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목사

 

교회소개
담임목사
선교활동
게시판
방명록
홈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cross01b.gif 사랑의 향기 cross01b.gif

                   ---고린도 후서 설교---                

머 리 말

이 책은 나의 사랑하는 평강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매주 발간되는 설교지 <숲 속의 사과나무>에 실렸던 것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뜨거운 눈물로 쓴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숱한 문제들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로 풀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 전서 설교집 제목을 주저함 없이 <사랑의 지혜>, 그리고 고린도 후서 설교집의 제목은 <사랑의 향기>라고 붙였습니다.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탈고하면서 다시 한번 미숙한 나의 목회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 그리고 뜨거운 가슴으로 목회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릴 따름입니다. 미흡하기 그지없는 설교집일지라도 여러분의 교회생활에 바른 길잡이가 되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는 나의 설교집을 발간할 때마다 문서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도와주신 <영기획, 도서출판 크리드>의 구영순 사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99년 3월 31일

야음(也音) 산기슭에서

이 동 희 목 사  

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 위로의 하나님(1:1-11)
 2. 아멘의 하나님(1:12-24)
 3. 그리스도의 향기(2:1-17)
 4. 그리스도의 편지(3:1-18)
 5. 보배를 질그릇에(4:1-18)
 6. 새로운 피조물(5:1-21)
 7.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6:1-18)
 8. 자신을 깨끗이 하자(7:1-4)
 9.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7:5-16)
10. 복으로 심는 자(8:1-24)
11. 모든 사람을 섬기는 후한 연보(9:1-15)
12.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10:1-18)
13 하나님의 열심(11:1-33)
14. 나의 원하는 것(12:1-21)
15. 진리 편에 서라(13:1-13)
  

 
1. 위로의 하나님

"(고후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고후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후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후1:6)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후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 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1: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고후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한 노부부가 원예 농장에서 한 그루의 덩굴장미를 사왔습니다. 노란 꽃을 풍성하게 맺는다는 그 덩굴장미를 심어 놓고 노부부는 매년 예쁜 꽃이 피어나길 얼마나 간절히 고대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그 무성한 장미 덩굴에는 한 송이 꽃도 피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노부부는 그 장미 덩굴을 샀던 농장으로 찾아갔습니다. "그간 우리 부부는 정성을 다해 나무를 가꾸어 왔소. 자주 물을 주었고 둘레의 흙을 기름지게 해주었소. 그 결과 나무는 무성하게 잘 자랐지만 끝내 장미는 피어나지 않는구려." 그러자 원예사는 바로 그런 환경이 꽃이 피지 않는 원인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장미는 정원에서 제일 비옥하지 않은 땅에 심어야 합니다. 모래흙이 제일 좋아요. 또 비료를 주어서도 안 됩니다. 자갈 섞인 흙을 넣으세요. 그리고 가지는 사정없이 잘라 버리세요." 원예사의 주의를 듣고 난 노부부는 즉시 그대로 실행해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해에는 탐스럽고 화려한 노란 꽃송이들을 보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아름다운 장미가 피어나듯 모진 고통과 시련은 인생을 더욱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순교자 가족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가 작사한 "주님 가신 길"(복음성가 347장)에 이런 아름다운 가사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 더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 아름답다.

이 세상의 부귀 영화 마귀 유혹 손짓하나

고생 중에 인내함은 최후 승리 이룩하네.

베드로 역시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장차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벧전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극한 환난 중에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 혹독한 환난을 경한 것으로, 그리고 잠시 받는 것으로 인내하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성도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고난과 역경은 여러분의 삶을 아름답고 향기나게 하며 장차는 영광스럽게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에베소에 머물면서 기록했습니다. 그 때 그의 계획은 마게도냐를 지나서 고린도를 방문해서 겨울을 보내고자 했습니다.

"(고전16: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고전16: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고전16: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에서 극심한 환난을 당하게 되어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후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1: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또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 전서를 읽고도 변화가 없었고, 바울이 보낸 디모데의 가르침도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디모데의 보고에 따르면 고린도 교회에 거짓 사도가 나타나 선동을 하며 바울의 사도적 권위에 도전함으로 교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직접 방문했지만 이 방문은 모두에게 가슴 아픈 방문이 되었습니다.

"(고후2:1)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그 후 바울은 애통하는 마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심하게 책망하는 편지를 써서 디도에게 전달하게 했습니다.

"(고후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눈물의 편지>를 통하여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해 줄 것과 문제의 거짓 사도를 징계해 줄 것 등을 간청한 것입니다. 한편 마게도냐에 건너가 디도를 만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보낸 <눈물의 편지>를 받고 회개하며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즉각 격려의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고린도 후서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교회의 변화 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그들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큰가를 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환난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하나님만 의지한 것 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자신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 위로의 메시지를 주며, 자신을 위해 기도로 후원해 줄 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 베드로를 정통 사도로 보고 바울을 이차적 사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교회 분쟁이 야기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아볼로의 달변과 철학적인 성경 해석의 기술에 심취한 사람들은 바울의 말이 유창하지 못하고 미련해 보이는 것을 걸고넘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바울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외모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전도의 미련한 것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 이렇게 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변화시키는 능력이 성령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천막을 깁는 천한 근로생활을 하면서 선교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러한 바울의 생활에서 참된 성령의 권위와 능력, 그리고 그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바울을 천하게 여기는 교만에 빠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살전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어떻게 오해를 했던지 고린도 교회의 터를 닦은 영적 아버지로서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고 교훈하며 안타까워하면서 사랑으로 그들을 권면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온갖 수고와 노력을 다한 바울이 도리어 그 교인들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마5:4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교훈을 몸소 실천하며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교인들의 비방을 끝까지 인내하며 양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는 바울의 신앙은 고난 가운데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 감당에는 특히 무수한 환난을 맞게 됩니다. 더구나 고통을 당하는 바울을 위로하고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는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그들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시며 다시금 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시며 굳세게 붙들어 주십니다. 본문에는 "위로"라는 말이 무려 10번이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환난 당한 바울을 그렇게 위로해주시는 것은 그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힘을 갖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환난과 위로가 바로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여기 "위로"라는 말의 라틴어는 "용감하다"(fortis)는 뜻을 가졌습니다. 기독교의 위로는 용기를 가져다주는 위로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처할 수 있게 하는 위로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양을 방목하여 기르는 어느 목장에 늑대와 여우가 내려와 양을 해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장 주인은 날렵한 사냥꾼들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목장 가까이에 살면서 양들을 괴롭히는 이 맹수들을 잡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양들의 피해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겨울에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예년에 비해 온화한 기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양들이 많이 얼어 죽어버린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목장 주인은 곧 생태학자들을 불러 그 이유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며칠간의 조사 끝에 이 학자들은 아주 놀랍고도 중요한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늑대나 여우와 같은 맹수는 양들에게 강인함을 부여하는 촉매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웬만한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지요. 그러나 이제 늑대와 여우가 사라지자 양들은 긴장이 풀어지고 저항력이 줄어들어 그 같은 추위를 견뎌내지 못하고 죽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고난을 성도의 신앙을 연단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정복하는 강인함으로 양육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환난을 주시는 목적은 인간이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구원자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구원자 하나님"이란 '자기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길 때에 비로소 그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란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무덤 속에 장사해버린 사람을 살리십니다. 죽은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비난에도 칭찬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그가 사는 세상은 전혀 딴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자처럼 사는 사람은 조용합니다. 시체는 살기 위한 욕심으로 아귀(餓鬼)다툼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런 소유도 없고 소유를 위해 다툴 줄도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권력다툼도 없습니다. 중세의 성 버나드의 수도원을 두 번이나 찾아 온 아일랜드의 말라기(Malachy)가 별세한 때에 버나드는 말하기를 "말라기는 살았을 때 죽었고, 죽었을 때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자처럼 살라는 것을 성경이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고전7: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고전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하나님은 성도가 이렇게 세상에 대해 죽은 자처럼 살도록 하기 위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구원자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 고난과 역경, 시련과 연단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랍인의 속담에 "갠 날만 계속되면 모든 것이 사막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하신 분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때로 역경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고난과 역경, 그리고 시험을 만나거든 오히려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장차 여러분을 영광스럽게 축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누리게 될 영광과 존귀를 바라보면 지금의 고난과 역경은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소망 중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게 하고 위안을 주며 현재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장래의 영광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험과 고난, 역경을 극복하는 방법은 내세(來世) 본위로 살고 이 세상 본위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생활 표준이 세상주의로 흐르게 되면 시험 환난이 왔을 때 동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세주의를 생활 표준으로 삼는 사람은 어떠한 시련과 환난이 닥쳐와도 감사함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환난에 대한 대답은 인내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내란 어쩔 수 없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정복하는 정신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고난 당하는 사람을 향하여 "고난은 인생을 아름답게 물들여 주지, 안 그래?" 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고난 당하는 이가 대답하기를 "그래요. 하지만 그 색깔은 내가 택하겠어요." 라고 했습니다. 은은 불 속에서 순수하게 되듯이 그리스도인은 환난 속에서 훌륭하고 강하며 깨끗하게 됩니다. 영적인 근육이 환난이라는 훈련을 통해 강하게 단련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당하신 후에 여러분의 삶이 빛깔로 말하면 순백(純白)으로, 금으로 말하면 정금같이 되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욥33:29)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욥33:30)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참다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희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는 기독교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것은 하나의 특권입니다. 어려운 일에 봉착하였을 때 그리스도인은 서머나 교회의 폴리캅이 화형을 당하면서 말한 것 같이 "주여, 내가 이 고난을 당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해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의 영광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존 밀턴은 44세에 소경이 되고 말았으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67세에 위대한 저서 <실락원>을 저술했는데 이 책이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혀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불쌍하게 여길 때 그는 "소경이 된 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소경을 이겨낼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비참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슬픔과 시련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 그것은 창조를 위한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베토벤은 음악가로서 없어서는 안 될 청력을 상실했으나 그 이후에 더욱 더 훌륭한 대명곡을 작곡해 냈습니다. 아름다운 찬송을 많이 작사한 화니 크로스비 여사는 어렸을 적에 의사의 실수로 맹인이 되었으나 그 시련을 딛고 일어서 귀한 찬송시를 많이 짓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성년이 되어서는 폐병을 앓았습니다. 그리고 고베의 빈민굴 속에서 수많은 한숨과 눈물로 지내면서 그의 삶이 성숙해졌습니다. 그의 저서 <사선을 넘어서>를 보면, 그가 슬픔과 비애 속에서 위대한 삶을 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슬픔을 도피해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슬픔을 정면으로 맞서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슬픔을 극복하며, 그 속에서 위대한 축복을 경험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들이 자기들이 당한 환난에 몸을 맡긴 채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며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귀한 영혼의 소리를 지어낼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위로의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얻을 수 있도록 감사함으로 기도하시며,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고후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특별한 종이면서도 일반 성도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는 있지만 남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사욕에 끌린 기도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특별히 교역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옵니다. 교역자는 교인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가 은혜 받을 때에 교인들도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여러 번 부탁한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는 죄를 많이 범하고 있습니다.

"(삼상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기도를 쉬지 않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몽고에서 선교하던 제임스 길모어는 글쓰는 중에 잉크가 떨어졌으면 그것이 마를 동안 기도했다고 합니다. 스펄젼 목사는 자기의 많은 능력을 설명할 때, 300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늘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방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위하여 많은 사람이 기도해주기를 원했습니다. 본문 "도우라"는 말은 "함께 도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합심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합심기도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프랑스가 독일 군에게 패하자 프랑스를 도와주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던 영국군 29만 대군이 그들의 힘만으로는 사태를 역전시킬 수 없었기에 다시 영국으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급히 도버해협을 건너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본국으로 철수하는 영국군을 전멸시키라고 태연히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위급한 때, 영국 왕 조지 5세는 영국 국민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호소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영국 군대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군대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영국군을 공격하려는 독일군 지역에 폭풍이 불어 비행기가 한 대도 뜰 수가 없었고, 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탱크 한 대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군이 철수하는 도버해협은 어찌나 잔잔하고 고요한지 29만의 많은 병력이 아무런 사고도 없이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118:7)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118:8)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시118:9)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기도는 반드시 그 결과, 즉 응답이 주어지기 때문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기도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생활로 변화되지 못한다면 그 기도는 잘못된 기도, 욕심으로 구한 기도에 불과합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선하게 변화시켜줌으로 범사에 감사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떤 목사가 비오는 날 교인이 두 사람밖에 오지 않았으나 감사드렸습니다. 그 감사의 제목은 늘 그와 같이 적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국제 회의에서 어떤 분이 강의를 하면서 자기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출세하지 않기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영국이 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을 골라서 캠브리지나 옥스퍼드에 보내거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보내면 총장, 장관이 되고 부자가 되고 대통령도 되는데 그중 95%- 99%가 배신을 해서 예수 안 믿는 사람처럼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도 나타난 통계적인 진리로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부자가 되고 권세가가 되면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고 안일하게 되고 풍요롭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지만 가난한 중에, 고난 중에, 병중에, 시련 중에 욥과 같이 된 가운데서도 감사와 찬송을 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기적 가운데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하면 얼마든지 인간에게 물질적 축복과 감각적인 쾌락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 하실 때 역경을 주십니다. 시련을 주십니다. 그것을 당한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순교자인 매스터 글로버는 주님을 위하여 감옥에 갇힌 것이 너무 기뻐서 울었다고 합니다. 세베루스 황제 때에 순교자들이 감옥에 갇혔다가 놓인 때가 있었는데, 그때에 그들은 생각하기를, 감옥이 아니라 향옥(香屋)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순교자 케아레스는 주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은 하늘 위에 가장 위대한 천사도 받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의 감사하지 못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순교자 부래드포드도 이런 고난 때문에 감사하지 못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환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환난 중에서 안심할 수 있는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여러분의 모든 삶의 정황 속에 "모든 위로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장차 누리게 될 영광과 존귀함을 바라보며 정금같은 신앙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 아멘의 하나님

"(고후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고후1: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고후1:14)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고후1: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고후1: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 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고후1:17)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고후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고후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1: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후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후1: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고후1: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1.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진실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곧 아멘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목장에서 말 구경을 하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말을 발견하고는 사고 싶은 마음에 그 목장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기 저 놈은 정말 아름답군요. 무슨 종입니까?" 목장 주인은 흐뭇한 듯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팔로미노입니다." "저 말을 사고 싶은데 파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 말은 전도사가 갖고 있던 말이라 다른 말과 달리 말이 달리기를 원할 때는 "하나님" 이라고 말하고, 멈추기를 원할 때는 "아멘" 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정도라면 쉽지요. 한 번 시험해 봐도 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그가 말에 올라타서 목장 주인이 말한 대로 "하나님"하고 외쳤더니 정말 말이 신기하게도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계속 달려서 어느덧 낭떠러지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갑자기 겁이 나서 말을 멈추어야겠다는 생각에 "워워" 하고 소리쳤으나 말은 계속 달리기만 했습니다. 순간 목장 주인의 말이 생각나서 "아멘" 하고 외쳤더니 놀랍게도 말이 우뚝 서버렸습니다. 정말 숨막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낭떠러지 끝에 말과 함께 서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오! 하나님"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흔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로 시작합니다.

"(요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그의 약속은 언제나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끝맺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성경 봉독) 났을 때, "아멘"이라고 화답합니다. 이 때 아멘이란 "그렇게 되어지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며, 참되시다는 것을 믿는 우리의 확신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2. 그러나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인생을 가리켜 거짓말쟁이라고 했습니다.

"(시116:11)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롬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신지라 식언(食言)치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식당에 한 거지 청년이 들어와 주인에게 공짜 음식을 부탁했습니다. 주인이 보니 그 청년은 너무 남루해 보이는 데다가 매우 배가 고픈 듯하여 "어떤 음식이 먹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식탁에 자리를 잡은 그는 그 집의 최고급 요리를 주문했습니다. 주인은 어이가 없지만 동정심이 생겨 그 집의 최고급 요리를 그에게 대접했습니다. 아주 맛있게 음식을 먹은 그는 주인에게 담배까지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는데 공교롭게도 고액권 지폐 한 장이 같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본 주인은 괘씸한 생각이 들어 "돈이 있으면서 공짜 음식을 먹느냐?"며 돈을 빼앗았습니다. "공짜로 주기로 하지 않았느냐?"는 청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음식값을 제하고 거스름돈만 돌려주었습니다. 거지 청년이 제발 그 돈을 돌려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주인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거지는 거스름돈만 받고 식당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송금을 하기 위해 은행에 가보니 그 돈은 위조지폐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살아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숨길 것이 하나도 없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바울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지배받는 생활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일구이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실된 아멘의 삶을 살고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마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21: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마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맏아들은 "예" 라고 대답한 후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니오" 라고 대답한 후 뉘우치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행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볼 때는 둘 다 아비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일시적인 충동으로 경솔하게 약속하고 지키지 못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섣불리 "예"하고 나중에 이를 부인하며 "아니오"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사 인간은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럴 수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고후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롬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3. 세상을 궁극적으로 이기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인생은 모두가 다 거짓되기 때문에 참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참되게 사는 것, 진실되게 사는 것이 그 비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신데 어찌 그가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증이 바로 예수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든 약속, 말씀에 대해 "그렇다. 그것은 진실이다." 라고 보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복을 구하려면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구하고, 땅에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65: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

여기 "진리의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진실로 진실로"를 헬라어로 하면 "아멘 아멘"입니다. 아멘이란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으로 믿을만하다고 확정하거나 보증할 때에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복을 받으려면 "아멘의 하나님", 곧 "진리의 하나님"을 믿으시고 참되게 진실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라"는 말씀 속에 진실, 정직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유대인들은 맹세에 사용되는 대상물이 어느 정도 거룩하느냐에 따라서만 맹세는 구속력을 지닐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전통에 따르면 그 대상물이 별로 거룩치 못하면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정직의 윤리를 모욕하는 처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아시고 위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신뢰받을 수 없을 만큼 꼭 맹세해야 한다면 그 사실 자체가 벌써 죄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의를 아는 사람은 전혀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 그대로가 진실되고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 그대로 나의 맹세가 되게 하자. 말이나 마음, 그리고 글이나 약속들을 우리 이웃들이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도록 생활하자.' 이것이 바로 정직의 법입니다. 오늘날 불신 사회에서 천국의 의가 되는 정직의 법을 가정과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삶의 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 혹은 '아니오'를 지나치게 과장하기 위해 필요 없는 말을 덧붙이는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양심이 깨끗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서는 '예'와 '아니오' 사이의 선택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가 되십니다.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자하면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예"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약속 앞에 항상 "예"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은 그 앞에 "예"하며 진실되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계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14: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계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계14: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세무서 직원이 한 목사의 집에 불쑥 찾아왔습니다. "댁의 재산을 조사하려고 세무서에서 왔습니다."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은 엄청난 부자라고 얘기하던 목사답게 대뜸 이렇게 실토했습니다. "저는 숨겨둔 재산이 아주 많습니다." 세무 공무원은 한 건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부리나케 장부를 꺼내 들었습니다. 재산 목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기 위함이었습니다. 목사는 숨겨둔 재산을 하나씩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나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둘째, 크고 아름다운 집이 천국에 있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들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평화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넷째, 말로 다 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다섯째,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여섯째, 현숙하고 신실한 아내가 있습니다. 일곱째, 건강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가 있습니다. 여덟째, 진실하고 변함없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아홉째, 캄캄한 밤중에도 찬송을 부를 수 가 있습니다. 열 번째,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열한번째,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저의 전 재산입니다." 그러자 세무서 직원은 아무 것도 적지 못한 채 장부를 덮으며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당신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은 성경에서 '거짓의 아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거짓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아멘의 하나님을 믿으시고 영접하여 무엇보다 진실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구할지라도 아멘의 하나님께 구하시고 구하시는 대로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하여 아멘으로 화답할 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진리, 아멘의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 약속 앞에 항상 "아멘"하는 생활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아멘은 하나님의 뜻을 긍정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신앙생활의 고백입니다. 범사에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3. 그리스도의 향기

"(고후2:1)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고후2: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고후2: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고후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2: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고후2:6)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은 것이 족하도다 (고후2: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후2: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고후2: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고후2:10)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고후2:11)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고후2: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고후2: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1. 고린도 교회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분쟁과 혼란, 음란과 허영, 사치와 교만 등으로 어지러운 모습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고린도 교회는 향기 나는 교회가 아니라 악취 나는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사람으로 혼심을 기울여 고린도 전서를 기록하여 디모데 편에 보냈지만 그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회는 변화되기는커녕 상황이 더 악화되어 이제 사도 바울을 모함하고 그의 사도권에 도전하며 교인들을 선동하기까지 했습니다. 디모데의 보고를 받고 바울은 성급히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지만, 오히려 극심한 멸시와 냉대, 굴욕을 당한 채 에베소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방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그의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곧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가 바로 본장(고후2장)으로 <눈물의 편지>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 <눈물의 편지>는 매우 신랄하고 준엄한 내용이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바울의 본심이 그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듯이 <눈물의 편지>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넘치는 사랑의 표출이었습니다. 결국 바울의 사랑이 담긴 <눈물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각성을 하였다는 기쁜 승리의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지게 됩니다. 바울의 사랑으로 쓴 <눈물의 편지>를 통한 준엄한 책망이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2.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준엄한 바울의 <눈물의 편지>에 순종하여 교회를 혼란케 하며, 바울을 비난하고 불의를 행한 범법자를 파문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 징계에 대해 만족하며 이제 그를 용서하고 격려하며 사랑으로 감싸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낙심하여 교회에서 아주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보살펴 주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미워한 것은 죄였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탄은 남을 용서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이용하여 파멸로 이끄는 다른 죄를 짓도록 합니다. 교회의 징계는 죄를 깨닫게 하고 그를 다시 온전한 성도의 위치로 회복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면 용서해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소년이 "용서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그것은 꽃이 짓밟힐 때에도 향기를 내뿜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바로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밟힘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억울함을 당해도, 독소를 내뿜지 말고 사랑의 향기를 뿜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갈 때, 사마리아의 한 촌에 들어가려 했더니,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이것을 본 야고보와 요한은 내심 분개했습니다.

