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목사

 

교회소개
담임목사
선교활동
게시판
방명록
홈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cross01b.gif 오직   성령 cross01b.gif
                   (이동희목사사도행전설교Ⅰ)

 책머리에

이 책은 나의 사랑하는 평강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매주 발간되는 설교지 <말씀의 샘>에 실렸던 것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교회의 역동성은 물론 가장 중요한 인간성 회복에 있어 근거와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靈), 성령(聖靈)이 부어져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관계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세 가지 형상 즉, 하나님의 불멸성, 지력(智力), 자유의지, 기타 여러가지 정서를 포함하는 자연적 형상과 인간 외에 다른 생물을 주관하는 정치적 형상, 하나님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순결성, 진실성 등이 인각(印刻)되어 있는 도덕적 형상 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웨슬레).

인간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나 범죄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성육(成肉)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한 인간의 죄를 십자가로 해결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 성령이 인간의 영에 거(居)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잃어버렸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 이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밝히며 의지와 감정을 바로 잡으며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영과 육을 아울러 정결케 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희열을 맛보게 하며 우리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연합을 실현시켜 주며 우리로 하여금 양자(養子)로서의 확신을 가지게 하며 창조주의 모습을 본받게 하십니다"(웨슬레).

진정한 인간성 회복은 성령이 몸과 혼, 그리고 영을 온전히 지배할 때 이루어집니다(The Spirit has more of me!). 누가복음 12:49의 "불"은 성령의 불로서 복음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처분(處分)하시는 그의 성역(聖役)을 가리키며 소멸시키며 정결케 하는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 책을 읽는 이 마다 성령의 불을 던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변화의 주체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책을 "성령의 불을 던지자!"는 표어 아래 세계 복음화의 기치를 높이 든 나의 사랑하는 평강 교회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삼가 바칩니다.

1996년 성탄절

야음(也音) 산 기슭에서

이 동 희 목 사

   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 오직성령-변화의 주체(1:1-11)
 2. 교회 태동(1:12-26)
 3. 통일 주체-성령(2:1-13)
 4. 우리가 어찌할꼬?(2:14-41)
 5. 성령받은 교회의 모습(2:42-47)
 6. 삶을 변화시킨 이름(3:1-10)
 7. 유쾌하게 되는 날(3:11-26)
 8. 비범한 사람이 되자(4:1-22)
 9. 기도와 사랑(4:23-37)
10.사랑의 공동체(5:1-11)
11.표적과 기사(5:12-16)
12.생명의 복음(5:17-42)
13.일곱 집사(6:1-7)
14.천사의 얼굴(6:8-15)
15.최초의 순교자(7:1-8:3)
16.그 흩어진 사람들(8:1-25)
17.빌립의 전도(8:26-40)
18.사울의 회심(9:1-9)
19.형제 사울이여!(9:10-19)
20.변화된 삶의 모습(9:19-31)
21.선행과 구제(9:32-43)
22.기도와 구제(10:1-8)
23.화평의 복음(10:9-48)
24.생명얻는 회개(11:1-18)
25.최초의 이방 교회(11:19-30)
26.교회의 힘(12:1-25)
27.선교하는 교회(13:1-3)
28.능력 선교(13:4-12)
29.역사의 소망-곧 예수(13:13-41)
30.수용과 거부(13:42-52)
31.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14:1-28)

 


1. 오직 성령(변화의 주체)


  "(행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행1: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행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행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 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행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통해 증거되는 과정과 그 결과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근원적인 동력(動力)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게 되었음을 상세히 기록했지만(눅 5:1; 8:11, 21; 11:28) 십자가 이후에는 교회를 통해 전파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게 되며, 그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행 4:29,31 ;6:2 ;8:4, 14, 25 ; 10: 36 ;11:1 ). 둘째, 기독교의 역사성과 복음의 진실성을 밝힘으로써 기독교가 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임을 변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유대인들에게는 기독교가 반율법적인 것이 아니라 조상들과 맺어진 언약(covenant)에 근거한 것임을 변증하며, 복음 증거자들을 반(反)로마적 선동가로 몰아붙이는 모함에 대해서는(16:20, 21; 17:7 ;18:13 ;24:5-9) 그 부당성과 터무니없음을 확연히 밝히고 있습니다(13:6-12 ; 16:35-39 ; 18:12-17). 셋째, 기독교가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세계적인 참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로 대표되는 이방인 교회가 서로 상충(相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소망과 한 복음 안에서 하나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12장은 베드로의 행적을, 13장-28장은 바울의 행적을 뚜렷이 병행하는 형식으로 기록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유대인들이 이해하기 곤란한 것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고 하나님이 다른 국민에게는 소용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빌립이 사마리아인(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스데반이 이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고 그 때문에 순교하는 것과 고넬료를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바울이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각 민족을 구원하는 것을 보여 주었고, 15장에서는 교회가 이방인들을 유대인과 같은 조건으로 받아들인다는 결정을 내린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누가는 기독교는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런 것들은 부차적(副次的)인 목적들입니다. 누가의 주 목적은 1장 8절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의 전체 교훈은 지금도 예수님의 생애가 그의 교회 안에서 성령을 통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 계승하는 교회의 이야기들입니다. 위 성구는 우리에게 교회가 증인의 일을 하기 위해서 권능을 어떻게 받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권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탄생케 했으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할 수 있도록 역사(役事)하는 성령은 무엇이겠습니까? 성령을 종종 보혜사(保惠師, comforter)라고 부르는데 이는 '용감하다.'는 의미의 라틴어 '포르티스'(fortis)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란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주시는 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시카고의 어느 상점에 화재가 나서 다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그 상점이 이제는 폐업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잿더미가 된 상점 앞에 간판이 나붙었는데,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집의 모든 것은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와 자식들과 희망은 타지 않았습니다.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영업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실망하고 슬퍼할 때에도 성령의 사람들은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언제나 새로온 소망과 힘, 그리고 위로와 용기를 주시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믿음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주시는 보혜사 성령이 교회 탄생 기념주일을 맞아 더욱 더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지금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의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구약 성서에 나타난 여호와의 절기들을 통해 성령의 약속이 예표적(豫表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번째 절기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민족 해방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장자(長子)재앙이었습니다. 이 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그 장자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왕 바로는 결국 그 재앙 앞에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주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보혜사 성령이 임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절기는 무교절입니다. 이 절기의 특징은 집에서 누룩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레23:6) 이 달 십 오 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 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레23:7)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레23:8) 너희는 칠 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 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출12:18) 정월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여기 "무교병"을 먹으라는 것은 누룩을 집안에서 완전히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누룩은 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나타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당연히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이 되신 예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의 보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고전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세번째 절기는 초실절(Feast of Firstfruit)입니다.

  "(레23: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23: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레23: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23: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23: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레23: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 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수확한 곡물의 첫 열매는 반드시 제사장에게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 첫 곡식은 내년의 더 많은 수확을 보장하는 의미로 주 앞에서 흔들어 바쳐졌습니다(요제).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후 있을 더 큰 부활의 보장이며 첫 열매임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이들 세 절기들을 살펴 볼 때,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이며, 무교절은 성도들의 구별된 생활을 예표하는 것이며, 초실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 초실절을 때때로 오순절(五旬節)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성령이 내려와 성도들 가운데 거하시게 된 날이 곧 이 날로서 우리에게는 주로 오순절로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이란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다음 성구에서 알 수 있습니다.

  "(레23:15)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레23:16)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오순절(칠칠절)은 유월절로부터 정확하게 50일째 되는 날 거행되었습니다. 오순절을 가리키는 헬라어 "펜테코스트"(pentecost)는 "50번째"라는 뜻인데 이 예표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50일째 되는 그 오순절날에 이루어졌던 것입니다(행2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1500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리라는 약속을 주셨고, 신약을 통해 우리는 그의 강림이 오순절날에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성구에서도 성령이 약속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욜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이 말씀의 성취는 오순절에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성취의 과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음의 성구들은 성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약속하시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수께서 아직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는 그의 삶과 역사하심의 의미가 제자들에 확실히 인식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구세주로 보았으며 자신들에게도 분깃이 돌아 올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자 낙심에 빠지게 되었고 그들은 소망없는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충격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 예수께서 보내시겠다고 하신 다른 보혜사에 관한 약속을 곰곰히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다음과 같이 확증하셨습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분명히 제자들은 성령이 오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생활과 사역에 전적인 변화를 가져 오게 했던 것이 바로 그 증거들입니다. 성령이 안 계셨더라면 그들은 절망 가운데서 삶과 사역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 사실 자체가 그들 제자의 수를 증가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나 부활의 몸을 직접 보여 주셨지만 여전히 담대하지 못하였고,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예수를 체험했지만 여전히 낙향(落鄕)하여 예전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요 21:1-14). 성령의 권능이 임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삶이 전혀 새롭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즉 오순절날 3000명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제자들의 공포와 패배를 영광스러운 승리로 바꾸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이 예수께서 약속하신대로 강림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 역사에 있어서 새 날이 밝아 온 것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세워진 교회는 날로 확장되어 당시 유럽을 시작으로 하여 세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모든 문명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과히 성령은 교회탄생케 하였고, 그 교회를 통한 성령의 권능은 세상과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개혁의 주체, 변화의 주체로 역사(役事)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통한 성령은 한 개인과 더불어 나라 민족의 역사를 변화시키는 개혁의 주체인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 한 사람이 성령으로 변화되었을 때 영국의 부패한 사회가 변화되어 산업사회의 번영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트루니에'라고 하는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위스에 30년 동안 정신과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러 다녔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대개 정신병자들은 그 원인을 분석해 보면 과거의 괴로왔던 일이나 어렸을 때 받았던 고통이나 충격이 있는데, 그들의 의식 속에서 그런 것을 찾아내어 고치는 것이 일반적인 치료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의식을 분석하고 과거를 분석해 보아도 그녀의 병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트루니에는 정신과 의사이면서 그리스도인이었기에 이 여자와 같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도록 도왔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여자는 자기의 잘못된 것을 낱낱이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30년 동안 정신과 의사들이 진단하고 분석해 보았어도 밝힐 수 없었던 그 여자의 병이 갑자기 치료되면서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황홀한 자유가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예수님이 나를 고쳐 주셨고 나는 주님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행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예수 전 시대에는 성령이 늘 사람들 위에(upon) 내려 오셨지만, 이제는 성령이 사람들 안으로(in) 오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간 역사에 대한 통치권을 선포하기 위해 내려오셨을 때 두 가지의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곧 바람과 불이었습니다. 성령의 오심이 마치 바람과 불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바람의 상징은 다음의 성구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무도 그의 존재와 힘에 대해 부인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거듭남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役事)도 이와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르신 말씀(요 3:8)은 죽은 죄인들에게 신적인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 성령 곧 "호흡"(바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면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인격과 생활의 변화를 보면 성령의 강림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윌리엄 제임스(W. James)라고 하는 유명한 심리학자에게 어떤 사람이 "영감(inspiration)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하자, 제임스는 "난 설명할 수 없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분은 보스톤에 있는 필립스 브룩스라고 하는 목사님이오. 그 분께 물어 보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적인 한계를 나타내 주는 좋은 예입니다. 어떤 사람이 변화받고서 거듭났다고 하자 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예수님이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모르겠는데요."
  "몇 살 때 세상을 떠나셨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아니,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예수님 믿는다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지적(知的)으로는 알지 못해요.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부터 게을렀던 내가 부지런해졌고, 아내에게 못된 짓을 하던 내가 진실한 남편이 되었고, 과거에는 거짓말과 악행만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변화된 것은 분명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삶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지식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거듭남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근본적인 개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두번째 상징은 불이었습니다. 유대인에 관한 한 하나님의 임재는 항상 불로써 상징되었습니다.

  "(출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19:18)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왕상18: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성령은 "소멸하는 영", "소멸하는 불" 등으로 말합니다.

  "(사4:4)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히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말3: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말3: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거했습니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성령께서 오셨다는 위대한 진리를 인간들에게 분명히 밝혀 줄 수 있는 더 이상의 적절한 상징은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며 깨우치시며 정결케 하시는 능력을 바람과 불처럼 우리에게 적절히 보여주는 상징도 없을 것입니다. 성도가 무지 중에 혹은 깜박잊고 성령의 오심을 구한다면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비기독교화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면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들에게 와 계십니다.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제 모든 일을 멈추고 성령을 주신 데 대해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시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성령은 모든 성도들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구석에서 그는 은혜로운 역사를 계속 이루어 나가십니다(성령의 무소부재의 속성).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살후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미국의 애리조나 주에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인디언들에게 세금도 면제해 주었습니다.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국가적인 보호와 혜택을 받아서 살고 있는 인디언들이 거의가 알코올 중독에 걸려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그곳에 사는 백인들은 혜택이 전혀 없어도 윤택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의 집이나 거리는 더럽고 추하고 무질서하였습니다. 술병을 하나씩 손에 들고 비틀거리면서 거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미국 사람들이지만 세금도 내지 아니하고 보호구역에 사는 인디언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것은 조건과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제도나 사회보장제도, 정치적 발전 등이 아무리 잘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자유와 정의의 사회를 이룩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길은 인간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지식이나 경험을 통해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참한 인간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은 오직 성령의 능력뿐입니다.
  세상에서 교육의 참 모습을 <몸과 마음 닦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튼 고등학교의 신사교육, 신라의 화랑도, 동방종교의 참선과 명상, 무예(武藝)와 예락(藝樂), 의전(儀典)과 의식(儀式), 음악 미술 문학에 대한 조예, 자연속의 관조화 생명예찬, 문화재 음미, 역사기행, 운동시합의 페어플레이, 지옥훈련의 힘겨움, 갈등조정의 훈련.... 등. 이런 것을 말하자면 교육의 기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 교육의 현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네 학교 교육은 심신의 살찌우기가 아닌 스트레스 주기, 피로와 짜증 주기, 갈등에 시달리게 하기, 쓸데없는 것 많이 외우게 하기, 싫은 데도 억지로 무엇을 하게 하기, 진절머리나게 재미없게 살게 하기,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기, 아니 사람이 도대체 무슨 재미와 낙으로 살아야하는지 모르게 하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고3 아이들 사는 것을 보면 이건 숫제 사람의 삶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곤충일 뿐이다. 학교에 가도 시험, 집에 가도 시험, 시험, 시험.... 우리는 이런 식의 <살리기>아닌 <죽이기>를 교육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세상 교육은 결국 근본적으로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참 교육의 시작을 성령으로 시작합니다. 인간은 인간에 의해 "그 몸과 마음이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새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옛 사람을 뜯어 고치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否定)하게 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완전히 죽게 하므로서 성령이 내주(內住)하여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인도하시는 주는 다름 아닌 성령 자신입니다. 세상과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교회를 탄생시킨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 운동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 영광과 승리로운 삶으로의 변화와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와 나라 민족의 근본적이고 복된 개혁과 변화를 위해서는 오직 "바람과 불"같은 성령의 맹렬한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야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에 오직 성령의 권능이 충만하시어 이 시대의 참된 개혁과 변화의 주체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이 홀연히 변화될 때까지 성령의 권능은 성도 여러분들과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 교회 태동(胎動)        

 "(행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행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행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1: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행1: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행1:17)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행1: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행1: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행1: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행1: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행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1:23)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행1: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행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행1: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교회, 즉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는 말씀이 성취되는 교회의 태동은 평범한 개인 집의 다락방에 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그 곳은 잘 알려지지않은 곳이었으며 120명이 머물기에는 아주 협소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주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였던 곳입니다. 교회 역사상 복음의 큰 운동들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모인 그 가운데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200년 전 이야기입니다. 영국에서 몹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플래처 크리스챤(Fletcher Christian)이라는 지도자를 단장으로 하여 바운티(Bounty)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남태평양 피트컨(Pitcairn)섬에 가서 상당한 수의 인디언들을 설득하여 작은 공동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9년 뒤 집단 사회는 실패하였습니다. 보통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 작은 사회에서도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열두 건의 살인, 폭력, 성도덕의 문란, 알콜중독자 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건의 자살 사건이 있었는데 그 장본인은 지도자인 플래쳐 크리스챤이었습니다. 바운티 집단 사회의 지도자 중의 하나인 존 아담스(John Adams)씨는 어느 날 창고를 정리하며 영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성경 한 권을 발견하였습니다. 9년 동안 아무도 읽지않은 책이었습니다. 아담스 씨는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두 달 동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구세주 예수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존 아담스는 배에 타지 않고 한 권의 성경을 들고 피트컨 섬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니콜슨이 쓴 존 아담스의 실화 전기(傳記) <피트컨 사람들>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피트컨 섬 사람들은 문명한 영국인들의 영향으로 불과 9년 사이에 술주정뱅이들이 되고, 폭행자와 성적인 문란자들이 되었었다. 그러나 존 아담스가 발견한 책 한 권은 아담스 자신뿐만 아니라 섬 전체가 소생하는 새 계기가 되었다."
  구약 성경 느헤미야 8장을 보면, 학사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회복시키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하시여 재건해 가시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느8:1)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느8:2)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느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느8:4)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 그 우편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 좌편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느8:5)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느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말라 ......"

  죠지 뮬러 목사는 영국에서 3천명 이상의 고아를 돌 본 사람으로 '사랑의 아버지'란 칭호를 받은 분입니다.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하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평생에 성서를 100회 통독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싫증이 난 일은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웠고 읽을 때마다 힘을 얻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54년 간의 경험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처음 3년 간 성경을 안 읽었습니다. 그 때 나는 신자로서의 기쁨도 사명도 느끼지 못한 죽은 크리스챤이었습니다. 나는 그 2-3년 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생활의 활력은 날마다 성경을 읽느냐 안 읽느냐 하는 문제와 정비례합니다. 성경읽기를 일과로 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은혜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는 여러분들에게 오순절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시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시19: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시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19:11)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최초의 교회 창립을 위한 멤버(회원수)는 120명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수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 강력한 영적 군사는 아니었습니다. 현재의 기독교인 수에 비하면 극히 보잘것 없는 소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이라는 위대한 위업을 수행해나가는데 있어 바로 이들을 사용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약점이 많은 무리들이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들을 사용하시고자 할 때는 그 약점은 얼마든지 보충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최초의 교회는 남녀로 구성되었습니다. 다시말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아무 차별이 없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구약의 교회에서는 남자와 여자간에 뚜렷한 구별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한 개인으로서는 위치를 얻지 못했고, 단지 그 여자가 속한 가정의 남자에 의해 교회에 속했으며 남자가 그 여자를 대표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자도 개인의 능력에 따라 지위를 차지하고 그의 남자 동료와 상응하는 권리와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남녀 누구나 하나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능력은 합심하는 곳에서 더욱 많아지는 법입니다.
 최초의 교회 창립멤버는 유명한자들과 무명한 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기독교회는 결코 어느 한 계급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 지혜있는 자와 지혜없는 자, 귀족과 평민 등 모두가 공동의 신앙고백과 주님께 대한 공동의 예배와 공동의 봉사에서 함께 만나고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통일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구성원은 모두 한 마음을 이루었습니다. 거기에는 불화의 정신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통일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통일성을 몸(육신)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또한 위의 말씀을 보면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는 과정이 바로 성령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연합, 통일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합, 통일의 요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엡4:3)...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를 그 몸으로서 세례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내주하시므로 하나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실로 통일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위대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행위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고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되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랑으로 여길 만한 것도, 뽐낼 만한 것도, 또 어떤 사람을 지배할 만한 것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약교회에는 계급조직이 없습니다. 다양한 은사들과 다양한 직분이 있을 뿐이지 계급조직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상층계급이나 하층계급은 없습니다.

  "(고전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 말씀은 분열을 멈추고 하나됨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 안에는 "한 새 사람, 새 몸, 새로운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지위에 구별이 없으며 민족성, 인종, 계급, 성(性)이라는 모든 장벽이 제거되고 "한 새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 모두가 하나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요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은 하나되는 방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뉴저지 주에 있는 드루대학(감리교계통대학)에 몹시 가난한 필리핀 학생 한 명이 유학해 왔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첫 주일날 아침 기숙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 밖에는 의젓한 중노인이 우산 두 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궂은 날이었습니다.
  "학생, 나는 이 학교 교수 중의 한 사람이오. 이 마을에 아주 설교가 좋은 교회가 있는데 나와 함께 가보지 않겠소?"
  하며 우산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이 교수의 권고 때문에 마지못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마침내 학부 4년 동안 계속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그는 사명감까지 생겼고 결국 같은 학교의 신학부까지 3년 더 다니고 졸업하게 되었으며 필리핀에 돌아가 목회를 하다가 감독에 피선되었습니다. 그는 감독 취임식에서 '두 개의 우산'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습니다.
  크리스챤은 이 대학 교수처럼 두 개의 우산을 가져야 합니다. 한 개는 자기의 이름으로 쓰는 것이고, 다른 한 개는 예수의 이름으로 쓰는 우산입니다. 비오는 날에 한 교수가 우산을 들고 외국에서 온 초라한 학생의 기숙사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이름이 뒷받침하고 힘을 주지 않았으면 전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교수의 겸손과 사랑이 그 둘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했습니다. 그 교수의 겸손과 사랑이 가난한 필리핀 학생을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였습니다.
  사랑과 겸손은 하나되게 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지하 묘지에서 만날 때 다음과 같은 예화를 즐겨 들었다고 합니다. 한 총각이 처녀를 미칠 듯이 사랑하였습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밤늦게 연인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처녀에게 날 좀 방안에 들여보내 달라고 청했습니다. 처녀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요"(It is I)
  그러나 방 안에서 처녀가 대답하였습니다.
  "이 방안은 너무 좁아요. 한 사람 밖에는 들어 올 수가 없답니다. 가세요!"
  그는 슬픔을 잊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는 처녀가 왜 자기를 거절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처녀도 자기를 사랑하는 게 분명한데도. 몇 년을 떠돌아 다니다가 마침내 한가지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날 밤 늦게 그는 다시 처녀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요?"
  하고 안에서 처녀가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입니다."(It is you)
  그러자 문이 열리고 연인이 뛰쳐나와 그를 껴안았습니다.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천국은 이 우주에서 가장 좁은 곳입니다. 그 곳에는 다만 한 분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분과 하나가 된 사람들만이 그 곳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불사조와 거북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수(數)가 암살당했습니다."
  사랑은 복수(複數)와 공존(共存)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영혼과 마음이 하나입니다. 솔로몬왕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6:8)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아6:9) 나의 비둘기,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나..."

  그리스도의 마음, 즉 겸손과 사랑을 품어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이 충만하게 부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요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여러분이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바로 사랑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전도 방법은 커다란 부흥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놀라도록 많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합이 우리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된 교회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는 하나입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는 전도합니다.  하나된 교회는 전도합니다.
  어떤 교인 하나가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는 전도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늘 별로 효과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로마서 5장 8절에서 크게 와 닿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후부터 이 교인은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이 전에는,
  "저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사람이 지나가는군"
  하고 생각했는데 그후에는,
  "저기 하나님께서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사람이 지나가는군"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는 눈이 달라지자 전도도 잘 되었다고 합니다.

  "(살전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최초의 교회창립 멤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남자 지도자로서 사도가 있었습니다. 첫째, 그 중에서도 뛰어난 세 명이 있었는데 베드로.요한.야고보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으로서 행동의 사도입니다(요 18:10). 요한은 주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의 사도입니다(요일 3:18, 4:7). 야고보는 요한의 형으로서 순교를 당했는데 아마도 용감하고 열정이 특출했던 것 같습니다(눅 9:54). 둘째 계층으로 5명의 사도가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맨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쫓았던 자 중의 하나이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입니다(요 1:40). 빌립은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만난 자로서(요 1:43) 영적 열망을 표시한 인물입니다(요 14:8). 도마는 디두모라고도 불리우며 의심과 의혹의 사람입니다(요 20:25). 또한 한 때는 우울증의 기미도 있었으나(요 11:16) 열정적인 헌신을 한 자였습니다(요 20:28). 또 바돌로매라고도 불리우는 나다나엘은 간사한 것이 없는 정직한 사람입니다(요 1:47). 마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리스도를 쫓았으며(마 9:9)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 부류로서 세 명의 사도가 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인데 가끔 작은 야고보라고 불리웠습니다(막 15:40). 비록 작은 야고보란 이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지만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열심당원이라 하는 시몬은 가나안인 시몬이라고도 불리우는데(마 10:4) 그는 열심으로 유명한 것 같습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다대오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아마 따뜻한 성품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는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상의 11사도 외에 우리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지도자로서의 위치와 평판을 얻었습니다(행 15:13, 갈 1:19). 여성지도자들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살로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수산나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최초의 교회가 태동하기 위해서 그들의 하는 일은 예수께서 약속한 것을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겔36: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겔36:38) 제사드릴 양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떼 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일지라도 그것이 이루어 지기를 구하여야(기도) 되는 것입니다.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기도가 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교회의 출발과 교회의 힘, 능력은 바로 기도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와 일은 병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 가운데 기도는 많이 열심히 하는데 봉사하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칫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영적 우월감에 빠지게 되어 교회의 조화를 파괴하고 교회의 연합을 깨트리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미신화(迷信化)를 초래하게 됩니다. 반면에 봉사는 열심히 하는데 기도를 등한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봉사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영적 힘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봉사의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게 됩니다. 봉사(일)의 신성화(神性化)를 막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마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즉 그들은 비어있는 사도의 자리를 채우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12라는 수는 예수께서 뽑으신 제자들의 수입니다. 교회를 출발함에 앞서 가롯 유다가 없어진 공석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12지파가 있었듯이 새 이스라엘인 교회에도 12사도로 출발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깔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기록자인 누가 자신이 그 12명의 중요성을 예수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눅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눅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눅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이 말씀은 새 이스라엘의 출발자인 열두 제자가 옛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교체는 베드로의 연설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자리에는 120명이 모였습니다. 예수가 활동할 때는 수 만명이 그 주변에 있었으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 제자가 되려는 자는 전부가 120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수는 창조적 소수로서 폭발력을 가진 복음의 씨였습니다.
  베드로의 연설은 시편을 인용하여 메시아에 대한 배신자가 있을 것은 이미 예언되어 있었음을 증언한 것이었습니다. 시편 69편과 109편을 인용하였는데 이미 시편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베드로의 연설 의도가 잘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시편 69편과 109편은 모두가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두 편의 공통점은 고난받는 자와 그 배신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이 시편을 읽을 때 <고난받는 자>는 이스라엘이며 배신자는 여호와의 언약을 이탈하는 자로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난받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 곧 참 이스라엘로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가롯 유다는 단순히 개인적 배반이 아니라 참 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대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두 줄기를 대립시켜 말했습니다. 참 이스라엘과 박해자의 줄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이스라엘이었고 그의 선택과 훈련을 받은 12제자가 참 이스라엘의 계보를 이어받았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적그리스도 편에 옮겼습니다. 이것은 영구히 공석으로 둘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열둘, 곧 참 이스라엘의 참다운 12지파를 채워야 한다고 본 것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12사도의 뒤를 이어 그 10배가 되는 120명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제자화됩니다.
  마가복음 3:14-15에는 예수께서 제자를 택하신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3:14)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3: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첫째로, 제자는 예수와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쉬울 때뿐이 아니라 고난받을 때에도 예수와 함께 하는 자입니다. 예수와 함께한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벧전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진정한 기독교인은 매일 매일 예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저 유명한 J.K.제롬이 한 늙은 구두 수선공이 지독히도 추운 겨울 날 자기 점포문을 열어놓은 것을 보고 올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왜 그러느냐고 묻자,
  "혹시 주님이 지나가시게 되면 들어오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금 여기 계시다면 우리의 생활이 어떨까?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자기 딸과 한바탕 싸우고 나서 화해하고 난 후 그 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집에 늘 계셨으면 좋겠어."
  참된 제자는 자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유다의 보충으로 두 명의 후보가 뽑혔는데(요셉과 맛디아) 이들은 모두 두 개의 조건에 맞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으로써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행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제자의 필수조건이 예수를 증거하는 전도에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제자의 내용은 귀신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을 하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 악령과 싸운다는 것은 에베소서 2:1-8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2:1)....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악령은 한 마디로 "불순종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순종하지 말라고 강하게 시험하고 유혹하는 세력입니다. 이것을 "(엡2:3)...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도록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이탈시키는 세력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악령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악령을 쫓아 해방시키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엡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우리를 죽음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은혜의 풍성함을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것이 바로 제자의 사명인 것입니다.
  흔히 살아 있는 교회와 죽어가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힘을 합하여 이룩하는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개인의 목적을 교회를 통하여 채우고 만족하려 하면 그때부터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죽어가는 교회로 전락하게 됩니다.
  30년을 목회하면서 신앙잡지 <Pulpit>까지 발행한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가 "살아있는 교회와 죽어가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 등 공간의 문제가 늘 있습니다. 죽어 가는 교회는 공간의 염려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합니다. 죽어 가는 교회는 늘 똑 같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소년 소녀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습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꾼이 부족합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씁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의 이름 알기가 어려워 애먹습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사업이 활발합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주는 자(giver)로 차 있고,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tipper)로 차 있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믿음 위에 운행되고,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 위에 운행됩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고, 죽어가는 교회는 쉬고 편안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활발히 전도하고, 죽어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가 석회화합니다."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로, 그리하여 살아 있는 교회로, 죽어 가는 이 세대를 구원할 수 있는 교회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3. 통일의 주체-성령        


 
 "(행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행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2: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행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본도와 아시아, (행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행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2: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행2:13)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금년은 한국전쟁 발발 4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물질(경제)에 가리워 "잊혀진 전쟁"(forgot war)이 되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야드베쉼이란 유대인의 민족박물관이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시 독일의 히틀러 정권이 서울 인구의 절반이 넘는 유대인 6백만 명의 귀한 생명을 처참하게 학살한 전시관이었는데, 유대인은 그 전시관에 "과거를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 말라."는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미국에서는 휴전 42주년(1995년 7월 27일)을 기념하여 위싱톤에 <한국전쟁 기념 전시관>을 10여 년 전부터 준비하여 설립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을 영원히 잊지않기 위해서 금년 7월 27일을 기하여 뉴저지주 287번 도로를 <한국전쟁 기념 도로>로 개명하기로 의회에서 결정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선 민족 분단을 초래한 전범(戰犯) 김일성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떻했습니까?
  김일성과 호네커(구동독 공산당 서기장), 이 둘은 다 분단 체제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최고권력을 누린 인물들이지만 말년의 인생은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에리히 호네커는 1971년 구동독 권력구조의 정상에 올라섰지만 1994년 5월 29일 81세의 나이로 남미 칠레에서 암으로 고생하던 중 외로이 죽었습니다. 자신의 유해가 고국땅에 묻히기를 원했다지만 끝내 그의 고향인 비헬즈키르헨이나 그의 여동생이 가족묘지를 갖고 있는 노인키르헨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산티아고에 묻혔습니다.
  이에 반해 김일성 장례식은 북한 주민의 오열과 대대적인 추모 속에 성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호네커가 죽었을 때 독일 언론들은 냉정했습니다. 짤막한 보도를 통해 그가 젊은 시절 반파시즘운동을 했고 감옥생활을 했으며 양독 관계개선과 긴장완화에 공헌한 점 등을 인정했습니다. 동시에 그가 소련의 지지를 업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 베를린장벽 건설의 총책임을 맡았으며 비밀경찰 제도를 강화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베를린장벽 탈출자들에게 총을 쏘도록 한 점 등에 대해 과오를 지적했습니다. 김일성에 비하면 호네커는 그 만큼 피를 흘리게 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호네커 인생의 황금기는 아마도 1987년 9월 그가 정상회담차 서독을 방문한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그는 국빈대우를 받았습니다. 서독 언론도 그의 화해와 공존정책을 추켜세웠습니다. 그러나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그의 운명은 천길 아래로 굴러떨어졌습니다.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린치위협을 피해 베를린 주재 소련군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호의로 소련군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을 탈출한 뒤 독일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러시아마저 옐친시대가 열리자 그는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1992년 6월 독일로 이송됐습니다. 그 뒤 그는 베를린 지방법원 법정에서 곤욕을 치렀습니다. 베를린장벽 희생자 가족들이 그를 살인혐의로 고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서 유치장 신세도 졌습니다. 그는 곤혹스러운 심문에 건강을 이유로 대답을 회피하던 중 간신히 병보석을 얻어 1993년 3월 칠레로 망명의 길을 떠났으나 말년의 가혹한 시련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15개월 만에 암으로 객지에서 죽었습니다.
  호네커와 비교할 때 김일성은 절묘한 시기에 죽음으로써 남한은 물론 미국.일본 등 세계도처에 미묘한 충격과 파장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바로 그의 죽음을 못내 아쉬워하는, 당혹스럽지만 부정할 수 없는 국민정서입니다. 그의 죽음이 처음 보도됐을 때 박수치는 국민은 매우 적었습니다. 오히려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이에 차질이 생긴 것을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마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 금방이라도 통일이 이루어질 것처럼 기대했던 것입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즉각적이고 공식적인 애도와 조의 표명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김일성의 공적이 어떠하건 간에 호네커와 비교할 때 그의 과오가 더 크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일으킨 죄악은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의 돌연한 죽음이 불러온 국민정서 흐름과 이 역사적 진실 사이에 미묘한 불협화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문화국민의 전통에 따라 아무리 원수라 하더라도 망자(亡者) 앞에서는 명복을 비는 예(禮)의 문화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무리들, 조의를 표한다고 역사적 진실에 눈을 감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므로 남북관계의 개선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다 하기 위해서 조문사절을 보내야 한다는 무리들, 메카시즘(극단적 반공주의) 선풍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무리들 등으로 사회는 균열되고 미묘한 불협화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도 인간적인 유화정책을 사용했던 다윗은 크게 낭패를 당하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망명길에 오를 때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역적(逆賊)의 무리 가운데 가담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반역의 무리들을 평정하고 환궁하게 될 때 다윗은 국민적 대화합이라는 차원에서 유다 지파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유다 지파를 회유하기 위해서 반역군 평정에 크게 공헌한 요압 군장(軍長)을 해임하고 반역군의 장수인 아마사를 임명했던 것입니다.

