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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목사 시국및절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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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한국 전쟁과 사명자(습 3:1-7) / 6.25설교

2. 개혁자의 삶(대하 34:1-33) / 국가

3. 우상숭배 정권의 불행(왕상 12:21-33) / 국가

4. 사라지지않는 불꽃(출3:1-12) / 광복절

5. 국가와 민족이 사는 길(삼하 24:10-24) / 국가

6. 의인 하나면 족하다(창18:22-32) / 국가

7.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라(암5:1-27) / 국가

8. 성결케하여 내일을 기다리라(수7:1-26) / 국가

9.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욘 1:1-15) / 국가

10.겨울에 피는 꽃(렘 1:11-12) / 국가

11.가시나무를 대신하여(사 55:1-13) / 국가

12.네 뒷맛이 쓰지않겠느냐?(삼하 2:24-28) / 국가

13.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에 4:1-17)

14.의인을 팔지 말라(암 2:6-8) /

15.울음군을 부르라(암 5:16-17) /

16.우리가 무엇을 마실까(출15:22-27)

17.향기를 날리라(호1:12-20) /

18.하나님을 찾으라(역대하 15:1-19) /

19.광야를 기억하라(신 8:1-6) /

20.너는 반석을 치라(출 17:1-7) /

21.방주로 들어가라(창 7:1-5) /

22.치료하는 여호와(출 15:22-28) /

23.영광을 하나님께!(단5:17-31) / 3.1절기념주일

24. 한국 전쟁과 통일지향의 기독교(계 13:1-18)

25. 너희는 거룩하라(히12:14)

26. 우리의 소원(롬9:1-5)

27. 개혁의 원리(히4:12-13)

28. 성전 기둥이 되라(계 3:7-13)

29.하나되게 하신 것(고전 11:23-29, 엡 4:1-6)

30.다시는 죄를 범치말라(요 8:3-11)

31.고침을 받게 하라(히 12:5-13)

32.통일의 주체/성령(행2:1-13)

33.자신을 깨끗이 하자(고후7:1-4)

34.신앙과 현실(마17:1-20)

35.빛과 소금이 되라(마5:13-16)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 한국전쟁과 사명자

"(습3: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습3: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습3: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습3:4)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습3: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 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습3:6) 내가 열국을 끊어 버렸으므로 그 망대가 황무하였고 내가 그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 모든 성읍이 황폐되며 사람이 없으며 거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습3: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어느 작가는 문민정부를 가리켜 '사고 공화국'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문민정부 출범 후 잇달아 일어나 사건 사고를 두고 붙여진 말입니다.

93년 1월 청주우암상가 붕괴 사건(27명 사망),

93년 3월 헬기 추락 사고(7명 사망),

93년 3월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78명 사망),

93년 6월 예비군 부대 폭발 사고(19명 사망),

93년 7월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사고(66명 사망),

93년 8월 헬기 추락 사고(10명 사망),

93년 10월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292명 사망),

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사고(32명 사망),

94년 10월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건(25명 사망),

94년 12월 아현동 가스 폭발 사건(12명 사망),.....

95년 4월 28일 대구 가스 폭발 사건(110명 사망).... 등

김홍신의 세태 만필을 통해 보면 그야말로 우리 사회는 총체적인 부정 부패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위기감이 팽배해 있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농약투성이인 채소와 콩나물을 먹어야 하고 오염된 물만 마시며 언제 다리가 무너져 죽을지, 어느 때 가스가 폭발해 시신도 못 찾게 될지, 언제 비행기가 추락하고 지하철이 흙더미에 묻힐지 모르는 곳에서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하는 이 기구한 팔자가 싫어졌다. 억척스럽게 벌어서 세금 내면 죄다 떼어먹는 판이요, 큰 죄 지은 자는 잘 먹고 잘 살고 작은 죄 지으면 가차없이 감옥행인 세상, 사건사고 터지면 조무래기들만 두름으로 엮듯 잡아가고 거물을 알아서 내버려두는 사회. 썩고 썩어서 거대한 고름덩어리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정치판 사람들은 권력의 핵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지 멀쩡하게 살아가고, 과거의 죄상이야 어쨌거나 핵심세력을 도왔다 하여 오장육부 터지게 잇속 챙긴 걸 토해내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 세상 이치가 되어버렸다. 산행을 하다가 만난 점잖고 곱게 나이든 노인들은 서슴없이 "망할 놈의 세상, 이렇게 엉망진창은 없었을거야"라고 한탄했다. 다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갈 생각을 하자 걱정거리 또한 태산이었다. 도둑과 강도떼가 극성인 판이요,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강도나 도둑의 피해를 입었다는 치안부재인 세상에, 시골로 내려간다고 피할 재간이 있겠는가. 어느 날 아현동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하여 수라장이 된 장면을 TV로 지켜 보던 딸아이가 한탄하듯 내?는 소리일까마는, 어린 속에도 하도 자주 터지는 사건사고에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차마 어린 것에게 왜 우리나라가 망할 거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하늘, 땅, 바다, 지하, 어디 한 군데 성한 데가 없네요. 이제 남은 건 산이 무너지는 것밖에 없네요." 딸아이의 말을 받은 것은 중학교 3학년짜리 아들녀석이었다. 틀린 말 같지 않았다...........최근에 시공되었던 터널 공사의 부실 현장이 종종 TV 화면에 공개되는 걸 보면 ..... 지금이라도 빨리 전국에 산재해 있는 터널의 안전진단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생태계의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한강 개발로 인해서 샛강이 줄고 고수부지가 떠억 버티고 있는 것은 언젠가는 서울 전체를 물바다로 만드는 대참사의 가능성을 예측케 하는 졸렬한 개발정책이라고 한다. 50년이나 100년에 한번 대홍수가 생기기 때문에 그 화를 후손이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기상이변이 세계적인 추세이고 환경파괴가 날로 심해진 탓에 50년이나 1백 주기의 대홍수는 더욱 당겨질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전문가의 이런 지적을 들으면서 한 가지 쉽게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어차피 대홍수가 난다면 그 때는 자기가 그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고, 언제일지 모르는 대홍수를 미리 예방하자고 건의해봐도 위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할 게 뻔하기 때문에 모르는 체하는 것이 상책일 거라는........"대한 민국 전체가 썩었다." 이렇게 절규하듯 말할 수 밖에 없는 우리네 현실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어느 고위공직자는 자식의 부정입학을 위해 2억 원을 내놓았다. 그의 월급액은 1백 60만 원이었다. 현재의 직위로만 따져도 2억 원을 모으기 위해선, 한 푼도 쓰지 않고도 무려 10년 5개월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낮은 계급의 옛날 월급에서부터 생활비와 교육비와 잡비 등을 계산에 넣어 보면 공직생활 20여 년을 통털어도 그만큼 모을 수 없다. 아니 그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여 월 1백만 원씩 받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20여 년이나 모아야 할 액수를 부정입학자금으로 쾌척할 수 있다니. 대한민국에서 평생토록 2억이란 거금을 만져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국민들이 분노하고 한편으로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이 같은 국민 모독죄가 도처에서 창궐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뒷짐을 쥔 자들과 이 따위 경제를 흔드는 자들이 부정부패의 세균들이란 사실을 어찌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몇 차례의 선거양상만 건성으로 훑어보아도 한국의 지하자금 규모가 정상적인 경제구조를 압도한다는 걸 짐작하고도 남는다. 국회의원의 세비나 장관의 월급액수로는 지역구 관리와 생활비를 댈 수 없다는 건 이미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 어떤 도깨비 방망이를 가졌기에 수십억 원씩의 선거자금을 융통했으며, 대통령 선거에서는 무슨 재주로 수백 수천억 원씩을 뿌릴 수 있었는지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설명이 불가능한 돈은 음험한 돈이고, 그런 돈은 음험하게 쓰여질 수 밖에 없다. 경제계와 정치계 사이에 주고받는 돈과 이권은 분명 음흉한 거래이자 부정부패의 표본인 것이다. 윗물이 그 모양인데 그보다 아래에 있는 물은 어떨꼬......>

광주지검이 광주. 전남지역의 4대선거 후보자 1천 7백45명의 전과를 조회한 결과 후보자의 44.8%가 전과자였습니다. 이들 중 행정범죄 전과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유형별로 보았더니 폭력 전과자가 2백 63명, 사기와 횡령 등 재산범죄가 79명, 절도 17명, 문서위조 17명, 심지어 강간 등 파렴치한 성범죄 전과자가 4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나타나 유권자들을 당황케 하고 있습니다. 이건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부산 지역의 경우는 72%나 된다는 것입니다. 4명 중 3명이 전과자이고 그 중 상당수가 무시무시한 범죄 전과자이니 이들이 당선되어 지방살림을 도맡게 되는 날은 결국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긴 꼴이 될터이니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닙니다. 검찰당국이 밝힌 바에 의하면 울산. 양산 지역 출마자 2백48명 중 67%에 달하는 1백 90명이 한 개 이상의 별(전과자에 붙여 이르는 말)을 갖고 있는 전과 보유자라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4범 이상이 42명으로 15%에 이르고, 혼인빙자 간음, 뇌물독직, 무고, 사기, 공갈 등의 파렴치범이 1백여 명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죄를 짓지 않고 살기란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법에 의해 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은 전과 기록 보유자들은 상대적으로 부도덕했다할 것입니다. 더구나 혼인빙자 간음, 뇌물 등의 파렴치행위로 인한 전과기록 보유자란 우리 사회에서 '지도급'으로 분류될 수 없는 부류라 할 것입니다. 한데도 이들 부도덕 파렴치 전과 기록 보유자들이 지역 살림을 일궈나가겠다며 지방의회 의원후보로 출마한 것은 지역민을 우롱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전과자들이 아니면 지도자가 없다는 말인가. 이는 한 마디로 총체적인 부정 부패, 총체적인 위기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봅시다.

"(습3: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 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위에 열거한 수 많은 사건사고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었건만 완악한 무리들은 자신의 죄악에 대해 수치를 모르는 죄에 대한 불감증에 걸렸다는 지적의 말씀입니다. 당시 예수살렘의 죄악상, 부정부패한 모습을 한 마디로 본문 1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습3: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먼저, "패역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한 것을 말합니다. 2절 말씀에서 바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습3: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다음으로 "더럽다."는 것은 이교도들이 우상숭배하는 것과 같은 의식적인 불결을 말합니다. 셋째, "포학하다."는 말은 타인의 권리와 위치를 무시하고 광포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들이나 과부들 혹은 고아들과 같은 힘없는 백성들이 그들의 권리가 무시당하고 함부로 취급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습3: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여기 "방백들"은 백성의 지도자, 귀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라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잘 인도하기보다는 먹이를 찾아 부르짖는 사자처럼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재판장들"은 배를 곯은 짐승이 먹이를 남겨 두지 않고 한꺼번에 먹어치우는 것처럼 불의한 재물을 축적하기 위해서 재판을 굽게 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습3:4)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이며 오직 하나님께 충성을 다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스바냐 당시 선지자들은 간사하여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하지 않고 오직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거짓 예언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혔다고 고발합니다. 제사장들은 제사 의식을 행함에 있어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여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바침으로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것입니다. 각계각층의 부정부패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습3:6) 내가 열국을 끊어 버렸으므로 그 망대가 황무하였고 내가 그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 모든 성읍이 황폐되며 사람이 없으며 거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습3: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습3: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한국전쟁이 가져온 중요한 구조적 변화는 냉전체제에 걸맞는 억압적인 국가기구가 형성되었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해방정국에 나타났던 좌파나 중도 우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우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파의 반공이데올로기는 1980년 중반에 이를 때까지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되어서 이른바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기후(social climate)가 되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60, 70년대 학교 미술시간에 6.25를 주제로 한 그림은 주로 "상기하자, 6.25. 멸공 통일. 반공. 승공" 등 이었으며, 흔하게 볼 수 있었던 포스타나 표어는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시자 공산당" 이었습니다. 전쟁이란 목숨을 건 싸움으로 적과 아군만이 존재할 뿐 그 중간에 다른 어떤 것도 개입할 여지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흑백논리에 의한 이분법이 인간의식을 지배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매우 경직된 사회 심리구조를 형성하는 데 크게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 정권형태를 띠게 되고 이 역시 경직된 사회의식구조를 형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상황을 두고서 그 당시의 한 정치가는 다수의 횡포와 폭력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적인 테러리즘'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극심한 생존경쟁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들은 기존의 규범을 파괴하였고 적과 아군이 뒤바뀌는 상황에서의 앞잡이, 밀고, 복수 등의 악순환적 형태는 인간관계와 행동규범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여기에다 외국군의 진주와 함께 외래문화, 특히 미국의 대중문화가 광범위하게 침투되어 문화적 교란과 가치관의 혼란, 곧 아노미(anomie)상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전쟁을 통해 강화된 반공을 앞세운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타락은 사회적 위기감과 아노미를 더욱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엄요섭은 사회변천의 가장 중요한 요인을 전쟁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국사회는 일제에서 해방된 이후 사회의 모든 현상이 무질서에 빠지면서 사회생활은 어떤 형을 잡지 못하고 그때그때 혼돈을 계속해왔고 또 전쟁이 발생하면서 이 사회생활은 더욱 무질서에 빠지고 말았다." 북한 당국의 혹심한 탄압으로 해방 전 한국교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하여 한국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연히 한국교회는 반공의 기수가 되었고, 기독교의 한국에서의 가장 큰 사명은 "멸공구족 민주건국(滅共救族 民主建國)"이며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기독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 한국교회는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반공주의에 완전히 침잠되거나 더 나아가서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50년대 초중반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극단적 반공주의)선풍까지도 어느 정도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철저히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과 당시 가장 강력한 반공세력이었던 기독교는 자연히 밀착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자신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유당 국회의원이나 정부 요직을 많은 수의 기독교인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익의 3영수'로 불린 이승만. 김구. 김규식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신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익의 정치적 승리를 기독교인들의 승리로 동일시하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인의 신념체계와 부합되거나 기독교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즉 이 대통령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허리를 굽히는 대신에 손을 가슴에 얹고 주목하도록 했으며, 감옥전도와 옥중전도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1951년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종군목사제도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보수로 촉탁되었지만 1954년부터 현역장교로 임관되는 군목제도가 확립되어 1955년 현대 카톨릭 27명을 포함하여 352명의 군목이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들어온 적지않은 원조물자들을 교회들을 통하여 배급하게 하여 기독교인들이 많은 혜택을 입을 수 있기도 했습니다. 일시적 현상이긴 하였지만 이른바 '밀가루 신자(밀가루와 같은 해외 원조 배급품을 타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신자)가 급격히 늘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기독교 방송의 허용, 일요일의 공휴일화, 형무소 목사 임명, 크리스마스의 공휴일화 등 여러가지 특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사이의 밀착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약화되어 갔습니다. 이승만 정권과의 밀착에 따른 기독교회의 혜택은 외형적으로 기독교회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 전체로 보아서는 심각한 문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곧 교회가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는 태도는 기독교의 예언자적 사명과 도덕적 위상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교회들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민주화, 유신 반대, 인권 옹호 등을 외치다가 많은 고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들은 역사의 어두움 속에서도 침묵하였고, 그 중의 일부는 예언자적 사명을 담당하는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매도하였으며, 삼선 개헌 지지와 유신 지지를 표명하고, 군부 독재 정권을 정당화하는 조찬 기도회 등을 개최하여 국가 권력으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사회에 대한 영적, 도덕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교회는 국가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그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국가 권력과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으면 권력의 잘못된 사용을 비판하고 그 개선을 요구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국가간을 살펴보겠습니다.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롬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13: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롬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롬13: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롬13: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롬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기독교인은 두 가지의 통치 영역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 통치로서 하나님의 통치이며, 다른 하나는 외부적 행동을 관할하는 육적 통치로서 곧 국가의 통치입니다. 위 성구는 기독교인이 사회 생활함에 있어서 취해야 할 국가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 국가 권력과 사회 속에서 영육간에 성결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국가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순결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하는 시민이기 때문에 재림의 날을 대망하며 "고요하고 단정한 중에 평안한 생활을 하려"(딤전2:2)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확고한 종말론적인 신앙 때문에 바른 국가관을 가지므로서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성결을 보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 교회에서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로써 정치를 포섭하려 했으나 결국 교회가 세속화되고 말았습니다. 중세에는 교권이 국권까지를 좌우하려고 하는 혼동에 빠져 결국 둘 다 부패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본문 1절은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독일 국민들에게 나치 정권의 살인마적 행위에 가담하는 구실을 주었고, 일제 시대에는 신사참배가 국민 모두의 당연한 의무라는 변명의 구실을 준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위 성구에 대한 바른 해석가운데 올바른 국가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위 성구는 분명히 국가 권력에 대한 복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같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2:1-2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디도서 3:1에서는 목회자에게 주는 충고로써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 전서 2:13-17에서는,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는 어디까지나 신본주의 윤리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곧, 국가 권력에 대한 순종의 이유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1절) 그렇게 때문에 본문1절 상반절에 "굴복하라"는 말씀은 무조건적 복종이나 절대적 복종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건적이며 상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위에 있는 권세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가 될 때에는 거기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29절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요한 계시록 13장에 나타나는 적 그리스도적인 독재 정부에는 굴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치 독일이나 일제 군국주의자들이나 북괴 김일성은 바로 적 그리스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거기에 절대 굴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정부 형태라면 비록 그들이 소위 민주적이 아닐지라도 굴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최고의 정부 형태로 생각하나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주권재민)하나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미국의 상하 양원제는 사사시대의 형태를 모방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민주주의 정부의 권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하는 것이라면 굴복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양심을 거스리는 불의한 권력자들이나 그 권력자들의 시책에 대해서 무조건적이요 맹목적으로 복종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경우에 성도들은 마땅히 자신의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왕상18:1-46).

"(단3:13)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단3: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단3:15)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단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단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3: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즉 우상 숭배와 같이 극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통치자들의 불의한 행위를 묵인하고 그대로 굴종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거스려 하나님을 배반하는 어리석은 행위인 것입니다(잠15:9, 10,딤후3:7, 8). 다니엘처럼 하나님께 뜻을 정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단1:8).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권력 행사를 허락하셨지만 권력을 남용하는 죄까지 허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한 시민으로써 통치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아울러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통치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기독교인이 취해야 할 자세로써 폭력적인 투쟁을 정당화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박해를 가하는 사악한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마5:44).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바울 당시 팔레스틴 특히 갈릴리 지역은 계속적으로 폭동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님밖에는 왕이 없다고 믿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조공을 바쳐서는 안된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들 자신을 돕기 위한 폭력 행위를 시작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돕지 않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직업적으로 살인과 암살을 서약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여하한 정부의 존재도 불가능케하는 것입니다. 소위 광신적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폭력적인 유대주의로부터 기독교를 완전히 분리시키고 올바른 국가관속에 선량한 시민 생활을 목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 국가를 폭군에게서 건져내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국가 권력이 불의를 행할 때 성도는 야합하거나 굴종할 것이 아니라 적법한 절차를 거쳐 공의의 회복에 앞장서서 불의의 세력을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칼빈). 정당한 정의와 권위에 대한 순응이 성도의 덕목이듯이 불의에 대한 비판과 개혁 또한 성도의 의무인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본질적인 사명은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행1:8).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각기 주어진 삶의 터전에서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삶을 변화시킨 성령은 그의 생활을 통해 영국 사회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므로서 부패한 영국 사회를 정화하고 부강한 산업사회로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따라서 한 인간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도는 개인적으로 사회 참여를 할 수 있으나 이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각기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인 견해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인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이름을 걸고 단체적으로 사회 참여를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므로 변화 많은 세상에 의해 영향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향해 거룩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롭게 하고 더욱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를 견고히 세우는 심부름꾼으로서의 국가 권위(정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도의 의무를 등한시해서는 안됩니다.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기울어 가는 그의 조국을 위하여 극한적인 위기 상황에 처해서도 눈물로써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렘20:7-18).

"(렘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렘20: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렘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20: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렘20: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하시는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렘20: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 (렘20: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렘20: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렘20:15)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렘20: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렘20: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렘20: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반면에 통치자들은 자신이 가진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겨야만 합니다.(시2:10, 11)

"(시2: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시2: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리고 통치자는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겔45:9).

"(겔45: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아 너희에게 족하니라 너희는 강포와 겁탈을 제하여 버리고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토색함을 그칠지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바울이 본장에서 천명하고 있는 국가관은 예수께서 주신 사명, 곧 복음의 선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마28:19, 20).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어떤 정부 또는 권세 아래있는 성도는 교회의 질서 못지않게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왜냐면 본질적으로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 질서 보존속에서 성도의 보존과 복음이 전진적으로 선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악을 억제하고 선을 증진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의 빈곤이나 무질서를 퇴치시키는 일 등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잠16:12,29:4).

"(잠16:12)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잠29: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교회가 내적인 일을 한다면 국가는 외적인 일을 합니다. 국가란 본래 서로 법령을 준수함으로써 어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결속하고 서약한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국가가 없이는 그리고 이 법률과 이 법률을 준수하겠다는 상호 약속 없이는 악하고 이기적인 강자만이 최고가 될 것입니다. 약한 자들은 발붙일 데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정글의 법칙에 따라 지배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국가에 자기의 안전을 빚지고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누리고 국가에 대한 의무는 지키지 않으려 한다면 옳지 못한 것입니다. 국민이 국가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 납세의 의무를 다해야 하며,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병역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중에 전시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 적을 죽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십계명 중에 제6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위반하지 말라는 것으로 개인적으로 살인을 금한 것입니다. 법적 재판에 의한 사형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출21:14-17).

"(출21:14)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 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출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21:16)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 지니라 (출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

기독교인이 전쟁이 나가는 것은 기쁜 일은 아니지만 전쟁에 나가는 것이 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어거스틴). 기독교인으로서 전쟁때에 개인의 생명을 아껴 어디까지든지 기피할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 무책임할 뿐 아니라 인류의 불행에 대하여 수수 방관하는 불의한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혹 불행하게 침략주의 국가의 국민이 되어 어떤 침략 전쟁에 군인으로 강제적 징발을 당할 때, 그는 그의 양심의 자유로 할것이로되 혹시 거기에 응하지 않을 경우도 있을 것이며, 그런 경우에도 그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강도 행위를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로써 국가는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본문4절). 기독교인들은 권세 잡은 자를 존경하되 하나님을 위하여 할 것이며, 다스리는 자가 백성을 양선하게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권세를 존중히 여긴 다윗은 끝까지 형통하였으나, 다윗의 세력을 반대한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전쟁하다가 머리카락이 상수리 나무 가지에 걸려 그 원수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삼하18:9-15).

"(삼하18:9)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간지라 (삼하18:10)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삼하18:11) 요압이 그 고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삼하18:12)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삼하18:13) 아무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 생명을 해하였다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삼하18:14) 요압이 가로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삼하18:15)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높일 자를 높히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합니다(롬13:7, 벧전2:13-18).

"(벧전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벧전2: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벧전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벧전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하라 (벧전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벧전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하나님의 도구로써 국가 권력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양심에 따라 순종하여야 하며 또한 우리의 신앙 생활의 성결 보존을 기하고자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기 위해 우리는 나라와 민족, 그리고 위정자들을 위해 사명적으로 열심히 기도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나라 민족을 통해 궁극적인 천국 복음(마24:14)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한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사명자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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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혁자(改革者)의 삶

"(대하34:1)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 일년을 치리하며 (대하34: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대하34:3) 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지 팔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십 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하여 그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매 (대하34:4) 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였으며 왕이 또 그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대하34:5) 제사장들의 뼈를 단 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였으며 (대하34:6) 또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여 (대하34:7) 단들을 훼파하며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대하34:8) 요시야가 위에 있은지 십 팔년에 그 땅과 전을 정결케 하기를 마치고 그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려하여 아살랴의 아들 사반과 부윤 마아세야와 서기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를 보낸지라 (대하34:9) 저희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나아가 전에 하나님의 전에 연보한 돈을 저에게 붙이니 이 돈은 문을 지키는 레위 사람이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온 유다와 베냐민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서 거둔 것이라 (대하34:10) 그 돈을 여호와의 전 역사를 감독하는 자의 손에 붙이니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그 전을 수리하게 하되 (대하34:11) 곧 목수와 건축하는 자에게 붙여 다듬은 돌과 연접하는 나무를 사며 유다 왕들이 헐어버린 전들을 위하여 들보를 만들게 하매 (대하34:12) 그 사람들이 진실히 그 일을 하니라 그 감독은 레위 사람 곧 므라리 자손 중 야핫과 오바댜요 그핫 자손 중 스가랴와 무술람이라 다 그 일을 주장하고 또 음악에 익숙한 레위 사람이 함께 하였으며 (대하34:13) 저희가 또 담부하는 자를 관할하며 범백 공장을 동독하고 어떤 레위 사람은 서기와 관리와 문지기가 되었더라 (대하34:14)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대하34:15) 서기관 사반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 (대하34:16) 사반이 책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복명하여 가로되 왕께서 종들에게 명하신 것을 종들이 다 준행하였나이다 (대하34:17) 또 여호와의 전에 있던 돈을 쏟아서 감독자와 공장의 손에 붙였나이다 하고 (대하34:18) 서기관 사반이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대하34:19)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대하34:20) 왕이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의 아들 압돈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신 아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대하34:21)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대하34:22) 이에 힐기야와 왕의 보낸 사람들이 여선지자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하스라의 손자 독핫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 저희가 그에게 이 뜻으로 고하매 (대하34:23) 훌다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으로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고하기를 (대하34:24)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 앞에서 읽은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하리니 (대하34:25)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노를 이 곳에 쏟으매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대하34:26)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대하34:27) 내가 이곳과 그 거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대하34:28)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대하34:29) 왕이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대하34:30)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노소하고 다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연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대하34:31)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대하34:32)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로 다 이에 참가하게 하매 예루살렘 거민이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의 언약을 좇으니라 (대하34:33)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을 다 제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신정부가 들어서 신한국 개혁 정책을 펴나가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군부 통치30년 동안 만연된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고 각계 각층의 부조리를 개혁해 나가는 신정부에 대해서 세계가 또한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 정책이 세계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할지라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목적을 가지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유다의 3대 성군 중 마지막 왕인 요시야의 통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이후 므낫세(B.C.697-642)와 아몬(B.C.642-640)왕의 악정으로 인해 유다는 이미 멸망의 지름길을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제16대 왕으로 즉위한 요시야가 선왕(先王) 아몬 때 다시 숭배되었던 우상들을 파괴하고 종교 개혁을 일으켜 하나님의 절기들을 다시 준수케 하고 파멸로 치닫는 유다 왕국의 운명을 잠시 멈추어 서게 했습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 운동은 히스기야 왕 때보다 더 광범위하고 확실하게, 그리고 부분적, 지엽적이 아니라 전국적인 성결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내용은 개혁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개혁자의 삶을 살게 될 때 역사의 단절을 막고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 역사의 계승자가 되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요시야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본문2절)고 했습니다(honest to God). 시인 윤동주는 자기의 서시 속에 " 하늘을 향하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처럼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은 바로 정직한 마음입니다. 사람의 인격의 가치를 측정하는 최상의 것은 정직입니다. 1977년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자 한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가던 중 20달러짜리 지폐를 25만 달러 어치나 길거리에 내던졌다고 합니다. 이 돈들은 바람에 날려 이 구석 저 구석으로 흩어져 갔습니다. 그 이튿날 경찰에 돈을 주웠다는 신고 액수가 무려 24만 2천 달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는 25만 달러의 96.8%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미국이 국제 사회에 있어서나 국내의 도덕적 문제 있어서 많은 모순과 갈등을 겪고 있지만, 아직도 모든 사람이 정을 붙이며 생명을 맡기고 살기에 가장 이상적인 나라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이런 정직성 때문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정직해서는 곤란하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어느 여론 조사의 결과를 보면 우리 나라의 정치가들이 제일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사회에 불신 풍조가 만연한 것은 바로 정치 지도자들의 정직하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이든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 또 어떤 분야 종사하든 모두가 정직할 때 그 사회는 가장 안전한 살기 좋은 사회인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세상에서의 일반적인 윤리 의식정도에서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실로 이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의 정직이 아니라 하나님 눈으로 볼 때의 정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정직은 완전 무결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직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정직해야만 합니다. 시편119:137,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정직하시니이다."하나님께서는 손의 행사가 다 정직하시고 판단도 정직하게 내리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나라의 사법부의 모든 판단이 정직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을 정직한 존재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전도서7: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참으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만듭니다. 시편11: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정직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시편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에게 흑암 중에서도 빛이 일어나게 만드십니다. 시편112:4,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정직하게 살기 때문에 고통과 아픔이 있다할지라도 끝까지 정직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광명한 때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자의 삶은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둘째로, 개혁자 요시야는 어떤 일에서나 좌우로 치우치는 일이 없었습니다(본문2절).참으로 '거문고 줄을 너무 늦추면 소리가 나지않고 너무 조이면 끊어지고 만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나라의 지도자가 교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 명령대로 행하면 그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7:18-20,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지도자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호수아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우리는 누구나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고루 주시는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마5:45-48)

셋째로, 개혁자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 단호한 결단을 통해 나라의 운명를 일신하였습니다. 요시야는 먼저 성전을 성결케하는 일을 통하여 신앙 생활에 활기를 얻을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으로 축복의 통로와 같은 것입니다. 외형적인 성전 복구 수리를 통하여 백성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을 새롭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항상 성결케 보존코자 하는 사람은 그 신앙이 날로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전이되는 자기 몸을 날마다 성결케함으로 자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고전3:16,17).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가까이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더욱 더 성결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성결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 성결할 때 거룩한 하나님의 영, 성령은 역사하십니다. 신한국 개혁 정책이 하나님께 합의한 개혁 운동이 되어 나라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결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가야 합니다. 성결운동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소멸시키는 성령의 불을 이 땅위의 모든 심령들에게 던집시다. 죄악이 일소되지 않은 개혁 운동은 악령만 역사할 뿐입니다. 민족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성전을 새롭게 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 민족의 진정한 개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개혁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성전을 세웁시다. 일본의 성서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나라가 부강하려면 경제가 부흥하여야 하고, 경제가 부흥하려면 정치가 민주적으로 발전되어야 하고, 정치가 발전되려면 사회가 안정되어야 하고, 사회가 안정되려면 도덕 수준이 높아야 하고, 도덕 수준이 높아지려면 올바른 종교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회복시켜주는 종교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시야는 더 나아가 철저하게 우상을 제거함으로 그 땅을 정결케 하였습니다(본문3-8절). 하나님의 성전, 교회가 성결해져야 함은 물론 땅이 성결해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은 우상을 제하되 그것들을 찍고 가루로 만들어 무덤에 뿌리는 등 철저하게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요시야는 선왕 므낫세가 그 우상들을 파괴하지 않고 그냥 내어버리기만 하여 그 아들 아몬이 다시 그 버린 우상을 가져와 섬겼던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 그 우상들을 찍어 가루로 만들어 날려 버렸던 것입니다(역대하33:22). 이처럼 우리도 옛 삶을 청산하되 죄지은 손을 잘라내듯 하고, 죄지은 눈을 빼어버리듯 하는(마18:8,9)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삶이 가능하고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요시야 왕같이 우상의 단(壇)과 우상 숭배를 철저히 분쇄시킬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지도자와 함께 하십니다. 멸망의 가증스런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손과 발을 잘라내고, 그 눈을 빼어버리듯하는 완전 타파할 때 이 땅이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북한 땅이 거룩한 하나님의 땅이 되기 위해, 우상의 단들과 우상의 문화, 그리고 우상 숭배의 세력들이 민족 문화를 빙자하여 악성 암세포처럼 번지고 있는 이 남한 땅이 성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하나님 말씀에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며, 백성들 앞에 강하고 담대한 요시야와 여호수아같은 지도자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시야는 이같은 종교 개혁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성전을 수리하는 중에 발견하고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사실을 깨닫는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박한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여선지자 <훌다>에게 질문했습니다(본문22-28절). 비록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여선지자 <훌다>의 예언을 들은 요시야 왕은 옷을 찢고 통고하며 회개하였고 그 결과 자신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본문 27,28절). 그리고 자신의 통치 재임 기간 동안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유보되었던 것입니다. 여선지자 <훌다>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요시야 왕의 사자들에게 조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엄청난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사실 그러한 심판이 직접적으로 요시야 왕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율법의 말씀을 완곡하게 전할 수도 있었고, 또 회개하여 그 심판을 면하라고 충고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선지자 <훌다>는 냉엄하게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돌이킬 수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격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씀의 선포는 권력이나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공명 정대하게 전해야 하는 선지자적 사명에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참선지자된 오늘날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 뿐만 아니라 말씀을 거역할 때 내려지는 저주와 심판 또한 주저함 없이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성경 연구에 몰두했던 학파나 교파는 신앙적으로 큰 부흥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예로 루터의 성경 연구 결과는 역사에 길이 빛날 종교 개혁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17,18세기에 크게 부흥하였던 경건주의 운동도 성경연구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17,18세기 부패한 영국 사회를 피흘리지 아니하고 개혁한 원동력은 요한 웨슬레의 속회(신성구락부)를 통한 성경 연구에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요시야 왕도 율법책의 내용을 듣고 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개혁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연구는 복음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 주고, 인간의 삶과 나라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케하여 사회적 국가적인 죄들에 대해 참다운 개혁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성경을 통해서 삶을 변화시키고, 성경을 토대로 하여 경건 훈련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개혁 운동의 지표요 추진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연구되어지고 읽혀지게 될 때 진정한 회개를 이루고, 옷을 찢고 마음을 찢는 회개 운동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 합의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개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 3:15-17에서 말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으로 하여금 의롭게 살아가도록 완성시키는 능력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확증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르게 살아 갈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영접하는 지도자들은 나라와 민족을 바르게 영도할 능력과 권능과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가정과 사회를 개혁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 그 사회의 도덕이 향상됩니다. 이렇게 성경은 국가 사회 도덕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국왕 윌리엄 4세가 죽던 날 밤,궁중에서는 한 처녀가 여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그녀는 64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영국의 번영은 이 빅토리아 여왕 때 성취된 것입니다. 영국의 국기인 유니온 잭 아래 해가 지지 않던 때도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었습니다. 일찌기 인류 역사상 빅토리아 여왕만큼 위대한 왕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로 무릎을 꿇고 성경을 폈습니다. 잠시도 자신의 품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던 성경을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내가 여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치를 하게 해주십시오."빅토리아 여왕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해결했고 기도로 정치를 했습니다. 하루는 인도의 왕자 한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을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정치를 잘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을 펴들고 힘 주어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 뿐입니다."오늘날 영국에는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사회주의자들의 소란이 끊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회가 공산화되지 않는 이유는 영국인들은 성경을 읽는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과 가정, 그리고 사회와 국가를 건강하게 지켜주는 힘과 능력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나라의 지도자들이 정직하도록 기도하는 개혁적인 삶을 삽시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 말씀 그대로 행하고 나라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돌아오도록 기도하는 개혁적인 삶을 삽시다. 우리가 먼저 물질과 지식과 명예, 그리고 권세의 우상을 깨끗이 청산하고 마음을 찢는 회개를 통하여 개혁적인 삶을 삽시다. 그리고 성결의 능력을 받아 개혁의 운동을 성결의 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갑시다. 삼천리 강산이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 되도록 사람의 우상과 각종 우상의 단, 우상 숭배의 세력의 타파와 분쇄를 위한 강하고 담대한 지도자를 강청하는 민족 기도를 합시다. 이 나라 민족의 우상 숭배의 죄를 불태우는 성령의 불을 민족의 심령마다에 던집시다.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이제 죄인과 죄악의 나라는 심판하고, 믿음을 지키고 나라와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는 의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가정과 나라 민족을 위한 개혁자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권능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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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상숭배 정권의 불행

"(왕상12:21)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 팔만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왕상12:22)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왕상12:23) 솔로몬의 아들 유다 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온 족속과 또 그 남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왕상12:24)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저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좇아 돌아갔더라 (왕상12: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왕상12:26)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왕상12: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왕상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왕상12: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왕상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왕상12:31)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왕상12:32)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왕상12:33)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과 멸망의 원인은 솔로몬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일찌기 다윗과 더불어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삼하12:24)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삼하12:25)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그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는데 이때가 역사상 최대의 황금기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솔로몬 개인의 인생 말년은 타락과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타락의 원인은 첫째, 지적 자만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의 지혜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고 문학과 시가, 자연과학 분야 등에서도 발군의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그는 잠언 삼천과 노래 일천 다섯을 지었고 심지어 하찮은 초목과 물고기에 관하여서도 다 논할 정도였습니다.

"(왕상4:32)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왕상4:33)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그러나 솔로몬은 자신의 뛰어난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망각하였을 때 그 지혜는 도리어 솔로몬을 타락과 실족케 하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만 것입니다. 둘째, 많은 처첩을 거느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칠백 명의 후비와 삼백 명의 빈장을 거느렸습니다.

"(왕상11:3)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정사를 수행하며 백성들을 돌아보는 데 전념하여야 할 제왕이 주색에 빠져 스스로를 망치고 한 걸음 나아가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우상숭배를 허용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해마다 세 번씩 하나님 앞에 공적 제사를 드렸습니다.

"(왕상9:25)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위에 해마다 세번씩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단에 분향하니라 이에 전 역사가 마치니라."

그러나 그는 왕실 내의 우상숭배를 허용함으로써 점차 그 예배의 순정성(純正性)을 잃어 갔습니다.

"(왕상11:4)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왕상11: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왕상11: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같이 좇지 아니하고 (왕상11: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왕상11:8)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다윗 왕의 위대한 점은 그가 비록 여러 아내와 후궁을 거느리긴 했지만 그들로 인해 우상숭배 죄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방인 아내들이 각기 자기 나라의 우상을 왕실 내에 들여오는 것을 금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이교신전을 세워 준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세번째 나타나셔서 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왕상11:9)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두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왕상11:10)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왕상11:11)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왕상11:12)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왕상11:13)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이리하여 마침내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하여 다시 합쳐지는 일없이 제각기 굴곡을 겪다가 몰락해가는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남 유다는 르호보암이 각각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축복의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왕상11:38)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왕상11:39)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지라."

그 조상 다윗처럼 여호와께 순종하면 그의 왕조가 지속되고 번영을 이룰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거나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서기 하기보다는 멀어지게 만든 우상숭배 정책의 심각한 많은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이 나라로써 존속하는 동안 그 나라에 쓴 열매를 맺게한 씨, 곧 우상숭배의 씨를 파종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된 여로보암은 남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갖고 있는 신앙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두려워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정치적으로는 분리되었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이 전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갖는 영향력이 지속되는 한 여로보암은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던 것입니다.

"(왕상12: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왕상12:26)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왕상12: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과 북부 백성 사이의 단절을 꾀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금송아지 형상을 벧엘과 단에 세우고 산당을 장려한 것이었습니다.

"(왕상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왕상12: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왕상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왕상12:31)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왕상12:32)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왕상12:33)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정권을 유지하게 위해서라면 율법을 어겨서라도 우상숭배 정책을 써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여로보암의 정책은 분명히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왕상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더 나아가 32절을 보면,

"(왕상12:32)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왕상12:33)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솔로몬 성전의 절기는 7월 15일(유대력)이었습니다.

"(왕상8:2)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칠월 절기에 솔로몬왕에게 모이고."

이 칠월 절기는 장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로서 한 해의 추수를 기념하는 축제의 절기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이 절기의 날짜를 8월 15일로 잡은 것은 자의대로 한 것이 아니고 북쪽 전통의 복원(復元)이었습니다. 즉 북쪽은 원래 남쪽에 비해 수확이 한달 가량 늦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진정한 목적은 절기의 자연성을 회복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백성들이 7월 장막절에 예수살렘을 방문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여로보암은 이로써 체제경쟁에 있어 나름의 종교적 정통성을 구색(具色)갖추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기를 7월로 통일되게 지키도록 한 율법과 상반되는 것입니다.

"(레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따라서 여로보암의 이 종교 정책은 죄악된 행동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정권은 한 마디로 우상숭배 정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문민정부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우상숭배 정책은 솔로몬의 종교 혼합정책(왕상 11:1-8)으로 타격을 받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한층 더 곪게 한 것이었기에 그 죄악은 더욱 더 큰 것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이 종교정책의 결과로 이스라엘의 신앙은 가나안 우상 종교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금송아지 형상과 산당은 이방 종교와 쉽사리 결합될 수 있는 요소를 애초부터 지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약 60 년 뒤에 엘리야는 북왕국에 만연한 이방 종교와 치열한 투쟁을 벌여야 했던 것입니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왕상19: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이처럼 여로보암의 우상숭배 정책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 꿰어진 하나의 저주요 주박(呪縛)이 되고 맙니다. 여로보암의 죄악은 여기서 그치지않고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상12:31)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일찍이 여로보암은 레위 자손의 제사장들을 파면시킨 장본이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위 자손의 제사장들이 모두 유다로 이주해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 제사장들을 하나님의 지시한대로 레위 자손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보통 백성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새 제사장들은 여로보암이 백성을 위해 편리한 곳에 건축한 여러 산당들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러한 편리주의에 편승하여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마음껏 숭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성전예배의 중요성을 상실하여 점차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하11:14) 레위 사람이 그 향리와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 아들들이 저희를 폐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민족에 대해 그들이 섬기는 일본 신사에 대해 일제히 참배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특히 조선의 기독교인들 모두에 대해 신사참배를 요구했고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온갖 유혹과 탄압정책을 펴며 그들의 우상에 대해 참배할 것을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믿음의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결단코 이를 거부하였음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의 무력을 동원하여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도처에서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64세이던 해 1938년 어느 날, 종로 경찰서 소속 고등계 형사 한 명이 숭동교회 사택으로 그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김목사님은 왜 동방배례가 우상숭배라고 설교하십니까?" "동쪽의 일본신사를 향해 절하는 것이 어찌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시요?" "그렇지 않소이다. 국민된 의례를 따라 동쪽을 향해 머리를 숙이라는 것이지 우상을 경배하라는 것이 아니외다." "어찌됐든, 우리 예수교 신자들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절하지 않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일이 올시다." "상부의 지시로 전하는 것이니 아무튼 황국신민의 도리로 신사에 참배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교 신자들은 다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뿐입니다. 이를 어기면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외다." "나로서는 상부의 명령을 어길 수 없는 일입니다. 훌륭하신 목사님께서 괜시리 고집을 피우시다가 봉변을 당하실까 염려가 되어 하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벌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릴 수는 없소이다." 고등계 형사의 회유와 협박에도 김익두 목사는 이미 각오가 되어있음인지 매우 분명한 어조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일본형사는 더 이상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음인지 매우 불쾌한 기색을 띠고 본서로 되돌아 가버렸습니다. 그가 되돌아간 다음 주일에도 김익두 목사는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결코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수일이 지난후, 종로경찰서의 고등계 형사가 다시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서장님이 한번 뵙자고 하시는데 바쁘시더라도 함께 가셨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김익두 목사는 마음 속으로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생각하고 가족들에게 간략한 부탁의 말을 남기도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종로경찰서는 일제시대 때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악명 높은 곳입니다. 안명근 사건 때 105인의 우국지사들을 참혹하게 고문했던 곳이며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들에게 이루 말할 수없는 고통을 주어 원한의 대상이 된 경찰서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연행되어온 김익두 목사는 무쇠도 녹아 나간다는 악명 높은 고문실에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었습니다. 잔인한 고문과 악형으로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육신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는 결코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일경들의 고문 방법은 매우 잔인하고 가혹했습니다. 목검을 가지고 그의 몸을 사정없이 치기도 하고 목검이 부러지면 쇠몽둥이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온몸이 피로 물들고 시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고통을 못이겨 수차례나 혼절했는데 그럴 때마다 일경들은 바켓츠에다 찬물을 가득 담아와서 그의 얼굴에 퍼부어 정신이 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이 들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고통 때문에 실언할까 두렵사오니 종의 입술을 지켜주소서." 그는 자신의 육체가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육체의 고통을 못이겨 일본제국주의자들 앞에 신앙의 절개를 굽혀 하나님께 범죄할까 그것을 염려했습니다. 일경들의 잔인한 고문은 거의 매일같이 계속되었습니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 참나무를 끼워 손가락이 으스러지도록 비틀기도 하고, 대나무를 뾰빢하게 깎아 만든 표창으로 그의 손톱 사이에 끼우고 사정없이 찌르기도 했습니다. 어느 때는 물에 고추가루를 태워 강제로 코에 붓기도 하고, 어느 때는 넓적한 널판지에 그를 눕히고 얼굴에 보자기를 씌운 후 그 위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면 코에 물이 들어가 금방 숨이 막힐듯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이런 혹독한 고문으로 몇번씩이나 까무러치고 실신해 버렸고 그의 전신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살은 찢어지고 온몸을 시퍼렇게 멍이 들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되어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의 육신은 모진 고문으로 말미암아 시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일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복음의 일선에서 헌신한 그에게 이러한 육체의 고난은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시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지금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는 믿음과 소망으로 이 모든 고난을 감내했습니다. "이제, 신사참배를 할 수 있겠소?" 종로경찰서장은 한달 가까이 가혹한 고문을 계속했음으로 천하의 김익두 목사도 별수없이 굴복하리라 믿고 득의만만한 얼굴로 이죽거렸습니다. "절대로 못하오. 절대로." 김익두 목사는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지독한 독종이다!" 마침내 서장은 그가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도저히 육체적인 고통만으로는 그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목사가 아니외다!. 그러므로 당신은 결코 숭동교회에서 설교를 해서는 안되오!" "설교권을 누가 주었는데 당신이 하라, 하지마라 하는게요?" "듣기 싫소! 이미 숭동교회에도 그렇게 통고했으니 속히 서울을 떠나시오." "목사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당신이 무엇인데 나보고 그만 두라는 게요?" 김익두 목사는 굽히지 않고 끝까지 항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엄청난 무력 앞에서 더 이상 그의 말은 아무런 효력도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김익두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강요에 의해 목사직을 빼앗기고 숭동교회의 담임목사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일이 지난 후 종로경찰서로부터 김익두 목사를 데려가라는 통보가 가족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부인과 성도들이 종로경찰서로 숨가쁘게 달려가 김익두 목사의 신병을 인수하고 보니 이미 그의 몸은 죽은 시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가슴에 귀를 대고 숨소리를 들어보았으나 겨우 희미한 호흡을 하고 있을 뿐이었고 맥박마저 고르지 않았습니다. 김익두 목사를 실은 달구지가 숭동교회 정문으로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많은 성도들이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슬픔과 분노를 못이겨 눈물을 흘렸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의 옷을 벗기고 보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이 온몸이 피멍이 들어 시퍼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의사의 지시를 따라 안정을 시키기 위해 따뜻한 방에 눕히고 정성껏 치료를 했습니다. 5일이 지나서야 겨우 의식을 회복했고 13일째 되어서야 겨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못했습니다. 1938년 12월 28일. 일제의 강제 파직으로 목사직을 박탈 당한 김익두 목사와 그의 가족들은 정든 숭동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일경들의 감시와 압력으로 더 이상 숭동교회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몸도 회복되지 아니한 불편한 몸을 수레에 싣고 마치 귀양가는 사람처럼 외로운 길을 떠나 머나먼 황해도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엄동의 12월 말에 머나먼 길을 떠나 황해도 은율군 직전리 어촌 마을의 소박한 초가집에 짐을 풀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이곳 뒷동산 후미진 곳에 큰 바위를 기도처로 삼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이 바위에서 1945년 조국 광복의 날까지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하루 세번씩 기도를 했는데 새벽, 낮, 밤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에 광명한 빛을 보내주소서. 언제까지나 이 어두움의 세월을 보내야 하옵니까! 일본제국주의를 무너뜨려 주시고 이 나라 이 민족에게 광복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옵소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그의 기도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7년 동안을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도하였는지 때로는 비를 맞으면서도 기도를 계속하여 옷이 흠뻑 젖는 것 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떠한 생명의 위협이 있어도 끝까지 우상숭배(신사참배)하지 않은 이 땅의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 민족에 밝은 빛, 조국 광복의 기쁨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제물을 먹지 않기로 자기의 마음을 확정하여 우상의 제물로부터 성결을 보존했던 다니엘과 그이 세 친구들은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몽조와 이상을 깨달을 수 있는 신령한 지식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단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우상숭배의 바벨론의 술객들과 박수무당들은 결국 몽땅 죽임을 당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단2:12)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무당)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

우상숭배는 곧 사망인 것인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입니다. 이들이 죽음을 당하게 된 이유는 우상숭배로 인하여 밝은 빛을 보지 못하여 몽조와 이상을 해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단2:1)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지 이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단2:2) 왕이 그 꿈을 자기에게 고하게 하려고 명하여 박수와 술객과 점장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매 그들이 들어와서 왕의 앞에 선지라 (단2: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이처럼 우상숭배하게 되면 자신과 더불어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멸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과 가정, 그리고 나라 민족이 살기 위해서는 가정에 만연한 우상과 옛 구습(추석, 구정 등 유교에서 비롯된 이방인의 절기)을 과감히 수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영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것까지라도 가정과 나라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수술해버릴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추석(한가위, 중추절, 가위. 음력 8월 15일)에는 추석빔을 입고 햅쌀로 술과 송편을 빚고 햇과일을 마련하여 가묘에 모신 조상신 앞에 차례를 지내며,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행합니다. 이는 분명히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출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출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우상숭배 정책의 여로보암 정권과 그 가족들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어치워버리는, 그야말로 그 정권과 가문을 말갛게 쓸어버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왕상14:7) 가서 여로보암에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너를 백성 중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고 (왕상14:8)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왕상14:9)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왕상14:10)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을 쓸어 버림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왕상14:11)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하셨나니."

우리 다 함께 이렇게 기도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 강산에 민족적 우상숭배와 구습을 좇는 범죄를 회개시켜 주시고 복 받게 하소서."

우상숭배하는 이방인의 규례를 쓰레기 버리듯이 청산하시고 오직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믿으시고 섬기시므로 자손 천대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는 행복한 여러분의 가정과 이 나라 민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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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라지지 아니하는 불꽃

"(출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3: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출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출3: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출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3: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출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3: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 1940년대 본격화된 공출은 곡물유출보다 더욱 가혹하여 삼림과 지하자원, 식량인 쌀, 심지어는 교회와 절에 매달린 종이나 집안의 솥과 숟가락.젓가락까지 약탈해 간 무자비한 강도행위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생필품마저 빼앗겨야 했던 조선의 민중들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고,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찧어 먹어야 했습니다. 일제는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젊은 조선의 남자들을 강제징용하여 전쟁의 도구로 삼거나 탄광 노동자로 삼았으며, 여성들도 예외없이 근로정신대라고 해서 여러 공사장에 강제동원했습니다. 더구나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젊은 처녀는 물론 아이를 밴 유부녀들마저 일본군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선으로 끌고 간 사실입니다. 이렇게 물자와 사람마저 빼앗기고 고통받던 조선 민중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민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지원병 보낸 어머니 가슴만 쥐얻뜯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양곡배급 적어서 콩깨묵만 먹고 사누나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정신대 보낸 어머니 딸이 가엾어 울고요

어라어랑 어허야

풀만 씹는 어미소 배가 고파서 우누나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금붙이 쇠붙이 밥그릇마저 모조리 긁어 갔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이름 석자 잃고서 족보만 들고 우누나.

1939년에 시작한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모두 700만명에 이릅니다. 일본 정부는 전쟁이 끝난 바로 뒤에 강제동원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소각해버렸고 우리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누가 언제 어디로 어떻게 끌려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그리고 이들의 피해보상은 고사하고 원통하게 죽은 시신조차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한채 52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살해되었는가? 한 예로 일본 홋카이도에서 강제동원되어 죽은 조선인 노동자의 숫자는 홋카이도 철도에 깔린 굉목보다 더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꽉짜여진 군대식 생활과 가혹한 노동, 견딜 수 없는 민족차별과 쉴 새 없는 폭력,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갔습니다. 이에 견디다 못한 조선인들은 파업이나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붙잡히면 오로지 고문과 죽음 뿐이었습니다. 붙잡혀 고문 끝에 살해당한 조선인들은 절벽 아래로 내던져지거나 작업장 근처에 집단으로 가매장되고 말았습니다. 그 시신도 무덤도 꽃도 십자가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홋카이도에서 죽어간 조선인 숫자는 약 30만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그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이제는 세월의 흐름에 묻힌 차디찬 백골이 되어 저녁에는 새소리로 흐느끼고 새벽에는 백골위로 맺히는 이슬을 눈물로 흘리며 저 머나먼 이역의 하늘을 원통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 인간으로서는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야수같은 삶을 강요당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끌려가 힘겨운 삶을 살다가 어느 날 한 줌의 재로 사라져 버린 조선인 원폭피해자들의 신음소리. / 동토의 땅 사할린에 강제동원되었다가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지 52년이 되었어도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 만리 머나먼 땅에 묶여버린 사할린 한인 동포들. / 일본 사회의 냉대와 법적 차별 속에 외국인 아닌 외국인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재일동포들. /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려나갔다가 부상당채 고통받는 조선인 출신 상이군인들과 억울하게 전범으로 몰려 오욕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이른바 조선인 출신 BC급 전범들의 통곡. / 일본 열도의 탄광촌과 지하 군수공장에서 혹은 남태평양의 전선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채 백골로 남아 오늘도 고향의 땅에 묻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45만 강제동원 희생자들. / 이 엄청난 민족 비극의 역사가 우리 교과서에조차 제대로 실리지 않은 채 광복 52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내팽개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뒤안길에서 광복 52년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우리는 망각 속에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일제의 강제동원에 앞장선 자들은 일본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지도층 인사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몇 가지만 예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시인 노천명은 일본 제국주의가 싱가폴을 점령하자 이를 찬미하는 시를 <매일신보>1942년 2월 19일자에 발표했습니다. 또한 시인 서정주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가미가제 특공대로 죽어간 마쓰이 히데오라는 조선인 비행사를 찬양했습니다. 특히 한국 여성박사 1호인 김활란 박사(창씨 개명:야마기 카스란)는 징병제도를 감격적 언어로 찬양고무했습니다. <징병제도와 반도여성의 각오>라는 글로 <신세대>1942년 12월호에 실린 내용의 일부를 보면,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최대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김활란은 해방 이후에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유엔총회 한국대표, 막사이사이상 수상, 대한민국 일등 수교훈장 수상 등 한국 여성계의 거물로 활약했습니다. 해방되었을 때 이들 친일파였던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일제시대의 관료, 군, 장교, 악질 경찰, 판검사 등은 마땅히 민족 정기를 지킨다는 뜻에서라도 법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친일파들이 여전히 사회 지도층으로 활약하므로 일제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광복 52주년을 맞아 아직도 나라 민족의 아픔과 고통의 역사가 청산되지 아니한 채, 경제는 날이 갈수록 일본에 종속화되어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고,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의 자국득실 계산 놀음에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아직도 부정 부패가 여전하며, 문화적으로는 이미 일본과 미국 문화에 잠식되어 청소년, 어른 가릴 것 없이 정신적 황폐화를 이룬지 벌써 오래입니다. 종교는 아직도 교단 확장 놀음에 정치와 결탁하여 종교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시대의 파숫군 역할을 상실하고 제 갈길을 잃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 가운데 과연 이 나라 민족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불꽃은 사라지고 있는 것인가?