"(눅9: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누가복음 9장 55절 난하주)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도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왔노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회개시켜 구원코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정신없는 소리 말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원수에 대해 사랑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향기로운 삶의 모습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항상 남의 허물을 비판하고 책망만하며 칭찬하지 않는다면 그 책망은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엄하기만 하면 그 책망의 가치는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책망을 자주 하지 않다가 꼭 필요할 때 한 번 하면 그 책망은 매우 효과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으로 책망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유일한 효과적인 책망은 그 사람을 사랑의 팔로 감싸고 하는 책망인 것입니다. 루터는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몹시 꺼림칙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너무나 엄격했기 때문에 아버지란 말이 그에게는 무서운 공포의 그림자를 던져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항상 말하기를 "채찍을 버리면 자식도 버린다. 그렇다 하지만 채찍 옆에 사과를 놓아 두라. 그리고 그가 잘 했을 때는 그 사과를 주라."고 했습니다. 형벌이나 책망은 사람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낙담시키거나 좌절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책망은 슬기롭게, 그리고 사랑의 동기에서 행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잠25:12)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전7:5)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참으로 "슬기로운 자, 지혜자의 책망은 생명의 길이며 금고리와 정금 장식"과 같은 것입니다. <눈물로 쓴 편지>에 담긴 사랑의 책망은 악취 나는 고린도 교회를 향기 나는 교회로 변화시켰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에 도전하며 비난과 멸시를 퍼부었던 사분 오열의 고린도 교인들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아름답고 향기 나는 교회로 변화된 것이었습니다. 어떤 목사는 설교하는 데 부인 신자가 졸고 있는 것을 보고 발로 강단을 구르며 "여보, 자매! 웬 잠을 그리 자오? 그것 참 졸자 노릇하겠구먼. 이 다음에 교회 올 때에는 고춧가루를 가지고 와서 졸음 올 때에 눈에다 치시오." 하니 그 부인은 한참 졸다가 깨어 목사에게 눈을 흘기며 "흥, 내 눈에다 고춧가루를 치라고 하지 말고 목사님의 설교에다 고춧가루를 치시오. 설교가 싱거워서 좁니다."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볼장 다 봤습니다. 목사는 신자가 존다고 야단이고 신자는 목사가 설교를 잘못한다고 야단이니 이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어느 교회의 늙은 집사님은 목사님이 설교를 잘못하고 강단에서 내려오니 목사님의 손을 잡고 훌쩍훌쩍 울었답니다. 목사님이 "집사님, 왜 우십니까?" 하고 물으니 "목사님이 오늘 설교를 잘못하신 것은 내 까닭입니다. 내가 목사님의 주일 설교를 위해서 토요일 밤에는 항상 기도했는데 지난밤에는 손님이 와서 기도를 못했더니 목사님 설교 죽 쑤었습니다." 하고 울더랍니다. 그 교회는 참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이 사회에서 피차 책임을 지고 서로 이해 깊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 향기 나는 삶인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은 죽고 예수만 살아야 합니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부패한 자아가 죽고 의로우신 예수가 내 안에 살게 될 때 향기 나는 삶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칠 때, 그리스도의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가시밭에 백합화는 더욱 그 향기가 널리 퍼지게 됩니다. 가시에 찔리고 찢겨질 때마다 백합의 향기는 그만큼 널리 퍼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을 때, 상처를 입을 때, 매를 맞고 박해와 핍박을 받을 때, 십자가를 지고 가는 등허리에 채찍이 내리칠 때 그리스도의 향기는 더욱 강렬해지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의 "그리스도의 향기"에서 향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오디아>는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를 위한 그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희생 제사와 같은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향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동시에 성도들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향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는 집 모퉁이의 요긴한 돌이 되시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어지게 하며 가루되게 하는 돌이 됩니다.

"(마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사랑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생명의 향기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 큰사랑을 배척하는 죄요, 사망의 냄새인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와서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얼굴이 볼 모양 없이 허물 자국으로 가득 찼고 그 손들도 허물 자국 천지였습니다. 몇 해 후에 이 어머니는 그 고아원에 찾아 와서 자기 아이를 만나보고자 했습니다. 그 아이는 벌써 한 다섯 살쯤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찾아내어 자기 어머니를 만나도록 했을 때에 그 아이는 그 여자를 자기 어머니인 줄 몰랐고, 또 그 여자의 얼굴과 손에 가득한 허물 자국들을 보고 놀라서 도망쳤습니다. 그때에 그 어머니는 엎드려 울었습니다. 실상 그 어머니는 그 아이가 화재로 인하여 죽게 되었을 때에 그를 불 가운데서 건져내다가 화상을 입어서 그렇게 허물 자국을 많이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여자는 실상 자기 자식을 사랑한 것 때문에 배척을 받은 셈입니다. 사랑을 배척하는 것은 죄 중의 죄입니다. 복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게 때문에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곧 구원을 받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요,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사망의 냄새인 것입니다. 사망 권세가 지배하고 있는, 사망의 냄새가 나는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생명의 향기를 발하며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향기를 발하기 위해서는 "(고후2:17)....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순전한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직 그 길만이 그리스도의 향기로 자기를 지키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비결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경대로 살고 성경대로 죽는 생활을 말합니다.

"(고전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고전15: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 그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한 순수한 신앙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향기 나는 신앙생활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사망의 악취가 나는 세상을 정화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생명의 향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시에 독일 나치스 정권에게 체포되어 감금되었던 노르웨이의 에빈 벨그라브라는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의 영력(靈力)의 감화는 무척 컸습니다. 그를 지킨 간수가 11명이나 되었습니다. 나치스 당국에서는 간수들이 벨그리브의 감화를 받지 못하게 하려고 자주 자주 다른 사람들을 보내어 지키게 했던 것입니다. 냄새는 소리 없이 고요히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고 한 것은 그 자신이 성령의 감동을 전달하는 자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인격의 감화는 그 사람 자신을 남들에게 알려주지만, 성령의 감화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여 주는 것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 마른 해골 뼈들로 가득한 골짜기 같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생명의 향기가 없습니다. 예수 없이 사는 삶은 사망의 냄새만 풍길 뿐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만이 내 안에 살게 될 때 생명과 사랑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셔서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를 향기 나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4.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3: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고후3: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3: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고후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후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3: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3: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고후3: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3: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고후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 요즈음 서점가에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인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3>에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토미라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은 명랑하고 협동심이 많고 학업 성적이 뛰어났는데, 최근 학업성적이 급격히 떨어지고, 행동이 파괴적이어서 담임교사가 그의 부모를 면담하고자 각각 호출했습니다. 토미의 부모는 별거 중이어서 각각 호출했는데 서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외아들인 토미가 갑자기 문제아로 전락해 가는 것은 그 부모의 별거와 이혼 소송에 따른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토미를 위해 그 부모를 호출했지만 어떻게 그들을 납득시킬지 막연했습니다. 이윽고 토미의 어머니가 들어왔고 그의 아버지도 곧 도착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서로 놀라며, 서로를 무시하고, 짜증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담임교사는 부모의 별거와 이혼이 자녀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토미의 부모가 깨달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문득 토미의 지저분한 시험 답안지를 보여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임교사는 토미의 책상 안에서 구겨진 영어 시험지를 한 장 꺼냈습니다. 시험지는 눈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지 앞뒤로 빼곡이 토미의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문제에 대한 답이 아니라 똑같은 문장을 끝없이 반복해서 휘갈겨 쓴 것이었습니다. 담임교사는 아무 말 없이 그 시험지를 펴서 토미의 어머니에게 건넸습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것을 들여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남편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의 얼굴이 펴졌습니다. 그는 거의 영원이라고 느껴질 만큼 오랫동안 그 휘갈겨 쓴 글들을 들여다보고만 있었습니다. 마침내 토미의 아버지는 시험지를 조심스럽게 접더니 그것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담임교사도 눈물이 글썽거렸지만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토미의 아버지는 아내가 코트 입는 걸 도와주고는 아내와 함께 교실을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이 다시 합쳐질 수 있도록 적당한 방법을 담임교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노란색 영어 시험지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시험지에는 어린 소년의 괴로운 마음에서 토로된 고뇌에 찬 문장이 끝없이 반복되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문장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 사랑해요. 엄마, 아빠 ..... 사랑해요." 비록 시험지 답안지이지만 별거중인 엄마 아빠에 대한 한 어린 소년의 사랑의 편지가 엄마 아빠의 마음을 변화시켜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게 했습니다. 편지란 그 사람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자,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와 하나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달하는 자는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요, 생명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생명의 편지, 사랑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류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며 사람과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화목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또한 편지에는 그 사람의 진실한 마음과 인격이 담겨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위한 하나의 광고판입니다. 교회의 명예, 그리스도의 명예는 신자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팔고 있는 상품을 보고 그 상인을 판단하며, 그 교회가 길러낸 사람들을 보고 그 교회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자들을 보고 그리스도를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나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공개장이며, 광고판이 된다는 막중한 책임을 지녀야만 합니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 희망과 용기, 그리고 생명을 전달하는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몸에 지녀야 그리스도의 인격과 생명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갈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영국의 옥스퍼셔란 마을의 한 여성도가 임종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30여 년 동안 시온 산을 오가며 순례하였던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다가오는 하늘의 영광으로 밝게 빛나고 있을 때, 카톨릭 파의 사제는 자기가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자기 교구인 중 그 누구도 하늘 나라로 갈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녀를 방문하였습니다. "제가 여기 온 것은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 여성도는 되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당신의 죄를 용서하려 왔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이 여성도는 말했습니다. "어디 손 좀 보여주시겠어요?" 어리둥절한 사제가 내민 손을 잠시 쳐다본 그녀는 부르짖었습니다. "이 사기꾼 같으니라구!" 깜짝 놀란 사제가 항의하자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사기꾼이에요. 저의 죄를 용서하신 그분은 그 손에 못자국이 있단 말이에요." 그리스도의 흔적, 못자국이 있어야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은 곧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입니다. 양손 양발에 못 박힌 흔적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예수의 몸에 새긴 사랑의 편지입니다. 자신은 십자가에 죽고 예수만이 내 속에 살아 역사할 때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기쁨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가보다도 사람들이 그에 대해 뭐라 말하는가에 더 의존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보다는 항상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사람이 기뻐할까 보다는 과연 이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를 먼저 생각하는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2.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그 사람의 심령을 지배해야만 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십계명)을 주실 때, 그것을 돌판(돌비)에 직접 써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돌비는 언약궤 속에 넣어 보관했습니다. 이 돌비에 새겨진 십계명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려면 '내적인 힘'이 필요한 것인데 율법(십계명)은 '외적인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지 말라'고 훈계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훈계들이 순종할 능력은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맡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외식하는데만 치중했던 것입니다.

"(마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속 사람이 깨끗해지려면 성령과 말씀이 역사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마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만 율법으로 다스릴 뿐 그 행위의 근본 원인이 되는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는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으로 얼마든지 사람을 미워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상해를 입히거나 살인을 행했을 때만 율법으로 다스려 죄를 정하고 처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하시고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마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의롭게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믿어 부어주시는 성령을 통해서만 그 사람의 삶을 의롭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그 사람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야만 합니다. 사람의 마음판, 즉 심비(心碑)에 새겨진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얼마든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깊이 자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에 의해 역사된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살아있는 편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이와 같은 성령을 통한 사람의 변화는 일찍이 구약 시대에 예언하신 바입니다.

"(겔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겔11: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 사랑의 편지가 되기 위해 여러분에게 성령과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더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또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는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서를 백성들에게 낭독하면 백성들은 거기에 동의하는 것에 그칩니다. 내심으로 거절하기를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의 마음에 임하고 그의 마음을 주장하면 그는 변화 받은 사람이 되기 때문에 법을 어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기려고 하지도 않게 됩니다. 씌워진 율법은 단지 율법만을 변화시킬 수 있고 오직 성령만이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령에 따라 행하며 성령에 따라 살아 갈 때 하나님의 형상, 신의 성품을 이룩하며 넉넉히 천국에 들어가는 천국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은 병을 진단할 수는 있었지만 치료할 수는 없었습니다. 옛 언약은 그 율법을 다 지켜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언약을 불이행한 죄인일 수 없습니다. 비록 불순종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입니다. 끊어버릴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가 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힘과 용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까지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는 아무리 낮고 비천한 직분이라도 영광으로 옷 입히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직분이 영광이라고 했는데, 새 언약은 사랑의 영으로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광이 더욱 크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광채가 났었습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말할 때에 그들은 그의 얼굴에서 영광을 볼 수 있었고 그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영광이 곧 사라질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다 가르치고 나서 그는 곧 수건을 썼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라질 영광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누가 영광을 잃어가는 그런 지도자를 따르고 싶어하겠습니까? 바울이 영광의 직분, 복음을 전하는 사도 직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을 때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진리를 배척하며 바울과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과 심령에 "영적인 수건"이 덮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인 수건"이 덮여 "영적인 소경"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읽어도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된 진리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 율법으로 말미암아 수건으로 가리워져서 소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오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했습니다.

"(고후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고후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수건이 벗겨져서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주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의 형상, 즉 신의 성품을 이룩하는 변화된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제 산에 올라갈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거울"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 곧 신의 성품으로 변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그의 음성을 듣고 땅바닥에 거꾸러진 사울은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하심으로 즉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행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행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행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행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이후 사울은 변하여 바울이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해 더욱 더 성령이 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약시대에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데 그쳤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만나게 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영광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 곧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것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직분입니다. 영원토록 영광스런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시며, 성령과 말씀이 충만하여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5. 보배를 질그릇에

"(고후4: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후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고후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4:13)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후4: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1. 1947년 2월에 사해 서쪽 여리고 남방 14km 지점에 있는 쿰란 마을에서 보물이 발견되었습니다. 한 소년이 잃어버린 산양을 찾기 위하여 절벽에 위치한 자연동굴에 들어갔습니다. 무서워서 깊이 들어가지는 못하고 돌을 던져봤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년은 이 굴에서 십여 개의 옹기 단지 곧 큼직한 질그릇들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양피지에 글이 쓰여진 두루마리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사해문서>(The Dead Sea Scrolls)의 첫 발견이었습니다. 사해문서는 기원전 2세기경에 복사된 성경사본으로서 이사야서, 시편 등이 들어 있는 획기적인 성경연구사료입니다. 그후 고고학자들은 이 근방의 자연동굴 2벽개 이상을 파헤쳤으며, 그 중 11개의 동굴에서 옛 성경사본들을 발견한 것입니다. 모두가 높이 65cm 정도의 질그릇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처음 발견한 목동 소년은 고물상에게 두루말이 한 개당 20파운드씩 받고 횡재한 줄 알았는데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가 고물상으로부터 한 개당 25만 달러씩 주고 사들인 보물이었습니다. 가장 값싼 토기 속에 보물이 들어있을 때, 이 질그릇은 엄청난 빛과 값어치를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을 질그릇, 곧 깨어지기 쉽고, 약하고, 가치 없는 존재로 비유하고,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깃들일 때 새로운 존재가 된다고 했습니다. 보물이 질그릇 속에 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바로 능력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 같은 내가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할 때 가치 있는 인생, 보배로운 질그릇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남미 아마존 밀림에 평화봉사단으로 갔던 마이클 그리피드의 경험담입니다. 숲 속에서 이상한 그릇을 보았습니다. 나무로 깎아 만든 것인데 배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옛 원주민의 부엌도구 같기도 해서 일단 숙소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며칠을 두고 보아도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릇으로 쓰기엔 너무 길쭉하고 이미 썩어 빛깔도 나빴습니다. 더럽게 보여 식기로 쓸 마음은 안 생겼습니다. 문밖에 버려 놓았더니 누가 가져갔는지 없어졌습니다. 그것으로 그 물건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후 1개월 뒤 계곡 마을에서 음악연주가 있었습니다. 옛 원주민의 악기를 연주하는 민속음악제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마이클 그리피드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마을의 한 소녀가 악기를 가지고 나와 옛 가락을 연주하는데 옛 하프였습니다. 놀란 것은 아름다운 그 음악보다 하프 통이 자기가 내버린 그 쓸모 없는 나무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체험에서 그리피드는 수필을 썼는데 그 제목이 <언제 너의 창조자로 그의 음악을 너를 통해 연주시킬 것인가>입니다. 내가 무가치한 밥통으로서 일생을 마칠 수도 있고, 훌륭한 악기로서 아름다운 음악을 이웃에 남길 수도 있습니다. 그 갈래길은 나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음악을 연주하시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때 가치 있는 한 인간의 생애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삶의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는 보배롭고 가치 있는 그릇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함 받은 질그릇이었습니다.

2. 사도 바울이 받은 직분은 복음 전도의 직분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직분을 영광스러운 직분이라고 말합니다. 복음 전도의 직분은 사람에게 생명과 구원과 의(義)를 가져다주고, 또한 복음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그 전도의 직분은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직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사람 됨됨이나 우리가 행한 어떤 공로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물로, 거저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복음 전도의 영광스런 직분을 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이 교회에서 받은 직분과 사명은 영광스런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직분과 사명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바울은 이 복음 전도의 직분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으로 인해 살 소망까지 거의 끊어졌다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고백했습니다.

"(고후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바울은 큰 은사를 받고 다방면에 걸쳐 많은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 인간이었고 인간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의 사명을 맡기실 뿐만 아니라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도 함께 주신 것입니다. 어느 설교자가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가인 알렉산더 휘트에게 자신의 직분을 포기하고 싶다는 편지를 써서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에 대해 휘트는 "설교하는 일을 포기할 생각은 하지 마오! 하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조차 당신의 위대한 일을 부러워하고 있소!" 라고 답장을 써보냈습니다. 참으로 이 구원의 복음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벧전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벧전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벧전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직분은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복음, 그 복음의 중심이 되는 예수를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지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고후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의 종된 것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오직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종으로써 사명에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파하기만 하면 빛이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창세기 1장을 보는 듯 했습니다.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은 흑암 가운데 처한 인생들이 복음을 전해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창조의 빛으로 말미암아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이 사라지고 빛과 어두움이 나뉘어 질서가 회복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피플즈(Peaples)잡지에 가수 앤디 기브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1977년 19세의 청년이 호주로부터 미국에 와서 그의 레코드가 히트했습니다. 첫해에 2백만 달러, 이듬해엔 1백만 달러를 벌고, 그래미상에 두 번 추천되었습니다. 그의 음반이 1천 5백만 장이 팔릴 때 그는 겨우 21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마약을 시작했습니다. 기울어지는 것도 빨랐습니다. 85년에 병들고 86년에 파산하고 87년에 1백 5십만 달러의 빚을 진 채 외로이 죽었습니다. 왜 이렇게 빨리 망했는가? 왜 약물을 의지했는가? 그의 친구들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공허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텅빈 마음, 이 공허를 무엇으로 채워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눈에 보이는데서 찾으려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을 가지면, 더 많이 가지면 채워질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도서 지혜자는 행복을 눈에 보이는데서 잡아보려는 인간은 일평생을 바람을 잡는 헛수고를 하며 걱정하다가 병들어 앓다가 화내다가 죽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5:16)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전5:17)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이 세상에서 갖출 것 다 갖추었는데 왜 공허한 것인가? 무엇이 빠져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빛 곧 예수 그리스도가 네 마음에 비취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나를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 분에게서 너희는 사람이 보고 알 수 있는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 성도는 복음 전도의 영광스런 직분을 받았지만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이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그릇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그 질그릇 안에 담겨 있는 보배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가리켜 바로 보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가리켜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택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릇이 중요하고 가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깨끗해야하며 주인의 쓰임에 합당해야만 합니다.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우리는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도록 무엇보다 마음과 영혼의 그릇을 깨끗하게 보존(성결 보존)해야만 합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일지라도 어디까지나 '흙으로 만든 질그릇'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 '흙으로 만든 질그릇'이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만 주인의 쓰임에 예비함이 되는 것입니다. 질그릇으로서 겸손하지 아니하면 결국 버림받게 됩니다. 질그릇 안에 담겨진 복음이 보배인 것이지, 질그릇이 보배가 아님을 끝까지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보배로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질그릇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자신이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환난이나 박해,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부서지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지만 보배인 복음을 담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그릇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 선교의 문을 연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신 사람들은 모두가 연약한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늘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생각했기에 그분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었다." 고난과 환난, 시련은 사람의 연약함을 드러내 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고전1:25)...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어디까지나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으로써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모두 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복음이 드러나기 위해서 때로 질그릇이 부서지고 깨어지기도 합니다. 자신이 죽어야 그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되고 성실하게 복음 전도의 사역을 했는지의 여부는 박수갈채와 명성(stars)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난으로 말미암은 상처(scars)에 의해 평가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받은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흔적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후6: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고후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고후6: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고후6: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고후6: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고후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11: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갈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어떠한 경우에도 이 영광스런 직분을 낙심하지 아니하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비록 질그릇일지라도 복음의 보배를 지니고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사는 것입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가치인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아브라함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하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소돔 성을 포기했지만, 롯은 믿음으로 행치 아니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행했기 때문에 소돔 성을 택했습니다.

"(히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믿음을 가진 성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보는 것같이 참을 수 있습니다.

