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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 속을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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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랑스런 교회 모습

2.우리를 택하신 하나님

3.성서 속을 달리라

 

 

       1. 자랑스런 교회 모습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 어졌음이라)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 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1:1-12)

성직 매매, 교회 세습, 면죄부 판매 등 교회의 타락으로 암흑기 시대로 불리우는 중세에 스스로 정통(catholic)이라고 자처 했던 교회에 그 타락상을 항의(protest) 고발함으로(비텐베르크 성문에 붙힌 마틴 루터의 95개조 항의문)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던 점을 염두에 두고 부끄러운 한국 교회 치부를 드러냄으로 자랑스런 교회 모습을 찾고자 드리는 말씀입니다. 교인수 수만명에서 수십만명을 자랑하는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대부분 교회 세습이라는 중세 시대의 병폐를 답습하고 있어 세인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중 감리교회에서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모 교회에서 내년에 은퇴하는 담임목사 후임에 아들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대해 비판여론이 비등해지자 그 교회 어느 장로가 <기독교 타임즈>에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반론 내용은 그 교회 위상이 세계적이어서 세계적인 지도자들과 어깨를 맞대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걸맞는 학위(박사)를 소지하여야 하며, 아울러 영어 동시 통역이 가능해야 하며, 광대한 그 교회 조직을 이끌 수 있는 탁월한 행정력을 갖추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그 교회를 잘 알고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담임목사의 아들이 교회를 맡아야 교회가 안정되기 때문에 가장 적임자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그 교회의 주장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를 따라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는 실력과 능력있는 사람만이 살아 남을 수 있고, 무능하고 실력이 없는 사람은 자연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같은 것을 <IMF>와 <세계화>를 통해 뻐아프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무능하고 실력이 없어 도태된 80%의 사람들은 실력과 능력으로 경제를 장악한 20%의 사람들이 던져주는 빵부스러기를 받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앞서 교회 세습을 목전에 두고 있는 교회도 학벌이 시원치않아 겨우 신학교나 졸업하고 일상영어회화도 변변치 못하고 시골 농어촌 개척교회만 돌아다녀 특별한 교회행정경험도 전무한 목사, 실력과 능력과 학벌이 없는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과 섬김으로 지배되어져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 조직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십자가 희생 위에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아무리 교인들이 많아져 소위 교세가 확장된다해도 끝까지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실력있고 능력있는 사람만 불러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에서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시어서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만드시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치고 어디 변변한 사람 하나 있었는가?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 전서 1:26-29)

교회는 사람의 실력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담임목사가 아니라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안에서는 적어도 능한 자가 무능한 자를 사랑으로 섬기며, 문벌좋은 자가 문벌이 없는 자를 더욱 존경하며, 지혜로운 자가 미련한 자를 섬기며,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며, 세상의 존귀한 자가 천한 자를 섬기며,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교회 담임자도 학벌이나 문벌, 실력이나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모두가 다 서로 이처럼 사랑으로 섬기는 가운데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크다고 해서 어찌할 수 없이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원리를 따른다면 이미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자선, 복지 단체나 이익집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라에서는 법으로일지라도 공공단체나 기업체에 장애인들을 의무적으로 고용하도록 하고 있는데 시각장애인 교회, 청각장애인 교회, 등 장애인 교회를 각각 따로 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위 대형교회에서 이들 장애인 목회자들을 수용하여 장애인들을 사랑으로 섬길 수는 없는 것이겠습니까? 교회는 크든 작든 예수 십자가 위에 세워져 그 십자가의 정신인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교회 안팎에서 막강한 교세를 내세워 지배하려는 자세는 예수 십자가의 삶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배구조를 과감히 개혁하고 일체 섬김의 구조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교회는 "믿음이 더욱 자라는 교회", "서로 사랑함이 풍성한 교회", "환난 중에 인내하는 교회" 등입니다. 믿음이 더욱 자란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더 예수를 닮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교회는 서로를 섬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별 족장으로 정탐군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40일동안 정탐을 마치고 모세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27)...`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28)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민13:27-29)

이같은 보고에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두려워하며 절망감에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정탐에 동행했던 갈렙이 일어나 백성을 안돈시키며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며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정탐군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31)...`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1-33)"