2..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복음의 불, 구원의 불을 가슴에 담고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그 후 약 20여년이 지난 1904년 무렵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미국의 에모리대학의 총장 캔들러는 당시 한국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제 땅 위의 희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안팎에서 완전히 절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기를 두고 추구한 일본의 야망이 성취되고 한국은 그 마지막 독립의 희망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라 민족 전체가 정신적, 도덕적, 사회적으로 구원받고 해방을 얻어야 한다는 사상은 전통 사회가 무너져가고 외세의 침입이 노골화되는 구한말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 사회의 구조의 억압과 외세의 침입에 대한 강한 반발의식이 구약적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결합되면서 한국 교회는 강렬한 민족해방의 환상과 영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국명이 로마철자로 Chosen이라고 표기되는 우연적인 현상을 놓고서도 그 뜻이 영어로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에 한국민은 유대민족과 같이 선택된 백성이라고 주장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한민족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단지파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인들은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 갈 때 민족의 구원을 위한 구국기도회가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노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1905년 추수감사절 다음날부터 일주일간 나라를 위한 기도회가 전국적으로 열렸으며, 을사보호조약이 그 해 11월에 발표되자 가장 앞장서 망국을 통곡하며 하나님께 절실히 기도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전덕기, 정순만의 인도로 상동교회에서 수천명이 연일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 당시 일본 기록에 의하면 전국 교회들은 서로 밀접한 연락을 취하면서 구국기도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의식과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원해 주시고 해방시켜 달라는 기도 속에서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 구원사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기도만 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 민족의 구원을 위해 개화운동, 애국 계몽운동 등에 활발히 참여했으며 이러한 전통은 일제하 한국교회 민족 운동으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이 땅에 전해진 복음의 불은 나라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구국 기도의 불과 구국 운동의 불길로 사라지지 아니하고 계속 지금까지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은 한국민을 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습니다. 전영택은 "예수 교회가 사명을 다하여 조선 사람, 조선 사회를 구하지 못한다면 불교, 유교, 천주고, 보천교 등 모든 다른 종교가 있는데 따로이 조선 안에 존립해 있을 가치가 어디 있으며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민족의 구원이 기독교회의 존재 의의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박희도의 설교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우리 조선 사람은 어떠합니까? 우리 조선서도 같은 것(아침이 언제 오느냐?)으로 조선 민족이 묻기를 쉬지 아니합니다. .... 조선의 그리스도 교회는 조선 민족에게 아침이 온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만일 아침이 온다 하지 못하게 되면 그리스도교의 존재는 없어지겠습니까?" 조선 민족이 쉬지 않고 묻는 물음은 "아침이 언제 오는가?" 곧 민족 구원의 날, 민족 해방의 날이 언제 오는가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사명이라는 인식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남만지역에서 항일 운동을 지도하면서 목회활동에 종사하다가 1935년 순교한 한경희 목사는 다니엘서를 가지고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국가가 패망할지라도 그 민족의 정신만 완전하면 회복할 날이 있을 것을 믿었다. 다니엘은 비록 바벨론 문학을 배워 삼조 대신이 되었으나 민족 정신과 종교 정신이 조금도 변치 아니하였다. 유대인들이 다니엘의 정신에 감화하여 70년만에 해방되었다." 주기철 목사의 "모세의 120년"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민족애와 애굽탈출 사건을 소개하면서 한국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구원에의 열망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늦은 비 휘 뿌리는 빗방울은 나일강에서 울부짖는 내 동포의 눈물이 아닐런가? 소슬한 가을 바람이여, 그 소리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내 동포의 한숨이 아닐런가?......눈을 감으며 애굽이요, 꿈을 꾸면 가나안 복지! 이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이 아닌가?.... 애굽 사람의 장자가 몰살하는 무서운 밤, 통곡의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유월절이오 해방이라, 이백만의 묶인 쇠줄이 하루 아침에 끊어지니 사백년간 종의 멍에 이제 벗고 자유로다. 꿈이런가 생시런가, 하나님의 권능일세.......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서고 믿지 않는 애굽인은 홍해에 몰살이다. 할렐루야 찬송하세." 다음과 같은 성구를 해석하는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를 해석할 때, "일국민(一國民) 혹 일민족(一民族)이 타국민 혹 타 민족을 학대함이 절대적 불가함을 전함이로다." 로 해석함으로 불의한 국가와 제도의 종말, 일제의 종말을 예수의 재림을 통해 예언하면서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해석되었습니다.

모세는 광야 깊숙한 곳,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먼 곳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호렙 산에 올랐을 때 가시덤불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추하고 험악하게 생겼습니다. 그것은 말라비틀어졌고 가지에는 가시가 가득했습니다. 모세는 그 모습을 보고 슬픈 마음이 들어 생각했습니다. "오 내 백성 이스라엘이여! 너는 광야에 있는 이 가시덤불과도 같구나! 너는 아주 비천하며 너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너를 피하는구나!" 그가 이렇게 자기 민족의 고통을 슬프게 생각하며 넋을 잃고 있을 때 갑자기 가시 덤불이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아주 놀라 소리쳤습니다. "나는 이 가시덤불을 내 민족 이스라엘에 비유하였다. 그런데 아! 거기서 불이 나와 덤불을 삼키는구나! 오 나의 주 하나님, 제 백성이 없어져야 합니까?" 그런데 모세가 보니 가시덤불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는 않는 것을 보고 근심이 사라지고 놀라운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때 그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가시덤불이 불길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유대민족도 계속 도리라. 그에 대항하여 밝혀진 모든 증오의 불길은 꺼질 것이며 어떠한 악과 불행도 그것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떨기 나무에 불이 붙으면서 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떨기 나무는 아름답고 고상한 나무들과 달라서 죄 많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불이 붙었다는 것은 그 백성이 애굽에서 수난당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불이 사라지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 백성이 고난 중에서도 망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라지지 아니하는 떨기 나무 불꽃"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재건, 그리고 성장과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의 사라지지않는 불은 어느 누구도, 어느 나라도 거역할 수 없는 선민 이스라엘 나라 민족 구원의 불이며, 건설과 발전 부흥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강력하게 나타난 소망의 불이었습니다.

3.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구원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기도와 탄원은 이러했습니다. "우리가 고요히 이 백성의 생명을 생각하면 남 유달리 병많고 죄많고 가난하여 생명의 주접이든 것같은 이 백성입니다.....새로운 혁명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이 백성의 생명은 다시 설 수 없사외다. 영원하신 대 주재여 이 백성을 기억하사 이 백성중 어미된 자, 자식된 자, 가르치는 자, 배우는 자 고루고루 그 생명의 새로지음을 받게 하소서. 껍질이 아닌 속 생명이 새로 지음을 받게 하소서." 또한 황재삼은 "주여 저희에게는 은과 금은 없습니다만 주님의 이름을 받았사오니 이 불쌍한 민족에게 주님의 귀하신 구원의 이름을 바로 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구원자가 되신다고 믿었습니다. 차재명은 참신앙은 자기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족까지도 구원하기 때문에 나라의 보배라고 했습니다. 김석현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슬픔과 괴롬 가운데 있는 동족에게 평안을 주고 구원을 주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신생명의 사설 기자는 "조선 4,000년 역사의 뒤끝인 오늘날 우리 민족은 늙고 병들고 썩어서 그 생명이 위험하여 조국을 붙들고 울며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민족의 유일한 빛이오 살 길은 오직 예수와 십자가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김교신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신앙이 민족구원의 핵심이라 된다는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은 성서와 조선.....사랑하는 자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 두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근를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우리는 오직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과학조선....농업조선..... 성업조선......공산조선 등이 다 그 진심성의로만 나올진대 해로울 것도 없겠지만 이러한 구형적 조선 밑에 영구한 기반을 넣어야 할 것이니 그 지하의 기초공사가 곧 성서적 진리를 이 백성에게 소유시키는 일이다. 넓게, 깊게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위에 세우라. 그러므로 조선을 성서위에!" 김교신은 이 나라 민족을 뜨거운 말씀의 불꽃 위에 세우는 것만이 나라 민족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영구히 새롭게 변화시키며 부흥케 할 수 있다는 신앙으로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신앙인들의 고백들을 통해 보면 당대 민족적 상황은 구원받아야 할 상황으로 이해하므로써 우리 민족을 지배하는 일제에 대한 저항과 부정의 의식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가슴 속에 붙었던 이 사라지지 아니하는 불꽃은 나라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불꽃으로 역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나라 초대교회 신앙인들에게 붙었던 복음의 불길은 그 어느 누구도 꺼뜨릴 수 없었던 구국의 불길로, 나라 사랑의 불꽃으로 꺼질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신 사명은 불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불을 받아 이웃과 세계에 불을 지르는 생활을 말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설교를 귀로 들어 머리라는 창고에 저장하지 마시오. 나는 예수의 불을 토합니다. 그 불의 열기를 몸으로 받아 들이십시오." 요한 웨슬레의 가슴 속에 붙었던 복음의 불길이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고, 나라를 구원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란 물로 씻음을 받고 성령이란 불로 나 자신을 불태우며 이 불을 인류 사회에 전달하는 생활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을 나르는 수레입니다. 욕정의 불을 나를 수도 있고 신념의 불을 나를 수도 있습니다. 미움의 불을 나를 수도 있고, 사랑의 불을 나를 수도 있습니다. 수레의 가치는 그 속에 담겨진 불의 종류로서 결정됩니다. 성령의 불을 담은, 성령의 불을 나르는 불수레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나라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성령의 불을 던지는 성령의 불수레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도탄에 빠져 국난에 처한 나라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구국의 불이 충만한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1947년 2월에 사해 서쪽 여리고 남방 14km 지점에 있는 쿰란 마을에서 보물이 발견되었습니다. 한 소년이 잃어버린 산양을 찾기 위하여 절벽에 위치한 자연동굴에 들어갔습니다. 무서우니까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년은 이 굴에서 십여 개의 옹기 단지 곧 큼직한 질그릇들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양피지에 글이 쓰여진 두루마리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사해문서>(The Dead Sea Scrolls)의 첫 발견이었습니다. 사해문서는 기원전 2세기 경에 복사된 성경사본으로서 이사야서, 시편 등이 들어 있는 획기적인 성경연구사료입니다. 그후 고고학자들은 이 근방의 자연동굴 2백개 이상을 파헤쳤으며, 그 중 11개의 동굴에서 옛 성경사본들을 발견한 것입니다. 모두가 높이 65cm 정도의 질그릇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처음 발견한 목동 소년은 고물상에게 두루말이 한 개당 20파운드씩 받고 횡재한 줄 알았는데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가 고물상으로부터 한 개 25만 달러씩 주고 사들인 보물이었습니다. 가장 값싼 토기 속에 보물이 들어있을 때, 이 질그릇은 엄청난 빛과 값어치를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을 질그릇, 곧 깨어지기 쉽고, 약하고, 가치없는 존재로 비유하고,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깃들일 때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보물이 질그릇 속에 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능력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습니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 같은 내가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서 성령으로 역사할 때 가치있는 인생, 보배로운 질그릇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라 민족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4. 우리 감리교회에 어윤희라는 여자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일찍이 일제 식민지 통치시대인 15세때에 출가를 하여서 이듬해인 16세에 그만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여생을 하나님과 조국을 위하여 바치리라고 결심을 하고 황해도 개성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 기미년 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어윤희 여사는 개성에서 한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한 손에는 독립선언서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힘껏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일본 헌병에게 체포를 당하여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에서 재판관이 그에게 묻기를 "너 누구의 명령을 따라서 이와 같은 짖을 하였느냐? 배후의 조종자를 대라" 고 할 때에 어윤희 여사는 대답하기를 "네놈들이 세계4대강국의 하나라고 자부를 하면서 여지껏 그것도 모르느냐? 한 고을에 새벽닭이 울때에 누가 시켜서 우느냐? 울때가 되니까 우는 것이다. 내가 조선의 딸로서 일 할 때가 되어서 일하는 것인데 누가 시켜서 하겠느냐?" 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재판관이 옆에 있는 간수에게 "저 여자의 옷을 발가벗겨라" 고 고함을 치니 간수들이 우루루 달려들어서 나이 30도 안된 여인을 수 많은 방청객들이 있는데서 옷을 벗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이 때 어윤희 여사는 "에이! 이 더러운 야만종 같은 놈들아 내몸에 손을 대지 마라 내손으로 벗으마!" 하고 그 관중앞에서 스스로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재판관 앞에 똑바로 서서 "자! 보아라, 네 어미도 나와 똑 같고 네 계집도 나와 닮았을 것이다. 이 야만종 같은 놈들아!" 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재판관은 고개를 돌리며 빨리 치우라고 소리를 치고 5년의 징역형을 언도하였습니다. 그 후 어윤희 여사는 류관순과 함께 감옥살이를 하다가 류관순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어여사는 석방이 되어서 평생을 고아를 키워가며 감리교회의 장로님으로 봉사하시다가 1961년 11월 18일 오후 3시 30분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에 갔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소중하게 간직하던 상자를 열어보니 유언장이 나왔는데 그중에 장례감사헌금으로 2만원을 담은 봉투가 있고 또 한 봉투에는 장례비용으로 4만원을 넣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수의도 모두 장만해 놓고 만약에 돈이 모자라면 이 반지를 팔아서 쓰라고 금반지 한 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례는 화장을 하여서 한강물에 뿌려 달라고 하고 배삯까지 따로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재산은 한푼도 없었다고 합니다. 유관순, 어윤희 장로에게 임했던 사라지지 않는 불은 나라 민족을 사랑하는 성령의 불꽃이었습니다. 그 불길이 전국에 번져 이 나라 민족의 해방과 구원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임했던 사라지지 아니하는 가시떨기나무 불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었습니다. 그 불꽃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의 고통과 부르짖음을 보고 들으시고 건져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3: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출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하나님의 이 사랑의 불꽃이 모세에게 붙었고, 이 불로 말미암아 홍해가 갈라지고 애굽에서 해방되어 430년 노예생활의 고통과 아픔에서 구원함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에이트컨 목사는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의 입술에 당신의 불을 붙여 주셔서 당신의 음성을 전달하게 하소서. 나의 마음에 당신의 불을 붙여 주셔서 당신의 뜻을 깊이 생각하게 하소서. 나의 심장에 당신의 불을 붙여 주셔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이그나티우스는 "십자가를 연료로 하고 있으면 사랑의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왜 사랑의 불이 일지 않거나 쉽게 꺼지는 것인가? 그것은 연료를 잘못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결심, 인간의 맹세, 인간적인 열심과 노력, 물질 등은 사랑의 연료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곧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해주셨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에너지로 할 때 비로소 사랑의 불이 계속 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연료로 하는 전도의 불이 인간을 구원하며,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연료로 하는 봉사의 불이 교회를 변화시키며, 사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연료로 하는 사랑의 불이 인간을 변화시키며, 인간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 핼록(G.B. Hallock) 목사의 목격담입니다. 그가 서인도 제도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기선 갑판에서 한 아이가 개를 데리고 놀고 있었습니다. 공을 던지면 개가 그 공을 물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공을 잘못 던져 바다로 굴러 떨어졌고 개도 공을 따라 파도로 뛰어든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얼른 선장에게 달려가 배를 돌이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커다란 배의 스케줄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제서야 선장도 할 수 없이 배를 돌이켰다고 합니다. 희생의 크기에 따라 변화의 규모도 달라집니다. 작은 보트라면 개 한 마리를 위해서도 진로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기선의 진로 변경은 한 인간의 생명이 달려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열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땅으로 오셔서 십자가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이 세상을 녹이는 사랑의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 민족의 죄를 태우는 회개의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섬기시는 제단 안에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의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 민족을 변화시키는 전도의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 백성에게 삶의 힘과 기쁨을 주는 찬송의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감사의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5. 불은 에너지(힘)입니다. 에너지(자연의 불)를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나라가 강하고 문화, 문명이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삶의 진정한 수준높은 문화와 문명은 성령의 불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참된 기독교의 문화 문명은 성령의 불로써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불이 바르게 역사하는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입니다. 멸망받을 죄인들을 위해 끊임없는 사랑과 구원의 불이 항상 지펴진 십자가 제단에 감사함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호렙산 떨기나무의 사라지지 않은 불은 능력의 불이었습니다. 애굽에서 400여년 동안 노예생활하며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세는 극구 사양했습니다. 이유는

"(출3: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이는 다시말해 자기는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출4:1)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자신의 영도력의 부족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출4:10)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언변도 재주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한마디로 자기는 무능하며 너무 부족한 것이 많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노발대발하십니다.

"(출4: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노발대발하시는 것은 그가 능력없다고 고백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으시기를,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지팡이입니다." "그것을 땅에 던지라." 그러자 그 마른 지팡이가 살아있는 뱀으로 변했습니다. 이같은 역사는 능력이 모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마른 막대기 지팡이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홍해를 갈랐고, 바위를 쳤을 때 바위에서 생수가 터져나왔습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이 능력을 믿는 사람이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며 나라 민족을 구원하는 민족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은 소명과 방향지시의 불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사라지지 아니하는 불꽃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 내 백성을 구하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이제 모세의 갈길이 정해졌습니다. 그의 삶의 방향이 구국의 길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성경에는 세 군데서 태워지지 아니하는 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나타난 불기둥은 무엇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향해 전진하라는 목적지를 지시하는 불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불붙는 풀무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그 불은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머리털 하나 태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을 복음화시키는 사명을 지시하는 사명지시의 불이었습니다.

"(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단3: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단3: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오순절 다락방에 내린 성령의 불길은 무엇을 태워없애는 불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는 전도 사명의 불길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임했던 사라지지 아니하는 불꽃은 모세의 삶의 방향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나라 민족을 구원하라는 사명 감당의 능력의 불이었습니다. 한국에서 27년간 일했던 일본 상사임원 모모세 다다시는 최근 그의 저서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없는 18가지 이유>에서 기술력의 차이보다 또 다른 차이로 "경영자와 대통령과 경제담당부서 책임자들의 지도력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옳은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가장 절실한 것은 모세와 같은 지도자, 모세와 같이 '사라지지 아니하는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라 민족 구원의 소명과 사랑의 불꽃을 가슴에 담은 지도자가 나타나야만 합니다. 쿠룩만 교수는 한국의 경제성장은 땀(perspiration)에 의존했지 영감창조성(inspiration)에는 의존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광복절 날 눈에 보이는 휘날리는 태극기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의 제 2지배(경제지배)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도 성령의 불같은 맹렬한 역사가 각계 각층에 일어나 영육간에 나라 민족을 부흥케 해야 할 것입니다. 광복 52주년을 맞아 국난에 처한 이 나라 민족을 구원하며 재건하기 위해, 진정 나라 민족을 사랑하는 사랑의 불, 능력의 불, 소명의 불이 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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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국가와 민족이 사는 길

"(삼하24:10)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삼하24: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삼하24: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24: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 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삼하24:14)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삼하24: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 (삼하24: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삼하24: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삼하24:18)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소서 하매 (삼하24:19) 다윗이 여호와의 명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삼하24:20)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삼하24:21)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삼하24:22)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삼하24:23)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삼하24: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삼하24: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1. 본문은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두 번째 큰 범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즉위 초기에 보잘 것 없는 군사력으로 주변의 크고 작은 모든 나라들을 점령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승리이시며 나의 방패이시며 나의 요새시며 나의 등불이라고 겸손해 했습니다. 그러던 다윗이 본문에서 보면 정반대로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힘을 더욱 의지하는 교만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개 목동을 일약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높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세상에 있는 자신의 권세와 새력을 확인하고자 인구조사를 실시했던 것입니다. 인구조사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적 눈으로 볼 때 잘 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그 어느 죄보다 큰 죄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왕이 되었던 다윗이 이제 세상 권력을 의존하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는 큰 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뒤늦게 마음에 자책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 가지 재앙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첫째 재앙은 7년 기근이고, 둘째 재앙은 석 달 동안 다윗이 대적에게 쫓겨다니는 생활이며, 셋째 재앙은 나라 전체에 3일 동안 온역(질병)이 휩쓰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각각 기근의 환난, 전쟁의 환난, 병의 환난을 말합니다. 다윗이 선택한 환난은 병의 환난이었습니다. 결국 이 병의 환난으로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돌아 3일 동안에 무려 7만명이나 죽음을 당했습니다. 나라 지도자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7만 명의 백성들이 병의 환난 가운데 죽어 갔습니다.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계속해서 수도 예루살렘을 치려하자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환난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삼하24:17)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다윗의 회개를 들으시고 선지자 갓을 통하여 명령하십니다.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재앙을 완전히 그치게 하는 방안으로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입니다. 나라 민족에 내린 재앙을 그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제사를 드리고자 했을 때 타작 마당 주인인 아라우나는 거저 왕에게 드리려고 했으나 다윗은 이렇게 말하며 거저 받기를 거절합니다.

"(삼하24:23)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삼하24: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결국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그 타작 마당을 타당한 값을 치루고 그곳에서 회개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그치게 하는 제사의 장소로 지시하신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은 이후에 솔로몬의 성전 터가 되었습니다.

"(대하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이스라엘 민족의 환난을 그치게 한 이 장소는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진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인류에게 내린 환난과 재앙을 그치게 하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전 인류에게 내려진 죽음의 재앙을 멈추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 남북한을 비롯하여 전 세계는 7대 환난과 재앙가운데 있습니다. 이름하여 천재 지변의 환난, 전쟁의 환난, 병의 환난, 정치의 환난, 경제의 환난, 죄악의 환난, 심령 번민의 환난 등에 세계 거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도자 다윗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난과 재앙 가운에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자신의 범죄를 곧 바로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게 되면 얼마든지 이 땅에 내린 환난과 재앙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이 땅에 임하고 있는 재앙과 환난을 멈추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엄청난 환난 가운데 처해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상 최대의 풍년을 눈 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 먼저 우리 나라의 지난 한 해 동안의 교통사고의 통계를 살펴보면 우리 나라가 환난 가운데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도시 교통연구소>에서 밝힌 통계 결과는 우리 나라 교통 사고가 "웬만한 전쟁보다 피해 크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교통사고로 1만명 이상이 죽고 30만명이 넘게 다친다. 지난 10년 동안 3백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좀 더 풀어서 보면 지난 10년 동안 서 너집에 한 집은 교통사고를 경험했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는 흔히 전쟁이 일어나면 망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 승패를 떠나서 일단 전쟁을 치르게 되면 인적 피해도 크고 물적 피해도 커서 국력이 쇠잔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화된 얘기다. 그렇다면 웬만한 전쟁보다 피해가 크다는 교통사고에 대해서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큰 손실을 주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교통사고로 날려버리는 돈은 6조6천억원에 이르며 이 같은 규모는 매일 1백 80억원이 교통사고비용으로 날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바꿀 수 없듯이 사망자의 손실비용도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사고를 당한 가족의 슬픔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뿐더러 부상당한 사람의 좌절감도 계량화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계량화할 수 없는 부분의 피해는 더 크고 깊기 때문에 돈으로 환산할 수없다.... 1년동안의 교통사고로 인한 재산피해액 6조8천억원. 이 돈은 우리나라 GNP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매일 1백80억원씩 증발되는 재산피해액은 종업원 1백여명의 건실한 중소기업이 1년동안 꾸준히 벌어들이는 매출액과 맞먹는 돈이다. ....자동차사고에 의한 사망자수가 지난해 1만3백23명을 기록, 하루 평균 28명이 교통사고로 귀중한 생명을 잃는 것으로 집계됐다..... 최근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자동차·철도·선박·항공 등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총발생건수는 25만9백42건, 이중 자동차사고가 24만8천8백65건으로 99.1%를 차지했으며, 사망자도 총 1만8백95명중 자동차에 의한 사망이 99%인 1만3백23명에 달했다. 총사망자중 자동차사고 사망률이 차지하는 비율은 6.7%,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요사망 원인중 1위인 암사망률 21.3%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수치다....하루 28명에 이르는 교통사고 사망자는‘교통대란’이라는 전투현장에서 1개 소대급 인원들이 매일 희생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망자뿐 아니라 자동차사고에 의해 장애자가 된 피해자들의 후유증은 더 심각하다. 한국지체장애인협회가 최근 교통사고에 의한 후유장애인 5백1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46.1%가 심각한 생계문제에 시달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들 중 1년 이내에 사고전의 직장이나 직업으로 돌아간 사람은 24% 뿐이었으며, 사고를 당한지 5년이 넘도록 실직상태인 피해자가 48.9%나 됐다. 사고충격으로 우울증 등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교통장애인도 58.4%에 달했으며 이들 중 74.2%가 소외감과 사회적 편견·냉대를 견디지 못해 자살을 고려하거나 시도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경제적 손실이 사망에 의한 손실 못지 않게 크고 심각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 어린이교통안전연구소가 초등학교 1~3학년생 8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어린이 50.4%가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당할 뻔한 경험이 있고 68.8%는 교통사고를 당할까봐 늘 불안하다고 밝혀 우리사회에서 교통사고는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질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참조: <민족사의 비극 중의 비극인 6.25 한국 전쟁의 인명피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투로 인한 인명 피해가 15만, 행방불명 20만, 부상자가 25만에 달했고, 공산군에 납치된 수가 10만 이상, 그리고 전재민 수는 수 백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측되며, 공산군이 받은 피해는 실로 그 몇 배나 될 것이다."(이기백의 '한국전쟁')>

교통사고로 인한 백성들이 당하는 심령 고통의 환난은 측량할 수 없다. 우리 나라의 교통 사고가 이 정도면, 사망률로 보면 전쟁의 환난에 못지 않고, 경제적 손실로 보면 경제의 환난에 틀림없으며, 사고 당사자 및 그 가족들이 당하는 정신적 심적 고통으로 말하면 심령 번민의 환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우리의 동포들인 북한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김정일 한 사람으로 인하여 북한 땅에 겪고 있는 환난과 재앙은 이렇습니다.

"양주 한 병 값이면 북한동포 1만5천명이 한 끼니 먹습니다. 북한주민들은 하루에 식량을 1백~2백g 배급받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식량기구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에 6백~8백g의 식량은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국제시세로 옥수수 1톤이 1백50~1백70달러입니다. 16만원이 안 되는 돈이죠. 옥수수 1톤을 현재 배급량인 2백g씩 배급하면 5 천명이 먹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하룻밤 술집에서 마셔버리는 양주 한 병 값이면 북한 사람 1만 5천명이 한 끼니를 먹는다는 얘기입니다...."

어찌됐든 북한은 <지도자> 한 사람의 정치 왜곡으로 인해 80%, 1천 7백만의 인민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기근의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살아 생전에 북한 전국토에 김일성 동상을 무려 2만 9천개나 세워 하나님 보다 김일성을 우상으로 모셨으니 어찌 한발과 수해 등 천재지변의 환난을 통한 기근의 환난이 임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미국의 월간 라이프 지는 최근 특집호에서 지난 1천년을 만들어낸 1백대 사건과 1백인의 인물을 선정, 지난 1천년을 회고했습니다. 그 지난 1천년을 만든 20대 사건 가운데 9위가 히틀러의 출현과 유대인 대학살 사건이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지난 1천년간 출현한 세계 최대의 괴물로 꼽혔습니다. 지난 1933년 권력을 장악한 그의 광기는 1천7백만 군인과 6천만 민간인, 그리고 6백만 유대인, 도합 8천 3백만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광기로 말미암아 1억 가까운 백성들이 당한 지상 최대의 전쟁과 죽음의 환난이었습니다. 다음은 <공산주의 흑서>에 실린 내용 중 일부 발췌한 어느 기자의 글입니다.

【"기아를 무기로 사용…공산주의 이름으로 인류 1억명 죽었다" 1917년 레닌이 러시아를 장악한 이후 오늘날까지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살륙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집대성한 <공산주의 흑서>라는 책은 프랑스 역사학자 11명이 공동 집필했다. 이 책은 거의 1세기 동안에 걸친 공산주의 살륙의 실증적 대차대조표. 백서 혹은 청서 등과 대비, 그 참혹한 역사를 상징할 수 있도록 <흑서>라는 이름도 붙였다. 단순히 추상적 개념과 주장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예증, 사진, 자료 등이 곁들여 있는 고발장이다. <흑서>는 레닌 이후 오늘까지 지구상에서 공산주의 때문에 희생된 사람을 1억명 가량으로 계산하고 있다. 그것은 <레닌에서 김정일까지> 이어지고 있는 범죄, 공포, 압제의 기록이다. 스탈린은 물론,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마오쩌둥(모택동), 베트남의 호치민(호지명), 캄보디아의 폴 포트 등은 모두 <지상 낙원>을 약속했고, 이를 <지옥>으로 실현했다. 저자는 공산 독재자가 반대파를 분쇄하기 위해 기아를 무기로 사용했다고 분석했다. 이것은 체계적이고 고의적이었다. 레닌이 처음이었고, 스탈린이 본받았으며, 나중에 에티오피아, 모잠비크 등이 이를 원용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레닌이 저지른 집단 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인질과 수감자 수만 명을 재판없이 총살했고, 1922년 기근으로 5백만명이 목숨을 잃도록 했다>는 것이다. 또 <1918∼1922년 사이 농민 반란, 노동자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만이 학살당했으며> 그 배후에 레닌이 있다고 <흑서>를 말하고 있다. 이후 스탈린이 자행한 무자비한 숙청,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 및 집단이주들이 기술되고 있으며..."북한정권 50년간 300만 희생"...53년 이후 북한 땅에서 기근과 병 때문에 숨진 사람을 50만명으로 추산했다. 리굴로 국장은 <오늘날 2천3백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북한 땅에서 지난 50년 동안 공산 체제로 인해 희생된 사람(기근으로 인한 아사자 제외)은 대략 3백만명 이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당 숙청으로 숨진 사람이 10만,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이 1백50만, 공산주의자들이 의도하고 조직하고 촉발한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이 1백30만명>이라고 말했다....】<파리=김광일기자>

4. 그러면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외국 사람들이 본 한국 경제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 지에 실린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 재벌들은 국가를 가난으로부터 건져내고 아시아 발전의 모델이 됐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잘못되고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8일 '비틀거리는 거인들'이란 제목으로 한국재벌들의 고민과 문제를 다룬 기사를 게재했다. '올해는 한국기업인들에게 무시무시한 해다. 6개 재벌이 지난 9개월 동안 파산을 했고, 쌍방울이 법원에다 보호신청을 했으며, 기아는 더이 상 오래갈것 같지 않다. 6개 다른 재벌들이 위험 리스트에 올라있다. 30대 재벌중 13곳이 지난해 손해보았다. 그 때문에 수 천개 부품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있고, 현재 추세로는 4천개 중견 또는 대기업들이 연말까지 파산할 것이다. 이것은 지난해보다 2배나 많다. 우울한 기운은 널리 퍼져있다. 경제 성장은 느리고, 원화가치는 하락하며, 주식시장은 5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튼튼해 보이던 한국 경제발전의 모델이 흔들리고 있다. 한국은 과거의 가난에서 벗어나 세계 11대 시장경제를 갖고있는데, 대부분 삼성-현대-LG-대우 등 4대 재벌의 기여 덕분이다. 서구에선 재벌들이 자동차-전자-조선업종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 내에선 농업부터 신문사 운영까지 모두 하고 있다. 4대 재벌들은 한국 전체 매출의 47%, 수출의 절반을 떠맡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한국을 부러움과 존경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그런 열정은 식고 있다. 한국사람들은 "오늘날 유일하게 번영하는 '재벌'은 서울지방법원뿐"이라고 비꼰다. 서울지방법원은 관리중인 60개 기업들의 자산인 2백70억달러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재벌들은 현재의 고통이 경기 사이클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하며, 곧 끝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걱정스럽게도 그들이 겪는 고통은 영원해 보인다. 재벌들은 빚더미속을 헤엄치고 있다. 1백 70개 이상의 기업들이 자기 자본의 5백%가 넘는 빚을 지고 있으며, 3백대 기업들도 평균치 4백%를 기록중이다. 이것은 미국 대기업들의 평균치보다 3배나 높다. 외화부채도 지난 2년간 2배로 늘어났다. 성장하는 경제라면 그런 대출은 문제가 없다. 문제는 한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급속히 쇠퇴하는데 있다. 한국 제조업의 임금은 이제 영국보다 30%가 더 높아졌다. 서울은 세계에서 3번째로 살기 비싼 도시가 됐다. 무력을 사용하는 노동조합과 해고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법률로 인해 종신고용의 전통은 지켜지고 있다. 재벌들은 지난 10년간 17%의 매출증가율을 기록했지만, 간접 관리인력들은 이보다 더많은 19%나 늘려왔다. 재벌들은 리스트럭처링(구조재 조정)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엄격한 노동법과 금융규제들이 그것을 막고 있다. 정부관리들은 재벌들이 과대하게 팽창해왔으며 전문경영인들을 적극 채용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한다. 은행들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정부압력에 의해 매우 위험해보이는 대출을 해주곤 한다. 지금까지 개혁은 거의 없었다. 지난해 정부가 최후의 수단으로 해고를 할수 있는 법개정을 추진했다가 대대적인 폭동에 직면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재벌 계열사들이 각각의 경영실적을 속이고 서로 돕기위해 자금을 지원하는 일을 막으려고 추진중이다. 더욱 급진적인 것은 금융 규제다. 그러나 바보같이 돈 빌려준 은행을 파산시키는 일은 적어도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98년초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재벌들도 자신들을 채근하고 있다. "변하라, 변하라, 변하라." 전경련의 한국경제연구원은 벽에 이같이 새겼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변화'는 자신들이 아니라 정부정책이다. 재벌 자신들은 자신들의 사업에 별로 잘못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LG는 대담한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기껏 자리에서 물러난 인력들을 퇴직시키거나 다른 유망산업으로 이전시키는 정도였다. LG관계자는 "우리 회장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면서 "우리는 수익을 올리기 위해 노동력을 자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재벌은 단일가족, 보통 설립자나 그의 아들에 의해 운영된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초창기엔 한 사람이 모든 결정을 신속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재벌은 너무 커졌다. 그리고 아들과 손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재벌 계열사들은 갈수록 힘을 잃어가고 있다. 주주들의 불평이 도움이 되겠지만, 유순한 한국의 주주들은 그들의 투표권을 거의 행사하지 않는다. 세법은 기업들의 인수합병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인수같은 것도 엄격히 금지돼 있다. 한 서구 기업컨설턴트들은 아직 절박감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재벌의 철학은 가족을 위한 부를 창출하는데 있으며, 그들은 이번 분기나 다음 분기의 실적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게 그의 말이다.】

이같은 영국 경제지의 한국경제에 대한 분석에 동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 경제가 지금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생산 증가율 보다는 소비증가율이 훨씬 높다는 데 있습니다. 관세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 해 모피의류. 화장품. 위스키. 승용차 등 주요 고급 사치성 소비재의 수입이 2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최근 당국이 집계한 20대 주요 사치성 소비재의 수입(통관기준)은 지난 해 20억 9천 4백만 달러를 기록, 전년의 14억 1천 1백만 달러에 비해 무려 48.4% 증가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양주 한 품목만해도 연간 3,4억 달러를 고스란히 해외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국가 경쟁력의 지표가 되는 외환보유고는 형편이 떨어지고 재경원이 공식집계한 총외채와 순외채는 각각 약 1천억 달러와 2백 50억 달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소비행태는 건전치 못할 뿐만 아니라 한계소비성향이 100.2를 기록하므로 소비증가가 소득증가보다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 여대생들의 옷 신발 가방 장신구 화장품 등 평균적인 몸 치장비는 미국의 3~4배, 일본의 2~3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봉급생활자 등 일 반 서민들의 경우 매달 카드빚으로 카드빚을 갚는 "외상 인생"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외상 구입의 주요 수단인 신용카드의 연체금액이 지난 3월말 현재 1조 원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30대 재벌 그룹이 보유한 자산 총액은 우리 나라 한해 예산의 5배에 육박하는 무려 287조원에 달하는 데, 이중 자기돈은 20%에 불과하고 나머지 8활은 모두 빚이라고 합니다.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들은 결국 거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80%가 거품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맹이는 없고 빈껍데기 뿐입니다. 우리 나라 경제위기는 이와같은 소위 '거품 경제'에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품'이란 겉보기에는 많아 보이고 부풀어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곧 꺼져 버리는 것입니다. '거품'은 자기가 가진 실제 보다 자신을 크게 보이게 만들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고 곧 꺼지면서 자기의 보잘 것 없는 실체를 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거품'은 경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품경제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거품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거품은 정치 경제에만 있지 아니하고 한국 교회에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인 수가 남한 인구의 1/4에 이른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빛과 소금'이 1/4이나 되지만 우리 사회는 오히려 부정 부패와 사치와 허영, 그리고 음란과 타락으로 더욱 어두워지고 있으며, 죄악으로 썩는 냄새가 가득합니다. 240여 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약 100여명이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데 국회의원들 중에 기업들로부터 비자금 받지 아니한 의원이 얼마나 됩니까? 이 나라의 법을 세우는 의원들이 얼마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사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사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사1: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무수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할지라도, 제아무리 '많이 기도한다' 할지라도, 각종 절기를 모두 다 지킨다 할지라도 악행과 악업을 버리고 손을 깨끗이 하며 공의와 자비, 선행을 베풀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 수천 수만의 제물보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주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미가 6:8)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는 거품 제사, 신앙은 거품 신앙에 불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거품 의식으로 가득찬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시고 저들의 그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행실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이 자기를 선생이라고 불러 주기를 즐긴다" 저들의 이런 행위는 모두 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들이 진정 율법을 사랑하고 그 율법대로 행하려면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말만 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화려한 쭉정이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저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시고 저들의 여지없이 공격하시어 저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들어 내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경제 정치 사회의 거품을 걷우어내기 전에 먼저 우리 신앙의 거품을 걷어내야 합니다. 나라 민족을 위해 누구를 막론하고 거품들을 걷어내야합니다. 다시말해 국가 민족이 살 길을 얻기 위해서 나라의 모든 지도자들과 더불어 백성들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복음 전파 100년의 역사로 말미암아 5천년역사의 때묻은 가난의 질곡을 벗어나 누리게 된 국가 민족의 번영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것입니다. 이번 전국 27개 도시를 순회하며 긴급 환난 경고집회가 국가 민족에 내려지고 있는 각종 환난을 멈추게 하는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거의 2천년만에 한반도에 도착하여 복음전파 100년만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하루 아침에 물거품으로 날려 보내지 않으려면 나라 민족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회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에스겔 22:30-31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시대에 하나님은 대한민국의 무너져 가는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멸망당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찾으시고 계십니다. 이번 집회에 참석하시어 긴급히 나라 민족의 죄악을 자신의 죄처럼 여기고 회개하시는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5. 국가와 민족이 사는 변화의 역사는 무엇으로 가능하겠습니까? 바울은 누구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 때 그는 박해자였으며, 침략군이 도시를 약탈하듯, 멧돼지가 포도원을 약탈하듯 교회를 약탈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늘로서 빛이 그를 비추었던 것입니다.

"(행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그 한 순간에 그리스도의 원수였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때 한 인간이 죽고 다른 인간이 태어났다고 밖에 달리 말할 길이 없습니다. 옛 바울은 죽고, 새 바울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변화는 누구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깊은 밤 어두움 속에 잠겨가고 있는 이 나라 민족이 사는 길은 역사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부정 부패, 사치와 허영, 음란를 추방하는 길은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우상숭배를 추방하고 그 세력을 꺾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역사의 찌꺼기 사회주의 세력을 일소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 민족의 역사가 새로워 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새로워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의 내일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 때를 얻든지 못든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기치를 높이 세워 이 땅에 모든 환난을 멈추게 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국가와 민족이 사는 길,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범죄로 인해 이 땅에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7대 환난에서 구원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 권력이 아니라 7대 환난에서 나라 민족을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복음의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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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의인이 하나면 족하다!

"(창 18:22-3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1. 지난 9월 22일자 조선일보에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크며, 단 한 사람의 장애자이지만 그를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무척이나 감동적인 기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기사내용은 이렇습니다.

<휠체어를 탄 한국의 중증 장애인 학생이 미국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인 케네디 스쿨의 정문을 바꿨다. 컴퓨터실엔 장애인 전용석이 마련됐고, 그 학생을 위한 주차설비도 갖춰졌다. 지난해 케네디 스쿨에 입학한 척수마비 장애인 이일세(36)씨를 위해 대학 측이 3개 동이 연결된 대학원 건물 출입문 3개를 2주 공사 끝에 장애자도 드나들 수 있게 고친 것이다. 이 일은 이씨의 친지들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일세씨는 84년 용평에서 스키를 타다 사고를 당해 척수가 마비됐다. 일세씨는 방황하던 중 90년 1월 결혼한 아내 김성은(31)씨의 뒷바라지로 학업에 전념해 메사추세츠대 경영학과를 3년만에 우등 졸업했고, 지난해 5월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알려진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에 입학했다. 기쁨도 잠시, 이씨에겐 학업 못지 않게 그 동안 장애인이 입학했던 사례가 없었던 케네디 스쿨의 건물을 드나드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시련이었다. 손가락 몇 개를 움직일 뿐 전신이 말을 듣지 않는 이씨의 처지를 확인한 대학 측은 일세씨에게 서면으로 "공부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줘야 하느냐?"고 물어왔다. 이에 일세씨는 "최근에 세워진 신축건물 1개 동을 제외한 옛날 건물 3개 동은 드나들기도 힘들다."며 "앞으로 또 다른 장애인이 입학할 수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장애인도 마음놓고 출입할 수 있게 문을 개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대학 측은 3개 동이 연결된 대학원 건물(36년 건립) 출입문 3개의 여닫이 대형 유리문에 자동 버튼식 개폐기를 장착했다. 컴퓨터실에 2개의 책상을 장애인 전용석으로 지정해 휠체어출입이 가능해졌고 마우스 대신 트랙 볼(Track Ball)을 장착한 컴퓨터 2대도 마련됐다. '장애학생이 없을 때는 이용해도 좋지만, 장애학생이 오면 즉시 떠나야 합니다'라는 안내 팻말도 설치됐다. 극심한 주차 난으로 20여 대 밖에 주차할 수 없는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주차장 입구 바리케이드의 개폐를 조종하는 원격 조정장치도 설치했다. 일세씨는 "하버드의 문을 열고, 하버드가 저를 위해 문을 고친 것은 아내의 힘"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살다 잠시 귀국했던 길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일세씨를 보고 배우자로 선택한 부인 김씨는 미국 행을 고집, 남편을 하버드에 입학시켰다. 김씨는 특히 월 2백 달러 정도의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학교에서 1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남편을 통학시키는 한편으로 자료준비를 도맡아 하는 등 남편의 학업을 도왔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결코 소흘 하지 말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너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0-46)

예수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힘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 지극히 작은 것 하나,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진정한 의인이며, 또한 그러한 의인 하나를 귀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어느 날 팔레스틴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하나는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요, 다른 하나는 소돔을 멸망시키시겠다는 심판의 소식이었습니다. 소돔성 심판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 성의 구원을 위해 끈질긴 집념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구제하거나, 정신적으로 위로하거나, 자신의 목숨을 바쳐 희생하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이웃 사랑의 방법은 모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의 영혼과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성에 살고 있는 그의 혈육 조카 롯과 그의 가족만을 위하지 않고 성중에 있는 모든 생명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소돔성이 당할 심판을 알고서 소돔성을 불쌍히 여기는 타인의 고통을 진정 자신의 고통으로 삼는 수준 높은 의인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도 놓칠 수 없다는 뜨거운 이웃 사랑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뜨거운 사랑과 끈질긴 기도에도 불구하고 소돔은 끝내 역사에서 완전히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중보기도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의인 롯과 그의 두 딸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웃을 위한 의인의 간구는 그 역사하는 힘이 큰 것입니다.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소돔은 지리적으로 보면 팔레스틴 남부에 위치한 사해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사해는 문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그 곳엔 염분이 너무 많아서 어떤 생물도 살 수가 없고 심지어는 그 주변의 풀들도 자라지 못합니다. 구약성서는 원래 이 지대가 비옥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받은 이 지역은 지금까지도 불모의 지대로 남아 있어 역사의 산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이 나라 삼천리 금수강산이 황폐한 나라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라 민족을 죄악을 대신하여 중보기도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의인 하나가 절실한 때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지에 실린 폼페이에 대한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남자가 돌로 포장된 거리에 누워 있는데, 그의 손은 아직도 금화 한줌을 움켜쥐고 있다. 어떻게 하여 그 금화를 갖게 되었던간에 1500여 년 동안 그것을 손아귀에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그의 몸은 재와 용암의 층에 묻혀 있다가 18 세기에야 발굴되었다. 그는 나폴리만 근처, 부유한 로마 사람들의 여름 휴양지인 폼페이의 시민이었다. 폼페이시는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던 무서운 날 폐허가 되었다. 화산은 그 도시를 파괴했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도시를 영구히 보존했다. 첫번째 지진이 내습하자 많은 사람들이 곧 도망쳤다. 왜냐하면 지진은 화산의 폭발을 알리는 신호였기에......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손을 뗄 수 없는 중요한 용무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도시에 묶여 있었다. 일단의 사람들은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근엄하게 앉아 있는 상태로 발굴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땅을 파서 귀중품을 묻으려다가 그대로 자신들이 묻혀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에 숨어 무자비한 화산의 힘에 항거해 보려고 가엾게 발버둥쳤다. 소지품을 마차에 조금 더 실으려다가 폼페이의 좁은 성문을 나가지 못하고 갇혀 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28시간 뒤 베수비오 화산이 잠잠해질 때까지 폼페이는 재와 용암으로 7m나 덮였고, 인구 2만 중에서 2000명이 죽었다. 이 도시와 이 비극은 수세기 동안 거의 잊혀졌었다. 그러다가 1748년 나폴리왕의 기사(技師) 알쿠비에르가 인근 사르노강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150년 전에 판 터널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운이 좋아 그가 제일 먼저 판 구멍이 폼페이의 상업 지구로 뚫려 멋진 벽화를 발굴해냈다. 그가 발견한 것 중 또 다른 것은 금화를 손에 움켜 쥐고 있는 한 폼페이 시민의 시체였다. 알쿠비에르는 좀 마구잡이이기는 했지만 그곳의 발굴을 열심히 계속했다. 그러다가 1763년 독일인 구두수선공의 아들인 요한 빈켈만이 폼페이의 비밀에 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폼페이 역사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지역의 고루한 관리들은 그가 폼페이를 방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켈만은 발견물을 연구하고 현장감독을 매수하여 현장을 살펴보는 등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그는 애써 얻은 학식의 힘으로 잡다한 유물들을 기초자료로 해서 고대 로마의 이 바닷가 휴양지의 1세기 당시의 생활기록을 정리해 놓았다. 그러나 빈켈만은 그의 연구작업을 더욱 진전시키지 못하고 1768년, 트리에스트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한테 살해되었다. 또 한 세기가 지난 뒤 이탈리아인 고고학자인 쥬세페 피오렐리가 지금과 같은 과학적인 발굴작업을 확립했다. 이것은 집 하나 하나, 거리 하나 하나를 차근차근히 시간을 들여 발굴해서 뭣하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발굴방법이다. 놀라운 사실이지만. 폼페이의 5분의 2가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다. 용암에 덮여 잠자고 있는 미지의 것들이 아마도 알려진 것들보다 더 깜짝 놀랄 만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2천년 가까이나 지하에 매몰되어 있던 그 도시가 발굴되어짐에 따라 당시의 문화가 얼마나 화려하고 고도했던가 하는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호화스러웠던 도시가 A.D. 79년에 화산이 폭발하여 어이없게도 순식간에 매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벽화들을 보면 성의 혁명시대에 살고 있다는 오늘 우리로서도 놀랄 정도로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었던 사회인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발굴된 그 도시를 보면 누구나 우선 그 화려했던 생활 흔적에 아연해집니다. 집의 구조나 목욕탕, 혹은 정원의 형태를 보면 그 스케일에 있어서나 미려한 장식에 있어서 요즘 서구 사람들의 상류생활도 뺨칠 정도로 호화스러웠음을 당장 알 수가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화석이 된 시체들을 보면 거의가 다 무엇인가를 끌어안은 채 죽어 있습니다. 마치 자기가 귀하게 여기던 보물을 마지막 순간까지 안고 뛰다가 그만 시간을 놓쳐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소유했던 모든 것들은 지금 화석이 되어 인간의 소유욕에 대한 미련함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소돔이 멸망한 얘기에도 이와 비슷한 요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만 두고라도 우선 롯의 가정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소돔성이 멸망한다는 예고와 함께 거기에서 탈출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탈출할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하나님 사자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롯의 아내가 앞을 향해 뛰다 말고 그만 뒤를 돌아보다가 불행하게도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왜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다보았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성서에 별다른 설명이 없으므로 역시 추측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아무래도 자기의 소유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미련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3. 그러나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 보려는 것은 소돔의 멸망 이유라든가 거기서 누가 왜 벌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한 개인이 전체에 있어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또 개개인이 전체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개인과 전체의 연대성 문제를 이해해 보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저주의 대상이 되어 버린 소돔을 앞에 놓고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합니다. 그는 우선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신다는 것은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당신의 뜻에 모순된다며 하나님께 항의하고 나섭니다. 그러면서 "만일 이 성중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 50명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멸하시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 물음에 대해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50명의 의인을 위해 전체를 살릴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래도 50명까지는 자신이 없어서 계속 에누리를 하다 마지막에는 10명까지로 내려가는데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은 "만일 10명만 있어도 나는 그들로 인해 이 성이 당해야 할 운명의 방향을 바꿀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대화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항의하다가 나중에는 의인만이 아니라 그 전체가 살 길이 없는가 하는 문제로 바꾸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결국 하나님은 만일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나는 그들로 인해 내 분노를 철회하리라고 합니다. 의인 10명으로 말미암아 그 집단, 사회, 민족의 운명이 급전환하여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저주와 분노의 신이시기 이전에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축복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상입니다. 아모스 3장 7절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진실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숨은 비밀과 하나님의 계획과 장래의 예언까지 숨기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진행하심에 있어 은밀히 비밀리에 실행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이를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즉, 세상을 심판하시되 갑자기 예고 없이 심판함으로써 쾌감을 느끼시는 분이 아니라, 부득이한 심판으로 심판에 대한 고통을 느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심판이 인간의 범죄에 대한 최종적인 방법이지, 심판을 목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할 수만 있으면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한 사람이라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에게 천사를 통해 예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진행하심에 있어 신중하고도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뜨거운 통회를 하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비밀을 의인에게 알려 주시고 의인이 하나님의 비밀을 전달받는다고 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 비밀이 없는 교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다급하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구원의 대상을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이 역사하신 사랑의 표현 그 자체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5:1을 보면 "너희는 빨리 예루살렘 거리에 두루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아라. 만일 너희가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감히 한 사람까지는 내려오지 못했는데 여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만일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있다면 내 진노를 철회하고 이 성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나는 이 성을 멸하고 싶지 않다. 공의를 행하는 자가 단 하나만이라도 발견된다면 나는 이 진노를 멈추리라. 그러니 제발 나를 좀 도와다오!"라고 호소하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에스겔 22장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땅 백성들은 강포하여 늑탈하며,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노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결국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한 사람'을 찾지 못하여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의인이라는 것이 대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의인이란 바로 무너진 성을 새로 쌓고, 그 무너지고 뚫린 구멍을 자기 몸으로 막아 하나님의 진노를 그 몸으로 대신할 자라는 것인데, 바로 이런 자를 하나님이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로 진노하지 못하게 하는 자' '내가 분을 품지 못하도록 뚫린 구멍을 가로막고 서서 "안됩니다!" 하는 사람을 찾았건만 결국 그런 사람이 없어서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전체의 운명을 위해 개인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개인의 결단과 처신 여하가 전체에게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점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개인은 전체 속에 함몰된 존재가 아니라 전체 속에 있으면서도 그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책임적 존재입니다. 흔히 우리는 진실을 추구하며 뭔가 참되고 정의롭게 살아 보려고 애를 쓰다가도 어느새 변심하여 남과 같은 통속으로 놀아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나 혼자만 그렇게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그 모양인데 나 혼자만 정직하게 살아 보겠다고 악악거려 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은 사회구조 속에서는 개인이란 참으로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분명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사회적인 역학 위에 발을 디디고 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기상도에 의해서 약해지거나 강해지거나 혹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된다면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분, 뚫어진 성을 자기 몸을 던져 가로막다 죽은 그 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에 발을 디디고 선 사람들이요, 한 사람의 의인을 찾아 이 땅, 이 역사를 구원하신다는 그 하나님 신앙에 기반을 두고 선 사람들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을 표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의 몸으로 가로막은 자', '하나님의 매를 자기의 등걸로 대신 맞은 자', '하나님의 저주를 자기 몸으로 받은 자'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바로 무너진 성을 자기 몸으로 가로막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돌이킨 자라고 주장했으며 또 그런 신앙 속에서 살았습니다. 구약 이사야서 53장에서도 이미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 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한 분의 그 회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성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기가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보다 더 큰 불행과 두려움은 이 위기에서 세상을 구출할 의인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내 사람됨에 대해 큰 기대를 할 수가 없습니다. 막말로 나를 봐서 내 민족을 살려 달라고 할 수도 없게 된 판입니다. 이것이 숨김없는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자기를 표현한대로 어쩌면 우리는 티끌보다도 못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체념 속에 주저앉아 불평만을 일삼을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유일한 의인이라는 것과 그 분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몸이라고 하고 우리를 그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내 자신이 의인일 수는 없더라도 의인의 한 작은 지체일 수만은 있다면 우리는 무너진 성을 쌓아 보려는, 그리고 뚫어진 구멍을 내 스스로 막아 보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앞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바로 그의 지체된 자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것이 가능할 것이냐 불가능할 것이냐를 저울질 해 보고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지레 돌아서는 행위는 장삿속이지 결코 기독교인의 신념은 아닙니다. 혼자라도 내 사명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기독교인의 고독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너무도 이상해져서 뭔가 정직하게 살아 보려는 사람이나 뜻을 가지고 좀 바르게 살아 보려는 사람은 아예 바보로 통합니다. 우리는 진실하고 참되게 살아 보려고 애쓰는 자들을 비웃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스스로도 소박하게나마 가정에서나 이 사회에서나, 대인관계 혹은 교회에서 늘 참을 추구하려 하고 진실을 좇으면서 편법이나 거짓이나 사욕을 떠나려는 노력을 해야지, 악한 의지와 타협이나 일삼고, 부조리한 현실에 무조건 적응하는 것만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외면해버린 허물어진 성을 홀로나마 쌓고 있는 자, 뚫어진 구멍을 자기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 찾는 의인이요, 또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자를 통해 그 민족과 그 사회 그 교회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 포기하고 버리니까 나도 떠나겠다는게 아니라 다 돌아서면 나 혼자만이라도 저 허물어진 성을 수축하겠다는 자세, 안되면 내 몸을 내대서라도 저 뚫린 구멍을 막아보겠다는 각오를 가진 자야말로 정말 남을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고독하게 죽어간 예수의 참된 제자요, 그 예수의 혼을 가진 자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런 자가 너무도 그리운 시대가 바로 오늘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시간 한 사람의 의인이 없어 고뇌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탄식을 들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DJP, 김대중 후보와 김종필 후보가 연대하고 게다가 박태준씨까지 연대하여 DJT가 되어 쓰리 쎄분(777)트리오<김대중, 김종필, 박태준 세 사람 모두가 70대인 점을 두고 비아냥거리는 말>된다할지라도, 아니 이들뿐만 아니라 여당 후보들이 몽땅 다 연대하여 영어 알파벳 모두를 다 쓴다해도 나라 그들이 나라 민족을 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 위기에 빠진 이 나라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의인 하나입니다. 의인 하나면 족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가 되시어서 이 시대의 파수꾼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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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의를 하수같이

"(암5: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암5:2)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암5: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암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암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암5:7)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암5: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암5:9) 저가 강한 자에게 홀연히 패망이 임하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암5: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암5:11)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암5:12)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암5:13)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암5: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암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암5: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암5: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5: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암5: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암5: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암5:21)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암5: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암5:23)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암5:24)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암5:25)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암5: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암5:27)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 아모스 제 5장은 아모스의 제 3설교입니다. 우리는 이 설교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또는 "너희는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라" 등등의 간곡한 선지자와 권면을 듣는 동시에 거듭 거듭 "화 있일진저 !"(5:18, 6;1)라고 탄식하며 슬퍼한 선지자의 애타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과 교통하며 이스라엘의 장래를 생각하여 탄식도 하고 슬퍼하는 뜻 깊은 사상가요 지혜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라 민족을 위해 그를 부를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순종했습니다. 그는 남방 유다 출신이지만 북쪽 이스라엘의 동포를 위하여 사마리아로, 또는 벧엘로 가서 자리를 옮겨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2. 아모스 당시는 국가의 부강과 더불어 사치가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들의 호화로움 중에 타락해 가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암6: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지도층의 타락과 더불어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불의와 부정과 착취는 날로 심해져갔습니다.

