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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oss01b.gif 사랑의 지혜 cross01b.gif
                 
(이동희목사 고린도 전서 설교)

머 리 말

이 책은 나의 사랑하는 평강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매주 발간되는 설교지 <숲 속의 사과나무>에 실렸던 것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뜨거운 눈물로 쓴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숱한 문제들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로 풀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 전서 설교집 제목을 주저함 없이 <사랑의 지혜>, 그리고 고린도 후서 설교집의 제목은 <사랑의 향기>라고 붙였습니다.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탈고하면서 다시 한번 미숙한 나의 목회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 그리고 뜨거운 가슴으로 목회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릴 따름입니다. 미흡하기 그지없는 설교집일지라도 여러분의 교회생활에 바른 길잡이가 되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는 나의 설교집을 발간할 때마다 문서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도와주신 <영기획, 도서출판 크리드>의 구영순 사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99년 3월 31일

야음(也音) 산기슭에서

이 동 희 목 사

anii33.gif 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지혜(1:1-31)
2. 신령한 자(2:1-16)
3. 하나님의 성전(3:1-23)
4. 하나님께로부터 칭찬(4:1-5)
5. 사랑의 권면(4:6-21)
6. 누룩없는 떡(5:1-13)
7.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6:1-11)
8.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6:12-20)
9. 기독교인의 결혼관<1>(7:1-24)
10.기독교인의 결혼관<2>(7:10-24)
11.기독교인의 결혼관<3>(7:25-40)
12.사랑과 지식(8:1-13)
13.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9:1-27)
14.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0:1-33)
15.창조의 질서(11:1-19)
16.피로 세운 언약(11:23-34)
17.은사의 원리(12:1-31)
18.제일 좋은 길(12:12-31)
19.사랑의 찬가(13:1-13)
20.사랑을 따라 구하라(14:1-19)
21.교회의 덕과 질서(14:20-40)
22.구원의 복음(15:1-19)
23.부활 신앙(15:20-49)
24.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15:50-58)
25.사랑으로 행하라(16:1-24)

 

1. 하나님의 지혜

"(고전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전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전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고전1: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고전1: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전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고전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전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전1: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고전1: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고전1: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전1: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고전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1. 고린도는 향락과 범죄로 유명한 허영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 지협에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그 위에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서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밤만 되면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내려와 거리에서 몸을 파는 거룩한 매춘부(?) 1 천명의 여사제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린도화한다."(고린티아제스타이)는 "도덕적으로 타락한다", "고린도 여자"는 창녀라는 뜻으로 쓰여졌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인"이라면 무모하고 방탕한 생활에 빠진 부잣집 탕아를 두고 한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고린도'는 부요와 사치, 술취함과 방탕, 더 나아가 불결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고린도 시에는 희랍 제일의 큰 원형 경기장 시설이 자랑거리였습니다. 도시 곳곳에는 모든 향락 시설과 잡다한 군중의 구미에 맞는 여러 가지의 극장, 사우나, 술집, 상점들이 즐비했습니다. 요는 고린도 시가 오로지 향락과 이윤을 위하여 문이 열린 자유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험을 좋아하는 헬라인, 유산 계급의 로마인,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베니게인이라는 이종(異種), 잡종의 인구, 거기에 유대인, 군인 출신, 철학자, 상인, 선원, 자유인, 노예, 소매상인, 행상인, 모든 악독의 주동자 등의 대집단"으로 법석대는 고린도는 "귀족도 없고, 전통도 없고, 확실히 자리잡힌 시민도 없는" 식민지였습니다. 이러한 고린도의 타락상은 고린도 교회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습니다.

"(고전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전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 한국은 어떤가? 1996년 10월 23일자 경향신문 칼럼은 그 음란과 타락상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매춘과 불륜의 천국이다. 세계에서 우리 나라만큼 매춘과 불륜의 기회가 많고 장소 제공이 잘 되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나라의 매춘 시장에 대한 한 통계에 따르면 업소는 40만 곳, 외형 신고액은 3조 2천 3백억 원, 무허가 업소를 포함한 실제 연간 매출액은 43조원, 접대부 수는 1백 20만--1백 50만 명에 이른다. 작년 우리 기업들의 접대비는 1조 6천억이었는데 이 돈의 가장 큰 몫은 룸살롱, 요정, 호텔 등에서 소비된다. 정중한 접대에 매춘이 포함된다는 것은 업계의 상식이다. 접대비는 세무서도 인정하고 있는 당당한 비용이므로 우리는 국가가 매춘을 실질적으로 장려하는 희한한 제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매춘의 형태도 다양화되고 있다. 기존의 매춘 여성들과는 달리 주로 미성년자, 주부, 직장 여성 등 다양한 연령과 직업의 여성들이 아르바이트나 쾌락을 위해 이른바 <보도 사무실>을 통해 매춘에 가담하고 있다. 최근 적발된 사례를 본다면 그런 신종 매춘은 꽤 큰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술집에서 일하는 접대부의 연령도 하향화되고 있다. 이른바 <영계>라는 10대 소녀를 두고 장사하는 곳이 많다. 최근엔 아예 여고생들끼리 모여 술집을 차린 사례도 있었거니와 초등학교 학생들을 고용한 술집마저 등장했다. 매춘과 불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러브호텔>은 어떠한가? 전국 방방곡곡에 길만 뚫렸다 하면 가장 먼저 들어서는 게 러브호텔이다. 서울 근교에만도 러브호텔의 수는 2,600여 개에 이른다. 시내 여관들도 <낮 손님>장사로 재미를 보는 러브호텔로 변신하고 있다. 카바레는 어떤가? 미혼 남녀 또는 부부가 카바레를 찾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이젠 <무도 교실>이나 <노인 교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카바레 영업을 하는 업소도 부지기수로 생겨나고 있다. 우리는 매춘과 불륜에 미쳐 있는 나라다." 같은 날자 조선 일보 칼럼은 이 나라의 사치와 허영의 단면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옷차림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건 TV, 그 중에서도 드라마의 영향 때문이라고 국내의 한 언론학자가 갈파한 일이 있다. 실제로 선진국 어디를 가보아도 방송출연자들의 옷차림이 우리처럼 고급스럽거나 선정적이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탤런트가 입고 나온 옷이나 머리모양, 심지어 액세서리까지 불티나게 팔리는 기현상을 빚고 있다. .......... 첫째, 국제적인 환경변화에 대비해 보자. 세계는 지금 20세기를 마감하며 다가올 새로운 천년에 대한 비전과 설계에 한창인데 우리는 한강에서 뱃놀이하듯 축축 늘어지는 연속극으로 국민들의 방향감각을 무디게 하고 있다. 둘째, 국내 상황은 어떤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북이 분단돼 있는 데다 최근에는 긴장감까지 감도는 현실일 뿐 아니라 경제는 내년까지도 어둡다는 전망이다. 그런데 TV를 보면 가무가 넘쳐나고 사랑타령에 흥청망청이다. 가정이나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접어두고라도 우리 TV드라마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고, 국가와 국민에게 생산적이 아니라 소모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최근의 한 조사를 보면, 한 주간에 총 34개 84편의 드라마가 3,965분, 66시간 이상을 4개 공중파 채널이 쏟아내고 있다. 자그마치 전체 방송시간의 15.3%를 한 장르로 채우는 <드라마 왕국>이다. ........드라마를 만들어 내더라도 우리 시대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 내야하며 내일에 대한 희망과 삶의 활력소를 주어야 한다. 올해 미국의 에미상을 받은 드라마 <ER(Emergency Room)>은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료인들의 헌신적인 열정을 사실감 있게 그리고 있고, <프렌드>는 주인공들이 각자의 개성에 맞는 인간형을 스스로 만들어 내며 21세기의 중심인물로 성장한다는 내용이다. 우리 드라마에 비해 메시지가 강하면서도 생산적이다."

당시 고린도 시를 방불케 하는 극도의 타락상이 우리 나라 도시, 시골 전 지역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본 고린도 전후서를 통해 사분오열 되는 현금(現今) 교회의 분쟁과 분열의 문제, 성도의 결혼, 성생활, 교회 지체로서의 임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절제, 은사의 바른 활용 등 실질적이면서도 다양한 삶의 문제, 이 시대에 안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문제들에 대한 바른 진리로 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2. 사도 바울은 먼저 편지 서두에서 이렇게 자신의 사도권(예수의 제자됨)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전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은"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극구 변호한 것은 자신의 명예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첫째로는, 바울의 빈약한 외모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과거 행적으로 인해 일부 교인들이 그의 사도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자신의 소명의 진실성을 증거하고, 셋째로는, 그가 쓴 서신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임을 확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14:36,37). 결국 사도로서 권위가 도전받거나 무시될 경우 복음 사역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1:17) 바울은 스스로 사도권을 변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된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집필할 무렵 그는 세 가지 소식을 입수하게 됩니다(11절). 그 내용은 교회 내부에 분열과 근친상간 등 성적 타락, 성도간의 법정고소, 그리고 교회 내의 각종 무질서와 혼란 등이었습니다. 이미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편지를 띄웠지만 교회가 계속적으로 여러 문제로 혼미에 빠지자 바울은 직접 방문해서 전해진 소식들 모두가 사실이며 그가 당부한 목회지침이 이행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고 교회에 강력히 시정할 것을 경고한 후에(고후 13:2) 그곳을 떠납니다. 그러자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바울이 떠나간 것은 그가 약하기 때문이며(고후 10:1,2) 바울의 권면이나 경고는 무시해버리라고 회중을 선동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기의 2차 방문이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고후2:1)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오래지 않아 디모데가 교회에 당도하지만 바울의 책망을 원한으로 생각하는 자들로 인해 디모데는 냉대를 받고 상처를 입습니다. 디모데가 에베소에 돌아와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니 바울이 다시 준엄한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 편지는 너무나 격렬한 감정의 글이라서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통곡하게 됩니다.

"(고후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의 목적은 디모데에게 어려움을 준 자들을 책벌하라는 최후 통첩이고 참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통보였습니다.

3. 바울은 교회 안에 네 개의 분파(스키스다마)를 말하고 있습니다. "스키스다마"는 옷의 해진 곳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해진 옷과 같이 보기 흉하게 될 위험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등의 이름을 도용하여 제멋대로 파벌을 만들어 서로 자랑하며 서 서로 적대감을 가지고 교회 분열의 위기를 조장했던 것입니다. 바울파를 자처하는 무리들은 주로 이방인들로 바울이 가르친 복음의 자유를 제 입맛대로 해석해서 자유를 방종으로 만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학문이 높고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에 취향이 맞는 사람들은 스스로 아볼로파임을 자처하여 바울의 전도 등을 은근히 멸시하며 기독교를 지성화시킨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직계 제자로 베드로 내세워 바울보다 베드로가 더 권위가 있다는 주장하며, 자신들만이 참 교회의 정통을 잇고 있다고 자처한 게바파(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새로 주신 이름)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파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아무 당에도 속하지 않고 파당이 없는 고린도에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완고하고, 독선적인 소수의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만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로 알고 다른 사람들 곧 바울이나 게바 역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인정치 않고 그들을 배격하였습니다(고후 10:7). 이들 파당들은 교회의 참모습과 그리스도의 모습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와 결국 복음 전파를 통한 인류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부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교회 분열의 첫째 원인은 육신의 본능대로 사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3:1-4).

"....(고전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3: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두번째 원인은 영적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셋째로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는 교만(4장)과 경쟁심이 교회 분열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는 온전한 분이시므로 우리는 분파를 초월해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믿되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로서만 믿고 다른 이들과 분쟁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 들어오세요. 그러나 다리는 들어오지 말고 밖에 그대로 두세요."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는 온전한 분이십니다. 또한 교회가 일치해야 할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고 거룩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 단 한 분뿐이십니다. 아볼로, 바울, 게바 그 누구도 우리를 용서하거나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음으로써 명실 상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자신에게 세례 받은 자들에게 자신은 망해야 할 자이며 예수만이 흥해야 할 분이라고 증언했던 것처럼, 성도들의 삶에 영향력을 끼치며 성도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을 깨닫고 분파를 일소하고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치해야 할 것입니다.

4. 교회가 하나되어야 할 이유는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십자가의 도"에 있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람의 지혜는 일시적이며 궁극적인 결실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고상해 보일지라도 인생을 속이기도 하며 결국 멸망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는 불신자들에게는 비록 미련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생명을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수학자 피타고라스, 로마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세네카, 여류시인 사포,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설국>의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 프랑스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음악가 로버트 슈만 등은 당대의 존경받는 지성인들이었지만 모두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지식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마저 악마에게 팔아 넘긴 <파우스트>는 "나는 세상의 모든 학문을 통달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독백합니다. 주님은 인생의 행복과 인간의 문제가 지식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인간은 다 죄인인 만큼 모두 다 자신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고 죄 사함을 얻은 후에야 인간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구세주이심을 알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야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은 사람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글을 아주 모르는 사람도 예수 믿고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지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성령으로라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신령한 감동이란 오직 받는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자라면 큰 권력이나 세력이나 영광의 소유자라야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그가 어떻게 구주가 되느냐?' 고 세상 사람은 의문을 가집니다. 십자가는 사형도구로서도 가장 천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못박아 죽이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구원의 도라고 말할 때에 이 세상 사람은 어리석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이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네 가지로, "미련함", "약함", "천함", "없는 것"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Moody) 그 네 가지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잘 사용되기만 하면 인생이 승리를 거두기 때문입니다. "미련함"은 지식의 부족함을 의미하는데, 지식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보다 미련함이 더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고전8:1).....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약함"은 그 자체로 승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하여 교만한 것보다 "약함"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언제나 교만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도 사람들도 교만한 자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약한 자가 그 약한 것 때문에 겸손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미련하여야 됩니다." 미련함은 세상 사람이 보기에 미련함인데 이는 미련한 듯이 주를 믿음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 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지혜를 희생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약한 생활을 하여야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약하다 함은 도덕적 연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약하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 앞에서도 연약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추시며 강한 자는 약하게 만드십니다. 독수리나 사자의 고기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되지 못하나, 양이나 비둘기는 제물로 사용되는 것에는 그와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흔히 영웅의 기질을 타고 난 사람들은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삭의 생애를 한 마디로 말하면 "연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가 우물을 팠다가 블레셋 사람에게 세 번이나 빼앗겼어도 양보한 일이 있었습니다.(창26:12-21) 그러나 하나님께서 필경 축복하여 그를 안전지대에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창26: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또한 기독교인은 업신여김이 되는 자리에 있어야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 사람의 업신여김을 달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업신여겨지는 사람'을 통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십니다. 기독교인은 남들이 업신여기기 전에 먼저 자기로서 자기를 업신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이와 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 자기 자랑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기 자랑은 해로운 것입니다. 자기 자랑은 망하는 데로 가는 발걸음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예레미야는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으나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칭찬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자신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둘째, 주안에서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지혜, 의, 성결, 그리고 구원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주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주만 자랑하여야 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는' 생활은 세상에서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가장 귀하게 여기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5. "십자가의 도"를 유대인들이 거리끼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을 하나님의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율법에 정통하여 이사야 53장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메시야의 십자가 고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예수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유대인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기원 45년에 '드다'란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몇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집을 버리고 자기와 함께 요단강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자기가 명령하면 요단강 물이 둘로 갈라져 모두 발을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약속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기원 54년에는 애굽으로부터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는 3만 명을 설득하여 감람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자기가 명령하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러한 대단한 능력과 표적들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본 예수는 온유, 겸손하여 섬기는 자, 급기야는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힘없이 죽어가는 모습뿐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헬라인들은 지혜(소피스트)를 구했습니다. 여기 지혜(소피스트)란 생각이 영리하고 말이 교묘하여 나쁜 것도 좋게 보이도록 하는 재변을 잘 쓰는 사람, 교묘히 기지와 매끈한 변설을 자랑하여 청중의 갈채를 받고 득의한 사람을 말합니다. 헬라인들은 아름다운 말에 취해 있었습니다. 때문에 헬라인들이 볼 때 무뚝뚝하게 말하는 기독교의 전도자들은 교양이 없는 조잡한 인간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복음 전도자들은 조소와 우롱의 대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초대교회에 모두 노예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당수의 상류층 출신들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아덴의 디오누시오(행 17:34), 그레데의 지방 총독 서기오 바울(행 13:6-12),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의 귀부인들(행 17:4,12), 아마 고린도의 재무인 에라스도(롬 16:23) 등 입니다. 네로 황제 시대에는 브리튼의 정복자 플라우디오의 아내 폼포니아 글라에기나가 기독교 신앙을 위해 순교 당했습니다. 도미니안 황제의 시대인 1세기 후반에는 황제의 사촌인 플라비오스 클레멘스가 역시 기독교인으로 순교 당했습니다. 2세기 말 비두니아의 총독 플리니가 로마 황제인 트라얀에게 편지를 보내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모든 계층으로부터 나왔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이 신분이 낮은 비천한 사람들이었다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로마 제국 안에는 6천 만 명의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노예는 "살아있는 도구"이며 물건이자 인간일 수 없었습니다. 주인은 늙은 노예를 필요 없게 된 호미나 괭이와 같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노예들을 고문하며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노예들 사이에는 결혼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아이들도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이와 같이 물건에 불과한 사람들을 참된 인격으로서의 남자나 여자로 만든 것, 아니 그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아들딸로 만든 것,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영광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무시당하였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무가치한 것으로 보였지만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위해서 죽을 수 있을 만큼 귀한 존재란 것을 기독교는 가르쳤습니다. 전 우주에 있어서 기독교는 글자 그대로 인간의 가치를 가장 높여준 또 여전히 높여 주고 있는 참 종교입니다.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하여 주며, 약한 자를 강하게 하여 주며, 천하고 멸시받는 자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며, 없는 자들을 부요케 만들어 주며, 불행한 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며, 더러운 자를 깨끗하게 하여 주며, 죽어 가는 자를 살려 주는 종교가 참된 종교인 것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죄는 자기 주장, 혹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인식 위에 설 때 비로소 참다운 종교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 무지, 무능, 무력함을 알고 있는 인간이 결국은 강하고 지혜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만이 우리는 인생의 길을 바로 걸으며,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만이 우리는 진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최봉석 목사라면 알 사람이 많지 않으나 최권능 목사라면 아는 이가 많습니다. 최봉석 목사가 곧 최권능 목사인데 그는 평생 전도하여 70여 교회를 세워서 70 교회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핍박과 조소를 받으면서도 기사와 이적을 많이 행한 하나님의 종으로 그에 관한 일화도 많습니다. 한번은 최 목사가 중학교 교장에게 전도하면서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주장하는 분이라고 설명하자 교장은 자기의 학식을 자랑하고 기독교를 미신시하는 마음으로 벼락치는 것도 하나님이 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최 목사가 죄인을 책망하기 위하여 벼락치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교장은 비웃으면서 그러면 왜 사람을 치지 않고 나무와 돌을 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최 목사가 무심히 던진 말에 답변이 궁하여 대답할 말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으니 교장이 최 목사에게 답변을 추궁하였습니다. 기도하고 난 최 목사는 갑자기 대답할 말이 생각나서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떠들거나 잘못하면 주먹으로 칠판과 교탁을 탁탁 두들일 때 칠판이나 교탁이 잘못해서 두드립니까? 학생이 잘못했는데 왜 교탁은 두드리십니까?" 교장은 학생을 주의시키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최 목사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도 나무와 돌에 벼락을 치셔서 죄인을 경계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학식을 자랑하던 교장이 머리를 숙이며 탄복했습니다. 세상적 안목으로 볼 때 미련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은 소외 받는 계층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사회의 모든 기득권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 핍박과 차별, 천대와 설움을 받는 자들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들어 당신의 유업을 잇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그들을 그 나라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써 가진 자와 지혜 있는 자, 권력자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십자가만을 자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므로 "(고후6:8)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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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령한 자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전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오래 전에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던 <로베데 장군>이란 영화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레지스탕스 즉 저항운동가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저항운동에 참가한 일이 없는데도 잘못 잡혀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처형당하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항운동에 가담했다가 붙잡혔으니까 처형당하는 것이 마땅한지 몰라도 자기는 장사나 하고 돈이나 벌며 살다가 잘못 잡혀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온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항운동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 때 그와 함께 붙어있던 한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잘못이다. 당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그것 하나로 죽어 마땅하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피를 흘렸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어 버렸다. 조국과 민족이 멸망 직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가?"

