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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장)

2.처음 사랑을 가지라(2장)

3.실상은 부요한 자(2장)

4.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으라(2장)

5.음행하지 마라(2장)

6.깨어 있으라(3장)

7.적은 능력을 가지고도(3장)

8.풍요 속에 빈곤한 교회(3장)

9.하늘 보좌(4장)

10.어린 양(5장)

11.누가 능히 서리요?(6장)

12.흰옷입은 자들이 누구냐?(7장)

13.불로 응답되는 성도의 기도(8장)

14.예수 믿으시오(9장)

15.교회의 고난(10장)

16.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11장)

17.역사의 승자(12장)

18.생명책(13장)

19.시온성(14장)

20.어린양의 노래와 마지막 재앙(15,16장)

21.큰 음녀의 받을 심판(17장)

22.무너졌도다.큰 성 바벨론아(18장)

23.어린양의 혼인잔치(19장)

24.첫째부활에 참예하는 자(20장)

25.새 하늘과 새 땅(21장)

26.생명나무(22장)

 

       1.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1-20)

1.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미래를 점치거나 미래의 사건에 대한 호기심이나 충족시켜 주려고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요즈음 항간에 신령하다고 자처하는 일부 기독교 목사가운데 <요한계시록 특별 무료 강해>를 선전하면서 자신만이 세대에 대한 특별히 비밀한 계시를 받은 것처럼 떠벌리는데 이는 사람들을 끌기 위한 호객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박해와 환난에 처한 교회를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세상 역사를 주관하는 것이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단의 세력이 강한 것같으나 궁극적으로 멸망당할 것이고 세상 구원의 주체가 되는 교회가 마침내 승리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승리"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교회는 비록 환난을 받으나, 장차는 결국 승리하리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깊이 터득한 몇몇 학자들의 본서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겠습니다. 해리슨(E.F.Harrison)은,

"우리는 본서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과 전능자의 보호와 인간들의 영적인 축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여 가는 교회의 항해 또는 그 이상의 모습을 본서 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회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며,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서 성도들의 소망을 영원히 타오르게 해주는 것으로 본서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필립 캐링턴(Philip Carrington)은,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스티븐슨이나 쿨러리지 이상 가는 예술가를 만납니다. 사도 요한은 스티븐슨보다 정확한 단어의 분별력을 가졌고, 쿨러리지보다 더한 하늘의 미의 구사력을 가졌으며, 바하보다 더 풍부한 멜로디와 리듬과 작곡의 감각력을 가졌습니다....그것은 신약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순수예술의 걸작입니다. 그 풍부함과 조화의 다양성은 헬라의 비극작품을 무색하게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같은 최고 걸작의 예언서 요한계시록은 일곱이란 완전수를 기본으로 하여 구성되어 "교회들의 상처를 치료해주며", 박해와 환난중에도 "성도들로 하여금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며 소망을 영원히 타오르게 해주며",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본서는 일곱 교회, 일곱 촛대, 일곱 별, 일곱 영, 일곱 인, 일곱 눈 등 일곱이란 수를 무려 54회 사용하며, 7이란 완전수로 상징되어지는 장면들과 사건들을 전개해가며 세상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과 교회의 영원한 승리를 드라마로 엮어나가고 있습니다. 일곱촛대로 상징되고 있는 일곱교회는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를 뜻하고, 일곱별은 그 일곱교회의 모든 사자들을 의미하는데 교회들과 그 사자들을 알파와 오메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오른편, 즉 권능의 손(성경에서 "오른편"이란 권능과 축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으로 붙잡고 계시고 있기 때문에 세상 역사는 교회의 승리로 끝이 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없이는 부활 승리가 없듯이, 교회의 궁극적인 승리가 있기까지는 수 많은 박해와 환난을 겪지 않을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것입니다.

2. 본서는 "고난의 시기를 위한 예언문"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당시의 성도들이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는 지상 최대의 제국이었던 로마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처음에는 자신들이 정복한 정복지에 대해 유화정책을 실시하여 대부분 문화와 종교를 인정, 흡수하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A.D.64년 로마의 대화재 사건이 발생했을 때 네로는 화재의 원인을 로마 정부에 비협조적이었던 기독교인들에게 돌린 후 기독교와 연류된 모든 사람을 투옥시키고 그 대부분을 원형극장인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밥이 되게 하는 등 처참하게 죽였으며 때로는 십자가형을 통해서 무참한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이렇듯 로마제국은 기독교인들의 생명을 보잘것없이 여겼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로마의 통치자인 황제를 신격화하는 최대의 교만을 보였습니다. A.D.79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큘레니움이 파괴되고 괴질로 인하여 폐허가 되다시피 한 국내의 혼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악하고 정치욕이 강했던 도미티안은 자신을 '주(主)와 신(神)'으로 경배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는 자신 이외의 '신'을 섬기는 집단과 개인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은 재산몰수는 물론 가차없이 처벌하였습니다. 실로 초강대국의 막강한 권력앞에 기독교인들은 파리목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세계를 제패한 로마 제국은 영원할 것 같았고 그 앞에 겨자씨같이 하찮아 보이는 기독교는 금새 소멸될 것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인 요한계시록은 로마 제국은 멸망당할 것이고 겨자씨같은 교회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당시의 종교적 상황을 보면 이렇습니다. 당시 교회와 유대교의 회당은 각각의 제도와 형태를 갖추고 발전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교리적(롬 3:22; 갈 2:16) 선언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유대교와 완전히 결별하게되고 말았습니다. 이같은 엄청난 교리적 차이가 전통 유대주의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 사이에 회복할 수 없는 거리감을 조성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교회를 적대시하게 되었고 교회는 결국 유대주의자들을 '사단의 회'(3:9)로 정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기독교는 유대교의 핍박과 위협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유대종교와 불가피하게 충돌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각종 이교 사상과 이방 종교들과도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A.D. 1세기 경 로마 제국의 각 도시들에는 애니미즘(animism)과 같은 원시 종교와 밀의 종교들(the mystery religions) 및 각종 주술 숭배와 점성술 그리고 여러 가지의 철학적 종교들 등 수많은 이교 사상과 종교들이 팽배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멸시하고 대적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교와 각종 이교사상과 원시종교들의 협공으로 교회 자체 내에 신앙이 퇴보하는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교회는 첫사랑의 열기처럼 뜨겁게 번져갔지만 점차 그 첫사랑과 처음 열심을 잃어버렸으며, 더우기 이교 사상의 영향으로 타락과 변절된 생활이 일반 성도에게까지 만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고사하고 타락과 방종, 음란과 배교 등으로 순수한 믿음을 지키기가 상당히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방 종교와 이교사상, 원시종교 등을 "귀신의 처소,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 바벨론"으로 규정하고 확고부동한 신앙과 믿음의 정절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희기가 양털같고 눈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으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말해 절대적으로 순결하시고 절대적으로 정확하고 예리하게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히 임할 것을 믿고 거룩하고 용감하고 불굴의 믿음으로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지상에서 온갖 환난과 핍박을 받으며 각종 이교사상과 이방종교 등의 음란한 세력의 도전을 받을지라도 세상의 그 어떤 세력보다 강하며, 세상 제국은 멸망해도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히 승리하리라는 것입니다. 각종 짐승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모든 세력들은 어린양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앞에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온갖 종류의 험상한 짐승들이 날뛰고 있지만 결국 약하게만 보이는 어린양으로 인해 마침내 멸망당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교회의 일곱촛대 사이에 다니신다는 것은 그 촛대의 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지켜신다는 확실한 교회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된 성도 여러분은 끝까지 거룩한 믿음으로 교회에 붙어 있어야만 승리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일곱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알파와 오메가되시는 분이시라 했습니다.

3.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글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알파)이시며 동시에 세상을 최후의 심판으로 종결짓는 종말자(오메가)시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알파(처음)이시며, 요한계시록 20장 11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는 말씀은 천지의 종말이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하는 하나님의 오메가(나중)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역사의 마지막이 되셔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시대와 세대의 주가 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심판주로서 모든 주권을 소유하고 계시는 세상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처음이요 나중이 되십니다. 즉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그 생명을 거두어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며(창 1:27),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시편 90:3)라는 말씀대로 불러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역사도 역시 하나님께서 처음과 나중이 되십니다. 즉 하나님은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이십니다. 한 국가의 흥망 성쇠와 온 세계의 마지막도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 속에 진행됩니다. 역사는 반복되거나 퇴행하거나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속에 오메가 즉 종말을 향하고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피조물도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의 영원한 주인이 되십니다. 이를 분명히 해주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역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 즉 세상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를 히브리서 13:8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되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 "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믿음만이 여러분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나중까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성도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요한복음 13:1)고 하셨습니다.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는 시종 여일하신 분이십니다. 시편 102:27에 "주는 여상하다"고 하였습니다. 여자의 마음만 갈대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이 갈대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조석으로 변하기 쉽고 부패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처음에는 열렬하나 곧 냉랭해질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다는 모성애를 가진 어머니도 자식을 버리는 경우가 있으며, 부부애와 형제우애도 처음은 뜨거운데 나중에는 미지근해지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시종 여일한 사랑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끝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베푸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공의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이사야 30:18에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세상의 법은 어제의 선한 법이 오늘에 악법이 될 수도 있고, 시대에 따라, 권력가에 따라 제멋대로 법을 뜯어고쳐 경우에 따라 불공정한 판결로 악인이 형면제와 특혜를 받고 죄없는 사람이 악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공의는 어제와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시며 선악에 대한 판결 역시 변함없이 공평하십니다. 그래서 악인에 대해서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정확하고 공의롭게 형벌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법은 절대 완전하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바꿀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을 더 보태거나 빼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법)은 더 이상 가감할 필요가 전혀 없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입니다. 인간과 역사는 영원토록 공의로우신 하나님 말씀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악법도 악법을 만든 사람도 영원토록 공의로우신 하나님 말씀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늘 나라 시민권을 가진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법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언약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인생은 식은 죽 먹듯이 약속을 지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아니신지라 식언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수기23:19)

하나님께서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보내실 것을 예언하시고 그 말씀대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성경에 예언하신대로 세상에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고전15:3-5) 지금까지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모두 지키신 분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말씀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대로 다시 오실 때 예수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웠던 사람들, 침을 ?고 조롱하며 멸시했던 사람들, 옆구리에 창을 찌른 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발악을 했던 자들, 그리고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다시 오시는 예수를 알아보고 애곡할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때는 예수께서 또 다시 십자가의 제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심판주로 그리고 영광스런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멸시하고 조롱하며 거절했던 사람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찬란한 영광가운데 다시 오시는 예수를 우러러 볼 때 얼마나 두렵고 통곡할 것인가를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공포와 위협, 애곡 애통이 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예언의 말씀은 옛날 그리스도를 직접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과 로마 사람들에 대하여 한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든지 범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자, 그리고 그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고 적대시하는 자는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핍박했던 로마 제국이 멸망당했듯이 이들 또한 영원히 멸망당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애곡 애통가운데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과 역사는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최후의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최후 승리를 위해 예수 믿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하였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여 지키는 것으로 끝을 맺어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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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처음 사랑을 가지라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1-7)

1 "아시아의 관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끊임없이 각 나라 사람과 각종 상품들이 흘러 오고 흘러 나가는 무역의 중심 지가 되어 아시아 최고의 부유한 도시가 되었으며, 각 나라의 문화 와 문명, 각종 이교 사상과 신비주의 종교가 성행하는 "세계 최고의 허영의 시장"이라 불리웠던 곳입니다. 특히 에베소는 세계 7대 불가 사의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아데미(다이아나)신전이 있는데 이 신전은 파르테논 신전보다 무려 4배가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아데미 신전에는 수천명의 남녀 사제들이 종사했었고, 다산을 기원하는 제사의식으로 여사제들은 매음행위를 하여 신성한 창부(娼婦)노릇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도피중인 범인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에베소는 또한 미신이 만연한 곳으로 이름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에베소 문서>라고 불리우는 부적은 만병통치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아이를 갖게 하고, 운동선수에게는 승리를, 여행자에게는 행운과 안전을, 사업가에는 성공을 보장했기 때문에 이것을 사기위해 세계 각지에서 에베소에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에베소는 각 나라의 범죄자들이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 몰려들었고, 각종 미신과 우상숭배에 따른 성적 타락과 부도덕이 넘실대는 곳이었습니다. 정신적, 영적, 도덕적 타락의 온상이며 모든 종교를 용납하여 종교박물관을 방불케하는 에베소에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에베소에 생명을 구원하는 거룩한 교회를 세운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하게 여겨질정도로 복음 전파에 불리한 조건들만 눈에 띄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에베소의 이 모든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하고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를 두고 P.C. 트렌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는 이보다더 좋은 땅은 다른 아무 곳에도 없다. 또한 여기처럼 깊은 뿌리를 내려서 믿음과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땅을 다른 데서 볼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처럼 기독교 신앙의 승리를 보여준 곳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에 교회를 개척하여 인근 지방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까지 간접적으로 전도하는 등 자신의 선교 절정기를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어 제3의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 이후에는 디모데가 이 교회를 관할하는 최초의 감독이 되었고 후에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이곳에 모셔 생활하다가 이곳에서 장사지냈다 합니다. 그만큼 이곳은 분명히 기독교를 대적하는 문화와 문명, 그 어떤 영적 세력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곳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복음 전도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다고 해도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 한 반드시 승리하여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2.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그 "그 행위와 수고"에 대해 칭찬받은 교회입니다. 여기 "수고"는 헬라어로 "고포스"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땀을 흘리기까지 일한다", "심신이 기진 맥진할 정도로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몸을 지나치게 아끼고 땀을 흘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칭찬받는 성도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심신이 기진 맥진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교회에 봉사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여 행위가 참으로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의 "인내" 또 한 칭찬받은 신앙의 내용이었습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휴포모네 "인데 고난, 환난, 손실을 씩씩하게 용기를 갖고 대항하여 그것을 은혜와 영광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환난은 인간 생활에 색채를 가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휴포모네" 즉 인내를 가지고 사는 기독교인은 그 당하는 환난과 고난을 인하여 예수 십자가를 통해 입혀주신 세마포 흰색이 더럽혀져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환난과 고난과 역경이 많다해도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회색분자가 되거나 아예 까만색으로 변질되어서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풀무에 단련할수록 정금이 되어 나오듯이 환난과 고난을 당할수록 더욱 더 순백의 광채를 발할 수 있어야 참된 교회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에베소 교회가 칭찬받은 것 가운데 또 하나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니골라 당'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 사 중 하나로서 배교했던 니골라를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들은 당시 만연했던 영지주의의 산물로 율법의 시대가 지났기 때문 에 지킬 필요가 없으며, 육신은 악하고 구원받는 것은 영이기 때문 에 육신으로 무슨 악한 짓을 범해도 영혼구원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치므로 극히 반도덕적, 비윤리적 생활을 했던 무리들이었 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삼아 양심에 아무런 가책을 느낄 것 없이 죄악을 조장하는 이단 사상으로 교회를 파괴하려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니골라 당의 창시자 니콜라우스란 이름은 '백성'을 뜻하는 헬라어 '라오스'와 '삼키다', '없애다', '정복하다'는 뜻의 헬라어 '니 카오'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해 "백성을 삼키는 자들"이란 뜻의 ' 니골라 당'의 실체가, 잘못되고 부도덕한 이단 사상의 가르침으로 백성을 삼키는 반기독교 집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 은 계시록 2장 14절의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과 같은 무리들 입니다. "발람"은 "삼키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발라'와 "백성" 을 뜻하는 히브리어 '암'의 합성어로, "백성을 삼킨다"는 니골라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발람은 니골라의 다른 이름일뿐 아니라 구약에 실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직접 저주하지 않았지만 미디안 여인들을 미끼로 놓아 이스라엘 백성 들로 하여금 음행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함으로 간접적으로 이스라 엘 백성을 망하게 만든 자였습니다.(민22-25장) 발람은 신약의 니골 라였고 니골라는 구약의 발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이나 니골라의 교훈은 한 가지 이단에 대한 두 가지 이름이라할 수 있습 니다. 발람의 시대에 일어났던 것이 요한의 시대에 일어날 수 있다 면 그것이 오늘날에도 꼭같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밖에 있는 불신 무리들보다 교회를 더 어지럽히는 악한 자들로서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세력이었습니다. 교회안에 죄악을 끌어들이거나 교인들의 죄악을 눈 감아 주거나 변명하거나 아예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방치하는 것은 건전하고 건강한 성도의 교제를 파괴하는 니골라 당의 무리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죄악을 무조건 용납하는 곳이 아니 라 지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하여 교 회의 성결을 보존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인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회개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3. 에베소 교회는 무역의 중심지에 위치하다보니 교회안에 뜨내기 신자들이 들끓었던 것입니다. 이들 뜨내기들이 교회의 자선과 사랑을 이용하여 교회마다 돌아다니며 성도들을 이용하여 돈을 모아 이들 중 일부는 상당한 재산을 긁어모아 호의호식하며 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무리들을 철저히 분별하여 교회 안에서 성도간의 교제를 금지시키거나 아예 교회 입교를 거절하거나 아니면 그 정도가 심하면 교회에서 아주 추방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 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입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뜨내기들을 분별하여 색출하고 각종 날뛰는 이단자들을 발본색원하다보니 사랑의 불이 식어진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잘못된 사람들을 일소하려던 열심, 교회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열심히 자칫 비판적인 신앙으로 기울었고 그러다 보니 사랑의 교제가 식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악을 용납하지 않고 교리를 수호하고 교회 정통 신앙을 지키려다 사랑이 식어지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정통주의는 생명력이 없는 껍데기만 남은 정통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단을 근절시켜려던 노력이 까다롭고 엄격한 정통주의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종적으로 수직적인 신앙은 좋았으나 횡적으로 수평적인 신앙을 등한시하므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차가운 이성은 차가운 가슴을 만들게 되기 쉬운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세워진 지 40여년이 지나자 성도들은 차츰 복음의 열정을 잃어 버렸습니다. 본문에 지적된 바와 같이 사실 에베소 교회는 진리에 대한 열심에 있어서 첫 사랑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바른 신앙이 있을지라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이 식어지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는 치명적인 결점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교회의 촛대를 옮기시고 말았습니다. 촛대가 옮겨졌다는 것은 더 이상 교회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만이 생명을 낳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내가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땀을 흘리며 심신이 기진맥진할정도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모든 환난과 고난을 용감히 견뎌내고, 어디 하나 나무랄데없이 정통신앙 을 지키려 했었으나 그만 사랑이 식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활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의 촛대를 붙잡고 계신 예수께서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처음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세가지 단계가 있음을 본문을 통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책망만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곧 이어 그들에게 문제 해결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첫단계는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즉 신앙 생활 초기에 가졌던 뜨거운 사랑을 다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즉 현재 신앙생활의 모습이 처음에 가졌던 적극적이고 열성적이며 헌신적인 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돌이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신앙생활이 처음보다 진보하고 성숙한 모습이 없다면 이미 마음의 촛대가 불이 꺼져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집을 뛰쳐나간 탕자가 먼 나라에 가서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갑자기 아버지 집에서 누렸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잘못의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그것을 슬퍼하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결단을 말합니다. 탕자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충심으로 그것을 슬퍼하며 아버지께 가겠다는 결단이 곧 회개입니다. 회개하는데 가장 어려운 일은 죄와 허물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즉각적이고 단번에 이루어져야 하는 결단입니다. 탕자가 회개한 후에 곧 바로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던 것처럼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한 열매가 없으면 가라지 인생에 불과합니다. 변화된 행동과 삶을 통해 자신의 회개가 참된 것임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역사속에 우리 평강교회가 에베소 교회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며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면에서 아주 작은 일이지만 엊그제 교회에 보내온 한 통의 편지는 우리 교회가 처음 사랑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었습니다. 바로 0 0 자매로부터 보내온 편지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동희 목사님, 평안 하셨습니까! 부산에 0 0 자매입니다. 평강 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로 이렇게 컴퓨터 e-메일로도 안부를 전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한해를 고이 접어 주님께 드리며 한해의 끝이라는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부끄러움과 아쉬움만 남는 것 같습니다. 이 한해도 주님 앞에 드린 것은 너무나 부족한데 받은 은혜는 너무 많아 주님께 책망이나 받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굳은 팔을 오른손으로만 계속 쓰다 보니 예전부터 어깨에 통증이 있어 조금은 힘들었는데 갈수록 심해져 그나마 이 모습 안에서 병상에 있는 환우들께 편지 보내는 이 작은 일도 못하면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무슨 말을 할까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는데 어느 날 책을 보니 '음성인식' 소프트 프로그램이 있어 키보드를 치지 않고도 음성으로 워드 같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뻤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무언가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또 남에게 기쁨을 주고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나의 삶에 큰 기쁨이었기에 그 소망이 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른 것을 제쳐놓고 그 프로그램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노트북 용량이 모자라 실행이 안되어 혹시 업그레이드시키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불가능하면 그 용량에 맞는 중고 컴퓨터라도 알아 볼까 싶어 0 0 0집사님께 컴퓨터 구입한데 연락처를 물어 본다는 것이 이렇게 새 컴퓨터를 받게 되어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께 폐를 끼쳐 너무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얼마 전 목사님의 추수 감사절 설교 말씀 중에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바이올리니스트 펄먼의 이야기에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아 제 자신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펄먼이 "때로는 모든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도 제게 남은 것만으로 연주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께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라는 그 말에 나 또한 통증이 조금 덜한 왼손으로 할 수 있는데 까지 하지 못하고 나에게 처한 상황만 보고 남아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주님 앞에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목사 님, 도심 속 콘크리트 벽 사이에 그 틈새를 뚫고 피어나는 작은 풀잎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연약해 보이는 풀잎이라도 하나님께서 다 뜻과 의미가 있어 존재케 한다는 생각에 연약하고 볼품없는 나의 삶일지라도 내게 주어진 삶의 몫에 감사하며 때로는 불편한 나의 육신 때문에 기대만큼 채워지지 않고 또 남들보다 빨리 달리지 못한 나의 삶일지라도 결코 초조해 하거나 내 발걸음을 아쉬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있는 그대로 주님께 드리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목사님, '음성인식'프로그램은 책을 보고 익히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분 집사님께서 오셔서 컴퓨터 놓을 책상을 조립하고 또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시고 하는 모습에서 울컥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 주신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께 어떠한 말보다 깊은 기도로써 감사함을 전합니다. 다가오는 거룩하고 복된 성탄절에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가정 위에 충만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샬롬! -부산에서 0 0자매- 》  
"세계 최대의 허영의 시장"으로 군림하던 당대 아시아 최대의 항구 도시였던 에베소는 지금은 배가 닿을 수 없는 모래 해안선과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황무지와 폐허로 버려진 오늘의 에베소가 처음 사랑을 찾아가지 못하므로 "촛대를 옮기리라" 는 예언의 성취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죄악된 세상을 이기는 길은 회개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촛대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길은 회개와 처 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했습니다. "생명 나무"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같이 에덴동산 한 복판에 있던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뱀으로 가장한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는 줄로 알아 그만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결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이들이 생 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여 화염검을 두어 그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기는 자에게는 이 "생명나무 실 과를 먹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첫 번째 아담이 잃어버렸 던 것을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켜주신다는 것 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으 로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창세기는 처 음 하늘과 처음 땅의 창조를, 요한계시록은 그 처음 땅과 하늘이 모두 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창 세기에는 에덴 동산에 침투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범죄 한 인간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형벌과 죽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요 한계시록에는 인간을 유혹했던 마귀와 죄와 사망의 영원한 멸망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창세기는 인간의 죽음을 말하고 있지 만 요한계시록은 사망과 사단에 대한 정복과 회개와 사랑으로 세상 과 죄악을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이켜보며 회개하는 성숙한 믿음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 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날로 더해가는 사랑이 충만한 성도와 교회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이 천사와 같은 여인을 잃게 되면 나는 미치광이가 되거나 일티 시강에 투신하는 것,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네." 이것은 1856년 3월 26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친구 브란겔리를 통해 열 정적으로 사랑하는 첫 사랑의 여인,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이 여인은 하급관리 이사예프의 아내로 일고여덟살된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폐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황제 타도 모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시베 리아에서 4년간 징역을 마치고 출옥하여 키르기스평원 부근의 자그마한 마을 세미팔라틴스크에서 군복무 중 이사예프 가족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사예프의 아내 마리아는 다정다감하고 정열적 인 스물여섯살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죄수 신분으로 군복무중인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깊은 동정과 연민의 정을 보내었습니다. 4년간이 감옥생활에서 막 벗어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마리아가 보여준 따뜻한 친절은 그를 첫 사랑의 정열로 이끌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1년후 이사예프는 600km나 떨어진 곳으로 전근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넘볼 수 없는 첫사랑이었지만 이별해야한다는 사실에 비탄에 빠져 몸부림을 치다시피했습니다. 첫 사랑 마리아와 헤어져 있는 동안 수많은 편지들을 주고 받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위의 편지밖에 없습니다. 이사예프가 이사간지 몇 달만에 술로 인한 병으로 죽어버리고 마리아는 어린 아들과 남편이 남긴 빚덩어리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소식을 알게 된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불행한 천사 마리아를 구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심하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마리아를 돕고 정식으로 청혼하게 됩니다. 아이가 딸리고 폐병을 앓고 있으며 빚더미에 앉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사랑의 열정에 마리아는 결혼을 승낙하게 됩니다. 결혼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근무지로 돌아오는 도중 심한 간질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간질환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 날 처음 알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권이 되어 아내 마리아와 함께 페테르브르크로 돌아왔지만 마리아의 폐병은 더욱 악화되었고 경제사정도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블라디미르, 모스크바로 옮겨가며 치료와 요양을 하다가 1864년 4월 서른 여섯 살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그런데 마리가아가 모스크바에서 요양생활을 할 무렵 도스토예프스키는 수슬로바라는 스물한 살의 젊은 여성과 밀애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여인과 재혼한 후에도 마리아의 아들을 끝까지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마리아에 대한 첫 사랑은 이미 그 열정이 식어진지 오랬지만 자신의 의무만은 다했다는 변명일 것입니다.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등 대작들을 발표한 러시아의 대작가였지만 첫 사랑을 저버린 그였기에 뒷맛이 씁쓸하고 개운치않은 느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대부분 첫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지만 그 첫 사랑에 대한 추억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첫 사랑은 그저 추억으로만 간직되어져야만 하지, 첫 사랑을 찾으려해서는 피차가 망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을 첫 사랑으로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첫 사랑에서 멀어졌다면 회개하고 첫 사랑을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낙원을 이루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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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실상은 부요한 자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2:8-11)

심판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만을 받은 교회는 일곱개 교회 가운데 빌라델비아와 서머나 교회 뿐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악질적인 핍박과 로마 제국이 황제를 신격화하며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환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믿음의 정절을 지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칭찬받은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서머나의 형편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서머나는 '아시아의 꽃, 아시아의 면류관'이라고 불리울만큼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습니다. 현재 인구 20만을 갖고 있는 터키의 이즈미르(Izmir)가 곧 옛 서머나입니다. '서머나'라는 이름은 일상적인 향료인 '미르'(myrrh)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미르'는 천막에 쓰이기도 하고 시체 방부제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가혹한 핍박과 환난, 궁핍을 겪으면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맡겨진 복음전도에 충성을 다한 신실한 증인으로서 살아간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항기나는 향료, '미르'라는 것을 암시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서머나는 로마의 키케로가 "우리의 자랑 신실하고 가장 오래된 우방"이라고 평가할만큼 아시아의 어느 도시보다도 로마에 대해 눈에 띌 정도로 충성을 다하고 로마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신의를 지켜온 도시였습니다. 로마가 원정 전선에서 불리하게 몰려 로마군인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서머나 사람들은 자신의 옷을 벗어 전선에서 고생하는 로마 군인들에게 보내 줄 만큼 로마에 대한 대단한 경외심과 신의를 가졌었습니다. 그 결과 주전 195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로마신과 로마 여신을 위한 신전을 짓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서머나의 로마에 대한 충절은 고대 세계에서 유명했던 것입니다. 서머나는 문화와 지식, 예술이 뛰어난 도시, 아시아의 면류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유명한 운동경기가 매년 열릴만한 거대한 운동장, 웅장한 공공 도서관, 오데이온이라 불리우는 아시아에서 제일 큰 음악당 등을 갖춘도시로 당대 최고의 이교 문화와 문명, 장엄하기까지한 이교의 신전들이 즐비한 도시였습니다. 서머나 시민들은 이러한 서머나를 세계 최고의 도시로 자랑하며 서머나 시민이라는 자존심, 프라이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서머나에 상당한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을 본문 9절을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도시 미화와 발전을 위해 1만 데나리온(1데나리온은 일반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는 거액을 헌납할 만큼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머나 권력자들과 밀착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 도시의 유력인사도 상당히 많았었습니다. 오늘날도 세계 주요 국가의 정치 경제 등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무리들은 어김없이 유대인들인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는 말로 고발하며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핍박하는데 앞장서서 로마 당국을 충동질하고 정치 경제적으로 압제를 가하여 기독교인들을 환난과 궁핍으로 몰아갔던 장본인들이 바로 이들 서머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를 박해한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복음 전파로 유대교에 입교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 유대 회당으로 가지 않고 예수 믿고 교회로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정경유착을 통해 이룩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로마 당국을 충동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하여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는데 앞장섰고 기독교인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도시 유력자들을 선동하므로 기독교인들을 정치 경제적으로 압박하고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이교 세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구실로 삼아 핍박을 가했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나의 몸이요, 이것은 나의 피"라는 성만찬 말씀을 왜곡하여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식인종이라는 소문을 퍼트려 기독교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둘째로, 기독교인들이 예배 후에 공동 식사를 합니다. 대부분 교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그중에 조금 넉넉한 몇몇 교인들이 예배 후에 굶주린 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위해 음식을 마련해 왔습니다. 이같은 공동식사는 오늘날도 대부분 교회에서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랑의 애찬(愛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애찬(愛餐)"이라는 말을 무슨 성적 잔치를 벌이는 것처럼 떠벌려 부도덕하고 정욕적이며 방탕한 모임이라고 규정하고 박해의 구실로 삼았습니다. 셋째로, 가족 중 누가 신자가 되면 나머지 안 믿는 가족과 분리되는 것으로 곡해하여 기독교인들은 가정을 파피하고 가족 관계를 악화시킨다고 비난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 기독교인들은 가정 파괴를 선동하는 무리들로 몰아부쳐 핍박을 가했던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태복음10:34-37)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검을 던지러 왔노라>는 말씀은 가정을 파괴하고 세상을 죽이기 위한 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죄로 병든 세상을 수술하여 살리기 위해 <검을 던지러 왔노라>는 뜻입니다. <검을 던져야> 할 곳이 어디 이 사회뿐이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검을 던져야>할 것을 말합니다. 어미가 모르는 아비의 죄, 아비가 모르는 어미의 죄, 어미가 모르는 딸의 죄, 딸이 모르는 어미의 죄, 며느리가 모르는 시어미의 죄, 시어미가 모르는 며느리의 죄, 이 죄악들이 예수께서 던지시는 검으로 수술되지 않으면 몽땅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악으로 서로 원수가 되기 전에 예수의 검으로 수술되지 않으면 피차에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우리네 가정이 검을 던지지 아니하면 안될 만큼 심각하게 죄로 병들어 가고 있음은 누구나 다 하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들 가정은 대부분 온갖 방탕과 음란, 사치와 허영, 탐욕과 정욕, 그리고 각종 우상숭배로 심각하게 병들어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머나 당시에도 그 형편이 마찬가지였음에도 회개하기는커녕 주어진 말씀에 말꼬리잡아 박해의 빌미로 삼았던 것입니다. 넷째로, 당시 이교들과 이방인들은 기독교를 무신론자라고 비난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처럼 신상도 없이 예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기독교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므로 정치적으로 불충성하는 잠재적 혁명가로 그냥 내버려두면 아주 위험한 집단이라며 몰아세웠던 것입니다. 여섯째로, 기독교인들은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베드로후서3:10-13)는 말씀에서 보듯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여 방화자로 몰아쳐 화재만 발생하면 기독교인들을 의심하고 기독교인 소행으로 소문을 퍼트려 핍박을 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사단의 회"라고 규정한 유대인들의 악랄한 박해 선동과 그 선동에 놀아난 로마 당국의 핍박, 그리고 이교도들의 터무니 없는 왜곡에 따른 온갖 박해 구실로 인해 로마 권력의 칼날 앞에 서머나 교회는 엄청난 환난을 당했고, 그 권력에 빌붙어 먹고 사는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의 끈질긴 박해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재산이 몰수되거나 강탈당했고 생계마저 어려운 궁핍에 허덕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머나 교회가 겪고 있는 "환난과 궁핍"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시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시므로 핍박자들의 허상과 핍박받은 성도들의 실상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핍박받는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그 자체였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핍박으로 인해 "환난과 궁핍"한 가운데 살았다는 것은 어떠한 핍박과 박해에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켰으며 그 신앙생활이 깨끗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인물이 서머나 교회 감독인 폴리캅이었습니다. 그는 "환난과 고난을 받으나 두려워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을 다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된", 기독교 순교사의 교과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주후 155년 2월 23일 토요일에 순교당했습니다. 그 때는 운동경기로 인파가 들끓고 있었습니다. 군중은 모두가 흥분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신론자들을 없애라! 폴리캅을 찾아라!"고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물론 그는 피신할 수 있었지만 이미 자기 머리밑의 베개가 불타는 환상을 꿈에 보았고 그 꿈 후에 그의 제자들에게 "나는 산 채로 불에 타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보아 자신의 순교를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은신처는 고문에 못이겨 자백한 한 어린 노예에 의해 밝혀졌고 당국은 폴리캅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폴리캅은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에게 음식을 주고 원하는대로 다 주라며 선대할 것을 말하고, 그 동안 자기는 마지막 한 시간의 기도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체포 책임자까지도 폴리캅이 죽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만큼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그리스도의 향기였습니다. 그래서 시내로 들어가는 도상에서 폴리캅에게 "가이사가 주시요!라고 딱 한번만 말하고 그에게 제물을 드리고 죽음을 면한다고 해서 나쁠 것이 무엇입니까?"라며 사는 길을 택하라고 간곡히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주님이시라는 확고한 신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가 원형극장안에 들어섰을 때 하늘에서 "폴리캅아, 굳세어라. 그리고 남자답게 싸워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지방 총독은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주하고 가이사에게 제사를 드리든가 안 그러면 죽음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폴리캅은 정중히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했습니다. "86년 간 나는 그리스도를 섬겨왔는데 그 동안 단 한번도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부인하거나 섭섭하게 하지 않았으니 내 어찌 나를 구속해주신 내 왕, 내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며 욕하겠소?" 그러자 총독이 그를 불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폴리캅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잠시 타다가 곧 꺼져 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나, 이는 당신이 다가올 심판날과 영원한 형벌에 악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불을 알지 못함이요. 무엇 때문에 지체하는 겁니까? 자 어서 와서 하고 싶은대로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폴리캅은 박해자들까지도 폴리캅의 인물이 아까워 살기를 간청했으나 그 마음이 변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군중들은 목공소와 목욕탕에서, 태워죽일 나무를 가지고 떼거리로 몰려 들었습니다. 이러한 일에 그 누구보다 앞장 섰던 무리들은 예수께서 "사단의 회"라고 불렀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핍박자들이 그를 화형대에 묶으려 들자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라. 불을 견디어내게 힘을 주신 그 분이 나에게 이 불길 속에서도 너희들이 못으로 꼼짝 못하게 박아놓은 것이 없을지라도 나로 하여금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게 하여 주실 것이요"라며 묶을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폴리캅을 느슨하게 묶은 채로 불을 질렀습니다. 그 때에 폴리캅은 다음과 같은 그 유명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이 시간에 영과 육이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기 위하여 순교자의 반열과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리고 오늘 주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통해 모범을 보이시고 이미 저를 위해 하늘 길을 예비하심을 찬양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나이다....아멘.》

