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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주제별 설교는 신앙생활에 보다 편리한 도움이 되도록 이동희 목사의 신약 성경 설교 가운데서 엮은 총 9가지 주제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2. 세가지 예물

3. 예수는 누구인가?

4. 사람, 경제, 그리고 예수

5.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6. 예수를 영접하라

7.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8. 요나의 표적

9. 삶을 풍요케 하시는 주님

10.삶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

11.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2.예수를 넘어지게 하지 마라

13.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

14.빛과 생명

15.말씀이 육신이 되다

16.예수는 누구인가?

17.하나님의 어린양

18.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19.나의 양식은 무엇인가?

20.나를 믿을 수 있느냐?

21.생명의 양식

22.참된 양식

23.빛과 어두움

24.선한 목자

25.생명의 주

26.예수가 계신 곳

27.기쁨에 이르는 길

28.세상을 이기었노라

29.십자가의 영광

30.십자가의 길

31.보라 네 어머니라

32.다 이루었다

33.부활과 성령

34.예수의 부활

35.사랑과 사명

36.삶을 변화시킨 이름

37.역사의 소망/ 곧 예수

38.주 예수의 은혜

39.예수께 받은 사명

40.그리스도의 향기

41.그리스도의 편지

42.보배를 질그릇에

43.새로운 피조물

44.아름다운 예수의 사람들

45.예수의 흔적을 가지라

46.그리스도의 비밀

47.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48.그리스도안에 뿌리를 박으라

49.예수 앞에 우리는 무엇이냐?

50.목자의 마음

51.항상 주와 함께

52.그리스도인의 참 모습

53.그리스도인의 품성

54.그리스도인의 사명

55.더욱 아름다운 이름

56.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57.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58.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59.예수를 바라보자

60.영문밖으로 나아가자

61.세상을 이긴 자가 누구냐?

62.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63.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으라

64.어린양

65.예수 믿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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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대러라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1-25, 눅 2:1-7, 3:23-38)

힌두교의 본산인 인도에 젊은 선교사가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그 곳에서 생활하던 중에 힌두교 승려 한 사람을 알게 되어 가까이 지내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던 중 선교사가 개미굴을 건드려 본의 아니게 많은 개미를 밟아 죽였습니다. 이를 본 승려가 깜짝 놀라며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난 듯이 말했습니다. "아니, 이 일을 어쩌나. 어쩌다가 이렇게 많은 생명을 죽였소.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 가운데는 우리 조상이 있을지도 모르는데...혹시 우리 할아버지나 고모나 손자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 승려는 영혼 불멸과 윤회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선교사는 어쩔줄 몰라 하며 그 해결책을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죠? 모르고 저지른 실수인데.... 어떻게 해야 죽은 개미들한테 사과를 할 수 있을까요?" "......" 승려는 한참을 말없이 개미굴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음........,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이 죽은 다음에 개미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선교사는 어리벙벙하여 있다가 지혜로운 답변을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개미가 되어야 개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겠군요. 실로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로 오신 까닭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에 빠져 허덕이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직접 이야기하셔서 죄를 깨우쳐 주기 위해 사람이 되셨던 것이지요."

구약 성경의 첫 번 성경인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인류 역사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약 성경의 첫 번 성경인 마태복음 1장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보여 주며, 마태복음은 타락한 인류와 그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신음하는 만물을 재창조하기 위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타난 예수의 족보 이야기는 한 마디로 죄 많은 세상에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즉 예수의 족보를 살펴보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족보의 특성은 다섯 명의 여인이 끼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다말, 라합, 룻, 그리고 밧세바와 마리아 등입니다. 원래 유대인의 족보에는 여자들 이름이 오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여자는 법률상의 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하나의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물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여자는 단순히 그 여자의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 물건으로 그 주인의 원하는대로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매일 아침에 드리는 기도문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이방인으로나 노예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드리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 족보에 오른 5명의 여자 중 라합과 룻, 그리고 다말 등 3명은 이방인이었고, 밧세바와 마리아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게다가 마리아를 제외한 4명의 여인들은 혼인법상 불륜의 관계까지 저지른 타락한 여인들로 불명예스런 과거를 안고 있는 여인들이었습니다. <다말>은 원래 유다의 아들인 엘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이 죽자 아들을 낳기 위한 집념으로 시아비 유다까지 유혹해서 자식을 낳은 집요한 여인이었습니다.(창38:6, 대상 2:4) <라합>은 잘 알다시피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습니다.(수 2:1-7) 그리고 <룻>은 모압 여자인데 원래 모압 족속은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올 때 아내가 소금기둥되어 죽고 두 딸만 데리고 나왔는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그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우고 서로 교대하여 아버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큰 딸이 낳은 아들이 모압이고, 작은 딸이 낳은 아들이 벤아미로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 19:31-38) 그러므로 <룻>은 근친상간을 통해 퍼진 불륜의 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불륜의 씨인 룻은 남편을 잃자 시어미 나오미를 따라 유대 나라에 들어와 역시 자식을 낳기 위해 근친상간을 서슴지 않았던 여자였습니다. <밧세바>는 본래 충신 우리아의 아내로, 다윗이 비겁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우리아를 전쟁 일선에 내보내 파놓은 함정에 빠뜨려 죽이고 빼앗은 여자였습니다. 이들 네 여인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불륜을 저지른 수치스런 여인들이었습니다. 가히 이방 여자에, 그것도 명예스럽지 못한 타락과 불륜의 여인들이 들어 있는 세계(족보)에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은 예수는 과연 모든 인간의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죄 많은 이 땅에 태어나신 분이심을 말합니다. 이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나 여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 등 누구나 다 평등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는 인종간에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는 모든 인종을 뛰어넘어 남녀노소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유대인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십니다. 유대 족보에 들 수 없었던 여자들의 이름이 올라 있다는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서는 남녀의 차별이 없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다 소중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모두가 다 평등합니다.

어느 곳에 잘 지은 호화판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뭇 으리으리한 그 교회 앞에 남루한 품팔이가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아! 여긴 천당이야.'이렇게 생각한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그리곤 목사를 만나서 그 교회의 신도가 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아! 당신이 여기 신도가 되겠다고. 갸륵하군.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신에게 간청하시오. 석달 열흘 동안. 그리곤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시오. 응답이 있거들랑 재차 찾아오시오!" 그리고 나서 목사는 이 사내의 등을 떠밀어 내보내었습니다. 그 길로 만사 끝난 줄 안 목사 앞에 사내는 정확하게 석달 열흘 뒤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왜 왔소? 주님의 응답이 있었소?" 목사는 사뭇 퉁명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품팔이 사내는 능청스러웠습니다. "그럼요. 응답을 주셨소. 주님께선......" "뭐라고 하셨소?" "이 교회의 신도 되길 단념하라 하셨소." "그럼 그렇겠지! 한데 뭐 하러 왔소." "주님께서 당신께 전하란 말씀이 있어서요!" 사내는 입술에 침을 묻히고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그의 말의 요지는 주께서는 이 교회가 탐이 나서 여기 드시기를 바라 부디 받아 달라고 빌었으나 끝내 거절해서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는 거였습니다. 말을 마친 사내는 힘주어 마무리를 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꼭 당신께 전하라고 하셨소!" 이 이야기는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이라는 책에서 그릇된 기독교를 비판하는 일종의 욕설을 소개한 것인데 만약 이 이야기가 우리네 기독교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으며, 빈부의 차별이 없으며, 지위고하의 차별이 없는 세계입니다. 예수께서 타락과 불륜의 여인들로 더럽혀진 유대 족보 가운데 태어나신 것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그대로 취하여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신 겸손하신 분이심(빌 2:5-8)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말합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마 9:13)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는 성도와 죄인 사이에 장벽이 없습니다. 또한 있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여러분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팎에 있는 죄인들 모두를 다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의 족보에 온갖 종류의 죄인들이 다 올라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류의 역사가 죄악에 가득 찬 역사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죄인들의 혈통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것은 그만큼 죄인들 사랑하시고 죄인들과 함께 하시며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고자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모두에게 평등합니다. 십자가의 구원은 모두에게 평등합니다. 십자가 예수 앞에 나와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구원을 체험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나신 예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자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습니다. 성령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생명의 영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따라 살게 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입니다. 이같은 성령의 열매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게 하여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줍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그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이루게 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이 예수 믿는 여러분 가운데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게 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깨닫게 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분의 삶을 통해,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하시며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분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잘 보여 줍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인간의 모습과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고, 비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만듭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고양이와 쥐의 관계로 설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쥐가 고양이에게 붙잡힌 것은 힘 때문입니다. 그러나 붙잡히기 전에도 쥐는 고양이 앞에서 꼼짝 못합니다. 힘이 가해진 것은 아니지만 능력 권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능력인 성령을 소유한 자는 강합니다. 그것을 물리적으로 분석하여 설명하기 힘들지만 이 능력을 받으면 다니엘처럼 사자 굴속에 던져져도 불안과 공포에 떨지않고 태연하며, 요셉이나 베드로처럼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을 부르며, 다윗이나 엘리야처럼 피난 중인 굴속에서도 미래를 꿈을 꾸게 됩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뒤에서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시퍼런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 진퇴양난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앞에 놓인 홍해 가운데 고속도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사막 한가운데 반석에서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생수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스데반처럼 예수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예수의 마음으로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하며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처럼 삼킬듯한 풍랑 속에서도 평안히 잠들 수가 있습니다. 이같은 성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살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권능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날마다 성령으로 거듭나시며 성령으로 살아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며, 세상을 이기는 성령의 권능이 항상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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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 가지 예물

(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 2:1-12)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 사랑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성탄절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성탄절을 맞이한 여러분의 표정을 보니 사랑하는 가족이나 형제들로부터,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사랑의 선물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설사 사랑의 선물을 받지 못했다해도 서운해 할 것 전혀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선물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크고 가장 기쁜 선물이 되시는 예수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예수님은 평화의 선물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헤롯왕이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유대의 왕이 될 예수께 자신도 경배하겠으니 태어난 곳을 알려달라고 한 것은 사실 태어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아예 처음부터 죽여 없애겠다는 의도에서 한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평화의 왕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인류에게 평화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평화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를 영접하고 경배하는 곳에 임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사라져 가는 새벽에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곳에 어두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를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경배하며 그에게 사랑의 예물을 드리십시오.

먼 옛날, 어느 나라에 오래된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그 예배당에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이 있었는데, 너무 높은 탑에 달려 있어서 좀처럼 사람의 힘으로는 종을 쳐서 소리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그 종은 크리스마스날 밤, 아기 예수께 귀한 예물을 바치는 사람이 있을 때에 저절로 움직여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껏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해 크리스마스 저녁에도 사람들은 종소리를 듣고자 저마다 귀한 예물을 가지고 예배당에 모여들었습니다. 피터와 그의 동생도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자 예배당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눈이 쌓인 길을 걸어가자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길가에 누군가 쓰러져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피터가 얼른 뛰어가 보니 한 아주머니가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피터는 동생에게 예물로 바칠 은전 한 닢을 건네주면서 먼저 교회로 보냈습니다. 자기도 예배를 드리고 싶었지만,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이 아주머니는 이미 얼어죽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당에는 사람들로 꽉차 있었습니다. 피터의 동생은 예배가 끝날 때쯤 예배당에 들어섰습니다. 그때는 마침 예물을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마다 훌륭한 예물을 들고 나왔습니다. 부자는 금전을, 학자는 그가 쓴 책을, 농부는 잘 앵글은 곡식 단을 한아름 안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임금님이 나올 차례였습니다.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며 바라보는 가운데 임금님은 그의 왕관을 벗어 제단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종소리 듣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름답고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제단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제단 앞에는 아무도 몰래 은전 한 닢을 올려놓은 피터의 동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눈밭에 쓰러져 얼어죽어 가는 사람을 돌보기 위해 동생에게 들려 보내 탄생하신 예수께 드린 은전 한 닢이 예배당의 종소리를 울리게 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이웃들을 섬길 때 사랑의 종소리로 멀리 멀리 펴져 울려 나가는 것입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곧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 이 표적 중의 표적이 되는 예수 님의 탄생,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는 찬송을 받으실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성탄절에 여러분들은 예물로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에서처럼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한과 몰 약을 드리시겠습니까?

크리스마스와 함께 항상 연상되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 예물을 예수께 드린 동방박사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의 이름과 출신은 알 길이 전혀 없습니다. 이방인들인 이들이 어떻게 예수를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늘의 별을 보고 탄생하신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임을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신비에 싸여 있을 뿐입니다. 일찍부터 있던 동방의 전설에 따르면 박사들은 열둘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셋이라는 전통이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이들이 셋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온 예물이 셋이라는 것을 보면 그들이 세 명이었다는 판단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훗날 전설은 그들을 왕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후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의 이름은 카스파르, 멜키올 그리고 발타잘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멜키올은 나이 많은 사람으로 백색 머리에 긴 수염을 가졌고 황금을 선물로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카스파르는 젊고 수염이 없었고 얼굴이 붉으며 유향을 선물로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발타잘은 새로이 기른 수염에 거므스레한 얼굴이었고 몰약을 선물로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아주 일찍부터 사람들은 이 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이 아주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특성과 그의 업적에 아주 특별히 잘 어울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 및 고귀한 사람을 만나거나 그에게 충성을 다짐할 때 특별한 예물을 바치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박사들이 바친 예물은 그보다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께 드린 첫번째 예물은 황금이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백발이 성성하며 수염이 하얀 멜키온이 예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황금은 동서 고금을 통해 최고 귀하며 불변하는 성질의 금속으로서 흔히 부(富)를 상징하며 왕께 드리는 예물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황금을 예물로 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을 세상 만물을 소유하실 정도로 부한 자요, 절대 권위를 가지신 왕으로서 인정하는 표시인 것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황금 반지를 예물로 주고받는 것은 서로의 사랑을 변치 말자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황금 예물은 하나님께 대한 변치 않는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황금 예물은 예수를 만왕의 왕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는 힘으로써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통치하십니다. 예수는 모든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시되 왕좌로써가 아니라 십자가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의 자리입니다. 예수는 곧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류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탄생하신 예수께 황금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만왕의 왕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왕에게 바치는 가장 좋은 선물은 무엇보다 순종과 충성입니다. 탄생하신 예수께 황금을 드리십시오. 불변하는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께 순종할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예물로 받으실 것입니다.

두 번째 예물은 홍안(紅顔)의 청년 카스파르가 드렸다고 알려지는 유향입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에서 채취한 향기로운 송진으로서 성전 제사나 헌물로 자주 사용되는 것입니다. 향기가 좋은 유향이 사용되는 곳은 성전 예배와 성전 희생제사였습니다. 예수께 이 유향을 드렸다는 것은 예수의 제사장(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임무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나타내는 라틴어 폰티펙스(pintifex)는 '다리를 세우는 자(bridge-builder)라는 뜻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량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를 성경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온 인류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십자가의 희생으로 다리를 놓으신 일이야말로 가장 향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은 상한 심령으로 통회 자복하는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참으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선물은 여러분의 유향, 즉 상한 심령, 통회 자복하는 회개의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검은 얼굴에 수염이 많았던 중년의 발타잘이 드린 예물은 몰약(沒藥)입니다. 몰약은 죽은 자를 위한 선물입니다. 몰약은 시체를 염(殮)하거나 시체가 썩지 않게 하기 위해 바르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매우 귀한 자의 시체에만 바를 정도로 고가품이었습니다. 탄생하신 예수께 이 몰약을 바친 것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예비하는 예물이었습니다. 예수는 실로 인류를 위해 희생의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홀만 훈트(Holman Hunt)는 예수에 대한 유명한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나사렛 목수집 문에 서 있는 그림입니다. 그는 아직 소년입니다. 기울어지는 저녁 햇빛이 문에 비치고 소년 예수는 벤치 위에서 갑갑했던 사지를 펴기 위해 문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문간에 서서 팔을 폈습니다. 그러자 그의 뒤편 벽에는 기울어 가는 석양이 비치어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그림자입니다. 배경에는 마리아가 서 있는데 그는 그림자를 보면서 다가올 비극의 공포를 그 눈에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사람을 위해 살다가 마침내 사람을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자신의 생명과 자기의 죽음을 바치려 오셨습니다. 탄생하신 예수께 몰약을 드리십시오.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고자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매우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아낌없이 예수의 몸에 부어 드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장사(葬事)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6-13)

예수를 위해, 곧 복음을 위해 여러분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몸(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쏟아 부으십시오. 그리고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여러분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의 장사(葬事)를 준비한다는 것은 복음 전파를 위해 옥합을 깨뜨린다는 의미입니다. 복음 전파와 관련이 없는 기념비들은 무의미한 것들입니다. 영원히 기념될 만한 예물, 몰약을 탄생하신 예수께 바치십시오. 결국 동방 박사들은 가장 위대하신 분께 가장 고귀한 예물들을 바치신 것입니다.

큰 기쁨의 계절, 성탄절에 여러분들은 예수께 예물로 무엇을 준비하여 오셨습니까? 황금을 바치십시오. 그리고 유한과 몰약을 바치십시오. 순종과 충성, 사랑과 희생, 그리고 상한 마음, 통회 자복하는 회개의 마음을 바치십시오. 또한 복음을 위해 옥합을 아낌없이 바치십시오.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되는 동방 박사들과 같이 가장 적합하고 가장 귀한 예물을 바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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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예수는 누구인가?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자라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요 1:18-28, 참조 : 마3:1-12, 막 1:7-8, 눅 3:15-17)

예수는 누구입니까? 예수를 만났던 저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아 : "나는 그 분의 곁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눅10:39)

바리새인 : "그는 더러운 여자의 접근을 허락한 인간이오."(눅7:39)

바디매오 : "그 분은 나를 보게 했습니다. 새 날을 주셨습니다."(막10:51)

강도 : "그 분은 나의 최악의 순간에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눅23:43)

가야바(대제사장) : "우리의 전통적인 종교를 파괴하는 자이다."(마26:65)

빌라도 : "정말 모를 사람이오. 난 개입하고 싶지 않소."(마27:24)

백부장 : "틀림없이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오."(마27:54)

거라사의 광인 : "그 분은 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막5:3)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5,16) 이에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여러분도 베드로같은 신앙고백으로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 앞에 나온 나다나엘은 한 번도 자기를 본 적도 없는 예수께서 자신의 속 사람의 됨됨이를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가리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 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자기 민족의 훌륭한 영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정치적인 '메시야'(구세주)로 예수를 파악한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 산에서 한 어린아이의 점심 도시락 하나로(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군중 5천명을 다 먹이고 남은 조각이 무려 열 두 바구니나 되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요6:1-15) 배고픈 유대인들은 경제적인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나라 안팎으로 경제가 어렵고 세계 정치가 혼란에 빠졌을 때 카리스마적인 구세주(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19세기의 프랑스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나폴레옹 전설'도 과거의 초상 속에서 당대의 메시아를 찾으려 했던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공화정의 비능률에 진절머리를 내며 나폴레옹1세 시대를 그리워하던 프랑스 국민들은 마침내 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을 황제로 떠받들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재림(再臨)'으로 기대했던 나폴레옹 3세의 등장은 프랑스의 영광을 되살리기는커녕 오히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 수도 파리가 함락되는 치욕을 안겨 주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에 지친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에게 대권을 안겨 준 것 역시 시대 착오적인 '메시야 콤플렉스'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의 어느 정부, 어느 나라이든 궁극적인 정부나 나라가 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의 제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 할지라도 궁극적인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제아무리 훌륭한 왕이었다 해도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될 수 없었습니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의 정부가 아니라면 그것은 영원할 수 없으며 당대 백성들의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이 세상)와 오는 시대(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메시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외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궁극적인 해결의 참된 "길과 진리"가 없습니다(요14:6). 예수께서 인류와 세계의 메시아가 되시는 이유는 그 분이 참된 인간이시며, 동시에 참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1:1,14,). 예수는 인류의 역사 이전에 이미 계신 분으로 인류의 역사 시작(알파)과 마지막(오메가)을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예수의 메시아 됨은 유대인이 생각했던 그러한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권능을 가진 메시아임이 여러 가지 표적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구약 성서가 약속한 모든 것을 성취하면서 전 인류에게 참 진리와 생명을 부여해 주고 보증해 주는 분으로서의 메시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전 인류를 포함한, 이 세상의 권세가 침범할 수 없는 영적 왕국을 건설하여 거기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가 참 하나님 되심과 참 인간 되심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1:1-3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고, 요한 복음1:1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바로 예수께서 창조 이전에 계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다는 것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흔히 <그리스도의 선재>(先在,The pre-existence of Christ)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해서는 성경 여기 저기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예수가 아브라함보다 나중에 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8:58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 자신의 기도문에서도 이를 밝히셨습니다. 요한 복음 17:5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2:6-8에서 그리스도의 선재를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골로새서 1:15-17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는 분명히 역사 이전에 계신 분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안으로 오신, 즉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바로 예수가 참 하나님 됨,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뜻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만이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인성(人性, 참 사람되심)과 신성(神性, 참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단(異端)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인간성을 무시하고 신성만을 강조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관계가 없는 존재가 될 것이며, 그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寶血)은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에 신성(神性)을 무시하고 인간성만을 강조하면 그의 생애와 부활은 전혀 우리와 무관한 것이 되어 인간에게 궁극적인 생명과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었습니다."(칼케돈 신조) 그러므로 예수가 누구인가를 바로 인식하는 것이 역사를 바로 인식하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되며,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바로 깨닫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미 역사 이전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참 인간 되심'(人性)과 '참 하나님 되심'(神性)은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역사적 소명의 내용이며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 골로새 교회의 상황을 에바브라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대부분은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그 열매를 맺게 된 것을 감사하고 칭찬을 했습니다. 또한 질서있고 견고한 신앙에 대하여 듣고 기뻐했습니다(골1:3-8,2:1). 바울은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일어난 이단적 사상에 대하여 교회가 상처받을 것을 염려하는 가운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으로 보존되기를 원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골로새서를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치료보다 예방이 좋다는 생각에 이단의 악한 사상이 만연하고 번성하는 기회를 가지기 전에 유비무환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와 주변 교회에 침투해 교회를 혼란시키고 무너지게 하려했던 이단 사상들은 대충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적 경향의 유대인들>, <이교도의 철학>, <미토라 신자>, <가현론(假現論)>, <엣세네 금욕주의>, <에비온 주의>, <영지주의파> 등 각종 이설(異說)들이 난무했습니다. 그 시대는 한 마디로 사상적 혼합주의(Syncretism) 시대였습니다. 헬라의 철학과 우상숭배, 동방의 신비주의, 성지 동편(聖地 東便)에 번영했던 금욕주의, 기타 미신적인 마술 행위에다 유대인의 율법주의 등이 뒤섞여 사상적인 일대 혼합주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교회가 사상적, 영적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골로새서입니다. 그 우월성의 첫째는 그리스도의 전적 충족성(全的 充足性)입니다. 골로새서 1:15,19,등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 안에 모든 것이 충만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특히 골로새서 2:2은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배가 감추어져 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골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골로새서 2:9은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과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지금도 잔재하고 있지만 고대 세계를 지배한 사상은 점성술이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이 점성술에 따른 철두철미한 숙명론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숙명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데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그 이상의 권세나 지식의 원조가 더 필요하다고 가르침으로 교회를 혼란시키고자 했던 것이 당시 각종 이단 사설들이었습니다. 이들 이단자들은 복음의 평이함을 들어 좀 더 치밀하고 깊이가 있는 지식(gnosis)을 더 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만으로 인류의 영육간의 모든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시기에 넉넉하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상이나 이론보다 우월하신 것은 예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6,17)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의 셋째는 그 분이 혈과 육을 가진 참된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인류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골1:22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참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참 인간이 되심을 골로새서 2:9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만큼 진실로 그리고 참으로 인간의 혈과 육을 가진 분이십니다.

이렇게 인류의 진정한 메시아가 되심에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되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부정하고 교회를 혼란시키고 붕괴시키려했던 당대의 대표적인 사상이 영지 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였습니다. 영지주의를 간단히 말하면 영은 선하고 물질(육체)은 악하다고 보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선하신 분인데 악한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오실 수 없다며 예수의 인간되심, 즉 인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이원론을 가지고 예수에게서 인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예수를 인류의 구주로 하는 것을 전연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의 육과 혈을 가진 몸을 강조하고 예수가 자기 몸을 통하여 인류를 구했다고 주장하는 것(골1:20-23)은 바로 이같은 영지주의 사상의 잘못된 것을 깨우쳐 배격하고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말대로 만일 물질이 악이라면 우리의 육체도 악이 됩니다. 육체가 악이라면 인간은 육체로 아무 짓을 해도 상관이 없게 됩니다. 영만이 중요하고 육체는 조금도 중요치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차피 구원받지 못할 육체를 가지고 별 짓을 다해도 무관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소위 윤리 도덕 폐기론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 영지주의 사상은 기독교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순결과 정절에 대한 관심을 버리게 하고 육체적 신체적인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3:5-8에서 이렇게 경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 3:5-8)

영지주의는 인간의 구성요소 중 육적 부분은 부정하고 영에 해당하는 부분인 엘리트(Elite)만을 인정하며 그를 독자적인 인간의 본체로 인정해 줍니다. 이들 사상은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영적인 인간은 지식(gnosis)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상 우리가 살펴 본 바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은 영지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기독교를 철학및 신지학(神知學)으로 변화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즉, 단지 하나의 종교 사상이나 철학으로 전락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성공했다면 기독교 신앙은 파괴되었을 것이고 기독교를 멸망시키고 세계에 있는 전 교회의 신앙에 치명적인 손해를 주었을 것입니다. 옛날 희랍 로마 시대는 영웅 숭배 시대로서 훌륭한 지도자란 절반쯤은 사람이고, 절반쯤은 신에 가까운 특수성을 지닌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이며 완벽한 지도자는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뿐이신 것입니다.

예수는 과연 누구입니까? 여러분과 세상의 구세주(그리스도)이십니다. 구세주로 참 인간이 되셔서 세상오신 예수를 영접할 때, 인간은 존재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삶의 목적을 바로 깨달아 창조적이고 영광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참 하나님 되심을 믿고 고백할 때 인간은 그 생명의 존엄성과 영원함, 그리고 역사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바로 인식하여 역사 속에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하나님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여러분에게는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예수가 여러분의 영육에 아울러 구세주(메시야, 그리스도)되심을 믿으시고,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영원한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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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람, 경제, 그리고 예수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 (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마 8:28-34)

영국의 서평 잡지 <로고스>가 금세기 100년(1900 - 2000)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들을 선정 발표했습니다. 선정 기준은 "인류의 휴머니즘을 고양시키고 세계사의 변화에 강한 영향을 끼친 책"이었습니다. 여기에 선정된 책들은 <20세기를 형성시킨 책 100권>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이 중에는 1994년 남아공 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쓴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을 비롯하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이 있는데 사상 서적으로 선정된 책은 자본주의를 기독교적 윤리관으로 해석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즘(기독교)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서적 경제윤리가 사람을 부유하게 했다. 18세기에 감리교를 창설한 웨슬레는 교인들에게 돈을 많이 벌라는 권고를 하거나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단지 정직하게 상도(商道)를 성서적 윤리 행위에 따라 지킬 것을 각성시키는 설교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말년의 설교는 대부분이 부자들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충일했던 바, 그 이유는 그의 교인들이 정직하게 상도덕을 지키면서 사업을 한 결과로 모두 부유하게 됐었기 때문이다." 요한 웨슬레가 교인들에게 강조한 것은 돈을 열심히 잘 벌어라, 그리고 잘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잘 쓰라는 것은 자기 좋은대로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남김없이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부자가 되기보다는 하늘나라에 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부자를 두고 자본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본가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돈을 열심히, 정직하게 벌고 그것을 정당한 곳에 재투자할 뿐 아니라 유익한 사회복지를 위해 바칠 수 있는 사업가를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나라의 소위 재벌들은 엄격히 말해 자본가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정직하게 벌었다거나 정당한 곳에 재투자해서 자본가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본주의를 받드는 정신은 탐욕이 아니라 금욕주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자본가에게 요구되는 금욕주의는 고행을 통한 단순한 금욕생활이 아니라 사업가가 가지는 일종의 소명의식으로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키기에 앞서 자기자신에게는 인색하면서도 공익을 위해서는 관대한 마음가짐 곧 사업을 공익을 위한 사명으로 여기고 헌신하는 정신을 말합니다. 막스 베버는 그러한 자본가의 소명의식의 기초를 기독교 신앙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이를 프로테스탄트의 자본주의 정신, 또는 직업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직업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소명을 위한 헌신의 방편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의 자본주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는 비윤리적인 상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기업인이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일시 위탁받은 청지기라는 관리정신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돈을 열심히 벌고 또 공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는 마음가짐을 지닐 때 참된 경제 성장을 이룰 있는 것입니다. 극기심을 가지고 자기의 욕심을 억제하면서 항시 많은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자본가의 정신에는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가 깊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을 자기의 안일과 쾌락을 위해서 쓰지 않고 금욕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본가는 자신의 삶을 검소하게 영위하고 사회에서 불쌍하게 버림받은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데 온 힘을 다했습니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경제사상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극기와 봉사의 양면성을 지닌 생활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근대경제체제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자본주의 정신이 오늘날 근대 경제의 발전을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앞으로 인류의 미래 사회가 어떠한 경제제도나 사상을 만들어 낸다해도 성서적 세계관이 그 경제윤리를 지배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될 것입니다. 제도보다는 그것을 받드는 정신적 초석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열심히 벌어서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베푸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정신을 예수의 삶과 예수의 말씀에 두고, 사람을 경제의 도구로 삼지않고 자본주의 목적을 삼아 경제활동을 전개해나아갈 때 건전한 사회, 건강한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건전한 사회>에서 현대인은 우주의 중심위치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였기 때문에 내적으로 삶의 싫증을 느끼는 불안과 불만 속에 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돈버는 방법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고양이 목장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한 마리에서 시작합니다. 고양이 한 마리는 1년에 12 마리의 새끼를 낳습니다. 그 많은 새끼들이 얼른 커져서 또 열두 마리씩 해마다 늘려 줍니다. 5년 뒤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통의 수학 실력으로는 계산이 안 되지만 다행히 야심만만한 한 청년이 컴퓨터로 계산한 바 약 249,000마리에서 날마다 5천 마리의 고양이 가죽을 벗길 수 있다고 합니다. 가죽 한 장을 1000원으로 계산한다고 해도 연간 18억 2천 5백만원의 수입이 됩니다. 그럼 이 많은 고양이를 무엇을 먹여 사육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무척 간단합니다. 고양이 목장 옆에 쥐를 사육하는 것입니다. 쥐의 번식률은 무려 고양이의 4배나 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쥐 네 마리를 한 마리의 고양이에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먹이는 남아 돌 것입니다. 그럼 이 쥐들에게는 무엇을 먹이느냐 하는 문제가 나올 것입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것은 공짜로 해결됩니다. 가죽 벗긴 고양이의 내장만으로도 쥐의 먹이는 남아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고양이에게는 쥐를 주고 쥐에게는 고양이를 주어 그 과정에서 남는 이윤은 주인이 독차지하는 경영 방법입니다. 이것이 역대 독재자들과 그 주변 무리들이 권력과 돈을 뽑아 낸 방법이었습니다. 불쌍한 것은 가죽이 벗겨진 고양이들과 먹이가 된 쥐들입니다. 이러한 방법을 쓰고 있는 무리들이 한국의 재벌들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고양이 내장으로 쥐를 먹이고 그 쥐를 잡아 고양이 먹이로 삼아 결국 돈 버는 것은 재벌들이나 재벌들과 결탁한 권력 계층이고 먹고 먹히어 결국 가죽이 벗겨지는 것은 힘없는 국민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되거나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이 나라는 <동물의 왕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재벌 총수들이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로, 그들이 거느린 회사가 많다는 이유로 그래서 불법이 드러났다고 구속하면 나라 경제가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면, 결국 피차 멸망당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권력을 강탈하여 긁어모은 돈 한 푼 회수하지 못할 정도로 뒤가 구린 정부라면 강도에게 순경복을 입혀 놓고 민중 때려잡는 몽둥이 들려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강도짓해서라도 땅 사고 집 사서 잘 살면 되고 그것이 합리화되는 국가 사회라고 한다면 이미 그 나라는 강도의 소굴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이미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도 전과자들과 미결수들이 정치와 경제계에 판치고 있습니다. 도입한 경제 이론은 기독교 정신에 근거한 서양 자본주의인데 껍데기일뿐 그 자본주의의 참된 사상과 정신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희한한 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 앞에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만 이용, 착취당하고 짓밟히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그 마을 변두리 공동묘지에서 아주 사납게 귀신들린 사람 둘을 만났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흉악하게 귀신들린 사람들 때문에 아무도 그 길을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게 된 귀신들린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이 말은 사실상 귀신들린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들 속에 들어간 귀신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두려워하는 말입니다. 귀신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귀신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그들을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넣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귀신들인지라 아직 세상 종말이 멀었는데 왜 벌써 오셔서 자기들을 괴롭게 하느냐며 소리를 질러 댄 것입니다. 이 귀신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예수로 인하여 그 마을에 경제적인 큰 타격을 입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보였습니다.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했습니다. "만일 우리를 이 마을, 이 사람들에게서 쫓아내시려거든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예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 더러운 귀신들아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게로 가라" 그러자 귀신들이 그 사람들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귀신들린 온 돼지 떼들이 미친 듯이 비탈길을 내리달아 갈릴리 호수에 빠져 몰사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놀란 것은 돼지 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곧장 마을에 들어가 이 모든 사실들을 알렸을 때 순식간에 경제적 큰 타격을 입은 온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나왔습니다. 공동묘지를 배회하며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귀신들린 사람들이 멀쩡하게 된 것은 당사자나 당사자 가족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이었지만 그 마을이 입게된 경제적 손실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권보다는 경제 논리가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예수 영접하기를 거절하고 자기 마을에서 떠나 줄 것을 간청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이웃들이 귀신들린데서 해방되어 이제 자기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보다는 단지 돼지 떼를 잃었다는 경제적 손실 때문에 예수를 배격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좀더 많은 물질이나 좀더 나은 세상 지위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진리를 유보하거나 거절하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귀신들린 두 사람이 사람 사는 사회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을 함께 기뻐할 줄 모르고 오직 돼지 떼가 죽었다는 것만을 문제삼는 사회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보다는 경제 논리가 앞서는 시대를 말합니다. 예수보다는 경제적 실리가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소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며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것임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섬머셋 모음의 대표작으로 <달과 6펜스>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 고갱을 모델로 한 이야기입니다. 달과 6펜스란 제목은 영국인에게 무엇인가를 얼른 느끼게 하는 대조되는 단어입니다. 6펜스란 영국 은화 중 최저액입니다. 따라서 달은 고상한 것을 대표하고 6펜스는 저속한 것의 대명사로 사용된 것입니다. 달과 6펜스는 둘 다 은색으로 빛나는 둥근 모양이라는 점에서 더 재미있는 대조가 됩니다. 작가는 작품의 주인공이 순수하게 추구하는 예술을 달로 표현했고 명예나 돈을 인생의 최고의 것으로 삼는 세속적 인간상을 6펜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달의 사람이 되느냐 6펜스짜리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선택은 누구든지 직면하는 사항입니다. 달을 택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택한 마을은 예술과 문화가 꽃을 피우는 진정한 사람 사는 마을이 되겠으나, 6펜스 동전 한 닢을 선택하듯, 예수를 거절한 마을은 돼지떼로 가득하여 잠시 경제가 넉넉할지 모르나 돼지에 매여 사는 마을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다라 지방의 비극은 경제적 손실을 이유로 예수를 거절한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마을에서 추방하여 잠시 경제적으로 호전되었을지 몰라도 그들은 결국 <6펜스>짜리 마을, <6펜스>짜리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경제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경제의 바탕에는 예수가 있어야 진정한 경제 발전과 건강한 경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제는 결코 <분홍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유명한 안데르센의 동화에 <분홍신>이 있습니다. 이 신발은 마술사가 만든 분홍신이었습니다. 이 신을 한 번 신으면 춤을 계속 추어야만 합니다. 너무나 예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가 이 신을 신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끌려 한 소녀가 분홍신을 사서 신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부터 소녀는 추기 싫은 춤을 억지로 추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이상의 행복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갈채로 받고 많은 총각들의 동경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피로가 왔습니다. 즐거운 춤은 고통의 춤이 되었습니다. 이제 누구를 위해 춤을 추는지 자기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추어야 하니까 추는 그 춤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었습니다. 번화한 도시를 돌고 한적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한때는 고향 마을을 춤을 추며 지날 때 정든 옛집에서 딸을 부르는 애절한 엄마의 음성을 들었지만 춤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에 소녀는 자기 집 앞을 그냥 지나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묘지에서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죽었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보고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은 모두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경제를 구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이 어찌 귀신들려 공동묘지를 배회하며 소외된 가운데 고통스럽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가족 중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냥 버려두겠습니까? 돼지떼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수 많은 돼지떼보다 귀한 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경제가 하나님께서 입히시는 들에 핀 백합화 하나만 같지 못함을 깨닫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 하나에게도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우선하고 사람을 구하는 이 나라의 경제가 이루어지기 위해 진실로 예수를 영접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열심히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은과 금(경제)을 주는 곳이 아니며, 또한 은과 금이 쌓여 있어서도 안되며, 오직 예수 이름을 주는 곳이며 그래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사람과 경제를 구하는 보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에 중심이 되어 이웃을 구하고 나라 경제를 바로 세워 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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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9-13, 참조 : 막 2:13-17, 눅 5:27-32)

예수 당시 세리는 권력에 빌붙어서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강제 부과하거나 부당하게 착취하는 일에 앞장서고, 부자들의 세금에 대해서는 뇌물을 받고 탈세를 조장하거나 감면해주는 등 악행을 서슴지 않음으로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악질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누구에게서나 멸시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마태 역시 세리로서 누구나 꺼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러한 세리 마태를 향해 "나를 좇으라"고 명령하시자 그는 곧 일어나 예수를 좇았습니다. 이는 좀 욕은 먹더라도 돈벌이가 괜찮은 자리인데 그 자리를 박차버리고, 다시 말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악하고 추하고 더러웠던 자신을 불러 그 소문에 듣던 예수의 영광스런 제자로 삼으신 것에 너무 감격스러워 예수를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마침 바리새인들이 이를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어찌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기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의인>은 영적, 윤리적으로 완전무결하다는 의미에서 의인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율법주의자 같은 교만한 자들을 나타냅니다. 한번은 <의인>과 <죄인>이 바다 여행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배는 곧 가라앉을 듯이 보였습니다. 그때 모든 선원과 승객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인>은 "오, 주여! 우리를 구해주십시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의인>은 "쉬, 쉬"라고 경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을 모르시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끝장이다!" 스스로 의인인 체하는 교만한 <의인>을 부르러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 때문에 모두가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옳다 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누가복음 16:15)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사람은 사람 중에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은 율법을 다 지키었다고 하면서, 일주일에 금식을 두 번씩이나 했다고 하면서,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했다고 하면서 스스로 의롭다며 자신을 세리와 비교하여 자신을 높이는 바리새인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의 연약하고 부족하며 허물과 죄 많은 모습을 바로 보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져 가슴을 쳤던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8:9-17)

죄는 한 마디로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며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으로 가장한 사탄이 와서, "선악과를 먹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네가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며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리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에 넘어가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피조물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높아진다는 말에 넘어가 그만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스스로를 높이려는 교만이 바로 죄입니다. 교만이 바로 죄의 뿌리입니다.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은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은 남과의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며 무엇이 죄인가를 바로 깨닫고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바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의 마음을 품어 참된 의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다시 말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죄인의 모습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섬기는 하나님의 겸손이며 예수 십자가는 그 겸손의 완성이요 극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는데 반해 인간은 십자가에 예수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자기를 높이려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섬기는데 반해 인간은 예수를 경쟁 대상으로 삼아 그를 이용하기도 하며 지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고 그 자리에 자신을 세우려 합니다. 이제부터는 세계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합니다.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자기 생각이 옳고, 자기 판단이 옳고, 자기 행동만이 옳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은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과 인간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오직 인간을 섬기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는 오직 한 분 의로우신 분이시지만 이 세상에서 죄인처럼 사셨습니다. 실로 의인이 죄인처럼 사신 것을 보여준 것이 바로 십자가 예수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하는 바리새인은 정작 자신이 죄인이면서 의인인체하며 의인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뿌리 깊고, 얼마나 큰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받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눈을 들어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며 스스로 그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호세아도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주일날 예배드리려 교회에 가는데 길가에 굶주려 허덕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불쌍해서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정성껏 대접하느라 예배시간을 어겼다면 안식일을 규례를 범한 죄입니까? 그래서 그 사람의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그 굶주린 사람을 그냥 모른 채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교회에 와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예배드렸다면 그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겠습니까? 이에 대한 확실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12:1-8)

구약시대 다윗과 그 무리들이 너무 배가 고파 성전 안에 들어가면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들어가 제사떡 진설병을 단숨에 먹어치웠습니다. 이는 분명히 안식일 율법을 범한 것이지만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배가 고파 길가에 밀 이삭 좀 뜯어먹었기로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바로 인애를 원하신다는 확실한 말씀이십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며 "따로 서서" 스스로 깨끗한 체하며 회개할 줄 모르는 바리새인의 예배를 하나님은 원하지 않습니다. "성전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며 회개할 줄 아는 죄인의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리새인과 같이 스스로 의롭다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할 줄 아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두 명의 율법 연구생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율법사에게 와서 울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을 했느냐?" "저희는 여인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율법사는 "주여, 지켜주소서! 너희들은 참으로 끔직한 죄를 저질렀구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회개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너희에게 신발 속에다가 콩을 넣고 일주일 동안 다니도록 명령한다.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율법 연구생은 가서 율법사가 말 한대로 했습니다. 며칠 뒤 그 둘이 길에서 만났습니다. 한 학생은 고통스럽게 절룩거리며 바싹 야윈 모습이었지만, 다른 학생은 태연한 표정으로 얼굴에 미소까지 짓고 있었습니다. 절룩거리는 친구가 그를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너는 이런 식으로 회개해도 되느냐? 나는 네가 율법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너는 신발에 콩을 넣지 않았지?" 다른 학생은 말했습니다. "물론 넣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먼저 삶은 다음에 넣었을 따름이다."

