어느 젊은이가 외쳤습니다. "모두들 그만 하세요. 소리 지르지 말아요. 저 아이는 바로 저 운전사의 듣지 못하는 아들이란 말입니다...." 야유를 퍼붓던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경적 소리에도 피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가 어찌 자기 아들인줄 몰랐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예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새 언약, 즉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언약의 은총 아래 살게 됩니다.(12절) 그런데 첫 언약은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다 새기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여 모세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언약을 어길 때마다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려 죄사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유효할 수 있도록 선지자들은 부지런히 언약을 상기시키고 가르쳐야만 했었습니다. 이렇게 첫 언약에는 모세나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 등의 중보자가 필요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돌비에 새긴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을 부으셔서 성령으로 육의 심비(心碑), 즉 마음판에 새기신 것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3:3)

그리고 그 언약을 생각나게 하고 가르치시는 분이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에게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직접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함께 하시는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새 언약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능히 볼 수 있게 하고 알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요14:17) 그래서 성령으로 마음판에 새겨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히 우리들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며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새 언약을 따라 살게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 시대에는 언약을 어길 때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예수의 십자가 피로 새 언약의 은총아래 사는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12절) 이 말씀의 원 뜻은 '죄인에게 그 죄에 대한 것을 책임지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기억지 아니한다' 는 뜻은 '기억이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그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서 담당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희생양이 되시는 예수에게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게 하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의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음으로 새 언약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범죄할 때마다 겸손히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그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요 5:14, 갈 4:8,9). 구약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 언약에 따른 제사의식과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나, 새 언약에 속한 신약시대의 성도는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약속하신 성령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롬8:2) 구약시대에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높이 매달아 그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모두 치료받아 살 수 있게 된 것과 같이(민 21:9) 새 언약에 속한 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치명적인 영혼의 질병이 치료를 받아 구원받게 됩니다. 구약시대의 모세의 높이 들려진 놋뱀은 상징적으로 십자가를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구약시대에 높이 들려진 놋뱀은 쳐다보아도 좋고 안 쳐다보아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쳐다보지 않으면 죽은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십자가는 바라보아도 좋고 안 보아도 좋은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고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 즉 <더 좋은 언약>은 인류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도 좋고 안 맺어도 좋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온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새 언약"의 은총 아래 사느냐 그 은총을 거절하느냐 하는 삶과 죽음이 달려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시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여러분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는 영광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시는 성도 여러분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날마다 거룩한 성도의 삶으로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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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하늘가는 유일한 길

(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 가로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브리서 9:1-28)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본토(본향)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향을 떠나온 후 한번도 본향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떠나온 세상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생각하고 지내었다면 얼마든지 돌아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11:15,16)"

이렇게 아브라함은 고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 가나안을 향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마저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했고,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고향에 묻지 않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 가나안에 묻었으며 자신 역시 그 곳에서 장사되었습니다.(창 23,24,25,30,31장).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상징적으로 지상의 본향보다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뜻합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세상의 고향을 찾지 않고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고향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찾았던 고향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곳, 즉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인간에게 <더 나은 본향>인 하늘을 사모하며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은 나그네 길 가는 것과 같은 것임을 깨닫게 하여 하늘 본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늘가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니이까?"고 묻는 제자 도마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1-6) 이 말씀은 하늘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에게 하늘가는 길을 열어놓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임재(臨在)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 장막과 장막에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장막(帳幕,tent)이란 "거주하는 장소"(dwelling place)를 뜻으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임재를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장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장막과 제사제도야말로 구약시대에 사람을 하나님께 가까이 인도하는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장막은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장막에서 제사드리는 모든 기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장막 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번제단(燔祭壇)인데 이는 사람의 죄를 뒤집어 쓴 동물을 태우는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豫表)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예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성소에 들어가면 일곱촛대로 되어진 등대와 12개의 떡이 놓인 떡상과 지성소(至聖所) 바로 앞에 놓인 금향로를 볼 수 있습니다. 등대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상징합니다. 떡상 역시 세상 모든 인류가 먹고 생명을 얻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6:48-51)