  "(삼하19:13)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남다른 공헌을 세운 요압의 공로를 무시하고 반역의 최일선에 섰던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았던 것은 다윗의 결정적인 실수였으며, 이 실수는 훗날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하고 맙니다(삼하 20:9,10). 지나치게 인간을 의식하거나 자기 감정에 사로잡히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실수하기 쉬운 것입니다. 환부(患部)를 칼로 째고 고름을 짜 내는 것과 같은 선행조처가 없이 무조건적으로 공동체 화합을 부르짖는 것 만큼이나 위험스러 일은 없는 것입니다. 민족 통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 상황이 아무리 변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한국전쟁(6.25)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전쟁의 인명피해는 남한에서는 사망 638,160명, 부상. 납치. 실종된 사람이 1,499,065명에 이릅니다. 북한측에서는 사망 884,279명, 부상. 실종된 사람이 3,328,763명에 이르고 있습니다(이 수치 속에는 민간인, 군인, 유엔군, 중공군이 모두 포함되며, 북한의 실종자 가운데는 월남민이 포함됨). 또한 한국전쟁을 통해 엄청난 재산손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발발 후 1952년 3월까지 입은 재산 피해에 대한 국방부의 통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반기업체 시설피해 6,874억 원, 일반기업체 건물피해 1조 1,310억 원, 일반주택 피해 3조 5,290억 원, 토목시설 피해 3,269억 원 등만 합쳐도 5조 6,743억 원이 됩니다.
 전쟁의 결과 많은 피난민이 생겨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이 618,721명, 남한내에서의 피난민이 1,714,192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산가족이 1,000만 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은 가족의 붕괴와 전쟁고아 및 전쟁미망인의 출현을 초래하였으며 인구이동은 안정된 지역공동체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족이나 지역공동체와 같은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것과 아울러 산업시설과 재산의 파괴로 인한 극심한 빈곤은 당연히 삶의 위기감을 조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6.25전후 기독교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8.15해방의 감격도 오래지않아 사상때문에 동족상잔의 피흘리는 6.25가 발발했습니다. 스탈린의 소련팽창주의 정책에 일치되어 대 일본전쟁참가는 이미 2월 얄타협정에서 한국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한반도를 분할하고 있었습니다. 원자폭탄 투하와 함께 대일선전으로 참전한 소련은 총 한 방쏘지않고 한.소국경인 두만강을 건너와 8월 24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여 사령부를 설치하는 신속성을 보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북위 38도선까지 내려와 남북을 분할하는 일에 서슴없는 행동으로 백성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예루살렘인 평양에서는 해방으로 형무소에서 출소한 출옥성도들이 한국교회 재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투옥된 목사들은 일제신사참배에 참여했던 한국교회의 정화를 위해 회개와 자숙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북한 사회에서는 일제 시대에서부터 교회 지도자들이 사회지도층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9월 신의주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목사 윤하영, 한경직 등이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함으로 해방 후 최초의 정당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뒤이어 평양의 김화식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기독교유당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심각한 불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도시마다 해방을 맞이 군중대회가 기독교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본 소련과 공산당은 북한내의 기독교 영향력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관계된 용암포사건과 신의주학생사건은 소련과 공산당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해방 후 처음맞는 3.1절은 한국교회에게는 남다른 감회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33인의 민족대표가운데 16인이 교회지도자였음을 긍지로 여기고 있는 한국교회는 거교회적으로 기념행사를 갖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묵과할 수 없는 소련당국과 공산당은 급조한 북조선인민위원회로 3.1절 행사를 주도케하여 교회중심 기념행사를 저지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는 평양, 신의주, 원산 등지의 북한 교회는 3.1절 기념행사를 예배와 함께 진행함으로 공산당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조직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수행되어갔습니다. 반공적인 교회활동을 간과할 수 없었던 공산당은 각종행사를 주일에 실시하여 교인들의 주일예배출석을 방해하였고, 정치강연을 교회당에서 강요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북한총선거일을 주일인 1946년 11월 3일로 공고하여 계획적으로 주일성수를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북한 교회는 "주일선거 반대결의문"을 발표하여 교회의 생명인 주일 성수를 지켜냄으로 종교탄압에 대한 교회의 의지를 천명하였습니다.
  신앙수호를 위한 교회의지를 쉽게 꺾을 수 없음을 안 공산당은 목사였던 강량욱을 앞세워 기독교도 연맹을 만들고 교역자들을 회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감언이설과 위협으로 목사들을 가입시켜 기독교도연맹은 김일성 지지와 주일선거 자진참여 등을 결의하여 기독교를 무력화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북한 교회는 선거에 불참함으로 교회의 참 모습을 보여주며 지켜나갔습니다.
  기독교도연맹은 기독교도연맹총회로 이름을 바꾸어 세력을 강화시켜 끝까지 가입하지 않고 버티는 교역자들을 파면, 제명하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공산당은 그들을 교회에서 추방과 투옥으로 괴롭혔으며 그들이 사역하였던 교회당은 정치학습장으로 강제징발하였습니다.
  갈수록 거세어지는 탄압을 견딜 수 없었던 많은 교역자들과 신도들은 월남하거나 기회를 놓친 이들은 6.25후퇴때까지 지하교회로 숨어들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교회만이 살아남을 수 있지만 아직도 전 지역 공산당의 손이 미치지 못한 때이기에 신자들의 보살핌 속에서 목회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일제에서 해방된 후 남한이 좌우익사상의 혼란과 서구문물 유입으로인한 가치관의 혼란 등을 겪고 있을 동안 북한은 토지개혁과 사상정리를 마치고 "남조선해방"이란 기치아래 강력한 군대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침에 앞서 그 때까지 남아있던 교회지도자들을 총검거하였으며 대부분의 교회를 폐쇄하였습니다.
  오랜 준비와 훈련으로 강화된 공산군은 소련군 탱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8월 15일까지 한반도 적화통일이라는 목표아래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끝없는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하루아침에 돌변하였습니다. 승승장구하던 공산군은 9.28수복 후 허리가 잘린채 패퇴를 거듭하였습니다.
  후퇴하던 그들은 교회지도자들과 신도들을 강제로 끌고 가다가 곳곳에서 생매장, 총살, 타살, 자살 등으로 집단살해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신도밀도가 가장 높은 평북, 용천, 의주 등은 연합군이 진주하지 못하여 어느 곳보다 많은 신자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통일을 눈 앞에 두고 기뻐하고 있을 때 중공군의 참전은 민족에게 또 한번 뼈아픈 비극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혹독한 추위로 후퇴하던 군대들을 따라 남하하는 피난민들 속에 신자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4후퇴 때 피난의 기회를 놓친 신자들은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은 북한내 교회당을 거의 불태워 교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북한에서 순교한 이들을 우리들은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나 그들 순교자의 피는 깊은 광맥처럼 북한 교회에 흐르고 있어 반드시 되살아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남한교회는 북한교회에서 출옥성도들의 교회재건운동처럼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총독의 종교정책에 의해 조직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간부였던 지도자들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교권을 쥐고 있었기에 교회정화를 위한 회개운동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일제 때 통합된 교단지도자들로서 교단 존속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각 교단들은 교단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남북대회는 무산되고 교단별로 교회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북한교회와같이 회개운동도 없었고, 해방후 정치세력에 의한 핍박도 없는 가운데 재건되었습니다.
  북한교회와는 달리 남한교회는 교권장악에 힘썼던 소수의 교권주의자들로 시달리고 있었고 월남한 목회자와 관계, 신학교문제 등으로 어수선했습니다. 1948년 10월 여수, 순천에서 일어난 반란은 남한에서의 교회수난의 시초였습니다. 호남지역에서도 교세가 강했던 이 지역에서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출옥성도인 손양원목사 아들 동인, 동신 형제의 순교와 아버지 손목사의 원수사랑의 실천, 그리고 6.25때 손양원 목사의 순교 일화는 한국교회 순교사의 꽃이기도 합니다.
  파죽지세로 몰아닥친 공산군의 침략으로 공산당의 탄압을 경험해보지 못한 남한 교역자들은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3개월 동안의 공산치하에서 다행히도 견디어왔던 교역자들은 후퇴하는 공산군에게 더 많은 희생을 당했던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당한 영.호남지역의 공산군들은 10월 중순 수복될 때까지 우익인사, 교회지도자과 신자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였습니다. 특히 전남의 도서지역에서의 집단학살은 인간임을 거부하는 악독함이었습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던 교회지도자들의 고생은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후퇴하던 공산군은 목사와 우익인사들을 색출하여 북으로 끌고갔습니다. 허약하거나 병들고 지친 사람들은 가다가 아무곳에서나 집단생매장, 총살, 찔러죽이는 등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순교, 납치 등의 인명손실뿐 아니라 교회당의 소실, 파괴 등도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으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동족간의 전쟁을 치른지 45년이 지났습니다. 빈번한 남북한의 접촉과 대화로 한반도의 통일이 성큼 다가선듯한 착각으로 지난 날의 비극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소흘히 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의 책임자는 분명하게 밝혀져야되고 신앙의 자유와  종교를 말살하려고 수 많은 목사, 전도사, 장로와 일반신자들의 생명을 빼았었던 공산정권의 죄악은 남김없이 기록되어져야 합니다.
  삼천리 화려한 금수강산 방방곡곡에 흘려졌던 순교의 피는 오늘도 쉬지 않은 채 한국교회를 지켜보고 있음을 믿음의 후손된 우리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옷깃을 여며야 할 것입니다.
  3.1운동 이후 공산주의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종교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이고,
  둘째, 그 당시 기독교회에 많이 등장한 내세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신앙운동에 대한 불만이었고,
  셋째, 사회문제나 민족문제에 대한 두 진영 사이의 노선 차이 등이 그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첫째, 무신론적이고 유물사관적인 공산주의 이념,
  둘째,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공산주의 사회건설 방법 등을 이유로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태도를 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방후 북한에서는 기독교와 공산정권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한국전쟁 결과 기독교회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매우 심한 박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북한교회에서 순교하거나 실종된 성직자 혹은 교회지도자의 명단이 밝혀진 경우만 해도 162명에 이르며, 남한교회의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의 수도 15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948개 처소의 교회당이나 기독교 기관건물이 전소되거나(243처소) 반소되는(705처소)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북한정권이 취한 정책을 보면, "반동적 장로, 목사들은 땅을 안 가졌던 자가 거의 없고 놀고 먹지 않는 자가 없는" 부르주아계급으로 규정하였으며, 따라서 '악질적. 반동적' 종교인들은 처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미제국주의자들과 연계'되었다는 누명을 씌워 체포하고 학살하는 정책을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탄압단계는 전쟁 때문에 더욱 가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종교인들이 공산정권에 가장 세찬 반대운동을 했고 유엔군의 북진을 가장 환영하고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하철의 책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에 보면 다음의 글이 있습니다.
  "지난 3년간의 조선전쟁과 오늘 남조선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미제가 감행한 무고한 인민에 대한 학살, 약탈, 방화 등 비인간적이고 야수적인 만행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약탈에 이용되는 종교의 추악하고 반동적인 본질을 말하여 주고 남음이 있다."
  기독교국가의 군대인 미군에 의해 혹독한 피해를 당했던 북한당국자들은 미국과 기독교를 동일시하여 그와같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북한교회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도자와 신도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었고, 전쟁을 통해 강화된 북한당국의 경직된 태도에서 나온 종교탄압정책에 눌려 거의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변화된 국제적 환경 속에서 북한당국은 필요에 의해 1988년 10월 평양 봉수동교회가 세워질 때까지 교회는 존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북한 기독교의 실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1946년 11월 28일 창립된 북조선 기독교도연맹이 모체로서, 1960년에 잠적했다가 1974년 다시 등장했습니다. 현재 위원장은 강영섭이고 서기장은 고기준이었으나, 고기준은 최근에 사망했습니다.
  1993년 말 현재 2개의 교회와 500여 개의 가정교회가 있으며, 20여 명의 목사와 130여 명의 전도사(책임지도원)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신도 수는 약 1만 명 정도입니다. 정식 교회당으로는 1988년 건립된 봉수교회와 1990년에 건립된 칠골교회가 있습니다.
  평양시 만경대 구역 건국동(옛 봉수동)에 있는 봉수교회의 신도 수는 300여 명인데 여성이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칠골교회(평양시 만경대 구역 칠골동)는 1992년 증축하여 규모를 늘렸으며, 김일성의 생모인 강반석의 이름을 따 반석교회로 불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예배의식은 남한과 같습니다. 정면에 십자가가 걸려 있고, 기도를 드리며, 성가대도 운영하고 가끔 특별 찬송도 부릅니다. 성경은 1990년에 만들어진 신구약 합본(1만부 발행)을, 찬송가의 경우도 그 해 4월에 만든 찬송가(401곡 수록)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헌금시 <잠자리 채> 헌금함을 사용하고 있어 남한교회의 과거를 회상케 합니다.
  세계 선교문화원장 임성기 목사에 의하면 세 종류의 교회가 북한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공식적인 교회로서, 정부에 의해서 일정하게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 교회에는 교인들이 번갈아 가면서 참석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1년에 한 번씩 교회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교회는 가정교회입니다. 북한 당국은 외국 사람들과 세계의 여론을 의식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가정교회를 허락했습니다. 지금은 약 500-1000개에 이르는 가정교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기도회와 성경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교회는 지하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철저히 비밀리에 활동하기 때문에 결코 그 정체가 아무에게도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교인 한 사람을 만들려면 매우 신중을 기해 전도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가정에서 쌀이 떨어지면(어느 가정이나 정부에서 주는 배급쌀이 정한 기한까지 가지 못하고 떨어집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쌀을 보내 줍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몇 차례 쌀을 받아 먹은 후, 지하교회는 <쪽복음> 성경을 쌀과 함께 넣어서 보냅니다. 이 전도 방법에 의해 믿음을 갖게 되면 지하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게 됩니다.
  세례는 예배에 몇 차례 참석한 후, 지하 교인들이 안전원을 가장하여 그들을 데려다가 위협과 협박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무사히 통과된 사람들이 세례를 받게 됩니다.
  북한 정권이 종교를 용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습니다. 북한의 종교단체들이나 종교인들의 활동을 보면, 주로 북한의 정책이나 입장을 지지하고 대남 비방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그치고 있으며, 순수한 종교 활동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시인 키플링(R. Kipling 1865--1936)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 동(東)은 동(東), 서(西)는 서(西), 이 둘은 결코 만나지 않으리라. 땅과 하늘이 신의 위대한 심판석상에 설 때까지." 키플링이 동은 동, 서는 서, 결코 만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분단된 한민족은 남(南)은 남(南), 북(北)은 북(北), 결코 만나 통일을 이룰 수 없는 것인가.
  1995년은 우리 민족이 잔혹한 일본제국주의의 36년 간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50주년을 맞게 되는 해입니다. 동시에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 뿐 아니라 6월은 같은 민족으로서 동족에게 총뿌리를 겨누고 죽인 6.25전쟁 4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역사의 주체가 되는 교회의 탄생을 가져 온 성령강림절이 있기도 뜻 깊은 달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통일의 주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진정한 나라 민족의 통일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교회 탄생을 가져왔으며 교회는 그 통일 과업을 수행하는 역사의 유일한 기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통일성 또는 합일성)과 다른 영(靈)들의 어지럽게 함을 대조시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4: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인간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열 사람은 함께 아수라장을 벌이고 말 테지만,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열 사람은 함께 하나를 이룰 것입니다.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려 흩어졌던 형제들이 한 마음 한 뜻, 참된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분쟁과 다툼과 불일치가 있는 곳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은 인간을 높이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진정한 통일은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강림으로 탄생한 교회를 통해서 인류는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통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인 것입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골로새서의 중심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3:3,1:19,2:9,1:14). 에베소서의 중심 사상은 그러한 사상을 발전시킨것이다. 교회를 통한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되어질 때 나라 민족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전체 사상은 제 1장에 나오는 두 개의 구절에서 요약되고 있고 있습니다(1:9-10).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핵심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을 하나로 모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부조화와 분리와 분열이 가장 불행한 사실이며, 여기서 나와 너(ich und du)그리고 나와 그것(ich und es)과의 분리,  분열, 부조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분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에베소서의 중심 사상은 자연계의 분리와 인간의 분리와 시간의 분리와 영원의 분리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든 분리는 다만 모든 인간과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될 때만이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의 근원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입니다. 당시 로마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묶이는 것을 바라보고, 세상 모든 것이 로마 보다 완벽한 충만성을 가진 그리스도 안에 집중되여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상징과 비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통일의 개념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먼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손, 발 등 도구와 지체가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화해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세째, 통일의 주체가 되는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통일된다는 사실을 전파해야 합니다.  
  "인생의 모든 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그리스도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 교회는 전 세계적이며 전 우주적인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라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교회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E.F.Scott)."

  1989년 냉전 시대의 대표적 상징을 뜻하던 베를린 장벽이 헐리고 이듬해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었습니다.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되고 1991년 8월 28일 '현존 사회주의'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이 붕괴되었습니다. 1917년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 이래 74년 간이나 통치하여 온 소련 공산당이 그의 붉은 깃발을 내리고 종언을 고하였습니다.
  그 후 세계 질서는 재편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대결인 동서의 대결에서 경제적 문제인 남북의 대결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경제 문제도 블럭화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민족과 인종을 앞세운 민족주의 고양과 인종에 의한 지역 분쟁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적 이기주의를 꾀하고 있습니다.
  세계에는 사회주의를 체제를 이념으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중국, 베트남, 쿠바, 북한이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한반도에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는 지구상 분단의 마지막 국가로 남아 탈냉전 시대에 냉전 지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분단된 국가는 4개국입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1949년 10월 1일 중국이 중공과 대만으로, 1954년 7월 21일 베트남이 월맹과 월남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이들 분단 국가들은 차례로 통일을 실현하였습니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은 적화 통일되었고, 1990년 10월3일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통일'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대만의 분단 문제는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분단국 문제로 취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면 1971년 유엔에서 대만이 추방된 후 세계의 여러 국가는 중공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대만은 중국 내 영토의 일부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분단 국가는 '우리 한반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의 주범이 김일성이었다는 사실은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년 6월 러시아 정부가 제공한 구소련 6.25관계 문서와 그 전후부터 최근까지 러시아에서 발견된 새 자료들은 김일성이 북한 정권 수립 직후부터 남침을 계획하고 스탈린과 모택동을 끈질지게 설득하여 무력남침을 감행한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끝났으나 전쟁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데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공산당의 몰락과 냉전종식에도 불구하고 6.25는 민족해방전쟁으로서 북침이냐, 남침이냐를 가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이른바 신수정주의학파의 주장이 여전히 소모적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의 장을 만들고 있는 한 6.25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혹 전쟁 미체험 세대들에게 위험하고 낭만적인 6.25전쟁관을 전파시키는 이론이 된다면 비극은 더욱 증폭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탈냉전 이후 세계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유일의 폐쇄사회인 북한은 6.25 그 날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상은 철저히 통제되고 주민들은 고립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억압과 동원체제에서 조금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금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쌀을 무상으로 제공받고 있으면서도 정전협정 파기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쟁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모두 풀고 하시(何時)라도 전쟁재발 명분을 얻어 가지고 전쟁을 재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들이 먼저 중립국 감시단과 중국 감독관을 무조건 일방적으로 철수시킨 것은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년 1개월 간의 6.25(1950.6.25--1953.7.27) 6.25라는 전쟁(한국전쟁)은 약 450만 명의 인명 피해와 산업시설의 43% 파괴, 주택 33% 완전 파괴 등의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남북한의 극심한 냉전적 대결 구도 속에서 서로 이질화된 삶의 양식과 가치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념 지향적인 가치관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집단주의적이고 조직 지향적인 가치관이 만연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유교 문화와 가치관이 온존하고 있습니다. 강한 통치 방식인 중앙집권력은 김일성 개인 숭배를 가져왔고, 김일성을 '어버이'로 호칭하는 '국가가족주의' 내지 '가족주의적 국가'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체 사상의 유일 사상적 가치관과 시혜적 가치관이 국가에서 배급하는 배급제 방식 때문에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런가하면 남한에서는 가치관이 전도(顚倒)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즉 본래적 가치가 도구적 가치로, 수단적 도구적 가치가 본래적 가치로 뒤바뀌는 사회를 말합니다. 돈이나 권력 등 외면적 가치를 중시하고, 인격. 학문. 사랑. 평화 등 내면적 가치를 경시하는 풍조입니다. 금전과 권력 지향적이며 관능적, 감각적 쾌락의 추구,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적인 경향, 연고주의 내지 정실주의, 외관을 중시하는 경향, 노동 천시, 인명 경시, 주체성이 빈곤한 순응주의, 정신적 빈곤에서 오는 반지성주의, 사고력의 열악성에서 오는 인정 편중 경향성 등입니다.
  남한에서는 천민 자본주의로 물질화된 물질 위주의 가치관이 지양되고 정신적 가치가 중시되는 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경우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완전히 통일이 되었지만 1등 국민(서독)과 2등 국민(동독) 사이에 마음의 장벽과 사회적 장벽은 아직도 높이 쌓여 있고, 과거에는 1민족 2국가였지만 이제는 1국가 2사회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라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운동은 다음과 같은 유형들이 있었습니다.  
  민족운동의 방법적인 유형을 분류하면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내 목숨을 걸고 원수의 목숨을 강요하는 피의 항쟁입니다. 갑신정변의 쿠데타, 갑오 동학란의 민중봉기나 을미의 의병, 을사의 시위연대 항쟁이나 병오. 정미의 의병, 1920년대의 만주 방면에서의 독립군 전투, 1940년대의 광복군의 대일참전 같은 무력항쟁이 그 한 갈래요, 광복회.의열단.파괴단 같은 폭격 암살단과 무수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의사. 열사에게서 보는 폭력항쟁이 다른 한 갈래며, 을사보호조약, 또는 경술국치 직후의 수 많은 순국에서 보는 자결이 또 한 갈래가 됩니다.
  둘째, 민족의 요구를 절규하며, 국제여론에 호소 청원하는 조직적 시위의 항쟁입니다. 3.1만세. 6.10만세. 학생만세 같은 비폭력 시위운동이 그 한 갈래요, 헤이그평화회의. 파리강화회의. 국제연맹 등에 대표를 보내고 스톡홀름의 만국사회당대회. 뉴욕의 25약소국회의.모스크바의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등에 대표를 보내어, 한국 독립문제의 후원을 호소하는 등의 외교항쟁이 다른 한 갈래며, 독립협회. 독립청년단. 대한외교청년단. 애국부인회나 흑우회. 공산당. 신간회. 근우회 등 무수한 비밀결사, 또한 합법적 조직운동의 항쟁이 그 또 다른 한 갈래입니다.
  셋째, 민중을 계발하고, 민의를 대변하며, 민족의 요구와 이념을 구현하는 문화항쟁입니다.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와 개벽. 조선지광 등 신문. 잡지의 언론항쟁이 그 한 갈래요, 문학.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의 예술운동과 사학. 어학. 민속학 등 국학연구운동과 각종 체육경기운동. 종교운동. 여성운동. 소년운동. 형평운동. 물산장려운동. 협동조합운동 등 사회운동으로 표현된 문화항쟁이 그 다른 한 갈래이며, 미션계의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뒤를 이어 서우학회. 기호흥학회. 호남학회. 관동학회 등이 일어나, 사립학교 설립운동과 민립대학운동 등으로 나타난 교육항쟁이 그 또 하나의 갈래였습니다.
  이제 참된 민족 구국 운동은 요한 웨슬레를 통하여 보여 주듯이 성령운동을 통한 인간성 회복과 교회의 갱신과 회복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인간성 회복과 교회 갱신과 회복을 위한 성령의 역사가 이 나라 민족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을 통한 나라 민족의 진정한 통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4. 우리가 어찌할꼬?

  "(행2:14)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2:15)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행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2: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행2: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행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행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2: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행2:26)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행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행2: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행2: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행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2:31)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2: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오늘은 맥추 감사절 주일입니다. 이스라엘에는 한 해를 절기로 시작하여 절기로 마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각종 제사들(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은 바로 이 많은 절기들(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혹은 맥추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초막절 등)을 중심으로 해서 지켜졌습니다(레위기 23장). 그 절기들의 의미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유월절이 있습니다. 유월절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고린도 전서 5장 7절에 있습니다.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여기 "우리의 유월절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장자 재앙으로서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되면 그 죽음의 재앙에서 '넘어간다'(유월, 逾越, passover)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인간이 죽음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해서 잔과 떡을 받는 것도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寶血)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유월절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살리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으심을 명백하게 보여 주는 절기입니다.
  두번째, 무교절이 있습니다. 무교절(無酵節)은 글자 그대로 "누룩이 없는 절기"라는 뜻으로 이 절기 중에는 무교병이라는 누룩이 없는 떡을 먹었습니다.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여기 "누룩"은 괴악하고 악독한 인간의 하나님을 떠난 행실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는 것은 옛 사람의 행실을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장사지낸 것처럼 장사지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교절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 즉 죽으심입니다.
  세번째, 초실절 혹은 맥추절이 있습니다. 초실절(初實節)은 생명의 첫번째 이삭을 제사장에게 가져다 드리는 절기입니다.

  "(레23: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레23: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인간 역사 속에서 사망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생명의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초실절 혹은 맥추절의 중요한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인 것입니다.

  "(고전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네번째, 오순절이 있습니다.

  "(레23:15)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레23:16)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레23:17)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행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은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드는(요제) 절기로써 유월절 후 50일째되는 날에 지켰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후 50일째 되는 날에 강림하신 성령강림절을 의미합니다. 떡 두 개는 흔히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한 지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탄생한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 안에서 인간의 모든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엡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엡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오순절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역사 속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인간의 역사는 성령의 개입을 통해 그 의미가 부여되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다섯번째, 나팔절이 있습니다.

  "(레23: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23:2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레23:25)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이 절기는 하나님과 만나는(임재) 영광스럽고도 희열과 즐거움이 넘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그 날에는 예수 믿고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일어나고, 살아서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변화되어 함께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만나는 거룩한 환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나팔절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인 것입니다.
  여섯번째, 속죄절이 있습니다.

  "(레23: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레23:28)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과의 환희의 만남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들에게는 견딜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여기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라는 말씀은 주님의 재림하시는 날, 복음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모든 사람들이 애곡과 통곡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파멸 속에 던지게 될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속죄절의 핵심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인 것입니다.

  "(계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계14: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계14: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계14: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계14: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일곱번째, 초막절이 있습니다.

  "(레23: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레23:35)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이 절기는 안식하는 절기로서 더할 수 없이 기다려지는 아주 기분 좋은 절기입니다. 이 절기에는 우리의 원두막 비슷한 초막에 올라가서 수금과 비파를 타고, 나무가지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마냥 찬양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주고 받으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내게 됩니다.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통치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안식하며 즐거워하는 축복스러운 절기입니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초막절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모든 제사와 절기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14절-42절은 세계에서 최초로 행한 기독교의 설교로서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이 설교에서 보여 주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은 모두 구약 성경에서 예언하셨던 것으로 모두 성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구약 성경 요엘 2:28-32과 시편 16:8-11, 110:1 등을 인용하며 예언 성취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재림 등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역사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23절) 그 의미와 내용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역사는 그 목적이 규정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입니다. 참다운 역사의식(歷史意識)은 예수를 증거하는 선교에 대한 사명의식(使命意識)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역사의 시작과 끝이 되며, 역사의 중심(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오순절성령강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役事)입니다. 인간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와 절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가시는 것처럼, 그 모든 제사와 절기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 인간 영역으로 들어 오셨으므로 인생도 세계도 다시는 절대로 전과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러자 "(행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증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를 보여주자 그들의 마음은 심한 찔림을 받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성취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십자가를 참으로 알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강하게 찔림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참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에 심한 찔림을 받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회개는 원래 '뒷 생각', 즉 '두 번째 생각'을 의미합니다. 종종 두 번째 생각이란 첫 번째 생각이 틀렸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게 되었고, 그 사람이 솔직한 사람이라면 마음의 변화는 그 사람의 '행위(생활)의 변화'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마음의 변화와 행위의 변화 둘이 다 포함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변하여 자기가 하는 일이 나쁜 것임을 알게 되지만 옛 생활에 깊이 빠져 있어서 그 생활을 바꾸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또 사람의 행위는 고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할 수 있습니다. 단지 변한 것은 두려움이나 조심성입니다. 그의 마음은 아직도 옛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회가 올 때 그 옛 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습니다. 참 회개란 마음의 변화와 행위의 변화를 포함한 것입니다.
  회개를 하게 되면 과거에 한 일에 대해 무엇인가가 일어납니다. 즉 과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용서가 죄의 결과를 없애주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정상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하나님과 관계가 정상화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을 통해 마음과 행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할지라도 어떻게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주어지는 성령을 따라 살게 될 때 우리 마음과 생활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며 완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신의 성품(하나님의 형상)을 이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천재적인 도둑 잭 머피(Jack Murphy)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어서 서핑(파도타기 스포츠)의 미국 챔피언이 된 일어 있어서 '머프 더 서프'(Murph the Surf)란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잘생기고 머리도 좋았는데 마음을 잘못 먹은 것입니다. 그는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1964년과 1968년에 사파이어 등 보석 40만 달러 상당을 완전 범죄로 훔쳐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여비서를 죽이려고 하다가 보석을 훔친 사건까지 모두 들통나 종신형을 받고 고향인 플로리다 주 교도소에 갇혔습니다. 마침 그 감옥에는 올란도 교도소 전도회가 맹렬히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로부터 감화를 받고 머피는 독실한 크리스챤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범수로서 15년으로 감형되어 조기 출옥하게 되었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75명의 동료 죄수들을 모범수로 만들어 감형 혜택을 받게 하였다고 합니다. 1986년에 머피가 감옥에서 나올 때(47세) 죄수 전원이 모여 밴드 반주로 찬송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를 합창하며 전송하였는데 그 곳은 감옥이라기 보다는 부흥회 도중의 교회당 같았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사회와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성령을 좇아 회개를 이룩하시므로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1: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인내에 경건을, (벧후1:7) 경건에 형제 우애를,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벧후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벧후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시는' 가운데 신의 성품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빅톨 위고는 세계적 문호로 그 이름을 날렸으나 개인 생활은 문란했습니다. 그의 심한 주색과 타락된 생활은 가정을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1841년 어느 여름 날 그의 사랑하던 딸 레오폴디느의 시체가 파리 세느 강에 떠올랐습니다. 소녀는 아버지가 바른 생활로 돌아올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남기고 세느 강에 몸을 던졌던 것입니다. 위고는 "이 비극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심판이다." 라고 외치며 며칠을 울고 회개하였습니다. 소녀의 희생은 아버지와 온 가정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위고는 정부 관리로 들어가 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후생사회국에서 일했습니다. 공무원으로서가 아니라 진짜로 몸을 바쳐 남을 도와 주는 자세로 일했으므로 그는 남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아 순조롭게 승진했으며 문교부 장관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국기인 3색기(파랑은 자유, 흰색은 평등, 빨강은 박애)제정의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소설도 더 깊이 있는 작품을 써서 1862년에는 <무정>이 출판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극심한 방탕생활에서 문자 그대로 180도 전환하여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프랑스와 전세계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기독교의 절기를 소중히 여기시며, 그 절기들을 정성껏 준비하여 지키시는 가운데 절기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의 변화와 세상 변화의 주체가 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5. 성령받은 교회의 모습

     
  
"(행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요즈음 교회 내에서 성령을 받았다는 분들로 인해 목회자들이 가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변해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여 목회자들을 우습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여러 모로 교회를 어지럽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은 교회 생활보다는 기도원을 즐겨 찾으면서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여 많은 성도들을 미혹케 합니다. 이러한 일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 경험이 있는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 성령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부작용이 두려워 성령운동 자체를 반대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곧 그 공동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생물에게는 먹고 먹히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생물의 세계에서 생존 투쟁이 벌어집니다. 그토록 뜨거웠던 초대 교회도 모든 것이 원만했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에도 항상 문제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받은 초대 교회의 모습, 즉 성령 받은 제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초대 교회의 첫번째 모습은 열심히 배우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행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사도들을 통한 설교와 성경강해 등 예수께 대하여, 그리고 구약과 그리스도와의 연결에 대하여 그들은 열심히 배웠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열심히 성경공부하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의 선교중에 가르침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초대 교회에서는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모여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오늘날 교회 교육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쉐마"(신명기 6:4-9)를 보면 우리의 교회 교육이 쉬지 않고 끊이지 말아야 하는 것임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신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地上) 사역(使役)은 가르침과 복음전파와 병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르치는 일은 예수님의 생애에 가장 강조된 사역이었습니다. 교육은 예수님의 최대의 사업이며 최대의 관심사였기에 먼저 제자들을 선택하셨고 계속 주위에 몰려 온 군중에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예수님을 랍비, 즉 선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막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요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님 자신도 그 표현이 옳다고 하셨고 자신의 메시야적 사명을 성취하시려 할 때 가르치는 교육적인 기능을 통해 수행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요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예수님의 최후적인 분부를 할 때에도,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 하심으로 오늘날 교회의 교육적 사명을 밝히셨습니다. 때문에 성령받은 초대 교회에서도 가르치는 일을 교회의 중심사건으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교육의 주체는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과 함께 하는 교육일때에만 신앙을 바르게 교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많이 읽고 가르쳐도 생활을 향상시키거나 성화(聖化)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계시되고 받아들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육의 내용이 되는 성경과 성령의 관계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히 4:12, 벧전 1:23).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생명을 낳지는 않습니다. 말씀은 성령의 역사적(役事的) 능력이 수반될 때만 효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이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서 말씀과 동시에 역사해서 신앙을 창조해 내고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도록 하지 않는 한 효력을 발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성경이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지만" (히 4:12) 성령의 사역이 없으면 그것은 효력 있게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말씀을 적용하는 한도 내에서 성경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말씀의 내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마음과 머리에 성령께서 말씀을 적용하시는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명칭이 52가지가 있는데 이 중에 성령의 교육 사역에 관한 것이 적어도 7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의 영",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과 여호와 경외의 신", "진리의 영", "보혜사", "지혜와 계시의 영" 등입니다.

  "(출28:3)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 내게 제사장직분을 행하게 하라."

  성령은 제사장의 옷을 짓는 제단사들에게 신령한 지혜의 근원이 되셔서 그들로 하여금 맡은 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사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위대한 지상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지혜와 총명의 신"이신 하나님의 영(성령)을 덧입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모략이란 좋은 충고를 줄 수 있는 능력을 암시하고, 재능이란 그 모략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암시합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에게 "모략과 재능의 신"을 역사하시므로 그로 하여금 지상에서의 교육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성령의 여러 명칭중 맨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최종적인 결과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결실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요한 복음에서만 세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의 영"이란 진리의 근원으로서의 성령을 말하며, 진리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믿는 자들의 생활에 진리를 적용시키실 수 있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보여 주고, 장차 다가올 일들을 가르쳐주며, 모든 것을 가르치며, 과거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신자들 속에 내주하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선고하며, 그리스도 부재시에 제자들을 위로하여 그리스도의 역사를 계속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 보내실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지혜와 계시의 영"은 신자들이 성령을 통해서 영적인 일들을 이해하며 하나님에 관한 "충만한 지식"을 얻도록 역사(役事)하는 것입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고전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슥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인간들은 무엇이나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이끌려 갑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새로운 소명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은 마음을 접촉하시면서 동시에 그 마음을 가르치십니다. 인간의 마음은 성령의 조명하에 들어가는 즉시 변화됩니다.  
  미국의 베이비 부머들(Baby boomer, 1950년대에 아기를 많이 낳았는데 그 때 태어난 사람들, 현재 30대)이 교회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썰물처럼 교회에서 빠져 나갔던 사람들이 어째서 밀물처럼 다시 교회로 모여들고 있을까? 여러 가지 연구가 있지만 캘리포니아대학 종교학 교수 루프(Wade Roof) 박사는 특히 "베이비 부머와 종교"에 관한 연구를 하였기 때문에 참고할 만합니다. 루프 교수는 종교로 돌아온 1천 8백만 베이비 부머들의 3분의 2가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라고 지적합니다. 단적으로 아이들에게 종교 교육이 절실히 필요해졌기 때문에 그 부모들도 아이들을 따라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루프 교수의 발표는 최근 뉴저지의 일간신문<레코드, Records>지의 조사에 의해 더 확실한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레코드, Records>지는 북부 뉴저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미국인의 종교 실태"를 조사하였는데 많은 아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갑자기 주일 학교 프로그램이 재미있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젊은 부모들이 극성스럽게 아이들을 교회에 나가도록 장려하고 데리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통계로 나온 숫자는 놀랄만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가는 부모가 48%, 한 달에 한 두번이 20%, 전혀 데리고 가지 않는 부모는 16%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응답이 54%, 약간 중요하다는 응답이 33%, 중요성이 없다는 응답은 겨우 3%뿐이었습니다.     
  그럼 왜 이토록 미국의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종교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시카고대학의 종교 심리학 교수 브라우닝(Donald Browning) 박사의 조사 발표가 적절한 대답입니다.
  "지금 미국의 가정들은 적대시할 만큼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의 위협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파도처럼 덮치는 이 악한 문화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이 부모들의 현실입니다. 부모들은 이 악한 문화와 대항해서 함께 싸울 동지를 찾고 있습니다. 마약과 자유 분방한 섹스와 폭력 등 이 거대한 악에서 학교가 아이들을 보호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부모들이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된 곳이 교회입니다."
  <레코드, Records>지가 발견한 것은 부모들의 기대는 교리를 배우게 하는데 있지 않고 도덕과 가치관을 배우게 하려는 데 교회를 찾는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황금률(Golden Rule), 즉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의 교훈 한 마디라도 배우게 해야겠다고 부모들이 주장하는 것은 학교에서는 이미 그런 교육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1780년 7월 영국에 신앙이 독실한 한 평신도 레이크스(Robert Raikes) 씨는 수심에 찬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을의 장래와 영국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범죄가 늘어가고 불결한 거리와 주택에서는 무서운 질병이 끊일 새 없어, 해마다 수백 명의 어린이들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도소 개혁 운동에 나서기도 하였으나, 출소자들이 대부분 한 달도 못 되어 다시 붙잡혀 오는 것을 보고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어린아이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교육받지 않으면 소망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어린아이들은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아이들도 주간에는 노동에 시달렸으며, 주일이 되면 싸우고 방황하며 도박 구경을 다녔습니다. 그 몸과 옷 차림새는 너무 지저분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부모들도 그들은 잘 돌보지 않았고 사회에서도 방치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한 번은 거리에서 이런 사회에 대한 걱정을, 열을 올려 가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불쑥 야유삼아 뇌까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신이 해보구려!(You can try!)"
  그 순간 레이크스의 머릿 속에 빛이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 말이 우연한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레이크스는 자기 집을 개방하여 주일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네 명의 교사를 구하여 주머니돈을 털어 교통비를 지출했습니다. 가르치는 내용은 읽기와 쓰기, 산수와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세수하고 오는 아이만 들어오게 했고, 돈이 없어 누더기 셔츠를 입을 수밖에 없는 아이에게는 새 셔츠를 사주었습니다. 매주일 아침 8시부터 저녁 예배 시간까지 점심 시간을 빼놓고는 종일 가르쳤습니다.
  레이크스의 별명은 "야생 거위(wild goose)"였습니다. 야생 거위처럼 더럽고 마구 날뛰는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크스의 주일학교 운동은 선풍적인 호응을 받아 30년 뒤에는 3천 주일 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주일 학교 운동은 그 후 5년이 지나자 미국 전역에서도 맹렬하게 전개 되었습니다. 실상 미국 학교 교육 제도의 전신(前身)은 주일 학교입니다. 2백년이 지난 오늘 미국만 해도 주일 학교의 수는 168,925학교이고, 등록된 학생수는 3천 4백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레이크스가 사망한 후 그의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적은 돈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마을의 모든 아이들에게 1실링씩과 케이크 한 개씩 사주십시오."
  레이크스가 평생의 목표로 삼은 성경 말씀은 디모데전서 4:6이었습니다.

  "(딤전4: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정신을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가르치는 일이라고 확신했으며, 동시에 그것이 마을과 국가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믿고 자기의 평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나라 민족을 바로 세우는 길은 성령받은 교회가 교육의 사명을 바로 감당할 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받은 교회의 모습은 무엇보다 교육의 주체가 되시는 성령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인 것입니다. 교육의 달을 맞아 교회의 참 모습을 성령을 통해 발견하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가는 교회가 되어질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6. 삶을 변화시킨 이름

    
   
 "(행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행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행3: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12제자들의 성령받기 전의 모습들은 자기 본연의 죄악된 심성(心性)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다양한 직업 속에서 천차만별의 성격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생활에 푹 젖어 있는 세속인들이었습니다.
  시몬(베드로)의 성격은 상황에 따라 조석(朝夕)으로 그 감정이 변하는 다혈질의 사람이었으며, 충동적이며(마 14:28), 겁이 많고 소심하며(마 14:30), 이기적인(마 19:27)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복수심과 야심이 많은(눅 9:54, 막 10:35-37)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진리를 늦게 깨닫는 사람이었습니다(요 14:8).
 도마 역시 진리를 늦게 깨달으며(요 20:14-21), 의심이 많고(요 20:26-29), 충동적인(요 11:16)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뭉쳐진 제자들을 '사도'라 칭하시고, 예수께서 친히 그들을 복음 사역자의 최선봉으로 맡기신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비롯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사도들 개인의 변화는 결국 개인의 변화라기보다 인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대학교수이며 전도여행까지 한 쟁쟁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기쁨도 없고 확신도 없는 미지근한 신앙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런던의 올더스 게이트(Aldersgate)거리에 있는 한 교회 집회에 참가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마침 그 교회에서는 지도자가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서문에는 로마서의 중심 사상인 인간은 자기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서 새 사람이 될 수 있고 구원함에 이를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많은 연구는 하였으나 피부로 느껴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 날 그 작은 집회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껴 감동이 되고 가슴이 뜨거워 오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웨슬레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활기가 붙고 용기가 나고 확신이 생겨 부패한 영국과 유럽사회의 변혁에 나섰던 것이며 신앙운동으로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와 성공을 보여준 첫 인물이 된 것입니다.
  이번 유럽 순회 기도회를 통해 재삼 느낀 바는 이렇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이태리 로마에서는, 고대 로마 문명의 폐허속에 기독교 문화 문명의 풍요로운 유산(遺産)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번째 들른  이집트에서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폐허더미 속에 변화받지 못한 아랍 회교 지배아래 빈곤의 병폐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세번째 들른 이스라엘에서는, 세상  변화의 주역인 기독교를 태동(胎動)시킨 유대교의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들른 터어키에서는, 찬란한 기독교 문화 문명의 말살을 기도(企圖)한 이슬람 종교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나라들이 축복으로 변화된 모습들과 그렇지 못한 나라들의 앉은뱅이같은 삶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이름"(6절)은 그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소개된 신앙의 대상, 능력의 근원이었습니다. 이름은 권위의 상징입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이름"만이 신앙과 능력의 기초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산 영이 되어 우리와 직접 관계하심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신앙과 능력의 근원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모든 기적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여졌습니다(행 3:16, 4:7, 10, 30). 죄의 용서는 예수의 이름으로만 이루어집니다(행 10:43). 악령추방도 예수의 이름이 나타내는 능력입니다. 이를 시험한 유대인 마술사들도 있었습니다(행 19:13-20). 박해도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받습니다(행 9:16,27-28). 헌신의 이유도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였습니다(행 15:25-26). 예수의 이름이 간판이 되고 힘이 되고 활동의 동기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유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위대한 올갠이스트이며 작곡가인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Johann Sebastian Bach)는 작곡이 끝나면 오선지 제일 뒷장에 "INDNJC"라고 적었습니다. 이것은 라틴어로 "In Nomine Domini Nostiri Jesu Christi"의 머리말입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뜻입니다. 바하는 자기가 작곡하는 음악이 결코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동기이며, 그 힘의 원천이며, 그 재주의 부여자이시며, 따라서 이 음악의 결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되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작곡마다 자신의 서명 대신 "INDNJC"라고 적어 넣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의 이름도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며 힘을 공급해 주며 기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놀라운 이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 때문에 생명과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먼저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씀을 통해서 앉은뱅이가 치유되는 놀라운 권능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씀을 받아들인 인간의 전존재(全存在)가 변화되었습니다.
  우선 앉은뱅이라는 질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앉은뱅이 걸인은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앉은뱅이라는 질병만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는 살 수 없다는 자포 자기의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오로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성전 미문"을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두 가지의 병이 모두 치료될 때에라야 온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육체의 질병만 고쳐진다면 그는 생활 환경의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또 다른 갈등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 두 가지의 고질병이 완치(16절)되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앉은뱅이는 육체의 병 고침을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 앉은뱅이는 그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자기를 미문에 데려다 주어야만 그나마 한푼의 동전이라도 만져 볼 수 있었을 것이며, 집에 들어가도 눈치밥을 먹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삶조차 이어가지 못하게 하는 환경의 변화를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 보겠다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있을 수 없었고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과 같은 생명력 없는 삶이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장애자들도 기술을 익히면 일을 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직업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앉은뱅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앉은뱅이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음을 자각했을 것이고 성인이 되어서는 그 생각이 거의 굳어버려 자신의 삶을 개척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발로 걷기도 하며 뛰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삶의 전기(轉機)를 마련해 주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그는 멀쩡한 몸으로 구걸할 수 없으므로 노동을 시작해야 하며 삶의 계획도 세워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다른 사람에 의존해서 살아왔으나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서서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처럼 수동적인 사람을 능동적으로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받기만했던 사람을 남에게 베풀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세번째로, 8절을 보면 그가 하나님을 찬미함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말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성전 미문에 앉았었지만 하나님을 찬미하기는 커녕 오히려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 겨우 연명해 가는 그에게는 영적인 문제보다는 우선 눈에 보이는 일, 육신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게 여겨 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게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라는 이름의 권세를 체험했으며 그 이름을 통해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앉은뱅이와 같은 영적 상태를 지니고 있었으나 이제는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는 영적 상태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감사보다는 원망만 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찬양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자신을 저주하거나 원망과 불평 속에 살았지만 이제 하나님께 찬양하는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적을 위해서는 사랑의 관심이 우선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돕기 위하여 명예와 부귀를 내버렸습니다.
  어느 날 그가 시골길을 걷고 있다가 거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중 한 거지가 톨스토이를 알아보고 달려와서 반갑게 말을 건넸습니다. 한참 동안 무슨 말인가를 주고 받다가 그는 친구가 있는 데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자 그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래, 그 위대한 톨스토이가 무엇을 주던가?"
  "돈이 없다는군. 그러나 그가 날더러 '형제여'하고 부르지 않겠어?"
  그는 아직도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물질적으로 가난함과 겸손함이 무엇인지를 알았지만 이 세상에는 빵에 대한 주림보다도 사랑과 관심에 대한 주림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 형제와 나눠야 하고 사랑과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3절에,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를 "보았다"는 말은 <에이돈, eidon >으로서 보통 본다는 뜻입니다. 별 생각없이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4절에, 베드로가 "주목했다"는 말은 <아테니자인, atenigein>으로서 자세히 신경을 써서 응시하는 동작입니다.
  역시 3절에 베드로가 거지에게 우리를 "보라"고 하는 말은 <부레포, blepo>로서 주의해서 본다는 뜻입니다.
  5절에 거지가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다"는 말은 <에펙소, epexo>로서 관찰한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이것을 분석해서 집필자가 전하려는 의도를 살펴보면 거지는 처음에 무심히 베드로를 보았으나 베드로는 이 앉은뱅이 걸인을 자세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길가에 앉은 거지를 무엇 때문에 자세히 신경을 써서 보았겠습니까? 거기에는 긍휼이 있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기적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중계자가 있어야 기적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경우, 베드로와 요한이 사랑의 중계자인 것입니다. 그들은 일개 거리의 거지, 신체장애자를 예사로이 스쳐 가지 않고 불쌍히 보며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지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부레포!>, 주의해서 우리를 똑똑히 보라는 뜻입니다.
  돈푼이나 바라는 그런 물질적인 안목이 아니라 정말 네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우리가 누구인지를 더 깊게 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너의 문제는 오늘 무엇을 먹고 사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즉 베드로와 요한이 발견한 보물, 은과 금보다 더 귀중한 근본적인 보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에게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깊은 진리를 앉은뱅이 거지가 얼른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아닌 무엇인가 더 중요한 것을 주겠다는 베드로에게 갈망하는 태도로 바라보는 <에펙소>가 있었습니다. 이 거지는 관심없이 바라보는 태도에서 갈망하는 태도로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기적은 구하는 자에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어느 도시에 두 맹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거리에 나가 구걸해서 연명했습니다. 그런데 한 맹인은 구걸하면서 "하나님께서 돕는 자는 도움을 받으리라."고 외쳤으며, 다른 맹인은 "왕께서 돕는 자는 도움을 받으리라."고 외쳤습니다.
  마침 그 나라 왕이 산책을 나왔다가 두 맹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왕은 자기에게 도움을 청한 맹인에게 빵 속에다 금 한 덩어리를 넣어 주었습니다. 이 빵을 받아든 맹인은 빵이 무겁고 딱딱해서 먹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옆에 있던 맹인에게 동전 몇 닢을 받고 팔아 버렸습니다. 빵을 산 맹인은 빵 속에서 금덩어리를 찾아 팔아서 더 이상 구걸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왕이 그 곳을 지나다가 여전히 구걸을 하고 있는 맹인을 보고 이상히 여겨 빵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왕께서 주신 빵은 무겁고 딱딱하길래 옆에 있던 맹인에게 팔았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탄복했습니다.
  "아, 참으로 하나님께서 돕는 자가 도움을 받았도다!"
    