한 마디로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며 그들 앞에 우리 자신은 <메뚜기>같은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볼 때 <메뚜기>같았을 것이라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존심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과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메뚜기>같이 보잘 것 없고 하찮아 보일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실 때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있는 자들, 강한 것들,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자" 했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비록 <메뚜기>같아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지극히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 여러분은 자신들을 <메뚜기>로 보지 말고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오히려 "세상의 강한 것들과 있는 것들과 지혜있다고 하는 것들을 우리의 <밥>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 그들은 우리 밥이라 !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 그들을 두려워 말라 !'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민 14:7-10)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메뚜기>같이 여기며 두려워하며 좌절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2)고 말씀하시므로 하나님 백성으로 자신을 <메뚜기>로 여기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악평하므로 하나님을 멸시하며 믿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탐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40년간 패역한 죄를 지고 광야에서 유리 방황하다가 소멸되어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반면 가나안 땅의 모든 족속들을 "<우리의 밥>으로 여기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믿음으로 백성을 격려했던 여호수와 갈렙만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는 그토록 하나님의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직접 체험했으면서도 믿음이 날로 자라기는커녕 "하나님의 주신 약속의 땅을 악평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신을 세상에 비교하여 <메뚜기>로 여기는 등 전혀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소멸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여러분이 겨자씨같이 비록 작고 하찮아 보여도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임을 잊지 마시고 어떠한 환경과 형편에서도 날로 믿음이 자라가는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성도과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믿음이 자라 예수를 닮아 더욱 더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자랑스런 교회는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 있는 교회"인데 "서로 사랑함의 풍성함"의 열매는 십자가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충만하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그 풍성한 사랑을 확증하시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희생과 사랑, 그리고 섬김의 표상입니다. 자신을 닮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구원하심이 십자가요, 사랑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섬기고자 하심이 십자가요, 인간을 섬김으로 구원하시고자 하심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선생으로 제자를 섬김과 의인으로서 죄인을 섬김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담임목사가 아무리 실력이 없고 보잘 것 없어도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교인들 중 아무리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그 하는 일이 천하여도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지혜있는 자들이 미련한 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이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한 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약하고 무능하고 병들고 미련한 자들을 도태시키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곳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대형 교회>는 담임목사로 장애인 목사나 실력과 학벌이 없는 목사가 청빙되어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하여 서로 하나되어 서로를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때 진정한 대형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아무리 교세가 강해져도 세력화되어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아무리 교인수가 많아지고 헌금액수가 불어나도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예수의 모습을 잃어서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실력과 능력과 학벌 등을 고루 갖춘 목사가 농어촌 시골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겠습니까? 알버트 슈바이쳐 박사는 신학박사 외에 서너가지의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어디 대형교회에서 목회하고자 하면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 오지로 달려가 병든 흑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대형 교회라서 십자가는 높이 세워져 가도 정작 십자가의 정신과 십자가의 삶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 위에 세워진 것이지 교회 위에 십자가가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과 섬김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교회가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인들이 무슨 철만 되면 큰 절간이나 높은 성당, 대형 교회 앞에 득실거리는 것은 종교가 세력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종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사랑으로 백성을 섬기고 있다면 그러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교회가 되어 정치인들이 어느 때고 가장 작은 교회에 찾아와 예수의 겸손을 배우고 나라 백성을 위한 희생과 사랑의 십자가를 하나씩 지고 나가는 그러한 교회가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랑스런 교회의 모습은 "핍박과 환난중에 인내하는 교회"입니다. 여기 <환난>이라함은 시련을 받아 고통당하는 것을 뜻하고 <핍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하며 그러한 연단된 믿음을 정금같이 여기십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당하는 핍박과 환난의 고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같은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소망 중에 인내하였던 것입니다. 주어지는 고난을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을 깨닫고 그것들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이겨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애매한 고난을 당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만이 하나님의 상급과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 동아일보 기사에서 한국인 두 사람이 필리핀을 사업차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서는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는데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여섯 명의 필리핀청년들에게 몰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필리핀 공항경찰에 신고를 해서 여섯 명이 체포되어 경찰에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6명은 한결 같이 우리가 한국에서 이제 일하고 막 돌아오는 길인데 그 동안 한국에서 당했던 수모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진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진술을 듣다 못한 경찰이 화가 나서 한국인 사업가 두 사람에게 재차 폭행을 가했다는 것입니다. 필리핀 주재 한국대사관에 신고를 하고 필리핀 정부당국에 항의도 했지만 일도 처리하지 못한 채 강제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 동아일보의 큰 기사입니다. 그 기사 맨 마지막에는 오로지 단하나 한국인 이유 때문이라고 적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네팔을 여행하던 대학교수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몰매를 맞았다거나,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는 '한국놈 개새끼'라는 제목의 책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법무부 공식통계에 따르면 외국인 노동자수는 36만5천명입니다. 이들 대부분이 밤낮없이 뼈빠지게 죽도록 일을 해주었는데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으며,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다 잘려 나간 손가락만 수십가마니는 될 것이라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의 집에서 일주일에 평균 3,4명씩 장례를 치루는데 대부분 임금체불과 상해로 인한 비관으로 자살하는 경우라는 것입니다.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라지고 팔뚝이 잘라지는 고통은 생활의 불편에서 끝나지 않고 평생 범죄자나 전과자로 오인 받고 평생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슬람권 국가인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지금도 코란 율법에 따라서 범죄형량에 따라 손가락이나 팔뚝을 잘라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받게 하는 자는 환난으로 갚으시는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의 눈물을 씻어줄지언정 이웃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자의 환난과 고난을 함께 나누어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서 받는 고통은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의 상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복음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랑과 영광이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천문학자 아이엔 쉘톤은 생물계만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계도 때가 되면 죽는다는 것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가 발견했었던 '수퍼노바'라는 별이 죽을 때 태양의 1억배 정도의 빛을 한꺼번에 발산하면서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신비스러운 것은 별들이 빛과 열을 발산하면서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 해체 또는 자기 폭발 등의 고통스런 죽음으로 또 다른 새로운 별이 창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별이 죽는 그 마지막 순간에 분출하는 자기 폭발과 자기 해체의 죽음은 새로운 에너지 입자를 거대하게 생산해 내는데 바로 그 입자들이 새로운 별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온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었고 그 빛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곧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40년이라는 길고 긴 광야의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고 연단하시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8.15광복이 아무런 고난없이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국 땅 해란강, 일송정, 청산리, 상해, 하와이 등지에서 피맺힌 눈물로 독립과 해방을 노래하며 피를 토했던 안중근, 윤봉길, 이준 등 이름도 빛도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순국 선열들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이 땅 구석 구석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피를 뿌린 수많은 순교자들의 그 고난과 죽음, 그리고 나라 민족의 고난을 대신 걸머지고 정신대로 끌려갔었던 우리의 선조 할머니들의 한 서린 울부짖음과 탄광촌으로 끌려가 돌아올 수 없는 해골이 되었던 수많은 젊은 가장(家長)들이 불렀던 고난의 '신고산타령' 등 이 모든 것들이 나라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거쳐야 했던 고난의 발자취였던 것입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과 생명의 영광을 바라보셨던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3-24)

