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목사

 

교회소개
담임목사
선교활동
게시판
방명록
홈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cross01b.gif  산상 수훈  cross01b.gif

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2.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3.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5.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

6.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

7.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

8.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9.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10.옛 법과 새 법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참조 :눅 6:20-23, 사 66:2-4)

1. 예수의 산상수훈은 인간이 행복해지는 8가지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덟 번에 걸친 "복이 있도다"는 말은 "행복하여라"는 뜻을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행복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류는 고통과 가시밭에서 살아야 하는 불행을 겪어야 했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는 이러한 인생들을 보시고 그 마음이 행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마음은 크나 큰 고뇌로 가득 차 있었고 무한한 연민과 슬픔가운데 있었습니다. 이 이유는 예수께서 인간의 슬픔과 비극, 불행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여기 "민망히 여기신다."는 말은 "마음 속 깊이 동정하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병든 사람, 소경, 귀신들린 자 등 각종 병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민망히 여기시고" 그들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슬픔에 빠진 사람을 동정하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시체를 메고 나갈 때 울부짖는 과부를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독자를 살려주셨습니다.(눅 7:11-17) 죽음으로 인한 불행을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는 이처럼 지금도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굶주린 사람을 그냥 보내지 아니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 15:32) 또한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고독한 사람들을 민망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둥병자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격리되어 홀로 고독하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웠던 가족들과 이웃들과 더불어 함께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의 소외되고 고독한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막 1:41) 예수께서는 죄 가운데 방황하며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무지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병으로 인해 불행한 사람, 죽음으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 굶주림으로 인해 불행하게 사는 사람, 소외되고 갇힌 자되어 불행한 사람 등 모든 불행을 겪고 있는 인류를 위해 산상수훈을 통해 행복해지는 삶의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류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불행이 죄에서 비롯되었음을 아시고 그 인간의 모든 죄악을 자신이 걸머지고 십자가에 희생당하시므로 인류에게는 행복을 안겨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고독과 죄의 무거운 짐을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에는 인간의 행복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시고 그 곳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모든 불행이 치유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이 행복해지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깨달으시고 십자가 예수를 마음 깊이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인간의 행복은 어떤 행함이나 소유가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being)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 행함이나 소유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마음이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행복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란 말은 원래 행복을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가난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닙니다. 빈민굴에서 굶주리며 병들어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빈곤은 기독교가 제거해야 할 목적 대상입니다. 기독교가 지향하는 곳은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이란 말은 절대적인 빈곤 상태로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의 슬픔과 고통을, 그리고 소외당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늘만을 쳐다보고 하나님만을 의존해서 사는 사람을 "가난한 자"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고 사는 사람,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해도 예수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 믿고 사는 사람, 이러한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결코 잊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영영히 실망시키지 아니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항상 하나님의 기억되신 바가 되며 결코 실망 당하지 아니하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시9:18)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시68:10)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72:4) 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지거나, 무엇을 소유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그 행복을 인간에게 열어주신 분은 십자가 예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은 예수 믿고 예수 안에 사는 데 있습니다. 예수 믿고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되어 여러분의 인생이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심령이 가난해지면 하나님 나라를 주어서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나,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미 천국을 가졌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며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행복이란 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힘, 또는 어떤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얻어지는 행복은 결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이라야만 영원히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의 환경을 행복하게 조성해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마음의 행복을 통해서 주변 환경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 살든지 변함없는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행복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마음에 하나님을 받아드리는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얻어지는 행복은 쉽게 얻을 수도 있고 또 쉽게 잃을 수도 있습니다. 환경이 바뀌었을 때, 건강을 잃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계획이 무산되었을 때 즐거움과 행복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 행복은 믿음을 잃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 또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우리 나라의 기독교 역사상 초창기의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에 대한 고전적인 실화 한 토막입니다. 이 목사님은 6.25동란 무렵에 목포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공산당에 붙잡혔습니다. 끌려가서 심한 고문과 조롱을 당하며 나날을 보내었는데 어느 날 한 공산당원이 이 목사님을 끌고 가서 또 고문을 하다가 아주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영감, 내한테 천국 좀 보여 줄 수 있어?"

하고는 발길로 걷어찼다. 이 목사님은 발길에 채이면서도

"예, 보여드리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야, 죽어서 가는 천당 말고 지금 당장 보여주란 말야."

하고는 또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예, 지금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라는 이 목사님의 말에 공산당원은,

"어떻게 보여 주냐?"

고 하며 또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은

"예, 천국 본점이야 내 소관이 아니니까 보여 드릴 수 없지만 지점이야 내가 보여 드릴 수 있지요. 그 천국 지점이 바로 제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천국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마음에 있는 천국이 발길로 채인들 빼앗길리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등 팔 복에서 나타나는 품성들은 하나나님 나라 백성이 가져야 할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무엇보다 "진실하게 순복"하는 품성을 지녔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기꺼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 말씀에 반항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합니다. 천국이란 결코 어떤 땅이나 영토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마음과 심령, 그리고 인간의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 하나님의 지배를 말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어떤 일로 친구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마침 그때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는 여러번 시도했으나 예수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림이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림 제작을 중단하고 며칠 동안 명상에 잠겼다가 실패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재주있는 손을 가졌다고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가졌다고 가치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을 때 나는 예술가도 될 수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될 수 없다."

다 빈치는 즉시 친구를 만나 화해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전에 얽혔던 분한 생각을 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 뒤 며칠이 지나 다시 작업실에 들어가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얼굴을 아주 만족스럽게 화폭 위에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찾는 것이 성한 눈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뜻합니다. 내 성격이나 내 욕심이 다스리는 세계가 아닙니다. 걱정과 불안과 나의 좁은 생각을 몽땅 묶어 하나님이 관리하시도록 맡기는 믿음의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할 때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행복은 먼 미래에, 죽어서 천당에나 가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마음속에 영접하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4. "마음이 가난한 자"(사66:2)는 단순히 재산이 없는 자가 아니라, 자신은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죄인임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 오는 사람을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 가를 분명히 말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 인간이 저지른 허물마다 지은 죄마다 모두가 다 드러난다면 이 세상은 쑥밭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모든 허물과 죄가 사함과 가리움을 받지 못한다면 결국 불행해지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그 허물과 죄가 가리움을 받은 자가 행복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사 66:2)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유대들은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때, 율법에 정한 소나 양을 희생시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제사드리기 위해 소를 잡는 것을 살인으로 간주할 것이고, 어린양을 잡아 제사드리는 것을 개의 목을 꺾는 것으로 여기시겠다는 것이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하는 것으로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사66:3) 이는 한 마디로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지 않고 그냥 동물만 잡아 제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심각한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에 대한 상한 심령,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가난한 심령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며, 오히려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천국이 임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예수 믿고 회개하는 자의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가난한 심령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철학 교수로 있는 클레이풀(John Claypool)박사의 간증입니다. 그는 대학교에 다닐 때 철학도로서 이론에 강하고 아는 것이 많아 모든 사람이 인정해 주는 수재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 집에 가서 친구의 여동생을 보았습니다. 19세의 소녀는 모든 것이 완벽하였는데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출생 시부터 기형아였습니다. 소녀는 특히 아름다움에 대한 정서가 발달하여 음악, 미술, 문학 등을 좋아했습니다. 클레이풀은 그녀에게 참고 있던 질문을 쏟아버렸습니다. "내가 당신의 처지였다면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은데 무엇이 당신을 미소짓게 하고, 신나게 하고, 명랑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누구나 가지지 못한 것이 있죠. 나의 경우는 팔과 다리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요. 맛을 볼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세계 명작을 읽을 수도 있으며, 친구들과 가족의 사랑이 있고, 무엇보다도 나는 예수님을 알게 되어 천국이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만큼 보물들을 가졌는데 내가 왜 슬퍼해야 합니까?" 클레이풀 교수는 그 날 하루의 체험이 철학과 2년의 공부보다 더 귀중한 진리를 배우게 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진리, 평화의 복음을 깨닫고 그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행복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시는 환경이 어떠하든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시고 마음에 천국을 이루어 참된 행복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누리시기 바랍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참조 : 눅 6:20-23)