몸과 마음, 영혼이 병들었다고 생각되십니까? 예수 앞에 나와 의롭다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예배를 배우기 전에 먼저 긍휼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도둑질, 강도 짓, 살인한 것 전혀 없고, 뇌물 먹은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주일 날 예배드리는 것 빠진 것 전혀 없고, 십일조, 감사헌금 꼬박꼬박 바쳤고, 적어도 일년에 성경 한 번 정도는 꼭 읽었고, 금식도 며칠씩 했다고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라고 자처하십니까? 여러분 눈에는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갇힌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눈에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깨끗하고 세상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다 더럽게 보이십니까? 의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는데도 스스로 의인인체 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하나님 행세하는 교만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하나님 행세하지 마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죄인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앞에 무릎을 꿇으시는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높이시며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으며 배우시므로 하나님 앞에 의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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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예수를 영접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1-42, 참조 : 막 3:13-19, 눅 6:12-16,51-53,14:26,27)

다가오는 21세기엔 새롭게 정치와 종교분쟁이 심화될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종교전문가 리처드 치미노와 돈 래틴은 최근 펴낸 책 「믿음 끌어모으기(Shopping for faith)-새 천년 미국인의 신앙」에서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교회와 국가가 심각한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습니다. 21세기형 정치와 종교 분쟁의 가장 큰 원인으로 국가의 사회복지정책 후퇴가 꼽히고 있습니다.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복지재정이 줄어들면서 교회는 소외계층을 끌어들여 사회복지의 주체로 나서려 할 것이고 국가는 교세가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 하게 돼 마찰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미국 교계는 교회가 사회봉사에 효과적인 만큼 국가를 대신해 사회복지의 주체가 되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정부나 비종교 사회단체들은 신앙과 무관해야 할 사회복지를 종교단체가 맡는 것은 정·교(政敎) 분리원칙에 어긋난다고 맞섭니다. 지방정부는 세수(稅收)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교회의 신설에 거부감을 숨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세확장을 위해 방언이나 기적 등 비정통적인 방식이 늘어나면서 교회 규제론 마저 고개 들고 있다고 이 책은 지적합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소외계층이 더 두꺼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교분쟁에 대해 염려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목적은 사회복지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영접하게 하여 금세와 내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죄악된 사회를 변화시켜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받을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는 세상에 오셨고, 세상에 오신 예수는 인류구원을 위해 비상하거나 출중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그들이 과거 경력이 얼마나 뛰어나고 화려한가, 지금 얼마나 귀중한 일을 하고 있는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장차 무엇을 해나갈 수 있는가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선택된 제자들을 당대 유명인사들과 비교해보면 극히 보잘것없는 겨자씨 같은 하찮은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그 제자들 가운데 흔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학자 하나 없었고, 재벌은커녕 중소기업체 사장 하나 없었고, 정치가는 물론 종교지도자이었던 제사장 하나 없었습니다. 혈통으로보나 가문으로 보나 학벌로 보나 지연으로 보나 모두가 형편없는 출신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주목할 제자는 세리 마태입니다. 세리는 당시 백성들을 등쳐먹고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열심당원 시몬도 있었습니다. 당시 열심당은 나라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폭력도 서슴지 않는 가장 극단적 국수주의자들로 오직 하나님만을 자신들의 왕으로 섬기며 세상의 어떤 왕도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국의 자유와 해방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누구라도 살해하는 극히 위험한 애국자(?)들이었습니다. 만약 바로 이러한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이 마태를 예수를 중심으로 모인 제자공동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열심당원 시몬은 세리 마태를 전혀 죄책감 없이 단숨에 살해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매국노와 애국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용해시켜 하나되게 하여 변화와 개혁의 주체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참된 종교란 사람을 구분하여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해시켜 하나되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극히 보잘것없는 하찮은 존재들이었지만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하나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참된 개혁과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매국노 세리 마태나 삭개오는 그들이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고 자신의 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놓음으로 과거 수치스럽고 어두웠던 과거를 만인 앞에서 깨끗이 청산하고 변화와 개혁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 바로 구원공동체인 교회입니다.

역사학자 신용하 교수는 우리 나라 부정부패의 가장 큰 원인이 매국노 친일파들에 대한 응당한 처벌이 없었다는 데 있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컨대 친일 매국노의 원흉 이완용이 매국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받은 소위 은사금으로 조성한 토지재산을 그 증손이 찾겠다고 소송을 제기하여 대한민국 법정이 여러 건 승소판결을 내렸습니다.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 후에 실행할 요강으로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에는 "친일파 부일파 민족반역자의 재산은 국가에서 몰수한다."고 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면 당연히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매국의 장물인 이완용 명의 토지를 국가가 환수해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바로 잡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까지도 나라의 주요 직위를 친일파들과 그 일당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주석은 백범 김구선생입니다. 일제가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놓고 수많은 군대와 첩보대를 동원해서 백범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했습니다. 해방 후 조국 땅에서 백주에 백범선생을 암살해놓고 암살범 안두희를 특진시키고 백주에 활보하게 특혜를 베풀고서 오히려 백범 암살 진상을 밝히는 것조차 박해했습니다. 백범을 암살한 음모의 책임자 김지웅은 일본 관동군 정보장교였고, 안두희는 그의 일본군 정보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임시정부 주석을 시해당하고도 처벌은커녕 그 진상조차 밝히지 못했던 것이 과거 초대정부였으며, 지금까지의 정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건국 직후 제헌의회는 48년 9월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여 나라의 기강을 반듯하게 세우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친일파들이 이승만 정권의 일부세력과 결탁하여 반민특위를 해체시킴으로써 민족 반역자를 단 한 사람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부정부패와 부조리의 근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독립지사와 그 가족들은 박해와 가난에 시달리고 친일파와 그 일당 자손들은 일제하에서 일제의 관리, 군수, 서장, 면서기 한 것까지 자랑하면서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국민의 정부가 부정부패를 망국병(亡國病)으로 보고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사정(査正)의 칼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먼저 친일잔재와 민족반역의 잔재에 사정의 칼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토색하거나 수탈한 재산의 4배를 갚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간 권력과 결탁하여 국민을 우롱하며 국가와 국민의 재산을 수탈한 이 나라의 권력층과 재벌들로 하여금 4배나 갚도록 한다면 단숨에 경제가 회복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늘 본문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멸망케 하는 죄악에 대해 사정의 칼을 던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중병에 걸린 환자가 있는데 그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진수성찬에 금은보화, 아니면 권세있는 자리나 지식의 최고봉인 박사학위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환부를 정확히 진단하여 바른 시술로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가 필요하겠습니까? 환자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사람을 죽게 하는 환부를 치료하던가 아니면 절단해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검을 던지러 왔노라>도 마찬가지로 세상을 죽이기 위한 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죄로 병든 세상을 수술하여 살리기 위해 <검을 던지러 왔노라>는 것입니다. <검을 던져야> 할 곳이 어디 이 사회뿐이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검을 던져야>할 것입니다. 어미가 모르는 아비의 죄, 아비가 모르는 어미의 죄, 어미가 모르는 딸의 죄, 딸이 모르는 어미의 죄, 며느리가 모르는 시어미의 죄, 시어미가 모르는 며느리의 죄, 이 죄악들이 예수께서 던지시는 검으로 수술되지 않으면 몽땅 다 죽습니다. 서로 원수가 되기 전에 예수의 검으로 수술되지 않으면 피차에 멸망당합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우리네 가정이 검을 던지지 아니하면 안될 만큼 심각하게 죄로 병들어 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들 가정은 대부분 온갖 방탕과 음란, 사치와 허영, 탐욕과 정욕, 그리고 각종 우상숭배로 심각하게 병들어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말씀에 십자가는 사형방법을 말합니다. 죄로 병든 자신을 예수의 검으로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죄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 것입니다. 목숨을 건지시기 원하십니까? 예수께서 던지시는 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던지시는 검은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여 우리들 죄로 병든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히4:12-13) 경제 범죄의 전과자들인 재벌들과 권력층들에게 사정의 칼을 들이대면 나라 경제가 위태해지고, 그들 하수인들에 불과한 문어발 사장이나 회장 몇몇 잡아들이면 나라 경제가 안정됩니까? 남편은 돈 벌어오니까 무슨 죄를 지어도 덮어두고 그냥 지내는 것이 낫다고 한다면 그 가정은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아내가 과연 행복합니까? 그 가정의 자녀들이 과연 무엇을 보고 배우겠습니까? 그런 가정의 미래가 밝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나라 경제가 바로 살리기 위해서는 죄악을 과감히 근절하는 예수의 검을 받아야 합니다.

<눈 달린 수술칼>이 개발되어 수술해야 하는 병환자들에게 희소식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 위스콘신대 아밋 랄 박사가 최근 실리콘 수술칼을 개발해서 기존의 금속 메스(mes)를 대체해 외과 수술에 혁신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반도체 회로판에 쓰이는 실리콘 웨이퍼로 만들어진 실리콘 메스는 놀라운 정밀도로 수술 성공률을 높여준다는 것입니다. 실리콘 메스는 붙어 있는 조직을 절단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과 조직 사이를 벌리는 것입니다. 기존의 초음파 티타늄 수술칼에 비해 실리콘 메스는 값도 싸고 과열되지도 않으며 8배 이상의 진동을 얻을 수 있어 훨씬 정밀한 수술이 보장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실리콘 메스 끝에 정밀한 센서(감지기)가 달려 있어 눈의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개발된 모래알 크기만한 컴퓨터가 부착되어 건강한 조직과 손상된 부분을 구분해 의사에게 도려내야 할 환부를 정확하게 알려준다는 얘기입니다. 21세기엔 사람의 어떠한 환부일지라도 이 <눈 달린 똑똑한 칼>로 수술하여 고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눈 달린 똑똑한 칼>이라도 사람의 마음과 혼과 정신의 병든 것까지는 수술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의 병든 것을 수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께서 던져주시는 검밖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던져주시는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브리서 4:12-13)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여러분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이 병든 국가 사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예수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병든 채 그대로 사는 것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물론 우리 가정, 우리 사회, 우리네 정치와 경제, 모든 분야에 걸쳐 변혁의 수술칼을 가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심각할 정도로 병들어 있습니다. 가정에는 진실과 사랑의 칼이 필요합니다. 직장에는 정직과 성실의 칼이 필요합니다. 사회에는 정의와 공평의 칼이 필요합니다. 경제에는 평등과 공평한 분배의 칼이 필요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는 겸손과 섬김의 칼이 필요합니다. 기독교는 이론이 아니라 죄악을 도려내어 생명을 구하는 종교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스탠퍼드 호텔은 방마다 성경을 놓아두었는데 15년간 한 권도 분실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어 사전을 놓아두었더니 한달 사이에 14권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호텔 사장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의 언어에는 훔쳐갈 정도로 관심이 많다."라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요시야 왕은 먼지 속에 잃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찾아 나라를 새롭게 개혁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혀 듣게 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의 중함을 깨닫고 마음을 찢어 회개하는 뜻으로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통회했습니다. 멸망을 재촉하던 나라 백성이 소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진실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선과 악이 분별되며 진실과 거짓이 분별될 것입니다. 예수를 진실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감취었던 죄가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악이 용서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진실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에 어둠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태양보다 밝은 빛이 들어올 것입니다. 예수를 진실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거짓과 부정, 부패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검찰, 아니 특별검사라도 수술하지 못하는 그것들이 예리한 검으로 수술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검, 성령의 검은 죄로 곪은 인간의 마음에 예리하게 파고들어 그 곪아 부패된 곳을 깨닫게 할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치료합니다. 이 나라의 정부는 지금까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정부패, 부조리가 여전히 판을 치고 있으며 이를 알면서도 자기 살을 칼로 도려내야 하기 때문에 감히 나서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진실로 예수를 영접하게 하면, 예수께서 던지시는 예리한 검이 그들의 환부를 깨끗이 도려내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병든 사람, 병든 가정, 병든 사회 수술하지 않으면 살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던져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검, 성령의 검만이 죄로 병든 곳을 깨끗이 치료하여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진실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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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참조 : 눅 10:21,22)

일본 도요(東洋)대학 철학과에 다니던 방정환은 동료 유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자네 출세하면 뭘하나. 우리 세대는 말과 노래를 잃고 이렇게 울며 지내더라도 다음 세대에게는 우리나라, 우리 문화, 우리 역사를 다시 찾아주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던 그는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어린이들을 잘 가르치고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이렇게 공언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의 어린이들을 일본인으로 교육하겠다. 일본 천황의 은혜에 감읍하도록 조선인을 세뇌시켜야 한다." 그러자 1923년 3월 16일 방정환, 윤극영, 조재호, 손진태, 정순철 등은 소년운동을 위한 단체를 만들기로 합의했습니다. 단체 이름은 색동회였습니다. 이 색동회 회원들은 어린이들에게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가르쳐주는 운동의 일환으로 어린이날을 정해 기념행사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에서 색동회 창립식이 열리는 5월 1일 제1회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날은 본래 5월 5일이 아니라 5월 1일이었습니다. 이날이 5월 5일로 바뀌게 된 것은 5월 1일이 노동자들의 기념일인 메이 데이와 겹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이 집회 허가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방정환은 색동회를 창립하며 "젊은이나 늙은이는 일의 희망이 없다. 우리는 오직 나머지 힘을 다하여 가련한 우리 후생 되는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의 길을 열어주자."며 그 취지를 밝혔습니다. 그가 밝힌 <소년운동의 기초조건>을 보면, 첫째,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둘째,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셋째,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어린이날 제정 75주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동들에 대해 인격적 예우를 다 하고 있습니까? 아동들을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있습니까? 아동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습니까? 전혀 거리가 먼 이야기들입니다. 어머니는 가출하고 병든 아버지를 리어카에 싣고 어린 동생들과 함께 움막집으로 이사가는 이윤복군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30여 년이 지난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아 새삼 마음에 떠오릅니다. 술주정하는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발가벗긴 채 골목길로 도망하기도 숱하게 하며, 어린 동생들과 함께 깡통을 들고 밥을 얻으러 다니던 윤복군의 무거운 발걸음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부모가 저버린 가족 부양의 무거운 짐과 병든 아버지의 행패라는 멍에를 견디지 못하고 요절해버린 윤복군을 지금 이 시대에도 수 없이 보는 듯합니다. IMF시대를 맞아 "여보, 어디계세요?" "아빠, 어디계세요? 빨리 집으로 돌아오세요. 사랑해요."라면서 가출한 부모들을 애타게 부르며 멍든 가슴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나이 어린 새싹들, 이들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리지는 않을까 안타깝습니다. 실직해서 집에만 계시는 아버지의 눈치가 보여 그냥 학교만 다닐 수가 없어 유흥가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14세 소녀는 지금도 술집에서 영계만을 찾는 어른들의 타락을 어떻게 볼까? 그 소녀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날의 어른들에게서 우리 나라, 우리 문화, 우리 역사를 어떻게 바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피곤한 곳입니다. 애나 어른이나 모두가 다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삶에 주는 것은 피곤함밖에 없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참된 안식과 기쁨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사는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경제 사회의 구조 개혁에 따라 억지로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있는 사람, 죄와 염려 걱정으로 심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 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다가 자포자기한 사람, 선해지려는 노력을 하다가 좌절한 사람, 자기 사명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사람, 기타 삶에 지치고 절망가운데 빠진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특히 전통적으로 부과되고 있는 율법과 유전(遺傳)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의 어깨에 율법과 유전의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다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그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1-4)

정통 유대인에게 있어서 종교란 일종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계명까지도 다 지키며 믿음이 좋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 이제 갓 예수를 믿거나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짐, 율법적인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문턱을 높여 아무라도 쉽게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을 가로막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다음은 우리 교회가 만약 이렇게 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염려되어 가상(假想)해서 만든 이야기입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울산에 이사와서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어느 교인 집에 저녁 식사 초청을 받았습니다. 여러 권사님들, 집사님들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심방예배를 마치고 곧 이어 정성을 다해 준비한 식사가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차려져 나왔습니다. 식탁 중앙에는 불고기판이 올려져 있고 이어서 양념된 돼지갈비가 푸짐하게 올려졌습니다. 그 외 식탁에 차려진 음식 종류는 대략 이렇습니다. 장어 구이, 오징어회 무침, 낙지 볶음, 갈치구이, 삶은 문어, 시금치 무침, 고사리 무침, 김치, 콩나물 무침, 돼지머리 누른 것, 국으로는 추어탕 등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식사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몇몇 사람의 눈이 뚱그래졌습니다. 정성을 다한 음식을 대접하는 믿음의 봉사를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막상 식사를 하려고 하니 한 두 가지 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결한 식생활 법에 대한 레위기의 계명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레11:3-10)

돼지갈비를 뜯어보려고 하니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지만 새김질을 못하므로 부정한 짐승인지라 먹을 수가 없고, 장어 구이나 오징어 회 무침, 낙지볶음, 추어탕을 먹어보자니 이들은 지느러미는 있어도 비늘이 없어 가증한 것이라 먹을 수가 없고, 고사리 무침은 정력에 안 좋다고 하니 먹을 수 없고, 그래 할 수없이 서로들 시금치 무침과 콩나물 무침, 그리고 김치에다 그 여러 사람이 집중 공격을 가하다 보니 순식간에 채소밭이 밭떼기 채로 팔려버리고 흰 접시만 뎅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저녁식사에 정성을 다해 우리들을 초청한 그 교인은 자신이 무슨 잘못한 것이 있나 의심하면서 얼굴이 붉어져 편치 못한 표정이었습니다. 우상의 제물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 그리고 음행 등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 짐도 지우지 아니하기로 예루살렘 공회에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가결하였습니다. 이것들을 삼가시므로 여러분의 하시는 일이 잘 되고 평안해지시기를 기원합니다. 교회는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짐을 지워주는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그 무거운 짐과 멍에를 쉽고 가볍게 덜어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 문턱을 높이는 사람들은 대개가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입니다.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분은 교회 문턱을 높이자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의 그 무거운 짐과 멍에를 쉽고 가볍게 나눠지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주어진 교회 직분으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15:19-29)

예수께로 와서 율법의 멍에를 던져버리고 예수의 가볍고 쉬운 은혜의 멍에를 지라는 것입니다. 여기 쉽고 가볍다는 말은 부드러운 새의 깃털만큼 가볍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멍에는 새의 깃털과 같아서 창공을 가벼웁고 자유롭게 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메라고 하신 멍에는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깃털처럼 부드럽고 가벼워서 하늘을 나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계명은 사랑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도덕이나 율법보다 무가치하거나 경박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보다 더 준엄하고 숭고하며 엄정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소년 하나를 만났는데 그 소년은 절름발이인 더 작은 소년 하나를 등에 업고 가는 것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업고 가기에 퍽 무겁겠군"하고 그 사람이 말하자 "무겁지 않아요. 얘는 내 꼬마 동생인 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랑으로 지고 사랑으로 운반하는 짐이란 언제나 가벼운 것입니다. 사랑은 가장 무거운 짐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의 짐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 때 그 짐은 짐이 아니라 "노래"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울산복음화, 세계복음화를 위해 벌이는 2+1000복음화 운동은 여러분에게 무거운 짐을 져주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운동은 위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아래로는 우리의 이웃을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랑의 운동, 사랑의 노래입니다. 2+1000복음화운동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의 무거운 짐과 멍에를 십자가의 은혜로 덜어주자는 이웃 사랑의 운동입니다. 피곤한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여러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참된 안식, 마음의 쉼을 얻고자 하면 예수 앞으로 나와야만 합니다. 양은 털을 제 때에 깎아주지 않으면 무척 길어집니다. 털이 너무 길어지면 먼지도 묻고 진흙도 묻게 되어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됩니다. 그런 상태로 진흙을 밝게 되면 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중심을 잃어 넘어지기 쉽습니다. 양이 무거운 털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게 되면 제 힘으로 일어서지 못합니다. 이 때 목동이 넘어진 양을 도와 일으켜 세워주는 것을 시편 23편에서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야같은 세상에 살다가 먼지도 묻고 진흙도 묻어 무거워진 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잘 달리지도 못하며 쉽게 쓰러지는 양들을 위해 우리의 목자가 되신 예수님께서 그 길어진 털을 깎아주십니다. 흙먼지 등으로 치렁치렁해진 털 때문에 둔해진 양을 잡아 그 털을 깎아주면 당장 보기는 민망스러울 정도로 흉하지만 금새 날아갈 듯이 초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시원해 보입니다. 온갖 죄악과 질병, 고통이 만연한 거친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순간적인 도피나 쾌락이 아닌 영원한 참 마음의 기쁨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있는 그대로 예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그 세상의 찌든 먼지와 진튊으로 더러워지고 무거워진 털을 깎이시고 영혼이 소생되시며 세상을 하나님의 은혜로 쉽고 가볍게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찬송가 205장 <예수 앞에 나오면>을 다같이 불러 봅시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예수 앞에 나와서 은총을 받으며

맘에 기쁨 넘치어 감사하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죄의 무거운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무거운 짐과 멍에를 쉽고 가볍게 덜어주는 것입니다.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크고 작은 짐과 멍에가 있습니다. 남이 져주지 못하고 자신만이 져야할 병고나 고독, 또는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무거운 짐, 사회적 책임이나 주님을 위하여 교회에서 섬기는 멍에들이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져야 할 가장 크고 최종적인 멍에일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여러 가지 무거운 짐과 멍에들을 젊었을 때 짐이나 멍에로 생각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것을 나에게 지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애3:27,28)

그러므로 할 수 없이 진다거나 누가 억지로 지워준 짐이라면 몹시 고통스러운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짐이라고 믿을 때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는 목적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므로 그것은 이미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보람있고 뜻깊은 가벼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30) 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내리막길이 있고 오르막길이 있는데 예수의 짐이 무겁게 느껴질 때는 내리막길이요 예수의 멍에가 가볍게 느껴질 때는 오르막길입니다. 피곤한 일요일을 교회당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그것이 오히려 안식과 기쁨을 주는 예수님의 멍에로 느껴진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는 약속을 지니고 약속 장소에 나가는 사람은 소망과 기쁨이 충만하고 채권자를 만나야 할 채무자의 발걸음은 무겁기가 그지없을 것입니다. 매주 마다 전도하는 것이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전도하는 기쁨이 충만할 것이고 채권자를 만나러 가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되어진다면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에게 베풀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남으로부터 받는 것 보다 얼마나 마음이 가벼운 것인가는 남에게 주어 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훨씬 마음이 가볍다는 것은 정말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준 예수님의 멍에는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무겁고 힘든 멍에를 주님께 맡겨버리시고 주님이 주시는 쉽고 가벼운 십자가 사랑의 멍에를 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짐이라면, 주님께서 주신 멍에라면 사랑의 짐이요 사랑의 멍에입니다. 겸손함으로 그 멍에를 메시기 바랍니다. 실로 우리 인간은 율법과 세상의 멍에가 아니면 예수님의 사랑의 멍에를 메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괴로움과 사망을 안겨다 주는 세상과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방법, 곧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새롭고도 가벼운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 인생들이 질고(疾苦)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내게 배우라"는 말씀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께 와서 배우라는 것으로 하나님 말씀을 배워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쉼, 참된 안식은 노력해서 누리는 것이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함과 사랑으로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참된 안식과 기쁨을 얻으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그 분의 겸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실로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분이십니다(빌 2:6-8).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의 겸손을 배울 때 사람이나 환경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참 평안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사에 널리 알려진 고전적인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한국의 간디'라고 불리우는 조만식 선생과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인연이 깊은 관계였습니다. 조 선생이 오산학교의 교장직을 맡고 있을 무렵에 주 목사는 그 학교의 학생이었고, 또 주 목사가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을 때 조 선생은 그 교회의 장로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조만식 장로가 교회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급한 손님이 찾아와 한 10여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대화를 마치고서 조 장로는 황급히 교회로 왔습니다. 헐레벌떡 도착한 조 장로가 뒷문을 살짝 열고 보니 벌써 설교 시간이었습니다. 이크, 설교가 시작되었구나. 그렇다고 안 들어갈 수도 없지‥‥‥ 이렇게 생각한 조 장로는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주기철 목사가 설교를 하다말고 갑자기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조 장로님 ! 오늘은 서서 예배를 드리세요! "조 장로는 깜짝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에 보통 사람 같으면 아무리 예배시간이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나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 장로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자가 호통을 치는 대로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꼬박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 시간의 예배 시간이 조 장로에게는 끔찍이도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제 예배를 다 마치자, 주 목사가 조 장로에게 대표 기도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조 장로님, 예배 마치기 전에 기도를 해주십시오."그러자 조 장로는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히 여긴 이 못난 죄인을 용서하옵소서‥‥또한 이 일로 주의 종을 마음 아프게 하였사오니 이 어찌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흐흐흑‥‥" 조 장로는 더 이상 말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교인들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마음이‥‥겸손하니‥‥내게 배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겸손의 본을 보인 조만식 선생은 이로 인하여 더욱 존경받는 스승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겸손함으로 예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야만 주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멍에를 멘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 우리는 당시 근동 지역의 농경 풍습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흔히 두 마리 소에 같은 멍에를 메우고 쟁기를 끌게 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그 소들에게 멍에를 메우기 전에 먼저 두 소를 싸움 붙였습니다. 그래서 싸움에서 이긴 소를 인도자로 두고 진 소가 함께 보조를 맞추도록 했던 것입니다. 실로 이것은 우리에게 큰 영적 교훈을 줍니다. 진정 우리가 참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전적으로 굴복할 때만 비로소 그분의 멍에를 멜 수가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인도에 함께 보조를 맞추어 순복할 때만 우리가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의 멍에를 메고 계십니까? 성도 여러분! 이 환난 많은 세상에서 자기 마음에 평안을 얻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특히 현대는 어떤 이의 말대로 불확실성의 시대여서 잠시도 불안과 긴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화가 늘 갈망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견디기 어려운 짐을 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즉,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예수께 나아가지 못하고, 그분의 겸손을 배우지 못하며, 그분의 멍에를 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은 평안을 얻는 참 비결을 실천함으로 삶의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얻으시는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삶에 피곤하고 지치신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시는 여러분, 겸손히 예수 앞에 나오셔서 참된 마음의 쉼과 기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겸손히 예수 앞에 나와 자신의 무거운 짐과 멍에를 벗어버리고 십자가 사랑의 멍에를 메심으로 자녀들의 무거운 짐과 멍에도 벗겨주시고 마음에 쉼과 기쁨을 누리시는 여러분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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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요나의 표적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38-45, 참조 : 막 3:1-6, 눅 11:29-32)

기적(miracle), 기사(wonder), 표적(signs) 등은 성경에서 다 같은 의미로 사용되며, 그 뜻은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삶 속에 뚫고 들어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삶 속에 파고 들어가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없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나타난 곳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적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사기행각을 벌이는 가짜 무리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적 만들기(Leap of Faith)>라는 흥미진진한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요나 나이팅게일 목사는 미국 전역을 돌며 가짜 치병 집회를 이끄는 사기꾼 목사입니다. 그는 사람을 사서 미리 짜고 기도로 병을 고쳐주는 척하기도 하고, 예수상(像)의 눈에 소금물을 발라 기적을 꾸며내기도 합니다. 또 이어폰을 사용해 마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쪽집게 예언자 노릇도 합니다. 비록 기만하는 행위일지라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 대가로 돈을 좀 받는 게 무어 그리 나쁘냐며 당당히 사기행각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소아마비 소년 보이드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소년은 가짜 목사 요나를 진심으로 신뢰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다리를 고쳐줄 거라고 믿습니다. 식은 죽 먹듯이 사기를 쳐온 요나도 소년의 순수함 앞에서는 잠시 주춤하면서 이제 자신에게 안수의 권세가 다 떨어져 나눠 줄 것이 없다며 춤과 찬양으로 얼버무립니다. 그러나 소년 보이드의 병치료를 위해 군중들은 "한번 더, 한번 더" 안수 기도해주라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다시 등장한 요나는 자신의 사기행각을 이미 알고 있는 보안관의 믿음에 달려 있다며 사기행각을 감추려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말로 기적이 일어납니다. 보안관에게 치유의 책임을 떠넘기는 엉터리 기도였는데도 소년이 목발을 치우고 스스로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미하고 가짜 목사 요나를 더욱 신뢰하며 더 많은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들판에서 새우잠을 자며 다음날 집회를 기다리게 됩니다. 하지만 진실한 소년 보이드의 치병(治病) 사건과 들판에 운집한 군중들의 진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요나는 사기극을 청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병고침을 받은 소년 보이드가 가짜 목사 요나를 따라가고자 나섭니다. 이를 만류하는 요나와 소년이 주고받은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하는 건 다 쇼야, 멍청이들을 위한 거라구"

"목사님이 가짜라는 거예요?"

"난 가짜다"

"일만 잘하시면 됐지 가짜면 어때요?"

병 고침을 받은 소년 보이드의 이 한 마디 말 "일만 잘하시면 됐지 가짜면 어때요?"가 이 시대의 우리 기독교의 왜곡된 모습을 비춰주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 정신의 삶은 없어도 어떻게 살든 열심히 기도하고 안수 받고 병 고치고 성공하고 출세하며 돈만 많이 벌면 그 신앙이 합리화되는 것이며 그러한 목사와 교회는 성공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없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이 영화는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론 영화에서와 달리 현실에서 목사는 사기죄로 구속되었고, 얼마 전 실형을 살고 나오자마자 다시 치병집회를 시작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을 끌어 모아 돈을 챙기고 있습니다. '거짓으로라도 희망을 주는 게 뭐가 나쁘냐?'고 말하는 가짜 목사 요나의 말에 오늘날도 영적 사기를 당하는 멍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며 희망을 주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주목적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고 그리하여 천국 백성으로 삼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를 비롯하여 유대인들은 표적 그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드러나는 표적으로 종교와 그 가르침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하나님 자녀답게 살려는 자세는 전혀 없고 완악하고 강퍅하여 예수께서 전하신 천국복음을 배척하거나 냉담하게 거절하고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영적 상황을 예수는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된 귀신 들린 자의 상태에 비유했습니다(43-45절). 예수께서 이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오직 요나의 표적밖에는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시며 그들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냈다 살아 나온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나의 표적이란 십자가의 표적을 말합니다. 표적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나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표적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을 구하나니 내가 곧 하나님의 표적이니라.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였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를 보고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알았고, 시바 여왕은 솔로몬을 보고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느니라. 너희들에게는 나를 통하여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가 나타났고, 요나가 전파했던 소식보다 더 큰 소식이 나타났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눈이 가리워서 진리를 보지 못하였고, 귀가 먹어서 그 경고하심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고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알아 본 옛 사람들이, 이보다 더 큰 기회를 가지고도 그를 영접하기를 거절할 너희들을 정죄하는 증인으로 설날이 오리라." 여기에 바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가 곧 하나님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듯이, 그리고 솔로문의 지혜를 보고 시바 여왕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듯이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 예수를 보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여 영접하지 아니하며 다른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심판 때에 정죄를 선언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표적은 가시면류관에 찔려 피흘린 자국, 못박혀 찢겨진 손과 발, 창에 찔려 터진 옆구리, 후려진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등허리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고난의 흔적, 고난받으신 사랑의 흔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으니.....그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4-5) 과연 나를 위하여 대신 욕을 받고 대신 아파하고 대신 죽을 사람이 있을까?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작곡가 멘델스존 가문에 전해 내려온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곱사등이었습니다. 한 여자를 짝사랑하였으나 워낙 미녀여서 자기 같은 곱사등의 사랑을 수락할 이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부유한 실업가의 딸이었으므로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이 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등을 곱사등으로 만든 것은 특별한 것들을 지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허락만 한다면 지금부터 평생동안 당신의 한숨과 눈물과, 당신의 걱정과 고독과, 당신의 아픔과 가시를 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대신 짊어지겠다, 책임지겠다는 이 말에 처녀는 몹시 감동되어 몇 달 후에는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흘리신 피야말로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이 하나님의 표적인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표적이 있다면 십자가의 표적밖에는 없습니다. 이를 구하는 생활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고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로 부요케 하시는 은혜를 감사드리나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 되게 하시기 위해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셨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와 슬픔을 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나이다.

가시에 찔리시고 채찍과 매를 맞아 상하며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하시며,

나음을 입게 하시는 은혜를 감사드리나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신 주님의 삶을 배우게 하옵소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예수님처럼

주님을 닮은 <사람의 모양>으로 살게 도와주옵소서. 아멘

여러분의 손과 발에 사랑과 섬김, 그리고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 흔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십자가 표적이 묻어나고 있습니까? 톨스토이 동화에 <황제와 청소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냈습니다. 이 날 참석자들 중 한 명을 뽑아 왕과 왕후 사이에 앉게 하고 푸짐한 상품을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손님들이 궁전에 도착하자 왕의 신하들이 손님들의 손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 왕의 옆자리에 앉도록 당선된 사람은 궁전의 청소부 할머니였습니다. 평생 힘든 노동에 종사한 청소부 노파의 손은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도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 손과 발을 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을 알아보게 하려면 '내 얼굴을 보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표적, 손과 발을 보이시며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체험하고 예수를 증거하며 살았던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부적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야 할 삶의 시작이요, 삶의 내용이며, 삶의 목표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2-25)

십자가에 나타난 표적의 흔적은 사랑과 섬김, 고난과 희생의 흔적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러한 십자가의 표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표적을 구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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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삶을 풍요케 하시는 주님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14, 참조 : 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五餠二魚)의 점심 도시락 한 개를 가지고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양(量)의 주(The Master of quantity)가 되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성령은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성령은 힘과 능력, 그리고 권능이 충만합니다.성령은 지혜와 지식이 충만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육간에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 역사(役事)를 일으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것을 풍요롭고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너희 마음눈을 밝히사,..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7, 18-23)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할"만큼 지혜가 충만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실"만큼 힘과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을" 가장 귀하고 위대한 것들로 만드실만큼 권능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멸시 받는 것들"을 택하사 가장 존귀한 것들로 만드실만큼 권세가 충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택하사" 가장 부요한 것들로 만드실만큼 모든 것의 모든(All in all)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 천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부요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스스로 미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전지(全知, omni science)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스스로 슬프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기쁨이 충만하고 그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스스로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악을 선케 하시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삶의 기갈을 당해 목마르십니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가 되시는 예수 믿으시고 여러분의 삶에 생수의 강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신 교회의 이중표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훌륭하신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이목사님은 한국 땅에 태어난 훌륭한 인물들을 연구하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한국 땅에 태어난 훌륭한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큰 강물을 먹으며 자라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낙동강 물을 먹든지,대동강 물이나 두만강 물을 먹든지, 압록강 물을 먹든지,...어쨌든 큰 강물을 먹었던 것입니다.한경직, 김창인, 박조준, 김선도, 곽선희 목사님은 대동강 물줄기를 마시며 자랐습니다. 김재준, 강원용, 안병무, 문익환 목사님은 두만강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이종성, 이상근 목사님은 낙동강 물을 마셨습니다. '아하,그러면 나는 무슨 강물을 마셨나,나는 만경강 물을 마셨다. 그러니 짧은 강물을 마신 이 종자는 큰 인물이 되기는 영 글렀다. 짧은 강물을 마셔서 그런지 키도 작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고민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하나님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주여,한국 땅을 주름잡는 인물들은 다 긴 강물을 마시고 자랐는데 저는 만경강 물을 마시며 자라도록 하셨으니 슬프도소이다,주여, 이대로 두시려나이까?' 성령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감동하시기를 '종아, 낙심하지 마라. 대동강 물줄기가 길다 한들 얼마나 길겠으며 낙동강이 길다 한들 얼마나 길겠느냐? 진짜 긴 강수,성령의 강수를 마셔라. 길이를 잴 수 없는 무한한 하늘의 강수를 마셔라. 그 강수가 그대 가슴에 흘러들어갈 때 하늘도 땅도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국경을 넘고, 세계를 넘어 큰 인물이 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이 말씀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한많은 호남땅 갈릴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까 할 때 '성령의 강수를 마신 예수님의 혼을 담아 너도 살아라.'라는 감동을 받아 여기까지 뛰고 달려왔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 성령의 강수가 흘러 넘치게 될 때 여러분의 현재 위치와 존재를 뛰어 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존귀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뛰어난 지혜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가장 부요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시고 성령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은 강물마다 심하게 오염되어서 그런지 목사가 죽어 장사지내는데 절간의 중이 와서 조사(弔辭)를 하는 경우도 있고, 기독교와 불교, 천주교 희랍 정교 그리고 회교까지도 혼합하여 서로 강단을 주고 받으며 세계 종교 단일화를 위해 날고 뛰는 그야말로 오염도가 치사량(致死量)을 훨씬 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가하면 유신론자인 기독교의 지도자가 무신론자인 김일성과 남북 통일을 위해 국법을 어겨가면서 자리를 함께 하는, 강물만이 아니라 국민 대중이 마시는 공기까지도 오염시키는 불상사도 벌어졌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성령과 말씀'으로 영육간에 성결 보존하여 어떠한 '세상의 강물과 공기'에도 오염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병이어,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밖에 없습니까? 주님께 바치십시오. 그리고 오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풍성한 축복을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형편 없습니까? 있는 그대로 주님께 바치십시오. 여호와께서 새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지혜와 재능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기십니까? 주님께 바치십시오.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뱀같은 지혜를 얻으십시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7-31)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 믿으시고 여러분의 영육간의 삶이 풍성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누리고 있는 문화와 문명이 풍요로와도 사랑에 기갈을 느끼고 있습니까? 예수 믿으시고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시고 삶의 참된 희락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16-21)

인간은 '밤이 맞도록 수고를 다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다'는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십시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5:6)

이같은 축복은 자신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이 넘치도록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5:3-7)

미국 텍사스에 유명한 셀 포드라는 목사는 "성경 말씀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물질을 관리하며 살아갈 때 축복이 되느냐 하는 말씀이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예수 믿는 사람은 그저 가난하게 사는 것이 잘 믿는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렵게 살고 가난하게 살아서 남에게 누를 끼치고 남에게 원조를 받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풍성한 물질의 축복을 받아서 가난한 사람과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가는 곳마다 농사를 지으면 백배나 잘되어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기까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도 객지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객지 생활을 시작하는 길에 하나님께 십일조 생활할 것을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야곱의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교회 생활의 규례가 되어 지켜지고 성도들이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축복된 생활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기쁨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것을 드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물질 때문에 걱정하지 아니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가진 것을 무엇이든지, 물질이든 봉사이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온전한 마음으로 드리십시오. 그리고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의 어떤 왕이 궁전에서 나가다가 한 거지를 만났습니다. 손을 내밀고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왕이 거지에게 하는 말, "네가 나에게 무엇을 주면 나도 너에게 주겠다."거지가 뭐 있겠습니까? 옆집에서 강냉이 한 홉을 얻었는데 그 강냉이 주머니를 열고 "저는 이것밖에 없습니다."하며 강냉이 다섯 알을 내밀었습니다. 왕이 그것을 척 받더니 웃으면서 하인에게 "얘! 금주머니에서 이 강냉이 알만한 금덩이 다섯 개만 꺼내서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것을 대신 너에게 주니 받아라."물론 거지가 감사히 받았지요. 그러나 속으로 탄식하면서 갔다고 합니다. 왜? "내가 그 강냉이 주머니를 다 그대로 드렸으면 금주머니째 내가 다 받았을 텐데"하는 탄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처럼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믿음을 과감히 버리시고 가지고 있는 "오병이어" 전부를 주님께 드리시고 '너와 나' 모두가 함께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적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축사',즉 감사기도를 드리심으로서 일어났습니다. 주께서는 지금 '보잘 것 없는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지만 벌써 저 멀리 오천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은 것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이 오병이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축사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현재의 위치와 상황, 그리고 형편 처지가 어떠할지라도 미래를 바라보고 미리 감사할 수 있는 깊은 믿음으로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기도하는 방법을 설명하시면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감사기도를 해야 들으신다고 하셨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어느 부인은 자기도 남편 문제로 감사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하고 한 숨을 쉬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남편은 매일같이 술이 만취되어 늦게 귀가하는 술고래였습니다. 그 날도 다른 날과 같이 술로써 인사불성이 되어 겨우 집에까지 도착해 문앞에서 쓰러진 남편을 힘들게 끌어다가 겨우 눕혔더니 세상 모르게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니 자기 신세가 처량하고 화도 나서 기구한 팔자타령을 하며 "하나님,나는 왜 이런 남자에게 시집을 와서 고생을 합니까?" 하고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울면서 절반은 신세타령하고 절반은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감사기도하라는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한참 동안 감사할 조건을 생각하다가, 감사할 것이 없어서 그저 감사하다고 기도했답니다. 바로 그 때 성령의 감동으로 감사할 일이 생각났습니다.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을 생각하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앞으로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감사하고,저토록 취했어도 집을 찾아올 수 있음에 감사하고,토요일은 더욱 술을 많이 마셔 주일날에 집을 잘 봐주어서 교회나오는데 불편하지 않아 좋고, 계속 해서 감사해야 할 일들이 자꾸 생각나서 정말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남편은 갈증이 나서 잠을 깨고 보니 부인이 웃으며 기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남편은 무엇이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물었더니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렇다고 감사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나도 예수 믿어 줄께" 하며 선뜻 교회에 나갈 것을 약속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그 동안 왜 몰랐겠습니까? 또한 자기 아내의 소원이 무엇인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이 부인이 간증하기를 10년 동안 그렇게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 번의 감사기도로써 이루어졌다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어느 때 들으실 것 같습니까? 오천 명을 앞에 놓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하는 이런 감사기도에 기적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정황이 어떠하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지금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영육간에 삶이 풍요로와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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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삶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요 6:16-21, 참조 : 마 14:22-33, 막 6:45-52)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는 여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기적은 진짜로 있었던 것이 아니란 말이예요. 예를 들어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가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너 갔을 때 바다의 깊이가 6인치 밖에 안 되는 갈대밭을 건너간 것이지 어떤 기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거든요."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뒤에 앉은 학생 한명이, "기적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좀 기분이 좋지않은 선생님은, "무슨 기적이란 말이예요?"라고 묻자 학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오던 애굽의 큰 군대를 모두 홍해 바다물에 빠져 죽게 했는데 6인치 깊이의 물에다 애굽의 그 많은 군대를 다 빠뜨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 진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가신 표적으로서 주님께서 '자연법의 주'(the master over natural law)가 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가지 표적을 행하심은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신앙 가운데 빠져 생명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삶의 풍랑은 누구나 다 겪게 되는 일이지만 신앙인은 '예수를 배에 영접하여 인생의 진정한 목적지에 안전히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타고 언제 끝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넓은 바다를 쉬임없이 항해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 세상은 바다며 인간은 항해자이며 인생은 항해입니다. 항해를 하다보면 뜻하지 않는 시기에, 예기치 않는 장소에서 이유도 알 수 없는 폭풍과 거센 파도에 휩쓸려 고생할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석양이 물드는 잔잔한 저녁 바다, 혹은 힘차게 태양이 솟구쳐 올라오는 고요한 아침 바다는 참으로 멋있습니다만 별안간, 그것도 한밤중에 몰아닥치는 폭풍과 파도는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개인생활이나 가정생활 혹은 신앙생활에서 순풍의 돛을 달고 평탄하게 달릴 때도 있지만 때로는 예기치 않게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풍랑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풍랑 만난 이야기가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구약에 나오는 요나가 만난 풍랑입니다. 이 풍랑은 내 자신의 잘못과 죄로 인하여 만나는 풍랑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과 정반대되는 곳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요나서 1:11-15).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죄악의 길로 가는 인생에게 거센 풍랑이 일어납니다. 둘째, 사도행전 27장에 나오는 풍랑으로 사도 바울이 탔던 배가 풍랑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이 풍랑은 하나님 보다 인간의 경험을, 진리의 말씀보다 재물을 더 의지할 때 찾아오는 풍랑입니다. 하나님의 종 바울은 계시를 통하여 항해 도중 큰 고난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항해를 지연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는 항해를 늦추게 될 경우 입게 될 경제적 손실을 염려한 결과 바울의 계시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경험과 실력을 믿고 항해를 강행하다 결국 배와 모든 화물을 몽땅 잃고 겨우 생명만을 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계시한대로 순종했더라면 풍랑을 피해 아무것도 잃지않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셋째,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것으로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갈릴리 바다에서 만난 풍랑입니다. 이 풍랑은 인간의 잘못과 아무 관계가 없는 풍랑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당할 수 밖에 없는 숙명적인 풍랑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리하여 바다생활에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점점 거칠어져가는 거센 풍랑을 어찌할 수 없어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험한 세상 속을 살아가면서 삶의 전문가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부들도 큰 풍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듯이 아무리 풍부한 경험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어도 아무리 높은 권세와 넘치는 재물이 있어도 어찌할 수 없는 격렬한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배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에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고요하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풍랑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만유의 주이신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값으로 오는 풍랑이든 세상을 의지하다 만난 풍랑이든 어떤 풍랑도 예수님은 잔잔케 하십니다. 인생의 거센 풍랑이 여러분을 위협할 때 예수님을 찾으시고 그 분을 인생의 배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거센 풍랑속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아름다운 인생을 노래한 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비록 두려움의 밤에