"(히11:27) 믿음으로...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어떤 사람이 날마다 외양간의 오물 속에서 일하는 노인을 동정하여 어떻게 그런 일을 날마다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상 너머의 것을 가진 사람은 조금도 피곤치 않다구요." 질그릇 같은 우리 인생이 육체적으로 보면 점점 죽음에 가깝고 날로 후패해져 가지만,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보다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 세월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를 가까이 이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 브라우닝은 "젊은이여, 나와 함께 늙어가자 더 좋은 것은 미래에 있다."라고 학생들에게 연설했습니다. 늙어 간다는 것은 더 좋은 것을 얻는 과정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통 지난날을 회고하며 그 때가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더 좋은 것이 앞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노년에 세상을 떠날 것을 예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딤후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받는 어떠한 환난도 다음 세상에서 영원토록 기쁘게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하늘에서 누릴 영광 속에서 얼마든지 잊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미국인 선교사가 오랫동안 아프리카에서 열정을 쏟아 선교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큰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회의를 느낀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선교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그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을 보았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을 때 은은하게 울리는 군악대들의 예포소리와 함께 부둣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오자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 소리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는 홀로 초라하게 내려왔습니다. 그는 '사냥을 갔다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을 받는데, 큰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잃고 선교를 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 라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거리를 걸었습니다. 깊은 고독감과 절망감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그때 마음으로부터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은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아니라 황금길을 깔아 너를 마중해 주마. 사랑하는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 이 말씀을 들은 선교사는 충성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발길을 돌이켜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영광스러운 복음 전도의 보배를 질그릇에 담으시고 열심과 충성을 다하심으로 가정과 나라, 세계를 변화시키며 하늘 나라에 예비된 영광의 면류관과 상급이 풍성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6. 새로운 피조물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후5: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고후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후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고후5: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고후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고후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고후5: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고후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 바울은 '현세의 삶'을 땅에 있는 '장막 집'으로, '내세의 삶'을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간절히 소망하는 바는 장막 집을 벗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덧입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이 세상에서 살기보다는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기를 더 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육체적 죽음으로 이는 생리적 죽음을 말하며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가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러한 죽음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으로 모든 사람이 한번은 겪게 되는 필연적인 과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이 육체적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죽음인데 이는 육체적 죽음이 육체와 영혼의 분리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면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이 영적 죽음 역시 인간의 죄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인간이 육체적으로는 당장 죽지 않았으나 죄와 사망과 질병 그리고 육체적 노동 등의 고통에 놓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범죄한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원한 죽음이 있습니다. 이 죽음은 영적인 죽음과 육적인 죽음의 최후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최후의 결과요 죄의 마지막 열매입니다. 그리스도 재림 때에 죄인들이 최후 심판을 받아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영원한 고통과 슬픔을 겪게 되는 상태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그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보증이 바로 성령입니다. 또한 성도들은 인간 위에 군림하여 왕노릇하던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무서워한 마지막 원수였던 죽음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승리로 말미암아 더 이상 생명을 주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를 믿는 성도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상태에 있습니다. 따라서 영생을 소유한 성도들은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곧 영생을 준비하는 소중한 순간임을 깊이 인식하고 삶 전체를 주께 헌신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 육신을 벗는 날, 곧 육체적 죽음의 날이 기쁨의 날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임시 거처와 같은 육체가 무너지면 우리 영혼의 영원한 거처로 옮겨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몸을 주실 날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 몸은 신령한 몸인데 그 몸을 입은 채 하늘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경배할 수 있는 몸입니다. 바울은 장차 다가올 생명에 대한 강한 기대와 동경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 세상의 생명을 경멸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언제나 담대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며, 바로 그 성령이 장차 누리게 될 생명의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뉴욕주 포트빌에 헬렌 워드라는 54세의 여성이 살았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에이즈라는 불치병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7년 전에 수혈한 일이 있었는데 보균혈액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대학교수이고, 연합감리교회의 독실한 신자이며, 여선교회 회장입니다. 마을의 지도자이고 인기 있는 성경연구반 교사였습니다. 그녀는 감리교 잡지에다 시를 실었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나는 절망했고 화가 났다. 내 가슴은 찢어지고 극도로 우울했다. 대학일, 교회일, 동네일, 귀여운 손자까지 주시고 그렇게 많은 문을 내 앞에 열어 주시더니, 왜 갑자기 모든 문을 단번에 닫아 버리시나? 그러나 나는 지금 회개한다. 내가 구원의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인 것을 잠시 잊었던 죄를 회개한다. 주님은 나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는데, 주님은 나에게 영광의 새 몸을 약속하셨는데, 낡고 썩어질 이 몸을 가지고 내가 왜 이토록 집착하는가? 나는 기도하였다. 오 주여, 이제부터 얼마를 살던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하게 하소서." 예수 믿어 성령의 보증으로 내세의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현재의 삶이 어떠하든 그것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남은 생애를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까, 어떻게 하여야 주님께 영광된 삶이 될까를 먼저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어차피 썩을 몸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될 때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의 확신과 소망, 그리고 그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2.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무엇보다 복음을 전하여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의 친구 빌레몬에게 쓴 짧은 편지 속에 화목에 대한 아름다운 예화가 있습니다. 빌레몬의 종인 오네시모는 주인에게서 돈을 훔쳐 갖고 로마로 달아났었습니다. 그 죄로 보자면, 그는 십자가형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나 회심했습니다. 바울은 이에 그의 친구인 빌레몬에게 편지하여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고 그를 다시 받아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주인 빌레몬에게 종 오네시모의 죄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친구처럼 영접하여 화목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네시모가 훔친 것이 있다면 그 대가를 자신이 다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몬1: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몬1:18)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의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키고 서로 화목을 이루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화목은 죄의 전가(轉嫁)됨에 기초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의 요구들이 십자가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화목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자들은 결코 다시는 죄가 자신들에게 전가되는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에는 두 종류의 성(省)이 있었는데, 하나는 원로원 관할의 성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황제 관할의 성이었습니다. 원로원 관할의 성에는 로마와 화친을 맺고 전쟁을 하지 않는 백성들이 거주했습니다. 즉, 그들은 로마에 완전히 항복하여 복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황제 관할의 성은 평화스럽지 못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로마에 반역하고자 하는 위험 인물들이었습니다. 로마는 반역이 발생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그곳에 대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이라고 한 말은 바꿔말해 이 세상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곳,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곳임을 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이 세상은 '황제 관할의 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 당신의 사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고후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거절하면 그것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직분은 죄인들을 권면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강요하거나, 어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그들을 위협해서는 안됩니다.

"(살전2: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진리이기 때문에 올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 생명력을 지니고 있으며 심판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이를 전하기 위해 구태여 간사나 궤계를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본문 11절의 말씀대로 "두려움"을 가지고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합니다.

"(고후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성경에 대해 농담을 함으로 영감(靈感)된 성경의 영광과 권위를 실추시키는 행위를 금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두려움을 가지고 복음 전파를 위해 "힘쓰노라"(9절)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여기 "힘쓰다"는 "우리는 야심을 품었다"는 뜻입니다.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야심이 아니라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야심을 말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역하며 그들의 협력을 요구했지만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 전도 사역은 세속적이고 타협적인 사역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 기뻐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을 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다음의 성구에서 밝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때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산 제물로 바치며 복음을 전파할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빌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경건한 야심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롬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야심을 가졌노니).." 사도 바울의 야심은 바울로 하여금 복음이 아직 들려지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경건한 야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부끄러움으로서가 아니라 담대함으로 주를 뵙기를 소원했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 야심을 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충성을 다 했다면 그 자리는 상급과 칭찬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자녀들이 상을 받으면 부모가 기뻐하듯이 우리 주님도 자신의 자녀들이 칭찬을 받고 상을 받을 때 기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상급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울산을, 내일은 한국을, 모레는 세계를 복음화시키겠다는 복음화에 대한 거룩한 야심을 가지시고 실천하여 장차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크신 기뻐하심과 상급과 영광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대비해서 무엇보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사람의 칭찬을 의지하지 말며 장차 누릴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바라보며 복음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고후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고후5: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참으로 열심히 충성을 다하는 자는 언제나 적당하게 일하는 미적지근한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듣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충성된 자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보고 바보라고 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주의 복음을 위해 조용하고 분별 있는 행동을 취할 때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세상이 그를 미쳤다고 볼 정도로 일해야 할 때도 필요한 것임을 사도 바울은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기준에 의해 사물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한 때 바울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판단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하려고 했으며, 그의 추종자들을 말살하며 기독교의 신앙을 이 세상으로부터 인멸시키려고 했었습니다. 이제는 그 표준이 달라졌습니다. 바울이 전 생애를 통해 찾아 헤매던 하나님과의 화해를 그리스도께서 찾도록 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전 생애 동안 찾아 헤매도 못 찾던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찾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858년에 해버갈은 아버지의 아픈 눈을 치료하기 위해 부녀가 함께 독일을 방문했습니다. 어떤 한 목사님의 집에 머물게 된 그녀는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아래엔 "내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했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른 종이 한 장을 준비해 그것을 주제로 해서 한 편의 시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별로 만족스럽지가 못해서 그만 그 종이를 꾸겨서 화로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종이는 타지 않은 채 화로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이를 본 그녀의 아버지는 그 시를 출판하라고 권면했는데, 그 시에 필립 블리스가 곡을 붙여 오늘날 우리 모두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185장, '내 너를 위하여')가 되었습니다.

[1절]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죄를 사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위해 몸을 주건만 날무엇주느냐 너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2절]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몸을 희생했건만 너무엇하느냐 내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3절] 죄중에 빠져서 영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피를 흘렸다 네죄를 대속했건만 너무엇하느냐 네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4절] 한없는 용서와 참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무엇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화목, 그리고 사랑과 기쁨을 주셨는데 우리는 무엇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까? 복음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신 성도 여러분은 이 복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열심과 충성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비결은 예수님의 사랑에 꽉 붙잡혀 살 때, 그리스도의 강권하는 사랑에 떠밀려 사는 사랑의 사람이 될 때 무너져가는 장막집 인간이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시는 새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 혁명전쟁 중 펜실바니아에 피터 밀러라는 목사가 살았습니다. 같은 동네에 원수 같은 인간이 있었는데 밀러 목사를 중상 모략하는 온갖 수단을 노골적으로 구사하여 십 년 동안이나 괴롭혔습니다. 이 사람이 전쟁 중 적에 내통하다가 체포되어 필라델피아에서 군법회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밀러 목사는 60마일을 걸어 필라델피아까지 가서 조지 워싱턴 장군에게 그의 구명을 탄원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은 "친구를 위하여 애쓰시는 목사님의 마음은 알 수 있으나 이미 어제 사형언도가 내렸습니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밀러 목사는 "제 친구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만난 중 가장 악한 원수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귀하지 않습니까?" 워싱턴은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원수를 위하여 60마일을 걸어왔다는 것입니까!" 감동한 워싱턴은 특사령에 서명하였습니다. 특사령을 휴대한 장교와 함께 밀러 목사는 사형수를 방문했습니다. 밀러 목사를 본 사형수는 씹어 ?듯이 말했습니다. "나의 교수형 구경을 하려고 에프라타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몹쓸 목사군!' 그러나 밀러 목사가 내민 것은 그의 특사령이었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은 "내 평생에 수천 번의 사인을 하였지만 그 때 매국노의 특사령에 사인한 것이 가장 감격적이었다." 고 술회하였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내 속에 있는 예수, 내 속에 있는 사랑은 나를 새롭게 하고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 때 이 썩어질 몸은 찬란한 영광이 비취는 새 몸이 됩니다. 무너져 가는 장막집, 이 텐트 같은 인간이 새롭게 탄생하여 아름답고 영원한 몸으로 변화하는 비밀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장차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를 두고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의 경쟁이 치열한 즈음, 어떤 교회의 직분자 한 사람이 한 후보를 지지하는 큰 띠를 몸에 두르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그를 제지하면서 교회 안에서는 그 띠를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걸 풀으라고요?" 그는 반문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훌륭한 후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불신자가 그 띠를 보았을 경우를 생각해보시오"라고 목사는 말하면서 "그 사람은 화가 나서 결국 말씀을 더욱 멀리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구원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은 부루퉁해서 그 띠를 풀어 버리더니, 곧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구세주가 필요한 죄인들이지 신한국당이나 국민회의당원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그것이 더 중요한 일이지요."이 세상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복음을 통해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자신만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다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땅의 가정들이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타락이 이 나라의 장래를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사회에는 부정 부패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기업들이 하루에도 수 백개씩 도산을 당하는 경제적 위기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이 나라 민족에 대해 하나님은 등을 돌리시고 계십니다. 이런 시대에 대해 벙어리 개처럼 정의와 공의를 부르짖지 못하는 교회와 나라 민족은 하나님의 진노의 칼 아래 놓여 있습니다.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나라 민족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못하면 나라 민족이 살 길이 전혀 없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 지도자와 성도들이 먼저 회개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아니하면 진노의 도끼를 피할 길 이 없습니다. 자신만 적당히, 안일하게 신앙생활 하면 그만이 아닙니다. 다함께 망하게 됩니다. 이 나라 민족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룩할 수 있도록 미친 사람처럼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나와 너, 나라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단테의 명장 <신곡>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단테가 안내자를 따라 한 장소에 도착합니다. 혈색 나쁜 사람들이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당에서 거절된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지옥에서도 거절당했습니다. 천당에 갈 만큼 선인도 아니고 지옥에 넣은 만큼 악인도 아닌 어정쩡한 부류입니다. 안내인이 말합니다. "저 인간들은 하나님도 좋아하시지 않고 사단도 좋아하지 않는 영원히 버려진 인간들입니다. 만나볼 것도 없으니 지나갑시다." 그들은 세상에서 착한 시민을 가장했던 사람이요. 괜찮은 기독교인을 가장했던 인간들이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뜨거운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열심과 충성을 다해 화목의 제물이 되시고, 장차 덧입게 될 영원한 처소를 바라보며, 그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헌신하는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7.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고후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6: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고후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고후6: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고후6: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고후6: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고후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6: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고후6: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고후6: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후6: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고후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1. 우리 나라 사람들, 특히 정치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김구 선생을 꼽는데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걸핏하면 `현실론'을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현실정치에 능숙하게 타협해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을 제치고, 당시엔 실패한 것 같았지만 `원칙'을 지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조국광복과 민족통일의 외길을 걸었던 선생의 올곧은 성품에 대한 흠모하는 것입니다. 김구 선생은 눈앞의 이익에 탐닉하지 않았습니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현실정치와 역사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일이 요즘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조기사면 논쟁이 그것입니다. 전·노씨를 추종하던 일부 세력들이 광복절 특사를 겨냥해 사면 청원운동을 벌이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반대운동으로 날카롭게 맞서고 있습니다. 배경에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문제가 어떤 형태로든 결말이 나리라는 판단이 깔려 있습니다.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권이 전·노씨 문제를 대하는 시각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많은 예비 후보들이 두 사람의 사면을 노골적으로 거론했습니다. 이는 영남 지역의 표를 의식하여 타협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야당도 전·노씨 사면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무주공산인 대구·경북지역의 표몰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열심히 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노씨의 사면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김영삼 대통령이“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며 미루고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했으나 국민들이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들고일어나 결국 5·18특별법을 제정케 하고“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된다.”는 본보기를 남긴 것이 아니었습니까? 수 백명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해 온갖 영화를 누리고는 잠시 감옥에 `들렸다가' 나와 다시 큰소리치게 한다면 역사에 무엇을 교훈으로 남기겠습니까? 더욱이 이들은 잘못을 진심으로 참회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빼돌려 숨겨놓은 돈의 행방을 밝힌 적도 없습니다. 지금 감옥에는 전·노씨의 군사통치에 항거했거나 이들의 잘못된 정치로 말미암아 생긴 상당수 양심수들이 갇혀 있습니다. 광주비극의 상흔이 채 아물지도 않았습니다. 김구 선생은 “마음속에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에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당장 손해볼 줄 알면서도 험난한 `역사의 정도'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현실정치와 타협하고 어울리지 아니함으로 역사의 장에서 퇴장했을지라도 그의 타협하지 아니하는 불굴의 정신은 혼탁한 오늘의 현실정치 사회에서 사표가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은 하나의 본성입니다. 돼지는 돼지의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흙구덩이에서 다른 돼지들과 함께 어울립니다. 또한 양은 양의 본성을 가졌기에 목장에서 다른 양들과 함께 풀을 뜯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의 성품을 지녔기에, 주님의 삶의 모습을 닮은 생활을 하며 성도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본문의 말씀은 다음 성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22: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신22: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신22:11)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소는 유대인에게는 깨끗한 짐승이었으나, 나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짐승들에게 나란히 멍에를 씌운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두 짐승은 서로 반대되는 본성을 가졌기에 도무지 함께 일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을 한 멍에로 묶는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본문의 말씀은 성도로써 신앙과 성결에 손해를 보면서까지 불신자와 타협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바로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민(聖民)으로 택함 받아 하나님 기업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의식주의 모든 생활에 있어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신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신14:3) 너는 가증한 물건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신14:4)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신14:5)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럼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 흰 노루와 뿔 긴 사슴과 산양들 (신14:6) 무릇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신14:7)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약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신14: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뿐만 아니라 '불신자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는 것입니다.

"(고후6: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이 본문은 이사야서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사52:11)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