대단히 인상 깊은 장면입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를 죽게 해도 마땅한 죄과였던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 가운데 주인으로부터 다섯 달란트를 맡은 자는 열심히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를 맡은 자도 마찬가지로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을 땅에 파묻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하나도 남긴 것이 없이 한 달란트를 그냥 도로 돌려주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내린 주인의 형벌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마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마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증거", 즉 복음 전파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질과 건강, 재능과 지혜, 은사와 은혜, 가정과 자녀, 기업과 생업을 주신 목적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복음 전파를 위해 열심히 쓰임 받도록 하심으로 많은 것을 남겨 "(마25:21)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즉 복음을 전도할 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습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당시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헬라 철학과 여러 가지 지혜들에 해박하며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하려고만 했다면 그의 박식한 철학적 논리로 그리스도를 설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삶만을 있는 그대로 전파하여야 함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하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증거는 지식의 나열이나 매끄러운 설명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영혼을 살리고 부패한 인간의 삶을 깨끗하고 영원한 삶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믿는 그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생애에 아무런 각색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특한 힘(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학문이 없는 보통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할 때 있는 그대로의 예수의 삶을 전하는 것이 면밀하게 짜놓은 이론보다도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항상 변함없는 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이성과 지성이 아닌 마음과 영에 호소함으로 그 사람의 가슴 속 깊이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에 호소하며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지혜는 인간의 수식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에서 선포되어지고 세상에 전파되어질 때 그 교회는 진정한 진리의 파수꾼 사명을 다 하게 되며,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복음의 대적들은 사도 바울을 경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후10: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바울은 작은 체구에 말솜씨는 졸렬했습니다. 그는 용기나 결단이 부족하지 않았고, 그의 대적들에 의해 흠잡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대자들처럼 호언장담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에 충실한 사역자로서 두려움과 떨림을 지니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복음의 대적들이 두려워 떤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고 복음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전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위로써 전파했습니다. 즉,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성령이 전하는 대로 말씀을 전했고 그 진리를 나타내도록 성령의 역사에 맡겼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자에게 있어 참으로 중요한 것은 논리성이나 지식의 정도, 문장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와 능력"임을 체험하고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적 체험(간증)과 철학적 지혜로 설교하다가 실패한 아덴에서의 쓰라린 전도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아덴에서 오직 한 번 기독교를 철학적인 말로 바꾸어 보려고 했습니다. 아덴의 말스 언덕에서 그는 철학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말과 용어들을 사용하며 그들이 인용하는 말을 자기도 인용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행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17: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17: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그러나 바울의 그러한 방식의 복음 전도는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철학적인 설교는 전혀 아무런 효과를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의 전도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만이 참된 것이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전하는 것이 가장 옳은 전도 방법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개종 체험과 전도 여행을 통해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이 실제로는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뿐이며 성령의 지혜만이 완전하며 십자가를 온전히 의지할 때만이 복음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지혜는 복음이며(6-9절), 그 지혜의 근원은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10-16절)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과 지식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실패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성령의 일(역사)을 거부하고 미련하게 여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증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뿐이었고 그것도 말재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복음을 전파할 때 "두려움과 떨림"으로 했습니다.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사도 바울이 심히 떨었었다고 고백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아덴에서의 전도 실패와 유대인들의 훼방과 대적, 그리고 고린도인들의 철학적 사변과 교만한 태도, 도덕적 타락 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철학적 지혜와 사변(思辨)과 구변(口辯)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자신의 부족함으로 복음의 능력이 가리워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2. "두려움과 떨림으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일반적으로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눌 때 '반드시 있어야만 할 사람', '있으나마나 한 사람', '전혀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 등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신령한 자가 되시므로 하나님을 위해, 이 나라 민족을 위해, 온 인류를 위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즉 "온전한 사람(6절)" 곧 "성령을 받은 사람(15절, "신령한 자")"과 그렇지 못한 사람(14절,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자(혼, psuche)"는 오직 육적인 것에만 지배를 받는 사람, 즉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 속에 계시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혼(프수케, psuche)"은 육체적인 생명의 원리로서 살아있는 것은 모두 "혼(프수케, psuche)"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나 고양이나 그 어떤 동물이라도 "혼(프수케, psuche)"는 가지고 있지만 성령(프뉴마, pneuma)을 가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혼(프수케, psuche)"은 모든 인간이 다른 모든 생물들과 공유하고 있는 육체적인 생명입니다. 이에 반하여 성령(프뉴마), 즉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되게 하는 것,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분하는 것,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는 육체적인 생명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고 있는 인간, 육체적· 물질적 필요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는 것 같이 생각하고 사는 사람, 육체적· 물질적 가치만을 진정한 가치로 생각하며, 육체적 물질적 기준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영적인 것과 영적인 일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순결의 의미가 이해될 수 없습니다. 축재를 인생의 최고 목적으로 삼는 자는 구제와 자선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또 욕망이야말로 행동의 궁극적인 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순수성이란 것의 가치가 이해될리 없고, 이 세상을 초월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알리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어리석은 일로만 보일 뿐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도무지 영적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오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에 대한 자랑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나 이에 반해 "신령한 자"는 구원받은 성도들 중에서도 온전한 영적 통찰력을 지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항상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습니다. 또한 성령에 민감하여 성령에 순종하며 그의 삶이 성령에 의해 인도될 뿐만 아니라 모든 결단과 판단을 성령의 영향과 지도 아래 행하는 사람입니다. 신령한 자는 이 세상의 가치와 생명을 초월한 가치와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항상 '영의 일'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영의 생각'은 곧 생명과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롬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육에 속한 자들은 신령한 일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 자체가 허황된 일이며 미련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에 속한 자는 이와 같은 영적인 일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와 같은 일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영안(靈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신령한 자는 모든 종류의 영적인 일을 분별하여 판단을 내릴 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그러므로 신령한 자는 다른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와 행동에 대하여 판단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가 영적인 일로 육에 속한 사람의 판단을 받지는 않는 것입니다.

"(고전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렇지만 아무리 신령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잃어버릴 때 그의 영안은 육신의 안목이라는 덧창이 씌워져 더 이상 영적 일을 올바로 분별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신앙의 연수(年數)가 깊어갈수록 자신이 선 줄로 생각하지 말고, 삼가 넘어질까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전2:16).....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옛날 신천 장안의 유명한 깡패요 불량배였던 김익두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김익두 목사님은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시느라 높은 산길을 걸어 오른 후에 너무도 더워서 웃옷을 벗어놓고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때 맞은 편에서 어떤 술취한 사람 하나가 올라오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느냐?"

고 시비하면서 다짜고짜 마구 때리더라는 것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표현대로라면

"이사간 집 굴뚝 헐 듯이 패더라."

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리 치고 저리 치는 대로 아무 저항없이 고스란히 매를 맞았습니다. 이윽고 저쪽에서 때리기를 멈추었을 때 김익두 목사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형님, 다 때렸소?"

"다 때렸다. 왜?"

목사님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상대방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어리둥절해졌습니다.

"내가 김익두야."

순간, 사나이는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젠 죽었구나 싶어 싹싹 빌었습니다. 목사님이 점잖게 말했습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하던가?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자네는 여기서 장례식을 치렀을 거야. 그러나 지금은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내가 예수 믿은 덕에 자네가 살았지 않았나?"

사나이는 그제야 반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얼 어떻게 해. 따라와야지."

목사님은 그를 데리고 가서 부흥회에 참석시켰고, 후일에 그 사람은 장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김익두 목사님의 매맞는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유 없이, 말도 안되는 그 부조리한 매를, 더구나 그 매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허수아비처럼 맞고만 있었습니다. 그 마음에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 마음을 다스린 것이 지성입니까? 교양입니까? 강한 의지입니까? 학벌입니까? 아니면 목사 체면입니까?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었으며 성령이 그의 마음을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성령이 그의 마음을 주장할 때 신령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마음을 주장할 때 "하나님의 증거" 즉,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진 신령한 자들이 되시므로 복음 전도의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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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하나님의 성전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3: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전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고전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3: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전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3: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3: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고전3: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고전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1. 고린도 교회가 겪은 커다란 어려움은 내부의 당파 싸움이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지도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복음 23:10).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주인이 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은사나 능력을 따라 사역자들에게 지나치게 치중하거나 심지어 숭배하기까지 하면 교회는 교회 본연의 모습을 상실하고 분열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분은, 그리고 경배드려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십니다. 사역자들에게 나타나는 은사나 능력은 아무리 크다해도 그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들입니다. 사역자들은 교회를 위해 쓰임받는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사역자들에게 치중하거나 그들을 신성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악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지나치게 치중했던 바울이나 아볼로는 "심고 물 주는" 일에 쓰임받은 종에 불과한 것이지, 그들이 식물을 "자라나게 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심었다"는 것은 복음을 전도하여 믿게 했다는 것이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다"는 것은 믿는 자들을 성경으로 가르쳐 주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며 인간은 단지 그 일에 쓰임 받는 종에 불과합니다. 또한 씨를 심는 일과 물주는 일은 서로 배타적이고 경쟁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씨를 심은 수고, 아볼로는 물주는 수고에 대한 그 만큼의 삯을 받는 것으로 족한 것이며 교회와 선교의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바울은 일을 시작하는 데 적합했고, 아볼로는 일을 성장시키는 데 적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사역의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는 그들 홀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밭에서 어떤 사람은 씨를 뿌리고, 또 어떤 사람은 물을 주지만 그 누구 한 사람도 자기가 자라게 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성장시키는 능력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인간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씨를 뿌리는 자나 물을 주는 자는 동등한 지위에 있는 것이지 한 편이 다른 한 편보다 상위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나 제사장, 사도, 복음전도자, 교사 등에 위 아래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들 모두가 한 주인-- 하나님 --을 위해 함께 일하는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와 사랑의 메시지를 온 인류에게 전하기 위한 도구로써 인간을 사용하시긴 하겠지만 사람들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거나 영적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창조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만이 이것을 재창조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역자들의 모든 사역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며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전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자랑할 것이 아니고 주만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중심이 되어 파당을 형성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교역자는 사람들의 인기나 칭찬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하늘의 상급을 목적으로 주님의 일을 성취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열매를 얻기 위해서 일하시는 밭입니다. 이런 교회에 일개 지도자의 사상 체계가 교회의 중심을 이룬다면 당연히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은 영적 분별력을 가지지 못한 교인들을 어린 아이, 육에 속한 자, 젖을 먹어야 할 자, 즉 영적 미숙아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적인 미숙아는 '사람을 따라 행하고' 시기하며 다투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실 시기와 분쟁은 유치한 사회에서 하는 것이고 영화(靈化)된 높은 수준의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웃음거리밖에 안됩니다. '사람을 따라 행한다.'는 말은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세상적인 가치기준에 따라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미숙아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심오한 영적 진리를 잘 깨닫지 못하는 '초신자'를 말하기도 합니다. "젖"은 모든 기본 교리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히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히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그리고 "밥"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어 행하시는 대제사장의 역사에 관한 교리들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히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히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와 이웃과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웃들과 불화하며, 싸움을 잘 하며, 말이 많고, 양보할 줄 모르고, 늘 말썽을 일으킨다면 그러한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거나 중직을 맡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육에 속한 자요, 영적 미숙아에 불과한 사람이지 하나님의 사람은 아닙니다. 반대로 이웃들과 사랑으로 화목하며 지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과 거리가 먼 사람은 하나님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며, 이웃과 단절된 사람은 하나님과도 단절된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이들은 키가 자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은혜와 지식에 있어서 성장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에 대한 경쟁과 싸움은 육적인 증거입니다. 참다운 신앙은 화평하게 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시기와 다툼이 어찌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보통 사람들의 수준보다 높게 살아야 할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 같게 살며 행동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러기들이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장면은 아름다운 경치 이상의 교훈을 던져 줍니다. 비행기와 망원경으로 기러기를 추적한 조류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기러기는 혼자 나는 것보다 떼를 지어 날 때 71%나 더 오래 날 수 있습니다. 이는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힘이 강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모이면 분파가 생겨 힘이 약해진다는 한국인은 기러기에게 배울 바가 많은 것입니다. 혼자 하고 혼자 이름을 내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함께 하고 함께 빛을 발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둘째, 기러기는 왜 V자 대형으로 나는가? 이것은 천부의 지혜로, 공기대(Swath of air)가 형성되어 뒤따르는 기러기들이 날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서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뒤에 있는 동료들을 조금이라도 편히 날게 하기 위하여 V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앞에서 나는 인도자격인 기러기가 가장 빨리 지치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기러기들은 가끔 위치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이만큼의 협조 정신과 남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사람에게 있습니까? 셋째, 기러기들은 날면서 계속 운다고 합니다. 이것은 힘들어 지르는 비명이 아닙니다. 기러기의 울음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위치를 알림으로써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를 격려하는 나팔 소리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힘겹게 먼길을 날면서도 가족과 동료를 격려하는 기러기의 울음소리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넷째, 만일 기러기 한 마리가 아프거나 부상으로 함께 여행을 계속하기 못하게 될 경우 반드시 서너 마리의 동료가 이 낙오자와 더불어 머문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신입니다. 기러기의 사회는 경쟁사회가 아닙니다. 동료의 불행을 함께 짊어지는 사회입니다. 요즘 사람 같으면 겉으로는 위로하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경쟁자의 낙오를 기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러기는 불행을 당한 동료를 따라 낯선 땅에 머물며 그가 회복되기까지 기다려 준다는 것입니다.

3.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고국에 돌아와 무너진 신앙 공동체를 재건하는데 있어서 제일 핵심적인 일은 성전 건축이었습니다. 작업 중에 현지의 토착민들이 방해하고 습격해 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아직 정착되지 않은 이주민으로서 큰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한편 유목 민족으로서 천막생활에 익숙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건축다운 건축은 성전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성전을 건축하는데서 중요한 신앙 훈련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의 무리들을 통해 이룰 지상 과제를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교회 즉 하나님의 집은 "반석"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워질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반석"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는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터 위에 세우는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려 그 값으로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계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시편 118:22 말씀을 인용하시어 자신이 교회의 머릿돌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시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마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뿐만 아니라 바울은 에베소서 5:23과 골로새서 1:18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마치 건축자들이 금, 은, 보석 또는 나무나 풀, 짚으로 집터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 금, 은, 보석 등은 성도들의 순전한 행실을, 나무, 풀, 짚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유명무실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삶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금, 은, 보석 등은 십자가의 도와 같은 순결한 복음의 진리를 의미하며, 나무, 풀 짚은 이 같은 복음의 기본 진리는 도외시한 채 말의 지혜로만 증거되는 어리석은 주장, 궤변 등의 거짓된 교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심판하시는 최후 심판 그 날에 금, 은, 보석으로 집을 지은 건축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을, 모든 공력이 불타버릴 것으로 집을 지은 건축자들에게는 부끄러운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불이 금을 찌꺼기로부터 구별하고 타버리는 물질과 타지 않는 금속을 구별하는 것과 같이 사람과 사람 그리고 일과 일을 구별하는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불란서 혁명 때에 사람들이 극도로 악하여 하나님을 모욕하는 뜻으로 노텔담 예배당 제단에 기생을 세워 놓고 그를 예배했습니다. 그 때에 그 인도자들이 벼락맞아 죽었습니다. 그것은 우연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심판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것입니다. 그 날에 모든 신자들의 공력이 밝혀지고 말 것입니다.

4.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란 하나님의 성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교회는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계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기 위해 준비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오리겐이 말했지만 교회와 그 사귐 속에 불화와 분쟁과 분열을 끌어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중의 의미로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시기와 다툼을 지니고 있다면 성령의 활동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미움이 교회 안에 들어오자마자 사랑은 거기서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기 속에서는 진리가 결코 바르게 들려질 수도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미움과 싸움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셔도 안으로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표시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사귐을 파괴하는 자는 교회를 파괴하는 자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와 같은 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 즉 교회를 파괴하는 근본 원인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 원인은 이 세상의 지혜를 숭배하는데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세상의 지혜는 이러한 것입니다.

"(욥5:13)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므로."

"(시94:11)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인간적인 지성의 자랑 때문에 그들은 설교하는 방법, 예를 들면 수사법이라든가 설득력의 유무라든가 변론의 정묘성 같은 것을 판단, 평가, 비판하는 데만 열중하였지 선교의 내용 같은 것은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적 교만은 언제나 논쟁적이어서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경청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게 됩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고 끝까지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겸손하게 상대방에게 배울 생각은 아니하고 언제나 자기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고는 가만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지적으로 교만한 자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입니다. 자기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 자는 모두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어리석은 자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자기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롭고 선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낮추어야 합니다. 현명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하고 자신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경쟁시켜서는 안됩니다.

5.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될 때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현재에 안전하고 영원히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나 아볼로, 그리고 게바는 모두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교회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 게바는 다 너희 것입니다. 모두 다 너희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 가는 벽돌 한 장 한 장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함으로 하나님의 건축하심에 일조할 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도 그들의 자리에서 견고히 자라가도록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코리 텐 붐 여사의 부친이자 시계 제조업자였던 캐스퍼씨에 대한 일화입니다.

어느 날 캐스퍼씨의 가족들은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누군가 와서 그 금액에 해당하는 시계를 사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어느 손님이 찾아와서 비싼 고급 시계를 하나 구입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얼마 전 자기가 이웃의 그리스도인 시계점에서 비싼 시계를 하나 구입했는데 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며 투덜거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캐스퍼씨는 그 시계를 한 번 보여달라고 하여 내부를 검사해 보았습니다. 살펴보니 조금만 수리하면 되는 것이어서 그는 그 자리에서 수리를 해주며 그 시계는 정말로 좋은 고급시계이며 이웃의 시계 점포 주인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손님은 그 시계를 받아들고는 미안하다며 자기가 산 시계를 반납했고 캐스퍼씨는 돈을 도로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죽 지켜본 코리가 손님이 나간 후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시계를 돌려주셨어요? 은행에 갚을 돈 때문에 오늘 기도까지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돈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내려주신 돈이 아닌 것 같구나."