그러므로 고난과 희생, 죽음을 새로운 창조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인내하는 교회와 성도야말로 장차 하나님의 자랑과 영광이 될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8:18) 하나님의 자녀로서 날로 믿음이 자라가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며, 핍박과 환난 중에도 인내하므로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2000년 8월 13일. 이동희 목사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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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우리를 택하신 하나님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 후서 2:1-17)

사도 바울 당시 대부분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예수께서 당장이라도 재림하실 것으로 생각하여 직장과 가정을 팽개치고 무위도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주된 원인은 예수믿고 진리대로 살기에 너무나 힘들 정도로 혹독한 박해와 핍박이 끊이질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한때 살기가 너무나 힘들고 정직하고 진실되게 살다가는 평생가도 집 한칸 마련할 수 없을만큼 부정부패가 심각하고 날이 갈수록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심각해지니까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애라, 모르겠다, 공산당이나 밀고 내려와 전쟁이라도 터져야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이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불법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모든 능력과 표적, 그리고 거짓 기적과 모든 속임수를 동원해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사람들은 진리와 정의에 대한 사랑이 모두 다 사라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불법하는 사람들>을 따라 사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모두가 다 진실, 진리, 정의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불법하는 사람들>을 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스스로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이라 하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불법하는 사람의 배후에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기적처럼 위장하려고 여러 가지 능력과 표적을 드러내고 거짓 기적을 행하는 등 모든 속임수를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목적은 그렇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 사랑과 성결에 무관심하게 만들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능력이 있든 없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숭배받을 이유도 숭배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다가 죽은 후에 후세 사람들에게 신앙과 숭배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천주교에서 <성인>, 혹은 <성자>라고 부릅니다. 상당수가 로마의 엄청난 박해에도 불굴의 신앙을 지키려다 순교한 사람들로 후세 사람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기 때문에 <성자>라는 칭호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들 <성인들>은 대개 숭배되어 왔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성인들의 유골숭배입니다. 성인들의 유골이 있는 곳을 성지로 여겨 순례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성인들의 생존시 보여준 영적인 힘이 자신에게 나타나서 자신을 치유해주거나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인들이 살았을 때 보여준 영적인 힘이 사후에도 여러 기적들을 나타내리라고 믿기 때문에 성인숭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그와같은 성인들은 죽은 후에 부활하여 하늘나라에서 지상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구체적인 애원을 들어주는 자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인숭배는 천주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에서 있습니다. 천주교의 성인에 해당하는 존재를 이슬람교에서는 <왈리,wali>라고 부릅니다. <왈리>란 "알라의 친구" 또는 "알라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는 그가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로 알라신의 친구나 가장 가까운 측근이기 때문에 그만큼 영험(靈驗)이 있다고 믿어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주교에는 <성인> 또는 <성자>가, 이슬람교에서는 <왈리> 등이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신령한 능력과 영적 경험이 풍부했던 바울도, 장로교의 아버지라 일컬어지고 있는 칼빈이나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도, 아니 종교개혁을 단행한 마틴 루터도 세계적인 부흥사인 빌리 그래함도 <성인>으로 숭배받을 존재가 아니라 예수믿는 성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들이 대단한 능력과 영적인 힘을 지녔으며 신앙의 아름다운 모범을 보였을지라도 다른 종교에서처럼 <성자>라는 명칭을 부여하여 특별히 숭배하는 일은 없습니다. 얼마 전 소천하신 한경직 목사를 두고 과연 그는 <성자>였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한 목사가 살아생전에 목사가 살아야 할 참된 본을 보여주었다는 것이지 그를 <성자>로 추앙하시는 않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흔히 말하는 목회에 대성공해서 몇 백억짜리 교회당 건물을 짓고, 교인수가 수만에서 수십만명에 이른다고 해서 미국의 어느 알 수 없는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올지언정 그 교회 담임목사를 <성인>이나 <성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교계에 여러 교회성장세미나에서 대부분 강사들의 공통적인 말이 교회는 반드시 교회담임자의 영적 성숙도만큼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영적 성숙도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에 비례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은사에 비례하여 사람의 인격이 성숙되어지지는 않습니다. 