이상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다음과 같은 있음직한 순교사화도 있습니다. 뜨거운 불길이 폴리캅을 덮쳤지만 그 불길로는 폴리캅을 죽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형 집행관이 칼로 찔러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형 집행관이 폴리캅에 칼을 찌르자 그 불길속에서 비둘기 하나가 나왔고 이어서 피가 어찌나 많이 나왔든지 불이 다 꺼지고 모든 관중이 놀라면서,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저렇게 다르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폴리캅은 서마나에서 순교당했습니다. 그의 순교는 믿음의 정절을 끝까지 지킨 순교요 오직 예수께 대해 죽도록 충성한 순교였습니다. 서마나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그 모든 환난과 궁핍을 극복하고 믿음을 지키고 칭찬만을 받은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동족의 핍박과 로마 제국의 박해가 제아무리 극심하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사랑을 저버리지않고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갔던 순교자들이야말로 참 생명의 길을 선택한 자들인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를 돌아보며 여러분은 지난 한 해 동안 믿음의 정절을 지켜왔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죽도록 충성을 다해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2002년 새해를 맞이하기 전 우리는 다시금 마음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머나 교회가 당한 극심한 고통과 환난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친히 그것들을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8절) 이로 말미암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부분은 없습니다. 도리어 성경은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핍박을 받으며 "환난과 궁핍"을 당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것, 믿음의 정절을 지킨다고 하는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충성을 다 한다는 것에는 환난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고, 예수 처럼 살며, 예수를 따라 가는 것은 '베드로처럼 <배와 그물과 부친까지도 모두 버려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예수를 따라 가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고자 했던 무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하셨습니다. 예수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이 없어 보이지만,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었고 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라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지만", 그가 채찍에 맞으며 가시 면류관과 창에 찔리고 상하며 십자가에 고난받아 죽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죄악에서 구원함을 받아 평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으로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기 위해서요, 그가 약하게 되심은 우리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요, 그가 징계를 받아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게 되심은 세상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서머나의 유대인들처럼 권력에 빌붙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여 온갖 특혜와 부귀영화를 누린다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실상 사단의 졸개들이며 모든 것을 태워버릴 영원한 불못 구덩이에 들어갈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처럼 가난한 자들을 부요케 하고, 병든 자들을 강건하게 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며, 갇힌 자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고 병든 자들과 그 아픔을 함께 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갇힌 자들처럼 사는 사람은 "실상은 부요한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영광스런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예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며, 세상을 다 잃는다해도 예수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라는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칭찬하신 것은 아시아의 면류관이라 일컫는 서머나 도시, 최고의 문화와 문명 시설들을 자랑하며 인간을 신격화하여 황제숭배에 앞장 서는 그 서머나 도시가 아니라, 그러한 도시 속에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어떠한 핍박과 환난, 궁핍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충성을 다한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서머나 시민됨에 자긍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예수 믿고 하늘 나라 시민됨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몇 천억짜리 월드컵 축구 경기장을 10개나 가지고 있고, 설사 세계 최고의 문화와 문명을 자랑하는 도시나 나라에 산다고 해도 그것을 긍지로 여길 것이 아니라, 비록 그런 도시에서 믿음의 정절을 지키고 오직 예수께 죽도록 충성을 다하는 신앙생활 때문에 세상에서 "환난과 궁핍"을 당한다해도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실상은 부요한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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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으라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2:12-17)

어떤 청년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주례자 앞에서 신부입장을 기다리고 있던 신랑이 신부입장 결혼 행진곡이 한창 울려 나오는데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내 식장이 소란해졌고 주례 목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축하객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30분이 족히 지나서야 신랑이 헐떡거리며 돌아왔는데 얼굴과 예복이 온통 물에 젖었고 게다가 검뎅이 칠로 뒤범벅이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주례를 계속해 주시지요?" 그 청년은 죄송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주례목사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신랑은 어디를 갔다왔습니까?" "목사님, 저는 소방수입니다. 신부의 결혼행진곡이 막 울려 퍼지려는 순간 화재 싸이렌이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서 불을 끄고 지금 달려오는 길입니다." 신랑의 이 말에 남은 축하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정말로 책임감이 강한 충실한 소방수라며 칭찬해 마지 않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되려면 자신에게 맡겨주신 위치를 충실히 지키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는 예수의 충성된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칭찬받은 것은 신앙생활이 극히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아 믿음을 저버리지않고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있던 버가모(pergamos)는 20만권 이상의 양피 두루마리 도서를 간직한 정도로 세계적인 큰 도서관이 있는 유명한 문화중심도시이며, 로마 총독이 주재하는 권력과 정치의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황제숭배의 본거지이며 제우스, 아테네,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우스 등의 이교 신전이 즐비했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치료와 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에는 뱀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했었는데 이는 뱀을 숭배하면 각종 질병이 낫는다는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뱀은 사단의 상징이기 때문에 본문에서 이곳을 '사단의 위가 있는 데'(13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버가모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이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버가모는 사단의 지배력이 가장 강한 곳이며 그만큼 사단의 권위가 최고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버가모 교회 교인들은 싫든 좋든 기독교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했고, 그렇다고 해서 그 도시를 벗어나 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는 사는 곳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다해도 그곳이 예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 파송받은 곳이라는 믿음과 사상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는 현실도피가 아니라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거나 그 환경에 좌우되는 생활이 아니라 죄악의 환경을 극복하고 변화시켜나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인 것입니다. 간혹 지금 사는 곳보다 신앙생활이 쉬운 곳, 그리고 전도가 훨씬 용이한 곳에서 생활하면 신앙생활도 복음 전도도 월등히 나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않습니다. 어떤 예수 믿는 청년이 모 회사에 다니는데 그 회사 분위기가 신앙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않고 회사원들에게 복음 전도도 쉽지 않는 곳이어서 이곳보다 규모는 작아도 기독교인 사장에 대부분 사원들이 기독교인들인 작은 회사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자신의 모든 생활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하시는 기독교인의 삶은 이 청년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환경과 직장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가 힘들고 어렵다고 그곳을 벗어나 도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러한 환경과 직장일수록 더욱 더 그곳에 머물면서 그곳 환경과 직장을 복음으로 정복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여 살라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희생을 각오하고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고 그곳을 복음으로 정복해야하는 사명을 지닌 것입니다. 기독교가 초대교회부터 신앙생활과 복음 전도의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도피해버렸다면 지금의 기독교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버가모는 황제숭배와 각종 이교숭배, 우상숭배 등 사단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가모 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며 충성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았다"는 말은 어떤 이교세력과 우상숭배세력의 도전과 핍박에도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고 예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이름을 끝까지 증거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순교자 안디바는 터툴리안의 말에 의하면 놋쇠 가마에 서서히 구어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예수를 증거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 사실을 알고 그에게 "충성된 증인"이란 예수 자신의 칭호을 주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 이름을 굳게 잡았을 뿐만 아니라 맡은 일에도 충성을 다했던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널리 알려진 존 와나메이카는 세계 주일학교 운동에 크게 기여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백악관에서는 신망이 두터운 그에게 장관이 되어 주기를 간청했으나 그는 정부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관이 되면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며 사양했습니다. 그는 "내가 장관이 됨으로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고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만약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에는 내 고향 필라델피아로 가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면 장관이 되어도 좋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그래도 좋다고 승낙하여 그는 장관이 되었습니다. 장관 직책이란 놓쳐도 되지만 주일학교 교사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직책은 결코 놓쳐서는 안될 너무나 소중한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미국의 장래를 위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중요시했던 미국의 주일학교가 있었기에 오늘의 미국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어떤 유혹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맡은 일에 충성된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충성된 증인이 되어 예수의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무리들 때문에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간단히 말하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과 유별나게 살지 말고 조상적부터 지켜져 온 관습이나 도덕, 풍습이나 윤리를 따른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을 올린다고 그게 뭐 잘못된 것이냐는 것입니다.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을 올림으로 자손들이 잘 되기를 빌며 자손들로 하여금 불효를 막고 부모를 잘 섬길 수 있도록 하며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자는 것인데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언뜻 들어보면 참으로 좋은 취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상숭배를 통해 후손들이 잘 되기를 비는 것 자체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자손들로부터 숭배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후손들의 안위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에 들어갔거나 아니면 지옥에 떨어졌기 때문에 제사상 받아 먹으러 올 수도 없고 자손들의 안위를 지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상을 차려놓으면 조상의 혼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이 얼싸 좋다하고 찾아와 숭배를 받기 때문에 결국 귀신 숭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상을 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우애하고 부모에게 공경하는 것도 주 안에서, 즉 하나님 말씀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이 세상 풍습이나 관습,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거나 격리되어 살라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경멸하거나 증오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도덕이나 윤리 등 세상 사람들이 사는 표준보다 더 나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일껏 제사상 차려 놓고 귀신들을 불러들여 부모공경, 형제우애 운운하므로 윤리 도덕을 귀신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말고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므로 윤리 도덕을 하나님 수준으로 끌어 올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세상 수준으로 끌어내려 세상 풍습과 관습을 따르게 하지 말고, 세상의 수준을 금세와 내세에 확실한 약속있는 기독교 수준으로 끌어 올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은 한 마디로 세상에 적당히 타협해서 쉽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버가모 교회 안에 일부 성도들에게 "회개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검은 심판의 칼인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검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6:17)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삶에 잘못과 죄악을 깨우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삶을 판단할 수 있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신앙생활 내용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 수준에 살고 있다면 과감하게 살던 방식을 말씀의 칼로 절단하여 버리고 회개하여 새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않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므로 예수 이름을 더럽히면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검은 심판의 칼이 되어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아 신앙의 성결을 지키며 주어진 직분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족제비과의 어민(ermine)이란 동물은 그 털이 순백이어서 비싼 털옷의 장식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어민은 자기의 털을 깨끗이 간수하는 것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깁니다. 이 본능을 이용하여 사냥꾼들은 어민이 사는 곳의 출입구에 더러운 물질을 발라 놓습니다. 어민은 오물이 없는 다른 쪽 입구에는 사나운 사냥개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털을 깨끗이 간수하기 위해 깨끗한 입구로 나온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몸을 더럽히느니 죽음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세상과 타협하여 예수 이름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예수 이름을 굳게 잡고 죽음을 택하는 순교자의 성결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죽기까지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충성된 증인으로 산 성도에게 예수께서는 "감추인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리라"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감추인 만나"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할 때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때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감추인 만나"는 먹어서 죽지않고 영생하는 거룩한 생명의 양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는 초대교회 당시 연회 잔치 초대권으로 <텟세라>라 불리우는 흰 돌을 주는 풍습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 텟세라, 즉 흰 돌을 가진 사람만이 그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흰돌을 주시겠다는 것은 장차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할 권리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시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받은 자의 이름을 새기는 것으로 이제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사도 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고백한 것처럼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를 맛본 자외에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의 보증으로 주신 성령체험을 통해 여러분의 이름이 흰 돌 위에 기록된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불레셋 장수 골리앗이 칼과 창과 단창으로 이스라엘의 군대를 치러 나올 때 이에 맞선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 곧 적장 골리앗이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치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간단히 쓰러트리고 승리했습니다. 과연 다윗의 말대로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며 그 이름, 오직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세상 끝날까지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모든 것을 놓친다해도 예수 이름만은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세상을 다 얻어도 예수 이름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리친 이후 다윗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다 겪으면서 한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놓쳐본 적이 없습니다. 인류가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아야 할 이유는 "예수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4:12)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고 했습니다. 세상이 골리앗처럼 우리 앞에 서있을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으시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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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음행하지 마라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18-29)

1. 두아디라는 소아시아 일곱 도시 중 가장 작고 이름없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직조업과 염직업 등이 성행하는 상공업중심 도시로 각종 조합(guild)이 발달했었습니다. 직공들이나 상인들이 결속해서 만들어진 조합은 막강한 단결권 행사로 상권을 장악했고 그 영향력은 종교까지도 좌지우지할 정도였습니다. 어떤 시민이든 그 조합에 가입하지 않고서는 상업과 공업에 종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었습니다. 당시 조합원들은 단합된 모습으로 이교 신전에 모여 소위 회식(공동식사)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식에 나오는 음식들이 모두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회식은 과음과 풍기 문란의 기회가 되어 대부분 조합원들간에 성적 타락을 조장했습니다. 당시 이렇게 막강한 조합세력은 교회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므로 미약한 교회는 이 조합과 충돌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 신자들 역시 두아디라에 살면서 그 지방 조합의 세력을 벗어나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시 조합 세력의 관례를 따르지 않게 되면 그는 사회에서 고립되고, 조합원의 귄리와 이익까지 배당받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다른 도시들처럼 황제숭배가 강요되지도 않았고 아폴로 신전외에는 다른 이교신전이 없었으나 그대신 조합 세력이 막강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있는 두아디라 교회를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은 불꽃같고 그 발은 빛난 주석과 같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두아디아 교회의 죄악상을 꿰뚫어 보시는 모습과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어김없이 짓밟으시는 준엄한 심판의 발을 표현한 것입니다. 황제숭배나 이방종교의 핍박이 없었음에도 교회 내부에 침투한 죄악을 좌시하지 않으시고 회개치않으면 이를 반드시 철저히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보신 것은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이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이란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인내로써 섬긴 것들"을 말합니다. 여기 사랑을 믿음보다 앞세운 것은 두아디라 교회의 포용주의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사랑을 위주로 할 때 교회는 비진리까지 포용하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 곧 진리에 대한 믿음을 근본으로 해서 사랑이 그 포용력을 가질 때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여 포용할 수 있는 것인데 두아디라 교회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이란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신본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라야 참된 것입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을 앞세우다 믿음을 소흘히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두아디라 교회는 진리의 터전위에 확고하게 서지 못한 상태에서 포용주의의 사랑만을 위주로 활동을 하다가 그만 비진리 곧, 이세벨같은 이단까지도 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 것보다 나중 행위가 더 많았다'는 칭찬을 받아 에베소 교회와는 대조적으로 처음 사람보다 나중 사랑이 더 열렬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지나친 포용주의의 결과 정통교리를 상실한 사랑이 되고 말았습니다.분재(盆栽)라는 것이 있습니다. 큰 나무를 작게 하여 화분에 가꾸는 기술을 말합니다. 미국 사람은 이것을 '난쟁이 나무', dwarf tree라고 부릅니다. 느티나무처럼 엄청나게 커지는 나무도 30∼45cm 정도 크기의 난쟁이로 만듭니다. 그 방법은 간단한데 곧은 뿌리, 즉 주근(主根)을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나무는 작은 표면의 잔뿌리 즉 세근(細根)으로 연명해야 하기 때문에 그 결과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란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근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주근이 되는 믿음이 확고한 진리의 터 위에 세워지지 않고 아무리 많은 사랑의 봉사를 했을지라도 그것들은 세근에 지나지 않아 진정한 영적 성장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3. 두아디라 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확고하게 세워진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고 말았습니다. 이세벨은 그녀의 사상과 활동성격이 구약의 실제인물 이세벨과 같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구약의 이세벨처럼 악명 높은 여자는 드물것입니다. 이세벨은 시돈 왕 에드 바알의 딸로서, 이스라엘 왕 아합의 왕비가 된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가 시돈에서 시집올 때 자신의 나라 신, 바알을 가지고 들어와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바알을 숭배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알종교의 부도덕한 생활을 퍼뜨리고, 바알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까지 따라 들어오게 하여 그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바알은 농업 신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남녀사제들끼리 혼음을 행했고,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기도 하고, 제사의식으로 춤을 추며 몸을 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바알 숭배는 자연히 이스라엘의 도덕을 타락시키고 종교를 더럽혔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에 바알 숭배의식을 혼합하여 종교의식을 갖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응하지 않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죽였고 자기 식탁에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같이 하는 등 각종 특혜를 베풀었습니다. 이세벨은 이런 바알 종교의 대표적 악질에 속하는 여인으로 <음행과 술수>의 대명사로 불리웠던 여자였습니다. 이세벨은 분명 이스라엘 종교를 타락시킨 부도덕한 음녀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은 교회를 타락시킨 음녀의 세력을 합니다. 이세벨같은 여선지자의 음행과 술수에 넘어가 상당수 교인들이 행음과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세벨은 에베소교회와 버가모 교회를 미혹했던 또 하나의 발람이었고 니골라였습니다. 계시록 2장에 있는 "악한 자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 "니골라당",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이세벨" 등은 모두가 영지주의 이단사설로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려는 한 통속의 음녀 세력입니다. 특히 두아디라의 음녀 이세벨은 조합의 막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두아디라 교인들을 협박하다시피하며 기독교인이라해서 조합에 가입하지않으므로 스스로 자기 사업을 망칠 필요가 무엇이며, "우상은 너희 기독교의 말대로 아무것도 아닌데" 우상의 제물을 먹는 회식에 불참하므로 따돌림당할 필요가 무엇이냐고 유혹했습니다. 이세벨은 세상과의 타협을 최상의 처세술과 미덕으로 가르치며, 그렇게 하면 교인들도 많아질 것이고, 돈 많이 벌어 교회 일도 많이 하면 누이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냐며 적극 조합에 가입하여 조합원들과 행동을 같이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교회는 겉으로 볼 때 교인들이 차고 넘치며 교회재정이 막강해져 교회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이세벨같은 음녀의 세력이 조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더럽혀 결국 교회를 파멸케 하려는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는 여기에 그치지않고 음행 등 온갖 죄악을 선동했습니다. 사람이란 무슨 죄이든 다 지어 보아야 하며, 죄를 경험해 보지 않고 깨끗한 영혼을 지닌 사람보다는 온갖 죄를 다 짓고도 그 영혼이 깨끗한 사람이 더욱 온전한 사람이라며 우상숭배와 음행을 선동했던 것입니다. 쾌락에 철저히 자신의 몸을 맡기면서도 그 영과 혼은 쾌락에 물들지 않는 사람, "사단의 깊은 것"까지도 체험해 본 사람이, 고도의 종교적 성숙한 인간이 될 수있다라고 가르치며 한번쯤 철저하게 쾌락과 타락에 빠져보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두아디라 교회는 이단에 물든 정도가 버가모 교회보다도 훨씬 심했습니다. 버가모 교회엔 소수가 그 교훈을 따르고 있었으나 두아디라 교회는 이미 전 교회적으로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에 넘어갔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단에 넘어간 무리들이 소수였으나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의 교훈에 물들지 않은 자들이 소수에 불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두아디라 교회가 번성하는 것 같았으나 실제로 번창한 것은 음녀 이세벨을 따르는 무리들만이 번창한 것이고,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믿음을 더럽히지 않은 성도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세벨은 교회보다 자기 사업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 말씀보다 사업적 성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 것을 두아디라 교회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교회가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업이 번창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세상의 경제적 도움이나, 세상의 교훈이나 사상 등을 받아드리거나 지원을 받아드리게 되면 이미 그 교회는 음행하는 것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설사 교회가 부흥되고 성장하며 번성한다해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음녀 이세벨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음녀 이세벨의 목적은 교회로 하여금 간부(姦婦)가 되게 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상부상조하는 기관이 아니라 세상을 예수 이름으로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4. 이세벨의 교훈에 물들어간 것을 행음과 간음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신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긴다."(출34:15)라고, 신약시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을 대적하는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마12:39) 그러므로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럽히는 것으로 행음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세상과 벗하는 사람들을 "간음하는 여자들"로 표현하며, 세상과 벗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원수됨을 알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밝히는 세상은 "큰 성 바벨론, 귀신의 처소,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계17,18장)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바는 교회를 세상과 마찬가지로 더럽히는 것이지 교회가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원하는 바는 교회가 자기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이 원하는 바는 이기적인 사랑이지 십자가의 희생적이며 거룩한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은 십자가의 거룩한 사랑을 싫어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바는 자기가 주인 노릇하는 것이지 예수가 주인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여 하나님의 백성됨을 싫어합니다. 세상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 앞에 자기 뜻과 생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아를 아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며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은 교회에 그냥 다니면서 세상이 원하는대로, 세상 사람 사는 방식대로 살면 돈도 제법 벌 수 있고, 출세도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교회에 많은 봉사도 할 수 있어 피차에 좋지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교훈에 따르면, 이방 종교를 포용력을 가지고 교회가 수용함으로 이방인들을 훨씬 더 쉽게 교회로 이끌수 있을 것이고, 교회에 대한 핍박이나 환난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초대교회 전체가 이런 이세벨의 교훈을 받아들였다면 기독교는 당시 너저분한 종교로 끝장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그 생명력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 것은 예수 외에는 구원받을 다른 길이 없다는 것, 예수 외에는 다른 진리가 없다는 것, 예수외에는 생명이 없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인생이 가야할 길이요, 살아야 할 진리요, 예수만이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외에는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리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이제 여러분은 하나만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세상 신을 섬기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과 사랑을 보여주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들이 다 우상숭배에 빠진다해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며 분명한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수24:14,15) 모든 교회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중심과 사상까지도 훤히 들여다 보시고 계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이세벨의 교훈을 용납하지 아니하며 믿음을 굳게 잡은 성도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 권세를 주어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2:8,9을 인용한 것인데, 철장 권세로 질그릇을 깨뜨린다고 해서 열방들을 때려부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통치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리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깨끗하게 지킨 자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약속은 새벽별을 주리라는 것입니다. 새벽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 끝날까지, 아니 영원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될 것이며, 예수께서 결코 그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입니다. "질그릇을 깨뜨리는 철장권세", 즉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권세"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은 것은 오직 세상으로 더불어 음행하지 않으며 하나님 뜻대로 사는 성도들에게 주어는 축복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새벽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의 신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신랑되시는 예수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음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할 수 있는대로 교회와 세상을 더럽혀 멸망케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더럽혀진 세상 인생들을 십자가의 피로 깨끗이 씻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 세상에 오셨고 그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되시는 성도로서 음행하였거든 회개하시고 마음과 뜻을 다해 오직 예수만을 사랑하는 정결하고 거룩한 주님의 신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은 어떠한 세상과의 타협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과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켜며 사는 성도가 되어 "질그릇을 깨뜨리는 철장권세와 새벽별"을 받으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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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깨어 있으라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1-6)

마틴 루터는 어느 날 희한한 꿈을 꾸었습니다. 이 꿈은 종교 개혁의 불을 당기려는 그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사탄이 기독교인 전멸 작전을 펴고 부하들로부터 작전 보고를 받는 내용의 꿈이었습니다. 사탄의 부하 하나가 이렇게 보고합니다. "수령님, 저는 사막을 걸어가는 예수쟁이들에게 굶주린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 앞에서도 평화스럽게 기도를 하더군요" 다른 부하가 또 보고합니다. "저는 바다를 항해하는 예수꾼들에게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암초에 걸려 배가 파선당해 죽어가면서도 찬송을 부르더군요" 그러자 또 다른 부하 하나가 아주 특이한 보고를 합니다. "저는 어느 한 교회를 찾아가 10일 동안 모든 일이 잘 되고 평안하게 만들어 주었더니 그들의 육과 영이 완전히 썩어버렸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촛대로 상징되는 일곱 교회와 일곱 별로 상징되는 일곱 교회 사자들을 붙드시고 인류 구원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시지만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 교회에 붙은 생명의 불을 끄고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생명의 불이 꺼진 유명무실한 교회가 되게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주요 방법이 교회로 하여금 무사안일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가 있었던 사데는 부강함과 지형적 난공불락의 성벽을 자랑하며 무사안일에 빠져 결국 두 번씩이나 함락을 당하고 로마제국의 경제적 지원으로 어느 정도 도시 모습을 찾았지만 이미 퇴폐하고 죽은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데는 BC 700년경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루디아 왕은 찬란함과 모든 위엄과 거의 무한한 부요함속에서 나라를 통치했었고 헬라 사람이 두려워할 정도로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고도 450m에 위치한 사데는 지형적인 난공불락의 성을 자랑했고, 크뢰수스 왕이 통치할 때는 역대 왕중에서 가장 국력과 문물의 황금시대를 구가했었습니다. 그 때는 부요함과 화려함, 웅장함과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사데는 페르샤와의 전쟁을 시작으로 종말을 당하게 됩니다. 페르샤 왕 싸이러스가 사데 성을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데 왕 크뢰수스와 사데 사람들은 난공불락의 성벽을 믿고 적군의 포위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싸이러스는 14일간의 포위 끝에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누구든지 난공불락의 사데 성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에게는 특별상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히에로에데스라는 군인이 성벽의 발포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사데 병사 하나가 실수해서 철모를 성벽밑으로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찾으려고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히에로에데스는 성벽에 오르는 작은 틈바구니를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페르샤 군사들이 그 바위 틈바구니로 기어올라 성벽 발포대까지 올라갔지만 보초병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데 성 사람들은 발포대는 보초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모두 철수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데 성은 이렇게 지형적 이점만을 믿고 무사안일에 빠져있다가 결국 무기력하게 함락되고 퇴폐의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 200년이 지나서 사데는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하에 희랍 문화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사데 지역은 안디오쿠스가 통치했는데, 그의 라이벌 아케우스가 이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다 난공불락의 사데 성으로 피신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안디오쿠스는 1년간이나 사데 성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라고라스라는 한 군인이 과거 페르샤 군사 히에로에데스가 발견했던 그 성벽 틈바구니를 또 찾아냈던 것입니다. 곧 이어 밤을 이용해 특공대원들이 성벽 틈바구니로 침투했고, 사데 사람들은 과거의 교훈을 까맣게 잊고 보초 하나 세우지않고 모두 깊이 잠들어 있다가 또다시 함락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이 후 로마가 사데 성을 지배하며 로마황제 티베리우스는 관대하게도 5년간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었고, 사데의 재건을 위하여 1천만 세스터스(40만 파운드)라는 당시 로마 당국의 막대한 경제적 지원으로 사데는 쉽사리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무사안일에 빠져 두 번씩이나 함락을 당한 결과 패배의식에 빠진 사데 성 사람들은 이미 생명과 생기를 잃고 도시는 죽은 도시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도시 환경에서 사데 교회 교인들도 그 생명력과 능력을 상실했고, 외부의 경제적 지원으로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데 교회 역시 사데 성만큼이나 지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되고 넉넉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곳은 니골라당과 같은 이단 사설 등의 위협도, 황제숭배의 박해도 없는 그야말로 신앙의 무풍지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환경에서 교회는 부흥하고 성숙되어가기 보다는 이방의 세속문명에 도취되어 영적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핍박과 이단의 공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도전이 없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단의 무리 니골라당으로 인해 애를 먹은 에베소 교회, 박해로 인해 순교당한 서머나 교회,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로 인해 어지럽던 버가모 교회, 음녀 이세벨에 미혹되어 괴로움을 당한 두아디라 교회는 그래도 죽었다는 책망을 듣지는 않았습니다. 사자는 죽은 고기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마귀는 죽은 교회엔 흥미가 없습니다. 박해는 언제나 생명력 있는 교회를 노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교회, 그것은 이미 마귀에게도 흥미가 없는 교회요, 박해할 가치가 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신앙의 고민이 있는 것은 그래도 신앙이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사데 교회는 이런 어려움이 없었고, 이런 신앙의 호조건들이 사데 교회를 죽어 버리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어 버린 교회에는 외적인 박해도, 내적 이단사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사데 교회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2절) 사데 교회는 믿음의 흰 옷이 더럽혀진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사데 교회는 잠자는 교회였습니다. 이 세가지 모습은 죽은 교회의 표징입니다. 사데 교회는 그 규모나 조직이나 재정 등에서 다른 교회에 뒤질 것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어느 작가의 글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상당한 한 독일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인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튿날 네 시간 이상 걸려 도착한 병원 문 앞에는 '경상자의 문'과 '중상자의 문'이라는 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는 '경상자의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긴 복도를 한참 걸어가자 두 개의 문이 나타났는데 한 문은 '장교의 문' 이었고, 다른 문은 '사병의 문' 이었습니다. 그는 '사병의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역시 한참을 걸어가니 또 두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당원의 문'과 '비당원의 문'이었습니다. 그가 아무 의심없이 '비당원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곳은 허허벌판 거리였습니다. 그가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께서 치료를 잘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어머니. 사실 치료는 받지 못하고 크게 구성된 조직만 보고 왔을 뿐입니다." 현대 교회는 대형화되어가면서 조직이 필요하고 그 조직과 인사에 대한 관리를 위해 현대 경영기법 등을 도입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인들도 그에 따라 분주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조직력이나 현대의 뛰어난 경영기법으로 교회 활동을 극대화시키고 그 활동의 효율성을 제고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령과 말씀으로 지배되지 않으면 이미 그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겉모양은 교회지만 실제 교회주식회사와 다를 바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교회 역시 영적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듯이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없으면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성령이 떠난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사데 교회는 조직은 있었지만 영적으로 죽은 교회로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정작 부상당한 병사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하고 조속한 치료임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자들의 권리에 의해 꾸며진 절차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을 위의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은 조직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조직은 성령에 따라 활동해야만 합니다. 성령은 조직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죽은 영을 살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목적하는 것은 사람이지 조직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지 교회의 조직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거대한 교단의 교권주의와 그의 조직들은 오히려 성령의 불을 끄다시피하여 복음의 암흑시대를 가져왔을 뿐 낮은 자, 낮은 곳을 향한 예수의 손과 발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령은 교회의 성공과 성도들의 출세를 위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지향하는 곳은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되며 갇힌 곳입니다. 교회가 크고 커진다고해서 성령이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 주어진 물질과 좋은 환경에 만족하며 안주하지 말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낮은 곳을 향해, 낮은 자들을 찾아가야만 합니다. 성령은 높은 곳, 높은 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 낮은 자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죠지 맥크레오드는 그의 저서『오직 남은 한 길』에서 과거 제정 러시아가 망할 때 정교회 지도자들은 최신 성의를 어떤 모양으로 하느냐, 옷단을 붉은 색 으로 하느냐 황금색으로 하느냐 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무려 10주야나 격론을 벌였으나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6명의 볼세비키 운동가들은 지하실에서 러시아 혁명을 음모하고 있었습니다. 그 볼세비키주의자들은 인민을 경제적 곤궁에서 건지는 길은 오직 혁명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혁명으로 러시아를 장악한 후 당시 러시아를 주름잡던 기독교 지도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처형했습니다. 러시아 교회 지도자들이 성령과 말씀에서 떠나 생명과 빛을 잃은 형식과 의식에만 치중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교권주의자들을 가차없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떠난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땅만 버리도록 그대로 두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사랑으로 낮은 자들을 섬겨야 할 교회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며 갇힌 자들을 외면하고 호의호식하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며 그러한 교회는 존재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왕궁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며 왕이나 교권주의자들, 소위 높으신 분들과 어울리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같은 모습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어진 물질과 환경에 만족하여 현실에 안주하지말고 여러분에 주어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며 낮은 곳을 찾아가는 살아있는 성도, 살아있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데 성이 천혜의 난공불락이라는 성벽을 믿고 보초도 세우지않고 깊은 잠에 빠져 적의 침투에 비상 나팔도 불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사데 교회 역시 시대의 파숫군이 되어 나팔을 불지 못하는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데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일곱 별을 잡으신 분, 곧 교회를 완전하게 소유하신 교회의 주인되시는 예수께서 보실 때 사데 교회는 분명 죽은 교회였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란 그 지역사회와 나라에 양심이어야 하고, 그 양심의 소리를 발하게 될 때 자연히 그 소리를 잠잠하게 하려는 세력의 도전을 받기 마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한다면 화가 있도다."(눅6:26)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 시대의 파숫군이 되어 시대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부르짖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당연히 미움을 받기 마련이고, 그러한 세상에서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경고의 나팔을 제대로 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시대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그에 따른 분명한 하나님의 소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언제나 반대에 부딪쳤었고 많은 핍박을 받게 마련이었습니다. 세상은 어둠이고 교회는 항상 빛을 비추어야 하는 데, 어둠은 본래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한 나머지 세상이 그 교회에 무엇인가 비난하고 공격할 것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인 것입니다. 반대와 공격을 야기시키지 못할 정도로 소극적이고 현실주의적이며 무사안일주의의 교회는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이미 죽은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시대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그 시대의 파숫군으로서 나팔을 제때에 불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칼에 죽임을 당하면 그 피값을 파숫군에게 돌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를 전하고 있습니다.(겔33:2-4)

예수 그리스도의 불꽃같은 눈으로 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의 죄악상을 꿰뚫어보고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고, 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성공과 출세를 부추기는 설교, 그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거나 만족시키는 설교 등은 교회와 교인들을 더럽히는 것으로 시대의 파숫군이 되지 못하는 죽은 교회요,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사56:10-12)

이 시대에 부정부패와 타락, 음란과 사치 향락의 죄를 지적하여 경고하며 회개를 부르짖을 때, 회개를 통해 자신을 항상 성결케 하고 진리와 정의편에 서서 사는 살아있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므로 살아있고 깨어있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 믿고 예수의 인격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 잔치에는 어린양되시는 예수의 피로 깨끗한 사람, 곧 흰 옷입은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불꽃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때 자신에게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다면서 예수의 이름을 더럽히며 예수 닮은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까? 회개하라는 말씀이 듣기 거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불이 꺼진 교회는 잠자는 교회요 죽은 교회입니다. 사랑의 불, 전도의 불, 봉사의 불, 회개의 불이 켜져있습니까? 성령은 사랑과 전도와 봉사, 그리고 회개에 불을 붙이며 역사하십니다. 깨어있는 성도는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여 경계하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민첩하게 움직이며, 그리고 항상 두 손 들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기도하는 손이 내려갔을 때 이스라엘은 적군 아멜렉에게 패배했고, 그 손이 올라가 있을 때 승리했습니다. 죄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에덴 동산에 찾아와 인간을 죄에 빠지게 했고 그 결과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대해 경계를 풀지않고 항상 깨어있는 신앙생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함께 하시는 낮은 곳을 찾아가는 낮은 자와 함께 하는 생활, 하나님 말씀 앞에 날마다 회개하는 생활로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흐리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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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은 능력을 가지고도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7-13)

빌라델비아는 버가모 왕조의 아탈루스 2세(B.C.159-138)가 자기 형제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건립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까지 "형제 사랑"을 의미하는 '빌라델비아'로 명명된 것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작은 아덴'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문화의 꽃을 피웠던 곳이며, 포도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이곳은 서북 아시아와 동방을 연결시켜주는 주요 도로가 나 있었으며, 특히 로마로부터 드로아, 버가모, 사데를 지나오는 1세기 당시의 최고 교통 요지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이 도시는 상공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키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또한 지형상 '지진이 가득한 도시'로 불려질만큼 지진이 흔한 지역이었습니다. 실제 A.D.17년에 이 지방을 중심하여 발생했던 지진은 인근 10여 개의 도시를 강타하여 전지역을 폐허로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이처럼 당시 높은 문화와 상당한 수준의 부요한 도시였습니다만, 정작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러한 문화적 혜택과 상업적 부요함을 누리기에는 너무나 빈곤한 교회였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신 말씀에서 볼 수있습니다. 여기 "적은 능력"에 해당되는 헬라어 <미크란 에케이스 뒤나민, micran ekeis dunamin>은 "능력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은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경제적 능력 등이 변변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단 공무원 신분가진 교인 하나 없었고, 밥먹고 살만한 동네 구멍가게 하나 가진 교인 하나 없었고, 반듯한 자기 집 하나 가진 교인 하나 없었고, 그렇다고 공부깨나 한 교인 하나 없었던 교회였습니다. 한 마디로 현대판 <달동네 교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0일 금식기도한 사람도, 유창한 방언하는 사람도, 그저 손만 얹어놓고 기도해도 질병이 낫는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쪽집게처럼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전혀 없는 영적 능력면에서도 빈곤한 교회였습니다. 교세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하나 없는 그야말로 "적은 능력"의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만을 받았습니다. 비록 사는 곳은 달동네 같고 능력도 달동네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 말씀만큼은 철저히 지켰고, 가진 것 없다고해서 비굴하게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생활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칭찬은 바로 이러한 교회에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난꾸러기 원숭이, 멍청이 당나귀, 겁쟁이 염소, 그리고 미련퉁이 곰이 사중주 연주회를 계획했습니다. 훌륭한 악보와 콘트라베이스, 비올라, 바이올린 두 대 등 값비싸고 쟁쟁한 악기들을 준비하여 보리수 나무 아래 풀밭에 모여 앉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연주 솜씨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악기 활을 움직여 일제히 연주를 시작했으나 박자도 틀리고 소리도 제멋대로였습니다. 그 때 원숭이가 말했습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요. 이래서야 어떻게 음악이라 하겠어요. 우리들의 앉은 자리가 틀렸어요 자 콘트라베이스인 곰님, 당신은 비올라와 마주앉고, 제 1바이올린인 나는 제2바이올린과 마주 앉아야 돼요. 이렇게 앉아 연주해야 숲의 나무들이 춤을 출 정도로 신명나는 음악이 될 거예요." 그래서 그들 네 명은 각각 위치를 바꿔 지정된 위치에 앉아 다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중주 역시 그 전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당나귀가 말했습니다. "잠깐 기다려요. 자, 내가 그 비결을 찾아냈어요. 우리가 일렬로 나란히 앉아서 연주하면 아마 훨씬 나을 거예요." 그래서 당나귀 말대로 사중주단은 일렬로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연주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넷이 서로 다투어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왜 연주가 잘 되지 않는지 그것이 누구 때문이며 어떤 위치로 앉아야 하는 것인지를 놓고 침을 튀기며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런 소란중에 때마침 음악의 거장 휘파람새가 날아왔습니다. 휘파람새를 본 그들 넷은 자신들의 의문을 풀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부디 우리 부탁을 좀 들어주세요. 우리에게는 좋은 악보도 있고 값비싸고 쟁쟁한 악기도 있는데 왜 연주가 안 되는지 답답해요. 휘파람새님, 우리가 어떻게 앉아야 연주가 잘 될 수 있을까요? 제발 좀 가르쳐 주세요." 휘파람새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음악가가 되는데 필요한 것은 어떻게 어디에 앉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악기를 연주하는 능력과 그리고 음악을 가려서 들을 줄 아는 예민한 귀가 있어야 되지요. 악기를 다룰 줄 모르는 당신들이 어떻게 앉는다 해도 당신들이 연주는 결코 나아질 수 없는 거예요."