며칠 후 다른 손님이 와서 이전보다 더욱 비싼 최고급 시계를 사가서 은행에 돈을 다 갚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캐스퍼씨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지킴은 물론 다른 그리스도인의 명예도 지켜준 것입니다. 우리는 지어져 가는 성전의 작은 일부분으로서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봉사함으로 성전 전체를 짓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함을 안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거룩하고 하나되게 하시며, 지혜롭게 성장하게 하시는 성령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시므로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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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하나님께로부터 칭찬

"(고전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고전4: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고전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볼로나 게바나 자기를 당파나 분파의 지도자로 생각지 말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생각해 달라고 당부합니다. 여기 "일꾼"이란 옛날 큰 배의 노를 저어 배가 달리게 하는 노예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달라고 부탁합니다. "맡은 자"란 청지기를 말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집과 재산을 전부 관리하며, 일군들을 감독하며, 물자를 지급· 분배하며, 집 전체를 보살피는 직분으로 이 역시 노예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청지기의 첫째 조건은 믿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많은 독립성과 책임과 지배권이 주어진 이상 주인의 절대적인 신임이 더욱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청지기로서 바울은 인간의 판단에 개의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판단에 충성된 일꾼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야말로 가장 참되고 유일한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이야말로 결정적인 판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모든 정황을 정확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속의 갈등을, 또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알고 계십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어디까지 올라 갔는지, 좋든 나쁘든 어떤 인간이 되었는지 그 가능성까지라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실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동기를 모조리 알고 계십니다. '인간은 행위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고결하게 보이는 많은 행위도 가장 이기적인 추악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을는지 모르며 비열하게 보이는 많은 행위가 가장 고결한 동기로부터 출발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마음을 창조하신 분만이 인간의 마음을 알고 또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판단으로 인간을 칭찬하실 수 있음을 알고 사도 바울은 그 분 앞에 열심과 충성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삶을 통해 칭찬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자는 적은 일에 충성된 자입니다.

"(마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마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마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마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마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마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동방에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습니다. 한 부유한 상인이 있었는데 사업차 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밀 두 자루를 두 친구에게 각각 한 자루씩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미안하지만 이것을 좀 맡아주게. 곧 돌아올테니 보관만 해주면 되네."

그 후 몇 달 뒤, 그 상인으로부터 일이 잘 되어 더 늦을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한 친구는 생각했습니다.

"아니 곧 온다는 사람이 어떻게 된 거야? 보관만 해달라고 했으니 그냥 둬 버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그 친구가 돌아올 때쯤이면 못쓰게 될 텐데. 뭘!"

다른 한 친구도 생각에 잠겼습니다.

"일이 잘 되었다니 기쁘긴 한데..... 이 밀을 어쩐다? 그냥 두면 못쓸테고. 이 친구는 언제 올 지 모르니 어쩐다지? 아! 밭에 심는 게 좋겠군!"

그 후, 그 상인은 몇 년이 지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두 친구에게 밀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한 친구는 묵은 냄새가 풀풀 나는 자루를 들고 왔습니다. 그 자루를 보고 상인은 그 친구를 나무라지는 않았지만 민망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친구는 그 상인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곧 추수를 기다리는 밀밭을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그 상인은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자넨 정말 신실한 나의 벗일세. 밀을 그냥 묵혀도 나는 아무 말 못했을 텐데. 이렇게 경작을 하다니! 정말 멋진 친구일세!"

그리고 그 상인은 수확하거든 밀을 두 자루만 자기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경작한 친구에게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이 상인이 기뻐한 것은 밀을 많이 얻게 되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이라면 밀을 두 자루만 맡아 달라고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친구의 성실한 태도가 그를 기쁘게 한 것입니다. 히브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명사(名詞)보다 부사(副詞)를 좋아하신다." 이 말은 일의 결과보다는 일을 해나가는 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를 본다는 뜻입니다. 밀을 많이 거두었다는 것보다 그렇게 하려고 했던 그 태도를 보시는 것입니다. 위 본문은 한 사람의 달란트가 얼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가 그것을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가 가지고 있지 아니한 능력을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능력을 충분히 사용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달란트가 다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노력에 있어서는 누구나 다 같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맡은 것이 10달란트이든, 5달란트이든, 아니 1달란트이든 이 모두는 "작은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편에서 상대적으로 아무리 크고 위대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초라해 보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모든 성도는 재능이나 권세, 돈, 지식, 건강 등에 있어 크거나 작거나 혹은 다양한 달란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양한 달란트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유익하게 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맡겨진 일에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칭찬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이지 '최고'가 된 사람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책망은 한 달란트라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선한 복음 사업을 위해 모험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려진 것입니다. 이 책망받은 자에게 내려진 형벌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는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한 달란트를 가졌다 하더라도 노력하면 그는 점차 더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한 달란트를 가지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불가피하게 그것까지 잃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재산, 건강, 재능 등을 잘 보존할 뿐만 아니라 더 풍족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복음 사업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용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용하시므로 있는 중에 더욱 풍성케 되는 축복과 하나님께로부터 칭찬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자는 마음속에 간사함이 없어야 합니다.

"(요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요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와 보라"는 말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날 수 있겠느냐?"면서 일단 의심하고 거절하였지만, 결국 행동으로 옮겨 예수님께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참 이스라엘이라는 칭찬과 인정, 그리고 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에게로 나오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언약)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성취을 소망하는 사람으로서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 마음을 의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마음이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마5:8). 바로 마음이 진실하고 청결한 나다나엘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보게 된 것입니다. 시편32:2에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모두 아십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그가 무화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유대 사고 방식에 있어서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언제나 평화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왕상4:25,미4:4). 무화과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 그 무성한 가지 아래 앉아 명상(기도)하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의심할 바 없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자, 메시아를 고대(苦待)하며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예수가 자기 심중의 깊은 곳을 통찰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꿈을 이해하는 분이 여기 있구나! 나의 기도를 아시는 분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나의 가장 사적(私的)이고 은밀한 갈망 즉, 내가 결코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던 갈망을 통찰하고 계시는 분이 여기 있구나! 말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의 탄식을 풀어줄 수 있는 분이 여기 있구나! 이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 분임이 틀림없다."나다나엘은 자기의 심중을 통찰하시고 이해하시고 만족시켜 주시는 분에게 영원히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뿐만 아니라 육신의 생활까지도 꿰뚫는 통찰력 즉, 전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한 가지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다나엘이 말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나겠느냐?"는 것입니다. '나사렛'이란 명칭은 '거룩'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곳 주민들의 생활 수준과 그곳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나사렛은 자연환경으로 볼 때, 지리적으로는 갈릴리 지역으로 예루살렘 북쪽91km, 갈릴리 호수 남쪽 24km, 해발 433m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마을은 예수님 당시 작고 보잘것 없는 고립된 마을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무식하고 성질이 괴팍하며 다른 도시의 문화적인 주민들과는 비교가 안 되었기 때문에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풍속도 추잡하고 저속한 것들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나사렛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생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공생애(公生涯) 기간에 이곳에서 이적을 행하셨고, 천국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마13:54). 그렇지만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습니다(마13:55-56).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마13:57)....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그러면 나사렛 마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그 교훈은 외형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너희가 만일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13).

오늘날 우리에게도 소위 달동네가 있는데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수준과 인격이 낮다하여 그들을 무시하는 실수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도 하나님의 경건한 자들이 성장하고 있으며,그곳은 곧 하나님이 도움이 필요한 곳이며,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참 기독교인은 무엇보다 진실한 사람입니다. 진실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예수를 만나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어 인간의 진실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진실한 삶으로 세상을 이기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 기독교인은 열심 있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교회에 열심히 다녀 보십시오. 그리하면 인간과 세상의 구세주, 메시아를 만나게 됩니다. 참 기독교인은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마음이 깨끗해지는 거룩한 역사(役事)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참 기독교인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때 누구든지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대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 기독교인이 되어 축복과 영광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자는 백부장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마8: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마8: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마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마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백부장의 믿음은 겸손을 갖춘 믿음이었습니다. 8절 말씀, "(마8:8)...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는 바로 지극히 황송스러워하는 태도로서 바로 그의 겸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백부장은 당시 백명의 로마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오만한 태도를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앞에서 더할 수 없는 겸손한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겸손을 갖춘 믿음의 생활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백부장의 칭찬받은 믿음은 말씀만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이에 덧붙여 하는 말, "(마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번거롭게 오실 필요없이 말씀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 한 마디가 건전한 신앙생활의 핵심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야말로 신앙생활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경이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말씀에서 벗어났다면 그것은 사특한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건전한가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말씀에 근거하여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에 근거한 신앙생활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자는 주님께 좋은 일을 하여야 합니다.

"(마26: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마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마26: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마26:4)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마26:5)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마26:6)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26:8)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마26:9)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26:10)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마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위 본문에 마리아가 노동자의 1년 임금에 해당되는 값비싼 나드 향유 한 병을 깨뜨려 예수께 부은 사건은 예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과 존경의 표시입니다.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님의 교훈과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였으며(눅10:39),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훌륭한 스승으로 여겨왔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신 기적과 축복을 인하여 자신이 소유한 최고의 것으로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존경을 표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 이상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는 예수님께 대한 겸손과 헌신의 표현입니다. 엎드려 발을 씻는 행위는 자신을 최대한으로 낮추는 표현입니다. 당시 손님의 발을 씻는 일은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일로 주인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마리아는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기시는 성도 여러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사랑과 헌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사랑과 헌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마음에 참 평안과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축복도 아울러 받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아름다운 사랑의 섬김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시고 칭찬하시며 축복하시었습니다.

"(마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를 은 30냥에 팔아먹을 가롯 유다는,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면서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을 돈으로 계산하며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본주의적 사고 방식과 평가, 그리고 가롯 유다의 인본주의적인 사고 방식과 평가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돈으로 계산하며 비판하는 가롯 유다가 되지 마시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도 아낌없이 헌신할 수 있는 칭찬받는 마리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자는 복음이 되시는 예수님을 위해 아낌없는 헌신과 사랑을 쏟아 붓는 사람입니다.

5.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자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진리를 사수하는 자입니다.

"(계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계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계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책망받은 일이 없고 칭찬만을 받은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적은 능력"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교회의 강하고 큰 힘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것은 적은 능력을 사용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며 매일 매일의 삶에서 그 말씀을 지켜나가는 교회를 사랑하시며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이름"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벗어나는 것은 변절이요 배교요, 주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영적 간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이름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안에서 예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높이는 것은 바로 타락한 증거인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또한 "열린 문"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이 "열린 문"은 신실한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통과할 문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시련 속에서도 복음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성을 다했으므로 이제 열린 구원의 문, 천국의 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교회, 적은 능력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은혜를 구하며 힘껏 충성하는 교회만이 끝내 구원의 문에 들어설 수 있으며 주께 칭찬받고 격려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아름다운 궁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궁전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번쯤 들어가 봤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궁전은 선한 일을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궁전 문지기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데 그 문지기는 선한 일을 한 자에게 열쇠를 주었고, 그것을 받아야만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소녀가 이 궁전에 꼭 들어가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름다운 옷과 보석을 걸치고 궁전 앞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소녀에게 열쇠를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문지기는 말했습니다.

"아가씨, 예쁜 옷을 입고 하루종일 문 앞에 서성거린다고 열쇠를 줄 수는 없습니다. 매일 한번씩이라도 남을 돕는 이에게 이 열쇠를 줄 수 있답니다."

그 소녀는 당장 돌아가 남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늙은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선행을 할 수 있음을 기뻐하며 돈을 전부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궁전 문지기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열쇠를 얻지 못했습니다. 거절당한 소녀는 실망해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또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할머니로부터 짐을 모두 빼앗다시피 하여 날라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문지기에게 다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열쇠의 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막 숲을 지날 때였습니다. 숲 속에서 가냘픈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른 달려가보니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덫에 걸려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 자기 자신을 다 잊어버린 채 그 강한 덫의 스프링을 발과 손으로 힘을 다해 벌려서 토끼를 살려냈습니다. 소녀의 손과 발은 찢어지고 피가 흘렀습니다. 치마를 찢어 토끼의 상처를 싸매주고 집에 데려와 먹이를 주었습니다. 이 때 궁전 문지기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궁전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소녀는 놀라서 말했습니다.

"저는 열쇠를 얻으려고 토끼를 살려준 것은 아니었어요."

문지기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이 궁전의 열쇠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남을 돕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적은 능력"일지라도 인류를 구원하는 복음을 위해 말씀을 지키며, 복음 전파를 위해 충성을 다하시므로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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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사랑의 권면

 "(고전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고전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고전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고전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4: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고전4: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고전4:19)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두 번째 전도 여행을 하면서 직접 개척한 교회입니다. 바울은 많은 어려움 속에 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더욱 더 애착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교회가 서로 파당을 짓고 서로 잘났다고 서로를 향하여 비난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 주위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지닌 교회가 교만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바울의 마음은 잘못된 길로 빠져 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던 것입니다. 본문의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이 성구를 어떤 번역에서는 "누가 너희를 잘난 사람으로 만들었느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잘난 척하는 교만한 사람들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분당을 이루게 된 것이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라고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날카롭게 추궁합니다. 재물이나 지식이나 재능이나 건강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 것들을 마치 자기가 잘나서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교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13절까지의 말씀은 바울과 아볼로의 겸손과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너희는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고 너희는 강하고, 우리는 비천하고 너희는 존귀하고, 우리는 주리고 목마른데 너희는 이미 배부르고, 우리는 헐벗고 정처없는데 너희는 이미 부요하고, 우리는 미말에 처한 세상의 구경거리요, 세상의 더러운 것이며, 만물의 찌끼같은데, 너희는 왕노릇하고, 우리는 매맞고 후욕당하고 핍박당하고 비방당하는데 너희는 서로 대적하고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자부심과 특권과 자랑하며 자기의 공적을 내세우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스스로 낮춰 사람들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기쁨으로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생활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한마디로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것입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아버지된 심정으로 사랑이 담긴 권면 즉 영적으로 겸손해질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의 영적 아버지로 표현함으로써 다른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직접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행 18:1-11) 그 교인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했으며(고전 1:3, 3:2) 그들이 어그러진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이렇게 사랑의 편지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과 사랑의 권면이 진실된 것이며 책망의 동기 역시 아버지 같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스승은 나이가 많고 믿을 수 있는 노예로서 자녀들을 매일 학교에 데리고 다니며 자녀의 도덕적인 면을 훈련하며, 품성에 주의를 기울여 남자다운 남자로 만들어내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많은 스승이 있을는지 몰라도 아버지는 한 분뿐입니다. 이와 같이 고린도 교인들은 앞으로 많은 스승이나 교사의 지도를 받을는지 몰라도 그들 중 아무도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바울이 한 것 같은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는 생명으로 낳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맹목적이거나 감상적인 가벼운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고전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장군과 타냐의 대화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

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 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 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신을 좇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예의 신도 물질의 우상도 조만간 내 손을 놓을 것입니다. 평생이라는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다 기울였던 그 안개 같은 나의 우상들은 코마로프가 불붙은 거리에서 어린 타냐를 떼어놓았듯이 얼마 뒤에 나를 배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허무한 우상들을 좇던 우리는 외로운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사랑은 때로는 징계도 필요한 것을 아는 사랑 또 징계를 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눈감아 줌으로 그 사람을 파멸케 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밝히 봄으로 그 사람을 개선시키는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은 상대방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상처를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잠20:30)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히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12: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히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사도 바울은 '진짜 아버지'의 심정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어찌 보면 이처럼 교만하고 불손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한 바울의 삶을 생각할 때, 그리고 주리고 헐벗고 매맞으면서도 온갖 핍박과 고통을 참으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사도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은 복음의 자녀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은 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의 실천을 보이라는 것, 바울의 겸손과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 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 안에서 화합하라는 것, 마음 중심으로 충성된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을 보여준 삶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위해 당한 다음과 같은 그의 고난의 모습을 통해 역력히 알 수 있습니다.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바울이 당한 고난의 목록은 고린도 후서 11장에도 나와 있듯이 그는 수많은 고통을 뚫고 살았습니다.

"(고후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사(선물)에는 <믿음>뿐만 아니라 <고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겸손과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새로운 삶과 그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마땅히 말로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고백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고 인정하는 자가 진정 성령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 말에 열중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앙의 형식은 거룩한 모양으로 지키고 있으나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영적 성숙됨이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사랑의 권면의 말씀입니다. 복음의 진실한 핵심은 멀리 하고 사소한 것들로 논쟁하기를 일삼는 편협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권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현실 생활을 지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가 복음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가는 도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장터에서 말을 사려고 흥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 타는 말인가요?"

"이 말은 등에 안장을 올려놓으려면 뛰고 차고 난리를 쳐서 타지는 못합니다."

"그럼 달구지를 끄는 말입니까?"

"달구지만 지우면 그냥 앉아 버립니다."

"그렇다면 뭣 때문에 팔려는 거죠?"

"모양이 좋지 않습니까? 스타일이죠."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 이 말과 같은 신자들은 없겠습니까? 안장도 못 올려놓게 하고, 짐도 지지 않고, 스타일만 갖추려는 기독교인은 없겠습니까? 우리는 스타일만의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하여 선택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오직 "겸손과 충성"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겸손과 충성을 다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여 주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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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누룩없는 떡

"(고전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고전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고전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고전5: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고전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고전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5:9)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고전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고전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고전5:12)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고전5: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당시 고린도 시는 오늘날의 도덕적 수준보다 훨씬 더 타락한 지역으로 성적 문란과 방탕한 생활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방탕한 생활에 있어서 고린도를 따를 고대 세계의 도시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무려 천 명이 넘는 무녀(우상숭배 신전 소속의 창녀)들이 아프로디테의 제단에서 일하면서 밤에는 창녀들로 활동했었습니다. 특히 당시의 영지주의(Gnosticism)와 쾌락주의(Epicureaninism) 등의 희랍철학은 성적 본능의 탐닉을 다른 어떤 신체적 욕망보다 나쁜 것으로 간주하지 않음으로서 성적 부도덕에 부채질을 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물질계는 본질적으로 악하고 더럽고, 영적인 세계만이 선하다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주장함으로써 도덕 폐기론을 유발시켰으며 쾌락주의 풍조 역시 음란한 일을 방조 내지는 가속화시켰습니다. 헬라시대의 남편들의 성적 방종은 이렇게 철학과 법에 의해 보호되었으며, 아내들은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헬라의 국가는 '공창'(House of prostitution)을 설립했으며,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아이를 기를 나이가 지난 남녀간의 혼음(混淫)을 광범위하게 허용하고 있습니다. 헬라 세계의 성적 타락에 대해 데모스테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향락을 위하여 창녀들을 두며, 매일의 육체적 필요를 위하여 연인들을 가지며, 자녀들의 어머니와 가정의 수호자로서 아내들을 가진다." 헬라에서는 혼전(婚前)과 혼외(婚外)의 관계가 정상적인 것이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로마의 풍자적 작가인 쥬베날은 로마 세계의 성적 타락을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아내인 황후 메사리나의 경우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황제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녀 한 명과 함께 밤에 머리에 뒤집어쓰는 고깔 달린 겉옷을 걸치고서 공창(公娼)이 있는 자신의 특별한 방으로 와서 거기에서 저속한 창녀들처럼 몸을 팔았다." 로마 세계에서는 이혼이 엄청나게 흔했습니다. 세네카는 말하기를 여인들은 이혼 당하기 위하여 결혼 당하며 또 결혼 당하기 위하여 이혼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여인들이 집정관의 이름으로 연도를 헤아리기보다는 저들의 남편들의 이름들로 연도를 헤아렸다고 말했습니다. 고대 사회는 동성애로 인하여 벌집같이 흠집투성이가 되었습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들 중에서 이런 종류의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물 정도였습니다. 플라토, 아리스토틀, 소포클레스 심지어는 위대한 소크라테스까지도 이런 사랑을 했던 것입니다. 성적 타락의 정도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플라토가 사랑을 말할 때, 그는 동성애를 뜻했던 것입니다. 로마의 첫 열 다섯 명의 황제들 중에서 열 네 명이 동성애를 즐겼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당시의 가장 위대한 인간들이며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 실행한 동성애를 신약 성서 시대의 사람들이 나쁜 것으로 여기기는 정말 어려웠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 성도들에게 이 일에 대하여 경고한 것이 결코 까닭없이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롬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고전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딤전1:10)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이와 같은 성적 타락은 모든 세기와 세대에서 만연된 것이었습니다. 사회에는 항상 영예롭고, 성실하며, 순수하고, 순결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이 살던 때의 분위기는 위에 언급한 바와 같았기 때문에 사회에 널리 만연된 부도덕의 감염을 피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은 너무도 부도덕하고 타락하여 생활 구석구석에서 고질화된 모습이었습니다. 고린도 지역의 이러한 음란과 방탕한 풍조가 교회 내까지 침입하여 근친상간(近親相姦)이라는 패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전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이와 같은 성적 타락의 모습은 소돔.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돔·고모라의 멸망 후 롯의 두 딸이 그 아비 롯과 동침하여 자녀를 생산한 것도 근친상간의 한 예입니다.(창 19:30-38)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교도(異敎徒)들은 순결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순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때, 원하는 곳에서 얼마든지 죄의식 없이 성적인 쾌락을 마음껏 탐닉했던 것입니다. 음란 마귀는 시공(時空)의 경계를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교회들을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가 음란한 풍조에 물들지 않으려고 해도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몇 세대씩이나 계속해서 내려온 성적 방탕의 습관이 생활화되어 하루 아침에 갑자기 단절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순결성을 보존하려면 낡고 부패한 이교도적인 생활에 대해 각별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어떤 남자가 자기의 계모와 불의한 관계를 맺었다고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이 사태를 용납하고 그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충격적인 죄악이 교회 내부에 있음을 보고도 온 교회가 슬퍼하며 그 죄악을 제거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죄악을 관대하게 넘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패역한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해 고린도 교회가 취한 행동은 교만한 것이었습니다.