실제 목사의 영적 성숙도만큼 그 사람의 인격이 성숙되어지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인격의 성숙은 성령의 열매이지 은사의 나타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은 그의 영적인 은사나 능력으로 자신이 높이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깨끗하시게 하는 능력으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그 인격과 그 삶이 깨끗하라는 것입니다. 치유의 능력이나 예언의 능력이나, 환상이나 꿈을 통해 신을 경험했다거나 해서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목사라고 해서 그들을 <성인>이나 <성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 대부분은 부정적 이미지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종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종교가 아니며 대부분 비윤리적인 행태의 <사이비 종교>,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악한 종교 집단인 <사교,邪敎>, 기독교 신학의 정통을 벗어나 분파를 이룬 <이단>, 종교와 비슷하지만 종교가 아닌 <유사 종교> 등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의 교주는 대단한 영적인 힘을 빙자하거나 빈발하는 종말의 시기에 대한 예언 등, 거짓 속임수로 상당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들 집단에서 신처럼 숭배되기까지 하며 대부분 불법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들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 빗나갔다해서 사회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위협적인(?) 종말론을 빙자해서 사기, 폭행, 살인 , 성폭행, 재정비리, 집단자살 같은 사회적 해악을 끼치며 사회전반에 물의를 빗기 때문에 범죄로 다루게 됩니다. 세계사에 세상 종말의 날짜를 예언하고 허탕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사실 붓다(부처)는 처음엔 여성을 제자로 받지 않다가 나중에야 받아들였는데, 그러면서도 "여자가 들어왔으니 우리 불교는 오백 년을 못 갈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그 불교는 지금까지 잘도 버텨오고 있습니다. 붓다의 예언이 빗나갔다고 해서 그를 사기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빗나간 예언을 빙자하여 사기, 재산갈취 등 범죄행위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 등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진리)과 정의, 사랑과 성결에 대한 무관심하게 만들고 힘들어도 진리편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 진리와 정의를 믿지 못하게 되어 삶의 가치를 상실하게 만들어 결국 파멸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마인드 바이러스>라는 책을 쓴 리처드 브로디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마인드 바이러스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침투해 사람의 의지와 생각의 방향을 조종하거나 심지어 삶을 파괴하기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결혼을 앞둔 A라는 총각이 친구와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혼은 한 번 하면 무르기 힘들어. 살아 보고 결혼하는 게 제일 좋은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스갯소리처럼 던진 친구의 말을 그 역시 농담으로 맞장구치며 받아 넘겼습니다. 하지만 그 날 저녁 여자 친구를 만난 A총각은 "결혼은 일단 하고 나면 무르기 힘드니까 우리 살아 보고 결혼하는 것이 어떨까?"라며 의견을 물었습니다. A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친구로부터 '살아 보고 결혼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마인드 바이러스에 전염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인드 바이러스는 미니 스커트나 유행어처럼 비교적 해롭지 않은 것을 비롯해 미혼모, 10대 갱 조직, 기독교 이단 집단과 같이 인간의 삶을 심하게 탈선시키는 것까지 다양합니다. 78년 9백명이 넘는 신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민사원 사건, 93년 미국 텍사스에서 경찰과 대치하다가 불을 질러 86명이 집단 자살한 다윗파 집단 자살 사건도 마인드 바이러스가 부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깝게는 지하철 테러를 벌인 일본의 옴 진리교, 우리나라의 오대양 사건 등도 마인드 바이러스가 초래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나 시한부 종말론 등은 인간의 영혼을 파멸케 하는 치명적인 영적 바이러스같은 것입니다. 한달 전 미국 뉴욕과 보스톤에 모기들로부터 감염되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나일 바이러스(West Nile Virus)가 발견되었는데 이 바이러스는 인간의 뇌를 부풀어 오르게 하며 일단 감염되면 대부분 사망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역당국은 별 방법이 없고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되도록 긴팔 옷을 입고 다니도록 당부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뇌를 부풀게 하여 결국 죽게 만드는 나일 바이러스처럼 "모든 능력과 표적, 거짓 기적과 모든 속임수"를 동원한 시한부 종말론 등은 사람들의 뇌를 부풀게 하여 파멸케 하는 영적(靈的) 나일 바이러스같은 것입니다. 첫째는 나일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는 모기에 물리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시한부종말론 등의 영적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만 합니다. 다음으로는 그러한 바이러스가 창궐해도 그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해야만 합니다. 진리만이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변치않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능력이나 표적이나 기적, 종말에 대한 예언 등이 우리 인생을 강하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영적 바이러스, 마인드 바이러스에도 강한 삶이 되고자 하십니까? 진리와 길과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진리와 정의편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보여주신 영원히 변치않는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5-39)