금향로는 예수 이름으로 드려지는 성도들의 예배와 기도, 감사와 찬양 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이 성소를 지나 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지성소입니다. 이 지성소는 이름 그대로 지극히 거룩한 장소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이 땅의 유일한 처소입니다. 이 지성소에 언약궤(또는 법궤)가 있는데 그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언약의 비석 즉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만나는 하늘 양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아론의 대제사장직이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죽은 지팡이에서 싹 즉 생명이 나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되심으로 인류가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그리고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은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궤를 덮는 뚜껑이 있는데 이를 속죄소라고 합니다. 이 속죄소 위에 대제사장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된 동물의 피를 뿌리게 되면 그 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소는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하늘가는 길로 인도하는 예수 십자가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장막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희생하시고 가나안 땅, 하늘가는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구약의 장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그림자입니다. 예수 십자가로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장막이며 구약의 장막은 그의 모형입니다. 예수야말로 완전한 장막이며 그의 십자가야말로 완전한 속죄의 제물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는 참 장막과 참 제물이 되는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구약시대의 장막 제사에 따른 제물은 율법에 죄를 정해진 것만을 정결케 하는 것이었지만 예수의 십자가 제물은 인간의 몸은 물론 마음과 영혼까지도 정결케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장막에서는 도둑질, 살인, 간음 등 외형적으로 드러난 죄를 정결케 하는 제사를 드릴 뿐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형제에게 미움을 품거나 욕을 퍼붓는다 해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 해도 그것은 율법에서 죄로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미움과 음욕을 품고서도 거룩한 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실제 살인죄만 죄가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여 욕을 퍼붓는 것도 살인죄와 동일한 죄이며, 실제 간음한 것만 죄가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마5:21-28) 더 나아가 로마서 성경은 남을 비방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무정한 자까지도 사형에 해당하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28-32) 이렇게 구약 장막 제사는 사람이 속에 품고 있는 죄까지는 정결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장막에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육체의 예법만 되어 온전한 제물과 온전한 장막이 되시는 예수께 개혁할 때까지"(10절)만 그 효력이 발휘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에 드러난 죄만 정결케 하는 속죄 제사를 드리고 속 사람은 여전히 탐욕과 음욕, 그리고 미움과 교만, 자랑 등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옛 언약(구약)에 따른 동물의 희생 제물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인 죄를 근본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성경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제물이 되심으로 지성소의 휘장을 단번에 영원히 열어 놓으시고 언제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올 수 있도록 참 장막이 있는 하늘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제물로 <하늘가는 길>이 모든 인류에게 언제든지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 처리해야 할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영원히 해결해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마음에 영접하면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완전히 해방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제물은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죄의 근본부터 씻어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마음에 죄의 포로가 되어 살지 않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이기신 십자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함께 계심으로 날마다 죄를 극복하는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 제물은 인간의 "죽은 양심을 일깨워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까지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장막이 되시며 참 제물이 되시므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늘가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이 만든 지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 앞으로 바로 들어가신 것처럼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교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어느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까운 벗이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칭찬받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는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예수께서 여러분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이제 두 번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제물로 자신을 드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참 장막이 되시며 참 제물이 되시는 두 번째 이유는 구약시대에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선택된 동물은 죽음을 강요당했지만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생명을 빼앗겼지만 예수께서는 생명을 스스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에게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인류를 위해 바치신 것입니다. 참 제물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구약시대에는 동물을 희생 제물로 드린 것은 율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간의 대속 제물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배후에 있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정하고 그 정한 바에 따라 형벌을 내리는데 그치지만, 참된 사랑은 그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므로 용서를 베풀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참된 사랑이야말로 참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구약시대 동물은 사고력이나 이성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왜, 누구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에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비록 자신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힘들고 쓰디쓴 잔이지만 그것이 온 인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얼마나 풍성한 생명을 주는가를 아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모르고 죽는 것은 참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도 희생 제물이 되었을 때 참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구약시대 동물은 율법에 정한 방법인 거의 기계적으로 미리 정한 방법으로 살해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본문 14절 말씀대로 "영원하신 성령으로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희생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정한 제사법을 자동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스스로 복종하셔서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참 제물은 하나님의 뜻을 성령을 통해 확실하게 깨닫고 스스로 복종할 때 참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장막과 참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마음에 영접하시므로 여러분에게 <하늘가는 길>이 항상 열려 있으며 결코 닫을 사람이 없는 하늘 문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앞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앞에 <하늘가는 길>과 멸망으로 가는 길이 놓여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죽음은 모든 것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마르커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이 죽으면 그 생명의 불꽃은 하나님에게 환원하고, 남는 것은 "먼지와 재와 뼈와 악취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에게 주신 새 언약,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기독교의 소망은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좋은 온전한 참 장막이 있는 참 하늘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세상은 그림자같은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의 본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본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참 장막이십니다. 참 장막이신 예수를 영접하므로 여러분의 본향에 돌아갈 수 있는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참 제물이 되시는 예수를 영접하시므로 "죄와 상관없이" 즉 심판에 상관없이 다시 오시는 예수를 기쁨과 영광 가운데 맞이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십자가의 제물로 정결함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에게 심판은 없습니다. 오직 그들에게는 <하늘가는 길>과 그 누구도 닫을 사람이 없는 하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인,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참 장막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항상 거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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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생명에 이르는 오직 한길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19-39)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누구나 할 것 없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법으로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신지라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인간이 사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구약시대에 동물희생제사제도였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정해놓은 예법에 따라 동물을 제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은 죄를 회개하면 용서해주시는 방법으로 제정하신 동물희생제사제도가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제물을 통해 하나님의 죄사하심을 얻는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제물이라는 대가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얻으려는 위험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은 죄를 대신하여 동물이 제물로 희생되는 것을 보고 죄가 얼마만큼 무겁고 중한 가를 깨달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원래 죄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동물의 피나 고기가 아니라 인간의 순종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은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누누이 밝혀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왕에게 사무엘 선지자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22)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삼상15:22)

죄를 지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즉 회개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6-17)

이사야 선지자는 지은 죄를 회개할 줄 모르고 제물을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너희 악행을 견디지 못하겠노라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1:10-20)