신앙과 형식이 나누인다 할지라도

폭풍우가

아무리 노호하더라도

그 폭풍우를 가르며

들려오는

보다 굵직한 음성을

듣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아름답도다"

<테니슨>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나신 후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신 반면 제자들을 미리 가버나움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항해하는 중 큰 바람이 불어 풍랑를 만나 제자들이 큰 역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을 피하여 산에 가셔서 먼저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의 모습을 지켜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시도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시고 지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광풍노도에 시달리던 그 자초지종을 예수님의 사랑의 눈초리는 떠나지 않으시고 항상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물 위로 걸어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시련에 부딪칠 때도 예수께서는 지켜 보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너무 편안하게만 해주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가 싸워서 우리 자신의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운동경기에서 훌륭한 노력을 다하는 자녀를 보시며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부모와 같으며 비극적으로 낙망하여 옆으로 빠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는 부모와 같습니다. 인생은 우리들 위에 내려 비치는 예수님의 사랑의 눈빛으로 말미암아 활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안전하게 마른 육지에 상륙할 최후의 노를 젓게 하시려고 산에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담담하고 무감동적인 거리를 둔 태도로 우리를 지켜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가 우리를 관람석이나 울타리 밖에서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모자라고 우리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때에 예수님은 사랑의 눈빛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승리와 성공으로 이끄는 최후의 분발과 최후의 노력을 불어 넣어 주는 힘과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신앙생활의 위대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찌 제자들을 잊으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어찌 제자들에게 무관심하시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고난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격한 풍랑이 제자들의 탄배를 몰아치는 것을 볼 수 있으셨습니다. 어두웠을 때에 조차도, 예수께서는 볼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우리의 생각도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슬픔도 모두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모든 어려움을 다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으며, 그들은 바다에서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마음은 그들을 걱정하고 계셨으며, 그래서 마침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틀림없이 우리에게 베푸시려고 사랑으로 우리를 살피시는 가운데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요6:19)

이 본문에서 분명히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그와같이 예수를 보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눈으로 예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눈으로 예수를 볼 수 없지만, 봄으로 행치 아니하고 믿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삶의 풍랑이 어떠하든지 간에, 파도가 얼마나 높든지 간에, 소동이 얼마나 심하든지 간에, 예수를 신뢰하고, 예수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앞을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께서 파도 위로 걸어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과 우리 자신의 환경에 얽매여 있어서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의 정황과 다를 바 전혀 없습니다. 세계가 경제적으로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세계가 정치적으로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세계가 사회적으로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세계가 종교적으로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기독교도 예외없이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와 사회가 사는 길은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오늘 본문 21절에도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요6:21)

다시말해서 예수님을 배에 영접하자 제자들은 가려던 항구에 속히 도달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현대가 당면한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열쇠가 되는 말씀인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가 없었을 때에는 위험했으나 일단 그를 배 안에 영접하자 풍랑이 잔잔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 '배'는 작게는 '나 자신'을 뜻하며, 크게는 '가정' '교회'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나의 문제나, 가정의 문제나, 교회의 문제나, 국가의 문제는 오직 예수님을 영접할 때만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말씀인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고 했습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하기까지는 언제 어떤 풍랑에 밀리고 요동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다와 바람을 창조하시고 자연법의 주가 되시는 주님을 모시면 목적한 항구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풍랑을 잔잔케하실 뿐만 아니라 삶의 참된 목적지까지 우리를 평안하게 이르게 하시는 예수님을 진실로 진실로 영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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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16:13-20)

쉐인 (Shane)이라는 서부 영화가 있습니다. 작가가 주인공(Alan Ladd, 주연) 쉐인을 통하여 그리스도상을 부각하려고 시도한 작품입니다. 한적한 광야에 외딴 집 한 채가 있습니다. 어린 아들 하나를 둔 부부, 그들은 착하고 힘없는 개척민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조와 마리온(Joe and Marion)이라고 붙인 것도 요셉과 마리아(Joseph and Maria)의 은유라고 합니다. 무례한 총잡이들이 이들을 괴롭힙니다. 그 때 이 집에 흘연히 나타나는 인물이 바로 쉐인입니다. 그는 얼마 동안 이 집에 유하면서 그들을 격려하며 희망을 잃지 않게 하고, 어린 소년에게 참다운 용기와 사랑을 가르치며 자기의 목숨을 걸고 악한들로부터 이 가정을 보호합니다. 일이 해결되어 다시 평화롭게 되자 이 신비한 나그네는 정처없이 지평선을 향해 떠납니다. 다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가 구름을 타고 올라가듯 쉐인이 광야의 먼지 속으로 사라질 무렵 소년은 그에게서 구세주와 같은 거룩함을 보며, 그를 따라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는 광야에 머물러 쉐인과 같은 사랑과 정의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신 교회는 지금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쳐지고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10년전에 씌여진 글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한국 교회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귀담아 들을 만한 정진홍 서울대 종교학 교수의 <기독교의 두 얼굴>이란 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988년 12월 20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는 충현교회라고 하는 개신교의 한 교회가 건물을 준공하여 헌당식을 가졌습니다....순전히 돌로 지은 건물로는 개신교 교회 건물 중에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합니다. 대지 6,432평, 연건평 11,371평, 첨탑 구조물 두 개를 포함하여 높이가 150미터....78년에 기공 예배를 올렸고, 88년에 완공했으니 짧게는 10년 공사이고, 길게는 18년 공사인 셈입니다. 그 긴 세월 동안에 기울였던 정성이 얼마나 극진했을까 생각하면 눈에 선한 듯합니다. 어쩌면 그 교회의 1만 9천이 넘는 신도들은 그 일로 해가 뜨고 지는 세월을 살았음에 틀림없을 듯싶습니다...그 일에 부어진 돈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돈에 둔해도 100억은, 아니 몇백 억은 넉넉히 들었을 줄로 여겨집니다...그런가 하면 그 새 교회가 계획하고 있는 교육, 선교, 구제의 3대 사업 내용도 그 건물만큼이나 대단합니다. 한국 교회 성장 연구소를 설치하여 국내 목회자들을 재교육하고, 더 나아가 국적, 문화, 인종, 언어가 다른 세계 여러 나라 교역자들을 유치하여 교육을 시키겠다고 합니다. 또 방글라데시 난민 구호와 같은 국제적인 구호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정신 박약아, 농아, 장애자, 노인들에 대한 폭넓은 봉사 활동을 펼치겠다고 합니다....한국의 개신교는 이제 참으로 대단합니다. 신도가 많고, 그래서 돈이 많고, 그래서 이미 커다란 사회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런 겉모습만이 아니라 하는 일의 계획이나 실천이나 평가도 꽤 성숙해 있습니다. 이제는 어떤 면에서도 한국의 개신교를 소흘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그런데 88년 11월, 세계 개신 교회의 협의체인 세계 교회 협의회가 발표한 자원 공유 연감에 따르면 '기가 막힌' 사실이 담겨져있습니다. 새해 89년의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가 세계 교회 협의회에 956,151달러를 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살펴보면 더욱 기가 막힙니다....우리나라의 교회가 지원을 요청한 자원금은 정의와 봉사 프로그램 단위에 소속된 '도시 농촌 선교'와 '교회간 원조와 난민 및 세계 봉사 위원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가난하고 헐벗고, 난리가 나서 먹고 살기가 어려워 세계 교회가 서로 울력하여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없는 경우를 생각하여 마련해 놓고 있는 기금 중에서 돈을 좀 보태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거나, 농촌이나 도시의 변두리를 위한 선교 자금을 좀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아무튼 그런 자료로 보면 한국의 개신교는 가난하기 이를 데 없어 밖의 원조가 없으면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딱하기 그지없는 교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세계 최대의 석조 건물을 지은 개신교와 세계 교회 협의회에 하고 싶은 일 한 가지씩을 들고 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돈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손을 내미는 개신교가 서로 다른 종교도, 서로 다른 종파일 수도 없을 텐데 이런 두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한 쪽은 세계 제일이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고, 한 쪽은 어떻게 해서라도 돈 좀 받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부자와 거지의 대조도 이럴 수는 없습니다....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에서 꼭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개신교의 이 두 얼굴은, 그 두 얼굴끼리는 어떻게 서로의 모습을 이야기할지는 몰라도, 밖엔 있는 사람의 눈길에는 아무래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꼴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집안 되어가는 꼴이 형편없이 보여 공연히 옆에서 불안하기조차 합니다. 마구 이야기한다면, 죄의 용서니 영혼의 구원이니 또 하늘나라의 실현이니 하면서도 종국에 가서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교회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개신교의 목표가 아닌가 싶고, 인권이니, 빈민이니, 노동자니, 농민이니 하면서도 밖에서 그 일을 위한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꼼짝도 못 할 새로운 직업이 그러한 기독교 운동의 실상이 아닌가 싶은 씁쓰레함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사람들은 착해서 큰 교회를 세운 그 정성과 그 건물의 아름다움에 깊이 감탄합니다. 사람들은 또 착해서 그릇된 체제에 저항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려는 교회의 몸부림을 볼 때에 그 순교적 정열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착함은 바보스러움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입을 열 때에 세계의 최대 석조 건물은 그 못난 부자스러움과 그 못난 거지스러움을 모두 끌어안은 채로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신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비극일 것입니다.> "못난 부자스러움과 그 못난 거지스러움"이 여전히 한국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의 질문을 통해 우리 교회는 다시 한번 바른 신앙고백으로 새롭게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지금까지 자신의 교훈과 수많은 기적 등을 보면서 예수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혹자는 세례 요한과 같이 청렴하고 정의로운 분이라고, 어떤 이는 엘리야같이 존경받는 위대한 선지자라고, 또 다른 사람들은 고난에 처한 민족과 조국을 위해 눈물로 호소했던 예레미야같은 분으로 부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자들을 향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 신앙고백에 예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면서 그같은 고백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깨우쳐 주시며,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특권과 의무를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통해 볼 때, 먼저 복있는 사람은 바른 신앙고백으로 예수를 바로 알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복되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세주>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고백은 세상을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교회와 성도가 구세주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나라 민족을 위기에 빠지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위기에 처한 가정이나 직장에서 교회와 성도가 구세주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가정이나 직장을 더 어렵고 어둡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없어서는 안될 빛과 소금같은 존재가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예수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을만큼 교회와 성도는 그런 존재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을만한 남편과 아내로 살고 있습니까? 예수믿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을만한 정치가와 기업가 등 지도자로 살고 있습니까? 예수믿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을만한 공무원과 노동자로 살고 있습니까? 아무리 많은 돈도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원할 구세주가 되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크고 높은 권력도 궁극적인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최고, 첨단의 지식이라고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여러분 삶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가정과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구세주같은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는 한 마디로 하늘 나라 청지기라 되라는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란 사망권세를 말하는 것으로 교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않은 생명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말고 생명이 되시는, 구세주되시는 예수를 전하여 세상 부귀영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국의 문을 활짝 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는 권한이라기보다는 책임을 말하는 것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하늘 나라 문을 여는 것이지 닫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 보면, 천국 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3천명에게 예수를 전하여 그들에게 천국 문을 열어 주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고넬료에게도 하늘 나라 문을 열어 준 것을 시작으로 천국문은 모든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활짝 열렸습니다. 초대 교회 예루살렘 공의회는 모든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천국 백성이 되는데 가로막고 있는 율법조항들을 없애버렸습니다.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사도행전 15:14-21)

이제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천국의 문을 열고 천국의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천국 열쇠가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반석위에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몸의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아니고서는 누구나 천국에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대부흥사 무디 (D.L. Moody)의 일화입니다. 한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는데 초만원이어서 16세 미만의 아이들은 입장을 금지하였습니다. 열두 살쯤 된 한 소년이 거절을 당하여 문가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이 때 마차로 무디 선생이 도착하였습니다. 무디는 우연히 이 소년을 발견하였습니다. "너 왜 우니? 집을 잃었니, 배가 고프니?" 야위고 헌 누더기를 걸친 소년이 대답하였습니다. "무디 선생님의 말씀이 듣고 싶은데 아이들은 못 들어가게 해요." 무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나의 외투 뒷자락을 꼭 붙잡고 따라와." 소년은 무디의 외투 자락을 잡고 따라갔습니다. 놀란 것은 성전의 입구를 무사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내려다보이는 강단위까지 을라간 것입니다. 어리둥절한 소년에게 무디가 말했습니다. "저 큰 의자에 앉아 있어도 좋다. 여기에는 내 옷자락만을 붙잡아도 들어올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 후 15년이 경과했을 때 이 시골 교회에 새로 부임해 온 목사가 위의 이야기를 하며 자기를 소개하였습니다. "그 때의 가난한 소년이 바로 저입니다. 제가 바로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실화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놀라운 계획을 진행하신다는 것, 교회는 누더기를 걸친 소년 하나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 천국 문이 좁지만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구세주이십니다. 세상은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구세주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예수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고백하므로 과거의 죄에서 구원받으시고 지금 천국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며 장차 천국에서 영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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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예수를 넘어지게 하지 말라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1-28, 참조 : 막 8:31-9:1, 눅 9:22-27)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네가 복이 있도다"는 주님의 칭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건전하고 건강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자칫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의 신앙생활에 실족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구세주)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메시야와 제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메시야는 크게 달랐습니다. 메시야로서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한 마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께 기대했던 메시야는 당시 로마제국을 둘러엎고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하는 정치적 혁명군 지도자,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한 경제적 메시야, 부정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를 새롭게 하는 사회 개혁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게 되리라며 메시야의 가는 길, 곧 십자가의 길을 가르쳤을 때,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했던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며 예수의 가고자 하시는 길을 극구 만류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자살이라도 하시는 것을 뒤에서 붙잡듯이 예수를 위해, 예수를 보호하려는 듯이 간청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며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셨던 것은 자기가 가시는 길에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자신은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위하여 산다고 하면서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하는 일이 교회를 넘어지게 하거나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주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단'이란 문자적 의미로 볼 때 '반대자'를 말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은 베드로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고 인간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이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세력입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주의 책망을 받은 사람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 예수를 가장 사랑한다고 하는 베드로였습니다. '사단'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학자 오리겐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베드로여, 그대의 자리는 내 앞이 아니고 내 뒤다. 내가 선택한 길로 나를 따르는 것이 그대의 위치이지, 그대가 가고자 하는 길로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그대의 설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사랑하고 위한다고 하면서 예수 앞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의 뒤에서 예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가 가시고자 하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에 자신감을 가지고 찾아왔던 부자 청년에게도,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제자)와 사단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베드로는 부친과 배, 그리고 그물까지 몽땅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으나 사단은 결코 예수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생각을 하여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베드로를 책망하신 말씀은 "내 뒤로 물러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곁에서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뒤로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본심은 예수의 가는 길을 막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의 가시는 길, 곧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 뒤로 물러가라 그리고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로마에 들어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예수를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자신감을 보였던 돈 많은 부자 청년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심 어린 모습으로 예수를 따르지 못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일찍이 베드로는 부친과 배와 그물을 몽땅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 자신이 넘어졌어도 곧 다시 일어나 예수의 뒤를 따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를 따르고자 하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부인해야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지금 까지 자기 중심의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생활을 버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자기 생활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활은 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갇힌 자들을 위한, 곧 이웃을 위한 사랑과 희생,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자요,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의 삶입니다. 드오리아의 소설 중에 영화로 유명해진 <하이눈, High Noon>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보안관은 마을의 법질서를 사수하려 최선을 다합니다. 악당들과의 대결을 앞두고 보안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간청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총 잘 쏘는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은 '이 일이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명도 나서지 않아 결국 보안관 혼자서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일이 나의 일이다'고 믿는 사람이 온 동네에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일 잘 하는 사람이나 능력있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이, 교회 일이 나의 일이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삶이 곧 자신의 삶,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가 구원받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곳은 성문 밖 골고다입니다. 성(城) 안에 부촌(富村)이나 권력의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흉악범에 대한 가장 참혹한 사형이 집행되는 자리입니다. 골고다는 사람들의 멸시, 천대와 버림받는 자립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자리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이름도 빛도 없이 달게 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데는 어떠한 보수도 보상도, 영광도 명예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초청받은 곳은 즐거운 잔치 자리, 누구나 좋아하는 영광과 명예스러운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자리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사람들의 멸시 천대를 받는 자리요, 결국에는 이웃을 위해 죽임을 당하는 희생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부활과 생명이 약속된 자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 생명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지고 가야할 것이 있다면, 십자가뿐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예수를 위해, 예수를 따르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자기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생명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예수께 드릴 것이 있다면 여러분의 생명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입술로는 예수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봉사에는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다는 것은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도, 십자가 없는 봉사, 십자가 없는 사랑, 십자가 없는 전도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생명이 없습니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이나 사회에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이나 사회에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넘어지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시대마다 위기를 극복하는데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인도가 낳은 대전도자 선다 싱의 회심 경험담입니다. 그는 1889년 9월 3일 인도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힌두교도로 선다 싱이 14세 때 세상을 떠나며 훌륭한 종교가가 될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그는 15세 때 이미 어려운 철학이나 종교서적을 읽었고 자기의 인생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며 고민하는 소년이었습니다. 1904년 12월 18일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기독교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기독교에 관계된 모든 책과 성경을 불태우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힌두교에도 기독교에도 해결책이 없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인생은 허무하고 절망만이 그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욕을 하고 새벽 5시 급행열차가 집 옆을 지나가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힌두교의 신이든 기독교의 신이든 대답 좀 해주십시오.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때 꿈인지 생시인지 선다 싱은 예수의 모습이 자기 옆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는 힌두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나를 괴롭히느냐? 나는 이미 너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다. 이제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이다." 선다 싱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과 희생의 십자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체험한 선다 싱은 "오 주님, 이제부터는 오직 주님만을 따르겠습니다."며 신앙고백을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중 도마가 인도 땅에 복음을 전한 이래 영안을 뜨고서 예수를 체험한 사람은 선다 싱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에서 태어난 복음 전도자로서 기념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를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중심으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랑과 희생으로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교회가 넘어지지 않도록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후에 부활 생명이 있습니다. 인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실 그 때에 여러분이 행한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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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39-43, 참조 : 마 27:32-34, 막 15:21-32)

제2차 세계대전 때 악명 높았던 헐레스코스라는 지방에는 6백만의 유태인을 비참하게 집단 학살한 인간 가마솥이 있었습니다. 선민(選民)으로서의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유태 민족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나 개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남녀 노소할 것 없이 가마솥에서 연기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에 위제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죽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나는 원고요. 그는 피고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통탄해 하며 원고의 심정이 되어 하나님을 고소하였습니다. 죽어가는 가운데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당신은 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허용하셨는지요?'라는 말들을 무수히 되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연합군이 유태인들이 죽어갔던 수용소를 탈환하여 수용소의 벽을 검사하다가 벽의 외진 한 구석에 희미하게 씌여진 찬송가의 가사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느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으로 보여지는 찬송가의 한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404장1절]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

[404장3절]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저주와 지옥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글귀를 발견한 그들은 그 벽의 아랫 면을 발견하고는 더욱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의 상태, 지옥의 절규 속에서 무엇보다 더욱 두렵고 안타깝게 그들을 떨게 만들었던 것은 독일의 잔인한 고문과 학살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회의와 갈등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결국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들을 사랑하시며 자신들의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심을 확신하였기에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라고 고백하며 죽어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려고, 그리고 그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 그리고 세리 등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까지도 죄인, 흉악한 강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미리암 르페브르 크루즈(Miriam LeFevre Crouse)는 이 사건에 관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또한 언덕에서 세 사람이 함께 죽음을 맞이했네

하지만 오직 한 사람만 죽었다네

다른 두 사람

강도와 자신이 하나님이신 분,

그 둘이 만났다네

갈보리 언덕에는

아직도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다네

아직도 죄로 인하여 그 십자가들은 높이 서 있는데

하나는 저주하며 죽어가는

멸망받은 자를 품고 있고

다른 하나에는 기도하는 강도가 달려 있네

그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그 옆에 계시네."

너무나 아름답게도 이 모든 일이 다음의 두 행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강도와 자신이 하나님이신 분

그 둘이 만났다네."

죄인된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소망되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은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0-13)

오늘 본문은 복음서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장 극형인 십자가형을 받은 것으로 보아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고 저질러 댔던 흉악한 강도 하나가 예수님의 최후의 순간에 함께 함으로 극적인 구원을 받아 낙원에 들어간 사건입니다. 이 강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수를 만났을 것입니다. 강도가 목격한 예수의 마지막 모습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는 우선 아무런 저항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십자가의 잔인한 형벌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의인의 놀라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사53:7 )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강도는 관원들이 예수님을 비웃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눅23:35)...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그리고 군병들의 희롱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눅23: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눅23: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이에 뒤질세라 자기 동료 강도가 주제넘게 예수를 비방하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눅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 모든 비웃는 소리, 희롱하는 소리, 비방하는 소리 등을 듣고 예수님의 기도 소리를 들은 한편의 강도는 참다못해 자기 동료 강도를 꾸짖어 외쳤습니다.

"(눅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말은 그 강도의 영혼 속에 일어난 혁명적인 삶의 변화를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이웃의 재산과 생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약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았을 흉악한 강도가 이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평생 동료 강도를 향해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며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받는 형벌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참회의 고백과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눅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아마 강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쏟아놓은 참된 회개와 신앙고백일 것입니다. 회개한 강도는 계속해서 예수께 이렇게 부탁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것은 한 순간의 회개와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삶을 약속받은 가장 극적인 삶의 변화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주님은 죽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강도도 마지막 고통의 순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도 그와 같은 상태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저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기도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권능과 권세가 있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실 것을 확신하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호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 십자가 처형을 내린 빌라도 법정보다도, 아니 로마 가이사의 왕좌보다 더 높은 영광스럽고 의로운 최후의 심판보좌가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강도 행각에 대해 십자가 처형을 내린 세상 법정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지만,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기도 내용을 보건대 한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강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께라면 그 최후의 심판보좌에 호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는 예수께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강도에게 그의 지난날의 죄악에 대해 한 마디도 묻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영원한 삶을 약속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어떤 경건한 사람이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당신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해야 하오. 당신은 자선을 베풀어야 하고, 병자를 돌보아야 하며, 죽은 자를 묻어 주어야 하오." 그 사람은 랍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다리를 절룩거리는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순간 그는 랍비의 말을 생각해 내고는 그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거지에게 풍성한 음식을 대접하고는 이로써 첫 번째 요건을 갖출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찬양드렸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걸인은 과식한 관계로 몸져 누웠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은 그를 침대에 눕히고는 약을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랍비의 두 번째 교훈을 생각해 내고는 그것도 이미 이루어졌다고 기뻐했습니다. 밤 사이에 걸인의 병세는 매우 악화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아침이 되자 그 경건한 사람은 그 걸인을 묻을 준비를 한 뒤,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고 기뻐 외쳤습니다. "이렇게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신 주님이여, 찬양받으소서!" 천국에는 누구라도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 행위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강도는 한 순간의 회개와 신앙고백으로 쉽게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 강도는 오직 죽는 순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회개하며 예수 믿은 것 밖에 없습니다. 또한 본문의 이야기는 그 언제라도, 무슨 죄라도 남김없이 용서받을 수 있음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저 우수(憂愁)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죄를 짓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기 죄를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라고 갈파(喝破)한 바 있습니다. 굳이 이 십자가상의 강도들처럼 흉악한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일생은 크고 작은 죄악으로 가득하며 더구나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의 몸 속에는 원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모습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롬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3: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롬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3: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믿고 회개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자신의 죄악이 너무 중하여 도저히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이제 돌이키기에는 너무 많은 죄악의 세월이 흘러갔다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죽음의 일보 직전에 회개함으로써 모든 죄악을 사함받고 천국에 들어간 십자가의 강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어떤 죄를 지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죄를 회개하느냐 하지않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 우편 강도의 회개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그것은 스스로도 고백하였듯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40절). 이제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이 흉악범은 지난날의 끔찍스런 범행을 되돌아보며 눈물겨운 회한에 잠겼을 것이며, 죽음의 터널을 지난 후 자신의 갈 곳은 어디일까에 대한 두려움과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무리들로 말미암아 날로 흉포해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주인의 자리에 올라 돈이나 권력 혹은 무력을 믿고 날뛰다가 급기야는 본문의 다른 한 강도와 같이 죽음의 자리에 이르러서까지 저주만 내뱉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듣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더없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청원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모든 것을 예수께 내어 맡긴다는 뜻입니다. 이 강도는 이제껏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죄의 종노릇하며 흉포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지금 회개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지금 천국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신앙고백으로 예수님을 믿으시고 자신의 삶을 맡기심으로 최후의 심판 때에 예수님의 기억된바 되어 천국에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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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빛과 생명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어떤 청년이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습니다. 왜 자살하려고 했느냐 하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던 것이 다 실패로 돌아가서 그는 좌절에 빠졌습니다. 돈벌이를 해보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과 가족에게서 배신당한 것 같고 버림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의지하고 사랑했던 여인도 그를 떠나 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약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잃어버린 삶의 의욕을 다시 일으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서 살려냈습니다. 그는 친구를 원망하면서 "나는 티끌만큼도 삶의 의욕이 없다. 그러니까 제발 내게 죽음이라는 안식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에게는 삶의 의욕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혼탁한 죽음 속을 그대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인간의 말과 힘으로는 이렇게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을 살려 낼 길이 없다. 오직 생명의 주이신 창조주의 손길이 이 생명을 터치(touch)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그에게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말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기쁨이 없었던 사람에게 기쁨을 주시고, 죽음에 처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거부를 했지만 자꾸만 그 친구가 주장하자 마지 못해서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기도했습니다. 기도하고 있는 동안 그 청년의 마음 속에서는 그 동안 멈추었던 거문고의 모든 줄이 울리면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꺼져 버렸던 등불이 다시 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생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시 삶의 의욕을 찾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순간적으로 창조주의 손이 그를 터치(touch)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입니다. 어둠에 빛이 비추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20장 30,3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공관 복음서(마태 복음,마가 복음,누가 복음)의 주요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인 반면, 요한 복음의 경우는 '영생'(Eternal Life) 즉, 사람들로 하여금 "빛과 생명"이신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이 보좌 주위에서 보았던 네 가지 생물은 각기 사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 복음)의 특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4: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마가 복음은 소의 특징과 비슷하다 하여 소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소는 인간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는 동물로서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은 후에도 그의 가죽과 뼈와 살은 인간들에게 바쳐지는 최고의 희생적인 동물입니다. 이처럼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특성도 생명까지 희생하며 봉사하시는 주님으로 부각되어, 말씀보다는 행동위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였기에 그의 시각으로는 예수께서 소외된 자들, 특히 많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신 점에 감명을 받아 사랑이 넘치는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은 사자로서 비유되는데, 사자는 동물들의 왕으로서 권세를 가진 동물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에서 부각된 예수는 율법을 권위 있게 해석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높은 권세를 가진 왕으로서, 메시야로서의 주님을 강조했습니다. 독수리는 요한 복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물들 중에서 오직 독수리만이 태양을 직시할 수 있으면서도 눈이 부시지 않으며, 요한이 모든 신약 성서의 저자들 중에서 영원한 신비와 영원한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바로 그것에 대하여 가장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책에서보다도 요한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더 가까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빛과 생명이신 하나님을 직시할 수 있는 복음이 바로 요한 복음인 것입니다. 이 요한 복음서를 통해서 빛과 생명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신령한 복음서인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인 20장30,31절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서 그 중요성을 인식합시다. 20장30,31절에는 세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표적'(sign)과 '믿음'(believe),그리고 '생명'(life) 등입니다. 첫째, 표적(sign)이란 단어는 요한이 개성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예수의 권능과 인격을 변증하는 단어입니다. 요한 복음 안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개의 표적이 있습니다.

(1).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표적(2:1-11)

이는 예수의 첫번째 표적으로, 물이 즉각적으로 기쁨의 상징인 포도주로 변화된 질(質)의 변화이며, 예수께서 "질(質)의 주(主)"(the master of quality)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는 무(無)맛의 물같은 인생을 포도주 맛 같은 '기쁨'의 삶으로 변화시키는 권능,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를 믿어 여러분의 삶이 참된 기쁨의 삶으로 변화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신 표적(4:46-54)

가나에서 20마일 이상 떨어진 가버나움에 있는 아들을 고치신 표적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거리와 공간의 주(主)"(the master of distance,or space)이심을 나타냅니다.

(3).38년간이나 반신불수였던 난치병자의 치유 표적(5:1-9)

38년간이나 짊어진 난치의 고통을 치유하심으로 예수는 "시간의 주"(the master of time)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서'(here and now)그의 권능과 능력을 성령을 통하여 나타내시고 있습니다.'지금 여기서' 예수를 믿어 그의 능력과 권능을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4).5천명을 먹이신 떡의 표적(6:1-14)

한 소년의 점심에 불과했던 양으로 부녀자나 어린이들을 제외한 장정만 5천명을 충족시켰고, 그러고도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께서 "양(量)의 주"(the master of quantity)이심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어 부족함이 없이 모든 면에서 충족되시는 참 만족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물위로 걸어가신 표적(6:16-21)

이 표적은 예수께서 "자연법의 주"(the master over natural law)되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6).태어날 때부터의 소경이 치유된 표적(9:1-12)

이 표적은 불가능의 치유라고 하는 측면만이 아니라, 그의 불행이 누구의 죄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운명의 주"(the master of misfortune)되심을 보여 줍니다. 불행과 저주의 인생은 예수를 믿어 행복과 축복의 인생으로 그 운명을 변화받으시기를 바랍니다.

(7).죽은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46)

이는 예수께서 "사망의 주"(the master of death)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고 외치고 있습니다. '사망의 주님'이신 예수를 믿어 생사를 초월한 당당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의 표적은 인간이 도시 어떻게 극복할 수 없는 한계정황이면서 인간사항(the factors of life)에 개입하는 예수의 인류를 구원하시는 요소들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불가능의 범주 하나 하나를 극복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어' 여러분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에 "빛과 생명"의 역사(役事)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믿음'(that you may believe)이란 단어입니다. 위와 같은 여러가지 표적들을 보이신 것은 바로 인류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함'(that you may believe)입니다. 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두 가지,즉 수용이 아니면 거부입니다. 수용 여부에 따라 삶의 중대한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하는 것은 삶의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축복과 저주 등을 가늠하는 중대하고 완전한 생애의 결단(a complete personal commitment)입니다. 역사적 사실인 일곱 가지의 표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전적으로 믿는 결단을 내리도록 하려는 목적인 것입니다. 셋째,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that you have life)는 말입니다. 성서는 언제나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지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하지 않고는 결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표적을 제시함으로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믿어야 할 인격자가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히 '빛과 생명'인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가능의 한계정황이 극복되어 나타난 예수의 표적은 인간의 구원과 생명을 실현하고 충족시키는 예수를 보여주기에 족한 것입니다. '표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고,'신앙'은 초대에 대한 반응이며,'생명'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 진정한 생명은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 그리스도는 생명의 원천으로서 생명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마태 복음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두 주인(two master)은 바로 '빛과 어두움'을 말합니다. 세상에는'빛의 자식들'(the children of light)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어두움의 자식들'(the children of darkness)이 있습니다(라인홀드 니이버). 빛은 절대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어두움은 상대적 개념으로 죄로 말미암아 절망과 죽음 상태에 처해 있는 인간 세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천지 창조시에 제일 먼저 창조된 것은 빛입니다."빛이 있으라"하는 말씀의 역사가 먼저 있었고, 다음 그 빛으로부터 이어져서 모든 식물, 동물 등 생물들이 창조되었습니다. 즉 모든 생물들이 빛에 의존하게끔 만들어졌습니다. 빛을 떠나서는 어떤 생물도 생명을 지탱할 수 없는 것처럼 빛되신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도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없는 생명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어둡고 혼돈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마음속에 밝은 빛을 지니며 자신도 모르게 많은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빛이며 우리는 이미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이게 합니다(창1:1-3).말씀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이 세상은 빛과 어두움으로 나누이게 되었습니다."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서(cosmos)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지 아니함으로(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음)빛의 아들로서 빛의 능력을 되찾을 수 없는 파멸과 어둠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인류 모두의 타락이었습니다. 둘째 아담이 되신 예수께서는 똑 같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며 말씀을 순종하심으로 어둠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빛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여러분의 삶에 빛과 생명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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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말씀이 육신이 되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어떤 사람이 '강아지 팝니다'라는 광고를 내자, 어린 소년 하나가 찾아와서 값이 비싸지 않으면 한 마리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25불은 내야 하는데...."라는 주인의 말에 실망한 소년이 "2불 5센트밖에 없는데요,...하여간 강아지를 보여 주시겠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렴, 보여주고 말고"라고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털뭉치 공 같은 조그마한 강아지 다섯 마리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순간 소년은 강아지들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아저씨! 이중에 한 마리가 다리를 절름거린다고 들었는데 어떤 거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바로 이 강아지가 다리를 절름거리는데 완치가 안 될 것 같구나."주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그 강아지가 바로 제가 원하는 강아지인데, 어떻게 돈을 차차 조금씩 갚기로 하고 살 수 없을까요? "하며 간청했습니다. "평생을 다리를 절어도? "라는 주인의 반문에 소년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한쪽 바지를 걷어올리며 자기의 성치 않은 다리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잘 걷지 못하고 절름거리지요." 그리고는 연민에 가득 찬 눈으로 그 강아지를 쳐다보며, "이 강아지에게는 많은 사랑과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저 역시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았지요. 불구의 몸으로 자라는 것이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니거든요"라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그 말을 듣고 "이 강아지를 가져가거라. 네가 이 강아지를 잘 보살펴 주리라는 것을 알고도 남겠다. 자, 돈은 필요 없으니 그냥 가져가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시는 동정이 넘치는 자비하심도 이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으로 사신 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예수를 곧 "말씀"(로고스)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유대인지만 주후 100년 경에 헬라 도시(에베소)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지대한 관심은 어떻게 하면 헬라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독교와 그리스도를 표현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야)로 증거하는데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이 환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길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유대 사상과 헬라 사상은 둘 다 "말씀"(로고스)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유대적 배경의 "말씀"(로고스)에 대한 뜻을 살펴봅시다. 창세기 27장을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속아 '에서'대신에 '야곱'을 축복한 사건이 있습니다. 장자에게 축복했어야 하는 것인데 '야곱'에게 속아서 그만 차남에게 축복하고 말았습니다.'야곱'에게 축복했던 것을 취소하고 '에서'에게 다시 축복하면 되지않겠느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축복한 말은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없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 그대로 성취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말은 반드시 그대로 실천되어져야하며 실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실수로 서원한 것일지라도 더디 하지말고 속히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신명기 23:21-23,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하면 네게 죄라,...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은 창조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시 107: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시 147:15,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이사야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이 형통하리라"

예레미야 23:29,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이처럼 구약 성서는 어느 곳에서나 이러한 강력하고도 능력에 충만하고 창조적인 "말씀"(로고스)의 개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참조:신약 마태복음 8:5-13,"...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하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로고스 즉 "말씀"은 지혜 문학이라고 불리우는 잠언 등에서는 "삶의 지혜"(보통 사변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과 생활 관리를 위한 실제적인 지혜를 말함)와 "이성"으로 인격화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잠언3:13-26,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로고스"즉 말씀은 '지혜'와 '이성'을 뜻합니다.'지혜'와 '이성'은 거의 같은 뜻입니다.잠언 8:1-9:2에서 "나"라는 말은 바로 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인화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지혜'는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는 "말씀" 즉 '로고스'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창조적인 힘 그리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말씀'을 보기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이 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들 가운데로 오셨느니라."(본문 14절) 다음으로 헬라적 배경에서 "말씀"(로고스)의 개념을 살펴 봅시다. 요한은 유대적 개념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헬라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하게 전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주전 560년 경에 헬라 철학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는 모든 것이 매일 매일 그리고 순간 순간 변한다는(만물의 유전<流轉> 사상) 근본 사상을 말했습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유전하는 상태의 만물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의해 질서가 잡혀있으며 통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물의 체제를 지배하는 것이 바로 "로고스"즉, "이성","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은 목적없이 움직이는 것이 없으며, 모든 생명과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도 목적과 계획, 방안과 설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로고스','하나님의 말씀','지혜','이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바라볼 때 그것을 올바르게 선택하고 그 진리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리고 사람에게 진리에 대한 이해력과 지식을 주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주는 것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이성'인 것입니다. 스토익(stoic)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이 별들의 궤도를 지키게 하는가? 무엇이 조수의 간만을 이루게 하는가? 무엇이 밤과 낮의 질서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가? 무엇이 철(season)이 되어 네 계절을 돌아오게 하는가? " 여기에 대해서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만물은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이성'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로고스'는 이 세상에 의미를 넣어 주는 능력이요 세계를 혼돈 대신에 질서로 만드는 능력이며 세계를 완전한 질서 가운데에서 진행하게 하고 그 진행을 지속시키는 힘이다.'로고스'는 만물에 퍼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수 백년 동안 너희들은 세상을 만드신 능력이요, 세계의 질서를 보존하시는 능력이요, 사람들이 그것으로 생각하고 추리하고 인식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접촉하게 해주는 능력인 '로고스'에 대하여 생각해온 바요, 상상해 왔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이 땅에 내려오신 '로고스'이신 것이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성육신(incarnation)은 죄로 말미암아 혼돈하고 무질서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보좌에 계시면서 인간들에게 그 높은 곳으로 올라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높은 보좌를 내놓으시고 사랑으로 우리들에게 직접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에 간 어느 선교사가 그곳의 중과 함께 길을 가다가 실수로 개미의 집을 밟았습니다. 이것을 본 중은 많은 생명을 죽였다고 깜짝 놀라며 안타까와 했습니다. 선교사는 대단히 민망하여 말하기를 "내가 밟고 싶어서 밟은 것이 아니라 발가락에 눈이 없어서 실수를 한 것이니 정말 미안하오. 어떻게 하면 개미에게 사과를 할 수 있겠소?"라고 물었더니, 윤회설을 믿고 있는 그이기에 다음과 같은 방법을 말했다고 합니다."당신이 죽어서 개미가 되어야겠소." 윤회설을 믿는 우매한 입장에서는 맞는 얘기입니다. 죽어서 개미가 되어야 개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선교사는 중의 대답을 듣는 순간 정색을 하고 "그래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와 이야기할 때는 어린 아이들의 언어를 써야 하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육신이 되어 인간을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내가 처한 형편, 이 현실 속에서 나를 만나 주시기 위해 나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사건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온갖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들 뉴스들 중에는 개인적 혹은 민족적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만한 초미의 관심사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시공간이 시작된 이래로 오늘 본문에서 제공되는 것처럼 엄청난 빅 뉴스는 없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지상에 오셨다는 소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 신문지상을 어지럽게 장식하고 있는 갖가지 인륜 파괴 행위들을 늘상 목격하노라면, 과연 사람이란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에 빠져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각별하신 계획과 사랑은 성육신(incarnation)을 통해 너무도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친히 찾아오신 사랑은 무조건이며 불변적인 은총을 확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요3:16).우리가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오히려 대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사랑의 주도권(initiative)을 쥐고서 친히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인간적 한계를 그어버린채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과 사랑을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인생을 변화시켜 영생을 가진 새로운 삶으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친히 낮고 천한 모습으로 임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하며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 깊이 영접하여 그리스도의 수준에까지 자라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말씀"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여 빛과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육신은 또한 하나님의 겸손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의 고통스럽고 연약한 처지와 형편들을 친히 경험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동정하여 구제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렵고도 귀한 일은 고통받는 자의 처지에 직접 처해보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혹은 중병에 걸려 고통 중에 처해보지 않고 어찌 그런 아픔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죽음까지도 함께 나누시고자 종의 형체(從의 形體)를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허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그리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가치를 높이며 영광과 축복의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과 생명,그리고 사랑'이 충만하시고,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빛과 생명,그리고 사랑'이 역사하는 창조적이고 능력있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 일서 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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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예수는 누구인가?

"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요1: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요1: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요1: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요1: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요1: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1: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요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1:28)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예수는 누구입니까?