1. 기독교는 인간의 삶을 해피 엔딩(Happy ending)으로 만들어 줍니다. 기독교의 끝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해피 엔딩이 되도록 하나님께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 복의 내용들, 즉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 등을 살펴보면 인간의 행복은 밖에(out)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in)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들이지 인간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인간은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행복하게 하시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야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이 사는 백악관에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애덤스(John Adams) 대통령부터 시작하여 40여명의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에 살았던 주인공들은 그다지 행복한 인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이 집을 "호화로운 감옥"이라 불렀고, 포드 대통령 부인인 배티 포드(Betty Ford) 여사는 이 집을 "금붕어 항아리"라고 백악관의 별명을 붙여 그 외로움과 불행을 표시하였습니다. 존슨 대통령 부인 루시 (Luci Johnson)는 "도대체 숨을 곳이 없는 집이다."라고 불평하였으며, 클리블랜드(Clover Cleveland) 대통령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라고 하며 아예 백악관을 비워 놓고 워싱턴 시내에 전세방을 얻어 살았습니다. 대통령은 반드시 백악관에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싫으면 나가 살 수 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장터에 사는 것 같다."라고 불평했습니다. 이런 평들이 모두가 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말들입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에 들어간 것이 오히려 자신과 자신의 가정에 불행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청와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그 끝이 불행했던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청와대에서 살다 나온 사람들이나 청송 감호소에 살다 나온 사람들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청송 감호소에 나온 사람들은 죄에 대한 자신의 형기를 다 마치고 나온터여서 홀가분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떠한 사람이 되느냐에 인간의 행복이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행복한 자는 "애통하는 자"입니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은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같이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지혜서인 전도서 7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을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여러분은 애통하는 자가 되어 금세와 내세에 행복하며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먼저 무엇을 위해서 애통하는 것이 복된 사람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슬퍼하는 자, 고통을 당하는 자와 더불어 함께 슬퍼하고 함께 고통당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치료 불가능한 특수한 병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병은 전혀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부딪쳐도 손을 데어도 울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곪은 데를 수술 칼로 베어내도 전혀 아파하지 않습니다. 단지 배고프거나 화가 났을 때만 우는 것입니다. 아파서 우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의사들은 중추신경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치료방법이 없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울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샴 쌍둥이에 대한 얘기입니다. 머리가 둘인데 몸통은 하나인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한 사람인지 아니면 두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그 아이의 한 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 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다른 한 쪽 머리의 아이가 똑같이 뜨겁다고 야단하면 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한 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었어도 다른 한쪽 머리에서 전혀 뜨겁다고 반응이 없으면 이 아이는 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류는 하나이고 하나이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온 인류가 하나되기 위해 기도하셨고,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걸머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추석선물로 수 백 만원 짜리 핸드백에서 10마리에 42만원하는 조기까지 서슴지 않고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찾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양노원 창가 넘어로 희미해져가는 고향을 떠올리는 이 땅에 버림받은 노인들이 있습니다. 1마리에 4만 2천 원하는 조기를 밥상에 올리는 사람을 놓고 애통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미국에 수 십억 수 백억하는 호화주택을 마련해놓고 스위스 은행에는 엄청난 달러를 유출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겨울이 멀지 않은데 구청에서 내린 철거명령에 수재민 보호소에서 한밤을 뒤척이며 잠못 이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도 없는 호화주택과 만질 수도 없는 달러를 놓고 애통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족집게 과외비로 수 천만원을 쓰는 가정이 있는가하면, 실직자 자녀로, 수재민 자녀로, 생활보호대상자 자녀로 학비를 내지 못하고 있는 42만명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있습니다. 족집게 과외시키는 사람들을 놓고 애통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지키지 않는 국회의원들이 있는가하면, 체불노임으로 허탈한 가슴 쓸어안고 맥없이 여기 저기 맴도는 사람들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세비를 축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정축재한 국회의원들을 놓고 애통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이북5도민회에서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금강산관광에 대해 정작 이북출신 실향민들의 생각은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대부분 "다녀올 생각이 없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시중 여론과 일반 국민들의 예상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설문조사 결과 금강산 관광에 대해 찬성은 8.8%에 불과했습니다. "매우 반가운 일이며 기필코 다녀오겠다."는 사람은 1.4%, "형편을 보아 다녀오겠다."는 사람은 7.4% 였습니다. 반면 부정적인 응답자는 80%에 달했습니다. 실제 지금까지 금강산 관광을 신청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실향민 1세대들은 북한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강제로 <퇴출>당한 이들 입니다. 직접 공산주의의 악몽을 겪은 이들로서 북한의 태도변화가 없는 한 김정일의 본심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향민들은 무엇보다 경제환난을 당해 실업자 200만명에 육박하고 있는 형편에 1인당 금강산 입산료로만 300달러라는 막대한 외화를 유출해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북 가족 및 친지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한가롭게>유람할 수 없으며 만에 하나 북한이 관광객을 선전에 악용할 때 북한의 혈육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기아로 고통당하는 북한 동포들의 아픔을 헤아리며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실향민들이 금강산관광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해선 결코 안 됩니다. 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도 절실한 사람들입니다. 실향민들이 죽기 전에 원하는 바는 무엇보다 이산가족의 생사를 확인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면 편지나 전화로라도 이산의 아픔을 달래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추석이 되어도 돌아갈 고향길이 막혀 철조망을 붙들고 통곡하는 사람,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생사를 모른 채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 실정에 가슴을 저미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내 나라 내 땅 금강산을 장사 밑천으로 삼아 한 몫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민족통일의 그 날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나라 어느 백성들 보다 애통해할 일이 많은 땅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 우리의 현실을 놓고 애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없는 백성은 불행합니다.

3. 마지막으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비통한 마음으로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같은 죄인된 자신의 존재가 "한 줌의 흙"에 불과하며,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야고보서 4:14)같음을 절통해 하는 자를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비통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어야할 만큼 자신의 죄가 중대함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위대한 힘은 인간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공포를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에 대한 공포 속에서 죄를 보게 될 때 그는 죄에 대한 강한 비애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가정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거든 그 십자가를 철거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부적이나 수호신이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마다 자신의 죄인됨을 애통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죄의 의식에서 출발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깊이 슬퍼하는 자이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범한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애통하는 사람이며 십자가를 보고 죄로 인하여 다가올 파멸로 인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죄의 공포를 경험하는 사람만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험이 회개의 경험이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인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몸둘 바를 모르며,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인 토마스 무어(Thomas Moore)의 작품에 <낙원>이 있는 데 그 내용을 각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책벌을 받고 세상으로 쫓겨난 한 천사가 다시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가 풀어야 할 한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것'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시장 바닥과 골목들을 누비며 이것을 찾아 헤매다가 어느 따스한 봄날의 아침, 한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동네 입구에 세워진 지계표 위에서 한 아낙네가 칭얼대는 아이를 가슴에 품고 젖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생각했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그림자로 일컬어지는 모성애가 듬뿍 깃든 저 엄마의 젖 한 방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 젖 한 방울을 얻어 낙원 문에 다달았으나 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낙심 속에 또 다시 방랑의 길에 오른 그가 어느 무더운 여름 한낮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한 전쟁터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생각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의 목숨 초개와 같이 사르는 애국지사, 그가 흘린 마지막 피 한 방울이야말로 가장 존귀할게야!" 식어 가는 피 한 방울을 조심스럽게 찍어 낙원 문에 도달했으나 대답은 "아니오!"였습니다. 실망을 안고 또 한번 여행길에 오른 그가 어느 겨울날 저녁 산등성이에서 있는 조그만 시골 교회를 들르게 되었습니다. 주일도 수요일도 아닌 평일 저녁, 약한 불빛 사이로 새어 나오는 사람의 말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제단 앞에 엎드려 통한과 함께 회개의 눈물을 쏟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깨달았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어머니의 젖과 애국지사가 흘린 피는 이 세상에서 더 없이 귀한 것이지만 노인의 참회하는 눈물 한 방울이야말로 낙원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 참회하는 노인의 눈물 한 방울을 들고 가 비로소 낙원으로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스펄죤도 "메마른 눈으로 천국에 올 자는 아무도 없다."고 갈파했듯이 한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데는 오직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앞에 회개하는 눈물 한 방울 뿐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찾으시는 것은 죄인의 상태를 용납해서가 아니라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며 회개 후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 보시기에 부지런히 찾고 또 찾으시는 것입니다. 성서는 그래서 "회개할 것"을 거듭 거듭 경고하며,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12사도들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느니라"며 회개의 복음을 힘있게 전했던 것입니다. 회개하는 영혼이 이 지상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회개의 역사야말로 천국에서는 가장 귀한 일입니다. 눈물로 회개하며 애통하는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천국"(계 21:4)에서 영원히 살게 하실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라 민족을 위해, 자신의 죄를 위해 애통하는 여러분이 되시므로 복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참조 : 눅 6:20-23)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하다는 말은 우유부단이나 아첨, 비열, 무력하고 굴종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유명한 성서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본문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분노할만한 때에 노하고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 노하지 않으며 자기의 본능과 충동과 정욕을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라 억제하며 자기의 무지와 연약함을 아는 겸손을 가진 자는 복되도다. 이 사람은 사람들 중 왕이로다."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며,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비겁하거나 비열하거나 무기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어느 때가 분노할 때이고 어느 때가 분노해서 안 될 때인가? 분노에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욕된 것이나 피해가 온다면 화를 내어서는 안 될 때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웃이 불편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비이기적인 분노여야만 합니다. 이기적인 분노는 항상 죄가 되지만 비이기적인 분노는 도덕과 정의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직을 모독하는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분노를 사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10:1-2)

하나님은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맹렬한 노를 발하여 그들을 멸망시키려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 어찌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32:11-14)

하나님은 불쌍한 사람을 돌보아주지 아니하면 분노하십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 22:21-23)

하나님은 사회의 부정 부패와 불의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아모스5:7-12)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10:1-20)

하나님은 나라가 외국의 원조나 힘, 군대만을 의존하는 하나님 불신행위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31:1-3)

예수님께서도 마음 중심은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서 형식만을 지키려는 사람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종교 모리배들에 대해 분개하시며 질책하셨습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11:15-17)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과 사회의 죄악을 없이 하고 혼돈과 어둠에 질서와 광명을 주는 생명력이 있는 창조적 분노, 거룩한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을 증오하며 심판을 목적으로 하는 분노가 아니라 인간을 새롭게 하며 구원하고자 하시는 사랑의 분노입니다. 그러나 분노해야 할 때에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분노할 까닭이 없을 때 화를 내는 것은 파괴적인 분노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년 365일 매일 매일 반복되는 부정부패, 살인 강도, 답답하고 지루한 내용들을 되풀이는 하는 매스컴들, 나날이 증가하는 실업률, 사이비 종교인들의 온갖 추태, 정권만 바뀌면 잡아들였다 놓아주는 작태들, 먹을 것을 찾아 탈출하는 수많은 북한 동포들과 세계 최고급 승용차 벤츠를 200대씩(약 300억원)이나 구입하는 북한 지도자들, 세계화의 허구 속에 날뛰며 춤추는 부자들과 멍들고 병들어가는 가난한 사람들...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들은 끝간데 없습니다. 분노하다 지쳐 슬프기까지 합니다. 분노의 소용돌이가 지난 뒤에 허전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비애와 슬픔뿐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인 분노, 타락과 퇴폐로 얼룩진 사회를 일신하는 거룩한 분노, 증오로 가득 찬 상한 마음에 아름다운 향기로 채우는 사랑의 분노일 것입니다. 매를 맞고 또는 꾸중을 듣고 아니면 욕을 먹고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감싸주는 온정 속에서 나오는 사랑의 분노로 우리를 새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극히 작아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천하보다 귀하고 소중히 여기며 돌보는 거룩한 분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참으로 온유한 자들입니다.

