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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을 힘입으라

2. 사랑의 영을 받으라

3. 성령의 강림

4.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5. 생수의 강

6. 성령의 역사

7. 진리의 성령

8. 부활과 성령

9. 오직 성령-변화의 주체

10.통일주체-성령

11.성령받은 교회의 모습

12.성령을 받았느냐?

13.영의 새로운 것

14.성령과 삶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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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을 힘입으라

(22)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태복음 12:22-37)

이규태의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 한국 사람들은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은 완전히 못 죽고 저승과 이승의 중간계에서 귀신으로 방황하여 이승에 원한 풀이를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 같은 생각들이 우리 나라에 많은 귀신들을 탄생시켜 왔습니다. 원한이 클수록 그 귀신 '파워'는 크고 '파워'가 클수록 해(害)를 많이 끼쳤으며 신술(神術)도 잘 부릴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승) 허공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귀신들이 방황하고 있으며 그 귀신 가운데 어떤 한 귀신이 인체에 들어오면 어떤 병이 되고 그 귀신이 나가면 병이 사라지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이 병귀(病鬼)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며 병이 들면 이 병귀를 나가도록 작동을 부려야 합니다. 그 제귀퇴귀(除鬼退鬼)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푸닥거리입니다. 다시 말해 무당이 음식을 차려놓고 귀신들을 잘 먹여서 내보내는 굿거리입니다. 병귀를 추방하는 방법에는 푸닥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직접 구타해서 내쫓는 방법도 있습니다. 곧 병귀가 환자의 몸속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서 그 병귀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환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행위입니다. 자기 아내가 정신병이 들었다 해서 사람들을 시켜 2주 동안 한숨도 못 자게끔 복숭아 가지로 계속 환자를 구타함으로써 전신에 상해를 입혀 결국 죽게 만든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있어 왔습니다. 환자의 몸 속에 들어간 병귀를 이 같은 폭력으로 고통을 줌으로써 내쫓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구타의 도구로 복숭아 나뭇가지를 이용한 것은 복숭아나무를 귀신이 제일 무서워한다는 속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축귀(逐鬼)에는 이러한 구타형말고도 병귀를 포박하여 감금하므로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봉박형(封縛型), 병귀가 든 인체에 직접 자상(刺傷)하는 자상형, 귀신을 놀라게 하거나 협박을 해서 병귀를 내쫓는 경압(輕壓)형, 귀신들이 붉은 빛을 무서워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20년 전 전국에 유행했던 여자의 붉은 속바지를 입는 화기형(火氣型) 등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한을 품고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쫓겨난 악령들이 귀신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탄을 하늘에서 세상으로 쫓겨난 신(神)으로 말하며, 그 사탄이 지금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사탄, 악한 영이 역사하는 곳입니다. 사람은 죽게 되면 천당에 가든지 지옥에 가든지 둘 중에 하나이지 혼령이나 귀신이 되어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일부 이 귀신들이 사람 몸에 들어가 병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예수께 고쳐 주셨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며 예수를 메시야처럼 여겼습니다. 그러자 심사가 뒤틀린 바리새인들이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며 예수의 메시야됨을 부정하고, 예수를 '파워'가 약한 귀신들을 억누를 수 있는 소위 '파워'가 센 무당정도로 비아냥거렸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귀신이 귀신을 쫓아내면 어찌 귀신 동네가 제대로 서겠느냐?'면서 그들의 말을 일축하고,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병을 고치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5-28)는 예수의 이 말씀은 귀신을 쫓아내는 힘이 성령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같은 성령의 역사가 임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천국 도래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지금 여기서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The Exorcism of demons)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임했으며 그들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탄이 세상을 지배하여 죄와 사망 가운데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의 힘, 성령의 권능이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여 년 전에 중국에서 어떤 여자가 귀신을 부리어 당시 사람들을 미혹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문을 외워 귀신을 불러서 갖은 재간을 다 부리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를 진실히 믿는 어떤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구경삼아 그 집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귀신 부리는 여자가 귀신을 아무리 불러도 웬일인지 아무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가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는데 한 아이가 와서 예수 믿는 부인에게 집에 손님이 왔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집으로 돌아가자 당장에 귀신이 나와서 그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귀신 부리는 여자가 "조금 전에는 왜 나오지를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귀신은 "오기는 벌써 왔는데 예수 믿는 여자와 같이 있는 성령이 무서워서 못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귀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무서워하는 것은 오직 성령밖에는 없습니다. 귀신에 붙잡힌 사람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29절)라고 말씀하셨는데 "강한 자"는 사탄을, "그 강한 자의 집"은 이 세상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강한 자의 세간"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뜻합니다. 문제는 누가 사탄의 영역에 들어가 먼저 "그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 세간"을 늑탈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지금 결박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지금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자", 즉 사탄을 결박한다는 말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혈과 육의 피조물이 아닙니다. 영적 세계의 존재입니다. 어떤 종류의 쇠사슬로도 천사나 영물(靈物)들을 결박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사탄의 결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므로 사탄의 세력이 꺾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 살지 않고 사탄의 결박에서 벗어나 의와 생명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는 세상에서 이제 사탄은 패배당한 원수에 불과합니다. 주목해야 할 성경 구절을 보겠습니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누가 복음 10:9-14)

여기 복음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도시들에 대해 왜 이처럼 두려운 심판을 선포하셨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에게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하고 있다는 증거가 곧 병든 자의 고침, 귀신들린 자의 고침 등이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귀신들이 쫓겨나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 임하였다는 징조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패배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는 것이었고, 이는 두려운 심판을 초래할 뿐이었습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누가 복음 10:17,18) 이 말씀은 사탄이 그 권세의 절정에서 떨어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 말씀도 바로 사탄의 패배, 사탄의 결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성령의 권능이 임하므로 사탄이 여전히 이 세상 신(神)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지만 그의 세력은 이미 꺾여졌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힘입어 하나님의 통치를 맛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악한 시대'는 계속되고 있지만 '오는 세상'의 권능인 성령의 힘이 지금 사람들 가운데 역사(役事)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 세상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어 보이나 사탄의 왕국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부분적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라는 성령의 권고를 소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적으로 매우 담대했던 오스틴 딥 목사에게 임종이 다가왔습니다. 그의 임종의 병상에 마귀가 찾아와서 "오스틴 목사, 그대는 평생 동안 나의 원수였소. 이제 그대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소. 나는 이제 그대를 꼼짝 못하게 하고 그대에게 복수를 퍼부을 작정이요."라고 잔인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틴 목사는 여전히 담대하게 "사탄아, 네가 나에게 복수를 퍼붓기 전에 우리 주님께서 나의 주위에 성령의 울타리를 두르고 계시는 것이 보이질 않느냐?" 이 담대한 말에 사탄은 마지막 기회마저 놓쳤다고 한탄하면서 물러가고 오스틴 목사는 평안히 임종을 맞아 하늘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은 평생토록 마귀의 세력과 싸우며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기회만 있으면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공중으로 이륙하지 못하도록 온갖 힘을 기울여 세상으로 잡아당깁니다. 마치 비행기가 하늘을 날기 위하여 이륙할 때가 가장 어려운 모험이며 지구의 인력을 많이 받듯이 사탄은 우리의 영혼이 하늘을 향해 이륙하는 순간에 가장 많은 힘을 경주합니다. 그러나 이륙하여 이 땅과 멀면 멀어질수록 지구의 인력을 적게 받는 비행기처럼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 울 때에야 비로소 사탄의 인력이 작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지만 사탄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믿고 성령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악령이 지배하는 죄와 사망의 세상에서 의와 생명 가운데 살기 위해 예수 믿고 성령의 힘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푸닥거리를 해서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광야에 가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을 주야로 금식하신 후였습니다. 이때 마귀가 예수께 와서 시험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는 두 번째 시험을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전혀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도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마귀는 세 번째 시험으로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영광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며 시험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모든 간계와 능력으로 예수를 유혹하고 공격했지만 결코 예수를 시험에 넘어지게 하거나 그를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하거나 정복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은 이제 예수 앞에서는 죄를 짓게 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이 완전히 정복된 것은 아니지만 그 능력에 치명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을 힘입어 예수처럼 사탄의 모든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오늘 본문에서 하신 말씀이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표징은 교회에 교인이 꽉 들어찬 교회나 거대한 부흥회를 하는 교회가 아니라, 실로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어 삶의 고통을 제거하고 어떠한 유혹과 시험에도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의롭게 살기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성령의 힘입어 사시기 바랍니다.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성령의 힘입어 영생을 맛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삶에 고통이 있습니까? 예수 믿고 성령의 힘입어 삶에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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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랑의 영을 받으라!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19-23, 참조 : 마 28:16-20, 막 16:14-18, 눅 24:36-49)

1. 부활절에 읽어 볼만한 책이 있다면, 1866년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만 45세 때 써낸 대장편 소설 <죄와 벌>을 들 수 있습니다. <죄와 벌>은 가난하지만 머리 좋은 대학생의 살인행위를 통해 인간심리의 복잡 다양한 변화과정을 그린 명작입니다. 대학생 라스꼴리니꼽이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쳐죽이고 돈을 강탈합니다. 그런데 이 살인강도행각에는 절박한 동기와 정당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 노파는 이잣돈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며,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귀한 돈을 혼자 차지하는 버러지이며 인간 쓰레기이기 때문에 죽여서 아까울 게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돈이 몹시 필요했습니다. 자신과 어머니를 위해 하기 싫은 결혼을 하겠다는 여동생의 편지를 받고 그의 마음은 더 다급해졌습니다. 그 노파는 없앨 만 했고 그럴만한 명분과 논리를 갖춘 그의 철학은 역시 젊고 멋있었습니다. 그의 살인의 동기를 약간 병적이었지만 그는 당당했습니다. 그래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지만 얼떨결에 노파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방문을 닫지도 않은 채로 돈 궤짝을 뒤지다가 지갑 한 개와 장신구 몇 개만 집어들고 허둥지둥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뒤뜰의 돌 밑에 숨겨 놓고서는 다시 찾아 쓸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범행 후의 사정은 예상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는 자꾸 불안해졌습니다. 이상하게 자꾸 외로워졌습니다. 그 범행으로 인하여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과 격리되어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그 고립된 느낌, 그 절대적인 고독을 달래보려고 그는 마음 착한 창녀 쏘냐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직업은 천했지만 마음만은 순결했습니다. 그는 쏘냐의 겸손과 인정과 자기희생의 생활을 접하면서 차차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책감이나 후회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범죄라니? 쓸모 없는 노파하나 죽인 게 뭐가 죄야? 난 보상할 생각 없어. 그건 절대로 범죄가 아니라구." 그는 여동생 두냐의 자수 권유를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살인 논리와 명분이 이처럼 확고한데 결국에 그는 제발로 찾아가 자수하고 형벌을 달게 받습니다. 그리하여 시베리아로 유형되어가게 되어, 그곳에서 강제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쏘냐의 영향이 컸습니다. 자기 한 몸을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남을 위하는 착한 쏘냐를 보고 그는 자기의 어설픈 수작이 허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무책임한 자신을 믿어주며, 계속적인 연민과 사랑을 쏟아주는 쏘냐에게 감탄하여 겸허와 용기를 되찾아 결국 자수하여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쏘냐는 냉대를 받으면서도 시베리아 유형지로 그를 따라갑니다. 그런데도 라스꼴리니꼽은 자신의 궤변철학(?)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그러나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감옥에서 맛본 고통을 통해 그 완악하고 강퍅한 살인 명분과 논리는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감옥의 병실을 잠시 나와 강가에 앉아 있는 그에게 쏘냐가 찾아옵니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무릎을 껴안습니다. 때는 부활절의 새봄. 그는 그때부터 변하기 시작합니다. 성경 속의 나사로의 소생이 여기서 다시 재연된 것입니다. 7년을 7일같이 지내왔던 쏘냐의 사랑 앞에 살인죄에 대해 철학적 논리로 당당한 명분을 내세워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던 그 대학생의 마음이 녹아지고 부활의 새 생명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가장 강렬하고 가장 내적인 관계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삶을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며, 새로운 삶이 솟아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쏘냐의 사랑이야말로 청년의 삶에 부활의 새 봄을 맞게 해 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을 통한 생명의 승리를 말합니다.

2. 바르트는 말하기를 "교회는 강하게 보일 때 오히려 약하고 약하게 보일 때 오히려 강하다."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강하게 보일 때가 언제입니까? 교세가 확장되고 교회 건물이 높이 올라갈 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고 헌금도 많이 하며 건물도 좋고 하니까 그럴 듯하게 보입니다. 그때는 오히려 약합니다. 왜냐 하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그만큼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스스로 뭐든지 할 만하다고 우쭐대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성도간의 관계가 붕괴되고 더 나아가서 단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교회론적인 면에서 볼 때 약한 교회요, 죽어 가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약하게 보일 때는 오히려 강합니다. 교인의 숫자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헌금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교회 건물도 임시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개척 당시의 목회자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강단에 나와서 계속 울부짖으며 "주여! 주여!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수가 없습니다."하며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성도간의 관계가 밀착되면 비록 보기에는 시원치 않게 보이겠지만 무서울 것이 없는 가장 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보호하고 살펴주시지 않는 교회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장해나가며 이웃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으로 성장해 가는 교회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무엇보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엡5:25)....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역사 하심에 의하여 개인적으로 사랑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을 통해 유기적인 공동체가 되어서 계속 성장할 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사회에 변화를 주며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 민족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약 6,100개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신구약이 번역된 언어는 겨우 262개, 그리고 신약만 번역된 언어는 562개입니다. 또한 선교사를 미리 파송하여 그곳의 언어를 배운 다음에 성경을 번역하고 있는 언어는 1,167개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지고 있거나 조금이라도 구경을 한 언어는 2,000개의 언어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계 언어가 6,100개인데 겨우 1/3의 언어로만 성경이 번역되었을 뿐입니다. 전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앞으로 4,100개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보급될 수 있도록 부단히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해야만 합니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 파송된 선교사 수는 대략 20여만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중 90%가 미국에서 파송한 선교사라고 합니다. 앞으로 90여만명정도의 선교사를 더 파송해야 전 세계가 복음화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전 세계에는 254개의 국가가 있고, 전 세계에 대략 100만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500만개의 교회가 필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400만개의 교회가 더 세워져야만 합니다. 인도의 9억 인구 중에 8억이 힌두교입니다. 힌두교는 3억 3천 개의 신을 섬기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암소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800만 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 세계에 모슬렘이 10억, 중국 공산당이 10억입니다. 이들 수만 합해도 30억이 넘습니다. 세계의 절반 이상이 구원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런데 회교의 선교사 수는 100만이 넘는데 비해 기독교의 선교사 수는 20만에 불과합니다. 회교 국가 중 하나인 터키의 인구가 6천만인데 그 중에 기독교인은 겨우 400명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18세기에 영혼 구원을 제일 많이 했던 영국의 스펄젼 목사는 한번도 교회를 성장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구령열(救靈熱)에 불타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만 했을 뿐입니다. 영혼 구원을 하다가 나오는 부스러기가 교회성장이지,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영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은 영혼구원이며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교회 성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면서 교회 자체가 성장하지 못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교회 성장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지 교회 성장이 죽은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해골떼 같은 이스라엘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야말로 사랑을 완성시키는 생명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처럼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신 것은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경험은 세찬 바람의 포효와 강한 불길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2-4)

이 세찬 바람과 강한 불길이야말로 제자들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며 생동하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경험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찬 바람과 강한 불길을 통한 하나님 사랑의 경험인 것입니다. 성령(바람, 불)은 인간을 생동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입니다. 불은 우리를 뜨겁게 하며, 따뜻함을 전해줍니다. 불은 우리를 밝게 비추고, 우리 자신도 빛나게 합니다. 불은 우리를 태우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불태우는 불길이 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본질은 '삼키는 불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사랑"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신4:24)

"....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하나님은 열정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노기(怒氣)는 불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시79:5)

불이 '삼키는 불길'로 불리울 때,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분노는 그의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거부당하고 상처받은 그의 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과 그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열정적 사랑은 치명적인 분노로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랑은 사랑으로 존속하기 위하여 분노의 형식을 취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분노 속에는 그가 끝까지 지키는 사랑이 숨어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 속에는 그의 은혜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키는 불길'처럼 활동하시는 그의 분노 속에는 하나님 사랑의 정열이 나타나고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의 "불길"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하고 그 새 삶을 뜨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

여기에서는 불은 정화(淨化)의 불이요, 모든 사물들을 녹이는 불이며, 세계의 새 창조의 불을 말합니다. 세찬 바람과 뜨거운 불길로 나타나는 성령은 무가치한 인간의 삶을 무한하게 가치 있는 삶으로 발견되게 하여 새 생명을 창조하고 그 삶을 생동케 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인 것입니다. 왜 사랑은 '죽을 만큼' 강한 것인가? 그것의 열화는 불과 같으며 사랑 자체가 '주님의 불길'이라 불려지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8:6)

오순절 찬송가라 할 수 있는 찬송가 173장 <불길 같은 성신여>는 흔히 한국 교회 강단에서 부흥회 인도 찬송으로 애용되며, 소위 은사를 받는 수단으로서 '불길 같은 성령'을 간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우리 안에 "뜨거운 사랑"을 깨워달라고 성령께 간구하는 찬송가입니다. "불길 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줍소서 성신이여 임하사 내영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합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합소서." 힐데가르트 폰 빙언이라는 사람은 여기 "불길 같은 성령"을 "불의 영", "사랑의 불길"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 불길과 같은 성령이여, 찬양을 받으소서..." "오, 사랑의 불길이여..........."