  "(렘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2,700년 전에 예레미야가 인간 변화에 대한 문제를 제시했습니다.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이것은 토론의 여지가 많은 질문입니다. "타고난 피부의 색깔이 변할 수 없듯이 타고난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교육도, 종교도 어쩔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그 집안의 내력을 은근히 따져 보는 습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은 성경 전체가 변화에 대한 증언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믿고도 변화되지 않았다면 아직 변화의 능력을 받을 만큼 깊이 들어간 믿음이 못된다는 뜻이 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했던 예수 믿는 사람들의 변화를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담대해지고 예수 부활 후 50일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들이 전도를 시작하고 이기적인 생활을 버리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는 기쁨에 찬 생활을 하며, 있는 것을 서로 나누어 쓰는 등 믿기 어려울 정도의 변화가 생겼던 것입니다. 성령의 힘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고, 이 변화는 전염성이 있어서 예수 믿는 자가 "날마다 더하여 갔다."는 것이 누가의 관찰입니다.
  초대교회에서 하루 3천 명씩 예수를 믿겠다는 결신자가 난 것은 베드로가 대설교가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120명 처음 크리스챤들의 변화된 인간성, 변화된 생활을 보고 이 새 종교 속에 무엇인가 개인 변화, 사회 변화의 능력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미국의 대부흥사였던 드와이트 무디가 목사들과 좌담회에서 "교회가 부흥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자기의 영혼의 문제를 매일 5분씩만 진실하게 생각하고 기도하는 사람 20명을 당신 교회에 둘 수 있다면 당신의 교회는 틀림없이 부흥할 것이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단 5분입니다. 진실되게 5분을 기도로 바쳐 "하나님, 오늘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살게 해주십시오. 살아계신 그리스도 성령이여, 오늘 내 속에 오셔서 역사해 주소서."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성령이 오셔서 변화의 능력,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십사 하고 간곡하게 바라는 영적인 방향, 물질적인 방향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내 영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적 방향으로 향방이 잡힌 사람이 개인과 교회와 사회 변화의 주춧돌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록펠러는 그 나이 33세때 이미 1백만 달러를 벌었고, 43세에는 미국의 정유산업을 장악했고, 53세에는 세계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로페시아라는 병에 걸려 머리털 눈썹까지 빠지고, 소화가 안 되어 우유와 크레커로 연명했습니다. 뭔가 자꾸 무서워져서 보디가드가 한 소대를 이루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웃음을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1년 더 살것이라고 측근에게 선언했고 신문들도 그의 조사(弔辭)와 특집을 미리 만들어 놓고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성경을 읽다가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 날부터 거듭났습니다. 재물을 풀어 많은 교회를 돕고, 구호사업을 하고, 의학연구소를 창설하고, 대학을 세웠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꾼 록펠러는 점차 건강을 회복해서 98세까지 살았습니다. 록펠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열살 때 신문배달을 하고 주급 1불 50센트를 받았다. 첫 주급을 어머님께 갔다 드렸더니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씀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교회의 헌금제도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지금 생각하니 삶의 가치를 하나님께 둘 것인가 나 자신에게 둘 것인가를 가르치신 것이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십일조 헌금을 가르치라 그 아이들은 크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변화되어져야만 합니다. 개인도 변화되고 사회도 변화시켜야만 합니다. 변화만이 개인과 국가 사회 발전을 약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앉은뱅이 거지같은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권세있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은과 금으로(경제, 물질) 개인과 국가 사회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그래서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성전을 왕래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행3:6)....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할 수 있는 믿음과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7. 유쾌하게 되는 날

      "(행3: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행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행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행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행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3: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 (행3: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3: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3: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행3: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행3: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행3: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행3: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행3: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는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심히도 기이히게 여기며 놀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솔로몬 행각에서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분명히 이 사람이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되어진 사건입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죽인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데 우리가 증인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믿는데 바로 그 이름이 이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이 사람은 성하게, 완전히 낫게 하였습니다. 여러분들과 로마의 관원들이 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죄없이 함을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대로 여러분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곧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축복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 육신적인 불구자가 완전함을 얻은 사건은 단순히 예수께서 병고치시는 능력으로 몸은 성케하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니라 불구가 되어있는 우리 영혼, 그리고 죄악과 사망의 그늘에서 잠자고 있는 불구가 되어 있는 우리 사회 전반을 고치는 것이 주 목적임을 깨우쳐 주는 사건입니다.

  "(행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우리 사회는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처럼 정신적 영적 불구에서 완전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진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회는 분명 정신적, 영적 불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회가 "유쾌하게 되는 날"을 맞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불구가 된 자가 성하게 된 것같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 악한 것들이 주관하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와 계획하신 바와 그의 성실하신 계획에 따라 결국 회복되는 날이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유쾌하게 되는 날"은 인류가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 입니다.

  "(사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11: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와같은 이상적인 나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지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사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사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사11: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사11: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함을 통해서 가장 "유쾌한 세상", "(사11:3)...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사11: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사11: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는" 세상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지금 우리가 평가하는 식으로의 가치를 주장하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돈이 최고가 아니고 명예가 최고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최고가 아닌 나라가 올 것입니다. 죄악과 불의한 것들이 우리를 주장하던 세상이 끝이 날 것입니다. 거기에는 오직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고 찬송이 있는 나라가 올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오수나 총독이 한 때 바르세르나의 죄수선(罪囚船)을 순시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총독이 죄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 이 죄수선에 타게 되었느냐고 묻자 죄수들은 '때는 이 때다.'하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무죄를 호소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저 묵묵히 아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총독이 "너는 왜 왔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실제로 죄를 범했으므로 이런 곳에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실은 작년 봄에 불의의 재난을 당해 저희 온 식구가 끼니도 때우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그럭저럭 참는다쳐도 도저히 처자식이 굶는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어 안하던 도둑질까지 하였답니다. 처음에는 숨어 지낼 수 있었으나 결국 하나님의 노하심을 받아 탄로가 나서 이곳에 오게 되었답니다. 그러니 벌을 받아도 싸지요."
  이 말을 듣고 있던 총독은 갑자기 자기의 지팡이로 이 죄수의 등을 후려치며
  "이 괘씸한 놈 같으니! 듣자하니 이 배 안에는 모두 죄없는 사람들뿐인데 유독 너 하나만  죄인이로구나!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너같은 사람을 이 무죄인들과 같이 둔다면 하나님도 노하실 터이니 당장 물러가거라! "하고 호통을 쳐서 내보냈습니다. 죄를 깨닫고 있는 사람을 남몰래 석방시켜 준 것입니다.
  중세 교회의 부패는 성직자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황 클레멘트 5세는 재위 기간 중에 24명의 추기경을 임명했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그의 친척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성직에 족벌주의가 성행하여 종교개혁 당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성직자는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사용하신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중세 교회는 족벌주의로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가속화시켰습니다. 그러다보니 성직자들은 자연적으로 세속 권력의 노리개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수치스러운 상태로 빠져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교권주의자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더욱 더 부패하졌습니다. 중세 교회는 이사야 당시 유다 백성들처럼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아니 우리 사회와 교계도 마찬가지로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하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1: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사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1:7)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 하였고 (사1:8)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원두밭의 상직막 같이,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사1: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사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사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사1: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사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사1: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교계와 사회가 이처럼 병들고 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 운동을 전개하지 않는다면 유다 백성들처럼 이방인들에게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면 사람들의 삶 자체가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가정에 평화가 사라져 화목이 깨어지게 됩니다. 게다가 경제적 어려움 또는 실직 그리고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 사고 등으로 인해 가정에 우환이 겹치게 됩니다.
  성도들의 가정에 이런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신앙을 재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조짐은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빅톨 위고(1802-1885)는 세계적 문호로 그 이름을 날렸으나 개인 생활은 문란했습니다. 그의 심한 주색(酒色)의 타락된 생활은 가정을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1841년 어느 여름날 그의 사랑하는 딸 레오폴디느의 시체가 파리 세느 강에 떠올랐습니다. 소녀는 아버지가 바른 생활로 돌아올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남기고 세느 강에 몸을 던졌던 것입니다. 위고는 "이 비극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심판이다."라고 외치며 며칠을 울고 회개하였습니다. 소녀의 희생은 아버지과 온 가정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위고는 정부 관리로 들어가 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후생사회국에서 일했습니다. 공무원으로서가 아니라 진짜로 몸을 바쳐 남을 도와 주는 자세로 일했으므로 그는 남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아 순조롭게 승진했으며 문교부 장관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국기인 3색기(파랑은 자유, 흰색은 평등, 빨강은 박애)제정의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소설도 더 깊이 있는 작품을 써서 1862년에는 <무정>이 출판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방탕생활에서 회개하여 문자 그대로 180전환하여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프랑스와 전 세계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중세 교회의 부패가 극심했던 1437년에 발생하여 지중해 연안을 비롯해 북부 유럽까지 3년 동안 휩쓸었던 흑사병으로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지 1이 사망했습니다. 이 엄청난 재앙이 우연히 발생했다고 생각하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 재앙은 분명히 당시 타락한 사회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예상치 못한 재난과 사건 사고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사1: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시대입니다.이 시대는 개인과 나라 교회 전체가 회개의 운동이 요청되는 때입니다. 진정한 회개운동만이 한국 사회와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중병이 들기 전에 회개함을 통해 "유쾌하게 되는" 나라 민족의 앞 날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회개하지않는 제물은 헛된 제물로 가져 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회개는 기독교 신앙의 초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날에는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회개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믿음이 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예배 또는 집회는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뉴욕의 컬럼비아 프레스비터리언 병원 현관에 이런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치유는 지극히 높은 자로부터 온다.(For of the most high cometh healing.)" 이것은 육신의 병뿐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 관계, 사회와 단체와 국가의 문제 해결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개인과 교회, 나라 민족이 병들었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죄인의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면 치유는 위로부터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회개하므로 병든 자신과 가정 그리고 이 나라 민족이 치유되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독일 본 교외에 위치한 콘라트 아데나워 고등학교는 미국처럼 마약이나 총기류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학생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는 과거사(過去事)를 회개하는 독일 교육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학교 역사담당 교사 하인츠 빌름스는 학생들을 끊임없이 다그치고 있습니다. 2차대전 종전 50주년을 맞는 올해 1월부터 학생들에게 히틀러가 등장해 33년 권력을 잡아 대학살을 자행하기까지의 매우 민감한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거 독일 청년들이 세계 어느 나라 청년들보다 더 잔인하고 파괴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이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심어주자는 취지에서 입니다. 이는 언젠가 유럽 정치및 경제의 주인공이 돼야할 독일의 전후세대에게 왜 그같은 과거사가 재연돼서는 안되는가를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독일은 역사교과서에 전쟁범죄의 책임을 명기하고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을 지금까지 판금시킬 정도로 역사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있습니다. 사죄 표명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70년 브란트 서독총리가 폴란드(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 유태인 희생자 기념비에서 무릎을 꿇고 그는 "과거를 잊는 자는 영혼이 병든다."며 사죄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올해 종전기념행사가 줄을 잇는 가운데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 등 참석자마다 망각증세에 대한 경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아우슈비츠 해방 50주년 기념식에서는 로만 헤르초크 독일 대통령이 참석해 희생자들을 추모했습니다. 최근에는 나치시절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젊은세대 역시 이 의무를 벗을 수 없다는 주문 한가지가 추가되었습니다. 독일은 이스라엘에게 배상하고 씻을 수 없는 나치독인의 죄악상을 만천하게 공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최선의 배상을 하고 있습니다. 95년 현재 순수배상총액은 3백 1억 달러에 이르고 있습니다.
  연방배상법(56년발효 65년 종료)에 따라 정치적 인종족 종교적 이유로 박해를 받은 피해자와 그 유족 2백 20만명에게 7백 10억 4천 9백만 마르크를 배상했습니다.
  연방반환법(57년 발효)은 나치정권에 몰수된 물건의 반환, 배상을 위해 39억 3천 3백만 마르크를 배상했습니다.    이스라엘조약(52년 이스라엘과 조인)은 독일에서 추방된 유태인들을 위해 34억 5천만 마르크를 배상했습니다.
  포괄보상협정(56년부터 64년까지 유럽12개국, 60-70년대 동유럽 4개국과 체결)은 동서유럽 전쟁피해자 배상비로 14억 마르크를 제공했습니다.
  기타 78억 마르크를 배상했으며 21세기까지 총배상예상총액으로 1천 2백 23억 마르크를 책정해 두고 있습니다.    이같은 독일 정부의 노력에 독일국민들도 합심함으로써 평화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독일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독일의 성의있는 회개와 배상정책은 주변국가와의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독일 국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국가 재정이 어려웠을 때에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독일 민족이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 배상한다는 국가적 행위는 독일 국민들을 죄많은 민족으로 남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승화시켜 주변국가와의 공존과 평화가 얼마나 귀중한 가치인가를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나치독일에 극심한 피해를 본 이스라엘은 독일의 배상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고 평가합니다. 피해국가로부터 만족한다는 평가를 얻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독일은 이같은 철저한 배상과 회개를 통해 과거를 청산하고 프랑스 영국 폴란드 등 주변국의 신뢰를 되찾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결과 2차대전때 독일의 적국이었던 서방 각국은 동서독통일과 독일의 유엔평화유지군참여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그런가 하면 대조적으로 일본은 어떠합니까?
  일본은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진정한 신뢰를 받고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국가입니다. 일본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면서도 외국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국가로 낙인찍혀 있습니다. 2차세계 대전중 직접적인 피해를 본 아시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다수 국가들마저 불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임이 자명한데 민간업자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계속 발뺌을 해 온 일본입니다. 종군위안부에 대한 배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후세들에게 침략과 만행의 역사를 올바르게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한국에 수학여행을 온 일본 학생들은 독립기념관에 가보고나서야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알게 될 정도로 그들의 역사를 모릅니다. 일본은 사죄와 회개는 커녕 엉뚱한 망언(妄言)을 일삼고 배상도 독일의 겨우 8분의 1에 그치고 있을 뿐입니다.
  회개와 그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민족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과거 잘못된 점들을 철저히 파헤쳐 회개하고 그의 합당한 청산의 노력을 다 함으로서 뼈아픈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참된 민족 통일을 이루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회개를 통하여 여러분 가정과 나라 민족이 "유쾌해지는 날"이 속히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8. 비범한 사람이 되자

     "(행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행4: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행4: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행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4:5)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행4: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행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행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행4: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행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행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4: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행4: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행4: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행4: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행4: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행4: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행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행4:21)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행4: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 세나 되었더라."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은 성전 미문은 성전 지역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앉은뱅이가 고침받은 기적은 가장 널리 알려 졌을 것입니다. 사람들로 가장 붐비는 복잡한 이곳에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성전관리책임자로 대제사장의 오른 팔이며 참모장이요 총 관리인임),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찾아왔습니다. 특히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현장에 나타나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은 사두개인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의 특징은 부자이며 귀족이었습니다. 수(數)로는 많지 않았지만 영향력이 대단히 컸던 계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이 바로 이들 사두개인들의 비위를 거스렸던 것입니다. 그 이유 중 첫째는 사두개인들은 영(靈)의 존재나 내세(來世), 천사의 존재,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이들 사두개인들은 부자 귀족이었기에 자연히 친(親)로마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자신의 부와 안위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마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현상유지에 역행하는 소요(騷擾)사태였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식민지에 대하여 관용적이었으나 군중의 소요사태에 대하여는 무자비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민중의 소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되면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위태롭게 될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소요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세력에 대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하는 잔혹한 성향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즉각적으로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 자신들의 음모로 죽인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게 되면, 자칫 민중들이 흥분하여 사두개인들의 권력에 대하여 비난과 도전으로 비화(飛火)될 위험성을 느꼈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탄압하여 처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어 끌려간 재판정은 산헤드린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이었고 로마 시대에까지도 체포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못할 일은 이방인이 성전에서 자신들의 뜰 이외의 곳에서 범죄했을 때 이외에는 사형선고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직권상 당연히 의장이었습니다. 산헤드린에는 제사장들이 있었고 모든 제사장들은 사실상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욕망은 현상을 유지하여 그들의 이익이 줄어들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열정적인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그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던 장로들도 있었습니다. 이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사형 선고한 법정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러한 산헤드린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당신을 처치할 구실을 마련키 위한 교활한 의도가 담긴 질문을 당하였듯이 사도들도 애매한 질문을 통하여 올무에 빠뜨리고자 하는 저들의 간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마21: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마21: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마21: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것이요 (마21:2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마21:27)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행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러나 예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의 술책을 알아차리고 지혜롭게 대처하신 것처럼 사도들도 터무니없는 저들의 속셈을 은근히 책망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행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행4: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행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행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러한 베드로와 요한의 기탄없는 설교를 듣고난 그들은 심히 놀라게 되었고 할 말을 잊었습니다.

  "(행4: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행4: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이슬람교를 믿던 터키 사람이 성경과 예수교 서적을 읽다가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교사에게 들켜서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심문하는 교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게 질문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질문인데?"
  "일전에 내가 어디를 가다 길을 잃었는데 옆을 보니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두 명이 있었습니다. 내가 길을 물어 본다면 어떤 사람에게 물어봐야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지."
  "그런 줄 알면서 왜 당신은 죽은 사람 보고 길을 물으라고 했나?"
  "당신들이 믿으라고 사는 마호메트는 죽은 사람이오, 내가 믿으려고 애쓰는 예수는 산 예수입니다. 어찌 죽은 마호메트를 의지하겠습니까? 길되신 예수를 따라야 할 것이 뻔한 노릇인데 인도자를 찾아 가는 나를 왜 괴롭히십니까?"
  그러자 교사는 아무 대답도 못하다가 한참 후에 "네 마음대로 하라."라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으로 알았다가" 이들의 담대함과 능력에 압도되어 결국 자신의 의도대로 사도들을 처리할 수 없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사도들이었으나 성경에 대한 능숙한 사도들의 논증은 가히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아연 실색케 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학문이 없다"는 말은 율법의 복잡한 규례와 궤변술의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범인(凡人)"이란 말은 아무런 특별한 전문가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산헤드린은 베드로와 요한을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문가도 아닌 인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범인, 凡人)이 소위 학적(學的)이고 전문적인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과 변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진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보혜사(변호사)가 되시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학적 조예나 직업적 지위가 줄 수 없는 진정한 품위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산헤드린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사도들의 증언 내용이 진리냐 아니냐 하는 것을 문제삼기 보다는 협박과 공갈로 사도들을 위협하기에 급급한 것이었지만,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참으로 만난 사도들은 올바른 지식, 생명의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기에 저들의 음모와 간계를 물리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복음 증거를 적극적으로 전개할  있었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제자들에게 두드러진 점은 진리에 대한 변함없는 확신을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충만함을 받기 전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主)님으로 고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진리의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때는 어려운 상황이 되면 비겁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진리를 깨닫고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그 진리를 위해 목숨도 버릴 각오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 학식이 없어 할 수 없다는 핑계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전의식(神前意識, Coram Deo)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성령이 충만하여 진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확신을 지니고 진리 사수하는 비범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그 진리대로 살고자하는 자에게 세상의 위협은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하므로 용기있고 비범한 성도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믿음의 위인들을 가리켜 "(히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치못하는 비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진리 사수하며 성령 충만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충만하여 비범해진 사도들의 신앙고백적인 설교에 기가 죽은 산헤드린은 "나가라!" 라고 명령한 뒤에 저희들끼리 서로 갑론을박(甲論乙駁) 논의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어 그저 사도들을 협박해서 내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행4: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행4: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행4: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행4: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이에 대한 사도들의 답변을 보자.

  "(행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산헤드린의 협박이 사도들을 회유(回遊)하기에 너무나 무력한 것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순간적이고 오직 하나님의 것만이 영원한 것임을 사도들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인가?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의 선택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웰스(H.G.Wells)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보다 이웃 사람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리는 것이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실로 사람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종교 개혁가인 죤 녹스는 "하나님을 극진히 두려워 했기 때문에 아무 사람의 얼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감추어져있는 힘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바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음성만이 크게 들리는 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범한 사람의  비범한 삶은 성령이 충만하여 세상에 대하여는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 분의 음성이 항상 크게 들려지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한 마디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입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들의 용기와 담대함, 그리고 그 비범함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삶 전체를 진정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삶 속에서는 무한한 용기와 담대함이 솟아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는 예수님의 원리를 철저히 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자들에게는 "자기"란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 속에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받아야만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는 한 때 자기 판단으로도 정말 형편없는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 도중 말을 더듬었을 뿐만 아니라 어찌나 허둥대었든지, 끝나고나니 이 설교는 완전히 실패였다는 좌절감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너무도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하나님, 당신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시니 그 형편없던 설교를 축복하소서."
  그리고 그 주 내내 그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다 말고 한밤중에도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고는 속으로 결심하기를, 다음 주일에는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설교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리라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확실히 그 다음 주일 설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은 그에게 몰려와 그의 설교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흐뭇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날 밤만큼은 어린 아이처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하지만 그 두 설교의 결과는?"
  그 결과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 설교는 마흔 한 명의 회심자를 낸 반면 그 위대한 설교는 단 하나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스펄젼 목사의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 형편없었던 설교는 들어 쓰셨으나 그 훌륭한 설교는 버리셨다. 즉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없이는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Christian Digest)
  여러분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충만하시므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비범한 능력과 진리 사수의 담대한 하나님 제일주의 믿음이 충만하여 세상을 능히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9. 기도와 사랑

      "(행4: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행4: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행4: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행4: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행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행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행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인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에 붙잡혀 가서 온갖 위협과 공갈 협박을 당하고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돌아와서 그 당한 일들을 모두 낱낱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사건의 경위를 다 듣고 난 후 교회는 틀림없이 임할 핍박과 박해를 예상하고 함께 모여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높여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여기 초대교회 기도의 특징을 통해 기도의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행4: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이어서 인간의 반항이 무용함을 선언하므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자로서의 존재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2: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시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시2: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시2: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이 두 가지의 기도 내용을 보면 세상의 역사가 모두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역사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을 고백한 것입니다.

  "(행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행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행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위의 기도를 보면, 사도들이 처한 험악한 주변 환경을 제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적대시하는 저들을 물리쳐 달라거나 그들의 세력을 무력화시켜달라는 것이 아니라, 또 단순히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대적할 것임을 이미 다 알고 계시며, 사도들도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또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역사의 주관자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되고 신실한 자로 하여금,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하여금 한 나라의 역사를 주관하게 하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은 늘 십자가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일을 시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권세를 잡고, 지식을 잡고, 물질을 잡아서 하나님 나라를 펼치리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방법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 역사는 더 혼탁해지고 강포한 것과 불의한 것들이 권세를 잡고 흔들어 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하므로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갈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요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를 잡으려 온 사람들을 물리칠 수 있는 하늘의 권세가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기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악의 세력이 없었더라면, 복음의 적대 세력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일이 더욱 더 성공했을텐데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닥치는 모든 환란과 고통과 난관을 꼭 없애야 한다든가 반대세력을 꼭 꺾어야 된다든가 그 세력을 이길 힘이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그 난관을 없애는 것으로 능력을 등장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합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합1:3)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합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놀란 것은 하나님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시오 천하의 대주재인신데 세상에는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에게 피해를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이 더 잘 살고 강포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압제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가 깨달은 것은 이런것이었습니다.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신자의 삶은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것이라거나 포도나무에 열매가 있는 것이라거나 감람나무에 소출이 많은 것이나 밭에 식물이 있는 것이나 우리와 외양간에 양과 소가 많은 것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존재로서 이미 충분하고 이미 너무나 소중하고 그것으로써 더 이상 다른 것은 쳐다볼 수 없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저 원수들이 저러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도 예전에 저러했을 때 예수를 보내신 것같이 저들이 원수짓하는 데 나를 하나님을 아는 자로 여기 못박아 놓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은 일이 있다면 이 공갈과 협박과 생명의 위협과 육체의 고난으로 인하여 내가 선 이 자리를 내가 알고 있는 이 생명의 진리를 내가 입다물고 주저앉지 않게 담대케 하옵소서입니다.
  감리교 김종우 감독은 풍채가 당당하였습니다. 전도인 시절 하루는 많은 노동꾼들이 휴식하는 자리에서 쪽복음서를 나누어 주며 전도하려 했습니다. 허리를 공손히 숙이며 전도했으나 사람들은 냉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반복해서 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하다가 방법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큰 소리로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버르장머리없는 놈들! 예이 듣거라! 너희 지금부터 한 놈씩 냉큼 나와 이걸 받아 가거라. 안 받아 가는 놈은 능지처참하리라."
  그야말로 불같은 호령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아직 양반의 불호령에 평민들은 쥐구멍을 찾는 것이 몸에 밴 때였습니다. 그들은 곧 태도가 돌변하여 재빨리 한 사람씩 나와 전도지를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일제히 허리를 숙이고 무슨 말이 떨어질까 싶어 하명을 기다렸습니다. 순간 김 목사는 위엄있는 목청으로 기독교의 도리를 전했습니다. 노동꾼들은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고 적지않은 결신자들이 생겼습니다.
  성경은 앞으로 가면 갈수록 환란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협박만 당하고 놓여났지만 다음엔 채찍 맞고 놓여나고 그 다음에는 감옥에 갇히고 드디어는 죽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에 대해 하등의 불평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일들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의 기도가 있다면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함 때문에 하나님의 목표와 목적하심을 놓고 눈 앞에 있는 위험과 협박에 타협해서 하나님의 뜻에서 일탈(逸脫)하지 않게 하옵소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그것만이 그들의 기도인 것이었습니다.

  "(행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행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우리의 삶과 현실이 어떤 위협과 환란과 고통 중에 있다할지라도 오직 주 예수의 이름만 나타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는 것과 우리가 기도하여 축복을 얻어내는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므로 우리의 삶과 죽음에 우리의 존재와 행함에 오직 주께서만이 증명되시옵소서. 그것이 증명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순교를 당해도 좋고 핍박을 받아도 좋고 오해를 받아도 좋고 멸시천대 괄시를 받아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존재를 이 무궁하신 지혜와 뜻 가운데 지키고 계시고 인도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당하는 일을 인하여 영원한 것을 팔아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아무것도 안 갖고 있고 늘 지는 것 같지만 내가 하나님 편을 들고 있고 세상에 지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충분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서쪽 열도의 뉴 헤브라이드스에 있는 한 묘에는 <1848년 그가 이 섬에 왔을 때는 크리스챤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1872년 그가 이곳을 떠날 때는 이교도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라고 씌어져 있는데 이는 평생을 이 섬에서 구령(救靈)사업으로 헌신한 선교사 게디 박사(Dr. Geddie) 묘의 비문입니다. 게디 박사는 이 섬사람들을 위하여 도착한 그날로부터 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처음 도착했을 때에 그 섬의 난폭한 살인자 카피오(Kapio)는 기도하는 게디 박사를 죽이려고 곤봉을 높이 쳐들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를 치지 못하도록 무엇이 뒤에서 잡고 있는 것 같아서 깜짝 놀라 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후에 그가 크리스챤이 된 후 "누가 분명히 그의 무릎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마트면 위대한 주의 종을 죽일 뻔하였다."라고 하며 "만약 그가 살해되었다면 우리 섬은 저주의 섬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무릎의 능력'으로 온 섬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 개인의 영혼도 이 '무릎의 능력'으로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32절이하를 봅시다.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 말씀은 기도가 가장 중요하였고 말씀의 증거도 특히 중요하였지만 그러나 가장 귀중한 것은 형제에의 사랑과 자비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곳에 관하여 전해져 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 터는 두 형제가 소유하고 있는 밀밭이었는데 형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아우에게는 아직 가족이 없었습니다. 밭에서 밀을 추수한 형제는 각기 자기의 몫을 따로 쌓아 두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형이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여보, 동생이 하루종일 곡식단을 나르고 뜨거운 볕에 견뎌내느라 몹시 힘들었을 것이요. 동생 몰래 나가서 우리 곡식단을 동생의 곡식단에 옮겨 놓아야겠소."라고 하고는 밤중에 나갔습니다. 동생도 집에 와서 생각하기를 "나의 형님은 가족이 있고 내게는 가족이 없으니 형님 몰래 나의 곡식단들을 형님의 곡식단에 옮겨 놓고 와야겠구나."라며 나가서 자기의 곡식단을 옮기고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각각 자기 밭에 나가보니 이상하게도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그날 밤도 나가서 부지런히 옮겨 놓았으나 다음 날에 보면 곡식단은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형제는 밤중에 나가서 몸을 숨기고 지켜 보았습니다. 한동안 망을 보았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다시 동생은 형의 곡식단으로, 형은 동생의 곡식단으로 각자의 곡식단을 옮기다가 그만 마주쳐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비밀을 알게 된 형제는 곡식단을 내던지고 와락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토록 사랑의 눈물이 떨어진 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날로 확장되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0. 사랑의 공동체

    "(행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행5: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행5: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행5: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행5: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행5: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곁에 장사하니 (행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초대교회는 탄생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서 순전하고 참된 사랑의 공동체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랑은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기꺼이 함께 나눌 정도였습니다.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위의 성구들을 통해 보면 유무상통하는 일과 물욕이 없어지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소유를 내놓고 이기심과 소유욕에서 벗어난 성도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사람으로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이 사람은 상당히 부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헌금하므로 초대교회에서 아주 긴요하게 쓰임받았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요셉의 별명이 바나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권위자"(勸尉者)란 뜻입니다. 다시말해 요셉은 초대교회에서 상당한 칭송과 영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자극하여 자신들도 돈을 갖다 내는 방법으로 영광과 칭송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 팔아 일부만을 내놓은 채 전체를 내놓은 양 교회를 속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순수한 교회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나눔의 공동체)에 먹칠을 한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초대교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탄생과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성령을 훼방한 죄로, 또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만홀(漫忽)이 여긴 죄로 회개의 은총도 받지 못한 채 중징계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행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아나니와 삽비라는 하나님 앞에서의 칭찬이 아니고 사람 앞에서의 칭찬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을 쏟아냈고 진심을 쏟아냈더라면 이렇게 속일 수 없습니다.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속이고 사람 앞에 받는 박수를 얻어내기 위하여 돈을 동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은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돈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 헌금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눅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18: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기도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응답되지 못하였고,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한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눅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엡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엡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엡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탐심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다시말해 자신의 욕심,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일 많이 등장하는 우상이 바알 신입니다. 바알, 아세라, 몰록, 밀곰 등 여러 우상 중에 바알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바알이 생산의 신, 풍요의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들의 방법으로 요구하는 대상이 우상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권세, 명예 등 입신양명과 세상에서의 쾌락 등 등 전부를 돈으로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물질만능인 것입니다. 돈으로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매수되지 않고 구원을 얻는 방법을 돈의 액수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넘어가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헌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엄청난 저주를 받아 즉사했던 것은 바로 우상숭배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민11: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민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민11: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탐욕을 품게 되므로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생기다 보니 자연히 우상 숭배의 애굽이 생각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탐심은 영원한 축복의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하고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하여 우상숭배로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것은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의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 아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친 물건 중에서 은과 외투와 금을 얼마간 취했습니다. 아간의 이 행위는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온 가족이 모두 멸절되는 심판을 자초했습니다.(수7:1-26)

  "(왕하5: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 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 (왕하5:21) 나아만의 뒤를 쫓아 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왕하5:22)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왕하5:23)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왕하5:24) 언덕에 이르러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저희를 보내어 가게 한 후 (왕하5:25)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왕하5:26)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왕하5: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탐심에 눈이 어두워 그의 스승 엘리사를 속이고 거짓말을 했던 게하시가 결국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죽임을 당한 이유를 알아보면 참으로 치사하고 더러운 내막이 있습니다. 죤 부스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형과의 많은 컴플렉스를 느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형은 아주 똑똑했고 나중에 그는 아주 훌륭한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부모한테 야단만 맞으며 "나같이 못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의 마음 깊은 속에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몰두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유명하게 되기 위해서는 유명한 사람을 죽이면 나도 유명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링컨을 향해 총을 당긴 것이었습니다. 한 시대가 낳은 위인을 죽였던 죄가 바로 탐심의 범죄였던 것입니다.
  풍요로운 물질과 안락한 생활을 누릴수록 참과 거짓에 대한 구별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치관이 전도(顚倒)되기 때문이며, 인간의 죄가 더욱 더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지 중에 거짓을 말하게 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출세와 성공과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하나의 수단으로서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것은 너무도 일상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 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거짓은 인간의 온갖 범죄에 작용하며 거기에 사단의 세력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거짓을 행하는 자마다 또한 거짓의 악습에 빠질 위험이 다분한 것입니다. 거짓은 인간의 품성을 해치는 도덕적 해악 요소일 뿐만 아니라 인간 전체를 파멸시킬 수 있는 영적 악의 세력이 속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을 행하며 악한 행동을 일삼는 자들에게 성경은 결정적이고 단호한 종말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에 속한 자들은 모두 불못에 던지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5:6)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잠19:5)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

  거짓은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의도에서 한 말뿐만 아니라 가식과 위선에 찬 행동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우상숭배와 그릇된 가르침도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사59: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롬3: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더 나아가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잘못 하는 것도 역시 거짓이라고 합니다.

  "(요일2: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성경이 이처럼 거짓에 대해 정의(定意)를 내리는 것은 그 모든 거짓된 언행들이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모든 인간은 죄의 세력 아래 있으며 거짓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께 범죄하였으나 자신들의 지은 죄를 은폐하려고 동산 나무에 숨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죄과를 변명하였거니와 이들의 행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거짓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실로 인간의 모든 범죄 행동 구석구석에는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고 있으며 이런 행동은 인간을 극심한 파멸의 구렁으로 몰아감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은 또한 간교합니다. 거짓은 겉으로 듣거나 보기엔 거의 진실인 것 같습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나(창 3:1-6) 가인이 아우 아벨을 살해하고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하나님께 거짓말하였을 때나 요셉을 구덩이에 가두어 놓은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안부를 묻는 야곱에게 요셉의 채색 옷을 보이며 대답한 거짓말은 한결같이 거짓을 행하는 자들의 간교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창37: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창37:32) 그 채색 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은 이처럼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참된 교회를 해치며 하나님과의 관계성까지 파괴하는 해악한 것임을 볼 때 성도는 마땅히 거짓된 행위를 경계하며 자신이 거짓으로부터 구함받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탐심과 거짓은 초대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어느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하루에 3만 마디의 말을 하면서 산다."고 했습니다. 그 3만 마디 중에서 우리가 진실이 담긴 말을 하는 것은 얼마나 되며, 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요?
  사랑의 공동체에는 탐심과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옛날 어느 형제가 아주 우애깊게 살았습니다. 하루는 그들이 함께 길을 걷다가 동생이 우연히 금덩이 두개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우선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지만 막상 형에게 한 덩이를 주고난 아우의 마음은 편치않았습니다.
  "이 길을 나 혼자 갔더라면 내가 둘 다 가질 수 있었는데, 내가 주웠으니까 형님에게는 안 주어도 되는건데"
  형제는 저마다 딴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길을 가면서도 마음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저 녀석이 필경 자기는 큰 것을 갖고 내개는 작은 것을 주었으렸다. 내 눈에 먼저 띄지 않고 하필 녀석이 주울게 뭐람. 내가 먼저 봤더라면 둘 다 내 것인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이나 동생 모두가
  "내가 왜 이런 마음을 먹지. 이러다간 천벌을 받지."
  하면서 뒤숭숭해지는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침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이때 동생이 갑자기 강물을 향해 금덩이를 힘껏 던져버렸습니다. 형이 깜짝 놀라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형님을 우애하고 존경했는데 저 금덩이를 나눠 가진 순간부터 별 불경스런 생각이 다 떠오르니 필경 저 물건이 상서롭지 못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까 마음이 심란하던 형도    
  "그래, 네 말이 맞다."
  하면서 자기 손에 들었던 금덩이도 함께 물 속에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탐욕과 거짓 대신에 사랑과 진실함으로 충만하여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가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세상에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1. 표적(表蹟)과 기사(奇事)
  

  "(행5: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행5: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행5: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행5: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행5: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불미스러운 사건(1-11절)에 이어 사도들을 통한 수 많은 표적(表蹟)과 기사(奇事)가 일어나고 이로 인하여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즉 교회 내의 죄를 청산하고 깨끗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역사(役事)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순결함과 거룩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금 가나안 땅을 향한 행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 문제를 해결하였을 때 복음의 역사(役事)는 앞으로 더욱 정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대의 교회사를 보면 순결과 거룩함이 유지된 교회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교회로서 역할을 다 하였으며 반대로 해로운 누룩을 제거하지 않고 적당히 세속주의와 타협하여 나아간 교회는 말씀의 능력도, 진실한 구원의 기쁨도 알지 못한 채 기형적으로 성장하였음을 상기하게 됩니다. 문제는 양(量)에 있지 않고 질(質)에 있는 것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에 대한 일화(逸話)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양자택일의 결단력이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용단을 내리는 남달리 강한 성격을 지녔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행3:6)....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라는 성구를 읽고 또 읽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누구이며 김익두는 누구인가?"
  황해도 신천읍에 안중근 의사가 살던 두라면 척서리 개울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신천의 명소였습니다. 이 개울에 돌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 옆에는 언제나 앉은뱅이 거지가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는 이 오는 이들이 앉은뱅이 거지를 불쌍히 여겨 동냥을 해 주었기 때문에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도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잊지않고 꼭 얼마의 돈을 쥐어주고 지나갔습니다. 때때로 김익두 목사님은 '나도 베드로처럼 저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만 있다면 근사할텐데....' 하고 늘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가랑비가 내리는 한적한 오후에 김익두 목사님이 그 다리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인적이 드문 시간이어서 매우 조용한 때였습니다.
  "한푼 적선합쇼!"
  김익두 목사님을 보고 앉은뱅이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성경구절을 암송하느라고 골똘해 있던 그는 움칫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은 인적도 뜸하고 마침 보는 사람도 없으니 이럴 때 한번 저 앉은뱅이를 일으켜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에 다시 한번 주위를 빙 돌아다보니 마침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행여나 사람이 보는데 시도하였다가 만일 실패하기라도 하면 무슨 망신일까 싶어 아무도 없을 때 한번 시도해 보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때가 마침 좋았고 기회가 적중하다고 생각되어 그 앉은뱅이에게 다가가서 손뼉을 딱 치면서 불렀습니다.
  "날 똑똑히 보시오!"
  "예? 나요?"
  앉은뱅이는 갑자기 상기된 김익두 목사님의 얼굴을 의아한 눈빛으로 올려다 보며 대답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앉은뱅이의 손을 꽉 움켜잡고 그를 주목하면서 큰 소리로 명령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외치면서 그를 힘껏 잡아 일으켰습니다. 원래 힘이 장사인 김익두 목사님이신지라 앉은뱅이는 그의 힘에 의해 번쩍 들려졌습니다. 그리고 김익두 목사님은 그의 손을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잠시 들려졌던 그 몸체가 그만 땅바닥에 털썩 떨어지면서 엉덩이가 땅에 부딪히고 비명이 터져 나왔습니다. 본래 불편한 육신인지라 통증을 못이겨 소리를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이이쿠 나 죽네! 사람 살려요!"
  그는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사람 죽여요! 아이구 아이구...."
  김익두 목사님이 살펴보니 앉은뱅이가 전혀 일어설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만 부끄럽고 무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순간 번쩍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왜 내가 믿음으로 하지 않고 주위를 돌아 보았는가? 이런 연약한 믿음으로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키겠다고 나섰는가? 참 한심한 노릇이다...."
  아무리 성경을 다시 상고해봐도 베드로가 한바퀴 빙 둘러보고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이 없었기에 생각할수록 자신의 행위가 부끄러웠습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와 그 길로 예배당으로 뛰어 갔습니다. 강단 아래 무릎을 꿇고 깊이 탄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종이 심히 믿음 없음을 회개하나이다. 이 연약하고 어리석은 종이 주의 영광을 훼손한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김익두 목사님은 자신의 믿음이 부족함을 탄식하며 진심으로 깊이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이러한 상태로 목회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행위인가를 깨닫고 7일을 금식하며 철야로 기도했습니다.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완전히 식음을 전폐한 채, 깊은 기도에 몰입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도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마음 깊이 깨달으며 기도에 열중했습니다.
  "주여! 하잘것 없는 개나 돼지도 발이 있고 소, 닭도 다리가 있어 걸어 다니고 있는데 저 불쌍한 인생은 무슨 죄가 많아서 저렇게 걷지도 못하고 앉아서 평생 저 고생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김익두 목사님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남달리 인정이 많은 그였습니다. 더우기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남을 가엾게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생겨 애통하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눈물로 흘러 내린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고쳐 한번 명성을 얻어 보리라'고 생각했던 허망한 명예욕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사랑과 긍휼의 눈물이 한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이렇게 눈물로 회개하고 기도하다가 6일째 되는 날 척서리 냇가로 다시 내려갔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엿새를 굶어서 다리가 휘청거리고 기운이 진하였지만 힘을 내어 간신히 다리까지 걸어갔습니다. 다리 근처에 자리를 잡고 동냥을 청하던 앉은뱅이는 멀리서 김익두 목사님이 자기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기겁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지 마시오! 적선 안해도 좋으니 제발 오지 마시오."
  앉은뱅이는 손을 휘저으며 김익두 목사님이 다가오는 것을 제지했습니다. 또한번 혼이 날까봐 겁을 집어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님은 그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지난번 일은 용서하시요. 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금식하고 철야하며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소이다. 오늘 밤이 기도 작정한 마지막 날인데 나와 함께 가서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말하는 김익두 목사님의 태도에 그는 마음이 움직여 함께 가기로 동의했습니다. 엿새동안을 꼬박 굶어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김익두 목사님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고 있는 힘을 다해 교회당으로 걸러 갔습니다. 강단 밑에 엎드린 김익두 목사님과 앉은뱅이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던지 전신에서 땀이 비오듯 흘렀고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주여! 이 불구자를 불쌍히 여겨 일으켜 주옵소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주께서 이 사람을 일으키사 걷게 하여 주옵소서! 걷지 못하는 다리에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믿습니다! 주여! 믿습니다!"
  밤이 새도록 두 사람은 서로 붙들고 울면서 목이 쉬도록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어느덧 깊은 밤이 지나고 새벽 미명이 되었을 때 갑자기 앉은뱅이가 다리에 힘을 얻더니 벌떡 일어섰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기더니 급기야는 예배당 안을 껑충껑충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기뻐서 두 손을 들고 "만세! 만세!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껑충껑충 뛰어 예배당 안을 계속 돌아 다녔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하나님이시여! 고맙고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 아 멘!"
  김익두 목사님도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앉은뱅이의 뛰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두 다리는 곧게 뻗어 있고 성한 사람의 발과 조금도 다름없이 뛰고 있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이러한 기적 가운데서도 결코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헌당식을 마친 직후에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일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 안을 앉은뱅이는 마구 뛰어 다녔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어쩔줄 몰랐던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 백년사에 최초로 나타난 이적이 이처럼 신천 서부교회 예배당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주위를 한바퀴 휘 둘러보고 기도했을 때는 실패했으나 회개하고 믿음으로 기도할 때는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한국 기독교사에 이적의 첫 봉화가 올랐으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표적(表蹟)과 기사(奇事)는 기적(奇蹟)에 대한 두 가지 명칭입니다. 표적은 그 기적의 영적 의미(그것을 행하신 이가 그리스도이심을 암시함)를 생각케 하고, 기사는 그것의 놀라움을 생각케 하는 명칭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표적(表蹟)과 기사(奇事)"를 나타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믿도록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히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다시말해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적이 나타나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야)라는 전도의 절대적 진실성이 증명되었던 것입니다.