'거기서 나와 떠나라'는 것은 반드시 장소적으로 분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로서 성결 보존하기 위해 이 지방에서 저 지방으로 이사를 다녀야 한다는 것은 신약 성경에 없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세상에 대해 도덕적 영적으로 구별되게 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런 명령으로 종종 그 백성을 인도해낸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낸 일이라든가, 롯을 소돔 고모라에서 불러내 구원하신 일이라든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일이라든가 하는 것들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성결을 위협하는 죄악에서 서슴지 말고 즉각 떠나라는 것입니다. 성결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뜻입니다. 성령의 모든 열매들은 모두 성결을 바탕으로 맺히는 거룩한 열매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결을 바탕으로 한 성령의 열매들을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시19: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예수님께서도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야고보는 말하기를, "(약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성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만큼 성결에 이르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을 모르면 모를수록 그만큼 영육간에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시며 제사를 원치 아니 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사도 바울도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코 성도의 성결 보존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성결을 단련하기 위한 도장(道場)인 것입니다. 사무엘 루사포드씨는 "악마란 성도들의 신앙과 인내를 연마하는 숫돌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알기는 사탄이란 언제나 새로운 예루살렘 건축을 위하여 돌을 닦는 연장이 되기 위하여 찾아오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밀톤의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악이 하나님이나 사람의 마음속에 드나들 수 있지만, 받지 않고 물리치면 아무 자국이나 허물도 남지 않으리."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죄의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리고 거룩한 성령의 지배 가운데 살게 되면 얼마든지 죄의 자국이나 흔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흔적이 남아 성결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영어에서 건강하다는 말과 거룩하다는 말과는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건강한 상태는 병이 없다는 증거이며, 거룩함은 영혼이 죄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인의 성결은 원죄를 깨끗이 하는 것이며 다른 것은 아직 청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영혼에 건강을 회복한 상태이지만 그것으로는 아직 병에 자신을 갖지 못합니다. 가령 아이가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어른이 되어서도 결코 병에는 자신이 있다고는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전히 깨끗해진 자도 영아기와 청년기와 장년기가 있습니다. 깨끗하여짐은 영혼에서 죄를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말하며 결실은 그때부터 힘과 아름다움으로 자라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죄의 유혹을 받아 잠시 어려움이 있지만 곧 면역체계가 세워져 건강한 삶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선민(選民)이며, 세상과 분리되어 성결 보존해야 하는 성민(聖民)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현세에 몸담은 채 살고 있으며 세상 자체가 자신들의 삶의 토양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세상과 안 믿는 사람들과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리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불신자와 분리 내지는 구별될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불신자들과 교제함으로 신앙생활, 성결보존의 생활에 손상을 입을 것을 우려해서 한 말씀이지 결코 그들과 일체의 교제를 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전5:9)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고전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장차 구원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 이 세상의 오염에 조금이라도 개입함으로써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올 때까지, 세상을 최후로 심판하실 그때까지, 추수 때까지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가라지가 맹위를 떨친다 할지라도 끝까지 알곡으로 남아 있어야만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성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항상 함께 거하시는 지성소라는 것입니다.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듯이 우리도 언제나 음행과 호색, 우상숭배, 술취함, 방탕 등과 같은 인간적인 더러운 것들이 우리 안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성령이 항상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파하며, 진리를 따라 살게 될 때, 많은 고난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매일 죽음의 위험과 환난을 겪고 있는 바울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자요 그들이 누리는 세상의 기쁨과 쾌락을 깨뜨리는 우울하고 침울한 자요 궁핍한 때가 더 많은 가난한 자로 비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끝났다고 외치는 순간에 바울은 다시 소생했으며, 죽음의 순간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으며, 마음속에 항상 샘솟듯 솟아오르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기쁨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함으로써 그들에게 영적 부요를 누리게 하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했습니다. 참으로 바울은 "(고전3:22)...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소유한 자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기꺼이 그리스도께서 당한 모든 고난을 함께 받겠다고 고백하면서 모든 성도들에게 이 세상에서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말고 성결 보존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얼마나 영적으로 부요했던 사람이었습니까?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사도 바울도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 말씀의 뜻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義)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육적으로 가난하여 남긴 재산은 한 푼도 없었으나 영적으로 부요하여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생활로 부요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소유케 함으로 많은 사람을 진정으로 부요한 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신과 더불어 모든 인류가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다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물 한 방울 찍어 마실 수 없는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 민족이 부강해지는 것은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모든 나라 민족이 영원히 사는 하늘나라에서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85세 고령의 일본최고의 전도자, 혼다 고지 목사가 무릎을 꿇어 큰절을 하며 자기 민족이 지은 죄악을 사죄했습니다.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저녁 명성교회에서 열린 97성회에서 <일본의 빌리그레이엄>으로 불리며 일본크리스천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있는 그는 지금까지 30여차례 한국을 방문하며 한국민족 앞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일제가 <조센징>으로 폄하했던 한국 국민들에게 큰절을 하며 사죄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한국 국민들에게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으면 괴로워 견딜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사죄이유입니다. 일제는 한국침략 36년 동안 인권유린 창씨개명 신사참배강요 종군위안부 등 최소 10개이상의 용서받을 수 없는 민족적 죄악을 한국민족에게 지었으며 그같은 죄악은 평생 사죄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입니다. "당시 일제는 악마였다."며 거침없이 말하는 혼다 목사는 한국인들이 과거 역사에 대해 분노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일본은 전국민이 마음 깊숙이 사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한국 국민들이 큰사랑으로 일본 민족을 용서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죄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의 죄악을 대신했던 것처럼 한국 크리스천들이 십자가의 무한한 사랑으로 죄악된 일본인들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혼다목사는 자신의 생명이 남아있는 한 사죄는 계속할 것이라면서 일본 내에도 자신과 같이 마음으로부터 사죄하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는 최근 일본의 우익화경향은 우려할 만 하다면서 일본이 진정한 크리스천 국가가 되는 것이 아시아와 세계평화를 위해 절실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본기독교는 전인구비례 신자수 1%의벽을 뛰어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순교자가 없어 섭니다. 일본 크리스천들은 고난과 핍박이 왔을 때 순교하지 않고 도망갔어요. 복음의 선진들이 무수한 순교의 피를 흘린 한국의 기독교가 부흥하고 피를 흘리지 않은 일본 기독교가 부흥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나는 내 생의 전부를 일본교회의 리바이바르(부흥)를 위해 바쳤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1%의 벽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그는 복음으로 거듭난 한민족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일본을 용서하고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서 힘써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인류 역사에 엄청난 죄악을 짓고도 아직까지 사죄할 줄 모르고 여전히 군국제국주의를 꿈꾸며 뻔뻔스런 태도를 버리지 않는 일본, 그리고 경제대국답게(?) 우상도 800만개나 섬기는 일본은 겉으로 세계 경제 대국일지는 몰라도 영적으로 볼 때, 기독교인 1%를 아직도 깨지 못하고 있는 영적으로 빈곤한 나라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나라이나 실상은 아무 것도 없는 가련한 나라요,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를 모르는 파렴치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1883년 전북 김제군 용진 면에서 출생한 박연세 목사는 3.1독립만세운동으로 투옥 당하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옥중에서 순교한 호남의 대표적인 목회자입니다. 그는 전위렴 선교사로부터 전도 받고 개종한 아버지(박자형)를 따라 어릴 때부터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전위렴 목사가 교장으로 있는 군산 영명학교에 입학해 공부한 뒤 이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대구형무소에서 2년 6개월간 보냈습니다. 그 뒤 박목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고 목포 양동 교회에서 목회를 했으며 4번이나 전남노회장을 지내고 총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박목사는 1937년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어쩔 수 없이 동조했으나 나중에 잘못을 깨닫고 일왕(日王)을 신격화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는 강단에서 일왕의 절대적 위치를 그리스도로 대체하는 발언을 계속하다 1942년 11월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4년 2월15일 감옥에서 동사했습니다. 진리를 사수하다 순교 당한 것입니다. 이 땅에 복음을 위해 순교의 피를 뿌리신 분이 어찌 이 한 분뿐이겠습니까? 박목사가 소천한 뒤 유일한 혈육이었던 박지영 집사는 유품들을 정리, 숨어 지내며 굶기를 밥먹듯이 했습니다. 비록 교인들이 도와줘 몸을 피할 곳은 있었으나 그의 후손들은 박목사가 순교 당한 뒤 수많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일경들의 감시를 피해 도망 다녀야 했고 먹고 자는 것을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박목사님의 신앙과 독립정신이 바로 이 나라 민족을 부요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순교의 피가 4천 2백만 남한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1,200만의 기독교 신자를 보유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수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실로 이 나라 민족은 많은 고난을 받아 "(고후6:9)....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6:10)...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아니 할 수 없는 영적으로 부강한 나라 민족임을 확신합니다. 50년 전, 미국에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폴 비트겐슈타인입니다. 그런데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오른팔을 잃었습니다. 피아니스트가 팔 하나를 잃었으니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트겐슈타인의 집에 악보 하나가 우송되어 왔습니다. 팔 잃은 피아니스트에게 장난을 친 것일까? 그의 마음을 더 괴롭히려는 것이었을까? 이 곡은 당시 미국 최고의 작곡가였던 레이블이 비트겐슈타인을 위하여 특별히 작곡한 것으로서, 곡명은 "왼손을 위한 콘체르토 D"입니다. 이 곡은 두 손을 가지고도 다루기 어려운 곡이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고통과 싸우며 연습하였고 놀라운 연주를 하여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자 많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하여 곡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의 곡을 써서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그 연주는 몹시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며, 손에 못이 박히고, 피를 흘리며 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 그 피, 그 인내와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부요해지는 개선곡이었던 것입니다.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멸시받아 싫어 버린 바 되시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셨으며, 채찍에 맞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으로, 허리에는 창으로 찔리셨으며, 급기야는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기쁨과 축복, 그리고 모든 것을 가진 부요함을 베풀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사셔서 모든 인류를 부요케 하는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은 재미있는 결혼 풍습이 있습니다. 결혼식 때 신부가 접시 한 개를 밟아 깨뜨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의 경험을 통하여 더 큰 기쁨을 맛보는 예식이라고 합니다. 기쁨을 고통으로 표현하는 의식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그 시점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 자신이 깨져 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는 슬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새 출발의 희망을 안고 낡은 접시를 깨는 신부처럼 파괴와 혼돈 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히 부요한 예수님의 아름다운 신부가 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나라 민족을 더욱 더 부강하게 만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늘나라의 부요한 자가 되시며, 모든 사람을 부요케 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8.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후7: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고후7:3)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고후7:4)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유난히도 많은 사건· 사고로 얼룩진 95년이었지만 특히 올해는 전세계적으로 정치인, 경제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던 한해였습니다.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지(誌) 최근호는 <뇌물 수수, 마약밀매 등 정치인 및 재계 인사들의 범죄행위가 올해만큼 빈번하고 규모가 컸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면서 95년을 빛낸 대(大) 사기꾼 8걸을 선정, 발표했습니다. <세계최고 대도(大盜)>의 불명예를 안은 인물은 나이지리아의 독재자인 사니 아바차 장군. 그는 외국으로부터 정유를 수입하면서 장부상으로 시장가격보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구입하는 것처럼 해놓고 차액을 챙기는 수법으로 무려 40억 마르크(약 2조원)를 꿀꺽한 뒤 스위스 레바논 등지의 은행계좌에 예치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노태우 전두환씨 등 전직 두 대통령은 재임중 각각 4천7백50억 원과 2천8백억 원을 챙겨 나란히 2위와 3위를 차지했습니다. 우리 한국이 얼마만큼 부패했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러워진 탐욕의 결과 눈이 멀어 부정부패와 악행을 서슴지 않음으로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정까지 파멸시켜 패가망신하는 사례를 역력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자산이란 사람이 대부의 벼슬에 있었습니다. 그는 관리가 뇌물을 받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한 번은 손님이 찾아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야기 끝에 손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일전에 보낸 생선을 받지 않으신 것을 보니 생선을 싫어하시는군요?" 그러자 그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생선을 아주 좋아합니다." 손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왜 돌려 보내셨습니까?" 이 말을 듣고 그는 매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서 보냈습니다.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요. 만약 내가 그 생선을 그냥 먹었다면 상에 올라오는 다른 생선들도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벼슬을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손님은 깜짝 놀라며 그에게 물었습니다. "생선 한 마리가 뇌물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남에게 받은 물건은 뇌물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훗날 내가 대부라는 벼슬을 버리고 국록을 먹지 않는다면 선생이 보내주신 생선을 기쁘게 먹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됩니다." 손님은 크게 감명을 받고 자신의 집을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에 우리 사회에도 이런 벼슬아치들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딤후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교회나 나라에서 귀하게 쓰이는 그릇은 그릇의 크기나 재질(材質)에 관계없이 깨끗해야만 된다는 분명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깨끗한 삶과 깨끗한 사회'가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를 맞아 다시 한 번 성결 보존의 중요성을 살펴봄으로 한 해를 성결한 삶으로 결산하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레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수7: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히12:14)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성결과 성화, 거룩은 다 같은 말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속성인데 아담은 범죄하여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동산 숲속에 숨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벧전 1: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해질 수 있는 제사 제도를 세우셨는데 그 핵심은 "피"에 있습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속죄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성결케 하시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음을 예표한 것입니다(히8:5,9:1-14). 어느 촌에서 전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한 선교사가 며칠간 묵었던 신도의 집에 쓰다 남은 세탁비누를 주고 갔습니다. 그런데 비누를 처음 본 그 집주인은 떡인 줄 알고 식구들과 누어 먹었으나 통 맛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불쾌하게 여겨져 주인은 선교사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해가 지나서 선교사가 다시 오자 주인은 비누 먹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선교사는 웃으면서 "그것은 더러워진 옷을 깨끗이 세탁하여 입으라고 드린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주인이 "그것으로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면 희어지는가요?"라고 묻자, 선교사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주인은 대단히 기쁜 표정으로 춤을 추었습니다. 이번에는 선교사가 주인에게 "왜 그렇게 기뻐하시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기를 "그 비누를 우리 집 식구가 다 먹었으니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졌을 것이 아닙니까? 나는 정말로 기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죄는 물과 비누로 씻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써만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36:25-26에서 성령에 의한 성결함을 예언했습니다.

"(겔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 시대에 우리는 예수의 피로, 말씀으로, 성령으로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성결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요17:15).

"(요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성결은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살전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가진 자는 성결해야하며(고후7:1)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자는 성결해야 합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딛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딛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일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성결은 받아야 할 은혜며 예수를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생활되어져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빛 되시는 예수와 사귐을 통해 얻어지는 성결 생활(요일 1:7)이 성결 보존입니다.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 웨슬레는 "가장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를 자기의 선지자로서 <세상의 빛>으로서 여전히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순간 순간의 빛만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물러가시면, 모든 것은 흑암이다. 하나님은 성결에 대한 저축을 주시기 않는다. 사람들이 순간순간 공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불결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성결 보존은 신의 성품을 산출케 하는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주고 있는 성결에 대한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신5: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받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그 자손이 영원히 복을 받게 됩니다.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성결 보존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를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모든 이상(異像)과 몽조(夢兆)를 해석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유명한 술객과 박사들이 풀지 못한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몽할 수 있었습니다.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단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단2:30)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단2:36)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단2: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단4:19)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얼마 동안 놀라 벙벙하며 마음이 번민하여 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을 인하여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단4: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단4: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단4:26)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단4:27)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다니엘이 죽음의 사자굴 속에서도 조금도 상함이 없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6:16) 이에 왕이 명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단6:19)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단6:20)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단6:21)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단6: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단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너무도 생생하고 실감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섬기게 될 것입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성령충만 하지 못하면 사탄이나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없게 되어 바로 섬길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사람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 두려워서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은 자신의 삶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육과 영에서 온갖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우리 신체를 바로 사용하지 않으면 몸은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육체를 더럽히는 15가지 죄악을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몸을 더럽히게 되면 정신이 더러워지고 부패되어서 결국 하나님과의 친교가 단절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더럽히는 죄악들을 제거시켜서 우리 자신을 깨끗이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몸을 더럽히는 것은 음란, 탐색, 기타 정욕에 속하는 것으로 결국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모독하는 죄인 것입니다. 그리고 영의 더러워짐은 이교도 사상으로 불건전한 정신이 믿는 자의 영을 더럽힘을 말합니다. 간혹 이교도의 사상에서 기독교 사상과 유사한 점들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중심적 내용이 이교적 색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을 살리지 못하고 도리어 영을 죽이는 간교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교도의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여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후 6:14-16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기독교인의 성결과 이방인의 불결이 함께 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세속화를 경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계1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14: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계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계14: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여기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는 바로 세속화되지 아니하고 성결보존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알퐁스 도테의 <불로장생주>는 이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불로장생주>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재정이 바닥났습니다. 가난을 미덕으로 삼았던 수도원이었지만 수도원의 뾰쪽탑이 허물어져가고 있었고, 수도원 주위에는 잡초가 무성하였으며, 유리창은 깨지고, 문틀도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지경에서 신부들은 종을 살 돈이 없어 기도시간을 알리는데 은행나무로 딱가리를 쳐서 알려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 수도원은 <불로장생주>라는 술로 떼돈을 벌어들이게 됩니다. 불로장생주란 고셰라는 수도사가 여러 가지 약초를 끓이고 증류해서 만든 훌륭한 술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셰라는 수도사는 바보 같은 위인이어서, 수도원에서 젖소 두 마리를 먹이는 소지기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열렬한 신앙인이었고, 모든 규율을 철저히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성이 착한 그는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는 수도원을 위해 공헌하고자, 어렸을 때 자기를 길러준 아주머니가 주조할 때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기억하여 6개월의 고생 끝에 신비의 술, 불로장생주를 제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술이 날개 돋친 듯 팔리자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활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문이 새로 단장되고, 건물이 보수되고, 신부들도 비싼 옷을 입었습니다. 수도사 고셰는 점점 신부들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낡은 예배당 안에 차린 주조장에서 오직 불로장생주 제조에 전념하게 됩니다. 30명의 수도사들은 날마다 산과 들로 약초를 찾아 헤매고 다녔습니다. 고셰는 그 빛나는 공적에 의해 어느덧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미사가 진행되던 중 두건을 비뚤어지게 쓰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자기 좌석도 찾지 못할 정도를 취한 고셰가 성당에 뛰어들어 난데없이 괴상한 노래를 불러댔습니다. "끌어내라. 귀신들렸구나!" 당황한 신부들은 소리쳤습니다. 그는 손수 만든 술을 시음하다가 중독자가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후 고셰는 성당에 나오지 말고 주조장 안에서 혼자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게되었습니다. 고민하던 고셰는 원장을 찾아가 술제조를 그만두고 전처럼 젖소를 먹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장은 자비로운 성 어거스틴이 죄를 용서해 줄 테니 안심하고 술만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재정담당 신부는 "이렇게 부자가 되어 가는데 우리를 망쳐놓을 셈이냐"고 순진한 고셰를 윽박질렀습니다. 그 후 불로장생주는 미친 듯이 팔려 나갔습니다. 신부와 수도사 전체가 술병을 포장하고, 상표를 붙이고, 짐을 운반하느라고 미사를 거를 때마저 있었습니다. 매일 저녁 미사가 끝나면 사제가 "우리 수도원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희생하고 있는 가련한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해서 그를 위해 기도했으나, 그 시간에 술을 제조하는 낡은 예배당 안에서는 어김없이 술주정 하는 고셰 신부의 노래 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때마다 신부들은 염려스럽게 말했습니다. "이를 어쩌나! 교구의 신도들이 알면 큰일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수도원이 본래의 의도와 목적에서 탈선하여 부의 축적에 혈안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저주받을 타락입니다. 기업이 도덕성과 기업윤리를 그 화려한 간판 밑에 묻어버리고 사리사욕 추구에 혈안이 되고 권력가와 자본가들이 엄청난 재산을 도피시키는 것은 타락을 넘어 마성을 드러내는 주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거머쥔 권력 밑에서 한 순박한 인간이 퍼렇게 멍들어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종교라는 권력의 메카니즘에 의해 부름 받은 수도사가 부(富)를 해산(解産)하는 기계로 화하고 결국은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를 위한 종교이며, 누구를 위한 권력인데 귀한 영혼이 주정꾼으로 변화되어 가는가 말입니다. 수도사들은 그러한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너는 수도원을 위하는 일을 하므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달래면서도 민심이 두려워 "교구 신도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큰일이야." 라면서 이 비밀은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서로 뻔뻔스러운 얼굴들로 부끄러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밀은 없는 법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날 것이고 숨기운 것이 알려지지 않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당리당략이나 정략을 떠나 깨끗한 삶과 깨끗한 사회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깨끗한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깨끗한 정부가 강한 정부입니다. 깨끗한 사회가 강한 사회입니다. 깨끗한 교회가 강한 교회입니다. 깨끗한 가정이 강한 가정입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언 22:1)

다윗은 도덕적, 영적 실패 후에 "(시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나라 백성들에게 정직한 영을 주시어 나라 민족이 새롭게 되어지기를 기원합시다. 먼저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축복받는 천국 시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9.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고후7: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고후7:7)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고후7: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고후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7: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다 (고후7:13)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고후7: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고후7:15)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고후7:16)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몇 년 전, 구 소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젊은이가 고기를 냉동 보관시키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그곳에서 고기의 육질을 검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하던 젊은이는 한 냉동고가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혹시'하는 마음으로 냉동고 안에 들어가 보았는데, 냉동고 안에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순간 '도둑이구나' 싶어 얼른 밖으로 빠져 나오려던 젊은이는 문이 밖에서 잠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힘껏 소리도 지르고 두드려 보기도 했지만 문 밖의 아무도 이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히 누군가가 문을 밖에서 열지 않으면 도저히 살수가 없었습니다. 손발이 저려오고 죽음이 서서히 그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상태를 쇠 조각으로 벽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숨이 막히고 손발이 저려온다. 이제 곧 산소도 다 없어지고 나는 얼음덩이로 변해버리겠지......이....이것이.....나의.... 마지막....이로구나.....' 시간이 얼마 지난 후 다른 직원에 의해 그 문이 열려졌는데 젊은이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단히 놀라운 사실은 그 냉동고는 오래 전에 고장이 나서 사용하지 않던 냉동고라는 것이었습니다. 산소는 충분했고 실내 온도는 겨우 16℃ 정도로 약간 쌀쌀한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 젊은이가 죽은 이유는 냉동고니까 으레 얼어 죽을 거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진실로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비록 근심 걱정뿐일지라도 머지않아 영원한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생명의 주님 앞에 사시는 생활로 범사에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마음의 근심과 걱정은 심령을 상하게 할뿐만 아니라 정신과 육체에 아울러 건강을 해치게 될 뿐입니다.