3.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불길 같은 사랑의 영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행했던 다락방에 모여서 전전긍긍하며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독기를 품은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 다락방 문을 굳게 닫고 행여나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떨어지지는않나 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 한 가운데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20:19,20)

죽음보다 강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그러므로 두려워 떨며 삶이 위축된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불길 같은 사랑의 영"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불길 같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에 '그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의 불길로 태워 정화시키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이 가치있는 것으로 발견되게 하며,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경험하게 하여 생동하는 삶으로 변화시키며, 죽은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21,22)

그래서 일찍이 "불길같은 사랑의 뜨거운 성령"을 다메셋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체험했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4-39)

세상의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시대에 "불길 같은 성령"으로 나타나고 경험되어지고 있습니다. "불길 같은 성령"은 불같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랑의 주체요 선교의 주체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인류에 대한 뜨거운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교도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의 가슴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가슴이요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 되는 곳에 사랑이 불길처럼 번져나갑니다. 그리고 죄악이 불태워지고, 인간이 생존해야 할 가치를 경험하게 하고, 잠자는 영혼, 죽은 영혼을 깨워 생명을 약동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죽기까지 하나님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이 항상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땅 위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사회 등등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불길 같은 성령을 받아야 죄악이 불태워지고 삶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그대로 있느냐 아니면 사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을 부어주시는 예수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부활의 예수를 증거 하는 제자들에게는 마음으로부터 깊이 참회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용서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이 위임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회개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용서를 선언하는 능력이 위임되어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경고하는 권한도 위임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인 것입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행3:1-10)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서 은과 금보다 백 번 더 나은 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부활하신 예수였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있어 당장 필요했던 것이 은과 금이라고 생각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과 금이 전부가 아닌 더 중요한 영적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은과 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분의 문제들과 이 나라 민족의 문제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일(선교)만이 자신과 나라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를 가지고 5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나 되는 기적, 물이 포도주가 되는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등등은 그 기적들을 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예수의 부활은 생명의 승리입니다. 사랑과 진리의 승리입니다. 예수를 무덤에 가둬둘 수 없듯이 생명과 진리와 사랑은 가둬둘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이 나라 민족 위에 생명과 진리와 사랑이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금과 은, 그리고 세상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분이 보내신 성령은 그 힘과 능력, 그리고 사랑의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부어주시는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어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은 사랑의 주체요 선교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인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로 나타내는 여러분이 되도록 성령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세상에는 이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삶의 가치를 상실하고 삶을 포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우리를 향해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불길 같은 사랑의 영을 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격렬했던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샌디에이고의 외곽지대에 있는 어느 화려한 저택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집주인 되는 부인이 전화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엄마, 저예요. 제가 죽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아들의 음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한시바삐 그 아들이 보고 싶어 볼멘소리를 합니다. "당장에 달려오지 않고 전화는 무슨 전화냐?"그러자 아들은 자못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가겠습니다. 그런데 불쌍한 내 친구와 함께 갈까 합니다. 이 친구는 함께 싸우던 전우인데 지금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으며, 다리 하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는 친구라서 저와 같이 있으려고 데려왔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며칠동안만 같이 있으려므나." 그러자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오랫동안입니다." 어머니는 다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한 일년 함께 있으려므나. 처음에는 그럭저럭 함께 지낼 수 있겠지만 세월이 가면 무거운 짐이 되어 괴로울 거야." "아니에요. 일생동안 같이 살 겁니다." 이것이 아들의 대답이었습니다. "너, 전쟁에 나가더니 감상주의자가 되었구나. 그런 사람을 길게 사랑하기 쉬운 줄 아느냐?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아도 얼마간 지내보면 싫증이 나고, 나중에는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이 말에 "그럴까요?" 하고 아들은 수화기를 놓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군 본부로부터 발송된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투신 자살했습니다. 시체를 찾아가십시오" 어머니는 허겁지겁 달려가 시체를 확인해봤습니다. 시체는 틀림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고, 다리 하나가 없었습니다. 아들은 "이토록 불구자가 된 나를 어머니가 어떻게 사랑해 줄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확인해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짐이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만 것입니다. 누가 아들을 죽인 것인가? 그는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그렇더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아도 장차는 짐이 될 것이라고 하니 무슨 용기로 살수가 있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누가 '눈 하나 없고, 팔 하나 없고, 다리 하나가 없는 불구 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겠습니까? 누가 불구되어 삶의 가치를 상실하고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의 하나님 심장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길 같은 뜨거운 사랑의 영", 성령을 받으라고. "(요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성령을 받으라."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젊은 선교사 죠지 애틀리는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손에 들려 있는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저들을 죽이고 자기는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방아쇠 한번 잡아당기면 끝날 일인데,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 그 마을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는 영영 끝이 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남을 죽인 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가 믿으려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그대로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찢기며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보니 그에게는 그런 놀라운 총이 있었고, 탄환도 열 발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원주민들은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3:16)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데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 주실 만큼 충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레바논의 유엔대사 찰스 말릭씨는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국의 공헌이 무엇이냐? 돈을 준 것이냐? 먹을 것을 준 것이냐? 의료기술이나 약품을 준 것이냐? 군사원조인가? 산업원조인가? 그렇지 않다. 내 생각에는 선교사를 많이 파견한 것이 정말 세계를 돕는 결과를 가져왔고, 20세기의 미국을 훌륭하게 평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여러 나라의 민족주의 앞에서 욕도 많이 먹고, 공산주의자를 위시한 유물론자들에게 악평도 많이 받았으나, 수없이 많은 순교자의 피를 전 세계에 뿌리며 신교육·신 문화사업·신 의료활동 등을 펼쳤고, 새 시대 새 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게 하는 개화 운동·독립 운동·빈민 구호·여권 신장·YMCA 등 청소년 운동·스포츠 보급·계급 타파·노예 폐지 등 헤아릴 수없을 만큼 엄청난 일을 전세계 각지에서 벌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백 년, 빛나는 미국의 20세기는 선교 운동의 열매라고 담대히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랑스럽고 빛나는 대한민국의 21세기는 한국교회의 선교 운동을 통해 이룩할 수 있도록 성도 여러분에게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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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령의 강림(聖靈降臨)

"(요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요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우리 교회의 표어 가운데 하나는 <인간성의 회복(人間性 回復)>의 주체(主體)가 되는 "성령의 불을 던지자"(눅12:49)입니다.그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形像,Imago Dei)대로 지음받았습니다.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靈), 성령이 부어져 인간은 영(靈)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관계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세 가지 형상 즉, 하나님의 불멸성(不滅性),지력(智力),자유의지(自由意志), 기타 여러가지 정서를 포함하는 자연적 형상과 인간외에 다른 생물을 주관하는 정치적 형상, 하나님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순결성,진실성 등이 인각(印刻)되어 있는 도덕적 형상 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웨슬레).

인간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나 범죄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성육(成肉)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한 인간의 죄를 십자가로 해결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 성령이 인간의 영에 거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잃어버렸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

이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밝히며 의지와 감정을 바로 잡으며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영과 육을 아울러 정결케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희열을 맛보게 하며 우리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연합을 실현시켜주며 우리로 하여금 양자로서의 확신을 가지게 하며 창조주의 모습을 본받게 합니다.> (웨슬레).

진정한 인간성 회복은 성령이 몸과 혼, 그리고 영을 온전히 지배할 때 이루어집니다.(The Spirit has more of me!)

누가복음 12:49의 "불"은 성령의 불로서 복음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처분하시는 그의 성역(聖役)을 가리키며 소멸시키며 정결케하는 성령의 역사(役事)를 말합니다.

증거되는 말씀에 성령의 불을 던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엄성(尊嚴性)을 회복시킵시다!"

요한 복음4:24,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이 말씀은 '성령은 곧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그의 작용에 있어서 말씀(성경)보다 휠씬 더 넓은 영역(領域)을 가집니다.

성령의 경험들은 언어의 말들 속에서만 나타날 뿐 아니라 감각적(感覺的) 현실 자체 만큼 매우 다양합니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령의 형식(形式)들도 있습니다.'우리의 마음' 속에 계신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은 우리 안에 있는 의식(意識)의 계층(階層)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그것은 모든 감각들을 깨우며,무의식적인 것과 육체 속에 꿰뚫고 들어가며 육체를 생동케 합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삶을 위한 새 에너지(energy)가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현대적 병을 앓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참된 성령의 체험은 <삶에의 사랑의 회복,생동력의 회복>을 가져다 줍니다.'삶에 대한 단호한 긍정'과 '살아 있는 것에 대한 단호한 사랑'은 하나님의 영,곧 성령의 첫 경험들인 것입니다.

성령의 경험을 통한 <삶에의 사랑>은 삶의 병(病)들과 장애(障碍)들과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며 '죽음에 대항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성령은 예수를 슈퍼맨(super man)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는 그의 인간적 고난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그 인간적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인간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역동적(力動的)인 사랑(요3:16)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역동적인 사랑의 삶을 살게 하는 원천(源泉)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 일서4:8)

유명한 현대 신학자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나는 육체의 아름다움과,활동들의 리듬과,눈들의 광채와,포옹들과,느낌들과,냄새들과,형형색색의 이 창조의 소리들을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을 내가 사랑할 때,나는 모든 것을 껴안고 싶습니다.당신의 사랑의 피조물 속에서 나는 나의 모든 감각들을 가지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내가 만나는 모든 것 안에서 나를 기다립니다.오랫동안 나는 당신을 내 안에서 찾았고,내 영혼의 달팽이 집 속으로 기어 들어 갔으며,접근할 수 없는 장갑차를 가지고 나를 방어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바깥에 계셨으며,내 마음의 좁은 데로부터 나를 삶에 대한 사랑의 넓은 영역 속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이리하여 나는 내 밖으로 나왔으며,나의 영혼을 나의 감각들 속에서 발견하였고,내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찾았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삶의 경험들을 더 깊게 하였고 그것을 위축시키지 않았습니다.하나님 경험은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수록,나는 더욱 더 여기에 있고 싶습니다.내가 보다 더 직접적이며 전체적으로 여기에 있으면 있을수록,나는 더욱 더 살아 계신 하나님을,삶의 무한한 원천을, 삶의 영원을 느낍니다."

인간의 삶에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과 지혜가,그리고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뿐만아니라 지금도 성령은 이와같이 역사(役事)하십니다.

미가서 3: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성령)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스겔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또 내 신(성령)을 네 속에 두어..."

위의 말씀들을 보면 성령은 무엇보다도 선지자들을 이끌어주고 그들에게 영감(靈感)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때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일을 행하십니다.

첫째로,성령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진리를 가져다 주십니다.

둘째로,성령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보게 되었을 때 그 진리를 인식(認識)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셋째로,성령은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주십니다.

이와같은 성령의 경험들은 대개 잠시 머물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신, 예수께서 경험한 성령은 순간적인 영감(靈感)이 아닙니다.지금까지 인간들에게 임하신 방법과는 아주 다른 독특한 방법으로,그리고 독자적(獨子的)으로 영구(永久)히 정착(定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본문33절). <세례(baptism)>라는 말은 '물에 담그다',혹은 '물에 잠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요한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가 성령에 깊이 잠겨 삶이 거기에 스며들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몰입(沒入)되고 우리의 마음과,생활과,존재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충만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들에게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사람들에게 묻어 있는 불결한 것들을 씻어서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그리고 옛 사람은 물 속에 장사(葬事)지내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종전과 다른 새로운 삶으로 나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례는 성령의 세례입니다.우리가 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첫째,우리의 인생이 계발(啓發)됩니다.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됩니다.하나님의 의도(意圖)하심이 무엇인지,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자신의 의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하나님의 지혜와 빛의 일부가 우리에게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둘째로,우리의 삶이 강하게 됩니다.능력없는 지식은 마음만 괴롭히고 좌절 의식만 주는 것입니다.그러나 성령은 우리들에게 올바른 것을 아는 지식만 줄 뿐 아니라 올바른 것을 행할 힘과 능력까지도 주십니다.성령은 우리들에게 인생에 대처하여 이기고 나갈 수 있는 적응력을 주십니다.

셋째로,우리의 삶이 정화(淨化)됩니다.그리스도의 영으로 베푸는 세례는 불 세례입니다(마3:11,눅3:16).여러 가지 악한 쓰레기나 저급한 혼합물이 정결하게 되고 불태워 없애 버린 후에야 비로소 인간은 정결하고 순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삶을 사랑하게 됩니다.인간과 자연,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삶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합니다.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삶의 기쁨만 아니라 삶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예수 믿는다는 것을 매일 세례받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삶을 향한 사랑의 역동성(力動性)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세례가 여러분에게 항상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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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요4: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요4: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요4: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요4: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요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요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요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요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요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4: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요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4: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요4: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1967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는 세계에서 4,000 여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모여 '정신 치료에 있어서의 인간의 가치'라는 주제로 세계 정신과 의사 대회가 열렸습니다.이 대회에서 3명의 강사가 차례로 주제 발표를 했습니다.

첫번째 강사는 롬(H.P.Rome)박사로,그는 인간이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길은 인간의 마음 속에 '믿음'이 있을 때라고 했습니다.그에 의하면 인간은 믿음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 강사는 잰즈(H.W.Janz)박사였습니다.그는 인간의 가치를 '소망'속에서 찾았습니다.그는 인간의 마음 속에 '소망'이 있을 때 인간으로서의 긍지와 삶의 보람과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세번째 강사인 시친(C.A.Sejuin)박사는,인간은 누구나 상처받은 마음을 갖고 살고 있다고 하면서,그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인간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며,좌절과 회의(懷疑)의 구렁텅이에서 탈출할 수 있는 끝없는 능력을 공급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주제 발표를 한 이들은 신학자도 종교학자도 아닌 정신과 의사들입니다.그들이 찾은 인간 가치의 회복의 길이 믿음,소망,사랑이었던 것입니다.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인간 회복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의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심각한 심령(心靈)의 갈증(渴症)을 겪고 있는 파괴된 인간성(人間性)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일시(一時)에 그 갈한 것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사랑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여인에게 참 생명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목마른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 4:13-1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 7:37-39)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6-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는 곧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자면 누구든지 값없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靈)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예수 없는 인생은 사실 죽은 인생입니다.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는 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천국문에 다다랐을 때 베드로가 우리를 맞으러 나와서 우리에게 종이와 연필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자,열 개의 문제를 내겠다.만약 그 중에 일곱 개 이상을 맞추면 그 사람은 천국으로 들어간다.하지만 네 개에서 일곱 개 사이를 맞추면 연옥에서 기다려 주어야겠다.만약 세 개 이하로 맞춘다면 미안하지만 즉시 지옥행이다." "자,준비는 되었겠지? 일 번 문제, 당신은 어떤 세례가 옳다고 믿는가? 침례(浸禮)인가? 재계(齋戒)인가? 아니면 관수(灌水)인가? 또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성자의 이름만으로 받는 것이 옳은가? 침례는 세 번 물에 잠기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거룩한 깃발 밑으로 통과하는 것이 옳은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줄로 이으면 된다." 이제 큰일났습니다! 옆 사람의 것을 컨닝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양쪽을 살펴보니 한쪽에는 구세군 출신이 앉아 있고,한쪽에는 영국 국교회 출신이 앉아 있는데,당신은 침례교도거든요.그러니 컨닝을 해봤자지요.세 사람 모두의 답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매사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례를 어떤 방식으로 베풀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와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교리시험 따위가 없습니다.베드로가 칠판과 종이,연필을 가지고 기다리고 서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대신 베드로는 청진기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리 시험을 치루기 위해 책을 잔뜩 짊어지고 천국문에 이를지도 모릅니다."베드로 선생님,시험을 보려고 하는데 책상이 어디 있나요?" 하지만 베드로는 들은 척도 하지않고 여러분에게 청진기를 들이댑니다."두근 두근 두근 두근.""좋아,통과! 천국에 들어가도 돼." "저,베드로선생님,감사합니다만 그러면 시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됐어,심장이 뛰는 걸 보니 살아 있군,그거면 됐어."