"(고전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이 문제에 대처한 고린도 교회의 행위는 그들이 이미 자신은 성령을 소유하고 많은 신령한 은사를 소유한다고 생각하고 또한 지혜를 가진 자로 생각한다 할지라도 실상은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칼라일이 말하기를 인간은 성결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죄의 무한한 추악함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미 위험한 지경에 빠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성적 타락의 사건에 대해 세상의 영을 따르고 사람을 따라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음행한 자에 대해 무관심 내지 방조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교만한 가운에 있던 고린도 교인들을 크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란 단지 비판하고 비난하면 된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몹시 놀라 스스로를 상처내면서 괴로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죄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사람들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죄를 안이하게 생각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근친상간이란 엄청난 죄를 범한 그 남자를 처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바울의 판단이었습니다. 바울은 분명한 표현을 사용하여 그 남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남자를 파문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 같이 이 세상은 사단의 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이 남자를 그가 속한 사단의 세계로 돌려보내라는 것, 즉 출교시키라는 것이 바울의 판결입니다. 이와 같은 엄중한 처벌은 보복이 아니라 결국에 가서는 그의 영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지금은 그에게 창피를 주어, 그의 욕정을 억눌러 주며 근절시켜 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행하는 처벌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제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지은 죄의 극악함과 심각성을 자각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처벌만을 위한 징계가 아니라 양심의 눈을 뜨게 해주는 징계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처벌이나 징계는 죄를 범한 인간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첫째로, 사랑의 정신뿐만 아니라 공의의 정신을 준수해야만 합니다. 교회 내에 범죄자가 있을 때에는 그를 권면하여 회개케 할 책임이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도들은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언제나 연대적 책임성과 지체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성은 한 지체가 영광을 받을 때뿐만 아니라 한 지체가 고난을 받을 때에도 발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의 무관심과 교만은 교회 내의 지체는 물론 다른 이웃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방해하는 범죄인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이루지 못한 죄는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게 해달라던 사무엘의 자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교회 내에 공공연히 드러난 범죄 행위에 대해서 교회가 징계와 출교 등 여하한 권징을 시행했을 때에는 회개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 교회가 이루어야 할 공의 정신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분께로 돌아오도록 인도하는 구속의 한 장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매를 들어 치리권을 행사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첫째, 교회의 성결 보존을 위함이며, 둘째,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범죄한 자를 회개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범죄한 교인에 대해서 먼저 신앙의 형제들이 훈계할 것이며 그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가 권고할 것이며, 그 말도 듣지 않을 경우에는 치리권을 행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범죄자가 회개하거든 기꺼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18: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눅17: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교회 안에 죄악을 방치하여 죄악이 교회 안에 침입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마치 누룩이 가루 덩어리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 같이 되어 교회 전체를 타락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죄악에 대해 징계하지 아니하고 눈을 감아준다면 그것은 그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을 더하여 주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독은 퍼지기 전에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잡초는 정원 전체에 퍼져서 더럽히기 전에 뽑아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최후로 결정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고전5: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이 말씀은 신명기 17:7 및 24:7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신17:7)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신24: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후려다가 그를 부리거나 판 것이 발견되거든 그 후린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암은 제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전염을 막기 위해 단호한 처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는 기쁨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겠다는 욕망도, 자기의 실력을 과시하겠다는 소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이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목자의 간절한 마음인 것입니다. 교회의 성결 보존을 위해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음행자와 사귀지 말라고 밝힘으로써 성도의 성결한 삶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전5:9)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교회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신부입니다. 신부의 생명은 성결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결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인 것입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 교회 안에 불의한 범죄가 있으면 교회는 거룩성을 보존하기 위해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회가 성결을 보존하는 것은 예수의 피와 성령과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거룩해질 수 있는 제사 제도(祭祀 制度)를 세우셨는데 그 핵심은 "피(血)"에 있습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贖)하느니라".

속죄 제사(贖罪祭祀)를 통해 이스라엘을 성결케 하시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임재(臨在)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보혈(寶血)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음을 예표(豫表)한 것입니다(히8:5,9:1-14). 에스겔 36:25-26에서는 성령에 의한 성결함을 예언했습니다.

"(겔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 시대에 우리는 오직 예수의 피로, 말씀으로, 성령으로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우리의 성결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요17:15).

"(요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성결은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살전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가진 자는 성결해야하며(고후7:1)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고대(苦待)하는 자는 성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딛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딛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결은 받아야 할 은혜로서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또한 생활되어져야 할 방식으로 빛되시는 예수와 사귐을 통해 얻어지는 성결 생활(요일 1:7)이 성결 보존입니다.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 웨슬레는 "가장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를 자기의 선지자로서 <세상의 빛>으로서 여전히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순간 순간의 빛만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물러가시면, 모든 것은 흑암이다. 하나님은 성결에 대한 저축을 주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순간 순간 공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불결(不潔)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성결 보존은 신의 성품을 산출(産出)케하는 성령의 역사(役事)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의 더러움을 교회 안에 들여와서는 안 됩니다. 배가 바다 물 위에 떠가나 물이 배안에 들어오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악을 피하기 위해 도피하는 염세적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 한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은 것은 그들이 세상에 동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기 위함이며, 세상 가운데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누룩없는 공동체로 존재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는 먼저 자신을 세상과 구별된 순결하고 깨끗한 존재로 보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순전하고 누룩없는 떡"으로 교회가 보존되어질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유대 문학에서 누룩은 나쁜 영향을 나타냅니다. 사람을 부패시키고 타락시키는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의 떡은 누룩이 없는 떡을 사용했습니다.

"(출12:15)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유월절 전 날에는 촛불을 켜 들고 의식을 차리고 집안에 있는 누룩을 찾아내어 아무리 적은 누룩이라도 모두 내버려야만 합니다. 이 누룩을 찾는 날은 4월 14일인데 이것이 우리가 부활절 전 고난 주간 첫날에 각 가정과 교회 안팎을 대청소하는 춘계 대청소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십자가에 희생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마지막 한 조각도 우리의 생활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빚어진 성도들은 묵은 누룩이 뜻하는 음란과 정욕, 술취함과 방탕,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 등 죄악의 습성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고 새 사람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에서 "순전함"은 동기(動機)의 순수함을 나타내고 "진실함"은 행동의 순수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는 기독교인의 삶의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누구든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는 유혹을 전혀 받지 않고 살게 될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유혹을 받는다고 해서 성결해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히4:15)...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분이십니다. 유혹은 우리의 가장 약한 곳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혹을 묵인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약한 곳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은 유혹뿐이며 그 유혹을 이겨내면 약한 곳이 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패하고 타락한 이 세상에 접촉해서 사는 동안 끊임없이 오관(五官)을 통해서 유혹을 받겠지만 우리가 그 때마다 유혹을 끊어버린다면 우리의 영혼에는 아무 더러움이 묻지 않고 끝나는 것입니다. 밀톤의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악이 하나님이나 사람의 마음속에 드나들 수는 있지만, 받지 않고 물리치면 아무 자국이나 허물도 남지 않으리." 우리가 순간 순간 유혹을 받을지라도 마음을 단속하고 악에 끌려 들어가지 않는다면 아무런 허물이나 진노하심도 남아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거울과 같은 물 위를 안개가 스쳐간들 물결도 물여울도 일으키지 못함 같이........ 그러면 죄란 무엇이겠습니까? 죄는 유혹을 만나는 그것이 아니고, 유혹에 빠진 결과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바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영국 의학협회에서 발간한 책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순결은 유행에 뒤진 것이며 젊은 사람에게 이것을 더 이상 가르쳐서는 안 된다." 이런 풍조 속에 임신중절이 놀랍게 널리 유행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1년에 30,000,000건이라는 놀라운 숫자의 낙태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더욱 더 두려운 것은 이같은 낙태수술을 점점 더 허용하는 법률이 법제화되고 있고, 동성애까지도 법률로 허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태 속에 기독교인의 순결은 과거 어느 때 보다 더 훨씬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기독교인의 빛이 어두운 곳에 비쳐져야 할 때입니다. 만일 교회가 이 세상에 영합하려는 정책을 추구한다면 교회는 바로 그 존재 이유를 이미 상실한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할수록 세상은 교회가 성결 보존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본질적으로 세상과는 다르다는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세상은 교회를 존경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항상 세상을 본뜨려고 노력한다면 이를 존경하지도 이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느 소녀가 산상수훈을 읽는 것을 보고 어른이 묻기를,

"너는 이 복 있는 자 가운데서 어느 구절을 택하겠느냐?"

한즉 그 소녀는 서슴지 않고

"저는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다는 곳을 택하겠어요."

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물은즉

"예, 이것만을 가지면 다른 복도 다 가질 줄 믿어요." 라고 했습니다.

순전하고 진실함의 누룩없는 떡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보내신 성령으로 성결보존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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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

"(고전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고전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고전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고전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전6: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고전6: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전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고전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전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유대인들은 동족간의 문제를 이방인의 법정에 고소하는 것을 명백히 금하며 그같은 행위는 하나님의 율법을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본래 성격상 소송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헬라인의 그 소송을 좋아하는 습성이 고린도 교회에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교인들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대원칙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형사 소송도 아닌 재산 소송을 사회법정에 맡겼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이같은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리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은 교회에 발생하는 각종 파벌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송사 문제로 사회 법정에 가는 일이 생겼때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고전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 송사 문제가 생겼을 때 당장 세상 법정에 끌고 가지 말고 가급적 교회 안에서 해결하도록 하고, 장차 하나님 앞에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임을 알고 좀 손해를 본다해도 길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불가피하게 금전 거래를 할 경우, 장로나 권사, 집사 등의 상대방 직분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신용상태나 상환능력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는 상대방이 제아무리 예언하는 능력이 출중하고 은사가 다양하다해도 그 인격을 신용할 수 없는 사람과는 거래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려주었는데 도저히 받을 수 없게 된 경우, 그리고 법적 소송을 제기해서 확실하게 승소할 수 있을 경우에도 그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가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 거리에 쫓겨나 앉을 형편이라 할지라도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며, 오히려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 준 사람이 잘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세상이 다른 점입니다. 잠시 있다 없어질 물질 때문에 영적 손해까지 입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도들은 장차 세상을 심판하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실 분들입니다.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러므로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세상 법정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영적 능력이 쇠퇴했다는 증거입니다. 성도들은 세상 법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는 상식 밖의 일들과 비합리적인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한 사람이면 될 일을 열 사람이 하고, 돈 십 만원이면 할 수 있는 일을 삼십 만원씩이나 들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구조개선, 경영합리화나 경영기법을 도입해서 이득을 남기는데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한 사람이 할 일을 열 사람이 함께 하게 하고, 십 만원들일을 삼십 만원 들여 모두가 다 동참할 기회를 주어 한 사람 한 사람을 신앙공동체 훈련과 그리스도인 인격의 성숙을 도모하게 하는 곳입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키워 가는 결코 아닙니다. 교회 성장은 성도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데 있습니다. 세상은 실패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일흔 번씩 일곱 번 주는 곳임을 보여야 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한 번 실수하면 두 번 용서하고 열 번 실수하면 스무 번 용서하는 곳으로 그 용서가 아무래도 좋다가 아니라 그 실패와 실수를 결국 하나님을 닮는 자리로, 거룩한 자리로, 죄를 외면하는 자리로 인도해 가는 것이요, 그렇게 되기까지 교회는 절대 그 사람들을 쫓아 내지 않고 붙잡고 훈련을 시키고 붙잡고 함께 울어서 고쳐내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야 되는 곳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거룩의 완성의 자리로 가야 되는데 혹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그 실패를 통하여 그 실수가 우리를 거룩으로 가게 하는, 실패와 실수가 용납되며 연습이 되는, 거룩을 완성하기 위해 연습이 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 거룩의 완성을 위하여 시행착오가 용납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가 거룩의 완성에 틀림없이 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사의 결론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형제의 실수나 허물에 대해 비판하기 보다 사랑을 가지고 인내하며 좋아질 때를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지금 저 원수만 없으면 우리 교회가 금방 그냥 열 배로 부흥될텐데 하는 생각을 버리고 그 원수가 하나님 앞에 귀히 쓰이고 하나님의 만족할 만한 사람으로 변할 것을 믿고 사랑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같은 처사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비합리적이고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한 사람을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문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 안에서 풀어갈 수 있도록 해야지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시도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영원하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곳이기 때문에 세상 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고전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고전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성도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보다는 먼저 교회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법정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았다해도 교회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미숙함을 말합니다. 설사 네 행위가 모두 옳다할지라도 상대방을 법정에 세우지 말고 상대방이 하나님 앞에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하며 좋아질 때를 기다리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싸우는 자리가 아니고, 잘못한 사람이 있거든 그 잘못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므로 피차에 거룩의 완성에 이르게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잘못한 사람이 더 큰 소리를 치고 피해를 입히거든 너희가 조용히 물러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해결방법이지 누가 옳으냐를 세상 앞으로 끌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가야 되는데 하나님은 세상이 쓰는 방법,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방법을 쓰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누구의 승패를 가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때가지 사랑으로 인내하며 서로가 함께 성장해 가는 곳이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서로 다투어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피차에 상처를 서로 싸매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피로 하나된 형제들입니다.

"(고전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형제가 아무리 못났고 못되었어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한 형제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돌에 맞으면서도 천사의 얼굴로 순교 당한 사람입니다. 그가 순교 당할 때 가표를 던진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 사울을 저주하지 않았고,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죄사함을 빌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바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란 옳은 자가 칼을 잡는 곳이 아니라 틀린 사람이 돌을 던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옳은 자가 그 틀린 자가 던지는 돌에 맞고 조용히 죽어 가는 것이 교회의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하면 "왜 틀린 것들이 교회에서 돌을 던지고 목소리를 높이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틀린 것들을 싹쓸이하고 옳은 사람으로 앞세워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자가 아닙니다. 교회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틀린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는 곳이 교회이고 옳은 사람이 묵묵히 돌을 맞고 돌아가는 데가 아름다운 교회요, 강한 교회요 성경이 요구하는 교회의 모델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 문제 거리를 일으키는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몰상식한 신자가 있을 수 있고, 신앙을 오해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신자의 초보단계에서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싸움은 언제나 부딪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는 말이 있듯이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함께 부딪쳐야 싸움이 일어납니다. 싸움의 이유는 네가 틀리고 내가 옳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내가 옳았다고 하는 것이 틀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높은 경지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6: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전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은 그의 실패, 그의 무식, 그의 낮은 수준이 깊어질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지금 싸워서 그의 유치함을 증명하고 그의 틀린 것을 심판하여 그를 잘라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결국 어떤 몰상식한 사람, 어떤 신앙의 잘못된 것으로 인하여 딴 얘기를 하는 사람, 하나밖에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에 의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기다려주지 않고 참아주지 않고 심판하려고 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참으로 사랑으로 참아주고 기다려 주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 누가 속상하고 누가 틀린 것을 들으셨습니까? 말없이 가서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교회 안의 문제를 푸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을 성경이 제시한 적은 없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문제이고, 그 해결책이고,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을 둘러보십시오. 위해서 기도할 사람이 많은 줄 아시고 여러분 마음에 있는 시기와 질투와 그 싸움들을 몰아내기 위해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업적 하나로 나머지 모든 잘못을 때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잘한 것이 없습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용서할 수 없는 마음, 어떻게 해서라도 손가락질하고 싶은 마음,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침을 받아 장차 하나님의 심판 때에 칭찬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찌꺼기와 같은 인간을 인간다운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수치를 모르던 인간을 붙잡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변화의 능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내놓으시고 해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불의를 당하셨으나 세상 법정으로 가지 않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므로 인류를 구원하시고 그의 의로우심을 증거했습니다. 십자가를 지더라도 차라리 불의를 당하시므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으시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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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전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고전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고전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전6: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고전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6: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 고린도 교회에 파고들었던 이단적 사상은 <영지주의, Gnosticism>였습니다. 영지주의란 물질계와 영적인 세계를 완전히 분리시켜, 물질세계는 항상 더럽고 악하지만 영적인 세계는 항상 깨끗하고 선하다고 보는 이원론적인 사상을 말합니다. 이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면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를 부정하게 됩니다. "어떻게 선하신 세계 속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더럽고 악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실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영지주의가 말하는 물질세계와 육신이 죄악 되고 더러운 것이라면 이는 두 가지 상반된 결론이 가능합니다. 첫째로, 육신은 본래 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는 육신의 더러움과 악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전혀 다른 세계이며, 또 이미 더럽고 악한 육신을 가지고 더러운 일을 행했다 하더라도 더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은 자신의 육신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결론에 도달한 영지주의 이단은 보통 <도덕 폐기론자들> 또는 <자유 방임주의자들>이라고 불려집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로 이러한 자유방임주의적인 영지주의 이단의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둘째로, 육신은 더럽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금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신뿐만 아니라 물질계에 속한 것은 다 악하고 더럽기 때문에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고, 아예 건드리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금욕주의적 영지주의 이단 사상은 골로새서에서도 발견됩니다.

"(골2: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또 바울서신에서도 발견됩니다.