"(암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암2: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이는 당시 도덕적 타락이 어느 정도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지적하는 이스라엘의 큰 죄악은 안일과 사치, 계급적인 빈부의 격차에 따른 학대와 천대, 그리고 도덕적 타락과 부패 등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이러한 타락의 근원이 무엇보다 종교적 신앙적 타락에서 비롯되었음을 탄식하며 슬퍼했습니다. 다음은 최근 <기독교 사상>지에 게재된 것으로 한국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참담해져 가는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급속한 부흥을 이루었다. 세계 10대 교회 가운데서 여섯 개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를 뒷받침해 주고도 남는다. 이제 한국이야말로 21세기 세계선교의 축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한국교회가 1990년대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감쪽같이, 때로는 공공연하게 성직세습을 자랑하는 예식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한국 교회의 앞날을 참담하게 만드는 징후들이 아닐 수 없다. 교회 안에서마저 정실이 판을 친다면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꼴이 된다. 북한의 김일성 부자에게나 있을 법한 못된 일인 줄 알았는데, 거룩하고 은혜로운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부끄럽고 두렵기조차 한 일이 아닐 수 없다.....초대교회는 인물이 절대 빈곤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성직의 세습제도를 인정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중세기에나 있던 이런 악습이 지금과 같은 광명천지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기 곤혹스런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세속정치에서도 세습은 용인되지 않고 있다. 이익을 목적으로 조직된 기업에서도, 세습 제도는 자랑스런 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기여라는 차원에서, 소유주는 대국적 입장에서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맡기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자행된다는 것은 현대판 사두개주의의 재판이 될 위험이 너무 크다. 한국교회가 전폭적으로 추앙하던 빌리 그래함 전도관, 적극적 사고 방식의 로버트 슐러 목사, 그들도 결국 자식들에게 세습시켰다 하여, 미국의 지각 있는 신앙인들을 실망시켰다. 교회는 결단코 이익집단이 될 수 없다......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몸을 바치는 교회가 혈통에 얽매인다는 것은 성서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다. 설사 적합한 인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업적)만이 찬양 받을 뿐, 어떤 성직자의 업적도 찬양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성 모독적 행위가 될 뿐이다. 어떤 성직자의 업적도 결단코 기득권이 될 수 없다. 다만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조직된 그리스도의 몸일 뿐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이것이 성직자의 삶이다. 이토록 거룩한 동기에서 시작된 성직자들이 은퇴할 즈음에는 그토록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혈육에 의지한다면 너무나 낭패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성직 세습의 피폐는 역사가 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교회 안에서 성직세습이 문제된 것은 11세기 초엽 프랑스 교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족 가문에서 감독직을 독점하다 보니, 어린 소년을 감독으로 세운 일도 있었고, 심지어 평신도가 어느 날 갑자기 성직 중의 성직인 '감독'으로 옹립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세기 교회의 쇠퇴를 가속화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위 성직의 세습 제도였다. 서방교회의 경우 15세기의 교황 이노센트 8세가 자기 형의 사생아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프렌치아의 세도가인 메디치의 압력을 받아 열세 살 된 메디치의 아들에게 수도원장직을 맡겼다 칼릭스투스 3세는 조카인 보르기아의 사생아에게 주교직을 맡겼다. 이 아이는 후일 아버지 보르기아가 알렉산더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었을 때엔 추기경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이 중세기 교회의 큰 흉터요, 교회 쇠퇴의 원인이라고 보아 이 일을 '보르기아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중세기의 사례들은 성직의 세습화는 성직매매와 상관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성직매매의 경우는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이해 관계가 그 원인이 되어 있고, 성직 세습의 경우는 성직자들의 기득권이 그 원인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교권의 도덕성이 훼손된 처지에서 그 위엄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이미 교황의 위신은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흔히 종교 개혁의 원인을 속죄권 매매에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속죄권 매매보다 훨씬 앞서, 구조적으로 썩기 시작한 것이 성직의 세습제와 매매 행위에 있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세습 문제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머지않아서 한국 개신교회에서도 성직자의 독신 제도가 논의될 명분이 충분해질 것이다. 성직 매매와 성직의 세습화가 극심해지자, 12세기의 로마교회는 제2차 라테란(Lateran)회의(1139년)에서 성직자의 독신 제도를 채택, 선포했다. 이와 같은 법이 제정되기까지 성직매매로 엄청난 부를 취득하고, 성직 세습으로 교회의 권위를 독점하는 일들이 교회 발전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고 있음을 안 교황 펠라기우스(Pelagius I세, 556~561년)는, 성직자는 결혼하였을지라도 자기 자손들에게 교회의 재산을 상속시키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 베네딕트 8세(1018년)는 재삼 성직자는 자손들에게 교회 재산을 상속시킬 수 없도록 조치하였다. 교회에서 성직의 세습은 교회재산의 상속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제도다........성직매매나 성직 세습 같은 봉건 시대의 작태가 용인된다는 것은 성직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현대판 사두개파'의 재현이다. 길키(L. Gilkey; 시카고대학) 교수는 성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제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교회를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하고 설명하였다. 성례전적인 교회, 말씀의 교회, 그리고 성령의 교회가 그것이다. 그 어느 부분도 교회는 인간적인 관습에 좌우되지 않게 되어 있다. 성례전적인 교회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과의 만남을 뜻하고, 말씀의 교회란, 진리의 교육과 선포를 뜻하고, 성령의 교회란 어떤 인간적인 조건도 용납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런 교회를 섬기는 청지기로서의 성직자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자신의 자리로 여긴다면 너무나 위험하고 당돌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그래서 아울렌 감독(스웨덴의 신학자)은 "교회는 그 목사만큼의 교회가 된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정실에 좌우되어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외형적으로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 성령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이미지는 구겨지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교회의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 다스리시고, 은혜로 지키시도록 맡겨야 한다. 혼란의 극소화라는 명분으로 성직의 세습이 정당화된다면,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손에서 떠난 교회임을 드러낸 것이다. 영원히 사는 분은 그리스도이실 뿐, 그리스도의 손에서 떠난 교회 치고 영원히 흥한 교회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맡겨진 교회만이 다시 부활하고, 부흥하는 것이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 그러나 그것들에게 하나님의 기운이 들어가자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한 민족을 형성하였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운과 바람이 일기를 기원해야지, 성직의 세습으로 명맥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

3. 나라의 번영과 더불어 부유해진 한국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구하시는 공의와 정의에 바로 서지 못하고 성직세습이나 성직매매, 정실 등으로 기울어진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본문 19절과 20절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심판의 날을 보여 줍니다. 그 날은 마치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고, 또 용케 곰을 피하여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다고 했습니다. 사자, 곰, 뱀은 그 심판이 어떻게 두려운 것이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잘 보여 줍니다. 본래 수리아 지방의 곰은 사자보다도 더 무섭고 잔인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에도 보면 장차 나타날 공포의 대상이 되는 네게 원수들의 환상을 보여 줄 때 사자보다 더 무서운 것이 곰으로 나타났고 곰 보다 더 무서운 것이 표범이요 마지막 제일 강한 열 뿔가진 짐승의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단 7:3--8). 그런데 본문에는 곰 다음에 뱀을 말했습니다. 사자와 곰은 피할 수 있으나 뱀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왜, 사자와 곰을 피하여 집에까지 간 자는 안심했습니다. 마음놓고 손을 벽에 기댈 수 있었습니다. 그때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피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여호와의 날은 이같이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죄인들에게 있어서 그날은 결코 빛남이 아니요 어두움의 날입니다. 구원과 생명이 아니요 멸망과 죽음의 날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공의와 진리편에 사시므로 심판의 날에 피할 바위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보다 교회의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21--2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하는 것은 번제나 화목제의 제물이 아니요 오직 공법이요 정의임을 가르치며, 여호와를 찾고 선을 구하는(4,6,14) 믿음임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 생활에 있어서 외형적이요, 의식적인 제사보다도 더 가치있는 것은 공법과 정의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음이요 진실이란 것을 처음으로 밝히고 나선 선지자는 아모스와 호세아입니다(호 6:6). 그러나 이스라엘은 마침내 불행하게도 그들을 듣지 아니하므로 가나안에서 쫓겨 날 것을 예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나 소제나 살진 희생의 화목제라도 흠향은 물론이요 돌아보지도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모스와 같은 시대의 선지자인 이사야와 미가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같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은 우상을 찬양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이사야는 말했습니다.(사 65 :3).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며 '돌아보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미 6:8)라고 했고, 또 이사야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을 내가 돌아보리라고 했습니다.(사 66:22) 이같이 아모스 선지도 종교적인 예식이나 제사와 성회의 의미를 부정하는듯 보이나 그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는 오직 윤리적인 책임과 하나님의 법에 근거한 도덕적인 의식과 양심을 떠난 삶을 문제로 삼고 그것을 정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법과 정의를 무시하면서도 점잖은듯 모든 제사에 참석하여 경건을 자랑하는 그런 가식과 이중성을 슬퍼하는 것이 선지자의 마음이었습니다. 계속하여 "노래도 비파소리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고 하신 말씀은 또 '네 노래 소리는 내게 무거운 짐이 되어 있은즉 그것을 내게서 옮기라'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 많은 희생의 제물과 더불어 찬양대의 노래와 여러 악기의 음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제 '내게 무거운 짐이요, 괴로운 것'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네 노래 소리란 말은 아름다운 음악을 말함이 아니라 떠드는 소리, 외치는 고함'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성 없는 예배의 노래 소리는 그같이 듣기 괴로운 굉음'이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월삭과 안식일과 절기에 그들이 모여 와서 드리는 예배를 가리켜, 같은 시대의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서도 하신 말씀이,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4)고 하신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의 말씀에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 :9)고 하실 말씀대로 어찌 들음이 없고 순종이 없는 그들의 기도만이 가증하겠는가. 그들의 노래 역시 하나님을 곤비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그들의 제물이나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구하시는 것은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이 땅에 흘리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정의와 공의를 저버리게 될 때 기독교는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1096년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은 그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 만행이 판을 친 전쟁이 없을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인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 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 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는 금지되었다. 셀주크 투르크 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열렬한 이슬람 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우르반 2세는 이것이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개최,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웅변술이 뛰어났던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기독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투르크 족의 위협을 설명하고,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을 거라고 역설했다. 그뿐 아니라, 동방엔 금은보화가 깔려 있고 아리따운 이슬람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제후들의 욕심을 부채질했다. 교황의 웅변에 감격한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하나님이 이를 원하신다!" 1096년 제1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다.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었다. 이 무렵 (마라의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출신의 기사 보에몽이 이끄는 십자군 부대는 마라 성에 도착하여 목숨이 아까운 자는 궁전 안으로 피난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런 다음 성안으로 진격,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륙을 자행했다. 사라센인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므로 성안은 시체로 뒤덮여 산을 이를 지경이었다. 게다가 궁전에 피난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공격해서 소유물을 빼앗고 살아남은 자는 노예로 팔아 버리고 말았다. 마라에 머문 지 1개월, 식량이 떨어지자 사라센 인을 죽여 톱으로 배를 갈라보기도 했다. 사라센 인들이 금은보화를 삼켜 뱃속에 간직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죽은 사라센 인의 고기를 요리해 먹기도 했다. 십자군의 약탈과 만행은 비단 마라에서만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들은 남하를 계속 1099년 6월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전투는 6주일간 계속되었다. 여기서도 십자군은 적군은 물론 주민들까지 무차별로 죽이는 잔학성을 보였다. 십자군에 종군했던 남프랑스 출신 성직자의 기록을 보자. "거기엔 너무도 처참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큰 거리와 광장엔 사람의 머리며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신전과 벽들은 물론 기사가 잡은 말 고 삐까지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성지순례를 방해했던 자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할 뿐 아니라 찬양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십자군의 대량학살은 신의 심판이요 영광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성지탈환에 성공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개선했다. 그러나 곧 다시 이슬람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겼고, 교황은 연달아 십자군을 파견했다. 십자군 원정은 총 8차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중 성지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제1차 원정 때 뿐이었다. 나머지는 어처구니없는 탈선행위로 일관했고, 심지어는 엉뚱하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 라틴 제국을 세운 일도 있었다. 1212년의 제5차 십자군, 이른바 소년 십자군은 상인들과 결탁한 선주의 농간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끌려가 사라센 인에게 노예로 팔렸다. 사라센 인들은 700명에 달하는 이 소년들을 다치지 않고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와 교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믿지 않게 되었다. 전쟁에 참가했던 영주와 기사들은 영지를 돌보지 않은 탓에 수입이 줄고, 참가비용을 조달하느라 가산을 탕진하여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기독교는 몰락되어가고 말았다.>

교회나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오히려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진다."(본문 7절)면 기독교는 몰락하고 말 것입니다.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외치기 전에 교회가 먼저 공의롭고 정의로워야 합니다.

6. 정의가 땅에 떨어진 이 때에 자신과 더불어 나라 민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라 했습니다. 이미 말했거니와 벧엘과 길갈은 그들이 잊을 수 없는 곳이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벌써 잘못이었습니다. 그 제단들은 혼합 종교(Syncretism)로 깊이 물들은 것들이었습니다. 바알의 이름과 여호와의 이름을 같이 부르는 그것들이야말로 벌써 '우상의 집'(벧 아웬)이요, '하나님의 집'(벧엘)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잃는 것이요, 참 하나님을 반역하는 음행이었습니다. 소위 성소'를 찾는다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이 하나님을 사모하여 찾는 것이 아니라면 양떼와 소떼를 끌고 간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호5:6).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주신 말씀과 같이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스스로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에 가증한 것을 기뻐하는 자"들의 제물은 비록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이라도 살인함과 같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다"(사 66:2,3)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벧엘을 찾고 길갈을 향하여 가는 많은 무리들은 벌써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버린 자들이었고 스스로 악행을 취한 자들이었습니다. 벧엘과 길갈의 제단이 그들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브엘세바로도 가지 말라 했습니다. 여기 '가지 말라'는 히브리 말은 국경을 '넘어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브엘세바는 헤브론에서 30마일, 예루살렘에서는 50마일이 넘는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통일왕국시대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의 전 판도를 말할 때는 종종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란 말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브엘세바는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국경을 넘어서도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일찍이 족장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제단을 쌓던 곳이요, 큰 은혜를 받은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친히 저들에게 나타나셨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북쪽 여로보암 1세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찾아가는 것을 막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엘세바는 많은 순례자들이 때를 따라 찾아 나선 곳이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브엘세바도 후일에 우상을 섬기는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거기에 여호와를 섬기는 제단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벌써 혼합종교(Syncretism)의 성격을 띤 것이었음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 사람의 입으로 여호와의 이름도 부르고 바알의 이름도 불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깊이 섬기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버린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여호와를 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알도 섬기고 여호와도 섬기는 혼잡된 신앙(Syncretism)은 비록 여호와를 섬겨도 그것은 그대로 우상을 섬기는 것이었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빛과소금>월간지에 "대선 뒤에 무당이 있다."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면 개탄할 수밖에 없는 이 나라 지도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무속, 역술, 풍수 등 이른바 무속에 종사하는 인구가 70만 명에 달한다. 이들에게 특히 연초나 입시철, 선거철은 특수 대목을 이루는 기간이다. 97 대선을 앞두고도 난립하는 후보군에 대한 '천기'누설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벌써부터 사회적 혼란과 폐단을 낳고 있다. 대통령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뜻이 있는 사람이 된다고 믿는 한국인의 심성과 전통적인 사상이 더욱 더 무속인을 찾게 하는 것 같다. 전국토의 1퍼센트가 분묘 면적으로 점령당하여 좁아지는 땅 덩어리를 염려하는 마당에 대통령 후보로 나설 사람들은 경선이 있기 전부터 거의 다 조상의 묘를 옮긴 상태다. 이 또한 굵직한 인물들은 땅 기운을 받고 나온다는 우리나라의 미신적 관습에 기인한 것인데, 이에 맞추어 대선주자들이 묘를 옮긴다는 것은 이들이 이러한 미신을 앞장서서 따르고, 조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정치, 무속 신뢰도 매우 높아 96년 4월 총선 당시에도 후보자와 그 가족, 측근들의 발길이 점집에 줄을 이었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액수의 복채가 점쟁이들에게 갔을 것이다. 복채는 이 나라의 경제를 무질서하게 할만큼 그 규모가 엄청나다. 점상(占床)의 경우 최상류는 부르는 게 값이고, 점쟁이들이 굿판을 벌일 경우에도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 복채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니 당선 후에는 본전을 뽑기 위해서라도 부정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선거를 앞둔 무속인의 준동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 미신에 빠져 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앞으로 이들이 정치를 하는 동안 국가 경제가 불의하게 운영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지관이나 풍수들은 오만스럽게도“이름 난 사람 가운데 내 신세 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교태를 부리고 있다. 결국 최고 권력자들과 재벌들이 미신에 앞장서고 조장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87년 대선 당시 불상 3만 개를 만들어 집집마다 세우면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미신 때문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10원짜리 동전 앞면에 새겨진 불국사 다보탑 상에 새로 불상을 추가했다는 소문은 크리스천들에게 큰 분노를 일으켰었다. 한국은행이 나서서 불상이 아니라 사자상이라고 해명을 했으나 설득력은 없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노 전 대통령은 자기의 영달을 위해 한 나라를 미신적 풍조에 빠뜨린 무서운 과오를 범한 것이다. 이처럼 대권주자나 국회의원을 비롯 재벌 등 이 나라의 역량있는 사람들까지 무당 앞에 쭈그리고 앉아 굽실거리고 있으니 이 나라는 '점술천국'이 돼버리고 말았다. 정부는 이러한 혹세무민하는 무당들을 관리할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특히 요사이 전화 정보서비스가 발달하여 700정보서비스가 서울에만 작년말까지 130여 개가 되며 전국적으로 600여개 이상의 전화 점집이 개설되었다. 이제는 청소년들에게까지 점이 퍼져나가 안방에 앉아 자유자재로 점을 치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무속 및 역술인 단체의 위상도 크게 높아져 대한승공경신연합회, 한국역리학회, 한국역술인협회, 전통민속예술시보사, 한국무속총연합회 등 협회를 구성하여 조직적으로 움직일 뿐 아니라 이들 무속인들이 사회에서 큰 위력을 가진 자들로 취급받고 있다. 크리스천의 각성과 항의운동 필요 이러한 무속인들의 준동에 대한 대안으로 먼저 기독교인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은 모두 악령이며 악령에 사로잡힌 자의 예언과 점궤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흑암의 흐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지어다."(출 22:18)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은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것으로 이를 어기고 사주, 관상, 역학, 풍수지리 그리고 무당들을 가까이 하면 저주가 있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기독교 문화를 형성해 가야 한다. 문화의 탈을 쓰고 부지불식간에 크리스천의 삶 가운데 스며드는 무속을 물리칠 수 있는 기독교 문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또한 무속행위 저지를 위한 서명날인, 신문과 텔레비전 등에 게재되는 미신적인 기사나 무속적인 광고에 대한 항의전화 등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크리스천 시민 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미아리 일대를 무속관광 특구로 삼으려는 성북구청의 계획이 기독교인들의 항의로 좌절된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나라를 비과학적, 반역사적, 반창조적인 운명론에 묶어 두려는 악마의 쇠사슬을 파해버리고 이 나라를 구해낼 책임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무당과 우상형태의 신앙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성소에 나왔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벧엘, 브엘세바, 길갈 모두가 하나님의 제단이 있는 곳이었으나 하나님 여호와와 무당, 우상을 겸하여 숭배하는 혼합종교, 더러운 귀신의 처소로 변질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형태로는 제아무리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호5:6) 저희가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본문에서 아모스는 "나를 찾으라, 그리고 살라!"(Seek me, and live)라는 간단한 두 마디로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아닌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거기에 생명이 있고 삶이 있습니다(시 69:32). 하나님 자신이 곧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요 우리가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임에 틀림없으나 이 둘은 서로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으로 살게 하여 주신다는 믿음이 없는 거기에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 자신을 찾는다는 말이요 그의 주시는 어떤 은혜나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얻게 될 때 거기에 생명이 있고 기쁨과 위로가 있고 능력과 소망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 그 안에 모든 충만함이 있습니다. 시편에, "하나님을 찾는 너회들아 너회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시 66 :32)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찾는 거기에 우리 마음의 변화도 있고 소생함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본절은(14절)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선은 곧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절에서 "너희는 나를 찾으라."라는 말과 ''선을 구하라."말은 본문에서의 "선을 사랑하라."말과 결국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앙으로 사는 삶이 곧 선이요 불신앙은 곧 악이라는 이러한 사상은 아모스 선지가 가르쳐 주는 '윤리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선을 구하고, 찾고 사랑할 때 그 길과는 무엇입니까?

1) 너희가 살고(4, 6절)

2)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고(14절)

3) 요셉의 남은 자를 긍흘히 여기시리라(15절) 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너회가 '살고'란 말은 개인의 육신의 생명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의 정치적 생명도 말합니다. 오히려 본문은 이스라엘 국가의 정치적 존립을 더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이 아닌 세상의 역사를 볼지라도 한 문명의 몰락과 한 나라의 멸망은 사회적인 불의와 부정과 도덕적인 부패가 그 가장 큰 원인이 되었었음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윤리적인 타락과 사회의 구조적인 악은 그 나라와 사회의 종말을 비참하게 만들고야 맙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너무도 관영하여 용서받을 길 없고 이제는 멸망이 정해져 있으나 그들이 돌이키면 그래도 소망이 있다는 선지자의 희망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이 여기의 '혹시'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 중에서도 혹시 긍휼히 여김을 받아 구원받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7. "(암5: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이 시대에,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이 사회에서 입다물고 살아야 지혜로운 것입니까? 본문 13절의 지혜자란 어떤 사람을 의미하며, 왜 그들은 잠잠함해야 합니까? 타의에서입니까? 자의에서입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자'란 생각이 깊고 분별력이 있는 사람'(The prudent, The intelligent)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잠잠합니까? 타의에서입니까? 자의에서입니까? 여기에 지혜자가 참 교사요 참 선지자 같은 사람을 말한다면 그 어떠한 희생을 감당하면서라도 외칠 때는 외쳐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 자신이 그랬고 또 하나님께서도 그런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겔 33:1-6). 악한 세상이야 듣든지 말든지 선지자는 크게 외쳐 경고해야 할 것은 경고해야 합니다. 잠잠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그것과 다릅니다. 진실한 교사들의 입을 쳐서 다물게 하고 그들의 자유를 빼앗은 폭력적인 악한 시대를 말합니다. 의인들이 곤욕을 당하며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때를 말합니다. 그들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해야 하는 그런 때를 의미한 것일 것입니다(사 53:7,눅 22:67,68). 만일 또 그렇지 않다면 잠언의 교훈과 같이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그러므로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잠 9:7,8)하신 그대로 악인들에게는 더 이상 책망이 필요 없기 때문이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도리어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신 말씀이 있거니와 이제 그 악한 시대는 경고가 더 이상 필요없고 오직 심판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겠습니까? 그 어떠한 경우이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악인이 일어나면 백성이 탄식하며 사람이 숨느니라."(잠 28:12,29:2)하신 그대로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의로운 자의 입을 침묵케 한 시대가 잘 될 수 없고 악인이 득세하며 외치는 때 치고 망하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영적으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의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참고 기다리며 잠잠해야 한다면 그러한 시대란 얼마나 괴로운 악한 시대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니 자신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경상대 아침성경공부에서 간음한 여인 사건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비겁한 자들이 예수를 옭아 넣기 위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돌로 치리까?" 그들은 예수가 모세의 법과 카이저의 법 사이에 빠진 딜레마에 빠지기를 바랬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예수는 그의 신적인 지혜로 이 딜레마를 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딜레마를 해결했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아직 해결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목사가 어느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한다 하였으니, 율법의 의는 어디로 갔습니까?" 교수가 대답하였습니다. "돌로 치지 못하게 한 자가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성경공부에 참석하였던 모두는 그 말에 동감하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우리 모두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대신 우리에게는 "그래, 내가 너희들의 모든 죄값을 다 치를 것이다. 그러니 너는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라면 이 시대는 나와 더불어 벌써 심판받고 돌에 맞아 죽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와 우리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충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관영한 가정과 교회, 나라 민족이 하나님의 공의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진실과 공의가 땅에 떨어진 교회가 누구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충족시켜 이 시대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암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여호와를 찾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는 성도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진실과 정의, 공평과 공의편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에 내리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 형벌의 불을 끌 수 있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공의대로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팎으로 진실과 정의, 공의가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에 십자가의 보혈과 능력이 충만하시므로 자신과 나라 민족을 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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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수7:1)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수7: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편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일러 가로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수7: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 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 (수7: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수7:5)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육 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 (수7: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수7:7)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수7:8)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수7:9)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수7: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수7: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수7: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수7: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 (수7:14) 아침에 너희는 너희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가족은 각 남자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수7:15)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수7:16)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수7:17)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수7:18)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수7:19)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수7:20) 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여차여차히 행하였나이다 (수7: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수7:22) 이에 여호수아가 사자를 보내매 그의 장막에 달려가 본즉 물건이 그의 장막 안에 감취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는지라 (수7:23) 그들이 그것을 장막 가운데서 취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가져오매 그들이 그것을 여호와 앞에 놓으니라 (수7:2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수7:25)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수7:26)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본문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할 여리고 성 전리품의 일부를 훔친 아간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는 장면입니다.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 하노라, 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수 6:18-19)

하나님의 명령대로 실천하는 여호수아의 영도아래 요단 동편의 두 왕인 시혼과 옥을 진멸하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등 지금까지 승리의 행진만을 계속해 오던 이스라엘이 뜻하지 않게 보잘 것 없는 아이 성 전투에서 처음으로 큰 참배를 겪게 된 것입니다. 범죄는 아간 한 사람이 했지만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수 7:1)

우리 나라도 정치지도자들의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말미암아 저지르고 있는 수 많은 범죄가 척결되지 아니하고서는 역사의 내일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내일을 위해 <아간>이 같은 인물들이 이 나라에서 완전히 제거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고 그러한 인물들이 나라의 지도자로 뽑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철옹성 여리고를 전쟁무기 하나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정복한 여호수아는 이제 아이성 정복에 나섰습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그곳에 정탐군을 보냈습니다. 당시 아이 성은 벧엘 동남쪽 약 3km에 위치한 인구 1만 2천명의 조그만한 성읍이었습니다. 정탐군의 보고는 이 삼천명 정도면 무난히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천명쯤이 아이성 정복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그 전투에서 36명이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는 겨우 도망쳐 후퇴하는 패배로 말미암아 백성 전체가 그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고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장로들과 함께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해가 저물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수7:7)....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수7:8)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수7:9)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이같이 낙담한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참패의 원인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수7: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수7: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어서 여호수아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은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성결케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내일>을 위해 구체적으로 그 방법까지 말씀하셨습니다. 12지파 모두 지파별로 모아놓고 제비 뽑고, 그 뽑힌 지파 중에서 족속대로 모아놓고 다시 제비 뽑고, 그 뽑힌 족속 중에서 가족대로 모아놓고 다시 제비 뽑고, 그 뽑힌 가족 중에서 남자를 나오게 해서 그의 모든 소유와 함께 불사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뽑힌 자가 바로 유다 지파 세라 족속 삽디 가족 갈미의 아들 아간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불러모아놓고 아간을 잡고 훔친 물건과 그의 아들들과 딸들과 그가 소유한 모든 짐승까지 아골 골짜기로 끌고 가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돌로 치고 불사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습니다. 이렇게 하자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게 되었고 그 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유명한 폼페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1,870년 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하룻밤 사이에 화산재 속에 파묻혀 멸망당했습니다. 이 페허가 폼페이를 발굴했을 때 사람들은 그 웅장함에 놀랐고 아름답고 호화스러웠던 옛 모습을 넉넉히 그려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굴된 폼페이의 거리는 도덕적인 부패상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모퉁이 모퉁이마다에는 술집이 있고 그 곁에는 사창굴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 페허를 자세히 본 사람은 누구나가 폼페이의 멸망을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극도로 부패했던 이 도시가 신의 형벌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아래 멸망당하지 않으려면 그 곳의 <아간>이를 철저하게 제거해야만 합니다. 한 가정도 그 가정의 축복된 내일을 기약하고자 한다면 그 가정의 축복을 가로막고 있는 <아간>이를 제거해야만 합니다. 한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하려면 그 교회의 <아간>이를 척결해야만 합니다. 한 나라도 마찬가지로 역사가 단절되지 아니하고 부흥과 발전을 거듭하는 복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간>이를 뿌리 뽑아 불태워 성결케해야만 합니다. 범죄는 <아간> 한 사람이 했지만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성 전투의 패배원인은 분명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진노의 원인을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다시말해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정탐하고 그 성을 과소평가한 정탐군들의 잘못을 책망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백성들 가운에 어떤 죄악이 있었는가를 살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문제 발생의 원인을 인간적인데서 찾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바로 역사의 오늘과 내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던 것입니다.

"(수7:8)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이 기도는 아이성 전투 패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기도는 이렇습니다.

"(수7:9)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아이성 전투 패배가 자신의 이름에 끼칠 악영향을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이름에 누를 끼칠까 염려스럽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금 자비를 베풀어 주도록 작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수7: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낙심해 있는 여호수아를 격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성 패배의 원인을 밝히시면서 그 죄를 제거하도록, 즉 성결케하여 내일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7: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수7: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수7: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

한반도의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주변 국가들을 극복하고 나라 민족의 <내일>을 기약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나라의 <아간>이를 척결하여 성결케 해야만 합니다. 이 땅에 아직도 아간이처럼 숨겨둔 비자금으로 정치, 경제를 어지럽히고 있는 수많은 지도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이 나라의 <내일>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나라 민족을 위한 뜨거운 기도가 여호수아의 기도가 되어 이 나라 전체를 환난과 위기로 몰아가는 <아간>이를 뽑아내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나라 민족의 진정한 발전과 부흥을 위해 예비된 깨끗한 그릇들이 선택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구약의 요셉은 항상 성결 보존하므로 그가 속해 있는 보디발 가정이나 애굽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자신의 가족들을 구원하는 일에 예비되어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창39: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요셉은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항상 자신을 성결케 하여 <내일>에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애굽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 국무총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창39:7)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창39: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창39: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창41:40)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창41: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창41: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창41: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결 보존한 요셉을 축복하신 것은 장차 팔레스틴 땅에 임하게 될 7년 흉년으로 인한 기근시에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45: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창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창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의 <내일>을 위해 <아간>이는 속히 척결되고 성결한 그릇들이 쓰임받아 환난과 위기에 처한 가정과 교회, 나라 민족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다니엘도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를 작정하여 성결보존하므로 <내일>에 쓰임받아 이방 나라를 복음화시키는데 뿐만 아니라 멸망받은 민족의 <내일>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딤후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금그릇과 은그릇, 나무 그릇과 질그릇 등 여러 종류의 재질로 된 그릇들이 있으나 그 그릇들의 재질이나 크기에 상관없이 <내일>에 귀하게 쓰임받는 그릇은 무엇보다도 깨끗한 그릇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능력과 실력, 재능과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깨끗한 사람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아무리 금그릇이라할지라도 더러우면 천하게 쓰임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깨끗한 그릇에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 그리고 학문과 명철 재주를 몽땅 부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형통케 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부강하게 만들며 다니엘처럼 역사의 미래를 보게 합니다.

"(단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의 <내일>을 위해 성결 보존하여 다니엘처럼, 요셉처럼 쓰임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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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욘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욘1:4)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욘1:5)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욘1: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욘1: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욘1: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욘1: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욘1:10)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욘1: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욘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욘1: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욘1: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욘1: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 성읍에 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고 "쳐서 외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니느웨는 앗수르의 성읍으로서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나는 니느웨에 가기 싫어했습니다. 이유는 멸망에 대한 선포를 듣고 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저들이 예수믿고 잘 되는 것이 배가 아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왜곡된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 국가에 미친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싫어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민족이나 종파에 국한되실 만큼 제한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편협한 신앙관에 얽매여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내에서만 통치하시는 일종의 지방신, 동네 하나님으로 전락시켰을 뿐 아니라 이방 세계에 대한 축복의 전달자로서의 사명과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율법을 전파해야 할 책무를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니느웨라는 이방 세계를 설정하시고 선교사로 요나를 택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수십만 영혼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원이 곧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권을 상실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하나님의 명령을 의지적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했었던 장소, 곧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을 벗어나기만 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외치라는 사명을 철회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렬하고 맹렬한 폭풍을 일으켜 불순종하여 도피행각을 벌이는 요나의 길을 저지시킵니다.

"(욘1:4)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욘1:5)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하나님의 폭풍 앞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력합니다.(5-10절) 배와 바다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는 선원들조차도 여호와가 보내신 바다의 폭풍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들의 신'을 부르고 '물건'(5절)을 던졌다는 사실은 인간적인 최대의 노력을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노력도 하나님의 폭풍 앞에선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온 것인가를 알고자 했습니다. 제비를 뽑은 결과는 바로 요나였습니다. 바다가 점점 '흉용'(11절)해지자 선원들이 요나에게 추궁성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잔잔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궁극적으로 이러한 상황이 자신의 불순종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욘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고 큰 폭풍은 잔잔해집니다.

"(욘1: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지금 이름하여 한국호(韓國號)는 "엄청난 대풍을 만나 거의 깨어지게 된" 형편입니다. 나라의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를 놓고 저마다 그 책임을 추궁하며 갑론을박하고 있지만 그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이지경이 된 원인을 놓고 제비를 뽑는다면 누가 뽑히겠습니까? 저는 누구보다도 이 땅에 기독교인이 뽑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요나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요나란 뜻은 "비둘기"이며 그의 아버지 이름은 "아밋대"(진실)이고 가드헤벨 사람입니다.(왕하 14:25). 진실한 아밋대의 아들 비둘기 같은 요나! 이름은 좋으나 유명무실한,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구원하시고자 하심도 간절하였지만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종종 자기 중심주의와 배타주의로 유명무실한 요나가 바로 이 시대의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을 거부한 요나 한 사람 때문에 그가 탄 배가 파선을 당하여 모두가 다 죽게 될 형편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주어진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자각이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왜곡된 민족주의와 배타주의, 치졸하기 그지없는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의 그릇된 신앙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하나님은 대풍이 일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었도다 함과 같이 목사라는, 장로라는, 집사라는, 신자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으나 유명 무실의 교역자와 신자들이 태반입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등지고 다시스로 갈 때에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 요나를 연단시킴과 같이, 오늘날 이 나라 민족이 겪고 있는 풍랑은 요나와 같은 나 한 사람, 요나와 같은 기독교인을 구원하여 바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안다면 나라 민족은 희망이 있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타고 가던 배가 풍랑에 부딪힐 때에 온 배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큰 고통을 주게 되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이 세상은 어찌되었는가? 아무래도 우리 배 안에 죄 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라고 하여 제비를 뽑았더니 요나가 뽑혔습니다. "요나야! 무슨 죄를 지었느냐? 어떻게 하여야 이 바다가 안정하겠느냐?"는 선원들의 부르짖음은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나는 "나를 취하여 바다에 던지라. 너희가 이 풍랑을 만난 것은 나의 연고이다."라면서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솔직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를 취하여 바다에 던지라. 너희가 풍랑을 만난 것은 나의 까닭이다." 하나님이 요나를 사랑하시고 택하시고 훈련시키심은 이 한마디 "내 까닭"이라고 한 데 있는 것입니다. 곧 예수의 정신이며 책임감있는 말입니다. 첫 아담은 제 죄도 남에게 전가시켰습니다. "너 왜 선악실과를 먹었느냐?" 하실 때에 "당신이 지어 주신 아내가 먹으라고 하여서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황송하게도 그 죄를 하나님께 전가시키고 아내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책임을 그 누구에게도 전가시키지 아니하고 만민의 죄를 다 걸머지시고 변명 한마디 안 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소인일수록 책임을 회피하나 위대한 인물은 책임을 강하게 지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는 이것은 영감 까닭, 저것은 마누라 까닭, 시어미 까닭, 며느리 까닭, 자식 까닭, 부모 까닭, 교회서는 목사 까닭, 장로 까닭, 집사 까닭, 신자 까닭, 정부에서는 백성 까닭, 백성들은 정부 까닭, 정치인들은 한나라당 까닭, 국민회의 까닭, 밤낮 남의 까닭, 남의 까닭하며 원망과 불평으로 분쟁과 파쟁을 일삼다가는 피차에 물고 물리다가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늙은 집사님은 목사님이 설교를 잘못하고 강단에서 내려오니 목사님의 손을 잡고 훌쩍훌쩍 울었답니다. 목사님이 "집사님, 왜 우십니까" 하고 물으니 "목사님이 오늘 설교를 잘 못하신 것은 내 까닭입니다. 내가 목사님의 주일 설교를 위해서 토요일 밤에는 항상 기도를 하였는데 지난 밤에는 손님이 와서 기도를 못했더니 목사님 설교 죽 쑤었습니다." 하고 울더랍니다. 그 교회는 참 아름답고 사랑이 끓는 교회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이 사회에서 피차 내 까닭이란 책임을 지고 서로 이해 깊은 사랑으로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화평의 꽃이 만발하고 희락의 열매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자신의 축복이 무궁 무진할 것입니다. 이 풍랑을 만난 것은 내 까닭입니다. 이 나라가 엄청난 풍랑을 만난 것은 바로 나를 요나처럼 바로 세워서 배에 탄 사람과 더 나아가 니느웨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과 사건 배후에는 하나님의 깊고 선하신 섭리와 목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도망할 때에 시므이의 저주와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비새 장군이 칼을 들어 시므이의 목을 자르려 하므로 다윗은 "아비새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것 시므이가 나를 저주하는 줄 아느냐 하나님께서 시므이더러 나를 저주하라고 하시었단다"(삼하 IS : 10)하고 그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실 때에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악당들이 달려들자 베드로가 칼을 뽑아 말고의 목을 치니 목은 잘라지지 않고 귀만 떨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여 가라사대 "베드로야 칼을 집에 꽃으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아버지가 주신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하시고 떨어진 귀를 붙여 주셨습니다(요 18 :11). 요셉을 보십시요. 형님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 가고 또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으나 범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믿은 요셉은 조금도 형님을 미워하거나 주인의 마누라를 원망치 않고 감옥에서 충성되이 일하고 떡도감, 술도감, 정치가들과 교제하여 일약 총리 대신이 되었으나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에 칠 년 흉년이 들어 양식을 사러 온 형님들은 20년 만에 만나는 동생에게서 지은 죄가 커서 시름에 잠겼으나 요셉은 "형님들이 나를 팔아 이곳에 이르게 함으로 근심하고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우리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앞서 보내셨나이다‥‥‥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 : 5, 8)고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우리가 겪고 있는 국난은 무엇보다 우리 기독교인들을 바로 세워 복음전파라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므로 나라를 축복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풍우대작하는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에 의해 삼켜져 삼일삼야를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받는 고난을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욘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욘2:2)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이는 불순종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사명감당하겠다는 서원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물고기에게 명하여 그를 니느웨 해변에 토하게 하였습니다.

"(욘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이를 두고 <요나의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예표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통해 온 인류가 구원받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마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요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다시말해 거듭났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인들이 거듭나야만 니느웨가 멸망당하지 아니하고 살아났던 것처럼 이 나라가 소생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요나가 강제적일지라도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파했을 때 니느웨 사람들은 금식하며 회개하므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욘3:9)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욘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나라가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먼저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걸머지고 먼저 골고다로 가는 길이 나라가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사는 길은 민족 복음화 밖에는 없습니다.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거듭한 요나처럼 복음을 전파하면, 어찌 알겠습니까? 대통령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며 온 나라에 금식을 선포하되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까지 금식하게 하여 회개하므로 악한 길과 강포한 손에서 떠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지 어찌 알겠습니까?

"(욘3:5)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욘3:6)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욘3:7)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욘3: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어느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이 회개를 하였고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순회 설교를 하던 중 어느 섬 마을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심한 알코올 중독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난폭한 성격과 과음으로 인하여 그 마을 대부분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시달림을 받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알게 된 그 설교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회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만약에 한 마리의 맹수가 있다고 합시다. 그 맹수는 닥치는 대로 사람을 물어버리고 또 가축이나 집안의 물건들을 못 쓰게 만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물린 사람을 치료해 주고 죽은 가축을 슬퍼하며 땅에 묻어주고 집이 엉망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다 일까요? 아닙니다. 정말로 우리의 해야 할 일은 다시는 피해를 입지 않도록 그 맹수를 잡는 일입니다." 이 사람의 설교는 바로 그 알코올 중독자를 향하여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서 한참이 지난 뒤, 그는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 그 알코올 중독자가 죽게 되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너는 심판받을 줄 모르고 이런 악한 일을 행하였느냐?" 그러자 그 사람이 울면서 대답하기를, "만약 누가 나한테 이런 곳이 있다고, 또 하나님이 계시다고 일러주었더라면 저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내게 이런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꿈에서 깬 설교자는 순간 이 꿈이 자신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질책임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죄로구나. 나의 역할이 바로 저런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위임받은 것이거늘 그를 미워하고 징계하려는 대책만 세웠지, 회개시키지는 못하였구나.'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임하신 전도의 사역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하여 회개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하고도 절박한 것입니다. 지연이나 선택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풍우대작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깊고 선하신 뜻과 목적을 깨닫기 위해서는 요나처럼 철저한 회개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철저한 회개기도를 통하여 새롭게 되었습니다.(2장) 그는 이 기도를 통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므로 니느웨가 구원함을 받게 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요나같은 기독교인들이 먼저 철저하게 회개하여 거듭나야만 합니다. 지난 12월 4일자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밤 10시, BMW, 푸조, 사브 수입 외제차가 나란히 서있는 서울 힐튼호텔 앞에 빨간색 외제 스포츠카가 미끄러지듯 멈춰선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지 20대 여성은 모피 코트 차림이다. 차에서 내린 이 젊은 남녀 한쌍은 곧바로 지하 1층에 위치한 디스코텍 '파라오(태양의 아들)'로 팔짱을 끼고 들어간다. 디스코텍 '파라오'에 바로 붙어 있는 회의장에서는 한국 경제의 앞날을 결정하는 IMF회담이 열리고 있다. 회의장 앞에는 방송사 카메라 불빛이 환하게 비춰지고, 협상단이 들어 갈때마다 사진 플래시가 터진다. 디스코장에 들어가려던 젊은이가 "탤런트 왔어요"라고 물어왔다. 동반했던 친구는 "IMF가 도대체 뭔데 이 난리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밤 10시30분쯤. 임창열 부총리가 회담을 마치고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협의내용을 짧막하게 설명하고 있노라면, 같은 복도 한쪽편에서는 술취한 남녀가 서로 포옹하는 광경이 벌어진다. 한쪽에서는 한국경제 신화의 붕괴를 막으려는 회담이 열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신나게 춤추고 마시는 장면이 벌어진다. 회담장과 디스코텍이 있는 복도에는 화장실이 하나 있다. 술취한 고객과 회담 취재에 지친 기자들, 정부와 IMF의 협상 대표들이 모두 마주치는 장소다. 회담 대표들은 대개 아무런 말이 없다. 기자들은 '성장률을 3%로 축소하면 경제가 어떻게 되는가'고 논란을 벌이지만, 다른 손님들은 서울 강남의 어떤 디스코텍이 '물이 좋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회의장 맞은 편 복도에는 장당 10만원이 넘는 연말 디너쇼 티켓을 판매하고 있다. IMF 실무 협상단중 한명은 "하필 이런 회의장을 잡았는지 모르겠다"며 "찢어지는 음악을 들으며 회담을 하는 심정이라니…"라고 얼굴을 찌푸렸다. 밤 11시쯤 같은 호텔 입구에는 한 정부 고위 관리가 거나하게 취해 누군가가 쥐어준 듯한 선물 보따리를 들고 차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자가용을 타고 떠나면 디스코 텍에서 나온 청년이 외제차를 몰고 나간다. 이런 희안한 풍경은 IMF와 심야회담이 열린 지난 5일간 서울 힐튼호텔에서 거의 매일 등장했다.>

어느 일간지 만평에 나온 그림 내용입니다. 만평 제목은 "누굴 탓하리오...."입니다. 상투머리에 외제 나이키 셔츠를 입은 어느 부유층 인사가 양담배를 입에 물고 신문에 난 기사 "경제 망친 관료들......"를 바라보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모습으로 "당장 모가지쳐야......"라며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가 앉아있는 쇼파는 수 천만원하는 이태리제 쇼파이며, 그 거실 안에는 일제 소니 대형 TV, 일제 아이와 AUDIO, 그 오디오에 기대어 있는 수 백만원을 호가하는 외제 골프채, 미제 대형 냉장고, 미제 컴퓨터, 수 억원을 넘나드는 벽화 등이 눈에 들어옵니다. 국산은 틀어맨 상투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주제에 만화 제목처럼 누굴 탓하며 "경제를 망친 관료를 당장 모가지 치라고....."큰 소리치고 있는가? 이제 나라를 부도낸 사람이 누구이든간에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불순종에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과 이 땅에 기독교인들을 바로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깨달았다면 요나처럼 하나님 앞에 구원을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 기독교인의 부르짖는 기도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꽃이 아름다워도 향기 없으면 꿀벌이 날아오지 않습니다. 모양은 없어도 향기가 있는 꽃에는 꿀벌이 날아드는 법입니다. 아무리 인물이 훌륭하고 지식과 재주가 많아도 기도의 향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꿀벌 같은 주님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못난이 바보 같을지라도, 또한 실수와 허물이 많을지라도 기도의 향기가 충만한 사람에게는 꿀벌 같으신 주님이 찾아가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의 기독교인이 철저히 회개하며 사명을 자각하고 사명을 바로 감당하고자 나라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향기나는 기도가 되어 꿀벌같으신 주님께서 이 나라를 새롭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유명한 이성봉목사님의 일화입니다.

<6.25 때 공산당들에게 검속되어 많은 악형을 당하고 나와서 식구들과 같이 남의 행랑방에서 많은 고생을 할 때에 우리 어린 딸이 "아버지 ! 이제는 인민공화국이 되었습니까? 대한민국은 망했습니까? 이거야 어떻게 살겠어요?"라고 말했다. "오! 내 딸아, 걱정 말아라. 공산당은 지금 승리하는 것 같지만 거기는 기도하는 자가 없단다. 스탈린은 기도할 줄 모른다. 모택동도 김일성도 기도할 줄 모른단다. 공산당은 기도하는 놈 보구 죽을래두 한 놈도 없단다. 그래두 우리 대한민국에는 기도 하는 사람이 많단다. 우리 대통령도 기도하시구, 장관 가운데도, 국회의원 가운데도, 경관 가운데도 군인 가운데도 못된 사람도 많지만 기도하는 사람이 있단다."라고 했다. 기도의 응답 없다고 그렇게 낙심 말아라, 만사에 때가 있나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만 더 기다려라 하고 노래를 지어 불렀다. 과연 미구에 하나님은 남한만이라도 바로잡아 주시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하나님이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자. 깨어 기도하라.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무기이다. 정신 차리고 기도하자. 쉬지 말고 기도하자.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고 주님은 부탁하셨다. 이 세상 험하고 내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이 땅에 모든 재앙을 불순종과 사명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이 나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바다에 던져지는 고난과 죽음이 있다해도 그 길이 바로 배에 탄 사람들과 악독으로 가득찬 니느웨를 구원하는 길입니다. 죄악과 악독으로 가득찬 이 나라가 구원받는 길은 바로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라고 말할 수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습니다. 이 나라에 임하고 있는 재앙과 풍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제비를 뽑는다면 기독교인들이 뽑힐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 백성들은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고 외치고 있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말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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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겨울에 피는 꽃

"(렘1: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렘1: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본문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나라 민족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을 때의 기사입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를 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살구나무는 감복숭아로 히브리어로는 "샤케드"입니다. 샤케드는 이스라엘과 북부 아프리카에 서생하는 식물로서 흰 꽃이 피며 열매가 열립니다. 샤케드는 1월에 꽃이 피는 특수한 나무로서 <겨울꽃>이란 별명이 붙어있습니다. 에델바이스가 눈 속에서 꽃이 피는 것과 비슷한 성격의 꽃입니다. 하나님이 청년 예레미야에게 샤케드 꽃을 보게 한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레미야에게 희생의 길을 택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추위 속에서 꽃피는 샤케드처럼 희생적인 정신으로 예언하라, 다시말해 희생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에언하며 "이스라엘 백성아,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는 설교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조국의 멸망을 예언하며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참다운 예언자가 되기 위해서는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샤케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신 목적이었습니다. 샤케드가 지니는 또 하나의 의미는 "내 말이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를 깨어 지켜보리라."는 것입니다.(성경 난하주 참조 : 비슷한 발음인 쇼케드의 뜻을 말합니다.) 즉 깨어 지켜보는 하나님이 네 곁에 있으므로 나이가 어리다느니, 경험이 부족하다느니 하며, 요시야 왕과 그 막강한 세력을 두려워하는 염려를 버리고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샤케드, 겨울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청년 예레미야는 용기 백 배하여 희생의 길을 나섰습니다. 희생의 길, 샤케드의 삶을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쓴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봄꽃이나 여름꽃이 좋지 왜 하필 내가 겨울꽃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은 누구나 갖게 됩니다. 예수께서도 오죽 하셨으면 십자가의 쓴잔을 앞에 두고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옮겨주소서."하고 기도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죽음의 겨울 바다 같은 이 세상에 생명의 겨울꽃을 피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여러 번 강조하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이며 하나님은 사랑과 희생의 제물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고 신앙생활의 핵심을 말하였습니다.