  "(막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와같은 복음의 권위와 진실성을 아는 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표적과 기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기독교인들에게 경건한 두려움을 주었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경외심을 갖도록 했으며 사도들의 교훈과 사도직을 확증해 주는 역할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표적과 기사들로 인해 사도들이 증거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더욱 신빙성있게 되었고 능력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초대교회 성도들과 사도들이 얼마나 힘있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왔는가 하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고 그래서 믿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과 상종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믿고 주께로 오는 자가 많은데 특별히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와서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하고 바랄 만큼 사도된 증거, 성도가 된 능력들이 많이 증거되고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벤허(Ben-Hu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벤이라는 것은 히브리어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벤훌(Ben-Hur)은 훌(Hur)의 자손 유다를 말합니다. 훌이면 그 유명한 모세시대에 모세가 여호수아를 전쟁에 내보내 아멜렉과 전투할 때 산에 올라가 기도하던 모세의 한쪽 팔을 붙들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유다는 그 훌의 자손입니다. 그 벤허가 모함을 받아 노예로 팔려서 전함(戰艦)에 가서 노를 젓는 노수가 됩니다. 그때 큰 해전이 일어났는데 벤허가 타고 있는 배가 아리아스 제독이 타고 있던 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상대방 배의 옆구리를 받쳐서 침몰됩니다. 그래서 사령관도 물에 빠지고 유다 벤허도 물에 빠졌습니다. 조그만 나무 조각을 붙잡고 살아나서 제독은 전쟁에 패한 줄 알고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벤허가 못 죽게 붙잡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군 배의 구출을 받고 그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아리아스 제독이 벤허를 돌아보며 뭐라고 합니까? 네가 믿는 하나님은 너를 구하기 위해서 로마에 승리를 줬구나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는 한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입으며 복을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손길에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소돔 고모라 성의 죄악이 너무 팽배하므로 이 성을 멸하기 위해 친히 시찰을 나가시다가 아브라함에게 들러 가십니다. 내가 하려는 일을 내가 왜 아브라함한테 감추겠느냐. 내가 소돔 고모라를 멸하려 간다고 그럽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한 말씀 올립니다. 거기 의인들을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의인들이 있으면 내가 멸하지 않겠다. 몇 명이나 있으면 됩니까? 숫자 싸움이 시작됩니다. 의인 오십명이 있어도 죽이시겠습니까? 의인 오십이 있으면 내가 그 성을 그대로 놔 두겠다. 거기서 열명이 모자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멸망시키지않겠다. 주여 노하지 마소서. 거기서 열 명이 모자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좋다. 그래서 몇 명까지 깎습니까? 열 명. 의인 열 명이 있으면 내가 소돔 고모라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그러니 소돔 고모라 성의 멸망은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까? 성도(의인)가 거기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이렇게 복을 누리고 있는 이유가 누구 탓이라고 생각됩니까? 어느 정치가 때문입니까. 어느 경제인들 덕택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땅의 성도들 덕택에 너도 복을 받고 나도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으시는 여러분들의 삶에 표적과 기사가 충만하시므로 이 땅에 예수 믿는 무리가 더욱 더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2. 생명의 복음

  "(행5: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행5: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행5: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행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행5:21)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행5:22)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행5:23)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행5: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행5:25)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행5:26)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행5:27)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행5:28)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행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것이 마땅하니라 (행5: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행5: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행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행5:33)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행5: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행5: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행5: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행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행5: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행5: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행5: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행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오늘 본문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로 하여금 예수를 전파하지 못하도록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자(使者)들을 보내어 사도들을 탈옥시켜 주시면서 "(행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기가 가득한 유대교 지도자들(산헤드린을 구성하고 있는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등)이 사도들을 핍박한 종교적 이유는 첫째, 권위의 문제였습니다. 산헤드린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법적 지위를 가진 실질적 통치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생전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육간에 허덕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력있는 말씀과 놀라운 표적을 베풀었을 때 점점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기쁨의 대상이 되어갔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대적으로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실추시킴은 물론 그들의 종교적 기반을 뿌리채 흔들만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사도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 살인죄에 대한 정당화 문제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직접적인 장본인은 바로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가에서 죽은 줄 알았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서 부활하셨고 이제 그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소문이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죽인 죄가(罪價)가 그들 자신에게 씌워짐을 모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28절). 이런 이유로 유대교 지도자들은 연합하여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전파를 방해하기 위한 온갖 음모가 꾸며졌으나 하나님께서는 일촉즉발의 살벌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사도들로 하여금 담대히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하셨고 그들로 더 큰 용기와 확신 속에서 예수의 증인된 사명 수행에 진력(盡力)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의 손길로 감옥에서 풀려난 후 즉시로 예수를 증거하였고 다시 공회 앞에 잡혀왔을 때도 전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자처하기를 조금도 꺼려하지 않은 것은 죽음도 불사하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의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태형<笞刑-가죽 끈을 세 줄로 꼬아 만든 형장(刑杖)으로 때리는 것으로 보통 40대에서 한 대 감한 매를 칠 수 있었습니다. 이 형장으로 매를 맞을 경우엔 살가죽이 벗겨지고 심지어는 뼈가 드러날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을 맞는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고초당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아픈 상처가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기쁨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는 주님의 말씀에 절대순종하는 모범을 확실히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진 핍박 속에서도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교회 부흥은 인간의 탁월한 능력과 상황에 있지 않고 어떤 상황도 뚫고 헤쳐나가는 전적인 순종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갖은 음모와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께만 순종하므로 풀무불 속에 던짐을 받았지만 "머리털 하나 그을리지아니하였고 고의(袴衣)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던" 기적의 사건이 구약성경에 있습니다.

  "(단3: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단3: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단3:21)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단3: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단3: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단3:24)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단3:25)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단3:26)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메삭,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단3:27)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이 기적을 통해 우상숭배하던 느브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이제 부터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자는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겠노라 전국에 조서를 내리게 됩니다.

  "(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단3: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 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단3: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왕 느브갓네살과 그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섬기도록하기 위해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그같은 기적을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행5: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행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석방은 즉시 복음을 전하기 위한 파송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편한한 생활을 위한 석방이 아니라 사명을 위한 석방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것은 편히 살다 죽으라는 뜻이 아니라 복음 전파, 즉 사명을 위해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가난에서 벗어나 재물을 갖게 하신 것은 잘 먹고 잘 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재물을 가지고 복음전파를 위해 물질 축복을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업을 축복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나라 민족을 부강한 나라로 축복하신 것은 열강가운데 우상숭배하며 사치하고 음란하며 교만하라는 것이 아니고 세계를 구원하는 복음을 전파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무시하고 자기의 욕심을 따르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바로 사도행전 5장 초두에서 다룬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결코 방해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병에 걸리거나 사업에 실패한다고 해서, 아니면 여러분들이 그 일을 행하지 않는다고해서 하나님의 복음이나 하나님의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중단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로도 하다못해 우리의 연약함으로도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욘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욘1:4)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욘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욘2:10)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욘3:1)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도망쳤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철회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도망치는 요나를 따라가 회개시키고 다시 돌이켜 하나님의 그릇이 되게 했습니다. 다시말해 억지로일지라도 니느웨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습니다.

  "(롬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확인한 사도 바울은 어떠한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도 굴하지않고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 나갔습니다.

  사도들이 여러가지 심문을 받고 공갈과 협박, 능욕을 받은 후에 풀려나면서도 오히려 기뻐하며 예수를 전파하는 일을 쉬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행5: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행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여기 기독교인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바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요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참된 성도의 지표(指標)는 그 증거가 세상에서의 환난과 핍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멀리하면 할수록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 불성실하거나 외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의 사실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지금까지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세상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으며 세상이 주려는 상을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환난과 핍박이라면, 적극적인 의미에서 영원한 나라를 물려받을 사람으로서 훈련되어야 합니다. 주의 사자들이 와서 감옥에서 꺼내주었다든가, 성령충만을 받았다든가 하는데서는 새로운 힘과 확신을 얻는 도움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채찍질당하고 놓여나는 것은 세상이 우리 편이 아니다 하는 것이 증명되었을지 몰라도 저들 자신의 신앙을 깊이 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을 기뻐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히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주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순종함으로 온전하게 되시었던 것입니다. 고난이란 첫째, 세상의 원리와 우리의 삶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빚어지는 갈등과 반목 때문에 겪는 고난, 세상 안에서 살면서 우리가 세상식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고, 둘째, 우리의 수준보다 더 크고 더 놀라운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기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도들과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은 바로 둘째번의 고난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당면해서는 순종하므로 그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께서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나의 일이 아니고 그것을 당함으로써 우리가 찔림으로써 저들이 나음을 얻고 우리가 채찍을 맞으므로 그들이 평화를 누리게 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눈물 흘리고 신앙인으로 당하는 모든 고난에서 여러분이 처신하는 행동들, 거기서 갖는 여러분의 신앙적인 갈등, 아픔, 눈물이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모두 알고 계십니다. 네가 그때 일로 고민했었느냐? 이 일로 인하여 네가 눈물 흘렸느냐? 이것으로 인하여 네가 속을 상하고 나한테 무릎을 꿇고 기도했었느냐? 그것으로 인하여 옆에 있던 이 사람이 회개했고 이 사람이 돌이키고 이 사람이 이렇게 되었느니라는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마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고난 중에도 기쁨으로 사명 감당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3. 일곱 집사

  "(행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행6:2)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행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행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행6: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급류가 흐르는 강가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소경이었고 또 한 사람은 절름발이였습니다. 두 사람이 한동안 강가에 앉아 있다가 절름발이가 소경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형씨는 왜 오랫동안 여기에 앉아 있는 거요?"
  소경이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이 강을 건너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 어디가 깊은지 어디가 위험한지 알 수가 없어서 건너지 못하여 이러고 있는 것이요. 그런데 형씨는 왜 여기에 있는거요?"
  절름발이가 대답했습니다.
  "나도 강을 건너야 할 사람이오. 그런데 나는 다리가 불구라 강을 건널 수 없어서 이러고 있는 거라오."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소경이 절름발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서로 힘을 합해서 이 강을 건너봅시다. 형씨는 볼 수 있은 눈을 가지고 있고 나는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으니 형씨가 내 등에 엎혀 안전한 곳으로 나를 인도하시오."
  소경의 제안대로 절름발이는 소경의 등에 업혔습니다. 그리고 소경의 귀를 잡아 앝은 곳으로 물살이 완만한 곳으로 인도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강이었지만 협력하니까 거뜬히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젓가락 하나를 똑바로 세우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두 개를 묶으면 균형잡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 개를 묶으면 아무렇게나 세워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협동의 위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협동하는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는 번영합니다. 그러나 분열하는 곳에는 패망이 있을 뿐입니다.

  "(마12: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리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곳은 지옥과 같은 곳이며 서로 돕고 사랑하는 곳은 천국과도 같은 곳입니다.

  "(전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전4: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의 대상은 본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12사도들이 유대인이었고 그 외 예수를 좇은 많은 무리들이 유대인들이었으므로 복음 전도는 자연히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초대 기독교 교회는 유대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했던 것입니다.
  유대 회당에는 상례적인 관습이 있었습니다. 구호금 접수인이 있어서 매 금요일 아침이면 시장과 일반 가정으로 돌아다니며 일부는 돈으로, 일부는 물품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호금품을 거두어 드렸습니다. 그 모아진 것은 당일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일시적으로 구호가 필요한 사람은 위급을 면할만큼 충분히 받고 영구 구호가 요구되는 사람들에게는 하루에 두 끼씩 일주일 즉 14끼니를 지낼 수 있으리만큼 받게 됩니다. 이 구호기금을 쿠파(Kuppah) 즉 광주리 기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밖에 긴급 요구호자들을 위한 매일 축호 모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탐후이(Tamhui) 즉 쟁반기금이라고 불렀습니다.
  초대교회는 현명하게도 이러한 유대 관습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역사상 유대인만큼 자기보다 처지가 못한 동포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민족은 없었고 현재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유대인 간에 분열이 생겨났습니다. 초대교회 내에는 두 종류의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즉 히브리파(헤브라이우스)와 헬라파(헬레니스톤)입니다. 히브리파란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구사하며 예루살렘과 팔레스틴(유다, 갈릴리, 사마리아 등)에 계속 살아온 유대인들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12사도는 전원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고 헬라파란 외국을 유랑하다가 돌아와 사는 소위 디아스포라 출신으로 역이민자(逆移民者)들 가운데 오순절에 참가하여 그리스도를 새로히 발견하고 초대교회에 들어 온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주로 로마에 노예로 끌려갔다가 오랜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온 2세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세계어인 헬라어(Greek)를 말하고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잊었거나 몰랐던 것입니다. 이들은 노예 출신으로 빈 손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히브리파 유대인들보다 훨씬 가난했습니다.
  영적으로 잘난체하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히브리파)들은 이 외국 출신 유대인(헬라파)들을 무시하고 경멸했습니다. 이 경멸은 구제금품을 나누어 주는데서 나타나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과부들은 자기네들이 소외당한다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유대 출신인 사도들은 숫적으로 우세한 히브리파 기독교인들 위주로 구제를 일삼았습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매일의 구제 대상에서 헬라파 출신 과부들이 집단적으로 빠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한 원망과 불평이 거룩한 신앙공동체의 화목한 분위기를 오염시켰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런 문제에 말려들어 가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바로 잡고 본래의 주어진 복음 전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일곱 집사가 선택되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문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은 헬라파 유대인의 무리 가운데서 일곱 사람을 택하여 공궤(供饋)의 일을 전담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상호간에 지체의식을 갖고서 제자들에게 부과된 사랑의 계명(요 13:34)을 실천함과 동시에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는 주의 지상명령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12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전파와 기도에 철저히 우선권을 두어야 함을 깨달았던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12사도들과 더불어 새로이 세움받은 일곱 집사들을 중심으로 더욱 부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행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행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행6: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초대 교회 부흥과 발전의 초석이 된 일곱 집사에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면모를 통해 이 시대에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지는 역사를 기원해 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는 많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직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주님의 일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 있을 뿐입니다.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여기 충성된 일꾼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본문을 통해 볼 때 첫째,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 직분맡은 자는 성령으로 거듭날 뿐만 아니라 범사에 기도하는 생활로 일관하여 언제든지 주의 뜻대로 생각하고 행하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둘째,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혜란 일반적 의미의 학식이나 상식보다는 진리를 분별할 줄 아는 영적 지혜를 가리킵니다. 이 지혜는 성령 충만이 전제된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성령의 은사로서 주어진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12:8)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왕을 예선(豫選)할 때 그는 이새의 아들 중 용모와 신장이 수려한 엘리압을 보고 왕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거부하고 말째 아들이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눈이 빼어났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윗이 매우 영특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은 후 다윗은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습니다.

  "(삼상16:12)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삼상16: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이러한 다윗은 왕이 되어 죽는 날까지 직분자의 자격을 상실하지 아니하고 지혜를 유지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지도자는 하나님 보다 자기를 드러내며 자기 뜻대로 하기 쉽기 때문에 직분 수행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신으로 감동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한 자였습니다. 그가 처음에는 자신의 힘으로 압제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보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실 때에 그는 이스라엘의 참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택함을 받은 사람의 자격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구분없이 동일하게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며 또한 지혜도 겸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칭찬을 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대인 관계이 있어 칭찬을 들을 만한 인격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디모데 전서를 통해 직분자의 자격을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딤전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딤전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딤전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딤전3: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딤전3: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딤전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딤전3: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딤전3:8)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딤전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딤전3: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딤전3: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딤전3: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딤전3: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소극적인 표현으로 요약하면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고 할 수 있으며 적극적인 표현으로는 "칭찬듣는 사람"인 것입니다.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던 모세에게 그의 장인 이드로가 찾아와서 백성의 농사를 담당할 자들의 자격을 이야기해 줄 때 재덕이 겸전(兼全)하고 진실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선출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기 위해서는 교회의 직분자가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맡은 자의 권위가 서고 성도들이 그를 신뢰하여 교회는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직분 맡은 자의 인격적 결함에 따라 나타나는 유형을 살펴보면 수 없이 많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12가지 유형을 살펴봄으로 교회 발전과 부흥에 좋은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 비굴형(아부형)이 있습니다. 신앙도 신의도 버린채 비겁하고 비굴하게 구는 사람입니다. 둘째, 대포형이 있습니다. 큰 소리만 뻥뻥치며 말로만 한몫보며 조그만 일도 과대해서 허풍을 떠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자기를 나타내려는 명예심과 자기의 약점을 감추려는 저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무능형이 있습니다. 자신있게 모든 일에 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먹기를 탐하여 권위를 잃게 되고(롬 8:6-7),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하여 실수가 많으며(롬 8:13), 영의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여 신앙심이 약해졌기 때문이요(암 8:11-12), 죄를 지은 연고로 양심의 가책과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비협조형이 있습니다. 자기가 앞장서서 모든 일을 이끌어 갈때는 열심히 일하다가도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맡게 되거나 자기보다 나은 자가 열심히 하게 되면 협조하지 않고 트집만 잡으려는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는 지나친 권위의식을 가진 사람이며, 타인의 성공을 질투하기 때문이요, 자기의 실수와 무지, 그리고 약점이 탄로날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계함이요, 성장 과정에서 배타적 습관을 가졌기 때문이요, 사명을 모르는 무지의 소산 때문입니다. 다섯째, 위약형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데서는 큰 소리치다가도 막상 자기가 말하던 사람이 나타나거나 자기를 잘 아는 사람 또는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겁쟁이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범사에 자신이 없고 담력이 부족하며 정신력이 빈약하고 실패의 개념과 죄가 괴롭히고 자기가 거짓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비밀경찰형(정치형)이 있습니다. 이런 자는 교역자나 성도들의 약점을 들추어 내려고 뒷조사 하는 자로써 자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여 자기 위치를 항상 불안해 하는 자요, 피해망상에 걸려 상대를 두려워 하는 자요, 자신에 대한 방어본능이 강한 자요, 사랑이 없고 무정한 자요, 말씀에 무지하고 영이 성숙치 못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독점형이 있습니다. 서로 상부상조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독점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자기가 아닌 타인이 하는 것은 모두 불안스럽고 못마땅하게 여기며, 자기만 잘하는 것 같아 타인은 염려스러워 일을 맡기지 못하고 혼자 모든 일을 하므로 타인의 숨은 기량을 발굴하지 못하게 되며, 영광과 칭찬도 자기 혼자 차지하려는 욕심에 빠지게 되며, 또한 혼자 고생하고 애를 쓰며 수고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좋은 소리를 못듣게 됩니다. 여덟째, 공갈 억압형이 있습니다. 어떤 교우가 범죄 사실과 실수 등을 상담조로 이야기 하거나 알게 되면 그 사실을 약점삼아 폭로하겠다며 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벌주실 것이니 당신은 나에게 와서 안수를 받아야 된다느니 자기가 시키는대로 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공갈과 억압으로 위협하는 자들입니다. 아홉째, 위세형이 있습니다. 공연한 허세를 부리는 자로서 이런 자는 허세를 부리기 위해 말을 많이 하고 외형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며,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고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며, 은사를 받지 못했으면서도 자기는 은사, 능력, 은혜 등을 혼자 다 받은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열 번째, 직설형이 있습니다. 이런자는 바른 말하기를 즐겨하는 습관으로 자기가 바른 말 잘함을 자랑으로 여겨 때와 장소를 구별치 않고 말하는 자로서 상대방을 무안케 하여 짓누르고 자기가 올라 서려는 것이요, 성미가 급한 연고로 실수가 많고 똑똑한 연고요, 인심이 각박한 연고요, 부도덕한 연고 때문입니다. 열 한번째, 복덕방형(사업형)이 있습니다. 자기의 물건이나 상품을 강매하려는 자와 매매 소개 중매 등을 잘하는 복덕방형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나쁘다는 것보다 그런 일들로 인해 부작용이 일어나거나 파당을 짓거나 조성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열두번째, 다방형이 있습니다. 공연히 빈둥거리며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이집 저집 돌아 다니거나 자기 집 또는 이웃집으로 교인들을 불러들여 먹고 마시며 쓸데없는 언행을 하는 자들로써 이런 자가 주로 교회에서 문제를 많이 일으킵니다.
 영화 "도망자"(Fugitive)의 이야기는 현대인을 상징한 것으로 평생을 도망다녀야 할 한 운명의 사나이를 그리고 있습니다. 자기 부인 살인 누명을 뒤집어 쓰고 잡혔다가 호송되는 도중 우연한 사고로 자유로운 몸이 되면서 도망자가 되어 수배를 받고 있는 킴볼 박사는 누명을 벗을 증거를 잡기 위하여 도망다니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는 야곱처럼 불안에 쫓깁니다. 그는 현대인처럼 줄곧 시간에 쫓깁니다. 그는 고독에 쫓기기도 합니다. 그는 도망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먹고 살아야 하는 긴박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체면에 쫓기기도 합니다. 그는 오해를 받아 쫓기기도 합니다. 또한 모든 친구나 이웃 사람들로부터 살인자로 몰리고 있는 안타까움에 그의 정신은 산산이 찢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몸과 마음은 극도로 피곤해집니다. 그것은 현대인의 심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 킴볼의 생활에서 강조하고 있는 주제가 있습니다. 킴볼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만났을 때에는 자신의 발등에 불똥이 떨어지고 있어도 그 일을 위하여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는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도망자이지만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잠시도 잊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의 휴머니즘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형사가 바로 문 밖에 도달했을 때에도 그는 의사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그 후에 다시 도망자의 길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없이 달려가면서도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생활, 어쩔 수 없이 쫓겨 다니면서도 사명감을 잃지 않는 생활, 이것이 바로 우리 직분 맡은 자의 생활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며 칭찬받는 직분자들이 되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가운데 점점 흥왕해지며 허다한 무리들이 그 말씀에 복종하는 축복의 역사가 충만해지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4. 천사의 얼굴

  "(행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6:9)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행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행6:11)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행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행6: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행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행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작 "최후의 만찬"에 얽힌 일화입니다.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림으로 남기고자 결심하고 유럽 일대를 돌아다니며 모델을 찾았습니다. 마침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은 얼굴을 지닌 사람을 만나게 되어 그를 모델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고는 돈을 주었습니다. 그 후에 열 한 제자의 얼굴은 모두 그렸는데 가롯 유다를 그리지 못해서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기 위해 10년을 헤맸습니다. 전유럽을 두루 다니던 중 어느 날 길가에서 술취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가롯 유다의 얼굴과 똑같이 생겼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와서 모델로 삼아 가롯 유다의 얼굴을 그리고 그림을 마무리졌습니다. 그림을 다 그린 다 빈치는 돈을 그 사람에게 주었으나 돈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돈은 이미 받았으니 안 줘도 됩니다."
  다 빈치는 놀랐습니다.
  "언제 받았습니까?"
  "당신이 10년 전에 예수의 얼굴을 닮은 사람을 모델로 그린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삐에꼬로 단기멜렉이었지요."
  "내가 바로 삐에꼬로 단기멜렉이오. 돈은 10년 전에 한번 받았으니 안 받겠소."
  다 빈치는 똑같은 사람을 한번은 그리스도의 얼굴로, 한번은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렸던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든 그 얼굴은 마음의 창문입니다. 그 마음에 은혜가 있을 때 그 얼굴이 예수님을 닮은 얼굴이 될 수도 있고, 그 마음이 약해지고 타락하고 썩어 버릴 때, 마치 가롯 유다의 얼굴처럼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도 사람의 피부는 4년마다 바뀐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예쁘게 보이려고 열심히 화장을 합니다만 사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바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병들면 아무리 바른다해도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마음에 기쁨과 은혜와 빛이 있어야 얼굴도 빛이 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썩어가는데 어찌 그 얼굴을 빛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스데반이 주로 헬라파 회당에 출입하면서 전도하다가 유대교 지도자들로 부터 성전과 율법과 모세를 거스린다는 거짓 증거로 공회에 고소당하는 내용입니다. 이들 유대교 지도자들은 앞서 4,5장에서도 수차례 사도들을 위협하여 복음 전도를 저지하려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가 조직(집사제도)을 갖추며 더욱 부흥해 가자 이들은 종교적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교회를 핍박하기로 계획하고 그 구체적 실행으로 민간에 혁혁한 "큰 기사(奇事)와 표적(表蹟)을 행함"과  더불어 말씀을 전하는 스데반을 죽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뱀과 같이 독을 내뿜으며 살기 등등한 이들 유대교 교권주의자들 앞에 끌려온 스데반의 모습은 평화와 기쁨을 잃지 않은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라고 했습니다.
  H.G. 웰스는 아브라함 링컨을 세계의 여섯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아마 자기 할아버지 이름은 몰라도 링컨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링컨처럼 고생을 많이 한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스무살이 될 때까지 그는 손에서 도끼 자루를 놓아보지 않았습니다. 직업만 하더라고 뱃사공, 농부, 노동자, 장사꾼, 품팔이, 군인, 우체국 직원, 측량사, 변호사, 주 의원, 상원의원, 대통령까지 안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학교에 다닌 것은 모두 합쳐서 1년도 되지 않습니다. 그는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고 독학으로 유명한 웅변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한 마디로 땀과 노력의 생애였습니다. 링컨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링컨은 문학적 수준에 있어서 세익스피어와 성서 연구는 전문자 수준이었습니다. 1865년, 57세의 나이에 흉탄에 맞아 죽는 순간까지 링컨은 열심이 배우고 부지런히 일하고 정직하게 살고 사랑을 나누어 주는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링컨은 특색있게 생기기도 했지만 그 얼굴에는 성실과 정직과 인자와 강한 의지가 동시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에는 고생과 눈물과 땀의 자국이 역력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관대함과 이해심과 통찰력까지도 지닌 얼굴입니다.
  죄악의 세상가운데 살면서 삶에 찌들어 있는 자신의 얼굴 모습은 아닌가요? 아니면 그런 가운데서도 천사의 얼굴을 이루어가는 자신의 모습인가요?
  천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원수로 지내가 20년만에 형을 만나게 됩니다. 400인을 데리고 오는 형님이 자기를 죽이러 오는 지 살리러 오는지를 알 수 없어 그는 얍복강변에서 밤을 새워가며 천사와 씨름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형님을 만나게 되는데, 원수로 대할까봐 걱정했던 형님은 동생과 형의 관계로 반갑게 만나서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야곱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창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에서라는 이름 자체가 "붉다"는 뜻이고 또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이라 험상궂은 얼굴모습인데도 불구하고, 동생 야곱이 볼 때  하나님 얼굴을 본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처럼 볼 수는 있습니다. 살기등등(殺氣騰騰)한 대적 앞에서도 스데반은 천사의 마음과 천사의 사랑을 지녔기 때문에 천사의 얼굴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천사의 얼굴로 나타나게 된데는 첫째, 그가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산에서 내려올 때 그 얼굴의 광채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그를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마에 수건을 둘렀습니다. 이는 모세가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음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그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출34: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출34: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출34: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출34:33)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출34: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출34: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마찬가지로 스데반도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혔으므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증거되며 큰 권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가지고 서 있었을 때 세상의 권위가 능히 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행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6:9)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행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성도는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충만하게 될 때 성도로서의 권위를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다고 했습니다.

  "(행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스데반의 적대자들이 여럿임에도 불구하고 스데반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 것은 바로 그가 지혜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공회 앞에 끌려가게 될지라도 무슨 말을 할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10:19)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인 것입니다.

  "(히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스데반은 자신의 지혜를 통해 설교하거나 변론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말했으므로 그와 변론한 자들이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관한 한 박사라 할 수 있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성경에 대한 토론에서 참패를 당했다는 것은 성경이 인간의 지혜로 해석되거나 가르쳐질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고전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3: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고전3: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아덴에서 자신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다가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령은 우리 자신의 성격까지도 개조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으로써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 성품과 인격이 변화되어 스데반의 모습처럼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선적으로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그에 따라 성품과 외모가 천사처럼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죄로 찌들거나 세상사로 병든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닮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反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병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한 전투에서 근처에 떨어진 포탄으로 말미암아 심한 화상을 입어 중태에 빠졌습니다. 그는 곧 본토의 재향군인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치료 끝에 다행히 그 병사는 완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흉칙할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기독교인인 성형외과 의사를 만나 상담하였습니다. 의사는 매우 희망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이전의 모습대로 회복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혹시 당신 얼굴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진이 있어야 그대로 수술을 할 수 있지요."
  "의사 선생님, 저의 얼굴은 굉장히 못생겼거든요."
  여기까지 말한 순간 병사는 우연히 의사의 진료실 벽에 걸려 있는 워너 솔맨이 그린 그리스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부탁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의 얼굴처럼 만들어 주시겠어요?"
  의사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윽고 병사는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되었고 그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해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벽에 걸려 있는 솔맨의 그리스도상을 보며 그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이제 제 얼굴은 저 사람의 모습과 똑같아요.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군가요?"
  "저 그림 속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아, 그래요? 저도 그 분이 훌륭하신 분이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그 분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 분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러자 의사는 병사에게 신약성경 한 권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 분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읽은 병사는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곧 구세주를 그의 삶 속으로 영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기쁨으로 충만해서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만들어 준 그 의사에게 달려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제 얼굴이 그리스도를 닮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최선을 다하여 그 분처럼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방식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을 지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 모습을 지니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는 성도로서 매우 불행한 일인데도 많은 성도들이 그 불행을 느끼지 못하므로 이 문제에 대해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같은 변화는 우리 자신의 힘이나 의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가능하다면 결국 기독교도 다른 여러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수양의 종교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데반과 같이 변화된 모습을 원하는 성도는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변화된 모습을 지닐 수 있습니다. 사람은 훈련이나 교육을 통해서 좀 더 고상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는 있으나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는 결코 변화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천주교 교인들에게 전도하여 많은 개종자들을 얻은 매콜(R.W.McAll)은 신앙심이 두터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매콜이 파리에서 죽었을 때 전에 무정부주의자였던 한 노동자가 매콜의 관 옆에서 몹시 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당신은 이 사람의 친척입니까?"
  라고 묻자 그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이 분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분이 당신에게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는 좌우로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얼굴이 말씀하셨습니다."
  즉 매콜의 얼굴이 예수의 구원을 말했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에게 은혜와 권능, 그리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시므로 예수의 구원을 증거하는 천사의 얼굴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5. 최초의 순교자

  "(행7:1)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행7: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행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7: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7:54)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행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행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오늘 본문에 "(행7:54)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마음에 찔린다"는 말은 디에프리온토(dieprionto)라는 헬라말로서 "마음을 조각내다"는 뜻인데 "톱으로 켜다"(히 11:37)는 말로도 번역되어 있어 말씀이 듣는 사람의 마음에 무서운 충격과 고문을 주듯이 강하게 찌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무서운 분노와 극한 감정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 성전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스데반을 향하여 증오의 불길을 내어뿜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나운 짐승이 강한 적을 만나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은 스데반의 설교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는 것(선민사상)에서 신앙과 사상에 있어 민족적 우월감과 함께 모든 사고의 가장 커다란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제일 잘 났기 때문에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나 민족 신화(神話)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단군신화입니다. 누가 낳았습니까? 곰이 낳았습니다. 곰 그러면 우스워보이지만 그 속에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 민족의 우월성이 감춰져 있는지 아십니까? 원래는 누구하고 누구하고 인내하게 되어 있습니까? 곰하고 호랑이하고 둘이 마늘만 먹기로 되어 있었는데 곰은 견디었습니다. 그러니까 도망간 호랑이는 후손이 아니고 견딘 곰이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일본 신화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그 건국 시조(始祖)가 와 보니까 바다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쪽 북해도의 땅을 하나 영차 끌어오고 저쪽 남태평양에 가서 땅을 하나 영차 끌어와서 섬을 4개 모아다가 오늘날 일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얼마나 힘이 센 신입니까? 그 시조가 얼마나 셉니까? 제일 좋은 땅을 하나씩 먼 데서 끌어가지고 아직도 기초를 못 잡고 흔들흔들하는게 흠이지만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나 건국신화를 보면 그 민족 신화는 전부 우리 민족이 너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너희보다 낫다. 지금 유대인이 갖는 것이 그 생각입니다. 그 나은 것을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여러 사람 중에 선택했고 모세를 일으켜 우리에게 율법을 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을 다른 성경구절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요8: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 (요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8: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과 같이 진리에 순종하지않고 오히려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였다는 것입니다.

  "(요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요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요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두번째 설교 내용은 할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창17: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 언약을 주고 선민이라는 이름을 준 것은 너희가 다른 사람들보다 빼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은혜와 자비로 너희를 놓지않고 사랑과 긍휼 가운데 불러냈다는 뜻이지 나는 남과 다르며 우월하다는 뜻으로서 너희가 주장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것이 스데반의 설교 핵심인 것입니다.

  "(신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7: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신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7: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와 구별해서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너희와 섞이지 않는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에서 지적하는 바나 성경 전체의 지적은 너희를 부른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면 선민답게 하나님 마음에 합하도록 행하라는 것입니다.

  "(렘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할례(세례)를 받았으면 뭔가 하나님 앞에 달라진 모습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갈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갈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할례는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 안에서 관계를 갖게 하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믿고 주 안에 들어와 주를 믿는 자로서 너희의 신앙 인격을, 너희의 존재를, 너희의 목표를 설정하고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에서 자유인이 되었으면 이제 주를 향하여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 섬기는 자로 의의 병기로 드려진 열매를 맺는 생활, 성결을 이룩하는 변화와 진전이 있는 생활을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않다면 할례(세례)받은 사람, 즉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갈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갈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갈6: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세번째 설교는 율법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선민사상을 가지고 민족적 우월감과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지닌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율법으로는 구원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갈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갈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을 준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자인케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함으로써 '그럼 너 형벌을 달게 받아라' 하고 끌고 가는게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로 오게 하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하려고, 주께서 베푸시는 은혜 아래 자복하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공격은 너희가 율법을 가졌느냐 너희가 모세를 지도자로 인정하느냐 그렇다면 그 율법이, 그 몽학선생이 너희를 왜 그리스도께 가지 못하게 하고 너희도 안가고 남도 못하게 막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스데반 설교의 지적입니다.

  "(롬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3: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롬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하며 우월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율법이 저들을 십자가로 인도하지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도취에 빠져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는냐?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유대인이든 이방인든 구원은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아, 너희가 가지고 있는 율법이 너희를 십자가로 인도하지 않았다면 너희를 회개케 하지 않았다면 그 율법을 헛된 것이니라. 아니 너희가 율법을 모르고 있는 것이니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이같은 내용의 설교를 듣고 유대인들은 화가 치밀었던 것입니다. 저들의 뿌리가 흔들리고 저들의 자부심과 긍지의 근거가 무너지고 이방인들이 저들과 동등하다는 스데반의 얘기에 너무 화가 나서 이를 갈고 덤벼들어 돌로쳐 죽였던 것입니다.
  네번째 설교는 성전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짓고 성전 제사를 드리는 민족이라는 데서 커다란 자부심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만이 성전을 지닌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들 편을 들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렘7:1)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렘7: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렘7: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렘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7: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렘7: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렘7:7)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성전은 원래 그 앞에 있었던 모형(장막, 성막)을 본떠 만들었습니다. 성막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고 가나안 땅이 아니고 광야에서 이미 그 성막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명하셔서 만들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광야다 가나안이다 하는 구별이 하나님에게는 없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라는 거짓말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렘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7: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렘7: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렘7:7)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여호와의 전을 갖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기쁘심을 따라 사람이 변화되고 충성스러워지고 진심과 모든 마음을 합쳐서 하나님께만 마음을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전을 소유하는 이유인 것이지 여호와의 전을 소유했으니까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예언하신 것과 같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요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 제사하는 장소로서 큰 의의가 있는 것이지 결코 건물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지 않음을 밝힘으로써 성전에 대한 미신적 숭배의식을 타파하라는 것이 스데반의 설교 핵심인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설교 때문에 스데반을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행7:54)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행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행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스데반의 순교는 직접적으로 유대교의 기독교 핍박이었지만 간접적으로는 교회의 확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즉 스데반의 설교에 자극을 받은 유대교 지도자들은 스데반을 죽이는 것으로 그치지않고 예루살렘 교회를 전면적으로 핍박하였고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각 처에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으로 전파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위하여 우리의 땀과 피를 쏟을 수 있겠습니까? 한평생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또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입니까? 국가를 위하여 전쟁에서 싸우다가 죽는 것도 위대한 일이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며 죽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며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다 바친다는 것은 참으로 영원히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복음이 없어서 영적인 어둠에 싸여 살던 아프리카 사람들을 사랑한 리빙스턴은 자기의 편안한 삶과 장래를 포기하고 아프리카의 선교사가 되어 죽기까지 복음을 전하였고, 마카오에 자기 아내와 아들과 함께 나란히 묻혀 있는 로버트 모리슨은 중국인들을 위하여 위험과 외로움, 심지어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음을 위하여 순교의 길을 갔고 요한 역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카타콤이라는 지하 동굴에는 복음을 버리지 않으려고 목숨을 포기한 17만 4천명의 순교자가 묻혀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터키 군은 서머나 시민 21만 명의 대학살을 감행하고 그 지방으로부터 기독교 신자들을 내쫓으려고 계획했습니다. 군대가 시에 진입하여 시 전체가 큰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크리소스톰은 용감하게 터키 군 앞에 나아가서 "시민학살을 그만두기 바랍니다."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잔혹한 터키 군은 그의 간청을 무시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를 잡아서 온갖 모욕을 자행했습니다. 먼저 그의 턱수염을 뽑은 다음 의복을 찢고 손톱과 발톱을 빼버렸습니다. 나중에는 혀까지 빼버렸습니다. 그들의 잔인한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시내 중심지인 이키 체스메 광장으로 끌고 가서 팔과 다리에 밧줄을 매고 그 앞에 4마리의 말을 묶었습니다. 말 위에는 4명의 기사가 타고 있었습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4마리의 말은 각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의인 크리소스톰의 온 몸은 갈기갈기 찢겨졌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었기 때문에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희롱과 채찍과 시련을 받고 무서운 환란 가운데 가난과 학대를 받으며 산과 토굴에서 살았지만 누가 그들을 보고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스데반을 자기를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들까지 용서하고 그들을 위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순교당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마음에 쉼과 평안이 없으며 오히려 불안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를 시기하여 억지로 잡아다가 외국에 팔아버린 비정한 형제들까지 용서하고 사랑한 요셉은 정말 예수님처럼 넓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전혀 없는데도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시고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피를 쏟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해밀턴 대학의 유명한 교수인 바커스는 병세가 악화되어 위독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교수 부인의 귀에 대고 "박사님의 임종 때가 가까웠습니다."라고 속삭였습니다. 우연히 이것을 들은 교수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면서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곧 죽음의 시간이군요. 미안하지만 나를 좀 일으켜 자리에서 나오게 해서 무릎을 꿇게 해 주십시오. 해밀턴 대학의 학생들을 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한 후 죽고 싶습니다."
  집안 사람들은 의사를 도와 그의 소원대로 침대 곁에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그의 안색은 점점 변하고, 죽음의 때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해밀턴 대학의 학생들을 죄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
  그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했습니다. 그가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는 것을 안타까워한 의사는 그를 다시 침대에 눕게 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도 입술을 미약하나마 계속 움직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이시여, 학생들을 구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그가 임종의 순간까지 기도한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놀랍게도 해밀턴 대학의 학생 거의 전부가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현대는 불확실성의 시대. 세상은 적응할 틈도 없이 급격히 변화하고 그 변화의 방향도 예측하기 힘듭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가로놓인 미래의 운명을 내다볼 수 없는 세상. 미래는 늘 불안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예언이 난무하는 사회. 종교는 힘을 잃고 과학도 맥을 못추고 있습니다. 그 틈을 비집고 <초(超)종교> <반(反)과학>적인 풍조가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집단최면에 걸린 듯 근거없는 예언과 미신을 좇고 있습니다.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이른바 <종말론>의 초침소리는 점점 커지고 때마침 파고드는 세기말적 증후군이 사회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인가. 요즘 점집은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주부는 물론 신세대들도 북적거립니다. 젊은층의 점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또한 새로운 풍속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점 카페>가 속속 등장하고 컴퓨터문화에도 점의 열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점집이 날로 번창하다보니 역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원도 서울 강남에 생겼습니다. 수강생은 20대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퇴직 공무원도 있고 대학생들도 눈에 띕니다. 5개월 과정을 마치면 3-5명 정도는 바로 개업한다고 학원관계자는 귀띔합니다. 점집의 최대 고객은 주부들인데 이들은 점을 보는데 만족하지않고 이제 직접 배우러 나서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수강생들 중에는 대학교수, 약사들도 있습니다. 캠퍼스라이프지가 3월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학생의 48%가 점을 본적이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들 젊은층의 점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점 카페>가 북적거리고 있습니다. 자칭 대학생도사들이 운세를 봐주는 <사주공간> <천기누설> 등의 카페가 지난 90년에 생겨 지금은 서울시내에만 6-7곳이 성업중입니다. 이제 점은 컴퓨터와도 손을 잡았습니다. <사주박사 3.0>이 그 결실체. 포인트라인이 판매하고 있는 이 소프트웨어는 사주가 만들어 낼 수 있는 1천 2백 96만가지의 조합을 수록해 놓았습니다. 점쟁이의 숫자도 급속히 늘고 있습니다. 속칭 신점(神占)을 치는 사람들의 모임인 경신연합회 회원수가 82년 3만9천명이던 것이 92년에는 15만1천명으로 약 3.9배 증가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증가율의 4배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정신과 의사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점. 푸닥거리. 살풀이. 굿을 통해 위안을 얻고자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서구화되고 합리적인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속(巫俗)이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과 한계에 대해 암시하고 공감하고 투사하고 카타르시스를 시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무속인들을 통해서 암시를 받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억압된 감정을 투사(投射)합니다. 무속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무속은 사람으로 하여금 진지하게 자신을 통찰하는 자세를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조상 탓> <초자연적 현상> <신의 섭리>로 풀이하여 자신의 책임을 흐리게 합니다. 기복(祈福)이나 개인적 갈등의 해소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장기적 안목의 역사의식이 부족해집니다. 무속에 빠지거나 자주 찾는 사람들은 대개 피암시성이 강한, 즉 심지가 약해 남의 말에 잘 현혹되는 사람, 미숙한 성격 혹은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 눈 앞의 행복이나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현세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에 깊이 빠져든다면 넓고 깊은 안목을 가져 앞날을 설계해야 할 젊은이에게는 불행인 것입니다.
  무속에 빠져들고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과 주부들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글로버(T.R.Glover, 1869-1943, 영국의 신학자, 케임브리지 대학교수)는 <역사 속의 예수>라는 책에서 기독교인들이 이교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이 "더 많이 인내했고, 더 생각했고, 더 많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고후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세상을 구원할 복음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순교자의 삶으로 이 땅에 빛과 생명이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6. 그 흩어진 사람들

  "(행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행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행8: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행8: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행8: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행8: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행8: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행8: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행8:11)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행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행8: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행8: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행8: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행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행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8: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행8: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8: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행8: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것도 없느니라 (행8: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행8: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행8:24)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행8: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스데반의 순교를 시작으로 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큰 핍박을 당하여 그 곳에 계속 머물 수 없으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각처로 흩어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디아스포라, diaspora) 중에 빌립의 선교 활동이 본장의 내용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며 또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과 지혜, 그리고 믿음이 충만한 안수받은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집사는 단지 교회의 행정적인 직무만을 담당(구제 등)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디든지 복음을 증거하는데도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전도자 빌립은 주의 말씀에 깨어 있는 사람이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였으며 주께서 명하신대로 어느 곳이나 거침없이, 그리고 용감하게 나아간 초대교회의 주요 인물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삶의 뿌리요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인해 실망과 좌절 그리고 낙심으로 무기력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결코 실망하지않고 부지런히 낯선 곳들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숨어 살거나 아니면 먹고 살기 위해 부정한 행위를 하거나 부끄러운 인생을 살지않았고,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지만 그것에 관하여 고민한 흔적이 없고, 살 곳이 마땅치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복음을 더 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그들이 당한 고난과 핍박과 삶의 고통을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했을때 많은 표적과 기적, 큰 능력이 일어났으며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빌립이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말만으로는 불가능한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오히려 그 말을 따르는 아름다운 생활이 더 좋은 전도가 되며 특히 성령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역사가 일어날 때 그들은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복음을 증거할 때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바울도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살전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전도는 위력이 있고 또 그러한 전도자 앞에서는 불신자들의 머리가 숙여지고 딱딱한 마음들이 녹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복음 전도를 위한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마리아 성에 복음을 전했을 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서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음을 입게 되어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인생을 바꾸고 운명을 바꾸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기쁨을 모든 인생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빌립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기에 그처럼 큰 기쁨과 능력이 나타났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했던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잘 산다는 것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다니면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이 전한 것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인간들이 통치할 때 혼돈과 다툼이 오지만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때 질서와 평안이 오고 참 안식과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과 복음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인 것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 이름으로 병든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났으며, 어느 날 온 세상이 그의 이름 앞에 모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이름을 "(사9:6)...기묘자라, 모사라,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평강의 왕이라..."하였으며,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으며, 그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위대하고 능력있는 이름인 것입니다.