"(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시31:9)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그러나 여기 본문의 '근심'이란 믿음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정의(知情意)의 신앙적 측면에서 참된 회개를 말합니다. 지적(知的)인 회개는 자신이 타락한 존재임을 아는 것을 말하며,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음을 아는 것을 지적인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정적(情的)인 회개는 죄에 대하여 상한 마음으로 슬퍼하며 통회자복하는 것을 말하며, 정적인 신앙은 이 통회자복하며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의지적(義志的) 회개는 통회자복한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말하며, 결국 그리스도에게로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의지적인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세상 근심>은 참된 근심이 아니라 단지 원망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죄를 짓고 도망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 죄를 짓고 당하는 책벌에 대한 원망, 죄를 어떻게 하면 은폐시킬가 하는 근심, 발각되지 않을까 하는 근심, 만약 발각되지 않을 방도만 있으면 다시금 죄를 저지를 마음으로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는 근심 등을 말합니다. 이러한 세상 근심은 죄를 온전히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후회하며 가책과 절망 속에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근심입니다. 요컨대 세상 근심은 자기 자신을 파멸시켜 종국에 사망을 이루는 것으로, 죄의 결과로 상실한 건강, 명예, 재산, 우의, 욕망 때문에 오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심이라고 무조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결국 생명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이러한 근심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근심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그 은혜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염려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장차 반드시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죄를 두고 슬퍼하며 근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근심들이 바로 회개의 원인과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고후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근심하는 가운데 회개하여 마침내 구원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고 계실까?'를 생각하는, 하나님의 판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이 판단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게 되므로 매튜헨리는 이를 '죄에 대한 근심이요,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린 배은망덕했던 행위에 대한 근심'이라고 표현하면서 '신령한 근심'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참으로 <신령한 근심>은 마음을 좋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전7: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무감각했던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죄악으로부터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순결 운동을 전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통해 성결한 교회로 변화되어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져야 할 참된 근심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자기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마음에 큰 근심과 고통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9:2) (1절에 포함되어 있음)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요즈음 지식인들이 일본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바는 이렇습니다. 일본의 '국민작가'로 일본 국민의 숭앙을 받는 인기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역사소설 <언덕위의 구름>은 일본인의 역사인식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책은 지난 27년 동안 1천만 부 가까이 팔렸습니다. 이 소설은 '메이지국가'에 대한 찬양론이며, 일·러전쟁 예찬론입니다. 시바의 표현을 빌리면 '세계의 벽지시골 같은 작은 나라가 처음으로 유럽문명과 피흘리는 대결'을 하여 승리한 전쟁이 바로 일·러전쟁입니다. 그에게는 그 전쟁이야말로 유색인종이 백인을 이긴 최초의 역사적 대결이며, 아시아로 팽창하려는 러시아세력을 꺾어 '조선반도를 보호하고 일본을 방어한 자위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러전쟁 긍정론에는 당시 일본에서 팽배했던 '러시아 위협론'이 전제돼 있습니다. 시바는 "만일 조선이 러시아領(령)이 돼 버렸다면 (그것은)자나깨나 옆구리에 비수를 들이댄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면 당시의 일본의 입장은 알수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일본적 민족주의를 한껏 고양시킨 '언덕위의 구름'은 일본의 '한반도침략=식민지화'를 정당화하는 '시바史觀(사관)'의 정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런 소설에서 후지오카가 일·러전쟁을 '양질의 국가지도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민족 위기를 구한' 민족방위전쟁으로 평가하며 자랑스런 역사의 본보기를 찾고 있음은 주목할 일입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이러한 시바사관(史觀)의 정체를 일본의 군국주의의 부활로 바라보며 심상치 않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관을 지닌 또 다른 연구회가 있습니다. 도쿄대학 교육학부의 후지오카 노부가쓰(藤岡信勝)교수가 이끄는 '자유주의사관 연구회'로 패전 50년째인 95년에 설립됐습니다. 이 조직의 목적은 '자랑스런 일본인'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사관을 바로 세우고 교과서에 잘못 기술된 역사를 고쳐주자는 것.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일본근현대사는 소련의 이익을 대변하는 좌익의 '코민테른 사관',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며 미국의 뜻에 의해 재단된 '도쿄재판 사관'에 입각하여 기술됐다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 비친 일본의 과거사 기술은 어두운 면만이 강조됐고 잘못된 면만이 부각된, '일본은 나쁜 나라' 라는 이미지로만 채색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런 부정적 기술을 암흑사관, 자학사관으로 매도합니다. 일본의 과거사에는 좋은 점 자랑할 점도 있게 마련이므로 선과 악의 2분법에 의해서만 평가하지 말고 건강한 내셔널리즘을 갖고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에서 일본의 역사를 새롭게 평가하자, 이것이 후지오카의 지론입니다. 적어도 표방된 지론은 그렇습니다. 여기까지는 그의 입장이 자유주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를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종군위안부, 난징(南京)대학살등의 교과서 기술 삭제운동을 작년에 적극적으로 벌이면서 그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呪縛(주박)당한 국가주의자 또는 불건전한 '일본주의자'로 변신하고 말았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이 연구회가 과거사의 자랑스런 면을 부각하여 편집한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제1, 2, 3부가 이태동안에 각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사실은 이들의 사관을 지지하는 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책을 출판한 후소샤(扶桑社)에 따르면 작년에 잇달아 간행된 제1, 2부는 55만부, 35만부가, 그리고 올해 발간된 제3부도 11만부 가까이 팔렸습니다. 또한 후지오카가 직접 저술한 '汚辱(오욕)의 근현대사'와 그가 편집장으로서 펴내고 있는 교과서 개혁운동의 전위지들도 일선교사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들 시바 사관과 자유주의 사관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으며 일본이 과거 군국주의 부활을 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대국을 바탕으로 한 군사대국 일본, 그 일본의 군국주의의 부활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쉽게 복음화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는 것이 참으로 우려해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일본의 빌리그래함이라고 불리는 혼다 고지 목사는 금년까지 30년 동안 매년 한국에 와서 코를 땅에 대고 자신의 민족과 국가가 지은 죄를 사죄하며, 세계 평화와 자신의 나라를 위해 기독교 인구가 1%도 채 되지 못하는 일본 복음화를 위해 와서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민주당 소속 윌리암 리핀스키(일리노이주)의원은 지난달 말 2차대전 기간중 일본이 벌인 군대위안부 문제 등의 만행을 규탄하고 피해자들에 대한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국제무대에서 일본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해온 위안부 문제가 미국에서 거론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리핀스키 의원은 광복절을 앞두고 이와 관련,“피해 당사자들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하루바삐 사죄와 배상을 통해 역사의 한 章(장)이 인도적으로 마감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결의안을 제출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결의안은 여·야당 의원 15명이 함께 발의한 초당적인 의제이기 때문에 쉽게 통과될 것으로 보이며, 일본 정부와 국민이 그 결의안으로부터 받을 충격은 상당하리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가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밝힌 미군 포로들이 당한 피해는 이렇습니다. <2차대전중 일본군에 포로가 된 미군은 3만3천5백87명, 민간인 1만3천9백 66명이었습니다. 군 포로중 37%가 목이 베이거나 총살 등으로 살육당했고 살아남은 자도 강제 노역과 아사상태에 시달렸습니다. 억류된 미국 민간인 가운데 11%가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나치의 전범들이 많이 처형됐으며 독일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과거를 사과했고 배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지금 독일의 민주주의는 바로 그런 터전 위에 기초를 두고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극소수의 전범들에 대한 처형으로 그쳤고 일본 정부는 과거 만행에 대해 (미국을 상대로) 공식 사과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굳이 지금 제기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피해자 모두가 늙고 병들어 있습니다. 죽기 전 일본으로부터 응분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역사의 한 章(장)을 인도적으로 마감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지급해야할 피해 배상액은 1인당 4만 달러(약3천6백 만원), 군대 위안부 희생자에게도 같은 액수가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근거는 93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재판소에서 내린 판결에 따른 것입니다. 당시 국제재판소는 일본 군부에 성적 노리개감으로 악용된 이들 위안부 출신 여인은 극악 상황을 당한 배상으로 1인당 4만달러를 지급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일본은 현재까지 이 판결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일본 민간 단체에서 고작 몇 백만 원을 지급하고 눈 가리고 아웅하고 있는 작태가 일본의 오늘의 강퍅한 모습입니다. 그는 그 법안에 일본의 만행이 재연될 것을 우려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태평양 연안국 가운데 상당수의 나라들이 지금 일본의 재침략 가능성에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일본의 사과와 배상은 필요한 일입니다. 최근 주일 대사를 역임한 월터 먼데일 前(전)부통령도 조지타운대 연설을 통해 "세계 속의 일본 리더십은 2차대전중 범한 과오를 전적으로 사과해야만 강화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하버드대의 철학교수였던 조지 산타야나 박사가 남긴 "과거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기필코 이를 재연하게 돼 있다."는 말을 나는 믿습니다.> 이어서 그는 배상 대상을 다음과 같이 상정하고 있습니다. <미군과 연합군 포로, 억류됐던 민간인, 특히 괌주민과 필리핀인을 합치면 20만명에 이를 것으로 봅니다. 여기에 한국 등지에서 군대 위안부로 끌려 간 20만 명의 여인들이 추가됩니다. 그리고 1939년 난징(南京)대학살로 희생된 30만 명의 중국인들은 별도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만행이 남긴 상처와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나눔의 집'의 광복 52주년은 착잡하기만 하다. 다리지체 장애와 양쪽 눈 실명 등 중복 장애로 고생하는 김완암(81)할머니가 지난 11일부터 "도깨비들이 모여들어서 무서워 못살겠다."고 호소하며 수면장애와 함께 치매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빛의 방향만 간신히 구별할 정도인 김할머니가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도깨비들이 보인다며 잠도 안자고 소리만 지르자 '나눔의 집' 식구들 모두 비상이 걸렸다. 너나할것 없이 비슷하게 고령과 노환으로 시달리는 할머니들에게 김할머니의 증상이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10명이었던 '나눔의 집'할머니들은 지난 2월 강덕경(1929∼1997)할머니가 저 세상으로 떠난 후 9명으로 줄었다. 강할머니의 사망 이후 '나눔의 집' 최연소할머니가 된 김복동(73)할머니는 누구보다 할 말이 많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고 배상도 받고 죽을 거야. 일본 정부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러놓고 50년이 지나도록 말 한마디 없다가 민간 위로금으로 입을 막겠다니 말이 돼? 단돈 한푼이라도 정부에서 줘야지. 우리 할머니들 다 죽도록 기다리는 것밖에 더돼?"> <러시아의 동쪽 끝에 길게 자리잡은 사할린섬에는 해방 52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완전한 해방이 찾아오지 않았다.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피맺힌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4만 여명의 우리 동포들에게 해방은 완료형이 아니라 여전히 끝나지 않은 진행형일 뿐이다. "50여년을 고국, 고국 하다가 다 늙어 버렸어. 하지만 단 하루를 살다가 눈을 감는 한이 있더라도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에겐 진정한 해방이지. 뼈만이라도 고국에 묻어야 그나마 한이 풀릴텐데…." 사할린의 州都(주도) 유주노 사할린스크의 한인 노인회에서 만난 이진우(81)할아버지는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의 귀국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1944년 일제에 강제징용을 당해 한탄과 한숨 속에 보낸 한 서린 망향 50여년의 세월이 금방이라도 폭포 같은 눈물로 변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사할린 동포의 영구귀국과 임시귀국 방문업무를 보고 있는 사할린 이산가족협회에는 고국에 가기를 갈망하는 동포들의 여권과 신청서가 상자에 빽빽이 담긴 채 쌓여있다. "고국에서보다 더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어도 이방인인 내가 마음껏 숨쉬고 맘 편히 안주할 땅은 결코 아냐. 내가 태어난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어." 고향이 충남 당진이라는 윤구병(80)할아버지. 이산가족협회에서 만난 그는 지금도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언덕이 눈에 선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들은 한국으로 영구귀국을 신청해 놓고 이제나 저제나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사할린 이산가족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적십자사가 주관하고 있는 올해 영구귀국 신청자는 모두 2백23명...> 중국은 과거 일본 731부대 상대로 첫 집단소송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모 일간지에 보도된 그 소송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소장에서 일본군이 지난 42년 충산촌에서 자행한 세균전 만행을 당시 기록과 함께 상세히 고발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그 해 가을 충산촌에 페스트균을 살포해 많은 주민들이 페스트에 감염됐다. 일본군은 세균전의 효과를 직접 관찰하기 위해 충산촌 인근에서 생체해부를 자행했다. 당시 18살이었던 우샤오나이는 많은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 채로 배가 갈리우면서 신장과 폐가 적출됐다. 그의 비명은 당시 산사를 진동시켰다. 일본군의 생체실험이 진행된 현장에서는 사지가 잘리우고, 장기가 없어진 사체들이 주민들에 의해 목격됐다. 일본군은 생체실험이 끝난 뒤 충산촌에 방화를 했다. 당시 페스트균에 오염돼 숨지거나 생체실험에 희생된 충산촌 주민은 4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이들은 밝히고 있다. 도쿄 지방법원에 간 희생자 대표인 허잉전(63·후난성 창더시)은 눈물을 흘리며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당시 18명이던 우리 집안은 형님과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형수 등 모두 6명이 페스트균에 감염된 뒤 생체해부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풍비박산이 났다." 허치원(66)은 일본 공군이 투하한 세균탄으로 부친이 경영하던 음식점 직원 18명 가운데 14명이 페스트에 감염돼 죽었고, 결국 음식점도 불타버렸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과거 일본군이 중국에서 세균전을 자행한 것을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시 관련기록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731부대의 세균전 자행과 관련한 중국 민간차원의 첫 소송인 이번 집단 소송은 배상 요구액이 10억8천만엔(약 939만 달러)에 달한다. 중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세균전 관련 배상을 요구한 적은 과거에도 있었다. 충산촌 주민 수백 명은 지난 94년에도 일본 대사관에 배상을 요구하는 연합 소장을 낸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부는 이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결국 이들의 요구는 묵살됐다.> 그 악명 높은 731부대란 무슨 짓을 했습니까? <이시이시로 일본 육군 군의중장의 이름을 따 '이시이 부대'로 불리기도 하는 731부대는 일제 세균전 부대의 본대격이다. 세균전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시이의 건의에 따라 1935~36년 히로히또 일왕의 칙령으로 창설된 일제 세균부대는 모두 4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얼빈 인근의 '관동군 방역급수부'라 불렸던 731부대를 비롯해 창춘 인근 멍자둔의 `관동군 군마방역국'이라는 100부대, 일명 `에이'라는 난징의 1644부대, 일명 `나미'라는 광둥의 8605부대가 그것이다. 이들 부대들은 일제의 세균전 연구책임자인 이시이가 직접 부대장으로 근무한 731부대를 중심으로 합동작전과 연구를 진행했다. 731부대는 이 부대에서 인체실험 대상자로 희생된 `마루타'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3천여명의 병력을 거느린 731부대는 모두 8개 부서로 구성됐다. 1부는 페스트, 콜레라균 등 각종 전염병균에 대한 연구를 중점 실시해 300~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감옥에 수감된 마루타들에게 세균실험을 자행했다. 2부가 이들 세균을 사용하는 실행부서였다. 제4부인 생산부는 말 그대로 병균과 세균을 대량생산하는 부서였다. 산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친 731부대에서는 1940년 이후 매년 600명의 마루타들이 생체실험 대상이 돼 최소한 3천여명의 중국 러시아 한국 몽골인이 희생된 것으로 소련의 일제전범재판 결과 드러났다. 이 재판에서 731부대 관계자들은 마루타 감옥이 만들어진 뒤 살아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731부대는 연구에 그치지 않고 지난 39년 일제가 몽골과 소련 접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소련에 대해 도발하다 대패하자, 소련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강물에 장티푸스균 등을 실제로 살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은 인류 역사에 저지른 이 엄청난 과거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회개치 아니하면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일본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진정으로 걱정하고 크게 근심하며 고통스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일본 복음화이며, 그를 통한 참된 회개의 역사일 것입니다. 나라 민족이 사는 길은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눅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눅13: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대기근이 휩쓰는 북녘'에서 지금도 들려오는 고난의 소리는 여전합니다. 한끼 연명을 위해 북한돈 100원, 한국돈 340원에 꽃제비 생활(몸파는 생활)하는 북녘의 딸들이 흐느끼는 밤의 곡성. 굶주리다 못해 정신착란을 일으켜 마루에서 놀고 있는 아이가 강아지로 보여 빨래 방망이로 머리를 쳐서 죽여 가마솥에다 삶아 먹다 안전부에 붙들려간 황해도 황주의 어느 아주머니의 비탄의 소리(사람고기 맛을 한 번 본 사람은 다시 먹게 되기 때문에 잡아다가 화형에 처한다고 함). 함북 세천 탄광지역에서 보통 하루에 10여명씩 굶어 죽어가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콩깍지를 갈아서 먹거나 진흙떡과 백토(하얀 흙)를 먹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조금 나은 사람들은 진흙에다 옥수수 가루를 조금이라도 뿌려서 먹고, 없는 사람들은 그냥 흙만 먹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먹고 나면 똥구멍이 막혀서 서로 똥구멍을 파주느라 고생을 하고 항문이 파열되어 병원에 갔다가 죽어나가는 통곡(痛哭). 먹고살기 위해 인신매매되어 탈북한 북한 여성이 성불구자 남편이나 장애자 할아버지 남편과 부부 싸움하다가 남편이 '네 년은 북에서 탈출해 온 년이니 신고해 버리겠다.'고 홧김에 하던 말을 이웃 사람이 듣고 신고한 바람에 진짜 북한공작원에 끌려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피의 절규. (탈북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첫 번째는 조국(북한) 사람이고, 두 번째는 남한 사람이다. 한번도 못 만나봤으니까. 세 번째는 중국 사람이다.) "내 목에 극약을 달아 주시오. 솔직히 말해 나는 노동당원이지만 이제는 당신의 하나님을 믿을 테니 만일 내가 당신의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면 그 약을 삼키겠오."라며 목이 메여 구원을 부르짖는 소리 등입니다. "전쟁하면 전 인민의 40%가 죽고 전쟁하지 않으면 전 인민의 60%가 죽는다. 전쟁만이 살길이다."라는 소문들입니다. 미국에는 올해 쌀만 1천5백만톤, 일본은 4백만 톤이 잉여농산물로 버릴 처지에 놓여있으며, 중국은 무역흑자가 100억불, 남한은 1천억 불이 넘는 수출국가입니다. 그런데 북한 전 인민의 생명은 그 중 단 5억불에 달려 있습니다. 남한 땅 들녘에는 그 숱한 태풍들도 비껴가면서 예년에 없는 풍년을 기약하건만, 대기근이 휩쓰는 북녘에는 어찌하여 곡성만이 들리는가. 기근으로 인한 북한 인민의 대량 아사(餓死)는 우리 민족 교회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민족과 열방이 탐욕으로 부패할 때 기근과 전쟁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 민족에게 임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작금 기업인과 변호사, 폭력조직 두목, 유명 연예인, 시의원 등 부유층 인사 40여명이 미국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최근 1년여동안 1천2백만 달러(1백억원)이상의 거액 도박판을 벌이고 외화를 불법 유출한 사실이 검찰에 적발됐습니다. 그런데 해외 카지노에서 5일간 무려 30억 원 상당의 외화를 탕진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피고인들이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 는 등의 이유로 구속 25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특히 석방된 피고인은 담당판사와 사법연수원 동기생으로 지난 3월 개업한 변호사를 선임한 것으로 밝혀져 전관예우가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습니다. 이미 내팽개쳐진 사회정의와 도덕 불감증 속에 이들 유명 기업인등 일부 부유층 인사들이 해외에서 거액의 외화를 노름으로 탕진한 보도는 충격보다는 이 나라 민족성에까지 의심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심각한 경제불황 속에 대량실업이 속출하는 현실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서민들에게 이들의 탈선은 배신감이나 허탈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라스베가스 카지노업계에서 한국인 고객들이 '봉'으로 통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번에 도박빚을 받으러 왔다 구속된 미라지호텔 카지노의 한국인 VIP고객 담당 직원 로라 최(崔)씨의 경우 지난 한해동안 한국인 고객에게 도박빚 5억 8천 만원을 받아냈고, 1백 8억 원의 외상장부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미뤄볼 때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날려버린 도박자금은 연간 1천억 원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허기진 배를 쥐어틀고 하루를 천년같이 살고 있는 북녘의 동포들. 5천년 역사의 때묻은 가난을 벗겨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하루아침에 날려 버리는 남녘의 쓸개없는 족속들. 쓸개없는 족속이라 동남아에 돌아다니며 뱀 쓸개며, 곰 쓸개며 쓸개란 쓸개는 다 쓸어 먹고 돌아다니는 싹쓸이 쓸개없는 족속들을 몽땅 붙잡아 가뭄들어 기근에 허덕이는 북녘 땅에 기우제 제물로 보내는 것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것이 아닐는지. 민족과 교회의 운명이 일각에 달렸으니 교회여 회개하라, 민족이여 회개하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회개치 않으면 북한이나 남한이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삼천리 금수강산을 더럽히고 있는 남북한의 각종 우상숭배와 부정 부패, 사치와 허영, 그리고 음란과 폭력, 불법 등은 우리 기독교인 모두가 근심하며 회개해야 할 심각하고 긴박한 문제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류가 예수 믿고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벧후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전범국가 일본이나 전쟁피해국가 한국 모두가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복음전도를 위해 근심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이 나라 민족을 위한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회개를 이루어 구원의 역사가 이 강산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0. 복으로 심는 자

"(고후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고후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8: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고후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후8: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고후8: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고후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후8: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8: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고후8: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고후8: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후8: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고후8: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8:15)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후8: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후8:17)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고후8:18)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고후8:19)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고후8: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고후8:21)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고후8:22)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고후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고후8:24)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