좋은 악기에 좋은 환경이 주어졌다고 좋은 음악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빨래판, 양동이, 칼 도마, 플라스틱 쓰레기통 등 흔히 악기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도 <난타>라는 신명나는 음악을 만들어 세계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물건이라도 그것을 가지고 아름다운 소리, 신명나는 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과 그런 음악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름하여 <달동네 교회>일지라도, 그래서 가진 것은 볼품 없어도 세상을 분별할 수 있는 눈과 귀, 거룩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 말씀에 대해 예민하게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와 그것을 지킬 줄 아는 믿음, 그리고 예수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렇게 2000년이 지나도록 칭찬받는 모범적인 교회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적은 능력"의 교회라고 해서 시련이나 핍박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나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못지않은 여러 가지 시험과 핍박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러한 시험과 핍박 중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켰고, 예수의 이름을 한번도 배반치 아니했습니다. 예수께서 칭찬하신 것은 교세가 크거나 능력이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신 것은 적은 능력일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는 깨끗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고 신앙생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인 교회로써 예수 외에는 어떤 이름도 갖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교회 안팎에서 예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높이는 것은 예수의 이름을 배반하는 타락한 증거입니다. 목회자가 대단한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거나, 탁월한 지도력을 가졌다거나, 뛰어난 설교 능력을 가졌다해서 그 목회자를 높이는 것은 아주 위험한 타락과 배반의 징조인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목사나 장로, 권사 집사 등 교인들은 모두가 다 그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손재주 발재주, 말재주가 좀 있다해서 그것들이 손이나 발 입에서 나오는 것들입니까? 모두가 다 머리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손과 발 입에 재능이 아무리 뛰어난다해도 칭찬과 영광을 받아야 하는 것은 머리인 것입니다. 능력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며 철저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와 성도가 칭찬받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타난 능력과 세상에서 받는 영광으로 하늘 나라 문이 열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늘 문은 비록 달동네 같은 교회일지라도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는 거룩한 교회에 항상 열려 있는 것입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단순히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드리고 속회예배 등을 착실히 지켰다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종의 모습으로, 가진 것 없어도 아낌없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아름다운 궁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궁전은 많은 사람들이 평생에 한번이라도 들어가 봤으면 하는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 궁전은 선한 일을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궁전 문지기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데 그 문지기는 선한 일을 한 자에게 열쇠를 주었고, 그것을 받아야만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소녀가 이 궁전에 꼭 들어가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름다운 옷과 보석을 걸치고 궁전 앞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소녀에게 열쇠를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문지기는 말했습니다. "아가씨, 예쁜 옷을 입고 하루종일 문 앞을 서성거린다고 열쇠를 줄 수는 없습니다. 매일 한번씩이라도 남을 돕는 이에게 이 열쇠를 줄 수 있답니다."그 소녀는 당장 돌아가 남을 도와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늙은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는 선행을 할 수 있음을 기뻐하며 가진 돈을 전부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궁전 문지기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열쇠는 얻지 못했습니다. 거절당한 소녀는 실망해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또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할머니로부터 짐을 모두 빼앗다시피하여 날라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문지기에게 다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열쇠의 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막 숲을 지날 때였습니다. 숲속에서 가냘픈 신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른 달려가보니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덫에 걸려 피를 흘리며 발버둥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불쌍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다 잊어 버린 채 그 강한 스프링 덫을 있는 힘을 다해 풀고서 토끼를 살려냈습니다. 그 바람에 소녀의 손과 발은 찢어지고 피가 흘렀습니다. 치마를 찢어 토끼의 상처를 싸매주고 집에 데려와 먹이를 주었습니다. 이때 궁전 문지기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궁전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소녀는 놀라서 말했습니다. "저는 열쇠를 얻으려고 토끼를 살려준 것은 아니었어요." 문지기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이 궁전의 열쇠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남을 돕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 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빌라델비아 도시의 높은 문화와 부요한 생활수준과는 거리가 멀었어도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비록 가진 것이 없었어도 오직 예수 처럼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닫을 사람이 없는 <열린 문>이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 최고의 문화와 생활을 누린다해도 하늘 문이 닫혀있는 사람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사는 수준이 달동네일지라도 누구도 닫을 사람이 없는 하늘 문이 열려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이 땅에 가진 것 없고, 가진 재능 없으며, 가진 건강 없을지라도 예수 믿고 예수처럼 사는 사람에게 그 누구도 닫을 사람이 없는 하늘 문은 항상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 좀 가지고 있다고, 능력과 재능 좀 있다고, 건강 좀 있다고 해서 제멋대로 살거나 흙탕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그 누구도 열 수 없는 닫힌 문만이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참으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열린 문'을 가졌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교회, 적은 능력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은혜를 구하며 어떠한 시련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교회만이 <열린 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은 예수 믿고 예수처럼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빌라델비아 교인처럼 사는 교인이라면 언제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인정을 받을만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해 예수께서는 '장차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을 받지 않고 생명의 부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말합니다. 또한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아무라도 '그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면류관을 빼앗기게 되고 그 면류관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에서>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지위를 <야곱>에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순종이 제사보다 낳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제멋대로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다가 결국 왕의 면류관을 <다윗>에게 뻬앗기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가롯 <유다>는 돈에 눈이 멀어 스승인 예수를 팔아 넘기므로 거룩하고 복된 사도의 반열을 <맛디아>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배고파도, 아무리 돈이 좋아보여도 철저히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처럼 사시므로 영광스런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할 것'이라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지진같은 재난과 환난이 일어난다해도 교회가 무너지지않도록 튼튼하게 받혀 주는 기둥같이 쓰임받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등은 그 온갖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도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튼튼하게 지켜나간 성전의 기둥과 같이 쓰임받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는 성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성전의 기둥과 같이 존귀하게 쓰임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기둥에는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지킨 성도의 이름을 함께 새겨놓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살게 하신다는 영광과 축복의 약속입니다. "능히 닫을 사람이 없는 열린 문"이 주어지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 위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시고 결코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바이올린 소리는 나무의 질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소리는 고산 지대의 나무로 만든 바이올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 해발 1만2천 피트인 로키 산맥 꼭대기에서 바이올린 목재를 얻는다고 합니다. 거기는 1년 내내 바람이 심하여 가지들이 한 방향으로 자랄 정도입니다. 고산 지대의 나무는 키도 클 수 없습니다. 바람 때문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추위와 바람에 오래 단련된 나무가 좋은 소리를 내어 고가의 바이올린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나무들은 고통 속에서, 바람 속에서 없드려 견디며 대자연의 섭리에 순종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지혜를 익힌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데, 예수 마음으로 예수 처럼 사는데는 많은 시련과 환난의 바람이 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고산지대의 나무처럼 그 성장이 더디고 클 수가 없을 경우도 있습니다. 능력이 많다고 인생의 가치가 주어지는 것 아닙니다. 크게 성공했다고 인생의 가치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도 교세가 크다고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래서 교회가 아무리 작아 보여도 하나님 말씀을 겸손과 인내로 지켰을 때 하늘에 열린 문을 가진 가장 복되고 칭찬듣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칭찬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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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풍요 속에 빈곤한 교회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3:14-22)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라고는 한 마디도 듣지 못하고 책망만을 잔뜩 받은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제일 먼저 책망받은 내용은 차지도 더웁지도 않고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차다는 것은 얼음이 얼 정도의 냉기를 말하고, 더웁다는 것은 물이 끓을 정도로 뜨겁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왕 예수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든가 그렇지않으면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하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적극적이지 못하고 매우 우유부단하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아합왕 시대에 왕비 이세벨로 인해 나라가 온통 우상숭배로 물들어갈 때 당시 선지자 엘리야가 참다 못해 어느 신이 참 신인지 증거하기 위해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라"면서 불로써 대결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이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모두 갈멜산에 불러 모았습니다. 이 때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그 태도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0,21) 시대가 아무리 음녀 이세벨 시대라해도 하나님을 믿을 것 같으면 그 태도를 분명히 하여 우상숭배를 과감히 타파해버리든가, 아니면 이세벨이 그토록 두려우면 아예 하나님을 버리고 음녀를 좇아 바알을 숭배하든가 양단간에 결단을 확실하게 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신앙을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대답을 유보했습니다. 이는 기회를 엿보다 바알 숭배하는 이세벨 세력이 유리하면 바알쪽으로 붙고, 수세에 몰리고 있지만 불의 대결을 통해 엘리야가 득세하게 되면 하나님 쪽으로 붙어보겠다는 기회주의자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겠느냐'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중간하고 우유부단한 믿음, 미지근한 신앙은 토해버리십니다.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희생할만큼 인간을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동시에 독생자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며 애절하게 하나님을 부르셨지만 냉혹하게 외면하실만큼 죄를 반드시 철저하게 형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 여러분도 차든지 더웁든지 신앙의 태도와 삶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축구의 황제라는 펠레 선수는 은퇴할 때 10만 관중 앞에서 "나는 축구를 시작한 날부터 축구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축구는 나의 심장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펠레는 과연 누구 못지않게 축구를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축구에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했던 축구선수였습니다. 그 결과 축구 황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으로 거룩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여러분께서 하나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어찌 미지근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뜨거운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책망받은 내용은 책망이라기보다 차라리 수치스럽다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물질적으로는 빈곤했을지라도 "실상은 부요한 자"라는 최대의 칭찬을 받은 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풍요로웠지만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었고 벌거벗은" 수치스런 모습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단의 공격이나 황제숭배 강요로 인한 핍박 등은 없었으나 소위 금권, 경제력 앞에 무릎을 꿇는 수치스런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진리를 배반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은행과 재정의 중심지로 당시 지상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A.D.61년 대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었었는데 로마 당국의 경제 지원을 일체 거절하고 순전히 자신들의 재력으로만 도시를 재건할 정도로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이처럼 부요한 도시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도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은 엄밀하게 따지면 <나는 부요하여 하나님의 도움이 전혀 필요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극빈에 허덕이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와도 영적으로는 빈곤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 얻어도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며, 세상을 다 잃어도 하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다 얻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난달 28일 경제대국 일본에서 2살짜리 여자 어린아이가 굶주린 끝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아이의 엄마는 미혼모로 직장을 잃은 채 딸과 함께 난방이 끊긴 아파트에서 열흘동안 굶었다고 경찰에서 밝혔습니다. 풍요로움 속에서도 끼니를 제때 잇지 못하는 결식아동이 올해 들어 17만명을 넘어섰다며 이들을 돕자는 광고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 등의 저자인 제레미 리프킨이 1993년에 '쇠고기 문화'에 던지는 경고장으로 쓴 <육식의 종말>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전세계에 소는 93년 추정치로 약 12억 8천만마리인데 이 소떼가 전세계 토지의 24%를 점유하고 있고, 전세계 곡물 생산량의 3분의 1을,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를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10억명의 인류가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때에, 소위 <가진 자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가들이 먹어치우기 위해 키우는 소를 비롯한 가축들을 사육하기 위해 전세계 곡물의 3분의 1, 즉 6억톤을 사료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매년 가축에게 먹이는 6억톤의 곡식을 부의 재분배를 통해 인간이 직접 먹는다면 10억명의 기아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0억명의 사람들은 넘치는 지방을 주체못해 다이어트에 열을 올리고 또 다른 10억은 기아에 허덕이며 뼈가 앙상해져 가고 있습니다. 수십억의 인간들이 곡식이 부족해 기아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선진국 미국인, 유럽인, 일본인들은 쇠고기 탐식으로 '풍요의 질병', 즉 심장발작, 암, 당뇨병 등에 걸려 아사자들보다 더 많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고깃덩이 탐닉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입니다. <가진 자들>은 배가 터지거나 배부른 병으로 죽어가고 있고, 이들 <가진 자들>에게 자신들의 토지를 소떼 사육장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힘없는 개발도상국가 백성들은 배를 곯고 있는 것입니다. 소떼들은 배가 터지는 데, 인간들은 배를 곯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신들의 토지를 소떼 사육장으로 빼앗긴 가난한 개발도상국들과 소떼들을 먹어치우는 부유한 국가들 사이에서는 정치적 적대감마저 싹뜨고 있습니다. 육식문화는 여기서 그치지않고 지구환경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습니다. 중남미의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열대 우림, 오스트레일리아 반건조지대 등이 소 방목용 목초지로 개간되면서 열대우림은 파괴되고 지구 사막화는 더욱 가속화됐습니다. 사하라 이남과 미국, 호주 남부 목장지대는 소 방목으로 이미 사막화가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사육장에서 흘러 나오는 축산폐기물의 양을 살펴보면, '소 1만마리를 사육하고 있는 비육장에서 배출되는 유기폐기물은 11만 인구의 도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양과 맞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축산 폐기물은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소가 내뿜는 메탄은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곡물 재배에 사용되는 1에이커(1224평) 토지는 육류 생산에 사용되는 1에이커 토지보다 5배 많은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시금치를 심으면 26배나 많은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저자는 이러한 통계를 제시하며 가진 자들의 육식문화를 조금 더 개선하고 부의 재분배를 이룩하면 굶주리고 있는 10억의 인류가 함께 공존할 수 있음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지금 지구는 풍요 속의 빈곤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0억의 지구인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주셨지만 <가진자들>의 독점으로 풍요 속에 빈곤층이 더욱 확산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지금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가진 자들>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없는 자들>은 더욱 빈곤해지는 소위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선진국가들은 경제적으로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지만, 굶주리고 있는 후진국가들과 가진 것을 함께 하지 못하고 독점하는 정신적, 영적 빈곤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방을 주체할 수 없을만큼 너무 먹어서 개기름이 질질한 10억의 <가진 자들>의 희희낙낙거리는 소리와 소떼들에게 초지마저 빼앗기고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10억의 <못 가진 자들>의 신음소리를 어찌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겠습니까? 쇠고기 잔뜩 먹고 사는 사람이나 평생 풀이나 뜯다시피 살았던 사람이나 죽는 것은 매 일반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시겠습니까? 서머나 교회처럼 적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는 생활로 하나님 나라에 부요한 자가 되시렵니까? 아니면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가련하고 곤고하며 눈멀고 벌거벗은 가난한 자가 되시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불로 연단한 금(벧전1:7)을 사서 부요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의 세친구처럼 비록 풀무속에 던짐을 받을지라도 세상 부귀영화의 길을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믿음생활을 지킬 때 불로 연단한 금같은 믿음을 가진 자로 진정한 영적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경제적 풍요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며 갇힌 자들과 함께 나누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누더기 하나 걸치지 못한 벌거숭이로 보이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양모 제조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양모가 대량생산되어 질 좋고 값싼 의류가 유명했습니다. 양모로 만들어진 질좋은 옷들을 값싸게 즐기다보니 하나님 보시기에 벌거벗은 것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은 영적으로 벌거벗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값비싸고 사치스런 옷을 입었다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시는 흰 옷을 입지 못한 사람은 벌거벗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세상의 어떤 옷으로도 더러운 죄를 덮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예수 십자가 피로 죄씻음을 받아 의의 깨끗한 옷, 흰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의 옷을 입으라는 것은 예수 믿고 예수의 인격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인격은 부의 독점이 아니라 남김없이 베푸는 삶입니다. 부의 독점은 고인 물처럼 썩어서 악취를 풍기는 것입니다. 경제적 풍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눈까지 멀게 만들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안과약과 귓병 치료약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습니다. 눈과 귀병에 관한한 세계적 수준의 고약으로 고치지 못할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의학 기술을 지나치게 믿는 나머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눈멀고 귀먹은 것 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대 영적 눈이 멀게 되면 하나님의 세계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악된 현실을 바로 깨닫게 하시며 또한 죄로 어두어진 우리의 눈을 여실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빈곤한 사람은 진정 보아야 할 참된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소경들입니다. 예수께서는 탐욕으로 가득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소경이라고 했습니다.(마23:26)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경제적 풍요 앞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전체적으로 부요해지다보니 자연히 한국 교회도 따라서 그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경제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경제적 풍요 속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지 아니한다면 교회는 풍요 속에 빈곤한 교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퐁요 속에 세상 죄악과 빈곤의 참상을 불꽃같은 눈으로 주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끓고 있는 물주전자를 무관심하게 쳐다본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와트는 거기서 짐을 끌고 가는 증기 기관차를 보았습니다. 번개를 보고 무서워한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그 속에서 어둠을 밝힐 전기를 보았습니다. 어느 날 조각가 로댕이 한 바위 앞에 섰습니다. 좋은 화강암이었습니다. 로댕에게 그 바위는 인생을 깊이 생각하며 고민하는 한 젊은이로 보였습니다. 얼마 후 이 바위는 인류의 마음을 울리는 명작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쥐를 보면 누구나 징그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디즈니는 같은 쥐를 보면서도 평화와 박애와 자유 사상을 대표할 애교있는 미키 마우스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보지만 '무엇을 보느냐'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향하여 이민선을 탔습니다. 2개월에 걸친 죽음의 항해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그들은 모진 바람 속에서 자유를 보았고 사나운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아메리카 벌판에 도착한 그들이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며 첫 겨울을 넘기는 동안 절반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어붙은 뉴잉글랜드 벌판에서 행복한 새 세계를 보았고 죽음 속에서 아메리카의 미래를 보았던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에 눈이 멀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풍요 속에 빈곤층은 세계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이들을 사랑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외면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눈멀고 가련한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 속에서도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생활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금같은 믿음을 가진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본의 기독교 아동 문학가로 노베찌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너의 둥지는 너무 낮았었다"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뜰에 있는 나무에 새가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새의 작업을 재미있게 구경하던 그는 갑자기 "둥지의 위치가 너무 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의 습격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낮은 위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새에게 충고할 방법도 없고 거의 완성한 둥지를 헐어버릴 수도 없어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얼마 후 이 둥지에 새끼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미 새가 먹이를 구해다가 먹여 주는 즐겁고 행복한 광경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예감했던 비극이 발생하였습니다. 새끼들은 고양이에게 희생되었고 먹이를 가지고 돌아온 어미 새는 새끼를 찾을 길이 없어 오랫동안 그 둥지에서 슬픈 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이 체험이 노베찌 시인으로 하여금 "너의 둥지는 너무 낮았었다"라는 시를 낳게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둥지도 너무 낮은 것이 아닐까? 노아는 대홍수의 환난과 고통속에서도 높은 곳에 신앙의 고향을 두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세상 한 복판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높은 산 위에 세워졌습니다. "저 높은 곳"에 믿음과 소망을 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의 둥지를 하늘 나라에 두지않고 세상과 세상 물질에 두었기 때문에 노아의 방주같은 교회가 되지 못하고 토하여 내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둥지, 터전을 저 높은 곳 하나님 나라에 두든지, 아니면 막강한 경제력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사냥하는 위험한 세상에 두든가 태도를 분명히 하시고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미지근하면 주께서 토하여 내치십니다. 두 마음을 품었었다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를 영접하여 회개하시고 예수의 흰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신령한 교제의 생활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하늘 나라에 부요한 자가 되며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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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하늘 보좌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4:1-11)

1. 요한 계시록 4장부터는 "이 후에 마땅히 될 일" 즉,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성도의 구원을 본격적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본 4장은 이 세상 역사에 대한 심판과 구원을 시행하실 하나님 보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엄하신 절대 권위의 보좌의 모양을 보이신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반드시 시행하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신지라 결코 식언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를 가감없이 반드시 이루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 문이 열리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늘 보좌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누구도 감히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딤전6:16)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빛으로 밖에는 묘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빛도 하나님에 대한 상징일 뿐이지 하나님 자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셨다."(시104:2)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 자체를 본 것이 아니라 그 "보좌에 앉으신 모양"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 앉으신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벽옥"은 수정같이 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성결, "홍보석"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다"고 했는데 이는 구약 솔로몬 성전의 시은소의 모양과도 같은 것입니다. 시은소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는 곳을 말합니다. 구약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 위에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된 동물의 피가 뿌려지는 곳을 바로 시은소(施恩所)라고 합니다. 죄 지은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동물 희생제사를 드리게 되면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언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녹보석 같은 보좌에 둘린 무지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아 구원함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언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모두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인류가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세상에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6-18)

요한 계시록에는 심판과 구원의 기준이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로 죄사함받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요한 계시록은 구원받은 성도의 해피엔딩을, 하나님의 심판받는 인생의 영원한 불행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린다해도 구원받지 못하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범죄한 두 눈을 다 가지고 지옥에 가는 인생보다 범죄한 한 쪽 눈을 빼버리고 한 눈만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인생이 행복한 것입니다. 범죄한 두 손과 발을 다 가지고 지옥에 가는 인생보다 범죄한 한 쪽 손과 발을 찍어버리고 한 손과 한 발만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인생이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전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들어가는 인생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행, 불행을 결정짓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세상에 오셨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받은 사람은 행복 시작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불행가운데 처한 사람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인생의 행,불행의 기준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는지 여부가 인생의 성패, 인생의 행,불행을 결정짓는 기준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손과 혀가 굳어도 내 몸의 피가 식어도 어린양 되시는 예수의 흘리신 피만 있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하늘 보좌 앞에 설 수 있습니다.

2.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고 했습니다. 보좌를 중심으로 둘러 있는 24장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성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들 성도들이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금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세상에서 어떠한 환란과 시련, 연단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신앙생활에 승리했다는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을 받은 성도만이 하나님 보좌 앞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어떠한 환난과 핍박, 시련과 연단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킨 성도만이 하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욥과 같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성도만이 하나님 보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난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 그리고 진노와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계시하며 그 사실을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심판과 구원에 대해 미리 말씀하시지 않고서는 시행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를 주기 위해 "이후에 마땅히 될 일들"을 반드시 미리 말씀하시거나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소돔성을 멸망시킬 때에도 그 일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창18:17-21)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땅 끝까지 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시고 오직 예수 믿는 성도들만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미리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어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는 수정같이 깨끗한 광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은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감히 근접할 수 없을만큼 절대적인 성결의 위치에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같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둘러 있는데 첫째가 사자같고, 둘째가 송아지같고, 셋째가 사람같고, 넷째는 독수리같다고 했습니다. 이들 네 생물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물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들이 밤낮을 쉬지않고 주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했습니다. 그 찬송의 내용들이 하나님의 속성들로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마지막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과 영원하심을 영원토록 찬양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24장로들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며 찬미를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엎드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가져야 할 자세로 하나님의 위엄에 대하여 엎드림을 말하고, "경배"는 앞서 말한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속성들에 대하여 경배함을 말하고, "면류관을 던짐"은 예배의 생활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해 "부분적으로 알고....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고전3:12) 지금은 계시록 말씀을 통하여 보좌에 앉으신 분을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어렴풋이 그 모양만을 알 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그러나 수정같이 맑은 하나님 나라에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신학대학도 필요없고 따라서 목사나 신학교수도 필요없고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도 필요없고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도 필요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는 말씀처럼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정같이 맑은 천국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아는데 있어서도 완전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아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하고서는 참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역시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하면 참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서로를 완전히 알기 때문에 서로의 사랑도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늘 보좌에 이른 성도의 내면에는 악이 전혀 없고 선과 진실과 거룩함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성도는 거룩한 성령의 열매들로 가득하고 생명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서로에 대한 사랑이 완전하며 충만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잘 모르는 것이 오히려 좋을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을 속속들이 알고 그 사람의 감추어진 내면에 온갖 죄악과 추악함, 그리고 못된 성격과 성품들, 게다가 상대가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다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상대방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생길뿐이지 도저히 사랑할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사람의 속에 오직 선함과 진실과 거룩함, 그리고 성령의 열매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사람의 속을 환히 들여다 보면 볼수록 사랑이 더욱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에 있는 온갖 죄악을 어린양의 피로 깨끗이 씻어주시고 성령의 역사로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알고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정같이 맑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므로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지전능하심과 영원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온전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심에 존귀와 영광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으며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며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금면류관을 드림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찬양과 경배는 눈물이 섞인 찬양, 아픔과 곤고함, 외로움과 가난 중에 드리는 경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좌 앞에서의 찬양과 경배는 더 이상 눈물과 고통, 곤고함과 외로움이 전혀 없는 완전한 새 노래의 찬양과 경배를 영원토록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행복의 절정이요, 행복의 극치를 말합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 재산과 바꾸려는 자는 멸시를 당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로 하나님 보좌 앞에서 영원한 행복의 극치인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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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어린 양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5:1-14)

계시록 4장에서 인류 구원과 심판이 하늘 보좌에서 시행되는 것을 보았고, 본 5장은 인류 구원과 심판의 계획을 기록해 놓은 책, 즉 하나님의 오른손에 책을 능히 취하여 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어린 양>에 대한 찬양과 경배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책이 "일곱 인으로 봉해졌다"는 것은 그 누구도 그 책의 내용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 계시라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과 심판, 즉 역사의 종말과 구원에 대한 완벽하고도 엄숙한 계시이기 때문에 봉인된 그 책을 감히 열어 볼 자가 "하늘 위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크게 울었습니다."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이 하나씩 하나씩 떼어져야만 역사의 구원과 심판이 실현되는데 그 일곱인을 감히 뗄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 일곱 인이 하나씩 하나씩 떼어져 속히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신부가 기다리는 것은 오직 신랑인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된 성도들의 소망은 오직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히 다시 오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크게 울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내용을 아시는 주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고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화답했습니다.(계22:20) 크게 우는 요한에게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인을 떼시리라"는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 오른손에 책을 능히 열어볼 수 있으려면 세상을 이긴 자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이기신 분은 바로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로 곧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어떻게 이기셨는가? 그것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이기신 것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 죄의 지배 아래있는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그 죄를 없애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죄악을 없애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어린 양"으로 희생하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죄에 대한 승리를 확실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그러므로 "어린 양"이란 표현 속에는 인류를 구원하시고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뗄 수 있습니다. 죄가 지배하는 세상을 이기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죄를 대신할 "어린 양"으로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세상 역사를 극복하는 길은 "어린 양"밖에 없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는 세상 역사는 한 마디로 짐승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세상을 지배하는 여러 세력들을 흉하게 생긴 짐승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 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계13:1-4)

멀쩡한 로마시를 불태우고 불길에 휩싸여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며 시를 읊조리는 네로 황제나, 미친 듯이 유태인 대학살극을 벌인 히틀러나 구국의 일념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한 잔다르크를 마녀사냥으로 화형시킨 교권주의자들, 이들 모두가 다 한결같이 짐승같은 세력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역사 무대에 여러 짐승들이 등장하지만 그 때마다 이들 짐승들을 이기는 것은 오직 "어린 양"이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임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계시록입니다. 세상에 대한 심판은 세상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인류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어린 양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종말, 세상 심판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어린 양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은 죄가 지배하지만 그 죄를 없애는 길은 오직 어린 양의 십자가 희생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88 서울 올림픽 최고의 뉴스거리는 벤 존슨이 약물을 복용했던 것이 탄로나 금메달을 박탈당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백미터 경주에서 신기록을 세워 화제의 정상에 올랐지만 영광의 금메달을 박탈당하고 패전 장군처럼 당시 김포 공항을 빠져 나갔습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하는 것같은 극적인 변화였습니다. 당시 올림픽 위원회는 "약물이 개입되지 않은 '깨끗한 경기'(clean game)를 고수하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표명하고 벤 존슨의 금메달을 박탈했던 것입니다. 벤 존슨은 약물복용이 들통나 승리를 박탈당했던 것입니다. 죄악의 세상이 하나님의 어린 양을 이기지 못하고 종말을 당하는 이유가 바로 "깨끗한 경기(clean game)"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온갖 흉한 짐승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세상 세력들은 불법, 부정부패, 사치와 향락, 음란과 우상숭배의 대명사입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깨끗한 정부, 깨끗한 기업, 깨끗한 사람 찾기가 어렵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세상은 의인 하나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멸망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소돔성이 멸당 당한 이유는 바로 의인 하나가 없이 온갖 죄악으로 가득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성을 멸망하시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가까이 나아가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라며 의인의 구원을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다시 한번 간청을 드립니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이에 하나님께서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또 다시 간청합니다.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답변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거듭 간청합니다.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런식으로 간청을 드리기를 계속하다가 의인 열명이라도 있으면 멸하지 아니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창18:22-33) 그러나 결국 소돔성은 의인 하나가 없어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의인을 찾으시고 그 의인들은 구원하시고 죄악의 세상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그 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져오는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들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가고 계십니다. 이같은 세상에서 구원받는 길은 어린 양의 십자가 희생으로 의롭게 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유는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어떤 경건한 사람이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해야 하오. 당신은 자선을 베풀어야 하고, 병자를 돌보아야 하며, 죽은 자를 묻어 주어야 하오." 그 사람은 랍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다리를 절룩거리는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 순간 그는 랍비의 말을 생각해 내고는 그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거지에게 풍성한 음식을 대접하고는 이로써 첫번째 요건을 갖출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찬양드렸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걸인은 과식한 관계로 몸져 누웠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은 그를 침대에 눕히고는 약을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랍비의 두번째 교훈을 생각해 내고는 그것도 이미 이루었다고 기뻐했습니다. 밤 사이에 걸인의 병세는 매우 악화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아침이 되자 그 경건한 사람은 그 걸인을 묻을 준비를 한 뒤, 유대인 묘지에 묻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고 기뻐 외쳤습니다. "이렇게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신 주님이여, 찬양을 받으소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자비와 양선을 베풀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을 이긴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으며 어린 양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심판 가운데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임당하신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장로들이 이렇게 찬양합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9,10절)

여기 찬양의 핵심은 어린 양이 하나님 오른손에 있는 일곱 인봉된 책을 떼시기에 지극히 합당하시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한 이유는 바로 "일찍 죽음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는 것, 곧 십자가의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어린 양으로 희생되심으로 인류가 죄에서 깨끗함을 받아 심판받지 아니하고 구원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천사들의 찬양(11,12절) 역시 24장로들의 찬양과 같은 것입니다. 어린 양에 대한 찬양은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전 우주 만물들이 찬양(13,14절)하므로 절정에 이릅니다. 요한 계시록은 역사의 심판과 성도의 구원을 계시한 것이지만, 그 구원의 문을 십자가 희생으로 열어놓으신 어린 양에 대한 찬송의 책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려야 할 내용은 바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영원토록 찬양해야 하는 내용은 바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십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야말로 찬양의 진수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야말로 영원히 세세토록 모든 만물들이 불러야 할 새 노래, 새 찬양인 것입니다. 네 생물과 24장로가 부른 노래는 한 "새 노래"였습니다. 그 이유는 "죽임 당하신 어린 양"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이름이 "새 이름"이고, 그곳에는 "새 예루살렘"이 있고, 땅과 하늘이 새롭게 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이기 때문에 노래 역시 "새 노래"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죽임 당하신 어린 양"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새 창조로 역사를 영원한 해피 엔딩으로 완성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 나라에서는 기쁨과 감동이 새롭고, 능력과 평화가 새롭고 모든 것이 새로운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감동과 기쁨, 능력과 평화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노래 역시 "새 노래", "새 찬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을 새롭게 하며 역사를 새롭게 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어린 양의 십자가 희생이 없이는 모든 것이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어린 양의 십자가 희생이 없이는 세상 종말에서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어린 양에 대한 찬양은 승리의 새 노래입니다. 죄악의 세상에 대한 승리의 찬양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 민족사의 아픔을 치료한 것도, 절망의 이 민족사에 희망을 주신 분도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어린 양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 민족이 세세토록 노래해야 할 것은 어린 양, 십자가의 노래여야 합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국가 연주의 영광은 오직 금메달을 수상한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국가 연주인 '새 노래'는 오직 세상을 이기신 어린양에게만 세세토록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런 '새 노래'는 오직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긴 성도들만이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 인생이 승리하여 세상을 이긴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어린양의 새 노래를 영원토록 부를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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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누가 능히 서리요?