  "(행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또한 그 이름을 믿어 생명을 얻는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위대하고 귀한 이름입니까?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 이름 곧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져내실 자라는 뜻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랑이나 자기 간증을 전하지말고 예수의 이름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경험을 내세우지말고 자기가 받은 은사를 내세우지말고 자기 신앙을 고집하지말고 자기 신학을 주장하지말고 오직 예수만을 전할 수 있는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의 핍박으로 인하여 "그 흩어진 사람들"을 통해 이방(異邦) 선교를 성취해 나가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의 성취인 것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일찍이 하나님께서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계시의 성취인 것이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 중의 하나인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는 혈통이나 종족 등 모든 장벽들을 복음 안에서 허물어버리시고 새로운 하나의 공동체를 탄생시키고자 하신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이 사마리아 전도는 전체적으로 아주 놀라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요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 상종치 않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사마리아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 왕은 처음에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이스라엘 왕국을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나라로 이끌어갔지만 만년에 이방 여인을 취하여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만연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왕국은 두 나라로 분열되었습니다.

  "(왕상11:30)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왕상11: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왕상11: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왕상11:33)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왕상11:34)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왕상11:35)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 이요 (왕상11:36)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왕상11:37)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이스라엘 왕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그곳을 수도(首都)로 삼았습니다.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두고 이를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인도한 신으로 섬기게 했습니다.

  "(왕상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왕상12: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때로부터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6대 왕인 오므리 왕은 사마리아 산을 사서 성(城)을 건축하고 그 성을 "사마리아"라고 부르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왕상16:24)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사마리아 성은 주전 800년경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게 함락되어 2만 7천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고 당시 승전국이 그러했듯이 그곳에 타민족을 이주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주 정책(移住政策)의 결과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유대인으로부터 배척과 멸시를 당했던 것입니다. 주전 6세기에 바벨론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둔 남왕조(유다)를 점령하여 바벨론으로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어갔으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민족성을 잃지 않고 완강하게 유대인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주전 5세기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에스라와 느혜미야 밑에서 파괴된 예루살렘을 재건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팔레스틴에 남아 있었던 북왕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민 온 이방인들과 잡혼(雜婚)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상실했고 그것은 유대인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었습니다. 남왕조 백성들이 환향(還鄕)하여 예루살렘성을 재건하려 했을 때 포로되지도 않고 남아 있었던 이방인과 혼인한 사마리아 주위의 사람들이 협조해 주겠다고 제안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제안은 그들이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기 좋게 거절당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화합할 수 없는 불화와 격한 증오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빌립이 거기 사마리아에서 가르치고, 사도들이 거기에 왔고, 예수님의 복음이 이 백성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당시 교회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제일보를 내딛고 있었던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한채 그리스도는 세계를 위한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이러한 사마리아인에게 친히 복음을 전하셨고 빌립 또한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였으니, 이스라엘 왕국 분열 이후 참신앙을 가지지 못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북음은 이처럼 어떤 장벽도 넘어서며, 어떤 민족도 복음의 빛을 받는 데서 제외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악 개오사(善惡皆吾師)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선한 것보다는 악한 일을 더 쉽게 본받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지만, 본받아서는 안되는 행위를 통해서 삶의 교훈을 받는다면 더 훌륭하고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의 경우는 바로 우리가 본받아서는 안 되는 신앙의 예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시몬은 마술로써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가다가 사도들의 전도를 받아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의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는 어리석을 범했던 것입니다.
  미국 작가 피츠제랄드(F.S. Fitzgerald, 1896-1940)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닉 캬라웨이는 젊은 주식상으로 롱아일랜드에 살면서 뉴욕으로 통근했는데 그럴 때면 언제나 "재의 골짜기"라고 불리우는 황무지를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닉이 사는 이웃의 대저택에는 제이 개츠비라는 정체 모를 한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닉은 그 남자를 관찰하는 중에 그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시 가난한 장교였던 개츠비는 닉의 아름다운 사촌 누이인 디지를 사랑했었는데, 그녀는 음흉한 거부인 톰과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개츠비는 빈곤에서 일어나 술 밀매로 큰 부자가 된 후에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나 잃어버린 사랑을 돈으로써 되찾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촌인 닉을 중간에 세워 디지와 합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지가 톰의 정부를 과실로 치어 죽인 사건을 발단으로 하여 개츠비는 비참하게도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돈을 주고 사들인 사랑이 그 비참한 종말을 가져왔듯이, 성령을 돈을 주고 사려던 시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시몬의 행위는 그가 복음의 내용보다는 표면적으로 나타난 표적과 능력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사도들을 따라다녔다는 것을 말합니다.

  "(행8: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표적과 기적, 능력 등은 때때로 인간의 부족한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향하도록 촉진시켜주기도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표적 행위 그 자체만 집착하는 것은 육신적인 영광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올바른 믿음에서 떠난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오늘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복음의 핵심 내용보다는 초자연적인 이적(異蹟)에만 온통 마음이 쏠려 있습니다. 지난 주에 소개했던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요즘 점집은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주부는 물론 신세대들도 북적거립니다. 젊은층의 점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또한 새로운 풍속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점 카페>가 속속 등장하고 컴퓨터문화에도 점의 열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점집이 날로 번창하다보니 역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원도 서울 강남에 생겼습니다. 수강생은 20대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퇴직 공무원도 있고 대학생들도 눈에 띕니다. 5개월 과정을 마치면 3-5명 정도는 바로 개업한다고 학원관계자는 귀띔합니다. 점집의 최대 고객은 주부들인데 이들은 점을 보는데 만족하지않고 이제 직접 배우러 나서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수강생들 중에는 대학교수, 약사들도 있습니다. 캠퍼스라이프지가 3월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학생의 48%가 점을 본적이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들 젊은층의 점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점 카페>가 북적거리고 있습니다. 자칭 대학생도사들이 운세를 봐주는 <사주공간> <천기누설> 등의 카페가 지난 90년에 생겨 지금은 서울시내에만 6-7곳이 성업중입니다. 이제 점은 컴퓨터와도 손을 잡았습니다. <사주박사 3.0>이 그 결실체. 포인트라인이 판매하고 있는 이 소프트웨어는 사주가 만들어 낼 수 있는 1천 2백 96만가지의 조합을 수록해 놓았습니다. 점쟁이의 숫자도 급속히 늘고 있습니다. 속칭 신점(神占)을 치는 사람들의 모임인 경신연합회 회원수가 82년 3만9천명이던 것이 92년에는 15만1천명으로 약 3.9배 증가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증가율의 4배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의 이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진정한 회개를 하지않았던 무리들과 아주 흡사한 모습인 것입니다.

  "(요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요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2: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이와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마치 자갈밭과 같아서 말씀을 듣고 즉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뿌리가 없어 쉽사리 넘어져버리는 것입니다.

  "(마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복음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회개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초자연적인 이적과 표적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면 시몬과 같은 저주가 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행8: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행8: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것도 없느니라 (행8: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행8: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시몬은 또한 본문 성구를 통해보면 명예욕에 급급하여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행8: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시몬처럼 물욕에 눈이 어두워 신앙의 정도(正道)를 이탈한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발람과 게하시가 바로 그런 인물들이었습니다.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는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물리치는 계책으로 발람에게 뇌물(복채,卜債)을 주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도록 합니다. 복채를 받아쥐고 여러번에 걸쳐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지만 하나님의 방해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맙니다.

  "(민22: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민22: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민22: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민22:31)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민22:32)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민22:33)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중세 천주교가 면죄부를 판 사실이나, 선교라는 미명 아래 금전으로 하나님의 일을 좌우하려는 일들은 모두 다 시몬의 유물주의적(唯物主義的)인 망동(妄動)과 같은 것들입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사람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음에도 탐욕에 눈이 어두워 자기 주인까지 속이며 아람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에게 돈을 얻어 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모든 사실을 꿰뚫어 본 엘리사 선지자의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걸리는 비참한 재앙을 당했습니다.

  "(왕하5: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 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 (왕하5:21) 나아만의 뒤를 쫓아 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왕하5:22)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왕하5:23)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왕하5:24) 언덕에 이르러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저희를 보내어 가게 한 후 (왕하5:25)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왕하5:26)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왕하5: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교인들중에도 마술사 시몬처럼 돈이나 권력이나 학력 또는 재산이 많으면 신앙도 소유하기가 좋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심지어 어느 교회에서는 돈이 많아야 교회의 직분을 받는다고 하는 말도 있고 목소리가 크고 자기 주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 회장이나 임원이 되기도 한다는 안타까운 말이 들립니다.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은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주시지만 또한 우리가 간구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은사와 하나님께 속한 비밀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것을 담을 만한 그릇이 준비되었을 때 비로소 채워주십니다. 더러운 그릇에 거룩한 것을 담을 수 없듯이 우리의 생각과 삶이 철저하게 깨끗하게 비어 있어야 신령한 은사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봉사하지만 자기를 드러내 보이고 싶고, 하나님께 헌금하면서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를 원하거나 기복적인 마음을 가진다면 아직도 그 마음이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시몬은 세례를 받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다고 하지만 그는 영적으로 깊이 변화하였거나 성숙한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육신적이요 욕심이 많은 인간적인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세례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며, 성령 충만함을 통해 보다 심각한 헌신과 내적인 변화가 있어야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몬은 자기가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베드로에게 부탁하기를 "(행8:24)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방금 전에는 성령의 은사를 돈으로 사려고 하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니 이제는 자기 잘못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대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시몬은 베드로의 기도가 또 다른 마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시몬은 영적인 일과 미신적인 이를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행위를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참된 회개의 뜻도 모르고 그저 베드로에게 부탁하여 대신 회개 기도를 드려달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마치 자기가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기는 숨고 그 대신 친구를 내세워 처리하려고 하는 염치없는 사람과도 같은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의 잘못과 죄에 대하여 깊은 고통으로 가슴 아파하고 거기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죄를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네델란드의 유명한 코리 텐 붐 할머니가 이러한 간증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공산권에 성경을 갖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당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할 때라 공항에서의 검색이 매우 치밀하고 엄격했습니다. 그녀는 성경책이 가득 담긴 커다란 가방을 들고 검열 대열의 맨 끝에서 두번째에 서 있었습니다. 보아하니 검색원은 딱딱한 말투로 이것 저것 묻거나 소지품을 뒤지기도 하며 한 사람 한 사람 통과시키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자기 차례가 가까와옴에 따라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방 속에 뭐가 들어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지? 거짓말을 할까? 아냐 거짓말은 안돼! 그럼 어떻게 하지?"
  그때
  "기도하라!"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당신의 천사를 보내사 저를 지켜 주시옵소서."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사이에 맨 뒤에 서 있던 사람이 새치기를 하였습니다. 이제 할머니가 맨 끝에 서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그녀가 검색 받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검색원이 다가와 말했습니다.    
  "어휴, 할머니 힘드시겠네요. 가방 이리 주세요. 제가 들어드릴께요."
  그리고는 가방을 검색원이 직접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항상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언제나 진지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어디든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올 수 있는 순종의 신앙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그 흩어진 사람들"처럼 여러분의 삶이 어떠한 정황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 전도의 큰 능력과 표적이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7. 빌립의 전도

  "(행8:26)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행8: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행8:28) 돌아 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아사야의 글을 읽더라 (행8: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행8: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행8:31)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행8:32)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행8:33)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행8: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행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행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행8:37) (없 음) (행8:38)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행8: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행8: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백홍준(1848-1893)은 만주에 갔다 온 부친에게서 이상한 책을 건네 받았습니다. 부친은 만주의 로스(J. Ross, 1842-1915,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선교사로 만주에서 한국인에게 선교활동)선교사에게서 양초와 함께 책을 선물받았는데 그 자신은 책에는 관심이 없고 양초에만 호기심을 갖고 책은 아들에게 읽어 보라고 건네 주었습니다. 그 책은 한문으로 된 성경책과 <훈아진언>(訓兒眞言)이란 제목의 전도책이었습니다. 백홍준은 이상한 책들을 읽는 동안 새로운 진리가 그 속에 있음을 알게 되었고 뜻이 통하는 친구들과 그 책을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백홍준은 2,3 년간 집에서 그렇게 공부한 후 1879년에 더 확실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 친구 셋과 함께 만주로 가서 매킨타이어(J. MacIntyre, 1837-1905,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선교사)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매킨타이어 밑에서 수개월간 교리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백홍준은 다시 의주로 돌아와서 은밀히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그의 전도는 기독교의 복음이 우리 민족에게 전파되는 효시(嚆矢)를 이루었습니다. 백홍준은 1879년 세례를 받은 한국의 첫 기독교인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주의 성서번역팀에 의해 성서가 한글로 번역된 것은 곧 한국 기독교의 시작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백홍준은 바로 여기에 핵심멤버로 참여했었습니다. 그는 평안도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그가 뿌린 복음의 씨는 계속적으로 열매를 맺어 훗날 평안도 일대가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는 초석을 놓은 것입니다. 백홍준의 노력이 큰 결실로 맺어진 것이 언더우드(H.G. Underwood)선교사의 전도여행시 행해진 압록강상의 33명 세례식입니다. 이는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고도 불리는데 1889년 언더우드 목사가 신혼여행을 겸한 전도여행에서 베풀었습니다. 당시 국법상 공개리에 영토내에서 세례를 베푸는 일이 어려워 압록강의 중국편 연안에서 거행했다고 전합니다. 이들은 대개 백홍준에 의해 전도받은 사람들로 보이며 이중에는 백홍준의 딸과 사위 김관근, 김관근의 부친 김이련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지난 주에 저는 우리 보다 앞서 복음이 전파되었던 일본에 재차 다녀왔습니다. 일본은 과연 경제 대국이었습니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0년 동안 이룩한 경제성장은 참으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내용들을 보면 도시나 농촌의 격차없이 모두가 한결같이 잘 살고 있습니다. 도시 교통망, 항만 시설, 공항 시설 등 사회 간접 시설이 허술하지않게 잘 건설되었습니다. 일본의 경제학자와 한국의 경제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경제구조나 경제 규모로 볼 때 한국은 일본에 약 2, 30년 정도 뒤떨어져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경제)적인 면에서 우리보다 2, 30년 앞서 있다고 할지라도 영적(복음적)인 면에서는 우리 한국이 일본보다 2, 300년 이상은 앞서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세계 여러나라에서 일본 선교를 위해 투자하는 비용과 다른 나라에 대한 선교비를 비교하면 그 선교의 효과는 엄청날 정도로 빈약합니다. 일본의 기독교인 비율은 인구대비 2%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일본은 그들이 먹고 입고 자는 데는 많은 투자를 하고 있으면서 그들의 과거 잔행에 대한 회개 청산하는데는 극히 인색하며, 선교를 위한 투자는 전무합니다. 오히려 동남 아시아 각국에 대한 침략과 만행을 합법적이라고 우겨대는 망언(妄言)을 일삼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지금 기독교 인구가 1,200만에 이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복음화를 위해 가장 많은 선교비 지출과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거듭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돌와왔습니다.

  "(마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잠24:1)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 (잠24:2)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 입술은 잔해를 말함이니라 (잠24:3)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잠24:4)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잠24:5)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잠24:6)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

  일본 사람들에게 들려 주고 싶은 다음과 같은 성구와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마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11:21)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마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예수믿고 천당갑시다."라는 전도자의 말에 재산이 많다는 중년 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우가 예수를 믿어요. 그런데 애들 학비를 내가 대준단 말입니다. 나는 가난한 천당은 가기 싫습니다."
  그러자 전도자가 말합니다.
  "재미있는 얘기 하나 들려드리고 가겠습니다. 옛날 농부 한 사람이 장에 가서 소를 한 마리 사 가지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고개 밑에 이르니 하얀 고무신 한 짝이 길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고무신이 보물처럼 귀하던 시대이긴 하지만 한 짝만으로는 쓸모가 없는지라 그냥 고개를 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짝이 또 거기 떨어져 있었습니다. 농부는 소를 나무에 매놓고 부지런히 고개를 넘어가 고무신짝을 맞추어 가지고 기분이 좋아 휘파람을 불면서 다시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소는 이미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후였습니다. 어리석은 농부는 고무신 한 켤레를 소 한 마리와 바꾼 셈이지요. 마귀는 재산을 미끼로 당신의 생명을 훔치려고 합니다. 부디 어리석은 농부가 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의 천사가 집사 빌립에게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을 향해 남쪽 광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빌립이 그 길로 가다가 마침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이며 그 그 여왕의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인데 마차에서 이사야 53장 말씀을 읽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빌립에게 "가까이 가라"고 말하자 빌립이 가까이 가서 "읽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가르쳐주는 자가 없으니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고는 빌립을 청해 마차에 앉게 했습니다. 이에 빌립이 그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에 대한 복음을 전하니 그가 길 가다 물 있는 곳을 보고 "여기 물이 있는데 제가 세례를 받아도 되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빌립이 그에게 세례를 주자 주의 성령이 빌립을 데려갔습니다.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기뻐하며 자기 길을 갔습니다.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은 아프리카 대륙에 복음이 첫걸음을 내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선교 활동이 예루살렘과 유다과 사마리아 지경을 훨씬 넘어 아프리카인 에디오피아까지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줄잡아 1,500km 이상의 거리로, 마차 여행시 적어도 한 달이 넘게 걸리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 먼 거리를 개의치 않고 예루살렘을 찾아 예배를 드리고 또 귀환 여행시 병거 위에서 이사야서를 탐독한 사실은 그의 신앙이 어떠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겸손하게 빌립을 청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며 복음을 들었을 때에도 일말의 주저함 없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그는 열심있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한 나라 왕의 국고를 맡을 만큼 두터운 신임을 받는 높은 위치에 있어서 할 일도, 맡은 일도 많아 분주한 사람이었지만, 그 와중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세와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더 없는 열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이렇게 축복합니다.

  "(시119:2)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마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는'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이 되심으로 내세와 금세에 아울러 백배의 결실하는 축복을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교회에 주신 분명하고 틀림없는 말씀은 "가서 (복음을)전하라!" 는 것입니다. 다음의 성구들은 그같은 예수님의 명령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1: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10: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이 복음을 전해야 할 영역도 역시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이 영역은 바로 온 세상입니다. 그 목표는 바로 온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막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꿈은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이 세상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골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참으로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고는 결코 만족해 하시지 않으십니다.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은 "교회는 아직 교인이 되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이 받은 바 복음 전도의 영역은 바로 온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국내에서나 국외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선교의 과업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의 일이 아닙니다. 선교는 교회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의무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독교인들은 통하여 세계를 복음화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인이 전도하지 않을 때에는 세계를 복음화하는 그리스도의 일이 방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옷(George Eliot)은 매우 귀중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제작자인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에 관한 시 한 수를 지었습니다. 스트라디바리는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바이올린을 만들었습니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은 비천하고 따분한 일이었습니다. 스트라디바리가 한 일은 바이올린을 만들고 칠을 하는 단순한 장(匠)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그를 깔보았습니다. 스트라디바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어느 명연주가이든지
  내가 만든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에
  그는 스트라디바리가 살아서
  가장 훌륭한 바이올린을 제작한 것을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연주의 재능을 주셨지만
  나는 저들에게
  연주할 바이올린을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돕도록 나를 선택하셨다.

  만일 나의 손이 게으름을 피운다면,
  나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바이올린 대신에
  완전하고 선한 여백을 주셨기에.
  연주의 재능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사람의 손이 없이는
  아무것도 불가능하다.
  그는 안토니오 없이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을 만들 수 없다.

  여기에 전도자의 모토(motto)가 있습니다.
  "만일 나의 손이 게으름을 피운다면, 나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전도의 과업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하나님)와 복음을 위하여 가라."
  오늘 본문의 빌립처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대로 가서 복음을 전하심으로 많은 결실을 맺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때로 강하게 역사하시어 최초의 선교계획을 바꾸십니다. 금세기의 선교사업을 살펴보면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허드슨 선교사는 인도에 가기를 원했지만 그의 계획은 변경되어 그대신 버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리빙스턴(D. Livingstone)은 12살 되던 해에 중국 선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결심이었습니다. 두번째 결심은 의료선교사가 되는 것이어서 이같은 계획을 갖고 의학 수련을 마쳤습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막 떠나려은 순간, 아편전쟁이 터졌고 영국인이었던 그는 중국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모팻이 영국에 있었는데 그를 통해 남아프리카 선교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리빙스턴은 모팻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이 지긋지긋한 아편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즉시 아프리카로 떠나자."
  성령님께서는 리빙스턴으로 하여금 아프리카로 가게 하셨고, 그로인해 그 천인공노할 만한 노예매매가 만천하에 폭로될 수 있었습니다.
  남인도 교회의 감독인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egin)이 한 말입니다.
  "교회가 참다운 교회인지 어떤지를 알아보려면 먼저 그 곳에 성령께서 강하고 분명하게 역사하고 계신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오순절 성령의 능력과 그 전도의 능력이 여러분들과 우리 교회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말 슬픈 일은 오늘날의 기독교인 중에는 자기 자신을 비워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엡 3:19) 준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종교적인 체험과 첫째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가장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가리켜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진리의 성령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빌립의 전도는 그야말로 성령께서 그를 진리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있는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 읽고 있는 말씀을 통해 예수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성령의 역사(役事)인 것이었습니다.
  도날지 지(Donald Gee)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말씀이 전부이고 성령이 없었다면 우리는 말라지고 비틀어지고, 성령이 전부이고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터져버리고 만다. 말씀과 성령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성장한다."
  스펄젼 목사는 한때 자기 판단으로도 정말 형편없는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 도중 말을 더듬었을 뿐만 아니라 어찌나 허둥대었던지, 끝나고나니 이 설교는 완전히 실패였다는 좌절감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너무도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하나님, 당신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시니 그 형편없던 설교를 축복하소서."
  그리고 그 주 내내 그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다 말고 한밤중에도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고는 속으로 결심하기를, 다음 주일에는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설교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리라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확실히 그 다음 주일 설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은 그에게 몰려와 그의 설교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흐뭇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날 밤만큼은 어린 아이처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하지만 그 두 설교의 결과는?'
  그 결과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 설교는 마흔 한 명의 회심자를 낸 반면 그 위대한 설교는 단 하나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스펄젼 목사의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 형편 없었던 설교는 들어 쓰셨으나 그 훌륭한 설교는 버리셨다. 즉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 전도 책자 "숲 속의 사과나무"를 가지고 전도할 때 받는 사람들이 냉담하다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는 잘 받아들인다고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책자를 가지고 전도하시기 전후에 반드시 일주일 동안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면 반드시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전도의 좋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예수 복음을 증거하는 진리의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빛과 생명의 말씀이 충만하시어 전도의 풍성한 결실을 거두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8. 사울의 회심

  "(행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행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행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행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행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오 헨리의 단편소설 중에 <소매치기>가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소매치기는 크게 성공합니다. 기술 면에서 그는 세계 최고의 소매치기임을 자부했습니다. 그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미녀들 속에 둘러싸여 있었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거리에서 한 여자의 지갑을 감쪽같이 손에 넣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어디선가 그 여자의 얼굴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쳐다보니 그녀는 고향 국민학교에서 책상에 나란히 앉아 공부하던 그의 짝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참다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던 소매치기는 순진하고 정답던 옛 친구를 만나고서야 가면(假面) 속에 들어있는 그 흉한 자기를 발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차거운 가로등 쇠기둥에 이마를 박으며 뇌까립니다.
  "오, 하나님, 내 자신이 싫어졌습니다."
  옛 친구와의 만남이 이 소매치기에게 가치관의 전환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성공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성공이 아니며,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정말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만족과 기쁨과 산다는 것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 그것은 옛 친구처럼 예수를 만나는데서 오는 새로운 탄생, 즉 거듭하는 경험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 마음을 고치지 않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이 변화되었으며 나아가 서양의 역사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로 변화되기 전의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의 외모를 가장 소상하게 알려주는 <바울과 데글라 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대머리에 안짱다리, 자그마한 몸집에 눈썹은 맞붙어 있고, 다소 큰 코를 가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는 바울이 활동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체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뒤떨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의 사상이나 자질 면에서 탁월했다 할지라도 신체적으로는 매우 빈약하고 보잘것없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렇듯 육체적 모습이 초라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선교라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행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외모보다 그 중심을 보시며 연약한 자를 들어 쓰시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러므로 우리의 외모가 초라하더라고 낙심하지 말 것이며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하루하루 잘 감당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생애에 있어서 태어나서 자란 고향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 형성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도시에서 자란 사람은 도시의 문화에 길들여지게 마련이며 시골에서 성장한 사람은 자연환경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에 동화되게 마련입니다.
  사울이 회심하여 전도자 바울이 되기까지는 결코 단순하지않은 그의 과거 생애와 사상, 그 주변 환경 요인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사울은 당시 시리아 주(州)의 하나인 길리기아의 가장 큰 도시 다소에서 자랐으므로 자연이나 시골 풍경 같은 요소를 반영하지 않고 인간의 사상에 대한 깊은 연구가 있었습니다.
  다소는 당시 세계 문명의 주류였던 그리이스 로마 문명이 꽃피운 전형적 도시로서, 동양과 서양의 합류 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에 철학과 교육, 문화, 법학, 의학 등 다방면의 학문 분야에 있어서 탁월한 수준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카데미, 에피큐로스, 스토아 학파의 철학이 다소의 사상계를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복합적 문명이 함께 어우러진 이러한 도시에서 성장함으로써 그 시대를 주도하는 사회, 문화, 정치, 도덕에 접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그 세계에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헬레니즘 문화가 성행한 다소에서 헬라 특유의 성격인 민첩성, 환경 적응성, 학문적 정열 등의 특성을 몸에 익힐 수 있었고 특히 당시 세계의 표준어인 코이네(Koine)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記者)를 제외하고는 바울만큼 헬라어를 사용한 이가 없다는 점은 그와 같은 사실을 능히 짐작케 해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당시 세계 문명과 문화의 주류인 헬레니즘 사상 가운데서 사울에게 가장 큰 영향은 미친 것은 스토아 사상이었습니다. 신의 내재(內在), 지혜, 자유, 보편주의적 형제애 등 네 개의 사항이 골자를 이루었던 스토아 사상은 편협한 히브리인의 세계에서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울에게 있어 헬레니즘은 전통적으로 유대교의 사상에 비견할 때 종속적이며 부차적이었다 하더라도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울이 훗날 기독교 철학자로서 진정한 위치를 점하게 된 데에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울이 무엇보다도 유대인이었다는 점은 그의 사상의 저변에 유대교가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된 후에도 자신이 유대인임을 잊지 않았고 때로는 유대인인 사실을 떳떳하게 자랑했습니다. 만일 그가 헬라의 문화와 로마적 세계관에 접하지 아니하였다면, 그는 이방 선교를 위한 그릇이 되지 못했을 정도로 자신이 순수한 유대인임을 마음 속에 새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울이 회심하여 기독교 사상의 중추적 인물이 된 데에는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유대교의 영향이 가장 지대했음을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유대인의 여러 종파 가운데 교리상 기독교와 가장 근접한 바리새파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파는 다른 종파와 달리 여러 면에서 엄격하였습니다. 사울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고 자증(自證)한 사실은 그러한 점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울은 바리새파주의를 빛낸 대표적인 청년이었거니와 그의 서신서들을 살펴볼 때 70인역 성경뿐만 아니라 히브리 구약성경과 외경, 그리고 유대 묵시 문학에 대해서까지 그가 정통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요 헬라인, 더 나아가 전세계의 인류에게로 그 대상이 확대되어야 했으므로 이를 위해서는 세계 선교를 적극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커다란 그릇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그릇에 해당하는 자가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사울이었지만 그를 당신의 사역자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좇아 예수의 증인이 된 사울의 변화는 장차 기독교를 세계 만방에 퍼뜨리는 놀라운 사역을 수행함으로써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엄청난 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바울이 여러가지 면에서 박학다식하고 충분한 자격 구비조건을 다 갖추었다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그는 한낱 콧대높은 히브리인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잔 다르크는 1412년 프랑스 동부의 동레미라는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쾌활한 성격으로 달리기 경주에서는 항상 1등을 차지하였고 집에 있을 때에는 종교심이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베도 짜고 양을 치며 집안일을 도왔습니다. 13세가 되던 해 여름의 어느날 교회의 종소리가 그칠 무렵 그녀는 천사들의 아름다운 합창이 울려퍼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때 천사장 미카엘의 모습이 잔 다르크의 머리 위에 나타나서 이렇게 일러 주었습니다.
  "프랑스를 지켜라. 잔아!"
  "오를레앙을 구하라."
  천사의 음성을 그후에도 여러 번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서 한번도 마을 밖으로 나가 보지 못한 무식한 시골 처녀로서는 어떻게 조국 프랑스를 구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잔아, 왜 망설이느냐?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어느 때보다도 엄숙한 목소리에 잔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결국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구하고 말았습니다. 두번째로 조국이 위기에 빠졌을 때 잔 다르크는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싸우는 도중 말에서 떨어져 그만 부르고뉴가군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부르고뉴가군은 영국군에게 많은 돈을 받고 잔 다르크를 팔아 넘겼습니다. 영국군은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아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7번의 재판 끝에 잔 다르크는 화형에 처한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1431년 5월 30일. 형장으로 정해진 루앙시의 광장에는 몇 만명의 군중으로 가득 찼습니다.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자 등의 글이 쓰여져 있는 종이모자를 쓰고 화형대에 오른 잔 다르크는 불길이 몸을 휩싸게 되었어도 끝내 자신의 행동이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19살의 꽃다운 나이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샤를르 7세는 잔 다르크를 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처형된 후 종교 재판을 다시 열어 마녀라는 오명을 씻어주었습니다. 잔 다르크의 출현은 확실히 프랑스를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한 기적적인 현상이며 프랑스의 애국심의 상징으로 후세에까지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 난국의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행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모세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신앙체험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사명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출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3: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출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출3: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출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헷 족속,아모리 족속,브리스 족속,히위 족속,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3: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출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3: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사야 선지자 역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민족을 위한 사명자로 부름받게 됩니다.

  "(사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울은 주의 음성을 듣는 중에 자신의 죄를 지적받고 통회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행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주님은 이렇게 "핍박"이란 말을 두 번이나 거듭 말씀하셔서 사울의 죄를 지적하셨고, 또 "어찌하여"라고 그 이유를 따졌습니다. 이것은 죄인으로 더불어 논쟁하시는 주님의 꾸지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죄에 대한 지적을 받아야 회개하게 됩니다. 죄악에 대한 지적은 사울에게는 공중에서 나는 소리로 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경 말씀으로 되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은 사람의 말에 의해서는 거꾸러지지 않고 도리어 강팍해질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 경남 하동군의 가마 고개에서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좁은 고갯길에서였습니다. 우연히 신부의 가마 행렬 둘이 맞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두 신부의 집안은 오랫동안 서루 다투어 온 가문들이었습니다. 서로의 학문 계통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고개가 높긴 했지만 한쪽이 비켜갈 수 없을 만큼 비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켜가는 가마쪽의 가문이 굽히는 것이란 생각 때문에 어느 한 쪽도 양보를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서로가 마주보며 대치하는 상황은 무려 사흘이나 갔습니다. 나중에는 각 가문의 문하생들까지 나와 응원을 하며 버텼습니다. 상황은 갈수록 절박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두 가문은 사태 해결의 방법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그 방법은 두 가문 모두 학문과 명예를 더럽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두 가문의 딸들에게 자결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새 무거운 돌덩이가 가마 속으로 들어가고 두 딸은 마침내 그것을 붉은 비단 치마에 싸안고 벼랑 밑 시퍼런 강물 속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꽃다운 신부 둘은 강바닥으로 가라 앉았고 두 가마는 비어진 채 오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이 두 가문은 자존심과 가문의 유전(遺傳)때문에 결국 두 딸이 희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두 가문처럼 사울은 조상의 유전(遺傳)에 충실하고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무모한 생명을 해치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은 육적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했고 학문적으로는 당대의 주류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여 바리새파의 전도 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정치, 문화, 종교 등 다방면에 있어서 두루 정통하였고 번뜩이는 지성을 소유한 천재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탁월성으로 인해 그는 당시의 기성 세력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그들의 지시를 따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자기의 신념이 옳다고 믿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그의 삶은 다름아닌 자기 중심적 삶이었기에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선한 사람을 핍박하면서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의 말씀 따위는 아예 염두에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고 하는 일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울처럼 자신의 그릇된 신념을 주장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악을 심어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는 삶을 살면서 조금도 죄의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28:26)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자기 중심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참된 자신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참 자아를 발견한다는 것은 곧 죄악된 인간 자아를 깨고 새롭게 태아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삶이요 이 삶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삶입니다.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사울은 율법에 관하여 정통한 자였지만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무고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면서 자신의 악행을 깨닫지 못한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향하던 그는 주님의 빛과 음성을 듣고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교만과 악함이 다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지난 날 행했던 모든 일이 엄청난 죄악이었음을 깨달은 그는 눈물로써 3일을 보냈습니다. 이 참회의 3일은 그의 자아가 깨어지는 순간이요 새롭게 태어나는 삶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삼일 삼야동안 뉘우치고 깨어졌던 것 같은 순간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말씀을 외면하지마시기 바랍니다. 요란하고 소란스러우며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들려주시는 세미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는 신앙체험으로 자신과 가정, 그리고 나라 민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9. 형제 사울이여!

  "(행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행9: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행9: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행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행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행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행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아나니아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아나니아야, 너는 지금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아 그를 도와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주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아나니아는 어느 미친 사람의 소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가서 너를 투옥하러 이곳에 왔고 너를 죽였으면 하던 사람을 도와 주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전혀 미심쩍하거나 불쾌하게 여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첫 마디가 "형제 사울이여!" 였던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뜻 밖의 환영인사말입니까? 이것은 기독교인의 사랑과 용서의 가장 숭고한 모범이 되는 말과 행동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어느 한 부흥회에서 부흥강사가 집회를 마친 후 마지막 집회시간에 청중에게 누구나 일어서서 이번 부흥집회에 받은 감상을 짧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한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그 소녀는 말을 잘 하지 못하고 그저 몇 마디 말을 주어 모았을 뿐인데 말하기를 "이 집회를 통하여 나는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주님이 나로 하여금 우리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나로 하여금 용서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인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남을, 아니 나의 원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무서운 원수였던 바울과 아나니아가 한 형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요 또한 박해의 대명사처럼 알려져서 악명이 높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만나기만 하면 무론남녀하고 감옥에 가두겠다고 했던 사울에게 안수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가 그에게 안수하고 성령충만을 받게 하였으며, 그를 믿음의 형제로 용납하였던 것입니다. "형제 사울이여!" 이 말은 비록 한 때는 원수와 같은 관계였을지라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인정하고 한 형제로 받아들인 진정한 관용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아끼는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해친 것과 또한 다메섹에 와서도 성도들을 핍박할 것을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처럼 성도들을 아끼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못나고 실수가 많으며 마음에 들지 않게 할지라도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여 생명까지 주신 주님을 비난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에 그들을 감싸주고 또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서로 부족한 점을 감싸고 협력하는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서로를 헐뜯고 끌어내린다고 할지라도 교회에서는 서로 아끼고 감싸주는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않아도,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를 쉬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회를 수십 년간 다녔어도 교회를 멀리 하거나 교회의 일을 소흘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신앙적으로 문제가 많기 마련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잊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간의 사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행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행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그래서 아나니아는 하나님과 대화를 주고받는 중에 사울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바를 간구했으며 성도들이 핍박받는 것을 견딜 수 없이 안타까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고는 이내 순종했습니다.

