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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1. 믿음의 시련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말라 (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야고보서 1:1-18)

"믿음의 시련"이란 예수 믿기 때문에 받게되는 시련을 말합니다. 로마제국 당시에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너무나 혹독했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것은 스스로 힘들게 살 것을, 아니 죽을 것을 결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시련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 "여기라"는 말의 헬라어(헤게사스데) 의미는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여러 가지 시련을 기쁘게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고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자녀들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련 역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속에 주어지는 가장 좋은 것으로 평가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시련을 금보다 더 귀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벧전1:7)

그리고 극심한 고난을 겪고 있는 욥은 이렇게 그 믿음의 시련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그리고 욥 등이 엄청난 환난과 고난 등 믿음의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믿음의 시련으로 인하여 장차 누리게 될 칭찬과 존귀, 그리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믿음의 시련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며",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있으므로 나라가 강해지고 산업이 발전하고 지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비법이 있는데 그것은 전쟁이 있어야 민족이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소련에서 살다온 사람은 공산당이고, 미국에서 살다온 사람은 민주주의이며 얼굴도 가지각색입니다. 그래서 평안하기만 하면 그들은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부득불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전쟁의 긴장관계에 있을 때 그들은 의견이 서로 다르다 하여도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싸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은 축복이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시련을 당하게 될 때 인내하며 이처럼 "온전히 기뻐하라"는 목적은 여러분 성도의 성숙한 신앙생활을 위해서입니다.(4절) 시련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인내를 통해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성도가 되도록 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련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으로 성숙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실 때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잘못 기도한다고 해서 꾸짖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시련이 주어지는 의미와 목적을 잘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꾸짖으시지 않으십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음직한 미국의 유명한 영화 <록키>가 있습니다. 헤비급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의 상대자로 록키가 선택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록키가 이길 것으로 믿지 않습니다. 록키 자신도 패배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상대가 되어 링에 올라갈 것을 수락한 이상 그는 15회전을 끝까지 링 위에 머물기 위한 목표를 세웁니다. 그는 "끝까지 버티자"(Go the distance)를 거듭 다짐하며 싸웁니다. 결국 끝까지 버틴 록키가 승리했습니다. 끝까지 싸우는 자체가 인생 승리라는 것입니다. 경주자의 승리도 끝까지 달려 완주하는데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끝은 칭찬과 존귀와 영광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며 끝까지 인내하므로 영광스런 결말을 볼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지라도 세상의 물질적 축복을 위해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부라고 하는 것은 풀의 꽃과 같아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꽃은 떨어지고 풀은 말라 시들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인생은 영원히 살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잠시 있다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살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인생으로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 부귀영화에 연연하여 그것에 매달리거나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 물질에 대한 욕심에 붙들리게 되면 신앙생활을 바르게 끝까지 할 수 없게 됩니다.

어느 마을에서 한 도둑이 붙잡혔습니다. 밤 11시 반 어떤 사나이가 큼직한 보따리를 양 손에 들고 가는 것을 경찰이 수상히 여기고 "여보시오."하고 소리쳤더니 그만 도둑은 곧장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도망하는 도둑은 스피드가 떨어지고 그 자리에 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벨트없는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가게에서 훔친 동전들을 두 주머니에 너무 많이 넣어 바지가 흘러내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오래 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욕심이 스피드를 가해 주는 것 같아도 결과적으로는 달려가는 길을 멈춰 서게 만들게 된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이 도둑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10원 짜리 50여 개, 50원 짜리 70여 개, 100원 짜리 40여 개 등이었습니다. 모두 합쳐보아야 몇 푼 안 되는 것을 욕심스럽게 주머니에 넣고 뛰어봤자 얼마 못 가 잡히고 만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시험은 결국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 본문에 사용된 "시험"은 "유혹"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을 때 하나님 보다 높아진다는 욕심, 하나님보다 지혜롭게 된다는 욕심에 미혹되어 그만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사망에 이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받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처럼 살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며 능력을 시험받으실 때나,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지극히 높은 권세에 대한 시험을 받으실 때나 모두 하나님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예수를 여러분의 재산을 늘려주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경영의 귀재(CEO)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인간에게 내린 저주를 자신에게 돌려 십자가에 죽으시고 인류에게는 생명과 축복을 안겨주셨습니다.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고 조롱하여 저주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대로 하면 됩니다. 시험을 이긴다 할 때 "이긴다"는 뜻은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매를 맞고도 사랑하면 이긴 것입니다. 때리고도 미워하면 지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도 감사하면 이긴 것입니다. 핍박을 받고도 '영광입니다' 하면 이긴 것입니다.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승리할 수 있도록 어떠한 경우를 당한다해도 인내하며 상대방을 위해 기도할지언정 혈기부리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혈기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분을 낼지라도 죄를 짓지 않도록 하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엡4:26)