(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5) 세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7) 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6:1-17)

본 6장은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손에 책>을 취하여 그 인을 하나씩 떼어갈 때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소위 말세의 징조, 말세의 재앙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재앙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과 아주 비슷한데(마24:1-35, 막13:1-37,눅21:5:33) "난리와 전쟁, 흉년과 기근, 성도들의 고난과 순교, 지진과 하늘의 징조들" 등입니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단순히 지구 환경파괴로 인한 재난이나 자연 발생적이라기보다는 철저히 <하나님의 오른손에 책>에 따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죄악을 반드시 징계하시는데 그 징계의 결과로 끔찍한 사건들과 재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징계의 목적은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 재앙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흰 말이 있는데 그 탄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활"은 군사력, 전쟁을 상징하고 "면류관"은 승리를 의미하고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는 것"은 정복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습은 군사대국주의의 정복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바클레이)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활이 꺾이도다"(렘51:56)는 말로 바벨론이 그 군사력이 꺾여 최후의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 사르시는도다."(시편46:8,9)는 말로 하나님은 활을 꺾으시고 창을 부수고 병거를 불에 태우시는 인류 평화를 이루시는 분으로 감히 인간의 어떤 군사력으로도 대항할 수 없는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을 뗀 결과 인간의 정복욕에 따른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비극적 재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작년 9.11 미국 세계무역센타 테러 사건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이어져 지금 세계는 수 많은 전쟁참사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경제 대국들은 여지없이 군사 대국화의 길을 걷고 군사 대국들은 어김없이 막강한 군사력을 휘둘러 승리의 면류관을 쓰게 되지만 그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 백성들은 엄청난 참극을 당하고 있습니다. 1937년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은 전쟁 참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은 불과 6주일간에 중국군과 민간인들을 상대로 온갖 잔혹한 살육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포로들은 물론이고 수천, 수만명의 젊은이들을 총검술훈련 혹은 '목베기 시합'의 대상물로 삼아 무자비하게 처형했습니다. 어린 소녀, 노파 할 것 없이 여자들은 무차별로 강간한 뒤 살해해 버렸습니다. 생매장하기도 하고 배를 가르거나 사지를 자르는가 하면 기름을 뿌려 불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한 생존 자는 훗날 "마치 하늘에서 비 아닌 피가 쏟아져 내린 듯했다"며 끔찍했던 참살현장을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이 당시 남경 인구의 절반 가까운 약 30만명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미국 신문(새너제이머큐리)은 "사망자들이 손을 잡으면 남경에서 항주까지의 3백 22㎞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천 2백톤, 시체는 기차 2천 5백량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었습니다. 군국주의 일본은 전쟁의 한 가운데서 야만과 잔혹성의 극치를 보였으면서도 전후 그런 사실을 철저히 숨기며 대학살 자체를 부인하고,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틈틈히 군사대국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다음 둘째 인을 떼실 때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3,4절)고 했습니다. 붉은 말을 탄 자가 하는 일은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를 살육전쟁으로 몰아가 평화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세계는 오래전부터 끊임없는 내란, 반란과 혁명 등으로 인간의 피비린내가 그칠날이 없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증오에 휩싸여 모든 인간관계는 파괴되고 민족과 나라는 분열을 거듭하며 극심한 전쟁의 회오리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 1차 대전쟁으로 말미암아 1천만여 명의 사상자가 나고 기아와 인플레이션 및 전염병 등으로 유럽은 인적·물적인 면에서 초토화되었습니다. 연합군측이 승리로 끝난 2차 대전은 1차대전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민간이 사망자가 전투요원 사망자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민간인을 포함한 총 사망자는 소련이 2천만명, 폴란드인 650만명, 독일인 450만명, 유고슬라비아 150만명, 프랑스 50만명 등이며, 아시아 지역에서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여 최소한 6천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1861년부터 4년동안에 걸친 미합중국의 내전, 시민전쟁은 나라가 갈라져 싸운 민족적 비극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남북 쌍방이 입은 인명피해는 막대하여 북부는 총동원수 200만 명 가운데 전사자 36만명, 남부는 60∼70만명 가운데 전사자 25만여 명으로 추정되었습니다. 패배한 남부는 여러 면에서 커다란 타격을 입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되어질 일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마24:6) 이러한 징조가 곧 세계 종말이 아니라 단지 재난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 전파와 함께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난리들'은 재난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과 종말을 재촉하고 있는 징조들임을 의미합니다.

세째 인을 떼실 때에...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음성이 들리는데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는 것이었습니다.(5,6절) 여기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겨우 자기 혼자의 하루 양식밖에는 아무것도 살 수 없고 처자식들을 위한 양식은 도저히 살 수 없는 극심한 기근현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흉년과 기근속에서도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여전히 사치와 향락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유한 선진대국들은 지나친 육식으로 비만해진 살을 빼는데 엄청난 비용과 비만으로 인해 생긴 각종 질병 치료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가난한 후진국가들은 가뭄과 흉년, 게다가 선진대국들의 에너지 충당을 위해 마구잡이식 개발로 국토 황폐화를 면치 못하고 선진국가들이 던져주는 빵부스러기로 연명하다시피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세계화>는 경제를 장악한 20%가 부익부를 누리고 이들이 먹다 남아 던져주는 빵부스러기로 연명하는 80%의 빈익빈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계화>운동은 검은 말의 재앙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경제 대국의 잉여농산물이 분배 정의를 이룩하고 가난한 나라 백성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수탈을 목적으로 여러 가지 조건을 달고 제공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들이 인권과 인도적 차원에서 잉여농산물을 제공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가진 자들의 탐욕을 감추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임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지금 세계는 검은 말의 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작년 세계식량계획(WFP)은 "전 세계 어린이 가운데 3억 명이 계속되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고,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현재 세계에는 6천만명 이상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고 밝혔으며, 자연재해와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2천7백만명, 아시아에서 2천5백만명 등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 동부지역에서만 1천8백만명이 기아 상태에 놓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전세계 60억 인구중 13억명이 하루 1달러도 채 안되는 돈으로, 28억 인구는 2달러 미만으로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등 총 41억 인구가 절대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입니다.(세계은행의 '빈자의 목소리'보고서 2000.3.14)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에티오피아, 부룬디, 시에라리온 등은 연간 1인당 평균소득이 130달러 이하인 것으로 집계되어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는 말씀 그대로 최악의 빈익빈에 허덕이고, 1인당 평균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는 스위스로 선두로 노르웨이, 미국, 덴마크, 일본, 스웨덴, 독일 등의 순인데 무려 4만달러에 육박하여 가난한 나라보다 무려 300배가 넘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 선진부국들은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는 말씀 그대로 엄청난 부익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은 20년간의 내전과 가뭄에 시달리는 가운데 8,9백만명이 굶어죽기 직전의 비참한 지경에 처해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은 가장 무서운 것은 미국의 공격보다 굶주림이라며 호소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날이갈수록 극심해지는 검은 말의 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네째 인을 떼실 때에...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고 했습니다. "청황색"은 희랍어로 <클로로스, chloros>인데 본래 잿빛이라는 의미에서 청황색을 말합니다. 칼과 기근, 사망과 질병 등으로 인해 겁에 질린 사람의 얼굴색을 나타냅니다. 한 마디로 공포의 재앙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린 형벌을 에스겔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않겠느냐"(겔14:21) 칼을 피하면 기근에 시달리고, 사나운 짐승을 피하면 각종 질병에 걸려 죽게 되어 진퇴양난의 사망가운데서 벗어날 길이 없는 공포의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중세(AD 1348-1350)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은 역사상 가장 가공할 전염병으로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재앙이었습니다. 불과 4년동안에 흑사병 사망자는 2천 5백만에서 3천 5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어 유럽 전체 인구의 1/3정도가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어떤 도시들은 주민의 90%가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유럽의 인구가 흑사병으로 창궐했던 1347년의 수준에 도달하는 데에는 무려 200년의 시간이 걸릴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희생자를 낸 흑사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태워버리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 질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포는 더욱 가중 되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악마의 소행이거나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겠냐고 떠들기도 했으며 우물이나 샘에 독을 풀었기 때문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평소에 미움을 받던 유대인들이 속죄양으로 몰려 학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세계는 천연두와 발진티푸스가 유행하여 인류를 곤경에 빠지게 하더니 19세기에는 인도에서 창궐한 콜레라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북아메리카를 강타하며 그 위력을 과시하였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인플루엔자가 수 년간의 유행으로 2천만명에 가까운 인명을 앗아 갔고, 의학이 현저히 발전한 20세기 후반에도 에볼라 바이러스와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같은 새로운 전염병이 계속해서 인류를 위협하며 인류를 공포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흑사병의 피해가 가장 컸으므로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에이즈를 '20세기 흑사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문가들은 21세기를 맞이하여 인류가 맞게 될 두 가지의 위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핵과 에이즈라고 말합니다. 먼저 핵은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가진 무기임에 분명하지만 실질적으로 핵이 터질 위험은 에이즈보다 더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핵은 안전 장치가 있지만 에이즈는 안전 장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이즈를 증폭시키는 계기는 바로 성(性)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전세계의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는 총 3,360만 명입니다. 이중 이미 1,630만 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매년 600만명, 매일 1만 6천명이 새로 감염되고 있습니다. 인류가 수년간 수십억 달러를 들어 집중 연구를 하고 있지만 에이즈는 여전히 사망 선고입니다. 14세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처럼 에이즈는 지금 이 순간도 지구촌을 흔들고 인류를 공포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에이즈의 비극이 가장 심한 곳은 에이즈의 발생지이자 현재 세계 전체 에이즈 환자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아프리카 지역입니다. 유엔 에이즈 기구(UNAIDS)는 아프리카의 에이즈 환자 2천3백만 명이 10년 이내에 모두 사망할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아프리카는 99년 한 해만 해도 200만 명 이상이 에이즈에 희생됐습니다. 특히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은 그 피해가 가장 큰 처참한 땅으로 1천1백2십만 명의 <에이즈 고아> 중 95퍼센트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아이들입니다. 지금도 에이즈로 인해 고아가 된 수백만의 아이들이 부모를 잃은 슬픔과 에이즈로 인한 차별, 편견 속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아프리카는 그야말로 에이즈와 전쟁 중입니다. 그러나 에이즈는 비단 아프리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느 나라도 에이즈로부터 안심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매년 4만 명이 감염되고 있고 영국 역시 약물 중독자의 에이즈 감염이 줄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 나라 에이즈 감염자는 작년 말 현재 1063명으로 그 증가 추세가 예년의 3.5배나 됐다고 합니다. 더 끔찍한 전망도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에이즈가 마치 인플루엔자처럼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것으로 바뀔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에이즈는 제 2의 흑사병이 될 것에 틀림없습니다. 14세기에 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죽음으로 휩쓸었던 흑사병처럼 에이즈는 인류가 막지 못하는 최대의 재앙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서운 질병이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나리라는 것입니다. 전쟁과 빈곤, 질병 등의 공포로부터 자유를 외치고 있지만 여전히 지구 곳곳에 인류를 공포로 몰아가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 즉 순교자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며 신원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을 지키며 예수를 증거하다가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길 것을 예수께서 미리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24:9, 막13:9-13, 눅21:12-18). 순교자들이 피의 제단 아래 부르짖으며 신원하는 것은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시79:5-13)

이러한 순교자들의 부르짖음에 주어진 응답은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11절)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이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승리한 것을 인정하시며 앞으로 교회가 더 많은 순교를 각오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땅 끝까지 복음을 다 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12-14절)라고 했습니다. 이는 천지를 진동케 하는 큰 지진과 기근으로 살아 남을 자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같은 경우를 예언한 바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사13:1012)

지금 지구촌은 지진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에 발생한 지진 일지만 보아도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1985년 멕시코 멕시코 시티를 강타한 지진으로 사망한 자가 12,000명, 1988년 아르메니 에레반 지진은 25,000명, 1990년 이란 길란에서 발생한 지진은 35,000명, 1995년 일본 고베 지진은 13,000명, 1999.8.17 터키 이즈미르 지진은 13,000명, 1999.9.21. 대만 중하오 지진은 25,000명, 2000.1.26. 인도 아마다바드 지진은 30,000명의 인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지질학자에 따르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진 예보를 시도하고 있지만 1년에 5만번 이상 발생하는 지진을 모두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20세기에 발생한 주요 지진현황을 보면, 1908년 이태리 지진으로 12만명이 사망한 것을 시작하여 1920년 중국 지진으로 18만명, 1976년 역시 중국 지진으로 24만2천명이 사망, 최근 2001년 인도 구자라트 지진으로 1만 8천명이 사망한 것 등 무려 20여회에 걸쳐 약 120만명이 사망했습니다. 역사상 최대 지진 피해는 1556년 1월 23일 중국 산시성 지진으로 83만명이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온 우주적인 무질서의 혼돈과 파괴로 인해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핏빛을 변하는 무시무시한 지구 재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재앙으로 하늘의 만상이 쇠잔할 것이며 포도나무 잎이 넝쿨에서 떨어지듯 할 것이며 무화과 나무에서 떨어질 듯 하다는 표현대로 감당키 어려운 기근에 죽어갈 것입니다. 이같은 날에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15-17절)했습니다. 이는 제아무리 막강한 힘과 권세와 물질을 가졌다해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위대하고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의 심판을 벗어날 자는 없습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고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제아무리 현대 과학과 의학이 첨단으로 발달한다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에 누가 능히 서겠습니까?" 죄를 범하고 동산 숲에 숨은 아담과 이브를 찾아내시는 하나님, 동생 아벨을 죽이고 시치미를 떼는 가인을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배 밑창에 숨어들은 요나를 찾아내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날에 숨을 자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같이 망하리라"(눅13:1-5) 죄는 하나님을 피하려고 하나 그 진노에서 피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죄를 대신하여 어린양으로 희생하심으로 예수 믿는 성도에게 영원한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의 흔적이 없었던 애굽의 바로왕과 애굽 백성들은 모두가 다 장자 죽음의 재앙을 피할 길이 없이 몽땅 죽임을 당했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어린양의 피를 흘리신 십자가만이 모든 인류의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을 피난처로 삼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세상의 어떠한 힘과 권세, 재력과 첨단 과학, 의학을 다 가졌다해도 어린양의 진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란 사랑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증오에서 나온 파괴적인 진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진노인데 이는 노하여서도 그가 사랑하는 자를 구원하고 고치고 새롭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계 심판과 성도 구원을 예언한 하나님 오른 손에 책의 인봉이 하나씩 하나씩 떼어지고 세계 종말의 징조들이 전쟁과 기근, 질병과 지진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같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류 구원의 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의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달리 피난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겠습니까?" 언제 어느 때 하나님 진노의 심판이 임할지라도 능히 그 앞에 설 수 있도록 십자가에 어린 양으로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항상 그 안에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조: 본 설교에 사용된 통계자료는 인터넷 사이트 www.Hunger.or.kr의 통계자료를 참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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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흰 옷입은 자들이 누구냐?

(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5)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7:1-17)

지난 주 설교(계시록 6장) 제목은 "누가 능히 서리요?"였습니다. 땅의 권세잡은 자들, 부자들, 강한 힘을 가진 자들 등이 두려워 떠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날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 7장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날에 능히 설 수 있는 자, 곧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印)맞은 자들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이나 성령의 인이나 다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치심,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 성령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나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뜻에 따라 성령의 힘으로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을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을 가리켜 "십사만사천명"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을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9절)라고 부르듯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흰 옷을 입은 자들"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14절)고 했습니다. 이들이 "큰 환난에서 나왔다"는 것은 세상에서 온갖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흰 옷을 더럽히지 않고 오직 예수 믿는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먹고 살기 힘들다고 비굴하고 더럽게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흰 옷을 입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과거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통치라는 나라 민족의 큰 환난을 통해 누가 흰 옷을 끝까지 깨끗이 지킨 사람들이며, 누가 흰 옷을 더럽힌 자들인가를 밝히 알 수 있습니다.

엊그제 3·1절을 하루 앞두고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이 '친일 반민족행위자' 708명의 명단을 발표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기대를 갖게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제2차대전 종전 후 나치독일에 협력한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수만명을 처단하고 경미한 부역자라 해도 공직사회 진출을 금지시키는가 하면 부역기업은 국유화를 하는 등 단죄를 가하므로 국기를 바로하여 나라의 정통성을 지켜왔습니다. 발표된 명단에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정미칠적은 물론 김활란 모윤숙 홍난파 서정주 등 저명한 교육·예술계 인사, 그리고 언론계 인사로는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창립자인 김성수 방응모 등 해방 후 각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인사들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한국 최대 최고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서정주 등이 친일파였다는 것은 그들의 눈부신 업적과 재능 등에 가리워져 있었기도 하지만 이들을 명백히 밝히지 못했던 것은 지금까지 정부 또한 친일파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친일파 김활란에 의해 작시된 찬송가 461장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서정주만해도 그렇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며 그의 시 <국화 옆에서>는 줄줄 외면서도, 그가 일제 말기에 그 눈부신 시적 재능을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신민화 정책 선전에 기꺼이 쏟아부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를 허탈하게 하는 것은 해방 이후에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이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고, 또 그들이 누리고 있던 지위와 현란하기까지한 경력과 업적, 그리고 그들의 문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후배와 제자들의 엄호에 가리어 미처 제대로 드러날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을 것을 강권하고, 일본 군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종군기사를 썼던 서정주의 대표적인 친일시 <자살 특공대>(1944년 12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함)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자살 놀음에 불과한 "일제의 가미가제 특공대" 오장 마쓰이 히데오를 숭고한 애국자로 한껏 찬양하고 미화하고 있는 시입니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에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서정주는 이렇게 자신의 시적 재능으로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의 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거나 태평양전쟁을 일본인들의 표현대로 성전(聖戰)으로 미화한 작품들을 수 없이 쏟아놓았습니다. 서정주는 일제가 민족말살에 광분하던 시기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에 내몬 '대동아 성전'을 선전하기 위한 일제의 주구였습니다. 서정주의 이같은 행보는 일제에서 그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승만 정권 당시는 이승만 전기를 써서 선전, 찬양에 앞장 섰고, 1980년대는 광주민중항쟁의 피무덤 위에 세워진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을 찬양했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 초여름에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를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지지하는 성명을 내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습니다. 권력에 약했는지 권력의 단맛을 보았는지 그는 87년 1월 8일 전두환의 생일 축하장에서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송시 내용 :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 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참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마련하셨나니/…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이같은 서정주에게 정부가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하고, 언론이 다투어 그를 찬양하는 것을 보면 이 나라의 정부와 언론은 또 하나의 친일세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서정주는 자신의 친일 행각에 대해 "달리 호구연명할 길이 아무것도 없는 입장으로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그저 할 수밖에 없는 일로 생각했다." 며 처자식 먹여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을 고무 찬양하는 글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는 궁색하다 못해 우매하기까지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일제가 1945년 8월에 패망하지 않았으면 그의 친일행위는 더 연장되었을 것이란 말과 똑같습니다. 서정주는 한 마디로 처자식과 더불어 먹고 살기 위해 백의민족의 얼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던져버리고 일제에 아첨하며 빌붙어 산 천민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서정주를 비롯하여 친일파 무리들이 반민족적 반민주주의적 삶을 살았더라도 그들의 공로와 업적, 재능이 있으니 마땅히 훈장을 수여하고 찬양해야 한다는 일부 쓸개빠진 수구세력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앞으로 민족을 배신하고 일신의 영달을 추구해도 재주만 있으면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다는 궤변이 판치는, 진리와 정의가 궤멸된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말대로 21세기는 친일파의 찬란한 영광을 기념하는 새 세기로 시작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는 살아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깨달아야 합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거짓과 불의는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나라 백성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이 나라가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소위 가진 자들, 배웠다고 하는 자들의 반민족적 친일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 친일파 무리들에 비해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했어도 불의한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으며 피흘려 죽기까지 일제의 불의에 항거한 애국 선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손양원 목사는 4년여 동안의 감옥생활중에 이런 시를 썼습니다.(김인서 저작 전집2,1974)

본가를 멀리 떠나 옥중에 들어오니 (遠離本家入獄中하니)

밤도 깊고 옥도 깊고 마음에 가득 찬 수심도 깊다 (夜深獄深滿愁深이라)

밤도 깊고 옥도 깊고 마음에 가득 찬 수심도 깊으나 (夜深獄深滿愁深이나)

주와 함께 동거하니 항상 기쁨이 충만하도다. (與主同居恒喜滿이라)

옥중 고생 4년은 아주 많은 날이나 (獄苦四年果多日이나)

주와 함께 동락하니 하루 같도다. (與主同樂如一日이라)

과거 4년 동안 평안히 보호하신 주는 (過去四年安保主는)

미래에도 그 같으실 주님이심을 확신하노라. (未來確信亦然主라)

신사참배 거부로 수차 옥고를 치르고 해방을 맞아 대구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한 여자 신도는 이렇게 옥중기도를 했습니다.(김두석,<감나무 고목에 핀 무궁화>)

"이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대한 민족적 차별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그 억울한 모습을 느낀 것이 바로 모세가 애굽에서 당하였던 민족감에 애굽인을 쳐죽인 동족애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빗발 같이 쏟아지는 한없는 눈물로써 주여! 우리도 나라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라가 없는 백성은 죽은 목숨이오 불쌍한 민족이 외다.......나는 오늘날까지 믿어온 신앙문제를 민족사상에 결부시키지 않기 위해 갖은 애와 기를 써 보았으나 이 여러 가지 내 앞에서 당하고 있는 억울한 동족의 쓰라린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에게도 나라가 있어야 할 필요성과 국가를 형성한 위에 종교의 자유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나라를 주시옵소서. 신앙의 자유를 주시옵소서.....' "

조선총독이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된 것은 평양 서기산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서기산 사건이란, 만주사변에 죽은 일본군들을 위한 위령제를 1932년 9월 평양 신사가 서있는 서기산에서 지내는데 여기에 기독교계 학교가 참가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 후 일제는 서서히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거부하면 탄압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실삼아 전쟁을 일삼는 일제의 전몰전사자들을 위해, 다시 말해 자기 나라 민족을 짓밟고 강점하여 민족말살을 기도하다 죽은 철천지 원수같은 일본군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라는 것인데 어찌 쓸개있는 나라 백성이라면 그 신사에 참배를 올리겠습니까? 이같은 신사참배는 전후에도 야스쿠니 신사를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야스쿠니(靖國)신사는 1869년 메이지일왕의 지시로 황군의 혼령을 달래기위한 국가신사로 도쿄중심가 황궁옆 약 10만평방킬로미터나 되는 광대한 부지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크기는 도쿄돔 야구장의 2배나 됩니다. 도쿠가와와 막부가 무너진 무진전쟁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11개 침략전쟁의 전몰자 총 246만여명이 안치돼 있고 일본전역 8만여개에 달하는 신사중의 신사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에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인 도조히데키 총리겸 육군대신을 비롯한 주동인물들 14명의 위패가 놓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스쿠니 신사는 침략전쟁을 일으켜 아시아 인민들을 전쟁의 고통에 몰아넣은 전쟁귀신들을 호국군신으로 모시고 있는 곳, 나라를 지키다 숨져간 애국자들이 묻혀 있는 곳이 아니라, 다른 나라를 침략하다가 죽어간 악령들의 위패가 있는 곳입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며, 일본군들이 전장터에 나갔다가 죽어서 그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다짐하면서 발대식을 거행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같은 전쟁귀신들을 숭배하는 신사에 참배를 강요하고 거부할 경우 무참하게 핍박을 가했던 것입니다. 일제는 온갖 회유와 악랄한 탄압 수단으로 1938년 9월에 장로회 총회를 최후로 신사참배에 굴복케 함으로 한국교회를 완전히 유린하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를 처음 받아들인 것은 천주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뒤질세라 감리교회에서 1938년 10월, 제 3차 연회에서 신사참배 실행을 결의하는 등 각 교단들의 공적인 굴복이 잇달았습니다. 일제의 탄압에 굴복한 교단 지도자들은 교회가 회집할 때마다 먼저 신사참배를 하고, 국민 맹서를 외우고, 동경에 있는 궁성을 향하여 동방요배를 드리고, 12시가 되면 죽은 영령들을 위한 묵도를 하도록했습니다. 심지어는 신사 불참배하려는 신도들을 경찰에 고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치밀하고도 악랄한 기독교 탄압 정책속에서도 몇몇 교회와 기독학교, 그리고 교역자와 평신도들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중에 끝까지 신사참배를 항거한 교회는 평양의 산정현교회였습니다. 산정현교회에는 민족의 거두라고 할만한 수다한 인물들이 모여있었습니다. '한국의 간디'로 통하는 조만식 장로를 비롯하여 유계준, 김동원, 방계성, 오윤선, 김찬두, 박정익 등의 장로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인숙 전도사와 오정모 여사와 같은 훌륭한 여성들이 역시 신사참배를 거부했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교회당 안에 일본 국기를 달게 하였고, 일본 귀신이 들어 있는 가미다나를 벽에 걸라고 강요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거짓된 우상숭배에 지나지않는 신사참배는 물론 일제의 어떠한 상징 하나일지라도 교회 강단에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38년 2월 8일 주목사는 경찰에 검거되어 2년여 동안의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고, 석방 후 주목사는 부모된 심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민족의 고난과 환난을 꿋꿋이 이겨낼 것을 성도들에게 당부했습니다. 그해 5월, 일본 경찰은 주목사에게 설교하지 말라고 협박했고, 주목사는 이 설교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며 거절하다 또 다시 검속되었습니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교단에서 자신을 파면하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주목사는 "흰 옷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온갖 고문을 받으며 옥중에서 7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안질과 폐와 심장이 허약해진 주목사는 1944년 4월 21일, 순교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지도자들 상당수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일본 귀신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배교의 행위를 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성종을 떼어 전쟁무기로 일본에 자진 헌납하기도 했고, 성도의 거룩한 헌금을 가지고 비행기 제조의 헌납금으로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이 밖에도 천인공노할 무시무시한 죄악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무렵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의 수난을 겪은 지도자가 70명이요 옥고로 순교당한 자가 50명, 사경에서 살아 나온 자가 20여명이었습니다. 1945년까지 이로 인해 투옥된 자가 2,000여명에 달하고 200여 개의 교회가 폐쇄되었습니다. 신사참배는 단순히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제의 모든 침략 전쟁과 그 체재를 고무 찬양하는 것으로 반민족적, 반인륜적 친일 행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감리교회를 비롯하여 대부분 한국 교회는 당시의 신사 참배에 참여한 자들의 철저한 회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확장된 교세와 또 다른 떳떳치 못한 교회의 세습의 그늘에 그 비굴한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 하겠습니다. 군부 30년 동안 한번도 제대로 예언자적인 소리를 내지 못하고 침묵과 아부로 알량한 지도자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한국 교회와 지도자들의 모습은 반민족적인 친일파 무리들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지킨 참 선배들, 목숨이 두려워 적당히 타협한 비겁한 선배들, 그리고 양심의 가책없이 오히려 성도들을 일본에 팔아 넘긴 간교한 선배들의 발자취를 샅샅히 살펴봄으로 오늘의 참된 교회 모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일제의 탄압과 친일파의 반민족적 반역과 배신으로 가중되는 핍박과 환난속에서도 오직 하나님과 나라 민족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과 순국 선열들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반민족적 친일파 무리들을 밝히고자 하는 것은 그들을 정죄하여 처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구실삼아 남의 나라를 무참히 짓밟고 수없는 인명과 재산을 온갖 잔혹한 방법으로 약탈, 강탈하며 무고한 백성들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피흘리게 한 일제의 앞잡이가 된 자들이 나라 백성의 지도자들이 되고 존경받는 불의함을 제거하여 정의를 세우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결코 불의한 나라 백성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삼천리 금수강산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무자비하게 짓밟고 한국 교회를 더럽힌 일본의 불의함과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군국주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일파 무리들의 반민족적 행위나 그들의 공적이나 업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를 보시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보신다는 것은 예수 믿고 지은 죄악을 철저히 회개하고 청산한 흔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오직 어린양의 피로 죄 사함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세상에서 아무리 큰 환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예수께서 입혀주신 흰 옷을 깨끗이 보존한 자들, 진리와 정의 편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산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3.1절 83주년을 맞아 지난 날 우리 기독교의 비굴했던 모습을 철저히 회개 청산하여 모두가 다 흰 옷입은 자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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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불로 응답되는 성도의 기도

(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6)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10) 세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11)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12) 네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 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계8:1-13)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에 가인은 뻔뻔하게도 모른체 하며,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며 오히려 반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의인이 흘린 피의 호소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심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의인의 피를 덮어 놓은 가인에게 이렇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7-12)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무고하게 흘린 피로 인하여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하는 의인의 핏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그 호소에 응답하시는 정의로우시고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단 한 사람의 핏소리일지라도 결코 소흘히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어찌 한 사람의 억울한 핏소리라도 놓치시겠습니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이방원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다 철퇴에 맞고 선죽교에서 흘린 정몽주의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친일파 경찰 끄나풀에게 고문당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무고한 백성들의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당하여 사할린 등지로 끌려가 탄광에서 억울하게 죽음당한 징용 조선인들의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친일파 지식인들의 선동에 어쩔 수 없이 학병과 정신대에 끌려가 희생당한 조선 남녀 청년들이 흘린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조선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다 이름도 빛도 없이 청산에 묻힌 독립군들의 흘린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군부 독재 30년간 자유와 민주를 위해 부르짖다 대공분실, 남산 등지로 아니 군대까지 끌려가 물고문 등 온갖 고문을 견디다 못해 피를 토하고 죽어간 민주 열사들의 흘린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저 남아공화국 흑인들이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다 백인 경찰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터지고 사냥개에 물려 흘린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세르비아의 탄압을 받아오던 크로아티아가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을 등에 업고 세르비아계 1백여만명을 학살한 <피의 보복>을 어찌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겠습니까? 동티모르의 1975년 12월과 1976년 1월은 <학살의 계절>로 불리는데 이 두달 동안 동티모르인 6만명이 학살되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3살 이상의 티모르인과 중국인은 모두 살해되었습니다. 이들이 흘린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아프리카 등에서 소위 인종 청소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내란으로 무고한 종족들이 흘린 피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600만 유대인들의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9.11 미국 세계무역센타 테러 사건으로 숨진 3천여명이 흘린 피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참으로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하늘에 부르짖는 핏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피의 역사라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피의 역사라함은 바로 죄의 역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억울하게 흘린 핏소리를 다 들으시고 드러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소위 가진 자들이 덮어놓은 핏자국들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더럽고 추악한 승자가 기록한 거짓된 세상 역사는 그 진실을 몽땅 밝히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사26:21)

오늘 본문에서 시작되는 일곱 나팔의 재앙은 땅에서부터 호소하는 핏소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 "큰 환난 가운데서도 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성도들의 신원하는 기도", 주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의 기도, 의인들의 기도가 심판의 불로 응답되어 지구에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금향로의 향연과 함께 하나님 앞에 올라가지만 그 기도가 응답되어 이 땅에 내려올 때는 재앙들로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는 근거가 됨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은 것은 반드시 응답되어 그 사람들을 징계하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고 권면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오히려 잘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자신의 대적들로 인해 고난당하는 가운데서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109:4)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원수들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롬12:19). 그러므로 성도는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직접 보복하거나 저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데반처럼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 그들이 잘 되기 위해 기도할 뿐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가르치신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금력 등 눈에 보이는 어떠한 힘보다 성도들의 기도가 더 강하고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재앙들도 앞선 계시록 6장에서 볼 수 있듯이 피흘리기까지 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교당한 성도들의 핏소리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계6:10)

성도들의 기도응답으로 울리는 일곱 천사의 일곱 나팔은 세상의 종말과 심판을 경고하는 나팔입니다.(고전15:51-52,살전4:16). 역사의 종말에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임박한 것을 알리는 경고 나팔입니다. 이 나팔이 울리면서 일곱 재앙이 시작되는데 그 재앙의 범위는 지구의 3분의 1만을 해치고, 3분의 2를 남겨두라는 부분적인 재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곱 나팔 재앙은 마지막 재앙이 아닙니다. 이는 재앙의 목적이 형벌과 심판이 아니라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경고의 나팔로 주어진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불신자와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대적하는 자들,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한 자들, 무고히 힘없는 사람들을 피를 흘리게 한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여전히 회개일 기회를 주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악에 물든 사람들은 엄청난 재앙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아니 그 재앙을 직접 당하면서도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지며 살인과 음행과 도적질이 그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완악하고 강퍅한 모습을 계시록 9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은,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계9:20-21)

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재앙으로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면서도, 실제 하늘에서 집채만한 우박이 내려 사람들이 박터져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계16:9,11,21)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이런 재앙에서 피할 곳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믿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자들은 구원함을 받을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목이 곧은 사람들은 일곱 재앙으로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경고의 나팔로 시작되는 재앙들의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재앙들의 특성은 한 마디로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인한 재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재앙인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진다."는 것은 핵시설 폭발 사건이나 핵무기 폭발로 인한 방사성 낙진 혹은 전쟁 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두번째 재앙인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는 것"은 화산 폭발같은 것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를, 셋째 재앙인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는 수질오염 등의 환경오염과 공해 등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는 슬픔과 비참한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같이 여기 나타나는 재앙들은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오염, 그리고 공해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땅'에 재앙을 내리신다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나 환경오염도는 일일이 그 통계지수를 밝히지 않아도 누구나 다 짐작하고 느끼고 있는 정도로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난 5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쥐가 까치의 공격을 받고 "걸음아 쥐생원 살려라!"면서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는 보기드문 모습이 문화일보 화보에 실렸습니다. 잡식성 조류인 까치가 독수리 등 맹금류의 사냥감인 쥐를 잡아먹을 듯 뒤쫓는 경우는 보기드문 경우입니다. 이같은 생태계 하극상은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지만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는다든가, 환경호르몬으로 동식물계에 성이 파괴되는 현상 등 여러 하극상들이 자주 보도되어왔습니다.