구원이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진 것을 아노라."(요한1서 3:14)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지 "올바른 교리가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생명입니다!.

예수가 사랑입니다!.

예수가 없는 곳에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가 없는 곳에 사랑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각양 각색 크고 작은 갈증을 지니고 삽니다.특히 생존 경쟁이 치열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의 현실적 부귀를 비교하여 상대적 목마름에 시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갈증은 바로 영혼의 갈증이라 하겠습니다.수백 세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지상의 갖가지 쾌락의 잔들을 홀짝거려 오면서 그것들에게서 궁극적인 즐거움을 발견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악의 즐거움은 잠깐 동안"(시 90:5,벧전 1:24)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시90: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그렇습니다.세상에 속한 즐거움의 꽃들은 오늘 피었다가 내일 시들어 죽을 것들입니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성과를 이룩하여 부와 명성과 권력을 손에 넣었습니다.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이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이는 마치 망망 대해에서 표류하는 자들이 주위에 그렇게도 많은 바닷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만약 그들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바닷물을 마신다면,오히려 갈증은 더해지고 종국에 가서는 목이 타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참된 만족은 없을까요? 사람이 영원히 세상을 헤매며 신기루(蜃氣樓)를 쫓다가 실망만을 계속 되씹어야 할까요?

아닙니다.인간의 마음을 참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여러분에게 생명의 물을 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시며,그 분이 주는 물을 마신다면 다시는 목마름이 없을 것입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입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성령을 베풀어 주십니다.

중국의 진시왕은 불사약을 구하려고 천진난만한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을 영주 삼신산으로 보냈습니다.불교에서 정신 수양을 통하여 인생사에서 오는 108번뇌를 물리치고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려 한 것도 영생의 욕구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영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 은혜는 믿음으로써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마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께서 자신을 밝히 드러내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영생의 생수를 마실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어느 한 민족이나 일단의 사람들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요3:16). 예수님은 이러한 그의 사랑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과 천대를 받아야 했던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친히 생수를 주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은 모든 죄인들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수"를 값없이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수천만금의 재산이 있어도,달나라를 가는 지식이 있어도,천하를 호령하는 권세를 가졌다해도,절세 미인이라할지라도,제아무리 많은 선행을 쌓았다해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생명,구원,사랑을 값으로 환산하여 파시지 않습니다.하나님은 생명을,사랑을 거저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리스도와 그 분이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에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명수"를 마시게 되며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죄의 생활에서 돌아서는 순간,그 모든 마음을 예수께 드리는 순간,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생명수이신 예수께서 주시는 '사랑의 생수'를 받아 마셔야 합니다. 한 번도 만난적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든 과거를 다 아시는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도 다 알고 계십니다.따라서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으로부터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여인에게 깊은 사랑을 베푸셨던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회개하는 모든 자들을 당신의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주시며,아울러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주님밖에는 살 소망이 없음을 알고 자신의 죄인됨을 솔직히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타임지에는 한 기업가의 인생이 한 페이지 전체에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그는 아리스토틀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라는 사람으로서 타임지는 그를 '우리 시대의 마지막 재계 거물들 가운데 하나'로 평하고 있었습니다. 오나시스는 겨우 17세의 나이에 고국 그리이스를 떠나 한 몫 잡아보려고 3등 선실에 몸을 싣고 아르헨티나로 갔습니다.단돈 100달러로 시작한 것이 4년 후 그가 21세가 되었을 때에는 백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그는 냉정하고 단호한 사업꾼으로 평판을 날리게 되었습니다.그는 부와 그 부가 가져다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타임지 기자는 오나시스의 말을 직접 인용하였습니다."요즘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 돈 밖에 더 있습니까? 지금은 돈 있는 사람들이 왕족이고 귀족이라구요." 그러나 아들 알렉산더가 비행기 사고로 죽는 일이 발생하자 오나시스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습니다.그의 한 측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는 하룻밤 사이에 폭삭 늙어버렸어요, 갑자기 노인이 되버렸다구요." 프랭크 브래이드(Frank Brady)는 자신의 책 <오나시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아들의 죽음과 함께 그 역시 죽었다." 오나시스는 계속 신경장애로 고생하다가 2년 후 딸 크리스티나 혼자서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그에겐 부는 있었지만 사랑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갈증을 영원히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더러워진 인간의 사랑을 정화(淨化)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깨어진 인간의 사랑을 재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으시고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신 행복하신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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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생수의 강

"(요7:25) - -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요7: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요7: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요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7: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7: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요7: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요7: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요7: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터인가 (요7: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요7: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7: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요7: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요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요7:43)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요7: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요7:45)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요7: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요7: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요7: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요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요7: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요7: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요7: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요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음악가 모짜르트가 한 번은 어느 도시를 지나가다가 어느 집 문 앞에 걸린 한 간판을 보게 되었습니다."모짜르트 연구소"라는 눈을 정지 시킬만한 간판이었습니다.누가 자기를 연구하기 위해서 연구소를 내었구나 생각하고 그곳에 들어갔습니다.마침 거기에 많은 음악 교수들이 모여 세미나를 하고 있었습니다.모짜르트의 곡목을 나열 해놓고 누가 연구 발표를 합니다."이 곡은 작곡할 당시 모짜르트가 어느 여인을 사랑하다가 실연을 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고 비통한 마음으로 쓴 곡입니다."모짜르트가 뒤에서 가만히 듣고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그가 손을 들었습니다."제가 아는 모짜르트는 그런 일이 없었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이 곡의 내용은 그렇지를 않습니다."그랬더니 적어도 대 음악가,대 교수가 음악을 해설하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근거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느냐는 눈치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중요하지 않은 몇 가지 지식으로 예수를 아는 척했습니다만 사실은 정말 알아야 할 사실을 몰랐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가면서 여러 교수들과 함께 성경과 신앙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교육심리학을 전공하신 교수는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성경과 신앙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경제학 교수는 경제학 분야에서 성경과 신앙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정치학 교수는 정치학의 눈으로 성경과 신앙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사회학 교수는 사회학의 관점에서 성경과 신앙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건축학 교수는 건축학의 안목에서 성경과 신앙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이들을 위해서 제가 한 기도는 사도 바울의 눈의 비늘을 벗겨서 바로 예수님을 볼 수 있게 하셨듯이 저들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 주옵소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영원한 영적 세계,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 만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하고 연구해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기독교를 계시(啓示)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본문에서 보면 예수님과 유대인들은 계속 서로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문제는 오순절 성령 강림한 다음에 성령의 역사(役事)가 함께 할 때 마음의 문이 열려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사도행전 16장에도 보면 루디아는 사도 바울을 만나 잠깐 이야기했는데 당장 성령께서 마음 문을 여시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행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당장 자기 집을 열어놓고 교회를 만들었습니다.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씩이나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아직도 마음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이것을 볼 때 역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여러분들에 진리의 영,성령이 충만히 임하시어 예수님을 바로 알고,그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신령한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생수의 강이신 성령이 충만하시어 생명의 말씀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유대인의 3대 명절중의 하나인 초막절(또는 장막절)입니다.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절기의 중요성과 그 절기를 지키는 의식(儀式)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유대인의 3대 명절은 유월절,오순절,그리고 초막절입니다.이 초막절에는 예루살렘에서 32km 이내에 사는 유대인 성년 남자는 의무적으로 참석해야만 합니다.이 절기에는 그 기간(7일간)이 끝날 때까지 자기 집을 떠나 작은 초막에서 지내야만 합니다.그래서 이 절기 동안에는 어느 곳이나 초막들이 들어섰습니다.즉 평평한 지붕 위에,가도(街道)에,시가지 광장에,정원에,바로 성전 뜰 안까지도 세워졌습니다.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로 세워서는 안되었습니다.초막의 벽들은 가지들과 잎으로 되어 있고 그것은 외기(外氣)는 막을 수 있을 정도였고,햇빛은 막아서는 안 되었습니다.지붕도 이어져 있었습니다.그러나 지붕은 있어야 하지만 넓게 성기어 있어 밤에는 지붕으로 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게 하여야 했습니다.이렇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집없이 나그네 되어 머리 위에 지붕없는 초막에서 지내던 때를 잊지 아니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레23:40)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레23:41) 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 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레23:42)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레23: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절기에는 종려나무의 가지들을 묶어 기쁨의 상징인 룰라브(lulab)라는 축제의 장식물을 만들어 매일 할렐(Hallel,시113-118편)을 부르는 동안 휴대하였습니다.그리고 매일 시편 118편 1절의 초두인 "여호와께 감사하라"라는 구절을 낭독할 때마다 이를 높이 흔들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을 표시하였습니다.이외에도 행해지는 세 가지 공통 의식이 있었습니다.

첫째로,매일 아침에 드려지는 헌수식(獻水式)이 있습니다.초막절 기간 동안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마다 줄을 지어 성전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 행진하였으며 그 못에서 성전 제단에 부을 물을 길었습니다.물은 장엄한 의식 속에서 길어졌는데,성문에서는 나팔을 불었으며 순례자들은 할렐을 찬송하였습니다.제사장들은 제단에 올라가 2개의 은그릇에 물과 포도주를 담았습니다.이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갈증에 시달릴 때 호렙산 바위에서 맑은 샘물을 솟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상기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출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둘째로,밤에 거행되는 촛불 축제입니다.제사장들은 초막절 기간 내내 매일 저녁마다 일곱 갈래로 뻗은 4개의 커다란 촛대에 불을 붙여 성전의 전 지역을 밝게 비추었는데,이는 광야에서 방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밤중에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고 이를 즐거워하는 의식이었습니다.이때 순례자들은 피리 곡조에 맞춰 횃불춤을 추었고 노래를 불렀으며 이 의식은 거의 밤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셋째로,예루살렘 성전 동쪽 문에서 거행되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의식입니다.초막절 기간 동안 제사장들은 새벽마다 성전의 동쪽 문으로 가서 해가 뜨는 순간에 성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서쪽을 향해 서서 다음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성구를 낭송하였습니다."우리의 조상들은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을 경배하였지만(겔8:16),우리의 얼굴은 주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이란 오랜 기간을 보내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를 수없이 맛보았음에도 이를 잊고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을 숭배하고 영적,도덕적으로 타락하였던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많고 허물 많은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을 약속한 땅으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놀랍고 인간이 측량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유대인들은 이처럼 그들 조상이 과거에 범한 영적 우매함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겠다는 비장한 결단의 시간을 이 초막절 기간의 새벽을 깨워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지난 날의 생애 가운데서 확인되고 체험된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뇌리 속에 항상 간직하고 또한 그 은혜를 때마다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성경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물을 통하여 인간에게 은혜와 축복도 주시지만,인간이 거역할 때에는 물을 통하여 심판하시기도 합니다.그러나 성경에는 물이 심판의 의미보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표현된 곳이 많습니다.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사라에게 쫓겨나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물이 없어 죽게 된 그들에게 샘물을 주셔서 구원하였습니다.

"(창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창21:15)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창21:16)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창21:17)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창21: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창21: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없이 사흘길을 걷다가 '마라'의 쓴물을 만나게 되었을 때 모세로 하여금 나무를 물에 던지게 하여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출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15: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또한 호렙산 반석에서 샘물을 솟게 하사 광야에서의 고통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출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울린 것은 아마도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했던 것입니다.주께서 말씀하십니다."너희는 너희 육신의 갈증을 해소하는 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고 있다.만일 너희가 너희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기를 원한다면 나에게로 오라."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는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58: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유대인들은 모든 감각과 사상과 정서를 신체의 어떤 부분에다 두었습니다.심장(心臟)은 사고(思考)와 지성의 자리이며,신장(腎臟)과 배(腹部)는 가장 내면적인 정서와 감각의 자리였습니다.

"(잠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정결케하고 회복시키며 생명을 주는 성령의 강을 통하여 우리의 사고와 감각과 정서와 가장 깊은 욕망이 새로운 생명으로 정결케 되고 다시 소생함을 받으며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오라,그리고 나를 영접하고 나를 믿으라, 그러면 나는 너희 속에다 나의 영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리라.그 새로운 생명은 너희에게 청결함과 만족함을 주고,모든 좌절감과 만족할 줄 모르는 주림을 없이 하며,너희가 항상 구하여도 얻어 보지 못한 그 새로운 생명을 주리라.'는 말씀입니다.물이란 것은 그것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그와 같이 그리스도 없이는 사람이 살 수도 없고 감히 죽음을 무릅쓸 수도 없습니다.그분으로부터 생명을 정결케 하고 강하게 하는 성령의 은사가 오는 것입니다.이 시대에 우리에게 생수의 강, 성령의 능력이 충만히 임하고 있습니다.예를 들면,이 세계에서 원자력이란 언제나 존재해 있었습니다.인간은 원자력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항상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야 인간은 이미 존재해 있던 원자력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되었습니다.마찬가지로 성령은 언제나 존재했습니다.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그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참으로 알지 못하다가 오순절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성령의 홍수가 강같이 쏟아진것은 오순절 이후에 와서 였습니다.그래서 "갈보리 없이는 오순절이 있을 수 없다."라는 훌륭한 말이 있습니다.사람들은 예수를 알았을 때 비로소 참다운 성령을 알았던 것입니다.사람들은 예수를 믿었을 때 비로소 성령의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인생의 참된 기쁨과 넘치는 만족,그리고 폭발적인 삶의 능력을 베푸시는 '생수의 강'이 예수믿는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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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성령의 역사(役事)

"(요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요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16: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요16: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요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요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요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20세기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조제프 토인비는 40여년에 걸친 그의 역작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는 신의 창조가 진전되는 모습"이라면서 문명의 발생, 성장, 소멸과정을 "도전과 응전(應戰)"이라는 구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막에서 꽃 핀 이집트의 문명을 이 이론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빙하지대가 축소함에 따라 아프라시아(북아프리카와 남아시아)지역은 건조화가 진행됐다. 그때까지 수렵생활을 하던 주민들에게 열려진 길은 3개였다. 익숙해진 기후대를 따라 북으로 이동하거나, 그 지역에 남아 수렵생활을 하며 근근히 살아남거나 역시 그 지역에 남기는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맞는 유목과 농경을 새로 개척해 나가냐 였다. 거주지도 생활양식도 바꾸지 않았던 무리는 건조화라는 도전에 응하지 않았던 셈으로 전멸이라는 벌을 받았다. 생활양식을 바꾸어 수렵자로부터 양치기로 변신한 무리는 아프라시아 스텝의 유목민이 되었다.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고 거주지를 변경한 무리들은 새로운 환경의 도전을 받아 이에 굴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또 다른 응전을 불러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건조화라는 도전에 대해 거주지와 생활양식을 모두 변경하며 응전한 집단이 있었다. 이 보기드문 이중의 반응이야말로 소멸돼 가는 아프라시아 초원지대의 몇개 미개 사회에서 이집트 문명과 수매르 문명을 창조한 역동적인 행위였다."

토인비는 이러한 이론으로 이집트문명 뿐만 아니라 마야문명. 미노스문명. 중국문명 등의 발생과 성장, 쇠퇴, 해체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론은 그 후 다양한 각도에서 재조명되고 비판도 받았지만 인종설이나 환경설에서 벗어나 역사를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역사학 연구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또한 문명의 대부분이 이미 사멸(死滅)했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모든 문명 앞에 죽음의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끊임없는 세상의 도전에 대해 교회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응전하여 지금까지 수 많은 인류를 구원하였으며 영원히 쇠퇴하지 않는 진정한 기독교 문명을 창조해 왔습니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이미 교회가 심하게 핍박을 당하던 시대였습니다. 트리야누스 황제 시대에 비두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는 사람들이 크리스챤인지 아닌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심문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가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초대 교회 전성시대에도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핍박에 대해 끝까지 저항하지 못하고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도전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 사수로 응전한 사람들에 의해 꽃이 피고 그 열매를 맺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 권력과 유대 교권(敎權) 세력이 합세하여 예수님과 그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소위 정통파(?)로 자처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例)"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울(후에 사도가 된 바울의 이전 이름)이 예수의 이름을 말살하고 교회를 근절시키려고 하고 있었을 때 사울 만큼 진정으로 그것이 신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행26: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줄 스스로 생각하고 (행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행26: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행26: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적어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행26: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행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26:1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와같은 일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16: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교회의 비극은 자기들만이, 자기 교회만이 하나님의 진리와 은총을 독점하고 매수(買受)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만이 참 신앙을 가지고 있고 참 교회라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생각이 매우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단(異端)을 교회에서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얼마 전 17세된 고교생 아들과 22세의 숙성한 처녀 딸을 공기총으로 쏘아 아들은 죽고 딸은 예측불허의 중태에 빠진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자녀를 이꼴로 만든 비정의 아버지 장판권씨는 서늘한 수갑을 찬 채 철창에 매달려 절규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까?' 살인범의 외침으로는 너무나 생경스러운 소리이겠지만 사이비 이단 종파들에게 아내와 자녀들을 빼앗겼던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어쩌면 이해가 가는 절규입니다. 그 자신 조실부모하고 외롭고 어려운 소년, 청년 시절을 보냈기에 남달리 가정에 애착을 갖고 살아온 착실한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습니다. 세상에 한 눈 팔지않고 가정에 대해 성실했던 그였지만 그의 아내가 안상홍 이단 집단에 유혹되어 결국 자녀들까지 그 이단 집단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이처럼 사이비 이단 집단이 한 가정을 파탄시키고 또 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었으며 두 젊은이의 생명을 앗아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이비 이단 집단들은 더욱 더 경계하여야 합니다.