중세기의 우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수도사 한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친구 어머니의 병문안을 가는 길이었습니다. 먼 길을 걷자니 점점 피곤해졌습니다. 정오가 되자 햇볕이 뜨거워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장기가 돌았습니다. 도시락을 싸 놓고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화가 났고 먼길을 떠나온 것에 대하여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피곤한 발로 홧김에 길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걷어차게 되었습니다. 발가락이 몹시도 아팠습니다. 그는 길에 앉아 중얼거렸습니다. "도대체 이 돌멩이가 하필 왜 여기에 있어서 나를 괴롭힐까?" 그러자 돌멩이는 갑자기 배로 커졌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려고 누가 갖다 놓았을 거야." 하고 생각하자 돌멩이는 다시 배로 켜져 큰 바위가 되었습니다. 그는 "흐음, 이런 바위를 갖다 놓고 나를 괴롭힐 만한 녀석은 바로 그 놈밖에 없어." 하고 이제는 구체적으로 주변에서 자기와 사이가 나쁜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바위는 몇 배로 더 커져 아예 길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한 소녀가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수도사에게 물었습니다. "수도사님, 어디가 편찮으세요? 길바닥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혼자 하고 계셔요?" 수도사는 지금까지 생긴 이상한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소녀는 두리번거리더니 "그런 산더미 만한 바위는 보이지 않는데요. 여기에 단지 주먹만한 돌멩이가 하나 있을 뿐인 걸요."하며 돌멩이를 가볍게 집어 길옆으로 옮겨 놓고 인사를 한 뒤 제 길을 가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분노가 미움으로 변하여 결국 그 미움을 증오를 낳게 되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마5:21-26)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자라면 살인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미움과 분노는 그 결과가 드러나지 아니한 살인미수죄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유혹이 있을 때 불평 불만을 터뜨리며 성내기보다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구약시대 아람 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수소문 끝에 이스라엘 나라에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내졌습니다. 나아만 군대장관은 군사를 이끌고 온갖 예물을 챙겨 엘리사를 찾았으나 엘리사로부터 문전박대를 받다시피했습니다. 멀리서 찾아온 아람국의 국방장관을 극진히 영접하지 않고 종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리하면 나으리라"는 전갈뿐이었습니다. 일국의 국방장관이 엘리사의 이러한 대접을 받다보니 화가 치밀어 그냥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참모들이 일어나 말렸습니다. 아쉬운 것은 국방장관 자신이니까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밑져야 본전아니겠냐며 요단강에 들어가 그가 시킨대로 일곱 번 씻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관은 아쉬운대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씻었고 그 결과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왕하5장) 만약 나아만 장관이 자신이 문전박대 당한 일에 대하여 화가 치민대로 본국으로 돌아갔다면 그는 일생동안 문둥병자로 살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입장에서 함부로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 말고 설사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화를 내거나 분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예배는 당신이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간 다음부터 시작됩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이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일상생활에 적용하는가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영국의 엄격한 청교도이자 혁명가인 크롬웰이 어느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금으로 만든 열 두 사도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곳 사제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이것들을 녹여 선한 일을 하는 데 사용하십시요."라고 크롬웰이 말했습니다. 교회 안에 멋지게 장식해 놓은 사도들의 조각상들처럼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고이 생각속에서만 간직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전한 이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겉치레가 될 뿐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믿음생활에는 여러 가지 시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때마다 가장 먼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뜻을 찾는 지혜를 가지고 인내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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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참된 믿음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 (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 (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4) 내 형제들아 !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1-26)

여기 자신이 업신여기고 있던 거미로부터 목숨을 구한 한 예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윗 왕은 추녀 끝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저놈은 어디나 가리지 않고 거미줄을 치는 더럽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벌레야. 생긴 것도 아주 징그럽구나." 그 후 다윗 왕은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싸움은 이스라엘군에게 불리하게 되어 다윗 왕은 적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은 여기저기 숨을 만한 곳을 찾았으나 헛수고 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사람 한 명이 기어들어 갈 만한 바위굴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실 그 굴이 그다지 안전해 보이진 않았으나 바로 얼마 뒤에서 적병이 추격해오고 있었기에 다윗은 앞뒤 가릴 새 없이 그 바위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적병들이 달려오는 발소리와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윗 왕은 숨을 죽이고 다가오는 적병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바위굴 입구로 내려와서 가로 세로 거미줄을 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얼마 뒤에는 굴 입구가 거미줄로 막혀버렸습니다. 굴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굴속에 숨었을지도 모르겠군." "아니지 이 거미줄을 보게나. 이 속에 사람이 들어갔다면 거미줄이 이렇게 고스란히 있겠는가." "정말 그렇군." 적병들은 이렇게 말하며 굴을 지나쳐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거미줄 때문에 다윗 왕은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모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 거미와 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일개 미물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교회 안팎에서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거나 힘없고 가난하다고 해서 멸시하거나 압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이나 외모가 아니라 우리 속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군대 백부장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많은 백성을 구제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환상 중에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하나님 사자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그 시각 베드로가 기도하러 가는 중 비몽사몽간에 역시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율법에 먹어서는 안되는 부정한 생물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습니다. 베드로가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더러운 것들을 먹을 수 없습니다."고 하자 또 다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씩이나 있었는데도 베드로는 그 환상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베드로를 초청했을 때 성령께서 그들이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그 초청에 응하라고 지시합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 고넬료 집에 가보니 이방인 고넬료가 일가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모아 놓고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자신이 보았던 환상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네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그리고 계속해서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며 고백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0장)

그러므로 재산이나 학식의 정도나, 인종과 상관없이 누구나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고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위대함이나 부요함을 치켜세우는 행위는 극히 위험한 것으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부요함>보다 <영적인 부요함>를 더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위대함>보다 <영적인 위대함>를 더 크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보다 세상이 어리석게 보는 <십자가의 지혜>를 더 큰 지혜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없고 배운 것이 없을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부요한 자, 큰 자로 여기시며, 세상에서 아무리 부요하고 지체가 높고 배운 것이 많다해도 하나님을 등지고 살게 되면 가장 어리석고 더러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여 가난한 자를 멸시하거나 압제하거나 더 나아가 억울하게 재판을 받게 하면 살인죄와 다를 바 없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의 판단은 피상적이어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게 됩니다. 마치 아름다운 꽃을 좋아하듯이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행위입니다. 행여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이 사랑하고 섬겨야 할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참된 믿음은 행함이 뒤따르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인이 나날이 줄어들어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갱들은 나날이 늘어만 가는 것이 아닌가! 목사님은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좋은 일을 한다는 교회의 교인들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못된 짓 하는 갱들은 늘어만 가니....말세지 말세!" 그 목사님은 갱 두목을 찾아가서 거룩한 목소리로 물어보았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당신네 같은 갱들은 나날이 늘어나니 그 이유는 뭡니까?" 갱 두목은 태연하게 한 마디 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우리가 당신네들보다 훨씬 더 사랑하니까 그렇지요!"》 (기독교세계6월호)