이처럼 하나님께서 구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천천 만만의 제물이 아니라 지은 죄를 회개하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6-8)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동물 제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순종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천천 만만의 동물을 제물로 드린다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에 가는 길은 닫혀지는 것입니다. 불순종으로 닫혀진 문과 길은 어떠한 동물을 제물로 드린다해도 열려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하나님 앞에 솔로몬처럼 일천번의 예배를 드린다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그 예배는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설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린다해도 하나님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드린 것이 완전한 제물이라는 것은 그가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제물로 죽으신 것은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철저하고 완전한 순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고 참다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예배드리는 사람이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마음과 순종하는 생활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본 뜻은 "무릎을 꿇는다"(kneel down)는 것으로 무릎을 꿇는 것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는 마음과 생활을 보여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순종, 이것을 행하시고 인간으로서는 드릴 수 없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완전한 순종을 보여주시고 그 순종의 제물이 되심으로 온 인류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영원히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그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항상 열려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순종하심으로 인류에게 보여주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희생할 만큼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완전한 제물은 완전한 순종이며, 완전한 순종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구약의 동물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형제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사랑을 십자가의 제물이 되셔서 보여주심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완전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희생 제물이 된 동물의 피를 가지고 휘장을 열고 매년 지성소에 들어가 죄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그것도 완전한 제물이 되심으로 단번에 영원히 성전 휘장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언제든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찰스 웨슬레는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 육체로 가리운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육체가 찢기운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적나라하게 보이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보이신 것은 십자가입니다. 성전 휘장이 찢길 때에 하나님께로 향한 길이 완전히 열리고 예수의 육체가 찢기울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하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하심은 인간의 어떠한 죄라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는 완전한 제물로 십자가에서 희생되셨다는데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동물 희생으로는 사람의 몸과 마음, 영혼까지 정결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제물로 십자가에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생각과 소원까지도 정결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죄를 정죄하거나 죄인을 멀리하고 버릴지언정 정결케 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죄를 정결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생명의 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자신을 사랑의 제물로 십자가에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사랑의 제물을 발로 짓밟는 죄악으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상처를 입었을 때는 참고 견딜 수 있는 일이지만 마음을 짓밟힐 때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공포 정치 시대에 어떤 사람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급기야는 집단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홀연히 모든 고통을 용기로써 참고 견디어 냈다고 합니다. 그의 몸은 쇠약해지고 상했지만 굴복하지 아니하고 결국에는 그 고통을 벗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누가 밀고해서 그가 체포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밀고자는 다름 아닌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는 살아갈 기력을 잃고 죽었던 것입니다. 그는 적의 공격에는 참고 견딜 수가 있었던 것이지만 사랑하는 자의 배신에는 참고 견딜 수가 없어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참하게 짓밟혀 상처입고 죽은 것입니다. 로마의 시이저는 암살을 계획하던 자들에게서는 굽힘이 없이 용기를 가지고 맞섰었지만 암살자 가운데 그를 찌르려고 손을 들고 있는 그의 친구인 부르터스를 보았을 때 시이저는 그의 상의로 얼굴을 덮고 숨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이후에 가장 극악한 죄는 율법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여 십자가의 사랑을 짓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거역하거나 배신하는 죄가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무서운 죄악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길만이 인간이 사는 길입니다.

홍수가 나서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집 지붕 위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어느새 물은 자기 발목까지 차 올랐습니다. 얼마 있으니까 보트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 보트에 타시오. 고 지대로 옮겨 드리겠소."

"고맙지만 거절하겠소 난 그리스도인이오.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믿소"라고 대꾸했습니다. 잠시 후 물이 허리까지 차 올랐습니다. 이때 자그마한 통통배가 지나가다 구명 튜브를 던져 주었습니다.

"이보시오. 그 튜브를 타고 이 배로 오시오. 지금 구출 작전을 펴고 있소"라고 외쳤습니다.

"고맙긴 하지만 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소."

이 사람은 또 구조를 거부했습니다. 이젠 물이 목까지 차 올랐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헬리콥터 한 대가 그 위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밧줄을 잡으세요. 저희가 끌어올리겠습니다."라고 조종사가 외쳤습니다.

"고맙소. 하지만 난 하나님을 믿으니 그분이 날 구해주실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몇 시간 더 버티다가 마침내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하나님 앞에 선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된 점에 대해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 전 하나님을 그렇게 고대했건만 끝내 절 구해주시지 않고 죽게 내버려 두셨지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그 말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대체 무엇을 기다렸다는 거냐. 난 너에게 두 대의 배와 한 대의 헬리콥터를 보냈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랑으로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끊임없이 구원의 손길을 베풀고 계십니다. 다만 인생이 어리석어 생활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는 그 사랑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제물로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의 문이 열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의 예수를 영접하여 생명과 사랑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22절) 권면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을 소흘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배(Worship=worth +ascribe)란 자신의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부터 받으시기 원하시는 최상의 것은 바로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을 죽도록 사랑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을 소흘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믿음의 소망을 굳게 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생활로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상처받은 이웃을 돌아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가운데 상처입은 채로 사셨습니다. 이웃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신 것을 잊지 말고 이웃을 돌아보는 생활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웃을 돌아보는 선행으로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건은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것이지 경건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항상 열려 있지만 그 길은 좁고 협착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을 정금같이 단련하기 위해 때로 고난이 주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의 신앙생활이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인간이란 역경에 처해 있을 때보다 순조로운 환경에 있을 때 넘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안락함이 고난보다는 많은 사람을 타락시켜왔습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하니발(Hannival)의 군대입니다. 카르타고의 하니발은 로마 군대를 쳐부신 단 한 사람의 장군이었습니다. 세계의 정복자인 로마 군대를 처부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은 한 전투는 뻬앗긴다 해도 전체적인 싸움에 지는 일이라고는 드물었습니다. 겨울이 다가와서 군사 행동을 정지해야 했을 때 하니발은 그가 점령한 카푸아에 군대를 주둔 시켰습니다. 카푸아는 매우 사치스러운 도시였습니다. 로마군에도 굴하지 아니했던 하니발의 군대는 카푸아에서 보낸 겨울 동안에 결정적인 영향의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도시에서의 호사스러운 생활이 카르타고 군대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어 봄이 돼서 재차 전투가 시작됐을 때는 로마 병정들에게 대할 수 없게끔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단련이 되고 안락으로 인해서 망하는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때에 굳건히 싸워 이길 수는 있어도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는 힘을 잃게되고 신앙이 타락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히브리서를 받아 읽은 사람들은 전에 박해받을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핍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재산까지도 몰수당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사회에서 의심받고 배척당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굳건히 잘 지키며 견디어 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야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32절 이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배신의 위험을 경고하며 하박국2:3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3,4)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주저하거나 뒤로 물러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랑의 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길만이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고 앞으로 전진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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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믿음이란?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16)