박태선의 전도관 운동이 한참 발흥할 때의 일입니다. 인천 제2장로 교회를 담임하던 이승길목사(1887-1965, 독립운동가)가 전도관 때문에 걱정하던 목회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허참, 모를 일이지. 부산의 18금과 인천의 18금이 다르다니 말이야."목회자들은 어리둥절해서 무슨 말인지 물었습니다. "분명히 18금이라면, 거짓없는 금이라면 부산엘 가나 인천엘 가나 항상 금이 아니겠소.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그건 가짜겠지요. 진짜 금은 변치 않는 색을 유지하며 반짝입니다. 그런데 가짜 금은 처음에는 순금보다 더 유난히 반짝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색하여 흉하게 됩니다. 전도관이 이와 같습니다. 오래 가지는 않을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빛을 잃지 않는 순금의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 무장은 성서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고후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단순히 축적하는데 그쳤을 뿐 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분별된 진리를 생활 속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영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죽은 지식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외형적인 죽은 지식의 소유자들이 진리의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은 생명없는 지식을 소유한 자의 무지한 열심이 빚어 낸 결과인 것입니다. 또한 좋은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사이비 이단 종파는 한 때 그 잎사귀가 무성하여 흥하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그 진위가 성령의 열매를 통해 밝혀지는 것입니다.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마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께서 조만간에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것만을 생각하고 당황하여 비탄에 빠져 근심이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요16: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요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요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가면 성령 즉 보혜사(保惠師)가 오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계시는 동안에는 사람들은 어느 곳이든지 예수와 함께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셨을 때에는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정신과 마음과 양심 속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육신을 입고 계시는 동안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靈)에는 제약이 없습니다. 사람이 어느 곳에 가든지 성령은 그와 함께 있습니다. 성령은 온 세상을 통하여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영혼에 호소합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은 "(마28:20).....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예수를 믿는 데 박해와 핍박이 뒤따르기 때문에, 그리고 많은 사이비 이단의 무리들이 날뛰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 진리의 성령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데 있어서 반드시 요구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도전에 대한 성도들의 응전하는 방법은 바로 성령의 역사(役事)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먼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해 말하면 대부분 고전12:4-11에 나타난 성령의 여러가지 은사들 즉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을 생각하거나 마음이 뜨겁고 눈물이 나고 하는 것들을 머리에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를 짓게 하여 망하게 하나 성령은 죄를 깨닫아 회개하여 구원(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갈릴레오가 이전의 학설을 뒤엎는 실험을 피사의 사탑에서 했습니다. '무거운 물건일수록 먼저 떨어진다.' 갈릴레오가 이 학설을 부정하는 증명을 하기 위하여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서 가벼운 물건과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는 실험을 했습니다. 동시에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중력은 무게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했습니다. 갈릴레오가 그런 실험을 한다고 하니까 장안에 있는 모든 호사가들이 다 모였습니다. 무거운 돼지와 가벼운 학을 동시에 떨어뜨렸는데 동시에 떨어졌다는 말입니다.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별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앞으로 과학을 전개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근거가 되며, 그 다음에 쌓아야 하는 모든 판단과 분별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기초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중 죄를 깨닫게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성령의 사역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때 자기들이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예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이 십자가에 너희가 죽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2000년 전 팔레스틴에서 범죄자로써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어떻게 여러 세기를 통하여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마음과 양심을 꿰뚫어 죄를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은 성령이 그 마음 속에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시인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 죄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은 의(義)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요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라는 말씀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범죄자로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예수는 심문을 당하고 유죄가 되어 유대인들에게는 사악한 이단자가 되었으며 로마인에게는 위험 인물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가 극악무도한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받고 흉악범과 하나님의 적이라고 하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생각되었던 것이 바뀌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았던 백부장과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이 십자가의 예수 모습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마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성령의 안목에서 볼 때,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죄가 전혀 없으신 즉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의로우신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번째 역사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확신시키는 것입니다.

"(요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세상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있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장차 심판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확신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확신을 주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빌라도가 의인이신 예수를 심판했을지라도 성령의 눈으로 볼 때 심판을 받은 것은 바로 빌라도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의 임금들을 심판하시고 역사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들을 어떻게 심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최종적인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확신하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믿는 신앙 때문에 박해와 핍박을 받든, 환란이나 역경을 당한다해도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가 무엇인지,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같은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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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진리의 성령

"(요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지금 예수님을 3년간 쫓아다신 제자들마저도, 말하자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기적,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눈뜨게 하신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 등등을 목격한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셔야 된다는 데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납득이 가지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죽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 쪽에서도 보면 얼마든지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승리의 나팔을 불며 그를 추종하는 자들과 그의 민족을 위하여 승리로, 영광스러운 나라를 만들어 내시지 않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언제나 적용되는 의문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전능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도 예수믿는 것이 오히려 이렇게 어려우며, 신앙인들이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데 대한 보답이 도리어 고난과 역경일까?"

"왜 교회들이 그 모양 그 꼴이며 왜 꼴같지 않은 사람들이 목사, 장로를 하는가?"

그런 것들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괜찮은 사람이 일을 맡지 않는다는 것이 공통된 통계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을 살펴봐도 그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장로가 평신도보다 꼭 낫지 않으며, 목사가 평신도보다 꼭 낫지 않으며, 잘난 평신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똑똑한 사람들은 똑똑한 대신 교회 일에 관여하지않는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열심을 부리는 사람들은 좀 모자란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고 교회 밖에서 비평하는 사람들 쪽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그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히브리 민족이 잘나고 똑똑하여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팔레스틴의 작고 보잘것 없으며 하찮은 떠돌이 빈민들이었습니다. 진리의 영은 똑똑한 사람들에게보다는 좀 모자라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분의 말씀(진리)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성구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 진리의 영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영광된 삶을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지혜는 미련한 자가 예수의 보내신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자랑스런 능력은 예수의 보내신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약한자가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랑스런 문벌은 예수의 보내신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문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진리의 영이 충만하시어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운 인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위대한 역사(役事)는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져오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져다 주는 것을 계시(Revelation)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계시의 원칙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계시(Revelation)는 점진적인 과정으로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예수님은 전지(全知,omni-science)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알고 계시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제자들이 그 많은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밖에는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가르침이나, 어떠한 계시라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능력에 합당한 것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국민학교 학생에게 고등학교 과정의 함수나 미분 적분들을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하나 하나 과정을 밟아 나아가야만 합니다. 다른 과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도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배울수 있는 것과 배우는데 합당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 중국선교여행중에 만난 조선족및 한족(漢族)들에게 제가 쓴 설교집 "빛과 생명"을 한 권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 책을 읽고 나서 하는 말이 책 속에 나오는 성경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 본문을 풀어서 설명한 설교 내용을 읽고나니까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낀 것 가운데 하나는 그저 성경책을 전해주는 것으로는 별 의미가 없고 그 성경책을 그들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게 풀어 쓴 설교집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될 때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적들을 완전하게 소탕해 버리고 가축과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몽땅 멸절시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같은 명령은 구약성서 도처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들은 그 배후에 가장 중요한 사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여하한 이교(異敎)의 저속한 종교에도 감염되는 위험을 범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그러한 것에 감염되고 악 영향을 받을 위험을 생각할 때 참된 하나님을 숭상하지 아니하는 이들 도당들을 멸망시켜버리는 편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종교의 순수성을 고수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단계에 있어서, 이교도(異敎徒)를 말살시켜 버리는 것으로서 그 순수성을 지켜나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삼상15: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삼상15: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삼상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후에는 그 순수성을 지켜나아가는 길은 이교도들을 개심시키고(convert), 그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구약 성서의 세상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한 가지 중대한 진리(즉 진리사수및 성결보존)만을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진리의 한 측면, 한 단편만을 파악한 것에 불과합니다. 계시는 바로 그러한 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법전인 레위기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신약의 히브리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예수에 대한 이해를 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밖에는 계시하실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자라가라."고 말합니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또한 율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합니다.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어린아이가 밥을 먹기까지는 여러 이유식(離乳食) 단계가 필요한 것처럼 계시의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또한 하나님의 계시에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誤謬)중의 한 가지는 하나님의 계시는 단지 성서에만 나타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주후 120년에 신약성서의 제일 마지막 책이 쓰여진 때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중단하셨으며, 그 때부터 하나님의 계시는 끝나고 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 진리의 성령은 언제나 활동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지상적(地上的)인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책 중에 나오는 한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시는 분이시며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도 계속하여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아직 예수께서 의도하신 바를 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끔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후 120년에 말씀하시는 것을 그치고 그 이후 줄곧 침묵하고 계시는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인간에게 그 진리를 계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둘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모든 진리, 진리 그 자체에 대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신학상의 진리라고 하는 것에 한정해서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입니다. 신학자와 설교가들만이 영감을 받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위대한 시인이 시간을 초월하는 말로서 인간들에게 훌륭한 메시지를 가져다 줄 때 그도 역시 영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헨리 프란시스 라이트(H.F.Lyte)가 찬송가 531장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의 가사를 지을 때 그는 전혀 작사할 기분에서가 아니었으며 그대로 받아 쓰기 식으로 그것을 냵던 것입니다. 위대한 작곡가도 영감을 받는 것입니다. 헨델은 그의 "메시야" 중의 할렐루야 코러스를 어떻게 작곡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했을 때 "하늘이 열리고 희고도 장엄하신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과학자가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고 보다 나은 생활에 공헌하는 것을 발명할 때,의사가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 고통을 덜게 하는 새로운 의술을 발견할 때, 어떤 사람이 괴로와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새로운 치료법과 약을 발견할 때,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의 일종입니다.인류에게 유익한 모든 과학과 의학, 문명의 모든 기술들,심지어 음악, 미술 등 모든 예술의 분야에 까지도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들이 실제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며 실험에 실험을 다 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한계점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思考)는 그 이상 더 나갈 수가 없습니다. 폐쇄된 문 앞에까지 다다른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섬광과도 같이 번쩍 떠 오르는 것입니다. 그가 그것을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사고의 그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들어 오신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모든 진리의 계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인 것입니다.진리는 본래 인간이 창조하거나 발명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인 것입니다. 인간의 구하고 찾는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이며 발견되어지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모든 첨단 과학이나 의학 등으로 인간이 교만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선물)에 대한 감사와 겸손한 수용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계시받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소유자이신 동시에 진리의 부여자이기도 합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발견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이 우리들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들이 스스로의 정신 과정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발견되게끔 대기하고 있는 것, 즉 우리들이 취득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계시는 예수에 관한 것을 끄집어 내어 그 중요성을 우리들에게 계시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위대함은 다 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것을 모두 파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참뜻에 완전히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삶과 신앙에 대해서, 개인과 세계에 대해서,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뜻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계시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지니고 있는 뜻과 그 중요성을 계속적으로 파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 역사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 참다운 삶의 가치관과 의미 등등은 모두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은 여러분들을 진리가 되시는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 아는 만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 아는 만큼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 아는 만큼 여러분의 삶의 가치와 깊이가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에 대해 아는 만큼 삶의 능력이 달라집니다.

계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책이나 신조나 인쇄된 글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는 살아 있는 인간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가까이 살면 살수록 그 만큼 더욱 많이 우리들이 예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에 대해 아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계시를 누리면서 이 어두운 시대를 밝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는 동일한 보조를 취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그에 순종하는 것만큼 예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믿고 그에 순종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를 계시하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서 뿐입니다. 짐승이 아닙니다.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받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를 받지 못하는 인생을 성경은 짐승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시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우리의 사고 방식을 그로 하여금 주장하게 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하게 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언제나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점점 더 죄악에 대해서 민감해지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동참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요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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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부활과 성령

"(요20: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요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요20: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요20: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20: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요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요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20: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못하더라 (요20: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영광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돌아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많은 죄를 범했고 많이 용서함을 받았던 사람이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으로 그는 창부였으며 일곱 귀신들렸던 여자로써 예수님께서 개심시키고 용서하시어 영육간에 깨끗함을 입은 가장 존귀한 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결코 예수님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 갔다는 것은 그 만큼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이 성구의 난하주(欄下註)를 보면, "간절히"가 "새벽에"로 되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쓰면 "....나를 새벽에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새벽에 찾을 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요14:21).....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녀는 곧장 성내로 되돌아가서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 갔습니다.(본문 2절의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바로 요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 두 제자들이 묘지에 이르렀을 때 요한은 그 속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급한 성격을 감추지 못하고 묘지 속을 들여다 볼 뿐만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텅 빈 무덤을 보고는 대경실색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마음 속에는 어떤 생각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예수의 시체를 옮겼다면, 만일 묘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고 했다면 어찌하여 그들은 수의(壽衣)를 남기고 갔을까?' 요한은 그 어떤 생각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의는 전혀 흩으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접은 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신체가 있었던 곳에는 신체용의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 머리가 있던 곳에는 머리를 쌌던 수건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수의는 벗겨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애당초의 형상대로 개켜서 놓여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벗어나서 그것을 놓고 떠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광경이 요한의 마음을 꿰뚫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요한 믿게 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여기 중요한 사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무덤을 찾아 갔던 사람은 예수님을 그처럼 간절히 사랑하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예수의 부활을 믿은 사람은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셨고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던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그의 부활의 표적을 최초로 목격하게 했고(막달라 마리아), 그 표적을 읽어서 아는 눈과 이해하고 믿는 마음을 가지게 했던 것입니다(요한).

삶의 위대한 법칙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위대한 해석자라는 것입니다. 지성이 모색과 불확실함 가운데서 혼매(昏昧)하고 있을 때에도 사랑은 진리를 파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연구로써 파악할 수 없는 때에도 사랑은 사물의 뜻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에 한 청년 화가가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 그리고 났을 때 그 유명한 화가 도레(Dore)에게 그의 비평을 부탁했습니다. 도레는 쉽사리 대답하려 하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단 한 마디만 했습니다.

"자네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지 않군, 그렇지 않았다면 보다 잘 그릴 수가 있었는데."

만일 우리들이 마음도 생각도 예수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 예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도와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이전 보다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시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시고, 자신의 인격과 삶 속에 예수님을 보다 잘 나타낼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보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은 가서 전하라(선교)는 것입니다.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그 때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행했던 다락방에서 모여 전전긍긍하며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여 목적을 달성한 유대인들이 이제 자기들을 잡아 죽이려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의 한 가운데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요20:21)....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요20:22)....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들을 새롭게 사명으로 창조하시는 것은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cultural mandate)을 가졌다면,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제자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선교)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복음 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과 권능입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제자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증거되는 복음이 생명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겔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37: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겔37: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겔37: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겔37: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여기 6, 9절의 "생기"와 14절의 "내 신(神)"은 바로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골짜기의 가득한 "마른 뼈들"(dry bones)에게 "생기", 즉 성령이 들어감으로 "이 뼈 저 뼈가 맞아서 서로 연락하고, 힘줄이 생기며,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덮혀 살아났습니다." 이 "마른 뼈들"(dry bones)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합니다.(10,11절) 나라 민족을 살리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인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죽은 것을 살리시는 생명의 영이십니다.

"(고전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예수)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복음 증거의 사명을 지닌 교회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위에 임하실 때 그 사명을 위해 능력으로 덧입히울 것이며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선교입니다.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의 각각 끝나는 부분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 한결같이 선교 명령을 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눅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어주신 성령은 선교의 거룩한 주체(主體)인 것입니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선교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은 오직 성령인 것입니다. 선교의 역사(役事)는 인간의 역사(役事)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진리의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강한 선교의 힘은 항상 "(고전2:4)....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은 선교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교회는, 부활 신앙을 가진 교회는 선교를 사명으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여서 증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행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2: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기에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과 복음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용과 신앙의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증거되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한 개인과 나라 민족의 생명은 죄 사함받아 의롭게 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사회 등등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죄가 그대로 있느냐 아니면 사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 이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인 것입니다.