요즈음 한국 영화 <친구>가 개봉 두 달만에 관객 동원수 700만을 넘어서 소위 <친구>신드롬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영화 화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욕설과 음담패설과 섹스와 여성학대의 연속이고 조직 폭력배들의 잔인하고 섬찍한 폭력과 살인 일색이라고 합니다. 초.중.고등학교 친구로 자라온 친구들이 졸업 후 부산 거리를 주름잡는 조직 폭력배가 되어 온갖 폭력과 마약 등에 휩싸이게 되는데 조직 계파를 달리하는 친구를 청부살해하게 됩니다. 법정에 선 그는 죄를 부하에게 덮어 씌우고 법을 피할 수도 있었으나 '친구의 의리'를 져버릴 수 없어 살인을 자백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수 십년 전 부산에 실제 있었던 폭력배들의 살인극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조직 폭력배들의 폭력, 살인, 타락상이 이렇게 많은 관객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을까?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나이들의 우정과 의리'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네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정이나 사랑, 그리고 의리가 바깥 세상보다 더 많고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까? 조금만 자기 배짱에 맞지 않으면 우정이나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사랑 타령하며 교회와 신앙을 등지는 인물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우정이나 사랑, 그리고 의리가 세상의 조직폭력배들보다 그 질이 떨어져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조폭>들은 우정이나 의리를 지키는데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합니다. 단순히 친구니까 우정과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지키는데 복잡한 생각이나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사랑 하나를 설명하는데도 이것저것 복잡하고 그것을 행하는데도 절차가 여간 많은 게 아닙니다. 사실상 진리는 간단하고 단순한 것입니다. 괜히 율법사나 목사, 신학자들이 밥 먹고 살기 위해 복잡다단하게 만든 것뿐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사랑하며 살겠다는 것인데 그 사랑을 베푸는데 이론도 많고 따지는 것도 많고 이유나 핑계, 변명도 너절너절하게 늘어 놓는게 십상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조폭>이나 갱들의 그 못된 짓만 빼면, 교회나 목사님들은 그 단순한 우정과 의리, 그리고 사랑을 한 수 배워야 할 형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모든 진리는 간단하고 단순한 것입니다. 조금 배웠다고 해서 그 진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복잡하게 만들어 가는 것은 유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행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음모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들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마23:1-5) 오른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하면 돌려대시고, 누가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하며 겉옷까지도 벗어주고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라도 동행하고 원수도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면 그만이지 복잡하게 생각하고 복잡하게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진리를 복잡하게 생각하고 복잡하게 만들어 가면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것을 행하라." 행함이 없는 믿음생활은 귀신들이 조롱할 것입니다.

웨일즈 아버판(Aber fan)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석탄 산사태가 나서 초등학교를 덮쳤는데 그 초등학교 교실 안에는 254명의 어린이들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산사태가 나자 검은 석탄 빙하가 되어 버린 초등학교를 찾아온 학부모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구조작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교회 목사도 나와서 불철주야 발굴작업을 돕고 있었습니다. 석탄더미라 끝없이 파도 내려오고 또 내려와서 금요일부터 파들어 갔는데 주일이 되어도 석탄더미는 그대로였습니다. 구조자들은 행여 비가 오거나 천둥이라도 치면 구조의 가망이 없다고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주일 아침 예배시간이 되어 구조자들이 "목사님, 예배시간이 되었습니다. 가 보셔야지요."라고 하자 그는 머리를 저으며 "오늘 나의 설교는 여기에서 나의 손과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라고 하며 삽질을 쉬지 않았습니다. 모든 구조자들은 그의 뜨거운 사랑과 헌신적인 손을 바라다보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능력을 느꼈고 모두 힘을 얻어 구조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목사의 입과 신자들의 귀만이 천국 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열 마디의 말보다 실천의 본을 보여주는 것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스스로 주를 영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본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행함을 통하여 주의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배나무 묘목을 사다가 그의 밭에 심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결실할 때가 되어 가서 보니 사과가 열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는 사과나무겠습니까? 아니면 배나무이겠습니까? 혹시 그 나무가 원래는 배나무인데 그가 잘못 가꾸어서 사과나무가 된 것은 아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과가 열렸다면 그것은 사과나무입니다. 단지 그가 처음부터 배나무라고 착각한 것뿐입니다. 사과나무는 당연히 사과를 맺고, 배나무는 당연히 배를 맺어야 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그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그 믿음의 열매가 없다면 그는 믿음이 없거나 아니면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의 열매는 행함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참된 믿음생활로 하나님의 <친구>라 칭함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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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된 지혜

(1) 내 형제들아 !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5) 이와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18)