믿음(신앙)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헤민'(h˝min, ?????)이라는 동사입니다. 기도 마지막에 말하는 '아멘'은 이 동사의 어근에서 나온 것입니다. '헤민'(아멘)은 '어떤 일이 확실하다고 여긴다', '신뢰하다', '약속한 바를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서에서 믿음이란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말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항상 그 앞에서 '아멘'으로 화답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로 인해 멸망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며 부활하시므로 온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희생하셨지만 그 십자가의 사건은 전적으로 나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그 십자가 사건으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인정할 때 '나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자기를 위한 사건으로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키며, 자신의 삶과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누가 "주 예수를 믿으세요"하면 "아멘"으로 화답하는 삶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최초로 선포하신 말씀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었으니 하나님 나라에 뜻을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 비유의 말씀들 모두가 "천국 복음", 즉 하나님 나라 복음이었습니다.(마태복음 5,6,7장)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체험하며 장차 그리스도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바로 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생각하고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다고 했습니다.(히브리서 11:9-16) 예수 믿는 사람은 삶의 목표를 세상에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윌리엄 헌슨이라는 맹수 훈련 전문가는 사자나 호랑이를 훈련시킬 때 훈련사가 왜 작은 의자(등받침이 없는)를 들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의자의 다리쪽을 사자 얼굴 앞에 들이대면 사자는 의자의 네 다리에 동시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이렇게 신경을 한꺼번에 여러 곳에 쓰면 일종의 신경 마취 작용을 하게 되어 쉽게 길들여진다고 합니다. 여러 군데에 동시에 신경을 쓰면 신경 작용의 분화로 무력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세상에 길들여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생활의 중요한 원칙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것으로 미혹케 하는 '마취국'(痲醉國)과 같은 것입니다. 흔히 현대 사회를 3S로 표현합니다. 즉 섹스(SEX,성), 스포츠(SPORTS, 운동), 스크린(SCREEN, 영화)을 말합니다. 이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도록 하는 마취제와 같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야고보4:4)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산 자처럼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갈6:14)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인 것을 믿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고린도 후서 4:18)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이 믿음입니다.(마6:33)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마가복음1:15)라는 말씀의 시제(時制)는 현재 진행형(THE KINGDOM OF GOD IS COMING NOW), 곧 지금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하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고 저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마음에서부터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바로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믿음을 가지면 시각장애자의 눈을 뜨게 하여 볼 수 있게 하기도 하고, 청각장애자의 귀를 열어 듣게 하기고 하며,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셨던 것처럼 한강을 물위로 걸어 건너갈 수 있기도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눈을 뜨게 하고 귀가 열리게 하고 한강 물위를 걸어 도강한다해도 하나님 말씀이 그 마음에서부터 이루어지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서부터 체험하고 사는 것입니다. 죽을병에 걸려 고통 당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 것"(요한계시록 21:4)을 믿고 소망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라(데살로니가 전서5:16-17)시는 말씀대로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이 곧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는 생활,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는 생활, 누가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는 생활,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그가 잘 되기 위해 기도하는 생활 등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나는 잘못되어도 너는 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 나는 낮아져도 너는 높아져야겠다는 마음, 나는 망해도 너는 흥해야 되리라는 마음, 나는 죽어도 너는 살아야겠다는 마음, 이것이 세례 요한의 마음이요 예수의 마음이요 예수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이같은 십자가 예수의 마음과 삶이 곧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나라가 분명히 있음을 믿고 그 나라에 뜻을 두며 하나님의 뜻, 말씀이 이 땅 내 마음에서부터 이루어지도록 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되어야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4-17)

믿음은 고난받고 있는 이웃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아파하는 자와 그 아픔을 함께 하며, 배고픈 자와 배고픔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했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병든 자들과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믿음은 참으로 기독교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으로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데서 벗어나 고난받는 이웃을 자신으로 알고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더 이상 자기 사랑에 매이지 않고 이웃 사랑에 매이게 되어 고난받고 있는 이웃과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으십니까? 하나님 말씀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예수는 가장 낮은 곳에 계십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병들고 소외되고 고난받는 이웃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사랑은 그 누구와도 하나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받는 이웃들과 사랑으로 한 몸인 것을 느끼고 이웃들과 모든 것, 기쁨과 슬픔, 아픔과 괴로움 등 모든 것을 함께 나누게 될 때 참된 믿음을 증명하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일화입니다.

뉴욕 역대 시장 중 가장 뛰어난 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씨였습니다. 그가 뉴욕 시의 즉결 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훔치던 노인이 기소되어 법정에 끌려왔습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10달러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냈습니다. "그 10달러를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나는 그 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죄에 대한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그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 씨에게 내주며 말했습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분들도 나처럼 너무 잘 먹은 데 대한 벌금을 내시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달러를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믿음의 사람은 고통을 당하는 이웃들에 대하여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15:12) 그리스도가 명령하는 사랑은 단순히 사랑의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상처받은 영혼들을 싸매 주며,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벌거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이하여, 자기를 높이지 말고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이 사랑하기를 포기한 사람일지라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용서하고 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참으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단순히 죽은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이웃들에게 베풀어 사랑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맛보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버리워 짓밟히는 것처럼 사랑이 없는 믿음은 맛을 잃은 소금처럼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행위 없는 믿음은 열매 없는 믿음이요, 열매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가운데에서 활동하지 않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사랑의 행위 자체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연민에서 베푸는 사랑이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에서 비롯된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은 한계가 있으며 사람을 구원하는 힘이 없습니다. 산 믿음이 되어 사람을 변화시키며 구원하는 사랑은 예수 십자가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그 대상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그 사랑의 끝이 않습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죄인을 변화시키며 구원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다해도 예수 믿는 믿음으로 행할 때에 하나님 나라에 상급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베풀기 위해 예수처럼 자신을 낮추어 이웃들과 함께 하는 생활로 여러분의 참된 믿음을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이 가난할 수 있어야 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그 아픔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며, 낮은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웃의 아픔과 가난과 병듦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 5:6).