"(딤전4: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식물이나 성관계는 모두 더러운 물질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금욕하는 것이 좋다는 태도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러한 사상은 발견되고 있습니다.

"(고전7:1)....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한국 교회 내에서도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경건파 신자들 가운데 이러한 금욕주의적 성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을 속되다고 생각하여 가능한 한 피하려 하고 금식을 찬양하며 마치 그것이 경건의 지표인 양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거스틴은 결혼생활에서 조차도 아이를 갖기 위한 목적이 아닌 성적 접촉을 죄로 보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부부들에게 경고하기를 잠자리에서 성적인 관계를 갖게 되면 성령이 그 자리를 떠난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이브스(Yves of Chartres)같은 이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목요일에는 그리스도의 잡히심을 인하여, 금요일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기억하여, 토요일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영광을 인하여(또는 예수의 무덤 속에 장사지내심을 인하여), 일요일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그리고 월요일에는 이미 고인이 된 조상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서 성생활의 절제를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개혁자들은 인간의 성을 보다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타락한 세상의 음욕을 염려하며 왜곡된 성(외설, 음욕, 가학성 변태성욕, 피학대 음란증 등)에 대해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만물은 다 깨끗하고 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법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성도들에게 유익을 줄 것입니다.

"(롬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14: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기독교인이 물질을 숭배하고 돈을 좋아해서는 안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딤전6:17)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누린다."는 말은 향유하고 즐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성(性, Sex)도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제도 속에서는 향유하고 즐기기 위해 주신 것이며 물질도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줄 알고 감사함으로 향유하고 즐기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금욕주의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창조질서 속에서 모든 것이 제대로 사용되기만 한다면 만물은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이처럼 영지주의 이단 사상에 따라 물질계인 몸에 대해 자유방임주의적인 태도를 취함으로 음행을 일삼으며 음란한데 빠져 창기와 더불어 합하는 것을 죄악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죄의 종노릇하는데 빠지고 만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를 얻어 그리스도의 지체,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주님의 일을 이루며 희생과 절제와 봉사와 충성으로 의와 거룩함을 나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창기와 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전6: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고전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6: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성도들의 이러한 자유는 자신이 기뻐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며 따라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12절)는 정신에 입각해서 향유되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도의 자유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데에 있어서 자유롭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자유는 자신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과 내 이웃, 형제를 위한 자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단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빙자해서 그릇된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유방임주의를 방패로 삼아 음행을 저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용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가하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고전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율법있는 자 같이 사는 것과 율법 없는 자 같이 사는 것도 신앙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약한 자 같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방언을 하든지 못하든지, 예언을 하든지 못하든지, 많이 배웠든지 못 배웠든지, 많이 가졌든지 못 가졌든지 등은 모두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왜 그가 참다운 신앙을 갖고 하나님께 매달리는데 어렵게 사는가 하는 것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사수하고 성결보존하며 열심과 충성을 다 하는데 왜 자녀가 학교에 떨어지느냐 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것은 모두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엽적인 것들입니다. <레마선교>에서 얘기하는 것과 같이 믿음을 가지면 모든 병이 낫는다던가 <베뢰아파>처럼 올바른 믿음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고, 사도 바울은 늘 고난과 병 속에서 헤맸습니다. 사도 바울보다 더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그는 늘 병마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이것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병치레가 많으냐 건강하냐 이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 성구에서 본질적인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후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교육을 받았느냐? 얼마나 부자냐? 얼마나 능력있느냐? 등은 전부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외의 어떤 것도 본질적인 것이 없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딱 하나 "예수 안에 있느냐? 예수를 믿느냐? 예수를 위해서 사느냐?" 이것 외에는 묻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해지고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것은 다 사기입니다. 그런 것을 성경이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십자가,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 이것이 본질인 것입니다. 이 본질이 중요한 것임을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전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고전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고전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에게는 그의 육신이 쾌락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자기의 쾌락,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런 배는 음식 먹고 배부른 맛, 맛있는 음식 먹는 것밖에는 몸이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몸을 음란과 쾌락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성구에서 신앙의 본질을 말합니다.

"(롬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롬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신앙의 본질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고" 인색함을 풀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듭 신앙의 본질을 이렇게 말합니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것은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 위해서는 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 본질이고 내가 무슨 꼴이 되느냐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이 여기서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상관없고 내가 문제지, 나는 이것을 못 참습니다." 어떤 나이 많으신 권사님 한 분이 기도원 원장이신데 아주 부자였습니다. 그분이 어느 날 어떻게 그렇게 부자가 되셨는가를 간증하셨는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밤을 새워가면서 호소를 했답니다. "하나님 저는 돈 없으면 못 살아요." 그랬더니 그 뒤로 하나님께서 돈을 얼마나 많이 주셨는지 동대문 시장에서 포목상을 했는데 매일 리어카로 돈을 포대에 쌓아 갖고 와서 그 돈을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권사님이 자랑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하나님 전 돈 없으면 못 살아요." 이것이 기도입니까? 그것을 기도라고 하고 또 간증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돈을 주었으며 "이 사람은 이것을 안 주어 가지고는 안될 사람이니까 돈을 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붙잡아 주셨다"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그러면 왜 나에겐 물질을 안 주십니까?"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넌 안 주어도 되는 사람으로 봤기 때문인데 너도 돈 없으면 못살겠니?"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앙의 본질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과 나라는 존재를 통해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식물을 위하여 있지 않습니다. 쾌락을 위하여 있지 않습니다. 음란과 음행, 그리고 창기에 자신의 몸을 팔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 자신의 몸을 바치고 희생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성경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는 것임을 말합니다. 나를 비운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좇기 위해서 그물과 배와 그 부친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마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마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4: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마4: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속칭 다음과 같은 교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달구지 같은 교인 - 밀어야만 가는 사람

연 같은 교인 - 끈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언제 어디로 갔는지 날아가버리는 사람

고양이 같은 교인 - 줄곧 토닥거려 줘야 만족하는 사람

풋볼 같은 교인 - 다음 순간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는 사람

풍선 같은 교인 - 잔뜩 부풀어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사람

전구 같은 교인 - 쉴새없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사람

이런 신자들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사람들로 자기를 비우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2) 더 나아가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야 합니다. 종은 헬라어로 둘로스인데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머슴>에 해당합니다.

머슴은 첫째 걱정이 없습니다. 머슴은 주인의 명령에 순종만 하면 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삶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께 순종만 할 따름인 것입니다. 머슴이 걱정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둘째로 머슴은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머슴은 주인의 명령에 이유를 달 필요가 없습니다. 머슴은 주인이 소를 몰고 오라 하면 비가 와도 어김없이 소를 몰고 와야만 합니다. 셋째로 머슴은 24시간 대기해야만 합니다. 머슴은 주인이 잠든 새벽에 일어나 쇠죽을 끓입니다. 넷째, 머슴은 주인뿐만 아니라 주인의 가족까지 돌보아야 합니다. 다섯째, 머슴은 불평할 자격이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묵묵히 행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해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 즉 머슴이 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서로 머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려야만 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자신을 날마다 죽이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참으로 사나 죽으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태어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슬픈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를 찾으시는 깊은 믿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1808년, 악성 하이든이 죽기 꼭 1년 전이었습니다. 그의 오라토리오 <창조>가 비엔나에서 연주되었습니다. 늙고 몹시 쇠약하였으나 하이든도 휠체어에 실려 참석하였습니다. 감격스러운 연주가 끝나자 연주자 일동과 청중은 모두 일어서 하이든이 있는 발코니를 향하여 박수를 보냈습니다. 하이든은 몹시 당황한 빛으로 "내가 아니오 내가 아니오. 빛을 만드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오!"라고 말하며 휠체어에서 상반신을 일으키다가 앞으로 쓰러졌습니다. 즉시 노인을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하이든은 실려가면서도 계속 "내가 아니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오."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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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기독교인의 결혼관(1)

"(고전7: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고전7: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고전7: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고전7: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고전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전7: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고전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고전7: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고전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전7:10)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고전7:11)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고전7: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고전7: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고전7: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고전7: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7:16)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고전7: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고전7:18)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고전7:19)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고전7: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고전7: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고전7: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고전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전7: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1. 우리는 음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 음란한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올바른 결혼관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여성대표가 조물주를 찾아가 불평을 했습니다. <어째서 아이를 낳을 때 여자만이 혼자서 그 고통을 겪게 만들었습니까? 이 불평들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아이를 갖게 한 남자 측에서도 그 진통을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산모의 고통을 반으로 덜어주고 나머지 반은 남자에게 주어야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성의 이러한 호소를 조물주는 그 자리에서 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조금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정당한 불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커다란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세상에는 깨끗하게 정절을 지키고 사는 여성들만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막상 진통을 해야 할 남편은 멀쩡한데 엉뚱하게 이웃집 남자가 갑작스레 배를 움켜쥐고 소리를 지르는 해괴한 광경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또 아내가 아이를 낳지도 않는데 남편 혼자서 진통을 하느라고 땀을 흘리는 수도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그의 아이를 낳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진통으로 도처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가정이 깨어져나갑니다. 조물주가 한숨을 짓고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여성 대표가 다시 찾아옵니다. 산고보다도 몇 배나 더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빨리 원상복귀를 해달라는 애원이었습니다. 부정(不貞)이 양성화될 때 남성보다 여성이 당하는 벌이 몇 배나 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생활에 있어 여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의무는 바로 정조의 문제입니다. 오늘날처럼 프리섹스시대가 아니라도 유럽의 경우, 이미 혼전 성관계가 로코코 시대 때부터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인공적으로 처녀성을 만드는 장사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를 보면 됩니다. 훅스의 조사에 따르면 그 당시의 약제사나 약종상(藥種商)은 수렴성(收斂性) 연고와 약으로 몇 번이고 처녀성을 만들어주는 이른바 <처녀 부활약>이라는 것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리고 주문이 쇄도하는 바람에 그들은 한결같이 거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기약이 아니라 <처녀 부활약>으로 약제사들이 치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혼전 성관계가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혼인의 순결성이 그다지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도덕적, 윤리적 심각성에 봉착해 있음을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인류학자 언윈은 "인류가 겪어온 88개 문명의 흥망사에서 재미있는 공통점을 지적할 수 있다. 어느 문명이나 그것이 일어나는 시대에는 성도덕이 건전했고 그것이 쇠망하는 시대에는 성도덕이 문란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동의 10%가 13세에 섹스를 경험하고, 해마다 10대 소녀의 10%가 임신하며, 대학생의 66%가 혼전 성관계를 체험했고, 80%가 혼전정사를 부도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미국의 성문제는 개인이나 가정문제를 넘어 문명의 존폐 위기에 관계된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미국의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우리 한국의 성적 타락의 현상도 미국에 못지 않게 나라의 존망을 위태롭게 할만큼 심각한 상태에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2. 이 음란한 시대에 금욕적인 독신생활이 신앙생활에 바람직한 것인가? 본문 1절이 제기하고 있는 바가 바로 그런 문제였습니다.

"(고전7: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문의한 내용 중의 하나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신령한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오해했던 것은 '보다 깊은 신앙의 차원에 이르려면 결혼을 안하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독신생활이 결혼생활보다 더 신령하고 <고급신앙>이며, 결혼생활은 저급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또는 독신생활이 신앙의 성숙에 있어서 결혼생활보다 낫다는 오해를 가졌던 것입니다. 제삼자가 볼 때 목사보다는 천주교 신부가, 개신교의 권사보다는 천주교의 수녀들이 더 신앙적이고 신령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안 했거나 금욕적인 것이 더 신령하고 더 신앙적이라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천주교 신부와 기독교 목사 중 어느 쪽 신앙이 더 좋아 보입니까? 대부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다 천주교가 더 종교적인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부와 수녀들이 결혼을 안 하니까 금욕적인 것으로 일단 더 점수를 줍니다. 그러나 만나서 얘기를 해보면 개신교 목사를 이길 만한 신앙을 가진 천주교 신부는 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부가 언제 마누라 때문에 속을 썩어봤겠습니까? 그가 언제 애 때문에 밤잠을 설쳐 봤습니까? 그런 것을 안 해 보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것입니다. 천주교 신부가 무슨 애국심을 가지고 민주화 투쟁으로, 무슨 인권 운동에 목숨을 걸고 그의 전 생애를 바쳤어도 속상하게 하는 아내와 일주일 산 것보다 훈련되는 양이 적은 법입니다. 결혼을 하고 일주일 살다 죽더라도 그것은 참 복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을 해서 30년 이상씩 산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안 훌륭해지겠습니까? 훌륭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있는 것이 좀 더 센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독신으로 60세를 산 사람보다 결혼해서 6년 산 사람이 더 센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우리보고 결혼해서 속상하는 아내를 만나고 속상한 남편을 만나고 속상한 부모와 속상한 자식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못 고친 병 남편이 고치고, 남편이 못 고친 병 자식이 고쳐서 결국 훌륭해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정한 법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훌륭해지느냐 하면 지지고 볶는 사람입니다. 누가 더 많이 지지고 볶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부부란 "원수끼리 만난 사이가 부부다."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애를 낳으면 좀 나을 줄 알았더니 혹 떼려다 혹 붙인 게 자식입니다. 교회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서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늘 필요한 만큼 문제가 있어서 속을 썩어야 되고 그래서 기도해야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훈련 도구가 되고 또 위로자가 되고 해결책이 되고 어떤 때는 매달리고 어떤 때는 업어주고 그렇게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금욕과 세상에서의 질서를 벗는 것이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지지고 볶는 그 속에서 신령한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참 뜻이며 정말 센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부부의 성에 관한 문제도 결국 우리가 이해해야 될 것은 금욕적인 것이 거룩으로 가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 결혼을 하는 것이 완성으로 가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독신으로 부름받아 하나님이 그를 거룩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더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은 결혼을 해서 지지고 볶는 속에서 거룩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견해는 남자나 여자나 독신의 은사를 받는 것은 좋지만, 독신 상태가 결혼한 것보다 월등히 나은 것은 아니며 더욱 어느 누구에게도 독신생활이 최상의 생활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신이나 결혼 중 어느 하나를 절대시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바울이 독신을 좋게 여긴 것은 그것이 창조 질서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근본 목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최선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그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에는 독신생활을 인정하는 성(性)의 신학이 없습니다. 실제로 유대교는 독신주의를 이상한 것으로 경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세된 남자들은 제사장이 되는 것을 금한 것 등입니다.(레21:20)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결혼을 반대한 것이 아니며 실제로 8,9절에서도 독신으로 인해 성적 욕망으로 타락하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독신 생활은 은사에 따라 허용되기는 하지만 명령은 아닌 것입니다. 또한 독신은 일종의 은사이며 아무나 이 은사를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고전7: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고전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창2:18) ....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독신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속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입니다.

"남편 때문에 나는 신앙이 나빠졌습니다."

"아내 때문에 내 신앙은 자라지 않습니다."

"애들 때문에 나는 짐이 무거워서 신앙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부부생활 때문에 내 신앙생활이 더 신령해지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사기이고 오리발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신앙에 방해될 것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결혼은 오히려 여러분의 신앙을 깊이 있게 하고 세상과 인생의 거짓된 것을 보게 하기 위해서 주신 처지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귀하신 주여, 결혼은......하나님의 선물이옵니다. 그것은 가장 감미롭고 값진 것이옵니다. 최고로 순전한 삶이옵니다." 노만 로벤츠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정(不貞)을 막는 데는 생기 있고 흥미로운 결혼생활이 특효다." 결혼생활 가운데서 우리가 신비와 흥분 그리고 모든 매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자리는 역시 성적인 친밀함의 자리입니다.

3. 그러면 결혼한 사람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

"(고전7: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고전7: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고전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몸을 주장한다"는 말의 뜻은 무슨 뜻인가? 남편과 아내의 몸에 완전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서로 상대방에게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이 아담스 교수는 상대방의 "몸을 주장하는 일"은 아내나 남편이 상대방에게 성생활을 통한 만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주장을 포함한다고 해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이란 그의 책에서 아담스 교수는 아내나 남편이 요구하는 성생활을 정당한 근거 없이 상대방이 거절하거나 오랫동안 거부하는 행위는 이기적이요 비성경적인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생활의 울타리 안에서 부부 사이에 건전한 성생활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전한 성생활이 존재하지 않는 결혼생활이란 것은 진정으로 행복한 결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혼제도를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결코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 건전하고 건강한 성생활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습니다. 가정생활이 불신의 늪을 헤매이거나 깨어지게 되는 원인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성경적 원칙을 부부 중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바울은 5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분방하다"는 말의 헬라어는 "속이다. 착취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동사를 사용한 배경을 볼 때 정당한 근거 없이 자기 몸을 상대방에 주기를 거절하는 행위를 분명히 "사기"요 "착취"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런 남편이나 아내는 도둑질하는 사람이요, 사기질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인정하는 정당한 근거는 본문에서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 "잠시 동안", 그것도 "합의상" 떨어져 사는 것 같은 일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생활이라는 미명아래 아내나 남편이 상대방에게 절제를 강요해도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합의상" 그리고 "얼마 동안"이라는 명백한 제한을 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의 인격적인 합의에 의해서만 그것도 잠시 동안만 떨어져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부 모두에게 동등한 결혼의 의무와 권리를 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내나 남편이 집을 비울 때는 반드시 서로의 동의를 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도둑질하는 사람이요 사기질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합의상" 떨어져 있는 것도 "잠시 동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은 부부가 함께 살기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돈을 번다는 명분에서나 기도생활이라는 명분에서 부부가 오랫동안 떨어져 사는 것은 그만큼 성경적 원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결혼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본문 10절 - 16절은 바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랍비 힐렐이 주도하는 힐렐 학파는 남자가 어떤 이유로든 아내와 이혼해도 좋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밥을 태웠다던가, 자기를 더 기쁘게 해주는 다른 애인을 만나게 됐을 경우 등은 충분한 이혼사유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랍비 샴마이로 대표되는 다른 학파는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이혼사유는 결혼의 부정 외에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 논쟁에 빠뜨리려고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마19: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시고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9: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마19: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한 몸"의 실재가 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답변은 모세의 율법적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마19:7)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마19: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모세는 여성들이 완악한 남자들로부터 보호받도록 하기 위하여 이혼을 허락했다는 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벽에 머리를 쥐어 박히느니 차라리 이혼 당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본래는 이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혼 때문에 여자들이 당한 상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혼에 해당하는 용어는 정확하게 문자적 의미로는 "내어버리다"라는 뜻이며, 여자들은 아주 간략한 절차로써, 법정이나 회당에도 갈 것 없이 버려질 수 있었습니다. 또 이혼 사유란 자기 차례도 아닌데 말을 했다든지, 강아지를 발로 걷어찼다든가 하는 실로 어떤 이유라도 성립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여자는 1세기의 가부장적 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희생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여자를 희생시키는 그러한 악습을 반대하신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아내를 버린 남자는 그녀를 "간음하게" 하는 자라고 질타를 하셨습니다.