"(행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행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행3: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서는 은과 금보다 백번 더 나은 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부활하신 예수를 전했던 것입니다. 앉은뱅이에게 있어 당장 필요했던 것이 은과 금이라고 생각됩니까? 결코 그렇지않습니다.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과 금이 전부가 아닌 더 중요한 영적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은과 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분의 문제들과 이 나라 민족의 문제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일(선교)만이 자신과 나라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시고 그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나 되는 기적, 물이 포도주가 되는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등등은 그 기적들을 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의 부활은 생명의 승리입니다. 또한 진리의 승리입니다. 예수를 무덤에 가둬둘 수 없듯이 생명과 진리는 가둬둘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이 나라 민족 위에 생명과 진리가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성령으로 체험한 사도 바울은 그 누구도 그를 가둬둘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행16: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행16: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행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행1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행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16: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행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16: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행16: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행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행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행16: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행12: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행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행12: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행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행12: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행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행12: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행12: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행12: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행12: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줄 알겠노라 하여 (행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행12: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행12:14)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행12: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행12: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행12: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행12:18)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행12: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구약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풀무불 속에, 사자 굴 속에 가둬둘 수가 없습니다.

"(단3: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단3: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단3:21)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단3: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단3: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단3:24)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단3:25)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단3:26)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단3:27)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단3: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 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단3: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단6:19)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단6:20)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단6:21)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단6: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단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단6:24)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 (단6:25) 이에 다리오 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가로되 원컨대 많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단6:26)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 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단6:27)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 (단6: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금과 은,그리고 세상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분이 보내신 성령은 그 힘과 능력의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어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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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오직 성령(변화의 주체)

"(행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행1: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행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행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 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행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통해 증거되는 과정과 그 결과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근원적인 동력(動力)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게 되었음을 상세히 기록했지만(눅 5:1; 8:11, 21; 11:28) 십자가 이후에는 교회를 통해 전파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게 되며, 그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행 4:29,31 ;6:2 ;8:4, 14, 25 ; 10: 36 ;11:1 ). 둘째, 기독교의 역사성과 복음의 진실성을 밝힘으로써 기독교가 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임을 변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유대인들에게는 기독교가 반율법적인 것이 아니라 조상들과 맺어진 언약(covenant)에 근거한 것임을 변증하며, 복음 증거자들을 반(反)로마적 선동가로 몰아붙이는 모함에 대해서는(16:20, 21; 17:7 ;18:13 ;24:5-9) 그 부당성과 터무니없음을 확연히 밝히고 있습니다(13:6-12 ; 16:35-39 ; 18:12-17). 셋째, 기독교가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세계적인 참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로 대표되는 이방인 교회가 서로 상충(相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소망과 한 복음 안에서 하나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12장은 베드로의 행적을, 13장-28장은 바울의 행적을 뚜렷이 병행하는 형식으로 기록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유대인들이 이해하기 곤란한 것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고 하나님이 다른 국민에게는 소용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빌립이 사마리아인(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스데반이 이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고 그 때문에 순교하는 것과 고넬료를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바울이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각 민족을 구원하는 것을 보여 주었고, 15장에서는 교회가 이방인들을 유대인과 같은 조건으로 받아들인다는 결정을 내린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누가는 기독교는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런 것들은 부차적(副次的)인 목적들입니다. 누가의 주 목적은 1장 8절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의 전체 교훈은 지금도 예수님의 생애가 그의 교회 안에서 성령을 통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 계승하는 교회의 이야기들입니다. 위 성구는 우리에게 교회가 증인의 일을 하기 위해서 권능을 어떻게 받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권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탄생케 했으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할 수 있도록 역사(役事)하는 성령은 무엇이겠습니까? 성령을 종종 보혜사(保惠師, comforter)라고 부르는데 이는 '용감하다.'는 의미의 라틴어 '포르티스'(fortis)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란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주시는 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시카고의 어느 상점에 화재가 나서 다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그 상점이 이제는 폐업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잿더미가 된 상점 앞에 간판이 나붙었는데,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집의 모든 것은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와 자식들과 희망은 타지 않았습니다.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영업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실망하고 슬퍼할 때에도 성령의 사람들은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언제나 새로온 소망과 힘, 그리고 위로와 용기를 주시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믿음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주시는 보혜사 성령이 교회 탄생 기념주일을 맞아 더욱 더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지금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의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구약 성서에 나타난 여호와의 절기들을 통해 성령의 약속이 예표적(豫表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번째 절기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민족 해방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장자(長子)재앙이었습니다. 이 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그 장자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왕 바로는 결국 그 재앙 앞에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주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보혜사 성령이 임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절기는 무교절입니다. 이 절기의 특징은 집에서 누룩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레23:6) 이 달 십 오 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 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레23:7)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레23:8) 너희는 칠 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 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출12:18) 정월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여기 "무교병"을 먹으라는 것은 누룩을 집안에서 완전히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누룩은 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나타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당연히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이 되신 예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의 보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고전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세번째 절기는 초실절(Feast of Firstfruit)입니다.

"(레23: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23: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레23: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23: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23: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레23: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 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수확한 곡물의 첫 열매는 반드시 제사장에게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 첫 곡식은 내년의 더 많은 수확을 보장하는 의미로 주 앞에서 흔들어 바쳐졌습니다(요제).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후 있을 더 큰 부활의 보장이며 첫 열매임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이들 세 절기들을 살펴 볼 때,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이며, 무교절은 성도들의 구별된 생활을 예표하는 것이며, 초실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 초실절을 때때로 오순절(五旬節)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성령이 내려와 성도들 가운데 거하시게 된 날이 곧 이 날로서 우리에게는 주로 오순절로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이란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다음 성구에서 알 수 있습니다.

"(레23:15)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레23:16)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오순절(칠칠절)은 유월절로부터 정확하게 50일째 되는 날 거행되었습니다. 오순절을 가리키는 헬라어 "펜테코스트"(pentecost)는 "50번째"라는 뜻인데 이 예표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50일째 되는 그 오순절날에 이루어졌던 것입니다(행2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1500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리라는 약속을 주셨고, 신약을 통해 우리는 그의 강림이 오순절날에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성구에서도 성령이 약속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욜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이 말씀의 성취는 오순절에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성취의 과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음의 성구들은 성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약속하시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수께서 아직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는 그의 삶과 역사하심의 의미가 제자들에 확실히 인식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구세주로 보았으며 자신들에게도 분깃이 돌아 올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자 낙심에 빠지게 되었고 그들은 소망없는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충격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 예수께서 보내시겠다고 하신 다른 보혜사에 관한 약속을 곰곰히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다음과 같이 확증하셨습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분명히 제자들은 성령이 오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생활과 사역에 전적인 변화를 가져 오게 했던 것이 바로 그 증거들입니다. 성령이 안 계셨더라면 그들은 절망 가운데서 삶과 사역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 사실 자체가 그들 제자의 수를 증가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나 부활의 몸을 직접 보여 주셨지만 여전히 담대하지 못하였고,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예수를 체험했지만 여전히 낙향(落鄕)하여 예전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요 21:1-14). 성령의 권능이 임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삶이 전혀 새롭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즉 오순절날 3000명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제자들의 공포와 패배를 영광스러운 승리로 바꾸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이 예수께서 약속하신대로 강림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 역사에 있어서 새 날이 밝아 온 것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세워진 교회는 날로 확장되어 당시 유럽을 시작으로 하여 세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모든 문명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과히 성령은 교회탄생케 하였고, 그 교회를 통한 성령의 권능은 세상과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개혁의 주체, 변화의 주체로 역사(役事)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통한 성령은 한 개인과 더불어 나라 민족의 역사를 변화시키는 개혁의 주체인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 한 사람이 성령으로 변화되었을 때 영국의 부패한 사회가 변화되어 산업사회의 번영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트루니에'라고 하는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위스에 30년 동안 정신과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러 다녔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대개 정신병자들은 그 원인을 분석해 보면 과거의 괴로왔던 일이나 어렸을 때 받았던 고통이나 충격이 있는데, 그들의 의식 속에서 그런 것을 찾아내어 고치는 것이 일반적인 치료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의식을 분석하고 과거를 분석해 보아도 그녀의 병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트루니에는 정신과 의사이면서 그리스도인이었기에 이 여자와 같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도록 도왔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여자는 자기의 잘못된 것을 낱낱이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30년 동안 정신과 의사들이 진단하고 분석해 보았어도 밝힐 수 없었던 그 여자의 병이 갑자기 치료되면서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황홀한 자유가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예수님이 나를 고쳐 주셨고 나는 주님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행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예수 전 시대에는 성령이 늘 사람들 위에(upon) 내려 오셨지만, 이제는 성령이 사람들 안으로(in) 오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간 역사에 대한 통치권을 선포하기 위해 내려오셨을 때 두 가지의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곧 바람과 불이었습니다. 성령의 오심이 마치 바람과 불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바람의 상징은 다음의 성구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무도 그의 존재와 힘에 대해 부인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거듭남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役事)도 이와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르신 말씀(요 3:8)은 죽은 죄인들에게 신적인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 성령 곧 "호흡"(바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면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인격과 생활의 변화를 보면 성령의 강림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윌리엄 제임스(W. James)라고 하는 유명한 심리학자에게 어떤 사람이 "영감(inspiration)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하자, 제임스는 "난 설명할 수 없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분은 보스톤에 있는 필립스 브룩스라고 하는 목사님이오. 그 분께 물어 보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적인 한계를 나타내 주는 좋은 예입니다. 어떤 사람이 변화받고서 거듭났다고 하자 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예수님이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모르겠는데요."

"몇 살 때 세상을 떠나셨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아니,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예수님 믿는다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지적(知的)으로는 알지 못해요.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부터 게을렀던 내가 부지런해졌고, 아내에게 못된 짓을 하던 내가 진실한 남편이 되었고, 과거에는 거짓말과 악행만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변화된 것은 분명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삶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지식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거듭남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근본적인 개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두번째 상징은 불이었습니다. 유대인에 관한 한 하나님의 임재는 항상 불로써 상징되었습니다.

"(출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19:18)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왕상18: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성령은 "소멸하는 영", "소멸하는 불" 등으로 말합니다.

"(사4:4)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히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말3: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말3: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거했습니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성령께서 오셨다는 위대한 진리를 인간들에게 분명히 밝혀 줄 수 있는 더 이상의 적절한 상징은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며 깨우치시며 정결케 하시는 능력을 바람과 불처럼 우리에게 적절히 보여주는 상징도 없을 것입니다. 성도가 무지 중에 혹은 깜박잊고 성령의 오심을 구한다면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비기독교화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면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들에게 와 계십니다.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제 모든 일을 멈추고 성령을 주신 데 대해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시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성령은 모든 성도들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구석에서 그는 은혜로운 역사를 계속 이루어 나가십니다(성령의 무소부재의 속성).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살후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미국의 애리조나 주에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인디언들에게 세금도 면제해 주었습니다.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국가적인 보호와 혜택을 받아서 살고 있는 인디언들이 거의가 알코올 중독에 걸려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그곳에 사는 백인들은 혜택이 전혀 없어도 윤택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의 집이나 거리는 더럽고 추하고 무질서하였습니다. 술병을 하나씩 손에 들고 비틀거리면서 거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미국 사람들이지만 세금도 내지 아니하고 보호구역에 사는 인디언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것은 조건과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제도나 사회보장제도, 정치적 발전 등이 아무리 잘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자유와 정의의 사회를 이룩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길은 인간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지식이나 경험을 통해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참한 인간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은 오직 성령의 능력뿐입니다.

세상에서 교육의 참 모습을 <몸과 마음 닦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튼 고등학교의 신사교육, 신라의 화랑도, 동방종교의 참선과 명상, 무예(武藝)와 예락(藝樂), 의전(儀典)과 의식(儀式), 음악 미술 문학에 대한 조예, 자연속의 관조화 생명예찬, 문화재 음미, 역사기행, 운동시합의 페어플레이, 지옥훈련의 힘겨움, 갈등조정의 훈련.... 등. 이런 것을 말하자면 교육의 기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 교육의 현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네 학교 교육은 심신의 살찌우기가 아닌 스트레스 주기, 피로와 짜증 주기, 갈등에 시달리게 하기, 쓸데없는 것 많이 외우게 하기, 싫은 데도 억지로 무엇을 하게 하기, 진절머리나게 재미없게 살게 하기,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기, 아니 사람이 도대체 무슨 재미와 낙으로 살아야하는지 모르게 하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고3 아이들 사는 것을 보면 이건 숫제 사람의 삶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곤충일 뿐이다. 학교에 가도 시험, 집에 가도 시험, 시험, 시험.... 우리는 이런 식의 <살리기>아닌 <죽이기>를 교육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세상 교육은 결국 근본적으로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참 교육의 시작을 성령으로 시작합니다. 인간은 인간에 의해 "그 몸과 마음이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새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옛 사람을 뜯어 고치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否定)하게 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완전히 죽게 하므로서 성령이 내주(內住)하여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인도하시는 주는 다름 아닌 성령 자신입니다. 세상과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교회를 탄생시킨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 운동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 영광과 승리로운 삶으로의 변화와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와 나라 민족의 근본적이고 복된 개혁과 변화를 위해서는 오직 "바람과 불"같은 성령의 맹렬한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야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에 오직 성령의 권능이 충만하시어 이 시대의 참된 개혁과 변화의 주체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이 홀연히 변화될 때까지 성령의 권능은 성도 여러분들과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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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통일의 주체-성령

"(행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행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2: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행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본도와 아시아, (행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행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2: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행2:13)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금년은 한국전쟁 발발 4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물질(경제)에 가리워 "잊혀진 전쟁"(forgot war)이 되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야드베쉼이란 유대인의 민족박물관이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시 독일의 히틀러 정권이 서울 인구의 절반이 넘는 유대인 6백만 명의 귀한 생명을 처참하게 학살한 전시관이었는데, 유대인은 그 전시관에 "과거를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 말라."는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미국에서는 휴전 42주년(1995년 7월 27일)을 기념하여 위싱톤에 <한국전쟁 기념 전시관>을 10여 년 전부터 준비하여 설립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을 영원히 잊지않기 위해서 금년 7월 27일을 기하여 뉴저지주 287번 도로를 <한국전쟁 기념 도로>로 개명하기로 의회에서 결정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선 민족 분단을 초래한 전범(戰犯) 김일성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떻했습니까?

김일성과 호네커(구동독 공산당 서기장), 이 둘은 다 분단 체제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최고권력을 누린 인물들이지만 말년의 인생은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에리히 호네커는 1971년 구동독 권력구조의 정상에 올라섰지만 1994년 5월 29일 81세의 나이로 남미 칠레에서 암으로 고생하던 중 외로이 죽었습니다. 자신의 유해가 고국땅에 묻히기를 원했다지만 끝내 그의 고향인 비헬즈키르헨이나 그의 여동생이 가족묘지를 갖고 있는 노인키르헨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산티아고에 묻혔습니다.

이에 반해 김일성 장례식은 북한 주민의 오열과 대대적인 추모 속에 성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호네커가 죽었을 때 독일 언론들은 냉정했습니다. 짤막한 보도를 통해 그가 젊은 시절 반파시즘운동을 했고 감옥생활을 했으며 양독 관계개선과 긴장완화에 공헌한 점 등을 인정했습니다. 동시에 그가 소련의 지지를 업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 베를린장벽 건설의 총책임을 맡았으며 비밀경찰 제도를 강화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베를린장벽 탈출자들에게 총을 쏘도록 한 점 등에 대해 과오를 지적했습니다. 김일성에 비하면 호네커는 그 만큼 피를 흘리게 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호네커 인생의 황금기는 아마도 1987년 9월 그가 정상회담차 서독을 방문한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그는 국빈대우를 받았습니다. 서독 언론도 그의 화해와 공존정책을 추켜세웠습니다. 그러나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그의 운명은 천길 아래로 굴러떨어졌습니다.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린치위협을 피해 베를린 주재 소련군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호의로 소련군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을 탈출한 뒤 독일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러시아마저 옐친시대가 열리자 그는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1992년 6월 독일로 이송됐습니다. 그 뒤 그는 베를린 지방법원 법정에서 곤욕을 치렀습니다. 베를린장벽 희생자 가족들이 그를 살인혐의로 고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서 유치장 신세도 졌습니다. 그는 곤혹스러운 심문에 건강을 이유로 대답을 회피하던 중 간신히 병보석을 얻어 1993년 3월 칠레로 망명의 길을 떠났으나 말년의 가혹한 시련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15개월 만에 암으로 객지에서 죽었습니다.