정부가 발표한 2000년도 대기오염과 사망 통계에 따르면, 미세먼지와 오존 등 각종 대기오염물질로 인한 급·만성 사망자는 전국 7대 도시에서 연간 2만8천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한계레신문)

세계경제포럼(WEF)은 지난 2일 한국의 환경지속지수(ESI)가 전세계 142개 국가 중 최하위권인 136위(35.1점)에 그쳐, 한국의 환경이 전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것으로 보고했습니다. ESI(Environmental Sustainability Index)는 돌이킬 수 없는 환경 파괴를 하지 않으면서 경제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 객관적인 능력을 의미하며, 물과 공기의 오염에 대한 대응 방법과 정부의 부패 정도 등 68가지 변수들을 고려한 것입니다. ESI에서 한국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국가들은 북한(31.8점)을 포함, 6개국에 불과했고 상위권은 핀란드 다음으로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차례로 2·3위를 차지, 북유럽이 단연 앞섰습니다. 국제지구과학정보센터는 "이번 조사에서 환경의 건강도는 경제발전 정도와는 상관관계가 적지만, 정부의 부패 정도와는 밀접한 관계가 발견됐다."면서 "정부가 부패한 국가일수록 환경에 관심을 갖는 정도가 낮았다."고 밝혔습니다. <생태계 파괴>나 <환경오염>은 나라 백성이 부정부패하고 사치와 향락, 음란 등이 심할수록 환경지속지수(ESI)가 아주 열악하다는 것입니다. 국민소득(GNP)은 일등급 규모일지라도 부정부패가 사회 곳곳에 만연하면 환경지속지수가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은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혼란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부정부패, 사치, 향락과 음란 등으로 인한 자기 혼란과 자기 파괴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생태계 파괴는 윤리 도덕의 붕괴를 초래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태계의 파괴(위기)는 산업화나 현대의 첨단 기술이 가져온 부작용이 아니라 죄악에 병든 인간 세상에 내리시는 재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구 환경 위험을 알리는 신호들 가운데 충격적인 것은 이미 북극 빙하의 42%가 녹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월드워치연구소의 <지구환경보고서 2001>이 환경을 잊고 지내는 우리에게 협박아닌 협박, 장난 아닌 진실들을 공개했습니다.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재앙이 지구에서 '현재 진행중'이라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놓고 있습니다. 2050년이 되면 북극에서 여름에 얼음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1950년 이래로 해저조사결과 북극의 얼음 두께가 42% 정도 줄었으며, 공중관측 결과 그린란드에서 매년 51㎦(5천1백만리터)의 빙하가 녹고 있어 이 빙하가 완전히 녹아버릴 경우 해수면이 7m 정도 상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추세가 2050년까지 계속될 경우 지구의 상당 지역이 물에 잠기게 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50년 안에 북극에서 여름철 빙하를 볼 수 없게 되고 원인도 모르게 양서류가 사라지는 등 지구는 암울한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진단하며 <미래의 재앙>은 이미 시작됐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같은 재앙에 대한 경고는 세계적인 사회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대부분 모든 사람들이 이에 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조사에 따르면 매60분마다 한 종의 식물이나 동물이 멸종되고 있습니다. 열대 지방 전체 종(種)의 멸종율은 자연적인 멸종율의 만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앞으로 10년내에 우리는 지구상에 남아 있는 모든 생물체의 20%를 잃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유엔 환경위원회에 따르면 사막화는 세계의 모든 대륙에 확산되어 지구 땅 표면의 35%, 3분의 1 이상이 사막화 위협에 놓여 있습니다. 전세계 인구의 20%인 8억 5천만명의 사람들이 사막화로 인해 황폐화된 땅에서 굶주린채로 잠들고 있습니다. 1982년부터 1984년 사이의 가뭄 때 사하라 사막의 남부에서 25만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는데 그들 모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전쟁 도발, 즉 환경파괴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개발 도상 국가에 살고 있는 13억이상의 사람들은 극빈자들입니다. 이들의 평균 수명은 겨우 57세이며 10명의 아이 중에 3명이 5세가 되기 전에 죽습니다. 사망의 주원인 기본적인 보건과 위생을 위한 깨끗한 물이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지구 남반구에 살고 있는 나라들 3분의 1에 달하는 가구가 이같은 상황에 처했습니다. 미국의 인구는 전세계의 5%도 되지 않지만 지구 천연자원의 30%를 소비하며, 이들 대부분의 물자들이 개발도상국가의 환경을 파괴하면서 만들어지고 값싸게 수입되어지는 것들입니다. 지금 미국은 이들 엄청난 자원들을 소비하면서 자기 땅 안에서 쓰레기 처리능력을 넘어서 버렸습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로부터 370만톤이 넘는 쓰레기가 매년 처리 비용이 보다 싸고 환경보전의 규제가 별로 엄하지 않은 가난한 개발도상국가들로 실려나가고 있습니다....『국제환경단체들은 지난달 25일 미국이 자국에서 폐기된 컴퓨터, 화학약품 및 중금속을 함유한 전자제품 폐기물 쓰레기들을 자국에서는 유해하다는 이유로 매립과 소각을 금지하면서도, 환경규제가 약하고 처리기술과 자본이 없는 중국·인도·파키스탄 등 아시아의 가난한 국가에 유해폐기물을 수출하므로 강대국 미국은 아시아 가난한 나라들을 향한 <환경 테러>를 일삼고 있으며, 전세계 <환경오염의 축>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난번 유해물질에 오염된 세계무역센터 고철, 9.11테러 사건으로 3천여명의 희생자들의 피로 얼룩진 고철더미를 아무런 사전조처없이 아시아 국가에 수출한 사건으로 '추악한 거래'를 일삼고 있다는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이상은 한계레신문에서 발췌)

삼림 벌채, 토양 침하, 유독성 폐기물, 살충제 사용의 증가 그리고 다른 많은 환경 위협이 하나밖에 없는 제한된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으로 인한 온실 효과와 오존의 고갈은 지구 어디에서도 피할 길이 없는 무소부재한 존재로 이미 지구 앞날에 강력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구 재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두 가지 가공할 환경 문제는 마침내 전지구가 '뿌리째 흔들리게 될' 때까지 퍼져 내려갈 것입니다.(생명권 정치학, 제레미 리프킨저, 대화출판사)》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는 환경오염이나 자연 세계의 파괴의 범위를 넘어서서 삶의 전 체계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결같이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류가 봉착한 문제는 단순히 생태계의 오염이나 생태계의 위기의 범위를 넘어서서 인류가 살아 남느냐 아니면 몰락하느냐의 문제 곧 생존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오염이나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리시는 심판에 대한 경고 나팔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길만이 나라 백성이 재앙과 심판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첨단 기술이나 노력 등으로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을 막고 환경을 재생한다해도 궁극적으로 내리는 하나님의 재앙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재앙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 앞에 나와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들 재앙이 내리는 목적은 바로 회개하고 하나님앞에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재앙이 내리는 형태를 영적으로 해석하든 문자적으로 해석하든 확실한 것은 이 모두가 인류의 죄에 대해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들 재앙으로 인류의 3분의 1이 죽고, 그 소유의 3분의 1이 일시에 초토화되지만 3분의 2를 남겨 두신다는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의 구원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이 목적이 아니라 재앙을 통한 인류 구원에 목적을 두고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 광야에서 물이 써서 마실 물이 없으므로 죽게 되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쓴물에 나무가지를 던지니 그 물이 달게 되어 백성들이 마시고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마라의 쓴물에 던져진 나무는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이든 실제이든 쓴물을 마시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마시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앞서간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보좌 앞에 상달되고 그 기도들이 이 땅에 심판을 위한 경고의 나팔로 재앙들이 임하고 있습니다. 마라의 쓴물을 영원한 생명수로 바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류가 사는 길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사시므로 어떠한 재앙들과 심판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

14. 예수 믿으시오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4)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9)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11)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12)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월,일,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16)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17)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18)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19)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은,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계9:1-21)

본 장은 '황충의 재앙', 그리고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에서 나와 <전갈같은 황충이 권세>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는 사탄을 말하고, <무저갱>은 사탄이 갇혀 있었던 곳을 말하며, <전갈 같은 권세>라 함은 무서운 독을 지닌 전갈에 쏘이면 치명적인 해를 입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이같은 전갈의 권세를 받은 황충이 떼로 몰려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고 싶을 정도의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황충은 메뚜기 일종입니다. 펄벅은 그의 책 <대지>에서 중국 땅을 초토화시킨 메뚜기떼의 공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느 날 남쪽 하늘에 작은 먹구름이 나타나더니 삽시간에 부채꼴로 퍼져 온 하늘을 뒤덮었다. 밤처럼 캄캄해지고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굉음만 같았다. 이 메뚜기떼가 내려앉기만 하면 푸르던 천지가 삽시간에 누런 황무지로 돌변해버린다. 부인들은 손을 높이 쳐들고 신명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고, 사나이들은 밭에 불을 지르고 장대를 휘둘러 메뚜기떼와 싸웠다.> 성경 출애굽기(10:13-15)는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하나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시고 그 바람을 타고 메뚜기떼가 온 애굽땅을 뒤덮어 하늘이 어둡게 되었고 채소, 나무 열매 등을 모두 먹어치워 애굽에는 푸른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같이 바람, 계절풍을 타고 날아들어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식물을 거덜 내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기 때문에 이 메뚜기떼들을 공포의 이빨을 가진 <바람의 이빨,Teeth of the Wind>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계절풍을 따라 10억 마리에서 심지어 100억 마리까지 떼를 지어 하루 동안 시속 16km의 속도로 300km까지 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합니다.(곤충의 행성, 하워드 에번스,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 동물학과 교수 저) 이 사막메뚜기들이 한번 무리를 이루면, 아프리카는 물론 인도까지 지구의 20%를 휩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거의 65개 나라가 이들로부터 침략을 받으며, 세계 인구의 10%가 직접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1928년에 몰아닥친 메뚜기떼를 몰아내는 데는 10년이 넘어 걸렸습니다. 1958년에 이디오피아를 뒤덮었던 <바람의 이빨>은, 100만 명이 1년 동안 먹을 16만 7천 톤의 곡식을 갉아먹었습니다. 소말리아를 뒤덮었던 400억 마리의 메뚜기떼는 하루에 8만톤을 먹어치울 수 있는 숫자였습니다. 1㎡에 300~1000마리, 한 발짝 디디면 24마리꼴로 밟히는 밀집농도로 모든 작물들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이 메뚜기 재앙을 황충의 재앙, 즉 황재라 부르며 수재, 한재와 더불어 3대 천재(天災)로 여겨왔습니다. 일찍이 메뚜기떼와 전쟁을 시작한 나라는 중국과 페루입니다. 작년 6월말 중국은 20년 만에 찾아든 극심한 가뭄과 더불어 구름처럼 몰려든 메뚜기떼의 공격으로 무려 366만여 헥타르의 농경지가 초토화되는 크나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환경 보호론자들은 중국의 산업발달로 인해 발생되는 환경오염과 산림 황폐화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이는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같은 달, 남미 페루일대에서도 1억 5천만 마리로 추정되는 메뚜기떼가 페루 농경지를 습격해 1만 7천여 에이커에 해당되는 지역이 황폐화되었습니다. 페루 북쪽의 안데스 지역에 30억 이상의 메뚜기떼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들 메뚜기떼는 현지 통계에 따르면 한해에 1만5천 헥타르의 자연 식물, 숲, 농작물을 먹어치운다는 것입니다. 이 지역 메뚜기떼 급증의 주원인은 해수면 온도상승으로 나타나는 '엘니뇨현상'인 것으로 학자들이 밝히고 있지만 이 역시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같은 황충, 즉 메뚜기떼가 모두 전갈같은 독침을 쏘면서 대들면 지구 3분의 1 인구가 순식간에 죽고 싶을 정도의 괴로움과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황충의 재앙을 당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고 싶지만 죽음이 저희를 피한다고 했습니다. 지옥이 다른 게 아닙니다. 뜨거운 불로 심판을 받아 죽고 싶어도 죽지 않고 꺼지지 않는 불길로 그 고통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한 부자가 세상에서 오늘날로 말하면 350만원짜리 유모차에 애키우고, 2천만원 홋가하는 양주를 홀짝홀짝 들이마시고, 잦은 해외 골프여행에 외화를 물쓰듯하고, 기 백만 원하는 맞춤 속옷에 수천 만원에 이르는 최고 브랜드 명품들로 온갖 치장을 다하고, 궁전 같은 저택에, 서민들 아파트 열 채 값도 더 되는 승용차에 온갖 사치와 호화스럽게 살다가 죽어 음부 곧 지옥에 들어가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살아 있을 때 예수 믿을 기회가 많았음에도 예수는 미련한 놈이나 믿는 것이라며 예수 영접하기를 거절했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라 하는 한 거지가 그 부자 집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워 먹고살려니까 동네 개들이 몰려와 병들어 헌데를 킮는 바람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다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 부자는 생전에 무슨 위인 전집 같은 자서전을 수없이 뿌리고, 자신을 기념하는 호화찬란한 문화 전당도 세우고,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최고 훈장과 상패, 명예박사 학위를 몇 개씩이나 받고 죽어 풍수 좋은 명당에 호화 분묘를 하고 장사되었고, 이것들을 몽땅 가지고 지옥에 갔는데 그 풀무 같은 불구덩이 다 타버리고 꺼지지 않는 뜨거운 불로 말할 수 없는 고통만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 하나가 아브라함의 품안에서 위로함을 받으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세상에서 자기 집 대문에 누워 빌어먹던 거지 나사로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부르며 세상에서 자기에게 빌어먹던 정을 생각해서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만 찍어 타들어 가는 혀를 좀 서늘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부자 너는 세상에서 혼자서 누릴 것 다 누렸으니 그것으로 족하고,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 온갖 고난을 당했으니 여기 하늘 나라에서 위로를 받는 것이니라'고 말하며 '이뿐 아니라 너 있는 곳과 이곳 사이에는 누구라도 능히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 있어 이곳에서 그곳으로 갈 수도 없고 그곳에서 이곳으로 올 수도 없어 물 한 방울 건넬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세상에서 예수 믿음 없이 자기 배만 위해 살았던 것이 뒤늦게나마 후회가 되어 아직 세상에서 자기처럼 살고 있는 자기 형제 다섯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제발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 하면 '금새 회개하고 예수 믿어 지옥에 들어오지 않게 될 것이라'며 신신당부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대답은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에 그토록 예수 믿으라고 했어도 믿지 않은 사람은 설사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복음을 전할지라도 예수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눅 16:19-31)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기적을 보아도 그때뿐이고 곧 잊어버리고 마는 것을 우리는 성경과 세상사를 통해서 많이 보아 왔습니다. 애굽에서 무려 10가지 기적들을 보고, 홍해가 쩍 갈라져 육지처럼 난 길을 직접 걸어서 바다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 산에 가있는 동안 그새를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것을 보면 기적을 보면 '와!' 하고 그때뿐이지 쉽게 믿음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울산 앞 바다가 쩍 하고 갈라져 일본까지 자동차로 월드컵 축구 구경하러 왔다갔다할 수 있다면 믿겠습니까? 발전노조가 파업하고 있는데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나타나 이 문제를 거뜬히 해결해준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같은 기적들을 보고 예수 믿을 사람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구경꾼들만 잔뜩 모여들고, 멀지않아 이들을 상대로 돈 벌기 위해 유흥업소, 카지노, 관광호텔 등으로 유흥가 환락가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죄악에 물들어 그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지면, 황충의 재앙으로 엄청난 괴로움과 고통을 당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가 되어도, 아니 세상 사람 3분의 1이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으로 죽어 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당하면서도 회개는커녕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게다가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말처럼 기고만장하여 온갖 우상숭배를 더하며 온갖 죄악을 더 행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믿음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은,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21절)

다음으로 여섯째 재앙은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으로 사람 3분의 1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입니다. 불과 유황은 죄악으로 가득찬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하나님의 심판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이 "불과 연기와 유황"이 말들의 입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말은 전쟁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전쟁으로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상 지금까지 전쟁으로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한 전쟁은 없었습니다. 세 명 가족 중 한 명, 한 가정에 한 명씩 전쟁으로 죽임을 당한다는 참혹한 전쟁의 재앙이 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불과 연기와 유황"은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될 뿐만 아니라 피바다가 되는 참상으로 이 재앙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충의 재앙"이나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은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印)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골라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에서 <인,印>이란 소유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을 맞았다는 것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소유,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인이 인격을 상징하는 "이마"에 있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로 그 인격과 성품이 예수를 닮은 모습(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 받은 흔적(표시)을 가지고 산다는 것, 구약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내린 장자의 재앙을 피할 수 있게 했던 <어린양의 피>의 흔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꿔 말하면 "황충의 재앙"이나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은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없는, 즉 회개하지 아니하고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만 골라서 내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재앙들의 목적은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그의 심판으로 고통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서 가운데서 재앙을 내리되 먼저는 <자연계의 재앙>들을 통해 깨닫도록 하시고, 그래도 깨닫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런 <황충의 재앙>을 내려 더욱 더 강하게 회개를 권면하고, 그렇게 해도 끝까지 이를 악물고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회개치 아니하는 자들을 위해 세계 인구 3분의 1이 죽임을 당하는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으로 강권하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끝내 거부하고 대적하며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마침내 사탄과 더불어 영원한 지옥에 처하는 최후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가 이러한 재앙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아무라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때까지 오래 참으시는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예수 믿든 안 믿든 누구라도 어린양의 피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회개하는 생활로 항상 성별된 삶을 살지 아니하면 재앙으로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5)"

하나님은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 곧 십자가의 피를 부정하는 것이며, 성령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으로 그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히10:26-31)며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내릴 참혹한 재앙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회개를 미루는 사람은 그 영혼이 사탄에게 저당 잡혀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T.Manton) 지금 여기서 회개하고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 믿고 사는 여러분은 어린양의 피의 흔적을 가지고 항상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생활로 흰옷을 더럽히지 아니하는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처럼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라고 고백하면서 죄가 항상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 십자가 은혜로 죄를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130:3)라고 했습니다. 어린양되시는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 심판을 피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참혹한 재앙들을 받지 않도록 성도는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죄를 물리치고 살아야만 합니다."(히12:4) 욥과 같이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찌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우상숭배를 강요받고 거절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으리라는 느브갓네살 왕의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의 명령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하나님께서 세상 권력의 손에서 자신들을 건져주시지 아니해서 극렬히 타는 풀무 불 속에 던져질지라도 우상숭배하는 죄를 범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리라는 것입니다.(단3:13-18)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결국 왕의 명령을 거절하고 풀무 불 속에 던져짐을 받았는데 느브갓네살 왕이 "그 풀무 속을 보니까 이들이 신들의 아들처럼 보이는 분과 함께 불 가운데서 춤을 추며 다니는 것을 보고 기절초풍하여 불구덩이 가까이 가서 이들을 불러내기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이리로 나오라'고 합니다. 이에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불 가운데서 나왔는데 왕과 더불어 모든 신하들이 함께 보고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그리고 왕은 토로하기를 "자신의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단3:27,28)고 했습니다. 과연 이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의 인>맞은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 맞은 사람들만이 모든 재앙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어린양의 피로 하나님의 인 맞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므로 모든 재앙에서 구원함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흐려지지 않도록 예수 마음과 예수의 인격과 성품을 갖추며 십자가의 은혜로 죄악을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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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교회의 고난

(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 그 손에 펴 u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3)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5)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7)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계10:1-11)

본 10장은 일곱째 재앙에 앞서 교회가 받을 고난을 담고 있는 <작은 책>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천사의 말대로 그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말합니다. <작은 책>을 먹어버리니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된" 이유는 교회가 받을 고난과 환난을 전해야만 하는 괴로운 책임, 고통스러운 사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인사말처럼 "부자 되세요"하면 듣는 사람이 기 분 좋을 것입니다. '나라 경제가 이제 완전히 회복세를 보이고 경제가 급성장하여 실업률도 줄어들 것입니다.' 면서 이제 '평안입니다. 부자 되세요' 하면 전하는 사람도 기분 좋고 듣는 사람도 기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치와 향락, 음란과 우상숭배, 부정부패와 불의의 죄를 회개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멸망당할 것입니다.'라고 외친다면 대부분 사람들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거나 코웃음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를 분명히 했습니다. 역사의 주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아니하든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9,10) 구약의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 당시 요시아 왕은 부정부패와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근절하고자 했지만 수구세력에 밀려 개혁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부정부패와 탐욕, 음란과 우상숭배 등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거짓 선지자들의 '평안이다, 평안이다'하는 유혹에 넘어가 회개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채찍을 들으셨습니다. 바벨론 국가를 들어 이스라엘을 치시기로 한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바벨론을 그 채찍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벨론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징계, 채찍을 달게 받으라는 것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징계, 채찍을 달게 받으라, 그렇지 않으면 그나마 생명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은 괴롭고 쓴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징계를 거역하여 바벨론에 항거하거나 이웃 다른 강대국 애굽으로 도피하여 잘 살겠다고 하면 결단코 칼과 기근과 염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당할 것이며 다시는 이스라엘 땅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식물의 핍절도 당치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 하면 잘못 되리라 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의 노와 분을 예루살렘 거민에게 부은 것 같이 너희가 애굽에 이른 때에 나의 분을 너희에게 부으리니 너희가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치욕거리가 될 것이라 너희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도다"(렘42:14-18)

나라가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국난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끝까지 투쟁하라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이 아니라, 침략국가에 항복하는 길만이 사는 길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는 예레미야에게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지도층이나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이들의 거짓 평안에 속아 살고 있는 백성들로부터 매국노로 몰려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괴롭고 위험스럽지만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나라 백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의 채찍 바벨론에 항복하여 징계를 달게 받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칼에 죽을 것이고 칼에서 살아 남는다해도 기근에 죽을 것이고, 기근에 살아 남을지라도 염병에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왕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렘38:17-18)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했던 예레미야는 매국노로 몰려 진흙 구덩에 갇히게 되었고, 시드기야 왕은 우유부단한 가운데 수구세력에 밀려 결국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채찍을 거역하다 나라는 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시드기야 왕은 자기 보는 앞에서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의 두 눈은 칼로 뽑히고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렘52:8-34,렘38:2-6)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으로 인한 상처는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지만 그 징계와 채찍을 피하거나 대항하여 죄악을 더하면 죽음을 초래한다는 뼈아픈 역사적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히틀러 소년대 출신 젊은이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내 나이 여섯 살이었습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독일 국민들이 그랬듯이 어린 나도 히틀러 숭배자였습니다. 물론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도 히틀러를 비판하는 소리를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십대 소년이 되자 나는 히틀러 소년대에 가입해서 충성을 다했고, 제3제국이 멸망하기 1년 전부터 자진해서 비행기 공장에 가서 일할 정도로 열심을 다해 나치 정권에 충성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1년여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히틀러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돌아간 어느 화창한 주일, 내가 평소 존경하는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만행을! 그리고 그가 이렇게 망하리라는 것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요 심판입니다." 나는 그날 예배가 끝날 무렵, 참기 어려운 분노와 환멸감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자마자, 현관에 서서 환하게 웃으며 교우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목사님에게 달려가 소리치며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그래 그게 지금 어쨌단 말입니까? 난 그 때 몰랐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 젊은 청춘을 다 바쳐 히틀러에게 충성했고, 역사의 심판을 받은 부끄러운 나치 정권에 내 젊은 청춘을 허비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지도자는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들의 사는 길, 생명의 길을 말해주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할 것이라 해서 그 시대에 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아니한다면 그 피 값을 고스란히 스스로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56:10-12)

히틀러가 역사의 심판을 받아 망할 나치 정권의 괴수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다물고 있음으로 해서 한 젊은이의 인생을 그르치게 되었다면 그 목사는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요 탐욕에 빠진 몰각한 목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시대의 파숫군이 되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죄악에서 떠나 생명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 피값을 반드시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인자야 !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3:17-21)

참된 지도자, 하나님의 종은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해서 사람들에게 사는 길을 제시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 마지막 말씀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전해주는 말씀이 자신에게 좋든 싫든, 자신의 비위에 맞든 맞지 아니하든 그 주어진 말씀대로 살아야만 생명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듣기 좋은 부분만 가려서 하나님 말씀을 취하고 듣기 거북하고 그 말씀대로 살자니 괴롭고 어려운 것이 많아서 뱉어 버린다면 시드기야 왕 같이 피차에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칼빈은 1527년경 하루는 파리에서 어느 곳을 지나다가 신부들과 병사들과 시민들이 모여 신교도, 즉 기독교인 한 사람을 불 태워 죽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화형 당하고 있는 기독교인이 너무나 평안하고 기쁘게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뜨거운 불에 타 죽으면서 어떻게 평안하고 기쁜 모습이 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텐데, 저렇게 끔찍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담대하고 평화스러울 수 있을까? 그렇다 내 친척 올리베탕의 충고대로 성경을 살펴보자. 그래서 나도 믿음의 새로운 길을 찾아보자."하면서 성경을 펴 보기 시작했습니다. 칼빈은 성경을 읽는 중 너무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자신의 죄에 대해 두려움과 죄책감에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죄의 무게를 감당키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읽기를 그만두려다가 힘들지만 계속해서 읽어나갈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마음에 평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긴 했어도 마음에 아직 걱정과 두려움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몸담았던 로마 천주교를 떠나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로마 천주교를 떠나 신교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하늘같은 교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참혹한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다시 성경에 돌아가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진리가 없는 곳에는 교회가 없다. 로마 천주교에는 거짓과 우상적 의식만 남아 있을 뿐 교회의 기초가 되는 진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죽음을 무릅쓰고 천주교에서 뛰쳐나와 종교개혁에 선봉에 나섰습니다. 칼빈은 임종시에 다음 성구를 외우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칼빈처럼 성경을 보고 죄책감을 가지지 못한다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시체가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법입니다. 성경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성경 읽기가 괴롭고 쓸지라도 십자가 예수의 은혜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는 길만이 새롭게 사는 길입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이 비록 십자가의 쓴잔이 될지라도 그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지 못한다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이 시대를 위해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지 아니하면 참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이미 진리의 기둥과 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수구세력들의 탐욕을 채우는 장터로 변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 성전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는 길임을 아시면서도 그 길만이 인류가 사는 길이기에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교단들은 교권을 장악한 수구세력들의 탐욕의 잔치 마당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상이 둘러엎어져야만 기독교가 새롭게 거듭나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될 수 있습니다. 부정부패와 탐욕의 정치판이 둘러엎어져야만 나라 민족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사는 길을 열어놓으시기 위해 십자가의 쓴잔을 스스로 취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에 묻습니다. '너희도 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십자가의 길이 비록 쓰다할지라도 그 길이 성경대로 사는 것이요 그 길이 인류가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앞에 어떠한 고난과 환난이 임한다할지라도 성경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이 세상에서 돈 버는 선택의 폭이 좁고 그 기간이 길고, 출세, 성공의 지름길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손해만 본다해도 그 길만이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가, 얼마나 출세하고 성공했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과연 성경대로 살았는지 그 여부를 보시고 알곡과 가라지로 분별하시는 것입니다. 불같이 임하는 교회의 고난이 장차 임할 것인데 그 때에 그 불에 타 없어지지 아니하고 알곡으로 남는 성도가 되기 위해 성경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2-15)

불같은 시련과 고난이 임할지라도 불에 타지 아니하는 정금같은 믿음으로 생명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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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세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계11:1-19)

지난 계시록 10장의 주제는 교회의 고난을 담고 있는 <작은 책>이었습니다. 오늘 11장은 그 <작은 책>의 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의 고난과 죽음은 "성전을 척량하라"는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대상을 "척량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보호, 보존을 의미하기도 하며,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두 증인>이기 때문에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만 척량하고 성전 밖 마당은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으니 그곳은 척량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성전은 예수 믿는 성도를 가리킵니다. 성전 안은 성도의 영혼을 뜻하고 성전 밖 마당은 성도의 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안에만 척량하고, 이방인에게 내어준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말라는 것은 <두 증인>의 영혼은 보존하시되 그 몸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내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증인>에게 허용된 고난받는 기간은 마흔 두 달, 즉 3년 반입니다. 이 기간을 후 3년 반이라고 합니다. 이 <두 증인>이 고난받기 전에 주어진 사명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명을 위해 모세와 엘리야에 주어졌었던 것과 같은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두 증인>이 예언할 때 대적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불에 타 죽임을 당할 것이고 이들은 예언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기도 하며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며 아무 때든지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릴 수 있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는" 기간이 일천 이백 육십일 즉 3년 반입니다. 이 기간을 가리켜 전 3년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두 증인>이 전 3년 반 동안에는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권세를 받아 복음을 전하고, 그 사명을 다 한 후 3년 반 동안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 전 3년반과 후 3년반을 합쳐 7년인데 이 기간은 예수 부활 승천 이후 재림까지의 신약시대, 또는 이방인에게 내어준 이방인의 시대로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여기 <두 증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스가랴서에서 보면 <두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받은 자들로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스가랴서4:11-14)

그리고 촛대는 계시록 1장을 통해 이미 교회를 상징하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설명되는 <두 증인>은 엘리야와 모세의 심령과 성령의 권능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는 모든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기름)의 권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도 이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그러면 <두 증인>의 둘이라는 숫자는 무엇이겠습니까? "둘"이란 숫자는 협력을 뜻합니다. 지혜서인 전도서에 보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니라...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전4:9,12)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바 있습니다.(눅10:1) 또한 증인이 둘이라는 것은 그 증거가 참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요8:17,18)

아이들이 연을 띄울 때 누가 물었습니다. "무엇이 연을 뜨게 만드는가?" 한 아이가 "바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는 대답하기를 "연 꼬리"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아이가 뒤질세라 "연 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연은 "바람"과 "연 꼬리"와 "연 줄" 등이 다 협동하여 하늘을 날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증거도 마찬가지로 예수의 증인이신 성도 여러분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음 증거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세워진 교회가 복음을 위해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명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정신병원에 환자들은 수 백명이 훨씬 넘는데 그 환자들을 감독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찾아와서 그 감독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 수 백명의 정신병자들이 무섭지 않습니까?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당신을 공격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감독이 "이들은 서로 단합할 줄을 모르는 것이 특징입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교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 성도들은 복음 전도를 위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두 세 사람일지라도 서로 연합하여 함께 할 때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성도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면 결코 복음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인이 둘이라는 것이 그 증거가 참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막달라 마리아 혼자서만 예수 부활에 대해 증인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마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의 몸을 보여주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다락방에 모여 있던 수많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의심 많던 도마에게 못박힌 손과 발을 보이시고 직접 만져 보게 하심으로 예수 부활이 그가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에 말씀하신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음을 확실하게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 부활에 대한 여러 증인들이 있음은 바로 그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증인>, 곧 말세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 성도들이 고난을 받게 되는 이유는 "굵은 베옷을 입고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굵은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회개하지 아니하면 죽으리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라"(마3:8-10)는 것과 같은 복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부정부패와 음란을 일삼고 사치와 향락의 옷을 입고 죽을 줄 모르고 사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성도 여러분은 이 시대의 증인으로써 "굵은 베옷을 입는" 마음과 생활로 회개하지 아니하면 모두 멸망당한다고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는 "굵은 베옷을 입고" 예수를 증거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대에 맞는 하나님의 바른 뜻을 전하게 될 때 죄를 짓고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싫어하며 괴로워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세례 요한 당시 헤롯이 그랬습니다. 헤롯이 권력을 악용해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광야의 소리로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사자 요한이 이를 알고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비록 왕일지라도 그 부정한 생활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왕의 부정을 고발하다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헤롯 왕의 왕비가 된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을 고발한 요한을 원수로 여기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 왕이 곧 바로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즉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의 고발 내용이 그릇된 없기 때문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막6:19,20)

그러나 헤롯 왕은 눈에 가시같은 요한 때문에 괴로웠지만 헤로디아 딸의 춤바람과 그 어미의 농간에 녹아나 세례 요한의 목을 헤로디아의 접시에 내어 주고 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역시 세상은 즐거워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요16:20)

이렇게 종말의 세상은 회개를 부르짖는 소리에 괴로워하다가 교회의 고난과 교회의 순교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그 특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성도는 이같은 사실을 깨닫고 세상이 복음을 즐겨 듣든 아니 듣든 전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대박이다, 복 터지게 받아라'는 식으로 전한다면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몸이지 복을 빌어주는 기복종교집단이 아닙니다. 저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가감없이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만 합니다. 복음 전도는 인간의 회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수용여부에 관계없이 전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복음이 무효화되거나 무기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전하는 복음에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진노와 심판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가 함께 나타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이, 예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그 머리 위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사람들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복음 전파가 실패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면 않는 그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0,11)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진리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가두고 인봉하고 로마 병정들로 하여금 철통같은 경비를 서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등 교권주의자들의 뇌물(금권)과 농간에 매수된 관권(인봉)과 막강한 군사력으로도 예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진리를 못박아 죽여 무덤에 가두고 인봉하고 지켰지만 결코 세상은 진리를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진리는 살아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이처럼 세상보다 강하지만 세상에서 핍박과 고난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전 밖 마당을 척량하지 아니하고 이방인에게 내어준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기' 전까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는 한 있더라도 복음의 능력을 믿고 권능을 받아 "굵은 베옷을 입고"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두 증인>, 즉 교회가 마흔 두 달이라는 정해진 기간 동안 복음 증거의 사명을 다하고 나니 이제 무저갱, 지옥에서 올라온 "짐승", 사탄의 세력이 <두 증인>을 죽이고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방관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교회의 성도들이 최악의 가혹하고 잔인한 순교를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이 그랬듯이 사흘만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두 증인>, 즉 순교한 교회 성도들 속에 들어가므로 그들이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의 증인들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예수의 증인들이 부활함으로 그들의 증거가 참된 것임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순교 당해 방치되었던 교회 성도들의 시체가 사흘만에 부활하고 하늘에서 올라오라는 음성을 듣고 승천하자 구경하던 자들이 크게 두려워할 때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나 되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회개하고 예수 믿은 사람들(남은 자들)은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곧 이루어지리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립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오래 전에 뉴욕에 대화재가 발생했었는데 시에서는 용감했던 소방대원들에게 표창 메달을 달아 주고 시가행진을 계획했습니다. 시장은 시민들에게 광고했습니다. "이번 대화재에서 용감한 소방대원들 때문에 구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가행진에 참가하시오" 그랬더니 무려 1만 2천명이나 시가행진 선두에 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로 소방대원들이 행진했습니다. 증인이 앞에 서고 구조자가 뒤를 따른 것은 바른 순서였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사람은 앞장서시오"하면 "내가 그 증인이오"라면서 앞장서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밀러 박사는 기독교인들이 평생 평균 6천번 설교를 듣고, 8천번 기도를 하고, 2만번 찬송을 부르는데 예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지적했습니다.(그의 책, 아스팔트에서의 낚시질) 어떠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다해도 예수 부활이 나의 부활임을 믿고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실 때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예수를 증거하는" 예수 증인으로 앞장서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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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역사의 승자

(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 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12:1-17)

누구나 다 아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세상에는 영원한 승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날 세계적인 권투선수로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알리는 지금 중풍으로 손과 발을 심하게 떨고 지냅니다. 영화배우 출신으로 미국의 대통령을 두 번씩이나 했던 레이건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부자도 권력도, 영원한 나라도 없습니다. 그 근본 이유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망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여기 "음부의 권세"란 사망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역사가 종말을 고할지라도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의 영원한 승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뿐입니다. 노아 당시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실 때 살아남은 것은 오직 노아의 방주뿐이었던 것처럼 역사 최후에도 승자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노아의 방주인 교회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대학자가 어느날 나룻배로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꽤 넓은 강이라 배를 타는 시간이 길어지자 무료해진 학자는 사공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사공 양반,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을 아시오?" "아이구, 제가 그런 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래요? 플라톤의 철학을 모르는 당신은 인생의 절반을 잃어버린거나 마찬가지요. 그는 대단히 훌륭한 철학자였어요. 그럼 프랑스라는 나라가 어디쯤에 있는지는 아시오?" "웬걸요. 그런 것을 제가 알 수 있나요." "참으로 안됐군요, 당신은 나머지 인생의 4분의 1을 잃어버렸수. 프랑스는 유럽에 있어요. 예술의 나라죠." 계속 모른다는 사공에게 학자는 자꾸만 난감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 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좀 아십니까?" "학자 어른, 전 그런 것 다 모릅니다." 계속 질문을 퍼붓던 학자는 불쌍하다는 듯이 사공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배가 강어귀에 다다랐을 때 쯤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 때문에 그만 배가 뒤집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물에 빠진 사공은 허우적거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학자에게 소리쳤습니다. "학자 어른, 수영할 줄 아십니까?" "어푸 어푸, 난 수영 못해요." "그렇다면 학자 어른은 목숨을 잃어버린 거예요"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도 교회를 모르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만이 음부의 권세, 즉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모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어도, 건강이 없고 세상에서 힘이 없어도 인생의 승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여러분은 역사의 승자로 영원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을 영원한 승자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교회가 역사의 영원한 승자가 되는 이유와 과정을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본 첫 번째 환상은 하늘에 이적 둘입니다.