1. 예레미야에게 보이고 아론의 지팡이에 꽃피었던 겨울꽃, 샤케드는 오늘날 우리의 가슴에서 꽃피어야 하겠습니다. 어느 율법사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질문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되물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자 이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눅10:30)...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비유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강도입니다. 강도는 남에게 고통과 아픔, 피해를 입히는 사람입니다. 둘째,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이들은 요즈음 말로 하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들은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피하여 지나가 버린 무자비한 사람들로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실속만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천대를 받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이 유대인이든 아니든 가리지 아니하고, 또한 그들로부터 어떠한 대접을 받고 있든 개의치않고 강도만나 고통가운데 죽어가는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 이야기에서 처럼 이웃에게 고통을 일으키며 고통을 주는 자와 이웃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 무자비한 사람, 그리고 이웃의 고통을 싸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은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웃에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자비한 사람에 대해 처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영육간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분명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죄악입니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25: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겔3: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겔3: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겔3:20)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겔3: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제노비즈의 경우>(Genovese Case)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뉴욕 퀸즈에서 발생하였던 실화에서 나온 말입니다. 1964년에 키티 제노비즈가 살해되었습니다. 이 여자가 공격을 받고 살해되는 장면을 설흔 여덟 개의 얼굴이 창문에서 바라보았는데 한 명도 경찰을 부르거나 나가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뒤에 그들을 심문하였는데 38명이 한결같이 "다른 사람이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최근 미국의 몇 개의 주는 위기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가령 로드 아일랜드의 경우 이런 무관심한 자에게 5백달러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벌금이 무서워 남을 도울 정도라면 수준 이하일 것입니다. 문민정부는 '양파정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양파는 껍질을 벗겨내고 벗겨내도 알맹이는 없고 눈에서 눈물만 흐르게 만듭니다. 한마디로 문민정부는 껍데기뿐이며 백성에게 고통의 눈물만 안겨주었습니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 땅에 고통받는 나라와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한 족속들도 하나님의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들은 고통당하는 나라 백성들을 외면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정녕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싸매주어야 할 것입니다. 영육간에 추운 겨울을 만난 이 나라 백성을 위해 희생적인 사랑으로 겨울꽃, 샤케드를 피우시기를 바랍니다. 청량리 굴다리 밑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밥지어 그들의 허기를 채우는 다일공동체는 이 시대 우리 한국의 사마리아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밥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이란 책에 나오는 그들의 희생적인 복음전파의 한 단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서 아침기도를 올리고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점심밥을 짓고, 만든 밥과 국 반찬들을 들고 내려가 손수레에 실어서 채소시장까지 운반하여 배식했다. 처음엔 밥을 나눌 수 있다는 기쁨과 공동체생활을 시작했다는 감격에 들떠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일들을 처리해냈다. 그러나 날마다 봉사팀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무거운 음식통을 6층 옥상에서부터 아래층까지 들어나르기란 정말 힘이 들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사력을 다해 음식을 만들고 기쁨으로 음식을 운반하고 쓰레기더미 속에서도 감사함으로 나누어 먹었다. 음식 만드는 봉사에 힘을 모았던 교회 중 주님의 교회 소망교회 은현교회 새바람교회 신장위교회 등 다섯 교회가 제일 처음 참여해주었다. 봉사자들이 만들어내는 음식은 메뉴도 새롭고 다양했다. 뿐만 아니라 정성을 다한 음식이라 정말 맛있었다. 윤기 흐르는 밥과 영양가 있고 따뜻한 국과 맛깔스러운 반찬들이 매일 나누어지자 밥상공동체 식구들은 날로 늘어갔다. 처음엔 40∼50명쯤 되던 식구가 한 달도 못되어 70명, 그 다음달은 1백명이 되더니 석달만에 1백50명으로 늘어나고 말았다.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은 행려자와 무의탁 노인뿐이 아니었다. 청량리 채소시장 언저리에서 찌꺼기 야채를 모아 파는 영세 좌판상 할머니들과 근처의 가난한 상인들, 학교에 다니지 않는 가난한 어린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밥 먹는 사람들에게 어떤 제한을 두지 않았다. 배고픈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함께 먹을 수 있다는. 우리의 태도에 불만을 품는 봉사자들도 있었다. "저 사람은 옷차림으로 보아 얻어 먹을 사람이 아닌데요. 아니, 왜 멀쩡한 사람까지 밥을 주어야 하나요?" 그러면 한 마디로 대답했다. "집에서 따슨 밥 편히 먹을 사람이 한 끼 얻어 먹자고 이 냄새나는 쓰레기더미 앞에서 몇 시간씩 줄서서 기다리겠어요? 겉으론 그래 보여도 아마도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일부 자원봉사자들 가운데는 '오직 기쁘게 봉사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하는 내 생각과는 달리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팀이 의외로 적지 않았다. 어디에나 있을법한 일이기에 그저 참고 말없이 봉사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길 기도할 도리밖에 없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밥을 나누면서 말로 하는 선교행위를 일절 하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도 예수님이니 어느 교회니 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기로 작정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자원봉사자 식구들에게도 예수의 '예' 자도 꺼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면 신학교에 갓 들어온 풋내기 신학생이나 처음 봉사하러온 열성쟁이 집사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그럼 밥 먹이는 것 자체가 교회의 목적이란 말이에요?"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해야지요, 전도를 '밥만 주나요? 말씀을 줘야지요." 그럴 때마다 나는 말했다. "밥 한 그릇으로 예수님을 팔 생각입니까? 우리가 아무 말 안해도 정말 예수님 사랑으로 저들을 대하면 끝내 예수 사랑을 다 알게 되고 저 분들도 다 천국 가게 될 겁니다. 내 말을 듣고 아무 생각 말고 언제나 친절하게 웃으며 밥이나 퍼드리세요." 그래도 그네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심지어는 밥 푸던 주걱을 놓으며 "난 더 이상 인본주의자들과는 함께 일 못해요." 하고 토라져가는 예수쟁이 같지 않은 예수쟁이도 있었다. '예수쟁이'라는말이 나왔으니 생각나는 '사건' 하나가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한번도 전도사란 말을 쓰지 않았다. 누가 내 이름을 묻거나 직업을 알고 싶어하면 그냥 "예, 최씨입니다. " 라고만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 사이에 매일 밥해 가지고 나오는 그 키 큰 젊은이가 누구냐는 말이 오갔던 모양이다. 하루는 두 패로 나뉜 사람들이 다가오.더니 그중 한 노인이 물었다. "최씨, 최씨는 성당 댕기는 사람이지유? 누가 그러는데 신부님인가, 수사님인가 말하던디유?" 그러자 다른 한 쪽에 있던 사람이 반박했다. "아녀, 그게 아녀. 최씨는 교회 댕긴다더먼, 뭔 소리여." "아이고, 교회에서 이런 일 하는 것 봤남? 내가 알기로는 이런 일은 다 성당에서 하더먼그랴?" "그래도 지난번에 왔던 어떤 여자분에게 내가 살짝 물어봤더니, 자기는 집사라고 허고, 저 양만은 전도사라고 하던디," "그럼 뭐가 진짜로 맞는대유? 속 션하게 말이나 해주셔유." 그들의 말을 듣다보니 우습기도 하고 교회에서 좋은 일 하는 건 못 보았다는 말에 가슴이 저려오기도 했다. 그래도 그들의 말을 못들은 척하며 대답했다. "최씨예요. 그냥 밥집 아저씨라고 부르든지 최씨라고만 하든지 맘대로 하세요." 그러자 전도사라고 자신있게 말하던 사람이 시체말로 열받았는지 한마디 던졌다. "아하, 이제 알았다. 전도사는 전도산디, 전도사라고 말할 수는 없는 사람이로구나. 데모하다가 제적을 당했든지 시국사건으로 '큰집에 갔다 왔든지 말여." "암,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신분을 못 밝힐 리가 없잖은가." 옆사람이 또 거들었다. 그래도 그 말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돌아섰다. 그러나 '저사람이 누군가?' 하는 시비는 쉽게 끝나질 않는 듯 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형사 한 사람이 나눔의 집으로 찾아왔다. 낯선 사람은 나를 보자 대뜸 물었다. "간첩이 나타나서 거지 떼에게 밥해주며 가난한 이들을 선동한다기에 일단 현장 조사를 하러 나왔습니다. 여기 저기 알아보니 최 전도사님이 시인이시고 곧 장로교 목사님이 되신다는 건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청량리역 광장에서 좋은 일하시는 것까지도요. 하지만 그들이 최 전도사님께 밥을 얻어 먹고도 간첩일지 모른다고 신고까지 하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글쎄요, 얼마 전 그들이 모여 내가 누구냐고 자꾸 묻기에 그저 최씨라고, 밥집 아저씨'라고 했더니 수상쩍게 생각했나보군요." 하도 기가 막혀서 그만 하하웃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그 형사도 웃음을 터뜨리며 이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우리 청량리 경찰서 관할 내에서는 전도사님에 대해 소문이 좌악퍼져 있어요. 전도를 할 바에야 저렇게 어려운 현장을 직접 뛰며 전도해야 진짜 전도라고요."〉

복음전도는 고통받는 삶의 현장에서 사랑으로 희생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 가운데는 병들어 고통 당하는 사람을 신유의 은사를 통해 고침받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교회가 부흥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목적삼는 교회와 기독교인이 없지 않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신출귀물한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온 인류가 받은 상처의 아픔과 고통을 몸소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의 쓴잔을 땅에 쏟아버리지 아니하시고 친히 그 잔을 받으시고 온 인류를 위해 겨울꽃을 피우셨습니다. 겨울을 만나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샤케드, 겨울꽃을 피우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샤케드의 두 번째 의미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꽃을 피우라는 것입니다. 자동차 뒤에 붙이는 스티카 글(Bumper Sticker) 중에 이런 좋은 말이 있었습니다. "네가 심어진 장소에서 꽃을 피우라."(Bloom where you are planted) 이 격언을 신앙 면에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심어 주신 이 교회에서 내가 꽃을 피워야 한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한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안타까운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쁨과 만족과 보람은 교회생활에 푹 파묻혀 봉사하고 성도의 교제를 천국으로 알고 온 가족이 그 교회를 뿌리로 해서 가지를 뻗고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 생활이 만족이 있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동화 중에 「토끼 브레어」(Brer rabbit)가 있습니다. 브레어 토끼는 어느날 같은 시간에 두 집에서 만찬 초청을 받습니다. 일찌감치 집을 떠나 갈래길까지 왔습니다. 오른쪽 길은 테라핀씨 집으로 가고 왼쪽은 포숨씨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어느 집이 잘 차렸을까?' 브레어 토끼는 왼쪽 길로 조금 가다가 아무래도 미세즈 테라핀의 요리 솜씨가 나을 것 같아 오른쪽 길로 갔다가 한참 동안 이렇게 두 길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두 집 파티가 다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브레어 토끼는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하나뿐인 인생을 실패작으로 남기게 됩니다. 엘리야 선지는 갈멜산에 모인 민중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길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겠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왕상 18:21)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서는 자리를 확실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물질의 우상, 황금의 우상, 섹스의 우상인 바알신과 아세라신에게도 기웃거리고 관심을 보내면서 두 길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 대통령 선거 중에 이런 말이 돌았습니다. 어느 후보가 당선되면 미국으로 이민가겠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제아무리 우리 나라가 추운 겨울같아도 하나님의 부름받은 내 나라 내 땅에서 샤케드, 겨울꽃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심겨진 장소에서 꽃을 피우는 샤케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25일자에서 한국 경제는 황제 행세하는 재벌총수들이 망쳤다면서 한국인들 앞에는 길고 혹심한 겨울이 기다리고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주요기사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민총생산의 절반을 잃어버린 한국은 10년을 후퇴했는데 이는 오로지 재벌을 소유하고 경제를 지배하고 있던 30대 혈족 때문입니다. 부채가 자기 자본의 4배를 넘으면 서구에서는 곧바로 파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들의 외형 부풀리기를 향한 경쟁은 광란을 넘어 정신착란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서울의 한 고위 관리는 "한국사회는 지난 10년동안 민주화됐으나 재벌만은 과거의 독재적 문화에 젖어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재벌은 다국적 기업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사이비종교처럼 기능했다."는 것입니다. 재벌 총수들은 유리와 철강으로 지어진 빌딩 속에 갇혀서 경호원에 둘러싸여 있었고, 참모들이 외부세계와 필터 역할을 했으며, 그들은 스태프진에게 우상숭배에 가까운 경배를 받으면서 세계 최고 갑부행세를 하는 등 마치 옛 황제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반대를 받은 적도 없고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삼성 그룹의 상속자인 이건희 회장은 기계에 열광하고 페라리 자동차 수집가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삼성마크의 자동차를 갖고자 집착했습니다. 한 재벌 총수의 욕망 때문에 이미 포화상태인 자동차 산업에 무모하게 투자하여 1백억 프랑을 단숨에 창밖에 던져버렸습니다. 왜 그토록 강력한 권한을 지닌 청와대가 재벌들의 고삐를 놓아버렸는가? 한국의 한 기자는 "금년 초 한보철강이 망했을 때 아무런 보증도 없이 은행에서 대출받은 45억달러중 60%만 투자되고 나머지는 한보의 총수와 수 십명 정치인들의 호주머니로 사라졌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재벌 총수 여러 명과 두 명의 전직 대통령 그리고 현 대통령의 아들이 관련된 재판은 이러한 부패의 위중함을 잘 드러내주었습니다. 거인이 돼버린 재벌들은 돈으로 정치를 사서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정치권에 음성적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얻어진 영향력 덕분에 재벌 총수들은 정부가 통제하고 있는 국민저축을 빨아먹었고 은행들을 피흘리게했습니다. 재벌 총수들은 파라오같은 야망과 세계 정복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을 파산의 나락으로 몰고갔던 것입니다. 칼국수먹던 청와대는 이제 피죽도 못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국인들 앞에는 길고 혹심한 겨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라의 앞날은 비록 추운 겨울이라 할지라도 겨울에 핀 한 송이 샤케드를 우리가 사는 울산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어느 일간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뇌사 판정을 받은 12세 소녀가 8명의 난치병 환자에게 새 삶을 선사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소 백의의 천사가 되겠다던 정영주(울산 명정초등학교 5)양이 친구들과 놀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게 지난 18일. 악성 뇌종양이었고, 23일 뇌사 판정을 받았습니다. 정병호(34)-이미연(34)씨 부부는 가슴에 묻을 자식 사랑을 장기이식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부산 백병원에서 실시한 장기적출 수술은 먼 곳의 환자들에게 장기가 빨리 전달될 수 있도록 25일 오전 5시에 시작돼 6시간여 만에 끝났습니다. 영주양의 심장과 폐는 인천 길병원에서 심장병과 폐질환을 앓는 이들에게, 간은 부산 고신복음병원에서 선천성 담도폐쇄증을 앓는 생후 14개월된 아기에게 이식되었습니다. 신장과 각막, 연골도 다른 환자들에게 옮겨졌습니다. 우유배달원과 보험설계사로 일했던 어머니 이씨는 영주 이름으로든 보험적립금 3백60여 만원을 어려운 이웃에 써달라며 교회에 헌납했고, 영주 또래 어린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고 싶다며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부산본부에 사후 장기기증을 약속했습니다.>

이 땅에 겨울이 아무리 길고 춥더라도 한 송이 꽃, 샤케드를 피울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환난과 고통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고통와 아픔을 친히 십자가에 걸머지신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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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사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사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사55:4)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사55:5)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사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사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사55:12)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사55: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여 구원받지 못한 모든 인생들을 "목마른 자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러므로 "물"은 구원을, "포도주와 젖"은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세 종류의 음료수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 먹으라 말씀하십니다.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사 먹으라"는 말은 모순된 말씀입니다. 산다는 것은 돈 주어 값을 치룬다는 것인데 "돈 없이, 값 없이" 사 먹으라는 것은 영적 신령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죄의 용서함을 받을 때는 반드시 그 값을 치루었습니다. 송아지나 양 같은 속죄의 제물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히9: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히9: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런데 파격적인 속죄의 방법, 구원의 방법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돈 없는 자" 누구나 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다 거저 오라는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 이미 그 "물과 포도주와 젖"값을 다 치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거저 와서 신령한 영적 양식을 값 없이 먹으라는 것입니다.

"(히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께서 인생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권고하십니다.

"(사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여기 "양식 아닌 것"과 "배부르게 못할 것"은 이 세상 부귀나 영화나 쾌락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가 신기루 같아서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로 인간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혹심한 포로 생활로 육과 영이 아울러 지치고 곤고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사55:2)....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만이 참된 만족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복음을 영접하여 순종하는 것만이 인간의 참된 양식과 음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본문은 이를 두고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를 "돈 없이, 값 없이"와서 거저 먹으라는 것이니 "확실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 나와 믿기만 하면 그 어떤 죄인도 "돈 없이, 값 없이"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은 남의 잘못을 마음에 두고 용서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회개하고 예수 앞에 돌아온 사람의 과거를 마음에 기억하시지 않으십니다. 인생은 어러번 거듭 용서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아니 끝없이 용서하십니다. 인생은 큰 죄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제아무리 큰 죄일지라도 흰 눈같이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확실하고 영영한 표징으로 약속하신 것이 본문 12,13절 말씀입니다.

"(사55:12)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사55: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 영영한 표징 가운데 하나가 오늘 말씀의 제목인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잣나무가 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사는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젖과 꿀"이 흐르는 에덴 동산에서 가시나무의 땅으로 붸겨 났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죄인들이 사는 세상이 바로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무성한 땅이며 땀을 흘려야만 먹을 수 있는 땅이며 필경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숙명의 땅입니다. 그러나 이 가시나무 이야기는 은혜의 이야기로 매듭지어집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시나무 세상을 향하여 걸어가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다는 이 한마디 속에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있고 배신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가 있습니다. 이 가죽옷은 가시에 찔려도 상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그리고 그의 보호하심에 대한 표징입니다. 그것은 거친 땅을 갈고 땀흘려 일해야 할 아담과 하와에게 도움을 주시는 작업복이요, 전투복이었습니다. 이 가죽옷은 하나님의 은혜의 옷이며 인생 전투장에서도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상징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바람과 파도가 심했습니다. 제자들은 절망하였습니다. 사람의 노력이 쇠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 속에, 그 물결을 딛고 주께서 오고 계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그들의 눈이 안 보였을 뿐입니다. 주님은 새벽 세 시, 그들과 함께 어둠 속에 계셨던 것입니다. 한 여자가 길바닥에 엎드려 있습니다. 머리는 흩뜨러지고 옷은 찢겼습니다. 간통의 현장에서 끌려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나운 낮으로 돌멩이를 들고 있습니다. 숨겨진 죄인이 드러난 죄인을 심판하려는 장면이었습니다. 죄책과 수치, 가족과 친구들에게 면목없는 얼굴 잃은 여자였습니다. 얼굴과 어깨와 그 상한 가슴에 돌 세례가 날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이 가련한 여자 곁에 한 남자가 쭈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돌을 던지면 나도 함께 맞겠다는 듯, 침을 뱉으면 나도 함께 더러워지겠다는 듯, 그 남자는 무엇인가 땅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해 못했으나 그분만은 이해하셨고, 아무도 용서하지 않았으나 그 분만은 용서하셨고 아무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으나 그분만은 곁에 앉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하나님 예수, 주님은 사나운 거리에서 외로운 여자 곁에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머리가 가시나무에 찔려 피가 납니까? 여러분의 가슴에 가시나무 가시가 박혀 고통스럽습니까? 여러분의 손과 발에 온통 가시나무에 찢겨 피투성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시나무 이야기를 들으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시나무 이야기를 은혜의 이야기를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말해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잣나무가 나게 할 것이며, 질려를 대신하여 화석류가 나게 할 것입니다. 가시나무에서 잣나무 열매가 나거나, 질려에서 화석류가 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가시나무와 질려를 뿌리 뽑아 버리고 잣나무와 화석류가 나도록 바꾸어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꾸어 놓는 역사를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고장난 부문을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새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수선사가 아니라 새 것을 창조하는 자이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시나무와 질려는 모두 사막의 식물들입니다. 그것들은 사막에서 그늘도 제공하지 못하고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닙니다. 사막의 나그네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움이 안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가시나무와 질려는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화석류와 잣나무를 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기도 좋고, 그늘도 제공하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유익한 나무들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끌려 가서 이미 60년이나 고생하고 있는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 것입니까? 외국에 강제 이주된 그들은 외로웠습니다. 고통의 포로 생활, 강제노동은 정말 괴로웠습니다. 60년이 지나도 해방의 소식은 까마득한데 또 한 세대가 지나갑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2 이사야는 외쳤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막의 가시와 질려 같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잣나무나 석류로 만드십니다. 눈물의 날을 기쁨의 날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 답답하고 아픈 마음을 평안한 마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실제적으로도 이루어져 이스라엘은 해방되어 춤을 추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기쁨의 역사가 생각치도 못한 짧은 세월 안에 생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소망 중에 기다립니다. 삼손이 어느 날 골짜기에서 사자를 만나 때려 눕혔습니다. 며칠 후 같은 장소를 지나다 보니 어느새 벌들이 죽은 사자의 몸에 둥지를 짓고 꿀을 저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수수께끼의 문제가 되어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달콤한 것이 나왔다."(삿 14:4)는 신앙의 진리가 되었습니다. 사자는 죽음과 절망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망을 바꾸어 달콤한 꿀로 바꾸신 것입니다. 실상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옛 것을 새 것으로 바꾸시는 이야기들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계속되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흑암을 광명으로,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악과 죄가 지배하던 세상을 하나님의 공의가 퍼지는 천국으로 바꾸어 놓고 한숨대신 찬송을, 눈물대신 기쁨을, 죽음이 있던 곳에 영생을 바꾸어 놓는 이야기로 성경이 끝나고있습니다. 신앙이란 나를 바꾸시는 하나님, 세계를 바꾸시는 하나님, 교회를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적인 죄의 정의는 바꾸시려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 죄입니다. "나는 바꾸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그대로의 나대로 남아 있겠습니다."고 말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 놀라운 일 곧 나를 바꾸어 주시는 일을 값없이 해주시기 때문에 이것을 바울은 은혜라고 이름붙였습니다. 본문 이사야서 55장 첫 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은혜의 약속입니다. 메마른 사막이 변하여 샘물이 쏟아지는 낙원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유명한 성 프랜시스의 기도는 기독교의 진리를 잘 표현하였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함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흑암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이것은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헛수고입니다. 성경의 방법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랑이 대치될 때 미움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우리는 계속 상함(hurt, injury)을 받습니다. 나에게 상함을 주는 사람을 설득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본을 받아 용서가 대치될 때 상함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심은 믿음이 대치되어야 해결점을 찾고 내 마음이 답답하고 어두울 때 답답한 원인들을 찾아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 주시는 소망의 빛이 내 속을 밝히는, 바꾸어 받는 역사가 있을 때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롬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습니다. 나에게서 죄악된 요소를 하나씩 둘씩 제거해 보려는 노력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됩니다. 선을 대치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곧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말씀을 충만하게 채우면 악은 이슬처럼 사라집니다.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 얼마나 고맙고 감사합니까? 선생님이 내 주신 도화지에 물감을 쏟아 못쓰게 되었습니다. 재생불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그려보라고 새 도화지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이 중생이며, 거듭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새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운 말씀은 우리의 육체까지도 새로운 몸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는 나를 욕된 몸으로 만들었으나 하나님은 영광된 몸으로 바꾸어 주시며, 약한 몸이 되었으나 강한 몸으로 바꾸어 주시고, 제한된 세월을 살다가 썩어지는 이 몸을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순간 우리는 무엇보다도 새 출발의 믿음을 우리의 묵은 생활, 실패의 자국에 바꾸어 받아야 하겠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동안 누워 있던 병자는 절망의 침상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38년이나 된 절망의 자리에 믿음이 바뀌어 놓인 것입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남보다 먼저 동작해 보려던 38년간의 긴 인간적 노력, 그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이 바꾸어 놓일 때 해결이 온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 어떤 걱정,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을 죽여야 하는 통곡의 제단 위에 어린 양을 바꾸어 주신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 곧 준비하는 하나님, 슬픔을 기쁨으로, 약함을 능력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잣나무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고 가시밭과 질려 같은 여러분의 삶이 잣나무와 화석류로 가득한 기쁨과 축복이 가득한 삶으로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시나무와 질려는 사막에서 자라고 석류와 잣나무는 비옥한 땅에서 성장하기 때문에 가시나무가 있던 자리에 잣나무가 대치된다는 말씀은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사막이 변하여 낙원이 된다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예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져 살은 찢기고 피가 흘렀습니다. 골고다의 가시면류관 이야기는 용서의 피와 낙원 회복을 선언하는 사랑의 표징이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누추함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는 다 쏟아주시고 다 내어주시고 조용히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의 가시면류관을 물려받아야 합니다. 내 살이 찔리고 내 가슴이 찔려도 그 가시가 사랑을 위한다면, 그 가시가 구원을 위하고 에덴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기쁘게 그 가시관을 쓰는 것이 우리들의 가시나무 이야기입니다. 바울에게는 가시가 너무 많았습니다. 줄곧 몸에 병은 몇 가지씩 있고, 살기는 힘들고 가슴아픈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가시들을 없애달라고 결사적인 기도를 세 번이나 드렸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대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깊이 깨닫고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도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12:7-10참조)고 외쳤습니다. 예수의 능력이 내 속에 머물러 나도 그리스도처럼 강해지기 위해서는 예수의 가시가 나에게도 필요하다는 말인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하늘의 광채를 맞고 쓰러졌을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행26:14)....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예수믿는 것이 가시채와 같이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제자가 되는 길은 형자의 길 곧 가시밭 길입니다. 그러나 가시채를 뒤발질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시를 피하는 것이 곧 행복이 아닙니다. 예수는 머리에 씌우는 가시관도 받고 손과 발에 박히는 못도 받고 옆구리를 꿰뚫는 창도 받으셨습니다. 그분의 찔림 때문에 우리가 고침을 받고 그분의 아픔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골고다의 가시나무 이야기가 구원의 이야기, 은혜의 이야기라면 우리들이 가시를 싫어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이야기는 한산한 미디안 광야,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내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져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시는 교회가 고침을 받는다면, 내 가슴에 가시가 박혀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가 나음을 입는다면, 내 손과 발에 온통 가시가 박혀 고통스러워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교회가 기쁨이 된다면, 그 가시들을 싫어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세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사명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때가 되면 가시나무 대신에 잣나무를, 질려 대신에 화석류가 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시나무와 질려 이야기가 잣나무과 화석류의 이야기로 하늘 나라에 기록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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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네 뒷맛이 쓰지않겠느냐?

(Do you not know that the end will be bitter?)

"(삼하2:24)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가 기아 맞은편 암마 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삼하2:25) 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떼를 이루고 작은 산꼭대기에 섰더라 (삼하2:26)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삼하2:27) 요압이 가로되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의 말을 내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삼하2:28)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1.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임기 중에 인기 있는 대통령이 되기보다는 임기 후에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시작보다는 나중에, 다시 말해 뒷맛이 괜찮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당선된 대통령은 부디 그렇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98년도 한 해의 시작이 비록 쓰다할지라도 그 뒷맛까지는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의 세 아들이 전사하고 사울마저 자결하므로 사울의 왕권이 끝이 나고 그의 가문 역시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된 다윗은 망명지 시글락에서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다 땅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오직 유다 지파만을 통치하는 불완전한 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의 마지막 남은 아들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도움을 받아 왕권을 계승하여 이스라엘 열 한 지파의 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보셋과 대립하면서 전 이스라엘에 대한 왕권을 확립해야 하는 과제, 즉 민족 통일의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희망이었던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비참하게 죽어 국가의 존립에 큰 위기가 닥쳤고, 백성들은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누군가 능력 있는 왕이 나타나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끌어 줄 것을 고대했었던 때에 다윗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 왕은 흩어진 온 이스라엘의 마음을 하나로 연합시키기에 충분한 인격을 갖추었습니다. 즉,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그의 애가(1:17-27),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베푼 공정한 호의(사울 왕의 시체를 장사지낸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적인 복을 빌고 그들에게 선정을 베풀 것을 약속했다는 점,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내편이든 원수편이든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베풀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는 공의로운 통치였습니다. 4 - 7절), 적군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 군대와의 대치에서 보여 준 수동적 방어 자세(12-15절), 적장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한 일(3:31-34) 등등 그가 백성들 앞에서 보여 준 행동 하나하나는 바로 그의 연단된 인격에서 나온 보배로운 것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그의 연단된 훌륭한 인격 안에서 분단된 국가를 하나의 통일 국가로 연합시켰던 것입니다(5:1-5). 이렇게 볼 때, 다윗이 그간 약 15년 동안 사울에게 쫓겨 광야에서 방황한 것은 그를 신정왕국의 강력한 왕으로 세우기 위해 불로 연단하신 하나님의 연단의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이제 때가 되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역시 어떠한 시련을 당하더라도 이와 같이 빈틈없는 하나님의 완전 무결한 섭리를 믿고, 그 고난을 자기의 신앙 인격을 키워나가는 기회로 삼는 긍정적인 신앙을 가야 할 것입니다(약 1:2-4). 그야말로 인생의 뒷맛이 쓰지 않도록 어떠한 삶의 고난과 아픔도 신의 성품, 성령의 열매를 맺는, 신앙의 인격 성장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2. 사울왕이 죽은 뒤, 왕자 이스보셋을 옹립하는 이스라엘 왕조 계승파와 다윗을 왕으로 모시고 유다 왕국을 창설한 파로 민족 분열을 가져와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은 곳곳마다 다윗 편이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의 참모총장이었던 넬 장군의 아들 아브넬이 청년장군으로서 이스라엘 군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전세가 기울어지자 부하들을 이끌고 요단 강 건너편으로 멀찍이 피신 길에 오릅니다. 이 망명군을 추격한 것이 유다의 3총사라는 3형제 장군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쫓는 자나 쫓기는 자나 얼마 전만 해도 같은 왕 사울 밑에서 용맹을 떨치던 동족이며 친구이며 전우들이었습니다. 암마산 봉우리에 몰린 아브넬이 추격하는 요압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삼하2:26)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이 번역은 영어번역(RSV)이 잘 살리고 있습니다. Do you not know that the end will be bitter. "뒷맛이 쓸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칼이 우리 민족의 문제를 영구히 해결할 줄 아느냐? 네가 형제인 나를 죽여 봐야 뒷맛이 쓸 것은 분명하지 않느냐?"하는 외침이었습니다. 이 한 마디를 듣고 요압은 추격을 중단하고 돌아가 버립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생각할 인생의 중요한 질문입니다.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하는 물음을 나 자신에게 언제나 물어야 합니다. 먼저, 아브넬이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 하는 질문으로서 요압의 반성을 촉구한 내용은 일시적인 성취가 성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산봉우리에 몰린 아브넬은 독 안에 든 쥐였습니다. 최후의 일격으로서 그의 목을 자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역사를 후세까지 내다볼 때 동족상잔과 형제의 피를 홀린 것이 정말 승리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뒷맛이 쓸 것이 분명하므로 실패인 것입니다. "일시적인 성취를 생각할 것인가? 나의 인생 전체를 내다보며 뒷맛이 쓰지 않을 발자국을 남길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기 인생의 뒷맛에 대해 자신하고 있었던 한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었던 부자 청년은 영생을 자신하고 예수께 찾아갔지만 그가 소유한 많은 재물을 처분하고 예수를 좇으라는 말씀에 쓴맛을 다시고 예수에게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도덕 수준과 경제 수준이 제아무리 높을지라도 예수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아니하면 인생의 뒷맛이 쓸 수밖에 없습니다.

"(마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가롯 유다는 은 삼십에 자기 스승을 배반하고 삶의 쓴맛을 마시고 말았습니다.

"(마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여러분 삶의 뒷맛이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할지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아브넬이 자기를 추격하는 젊은 장교 요압을 향하여 "네가 취하고 있는 행동이 뒷맛을 쓰게 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외친 내용은 적어도 한 인생의 결론을 생각하라는 반성의 촉구였습니다. 요압이 아브넬의 목을 가지고 돌아가면 새로운 왕국 유다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의 목을 잘라 영웅이 되는 것이 요압의 인생 전체를 두고 볼 때 과연 성공일까? 사람은 죽는 순간에 가서 후회를 안 남기도록 살아야 합니다. 인생 도중에서 갖는 몇 번의 쾌감이나 수차의 성공감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인생의 막이 내릴 때 뒷맛이 쓰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날마다의 문제입니다.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 하는 것은 나의 모든 결정과 모든 생각과 모든 행동에 결부시킬 문제입니다. 권력을 탐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십자가의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마시려는 잔이 무슨 잔 인줄도 모르고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지막 발을 옮겼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향한 전진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 중에 예수를 존경하는 인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헤롯당의 내부기밀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권력층 내부의 인사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찾아와 귓뜸을 해주었습니다. "여보십쇼, 헤롯 일당이 당신을 살해 할 계획을 추진 중이니 예루살렘에는 가지 마시오." 이때 예수는 결연히 말했습니다. "그 여우에게 돌아가서 내 말을 전해 주오. 예수는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자기의 길을 계속 갈 것이라고."(눅 13:33)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 위에서 최후의 개선가를 부를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신의 길, 십자가의 길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남들이 나사렛 시골뜨기라고 흉을 보든 말든, 술을 좋아하는 자라고 욕하고, 창녀와 세리와 어울린다고 비난하고, 어머니와 형제들까지도 이해해주지 않고, 제자들마저 예수의 길을 돌이키게 하려하고, 위협과 공갈이 길을 막았지만 그는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십자가의 길을 충실히 걷겠다는 결의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현재는 썼지만 뒷맛을 쓰게 만들지 않은 성공의 비결이었다. 카나다의 유모어에는 뉴피(뉴 파운드랜드 사람을 경멸하는 "촌놈"에 해당하는 말)에 대한 이 야기가 많으며 모두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뉴 파운드랜드의 하이웨이를 두 차가 교차했는데 두 차의 운전하던 사람은 모두 죽고 차체는 둘 다 상한 데가 없었다고 합니다. 운전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창 밖으로 내밀고 서로 구경하다가 얼굴끼리만 부딪친 것입니다. 이 유머어는 자기 갈 곳이나 똑바로 바라볼 것이지 남의 운전에 관여하지 말라는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내 길, 십자가의 길을 갈 것이다."고 선언한 예수의 인생태도가 뒷맛이 쓰지 않는 생애를 위한 정답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크리스찬으로서 "내가 갈 길"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즉 "나는 어디를 향하여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하는 결정입니다. 후회함이 없는 삶의 길을 가기 위해서 진리와 생명, 그리고 길이 되신 예수의 길, 십자가의 길, 좁지만 생명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요압이 "너의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는 아브넬의 심각한 도전을 받고 개인적 성취보다는 민족을 생각했고, 일시적 성공보다는 장래를 생각했으며, 순간적 쾌감보다는 뒷맛을 생각한 것처럼 하나 밖에 없는 나의 생애, 한번 사는 나의 인생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성경이 보여주는 보다 고상한 목적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갔던 복음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장차 의의 면류관이 예비된 그 뒷맛이 달콤한 삶의 길입니다.

"(딤후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3. 마지막으로, 십자가 복음의 길의 뒷맛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로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왕 다윗 측과 이스라엘 열 한 지파의 왕 이스보셋 측과의 군사적 충돌인 기브온 전투가 발발하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언약 국가인 이스라엘에 의의 세력과 불의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이미 하나님께 세우신 참다운 왕 다윗이 헤브론에서 통치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4절) 마하나임에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한 또 하나의 정부가 수립된 점(8-11절)은 부득불 두 세력간의 충돌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기브온 전투가 발발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기브온 못을 차지하기 위한 이스보셋측의 야망에 찬 전쟁 제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하2:12) 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서 기브온에 이르고 (삼하2:13)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서 기브온 못가에서 저희를 만나 앉으니 이는 못 이편이요 저는 못 저편이라 (삼하2:14)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요압이 가로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지형적 특성상 팔레스틴에는 물이 귀하였습니다. 당시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던 기브온 못은 이스보셋 측의 탐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기브온 못은 양 진영이 탐을 낼만큼 많은 물을 담아 놓을 수 있었던 큰 저수지였습니다. 이곳에 물을 채우면 약 6천 여명이 마실 수 있는 저장량으로 당분간 성이 포위되더라도 물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물이 귀한 가나안에서 중요한 식수 공급원이었으며 전략적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이곳에 대한 지배권을 쟁탈하기 위해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브온 전투는 이스보셋 측의 뜻대로 진행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물론 쌍방간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나기는 하였지만 대세는 다윗 측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중요한 원인은 이스보셋과 다윗은 서로 그 즉위 배경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스보셋 왕국이 근본적으로 출발부터 잘못된 인본주의적 왕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인정 속에 왕이 되었으나(삼상 16:1-13) 이스보셋은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유다 사람들 곧 장로들이 와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으나(4절) 이스보셋은 아브넬 개인의 세력을 바탕 삼아 즉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스보셋의 즉위는 사실 이스보셋을 앞에 내세워 통치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려 한 아브넬의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의 세력과 인정하시지 않는 불의의 세력간의 전쟁은 그 결과가 뻔한 것입니다. 아브넬은 아군의 상황이 불리해지자 양군의 동족성을 내세워 요압에게 휴전을 제의합니다.

"(삼하2:26)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그러자 요압은 비록 아브넬의 제안이 못마땅했지만 피흘리기를 싫어하는 자기 군주 다윗 왕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터라 이 제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삼하2:27) 요압이 가로되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의 말을 내지 아니 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삼하2:28)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삼하2:29) 아브넬과 그 종자들이 밤새도록 행하여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휴전 결과를 살펴보니 유다의 전사자는 19명과 아사헬, 이스라엘의 전사자는 360명이었습니다(30-32절). 우리는 이 사건에서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전투에서는 승자나 패자 없이 모두 슬픔을 맛보았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간의 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이편도 저편도 아니라 오직 바깥 세상의 원수들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쓸데없는 분쟁을 일삼을 때 득을 얻는 자는 오직 사단뿐임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마12: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민27:14)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이스보셋이 무려 열 한 지파라는 절대다수를 지배하는 왕이었다 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신과 그 나라의 뒷맛은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의 세력은 비록 그 수가 적을지라도 뒷맛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의의 세력은 분열과 동족상잔보다는, 그리고 일시적인 성공과 성취감보다는 하나가 되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 생활의 뒷맛이 쓰지 않도록 십자가로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돈에 맛들인 사람들이여, 그 뒷맛이 쓰지 않겠습니까? 권력에 맛들인 사람들이여, 그 뒷맛이 쓰지 않겠습니까? 교권에 맛들인 사람들이여, 그 뒷맛이 쓰지 않겠습니까? <국민의 정부>라고 이름지어진 김대중 정부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며 진실과 정의, 그리고 공의의 세력이 될 뿐만 아니라 민족이 하나가 되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정부가 되어 그 뒷맛이 쓰지 않는 정부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믿고 사는 그 앞에 십자가의 쓴맛이 기다린다해도 그 뒷맛은 부활, 영생 천국입니다.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의 훗날에 그 뒷맛이 쓰지 않도록 예수 믿는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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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에4:1)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으며 재를 무릅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에4:2)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를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에4:3)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에4:4)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고하니 왕후가 심히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를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에4:5) 에스더가 왕의 명으로 자기에게 근시하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슨 연고인가 알아보라 하매 (에4:6) 하닥이 대궐 문 앞 성중 광장에 있는 모르드개에게 이르니 (에4:7) 모르드개가 자기의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부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수효를 하닥에게 말하고 (에4: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에4:9) 하닥이 돌아와 모드드개의 말을 에스더에게 고하매 (에4:10)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고하기를 (에4:11)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에4:12) 그가 에스더의 말로 모르드개에게 고하매 (에4: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에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4:15)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에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4: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 대로 다 행하니라."

1. 전형적인 형사 폭력물의 하나로서 미국 영화에 윌리스(Bruce Willis)주연의 <다이 하드, Die Hard>가 있습니다.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죽을 것 같은데도 좀처럼 죽지 않고 불사조처럼 살아 남는 현대판 조작영웅(造作英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원래 "다이 하드, Die Hards"의 유래는 약 2세기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3개 연합군이 1811년 스페인의 서북부에 위치한 도시 알부에라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프랑스군을 격파한 영국의 육군 제 57 보병연대는 그 영웅적이고 무모할 정도의 희생으로 인하여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57연대 병력이 적의 포화로 여기 저기서 허물어져 갈 때 연대장 윌리엄 잉글리스 경도 빈사의 중상을 입고 쓰러지면서 "버티어라, 57연대여! 최후까지 저항하라!(다이 하드, Die Hard!)"라고 절규했습니다. 연대장의 말을 그대로 실행하여 "다이 하드, Die Hard!"란 명칭을 얻게 된 것입니다. 20세기 들어와서는 분명히 패색이 짙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고집하는 정치가에 대해 조소하는 뜻으로 사용된 영국의 정치용어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20세기 영국의 정치 현장에서 전용(轉用)된 뜻의 의미도, 20세기 말 미국의 영상 예술에서 조작된 영웅의 모습도 아닌, 18세기 원래의 유래에서 처럼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과 뜻으로서의 "다이 하드, Die Hard"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시대의 취약점 중의 하나가 바로 <저항 정신>의 결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의, 부정에 대해 침묵하고 불법에 항거치 못하는 그야말로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왜곡된 현실에 안주하며 바르지 못한 힘들과 적당히 타협하는 안정추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56:10)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삶의 환경에 대한 문제만 해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너무 빨리 좌절하고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장애물을 뛰어 넘기 전에 아예 주저 앉아 버립니다. 위험부담이 따르는 모험은 한사코 거절합니다. 현명한 사람이 되고자 저항도 싸움도 위험수위를 결단코 넘지 않습니다. 싸움에도 한계가 있고 저항에도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없는 반항이 아니고 분별없는 싸움이 아니라면, 목적이 뚜렷하고 의식있는 반항과 명분있는 싸움이라면 끈질길 필요가 있습니다. <용기>란 스피노자의 말대로 "불요불굴의 정신"(fortitude)일진대 끝까지 저항하는 이가 진정한 용기의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義人)의 삶이요 "다이 하드, Die Hard"의 진면목인 것입니다.

"(잠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인생의 3분의 1을 감옥에서 지낸 남아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은 <저항정신>의 표상이며 승리였습니다. 우리나라 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을 흔히 '인동초'(忍冬草)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40여 년의 그의 야당생활은 군사독재 정권의 불의에 대한 생명을 건 저항생활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3.1절을 맞아, 나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순교의 피를 흘리신 순교자들의 <저항 정신>이 이 시대에는 나라의 정의와 진리를 위해 요청되고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입니다.

2.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지 10년째인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뒤 일경에게 연락하여 당당히 자진해서 체포되어 갔습니다. 이때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함으로써 혁명운동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여기에 모였던 학생과 시민 등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에 들어갔습니다. 이 3.1독립만세의 메아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자 크게 놀란 일경과 헌병은 총칼을 휘두르며 시민과 학생들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2천만 국민은 이에 굴하지 않고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제에 저항했습니다. 이 3.1혁명이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한 중대한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었습니다. 3.1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주의적, 반제국주의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특히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 내지 반지배를 받고 있던 세계의 여러 약소국에 큰 자극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같은 해 일어났던 중국의 '5.4운동'을 비롯 인도의 '사탸그라하 운동' 및 베트남의 '독립 운동' 등은 이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나타나는 기독교계의 흐름가운데 하나는 부흥회를 중심으로 한 타계주의적, 내세지향적 경향이었습니다. 이것은 3.1운동을 실패로 보고 깊은 좌절감에 빠지면서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3.1운동의 종결을 계기로 민족 독립의 가능성에 절망감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 심화되었습니다. 3.1운동이후 1920년대 부흥회를 주도한 사람은 김익두목사였습니다. 그는 특히 가난하고 멸시받던 소외 계층 사이에서 신유를 행하는 인물로 유명했습니다.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많은 민중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이루었습니다. 1930년대 초에는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의 상"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용도목사의 신비주의적 부흥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그는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였던 1930년대 신비주의 운동의 시초를 열었습니다. 이같은 기독교계의 신비주의적·내세지향적 경향에 대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 교회 내에서는 물론 사회주의 계열에서 강렬한 비판이 나왔습니다. 개벽에 실린 견지 동인의 <예루살렘의 조선을 바라보면서>(부제 .조선 기독교 현상에 대한 소감)는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새 보면 종교로 달아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간다. 그 중에도 기독교로 몰리는 청년들이 더욱 많다. 따라서 그 현실 저주의 인심은 종교로 귀의되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런데 조선의 기독교로 말하면 이러한 인심들을 맞춰주기에 매우 적절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즉 현실 생활에 대한 도피와 엄폐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회 생활의 진리나 사회적 정의와 사회적 평화를 현실의 투쟁 속에서 구하지 아니하고 투쟁의 현실을 떠나 기독교에 가서 구한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학대를 받은 나머지 기독교로 몰려 안심·생명의 길이나 구하는 이 무리들은 언제나 요단강을 건너나 하여 마음을 가공의 천국에 매달아 두고 한갖 현실을 저주해 마지않는다. 실로 오늘날의 기독교회는 불안정한 생활을 안정케 하며 알력이 있는 사회를 평화롭게 하며 불공평한 사회 생활을 공평케 하는 힘을 현실 생활 속에서 투쟁에 의해 찾지 않고서 자기의 주위를 도는 환상의 태양에게 일임하고서 그의 섭리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감상적 기도 속에서는 아름다운 희망이 될런지는 모르나 사회의 알력과 생활의 불안정과 그것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참혹한 사회상의 이해가 서로 다른 빈·부 두 계급의 대치 관계로부터 원인되는 이상, 현실의 면전에서 투쟁 수단을 의치 않고서는 사회적 평화, 생활 안정을 바랄 수 없는 것이요, 또 사회적 정의의 승리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은 구름과 같은 초현실 세계를 향하여 그 해결을 맡기고 있다. 그러고서 사랑을 말하며 온유를 말하며 정의를 말하며 인류애를 말한다. 엄연히 있는 계급 대립 위에서 인류애를 말하는 이 딱한 사람들은 불합리한 사회 현상에 대해 눈을 감고 현실을 도피한다. 그와 같은 현실 도피, 현실 무시는 현실 긍정, 현실 유지의 결과를 내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의 기독 교회는 현실 긍정과 참고 복종하는 것을 미로 추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 예루살렘의 조선은 권위 추종자, 가난한 이를 짓밟는 외식적 소경이 되어 남을 인도하는 위선자들의 준동하는 곳이 되었다. 기독 교회여 ! 회칠한 무덤과 같은 예루살렘의 조선이여 ! 복 있을진져 너의 집이 터만 남으리로다."

이것은 물론 사회주의적인 시각에서의 사회 개혁, 곧 계급 대립과 계급 투쟁에 의한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는 방법과 목적을 궁극적인 결론으로 하는 전제하에서 제기된 비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기독교계의 일각에서 보여준, 현실 외면과 현실 등한시라는 자세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20년대에서 30년대에 유행한 부흥회적 흐름이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참담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회피할 수 있게 한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인은 사회 정의의 실현이 인간의 힘만으로 가능하다고 믿지는 않으며, 인간 위에 역사하시는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이 점이 기독교인과 사회주의자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현실 인식을 부정하거나 게을리 할 수는 없습니다. 1920년대 기독교계가 받은 비판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 일부에도 해당되는 비판입니다. 제14대 문민정부가 실패한 원인을 지적하는데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권위주의의 상징인 '각하'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지난 5년 동안 한 사람도 없었다는데 그 실패의 원인을 말합니다. 심지어 장로 대통령을 둔 기독교에서조차 "짖지못하는 벙어리 개"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백성)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교회)은 멸망하리라."라는 말씀을 교회는 이 시대에 들려주시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저항정신을 상실한 한국 교회는 3.1절 제79주년을 맞아 3.1정신을 계승하여 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3. 삼일운동은 첫째 민족 자주 선언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발적인 의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일본의 무력과 강점에 의해 이루어진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 등으로 빼앗긴 외교권, 경제권, 주권을 되찾겠다는 선언이며 불의의 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의 표현입니다. 이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와 민족을 공평하게 다스리시며(시 67:4) 억압받는 백성의 호소와 신음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출 2:23-25). 하나님은 만민에게 자신들이 살아갈 땅, 즉 조국을 주셔서 그 땅의 소출을 먹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천부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무력으로 탈취하거나 팔아 넘기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도전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주신 계명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의 경계선을 옮기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신 19:14). 그러므로 조국을 빼앗기고도 벙어리 개처럼 잠잠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의한 일을 의로우신 하나님께 고발, 탄원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불의와 죄악을 물리쳐야 합니다. 성령이 예수께 임하신 목적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4:18) 다음으로, 삼일운동은 강권적 군사 통치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일제는 합방 이후 즉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군 통수권을 가진 총독으로 하여금 헌병, 경찰권을 행사하여 무단정치를 하게 했습니다. 삼일운동은 여기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었습니다. 일본 군대의 총칼 앞에 시위자들은 무참하게 쓰러져 갔습니다. 3월과 4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시위에 참가한 총 인원수는 200만이 넘었고 시위 횟수는 1,500여 회에 이르렀으며 피살된 사람이 7천여 명, 부상자가 1만5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일본군경에 의해 불살라진 민가는 715채, 교회당 47개소, 학교 2개소였습니다. 분노한 시위 군중은 관청, 경찰관 파출소, 헌병관서 등을 습격하게 되지만 무장한 일본인들 앞에서는 달걀로 바위 치기일 뿐이었습니다. 일제의 총칼 앞에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서도 오직 해방과 자유를 기원하며 손에 태극기만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불의한 일제에 저항했습니다. 악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되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었던(롬 12:21) 숭고한 민족운동이었습니다. 따라서 삼일정신을 오늘에 계승한다는 것은 우선 정치적으로나 문화·경제적으로 주변 강대국에 종속되지 않는 주권국가로 당당하게 성장해 나아가는 것을 뜻하며 또한 어떤 형태이든지 백성을 억압하는 무력적 통치를 배격하고 자유와 평화를 지켜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는 민족생존권을 수호하는 일이며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이고 성경의 영원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폭력과 억압, 착취와 불의를 미워하시며 공평과 정의,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십니다. 교회는 죄악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되 선으로써 이겨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나 경제(물질)에 종속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평화를 지켜나가는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 어느 기관보다도 공평과 정의로워야만 합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가운데 기독교대표가 16명이나 되며 그 중에 감리교인이 9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떤까? 지난 19일 한국교회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대통령 당선자와 나라 민족을 위한 기도회에서 사회를 맡은 대한 기독교서회 사장 목사는 당선자가 입장하자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자리인가? 우리 모두 축하하는 의미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자."며 너무 감격한 나머지 <묵도>순서를 깜박했다해서 구설수에 올랐다고 합니다. 기도회 순서에 <묵도>가 들어있으면 어떻고 안 들어 있으면 또 어떻습니까? 국난을 만난 "(에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백성)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교회)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는 경고를 먼저 들을 수 있는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3.1절을 맞는 한국교회는 국난을 만난 이 때에 그 주어진 사명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엊그제 새마을금고 여직원 최금희양이 칼을 들고 현금을 강탈하는 강도에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저항하여 결국 강도를 붙잡고 금고를 지켰던 사건을 한국 교회와 지도자들은 사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저항정신을 상실했던 한국 교회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을 깨끗이 청산하고 국난에 처한 나라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은 귀한 지침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4. 멸절의 위기에 놓인 유다 민족의 구원을 위해 모르드개는 직면한 위기 상황 속에서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모르드개는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할 최초의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민족 구원을 위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그 기도 가운데서 깨달았습니다. 만일 그가 인간의 능력과 힘에만 의지하는 인본주의자였다면 초상났을 때나 입는 베옷을 입고 애통하며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즉시 에스더에게 연락하여 왕께 나아가서 민족을 구원해줄 것을 간청하라고 요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평상복을 입고 대궐로 들어가서 에스더에게 요구하기 보다는, 굵은 베옷을 입고 먼저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을 선택하였습니다. 나라가 위기를 만났을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통회 자복하는 회개가 우선해야 합니다. 하만의 계략에 의하여 유다인 전체가 하루 아침 사이에 도륙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심각한 민족적 위기였습니다. 게다가 그런 상황이 어떻게 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던가를 잘 알아차릴 수 있었던 모르드개로서는 정녕 통분을 금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사실을 알자마자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옷으로 갈아 입은 다음 성중으로 나아가서 재를 뒤집어쓰고 대성 통곡하였습니다(1절). 옷을 찢고 금식하면서 애통하는 행위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볼 때,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참회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고(욜 2:12,13), 당면한 커다란 환난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절대로 극복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에만 매달리는 모습이기도 합니다(욘 2:5-8). 그렇습니다. 위기 상황에 부딪쳐서만 아니라, 우리는 평소에도 애통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애통은 자기의 비참한 상태를 직시하면서 하나님께 고백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5:4). 하물며 어떤 위기에 부딪쳐서도 그냥 지내고 있다면 그것이 곧 사망의 잠을 자고 있는 상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시13:3) 선지자 요엘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습니다(욜 2:12). 사실 개인이나 국가나 할 것 없이 어떤 위기에 부딪치면 하나님 앞에 털어놓는 길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습니다. 누군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한 자리로 뛰쳐 나와 서로 붙들고 통곡을 터뜨릴 수만 있다면 인류의 허다한 문제는 그 순간에 즉시 다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국난을 만난 우리 한국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가슴치는 마음으로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며 부르짖어야만 살 길을 얻을 수 있습니다(롬 14:12). 이승만 초대 정권부터 시작하여 박정희 군사 유신 독재정권, 그리고 5공 6공,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처럼 불의와 부정부패에 대해 저항정신을 상실했던 과거 행적을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에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는 주의 경고를 결코 소흘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모르드개가 행했던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 상황을 에스더에게 알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외환위기 상황은 외국 경제 단체에서 2년전부터 예상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 많은 한국의 경제 관료들이나 경제 전문가들은 나라가 파산 상태(모라토리움)에 빠졌음에도 그 사실을 알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청와대조차 그 사실을 몰랐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신정부는 나라의 외환 위기 상황을 알리지 않고 그 책임을 다 하지 않은 책임을 반드시 밝혀내겠다고 합니다. 모르드개가 이스라엘 백성의 위기 상황을 왕비 에스더에게 알려야 했던 이유는 에스더가 구중궁궐(九重宮闕) 깊숙한 곳에 거처하고 있어 정치 문제에 무지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정치 상황을 알고 있었을 그의 일부 측근들도, 에스더가 유대인임을 몰랐기 때문에 유대인 학살 명령이 그녀와 전혀 무관한 줄로 여기고 그녀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아니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르드개는 하만의 음모로 모든 유대인들이 학살당할 처지에 놓여 있음을 알려야만 했던 자신의 책임성을 통감하고 과감히 행동한 것입니다. 이같은 모르드개의 행동은 에스더의 힘을 빌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한 것은 마치 신앙적인 행동이 아니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긴박한 상황하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역사를 행하시기를 기도하는 것만이 옳은 듯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어느 때이든지 초자연적 기적을 베푸셔서 당신께서 조성하신 창조적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이 하는 수고와 애씀을 통해 전혀 부족함이 없이 당신의 뜻을 펼쳐 나가십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녀를 왕후의 자리에 올리셨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였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역사보다는 자연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바랬던 것입니다.

어떤 위기에 부딪치면 먼저 하나님 앞에 통절한 심정을 털어놓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채로 주저앉아 있기만 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는 자를 그 크신 권능으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불 속에 갇힌 사람을 두고서 하나님께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꿇어 엎드려 기도만 하는 것은 어리석고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마음 못지 않게 불 속에 갇힌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신속히 불길에 물을 퍼붓든가, 벽을 허물든가, 사닥다리를 놓든가 좌우간 재빨리 최선의 방책을 강구하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어렸을 적에 하마터면 불길에 타 죽을 뻔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의 부모는 발버둥치면서 하나님께 호소했는데, 그 사이에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서 불길에 갇힌 웨슬레를 끌어내었습니다. 만약 그 때 기도만 하고 내버려두었다면 오늘날의 영국과 감리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과 이성은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바른 이성은 신앙에로 나아가며 신앙은 건강한 이성을 포용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르드개는 민족적인 멸망의 위기에 부딪쳤을 때에 먼저 크게 애통해 하고 나서 곧바로 그 타개책을 강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실천적인 행동들은 모두 이성의 바른 활동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자기 내면적 불행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특히 어떤 위기를 만나서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애통하는 마음에야말로 참회 정신과 간구의 기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만 멈추지 말고 즉시 나서서 합리적인 타개책도 강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어떤 진공 상태에서 나타나기 보다는 인간의 구체적인 헌신과 열정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1921년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자작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서대문에 상점을 열어 조선 물산을 판매하며 외국산을 배척하면서 시작된 '조선 물산 장려회', 일제의 식민정책에 따른 수탈을 가장 심하게 받은 농촌 농민을 위해 기독교가 주체가 되어 전개한 '농민 운동', 이를 계기로 각 교단에서 농촌부를 두어 농촌의 경제 자립을 위한 농촌 계몽운동, 소작 농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활동, 192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추진된 산업화에 따른 일제의 노동력 착취에 대항하여 YMCA와 지방교회가 중심이 된 조합운동, 금주 금연 아편금지 등을 중심으로하여 공창(公娼) 폐지운동에 이르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담은 '절제.정화 운동' 등이 당시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받기 위한 구체적인 타개책들이었습니다. 교회 예배당에 틀어박혀 기도만 드린 것이 아니라 나라 민족의 암담한 현실에 가슴을 치고 애통하며 국난 타개를 위해 구체적으로 정치, 경제, 문화를 수호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입니다.

호화로운 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큰 폭풍우가 몰아쳐 배가 걷잡을 수 없이 파도에 휘말리게 되었다. 어두움과 폭풍 가운데서 배가 질주하는 동안 그는 배 멀미로 선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째지는 듯한 외마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사람이 갑판에서 떨어졌다!" "저걸 어쩌면 좋아?" 하는 웅성거림이 들려왔습니다. '정말 안됐군!' 선실 침대에 누워 있던 그는 혀를 끌끌 차며 진심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내가 도와줄 일이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은가?' 그때였습니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들려 오는 작은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왜 없단 말이냐? 선창에서 간데라를 비춰주면 불빛을 보고 배로 돌아 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멀미를 참으며 침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곧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좇아 행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물에 빠진 사람은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잠시 후 여객선의 선장이 간데라를 비추고 있었던 이 사람에게 다가와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말하더군요. 피로와 절망에 지쳐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느꼈을 때 당신이 비추어 준 간데라의 불빛은 자신에게 구원의 희망이었다고요." 그는 덧붙였습니다. "정말 그것은 희망의 불빛이었지요. 간데라 불빛이 선창으로부터 비추어져 캄캄한 바다에서 우리가 그를 발견하고 구출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가 처한 각 위치에서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거부함으로써 귀중한 영혼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는 말씀을 듣지 못하여 이 큰 폭풍우를 만난 이 나라 백성에게 빛이 되지 못한다면 끝내는 버림받고 말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 비록 겨자씨 같이 작아 보일지라도 '다이 하드, Die hard의 저항정신을 가지고 정의와 진리를 위해 십자가를 등에 지고 피흘리기까지 싸울 때 교회는 그 존재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여, 이 때는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통렬히 회개해야만 살 수 있는 국가 위기의 시기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다."는 각오로 주어진 구국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작은 불빛이라도 비추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1정신을 계승하여 국난 타개를 선도할 수 있는 한국 교회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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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의인을 팔지 말라!