진리와 정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면 영적 바이러스, 해로운 마인드 바이러스에 감염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에 사랑이 식어지면 영적 바이러스, 해로운 마인드 바이러스에 감염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에 사랑이 식어질지라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서 강건하시기를 바랍니다. 직장과 사회에 진리와 정의가 식어갈지라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진리와 정의편에 서서 여러분이 몸 담고 사는 사회와 직장을 건강하게 지켜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면, 앞으로 통일에 대비에서 상당히 염려되는 부분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남한 가족을 만나게된 북측 가족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모두가 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은공으로 이같은 상봉이 이루어졌으며 그같은 은공으로 북한에서 고생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에 간 남측 이산가족들에게 북한 이산가족들이 빠트리지않고 하는 말도 똑같았습니다. 그간 북한에서 부모없이 형제와 떨어져 사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는 안부에 대해 '김정일 국방 위원장의 은공으로 전혀 고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없이 애들만 데리고 북한에서 살아온 아내를 50년만에 만나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는 남편의 위로 말에도 자식들 모두를 김일성 장군님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께 다 키워주셔서 자신은 그저 낳기만 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사하시는 선물이니 일어나 받고 김위원장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라며 억지를 부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북측 가족들의 말에 남측 가족들은 그저 긍정만해주는 모습이었습니다. 기실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북한의 지금까지의 내막을 모두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같은 장면들을 보고 북한 사람들의 마음(마인드)에 아주 심각한 김일성, 김정일 바이러스가 감염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15해방 직후 북한에는 2천4백개의 교회와 12만명의 기독교신자 및 260명의 성직자가 있었으며, 평양에는 40만명의 인구중 기독교신자가 2만명이었고 교회도 70여개에 달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워졌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공산정권 수립이후 기독교 신자와 가족들을 반국가적 범죄자로 몰아 처형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는 등 말살조치를 취해 현재 소수의 지하교회 모임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는 북한 공산당은 그들의 정치용어사전에서 기독교를 "피착취 근로대중의 해방투쟁을 말살하고 착취 제도를 영구화하기 위한 도구"로 규정, 죄악시하고 있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공산당 바이러스에 북한의 기독교 신자들이 몰살을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앞세우고 있는 조선 기독교도 연맹이나 잘 알려진 봉수교회, 칠골교회 등은 모두가 다 위장종교단체에 불과한 것이며 그간 대남 비방선전용으로 이용해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치명적인 영적 바이러스나 삶에 파멸을 가져오는 마인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도록 아무리 여러분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예수 믿고 더욱 더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시고 성령의 깨끗하게 하시는 능력으로 그 인격과 삶에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택하시어 하나님의 자녀삼으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보내주시는 성령의 깨끗하게 하시는 역사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인격과 그 삶이 깨끗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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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성서 속을 달리라