존 웨슬리 목사님이 어느 날 설교하는데 그 마을에 유명한 구두쇠 부자가 참석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여러분, 돈을 벌 수 있는 대로 많이 버십시오." 하니까, 그 부자는 좋아서 "야, 그 사람 설교 참 잘 한다."며 기뻐했습니다. 그 다음 "저축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십시오."했더니 이번에는 손을 싹싹 비비면서 "이렇게 설교 잘 하는 사람 처음 보았다."고 하며 좋아했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대한 쓰십시오." 하니까, 그 구두쇠는 "어이구, 좋은 설교 다 잡쳤다."고 하면서 일어나 나가더랍니다. 재물은 열심히 모으고 열심히 저축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써야 할 때는 아낌없이 써야 합니다. 최대한 벌어서 최대한 선한 일을 위해 써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 전도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 이상 선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이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끝 날까지 전파하는 지상 유일한 구원선입니다. 때문에 복음 전파를 통한 인류 구원의 사명을 가진 교회는 막대한 선교 헌금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은 성도들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선교를 위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기쁨으로" 헌금해야만 합니다. 마게도냐 교인들(그리스 북쪽 곧 현재의 발칸 반도에 위치해 있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 등의 교인들)은 로마의 정복자들에게 많은 천연자원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심한 학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극한 가난" 가운데 처해있었다고 했습니다. "극한 가난"은 "밑창까지 내려간 빈핍"을 말하는 것으로 그릇에 담긴 물건이 소진되어 그릇의 밑바닥이 드러난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이렇게 극빈 상태에서도 헌금열은 오히려 부자들보다 뜨거웠습니다. 이와 같은 그들의 뜨거운 선교 헌금열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신본주의, 즉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적지근한 교인들의 생활원리와 참된 교인들의 생활원리는 각기 그들의 헌금열에서도 다른 것입니다. 미온적인 신자들(계 3:15-19)은 언제나 헌금을 등한히 여기면서 부요할 때에는 인색해서, 그리고 가난한 때에는 걱정이 많아서 "기쁨으로, 자원해서, 풍성하게" 헌금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된 교인은 환난의 시기를 도리어 기쁨과 축복의 기회로 알고 빈곤의 시기를 헌금의 호시절로 알아 더욱 뜨겁게 헌금합니다. 이와 같은 것은 믿음의 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마게도냐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풍성한 선교 헌금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먼저 주님께" 바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가 자기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나면 다른 모든 것들도 아낌없이 주님께 바칠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주님께 바치지 않는 자는 자기의 소유도 자기와 함께 안 바친 대로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치기 전에는 물질 문제에 대하여 바치는 원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면, 물질 문제에 관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잠15:16)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희망하던 헌금의 분량은 그렇게 거액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처럼 거액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의 뜻이면 무엇이든 행하려고 하는 성도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나 선교를 위해 헌금하는 일에 있어서 어떤 일정한 제한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을 요구하지 않고 먼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어떤 이가 거액의 재산을 가져 선교 헌금하면서도 그 마음과 몸을 바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삼상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또한 그들이 많은 헌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헌금할 때는 아무런 복잡한 마음이 없이 단순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목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헌금의 표준은 그 드리는 물질의 다소에 있다기 보다는 그 헌금자의 품은 목적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려는 단순성을 가졌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박해와 극한 가난 중에서도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들의 '기쁨'과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알 때 구원의 은총이 임합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모두 예수님을 통해 병고침을 받았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린 그 사람만이 구원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눅17: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눅17: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17: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17: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17: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17: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눅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17: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눅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에드워드 스펜서는 미국 교과서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1860년 9월 8일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게렛 신학교 학생으로 있었던 스펜서군은 밤중에 친구의 고함소리를 듣고 눈을 떴습니다. 가까운 미시간 호수에서 큰 연락선이 조난되었다는 것입니다. 스펜서는 더 생각할 것 없이 미시간 호수까지 달려갔습니다. 385명을 태운 여객선이 암초에 부딪쳐 침몰한 것입니다. 그 중 287명이 익사하는 큰 사고였습니다. 스펜서는 고등학교 시절 수영 선수였으므로 수영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심한 바람과 높은 물결을 뚫고 호수로 뛰어들어가 한 사람씩 구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열 여섯 명을 쉬지 않고 육지로 끌어냈습니다. 아무리 수영 선수라도 그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는 너무 지쳐 육지에 쓰러졌으며 최후의 힘까지도 다 소비한 상태였습니다. 그 때 곁에서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파도 속에 허우적거리는 또 한 명의 조난자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스펜서는 정신없이 일어나 다시 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의 무리가 화근이 되어 그는 병상에 눕게 되었고 7년 후 3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신문 기자의 방문을 받고 그 날의 소감을 질문 받았을 때 그는 힘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날 밤 내가 물에서 건져내어 생명을 되찾아 준 사람은 17명인데 나에게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그중 한 소녀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 소녀는 지금까지 7년 동안 크리스마스마다 감사의 카드를 보내왔습니다. 나는 감사할 줄 모르는 16명보다도 이 한 명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위로를 받습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선물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내지는 그 관대하신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영원하고 충만합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받은 것을 항상 감사하셔서 은혜가 더욱더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화(成肉化)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으로서 부요하셨지만, 그의 희생을 통하여 세상을 부요케 하시려고 그 모든 것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시104:24)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실 때에는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낮은 인간 상태에 들어오심으로써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는 부(富)를 소유해 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는 머리 둘 곳도 없으셨습니다. 그가 이렇게 가난해졌으므로 그를 믿는 자들은 영적으로 부하여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신 은혜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감사하여 극한 가난 중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넉넉한 마음으로 넘치는 감사의 헌금을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비천한 말 구유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태어나셨지만 그 무한하신 사랑으로 완악한 우리를 변화시켜서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하셨음을 감사하셨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이 심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한 헌금을 드린 것은 바로 이 "넉넉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넉넉한 마음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비록 물질적으로 빈곤했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풍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가난한 과부도 마찬가지로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로 비록 가난하였지만 풍요한 삶을 누린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눅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눅21: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눅21: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눅2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은 어느 누구도 강요에 의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능력 이상으로 자원하여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선교 구제 헌금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 같은 마음에서만이 참다운 선교 구제가 이루어지며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고후8:3)...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헌금했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 전체를 헌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바치는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준 것과 같은 헌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의 이 같은 정신은 우리의 모든 소유는 물론 우리 자신마저도 하나님의 소유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색함은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한 절대 소유자라는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인들에 비하면 아주 탁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나 언변에 있어서 또 지식과 진지함과 간절함에 있어서 고린도 교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인들에 비해 그들은 아주 인색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인들보다 훨씬 풍부한 삶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풍성한 선교 구제 헌금을 바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은사면에서도 여러 가지 많은 은사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훨씬 가난한 마게도냐 교인들에 비하면 인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인들은 "(고후8:3)...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거액의 헌금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막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14: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막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막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막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막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막14:10) 열둘 중에 하나인 가롯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막14:11)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여기 마리아는 자기 오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가 예수님이 살려 주신 것과 자신이 죄사함받고 구원받은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보통 사람이 일년 이상 품팔이 해야 벌 수 있는 돈 값에 해당되는 진귀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몽땅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이 엄청난 마리아의 감사행위에 대해 놀란 제자들은, 그 가운데서도 특히 가롯 유다는 마리아를 비판하면서,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막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마리아를 책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을 배신자 유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 엄청난 물질이 허비되는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교회에서 중직(重職)을 맡았다고 해서 다 올바른 믿음과 판단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오히려 교회에 오래 다닌 중직들이 잘 믿으려고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며 헌금도 풍성히 하는 초신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값비싼 옥합을 아낌없이 깨트려, "자기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처럼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삼상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 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8:18)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혹자가 말하길, 하나님께 어떤 헌금할 일을 놓고 기도할 때, 제일 큰 금액은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요, 중간 금액은 인간의 생각이요, 제일 작은 금액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작고 큰 금액을 놓고 마음에 싸움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큰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가장 값비싼 것을 주님께 아낌없이 "힘을 다하여" 드렸습니다. 무엇이든 주님께 드리는 것은 제일 좋은 것, 제일 귀한 것, 최고의 정성이 담긴 것들을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참된 예배(worship, worth+ascribe)는 최상의 것을 주님께 돌려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봉사도 헌금도 너무 귀해서 드리기 어려울 때 그것을 드려야 하나님께서 귀한 것으로 기뻐 열납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말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못 팔아먹을 것, 상품 가치가 없는 것, 눈 먼 것, 다리 저는 것, 병들어 죽어 가는 것들을 드리는 것을 보시고 진노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갖다줘도 불쾌해서 안 받을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복을 받겠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또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말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1: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돈이 만능인 것 같아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서양의 어느 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는 있으나 잠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책은 살 수는 있지만 두뇌를 살 수 없고,

돈으로 음식은 살 수 있으나 입맛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집은 살 수는 있지만 가정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약은 살 수는 있으나 건강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사치품은 살 수는 있지만 교양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오락은 살 수는 있으나 기쁨을 살 수 없고,

돈으로 멋진 옷은 살 수 있지만 미를 살 수 없고,

돈으로 향락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십자가는 살 수 있지만 구세주를 살 수 없고,

돈으로 교회는 살 수 있으나 천국을 살 수 없다.

마음의 평화, 구원, 천국은 돈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돈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노이로제 걸리고 자살하는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 중에 더 많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물질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하늘 나라에 저축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조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므로 돈이 필요없습니다. 단지 여러분의 마음과 정성이 얼마나 하나님께 있는가를 보시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눈여겨 보십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 은행의 이자가 가장 높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투자할 줄 모르는 사람은 생전 예수를 믿어도 믿음이 안 자라고 체험도 생기지 않습니다. 클론다이크 광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탐사단이 그 광산을 탐사했더니 어느 오두막집에 두 사람의 해골이 누워 있고 그 해골들 사이에 많은 황금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친 탁자 위에는 편지가 놓여 있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금을 발견하려고 북쪽 땅에 찾아가서 많은 황금을 발견했으나 그 곳에는 추운 겨울이 빨리 온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눈이 쌓이고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얼마간의 양식도 다 떨어졌습니다. 결국 많은 금 덩어리 사이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었습니다." 그들은 금을 찾는 일에는 성공했으나 조만간에 닥쳐올 겨울은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앞에도 죽음의 겨울이 닥쳐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최선을 다하여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눅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벌써 속회가 돌아왔나, 벌써 주일이야, 벌써 추수감사절이야 하며 귀찮아하는 마음으로 무성의하게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출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힘대로 할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기쁨으로 복을 심어 풍성한 하늘의 복을 거두시는 지혜로운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1. 모든 사람을 섬기는 후한 연보

"(고후9:1)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고후9:2)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히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고후9: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9: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9: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고후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9:9)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고후9: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고후9:11)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고후9: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고후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후9:14)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고후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 교회처럼 환난을 당하거나 극히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은사도 풍성했으며 물질적으로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풍성하게 체험했으면서도 남을 구제하고 선교하는데는 인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며 본문 6,7,8절의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잠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잠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잠11:26) 곡식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고후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외국인 노동자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는 김재오 전도사가 97년 2월 2일 평안도 개천에서 식량을 구하러 중국으로 넘어온 조선 청년 세 명을 만난 후 느낀 감상을 기록한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대기근이 휩쓰는 북녘 --- 무산의 위대한 영웅

---- 원죄의 땅 ----

비틀, 비틀 발걸음이 헛 딛인다

현기증과 어지러움, 눈동자에 불이 인다

온 세상의 생물들이 음식으로 보인다

신촌, 강남, 화량리 거리엔

기름진 음식들, 술과 포도주 잔치가 열리고

거리엔 비틀, 비틀 구역질 소리

찌꺼기가 쌓였다

굶주림과 사치의 향연

원죄가 내려쓰는 땅

한반도!

탐욕이 흐르는 땅에서

신의 진노가 광풍같이 일었구나

혈육이 제일 두려운 세대여

연약한 백성들끼리 서로 서로 눈을 감고

식용으로 전락한 아이들과 살찐 처녀들

빈궁한 단칸 골방에서 진흙떡을 먹으며

흐느끼는구나

십자가가 내려왔구나

골고다의 십자가가

다시 다시 이 땅에 일었구나

지도에 갇힌 불쌍한 인민들

가여운 인민들을 보고

주께서 우시는구나

주의 십자가를 따라 나도 가련다

십자가를 끌고,

고난의 인민의 땅을 쓸러 가련다

인민이 주체가 되고 수령이 비주체가 되는

예수의 새 하늘 새 땅을

일구러 가련다.

지난 3월 1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한의 식량난과 국제 민간지원 실태 보고회'에서 스티브 린튼 유진벨 재단 이사장은(그의 외증조할아버지 유진벨 선교사는 1백년 전에 순천에 와서 선교했으며, 그의 외손자 스티브 린튼은 할아버지의 조선 선교 1백년을 기념해서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여 북한 식량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양주 한 병 값이면 북한동포 1만5천명이 한 끼니 먹습니다. 북한주민들은 하루에 식량을 1백~2백g씩 배급받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식량기구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에 6백~8백g의 식량은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국제시세로 옥수수 1톤이 1백50~1백70달러입니다. 16만원이 안 되는 돈이죠. 옥수수 1톤을 현재 배급량인 2백g씩 배급하면 5 천명이 먹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하룻밤 술집에서 마셔버리는 양주 한 병 값이면 북한 사람 1만 5천명이 한 끼니를 먹는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북한을 보면 아니할 말로 죽어도 문제, 살아도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른은 2~3년 제대로 못 먹어도 그 후에 정상적으로 먹으면 곧 회복됩니다. 그러나 다섯 살 이하의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회복불능의 피해를 입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어릴 때 잘 못 먹으면 우선 키가 자라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뇌가 제대로 발달되지 않아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미발달된 세대를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아프리카에서 증명된 사실입니다. 남북한은 21세기에 통일을 해야 하는데 그런 세대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입니까? 국제사회는 북한 기아문제에 대처하는데 실패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올해 2백만t의 식량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유엔에서는 각국 정부차원에서 지원금을 거둬 10만 톤만을 보낸다고 합니다. 부족 분의 5%밖에 안 되는 분량입니다. 비정부기구에서 하는 것은 0.5%나 될까. 국제사회의 정부와 비정부기구가 보낸 식량을 돈으로 환산하면 서울에서 6층짜리 건물하나 사기 힘든 금액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가 기독교인이니까 하는 얘긴데 이것은 서울 어느 교회의 건축헌금보다도 적은 액수입니다. 이 정도 돈을 가지고 북한을 돕는다고 우리가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모금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왜 모금이 안 되는가. 에티오피아 기아는 북한보다 덜 심합니다. 그래도 미국정부는 북한지원금의 10배나 냈습니다. 한국정부도 10배는 냈을 겁니다. 저는 북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백악관에 찾아가 호소했습니다. 담당관리의 말은 이랬습니다. '북한의 가장 가까운 우방은 중국인데 중국은 올해 옥수수 풍년입니다. 거기다 같은 동포라는 한국은 쌀 풍년입니다. 일본도 쌀 재고 때문에 골치입니다. 아시아는 21세기 세계경제의 중심이고 북한 문제는 동아시아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동아시아인들이 해결해야지 왜 미국사람 세금으로 쌀을 보내야 합니까.' 게다가 북한사람들 자존심 때문에 모금이 안됩니다. 제가 미국에서 북한 돕기 모금운동에 쓰려고 전단을 만들었는데 그게 어쩌다 유엔대표부에 있는 북한 외교관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전화해서 화를 내면서 '왜 전단에다 북한은 가난한 나라라고 썼냐?'고 막 항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난한 나라라고 쓰지 않으면 어떻게 원조를 주자고 하겠습니까?' 했더니 그 분 말씀이 '형편은 괜찮지만 원조 좀 보내자고 쓸 수 없을까요?'하는 겁니다. 원래 국제사회에서의 모금이란, '에티오피아' 하면 여러분 눈앞에 바로 떠오르는 것처럼 바짝 말라붙은 젖에 달라붙은 빼빼 마른 아기들의 참상이 TV화면에 넘쳐나야 활발해집니다. 그래서 모금에 필요하니 감정에 호소하는 비참한 모습 좀 찍자고 하면 북한사람들 얘기는 '죽으면 죽었지 나라 망신은 못 시킨다.'입니다. 그래서 북한사람들이 힘없이 줄서서 쌀 분배받는 것 이상의 사진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가정에 가서 기아 장면을 찍어보려고 여러 집들을 방문했는데 식량만 없지 어쩌면 그렇게도 깨끗한지요. 먼지 하나 없습니다. 물론 손님 온다고 미리 청소를 했겠지요. 자세히 보면 양말도 없고 다른 것들도 없는 게 눈에 띄지만 사진감은 안 되는 겁니다. 인터뷰라도 해보려고 '당신 배고픕니까?'하면 대답은 '괜찮습니다.'입니다. '무엇을 먹고 삽니까?'하면 '선생님이 일전에 쌀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까?'합니다. '그전에는 뭐 먹고 살았습니까?'하면 '산에 올라가서 남새 캐다 먹었는데 그게 몸에 좋습니다.'합니다. 한국사람들은 정말 상다리가 휘게 차려놓고도 '차린 게 아무 것도 없어 송구합니다.'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진짜로 아무 것도 없을 때는 오히려 있는 체 하는 게 한국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질로는 서방문화에서 모금을 못합니다. 그런데 세계무대에서 기아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은 북한일을 하면서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구호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기아상황을 조사할 때 어린이만 조사하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어린이들이 먼저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우선 어린이를 먼저 먹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노인을 먹이려고 하지만 노인들은 손자, 손녀에게 양보하고 아무런 불평없이 조용히 죽어갑니다. 구호전문가들은 세계 어디에도 이런 나라는 없다면서 대단히 놀라고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북한이 식량난 때문에 곧 망한다고 생각하지만 한반도 5천년 역사에서 기아 때문에 망한 정부가 있습니까? 북한은 현재 불신 때문에 한국의 손을 잡지 않으려고 합니다. 화해는 민간의 몫입니다. 이제 한국 국민들이 나서야 할 차례입니다. 감사합니다." 최근 평양을 방문한 내외국인 4인은 요즘 북한 동포들의 생각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보리·강냉이, 간장에 비벼 먹고 삽네다. 수해가 아니라 미국과 남조선 때문에 배가 고프다." 그리고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식량문제로 그들을 한 맺히게 한다면 남북화해는 또 한 세대 늦어질 수밖에 없다." 96년 한국정부의 대북 정책은 사실상 '북한 동포 굶겨 죽이기'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국내의 일부 흡수통일론자들은 내심 '그 길이 빠르다.'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박경서 박사는 이같은 입장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 언제쯤 망할 것 같냐고 제게 묻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체사상에 따라 죽어도 조용히 죽는 연습을 50년동안 해온 사람들입니다. '간장에 보리·옥수수 비벼 먹고 삽네다.'라는 말 그대로 형편없는 칼로리를 섭취하면서도 정신무장은 엄청납니다. 아울러 그는 북한동포들이 어려움을 이겨나가게 하는 저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일교회가 보낸 구호식량 배급 과정을 확인하러 평양에 온 독일개신교회 긴급구호국장 헨슬레 여사를 만났는데 그녀는 존 프로드 세계식량계획 평양주재 부책임자에게 '우리가 보낸 식량이 타겟트 그룹에게 잘 전달이 됐는가?'라고 묻더군요. 타겟트 그룹이란 어린이·노인·임산부 등 약자들을 말합니다. 그러자 프로드씨는 '이곳에서는 식량을 타겟트 그룹에게 전달하기 위해 특별히 나눠주러 다닐 필요가 없다. 이 민족은 구호식량을 받으면 먼저 노인과 어린이·임산부에게 먹이고 가장 나중에 먹는 사람이 가장이다.'라고 대답하더군요. 남이든 북이든 그런 게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전통 아닙니까. 세계식량계획 평양주재 책임자인 브리깃대 칼그램 여사는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민족을 크게 본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흐뭇했습니다."

2. 헌금이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표시로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을 의미합니다. '헌금'(헬라어로 율로기아)은 축복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는 참된 구제는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헌금은 자원함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의무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자기 희생적인 것이 되어야지 자기 만족적인 것이 되면 안 되고,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되어야 하지 자기 자랑에서 비롯되어서는 안됩니다.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해 구제 헌금을 하든지, 세계 복음화를 위해 선교 헌금을 하든지, 모든 헌금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먼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믿음과 사랑으로 자원함과 기쁨과 감사함으로 해야만 합니다. 헌금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의 행위입니다. 그 한 예가 가난한 과부의 연보였습니다. 그 여인은 생활비 전부를 연보했습니다.

"(막12:41)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 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막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막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12: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여기 가난한 과부의 연보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진실된 사랑의 표현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물질 만능의 사회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리는 것이며, 이 시대를 지배하는 돈의 악령인 맘몬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맘몬주의가 휩쓰는 이 시대를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황금 만능주의에 휩쓸리는 재정 운영 대신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세로 보다 신실하게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3. 물질에 대한 왜곡된 견해들이 교회 가운데 범람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돈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의 표시요, 가난은 하나님이 불쾌하게 여기시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견해가 기독교를 개인적인 번영과 평안의 종교로 저질스럽게 변질시켰습니다. 이를 막말로 하면 "예수님을 사랑하고 잘 믿어서 부자가 되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이 정확한 수학공식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칠 배나 복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소위 럭키 세븐 축복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에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명백히 하셨습니다.

"(눅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또한 부 그 자체가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의 성공을 입증해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단적인 예로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참다운 부요는 불로 연단한 정금같은 신앙이라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에 부 그 자체가 성공의 척도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마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돈이 이 시대에 힘과 능력으로 행세하고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며 예수를 증거하는 일에는 결코 돈이 힘과 능력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눅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마귀와 화려한 능력 대결을 펼쳐서, 풍성한 물질을 바쳐서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독생자를 아낌없이 희생하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의 은혜가 인간을 변화시키며,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풍성함과 건강이 구원의 삼박자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방법의 구원을 말한 곳은 전혀 없습니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성구는 "가이오 장로는 핍박당하는 불쌍한 많은 성도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숨을 곳과 쉴 곳을 제공하고 구제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 영혼이 훌륭해져서 구제를 많이 하니 가이오 장로야, 네 영혼이 잘된 것과 같이 네가 육신적으로 더욱 풍성해져서 그러한 선한 일을 더 많이 하며, 빨리 죽지 않아야 선한 일을 더 많이 할 것이니 네 영혼이 잘됨같이 육신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는 바친 헌금이나 구제의 금액은 장차 하늘 나라에서 받게 될 상급은 될지언정 받을 구원의 축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질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물질은 인간의 행위의 결과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의 성구가 이를 증명합니다.

"(신6: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신6: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이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얻게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욥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시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레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4. 그러므로 참된 부요는 첫째,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풍요이며 둘째, 형제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첩경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15: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신15: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신15:9)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웠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 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신15: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며 측량할 수 없으므로 그런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특별히 따지지 않고 계산하지 않으면서(마26:6-13의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다른 이들에게 친절함과 관대함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친절하고 너그러운 이 베풂은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하도록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감격에 넘쳐서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에게 즐거이 주는 성도를 사랑하시므로 성도는 당연히 즐거이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그러면서도 그 베풂은 즉흥적이거나 충동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출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기쁨으로 드리는 헌금이 사랑으로 드리는 헌금이며 마음으로 드리는 정성스러운 헌금입니다.

"(눅12: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이러한 관점에서 헌금은 믿음의 척도이며 믿음의 표준이라고 합니다. 어느 마을에 한 농부가 암소를 정성스럽게 키웠습니다. 어느 날 암소는 예쁜 새끼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하나는 붉은 놈이었고 다른 하나는 흰 놈이었습니다. 둘 다 아주 튼튼하고 귀여웠습니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농부는 매우 흐뭇해했습니다. 농부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저 송아지를 키워 무엇을 하면 좋겠소?" "저 어미 소가 잘 자란 것도 저렇게 좋은 송아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보살피심이니,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치기로 합시다." "그렇게 합시다." 그때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어느 것을 바칠까요?" "지금 그 문제로 걱정할 게 뭐요? 그것들을 똑같이 키웠다가 때가 오면 약속대로 하나님께 한 마리를 바칩시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습니다. 두 송아지는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그만 한 마리가 병이 들어 죽어 버렸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부엌에 있는 아내에게 갔습니다. 남편은 슬픈 기색을 띠며 아내를 향하여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어버렸으니 어쩌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느 것이 하나님의 송아지라고 결정하시지 않았잖아요? "아... 그게 말이요. 나는 항상 흰 놈을 하나님의 것으로 정하고 있었는데 그 놈이 죽었다는 말이오."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 가지의 회심이 필요하다. 가슴의 회심, 정신의 회심, 그리고 돈지갑의 회심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우리 현대인들로서는 돈지갑의 회심이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신분적인 면에서 남에게 줄만큼 풍성하고 여유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도 만난 이웃의 곤경을 자신이 맡아 돌보았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헌금을 드렸던 것입니다.