호네커와 비교할 때 김일성은 절묘한 시기에 죽음으로써 남한은 물론 미국.일본 등 세계도처에 미묘한 충격과 파장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바로 그의 죽음을 못내 아쉬워하는, 당혹스럽지만 부정할 수 없는 국민정서입니다. 그의 죽음이 처음 보도됐을 때 박수치는 국민은 매우 적었습니다. 오히려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이에 차질이 생긴 것을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마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 금방이라도 통일이 이루어질 것처럼 기대했던 것입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즉각적이고 공식적인 애도와 조의 표명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김일성의 공적이 어떠하건 간에 호네커와 비교할 때 그의 과오가 더 크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일으킨 죄악은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의 돌연한 죽음이 불러온 국민정서 흐름과 이 역사적 진실 사이에 미묘한 불협화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문화국민의 전통에 따라 아무리 원수라 하더라도 망자(亡者) 앞에서는 명복을 비는 예(禮)의 문화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무리들, 조의를 표한다고 역사적 진실에 눈을 감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므로 남북관계의 개선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다 하기 위해서 조문사절을 보내야 한다는 무리들, 메카시즘(극단적 반공주의) 선풍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무리들 등으로 사회는 균열되고 미묘한 불협화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도 인간적인 유화정책을 사용했던 다윗은 크게 낭패를 당하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망명길에 오를 때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역적(逆賊)의 무리 가운데 가담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반역의 무리들을 평정하고 환궁하게 될 때 다윗은 국민적 대화합이라는 차원에서 유다 지파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유다 지파를 회유하기 위해서 반역군 평정에 크게 공헌한 요압 군장(軍長)을 해임하고 반역군의 장수인 아마사를 임명했던 것입니다.

"(삼하19:13)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남다른 공헌을 세운 요압의 공로를 무시하고 반역의 최일선에 섰던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았던 것은 다윗의 결정적인 실수였으며, 이 실수는 훗날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하고 맙니다(삼하 20:9,10). 지나치게 인간을 의식하거나 자기 감정에 사로잡히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실수하기 쉬운 것입니다. 환부(患部)를 칼로 째고 고름을 짜 내는 것과 같은 선행조처가 없이 무조건적으로 공동체 화합을 부르짖는 것 만큼이나 위험스러 일은 없는 것입니다. 민족 통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 상황이 아무리 변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한국전쟁(6.25)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전쟁의 인명피해는 남한에서는 사망 638,160명, 부상. 납치. 실종된 사람이 1,499,065명에 이릅니다. 북한측에서는 사망 884,279명, 부상. 실종된 사람이 3,328,763명에 이르고 있습니다(이 수치 속에는 민간인, 군인, 유엔군, 중공군이 모두 포함되며, 북한의 실종자 가운데는 월남민이 포함됨). 또한 한국전쟁을 통해 엄청난 재산손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발발 후 1952년 3월까지 입은 재산 피해에 대한 국방부의 통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반기업체 시설피해 6,874억 원, 일반기업체 건물피해 1조 1,310억 원, 일반주택 피해 3조 5,290억 원, 토목시설 피해 3,269억 원 등만 합쳐도 5조 6,743억 원이 됩니다.

전쟁의 결과 많은 피난민이 생겨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이 618,721명, 남한내에서의 피난민이 1,714,192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산가족이 1,000만 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은 가족의 붕괴와 전쟁고아 및 전쟁미망인의 출현을 초래하였으며 인구이동은 안정된 지역공동체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족이나 지역공동체와 같은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것과 아울러 산업시설과 재산의 파괴로 인한 극심한 빈곤은 당연히 삶의 위기감을 조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6.25전후 기독교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8.15해방의 감격도 오래지않아 사상때문에 동족상잔의 피흘리는 6.25가 발발했습니다. 스탈린의 소련팽창주의 정책에 일치되어 대 일본전쟁참가는 이미 2월 얄타협정에서 한국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한반도를 분할하고 있었습니다. 원자폭탄 투하와 함께 대일선전으로 참전한 소련은 총 한 방쏘지않고 한.소국경인 두만강을 건너와 8월 24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여 사령부를 설치하는 신속성을 보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북위 38도선까지 내려와 남북을 분할하는 일에 서슴없는 행동으로 백성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예루살렘인 평양에서는 해방으로 형무소에서 출소한 출옥성도들이 한국교회 재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투옥된 목사들은 일제신사참배에 참여했던 한국교회의 정화를 위해 회개와 자숙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북한 사회에서는 일제 시대에서부터 교회 지도자들이 사회지도층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9월 신의주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목사 윤하영, 한경직 등이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함으로 해방 후 최초의 정당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뒤이어 평양의 김화식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기독교유당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심각한 불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도시마다 해방을 맞이 군중대회가 기독교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본 소련과 공산당은 북한내의 기독교 영향력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관계된 용암포사건과 신의주학생사건은 소련과 공산당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해방 후 처음맞는 3.1절은 한국교회에게는 남다른 감회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33인의 민족대표가운데 16인이 교회지도자였음을 긍지로 여기고 있는 한국교회는 거교회적으로 기념행사를 갖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묵과할 수 없는 소련당국과 공산당은 급조한 북조선인민위원회로 3.1절 행사를 주도케하여 교회중심 기념행사를 저지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는 평양, 신의주, 원산 등지의 북한 교회는 3.1절 기념행사를 예배와 함께 진행함으로 공산당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조직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수행되어갔습니다. 반공적인 교회활동을 간과할 수 없었던 공산당은 각종행사를 주일에 실시하여 교인들의 주일예배출석을 방해하였고, 정치강연을 교회당에서 강요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북한총선거일을 주일인 1946년 11월 3일로 공고하여 계획적으로 주일성수를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북한 교회는 "주일선거 반대결의문"을 발표하여 교회의 생명인 주일 성수를 지켜냄으로 종교탄압에 대한 교회의 의지를 천명하였습니다.

신앙수호를 위한 교회의지를 쉽게 꺾을 수 없음을 안 공산당은 목사였던 강량욱을 앞세워 기독교도 연맹을 만들고 교역자들을 회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감언이설과 위협으로 목사들을 가입시켜 기독교도연맹은 김일성 지지와 주일선거 자진참여 등을 결의하여 기독교를 무력화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북한 교회는 선거에 불참함으로 교회의 참 모습을 보여주며 지켜나갔습니다.

기독교도연맹은 기독교도연맹총회로 이름을 바꾸어 세력을 강화시켜 끝까지 가입하지 않고 버티는 교역자들을 파면, 제명하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공산당은 그들을 교회에서 추방과 투옥으로 괴롭혔으며 그들이 사역하였던 교회당은 정치학습장으로 강제징발하였습니다.

갈수록 거세어지는 탄압을 견딜 수 없었던 많은 교역자들과 신도들은 월남하거나 기회를 놓친 이들은 6.25후퇴때까지 지하교회로 숨어들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교회만이 살아남을 수 있지만 아직도 전 지역 공산당의 손이 미치지 못한 때이기에 신자들의 보살핌 속에서 목회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일제에서 해방된 후 남한이 좌우익사상의 혼란과 서구문물 유입으로인한 가치관의 혼란 등을 겪고 있을 동안 북한은 토지개혁과 사상정리를 마치고 "남조선해방"이란 기치아래 강력한 군대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침에 앞서 그 때까지 남아있던 교회지도자들을 총검거하였으며 대부분의 교회를 폐쇄하였습니다.

오랜 준비와 훈련으로 강화된 공산군은 소련군 탱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8월 15일까지 한반도 적화통일이라는 목표아래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끝없는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하루아침에 돌변하였습니다. 승승장구하던 공산군은 9.28수복 후 허리가 잘린채 패퇴를 거듭하였습니다.

후퇴하던 그들은 교회지도자들과 신도들을 강제로 끌고 가다가 곳곳에서 생매장, 총살, 타살, 자살 등으로 집단살해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신도밀도가 가장 높은 평북, 용천, 의주 등은 연합군이 진주하지 못하여 어느 곳보다 많은 신자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통일을 눈 앞에 두고 기뻐하고 있을 때 중공군의 참전은 민족에게 또 한번 뼈아픈 비극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혹독한 추위로 후퇴하던 군대들을 따라 남하하는 피난민들 속에 신자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4후퇴 때 피난의 기회를 놓친 신자들은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은 북한내 교회당을 거의 불태워 교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북한에서 순교한 이들을 우리들은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나 그들 순교자의 피는 깊은 광맥처럼 북한 교회에 흐르고 있어 반드시 되살아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남한교회는 북한교회에서 출옥성도들의 교회재건운동처럼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총독의 종교정책에 의해 조직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간부였던 지도자들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교권을 쥐고 있었기에 교회정화를 위한 회개운동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일제 때 통합된 교단지도자들로서 교단 존속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각 교단들은 교단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남북대회는 무산되고 교단별로 교회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북한교회와같이 회개운동도 없었고, 해방후 정치세력에 의한 핍박도 없는 가운데 재건되었습니다.

북한교회와는 달리 남한교회는 교권장악에 힘썼던 소수의 교권주의자들로 시달리고 있었고 월남한 목회자와 관계, 신학교문제 등으로 어수선했습니다. 1948년 10월 여수, 순천에서 일어난 반란은 남한에서의 교회수난의 시초였습니다. 호남지역에서도 교세가 강했던 이 지역에서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출옥성도인 손양원목사 아들 동인, 동신 형제의 순교와 아버지 손목사의 원수사랑의 실천, 그리고 6.25때 손양원 목사의 순교 일화는 한국교회 순교사의 꽃이기도 합니다.

파죽지세로 몰아닥친 공산군의 침략으로 공산당의 탄압을 경험해보지 못한 남한 교역자들은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3개월 동안의 공산치하에서 다행히도 견디어왔던 교역자들은 후퇴하는 공산군에게 더 많은 희생을 당했던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당한 영.호남지역의 공산군들은 10월 중순 수복될 때까지 우익인사, 교회지도자과 신자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였습니다. 특히 전남의 도서지역에서의 집단학살은 인간임을 거부하는 악독함이었습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던 교회지도자들의 고생은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후퇴하던 공산군은 목사와 우익인사들을 색출하여 북으로 끌고갔습니다. 허약하거나 병들고 지친 사람들은 가다가 아무곳에서나 집단생매장, 총살, 찔러죽이는 등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순교, 납치 등의 인명손실뿐 아니라 교회당의 소실, 파괴 등도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으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동족간의 전쟁을 치른지 45년이 지났습니다. 빈번한 남북한의 접촉과 대화로 한반도의 통일이 성큼 다가선듯한 착각으로 지난 날의 비극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소흘히 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의 책임자는 분명하게 밝혀져야되고 신앙의 자유와 종교를 말살하려고 수 많은 목사, 전도사, 장로와 일반신자들의 생명을 빼았었던 공산정권의 죄악은 남김없이 기록되어져야 합니다.

삼천리 화려한 금수강산 방방곡곡에 흘려졌던 순교의 피는 오늘도 쉬지 않은 채 한국교회를 지켜보고 있음을 믿음의 후손된 우리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옷깃을 여며야 할 것입니다.

3.1운동 이후 공산주의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종교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이고,

둘째, 그 당시 기독교회에 많이 등장한 내세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신앙운동에 대한 불만이었고,

셋째, 사회문제나 민족문제에 대한 두 진영 사이의 노선 차이 등이 그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첫째, 무신론적이고 유물사관적인 공산주의 이념,

둘째,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공산주의 사회건설 방법 등을 이유로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태도를 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방후 북한에서는 기독교와 공산정권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한국전쟁 결과 기독교회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매우 심한 박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북한교회에서 순교하거나 실종된 성직자 혹은 교회지도자의 명단이 밝혀진 경우만 해도 162명에 이르며, 남한교회의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의 수도 15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948개 처소의 교회당이나 기독교 기관건물이 전소되거나(243처소) 반소되는(705처소)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북한정권이 취한 정책을 보면, "반동적 장로, 목사들은 땅을 안 가졌던 자가 거의 없고 놀고 먹지 않는 자가 없는" 부르주아계급으로 규정하였으며, 따라서 '악질적. 반동적' 종교인들은 처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미제국주의자들과 연계'되었다는 누명을 씌워 체포하고 학살하는 정책을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탄압단계는 전쟁 때문에 더욱 가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종교인들이 공산정권에 가장 세찬 반대운동을 했고 유엔군의 북진을 가장 환영하고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하철의 책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에 보면 다음의 글이 있습니다.

"지난 3년간의 조선전쟁과 오늘 남조선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미제가 감행한 무고한 인민에 대한 학살, 약탈, 방화 등 비인간적이고 야수적인 만행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약탈에 이용되는 종교의 추악하고 반동적인 본질을 말하여 주고 남음이 있다."

기독교국가의 군대인 미군에 의해 혹독한 피해를 당했던 북한당국자들은 미국과 기독교를 동일시하여 그와같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북한교회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도자와 신도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었고, 전쟁을 통해 강화된 북한당국의 경직된 태도에서 나온 종교탄압정책에 눌려 거의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변화된 국제적 환경 속에서 북한당국은 필요에 의해 1988년 10월 평양 봉수동교회가 세워질 때까지 교회는 존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북한 기독교의 실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1946년 11월 28일 창립된 북조선 기독교도연맹이 모체로서, 1960년에 잠적했다가 1974년 다시 등장했습니다. 현재 위원장은 강영섭이고 서기장은 고기준이었으나, 고기준은 최근에 사망했습니다.

1993년 말 현재 2개의 교회와 500여 개의 가정교회가 있으며, 20여 명의 목사와 130여 명의 전도사(책임지도원)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신도 수는 약 1만 명 정도입니다. 정식 교회당으로는 1988년 건립된 봉수교회와 1990년에 건립된 칠골교회가 있습니다.

평양시 만경대 구역 건국동(옛 봉수동)에 있는 봉수교회의 신도 수는 300여 명인데 여성이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칠골교회(평양시 만경대 구역 칠골동)는 1992년 증축하여 규모를 늘렸으며, 김일성의 생모인 강반석의 이름을 따 반석교회로 불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예배의식은 남한과 같습니다. 정면에 십자가가 걸려 있고, 기도를 드리며, 성가대도 운영하고 가끔 특별 찬송도 부릅니다. 성경은 1990년에 만들어진 신구약 합본(1만부 발행)을, 찬송가의 경우도 그 해 4월에 만든 찬송가(401곡 수록)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헌금시 <잠자리 채> 헌금함을 사용하고 있어 남한교회의 과거를 회상케 합니다.

세계 선교문화원장 임성기 목사에 의하면 세 종류의 교회가 북한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공식적인 교회로서, 정부에 의해서 일정하게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 교회에는 교인들이 번갈아 가면서 참석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1년에 한 번씩 교회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교회는 가정교회입니다. 북한 당국은 외국 사람들과 세계의 여론을 의식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가정교회를 허락했습니다. 지금은 약 500-1000개에 이르는 가정교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기도회와 성경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교회는 지하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철저히 비밀리에 활동하기 때문에 결코 그 정체가 아무에게도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교인 한 사람을 만들려면 매우 신중을 기해 전도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가정에서 쌀이 떨어지면(어느 가정이나 정부에서 주는 배급쌀이 정한 기한까지 가지 못하고 떨어집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쌀을 보내 줍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몇 차례 쌀을 받아 먹은 후, 지하교회는 <쪽복음> 성경을 쌀과 함께 넣어서 보냅니다. 이 전도 방법에 의해 믿음을 갖게 되면 지하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게 됩니다.

세례는 예배에 몇 차례 참석한 후, 지하 교인들이 안전원을 가장하여 그들을 데려다가 위협과 협박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무사히 통과된 사람들이 세례를 받게 됩니다.

북한 정권이 종교를 용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습니다. 북한의 종교단체들이나 종교인들의 활동을 보면, 주로 북한의 정책이나 입장을 지지하고 대남 비방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그치고 있으며, 순수한 종교 활동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시인 키플링(R. Kipling 1865--1936)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 동(東)은 동(東), 서(西)는 서(西), 이 둘은 결코 만나지 않으리라. 땅과 하늘이 신의 위대한 심판석상에 설 때까지." 키플링이 동은 동, 서는 서, 결코 만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분단된 한민족은 남(南)은 남(南), 북(北)은 북(北), 결코 만나 통일을 이룰 수 없는 것인가.