(1)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4) 너희에게 대하여는 우리의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6) 형제들아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 형제들아 !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데살로니가 후서 3:1-15)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 <달리기, 마라톤>로 비유하여 마라톤에서 완주한 자로 고백하며 그에 대한 의의 면류관을 확신하고 살았습니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의 삶도 역시 <달리기, 마라톤>로 비유하면서 마라톤에서 완주하여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모든 일에 절제하며 법대로 해야만 된다는 하나님 말씀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賞)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節制)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4-27)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 2:5)

오늘 본문에서도 영광스러운 여러분의 삶이 되기 위해 성서 속을 달리기하는 것처럼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믿음)은 성서 속을 달리는 생활입니다. 성서 속을 달리는 삶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마라톤의 기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원전 B.C. 490 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사신을 보내 페르시아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오히려 사신을 우물 속에 매장시켜버렸습니다. 이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는 전함 6백척을 비롯하여 보병 10만명 및 기갑 1만명, 실로 어마어마한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여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정벌토록 했습니다. 페르시아 원정군은 그리스 본토 아티카주의 동쪽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위급해진 아테네는 다급히 스파르타에 원군 요청을 하기로 하고 당시 올림피아 경기의 달리기 선수였던 '필리피데스'를 사자로 스파르타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출병을 거절했습니다. 국가 존망의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은 아테네는 지략이 뛰어난 용장 '밀티아데스' 장군 지휘하에 불과 1만명의 기갑병으로 페르시아 원정군을 요격케 했습니다. 아테네는 동북방 42Km지점에서 양군을 대치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역사적인 마라톤 전쟁이 시작된 마라톤 평원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병력이 10배나 우세한 페르시아군은 '밀티아데스' 장군의 교묘한 전술에 협곡으로 유인돼 괴멸당하고 말았습니다. 뜻밖의 이 기쁜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스파르타에 원병 요청 사신으로 갔던 '필리피데스'가 다시 사신으로 임명돼 마라톤 평원에서 약 42Km의 거리를 단숨에 달려가 수만 아테네 시민에 둘러싸인 가운데 "우리 아테네군이 승리했다." 이 한마디를 전하고 숨을 거둡니다. 이와 같은 마라톤전쟁의 고사를 스포츠로 승화시켜 장거리 마라톤이 창설되어 제 1회 아테네 올림픽에서부터 지금까지 약 90년을 거치는 동안 전세계로 보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마라톤을 금기로 여기고 있는 국가가 있습니다. 그 국가가 바로 이란입니다. 이란은 마라톤의 근원이 되는 마라톤 전쟁에서 패배했던 페르시아의 후예이기 때문에 당연히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974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을 때도 마라톤 종목은 거두절미하고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었습니다.>

마라톤을 올림픽 정신의 꽃이라고 하는 것은 '필리피데스'가 42km를 달려 승전보를 알리고 숨을 거뒀기 때문에 그 42km 거리를 인간의 한계로 보고 마라톤 경기를 통해 그 인간의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큰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 속에는 인간의 한계상황인 42km 마라톤 거리를 완주하여 승전보를 전한 선수처럼 신앙생활의 달려갈 길을 완주한 감동적인 인물들의 신앙기록들이 하다합니다.