1. 먼저,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1,2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이스라엘, 오늘날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며, <해산의 고통>은 교회 탄생에 따른 많은 <박해와 핍박>을, <여자가 해를 입었다>는 것은 <예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여자의 발 아래에 달이 있다>는 것은 달은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세상의 운명이 교회에 달려 있다>는 것이며,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쓴 것>은 <교회가 장차 역사 최후의 심판자의 자리에 있을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며 세상 역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교회가 탄생하지만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탄이 엄청난 박해와 핍박을 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가 여자로 표현된 것은 교회의 연약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거대한 로마제국 당시 식민지 나라의 예수 하나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이야 지극히 하찮은 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 십자가의 죽음으로 탄생한 교회가 비록 겨자씨처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으며 연약해 보여도 세상에 위에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는 하나님의 통치기구라는 사실을 세상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예수께서 확실하게 밝히셨습니다. 제자들이 세상 종말에 대해서 물었을 때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시므로 역사의 종말은 교회에 위임된 복음전파에 달려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지구 종말을 알리는 시각을 흔히 핵무기 증가에 따른 세계전쟁의 위험 정도로 표시하지만 역사의 남은 시간은 오직 교회의 복음 전파에 달려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보는 시각은 이렇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2,3)

세상은 교회를 여전히 귀하게 보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보화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교회와 성도를 겨자씨같이 하찮게 볼지라도 신경쓸 것 하나 없습니다. 다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비록 하찮은 겨자씨 같을지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노아 당시 죄악에 깊이 빠진 사람들이 산 위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우습게 여기고 조롱하며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정작 홍수 심판으로 물이 차 오르고 피할 곳이 점점 사라지자 산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고 노아의 방주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의 문은 이미 굳게 닫히고 난 뒤였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유일한 구원선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이 시대에 작고 하찮아 보일지라도 노아의 방주와 같이 유일한 인류 구원선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생활을 하찮게 여기고 소흘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에서 피눈물이 나도록 후회해도 소용없는 날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2. 두 번째 이적은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 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3-5절)는 것입니다. 용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며 사단이라고도 하는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세력,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대적하는 세력을 말하고, 용의 모습이 "붉다"는 것은 사단의 파괴적인 성격을, "그 머리가 일곱"이라는 것은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할 준비가 완비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붉은 용의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는 말은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기 위한 사단의 가공할 파괴력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붉은 용"이 여자가 낳은 아이를 삼키고자 하는" 것은 교회의 탄생을 막으려는 사탄의 본색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으로 탄생한 교회가 사탄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파멸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탄생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 가셨습니다." 이 표현들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인류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단의 모든 계획이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으로 완전히 좌절된 것을 말합니다. 사탄이 목적하는 것은 인류가 죄인으로 멸망당하는 것인데 예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죄사함을 얻고 예수의 부활로 영생을 얻게 되기 때문에 사탄의 모든 계획이 꺾이게 된 것입니다. "붉은 용"을 피해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한 것"은 사단의 핍박을 피해 도망한 것이 아니라, 탄생한 아기 예수를 죽이려했던 헤롯의 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요셉과 마리아로 하여금 애굽으로 피난가게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을 받은 곳이며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곳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40년간 양육하시고 훈련하신 곳입니다. 이 광야로 피해 있는 기간이 3년 반이라는 것은 교회가 앞으로 있을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단의 핍박이 아무리 극심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성도를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3. 요한이 본 두 번째 환상은 "하늘에 전쟁"입니다.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군대가 용과 더불어 싸우는데 결국 용이 패배하여 하늘에서 있을 곳을 얻지 못하여 땅으로 내어 쫓기는데 그의 졸개들과 함께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쫓겨나 온 천하를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온갖 종류의 유혹이 많고 그 유혹에 넘어가 죄악이 넘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바로 사탄이 세상으로 쫓겨나 온 세상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세력은 하늘과 땅에서도 마찬가지로 패배하고 있습니다. 그 패배의 가장 근본 원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단의 권세인 사망 권세가 힘을 잃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간의 죄가 사함을 받고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더 이상 사망 권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호령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57) 사탄의 패배는 어린양의 피로 죄인들이 하나씩하나씩 사라지고 의인들이 하나씩하나씩 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는 사망이 지배하는 모든 세계의 승리이며 하늘과 땅의 모든 교회의 승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여전히 계속해서 온 세상을 유혹하고 시험하여 사람들을 죄악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광야에서 유혹하고 시험했던 사탄은 십자가에까지 따라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와 나를 구원해 보라"며 십자가를 포기하도록 유혹하고 시험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포기시키는 것이 바로 사탄의 목적이고 사탄이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수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결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나이다"며 예수 십자가의 길을 막아섰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1-24)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것은 바로 사단의 유혹이요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생명도 승리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여러분에게 '신앙생활을 십자가 없이 아주 편안하게 할 것이지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험악한 십자가를 붙들고 신앙생활 하려느냐?' 면서 유혹하고 시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승리를 위해 여러분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여러분 가정의 십자가를 지시고, 여러분 교회의 십자가를 지시고, 나라 민족의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랑으로 섬기며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4. 사랑으로 섬기며 희생하므로 십자가를 지고 승리한 사람들의 찬송이 하늘에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10-13절)

하늘에서 들리는 찬송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 십자가의 죽음으로 시작되었으며, 우리의 죄를 대신한 예수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단은 더 이상 우리를 참소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결국 죄를 대신하여 희생당하신 어린양의 피로 사단을 이기었다는 것과 그 사실을 증거하는 복음 전파로 인하여 이기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며 예수 십자가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사단이 마지막으로 영원한 불못에 추방당하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최후로 발악하며 교회를 핍박하는 환난이 임한다할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 십자가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5. 교회가 이렇게 핍박을 받을지라도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짐승들의 부르짖는 황무지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시고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며 지키시는 것이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는 것 같이 하셨다"고 했습니다.(신32:10-11)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하신 능력으로 교회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보호처이며 영적 피난처인 것입니다. 환난날에도 결코 자기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고 보호하십니다. "한 때와 두 때 반" 3일반으로 교회가 극렬히 박해를 받는 기간을 말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큰 독수리의 두 날개"아래에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비록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온갖 악과 환난이 차고 넘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을 결코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자에게는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32:6)고 했습니다. 사단 마귀의 환난의 홍수라도 교회를 삼키지 못할 것이고 교회는 역사의 승자로 남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5:20,16:33)

어떤 젊은이가 존경받는 그 나라의 임금을 찾아가 유혹을 이기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옆에 있던 잔을 들어 포도주를 가득 따라서 젊은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신하를 불러 명령하였습니다. "이제 저 젊은이가 포도주 잔을 들고 시내 거리를 한 바퀴 돌터인데, 너는 칼을 들고 젊은이의 옆에서 함께 걸어라. 만일 그가 포도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지체 말고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어 버리라!" 거리로 나온 젊은이는 진땀을 흘리며 조심스레 걸었습니다. 무사히 왕궁까지 돌아온 젊은이에게 임금은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거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네가 보고들은 것을 말해보아라." "저는 아무 것도 보고 듣지를 못했습니다." "아니,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이나, 소리쳐대는 장사꾼들, 그리고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싸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단 말이냐?" 임금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서, "예, 저는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보고 듣지를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제서야 임금은 다정한 목소리로 자상하게 그에게 충고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네가 알고자 하는 비결이다. 네가 시내 거리를 도는 동안 포도주 잔에만 정신을 집중시켜서 아무 것도 보고 듣지 못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을 지키고자 사력을 다 할 때, 유혹의 소리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인생이 역사의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있기 위해 오직 십자가 예수만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어떠한 유혹과 시험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오직 예수 십자가만 바라보실 때 역사의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이렇게 사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1-4)

예수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예수 십자가의 증인으로 사시므로 예수 다시 오실 때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는 역사의 영원한 승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

18. 생명책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계13:1-18)

김대중 정부 출범을 전후해 소위 <안기부 殺生簿(살생부)>가 돌아다녀 정치계에 큰 파문이 일어났었습니다. <안기부 살생부>란 김영삼 정부의 안기부에서 정치 관여를 했거나 안기부 내의 호남 사람들을 핍박했다는 사람들의 명단이었는데, 소위 호남 출신 대통령이 들어서서 잡아죽일 사람들 리스트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 새 정부가 들어서서 '서슬이 퍼런 칼찬 자리'(소위 힘있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호남출신들이 앉았었습니다. 금년 말 대선에서 경상도 출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또 다른 <살생부>가 작성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정치인들이 변화되고 개혁되지 않는 한 얼마든지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힘과 죄악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이처럼 <살생부>라는 것을 만들어 적들을 죽이고자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어린양의 생명책>이 있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이란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기록된 책을 말합니다. 그 책에는 전라도, 경상도 등 출신이나 남녀 성분 표시가 없고, 학력이나 경력 등의 기록, 흑인 백인 등의 인종 표시, 재산 정도나 상패와 공로패, 전과 등의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그 이름에 어린양의 피가 있는 사람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그 이름이 <의인>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며 그 책에 녹명되지 못한 사람들, 즉 그 이름에 어린양의 피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짐승이 등장하여 성도들을 핍박하는 내용과 세상을 타락시켜 멸망케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두 짐승은 사탄을 의미하는 용의 하수인들로 그 첫 번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으로 그 모습은 이렇습니다.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더라." 여기 "뿔"은 야수같은 힘을 말하고 "머리"는 권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가 일곱이며 그 머리에 난 뿔이 열 개인데 열 면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탄의 완벽하고도 야수적인 권력과 능력을 부여받아 과거 로마 황제들처럼 자신을 신으로 숭배할 것을 강요하며 그에 따르지 아니하면 표범처럼 사납고 신속하게, 곰같은 파괴력으로, 그리고 사자같이 무섭고도 잔인하게 죽이겠다는 적그리스도 국가나 세상 권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역사상 기독교를 가장 혹독하고 잔인하게 핍박했던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앞으로 역사상 나타날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개 인간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잠시 부여받은 권력이 막강하다해서 신처럼 군림하는 것을 가리켜 "그 머리들에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로마 황제 네로가 화폐에다 자신의 이름을 "세상의 구주"로 새겨 넣어 호칭하게 했고, 네로 못지 않게 기독교를 핍박했던 제2의 박해자 도미시안 황제는 자신을 "우리 하나님"으로 숭배하게 했던 것 등이 인간분수에 지나치는 망언이요 참람된 말들인 것입니다. 과거 일본 제국이 히로히토를 천황으로 숭배하며 그들의 식민지 조선에게도 천황숭배를 강요하고 그에 순응하지 않으면 핍박을 가했던 것은 이 시대에 나타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세력을 잘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참람된 이름들을 가진 짐승들은 자신을 신격화하여 숭배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권력을 부여한 용, 즉 사탄에게도 경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를 핍박하는 국가 권력을 경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 숭배가 결국 로마 권력을 신격화하게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황제숭배를 통해 세상 권력을 숭배하게 하고 세상 권력을 숭배하게 하므로 결국에는 용 즉 사탄을 숭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거만하게 굴던 "짐승"과 "용"이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라면서 그 막강한 힘과 권력을 과시합니다. 이들 "짐승과 용"이 성도들을 핍박하는 기간은 마흔 두달 즉 3년반이라는 제한된 극히 짧은 기간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 "잠시"(고후4:17)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혹독하고 잔혹한 핍박일지라도, 그리고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짐승과 용"에게 경배한다할지라도 성도들은 인내와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며 섬겨야 합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사자굴속과 풀무불 속에 던져짐을 받는다해도 황제숭배와 권력숭배를 끝까지 거절하므로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사람들은 황제숭배와 권력숭배를 통해 살 길을 찾으려 하지만,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성도들은 구원과 생명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섬겨야 합니다.

용의 두 번째 하수인은 "땅에서 올라오는데 새끼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고 첫 번째 짐승이 받은 것과 똑같은 권세를 용으로부터 받았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짐승이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 권력을 상징한다면, 두 번째 짐승은 교회 내부에 침투하여 교회를 부패시키는 거짓 선지자 무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짐승이 하는 일은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12절) 교회 내부에 침투하여 교회를 부패하게 만들고 그 교권을 장악하여 결국에는 세상 권력 앞에 교회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난 우리 나라 이승만 정권이나 군부 30년 동안 한국 기독교가 어용이라는 비난을 받았어도 할 말이 없었다는 것은 교권을 장악한 무리들이 세상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단 지도자들이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한 것입니다. 일제 시대에 천황숭배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용의 두 번째 하수인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외모는 어린 양되시는 예수처럼 양 같아 보여도 실제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인 것입니다. "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는 것은 양을 가장하여 미혹하지만 그 중심 사상은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일제가 한국교회를 핍박할 때 세상 권력에 약하여 타락한 교역자들을 자기들의 앞잡이로 세워 천황숭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그 반대자나 거부자들을 핍박했던 것은 기독교의 교권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세상 권력에 의해 이용당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대통령 조찬 기도회나 국회 의원 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자랑하며 세를 과시하는 쓸개빠진 교역자들은 한 마디로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들"에 불과합니다. 설사 이들이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이적 등을 행한다할지라도, 아니 로봇이 사람처럼 생기를 가지고 말한다해도 이 모든 현상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 즉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과 세상을 미혹하여 결국 사탄을 숭배하게 하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13:1-3)

두 번째 짐승과 용은 여러 이적과 기적을 보고도 미혹되지 않는 무리들을 핍박하기 위해 "오른 손에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는 매매를 못하게" 하는 수작을 부리게 됩니다. "오른손에나 이마에 짐승의 이름"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경제력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짐승'의 소유, 즉 사탄의 소유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생존권을 장악하므로 사탄의 목적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권력이나 교권과 타협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도 이같은 세상 권력이 성도의 생존권을 박탈한 예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과거 일제가 조선 사람들에게 천황숭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그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배급통장을 빼앗아 일체의 매매를 못하게 했고, 해방 후 북한에서도 김일성 사상에 동조하지 않거나 김일성을 어버이처럼 숭배하지 아니하면 아예 살 수 없도록 만드는 예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표를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하는 것은 했는데 기원 후 10세기에 아라비아 숫자가 발명되기까지 문자로 숫자를 표기하는 법이 많았기 때문에 그 이름이나 숫자는 같은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 로마 황제 숭배를 강요했던 네로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표기하면 <네론 카이살>인데 이 이름에 해당되는 숫가를 계산해보면 666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데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기 때문에 666이라는 숫자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숫자의 상징으로 볼 때 7은 완전수이고 6은 불완전수입니다. 그래서 7이 세 개 모인 777은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7에서 하나 모자란 6이 세 개모인 666은 마귀 사탄의 수, 혹은 사탄의 미혹하는 사상인 인본주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가 모자라서 실패하고 마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666이라는 마귀 숫자를 '실패에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같은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일제의 천황숭배와 신사참배는 여전히 실패로 끝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를 멸망케 하려던 사탄의 계획은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사탄이 세상 권력을 주도하여 기독교를 핍박하려는 모든 짐승들의 활약은 앞으로도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 죄악에 지배되고 있는 인간을 해방시킨 것이 어린양으로 희생당하신 십자가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짐승의 세력들은 어린양 앞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하십니까?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도록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어떠한 핍박과 미혹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섬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정의와 평화를 지키려는 한 사나이와 소년의 우정이 낭만적인 서사극으로 그려진 불후의 웨스턴 무비 <셰인>을 리메이크한 서부 영화 <페일 라이더,Pale Rider>가 있습니다. 자연 경관이 수려한 북부 캘리포니아 골짜기 시냇물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사람들의 마을에 난데없이 말 탄 폭력배들이 들이닥쳐 행패를 부린 뒤 사라집니다. 악덕 금광업자 러후드(Josh LaHood)가 채굴권을 소유한 영세 사금채취자들을 몰아내려고 한 짓이었습니다. 마을 이장 같은 헐 배럿(Hull Barret)은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며 러후드에게 저항하는데, 필요한 물건을 사러 마을로 내려갔다가 러후드의 졸개들에게 잡혀 집단 폭행을 당합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The Preacher: 클린트 이스트우드 분)가 러후드의 부하들을 때려눕힙니다. 사람들은 그가 목사임을 알고 놀라는데, 모두 이 신비한 인물에게 존경심을 품게 됩니다. 그러던 중 헐이 꽤 큰 금덩이를 발견하고, 결국 러후드는 사금채취자 일인당 천 달러씩 준다며 모두 나가라면서 제안을 거절할 때에는 최고의 총잡이 악당 스탁번을 부르겠다며 협박합니다. 결국 악덕 금광업자 러후드는 최고의 총잡이 스탁번을 불러 마을을 장악하려 하지만 이름도 없이 목사님으로만 알려진 총잡이가 혼자서 이들 악당들 수 십명을 하나씩 하나씩을 기막힌 총 솜씨로 처단하고 마지막 악당 스탁번까지도 최후의 발악을 하지 못하도록 권총을 난사하여 완벽하게 끝장을 내고 맙니다. 그리고 못내 아쉬워하는 어느 한 소녀가 "목사님! 목사님! 감사해요. 안녕히 가세요!"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석양을 등지고 유유히 계곡으로 사라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잠간 보면서 '저 총잡이 목사님이 참 멋있구나!'하고 느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들을 최고의 총 솜씨로 완벽하게 쓸어버리고 마을의 정의와 평화를 지켜주는 총잡이 목사, 그리고 이름도 알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말을 타고 사라지는 힘있고 능력있는 총잡이 목사가 얼마나 멋있습니까? 예수의 제자들도 최고의 총잡이 예수, 슈퍼스타 예수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권을 장악하고 로마 권력과 결탁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힘없는 백성들을 등쳐먹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 무리들을 단칼에 없애고 짐승같은 로마 제국을 완전히 진멸해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택하신 길은 총잡이 예수, 슈퍼스타 예수가 아니라 <어린양>예수였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그가 택하신 길은 어린양으로 희생당하신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역사적 인물 가운데 힘의 상징적 존재를 든다면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을 말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외로이 죽음을 기다리며 독백하기를, "알렉산더 대왕, 시저, 샤를레망 대왕, 그리고 나 자신은 왕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무슨 터 위에 왕국을 건설했던가? 힘! 아, 우리는 힘 위에 왕국을 건설했었다. 그러나 그의 말로는 어찌되었던가? 예수만이 그의 사랑의 터 위에 나라를 세웠다. 오늘날 그의 나라는 왕성하여 모든 인류가 그를 경배하며 수 천만 명이 그를 위하여 죽으려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의 사랑만이 참 만족을 줄 수 있으며 예수 사랑만이 세상의 어떤 힘보다 강하구나..."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힘은 마치 자동차 타이어와 같아서 바람이 가득한 때는 제법 탄탄해 보이지만 그 바람만 빠지면 완전히 주저앉고 마는 것입니다. 자동차 타이어 바람은 언젠가는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마치 뜨겁게 흐르는 용암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용암이 물처럼 유연하게 흐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히 굳어져 바위 덩어리가 됩니다. 이같은 사랑 위에 세워진 왕국은 세월이 흐를수록 왕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칼, 힘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나 예수의 사랑으로 사는 자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어 그 어떤 짐승과 용의 세력도 당할 수 없습니다. 보다 나은 경제생활을 위해 신앙생활을 소흘히 여기는 사람은 그 이마에 짐승의 이름을 가지게 되는 사람입니다. 천황숭배 사상으로 결집하여 경제대국을 이룩한 일본 사람을 가리켜 "경제적 동물", 곧 '경제적 짐승'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짐승의 이름"을 가진 나라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소유의 넉넉함으로 사치와 향락을 누리며 삶의 질, 삶의 가치를 운운하는 자는 그 이마에 짐승의 숫자가 새겨진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세상의 힘, 권력, 경제력에 굴복하거나 그것들에 의존하는 자들은 죽을 것이나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는 자들은 살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칼을 쓰는 자, 힘을 의지했던 자들은 모두 다 망했습니다. 세상은 힘과 권력, 경제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지향하여 추구하지만 예수 믿는 성도는 십자가 사랑을 최고의 가치와 생명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계 최강의 로마 제국, 기독교를 무참하게 핍박했던 짐승의 권세 로마 제국을 점령한 것은 약 300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바로 예수 십자가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린양 생명책>에 녹명된 성도로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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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시온성

(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9)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가졌더라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계14:1-12)

지금 유대인과 팔레스틴 아랍인들 사이에 첨예한 대립과 전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보복이 그치지 않고 있는 가나안 땅 이스라엘, 그 가운데 예루살렘, <시온 산>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상징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곳이 그 옛날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 산이라고 믿고 있고, 다윗 시대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안치되었던 성막이 있었던 곳이며, 그 후 솔로몬 왕은 아름다운 성전을 세웠던 곳이기 때문에 명실공히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48:1-2)"주님은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그지없이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다. 그의 거룩한 산아, 그 봉우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온 땅이 즐거워하는구나. 먼 북녘의 시온 산은, 위대한 왕의 도성, 하나님은 그 성의 여러 궁궐에 서, 자신이 피난처이심을 스스로 알리셨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제1차 멸망당한 후 바벨론 포로시기에 시온(Zion)은 백성이 나라 잃고 바벨론 포로생활의 애환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땅'(The Holy Land), 가나안으로의 귀향을 강하게 소망하는 표현이 "시온"이었습니다. 이같은 소망을 간절히 노래한 것이 시편 137편인데, 아프리카에서 미국땅으로 노예로 팔려간 흑인들도 같은 소망을 품고 고달픈 애환속에 부르는 노래가 흑인영가입니다. 그 흑인들의 애환을 그룹 보니 앰(Boney M.)이 흑인영가의 감동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로 시137편을 "바벨론 여러 강변에서"(By the rivers of Babylon)라는 타이틀로 내용을 그대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By the wat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and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당해 지난 2000년 동안 나라없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잃어버린 조국 땅을 찾아 돌아오는 운동을 "시온 운동", 시온이즘(Zionism)이라고 부릅니다. 시온이즘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이 고국 땅으로 지금도 돌아오고 있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쫓겨난 그 땅에는 지난 2000년 동안 팔레스틴 아랍인들이 자리잡고 황금돔의 알라신을 숭배하는 사원을 모리아산 위에 세워 회교 3대 성지로 받들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고분고분하게 그 땅을 비워줄 리가 없습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시온이즘>이래 시온성, 예루살렘은 유대인과 팔레스틴 아랍인 사이에 피 튀기는 테러와 보복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땅에서 시온이즘의 승리는 아랍인들의 불행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반면 시온이즘의 패배는 유대인의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테러와 보복전쟁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 팔레스틴 땅에 <시온성>, 예루살렘의 회복은 인간의 무력이나 정치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예루살렘 <시온성>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잃어버린 시온성은 오직 예수 십자가만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지상의 <시온성>은 더 이상 인류가 소망하는 영원한 도성이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하늘에 있는 <시온성>만이 모든 인류가 소망하는 참되고 영원한 평화의 도성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 도성, <시온성>은 십자가 예수 믿고 그 믿음을 지킨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세상에 사는 성도들이 장차 돌아갈 고향,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을 가리켜 <시온산>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온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를 가리켜 <시온성>과 같은 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모든 인류가 목적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이 땅에 <시온성>이 아니라 어린양이서 있는 하늘의 <시온성>입니다.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1절)는 말씀의 의미는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시련과 역경, 환난가운데서도 오직 예수 믿음을 지키고 구원받은 사람들만이 시온산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만이 하늘에서 "새 노래"를 부르며 새 노래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2-3절) 세상에 살 동안 어떠한 환경과 환난가운데서도 예수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에 구원의 "새 노래"를 부르며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신앙체험이 없는 입술만의 찬송은 진실한 찬송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들은 모두가 앞서간 성도들이 숱한 역경과 시련, 환난가운데서도 끝까지 예수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체험한데서 불려진 노래들입니다. <시온성>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여야 합니다. 이 말은 육체적인 정결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정결, 즉 신앙의 절개를 지킨 자를 말합니다. 육체적 순결, 성적인 순결을 지키는 것이 시대에 덜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세상에서 자신의 생각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신앙을 유보하거나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영특한 기독교인같은 느낌을 줄지라도 그같은 삶은 영원한 도성, 거룩한 <시온성>에 들어갈 수 없는 음행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거나 우상숭배하는 일을 여자로 더불어 더럽힌 음행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세상에서 이루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것 역시 영적인 음행으로 간주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정체는 "큰 성 바벨론"같은 곳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음행의 포도주를 먹이는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137편은 "여자같은 멸망할 바벨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음행이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 권력을 사랑하는 자, 성적 쾌락에 빠진 자, 세상 명예를 사랑하는 자 등은 모두가 다 음행하는 자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음행하는 자나 음행하도록 만드는 자나 모두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시온성이나 그 시온성을 멸망시킨 바벨론을 멸망시킨 이유는 바로 음행과 우상숭배에 있었습니다. 요한에게 보여주신 확실한 세 번째 환상(8절)은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역시 하나님의 진노(9-12절)의 대상인 간음과 같은 것입니다. 과거 로마시대의 황제숭배나 일제의 천황숭배와 신사참배 등 의 강요와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그들의 요구대로 현실과 타협했던 자들은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영적인 간음죄를 범한 자들입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우상숭배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철저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믿음을 지켜야만 합니다. 황제숭배 신사참배 등 우상숭배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 보여도,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 보여도 철저히 그 계명을 지키며 예수 믿음을 지켜야만 합니다. 제아무리 혹독한 핍박이 따른다해도 오직 어린양되시는 예수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다가 순교당한 자들이 복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과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해방이 되어서도 나라의 혼란한 틈을 이용해 온갖 특혜를 누리며 양극의 두 시대를 죽지않고 교묘히 살았다해도 그 인생은 복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란하고 불행한 것입니다.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하기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이 복된 것이지 시대에 타협하고 영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며 장수하는 것은 오히려 씻을 수 없는 음란과 불행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교당한 이들의 하나 하나의 행위를 모두 기억하시어 하늘의 참되고 영원한 안식과 축복을 내리십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만이 <시온성>에 설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것이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따른다해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는 생활, 순교를 당하기까지 신앙을 지키며 예수를 증거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생, 구원을 위해 예수 찾아왔던 어느 부자 청년은 '네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불행히도 예수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깨닫고 사는 행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영원한 도성 <시온성>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 믿고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바치는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믿음과 생활이 일치하여 신앙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신앙생활의 열매가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열매는 거룩한 성품의 열매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신앙 인격과 성품이 예수의 성품이 되지 않고서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벧후1:4-11)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나님은 반드시 씨를 뿌리시고 추수하시는 분이십니다. 아주 날카로운 추수의 낫을 들어 알곡은 거두어 하늘 곳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모아 불에 태우십니다.(마13:30,40-42) 요한이 본 일곱 번째 환상은(17-20절)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즙틀에 넣어 밟아서 즙이 피같이 흘러나오는 광경처럼 비참한 심판을 천사를 시켜 시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추수 심판의 대상이 되는 "땅의 포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완강히 거부하며 세상을 사랑하며 사는 모든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에 대한 포도즙틀을 밟듯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추수심판을 분명히 했습니다.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사63:2-6) 결국 포도즙틀의 심판은 악인의 피로 더럽혀진 땅을 물들일만큼 비참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으면 말굴레까지 닿을 정도이겠습니까? 양으로 따지면 "일천 육백 스다디온"이라 했습니다. 1,600은 (4×10)×4로서 4는 동서남북 땅을 가리키는 수, 10은 세상적인 만수, 이를 곱한 40을 또 다시 4, 즉 땅의 수로 곱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전 세계에 가득히 미치게 될 것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심판이 미치지 않는 곳이 하나 없이 심판이 이루어질 것임을 말합니다. 세상은 여러분의 인생을 거짓되게 만들며, 예수 십자가 피로 깨끗해진 여러분의 삶에 흠집을 내며 더럽게 하는 곳입니다. 세상은 점점 음란해지면서 그 음행으로 오는 질병과 저주, 파괴를 당하면서 음란을 멀리하기는커녕 음란의 기준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성적 타락은 분명하고 확실한 음란입니다. 우상숭배 역시 음행일 뿐만 아니라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삶은 모두가 음란한 행위입니다. 세상은 모두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제멋대로 자기들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 되기 위해 진실 무망하신 예수만을 붙들고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어 어린양의 <시온성>에 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 <시온성>보다 결코 크지 않습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세상은 잠간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 <시온성>은 영원합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세상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는 못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아울러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배하시는 성도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며, 가장 지혜롭게 사는 인생의 본분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여자같이 멸망당할 바벨론"임을 기억하고 "여자로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예수 믿음을 끝까지 지키며 신앙생활의 아름다움 열매를 맺어 어린양이 서 있는 <시온성>, 영원한 평화의 하나님 도성에 돌아갈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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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어린양의 노래와 마지막 재앙

"(계15:1-8,16:1-2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1.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까지 그 규모와 종류가 다를 뿐 끊임없는 재앙의 연속이었습니다. 지나간 20세기, 100년 동안 인간에 의해 자행된 전쟁. 학살 등으로만 숨져간 사람은 1억 8천만여명, 전문가들은 인류 역사상 이렇게 잔혹했던 시기는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20세기를 `전쟁의 세기'로 규정했습니다. 그중 5천만명을 죽인 2차 세계대전과 6백만명을 죽인 나치 유대인 학살을 금세기 최악의 재앙 1,2위로 꼽았습니다. 300만명을 죽인 한국전쟁은 세계 1,2차세계대전을 제외하곤 20세기 최대의 희생자를 낳은 전쟁 재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한국 전쟁의 재앙은 아직도 휴전상태로 군사적 대치상태에 있으며, 1천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치유되지 못한 채 21세기까지 지속되는 재앙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전문가가 뽑은 20세기의 20대 재앙들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한계레2)

1. 2차세계대전 5천만명 사망(1937-45)

2. 유대인 600만명 학살(1940-45)

3. 스탈린 피의 숙청 2천만명 희생(1927-45)

4. 1차세계대전 1500만명 사망(1914-17)

5.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폭발 1만5천명 사망(1987)

6.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10만5천명 즉사(1945)

7. 한국전쟁 300만명 희생(1950)

8. 20세기 흑사병 에이즈 발병확인(1981)

9. 캄보디아 킬링필드 170만명 희생(1973)

10. 지구온난화, 엘니뇨, 라니냐

11. 아프리카 대기근 200만명 아사(1984-85)

12. 일본군 731부대 인간생체실험(1933-45)

13. 런던 치명적 스모그 닷새간 4000명 사망(1952)

14. 난징 대학살 20만명 이상 희생(1937)

15. 북한 식량위기 수십만명 아사(1995-)

16.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20만명 희생(1923)

17. 미군 베트남 고엽제 살포(1969)

18. 남미 군사정권 `추악한 전쟁' 수만명 사망실종(1976-83)

19. 매카시 선풍(1953)

20. 일 미나마타 수은중독 1000여명 사망(1959)