지난 5월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가 불명예스럽게도 42시간만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의 발단은 <용비어천가>를 방불케 하는 충성서약으로 가득 차 있는 소위 "충성메모"때문이었습니다. 문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 개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인 중책을 맡겨주시고 여러 가지 경력이 부족한 저를 파격적으로 발탁해주신 대통령님의 태산같은 성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중요한 집권후반기에 대통령님의 통치철학에 따라 대통령님께 목숨을 바칠 각오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성공한 위대한 대통령님과 성공한 국민의 정부만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정치적 중립을 엄정히 지켜야 할 법무부 수장이 정권 재창출을 다짐하고 있는 '충성서약'으로 자칫 나라에 엄청난 재난을 초래할 우려를 낳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42시간만에 가문의 명예는 고사하고 잠시나마 나라 전체를 어지럽히고 백성들의 조롱가운데 물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컴퓨터로 작성한 메모 한 장이 흘러나와 수많은 시비를 불러일으키며 정치권을 발끈하게 만들었고 나라 전체를 혼란케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셋이 있는데, 그것은 '쏜 화살'과 '놓쳐버린 기회'와 '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말이란 엎지른 물과 같아서 한 번 입밖에 나오면 다시 거둬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혀를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혀는 불과 같이 삽시간에 전인격을 부패시키며 그 삶의 행로를 불사르게 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지혜서인 잠언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언 18:21) 그런데 우리 속담에 "천냥 빚도 한 마디 말로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란 쓰기에 따라 많은 유익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에 문을 지키소서."(시141:3) 이는 혀는 작지만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드린 기도문입니다. 혀는 비록 세치에 불과 하지만 나라 백성을 좋게도, 나쁘게도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뱉은 악한 말 한 마디로 인하여 싸움이 나기도 하며, 우정과 사랑이 파괴되어 가정이 무너지기도 하며, 나라 민족간에 전쟁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한 말은 분쟁을 화해로 이끌며, 실망한 사람을 위로하여 줍니다. 실로 중요할 때 말 한마디는 정금보다 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의 위대한 능력을 지적하며 본문에서 야고보는 "말은 큰 배를 움직이는 작은 키와 같다."고 하였습니다(4절). 키는 비록 작지만 큰 배의 방향을 마음대로 좌우합니다. 혀는 바로 이 키와 같은 것입니다. 혀는 작아도 인생의 행로를 정하여 나아가게 합니다. 키를 올바르게 조종할 때 그 배는 순조롭게 잘 움직여 나갑니다. 그러나 잘못 조종하면 배는 제멋대로 움직여 바다에 표류하다가 결국은 파선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혀도 바로 사용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되어 나가지만, 만일 잘못 사용하면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여로보암을 비롯한 북방 열 지파의 백성들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통치자인 르호보암에게 가혹한 통치를 완화시켜 달라고 이렇게 탄원했습니다.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대하10:3-4) 그러나 르호보암은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더할지라 내 부 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하리라."(대하 10:14)며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이 한 마디 말로 다윗의 통일 왕국은 깨어져 남북으로 갈리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혀는 작지만 이처럼 국가의 운명도 좌우할 만큼 커다란 위력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혀를 잘못 사용하면 크나 큰 재앙을 가져옴을 깊이 인식하고 혀에 재갈먹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길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한 개피의 성냥불은 비록 작지만 온 집과 온 마을, 온 산을 태울 수 있습니다. 불은 모든 것을 다 태워 재로 만들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실로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험한 불도 잘만 이용하면 인간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 다 줍니다. 혀는 바로 이 불과 같은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6절). 또한 잠언 16:27에는 "불량한 자의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혀가 끼치는 피해를 불과 같다고 하였을까요? 그것은 첫째로, 피해의 범위가 넓기 때문입니다. 산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듯이, 혀도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우리 속담에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무심코 내뱉는 한 마디가 어느새 널리 퍼져 많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몸의 상처는 나을 수 있으나, 마음에 받은 모욕의 상처는 평생 동안 지속된다고 했으며 총칼로 죽은 사람보다 독설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독설로 죽일 수 있을 만큼 그 피해의 범위가 대단히 넓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걷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이 나면 걷잡을 틈이 없이 이웃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혀가 미치는 피해도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갑니다. 말이란 한 번 입밖에 나오면 다시 거둬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고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참된 지혜의 언어생활은 한 입으로 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기도 하고 형제를 저주하기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9절) 한 우물에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11절)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 인간은 단 물과 쓴 물을 내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수제자인 사도 베드로마저도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던(마 26:35) 그 혀로 세 번씩이나 주를 모르노라고 부인했었습니다.(마 26:69-75)그런데 우리 평범한 인생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밖에 나와서는 사랑과 온유로 말하며 친절을 보이나, 집에 들어가면 가족들에게는 성급하고 불친절하게 대한다거나 교회에서는 가장 경건한 언행으로 점잖은 행동을 하나 밖에 나가면 몰상식한 말로 남의 명예를 중상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 모두가 한 우물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내는 행위들입니다. 이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된 뱀의 갈라진 혓바닥이지 결코 사람의 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회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거룩한 하나님을 찬송하던 혀로 형제를 비난하거나 저주를 퍼붓는 것은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참된 성도라면 결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항상 자신의 말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단 물만 내는 선한 혀를 가짐으로써 참된 지혜를 지닌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 속에 거룩하신 성령과 하나님 말씀으로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참된 지혜는 세상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미국의 사상가요 시인이었던 에머슨은 "라파엘은 지혜를 그렸고, 헨델은 지혜를 노래했고, 세익스피어는 지혜를 썼고, 렌은 지혜를 세웠고, 콜롬부스는 지혜를 항해했고, 루터는 지혜를 설파했고, 워싱턴은 지혜로 무장했고, 왓트는 지혜를 기계화 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지혜는 인간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매주 귀중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인 지혜보다는 위로부터 나는 지혜를 성경은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위로부터 나는 지혜, 곧 하늘로부터 나는 지혜야말로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나는 지혜는 세상에서 얻어지고 경험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가 있는데 "이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것으로 온갖 참된 지혜를 배척"(잠18:1)하는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시기와 다툼으로 분열과 요란을 가져와 결국 진리를 거스리는 악한 지혜입니다. 