  "(행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첫째, 아나니아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환상 중에 주의 음성을 듣는다."(10절)는 말은 성경에 가끔 나옵니다. 그는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입니다. 기도 중에 주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빌립 집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에디오피아 환관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주의 음성을 듣고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바나바와 사울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기도 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신비한 체험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주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민주사회에서는 다수의 소리가 지배할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다수가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후 절대다수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대로 행한 빌라도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시끄럽고 잡다한 소음에 묻혀 자기 속에 들려오는 고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깥 소리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입니다. 기도 중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는 역사무대에 소중한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바울, 베드로, 바나바 같은 주역(主役)이 아닙니다. 그는 그늘에 숨은 조역(助役)입니다. 그러나 조역의 중요성은 주역을 낳게 하는데 있습니다. 잘 알려진 크게 쓰임받는 하나님의 종들 배후에는 알려지지않고 보잘것 없는 듯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귀한 보배들입니다. 숨은 기도의 사람이 없으면 드러난 하나님의 종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사울을 말 위에서 떨어뜨렸으나 아나니아의 손은 그를 거름 무더기에서 들어올렸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의 손은 그를 거룩한 교회 안으로 이끌었습니다. 베드로는 수 천명에게로, 빌립도 한 성에 보내졌으나, 아나니아는 오직 한 사람에게로 보내졌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고 작은 것이 곧 큰 것입니다.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마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1855년 4월 21일 킴볼(Edward Kimball)이 주일학교 학생 한 명을 인도했으나 그 학생이 나중에 수 백만을 주님께로 인도한 무디(D.L.Moody)가 되었습니다. 무명의 성경수련회에서 해리슨(Norman Harrison)이 에프(Theodore Epp)을 하나님께 인도했고, 에프는 위대한 성경교사로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한 영혼을 진실되이 주님 앞에 인도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역할은 그를 자신의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나니아는 용감한 전도인이었습니다. 사울을 찾아가는 것은 어려운 결단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온 자입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많은 반문을 던집니다. 걱정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심하고 박해자를 찾아가 전도합니다. 그리고 무서워 떠는 피동적 태도가 아니라 그를 붙들고 안수합니다.(17절) 기도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안수는 일종의 축복기도입니다. 기독교회 전체의 원수를 붙들고 축복기도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며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셋째, 그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박해자 사울을 만나자마자 "형제 사울이여!"라고 부릅니다. 청년 사울이 얼마나 감격하였을까? 원수라고 불러야 할 자기를 이 크리스챤 형제라고 불러줍니다. 아나니아는 틀림없이 인자하고 사랑에 넘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넓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 없이 원수를 형제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인디언인 프에불로 족 추장 비아노를 만났을 때 인상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백인이 인디언보다 얼굴의 주름살이 더 많은 것은 백인들은 머리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추장은 말했습니다. 인디언은 가슴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백인이 인디언보다 더 빨리 화를 내는 것도 머리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시대에 가슴과 가슴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머리로 생각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형제 사울이여!"라는 아나니아의 말은 가슴에서 나오는 언어입니다. "형제 사울이여!"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가슴을 가지고 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러시아 전역에 기근이 일어나 기아에 허덕이던 어느 날, 다 떨어진 남루한 옷에 먹지 못해 쇠약해져 거의 죽어가는 거지가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톨스토이는 동전 한 푼이라도 도와 주려고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구리조각 같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양손으로 그 거지의 초췌한 손을 꼭 붙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화내지 마시오, 형제여.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당신을 도와줄 수 없게 되었소. 정말 미안하오."
  그러나 주름살이 깊게 패인 거지의 얼굴은 이 말을 듣자마자 한 줄기 빛이 비친 것처럼 밝아졌으며 속삭이듯 듯한 그러나 감격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나를 '형제'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커다란 선물이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여전히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물질적으로 가난함과 겸손함이 무엇인지를 알았지만 이 세상에는 빵에 대한 굶주림보다도 사랑과 관심에 대한 주림이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 형제와 나눠야 하고 사랑과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넷째, 아나니아에 대한 22장 12절에 나오는 바울의 회심기사는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잘 지키는 자입니다. 즉 똑바로 의롭게 살려고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인 생활에서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의 칭찬을 듣는 인물이었습니다. 다메섹 마을의 존경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기독교의 사랑의 진수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 정황 속에서 우리가 본 받아 실천에 옮겨야 할 십자가의 참 정신인 것입니다. 자기 희생없이 사랑은 실천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너무 계산적이고 실리적입니다. 때문에 사랑이 자리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아나니아의 사울에 대한 사랑의 행위는 결국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나가게 하여 다시 보게 했습니다. 다시말해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로와지고 사람을 보는 눈과 하나님을 보는 눈이 새로와 진 것입니다. 교만하고 관습에 찌들고 인간적인 것이 깊이 뿌리가 박힌 어두운 귀와 정욕적이며 세속적인 눈과 누추한 마음이 성령의 할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일에는 이렇게 새로운 시력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했을 때 사울은 성령충만을 받고 새로운 믿음과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이미 구약을 익히 아는 신학자요 당시의 언어에 능통한 언어학자요 웅변이 뛰어난 수사학자며 사회적으로도 권세가 있는 자였기 때문에 외부적으로 볼 때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성령충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택함받은 전도자에게 성령충만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에게 아나니아와 같은 사랑의 마음이 충만하시므로 영적인 시야가 새로와지며 동시에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열매가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0. 변화된 삶의 모습

  "(행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행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행9: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행9: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행9: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행9: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행9: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행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행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행9: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행9: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행9: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급격하게 변화된 사울은 삼일간 소경이 된 채 식음을 전폐하다가 아나니아의 안수 기도를 받은 후 눈을 뜨고 나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담대히 증거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갈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갈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갈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갈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1: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갈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딤전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전에는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교회를 잔해(殘害)하던 자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에 괴수(魁首)였던" 사울을 변화시킨 것은 그가 받은 세례나 그의 종교적인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습니다.

  "(행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행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행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실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사울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 유대교의 율법에 얽매여 죽어 있다가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나 성경을 읽을 때 또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우리의 죽은 신앙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를 통해 전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니느웨 성은 재앙을 받지 아니하고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욘3:1)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욘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욘3:4)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욘3:5)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욘3:6)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욘3:7)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욘3: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욘3:9)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욘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처럼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삶이 변화된 사울은 즉시 다메섹의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사울이 유대종교와 산헤드린의 공식 대리인으로서 신임장을 받았던 것은  바로 이 다메섹 회당으로 보내지는 공문으로 기독교인 박해가 그 내용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을 박해하던 그 다메섹 회당에서 박해 공문을 가져가려던 사울이 오히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놀라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이미 예루살렘과 교계에 잘 알려진 열성적인 인물로서 당대에 누구보다도 유대교에 열심이 특심하여 기독교인들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존재였는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를 믿으라고 전하고 있으니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가 핍박하던 성도들과 함께 서 있었으며 그가 잔해하였던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변화된 말과 태도가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그 인생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릴리 어촌의 어부에 불과했던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고 나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했습니다. 남편을 다섯번이나 갈아치운 수가성의 한 여인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로 변하였습니다. 악명높은 세리로 백성들의 원망과 미움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삭개오가 예수를 만난 후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변화된 삶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변화된 삶이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까?
  변화된 삶의 모습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증거할 때 사울은 더욱 더 힘을 얻어 많은 유대인들을 굴복시켰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신령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전통과 도덕과 철학보다 더 강하며 또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력을 지녔기 때문에 사람을 굴복시키는 신령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후10: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고후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고후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여러 날 후 유대인들은 사울을 처치하려고 계략을 세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얼마나 굳게 마음 먹었는지 성문에까지 보초를 두어 지키게 하여 혹시 그가 몰래 빠져 도망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깊은 밤중에 사울은 어느 성벽 위 집으로 가서 광주리에 넣어 밧줄로 달아내려 졌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몰래 다메섹을 빠져 나와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복음을 위한 그의 모험적 생애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적대시하는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전에 핍박한 주님을 이제는 그가 사랑하는 주님으로서 그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섬기고 목숨을 바쳐 충성심을 보일 기회로 삼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전도와 증거는 아주 효과있는 증거였습니다. 그의 설교와 증거에는 반박할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토론을 못하고 폭력에 호소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무능하고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핍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혹자는 "늑대는 그림의 양은 절대로 잡아먹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거짓 기독교는 항상 안전하고 진정한 기독교는 항상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핍박을 견디어 낸다는 것은 최대의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사울은 자기가 극성으로 박해하던 교회를 위해 일생을 바치는 복음 사역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행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자가 이제 와서 함께 어울려 사귀고자 하니 모두 무서워서 도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사울의 생애에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하는 바나바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성경은 바나바를 이렇게 말합니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는 사울을 인도하여 사도들과 만나게 한 후, 사울이 과연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을 듣고 변화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변화를 받은 즉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외치기 시작하였으며, 그로 인해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깨닫고 주께 돌아온 사실을 일일이 말해 주었습니다. 그후 약 3년간 아라비아 사막에서 자신의 허물된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어 새 소명을 받고 돌아왔다고 말하면서 그를 믿음의 한 형제로 받아 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은 그 신실하고 착한 바나바의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는 마음을 놓고 사울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의 과거를 그 사람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치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누가 한 번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항상 좋지 않게 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우리를 언짢게 생각지 않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의 일대 특징입니다. 우리도 누가 한 번 실수를 했다고 절대로 그를 저주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사울은 형제들의 사랑과 지원을 받으면서 유대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왕래하며 복음을 힘차게 외치게 되었습니다. 특히 헬라어로 말하는 유식한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여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는지, 그리고 예수가 바로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설득력있게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를 잡아죽였던 유대인들은 사울을 미워하여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이 사실을 알고 사울을 사울의 고향 다소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고향에 가서 고향 사람들에게 자기는 변화된 사람이며 자기를 변화시킨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것은 교회가 평안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툼과 갈등이 없고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며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교회에 오면 마음이 평안과 쉼이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서가는 교회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를 경외하는 신앙이 있을 때 그 수가 많아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교회가 성장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사람이 높아지거나 조직이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교회가 성숙한 교회인 것입니다.
  미국 켄터키주의 시골 목사님께서 술에 취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선임 장로가 다가와 성도들의 1/3이 담배농사를 짓는데 자꾸 그러시면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주에는 놀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특히 경마같이 도박성이 강한 것에 취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자, 역시 선임 장로가 나머지 1/3의 교인들은 경주마를 기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난감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에는 전혀 엉뚱한 "밀수"에 관한 말씀을 전했는데 그 다음 주일에 선임 장로가 보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 장로가 바로 밀수꾼이었던 것입니다. 누구의 눈치를 보면서 말씀을 전한다면 그 교회는 든든한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섬기는 것은 장로도 아니고 성도도 아니며 오직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신10: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섬기는 믿음이 견고한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않고 든든히 서 가는 교회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위로가 있을 때 교회는 든든히 서 가는 것입니다. 교주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대접을 받거나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것들이 판을 치지않고, 오히려 성령의 위로가 있어서 상한 마음이 치료를 받고 실망한 영혼이 새 힘을 얻으며 포기하였던 인생이 새 생명을 발견하여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고 있다면 그 교회는 든든히 서 가는 교회인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위로도 언제나 필요합니다. 서로 물고 싸우지 않고 서로 격려하여 넘어지는 자를 붙잡아 주는 사랑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각 사람을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위로하여서 영적인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할 때 교회는 진정으로 든든히 서 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변화된 삶의 모습이 든든히 서 가는 교회로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1. 선행과 구제

  "(행9:32)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행9: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년이라 (행9:34)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행9: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행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행9: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행9: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행9: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행9: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행9: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행9: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행9: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뚜르 지방에서 온 '마틴'이라는 군인은 열심히 군복무를 했던 선량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눈보라 치는 추운 어느 겨울날, 거리를 지나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를 보았습니다. 아직 나이도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황량한 거리에는 인적조차 드물었습니다.
  아이는 꽁꽁언 손을 내밀고 구걸을 하였습니다.
  "아저씨, 한 푼만 주세요."
  마틴은 얼른 주머니를 뒤졌지만 한 푼의 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벌벌 떨고 있는 거지 소년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낡은 군인 외투가 생각났습니다.
  "미안하구나, 내겐 돈이 없어. 이 낡은 외투밖에는 너에게 줄 것이 없다."
  마틴은 외투를 그 소년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그날 밤 마틴은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계신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 헐어빠진 군인 외투를 입고 계셨습니다. 천사 하나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왜 그 거지같은 로마 군복을 입고 계십니까?"
그러자 주님은
  "이것은 나의 종 마틴이 나에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이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가리켜 "복 받을 자들"이라고 하시며, "창세로부터 예비한 상속하라", "영생에 들어가라."는 축복을 선언하셨습니다.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25: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고아(孤兒)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객(客)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고아나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시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146:9)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출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본문의 도르가는 과부로서 많은 과부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그녀가 죽었을 때 "모든 과부"가 그녀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던 것입니다. 이를 보면 도르가가 신약의 유일한 여제자로서 초대 교회 신앙공동체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비다"는 히브리 이름이고, 이에 대한 헬라식 이름은 "도르가"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눈이 아름답다', '은혜롭고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노루, 사슴(gazelle)' 등입니다. 도르가는 이 이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은 초대 교회 유일한 여제자였습니다. 참으로 도르가는 그의 성품이 아름다웠으며, 또한 그녀의 생활이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도르가의 심히도 많은 선행과 구제가 어쩌면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 생명을 체험하는 축복을 누리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이 말씀을 보면 다비다의 신앙이 독실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그의 사망을 심히 가석히 여겨 베드로를 청해 왔던 것입니다.    
  '호사유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이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이름을 남긴다는 격언입니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거나 그 이름이 명예로운 이름인지 아니면 불명예스런 이름인지 하는 것은 후세의 사람들이 평가해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후 거액의 재산을 남기나 생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을 사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세인의 지탄을 받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살아 있을 동안 권좌에 앉아 부귀와 공명을 누렸으나 죽은 후에 역시 악평을 듣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기간 동안 살다가 돌아가게 되어 있을 진대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는 것이 복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도르가는 예수님을 믿는 여제자로서 그녀의 선행과 구제로 말미암아 명예로운 이름을 남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르가가 남긴 유산은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것이라고는 값으로 계산하면 얼마 되지 않는 속옷과 겉옷 몇 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웬만한 사람이 죽은 후 남긴 유산에 비교하면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커다란 빌딩과 넓은 땅, 그리고 엄청난 액수에 달하는 재물과 방대한 사업을 유산으로 남긴 사람은 죽은 후에도 매우 화려하고 장대한 여운을 남깁니다. 하지만 사람이 남긴 유산의 이면에 내재하는 우여곡절을 살펴본다면 진정한 유산의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도르가가 남긴 유산은 얼마 안되는 것이었지만, 그것들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생각할 때 실로 귀중한 가치를 지녔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도르가는 생전에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속옷과 겉옷을 손수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가진 것은 얼마 안 되지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들였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녀의 이와같은 구제와 선행의 가치는 그녀의 형편을 볼 때 더욱 귀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도르가는 자식도 없은 외로운 과부였습니다.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에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는 데도 가련한 이웃을 도운 것은 이웃에 대한 도르가의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헌신적이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많이 가진 중에 얼마를 적선하는 것과 없는 가운데서 전체를 바치는 것과의 차이는 가난한 과부가 그녀의 생활비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 사실에서 족히 알 수 있습니다.

  "(눅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 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눅21: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눅21: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눅2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이처럼 도르가는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심히 많은 구제와 선행을 행했던, 아름다운 일을 많이도 행한 예수님의 참제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러 오셨고 또한 작은 자를 섬겨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와 병든 사람들은 큰 것을 추구하는 자의 눈에는 안 보이나 도르가와 같이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의 눈에는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을 볼 줄 알고 또한 작은 것으로 이웃을 구제하는 도르가의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며 복된 삶인 것입니다.
  도르가의 심히 많은 구제와 선행은 그녀의 도움을 받은 이웃들을 크게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행9: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행9: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도르가는 죽기에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었기에 베드로가 가까운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지체치않고 사람을 보내어 도르가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당도했을 때 그들은 도르가의 선행과 구제를 직접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사람이 가진 재물이란 죽은 다음에는 그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는 죽을 때 재물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 재물이 그의 죽음을 변화시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시49: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시49:7)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시49:8)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살아있는 동안 선행과 구제를 쌓은 도르가는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참된 이웃이 함께 하였거니와 이것을 복된 인생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션(Shun)'이란 남을 기피한다는 뜻인데, 본래 유럽에서 18세기에 성행되던 징벌의 명칭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션 선고가 내려지면 아무도 그를 상대해선 안 됩니다. 동네에 살지만 실상 그 지역 사회에 소속되지 못한 자가 되고, 사람 틈에 있어도 관심 밖에 벗어난 인간으로 남는 것입니다. 살았지만 죽은 상태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은 관심 속에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펜실베이니아 주 콤버랜드에 로버트 베어라는 50세 된 메노나이트교회에 속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교회 감독의 뜻을 거역한 죄로 메노나이트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회피(Shun)'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징벌로 인해 온 동네 사람들이 그를 회피하고 일정한 기간 동안 말 상대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베어 씨는 갑자기 늙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머리가 희어지고 몸이 마르고 음성까지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회피의 징벌'기간을 끝내고 사람들이 다시 친구가 되어주며 오랜 징벌 기간 동안 잘 참은 것을 칭찬해주고 다시 인정해주자 그는 이전의 원기를 회복했으며 음성도 예전처럼 돌아왔으며 다시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뉴욕 시에서는 해마다 약 100명이 혼자서 죽음을 맞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혼자 사는 노인들입니다. 혼자 세상을 떠나는 것만도 서글픈데 죽은 후 몇 시간은 보통이고 심지어는 1주일쯤 지난 뒤에 발견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노인의 아파트 앞에 우편물이 며칠 동안 쌓이면 곧 방안을 조사하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일본 도쿄 시에는 '안심 전화'라는 것이 생겼다고 합니다. 혼자 사는 노인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예감하면 베겟머리에 붙은 단추를 누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화국 컴퓨터가 즉시 경찰과 노인 복지국과 친척 한 사람에게 연락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고독한 것입니다 물론 함께 죽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는 자리에나마 누군가 함께 있었으면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는 생각입니다. 이웃이 있다는 것, 가족이 있다는 것,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 이상의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기러기들이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장면은 아름다운 경치 이상의 교훈을 던져 줍니다. 비행기와 망원경으로 기러기를 추적한 조류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첫째, 기러기는 혼자 나는 것보다 떼를 지어 날 때 71%나 더 오래 날 수 있습니다. 이는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힘이 강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모이면 분파가 생겨 힘이 약해진다는 한국인은 기러기에게 배울 바가 많은 것입니다. 현명한 우리 조상들은 종잇장도 맞들어야 가볍다고 했습니다. 옛날 애국 지사들의 구호처럼 모이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혼자 하고 혼자 이름을 내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함께 하고 함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둘째, 기러기는 왜 V자 대형으로 나는가? 이것은 천부의 지혜로, 공기대(Swath of air)가 형성되어 뒤따르는 기러기들이 날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서로 도와 주고 있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동료를 조금이라고 편히 날게 하기 위하여 V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앞에서 나는 인도자격인 기러기가 가장 빨리 지치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기러기들은 가끔 위치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이만큼의 협조 정신과 남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사람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기러기들은 날면서 계속 웁니다. 이것은 힘들어 지르는 비명이 아닙니다. 기러기의 울음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위치를 알림으로써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를 격려하는 나팔소리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힘겹게 먼 길을 날면서도 가족과 동료를 격려하는 기러기의 울음 소리를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넷째, 만일 기러기 한 마리가 아프거나 부상으로 함께 여행을 계속하지 못하게 될 경우 반드시 서너 마리의 동료가 이 낙오자와 더불어 머문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신입니다. 기러기의 사회는 경쟁사회가 아닙니다. 동료의 불행을 함께 짊어지는 사회입니다. 요즘 인간 같으면 겉으로는 위로하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경쟁자의 낙오를 기뻐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러기는 불행당한 동료를 따라 낯선 땅에 머물며 그가 회복되기까지 기다려 준다는 것입니다.

  "(눅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강도에게 매맞아 죽어가는 사람을 세 종류의 인간이 발견하였습니다. 첫째는 제사장직에 있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둘째는 한 레위인이 발견하였는데 역시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셋째는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발견했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가까이 접근했다는 이 표현 속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이웃은 피하여 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골치아픈 일이 되지나 않을까 해서, 혹은 손해를 보지 않을까 해서 피한다면 이웃이 될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웃이란 어려울 때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입니다. 필요할 때만 접근하는 사람은 이웃이 아닙니다.
  50년전 황해도 시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열 한 살 난 소년이 마마로 죽어 다음날 초상을 치르려고 시체를 방에 두고 상여꾼에게 술대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병풍이 넘어지면서 죽었던 소년이 살아났습니다.
  그리고는 소년이 그 동안 겪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갔더니 아직 올 때가 못되었으니 돌아가라고 해서 사자를 좇아 세상으로 돌아오면서 천당구경을 했습니다. 한 방에는 사람의 혀가 가득했는데 이는 말만 하는 교인들의 혀였고, 또 다른 방에는 귀만 가득했는데 이는 듣기만 하고 실천이 없는 교인들의 귀였습니다. 또 얼마를 지나가다 보니 우리 동네 박 구장의 문패가 붙은 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자에게 물었더니 구장이 아직 살아있으나 좋은 일을 해서 준비한 집이라고 가르쳐줬습니다.
  그래서 어떤 좋은 일을 했느냐고 제가 묻자 사자는 몇 해 전 구장과 구장 부인이 소달구지를 타고 가다가 길가에서 산고를 겪고 있는 부인을 보고 해산을 돕고 집에 데려다가 간호해 주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약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인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은 여러분들이 되시므로 도르가처럼 부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2. 기도와 구제

  "(행10: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행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10:3)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행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행10: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행10:6)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행10: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행10:8)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로마 황제 시저의 이름을 가진 도시로 꽤 주목을 받던 가이사랴에 이태리에서 파견되어 주둔하고 있던 고넬료라는 군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유대인이 아니었고 할례나 세례를 받은 적이 없는 순전한 이방인이었지만, 그는 온 집안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외국 땅인 이스라엘의 가이사랴에 주둔하여 살면서 경건하고 도덕적이며 애국적인 유대인들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을 믿으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고넬료는 여러 면에서 훌륭한 이방인이요 종교인이었습니다. 즉 우상숭배가 일반적인 로마 군대에 속해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할 뿐 아니라 그의 집안 식구들과 심지어 종들까지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을 보면 그의 지도력이 뛰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틈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의 음성듣기를 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예배하였고, 하나님과 유대교의 종교적인 것들을 좋아하여 유대인들에게 이미 알려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직위나 경제적인 안정 또는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진정으로 바른 기도를 하는 사람은 악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넬료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둘째, 구제하는데 열심히 있는 사람이었으며 셋째, 고넬료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움을 섬겼던 히브리 여인들은 왕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적 증가를 막기 위한 가혹한 노동 착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번창하자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더욱 악랄한 학대 정책을 폄으로써 자신의 마성(魔性)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즉 중노동을 통한 출산의 억제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로는 산파를 통한 이스라엘 신생(新生) 남아(男兒)의 살해를 꾀하게 됩니다.

  "(출1: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1: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출1:13)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하여 (출1:14)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출1:15) 애굽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출1:16)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남의 나라에서 노예로 사는 처지에 국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일개 산파의 신분으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애굽왕이 직접 불러 명을 내린 십브라라는 산파와 부아라는 산파는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그대로 살려 두었습니다. 그들이 왕의 명령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출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애굽왕 바로는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바로 앞에서 그들의 목숨은 풀 한 포기의 가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들에게 바로가 주는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이 참으로 두려운 분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여인, 그들이 바로 히브리 여인들이었으며, 십브라였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전해야 할 영원한 복음은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 둘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셋째,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계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계14: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노발 대발한 애굽왕이 두 산파를 소환하여 문초하게 됩니다.

  "(출1:18) 애굽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이에 대한 산파의 대답은 정말 지혜롭고 담대하기 까지 했습니다.

  "(출1: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 이런 지혜로운 대답이 나온다는 것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들의 심중과 지혜로움을 보시고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출1: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출1:21)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야고보는 이렇게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우리 교회는 가난한 이웃을 위한 사회 봉사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나라 민족을 위해 기도만하고 나 혼자 말씀대로 살면 그만이며 성도들끼리만 사랑을 주고 받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경건의 생활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옛날에 아주 지혜롭고 나이 많은 한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대를 이을 후손이 하나도 없었던 그는 자신의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을 뽑기 위해 전국에 후보자를 모으는 방을 붙였습니다. 곧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왕이 있는 궁전으로 몰려들었고 왕은 그 중에서 최종적으로 세 명의 훌륭한 청년들을 뽑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길다스, 씨릭, 오스프리스로서 모두 지혜롭고 준수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왕은 이제 마지막 시험을 통해 이들 셋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선택하려 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왕의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왕은 세 사람을 한 자리에 모아 놓더니 한 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가 들어있는 책이다. 이제 내가 이 책 중 한 구절을 읽어 줄테니 너희들은 일주일 동안 그 말대로 살아가도록 하여라. 제일 잘 수행한 사람이 나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왕이 읽은 구절은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곧 세 사람은 왕에게서 물러나 각자의 길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그들은 다시 왕 앞으로 나아오게 되었고 왕에게 일주일 동안 자신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차레로 보고하였습니다. 먼저 길다스가 피곤한 모습으로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저는 왕의 명을 받은 즉시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밤낮없이 계속 기도했지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는 함께 있었던 수도사에게 물어보시면 잘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길다스에게 다시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수고했구나. 그렇다면 너의 그 기도로 좀더 행복해진 사람이 있느냐?"
  길다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곧 두 번째로 씨릭이 쉰 목소리로 왕께 보고했습니다.
  "왕이시여! 저는 일주일 동안 교회에 가서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제 목소리 좀 들어 보십시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던지 목이 다 쉬었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왕은 씨릭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너는 네 기도로 인해 이 나라가 좀더 행복해졌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씨릭 역시 이 물음에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스프리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예전에 생활하던 대로 살았답니다. 저는 할 일이 많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집도 지어 주어야 했고 마을에 다리도 놓아야 했고 아픈 친구의 집도 돌봐야 했고....., 그렇지만 저는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했답니다. 제 마음 속에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럽더니 많은 사람들이 왕 앞으로 몰려와 오스프리스에게 받은 도움과 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왕은 비로소 얼굴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왕관을 오스프리스에게 씌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기도의 생활이 있어야 필요한 것입니다.
  구제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우선적인 의무였는데, 다만 그들은 조금 구제하고 많이 떠벌인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고넬료는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헌금하는 자세를 세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하곤 합니다.
  첫째는 부싯돌형입니다. 이런 유형의 교인들은 때려야 헌금을 합니다. 생활이 평탄하면 안일해지고 모든 것이 자신의 업적인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부싯돌처럼 쳐야 부스러기가 생기고 불꽃이 생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스폰지형이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교인들은 짜내야만 헌금할 돈이 생깁니다. 모든 물질이 생기면 마치 스폰지처럼 흡수만 하니 안 짜낼 수 없는 것입니다. 짜기만 하면 많이 내놓기는 하지만 자신해서 내놓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꿀벌형이 있습니다. 여기저기를 다니며 힘들게 꿀을 모아 벌집 속을 가득 채우고 아주 달고 유익한 물질을 만들어 놓습니다. 힘들게 모아서 아주 유익하게 만드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풍요를 안 주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꿀벌처럼 주어지는 물질의 갑절을 내놓을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경건은 기도, 구제와 함께 병행되는 것입니다.  
 
  "(사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사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두 번째로 고넬료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는다는 것은 기도 생활에 장애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현재 아현중앙감리교회 장로님이시며, 연세대학교 총장이신 송자박사는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송자 총장은 지금 대전 맹아학교 교장으로 있는 맹인 동생으로부터 교회를 알게 되었고 기독교 집안인 큰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됨으로 열심히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부터 3학년 때까지 새벽기도를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다섯 명이 있었는데 똘똘 뭉쳐서 서로 깨워주면서 다녔습니다. 그 때 기독교 대학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연세대학교를 거쳐 총장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렘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 하늘을 자물쇠로 잠그고 그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왕상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약5:18) 디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게 될 때, 즉 하나님이 특별히 행하라고 명령하지지 않았을지라도 그 분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게 될 때 기도는 상달되는 것입니다.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기도의 응답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기적인 목적을 갖고 하는 기도입니다.

  "(약4: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약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악한 동기를 가지고 정욕과 탐욕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바른 목적과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목적은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기도의 진정한 목적은 나 자신의 유익이나 이기적인 욕망이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너무도 열심히 그리고 희생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의 동기와 목적은 성경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이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그는 예수님만 안 믿었지 모든 면에서 너무도 훌륭하고 좋은 분이예요. 아마 그런 분이 예수님만 믿으면 저는 너무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 거에요."
  남편이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선하며 완전한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를 순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 앞에서 사악하고 완고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남편을 선하다고 말하는 여성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만, 또 사랑해야 하지만 그를 선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단지 남편이 구원받고 영원한 지옥에서 탈출하는 그 기쁨을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남편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 응답의 장애물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 하더라도 마음 속에 품은 죄악이 있으면 하나님은 절대로 기도의 응답을 하시지 않고 또 하실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생활 가운데 어떤 죄악이 있는가를, 혹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어떤 무엇이 있는가를 보여 달라고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후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속히 들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도응답의 장애물은 마음 속의 우상입니다.

  "(겔14:1)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겔14: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14: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여기 우상이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어떤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독교인이 무엇을 하나님 앞에 둘 때 바로 그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자기 아내나 남편, 자녀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은 우상이며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남편이나 아내, 자녀를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나 아내, 자녀를 하나님 앞에 놓는다면 그 위치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네 번째 기도응답의 장애물은 용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 아내들이 너무나 간절히 남편과 자녀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자기에게 잘못한 남편이나 자녀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원망과 혐의를 가지고 있으며 한을 품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기도응답의 장애물은 주는데 인색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고 뒤를 막아버리면 하나님도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으시고 귀를 막아 버린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는 데에 아주 인색하고 움켜쥐려고 하는 사람은 능력있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잠21:13)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것만큼 하나님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색한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받을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의 사역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바울을 도왔기 때문에 하나님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만큼 갚아 주셨던 것입니다.

  "(빌4: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빌4: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빌4: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빌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게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참으로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은 정말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들입니다.
  영국 브리스톨의 죠지 뮬러는 지난 세대에 가장 위대한 기도의 사람 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72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의 돈을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았습니다. 그는 약 60년 동안 영국의 고아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을 여러 가지로 지원했으며, 때로는 한꺼번에 2000명이 넘는 고아들을 수용하여 하루 세 끼를 충분히 먹이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놀라운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필요한 돈과 또 그가 관계하고 있는 다른 일에 필요한 모든 돈을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았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 그 일들을 위해 모금이나 헌금이나 기부금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계속해서 그 돈은 들어 왔습니다. 어떤 때는 돈이 끊어진 상태가 되어 마지막을 기다리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틀림없이 돈은 들어 왔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100파운드를 구하면 하나님은 100파운드를 주십니다. 그러면 100파운드를 고아들과 혹은 다른 사역에 그대로 다 써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720만 달러를 응답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 써버렸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응답받은 돈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않고 움켜 쥐고 있으면 하나님도 더 이상 주는 것을 중지하시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기도응답의 장애물은 부부관계의 불화입니다.

  "(벧전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여기서 남편이 아내를 잘못 대하고 아내가 남편을 잘못 대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불화가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남편이나 아내 그 어느 편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넬료는 구제하는데 열심을 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하는 방법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하여 (마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인간도 마땅히 이웃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 구체적인 표현이 구제인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이고 또 칭찬을 받기 위해 구제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그것은 가난한 사람을 이용해 자기 영광을 얻으려는 악한 행위입니다. 예수께서는 잘못된 구제가 많이 있음을 아시고 참된 구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구제의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신14:28)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 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신14: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 하시느니라."

 "(잠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잠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에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에 감동을 받고 신앙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삶의 분량대로 구제의 손을 내밀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새로나 백화점 건물이 우뚝 올라간 상동교회의 시작은 거지들의 교회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교회 교인은 대부분이 가난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할 것입니다. 겨울 동안에도 이러한 목적으로 모금한 결과 30원이 걷혔습니다. 또한 우리 교인들 가운데 극빈자들이 죽는 경우 그 장례비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그 목적으로 쓸 돈 10-12원이 비축되어 있습니다."
  상동교회 설립자 스크랜톤의 휴가시에 잠시 교회를 맡아 보았던 스웨어러의 보고 내용입니다. 이처럼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교회가 그 시절 상동교회의 모습입니다. 스크랜톤도 자신의 교회를 "부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반대로 가난하고 나이 많은 이들이 상당히 많은데 지난 겨울 그들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업무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농가에 한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습니다. 욕심이 많은 농부의 아내는 밭에 토마토, 오이, 가지 등 많은 열매가 열렸으나 다 썩어가는 마늘 줄기를 하나 뽑아 주었습니다. 거지는 그것으로 요기를 채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농부의 아내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천사에게 자신은 자선 사업을 많이 했으니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그녀가 생전에 거지에게 주었던 마늘 줄기를 가지고 오더니 이것을 붙잡고 천국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천사가 마늘 줄기의 한쪽 끝을 잡고 농부의 아내가 한쪽 끝을 잡고 천국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썩은 줄기가 갑자기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농부의 아내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할 때는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보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1: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금년 성탄절에는 하나님 앞에 경건한 신앙생활인 기도와 구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시고, 범사에 윤택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3. 화평의 복음

 "(행10: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행10: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행10: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행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10: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행10:15)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10: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행10:17) 베드로가 본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밖에   서서 (행10: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행10: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행10: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행10: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행10:22)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행10: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행10: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행10: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행10:26)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행10: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행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행10:29)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행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행10: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행10: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행10: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행10: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행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10: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행10: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베드로는 기도하려는 중에 환상을 보고 주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행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행10: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행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이에 베드로는,

"(행10:14)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행10:15) ...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거듭 세 번씩이나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환상이 보여 주는 뜻을 몰라서 깊이 생각하는 중에 성령의 음성을 듣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만나 가이사랴 고넬료집에 가게 됩니다.

"(행10: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고넬료는 일가친척과 친구들을 모두 불러 놓고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오자 고넬료는 로마 백부장으로서 보기 드물게 겸손하여 베드로 발 앞에서 엎드리어 절하게 되고, 베드로 역시 겸손하여 자신이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고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며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자기가 여기에 오게 된 연유를 말하고 자신을 부르게 된 목적을 묻게 됩니다.

"(행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행10:29)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고넬료는 자신이 기도 중에 환상을 보고 자신도 마찬가지로 주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를 초청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합니다.

"(행10:31)...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행10: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행10: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에 베드로는 "(행10:34)....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행10: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며 "화평의 복음"을 설교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설교 중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됨을 보고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에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 평등해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환상 중에 큰 보자기 안에 온갖 종류의 동물들과 새들을 가득 차 있는 것을 먹으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이를 거절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거절한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레1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레11:3)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레11:4)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레11:5)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부정하다고 경멸하고 천시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한 음식을 이방인들이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1장에 유대인들이 지키는 엄격한 식물법 규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유대인은 새김질을 하고 굽이 갈라진 짐승만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수세대 동안 "이방인들은 저속한(common) 인간들이고 우리는 영적인 귀족이다!" 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조차도 얼마든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돼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먹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레11: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더나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고 모든 영적인 특권에서 제외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교회 밖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아무도 속되다고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고백을 하는 기독교인들 중에도 베드로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단지 자기들과 신분, 교육수준 등이 같은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나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가난한 자, 궁핍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환상과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말만 잘하는 어느 청년이 한 그리스도인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 다닙니까?" 라고 물으면 "십자가에 죽어가는 강도는 교회에 안 나가고도 천국 갔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세례는 받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죽어가던 강도는 세례받지도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헌금한 적은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죽어가던 강도는 헌금 안했는데 정죄받지 않았죠!" 라고 했답니다.
대화를 마친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던진 말은 이렇습니다. "당신과 그 강도 가운데 차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죽어 가는 강도였고, 당신은 날강도 같군요."
베드로는 율법을 지키려 하였지만 그렇게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교회의 전통을 지키려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아야 하고, 사람들이 세운 관습과 유전을 따르다가 주님의 진정한 뜻을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듣게 된 주의 음성은, "(행10:15)....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하고 신비롭고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구속(redemption)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구원(salvation)된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구원(salvation)"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을 말하며, "구속(redemption)"은 신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구속(redemption)"은 모든 사람의 이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든 믿지 아니하든 십자가의 표적이 새겨졌으며, 모든 사람의 삶 속에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희생의 신비가 머무르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온 세상 사람들이 구속받으므로 말미암아 종족적인 모든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 앞에서 누구나 평등한 것이며 저속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약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약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약2: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약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약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약2: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약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약2: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골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골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상의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인종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으시며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탈무드의 기도에는 "오 하나님 내가 이방인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고 여인도 아님을 감사하나이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마 바울도 수년 동안 날마다 그러한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똑같이 평등한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종족적인 편견을 가지거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바 교회 내에 있는 이들만을 돌보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돌보지 아니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본문이 가르치고 있는 위대한 영적인 교훈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롬3: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엡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 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사도행전 16장을 통해 나타난 빌립보 교회의 최초 구성인들인 세 인물들은 그리스도의 보편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주장사 루디아, 점쟁이로서 주인에게 고용된 미친 노예 소녀, 그리고 로마인 간수 등이 그 중심 인물입니다.  
이 사람들은 고대 사회의 놀라운 단면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세 종류의 국적을 가진 자들입니다. 루디아는 아시아인, 노예 소녀는 나면서 헬라인, 간수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모든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 교회에 모인 것입니다.  
이들 세 사람은 국적이 다를 뿐만아니라 매우 다른 사회 계급의 출신이기도 합니다. 루디아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자주 장사로 상인 귀족이었으며, 노예 소녀는 하나의 노예로서 법률적으로 전혀 사람이 아니라 산 도구에 불과했으며, 간수는 로마 시민으로 직업으로 보아 로마 중류 계급에 속한 건전한 공무원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사회의 상류와 중류와 하류의 전계급을 대표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가져 온 신앙을 그렇게 잘 포괄적으로 표시된 것을 다른 성서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간디는 독실한 예수 숭배자이면서도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교인이 되지 않음을 세상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간디가 교회에 다니지 않은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간디의 친구 중에는 앤드루스라는 영국 선교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선교사가 간디에게 찾아와 대화를 나누며 전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 다음 주일에 간디는 그 선교사가 다니는 영국인 교회에 나가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이윽고 주일이 되어서 간디는 앤드루스 선교사와 같이 예배당에 찾아가 문을 열고 막 들어서려는데 그 예배당 문지기가 간디를 유색인이라며 밖으로 내밀어 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간디는 절대로 교회에 가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23: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둘째, 베드로가 깨닫게 된 두 번째는,

"(행10:34) ....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행10: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어떤 프랑스 상인이 아리따운 딸의 부탁으로 야수(野獸)의 정원에서 몰래 장미를 잘랐습니다. 그러나 화가 난 야수는 상인에게 엄포를 놓았습니다.
"당신 딸을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딸은 자기를 희생하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야수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야수는 밤이 되면 젊고 멋있는 왕자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상인의 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왕자는 악마의 저주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맺어졌습니다.
인간의 가치란 외모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야수같이 흉하게 생긴 남자에게도 왕자의 고귀한 정신이 깃들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왕자와 같은 수려한 외모에도 야수의 본성이 숨겨져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오스카 와일드)

"(약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약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약2: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 (약2: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우리는 '세상적인 위대함이나 부요함을 치켜 올리는 행위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에서 특별히 경계해야 할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며, 세상적인 부보다 영적인 부를 더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자나 가난한 자도 아닌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십니다.

어떤 교사가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그는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이니 어린 학생들에게 주님을 맞을 준비를 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계단식으로 된 교실로 아이들을 불러서는 자리를 정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앞자리, 그러니까 주님께서 앉으실 곳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백인종 어린이를 앉혔습니다. 그 뒤를 이어 황인종 어린이, 홍인종 어린이의 순서대로 앉혔습니다. 흑인종 어린이는 맨 뒷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자리 정돈을 끝낸 선생은 느긋하게 학생들을 둘러보다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 저 검은 피부의 어린이가 맨 뒷좌석에 앉아야 하는 거지? 저 애들은 모두 앞줄에 나란히 앉아야 해.'
이렇게 생각한 선생은 자리를 다시 정돈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실 안을 온통 뒤집어 놓고 있는데 밖에서 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들이 주님을 맞을 준비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책임을 맡은 선생의 입장이 참으로 난처해졌습니다. 발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할 수 없이 주님을 맞으러 문쪽으로 달려가던 선생은 근심스러운 듯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이들에게서 피부색깔이 모두 사라지고 아무런 차이점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는 동서남북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호화주택에 사는 사람이건, 형편없는 오두막에 사는 사람이건 간에,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재산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며, 교육수준에 따라서 차별하지 않으시며, 피부색이나 문화에 따라서 차별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복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도 그 분과 똑같이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셨고, 이천 년 동안 이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복음이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왔습니다. 고넬료는 신실하고 독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구원을 말씀과 성령을 통해 알아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성령과 말씀을 통해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의 구세주이시고, 우리의 책임은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기회를 통해서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4. 생명얻는 회개

  "(행11: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행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행11:3)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행11:4)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행11:5)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행11: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행11: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11:8)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행11: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행11: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행11:11)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행11: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행11: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행11: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행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행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행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이사랴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고넬료와 그의 모든 일가 친척들, 그리고 그의 친구들까지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에 역사하신 성령 세례를 받고 물로 세례를 받아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세례받고 구원받은 그들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를 수일 동안 더 머물게하여 함께 먹고 즐겁게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교회 안에 "할례당"이 베드로의 이방선교를 문제삼아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받지않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했다."는 이유로 베드로에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어떤 선행이나 교회 전통, 성찬, 세례 등으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할례당"은 대단히 율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시대의 유대인 전통들을 신약의 기독교에 포함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할례당"은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 이유로 힐난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방인들, 할례받지않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했다는 이유만으로 문제를 삼아 비난했던 것입니다. 가이사랴에 있는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생명얻는 회개를 통해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기뻐하기는 커녕 전혀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자리를 같이 하자, 그들을 무시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서로 수근거리며 "이 사람이 죄인들을 환영하고 식사를 같이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눅15: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눅15: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눅15: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눅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중국의 장개석 총통의 부인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가 전한 사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농부가 산등성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진이 시작되면서 멀리 해변가로부터 산더미같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건너편 아랫쪽에서는 여러 사람이 논에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피신하지 않으면 모두 몰에 밀려서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었습니다. 산등성이에서 일하던 농부는 "해일입니다. 빨리 피하세요. 모두 죽습니다.!" 라고 소리쳤지만 그들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소리를 쳐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건조한 자기 밭의 곡식 더미에 모두 불을 질러 연기를 올렸습니다. 저 아래 쪽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산에서 갑자기 검은 연기가 솟구치는 것을 보고는 거기서 늘 일하던 사람을 구하려고 모두 달려왔는데, 그들이 언덕 쪽으로 올라서자마자 무서운 파도가 온 논을 완전히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한 농부가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자기들을 구한 것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세워 주었는데, 그 기념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소유했던 가장 귀한 모든 것을 남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주었다. 그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누추한 이방인이었던 우리를 구하시려고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습이며 그것은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이 사랑에 감격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이방인 선교를 두고 비방을 일삼는 이들 "할례당"에 대해 친절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답변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행한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욥바에서 자신이 본 동물이 가득찬 보자기의 환상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말했습니다.

"(행11:4)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행11:5)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행11: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행11: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11:8)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행11: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둘째,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도착과 성령님께서 자기에게 그들을 따라가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행11:11)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행11: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셋째, 베드로는 고넬료의 환상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쪽 사람 모두에게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고넬료에게는 환상을 통해 베드로를 찾으려 사람을 보내라고 하셨고, 베드로에게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서 가이사랴로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넷째, 베드로는 자신을 초청한 고넬료 집에서 설교할 때, 오순절에 유대인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던 것과 똑같이 가이사랴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임하셨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누군데 감히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막겠느냐며 불가항력적인 성령의 역사였음을 밝혔던 것입니다.