먼저, 성서 속을 달리는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 2:5)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2-27)

신앙생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그래서 여러 가지 성령의 권능을 행하거나 남들이 쉽게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해서 자신의 신앙이 모든 사람들 중에 최고봉인 것처럼 생각하여 제멋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성경보다 자신이 받은 계시를 더 권위있게 받아들이게 하거나, 세상 종말이나 예수의 재림에 대한 정확한 날짜를 계시받았다 해서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불법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성경에서 손떼고 사는 사람들, 무슨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 해서, 계시를 받았다 해서, 하나님 나라에 지름길로 가는 것처럼 말하는 자는 모두가 다 사기꾼들이며 그들 불법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그냥 곧장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직행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는 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를 통해 주어진 십계명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광야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지켜야 할 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 성서 속을 달리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라톤 경기에는 공식 코스를 반드시 지켜 달려야 하며, 또한 반드시 자력으로 완주해야합니다. 힘들다고 해서 코스를 벗어나 지름길을 택하는 등의 행위나, 레이스 도중 타인의 도움을 받게 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실격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힘든 역경과 곤경이 뒤따른다해도 하나님 말씀을 벗어나 쉽게 살고자 하면 실격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마라톤이 반드시 자력으로 완주해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남의 계시나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와 능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으로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가지며, 아무리 쉬운 길, 지름길이 여러분을 유혹한다해도 끝까지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완주하여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성서 속을 달리는 신앙생활을 완주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으로 자신의 페이스를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을 깨닫고 믿음의 분수를 지키며 성서 속을 달려야 완주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 42.195km를 완주하기 위해 마라토너들은 "다른 사람을 쫓아 달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자신의 페이스를 즐기며 달린다고 합니다. 저마다 신체적 특성과 선천적인 소질이 다른 것을 알아 자신에게 맞는 스피드를 즐기며 달려야지 컨디션 좋다고 속도를 올리게 되면 결국 후반에 탈진하여 완주에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주를 목표삼고 달려야지 시간기록을 목표삼아 달려서는 실패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성서 속을 달리는 신앙생활도 완주하는데 목표를 세워야지 믿음과 은사,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내일 당장 예수님이 오시는 것처럼 규모없이 행동하여 하루아침에 신앙생활이 끝장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마라톤에서 자신의 페이스를 즐기며 달려야 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과 분수를 지키며 즐거움으로 성서 속을 달려야 합니다.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3-8)

간혹 보면, 예언의 능력이 있다해서 목사하는 사람, 가르치기를 잘 한다해서 목사하는 사람, 찬양과 율동을 잘 한다해서 목사하는 사람 등등 저마다 이래저래 다 목사하겠다는 사람, 그래서 목사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남이 목사한다고 다 따라 목사되려 하면, 이런 저런 은사 좀 받았다해서 다 목사하면 누가 장로하고 권사하고 집사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이목구비 중에 입이 좋은 것만을 먹고 마신다고 해서 눈이나 코나 귀가 저마다 다 자신도 입이 되겠다고 해서 입이 되어 귀가 붙어있을 자리에 또 다른 입이 붙어 있고, 코가 있을 자리에도 또 다른 입이 붙어 있고, 눈이 붙어야 할 자리에 또 다른 입이 붙어 있어서 얼굴에 온통 입으로 가득하면 보는 것은 무엇으로 보며 듣는 것은 무엇으로 들으며 숨쉬는 것은 무엇으로 숨쉬겠습니까? 자신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을 지혜롭게 생각하시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각각 다른 것임을 깨달아 믿음의 분수를 지키며 신앙생활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지혜롭게 생각하고 믿음의 분수를 지키며 성서 속을 달리되 즐거운 마음으로 완주하여 넉넉히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마라톤 동호회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가족과 함께 달리면 그 즐거움은 배가(倍加)된다는 것입니다. 건강유지나 증진을 위해서 달리기를 할 경우 무엇보다 오래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온 가족을 설득하여 함께 달리는 것이 즐겁게 달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가족이 모여 흠뻑 땀을 흘리고 서로 대화를 나누면 가정의 화목도 더욱 돈독히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달리기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자기 혼자하면 쉽게 지치고 힘들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에서 혼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왕이면 온 가족들이 함께 신앙생활하게 되면 보다 더 오래 지속적으로 그리고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 가족들이 모두 다 함께 성서 속을 달리는 신앙생활할 수 있도록 가정 복음화를 위한 여러분의 기도에 열매를 맺으시기 기원합니다. 셋째는 확실한 목표를 세우고 성서 속을 달려야 합니다. 무언가를 시작할때 어떤 목표를 확고하게 설정해놓으면 비교적 오래 계속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달리기도 그냥 막연하게 달리는 것보다 목표를 확실하게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표를 너무 높게 잡지 말고 반드시 달성할 수 있도록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표를 설정할 때 무리없이 여유있게 달릴 수 있는 거리를 설정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래야 성취감도 생기고 또 계속 달리고싶은 의욕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일 관내를 2km 달리겠다고 정하면 확실하게 실행해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 믿겠다 하면서 신앙생활에 아무런 목표를 세우지 않고 그냥 주일날 형편이 되면 생각없이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10년, 20년이 가도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왕 성서 속을 달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매년 성경을 1독 하겠다든가, 나도 언젠가는 성가대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찬송가를 열심히 배우겠다든가, 적어도 1년에 새벽기도회는 몇번 참석하겠다든가, 1년에 몇 사람을 전도해서 예수 앞에 인도하겠다든가 하는 목표를 세워야 신앙생활에 성취감과 신앙생활에 의욕이 높아져 보다 더 믿음이 성숙해지며 지속적으로 달려 완주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단조로운 코스보다 다양한 코스를 즐기며 달려야 지속적으로 달릴 수 있으며 영육간에 건강이 배가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하면 어느 사이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달리기에서도 같은 코스만을 달리다보면 단조로움을 느끼게 되고 곧 물리게 됩니다. 남들은 달리기도 편한 직선 코스도 많은데 어찌하여 나는 이렇게 직선코스는 별로 없고, 신호도 많고 육교도 몇 개씩이 있고, 오르막도 그렇게나 많은지 하면서 신세타령하지 말고, 생각을 바꿔 코스가 다양하여 볼 것도 많고 다양한 것을 경험할 수 있어 얼마나 좋으냐며 다양한 난코스를 즐기며 달리는 것이 몸과 마음, 영혼의 건강에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서 속을 달리는 신앙생활에 코스를 정하는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주어진 변화무쌍한 삶의 난코스를 오히려 감사하며 즐기며 달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평생 떠나지 않았던 질병과 말할 수 없는 핍박과 박해 등 여러 가지 환난과 시련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그것들을 감사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에 난 코스로 인해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숱한 환난과 역경은 장차 누릴 크나큰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 모든 환난을 잠시받는 경한 것으로 여겨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하며 신앙생활의 경주를 다했던 것입니다. 출애굽하여 곧장 지름길로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아니하고 돌아 돌아간다며 원망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도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4)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 하노라'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 21:4-6)