이렇게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는 세상의 지혜는 화평을 모르는 지혜이며 사람을 교만케 하는 지혜입니다. 이사야 47:10에 "지혜의 유혹을 받아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고 하였으며, 에스겔 28:5에는 "큰 지혜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마음이 교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교만에서 다툼이 일어나며(잠 13:10), 이 다툼에서 모든 요란과 악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16절). 이처럼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는 지혜는 사회적 혼란과 죄악을 가져옵니다. 즉 세상적인 지혜는 평화보다 투쟁을 일으키고 화합보다 분열을 일으키며 친교보다 불화를 조성합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미스러운 문제들도 모두 이 세상적인 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를 멀리 하여 이웃과 교회의 친화를 도모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참된 지혜란 위로부터 난 즉 하늘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나는 지혜야말로 참되고 영원한 지혜인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섬기는데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참된 지혜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하늘로부터 나는 참된 지혜는 여덟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결이 참된 지혜입니다. 세상에서 제아무리 재물이 많고 학식이 많고 지체가 높을지라 더러운 자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결코 하나님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오직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물이나 불로써 씻어지거나 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성령으로써만 씻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진 것 없어도, 배운 것 없어도, 누리는 것이 없어도 깨끗하게 사는 사람이 영원하고 참된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며 모든 생활에 깨끗하게 사시므로 참된 지혜를 가진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참되고 영원한 지혜로운 삶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항상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참된 지혜는 화평케 하는 생활입니다. 십자가가 세상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죄의 장벽을 허물고 화평을 이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평케 이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시기와 다툼으로 분쟁을 조장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며, 오만한 태도와 교활한 말과 표정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행위는 인생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아픔과 희생이 있다해도 화평케 하는 자가 참된 지혜를 가진 성도인 것입니다. 셋째로, 관용하며 사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이는 인간의 이해 관계에 있어서 지나친 이익만을 취하지 않으며, 거친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으며, 토론이나 협상에 임하여 무조건 내 주장만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실수나 과오를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는 지혜를 말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셋째로, 양순한 마음과 생활이 참된 지혜입니다. 양순하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과 호소에 이해와 마음의 문을 닫지 않고 양보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다섯째로, 긍휼을 베푸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긍휼은 '어려운 이웃을 불쌍히 여겨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님처럼 우는 자와 함께 울며 고통하는 자와 함께 아파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며 갇히며 눌린 자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 참된 지혜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선한 열매가 가득한 사람이 참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선한 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나라에 기록되는 선한 일이 있고, 또 하나는 하늘나라에 기록되지 아니하는 선한 일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기록되는 선한 일이란 예수 믿는 믿음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말하며, 하늘나라에 기록되지 아니하는 선한 일은 인간적인 동정과 애정으로 베푸는 자선을 말합니다. 세상에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먹어도 마셔도 살든지 죽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마른 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할지라도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지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늘 나라에 기록될 선한 열매가 될 것입니다. 일곱째로, 편벽되지 않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해 차별이 없으십니다.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나는 참된 지혜는 편파적이거나 편벽되지 아니하고 어떤 선입견이 없이 올바르게 사람이나 사물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분파적인 행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여덟째로, 참된 지혜는 거짓이 없습니다. 위로부터 나는 참된 지혜는 꾸밈이나 겉치레를 모르며, 어떤 목적을 위하여 속임수를 쓰지 않으며, 진실을 은폐하거나 가장하지도 않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아무리 많은 힘이나 재물,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힘과 재물과 지식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혜 중에서도 오직 참된 지혜인 위로부터 나는 지혜만이 영원하며 여러분 인생을 헛되지 않고 복되게 할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9:10)고 했습니다. 참된 지혜의 근본은 위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언어생활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재갈먹여 길들여지므로 참된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결과 화평, 관용과 양순, 긍휼과 선한 열매, 그리고 편벽과 거짓이 없는 생활로 하나님 나라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는 참된 지혜를 가진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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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 마음을 성결케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11) 형제들아 !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17)