"(행11: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행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행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행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사상가 존 러스킨은 미술에도 재주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파티에 갔는데 한 귀부인이 값진 손수건을 내보이며 불평을 털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손수건은 다시 구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인데 잉크를 쏟아 버리지 않았겠어요."
"부인, 그 손수건을 며칠 빌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며칠 후 러스킨은 손수건을 가지고, 다시 그 댁을 방문했습니다. 손수건을 받아든 부인은 무척 놀랐습니다. 잉크 자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이전 손수건보다 더 고상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더러워지고 흉하게 된 인간도 하나님의 손이 닿으면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성령의 역사가 아직도 인가귀도되지 못한 가정들마다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의 행위는 참으로 정정당당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파했고 성령께서 그 가운데 역사하심으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두고 유대인의 전통 운운하며 자신을 힐난하는 것에 대해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할례당"에게 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이같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간증은 할례당의 입을 막고 비난을 그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행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미국 연방 정부의 우정국장을 지낸 켄달(Amos Kendall) 씨는 자기가 속한 워싱턴 교회에 가서 간증을 자청하였습니다.
"나는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도우면, 좋은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적은 두었으나 예배에 참석도 하지 않고 교인들의 친교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한 사실을 우연히 깨달았습니다. 무슨 이유이든 말년이 불행해진 내 친구 열두 명이 한결같이 나처럼 교회생활을 등한히 하고 선행을 기독교인의 간판으로 알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잃은 양 같았습니다. 무리를 떠난 양은 아무리 똑똑해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켄달 씨는 기독교인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70년만에 회개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하나님 앞에 풀어놓는 순간, 자유의 날개가 생겨 알지 못하던 새 세계을 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지 오래였지만 아직도 "할례당"처럼 편견 속에 갇힌 잘못된 신앙으로 앉은뱅이같은 사람들은 "생명얻는 회개"를 통해 새로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5. 최초의 이방 교회

  "(행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행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행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행11: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11: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행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행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행11: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은 부유하고 웅장한 도시였습니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 가는 세계에서 세 번째가는 큰 도시로서 아시아의 심장부로 일컬어졌습니다. 로마의 총독과 공관이 있었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안디옥은 헬라 문명화된 도시였으며, 지중해에서 24km 떨어진 오론헤스강 하구 근처에 있었고, 아름다운 국제도시였으나 호화로운 생활과 부도덕의 대명사이기도 했습니다. 안디옥은 마차경기로 유명했고 문자 그대로 밤낮 계속되는 향락 추구자로 생각되는 사람들로 유명했습니다. 안디옥은 미친 듯이 뛰는 스포츠와 사형, 도박, 나이트클럽 등으로 가득찬 도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유혹적이고 저속한 이방 종교가 성행하기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도시에는 대프니이(Daphne)신 숭배로 유명한데 그 신전은 8km밖 월계수 숲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대프니이는 아폴로 신이 사랑하게 된 처녀였습니다. 아폴로는 그녀를 쫓아다녔지만 대프니이는 꼬임에 빠지지 않으려고 월계수로 변해버렸습니다. 대프니이 사원의 여승들은 종교적 창녀였으며 밤이면 이 월계수 숲 속에서 여승과 예배자들 간에 사랑의 행각이 다시 재연됩니다. "대프니이 윤리"란 단어는 해이하고 음탕한 생활을 뜻하는 말로 다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믿어지기 어렵지만 세계의 종교가 되려는 위대한 첫 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이런 도시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대도시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안디옥은 오히려 로마나 알렉산드리아보다도 로마 세계의 중심지로서 훨씬 더 긴요한 곳이었으며, 율법적인 히브리 사상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도시로서 복음 전파를 위한 전략적인 요충지로 가장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회피했을 뿐만 아니라 죄악시했을 정도였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난 사건을 두고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이 비난한 사실입니다.

"(행11: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행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행11:3)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사상으로부터 보다 더 자유로운 헬라파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방 선교의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복음의 세계화는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로 시작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반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 세계와 이방 세계의 가교를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받아들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고넬료였습니다. 교회가 고넬료를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극적이었지만 이방인들을 받아들인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의 세계화를 이룩하는 세 번째 단계는 이 안디옥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유대인들에게도 반 유대인에게도 가지 않았고, 또는 기독교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이방인들의 접근을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의식적으로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의 초청을 기다린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최초로 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적지않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이방 교회 안디옥 교회가 설립되었고 이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사명이 주어진 바울의 선교진출의 근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은 수세기를 지내 오면서 변화를 겪고, 도시는 타락 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 새 운동이 일어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헬라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안디옥은 장차 이웃 지역과 나아가서는 전세계를 향한 선교의 전초 기지로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집단적으로 복음을 영접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교회로서는 미증유(未曾有)의 대사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을 통해서 이방인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유대인의 우선적인 구원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즉 이방인의 구원은 모든 유대인의 구원이 완결된 후에 발생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디옥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확인할 필요를 느꼈고, 이 임무를 위해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파송한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율법으로 하나님을 삼고 율법의 규례로 얽매인 엄격하고 마음이 좁은 사람을 보낼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들은 당시 교회에서 가장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 바나바를 보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미 모든 사람이 바울을 의심하였을 때 그의 곁에 서서 그의 보증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행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바나바는 가난한 형제들에게 그의 아낌없는 마음을 보여 그의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입증했습니다.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오늘 본문에서 바나바는 사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성경의 묘사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하나님의 바나바에 대한 칭찬은 <재능있는 바나바>나 <천재 바나바>가 아니고 "착한 사람 바나바"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을 착하다고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롬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3: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롬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3: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착한 사람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인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건 사람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이처럼 착한 사람의 두 번째 표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나바는 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청지기 같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순절 직후에 교회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로 넘쳤습니다. 아무도 바나바에게 강요하지 않았건만 그는 조용히 자기 땅을 팔아서 그 모든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쓰도록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착한 사람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나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셨음을 알고 있었으며, 가치있는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또한 바나바는 친구같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웠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뒤에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만나려고 애를 썼지만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하며 피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교회의 큰 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바울을 변호하면서 바울이 참으로 회심했다는 사실과 신자들이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여야 함을 교회에 잘 설명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나바의 착함과 헌신적인 삶 때문에 수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행해지고 있는 전도와 이방인, 헬라파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함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행11: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그러나 누군가가 이 일에 책임질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 일에 적임자는 두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유대적 전통에서 자라난 유대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이방인들을 동등한 입장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안디옥을 기독교의 중심지로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용기가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그 위에 교회에 대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격을 막아낼만큼 능변가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적임자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9년간 바울의 소식을 전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아는 소식은 그가 가이사랴를 통해 다소로 도피한 것입니다.

"(행9: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의심없이 바울은 9년이란 세월을 자기 고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가 맡아야 할 사명, 즉 이방인에 복음 전도의 사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바울을 최초의 이방인 교회 책임자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바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바울과 협동으로 목회한 결과 안디옥 교회는 영적, 물적 큰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비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행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는 안디옥 사람들이 교회를 더 이상 유대주의의 한 종파와 일부로 인식하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로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나 '성도들'이라고 불렀고, 유대인들은 주로 '나사렛 이단', '도를 좇는 자' 등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는 안디옥의 기독교 신자들에게서 유래되었으며, 이것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열심히 그리스도를 사랑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얻게 된 별명,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전 세계가 알게 될 이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살아 계신 분으로 말미암아 멸시될 이름을 모든 사람이 놀랄 용기와 사랑의 이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선지자 아가보가 큰 기근을 예언했을 때,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이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곧 사도들의 지시를 좇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 마음에 있는 새 생명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유대의 형제들을 사랑으로 돌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구제 사역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보내기 위해 자신들을 가르쳤던 두 선생님들에게 그 임무를 위탁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점을 계시하는 멋지고 은혜로운 행위입니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언에 복종하여 앞으로 있을 큰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당할 유대의 형제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교회의 일치를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교회의 한 부분이 고통을 당하는데 다른 한편이 가만히 있다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안디옥 교회의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들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성 크리스토퍼라는 성자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오펠로는 시리아에 사는 힘센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세계에서 제일 강한 사람의 신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리아 왕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왕은 노래 가사 가운데 악마라는 말이 나오자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궁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 악마를 찾아가서 그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나쁜 짓을 하며 금은보화를 훔쳤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악마와 함께 교회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악마가 교회 지붕의 십자가를 보고 몹시 무서워하며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닌가! 악마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십자가는 자기가 제일 무서워하는 예수의 상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펠로는 악마로부터 빠져나와 예수의 부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오펠로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나룻터의 사공이 되어 예수를 기다렸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직 예수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사흘 동안 장대같은 소낙비가 퍼부어 홍수가 졌습니다. 오펠로는 물이 불어서 나룻배를 띄우기가 위험해지자 일단 휴업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오펠로가 머무는 거처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습니다. 한 소년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위독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당장 나루를 건너가야 한다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펠로는 소년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강을 건너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물결이 너무 거세기 때문에 배로는 어려워 소년을 업고 강을 건너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소년은 더욱 무거워만 갔습니다.
그래서 오펠로는
  "너는 무엇을 먹고 자랐기에 이렇게 무겁냐?"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 때 그의 등뒤에서는 어른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만나려고 하던 예수다."
이 전설이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권력(왕)의 신하나 재물(악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바른 주인인 예수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섬긴다고하는 것은 곧 한 이름없는 아이를 위해 위험을 무릎쓰는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여 유대의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낸 것 또한 주님을 섬기는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죄악이 가득한 곳에서도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진주가 진흙 속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하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죄악된 세상에서 그 진가(眞價)를 더욱 발휘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죄 많은 곳 은혜가 더욱 넘치는 교회, 형제 사랑으로 뜨거운 교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말씀이 충만한 생명수 넘치는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안디옥 교회처럼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前哨基地)가 되는 우리 평강 교회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6. 교회의 힘

  "(행12: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행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행12: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행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행12: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애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행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행12: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 대 (행12: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행12: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행12: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줄 알겠노라하여 (행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행12: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행12:14)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밖에   섰더라 하니 (행12: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행12: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행12: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행12:18)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행12: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행12: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행12: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행12: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행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행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행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이 장은 야고보는 죽고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헤롯은 승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헤롯은 죽고 베드로는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승리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처럼 절대적인 인간의 계획들을 뒤엎으시고 그 대신에 그 분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킵니다. 폭군들은 잠시 교회를 억압하고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면서 자랑하고 뽐내도록 허용될 수는 있지만, 그들은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에 가서 그들의 제국은 무너지고 그들의 교만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과 지옥의 권세라 해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잡으려고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이 온다는 것을 알고 요새로 들어갔다가 전열을 정비한 다음에 그들과 맞서 싸우려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이미 르바임 골짜기에 도착하여 그곳을 장악하고 그곳을 약탈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나가서 불레셋 사람들과 싸울까요? 주께서 저들은 내 손에 넘겨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좋다, 나가서 싸우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겠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에 다윗은 나가서 그들과 싸워 그들을 격퇴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쳐서 흩어버리듯이 내 앞에서 대적을 쳐서 흩어버리셨다!"
 그리고 그곳을 바알브라심 즉 "돌파하시는 주"라고 불렀습니다.

 "(삼하5:17)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해처로 나가니라 (삼하5:18) 블레셋 사람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삼하5:19)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삼하5:20)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

오늘 본문은 교회의 확장과 복음 전파에 대한 헤롯의 박해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철통같은 감옥에 갇혔으나 교회가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므로 주의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로 세상 권력을 "돌파하는" 교회의 힘과 복음의 능력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예수님이 탄생하였을 때 동방 박사들의 말을 듣고 나서 어린 아이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잔인한 왕의 손자입니다. 그 할아버지는 결혼을 10번이나 할 만큼 음란하고 악한 왕이었는데, 그의 아들들인 빌립, 안디바, 아겔로 등의 왕들도 모두 악한 통치자들이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그의 어머니가 저 위대한 마카비 가문 후예인 미리암네였습니다. 그는 갈릴리와 유대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조심스럽게 율법과 모든 유대 율례를 지킴으로써 부지런히 유대 사람들의 좋은 기풍을 기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통 유대주의자들 간에 더욱 더 큰 인기를 얻기 위해서 그는 기독교회와 그 지도자들에게 모종의 조치를 하기로 결심한 것이 확실합니다. 헤롯 아그립바가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이유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기쁘게 해주어서 그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대중 인기를 얻으려는 헤롯의 이런 음모에 희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였으며 예수님께서 특별히 가까이 하셨던 세 사람, 곧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의 투옥도 동일한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체포 자체도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그의 의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야고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즐거워하며 헤롯 왕을 칭송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들한테서 더 큰 인기를 얻고자 베드로를 야고보처럼 죽이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베드로가 교회의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며 베드로의 죽음은 모든 유대인들을 대단히 기쁘게 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이처럼 세상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죄와 타협하며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는 일이 흔한 것입니다.
보통은 죄수가 한 명의 군인에게 쇠사슬로 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간주되지만, 특별한 예방책으로서 베드로에게는 양옆에 군인들이 있고 그의 두 손목은 모두 수갑에 채워졌으며, 한편 감옥 바깥에는 다른 두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구조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철통같은 경호를 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야고보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베드로는 공포에 떨기는커녕 전혀 불안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 반대로 금새 잠이 들었습니다. 후에 바울은 빌립보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행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크리소스톰은 이를 다음과 같이 주석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찬송가를 부르며, 한편 여기에서 베드로가 잠이 든 것은 아름다운 장면이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기도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쉬지않고 기도했습니다. 그야말로 교회가 위기를 만났을 때 그들은 철야기도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여전히 우리의 책임이며 우리의 힘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가운데에서도 어떠한 연합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지모(智謀)나 기술이나 재치가 아니라 기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자주 전쟁을 할 때의 일입니다. 한 번은 시리아 왕이 부하들과 의논하여 진 칠 곳을 미리 정해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사가 미리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시리아 군이 진 칠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계획은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도 이러한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에 몹시 당황한 시리아 왕은 지휘관들을 불러모으고 "반역자가 누구냐?" 라며 노발대발하였습니다. 그 때 지휘관 하나가 "왕이시여, 우리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는데 그는 왕이 침실에서 은밀하게 말하는 것까지 모두 이스라엘 왕에게 일러 바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엘리사가 있는 도단에 말과 전차와 많은 병력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밤에 도착하여 그 성을 포위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엘리사의 사환이 일찍 일어나 나가 보니 많은 시리아 군인들이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사환은 엘리사에게 달려가 "아 아 주인님, 이제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라고 외쳤습니다.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와 함께한 군대가 그들의 군대보다 더 많다." 라고 하고서 "여호와여, 이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에 사환이 보니 불말과 불수레가 온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시리아 군이 공격해오자 엘리사는 "여호와여, 저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그들에게 "너희가 길을 잘못 들었다. 내가 너희를 안내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 데려가 주겠다" 라고 하며 그들을 사마리아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자 엘리사는 "여호와여, 이 사람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시리아 군을 보고 엘리사에게 "내가 이들을 죽일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엘리사는 "그건 안됩니다. 칼과 활로 생포한 전쟁 포로도 아닌데 어떻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음식을 주어 먹고 마시게 한 다음 돌려 보내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왕이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그들은 실컷 먹고 마신 후에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로 얼마 동안 시리아 군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않았습니다(왕하 6:8-23)

"(롬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12:21)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이  세상의 도전에 대한 교회의 대응방법인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을지라도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사랑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책임입니다.
오직 기도하는 교회만이 이러한 세력에 맞설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간절히 그리고 약간은 의심하면서 기도했지만 그들의 간절하고 계속적인 기도의 힘은 헤롯보다 강했고 지옥보다고 강했습니다.
그 결과 주의 천사가 감옥에 들어와 베드로 옆에 섰습니다. 감옥은 광채가 조요했지만 베드로는 계속 잠을 잤습니다. 베드로를 깨우려고 천사가 그의 옆구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빨리 일어나라" 고 말하자 쇠사슬이 베드로의 손에서 벗어졌습니다. "옷을 입고, 신을 신고, 그리고 겉옷을 입고 나를 따라오라"는 천사의 말대로 따라가다가 이것이 환상인가 했는데 첫째 둘째 파수를 지나 육중한 철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 육중한 철문이 오토매틱으로(자동으로, 저절로, <헬> automatos,  Automatic) 열렸습니다. 천사와 베드로가 그 <자동문>을 나오자 천사는 사라지고 베드로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어 교인들이 기도하던 집으로 갔습니다. 베드로가 문을 두드리자 어린 하녀 로데가 베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너무 기뻐서 문여는 것을 잊어버리고 안으로 급히 들어가 소리쳤습니다. "베드로님이 문밖에 계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네가 미쳤구나!"(마이네, maine) 라고 하나 하녀는 참말이라고 하자 천사라고 우기며 하녀를 따라 문으로 갔습니다. 베드로가 그곳에서 계속 문을 두드리자 그들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랐습니다.
놀란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헤롯은 속이 뒤집히고 화가 나서 간수들을 사형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헤롯은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기를 위해서 자기 영혼을 팔아 먹은 자였습니다. 큰 명절 기간 중에 그는 가이사랴에 있었습니다. 그의 보좌는 백성들 위에 높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는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은으로 만든 옷을 입고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연설을 하자 백성들은 외치기를 "이것은 신(하나님)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고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자기의 것으로)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인 척하면서.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고통으로 몸을 구부렸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5일 동안 극심한 통증으로 고통을 겪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벌레가 먹어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야고보 사도를 죽였고, 베드로를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고, 까닭없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고, 죄없는 병사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하나님께서 보낸 벌레들이 헤롯 왕의 뱃속으로 들어가 그를 죽도록 만들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이 뿌린 것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은 벌레에게 먹힐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벌레들은 그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을 먹을 것입니다.
헤롯은 벌레에게 먹혔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헤롯을 부러워했습니다. 그의 권세를 부러워했고, 그의 인기를 부러워했고, 그의 부유함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인생의 종말을 보라. 그는 벌레에게 먹혀서 땅바닥에 거꾸러져 누웠습니다. 대중적인 인기를 부러워하지 말고, 많은 재산을 소유한 세상적인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하여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세상 권력의 위력이 아무리 무섭다고 할지라고 궁극적으로 불의한 세력은 무너지고 정의가 승리를 거두게 마련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는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요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요 하나님이 곧 정의입니다.

"(민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시요 세상 권력까지도 좌우하는 분이시기에 교만한 인간들과 독재 권력가들이 아무리 횡포를 부린다 하더라도 회개치 않는다면 결국은 다 망하게 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아합의 권력을 등에 업고 교만히 행했던 이세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실이나 자신을 신격화한 헤롯이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충이 먹어 죽은 사실은 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세상 권력자들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이 곧 정의라고 믿고 그 힘을 미친 듯이 남용하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있지만 우리는 그러한 힘보다 더 크고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은 30개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고, 데마가 세상을 따르기 위해 바울을 등진 것처럼, 오늘날 권력을 잡기 위해 혹은 재력을 거머쥐기 위해 자기의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시2: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시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시2: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시2: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시2: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시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그리스도의 군사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를 통해서 주어진 그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힘이 되는 기도의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7. 선교하는 교회

  "(행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예루살렘 교회 이외에 이방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를 위한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구성 명단을 보면 그 적합성과 복음의 세계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 유대인이고, 루기오는 북아프리카 구레네 사람이고, 시므온은 유대인이나 그의 다른 이름 니게르는 로마 이름이고 이는 그가 로마인들 사이에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마나엔은 귀족으로서 왕실에 관계가 깊은 사람이었을 것이고 바울 자신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 유대인이며 교육받은 랍비였습니다. 이렇듯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신분과 출신으로 구성된 교회였지만,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열심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성의 공존으로 말미암아 이방인 선교를 진행하는데 적합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참으로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하나가 된 교회였습니다. 그들 안에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있었고, 잘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함께 있었으며, 천인 출신과 귀족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 안에는 본토 사람들과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있었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었으며 보수적인 사람과 진보적인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인종이나 빈부나 신분이나 출신이나 사고방식이나 그 밖의 어떤 인간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피차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 안디옥 교회는 일치된 모습으로 세계 선교라는 아름답고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항상 자기들이 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이 그들에게 원하시는 일, 즉 하나님의 뜻을 가장 먼저 앞세웠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간의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요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17: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요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는 그의 각 지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온전히 성장할 수 있으며 또 세상은 교회가 하나가 된 모습을 보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질환자들이 2, 300백 명이 모여 있는 어느 요양원에 그 많은 정신질환자를 지키는 것은 작은 작대기 하나 들고 서 있는 사람 한 명뿐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놀란 방문객이
  "이 많은 사람을 그 작대기 하나만 들고 지키다니 ..... 위험하지 않습니까? 겁나지 않아요? 여럿이 한꺼번에 덤비면 어쩔려고..."
  하며 걱정하자 빙그레 웃으면서 지키던 사람이 하는 말이
  "미친 사람들은 단합이 절대로 안 됩니다. 다들 각자 뛰놀죠. 그저 한 사람씩만 다루면 되니까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요."
  하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교회, 그리고 나라가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신질환자들은 연합할 줄을 모릅니다.
미국 남부 멤피스에 가면, 이혼녀들만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는 이혼한 사람들만이 다닐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계층의 부류들만이 모이는 교회는 바람직한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어울리고 남녀가 차별이 없으며, 지식인과 비지식인도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도 거리낌이 없이 더불어 함께 봉사하고 지방색이 없는 교회가 참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선교하는 교회로서 안디옥 교회는 예배를 바르게 잘 드리는 교회였습니다.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라는 본문에서 안디옥 교회의 활동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기 "섬기다"(minister) 라는 단어는 "의식"(儀式, liturgy)이라는 의미와 "봉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점차 정규적인 예배 형식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천사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히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섬기는 것은 예배와 관계가 있습니다. 천사들은 섬기는 영들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에게 제물을 드리는 영들입니다. 주를 섬기는 것은 그를 경배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들은 일이 전부가 아니며 오히려 경배가 더 중요하고도 우선적인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배드리는 일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성령께서 시키시는 일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위한 조직이며, 교인들은 주님을 섬깁니다. 이렇게 예배하며 섬길 때 그들은 봉사의 일을 위하여 보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와 일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배드리지 않고 일만 하려 한다면 우리는 비참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일은 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려 한다면 우리는 의식주의자(儀式主義者)들이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배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이 구절은 당시 교회가 특별한 영적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다른 모든 활동을 끊고 오직 주를 섬기는 일에만 전념하였던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이런 교회에게 말씀하시며, 그 때 교회는 그의 음성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주를 섬기는 일", 예배를 잘 드림으로해서 안디옥 교회는 세계 최초의 선교사,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셋째, 안디옥 교회는 기도의 정신으로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선교의 필요한 요건은 기도의 정신인 것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기 전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임하셔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는 일꾼으로 선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치열한 영적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흑암에서 광명으로, 그리고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할 때 이미 보이지 않는 사단적 힘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교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엡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엡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기도가 없이는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하는 일, 그 자체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기도와 금식까지라도 하지 않고서, 어떻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기적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겸손하게 우리의 전적인 연약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그의 성령의 능력을 부음받기 위해서 간구하지않는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사단의 왕국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안디옥 교회는 금식 기도하는 정신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선교하는 강한 교회가 된 것이었습니다.
넷째, 본문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를 보면,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여 역사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가장 강한 선교의 힘은 항상 "(고전2:4)....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선교의 사명이 성취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성령은 선교의 거룩한 주체입니다. 우리가 아닌 성령이 세상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선교하는 성령의 역사없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는 결코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하나님의 성령은 본질적으로 증거의 영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선교에 대한 명령에 순종하자면, 그의 성령의 능력이 없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을 통해서 말해지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컵에 하나 가득히 어떤 액체를 채워가지고 가는데 내가 당신에게 부딪쳤다면, 뭐가 쏟아지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 컵에 담겨 있던 것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우리를 거리에서, 상점에서,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또는 병원에서 날마다 부딪칠 때에 무엇이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쏟아져 나올 것인가? 분명히 우리 마음 속에 담겨 있던 그것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까지 기다리도록 명령을 받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였던 것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신앙에 대한 이론에 설복되어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유는 성경 내용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교인들의 불친절과 누추한 모습(ugliness)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첫번째 열매인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실로 성령의 능력은 선교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하여 (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덧입히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시험받으러 가실 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께 순종하여 그 6주간에 걸친 혹독한 시험을 대항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돌아오시어", 곧 놀라운 그의 사역에 착수하셨습니다.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눅4:14)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행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다음과 같은 선교의 역사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행5: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행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마지막으로,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한 교회였습니다. 강한 교회를 세우는 최선의 길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계선교의 꿈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쇠퇴해서 사라질 것입니다.
"(행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라는 본문 가운데 "이에"(then)라는 말은 곧 '성령께서 말씀하신 후' 라는 뜻과 '교회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즉, 성령의 명령에 따라)'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선교사를 한 명 뽑아야 했습니다. 한 사람이 전화를 해서 지원했는데 새벽 3시에 면접을 보자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새벽 3시에 선교 위원장 집으로 시간을 맞추어 갔습니다. 그리고 썰렁한 마루에서 장장 5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아침 8시가 되자 한 사람이 나오더니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시험을 치릅시다." 하면서 질문 몇 가지를 던졌습니다. 그는 "글 쓸 줄 아십니까? 'baker'(빵 굽는 사람) 라고 써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시키는 대로 "baker" 라고 썼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계산할 줄 아십니까? 2+2 가 얼마입니까?" 였습니다. 그는 "4입니다." 라고 대답했고 시험은 끝났습니다. 다음 날 선교 위원회에서 소집이 있었고, 그 때 시험을 주관했던 위원장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정말 좋은 선교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는가 시험하려고 새벽 3시에 오라 했더니 그 때 왔습니다. 둘째로, 정확한 사람인가 알아봤더니 정확히 새벽 3시에 제 집 앞에 왔습니다. 셋째, 인내가 있는 사람인가 했는데 아침에 5시간을 기다리고도 불평 한 마디들을 수 없었고, 넷째, 성품을 시험했는데 역시 늦게 나타난 나에게 얼굴 하나 붉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겸손한 사람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저는 5살 난 아이도 알 수 있는 질문을 했는데 성심껏 대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선교사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사람은 지식이 풍부한 사람도, 가진 것이 많은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일이 귀하기 때문에 어떠한 일에도 순종할 줄 하는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에 순종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따로 세워 안수했고,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에 순종하여 세계 최초의 선교사로 보냄을 받아 제1차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 세워진 우리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예배를 정성껏, 열심히, 일치 단결하여 바르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의 능력이 충만하시므로 선교의 능력이 되시는 성령이 충만하시고, 순종을 통하여 선교의 사명을 완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8. 능력 선교

  "(행1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행13: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행13: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행13: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행13:8)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행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13: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행13: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행13: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사역한 덕망높은 선교사 헨리 마틴(Henry Martyn)은 "그리스도의 영은 선교의 영이며, 그 분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더욱 열정적인 선교사가 된다" 고 말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사역할 때 그런 체험을 했고, 복음을 이방 로마 세계에 전하도록 성령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는(1-12장) 예루살렘이 사역의 중심지였고, 베드로가 핵심적인 사도로서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는(13-28장) 수리아의 안디옥이 새 중심지가 될 것이고, 바울이 새 지도자로서 주로 이방인에 대한 사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10장에서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에 의해 개종되었음이 강조된 후에 13장에서는 로마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사울에 의해 기독교에로 전향되었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선교의 영"이 되시는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 이 두 사람을 이방 선교를 위해 제1차로 보낸 곳은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였습니다(4:36). 그 곳의 총독은 서기오 바울("분별있는 사람"이란 의미)이었습니다. 두 사도는 구브로의 수도인 바보로 갔습니다. 바보는 사랑의 여신 뷔너스 숭배로 유명했고 또 한편 악명도 높았습니다. 이 단어는 음란한 부도덕의 대명사였습니다. 당시는 미신이 성행한 때였습니다. 미신이란 언제나 퇴폐적인 문명의 징조입니다. 대부분의 고위층 인물 특히 서기오 바울과 같이 교양있는 사람도 자기의 마법사를 두고 있었는데 이들은 점장이요 요술장이들이었습니다.  
사울은 당시 이러한 환경의 총독 서기오 바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유대인으로 마술사이며 거짓 선지자인 바예수("예수의 아들"이라는 뜻)가 있었습니다. 그의 헬라식 이름은 엘루마("마법사", "재주있는 사람" 이라는 뜻)였습니다. 엘루마는 서기오 바울의 개인 마법사였습니다. 그는 만일 총독이 기독교를 믿게 되면 자기는 끝장이 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루마는 총독 서기오 바울을 설득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할 수 있는 온갖 짓을 다 했습니다.

"(행13:8)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마침내 사울이 엘루마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했습니다.

"(행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13: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행13: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즉시로 엘루마는 소경이 되었습니다. 총독이 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서 경악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총독을 구원하길 바라셨는데 사단은 훼방놓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것은 흔한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역사하실 때에 사단은 훼방을 놓으며 그 사람이 회심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성경은 예언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여러 가지 징조가 나타나는데 그 중에 하나가 거짓 선지자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마24: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 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2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살후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살후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살후2: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살후2: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문의 바울과 거짓 선지자 엘루마의 대결은 참 하나님과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하여 이용된 거짓 신의 대결입니다.
초대 교회는 처음부터 이러한 종교의 신앙을 흡수 이용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대결하여 극복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18:20-40에 나오는 엘리야의 싸움입니다. 바알신과의 타협이나 융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혼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과 대결합니다. 이 850명은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자들이었습니다" 즉 왕의 권력과 밀착하여 서로 이익을 얻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막강한 교권 정권과 대항하여 엘리야는 혼자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우상숭배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처단하므로 승리의 뒷처리를 깨끗이 하였습니다.

"(왕상18: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이는 처참한 사화이지만 참 하나님과 거짓 신 사이의 선택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갈멜산에서 모든 백성에게 외친 엘리야의 선전포고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교회 안에 거짓이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된다는 절대적 명제(命題)가 애석하게도 무너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박수 엘루마의 사건 속에서는, 교회 밖의 대적 세력에 대해 불 같은 공격을 가하신 성령의 활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진 바울은 박수 엘루마를 쏘아보면서 "(행13: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고 했습니다. 바울을 통한 성령의 이같은 격렬한 표현은 그 자리에 있었던 서기오 바울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기오 바울은 로마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그는 진리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행13: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갈망하였기 때문에 바나바와 사울을 데려오라고 사람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 즉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예수(Bar-Jesus)가 그의 곁에 있었으며, 또한 사람을 보내어 바나바와 사울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는 박수 엘루마가 대변하는 세력과 바나바와 사울이 대변하는 세력의 틈바구니에 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엘루마는 자신의 이권과 교권을 지키기 위해 서기오 바울 총독을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위해 조직적인 노력을 폈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바울이 불같이 노하여 기이하고 놀라운 말을 한 것은 바로 서기오 바울이 위험스런 상태에 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진리와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자들에게 지극히 엄한 경고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 말기에 여덟 가지 큰 화(禍)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화(禍)들은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선포된 것이 아니라 모두 거짓 선생들과 거짓 인도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그릇 해석하는 자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스스로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고 공언하면서도 사실은 그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자들에게 준엄하게 화를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마23:16)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23: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23: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마23: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23: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성령께서 바울을 통하여 그토록 격렬하게 엘루마를 대적하신 것은 이 유대인이자 거짓 선지자인 엘루마가 진리와 생명을 찾으려는 사람을 방해하려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성령께서 불같이 강력하게 역사하신 것은 엘루마가 진리를 방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바울은 명확한 분별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엘루마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명석함이나 단순한 통찰력의 결과가 아니라 즉각적인 성령 충만의 결과였습니다. 즉, 이 성령 충만이 그에게 빛을 비추어 주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앞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자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루마를 향한 성령의 불같은 역사는 서기오 바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서기오 바울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는 즉시 바울을 무장시켰으며, 그 결과 엄히 그를 꾸짖어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행13: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행13: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러한 성령의 불같은 역사는 바나바와 사울이 선포한 진리를 변호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서기오 바울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였던 것입니다.

"(행13: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성령께서는 복음 전파의 적대 세력을 물리치시는 불같은 세력이십니다. 박수 엘루마는 물질과 지위를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 같은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성령님의 인간에 대한 거룩한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박수 엘루마의 목적은 서기오 바울을 진리의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었으나, 이런 엘루마의 사악한 목적을 좌절시키는 성령의 목적은 서기오 바울에게 진리의 신앙을 심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릇된 초자연주의와 마술은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지극히 위험스런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래 왔으며, 또한 지금도 그러합니다. 오늘날 사두개인적인 철학이 유행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다행히도 소멸되어가고 있습니다. 왜냐면 인간이란 물질과 빵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 말씀과 아무 상관도 없는 마술과 저열한 영성주의(靈性主義)와 온갖 형태의 심령 치료들입니다. 인간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존 윔버는 그의 책 <능력 전도>와 <능력 치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능력 전도는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또한 그 이성을 초월하는 복음의 표현이다. 복음에 대한 설명은 이적과 기사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 시위와 함께 해야 한다"
이 방법은 그에게 매우 효과적이었다.
"왜냐하면 능력 전도에 있어서 복음의 거부감은 초자연적인 사건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제거되며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수용성이 매우 높게 되기 때문이다".
하비 콕스는 그의 책 <Fire from Heaven, 21세기 종교와 성령운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 관련 통계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데이비드 배렛(David Barrett)에 따르면 다양한 형태의 모든 성령운동 교회는 교인 수가 이미 4억 이상이 된다. 그것은 기독교인 4명 중 1명이 성령운동 교회인 셈인 것이다. 범세계적인 성령운동이 일부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시골이나 산간 벽지의 종교가 아니라 주로 도시의 종교적 현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서울이나 상파울로 또는 잠비아의 루사카 같은 제3세계의 대도시들 속에서 매우 급속도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그러한 대도시들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판자촌의 밀림 속에서 유일하게 번성해 가는 공동체가 바로 성령운동 교회들이다."
본문은 사도행전에서 귀신의 힘에 대결하여 승리를 거둔 네 번의 사건 가운데 두 번째의 것으로 "능력 선교"를 통한 교회의 확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참조. 8:9-23, 16;16-18, 19:13-17).
아시아 선교회 총무인 데이빗 왕(David Wang)은 최근에 자신이 내몽고를 방문한 여행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어느 가정 교회 모임에서 그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한 그리스도인 여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아들을 데리고 다른 마을로 이주했으나 마땅히 살 만한 집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 지역의 지도자가 그들을 빈 집으로 데리고 가서 여기 살아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한 주일 후에 그 지도자가 다시 와서 그 식구들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들이 정말 잘 살고 있다는 대답을 듣고 대단히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약간은 장난치는 듯한 기분으로 이들에게 밤에는 사람들이 근처에도 갈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유령의 집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신론자인 그 지도자는 귀신들이 이 크리스챤 여인에게는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여인에게 수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지내고 있는 마을의 한 여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귀신들린 여자는 완전히 소망이 없어 보이는 경우로, 쇠사슬에 묶여진 채 마루바닥 속에서 지내고 있었고 너무나 난폭했기 때문에 맹수를 다루듯이 음식을 던져 넣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 크리스챤 여인은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 그녀와 함께 기도팀을 모집했습니다. 기도팀은 마을 지도자의 안내를 받아 귀신들린 여인이 기거하는 오두막에 도착했습니다. 밖에는 많은 군중들이 운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 기도팀 중 한 사람이 나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목욕시킬 물과 몇 가지 의복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 시간쯤 후에 그 귀신들린 여인은 깨끗이 완치된 상태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이 능력 전도의 결과로 인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피터 와그너, <오늘날의 이적과 기사>)
태국에서는 살인 강도떼가 한 그룹의 그리스도인들을 습격하러 가다가 길에서 불붙는 화염검을 든 두 천사의 출현으로 제지된 일이 있었습니다. 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예수 영화 상영팀이 귀신들의 주거지로 유명한 한 절에서 숙박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귀신들이 나타났고 그 팀은 귀신들을 예수 이름으로 쫓아버리고 평화스럽게 잠을 잤는데 이 사실을 안 마을 주민들은 굉장히 놀랐습니다.(폴 에슐만, <나는 막 예수를 보았다>)
이런 류의 극적인 능력 전도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상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깊은 생명 성서 교회>, 영국의 <가정 교회>(1980-1985사이에 190개에서 650개로 늘어났으며 7만 5천 성도를 가지고 있다), 스웨덴 웁살라의 <생명의 말씀 교회>, 칠레의 산티아고에 있는 <죠타베체 복음주의 대성당>, 말레이지아 쿠알라룸푸의 <갈보리 교회>, 싱가폴의 <갈보리 카리스마틱 센터>, 태국 방콕의 <소망교회> 등이 능력 전도를 통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들입니다.
본문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불리웠던 사울이라는 이름이 바울로 바뀌어 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이란 이름은 헬라식 이름으로 "작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사울'은 히브리적 이름으로서 "구하였다", "하나님께 청함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식 이름인인 '사울'은 주로 이방 선교 여행을 하기 전 사용된 반면 이방 선교 여행이 시작된 이후부터 '바울'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사실 13절 이후 '사울'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거의 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유대 이름으로 자기네들 주위에서 알려진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 이름으로 더 넓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름입니다. 예를 들어 게바는 히브리어요, 베드로는 바위란 뜻의 헬라어이고, 도마는 히브리어요 디두모는 쌍둥이의 헬라어의 이름입니다. 어떤 때는 음역(音譯)을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엘리아김은 헬라어로 알기모가 되고 여호수아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히브리어로 사울이요 기타 세계에서는 바울입니다. 아마 바울은 이 때부터 자신의 이방인 사도직을 전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 이방 이름만을 사용하기로 결심한 듯합니다. 바야흐로 이방인 구원을 위한 바울의 생애가 시작된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돈 버는 것입니까? 사업을 크게 하는 것입니까? 유명해지는 것입니까?
바울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던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 여러분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같은 <능력 선교>을 위한 능력있는 삶을 위해 여러분들게 성령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표적이나 지혜를 구하지 말고 삶의 능력과 "능력 선교"를 이루는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9. 역사의 소망-곧 예수

  "(행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행13: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행13: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행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행13: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행13:18) 광야에서 약 사십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행13: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 오십 년간) (행13: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행13: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행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행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행13:24)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행13: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행13:26)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행13: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행13: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행13: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행13:30)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행13: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행13: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행13: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행13: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행13:35)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행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행13:37)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행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행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행13: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행13: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본문 13절에 나오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대수롭게 넘겨 볼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그 순서가 늘 바나바와 사울였습니다. 전도 여행의 지도자로 시작한 것은 항상 바나바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었습니다. 전에 바울은 바나바를 돕는 입장에 있었으나 이제는 바울이 전도 여행의 중심인물이 된 것입니다. 전도 여행의 지도자의 위치를 사실상 계승한 것입니다. 바나바에 관한 아름다운 점은 그가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의 사업이 성취되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리를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3절의 주된 관심은 마가 요한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이 바나바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조수로 데리고 다녔는데 이제 그가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바울과 그들의 일행이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전진해 나가려고 할 때 마가 요한이 성령께서 지시하신 방향에서 이탈했다는 사건입니다. 마가 요한이 이 선교 대열에서 이탈한 이유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첫째, 그의 친척 바나바가 지도자 지위를 버린 데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고 이탈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는 여행 길은 가장 험하고 위험이 도사린 고원지대였기 때문에 그만 위축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베드로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이방인 선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넷째, 마가 요한은 모든 일을 용두사미격으로 처리하는 한 청년에 불과했을 것이란 것입니다. 다섯째, 크리소스톰이 오래 전해 말했듯이 과부인 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향수병이 나서 그 대열에서 이탈했을 것이란 것입니다. 여하튼 마가 요한은 가버렸습니다. 바울은 이를 얼마동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를 떠났을 때 바나바는 마가를 또 다시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이탈한 자를 데리고 가기를 거절했습니다.

"(행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그리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로 인하여 영영 헤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후 마가 요한은 바울과 다시 원만한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로마 감옥에 마지막으로 투옥되었을 때에 쓴 디모데후서에서 밤빌리아에서 그를 떠났던 마가에 대하여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딤후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한번 이탈자가 되었던 사람이 이제는 바울에게 유용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마가는 베드로 수종자가 됩니다. 베드로의 통역이 되어 베드로의 해외 선교시에 수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마가를 가리켜 "내 아들 마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벧전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베드로를 수행하는 중에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말씀을 반복해서 듣게 되고 마침내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좀더 적극적이고 좀더 강인하고 충성된 사람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역사가 미쉬레는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는 불과 30대에 심한 두통과 위장병을 얻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책을 많이 보면 눈이 나빠지고 소화도 안되며 심장도 더 나빠질 것이니 책을 보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가만히 있으면서 책을 안보고 지냈더니 이건 죽는 게 낫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안보는 대신에 책을 쓰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사가가 되었으며, 책을 열심히 쓰다보니 심장병도 낫고 위장병도 나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결국 적극적으로 해결할 것이요, 긍정적으로 해결할 것이며, 더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밀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비겁한 것은 없습니다.

"(히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히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10: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뒤로 물러서는 자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사업에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사도 바울처럼 전진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다음으로, 바울이 안디옥의 회당에서 전한 메시지(17-41절)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역사의 주체로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을 택하시고 높이시고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광야에서 그는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습니다.(또는 양육하는 아버지로서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습니다.) 그는 그들 앞에서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시고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사사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는 그들이 극성스럽게 왕을 구할 때에 그들에게 사울을 왕으로 주셨습니다. 그후 그는 사울을 폐하고 대신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다윗 이후에는 솔로몬의 통치가 있었으며 그후 그들의 나라는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그후 그들은 패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재난을 당했습니다. 그리하여 종래에는 왕도 제사장도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그후 남은 백성들은 로마의 멍에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로마의 멍에 아래서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세우셨습니다. 이제까지 개관한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온갖 실패에도 불구하고 인간 구원이라는 그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늘 전진하시는 분이라고 바울은 선포한 것입니다.