《아름다운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남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이 시는 남강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죽은 논개를 추모하는 변영로의 "논개" 시입니다. 임진왜란을 맞은 국민의 도리로써, 또한 사랑하는 님인 황진을 먼저 왜적에게 잃은 아낙으로서 논개의 분노를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를 탄식하고 한탄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분노를 행동화했던 것입니다. 이 시의 "더 푸른 그 물결"은 흘러가는 역사의 물결인 청사(靑史)를 뜻하며, "더 붉은 그 마음"은 애국충정이요 일편단심을 뜻하는 상징이 들어 있어서 "청사에 빛나는 일편단심의 논개여"라는 해석을 붙일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분노는 이처럼 청사에 빛이 나는 법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져있는데 분노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요 "온유한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자는 "분노할만한 때에 노하고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 노하지 않으며 자기의 본능과 충동과 정욕을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라 억제하는 자"입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해주신 생활감정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라 억제되지 아니하면 파괴적인 분노가 될 뿐이며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노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잠언 22:24-25)

"대저 젖을 저으면 뻐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잠30:33)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4:26)

분노를 억누르는 것은 자신을 계속 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분노를 해소하지 않고 억누르기만 하고 계속 가슴에 품고 있게 되면 인격을 부정하게 만들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파괴적인 분노로 분출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의 존재를 인정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분노를 피하고 절제하라고 충고는 하면서도 분노의 감정을 무시하라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온유가 성령의 열매이듯이 의분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며, 성령은 우리들에게 건전한 열기의 의분을 심어 주셨습니다. 분노가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자가 온유한 자이며 복있는 자입니다. 그러한 성령에 의한 의분이야말로 창조적인 분노, 거룩한 분노, 사랑의 분노인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분노를 완전하게 자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의분강개(義憤慷慨)의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허만 멜빌의 <백경>에 말향고래 중 하나인 흰 고래 모비딕이 있습니다. 일본 근해에서 이 모비딕에게 한 쪽 다리를 잃은 주인공 에이헤브는 그 고래와 똑같은 종류의 고래를 잡아 그 턱뼈를 갈아 흰 의족(義足)을 만들어 달고 다닙니다. 그는 의족을 배에 걸친 채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 그 거대한 흰고래를 추적합니다. 결국 에이헤브는 흰고래를 발견했고 분노를 다해 추격합니다. 마치 희고 견고하고 거대한 성벽같은, 인간의 완력으로는 대적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흰고래와 마주 섰을 때, 에이헤브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험난한 파도여, 끝없는 저편에서 몰려와 내 숭고한 죽음의 정수리를 더욱 치켜올려다오. 모비딕! 난 네 놈과 싸워 널 지옥의 한가운데서 찔러 죽인 후, 내 가슴에 쌓여 있던 증오의 마지막 숨을 내뱉을 것이다." 결국 분노라는 증오의 독약이 묻어있는 에이헤브의 작살은 던져지고 고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마지막 질주를 시작합니다. 충격적인 것은 바로 이 철저한 복수의 순간, 에이헤브는 밧줄의 고리에 목이 감겨 보트로부터 바다에 굴러떨어집니다. 에이헤브는 마치 터어키의 망나니가 처형자의 목을 형틀에 매단 것처럼 그렇게 밧줄에 감긴 채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결국 에이헤브는 자신의 손에 들려져 있는 분노의 작살이 고래의 목숨을 관통하는 그 순간이 자신에게도 똑같은 파멸의 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에이헤브의 분노의 작살은 흰고래 뿐만 아니라 그의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선원 중 오직 한 사람의 생존자만 남긴 채, 모두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데 더 큰 비극이 있습니다. 에이헤브는 그의 분노 때문에 그 분노와 아무 상관도 없는 선량한 선원들을 간접 학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포경선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증언자인 이스마엘은 에이헤브의 분노의 작살이 흰고래에게 던져지기 전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늙은이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분노의 존재를 창조해서 스스로 프로메테우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분노의 독수리는 바로 그 자신이 만들어낸 분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통제, 성령의 통제를 받지 않은 분노는 파괴적인 분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창조적 분노, 거룩한 분노, 사랑의 분노로 인간의 죄악과 사회의 무질서와 혼돈, 어둠을 광명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온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 예수 믿으시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 온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온유한 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받아들여 결실하는 옥토와 같습니다. 옥토는 말씀의 씨가 떨어질 때 잘 자라서 100백, 60배, 3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가르침 받기를 잘 하는 마음이야말로 진리를 속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여는 자가 참으로 온유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여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가장 교만한 자를 가장 겸손하게 만들 수 있고, 가장 완악한 자를 가장 온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라 불리웠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도 복음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18-23)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라면 가장 큰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장 큰 온유와 겸손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분노를 성공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분노에 대한 최고의 해방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사로잡아 돌처럼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겔11:19)

성령은 여러분의 마음을 온유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죄가 하나 없으신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가시면류관 쓰시고,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다 받으시고, 십자가를 걸머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그리고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도 그 인간 군상들을 향해 한 마디 분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을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분노이며, 인간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인 분노의 표현입니다. 예수 믿고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온유한 자가 되시므로 자신과 더불어 이웃을 행복하게 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참조 : 눅 6:20-23)

1.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기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을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편143:2)

그래서 의로운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목마름"은 당장 마시지 않으면 죽게 될 정도의 갈증을 뜻하고, "굶주림"은 당장 먹지 않으면 죽게 될 정도의 굶주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자가 먹을 것을 찾는 것만큼, 목말라 죽어가는 자가 마실 물을 구하는 것만큼 강렬하고 절실하게 의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노래가 서투른 음치인 사람일지라도 음악을 열렬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죄인일지라도 의를 강렬하고 열렬하게 사모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를 원했지만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다윗의 성전 건축에 대한 뜨거운 마음만으로도 하나님은 기쁘게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가 성취한 것만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비록 성취하지는 못했다해도 간절한 마음으로 강렬하게 소원하며 노력했던 것까지도 높이 평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지 못했다할지라도 죽기까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주리고 목말라했다면 복이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다 맺지 못하고 비록 한 두 개 정도만 맺었다해도 그 열매들을 맺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했다면 그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그러면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의, 우리가 "주리고 목말라"해야 하는 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결코 묵과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의 재판은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형벌과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는 곳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는 저주받아 죽임을 당해야 할 만큼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며, 그 죄는 반드시 처벌받아야된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저주받은 십자가 형벌을 당신의 독생자 예수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고 있는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가 전혀 없는 의로우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므로 우리가 당해야 할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구원과 평화를 누리게 하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를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가 우리의 의의 근거이며 우리의 의이십니다.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내 죄가 용서함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요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이제 누구든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십자가에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주리고 목마른 자"의 뜨겁고 강렬한 심정으로 의(義)를 사모하는 자가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로도 이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야만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바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워졌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3.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정확하게 바치고 안식일을 근엄하게 지키는 자신들이 의롭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율법의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는 줄로 잘못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고 감사드렸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9-12)

그런데 스스로 죄인임을 잘 아는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눅 18:14)

자신의 의를 내세운 바리새인들은 결코 의롭다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의인이 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을 의지한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의 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유일한 관심은 의의 성취였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이들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 복음 5장 21절 이하를 살펴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먼저 화내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마5:21-22)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은 "노(怒)는 죄"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우리 가운데 한번도 화내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 즉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라가"는 히브리인의 욕설로 "골빈 녀석"(empty head)이라는 뜻입니다. "라가", 미련한 놈이라는 욕설은 일종의 강한 화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에 욕 한번 안 해 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화는 과연 살인만큼 나쁜 것이어서 "심판받게 되고" "지옥 불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뜻하시는 바는 "살인은 정말 죄이다." 그러나 "화도 역시 죄다."라는 것입니다. 화가 치밀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도 있지않습니까? 화가 폭발하게 되면 험악한 짓을 얼마든지 저지르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화가 성숙하게 되면 살인이 되는 것입니다. 화는 이미 마음속에서 폭행과 살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서기관은 외적 행동을 강조하여 마음속에 아무리 화를 품고 욕설을 퍼부어도 살인치만 않으면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이것은 참된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외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인 것입니다. 마음에 화를 끓이고 있으면서 욕하며 죽이고 싶은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실 때 이미 그는 죄인이며 "지옥 불에 들어갈" 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죄의 드러난 결과만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너희가 무엇을 행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형제들에 대하여 마음속에 악의를 전혀 품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을 따라 살게 될 때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신밧드의 모험>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높은 나무에 달려있는 코코넛을 따는 방법을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그 나무에 있는 원숭이에게 돌멩이를 마구 던져 화가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깔 난 원숭이는 코코넛을 따서 던지게 됩니다. 그래서 손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습니다. 성질 부려 보았자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하나도 없고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19-20)

2) 다음으로, 순결을 지키며 살라는 것입니다.

"(마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율법은 불법적인 성관계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보다 더 높은 수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간음은 분명히 죄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육욕을 품는다면 이미 간음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간음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존재의 깊은 곳을 살피고 계십니다.

폴 레프(Paul Rep)의 저서 <선과 살과 뼈(Zer Flesh, Zen Bones)>에 이런 우화가 나옵니다. 선(禪)을 공부하는 두 중이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습니다. 물이 많아 시내를 못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한 중이 성큼 그 여자를 안아 물을 건넜습니다. 그러자 다른 중이 비난했습니다.

"수도승으로서 여자를 가까이 해서 되겠는가! 위험하네. 특히 저런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안다니."

상대 중이 말했습니다.