이러한 세상은 결국 <일곱 재앙>, 즉 <마지막 재앙>으로 종말을 고하고 <어린양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본 15장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마지막 재앙>이 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곱 재앙이란 7이라는 완전수가 암시하듯 완전한 재앙, 즉 마지막 재앙을 말합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일곱 재앙은 7배의 재앙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결국 7배의 재앙으로 최후의 심판으로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레26:21)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이러한 일곱 재앙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본문 3,4절의 <어린양의 노래>입니다. 구약 시대에 모세의 인도함을 따라 홍해를 건너 구원받고 부른 노래를 <모세의 노래>라고 하듯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늘 유리 바닷가에서 부르는 노래를 <어린양의 노래>라고 합니다. 이 노래는 일곱 재앙이 모두 끝나고 하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들만이 부를 수 있습니다. 끝까지 예수 믿음으로 죄악의 세상을 이기고 시험과 시련의 홍해를 건너 하늘 성전에 능히 들어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이제 16장을 통해 인류 역사 최후에 내릴 마지막 일곱 재앙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첫째 재앙(2절)은 독종의 재앙입니다. 이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했던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바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서 시키신대로 풀무 아궁이에서 재를 두 움큼을 가져다가 하늘에 날렸습니다. 그러자 그 재가 애굽 온 땅에 티끌이 되어 사람과 짐승들에게 붙어서 독종이 발하게 되었습니다.(출9:8,9) 마치 중국 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로 인해 구제역이라는 질병이 가축들에게 번져 무더기 죽음을 당했던 것처럼 바람에 날리는 티끌마다 독종이 번지게 하여 사람들과 짐승들이 죽음을 당하게 했던 재앙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황사현상이 빈번하고 그 공해정도가 극심해서 황사를 재앙으로 규정하고 황사경계경보제도까지 두고 있지만 인간의 힘으로 막아낼 엄두를 못내고 있는 실정이며 이 황사는 저 멀리 미국 서부지역까지 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작년 미국 911테러 사건이후 전세계는 탄저균이라는 백색가루 공포에 휩싸인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 미세 탄저균이 우편물에 의해 배달되지 않고 황사 바람을 타고 날린다면 상상할 수 없는 사망자가 전세계에서 속출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는 이같은 재앙이 언제라도 가능한 사망의 골짜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독종의 재앙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자신을 영화스럽게 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입니다. 부모를 대적하는 자식이 패역한 것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패역한 인생은 패망할 따름인 것입니다. 독종의 재앙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 즉 권력과 물질앞에 무릎을 꿇고 현실과 타협하여 진리와 정의를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내릴 것입니다. 또한 우상숭배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경배하며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재앙(3절)은 모든 물이 피가 되어 바다의 모든 생물이 죽음을 당하는 재앙입니다. 일부 바다의 적조현상에도 엄청난 고기떼가 죽음을 당하는데 모든 물이 붉은 피로 변한다면 그야말로 모든 생물의 죽음은 뻔한 것입니다. 생태계에 몇가지 곤충이나 동물의 멸종이 생태계 파괴를 가져오고 생태계 파괴는 결국 인류의 생존환경에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있음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의 죽음은 세상 종말이 다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셋째 재앙(4-7절)은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되는 재앙으로 이는 수질오염정도가 아니라 더 이상 마실 물이 없어진 파멸현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부족으로 인한 불편함과 각종 질병의 창궐은 이미 지구촌에서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물며 물 자체가 피로 변하여 도저히 먹을 수 없다는 것은 한 마디로 사망을 선고하는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재앙은 예수 믿는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한 이 땅에 내리는 재앙인 것입니다.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자들에게 피를 마시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 넷째 재앙(8-9절)은 태양으로 사람을 태우는 재앙입니다. 피부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태우는 정도가 아닙니다. 또한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태워버리는 재앙입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탄 두 개에 그 빛과 열풍에 살이 녹아져 내려 즉사한 사람이 10만5천명이나 되는데, 만약 히스기야 왕의 생명을 연장해주기 위해 태양을 뒤로 물러나게 하셨던 하나님의 권능으로 태양을 지구쪽으로 조금만 당겨온다거나 지구를 태양 가까이 이끌어 간다고 가정한다면 섬들과 산들이라도 녹아내릴 것인데 사람인들 어찌되겠습니까? 태양으로 사람들을 태우는 재앙은 어쩌면 죄악으로 더러워진 몸을 회개하지 아니하는 추악한 인생들을 태워버리는 재앙이랄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처럼 회개하는 겸손한 신앙생활로 태양을 뒤로 물러가게 하는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재앙(10-11절)은 세상이 온통 캄캄해지는 암흑 재앙이며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 혀를 깨물 정도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훼방하고 회개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환자가 수술받고 있는데 갑자기 전기가 끊어진다면 의사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수술환자는 그냥 수술중에 죽음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갑자기 온 세상에 캄캄해져 활주로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탑승객 모두의 운명은 이미 끝장난 것입니다. 재수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 나라가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붉은 악마'의 열렬한 응원속에 그토록 열망하던 16강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슛하는 순간 갑자기 전기가 끊기고 나라 전체가 온통 암흑에 빠진다면 엄청난 절망과 불안, 공포는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혼란과 파괴가 일어날 것입니다. 월드컵을 개최하는 한일양국이 공히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암흑의 재앙은 어느 한 도시나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엄청난 혼란과 파괴를 당하게 하는 마지막 재앙입니다. 암흑은 혼란과 파괴로 그치지 않고 결국 모든 생물의 죽음을 초래하는 재앙입니다. 이러한 재앙들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회개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훼방하고 이를 악물고 대적하는 인간의 완악하고 강퍅한 마음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빛이 되시는 예수 믿음안에 살지 아니하고 어둠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같은 암흑의 재앙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섯째 재앙은(12-16) 세상 마지막에 있을 인류 최후의 전쟁을 통한 재앙입니다. 이름하여 널리 알려진 "아마겟돈 전쟁"의 재앙입니다. "아마겟돈"은 "므깃도의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갈멜산 북쪽 에스드랠리온 평야에 위치한 고대 도시입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쟁터였습니다. 바락과 드보라가 시스라를 격멸시킨 곳이 "아마겟돈"이었습니다.(삿5:19-21) 또한 예후가 아하시야를 죽이고 혁명에 성공한 곳이기도 했습니다.(왕하9:27) 에스겔 선지자는 세상 종말에 곡과 마곡이 하나님 백성과 전쟁할 곳으로 "이스라엘 산"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곳이 바로 "아마겟돈", "므깃도"를 말합니다.(겔38:8) 이같은 역사를 통해 아마겟돈, 므깃도는 대적을 패멸시킨 곳, 혁명을 성사시킨 곳이기도 하며, 하나님의 대적들을 한 곳에 모아들여 최후의 심판 재앙을 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월드컵 축구대회를 앞두고 우리나라에서 BBB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BBB란 Before Babel Brigade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든 것으로 그 뜻은 바벨탑 사건 이전에 온 인류 언어가 하나로 통하였듯이, 2천5백만 휴대폰을 가진 시민들이 방한하는 외국인들에게 휴대폰을 빌려주어, 외국어 통역봉사단을 전화로 통해 언어장벽을 넘어, 한국관광에 불편함이 없도록 봉사하자는 운동입니다. 지금 인류는 첨단 과학과 문명의 이기들을 통해 바벨탑 사건이후 흩어졌던 인종간에 언어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과거 언어가 하나였을 때 인간은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전세계에 흩어져 살게 하므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과학문명은 언어의 장벽들을 하나씩하나씩 허물어가고 있습니다.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살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인류의 재앙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의 세력들이 더러운 귀신의 영들에 이끌려 아마겟돈에 모여 최후의 전쟁 재앙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인류 역사상 마지막 전쟁의 재앙입니다. 더러운 귀신들을 멀리하는 길은 예수 믿고 죄사함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인류가 사는 길은 예수 믿음으로 하나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컴퓨터 언어 프로그램을 통해 전세계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바벨탑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먼저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감히 하나님께 도전하며 대적하는 세상은 므깃도 골짜기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성령이 강림하여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예수를 증거했을 때 각 나라 각 사람들이 자신들의 말로 모두 알아듣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듯이 예수 믿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과 하나되는 길만이 인류가 아마겟돈 전쟁의 재앙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일곱째 재앙은(17-21절)은 최후의 재앙으로 지금까지 없었던 역사상 초유의 대지진으로 산과 섬들이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그 유명한 킬리만자로 산봉우리가 사라지고 하와이같은 섬들이 보이지않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50,60kg(한 달란트의 무게)이나 되는 엄청난 우박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재앙으로 이에서 살아남을 자가 없는 재앙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갈수록 심해지는 재앙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훼방하게 됩니다. 참으로 끝까지 멸망받기에 합당한 무리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가 회개를 가져오는 것이지 형벌이 회개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재앙이 그치지 않고 있는 시대에 예수 믿고 회개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를 회개하는 생활로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윗왕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훌륭한 점은 언제 어느 때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즉시 회개할 줄 아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완전 범죄를 꾀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장 최일선에 보내 죽였습니다. 그 누구도 모르게 일을 꾸몄고 성공했지만 하나님의 눈을 결코 속일 수 없었습니다. 당시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다윗을 크게 책망하셨고, 다윗은 즉시 벽을 향해 무릎을 끓고 침상을 다 적실 정도로 진실된 통회의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다윗을 사랑하시고 왕위를 보존하여 주시었습니다. 그러나 변명과 입술에 그친 회개로 일관했던 사울왕은 왕좌에서 쫓겨나 결국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삼상15:26) 회개없는 신앙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심판주로 믿고 그 앞에 겸손히 무릎을 끓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결국 더 큰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롬2:4-5)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성전 제물을 사취하여 뱃속을 챙기는 등 온갖 죄악을 다 저질렀습니다. 이에 엘리는 두 아들을 책망했지만 아들들은 결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버지까지도 두 아들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집안의 대가 끊기며 두 아들들이 한 날 한 시에 죽임을 당하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받았습니다.(삼상2:29-34) 우리 나라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지도자들, 가졌다고 하는 지도자들이 엄청난 뇌물 등을 챙기고 사치와 허영을 일삼으면서 들통이 나면 한결같이 오리발을 내밀며 절대 그런 일이 없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모두가 다 구속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비롯해서 그 어느 누구도 전혀 자신의 잘못과 범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른들이 그 지경인데 십대, 이십대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유흥비마련을 위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들을 죽이고서도 반성은커녕 물들인 머리칼을 날리며 뻔뻔한 태도를 감추지 않습니다. 아마겟돈은 죄악의 세력이 최후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는 곳입니다. 끝까지 회개를 거부하며 완악하고 강퍅한 자들을 한 곳에 모아들여 최후의 전쟁으로 죽임을 당케 하는 곳이 아마겟돈입니다. 인류 마지막 재앙을 이기고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 믿고 회개하여 자신을 항상 깨끗하게 지키는 성도들뿐입니다. 재앙이 그치는 날이 세상의 종말입니다. 마지막 재앙이 임하기전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예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고 용서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지만, 끝까지 예수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에는 아마겟돈 전쟁 재앙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인류의 모든 재앙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 예수밖에 없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예수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겸손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이 항상 함께 하시므로, 언제 어느 때라도 마침내 마지막 재앙을 피하여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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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큰 음녀의 받을 심판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것 들이 가득하더라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또 내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계17:1-18)

1. 요한 계시록은 세상이 더욱 더 음란해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표현하는 3S, 즉 성(Sex)과 스크린(Screen,영화), 그리고 스포츠(Sport,운동)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만들뿐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경건하게 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영적인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음란한 행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을 신랑과 신부 관계로 표현하며 신랑을 멀리하는 행위는 이미 마음에 간음을 범한 죄악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 백성을 달콤하게 유혹하는 음녀와 같은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가까이 하는 것은 함정에 빠지는 것이며, 인생을 탕진하다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23:27,6:26) 대저 음녀는 깊은 구렁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이 시대에 다시 고개 들고 있는 동성애(게이, 레즈비언)는 분명 성경에서 지적하는 음란한 죄악으로 반드시 그에 상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롬1:26-27)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아무리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고 인권 사상이 발전한다고 해서 죄악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4~5세기 로마에서 기독교인 황제들이 등장해서 동성애, 특히 남성 매춘행위를 법령으로 규제하기 전까지 로마제국은 로마달력으로 4월25일을 매춘 남성의 축제일로 정해놓고 음란한 축제를 즐겼습니다. 황제숭배 등의 우상숭배의 종교가 지배하는 곳에는 죄악의 기준이 시대와 사상에 따라 인간의 편의대로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 등의 음행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변함없이 중대한 죄악입니다. 그런데 시대를 역행해서 동성애를 진보적인 인권사상에서 용납하고 죄악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다시 강하게 일고 있습니다. 전세계 영화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여러분 부~자 되세요"는 "여러분 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 되세요"와 같다고 합니다. 할리우드에서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레즈비언이 돼야 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할리우드에서 여자 동성애자 배우가 연평균 790만 달러(약 102억원)의 돈을 벌어 600만 달러(약 78억원)의 이성애자 여배우를 능가한다고 밝혔습니다.(미국의 대중지 <내셔널 인콰이어러> 최신호) 이를 조사한 샌더스 교수는 동성애자들이 일찍이 결혼을 포기함으로 자녀양육비 등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에 정상인 배우들보다 소득이 많다고 그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동성애는 "(창2:24)...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축복하신 가정을 부정하는 죄악입니다. 이렇게 가정제도를 파괴하는 동성애에 대해 성경은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레20:13)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전 세계적으로 지역에 관계없이 전체의 3∼5%가 동성애자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93년 처음 동성애자들의 모임인 '초동회'가 만들어졌고, 이후 기독교 대학인 연세대에 '컴투게더', 민족 사학으로 불리우는 고려대에 '사람과 사람', 그리고 한국 최고 명문대 서울대에 '마음006' 등의 동성애자 동호회가 생기면서 <게이 카페>, <게이 바>, <게이 축제> 등이 대학가 유흥가를 중심으로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터넷 등장과 함께 동성애자 사이트가 무려 40여개나 활동하는 등 동성애자 모임 수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 연구기관은 국내 동성애자 수가 10만명이 넘는다고 추산하고 있으나 동성애자들은 30만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동성애가 삶의 하나의 방식으로 용인될 수 있는가'라는 여론조사에서 '예'라고 대답한 비율은 50%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97년 바나 리서치 그룹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약 46%의 사람들이 '교회는 동성애자가 교회 지도자가 되는 것을 용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응답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 6월 미국장로교회(PCUSA)는 제213차 정기총회를 갖고 동성애자에게 목사 장로 등의 안수를 줄 수 없도록 규정한 조항을 삭제하도록 결의해 미국 및 한국교계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점입가경으로 '동성애 기독인들'(게이 크리스천)과 '동성애자 교회'(게이 처치)들도 늘고 있는 추세여서 대다수의 교회들이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연예인 홍석천씨의 '커밍아웃'(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외부에 밝히는 것)을 계기로 '동성애 찬반논쟁'이 한때 뜨겁게 벌어졌으나 방송매체를 통해 트렌스젠더(성전환자)나 게이들의 계속되는 출연으로 일반 대중들은 동성애를 죄의식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음지에서만 거론되던 동성애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되면서 동성애자들은 더욱 힘을 얻어 동성애자 고용차별을 금지하는 운동 내지는 항의시위까지 계획 중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동성애 찬성론자들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존엄성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라면 성적 소수자의 '커밍아웃'을 축복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다 보니 요즈음은 창녀들까지도 자신들의 인권을 보장해달라고 외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윤락행위를 죄악으로 보지 말고 정당한 직업으로 인정해달라는 노골적이고 뻔뻔한 음란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성애나 그들의 '커밍아웃'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존엄성'차원에서 받아들이거나 인정해주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멸망받을 가증스런 죄악이라는 태도를 교회는 분명히 밝혀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빈부귀천이 없는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존귀한 인간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창1:2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섭리를 거역하는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성애를 인정하셨다면 애초부터 하와라는 여자를 만들 필요없이 똑같은 아담을 한 쌍으로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태초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가정 제도를 통해 생육하고 번성할 뿐만 아니라 우주만물을 아름답게 보존하고 다스릴 특권을 저버리는 죄악입니다. 따라서 최근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고 있는 '커밍아웃'은 그들의 용기에 박수치고 차별없이 받아들여야 할 문제가 아니라, 태초에 제정한 그 거룩하고 성스러운 가정제도를 파괴하는 범죄행위요, 가정의 가치를 말살하는 비윤리적 행위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우쳐야만 합니다. 우리는 소돔성 멸망의 원인이 바로 동성애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두 천사가 소돔성을 찾았을 때 롯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이를 어떻게 알고 소돔 사람들이 애, 어른 할 것 없이 떼로 몰려들어 롯의 집을 에워싸고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창19:1-5)며 협박했습니다. '상관'은 히브리어 '소도미'(sodomy)의 원뜻으로 '남색', 즉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소돔성이 불과 유황불로 멸망당한 원인이 온갖 형태의 성적 음란과 타락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동성애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며 인류의 아름다운 가정제도를 조롱하는 가증스런 죄악으로 멸망받아 마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국교가 지옥을 부인하기에 이르렀고, 스위스의 복음주의 목사라는 자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식을 주례한다고 합니다. 미감리교, 장로교단에서 '게이, 레스비안'들의 목사안수와 이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동성연애는 하나님께서 가증한 죄악으로 여기는 분명한 성적 타락이며 음란한 행위입니다.

2. 오늘 계시록 본문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음녀'의 뜻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1:21에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고 했습니다. '신실하던 성읍'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성읍이 '창기'가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 우상숭배 종교와 문화 등을 수용함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는 물론 사치, 향락과 음란, 부정부패 등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루살렘만 창기가 된 것이 아니라 과거 로마 제국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아내 메살리나는 제국의 황후였지만 밤만되면 창녀촌에 가서 윤락행위를 일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음녀는 이방 우상숭배의 종교와 문화 등으로 사치, 향락과 음란에 취하게 만드는 세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음녀가 많은 물위에 앉아서 땅의 임금들, 땅의 거하는 자들과 더불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는 것은 당시 로마제국이 세계를 지배했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의 로마 문화 등을 강요하므로 로마의 지배를 받던 나라 백성들을 영적으로 음란하게 만들고 도덕적으로는 사치, 향락과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탄" 모습은 짐승같은 야수적인 힘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 권력(로마)의 횡포를 의미합니다. "큰 음녀(로마)가 금잔을 들고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다"는 것은 사치와 영화, 화려함으로 치장한 "큰 음녀", 즉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음녀가 가진 손에 가진 것은 "금잔"이고 "금과 보석과 진주 등으로 꾸몄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물들은 가증하고 음행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세상은 화려해 보여도 음행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이 큰 음녀의 이름이 바로 "큰 바벨론"이라 불리우는 것입니다. 큰 음녀를 바벨론이라 부르는 근거는 창세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온땅에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서로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여호와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니...그들이 성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하니...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11:1-9)

여기 고대 최초의 통일제국을 만든 '니므롯'이 여러 종족들을 손쉽게 통치하기 위해 쌓은 것이 70층 규모의 바벨탑입니다. 이 바벨탑 꼭대기에는 거대한 바빌로니아 신전(우상신전)을 지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탑을 세운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이름을 높이자는 인본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탑 꼭대기에는 바벨론의 신전을 세우고자 한 것이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숭배를 조장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은 하나님을 떠난 우상숭배와 인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나되어 각종 죄악과 향락, 음란에 빠진 세상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바벨론을 '음녀'로 표현하는 것은 세상을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더럽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느브갓네살왕 당시에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그에 응하지 않았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풀무불 속에 던져 넣거나 사자굴속에 던져 넣었던 것처럼 바벨론은 우상숭배, 황제숭배 등을 강요하며 핍박하는 세상 세력들을 말합니다. 과거 로마나 중세 시대에 무수한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했던 교권주의 세력 등을 큰 바벨론, 큰 음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느 시대이건 거룩한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숭배 등으로 인류를 타락시키는 문화와 세력 등을 모두 "큰 음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음녀"되는 바벨론 세력은 이같은 목적을 이루어 인류를 음란함으로 타락시키기 위해 온갖 핍박을 다 감행해왔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 곧 이어 지체없이 많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피를 흘리며 순교당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살해되었으며, 마가는 죽기까지 거리에 끌려 다녔으며, 누가는 목이 매여 죽었고, 베드로와 시몬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드레는 십자가에 달리었고, 야곱은 목베임을 당하였으며, 빌립은 십자가에서 맞아 죽었고, 바돌로매는 산 채로 가죽을 벗기웠으며, 도마는 창에 찔려 죽었고, 동생 야곱은 회당에서 내던지어 죽기까지 매를 맞았으며, 유다는 화살에, 맛디아는 돌에 맞아 죽었고, 바울은 목베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들과 성도들의 순교는 주로 유대교와 이방 우상숭배 종교 세력에 의해 약 100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순교의 피는 더욱 더 복음은 힘차게 전파되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복음은 로마 제국을 비롯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세상 구석구석 모든 곳에 전파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 역사상에서 암흑시대라 알려져 있는 중세(A.D.700-1307)는 어둡고 피비린내 나며 말할 수 없는 무서운 시대였습니다. 중세 암흑시대 12,13세기 동안의 기간만 하더라도 최근 세계 1,2차 대전에서 죽은 사상자보다도 훨씬 많은 5천만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피를 흘리며 순교당했습니다. 이 역사의 암흑기에 일어난 성도들의 순교는 모두가 흔히 중세 "큰 음녀"로 불리우는 로마 천주교에 의한 가혹하고 잔악한 박해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사무엘 클락은 자신의 책(순교사)에서 중세 암흑시대에 순교당한 모습들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놓았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채 거꾸로 매달려 흘려 내린 피가 응고되어 죽기도 하고, 밧줄에 매달아 불위에서 서서히 태워죽이기도 하고, 황소뿔에 박혀서 죽기도 하고, 절구통에 넣어 절구에 찧여 죽기도 하고, 기름가마에 끓여져서 죽기도 하고, 망치와 끌로 입 코 눈이 뜯겨져 죽기도 하고, 벌거벗긴채 머리카락이 나무에 매달려 맞아죽기도 하고, 산채로 배가 갈려져 죽기도 하고, 나무에 매달린채 가슴이 난자당해 죽기도 하고, 불 인두로 창자가 튀어나올 때까지 지져져서 죽기도 했습니다.》 성경 그대로 "큰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세상 역사 행로였습니다." "큰 음녀"는 예수 믿는 성도들을 음행으로 더럽히고자 온갖 수단 방법을 다해 핍박을 가하고 수많은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큰 음녀"는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대신에 '바벨', 즉 혼합주의 사상으로 세상과 기독교를 음란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영국불교협회장 불교 승려가 케임브리지 대학 교회에서 주일 대예배 설교를 하게 하더니 이제는 '모슬렘'(회교) 사제가 교회 강단에 섰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는 석가탄생을 기념하여 불교계에 다음과 같은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든 존재의 존귀함을 설파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 종교인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과 불자들이 다툼과 분열이 없는 화해된 세상,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는 세상으로 만들어가자." 그러나 이 메시지는 우리 기독교인들 모두의 뜻이 아니라 '큰 음녀'의 뜻일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불교는 우상숭배임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라는 간판을 달았다고 해서 그 모임이 한국의 모든 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또한 그 단체 총무가 석가탄생을 축하하는 것도 모든 기독교인의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대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뜻은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타종교와의 대화와 화해라는 명목과 진보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영적인 면에서 음란해지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스포츠의 성공을 위해 불교, 천주교와 뜻을 같이 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 기분 좋은 일일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음행인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과 스크린, 스포츠의 우상으로 더럽혀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일지라도 음란에 빠졌을 때 가차없이 멸망당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과 기독교를 더럽히려는 음녀는 자신에게 막강한 능력과 권세를 주었던 짐승에 의해 무참하게 멸망당하게 됩니다.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는 <큰 음녀>에게 권세를 주어 세상을 더럽히게 했던 <짐승>이 변심하여 그 <큰 음녀>를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살라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성도들을 더럽히고 핍박하는 일에 연합했던 이들이 최후의 심판 때가 다 되니까 하나님께서 <짐승>을 <큰 음녀>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란한 모든 세상 권력은 그 자체 안에 자멸의 씨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음행은 나라 백성 모두가 다 망하는 죄악입니다. 예수 외에는 생명의 씨가 없습니다. 어느 작가의 말대로 "21세기는 트랜스젠더 하리수가 당당하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시대이며, 게이와 레즈비언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가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시대이며, 또한 남성과 여성을 두루 가진 유니섹스(양성인), 동물과의 음행을 암시하는 반인반마(半人半馬), 동성애, 근친상간처럼 제도에 대한 위반으로 가득 찬 이야기인 우상숭배의 신화를 담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음란한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성문화, 스크린과 스포츠 문화 등으로 온통 더럽혀지고 있는 음란한 시대에 잠언 지혜자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7:25-27)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지난 3월 3일 50여만명이란 엄청난 인파가 몰린 호주의 '시드니 게이 레즈비언 마디그라'(Sydney Gay+Lesbian Mardi Gras)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동성애자 축제입니다. 이 동성애자들의 축제 마디그라를 반대하기 위해 나온 일부 뜻있는 기독교인들은 동성애로 더럽혀지고 있는 호주 시드니를 용서해달라며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도로변에서 'God Forgive Sydney'(하나님, 시드니를 용서하소서)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기간내내 조용히 시위했다고 합니다.(한겨레21,3월13일자) 이는 과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이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아 멸망당한 것을 거울로 삼아"(유1:7) 동성애자들로 더럽혀지고 있는 시드니를 용서해달라는 간곡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음녀에 빠져 살아남을 나라 백성 하나 없습니다.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여 세상 모든 음란 문화로 인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않으리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큰 음녀와 같은 곳입니다. 음녀를 이기고 짐승같은 세상을 이기시는 분은 오직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하는 진실한 성도들만이 음란한 세상, 짐승같은 세상을 이기고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은 예수 그리스도 믿는 여러분이 되시고 예수와 항상 함께 하는 진실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2.5.12.주일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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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계18:1-24)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보지 못하리로다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본문은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나 세상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대적하여 살아남은 나라 백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벨론이 멸망당하는 이유는 우상숭배와 사치에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행위는 모두가 다 우상숭배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어떤 형상이나 그림이든 숭배를 위해 만드는 행위, 만드는 자, 그것들을 숭배하는 행위 등은 모두가 가증스런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같은 우상숭배를 결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이건 모든 재앙을 피하는 길은 우상숭배나 사치 향락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 죄를 피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인 정치인들 가운데 교회에서 거룩한 직분까지 맡았으면서 타종교인들의 득표를 위해 우상숭배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행위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죄악이며 동시에 영적 음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아야함에도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는 스스로 재앙을 부추기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있는 자는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 바벨론과 같았었습니다. 세계를 제패하는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습니다. 게다가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며 거만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과부가 아니라"는 말은 한번도 자기 가족 중에는 죽은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로마는 한번도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고, 전사자를 내 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로마제국의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호언장담합니다.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로마는 결코 패전하지 않으리라는 자신만만한 오만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로마의 교만은 하나님 없이도 부요하고 안전하며, 하나님 없이도 평화스럽게 잘 살고 있으며, 하나님 없이도 나라가 부강하여 어느 나라도 감히 로마를 무너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 바벨론도 이같은 거만함을 보이고 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 할것이라 네가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사 47:7-9).

역사가 증명하듯이 바벨론은 부여받은 국력과 부요함으로 사치 향락을 일삼으며 자신은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처럼 기고만장하고 우상숭배하다 결국 한 날에 홀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역대 바벨론 제국의 최고 부강한 시대를 이룩한 느브갓네살 왕은 세상 나라의 권세가 모두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우상숭배와 교만을 떨다가 권좌와 인생중에서 붸겨나 소처럼 풀을 뜯어 먹으며 7년간을 짐승으로 살았습니다. 7년이란 기간은 그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의 기간이었습니다.(단4:32-33,5:18-21) 이같은 부친의 창피하고 두려운 사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면서도 아들 벨사살 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비웃듯이라도 하듯 온갖 우상들을 찬양하며 그것도 부족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한 성전 기구들을 가져다가 술 퍼마시다가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나라는 두 쪽 나고 말았습니다.(단5:22-31)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국력과 부요함은 다함께 누리라는 것이지 교만을 피우며 부요함을 독점하거나 그것을 바탕으로 거만하여 우상숭배나 사치 향락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부자 도시였습니다. 유대인 탈무드에는 이 세상에 열 개의 부가 내려 왔는데 그 중 로마가 아홉을 받았고 나머지 한 개를 전세계가 겨우 차지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가 "고대 로마의 사치와 낭비성과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최고 화려한 사치는 빈곤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로 로마의 사치 향락은 극에 달했었습니다. 로마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굴라 황제는 값비싼 향수를 끓인 온탕과 냉탕에서 목욕하기를 즐겼는가 하면 황금가루로 뒤덮인 빵과 고기를 즐겨 먹기도 했습니다. 또한 몸에 좋다하여 값비싼 진주를 식초에 녹여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진주와 보석을 좋아한 이유는 그 진주 보석들이 건강과 각종 질병에 효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수정은 술 취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고, 백옥은 출혈에 효과가 있고, 녹벽옥은 다산을 가져오며, 다이아몬드는 독을 중화시키는데, 그리고 정신착란을 고치는데 효험이 있고, 호박 보석을 목에 걸고 다니면 열병과 기타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네로는 잔치 한 번 베푸는데 애굽산 장미꽃 장식 비용으로만 거의 10만불(1억3천만원)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로마 황제에 올라 1년도 채우지 못한 비텔리우스는 식사비용에 2천만불(260억원)이나 소비했고, 아피키우스란 로마 평민은 300만불(40억원)을 주색에 낭비하고 30만불이 남았을 때 그런 적은 돈으로 어떻게 사느냐며 자살해 버렸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하나에 24만불(3억1천2백만원)짜리 진주를 녹여 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부와 사치를 유지하기 위해 로마는 각처에서 물품을 수입해야 했습니다. 팍스 로마나를 구가하던 시대, 즉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부터 약 200년간 계속된 로마 평화의 시대에는 변경의 수비도 견고하였고, 이민족의 침입도 없었으며, 국내의 치안도 확립되어 교통, 물자의 교류도 활발하였고, 로마제국 내의 각지에서 도시가 번영하여 전국민은 평화를 구가했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영국해협으로부터 겐지스강까지의 각 지방의 특산물과 명품들이 로마 제국의 창고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에는 세계 도처의 명품들과 사치성 물건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과거 로마는 역사상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사치와 향락에 미친 사람들로 넘실거렸습니다. 요즈음 하나에 108만원이나 하는 일제 화장품을 사다 쓰는 여성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화장품을 사용하면 얼굴에 주름살이 제거되어 처녀 얼굴처럼 팽팽해진다는 것입니다. 소년소녀가장의 6개월 생활비에 해당되는 108만원을 조금 있으면 늘어지고 쳐지다가 썩어질 얼굴 껍데기에 매대기치는 등 미용을 위해서라면 빚을 내서라도 덤벼드는 분에 지나친 미용사치 풍조, 건강에 좋다면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먹어치우는가 하면 심지어 황금이 몸에 좋다하여 조기 생선에다 황금을 도금해서 먹어 치우는 음식 사치 등이 우리 사회에도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치 향락으로 좋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재앙이 두려운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이 사치 향락하는 품목들 중 마지막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었습니다. 이는 사치 향락의 말기적 현상이 바로 인간을 상품화하는 풍조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로마 당시와 다를 바 없이 성이 상품화되고 인간의 고귀한 생명이 상품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성이 상품화되고 있는 우리 시대를 우려하는 어느 대학 교수의 글에 귀담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요즘은 여성의 성 상품화에 대한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대중매체가 보여 주는 남성상과 여성상은 어린이의 사회화의 모델 역할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의식구조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한 어린이가 성장 하기까지 15만 편의 광고를 본다고 한다. 이런 광고들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비춰지는 가를 생각해 볼 때 여성은 자아실현이나 지적인 사고 등은 전혀 없이 남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항상 가정을 위해 헌신만을 하고 자신을 꾸미기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거나 아름답게 화장하는 모습들밖에는 비춰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곧 여성은 남성을 위해 존재하고 남성에게 서비스를 하는 모습들이 나타나면서 남녀가 평등한 것이 아닌 상하 종속적 관계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성숙한 판단력을 갖추지 못한 아이들로서는 그처럼 그릇된 여성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성장한다는 것은 예견된 일이라 할 것이다. 광고에서 보여지는 여성들의 모습을 대체적으로 분류해보면, 첫째, 현모양처형 여성, 둘째, 소비적이고 호화스러운 여성, 셋째,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 넷째, 신체적으로 아름다운 여성, 다섯째...., 여섯째..... 등이 있는데, 첫째 현모양처형 여성인 경우 청소나 요리 등 집안 일에 전념하고 아이들과 남편 뒷바라지에 희생적이며, 가정에의 활동에만 만족하는 좋은 주부가 되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두 번째로 소비적이고 호사스러운 여성상은 주로 값비싼 의상이나 장신구 등으로 치장하는데 열심이며, 고가품의 소유에 관심을 갖고 여가나 여행을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만족해 하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셋째 성적인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경우에는 광고하는 상품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여성모델이 장식적인 역할로 등장하며, 유혹적으로 성적 연상을 불러일으키며, 여성의 신체를 노출하는 등의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TV 광고 뿐만이 아니다. 잡지, 신문, 인터넷 등을 볼 때, 상품이나 제품과는 전혀 상관없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성 모델이 나온다거나 성적인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문구를 사용하는 등의 광고 행태가 많이 자행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광고들이 모든 광고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수의 광고에서 때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성이 상품화되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광고를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소비자들의 태도도 역시 큰 문제이다....여자는 상품이 아니며 남성의 부속물도 아니다. 여성은 독립적인 인격체인 것이다....》

오늘날은 무엇이든지 돈이 될만한 것은 모조리 상품화하는 시대입니다. 망국병에 해당되는 우리 나라의 사치 향락 풍조는 참으로 날이 갈수록 그 도를 더해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인터넷에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명품 열기는 사치 향락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프라다, 샤넬, 구치, 버버리, 루이비통 등 명품을 사고 팔거나 관련 정보를 교환하는 인터넷 동호회가 하루 평균 5개 이상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어떤 동호회는 개설 4일 만에 120여만명의 회원을 확보, 1차 공동구매 물품을 신청받고 있을 정도로 호황이라고 합니다. 어느 명품 동호회 게시판에는 "옥주현 등 연예인들이 많이 차는 카르티에 시계를 2달 정도 착용했어요. 340만원에 샀는데 200만원에 팔아요"라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명품족이 되고 싶지만 돈이 없는 네티즌을 위해 대출해주는 동호회도 등장했습니다. 명품족의 품위 유지를 위해 최소 200만원에서 3,000만원까지 대출해준다는 것입니다. 명품 반대자들은 "돈 많은 졸부들이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값비싼 해외 제품들을 산다" 거나 "명품을 사는 사람은 돈을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바보들"이라며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어느 네티즌은 "아무리 돈이 우선시되는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분에 넘치는 사치는 죄악"이라며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11일 한국은행은 지난 1분기에 사치성 소비재 수입이 급증하고 있다고 발표하며, 최고급 양주 수입액이 무려 3개월동안 1,300억원, 또 미국, 프랑스, 일본산 기초 화장품·향수·립스틱 등 화장품류 수입액은 2,400억원이나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3개월 퍼마신 양주값은 우리 나라 자동차 162만대, 즉 1년동안 자동차 수출해서 벌어들인 돈에 해당됩니다. 뼈빠지게 일해 박리다매로 수출하여 벌어들인 외화를 사치 향락하는데 낭비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요즈음은 사치 의료까지 성행하는 시대입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수술을 해 줄 외과의사는 모자라는 반면 미용 전문 의사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외과와 진단방사선과, 해부병리과 등 돈벌이가 적고 일이 고된 3D 진료 과목은 지원자 격감으로 폐과 위기에 처해 있고 수석 졸업자 등 인재들은 성형외과와 피부과 안과 등 비보험 치료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곳으로만 몰리고 있습니다. 필수 의료의 몰락과 사치 의료의 성행은 환자를 위해 불행한 일입니다. 병을 치료해 줄 의사는 없고 멋내기를 돕는 의사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과 마찬가지로 사치 향락을 일삼을 뿐만 아니라 이를 조장하고 이를 팔아 부요함을 누리게 되는 나라 백성들은 로마 제국의 멸망이 주는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루 동안에 재앙을 만나 일시에 사망과 애통과 흉년으로 멸망당하리라는 경고를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치성 상품들을 팔아 치부한 상인들이 애통하는 이유는 사치 낭비, 우상숭배 등으로 망한 나라들 때문에 더 이상 판로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돈되는 일이라면 남이야 망하든 말든 사치 낭비를 조장하는 망국적 상업주의 행태의 말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고전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약4:13-17) `오늘이나 내일 어떤 도시에 가서 한 해 동안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겠다.'고 말해야 할 여러분이 도리어 허영에 들떠 자랑만 하고 있으니 그런 것은 다 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먹을 것이 없이 피골이 상접한대로 죽어 가는 지구촌 사람들을 보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악입니다. 나라가 부강하여 잉여농산물을 쌓아놓고 있으면서 식량부족국가로 굶주리고 있는 나라 백성들을 구제하지 않으면 죄악입니다. 수술비 없어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악입니다. 멸망으로 가는 영혼들을 바라보면서도 생명의 예수를 전하지 않으면 죄악입니다. 주어진 소유와 건강과 하나님의 사랑을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나누지 않고 독점하거나 낭비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옛날 어느 책에 "박새가 가장 깊은 숲속 으로 날아 들어가 집을 지어도 나뭇가지 하나밖에는 소유하지 못하고, 수달피가 중국 최대의 강인 황하에 나와 물을 마셔도 자기 위장만큼의 물밖에 마시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아주 작고 미천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부를 향한 끝없는 욕심으로 자신들을 얽어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신앙과 인격보다는 집 넓이, 주식의 배당률, 승용차의 가격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기 일쑤입니다. 로마 당시 사람들처럼 물질적 풍부한 생활에 마음을 빼앗겨 사치 향락에 취하고 물질 소비생활에 기쁨을 찾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이미 더러운 귀신의 처소가 되어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사치 향락의 문화와 우상숭배의 문화가 쌓아 올린 나라 백성은 "바다에 던져진 큰 맷돌처럼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도록 영원히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눈과 마음이 우상숭배나 사치 향락하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곳에 쏠리거나 참여하지 말고, 마음은 낮추어 예수의 마음을 품으시고 눈은 들어 저 높은 곳의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생활은 낮추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며 갇힌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거룩한 성도, 내세의 소망이 확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2.5.19.주일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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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어린양의 혼인잔치