우리나라 마라톤 희망주라 불리우는 이봉주 선수는 마라톤 선수로는 너무나 환경이나 신체적 조건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 영양상태가 좋지않아 운동하기에는 부적합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왼발은 255㎜, 오른발은 250㎜인 짝발이서 달리다 보면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왼쪽 엄지발가락이 피투성이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짝발 말고도 짝눈, 강훈련으로 인한 갖가지 부상으로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이봉주 선수는 '달리는 종합병원'으로 불리웁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포기하고 주저앉을 상황에서도 그는 불굴의 의지로 일어서 한국인의 끈기와 투혼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93년 전국체전 때는 발톱이 빠져 러닝화를 피로 흥건히 물들이면서 끝까지 완주한 것은 그의 정신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봉주선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힘든 운동을 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마라톤은 힘든 운동이지만 힘든 만큼 보람도 큽니다. 1등이나 꼴찌나 풀코스를 달리고 나면 곧 죽을 것 같다가도 다시 뛰라면 더 잘 달릴 것 같은 생각이 드는게 마라톤이죠. 앞으로도 나는 끝없이 도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 마라톤에서의 승리는 빛난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은 고비를 넘기고 결승점에 도달할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지켜보는 사람들에게까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점에서 큰 감동을 전해줍니다. 마라톤은 올림픽 경기 마지막 피날레로 치루어집니다. 물론 1등으로 들어오는 선수에게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지만 관중들은 완주하는 마지막 주자를 끝까지 기다려 그에게 더욱 더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올림픽 정신의 꽃으로 꼽히기 때문입니다.

성서 속을 달리는 신앙생활에 주변 환경과 신체적 조건이 아주 악조건들밖에 없습니까? 이봉주 선수처럼 "달리는 종합병원"이라할 만큼 병도 많고 몸도 약하며 나이도 많습니까? 마라톤에는 다른 종목과 달리 예선전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달릴 수 있습니다. 성서 속을 달리는데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건강유무를 따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환경이 성서 속을 달리는 데 악조건이 많을수록 그만큼 힘은 들겠지만, 발톱이 빠지고 피가 흥건하게 흐르겠지만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완주하게 되면 그만큼 감동스런 영광과 면류관이 여러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끝까지 지켜 성서 속을 달려 완주하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어 영원하고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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