"나는 안았다가 곧 내려놓았지만 자네는 마음 속으로 저 여자를 안고 아직 안 내려놓고 있지 않은가?"

천국의 의, 성적 순결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다음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마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예쁜 여자를 보고 "참 아름답다!"라고 말하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예쁜 여자와 한번 잠자봤으면 좋겠다."고 하면 음욕을 품은 간음죄가 성립됩니다. 그래서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으니 눈을 빼어버린다면 아마도 이 세상의 남자들 가운데 성한 눈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설사 눈을 빼버렸다고 하여 근본적으로 의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간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마음에 머무는 것이지 눈이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눈이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문제의 근본 해결책을 찾아 필요하다면 어떤 댓가를 치루고서라도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문제 해결을 위해 눈을 빼고, 손을 찍어 버려서 깨끗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렇게 해서라도 죄를 짓고 멸망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이 높은 수준의 의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겠습니까? 순결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삶의 영"이 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을 따라 살게 될 때 마음에서부터 순결한 하나님의 의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의 강렬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여 성결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3) 다음으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마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유대인들은 맹세에 사용되는 대상물이 어느 정도 거룩하느냐에 따라서만 맹세는 구속력을 지닐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전통에 따르면 그 대상물이 별로 거룩치 못하면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정직의 윤리를 모욕하는 처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아시고 위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신뢰받을 수 없을 만큼 꼭 맹세해야 한다면 그 사실 자체가 벌써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은 전혀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 그대로가 진실되고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 그대로 나의 맹세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말이나 마음, 그리고 글이나 약속들을 우리 이웃들이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도록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직의 법입니다. 오늘날 불신 사회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정직의 법을 가정과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삶의 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거짓말이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입니다. 거짓말 안 하고 장사할 수 있느냐? 세금 안 속이고 돈 벌 수 있느냐? 남편과 아내는 서로 속고 속이고 살며 판매영업사원의 역량은 얼마나 소비자에게 거짓말을 잘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다 할지라도 "주리고 목마른 자"의 강렬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여 정직과 진실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4) 다음으로, 사랑의 법(the Law of Love)이 있습니다.

"(마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사악한 시대에 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사업이나 국제 정치 사회에 적용한다면 스스로 엄청난 파멸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살피시는 것은 인간의 마음 상태와 중심인 것입니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마음의 의인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바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지라도 전혀 복수할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에 대해 사랑에 동기된 마음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원수에게까지 넓혀가라는 말씀입니다.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원수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인이 거쳐야 할 최고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란 뜻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부지수불여공여천(父之?弗與共戴天)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지수불반병(兄弟之?不反兵)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리>

교유지수부동국(交遊之?不同國)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합니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든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은 무엇인가?

교회 안팎에서 자신에 대해 호의나 적의 등 어떤 태도를 취하든 항상 사랑의 동기를 지니고 상대방을 대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참 기독교인의 정신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실제 관심입니다. 사랑은 관심 대상의 최고 번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실제 호의를 베풀고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된 처녀는 아름답기는 해도 아주 표독스럽고 잔인한 취미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처녀는 청년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어머니에게서 심장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심장을 가지고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다가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그의 손에서 빠져 나와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그렇게 굴러가면서 어머니의 심장은 말했습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이 어머니같은 마음의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입니다. 사랑은 원수까지일지라도 그의 최고의 번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원수에게 구했던 축복이 저주로, 온유함이 폭력으로, 친절이 나쁜 것으로 원수에게 응답될 수 있습니다. 복수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관심 속에서 그렇게 했을 경우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완전한 순결성, 완전한 정직, 완전한 사랑 등입니다. 누가 이런 수준의 의로운 생활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의 강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여 보다 더 깨끗하게, 보다 더 정직하게, 보다 더 사랑하며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주리고 목마른 자"의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여 믿으시므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인정을 받으시고 금세와 내세에 아울러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참조 : 눅 6:20-23)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가 여러분에게 돈을 빌리거나 먹을 것을 요구할 때 그 요구하는대로 넉넉히 꾸어주지 않거나 구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는 것을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남을 해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지 아니하는 것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려운 이웃에게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고 넉넉한 마음으로 긍휼을 베풀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으시고 범사에, 그리고 손으로 하는 바에 복있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단순히 남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우리가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 입장에서 그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며 그의 느낌으로 느끼는 공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물과 사건을 경험하고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느낌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남을 동정할 때도 동정받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동정을 베풂으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일공동체의 최일도 목사의 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청년이 사무실로 올라왔습니다.

"저‥‥ 사진 촬영 좀 하면 안 될까요?"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사진과를 지망하는 고3 수험생이었습니다. 입학작품으로 사진을 제출해야 하는데 테마를 밥상공동체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런 친구들이 올 때마다 약간은 미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밥상공동체 가족들도 아무에게나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 일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밥을 먹는데 생판 처음 보는 친구가 사진기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내 얼굴을 찍어 댄다면, 나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일 식당에 발을 끊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거절하는 다일 가족들의 태도가 너무 단호했던지 더 이상 말도 못 꺼내고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 집으로 가지 않고 공동체에 남아서 이것저것 궂은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한 주일 두 주일 세 주일‥‥ 이 청년의 봉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몸을 던져가며(?) 섬기는 형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사진 촬영을 허락했습니다. 다일 교회 입당감사예배에도 와서 사진기를 들고 맹활약을 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교회예배에 참석하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방학 내내 공동체에서 봉사를 하더니만 밥상공동체 가족들과 아주 친해졌습니다.

밥상공동체 최고의 터프가이 할아버지 왈

"너 사진 잘 찍는다면서?"

"예‥‥‥ (쭈뼛쭈뼛)"

"그럼 내 얼굴 좀 박아봐. 영정으로 보관 할껴. 그리 알고 잘 박아 봐."

"예, 예"

"그럼, 나도 찍어 줘 봐."

"나도."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소리를 칩니다. 이 분들은 공짜라면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꺽다리 학생은 밥상공동체 가족들의 전속 사진사가 되었습니다. 매일 새로운 사진들을 한 아름 안고 와서는 여기저기 나누어 드립니다. 사실 밥상공동체 가족들만 허락을 하면 사진이 아니라 영화를 찍어도 화기애애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평상시 천막식당 안에서 플래시가 펑펑 터지면 긴장해서 카메라 반대쪽으로 눈길을 보내는데 꺽다리 학생을 통해서 번쩍거리는 사진기 조명은 밥상공동체 가족들이 신나게 즐기는 불꽃놀이 같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역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것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덕분에 밥상공동체 가족들은 영정을, 봉사자들은 독사진을 성경 책갈피에 꽂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밥 한끼 얻어 먹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마구 사진을 찍어댄다면 상대방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진기를 치워두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먹는 밥을 같이 먹고 그들이 자는 곳에서 함께 자고, 그야말로 동고동락할 때 사진을 찍어도 좋고 영화를 촬영해도 좋다며 마음을 열게 됩니다. 얻어먹고 사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고 절대로 소흘하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나그네, 고아, 과부, 그리고 병들고 갇힌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성경에서 양은 복받을 자들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고, 염소는 저주받을 자들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들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영광의 보좌에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태복음 25:35)

영광의 보좌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복받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복음 25:36)

그러자 오른편의 양들(의인)이 의아해하며 이렇게 반문합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으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임금되신 주님께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제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을 높은데서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는 분이 아니라 낮은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을 <여의도>에서 찾지 마시고 <달동네>에 가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골프장이나 헬스클럽에서 찾지 마시고 병원이나 감옥에 가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해 신년 초에 목사들이 모여 교회를 상대로 동냥을 하러 오는 사람들에 대해 대처하는 이른바 <거지 대책회의>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온 경험담을 간추려 보면 거지들을 몇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었습니다.

첫째, 사기형이 있습니다. 집을 떠나서 어디를 가는 중에 몽땅 쓰리를 당했다고 차비를 구걸하는 경우. 노방 전도를 하러 다니는 목사인데 전도지 값이라도 달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대접을 특별히 잘해 주어야 합니다. 무슨 검사라든가, 혹은 지방에 있는 아는 목사의 이름을 사칭하여 이러이러한 사람이 찾아가니 잘 부탁한다는 전화를 해놓고 얼마 후에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돈을 요구하는 경우 등등입니다.

둘째, 공갈 협박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동정심에 호소하다가 돈이 적다고 생각되면 은근히 공갈 협박, 혹은 훈계쪼로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이게 뭐냐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 등입니다.

셋째, 실무형이 있습니다. 어차피 목사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교회예산에 구제비가 책정되어 있는 것을 수금하러 왔다는 듯한 당당한 태도 등등입니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여러가지 경우가 있었는데 아마도 동냥꾼들도 모여서 새로운 방법들을 개발해 내는지 생각하기도 어려운 기상천외의 방법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대비책은 어떤 것이 좋겠는가? 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방법 중에 가장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골라 보았습니다.