마리아:"나는 그 분의 곁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눅10:39)

바리새인:"그는 더러운 여자의 접근을 허락한 인간이오."(눅7:39)

바디매오:"그 분은 나를 보게 했습니다.새 날을 주셨습니다."(막10:51)

강도:"그 분은 나의 최악의 순간에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눅23:43)

가야바:"우리의 전통적인 종교를 파괴하는 자이다."(마26:65)

빌라도:"정말 모를 사람이오.난 개입하고 싶지 않소."(마27:24)

백부장:"틀림없이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오."(마27:54)

거라사의 광인:"그 분은 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막5:3)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 앞에 나온 나다나엘은 한 번도 자기를 본 적도 없는 예수께서 자신의 속 사람의 됨됨이를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가리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 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자기 민족의 훌륭한 영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정치적인 '메시야'(구세주)로 예수를 파악한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 산에서 한 어린아이의 점심 도시락하나로(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군중 5천명을 다 먹이고 남은 조각이 무려 열 두 바구니나 되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요6:1-15) 배고픈 유대인들은 경제적인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나라 안팎으로 경제가 어렵고 세계 정치가 혼란에 빠졌을 때 카리스마적인 구세주(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19세기의 프랑스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던 '나폴레옹 전설'도 과거의 초상속에서 당대의 메시야를 찾으려했던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공화정의 비능률에 진절머리를 내며 나폴레옹1세 시대를 그리워하던 프랑스 국민들은 마침내 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을 황제로 떠받들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재림(再臨)'으로 기대했던 나폴레옹 3세의 등장은 프랑스의 영광을 되살리기는커녕 오히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 수도 파리가 함락되는 치욕을 안겨 주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에 지친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에게 대권을 안겨준 것 역시 시대 착오적인 '메시야 콤플렉스'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소위 '문민 시대'를 나라 안팎으로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정부보다는 국제 무대에서 당당히 '할 말을 하며' 그 위상을 높이고 있습니다. 정권의 창출이 국민으로부터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민 시대의 문민 정부가 우리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의 정부가 아니라면 그것은 영원할 수 없으며 당대 백성들의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의 어느 정부, 어느 나라이든 궁극적인 정부나 나라가 될 수가 없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 시대(이 세상)와 오는 시대(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메시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외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궁극적인 해결의 참된 "길과 진리"가 없습니다(요14:6). 예수는 참된 인간이시며,동시에 참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1:1,14,). 예수는 인류의 역사 이전에 이미 계신 분으로 인류의 역사 시작(알파)과 마지막(오메가)을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예수의 메시야 됨은 유대인이 생각했던 그러한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권능을 가진 메시야임이 여러가지 표적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구약 성서가 약속한 모든 것을 성취하면서 전 인류에게 참 진리와 생명을 부여해 주고 보증해 주는 분으로서의 메시야인 것입니다. 육적이고 물리적인 왕국을 건설해서 그 위에서 군림하는 왕으로서의 메시야가 아니라 전 인류를 포함한, 이 세상의 권세가 침범할 수 없는 영적 왕국을 건설하여 거기서 영생을 즐기게 하는 그러한 왕국을 건설할 메시야로서의 예수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요한복음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께서 창조 이전에 계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다는 것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흔히 "그리스도의 선재"(先在,The pre-existence of Christ)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해서는 성경 여기 저기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예수가 아브라함보다 나중에 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 복음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예수님 자신의 기도문에서도 밝혀졌습니다.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선재를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골로새서 1:15-17,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는 분명히 역사 이전에 계신 분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안으로 오신, 즉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 1:1의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는 곧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참 하나님됨,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만이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인성(참사람되심)과 신성(참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단일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인간성을 무시하고 신성만을 강조하면, 예수는 우리와 관계가 없는 존재가 될 것이며,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에 신성(神性)을 무시하고 인간성만을 강조하면 그의 생애와 부활은 전혀 우리와 무관한 것이 되어 인간에게 궁극적인 생명과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었습니다."(칼케돈 신조) 그러므로 예수가 누구인가를 바로 인식하는 것이 역사를 바로 인식하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되며,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바로 깨닫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미 역사 이전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참 인간되심'과 '참 하나님 되심')은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역사적 소명의 내용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 골로새 교회의 상황을 에바브라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전해진 소식의 대부분은 좋은 보고였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열매가 맺힌 것을 기뻐하고 있으며 영적 사랑의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질서있는 그리고 견고한 신앙에 대하여 듣고 기뻐했습니다(골1:3-8,2:1). 바울은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일어난 이단적 사상에 대하여 교회가 상처받을 것을 염려하는 가운데 기독교적 교회로 보존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기독론적 교리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믿음에 흔들리지 말 것을 권면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골로새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치료보다 예방이 좋다고 믿었습니다. 이단의 악한 사상이 만연하고 번영하고 성장하는 기회를 가지기 전에 예의 주시 파악하여 유비무환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와 주변 교회에 침투해 괴롭힌 이단 사상의 형태들은 학자들에 따라 다양하나 대충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적 경향의 유대인들, 이교도의 철학, 미토라 신자, 가현론, 엣세네 금욕주의, 에비온 주의, 영지주의파 등 이설이 난무하였습니다. 그 시대는 한 마디로 사상적 혼합주의(Syncretism)의 때였습니다. 헬라의 철학과 우상숭배, 동방의 신비주의, 성지 동편에 번영했던 금욕주의, 기타 미신적인 마술 행위에다 유대인의 율법주의 등이 뒤섞여 모여들어 사상적인 일대 혼합주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의 영적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강조되고 있는 골로새서에 나타난 중요한 사상들을 통해 반증적으로 이단 사상들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의 전적 충족성과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15,19,등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 안에 모든 것이 충만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로새서 2:2은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배가 감추어져 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골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골로새서 2:9은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과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고대 세계를 지배한 사상은 별의 영향력입니다. 고대 세계 사람들은 모든 사물도 모든 사람도 천체의 영향력에 의하여 설정된 철두철미한 숙명론에 붙잡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점성술은 사람들을 이 세상의 4대 영력의 노예로부터 해방하는 주문과 비밀지식을 준다고 주장했습니다.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이 이 세상의 4대 영력과 천체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데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그 이상의 것이 더 필요하다고 가르침으로 교회를 혼란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들 거짓 교사들은 악마들의 힘을 이기는데는 예수 그리스도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며 악마를 처치하는 데는 예수 그리스도만으로는 불충분하여 무엇인가 다른 권세나 지식의 원조가 필요하다고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이단자들은 복음의 평이함을 들어 좀 더 치밀하고 깊이가 있는 지식(gnosis)을 더 할 필요가 있다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만으로 인류의 영육간의 모든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시기에 넉넉하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천지창조 사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16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골로새서 1:17에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를 창조할 때 성부 하나님이 수단이 되었습니다.

"(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 혈과 육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22에서 그의 육체 안에서 구속의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골로새서 2:9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의 형태로 그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 만큼 진실로 그리고 참으로 인간의 혈과 육을 가진 분이십니다.

"(골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이제 영지 주의(Gnosticism)를 간단히 살펴봄으로 위와 같은 기독교 사상을 강조하고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지주의는 A.D.1-3세기에 널리 퍼져 있던 일정한 종교 또는 철학 운동을 말합니다. 이 사상은 인류는 무지한 망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영지(Gnosis)를 통하여 영적 해방에 도달한다는 것, 오직 영지를 통하여 신성과 자신의 일체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영지주의는 물질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 가정을 설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제1은 영만이 선하고 물질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악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선하고 신적 영역에 있고, 아울러 물질은 악하므로 물질적 요소로 구성된 이 세상은 모두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2는 물질은 불멸이고 우주는 무에서 창조된 것(정통신앙)이 아니고 이 불완전한 물질이 이 세계가 창조될 때 원료가 되고 소재가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는 건전한 사도의 가르침을 이교 철학과 뒤섞은 것이거나 심지어 점성술과 희랍의 밀의종교까지도 뒤섞어 놓은 것으로 생긴 탈선적 이단으로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같은 신학자들로부터 정죄받았습니다. 영지주의가 기독교 신앙에 끼친 좋지못한 영향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첫째, 창조 교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영지주의는 "만약 하나님이 영이시라면 하나님은 온전히 선하다.그러나 하나님은 불완전하고 악한 물질을 다치거나 그것을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가 아니다. 물질 창조주는 저급한 신성인 데미우르고스다."라고 주장하며 기독교의 창조신과 유출물 동일시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들 이단 사상을 대항하여 주장하는 창조때 하나님의 대행자가 된 분은 어떤 무지하고 대적하는 힘이 아니고 아버지된 하나님을 완전 무결하게 알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골1:14-17).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교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물질이 전적으로 악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육과 혈의 몸을 가질 수 없다라고 영지주의자들은 반박하였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이원론을 가지고 예수에게서 인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예수를 인류의 구주로 하는 것을 전연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의 육과 혈을 가진 몸을 강조하고 예수가 자기 몸을 통하여 인류를 구했다고 주장하는 것(골1:20-23)은 바로 이같은 영지주의 사상에 대항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셋째, 윤리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만일 물질이 악이라면 우리의 육체도 악이 됩니다. 우리의 육체가 악이라면 다음 중 하나의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가).우리는 육체를 억누르고 모든 욕구와 원망을 단절하기 위하여 엄격한 금욕주의의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육체가 악이라면 육체는 계속 억압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골로새서2:16,2:21 등을 보면 "붙잡지도 말라","맛보지도 말라","만지지도 말라" 는 표어가 있는데 이는 여러가지 종류의 의식과 규정과 습관을 강요함으로서 기독교인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이단 사상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그러나 육체가 악이라면 엄밀히 말해서 전연 반대의 견해를 취하는것이 가능합니다. 즉, 육체가 악이라면 인간은 육체로 아무 짓을 해도 상관이 없게 됩니다. 영만이 중요하고 육체는 조금도 중요치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식욕도 욕망도 채울 수 있는 대로 만족케 해도 좋습니다. 육체로 무엇을 해도 상관없고, 만족시켜도, 시키지 않아도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금욕주의의 결과 (가)를 낳을 수도, 어떤 부도덕한 것도 정당화시키는 도덕 폐기론의 결과 (나)를 낳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들 영지주의 사상은 기독교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순결과 정절에 대한 관심을 버리게 하고 육체적 신체적인 죄를 경하게 생각게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골3:5-8). 영지주의는 인간의 구성요소 중 육적 부분은 부정하고 영에 해당하는 부분인 엘리트(Elite)만을 인정하며 그를 독자적인 인간의 본체로 인정해 줍니다. 이들 사상은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영적인 인간은 지식(gnosis)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상 우리가 살펴 본 바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은 영지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기독교를 철학및 신지학으로 변화시키려 하였던 것입니다. 즉, 단지 하나의 종교 사상이나 철학으로 전락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성공했다면 기독교 신앙은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울 서신으로 말미암아, 아시아의 기독교를 멸망시키고 세계에 있는 전 교회의 신앙에 치명적인 손해를 주었을 어떤 풍조를 방지한 것입니다. 옛날 희랍. 로마 시대는 영웅 숭배 시대로서 훌륭한 지도자란 절반쯤은 사람이고, 절반쯤은 신에 가까운 특수성을 지닌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이며 완벽한 지도자는 참 인간이시며,참 하나님이신 예수뿐이신 것입니다.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예수의 참 인간되심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 의미를 바로 깨닫고,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아야할 것인가를 알아 삶의 가치를 창조하는 영광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참 하나님 되심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과 영원함, 그리고 역사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바로 인식하여 역사 속에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하나님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여러분에게는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예수가 여러분의 영육에 아울러 구세주(메시야)되심을 믿으시고,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영원한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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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하나님의 어린양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요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요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텍사스에 돈 많은 목장주가 세계 여행을 하며 영국의 버킹검 궁전 앞까지 왔습니다. 그는 문지기 한테 1,000불짜리 지폐를 주면서 "이 정도면 들어가지?"하며 물었습니다. 문지기가 하는 말이 "왕궁으로 들어 가는 것은 돈을 주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 초청을 받은 사람은 1불도 없어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증거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공적이 없어도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드>라는 작품 속에 맥베드가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는데 아무리 손을 씻고 증거를 인멸해도 마음 속의 살인 죄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이 의사가 짐작을 하고 이 병은 자신이 고칠 병이 아니니 스스로 마음에서 고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오 ! 아라비아의 향수를 다 가지고도 이 손 하나 말끔히 할 수 없는가? 이것을 파내 버릴 망각제는 세상에 없는 것일까?' 하고 탄식을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맥베드의 입을 통해서 '죄를 씻을 것은 지구상에 없다. 자기 마음으로도 안 되고 무엇으로도 안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마음속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되시는 예수의 피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양심의 가책이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씻음을 받을 때 우리는 양심의 평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틴 루터가 체험한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한 때 악마가 나타나서 루터의 죄목을 썼습니다. 두루마리에 써 가지고 왔습니다. 그 때 예수의 피 묻은 손이 나타나서 그것을 지웠습니다. 루터는 잉크병을 던지면서 '예수의 피, 예수의 피'라고 외쳤습니다. 요한 일서 1:7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본문 29절)이라는 구절에서 '어린양'은 이스라엘민족의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에 사용되었던 '희생양'을 말합니다. 출애굽기 12:11 이하에 유월절에 대한 내용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요셉으로 시작된 야곱 가족의 애굽 이민은 불과 그의 가족 70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400년이 흐르는 동안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1:7)고 했습니다. 이에 애굽 왕은 두려워하여 무거운 짐을 지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해 갔습니다(출11-14).날이 갈수록 심한 학대속에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출3:7-12)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모세를 애굽왕 바로에게 보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왕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1 이하) 그러나 강팍한 애굽의 바로왕이 그냥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줄리 없었습니다(출7:14).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의 모든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개구리가 온 지경에 가득한 재앙,집집마다 파리떼가 가득한 재앙, 애굽에 속한 모든 생축 몰살의 재앙,독종의 재앙, 우박의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의 재앙 등 여러가지 재앙들을 내렸습니다. 그래도 애굽 왕 '바로'는 더욱 완악하고 강팍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최후의 재앙을 선포했습니다. 즉 장자 죽음의 재앙이었습니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출11:5-6)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재앙이 시작되는 달을 일년 중 첫 달로 삼고,이 달 열흘에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로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서 그 재앙을 면하라고 말씀하시며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라고 하셨습니다(출12:1-11).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출12:13-14)

이 재앙은 이스라엘 사람이든 애굽 사람이든, 짐승이든 사람이든 무론하고 애굽 전역에 내리는 것으로서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없으면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애굽 사람들 중에서도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서 하나님을 섬기기 않으면서도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무사히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재앙에 견디지 못하고 그 완악하고 강팍한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役事)하신 그 과정에서 "어린양의 피"는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7:11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 것은 상징적으로 죄의 종노릇한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재앙에서 면제받을 수 있게 한 "어린 양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의 피"를 보시고 죽음의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1-14)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5:7에서 예수를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표현하며, 베드로 전서 1:19에서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시대에 온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아침 저녁으로 태어난지 1년되는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단에 어린양의 피가 계속해서 불타야만 그들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죄 없는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때문에 "어린 양의 피"가 있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이 우리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사함을 받고자 희생시킨 "어린 양"은 "점도 없고 흠 없는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점도 없고 흠 없는" 그야말로 '죄 없는 양'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점도 흠도 없는",죄가 하나도 없는 아주 의로운 "어린 양"이십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희생당하심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그 가 흘리신 "어린 양의 피"가 능히 주홍 빛 같은 죄일지라도 양털같이, 흰 눈 같이 깨끗하게 씻어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모세를 향해 원망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려 수 천명씩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지도자로서 하나님께 나아가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끝에 매달고 이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대에 높이 매달린 구리뱀을 그저 단순히 쳐다보기만 하면 과거야 어떻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도 그 말을 믿지 못하고, 그냥 쳐다 보기만 하면 될 것을 순종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장대에 높이 매달린 구리뱀은 상징적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다시말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보기만 하면 산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길은 오직 예수 믿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이 구원받는 방법은 오직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밖에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이 가득한 곳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사망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5:4-8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고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만이 세상 모든 것을 이기는 권세과 권능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세상 세력들을 상징하는 여러 동물들, 즉 사자, 표범, 용, 뱀, 곰, 등 짐승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짐승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밖에는 없음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계13:1-14:5). 그래서 요한 계시록5:12-13에서는 어린 양의 권세에 대한 찬양의 노래가 나오고 있습니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던 나라들은 애굽을 비롯하여 블레셋,아말렉,모압,아람,에돔,미디안 그리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와 바벨론 등이 그 대표적인 나라들입니다. 특히 이들 중에 이스라엘에 큰 해를 끼친 나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 그 나라들 중에 오늘날 두각을 나타낼 만한 정치, 경제적 능력을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나라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의 결과가 어떠함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계17:3,4에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이 등장하는데 이는 모든 세대에 일어날 수 있는 반기독교적인 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린양을 대적하는 반기독교적인 세력(Anti-Christ)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특히 "일곱 머리"의 일곱이란 수와 "열 뿔"의 열이란 숫자는 완전수로서 그들의 능력과 권세가 매우 강함을 암시합니다(계13:1-3). 이 대적들이 성도들에게 큰 위협이 될 뿐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계17:13을 보면 반기독교적 세력들이 자신들의 악한 의도를 짐승에게 부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즉 궁극적으로 악한 일을 행하는 주체가 짐승, 곧 사탄의 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그 짐승을 통해서 반기독교적 활동을 하게 될 것이며 그들은 그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한 마음,한 뜻이 되어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대적할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다른 일에는 한 뜻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일에 있어서는 함께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원수 사이였던 빌라도와 헤롯이, 그리고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예수를 죽이는 일에 하나가 되었던 사실은 반기독교적 세력이 그들의 이해 관계를 떠나서 악한 일에 한 뜻이 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악한 권세는 일시적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지만 결국은 어린양이 이기실 것이며, 따라서 그와 함께 있던 자들,"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그 이마에 씌어져 있는 자들(계14:1)","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 즉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들"(계14:4-5) 이 마침내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아갈 때 오직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이름만을 가지고 나가 승리했던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만을 가지고 나아가야만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물밀듯 밀려오는 세상 죄를 이기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되시는 예수의 피 권세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보혈이 흐르는 곳에 항상 승리가 있습니다. 죄의 권세는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를 진실로 믿으시고 그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우신 피가 여러분의 심령에, 가정에, 그리고 이 나라에 차고 넘치게 흘러 성결의 능력과 더불어 승리의 권세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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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요4: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요4: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요4: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요4: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요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요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요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요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요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4: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요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4: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요4: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1967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는 세계에서 4,000 여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모여 '정신 치료에 있어서의 인간의 가치'라는 주제로 세계 정신과 의사 대회가 열렸습니다.이 대회에서 3명의 강사가 차례로 주제 발표를 했습니다. 첫번째 강사는 롬(H.P.Rome)박사로,그는 인간이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길은 인간의 마음 속에 '믿음'이 있을 때라고 했습니다.그에 의하면 인간은 믿음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 강사는 잰즈(H.W.Janz)박사였습니다.그는 인간의 가치를 '소망'속에서 찾았습니다.그는 인간의 마음 속에 '소망'이 있을 때 인간으로서의 긍지와 삶의 보람과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세번째 강사인 시친(C.A.Sejuin)박사는,인간은 누구나 상처받은 마음을 갖고 살고 있다고 하면서,그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인간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며,좌절과 회의의 구렁텅이에서 탈출할 수 있는 끝없는 능력을 공급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주제 발표를 한 이들은 신학자도 종교학자도 아닌 정신과 의사들입니다.그들이 찾은 인간 가치의 회복의 길이 믿음,소망,사랑이었던 것입니다.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인간 회복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의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심각한 심령의 갈증을 겪고 있는 파괴된 인간성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일시에 그 갈한 것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사랑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여인에게 참 생명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목마른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 4:13-1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 7:37-39)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6-7)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는 곧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자면 누구든지 값없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예수 없는 인생은 사실 죽은 인생입니다.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는 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천국문에 다다랐을 때 베드로가 우리를 맞으러 나와서 우리에게 종이와 연필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자,열 개의 문제를 내겠다.만약 그 중에 일곱 개 이상을 맞추면 그 사람은 천국으로 들어간다.하지만 네 개에서 일곱 개 사이를 맞추면 연옥에서 기다려 주어야겠다.만약 세 개 이하로 맞춘다면 미안하지만 즉시 지옥행이다." "자,준비는 되었겠지? 일 번 문제, 당신은 어떤 세례가 옳다고 믿는가? 침례인가? 재계인가? 아니면 관수인가? 또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성자의 이름만으로 받는 것이 옳은가? 침례는 세 번 물에 잠기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거룩한 깃발 밑으로 통과하는 것이 옳은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줄로 이으면 된다."이제 큰일났습니다! 옆 사람의 것을 컨닝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양쪽을 살펴보니 한쪽에는 구세군 출신이 앉아 있고,한쪽에는 영국 국교회 출신이 앉아 있는데,당신은 침례교도거든요.그러니 컨닝을 해봤자지요.세 사람 모두의 답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매사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례를 어떤 방식으로 베풀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와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교리시험 따위가 없습니다.베드로가 칠판과 종이,연필을 가지고 기다리고 서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대신 베드로는 청진기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리 시험을 치루기 위해 책을 잔뜩 짊어지고 천국문에 이를지도 모릅니다."베드로 선생님,시험을 보려고 하는데 책상이 어디 있나요?" 하지만 베드로는 들은 척도 하지않고 여러분에게 청진기를 들이댑니다."두근 두근 두근 두근.""좋아,통과! 천국에 들어가도 돼." "저,베드로선생님,감사합니다만 그러면 시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됐어,심장이 뛰는 걸 보니 살아 있군,그거면 됐어." 구원이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진 것을 아노라."(요한1서 3:14)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지 "올바른 교리가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생명입니다!.

예수가 사랑입니다!.

예수가 없는 곳에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가 없는 곳에 사랑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각양 각색 크고 작은 갈증을 지니고 삽니다.특히 생존 경쟁이 치열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의 현실적 부귀를 비교하여 상대적 목마름에 시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갈증은 바로 영혼의 갈증이라 하겠습니다.수백 세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지상의 갖가지 쾌락의 잔들을 홀짝거려 오면서 그것들에게서 궁극적인 즐거움을 발견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악의 즐거움은 잠깐 동안"(시 90:5,벧전 1:24)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시90: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그렇습니다.세상에 속한 즐거움의 꽃들은 오늘 피었다가 내일 시들어 죽을 것들입니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성과를 이룩하여 부와 명성과 권력을 손에 넣었습니다.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이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이는 마치 망망 대해에서 표류하는 자들이 주위에 그렇게도 많은 바닷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만약 그들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바닷물을 마신다면,오히려 갈증은 더해지고 종국에 가서는 목이 타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참된 만족은 없을까요? 사람이 영원히 세상을 헤매며 신기루를 쫓다가 실망만을 계속 되씹어야 할까요? 아닙니다.인간의 마음을 참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여러분에게 생명의 물을 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시며,그 분이 주는 물을 마신다면 다시는 목마름이 없을 것입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입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성령을 베풀어 주십니다. 중국의 진시왕은 불사약을 구하려고 천진난만한 동남동녀 500명을 영주 삼신산으로 보냈습니다.불교에서 정신 수양을 통하여 인생사에서 오는 108번뇌를 물리치고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려 한 것도 영생의 욕구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영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 은혜는 믿음으로써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마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께서 자신을 밝히 드러내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영생의 생수를 마실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어느 한 민족이나 일단의 사람들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요3:16). 예수님은 이러한 그의 사랑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과 천대를 받아야 했던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친히 생수를 주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은 모든 죄인들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수"를 값없이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수천만금의 재산이 있어도,달나라를 가는 지식이 있어도,천하를 호령하는 권세를 가졌다해도,절세 미인이라할지라도,제아무리 많은 선행을 쌓았다해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생명,구원,사랑을 값으로 환산하여 파시지 않습니다.하나님은 생명을,사랑을 거저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리스도와 그 분이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에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명수"를 마시게 되며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죄의 생활에서 돌아서는 순간,그 모든 마음을 예수께 드리는 순간,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생명수이신 예수께서 주시는 '사랑의 생수'를 받아 마셔야 합니다. 한 번도 만난적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든 과거를 다 아시는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도 다 알고 계십니다.따라서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으로부터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여인에게 깊은 사랑을 베푸셨던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회개하는 모든 자들을 당신의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주시며,아울러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주님밖에는 살 소망이 없음을 알고 자신의 죄인됨을 솔직히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타임지에는 한 기업가의 인생이 한 페이지 전체에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그는 아리스토틀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라는 사람으로서 타임지는 그를 '우리 시대의 마지막 재계 거물들 가운데 하나'로 평하고 있었습니다. 오나시스는 겨우 17세의 나이에 고국 그리이스를 떠나 한 몫 잡아보려고 3등 선실에 몸을 싣고 아르헨티나로 갔습니다.단돈 100달러로 시작한 것이 4년 후 그가 21세가 되었을 때에는 백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그는 냉정하고 단호한 사업꾼으로 평판을 날리게 되었습니다.그는 부와 그 부가 가져다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타임지 기자는 오나시스의 말을 직접 인용하였습니다."요즘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 돈 밖에 더 있습니까? 지금은 돈 있는 사람들이 왕족이고 귀족이라구요." 그러나 아들 알렉산더가 비행기 사고로 죽는 일이 발생하자 오나시스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습니다.그의 한 측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는 하룻밤 사이에 폭삭 늙어버렸어요, 갑자기 노인이 되버렸다구요." 프랭크 브래이드(Frank Brady)는 자신의 책 <오나시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아들의 죽음과 함께 그 역시 죽었다." 오나시스는 계속 신경장애로 고생하다가 2년 후 딸 크리스티나 혼자서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그에겐 부는 있었지만 사랑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갈증을 영원히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더러워진 인간의 사랑을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깨어진 인간의 사랑을 재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예수를 진실로 믿으시고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신 행복하신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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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나의 양식은 무엇인가?

"(요4: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니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요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4: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4: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요4: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5)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4: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4: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요4: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요4: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요4: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요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마4:4)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합니까? 사람에게 있어서 먹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먹지 못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먹을 양식을 구해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드리면서 "선생님,시장하신데 진지를 드십시오."(본문31절)하고 말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본문32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영적인 뜻을 알지못하는 제자들은 "우리가 양식을 구하러간 그 동안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습니까?"(본문33절)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본문34절)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삶의 "양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뜻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방탕하고 타락한 한 여인을 대화를 통해서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두고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본문32절)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께 있어서는 하루 세끼 식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필수적인 일이었다는 뜻입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위대한 요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예수님은 과거나 미래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바는 결코 행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원하신 바를 행한 유일한 분이십니다.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헬라어,아포스텔레인<apostellein> 또는 펨페인<pempein>)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요한 복음에서는 무려 44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예수님은 명령받은 사람이었습니다.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보냄 받은대로 가는 사람"입니다.하나님께서 보내시는 환경이 어디든지,만나야 할 대상이 누구이든지,전해야 할 내용이 무엇이든지 순종하면서 가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하나님의 사람',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요나처럼 불순종한 예언자도 있고 시드기야처럼 거짓 영에 사로잡힌 예언자도 있지만(대하18장),무명 예언자로부터 대 예언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보내심에 철저히 순종한 예언자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자아인식'이 확고한 사람입니다.하나님께 부름 받음은 "소명"(calling)의 문제요,하나님에 의해 보냄 받음은 "사명"(mission)의 문제입니다. 자기를 참으로 인식한 '하나님의 사람'은 '소명의식'과 '사명의식'이 뚜렷한 사람을 의미합니다.이사야가 그 전형적인 인물입니다(사6:1-8,60:1-3).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늘 아버지에 의해 세상으로 보내심 받은 자임을 늘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요7:28-29)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때 그는 최초의 사도로 이 땅에 오셨으며,보내심 받은 자로서 자기를 보내신 천부(天夫)의 뜻을 부지런히 펼쳐 보이면서 살아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보냄 받은 자,곧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야 할 생의 전형은 바로 주님 자신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은 자이며,동시에 사람들을 위해 보냄 받은 자입니다.그리스도인은 천국으로 부름을 받은 자이며,동시에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을 살아감에 있어 우선적인 것이 바로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자임을 깨닫는 철저한 '자아인식(self-perception)'입니다. 한 나라의 대사가 그를 파견한 최고 통치자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듯이 주님에 의해 세상 깊숙히 보냄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보내신 그 주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 보냄 받은 목적을 성취하기위해서는 '자아인식'만으로는 부족한 것입니다.정확한 '상황인식'이 뒤따라야만 합니다.누가복음10:3에,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고 했습니다. 자신이 보냄받은 환경이 "이리 떼 속의 양"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상황인식'(context-perception)입니다.그리스도인이 세상 가운데 처한 환경은 일면에서 보아 최악입니다.탐욕스런 이리떼들 속에 순진무후한 양떼로 있는 것이요,강자들 틈바구니에 약자로 끼어 있는 것이요,박해자들이 날뛰는 중에 순교자로 엎드린 것이요,다수자들 속에 소수자로 눌려 있는 삶의 정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라도 탐욕스런 강자의 주 공격대상이 됩니다.그러나 양은 이리와 동화될 수 없습니다.양과 이리는 존재가 다릅니다.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위치란 마치 모두가 한 모양인데 비해 다른 것으로 굳게 버티는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함'인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물위에 뜬 기름처럼,닭무리 속의 학처럼,이리 가운데의 양처럼 결코 조화될 수도, 일치될 수도 없는 위치인것입니다(고후6:14-16).'대나무는 꺽이어도 그 색을 변치 않으며,구슬은 깨어져도 그 빛을 잃지 않음'같이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극한적 삶의 정황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본색,그 근본되는 빛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해야 하는 '목표인식(goal-perception)'이 분명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5-6에,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잃은 버린 양"에게로 보냄 받았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목표인식'인 것입니다.하나님 자신이 친히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시74:1)"잃어버린 자"(렘50:6)를 찾음같이(겔34:16) 그리스도인은 "빚진 자"(롬1:14)의 자세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다"(고전9:16)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잃은 양",사마리아의 한 여인을 찾아 물을 구하며 대화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수행해 나가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은 전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는 소위 '내용인식'을 가져야만 합니다(content-perception).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전해야 할 내용은 바로 '복음' 그 자체입니다.예수가 바로 복음입니다.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요(고후1:10),믿지않는 자에게는 심판(요1:18)인 것을 전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시고 명하신 바를 바로 깨닫는 것이 '내용인식'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하나님의 사람'은 세움받은대로 일하는 사람입니다.하나님께서 어느 자리에 세워 주셨든지 세워 주신 자리에서 할 일을 다 하는 사람입니다.성경에는 세움을 받은 자리에서 벗어나 분수에 지나도록 행한 사람들도 있으며(민16:1-11),아예 일하지 않은 사람도 있으나(마25:24-30)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충성껏 일한 하나님의 일군들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살고,하나님의 일에 죽는 '하나님의 일의 사람'입니다. 요한 복음 8:29-30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고 했습니다. 자신을 어떠한 자리에 세워 주셨는가를 깨닫는 것을 '사명인식(mission-perception)'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보냄 받은 자임을 깨닫는 것이 '자아인식'이요, 자신이 보냄 받은 곳의 환경이 "이리떼 속의 양"임을 깨닫는 것이 '상황인식'이고, 자신이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냄 받았음"을 깨닫는 것이 '목표인식'이며, 자신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바를 깨닫는 것이 '내용인식'이라면, 자신을 어떠한 자리에 세워 주셨음을 깨닫는 것은 '사명인식'인 것입니다. 이 '사명인식'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부적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냄 받은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정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욥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23:12)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서 묵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만 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요한 복음6:27-29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상에서의 지위나 부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므로 그 뜻을 성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평화를 향한 오직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이땅의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과 이 나라에,그리고 세계에 참 평화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행복과 축복을 향한 오직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반대하고 인간적인 무지에 제한되어 있을 때 행복과 축복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행복과 축복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신28:1-14). 능력을 향한 오직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우리 멋대로 행동하게 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힘 외에는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게 됩니다.그러므로 파멸은 불가피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 능력 안에서 행하게 되고 따라서 승리가 확실케 되는 것입니다. 능력있는 삶을 원하십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한 순간에 펄럭이면서 타오르다가 금새 꺼져버리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그것은 바로 본질이며,존재이며,원천이며,핵이며,힘이며 움직이는 그의 생명의 능력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여러분은 복잡하고 험난한 인생 살이에 지쳐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포기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루 하루 연명하며 보다 안락한 내일을 위해 재물을 모으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삶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삶은 될지언정 참다운 삶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 존재입니다.그리고 살아도 그냥 자의대로가 아니라 영원한 하늘 나라와 숭고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고귀한 존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롬14:8)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성취하는 일을 위해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사명자의 삶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는 여러분에게 평화와 축복과 능력의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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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5: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요5: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요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요5: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5: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요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요5: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5: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5: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요5: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5: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팔복에 한 개의 축복을 더 약속하였습니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믿음'과 '축복'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입니다.'축복'의 헬라어는 '마카리오스(makarios)'인데 이는 '행복하다'는 뜻입니다.이 단어는 내세적인 용어가 아니라 지금 현세에서의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예수를 믿는 사람은 오는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믿음'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아 행복하고 축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미국의 코메디언이며 영화 제작자인 우디 알렌(Woody Allen)은 "하나님이 내 이름으로 스위스 은행에 백만 달러를 예금해주시면 믿기가 쉬워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이러한 믿음은 그 뿌리가 약해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7개의 표적(sign)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이같은 표적을 행하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 사마리아 여인(요4:4-38)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습니다.그리고 그녀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듣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많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4:39-45).왕의 신하도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음으로 병들어 죽게된 아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요4:46-52).이들은 모두 유대인과 비교하면 이방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들,그것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커녕 믿기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5:1-47).예수님의 고향 갈릴리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요6:1-15). 구약 성경의 '욥'은 하나님이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가실 때 의심과 고민도 했지만 더 확실한 믿음을 굳혔습니다.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빼앗아가려 하실 때 그 순종과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이 믿음이라면 빼앗겨도 그 믿음은 변치 않는 것입니다. 방송인 데이빗 브린클리(David Brinkley)씨는 "믿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던진 벽돌에 걸려 넘어가도 그 벽돌을 주워 기초돌을 삼고 집을 짓기 시작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이스 북부 산악지대에 가면 큰 수도원 20개가 관광지가 되어 있습니다.모두 1천년 전에 건축된 것으로 그 당시 기독교는 열렬한 기도운동이 일어났고 양적인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예수 잘 믿는다는 교인들은 모두 직업이나 가정 등 사회적 책임을 이탈하고 산에 들어가 금식철야기도회를 가졌고 대규모의 수도원도 모두 높은 산 꼭대기에 지어 하나님과 가깝게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도사의 시대는 기백년도 가지 않아 쇠진하고 오늘날 그 웅장한 기도원들은 옛 건축양식을 보는 관광지에 불과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열렬한 기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높은 산의 기도원이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여하한 노력으로도 하나님께 이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방법입니다. 익살맞은 K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어떤 청년이 와서 토론을 하자고 덤볐다고 합니다. "목사님, 기독교는 불필요합니다.2천 년 동안이나 전도했다지만 이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나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K목사님이 답변했습니다. "물은 이 지구상에 수십만 년 동안 있는데 당신의 와이샤쓰 깃에 때가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이오?" 물이 있어도 빨지 않으면 때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이 이론에 머물러 있는 한 나에게 도움이 안됩니다.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그래서 믿음을 갖는 것은 어렵습니다. 옛 소련의 우주항공사 티토브(Titov)가 우주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나는 하나님을 찾았지만 우주에는 하나님이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우주여행을 하고 귀환한 미국 항공사 맥디비트(McDivitt)는 "하나님의 모양을 볼 수는 없었다.그러나 천체의 신비 속에서 나는 창조자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함을 믿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우주를 보아도 육안으로 보는 자와 영의 눈을 뜨고 보는 자는 차이가 나는 법입니다. 믿음은 영의 눈을 뜬 자만이 가지게 됩니다.성경은 육신의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닙니다.영의 눈으로 믿음을 가지고 읽을 때만 성경이 됩니다.하나님은 인간의 논리나 과학의 방법으로 증명되는 존재가 아닙니다.증명의 대상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실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떳떳하게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수 많은 모래를 삼켜야 영롱한 진주가 탄생하며 여러 번의 정련 과정을 거쳐야 번쩍이는 순금이 나오듯,숱한 우여 곡절을 거친 연단된 믿음의 소유자가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이루는 데 장애물들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악한 마음,탐욕,방탕,시기심,무절제,성급함 등과 같은 죄악들이 있습니다.그러나 현대 사회에 있어서 구조적이라 할 수 있는 더 커다란 믿음의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 중심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우리는 사람을 더 많이 바라보면 볼 수록,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덜 생각하며 덜 중하게 여기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치명적이고 위험한 장애물은 무엇보다도 첫째,인본주의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흔히 현대 문화를 이룬 업적을 찬양하고 획기적으로 발달한 과학기술문명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뿐만아니라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가 각 분야에 걸쳐 확대됨으로써 인간 개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풍부한 물질 문명의 혜택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이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고 또 모든 면에서 세련되고 우아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우리들은 더욱 교양있고 예절이 있으며 남에 대한 동정심이 많아졌고 감수성도 예민해졌다고 생각합니다.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구시대의 진부한 생각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모든 면에서 우리들은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남에게 친절히 대하려고 합니다.우리들은 서로 싸우는 것을 싫어하며 상대방에게 고통과 고민거리를 주기 싫어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상호 협동하는 것을 존중하며 무뚝뚝하고 노골적인 행동이나 말을 싫어합니다.우리는 명예를 추구하고 신사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며 그와같은 사람을 존경하고 또 자신이 기꺼이 그러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명예로운 시민,자부심과 긍지를 지닌 국민임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문화와 사회에서 통용되고 존중되는 생활과 사고방식에 신경을 쓰는 한, 그밖의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해져 가게 됩니다.혹시 우리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이나 위신 등이 실상 우리의 신앙이나 영적 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우리 자신만을, 즉 인간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풍조에 적지않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자신도 모르게 그와 같은 인본주의 물결에 쉽사리 쓸려가고 동화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인본주의의 본질을 말한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며(마6:5),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어서(마6:2) 겉은 깨끗하고 고상해 보이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것이며(마23:25),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것입니다. 다음, 믿음의 장애물로는 세속화주의가 있습니다. 현대와 같이 결혼의 신성함이나 정조의 고귀한 가치가 무시되는 시대는 없었던것 같습니다.겸손의 덕과 청렴의 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무엇인가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 또 이것을 유모어 있게 잘 할 때 이런 사람은 많은 대중들의 인기를 얻으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가장 무서운 우상은 절대적인 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 혹은 세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를 일반화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이 그토록 경시되고 독선적인 풍자나 은유를 위하여 인용되며,하나님의 이름을 그토록 방약 무인하게 들먹거리며,주일성수가 그토록 뻔뻔스럽게 와해된 시대가 언제 있었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이 심각하게 무시당하고 있으며 유구한 역사를 가지는 기독교의 고상한 원리들이 이렇게 경멸시된 때는 일찌기 없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더욱 더 자신만을 존중하며 하나님을 경시하고 있으니,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도리어 자신을 합리화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하며 거룩한 것을 세속화시키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속화주의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사47:10-11)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47: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사47:11)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신을 그렇게 많이 섬겼던 바벨론 사람들은 바로 그와같은 세속화주의 내지 상대주의적인 삶을 추구했던 바, 그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사47:8,10) 라는 식으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화주의 결말은 파멸이요 재앙뿐임을 하나님의 경고를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사47:11). 세번째 믿음의 장애물은 외면적인 정신 자세입니다.현대인의 생활과 사고의 습성 중 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일들을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쉽게 넘어가는 것이며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마음 깊이 숙고하기 보다는 쉽게 생각하고 쉽게 살아가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때때로 우리의 삶 속에 필요하며 우리의 상황이 그러한 태도를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이 외면적인 태도가 우리의 생활 전반에 작용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단지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며,순간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쾌락 가운데 던지고 싶어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상 강조되는 교훈을 지겹게 여기고 매번 반복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며 좀 더 참신하고 획기적인 것은 없을까 하고 물어보지 않습니까? 신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철새처럼 일정한 절기가 되면 하나님의 집에 겨우 찾아오다가 곧 사라지고,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을 찾아 이곳 저곳 옮겨다니나 어느 한 곳에서 만족할 줄 모르고 습관처럼 계속 하나님의 집을 찾아 헤맵니다. 우리들은 처음에 주님을 만나서 느낀 첫사랑을 잊어버린 채 이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발견해 보려 하고 손쉽게 무엇인가를 얻어 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찾지 아니하고 노력이나 수고 없이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에만 만족하려는 것은 외면적인 신앙 자세이며,이는 곧 믿음의 치명적인 적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인본주의와 세속화주의와 외면적인 정신자세의 공통점은 진실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생각할수록,경건한 것보다 세상 것들을 사랑할수록, 그리고 내면적인 것보다 표면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속에는 진실성이 없게 마련입니다. 진실성이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속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인간의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

세속적인 영광에 구애받지말고 오로지 진실된 마음으로써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네번째 믿음의 적은 후기 근대주의,즉 포스트모던이즘(Post-Modernism)입니다.후기근대주의(Post-Modernism)는 현대주의(Modernism)도 거부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지금까지 내려온 기독교 진리 자체도 거부하는 사상입니다. "현대 계몽주의,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현대주의를 과감히 거부해야하며 현대주의의 발전체재와 전통주의 절대가치와 절대 이데올로기 등을 완전히 배격하는 사상입니다.이제 더 이상 절대가치,절대 진리,절대 전통,절대 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후기 근대주의(Post-Modernism)자들은 가장 중요한 교리인 십자가의 피의 구속을 부인하면서 "예수님의 피나 짐승의 피나 같은 것이지" 무슨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예수님의 신성도 부인하면서 술주정뱅이 취급까지 하고 부활의 역사성도 부인합니다. "부활은 하나의 예시행위다"라고 하고"기독교 신앙은 생물학적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서의 예수 부활이요,그것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임마누엘에 있다."고 하면서 교활하게도 의미상의 부활론을 말하고,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믿지 못하며,동정녀 탄생,대속의 죽음,구원론,부활론,재림론을 정면으로 도전하여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다섯번째 믿음의 적은 종교 다원주의입니다.이 신학사상은 1960년 부터 미국에 소수민족이 많이 이민해 오면서 그들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들어가 문제들이 야기되면서 생겨난 사상입니다.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모든 종교는 공존해야 된다고 하는데서 시작된 것인데 발전하다보니까 "특정 종교만이 절대 진리,절대 구원을 주장하는 시기는 지나갔고 종교는 궁극적으로 단순히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구원,같은 진리에 도달한다."라고 논리를 전개하기 까지에 이른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유일성도 부인하고 십자가의 피의 구속도 부인하며 부활도 부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마리아가 낳은 예수가 종국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며 모든 종교에 다 그리스도가 있고,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입니다. 자유주의 신학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는 이단 신학사상으로 오늘날 여권 신장을 들고 일어나는 소위 여성신학이 있습니다. 미국 연합감리회에서 행했던 수양회에서 어느 여자 목사가 여성신학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기도할 때도 "Dear Mother"로 불렀다고 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바꾸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쏘피아 하나님(sophia God)"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하워드(Harward)신학교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아주 행복한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도 착하고 부인도 얌전했는데, 그 얌전한 여자가,여성신학을 배우기 시작하더니 얼굴 모습이 사나와지고 눈빛이 달라지더니 남편을 사랑의 대상인 배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감정을 품고, 공격의 대상, 복수의 대상으로 삼더니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성신학의 권위자 메리 데일리(Morrydaly)는 말하기를 "적 그리스도(Anti-Christ)가 오기전까지는 여성이 해방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미국 연합감리교회가 1965년까지는 1,200만까지 교인수가 증가되었으나 그 이후 1990년도 까지 400만명 이상이나 교인수가 감소되었고,매일 350명짜리 교회 하나씩 문을 닫고 있는 형편입니다.1993년 8월의 어느 호 뉴스위크지는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고국인 영국에서도 감리교회가 1930년에는 14,000교회였는데 지금은 8,000교회가 없어지고,6,000교회만 남았는데 그나마도 계속 문을 닫고 없어지고 있는 형편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런던에 있는 모 전통있는 큰 교회가 술집으로 팔려서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라고 기록했습니다.그외에도 가구전시장,누드 그리는 화방 등으로 팔리거나 전세를 놓고 있는 형편입니다.영국의 모신학교는 목사 지원자가 없어서 재정도 모자라니까 회교에서 1년에 100만불씩 받아 운영하면서 회교의 통제를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최근의 한국 교회도 7,80년대의 교인 증가추세가 90년대에 들어와서 감소추세로 돌아서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이유는 모든 성경의 권위 자체를 부인하고,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됨을 부인하고,십자가의 피의 구속의 부활을 믿지않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때문인 것입니다. 이같은 자유주의 신학과 사상이 성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식어지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의 어느 심리학자가 많은 임상 케이스를 기록한 가운데 30여세가 되도록 사람을 전혀 믿을 수 없고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고아 출신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의심을 가지고 대합니다.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한 번도 없습니다.세상에서 너무나 심한 천대와 학대와 사기를 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그 부인의 고민은 자기가 사랑한다는 진정을 남편이 믿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3,4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자기의 진실과 사랑을 그의 마음 속에 깨우쳐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자기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선 사람을 믿지 아니하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하나님을 아는 것은 둘에다 둘을 더하면 넷이라는 자명의 진리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무한하시고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하여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그것을 진실이라고 받아 들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인 인식인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 즉 구세주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없어지는 곳에 악마주의가 발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그가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지 않은 유대인들은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엄청난 파멸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영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사람과 세상의 영광을 바라기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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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생명의 양식

"(요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요6: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요6: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요6: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요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6: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6: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어느 임금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그 임금은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습니다.그러나 누가 그 적임자인지를 분별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임금은 세 아들을 불러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구해오는 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했습니다.그리하여 세 왕자는 가장 귀한 것을 얻기 위하여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이웃에 있는 큰 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기 때문에 그 나라는 망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큰 왕자는 보물을 하나 구해가지고 왔습니다.그것은 나뭇잎을 부치면 그 나뭇잎이 군인이 되는 신기한 부채였습니다.큰 왕자는 그 부채로 많은 군사를 만들어 이웃 군대를 손쉽게 물리쳤습니다.온 백성들은 신기한 부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환호했습니다.왕위는 당연히 큰 왕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문제가 생겼습니다.인구가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식량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양식이 떨어져 굶주린 백성들은 금세라도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습니다. 그때 둘째 왕자가 귀한 보물 하나를 구해가지고 왔습니다.그 보물은 돌리기만 하면 하염없이 쌀이 쏟아져 나오는 멧돌이었습니다.그 나라는 둘째 왕자가 가지고 온 멧돌로 많은 쌀을 만들어 식량난을 깨끗이 해결했습니다.백성들은 멧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외쳤습니다.그리고 왕위 계승은 당연히 둘째 왕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나라 안에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식량난이 해결되니까 백성들은 게을러지고 방탕하기 시작했습니다.그들은 남아도는 쌀로 술을 만들어 먹고는 취하여 서로 싸우고 음란과 향락을 일삼았습니다.그리하여 온 나라가 혼란하고 생지옥같이 되었습니다. 그때 세째 왕자가 한 권의 책을 구해가지고 왔습니다.그 책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무엇을 해야 되는지에 대하여 지혜를 주는 진리의 책이었습니다.왕자는 그 책에 기록된 진리를 모든 백성들에게 보급하였습니다.진리를 통하여 깨달은 백성들은 점차 바른 생활로 돌아왔고 근면하게 일하여 나라는 다시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왕은 세째 왕자야말로 자신의 뒤를 이을 훌륭한 왕자라고 생각하고 그를 왕으로 계승시켰습니다.이 이야기는 군사력이나 양식(경제력)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은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좋은 비유입니다. 고대는 현인을 원했고,중세는 성자를 갈망했으나,현재는 오직 부자(경제지상주의)만이 요구되고 있습니다.어쩌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지를 더 흠모하는 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지성인들 중에는 깨끗한 양심보다는 한 장의 지폐를 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그래서 일찌기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현대인은 소유하고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고 지적했습니다.배금주의 사상에 흠뻑 젖은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황금을 올려놓고,메시야 대신에 기계를,영혼의 구원 대신 성(sex)을 대체시킴으로써 스스로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를 만들고 있습니다.현대는 풍요 속에서 방탕과 타락으로 인하여 혼란과 공포의 시대가 되어버리고 있습니다. 인간 생활에 물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그러나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서야 물질도 힘도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성경은 말합니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시19:7) 여호와의 율법(말씀)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말씀)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시19:8) 여호와의 교훈(말씀)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말씀)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시19: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말씀)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시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19:11)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현대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곧 "진리"입니다.진리가 실종되니까 과학문명의 발달과 물질의 풍요도 인간을 행복하게 못하는 것입니다.