"(엡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눅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난 자를 회피하며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가슴과 정신 그리고 돈지갑까지 회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강도 만난 자를 멀리 가서 찾지 말고 내 주변에서, 이 한 많은 한반도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는 후한 연보는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영육간에 강도 만난 우리의 어려운 이웃들을 외면하거나 기피하지 마시고 가슴과 마음, 정신과 돈지갑을 열어 후한 헌금을 바치시므로 하나님께 영광과 장차 들어가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풍성히 쌓아두시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2.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

"(고후10: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고후10:2)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고후10: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고후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고후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고후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고후10:9)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고후10: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고후10: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 (고후10: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후10:13) 그러나 우리는 분량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고후10: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고후10: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 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고후10:16)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고후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고후10: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처음 편지를 보내고 나서 얼마 후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으나 온갖 모욕을 당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서 바울을 비난하는 무리들은 무엇보다 먼저 바울의 외모와 그의 부족한 언변을 트집잡아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그의 사도권을 부정하도록 선동했습니다. 기원 200년경에 쓰여진 <바울과 데클라 행전>이란 책에서는 바울의 외모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키가 작고 이마가 벗겨지고 다리는 굽어있고 몸집은 뚱뚱하고 눈썹은 맞붙고 코는 매부리코인데, 은혜가 넘쳐 때로는 사람의 얼굴로 때로는 천사의 얼굴로 보였다." 바울의 이러한 빈약한 외모를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조롱했습니다. 바울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편지는 담대한 면을 보이지만, 실제 생활은 세상적인 가치 기준과 동기에 따라 행동하며 철저히 인간적인 사고와 방법에 따라 행한다는 것입니다(본문 2절 "육체대로"). 그리고 직접 고린도 교인들을 대면할 때는 비겁할 정도로 겸비한 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겁쟁이며, 타락한 이기주의자이며, 음흉한 기회주의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고만 할뿐이지 실제는 외모처럼 볼품없으며 무능하고 세속적인 전도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이러한 비난의 목적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교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파울을 형편없는 인물로 비난하며, 자신들은 황홀한 체험과 예언의 은사 등으로 자신들의 사역을 돋보이게 하여 교권과 명예를 장악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사도인양 행동하며 자신이야말로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며 지도할 권리가 있다면서 자화자찬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거짓 사도들에 대해 바울 자신은 언제든지 담대할 수 있지만 그들 스스로 잘못된 것을 고칠 것을 요청합니다. 징계받기전에 모든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바로 잡으라며 온유함으로 권고했습니다.

"(고후10:2)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후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본문 4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소유한 병기는 "(고후10:4)...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천명하면서 자신의 사도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강력"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견고한 진"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든 악한 세력과 지적 교만 등을 말합니다. 지적 교만은 굳게 닫혀 오가는 사람이 없는 '여리고 성'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부패시키고 완악하게 하는 정신적 장벽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지적 교만은 소위 지성주의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거만한 태도를 말합니다. 성경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경고합니다.

"(롬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이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은 '하나님을 위해 강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도 바울은 인간의 재능과 능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사랑· 그리고 겸손과 의로써 싸운다는 말입니다. 악이 비록 성해도 진리가 승리합니다. 미움과 증오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사랑이 승리합니다. 교만하고 거만하면 사단의 계략에 빠지기 쉽습니다. 겸손이야말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영적 병기입니다.

"(잠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모세가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온유,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는 흥해야 하겠고 자기는 쇠하여야 하겠다며 겸손의 의미를 보여 주었습니다.

"(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존 번연은 말하기를 "겸손한 자는 넘어질 염려 없다." 고 했습니다. 겸손의 실체는 자기의 부족함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 부족함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억울함을 당한 중에도 그 억울함을 달게 받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기 위해 스스로 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기 위해 인간의 비천함을 알아 하나님의 높여 주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기 위해 멸시, 천대, 업신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발 밑에 무릎을 꿇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기 위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해야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거만하고 교만한 빌라도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지니셨으면서도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식이나 인격적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오직 영적 병기가 되는 진리와 사랑, 겸손과 온유, 기도와 의, 그리고 자신의 삶에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결국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신의 성품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여하신 "강력"은 한 마디로 신의 성품이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하나님의 힘이며 사도의 권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사도의 권위, 즉 "강력"은 교회를 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강건하게 세워나가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고후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진정으로 신령한 권능은 권력을 휘두르는 데 있지 아니하고 "온유와 관용(본문 1절)"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우는데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와 권능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은 그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교회를 이용했습니다. 예수께서 목회자들에게 부여하신 권위("강력")는 교회를 강압적으로 인도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진리 위에 바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세속적인 병기, 즉 교만과 거만, 지식과 외모 등이 아니라 영적 병기들인 진리와 사랑, 겸손과 온유, 기도와 의 등을 자랑해야 합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삼아 타인을 비교하여 스스로 자화자찬하지 말고 "(잠27:2)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라"는 것입니다. 자화자찬이 심해지면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절대화하게 됩니다. 아내나 자식 자랑하는 사람을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특히 성도들이 어느 특별한 교회나 목회자를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도 우상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만큼 잘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헤아릴 수 있는 자막대기이며, 우리의 모든 비교의 표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헤아려 보면 우리는 조금도 자랑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찾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잘 하였도다"라고 하시는 말씀이어야 합니다.헬라인은 철학을 자랑했고, 로마인은 법을 자랑했고, 오늘날 미국인은 부유함을 자랑하고, 영국인은 그들의 신사도를 자랑하고, 프랑스인은 그들의 예술을 자랑하고, 일본인은 그들의 부강한 경제를 자랑하고, 이스라엘인은 혈통과 선민 사상을 자랑하고, 우리 한국인은 양반 가문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자랑들은 허탈한 것이며 악한 자랑이라고 경고합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약4: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고후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주님을 알고 그의 속성을 알라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그의 속성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이 비록 비난하고 조롱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잘 했다"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또한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은 자기로써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칭찬으로만 만족하는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교역자들은 특히 자기들의 사역으로 영광을 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며, 모든 성공과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할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고치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이를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처럼 받들고 경배하려고 하자 옷을 찢으며 소리를 질러 가로막았습니다.

"(행14: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행14:13)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행14: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행14: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능력을 가지고 자신들이 그 영광을 감히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아무리 세상이 옳게 보아준다 할지라도, 또 자신이 스스로를 옳다고 주장해도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해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 날",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서는 "그 날"에 옳다 인정함을 받고 칭찬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 노릇하는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 할지라도 불법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한 쭉정이나 가라지가 되어 불에 던져지고 맙니다. 천국에는 아름다운 알곡만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경제는 지금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생산 증가율 보다 소비증가율이 훨씬 높다는 데 있습니다. 관세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 해 모피의류. 화장품. 위스키. 승용차 등 주요 고급 사치성 소비재의 수입이 2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최근 당국이 집계한 20대 주요 사치성 소비재의 수입(통관기준)은 지난 해 20억 9천 4백만 달러를 기록, 전년의 14억 1천 1백만 달러에 비해 무려 48.4% 증가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양주 한 품목만 해도 연간 3,4억 달러를 고스란히 해외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국가 경쟁력의 지표가 되는 외환보유고는 형편이 떨어지고 재경원이 공식 집계한 총 외채와 순 외채는 각각 약 1천억 달러와 2백 50억 달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소비행태는 건전치 못할 뿐만 아니라 한계소비성향이 100.2를 기록하므로 소비증가가 소득증가보다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 여대생들의 옷, 신발, 가방, 장신구 화장품 등 평균적인 몸치장비는 미국의 3~4배, 일본의 2~3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봉급생활자 등 일반 서민들의 경우 매달 카드 빚으로 카드 빚을 갚는 "외상 인생"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외상 구입의 주요 수단인 신용카드의 연체금액이 지난 3월말 현재 1조 원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30대 재벌 그룹이 보유한 자산 총액은 우리 나라 한해 예산의 5배에 육박하는 무려 287조원에 달하는데, 이중 자기 돈은 20%에 불과하고 나머지 8할은 모두 빚이라고 합니다.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들은 결국 거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80%가 거품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맹이는 없고 빈 껍데기뿐입니다. 우리 나라 경제위기는 이와 같은 소위 '거품 경제'에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품'이란 겉보기에는 많아 보이고 부풀어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곧 꺼져 버리는 것입니다. '거품'은 자기가 가진 실제 보다 자신을 크게 보이게 만들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고 곧 꺼지면서 자기의 보잘것 없는 실체를 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거품'은 경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품경제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거품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거품은 정치· 경제에만 있지 아니하고 한국 교회에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인 수가 남한 인구의 1/4에 이른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빛과 소금'이 1/4이나 되지만 우리 사회는 오히려 부정 부패와 사치와 허영, 그리고 음란과 타락으로 더욱 어두워지고 있으며, 죄악으로 썩는 냄새가 가득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사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사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사1: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무수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제아무리 많이 기도한다 할지라도, 각종 절기를 모두 다 지킨다 할지라도, 악행과 악업을 버리고 손을 깨끗이 하며 공의와 자비, 선행을 베풀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 수천 수만의 제물보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주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미가 6:8)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는 거품 제사, 신앙은 거품 신앙에 불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거품 의식으로 가득찬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시고 저들의 그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행실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이 자기를 선생이라고 불러 주기를 즐긴다" 저들의 이런 행위는 모두 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들이 진정 율법을 사랑하고 그 율법대로 행하려면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말만 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화려한 쭉정이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저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시고 저들을 여지없이 공격하시어 저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들어 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과시욕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본성을 올 바로 파악하고, 겸손해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하고 늘 겸손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경제· 정치· 사회의 거품을 걷어내기 전에 먼저 우리 신앙의 거품을 걷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를 부풀려 보이는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겸손한 신앙의 길을 추구해 가야 하겠습니다. 영국의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수 백만 명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녀가 거주했던 켄싱턴 궁 앞에는 꽃다발로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지구의 절반 이상이 그녀의 장례식을 시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죽음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지상에서 수 백, 수천만의 인기와 명예를 다 누린다한들 하늘 나라에 무명한 자가 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고 했습니다. 자랑할 것이 오직 주님께만 있는 성도가 되기 위해 신앙생활의 교만과 거만, 그리고 성경 말씀을 아는 것은 많아도 행함이 없는 죽은 신앙의 거품, 받은 바 은사는 여러 가지며 그 체험도 많으나 아름다운 열매가 없는 쭉정이, 가라지 같은 거품을 성령과 말씀의 불로 다 제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랑할 것이 오직 주님께만 있는 나라 민족이 되기 위해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이 이 땅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암5:21)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암5: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암5:23)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암5:24)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3. 하나님의 열심

 "(고후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고후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11: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고후11: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고후11:7)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고후11:8)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고후11:9)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고후11:10)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고후11:11)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고후11:12)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 (고후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11:16)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고후11: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고후11:18)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고후11: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고후11: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후11:21)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고후11:22)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고후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11: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고후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고후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고후11: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1. 어느 날 밤 몇 명의 사람이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었을 때 생긴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식사 후에 각자 돌려가며 한 가지씩 낭송하도록 합의를 보았습니다. 한 유명한 배우가 일어나서, 모든 웅변술과 연극적인 기교를 다 부리면서 시편 23편을 낭송하였는데 그가 앉자마자 박수가 요란하게 울려 나왔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 한 조용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그도 역시 시편 23편을 낭송하였는데 처음엔 비웃음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낭송을 끝내기 전에 어떤 박수보다도 더 감동적인 고요함이 그 방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말을 낭송하였을 때도 고요함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때 그 배우가 몸을 일으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나는 그 시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목자를 알고 있습니다." 바울의 적대자, 즉 거짓 사도들은 웅변술이나 여러 가지 기술들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말하는 것이 서툴고 숙달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하는 내용 그 자체를 알고 말하는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바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참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되어 참 사도인 바울을 배반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기 위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강력한 중상 모략을 일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전한 예수와는 다른 예수를 전하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랍비를 부양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임한다.'고 선전하여 많은 재물을 착취하였고,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아버지 이상의 대우를 원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의 뺨을 때릴 정도로 거만했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이러한 거짓 사도들의 태도마저 사도들의 권위라고 오해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어리석게도 거짓 사도들의 바울에 대한 중상 모략은 잘도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은 퍽이나 지혜로운 척 했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는 거짓 사도들의 탐욕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며 사도 바울은 "(고후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고 타이르며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이같은 열심은 바로 교회를 성결 보존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께 중매한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열심"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을 유대인의 결혼 관습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라는 구약 사상을 혼합해서 인용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54:5)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사62: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같은 구약 사상에서 볼 때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중매한 그리스도의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된 고린도 교회가 거짓 사도들의 미혹을 받아, 마치 뱀의 간계로 하와가 미혹된 것처럼 더럽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유대 관습에서 신랑의 친구들은 신부의 정조를 보증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고린도 교회 사이에서 이같은 순결성 보증의 책임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로서 신부인 고린도 교회의 정절을 보증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결성과 성결의 보존을 위해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따라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 정신적, 육체적 성결을 보존해야만 합니다. 신부된 성도의 성결 보존을 위해 신랑되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마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25: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마25: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마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마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마25: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마25: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마25: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마25: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마25: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마25: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마25: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마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성결은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살전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가진 자는 성결해야하며(고후7:1)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자는 성결해야 합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딛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딛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결은 받아야 할 은혜로서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다. 또한 생활되어져야 할 삶의 방식으로 빛되시는 예수와 사귐을 통해 얻어지는 성결 생활(요일 1:7)이 성결 보존입니다.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성결 보존을 위해서 빛 가운데 행하며 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있어야만 합니다. 월간지 <신동아>(97년 기획연재물)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총재는 대선 주자 가운데 유일한 개신교 신자. 따라서 자민련 측에선 은근히 개신교 신자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김총재는 감리교단의 모(母)교회인 정동감리교회에 30년 가까이 다니고 있다. 오랫동안 집사로 있다가 지난 4월에 권사로 「승진」했다고 한다. 김총재는 80년 관훈토론회에서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 솔직하게 밝힌 적이 있다.『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중학교 2학년 때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통 안 가다가 66년부터 정동교회에 적을 두었습니다. 제 아우는 자다 말고 성경을 읽는 깊은 신앙인입니다만, 나는 일요일에도 잘 안 갑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안식을 필요로 할 때 교회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목사님을 모셔다가 조찬기도회 같은 모임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습니다』김총재의 집안은 종교가 모두 다르다. 김총재의 부인 박영옥 여사는 가톨릭 신자로 알려져 있지만 요즘에는 개인 사정으로 성당에 자주 못 나간다고 전한다. 현재 파나마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김총재의 외아들 김진씨 역시 가톨릭 신자. 한편 김총재의 수행비서 역할을 하고 있는 딸 예리씨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청연화(靑蓮花)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다. 지난 초파일에 전국 사찰에 가장 많은 연등을 단 것으로 알려진 예리씨는 김총재와 불교계를 잇는 가교 역할도 맡고 있다. 김총재 자신도 불교와 인연이 있다. 92년 대선 무렵 원불교 종법사에게서 수산(首山)이라는 법호를 받은 것. 그런 인연 탓인지 김총재는 지난 5월14일 법호 수산을 자신의 이름 앞에 붙여 부처님오신날 메시지를 발표했다. 김총재는 자신이 믿지 않는 종교의 예식에 참여하는 데 대해『자기가 믿는 종교가 소중하면 타인이 믿는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상호존중론에 입각해보면 문제가 없다』고 원론적으로 답변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후6: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고후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고전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고전10: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 (고전10: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성결 보존을 위해 성령과 말씀이 충만하며,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와만 교제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바울 당시 거짓 사도들은 교회로부터 생활비 받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물론 성경적 근거를 지닌 복음 사역자의 권리였습니다.

"(신25:4)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눅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부담을 갖지 않은 채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또 그들로 하여금 복음에만 마음과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은 장막 만드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행18: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행18: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행18: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살전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살후3:8)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에 대해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은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으면서 그것이 참 사도의 표라고 주장하며, 바울이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은 그가 전하는 복음이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복음을 매도하며 악선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계 유지를 위해 장막 만드는 일을 하던 바울의 초라함과 고된 노동을 천하다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이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는 것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까지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는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면서 마게도냐교회로부터는 헌금을 받고 고린도 교회로부터는 받지 않는 이유가 결코 고린도 교회보다 마게도냐 교회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고후11:11)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바울이 고린도에서 헌금을 받지 않은 이유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고린도에 만연한 물질 만능주의 때문이었습니다. 부유한 고린도에 많은 전도자들과 가난한 철학자들이 있었고 고린도인들은 그들의 후원자가 되고 있었는데 이 후원자들은 암암리에 그 전도자들이나 철학자들의 선교나 사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무의 도움을 받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뜻에 좌지우지하지 않고 순수한 하나님의 복음에만 전념코자 했던 것입니다. 황금이 교회를 지배하려는 위기에 처한 이 시대의 교역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부분입니다. 순수한 복음 전파와 교회를 위한 바울의 열심과 고난은 참으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후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11: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사도 바울은 40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유대의 태형법에는 매를 40대까지만 때리게 되어 있습니다.

"(신25: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

그래서 40을 넘기지 않기 위한 대행 집행자의 완전 조치로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39대를 맞은 것입니다. 유대 문학인 미쉬나에 이 태형은 매우 혹독한 매질로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매를 무려 세 번씩이나 맞아가면서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중매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를 위해 매뿐만 아니라 돌에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당한 고난으로, 그 때 돌에 맞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바울을 사람들은 죽은 줄로 생각하고 그를 성밖에 내던졌습니다.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행14: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행14: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같은 수없는 고난과 핍박은 대부분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거짓 사도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동족들로부터 이같은 숱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가 염려하는 바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값을 주고 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과 같이 교회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고후11: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실로 성도들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교회를 섬기며 봉사할 수 없고,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3. 바울도 유대 율법에 노예로 있었을 때, 즉 바울 이전의 사울은 그릇된 신앙의 열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빌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유대인들의 무지한 열심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롬10장;요2:17).

"(요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그러므로 올바른 열심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예수님(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사울 역시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성령체험을 통해서 복음 전파와 교회를 위한 올바른 열심,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느하스는 이스라엘에 내린 염병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그 분의 마음과 열심을 가지고 음행하는 두 남녀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게하고 자신은 평화의 언약, 즉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얻었습니다(민 25:1-11). 여호와의 열심이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희생시키므로 인류구원의 역사을 성취하셨습니다.

"(사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59:17)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고 보수로 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열심은 항상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고 불타는 심정으로 자신을 몽땅 불태우고도 무엇을 했다고 생각조차 못하는 것입니다(마 25:31-46).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와 이웃을 섬기시므로 이 땅에 드리워진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게 하시고 공평과 정의, 그리고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는 나라 민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4. 나의 원하는 것

"(고후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고후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12: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12: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고후12: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고후12: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고후12:13)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고후12:14)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고후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고후12: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고후12: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고후12: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고후12:19)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고후12: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고후12:21)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1.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나의 구하는 것은 오직 너희니라....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라면서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환상이나 계시나 재물이 아니라 인간 구원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고후12:14)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고후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한 거지가 어느 착한 여인이 살고 있는 집에 구걸을 위해 찾아 왔습니다. 무엇인가 줄 것이 없는가하고 그녀는 집안을 찾아 보았지만 마침 잔돈이 집에 한 잎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잔돈이 없는데, 마침 빵이 좀 필요해요. 여기 1파운드 짜리 돈이 있으니까, 가서 빵을 좀 사다 주시면 잔돈 가운데서 얼마를 드리겠어요." 그 사람은 심부름을 갔다 왔으며, 그녀는 작은 동전을 다시 그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을 때 그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돈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남자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믿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아무도 나를 믿어 주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이상 더 고마울 데가 없습니다." 그녀가 너무 어리석은 마음씨를 가졌기에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남자에게 돈 이상의 것을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남자를 신용해 줌으로써 그녀 자신의 일부를 그 남자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굶주린 자에 대한 교회의 의무가 그들에게 돈만 내주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은 재물만이 아니라 그에게 따뜻한 마음,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마음을 베푸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실성은 그 건물의 웅장함이나 예배 의식의 화려함이나 헌금 액수의 양이나 많은 교인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변화된 삶에 있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다면 교회의 참 모습을 보여 주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나의 구하는 것은 오직 너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변화가 자신의 복음 전도의 초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19절 이하에서 회개를 이렇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고후12:19)....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고후12: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2. 사도 바울이 14년만에 본 환상과 계시는 자신의 중요한 신앙체험일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환상과 계시의 체험을 내세워 자랑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이 사도임을 증거하거나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자신의 사도로서 내세울 만한 것이 있다면, 그리고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연약한 가운데 참는 것이며, 연약한 중에 힘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신령한 체험을 자신의 사도됨을 입증하는데 이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의 위대성을 나타내며, 그것을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우며 교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왜 14년 전의 신앙 체험을 언급했는가?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사도로서의 징표를 보이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후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고후12: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환상과 계시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일로 인해 자신의 육체에 가시를 받은 사실을 자랑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 환상과 계시로 말미암아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깨우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육체의 가시 속에 머무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랑하고 감사했습니다.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만약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없었다면, 삼층천에서의 신령한 체험들로 인해 바울은 자고(自高)하여 우쭐한 가운데 여러 가지 범죄와 교회를 문란하게 하는데 일조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환상과 계시를 본 이후의 14년간은 성공 대신에 실패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환상과 계시의 체험을 제삼자적인 '객관적인 형식', 다시 말해 3인칭으로 표현하고 있음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체험을 타인의 체험인 것처럼 객관화하여 말한 것은 자랑이 아무 유익함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표현함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환상이나 계시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많은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음성을 빛 가운데서 들었습니다.

"(행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구원을 부르짖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행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 전도하는데 난관에 부딪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바울을 위로하셨습니다.

"(행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행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또 다시 환상으로 위로하셨습니다.

"(행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로마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되어가던 중 바울이 탄 배가 큰 광풍을 만나 모두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그와 더불어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이 무사할 것을 알려 주심으로 위로했습니다.

"(행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행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행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모든 환상들은 바울이 복음 사역을 행할 때 곤경에 처해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시어 위로하시고 사명 감당케 하신 것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환상들을 통해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나타내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큰 체험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부여하신 육체의 가시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크나큰 신앙 체험에 육체의 가시라는 고통이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겪는 육체적 고통의 신비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함부로 그 당하는 고통을 해석해서도 안됩니다. 육체적 고통은 경건한 성품을 세워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사도 바울은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 신의 성품을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닷가를 거닐다보면 파도가 닿지 않은 만(灣)쪽의 바위는 날카로운 모양들을 하고 있지만 파도가 쉴새없이 밀려오는 곳에 있는 바윗돌들은 둥글게 다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파도들과 큰 물결들'을 사용하셔서 모난 우리의 삶의 모습들을 다듬어 가십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환상과 계시의 신령한 체험과 육체적 가시의 체험은 바울로 하여금 복음 사역을 바로 감당하게 하기 위한 불가분의 체험들이었습니다. 그는 삼층천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하늘의 체험과 땅에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르는 육체의 가시 체험을 항상 병행해서 지니고 생활했습니다. 그는 황홀경을 맛보았고 죽음에 이르는 고뇌와 고통도 체험했으나 이는 그에게 주어진 복음 사역에 필연적인 견인차였습니다.