첫째, 계속해서 찾아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너무 자주 찾아 오는 사람에게 왔다간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자주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 내가 언제 왔었느냐고 오리발을 내민다고 합니다. 이런 유형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는 돈을 줄 때마다 영수증을 써달라고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영수증을 쓰기 싫어서 자주 오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성자형입니다. 돈을 얻으러 오는 사람이 아이일 경우에 이렇게 고생을하면서 다니지 말고 우리 집에 아주 들어와서 살라고 하면 대부분 형이나 동생이 있어서 안 된다는 등 요리조리 이유를 대면서 절대로 안 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왕초가 있기 때문에 들어와 살고 싶어도 못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한번 그러고 나면 왕초가 목사에게 잡힐까 봐서도 그 집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실무형입니다. 1000원을 주었는데 돈을 더 달라고 하면 "무슨 소리냐?거지도 분명한 직업인데 한 집에 백원씩 100집이면 10000인을 버는 것이니까 부지런히 100집을 다녀서 하루 일당 10000원을 벌어라.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당신만 편하게 살려고 하느냐?"고 오히려 큰소리쳐서 보내는 방법 등등이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목사들이 어떻게 하면 불쌍한 사람들을 덜 도와 줄 수 있을까 하는 일에 머리를 짜고 있으니 참으로 모순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어서 안타깝게도 도와줄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안심하고 믿고 사랑으로 동정을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어떤 순진한 전도사가 버스에서 동냥을 하는 전과자를 집에 데려가서 함께 생활하려고, 집까지 따라갔더니 없는 것 없이 잘해 놓고 살면서 하는 말이 "동냥도 엄연한 하나의 직업이고 내가 당신보다 돈을 잘 벌고 있으니 당신도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아보라."고 오히려 격려를 받고 온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육교 위에서 꾸부리고 있는 여자 옆에 하루종일 잠자고 있는 아기는 수면제를 먹여 재우기 위해서 빌려온 아이라는, 소름이 끼치는 끔찍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대단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실상이 그런 것을 어찌하랴. 아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진짜로 도움을 받아야만 할 사람들조차 도울 수 없는 저주받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다할지라도 성도 여러분은 <거지대책>을 구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고린도 전서 6:8)는 자세로 사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나는 손해를 보아도 너에게 유익하다면 그렇게 살겠다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나는 잘못되어도 너는 잘 되어야겠다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병들고 갇힌 자, 세상에서 지극히 작게 여김을 받는 자들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속아도 하나님에게 속았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한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와 영벌을 선고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신 것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태복음 25:41-43)

왼편에 있는 <염소>들이 항변합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작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최근 어느 소책자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아‥‥배 고파. 엄마, 뭐 먹을 것 좀 없어요?"

오늘도 밤 10시가 넘어서야 학교에서 돌아온 지연이는 책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어 젖히며 수선을 피웠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먹으면 뭐든지 다 살로 간댄다. 좀 참지 그러니?"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지연이는 결국 커다란 양푼에 밥을 한 가득 담 아 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비비기 시작했다. 참기름에 김 부스러기까지 얹어 완성된 비빔밥은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갈 정도록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엄마도 좀 드실래요?"

한 술 가득 떠서 입으로 가져가다가 불쑥 숟가락을 내미는 지연이.

"너나 많이 먹으렴"

딸아이의 저녁 만찬이 계속된 지 벌써 두 달째이다. 전에는 매일 두 개씩 가져가는 도시락도 남겨와서 걱정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싹싹 비워 오는 가 싶더니 급기야 매일 저녁, 한 끼의 식사를 더 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이어트를 한다며 오후 여섯시 이후에는 사과 한 조각 안 먹으려 했던 아이였기에 그런 변화가 더욱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그만큼 공부가 고된 것일까, 갓 피어난 꽃잎처럼 한창 싱그러워야 할 나이에 밤 늦도록 책상 앞에 앉아 딱딱한 수학공식과 지겨운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을 딸아이가 애처로워 가슴 한 구석에 뜨거운 것이 밀려들었다.

"엄마, 왜 그래요?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연이가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아, 아니야. 잠시 네 생각을 했어."

나는 얼른 일어나며 딸아이의 가방에서 빈 도시락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도시락의 뚜껑을 여는 순간, 작은 쪽지 하나가 툭 떨어지는 게 아닌가.

"어머니, 고맙습니다."

쪽지 겉면에 쓰여져 있는 꼭꼭 눌러 쓴 글씨. 분명 딸애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쪽지를 펼쳐 보았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지연이 친구인 희정입니다. 그 동안 제 도시락까지 싸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편지로 대신하는 걸 용서해 주세요. 처음에는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저도 언젠가는 나누면서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지연이가 하루에 네 끼를 먹으면서도 오히려 핼쑥해져 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랑스런 내 딸은 학교에서 수학공식과 영어단어 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더 중요한 것들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요즈음 학교마다 결식(缺食)학생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도시락하나 마련하지 못하는 친구와 친구집안의 어려운 형편을 이해하고 자신의 도시락을 친구에게 주고 자기는 집에 가서 허기진 배를 채우는 갸륵한 마음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의로운 삶이요, 굶주린 예수님에게 먹을 것을 드린 복 받을 자의 거룩한 생활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며 기독교인의 실천적인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서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자는 심판을 이기고 자랑할만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 2:13)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작은 것 하나 소흘하게 여기지 마시고 넉넉한 마음으로 손을 펴 긍휼을 베푸심으로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참조 : 눅 6:20-23)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3)는 말은 이 세상에 깨끗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깨끗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더러운 죄인입니다. 죄인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더러운 죄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렘2:22)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음으로 나의 더러운 죄가 용서되고 깨끗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 사실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1-5)

여기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은 바로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또한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한 마음으로 일편 단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의 마음을 가지고 일편단심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될 때 그리스도를 닮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사람의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데 있습니다.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자 하나를 끌고 예수께 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돌을 들었던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하나 둘씩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와 그 여자 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마라!'(요8:1-11)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도, 그 어느 누구도 그 여자를 정죄한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자의 과거를 묻지도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정죄하지 아니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는 예수를 만나 불행했던 삶의 종지부를 찍고 행복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질 만큼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여인을 향해 돌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 여인보다 몸은 깨끗했을지 몰라도 그들의 마음은 죄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 둘씩 모두 자리를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을 정죄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를 대신 걸머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시면 그 사람은 깨끗한 사람이요 의로운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였습니다. 마귀가 그에게 나타나 루터의 죄가 낱낱이 기록된 종이를 건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루터를 비웃으면서 '너같이 죄많은 녀석이 어떻게 종교를 개혁해? 너나 좀 바로 살아라!'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말도 못하고 힘없이 앉아 있는데 뒤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는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제서야 그는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오늘의 기독교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과거가 어떠하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함받아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옛날 유대인들은 몸의 정결을 유지하는 것이 삶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몸의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생활부터 정결하게 구별된 음식을 먹어야만 깨끗해지는 것으로 알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몸의 정결을 위한 정결법에 따르면, 정결한 음식은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약대나 토끼 등은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부정한 음식입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지만 새김질을 못하기 때문에 부정한 음식입니다. 또한 물에 있는 것 중 정결한 생물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징어나 문어 같은 생물은 부정한 음식입니다.(레위기 11:1-23)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깨끗해지거나 더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은 모두가 깨끗한 것이며, 사람을 더럽게 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15-23)

그러므로 몸의 정결보다 더 크고 긴급한 문제는 마음의 청결입니다. 몸만 깨끗하면 마음이야 어찌되었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몸의 정결을 가장 중요시하고 그 정결법에 따라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역시 몸의 정결법을 버리지 못했었습니다. 베드로가 환상 중에 하늘에서 큰 보따리 하나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니까 그 안에는 정결법에 모두가 부정한 음식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며 먹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늘에서 두 번째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9-16)

사람이 깨끗해지는 기준이 구약의 정결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여전히 구약의 정결법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향해,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11:17)고 반문함으로써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시면 그것은 곧 깨끗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면 곧 그 사람은 의로운 것입니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원래부터 아예 각각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소위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온 것들도 정결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나 속되게 여기는 자에게는 속되니라."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몸보다도 마음 자체가 정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했습니다. 소유욕이나 감각욕, 명예욕이나 인정받고 싶은 욕망 등 인간의 각종 욕망과 욕심이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청결을 유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란 마음이 욕심에 의해 출렁이지 않는 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청결한 마음' 이것은 욕심이 완전히 걷혀진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낮추어 남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청결한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인가? 요한복음 1장 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어디에서 어떻게 본다는 것인가? 왜 애통하는 자나 온유한 자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 보상으로 하나님을 보는 특권 대신, 다른 품목을 받는가? 왜 긍휼히 여기는 자나 화평케 하는 자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얻지 못하는가? 왜 오직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마음이 청결한 상태야말로 바로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 상태를 가장 적절히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때 '형상'은 외형이 아니라, '마음'을 뜻합니다. 청결한 인간의 마음은 청결한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82편 6절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은 신들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볼 수 있다고 한 것은,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보여준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으며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과연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이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을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흔히 "마음을 곱게 먹어라."는 말을 합니다. 마음을 곱게 먹으면, 아무리 미운 사람도 고운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원래부터 고운 사람과 미운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시각과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찬송가 495장 가사처럼,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귈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그 곳은 환경이 나빠도 천국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주님이 지옥에 계시다면 나는 기꺼이 지옥을 가고 싶다." 문제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분별력이 뛰어난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그가 그들과 함께 식사하려고 식탁에 앉았을 때 그에게 성령이 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꿀을 먹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빵을 먹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대변을 먹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속으로 매우 놀라면서 "주여, 나에게 이러한 신비를 계시해주소서!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그들 모두 앞에는 다 똑같은 음식이 놓여 있는데, 왜 그들이 각각 다른 음식, 곧 어떤 이들은 꿀을, 다른 이들은 빵을, 또 다른 이들은 대변을 먹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까?"라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한 목소리가 위에서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꿀을 먹고 있는 자들은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 그리고 영적인 기쁨을 가지고 식탁에 앉으며 또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기도는 향기처럼 하나님께 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꿀을 먹고 있는 것이다. 빵을 먹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일에 참여케 된 것을 감사하는 자들이다. 대변을 먹고있는 자들은 불평하면서 '이것은 좋은 것이며 저것은 불쾌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게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됩니다. 마음의 청결을 위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기 비어 종의 모습으로 이웃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속에 욕심을 제거해주시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소유에 가치를 두고 살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데서 행복과 기쁨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남을 섬기며 사는 사람치고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그의 마음, 자기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져 남을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사시므로 하나님의 얼굴 모습을 보여주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참조 : 눅 6:20-23)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본래 에덴 동산에는 하나님, 그리고 아담과 이브, 모든 생물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동산 숲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평화의 동산,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의 큰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평화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므로 이제 인간과 자연사이의 평화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생존원리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간 사회도 어느 정도까지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에덴 동산의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도 에덴 동산의 평화를 소망하며 그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사야 11:6-9)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세상에 충만할 때" 평화가 이룩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죄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는 평화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난 3000년 동안의 인류의 역사에 3500번이 넘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지진, 홍수, 가뭄, 태풍 등의 자연재해는 지금도 계속되는 가운데 인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한 인간의 부단한 노력가운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첨단을 달리고 있는 과학과 의학이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월등한 경제 이론이나 정치이념이 인간에게 평화를 안겨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평화는 이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평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14절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늘의 천군 천사가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했습니다. 다시말해 인류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14:27)