"(사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배고픔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물질적인 음식이 만족시킬 수 있는 물질적인 배고픔과 물질적인 음식만으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영적인 배고픔이 있습니다. 주후 60년 이후의 로마 사회의 사치는 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공작새의 골과 나이팅게일의 혓바닥 요리로 잔치를 베풀던 때가 바로 그 때였으며 계속해 나오는 더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구토제를 마신다든가 하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도 또 수천파운드의 비용이 드는 식사는 보통으로 되어 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이렇게 된 여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그 이유란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어떤 깊은 불만족과 주림에 있습니다.그들은 인생의 어떤 새로운 스릴과 새로운 맛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왜냐면 그들은 엄청나게 부유하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굶주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튜 아놀드(Mathew Arnold)는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매의 눈초리로

써늘하게 넓은 방 안에

로마의 귀족은 누워 있네.

화려한 복장을 하고

아피안의 대로를

마차를 타고 활주하였네.

축제를 열어 맹열히

술을 들이키고 꽃으로 그 머리에

관을 냵으나

역겨운 시간은

더 나은 위안도

더 빠른 흐름도 없네."

만족할 줄 모르는 굶주림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이 인간의 모든 굶주림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인간은 생명에 대한 굶주림이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을 줄 수 있으며 그 생명을 더욱 더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인간은 사랑에 대한 굶주림이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와 죽음을 극복하는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끝날 줄 모르는 갈망과 인간의 심정과 영혼에 있어 안정할 수 없는 굶주림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요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6: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하나님과의 참된 새로운 관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그가 없이 또는 그를 떠나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과의 그러한 새로운 관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존재는 될지언정 생명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요1:4) 그(하나님,예수 그리스도,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인간은 생명의 떡(양식)이신 예수를 먹어야 사는 것입니다.그의 살을 먹는다는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먹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몸은 떡(양식)으로 살며, 영은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말씀이란 사랑이며,사랑은 곧 생명입니다.그러므로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랑하는 사랑의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속성은 사랑이고 그 본질적인 덕도 사랑입니다.사랑은 인생의 알파(alpha,시작)입니다.그러니까 사랑이 없으면 인생도 없고 사랑이 있어야 인생도 있습니다.인생이 <살았다>는 말은 곧 <사랑한다>는 말과 통합니다.독일말을 보면 사랑과 산다는 말의 어원이 같습니다.하나님의 말씀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이 곧 사랑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의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시고 영원히 배고프지않은 생명의 양식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모든 인류가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임금에게 외동딸이 있었습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딸은 불치의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임금은 유명하다는 의원에게는 모두 보여봤지만 한결같이 절망적인 반응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이 땅 어디엔가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그래서 임금은 자기 딸의 병을 고쳐 낫게 한 사람에게는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고 자신의 대를 이어 임금으로 삼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전국에 붙이도록 했습니다. 그때 마침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각자 진기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세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어느날 마법의 망원경을 가지고 있던 맏형이 자신의 망원경으로 그 포고령을 보게 되었습니다.그리고 그는 공주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맏형은 나머지 두 형제와 의논하여 공주의 병을 낫게 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세 형제 중 둘째는 마법의 양탄자를 가지고 있었고 막내는 마법의 사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런데 막내가 가지고 있는 마법의 사과는 어떤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이 사과를 먹으면 병이 낫게 되는 사과였습니다.세 형제는 공주를 구하기 위해서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공주가 있는 왕궁으로 갔습니다.그들은 왕궁에 도착하자 곧바로 공주에게 사과를 먹였습니다.그러자 공주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죽을 병에 걸렸던 공주의 병이 낫게 되자 모두가 기뻐하였습니다.그리고 임금은 큰 연회를 베풀었습니다.임금은 연회장에서 공주의 남편감이요 자신의 후계자가 될 사람을 발표할 생각을 했습니다.그러나 한 가지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왜냐면 세 형제가 서로 자신이 공주를 구했으니 자신이야말로 공주의 신랑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맏형은 "내가 망원경으로 보지 못했더라면 이런 사실조차 알 수 없었을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으며 둘째는 "마법의 양탄자가 없었더라면 도저히 이렇게 먼 데까지 올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체되어 공주의 생명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하고 자신의 입장을 말했으며 셋째는 "만일 사과가 없었다면 병을 고칠 수가 없었을 것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가 공주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그 나라 임금은 매우 지혜로운 판단으로 자신의 후계자요 공주의 남편감이 될 사람을 세째로 정했습니다.그 이유는 맏형과 둘째는 아직도 망원경과 양탄자를 가지고 있지만 셋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과를 공주가 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그는 공주를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주었던 것입니다.탈무드에는 "무엇을 해줄 때에는 모든 것을 거기에 거는 자가 가장 존귀하다."는 명언이 있습니다.희생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생명이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의 양식은 '사랑'입니다. 인간의 생명의 양식은 '진리'입니다. 인간의 생명의 양식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으시고 마음으로 영접하시므로 영원히 썩지아니할 생명의 양식으로 영육간의 모든 생활에 참 만족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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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참된 양식

"(요6: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요6: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요6: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6: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6: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6: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6: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6: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6: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6: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모습은 마치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것입니다.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평화를 구하나 참 평화가 없습니다. 안전를 구하나 참 안전이 없습니다.사랑을 구하나 참 사랑이 없습니다.만족을 구하나 참 만족이 없습니다.행복을 구하나 참 행복이 없습니다.결과는 원망과 불평,불만이 계속되는 삶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여유가 있고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도 좌절과 실의와 허무감,그리고 불만족 가운데 사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참된 의미와 희망과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다시말해 참된 삶의 양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암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8: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암8: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인간의 참된 양식은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생명의 떡,참된 양식인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생(永生)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관하여 계시하신 것,즉 그 십자가에서 예수의 보배로운 몸이 우리를 위해 버려지셨다는 것과 그의 피가 우리의 구속(구원)을 위해 흘려졌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흘려진,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 죄를 속했다는 것을 인정할 때,우리는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같은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유대인들은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일에 보다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영에 속한 사람은 오직 영에 대해 관심이 많고,육에 속한 사람은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그래서 비록 부부라 할지라도 속해 있는 부분이 다르면 몇 십년을 살았어도 타인입니다. 영에 속했느냐 육에 속했느냐의 구별은,보는 것과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에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그 둘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가령 무엇을 깨닫는다고 할 때,이 깨달음도 그가 가진 관심에 기준해서 깨닫게 되며 무엇을 보아도 관심대로 보여집니다.같은 것을 놓고 보더라도 육에 속한 사람은 돈으로 보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진리로 보여집니다.얼핏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 완전하게 알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이 가는 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어느 남편이 은근히 옆집에 사는 부인을 좋아해서 그 집 음식이면 무엇이든 다 좋아보이고 맛있다고 해서 부인이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어느 날 꾀를 내어 그 부인은 옆집에서 김치를 얻어 밥상에 올려놓고 김치 맛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그 때 남편은 "이걸 김치라고 만들었느냐"고 짜증을 내며 맛이 없다고 투정을 했습니다.다음 날은 자기 집 김치를 내놓으며 옆집에서 가져왔다고 했더니,남편은 맛을 보자마자 "이것이 바로 김치다"라고 아주 만족해 했습니다.입맛까지도 마음가는 대로 맛이 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결국 관심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면 서로 막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 관계가 서로 단절되어 통할 수 없는 것처럼 답답한 일은 없습니다.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어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예수님과 유대인들은 서로의 관심이 다르기 때문에 피차에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히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은 이 시대에 그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말씀(대화,communication)하십니다.하나님과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인 대화는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참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지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보내신 성령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인간은 사랑으로서 응답해야 대화의 기적(communication)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대화와 사랑의 관계는 마치 피와 몸과의 관계에 비길 수 있습니다.혈액 순환이 정지되면 몸은 죽게 마련입니다.대화가 끊기는 때에 사랑은 죽고 반감과 증오가 생기게 됩니다.하지만 대화는 죽음의 관계에서 소생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대화의 기적인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대화를 들으시고,우리의 찬송과 기도,그리고 사랑의 봉사와 헌신으로 그 대화에 응답하시므로 대화의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카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하나님께서 그의 동생에 관한 일을 물으시려고 그를 불렀을 때,모든 시대를 통해 계속 메아리치고 있는 저 비극적인 대답을 합니다.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된 비극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하나님께서 살인범 카인을 부르시는 참 뜻을 모르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묵살하는 인간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예입니다.하나님은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인된 인간들을 사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마틴 부버는 대화를 "상대방의 처지를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처지를 말씀과 성령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한 말씀과 성령이 역사할 때 삶의 기적은 체험되는 것입니다.

"(겔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어느 조각 작품에 어머니의 유방은 풍만하여 젖이 철철 넘쳐 흐르고 있는 그 어머니 품 안에 안겨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유난히도 바짝 말라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있었습니다.그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니 어머니는 애써 젖을 먹이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데 어린아이는 도무지 먹지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머니의 젖이 풍부해도 그것을 거절하고 먹지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고자 충만한 말씀과 성령으로 사람들에게 참된 양식을 공급하시고자해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1841년 미국기선이 빙산에 충돌했습니다.구명 보오트 한 척에 기어오른 사람이 너무 많아 홈즈 선장은 그중 일부를 파도 속으로 밀어냈습니다.그는 살인죄 판결을 받았으나 타일러 대통령의 특사령으로 살아났습니다.이때의 논쟁에서 <구명보오트 윤리>(Lifeboat Ethics)라는 말이 나왔습니다.일부의 생존을 위하여 일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논리입니다.예수님은 이런 논리를 배격합니다.사람이 5천명이고 떡이 다섯 개일 때 강하고 우수한 인간 다섯 명을 먼저 먹여 살리자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그것은 빌립의 타산적이고 계산적인 믿음입니다.다 살릴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의 계산이고 강자의 사고방식일뿐입니다.예수님은 다섯 명만이 아니라 5천명을 다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의 떡이 남는 풍성하고 참된,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양과 질의 주님이 되십니다. 생명의 양식,참된 인생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생명력을 불어넣으시는 성령이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의 삶이 보다 더 풍요롭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국의 현대시인 풀레쳐(Giles Fletcher)의 노래를 들어봅시다.

방황하는 자여,잘못된 길로 가는 자여

참길은 예수이시다.

헐벗은 자여 부끄러운 자여

참옷은 예수이시다.

굶주린 자여 허덕이는 자여

참떡은 예수이시다.

짐진 자여 눌린 자여

참자유는 예수이시다.

그대 약한가 쓰러지는가

예수는 강하다.

그는 죽음을 깨는 생명이 되시고

그는 아픔을 낫게하는 의사가 되시고

맹인에게는 광명이 되신다

예수를 먹으라 예수를 마시라

그는 생명,영생의 떡이시니.

<"Excellency of Christ"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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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빛과 어두움

"(요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요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요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요8: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요8: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 (요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8: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요8: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요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요8: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요8: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요8: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요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요8: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8: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요8: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요8: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8: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본문을 유념하여 보면 대조적인 말을 찾을 수 있습니다.'자유'와 '종','진리와 거짓'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시비와 음모,살인 책동에도 끝까지 '빛'에 거하시는 '진리와 자유'의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하며", "진리"를 죽이려는 어두운 모습의 '죄'와 '율법'의 '종', 유대인들을 대조하여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흥사가 지방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담임 목사님이 대접을 잘 하면서 말합니다."목사님,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기 전에 먼저 제 말을 듣고 설교를 하셔야 합니다.먼저 주초 문제는 공격하지마십시오.우리 교회는 군인 가족이 많고 또 이 고장이 담배 생산지여서 온 교인이 담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또 수석 장로님이 양조장을 하고 있습니다.다음에는 축첩 문제는 거론하지 마십시오.이혼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잘못 말씀하면 쫓겨나니까 그저 은혜 많이 받으라고 하고 복 많이 받으라고 하는 설교를 하십시오."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거침없이 책망하십니다.'말만 많고 행함이 없는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아브라함처럼 대접하기는 커녕 오히려 죽이려 하는도다.너희는 내가 말하는 진리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니 마귀의 자식이요,살인한 자요,거짓말장이로다.귀신들린 것은 바로 너희들이요,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도무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보다 더 훌륭하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그 분을 따를 수도 있었습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뚜렷한 주관도 없이 그저 덤덤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면서 살려고 합니다.어떤 사람은 호인이 되기를 원합니다.잘못을 보고도 지적하지 않고 적당히 넘기는 사람을 덕있는 사람이라 하고 존경할지 모릅니다.그러나 성도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성도는 호인이 아니라 불의를 향해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의인이 되어야만 합니다.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기를 무릅쓰고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마귀의 자식이라고 소리치면서 바른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살아야지 절대로 호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의 정치학 교수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조선일보,1994.7.24.時論).

"한국 사회는 주사파 때문에 오래전부터 진통을 겪어 왔고,특히 대학사회의 무질서와 혼란은 80년대나 90년대나 풀림이 없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혼란스러움에 관한한 우리 대학들은 모두 획일화 되어있다. 어디든 대학이라는 이름만 붙은 곳이면 으레 해괴한 구호들이 난무해 있다.뭐든 규탄하고 뭐든 부정하고 뭐든 매도하는 방들이 구내 요소 요소에 붙지 않은 곳이 없다.무당 굿하는 데서나 볼 수 있는 울긋 불긋한 천들의 플래카드,지식인 티라고는 어느 한 군데도 찾아 볼 수 없는 이상한 몸가짐이며 목소리들-- 그것이 예나 이제나 조금도 변화없이 횡행하는 곳이 한국의 대학이다......(중략)...지적으로 황폐하고 정신적으로 왜곡된 이들을 어떻게 대학이라는 이름의 광장에서 활보하도록 내버려 둘것인가,대학은 지를 창조하는 곳이고 정신을 세우는 곳이다.그런데 정반대로 지를 후퇴시키고 정신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대학을 주름잡고 대학을 사유물화하도록 우리는 방치해두고 있다.그것은 오로지 우리 대다수 지식인들이 침묵하고,우리 대다수 교수들이 오불관언의 태도를 보인데서 연유한다.심지어 침묵하지 않는 지식인,관여의 의지를 보인 교수도 크게 다를 바 없다.그들은 그들대로 분열하고,그들대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이제 지식인은 지식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서,지식인 본연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지식인은 본연은 시를 시로,비를 비로 가리는 정신이다....(중략)...어째서 선생이 학생을 꾸짖고 학생에게 벌을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는가.어째서 지식인이 잘못을 규탄하는데 인색하고 주저하는가.설혹 두렵고 주저스러워도 어느 한 지식인의 용기있는 목소리를 따라가는 용기쯤은 가져야 한다." 그는 또한 지식인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어느 나라든 지식인은 분열돼 있고,어느 나라에서든 지식인은 용기가 적다.지는 각기 추구하는 것이어서 추구하는 사람 저마다 같은 소리를 내기는 어렵다.지는 또한 용과 분리돼 있는 것이어서 용기를 가진 지식인은 어느 사회나 많지 않다.지의 분열과 지의 무용은 지식인의 속성이다."

대학에서 말하는 지식은 인간의 생활을 위한 지식에 불과한 것이지 생을 걸만한 영원한 지식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참된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진리입니다.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십니다.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생명력이 없는 지식은 무력한 것입니다.진리는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합니다.진리는 빛이기 때문에 빛이 비추이는 곳에 어두움이 사라집니다.그러므로 참된 지식인,지성인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진정한 의미의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zia)는 빛과 진리,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계층입니다.예수 믿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를 사수하며 믿음의 용기를 가지시는 여러분들이 진정한 의미의 이 나라의 지성인요,지식인들입니다.헤롯 대왕의 부정과 부패,음란을 신랄히 비판하며 책망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세례 요한,그는 비록 참수형을 당했으나 예수께서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일컬음을 받았습니다.미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인권이 유린당하는 나라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미국에 진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시비를 바르게 분별하는 사명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지성,피와 땀으로 고투를 이겨내는 지성,그리고 거짓과 속임과 혼탕물이 아닌 순수한 지성,역사가 토인비(Toynbee)의 말을 빌리면 "기독교의 공기를 호흡하는 지성"이 이 시대에 요구되는 것입니다.아부하는 지성,어리뻥뻥한 양비론의 지성이 아닌 정의 앞에 순교를 각오하면서 의를 사모하는 지성,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빌3:8) 지성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현대의 과학주의적 지성들은 시편 23편을 다음과 같이 변조시키고 있습니다.

"과학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문명의 요람에 눕게 하시며

눈부신 네온 가(街)가로 인도하시도다.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기계가 나와 함께 있음이라.

물질의 지팡이와 쾌락의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도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 문명은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화 시켰습니다.참으로 오늘의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한 기계의 노예와 혼을 잃은 기능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그 영혼이 쉴만한 푸른 초장을 잃은 지는 오래입니다.과학 문명이 이 시대의 빛이 아니라 인간성과 그 영혼에 어두움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현대의 지성들은 인간의 목마름은 잘 지적하고 있지만 생수를 주지 못하고 있으며,<갈보리산>에 오르기는 했지만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국민학교에서 있었던 일인데,<동물의 생태> 시간에 책상 위에 고양이 한 마리를 놓고,"암컷이냐? 숫컷이냐? "고 여선생님이 물었습니다.그때 한 학생이 "선생님! 투표해 보면 압니다."고 대답했다는 풍자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사실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50%+1명=진리>가 되는 숫자의 비극이 있습니다.또 이것이 민주주의의 산술이요,민중의 소리인 동시에 신의 음성입니다.따라서 현대의 지성들이 마치 성경의 빌라도 경우처럼,머릿 수를 헤아림으로서 진리를 판가름 하다가 <참 진리>를 교수대에 세워버리는 오류를 버릇삼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바라바>를 놓아주고 <메시야>이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큰 소리>에 자라목이 되어버린 현대지성의 시대입니다.세상의 소금(마5:13)이 되는 지성,세상의 빛(마5:14)이 되는 지성, 진리 앞에서는 아부를 모르고,오직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빌4:18) 같은 지성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정의와 진리에 헐벗고 굶주린 이 백성들에 대하여 어떤 사명감을 뼈저리게 자각하며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8:5),그러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으로 삼는 지성이 이 나라 민족의 새 시대를 창조하는 참된 지성인 것입니다."(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의 지성이 참으로 아쉬운 시대입니다.한번도 꺼져본 일이 없는 빛,유일한 빛,곧 생명의 빛(요8:12)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 나라 민족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시온의 아침을 여는 지성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마10:26)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고,그 진실을 왜곡한 악한 세력의 음모가 반드시 백일하에 드러날 터이기 때문에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하나님은 반드시 시비를 가려 냅니다.그는 분명히 그러한 때를 약속하셨습니다.만약 그러한 때가 없다면 목을 걸고라도 진실과 참을 추구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이란 실은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가장 불쌍하고 가장 어리석은 자들입니다.그러나 예수는 알곡과 가라지를,쓸 것과 못쓸 것을 가리듯 진실과 거짓을 밝힐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므로 마치 모순과 어두움이 영원히 지속되기나 할 듯이 그렇게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헨리 왕이 임석한 자리에서 파티머 감독이 설교하려고 단 위에 섰을 때 어떤 감독 하나가 "헨리 왕이 임석했으니 주의 하시오" 라고 속삭였습니다.그러나 또 그는 동시에 "파티머야,만왕의 왕이 여기 계시니 주의하라!"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그때 그는 더 이상 헨리 왕의 비위를 맞추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비겁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리는,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요,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즉 의인의 계보를 통해 세상 역사를 창조해 가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시대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않는 사람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혹독하게 질책합니다.마귀는 본질적으로 살인자입니다.악의 특질은 파괴하는 일에 있습니다.진리를 미워하고 진리를 파괴하려는 것이 마귀의 궁극적 목적입니다.마귀는 또한 거짓을 사랑합니다.허위적인 언사,거짓된 사상,진리를 왜곡하는 것,그리고 거짓말 등은 그 모두가 마귀의 것입니다.유대인들이 예수를 미워하고 증오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진리를 깨닫지 못하고,들을 줄 모르는데서 비롯됩니다.예수께서 유대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고발한 것은 그들의 생각이 언제나 선을 파괴하고 거짓된 것을 옹호하려고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진리를 파괴하려고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마귀의 역사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치는 음악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색맹인 사람은 그림을 감상할 수가 없습니다.리듬 감각이 없는 사람은 발레나 댄스에 흥겨울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매우 놀라운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하나님의 영은 두 가지의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그 영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그리고 영은 인간이 진리와 마주칠 때 그것을 인식하고 이해하겠끔 이끄시는 것입니다.그것은 분명히 인간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리와 마주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수가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또한 그것은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에 따른다고 하면 영은 그 사람 마음 속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비록 진리가 그의 목전에 충분히 제시된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볼 수도 인식할 수도 없으며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할 수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즉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너희는 제멋대로의 길을 갔다.너희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따랐다.너희들은 자기들 나름의 하나님을 만든 것이다.하나님의 영이 너희들 마음 속에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너희가 나를 인식할 수 없는 것도 그리고 나의 말을 듣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 위기를 폭로한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의 저서,"빛의 자식과 어두움의 자식"(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에서 '어두움의 자식'은 모든 일과 행동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꾸며 나가는 모든 사람,남을 사기하고 협작하는 일은 물론이지만 남을 도와주는 척하면서도 그것은 결국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머리와 지혜를 쓰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이들은 마귀라는 세력으로 상징된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그러나 빛의 자녀들은 빛과 생명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빛에 속한 사람이며 그렇지못한 사람은 어두움에 속한 사람입니다.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거짓보다 진리가 더 강합니다.예수의 부활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었습니다.빛과 진리를 사랑하는 이 시대의 참된 지성인들이 되시므로 민족사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역사의 주체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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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선한 목자

"(요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요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요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요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10: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10: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구약성서에서는 흔히 하나님은 목자로,백성은 그의 양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그 예로 다음과 같은 성구들이 있습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77:20) 주의 백성을 무리양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시79:13)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시80:1)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

"(시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신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그것을 구하는 목자이십니다.예수님은 영혼의 목자이시며,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벧전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히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교회 '복음 성가' 115장,"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듯"을 불러 봅시다.

"1.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듯

나의 주님 이 죄인을 찾으셨도다.

<후렴>양을 위해 생명바친 목자의 심정

그 사랑을 잠시라도 잊지 말지라

2.험산준령 헤매이는 어린양찾아

나의 주님 산가시에 찔리셨도다.

3.양 아흔 아홉마리 그 보다 더욱

길 잃은 한 마리 양 사랑했도다.

4.목자는 어린양의 그 소리 알고

참다운 목자 음성 양이 알도다.

5.어린 목자 내 주 예수 이 몸 붙드사

푸른 초장 물가으로 인도합소서."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생명을 바칩니다.다윗은 선한 목자였습니다.

"(삼상17: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삼상17: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삼상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그러나 악하고 거짓된 목자는 소명으로서가 아니라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 양치는 일에 종사합니다.목자의 긍지나 책임감이 전혀 없습니다.또한 흩어진 양들을 한 군데로 모으려고 하지 아니합니다.

"(슥11:16)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슥11:17) 화 있을찐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없어진 양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목자,흩어진 양들을 찾지아니하는 목자,상한 양을 고치지 아니하는 목자,병약한 양을 먹이지 아니하는 목자,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에게 화가 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이 시대의 목자이며 교인들은 그 양떼인 것입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목자로서 하나님의 양떼들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최후의 명령을 사명으로 부여받은 것입니다.지도자의 사명 감당의 요건이 바로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지도자의 사명 감당의 요건은 바로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지도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는 일이며 그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행하여야 합니다.금전에 집착한다든가,지위를 이용해서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벧전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목사라는 어휘는(엡4:11) 그 자체가 목자를 나타내는 라틴어인 것입니다.보수만을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금전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사랑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이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의 일을 생각합니다.예수님은 선한 목자였으며 그는 자기의 양을 깊이 사랑하셨고 그 양의 안전을 위하여 위험을 무릎쓰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주신 것입니다. 한편 양떼는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그 양떼들은 두 가지 위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첫째,외부로부터는 이리와 강도와 약탈자들의 습격을 당하기 쉽습니다.둘째,내부로부터는 언제나 양떼들은 거짓 목자로 말미암아 시달림을 받기 일쑤입니다.거짓된 지도자 즉, 소명을 출세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봉사의 수단으로는 생각하지 아니하는 목자로 인하여 비극을 초래하는 일도 적지 아니합니다. 둘째의 위험이 훨씬 나쁜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목자가 성실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하면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강력한 방어가 되겠지만 목자가 불성실하고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적은 외부로부터 쉽사리 침입하여 양떼들을 파괴해 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교회의 본질적인 것 중에서도 첫째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있는 지도자입니다. 세계 역사를 살펴 보면 알렉산더나 나폴레옹 같은 영웅들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전쟁터로 데려가 그 곳에서 피를 뿌리게 했습니다.또한 일본 천황이나 히틀러 처럼 잘못된 지도자들을 만나 나라가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 패망한 경우도 허다합니다.그런가 하면 온갖 사상의 창시자들이 잡다한 사상들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사상의 노예로 만들어 인생을 망치고 나라와 국가를 멍들게 하기도 했습니다.구소련은 70년 공산당 사상(Marxism)의 지배로 말미암아 사회,경제,정치 등이 피폐해졌으며 그 혼란에서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쿠바의 카스트로 공산주의 정권 아래 지금 수 많은 난민들이 자유를 찾아 생명을 걸고 탈출하고 있습니다.김일성 주체사상의 노예가 된 북한 동포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김일성 주체사상을 <북한의 구약>으로,김정일 교시를 <북한의 신약>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본격적인 <신약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북한도 그 종말이 멀지않았습니다.시대적으로 종언을 고한 공산주의 사상과 김일성 주체 사상의 노예가 된 이 땅의 일부 학생,정치인,경제인,종교인,지식인 등이 귀신들린 온 돼지떼처럼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로 들어가고 있습니다(마8:28-32).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선정을 베푼 왕보다도 악정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한 왕들이 더 많았습니다.그리고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참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고난당했던 사례도 많았습니다.이처럼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또한 사상적으로 잘못된 지도자들에 의해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거나 사망의 길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구약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은 선한 목자로서 자신이 택한 사람들을 끝까지 보호하시며 그 사람들의 궁핍함을 채워주셨습니다.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님은 자신을 직접 선한 목자로서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먼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갑니다.그렇지않고 문을 부수거나 문을 뛰어넘어 들어가는 자는 양들을 죽이거나 훔치는 자들입니다.'양의 우리에 문'은 '진리의 문'을 말합니다.참 지도자는 진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그 이외의 방법을 취하는 자들은 모두 양들을 약탈하는 자들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참된 지도자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알아야만 합니다.이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예수님은 친히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 중 가장 먼저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까?다른 신들은 결코 진리의 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진리의 문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그래서 다윗은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진리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않는 모든 지도자들은 거짓된 목자들입니다.그들은 양을 죽이거나 훔치는 자들일 뿐입니다.어떤 지도자 속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그 지도자는 선한 목자이며 또한 양들에게 생명을 전달하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또한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다음으로, 선한 목자는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자입니다.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참 목자이신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겔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여기 다윗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왜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목자들의 음성을 알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선지자인 양 자신의 사상을 자신있게 가르쳤습니다.수 많은 이단 사상들도 자기들이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체 했으며 지금도 그러합니다.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께 공격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으나 여호와 하나님 종교를 빌미로 백성들을 사망의 길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그들은 귀가 있어도 진리의 문이시며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그들은 눈이 있어도 진리의 문이시며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아 보지못했습니다.그렇게 때문에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먼저 목자장이신 예수님(벧전5:4)의 음성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양들이 자기의 음성을 알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그렇지 못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같이 벼랑에 떨어져 죽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는 것은 목자에 대한 존경과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목자의 음성만 들으면 안심이 되는 것처럼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아 듣고,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입니다.다정한 목자의 음성만 있으면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문제가 되지않습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바로 이 말씀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세번째로,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냅니다.

"(요10:3)....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목자와 양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말합니다.목자가 양을 대할 때 양이 많다고 해서 한 마리쯤은 하고 소흘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돌보는 것입니다. 옛날에 가난한 집에서 부자집에 양자를 보내려고 여러 자식 중에 누구를 보낼까 생각하는데 큰 아이는 커서 안되고 작은 아이는 작아서 안되고 약하면 약해서 안되고 건강한 아이는 건강해서 안되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그만 두었다는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자식이 많다고 해서 어느 자식 하나라도 소흘할 수는 없습니다.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하나님은 개별적으로 나를 사랑하십니다.예수님께서도 양 아흔 아홉마리가 있어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반드시 찾으시겠다는 참 사랑의 말씀을 하셨습니다.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부르고 계십니다.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부르시는 대상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여기 '우리'(fold)는 유대인이며,'다른 양'은 이방인 중에서 불러내실 신자라면,이방인도 한 우리에 들어올 존재입니다.즉 자신의 목숨을 버려 생명을 주시려고 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인,즉 전 세계 인류라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의 목자가 아니라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또한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양의 한 우리 속에 있다고 한 무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즉,목자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고 순종할 때 '한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한 목자'의 '한 무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선한 목자의 양이 되어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그를 따르리니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시23:6) 인생의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시고 순종하시므로 '부족함이 없는' 영육간의 축복하심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심'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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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생명의 주

"(요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요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요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요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요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11: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요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요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요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요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요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요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요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요11: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요11: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요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요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요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11:37) 그 중 어떤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요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요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요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사랑하시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며칠이 지나서야 가시게 되었습니다.나사로는 벌써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그들의 '사랑'인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도 우셨습니다.그토록 나사로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여러분은 그 누군가를 위하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유대인의 지혜>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일 몸 하나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이 아이를 두 사람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아니면 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머리가 두 개이니까 두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하며,또 다른 사람들은 몸이 하나이니까 한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그러나 이에 대해 유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두개의 머리 중 한 머리에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부어 보아라.만일 양쪽이 다 뜨겁다고 놀라서 울면 바로 한 사람이다.그러나 한 쪽은 뜨겁다고 우는 반면에 다른 한 쪽은 아무렇지도 않게 히죽히죽 웃는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다.>유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자신의 이웃이 슬픈 일에 처해있을 때 그 아픔을 같이 느낄 수 있다면 유대인이고,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다면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지고 가장 깊고 거룩한 데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11:33)예수께서 그이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덤에 가셔서 몸이 썩어서 냄새가 나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하나 밖에 없는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을 맞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비통한 상황,썩어서 냄새가 나는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인간 마르다와 마리아의 통곡,이것이 인간의 상황이고,다시 산 사랑하는 나사로와의 만남,이것이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인 것입니다.우리는 다 아버지 ,어머니,남편,아내,아들 딸을 잃었습니다.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부모,사랑하는 부모를 잃은 자식,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아내,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편,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사람,이들의 희망은 무엇이겠습니까?그것은 그들이 서로 다시 만나는 일,그리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는 일입니다.예수 종교,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이태리의 시성 단테(Dante)는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참으로 영원을 모르는 생명은 생명이 아닙니다.생명의 가치는 영원한 것입니다.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생명은 지구보다 무겁다.'는 속담도 있습니다.그러므로 생명은 결코 금전으로는 따질 수가 없습니다.몇해 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45세의 한 남자가 미항공기 추락사고로 그의 아내는 사망하고 자신은 중상으로 불구가 되었습니다.그 때에 법원의 배상금 판결은 약 70억원을 원고에게 지급하라는 것이었습니다.생명의 값도 이쯤되면 상당한 것입니다.복지 국가일수록 그 생명의 값은 더 높다고 합니다.스웨덴은 29억원,화란은 1억 8천만원,프랑스는 1억 5천만원,서독은 9천 7백만원,그리고 일본은 대개 1억원정도라고 합니다.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겨우 2백만원 정도에서 타협을 보는 예가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결국 가난한 나라의 생명은 그 값도 헐값인 셈입니다.요즘 내전과 가뭄 등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르완다>의 경우 하루 1,2백원 정도이면 하루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물리적인 원리만으로는 풀 수가 없습니다.생명은 응당 생명의 원리로 풀어야 합니다.생명의 가치는 곧 인간의 가치요,인간의 존재 근거는 바로 생명입니다.인간이 있다는 말은 곧 생명이 있다는 말이요,인간이 없다는 말은 곧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그래서 딜타이(Dilthey)는 생명은 <생명으로 이해하는 길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생명>이십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기독교에는 인간의 궁극적인 <상황>인 죽음을 <생명>으로 극복하게 하는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사망,죽음이란 무엇입니까?그것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영원하고 궁극적인 관심과 과제입니다.기독교에 있어서 죽음의 의미를 오스카 쿨만은 그의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이란 글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을 비교함으로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이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영혼의 해방'으로서 아름다운 죽음이다.거기에는 죽음의 공포란 없다.왜냐하면 죽음은 우리를 육체에서 자유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삶은 영혼의 죽음이 되고, 죽음은 더 높은 삶으로의 비약이다.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요,육신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죽지않고 파멸되지 않는 것이다.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사는 한 우리의 영혼을 자유하지 못하게 하고,이 영혼은 영원한 본질과 합해서 살 수 없게 하는 외적 의복에 지나지 않는다.영혼은 육체 속에 갇혀 있으나 영혼은 영원한 세계 속에 갇혀 있다.실로 죽음은 영혼의 해방자이다.죽음은 쇠사슬을 풀어 준다.죽음은 영혼을 육의 감옥에서 풀어서 그의 영원한 집으로 되돌아 가게 하기 때문이다.소크라테스가 죽던 날 제자들에게 향한 그의 가르침에서 그는 이 영혼 불멸의 교리를 단순히 가르친 것만이 아니라 이 교리를 몸소 살았던 것이다.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축복의 기회요,자유의 축제이다.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이다.거기에는 죽음의 공포란 없다.죽음은 위대한 친구이다.왜냐하면 죽음은 영혼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그렇지 않다.예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다르다.공관 복음서(마태,마가,누가 복음)가 일치하게 보도하는 바에 의하면 겟세마네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예수는 <심히 놀라며 슬퍼하기 시작했고>(막14:33),<내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됐다.>(막14:34) 고 제자들에게 말했다.예수는 죽음을 두려워했다.예수에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해방이 아니었다.히브리서 기자는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말하고 있다.그는 죽음에 직면하여 우시고 부르짖었다.그는 <(막14:36)...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였다.침착하고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와 우시고 부르짖으시는 예수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죽음의 광경도 처절했다.소크라테스는 장엄하고 냉정한 가운데 독배를 들었고 ,예수는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부르짖으며,큰 소리를 지르고 운명하셨다(막15:37).예수에게 죽음은 친구가 아니었다.죽음은 무서운 공포이며,죽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무서운 <원수>로 나타난다." 성서는 삶과 죽음 사이의 한 비극적인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그것은 바로 인간의 타락입니다.인류의 시조 아담과 이브의 타락 사건으로 인간은 죄와 죽음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리고 인간은 율법을 통해서 인간 속에 잠자고 있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롬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롬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인간의 삶은 다만 '죽음을 향한 존재'(Zum-Tode-Sein)만이 아니라 죄의 삶이고 죄의 삶은 율법 앞에서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고전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죽음은 이 죄의 지배 아래서 일어나기 때문에 모든 공포와 심판과 저주가 따르게 됩니다.인간은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원수가 아닙니다.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변치 않고 그 사랑은 그 누구도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그러나 죄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그리고 죄의 권세는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그러므로 죽음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죽음은 하나님의 대적이며 원수이기 때문에 이 죽음은 우리를 참 삶이며 모든 삶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떼어 놓습니다.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서로 떼어 놓습니다.죽음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원수)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의미합니다.그러므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 있어서 죽음은 결코 아름다운 것,해방,축제가 될 수 없습니다.죄가 결코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듯이 말입니다.그러므로 인간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고 보다 더 죽음 앞에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 합니다.죽음은 죄의 결과,죄의 값입니다.죄의 댓가는 심판과 죽음,저주입니다.아담의 타락 이후 죽음은 저주입니다.죽음은 죄가 제거되는 한에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죽음은 죄의 값이기 때문입니다.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 죄를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죽음 그 자체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죽음은 육으로부터의 영의 해방일 수 없습니다.오직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서만,예수만이 자신의 구세주(그리스도,메시야)이심을 믿는 믿음으로서만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라,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그의 독생자 예수를 죽음으로 내어 주신 하나님의 인간 사랑,'아가페'입니다(요3;16).예수의 죽음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서 죄인이 되셨고,죄인으로서 죄인의 선고를 받으신 것입니다(고후5:21).그는 실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롬5:6) 모든 인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죽음이 예수에게 내려진 것입니다.그래서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인이 아닙니다.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새로운 존재로 탄생합니다.예수 안에 있으면 인간은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예수가 그의 죽음에서 죄의 결과인 심판으로서의 인간의 죽음을 맞았기 때문입니다.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사망의 권세를 이기시었습니다.이제 그는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신앙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에게는 '부활'이 약속되고,그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이 주어지게 됩니다.그는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약속 안으로 들어갑니다.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죽으면 또한 그와 같이 살 것입니다.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리스도는 곧 부활이며 생명 그 자체입니다.

"(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의 이같은 질문에 "(요11:27)...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고 신앙고백하시는 여러분들에게 인생 승리의 영광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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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예수가 계신 곳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유재헌 목사님의 복음성가 <예수로 만족합니다>(찬송가 144장곡에 맞춰서 부릅니다)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습니다.

1.예수 소유하여서 나는 부자되고

예수 한 분 잃어서 나는 거지되네

<후렴>예수여 예수여

내 중심에 오소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2.예수없는 문화는 사막같이 뵈고

예수없는 식탁도 맛을 잃게 되네

3.예수없는 천당은 내가 원치 않고

예수 있는 지옥도 나 싫지 않도다

4.아침에는 예수로 눈뜨게 하시고

저녁에도 예수로 잠들게 하소서

5.예수 함께 나아가 일하게 하시고

예수 함께 들어와 감사케 하소서

6.나의 혈관 그 속에 주님 피 부시고

나의 심장 그 속에 주님 힘 넣소서

7.사랑하는 예수로 나 아주 미치고

그 예수님 위하여 죽어 시원하네

철두철미하게 예수 중심의 신앙을 노래하고 있습니다.인간의 존재 양식이 오직 예수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없는 인생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없는 삶, 예수없는 문화, 천당까지일지라도 예수가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찬송가 495장 3절)

예수가 계신 곳이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천국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두 가지 측면 즉, 천국의 미래성과 현재성 중에서 천국의 현재성을 노래로 신앙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는 영역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 모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면 바로 그곳이 천국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인류가 꿈꾸는 천국을 요한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22: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22:4)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그리고 구약 성경 이사야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11: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현대 과학과 의학 그리고 물질 문명이 놀라우리만치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복과 안전은 그에 비례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더 두려운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의 라이트 교수(Quincy Wright)가 <전쟁 연구>(Study of War)라는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거기에는 1480년부터 1941년까지 461년 동안에 각 나라가 전쟁을 한 횟수가 발표되었습니다. 영국 78회, 프랑스 71회, 스페인 64회, 오스트리아 52회, 터키 43회, 스웨덴 26회, 이탈리아 25회, 화란 23회, 독일 23회, 덴마크 20회, 중국 11회, 일본 9회 등입니다. 미국은 지난 150년 동안에 13회 전쟁에 가담했습니다. 이 모든 숫자를 합치면 461년 동안에 278회의 전쟁을 각 나라가 한 것입니다. 사람의 역사는 싸움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싸워서 서로 죽이고 시설을 파괴하고 고아와 과부와 불구자를 산출하는 비극은 둘째로 미루더라도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백성의 살림이 위협당하고 다른 방면의 건설적인 발전에 막대한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무기 통제연구소(World Arms Control Agency)의 시바드(Ruth Sivard)박사는 1987년 일 년 동안에 세계는 군사비로 9천억 달러를 소비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20년 전에 비해 2.5배가 상승한 것입니다. 미국과 소련 두 나라만의 군사비만 합친 것만이 5천억 달러입니다. 미국 GNP의 6.4%, 소련은 11.4%, 그나마 중동의 여러 날라들은 약 18%를 군사비로 쓰고 있습니다. 1987년 한 해 동안 세계에 22개의 전쟁이 터져 역사를 깼고, 죽은 자가 220만명이며 그 중 80%는 민간인들입니다. 9천억 달러가 얼마만큼이나 되는 금액인지를 간단히 소개하면 밤낮 자지 않고 매초마다 1달러 지폐를 내버리는 것을 3만2천 년 동안 계속해야 9천억을 다 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돈을 불과 한 해 동안에 인류를 죽이는데 버리고 있습니다.그 반면 현재 10억의 인구가 빈곤에 처해 있고 그 중 5억은 심한 영양 실조로 허덕이며 연명하는 실태입니다. 원자력 잠수함 한 척을 만드는 비용이 소위 발전했다고 하는 나라 12개국의 교육비와 맞먹는 것입니다. 20세기는 "죽음의 세기"였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1980년까지 80년 동안에 전쟁으로 죽은 자가 1억5천만 명입니다. 금세기 말까지는 1억6천만이 넘을 것입니다. 남한 인구의 네 배가 전쟁으로 죽었습니다. 전쟁광들은 아이들까지 싸움을 시켜 죽게 하고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은 15세 미만도 모병하고, 이란은 13세까지 징집하며, 니카라과 정부군은 3천명의 어린이 군인을 가졌고, 콘트라 반군도 12세의 어린이까지 총을 잡게 했습니다. 현재 세계에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군대가 20만명이나 됩니다.(영국 Friends World Committee의 보고서) 위대한 시인 로버트 번즈가 쟁기로 조그마한 들쥐의 집을 엎어 버렸을 때, 들쥐가 공포에 질려서 뛰쳐 나왔습니다. 번즈는 자기 때문에 작은 들쥐가 무서워 떠는 것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자연의 유대를 깨치는

인간의 횡포여 !