예수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순종의 생활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하나님 나라에 삶의 뜻과 목적을 두고 세상에 대해서는 나그네처럼 사는 믿음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자신의 믿음이 참된 것임을 사랑으로 증거하는 믿음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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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믿음이란?(2)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브리서 11:17-38)

믿음이란 '예수 십자가의 사건'을 '나를 위한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났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죽었고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즉 자연인 '이동희'는 십자가에 죽었고, '그리스도인 이동희'로 다시 태어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자연인 이동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을, '그리스도인 이동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뜻합니다. 이는 예수 믿기 전에는 자신이나 세상에 있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 경험 등이 자신의 삶을 주도했지만, 예수 믿고 난 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삶을 말합니다. 이제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나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게 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마6:24)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라 시인하며 살아갈 때 믿음생활이라 합니다.(빌2:11) 그러므로 믿음의 핵심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 고백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갈 2:20)을 뜻합니다. 참으로 믿음이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며,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을 위해서 살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를 위해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비록 힘들고 가시밭같은 고난이 따른다해도 예수께 속한 삶을 사는 이유는 세상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세상(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더 큰 재물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자신의 성읍이 제아무리 견고하다해도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면 멸망당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탐군을 영접하여 하나님께 속하게 됨으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같은 인생일지라도 그 질그릇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릇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금으로 만든 그릇이라도 된장을 담아두면 된장 그릇입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든 질그릇이라도 그 속에 보화를 담아두면 보물단지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젊은 오르가니스트 론 세버린이 술집 앞을 지나다가 그 앞에 수북히 쌓여있는 빈 맥주깡통을 보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는 곧 주인을 만나 그 빈깡통들을 공짜로 치워드리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주인은 감사하다며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세버린은 당시 캘리포니아 롱 비치 주립대학 학생으로 다우니 교회의 올갠 반주자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빈 맥주깡통을 가뜩 실어온 그는 깡통의 위아래 부분을 모조리 따내고 깨끗이 소독을 한 다음 긴 파이프가 되게 납땜을 했습니다. 어떤 것은 길게, 또 어떤 것은 짧게 만들고, 파이프의 주둥이 부분을 만들어 달았습니다. 그 파이프의 길이를 달리하여 플룻과 비올라 소리를 나게 하는데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리이드 음을 내는데는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3년이나 걸려 결국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인류를 타락시키는 맥주가 담겼던 빈 맥주깡통이 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상한 악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빈깡통이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같은 상자라도 보석을 넣으면 보석상자가 되고 술을 담으면 술통이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예수 믿고 예수를 영접하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그는 썩어질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어 영원한 최고의 가치있는 인생, 하나님 앞에 보배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는 이같은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믿음의 선배들은 악형을 받을지라도 구차히 면하고 하지 않았고, 희롱과 채찍질뿐만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힐지라도 시험에 넘어지지 않았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로 죽음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을지라도 끝까지 예수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을 세상에 감당치 못한 것은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오직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에 대한 소유권이 자신에게서 예수에게로 이전된 것입니다. 세상말로 하면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친 삶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부터는 자기 자신의 주가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 외에는 그 어떤 것들도, 다른 어떤 신들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그 분의 말씀에만 '아멘'(순종)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와 그 분의 말씀에 '아멘'하는 믿음은 그 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자 에밀 부르너는 하나님 말씀을 "주인의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묻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과 목적을 알지 못하고 또 그 아는 일에 소흘히 한다면 예수를 주님으로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항상 그 분께서 보내신 성령을 통해 그 분의 말씀을 듣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항상 예수의 말씀을 듣는 생활이 이루어질 때 예수님의 인격을 체험할 수 있으며, 예수의 인격을 만나게 될 때 성도는 예수의모습, 인격을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의 말씀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며 그 분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갈 때 예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란 신비체험이나 무아지경의 황홀경을 맛보는 것이 그 주목적이 아닙니다. 또한 믿음생활이란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축복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고자 했던 무리들이 사회적인 출세나 물질적인 축복을 기대했을 때 예수는 머리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머리둘 곳조차 없으신 예수를 따랐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아무리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부르고 기도드린다 해도 예수를 주로 모시고 예수의 닮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라 볼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으로 세례받고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 목사도 될 수 있지만 그가 예수를 닮은 모습을 이웃들에게 보여주지 못한다면 바른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와 그 분의 말씀에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맡기고 오직 그 분만을 주님으로 섬기며 살아갈 때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태복음 7:15-24)

믿음생활의 진실여부는 그 열매로써 알 수 있습니다. 열매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할 때 맺어지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부르며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다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다시 말해 좋은 열매를 맺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 생활에 열매가 없는 것은 불법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알곡들만 들어가는 곳이지 가라지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베드로 후서 1:8-11)