1995년은 우리 민족이 잔혹한 일본제국주의의 36년 간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50주년을 맞게 되는 해입니다. 동시에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 뿐 아니라 6월은 같은 민족으로서 동족에게 총뿌리를 겨누고 죽인 6.25전쟁 4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역사의 주체가 되는 교회의 탄생을 가져 온 성령강림절이 있기도 뜻 깊은 달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통일의 주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진정한 나라 민족의 통일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교회 탄생을 가져왔으며 교회는 그 통일 과업을 수행하는 역사의 유일한 기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통일성 또는 합일성)과 다른 영(靈)들의 어지럽게 함을 대조시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4: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인간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열 사람은 함께 아수라장을 벌이고 말 테지만,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열 사람은 함께 하나를 이룰 것입니다.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려 흩어졌던 형제들이 한 마음 한 뜻, 참된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분쟁과 다툼과 불일치가 있는 곳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은 인간을 높이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진정한 통일은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강림으로 탄생한 교회를 통해서 인류는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통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인 것입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골로새서의 중심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3:3,1:19,2:9,1:14). 에베소서의 중심 사상은 그러한 사상을 발전시킨것이다. 교회를 통한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되어질 때 나라 민족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전체 사상은 제 1장에 나오는 두 개의 구절에서 요약되고 있고 있습니다(1:9-10).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핵심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을 하나로 모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부조화와 분리와 분열이 가장 불행한 사실이며, 여기서 나와 너(ich und du)그리고 나와 그것(ich und es)과의 분리, 분열, 부조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분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에베소서의 중심 사상은 자연계의 분리와 인간의 분리와 시간의 분리와 영원의 분리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든 분리는 다만 모든 인간과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될 때만이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의 근원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입니다. 당시 로마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묶이는 것을 바라보고, 세상 모든 것이 로마 보다 완벽한 충만성을 가진 그리스도 안에 집중되여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상징과 비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통일의 개념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먼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손, 발 등 도구와 지체가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화해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세째, 통일의 주체가 되는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통일된다는 사실을 전파해야 합니다.

"인생의 모든 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그리스도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 교회는 전 세계적이며 전 우주적인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라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교회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E.F.Scott)."

1989년 냉전 시대의 대표적 상징을 뜻하던 베를린 장벽이 헐리고 이듬해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었습니다.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되고 1991년 8월 28일 '현존 사회주의'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이 붕괴되었습니다. 1917년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 이래 74년 간이나 통치하여 온 소련 공산당이 그의 붉은 깃발을 내리고 종언을 고하였습니다.

그 후 세계 질서는 재편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대결인 동서의 대결에서 경제적 문제인 남북의 대결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경제 문제도 블럭화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민족과 인종을 앞세운 민족주의 고양과 인종에 의한 지역 분쟁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적 이기주의를 꾀하고 있습니다.

세계에는 사회주의를 체제를 이념으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중국, 베트남, 쿠바, 북한이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한반도에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는 지구상 분단의 마지막 국가로 남아 탈냉전 시대에 냉전 지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분단된 국가는 4개국입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1949년 10월 1일 중국이 중공과 대만으로, 1954년 7월 21일 베트남이 월맹과 월남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이들 분단 국가들은 차례로 통일을 실현하였습니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은 적화 통일되었고, 1990년 10월3일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통일'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대만의 분단 문제는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분단국 문제로 취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면 1971년 유엔에서 대만이 추방된 후 세계의 여러 국가는 중공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대만은 중국 내 영토의 일부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분단 국가는 '우리 한반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의 주범이 김일성이었다는 사실은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년 6월 러시아 정부가 제공한 구소련 6.25관계 문서와 그 전후부터 최근까지 러시아에서 발견된 새 자료들은 김일성이 북한 정권 수립 직후부터 남침을 계획하고 스탈린과 모택동을 끈질지게 설득하여 무력남침을 감행한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끝났으나 전쟁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데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공산당의 몰락과 냉전종식에도 불구하고 6.25는 민족해방전쟁으로서 북침이냐, 남침이냐를 가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이른바 신수정주의학파의 주장이 여전히 소모적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의 장을 만들고 있는 한 6.25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혹 전쟁 미체험 세대들에게 위험하고 낭만적인 6.25전쟁관을 전파시키는 이론이 된다면 비극은 더욱 증폭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탈냉전 이후 세계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유일의 폐쇄사회인 북한은 6.25 그 날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상은 철저히 통제되고 주민들은 고립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억압과 동원체제에서 조금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금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쌀을 무상으로 제공받고 있으면서도 정전협정 파기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쟁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모두 풀고 하시(何時)라도 전쟁재발 명분을 얻어 가지고 전쟁을 재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들이 먼저 중립국 감시단과 중국 감독관을 무조건 일방적으로 철수시킨 것은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년 1개월 간의 6.25(1950.6.25--1953.7.27) 6.25라는 전쟁(한국전쟁)은 약 450만 명의 인명 피해와 산업시설의 43% 파괴, 주택 33% 완전 파괴 등의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남북한의 극심한 냉전적 대결 구도 속에서 서로 이질화된 삶의 양식과 가치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념 지향적인 가치관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집단주의적이고 조직 지향적인 가치관이 만연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유교 문화와 가치관이 온존하고 있습니다. 강한 통치 방식인 중앙집권력은 김일성 개인 숭배를 가져왔고, 김일성을 '어버이'로 호칭하는 '국가가족주의' 내지 '가족주의적 국가'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체 사상의 유일 사상적 가치관과 시혜적 가치관이 국가에서 배급하는 배급제 방식 때문에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런가하면 남한에서는 가치관이 전도(顚倒)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즉 본래적 가치가 도구적 가치로, 수단적 도구적 가치가 본래적 가치로 뒤바뀌는 사회를 말합니다. 돈이나 권력 등 외면적 가치를 중시하고, 인격. 학문. 사랑. 평화 등 내면적 가치를 경시하는 풍조입니다. 금전과 권력 지향적이며 관능적, 감각적 쾌락의 추구,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적인 경향, 연고주의 내지 정실주의, 외관을 중시하는 경향, 노동 천시, 인명 경시, 주체성이 빈곤한 순응주의, 정신적 빈곤에서 오는 반지성주의, 사고력의 열악성에서 오는 인정 편중 경향성 등입니다.

남한에서는 천민 자본주의로 물질화된 물질 위주의 가치관이 지양되고 정신적 가치가 중시되는 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경우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완전히 통일이 되었지만 1등 국민(서독)과 2등 국민(동독) 사이에 마음의 장벽과 사회적 장벽은 아직도 높이 쌓여 있고, 과거에는 1민족 2국가였지만 이제는 1국가 2사회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라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운동은 다음과 같은 유형들이 있었습니다.

민족운동의 방법적인 유형을 분류하면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내 목숨을 걸고 원수의 목숨을 강요하는 피의 항쟁입니다. 갑신정변의 쿠데타, 갑오 동학란의 민중봉기나 을미의 의병, 을사의 시위연대 항쟁이나 병오. 정미의 의병, 1920년대의 만주 방면에서의 독립군 전투, 1940년대의 광복군의 대일참전 같은 무력항쟁이 그 한 갈래요, 광복회.의열단.파괴단 같은 폭격 암살단과 무수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의사. 열사에게서 보는 폭력항쟁이 다른 한 갈래며, 을사보호조약, 또는 경술국치 직후의 수 많은 순국에서 보는 자결이 또 한 갈래가 됩니다.

둘째, 민족의 요구를 절규하며, 국제여론에 호소 청원하는 조직적 시위의 항쟁입니다. 3.1만세. 6.10만세. 학생만세 같은 비폭력 시위운동이 그 한 갈래요, 헤이그평화회의. 파리강화회의. 국제연맹 등에 대표를 보내고 스톡홀름의 만국사회당대회. 뉴욕의 25약소국회의.모스크바의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등에 대표를 보내어, 한국 독립문제의 후원을 호소하는 등의 외교항쟁이 다른 한 갈래며, 독립협회. 독립청년단. 대한외교청년단. 애국부인회나 흑우회. 공산당. 신간회. 근우회 등 무수한 비밀결사, 또한 합법적 조직운동의 항쟁이 그 또 다른 한 갈래입니다.

셋째, 민중을 계발하고, 민의를 대변하며, 민족의 요구와 이념을 구현하는 문화항쟁입니다.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와 개벽. 조선지광 등 신문. 잡지의 언론항쟁이 그 한 갈래요, 문학.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의 예술운동과 사학. 어학. 민속학 등 국학연구운동과 각종 체육경기운동. 종교운동. 여성운동. 소년운동. 형평운동. 물산장려운동. 협동조합운동 등 사회운동으로 표현된 문화항쟁이 그 다른 한 갈래이며, 미션계의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뒤를 이어 서우학회. 기호흥학회. 호남학회. 관동학회 등이 일어나, 사립학교 설립운동과 민립대학운동 등으로 나타난 교육항쟁이 그 또 하나의 갈래였습니다.

이제 참된 민족 구국 운동은 요한 웨슬레를 통하여 보여 주듯이 성령운동을 통한 인간성 회복과 교회의 갱신과 회복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인간성 회복과 교회 갱신과 회복을 위한 성령의 역사가 이 나라 민족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을 통한 나라 민족의 진정한 통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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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성령받은 교회의 모습

"(행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요즈음 교회 내에서 성령을 받았다는 분들로 인해 목회자들이 가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변해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여 목회자들을 우습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여러 모로 교회를 어지럽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은 교회 생활보다는 기도원을 즐겨 찾으면서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여 많은 성도들을 미혹케 합니다. 이러한 일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 경험이 있는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 성령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부작용이 두려워 성령운동 자체를 반대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곧 그 공동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생물에게는 먹고 먹히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생물의 세계에서 생존 투쟁이 벌어집니다. 그토록 뜨거웠던 초대 교회도 모든 것이 원만했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에도 항상 문제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받은 초대 교회의 모습, 즉 성령 받은 제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초대 교회의 첫번째 모습은 열심히 배우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행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사도들을 통한 설교와 성경강해 등 예수께 대하여, 그리고 구약과 그리스도와의 연결에 대하여 그들은 열심히 배웠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열심히 성경공부하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의 선교중에 가르침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초대 교회에서는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모여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오늘날 교회 교육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쉐마"(신명기 6:4-9)를 보면 우리의 교회 교육이 쉬지 않고 끊이지 말아야 하는 것임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신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地上) 사역(使役)은 가르침과 복음전파와 병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르치는 일은 예수님의 생애에 가장 강조된 사역이었습니다. 교육은 예수님의 최대의 사업이며 최대의 관심사였기에 먼저 제자들을 선택하셨고 계속 주위에 몰려 온 군중에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예수님을 랍비, 즉 선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막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요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님 자신도 그 표현이 옳다고 하셨고 자신의 메시야적 사명을 성취하시려 할 때 가르치는 교육적인 기능을 통해 수행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요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예수님의 최후적인 분부를 할 때에도,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 하심으로 오늘날 교회의 교육적 사명을 밝히셨습니다. 때문에 성령받은 초대 교회에서도 가르치는 일을 교회의 중심사건으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교육의 주체는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과 함께 하는 교육일때에만 신앙을 바르게 교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많이 읽고 가르쳐도 생활을 향상시키거나 성화(聖化)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계시되고 받아들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육의 내용이 되는 성경과 성령의 관계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히 4:12, 벧전 1:23).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생명을 낳지는 않습니다. 말씀은 성령의 역사적(役事的) 능력이 수반될 때만 효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이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서 말씀과 동시에 역사해서 신앙을 창조해 내고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도록 하지 않는 한 효력을 발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성경이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지만" (히 4:12) 성령의 사역이 없으면 그것은 효력 있게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말씀을 적용하는 한도 내에서 성경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말씀의 내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마음과 머리에 성령께서 말씀을 적용하시는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명칭이 52가지가 있는데 이 중에 성령의 교육 사역에 관한 것이 적어도 7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의 영",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과 여호와 경외의 신", "진리의 영", "보혜사", "지혜와 계시의 영" 등입니다.

"(출28:3)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 내게 제사장직분을 행하게 하라."

성령은 제사장의 옷을 짓는 제단사들에게 신령한 지혜의 근원이 되셔서 그들로 하여금 맡은 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사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위대한 지상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지혜와 총명의 신"이신 하나님의 영(성령)을 덧입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모략이란 좋은 충고를 줄 수 있는 능력을 암시하고, 재능이란 그 모략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암시합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에게 "모략과 재능의 신"을 역사하시므로 그로 하여금 지상에서의 교육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성령의 여러 명칭중 맨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최종적인 결과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결실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요한 복음에서만 세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의 영"이란 진리의 근원으로서의 성령을 말하며, 진리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믿는 자들의 생활에 진리를 적용시키실 수 있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보여 주고, 장차 다가올 일들을 가르쳐주며, 모든 것을 가르치며, 과거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신자들 속에 내주하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선고하며, 그리스도 부재시에 제자들을 위로하여 그리스도의 역사를 계속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 보내실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지혜와 계시의 영"은 신자들이 성령을 통해서 영적인 일들을 이해하며 하나님에 관한 "충만한 지식"을 얻도록 역사(役事)하는 것입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고전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슥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인간들은 무엇이나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이끌려 갑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새로운 소명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은 마음을 접촉하시면서 동시에 그 마음을 가르치십니다. 인간의 마음은 성령의 조명하에 들어가는 즉시 변화됩니다.

미국의 베이비 부머들(Baby boomer, 1950년대에 아기를 많이 낳았는데 그 때 태어난 사람들, 현재 30대)이 교회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썰물처럼 교회에서 빠져 나갔던 사람들이 어째서 밀물처럼 다시 교회로 모여들고 있을까? 여러 가지 연구가 있지만 캘리포니아대학 종교학 교수 루프(Wade Roof) 박사는 특히 "베이비 부머와 종교"에 관한 연구를 하였기 때문에 참고할 만합니다. 루프 교수는 종교로 돌아온 1천 8백만 베이비 부머들의 3분의 2가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라고 지적합니다. 단적으로 아이들에게 종교 교육이 절실히 필요해졌기 때문에 그 부모들도 아이들을 따라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루프 교수의 발표는 최근 뉴저지의 일간신문<레코드, Records>지의 조사에 의해 더 확실한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레코드, Records>지는 북부 뉴저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미국인의 종교 실태"를 조사하였는데 많은 아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갑자기 주일 학교 프로그램이 재미있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젊은 부모들이 극성스럽게 아이들을 교회에 나가도록 장려하고 데리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통계로 나온 숫자는 놀랄만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가는 부모가 48%, 한 달에 한 두번이 20%, 전혀 데리고 가지 않는 부모는 16%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응답이 54%, 약간 중요하다는 응답이 33%, 중요성이 없다는 응답은 겨우 3%뿐이었습니다.

그럼 왜 이토록 미국의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종교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시카고대학의 종교 심리학 교수 브라우닝(Donald Browning) 박사의 조사 발표가 적절한 대답입니다.

"지금 미국의 가정들은 적대시할 만큼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의 위협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파도처럼 덮치는 이 악한 문화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이 부모들의 현실입니다. 부모들은 이 악한 문화와 대항해서 함께 싸울 동지를 찾고 있습니다. 마약과 자유 분방한 섹스와 폭력 등 이 거대한 악에서 학교가 아이들을 보호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부모들이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된 곳이 교회입니다."

<레코드, Records>지가 발견한 것은 부모들의 기대는 교리를 배우게 하는데 있지 않고 도덕과 가치관을 배우게 하려는 데 교회를 찾는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황금률(Golden Rule), 즉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의 교훈 한 마디라도 배우게 해야겠다고 부모들이 주장하는 것은 학교에서는 이미 그런 교육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1780년 7월 영국에 신앙이 독실한 한 평신도 레이크스(Robert Raikes) 씨는 수심에 찬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을의 장래와 영국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범죄가 늘어가고 불결한 거리와 주택에서는 무서운 질병이 끊일 새 없어, 해마다 수백 명의 어린이들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도소 개혁 운동에 나서기도 하였으나, 출소자들이 대부분 한 달도 못 되어 다시 붙잡혀 오는 것을 보고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어린아이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교육받지 않으면 소망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어린아이들은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아이들도 주간에는 노동에 시달렸으며, 주일이 되면 싸우고 방황하며 도박 구경을 다녔습니다. 그 몸과 옷 차림새는 너무 지저분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부모들도 그들은 잘 돌보지 않았고 사회에서도 방치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한 번은 거리에서 이런 사회에 대한 걱정을, 열을 올려 가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불쑥 야유삼아 뇌까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신이 해보구려!(You can try!)"

그 순간 레이크스의 머릿 속에 빛이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 말이 우연한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레이크스는 자기 집을 개방하여 주일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네 명의 교사를 구하여 주머니돈을 털어 교통비를 지출했습니다. 가르치는 내용은 읽기와 쓰기, 산수와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세수하고 오는 아이만 들어오게 했고, 돈이 없어 누더기 셔츠를 입을 수밖에 없는 아이에게는 새 셔츠를 사주었습니다. 매주일 아침 8시부터 저녁 예배 시간까지 점심 시간을 빼놓고는 종일 가르쳤습니다.