어느 역사학자의 통계에 따르면 유사 이래로 지구상에 국부적인 전쟁이 아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일어난 큰 전쟁만 해도 14,531회나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평균을 내어보면 1년에 약 2.6회의 전쟁이 일어난 샘이 됩니다. 과히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만해도 오 천년 동안 무려 천 여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에는 끊임없이 "다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기독교 초기 교회 안에서도 "다툼"이 많이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까지 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원인을 한 마디로 "정욕"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 "정욕"이란 '자기 주장을 고수하려는 의지'를 말합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대형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세습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의 대형교회마다 그 대형교회에 대해 갈등하며 인터넷 안티 사이트가 운영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세습에 문제가 없다며 나름대로 그 타당성을 주장하는 기득권층과 교회 세습은 중세 교회를 타락시켰던 것처럼 한국 교회의 심각한 문제임을 지적하며 그 부당성을 주장하는 계층간에 갈등과 "다툼"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정욕", "욕심"(약1:15)이 죄의 본질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어디든지 이러한 자기 주장을 관철시켜려는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결코 "다툼"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다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주장을 포기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쉽게 자기 주장을 포기하게 하지 않습니다.

교회란 예수께서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 주장이 포기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란 예수께서 그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내어줄 때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을 때, 인류는 구원을 받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모든 갈등과 장벽이 무너지고 화해와 치유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의 모든 갈등과 장벽을 허물고 모든 다툼을 치유하며 인류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미얀마의 전설에 어떤 토기장이가 한 세탁소가 번창하는 것을 시기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기장이는 세탁소 주인이 사업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황제를 설득하여 왕실의 검은 코끼리를 희게 만들라는 명령을 세탁소에 내리게 했습니다. 이에 세탁소 주인은 황제에게 코끼리를 담을 수 있는 큰그릇이 필요하다고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토기장이에게 그 그릇을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토기장이는 황급히 커다란 그릇을 만들어 세탁소 주인에게 배달했습니다. 그러나 코끼리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그릇은 곧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계속 다른 그릇을 만들었지만 코끼리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을 망치려고 한 그 계략 때문에 결국 망하게 된 것은 토기장이 자신이었습니다.

바로 구하는 잘된 기도는 주께서 모범을 보여주신 기도와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즉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한 마디로 바른 기도는 자기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이루시는 것입니다. 정욕, 즉 자기 뜻과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규정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곳, 인간의 자기 주장이 만연한 곳을 말합니다. 인간의 자기 주장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자기 주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아를 아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며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욕에 따라 사는 삶은 예수를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자기가 자신의 주인노릇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여 하나님의 백성됨을 싫어합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마귀의 뜻을 받아들였을 때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에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의 백성들을 다시 회복코자 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결단만 하면 그는 다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의 삶 속에서는 그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자신의 뜻과 자신의 정욕에 이끌려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스스로 속지 말라. 정욕에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6절). '교만한 자'의 '휘페레파노이스'(???????????, whiperepanois)는 '위에'를 뜻하는 '휘페르'(????)와 '자신을 나타내다'를 뜻하는'파이노마이'(????????)의 합성어로서 '우월감에 빠져 있는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적 우월감에 젖어 있어서 다른 사람들, 심지어 하나님을 의지하기는커녕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려 합니다. 교만은 자기 뜻이나 주장을 상대방이나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올려놓고 자기 자신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자기 주장이 강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그러므로 교만은 사단의 본성이며 동시에 특성이며 이것은 결국 다툼과 파국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만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섬기는 자리에 처하기보다는 정욕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자리에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이 교만입니다. 이 교만한 마귀가 쫓겨난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내어준 곳이지만 사탄의 뜻대로 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임을 믿으시고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세상은 마귀에게 내어준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위에 올려놓고 자기 자신을 나타내려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고 하나님의 뜻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멸망의 파국을 당하는 다툼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시고, 다음으로 마귀를 대적하여야만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고 해서 무당 푸닥거리하는 것처럼 해서 마귀를 물리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대적해야 할 대상입니다.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그 뜻대로 살면 마귀는 물러갑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뜻을 피해가며 사는 사람에게 붙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세상과 벗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멀리하는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시편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24:3,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 즉 여호와의 산에 오를 사람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생활이 깨끗한 것을 말하고 마음이 청결한 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오직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0 0 감호소에서 출감한지 두 달되신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아내와 6세, 7세된 두 아들을 데리고 울산 어느 여인숙에 머물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감호소에 있을 때 우리 교회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까지 받았다고 했습니다. 마땅히 갈 곳이 없고 일자리가 없어 <숲 속의 사과나무> 전도지를 보고 우리 교회에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장로님과 상의해서 교회 교육관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하기로 하고 그들을 데려왔습니다. 그 분들이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필요한 생활도구와 생필품들을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 일자리를 알선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교회에서 알선한 직장에 간다고 아침 일찍 나가서 하루종일 돌아오지 않더니 결국 동네 술집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평강 교회 목사님 조카라며 돈을 요구하다 들통이 나자 새벽에 얘들을 데리고 소리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어디 제 버릇 어디 가겠는가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배신감을 느끼신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을 비방하거나 쉽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그 분들이 설사 그렇다해도 비방과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더욱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고 그 분들이 잘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형제는 비방과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형제는 연합하여 동거함이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시133:1)입니다.

인생은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개같은 세상에 매여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안개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장사하여 이를 보려고 혈안이 되어 사는 것이 또한 인생들입니다. 세상이 영원한 것처럼 보일지라고 안개처럼 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선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은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며, 지혜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아서 망하는 것입니다.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 것 저 것을 하리라"고 말은 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 물질의 자랑은 모두 허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허탄치 아니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천년의 갑절을 산다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인생은 허무한 것이 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단 하루를 살았다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은 결코 그 인생이 후회되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으로 살고자 하며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터진 웅덩이"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사람이 아무리 자기 힘과 노력으로 이익을 보려고 발버둥쳐보지만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터진 웅덩이>라 물이 고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욕심과 주장과 생각을 버리고 보다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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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말론적인 신앙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6)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12) 내 형제들아 !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 저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17)

사회 비평가로 유명한 미국 워튼 경영대학원 교수 제러미 리프킨이 쓴 <소유의 종말, The age of access>에 실린 글입니다.