오! 미안하이."

스티븐슨(R.L.Stevenson)이 개를 학대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옆에 있던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을 좀 말려야 되겠네." 스티븐슨이 그런 공연한 일에 말려들기를 바라지 않던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걱정이야 ! 네 개도 아니지 않아? " "그래" 스티븐슨은 말했습니다. "내 개가 아니야. 하지만 하나님의 개야. 나는 저처럼 학대받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있을 수 없네."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 역사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고대의 시인들과 철학자들은 이상적인 사회와 국가를 꿈 꾸어왔지만 현실과 너무 거리가 먼 꿈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유대 민족은 언제나 장차 임할 황금 시대 곧 하나님 나라(천국)를 기대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작은 산들은 녹으리라......저희가 포도원들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암9:13,14)

그 땅이 너무 비옥하고 기름졌기 때문에 거두는 자들은 씨 뿌리는 자들의 바로 뒤에서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렘31:12)

아무도 주리지 않으며, 아무도 목마르지 않으며, 그리고 아무도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풍요로운 천국을 꿈 꾸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호2:18,참조 사11:6-9,65:25)

위 성구들은 인류 사회의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참된 평화와 안전의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사65:20,참조 22절,25:8)

다시는 고통과 늙는 것과 약함과 쇠퇴가 없는 하나님 나라(천국)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약속되어 왔던 하나님 나라(천국)가 도래했다고 예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천국의 도래가 예수님의 선교의 핵심이었습니다. 마태 복음 5,6,7장의 말씀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권능있는 사역들도 "천국이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들이었습니다(마12:28).

"(마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들도 천국에 대한 진리를 제자들에게 깨우치기 위함이었습니다(마13:11). 주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핵심도 "나라이(천국)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천국은 언제 어떻게 올 것입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다양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의와 평강과 희락"은 성령의 열매들로써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지금' 누리는 영적 실체들입니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 역사상 초창기의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이 6.25동란 무렵에 목포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공산당에 붙잡혔습니다. 끌려가서 심한 고문과 조롱을 당하며 나날을 보내었는데 어느날 한 공산당원이 이 목사님을 끌고 가서 또 고문을 하다가 아주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영감, 내한테 천국 좀 보여 줄 수 있어? "하고는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이목사님은 발길에 채이면서도 "예, 보여드리지요."하고 말했습니다. "야, 죽어서 가는 천당말고 지금 당장 보여주란 말야."하고는 또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예, 지금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라는 이 목사님의 말에 공산당원은, "어떻게 보여주냐?"고 하며 또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그 때 이목사님은 "예, 천국 본점이야 내 소관이 아니니까 보여 드릴 수 없지만 지점이야 내가 보여 드릴 수 있지요. 그 천국 지점이 바로 제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천국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미 "아들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는 말씀입니다(참조 엡5:5,계11:15).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하나님 나라의 복음" 즉 천국 복음을 받아 들이고 믿는 사람들은 '지금' 천국에 들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요한 복음 18장 36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후1:11, 마8:11, 마13:41,43 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 재림시에 들어 갈 미래의 영역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들도 다양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실마리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에 대한 의미를 밝히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가복음 10:15에 보면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야만"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받아야 합니까?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미래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완전한 믿음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해야 합니다. 또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야"만 합니다(마6:33). "그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생활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없이 천국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가운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문은 오직 하나님만이 전 세계의 왕이 되시기를 바라는 하나님 통치에 대한 기원입니다. 천국이란 결코 어떤 땅이나 영토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마음과 심령과 그리고 인간의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과 하나님의 지배를 말합니다. 천국은 정치적인 왕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랑의 왕국인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 통치의 축복을 부분적이나마 지금 경험할 수 있는 현재 영역이며, 예수님 재림시에 완전히 경험하게 될 미래 영역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그 분의 말씀대로 생활할 때 천국 생활의 기쁨을 지금 여기서 누릴 뿐만아니라 장차 임하게 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인류가 꿈꾸는 천국이 있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옛날 미국 남북 전쟁시에 어느 장군을 죽이기 위해서 그 장군의 딸에게 한 간첩이 아주 좋은 보석 상자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물론, 보석 상자 안에는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너무 예쁜 상자라 아버지께 자랑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가 주더냐고 물었더니, 지나가던 좋은 아저씨가 주고 갔다고 어린 딸은 대단히 기뻐합니다. 이 때, 아버지는 딸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아느냐?" "네, 압니다." "그러면, 그 상자를 갖다 버려라." 영문을 모르는 아이는 이 좋은 것을 왜 버리라고 하시는지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좋은 것을 사 주시지도 않으면서 버리라고만 하시니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엄하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아느냐?" "네. 압니다." "그러면, 네 손으로 저 멀리 갖다 버려라." 아이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멀리 내다버리고 돌아서는데, 그 상자는 "꽝!" 하고 터졌습니다. 장군의 딸은 아버지를 믿고 인격을 믿었기에 버렸습니다. 내가 다 알고, 다 경험하고, 그리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천당을 가 보고 믿겠다고 말합니까? 가 보고 알 때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믿음으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찬송가 545장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는 1892년 초창기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48년 동안 일하다가 미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인에게 추방된 윌리암 스왈렌(William Swallen)목사의 시입니다. 백 년 전의 한국입니다.너무나도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 한국인들, 특히 초대 한국 교회에는 가난한 층과 부녀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한국 여인들의 한에 맺힌 눈물의 생활(三從之道 등)을 보고 이 가난과 눈물을 견딜 수 있는 힘은 "하늘 가는 밝은 길, 저 높은 곳을 바라보는 데"서 올 수 밖에 없음을 한국 교인들이 찬송으로 부르게 하기 위하여 지어서 급한대로 애환의 민요 애니 로리(Annie Laurie)곡에 붙여 보급시켰던 것입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보고 있는 자, 그리고 방향을 확정한 자, 그 밝음을 향하여 올라가는 자는 슬픈 일과 고생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문제를 사소한 일로 여겨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어둠 속에서도 항상 빛을 볼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항상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천국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할 때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포로된 몸으로 왕의 명령보다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굶주린 사자굴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그 몸에 조그마한 상처하나 입히지 아니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 역시 왕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기 때문에 평소보다 7배다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졌지만 그 불 속에 신들의 아들과 같은 분이 함께 하시므로 "(단3:27)...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천국은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잠15:17)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팀이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병원에서 도와주는 사랑의 모습을 찍은 기록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그 학생들의 IG-A(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를 검사했습니다. 일주일 후 같은 학생들에게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잔인한 기록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IG-A를 조사했더니 사랑의 영화를 본 뒤의 IG-A수치가 훨씬 높았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각이 어떤 사랑의 능력에 연결될 때 병균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어찌 병균 뿐이겠습니까? 세상과 싸우는 힘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위력을 가졌습니다. 상식과 지식을 넘어선 놀라운 힘이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내가 연결될 때 그 능력과 권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UCB(바클레 대학)에서도 비슷한 실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쥐에게 먹이를 줘서 키우는데 세 종류로 분류하였습니다. 1번 쥐는 혼자 먹게 하였습니다. 2번 쥐는 다섯 마리가 함께 먹게 하였습니다. 3번 쥐는 사람이 손에 들고 먹이를 먹여 주며 키웠습니다. 즉 사람의 사랑을 느끼며 먹고 자라게 한 것입니다. 1번 쥐는 600일을 살고 2번 쥐는 700일을 살았으며 3번 쥐는 950일을 살았습니다. 1번 쥐는 뇌가 가장 가벼웠고 2번 쥐들의 뇌는 1번보다 더 무거웠으며 3번 쥐의 뇌세포는 사방의 세포들과 많은 연결을 맺으며 뻗고 발달하여 훨씬 무거운 뇌가 되어 있었습니다. 쥐에게 사람을 알거나 이해할 능력은 없지만 쥐의 지락을 초월한 어떤 큰 존재의 사랑과 연결될 때 생물학적으로 뇌하수체 속의 성장 호르몬 인자를 얼마나 자극하여 건강하게 살고 오래 사는 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지배를 받고 살게 될 때 진실로 천국의 기쁨과 행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이야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며 계속 중얼거립니다. 더웁긴 하고, 힘은 들고, 별 의미가 없는 것에 시간 쓰는 것 같고 해서 불만인 것입니다. "하나님, 배 만드는 것이 진짜 필요합니까? 저는 바쁜 사람입니다요. 할 일도 많고 한데."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질문에 대답하면 나도 네 질문에 대답해 주겠다. 너는 물 위로 몇 발자국 걸어갈 수 있겠니?" 대홍수가 육지를 덮을 때 한 발자국도 걸어갈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이 아는 척하고, 바쁜 척하고, 똑똑한 척하는 것이 우주의 운행자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어리석은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묵묵히 순종하고 모든 염려와 내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것이 옳다는 교훈입니다. 구름타고 오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잊거나 모르고 사는 때가 많습니다. 세상이 재미있어서, 먹을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아서, 돈 세는 재미에, 죄 짓는 재미에, 바쁘다는 것이 무엇인지,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도 모른 채 다람쥐 채바퀴 돌 듯이 살면서 구름 타고 오리라고 한 예수가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칼럼니스트 시드니 해리스는, "현대인들은 천국에서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더 원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과거에 서구세계를 움직여 나갔던 힘은 장차 도래할 저 세상에서 주어지는 행복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천국에 대한 희망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한 삶에 대한 희망으로 대체되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것이 자신의 생존시에 아니면 자기의 후손들에게서 충족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종말론적 개념들이 정치. 경제. 사회라는 세속적인 영역 속으로 흡수되었다. 천국이라는 개념은 이 세상에서 건설되는 유토피아라는 사상으로 세속화되었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활력 뿐만 아니라 불화를, 열렬한 희망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공포까지 가져다 주었다." 영국의 도덕적 타락에 대하여 윈스턴 처칠경은 "대영제국의 도덕이 이렇게 까지 타락하고 문란한 상태에 이르게 된 이유는 이 나라에 천국과 지옥이 더 이상 선포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라고 논평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가야 할 천국도 없고, 피해야 할 지옥도 없다면 왜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으며, 왜 먹고 마시고 즐기지 않겠는가?" 천당이 있습니다.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 믿는 믿음으로서만 가는 나라입니다. 예수 없는 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예수 계신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여러분의 가정에 예수님께서 항상 계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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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기쁨에 이르는길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기쁨은 인간의 마음에 양약과 같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므로 기쁨이 충만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목적이 신앙생활에서 기쁨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얻어지는 것은 기쁨인 것입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기독교인은 기쁨의 사람이어야 하고 항상 웃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침울한 기독교인은 진정한 기독교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기독교인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참된 기쁨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즐거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과 기쁨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기쁨이 없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즐거움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입니다. 기쁨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삶의 기쁨이 충만하시고 인생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일뿐입니다. 예수 믿으시고 영원한 기쁨을,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영원한 즐거움을,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시기 기원합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생전에 노쇠방지와 건강증진을 위해 녹음보고, 만담조운영, 18세 미만의 처녀의 피 수혈등 비방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에게 보고할 사항은 <아주 중요한 것>이거나 <기분 좋은 것>만 골라 녹음해 두었다가 시중드는 처녀가 산책시간에 눈치를 봐서 김일성이 기분 나쁘지 않을 때에 들려 주도록 했습니다. 또 만담조는 7명의 젊은 남녀로 구성, 매일 한 사람씩 돌아가며 항상 새로운 레퍼토리의 익살과 해학으로 김일성에게 웃음을 선사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의 장수비결중 만담조운영은 <웃음을 선물>한다는 점에서 김일성의 건강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예방의학자들도 긍정적인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웃음은 뇌에 자극을 주어 엔도르핀의 생성을 촉진시켜 스트레스 해소와 신진대사에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한 심장전문의는 어른과 어린이의 웃음을 비교 연구한 결과, 어린이는 하루에 평균 4백번 정도 웃는데 비해 어른은 고작 15번 정도 웃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린이가 어른처럼 잘 웃지 않으면 성장이 늦을뿐 아니라 각종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습니다. 웃음의 효과에 대해 연구한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윌리엄 프라이 박사는 웃음은 심리적 조깅(jogging)이며 에어로빅이라고까지 말합니다. 프라이박사는 20초동안 크게 소리내어 웃으면 5분간 에어로빅을 하며 몸을 뒤흔든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한번에 5초씩 하루 1백번 웃을 경우 보트의 노젓기를 10분동안 한것과 맞먹는 운동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크게 소리내 유쾌하게 웃으면 세포가 활성화하고 신체의 면역능력이 증진된다고 합니다. 실제 건강한 사람은 하루에 1백번 이상 웃는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롬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세상에서의 삶에 웃을 일이 없다해도, 나를 구원하신 예수만 생각해도,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뻐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과실을 맺기 위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하는 것처럼(요15:1-10) 사람의 진정한 기쁨의 열매를 맺는 삶을 위해서는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해도,어떠한 일을 당한다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궁극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 육신의 유익을 위하심보다 경건의 유익을 위하신 것입니다.기쁨이 있어야 신앙이 성장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은 믿음을 쇠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어야 감사하게 되고 감사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더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쁨이 있어야 생활에 힘과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하려고 해도 마음에 용기도 없고 몸도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죠지 뮬러는 설교를 맡은 경우에 먼저 기도를 많이 하여 기쁨을 얻은 후에야 설교하러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기쁨이 충만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하므로 그물이 찢어질만큼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낚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5: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였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요2:1-11)

"(요2: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주신 계명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행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여 두려움을 몰아내고 기쁨이 충만해지게 됩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기쁨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임하시므로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16)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 본질이십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쁨은 영원히 변치않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계명을 지켜 순종의 오묘함을 배워야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결코 무거운 짐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말씀을 지키는 것이 무겁게만 느껴진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계명,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믿음이 강해지며 영안이 밝아져서 모든 것을 바로 해석하며 기쁜 생활을 항상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계명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요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계명을 사랑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계명에 순종할 때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잠4:13)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하나님의 계명,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자기 생명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한 번은 미국의 큰 배가 남태평양에서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큰 고래 한 마리가 여러 차례 배에 부딪혀 오므로해서 배에 구멍이 뚫려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결국 파선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선원들은 작은 보트들을 내려 타고 대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물에 뛰어 들어가 헤엄쳐 큰 배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선원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그들이 배에 있던 나침반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하여 큰 모험을 하였으니 그 이유는 항해할 때에는 나침반을 생명과 같이 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에 이르게 하는 나침반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걸고 계명을 지켜야만 합니다. 이렇게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계명은 결코 무거운 짐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의 계명, 말씀은 우리에게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새의 날개가 무거운 것 같아도 그 날개가 창공을 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계명을 지키므로 유쾌해지고, 기쁘고, 은혜를 받으며, 영적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생활에는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계명을 지켜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께서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 자기 사이에 장벽을 두지 않으셨으므로 죄인들을 친구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도 불신자들과 사이에 장벽을 두지 않아야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가장 미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인들과의 장벽이 되는 죄를 제거하심으로 우리 죄인들을 자신의 친구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 친구의 죄의 장벽을 없애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분의 말씀, 계명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에 맞는 친구를 구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친구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친구를 만드는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므로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친구를 만드는 것, 이것이 계명을 지키는 자가 맺게 되는 아름다운 열매인 것입니다. 곧 사랑의 결실인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생활의 결실인 것입니다. 기쁨에 이르는 길, 그것은 바로 계명을 지켜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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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요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요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요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요16: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요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요16: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신혼 초에 사랑하는 아내가 아플 때는 "어서 옷입어 병원에 가야지." 1년 후에 아프다고 전화하면 "여보, 지난 번 간 병원알지? 택시 타고 다녀와 오늘 빨리 갈께." 2년 후 아프다고 전화하면 "집엔 약도 없어? 약 먹고 누워서 쉬라고 또 몸살이 난 모양이구먼." 5년 후 몸이 불편하다고 전화하면 "도대체 뭘 한다고 당신은 맨날 아프다는 거야? 나 원참, 원래 당신은 좀 약한 체질이었던 같애." 10년 후 전화도 못하고 누워 있는 아내를 본 남편 왈 "아무리 몸이 좀 아파도 집안은 정리해 놓고 있어야지. 나 원참, 이러니 밖에서 되는 일이 있겠어!" 라고 소리치면서 저 혼자 밥 사 먹으러 밖으로 나가는 남자. 아내는 겉으로 보이는 외모는 변해도 마음만은 변덕쟁이가 아닌 신혼 초의 기분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그런 마음으로 옷을 입은 남편을 아내는 좋아한다고 합니다. 아내와 가정의 환경과 분위기가 달라지기를 바라지말고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질 때 아내와 가정의 환경이 변화되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믿고 주변의 환경과 분위기가 달라지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이 변화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30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펼쳐놓은 책을 읽듯이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요16: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예수께서는 무슨 일이고 누구에게나 물어보실 필요없이 그들이 이야기하기 전에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와같이 예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투시할 수 있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요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뿐만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것을 모두 아시고 계시다는 것을 통해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케 되었습니다. 예수님만큼 하나님과 인간을 알고 있던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의 연약함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실패와 배반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장차 극도의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들이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요16: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요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장차 자기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하고 모두 떠나가버릴 것임을 알고서도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을 놓고 한 마디 원망하거나 섭섭하게 생각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신뢰하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최악의 상태를 알고 계시면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시고 신뢰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어느 누구를 용서해 줄 수는 있지만, 다시는 그 사람을 신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연약함으로 인해서 나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 그래도 너희는 반드시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아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이와같은 사랑과 용서,그리고 신뢰가 함께 이루어지는 예는 없습니다. 사람을 용서하고 과오를 범한 인간을 신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실수하고 과오를 범한 사람을 용서하기는 하여도 계속해서 그 사람을 신뢰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상대방을 믿어주므로해서 창조적인 삶을 이룰 수 있도록 밀어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버릴 때까지 그들을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버리고 나서도 그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셨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총명하여야 합니다. 총명한 사랑은 바로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우상화하고 상대하는 남자나 여자를 결점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실망으로 끝나고 말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우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총명한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아주 똑똑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해타산이 아주 빠르고 함께 살고 있는 상대방이 싹수가 노랗게 보이면 아예 일찌감치 결판을 내버립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남편이요 아내이면서도 실수와 과오가 있을 때 있는 그대로의 남편과 아내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데는 그지없이 인색하기 짝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남편이나 아내를 계속해서 신뢰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인간의 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총명한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것이며, 실패한 삶을 성공으로 이끌며, 버림받은 인생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쓸모있는 인생으로 변화시키기에 총명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랑은 이해타산이 맞지아니하면 얼마든지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똑똑한 것 같으나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세상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혜와 총명이 되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총명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총명하기 위해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에는 고독함이 있어 보이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각각 제 곳으로 흩어져 갔지만 그는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은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의인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와졌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버리시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예수님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과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세상의 친구들이 모두 자신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요점은 이런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연약함을 미리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후에 가서 그들이 예수를 실망시키고 예수를 버리고 도망해 가버린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사실들이 그들 자신을 얼마나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 넣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장차 너희들 앞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나는 알고 있다. 그 일을 이제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겠다. 너희들의 불충실과 나에 대한 배반이 나에게 큰 충격을 주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흩어져 버릴 것을 내가 알고 있다. 나 혼자만 남게 될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너희들이 비록 내 곁을 모두 떠난다해도 나의 너희들에 대한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 나중에 가서 너희들이 나를 배반한 사실을 생각할 때 자신을 비관하거나 낙담해서는 안된다." 바로 이와같은 말씀 속에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동정과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인간의 죄가 어떻게 자기를 상하게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인간들을 해치는가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사람이 얼마 만큼이나 자기를 해쳤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쳤다고 하는 사실이 얼마나 그 사람의 마음을 찌르고 얼마나 그 사람을 가책과 후회와 슬픔으로 돌아가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삶의 차원에 있어 대단한 차이를 가져올 것입니다. 조금만 자기 마음에 고통과 상처를 주게 되면 참지 못하고 울며 불며 난리를 치고 따지고 덤벼드는 것이 상례인데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에 고통을 안겨준 사람이 앞으로 당하게 될 마음의 상처까지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도리어 평안하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마음을 잃지않는 지혜로운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뿐만 아니라 배반당한 사람이 그 배반당한 사실에 가슴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자기를 배반한 사람이 그 배반으로 인해 당하게 될 마음에 괴로움과 상처를 염려하여 "평안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

실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예수 곁을 멀리 떠나 낙향했던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반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마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26: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26: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26: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중략).........................

"(마26: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중략)........................

"(요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요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과연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을 면밀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을 확인하며 어디에서나 평안함을 누리며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예수님의 사랑은 이와같은 평안함을 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용기와 승리를 안겨 주는 것입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세상이 예수님에 대해 최악의 일을 다 저지른다해도 결코 예수를 패배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이 여러분의 실패한 배반의 삶을 부활시켜 심령에 평안함과 삶에 승리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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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십자가의 영광

"(요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본문은 예수님의 기도로써 주기도문(마6:9-13),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마26:36-46)와 더불어 예수님의 대표적인 기도 중의 하나입니다. 주기도문은 누가복음 11:2-4에 나타난 바 처럼 천국 시민의 생활 원리로서 기도하는 자의 자세와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눅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눅11: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눅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본장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목전에 두고서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신 자발적인 순종의 기도였습니다.

"(눅22:40)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눅22: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눅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눅22: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눅22: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요한 복음 17장은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로써 1절-5절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이며, 6절-19절은 제자들의 보존과 일치를 위한 기도이며, 20절-26절까지는 성도들의 영생과 일치를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 자신과 그의 제자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성도들을 위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중보의 기도'인 것입니다. 본장의 기도 주제와 목적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요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여기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나타나게 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고난을 통한 하나님 사랑의 계시와 복음의 전파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이 인식될 수 있으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신학이요, 인간의 참된 하나님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영광"을 구하는 예수님의 기도인 것입니다.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과 아들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출세하거나 사업이 잘 되거나 잘 살아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여주는 진리는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이 없이는 영광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진리를 바로 깨달아 삶의 어떠한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며 삶의 목적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 존재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 1절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쓰임받게 하옵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에 그 십자가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인생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광", 곧 죽음을 통한 영광을 말합니다. 대개 위인들은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쟌 다크는 영국인에 의해서 마녀 또는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쟌 다크를 화형에 처할 때 그 군중 속에는 전에 그녀를 처형할 때는 자기도 불피울 나뭇단을 보태겠다고 맹세했던 영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에 이르러서는 "저 여성의 영혼이 있는 곳에 나의 영혼도 있게 하소서."라고 그는 외쳤던 것입니다. 영국왕의 측근인 한 사람은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노라. 한 사람의 성자를 화형해 버렸으니 말이다."라고 말하면서 쟌 다크의 화형장을 떠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면 십자가 밑에 서 있던 백부장 마저도 같은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마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십자가는 예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사명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질 때 나타나는 영광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신 것처럼 자아의 부정(否定) 즉, 자신이 십자가에 죽을 때 하나님께 영광스런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자신은 십자가에 죽노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 스스로 구하는 영광은 냄새나는 영광이요, 썩어질 영광인 것입니다. 썩지않고 영원한 영광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자아를 십자가에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아를 부정하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타내고자 할 때 자신의 삶이 가치를 창조하며, 존귀하고 영광스런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므로 오늘날 영원히 영광스런 존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비록 당시에는 사람들로부터 미련하게 산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타내는 삶의 결과 참수형을 당했을지라도 결국 그의 삶이 가장 지혜로왔으며 영광스런 삶이었던것임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성도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서 영광을 돌리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입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의 순종함을 배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독립선언문과 3.1만세운동의 정신 속에는 예수님의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3.1만세운동이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무저항의 사랑으로 일관한 것은 당시 조선의 지도자들 중 많은 사람이 예수의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지도자 중 철저한 사랑의 사도인 길선주 목사와 월남 이상재 선생의 무저항주의의 영향이 컸던 것입니다.길선주목사는 당시 유명한 부흥사로 가는 곳마다 예수의 사랑을 전했으며 취조하는 일본 관헌들에게도 털깎이는 양같이 겸허하게 사랑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천도교측에서 강력하게 무력저항을 주장했으나 끝까지 만세 운동을 무저항운동으로 이끌었습니다. 이 사실은 무척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양주에 있는 묘비에 변영로씨가 이렇게 써넣었습니다. "당시 천도교주 손병희 선생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실새 다수인이 한결같이 살육을 주장했으나 오직 이상재 선생은 살육하느니보다 우리가 죽음으로 항거하여 대의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 제의하시었다."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한 순종으로 나타내었기 때문에 3.1운동은 가장 성공적인 독립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들 지도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어린양으로서 그 사명을 다 하였던 것입니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는 작곡이 끝나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오선지에 "SDG"(Soli Deo Gloria의 두문자) 즉,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적어 넣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죽음으로 다 하기까지 여러분의 인생 오선지에도 "SDG",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말이 기록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이러한 "십자가의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원함', '영생'을 헬라어로 '아이오니오스'(aionios)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생명의 지속 기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면 생명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반드시 축복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 바람직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악인으로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불행한 것입니다. 병들어 고통 중에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은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무의미한 삶의 장수는 별 가치가 없습니다. 영생 즉, '아이오니오스'(aionios)의 주요한 뜻은 생명의 질입니다. 이 단어를 올바로 적용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영생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영생을 소유하는 것,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특질인 빛과 희락과 화평과 거룩함 등을 어떠한 형태로든지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없는 삶의 지속은 생명의 의미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일본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는 나라 민족은 장수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33년이란 짧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영원한 영광스런 삶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그 분 스스로 생명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나 죽으나 힘들거나 고통스럽거나 어떠한 형편에서도 오직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시는 자가 되시므로 영원히 영광스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아나톨 프랑스는 영생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시골 노파와 대화를 나누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100만 년 동안 더 살 수 있지만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해 주지? 그래도 만족하지 못할걸." 물론 그럴 것입니다. 노파가 원하는 것은 100만 년 동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그 시골 노파가 원하는 것은 먹고 마시는 일 외에 뭔가 의미 있는 생이 그에게 마련되어 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그녀가 영혼과 마음으로 바란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시고 하나님이 사셨으니 자신도 살았으며, 사는 동안 하나님의 수고와 고난에 동참하였고 마지막 영원한 승리에도 참여하게 되리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어떤 부인이 저녁에 퇴근한 남편에게 낮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심방다녀가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래, 그 분이 뭐라고 말씀하셨지?" 남편이 묻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이 매우 이상한 질문을 하셨어요. '이 집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가요?' 라고 묻지 않겠어요." "그래? 목사님께서 우리는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또 주일에는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고 있다고 말씀드렸어?" "웬걸요. 그런 것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으시고 단지 '이 집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가요?' 라고 질문만 하셨어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친교는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말씀대로 사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희락과 평화 등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영어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어를 쓰는 사회 속에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영어이고, 하는 것이 영어일 수 밖에 없는 사회, 눈만 뜨면 온통 영어인 사회,영어를 쓰지않으면 빵 하나 사먹지 못하는 사회에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확실하게 잘 아는 것은 그 분의 말씀 속에 사는 것입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줄줄이 암송하며 십계명을 외우고 있다고, 성경 구절을 많이 알고 있고 신학과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영생에 이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인간의 삶, 생명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영원한 가치와 의미있는 삶을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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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십자가의 길

"(요19: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 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요19: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요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요19: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요19: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요19: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19: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요19: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셍케비치(Sienkiewicz)의 노벨상 수상작인 <쿠오바디스>는 너무나 유명한 초기 기독교의 야사입니다. 로마에서 전도하던 사도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여 압비아 가도(Appian Way)를 정신없이 도망하다가 공중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환상에 놀라 발길을 멈춘 것입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길을 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놀라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나는 배역하는 로마의 시민을 위해 두 번째 십자가에 달리려 간다마는 너는 어디로 가느냐?(Quo Vadis)"라고 반문하셨다고 합니다. 여기 주목할 것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주께서 "너는 어디로 가느냐?" 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말은 "주여 이 세상을 어디로 이끄시렵니까?, 또는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는 말이 됩니다. "너는 어디로 가느냐?"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상태이며 믿음은 어떠냐는 물음이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이 가는 길에 관심이 크고 심하면 주님에게까지 원망할 때가 있지만 나 자신의 가는 길은 살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나 자신을 먼저 살피고 나의 가는 길을 바로 정할 때 우리는 세상의 가는 길도 바로 볼 수 있고 또 주님의 뜻도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바로 이해하게 될 때 세상의 가는 길을 바로 이해하며, 세상과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이해할 때 자신의 십자가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마는 항상 마음 가운데 "내가 진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서..." 하는 불평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꿈을 꾸는데 역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올라 갔습니다. 올라가다 보니까 산 중턱쯤인데 십자가를 여러개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위로부터 소리가 들리는데 "네가 지고 올라오는 십자가 때문에 매우 고생스러울텐데 여기 십자가가 많이 있으니 네 마음대로 하나 택해 보아라."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옳다. 되었다. 다른 것 하나 얻어보자."하고서 살펴보니 참 자그마한 십자가가 하나 있었습니다. 빛이 번쩍 번쩍 나고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얼른 이 십자가를 한 번 져 보겠다고 했습니다. 허락을 받아 이 십자가를 어깨에 메니 조그맣기는 하나 전부 황금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무거워서 일어나기 조차 어려웠습니다. 겨우 일어나서 몇 걸음 걷다가 "이거 너무 무거워 못지겠습니다." 하고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걸 하나 골라 보라고 했습니다. 이번엔 조그마한 중 십자가인데 아름다운 장미꽃이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향기가 나고 아름답고 해서 이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져보니 처음엔 괜찮더니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지 않은가? 이 가시가 어떻게 잔등을 찌르는지 지고 갈래야 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건 너무 가시가 많아 못 지겠습니다." "그럼 벗어 놓아라. 어떤 십자가를 택하려느냐?" 잘 살펴 보다가 골라잡은 것은 처음에 벗어놓은 자기의 십자가였습니다. "그건 네가 벗어놓은 십자가가 아니냐?" "그래도 이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 "그럼 네 마음대로 해라." 자기가 벗어놓았던 십자가를 다시 지고가니까 한결 가볍더라는 것입니다. 남 보기에는 다른 사람은 별로 십자가가 없고 내가 진 십자가가 제일 무거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그 사람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이 진 십자가를 져보려고 하면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는 지혜있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각기 주어진 십자가인데 지금은 깨달을 수 없어도 그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것이 제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바로 이해하시므로 자신의 십자가의 길이 승리의 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슬픔의 길)은 지금의 엑시 호모 교회(Ecce Homo Church, 요 19:5, 빌라도 법정 자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 옛 도시의 좁고 꼬불 꼬불한 길을 따라 골고다 언덕까지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말합니다. 성지순례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소는 바로 이 십자가의 길, 비아돌로로사입니다. 십자가형에 의한 죽음만큼 무서운 죽음은 없습니다.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하고도 소름끼치는 사형"(키케로)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본래 페르샤의 사형제도인데 칼타고인들이 이어 받았고, 이것을 다시 로마인들이 칼타고인들로부터 배워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형은 로마 본국 이외의 영토에서만 사용되었고 그것도 노예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의 경우 반역죄에 해당되는 사람만이 사형을 당하지만 십자가 상에서 사형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가형의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죄가 선고되면 재판관의 "십자가 형으로 한다."는 언도와 함께 다음과 같은 명령이 집행관에게 내려집니다. "옷을 벗겨라, 그리고 채찍질하라!"(Summove, lictor, despolia, verbera=Remove him, lictor, strip him, and scourage him) 채찍질은 가장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한 가죽 채찍이 아니었습니다. 그 채찍의 긴 가죽끈에는 뾰족한 뼈조각과 날카로운 납조각 등이 촘촘히 박혀 있어 옷이 벗겨진 채로 그 등허리를 후려치게 되면 의식을 잃고 실신하거나 헛소리를 내며 미친 사람처럼되기도 합니다. 심하면 그 채찍에 그만 까무라쳐 거의 초죽음상태에 이르게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채찍에 맞고 나면 즉시 끌려 나와 4명의 로마 군인 가운데서 자신의 십자가를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 때때로 죄인은 일어나서 걸어가게 하기 위하여 채찍질을 받고 뭉둥이로 몰림을 당하여 비틀거리면서 십자가의 형장까지 걸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메고 가는 죄인 앞에서는 한 사람의 관리가 그가 사형을 받아야 할 죄상을 기록한 죄패를 들고 행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죄상을 보고 그같은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십자가형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 죄상을 기록한 것을 죄인보다 앞세워 긴거리를 가게함으로 그 죄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서 그에 대한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그 죄인에게 유리한 증언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면 십자가 행진은 즉시 중지되고 소송을 재심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를 높이 세우게 되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못이 뚫고 지나간 손과 발의 신경과 힘줄에 체중이 언쳐있으므로 극히 미미한 움직임만 있어도 온 몸이 전률하며 고통은 극에 달하여 가장 부자연스런 모습으로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점점 더 극심해지게 됩니다. 그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길은 전혀 없습니다. 그 못박힌 자리에는 염증이 점점 심해지고 종국에는 살이 썩어 문들어지고 맙니다. 이러한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면 피가 역류하여 혈관을 압축하게 되고 특히 머리에 피가 팽창하게 되어 그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고통에 더 한층 고통을 주는 것은 탈진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범죄인은 기아와 갈증과 볕에 노출시키는 것으로 인하여 완전히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달려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법에 따르면 시체는 해가 지면 내려서 묻어버려야만 했습니다. 로마법에서는 죄인의 시체는 매장하지 아니하고 독수리와 까마귀, 그리고 들개들이 처치하는 대로 방치해 두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오랜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 어머니, 처자, 교우들을 부탁합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5종목의 기도" 라는 주기철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에서)라고 기도하며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소서!"라고 외치며 1944년 4월 21일 병감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영문 밖의 길"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이 어떤 길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영문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2절)

십자가의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가오랴

주님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5절)

십자가의 길은 첫째 순종의 길(2절)이며, 둘째 사명의 길(5절)입니다. 첫째, 십자가의 길, 십자가를 지는 생활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생자(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가는 그 길이 바로 독생자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이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순종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순종의 길을 걸어가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란 영광된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 비아돌로로사도 순종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主)님이십니다. 모택동이 정권을 잡은 후, 예배 금지 명령이 내렸습니다. 기독교인들끼리 3백 명이 모여 공동 농장을 경영하는 부락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명령을 거스려 예배를 계속드렸습니다. 어느 날 당원들이 나아와 예배를 계속할 경우 매주일 한 사람씩 총살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이들은 여전히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총을 든 당원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 때, 장로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뛰어나가며 외쳤습니다. "제일 먼저 천국에 가는 영광을 나에게 주십시오." 장로는 즉석에서 총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동안 계속되었는지는 몰라도 이 기독교인들의 공동 농장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배고파도 올라가야 하는 길, 골고다의 좁은 길, 죽더라도 올라가야 하는 길, 그러나 이 길만이 생명과 영광, 영생복락의 길이기에, 아니 이 나라 민족을 살리는 길이기에 우리는 이 길을 가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만이 이 나라 민족의 병든 것과 상한 것, 반목과 분쟁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비시켜 피흘리게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연산군은 나중에 엄청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복수가 행해졌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피는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는 흘리면 흘릴수록 더 많은 사람의 죄가 용서되고 미움과 복수보다는 사랑과 평화가 더욱 더 흘러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의 길은 사명의 길입니다. <잠 못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카알 힐티는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과제에 속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가운데 <신 밖에 아무도 모른다.>는 제목으로 된 감명깊은 작품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어떤 잡화상을 경영하는 니콜데이 이와노비치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으로 모든 사람의 촉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점의 물품을 구하기 위해서 매달 한 두 차례씩 장을 보아야만 했는데 장이 있는 곳은 마차로 왕복 거리가 이틀 정도 걸렸습니다. 이제 그는 내일 떠나기로 작정하고 잠자리에 누었는데 자기가 백발이 되어 집에 돌아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그 꿈 이야기를 사랑하는 아내에게 했을 때 아내는 매우 불길하다고 말하면서 떠나지 않도록 만류하였으나 이와노비치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예정대로 떠났습니다. 날이 저물어 그는 여관에 투숙하여 하루종일 마차에 시달린 몸을 침대 위에 던지고 쉬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날 그는 길을 떠나려고 준비하는데 갑자기 경찰관들이 달려와서 지난 밤 그 여관에서 살인강도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하면서 수색을 벌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노비치 차례가 되었을 때 수사관들이 그의 가방에서 피 묻은 칼을 끄집어 내었습니다. 그는 아연실색하여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결국 그는 살인죄의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지게 되었습니다. 이와노비치는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사건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귀중한 인생을 형무소에서 희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평이나 저주나 실망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기의 삶을 인내와 성실로서 살았습니다. 그가 모든 동료 죄수들과 간수들이 신임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되어 모범수로 석방될 때 그의 머리는 이미 백발로 변하였습니다. 그가 왜 무죄한 인간으로서 비참하게도 살인자로 종신형을 지내야 했는가에 대하여 "신 밖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신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비아돌로로사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나의 사명이다."고 하는 확고부동한 신앙의 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은 실로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으시는 길이었습니다. 고전 7:22의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 를 사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명자는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서" 사명을 주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아모스(암 7:14-15), 이사야(사 6:8), 예레미야(렘 1:4-14), 그리고 에스겔(1:1-3) 등은 모두 하나님께서 부르고 그에 따른 소명체험을 통해서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암7: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암7:15)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겔1:1)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겔1:2) 여호야긴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겔1:3) 갈대아 땅 그발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만방에 말씀을 전할 사명자로 부르셨을 때 자기는 말을 잘 할 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입에 전할 말씀을 담아 주시며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가 주시는 말씀의 두루마리 책을 받아서 먹는 신비체험을 통해서 예언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울(바울)도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예수를 만나는 신비스런 체험을 통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예수를 전하기 위하여"(행9:4-15) 사명자로 선택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명자들은 부르심을 받는 체험 즉, 소명체험을 통해 사명의식을 갖게 되었고 강렬한 사명감으로 힘차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부르심을 받은 120명 모두에게 한꺼번에 부어주시는 사명체험이었습니다. 이 사명체험을 통해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성령 체험은 사명 감당의 기본 조건입니다. 베드로는 목자로서 사명을 받기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번씩이나 받았습니다. 이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사명 감당의 필수요건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는 사명으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 사명을 완전한 사랑과 순종인 십자가로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써붙인 죄장서가 히브리어와 라틴어, 그리고 헬라어로 쓰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 3대 언어는 당시 3대 위대한 민족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헬라는 조형의 미와 사상의 미를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법과 탁월한 정치를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는 종교와 참된 신이신 하나님의 예배를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의 극치는 바로 예수 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 안에는 그 위에 다시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최고의 사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진선미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이 탐구하고 획득하려고 추구해왔던 모든 것은 예수 안에서 그 극치를 찾아 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삶의 최고 진선미를 이루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므로 여러분의 삶이 가장 진실되고 선하며 아름다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 밑에 있는 도박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살폈듯이 죄인은 4명의 군인들이 호송하여 형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죄수 처형 임무를 띠고 있는 이들 군인들은 죄인이 입고 있는 의복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통상적으로 다섯 가지 의복을 입었습니다. 신과 터번, 띠, 속옷, 겉옷이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4명이고 의복은 다섯 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비를 뽑아 취했던 것입니다. 제각기 자기가 뽑은 것을 취한 후에 속옷만이 남았습니다. 그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통채로 짠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네 조각으로 자르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그것을 취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제비를 뽑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군인들은 십자가 밑에서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을 이렇게 까지 나타내 보이는 정경은 없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가 고통 가운데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십자가 밑에서 군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듯이 즐겁게 주사위를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극은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적대심이 아닙니다. 그 비극은 이 세상의 무관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 것도 아닌듯이 취급하고 있는 무관심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여인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미워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인류를 사랑하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는 무관심하고 남은 옷가지 몇 벌에, 세상 썩어질 것, 물질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히덕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탈냉전시대를 맞아 사상과 이념, 문화의 벽을 뛰어 넘어 지금 세계는 소위 "빵"을 놓고 전쟁(경제 전쟁)을 벌이는데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경제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됩니까? 가져야 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관심, 무감각한 인생들에게는 결국 자아 상실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작가 중에 엔도 슈우사꾸라는 사람이 <바다와 독약>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본의 후방 기지 병원에 있던 젊은 군의관 로다는 일본 군부의 명령을 받아 미군 포로를 잡아다가 마취시켜서 생체 실험을 하는데 참가했습니다. 처음에는 미군 포로를 잡아서 진단하는 척하다가 그 포로들에게 병이 들었으니까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미군 포로가 처음에는 의심하고 거부해 보려고 했지만 적의 의사이든 아군 의사이든 혹은 전쟁 중이든 평화시이든 의사만은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의사에 대한 절대 신뢰로 수술을 승락했습니다. 일본 의사는 미국 포로의 몸을 해부해서 왼쪽 폐 전체를 잘라 내고 오른 쪽 폐의 상엽을 절단했습니다. 폐를 얼마만큼 남겨 놓았을 때 사람은 얼마 동안 살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리를 잘랐을 경우에는 얼마 동안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생체 실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로다라는 의사는 그 순간에 자기의 귓가에 반복해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죽였다. 죽였다."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또 "나는 책임이 없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누구도 안 할 수 없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이후로 의사는 거의 자아를 상실하고 망령처럼 삽니다. 자기가 잘라 낸 미군 포로의 폐를 보며 그 젊은 의사는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그는 미쳐 버렸습니다. 그가 무서워하는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사람의 폐를 보고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인 인간의 일부분을 보고도 무감각하고 괴로와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자기의 마음을 보고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가책이었습니다. 가슴의 고통이었습니다. 마음을 찢는 회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엡4: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눅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일본 도쿄 지하철 독가스 사건이 옴진리교란 신흥종교 집단의 조직적인 음모에 의해 저질러 진 사실이 확인되면서 신흥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일본 언론에 의하면 최근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신흥종교단체들은 일본 경제가 급성장한 지난 75년 이후 결성된 단체들입니다. 일본 당국의 집계에 따르면 현재 등록된 종교단체수는 1만 2천여개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들 신흥종교는 초능력에서부터 영능(靈能), 제영(除靈), 염력(念力), 텔레파시, 그리고 옴진리교 교주가 내세운 공중부유(空中浮遊)에 이르기까지 초자연적인 4차원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53년 결성된 진여원(眞如苑)은 영령개발을 내세워 현재 신도수만도 70만명이 이르고 있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는 것을 교의로 삼고 있는 숭교진광(崇敎眞光, 78년도 결성)도 무려 50만명 가까운 신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일본성도교단, 신명애심회, 광명회, 행복의 과학등도 적지않은 세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들 종교단체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신도층이 젊다는 것입니다. 특히 진여원(眞如苑)을 비롯한 옴진리교,행복의 과학 등에는 인기배우와 TV탤런트 등을 비롯해서 갓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들이 대거 입교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고령자라는 기존의 관념과는 정반대의 현상입니다. 이들 젊은층들이 종교단체에 빠져드는 동기도 과거와는 사뭇 다릅니다. 2차대전 패전 직후 가난과 병 고통등에서 탈피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종교단체에 가입한 것과는 달리 이들 젊은이들은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했다든지 신비에 매료됐기 때문이라는 언뜻 보기에는 너무나도 순수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신흥종교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발생하는 것은 일본만이 아닙니다. 미국의 유사종교는 워싱턴 대학 스타크 교수의 조사로는 4백25개나 됩니다. 그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에 있습니다.그러나 현대 유사종교의 낙원은 미국이 아니라 유럽입니다. 현재 밝혀진 것만도 1천 3백개가 넘습니다. 인구비례로 따져 가장 그런 것이 많은 곳은 이상하게도 스위스입니다. 그 작은 나라에 1백개가 넘는 유사종교가 있는 까닭을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신흥종교의 교주는 라엘입니다. 전직이 자동차 평론가겸 가수였던 그의 신도는 8천명쯤 됩니다. 이들은 수입의 7%씩을 바치고 교주와 함께 벌거벗고 명상을 하는 <혜택>을 받게 됩니다. 영국에서 지금 가장 급성장하고 있는 신흥종교는 <예스 군대>입니다. 2천명이 넘는 신자 대부분이 젊은이들인데 군복을 입고 완전히 금욕적인 집단생활을 합니다. 이들 신흥종교의 특색은 신자들이 중류 계급에 속하고 고등교육을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이들이 가장 정신적인 공허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전3: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외양적인 삶의 질을 볼 때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이들은 이러한 신흥종교집단에 입교 후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거나 아니면 집단 자살로 그 종말을 고하고 맙니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수학자 피타고라스, 로마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세네카, 여류시인 사포,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설국>의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 프랑스의 화가 빈센트 반 고호, 음각가 로버트 슈만 등 이들은 당대의 존경받는 지성인이었지만 모두가 자살했습니다. 지식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마저 악마에게 팔아넘긴 <파우스트>는 "나는 세상의 모든 학문을 통달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독백합니다. 인생의 행복과 인간의 문제가 인간의 지식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각종 경제 지표가 나타내는 경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해서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삶의 질은 눈에 보이는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 즉 사랑과 공의, 정직과 성실, 근면 등이 더욱 편만한 사회에 있는 것입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앗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 Francesco of Assisi,1182-1226)가 어떤 시골로 여행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시골 처녀가 우물에서 물을 긷고는 물 위에 나무 조각을 띄워 메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히 여긴 성자는 그 이유를 물으니 물 위에 나무 조각을 띄워두어야 물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 때 프란체스코는 크게 깨닫게 되어 그 후 설교할 때면 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의 마음에도 십자가를 얹어 두면 동요가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풍랑은 너무 심하고 우리의 마음은 너무 약하여, 늘 흔들리고 늘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십자가가 건재할 때 마음의 동요는 진정되고 고요한 펑안을 느끼에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도취된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마음에 건재할 때 마음의 안정이 있고, 우리가 십자가에 도취될 때 우리는 강해지는 것입니다.