3. 사도 바울의 신비 체험의 특이한 점은 육체대로 셋째 하늘까지 휴거되었는지, 아니면 탈혼(脫魂) 상태로 된 것인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신비 체험은 대부분 불가해하고 순간적이고 일상 생활과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신비 체험이 참 구원의 복음일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나 철학, 선(禪)은 그 극치를 신비적 체험에 두며 그것을 최상의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신비적이고 절묘한 체험을 얻었지만 결코 자랑하지 않고, 제삼자에 관한 이야기처럼 말했습니다. 이같은 사도 바울의 태도는 기독교가 신비 체험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기초를 이런 체험에 두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신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신을 체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명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신의 삶의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의 대표적인 표현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구절은 바울 신앙의 극치요, 소위 바울의 신비주의입니다. 또한 바울의 위대한 신비적 발언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철저한 사상이 바로 그의 신비주의 사상입니다. 바울과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완전하였으므로 바울의 독립적인 인격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합치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스스로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요한 복음 15:1-6에 기록된 포도나무와 가지가 하나됨의 신비적 관계입니다.

"(요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요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표현은 다른 종교에 있어서의 신비적 경험에서 하는 말이라기 보다 바울의 절대 신앙입니다. 바울에게 신비 체험이 있으나 신앙은 신비주의와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바울의 서신 중에서 그리스도에 신앙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 164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과 영이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결합 관계를 보여주지만 신비주의적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를 채우시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과거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힘이시고, 매일 역사하는 생명력이십니다. 그것은 비인격적인 생명력이 아니라 인격적 영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현존하시는 영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앙 중심은 영적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합에 있습니다. 이 영적 결합으로 나타나는 것이 변화된 삶의 모습인 신의 성품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무당이나 신접한 자나 신 들린 사람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 들려서 나의 인격은 신에게 흡수되고, 빼앗겨버리고, 딴 짓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에 있어서 신은 영원히 신이시오, 인간은 영원히 인간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는 경우는 있어도 인간이 신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쉽게 빠져들고 있는 초자연적인 신비주의는 경계해야 합니다. 초자연적인 신비주의 체험이 끼치는 폐해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참 성령인지 악령인지 혼동되어 속기 쉽다.

2) 자부심, 허영심에 빠지기 쉽다.

3) 이런 지각 때문에 악마는 우리를 속일 좋은 기회를 얻는다.

4) 신자가 소망의 덕으로 하나님과 일치되는 데 방해가 된다.

5) 그 대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을 비천하게 판단한다.

4. 요사이 소위 은혜파 운동이 쓰고 있는 선동적 열광, 박수, 춤, 북, 고함, 방언, 신유, 예언 등의 현상에는 무속적인 요소가 다분이 이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잘못 행해지는 이러한 운동을 비판하기보다는 건실 방향으로 지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율이 없는 음악이 있을 수 없듯이 신비적 요소가 없는 종교는 우상 숭배이거나 세속적 종교입니다. 마틴 루터나 종교 개혁자들의 말대로 "믿기만"하면 되는 기독교도 있고 성자들의 체험처럼 신비주의적인 기독교도 있습니다. 어느 쪽도 잘못은 아닙니다. 제아무리 많은 신비적 체험을 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신비적 체험은 어떤 방법이나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깊고, 진실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얻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그런 신비 체험을 자랑하지도 않고, 그런 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믿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다른 특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신비적 체험을 바르게 경험한 사람이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아니라 바로 성경 자체의 가르침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건전한 신비 체험은 개인이나 교회 신앙에 활기를 주는 것입니다. 페넬론(Fenelon)은 "하나님의 바람은 항상 불고 있다. 그러나 돛은 우리가 달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오로지 사랑의 계시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고, 짐승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사업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사랑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현대에 대하여 할 말이 있다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죽는 일이 얼마나 용감한 일인가? 그보다 사랑을 위하여 사는 일은 더 큰 용감한 일이요, 모험이다. 그것은 매일의 생활에서 날마다 사랑의 불꽃을 화려하게 피우는 일이다." 프란치스코가 28세에 세운 "작은 형제단"은 절대 청빈과 절대 사랑, 절대 정결과 절대 순종을 슬로건으로 하여 복음 전도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목표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을 몸으로 태워갔습니다. 이들의 이같은 생활은 많은 열매를 맺어갔습니다. "작은 형제단"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와도 회개하는 자가 속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사랑이 순화되어 남녀간에 건전한 사랑으로 변화되었고, 진실로 이웃을 사랑했고, 나아가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 시민으로 변화시켰으며, 나중에는 예수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결국 사랑을 사랑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교회 역사 이천 년 중 그 누구보다 귀한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12세기 교회가 요구하는 것은 한 개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상징은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처가 십자가입니다. 우리도 손과 발, 옆구리에 다섯 개의 상처를 받아야 합니다. 이 상처가 없이는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향해 사랑을 부르짖어도 그들은 우리의 메시지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에, 하나님의 일만 보는 학교가 있고 인간의 일만 보는 학교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자의 특징은 예배, 희생물을 바치는 노력에 집중하여 인간이야 어찌되든 하나님의 기분만 어루만져 주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이방 종교와 바리새교 등이 그렇습니다. 사람의 일만 보는 종교란 예수님의 말씀 중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는 말씀이나 선지자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는 것"이라는 것 등을 말합니다.(사 1:3-17)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단"운동은 바로 회심, 성결, 사랑에 주력하여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8월 초 어느 날 해가 넘어가는 저녁 때, 바위 위에 엎드려 얼음같이 싸늘한 달빛을 받으며 밤새 기도했습니다. 새벽이 되어 동녘 하늘이 밝아올 무렵, 세라핌(스랍 천사)이 먼 지평선에서 날아와 프란치스코가 엎드린 주위를 불꽃으로 둘러쌌습니다. 세라핌의 날개는 하늘을 덮고, 그 중간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그때 형언할 수 없는 환희와 경애가 그의 마음을 적셨습니다. 얼마 후 이 환상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여전히 그 바위 위에 엎드린 채 있었습니다. 태양이 떠올라 주위를 비출 때, 프란치스코가 몸을 일으켜 일어나려고 하니 뼈를 끊는 것 같은 통증을 손, 발, 옆구리에서 느꼈습니다. 그가 자기 몸을 살펴보니 그의 몸에는 주 예수님의 것과 같은 상흔(傷痕)이 생겼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프란치스코는 보행이 곤란했습니다. 얼마 후에 프란치스코의 시력은 점점 쇠약해지더니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불편한 몸으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할 무렵 홀연히 황홀해진 그는 환희에 차서 "주를 찬송할지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는 유명한 "태양 찬송"을 즉흥적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찬송가 33장"(온 천하 만물 우러러), 이 "태양 찬송가"는 중세기의 가장 위대한 찬송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33장1절]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다 주를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 금빛나는 밝은해 저 은빛나는 밝은 달 하나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33장2절] 힘차게 부는 바람아 떠가는 묘한 구름아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 돋는 장한 아침해 저 지는 고운 저녁 놀

[33장3절] 저 흘러가는 맑은 물 다 주를 노래하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 조화 많은 밝은 불 그 빛과 열을 내어서

[33장4절] 저 귀한 땅은 날마다 한없는 복을 펼치어 할렐루야 할렐루야 땅 위의 꽃과 열매들 주 영광 나타내어서

[33장5절] 너 선한 마음을 가진 자 남 용서하며 살아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고통과 슬픔 지닌 자 네 근심 주께 맡겨라

그리스도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사랑의 삶을 살고자 할 때, 때로 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태양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신령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의 구하는 바는 환상과 계시나 재물이 아니라 오직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었으며, 구원받은 성도들의 변화된 사랑의 삶, 곧 신의 성품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구할 바를 바로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그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저에게 큰 은혜를 주셨고 왕이 되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종은 작은 아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제게 주신 주의 큰 백성은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아서 바르게 재판할 수가 없으니 저에게 이들을 바르게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구했습니다. 솔로몬의 구하는 바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지라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그가 구한 총명한 마음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전무후무한 부와 영광까지도 베풀어주셨습니다.

"(왕상3:4)...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왕상3: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3: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상3: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왕상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3: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왕상3:11)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왕상3: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왕상3:13)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 여러분, 오직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를 통한 인류 구원을 삶의 목표로 삼으시고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5. 진리 편에 서라

"(고후13: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고후13: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고후13: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13:6)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고후13:7)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고후13: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고후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고후13:10)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후13: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선데이 포스트지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목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목사 초빙위원회는 그 교회에 목사로 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검토하면서 고르고 있었습니다. 목사 초빙위원회는 서기가 지망하는 목사들의 지원서를 하나 하나 읽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지망하는 목사들은 한 사람만 빼놓고는 모두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신사들처럼 보였습니다. 이들은 아주 훌륭한 웅변가들이었고, 정력적인 목회자들이었고 그리고 회중들의 신앙을 부흥시킬 수 있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다른 지망 목사들과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한 지망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대개 큰 도시들 안에 있는 많은 작은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그러나 한 교회에서 삼 년 이상 목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책을 저술한 저자로서 약간 성공했습니다. 내가 목회하던 교회의 제직들과 나와의 관계는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교회의 제직들은 나를 협박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평화를 깨뜨렸다는 죄목으로 서너 차례 투옥된 적이 있습니다. 나이는 50세가 넘었습니다. 건강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닙니다. 기억력도 좋지 않습니다. 내가 세례준 사람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 목사로 초빙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목사 초빙위원회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런 건강도 좋지 않고, 말썽꾸러기이고, 기억력도 좋지 않고, 감옥을 제집 안방 드나들 듯이 하는 사람을 목사로 초빙해야 하다니?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녀석인가?" 서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위원장님, 그런데 그의 이름은 바울이라고 합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어떤 교회에 목사로 가기 위하여 그의 지원서를 썼다면 위의 목사가 자기를 소개하기 위하여 쓴 지원서와 거의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하기에 적합한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그의 몸을 찌르는 가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몸에 있는 가시 때문에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많은 일들은 약한 자, 병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의 위대한 황제 어거스터스는 위궤양을 앓았습니다. 가장 위대한 장군들의 하나였던 쥴리어스 시저는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넬슨은 위대한 해군 제독이었지만 말년에는 배만 타면 배멀미를 했습니다. 스코틀랜드가 낳은 가장 인기있는 설교가들 중의 하나는 토마스 찰머스였습니다. 그는 설교할 때에 항상 눈을 원고에서 떼지 않았습니다. 그는 설교할 때에 스코틀랜드 한 지방의 독특한 억양으로 원고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재주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바울만큼 효과있는 설교를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영력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온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되 간접적으로 알지 않고 직접 체험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을 외모로만 평가하고 약하고 능력없는 사도로 잘못 판단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강력한 징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전장(前章) 20, 21절에서 지적한 '성적 부도덕과 음란 등'을 이번 세 번째 방문길에도 회개치 않으면 불가불 강력한 징계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최후의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의 이같은 징계의 선포는 처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서 한 사람이라도 교회에서 추방당하거나 책망받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가?" 스스로 반문해보고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는 버리운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회개하고 '진리편에 서라'는 말입니다. 유대 나라에는 좋은 풍속이 하나 있습니다. 남자아이를 낳으면 감람나무 묘목을 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이 아이가 어른이 되면 꼭 감람나무 열매 같은 좋은 행동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자아이를 낳으면 소나무 묘목을 심는데 이것은 소나무와 같이 변치 않는 사랑의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대단히 좋은 관습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그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늘 그 감람나무와 소나무를 바라볼텐데 그때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그 뜻을 생길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처음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 때부터 어떠한 좌표가 필요하리라 여겨집니다.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달려갈 때에 스스로 점검을 하고 자신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결코 낙오됨이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신앙생활이 진리 편에 서 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 본문은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근심하지않고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느 때를 막론하고, 사도 바울처럼 몸에 가시가 떠나지 않을지라도, 그리고 감옥에 갇혀서도 항상 기뻐하는 생활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입니다. 그것이 진리 안에 사는 생활입니다. 진리 안에 있으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고후 13:11)...형제들아 기뻐하라..."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둘째,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고후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의 온전이란 완전무결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사랑 즉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가능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온전이란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눈먼 딸 하나가 먼데 가 있는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려고 종이에 글을 써서 부쳤습니다. 아버지가 이 편지를 보고 고르지 못하게 쓰인 글이나 줄을 가지고 탓하시겠습니까? 도리어 다른 어느 익숙한 편지보다도 더욱 깊이 간직하고 중하게 두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딸이 장님인데도 불구하고 제 정성을 다해서 쓴 편지 속에 나타난 사랑의 마음을 아버지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가는 곳을 보시고 우리가 행한 결과는 보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온전한 사랑이란 그 성공하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온갖 행동에 정성을 다하여 바치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 그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추운 겨울 아침에 어머니께서 외출하려는 눈치를 채고 빨리 나가서 어머니의 신을 불에 녹혀 드리려다가 잘못해서 불 속에 떨어뜨려 태웠다고 합시다. 어머니는 이 때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도리어 그를 귀하게 여겨 껴안고 입을 맞출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의 행동도 때로는 잘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고쳐나가야 할 것이 있기는 하여도 그 동기의 출발이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에서였다면 하나님은 그 동기를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한 폭의 그림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부인이 한 손에는 불을 들고 한 손엔 물을 가지고 지금 곧 루이스성으로 떠나려는 순간 아이봐라는 청년이 나타나 그 이유를 물은 즉 부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 불로 천국을 사르고, 이 물로는 지옥의 불을 끄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천국에만 들어가겠다는 욕심이 없어질 것이며, 지옥에도 떨어질 공포심이 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도록 하렵니다." 하더라는 말이었습니다. 이야말로 온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할 일 인줄 압니다. 천국을 부러워할 마음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공포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이 차있으면 그는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진 자입니다. 같은 일이라도 누구는 마치 야곱이 라반의 목장에서 일하듯이 사랑을 위하여 일하고, 누구는 옛날 애굽에서 벽돌을 굽고 있듯이 두려움으로 마지못하여 일합니다. 공장 안에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며 일하는 직공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퇴근 시간이 지나고 온 직공들이 퇴근한 다음도 홀로 남아 있어서 콧노래를 부르며 일하고 있는 청년 하나가 있습니다. 이 청년은 흥미를 갖고 일을 하는 공장 주인의 아들입니다. 많은 직공들은 봉급만을 노리는 자들이지만 이 청년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인줄 모르고 직공같이 삯을 바라면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두 가지를 다 바라고 일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동안 금과 돌이 함께 나옵니다. 진리 편에 서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진리 편에 있는 사람은 범사에 항상 기뻐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이단자는, 그릇된 교훈을 가르쳤다고 이단자가 아니고 그것을 고치지 않는 고로 이단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온전한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늘 고치는 자입니다. 셋째, 위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길 때 가능합니다. 또한 애통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애통할 것인가?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은 삶이 가져다주는 가장 쓰라린 비애를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랍 격언에 "태양 빛이 언제나 계속 비친다면 사막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막이 왜 사막이 되었습니까? 비가 내리지 않고 태양 빛만 사시사철 내리 쬐기 때문입니다. 태양 빛이 항상 내려 쪼이는 그 땅은 곧 식물이 성장할 수 없는 건조지가 되고 결국 메마른 사막이 되고 맙니다. 비가 내려야만 생산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슬픔을 통해서 비로소 경험되어지는 축복입니다. 슬픔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긍휼 이외는 그 무엇도 위로를 줄 수 없음을 알려 줍니다. 사람들이 슬픔에 빠졌을 때에 비로소 이웃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사물의 표면 이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슬픔에 부딪칠 때 인간은 삶의 깊이에 들어가게 되고 이 때에 그 슬픔을 바르게만 받아들인다면 새로운 힘과 아름다움이 그의 영혼에 더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기쁨과 더불어

한 마일을 걸었네

내내 기쁨만이 종알 거려

슬기는 나를 떠나 버렸네

나는 슬픔과 더불어

한 마일을 걸었네

그는 내내 한 마디 말도 없어

오! 나는 배웠네 가치 있는 것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더 나아가 "자신의 죄와 자기의 무가치함을 절망하리만치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였습니다. 사람이 만일 자기 죄를 비통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와 축복의 마스코트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가지는 위대한 힘 중의 하나는 인간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죄를 보게 될 때 그는 죄에 대한 강한 비애를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죄의 의식에서 출발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를 깊이 슬퍼하는 자이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범한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애통하는 사람이며 십자가를 보고 죄로 인하여 다가올 파멸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죄의 두려움을 경험하는 사람만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가지고 회개하는 자를 위로하시고 멸시치 아니하십니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용서함 받은 자의 기쁨을 얻는 길은 상한 심령을 가진 자의 철저한 비애를 통해서만 오는 것입니다. 세상 고통과 자기 죄로 인하여 상한 심령을 가진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 나라 백성들이 우상 숭배하는 죄, 부정 부패하고 음란과 사치, 허영의 죄악에 빠진 것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 자신과 나라 민족의 죄를 애통하며 진리 편에 서시기를 기원합니다. 넷째, 마음을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되어질 때 참 평안히 누리게 됩니다. 예수 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우리가 진리 편에 서서 서로 하나가 되어질 때, 마치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듯이 우리가 하나가 되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 가운에 하나가 되어질 때 비록 눈앞에 십자가가 있다할지라도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생활이며 참 평안의 복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인간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불란서의 철학자 볼테르가 유언하기를,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기독교 성경은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로 그의 살던 집이 성서공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유언한 것은, 진리의 세계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고 도리어 역효과를 낸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진리를 위할 뿐입니다. 진리를 위한다는 말은 진리가 우리편으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 편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해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령과 하나되기 위해 항상 성결보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은 모두가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진리 편에 서서 삶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고예화>

오 헨리의 단편 중에 <묵은 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빵집에서 싸게 파는 묵은 빵만을 사 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빵집 여주인은 매일 묵은 빵만 찾는 그 남자를 동정하여 빵 속에 버터를 듬뿍 넣어 주었습니다.

건축 설계가인 이 가난한 남자는 마침 현상 응모에 출품할 작품인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빵 속에서 흘러나온 버터 때문에 설계도를 버리게 되어 응모하지 못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그 남자는 설계 도면을 지우기 위해 묵은 빵을 사갔던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오 헨리는 여주인의 얄팍한 사랑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얄팍한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무심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고 먼 훗날이 되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은 결국 어그러진 우리의 모습을 바르게 고쳐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잴 인간의 자(尺度)는 없습니다. 우리의 소견이 좁고 짧으며 인간의 이해가 부족할 뿐입니다. 세월이 가고 경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도 한없이 연장됨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이야기는 우리가 시카고에서 라디오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 익명의 청취자가 들려 준 것입니다.

수지가 물었습니다.

"엄마, 지금 뭘해?"

.엄마가 말했습니다.

"이웃집에 사는 스미스 부인에게 갖다 주려고 볶음밥을 만드는 중이다."

이제 여섯 살밖에 안 된 수지가 물었습니다.

"왜?"

"왜냐하면 스미스 부인이 매우 슬프기 때문이란다. 얼마 전에 딸을 잃어서 가슴에 상처를 입었거든. 그래서 우리가 한동안 돌봐 드려야만 해."

"왜, 엄마?"

"수지야, 누군가 아주 아주 슬플 때는 음식을 만든다거나 집안 청소같은 작은 일들을 하기가 어려워진단다. 우리 모두는 함께 살아가고 있고 또 스미스 부인은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 때는 우리가 도와 드려야지. 스미스 부인은 다시는 딸과 얘기할 수도 없고 딸을 껴안을 수도 없고 엄마와 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신나는 일들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단다. 넌 매우 똑똑한 아이야, 수지. 그러니 너도 스미스 부인에게 도움이 되어 줄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거야."

수지는 이 새로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미스 부인을 돕는 일에 자신도 참여할 수 있을까 깊이 생각했습니다. 몇 분 뒤 수지는 스미스 부인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한참 지나서 스미스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안녕, 수지."

수지는 스미스 부인이 다른 때와 같이 귀에 익은 음악 같은 목소리로 인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스미스 부인은 또 울고 있었던 듯했습니다. 눈이 부어 있고 물기에 젖어 축축했습니다. 스미스 부인이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니. 수지야?"

수지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그러시는데 아줌마가 딸을 잃어서 가슴에 상처가 났고, 그래서 아주 아주 슬프시대요."

수지는 부끄러워하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손에는 일회용 반창고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가슴에 난 상처에 이걸 붙이세요. 그러면 금방 나을 거예요."

스미스 부인은 갑자기 목이 메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수지를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습니다.

"고맙다. 수지야. 이 반창고가 내 상처를 금방 낫게 해 줄 거야."

스미스 부인은 수지의 친절한 행동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상점에 가서 둥근 유리 안에 작은 사진을 넣을 수 있도록 된 열쇠고리 하나를 사 왔습니다. 열쇠를 갖고 다니면서 동시에 가족 사진을 넣고 다닐 수 있도록 고안된 고리였습니다. 스미스 부인은 수지가 준 일회용 밴드를 그 유리 안에 넣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상처가 조금씩 치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마음의 치료에는 시간과 주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열쇠 고리는 그녀에게 치료의 상징이 되었고 그녀가 딸과 함께 나눈 기쁨과 사랑을 언제나 기억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잠16: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arrow43_L.gif 차례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