과연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인류 평화를 위해 행하신 일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로새서 1:20)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8)

이제 인간은 평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시한 평화의 길입니다. 예수 십자가가 없는 곳에 인류의 평화는 없습니다. 인류 평화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눅 19:41-42)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평화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고 며칠 뒤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길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평화의 길을 트게 하신 십자가의 예수를 거절할 것을 미리 아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잔을 나누어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과 피이므로 너희도 성찬을 받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내 몸 속에 넣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뜻대로 내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칼타고(Cathage)의 감독 키프리언 (Cyprian)은 258년에 순교당했습니다. 사형선고문이 낭독되자 그는 희열에 찬 밝은 낯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감사합니다. 이제야 주님과 완전한 화목을 이루었습니다."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에게 죽음도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자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해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형편에 처해 있다해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시는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바로 십자가의 예수를 전파하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자들을 말합니다. 인류의 평화는 예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평화의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막힌 담도 허무는 화목의 길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간곡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바로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것을 아뢰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가운데 차고 넘치게 하려 함입니다."(요한 17:11-13)

예수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는 우리들이 하나가 되고 우리 마음속에 기쁨과 평화가 차고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서로 하나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십자가 못박는 정신을 가지고 서로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십자가로 하나되는 것, 인간과 인간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십자가로 우리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 5:18)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지 못하면 평화의 세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하나님은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형제와 화목을 이루고 나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5:23-24)

깊은 산 오솔길 옆의 자그마한 연못에 예쁜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싸움이 벌어져, 두 마리의 붕어는 서로 물고 뜯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결국 한 마리가 죽어 물 위에 뜨고 몸이 썩었으며, 연못의 물도 부패되었습니다. 살아 남은 붕어는 혼자서 영원히 잘 살 줄 알았지만 썩은 물을 먹게 되자, 곧 그도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로 물고 뜯으면 피차 망하게 되는 법입니다. 인간관계의 화평을 위해 서로가 마음 상하는 말이나 행위를 삼가고 위로와 격려, 사랑과 용기를 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사이, 인간과 인간사이, 민족과 민족사이, 인간과 자연사이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랑으로 희생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마음속에 평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속에 십자가를 통한 평화, 자유, 해방을 체험함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 평화, 자유,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면류관에 찔리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시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평화, 인류의 평화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예수를 전파하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8.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참조 : 눅 6:20-23)

본문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의"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의로우신 분은 한 분 예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롬3: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러므로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다른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본문의 말씀을 정리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믿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게 되면 애매하게 고통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는 증거는 출세하고 성공하거나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을 받았다거나, 손해를 입었다거나, 고통을 당했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의 축복의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축복이라고 하는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신앙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갈 바를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히 11:8)입니다. 성경은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나아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믿음이나 의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거나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대로 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생각보다 더 높기 때문입니다.

"(사55:9-10)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복이라고 하시는 것과 사람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방법과 인간이 복이라고 누리는 방법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욕을 먹었거나, 손해를 보았거나, 핍박을 받은 것을 축복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출세하거나, 성공하며, 부귀영화를 누려야만 축복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잘 믿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출세하거나 성공하거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이 제시한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복 주시는 방법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사는 길을 세상에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복을 세상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사한 인류가 복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은 구원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마음을 지니고 사셨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복된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8복에 대한 교훈은 인간의 행복이 어떤 행위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 다시 말해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8복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며, 8복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8복에 나타난 8가지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마음과 성품을 보여줍니다. 8복에 나타난 8가지 사는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는 방법 8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8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데반은 가장 많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며 돌멩이를 던져 죽이고자 하는 살기등등한 군중들을 위해 예수님처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천사의 얼굴을 보여주었다고 했습니다.

"(행7:54-60)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노예처럼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손해를 본다해도, 아무리 고통이 심하다할지라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한다해도 가해자를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축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가 잘 되기 위해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14-21)

이렇게 말한 사도 바울은 참으로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그를 두고 불행했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후11:23-28)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환난을 수 없이 당했으면서도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항상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할 수 있었으며 자신도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고후4:16-18)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輕)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환난을 일시적이고 가볍게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난으로 인해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축복을 영원하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확신한 것입니다. 출세나 성공이나 건강이나 부귀영화 등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잠간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고 손해를 보고 고통을 받았던 것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복과 상급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시편 기자도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하다며 그 유익함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119:71-72)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이 비록 험하고 많은 고통과 손해보는 일이 생긴다해도 그 길이 곧 "천천 금은보다 승한" 복된 길임을 믿으시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선정한 <세계를 변화시킨 가장 극적인 세계사 100대 사건>가운데 하나가 서기 60년대의 기독교 대 박해입니다. 비록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사후 300년 동안 모든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뿌리를 내렸지만 신자수는 불과 로마제국 인구의 10분의 1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신앙이 확고한데다 소수의 사람들의 종교라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는 자연히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을 유태인들과 동일시하여 똑같은 취급했으나 예수가 죽은 후에 곧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서로 다른 점들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상징인 황제에게 희생제물을 바치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행동은 반역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인들의 편견은 그런 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유태교도들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 많았던 반면 기독교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쉽게 박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이 성찬식을 하면서 사람의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신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기독교도들의 이런 끔찍한 의식의 결과로 재난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생겨나 "기독교인들 때문에 비가 안온다."는 말이 속담처럼 로마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서기 60년대에 네로 왕 치하의 로마 대 화재 당시 최초의 대규모 기독교도 박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인망이 없었던 네로 황제는 화재의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으로 기독교인들을 선택했습니다. 기독교인들 수 백명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습니다. 또한 황소에 받히거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인간횃불"이 되어 불타 죽기도 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울도 로마의 기독교인 대량 학살 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서기 2세기경에는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었으나 98년에서 117년까지 재위한 트라야누스 황제는 기독교인들도 정식 재판을 받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금지했습니다. 로마황제들은 순교자들이 생겨나도 기독교가 위축되기보다 오히려 번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위기가 닥치면 대부분 숨어 지내면서 고비를 넘겼습니다. 대체로 순교자들은 사람들의 편견이나 야만적 관습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순교자들은 종종 관료들의 분노를 돋우었으며, 심지어 어떤 순교자들은 고문을 당하면서 기뻐하기도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원형경기장에서 로마시민의 오락을 위해 야수들에게 던져지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들은 곧 기독교역사에 기록되어 그리스도가 몸소 겪었던 고통을 견디어 낸 본보기로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었습니다. 3세기에 테시우스 황제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로마인들이 로마의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하며 이를 확인하는 증명서를 받아야한다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곧 가짜 증명서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칙령은 효력이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발레리아누스 황제 (257∼9)가 비슷한 칙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303년 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소위 "대 박해"를 시작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는 이들은 고문, 투옥, 또는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수 천명이 죽었지만 전체 기독교인 수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은 사람들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곧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하늘에서 상급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로마의 콜로세움 원형 경기장 높은 곳에 지금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무엇을 상징합니까? 로마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숨져간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승리를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길바닥에 끌려다니다 죽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에서 올리부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진 후 매맞아 죽었습니다.

안드레도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설교했습니다.

맛디아와 바나바는 모두 돌로 맞아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네로에 의해 로마에서 교수형을 받았습니다.

이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이들 순교자들을 두고 불행하게 살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들로 천국을 소유한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는 세계사를 변화시키는 가장 극적이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체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만큼 가정과 교회, 나라와 세계는 극적인 변화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정이 변화되기 원하십니까? 교회가 변화되어 부흥되기를 원하신다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극적으로 변화되는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복 받고 사는 방법입니다.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그리고 생명의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감수하시므로 천국을 소유하고 하늘 나라에서 상급이 크신 최고의 복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9.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참조 : 막 9:50, 눅 14:34-35)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겠습니까?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해서, 일류 대학에 입학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구약 요셉이나 다니엘이 이국(異國)에 가서 국무총리가 되는 출세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성서 기록은 없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서 국무총리가 된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번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국무총리가 된 배경에는 일찍부터 우상숭배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을 확정하고 어떠한 생명의 위험이 있어도 깨끗하게 산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질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최고의 찬사, 최고의 칭호를 성도들에게 붙여주셨습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호는 "빛과 소금"입니다. 본질적으로 세상은 "어둠"이며, 죄악으로 부패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빛이며, 죄악에 썩어져 가는 세상에 없어서 안될 것이 소금인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대통령을 인종차별의 높은 벽을 부순 아프리카의 자유의 등불이라고 부르는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투옥되어 무려 27년간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서도 <아파르트헤이트>로 불리우는 악명 높은 인종차별정책의 철폐를 위해 끝없는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그의 옥중생활은 어둠을 자유 아프리카의 빛으로 탈바꿈시킨 동력으로서의 순결한 투쟁 그 자체였습니다. 빗발치는 국제여론과 세계 각국의 경제봉쇄 등에 시달린 백인정부는 결국 1990년 2월 11일 조건 없이 만델라를 석방했고, 1994년 4월에 실시된 최초의 자유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만델라는 드디어 남아공의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그는 반인간적인 인종차별의 어둠을 몰아내고 인종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빛을 보게 했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넘나들면서도 자유와 평등을 위한 꺼지지 않는 그의 투쟁의지가 결국 어둠을 추방하고 빛의 승리를 입증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 사람들은 소금을 "신(神)과 같은 것"(theion)이라고 부를 만큼 귀중히 여겼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태양과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Nil utilius sole et sale)라는 노래까지 불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소금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첫째, 소금은 순결을 연상케 합니다. 소금의 반짝이는 백색이 바로 순결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소금이 제일 순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 하면 소금은 순수한 태양과 바다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깨끗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미래의 소망을 가지려면 깨끗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딤후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다니엘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마음을 확정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으므로 결국 느브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토록 만들었습니다.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여러분도 다니엘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항상 깨끗이 하는 생활로 이웃들을 거룩한 하나님 앞에 인도할 수 있는 능력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도의 참된 능력은 깨끗함에 있습니다.