"(출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 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15: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 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마라의 물이 써서 사람들이 마시지 못하였던 것처럼 이 세상은 쓴물로 가득합니다. 이 쓴물을 마시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계8:10) 세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계8:11)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마라의 쓴물에 한 나무가 던져지므로 그 물이 달아졌으며, 그 단물을 마시므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라의 쓴물에 던져진 나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던져지는 곳에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던져지는 곳에 사람들에게 내린 질병, 영혼과 정신의 모든 질병까지도 치료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던져지는 곳에 세상의 많은 풍랑이 잔잔해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를 집시다. 자신과 가정, 그리고 나라 민족의 십자가를 집시다.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일지라도 십자가를 지고 갑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만이 세상의 풍랑을 잔잔케 하고, 세상의 쓴물을 달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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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보라, 네 어머니라

"(요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19: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문학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예리하게 통찰 분석하므로 선지자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어령 교수의 작품들 가운데 "이것이 여성이다."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소설가 몽테를랑은 그의 여러 작품 속에서 어머니 때문에 좌절하고 만 젊은이들의 운명을 그리고 있습니다. <올림픽>이란 그의 소설 속에서는 스포츠에 열중하려는 뜻을 가진 청년이 어머니의 소심한 이기주의에 의해서 차단됩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죄는 자기 아들을 영원히 자기 자궁의 암흑 속에 가둬두길 바라는 일입니다. 아들을 독점하고 그것에 의해 자기 존재의 막막한 공허감을 메우려는 나머지 어머니는 아들을 병신으로 만듭니다. 어머니만큼 가련한 교육자는 없습니다. 아들의 날개를 자르고 그가 오르고 싶어하는 산봉우리에 접근시키지 않고 아들을 바보로 만들고 못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는 몽테를랑의 어머니관을 이렇게 요약해 놓고 거기에 대해서 맹공격을 퍼붓고 있지만 그녀 자신도 <몽테를랑의 비난은 전연 무근거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라고 양보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사랑이 너무 많아서 그 남편을 그리고 아들의 날갯죽지를 분절러 놓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바다같이 넓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때때로 자녀들이 이 바다에서 익사하는 사실에 대헤서 우리는 너무나 소흘히 대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산처럼 높은 것도 분명하지만 너무 높기에 거기서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하는 수가 많은 것입니다. 동물학자들은 반드시 모성애는 암컷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령 펭귄새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암놈은 알을 수컷의 발등에다 낳습니다. 그러면 수컷은 그 순간부터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알이 깰 때까지 죽은 듯이 서 있습니다. 발에서는 털이 자라기 시작해서 알을 따뜻하게 덮어 줍니다. 물론 암놈은 알을 남편에게 맡겨두고 편안하게 놉니다. 적어도 펭귄새에 있어서는 모성애보다 부성애가 산이며 바다인 셈입니다.(오늘날에는 펭귄새가 같은 젊은 세대 아빠들이 점차 늘어 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르네상스 시대의 여수도원 근방의 연못에서는 으례 낚시금지의 푯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태아를 버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적 사실을 놓고 보더라도 모성애를 일방적으로 절대신비시하는 것은 하나의 맹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성애는 혹시나 하는 믿을 수 없는 구석이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 불변의 사랑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아니할 것이라 (사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현대 여성의 앞가슴은 아이의 양육이라는 실용적인 가치보다도 미학적인 악세사리로 더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어머니와의 육체적 접촉은 시대가 흐를수록 어렵게 되어 갑니다. <학사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자신의 체온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유모차의 포대기(강보)로 기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플래스틱 우유병을 빨리고 있는 광경을 우리는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미국의 통계로 보면 아이들 열 명 가운데 가장 불행한 아이가-----그것도 검둥이지만-----뜻밖에도 어머니 젖을 빨며 자라나는 행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아이들인 90%가 어머니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모르고 자라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의 촉감이 아닌 비닐제품의 그 대용 젖꼭지입니다. 그래서 현대 문명은 바로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아니라 <비닐 콤플렉스>에 걸린 2세들에 의하여 전개되어 가고 있습니다.(그래서 그런지 요새 아이들이 자꾸만 비닐 봉지에다 본드 접착제를 넣고 마셔대므로 환각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외부의 변화들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들의 심리 내부까지도 흔들어 놓습니다. 현대의 어머니들은 대부분이 자녀에 대해 무의식적인 죄책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옛날의 여성들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칠거지악의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비로소 확고한 자신의 지위와 그 권한을 보장받게 됩니다...그러나 현대의 <학사 어머니>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옛날의 여성들은 아이를 낳는데서 자기 인생이 시작되었지만 현대의 여성들은 도리어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퀴리부인이 되려던 꿈, 로랑상이 되려던 꿈, 대학 캠퍼스에서 자라나던 모든 꿈들이 아이의 탄생으로 끝장이 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회가 달라졌기 때문에 자신을 <보장>해 주던 아이가 오늘날엔 장애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저 아이만 없었던들 이혼을 할 수 있을 텐데....> <저 아이만 아니었던들 지금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얻었을 텐데...> 내부에서 이런 소리가 들릴 때 여성들은 갑자기 놀라며 귀를 틀어 막습니다. <내가 못됐지, 이런 생각을 하다니...> 혹시 자기는 아이들을 미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 불안 때문에 반사적으로 자기가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으스러지도록 아이를 끌어안고 뽀뽀를 해주고 발작적인 소나기의 사랑을 퍼붓습니다.....가족계획으로 중절수술을 하고 있는 현대의 어머니들은 한번쯤은 낳을까 말까 하고 망설이다 그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고치면 죽일까 말까 하는 끔찍한 살인의식을 품고 애를 낳았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파티나 동창의 모임으로 집을 자주 비우는 파티형 어머니, 여권 운동에 바쁜 세미나형 어머니, 라디오나 텔레비젼에서 활약하고 있는 매스컴형 어머니, 직장에 나가 돈벌이를 하는 아버지형 어머니, .... 이 많은 현대의 어머니들은 자녀를 충분히, 그러니까 자신을 키워준 어머님처럼 그렇게 충분히, 사랑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빠진 죄의식을 씻어내기 위해 자녀들을 히스테리컬하게 껴안게 되는 것입니다.... 못다한 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오늘의 어머니들은 <눈물>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돈>을, 사치스러운 옷과 장난감을 안겨줍니다. 피아노 개인교수를 불러들이고, 미술연구소와 그리고 일류교에 아이들을 집어 넣으려고 극성을 떱니다. 이것이 바로 그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합니다....옛날의 아이들이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과 그 사랑을 서로 구별하지 못한 것처럼 요즘 아이들은 어머니가 주는 <물질>과 <사랑>을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엄마의 애정 표현은 곧 물질적 표현과 등가물(等價物)이 되고 맙니다....<학사 어머니>들은 물질 이외로 자녀를 사랑해 주는 모성의 본능적 방법을 잊어버린 카나리아들입니다. 라틴어와 히브리어를 자기 고장 사투리처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는, 그래서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어느 여류학자님은 처음 이 세상에서 어머니가 되시던 날 활명수를 서너 병이나 마셨다는 애화가 있습니다. 저녁 식사가 갑자기 체한 줄로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는 알아도 아이를 낳으려면 진통을 하게 된다는 어머니의 소박한 그 본능적 언어는 그만 몰랐던 까닭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히피 여성들은 브래지어로 젖을 보호하고 어린아이에게는 분유를 먹이는 현대의 어머니들을 향해 일종의 선전포고를 하고 있습니다. 히피여성들은 <아기에 대한 최대의 사랑은 직접 젖을 먹이는 이외의 것은 없다.>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날 소위 배웠다고 하는 <학사 어머니>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시인 조병화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나는 소위 대학에서 배운 사람

어머니는 산골에서 자란 여성

어머니는 그저 평범한 한국 여성의 한 사람

그러나 학교에서, 서적에서 배운 인생보다도

이렇게 어머니 밑에서 배운 인생이 더욱 컷습니다.

요사이 신문지상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가정파탄, 이혼급증, 인신매매, 가정파괴범, 성폭력사범의 증가, 중년의 위기, 낙태, 동성연애, 사생아의 증가, 노인학대, 배우자 구타, 십대 미혼모 증가, 가출 청소년 증가, 존속상해및 살인 증가, 청소년 마약사범 증가,... 점점 붕괴되어가는 가정들을 연상케 하는 단어들입니다. 현대가정은 전통적인 가정에 비해 불안정합니다. 현대가정이 불안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징조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높아가는 이혼율, 부모와 자녀간의 괴리현상, 그리고 유동적으로 변해가는 부부역할 등은 우리의 가정을 혼란의 와중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말했습니다. "가정은 최상의 학교이다. 이 학교의 교과 과정은 사랑이다." 헨리 포드는 무척 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동차 산업으로 거부가 된 뒤에 고향 땅에 작은 주택을 지었습니다. "백만 장자의 집 치고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하는 친구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건물이 문제가 아닐세. 그 속에 사랑이 있으면 위대한 가정이고 사랑이 없다면 석조로 지은 대저택도 무너질 것일세." 서양의 여성상 중에는 셋의 전형이 있습니다. 이브와 비너스,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이브는 여성을 대표하고, 비너스는 미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경건한 모상이며 구원의 모상입니다. 어느 날 하늘의 천사가 가장 아름다운 것 셋을 구하려고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천사가 구한 셋은 <아름다운 꽃>과 <어린이의 미소>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하늘까지 가는 도중에 아름다운 꽃은 시들고, 어린이의 미소는 흉해지고, 오직 어머니의 사랑만 한결 아름다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꽃가루는 나비를 통해서 운반되게 하고, 그의 아가페(Agape) 사랑은 모성애를 통해서 전달되게 하셨습니다. 빅톨 위고는 편모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어느 해 가을 앞집 감나무에 달린 탐스러운 열매를 보고 그는 배고픔을 참기 어려워 그만 따먹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집주인이 알고 노발대발하였습니다. 담장을 쌓겠다고 호통을 치며 화를 내었습니다. 빅톨 위고의 어머니는 주인에게 "우리 아이는 내가 한번 하지 말라 하면 절대로 같은 잘못을 하지 않습니다. 주의시키겠습니다." 하고 사죄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앞집 정원에 감이 떨어져 낙엽에 덮여도 그 집에 들어간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비록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어도 빅톨 위고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순종하며 자랐기에 그 마음 속에는 정의감이 불탔던 것입니다. 빅톨 위고가 나폴레옹의 독재에 항거하며 양심을 굽히지 않고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교육과 사랑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 배후에 위대한 어머니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무엘의 배후에 한나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배후에 요게벳이 있었고, 디모데의 배후에 유니게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배후에 엘리사벳, 어거스틴의 배후에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 웨슬레의 배후에 수산나가, 아브라함 링컹의 배후에 낸시가, 율곡의 배후에 신사임당이 있었습니다. 조지 이스트맨은 뛰어난 발명가이며 코닥회사의 창설자입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몹시 가난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키우며 노동에 종사했습니다. 어머니가 밤낮 고생하는 모습을 그는 커 가면서 계속 관찰하였습니다. 특히 손가락 마디가 굵고 험해진 그 손을 모으고,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를 옆에 앉히고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 진실된 음성과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청년 이스트맨이 사진 기술을 개발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어코 돈을 벌어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려야겠다. 어머니의 기도가 헛되지 않게 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그를 사진 기술쪽으로 몰아넣었고 정말 억만 장자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미국 LA에 있는 페퍼다인대학교 교육대학원장인 스티네트 박사가 지은 가정 문제에 대한 좋은 책, <강한 가정의 비결>에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를 건강하고 좋은 가정이 될 수 있는 요소로 지적하면서 이런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행복한 장래가 보장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헌신(Commitment)---팀 의식이 강한 가정, 한 가족으로서의 단결과 화합이 강하다.

2. 감사(Appreciation)---서로 칭찬하고 격려하여 붙들어 주는 가족, 피차의 감정을 보살펴주는 가정.

3. 교통(Cmmunication)---대화가 많고 잘 들어주는 가족들, 고립감을 느끼지 않는 접촉이 잦은 가족.

4. 동행(Time together)---먹어도 놀아도 일해도 되도록 함께 갖는 시간이 많은 가정. 집 바깥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지 않고 매사에 동행하는 가족들.

5. 정신적 건강(Spiritual Health)---가족들이 함께 이웃에 대한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가정.

6. 극복하는 기술(Coping Skill)---가족 중 누가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가족들이 이해하고 넓은 아량으로 힘을 주는 도움의 태도.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레는 19명의 자녀를 낳아 모두 훌륭하게 양육하였습니다. 그 녀는 훌륭한 신앙인이라면 훌륭한 가정을 만들어야 하고, 훌륭한 가정은 아이들에 대한 가정 교육에 달렸다는 신념으로 다음과 같은 교육 원칙을 실천하였습니다.

1. 간식 엄금

2. 전원 여덟 시에 취침

3. 개인의 의사 존중

4. 아이 전원을 하나님께 인도

5. 말하기 시작하면 기도부터 가르침

6. 가정예배 때는 절대 정숙

7. 떼쓸 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8. 잘못을 고백하면 무조건 용서하고, 고백하지 않은 잘못은 반드시 벌한다.

9. 부모나 아이들이나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

10. 부모의 채찍을 두려워하며 부모의 훈계를 고맙게 여기게 한다.

수산나 웨슬레의 이러한 가정 교육이 가정의 방파제가 되어 성경의 진리로써 사나운 세상의 물결을 막아선 것입니다. 마리아와 아들 예수 사이에는 깊은 신뢰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에게 이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의 반응은 "(요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하고 무관심을 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잔치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요2:5)...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 뒤 예수께서 시키시는대로 하인들이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워서 연회장에 갖다주니 모두 포도주로 변하게 된 최초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와의 신뢰가 놀라운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들이 이런 때에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 않을 것을 믿고 있었고, 아들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말로는 어떻게 반응을 보이든 그 마음 속에 있는 자비와 이웃의 곤란에 손발을 걷고 나서는 사랑의 정신을 알고 있었으며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과 신뢰의 줄로 이어져 있는 어머니는 아들 딸의 현재 상황이 어떻든 기쁘고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은 이런 어머니를 배신하는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이런 어머니와 아들 딸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는 어머니 아버지와 그 자녀가 멀어지는 비극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와의 이러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는 십자가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심에 있어서도 인륜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대하여 하실 바 책임을 다 하셨습니다. 그는 모친 부양의 책임을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가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신 것은, 그의 보다 큰 사명, 곧 영적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혈육보다 영적 가족을 더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동생들보다 사도 요한에게 맡기셨던 것입니다.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영적 혈통은 영원한 것이며,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니만큼, 그것을 위주할수록 하나님이 가까와집니다.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라고 하였으며, 디모데와 디도를 자기의 참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딤전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딛1: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랑과 신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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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다 이루었다

"(요19: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19: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19:31)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 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요19: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요19: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요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19: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요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요19: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 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요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요19: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요19:41)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요19:42)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자유진영의 승리로 이끈 처칠 수상이 1940년 영국 의회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그 요지는 "인생의 3대 액체인 피와 땀과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리느냐에 따라서 모든 일의 성패가 결정되며 개인과 국가의 운명이 좌우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피를 흘려야 할 때가 있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으며, 땀을 흘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피를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으면 남의 노예가 되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으면 동물의 차원으로 떨어지며, 땀을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으면 빈곤의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몽땅 흘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가 죄의 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땀과 눈물을 흘리시므로 우리가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물이 인류와 역사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최후로 남기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끝"(omega point), 즉 역사의 완성을 가져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지 않은 삶은 모두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역사와 인간의 삶이 완성되고자 하면 오메가 포인트(끝, omega point)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어야 합니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인생은 끝나봐야 아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평가는 후세로 미루는 것이 좋습니다. 끝까지 잘 살면서 사랑의 제물로 나 자신과 나의 가장 중요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므두셀라는 969년이나 살았지만 성경에 쓰일 만한 가치가 있는 말을 단 한 마디로 남기지 못했으며 기록될 만한 한 번의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치 죽어버린 나무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 3년 동안 공생애를 살았지만 그의 이름은 찬양과 더불어 온 세계로 퍼져나갔고 그의 행위는 앞으로도 영원히 인류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바이런(G. Byron, 영국 낭만파의 대표적 시인)이 <나를 당혹하게 하는 것은 내가 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되었을 뻔한 것이다.> 라고 말한 것처럼 나중에 후회가 아닌 즐거움으로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으려면 당신의 삶을 도움과 친절로 채워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인생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그리스도가 그의 삶을 타인을 위한 고귀한 행동으로 가득 채웠듯이 당신의 삶을 그렇게 채워간다면 인생은 당신의 것이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Herber Evans) 여러분들께서 오늘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어떤 말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세익스피어가 말했습니다. "이 세상 전체가 하나의 무대 그리고 인간은 모두가 배우, 그들은 각자 자기 문으로 들어와 자기 문으로 나간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무대로부터 퇴장하게 될 때, 절망에 빠져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삼상 26:21)라고 한탄할 것인가, 아니면 기쁨에 넘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웰스(H.G.Wells,문인)는 임종시 "저리들 가! 난 괜찮아."라고 말했습니다. 칸트는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을 철학에만 힘썼습니다. 그는 16세부터 가정교사를 하면서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철학 등을 공부했고, 30세 때는 겨우 대학 강사자리를 얻어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다가 46세에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70세까지 대학교수를 지내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을 뿐 아니라 남과 교제를 하거나 그렇다고 여행을 하는 일도 없이 오로지 자기 서재와 학교 사이만 오가며 생활하였습니다. 매일 그가 다니는 시간이 어찌나 정확한지 이웃 사람들은 그가 지나갈 때 시계를 맞추곤 했습니다. 칸트는 학교에서 강의하고 집에서 연구하는 일을 되풀이할 뿐 다른 일에는 조금도 한 눈을 팔지 않았습니다. 흔히 학자들이 자기 연구에 몰두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아 인정이 메마른 사람이라고 지탄받는데 반해, 칸트는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면서 불행한 누이들의 생활을 돌보는 동기간의 정도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80세에 죽었는데, 임종시에 "이제 그만하면 됐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인 괴테는 죽을 때 "창문을 열어다오. 빛을....빛을..."하고 시인다운 최후의 말을 했습니다. 베토벤은 죽을 때 "친구여, 박수를....희극은 끝났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훌륭한 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레 미제라불>의 저자 빅토르 위고는 1885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사람들에게 '나의 일과를 다 마쳤소.'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 일생을 다 끝냈소.'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곧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면 나의 일과가 다시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어둠에 싸여 있는 미로가 아닙니다. 곧게 뻗어 있는 밝은 길입니다. 우리는 하루 해가 질 때 무덤 속으로 내려가지만 새벽의 여명과 함께 다시 깨어나게 됩니다."(W.C.푸울)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영원한 새 아침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는 가운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명작 <이반 일리히의 생애와 죽음>의 마지막 장면은 "억울하다!"하고 뇌까리며 화가 나서 죽는 것입니다. 이반 일리히는 정직한 남편, 정직한 아버지로서 정직하게 살고 평생을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이 다가온 시간에 생각해 보니까 참 행복을 느끼지 못했고 보람있는 시간들을 산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순간에 화가 난 채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살지 못하고 나의 시간만을 산 사람은 이반 일리히처럼 쓸쓸한 최후를 맞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동생이자 찬송가 작가인 찰스 웨슬레는 운명 직전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기쁩니다. 아, 만족하다. 만족하다." 이 얼마나 평화스럽고 행복한 죽음입니까? 그는 천국에서 자기를 맞이해 주시는 하나님의 기쁜 낯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죽음의 시간이,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으로 생각되지 않고 새로운 시작으로 믿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comma)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에 맨 마지막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헬라 원어로는 "테텔레스타이"라고 하는데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헬라의 도시를 발굴해 냈을 때 옛날의 세금 영수증을 발견해 냈는데 거기에 바로 "테텔레스타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금을 지불했다, 지불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신 고로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부터 죄값을 다 받으시고 하나님의 책에서, 하나님의 장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지워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그렇게 멀리 옮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롬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인류 역사의 궁극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인류는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죄값을 다 지불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시 죄가 그의 삶을 지배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그를 지배했던 죄의 세력은 완전히 끝나고(omega point) 사랑의 역사가 시작(alpa point)됩니다. 라틴어로 아모르(amor)라고 하면 <사랑>을, 모르(mort)라고 하면 <죽음>을 뜻합니다. 서양인들은 사랑과 죽음에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탕달은 서양인의 사랑은 죽음과 통한다 하여 이 라틴어를 서로 비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 교수가 한번은 학자들이 모인 세미나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교수께서는 성서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셨는데 한 마디로 성경의 진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르트 교수는 미소를 띠며 "성경은 결국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보았네.>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한 학자들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대답은 누구나가 알 수 있는 어린이 찬송가의 첫 절을 인용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 속에는 깊은 연구의 결과가 나타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단순한 사실은 어린이에게만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유일한 진리, 성경 전체를 묶어 놓은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인류 속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그 사랑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모두 불완전하고 미완성입니다. 에로스, 남녀간의 사랑도, 스톨게, 부모 자녀간의 사랑도, 필리아, 친구간의 사랑도 모두 불완전하며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면 모든 종류의 사랑이 완성되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에 대한 이어령 교수의 다음 얘기를 봅시다. 플라토의 우화에 에로스(사랑)의 아버지는 풍족(Poros, 豊足, 知의 神)의 신이며 그 어머니는 빈곤(Penia, 무지의 신)의 신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끝없는 충족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그 마음은 항상 결핍 속에 있습니다. 아무리 열렬한 사랑이라 해도 충족되지 못한 허전한 불만을 느낍니다. 19세기 유럽의 판화에는 남녀의 사랑을 풍자한 만화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잠시 보겠습니다. 첫 장면에는 비오는 날 거만하게 걸어가는 여자에게 남자가 뒤따라오면서 우산을 받쳐줍니다. 기사풍의 이 남성은 그 여인에게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도록 우산을 씌워주고 있는 바람에 자기는 흠뻑 비에 젖고 있습니다. 둘째 장면은 우산으로 가리고 이 남녀는 열렬한 키스를 합니다. 이때는 우산이 공평하게 두 사람을 다 덮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이 다시 빗속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산이 처음과는 반대로 그것을 들고 있는 남자 쪽으로만 기울어져 있습니다. 여자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흘겨보면서 비에 젖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는 기사가 아닙니다. 이것이 에로스 사랑의 모든 과정입니다. 구애할 때는 으례 남자가 저자세이고 여자는 고자세입니다. 그러나 일단 사랑을 손에 넣으면 그 자세가 전도되고 맙니다. 사랑의 우산을 잡은 손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입니다. 왜냐면 남자에겐 동정이란 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자에게 처녀성이란 것이 하나의 신화처럼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사랑의 완성이 여자에게는 <몸을 버린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하는 것이 남자의 경우엔 <정복>이라고 말해지며 여자의 입장에선 <상실>이 되는 셈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같은 사랑이라 해도 여자는 하나의 핸디캡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사랑을 얻는 순간, 여성은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이른바 <이별 콤플렉스>입니다. <사랑의 장부>를 보면 남자는 언제나 흑자이고, 여성의 것에는 적자로 기록됩니다. 두번째, 세번째의 여성을 만나게 될수록 남성은 유리한 게임을 벌이게 됩니다. 여성의 심리를 환히 바라보고 있는 그 경험때문에 사랑의 작전에서는 언제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가 있습니다. 여성은 반대로 경험이 많을수록 그 값어치가 하락합니다. 첫번째 남성보다 두번째의 남성이, 두번째의 남성보다는 세번째의 남성이 보다 불리한 자리에서 선택됩니다. 처녀성과 정조라는 그 신화가 여성에게만 적용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4: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요4: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남편을 다섯이나 사랑해보았지만 모두가 빗나간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참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 사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에는 율법의 완성을 말합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율법의 대강령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말은 사랑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다음으로, "다 이루었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책임을 완수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요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지도자의 사명감당 요건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정치 경제 사회 등 각계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사랑하므로 그 주어진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마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신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 중에 제인 아담스(Jane Adams, 1860-1935)가 있습니다. 그녀는 시카고의 부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의과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척추에 병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의사의 권고로 휴양차 유럽을 여행하였습니다. 런던에 갔을 때, 그녀는 빈민굴을 방문하였다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녀는 비로소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다.>라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후 그녀는 런던 빈민굴에서 봉사의 삶을 결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한다는 헌신의 75세로 죽을 때가지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시카고 빈민굴의 낡은 집을 사서 빈민의 탁아소, 가출 소녀의 숙소로 삼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유명한 헐 하우스(Hull House)입니다. 제인은 죽는 날까지 척추병으로 고생하였으나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맡았기 때문이다."라는 20대 후반의 결심을 잊지않고 정력적으로 일했습니다. 그 당시 미국에는 16세 미만의 아동 노동자가 2백만 명이나 되었고, 수 많은 문맹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백악관 아동 회의>를 창설한 것도 제인의 노력이었습니다. 그녀는 1931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제인 아담스의 좌우명은 미가서 6장 8절 말씀이었습니다.

"(미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나의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겸손하게 묵묵히 꾸준하게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도장을 맡은 자가 나아갈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고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을 지배했던 죄의 세력이 끝장나고 이제 사랑의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고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의 목적과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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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부활과 성령

"(요20: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요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요20: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요20: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20: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요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요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20: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못하더라 (요20: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영광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돌아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많은 죄를 범했고 많이 용서함을 받았던 사람이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으로 그는 창부였으며 일곱 귀신들렸던 여자로써 예수님께서 개심시키고 용서하시어 영육간에 깨끗함을 입은 가장 존귀한 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결코 예수님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 갔다는 것은 그 만큼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이 성구의 난하주를 보면, "간절히"가 "새벽에"로 되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쓰면 "....나를 새벽에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새벽에 찾을 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요14:21).....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녀는 곧장 성내로 되돌아가서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 갔습니다.(본문 2절의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바로 요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 두 제자들이 묘지에 이르렀을 때 요한은 그 속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급한 성격을 감추지 못하고 묘지 속을 들여다 볼 뿐만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텅 빈 무덤을 보고는 대경실색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마음 속에는 어떤 생각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예수의 시체를 옮겼다면, 만일 묘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고 했다면 어찌하여 그들은 수의를 남기고 갔을까?' 요한은 그 어떤 생각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의는 전혀 흩으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접은 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신체가 있었던 곳에는 신체용의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 머리가 있던 곳에는 머리를 쌌던 수건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수의는 벗겨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애당초의 형상대로 개켜서 놓여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벗어나서 그것을 놓고 떠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광경이 요한의 마음을 꿰뚫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요한 믿게 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여기 중요한 사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무덤을 찾아 갔던 사람은 예수님을 그처럼 간절히 사랑하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예수의 부활을 믿은 사람은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셨고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던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그의 부활의 표적을 최초로 목격하게 했고(막달라 마리아), 그 표적을 읽어서 아는 눈과 이해하고 믿는 마음을 가지게 했던 것입니다(요한). 삶의 위대한 법칙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위대한 해석자라는 것입니다. 지성이 모색과 불확실함 가운데서 혼매하고 있을 때에도 사랑은 진리를 파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연구로써 파악할 수 없는 때에도 사랑은 사물의 뜻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에 한 청년 화가가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 그리고 났을 때 그 유명한 화가 도레(Dore)에게 그의 비평을 부탁했습니다. 도레는 쉽사리 대답하려 하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단 한 마디만 했습니다. "자네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지 않군, 그렇지 않았다면 보다 잘 그릴 수가 있었는데." 만일 우리들이 마음도 생각도 예수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 예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도와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이전 보다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시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시고, 자신의 인격과 삶 속에 예수님을 보다 잘 나타낼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보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은 가서 전하라(선교)는 것입니다.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그 때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행했던 다락방에서 모여 전전긍긍하며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여 목적을 달성한 유대인들이 이제 자기들을 잡아 죽이려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의 한 가운데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요20:21)....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요20:22)....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들을 새롭게 사명으로 창조하시는 것은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cultural mandate)을 가졌다면,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제자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선교)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복음 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과 권능입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제자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증거되는 복음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겔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37: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겔37: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겔37: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겔37: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여기 6, 9절의 "생기"와 14절의 "내 신"은 바로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골짜기의 가득한 "마른 뼈들"(dry bones)에게 "생기", 즉 성령이 들어감으로 "이 뼈 저 뼈가 맞아서 서로 연락하고, 힘줄이 생기며,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덮혀 살아났습니다." 이 "마른 뼈들"(dry bones)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합니다.(10,11절) 나라 민족을 살리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인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죽은 것을 살리시는 생명의 영이십니다.

"(고전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예수)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복음 증거의 사명을 지닌 교회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위에 임하실 때 그 사명을 위해 능력으로 덧입히울 것이며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선교입니다.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의 각각 끝나는 부분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 한결같이 선교 명령을 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눅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어주신 성령은 선교의 거룩한 주체인 것입니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선교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은 오직 성령인 것입니다. 선교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진리의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강한 선교의 힘은 항상 "(고전2:4)....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은 선교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교회는, 부활 신앙을 가진 교회는 선교를 사명으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여서 증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행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2: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기에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과 복음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용과 신앙의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증거되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한 개인과 나라 민족의 생명은 죄 사함받아 의롭게 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사회 등등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죄가 그대로 있느냐 아니면 사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 이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인 것입니다.

"(행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행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행3: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서는 은과 금보다 백번 더 나은 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부활하신 예수를 전했던 것입니다. 앉은뱅이에게 있어 당장 필요했던 것이 은과 금이라고 생각됩니까? 결코 그렇지않습니다.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과 금이 전부가 아닌 더 중요한 영적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은과 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분의 문제들과 이 나라 민족의 문제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일(선교)만이 자신과 나라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시고 그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나 되는 기적, 물이 포도주가 되는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등등은 그 기적들을 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의 부활은 생명의 승리입니다. 또한 진리의 승리입니다. 예수를 무덤에 가둬둘 수 없듯이 생명과 진리는 가둬둘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이 나라 민족 위에 생명과 진리가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성령으로 체험한 사도 바울은 그 누구도 그를 가둬둘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행16: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행16: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행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행1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행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16: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행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16: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행16: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행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행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행16: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행12: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행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행12: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행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행12: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행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행12: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행12: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행12: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행12: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줄 알겠노라 하여 (행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행12: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행12:14)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행12: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행12: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행12: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행12:18)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행12: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구약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풀무불 속에, 사자 굴 속에 가둬둘 수가 없습니다.

"(단3: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단3: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단3:21)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단3: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단3: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단3:24)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단3:25)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단3:26)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단3:27)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단3: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 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단3: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단6:19)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단6:20)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단6:21)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단6: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단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단6:24)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 (단6:25) 이에 다리오 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가로되 원컨대 많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단6:26)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 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단6:27)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 (단6: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금과 은,그리고 세상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분이 보내신 성령은 그 힘과 능력의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어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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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예수의 부활

"(요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요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타임(Time)지의 기사(1962.11)에 의하면 4월은 자살이 가장 많은 달입니다. 그 이유는 만물이 싱싱하게 소생하는 생명에 대하여 자기의 인생은 너무도 허무하다고 느끼는 탓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 엘리옷(T.S.Eliot)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신앙인들에게는 꽃망울이 열리는 달이고, 생명이 움돋는 부활의 달입니다. 눈이 죽어버린 소경이 눈을 뜨고, 귀가 죽어버린 귀머거리가 듣고, 사지가 죽어버린 중풍병자가 일어나는 기적의 달입니다. 심장이 몽땅 죽어버린 '나사로'(요11:43) 인생들이 무덤을 열고 생명의 나팔을 불면서 부활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생명에는 살았으나 죽은 생명이 있고, 죽었으나 산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살기 위해서 온 생명이 있고 죽기 위해서 온 생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생명은 살기 위해서 오신 생명이 아니라 실존(인간)을 위하여 죽으러 오신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무덤이 그를 가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원수를 이김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울은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실로 그에게는 무덤이 없습니다. 비석도 없습니다.다만 천사의 입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28:6)고 비문이 한번 낭독되었을 뿐입니다. 부활! 부활! 무덤을 파헤친 생명! 생명! 그리고 이 감격! 이 기쁨! 누구에게 전할 것인가? 어느 가슴에다 심을 것인가? 이 땅에 메말라버린 지식인의 사상 속에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땅에 비틀어진 정치인의 양심 속에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땅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도덕과 윤리 가운데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땅에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교육계에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땅에 천민 자본주의로 곰팡이 냄새나는 기업인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민족의 가슴마다 죽음의 무덤을 파헤친 부활의 생명을 주옵소서!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긴 월남 이상재(1850-1927) 장로님에게 한 번은 일본 신문 기자가 질문하기를 "간디는 평소에 100세를 산다고 하였고 누구는 몇 세를 산다고 하였는데, 선생님은 몇 년이나 사실 작정이십니까?" 하였습니다. 이상재 장로님은 그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사람이 한 번 났으면 영원히 살지, 죽기는 왜 죽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로 정치가로 외교관으로 교육가로 그리고 교회 봉사자로 다양한 일생을 보내신 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생의 비결은 이와같은 "부활의 신앙"이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이 부활의 생명을 확실히 바라볼 때 현세를 건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재 시인 괴테는 "너 아무리 성공의 정상에 서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죽고 다시 산다는 진리를 알기까지는 처량한 나그네"라 하였고,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4,19,20)고 했습니다.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의 지상 활동을 총결산해주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신의 계시 사역의 정점이 되는 동시에 인류 역사와 존재의 결정적 전환점을 가져다 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도 중요한 부활 사건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이 없이는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유태계 미국인 작가 아이색 씽어(I.B.Singer)의 작품 중 '바보 김펠'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펠은 부모를 일찍 여윈 채 고아로 자라났습니다. 워낙 천성이 착한 데다가 사람들의 말에 잘 속아넘어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바보 김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결혼 적령기에 이르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사생아까지 있으며 성격이 포악한 창녀 엘카에게 장가들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녀가 행실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혼을 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결혼한 지 4달만에 부인 엘카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김펠은 고민했습니다. 그도 아이는 10달만에 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곧 그는 아내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세상에 의심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어.' 따라서 그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갓 태어난 자기의 아기를 위해 그리고 아내를 위해 황소처럼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다른 남자와 누워자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멍텅구리 노릇도 이젠 그만해야지,평생 동안 남에게 당하면서만 살 순 없어.'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은 순결하며 따라서 김펠이 헛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아내의 말을 또다시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후 김펠은 20년 간을 그런 식으로 살면서 네 딸과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는 그의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병으로 갑자기 죽게 됩니다. 그런데 상이 끝나는 날 밤, 꿈에 악마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온 세상이 너를 속이는데 너는 언제까지 그들을 믿을 작정이냐? 그들은 거짓으로 뒤범벅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바보처럼 그들을 믿지 말고 너도 그들을 속이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나?' 꿈에서 깨어난 김펠은 악마의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아 괴로워하다가 드디어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난 모든 사람들을 믿어 주었지만 나에게 돌아온 것은 '바보'라는 별명뿐이었어. 이제 나의 믿음을 배반한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 해." 그는 20여년 동안 빵 가게를 운영해 왔는데 정직과 성실로 일해 왔으므로 온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빵을 즐겨 먹어 왔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복수로 밀가루 반죽에 오줌을 한 통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곧 빵을 구울 준비를 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온몸을 검게 그을린 아내 엘카가 나타나 매우 슬픈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바보같은 사람... 지금까지 쌓아온 믿음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려하다니! 몇 사람이 거짓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거짓된 것은 아니야. 제발 믿음을 저버리지마. 난 지금 다른 이들을 속이고 의심한 죄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단 말야." 그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었습니다. "아차 했으면 난 영원한 삶을 잃을뻔 했어. 믿음이란 가장 중요한 거야. 작은 일 하나부터 의심하다 보면 나중엔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될거야.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할지도 몰라. 그래 누가 뭐래도 나는 그 모든 것을 믿어야 해." 여러분은 김펠이 정말 바보로 여겨집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본문의 의심많은 '도마'보다 바보 김펠의 단순한 믿음이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본문27-2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기를 원합니다.이러한 바램들은 불신자 뿐만 아니라 신자들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한 번 보여 준다면 교회 나가겠다고 하고,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한번 나타나 주신다면 더욱 더 신앙 생활을 잘 할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분명히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현대의 우상이 되어 버린 과학만능주의의 영향으로 신앙조차도 실험실에서 분해하려고 드는 경향에 대해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의 출애굽 사건 기록은 보고도 믿지 못한 자와 보지 않고도 믿었던 자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주는 현대의 과학주의적 신앙관에 일침을 가하는 좋은 실례입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다가 해방을 받은 출애굽 1세대들만큼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한 세대가 없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무수히 겪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사막의 지열을 식혀주었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혹독한 추위와 짙은 어둠을 물리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인 이동식 여행과 사막의 열악한 기후로 농사를 짓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여년 간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셔서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게다가 수시로 반석의 물을 끌어내어 식수로 공급하시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들을 노예로 부려먹던 당대의 막강한 권세자인 '바로' 왕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홍해의 이적도 친히 목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던 사람은 과연 몇 명이었습니까? 믿음을 지킨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보고도 믿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보지 못하고 믿었던 대표적인 기생 '라합'을 우리 믿음의 귀감으로 삼읍시다. '라합'은 가나안 여인으로서 당시의 잡다한 혼합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세속화의 첨병으로서 부초처럼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라합은 믿음을 받아들이기에 가장 부적합한 조건과 환경 가운데 살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녀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1세대처럼 하나님의 이적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라합의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성경의 말씀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에 대한 소문만으로 믿음을 가진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마1장). 도마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간 예수님의 무수한 행적을 보았으면서도 드러낸 불신앙의 태도를 경고 삼고, 보지 못하고도 믿음을 가진 라합의 영광된 결말을 믿음의 사표로 삼아 예수 부활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영광된 첫째 부활에 참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위대한 진리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허위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진리를 제거하고, 말살하고,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진리가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임을 궁극적으로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선이 악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선이시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그 선을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선이 궁극적으로는 악에 대해 승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주었습니다.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단번에 완전히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생명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죽음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모든 생명은 죽음과 함께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죽음의 한계를 깨뜨렸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하나의 한계일 수 있으나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될 수 없습니다. 없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창조의 하나님은 죽은 예수를 살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삶에 의해 삼키어졌습니다. 죽음의 독침 곧 죄의 세력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단 한번에 극복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영원한 삶의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넷째,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싸움은 결국 인간의 미움과 하나님의 사랑 사이의 싸움이었습니다. 인간은 그 사랑을 취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영원히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모든 미움 보다 강하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미움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위대한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면 인생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인간과 세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새로운 삶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예수가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받은 사건이라면, 부활은 심판을 받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그 외형에 있어서 하나님의 분노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과 수난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하나님의 자기 높이심과 영광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예수의 역사적 존재를 나타낸다면, 부활은 모든 역사적 제한성을 벗어난 예수의 영원하고 현재적인 존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만일회적(ein fur allemal)사건이라면, 부활은 이 사건의 영원하고 현재적인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J.Moltman).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이전에 있었던 제한된 인간의 삶으로 되돌아가서 이 삶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제한되지 않은 하나님의 새로운 삶으로의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삶은 "한 새로운 몸의 새로운 삶", "하나의 질적으로 새로운 삶, 죽음을 더 이상 알지 못하며, 그러므로 이 사멸할 삶의 연장일 수 없는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삶이 아니라, 새롭고 다른 삶인 것입니다."(J.Moltman). 사도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마음과 생활로 믿으시고 "새로운 삶으로의 생명"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으로 통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인생은 그 날이 풀입니다. 그 영화는 들의 꽃입니다.