레이크스의 별명은 "야생 거위(wild goose)"였습니다. 야생 거위처럼 더럽고 마구 날뛰는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크스의 주일학교 운동은 선풍적인 호응을 받아 30년 뒤에는 3천 주일 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주일 학교 운동은 그 후 5년이 지나자 미국 전역에서도 맹렬하게 전개 되었습니다. 실상 미국 학교 교육 제도의 전신(前身)은 주일 학교입니다. 2백년이 지난 오늘 미국만 해도 주일 학교의 수는 168,925학교이고, 등록된 학생수는 3천 4백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레이크스가 사망한 후 그의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적은 돈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마을의 모든 아이들에게 1실링씩과 케이크 한 개씩 사주십시오."

레이크스가 평생의 목표로 삼은 성경 말씀은 디모데전서 4:6이었습니다.

"(딤전4: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정신을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가르치는 일이라고 확신했으며, 동시에 그것이 마을과 국가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믿고 자기의 평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나라 민족을 바로 세우는 길은 성령받은 교회가 교육의 사명을 바로 감당할 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받은 교회의 모습은 무엇보다 교육의 주체가 되시는 성령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인 것입니다. 교육의 달을 맞아 교회의 참 모습을 성령을 통해 발견하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가는 교회가 되어질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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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성령을 받았느냐?

"(행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행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19: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행19: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행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진정한 기독교인인가 아닌가 하는 판가름은 '성령을 받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스테인드 글래스(彩色窓)의 거장인 찰스 코닉(Charles Connick)은 어느 날 젊은 미술학도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 학생은 말하기를 "선생님의 화구(畵具)를 며칠만 빌려 주십시오. 제가 찰스 코닉이 된 기분으로 스테인드 글래스 하나를 그려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궁금히 여긴 코닉은 자기 제자의 화실을 찾아 갔습니다. 그때 그 학생은 스승의 화구를 써도 역시 그림은 잘 안된다고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코닉은 말하기를 "스승의 도구가 자네를 변화시킬 수는 없네. 오직 스승의 불을 받아가야 한다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색유리(스테인드 글래스) 한 장을 만드는 데도 괜찮은 작품을 내놓자면 불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성도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 할 때 그리스도의 불,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불 같은 성령은 설명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내 몸을 주를 위해 불 사를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에 들어가려면 성령을 받아야만 합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처럼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질문은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멸망이냐? 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가 성령을 받으리라고 예언하셨고 또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에베소는 우상숭배로 악명높은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극심한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Artemis), 즉 다이아나(Diana)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종교와 상업이 굳게 결탁해 있었는데, 대상인들은 아데미 신전을 끼고 돈벌이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헬라가 이상(理想)으로 삼아 숭배하던 것들 중에 순수함이나 덕과 같은 것들이 에베소에서는 부패되고 말았는데 이는 상인들의 상업주의의 영향을 받을 결과였습니다. 더욱이 당시 에베소에는 귀신 신앙. 마술. 마법에 크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곳에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질문에 에베소 제자들은 성령의 있음도 듣지도 못하였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고 묻자 "요한의 세례"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의 아볼로의 상태와 동일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버릴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를 버리는 것이 곧 신앙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가슴을 치고 통회하며 뉘우친다고 해서 그가 곧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뿐만 아니라 그 단계에서 더 나아가 그 죄를 용서하시고 또 받아주시는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 곧 구세주(주님)로 믿고 영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주 회개를 해도 또 죄에 빠지며, 거기서 헤어날 방도가 없게 됩니다. 죄를 뉘우치는 사람은 많습니다. 감옥살이를 하는 죄수 중에 죄를 뉘우치는 사람도 있고, 경찰 앞에서 심문을 받는 범인 중에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곧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도 진정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지난 죄를 버리고 예수를 붙잡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음 성구는 회개가 반드시 예수를 믿는 것과 연관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마12: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마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말씀은 회개는 하였지만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지 않을 때, 그 회개는 아무 쓸모가 없고 더욱 강퍅한 마음이 될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회개한 연후에는 반드시 예수를 자신의 삶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순절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을 받고나서 그들 에베소 제자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19:5)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안수했고 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에게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그들이 성령을 받자 즉시 나타났습니다. 즉 그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방언을 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신앙이 내부적으로 불붙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고, 그들이 예언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지성이 계발(啓發)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의 제자들은 알고 있던 계시보다도 더 밝고 더 풍부한 계시와 또한 풍성한 생명을 성령을 받으므로서 경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현재 로스엔젤레스의 시펄버다(Sepulveda)감리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에드워드 맥래(Edward McRae) 목사의 간증입니다. 1982년 여름, 18세의 외아들 스튜어트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의 외아들은 죽기 2주 전에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맥래 목사는 아들의 졸업식이 거행된 학교 운동장에 가서 마구 달리며 아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대여섯 바퀴쯤 운동장을 달렸을 때 였습니다. 갑자기 눈 앞에 금빛나는 두 개의 별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그것은 환상이었습니다. 아들이 받은 상은 '투 스타'라고 해서 금빛 나는 두 개의 별이 박힌 상장이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땅에 엎드리며 외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스튜어트를 위하여 죽으셨고 스튜어트를 위하여 부활하셨군요!" 그는 이 순간 바로 자기에게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재현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지금 까지 막연하고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하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와 관계가 있다고 깨닫는 순간이 바로 성령을 받는 순간입니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도 신약성경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즉 요한의 세례만을 알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형식상 물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심과 우리를 변화시키는 역사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지한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메튜 헨리는 "아무 목적없이 세례를 받고 이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고 성령을 받지도 않았으며 성령에 복종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하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 사실 심각한 질문이다. 성령이 모든 믿는 자와 구하는 자에게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잘못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상 성령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성령의 은사가 있는 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성령의 은혜와 위로를 받고 있다고 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엄격하게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는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그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는 법이다. 과연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갖고 있는가? 또한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가?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우리는 성령의 통치 아래 있는가? 물어야 한다."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고 신앙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다시말해 성령이 임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수준에 한해서 남들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도달한 경지 이상으로 남들을 끌어올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유대인으로서 학식이 많고 성경에 능하고 열심 있고 신중하게 가르치고 담대히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그가 이르른 수준까지밖에 남들을 인도할 수 없었으며, 그 이상으로는 한 치도 더 끌어올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곧 그의 제자들은 오직 요한의 세례만을 알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이 그들에게 찾아왔습니다. 바울은 그가 아볼로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폭 넓은 지식과 더 깊은 체험을 가졌기 때문에 에베소에 제자들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그 결과 결국 아름답고 정직하고 정확하지만 차가운 그들의 도덕성이 성령께서 주시는 뜨거움과 정열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아볼로는 그 자신이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그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가 보다 깊은 체험과 지식을 얻게 되었을 때 그는 고린도로 갔으며, 바울이 에베소에서 아볼로를 위하여 한 일을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바울을 위하여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심는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으며,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바울이 에베소에 온다면, 그는 아볼로가 심은 것에 물을 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시는데, 때로는 안수를 통하여, 때로는 안수 없이, 때로는 물세례에 응하여, 때로는 물 세례 전에 오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에게 성령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의 임재와 조명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지도 못하고 그에 대하여 가르치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근본적인 역사가 거듭나게 하는 역사라면 성령의 두 번째 역사는 거듭나는 영혼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더하사 주를 위해서 일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일하기 원하는 제자들에게 무턱대고 나가서 일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너희가 권능을 받은 후에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이들 말씀을 통해 보면,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주를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주님의 증인이 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되며 더 나아가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미국의 저명한 교육자인 레이니(Rainy) 교장은 "기쁨(희락)은 왕궁의 깃발과 같다."고 강조하고 아이들에게 즐거운 생활을 하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성에 왕이 계시면 왕을 상징하는 깃발이 휘날렸습니다. 왕이 외출중이면 깃발이 꽂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얼굴과 행동은 이 왕궁의 깃발 같습니다. 즐겁고 활기차고 그 행동에 기쁨이 넘치면 그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레이니 교장의 교훈은 성령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 사람은 그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은 성령의 존재를 증명하는 깃발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됩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또한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참된 영적 자유함이 있습니다.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사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다음으로, 성령은 충만하게 역사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당시의 에베소는 번화한 도시로 방탕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술에 취하는 일은 오히려 그 사회에서 자랑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술을 많이 마시는 자에게 상을 주었고, 이러한 경기에서 술을 마시다가 죽은 사람이 3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행여라도 술취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대신에 성령에 취해야 합니다. 사실 오순절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을 말하니 듣는 자들이 "저희가 새 술(Spirit)에 취하였다."(행 2:13)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함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목적, 감정, 사상, 언어, 행동을 성령이 지배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곧 성령의 완전한 삶의 지배를 말합니다. 그 때에 우리의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유명한 전도자였던 무디는 자신의 신앙과 성령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치 번갯불이 번쩍이듯이 나에게 놀라운 축복이 쏟아졌습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봉사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갈급하고 목말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내 힘으로 했기 때문에 지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내 맘에 충만하게 임하신 이후로 나는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곧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번화한 거리를 걸으면서도 내 마음에는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나에게 임하셨을 때, 나는 그의 큰 손이 내 위에 머무는 것을 느꼈고, 그 순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충만하게 하셨으며, 온 세상을 내 마음에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풍성한 삶의 비결이요 열매있는 사역의 비결인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함을 받으시고 자신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여러분의 이웃을 변화시키는 삶의 아름다운 열매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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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영(靈)의 새로운 것

"(롬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롬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사망은 모든 계약을 말소시킨다.한 여인의 남편이 살아 있는 한 그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 여인은 간음한 자이다.그러나 그 여자의 남편이 죽으면 소위 계약은 취소된다.그리고 그 여자는 자유스럽게 자기가 좋아하는 자와 결혼할 수 있다.

이혼할 수 있는 조건은 간음한 연고 이외는 없다.간음한 자는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정조를 생명과 같이 여기기 때문이다. 새 남편을 맞으려면 남편이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전 남편을 여러가지 비유로 말씀하고 있다.

첫째 남편은 "죄"였다.죄를 섬기며, 죄와 함께 살며 죄를 낳고 살았기에 죄가 그 남편이었다.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죽었다(롬6:1-6).전 남편인 죄가 죽었으니 새 남편 예수님을 맞이할 수가 있게 되었다.그리고 더 이상 죽은 남편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남편은 "율법"을 말한다.우리는 율법과 결혼했고 그 율법에 매였었다.율법아래 살면서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했다.율법에 죄의 삯은 사망이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켰다.그러므로 율법은 죽었고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율법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옛 남편인 율법에 매인 것이 아니고 새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매인 바 된 것이다.아내가 결혼법에 매이듯 우리는 과거 죄와 사망의 법,율법에 매여 있었으며 이 결혼의 소산은 죽음에 이르는 열매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생명이신 예수와 결혼함으로 의의 열매와 영생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예수와의 결혼 목적은 사랑,은혜및 모든 선한 일에 있어서 풍성한 수확이다.이것은 하나님께 맺어드리는 열매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요 그의 뜻에 합치하는 것이요 그의 영광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가 없다(요15:1-8,엡2:10,골3:17).

이제 새로운 남편에게 결혼했으면 우리의 행동과 사상도 바뀌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이제 우리는 새 영으로,새로운 정신적 규범에 의해서,새로운 정신적 원칙으로 곧 "신령과 진리"로 섬겨야 한다(요4:24).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이뤄진 우리의 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한 미국인 선교사가 선교를 하다가 식인종에게 붙잡혔다.이윽고 오랏줄에 묶여 추장앞으로 끌려 갔다.선교사는 추장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그 추장은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왔던 대학 동창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는 "자네는 그렇게 많이 배웠어도 변한 것이 없었나?"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추장은 "아니,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 - -! 나도 변했네.과거에는 손가락으로 사람 고기를 집어 먹었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포크를 사용하지! "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알고 있어도 '영의 새로운 것'으로 몸과 마음 그리고 생활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따라서 우리는 영적(靈的)이어야 하고 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후3:16이하).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부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하여야 한다(롬12:1-2).

창조의 영이신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로 날마다 새로운 신혼의 삶(honey-moon)을 사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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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성령과 삶의 원리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게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유대인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린(Victor Franklin)은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하여,"모든 삶은 제각기 의미가 있다.인간은 어떠한 죽음의 상황속에서도 덧없이 죽어갈 수는 없다.하나님께서 인간은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그 가운데는 창조자의 뜻이 있다.그 창조자의 뜻을 발견하고 살아갈 때 인생의 의미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인간의 의미를 바르게 발견하게 될 때 신앙생활및 사회생활,그리고 가정생활 등을 바르고 건강하게 할 수가 있다.

"제가 무엇이관대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겠습니까?"(출3:11) 이 말씀은 모세의 자기 인식(自己認識)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같이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인간의 자기 인식(自己認識)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고 그의 미래를 위한 사명을 맡길 때에 일어난다.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 말을 잘 못합니다."(렘1:6) 이는 하나님께서 예례미야에게 예언자의 사명을 맡기실 때, 예례미야가 가진 자기 인식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찾아 왔을 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자기 인식(自己認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저는 죄인입니다.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눅5:8).

이처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고자 할 때 인간은 그가 어떤 존재로 되어야 하는가를 경험하는 동시에 자기 힘으로써는 그가 되어야 할 바의 존재로 될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하나님을 성전에서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큰일 났구나,이제 나는 죽었다.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사6:5).

헤겔은 "정신만이 인간의 참된 본질이며 정신의 참된 형태는 사유하는 정신.이론적이며 사변적인 정신이다.인간은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이다.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에 불과 하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속에서 존재 가치를 찾을 수는 없다.갈대를 나부끼게하는 바람이 상징하는 성령안에서 인간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해하는 인간은,

(1).자연적인 존재이다. 자연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신체적이고 감상적인 존재이다.

(2).생산하는 존재이다. 내지는 노동하는 존재이다.인간은 자연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하고 생산한다.

(3).철저히 사회적인 존재이다.사회로부터 추상화된 개인은 없다.

(4).사회적존재로서의 인간은 경제적인 존재이다.

(5).인간은 역사의 목표인 공산주의 사회를 향한 도상(途上)의 존재이다.그에게는 이 세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없다.

기독교 인간학은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식(認識)의 원천과 규범이다.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영원한 지식을 전달하여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회개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요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가를 밝혀준다.

회개가 필요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로부터 그 인식(認識)이 밝혀진다.왜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 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인간학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데서 시작한다.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이다.이는 우리의 삶의 시작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지만,삶의 종국(終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하나님 의존적(依存的)인 존재임을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있게된 독자적(獨自的) 존재가 아니다.하나님과 함께,하나님과 사귐속에서 감사하며 살아야 할 존재이며,하나님을 위한,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존재이며 이러한 삶의 모습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나님앞에 책임적인 존재인 것이다.우선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알기위해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그리고 그 뜻에 순종할 책임이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 소명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어야 할 책임적인 존재이다.

아울러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앞에 사회적인 책임이 있다. 본문은 삶의 두 원칙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죄많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 지배되는 삶이 있다.자신의 욕망이 자신의 유일한 법이며 따라서 그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행하는 삶이다.욕정이든 교만이든 야심이든 그의 특징은,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성이 추구하는 일에 열중하는 것이다.

생명이되시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의 결국이 사망인 것이다.죄는 인간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의 분리(分離)에 있는 것이다.

육체를 좇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본능에 따라 사람을 가리킨다.이런 사람은 생각의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 있으며 자연히 자기 중심적(ego-centric)인 사람이다.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위해서 하는 사람이다.또한 자기 중심으로 살기때문에 자연히 자존심(自尊心)에 매여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과 자존심과 교만 등에 매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설사 듣는다 해도 마귀의 음성이나 자기의 음성을 듣게 된다.

칼빈은 말하기를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당나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육(肉)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려 구제 불능한 존재이므로, 결과는 영적(靈的)인 사망뿐인 것이다.

다음으로 영(靈)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삶이 있다.이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배되는 삶,그리스도 중심의 삶,하나님 집중적 삶으로 생명과 평안으로가는 길에서 사는 생활이다.세상과는 비록 멀어질지라도 날마다 하늘에 가까와지는 삶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생활이다.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않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영성(靈性)을 지닌 사람이다.성령이 그의 삶을 주관하는 사람이다.그의 생각이 그리스도로 가득한 삶,하나님의 일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을 위해 사는 삶,비록 육에 관련된 사회 생활에 임하지만 영이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희락과 평안과 생명이 있다.고통중에도, 핍박중에도, 환란중에도, 심지어 죽음의 상황속에서도 기쁨과 감사가 있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는 삶은 십자가 후에 부활 승리가 있고 영원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성령으로 행하고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다.

인간의 의미와 삶의 의미를 예수 십자가에서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사람이되어 생명과 평안이 이르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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