"(행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행13: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행13:18) 광야에서 약 사십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행13: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 오십 년간) (행13: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행13: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행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행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사도 바울의 이같은 설교는 역사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자 역사에 개입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 시대에 그 분의 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의 선교가 바로 역사의 주체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 교회의 표어 가운에 하나인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역사의 주체성-"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
1.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마24:14)
   -역사의 주체성(歷史의 主體性)-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역사의 알파(시작)와 오메가(끝)이며 세계는 철저히 하나님의 역사이다 (헤겔). 예수 전시대(前時代)의 역사의 축(軸)은 의인(義人)과 이스라엘이었다. 예수의 초림(初臨)으로 그가 세운 교회가 역사의 축이 되고 있다.
  교회는 역사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선택받은 종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계승한다. 그러므로 세계사는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성격이 규정된 역사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역사는 그 목적이 규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다(몰트만). 참다운 역사의식(歷史意識)은 예수를 증거하는 선교에 대한 사명의식(使命意識)이다.
  "천국 복음" 은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의 몸된 교회가 땅끝까지 전해야 할 복음은 바로 천국복음이다. 역사의 완성은 이 천국복음을 통한 세계 복음화로 성취된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교회는 천국복음 선교를 위임받은 종말론적인 신앙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하고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역사하고 있다. 본문은 바로 이 인간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확실히 밝혀주는 중요한 구절이다. 천국 복음은 하나님 나라 생명의 복음이다.  
  전체 성경의 중심주제는 역사가운데서의 하나님의 구속 활동이다. 교회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이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역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지(救贖意志)가 수행되어지고 있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선교를 통해서이다(죠지 래드). 주님의 승천과 영광의 재림사이에 있는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는 세상 가운데서 천국 복음이 확장되어지고 역사(役事)하고 있음을 통하여 발견되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역사의 의미와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의 주체다 !
-------------------------------------------------------------------------
문예부흥 이후에 인간중심의 사관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비코나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가진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전쟁도 협상도 암투도 위선과 사기도 사랑도 모두 다 세력을 얻기 위해서 이용되는 도구들이었습니다. 힘과 힘이 만나고 합쳐지고 갈라지고 충돌하면서 인간의 역사는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아름다운 덕들도 단지 도구로 이용될 뿐입니다. 결국 인간의 힘이 역사의 원동력이요 주체였다고 주장하나 이러한 역사에는 아무런 도덕성의 흔적도 비쳐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과거 군부 30년 통치를 이룩했던 권력 지향의 인물들의 결과들을 볼 때 과연 그들이 과연 역사에 깨끗한 도덕성의  흔적들이었습니까?
한편 칸트는 인간성의 완성, 즉 도덕에의 의지가, 헤겔은 자유를 추구하는 세계정신이 역사의 원동력이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관은 단계적으로 더 나은 상태로의 진보를 기대하게 했습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낫고 결국 미래는 더 나은 상태로 역사는 발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첨단 과학과 문명의 시대에 과연 도덕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역사의 흐름을 바르게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헤겔의 제자 맑스는 경제에 대한 욕구가 역사를 이루어 간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나라 안의 모든 갈등들, 즉 민주주의와 귀족정치, 군주정치 간의 투쟁, 전매권을 얻으려는 투쟁 등등, 모두가 다 실제가 아닌 헛 것을 보는 것이고 실체는 서로 다른 계급들이 싸우는 것일 뿐이다." 즉 경제의 욕구가 투쟁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언하였습니다. "역사의 원동력은 비평이 아니며 혁명이었다." 유토피아를 위해 그들은 혁명을 부르짖었고 이론대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결과 중국, 한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서 수천만의 희생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분배를 공정히 하면 모든 투쟁은 사라지고 행복이 오리라고 단순하게 기대했지만 결국 그들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가난해지고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통은 하나도 감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인간 중심의 사관이 가진 공통점은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요 역사를 만드는 힘을 가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요 역사의 주인이요 역사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 될 때는 모두가 죄된 인간이기 때문에 그 역사의 수준은 인간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 중심의 역사관의 가장 잘못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도외시할 때 인간 중심의 사고가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고 지적합니다. 모든 고통은 인간의 죄로부터 시작합니다. 심지어 자연 세계의 고통까지도 인간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므로 생명이 없고 능력도 없게 된 것입니다. 도무지 그 안에 선을 행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사회 구조를 바꾸고 분배체제를 바로 한다고 인간의 죄문제 해결없이 지상낙원이 오고 행복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덕과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그것을 실천할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그대로 두고 역사는 발전되지 않고 항상 원점에서 맴돌 뿐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전혀 없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역사를 새롭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역사는 의인의 역사이지 죄인의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설교의 결론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 역사의 소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행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행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민족의 소망이 되고 역사의 소망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고 새로운 삶을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는 이 시대에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에서의 하나님의 구속(救贖)사업에 대한 확신은 교회의 중요한 표식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 세대는 역사의 의미라는 문제를 안고,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사건들은 우리가 파멸 이외에 아무데로도 가고 있지 않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서구문명이 필시 몰락할 것처럼, 악의 세력도 그렇지 아니한가? 다람쥐 체바퀴 돌 듯 하는, 문명의 발생과 붕괴의 끝없는 순환 속에 갇힌 우리가 아닌가? 우리 시대의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교회는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말은 사색이나 철학, 또는 이상적 희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증거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역사를 구속하시기 위해, 역사 속에 행동하였고, 행동하실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불문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한 위대한 신학자는 말하기를 "역사의 의미를 위한 탐구는 무의미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소리이지, 기독교 신앙의 소리는 아닙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역사의 의미와 목표는 인간에게 두지않고,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역사의 의미는 역사 자체 속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에서는 발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며, 행동하셨고, 행동하실 것입니다. 미래는 그분의 것인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과거가 그분의 것임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소망이십니다.
한국 동란을 취재해서 미국에서 퓰리처 상을 받은 바 있는 라이트 허긴스 기자가 압록강변에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영하 42도의 추운 날씨에 포탄맞은 군용 트럭옆에 기대서서 깡통 통조림을 먹고 있는 해병대 용사들, 참호용 칼로 통조림 콩을 찍어 먹고 있는 그들의 옷은 대나무처럼 얼어 붙어서 빳빳해지고, 얼굴과 수염은 흙으로 범벅이었다. 이렇듯 참담한 모습을 목격한 허긴스 기자는 생각하기를, 세계에서 제일 잘 산다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어쩌다다가 이 전쟁에 불려와서 이 모양이 되었는가! 너무나 괴로와 신음하다가 병사들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내가 만일 당신들이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당신들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겠는가?" 그들은 한참 생각했다가 이구동성으로
  "우리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추위와 굶주림,그리고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려 줄 수 있는 복음이 무엇일까?
  "내일"을 주는 것이다. 내일이 있을 때 인간은 어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되며 살아야 할 이유와 가치를 갖는다.
  사람은 어디로 가고 있는것인가? 인류 역사에 소망은 참으로 있는 것인가?  역사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한 때 진보주의 철학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상승하는 직선으로 표시하여 원시적이고 미개한 인간의 역사가 점진적으로 높은 수준의 문명과 문화로 발전해간다고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악과 전쟁과 가난과 갈등이 사라져 버린 완전한 사회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어났던 사건들은 이러한 견해를 산산히 부수어 버렸습니다.
  또 다른 견해는 역사를 나선형(螺旋形)의 도형(圖形)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발전과 퇴보을 거듭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발전해간다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앞선 진보주의 견해를 수정한 것에 불과하며 역사속에 빗나간 견해임이 들어났습니다.
  극도의 비관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마치 술취한 파리가 발에 잉크를 적시고 백지위를 비틀거려 생기는 자국처럼 역사는 그 방향도 없고 그 목적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가장 유명한 신약성경 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은 "오늘날 우리는 역사의 종국과 그 의미를 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역사에 있어서의 의미 문제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슈펭글러(Spengler)는 진보란 불가능하며 역사는 운명적으로 불가피하게 퇴보하고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토인비(Toynbee)는 많은 연구 업적을 발표했는데 그는 인류의 문명사에서 역사의 의미와 유형과 그 주기를 찾아내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한편 니이버(Niebuhr)와 러스트(Rust)와 피퍼(Piper)와 같은 학자들은 성경적인 계시 진리 가운데서 역사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역사(歷史)의 궁극적인 의미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속에 기록되어지고 해석되어진대로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동가운데서 발견되어질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역사의 키(Key)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그렇지않다면 우리는 비관적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과 공의(公義)를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하신 인간과 인간 역사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신의 목적을 나타내시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성경 전체의 중심 주제는 역사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구속 활동입니다. 인간과 역사의 소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사람이 세운 이 세상 나라는 무너진다. 무너지면서 동시에 보이지않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2절에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는 의미 심장한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염세주의와 신앙적인 낙천주의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멸망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치 어거스틴이 무너져가는 로마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어 가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역사는 전환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성구도 바로 이 그리스도 중심의 역사관으로 관철되어 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탄식하는 자연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맞게 되는 역사의 지평선 저 너머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동물과 식물도 함께 저주를 받아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고 있습니다. 함께 영광을 누려야 될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 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2)"

이렇게 인간과 더불어 만물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구원은 영과 몸의 구원을 가리키는데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 영의 구원을 받았으나 아직 몸의 구원은 이르지 않았습니다. "영광스런 몸"의 구원을 탄식하는가운데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영광스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마라나다"(주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현재의 아픔과 고통을 인내하면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이러한 영광스러운 소망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될 때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과 가난과 질병과 죽음까지도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이런 소망을 확증시켜주십니다. 인류의 소망은, 역사의 소망은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에게서 인류는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스런 소망은 예수를 믿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곧 소망이며 힘이며 세상을 이겨나가는 능력과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에 대한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한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30. 수용과 거부

  "(행13:42)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하더라 (행13: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행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하여 모이니 (행13: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행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행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행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행13: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행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수 년 동안 유대인의 전통적인 예배의식에 젖어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본서를 기록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말씀을 마치고 회당을 나서자, 사람들이 다음 주일에도 와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청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한 무리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며 오히려 바울의 설교를 변박하며 비방한 무리들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하여 모이니.(행13: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거듭 설교를 요청한 무리들에게 두 사도는 항상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은혜란 두 가지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은혜란 본질적으로 하나의 아름다운, 매력있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헬라어는 카리스(charis)인데, 카리스란 말은 육체미, 그리고 매력이란 말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은혜란 말은 언제나 애교적인, 사랑스러운, 매혹적인, 아름다운 그리고 매력적인 것이라는 범주에서 고루 사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 속에 거룩함이 나타내는 모든 아름다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되기"(고전 15:42-44) 때문에 은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키므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므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난을 부요함으로 변화시키므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변화시키므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병든 자를 건강한 자로 변화시키므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미련한 자를 지혜로운 자로 변화시키므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교만한 자를 겸손한 자로 변화시키므로 아름다운 것입니다.(눅 6:20-26, 7:36-50, 8:1-3, 43-48, 마15:29-31)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므로 가정에서 매력있는 남편과 아내로 부활되시기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므로 교회에서 매력있는 성도로 부활되시기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므로 직장과 사회에서 매력있는 사람으로 부활되시기 축원합니다.
둘째, 은혜란 말 안에는 언제나, 완전히 값없이 그리고 자격을 따지지 않고 주는 선물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은혜는 벌어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겸손히, 감사와 경배심을 가지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은혜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상(無償)이란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은혜의 근본적인 개념은 주는 사람이 전적인 아량을 가지고 주는 선물이며, 받는 사람이 절대로 벌어들이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그걸 받을 만한 자격을 만들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닙니다.    
은혜의 개념 배후에 있는 기본적인 사상은 하나님의 자격을 묻지 않으시는 관대하심입니다. 은혜의 사상은 값없는 은사로써 인간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상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도저히 받을 만한 것이거나 벌어들일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관대하심으로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은혜가 그에게 끼쳐준 결과를 결코 잊을 수 없으며 은혜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위대한 가수"라는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 음악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입장에서도 백 명의 목사들보다 낫다고들 말합니다. 영감에 가득 찬 그녀의 노래는 사람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쳤습니다.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회개를 일으켰으며 많은 불신자와 방황하는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마리안은 필라델피아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고교생 때부터 노래 실력이 뛰어나 그녀가 다니던 작은 흑인 교회에서는 189달러의 후원기금을 모아 그를 지원하였습니다. 그녀는 몇 해 동안 개인 교수를 받은 후 드디어 뉴욕의 타운홀에서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독창회에 대한 음악평은 형편없이 나빴습니다. 실의에 찬 마리안에게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안아, 은혜가 위대함보다 먼저 와야 한다.(Marian, Grace must come before greatness)"  
  어머니의 이 한 마디는 마리안을 위대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전생애를 변화시킨 금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은혜가 성공보다 먼저 와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체험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쓴 모든 서신은 은혜란 말로 시작하여 은혜로 끝나고 있습니다.

"(롬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롬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전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전16: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은혜 가운데 있었던 바울과 바나바는 일부 유대인들이 자신의 설교를 변박하고 비방하며 급기야는 핍박하며 추방했을지라도 오히려 담대하여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행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하여 모이니 (행13: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행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행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행13: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행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이처럼 은혜는 날마다의 굳굳함과 힘으로 인간에게 무장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은혜는 인간의 생활을 아름다운 것으로 장식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직 은혜 만이 인생의 무서운 긴장을 뚫고 나가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살후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살후2: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살후2: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지않고 수용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에 위대한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휘트브레드 문학상(British Whitbread Award) 1989년도 수상작품은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의 자전적 소설 <시계의 눈 밑에서(Under the Eye of the Clock)>였습니다. 놀란은 어렸을 때(3세) 뇌성마비가 되어 오직 눈으로만 의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도 못했으며 듣지도 못했으며 손을 움직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마에 작은 막대기를 붙이고 키를 누르는 방법으로 타자를 쳤습니다. 타자지 한 쪽을 찍는 데 열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말대로 쓸모없는 육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런 위대한 시인이요, 소설가가 되었는가?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내 모습 그대로 받아 주었기 때문입니다.(They accepted me for what I am)"      
거부는 사람을 슬픔과 좌절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받아 주는 것은 희망의 출발이며 의욕과 노력의 동력이 됩니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고 하시며 하나님이 예수를 받아 주신 것처럼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께서 받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내 모습 이대로를 기쁨으로 영접해 주시고 나 같은 인간, 나 같은 죄인을 통하여서도 무엇인가 이룩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그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는 주께서 명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행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 말씀은 일찍이 주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명하신 것입니다.

"(마10: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마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10: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마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마10:11)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마10: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마10: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마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될 때 이를 받아들이면 영생과 구원이지만 거부할 때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요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류에게 내어주신 바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단 한 가지의 근본적인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즉, 결단에 대한 요구입니다. 천국이 이미 가까이 왔고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역사 속에 오셨으며 심판의 영이 지금 역사(役事)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에게 단 한 가지 요구되는 것은 바로 결단입니다. 불트만은 "예수께서 요구자(The Demander)로서 하나님의 가까움을 선포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회개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회개의 근본 뜻은 '돌아오는 것',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 '삶의 방식을 아주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결단을 내려 천국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결단으로 이루어집니다. 인생의 진로는 자신의 결단에 의해 결정됩니다.
도둑이 무디 선생의 전도강연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를 찾아와 자기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도둑질 해온 물건을 팔아 그것으로 장사하여 돈을 벌어 훔쳐온 주인들에게 모두 갚아 주겠습니다."
  그러나 무디 선생은 이렇게 훈계하였습니다.
  "다음에 벌어서 갚을 생각 말고 지금 있는 것으로 갚고 모자라는 것은 다음에 갚도록 하시오. 다음에 갚겠다고 했다가 만일 갚지 못하고 죽는 날에는 회개할 수 없게 될터이니 이제 곧 참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도둑은 모든 재산을 팔아서 주인들에게 돌려 주고 모자라는 것은 자기가 종이 되어 섬기겠다고 눈물로써 고백하였습니다. 이 때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어 장사를 하게하여 마침내 큰 사업가로 만들었습니다.
  <고민과 황홀>이라는 소설을 쓴 어빙스턴은 "미켈란젤로가 다윗을 조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거인 골리앗에게 도전한 씩씩하고 용감한 목자상을 성서의 기록에서 모형을 땄다."라고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다윗이 거인이 되었는가? 골리앗을 죽인 다음엔가? 혹은 자기가 반드시 해보겠다고 결심한 순간인가?" 그가 결론을 내린 것은 다윗이 거인이 된 것은 살육이 아니라 결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의연한 결단은 가장 약한 인간을 거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된 것은 안디옥이나 로마에서가 아니라 다메섹에 가까운 사막의 모래 위에서 결단내렸던 순간이었습니다.
  회개는 현세의 삶의 내용과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결단인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인 토마스 무어(Thomas Moore)의 작품에 <낙원>이 있는데 그 내용을 각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책벌을 받고 세상으로 쫓겨난 한 천사가 다시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가 풀어야 할 한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것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시장 바닥과 골목들을 누비며 이것을 찾아 헤매다가 어느 따스한 봄날의 아침, 한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동네 입구에 세워진 지계표 위에서 한 아낙네가 칭얼대는 아이를 가슴에 품고 젖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생각했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그림자로 일컬어지는 모성애가 듬뿍 깃든 저 젖 한 방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 젖 한 방울을 얻어 낙원 문에 다달았으나 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낙심 속에 또 다시 방랑 길에 오른 그가 어느 무더운 여름 한낮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한 전쟁터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생각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같이 사르는 애국지사, 그가 흘린 마지막 피 한 방울이야말로 가장 존귀할게야!" 식어가는 피 한 방울을 조심스럽게 찍어 낙원 문에 도달했으나 대답은 역시 "아니오!" 였습니다.
  실망을 안고 또 한 번 여행길에 오른 그가 어느 겨울날 저녁 산등성이에 서 있는 조그만 시골 교회를 들르게 되었습니다. 주일도 수요일도 아닌 평일 저녁, 약한 불빛 사이로 새어 나오는 사람의 말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제단 앞에 엎드려 통한과 함께 회개의 눈물을 쏟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깨달았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어머니의 젖과 애국지사가 흘린 피는 이 세상에서 더 없이 귀한 것이지만 노인의 참회하는 눈물 한 방울이야말로 낙원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 참회하는 노인의 눈물 한 방울을 들고가 비로소 낙원으로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스펄젼도 "메마른 눈으로 천국에 올 자는 아무도 없다"(No coming to Heaven with dry eyes)라고 갈파했듯이 한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는 데는 그리스도의 보혈(寶血)과 인간의 회개하는 눈물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찾으시는 것은 죄인의 상태를 용납해서가 아니라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며 회개 후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시기에 부지런히 찾고 또 찾으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영혼이 이 지상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회개하는 역사야말로 천국에서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여기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회개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로 회개하는 자들만이 그 "성", 천국에 들어갈 권세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70명의 제자들을 각처로 보내시면서 다음과 같이 분부하셨습니다.

  "(눅10: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천국이 예수님의 전권대사인 제자들을 통해 그들 각 마을에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그저 평범한 갈릴리 어부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들을 영접하므로서 천국 자체를 받을 수도 있었고 아예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절하는 것은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눅10: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눅10: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눅10: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천국이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바는 인간 의지의 응답입니다. 인간은 천국을 받아 들이고 그리고 그에 복종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천국의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천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므로서 천국의 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단 한 가지 요구는 바로 "회개하라, 돌아서라, 그리고 결단하라, 천국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영접하므로 생명을 얻고 축복을 받고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단호한 결단(Resolute decision)을 요구하셨습니다.

  "(눅9: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눅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집도 권세도 특권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따를 수 있겠는가?  

  "(눅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여기서 보면, 천국은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이며 긴급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생명", "천국의 생명"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눅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보면, 천국의 요구는 주저하거나 뒤돌아보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습니다. 천국은 단호하고, 돌이킬 수 없는, 그리고 명확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혹한을 피해 남쪽으로 떠나려고 준비하는 오리떼들은 늦은 가을 밤에 모든 준비를 갖추고 파티를 마련했습니다. 큰 농장에 모여 곡식을 잔뜩 주워 배불리 먹으며 내일부터 펼쳐질 고통의 장도를 위해 힘을 축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출발의 순간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때 큰 오리 한 마리가 주저하며 말했습니다.
  "이 곡식 알들은 참 먹기가 좋으니 나는 좀 더 남아 이것을 충분히 먹고 떠나기로 했어."
  다른 동료들이 떠나고 난 뒤 맛있는 곡식을 마음껏 먹은 그 오리는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다가 며칠이 지났습니다. 오리는 매일 습관처럼 "내일 나는 남쪽을 향해 날아야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행은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세찬 겨울 바람이 천지를 뒤덮고 더 이상 거기에 머무를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오리는 그제서야 비로소 날개를 펴고 농장 마당을 가로질러 날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리는 날 수가 없었습니다. 살이 너무 쪄서 하늘로 날아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결단의 순간을 상실한 오리는 남쪽으로 향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입니다. 후회하는 오리에게 매서운 북풍만이 불어닥칠 뿐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 시대에 외치며 결단을 촉구합니다.

  "(왕상18:21)....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여호수아가 이 시대에 결단을 요구합니다.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다음으로, 천국은 극단적인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마11:12)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에 대한 누가 복음의 해석을 보겠습니다.

  "(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여기서 보면,  천국은 폭력과 힘이라는 용어("침입")로 표현될 정도로 극단적인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마가 복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4) (없음) (막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6) (없 음) (막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눈을 빼고 손 발을 찍어버리는 것도 불사하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일부를 잘라내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빼어버려야 한다는, 다시 말하면 철저한 영적 수술이 필요하다는 단호한 의지를 종말적 심판과 연관지어 설명한 것입니다. 만약 범죄한 원인을 그대로 두고 있으면 지옥의 길로 간다는 자명한 확언을 통해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며 자신이 저지른 범죄적 행동에 대해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판단 기준이 인간의  윤리적 노력이나 윤리적 행동이 아니라 신앙에 의한 철저한 회개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음 성구를 보겠습니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여기 검은 분명 폭력의 도구입니다. 때로는 천국에 대한 결단이 물질이나 인간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고통과 아픔을 주는 검이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 가족,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폭력'인 것입니다.
  다음, 천국은 값비싼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는 천국(생명, 영생, 구원)에 대한 상당히 깊은 관심과 열망을 지니고 있는 어느 부자 청년의 질문입니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의 중심을 보시고 중대한 결단에 방해가 되는 모든 소유물을 처분하고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이 가지고 있는 부(富)를 문제삼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있어 '장벽'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그 장벽이 돈, 명예, 가족, 지식 등 무엇이든지간에 천국의 요구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과감히 벗어던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이 가난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거짓된 안전'에서 구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사람들은 부의 축적이 생명을 안전 보장하고 근심 걱정을 없애주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축적된 부를 잃을까 하는 염려만 더 할 뿐입니다. 가난 그 자체가 덕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천국에 복종하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가난도 불사하라는 것입니다. 부가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데 있어 장애물이 된다면 그 부는 악한 것입니다. 그 부자 청년은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천국은 정말 값비싼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귀, 영화, 명예, 지위 등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통치에 부속되는 것으로 부차적인 것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참된 축복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성구를 보겠습니다.

  "(골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천국을 위해 살았던 사도 바울은,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을 경험하고 살았기 때문에 세상적인 지위나 소유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체득했던 것입니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의 만족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에 있지 않고 바로 주님께 있었습니다. 천국의 축복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같은 경험들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앞선 그 부자 청년의 삶은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국에 대한 아는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그의 삶은 소유한 돈으로 살 수 있었던 '먹고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제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었고 또 만족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삼는 것은 부가 아니라 그 부에 대한 '사랑'입니다.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사람의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맡기면,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천국(그의 나라)을 구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더하여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결단은 때때로 애정의 단절이라는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삶에 있어 가족간의 애정보다 우선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분명히 가족 관계를 혹독하게 단절시키기를 원하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사랑으로 이룩한 부부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관계가 천국의 요구에 장애가 될 경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 가족 관계가 깨어진다하더라도 천국의 요구가 가장 우선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가, 가족 관계가 인간의 생명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또한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 청년들은 결혼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는 것이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해 축복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후에 하나님이냐, 가족이냐를 선택해야하는 값비싼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다시 천국은 사람의 목숨까지도 요구하십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여기에 결단의 궁극적인 댓가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질병, 사업의 문제, 남편 아내의 문제, 자녀 문제 등 이런 것이 십자가인가? 이러한 것들은 십자가가 아니라 "짐"들입니다. 때때로 짐은 벗어 던져 버릴 수 있으나 십자가는 짐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경우를 보겠습니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을 부인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의 것(my-self things)을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my-self)을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것을 부인하는 것(self-denial)은 자기 중심적인 것이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denial of self)은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죽음 외에는 다른 뜻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형의 도구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육체적인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천국의 요구에 순응하고자 하는 사람은 목숨을 바쳐 피흘릴 각오를 가지고 이 악한 시대에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예수를 위해 죽을 준비됨을 뜻합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헌신, 일사각오의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남김없는 철저한 복종을 뜻한다. 자신의 생명, 의지, 욕망, 꿈, 소망 등 모든 것을 주님께 두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살아 통치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으로서 근본적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가 있다면 이제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생명은 나의 모든 것과 더불어 모두 주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내가 나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까지는 예수께서 나의 삶에 통치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통치자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자신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냐 입니다.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수 있습니다.     
  버뱅크(Luther Burbank)란 식물학자는 가축용 선인장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16년간 그의 손가락에서 뽑아낸 선인장 가시는 무려 1,000,00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울어야 하고,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산모는 열 달 전부터 준비해야 하듯"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태초부터 희생양을 잡아야 했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사자의 밀도는 20평방 킬로미터에 연간 평균 40마리의 초식동물을 잡아 먹는데, 이들은 보통 10마리 전후가 집단생활을 하므로 약 400마리의 먹이가 필요합니다. 이들의 먹이인 얼룩말 10마리는 연평균 3.5마리의 새끼를 생산하므로 연간 400마리의 사자에 의한 소비를 보충키 위해서는 1,200마리의 얼룩말이 필요하며, 사고와 질병에 의한 죽음까지 포함한다면 1,500마리의 초식동물이 없으면 10마리의 사자는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1마리의 얼룩말은 연간 10톤의 풀을 먹음으로 약 1헥타르 면적의 초원이 필요합니다.
  동식물을 막론하고 생존이나 보다 나은 삶의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희생이 있기 마련입니다. 값비싼 삶은 값비싼 희생을 요구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값비싼 삶은 영원한 삶인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에 처한 인간을 영원한 삶으로 이끌기 위해 그래서 하나님은 값비싼 희생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죽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결코 값싼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값비싼 희생의 죽음이었다. 그것은 실로 <값없이 받는 값비싼 은혜요, 대가(代價)없이 받은 고가(高價)의 선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천국은 영원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눅12: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눅12: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막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위의 말씀들은 천국의 요구에 대해 '지금' 내린 결단이 인간의 미래 운명을 결정하는 영원한 결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은총의 하나님께서는 권능과 영광의 천국이 이 땅에 이르기 전에, 심판과 분리가 임하기 전에,  천국의 축복과 천국의 요구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영광과 심판으로 임하시기 전에 천국의 생명과 축복들을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여기서' 영접하는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이 결단은 영원한 생명과 축복들을 '지금 여기서' 결단하는 영원한 결단입니다. 천국이 이 세상에 도래했습니다. 내일의 생명이 오늘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그리고 천국 복음을 영접하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 이것이 천국의 요구인 것입니다. 천국의 요구는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라는 말입니다.
어느 날 영리한 여우 한 마리가 바닷가에 갔습니다. 그 여우는 물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에 꾀를 하나 내었습니다.
"물고기 여러분! 내말 좀 들어 보세요. 어부들이 그물을 가지고 여러분을 잡으러 저기서 오고 있어요. 바다 속은 위험하니까 뭍으로 올라오세요. 그리고 물 속에서는 큰 물고기들이 여러분을 괴롭히니 차라리 이 뭍에서 우리와 함께 사십시다. 육지에 올라오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이 말을 들은 물고기들은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갑론 을박(甲論乙駁). 좀처럼 회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우는 영리하니까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주장과 바다 속에 사는 것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아오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나왔습니다. 결국 물고기들은 오랜 회의 끝에 여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물고기 대표는 얼굴을 밖으로 내밀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우님, 우리를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우리는 물 속에 사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이 우화는 유대인 가정의 식탁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다 들려준 아버지는 계속 이런 질문을 합니다.
"물고기가 뭍으로 나오면 어떻게 되지?"
어린 아이들은 금방 알아듣고
"그야 말라 죽게 되지요"
라고 대답합니다.
"바로 그렇단다.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살아야지 아무리 유혹이 와도 유대인임을 저버릴 수는 없는 거란다."
어린이의 마음 속에 분명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가슴에 각성이 있게 됩니다. 무서운 교훈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린 마음 속에 유대인은 유대인으로서의 신분과 정신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 깊이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면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영적으로 말라죽고 말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시므로 세상에서의 삶이 천국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3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행14: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행14: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행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행14: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행14: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행14: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행14: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행14: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행14: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행14: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행14: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하여 (행14: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행14:13)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행14: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행14: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행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행14: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행14: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행14: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행14: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행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행14: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행14: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행14: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행14: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행14: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사도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은 본문에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13장에서 수리아 안디옥을 떠나 구브로와 소아시아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복음 전도는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된 반면 본장의 제1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에서의 복음 전도는 핍박이 고조된 그야말로 가시밭과 같은 사역이었습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의 핍박을 피하여 이고니온 지역으로 도피해온 두 사도는 여기서도 복음 전도 사역을 그칠 줄 모릅니다. 이방인의 구원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이(2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 전파를 방해했지만 두 사도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더욱 더 공개적인 복음 전파를 감행했습니다(3절). 그 결과 바울은 돌에 맞아 사경을 헤매기도 했지만 이런 핍박들은 오히려 복음 전파의 열정을 더 강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21절). 이처럼 복음 전파에 있어 일사각오의 자세로 임한 바울과 바나바의 태도는 "세상에 감당치 못하는"(히 11:38)  복음의 산증인이 취하는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로는 핍박을 피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에 따른 것으로 하나님께서 '순교자의 피'보다 '전도자의 발걸음'을 더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마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 여러 차례 대적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에 직면했거니와 이 때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임하기 전까지 군중 속으로 피신하셨던 것입니다.  
두 사도의 복음 사역에는 "은혜의 말씀"(3절)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하여 주셨습니다. 그 표적과 기사 중에 하나가 루스드라에 있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하나가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행14: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행14: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앉은뱅이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가 위대한 사도 바울이 있는 곳에 갈 수는 없어도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 왔으니 얼마나 놀라운 기회입니까? 사실 바울은 그곳에 의도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핍박을 받아 쫓겨다니다가 온 것입니다. 이는 앉은뱅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진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를 부르고 또 그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을 만한 때가 있고, 또 은혜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건강과 힘이 있을 때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젊음과 물질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복음 전도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늘 전도하고 싶은 생각이 끓어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 기도 중에 가족이 생각나고 친구가 생각나고 안 믿는 남편이 생각 나서 가슴이 미어질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상대방의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옥토처럼 될 때가 있습니다.
앉은 뱅이는 그 때를 만나서 놓치지않고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꾸준히 경청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회가 된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알라스카 주는 본토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큰 땅덩어리입니다. 본래 알라스카는 소련 땅이었는데 미국이 1867년에 720만 달러를 주고 사들인 것입니다. 당시 정부가 알라스카를 사들이자 의회가 떠들고 일어나 국무장관 슈워드와 죤슨 대통령을 소환하여 맹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유는 아무 쓸모도 없는 땅을 엄청난 돈을 주고 사들이다니 그것은 의회를 무시한 처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의회에 불려간 대통령은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미 사버린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의회를 거치려고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게 되면 매스컴이 떠들어 소문이 퍼지게 될 것이고 따라서 소련이 팔지 않겠다고 하거나 값을 많이 달라고 할 것 같아서 국무장관과 의논해서 샀습니다." 라고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의원들은 막무가내로 "정 얼음이 그렇게 필요하면 겨울에 꽁꽁 언 미시시피 강의 얼음을 깨다가 쓸 것이지 미쳤다고 쓸모도 없는 땅덩어리를 720만불씩이나 주고 사들였느냐"고 욕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그후 의회가 조사단을 파견하여 알라스카를 조사해 보았더니 금과 백금이 가득하고, 풍요한 어장과 산림이 우거져 있고, 석유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코가 납작해진 의회는 대통령을 찾아가 "의회에서 있었던 당신의 사과를 돌려드립니다. 알라스카는 얼음 창고가 아니라 보물 창고입니다. 잘 샀습니다." 라고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알라스카의 경우처럼 우리에게도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행복한 삶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경 바디매오, 그는 주님이 그의 앞을 지나가실 때 그저 주님께서 알아서 고쳐 주시겠지 하는 안일한 태도가 아니라 사력을 다해 주님을 만날 기회를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어둠과 절망으로부터 구출되어 빛과 희망의 삶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일이 벌어지자 그곳에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여러 종교의 우상을 만들어서 섬겼는데, 이번에야말로 진짜 신이 사람으로 나타난 줄로 알고 법석을 떨며 두 사도를 우상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사도에게 신의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에게는 한 전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때 쓰스(Zeus)와 허메(Hermes) 신이 이 세상에 아무도 모르게 변장하고 내려 왔습니다. 지구상에는 아무도 그들을 영접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늙은 농부인 빌레몬과 그의 처 바우시스가 집으로 영접했고 친절하게 해주었습니다. 결과는 빌레몬과 바우시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몰살을 당했는데 이 두 농부는 찬란한 신전의 수호자가 되었고 후에 죽었을 때는 두 그루의 큰 나무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번에는 전과 같은 실수를 하여 신을 몰라 보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바나바는 체격이 건장하고 귀족 같았기 때문에 신중의 왕인 쓰스(제우스, Zeus)라고 생각했고 허메는 신들의 소식을 전하는 대변자 신으로 신들의 사자였으므로 말 잘하는 바울을 보고 허메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을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거나 신의 장난이라고 하면서 제사를 드리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의 무속을 보면 산에 가면 산신령이 있다하여 서낭당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고, 동네에는 토지신이 있어서 그 모습으로 남녀의 장승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귀신들이 많아서 무당들은 굿을 하면서 수많은 귀신들을 달래는 일을 하였습니다. 특히 초대교회의 시대에는 그리스와 로마에 수많은 우상들로 온 도시가 가득 차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런데 신을 잘 섬기려고 우상을 만들 때 인간들은 더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쓰다 남은 통나무요, 산에서 가져다 정으로 조각한 돌맹이일 뿐이며, 거기에는 생명이 없고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고 쪽이 떨어져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지방 문화재 운운하면서 그 우상에게 음식을 바치고 허리가 휘도록 절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병든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밖에   없는줄 아노라."

그런데 본문을 보면  "(행14:13)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라고 했습니다. 두 사도가 서 있는 곳이 마침 쓰스 즉 제우스의 신전이어서 꽃다발로 장식한 황소들을 몰고 두 사도의 발 앞에 와서 살아 있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겠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수많은 돌부처를 만들어 거기에 음식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며, 심지어 스리랑카 같은 불교 국가에서는 석가가 죽으면서 남긴 이빨이 있다고 하여, 매년 수십만 명의 불교도들이 금과 은과 보석들을 가지고 와서 그 앞에 바치고, 엄청난 양의 루비와 꽃으로 둘러 쌓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매일 40kg의 쌀밥을 지어 바치면서 복을 빌기도 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대단히 많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파리신에게 소를 잡아 드리는 예식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으나 한 번도 제사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하고 귀신들렸다고 배척하였는데,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제 산 사람들에게 거창한 제사를 드리겠다고 법석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두 사도는 펄쩍 뛰면서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옷을 찢으면서 그들에게 달려가서 소리를 치며 제사 행위를 막았습니다.

"(행14: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행14: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

계속하여 두 사도는 자신들이 그들과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죄인이요 허물과 약점을 많이 가진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 말하며 그 허망하고 부패한 우상 종교를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행14: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행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행14: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행14: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선지자 이사야는 우상 종교의 허망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44: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 (사44:19)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 나무의 얼마로 불을 사르고 그 숯불 위에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

그리고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며 거기에 절하는 자들을 결국 수치를 당하게 되고 망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장군 동무와 타냐의 대화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 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 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고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신을 쫓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예의 신도 물질의 우상도 조만간 내 손을 놓을 것입니다. 평생이라는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다 기울였던 그 안개 같은 나의 우상들을 코마로프가 불 붙는 거리에서 어린 타냐를 떼어놓았듯이 얼마 뒤에 나를 배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허무한 우상들을 쫓던 우리는 외로운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아직 하나님에 관하여 깊이 알지 못했는데,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자 그것을 섬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별들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은하수가 보여서 그것을 예배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사라졌습니다. 잠시 후에 달에 떳는데 그것을 숭배하려고 하니 또 며칠 지나지 않아 달이 기울고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태양을 섬기려고 하였는데 해만 지면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도 포기하고, 결국 영원히 변하지 않고 또 사라지지않는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두 사도의 외침은 바로 그 길만이 인생이 사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하는 자들까지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오래 동안 참으시며 기다십니다.

"(사48: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유대 사회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천사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 때 정의의 천사는 말하기를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들은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진리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들은 온갖 거짓을 다 만들어 낼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긍휼의 천사가 말하기를, "사람을 창조하십시오. 그들이 불의를 행하거나, 거짓을 말하거나 누추한 일을 행하면 제가 살며시 그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로 이끌어 오겠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유한 후에 사람들이 두 사도를 신으로 여겨서 제사를 지내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니, 유대인들은 더욱 시기심이 불타 올라서 흥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사람들을 다시 선동하여 이끌고 루스드라까지 원정을 와서 바울을 돌로 치는 것이었습니다.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피를 쏟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바울이 움직이지도 않자 사람들은 그가 숨이 끊어진 줄로 알았습니다. 분노에 미친 사람처럼 날뛰던 사람들은 침을 밷으며 그 시체를 끌어다가 성밖에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그러면 개나 들짐승들이 피냄새를 맡고 와서 그것을 뜯어 먹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생명을 보존시켜 주셨습니다. 바울은 죽은 것이 아니라 피를 많이 쏟아서 잠시 졸도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일, 즉 사명을 마칠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심과 충성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지상에서의 여러분의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여러분이 죽임당함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어나 더베로 가서 계속 복음을 전했으며, 안디옥으로 돌아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믿음에 거하라고 권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행14: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행14: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환난에 대한 특별한 마음 가짐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 올바르게 성숙되려면 많은 환난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 나쁜 것만이 결코 아닙니다. 환난은 기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아가는, 십자가 다음에 오는 부활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아주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환난을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을 배워야 합니다.
평생 기도와 전도밖에 안하는 어느 수도사가 길을 가다가 영안으로 보니까 예배당이 보이는데 예배당 지붕에 마귀들이 새까맣게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웬일이지? 예배당 위에 마귀들이 낮잠을 자는구먼!"
하면서 교회에 들어가 보았더니 교인들이 기도하다말고 모두 자고 있더랍니다.
"옳지! 교인들이 자니까 할 일이 없어서 마귀들도 자는구나!"
그 다음에 조금 더 가니까 교회가 있는데 지붕 위에서 마귀들이 창을 들고 지붕을 팍팍 찌르면서 춤을 추며 발악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별일이다." 하면서 교회문을 열어보니 교인들이 열심히 깨어서 찬송하고 기도하더랍니다.
"옳지! 교인들이 열심을 내니까 마귀들도 열심을 내는구나!"
시시한 사람, 벌써 썩은 사람, 그대로 두어도 죽을 사람은 마귀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믿음이 올라간다고 해서 시험과 환난이 물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핍박을 받고도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승리하게 됩니다.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은 전쟁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있으므로 나라가 강해지고 산업이 발전하고 지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비법이 있는데 그것은 전쟁이 있어야 민족이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소련에서 살다온 사람은 공산당이고, 미국에서 살다온 사람은 민주주의이며 얼굴도 가지각색입니다. 그래서 평안하기만 하면 그들은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부득불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전쟁의 긴장관계에 있을 때 그들은 의견이 서로 다르다 하여도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싸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은 축복이다."라고 말합니다.
중국의 횡장군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켰던 훌륭한 믿음의 인물입니다. 그는 이러한 강한 확신과 믿음을 1900년도 북청 사변 때 있었던 한 선교사의 거룩한 죽음을 목격하고나서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북청사변은 중국에서 외국인을 몰아내자는 비밀 결사단체의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청소년이었던 그는 폭도들이 한 선교사를 살해하는 잔인한 광경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난폭한 폭도들은 먼저 선교사의 손목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팔목을, 발목을 잘랐습니다. 이어 그들은 그의 두 무릎을 잘랐습니다. 사지가 잘려나간 선교사의 몸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습니다. 폭도들은 죽어가는 선교사에게 마지막 할 말이 없는가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선교사의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나의 아들에게 말을 전해 주시오. 나의 아들에게 선교사로 중국에 와서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가라는 말을 말이오!"
그리고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외에도 죽음과 극심한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꿋꿋이 지킨 믿음의 선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목이 잘리고, 어떤 이는 톱으로 육신의 상하위가 두동강이나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고, 아사하고, 태형으로 혹은 돌에 맞아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표면적으로 가해지는 핍박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때, 우리는 조금 더 안일하고 조금 더 편안하게만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연단과 시험, 그리고 환난을 피하려고만 하지말고 그것들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일 때 충만한 기쁨과 하늘의 상이 크게 될 것입니다.

주여, 오직 당신으로 기뻐하나이다.
당신의 고난, 나의 기쁨이 되었으니
당신의 죽음, 나의 생명이 되었으니
당신의 부활, 나의 소망이 되었으니
이제로
나의 고난 당신의 기쁨 속에서
나의 죽음 당신의 생명 속에서
나의 부활 당신의 소망 속에서
찾게 하소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하여도 생명의 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 넓은 문 보다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는 천국 백성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