"(시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러나 세상에는 죽을 생명이 있고, 죽어서 영원히 살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으시고 죽어서 영원히 사는 생명을 '지금 여기서'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중세 시대에 어떤 수도사가 성지 순례를 갔습니다. 갈보리 산 근처에 돌아다니던 중에 뜻밖에 이 수도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쓰셨던 가시 면류관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가시 면류관은 보기에도 험상스러운 가시로 되었고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볼품은 없지마는 주님께서 쓰셨던 가시 면류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지극한 보배로 여겨져 그 면류관을 고이 자기 나라까지 가져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자기가 있는 수도원 예배당의 강대상 위에다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부활절 아침을 맞아 수도사들이 일찍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그 예배당 문을 열었더니 온 예배당이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차 있더랍니다. 이게 웬 일이냐고 사방을 둘러 보니 그 험상스러운 면류관의 가시에 아름다운 장미꽃이 많이 피었더랍니다. 물론 얘기에 불과하지만 여기에는 뜻이 있습니다. 부활 생명을 의미합니다. 승리를 의미합니다. 향기를 의미합니다. 기쁨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그를 영접하는 이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생깁니다. 새로운 능력이 생깁니다. 향기가 나는 생활로 변합니다. 기쁨이 충만하여지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심으로 참된 생명과 승리와 향기과 기쁨을 얻었습니까? 이 기쁜 주님의 부활의 날에 충심으로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영접해서, 이 시간부터 여러분의 생활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승리의 생활, 향기를 뿜는 생활, 기쁨이 충만한 생활로 변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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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사랑과 사명

"(요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요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요21: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21: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21: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요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요21: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요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요21: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요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요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요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요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요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요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

갈릴리 바다에서 일곱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려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대로 순종하였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요한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명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순종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어두운 모습의 일곱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크론 대학 교수 텅크스(Tunks)박사의 말에 의하면, 유사 이래 문명시대가 21회나 있었는데, 그 모든 멸망의 원인들이 하나님을 거스린데 있다고 밝혔습니다.("무화과 나무 열매", p.62) 일곱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비록 예수님을 배반하고 낙향했지만 그의 용서와 은총을 입어 그의 사랑을 깨달아 예수님을 알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부활의 예수님을 체험하실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가 되시므로 제일 먼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 베드로에게 제일 먼저 주고 받으신 대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여기 세번에 걸친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는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각기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첫번째 질문,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여기 네 형제 자매 부모 친구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며, 두번째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은 여기 네가 가지고 있는 배와 그물, 고기, 고향 갈릴리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며, 세번째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은 네 자신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확인하고나서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사명을 말합니다.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는데 너의 생애를 다 바치라."는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세상에서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세상에서도 가장 큰 책임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로 사랑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은 사명만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로마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죽는 날이 돌아 왔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십자가로 끌려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에 못박으려 했을 때 그는 그 곳에 거꾸로 달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죽기에는 가치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었고, 사랑은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책임을 수반하고 또한 사랑은 언제나 희생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의 사명을 대하고 그 십자가를 받아들일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다고는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자의 사명 감당 요건은 바로 사랑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사명은, 곧 "양을 치고 먹이는 것"과 최후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직분(사명)은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증거하고 장수하여 평안한 가운데 죽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받은 바 사명의 우열과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기 주어진 사명에 따라 정해 진 곳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요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예수께서 오늘날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광은 단연코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영광은 우리들에게 할당된 능력이 어떠하든간에 그것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명예를 서로 쟁탈하는 사이가 아니라 베드로는 위대한 목자이며 요한은 위대한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고전15: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15: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양을 치고 먹이는" 목자의 사명은 양의 특성상 성결 보존을 위해 죽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미워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양들을 목양하는데 있어서 죄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말하기를, "만일 나에게,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죄만을 두려워하는 사람 백 명만 있다면, 나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 시대에 역사의 운명을 가늠하는 천국 복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마땅히 성결하지 아니하면 역사에 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에 교회는 성결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양과 염소를 분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마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경향신문 5월 31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청각장애 발레리나 강진희,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소리를 듣지 못한 스물 네살, 그녀는 어떻게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음악이 몸에 감겨 들까, 그녀의 공연에서는 그래서 관객들이 숨을 죽인다. 음악이 춤속으로 스며 들어 완전히 하나가 될 때 객석은 무대 위보다 더 격정에 휩싸인다. 춤동작은 또 어떠한가, 관객들의 경탄 속에 우뚝 솟아올라 힘차게 비상한다. 활달하고 시원하다. 내면에서 우러난 표정연기는 너무도 당당하다. 우아한 자태에 당당한 표정. 자칫 교만하게 보일 정도의 자신감. 그녀를 감싸고 있는 신비로운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무엇이 영혼 속을 흐르기에 침묵의 세계에서도 노래를 듣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부모가 자신의 딸이 농아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생후 10개월 때였다. 놀라지 않는 아이. 울음소리가 이상한 아이. 어머니는 기도하며 울었다. 말못하는 딸을 위해 여러가지를 가르쳤다. 농아에 맞는다는 미술, 테니스, 육상,.... 그러나 딸은 무용만을 고집했다. 그렇다고 듣지 못하는 딸에게 무용을 시킬 순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농아 소녀의 담임선생은 마침 무용교사였다. 소녀는 담임선생에게 매달렸다. 선생은 단호히 뿌리쳤다. 그러나 뜻밖에 어머니가 소녀의 편이 되었다. 어머니의 기도 속에 춤추는 딸이 보였던 것이다. 기도의 응답이었다. 이번엔 모녀가 함께 졸랐다. 이렇게 해서 소녀의 바람은 이뤄졌다. 선생은 농아라고 봐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가르치고 따라오지 못하면 가혹하게 나무랐다. 매도 들었다.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울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음악을 따라갈 수 없었다. 자신보다 앞서거나 뒤에 처지는 음악과 간격을 좁힐 수 없었다. 다른 아이가 다섯번 연습하면 꼭 4배인 스무번을 했다. 발가락에 피멍이 가실때쯤 되면 선생은 연습량을 더 늘렸다. 중학교 2학년때 처음 솔로 콩쿠르에 참가했다. 탁월한 기량으로 예선을 통과했지만 본선에선 탈락했다. 역시 음악이 문제였다 음악을 타지 못하는 발레리나. 듣지 못하는 음악을 눈으로 헤아려 외우고 리듬을 타는 연습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신의 몫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녀에겐 음악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소리의 작은 입자--진동이 느껴졌다. 끝내 이듬해 참가한 콩쿠르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그 후 그녀는 대학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 연기를 배웠다. 거친 동작들은 하나씩 시어(詩語)로 변했다. 그녀의 춤은 갈수록 무르익었다. 92년 전국대학 콩쿠르 금상, 93년 마카오 초청공연 북큐수 국제 양무 콩쿠르 준우승. 마침내 대학 졸업을 앞둔 95년 2월 그녀는 조승미 발레단이 공연하는 <삼손과 데릴라>에 주연으로 발탁됐다. <기적의 발레리나 강진희. 청각장애인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발레리나인 강진희양은 천부적인 예술성과 고도의 테크닉, 그리고 예민한 감성으로 강렬한 인상을 줄 것이다.> 필담을 통해 그녀와 얘기를 나누었다. "발레를 통해 무엇을 얻는가?" "평강이다. 마음에 알 수 없는 것들이 흐른다. 난 느끼지 못하지만 아마 노래인지도 모른다." "감명받은 영화가 있는가?" "십계명과 작년에 본 쉰들러리스트다. 십계명에서 기적의 하나님을 확인했고 쉰들러리스트에선 인간 사랑이 감동적이었다. 쉰들러의 자기 본성 고백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녀의 삶은 사랑이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녀을 위해 새벽기도를 올린다. 청각장애자의 발레리나 성공은 딸에 대한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과, 무용에 대한 청각장애자의 사랑의 역사(役事)인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할 때 즐겁고 기쁘게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지난 15년간 복권 당첨으로 백만장자가 된 139명을 추적, 조사해 보았더니 약 6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1년 후에는 다시 직장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행복해지려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은 일(사명)을 가질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서는 행복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가장 큰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일찍이 무자극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아무런 치장도 되어 있지 않은 방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먹고 자기만 하면 일정한 돈을 지급하겠다는 실험을 해 본 결과 대부분 2-3일만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고 합니다. 일(사명)은 자기 자신이 가치를 느껴서 자발적으로 일을 해야 즐겁고 성과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강제로 시키면 똑같은 일이라도 재미가 없어지고 성과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직장인 중에는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면서도 좋은 건강을 유지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피로를 느끼며 지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자기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느냐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양을 치고 먹이는 일"은 영원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사명)입니다. 때문에 사도(제자)들은,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순교하기까지 십자가에 죽기 까지 복음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던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사함으로 주어진 사명과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끊임없이 출렁대는 가슴의 번민을 안고서 그의 고뇌처럼 얽히고 설킨 그물을 하염없이 던지고 또 던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여윈 슬픔에서 그가 도망쳐 갈 수 있는 곳은 이전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바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허탕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손금보듯 환하게 알고 있는 그였지만........ 마침내 그물질을 포기하고 텅빈 배를 저어 해변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해변가에 서 계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폴란드 소설가 셍케비치의 소설 <쿼바디스>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이후로 네로 황제는 더욱 더 잔인한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학살합니다. 그 때 기독교인이던 <기리아>가 수 많은 시민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들소가 들어있는 원형 극장 안으로 들여보내집니다. 그러나 당시 노예였던 <우르서스>가 원형 극장 안으로 뛰어들어가 들소의 머리를 비틀어 가까스로 <기리아>를 구출해 나옵니다. 이처럼 구사 일생으로 살아남은 <기리아>와 <우르서스>는 지하 교회에 숨어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 한시 바삐 이 죽음의 도시인 로마를 탈출한 것을 종용합니다. 신도들의 요구에 의해 베드로가 로마를 빠져나와 캄파니아 들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갑자기 환한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옵니다.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안 베드로는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그러자 그 빛이신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지 않겠는가?" 1920년대 후반 메사추세츠 주(州)의 법정에서 흥미 진진한 사건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부두가를 거닐던 한 사람이 로프에 걸려 그만 차갑고 깊은 바다 속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헤엄을 칠 줄 모르던 사람인데다 갑자기 차가운 물이 닿는 바람에 다리에 쥐까지 나서 그는 물 위에 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살려줘요!" 그는 잠시 동안 허우적대며 도와 달라고 소리치다가 그만 물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그의 친구들이 달려 왔을 때는 너무 늦어 이미 그의 생명은 끊어진 뒤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에 빠진 사람으로부터 불과 몇 미터도 못되는 거리에 젊은이 한 사람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분명히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줘요!" 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수영에도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심하게도 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일광욕을 즐기며......... 이것을 알게 된 익사자의 가족은 그의 이러한 행동에 분개한 나머지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이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다니요! 그것도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 그러나 결과는 익사자의 가족이 패소한 것으로 끝났습니다. 법정의 판결은 부두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할 법적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대한 영적 책임을 묻습니다. 결코 죄 없다 하지 않습니다.

"(사56:9)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사56:10)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사56: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사56:12)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겔3: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겔3: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겔3: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겔3:20)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겔3: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찾으려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눅15: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눅15: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지옥으로 빠져가는 이웃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영적 흑암에서 꺼내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명령하고 계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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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삶을 변화시킨 이름

"(행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행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행3: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12제자들의 성령받기 전의 모습들은 자기 본연의 죄악된 심성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다양한 직업 속에서 천차만별의 성격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생활에 푹 젖어 있는 세속인들이었습니다. 시몬(베드로)의 성격은 상황에 따라 조석으로 그 감정이 변하는 다혈질의 사람이었으며, 충동적이며(마 14:28), 겁이 많고 소심하며(마 14:30), 이기적인(마 19:27)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복수심과 야심이 많은(눅 9:54, 막 10:35-37)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진리를 늦게 깨닫는 사람이었습니다(요 14:8).도마 역시 진리를 늦게 깨달으며(요 20:14-21), 의심이 많고(요 20:26-29), 충동적인(요 11:16)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뭉쳐진 제자들을 '사도'라 칭하시고, 예수께서 친히 그들을 복음 사역자의 최선봉으로 맡기신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비롯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사도들 개인의 변화는 결국 개인의 변화라기보다 인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대학교수이며 전도여행까지 한 쟁쟁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기쁨도 없고 확신도 없는 미지근한 신앙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런던의 올더스 게이트(Aldersgate)거리에 있는 한 교회 집회에 참가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마침 그 교회에서는 지도자가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서문에는 로마서의 중심 사상인 인간은 자기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서 새 사람이 될 수 있고 구원함에 이를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많은 연구는 하였으나 피부로 느껴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 날 그 작은 집회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껴 감동이 되고 가슴이 뜨거워 오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웨슬레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활기가 붙고 용기가 나고 확신이 생겨 부패한 영국과 유럽사회의 변혁에 나섰던 것이며 신앙운동으로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와 성공을 보여준 첫 인물이 된 것입니다. 이번 유럽 순회 기도회를 통해 재삼 느낀 바는 이렇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이태리 로마에서는, 고대 로마 문명의 폐허속에 기독교 문화 문명의 풍요로운 유산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번째 들른 이집트에서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폐허더미 속에 변화받지 못한 아랍 회교 지배아래 빈곤의 병폐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세번째 들른 이스라엘에서는, 세상 변화의 주역인 기독교를 태동시킨 유대교의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들른 터어키에서는, 찬란한 기독교 문화 문명의 말살을 기도한 이슬람 종교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나라들이 축복으로 변화된 모습들과 그렇지 못한 나라들의 앉은뱅이같은 삶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이름"(6절)은 그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소개된 신앙의 대상, 능력의 근원이었습니다. 이름은 권위의 상징입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이름"만이 신앙과 능력의 기초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산 영이 되어 우리와 직접 관계하심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신앙과 능력의 근원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모든 기적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여졌습니다(행 3:16, 4:7, 10, 30). 죄의 용서는 예수의 이름으로만 이루어집니다(행 10:43). 악령추방도 예수의 이름이 나타내는 능력입니다. 이를 시험한 유대인 마술사들도 있었습니다(행 19:13-20). 박해도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받습니다(행 9:16,27-28). 헌신의 이유도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였습니다(행 15:25-26). 예수의 이름이 간판이 되고 힘이 되고 활동의 동기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유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위대한 올갠이스트이며 작곡가인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Johann Sebastian Bach)는 작곡이 끝나면 오선지 제일 뒷장에 "INDNJC"라고 적었습니다. 이것은 라틴어로 "In Nomine Domini Nostiri Jesu Christi"의 머리말입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뜻입니다. 바하는 자기가 작곡하는 음악이 결코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동기이며, 그 힘의 원천이며, 그 재주의 부여자이시며, 따라서 이 음악의 결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되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작곡마다 자신의 서명 대신 "INDNJC"라고 적어 넣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의 이름도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며 힘을 공급해 주며 기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놀라운 이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 때문에 생명과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먼저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씀을 통해서 앉은뱅이가 치유되는 놀라운 권능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씀을 받아들인 인간의 전존재가 변화되었습니다. 우선 앉은뱅이라는 질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앉은뱅이 걸인은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앉은뱅이라는 질병만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는 살 수 없다는 자포 자기의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오로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성전 미문"을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두 가지의 병이 모두 치료될 때에라야 온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육체의 질병만 고쳐진다면 그는 생활 환경의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또 다른 갈등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 두 가지의 고질병이 완치(16절)되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앉은뱅이는 육체의 병 고침을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 앉은뱅이는 그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자기를 미문에 데려다 주어야만 그나마 한푼의 동전이라도 만져 볼 수 있었을 것이며, 집에 들어가도 눈치밥을 먹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삶조차 이어가지 못하게 하는 환경의 변화를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 보겠다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있을 수 없었고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과 같은 생명력 없는 삶이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장애자들도 기술을 익히면 일을 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직업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앉은뱅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앉은뱅이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음을 자각했을 것이고 성인이 되어서는 그 생각이 거의 굳어버려 자신의 삶을 개척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발로 걷기도 하며 뛰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삶의 전기를 마련해 주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그는 멀쩡한 몸으로 구걸할 수 없으므로 노동을 시작해야 하며 삶의 계획도 세워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다른 사람에 의존해서 살아왔으나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서서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처럼 수동적인 사람을 능동적으로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받기만했던 사람을 남에게 베풀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세번째로, 8절을 보면 그가 하나님을 찬미함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말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성전 미문에 앉았었지만 하나님을 찬미하기는 커녕 오히려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 겨우 연명해 가는 그에게는 영적인 문제보다는 우선 눈에 보이는 일, 육신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게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라는 이름의 권세를 체험했으며 그 이름을 통해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앉은뱅이와 같은 영적 상태를 지니고 있었으나 이제는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는 영적 상태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감사보다는 원망만 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찬양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자신을 저주하거나 원망과 불평 속에 살았지만 이제 하나님께 찬양하는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적을 위해서는 사랑의 관심이 우선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돕기 위하여 명예와 부귀를 내버렸습니다. 어느 날 그가 시골길을 걷고 있다가 거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중 한 거지가 톨스토이를 알아보고 달려와서 반갑게 말을 건넸습니다. 한참 동안 무슨 말인가를 주고 받다가 그는 친구가 있는 데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자 그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래, 그 위대한 톨스토이가 무엇을 주던가?" "돈이 없다는군. 그러나 그가 날더러 '형제여'하고 부르지 않겠어?" 그는 아직도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물질적으로 가난함과 겸손함이 무엇인지를 알았지만 이 세상에는 빵에 대한 주림보다도 사랑과 관심에 대한 주림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 형제와 나눠야 하고 사랑과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3절에,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를 "보았다"는 말은 <에이돈, eidon >으로서 보통 본다는 뜻입니다. 별 생각없이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4절에, 베드로가 "주목했다"는 말은 <아테니자인, atenigein>으로서 자세히 신경을 써서 응시하는 동작입니다. 역시 3절에 베드로가 거지에게 우리를 "보라"고 하는 말은 <부레포, blepo>로서 주의해서 본다는 뜻입니다. 5절에 거지가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다"는 말은 <에펙소, epexo>로서 관찰한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이것을 분석해서 집필자가 전하려는 의도를 살펴보면 거지는 처음에 무심히 베드로를 보았으나 베드로는 이 앉은뱅이 걸인을 자세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길가에 앉은 거지를 무엇 때문에 자세히 신경을 써서 보았겠습니까? 거기에는 긍휼이 있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기적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중계자가 있어야 기적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경우, 베드로와 요한이 사랑의 중계자인 것입니다. 그들은 일개 거리의 거지, 신체장애자를 예사로이 스쳐 가지 않고 불쌍히 보며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지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부레포!>, 주의해서 우리를 똑똑히 보라는 뜻입니다. 돈푼이나 바라는 그런 물질적인 안목이 아니라 정말 네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우리가 누구인지를 더 깊게 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너의 문제는 오늘 무엇을 먹고 사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즉 베드로와 요한이 발견한 보물, 은과 금보다 더 귀중한 근본적인 보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에게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깊은 진리를 앉은뱅이 거지가 얼른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아닌 무엇인가 더 중요한 것을 주겠다는 베드로에게 갈망하는 태도로 바라보는 <에펙소>가 있었습니다. 이 거지는 관심없이 바라보는 태도에서 갈망하는 태도로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기적은 구하는 자에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어느 도시에 두 맹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거리에 나가 구걸해서 연명했습니다. 그런데 한 맹인은 구걸하면서 "하나님께서 돕는 자는 도움을 받으리라."고 외쳤으며, 다른 맹인은 "왕께서 돕는 자는 도움을 받으리라."고 외쳤습니다. 마침 그 나라 왕이 산책을 나왔다가 두 맹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왕은 자기에게 도움을 청한 맹인에게 빵 속에다 금 한 덩어리를 넣어 주었습니다. 이 빵을 받아든 맹인은 빵이 무겁고 딱딱해서 먹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옆에 있던 맹인에게 동전 몇 닢을 받고 팔아 버렸습니다. 빵을 산 맹인은 빵 속에서 금덩어리를 찾아 팔아서 더 이상 구걸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왕이 그 곳을 지나다가 여전히 구걸을 하고 있는 맹인을 보고 이상히 여겨 빵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왕께서 주신 빵은 무겁고 딱딱하길래 옆에 있던 맹인에게 팔았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탄복했습니다. "아, 참으로 하나님께서 돕는 자가 도움을 받았도다!"

"(렘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2,700년 전에 예레미야가 인간 변화에 대한 문제를 제시했습니다.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이것은 토론의 여지가 많은 질문입니다. "타고난 피부의 색깔이 변할 수 없듯이 타고난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교육도, 종교도 어쩔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그 집안의 내력을 은근히 따져 보는 습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은 성경 전체가 변화에 대한 증언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믿고도 변화되지 않았다면 아직 변화의 능력을 받을 만큼 깊이 들어간 믿음이 못된다는 뜻이 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했던 예수 믿는 사람들의 변화를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담대해지고 예수 부활 후 50일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들이 전도를 시작하고 이기적인 생활을 버리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는 기쁨에 찬 생활을 하며, 있는 것을 서로 나누어 쓰는 등 믿기 어려울 정도의 변화가 생겼던 것입니다. 성령의 힘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고, 이 변화는 전염성이 있어서 예수 믿는 자가 "날마다 더하여 갔다."는 것이 누가의 관찰입니다. 초대교회에서 하루 3천 명씩 예수를 믿겠다는 결신자가 난 것은 베드로가 대설교가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120명 처음 크리스챤들의 변화된 인간성, 변화된 생활을 보고 이 새 종교 속에 무엇인가 개인 변화, 사회 변화의 능력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미국의 대부흥사였던 드와이트 무디가 목사들과 좌담회에서 "교회가 부흥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자기의 영혼의 문제를 매일 5분씩만 진실하게 생각하고 기도하는 사람 20명을 당신 교회에 둘 수 있다면 당신의 교회는 틀림없이 부흥할 것이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단 5분입니다. 진실되게 5분을 기도로 바쳐 "하나님, 오늘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살게 해주십시오. 살아계신 그리스도 성령이여, 오늘 내 속에 오셔서 역사해 주소서."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성령이 오셔서 변화의 능력,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십사 하고 간곡하게 바라는 영적인 방향, 물질적인 방향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내 영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적 방향으로 향방이 잡힌 사람이 개인과 교회와 사회 변화의 주춧돌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록펠러는 그 나이 33세때 이미 1백만 달러를 벌었고, 43세에는 미국의 정유산업을 장악했고, 53세에는 세계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로페시아라는 병에 걸려 머리털 눈썹까지 빠지고, 소화가 안 되어 우유와 크레커로 연명했습니다. 뭔가 자꾸 무서워져서 보디가드가 한 소대를 이루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웃음을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1년 더 살것이라고 측근에게 선언했고 신문들도 그의 조사(弔辭)와 특집을 미리 만들어 놓고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성경을 읽다가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 날부터 거듭났습니다. 재물을 풀어 많은 교회를 돕고, 구호사업을 하고, 의학연구소를 창설하고, 대학을 세웠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꾼 록펠러는 점차 건강을 회복해서 98세까지 살았습니다. 록펠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열살 때 신문배달을 하고 주급 1불 50센트를 받았다. 첫 주급을 어머님께 갔다 드렸더니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씀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교회의 헌금제도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지금 생각하니 삶의 가치를 하나님께 둘 것인가 나 자신에게 둘 것인가를 가르치신 것이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십일조 헌금을 가르치라 그 아이들은 크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변화되어져야만 합니다. 개인도 변화되고 사회도 변화시켜야만 합니다. 변화만이 개인과 국가 사회 발전을 약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앉은뱅이 거지같은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권세있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은과 금으로(경제, 물질) 개인과 국가 사회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그래서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성전을 왕래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행3:6)....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할 수 있는 믿음과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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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역사의 소망-곧 예수

"(행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행13: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행13: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행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행13: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행13:18) 광야에서 약 사십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행13: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 오십 년간) (행13: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행13: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행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행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행13:24)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행13: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행13:26)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행13: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행13: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행13: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행13:30)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행13: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행13: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행13: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행13: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행13:35)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행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행13:37)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행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행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행13: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행13: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본문 13절에 나오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대수롭게 넘겨 볼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그 순서가 늘 바나바와 사울였습니다. 전도 여행의 지도자로 시작한 것은 항상 바나바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었습니다. 전에 바울은 바나바를 돕는 입장에 있었으나 이제는 바울이 전도 여행의 중심인물이 된 것입니다. 전도 여행의 지도자의 위치를 사실상 계승한 것입니다. 바나바에 관한 아름다운 점은 그가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의 사업이 성취되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리를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3절의 주된 관심은 마가 요한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이 바나바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조수로 데리고 다녔는데 이제 그가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바울과 그들의 일행이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전진해 나가려고 할 때 마가 요한이 성령께서 지시하신 방향에서 이탈했다는 사건입니다. 마가 요한이 이 선교 대열에서 이탈한 이유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첫째, 그의 친척 바나바가 지도자 지위를 버린 데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고 이탈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는 여행 길은 가장 험하고 위험이 도사린 고원지대였기 때문에 그만 위축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베드로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이방인 선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넷째, 마가 요한은 모든 일을 용두사미격으로 처리하는 한 청년에 불과했을 것이란 것입니다. 다섯째, 크리소스톰이 오래 전해 말했듯이 과부인 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향수병이 나서 그 대열에서 이탈했을 것이란 것입니다. 여하튼 마가 요한은 가버렸습니다. 바울은 이를 얼마동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를 떠났을 때 바나바는 마가를 또 다시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이탈한 자를 데리고 가기를 거절했습니다.

"(행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그리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로 인하여 영영 헤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후 마가 요한은 바울과 다시 원만한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로마 감옥에 마지막으로 투옥되었을 때에 쓴 디모데후서에서 밤빌리아에서 그를 떠났던 마가에 대하여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딤후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한번 이탈자가 되었던 사람이 이제는 바울에게 유용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마가는 베드로 수종자가 됩니다. 베드로의 통역이 되어 베드로의 해외 선교시에 수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마가를 가리켜 "내 아들 마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벧전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베드로를 수행하는 중에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말씀을 반복해서 듣게 되고 마침내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좀더 적극적이고 좀더 강인하고 충성된 사람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역사가 미쉬레는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는 불과 30대에 심한 두통과 위장병을 얻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책을 많이 보면 눈이 나빠지고 소화도 안되며 심장도 더 나빠질 것이니 책을 보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가만히 있으면서 책을 안보고 지냈더니 이건 죽는 게 낫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안보는 대신에 책을 쓰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사가가 되었으며, 책을 열심히 쓰다보니 심장병도 낫고 위장병도 나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결국 적극적으로 해결할 것이요, 긍정적으로 해결할 것이며, 더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밀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비겁한 것은 없습니다.

"(히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히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10: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뒤로 물러서는 자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사업에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사도 바울처럼 전진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다음으로, 바울이 안디옥의 회당에서 전한 메시지(17-41절)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역사의 주체로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을 택하시고 높이시고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광야에서 그는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습니다.(또는 양육하는 아버지로서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습니다.) 그는 그들 앞에서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시고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사사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는 그들이 극성스럽게 왕을 구할 때에 그들에게 사울을 왕으로 주셨습니다. 그후 그는 사울을 폐하고 대신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다윗 이후에는 솔로몬의 통치가 있었으며 그후 그들의 나라는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그후 그들은 패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재난을 당했습니다. 그리하여 종래에는 왕도 제사장도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그후 남은 백성들은 로마의 멍에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로마의 멍에 아래서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세우셨습니다. 이제까지 개관한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온갖 실패에도 불구하고 인간 구원이라는 그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늘 전진하시는 분이라고 바울은 선포한 것입니다.

"(행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행13: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행13:18) 광야에서 약 사십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행13: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 오십 년간) (행13: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행13: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행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행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사도 바울의 이같은 설교는 역사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자 역사에 개입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 시대에 그 분의 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의 선교가 바로 역사의 주체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 교회의 표어 가운에 하나인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역사의 주체성-"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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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마24:14)

-역사의 주체성-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역사의 알파(시작)와 오메가(끝)이며 세계는 철저히 하나님의 역사이다 (헤겔). 예수 전시대의 역사의 축은 의인과 이스라엘이었다. 예수의 초림으로 그가 세운 교회가 역사의 축이 되고 있다. 교회는 역사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선택받은 종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계승한다. 그러므로 세계사는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성격이 규정된 역사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역사는 그 목적이 규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다(몰트만). 참다운 역사의식은 예수를 증거하는 선교에 대한 사명의식이다. "천국 복음" 은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의 몸된 교회가 땅끝까지 전해야 할 복음은 바로 천국복음이다. 역사의 완성은 이 천국복음을 통한 세계 복음화로 성취된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교회는 천국복음 선교를 위임받은 종말론적인 신앙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하고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역사하고 있다. 본문은 바로 이 인간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확실히 밝혀주는 중요한 구절이다. 천국 복음은 하나님 나라 생명의 복음이다. 전체 성경의 중심주제는 역사가운데서의 하나님의 구속 활동이다. 교회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이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역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지가 수행되어지고 있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선교를 통해서이다(죠지 래드). 주님의 승천과 영광의 재림사이에 있는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는 세상 가운데서 천국 복음이 확장되어지고 역사하고 있음을 통하여 발견되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역사의 의미와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의 주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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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부흥 이후에 인간중심의 사관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비코나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가진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전쟁도 협상도 암투도 위선과 사기도 사랑도 모두 다 세력을 얻기 위해서 이용되는 도구들이었습니다. 힘과 힘이 만나고 합쳐지고 갈라지고 충돌하면서 인간의 역사는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아름다운 덕들도 단지 도구로 이용될 뿐입니다. 결국 인간의 힘이 역사의 원동력이요 주체였다고 주장하나 이러한 역사에는 아무런 도덕성의 흔적도 비쳐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과거 군부 30년 통치를 이룩했던 권력 지향의 인물들의 결과들을 볼 때 과연 그들이 과연 역사에 깨끗한 도덕성의 흔적들이었습니까? 한편 칸트는 인간성의 완성, 즉 도덕에의 의지가, 헤겔은 자유를 추구하는 세계정신이 역사의 원동력이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관은 단계적으로 더 나은 상태로의 진보를 기대하게 했습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낫고 결국 미래는 더 나은 상태로 역사는 발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첨단 과학과 문명의 시대에 과연 도덕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역사의 흐름을 바르게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헤겔의 제자 맑스는 경제에 대한 욕구가 역사를 이루어 간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나라 안의 모든 갈등들, 즉 민주주의와 귀족정치, 군주정치 간의 투쟁, 전매권을 얻으려는 투쟁 등등, 모두가 다 실제가 아닌 헛 것을 보는 것이고 실체는 서로 다른 계급들이 싸우는 것일 뿐이다." 즉 경제의 욕구가 투쟁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언하였습니다. "역사의 원동력은 비평이 아니며 혁명이었다." 유토피아를 위해 그들은 혁명을 부르짖었고 이론대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결과 중국, 한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서 수천만의 희생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분배를 공정히 하면 모든 투쟁은 사라지고 행복이 오리라고 단순하게 기대했지만 결국 그들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가난해지고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통은 하나도 감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인간 중심의 사관이 가진 공통점은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요 역사를 만드는 힘을 가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요 역사의 주인이요 역사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 될 때는 모두가 죄된 인간이기 때문에 그 역사의 수준은 인간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 중심의 역사관의 가장 잘못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도외시할 때 인간 중심의 사고가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고 지적합니다. 모든 고통은 인간의 죄로부터 시작합니다. 심지어 자연 세계의 고통까지도 인간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므로 생명이 없고 능력도 없게 된 것입니다. 도무지 그 안에 선을 행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사회 구조를 바꾸고 분배체제를 바로 한다고 인간의 죄문제 해결없이 지상낙원이 오고 행복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덕과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그것을 실천할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그대로 두고 역사는 발전되지 않고 항상 원점에서 맴돌 뿐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전혀 없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역사를 새롭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역사는 의인의 역사이지 죄인의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설교의 결론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 역사의 소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행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행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민족의 소망이 되고 역사의 소망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고 새로운 삶을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는 이 시대에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사업에 대한 확신은 교회의 중요한 표식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 세대는 역사의 의미라는 문제를 안고,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사건들은 우리가 파멸 이외에 아무데로도 가고 있지 않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서구문명이 필시 몰락할 것처럼, 악의 세력도 그렇지 아니한가? 다람쥐 체바퀴 돌 듯 하는, 문명의 발생과 붕괴의 끝없는 순환 속에 갇힌 우리가 아닌가? 우리 시대의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교회는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말은 사색이나 철학, 또는 이상적 희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증거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역사를 구속하시기 위해, 역사 속에 행동하였고, 행동하실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불문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한 위대한 신학자는 말하기를 "역사의 의미를 위한 탐구는 무의미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소리이지, 기독교 신앙의 소리는 아닙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역사의 의미와 목표는 인간에게 두지않고,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역사의 의미는 역사 자체 속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에서는 발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며, 행동하셨고, 행동하실 것입니다. 미래는 그분의 것인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과거가 그분의 것임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소망이십니다. 한국 동란을 취재해서 미국에서 퓰리처 상을 받은 바 있는 라이트 허긴스 기자가 압록강변에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영하 42도의 추운 날씨에 포탄맞은 군용 트럭옆에 기대서서 깡통 통조림을 먹고 있는 해병대 용사들, 참호용 칼로 통조림 콩을 찍어 먹고 있는 그들의 옷은 대나무처럼 얼어 붙어서 빳빳해지고, 얼굴과 수염은 흙으로 범벅이었다. 이렇듯 참담한 모습을 목격한 허긴스 기자는 생각하기를, 세계에서 제일 잘 산다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어쩌다다가 이 전쟁에 불려와서 이 모양이 되었는가! 너무나 괴로와 신음하다가 병사들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내가 만일 당신들이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당신들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겠는가?" 그들은 한참 생각했다가 이구동성으로 "우리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추위와 굶주림,그리고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려 줄 수 있는 복음이 무엇일까? "내일"을 주는 것이다. 내일이 있을 때 인간은 어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되며 살아야 할 이유와 가치를 갖는다. 사람은 어디로 가고 있는것인가? 인류 역사에 소망은 참으로 있는 것인가? 역사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한 때 진보주의 철학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상승하는 직선으로 표시하여 원시적이고 미개한 인간의 역사가 점진적으로 높은 수준의 문명과 문화로 발전해간다고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악과 전쟁과 가난과 갈등이 사라져 버린 완전한 사회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어났던 사건들은 이러한 견해를 산산히 부수어 버렸습니다. 또 다른 견해는 역사를 나선형의 도형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발전과 퇴보을 거듭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발전해간다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앞선 진보주의 견해를 수정한 것에 불과하며 역사속에 빗나간 견해임이 들어났습니다. 극도의 비관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마치 술취한 파리가 발에 잉크를 적시고 백지위를 비틀거려 생기는 자국처럼 역사는 그 방향도 없고 그 목적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가장 유명한 신약성경 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은 "오늘날 우리는 역사의 종국과 그 의미를 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역사에 있어서의 의미 문제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슈펭글러(Spengler)는 진보란 불가능하며 역사는 운명적으로 불가피하게 퇴보하고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토인비(Toynbee)는 많은 연구 업적을 발표했는데 그는 인류의 문명사에서 역사의 의미와 유형과 그 주기를 찾아내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한편 니이버(Niebuhr)와 러스트(Rust)와 피퍼(Piper)와 같은 학자들은 성경적인 계시 진리 가운데서 역사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속에 기록되어지고 해석되어진대로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동가운데서 발견되어질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역사의 키(Key)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그렇지않다면 우리는 비관적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과 공의를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하신 인간과 인간 역사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신의 목적을 나타내시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성경 전체의 중심 주제는 역사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구속 활동입니다. 인간과 역사의 소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사람이 세운 이 세상 나라는 무너진다. 무너지면서 동시에 보이지않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2절에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는 의미 심장한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염세주의와 신앙적인 낙천주의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멸망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치 어거스틴이 무너져가는 로마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어 가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역사는 전환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성구도 바로 이 그리스도 중심의 역사관으로 관철되어 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탄식하는 자연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맞게 되는 역사의 지평선 저 너머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동물과 식물도 함께 저주를 받아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고 있습니다. 함께 영광을 누려야 될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 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2)"

이렇게 인간과 더불어 만물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구원은 영과 몸의 구원을 가리키는데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 영의 구원을 받았으나 아직 몸의 구원은 이르지 않았습니다. "영광스런 몸"의 구원을 탄식하는가운데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영광스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마라나다"(주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현재의 아픔과 고통을 인내하면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이러한 영광스러운 소망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될 때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과 가난과 질병과 죽음까지도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이런 소망을 확증시켜주십니다. 인류의 소망은, 역사의 소망은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에게서 인류는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스런 소망은 예수를 믿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곧 소망이며 힘이며 세상을 이겨나가는 능력과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에 대한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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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주 예수의 은혜

"(행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 (행15: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 (행15: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행15: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행15: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행15: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행15: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행15: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행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행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행15: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행15: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행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행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행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행15: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행15: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행15: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행15: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행15: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본장은 유대교와 기독교, 율법과 복음을 갈라 놓는 분수령입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로 계속 남을 것인가 아니면 세계를 구원하는 복음의 세계화로 발걸음을 내디딜 것인가 하는 결정적이고도 숨막히는 장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에 대한 전도로 초대 교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오게 됨으로 몇 가지 문제점들이 제기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전체 정신적 배경은 선민 사상입니다. 자기 민족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소유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자기들의 특별한 소유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선민의 가장 중요한 표시로 간직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바로 할례에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의 한 일원이 되기 전에 할례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가? 특히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를 유일한 참 종교로 생각했고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종교로 간주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행15:1)....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는 어린아이의 성기의 끝을 자르는 예식으로서 난지 팔일만에 행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할례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그 예식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창17: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창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헌신의 약속을 살 속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 할례의 시행은 피의 제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피로써 죄를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할례를 시행할 때도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어린아이의 양피를 자를 때 피가 쏟아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생명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헌신의 표시는 영원히 그의 살 속에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의 표시가 할례받은 자의 살 속에 영원히 남아 있어 그것을 기억하며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증표로서 처음 시행되었던 할례 의식은 할례 그 자체보다는 그 할례 속에 담긴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신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말라."

예레미야 선지자도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고 외칩니다.

"(렘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마음 가죽을 베라"는 말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렘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신약의 스데반도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행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할례가 가진 근본적인 계약의 의미는 망각하고 단순히 할례를 받았다는 그 사실로 만족하고 할례 표시만 있으면 무조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곧 영적 할례를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할례받은 성도들이지만, 고넬료는 이탈리아 장군으로서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를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할례를 받지 않았으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그 곁에 있던 강도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고백을 하고 죽었는데 할례는 고사하고, 성수주일이나 헌금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으로 간단한 신앙 고백을 통하여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나 율법 자체가 구원의 길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빌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같은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다음 성구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를 받음은 물 속에 옛 사람을 장사 지내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세례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의 깊은 뜻, 즉 거듭나는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그런데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주)로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고 유대교의 모든 전통으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전파했던 복음과는 확연히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이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세운 이방인 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런 이단 사상을 퍼뜨리며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었습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라든가 "세례받지 않았으면 구원받지 않았다."라든가 또는 극단적으로 "우리 교회만이 유일한 참 교회이기 때문에 당신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라든가 "우리 교회는 대학교로 치면 서울대학교와 같은 곳이어서 2, 3류 대학이나 지방대학교와는 다르다."라든가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옛날의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이 가르쳤던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이단 사상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잘못된 가르침들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일을 행해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모든 거짓된 종교들의 기본원리입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덧붙여서 이것이나 저것을 행해야만 한다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천국에 가려는 사람은 오직 주 예수의 은혜에 의해서만 그곳에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행한 행위(일, 노력, 공로)에 의거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직 한 가지 대답이 있을 뿐입니다.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례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이단사상을 가르치는 이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바울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속아서 주님으로부터 떠났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로 대단한 충격을 받았고, 아주 강력한 말로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갈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기독교 대신에 유대교를 가르치고 있었던 이런 거짓 교사들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대표자들로서 예루살렘에 파송되었고 예루살렘에서는 이 문제로 특별한 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변호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최초로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할 자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변호할 특별한 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변호합니다.

"(행15: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행15: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계속해서 베드로는 강변합니다.

"(행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베드로는 그 모든 문제를 위대한 한 마디로 결론을 맺습니다.

"(행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가 내린 복음의 영원한 결론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거듭남으로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구원얻은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것은 전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의 은혜를 감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의 거짓된 종교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Do and Live) 입니다. 바울의 참 복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믿으라 그러면 살리라!"(Believe and Live)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여러분이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을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막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막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막7: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부패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죄인으로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인 뉴턴(John Newto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늘 나라에서 세 가지의 놀라운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틀림없이 와 있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 놀라고, 둘째는 하늘 나라의 문턱에도 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사람이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셋째로는 나 같은 인간이 하늘 나라에 들어왔음을 알고 놀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관찰로는 누가 천국 시민이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덕적인 행위를 보고 선인과 악인을 판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전혀 각도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나는 착한 일을 했습니다." 하고 내세우는 자칭 선인보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는 태도(믿음)를 더욱 높이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기는 것인데 인간이 아무리 도덕적인 노력과 선행과 할례를 받는, 그런 겉 모양을 뜯어 고치는 일을 해도 그런 것으로는 절대로 죄를 씻어 내릴수 없습니다. 성령의 내적 역사로 십자가의 보혈의 생명이 우리 마음 속에 흘러 들어갈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 예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할례냐 무할례냐가 인간을 구원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갈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영원한 복음의 진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라는 이 한 마디는 루터의 결론이었고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루터는 이것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은혜란 말은 루터 이전에도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은혜에 대하여 바른 해석을 내렸던 것입니다. 은혜란 살 수도 없고 팔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공적에 의해서 포장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중세기의 카톨릭 교회가 믿고 있었듯이 교회의 성례전에 의해서 신비적으로 내려지는 성격의 은사도 아닙니다. 루터는 '은혜란 하나님의 가운데 이름(middle name: 서양인은 성과 이름 사이에 가운데 이름을 가짐)'이라고 불렀습니다. 은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은혜란 바로 말 구유에서 태어나신 하나님,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롱펠로우(미국의 시인)가 휴지를 집어들어 갑자기 떠오른 시상을 적은 것이 6천 달러에 팔렸습니다. 휴지에 위대한 문학성이 더해진 값이었습니다. 롱펠로우는 보통 메모지에 사인을 해서 1백만 달러를 움직일 수도 있었습니다. 값없는 종이 조각의 배후에 든든한 서명이 더해진 값어치였습니다. 미국 정부가 종이 조각에 독수리 도장을 찍으면 그것은 백 달러짜리 지폐가 되며 전세계 가게에서 받아 줍니다. 종이 조각에 정부 보증이 더해진 값입니다. 피카소가 종이 조각에 데생한 것은 집 한 채 값입니다. 무가치한 종이에 천재의 이름이 붙어 엄청난 가치로 변한 것입니다. 루터가 깨달은 은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무가치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가해질 때,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가치가 생긴 것입니다. 내가 구원함을 받아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엄청난 가치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들이 되시었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충만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에 무한한 가치가 창조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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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예수께 받은 사명

"(행20: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행20:2)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행20:3)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행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행20: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행20: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행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행20:8)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행20: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행20: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행20: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행20: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행20: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행20: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행20: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행20: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행20: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행20: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행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행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행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행20:2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행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1. 사도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에서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구브로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그리고 루스드라 등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으며(13:4-18), 제2차 전도여행은 마게도냐 환상을 통하여 유럽에서 이루어졌으니 곧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그리고 고린도가 선교의 중심지였습니다(16:6-18:23). 또한 약 3년간에 걸친 제3차 전도여행은 대부분 소아시아 서부 지방에서 이루어졌던 바, 바울은 주로 에베소의 복음화에 주력했습니다(19:1-21:16). 바울은 3차에 걸친 자유로운 전도 여행을 통하여 눈부신 이방 전도의 성과를 올렸으니 사도 바울로 인하여 복음의 불길은 강력하게 번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라틴 세계와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며(롬 15:24), 로마를 그의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본장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의 마지막 체류지였던 밀레도에서 고별설교를 통하여 자신이 세계 선교를 위한 전도자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