지난 1일 북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남미 도미니카 공화국 위조 여권을 가지고 일본에 불법 입국하려다 체포되었습니다. 북한은 일본과 국교를 수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 사람이 일본에 입국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비록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일의 장남이라도 외교관계가 없으면 입국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미 대부분 국가들이 일본과 비자면제협정을 맺어 일본 입국 비자를 따로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남미 도미니카 공화국의 여권을 위조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김정남은 불법 입국하려다 체포되어 "내가 김정일 아들이다."고 말했지만 일본 디즈니랜드 관광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국제적인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중국으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아예 여러분에게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자유롭게 하나님 나라에 입국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하면서도 믿음생활의 열매가 없으면 위조여권으로 불법 입국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 시민권자인지 여부는 그 열매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예수 닮은 모습을 가리켜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입니까?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성령의 열매들 맺으시기 바랍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라디아서 5:22-24)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예수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인생은 아무 열매도 거둘 수 없습니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4-8)

예수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생활, 즉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로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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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예수를 바라보자!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브리서 12:1-13)

신앙생활은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마라톤 경주는 1등을 하여 월계관을 쓰게 되면 좋지만 마라톤의 더 큰 의의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완주에 있습니다. 이 마라톤에서 완주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모든 무거운 것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가방을 둘러메고 달리거나 도시락통 들고 마라톤하는 사람 봤습니까?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완주하려면 모든 무거운 것들을 벗어버려야만 합니다. 무거운 것이란 세상의 염려, 근심 걱정과 재리의 유혹 등으로 이런 것들을 벗어버려야만 합니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리(財利)의 유혹, 즉 어떻게 하면 돈을 남보다 더 쉽게, 더 빨리,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하는 것 등이 재리의 유혹입니다. 재리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신앙생활을 완주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벗어야 할 것은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은 마라톤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병을 치료하지 않고 달리다가는 불상사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죄는 병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생활할 때 죄를 그냥 달고 다니면 결코 완주할 수 없습니다. 죄를 벗어버리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회개밖에 없습니다. 회개생활이 없는 신앙생활은 진보하기는커녕 불상사를 당해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죄를 그냥 덮어두고 살다가는 결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모든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신앙생활을 경주할 때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는 중 몇 번이나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사울, 대세가 이미 다윗으로 기울어진 왕권, 주변의 상당수 신하들의 동조 등등 얼마든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명분과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모든 유혹을 물리쳤습니다(삼상 24:1-7, 26:6-12).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짐을 하루 속히 벗기 위해서는 사울 왕을 죽이는 편이 가장 빠른 길이었으나 다윗은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끝까지 참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참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반란으로 왕위를 찬탈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었으며 훗날에 그 왕위가 튼튼히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욥은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느니라."(약5:7-11)

인내로써 신앙생활의 경주를 다하므로 믿음의 아름답고 복된 결말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목표를 예수께 두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를 세상의 높은 자리에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당시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큰 절을 올리며 이렇게 청탁했습니다.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내가 로마에 입성하여 황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고자 하느니라 너희도 나와 같이 십자가에 죽고자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세베대의 어미는 자기 아들들이 예수를 배우기보다는 예수의 능력과 권능 등을 보고 나중에 예수가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 높은 자리를 부탁했던 것입니다. (마20:20-28)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은 신앙생활의 목표를 세상에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유대 대제사장들의 고소로 예수께서 빌라도 법정에 끌려 왔습니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심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에 예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자신이 목적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인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요18:33-36) 그러므로 세상 나라를 목적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목적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은 낮은 곳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높은 곳에 계시지 않고 낮은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들을 고치시고 수제자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며 또한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 중에 한 서기관이 예수를 따라다니면 수지맞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대단한 기대와 결심을 가지고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14-22) 예수의 이 한 마디로 서기관은 크게 실망하고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권세나 명예, 물질 등 세상에서의 성공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게 되면' 실족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지 세상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갇힌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에게 임하신 성령은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눅4:18,19)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세상에서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과 NBC방송 공동조사 결과 미국 역대 최고의 대통령은 경제 대공항을 뉴딜 정책으로 극복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선정되었습니다. 금세기 최고의 기업가이며 최고 부자는 마이크로 소프트사 설립자 빌 게이츠, 최고의 스포츠 스타는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 최고의 영화배우는 존 웨인과 캐서린 햅번, 최고의 영화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지난 1천년 동안 문화, 역사, 정치, 사회 분야에 최고의 영향을 끼친 인물은 인쇄술을 발명하여 성경을 보급한 구텐베르크가 선정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최고로 인기있는 운동경기는 축구이며 최고의 축구선수로는 네델란드 출신의 요한 크루이프, 20세기 한국 최고의 축구선수로는 차범근이었습니다. 지난 천년간 인간의 정신 세계를 가장 풍족하게 해준 문학가로는 세익스피어, 20세기 최고의 팝송은 폴 매카트니가 발표한 '예스터데이', 한국 및 아시아권 최고의 대학은 KAIST, 미국 최고의 대학은 프린스턴이었습니다. 한국 최고의 설교가는 지구촌 교회의 이동원 목사입니다. 세계 최고의 교회도 한국에 상당수 있습니다. 네티즌 조사결과 한국 최고의 미인은 탤런트 황수정이었습니다. 여기 할머니 권사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도 할머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황수정 보다 완벽한 미인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학벌과 재벌이 필요 없습니다. 길바닥이 금과 보석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최고는 하나님 나라에서 꼴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꼴찌가 하나님 나라에서 최고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최고가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서 최고가 되도록 예수를 바라보고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종으로 오셔서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나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6-11) 믿음의 허다한 증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 최고 권력의 자리인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습니다.(히11:24-26) 바울은 자신의 학벌과 문벌 등 세상에서 부러워할만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버렸습니다.