"(암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암2: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암2:8)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1. 미국의 유명한 잡지인 <라이프, Life>지의 사진 기자가 영국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 기자는 지하철 대합실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자리에 노인 부부가 서로 부축하면서 소꿉동무처럼 정답게 앉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비스켓을 주문하고 아내는 차 한 잔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들의 차림새는 퍽 누추하였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개의치 않고 조용히 마주앉아 서로의 손을 잡고 주문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주문한 비스켓과 차가 나왔습니다. 남편은 비스켓을 천천히 먹기 시작하였고 아내는 뜨거운 차를 몇 모금 마시고 나서 남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잡지사 기자는 그 다음의 신기한 장면에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비스켓을 반쯤 먹고나서 틀니를 뽑아 깨끗이 닦아 아내에게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그 틀니를 자연스레 입에 넣고는 비스켓을 천천히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가 마시던 차를 마시며 아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잡지사의 기자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코가 찡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의 사랑이 있는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 서로를 아껴주고 기다려 주고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 이런 사랑을 지닌 사람들은 경제적 가난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시대와 연령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노인 부부에게 주위의 사물과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체면 따위는 더더욱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참된 사랑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코 외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사랑을 나누는 행사가 다양하게 각계 각층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감리교 한 원로목사가 이끄는 <사랑 나누기>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정리해고로 실직당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6개월 동안 약 50만원에서 60만원 정도를 매월 지급하자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실직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실직당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봉급에서 1구좌에 1만원씩을 도와 그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또 하나 모 방송국에서 벌이는 행사로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로 연예인들이 소개하는 전국 어린이 병환자 중에서 치료비나 수술비가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 어린이나, 소년 소녀 가장들을 위해 ARS 전화 한 통화에 1천원씩을 기부받아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사랑으로 함께 나누는 운동인데 매주 1억이 넘는 후원금이 답지되고 있습니다. 최근 모 일간지에 기독교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어느 목사의 글이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제 한국 교회가 품속에 있는 물고기와 보리떡을 내놓아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2. 예언자들 중에서 가난한 사람의 고난과 슬픔, 그리고 억울함과 멸시당함의 고독을 가장 잘 대변하며 경제정의 실천을 부르짖은 사람은 아모스입니다. 아모스가 전하는 당시 사회상은 사회의 풍요로운 물질적인 삶과 사치와 허영의 삶을 누리던 부자와 권력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서로 어떤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경제 정의가 상실된 그 배후에는 부자와 권력자의 소망과 횡포와 탐욕과 소비성이 깔려 있습니다. 아모스의 눈에 비친 빈자는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참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모스는 가난한 자의 값이 신 한 켤레 값밖에 되지 못한 실정(8:6), 빈자가 억울한 대접을 받고 있는 실정(4:1), 궁핍한 자가 압제를 당하고 있는 실정, 뇌물 정치 아래서 빈자의 정당성이 묵살당하는 실정(5:12), 궁핍한 자를 통채로 삼켜 완전히 망하게 만들고 마는 실정(8:4)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돈으로 산다는 것은 곧 인신매매의 죄악입니다. "신 한 켤레로 판다."는 것은 실지 매매된 금액이라기보다 최하의 값 또는 공짜, 아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소유하는 착취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를 두고 부한 자들의 탐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낸다."는 말은 가난한 자가 망하여 불행해져서 머리에 티끌을 쓰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는 부자의 잔학성을 말합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일반 대중과 저소득의 사람, 서민층, 막벌이꾼과 가난한 사람들의 죄악을 공격함이 거의 없습니다. 항상 그 나라를 다스리고 사회 각계 각층에서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지도자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라를 망치는 것은 일반 가난한 대중이 아니라 이 대중을 이끌고 가는 지도자 편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모스를 읽는 사람은 무엇보다 그의 예언의 대상이 누구냐함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 나라의 질병은 "가난한자", "의인", "궁핍한 자", "겸손한 자"들에 대한 인격적 대우도, 윤리적 관심이나 도덕적 책임의식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 사회의 한 어두운 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네 종류의 사람, "가난한 자, 의인, 궁핍한 자, 겸손한 자"가 각각 딴 사람이라고 보기보다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천대받고 있는 일반 대중을 네 가지 명칭으로 각각 다르게 부른 것입니다. 그것은 대체로 의인이 가난하고 궁핍하고 또 겸손하여 자기가 차지해야 할 권리를 찾지 못하고 친대와 멸시를 받고 그들의 빼앗긴 인권과 자유 때문에 항상 수난을 당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의인", "궁핍한 자", "가난한 자", "겸손한 자" 등 이스라엘 사회에서 천대와 수난을 받고 있는 이 네 종류의 사람은 많은 시편에서도 서로 나란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학적으로 매우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난한 자"는 의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궁핍하게 살아가야 하고 또 대우를 못 받는 천덕꾸러기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겸손한 자"는 겸양의 덕을 보여주는 겸손이 아니고, 이는 권력자와 악한 부유층의 독점의식과 그 욕심의 결과로써 무엇을 갖고파 하나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어 인격적으로 천대를 받아 억울한 죄인인양 고난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겸손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자기를 중시하고 모든 것을 가지려는 사람 때문에 대접이나 물질의 부스러기도 차지하지 못한 사회 말단에 처한 찌꺼기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고난의 인간을 말합니다. 대접 못 받고 소외당한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괴롬에서 나고 죽은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썩어 문드러지는 고기덩어리가 되는 것보다는 한번 찌르고 그 생명이 다해버리는 장미의 가시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라의 수치와 허물을 무작정 덮어두는 자는 그러한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자보다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기의 악이 드러날까 염려해서 그 죄악을 고발하는 사람을 핍박하여 말을 못하게 하거나 그를 죽이는 일을 고발하는 사람을 핍박하여 말을 못하게 하거나 그를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은 더 악한 사람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자기 동족인 북이스라엘의 종말을 바라보면서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릇된 국민들과 지도자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른 방향으로 돌려보려고 외친 사람입니다. 이로인해 그는 핍박을 받았지만 생명을 걸고 바른 말을 외치는 사명을 다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비록 양을 치며 뽕나무를 재배하는 농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라 민족의 현실을 바라볼 때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치명적인 위기 상황임을 깨닫고 답답하지만 급박한 심정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외치는 이스라엘의 병폐는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암2: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는" 것이었습니다.

3. 샌프란시스코에 호화로운 방들이 즐비하고, 이곳에 잠시라도 머물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캘리포니아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건축 양식의 페어몬트 호텔이 있습니다. 이 페어몬트 호텔은 마치 하나의 커다란 경계석처럼 현대와 미래 사이에 서 있고, 미국과 태평양 사이에 서 있습니다. 호텔 바로 앞쪽 비탈에는 수십만 명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컴퓨터 혁명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실리콘 밸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1906년 캘리포니아 대지진 때 엄청난 돈을 번 사람들, 세계대전 때 맹활약을 했던 미국의 장성들, 유엔의 창설자들, 대기업의 사장들, 그리고 20세기의 모든 미국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이 호텔로 몰려들어 호화로운 축제의 밤을 즐기곤 했습니다. 1995년 9월 말, 바로 이 역사적인 호텔에서 세계적인 엘리트 중의 한 사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대략 5백여 명의 정치가, 경제인, 학자들을 세계 각국으로부터 불러들여 축배를 들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고르바초프가 이름붙인 것처럼 이 모임은 "세계적인 브레인 집단"으로서 21세기를 맞는 지구촌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문명"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세계적 지도자인 조지 부시, 조지 술츠, 마거릿 대처 등도 나와 세계적 언론 재벌인 CNN방송사의 설립자 테드 터너나 동남아 무역귀족 워싱턴 시싶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3일 간에 걸쳐 진지한 토론을 벌이게 되는데, 여기에는 물론 컴퓨터나 세계적인 금융계의 지도자들, 경제인들, 스탠포드나 하버드, 옥스포드대학의 경제학 교수들이 소그룹으로 참석하였습니다. 이 페어몬트 호텔에 모여 국제회의를 열고 있는 이 세계적인 실용주의자들은 인류의 미래를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20 대 80의 사회>라는 말과 '티티테인먼트tittytainment'라는 말입니다. <20 대 80의 사회>라는 말은, 다가오는 21세기에는 노동 가능한 인구 중에서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역귀족 출신 워싱턴 시싶은, "더 이상의 노동력은 필요 없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 다섯 중 하나면 모든 상품을 생산하고 값어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충분합니다. 이 20%의 사람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돈벌이나 소비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간혹 1∼2% 정도의 다른 사람들은 운 좋게 상속을 받아 이 대열에 추가로 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가?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 중에서 80%는 놀아야만 하는가? <노동의 종말>을 쓴 미국의 저술가 제레미 리프킨은 "확실히 그렇다."라고 말합니다. "아래쪽에 있는 80%의 사람들은 엄청난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선 시스템의 경영자 게이지는 이제 앞으로 문제는 "밥을 먹을 수 있느냐, 아니면 먹히느냐"의 문제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이어서 이 열띤 토론회는 '노동의 미래'와 관련해 실업문제로 넘어갑니다. 이와 관련해 참석자들 모두는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샌프란시스코 해변에서 행복을 느끼며 인생을 즐기기 보다는 실업자 상태로 생존경쟁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한마디로, 페어몬트 호텔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질서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탄탄한 중산층도 없고, 아무도 저항할 세력이 없는 부유한 나라' 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히려 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티티테인먼트'가 판을 치게 될 것인데, 이 말은 원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만든 말입니다. 그는 원래 폴란드 출신으로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안보담당 보좌관을 역임했습니다. 그 뒤로 그는 지역전략 문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티티테인먼트'는 즐기는 것을 뜻하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와 엄마 젖을 뜻하는 미국 속어 '티쯔tits'를 합친 말입니다. 다시 말해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들을 기분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경영자들은 이 토론회에서 20%의 잘 사는 사람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먹여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펼쳤습니다. 기업이 이들을 부담하기에는 범지구적인 경쟁이 너무나 치열하기 때문에, 실업자들에 대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보살펴야 한다는데에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동의합니다. 이들은 차라리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종교단체나 이웃을 돌보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 스포츠 교실, 또는 여러 시민단체 등에서 뜻 있는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가치를 평가하여 보상을 해주야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백만의 실업자들한테도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로이 교수는 말합니다. 사실상 이미 선진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의 보수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거리 청소를 하거나 가정부 노릇을 하여 생계를 겨우 이어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더 많이 그러할 것이라고 대기업 경영자들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80년대부터 유럽에 널리 퍼졌던 <3분의 2사회>가 아니라 <20대 80의 사회>또는 <5분의 1사회>, 사회복지와 사회적 지위가 1대 4의 비율로 배분되어야만 하는 그런 사회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 <20대 80의 사회>에서는 사회로부터 배척된 80%의 사람들이 약간의 오락물과 먹거리에 만족하며 조용히 살아야만 합니다. 이 모두가 지나친 과장일까?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는 20%의 부자나 권력자가 지배하는 세계 경제 구도 속에 그들이 멸시 천대하며 던져주는 부스러기 먹거리로 80%가 만족해 하며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20%의 경쟁력있는 지배계층이 80%의 피지배계층에 대한 비인간화 작업이 바로 세계화라는 허구의 이데올로기입니다.

4. 본문은 가난한 사람, 겸손한 사람을 통틀어 지칭하는 80%의 "의인"을 인간 이하의 물질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는 이스라엘 지배자들, 부자, 권력자 등 사회 고위층의 죄에 대한 고발의 내용입니다. 여기 비인간화의 일이 얼마나 무서운 질병인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을 받고 의인을 판다."고 함은 "의인"이 가진 정신적인 가치와 그들의 윤리와 신앙을 화폐 가치 이하로 취급하는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당시의 지배계층의 죄악에 대한 고발입니다.

여기 "의인을 은으로 판다"는 것은 의로운 사람의 말을 금력으로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정의가 금전으로 매매당한다는 사실은 부정과 부패의 현상입니다. 정의를 은으로 팔아먹는 의인이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금전에 매수될 사람이라면 그는 절대로 "의인"이란 칭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근본 뜻은 한 나라의 사법 질서와 그 권리 행사가 금전으로 좌우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죄를 지은 사람도 그의 금전으로 무죄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아무 죄가 없는 사람도 그가 뇌물을 요로에 적당히 바치지 못했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는 것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소위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말합니다. 살인 청부업이란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의인이 금품으로 매수된 하수인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은 경우도 있습니다. 조그만 사고가 금품으로 시시비비가 가려지는 사회는 병든 나라의 징조입니다. 사직당국이 은으로 좌우되어 의인과 죄인이 구별지어졌다는 아모스의 고발은 결코 옛날 얘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사회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가 신 한 켤레로 매매 된다."는 그 다음 구절은 쉽게 이해됩니다. "궁핍한 자"가 그 가난함 때문에 신 한 켤레 값으로 인격이 좌우되어 버리는 사회도 병든 나라의 사회적 질환입니다. 인간의 가치의 저하를 죄악으로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노예 제도란 인간을 물질과 같은 소유물로 보는 것인데, 이것은 노예제도가 용납되어 있는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구조 사회 속에서는 인간이 신 한 켤레 값으로 팔리고 있음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인간의 값이 정치라는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취급받고 있음을, 자살할 자유라도 가진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대접보다 더 악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법권이 완전히 행정부의 지배를 받아 사법권의 독자성 보다 그 시녀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가치의 절하는 사법권의 부당성 때문만이 아니고, 무엇을 가진 부유층의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경우를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낸다." 여기 문제는 부자의 탐욕적인 삶입니다. 극도의 개인주의입니다. 여기 "머리 위 티끌'은 무가치성의 의미도 되지만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비극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의 기회로 삼는다는 뜻으로도 해석됩니다. 또한 '탐내다"라는 말이 "가난한자의 머리를 땅바닥에 내려쳐 상하게 하는자"라고 읽혀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3장 15절에 "가난한 자의 얼굴을 맷돌질한다"는 말과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자의 횡포의 극치를 표현했거나, 부자가 가난한 자의 비극을 이용한다거나 또는 부자의 잔인성을 표현했거나, 뉘앙스나 강조에 차이는 있어도 다같이 부유층이 자기 물질로 다른 형제를 인간으로 대접해 주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는 같습니다. 사람의 값을 티끌과 같게 만드는 일이나 가난하고 약한 자의 비극을 자기의 탐심의 기회로 삼고 또 그 물질 때문에 보여 주는 잔인성이 모두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공산주의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비인간화의 문제입니다. 여기 지배하는 세력은 물질(경제)과 이데올로기(세계화)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물질을 지배해야만 합니다. 인간이 물질에 좌우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데올로기를 지배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과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음은 곧 그 나라가 병들어 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합니다. 이 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이 다만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값이 최고로 높여지는 공의가 무너지면,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고 맙니다.

기독교 사상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나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이와같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만물을 다스리라는 소위 문화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문화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물질을 다스리고 그에 필요한 이데올로기까지도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물질이나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21세기는 지구촌 전체에서 일할 수 있는 인구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20대 80의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가 지금 세계 곳곳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계화 지구촌>의 모습은 곳곳에서 벌써부터 그 전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독일의 실업자는 6백만명을 상회했습니다. 이는 48년 서독 건국이래 가장 많은 실업자수입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안에 제조업에서만 1백5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화는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일자리를 급격하게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낸다는 세계화 지상론자들 외침은 설득력을 잃은지 오래됐다는 주장입니다. 또 세계화는 세계를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로 양분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은 심각한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고 13억명은 하루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세계적 갑부 358명의 재산을 전부 합치면 25억명의 재산과 맞먹습니다.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최근 선정한 미국 400대 부자 랭킹에 따르면 10억달러 이상을 보유한 재산가(빌리어네어)는 지난해 135명에서 올해 170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400대 부자에 오른 화제의 인물로는 또 최근 동남아 통화위기를 배후 조정했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투자가 조지 소로스(27위), 90년대 들어 미 대통령 선거에 연거푸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실패한 텍사스의 거부 로스(33위) 등이 있습니다..... 400대 부자들은 백인들의 독무대가 되고 있는 가운데 흑인으로는 여성 방송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가 유일하게 349위에 기록됐다. 반면 아시아와 남미 계통의 재산가는 400위 안에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400대 부자 중에서 27, 33위가 동남아 통화위기를 배후 조정했다고 한다면, 이미 "20대 80의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하루를 연명하는 13억명의 지구촌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일주일에 무려 4억달러를 벌어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13,14세에 몸을 팔아 연명해가는 아이들, 거리에 버려져 구걸하며 겨우 겨우 살아가는 아이들이 무려 1억명이 된다고 합니다. 선진 강대국들이 끌고가는 세계화는 "20대 80의 사회"라는 가난과 질병으로 억눌려 고통받는 사람들만 늘려가는 허구에 불과합니다. 세계화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화는 살인적인 생존경쟁 속에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허구일뿐입니다. 세계화는 세계를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로 양분하는 인류의 덫일 뿐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를 강한 자로 만들고, 가난한 자를 부유한 자로 만들며,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만들며, 다수의 패배자들을 승리자로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의 복음화입니다. 복음화만이 비인간화되어가는 병폐된 사회와 국가를 고칠 수 있습니다. 복음화는 인간화 운동입니다.

6. 오늘의 역사가 안고 있는 빈부의 문제, 그로 인한 비인간화의 문제는 단순한 고민거리만이 아니라 일종의 위기의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갈브레이드 교수는 그의 책 <풍요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왜 빈곤한가?" "어째서 일부의 사람들이 풍요한 사회의 혜택에서 제외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가난한 사람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등의 성구들은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계 인류가 안고 있는 가난한 자의 문제는 교회가 안아야 할 가장 긴요한 문제입니다. 교회는 오늘날 세계를 긴장하게 만들고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고 말 가능성마저 있는 가난한 자에 대한 문제를 해소할 의무가 있습니다. 비록 가난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그 존엄성을 방치해서는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난 때문에 고생을 하지만 저 세상 "하늘 나라"에서는 "눈물도 슬픔도 죽음도 없다."는 것을 교회의 메시지로 내세운다면 이는 아편과 같은 종교를 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탐욕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공평하게 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이 무엇을 더 소유했다고 해서 가지지 못한 사람을 천대하거나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의로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이란 것은 가진 자가 많은 사회 속에서 다만 무엇을 남보다 못가졌다는 것 때문에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인간이 누려야 할 만족과 행복의 감정보다는 억울함과 부족함과 불만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출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출22: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출22:27)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난한 자는 있기 마련인데 이들이 당장에 필요한 삶을 위하여 가진 자들에게서 빚을 얻어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벌 옷을 전당포에 잡히고 생활비를 마련해야할만큼 궁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난한 자들의 권리나 소유가 침해를 당하거나 약탈을 당하게 될 때 가난하다고 해서 법률적으로 부당하게 처리되어서는 안됩니다.

"(출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출23: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출23:5)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 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출23:6)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출23:10) 너는 육 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출23:11) 제 칠 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땅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성구에 나타난 하나님 사상은 가난한 자를 천대하거나 억울하게 하지 말고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먹고 입는 문제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신15: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신15: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신15:9)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웠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신15: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가난한 자에게 인색하지 말고 아량을 베풀되 그 쓸 것을 넉넉히 주라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결코 가난한 사람 자신의 절약과 검소에서 물러갈 것이 아닙니다. 또는 빈자가 그의 기도의 힘으로 갑자기 부자방망이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을 이 땅에서 물리치는 길은 가진 자들이 자기 소유권을 포기하고 일부 또는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의 요구를 채워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교훈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가진 부는 자기들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그 물질을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하여 쓰도록 하나님은 용납하지 아니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빈자들에 대하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자기 것이라고 움켜쥐기만 하지 말고 반드시 그 손을 펴서 이웃 가난한 자를 넉넉하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빈자를 돕지않는 것은 벌써 "악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돕지 않는 행동이 전에 벌써 마음으로 죄를 범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빈자를 계속해서 너그럽고 넉넉하게 후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길이요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신24: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신24: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이 성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노동을 파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존재이며 이들 노동자는 나그네로 떠돌아 다니는 외국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품삯은 해가 진 다음까지 미루지 말고 당일 계산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노동자들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막벌이 생활을 하기 때문에 품삯을 받는 일을 최대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품삯을 미루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노동법이 사용자측, 즉 강자의 법이 되어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법에 호소할 길도 막혀 비인간화의 비극이 생긴다면 하나님께 호소된다면 그 죄가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잠언서를 보면 사회학적인 이유에서 불가피하게 가난하게 되고 약자가 되고 천대받는 사람이 되어버린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잠언서를 보면, 이 "가난한 자"는 항상 부자와 권력자의 압제와 핍박과 착취 때문에 만들어진 가난한 자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학대하는 사람 때문에 가난한 자가 생겼다는 말입니다(잠 14:31).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가난해진다."(잠 22:16)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경우"는 폭우같다(잠 28:4),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악한 관리는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다."(잠 28,15)는 구절은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가난해져서 천민이 되고 약자가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권력자의 학대와 압제가 결국 가난한 자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잠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22:16) 이를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잠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잠28:15)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그러므로 강자가 약자의 약점을 담당하지 않거나, 가진 자가 못가진 자의 궁핍을 담당하지 않는 것은 그 주어진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긍휼없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만이 주어질 것입니다. 교회가 이 시대에 벌여야 할 성령 운동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복음 전도운동입니다. 성령 운동을 통해 교세나 확장하거나 권위를 나타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지향해야 할 곳은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에 있는 가난한 자, 병들고 소외된 자, 갇히고 눌린 자들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땅 한 평 남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기독교 공원묘지 하나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저금 통장 하나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살아계셨을 때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예수님은 죽으실 때 벌거벗은 몸이셨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인류를 위해 벌거벗은 몸으로 가시관을 써야 할 때입니다. 십자가를 걸머지고 나라 백성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신 목적은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의인을 팔아먹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교회는 피값을 주고서라도 그 의인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평강교회가 이 시대의 아픔과 고통의 짐을 함께 지는 교회로 변화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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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울음군을 부르라

"(암5: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암5: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 최근 어느 신문 <시론>에 다음과 같은 공감대를 갖게 하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하면서 새삼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된 소나무가 있습니다. 이름은 "모래시계 소나무".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 역 플랫폼에 서 있는 네 그루의 소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령도 20년 정도밖에 안됐고 보통사람의 키보다 약간 큰 소나무입니다. SBS의 인기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인공인 혜린(고현정)의 배경장면에 잠깐동안 등장하면서 볼거리의 하나가 됐습니다. 이 "모래시계 소나무"는 관광객들이 붙인 이름을 정동진역에서 그대로 썼다는 것입니다. 세찬 바람에 시달려 젊은 나이에 허리가 굽어져 있는 소나무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애처로움을 느끼게 한다고 합니다. 계절이 바뀌는 요즘 정동진역은 안팎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일요일(15일)에도 6천여명의 관광객이 밀어닥쳐 낮 한때는 역구내가 통제불능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고 그날 근무자 김용욱씨가 전했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 중엔 "모래시계 소나무"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거나 멀리서 그 소나무를 망연히 바라보는 관광객들이 있습니다. 대개가 30대 또는 그 후반 이상의 세대들입니다. 물론 대학을 갓 졸업한 듯한 20대도 없지 않습니다. 얼핏보아 직장이 불안하거나 실직 등 어려운 이 시대의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듭니다. 버팀목도 없이 맞바람에 시달리는 "모래시계 소나무"를 자신이 겪는 고통처럼 생각하거나, 허리가 굽어진 그 소나무를 자신의 현재 모습으로 상상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대다수의 국민은 지금 국제통화기금(IMF)사태라는 예기치 못했던 큰 재앙에 빠져 있습니다. 자연에서 부는 그 어떤 태풍보다 강력하고 파괴적인 바람입니다. 피해범위도 전국적이고 모든 산업, 업종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실직자는 물론 노숙자, 방랑자등이 무수하게 늘고 있습니다. 거처만 확실하다면 가족이 헤어진 가정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아내 또는 자녀들의 무작정 가출 등으로 파괴돼 가는 가정이 나날이 늘어나는 실정입니다. 이제 시작단계인 대기업들의 대량해고, 구조조정이 본격화할 때 우리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바람은 잠재워야 합니다. 지난 정권이 일으킨 세계화 바람이 온 국민을 착각과 환상 속에 빠져들게 하고 한국경제가 IMF병원의 응급수술대에 올려지도록 만들지 않았는가. 모두 무지개를 탄 하늘사람들처럼 만들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의 주변엔 언제 불어닥칠지 모를 국제적 돌풍의 가능성이 산재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중국은 위안貨(화)를 평가절하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지만 그것도 항구적인 정책으로 보아선 안될 형편입니다. 중국이 자국의 경제상황변동에 따라 언제 환율을 조정, 거센 황색환풍(黃色換風)을 일으키게 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의 불안한 정국상황과 경제위기도 우리에겐 불안감을 갖게 하는 변수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동남아의 태풍으로 둔갑, 한국경제를 강타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외환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지금 국내외에서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칠 경우 한국경제는 쉽게 재기하기가 어려운 상태에 놓일 가능성이 너무나 큰 것입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소위 "북풍" 문제도 장기화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이다. "모래시계 소나무"는 원래 해풍으로부터 기차승객을 보호하기 위해 심었다고 합니다. 크게 굽어진 국가경제의 허리를 조속히 펴도록 하기 위해, 또 IMF사태라는 모진 바람에 시달림을 받는 국민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모래시계 소나무" 같은 바람막이 나무를 이 땅에 더 많이 심어야 할 것입니다.>

"모래 시계"의 여대생 주인공은 당시 군부독재의 불의에 항거해보지만 기득권 세력에 여지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독재 세력에 밀려 바다가 보이는 강원도 시골역 플랫폼으로 잠시 현실을 도피해봅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에 세찬 바닷 바람이 불어오고 그 곁에 해풍에 늘상 시달려 허리가 굽어진 한 그루 소나무는 마치 그 여대생 주인공과 학생 저항세력의 애처러운 모습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 "모래시계 소나무"를 힘없는 민초 서민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듯 합니다.

2. IMF시대에 들어 계속 증가해온 생계형 범죄가 이제는 점차 강력범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한일은행 권총강도범은 오토바이점을 운영하다 2억 여 원의 빚에 쪼들린 끝에 범행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범인은 전쟁기념관에 외벽을 타고 잠입해 전시된 권총을 훔치고, 부족한 부품을 시내에서 구입한 뒤 괌(GUAM)까지 날아가 사격장에서 실탄을 구해오기까지 했습니다. 범인이 진술한 범행동기가 사실이라면 이처럼 주도면밀하기 그지없는 계획은 역설적으로 생계난과 생계형 범죄의 실상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생계형 범죄가 이제는 이처럼 강력범화할 뿐만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는 점이고, 반면 이 강도에 대항하여 '죽기 살기로' 이단옆차기로 대응하여 돈을 지키고자 하는 세태가 더욱 더 우리를 서글프게 합니다. 지난해 말 실직해 보름째 집에서 소일하고 있는 강 아무개씨는 최근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의 방학 숙제 그림일기장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집안 방에서 아빠가 모로 누워 비디오를 보는 모습을 그려놓고, 일기에는‘IMF가 아빠를 회사에 못나가게 했다. 이제 우리 식구는 어떻게살아야 할지 죽고만 싶다’라고 써놓았던 것입니다. 사회 전체가 집단 우울증에 빠진 상황에서 더욱 심각한 증상으로 발전한 쪽은 아무래도 IMF 체제 이후 파산 상태에 처한 개인들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자기의 증상을 치유할 겨를도 없이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올해 들어 빚에 쪼들린 영세 상인·주부·중소기업인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하루에도 2∼3건씩 신문 지면에 오르고 있습니다. IMF 증후군이 국민들에게 자살하고 싶은 유혹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IMF형 자살>이 급증,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지난 2개월 동안 접수된 자살 사건이 12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3배나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강 투신자살 건수도 지난 2개월간 13건으로 과거 월평균보다 5배 가량 증가했습니다. 선량한 사람이 우발적으로 사고를 저지르는 경우도 잦아졌습니다. 밀린 임금문제로 다투다 사장에게 흉기를 휘두른 20대 공원, 집에 먹을 식량이 없어 가게에서 봉지쌀을 훔친 40대 가장, 빚독촉에 시달리자 신생아를 유괴한 임산부 등등. 이런 종류의 사건은 피의자들이 절박한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이기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생계가 막연한 사람들에게는 법과 윤리, 도덕과 체면이 소용없습니다. 이 난리통에 <피라미드식 판매>사기범들이 날뛰는 바람에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실업자가 1만명씩 생겨나 지금은 150만에서 20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4인가족으로 계산하면 600만명에서 800만명이 실직으로인해 배고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금의 사태를 6·25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서울역 남대문쪽 지하도에서 국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는 5백 여 명의 실업자 및 행려병자들과 서울역 대합실에서 노숙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6.25 전쟁참화를 연상케 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돌아갈 가정이 있고 부양해야 할 처자식이 있는 한 집안의 가장들입니다. 그럼에도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며 무료급식에 허기를 달래고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실직자는 따분한 시간을 죽이기 위해 지하철 순환선을 타고 하루에 열 바퀴를 돌기도 했다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 모두는 한 집안의 든든한 가장이요, 자랑스러운 아버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집을 나와 정처없이 떠도는 부랑자(浮浪者)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런 대량 실직사태보다 더 걱정스러운 일은 가정이라는 <둥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전에는 밖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지친 몸과 마음을 누일 가정이라는 안식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고락을 함께 하던 그 둥지마저 무너지고 있습니다. 갑자기 밀어닥친 IMF한파는 우리 경제뿐만 아니라 마침내 우리 가정의 밑뿌리까지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국제통화기금(IMF)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이러한 슬픈 행렬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집에도 떳떳히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의 심정이나 돌아오지 않는 가장을 기다리는 가족의 마음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착한 이들을 누가 거리로 내몰았습니까? 하루속히 이들이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은 당연히 정부와 정치권 및 기업의 몫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통분담에도 이들이 마땅히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은 너무 비정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합니다. 정치권은 이런 서민들의 절박한 처지는 망각한 채 오로지 출세와 당리당략에만 정신이 팔려 '신성한 국회의사당'에서 '고스톱'으로 시간을 죽이고, 판사와 변호사는 돈에 팔려 서민들의 화급한 민사재판을 2년에서 5년씩이나 끌어가고, 검사들은 가재도 게 편이라고 이들 '돈판사' '돈 변호사'에 대해 그 많은 돈을 푼돈이라며 기소유예 처분하며, 누구말대로 '권력의 초보운전자들'은 난폭운전을 즐기고 있고, 기업인들은 뼈를 깎는 자구노력은 외면한 채 근로자들의 목을 치는 일에만 신바람이 나 있습니다.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은 이 나라의 각계 각층의 '지도층인사들'임에도 불구하고 IMF한파로 고통을 당해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입니다. 게다가 병원까지 발 벗고 나서 환자들을 슬프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11일 서울지검 특별수사부는 서울의 13개 대형 종합병원들이 환자들을 상대로 진료비를 이중으로 청구하는 등 부조리를 저질렀다고 발표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1996년 한해 동안 26만여건(명)을 <사기쳐서>챙긴 진료비는 무려 1백58억3천만원. 그러나 실제 병원들이 챙긴 부정한 진료비는 그 이상이리라 추정됩니다. 특히 사람의 생명을 구제한다는 병원이 여러 가지 편법과 불법을 동원해 환자들로부터 부당한 진료비를 받아냈다는 부도덕성은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검찰 수사대상이 되었던 13개 종합병원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병원에서 환자를 상대로 공공연하게 부당 진료비를 받고있으며, 현재로서는 그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서 몸이 아프면 싫어도 별 수 없이 찾아가야 하는 곳이 병원입니다. 환자와 그 가족들은 병원에서 의료진의 도움으로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고 정신적인 위로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우리 나라 병원들은 환자들에게 만족할 만한 편의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고, 불친절하며, 환자를 진료하는 실력도 부족할 뿐더러 오히려 환자들로부터 비싼 진료비를 받아내고 있습니다. 한술 더 떠 환자에게 진료비 사기까지 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 병원들의 현주소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여기서 터지고 저기서 터져서 온 몸에 멍들어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거의 완벽하게 건조되었는데도 단 한가지 결함 때문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결함 투성이의 대한민국호는 침몰해 가고 있는데, 소위 지도층은 배의 부품을 뜯어 가지려고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형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예언자 아모스 눈에 비친 이스라엘 왕국은 비관적인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질서가 바로 잡혀 국가가 번영하고 민족역사가 자랑스럽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무도 망국으로 치달리는 역사의 내리막을 붙잡아 올려 구원시킬 수 없음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살고 있었던 그 시대상황, 다시말해 나라의 정치현실, 국민의 생활의욕의 감퇴, 국민도덕의 부패, 방향감각의 상실, 국가 안보의 불가항력적인 위기 등 비관적 현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모스는 성격적으로 쾌활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어서 역사를 비관적으로만 보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주권자, 부유층 유지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종교적인 권위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며 사회정의와 인권선언과 부정부패에 대한 규탄을 과감하게 한 것을 보아 그는 국가 사회의 어두운 면만을 보고 눈물만을 흘리고 있을 소극적이고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모스는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울 줄 아는 눈물의 소유자였고, 슬픈 일에 애통하고 잘못된 일에 통탄하고 모순된 일에 의분을 느끼고 무너져 가는 사직의 운명과 함께 통곡할 줄 아는 진정한 선지자였습니다. 아모스는 오늘 본문(5:16-17)에서 통곡해야 할 이유로 "하나님 이 그 역사 한 가운데로 지나가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통곡해야 할 때가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께서 지금 이 나라를 보신다해도 우리 모두가 거리 거리로 나가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일 것입니다. 통곡할 눈물마저 없거든 울음군을 불러서라도 울부짖어야만 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북왕국수도 사마리아 여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 에게 "통곡하라"고 권고합니다. 나라가 더 이상 황폐케 되지않도록, 과거 예레미야 당시 패망하여 황폐했던 이스라엘을 기억하고 통곡하라는 것입니다.

"(애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

아모스의 통곡 권고는 이스라엘 나라가 이러한 비통한 운명으로 바꾸어지지 않도록 나라의 부정 부패에 대하여, 집권자에게 밟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인권에 대하여, 부유층의 경제적 착취에 대하여, 망국으로 몰아가는 국민윤리의 타락에 대하여, 권력에 아부하는 종교인에 대하여, 역사의식이나 가치관도 없이 향락과 이기심에 도취한 사람들에 대하여, 특히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를 절대화시키고 있는 권력자에 대하여 통곡할 줄 아는 백성이 되라고 아모스는 권고합니다. 사실 이 나라를 이 모양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저는 서슴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믿으면서 소위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망쳐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치며 애곡하며 울음군을 불러서라도 통곡해야 할 사람은 바로 이 땅에 기독교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칼을 들고 이 나라 역사에 개입하시기 전에 베옷입고 거리 거리마다 나가 주저하지말고 통곡하며 회개해야 할 사람은 이 땅에 지도층 기독교인들입니다.

"(암5: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암5: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사실 한 개인이 통곡할 일도 있어서는 안 되지만, 한 민족국가가 통곡해야 할 운명에 놓였다는 사실은 역사의 전환점을 예상할 수 있는 대사건입니다. 아모스가 긴박하게 요청하는 통곡은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을 내다본 슬픔에서 나온 것입니다. 외적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나라 자체 내에서 볼 수 있는 각계 지도층의 타락과 부정부 그리고 국민의 윤리적 타락 때문에 생길 내면적인 붕괴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이러한 망할 징조를 말하며 경고하신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통곡은 아모스 자신의 권고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서 되어진 것입니다. 아모스가 말하는 통곡은 국가운명의 비운을 슬퍼하여 '오호라! 오호라!' 통곡하지만, 예레미야의 경우는 그 슬픔의 도가 지나 눈물이 나오지 않고 통곡도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렘22:18)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한 나라가 망했는데도 통곡하는 백성이 없다면 이 얼마나 처참한 현실입니까? '오호라' 이 말은 "슬픔을 못 이겨 몸을 뒤흔드는 것"을 뜻합니다. 이 '통곡'의 행동은 큰 울음소리와 자기 가슴을 치는 행동을 동반합니다. 때로는 이 슬픔이 "굵은 베를 몸에 두르고", "옷을 찢으며," 또한 "금식하는 행동도 따릅니다"(렘 4:8; 삼하 3:31; 삼하 1:12). 지금은 나라 민족을 위하여 굵은 베옷을 몸에 두르고 옷을 찢으며 금식하며 통곡해야 하는 긴박한 때입니다. 슬픔의 도가 지나쳐 눈물마저 사라졌거든 울음군이라도 불러서 울지 않으면 안될 시기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통곡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모든 "광장"과 "거리"로 나가 통곡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망국의 비탄과 곡성이 들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무너지고 황폐해질 위기에 빠진 나라 민족의 운명을 위하여 도시에서는 넓은 광장과 거리마다 곡성이 들리고, 농촌에는 들에 일하러 나간 '장정들'까지도 집으로 불러와서 통곡하게 하고, 가족들끼리만의 통곡으로는 그 슬픔을 다 표할 수 없어서 직업적인 "울음군"을 불러다가 통곡하라는 것입니다. 들에 나간 농부를 불러 와서 통곡을 하게 한다는 것은 생업을 포기한 비극적인 상황을 암시해 주기도 합니다. 또는 들에 나간 농부를 불러온다는 이 상황이 비극적이라 함은 적군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집에 남아 있던 식구들은 졸지에 다 참변을 당해 죽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위하여 통곡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들에 나가서 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그 참변을 면한 사람들을 불러와서 통곡해야 할 일 임을 말한다고 상상합니다. 비극적인 국가 운명이 광장과 거리가 있는 도시만이 아니라, 포도원과 농부가 있는 농촌에까지 미치는 전 국가적, 전 민족적 비통한 불행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의 종말을 눈 앞에 보고 역시 이러한 직업적인 울음군을 불러와서 슬픔과 탄식을 해야 할 역사의 비극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렘9: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하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렘9:18)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렘9:19) 이는 시온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수욕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주택을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이 노래도 아모스의 노래와 같이 자기 나라의 비극적인 운명을 내다보면서 이젠 구원받을 길이 없고 "멸망!"그 한 길로만 치닫고 있는 것을 단순한 예언자의 직감에 의한 감상이나, 정치, 경제, 교육 등 문화에 대한 과학적인 비판의 결과에서 나온 노래가 아니고 역시 아모스의 노래와 같이 여호와의 심판을 선언한 노래입니다. 한 나라의 주권이 백성의 이익과 그 봉사의 정신을 가지지 못하고 권력의 연장과 거기에 이권과 명예와 향락과 생명을 걸고 아부하고 있는 정부관리, 경제인, 문화인, 종교인들이 있는 이상 도시나 농촌이나 마찬가지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가는 농촌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미1:8)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미1:9)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미1:10) 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지어다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지어다 (미1:11) 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거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미1:12) 마롯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미1:13)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미1: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여하튼 아모스 당시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우리 형편은 초상집과 같은 비극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울음군을 불러서라도 울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때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80편은 이 상징적인 의미로써 자기 조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80: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시80:5)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시80:6)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시80: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시80:9)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시80:10)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시80:11)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시80:1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시80:13)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시80:14)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시80:15)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시80:16)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

이 시편은 대표적인 민족 탄식시입니다. 여기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한 "포도원"으로 비유하여 하나님 자신이 심고 가꾸신 포도원이 야수들에 의하여 짓밟히고 그 아름다운 과실이 도적당하고 짓밟히게 된 것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포도원은 본래 보잘것 없는 한 작은 포도원이었습니다. 애굽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가져다 심었다고 한 대로 이 민족의 역사는 출애굽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이 나라는 중동 아시아 세계를 장악할만큼 장하고 자랑스럽게 자랐습니다.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인근 작은 민족국가들의 조공을 받을 만치 주권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포도원은 이제 들짐승들에게 짓밟히는 패망의 포도원이 되었습니다. 그 패망이 포도 종자가 잘못 선택된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예언자 이사야는 그의 유명한 "포도원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5: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사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이사야도 자기 나라의 죄와 불의를 보고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그 아름다워야 할 포도원이 들포도밭이 되어버린 것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중심한 예언자로서 수도 집권층, 지도층, 부유층에서 볼 수 있었던 온갖 불의와 부정에 침묵을 지킬 수 없어서 이 "포도원 노래"를 환희의 노래라기보다 슬픈 애가로 지어 불렀습니다. 아모스 역시 그의 통탄하는 원인을 포도나무 자체나 그 땅 때문이 아니라 이 포도원을 가꾸어야 할 책임자인 지도자와 백성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았다고 폭로합니다. 이 한반도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어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거늘 어찌 슬픈 애가를 부르지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불모지 같은 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으나 거둬들인 것은 먹을 수 없는 들포도나 빈 껍데기뿐인데 어찌 패망의 포도원이라 하지 아니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의 철퇴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80:5)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지금은 나라 민족을 위해 "눈물" 양식을 먹으며 "다량의 눈물"을 마셔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이라."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한복판으로 지나가심으로 생겨질 비극이라는 뜻입니다. "너희 가운데"란 말은 "인간의 내면성" 또는 "영혼의 깊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심부를 통과한다는 뜻은, 그 역사의 중심에 대하여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간섭하신다는 사상은 지극히 구약적이며 사실 출애굽기 12장 1절에 하나님이 애굽의 역사에 간섭하심으로 큰 재난이 임했습니다.

"(출12: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출12: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출12: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하나님께서 역사에 간섭하셔서 애굽 한 가운데로 지나가심으로 한 나라에 비극적이고 비통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하신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대면을 한다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책임성을 감당해야 할 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얼마나 진실히 자기의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했는가를 물어, 어디에 하나님의 질서가 거부되었으며, 짓밟고 있는가를 밝히는 일입니다. 각계 각층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밝히는 일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병들고 갇히며 눌린 사람들에 대한 가진 자들의 사회적 책임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지를 심문하는 일입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위기를 직시하고 사회정의를 외쳤다는 것은 나라의 비극적 운명을 바라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 망해야 할 최후의 순간에서라도 나라의 운명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의 호소를 들어 주었습니까? 아무도 그의 호소를 듣고 울지 않았습니다. 울음군도 부르지 아니했습니다. 아모스의 마음은 그래서 더 안타까웠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를 이렇게 비유하여 안타까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눅7:31)...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눅7: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나라 민족과 자신의 삶 한 가운데 지나가시는" 심판의 때에 슬피 울며 이를 갈지 말고 지금 울음군을 불러서라도 울 수 있는 비통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라를 거덜나게 하는데 한 몫을 한 계층이 소위 '높은 데 있는' 지도층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높은 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족속들이 지도층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경제난국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베옷으로 갈아입고 길바닥에 나 앉아 통곡하기는커녕 기득권보호에 급급한 탐욕에 찌든 추악한 작태를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포도원'을 망쳐놓은 자들은 '높은 데 있는' 지도층 인사들인데도 그 고통과 아픔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은 '낮은 데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들뿐입니다. 예수께서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눅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시대를 놓고 애통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위를 보면 눈물이 아니라 울분밖에 쏟아질 것이 없을지라도 아래를 보면 눈물이 절로 날 것입니다. 아래에 있는 힘없고 가난한 민초들의 고통과 아픔을 바라보고 애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의 위에 있는 지도층 인사들이여, 눈물이 아깝거든 아래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나라 민족을 위해 울음군이라도 불러다 울 수 있는 티끌만한 양심이라고 보여주기 바랍니다. 나라 민족을 위해 애통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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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출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15: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최근 조선일보 <만물상>에서 이런 기사를 읽었습니다.

《한탄강 지류인 신천은 오-폐수로 새까만 먹물이었다. 시커먼 물줄기가 번들거리는 기름띠를 비늘처럼 두르고 기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염색-피혁 폐수로 더 이상 더러워질 수도 없는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역한 냄새가 헬기까지 올라오는 듯했다. 광주를 끼고 있는 경안천은 아예 구정물이었다. 왕숙천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드는 시커먼 폐수는 서울 시민의 식수인 잠실 수중보를 향해 검은 띠를 형성하며 마치 죽음의 독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거대한 팔당호는 온통 흙빛이었다....어느 기자는 이렇게 강물을 더렵혀 놓고 방치하는 나라가 세상에 또 있겠느냐는 한탄도 덧붙였다. 신천, 경안천, 왕숙천은 북한강과 남한강 지류로서 모두 팔당호로 흘러드는 강들이고 수도권 주민들은 바로 그런 팔당호 물을 마시고 있다. 정수를 한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2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이 <새까만 먹물> <구정물> <기름띠를 두른 오-폐수>를 상수원으로 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환경오염은 간접살인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지만, 이쯤 되면 직접살인하고 무엇이 다른가...》(1998.4.25.)

우리는 지금 어떤 물을 마시고 있습니까? 고도의 정수가 필요한 3급수, 쓴물을 마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수가 필요없는 1급수 생수를 마시고 있습니까?

오늘날 전 세계에 엘니뇨현상으로 기상이변이 속출하면서 자연재해 속에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심각한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파괴가 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연의 세계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후부터 인간이 발전시킨 자연과학적 문명에 의하여 무참하게 오염되어 가고 있으며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매년 약 500만톤의 석유가 바다에 유출되고 있으며, 각종 농약들, 10억톤의 DDT 등이 바다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남극의 펭귄과 북극의 곰에도 DDT 성분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원자로에서 배출되고 있는 뜨거운 물은 바닷물 온도를 상승시켜 바다의 모든 생물이 필요로 하는 산소의 농도가 저하되어 물고기들이 각종 질병에 걸려 산란이 감소되고 어류의 생존율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동차의 배기 가스와 산업공단의 굴뚝에서 배출되는 납과 수은은 뇌의 억제 기능을 저해하며 뇌 장애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대기의 오염은 대기권 오존층을 파괴함으로써 피부암 등의 질환을 유발시키며, 물을 산성화시켜 모든 생물들의 저항력을 약화시킵니다. 공장의 폐수, 도시의 하수, 농경하수, 펄프공장과 피혁, 직물공장에서 방출되는 폐수, 석유정제공장에서 방출되는 유독성폐수 등으로 인한 수질오염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을 주고 있습니다. 수질오염으로 인한 상수원 오염은 인간에게 발암률과 기형아 출생률을 높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생태계를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은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이 생태계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 남느냐 아니면 죽느냐의 문제 곧 생존의 문제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종말의 문제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원인은 <소유>와 <향유(享有)>를 최고 가치로 생각하는 현대사회의 가치관에 있습니다. 그래서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는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기본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적 프로그램과 운동도 필요하지만, 이와 동시에 현대인과 현대사회의 가치관이 변화되지 않으며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이 계속될 것이며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수고와 노력들은 끝없는 악순환을 거듭할 것입니다. 로마 클럽의 제 2보고서를 작성한 과학자들은 "지구의 현재 상황이 변화되기 위하여 소유와 팽창을 기본 가치로 보는 현대인의 기본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한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간의 자기중심적 생각과 행동이 변화되어야 한다. 인간은 소유를 중심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소위 문명의 이기들을 포기하고 불편한 생활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자원과 에너지의 무절제한 사용을 포기해야 하며 더 큰 이윤과 성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산업구조를 개편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새로운 인간성이 태어나야 하며 의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성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을까? 끝없는 인간의 소유욕과 파렴치한 향유를 서슴지 않는 삶의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기적인 본성에 사로잡힌 인간을 어떻게 이타적인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인간 본성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신을 자신의 욕망에서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문제의 가장 근본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계명 없이 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 인간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됩니다. 이웃도 자연의 세계도,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한 이용대상에 불과합니다. 보다 더 많은 소유와 자기확장과 모든 대상의 지배와 쾌락이 삶의 목표가 됩니다. 아무리 소유하여도 만족할 줄 모르며 감사할 줄 모르게 됩니다. 오늘날 생태계의 근본원인은 인간의 이러한 만족할 줄 모르는 소유욕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 중심적 소유욕과 팽창욕,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인간은 물론 "땅"도 저주를 받으며, 저주받은 땅은 인간에 해가 되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땅은 거꾸로 인간을 저주하게 됩니다.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그러므로 오늘날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나)에게 이웃(너)과 자연(그것)이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임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지금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썩어짐의 종노릇하며 탄식하며 고통 당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해방되어 자유에 이르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이같은 피조물의 탄식하며 고통 당하는 것을 아시고 탄식함으로 하나님께 친히 간구하시고 계십니다.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8:23) 이뿐 아니라...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인간과 더불어 모든 피조물이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다시말해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아야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 악한 본성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거듭 태어날 때 변화될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면,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인간이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세계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한다면 먼저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본래 자연의 세계가 죄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하나님의 새로운 인간성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회를 형성하는 인간의 변화 없이 사회가 변화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인간의 탄생 없이 세계가 달라진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세계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하여 인류사에 쓴물이 흐르게 만든 것은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 홍해를 건넌 후 수르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어갔지만 물을 얻지못하고 마라라고 하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물이 있긴 있어도 마실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사흘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불과 사흘 전 홍해의 기적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새까맣게 잊어 버리고 모세를 원망하며 불신앙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그때에 모세는 기도했고 하나님은 응답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무 하나를 그 쓴물에 던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모세가 나무가지를 쓴물에 던지자 먹을 수 없는 쓴물이 먹을 수 있는 단물로 변화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여기 '마라'는 '쓰다'는 뜻입니다. 물에 던진 나무는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불행과 고통을 행복과 기쁨으로 변화시켜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신23: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의 조건에서도 신앙으로 기뻐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때, 비참하고 불행하게만 보여졌던 자기 인생이 다행스럽고 축복된 생애로 변하게 됩니다. 형제의 시기 질투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기도 하며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기도 했던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절망적이고 불행했던 삶이 기쁨과 행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하나님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죽어가는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 등을 소생시키며 축복하시는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야말로 저주받은 인류를 구원하여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없는 지구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는 이 세상은 쓰디 쓴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는 인류의 소망과 기쁨, 행복과 축복입니다.

출애굽하여 홍해의 기적을 체험했던 그들이 불과 사흘도 되지않아 물이 없다고 원망하며 하나님에 대해 불신앙을 드러냈던 이스라엘 백성들인지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삶의 어떤 상황속에서도 원망 불평하지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실 물 하나 변변치 못하다고 해서 원망 불평한다면 어찌 복받을 만한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삶의 모든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이 복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렘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부유하여 환경이 좋은 사람을 복되다 하지 않고 가난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복되며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무상할뿐이며 참으로 신뢰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인 것을 욥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욥8:14)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환경을 원망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일뿐만 아니라 질병으로 죽음까지도 불러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6장 41-48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14,700명이나 염병으로 죽었습니다. 환경을 원망하는 마음은 책임전가의 마음이요, 모든 일에 비협조적인 마음입니다. 원망 불평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그 환경의 쓴물에 대한 책임을 다른 피조물에게 전가시키는 이중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원망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2장 14절에는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어진 모든 환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현실에 긍정적인 자세를 갖는 사람만이 원망없고 건강한 삶이 가능합니다. 분을 낼만한 처지와 환경이 되어 분을 낼지라도 원망 불평하는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도록 아무 죄도 없는 독생자를 잃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마음에 품으시기 바랍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의 해군 장교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사회가 부패되었고 무질서했습니다. 그는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몸은 점점 마비되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보아도 무슨 병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비가 되어 걷지도 못하는 그에게 정신과 의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만나는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하시오. 그런데 하루에 적어도 만 번을 해야 하오." 이 사람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억지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한번은 자기 아들이 감 두 개를 주자 그 아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을 손으로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마비되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완전히 치유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라 살림을 거덜 낸 것은 부패한 지도자들인데 힘없고 무력한 근로자들만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놓고 원망 불평이 생기지 않을 리 없습니다. 감정이 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통이 터질지경입니다. 단물은 '높으신 분들'께서 다 빨아 잡숫고, '낮은 곳'으로 구정물과 먹지 못할 쓴물만 쏟아붓는 우리의 현실이 용서되지 않습니까?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같이 이렇게 기도합시다.

나의 힘이 되시며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부유한 미국에서 노인 아파트 방한칸에

세들어 살며

새벽마다 깡통을 모아 번돈으로

교포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며

10억원의 전재산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교회에 바친 이주영, '깡통할머니'처럼

새벽기도가는 교인들의 발걸음이

사슴같게 하사

저 높은 곳에 다니는

'깡통교인'이 되게 하소서.

<김종필씨를 비롯한 정관계 인사는 물론

재벌회장, 전직 중앙정보부장,

신군부 핵심인사 등

당시 부촌이었던 장충동 한남동 신문로 등

고급 주택에 거의 들어갔었다>며

권력층의 치부를 말하고 싶다며

15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대도(大盜) 조세형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그리하여 이제라도 그들 권력층의 외양간을

비우게 하시고

그들 눈에서 수 억원을 홋가하는

<물방울 다이아몬드>같은 눈물이 흐르게 하사

깡통차고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게 하소서.

주의 일을 수년내에 부흥케 하시는 여호와여,

경제환난날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뼈가 썩어들어가면서 몸을 떨고 있는

이 나라의 민초(民草)들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게 하소서."

마라의 쓴물에 던져진 나무는 불신앙과 원망 불평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표현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든지 영육간에 고침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약속한 가나안 땅에 가는데, 지름길로 가지 않고 둘러 간다고 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하나님께서 보낸 불뱀에 물려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이 때 백성의 지도자 모세는 자기를 원망한 백성들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고 불뱀에 물린 자마다 쳐다보면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쳐다본 자마다 살아났습니다. 여기 놋뱀은 상징적으로 십자가를 뜻합니다.(민 21장)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만한 관계를, 그리고 이 용서를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의 치유를 가져옵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씻음 받지 못할 만큼 큰 죄인도 없으며, 예수님의 피가 필요없을 만큼 깨끗한 의인도 없기에 서로간에 스스럼 없이 용서하며 용서받을 줄 아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모습이며 건강한 삶과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비결인 것입니다.

룻기에 보면 베들레헴에 살던 행복한 여인 나오미가 있었습니다. 나오미란 이름은 행복한(즐거운) 여인 이란 뜻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모압땅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남편과 자식을 객지에서 잃어버린 불행한 여인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고향에 돌아갔더니 옛친구들이 이 여인의 수척한 모습을 보고 "네가 나오미가 아니냐?"라고 반깁니다. 그때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룻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희락)라 칭하지 말고 마라(고통)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룻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모압으로 갔던 나오미(즐거움)의 인생이 마라(고통)가 되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신앙의 터전을 버리고 물질을 찾아 떠났던 나오미, 희락은 마라, 고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마라가 되고서야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다. 마라는 고통과 불행입니다. 흉년이 들어 신앙의 터전을 버리고 먹을 것을 찾아 떠났던 나오미는 두 아들마저 잃어버리는 불행과 고통을 가슴에 안고 빈털털이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불행과 고통을 당하고서야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나오미가 마라의 인생이 되지 않았다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방 여인으로 함께 어울려 살다가 죽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마라 인생의 고통과 불행의 쓰라린 체험을 통하여 베들레헴에 돌아왔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다윗을 낳는 위대한 할머니가 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게 하셨던 것입니다.

스스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하시고 채찍하십니다. 우리는 생애에 있어서 언제나 마라에 이르는 것을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쓴맛을 알아야 단 맛을 압니다 "고진감래"란 말이 있습니다. 쓴 것을 모르는 혀는 단 것을 모릅니다. 세상이 쓴 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단 줄 압니다. 세상이 허무한 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세상이 주는 쓴물은 마시면 죽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쓴물을 달게 하셔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계8: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계8:11)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문제는 마라, 즉 고통과 불행에 직면하게 될 때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하고 자기와 함께 사는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라와 같은 IMF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고통과 불행에 처할수록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야합니다. 모세는 마라의 쓴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자기를 죽일 듯 달려드는 백성을 향해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삶에 고통과 불행을 당할 때 삶을 변명하지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는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는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기도가 시작될 때 이미 문제도 풀려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쓴물이 단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아무 나무나 아무렇게 던진다고 해서 쓴 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무를 던져야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이태리 가구를 만드는 나무를 던져도 소용없습니다. 금도끼나 은도끼를 마라의 연못에 던진다고 쓴물이 단물이 되지 않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권력이나 달러를 던진다고 쓰디쓴 인생이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침받고, 단물처럼 맛있고 가치있는 삶을 소유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여러분의 삶에 던져야 합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 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쓴물을 달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신 십자가의 쓴잔만이 우리 인생의 쓴잔을 달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라의 쓴잔을 마셔본 사람일수록 십자가 예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삶의 질을 달게 하시는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맛보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마실 물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쓴물밖에 없습니다. 마라같은 세상입니다. 인생 자체가 마라입니다. 인생이란 뚜껑을 열면 쓴 물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라는 쓴 물, 고통과 불행의 인생, 쓴 가정, 쓰디 쓴 세상사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십자가는 모든 것을 고치고 치료하여 달게하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여러분의 삶의 쓴맛을 달게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나무, 십자가의 예수를 가슴에 품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고통과 불행의 쓴잔을 십자가에서 마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주셨습니다. 예수앞에 나아가 십자가 든든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수 천년 동안 갈보리 언덕에 서 있는 저 십자가는 인류역사의 구석구석에서 고통하며 신음하는 자들에게 삶의 질병을 고치고 삶의 쓴맛을 단맛으로 바꾸어 주시고 있습니다. 십자가 나무가 던져진 곳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무의미하게 보람없이 살던 사람들이 보람을 찾았고, 슬픔 속에 살던 사람들이 기쁨을 찾았고, 다툼 속에 파괴되었던 가정들이 평화와 사랑을 찾았고, 질병에 시달리던 자들이 건강을 찾았고, 저주의 인생이 축복의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쓴물을 단물로 고치신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행진하여 "엘림"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 곳엔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시원하게 솟아나는 물샘 열둘과 종려 70주가 우거져 있는 오아시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원하게 솟아나는 "물샘 열둘과 종려 70주"가 우거져 있는 오아시스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림은 마라의 쓴물을 극복하고 걸어온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축복의 오아시스입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며 행진을 계속하노라면 반드시 엘림의 축복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삶에 쓴맛으로 불평과 원망의 한숨을 짓거나 슬퍼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준비하신 오아시스같은 교회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여러분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키는 능력과 오아시스같은 물샘과 시원한 삶의 그늘을 제공하여 참된 쉼터를 제공하는 축복의 전당입니다. 저희 평강교회는 여러분의 삶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주며, 참된 평안함과 강건함, 그리고 시원한 나무 그늘을 제공하는 평강의 교회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마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시하신 십자가가 있는 교회에 나오셔서 영원한 생수를 마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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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향기를 날리라!