《몇 해 전 캘리포니아 법원은 무엇이 소유이고 무엇이 소유가 아닌지에 대해 새로운 판례가 될 수 있는 놀라운 판결을 내렸습니다. 알래스카의 사업가 존 무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신체의 일부에 특허가 발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 무어는 희귀한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캘리포니아 대학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무어를 치료했던 의사와 연구원은 무어의 비장 섬유에서 암 세포와 싸워 백혈구 세포의 성장을 촉진하는 혈액 단백질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대학측은 무어의 비장 섬유에서 세포 계열을 만들어 1984년 <발명> 특허를 받았습니다. 이 세포 계열의 가치는 3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어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의 비장 섬유에 대한 재산권을 주장하면서 캘리포니아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 했습니다. 1990년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무어가 자기 몸의 섬유에 대한 재산권을 주장할 수 없다며 원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무어의 물리적 재산권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세포 계열에 대한 캘리포니아 대학의 지적 재산권 행사는 정당하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은 새로운 시대의 판단 기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체 섬유 안에 들어 있는 유형 재산은 재산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같은 인체에서 나온 세포 계열에 대한 특허 형태의 무형 자산은 존중되고 법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무어의 가족이나 직계 후손이 나중에 이 세포 계열을 이용한 치료를 받아야 할 경우 그들은 캘리포니아 대학에 지적 재산권에 대한 접속료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환자가 유전자 치료를 위해 해당되는 유전자 정보를 이용할 때마다 엄청난 사용료를 부담해야 할 것을 암시하는 사건이며, 또한 이는 부동산 등의 물리적 재산보다 지적 재산권이 막강한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제러미 리프킨 교수는 이러한 컴퓨터를 매개로 한 네트워크 시대에 지적 재산권의 공유로 인간의 이기심이나 탐욕, 착취가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가진 자>들은 컴퓨터 인테넷을 통한 전자 네트워크를 통해 물질과 정신에 대한 보다 강력한 지배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자금과 학식과 시간이 터무니 없이 부족한 빈곤층은 전자 네트워크로 들어가는 대문 바깥에서 가난과 절망이 지배하는 또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한 제러미 리프킨 교수의 세계 진단과 비평을 위한 그의 방대한 자료들을(소유의 종말, p.338 "네트워크 바깥 사람들") 살펴보겠습니다.

『통신 혁명과 미래의 네트워크 세계에 대한 대단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보면 세계 인구의 65퍼센트가 평생 전화를 걸어본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들이고 40퍼센트는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뉴욕의 맨해튼 한곳에 있는 전화기 수가 사하라 사막 남쪽의 전체 아프리카에 있는 전화기 수보다 많습니다....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OECD 24개국이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5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전화선의 71퍼센트가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유럽과 북미의 인구는 전세계 인구의 20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TV와 라디오는 2/3가 이곳에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글로벌 네트워크 경제로부터 사실상 단절되어 있는 대륙입니다. 북미에는 인구 1천 명당 758대의 텔레비전과 2,017대의 라디오가 있는 반면 아프리카에는 인구 1천 명당 고작 37대의 텔레비전과 172대의 라디오가 있을 뿐입니다. 세계 인구의 15퍼센트를 차지하는 선진 공업국에 인터넷 사용자의 88퍼센트가 몰려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5퍼센트에 불과한 북미 지역에 인터넷 사용자의 절반 이상이 거주합니다. 반면 세계 인구의 20퍼센트를 차지하는 남아시아에는 전체 인터넷 사용자의 1퍼센트 미만이 거주합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통신 격차는 아주 심각한 수준이어서 세계가 정보 부국과 정보 빈국으로 급격히 분열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전문가가 상당수에 이릅니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클라인은 하이테크 잡지 <와이어드>에 기고한 글에서 <미래는 풍족하고 어디서나 살 수 있으며 교육을 많이 받은 우리 중의 소수에게만 기회의 낙원으로 다가올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들, 다시 말해서 대학을 나오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소위 불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디지털 암흑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우려합니다....유엔 개발 계획이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358명의 억만장자들이 세계 인구의 절반이 가진 재산보다 더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미국 인구의 절반을 합친 것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전세계의 30억 노동자 가운데 1/3은 일자리가 없거나 생활비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 1998년 국제 노동 기구의 보고서 내용입니다. 그 결과 전세계의 가장 부유한 인구 집단은 오락을 즐기면서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현하며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반면 거의 10억에 달하는 인구는 빈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수십억 명은 빠듯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코앞의 미래는 더욱 암울합니다....전세계적으로 6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예 집이 없거나 조악하고 불결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계은행은 2010년까지는 14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위생적인 물을 공급받지 못한 채 살아갈 것으로 예상합니다. 반면 전세계의 상위 20퍼센트 부유층은 민간 소비의 66퍼센트를 차지하며 하위 20퍼센트의 빈민층은 1.3퍼센트밖에 소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미국인이 화장품 구입에 쓰는 돈(연간 80억 달러)과 유럽인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데 쓰는 돈(연간 110억 달러)은 학교 교육을 못 받고 공동 화장실을 쓰면서 살아야 하는 세계 20억 명의 인구에게 기본 교육, 깨끗한 물, 위생 시설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돈보다도 많은 액수입니다. 점점 벌어지는 부자와 빈자의 수입 격차는 개발도상국만이 아니라 선진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지난 20년 동안 다른 어떤 선진국보다도 계층간의 수입 격차가 급격히 벌어졌습니다. 미국 인구 통계국은 현재 빈부간의 수입 격차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벌어졌다는 보고를 내놓았습니다. 오늘날 미국 인구의 20퍼센트가 미국 국민 전체 소득의 50퍼센트를 가져가지만 50퍼센트의 가구는 금융 자산이 1천 달러에도 못 미칩니다....부유층은 점점 전자 대문의 안쪽으로 넘어가는 반면 미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은 교도소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 교도소에는 150만 명의 미국인이 갇혀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죄수가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1980년에 캘리포니아의 교도소 운영 예산은 전체 예산의 불과 2퍼센트였지만 1995년에는 9퍼센트로 늘어났고 2002년까지는 거의 18퍼센트 수준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캘리포니아의 교도소 예산은 고등 교육 예산보다도 많습니다....전화도 못 쓰는 미국의 7백만 가구에게 빌게이츠가 구상하는 정보 고속도로로 연결된 세계는 무의미한 소리입니다. 극빈층이 아니더라도 가난한 노동자층과 중하류층은 새로운 전자 네트워크 세계에 능동적으로 참여 할 수 있는 자금과 학식과 시간이 부족합니다. 부유층은 자기들끼리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사업과 교제의 네트워크를 더욱 공고히 쌓아갈지 모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고립되고 소외된 채 점점 고달파지는 세상에서 점점 가난하게 살아갈 위험성에 직면해 있습니다.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사람은 접속의 시대에도 낙오됩니다.』