요즘 올림픽 경기는 상업주의화되어 올림픽 본래의 취지가 퇴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즈음 우리 한국 교회도 상업화되어 가고 있다는 지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신앙생활, 삶의 목표가 아니라 물질 축복, 예수의 능력과 권능 등이 신앙생활의 목적인 것처럼 교회에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지금도 무슨 희한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선전하면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더러운 세상을 깨끗하게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더러운 세상을 따라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예수를 바라보는 신앙생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지 물질이나 권세나 능력 권능 등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이 먹는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를 마시며 얼마든지 출세하고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일과 우상숭배 등으로 자신과 자신의 신앙을 결코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의 제물로 나오는 바벨론 왕의 진미와 마시는 포도주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서, 자신들의 몸을 음식으로 더럽히지 않기 위해 기름진 왕의 산해진미를 거절하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최고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삶의 목표를 예수께 두고 예수를 바라보며, 사자굴속에 던져진다해도, 풀무불 속에 던져진다해도 결코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최고(TOP & BEST)가 된다해도 더러운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겨자씨같이 작고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여도, 그리고 가장 낮고 천해 보여도 깨끗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습니다. 불법하여 자신을 더럽힌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능력이나 권능을 행했다고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어린 양되시는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입은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경주를 더욱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때때로 징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성도는 징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운동 선수들은 훈련 도중 잘못을 범했을 때 코치나 감독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습니다. 이 질책은 더 잘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한자 숙어 중에 주마 가편(走馬加鞭)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는 의미로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하여금 더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도록 격려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오직 예수께 두고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사람보다 많은 환난과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정력적으로 복음 진도를 했으며 또한 많은 열매를 얻었습니다(고후11:23-27).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이 약할 때 더욱 온전하여짐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고후 12:10).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에게 하나님은 능력이 되어주십니다. 그러나 징계를 받지 않으려 하는 성도는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열심히 경주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자녀로 부르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경주에 전심 전력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5,16)고 권면했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동방의 의인 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조차도 그가 당하는 고난에 동참하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그는 귀로만 들어 알고 있던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욥의 신앙 자세는 예수께서 보이신 고난의 모범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 전도를 위해 수없이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의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복음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만을 바라보며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피묻은 흔적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단테의 유명한 작품 <신곡>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단테가 안내자를 따라 어느 한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혈색이 나쁜 사람들이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당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시에 지옥에서도 거절당했던 것이었습니다. 천당에 갈 만큼 선한 사람들도 아니고 지옥에 쳐 넣을 만큼 악한 사람들도 아닌 어정쩡한 군상들이었습니다. 안내인이 이들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저 인간들은 하나님도 좋아하시지 않고 그렇다고 사탄도 좋아하지 않는 영원히 버려진 인간들입니다. 만나볼 것도 없으니 그냥 지나갑시다." 그들은 세상에서 착한 시민으로 가장했던 사람들이었으며, 괜찮은 기독교인으로 가장했던 인간들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어정쩡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확실하게 벗어버리고 목표를 확실히 예수께 두고 예수만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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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3:1-17)