둘째, 소금은 부패방지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이 더 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방부제의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세상은 부패하기 쉬운 곳이기 때문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되지 아니하면 세상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는 권력이나 물질이 아니라 소금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소금이라고 불러주신 곳은 교회 외에는 아무 곳도 없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세상의 소금이기 때문에 교회가 소금이 되지 못하면 세상은 당연히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어느 곳에 있든지 소금이 되어 부패를 방지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성도가 정치를 하면 정치가 부패하지 않아야 하고, 기업을 경영하면 기업이 부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가 사법부에 있으면 사법부가 부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어느 곳에 있든지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사명을 다 해야 합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가 부패되지 않도록 하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은 단지 부패를 방지할 뿐이지 이미 상한 것을 성한 것으로 되돌려놓지는 못합니다. 소금은 다만 부패의 방지와 확산을 막아 그 신선도를 유지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성도가 소금이라 해서 이미 부패한 사람을 깨끗한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죄악에 썩어 부패한 사람을 의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아무리 더럽고 부패한 사람일지라도 한 순간에 흰 눈같이 정결하게 만드시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 능력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예수의 피가 인간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죄악에 썩어져 가는 세상에 소금이 되고자 하시는 성도 여러분에게 죄를 정케하는 십자가의 능력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셋째, 소금의 가장 크고 가장 분명한 특성은 음식에 맛을 주는 것입니다. 소금이 들지 아니한 음식은 좋아 보여도 맛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인생에 맛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맛'이라고 해서 흔히 말하는 쾌락이 아닙니다. 진정한 '인생의 맛'이란 어둠 속에 빛을 발하며,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며, 좌절과 절망 가운데 희망을 심어주며, 불안과 혼동 속에 삶의 평안과 질서를 심어주며, 진실 앞에 거짓이 무릎을 꿇게 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기독교는 모름지기 이러한 맛을 내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이러한 소금의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도 없으며 밖에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용지물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성도가 소금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면 당연히 버림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 구약시대 유대인중 배교했다 다시 돌아온 유대인은 회당에 정식으로 받아 드려지기 전에 참회하는 의미에서 회당 문에 가로누워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갈 때에 밟고 가게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관습을 지키고 있는 일부 지역이 있다합니다. 규칙상 교회에서 제적되었던 자가 다시 용서함을 받기 전에 교회 문에 누워서 사람들이 들어갈 때 "나는 맛을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라고 하게 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버리워 짓밟히지 않도록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본문 14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찬사입니다. 왜냐 하면 본질적으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은 예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요1:4)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도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명하신 것은 바로 예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참 빛이 되시는 예수를 믿고 예수처럼 살 때에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오직 참 빛이 되시는 예수를 마음과 생활 속에 받아들을 때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의 요구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빛을 비춰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신부 얼굴의 광채는 신랑의 사랑에서 반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간직되고 반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처럼 십자가를 통해 그 사랑을 나타내게 될 때 진정한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믿는 자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빛은 어두운 곳을 비추어야 합니다. 어두운 방안을 밝혀 집안 모든 사람 앞에 비취게 하기 위해서는 등불을 등경 위, 곧 높은 곳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란 착한 행실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빛을 비취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만 교회 안에서만 빛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 문안에서만 효력이 머물러 있는 기독교라면 누구에게도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교회 밖, 세상 생활에서 더 많은 빛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교회의 빛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빛이 존재하는 목적은 어두운 곳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목적은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 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을 밝게 하는 빛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는 빛을 발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빛이 되시는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발등상의 등불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으면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중세 암흑기의 기독교에 불을 밝힌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2차대전 중 미국 해군의 역사 중에 가장 용감했던 지휘의 사례가 남아 있습니다. 1944년 6월 20일에 있었던 필리핀 바다의 전투였습니다. 지휘관은 미쳐(Marc Mitscher)제독이었습니다. 대규모의 일본 함대를 미군 항공기들이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출격했던 전투기들이 항공모함으로 귀환할 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파도는 높았으므로 착륙이 위험했습니다. 전투지구에서 함정들은 적의 공격을 피하여 등화관제를 실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쳐 제독은 그 유명한 "불빛을 밝히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험을 강행한 것입니다. 적의 표적이 되더라도 아군 항공기들을 무사 귀환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종사들은 뒤에 그날의 감동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우리 군함들은 너무나 찬란하고 분명하고 아름다웠다. 할리우드 개봉축하연과 중국인의 설날과 독립기념일을 합친 것처럼 우리 군함들은 밝게 드러나 마치 지옥에서 오아시스를 보는 것 같았다." 이날 80대가 무사귀환 착륙하고 불과 세 대만이 희생된 것은 기적이라고들 합니다. 미쳐 제독의 과감한 작전이 성공한 것입니다. 성도는 아무리 위험부담과 희생이 뒤따른다할지라도 분명히 불을 밝혀야 합니다. 둘째, 빛은 인도자의 역할을 합니다. 빛은 길을 분명하게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분명하게 밝혀 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세상은 무엇보다도 선을 위해서 굳세게 서서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할 선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부정 부패를 보고서 그대로 방치한다면 엄격히 말해 그 사람은 부정 부패 방조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정 부패에 대한 분명한 지적과 더불어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진리와 정의를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 혼자서는 일어날 수 없을 만큼 도덕적 힘과 용기가 결핍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한 사람이 먼저 이끌고 가면 그들은 따를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의지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어떤 힘있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그들은 곧 어떤 일이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약한 형제가 지탱할 수 있고 솔선해서 용기가 부족한 자들이 따를 수 있도록 강하게 일어서는 것이 성도가 받은 빛의 사명입니다. 세상은 진리와 정의와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빛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 스스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가 솔선해서 용기 있게 행하고 태도를 명확히 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어두운 사회를 빛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생명을 걸고 감당해야 합니다.

밝은 세상을 위하여 짐 맥클로스키(Jim Mcclosky) 씨는 특별한 일에 평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거짓말쟁이들을 가려내는 일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세 명이 무죄 판결을 받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뉴저지 프린스턴에 '센추리온 미스트리스'(Centurion Mistries)란 작은 간판을 걸고 혼자 일합니다. 그는 거기서 억울한 판결을 받았다는 심증이 가는 복역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하여 무보수로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정 증인들의 거짓 증언 때문에 억울한 죄명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맥클로스키 씨는 증인들을 다시 만나보고 배후 조사를 하고 끈질긴 설득을 통하여 진실을 가려내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한 가지라도 바로잡는 것이 온 세상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며칠 전에도 그는 기쁨의 개가를 올렸습니다. 1976년에 경찰관을 살해한 죄로 복역중이던 제임스 란다노의 무죄를 증명한 것입니다. 뉴욕 법정에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과 절망 속을 살던 란다노 씨는 눈물의 포옹을 했습니다. 그는 또한 두 명을 살해한 죄로 평생 감옥에 있어야 할 산토스 씨의 무죄를 증명하여 6년 만에 광명을 보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강간 살인죄로 12년간 복역중이던 사람의 무죄를 증명하여 자유를 안겨 준 일도 있었습니다. 현재 그가 매달리고 있는 사건은 열 건에 달합니다. 맥클로스키 씨는 개인 사업을 하다가 중단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 들어가 1984년에 졸업하여 교도소 목사로 사역하던 중 자기의 무죄를 호소하는 한 죄수를 돕기 시작하면서 이런 일에 평생을 바칠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돈벌이도 되지 않고 숨어서 하는 일이지만 정의를 추구하고 거짓말쟁이들을 가려내는 것이 밝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랑과 정의의 정신은 인종을 초월합니다. 그는 텍사스 주에서 여고생 강간 살인으로 역시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흑인 브래들리의 무죄를 증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죄수는 고등학교 청소부였는데, 백인 동료 청소부 네 명의 위증으로 꼼짝할 수 없이 죄를 뒤집어쓴 것입니다. 그런데 맥클로스키 씨의 사랑과 정열에 넘친 설득이 효과를 거두어 네 명의 증인 모두가 위증을 자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실만이 사회를 밝게 한다."는 그의 좌우명은 혼탁한 전세계에 퍼져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을 때 내일의 세계는 밝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본문의 "착한 행실"은 선하며 매력있고 아름다우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행위를 뜻합니다. 성도의 "착한 행실"은 단순히 선할 뿐만 아니라 역시 마음을 끄는 매력과 힘,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선이 있고 사람에게 반발을 느끼게 하는 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은 아름다운 것이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선을 베풀면서도 추한 모습과 주위의 반발을 사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지극히 작은 선을 베풀고서도 사람을 이끄는 매력과 호감, 그리고 인정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사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선한 행실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경우들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착한 행실"로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게 해야만 합니다. 성도는 사람들의 눈을 자기에게 집중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게 해야만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세상에 그만큼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 영향력의 성격은 진실무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됨됨이가 예수님을 닮아야만 참다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으로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공부 잘 해서 잘 되라는 말을 통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간됨됨이를 통해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감화력은 바로 인격에 있습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성도의 영향력은 얼마만큼 예수의 인격을 갖추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소금이 되지 않으면 이미 방부제의 기능을 발휘할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지 아니하면 세상을 비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 소금의 영향력도, 빛의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발휘해야 하는 영향력은 바로 됨됨이의 영향력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공시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480년 전의 일이지만 그의 용기는 인류 역사와 더불어 길이 길이 빛나고 있습니다. 권위에 대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때, 특히 그 권위가 자신에게 죽음을 줄 수 있는 상황 아래에서의 항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진실의 편에서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서는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마을의 모든 기왓장이 나를 거스를지라도 나는 진실을 추구하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선두에 섰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바로 진실을 추구한 마틴 루터의 빛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과 지역사회, 그리고 교회에 영향력있는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인간됨됨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0. 옛법과 새법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또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17-48)