"(호1: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호2: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호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아4: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1. 구약성경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최후 승리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품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한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멜과 결혼해서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들 세 자녀의 이름을 '이스르엘'과 '로루하마', '로암미'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이들 이름은 각각 '하나님께서 흩으시다', '사랑을 받지 못하다',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묵과하지 않고 징계하고 심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품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한 고멜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고멜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그 음란한 여인의 죄를 용서할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음란한 이스라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음란하여 사랑할 수 없는 여인과 결혼하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버릴애야 버릴 수 없고,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는 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뼈 아픈 사랑'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선지자 호세아로 하여금 이러한 고멜과 결혼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픔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참 종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멜과 비극적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체험토록 했던 것입니다. 호세아의 이와같은 비극적 사랑의 결혼은 선지자에게 짊어지운 하나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그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아픈 사랑'의 메시지를 몸소 증거해야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하신 '아픈 사랑'의 표현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 구약성경 아가서는 성도를 가리켜 백합화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백합화는 아름다움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다시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통해 고멜과 같이 더러워진 우리가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로 사랑을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신앙안에 있기만 하면 제 아무리 고멜같은 사람일지라도 아름답고 순결한 백합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멜같은 이스라엘에게 선언하신 복된 말씀은, 내가 네 죄악을 용서한다거나 너를 아내로 다시 받아 들인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 보다 더 은혜스러운 말씀이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은총과 긍휼히 여겨 진실함으로 너에게 장가들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하면 누구든지 과거의 모든 것은 온전히 잊어 버리고 오직 '새로운 혼인'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호2: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호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여기, "내가 네게 장가들리라"는 것은 허물 없는 순결한 처녀와의 혼인을 의미하는 것이지 가출하여 탕녀가 되어버린 아내를 다시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백합화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처녀로 삼아 결혼하여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하면 그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든지 불문하고 백합화같이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로 삼아 "새 언약"(혼인)으로 백년가약, 아니 영원한 가약을 맺겠다는 것입니다.

작곡가 멘델스존의 가문에 전해 내려온 사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곱사등이었습니다. 한 여자를 짝사랑하였으나 워낙 미녀여서 자기 같은 곱사의 사랑을 수락할리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함부르그의 부유한 실업가의 딸이었으므로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용기를 내어 이 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등을 곱사등으로 만든 것은 특별한 것들을 지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지금부터 평생동안 당신의 한숨과 눈물과, 당신의 걱정과 고독과, 당신의 아픔과 가시를 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대신 짊어지겠다, 책임지겠다는 이 말에 처녀는 몹시 감동되어 몇 달 후에는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그 손과 발의 못자국, 옆구리의 창자국에는 여러분의 한숨과 눈물, 걱정과 고독, 아픔과 가시를 예수께서 짊어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에게 삶의 가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하시면 그 가시나무 대신에 잣나무가 나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 숱한 가시덤불에 찔리고 찢어지며 짓밟혀 볼 품없는 들꽃 인생일지라도 예수 앞에 나오기만하면 그를 백합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지금도 가시덤불 세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삶의 향기를 잃어버리신 여러분, 예수 앞에 나와 백합화 향기나는 신부로 새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55: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가시들을 예수께서 그 손과 발에 받으시고 여러분을 신부로 맞아들이실 것입니다. 육체의 고통 중에 영혼의 유익을 주지않는 고통은 한 가지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오시면 인생에 있어 가시는 한 개 한 개가 하나님의 은총이요 사랑입니다.

2.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백합화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에게 본문은 그 백합화 향기를 날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에서 "북풍"은 찬바람을, "남풍"은 온화하고 따뜻한 바람을 말합니다. 북풍과 남풍, 찬바람과 따뜻한 바람이 교차로 불 때 동산의 나무가 성장하고 열매가 풍성히 맺는 것입니다. 성도의 보다 더 풍요로운 삶, 그리고 성숙된 삶을 위해서는 남풍만이 아니라 북풍이 교대로 불어와야 되듯이 연단의 시련과 사랑의 은총이 교대로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은총으로 아름답고 순결한 백합화가 되어진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백합화 향기가 멀리 멀리 퍼져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북풍과 남풍입니다. 쓸모없고 오히려 해를 주는 가시나무 가운데서 핀 백합화가 그 가시에 찔려 찢기면서 불어오는 북풍과 남풍에 날려 향기가 멀리 멀리 퍼져 가는 것입니다.

콜린 맥킬러스라는 호주의 여류작가 소설 <가시나무 새>가 있습니다. 여기 <가시나무 새>는 보통 새와는 다릅니다. 보통 새들은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꽃이나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푸른 숲을 찾아다닙니다. 거기에 편한 둥지를 틀고 삽니다. 그러나 <가시나무 새>들은 꽃나무나 푸른 나무가지를 찾아다니지 않고 황량한 벌판의 가시나무만 찾아 다닙니다. 그래서 제일 뾰족하고 억센 가시나무를 찾아서 자신의 심장을 그 가시에 찔려 죽는다는 겁니다. 아주 팔자가 사납고 비극적인 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새이기도 합니다. 심장을 가시나무에 찔릴 때, 그 고통 속에서 <가시나무 새>는 비로소 우는 것입니다. 그 울음소리는 보통 새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리입니다. 고통 속에서만 창조될 수 있는 영혼, 그 아름다움, 생의 절정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입니다. 여러분은 먹을 것을 찾아 시끄럽게 떠드는 참새가 아니라 <가시나무 새>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시나무 새>가 되어 가시나무가 많은 광야같은 세상으로 날아가시기 바랍니다. 가시나무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고통 속에서만 심장에서 울려나오는 창조적인 사랑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어떤 여인이나 연인, 신부도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운 생의 노래, 사랑의 노래를 창조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인간들을 향해 최후에 쏟아놓으신 주님의 말씀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는 아무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모든 인류를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심장에서 울려나오는 창조적인 사랑의 노래입니다.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해 "(행7:59)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던 스데반의 기도는 가시나무에 찔리면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린 백합화 향기였으며, 사울이라 하는 청년을 바울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창조적인 사랑의 노래였습니다. 내 살이 찔리고 내 가슴이 찔여도 그 가시가 사랑을 위한다면, 그 가시가 구원을 위하고 에덴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쁘게 그 가시관을 쓸 수 있어야 백합화같은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령 교수의 <야위어 가는 사람과 못 자국의 상징>이라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대로 옮겨싣는 것이니 타종교인들은 오해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경주의 석굴암을 구경하던 미국인 관광객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 부처님은 파란 눈으로 보아도 과연 여전히 아름다움과 자비의 극치를 나타낸 '기적의 돌'로 비칠 것인가? 나는 호기심을 품고 그들의 말을 몰래 엿들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닙니다. 무엄하게도 말입니다. 금발의 한 여인은 부처님의 엉덩이 쪽을 손가락질하면서 킬킬거리고 웃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투 패트!"(야, 너무 살쪘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투 패트! 지금도 나는 그때의 충격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컬처 쇼크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상과 비교해 보면 불상은 살이 너무 찐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당신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연화대에 앉아 계신 부처님을 십자가에 매단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나는 예수의 모습이 머리 속에 찍혀 있습니다. 뚱뚱한 예수, 배가 나온 예수, 체중이 레슬러처럼 1백 킬로그램이 되는 예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 보듯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에서 보듯이, 그분은 뒤틀린 철사처럼 야위어 있습니다.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아파하고 슬퍼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사랑은 자비와 또 다른 것입니다. 자비는 연민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연민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희열만이 아니라 위험과 비탄과 어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것은 편안함보다 '야윈' 모습으로 상징되는 세계입니다.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초상집을 잠시 들여다보십시오. 제일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사람이야말로 생시에 그 고인을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입니다. 거꾸로 아무 고통이나 슬픔도 없이 부의 봉투를 내던지고 돌아가는 사람은, 그 고인과 이해 관계로 사귀었을지언정 사랑으로 만난 적은 없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거듭거듭 말합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은 적도 없고, 교회에서 연보 돈을 바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의 모습만은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에게는 원죄의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 전체가 초상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손바닥의 못 자국을 보였습니다. 고통의 못 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사랑을 증명해 보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손바닥에 찍힌 그러한 못 자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옆구리에 창 자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예수의 것 보다는 작고 희미할망정, 누군가를 절실히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고통의 상흔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누구나 마굿간에 태어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은 괴로운 삶을 선택한 사랑인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편안한 삶, 살쪄 가는 삶, 부유한 삶을 원한다면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편안히 살기 위해, 고통을 덜기 위해 온갖 도구와 여러 기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증권 시장에 모여드는 사람처럼 이익을 얻기 위해 목이 쉬도록 외쳐댑니다. 이러한 문명 속에서는 누구도 고통이나 슬픔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편한 잠을 위해서는 불행한 이웃을 향해서 모른다고 고개를 내젓습니다. 어두운 감방이나 병실에 있는 사람들의 그 얼굴을 모른다고 합니다. 공장에서, 탄광에서, 바다 속 밑바닥에서 일하다가 지쳐 버린 사람들을 향해서 눈을 감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부정하고 또 부정합니다....우리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그 못 자국을 보여 주는 것으로만 서로의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보면 서도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는 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당신마저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준 그분이 이따금 예고 없이 나타나는 까닭입니다. 당신의 머리맡에 나타나 야위신 손을 내밀 때, 당신은 '도마'처럼 그분의 아픈 못자국을 만져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나는 그들을 모른다."고 부정할 때, 높은 베개를 베고 코를 골고 있을 때, 당신만은 눈을 뜨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파해야 합니다.」

예수믿는 성도는 호세아가 그의 비극적이고 고통스런 고멜과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아픈 가슴, 아픈 사랑을 체험했듯이 아파해야만 합니다. 성도는 그 사랑의 고통을 통해 이 시대의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아픈 가슴을 이해하고 그 아픈 가슴을 싸매며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최고의 사랑, 최고의 사랑의 노래인 우리 교회 2+1000복음화(민족복음화 + 세계복음화) 운동은 이 시대에 아파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손과 발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여주어 서로의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할 수 있는 사랑의 운동이어야 합니다. 고통의 십자가 못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증명해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손과 발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아파하고 고통당하는 우리의 이웃들은 여러분의 못박힌 손과 발,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달라고 소리없이 절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선교사화(史話)에 미얀마에 초창기 선교사로 갔던 저드슨 목사의 일화입니다. 미얀마에 도착하여 왕에게 기독교 선교의 신청서를 냈습니다. 불교국가로서 타종교의 선교활동은 왕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습니다. 왕은 저드슨 목사의 손을 보고 "그런 손으로는 무슨 말을 해도 내 백성이 듣지 않을거요. 먼저 내 백성의 손과 비슷해지시오." 저드슨 목사는 일체의 선교활동을 중단하고 농촌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며 원주민처럼 심한 농사일에 2년을 종사했습니다. 그의 손이 농부의 손과 같이 거칠어진 뒤에 선교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때 저드슨 목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드슨 목사를 통해 불교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미얀마인이 그의 평생에 5만명에 달했습니다. 가시에 찔리고 찢긴 한 사람의 아픔을 통해 무려 5만명의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눈 먼자를 위한 진흙묻은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문둥병자를 껴안은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십자가에 못박혀 찢겨진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내 허물을 가리워 주신 손이요, 내 죄 때문에 내대신 형벌을 받으신 손, 돌아 온 탕자를 무조건 껴안으시고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손입니다. 백합화같으신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찬바람, 북풍이 불어온다해도, 그래서 가시나무에 찔려 그 꽃잎이 찢겨진다해도 그것이 오히려 백합화 향기를 멀리 멀리 퍼트리게 하시는 이웃 사랑을 이룩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믿으시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백합화 향기는 그 꽃잎이 가시에 찔려 찢겨질 때 그 진한 향기가 진동하며, 때 마침 불어오는 북풍과 남풍에 실려 사방에 향기를 날려 보낼 수 있습니다.

3. 호세아는 범죄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의 새 희망은 나라를 개혁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소망을 둔다면 정치 경제사회의 구조 개혁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있습니다. 아무리 구조 개혁이 이루어진다해도 하나님께서 이 나라 백성을 향해,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며 등을 돌리시고 흩으신다면 모든 것이 허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범죄한 나라,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행위가 부패한 자식"같은 나라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인 것입니다.

"(사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1: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사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지금 이 시대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인 이 나라 이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긍휼로 "짜며 싸매며", 성령의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먹을 찾아 다니며 시끄럽게 쏘다니는 참새나, 꿀을 따기 위해 이 꽃 저 꽃을 찾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개젓는 벌새가 되지 마시고, 가시나무 가시에 찔릴지라도 가시에 찔려 아파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가시나무 새>가 되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시고, 가시에 찔린 백합화가 되어 때마침 불어오는 북풍과 남풍에 향기를 실어 멀리 멀리 날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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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하나님을 찾으라!

"(대하15:1)...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셨나니 (대하15:5) 그 때에 열국에 거한 모든 백성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치 못하며 (대하15:6) 이 나라가 저 나라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 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모든 고난으로 요란케 하셨음이니라 (대하15:7)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대하15:13)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대하15:14)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대하15:15)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대하15:16) 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대하15:17)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대하15:18) 저가 또 그 부친의 구별한 물건과 자기의 구별한 물건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렸더니 (대하15:19) 이 때부터 아사 왕 삼십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남 유다 아사 왕은 침략군 구스 군대를 대파하고 개선가를 부르며 예루살렘에 당당하게 입성합니다. 이 때 하나님의 사자(使者) 아사랴가 왕을 영접하여 개선을 축하하기 보다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에게 전합니다.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아사 왕은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 민족이 되기 위해 제2차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이스라엘 역대 왕중에서 아사 왕처럼 두 번씩이나 개혁을 단행한 왕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구스와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므로 교만해져 자칫 개혁을 중단하고 하나님을 망각하기 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이때 하나님의 버림을 받지않기 위해 개혁의 의지를 굽히지 아니하고 과감하고 철저하게 제2차 개혁을 단행함으로 하나님께서 나라 사방에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은 역사적 사실을 통해 볼 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하여 나라가 전쟁이 없는 사방의 평안을 누리고자 하면 지속적인 개혁 단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아사 왕의 개혁은 자신의 집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사 왕은 태후이며 자신의 어머니인 마아가를 개혁 차원에서 제일 먼저 처벌했습니다. 왕의 모친 마아가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아세라를 숭배했었습니다. 왕은 가차없이 그 우상을 찍어 산산히 부숴 가루로 만들어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왕의 어머니라는 태후의 지위까지도 폐위시켜버렸습니다.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을 과감하게 치워버렸습니다. 이는 나라 민족이 평안해지기 위해서는 개혁이 혈연의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않고 공정하게 시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국가 지도층을 대변할 만한 인물일지라도, 소위 집권 세력의 가신(家臣)일지라도 단호하게 처벌함으로 개혁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개혁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나아가 우상숭배의 폐단을 일깨우고 그 일을 자행하는 일반 국민에게 경종을 울리며 국민 총화를 이룩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 것입니다. 자신의 모친인 마아가의 지위까지도 폐위시키는 일들이 개인적으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아픔이었지만, 아사 왕은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는 하나님 말씀대로 마음을 강하게 하여 소위 성역없는 개혁을 단행하므로 국민총화를 이룩하여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사 왕은 이미 한 번의 개혁을 치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수구세력의 상당한 저항을 받아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개혁을 시도한다는 것은 마음에 큰 부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음을 강하게 하여 1차 개혁 당시보다 더 단호하게, 그야말로 성역없는 개혁을 단행하여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개혁은 많은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남유다의 경건한 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북왕국의 여러 지파들까지 그의 개혁을 지지하고 개혁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대하15:9) 또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를 모으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저희 중에 우거하는 자를 모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

김대중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들의 청와대 만찬회동 계획이 알려진 7월22일부터 청와대와 국민회의에는 항의성 전화가 빗발쳐 민원담당부서가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고 합니다.

"잘한 것도 없는 사람들을 왜 비싼 돈 들여 저녁식사에 초대하느냐?"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돈이 있으면 거리의 노숙자들에게 밥이나 사줘라!"

"나라를 망친 범법자들에게 삭스핀(상어 지느러미)까지 포함된 진수성찬이 말이 되느냐?"

특히 김영삼 전대통령에 대해서는 "나라를 거덜 낸 사람에게 웬 환대냐?"

"미적거리지 말고 경제청문회나 빨리 열어 심판대에 세워라!"는 등의 비난이 퍼부어졌습니다.

또 <반란 및 내란의 수괴들>이자 수 천억 원대 천문학적 규모의 축재 장본인인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앞을 다퉈 <나라를 걱정하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국민의 감정을 폭발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감정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전직 대통령들의 청와대 만찬은 그들과 관련된 <사건들>이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몇 가지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점을 드러냈습니다. 우선 <국민적 화합>이라는 명목하에 전직 대통령들의 형사 사안을 대충 넘기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청와대 만찬으로 YS(김영삼 전대통령)에게 경제청문회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김대통령은 5월4일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월 스트리트 저널>과의 회견에서 "경제 실패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김영삼 전대통령에게 있지만 당시 대통령은 경제에 대해 잘 몰랐다."면서 "그러나 김 전대통령의 운명이 앞서간 전직 대통령들의 운명과 같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YS에 대해 어떠한 <처벌>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시사주간지 뉴스 플러스 8월 3일자) 김대중 대통령은 최근 네 전직 대통령과 만찬회동을 통해 경제위기 극복과 국민 총 화합을 이룩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현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과의 화합을 도모하려는 이러한 모습은 외면적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사법부의 확정 판결로 청산해야할 것들을 해결하지 않고는 진정한 국민적 화합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재임 시 불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구속돼 실형을 받았습니다. 대법원 확정판결로 이들에게 추징할 금액은 전 전대통령 2205억 원, 노 전대통령 2628억9600만원에 이릅니다. 김 전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도 항소심에서 벌금 14억4000만원, 추징금 5억2420원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석방된 지 상당기간이 지났지만 마땅히 내야 할 추징금을 완납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김 전대통령이 92년 대선 자금으로 쓰고 남겨둔 돈으로 추정되는, 김현철씨가 내야 할 벌금과 추징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국난을 초래한데 일차적인 책임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바로 이들 전직 대통령들입니다. 경제위기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집권자들의 누적된 부패구조와 총체적인 사회적 모순이 한계상황에 이르자, 필연적으로 터져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금계좌를 찾아 가져 갈테면 가져가 보라는 식은 국가의 최고 지도자였던 사람으로서의 태도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라 경제가 이 지경인데도 대통령을 지낸 분들이 법적 책임마저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국민을 우습게 보는 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법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집행될 때 진정한 국민 총화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들은 재임 중 불법 행위가 명백히 판명되었으므로, 판결내용만이라도 성실하게 이행해야 합니다. 현 정부가 국민의 지지 속에 개혁에 성공하여 나라가 평안해지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우선 이들 지도층에 대한 아사 왕같은 과감한 개혁 단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함으로 투명하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며,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관행이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서는 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탈옥수 신창원을 홍길동이나 임꺽정으로 만들어가는 세태 속에 이 땅에는 탈법자는 더욱 더 늘어만 갈 것이고, 국민총화합을 끌어내지 못하므로 개혁을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이 일개 탈옥수 하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지도층의 부정 부패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권력을 빙자하여 불법으로 조성한 불법 비자금과 불법으로 해외에 반출한 외화를 조속하고 철저하게 환수하여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근로자들을 위해 재분배되어지 아니하면 진정한 국민 총화는 이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결국 나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더욱 더 가중될 것입니다.

저는 나라 민족의 가슴아픈 현실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해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한 곡물공출로 1920년대 조선 민중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설움과 분노의 눈물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목포항을 통해 빠져나가는 곡식을 눈 뜨고 보면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분노와 나라 잃은 슬픔을 <목포의 눈물>이라는 유행가에 담아 부르며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뼈아프게 노래했었습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밑에

임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초

유달산 바람은 영산강을 안으니

임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조선 민중의 가슴에 <목포의 눈물>이 흐르게 한 일제를 망하게 하신 하나님이시여, 지난 청와대 전직 대통령 만찬에 항의 전화가 항의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나라를 망친 범법자들에게 삭스핀(상어 지느러미)까지 포함된 진수성찬이 말이 되느냐?"

"나라를 거덜낸 사람에게 웬 환대냐?"

"반란 및 내라느이 수괴자들이자 수 천억원대 천문학적 규모의 부정 축재 장본인들이 나라 걱정은 웬 망발이냐?"

"대법원 확정판결로 이들에게 추징할 금액이 전 전대통령은 2205억원, 노 전대통령은 2628억 9600만원인데 청와대 만찬은 이들에 대한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냐?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돈이 있으면 거리의 노숙자들에게 밥이나 사줘라"

이들 항의 전화가 <목포의 눈물>이 되게 하소서.

어찌 이뿐이랴?

최근 대기업의 재산 해외도피 사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신동아 1억 6천만 달러(약 2000억원), 한보 3270만 달러(약 400억원), 국내 <졸부>들이 해외로 빼돌렸거나 장롱에 감춰진 달러는 약 300억 달러(37조원) 내지는 500억 달러(약 61조원) 등.

검찰총장은 "해외로 빼돌린 금액에 대한 정보를 정부도 갖고 있지만 그 액수가 엄청나 공개될 경우 <난리>가 나기 때문에 규모를 말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스위스 뱅커와 접촉한 한 금융권 인사는 "현재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한국인의 예금은 결코 적은 규모가 아니며 지금도 한국 돈이 스위스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뼈빠지게 일해서 벌어들인 달러, 백주에 <졸부>들에 의해 다 빠져나가는 판국에 <목포의 눈물>이 <가요 톱 10>에 1위곡이 되게 하소서.

나라가 사방에 평안함을 얻으려면 개혁만으로 되지않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야만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의 만난바 되는 나라 백성이 되어야 전쟁이 없는 사방의 평안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가장 원하시는 제물은 바로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과 슬픔들은 모두가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면 세상에서 상하고 찢겨진 마음들을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며 마음에 평안함을 베풀어주십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 하나님의 만난 바 되시기 바랍니다.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하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아니하면 죽이기로 작정했겠습니까?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대하15:13)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대하15:14)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대하15:15)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1세기 초대 교회 당시 기록된 기독교 문서들을 찾아보면 예수님을 좇았고 사랑했던 많은 제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의 이름 가운데 '티테디오스'라는 이름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티테디오스 바울,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알미우스 등등‥‥ 그런데 티테디오스는 그 사람의 원래 이름이 아니라 이름 앞에 붙였던 하나의 별칭이었습니다. 티테디오스는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들의 삶이 변화된 다음에 붙여지게 된 하나의 애칭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의 예수의 제자들이 왜 이러한 이름을 많이 가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하나님인 것을 깨달은 순간, 자신들의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길 수 있었고 비로소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평강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불안과 초조, 근심과 걱정 속에 지낼 수 밖에 없었으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순간부터는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평안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알지도 못하는 평안이 있습니다. 아사 왕의 개혁은 내적인 개혁으로 발전되어 백성들은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게 되었고, 자신을 찾는 유다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도 만나 주시었고 또한 평안을 주시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만났기에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즉, 근심과 염려 없는 삶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부터 여러분의 이름 앞에도 '티테디오스'라는 붙일 수 있는 하나님의 평안이 항상 함께 하실 수 있도록 이전보다 더욱 더 간절한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나라 민족 전체가 사는 길은, 평안해지는 길은 하나님을 찾는 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과감하고 중단없는 개혁을 통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하나님의 만난바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방의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과 더불어 여러분의 가정, 우리 교회, 더 나아가 이 나라 민족 가운데 아직도 개혁되지 아니한 것들이 있거든 누구, 어느 기관을 막론하고 과감하고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사방에 평안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교회 성장과 부흥에 최대의 걸림돌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다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와 나라 민족의 부흥을 사모하게 되었을 때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사모하지 아니하고 냉담하여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지를 그들은 깨달았기 때문에 "(대하15:13)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대하15:14)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까지 했겠습니까? 아사 왕은 우상 몇 개를 때려 부숴버리고 불합리한 제도 몇 가지를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이 하나같이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그 마음의 밭을 갈아엎도록 했던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훨씬 더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이 평안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해 살고자 할 때 평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와 건강과 모든 생명을 아낌없이 드릴 때 자신과 교회, 나라와 백성이 온전한 성장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어떻습니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는 무정한 세대가 아닙니까?

"(마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마11: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아사 왕의 개혁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만큼 온 땅을 둘러싸고 있는 우상의 세력들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것이 우상의 세력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종교는 형식만 남고 그 내용들은 속속들이 이방문화에 오염되어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심을 다해 찾으라고, 그렇지 아니하면 죽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 민족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평강의 나라가 되기 위해 그야말로 성역 없는, 그리고 과감하고 지속적인 개혁이 위에서부터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더 나아가 썩어질 세상 것들을 찾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찾으시는 나라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시기 기원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더 뜨거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을 찾으시므로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평안함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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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광야를 기억하라

"(신8: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신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신8: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일제 시대의 악몽을 체험했던 세대들이 안타깝게도 점차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일제의 만행을 하나 하나 밝혀내어 그 사실들을 다시 한번 상기함으로 역사를 통해 주시는 이 나라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저는 며칠전 모방송사에서 방영했던 <트럭섬의 비명>을 보고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당했던 고난의 역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54년전 남태평양 군도 <트럭섬의 비명>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아래 이 나라 민족이 당한 뼈아픈 과거를 상기해보자. 트럭섬은 당시 조선에서 뱃길로 한 달 남짓 걸리는 머나 먼 남태평양의 한 군도입니다. 이 섬은 천혜의 산호섬으로 일본 핵심 군수기지였습니다. 1930년부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징용당한 조선 사람들은 대략 700여만 명 정도였습니다. 이중 1만여 명이 트럭섬에 징용되어 트럭섬 에덴비행장 건설과 군수물자 보급에 노예로 사용되었습니다. 위안부로 이곳에 끌려간 조선 여자들은 대략 500여 명으로 추산되었습니다. 이곳에 노예로 끌려간 조선 징용자들은 대부분 1944년 2월 17,18일 양일간에 걸친 미군의 폭격으로 일본군과 함께 수장되거나 무참하게 살해되기도 하고 아니면 생체실험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군의 폭격은 일본의 진주만 폭격보다 15배가 넘는 화력으로 무려 1813톤의 폭탄이 이틀간에 쏟어부어지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 폭격으로 40여척의 일본 군함은 하나도 남지않고 모두 침몰당하고 말았습니다. 침몰하는 일본 군함들과 함께 수장된 징용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곳 바다에 가라앉은 배 밑바닥에서 발견되는 유물들과 유골들을 보면 그 당시의 참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미군들과 조선사람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던 일본군은 12명으로 밝혀져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일본군은 패전 직전 부족한 식량 때문에 조선 징용자들이 굶주려 2,3일동안 일을 나가지 못하면 그냥 생매장당했다고 원주민들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들 징용자들은 굶다못해 도마뱀을 잡아 몰래 구워먹기도 하고, 어쩌다 쥐라도 한 마리 잡으면 포식했노라고 위안을 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배가 고파 견디지 못하다가 트럭섬에 흔한 고무나무를 칼로 베면 하얀물이 나오는데 이것이 달기도 해서 킻아 먹기도 했습니다. 너무 배고픈 나머지 계속해서 그 하얀물을 먹다보면 그것이 내장에 들어가 고무가 되어 굳어져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이곳에 두블란 위안소 등 위안소가 3군데 있었는데 위안부로 끌려갔던 김복동 할머니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위안부 한 명이 주말이면 일본군 3,40명 정도를 상대했는데 나중에는 거동을 못할 정도로 성노예로, 성노리개감으로 사용되었답니다. 이들은 성노예로 뿐만 아니라 강제 수혈까지 당했습니다. 평소에 피검사를 해놓았다가 부상당한 일본군의 수술이 있을 때 끌려가 강제로 수혈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잘 먹지도 못한 몸으로 밤으로는 성노예로, 수술시에는 강제 수혈을 당하게 되면 몸은 엉망진창이 되어 비칠비칠하고 고통은 참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들 위안부들은 생체실험으로 쓰이거나, 패전 후 다행히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돌아오는 배에서 자괴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돌아가 봐야 병들고 힘없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 하나 없고 의지할만한 자식 하나 없기 때문에 대부분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한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트럭섬에서 비명에 죽어간 조선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해주는 사람없이 원주민이 부르는 <아리랑> 노래 가락에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일본 전역에서 우리 한민족은 북해도 철도에 깔린 나무토막 숫자만큼이나 많이 한을 안고 쓰러져 갔으며, 지금도 시멘트로 뒤덮인 땅속에서 백골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다 떨어진 타올 한 장을 들고 뼈와 가죽만 남은 수척한 우리 동포가 낙반이나 가스폭발 또는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채 차가운 이역의 땅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주검으로 묻혀있는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동원 된 분들, 이들은 바로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입니다. 이분들은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속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요구받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노예처럼 굴종하면서 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북해도의 탄광촌을 비롯해 일본제국주의 본토 곳곳에서 파업과 폭력투쟁을 전개하면서 제국주의에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많은 분들이 숨져 갔습니다. 강제동원의 역사 속에는 노예의 삶을 거부하고 투쟁한 피와 눈물의 기록이 아롱져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강제동원의 역사, 그 뼈아픈 역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하는 말을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 있습니다. 역사 그 자체를 만드시는 하나님을 제외하고서는 역사의 바른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만들고 역사를 진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지난 광야 40년간의 역사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묻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 민족의 일제 36년사에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나라가 겪었던 일제 36년의 고난의 역사 못지 않게 이스라엘의 광야 40년도 말 그대로 거칠고 삭막한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인간으로 하여금 고생케 하거나 근심케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닙니다.

"(애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해 그냥 눈감아 주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죄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엄히 징계하셔서 그 죄악을 깨우치며 회개토록 하여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은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유리방황케 하신 이유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낮에는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아래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습니다. 또한 밤에는 추위로 말미암아 불기운이 없이는 몇 시간도 견딜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마실 물이나 사람이 먹고 살만한 음식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시고, 밤에는 따뜻한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시지 아니하면 단 하루도 견딜 수 없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동안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하늘에서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반석을 쳐서 그들의 마실 물, 생수를 공급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40년 동안 그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고, 그들의 발까지 하나 부릍지 아니하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이 입고 먹고 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인생을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달프고 험난한 광야 생활 중에서도 의식주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상기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계명을 순종하도록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광야에서 겪는 여러 가지 고난과 위험 가운데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통감하고 완악하며 오만한 마음을 버릴 때까지 광야에서 생활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광야 40년간의 고난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겸손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는 일제의 강점하에 나라가 일본과 합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자, 사람 가릴 것 없이 모두 수탈을 당한 상태에서 도저히 스스로는 독립하거나 국권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 개입이 없었던들 우리는 나라 해방이라는 광복은 누릴 수 없었습니다. 광복 후 반세기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 민족을 엄청나게 축복하셨습니다. 선진국 대열 진입 일보직전까지 이르도록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겸손치 못하고 교만해져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부정부패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 국민 1인당 500만원이라는 사상 초유의 채무국가로 전락하여 IMF의 경제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는 데는 단지 폭탄 두 발로 충분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에 약 4톤의 원자폭탄을 실은 B29 폭격기가 일본의 히로시마를 조준했습니다. 미국에서 그해 7월에 개발된 이 새로운 폭탄은 맨먼저 눈부신 섬광이 빛을 발하고 곧이어 버섯구름 모양의 불덩어리로 변하는데 이러한 현상을 본 것만으로도 상해를 입을 만큼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히로시마의 인구는 약 44만 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6만 명이 투하 직후 곧 바로 즉사했습니다. 압력파로 인하여 투하지점 1Km 내외에 있던 사람들의 86%가 즉사한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실로 처참했습니다. 방사능에 의해 살갖이 벗겨졌고 내장기관이 녹아 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약 5km 범위에서 섬광을 본 사람들은 모두 눈에 화상을 입고 실명했습니다. 암이 희생자들에게 발병해서 히로시마의 암환자가 2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폭발의 중심부는 모두 타서 녹아 들어가 그 녹은 중심부가 검게 탄 땅위로 밝은 빛을 드리웠습니다. 버섯구름이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이 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 나가사키(당시 인구 30만 명)에 투하된 두 번째 폭탄 역시 4만 명을 희생시켰습니다. 이 당시 두 도시에 징병과 징용 등으로 강제 또는 반강제로 끌려와 살았던 조선인이 7만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원폭 당시 4만 명이 죽었고 3만 명이 살아남았으나 대부분이 원폭피해로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능력마저 상실한 채 주위의 외면과 무관심 속에서 어렵게 살아 가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으로 돌아온 원폭 피해자들은 보상은커녕 치료받을 방법도 없이 지금까지도 고통받으며 겨우 연명해가고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신다고 했는데(마태복음 10장 29절) 어찌 이같은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없겠습니까? 이 나라 민족을 사생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참 아들로 대우하사 장차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를 가나안 땅의 축복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인 것입니다.

"(히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히12:5)...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날 우리 민족이 겪었던 고난의 광야 생활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 사랑의 손길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이 나라 민족이 어떠한 환경에서도 변함없이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여부를 시험키 위해서 광야로 내몰았던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환난 가운데 처하게 되면 자신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마26: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역시 자신에게 환난이 닥치자 맹세의 기운이 채 사라지지도 않은 그 날 새벽녘에 자신의 말을 뒤집고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광야 40년의 역경과 환난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여부를 시험해 보려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성도들을 시험하며 연단시키기를 마치 풀무불로 은을 단련함 같이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66: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IMF체재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재(水災)를 하나님께서 이 나라 민족을 사랑하사 연단하시는 불 시험으로 알고 어려울수록 더욱 더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광복 53주년을 맞아 이 나라 민족이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세우고...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이렇게 기도드리기를 원합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셔서 대한민국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여,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 인간으로서는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야수같은 삶을 강요당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끌려가 힘겨운 삶을 살다가

어느 날 한줌 재로 사라져 버린 조선인 원폭 희생자들과

아직도 질병과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원폭피해자들의 신음소리.

동토의 땅 사할린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한 지 50년이 되었어도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 만리 머나먼 땅에 묶여버린 사할린 한인 동포들.

일본 사회의 정대와 법적 차별 속에

외국인 아닌 외국인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재일 동포들

일본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려 나갔다가

부상당한 채 고통받는 조선인 출신 상이군인들과

억울하게 전범으로 몰려 오욕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이른바 조선인 출신 BC급 전범들의 통곡.

일본 열도의 탄광촌과 지하 군수공장에서 혹은 남태평양의 전선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채 백골로 남아

오늘도 고향의 땅에 묻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45만 강제동원 희생자들

일본제국주의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패망할 때까지 조선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이들 700여 만 명이 전쟁도구로 국내외로 강제로 끌려가 비참한 생애를 살았던 이 강제동원의 역사는 아직도 그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으며 죽은 자의 한 맺힌 두 눈이 부릅뜨고 있는데 아직도 그 피 맺힌 눈을 감겨줄 사람이 없나이다.

광복 53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내팽겨져 있었던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맺힌 한을 속히 풀어주사 편히 잠들게 하소서.

다시는 이 땅 위에 <신고산 타령>이 들리지 않게 하소서.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지원병 보낸 어머니 가슴만 쥐어뜯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양곡배급 적어서 콩깨묵만 먹고 사누나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정신대 보낸 어머니 딸이 가엾어 울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풀만 씹는 어미소 배가 고파서 우누나.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금붙이 쇠붙이 밥그릇마저 모조리 긁어 갔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이름 석자 잃고서 족보만 들고 우누나.

이 노래가 우리들의 아들, 딸들이

밝은 내일을 만드는 거름이 되게 하소서.>

조선 총독부 총독 미나미, 그 후임자 고이소, 아베 모두가 일제 당시 조선 교회를 완전히 해체하여 일본 교단 산하에 두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자들을 모조리 투옥했지만 오히려 불안을 감추지 못했던 것을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패전 직전 "미군이 필리핀을 함락시켰을 때 일본군 지도자는 미·소가 조선에 진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조선인 기독교인이 거기에 협력할 것을 두려워하여 1945년 8월 중순경 조선인 기독교인을 모두 살해하도록 본격적으로 계획하고 있었다."고 블레어(W.N.Blair)는 기록했으며 마펫은 그 처형이 8월 18일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총독부는 "조선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않는 40만의 군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교도들입니다."는 보고를 받고 이들을 살해할 계획을 수립, 진행할 예정이었습니다. 영변에서는 2시간에 20명씩 살인할 능력을 가진 일본군인에 의하여 죽창과 일본도로 찔러 죽이는 방법으로 2만 7천명의 살해를 예정했던 약 20평의 살인굴이 전 일본 형사의 안내로 확인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나라 역사에 대한 개입이 없었던들 이 땅에 40만 기독교인들은 8월 18일 몰살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나라 민족에 대한 혹독한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기독교인들이여, 누구보다 먼저 이 나라의 고난의 역사를 마음 속 깊이 기억하고 겸손해지며,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높아진 마음을 낮추시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리고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시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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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너는 반석을 치라

"(출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출17: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출17: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출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출17: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출17:6)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출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1. 200만명이 훨씬 넘는 엄청난 인구의 이스라엘 백성이 불모지 광야를 거듭 거듭 행진하여 마침내 르비딤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곳에는 기대했던 마실 물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막에서 물이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완전히 절망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시 그들의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그처럼 고생과 고통으로 얼룩진 광야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이 바로 모세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그간 그토록 수 많은 이적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모세만이 눈에 보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광야로 이끌어 내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모세는 단지 하나님의 뜻만을 전달하며 시키시는대로 행했을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 광야에서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200만 명이 훨씬 넘는 백성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출16: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출16: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출16: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출16: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출16:35)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당장에 물이 없다고 지도자 모세만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놀라운 기적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고 자신들의 패역하고 완악한 죄악상은 한 번도 뉘우칠 줄 모르고 당면한 현실의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만 전가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과 불행의 책임을 오직 모세에게만 돌리며 모세를 돌로 치려고 하는 영적 무지와 마음의 패역함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여러 가지 환난을 겪으면서 지도자들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온 국민이 겪고 있는 경제환난의 원인을 문민정부에 돌리고 그 책임소재를 밝히고 위해 여당에서는 경제 청문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경제 환난에 책임을 물어 구속 수감중에 있습니다. 분명히 부정부패는 발본색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경제환난의 책임이 문민정부에만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 잘 살게 되었다고 사치와 허영에 빠져 향락과 음란을 일삼았던 우리들이 아니었습니까? 사법부와 입법부, 지금의 여당은 그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환난의 책임을 묻는다면 총체적으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도자를 원망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모세나 지도자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크고 작은 환난을 당했을 때는 그 문제 해결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는데, 많은 참새보다 귀한 이 나라 백성이 엄청난 환난 가운데 죽어가고 있는데, 어찌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없겠습니까?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마10: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러므로 무턱대고 환난의 책임을 지도자에게 전가하고 원망하는 것은 성숙되지 못한 이기주의의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모세를 환난의 원흉으로 몰아세우며 돌로 치려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출17:5)...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출17:6)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반석을 쳤습니다. 그러자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200만 명이 훨씬 넘는 엄청난 백성들이 다 마시고 짐승들까지도 마시우고 남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안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반석을 한 번만 치니까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지금 경제 청문회를 한다고 여의도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지 않습니다. 아시아 전체가 달러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IMF가 반석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반석을 쳐야만 생수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 당시의 이 반석을 쳐서 생수가 터져 나온 역사적 사실은 단순히 사실 자체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인류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주는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여기 반석을 쳐서 생수가 터져 나온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고전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10: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고전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반석은 그리스도요 반석을 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합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고난 당하심으로 모든 인류가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고난, 이것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며 그곳에서 인류가 마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암반을 뚫고 지하수 터져나오게 한 것이 아닙니다. 호렙산에는 반석이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아무 반석이나 친다고 생수가 터져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반석이라야만 그곳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반석을 쳐서 터져 나오는 생수의 양은 인구 100만 명의 울산 광역시 인구의 2배가 넘는 사람이 먹고도 남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민20:10)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민20:11)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시편기자는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생수의 양을 "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시105:41)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같이 흘렀으니."

이 "강"이란 단어는 에덴 동산을 적시던 "강"과 같은 단어입니다.

"(창2: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인간의 삶을 충분히 에덴 동산과 같이 만들고도 남을 만한 생수의 양이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터져 나오는 신령한 음료는 전 인류가 마시고 생명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입니다. 신령한 음료는 신령한 반석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다뉴브강이 뽐내며 말했습니다. "나는 매일 무거운 배들을 실어 나른다구." 나일강이 으시대며 말했습니다. "나는 제일 길어, 난 날마다 거의 4,000마일을 흐른다구." 갠지스강이 질세라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성결하게 해 주지, 내 거룩한 물에 죄를 씻어 버리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구." 마지막으로 요단강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대들이 할 수 있는 것들로 뽐낼 수는 없소. 그러나 해마다 내 둑이 넘쳐서 나는 필요한 논밭에 물을 주어 곡식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며, 그것으로 굶주신 사람들을 먹이게 한다오. 내가 하는 일이란 단지 흘러 넘치는 것 뿐이라오." 신령한 반석이 되신 예수 앞에 나오시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바꾼 요단강물처럼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생수가 넘쳐날 것입니다.

3. 여러분이 사는 세상은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곳이 못됩니다. 인간의 갈증을 해결해 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수고하고 목마른 인생들은 신령한 반석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여러분이 애써서 우물을 파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반석이 되신 예수 앞에 나오시면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생수가 부족할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온 천하만민이 다 마시고 짐승들까지라도 마시고도 남을 만큼 생수는 무한합니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와서 마실 수 있습니다. 이 생수를 마신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퍼서 마실수록 끝없이 터져 나오는 영생수입니다. 그야말로 신령한 반석에서 나오는 신령한 음료입니다. 찬송가 316장을 다같이 부르십시다.

1절.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이 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힘쓰고 애씀이 없을지라도 이 샘에 오면 다 마시겠네

2절. 이 샘에 나는 물 강같이 흘러 온 천하만국에 다 통하네 빈부나 귀천이 분별이 없이 다 와서 쉬고 또 마시겠네

3절. 신기한 샘물을 마신 자마다 목 다시 갈하지 아니하고 속에서 솟아나 생수가 되어 영원히 솟아 늘 풍성하리

4절. 이 샘의 이름은 생명의 샘물 저 수정빛같이 늘 맑도다 어린 양 보좌가 근원이 되어 생명수 샘이 늘 그치쟎네

삶에 갈증을 느끼시는 목마른 사람들, 돈 없는 사람도 신령한 반석이신 예수 앞에 나와 돈 없이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고 마음에 기름진 것으로 삶에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약속합니다.

"(사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여러분의 삶에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나 환난을 당했을 때 모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으시며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와 여러분의 소원하는 바를 만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반석,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심각한 심령의 갈증을 겪고 있는 파괴된 인간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일시에 그 갈한 것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여전히 참 사랑에 목마른 여인,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만족함이 없었던 여인,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광야에 홀로 남은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여인에게 참 생명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목마른 인생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 4:13-14)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축복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 7:37-39)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는 곧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자면 누구든지 값없이 받게 되는 생수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없는 인생은 물 없는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처럼 죽은 인생입니다. 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각양 각색 크고 작은 갈증을 지니고 삽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반석에서만 생수가 터져 나옵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생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바다와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신다면 오히려 갈증은 더 심해질 것이고 종국에는 목이 타서 죽고 말 것입니다. 신령한 반석이 되신 예수 외에는 세상 어디에서도 신령한 음료를 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은 모든 죄인들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수"를 값없이 나누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수 천만금의 재산이 있어도, 달나라를 가는 지식이 있어도,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를 가졌다해도, 절세 미인이라 할지라도, 제아무리 많은 선행을 쌓았다해도 예수 앞에 나오지 아니하고서는 영원한 생명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시고 생명수가 터져 나오는 예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경제가 거덜나 살기 힘들다고 누구를 탓하거나 돌을 던지지 마시고 신령한 반석이 되신 예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한들 삶에 만족함이 없고 심령에 갈증을 느끼시거든 단 한번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생수가 터져 나오는 예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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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방주로 들어가라

"(창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창7: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창7: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창7: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창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의 대홍수 사건은 결코 자연의 재난이 아니고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노아의 의로움과 피조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지진, 홍수, 해일, 태풍, 마른 번개, 화산폭발, 기타 여러 가지 재앙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앙들은 지난 20년 동안 280만명이 넘는 인명을 앗아갔습니다. 산사태 하나만 해도 해마다 50억 달러 상당의 재산피해를 내고 있고, 열대성 태풍으로 인한 재산피해는 70억 달러에 달합니다. 그런데 지구 인구 60억 인구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난을 당하기 쉬운 해안 지대, 홍수가 잦은 평지와 삼각주, 비옥한 화산 경사면 등지에 살고 있습니다. 지구에는 대략 30초마다 지진이 발생해서 한해 동안 1만 5000명이 생명을 잃고 있습니다. 자연 재앙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각종 질병입니다. 예방주사를 맞지 않은 어린이들이 매년 디프테리아, 백일해, 파상풍, 홍역, 소아마비, 결핵 등에 걸려 400만명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기아에 의한 사망도 엄청납니다.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농작물 수확량이 크게 줄어 전 세계에서 5억이 넘는 사람들이 만성적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고, 식량부족으로 매년 2000만명 이상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인간에 의한 생태계 파괴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힘을 추구하는 인간에 의해 힘없이 파괴당하는 자연의 탄식과 고통이 인간에게 되돌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비천하며 소외되고 힘없는 자의 편에서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은 원래 팔레스틴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떠돌이 하층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로 고난을 당할 때, 그들의 고통을 정녕히 보시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사회가 다시 노예를 소유하고 억압하는 사회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의 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 나그네, 과부와 고아들을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그들 자신이 이집트에서 가난하였고 나그네였다는 것을 언제나 다시금 회상하면서 가난한 자, 나그네 된 자, 힘없는 자들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 민족은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정을 세우고, 소수의 통치자들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부와 힘을 축적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회는 점점 부정 부패가 만연하고 불의가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사회의 불의와 부정 부패는 가나안 사람들의 신 바알 숭배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알은 "주(主)와 소유자"를 뜻합니다. 바알은 주인들과 소유자들의 신이요, 생육과 성장의 우상입니다. 자신의 번영과 성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부정과 불의를 일삼아 자연과 사람을 짓밟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소유와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얼마든지 자연과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알이란 이름이 억압을 나타낸다면, 여호와라는 이름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힘없이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밝힌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은 연약하고 힘없는 자를 위하여 존재하며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2:16). 이와 같이 성경의 하나님은 힘없고 소외당하며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서신다면, 인간의 탐욕에 의하여 여지없이 파괴당하는 자연의 편에 서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의 편에서 서지 않고 힘없이 억압당하는 자연의 편에 서서 자연과 함께 고통을 당하며 자연과 함께 신음하고 계십니다.(롬 8:18이하 참조). 공중의 참새 한 마리와 들에 피는 들꽃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하나님은 이들을 돌보십니다.(마 6:25 이하 참조). 그러므로 힘없고 말이 없는 자연을 지배대상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파괴하는 일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을 멸시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서로 하나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데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도 함께 나누지만 슬픔과 불행과 고난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오해입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생태계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외의 다른 피조물도 사랑하십니다. 돈이나 권력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 외의 모든 것을 이용대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인간보다 하나님은 자연의 피조물을 더 사랑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사람의 생명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도 사랑하지만 맑은 하늘과 푸른 숲과 땅 속의 지렁이를 하나님은 간악한 인간보다 더 사랑하실지 모릅니다. 간사스러운 혀로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인간 보다 말없는 자연을 더 사랑하실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의 고난을 함께 당하시고 계십니다. 지구 위에 있는 식물과 동물 가운데에 매일 한 가지 종류가 멸종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편리와 욕심 때문에 죄 없는 생물의 종이 멸종 당할 때 하나님 자신이 그 고통을 함께 당하십니다. 피조물의 고난은 하나님 자신의 고난입니다. 피조물의 고난의 역사는 하나님 자신의 고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가난하고 힘없는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삶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당하는 십자가의 고난은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고난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의 부르짖음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향한 모든 연약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고난을 나타냅니다. 그의 죽음의 부르짖음은 억압과 고난과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인류의 죽음의 부르짖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탐욕에 찬 인간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죽어가고 있는 식물과 동물들의 죽음의 부르짖음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로 말미암아 재난을 당하고 있는 인류는 저마다 나라마다 환경보호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환경보호 관련 단체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캠페인보다 우선할 것은 인간의 죄악상에 대한 회개운동입니다. 바알이라는 물질숭배에 빠져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이 벌이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행위를 먼저 회개시켜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자연을 보호하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생태계 보존을 위해 환경캠페인을 등한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물질 숭배의 죄악을 회개하여 변화되지 아니하면 자연은 그 당하는 탄식과 고통보다 더 큰 재앙을 인간에게 안겨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범죄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보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노아 시대는 정말 용서하기 힘들만큼 죄악이 극도에 달한 시대였습니다. 도덕적으로 자제가 불가능하며 사회법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각종 범죄가 보편화되고 일반화된 무서운 시대였습니다. 성경은 당시의 죄악상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더라 하시니라."(창세기 6장 5절-7절)

이와 같이 노아 당시는 말 그대로 죄악이 충만하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심을 한탄하실 정도로 구제불능의 한심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자그마치 1백 20년 동안이나 주셨습니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 백 이 십년이 되리라‥‥‥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 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창세기 6장 3절, 7절)

그들의 수명이 1백 20년이 되리라는 것은 홍수로 심판하기 전에 그만큼 회개할 시간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기회가 없어 회개하지 못했다는 핑계는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결국 홍수가 나서 다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롯의 때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소돔성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모두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세상이 망해도 사는 길이 있습니다. 비록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산다할지라도 노아처럼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노아는 죄에 묻혀 살면서도 현실에 물들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신앙이 아니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믿음만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요일 5:5) 성경은 노아의 믿음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히11:7)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홍수 심판의 경고를 믿고 그대로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하여 자신과 더불어 가족 모두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을지라도,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을지라도,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을지라도, 백성을 떡 먹듯이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노아처럼 하나님을 찾으시고 하나님을 믿으시며 방주를 예비하여 구원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1절의 말씀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노아의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위한 노아의 방주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하셨습니다. 60억 인구가 몽땅 다 승선하고도 넉넉히 남을 방주를 이미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이 시대에 노아의 방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노아의 방주에 승선하지 않은 모든 피조물이 멸망당했듯이 오늘날도 노아의 방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인류가 구원받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사도행전 4장 l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더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인류가 사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노아의 대홍수 사건 당시 심판의 경계가 되었던 것은 방주 안에 있었느냐 아니면 밖에 있었느냐입니다. 오늘날도 구원의 방법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방주 안에 있을 때 홍수심판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부정한 짐승도 방주 안에 들어감으로써 구원받았습니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창세기 7장 2절)

이 말씀을 통해 보면, 구원의 조건이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에 있지 않습니다. 다만 방주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구원이 판가름납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도덕과 윤리를 책임지는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도덕과 윤리를 향상시키는 사명이 아니라, 죄악으로 멸망해 가는 세상에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하는 사명이 주어진 곳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세상의 도덕과 윤리를 능가하는 삶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방주에 들어가야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수명이 1백 20년, 아니 1천년이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시지 않으시겠다고 무지개를 띄워 약속하셨습니다. 대신 성경은 앞으로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겠다고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 3:10-12)

사랑하는 여러분,

마지막 때에 어려운 시기가 닥쳐 오리라는 것을 알아 두시오. 그 때에 사람들은 이기주의에 흐르고 돈을 사랑하고 뽐내고 교만해지고 악담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르고 경건하지 않고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남을 비방하고 무절제하고 난폭하고 선을 좋아하지 않고 배신하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자만으로 부풀어 있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할 것이며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겠지만 신앙의 힘을 부인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멀리하시오.(디모데 후서 3장 1절- 5절) 그리고 이 시대에 방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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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치료하는 여호와

"(출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15: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병든 몸뿐만 아니라 병든 마음, 정신 그리고 영혼까지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 사회생활까지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치유는 한 인격으로 하여금 육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법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치유는 단지 몸(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정신)과 영혼을 포함한 전인적인 치유를 포함합니다. 이는 인간관계의 치유, 대(對) 사회, 환경 관계에 대한 치유 등 전인적인 치유를 말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육체와 정신, 영혼이 조화를 이루어 기능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과 또 다른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이루는 사람을 말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글자 그대로 병든 것입니다. <건강한 사회>란 정의와 진리, 사랑 등의 속성을 지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사회를 말합니다. <건강한 사회>의 가장 완벽한 모델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 땅에 부분적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명을 지녔기 때문에 <병든 사람>, <병든 사회>를 치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 이유는 바로 <병든 사람>, <병든 사회>의 치유를 위해서입니다. 치유가 목적이 아니라 치유를 통한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치유는 구원의 일부입니다. 구원은 병든 상태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치유는 부분적이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마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교회는 <병든 사람>과 <병든 사회>를 치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눅5: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눅5: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고통, 아픈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고통 그 자체가 반드시 우리를 고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극심한 고통은 때로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며칠 전 마산에서 어느 이혼한 가장이 10살 난 초등학생 아들 하나 데리고 사는데 사는게 힘들다고 아들 이름으로 1000만원 짜리 보험에 가입하고, 아들의 새끼 손가락을 절단하고 강도한테 당한 것처럼 거짓 신고하고 보험금 타먹으려다 결국 들통나서 수갑차고 말았습니다. 경제적인 고통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어린 아들 손가락을 절단하여 아들의 고통을 팔아 자신이 해야할 일을 대신하게 하는 것은 심각한 경제적 고통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과 병든 가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병든 사람>과 <병든 사회>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건강하기를 진실로 소원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간이나 앓고 있는 병자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진정 도움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예수 자신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병자는 하도 오래 아파서 병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서울역 대합실이나 지하철역에 노숙하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줘도 일하기 싫다며 한결같이 거절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노숙자들이 아예 집에 돌아가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이제는 노숙자 생활에 익숙해져 일자리에 대한 소원도 없고 가정에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도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정신에 심각한 병든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병환자가 건강해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건강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은 병 낫기를 간절히 원하는 소원과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와 가정이 심각하게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몇 가지 그 실태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족집게 과외>비로 6급 세무공무원 가정에서 8000만원, 대학 교육 개혁을 주도하던 총장 가정에서 2000만원, 한국 지성을 대표하는 문인의 가정에서 기천만원 등을 뿌리는 행위는 우리 교육계의 심각한 병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난으로 심각해진 빈부격차의 괴리감을 부채질하고 있는 파렴치한 작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각계의 지도층에서 말단 관리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뇌물 상납 고리로 끝도 없이 부정부패한 우리 사회는 어디에서부터 수술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 나라 뿐만이 아닙니다. 국제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앨빈 토플러의 <전쟁과 반전쟁>에 보면 다음과 같은 놀랄만한 통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양 있는 성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어떤 전쟁이 일어났는지 아느냐고 물으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한국전쟁(1950∼53년)·베트남전쟁(1957∼75년)·아랍-이스라엘전쟁(1967, 73, 82년)·걸프전쟁(1990∼91년) 등을 열거할 것이다. 그러나 1945년에 <평화>가 마련된 이후 전세계에 걸쳐 일어난 전쟁과 내전은 계산방법에 따라 150∼160회에 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군인 약 720만 명이 살육 당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수치에는 부상자, 고문받거나 불구가 된 사람들을 제외한 사망자만 포함된 것이다. 사망자건 부상자건 이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 피해자 수는 이 통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전쟁의 여파로 죽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전체 전사자 수는 약 840만 명으로 이보다 약간 많을 뿐이다. 이것은 폭넓은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전사자 수를 가지고 볼 때, 놀랍게도 세계는 1945년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을 다시 한번 치른 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민간인을 포함한 총 사망자 수는 3,300만∼4,000만 명에 달하는데 이 역시 부상당하거나 강간당하거나 강제 이주 당하거나 병들거나 빈곤에 빠진 사람들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사람들은 브룬디와 볼리비아에서, 키프로스와 스리랑카에서, 마다가스카르와 모로코에서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리고 폭격받고 독가스로 질식당하는 등의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오늘날 유엔회원국은 대략 175개 국인데 그 중 60개 국이 넘는 회원국들이 전쟁을 치렀다. 스톡흘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1990년만 해도 31건의 무력충돌이 있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1945∼90년의 전체 2,340주 중에서 지구상에 전쟁이 전혀 없었던 기간은 도합 3주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1945년 이후 지금까지의 기간을 <전후>시기라고 부르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제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란 단 한가지 측면만 살펴봐도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세상인 것을 역력히 알 수 있습니다. 60년 이후 모든 전쟁은 베트남, 이란, 이라크, 캄보디아, 에티오피아, 앙골라 또는 더욱 더 후미진 후진국가에서만 일어났을 뿐 주요 강대국 영토에서는 한번도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미국과 러시아 이 두 초강대국들이 자기들 국가에 경제적, 군사적으로 예속된 위성국, 동맹국들에게 무기를 원조하거나 판매하여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채질한 것입니다. 전쟁을 통해 무기를 판매하거나 원조하므로 경제적, 군사적으로 더욱 강하게 예속시켜 자국의 경제를 살찌우게 하고 약소국가들은 더욱 더 그 고통이 가중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국제 사회입니다. 한 나라의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면 지도자들은 고통을 분담하자고 하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가느다란 목을 더욱 죄여서 그들의 삶의 질은 더욱 크게 향상시키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은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작금 우리 살고 있는 <병든 사회>입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기적적으로 가르고 바다를 육지처럼 건넌 감격과 벅찬 기쁨 속에 광야를 여행하게 됩니다. 그들은 승리의 찬송을 부르고 춤을 추며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사흘만에 "수르"라는 곳에 도착했으나 기대했던 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물을 찾아 "마라"라고 하는 곳에 도착합니다. 마라라고 하는 지명은 그곳에 물이 있긴 있으나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어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물이 써서 도저히 먹을 수 없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사흘 전에 홍해를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으로 건너게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춤추고 노래했던 그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잊어버리고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모세가 지시받은 나무를 물에 던졌더니 그 마실 수 없는 쓴 물이 먹을 수 있는 단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앞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모든 질병 하나도 걸리지 않게 하며 치료하는 여호와가 되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 축복의 땅, 엘림으로 인도하여 그곳에 장막을 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어 원망 불평했던 마라는 상징적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나타냅니다. 세상은 인생들에게 쓴 맛을 주는 곳입니다. 룻기에 보면 신앙의 고향, 베들레헴에 살던 행복한 여인 나오미가 있었습니다. 나오미란 이름은 '행복한(즐거운) 여인'이란 뜻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모압 땅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남편과 자식을 객지에서 잃어버린 불행한 여인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고향에 돌아갔더니 옛친구들이 이 여인의 수척한 모습을 보고 "네가 나오미가 아니냐?"라고 반깁니다. 그때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즐거움)라 하지 말고 마라(고통)라 하라." 하나님의 은혜로 나오미(즐거움)의 인생이, 물질을 따라 모압으로 갔다가 마라(고통)가 되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해서 신앙의 고향 베들레헴을 떠났던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들을 모두 잃고 삶의 쓴 맛을 톡톡히 맛본 채 마라가 되어 다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늦게나마 돌아온 나오미는 함께 돌아온 자부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켜 그의 후손 가운데 다윗을 낳는 위대한 할머니가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쓴 줄 알아야 신앙으로 돌아와 삶의 쓴 맛을 달게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마라의 쓴 물은 신앙을 거쳐 엘림의 축복으로 가는 하나의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라에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변화시켰던 한 나무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응답받은대로 한 나무를 쓴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이 시대에 교회는 모세처럼 세상의 쓴 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래서 쓴 물을 달게 변화시키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던져야만 <병든 사람>, <병든 사회>가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여러분의 삶에 쓴 맛을 달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돈이 여러분의 삶의 쓴 맛을 달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돈의 쓴 맛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권력이 여러분의 삶의 쓴 맛을 달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권력의 쓴 맛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 나무나 아무렇게 던진다고 해서 쓴 물이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무를 던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단물처럼 맛있고 가치있는 삶으로 변화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던져야 합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 외에 다른 묘약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라의 쓴잔을 마셔본 사람일수록 십자가 밑으로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십자가는 모든 것을 고치고 치료하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본문 26절 끝에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했습니다. 십자가에는 <병든 사람>과 <병든 사회>를 치료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의 구석구석에서 고통하며 신음하는 자들에게 삶의 질병을 고치고 삶의 맛을 바꾸어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

십자가 나무가 던져진 곳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무의미하게 보람없이 살던 사람들이 보람을 찾았고, 슬픔 속에 살던 사람들이 기쁨을 찾았고, 다툼 속에 파괴되었던 가정들이 평화와 사랑을 찾았고, 질병에 시달리던 자들이 건강을 찾았습니다. <병든 사람>, <병든 사회>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쓴 물을 단 물로 고치신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한 그들이 계속 행진하여 "엘림"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 곳엔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시원하게 솟아나는 물샘 열둘과 종려 70주가 우거져 있는 오아시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샘 열 둘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위한 것이요, 종려 70주도 이스라엘 70인 장로를 위한 것으로 이는 성도들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엘림은 마라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극복하고 걸어온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축복의 오아시스입니다. 마라의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엘림의 축복도 주십니다. 마라같은 세상에서 주는 쓴 물로 인하여 원망 불평하지 마시고 십자가 예수 앞에 나오셔서 그 쓴 맛을 단 물로 변화시키는, 치료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축복의 물샘과 종려 칠십주가 준비되어 있는 엘림에 장막을 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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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영광을 하나님께!