히브리서의 결론은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유대교의 압박과 로마의 핍박으로 인해 자칫 신앙공동체가 분열되는 위험과 분쟁과 반목질시로 인해 사랑이 식어지거나 결핍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적 상황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성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혼인의 순결성을 무시하고 성적 쾌락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박해로 인해 궁핍에 대한 두려움으로 돈을 사랑하는 풍조마저 만연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초대 교회에 가장 시급한 것은 사랑의 회복,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회복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져 냉랭하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 자체가 붕괴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사랑하여 십자가에 희생하신 곳은 예루살렘 성안이 아니라 성문 밖, 즉 영문 밖 광야 같은 골고다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영문 밖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만을 위해 십자가에 희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온 인류 구원을 위해 사랑으로 십자가에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온 인류를 사랑하시어 영문 밖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온 인류를 사랑으로 섬겨 구원하고자 십자가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시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도 마땅히 영문 밖으로 나아가 우리의 고난받는 이웃들을 위해 사랑으로 섬기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성문 밖에서 죽으셨다(12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모으는 일뿐만 아니라 고난받는 이웃들을 능동적으로 찾아가서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로 가만히 앉아서 교회를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길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임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를 드리거나 절기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야만 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 살든지 유대인들은 구원의 중심이 되는 예루살렘을 찾아와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 능욕을 지고 예루살렘 영문 밖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더 이상 선교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으러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받는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그들이 스스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찾아 가야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길 잃어버린 양들이 스스로 찾아오기를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 선교요 사랑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교와 사랑으로 섬기는 일은 안락하고 화려한 성안의 장벽과 문을 뚫고 세상을 위해, 세상을 향해 "그가 당하신 능욕" 곧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그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음"을 알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며" "장막 즉 천막에 거하였던" 것(히11:9)처럼 이 세상에 잠시 머물러 있는 신앙공동체의 의미를 찾아 교회 건축과 성장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고립된 요새나 성곽이 아니라 잠정적 거주지요, 광야의 천막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일부 교회에서 마치 무너지지 아니할 영원한 성전을 짓듯이 교회당을 건축하거나 그 일에 엄청난 건축비용을 들이는 것이나, 교회 성장을 마치 어떤 세도가나 재벌가를 구축하듯이 목적삼는 것은 교회의 참모습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어디까지나 '성문 밖, 영문 밖으로 능욕을 지고 나아가신 예수께 나아가는' 모습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살며 이웃을 위해 능욕을 지고 십자가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찬미의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영문 밖으로 능욕을 지고 나아가는 삶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까지도 기꺼이 희생하는 십자가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거룩한 성전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죄와 악의 세계, 고난과 불의의 이 세계는 영원한 도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다만 영원한 도성, 하나님 나라를 행해 가는 성도와 교회가 십자가를 지고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겨 구원을 이루어 가는 임시 거처에 불과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나그네처럼 살며 나그네 인생을 깨우쳐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도성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도와 교회는 편안하고 안락한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문 밖에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는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총을 개인적 소유로서만 간직하지 말고 주변의 이웃들에게 증거하여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을 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에 참된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처럼 희생되어질 때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세계 제2차대전 중 영국의 탄광노조가 스트라이크를 결의했습니다. 이것은 국 가 비상시에 큰 타격을 줄 대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런던에서 가장 큰 강당이었던 팔라디엄에 수천 명의 탄광 노동자들이 모인 자리에 윈스톤 처칠 수상이 자진 출두하여 연설하였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치는 머지 않아 패배하고 런던거리에서는 전승 축하행렬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공군에서 봉사한 사람들은 우리는 격추될 위험을 무릅쓰고 하늘에서 싸웠다고 자랑할 것이고 해군에서 나라를 섬긴 사람들은 우리는 잠수함의 위협을 무릅쓰고 험한 파도와 잠수함의 위험 속에서 싸웠다고 자랑할 것이며, 보병으로 일선에 섰던 사람들은 우리는 총알받이가 되어 적의 탱크 앞에서 싸웠다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자랑을 할 사람들은 여러분 탄광노동자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하기를 우리는 가장 깊은 지구의 뱃속에 들어가 석탄을 캠으로써 비행기를 날게 하고 군함을 움직이게 하고 탱크를 전진시켰다고 가슴 펴고 말할 것입니다." 드러나는 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숨은 자리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회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면 일도 안 하고 돈도 안 내는 태도는 좁은 생각은 오늘날 우리 나라 정치인들과 같은 행태로 나라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정말 훌륭한 사람들은 눈에 안 띄는 구석에서 말없이 봉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래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은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이나 비판에 좌우되지 않고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세로 살아갑니다. 오늘날 교회도 신문, 방송, 인터넷 등 미디어의 주요 광고주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의 광고주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광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널리 드러내 광고하라는 사명이 아니라 낮고 숨은 자리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작은 일에 충성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건축과 성장도 역시 경쟁의 내용이 아니라 십자가의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마13:31-33)는 오늘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즉 겨자씨는 작지만 큰 나무가 된다는 것과 누룩도 적은 분량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물질주의가 사람의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나 많고 큰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알아 좀 더 많이 가지려 하고 좀 더 큰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교회도 부담스러운 작은 교회보다 여러 가지 이점이 많을 것 같은 대형교회를 찾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물량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많은 것을 가지려 하지 말고 이웃을 위해 가난해지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남보다 높아지거나 크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마17:20) 이는 믿음은 분량으로 말할 수 없고 그 질로 결정됨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드러난 크기나 물량으로 신앙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는 또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에게" 하나님의 상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10:42) 소자는 어린아이로 해석 할 수도 있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작은 사랑도 순수할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10)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룩의 비유는 조용한 성장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가루 서 말속에 넣은 한 줌의 누룩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소리 없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예수의 제자는 누룩과 같아야 합니다. 교회도 누룩과 같아야 합니다. 자기를 선전하고 나팔을 불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말없이 섬기고 사랑할 때 이웃과 사회는 복음화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씨가 자라나는 비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마가복음 4:26-29) 씨가 흙 속에서 싹이 나고 이삭이 오르고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지만 모든 과정은 자고 깨는 사이에 조용하고 신비하게 성장합니다.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조용히 자라게 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고요한 밤중에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의 권세와 능력과 각종 은사 등을 떠벌리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조용하게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초라한 도시락인 보리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가 주님을 위하여 조용히 바쳐질 때 5천 명이 먹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요6:5-13) 누룩의 비유에서 "여자가 누룩을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었다."는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누룩은 가루 속에 묻혀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기름처럼 우리끼리만 몰려있을 것이 아니라 세상 구석구석에 묻히고 섞여 누룩과 소금이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작은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고 작은 시간을 하나님께 봉사하는 작은 누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겨자씨 믿음, 겨자씨 사랑이 산을 옮기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산하는 것은 나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내가 은밀하게 짊어졌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계산하는 것은 내가 나를 위해 쌓아올린 것들이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소리 없이 내준 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자신이 세상에서 누린 기쁨은 전혀 기록되지 않고 이웃들을 위해 사랑으로 섬기면서 소리없이 흘린 눈물방울들이 계산되어 있습니다. 희생만큼 강한 무기는 없습니다. 희생을 보이는 것만큼 값진 교육은 없습니다. 별로 희생다운 희생을 해보지 않고 죽는 사람은 살아보지 못하고 죽은 무가치의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우울하고 슬프고 외로운 것은 남을 위해 희생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희생을 해보면 그 다음 순간부터 기쁨이 샘솟고 모든 인간이 내 친구로 느껴지는 법입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성경 말씀은 진짜 진리입니다. 받으려고 기대하는 한 결코 행복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희생적 사랑은 나의 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엄청난 은총입니다. 희생적인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고 이기적 인간은 반드시 외로워지기 마련입니다. 예수께서는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 밖으로 능욕을 지고 나아가셨지만 그 길이 온 인류와 함께 하시는 길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영문 밖으로 능욕을 지고 나아가실 때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셨고, 들내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가는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들내지 아니하며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교회와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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