요즈음은 회사원 채용할 때 주로 면접시험으로 결정한다고 합니다. 어느 회사 사장이 응시자들을 직접 면접하게 되었습니다. 사장은 응시자들에게 어느 학교 출신이냐, 전공이 뭐냐, 자격증은 몇 개나 가지고 있느냐, 외국어는 몇 가지나 가능하냐 등등은 전혀 묻지 않고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가? 그리고 당신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가?"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 사장은 사람의 됨됨이를 아는데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믿지 않는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항상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생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월급을 받기 위해서나 고용주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일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활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일에 정직하고 진실하며 근면 성실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매우 진취적이고 창의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즈음 우리 한국 사회에서 '예수 믿는가 믿지 않는가'를 놓고 사원 채용을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으며, 예수 믿는 사람들의 됨됨이를 높게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하고 슬픈 일이지만 아마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예수 제대로 믿고서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믿고 부자가 된 사람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예수 제대로 믿으려면, 우선 정직하고 진실해야 할뿐만 아니라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도 돌려 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아야 되는데, 그리고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는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장사해서 돈 벌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예수 믿어 부자되고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본인과 한국 교회를 위해서라도 교회를 떠나서 양심에 부담없이 사는 편이 나을 겁니다. 한국 기독교를 저급한 종교로 추락시킨 것은 소위 <예수 믿어 부자 되고 높아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종교이든 그 종교의 참된 정신을 망각하고 종교를 탐욕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 때문에 종교는 왜곡되고 종교인이 신뢰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부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가진 것을 몽땅 다 가난한 자들에게 퍼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네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내어 주고 하늘나라에 부요한 자가 되라." 인류를 위해 어느 것 하나 아낌없이 다 내어 주시고 마침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신 예수를 두고 가난하다고 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기도원 하나, 수도원 하나, 교회 묘지 하나, 부동산 증서 하나 남기지 않으셨으나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하신 만유(萬有)의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자가 같으나 부요하신 분이며,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친히 가난하게 되신 분이십니다. 이 땅에서 부자가 된 한국 교회, 그리고 그 부자가 된 교회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목사들을 하늘에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것이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신 예수님의 뜻입니까? 자식에게 물려줄 만큼 부요하여 탐이 나는 교회가 신뢰받을 수 있는 교회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회는 이미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굴 하나 두지 않으셨던 것을 본 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셔서 어느 곳 어디서나 신뢰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예수 마음을 가지고 예수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삶의 양식으로 주신 새 법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옛법으로 일컬어지는 율법으로는 결코 천국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법인 율법의 근본은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등등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법을 지키는 정도의 수준을 바리새인의 율법 수준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정신을 버리고 율법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데만 정신이 팔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그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아무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일>, 즉 노동이란 무엇이냐를 정의를 내려야 했습니다. <노동>에 대해 정의를 내리다보니 노동이란 <짐을 운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짐>은 무엇인가? <짐>이란 마른 무화과 한 송이 무게를 옮기는 것, 상처에 바를만한 소량의 꿀을 바르는 행위, 한 모금 정도의 우유를 마시는 것, 알파?의 글자 두 개를 기록하는 행위, 안식일에 여자가 가슴에 부로치를 다는 행위, 안식일에 가발을 쓰는 행위 등등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참된 종교이며, 하나님께 대한 참된 봉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를 내린 수 천가지의 율법을 기원 3세기에 법전으로 성문화한 것이 바로 미슈나(Mishnah)이며, 이를 후에 유대 학자들이 해설해 놓은 것이 그 유명한 탈무드(Talmud)입니다. 예수 당시 엄격한 정통 유대인은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정의를 내린 수 천가지가 넘는 율법들을 지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모든 율법의 본질이며 기반인 십계명은 한 마디로 경외(敬畏)와 존경(尊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날을 경외하며 부모를 존경하며 생명을 존경하며 인격과 그 소유물을 존경하며 진리와 다른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로 하나님을 사랑으로 섬기며,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율법은 옛 법이며, 사랑은 그 옛 법을 완성하는 새 법입니다. 수 천 가지의 율법을 다 지킨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 율법의 근본 정신과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주께서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긍휼을 원하신다는 말씀은 수 천 가지의 율법에 따른 제사보다는 긍휼, 사랑의 삶을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바리새인들이 내린 율법을 충족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삶으로 율법을 완성하는데 있습니다. 율법을 능가하는 사랑의 삶은 첫째로 형제에게 분노를 품거나 멸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20)고 했습니다. 진실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정당한 분노일지라도, 분노를 마음에 오래 동안 품거나 그 분노를 잊지 않거나 화해를 거절하며 분노하거나 복수하려고 분을 품고 있거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보다 더 죄질이 나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웃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좀 많이 배웠다는 교만에서 나오는 멸시는 추악한 것입니다. 남보다 지위가 좀 높다거나 좀 더 많이 가졌다 해서 이웃을 멸시하는 것은 더러운 죄악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중한 죄는 사람의 명예와 그의 신용을 파괴하거나 탈취하는 것입니다. 악담을 지어내어 이웃의 명예를 더럽히고 뒷공론을 일삼아 이웃을 멸시하는 행위는 살인 못지 않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분노와 멸시로 가로막힌 인간관계를 하나님 사랑으로 회복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화내지 않고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도록 화를 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화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겠는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그 가능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시지만 인류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 고통, 옆구리에 창으로 찔리는 아픔,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히는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을 다 받으시면서도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시거나 조롱하는 강도를 향해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스데반은 과연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돌을 던져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군중들을 향하여 전혀 분노하여 저주하거나 그들을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처럼 그들의 죄사함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화가 날 때마다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를 더욱 더 마음 속 깊이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의 마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여성의 인격에 대한 모욕이며, 자신의 인격을 더럽히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폴 레프(Paul Rep)의 저서 <선과 살과 뼈(Zer Flesh, Zen Bones)>에 이런 우화가 나옵니다. 선을 공부하는 두 중이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습니다. 물이 많아 시내를 못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한 중이 성큼 그 여자를 안아 물을 건넜습니다. 다른 중이 비난했습니다. "수도승으로서 여자를 가까이 해서 되겠는가! 위험하네. 특히 저런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안다니." 상대 중이 말했습니다. "나는 안았다가 곧 내려놓았지만 자네는 마음 속으로 저 여자를 안고 아직 안 내려놓고 있지 않은가?" 죄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지켜 주며 존중할 때 인생이 아름다워지고 매력있는 인생이 될 뿐만 아니라 건강한 가정,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성과 그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쾌락의 도구로 삼는 것은 인권 침해와 동일한 범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범죄를 저지른 사지백체를 찍어버리라고 할만큼 중한 죄악입니다. 아름다운 꽃도 꺾어버리면 곧 향기를 잃어버리고 시들어 악취가 나게 됩니다. 아름다운 꽃은 잘 가꾸고 보살펴 지켜 줄 때 향기 가득하며 그 아름다움으로 모두가 다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던지신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던져 여성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더러운 죄로 얼룩진 나를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항상 마음에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깨끗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자신의 성결뿐만 아니라 이웃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지켜줄 수 있는 성령이 여러분에게 항상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누구 앞에서나 맹세할 필요가 전혀 없는 진실한 인격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도 점점 신용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IMF이후 전국에서 230만명 정도가 은행거래 신용불량자로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어쩔 수 없이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겠으나 자기 생명을 걸고 신용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행에 가서 교회 담임목사인데 돈 좀 빌려달라하면 절대로 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간 은행거래 내용을 살펴 신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조사해서 대출가능 한도액에서 대출해줍니다. 만약 그간 신용카드 이용대금이 연체된 적이 있거나 대출금 상환이 연체된 적이 있으면 신용대출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생활에 정직과 진실로 어디에서나 신뢰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은행에서조차 저 사람정도라면 얼마든지 믿고 대출해줄 수 있다고 할만큼 신뢰할 수 있는 기독교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국제 사회에서도 국가에 대한 신인도가 떨어지면 돈 빌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던 것을 잘 보셨을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시키는 사랑의 삶을 위해서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미움이 없어야 합니다. 미움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가 미워지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왔는데 눈 앞에 가로 놓인 것은 파도가 넘치는 홍해바다였습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애굽의 바로 왕이 군대를 이끌고 풀어 놓아 주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들이기 위해 먼지를 날리며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내려쳤습니다. 꿈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다가 갈라져 육지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급히 홍해를 다 건넜습니다. 문제는 곧 이어 애굽 군대가 그 뒤좇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다 홍해를 막 건너고 난 뒤 갈라졌던 홍해가 다시 합해져 그 뒤를 바짝 좇고 있던 애굽 군대가 그만 바다 물속에 잠겨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하늘의 천사들이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슬픈 빛으로 말씀하시기를 "내 손으로 지어 만든 것이 바다에 가라앉거늘 너희들은 내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합당한가?"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이 손수 만드신 피조물 중의 어느 하나라도 멸망되는 것을 결코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고 위대하심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처럼 모든 사람에 대해 깊은 사랑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 가는 길은 모든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같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될 때 참된 인간이 되고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옛 법인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의 새 법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새로워지록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