(계19:1-2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다이애나는 1981년 영국 황태자 챨스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얼마나 행복할까?'라며 온 세상 여자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특히 다이애나가 살아온 환경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녀는 신데렐라와 같았습니다. 다이애나는 상류층 자녀들이 다니는 고등학교 재학중 부모의 이혼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 16세에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그후 왕궁 가까이 있는 유치원 보조교사도 하고 파출부 생활을 하던 시절에 챨스 황태자의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챨스는 빨리 결혼하도록 왕실의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황태자비의 1차 자격은 가문 좋고 개신교도인 처녀여야 했습니다. 다이애나는 챨스의 사교 서클에 이미 드나들면서 황태자 챨스에 대한 사랑을 품게 되었습니다. 소녀 다이애나의 사랑의 꿈은 현실이 되어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고 일약 황태자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은 신혼 당초부터 한없이 무관심했습니다. 왕실의 격식에 익숙치않은 다이애나가 왕궁생활에 적응해 보려고 고민하며 몸부림치는 동안 챨스는 마냥 내버려두고 정신적인 도움을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다이애나의 마음을 더 괴롭힌 것은 챨스가 이전 여자 친구인 카밀라와의 교제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데다 많은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다이애나는 심리적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다섯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모두 미수로 끝났습니다. 이후 식욕과다증은 심해지고 우울증 치료를 여러 번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다이애나는 아직은 이혼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왕가의 특권, 두 아들, 엄청난 인기, 막대한 보석과 찬란한 의상들, 사회적 최고의 지위 등을 버릴 것인가? 아무리 결혼생활이 불행해도 부귀영화의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불행을 씹으며 왕궁의 격식 속에 갇혀 사는 날지 못하는 한 마리의 불행한 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다이애나를 부러워했으나 행복이 정말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혼초부터 불행했던 다이애나는 결혼 5년 후, 유명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한 소문난 바람둥이 도디와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이애나는 도디를 만나면서 불행했던 결혼생활에 보상이라도 받듯이 행복한 표정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언론들(파파라치)은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계속해서 쫓았습니다. 새로운 사랑에 들떠 있던 다이애나는 결국 이같은 파파라치의 추적을 피하려다 교통사고로 사랑을 꽃피우지 못한채 35세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달 머리손질 비용으로 700여만원, 매주 매니큐어와 발톱손질에 500여만원 등등 하루 평균 200만원씩 1년에 7억5천만원을 쓰며 황태자비로 살았지만 다이애나는 결국 비극적인 <분홍신>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국 격언 "하루만 행복하려면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아라. 1주일만 행복해지고 싶거든 결혼을 하라. 1개월 정도라면 말(馬)을 사고, 1년이라면 새 집을 지어라. 그런데 평생토록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정직한 인간이 되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세상에서의 행복이란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결혼이란 불완전한 남녀가 사랑으로 결속되어 이 세상에서 함께 사는 제도이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행복한 사람은 아쉽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천만다행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참되고 영원한 행복의 혼인잔치가 있습니다. 바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어린양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어린양의 신부는 모든 시련을 견디어내고 믿음을 지킨 예수의 교회, 성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혼인잔치>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결한 신부처럼 믿음을 지킨 성도들이 영원한 사랑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어린양의 신부들이 모두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고> 이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옳은 행실>이란 일반적인 옳은 행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을 받아 깨끗하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간직하여 믿음을 배반치 아니하고 성결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배반치 아니하는 생활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옛날에 폴이라는 양치기 소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양떼를 몰고 산골짜기에 서 풀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냥꾼이 두리번거리며 지나다가 길을 물었습니다. "여기서 마을까지는 얼마나 되고 어느 길로 가야 하느냐?" "마을로 가려면 십오리나 되는데 그 길은 양떼만 다니므로 분명치 않아 길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 사냥꾼은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내가 대단히 피곤하고 배도 고파서 길을 찾아갈 수 없으니 네 양들을 두고 나를 인도하여 주면 돈을 주겠네." "그렇게 할 수가 없는데요. 양들은 잠시라도 버려두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목자가 없으면 양들이 이리저리 다니다가 늑대같은 악한 짐승에게 물려가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네 것도 아니고 설사 한두 마리 잃어버려도 상관없지 않느냐? 내가 네 봉급의 일년치 이상의 돈을 주겠다." "안 그렇습니다. 나와 주인은 계약을 했기 때문에 내게 있는 시간은 내 것이 아니요 내 주인의 것이고 만약 한 마리의 양이라도 잃어버리면 그것은 내 책임입니다." 사냥꾼은 그러면 양을 자신에게 맡기고 마을로 내려가서 안내자와 음식 얻어오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폴은 "양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라며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이 말에 사냥꾼은 "내가 도적인 줄 아느냐?"며 화를 벌컥 내었습니다. 그러자 폴은 "나와 내 주인 사이의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말씀을 하시니 내가 어떻게 당신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제서야 사냥꾼은 양치기의 말뜻을 깨닫고 웃으며 "오, 너는 과연 신실한 아이로다."하며 폴이 가르쳐 준 길로 떠났습니다. 얼마 후에 왕이 신하를 보내어 양치기 소년을 왕궁으로 불러들였는데 알고 보니 그 사냥꾼이 바로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날 사냥을 나갔다가 혼자서 길을 잃고 마을을 찾다가 폴을 만났고 그의 신실한 마음과 옳은 행실을 보았던 것입니다. 왕은 양치기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참으로 주인에게 신실한 아이다. 이제부터 나와 같이 지내며 나의 왕자가 되어다오." 목동은 주인과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신실함으로 결국 왕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을 끝까지 거룩하고 신실하게 지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기를 바랍니다.

이같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는 복되다>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요한은 너무나 감격해서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자신도 요한 사도처럼 하나님의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말합니다.(10절)

어떤 문학회 동인들이 어느 날 런던의 한 클럽에서 모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실낙원>으로 유명한 밀턴이 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기쁨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그럼, 이 자리에 종교의 대서사시 <신곡>으로 유명한 단테가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 한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단테가 온다면 우리는 두 손을 높이 들고 환영하겠습니다." "오늘밤 이 자리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한 세익스피어가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일어서서 박수로 맞이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자리에 오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때 찰스 램이 또렷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그의 발아래 얼굴을 대고 엎드려 경배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하다 할지라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천사나 인간 모두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피조물이지 경배받을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어느 피조물이라도 경배하는 행위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받은 계시는 천사 자신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천사는 단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합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거나 그 계시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해설할 뿐이기 때문에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목사가 설교를 잘 하고 능력이 있다해도 목사는 어디까지나 계시에 대한 전달 매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경배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아무리 목사가 설교를 잘 하고 능력이 있다해도 하나님의 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아니하거나 못하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인류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어린양으로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웨인 놀튼 목사는 도살장에서 백정을 하던 교인의 간증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소도 죽이고 돼지 목도 땄습니다. 어느날 처음으로 양 몇 마리를 도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직업적 백정으로 짐승의 비명에 귀가 만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소도 비명을 지르고 돼지도 요란하게 울며 죽었습니다. 그러나 양은 백정의 칼에 목이 찔렸을 때 아무런 울음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슬픈 눈으로 찌른 자를 한 번 보고 조용히 쓰러져 죽어갔습니다. 이 백정은 그 소리없는 양의 모습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 며칠 밤을 고민하다가 결국 백정의 직업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어린양이 말없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사야는 어린양되시는 예수를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면 예수는 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매를 맞고 가시에 찔리고 창에 찔리면서도 잠잠하셨습니까? 이사야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잠잠한 양같이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에게 참된 평화를 누리게 하고 참된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 혼인잔치의 행복한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22장)

임금으로 비유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종들을 보내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거듭거듭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초청받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모두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게다가 임금이 보낸 종들을 핍박하고 죽이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에 화가 난 임금은 군대를 보내 이들을 모두 진멸하고 그 동네를 몽땅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종들을 시켜 중심가에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게 했습니다. 과연 혼인잔치집에는 손님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흐뭇해서 잔치 자리를 둘러보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이에 임금이 사환들을 시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케 해서 바깥 어두운 곳에 내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사람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 마지막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아 거룩한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거절하는 것은 인생의 참된 행복과 기쁨을 놓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임금이 보낸 군대에 의해 진멸당하고 그 동네는 불타버리는 비극으로 끝장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임금되시는 하나님의 초청, 예수 믿고 하늘 나라 잔치에 참여하라는 혼인 잔치에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이미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살후1:7-10)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세상에서는 신데랄라를 꿈꾸는 처녀들이 백마를 탄 왕자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세상 종말에 나타나시는 <백마 타신 자>는 불꽃같은 눈으로 공평과 정의로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백마 타신 예수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들이나 우상숭배와 음란, 사치 향락 등으로 더럽혀진 바벨론 같은 세상을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철장 권세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음녀같이 더러운 세상이 멸망당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하늘 성도, 특히 세상에서 거룩한 믿음을 지키다 순교당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바벨론이 완전히 멸망된 것을 보고 하늘 성도들과 이십 사 장로 등 모두가 하나님께 찬양이 울려 퍼지고, 이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베풀어집니다. 모든 인생이 가는 길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 믿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행복한 인생이 되느냐 아니면 <백마 타신 메시아>의 최후 심판을 받아 영원한 유황불 못에 던지움을 받거나 죽은 시체들을 먹어치우는 새들의 잔치밥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당장에 예수 믿지 않아도 별일없다며 <어린양 혼인잔치>를 놓치는 불행한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할 일은 많고 세상은 넓다며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소흘히 여기는 불행한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사는 세상에는 참되고 영원한 행복과 기쁨이 없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만> 참되고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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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

(계20:1-15)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 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인류가 사는 세상은 영원한 곳이 아닙니다. 또한 인생이 영원하지 못한데 세상이 영원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인류는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고 영원한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인류가 꿈꾸고 있는 영원한 나라를 세상 사람들은 '이상향'이라고 부르고 성경은 '하나님 나라'라고 부릅니다. 영원하지 못한 인간일지라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자연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면 영원한 "불못", 즉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왜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인가? 생명이란 죄가 없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의 죄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 예수의 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 믿고 죄사함을 얻은 의인들만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못", 즉 지옥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죄인들이 영원히 형벌을 받는 곳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양과 염소를 분별하듯 의인과 죄인을 분별하는 최후의 심판으로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죄인들의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죄인들이 구원받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두셨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세상을 섭리하십니다. 간단히 그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가장 시급한 것이 인류가 죄인으로 죽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죽는 것은 영원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을지라도 죄인으로 죽지 않고 의인으로 죽게 되면 "생명책"에 기록되어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아 의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 자신의 죄사함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를 믿음으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은 둘째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둘째 부활은 영원한 형벌과 심판을 위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의인들의 첫째 부활은 언제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의인들의 첫째 부활을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의인들과 함께 천년세계를 다스리고 그 통치기간이 끝나면 사탄과 죄인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에 들어가게 되고 예수 믿는 의인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마귀 사탄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예수를 믿지 못하게 미혹하거나 예수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유혹하여 죄악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 사탄의 미혹은 최후의 심판시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 마귀 사탄의 미혹을 이기지 못하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사람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하지 못하고 "둘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유황과 불못에 던져져 영벌을 받게 됩니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생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인생은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아침안개같은 세상에 마음을 뺏기고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무리 좋아보여도 세상의 운명은 소돔성과 같은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목베임을 받을지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복된 자가 되도록 세상 온갖 형태의 우상 숭배와 음란, 거짓과 사치 향락을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한 청년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열 개의 병을 내보이며 "여기 아홉 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 있고 한 개에만 독약이 들어있다. 만약 열 개 가운데 아무 병이나 하나를 마시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청년은 곰곰이 생각한 후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생명과 바꿀 수는 없지"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계속 유혹했습니다. "열 병 가운데 겨우 한 병이야. 하나만 마시면 엄청난 돈이 네 것이 되는 거야." 청년의 눈앞에는 돈뭉치가 오락가락했습니다. "그래, 딱 한 번만 하는 거야. 설마 한 번에 어떻게 되진 않겠지 이번 한 번이면 평생동안 일을 안해도 될테니까." 청년은 떨리는 손으로 진땀을 흘리며 한 병을 골라 마셨습니다. 순간 아찔했습니다. '설마 이것이 독약이 든 병은 아니겠지 다시는 이 짓을 말아야지' 이렇게 중얼대던 청년은 잠시 후에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야! 내가 살았구나. 자칫하면 죽을 뻔했어. 자 어서 돈을 내놔. 그리고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 사탄은 청년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다음 번에 언제라도 아홉 개 중 하나를 마시면 돈을 곱으로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웃으며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청년은 쉽게 번 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로 알콜 중독, 마약중독, 성병 등으로 청년은 은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돈이 떨어질 때마다 사탄을 불러대기에 바빴습니다. 처음 몇 번은 고민과 긴장감을 가졌으나 나중에는 어느 병을 골라야 할지 고만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결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청년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두 병만을 앞에 두고 술과 마약으로 인해 떨리는 손으로 하나를 집어야만 했습니다. '돈벼락이냐, 죽음이냐' 병을 잡는 그의 얼굴에는 식은 땀이 흘렀습니다. 노인은 마지막 병을 마셨습니다. "아! 나는 이겼어. 나는 끝까지 살아남고야 말았어. 내놔라 돈!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마지막 병은 마시지 않겠어. 날 찾지마라." 이때 사탄은 남은 마지막 한 병을 쑥 들이마시더니 "자, 이래도 네가 이겼느냐? 후후 어리석은 자여. 처음부터 독약이 든 병은 없었다. 그러나 너는 돈이라는 독약에 이미 죽었다. 너는 천하보다 귀한 일생을 돈이라는 하잘것없는 종이 쪽지에 팔았다. 나는 너의 청춘을 망가뜨렸지. 사람으로 태어나 다른 것이라곤 아무 것도 모르고 돈만을 쫓아 바보처럼 살다가 너는 죽게 됐다. 이제 너는 영원한 고통을 당할 불못에 가게 될거야." 사탄은 유유히 웃으며 돌아갔습니다.

"사람 나고 돈 낫지 돈 나고 사람이 낫느냐..."는 어느 유행가가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 즉 경제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스포츠 또한 돈 못지 않게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 영혼 육체까지 빼앗아가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마귀 사탄의 목적은 사람들의 미혹하고자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예수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단테가 <신곡>을 통해 세상을 <마취국>이라고 표현했듯이 세상은 돈과 스포츠, 우상숭배와 각종 미신, 음란과 사치 향락 등으로 사람들을 마취시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평안하다느니, 죽으면 끝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죽으면 결코 끝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죄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인간의 죄는 스스로 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밖에는 지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증거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죄사함받은 의인으로 영생에 이르고, 예수 믿지 않으면 죄인으로 심판을 받아 영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그 뒤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죄인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에 던져져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말씀으로 의인은 영생에, 그리고 의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영벌에 들어가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며 또한 회개에 합당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고 탐욕에 치우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쭉정이와 같이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마3:7-12)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러므로 회개하는 생활로 성령의 좋은 열매들을 맺는 알곡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 믿는다하면서 헐벗고 굶주리며, 병들고 갇히며 소외된 자들, 곧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외면하고 사랑으로 섬기지 아니하면 영벌에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마25:41-46)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의인이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세상에 오신 예수처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소흘히 여기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모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사랑으로 섬기는 의인들이 되시어 영생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참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과실을 맺을 수 없고, 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한 가지마다 버리워 말라지면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인생은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마른 가지처럼 되어 결국 불에 사른다는 뜻입니다.

(요15:1-6)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 믿고 철저히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가 되어 과실을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심판과 부활이 없다면 거지 나사로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심판과 부활이 없다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사도 바울과 여러 순교자들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심판과 부활이 없다면 사랑과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고전15:12-26) 심판과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요3:16-18) 그에게는 첫째 부활이 아니라 둘째 부활 곧 둘째 사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려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 되어 영생에 들어가게 하려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회개하는 생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생활,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로 성령의 좋은 열매들을 풍성히 맺어 넉넉히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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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새 하늘과 새 땅

(계21:1-2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 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새 하늘과 새 땅"은 인류가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이며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 그 나라의 시민권을 가졌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셨습니다.

"(사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그리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구체적인 모습, 모든 장애자가 온전해지며 가뭄과 홍수, 화산과 지진 등 저주받은 땅이 온전해지며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계가 사라지며 온전한 사랑과 정의만이 지배하며 오직 예수 십자가의 피로 거룩해진 성도들만이 영생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사35:5-9)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 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헬라어에는 "새 것"을 의미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하는 '네오스'(neos)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하는 '카이노스'(kainos)가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쓰인 단어는 '카이노스'(kainos)입니다. 이를 더 구체적 예를 들어 설명하면 태중의 아이가 열달만에 세상에 태어날 때 그 아이는 신생아로서 '네오스'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신생아이지만 죄중에 잉태되고 죄중에 태어나 죄중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 신생아이지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늙고 병들어 죽는 여전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병들거나 늙거나 쇠하지 않을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체, 질적으로 새로운 '카이노스'의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카이노스'란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창조되는 것을 말합니다. 죄가 전혀 없고 고통이 없으며 사망이 없는 몸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을 '카이노스'라고 합니다. 인간이 '네오스'의 존재로 태어났을지라도 예수 믿으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카이노스'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생명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으로 살게 됩니다. 자신이 예수 믿고 "카이노스'의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되지 않으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한다할지라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예수 안에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시어 언제라도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까지 인류가 살던 하늘과 땅의 변형이나 환경운동을 통해 개선된 하늘과 땅이 아니라, 전혀 죄와 고통과 사망이 지배하지 아니하는, 그리고 하나님과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았던 하늘과 땅은 전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하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기미 독립선언문에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폭력의 시대는 지나고 정의의 시대가 오누나"라는 선언이 있습니다. 당시 사학자였던 최남선이 작성한 이 선언문에는 특히 기독교 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후에 최남선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서적을 많이 읽어서 기독교 사상을 품게 된 것이 사실이다. 나는 사실 자유 사상이 농후한 사람인데다 독립, 자유, 평등 및 정의 같은 말들이 모두 기독교에서 나온 것인 만큼 나에게서 이와 같은 사상을 빼놓고서는 나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선언문에는 기독교 사상이 잘 표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언문은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통치에 맞서서 불법으로 빼앗긴 나라와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 투쟁과 애국애족의 자립 정신,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 정신, 불의에 항거하는 자주 정신 등과 함께 신앙고백적 삶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꿈꾸는 영원하고 참된 독립, 자유, 평등 및 정의가 지배하는 신천신지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역사라는 시간에 묻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금도 부정과 불의, 투쟁과 타협, 전쟁과 싸움, 가난과 억압 등의 수많은 사건들로 감당키 어려운 슬픔과 고통, 그리고 어둠과 사망가운데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갖 권력형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가운데 저마다 나라와 정치, 경제 등을 새롭게 하겠다며 동네를 시끄럽게 하는 선거철이 되었습니다. 허나 지금까지 인물을 새롭게 바꿔보고 정당을 새롭게 갈아보기도 하고 정당 이름까지 새롭게 바꿔도 보았지만 날이 갈수록 부정부패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며 권력형 비리는 대를 물려가면서 그 규모를 늘려가고만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정치 경제 사상이나 도덕 윤리나 이념 종교 등으로도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시 볼 수 없도록 소멸될 것이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만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여 하나님이 통치하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이라"(6절)하신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파' 즉 '처음'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의 원천과 기원이라는 뜻입니다. "알파"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더러워진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불로 태워버리시고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이제는 예수 십자가 피로 새로워진 성도들만이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 나라, "새 예루살렘 성"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성도들이 장차 들어갈 거룩한 예루살렘 성은 동서남북에 각각 세 문씩 있다했습니다. 이에 대한 아름답고 위로가 되는 상징적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동쪽은 새벽과 해가 뜨는 곳, 그리고 하루가 시작되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루 일과, 인생의 시작과 처음을 오직 해가 되시는 예수를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북쪽은 차가운 곳입니다. 그래서 사색하고 이론적이며 이성적인 신앙을 가지고 산 사람들, 마음보다는 머리를 통해 신앙을 발견하고 살았던 성도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남쪽은 따뜻한 곳이며 부드러운 남풍이 부는 기후가 온화한 곳입니다. 감정을 통해 신앙을 체험한 사람들, 이성보다는 마음으로 예수를 경험한 사람들, 십자가를 보자마자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해버리며 그 감동적인 사랑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서쪽은 해가 저무는 곳, 저녁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늙으막에, 인생의 황혼 길에 예수 믿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동서남북, 남녀노소 누구를 불문하고, 언제 어느 때라도 예수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면 들어갈 수 있는 활짝 열린 성입니다. 이 성은 또한 "네모 반듯하여 장광이 같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가로 세로 높이가 다 같은 정입방체라는 것입니다. 정입방체는 완전한 형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완전하며, 하나님의 통치 또한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의 성곽이 벽옥으로 쌓였고 각색 보석 등 12보석으로 기초석을 삼았으며 성의 문마다 한 진주로 만들어졌으며 성의 길은 정금으로 깔렸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주먹만한 진주 하나도 찾을 수 없는데 성의 문짝 하나가 통째로 진주 하나로 되어 있으며 각종 12보석으로 성을 쌓고 길마다 정금으로 포장되어 있으니 어찌 값으로 측량할 수 있겠는가? 그 영광과 부요함을 어디에다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믿음으로써만 이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안에 성전이 없다했습니다. 이는 "새 예루살렘"성은 성 전체가 성전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 전체가 성전이며 지성소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이나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도록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곳인데 "새 예루살렘성"에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성전이나 지성소가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한 성도가 어디서나 언제나 함께 하기 때문에 성 전체가 성전이며 지성소인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 교회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건물이나 예배 의식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며 목사가 임명되므로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만드는 단 한 가지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곧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없이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에는 빛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어둠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끝없는 욕망이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죄가 없어질 것이고 따라서 모든 슬픔과 고통, 어둠과 사망이 다시는 있지 아니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신다"했습니다. 병들어 눈물나고, 아파서 눈물이 나고, 괴롭고 외로워서 눈물나고 사랑하는 이를 잃어서 눈물나고 늙는게 서러워서 눈물나는 등 모든 눈물을 씻기신다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눈물을 씻기신다"는 것은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이 여러분과 인류가 소망하는 나라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에는 '두려워하는 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 물질이나 권세 등을 두려워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 등은 불과 유황 불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세상을 목적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목적하고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며 하나님 나라, 새 하늘 새 땅을 돌아갈 고향으로 고대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 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

베드로 역시 예수 믿는 형제들을 나그네와 행인같은 존재로 부르고 있습니다.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나그네 되신 삶으로 표현하시며 나그네된 사람들을 사랑으로 잘 섬기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인생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은 나그네 인생길에 지나지 않고 인간이 돌아갈 영원한 고향은 하나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돌아갈 고향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 하나님 나라입니다.

1764년 카나다 칼리슬 마을에서 감격스러운 재회가 이루어졌습니다. 10년 전인 1754년에 백인 개척민 마을이 인디언의 습격을 받고 아이들이 납치되었습니다. 그 중에 바바라(8세)와 레지나(6세) 두 여자 형제가 있었습니다. 두 형제는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레지나는 깊은 산 속 인디언 마을에서 자라났습니다. 독일계 카나다 개척민으로 어려서 독일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하였는데 10년간 인디언 속에 혼자 있으면서 말을 잊어버리고 고향에 대한 기억도 부모의 얼굴도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습니다. 레지나가 16세 때 영국 군대가 이 마을을 습격하고 백인 소녀가 있는 것을 발견하여 구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인디언 아닌 인디언 소녀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말도 행동도 얼굴까지도 검게 타 인디언이 되어버린 레지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레지나가 기억하는 유일한 것은 고향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불렀던 찬송이었습니다. 10년 동안 인디언 속에서도 날마다 되풀이하던 노래는 찬송가 431장이었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합소서....>(431장) 약간 발음이 이상했으나 분명한 영어로 부르는 찬송가였습니다.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울면서 달려나와 레지나를 껴안았습니다. 레지나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이 소녀는 모든 면에서 고향과 단절되어 있었으나 어머니가 들려주던 찬송가 한 곡이 유일하게 어머니와 고향과의 유대를 이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유대에서 끊어지고 있을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되어주시려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우리의 길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는 우리를 아버지의 품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고향길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요한 계시록을 통해 인류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소개하고 생명과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돌아갈 고향으로 목적하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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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생명 나무

(계22:1-20)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최초의 인간 아담이 살았던 에덴 동산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인간의 영원한 본향입니다. 그러나 범죄한 아담이 내어쫓긴 에덴 동산 밖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무성한 불모지의 땅이며, 고통과 죽음, 거짓과 살인 등이 난무하는 곳으로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삶의 터전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지금 사는 에덴 동산밖에는 <생명나무>가 없는 곳입니다. 한신대학 장일선 교수는 인간이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현대인은 에덴 동산에서 마구 뛰노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동산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있고, 또 동산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부모의 명령이 자신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동산 밖의 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려 보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에덴 동산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그런데 동산 밖의 세상은 그가 생각하던 자유 천지와는 달리 고뇌와 번민과 해산의 고통과 수고의 연속인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인 깊은 숲속입니다. 동화작가 그림(Grimm)의 이야기에 나오는 한센과 그레텔이 집으로 가는 길을 잃고 깊은 숲속에서 헤매다 집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점점 더 멀어졌듯이, 현대인은 앞이 안 보이는 가시덤불 숲속에서 방향을 잃고 동산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한 채 헤맬 뿐입니다.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동산 안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했을 터인데 공연히 무모한 짓을 했구나 하고 후회가 막심했으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응분의 대가는 이미 쏟아진 물과 같았습니다. 복음서 비유에 나오는 탕자는 뒤늦게나마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갔으나, 현대인은 백 배 사죄 할 단단한 결심을 가지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지만 도저히 그 길을 찾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해산의 고통을 참아가면서 <생명 나무> 동산으로 다시 찾아가려고 가시덤불 숲속에서 안간힘을 쓸 뿐입니다. 바로 그때 어떤 낯선 젊은이가 이 현대인의 등뒤로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툭 칩니다. 현대인이 놀라 몸을 돌려 그 젊은이를 쳐다보니, 그 젊은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생명나무> 동산으로 가는 길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를 따라오십시오" 현대인은 그 말에 움칠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이 문득 번개처럼 그의 마음을 스쳐갔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동산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소비했음에도 아직까지 그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저 낯선 사람은 도대체 누구길래 그 길을 안다고 감히 나설 수 있는 것인가?' 현대인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그 젊은이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나는 저 동산 주인의 아들로서 동산과 이 가시덤불 숲 전체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기에 이쪽 지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공손하게 대답합니다. 그래도 현대인은 얼른 마음이 내키질 않았습니다. 예수 제자 중의 한 사람이던 도마가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했던 것처럼, 현대인은 그 젊은이에게 다시 캐묻습니다. "당신이 저 동산 주인의 아들이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그때 그 젊은이는 자신의 두 손과 허리와 두 발을 가리키면서 "보십시오, 내가 당신을 찾아오느라고 이렇게 가시에 찔리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한 뒤, 그는 현대인 앞에 피가 흐르는 그의 두 손을 펴 보입니다. 그제서야 현대인은 그 젊은이 앞에 무릎을 꿇고,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한 뒤 말했던 것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20:28)이라고 고백합니다.》그리고 동산 주인의 아들을 따라 <생명나무>가 있는 인간의 본향으로 돌아갑니다.

<생명나무>가 있는 인류의 본향으로 가는 길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본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오라시는 말씀을 듣고 목마른 자의 심정으로 예수 앞에 나오는 사람은 <생명나무>가 있는 본향으로 값없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 14:6)

<생명나무>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강 좌우에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케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며 <생명나무>를 즐기는 성도가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됨을 뜻합니다. 이와같은 에덴 동산의 회복은 일찍이 에스겔을 통해 예언하셨습니다.

(겔47:6-12)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생명나무>가 없는 세상은 마치 생물이 전혀 살 수 없는 사해와 같은 곳, "소금의 땅"입니다. 그러나 어떤 고기나 생물도 살 수 없는 소금의 바다, 소금의 땅일지라도 그곳에 생명수의 강이 흘러 들어가면 그 땅과 바다는 소성되어 모든 생물들이 번성하게 되고 그 강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는 풍부하고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게 됩니다. 이처럼 에스겔을 통해 예언한 에덴 동산의 회복이 요한 계시록 마지막 장을 통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알파되시는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었으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에덴을 역시 오메가되신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하시고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악을 뿌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열매들을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인생을 마무리짓고 수확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여러분 인생이 <생명나무>가 없는 소금의 땅에서 시작되었다할지라도 오메가되시는 예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여러분의 삶은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로이 로버트슨은 미해군 병사였습니다. 1941년 12월 6일,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한 함정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복무하던 그들은 360대의 일본기 습격을 받고 수라장이 됩니다. 로버트슨은 기관포로 달려갔지만 거기에 있는 것은 연습용 탄환뿐이었습니다. 실탄이 보급되기까지 15분이 걸렸습니다. 15분 동안 그는 기관포에 앉아 소리만 내고 싸우는 시늉만 했던 것입니다. 철저하게 앉아서 파괴만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짜의 무력함과 허무함을 톡톡이 맛보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어느 날 그는 성경공부 그룹에 참석했습니다. 열 명쯤이 둘러앉았는데 인도자가 성구 한 구절씩을 돌아가며 외워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버트슨 병사가 암송하는 성구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을 앞선 사람이 외워버렸습니다. 자기 차례가 왔을 때 그도 같은 성구를 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교회 한 구석에 앉아 자기 자신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나는 가짜다."하는 결론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가짜였습니다. 애인 노릇도 가짜였습니다. 실탄 없이 공포를 쏘고 있는 자기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며칠을 반성하고 결심하고 진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진실하게 예수 믿고 진실한 친구, 진실한 애인, 진실한 인간이 되기를 힘썼습니다. 그후 로이 로버트슨은 한 때 빌리 그레함 전도단의 주역이었고 그후 트로트만과 함께 네비게이터(청년신앙훈련단체)를 창설했습니다. 그는 실로 진실된 기독교인으로 복음전도의 많은 열매를 맺어 알곡과 같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은 어떠합니까? 가짜가 아닙니까?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가장 무도회에서 탈을 쓰고 춤추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진실한 애인, 진실한 아내, 진실한 아버지가 되어있습니까? 예수를 따르는데 심각성이 있습니까? 진실한 제자가 되어있습니까? 공포를 쏘는 포수처럼 소리만 요란한 것이 아닙니까? 가짜, 가라지, 거짓된 무리들은 결코 <생명나무>의 본향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나의 오메가 곧 나의 인생을 끝내는 분, 나의 인생을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 앞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위선적 요소, 거짓된 부분을 말끔히 털어 내시고 오메가되시는 예수 앞에 여러분을 삶을 맡기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오메가 되시는 예수 없이는 여러분의 삶이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서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삶의 오메가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최후의 심판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여러분 인생이 어떻게 끝이나든 그 끝이 멀리 있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인생의 오메가, 마침표는 수에 칠 가치가 없는 여러분 코밑에 있습니다.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인생의 오메가이신 주께서 호흡을 취하시면 당일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시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생명이 바로 여러분 코밑에 달려 있는 만큼 종말의 때가 가까이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계시록 말씀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다시 말해 회개할 기회가 앞으로 얼마든지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는 여러분이 숨을 한번 들이쉬는 그 순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보다 깨끗하게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빈껍데기, 가라지의 인생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복있는 자는 세상에서 잘 되는 자가 아니라 날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즉 하나님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깨끗이 하는 자들이 복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실락원>을 쓴 영국의 문호 존 밀턴은 그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놓고 있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접근하면서 하와를 하늘 나라의 여신과 같이 아름답다고 칭찬합니다. 여성의 허영심에 대한 호소입니다. 그런 뒤에 뱀은 하나님이 정말 이 동산이 모든 나무 열매를 다 따먹지 못하게 했느냐고 반문합니다. 일개 짐승인 자기도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는 이 열매를 왜 인간인 하와에게는 못 따먹게 했느냐고 하면서 인간의 교만심에 불을 붙여 유혹합니다. 그러면서 설사 하와가 그것을 따먹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정말 화를 내시겠느냐고 하며, 오히려 선과 악의 지식을 알게 해주는 엄청난 발견에 비해 하나님은 그까짓 사소한 범과를 문책하시지 않고, 그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무릅쓴 그 용기를 칭찬할지도 모른다고 권유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신과 같이 되어 보려고 하는 욕심에 인간으로서는 넘지 못할 장애물을 넘으려고 하다가 그것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말씀의 경계를 넘어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허영에 좇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죄 지을 용기보다는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는 용기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마라나타!"(주여 속히 오시옵소서!)라며 언제라도 다시 오시는 주님을 소망할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로 <생명나무>가 있는 여러분의 영원한 본향에 돌아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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