(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18)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21)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은,동,철과 목,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25)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30)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다니엘 5:17-31)

저는 3.1절이 되면 잊을 수 없는 역사 한 토막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모 민비가 일제 깡패 살해조직에 의해 살해되는 절박한 상황에서 부르짖는 조선 마지막 황제 고종의 외마디 "밖에 누구 기독교인 없느냐?"는 것입니다.

1895년에 일어난 민비 살해 사건(을미사변)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조선의 일본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코로오는 아다찌 겐조와 구리토모 시게아리카라는 직업 청부 깡패 둘을 은밀히 불러 거사를 설명했습니다. 이들은 불량배 24명을 모아 살해 특공대를 조직했고 거사를 위하여 벌써 군과 경찰도 동원 계획을 세운 터였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3시쯤 대원군의 집이 있던 시골, 오늘의 마포 공덕동에서 민비를 꺾고 집권하려는 대원군과 일본인 살해 특공대들이 출발했습니다. 행동대는 그날 새벽에 쉽게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본군이 궁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일본 정규군은 궁을 차단하여 지켰습니다. 살해조 깡패들이 왕의 침소가 있는 곳의 담을 넘었습니다. 곧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약간의 조선인 수비대는 사살됨으로써 곧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깡패들 일부는 고종의 침소로 들이닥쳐 고종을 위협했습니다. 민비와 이혼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민비 살해조는 왕비의 침소로 뛰어들었습니다. 깡패들은 도망치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두들겨 패면서 왕비가 어디 있느냐고 다그쳤습니다. 모르겠다며 애원하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옆방으로 가던 살해조는 방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살해조 조장인 일본군 고문 오카모도 류노스케가 그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제끼면서 왕비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이를 부인하면서 몸을 홱 뿌리치며 비명을 지르며 낭하로 도망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세자가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모후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살해조가 민비를 덮쳤습니다. 여러 명이 쓰러진 작은 여인을 난자했습니다. 칼에 피가 튀었습니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살해조는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왕비를 이불에 둘둘 말아 멀지 않은 정원 마당으로 옮겨 던졌습니다. 그 위에 석유를 붓고 준비한 나무를 주위에 쌓았습니다. 타오르는 불에 계속 석유를 부어댔습니다. "모든 것이 다 타고, 그리고는 몇 조각의 뼈만 남았다." 기울어 가는 나라, 그 슬픈 나라의 '국모'는 이렇게 죽었습니다. 민비가 살해되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고종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밖에 기독교인 누구 없느냐!" (프레데릭 맥켄지가 쓴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기독교는 그 때 그 가련한 왕이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위기의 때에 왕은 기독교가 필요했습니다. 고종의 외침은 1800년대의 마지막 15년 동안에 한국 사람이 기독교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당시에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 앞잡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 나라는 기독교를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벌써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침략국이 일본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통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교회로 들어왔는데, 그 까닭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도 기독교를 '어렵고 위험한 때에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로 보았던 것입니다. 과연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은 당시 기독교인들이었다는 것을 한국 독립운동사가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의 한국 기독교의 위치와 지금의 한국 기독교를 비교해보면 어떻겠습니까? 1919년 당시 한국의 인구는 1천 7백만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30만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대표 33인 가운에 16인이 기독교인이었고 3.1운동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의 30%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기독교가 "어렵고 위험한 때에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로 그 사명을 다 했던 것입니다.

3.1절은 1910년 8월 한일합방 전후 나라의 어두웠던 과거 일제 탄압 무단 정치 속에서 일어났던 빛나는 독립 운동을 기념하며 과거의 역사를 통해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찾고자 하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일본은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민족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학살 투옥하고, 모든 정치적인 모임과 단순한 일반 모임도 폐지하고 모든 신문을 폐간하고 탄압하므로 인권과 자유를 말살하는 무단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교육정책에 있어서는 조선인은 나라를 빼앗기고도 분통해하지 않는 '열등민족'이라느니 일제의 '개혁정치'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고 있다느니 하면서 우민정책을 실시하여 민족의식의 성장을 억제하고 조선의 고유문화를 말살하고자 하는 민족말살통치를 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토지·광산·철도·금융 등 모든 분야의 이권을 강제로 빼앗고 좋은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않고 모조리 일본으로 약탈해갔습니다. 이로 인해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화전민 등으로 전락하였으며, 생활난으로 인하여 만주 등지로 유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고유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사상과 종교까지도 일제의 강제 탄압에 자유를 잃고 노예나 다를 바 없는 일제 시대에 비참한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며, 민족 지도자들은 나라안에서 힘을 제대로 키우기 힘들게 되자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1918년 11월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어느 나라 민족이든 자기 나라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 지어야 한다."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 주의> 선언은 한국 민족에게 독립 의식을 더욱 고취케 하였고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조국에서 그리고 중국, 불란서, 미국 등등 세계 각 곳에서 민족 자결 주의를 전파하도록 하고 일본 유학생들에게도 전하게 하였습니다. 민족 자결 주의의 물결은 만주에서 독립 선언을 하게 하고 일본에 유학중이던 이광수에게 독립 선언서를 쓰게 했습니다.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백성들은 일본의 횡포와 흉악한 정치와 속셈에 몸을 떨고 흥분하였으며 같은 해 2월 8일 일본에 유학중이던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 청년 독립단이 조직되었고 도쿄에 있는 조선 기독 청년회관에서 이광수가 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인쇄물을 뿌렸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가 행진을 하였고 그들 모두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의 애국 지사들은 주먹을 쥐고 머리를 맞대고 독립 선언을 의논하고 진행 방법을 구상하였습니다. "기독교, 천도교 유지들을 민족 대표로 정하고 민족 대표의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함과 아울러 그 취지를 세계 각국에 보냅시다."라고 그들은 의견을 모으고 독립 선언서에 서명할 민족 대표 인사들을 교섭하였습니다. 기독교 측에서는 이승훈이 천도교 측에서는 최린이 교섭하여 많은 동지를 얻었고 불교측에서도 한용운이 가담해서 결국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 모두 33인은 민족 대표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고 1919년 3월 1일 기미년 독립 만세 운동은 서울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인쇄물을 뿌려 만세 운동을 벌였고 각 지방에도 알려서 거국적 민족 운동을 거행되었습니다. 온 국민과 학생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온 서울 장안과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총독부에서는 만세 독립 운동을 처음부터 무력으로 강제 탄압하였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하고 감옥에 갔으며 특히 수원 제암리에서는 일본 군경찰들이 주민들을 전부 교회에 가두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총을 쏘고 불을 질러 죽이는 잔인한 학살 사건이 있었고 전국에서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일본군의 무력 앞에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 의식은 세계 각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민족의 단결은 희생자들의 숭고한 정신과 삶으로 한층 강화되어 갔습니다. 기미년 3.1운동은 남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여성들도 참가하였습니다. 그 중에 어린 16살의 기독 학생 류관순의 희생과 활약은 우리 민족의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우리 불쌍한 2천만 동포가 왜놈들의 사슬에서 풀어 주소서. 대한 독립을 주소서!"라고 기도를 올렸고 감옥 안에서도 사랑하는 조국의 만세를 불렀으며 17살의 꽃다운 나이로 일본군의 가혹한 고문으로 순국되었지만 류관순은 우리 민족의 꽃이요 우리 마음에 길이 남아 있습니다. 천관우는 《신세시기(新歲時記) 봄》에서 " 3·1 만세는...피눈물이 맺힌 만세요, 부르면 잡혀 가고 때로는 살상을 당하는 만세였다. 그리고 누가 시켜서 된 만세가 아니라, 고을마다 동네마다 제각기 복받쳐 오르는 절규를 이 한 마디로 표현하여 13도 방방곡곡이 부르고 응해서 터져 나온 만세였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3.1운동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있던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거의 1년간이나 계속된 한국인의 항일민족독립운동을 가리킵니다. 당시 일제의 축소된 통계에 의해서 보더라도, 1천524회의 집회에 202만 3천여명이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는데, 이 통계는 50명 이상의 사건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봅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는 1년간 1천만명이 넘는 수자가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3.1운동은,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에서 약속한 바와 같이,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개하였지만, 일제는 무도하게 총검으로 무차별 살육을 감행하여 한국인 사상자를 많이 내었고 교회, 학교 등에도 많은 손해를 입혔습니다. 즉, 한국인 7천500여명이 살해당했으며, 1만5천900여명이 부상당했고, 4만6천900여명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47개의 교회당과 2개의 학교, 그리고 715채의 한국인 민가가 소각당했습니다. 이같이 많은 살상과 피해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은 한국 민족운동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했을 뿐만 아니고 세계사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3.1운동은, 북한에서처럼 결코 과소 평가되어질 사건이 아닙니다. 시대가 흐를수록 새롭게 해석되어 생명력을 더해가는 역사적 의미가 깊은 것이 3.1운동입니다. 3.1운동이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 몇 가지 사례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자주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시 북경대학 교수로서 신문화운동의 지도자였던 진독수(陳獨秀)는 <조선독립운동지감상>에서 3.1운동을 격찬하면서 중국민족의 궐기를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습니다. "이번의 조선독립운동은 위대하고 성실하고 비장하며 명료하고 정확한 생각을 갖추고 있다. 민의를 사용하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참으로 세계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우리들은 이에 대하여 찬미 애상(哀想) 흥분 희망 참괴(懺愧) 등의 여러가지 감상을 갖는다. 조선민족의 활동의 영광스러움에 비추어 우리 중국민족의 위미(萎靡)하고 부진함의 치욕이 더욱 두드러진다. 조선인에 비하여 우리들은 참으로 참괴함을 금할 수 없다." 이는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1운동은 더 나아가 인도 국민회의파의 비폭력 독립운동과 인도차이나 반도·필립핀·아랍의 일부지역의 독립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특히 1919년 4월 5일부터 시작된 인도의 '사티야그라하(Satyagraha, 眞理把守)' 운동은 한국의 3.1운동이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3.1운동이 아시아 제국의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당시 이해하고 있었기 망명지에서 3.1운동을 경험한 박은식은, "우리 민족은 맨주먹으로 분기하여 붉은 피로써 독립을 구하여 세계 혁명사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그 세계사적인 의의를 극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3.1 운동은 독립 운동의 분수령으로서 우리 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였고 민족의 슬기와 독립의 의지를 전세계에 천명한 자유와 평등 운동의 등불이라 평가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3.1 운동은 중국(5.4운동), 인도(간디의 무저항주의 운동) 및 중동 지역에서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을 일으키게 한 선구적인 운동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과연 3.1 운동은 민족의 저력을 국내외에 과시한 쾌거였으며, 일제에 동조하던 세계 여러 나라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3.1 운동은 민족 독립 운동을 국내외의 거족적인 항쟁으로 유도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 운동으로 발전시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는 발판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요즈음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왜곡 사건으로 한일 및 중일의 심각한 외교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일본 교육계는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제의 침략사'라는 역사를 '아시아 민족 해방 전쟁'이라고 불러 그들의 침략사를 왜곡 미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군 위안부'를 단순히 '위안부'라고 기술하거나 완전 삭제하여 일제 당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삼았다는 사실 등을 왜곡하는 등 망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같은 전범 국가이지만 독일은 이러한 치졸한 일본과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일이 베를린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새 수도에 대형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기념물을 세운 것은 대단히 전향적인 과거 청산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독일 국민은 이를 보며 선조들이 저지른 죄와 만행을 회개하며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것입니다. 독일 정부가 최근 유태인 국제협력단체에 100억마르크의 피해 보상을 하기로 한 것도 과거 죄와 만행에 대한 회개 청산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미 1972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의 무명용사 묘역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나, 나치 시대의 참상을 재현해 '우리는 이렇게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듯한 다하우 박물관을 건립한 것, 1998년 홀로코스트 피해 보상금으로 12억 달러를 제공하기 시작해 나치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양보와 보상으로 사죄의 뜻을 표명한 것 등은 역사에 충실한 독일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유대인으로부터 빼앗은 금융재산을 비롯한 많은 물품을 전쟁비용으로 사용하고 강제노동으로 인권과 노동의 대가를 착취한 데 대한 책임을 반세기도 더 지난 오늘에 이르러 독일 정부가 인정한 것입니다. 독일은 직접적인 피해를 본 국가들뿐만 아니라 이웃국가들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보상정책을 펴왔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최근 우리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일제가 한국인들에게 가한 가혹행위에 대한 보상을 일본으로부터 거절당한 일이 있습니다. 단지 사죄의 표현만 가능하다는 외교적 답변이 돌아왔을 뿐입니다. 일본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사이에 놓여 있는 '지난날의 어두운 죄악과 만행''을 회개 청산하지 않고서는 역사의 심각한 대가를 치루게 될 것입니다. 진리와 진실, 정의는 항상 역사 속에 살아있습니다. 독일과 일본은 같은 패전국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회개를 거부하며 거듭되는 망발 속에 경제적인 번영을 바탕으로 과거 군국주의 부활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가 경고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구약 성서 다니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헬라의 통치 밑에서 고난 당하며 신음하던 시기에 써진 책으로 특히 다니엘서 5장은 과거 역사의 교훈을 외면한 벨사살 왕의 갑작스런 죽음과 나라의 분열을 담고 있습니다. 벨사살은 바벨론의 영토를 크게 넓힌 느부갓네살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으켜 놓은 거대한 제국의 왕이 된 벨사살은 그 거대한 왕국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 알지 못한 채 그 영광에 취하여 그것을 과시하고자 하는 오만에 빠져 버렸습니다. 귀족 1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판을 벌리고 자신의 힘과 세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친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소에서 약탈한 금 은으로 된 그릇들을 오게 해서 그것으로 술을 퍼마시게 하고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들어진 자신들이 섬기는 잡신들을 찬양하게 했습니다. 바로 그 때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의 맞은 편 벽면에 글자 쓰는 것을 보고 왕은 얼굴빛이 변하고 넓적 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 글자를 해석하는 자에게는 최고의 보물과 국가 권력 서열 3위를 걸고 나라의 각종 무당과 점쟁이들을 불러 그 새겨진 글자를 해석하도록 했으나 해석은커녕 읽기조차 못하였습니다. 결국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로 알려진 다니엘이 부름을 받고 왕 앞에 나타나 '각종 상급과 권력의 보장은 다른 사람에게 주시옵소서. 내가 왕을 위해 그 글을 해석해드리겠나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왕이여, 당신의 아버지 느부갓네살 왕이 모든 권력과 영광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교만하여졌을 때 어떻게 낮아졌는가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당신 아버지는 인생 중에서 쫓겨나 나라와 왕의 흥망성쇠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7년간이나 들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이슬을 맞아가며 소처럼 풀을 뜯어먹고 살았던 것을 잊으셨습니까?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 사실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예루살렘 성소의 그릇들을 가져다가 술이나 퍼마시고 왕이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각종 잡신들을 찬양토록 하고 왕의 생명과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손을 보내셔서 이 글자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다니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심판선고를 그 왕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벽에 쓰인 글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으로 그 해석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리셨는데,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이고, '바르신'은 왕의 왕국이 둘로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밤으로 벨사살은 누가 죽였는지는 모르지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도 없이 그는 죽음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나라의 번영과 영광에 도취되어 교만에 빠졌을 때 자신은 갑작스런 죽음과 파멸을 당했고 나라는 두 동강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역사가 주는 준엄한 교훈을 외면한 왕과 그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은 그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입니다. 벨사살왕은 비록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바벨론 왕이기는 하지만, 부왕 느부갓네살을 통하여 그 하나님이 세계 역사를 이루시는 분임을 배웠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하나님의 성전의 성물들을 가지고 술잔을 삼아 하나님을 모독하고 조롱했던 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냥 놔둘리 없는 것입니다. 역사는 지난날의 단순한 사건의 기록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새겨져 있으며, 중요한 교훈과 경고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역사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읽고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아는 사람은 삶의 지혜를 얻으며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며 역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고 겸허한 자세로 역사의 교훈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지도자들은 역사를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역사를 외면하거나 역사를 자유자재로 왜곡시키는데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다니엘 시대가 아니라고 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니엘 시대에 벨사살을 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함부로 말하고 교만하게 자기 뜻을 내세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오는 심판선고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게 됩니다. 벨사살 왕은 저울에 달아 부족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에서 그는 함량 미달의 미숙아였습니다. 가벼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캐논, canon>이라고 합니다. 이는 길이나 무게를 재는 측량기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을 저울질하는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권력이나 돈, 지식이나 학벌 등을 잣대로 하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권력이나 돈, 지식이나 학벌 등이 인생을 무겁게 만드는 것 아닙니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 돈을 물쓰듯하는 사람, 첨단 지식이나 학벌을 자랑하는 사람, 이들은 권력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첨단 지식으로 한 순간에 재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벨사살 왕이 온갖 부귀와 권력을 다 가졌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가지지 못하므로 그는 연기처럼 가벼웠고, 아침해가 돋으면서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 시대에 권력 서열 제 2위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가져 그 삶의 무게를 더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집권 초기에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부귀영화와 전무후무한 지혜로 왕의 무게를 더하였으나 점차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우상숭배하므로 그 역시 벨사살처럼 그날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나라를 결국 남과 북으로 두 쪽나고 말았습니다. 진정 여러분의 삶에 무게를 더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는데 삶의 무게를 더하는 지식과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일제의 압제를 받았던 한국이나 한국과 아시아를 강점하여 온갖 압제와 수탈을 일삼았던 일본은 다같이 하나님의 역사를 돌아보며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한국은 김대중이 세운 나라도 아니고 김대중의 나라도 아닙니다. 한국은 야당 지도자가 물려받을 나라도 그들이 세운 나라도 아닙니다. 한국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는 나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의 경제 성장과 번영에 자만하지 말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깨달아 겸손히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 정치 권력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볼 때 "데겔"이라며 무게가 떨어진다는 글자가 새겨지지는 않겠습니까? 여의도 국회 의사당 벽면에, 그리고 청와대 벽면에 "데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은 아닙니까?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물량적 외형적 성장과 발전을 가져왔지만 과연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볼 때 "데겔"이라며 무게가 떨어진다는 글자가 새겨지지는 않겠습니까? 오늘의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볼 때 "데겔"이라며 무게가 떨어진다는 글자가 새겨지지는 않겠습니까? 역사가 주는 교훈을 깨닫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겨 삶의 무게를 더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1년 2월 25일 이동희 목사 3.1절 기념 주일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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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한국전쟁과 통일지향의 기독교

"(계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계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계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계13: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계13: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계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계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계13: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계13: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계13: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계13: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계13: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계13: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계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

독일 본 교외에 위치한 콘라트 아데나워 고등학교는 미국처럼 마약이나 총기류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학생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는 과거사를 회개하는 독일 교육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학교 역사담당 교사 하인츠 빌름스는 학생들을 끊임없이 다그치고 있습니다. 2차대전 종전 50주년을 맞는 올해 1월부터 학생들에게 히틀러가 등장해 33년 권력을 잡아 대학살을 자행하기까지의 매우 민감한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거 독일 청년들이 세계 어느 나라 청년들보다 더 잔인하고 파괴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이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심어주자는 취지에서 입니다. 이는 언젠가 유럽 정치및 경제의 주인공이 돼야할 독일의 전후세대에게 왜 그같은 과거사가 재연돼서는 안되는가를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독일은 역사교과서에 전쟁범죄의 책임을 명기하고 히틀러자서전 <나의 투쟁>을 지금까지 판금시킬 정도로 역사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있습니다. 사죄 표명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70년 브란트 서독총리가 폴란드(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 유태인 희생자 기념비에서 무릎을 꿇고 그는 "과거를 잊는 자는 영혼이 병든다."며 사죄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올해 종전기념행사가 줄을 잇는 가운데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 등 참석자마다 망각증세에 대한 경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아우슈비츠 해방 50주년 기념식에서는 로만 헤르초크 독일 대통령이 참석해 희생자들을 추모했습니다. 최근에는 나치시절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젊은세대 역시 이 의무를 벗을 수 없다는 주문 한가지가 추가되었습니다. 독일은 이스라엘에게 배상하고 씻을 수 없는 나치독인의 죄악상을 만천하게 공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최선의 배상을 하고 있습니다. 95년 현재 순수배상총액은 3백 1억 달러에 이르고 있습니다. 연방배상법(56년발효 65년 종료)에 따라 정치적 인종족 종교적 이유로 박해를 받은 피해자와 그 유족 2백 20만명에게 7백 10억 4천 9백만 마르크를 배상했습니다. 연방반환법(57년 발효)은 나치정권에 몰수된 물건의 반환, 배상을 위해 39억 3천 3백만 마르크를 배상했습니다. 이스라엘조약(52년 이스라엘과 조인)은 독일에서 추방된 유태인들을 위해 34억 5천만 마르크를 배상했습니다. 포괄보상협정(56년부터 64년까지 유럽12개국, 60-70년대 동유럽 4개국과 체결)은 동서유럽 전쟁피해자 배상비로 14억 마르크를 제공했습니다. 기타 78억 마르크를 배상했으며 21세기까지 총배상예상총액으로 1천 2백 23억 마르크를 책정해 두고 있습니다. 이같은 독일 정부의 노력에 독일국민들도 합심함으로써 평화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독일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독일의 성의있는 회개와 배상정책은 주변국가와의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독일 국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국가 재정이 어려웠을 때에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독일 민족이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 배상한다는 국가적 행위는 독일 국민들을 죄많은 민족으로 남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승화시켜 주변국가와의 공존과 평화가 얼마나 귀중한 가치인가를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나치독일에 극심한 피해를 본 이스라엘은 독일의 배상에 대단히 만족스러웠다고 평가합니다. 피해국가로부터 만족한다는 평가를 얻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독일은 이같은 철저한 배상과 회개를 통해 과거를 청산하고 프랑스 영국 폴란드 등 주변국의 신뢰를 되찾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결과 2차대전때 독일의 적국이었던 서방 각국은 동서독통일과 독일의 유엔평화유지군참여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그런가 하면 대조적으로 일본은 어떠합니까? 일본은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진정한 신뢰를 받고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국가입니다. 일본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면서도 외국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국가로 낙인찍혀 있습니다. 2차세계 대전중 직접적인 피해를 본 아시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다수 국가들마저 불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임이 자명한데 민간업자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계속 발뺌을 해 온 일본입니다. 종군위안부에 대한 배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후세들에게 침략과 만행의 역사를 올바르게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한국에 수학여행을 온 일본 학생들은 독립기념관에 가보고 나서야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알게 될 정도로 그들의 역사를 모릅니다. 일본은 사죄와 회개는커녕 엉뚱한 망언을 일삼고 배상도 독일의 겨우 8분의 1에 그치고 있을 뿐입니다. 회개와 그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민족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과거 한국 교회의 잘못된 점들을 철저히 파헤쳐 회개하고 그의 합당한 청산의 노력을 다 함으로서 뼈아픈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참된 민족 통일을 이루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에 나타난 두 가지 주목해야 할 현상을 살펴보며 통일 지향의 기독교의 자세를 바르게 가지고자 합니다. 한국전쟁 전후 나타난 중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신사참배로 인한 교단의 분열이며, 또 하나는 신흥종교운동의 출현입니다. 아울러 기독교의 정치와의 밀착 현상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며, 기독교의 세상 권력에 대한 바른 자세를 확립하여 이 땅위에 참된 평화을 이룩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1. 1950년대는 교단분열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각 종교는 심각한 교단분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절대다수을 이루고 있는 장로교가 1950년대에 세 번의 큰 분열을 경험하게 되었고 두번째로 큰 교단인 감리교도 이 시기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장로교의 분열은 신사참배문제가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신사참배란 사상적. 정치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 일제에 의해 강요된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숭배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숭배행위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의식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에 대한 믿음을 간직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사참배행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무서운 범죄행위에 상응하는 참회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교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명분상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고신파의 경우, 자신들만 옳고 다른 모든 교회는 그르다는 극단적 논리, 즉 흑백 논리는 전쟁으로 인한 사회심리적 경직된 태도로서 교단에도 강한 영향력을 끼쳐 보수 진영의 강한 폐쇄주의적 성향으로 더욱 분열을 가속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가 상호 보완적인 작용을 하면서 경쟁과 협조를 이루는 이상적인 관계 구조를 만들지 못하고 상대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갈등적 관계 구조는 극복하기 어려운 한국교회의 성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 사회는 남북의 분열, 동서의 분열, 세대간의 분열, 계급 및 계층에 따른 분열 등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한국교회는 이러한 분열의 아픔을 치유하고 더 높은 차원에서 평화를 이루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기는커녕 교회 안의 문제조차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종교로서의 높은 이념과 사상에 충실하지 못할 때 사회적 조건들에 굴복하여 갈등과 분열과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조건들의 압력을 더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에 굴복하여 분열된 교회를 향하여 "교회분열 그것은 교회의 윤리적 패배이다."라고 한 니버의 말에 귀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치의 활동이란 기껏해야 찬송가의 통일, 부활절 공동 예배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한국전쟁을 우리 민족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김인서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있습니다. "내가 불탄 성읍을 향해 우는 것이 아니라 이 백성의 죄악을 통곡하옵고, 무너진 예배당을 곡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통곡하나이다."

2. 한국전쟁이 가져온 위기감과 아노미상태는 민중들로 하여금 신흥종파운동에 몰두하도록 작용하였습니다. 당시 중요한 신흥종파운동으로서는 나운몽 장로가 중심이 된 용문산운동, 박태선 장로가 중심이 된 전도관 운동, 문선명 교주가 중심이 된 통일교회운동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파운동이 나타나는 데는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로 이어지는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전통이 크게 작용하였고,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한국 종교문화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폐허, 정치적 혼란, 경제적 극빈, 기성종교의 무기력 등과 같은 상황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요구하게 하였고, 이러한 요구에 응하여 나타난 것이 당시의 신흥종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 그 당시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건 무엇일까? 먹지 못한 양의 몸부림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교회는 원조물자 오면 나눠먹을 생각만 하고, 목사들은 큰 교회 자리를 얻기 위해 싸움만 하고 세계정세는 호전되는 것도 없고, 산업은 날로 쇠해가고, 관리는 점점 썩어가고, 학교 선생님들은 고리대금없자로 화하고 민중은 실로 마음을 가져다 붙일 곳이 없다. 그렇게 갈급하는 심리에서, 궁금한 심리에서 나온 것이 성신받는다는 현상이다." 용문산운동에 참여한 한 젊은이의 다음과 고백은 전쟁 후 도시에서의 삶이 얼마나 큰 아노미적 심리에 시달리게 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서울을 미워함은 농촌에서 서울 가 6년 동안 지은 죄가 내 30평생의 범죄의 대부분이었고, 죄악의 질이 극히 흉악하여 거기서 받은 죄의 독소는 쉬 빼낼 수도 없다. 회고컨대 나의 순수한 신앙절개가 서울에서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능욕당하고 첫 믿음을 도적맞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후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위기의식과 아노미가 한국민으로 하여금 신흥종파운동에 들어가도록 한 배출요인(pushing factor)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심리적 상태를 가진 사람들을 흡수한 흡입요인(pulling factor)이 무엇이겠습니까?

첫번째로 신흥종파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성격을 들 수 있습니다. 용문산운동의 지도자 나운몽 장로가 안수를 하면 가지가지의 병이 나았고, 성령이 역사하여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인까지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렸으며 귀신이 쫓겨나가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박태선 장로 역시 안수를 통해 병 고치는 능력이 있어서 윤치영, 임영신씨 등 당시의 저명한 인사들이 그러한 체험에 대한 간증을 하는가 하면 그의 설교하는 외모는 다음과 같았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얼굴은 희고 맑고 키는 커다랗고, 정열에 빛난 눈으로 수만 군중을 노려보며 강단에 우뚝 서 있을 때는 마치 하늘 천사 미카엘이 거기 서 있는 듯, 마귀도 당장 물리칠 듯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안심고라 흥분을 준다.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때도 많다. 입을 열면 그의 입에서 불이 나온다. 인간의 입에서 불이 나오는 놀라운 광경에서 나는 눈으로 보았다." 문선명 교주의 카리스마도 매우 강렬하여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가도 선생님이 나타나시어 일일이 지시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는 고백을 하는 신도가 있는가 하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을 다음과 같이 감격에 겨워 표현한 신도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증거해주신 그 분이었습니다. 너무너무 감격스러워 자력에 끌리듯 끌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 분의 발등을 문질러주고 싶고 그 분의 옷자락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습니다." 이상 살펴본 내용들이 성령의 역사이든 악령의 역사이든 신흥종파의 지도자들에게 독특한 종교적 능력, 곧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한국전쟁 후의 위기상황에 처한 한국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카리스마를 요구하였고, 그러한 요구에 성공적으로 응한 신흥종파 지도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영역으로 흡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번째의 흡입요인은 신도들이 경험한 신비스러운 특수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자주 나타나는 그런 현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성령을 받아' 어떤 뜨거운 감정이나 방언 등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나운몽 장로는 자신이 집회를 이끈 어느 교회의 뜨거운 감정적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통성기도 시간에는 온 장내가 뒤덮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모두 꿇어앉아 드리는 기도이면서 엉덩방아를 안 찧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꾸두둥거리는 소리와 아울러 우는 소리, 가슴을 치는 소리, 이 모든 소리는 아집과 죄악성이 무너지는 소리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1955년 박태선 장로가 남산 부흥회를 인도할 때는 썩은 뼈 타는 냄새가 나다가 백합화 향기가 가득하고 이슬이 내리는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통일교 신도 가운데는 박해하는 아버지가 통일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로 소나무에다 한 처녀를 철사줄로 꼭꼭 묶어놓았는데 한 밤중에 사도바울이 홀연히 나타나더니 철사줄이 흐느적거리면서 풀어져버렸다는 신비한 체험 이야기가 당시의 통일교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그 진위를 떠나 자신이 믿는 신앙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며 이러한 확신은 전쟁 이후 무너져버린 규범이나 가치를 회복시켜줄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신흥종파에서 자주 등장하는 신비체험은 신도들을 종교로 끌어당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요인으로 당시의 신흥종파가 제공한 공동체적 분위기를 들 수 있습니다. 나운몽 장로는 일찍이 일제 말부터 용문산 아래 도치랑 마을에 야학당을 만들어 일본어를 가르친다는 핑계를 대면서 성경을 가르치는 신앙공동체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47년 4월 나 장로와 5명의 숙생이 모여 애향숙이라는 신앙공동체의 개숙식(開塾式)을 가진 이래 이 공동체는 꾸준히 성장하여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따뜻한 공동체적 분위기에 대하여 병든 몸으로 자살까지 기도했다가 용문산에 온 한 신도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지할 이 없는 몸이지만 주의 영을 받은 사람 모두가 부모되고 형제가 되니 주의 사랑 주의 은혜 더욱 넘친다." 면서 "가련다 이 몸은 생명수 흐르는 곳 은혜의 비가 오고 사랑의 꽃이 피는 따뜻한 주님의 품 속을 찾아서 이 몸은 가련다. 그리운 용문산으로" 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종교적 공동체 그 자체가 하나의 핵심적인 요소가 됩니다. 즉 문선명 교주는 한을 안고 가신 예수께서 영광으로 현현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가정과 종족과 전체가 하나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축복가정, 합동결혼식 등의 종교적 관행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박태선 장로의 경우 신약성경 계시록을 근거하여, 신앙촌을 세워 그 안에 14만 4천 명의 수를 다 채우게 되면 예수께서 재림한다고 하면서 공동체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신앙촌에 들어가게 되면 죽음이 없고, 살아서 주를 맞이하며, 낙원생활을 하고, 주와 함께 왕노릇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소사, 덕소 등에 대규모의 신앙촌을 설립하여 거대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인명의 손실과 인구의 이동 그리고 같은 마을사람끼리의 적대행위 등은 필연적으로 가족공동체와 지역공동체의 상실 혹은 약화를 초래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후 형성된 이들 신흥종파들은 공동체적인 성격을 강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상실감에 시달리는 많은 신도들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교단분열에 시달리면서 힘이 약화되고 위신이 추락한 기성교회들은 의미있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실패했다고 볼 수있습니다. 당시 신흥종파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기성교회의 기독교인들(전도관에 온 신도의 89%가 기독교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음)로써 이들은 한결같이 기성교회의 냉랭함, 부패 등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네번째 요인은 한국민족의 자부심 혹은 사명을 강조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인간성의 추악한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비참한 경험을 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에 의해서 형성된 자기비하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한국민에게는 무엇인가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신흥종파운동은 한국민의 이러한 요구에 매우 잘 부응하였습니다. 박태선 장로는 하나님께서 옛 이스라엘 나라를 버리시고 새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셨는데 그것이 곧 한국이라고 했으며, 계시록 2장과 스가랴 4장 14절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메시야를 상징함)는 박태선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은 한계를 지닌 것이므로 재림하신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어야 하는데 재림하시는 동방의 나라가 곧 한국이며, 따라서 이 나라는 탕감복귀의 민족적 기대(基臺)를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일제하의 박해 40년, 국토의 분단은 탕감복귀의 일환으로 해석하므로 소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전쟁, 가난, 원조, 억압 등의 분위기 속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와 사명을 가르쳐주는 교리는 확실히 그 종파로 끌어당기는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부정적인 결과로 인해서 한국전쟁의 충격 못지않은 큰 충격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충격은 분명히 병리적인 사회심리로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종교를 포함한 여러가지 사회적 삶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현상에만 국한시켜 보아도 여러가지 병리현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92년 10월 28일의 시한부 종말론, 이웃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개별교회 자체의 확장에만 몰두하는 개교회주의, 포스트 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와의 관련된 신학논쟁으로 인한 갈등 등입니다.

3. 철저히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과 당시 가장 강력한 반공세력이었던 기독교는 자연히 밀착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자신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유당 국회의원이나 정부 요직을 많은 수의 기독교인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익의 3영수'로 불린 이승만. 김구. 김규식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신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익의 정치적 승리를 기독교인들의 승리로 동일시하기 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인의 신념체계와 부합되거나 기독교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즉 이 대통령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허리를 굽히는 대신에 손을 가슴에 얹고 주목하도록 했으며, 감옥전도와 옥중전도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1951년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종군목사제도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보수로 촉탁되었지만 1954년부터 현역장교로 임관되는 군목제도가 확립되어 1955년 현대 카톨릭 27명을 포함하여 352명의 군목이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들어온 적지않은 원조물자들을 교회들을 통하여 배급하게 하여 기독교인들이 많은 혜택을 입을 수 있기도 했습니다. 일시적 현상이긴 하였지만 이른바 '밀가루 신자(밀가루와 같은 해외 원조 배급품을 타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신자)가 급격히 늘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기독교 방송의 허용, 일요일의 공휴일화, 형무소 목사 임명, 크리스마스의 공휴일화 등 여러가지 특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사이의 밀착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약화되어 갔습니다. 이승만 정권과의 밀착에 따른 기독교회의 혜택은 외형적으로 기독교회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 전체로 보아서는 심각한 문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곧 교회가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는 태도는 기독교의 예언자적 사명과 도덕적 위상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교회들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민주화, 유신 반대, 인권 옹호 등을 외치다가 많은 고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들은 역사의 어두움 속에서도 침묵하였고, 그 중의 일부는 예언자적 사명을 담당하는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매도하였으며, 삼선 개헌 지지와 유신 지지를 표명하고, 군부 독재 정권을 정당화하는 조찬 기도회 등을 개최하여 국가 권력으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사회에 대한 영적, 도덕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교회는 국가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그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국가 권력과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으면 권력의 잘못된 사용을 비판하고 그 개선을 요구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4. 본문은 여자의 남은 후손과 싸우려고 바닷가에 서 있던 12:17의 용(마귀)의 모습과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용(마귀)이 바닷가에서 한 짐승을 불러냅니다. 본문 1절-10절까지의 내용은 바다에서 나오는 한 짐승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짐승은 12장의 용(마귀)으로부터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부여받습니다. 다시말해 이 짐승은 마귀에 의하여 세움을 받고 마귀의 일을 수행하며 마귀의 이익을 높여주는 일을 행함에 있어 마귀의 도움을 받습니다. 마귀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이 짐승에게 주었습니다. 용(마귀)는 하늘의 전쟁에서 패함으로 하늘에서의 자신의 보좌를 상실하고 대신 '이 세상 임금'으로서의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일시적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용(마귀)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짐승으로 비유된 세상 권력에게 양도했기 때문에 이 짐승, 즉 적그리스도적인 세상 권력들은 사단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되어 교회와 성도들을 조직적으로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본서가 기록될 당시 이 권세는 이교국이었던 로마제국을 가리킨 것입니다.) 여기 짐승은 역사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고 핍박하는 세상 권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치적 세력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자기를 높이거나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는 사단과 협력하는 세력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기만, 우상숭배, 영적 모독 및 간음 등을 통하여 사단의 제자로 유혹하는 자들은 구체적인 짐승의 모습들인 것입니다. 이 짐승의 뿔에 난 열 면류관은 세상의 왕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앙의 승리자들이 받게 되는 영광의 면류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머리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다고 했는데 "참람하다."는 말은 '훼방하다.' 또는 '모독하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짐승으로 비유된 세상 권세가 참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부인하고, 그 분에 대한 망언(妄言)을 일삼으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난하려고 모든 시도를 다 행하며, 하나님께 돌려야 할 존경과 경배를 자신(우상)에게 돌린다는 것입니다. 이 짐승이 이러한 일을 행하기 위해 몇 가지 권세를 받았는데, 첫째는,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았다."(5절)고 했습니다. "큰 말"은 세상을 지배할 권세와 교만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참람된 말'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난하려는 모든 시도를 나타냅니다. 다음으로,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권세를 받았습니다."(7절) 여기 싸운다는 것은 군사적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긴다.'는 것은 짐승이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육신적 생명을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각 족속과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7절). 이는 사단이 메시야처럼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권세를 지닌 짐승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13:4).......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용과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짐승의 목적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경배와 충성을 용과 짐승에게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짐승의 권세는 한시적입니다. 즉 마흔 두 달 동안만입니다.

"(계13: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여기 "마흔 두달"은 예수 그리스도 재림 전까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를 가지고 성도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게 될 제한된 시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박해는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전쟁에서 성도들이 승리하고 짐승은 패하여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짐승은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에게서만 경배를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짐승의 권세가 아무리 강력하고 위협적이라 해도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게서 참 생명, 즉 믿음과 진리를 빼앗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10절의 말씀입니다.

"(계13: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여기 "인내"란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어떤 일을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용감하게 인생의 최악의 경우를 받아들여 이를 영광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믿음"이란 자기 주인에게 대한 최상의 충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신의를 말합니다.

두번째로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에 대해 11절에서 18절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은 인간의 종교 생활, 즉 예배와 관련되는 짐승으로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합니다. 자칭 선지자로 자처하며 여러가지 이적을 행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데 그들의 종교가 거짓종교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첫번째 짐승을 사회를 타락시키는 사단의 활동이라고 한다면, 땅에서 올라온 이 두번째 짐승은 기독교를 타락시키는 사단의 활동을 말합니다. 이 짐승의 주된 임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진리를 떠나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이 짐승은 먼저 나온 바다 짐승의 모든 권세를 행하는데 이는 거짓된 종교 지도자 및 거짓예언자들이 세상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악행을 자행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짐승은 세상의 권력을 등에 업고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사람들을 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게 경배하게 만들 것입니다.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이 목적 달성을 위해 짐승은 이적을 행하고, 우상을 만들게 하고 이 우상에게 생기를 줍니다. 즉 적그리스도의 활동 가운데 생명력과 실재성 그리고 큰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생명과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자신을 우상화하여 곳곳에 우상을 세웠습니다. 모든 북한 주민들이 자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 하도록 요구합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눈을 감게하여 어버이 수령님을 찾게 한 후 그들의 책상 위에 빵이나 과자를 두고 그것을 누가 주셨느냐고 선생이 물으면 학생들은 큰 소리로 어버이 수령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 아들 김정일은 이 우상화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짐승의 손에 사로잡힌 자들도 짐승만을 절대시하며 그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이처럼 사단은 이적을 통해 사람을 미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짐승이 '어린양 처럼 두 뿔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가장하며 사람들 앞에 큰 이적을 행하므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언급된 일곱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와 버가모 교회,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 가운데서도 광명의 천사의 탈을 쓴 사단이 은밀히 활동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2:8-11, 12-17, 18-24).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양 온갖 능력과 신비한 역사를 동원하여 미숙한 성도들을 유혹하는 거짓 선지자, 사이비 종교인들이 종종 있습니다. 마치 출애굽기 7:11,12에서 애굽의 술객들이 모세가 행한 것과 같은 이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의 치부와 명예를 위해 활동하는데 이는 결국 용과 사단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온 짐승에게 미혹되어 우상을 숭배하고 짐승을 경배하게 되는 사람들은 이 짐승에게서 '이마'나 '오른 손'에 짐승의 표를 받게 됩니다. 여기 '오른 손'은 신체적 활동의 대표하는 것이며, '이마'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지위, 신분 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진정한 소유권과 충성심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인 것입니다. 즉 성도들이 그 몸과 마음에 하나님의 소유라는 낙인이 있듯이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도 사단의 소속이며, 짐승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다는 낙인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박태선이란 사람이 굉장한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보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든 재산을 팔아 그를 따라서 신앙촌에 들어갔습니다. 그를 따라 들어간 사람들은 오직 박태선만을 신봉하면서 그를 위한 하수인 노릇을 했습니다.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에 그 소굴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습니다.사람들이 박태선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곳을 빠져 나오지 못했던 것은 생계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이 이와 유사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종말이 어떤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14:9)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계14: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계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계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붙는 못에 던지우고 (계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지금 이 시대에 사단은 종교와 학문을 통합시키는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통합의 작업을 위해 과학까지 동원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동양의 기 철학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려고 하는 시도도 역시 사단의 짓거리에 불과합니다.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을 찾아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신앙생활, 이적과 기적이 나타나는 교회라야만 능력있는 교회라고 따르는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없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시키는데 더욱 더 열심과 충성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이적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이었지 그 자체가 기독교를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존귀케 되어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지 인간이나 인간의 가르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외부적인 박해와 핍박에 대해서도 인내할 준비를 해야 되지만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이적, 기적 등의 능력행함과 같은 내부적 도전에 동요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씀에 근거한 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롬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고후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5. 이제 세상에 대한 비밀을 파악한 바탕 위에 통일 지향의 기독교 자세를 바르게 하고자 합니다. 오늘날의 평화전략은 힘의 지배 논리에 입각한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자신의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만든 지배 전략을 총괄하여 "팍스 로마나"(로마제국의 평화)라고 부릅니다. "팍스 로마나"는 크게 보아 세 가지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군사적 측면에서 말하는 평화입니다. 군사력의 우위를 전제로 하고 그 군사력을 동원한 무력적 평정이란 의미의 평화입니다. 군사행동을 통한 평화달성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자만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지 패자는 평화를 빼앗긴 채 좌절하고 고통당하며 분노의 소리를 발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쟁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당연히 힘의 우위 확보, 곧 군비 확장이라는 것입니다. 군비 경쟁의 최첨단을 장식하는 핵무기의 개발과 핵 대결이 바로 한반도의 현실에서까지 반평화의 분명한 원인 제공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핵 갈등이 엄청나게 위험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핵 전쟁 발발하게 되면 승자와 패자가 영원히 확연하게 갈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하 24장을 보면, 다윗이 인구 조사를 강행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인구조사의 목적은 단순히 인구조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의 강화와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시행됩니다. 성경은 이같은 다윗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 큰 범죄행위로 고발하고 그에 대한 엄청난 댓가를 치루게 됩니다. 다윗이 즉위 초기에 미미한 군사력으로 주변 모든 나라들의 대군을 격파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승리이시며 나의 방패시며 나의 요새시며 나의 등불이라고 겸손해 하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인구 조사를 통해 군사력 강화를 꾀하는, 다시말해 하나님 보다 인간들의 힘을 더욱 의지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구 조사 결과 병력수가 130만 명이나 되어 다윗은 크게 만족했습니다. 허나 그 만족도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자랑하고 만족해 하던 군사력은 하루 아침에 7만 명이나 줄어 들고 말았습니다. 군사력을 의지하려했던 다윗의 불신앙을 꺾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라에 온역을 내려 7만 명을 죽였던 것입니다.

"(삼하24: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인이라."

인간이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더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이며, 인간이 하나님 외에 다른 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신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 왕국의 번영과 평화는 아름답게 들립니다. 그런데 그 평화 유지정책 중 하나는 결혼동맹이었습니다. 즉 주변 국가들과 동맹 관계를 맺기 위하여 정략상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조차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이것이 나라 민족에 어떠한 파멸을 초래했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같이 좇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왕비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왕상11:1-8)

뿐만 아니라 부강한 나라만이 가질 수 있는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 솔로몬의 많은 말병거들의 수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왕상4:26) 솔로몬의 병거의 말의 외양간이 사만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며."

이러한 아내를 많이 두는 것과 말병거(군사력)를 많이 두는 것은 분명 모세의 율법에 금지되어있는 것입니다.

"(신17: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신17:17)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이러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솔로몬 왕국은 오래가지 않아서 나라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핵 무기의 소유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군사력을 동원한 평화는 참 평화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막강한 화력의 유엔군이, 그것도 16개 연합국이 공산세력을 물리치고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주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 민족이 하나님의 능력의 장중에 잡히게 되기만 하면 핵 무기가 결코 두려운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한국교회가 신앙고백적으로 반핵 평화운동을 펴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한국교회가 과거를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갱신과 개혁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식의 평화는 두 번째로 정치적 차원의 두 가지 이데올로기와 밀착되어 있습니다. 곧 팍스(pax, 평화)는 제국 안보와 제국 국민의 획일적인 총화를 전제로 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말하는 국가 안보의 이데올로기와 국민 총화라는 유신 시절 및 그 후에 지속된 군사독재체재의 한국 상황을 바로 이와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우리의 암울했던 독재 시절의 역사를 자가비판적인 눈으로 돌이켜 볼 때 국가 안보는 실제로 정권 안보에 불과했고, 국민 총화는 국민의 민주적 자유와 정의로운 생존권을 유린한 것이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안보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위에 이루어질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총화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룩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냉전 체재의 종언(終焉)으로 동구권이 붕괴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승리요,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패배라는 식으로 단순 도식화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싱가폴의 경우는 사회주의의 성공한 한 예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제도상의 통일이 구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통일 이 후 독일의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갈등과 또 다른 반목이 바로 이를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팍스"(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다음으로 "팍스 로마나"의 종교적 측면이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군사적 평정과 정치적 제국 수립을 완료하면서 '아우구스투스 평화'라 하는 신전을 만들었습니다. 팍스의 주인공인 황제가 신격화되면서 정치적으로는 국가권력의 절대화 상징인 '황제 숭배'가 국민들에게 생활화된 것입니다. 로마 당시 통용되던 화폐인 동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상이 인각되어 있습니다. 황제 숭배라는 전체 로마 제국의 황국 신민화 정책의 틀에 세금바치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납세거부는 단순히 정치적 저항 행위일 뿐 아니라 동시에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일종의 반역죄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막12:13)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막12: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막12: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막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 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12:17)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팍스 숭배는 일종의 정치 종교의 극치이며, 정치 종교는 실제로 국민의 총화적 획일주의와 함께 지배 체재의 종교적 정당화를 꾀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기본적으로 평화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평화가 있고, 그 평화는 세상(로마)이 주는 평화처럼 속박하고 전쟁하고 지배하는 거짓 평화는 아닙니다. 그 평화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평화인 것입니다.

"(눅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복음을 전파함으로 참된 자유와 평화를, 즉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를 보게하는 영육의 자유를, 눌린 자에 자유를(정치적인 자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경제적인 자유) 누리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자유와 평화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와 평화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엄청난 댓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지불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 땅에 충만할 때 진정한 자유와 평화, 평화적인 민족의 통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황제 숭배 문제는 우리 역사에서도 비극의 극치를 이루었음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일제 시대의 신사참배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종교적 차원의 우상숭배만이 아닌, 민족 말살이라는 극악의 정치 행위였습니다. 독일 교회가 히틀러의 교묘한 반공주의에 덫에 걸려 무자비한 히틀러 독재를 앞장서서 도왔던 비극을 우리도 한국의 군부독재상황에서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야말로 참된 평화인 것입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러므로 진정한 나라 민족의 평화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므로 한국 교회는 현대판 우상숭배의 굴레에서 먼저 해방되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해방 이 후에 태어나 서로간의 체재를 전혀 접해보지 못한 채 살아온 연령의 인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함은 물론, 우리 민족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의 참화 그리고 그에 따른 생래적인 적대감을 지니지 않은 채 흑백 논리의 정치 체재를 살아온 6.25 이 후의 세대 역시 엄청난 인구 비율을 차지하는데, 이들이 바로 통일 조국의 살림살이를 주도적으로 맡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남한 교회의 다듬어지지 않은 우월주의적 교만을 버리고 북한 교회나 사회가 열등주의적 자기 비하를 하지 않는 선교의 주체가 되므로 해서 참된 평화 통일을 이룩하는 통일 주체의 교회 사명을 다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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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너희는 거룩하라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레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어느 소녀가 산상수훈을 읽는 것을 보고 어른이 묻기를, "너는 이 복 있는 자 가운데서 어느 구절을 택하겠느냐?" 그 소녀는 서슴지 않고 "저는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다는 곳을 택하겠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은 즉 "예, 이것만을 가지면 다른 복도 다 가질 줄 믿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기독교인은 메마른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회개하는 깨끗한 눈물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회개하는 깨끗한 눈물 속에 이 땅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사회는 모두가 다 더러워졌습니다. 돈이 정치를 더럽혔습니다. 권력이 기업을 더럽혔습니다. 음란물들이 청소년과 사회를 더렵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양심과 진리의 최후 보루인 종교계까지도 돈과 권력으로 더렵혀진지 오래입니다. 지금 야당에선 지난 대선자금을 밝히라고 여당을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만약 밝히지 아니하면 차기 정권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단죄하여 형무소에 보내겠다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사상 초유로 전직 대통령과 '소통령'(아들 김현철)이 함께 구속되는 이 나라 역사의 오점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청와대를 비롯하여 말단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구석에 쓸만한 그릇이 없습니다. 모두 다 더럽혀진 그릇들로 가득합니다. 그릇이 크든 작든, 그릇이 금그릇이든 나무그릇이든 깨끗한 그릇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라가 잘 되려면 깨끗한 그릇이 많아야 합니다. 돈 많은 나라가 강한 나라가 아니라 깨끗한 나라가 강한 나라입니다. 돈 많은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 깨끗한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불법과 부정 부패가 만연한 나라는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이 나라의 밝은 내일을 위해 무엇보다 성결(거룩)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유대인 자녀 교육의 목적은 한마디로 성결 교육입니다.(바클레이) 또한 유대주의의 기본은 성결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나라 관리들이 부정부패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여 광야로 이끌어 낸 후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과 분리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레19:2)....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성도가 구원받으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가정과 나라가 구원함을 얻으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이요 속성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거룩해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어떠한 것으로도 씻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금을 연단하는 풀무의 그 뜨거운 불로써도 태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표백하는 잿물로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말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말3: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인간의 죄에 대한 유일한 청결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성령입니다.