"(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바는 거리로 쫓겨나게 된 여인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녀는 밖에 나가서 직업을 구할 데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딱 하나 팔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몸을 파는 매춘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세기경에 매춘이 판을 치게 된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고전7: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이혼은 "화평 중에 부르신" "한 몸"의 연합을 깨뜨리는 분열로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가능한 모든 은총의 수단과 방법을 다 써 본 후 최종적인 해결책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단지 결혼생활 중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든지"하는 이유로 이혼을 선택하는 것은 정면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찰스 스윈돌은 "결코 성급하게 서두르지 말아야 할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곧 장례식과 이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쉽사리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글자 그대로 용서받고 구속된 관계의 소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혼에서 성공하기를 열렬히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때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해 보았습니다.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으며, 안 해본 일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결혼생활은 절망과 고통의 늪으로 빠져 갑니다. 이런 경우라면 사랑의 법은 이혼해야 할 것을 명령합니다. 진실로 이혼만이 사랑의 법이 처방한 최종의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라면 대부분의 이혼의 현장에 나타나는 악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이란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이혼을 하게 될 때에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변호사와 재판관으로 삼아 사랑의 법에 순종하도록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결혼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이혼하는 것보다 현저히 파괴적이라는 판단이 분명히 서면 그때는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최종적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이혼을 택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정죄하신 바와 같이 냉정하게 "내어 버려서는" 안됩니다. 적절한 재산의 분배를 통하여 살 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 양자가 모두 빈궁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어느 편도 상대방을 감정적으로 "내어 버려서는" 안되며 가능한 한 성심을 다하여 고통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충성하려고 잘못된 결혼생활이라 해도 그를 포기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극도로 험난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성도들의 뜨거운 기도와 협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이 나중에는 결국 이혼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해도 그들은 결코 실패하였다거나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너그러운 사랑으로 받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 한쪽이 불신자인 경우에 불신자 편에서 이혼을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그가 떠나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고, 불신자가 결혼생활을 계속 원한다면 이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배우자를 통해서 불신 배우자가 깨끗해질 수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 자녀들까지도 깨끗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불신 배우자에게도 회심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가 결혼생활을 원한다면 그 생활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의 분열 문제를 다룬 어그스버그(David Augsburg) 박사의 저서 <사랑의 대결>은 부부 싸움의 세 가지 형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이기고 네가 졌다(I win, You lose)"로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부부 싸움입니다. 둘째 형태는 "네가 이겼다. 나는 포기한다(You win, I give up)"로 역시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포기는 실상 증오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형태는 "신발 흙털개(doormat)"입니다. "나를 밟고 가라. 그러나 진흙까지 집안에 들여놓지는 말라."는 사랑의 정신으로서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생활에 충만하시므로 이 음란한 시대에 성결한 가정, 행복한 가정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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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기독교인의 결혼관(2)

"(고전7:10)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고전7:11)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고전7: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고전7: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고전7: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고전7: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7:16)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고전7: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고전7:18)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고전7:19)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고전7: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고전7: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고전7: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고전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전7: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미국 유머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미국인이 6.25 전에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산길을 걷다가 이상한 광경 하나를 보았습니다. 남자는 나귀를 타고 그 아내는 뒤에서 숨을 헐떡이며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인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레이디 퍼스트의 예의도 모르시오? 여자를 저렇게 학대하다니.....> 그러자 그 군자는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풍속이오.> 그런데 그 미국인이 6.25 사변 직후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는 그와 정반대의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똑같은 산길이었지만 이번에는 여자가 앞에서 나귀를 타고 남자는 멀찍이 떨어져 조심성 있게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 미국인은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여보시오. 그 동안에 풍속이 변했구려.> 그러자 그 군자는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는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쟁통에 지뢰가 사방에 묻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아내를 앞세우고 가는 거랍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인의 그 철저한 남존여비의 풍속을 희화화(戱畵化)한 유머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은 <고개숙인 남자>라는 말 그대로 남존여비의 풍속이 고개숙인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9세기 유럽의 판화(版畵)에는 남녀의 사랑 그것을 풍자한 만화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첫 장면은 비오는 날 거만하게 걸어가는 여자에게 남자가 뒤따라오면서 우산을 받쳐줍니다. 기사풍의 이 남성은 그 여인에게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도록 우산을 씌워주고 있는 바람에 자기는 흠뻑 비에 젖고 있습니다. 둘째 장면은 우산으로 가리고 이 남녀는 열렬한 키스를 합니다. 이 때는 우산이 공평하게 두 사람을 다 덮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이 다시 빗속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산이 처음과는 반대로 그것을 들고 있는 남자 쪽으로만 기울어져 있습니다. 여자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흘겨보면서 비에 젖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는 기사가 아닙니다. 이것이 사랑의 과정입니다. 구애 할 때는 으레 남자가 저자세이고 여자는 고자세입니다. 그러나 일단 사랑을 손에 넣으면 그 자세는 전도(顚倒)되고 맙니다. 사랑의 우산을 잡은 손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입니다. 왜냐하면 남자에겐 동정(童貞)이란 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자에게 처녀성이란 것이 하나의 신화처럼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사랑의 완성이 여자에게는 <몸을 버린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하는 것이 남자의 경우에는 <정복>이라고 말해지며 여자의 입장에선 <상실>이 되는 셈입니다..........<사랑의 장부>를 보면 남자의 것은 언제나 흑자이고, 여자의 것은 적자로 기록됩니다. 두 번째, 세 번째의 여성을 만나게 될수록 남성은 유리한 게임을 벌이게 됩니다. 여성의 심리를 환히 바라보고 있는 경험 때문에 사랑의 작전에서는 언제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가 있습니다. 여성은 반대로 경험이 많을수록 그 값어치가 하락합니다.(이어령의 글에서)

결혼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는 앞의 설교(7:10-16)에서 자세히 말씀드렸기 때문에 다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혼이란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혼을 했거든 혼자 지내던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부부가 살면서 무슨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혼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혼이라는 방법으로 부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을 아예 머리 속에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헤어진다는 가능성과 생각은 신자의 마음속에서 없애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졌거든 다른 사람과 재혼하지 말고 할 수 있으면 다시 결합하라는 것입니다. 갈라지려는 마음이 있거든 그 마음을 가지고 오히려 참고 견디고 용서하고 화해하여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이혼을 할만큼 복잡한 관계, 참을 수 없는 것이 이 화해의 마음으로 삼켜져서 너희의 결혼이 이혼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대를 용서하고 함께 묶여져 있는 것을 감수하고 화해하는 마음으로 견뎌 나가는 것이 신자로서 더 멋진 신령한 결혼 생활의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청산 유수로 멋진 기도를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이런 것이 신자의 가장 높은 경지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그 일, 그래서 지지고 볶고 그래서 늘 울고 불고 가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감수하는 것이 신자가 나타내야 될 가장 신령한 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부부끼리는 적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할 때 무엇보다도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자기 자식, 자기 부모에게 먼저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는 부부가 만날 때 혹은 부모와 자식간에 모두가 상대방이 내 짐을 덜어주고 나를 이해해 주고 나를 편하게 해 주리라고 기대합니다. 이 사람이라면 내 짐을 덜어주고 나를 이해하며 사랑하며 나를 편하게 행복하게 해주리라. 그래서 서로가 만납니다. 서로가 만나서 짐을 덜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는 둘이 만나면 짐이 두 배로 늘어납니다. 내 짐은 물론 내가져야 할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짐도 내가 져야되는 것입니다. 짐을 더는 것이 아니라 짐을 갖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롬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연약한 것을 비판하지 말고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남을 기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롬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롬15: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부부간의 화해는 상대방도 한 걸음 양보하고 나도 한 걸음 양보하는 화해가 아닙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하는 화해, 내가 나의 기쁨을 위하여 살지 않고 상대방의 기쁨을 위하여 나를 양보하고 나의 기쁨을 유보하는 것이 화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이란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어떤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며, 내가져야 할 짐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렸거든 혼자 지내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불신자와 결혼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본문 12절 이하는 그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결혼을 한 한쪽이 불신자인 경우에 불신자 편에서 이혼을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그가 떠나게 내버려두라는 것이고, 불신자가 결혼생활을 계속 원한다면 이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배우자를 통해서 불신 배우자가 깨끗해질 수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 자녀들까지도 깨끗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불신 배우자에게도 회심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가 결혼생활을 원한다면 그 생활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아내나 믿지 않는 남편이 있을 때 갈라서는 것이 원칙이냐 아니냐를 물으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갈라서야 한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마도 다음의 성구에 근거해서 그럴 것입니다.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후6: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고후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분명히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는 원칙에 의하면 믿지 않는 사람과 부부로서 같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강한 원리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고전7: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같이 살기를 원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가 그 신앙을 이유로 해서 갈라서겠다면 갈라서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의 신앙을 핑계삼아서 갈라설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다음에 분명히 나옵니다.

"(고전7:16)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현재의 결혼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역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한국의 대부분의 여성운동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주장합니다. 매맞고 울고 짜면서 사느니, 무능하고 무기력한 남편과 힘들게 사느니 일찌감치 헤어져서 자기 삶을 찾으라고 아우성입니다. 이들, 똑똑하고 소위 많이 배웠다고 하는 대부분의 여성운동가들은 이혼해서 결손가정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천민 출신의 바보 온달이었지만 평강 공주의 온갖 시련을 극복한 사랑으로 나라의 훌륭한 장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평강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모두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공적인,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이룩하시는 <평강 공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불행하며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가정들을 성공시키며 행복하게 변화시키는 사랑의 역사가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대부분 자식들을 결혼시킬 때 보면, 신앙 있는 집에 보내는 것보다 돈 많은 집, 가문 좋은 집, 장래가 보장된 집에 자식을 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그것을 우리의 못난 대로 갚으시지 않으시고 믿지 않은 사돈까지 다 믿게 하는 결과를 많이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이 별 볼일 없어 보여 믿지 않는 사람과 사돈을 맺고 돈보고 세상의 지위를 보고 여러분의 딸을 주고 아들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하고 결혼해서 피눈물을 흘리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경험하셨고 여러분 친구가 경험하고 있고 여러분 주변에서 상당한 사람들이 그같은 경험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시지 않고 긍휼을 베푸사 그 사돈 맺은 집을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지위가 없고 돈 없는 집에 순전히 믿음만을 보고 사돈을 맺으면 그 은혜 말고 승리와 영광과 기쁨과 감사가 가득 찬 생활을 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가장 어려운 것이 가정입니다. 부부란 참으로 어려운 관계입니다. 가장 큰 힘이 되기도 하고, 가장 큰 짐이 되기도 하고, 가장 큰 위로를 받기도 하고, 가장 큰 절망을 맛보기도 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희생하신 것을 기억하며 가정생활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가정의 모든 문제들을 넉넉히 극복하고 승리하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마음씨 좋은 남편 얘기가 있습니다. 악한 마누라가 늘 꼬집고 뜯고 그래도 늘 남편이 웃기만 하니까 한번은 팔을 꺾더랍니다. 남편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여보, 그러지마, 그럼 부러져,"

그러자 딱 부러졌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말하길

"거봐 부러졌잖아요."

이러면 싸움이 없는 것입니다. 부부란 누가 이기고 지는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짐을 져주고 용서하며 이해하며 희생하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생활에 충만하시므로 실패한 가정은 성공적인 가정으로, 믿음의 가정은 영광과 기쁨이 가득한 가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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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독교인의 결혼관(3)

"(고전7: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고전7: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고전7: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고전7:28)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고전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고전7: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고전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전7: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고전7:33)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고전7:34)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고전7: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노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고전7:36)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고전7:37)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고전7:38)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고전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고전7: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1. 결혼에 대하여

어느 날 황제가 랍비 가말리엘에게 "당신네들의 하나님은 도둑이다. 그는 왜 아담을 잠들게 해놓고 갈비뼈를 훔쳐 갔는가?"라고 말했습니다. 황제의 딸이 말을 가로막고 나서서 랍비 가말리엘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물음에 대신 답하겠어요." 그러고는 그녀는 황제에게 몸을 돌리면서 "재판관을 불러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재판관이 필요하니?" 라고 황제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간밤에 제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그런데 도둑은 은으로 만든 주전자를 훔쳐 가고는 금으로 만든 주전자를 남겨놓고 갔어요."라고 공주는 말했습니다. "그런 도둑은 매일 밤 나타나면 좋겠구나!"라고 황제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담은 그런 행운을 얻지 않았나요? 하나님은 그에게서 갈비뼈 하나를 취한 대신 성실한 아내를 주셨지요." "내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만든 것이 잘못이란다. 하나님이 갈비뼈를 취하려고 하셨다면 그 일을 은밀하게 하지 말았어야 했지"라고 황제가 말했습니다. "아버지, 고기 한 덩어리를 가져오도록 해 주세요." 황제는 이 말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녀가 말한 대로 고기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공주는 날고기를 가지고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뜨거운 재 속에 집어넣고 구웠습니다. 고기 요리가 끝났을 때 그녀는 아버지에게 "여기 있어요, 아버지, 이 고기를 드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역겨워하면서 먹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날고기를 보았다가 이제 재를 뒤집어 쓴 모양을 본 것입니다. "구역질이 나는구나!"라고 그는 소리쳤습니다. "거 보세요"라고 공주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만약 아담이 눈을 뜬 채 하나님께서 자기 갈비뼈를 취하셔서 여자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면 그녀를 보기만 해도 역겨웠을 거예요."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축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처녀에 대해서 주님께 직접 받은 계명과 계시는 없었지만 그도 역시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받은 자로서 처녀의 결혼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분별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전7: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고전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성령의 지시와 인도하심을 따라 판단할 때 환난이 임박한 상황에서 처녀 총각이 결혼하게 되면 여러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을 알고 그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임박한 환난"은 그리스도 재림을 앞두고 이 세상에 임할 대환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환난은 전무후무한 것으로서 이 때에는 특히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눅21: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그러나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세상 기쁨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는 결혼 그 자체가 옳고 그르다는 논쟁이 아니라 성도들이 현재의 주어진 모든 환경과 시간, 능력을 어떻게 옳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지내든 결혼을 하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가정 일을 너무 염려한 나머지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태만히 하는 누를 범치 않도록 일깨워 주려는 데서 독신생활을 언급한 것이지 결코 독신 생활을 장려하고 결혼 자체를 업신여긴 것은 아닙니다. 바쁜 세상 가운데서 분주히 살아가는 동안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자칫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그를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2. 독신에 대하여

결혼한 자들은 상대방에 대한 의무와 사랑 때문에 마음을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갈린 마음을 가지게 되지만, 결혼하지 않은 과부들과 처녀들은 오직 주님께만 헌신하고 주님에 속한 일들만 염려하며 자신과 영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보고 독신을 선호한 것입니다. 처녀라고 해서 결혼한 여자보다 더 윤리적으로 거룩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오직 한 마음으로 주님께 헌신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바울이 독신주의를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전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고전7: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고전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결혼하는 것이 저급한 신앙이 아니라 종말론적 시각에서 볼 때 독신주의가 더 종말론적 신앙관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신앙관이란 예수님이 오실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믿고 장차 그 앞에 설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 앞에 설 것(Coram Deo)을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최초로 허락하신 것이 부부입니다. 아담 혼자 있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아 친히 이브를 만들어 짝지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무조건 안하고 혼자 사는 것이 꼭 신앙적인 것이 아닙니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이 세상에서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결혼이든 독신이든 간에 삶의 최고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 사는 것이 종말론적인 신앙관인 것입니다. 결혼이 인생 최고의 행복과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7:33)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고전7:34)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결혼은 그 자체가 인생 최고의 행복과 목표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축복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5장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은 그리스도의 상징이고 아내는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결혼하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사랑, 그리스도의 구속함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교회, 즉 신자들의 만족과 감사와 순종을 드러낼 방법이 없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이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과 최고의 어떤 보상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혼의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데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금욕주의와 독신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금욕주의는 사람이 자기 즐거움을 목표로 삼거나 즐거움을 취하는 것 자체를 범죄 행위로 보는 것이고, 독신주의는 더 좋은 일을 위해서 즐거움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말씀을 본 장에서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금욕주의자가 아니라 독신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장가를 갈 수 있으나 안가면 더 잘하는 것이고, 시집을 갈 수 있으나 안가면 더 잘하는 것이다(30절-34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7:38)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자제와 금욕은 휼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본능이나 정열을 제거하는 일이 기독교인의 의무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종교를 부자연스런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도승, 은자(隱者), 수녀들의 잘못은 결국 그런 것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좀 더 신령해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을 버려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남녀의 생활에서 자기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결코 일상적이며 정상적인 생활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고통을 주는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 하나님께서 육체 속에 넣어 주신 마음,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인간 속에 살게된 본능이나 정열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것들을 어떻게 하면 제거할 수 있는가를 가르치지 않고, 정열을 순화하며 인간애를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정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영위하는데 가장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는 장소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가정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힘의 원천인 휴식과 사랑을 제공해 주는 장소인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정생활 상담가로 유명한 Y교수가 참 기가 막힌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그가 한참 가정생활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아빠!" 하고 뛰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뒤에서 사회를 보시려고 앉아 계시던 목사님이 벌떡 일어나 내려가서 그 애를 안고 나갔습니다. 바로 그 목사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은 눈물자국으로 꾀죄죄하고 속바지는 반쯤 흘러 내려온 데다가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습니다. 세미나를 끝내고 Y교수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이 안 계신가요?" "............." 목사님은 말이 없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그가 들려준 얘기는 적지 않게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교회 사모님은 모 신학원을 졸업한 신학석사입니다. 신앙이 뜨겁고 열정적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적극적인 태도 덕분으로 목사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까 그가 추구하던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정일을 팽개치고 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기도를 마치고 내려와서는 날마다 성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기도해 준다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후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이 선교사가 되라는 계시를 주셨다고 하면서 기도원으로 가버렸습니다. 첫 아이가 태어난 지 일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막무간으로 아이를 이모에게 맡기고는 기도원에서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아이는 말할 수 없는 여건 속에서 제멋대로 자라는데도 어머니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주변에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하지 아니하고 자기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상상외로 많습니다. 자기의 성격에 결함이 있다든지 아니면 가정에 욕구불만이 있을 때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집안 식구들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은혜스럽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가정 일을 책임있게 한다고 해서 교회 일을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가정생활에 충실치 못한 사람이 교회에서는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정을 돌아보지 아니하면서 교회 일에 동분서주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오히려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또한 가정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해서도 절대 안될 것입니다. 결혼을 고려하고 있는 젊은 남녀들은 다음의 사항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는 무엇인가?

둘째, 나는 믿는 사람과 결혼하는가?

셋째, 현재의 상황은 결혼해도 좋은 상황인가?