성경은 이 땅의 부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여기 "부한 자들"이란 부당한 방법으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수탈하여 축재하며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불의한 무리들, 그리고 물질(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은 부를 무조건 정죄하거나 부에 대한 축적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이 문제삼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어떤 목적으로 부를 쌓았으며, 어디에 사용했는가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부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부가 축복이라 한다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가난을 덕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재물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 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재물은 복이 될 수 없고, 비록 가난하다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근본 사상은 부, 재물은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단지 그 부(재물)에 대한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청지기 사상은 비단 재물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부여된 재능이나 지식, 생명까지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하고 추구해야 할 것은 재물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입니다. 재물이란 사람들에게 삶을 편리하게 하며 자유와 힘을 주는 것같이 보이며,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 같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8) 선한 일이란 하나님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물이란 나 자신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맡겨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재물을 축적할 수 있는 지식이나 정보, 재능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의 까뮈라는 사람이 노벨 문학상을 탔습니다. 그는 거기서 받은 상금으로 파리 근교에 좋은 별장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별장으로 차를 몰고 가던 도중에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슈바이쳐 박사는 이와 대조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까뮈와는 달리 거기서 받은 상금으로 아프리카 문둥병 환자들을 위하여 병원을 지어 주었기 때문에 오늘도 수백 명의 환자들이 그 병원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같은 돈이었으나 쓰는 용도에 따라서 이렇게 큰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재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되어질 때 인간의 존재 가치를 더욱 더 아름답고 영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계의 첨단 문화와 문명, 지식과 정보를 장악한 20%의 부유층들은 80%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저 마지못해 먹다 남은 빵부스러기나 던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자신과 그 재물에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과 재물의 존재의미가 하나님과 가난한 이웃들에게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가 영원한 부자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영원히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죽을 줄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이란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염두에 두고 예수 믿는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알고 그 심판날이 "울고 통곡하는 날", "도살의 날"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살지게 하며"살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가난한 이웃의 유익을 위해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며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는 부자들에게 오늘 성경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약5:3-5)

하나님의 뜻과 이웃들을 외면하고 자신들을 위해 재물을 불려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도살당하기 위해서 살쪄 가는 돼지들의 모습으로 본 것입니다. 앙드레 비엘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재물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쓰여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일과 선한 사업에 부요한 자가 될지언정 재물에 부한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선한 일과 선한 사업에 부요한 자가 되지 못하고 재물에 부한 자가 된다면 그 인생은 살쪄 가는 돼지나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도둑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한 일과 선한 사업에 부한 이 땅에 부자들이 되므로 "장래에 자기를 위해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지혜로운" 인생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나라의 대부분의 부자들과 정치인들은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당한 방법으로 권좌에 오르거나 땀흘려 돈을 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경유착, 즉 정치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통해 경제력을 장악하거나 탈세 등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의를 통해 재물을 축적했다는 사실을 온 천하가 다 아는 바이기 때문에 존경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국가 경제 성장을 빌미로 유착된 정치권력은 국민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고 경제 세력들은 나어린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력을 착취하여 오늘날 한국의 재벌왕국을 형성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삯을 제대로 받지 못한 품군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들렸으며 그 죄가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곤궁하고 빈한한 품군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신24:14,15)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 것입니다."(렘22:13) 더 나아가 이들 불의한 부자들은 정당한 품삯을 부르짖는 옳은 자를 편벽된 재판으로 몰아가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부당한 품삯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부자들을 고소했지만 이미 부자들과 정치권력에 매수된 재판관들은 불의한 부자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며 오히려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돈 있는 전과자는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에서 판치고, 돈 없는 전과자는 사회의 냉대 속에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를 놓고 여당 일부에서 흘러나온 말이 "1년 안에 모두 풀어줄테니 그냥 감옥에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사실들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높은 권좌에 오르는데 저지른 부정부패와 불의에 대해 설사 최고 법원인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났다할지라도 그 사건이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힘없어 억울하게 재판정에 끌려가 편벽된 유죄판결을 받았다할지라도 모든 것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주의 강림, 즉 하나님의 심판날, 도살의 날이 가까운 것을 믿고 마음을 강하고 굳게 하여 더러운 세상과 타협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진실되게 살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9절)고 했습니다. 원망이란 부정적인 비판으로, 참다 못해서 자신이 처한 어려움의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이나 형제를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갈 때에 시므리란 자가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계속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 때 다윗의 신하 아비새가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하며 시므이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말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16:5-14) 바로 이같은 다윗의 신앙을 우리가 배워 인내해야 합니다. 도살의 날, 심판의 날이 없다면 세상은 너무나 불의하고 불공평한 것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진리가 살아있음을 증거하신 예수께서 세상 끝날에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세상은 비록 불의와 불공평할지라도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 도살의 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며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난당하는 자들과 병든 자들과 낙심하여 진리에서 떠난 자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종말론적인 신앙생활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이 뭔지 몰라 설사 <돼지털>이라고 반문하는 <디지털 문맹>일지라도 자신에 주어진 재물과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신앙생활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날에 허다한 죄가 가리움을 받는 복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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