"(히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요일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시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시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써 인간은 성결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하고 사람의 죄를 없이 하는 묘약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멕베드>라는 작품 속에 멕베드가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는데 아무리 손을 씻고 증거를 인멸해도 마음 속의 살인 죄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사의 도움을 청했더니 이 의사가 짐작을 하고 이 병은 자신이 고칠 병이 아니니 스스로 마음에서 고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오! 아라비아의 향수를 다 가지고도 이 손 하나 말끔히 할 수 없는가? 이것을 파내 버릴 망각제는 세상에 없는 것일까?' 하고 탄식합니다. 세익스피어는 멕베드의 입을 통해서 '죄를 씻을 것은 지구상에 없다. 자기 마음으로도 안 되고 무엇으로도 안 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를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역사합니다. 십자가의 피를 통해 거룩해지고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결의 영입니다.(롬 1:4) 성경은 예수 믿는 것을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결혼식과 결혼 생활은 명백한 다른 것입니다. 결혼식은 "단 일회"의 사건입니다. 결혼식을 거행한 때와 장소가 분명합니다. 결혼식은 반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단 일회"의 사건은 아닙니다. 이것은 영속되는 관계입니다. 결혼식은 예식을 마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 있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결혼식은 교회나 예식장에서 치루어집니다. 결혼 생활은 날마다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생활의 범위는 남녀가 교제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장소 즉 회사, 학교, 시장, 상점 등 무릇 사람들이 모이는 일반 사회 생활까지 확대해 나갑니다. 실패하고 마는 가정은 결혼식 때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고 결혼 생활의 과정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시련은 화려한 결혼식 때에 오는 것이 아니고, 로맨스가 지나가고 숨은 허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결혼 생활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식 없이 결혼 생활에 들어갈 수 없는 것 같이 계속적인 성결 생활도 그것을 시작하는 은혜의 경험없이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결혼식이 건전한 결혼 생활을 동반하지 못한다면 별로 가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혜의 경험도 그것이 보다 깊고 또 풍성한 관계의 개시가 아니라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결혼식, 성결 보존은 결혼 생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행15: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히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히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웨슬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의 최대 목적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에 있다. 즉 처음 조상이 지은 죄로 완전히 잃어버렸던 의와 참된 거룩함(성결)을 되찾는데 있다. 만일 어느 종교나 이 큰 목적에 응하지 못한다면.......이것은 한갖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멸망의 길로 인도할 뿐이다."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참된 성결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성결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극적 성결은 옛 생활과의 단절이요, 죄에서 용서받음이며, 죄의 뿌리, 세력에서 해방됨을 뜻합니다. 적극적 성결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기에 충분한 능력을 받게 됩니다. 곧 사랑의 완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적극적 성결을 온전히 이루어 "사랑 안에서 완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서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인 성결을 얻도록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성결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며 그 표현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성결케 하기 위한 하나님 사랑의 최고 표현입니다. 무디는 "하나님의 본성을 성서적으로 드러냄에 있어서 성결은 출발점이요, 사랑은 최고봉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여인이, 엄격하고 잔소리 많고 사랑 없는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 남편은 그녀의 삶을 언제나 불행하게 했습니다. 아침마다 남편은 그녀에게 그날에 해야할 일의 할당표를 주고 저녁 때가 되면 올바로 실행됐느냐의 여부를 점검하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준수해야 할 가훈 열 가지를 써서 붙일 정도였습니다. 그녀가 남편을 향해서 가졌던 약간의 사랑도 얼마가지 않아서 산산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그 남편은 죽고 그 과부는 남편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훌륭한 기독교인 신사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제 2의 남편은 동정심이 많고 친절하며 첫째 번 남편이 못 가졌던 것을 모두 갖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그 가정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부인은 큰 책상서랍을 정리하다가 첫째 남편의 유물인 가훈 열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호기심을 갖고 그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놀라운 일은 자기가 그 모든 요구를 새 남편에게 지키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의무감 때문이 아니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자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도록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최근 미국 텍사스주 경찰국에서 <나쁜 자녀로 키우는 10가지 계명> 이란 이색적인 자료를 발표해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이가 갖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어라.(그러면 아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될 수 있다고 오만해질 것이다.)

2) 아이가 나쁜 말을 할 때는 그냥 웃고 넘겨라.(그러면 자기가 재치있는 줄 알고 더욱 나쁜 말과 생각을 할 것이다.)

3) 그 어떠한 형태의 교훈적인 훈련과 교육도 시키지 말아라.(커가는 과정에서 자기 마음대로 알아서 생각할 것이다.)

4) 잘못된 품성은 책망하지 말고 그냥 두어라.(이 다음에 사회가 책망할 것이다.)

5) 아이가 어질러 놓은 침대, 옷, 신발 등은 모두 정돈해 주어라.(자기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해 버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6) 텔레비젼이나 비디오를 마음대로 볼 수 있게 해 주어라.(곧 아이의 마음은 쓰레기통이 될 것이다.)

7) 아이들 앞에서 부부나 가족들이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어라.(그러면 이 다음에 가정이 깨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8) 달라는 대로 용돈을 얼마든지 주어라.(타락의 길을 쉽게 터득할 것이다.)

9) 먹고 싶다는 것은 다 먹이고 마시고 싶다는 것도 다 마시게 하고 좋다는 것은 다 해 주어라.(어떠한 거절이라도 한번만 당하면 곧 낭패에 빠지는 사람이 될 것이다.)

10) 아이가 대립되는 자세나 마음을 가질 때는 언제나 아이편이 되어 주어라.(건전한 사회가 모두 그 아이의 적이 될 것이다.)

신구약 성경 전체는 거룩하고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계시인 것입니다. 거룩과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본질인 것입니다. 거룩과 사랑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죄인에게는 대속(代贖)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예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거룩은 죄인을 부르신 목적이요, 사랑은 죄인을 거룩케 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구원의 정점인 거룩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성결의 본질이 사랑이면서, 성결한 신앙과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비결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유혹을 이기는 힘이 되고 타락을 방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승리의 비결이 바로 성결 곧 사랑입니다. 또 하나의 거룩해지는 비결은 진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이 진리가 죄인을 성결케 하는 수단입니다.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라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거룩함과 진리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거룩함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의 근본으로서 그들 속성들과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치 빛의 일곱가지 색깔이 모이면 흰색이듯이 거룩은 모든 속성의 총합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치고 사는 것이 거룩해지는 비결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닮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닮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라, 곧 율법을 주신 이유도 그들의 성결 교육을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대인 랍비들은 "(신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는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말씀들을 너희 마음에 넣으라. 그리하면 너는 거룩한 자를 깨닫게 되고 그의 축복을 받게 되고 그의 길을 고수할 수 있다."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민 15:40)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어려운 환난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4: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잠4:13)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고 당부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붙어 있을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말씀과 기도로 양육받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안디옥 교인들에게 "(행11:23)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4:14에서 "진리를 굳게 잡으라." 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께 붙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 말씀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에 붙어 있다는 것은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알고 지켜 행하는(순종) 것입니다.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영혼이 거룩해지며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자녀에게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교육시켜야 합니다.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시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닮는 교육이 될 수 없습니다. 거룩에 이르는 성결 교육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교육을 말합니다. 마틴 부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악마는 사람들이 탈무드를 공부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 왜냐하면 그 방면의 학위를 따는 것은 그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고 명성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성서를 펴들고 있으면 방해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성서를 공부하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싹트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유명한 교육학자 페스탈로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육의 정신은 첫째,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셋째, 그 하나님께 늘 감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바로 성서입니다. 사람은 기적을 통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육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딤후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의 자녀와 가정이 거룩해지는 길, 교회와 나라가 깨끗해지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보내신 성령과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이 사는 길, 거룩해지는 길은 이 땅에 예수, 예수의 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이 사는 길, 거룩해지는 길은 이 땅에 성령과 말씀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을 통해 이 나라 민족이 성화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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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우리의 소원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9:2) (1절에 포함되어 있음)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9: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롬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일제 시대의 뛰어난 기독교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인 김교신은 인간 개인의 삶이나 민족과 인류의 역사적 삶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움직인다는 섭리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민족의 흥망성쇠는 다른 무엇이 아닌 한 민족의 신앙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김교신은 구약 성서를 해석하면서 느헤미야가 가진 망국민의 애국심을 논의한 후 그가 예루살렘성의 황폐화 소식을 듣고 동포들의 무능을 탓하거나 이웃의 적대국들을 원망하며 어떤 정치적인 책략을 짜기 전에 먼저 회개하였음을 강조했습니다. 즉 "나라의 흥망성쇠가 그 나라의 병거(兵車)의 수의 다소와 외교 책략의 우열에 있지 아니함을 알기 때문에 저는 근본 문제에 착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애국은 진정한 애국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국가나 민족 문제의 근본은 정치경제적인 어떤 요소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사회와 국가의 융성은 모두 건전한 도덕 생활의 기초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건실한 도덕만 확립되면 난마와 같은 민족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도덕이란 한 두 가지 행위의 과오 실책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근본 방침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태도, 곧 신앙이 도덕입니다. ......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것이 도덕의 총화요, 갱생 융성의 원동력"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정도로 신앙과 민족애가 결합된 투철한 의식을 지닌 김교신은 그의 <성서 조선의 해(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 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으나 인력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혹자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혹자는 문학을 주며, 혹자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근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 ......과학 지식의 토대 위에 새 조선을 건설하려는 과학 조선의 운동이 시대에 적절하지 않음이요, 그 인구의 팔 할 이상을 차지한 농민으로 하여금 덴마아크식 농업 조선을 중흥하려는 기도가 시의에 부합함이 아니며, 기타 신흥 도시를 위주 한 상공 조선이나 사조에 파도치는 공산(共産) 조선 등이 다 그 진심 성의로만 나온 것일진대 해로울 것도 없겠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들은 모두 풀의 꽃과 같고 아침 이슬과 같아서 오늘 있었으나 내일에는 그 자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모래 위의 건축이라 풍우를 당하여 파괴됨이 심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형적(具形的) 조선 밑에 영구한 기반을 넣어야 할 것이니 그 지하의 기초공사가 곧 성서적 진리를 이 백성에게 소유시키는 일이다. 넓게 깊게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라. 그러므로 조선을 성서 위에."

일본의 내촌감삼은 "내게는 두 개의 제이(J)자가 있다. 하나는 Japan(일본)이요 다른 하나는 Jesus(예수)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내촌은 일본의 참 애국자인데 그 애국의 근원이 다름아닌 불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라고 했습니다. 그런점에서 우리에게도 두 개의 씨(C)자가 있어야 겠습니다. 하나는 Coree(불어로 Korea란 뜻)요 다른 하나는 Christ(그리스도)입니다.바울은 자신의 민족을 위해 늘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않는 고통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본문1,2절). 그가 비록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이기는 하지만 인류의 참된 살 길인 복음이 그 누구에게보다도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전파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본문 3절의 "친척"은 동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 민족만 사랑하지말고 다른 민족을 또한 귀하게 볼 것을 요구하십니다. 요나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 니느웨, 유대인을 가장 괴롭힌, 유대인이 가장 증오하는 니느웨에 가서 그 민족이 살 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신본주의에 입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혈통만을 사랑하는 동족애는 교만의 죄를 범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자기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스라엘 동포를 사랑한 이유는 그 민족이 일찍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 제일주의, 신본주의에 따른 애국 사상이었지 민족 지상주의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민족과 국가는 다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먼저 민족 지상주의를 부르짖은 자와 부르짖는 민족의 마지막은 다 같은 운명에 빠집니다. 이태리의 뭇솔리니는 일찍이 일어나서 이태리 청년들에게 하는 말이 이태리 사람들이 제일 먼저 구할 것은 옛날 한 번 없어진 로마 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가가 지상이라고 하며 이태리인들은 먼저 국가를 구하자고 외쳤습니다. 많은 이태리 청년들이 그 부름을 따라서 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먼저 국가를 찾으면 이와 같이 동일한 운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9:26-28 의 말씀을 보더라도 모세는 민족을 위하여 민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민족을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한 번은 미국 대사를 만나서 하는 말이, "당신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이 북미에 왔다가 하나님도 찾았을 뿐아니라 금도 찾고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그러나 우리 아르헨티나의 경우 우리 조상의 대부분이 금을 찾아 돈을 모으기 위해서 아르헨티나에 이주해 왔는데 지금 보니 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민족 국가가 잘 사는 길은 어떤 정치제도나 경제 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도나 구조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변화가 더욱 더 중요한 민족 국가 번영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민족이 살 길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만민을 사랑하는 길은 예수 복음을 전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진정한 민족을 사랑하는 방법은 복음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크게 근심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지않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찢어진 가슴의 날카로운 슬픔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척하는 죄를 미워한 것이지 자기 동족을 미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미워한 것이지 죄인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노함으로 채찍맞을 백성으로 본 것이 아니라 갈망하는 사랑으로 동정해야 할 백성으로 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제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저주(아나테마,anathema)라도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애중에 가장 귀한 것은 아무것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롬8:31-39). 그러나 만약 그것이 자기 골육 지친을 구원하는데 어떤 도움이 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아나테마, anathema)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잠시도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유대인의 지위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문4-5절에 유대인들이 지닌 특권을 여러가지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 이스라엘이란 이름 자체가 복입니다(창32:28). 이 말은 '하나님의 왕자'라는 복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신14:1,32:6,출4:22,호11:1 참조).

보어햄(Boreham)이란 소년이 어디에선가 그가 소년 시절에 어떻게 아는 친구의 집을 방문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들어가서는 안될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그 방 건너 편에 앉아 있었는데 그 때 그 방문이 열리며 그 안에 자기 나이의 한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무서운 백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 소년의 어머니가 그 소년 곁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틀림없이 어린 보어햄이 건장하고 온전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아들을 보고는 비교를 함으로써 그 가슴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는 그 어머니가 그 백치 소년의 곁에 무릎을 꿇고 고통스럽게 대성 통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너를 먹이고 입히고 사랑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이렇게도 몰라 주는구나."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셨을 말씀일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다만 더 심한 것 뿐입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의 예수 배척은 고의적이고 의식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마21:33-46 참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왕자란 특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예수를 모르고 배척하는 자기 동족에 대해 가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영광"-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보러 내려 오실 때 내려 온 하나님의 웅장한 빛을 말합니다.(출16:10)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하나님을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여러가지 이적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지만 오히려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세상 길을 택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마21:39-41).

셋째, "언약"-이스라엘은 언약을 소유했습니다. 그 첫번째 언약은 홍수 후에 노아와 맺어진 것입니다. 그 언약의 표징으로 하늘에 있는 무지개로써 다시는 이 땅에 홍수가 나지 아니한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두번째 언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입니다. 그 표는 할례였습니다. 세번째 언약은 시내산에서 한 민족과 맺은 언약으로써 그 근거는 율법이었습니다. 네번째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입니다(고전11:23-26).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반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셨고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축복의 관계들을 거절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접근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의지의 무서운 책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넷째, "율법을 세우신것과"-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고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 삶의 모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범죄했으면 그들은 모르고서가 아니라 알고서 범죄한 것이었습니다. 알고서 지은 죄는 모든 죄악 중 가장 큰 죄악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죄입니다.

다섯째, "예배"- 성막 혹은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길로써 예수를 보내주셨건만(요4:20-26) 그들은 거절했던 것입니다.

여섯째, "언약" - 이스라엘은 그 민족의 운명을 모른다고 절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안에 그들을 위해 쌓아 둔 임무와 특권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그들이 크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신28:1-14). 그러나 크게 되고 머리가 되는 기준이 되는 말씀이신 예수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일곱째,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 유대인들은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 즉 아브라함(4:1-3), 이삭(7절), 야곱(13절), 다윗(1:3,4:6-8) 등이 그들의 조상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실 때 유대인의 혈통을 택하셨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를 그들은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절당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뒤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찢어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처럼 많은 특권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救贖歷史)의 주역이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길은 바울이 그토록 갈망했던 민족 복음화를 통해 세계 구원의 주역이되는 것입니다. 진정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면 바울이 가진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희생과 그치지않는 고통을 가슴에 안고 이 땅에 예수를 줄기차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분단된 조국을 통일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저 북녁 땅에 복음화가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뜻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역사의 완성은 이 천국 복음을 통한 세계 복음화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복음화하여 세계 복음화의 주역이 되게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소원은 민족 복음화를 통한 세계 복음화입니다.

1895년에 일어난 민비 살해 사건(을미사변)의 발단은 이렇습니다.(프레데릭 맥켄지가 쓴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미우라 코로오는 직업 청부 깡패 둘을 은밀히 불러 거사를 설명했습니다. 이번 거사를 위하여 벌써 군과 경찰도 동원 계획을 세운 터였습니다. 두 깡패 아다찌 겐조와 구리토모 시게아리카는 불량배 24명을 모아 행동대를 조직했습니다. 살해 특공대였습니다. 미우라 코로오는 약 한 달전에 조선의 공사로 부임한 자며 구리토모 시게아리카는 황성신문사 주필이었습니다. 일등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가 코로오 공사와 대원군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에서 기울어가는 일본의 영향력를 회복하려는 코로오와 민비를 꺾고 집권하려는 대원군이 손을 잡았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3시쯤 대원군의 집이 있던 시골, 오늘의 마포 공덕동에서 대원군과 일본인들이 출발했습니다. 행동대는 그날 새벽에 쉽게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본군이 궁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일본 정규군은 궁을 차단하여 지켰습니다. 살해조 깡패들이 왕의 침소가 있는 곳의 담을 넘었습니다. 곧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약간의 조선인 수비대는 사살됨으로써 곧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깡패들 일부는 고종의 침소로 들이닥쳐 고종을 위협했습니다. 민비와 이혼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민비 살해조는 왕비의 침소로 뛰어들었습니다. 깡패들은 도망치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두들겨 패면서 왕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르겠다고 말하며 애원하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옆방으로 가던 살해조는 방 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살해조 조장인 일본군 고문 오카모도 류노스케가 그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제끼면서 왕비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이를 부인하면서 몸을 홱 뿌리치며 비명을 지르며 낭하로 도망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세자가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는 모후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살해조가 민비를 덮쳤습니다. 여러 명이 쓰러진 작은 여인을 난자했습니다. 칼에 피가 튀었습니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살해조는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왕비를 이불에 둘둘 말아 멀지 않은 정원 마당으로 옮겨 던졌습니다. 그 위에 석유를 붓고 준비한 나무를 주위에 쌓았습니다. 타오르는 불에 계속 석유를 부어댔습니다. "모든 것이 다 타고, 그리고는 몇 조각의 뼈만 남았다." 기울어 가는 나라, 그 슬픈 나라의 '국모'는 이렇게 죽었습니다. 민비가 살해되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고종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밖에 기독교인 누구 없느냐!" 기독교는 그 때 그 가련한 왕이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위기의 때에 왕은 기독교가 필요했습니다. 고종의 외침은 1800년대의 마지막 15년 동안에 한국 사람이 기독교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당시에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 앞잡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 나라는 기독교를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벌써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침략국이 일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통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교회로 들어왔는데, 그 까닭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도 기독교를 '어렵고 위험한 때에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로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삼류 정치, 정권의 비호 아래 커왔고 아직도 정치와 밀착해 있는 경제, 경제 규모가 커지기는 했어도 아직 그렇게까지 흥청망청 쓸 때가 아닌데도 돈을 물쓰듯하는 부자들, 이것을 부추기는 소비지향적 문화와 향락주의, 그리고 이런 가운데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의 절망감, 여러 종교들이 나름대로 진리를 외치기는 하지만 그렇게 큰 영향은 없는 듯한 상황, 아니 진리를 말한다고 하는 종교들도 '성장 경쟁식 사고'를 더 부추기고 있는 상황.... 이런 전반적인 문제점은 결코 우리들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윤리 도덕적 타락과 가치관이 뒤집힌 상황을 교회가 과연 해결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니 교회는 도덕 윤리적으로 바르다고 볼 수 있는가? 경제의 부조리를 보면서, 그래도 예수 믿는 경제인들이 부정 부패에서 깨끗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그 지긋지긋한 도당 정치 현상을 보면서, 그래도 기독교인 정치가들이 바른 정치 철학과 믿는 사람다운 정치 도의를 지녔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과연 이 사회가 교회를 필요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교회는 타락과 부패와 혼돈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해왔습니다. 복음이 들어간 곳에는 또 언제나 윤리 도덕의 차원이 높아졌습니다. 바른 가치관과 건전한 문화와 문명의 꽃이 피었습니다. 시대가 어두워지고 도덕 가치가 땅에 떨어질 때, 사람들의 눈에 먼저 띄는 것은 교회가 지닌 높은 도덕 윤리적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그 사회를 구원할 희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교회 자신이 타락할 때 이런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주어진 사명을 망각하고 사명을 다하지 못했을 때 회개하고 갱신하므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밖에 누구 사명자 없느냐?"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복음으로 민족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복음으로 전 세계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이 사는 길, 세계가 구원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교회는 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 속에 그 존재 의미가 있으며, 이 사회의 필요한 존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나라 민족, 사회가 제 2의 광복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주님과 우리 교회의 소원은 이 땅을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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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개혁의 원리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 문민정부가 들어서서 사정의 칼을 뽑아 소위 문민 개혁을 단행하여 정치, 사법, 경제 분야는 접어두고 군부의 떨어진 별만도 42개였습니다. 이러한 문민 개혁은 그 초기에 개혁을 '혁명'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군사통치 30년의 고질화된 윗물의 비리뿐만 아니라 해방 후 이승만 정권 이래 이런 '혁명적 개혁'은 한차례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리는 조선 중종기의 조광조의 예를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진사류로 그의 칼날 같은 개혁정치가 큰 호응을 얻었지만 끝내 경륜 많고 교활한 수구세력에 밀려 기묘사화 때 사사(賜死)되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를 의심하게 할 만하게도 문민 정부의 말기 현상은 조선 중종기와 비슷하게 대통령 아들의 구속을 뒷전으로 '혁명같은 개혁'은 이제 물건너가고 있습니다. 수구세력은 여전히 고개를 들고 구속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석방을 주장하고 있고, 경제는 물거품이 된채, 정치판은 여전히 3김 정치로 흙탕물이 된채, 사회는 각종 범죄 소굴화되어진 채로 문민 시대는 종막을 고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문민개혁은 허탈하게도 실패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혁명이나 개혁은 과연 성공할 수 없는 것인가?

2. 고리키는 세계를 뒤흔든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나 고통을 참을 수 밖에 없다고만 역설되는 나라 러시아에서, 아니 이 세상 전체에서 레닌만큼 심각하고 강하게 불행과 슬픔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저주한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고통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하고 또 물리칠 수 있는 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특히 위대한 인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고리키가 평가한대로 레닌은 그가 주도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었습니까? 사회주의 혁명으로 공산주의가 지배했던 지난 80여년의 구 소련은 엄청난 죽음과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한 고통은 오늘날 러시아에게 까지도 말할 수 없는 혼란과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결과 발트 3국의 하나였던 에스토니아에서 시작된 레닌 동상 제거작업은 소련 각국으로 퍼져 나가 이제 그의 동상은 형체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레닌의 혁명은 역사에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레닌은 자신이 죽기 2년 전 "레닌 사상의 가장 탁월한 계승자로" 판단하여 당 서기장으로 스탈린을 임명했습니다. 스탈린은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들어갔던 츠빌리시 신학교를 5년만에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츠빌리시 철도 노동자들로 구성된 한 학습 모임을 지도하는 것을 시작으로 직업혁명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이 당 서기장에 올라서 1934년부터 시작된 대숙청은 당과 군의 최고위 지도자들이 다수 처형된 것을 비롯하여 수천만 명이 체포되고 피의 숙청을 당했습니다. 이 숙청의 피냄새가 채 가시기 전에 터진 2차 대전을 통해서 소련 국민 2천만 ~ 3천만 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인간적인 사상이나 정치, 경제의 혁명의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인류의 고통과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3. 오늘날 개혁을 수 없이 부르짖지만 개혁이 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개혁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에라스무스였습니다. 그가 당시에 기록한 <우신예찬>을 보면 지금 우리 나라에서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내용들입니다. 교회 내에서 자행되는 불의, 부정, 믿는 자들의 미신과 부도덕, 그리고 성직자들의 사치와 방탕 등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을 그만 두고 서로 사랑하며 도덕적인 삶을 살기를 강력히 외치는 점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에라스무스 자신도 교회에서 처벌하려는 눈치를 보이자 자신의 주장을 모두 철회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지적한 잘못들은 인간의 기준으로 본 것들이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그리고 도덕으로 볼 때 중세말의 교회나 신자들이나 성직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성과 도덕이란 기준에 의해서 그런 부도덕들은 시정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은 에라스무스와는 근본적으로 개혁의 기준과 방법이 달랐습니다. 비록 같은 잘못을 지적해도 두 사람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에라스무스의 기준은 이성과 도덕이었습니다만 루터는 그런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루터는 신앙적인 관점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당시 교회의 잘못된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러기에 에라스무스가 위협에 눌려 잠잠해져도 루터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생사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죽음을 무릎쓰고 개혁에 끝까지 참여했습니다. 루터의 개혁의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성전)가 바로 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룩할 때 참된 개혁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될 때 사회 전반에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위대한 성직자의 말이나 기도원 원장의 말이나 교회의 전통이나 사회의 풍습이나 과학자 또는 최고 지성인의 말은 상대적인 기준만 될 뿐이지 성경말씀처럼 절대적인 권위는 가질 수 없었습니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존재하게 했고 모든 것을 운행하며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었습니다. 이 하나님 말씀 앞에 겸손히 서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죄악을 보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개혁은 말이나 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능력은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 그래서 지금 내가 어떤 상태로 바뀌었으며 장차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기준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요 개혁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은 외형적인 변화보다는 복음이 바로 전파되게 하는 것을 첫째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은 누구보다도 교회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그 잘못을 시정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교회가 바른 신앙에 서기를 요구하였고 개혁을 수행할 능력을 가졌었습니다. 교회가 바른 신앙에 서게 되자 다른 개혁은 모두 다 자동적으로 뒤따라왔습니다.

4. 그래서 구약 시대 개혁자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 단호한 결단을 통해 나라의 운명을 일신하였습니다. 요시야는 먼저 성전을 성결케하는 일을 통하여 신앙 생활에 생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으로 축복의 통로와 같은 것입니다. 외형적인 성전 복구 수리를 통하여 백성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을 새롭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항상 성결케 보존코자 하는 사람은 그 신앙이 날로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전(殿)이되는 자기 몸을 날마다 성결케함으로 자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고전3:16,17).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가까이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더욱 더 성결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성결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 성결할 때 거룩한 하나님의 영, 성령은 역사(役事)하십니다. 나라의 개혁 정책이 하나님께 합의한 개혁 운동이 되어 나라가 새롭게 되기위해서는 먼저 성결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가야 합니다. 성결운동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소멸시키는 성령의 불을 이 땅위의 모든 심령들에게 던집시다. 죄악이 일소되지않은 개혁 운동은 악령만 역사할 뿐입니다. 민족의 신앙을 새롭게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성전을 새롭게 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 민족의 진정한 개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개혁을 위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는 하나님 말씀과 이 땅의 죄악을 불태우는 거룩한 성령이 누구보다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시야는 더 나아가 철저하게 우상을 제거함으로 그 땅을 정결케 하였습니다(대하 34:3-8절). 나라 민족이 개혁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전, 교회가 성결해져야 함은 물론 땅이 성결해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은 우상을 제거하되 그것들을 찍고 가루로 만들어 우상숭배의 제사장 무덤에 뿌리는 등 철저하게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요시야는 선왕 므낫세가 그 우상들을 파괴하지 않고 그냥 내어버리기만 하여 그 아들 아몬이 다시 그 버린 우상을 가져와 섬겼던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 그 우상들을 찍어 가루로 만들어 날려 버렸던 것입니다(역대하33:22). 이처럼 우리도 옛 삶을 청산하되 죄지은 손을 잘라내듯 하고, 죄지은 눈을 빼어버리듯 하는(마18:8,9) 단호한 의지와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삶이 가능하고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요시야 왕같이 우상의 단(壇)과 우상 숭배를 철저히 분쇄시킬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지도자와 함께 하십니다. 멸망의 가증스런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손과 발을 잘라내고, 그 눈을 빼어버리듯하는 완전 타파할 때 이 땅이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북한 땅이 거룩한 하나님의 땅이 되기 위해, 우상의 단들과 우상의 문화, 그리고 우상 숭배의 세력들이 민족 문화를 빙자하여 악성 암세포처럼 번지고 있는 이 남한 땅이 성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하나님 말씀에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직 그 명령에 순종하며, 백성들 앞에 강하고 담대한 요시야와 여호수아같은 지도자가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5.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공표하기 전 어느 날, 설교사 한 사람이 붉은 색을 칠한 십자가와 교황을 상징하는 깃발을 세워 놓고 면죄부를 팔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돈이 이 상자 속에 들어가 땡그랑 하고 소리를 내는 바로 그 순간, 여러분의 영혼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몇푼 안 되는 면죄부로 천당에 가는 길을 예약해 두지 않으시렵니까?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딱 한 번, 지금 안 사면 후회하게 됩니다." 루터는 야바위꾼 같은 설교사를 향해 침이라도 ?어 주고 싶었으나, 꾹 참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정말 구제 불능이군." 루터의 말마따나 당시의 교회는 정말 한심했습니다. 교황을 포함하여 성직자들 중에는 몰래 자식을 낳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게다가 주교나 수도원장 같은 자리를 둘러싸고 공공연한 뇌물 수수행위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교회는 영주와 마찬가지로 광대한 토지와 수많은 농노들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구나 수도원 책임자는 농노들의 토지 경작으로부터 생겨나는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착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인가? 주민들이 납부하는 십일조라든가 그 밖의 교회에서 무슨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주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돈까지 계산하면 교회의 수입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514년 마인츠 지방의 대주교가 된 알브레히트는 당시 관례에 따라 처음 일년간의 수입을 교황에게 바칠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긁어모은 푸거 가문으로부터 돈을 빌려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당시 교황은 레오 10세였습니다. 그의 전임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는 재임기간 중에 로마에 성 베드로 성당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우두머리로서의 위엄도 과시할 겸 유럽인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기독교의 위세도 과시할 겸 율리우스 2세가 세우려 했던 웅장하고 거대한 베드로 성당은 레오 10세가 교황에 취임한 이후에도 완성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던 레오 10세는 도박과 사냥과 파티를 좋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주제에 욕심은 있어서 성당을 하루라도 빨리 완성시키려고 안달복달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새로운 돈벌이를 구상했습니다. 한편 알브레히트에게 거액을 빌려준 푸거 가문은 어떻게 빨리 정확하게 돈을 회수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에게 거액을 차용해 바친 알브레히트와 과시욕에 빠신 교황 레오 10세, 그리고 고리대금업자 푸거 가문, 이렇게 세 주인공이 대동단결하여 꾸며 낸 것이 바로 면죄부 판매습니다. 교황은 면죄부라는 상품을 만들어 알브레히트에게 독점판매권을 주는 대신 판매액의 절반을 갖기로 합니다. 알브레히트는 푸거 가문에게 진 빚을 상환하기 위해 푸거 가문의 사람들과 함께 면죄부 장사를 합니다. 그래서 판매액의 절반을 푸거 가문에게 진 빚을 갚기로 합니다. 당시 독일의 시인이었던 후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에는 세 가지가 팔리고 있다. 그 세 가지란 예수, 성직자의 자리, 여자이다. 로마에서는 세 가지가 미움을 받고 있다. 즉 교회에 대한 의심, 교회의 개혁, 독일인의 각성이다. 나는 로마를 위해 세 가지를 기원한다. 그 세 가지란 페스트, 기근, 전쟁이다." 당시 교황과 성직자들의 횡포에 대한 적개심은 신분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루터가 1520년에 저술한 종교개혁 3대문서인 <독일 민족의 귀족에게 드리는 호소>는 독일에서의 로마 교황과 교회의 횡포를 열거한 후 독일의 귀족들이 독일 민족의 이익을 위해 교회와 싸울 것을 호소한 내용입니다. 또 하나의 문서는 <교회의 바빌론 유폐(幽閉)에 관하여>입니다. 이 책에서 루터는 교회에서 행해지는 여러 의식들이 대부분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 두고 다른 의식들은 모두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문서는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하여>인데 이 책에서 루터는 기독교인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는 그 책에서 절대적인 신앙의 자유와 하나님 말씀에 따르는 신앙인으로서의 책임을 함께 강조했습니다. 루터는 성직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면서, 진정한 신앙심은 하나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원받는 길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거기에 씌여져 있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도대체 독일인 중에서 성경을 끝까지 읽어 본 사람, 아니 성경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독일 글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라틴어로 씌여진 성경을 어떻게 읽을 수 있다는 말인가? 목사가 목소리를 깔고 잔뜩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성경을 한 구절을 읽으면, 신자들은 저 목사가 지금 자신들이 세수를 안 하고 왔다고 욕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배가 끝나면 남으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이용해서 성직자들이 온갖 부패와 타락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보다못해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성직자들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독일어 성경은 루터에 의해 완성되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에 무슨 말이 씌여져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태까지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손에만 쥐어져 있던 성경이 마침내 독일인의 품 안에도 안기게 된 것입니다. 이제 루터는 더욱 더 강하게 주장합니다. "교회에 가 보라. 거기엔 사방에 갖가지 조각과 장식들이 현란하게 걸려 있다.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데에 성모 마리아 상이 왜 필요한가? 이것들은 공연히 사람들의 감정을 주눅들게 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우상들 아래에 무릎꿇고 앉아 억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변치 않아야 할 진정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 신앙을 강요하는 저 우상들을 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 우상 숭배의 결과는 허무와 수치밖에 남을 것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를 척결해야만 합니다. 시편 97:7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6. 성전을 성결케 하고 나라의 모든 우상을 척결할 때, 요시아 왕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요시아 왕은 여선지자 <훌다>에게 나라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선지자는 왕의 사자들에게 조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엄청난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사실 그러한 심판이 직접적으로 요시야 왕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율법의 말씀을 완곡하게 전할 수도 있었고, 또 회개하여 그 심판을 면하라고 충고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선지자 <훌다>는 냉엄하게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돌이킬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격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씀의 선포는 권력이나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공명 정대하게 전해야 하는 선지자적 사명에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 민족이 개혁을 통해 역사가 단절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바로 전하며 듣는 자는 그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참 선지자된 오늘날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 뿐만 아니라 말씀을 거역할 때 내려지는 저주와 심판 또한 주저함 없이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내용을 바로 듣고 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개혁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은 복음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 주고, 인간의 삶과 나라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는 능력입니다. 더 나아가 복음은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케하여 사회적 국가적인 죄들에 대해 참다운 개혁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어느 시대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개혁 운동의 지표요 추진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연구되어지고 읽혀지게 될 때 진정한 회개를 이루고, 옷을 찢고 마음을 찢는 회개 운동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 합의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공적인 개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 3:15-17에서 말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으로 하여금 의롭게 살아가도록 완성시키는 능력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확증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르게 살아 갈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영접하는 지도자들은 나라와 민족을 바르게 영도할 능력과 권능과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가정과 사회를 개혁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 그 사회의 도덕이 향상됩니다. 이렇게 성경은 국가 사회 도덕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국왕 윌리엄 4세가 죽던 날 밤, 궁중에서는 한 처녀가 여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그녀는 64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영국의 번영은 이 빅토리아 여왕 때 성취된 것입니다. 영국의 국기인 유니온 잭 아래 해가 지지 않던 때도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었습니다. 일찌기 인류 역사상 빅토리아 여왕만큼 위대한 왕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로 무릎을 꿇고 성경을 폈습니다. 잠시도 자신의 품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던 성경을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내가 여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치를 하게 해주십시오."빅토리아 여왕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해결했고 기도로 정치를 했습니다. 하루는 인도의 왕자 한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을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정치를 잘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을 펴들고 힘 주어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 뿐입니다."우리 나라에도 일찍이 이와같은 선각자가 있었습니다. 일제 시대의 뛰어난 기독교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인 김교신은 인간 개인의 삶이나 민족과 인류의 역사적 삶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움직인다는 섭리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민족의 흥망성쇠는 다른 무엇이 아닌 한 민족의 신앙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김교신은 구약 성서를 해석하면서 느헤미야가 가진 망국민의 애국심을 논의한 후 그가 예루살렘성의 황폐화 소식을 듣고 동포들의 무능을 탓하거나, 이웃의 적대국들을 원망하며, 어떤 정치적인 책략을 짜기 전에 먼저 회개하였음을 강조했습니다. 즉 "나라의 흥망성쇠가 그 나라의 병거(兵車)의 수의 다소와 외교 책략의 우열에 있지 아니함을 알기 때문에 저는 근본 문제에 착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애국은 진정한 애국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국가나 민족 문제의 근본은 정치경제적인 어떤 요소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사회와 국가의 융성은 모두 건전한 도덕 생활의 기초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건실한 도덕만 확립되면 난마와 같은 민족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도덕이란 한 두 가지 행위의 과오 실책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근본 방침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태도, 곧 신앙이 도덕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것이 도덕의 총화요, 갱생 융성의 원동력"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정도로 신앙과 민족애가 결합된 투철한 의식을 지닌 김교신은 그의 <성서 조선의 해(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 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으나 인력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혹자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혹자는 문학을 주며, 혹자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근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과학 지식의 토대 위에 새 조선을 건설하려는 과학 조선의 운동이 시대에 적절하지 않음이요, 그 인구의 팔 할 이상을 차지한 농민으로 하여금 덴마아크식 농업 조선을 중흥하려는 기도가 시의에 부합함이 아니며, 기타 신흥 도시를 위주한 상공 조선이나 사조에 파도치는 공산(共産) 조선 등이 다 그 진심 성의로만 나온 것일진대 해로울 것도 없겠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들은 모두 풀의 꽃과 같고 아침 이슬과 같아서 오늘 있었으나 내일에는 그 자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모래 위의 건축이라 풍우를 당하여 파괴됨이 심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형적(具形的) 조선 밑에 영구한 기반을 넣어야 할 것이니 그 지하의 기초공사가 곧 성서적 진리를 이 백성에게 소유시키는 일이다. 넓게 깊게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라. 그러므로 조선을 성서 위에."

여러분의 신앙과 이 나라 민족을 성서 위에 세우므로 참된 개혁과 반석 위에 세워지는 튼튼하고 건강하며 부강한 나라 민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7. 미국 라이프지가 선정한, 지난 1천년을 만든 20대 사건 가운데 제 1위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이었습니다. 예수탄생 이후 두 번째 맞는 천년의 최대 사건은 1455년 독일 대장장이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성경을 인쇄한 사건이었습니다. 귀족과 성직자의 전유물이던 성경은 그의 인쇄기를 통해 일반에 퍼져나갔고, 이후 르네상스와, 문예부흥과 16세기 종교개혁, 18세기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다시말해 그간 1천년이 넘게 귀족들과 성직자의 손에 갇혀있었던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이 금속활자 발명으로 말미암아 일반 평민들게 확산되므로 세계 문화 문명사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암흑기의 중세 교회를 개혁하고 혁명하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확산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18세기 산업혁명을 가져와 세계 인류의 삶의 패턴을 새롭게 변화시켰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하나님 말씀, 복음 전파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과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지 세상 정치 권력이나 물질 장악, 성공 등을 퉁해 세상을 점령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교회의 가장 강력한 행동은 진리를 바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핍박을 초래할지라도 진리를 사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 교회답게 바로 서서 하나님 말씀을 바로 선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나라 민족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제2의 르네상스를 이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사에 중세가 암흑기가 된 이유는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파하는 교회로, 진리를 사수하며 진리 가운데 서 있지 못하고 세상 권력에 미혹당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받은 권력(능력)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전파의 능력(권력)입니다. 복음 전파의 영적인 능력은 세상에서 말하는 권세나 권력과는 무관한 권력, 능력을 말합니다. 마태 복음 28장 18절에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복음 전파를 위한 영적인 권세를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만나 예수께 던진 제자들의 질문은 "(행1:6)....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였습니다. 제자들은 회복된 나라에서 얼마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그런 나라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왕국을 회복하여 권위와 지위를 가지고 로마인들에게 권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줄 수 있는 때가 지금입니까?" 그러나 그런 나라에 관한 것은 알 바가 아니고 대신에 그는 능력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전파의 영적인 능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바로 이 복음 전파의 영적 능력을 상실하고 권력 탐욕에 빠져 중세는 암흑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더 이상 정치 권력에 미혹당하거나 교회를 더럽히지 말고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쪼개여 회개하며 이 시대에 들려주시는 나라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요시아 왕이 율법책을 통해 나라의 운명이 멸망 직전에 처해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므로" 나라 민족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눈으로 보지 않게 되었던 것처럼,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라 민족이 거듭나기를 축원합니다.

8. 1895년에 일어난 민비 살해 사건(을미사변)의 발단은 이렇습니다.(프레데릭 맥켄지가 쓴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미우라 코로오는 직업 청부 깡패 둘을 은밀히 불러 거사를 설명했습니다. 이번 거사를 위하여 벌써 군과 경찰도 동원 계획을 세운 터였습니다. 두 깡패 아다찌 겐조와 구리토모 시게아리카는 불량배 24명을 모아 행동대를 조직했습니다. 살해 특공대였습니다. 미우라 코로오는 약 한 달전에 조선의 공사로 부임한 자며 구리토모 시게아리카는 황성신문사 주필이었습니다. 일등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가 코로오 공사와 대원군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에서 기울어가는 일본의 영향력를 회복하려는 코로오와 민비를 꺾고 집권하려는 대원군이 손을 잡았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3시쯤 대원군의 집이 있던 시골, 오늘의 마포 공덕동에서 대원군과 일본인들이 출발했습니다. 행동대는 그날 새벽에 쉽게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본군이 궁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일본 정규군은 궁을 차단하여 지켰습니다. 살해조 깡패들이 왕의 침소가 있는 곳의 담을 넘었습니다. 곧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약간의 조선인 수비대는 사살됨으로써 곧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깡패들 일부는 고종의 침소로 들이닥쳐 고종을 위협했습니다. 민비와 이혼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민비 살해조는 왕비의 침소로 뛰어들었습니다. 깡패들은 도망치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두들겨 패면서 왕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르겠다고 말하며 애원하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옆방으로 가던 살해조는 방 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살해조 조장인 일본군 고문 오카모도 류노스케가 그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제끼면서 왕비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이를 부인하면서 몸을 홱 뿌리치며 비명을 지르며 낭하로 도망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세자가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는 모후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살해조가 민비를 덮쳤습니다. 여러 명이 쓰러진 작은 여인을 난자했습니다. 칼에 피가 튀었습니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살해조는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왕비를 이불에 둘둘 말아 멀지 않은 정원 마당으로 옮겨 던졌습니다. 그 위에 석유를 붓고 준비한 나무를 주위에 쌓았습니다. 타오르는 불에 계속 석유를 부어댔습니다. "모든 것이 다 타고, 그리고는 몇 조각의 뼈만 남았다." 기울어 가는 나라, 그 슬픈 나라의 '국모'는 이렇게 죽었습니다. 민비가 살해되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고종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밖에 기독교인 누구 없느냐!" 기독교는 그 때 그 가련한 왕이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위기의 때에 왕은 기독교가 필요했습니다. 고종의 외침은 1800년대의 마지막 15년 동안에 한국 사람이 기독교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당시에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 앞잡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 나라는 기독교를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벌써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침략국이 일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통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교회로 들어왔는데, 그 까닭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도 기독교를 '어렵고 위험한 때에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로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삼류 정치, 정권의 비호 아래 커왔고 아직도 정치와 밀착해 있는 경제, 경제 규모가 커지기는 했어도 아직 그렇게까지 흥청망청 쓸 때가 아닌데도 돈을 물쓰듯하는 부자들, 이것을 부추기는 소비지향적 문화와 향락주의, 그리고 이런 가운데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의 절망감, 여러 종교들이 나름대로 진리를 외치기는 하지만 그렇게 큰 영향은 없는 듯한 상황, 아니 진리를 말한다고 하는 종교들도 '성장 경쟁식 사고'를 더 부추기고 있는 상황.... 이런 전반적인 문제점은 결코 우리들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윤리 도덕적 타락과 가치관이 뒤집힌 상황을 교회가 과연 해결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니 교회는 도덕 윤리적으로 바르다고 볼 수 있는가? 경제의 부조리를 보면서, 그래도 예수 믿는 경제인들이 부정 부패에서 깨끗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그 지긋지긋한 도당 정치 현상을 보면서, 그래도 기독교인 정치가들이 바른 정치 철학과 믿는 사람다운 정치 도의를 지녔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과연 이 사회가 교회를 필요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교회는 타락과 부패와 혼돈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해왔습니다. 복음이 들어간 곳에는 또 언제나 윤리 도덕의 차원이 높아졌습니다. 바른 가치관과 건전한 문화와 문명의 꽃이 피었습니다. 시대가 어두워지고 도덕 가치가 땅에 떨어질 때, 사람들의 눈에 먼저 띄는 것은 교회가 지닌 높은 도덕 윤리적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그 사회를 구원할 희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전히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세우신 유일한 기관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자신이 타락할 때는 이런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주어진 사명을 망각하고 사명을 다하지 못했을 때 회개하고 갱신하므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밖에 누구 사명자 없느냐?"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마르탱은 루터의 얼굴이 그려진 네 장의 그림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수도원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그려진 루터의 얼굴은 깡마르긴 했으나 정결하고 엄숙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려진 루터의 얼굴에는 투지는 있으나 겸손함이 사라져 버렸다. 제일 나중에 그려진 그림의 루터는 살이 잔뜩 찐 얼굴에 속물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자신과 교회, 그리고 나라 민족의 참된 개혁을 위해 끝까지 성결 보존하시고, 개혁의지를 끝까지 불태우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수 있도록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하여 섬기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교회와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500여 명이 모인 어떤 모임에서 목사가 청중들에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의 느끼는 기독교에 대해서 말입니다. 모든 의심이나 반감을 허심 탄회하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맨 앞에 앉아 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그리스도들은 모순된 생활을 합니다. 한마디로 위선자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니까요." 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목사들은 그들의 받은 바 소명대로 행하지 않으며 사욕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뒷줄 문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는 말했습니다. "교회 안에 악한 자가 훨씬 많소." 여기저기서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모두 스물 여덟 가지의 반론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때 목사가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이 말씀하신 것 모두가 맞습니다. 교회 안에도 위선자가 있으며 목사 중에서는 사심을 가지고 목회하는 이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의 말을 들으며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정작 교회 안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앙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쓴 뿌리가 우후죽순처럼 자라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개혁의 원리와 원동력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독생자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나라 민족의 개혁을 기원하시는 여러분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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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성전 기둥이 되라

"(계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계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계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아름다운 궁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궁전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 번쯤 들어가 봤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 궁전은 선한 일을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궁전 문지기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데 그 문지기는 선한 일을 한 자에게 열쇠를 주었고, 그것을 받아야만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소녀가 이 궁전에 꼭 들어가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름다운 옷과 보석을 걸치고 궁전 앞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소녀에게 열쇠를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문지기는 말했습니다. "아가씨, 예쁜 옷을 입고 하루종일 문 앞을 서성거린다고 열쇠를 줄 수는 없습니다. 매일 한 번씩이라도 남을 돕는 이에게 이 열쇠를 줄 수 있답니다." 그 소녀는 당장 돌아가 남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늙은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는 선행을 할 수 있음을 기뻐하며 돈을 전부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궁전 문지기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열쇠는 얻지 못했습니다. 거절당한 소녀는 실망해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또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할머니로부터 짐을 모두 뻬앗다시피 하여 날라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문지기에게 다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열쇠의 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막 숲을 지날 때였습니다. 숲 속에서 가냘픈 신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른 달려가 보니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덫에 걸려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 자기 자신을 다 잊어버린 채 그 강한 덫의 스프링을 발과 손으로 힘을 다해 벌려서 토끼를 살려냈습니다. 소녀의 손과 발은 찢어지고 피가 흘렀습니다. 치마를 찢어 토끼의 상처를 싸매 주고 집에 데려와 먹이를 주었습니다. 이때 궁전 문지기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궁전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소녀는 놀라서 말했습니다. "저는 열쇠를 얻으려고 토끼를 살려준 것은 아니었어요." 문지기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이 궁전의 열쇠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남을 돕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룩하시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다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많은 교회 중에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시며 그 교회에 주시는 축복의 약속들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 나라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2. 빌라델비아는 사데 동남쪽 약40km지점에 위치한 고원 도시로써 '작은 아덴'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문화의 꽃을 피웠던 곳이며, 포도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1세기 당시의 최고 교통 요지이기도 했던 이 도시는 상공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키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주변 도시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문화와 언어(헬라어)의 통일을 유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소재 중 가장 역사가 짧은 도시로 버가모의 왕 아탈루스 2세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는 자기 동생 유메네스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이곳 이름을 필라델포스(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뜻)로 명명하였습니다. 한편 이 곳은 지진이 많기로 유명한데 그중 A.D. 17년에 이 지방을 중심하여 발생했던 지진은 인근 10여 개의 도시를 강타하여 전지역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그후 이곳의 통치자는 도시를 재건하고 도시의 이름을 '네오 가이사랴'(새 황제)라고 개칭하였습니다. 본문 12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는 말씀은 바로 당시에 지진이 나서 밖으로 뛰쳐 나갔던 일과 그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여 도시 이름을 개칭했던 일을 염두에 두고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암미아(Ammia)라는 여선지자가 이 교회를 관할하면서부터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A.D. 100-160년). 암미아는 초대 교회 내에서 선지자로 활약했던 빌립의 네 딸(행 21 : 7-14)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으며 그녀의 예언과 은사가 교회를 섬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은사는 모두가 교회에 덕이 되며 교회를 섬기는데 바르게 사용되어져야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지 주어진 은사가 무슨 영적 특권인양 은사를 가지고 다스리고 주장하고 지배하려고 하면 교회부흥은커녕 교회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장으로 유랑하던 유대인들이 개종하는 큰 역사가 일어났으며(9절)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도전도 모두 복음의 능력으로 극복되었습니다.

"(계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책망받는 일은 없고 위 본문에서 처럼 주님의 사랑과 칭찬만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며 칭찬하신 것은 무엇보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진리를 사수하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가 강하고 큰 힘을 가진 것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시험 중에 인내의 믿음을 가지고 영적 순결함을 보존한 것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주님의 표현이라면, 이름은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벗어나는 것은 변절이요 배교요 주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영적 간음입니다. 그리스도께 배필이 되는 순결한 신부인 교회는(고후 2:11)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이름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 안에서 예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높이는 것은 타락한 증거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교회, 적은 능력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은혜를 구하며 힘껏 충성하는 교회만이 끝내 구원의 열린 문에 들어설 수 있으며 주께 칭찬받고 격려와 축복의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실제로 주변 도시가 모두 회교화된 상황에서도 1392년까지 기독교 도시로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 평강 교회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 남아서 사명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운 시험과 시련 속에서도 진리를 사수하며, 적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고 인내의 말씀을 간직하여 주님께만 충성을 다 해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있는 어려움도 알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어려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은 그들에게 격려와 위로, 그리고 축복의 약속들을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시며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주신 격려와 축복의 약속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를 메시야가 아니라고 맹렬히 부인하고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핍박하며 거짓말을 하는 유대인들을 오히려 빌라델비아 교인들 발 앞에 절하게 만들어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참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사랑하는 교인들임을 알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계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교회 안에서 거짓말하는 자들을 분별하여 속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진실한 성도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게 만들 수 있도록 거룩하고 진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이름을 지키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과 시련 중에서도 진리 편에서 말씀대로 살게 되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장차 임하게 될 '여호와의 날', '대환난의 날'에 무사히 통과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장차 임할 대환난을 무사통과하기 위해서 인내를 가지고 진리를 사수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험 중에 참고 성결보존하며 진리를 사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면류관을 주셨습니다.

"(계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말씀 위해 굳게 서서 믿음을 보존하여 이미 확보한 면류관을 아무나 빼앗지 못하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인들 중 신앙의 승리를 거둘 자들에게 '내 하나님 성전기둥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기둥이란 표현은 지진이 많아 자꾸 무너져 내리던 빌라델비아의 지형 조건과 대조됩니다. 즉 신실한 성도는 어떤 고난과 풍파가 휘몰아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에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의 광휘를 떠받드는 기둥으로 남아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기둥에는 그 당시의 풍습대로 하나님께서 당신 이름을 새겨서 새긴 자(하나님)와 새김 받은 자(성도)의 일치를 표시하실 것이며, 그들 새 예루살렘 곧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공개적으로 인정하시며 또한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예수의 '새 이름'을 붙여주셔서 더 이상의 개명 작업이 없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당신을 위해 수고하며 눈물 흘리며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 최선 다한 자들에게 다양한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께 대한 절대적 충성뿐입니다(딤후 4 : 5-8). 모든 교회들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왕국의 기둥으로 완성될 때까지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인내를 요구하십니다.

3. 우리 교회는 책망받을 만한 것이 없습니까? 오늘 본문인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거룩하고 진실한 교회",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진리를 사수"하는 교회, "시험과 시련을 인내의 말씀을 붙들고 극복하는 교회"가 되어 주님이 기뻐하시고 칭찬과 사랑받은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성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교회라는 뜻과 새 예루살렘 곧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따라서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라는 축복은 교회의 기둥이 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기둥이 되는 최고의 영광을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있는 요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기둥이라는 표현 자체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을 나타냅니다. 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이라고 성전 기둥의 자격이 말씀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많은 중에서도 성전 기둥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의 말씀"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종말에 그리스도인들이 겪을 여러 시험을 말씀하신 후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고 하셨고, 예수 자신도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견디었습니다. 성전 기둥은 이처럼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신앙인입니다. 찬송시를 지은 초인간적인 문인이 있었습니다.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인데 뉴욕주 프트남 군 출신입니다. 그녀는 평생에 9천 편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미국 찬송가에도 가장 많이 채택되고, 우리 찬송가에도 그녀의 시가 22편 들어 있어 가장 많습니다. 그러나 이 여성은 맹인이었습니다. 어려서 의사의 실수로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불행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믿었으며 신체장애라는 괴로운 조건이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있는 거룩한 봉사의 계기가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그녀는 또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불운을 불평하지 않고 행운을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크로스비 여사의 찬송 중 446장을 감상해 보자. 이 시는 그녀가 점자 성경으로 시편 57편을 읽다가 감동을 받고 지은 찬송입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