넷째, 이 결혼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다섯째, 결혼은 평생을 위한 새로운 결합이다. 나는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고전7:36)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여기 "혼기"란 처녀가 점점 나이가 들어간다는 단순한 뜻이지만, 케네드 웨스트 박사는 "청춘이 꽃피는 시기가 지나간 처녀"라고 해석했습니다. 혼기를 놓친 처녀들은 교회 안에서 "원하는 사람이 없는 축복(unclaimed blessing)"이 되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노처녀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을 한 탓에 잘못된 결혼을 할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주받은 결혼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각 사람이 처한 상황은 저마다 다르므로 부모와 그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훌륭한 배우자를 선택하면 결혼생활도 훌륭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배우자의 선택을 위하여 미국의 닐클락 위렌 박사가 제시한 배우자 선택을 그르치게 하는 7가지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결혼하겠다는 결정을 너무 성급하게 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배우자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볼 수 있도록 2년 이상 교제를 해보는 등의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둘째, 너무 어린 나이에 결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23-24세 이전에 결혼한 부부가 그 이후에 결혼한 부부보다 두 배의 이혼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셋째, 두 사람 다 너무나 결혼을 하고 싶어할 때는 삼가라는 것입니다. 넷째,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배우자를 선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자신과 너무나 차이가 나는 삶을 사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곱째, 당신이 영원히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그런 성격이나 습성을 가진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배우자감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상당수 처녀들이 흔히 말하기를 <결혼해서 믿게 하면 되지요. 전도도 되고..........> 결혼해서 배우자를 믿게 하겠다는 사람은 구원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아니라면 천 날을 금식하고 철야기도해도 상대방이 변화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것은 축복으로 주신 것이지 결코 선교지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결혼해서 남편을 전도하겠다는 사람은 가정을 선교지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과부의 재혼에 대하여

다음으로 과부의 재혼에 대한 문제(39-40절)입니다. 남편이 죽을 경우 과부들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으나 "주안에서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남편을 잃은 과부가 재혼할 때는 오직 믿는 남자와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재혼을 하든 안 하든 본인이 결정할 일이지만 믿는 자와만 하라는 것입니다. 재혼에 대해서는 다음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1) 부부관계는 죽음으로 끝이 나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맺은 부부관계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원히 지속되는 불변의 것입니다.

"(계19: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계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배우자를 얻은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영적인 배우자로 얻은 것에 대하여 기뻐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과부의 재혼은 기독교적 원리 즉, 남녀 평등의 정신과 일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재혼을 허용하지 않고 미망인의 정조를 강요하던 동양의 유교적 전통과는 달리 여자의 또 다른 선택과 삶까지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3) 과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재혼이냐, 홀로 지내느냐의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주안에서 이루어진 삶이냐 아니냐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느냐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결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결혼 생활도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영위되어질 때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가정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19-1901, 강렬하고 소박, 정직한 성격에 주도면밀한 정치력으로 다사다난한 국내외 문제를 절묘하게 해결하고 제국의 번영을 실현하므로 국민의 커다란 존경을 받았다.)이 남편인 앨버트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였습니다. 앨버트는 흥분하였지만 상대가 아내라 하더라도 여왕인지라 흥분을 억누르고 자기 거실로 가버렸습니다. 남편의 이런 모습을 본 빅토리아 여왕은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남편을 자기가 너무 심하게 대한 것이 아닌가 하고 후회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사과하려고 남편의 거실을 찾아갔습니다. 남편의 거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여왕은 조용히 문을 노크했습니다. "누구시오?" 남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여왕입니다." 여왕은 부드러우면서도 위엄 있는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문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나 해서 여왕은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문 열어요!" 여왕이 날카롭게 명령조로 말했습니다. 방안에서 다시 되돌아온 말이 있었습니다. "누구요?" 전과 다름없이 가라앉은 목소리였습니다. "영국 여왕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자기의 위엄 있는 말투로 인해 이번에는 문이 열리리라고 생각했으나 역시 문은 열리지 않았고, 방안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여왕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영국 여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도 있는 유일한 사람, 그가 바로 자신의 남편이라고 생각하니 흥분이 차츰 가라앉았습니다. "열어 주세요........저예요. 당신의 아내예요." 여왕이 다정하게 이렇게 말하자, 문은 스르르 열렸습니다.

기독교인의 결혼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며 축복인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가정의 질서를 지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여 가정의 축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결혼하지 아니 한 사람들은 더욱 거룩한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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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랑과 지식

"(고전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전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고전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고전8: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고전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전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고전8: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고전8: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8: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고전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고린도같은 도시에서는 이교(異敎)의 생활권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시장에서 팔고 있는 고기는 모두 각종 이교 신전에서 제물로 바쳤던 것들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사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있던 영지주의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모든 것이 가하다(6:12)"고 했고, 우상을 무시하는 자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4절). 우상 제물과 관련된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네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상에 대한 상당한 신앙 지식을 가진 믿음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상은 원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무슨 문제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 제물을 떳떳이 먹는 것입니다.

"(고전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고전8: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고전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둘째, 식물 먹는 것은 죄도 아니고 영적인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전8: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믿음이 강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들이 우상을 섬기는 신전에 들어가서도 먹는 것입니다. 신전에 들어가서 먹으면 어떻고, 제단 앞에서 먹으면 어떠냐? 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안 된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어디서 먹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셋째, 성례(성찬과 세례)를 받는 것이 어떤 마술적인 보호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찬을 받으면 귀신의 살을 먹어도 괜찮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상 제물 같은 것은 성찬에 참여한다면 문제도 안되며, 뭘 먹든 무슨 일을 하든 괜찮다는 어떤 마술적 효과가 성찬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고전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신앙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는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최고 기준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네가 알고 있는 지식이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는가, 교회에 유익이 되는가를 따져야지 네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이 신앙의 최고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믿음이 약한 형제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8: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따라서 자신의 신앙의 중요한 기준을 신앙 지식에 두지 말고 사랑에 둔 후에 그것이 남에게 덕이 되는가 교회에 유익함이 되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문제, 즉 음식은 신령한 일과 무관한 것이므로 무엇을 먹거나 어디서 먹거나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고전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고전10: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10: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고전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우상의 제물 중에서 시장에서 산 것이나 개인 집에서 초청 받았을 때는 먹어도 좋고 우상을 섬기는 신전이라고 해서 먹지 못할 것은 없지만, 만약 예수 믿는 성도가 우상을 섬기는 곳에 들어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제 삼자가 볼 때 분명히 그 우상을 섬기는 행위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다른 신을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장이나 개인 집은 우상에게 제사하는 곳이 아니라 먹고 교제하는 장이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먹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문제에 대한 답은 성찬이나 세례가 마술적인 보호 구실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찬에 참여했다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교훈이 고린도 전서 10장에 있습니다.

"(고전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10: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고전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10: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10: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고전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전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을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물로 세례 받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만나와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신 것을 성찬 받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순종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두가 멸망당했습니다. 이를 보건대 성례에 참여했다고 불순종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례에 참여했다고 우상숭배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음식물과 관련된 각종 규제 사항을(레 19:26, 신 12:26, 23-25, 15:23 등) 오늘날에도 지켜 부정한 짐승 및 짐승의 피를 먹어서는 안 되는가? 사실상 구약의 율법을 완전케 하려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선언함으로 음식물에 관한 율법적 금지 규례들을 파하셨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막7: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왜냐하면 "(히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들은 더 이상 음식물을 취하는 것에 대하여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사도 베드로가 보았던 부정한 짐승의 환상에서도 간접적으로 시사되고 있습니다. 또한 다음의 성구에서도 분명히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딤전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히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 구약과 예루살렘 공회에서조차 피를 멀리하라고 금한 근본 의미는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는 만큼 짐승이든 사람이든 간에 그 생명을 귀히 여기라는데 있으므로 그 정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음식물을 먹되 부정하다고 여기면서 먹거나 자신이 음식물을 먹는 것으로 인하여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시험에 들게 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상대방의 마음을 상케 하는 것은 사랑으로 행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서로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주고받아야 하며, 자신에 대해서는 정당하다해도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하여 절제하므로 신앙 공동체에 덕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참을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 문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의 믿음을 자기 믿음과 동등하게 존중해 주는 사랑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록 자신은 좀 답답하고 덜 자유로울지 모르나 개개인의 적극적인 사랑 속에서 신앙 공동체 전체의 성장과 성숙이 촉진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 특히 교회 생활에는 지식이 전부가 아니며 늘 사랑의 요구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만을 최대한대로 고집할 때 교회는 쉽게 분열될 위험에 처하게 되지만, 자신의 자유를 사랑의 원칙에서 스스로 제한할 때 교회는 진정한 본질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바른 교리의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형제들이 아니라 그 지식과 함께 교회의 평화를 원하고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충심으로 바라고 그것을 위해 기쁨으로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즉 자기의 이익보다는 교회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디아포라(adiaphora)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란 뜻으로 기독교 윤리사(倫理史)에서 있어서 하나님께서 명하시지도, 금하시지도 않은 행동들을 말합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선악에 관련된 것은 아닌 것으로 성경이 직접 금하거나 행하라고 밝히지 않은 것, 그러므로 성도 각 개인이 자신의 판단과 신앙 양심의 자유에 맡겨야 할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악에 관련 없는 주초(酒草) 문제로서 이는 각 개인의 책임감 있는 판단과 양심의 자유에 맡겨진 것이므로 독선이나 독단에 치우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우며, 유대인들의 음식과 음료를 관장하는 의무로부터 자유로우며, 율법적인 노예의 신세로부터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책임감에 의하여 조정이 되고 사랑에 의하여 제약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기독교적인 자유의 통제 수단이고 조건인 셈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주어진 환경에서 특정한 행위가 그리스도인 자신에게 허용되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그 행위가 "내가 현재의 상황에서 그것을 행하는 것이 잘못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되면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성경은 나에게 이 행위를 금하는가? 만일 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행위를 금하는 절대적인 명령을 했다면 그 행위를 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살인은 나쁜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 답변은 반드시 "예"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분명하게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비록 그것이 본질적으로 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가 행함으로 시험에 빠지거나 혹 죄를 지을 수도 있는가? 그 예로 다음과 같은 성구를 들 수 있습니다.

"(마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우리 몸을 실제로 절단하면서 죄를 피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참뜻은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질 위험이 있는 모든 기회를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이 행위를 하는 것이 약한 형제를 자극하여 그를 실족하게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성경에서 금한 범죄 행위와 그 안에 죄는 없으나 죄를 범하게 하는 행위를 피할 의무가 있을 뿐 아니라 약한 형제를 자극해서 그가 실족 당하는 것을 피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찬에 초대된 세 명의 교인이 있습니다. 이들을 갑, 을, 병이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이들은 제각기 포도주 한 잔씩을 대접받았습니다. 갑은 하나님 앞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자유롭습니다. 성경은 술마시는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그에게 있어서 술은 유혹거리도 아니고 물론 포도주 자체는 죄도 아닙니다. 을의 경우엔 비록 포도주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과거의 알코올 중독 경험의 예로 보아서 술마시는 것은 그에게 안전한 일이 못됩니다. 그러나 병은 믿음이 약한 자입니다. 그는 어떤 순간이라도 술 한 잔을 마시면 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 갑이 술을 마시면 병으로 하여금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병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따라 마시게 됨으로 점점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될 소지가 있거나 혹은 갑에 대하여 독단적인 편견을 갖게 될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갑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가? 성경은 "아니다"라고 답변하는 것입니다. 갑이 포도주를 마시면 안 되는 이유는 포도주 마시는 것이 죄가 되어서가 아니며, 그것이 갑으로 하여금 취하게 해서 그런 것도 아니며, 정작 그것이 약한 형제인 병을 자극해서 그를 실족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결정하려는 이들 세 가지 원리를 사용하는데는 각기 신자가 스스로 성경을 아는 것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양심을 비판하는 일을 어떤 사람이나 교회에 맡겨서는 안 됩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루터와 같이 "나는 성경의 내용에 매였고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가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각기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를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에 관해서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남의 자유나 결정에 대하여 판단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자신이 결정한 모든 것에 대해서만 하나님 앞에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하며 마지막 날에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셋째 원리, "내가 이 행위를 하는 것이 약한 형제를 자극하여 그를 실족하게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자신의 자유를 통제하는 자들은 많은 것을 맡긴이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성구를 보면 지식이 한 생명을 자라나게 하지 않고 한 생명을 밟아 버리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8: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고전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참으로 사랑은 '세우는 것"입니다.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란 말은 바로 사랑 안에서란 말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예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랑 안에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틀렸다고 해서 그 순간에 잘라 버리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세워질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이 사랑의 요소가 없을 때는 지식은 언제나 잘라 버리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교회 생활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지혜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은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랑과는 정반대입니다. 우상을 가서 공격하는 것으로, "난 제사 안 지내, 난 주일엔 아무 것도 안 사먹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 지식을 증명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사도 지내고 주일성수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와 어떻게 이야기하다가 신자라는 것이 탄로가 났습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인상을 쓰더니 "한 말씀 물어 봅시다." "예, 하시죠." "예수 믿는 사람 왜 그래요?" "왜요?" 한번은 어떤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넷이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린 다음에는 차비 때문에 두 시간 동안이나 싸웠다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덕을 세우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신앙 지식은 교만하여 덕을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될" 만큼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을 먹느냐에 대한 신앙적 율법적 지식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증거인 것을 깨달아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해 역사적인 산 증인으로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암흑의 대륙에 가서 그 평생을 헌신했던 대단한 신앙의 실천가였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어떤 아이하고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싸움 도중에 이겼습니다. 그 아이를 눕혀 놓고 때려주는데, 그 깔린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너같이 일주일에 한번만이라도 고기를 먹으면 너에게 지지 않을텐데." 이 말에 슈바이처가 충격을 받아서 그 다음부터 평생 고기를 안 먹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의 원리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롬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롬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어떤 가정에서 어린아이가 놀다가 잘못해서 방바닥에 두었던 유리컵을 깼습니다. 이것을 본 어머니가, "너는 눈도 없느냐?" 며 심하게 아이를 꾸짖었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본 아이의 아버지는 "아니 당신은 그걸 여태 치우지 않았소?" 라며 아내에게 화를 냈습니다. 시어머니가 그런 광경을 보고 시끄럽다며 며느리의 평소 게으름을 나무랐습니다. 깨진 컵조각에 발이 찔린 아이는 어른들이 화를 내자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날 저녁 그 가정에서는 유리컵 하나 때문에 심각한 불화가 생겼습니다. 한편 그 이웃집에서도 어린아이가 방바닥에 두었던 접시를 깨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는 한꺼번에 아이에게로 달려와 다친 곳이 없는 지부터 살폈습니다. 어머니는 얼른 깨진 접시 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구나. 이 늙은 것이 집에서 빈둥빈둥 놀면서도 방바닥에 돌아다니는 접시 하나 치우지 못했구나." 이 말에 며느리는 송구스러워하며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어머님, 제가 게을러서 그만......,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떡을 맛있게 먹은 제가 당연히 치워야 했는데......." 이런 대화를 들은 아이는 "죄송합니다. 제가 조심을 했어야 하는데.......,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라고 미안한 듯 말했습니다. 이 두 가정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세우는 것입니다.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율법에 대한 지식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시므로 자신에게는 보다 더 성숙한 신앙 생활이 되시고, 가정과 교회에는 덕을 세우는 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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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전9: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고전9: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고전9: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고전9: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고전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고전9: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고전9: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고전9: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고전9: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고전9: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고전9: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고전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고전9: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전9: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전9: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9: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고전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고전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9: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1.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고 복음의 열매를 통해 자신의 사도됨과 그리스도인됨을 증명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창피해서 속장, 집사, 권사 못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를 하나님이 대학에 붙여 주시든지 아니면 제가 이 교회를 떠나든지 어떻게 승부를 내야지 창피해서 예수 못 믿겠습니다."

"목사님, 저는 창피해서 권사 못하겠습니다. 우리 남편을 하나님이 승진을 시켜주시든지 아니면 제가 이 교회를 떠나든지 해야하지 창피해서 교회 못 다니겠습니다."

자녀가 대학에 못 들어간 것이, 남편이 승진 못한 것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도답게 살지 못한 것이 창피한 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하나님의 사도인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우리가 아무리 연약해져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약하게 된 것을 자신의 기쁨과 자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목표가 무엇입니까? 내가 남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남보다 좀 낫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까? 내가 남다르게 기도했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내가 신령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공부 안 해도 다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헛된 자랑입니다. 자녀가 대학에 못 가거나, 질병으로 앓거나 할 때, 주위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짓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마치 신앙이 강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합니다. "기도 안 해서 그렇지 뭐야." "기도 안 해서" 이것보다 교만하고 이것보다 상처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은 없습니다. 손가락질하는 사람의 기고만장한 모습만 보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은 이것입니다.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 써 주시는 것, 그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불러낸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가장 미련했던 것, 부끄러운 사실들을 가지고도 하나님이 자기를 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자기를 불러 써 주신 것, 그래서 그 결과로 죽어 가는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결과가 생기는 것, 이것이 그의 유일한 자랑입니다. 바울이 갖고 있는 그의 자랑, 그의 기쁨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께서 영광 받으시고 주의 은혜가 드러나는 일을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약해질 수 있습니다. 나는 얼마든지 오해받아도 좋고 나는 얼마든지 모멸과 능력과 오해와 괄시를 감수할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절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대목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드렸는데 이것이 무슨 망신살입니까?" 교회 안에서 여러분들은 개인적인 자존심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 사역이 얼마나 많이 방해를 받고 있는지를,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사람이 혹시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는 스스로의 잘못은 없어도 많은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진심을 꺼내 놓은 자세와 분위기와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얼굴에 찬 기운이 돌거나 똑 소리나게 생긴 모습보다는 좀 순진하게 보이고 좀 어수룩한 모습, 세련되고 멋있고 화려한 모습보다는 좀 수수하고 근검한 모습으로 교회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태도가 사도 바울이 가졌던 태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몸에 거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은 얼마든지 약해지겠다는 자세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이 쉬워지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있어 복음의 장애가 될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여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와 어떻게 이야기하다가 신자라는 것이 탄로가 났습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인상을 쓰더니 "한 말씀 물어 봅시다." "예, 하시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그래요?" "왜요?" 한번은 어떤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넷이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린 다음에는 차비 때문에 두 시간 동안이나 싸웠다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도로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고전9: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고전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고전9: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여기 본문에 보면 첫째, 먹고 마시는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로부터 생활의 기본권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물질적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기간 동안 장막을 제작하는 육체적인 노동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시간을 복음 전하는 사역에만 할애할 권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굳이 천막을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일하지 아니 할 권리, 즉 교회에서 녹(祿)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로 신명기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전9: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고전9: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고전9: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또한 유대적 관습으로서 성전의 일을 하는 자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들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눈다는 사실을 들어 그 당연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민18:8)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거제물 곧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한 모든 예물을 너로 주관하게 하고 네가 기름 부음을 받았음을 인하여 그것을 너와 네 아들들에게 영영한 응식으로 주노라 (민18:9) 지성물 중에 불사르지 않은 것은 네 것이라 그들이 내게 드리는 모든 예물의 모든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 제물은 다 지극히 거룩한즉 너와 네 아들들에게 돌리리니."

"(신18:1)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신18:2) 그들이 그 형제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라 (신18:3)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응식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우양을 물론하고 그 앞 넓적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신18:4) 또 너의 처음 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너의 처음 깎은 양털을 네가 그에게 줄 것이니."

이처럼 구약 시대 제사장들은 중요한 제사들을 통해 제물의 몫을 나누어 받아 생활을 했었습니다. 번제를 통해서 동물의 가죽을, 속죄제와 속건제를 통해서 고기 전부를, 소제를 통해서 대부분의 가루와 포도주와 기름을, 화목제를 통해서 동물의 가슴과 오른 편 어깨를 몫으로 나누어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열매, 벌꿀 등 일곱 가지의 처음 익은 열매는 제사장들의 것이었습니다. <테루마>라고 해서 가장 좋은 농작물 수확의 50분의 1을 취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십일조 또한 레위인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배경이 되어서 사도 바울은 교회로부터 당연히 녹(祿)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의 원조도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로부터 원조를 거부한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제사장들은 항상 웃음거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보통 유대인 가정에서는 고기를 겨우 1주에 한번 정도밖에 먹지 못했는데 제사장들은 고기를 지나치게 많이 먹어서 직업병에 걸려 고통 당할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의 권리, 특권, 사치, 강한 욕심은 악명이 높았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제사장들이 신앙을 빙자하여 자기 살만 찌운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제사장들의 악업과 악평 때문에 교회로부터 어떤 원조도 거부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일로 인해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적 복음의 씨를 뿌린 전도자들이 영적 밭인 성도들로부터 물질적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갈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예수님께서도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눅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눅10: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마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두 번째, 베드로 등을 비롯하여 당시 사도들이 자신의 아내들과 더불어 복음 사역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들어 바울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위하여 그러한 자유와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물질축복을 여러분 자신을 위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으나 복음을 위해 그 권리와 자유를 절제하며 희생하며, 때로는 포기할 수 있어야 진정한 복음 전도자의 영광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주어진 권리와 자유를 절제하며 희생하며 포기하는 물질 생활을 "물질의 성화(聖化)"를 이룩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을 내는 사람들과 은사나 체험을 권면하는 사람들이 종종 결례를 범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보통 결례를 범하기 쉬운 것입니다. 어떤 신우회에서 한 분이 그 모임에 오기 위해서 택시를 타고 왔는데 택시 운전사가 불교방송을 틀더라는 것입니다. 오다가 속상해서 "아저씨 불교 믿으세요?" "믿지는 않지만 즐겨 듣습니다." "아저씨 그런 것은 왜 들으십니까?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말하고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영적 싸움에서 벌써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 옳다는 것을 말하거나 싸울 문제가 아니라 겸손과 자비, 사랑과 온유로 대하고 내가지는 것같이 대해야 합니다. 마치 내가 그 사람에게 빚진 사람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들의 영혼이 거듭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 지혜, 내 방법, 내 학력, 내 열심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 몸을 쳐 하나님께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쳐 복종하는" 절제를 배워야 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신앙생활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남들이 예수를 믿으려면 적어도 저만큼은 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위치에 섰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유인이지만 더 많은 사람을 복음으로 구원받게 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19절) 바울이 모든 사람의 종노릇하는 것은 순전히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정신,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 사람들을 섬기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죄인들이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제자된 우리들도 모든 사람들을 섬길 때에만 그들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보여 주고 있는, 세상 사람들의 종교, 문화의 패턴들을 존중하는 것은, 그리고 유대인들의 관습과 문화를 인정하는 것은 거기에 어떤 궁극적인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복음 전파의 적응성을 얻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패턴과 관습을 인정해야 그들을 복음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적응성의 원리를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의 원리이며,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선교사가 된 사람이 그가 선교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의식주를 혐오하고 그들처럼 살기를 싫어한다면 그는 선교사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선교 대상 지역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종교와 관습 등을 이해하고 익혀야만 그들에게 복음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 서양 선교사들 가운데 한국인의 옷을 입고 한국말을 하며 한국인의 음식을 먹기를 싫어하고 선교지에서 별장 짓고 외제차 몰고 다니며 한국말을 배우기는커녕 통역자들을 대동하고 다니면서 서양음식만 먹고 다니던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국인을 멸시하고 낮게 보며 마치 군주처럼 그들을 종 부리듯 하기를 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적어도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자신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적응시킨 것은 결국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아무쪼록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낮고 천한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입니다."(빌 2:7-8) 바로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 사랑의 원리인 것입니다. 이렇게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고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정신이 없으면 복음 전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치 경기하는 자처럼 자기를 쳐 복종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희생적인 절제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경기하는 사람이 절제하지도 못하고 자기하고 싶은 것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을 때 그는 훌륭한 경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경기자는 경기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무작정 달리거나 적을 보지도 않고 무작정 공중을 치는 권투선수도 아닌 것입니다.

"(고전9: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성도는 자신의 삶과 복음 전파의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만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체조 코치인 벨라 카롤리가 있습니다. 그는 루마니아의 체조 코치로 나디아 코마네치를 길러낸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휴스턴에서 미국의 체조 선수 300명을 길러 냈습니다. 그는 선수들을 연습시킬 때 세 가지 조건을 요구합니다. 첫째는 개인적 평안을 포기하고 코치의 훈련 방향에 순종할 것, 둘째는 생활의 우선 순위 중 체조를 1위에 둘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체조에 헌신할 것 등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평안을 포기하고 자기 희생적인 절제 생활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고, 삶의 우선 순위를 항상 복음 전파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훌륭한 경기자, 즉 복음 전도자는 죄를 멀리할 뿐만 아니라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 영혼을 성결하게 보존해야만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는 복음을 위하여 태어났고 복음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며 이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은혜와 은사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증언합니다.

"(롬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으며, 여러분의 존재 가치도 복음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고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요,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오직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시는, 그리스도 예수만을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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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10: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고전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10: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10: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고전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전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고전10: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전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고전10: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고전10: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고전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고전10: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 (고전10: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고전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고전10: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고전10: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10: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고전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고전10: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해방받아 출애굽 하였지만 홍해를 앞에 놓고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고 바다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놀라운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체험을 통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것도 나지 않는 광야에서 무엇을 먹고살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셔서 그들이 배부르게 하셨고,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므로 그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찬을 통해 떡과 포도즙을 나누어주시면서 이는 내 몸이요 내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식물과 신령한 음료"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요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6: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2.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그야말로 "신령한 떡"을 먹었음에도 왜 그들은 죽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우상 숭배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 숭배를 통하여 음행의 유혹이 뒤따랐으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유혹, 원망 불평하는 유혹 등이 계속되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이처럼 간음죄와 더불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 원망 불평하는 죄를 낳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란 구체적인 신상(神像)으로 표현된 이방 신에 대한 숭배를 뜻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재물이든 어떤 사상이든 궁극적인 의미에서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예배보다는 피조물을 숭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음행과 탐욕을 우상 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3: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엡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대부분의 신자들이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왜 내가 이렇게 열심히 예수를 믿는데 이렇게 형통함이 없이 어려움만 만나게 됩니까?" 그것은 그 신자가 감당할 만한 시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습니다. 하나님, 내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다려 보겠습니다. 여기서 안되면 이제는 내 책임이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 숭배이며, 간음하는 것이며, 주를 시험하는 것이며,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저주받아 마땅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참으로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하시므로 구원하셨건만 우리는 생명을 바쳐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고작해야 십일조 바칠 사랑밖에는 안 가지고 있습니다. 정작 내가 희생을 해야 되고 정작 못 참을 만한 일이 생기면 우리는 직분이고 사명이고 가릴 것 없이 내팽개치고 교회에서 돌아서 버리고 맙니다. 이런 것이 바로 우상 숭배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통해 놀라운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고, 광야에서 신령하고 거룩한 의식들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기뻐하지 아니한 다수>가 되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멸망당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3: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히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히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히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히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히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이 말씀에서 보면 놀라운 구원사건을 경험하고 온갖 축복들과 능력들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순종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멸망당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비록 거룩한 의식과 성례전을 행할지라도, 그리고 놀라운 은사와 능력을 체험했을지라도 마음 깊이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려는 변화된 삶의 자세가 없으면 거룩한 의식이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3. 다음으로 그들은 원망 불평하므로 광야에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원망의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가를 신명기 8장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8: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의 핵심은 우리가 주를 섬기고 싶고 주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배가 고파서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조건이 허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신앙생활의 조건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출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광야 40년 동안 의복이 해어지지 않게 하고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고 매일 아침마다 어김없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밤낮을 인도하시고 지켜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40년 광야에서 다 멸망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하게 그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필요한 모든 조건을 다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 숭배하다 죽어 갔고, 간음하다 죽어 갔고, 시험하다 죽어 갔고, 원망 불평하다 죽어 갔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확신시킨 것입니다. 환경과 물질적 조건이 완전히 구비되면 신앙생활이 승승장구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과 물질적 조건에서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음미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능히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성경책에는 기업투자의 비법도 없고, 기업경영이나 창업의 비법도 없고, 장수의 비결도 없습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하며 그를 거룩하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성경 이외의 것을 추구하며 찾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방법과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며 원망 불평하는 잘못된 습성이 남아 있습니다.

"(민11:1)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민11: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민11: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칭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연고였더라 (민11: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민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민11: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현대적 삶으로 표현한다면 "예수 믿었는데 아무 것도 안주고 밤낮 성경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만으로도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면서 <만나>밖에 없느냐며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만나>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로부터 신령한 축복들, 즉 반석으로부터 나오는 신령한 물과 하늘로부터 비같이 내리셨던 신령한 만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홍해를 건너왔다고, 즉 세례를 받았다고, 가나안 땅을 약속 받았다고, 다시 말해 천국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고 너무 방심하지 말라고 사도 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같은 교만을 버리지 못하면 광야에서 넘어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물로 세례 받았다고 해서,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고 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안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최대의 특권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코 유혹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유혹이 올 때 특별한 은혜도 안전의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니 지금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국 능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순교,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의 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노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 가지고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며 그것으로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 극복되지 않을 때는 기꺼이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죽으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을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상 숭배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하나님 사랑하기를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한다면 우상 숭배의 죄가 가져오는 간음하는 죄, 주를 시험하는 죄, 원망 불평하는 죄 등을 멀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변화된 삶의 모습이 없는 사람은 자연히 악을 즐기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며 탐욕적인 방향으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가장 큰 병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딤후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우상의 제물을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이 죄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는 악령이 시키는 것입니다. 악령은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고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아니라 악령과의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들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악령들의 목적에 쓰여진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더러운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성찬에 참여한 자는 악령들이 수단으로 사용한 식탁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우수한 그리스도의 상(像) 가운데 하나는 돌월드센이 조각한 것입니다. 그가 이것을 완성한 후에 루블 미술박물관을 위해 비너스 여신상의 조각을 의뢰 받았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상을 조각한 이 손이 이교(異敎)의 여신상을 조각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이교도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았을 경우 자기 앞에 나온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 하나 문제 삼지 말고 먹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가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라고 분명히 들어 알게 되었을 경우에는 그 고기는 먹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고기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마음에서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형제가 그런 말을 꺼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같은 경우라면 바로 그 형제를 고민케하거나 불안하게 하여 실족케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같은 교인들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보고 자기 행동의 본을 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할지라도 교회 내의 젊은이나 신앙이 미숙한 사람들이 때때로 우리에게 지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결단하지 못하는 자에게 확신을 주며, 유혹 당하는 자에게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의무를 염두에 둘 때 비로소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도 함께 구하는 삶, 즉 그들로 구원받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행동하기 전에 상고해 보아야 할 몇 가지 기준들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다." 그러나

1) 그 일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어떤 제재를 주는가?(6:12)

2) 그 일은 나를 거치는 돌이나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로 만들지는 않는가?(8:13)

3) 그 일은 나의 덕을 세우는가, 아니면 나를 파괴하는가?(10:23)

4) 그 일은 나만을 기쁘게 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는가?(10:31)

5) 그 일로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으며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10:33)

강한 성도와 연약한 성도는 서로를 세워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 사랑 안에서 함께 힘써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신과 교회에는 덕을 세우고, 이웃 형제들에게는 구원을 가져오며,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사랑의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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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창조의 질서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11: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고전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전11: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고전11: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고전11:6)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고전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고전11: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고전11: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고전11: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고전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전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전11: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고전11:14)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고전11: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고전11: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고전11: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고전11:18)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고전11: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1. 기독교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과, 노예들에게 자유와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족과 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다 평등하다고, 또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종족, 사회적 신분, 성(性) 및 경제적 지위 등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서 교제를 나누던 곳은 교회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합니다.

2. 한국에서의 남녀 차별에 대해 이어령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조시대 한국 남성들은 세 여인상 속에서 그들의 이상(理想)을 찾으려 했는지 모른다. 즉 심청과 같은 딸, 춘향과 같은 여인, 그리고 사씨와 같은 아내 ---- <심청전>과 <춘향전> 그리고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합치면 이조의 <여자의 일생>이 될 것이다. 특히 <사씨남정기>는 외롭고 험준한 아내의 일생으로서 이조의 여성적 특성을 나타낸 가장 전형적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조 때의 소설을 보면 대체로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 활동적이고 생활능력이 있고, 경제적이며 지능면에서도 매우 우월하다. 그에 비해서 남자들은 무책임하고 무계획적이며 의지력도 약하다. <심청전>의 심봉사는 눈먼 소경이라고는 하나 남자이면서도 등덩굴처럼 연약한 여성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봉사라고 해서 모두가 심봉사와 같은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자활하는 판수들이 얼마든지 있다. 마땅히 한 가족을 부양해야 할 가장이면서도 심봉사는 아내의 덕과, 그리고 나중에는 딸이 구걸해 온 음식을 먹으며 기생해 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절간에 공양미 삼백 석을 내면 눈을 뜰 수 있다고 했을 때 조석끼니도 없는 처지이면서도 선뜻 권선록에 자기 이름을 적었던 것을 보아도 심봉사의 무계획성과 무책임한 행동을 엿볼 수 있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고 심청의 몸값으로 받은 이웃들의 동정금을 뺑덕어미에게 모두 털리게 된다든지, 소경잔치에 오라는 여비마저 제대로 꾸리지 못한 심봉사의 행동은 무능의 전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심청은 매사에 계획성 있고 신의가 있으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꿋꿋한 기품을 보인다. 적어도 심봉사 보다는 냉정하고 분별이 있다. 이러한 소설 속에 나타난 남자와 여자를 보면, 유교의 영향은 한국의 남성을 여성화해 버렸고, 거꾸로 여성들을 남성적으로 만들어 꿋꿋한 기상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남자가 유교의 엄격한 윤리를 따르자면 전투적이고 야성적인 기질을 거세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장사상(老莊思想)과 같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청빈낙도를 추구하고 자연에의 은둔을 인생의 멋으로 삼았던 시대에서는 경제능력마저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 바로 남성들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여성에겐 수절이나 부덕(婦德)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 여성적인 나약한 기품은 의지력에 의해 단련될 수밖에 없었다. 절개를 지키다 보면 춘향처럼 억세어질 수밖에 없고 음풍명월만 하고 있는 남편들의 곁에서는 자연히 먹기 위해 옷소매를 걷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자녀를 길러야 한다는 생의 본능이 남성들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그만큼 경제적이고 활동적이었다는 것은 남성들이 그만큼 생활의 무능력자였다는 반증이다. 굶으면서도 책을 읽고 반대로 호탕하다 싶으면 주색 잡기나 하고 다녔던 당대의 남성들 때문에 여성들까지 방안의 화초처럼 있을 수는 없었다. 남성들은 눈을 떴어도 생활에 관한 한 심봉사와 같은 소경들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내로부터 여자는 불평등한 대접을 받는다. ---- 계집아이들의 이름은 섭섭하다고 해서 <섭섭이>, 그만 낳으라고 <구만이>, 그리고 <말숙이> <필순이>가 된다. 그러다가 다음에는 남자아이를 낳으라고 갑작스레 용감한 남자이름을 붙여주기도 한다. 남자아이들에겐 어엿한 돌림자를 붙이고 그 이름도 다양하지만 여자는 그저 곱고 어질고 착하고 밝으라고 연(姸), 인(仁), 선(善), 명(明)자를 붙여준다. 여자에겐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여학교에서는 <이명숙A> <이명숙B>라는 식으로 출석부가 되어 있다. 이름은 있어도 한 개성을 나타낸 고유명사의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 고유명사라기보다 보통명사에 가까운 여자이름 하나를 봐도 그들에겐 독립된 개성이라는 것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에서 남녀의 차별은 상당히 개선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남녀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가고 있는 실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부권(父權)과 부권(婦權)이 서로 자리바꿈을 하는 <성(性)의 질서 파괴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3. 유대인의 눈으로 본 여자의 지위는 이렇습니다. 유대 율법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낮은 존재였습니다. 여자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졌으며,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지음 받았습니다. 랍비의 주석에 다음과 같은 기묘한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머리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녀가 교만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 눈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정욕이 강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며, 귀로 만들지 않은 것은 호기심을 억제하기 위해서이며, 입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질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며,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욕심쟁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며, 발로 만들지 않은 것은 이리 저리 다니며 말참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자를 갈빗대로 만드셨다. 갈빗대는 몸 안에 숨겨져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숙함이야말로 여자의 제일의 덕성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불행하게도 유대 율법에서 여자는 단순한 물건에 불과하며 남편의 재산의 일부였습니다. 따라서 그 절대적인 처분권이 남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 적인 관점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차등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 사회적으로 비하되고 억압받던 여자들에게 그야말로 복음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적 배경에서 볼 때 획기적인 변화였습니다. 모든 다툼과 분리와 차별이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극복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창조 질서에 있어서 여성의 종속을 언급하고 있지만 "(고전11:11) 그러나 주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전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지배하는 새 시대에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동역자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4.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여자들이 너울('야쉬막'이라는 수건)을 써야 되느냐, 벗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울 당시 헬라와 근동 지방의 여인들은 공적인 모임에서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이 '야쉬막'을 쓰고 다녔습니다. 이는 남자에 대한 복종을 나타내며 자신은 남자의 권위와 보호 아래 놓인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 너울을 쓰지 않은 여인은 창기밖에 없었고, 정숙하고 존경받는 여인들은 머리를 가리지 않고 공중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 통상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이같이 머리에 쓰는 수건(야쉬막)은 여자의 낮은 지위를 나타낼 뿐 아니라 그녀의 정숙과 순결을 지켜주는 강한 방패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여인이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자기의 남편을 업신여기거나 다른 남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일부 여자들은 사회의 통상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너울을 쓰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은 당시 사회적 관습이요 전통인데 이 관습과 전통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 시대의 관습과 전통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복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복음의 진리마저 포기하고 자신의 문화에 동화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진리 안에서 이웃에 대해 덕을 세우며 복음 전파를 위해 그 시대의 문화와 사회적 관습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 관습(문화) 때문에 복음 자체가 손상 받거나 거부되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문화 속에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적절하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린도 교회 안에 여성 해방과 자유를 부르짖는 자들은 왜 더운 지방에서 여자만 너울을 써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점을 제기했었습니다. 또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 창기였기 때문에 옛 습관대로 너울을 쓰지 않고 예배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었습니다. 유대주의 전통을 고집하는 자들은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했고, 당시 불신자들 역시 교회를 향하여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는 몰상식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전통과 문화를 무시하는 기독교인의 자유란 결코 이웃에게 덕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인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질서와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는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고 예배드리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성도들은 공동체의 질서와 화평을 위하여 그 시대적 문화의 요구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분명한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전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교회가 화평하려면 반드시 어떠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서에는 서열(序列) 개념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서열이 있다고 해서 교인들간에 불평등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지휘관은 사병보다 서열이 높습니다. 그러나 사병이 지휘관보다 인격적으로 훌륭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됨"의 지위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시고,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며, 남자는 여자의 머리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만, 구속 사역에 있어 성자는 성부에게 복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있는 것입니다.

"(고전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여자가 교회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하려면 반드시 긴 머리를 지녀야 하며, 그 위에 무엇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긴 머리를 하거나 머리에 무엇을 써서는 안 되었습니다. 남자들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음으로써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존중함을 나타내었습니다. 반면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씀으로써 머리된 남편에 대한 존중을 나타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자는 하나님과 남편 모두에게 대한 존경과 복종을 나타냈습니다. 창조 질서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으며, 여자는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창조되고 나중에 창조된 것이 남자와 여자의 우열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 속에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될 뿐만 아니라 둘 사이의 동등한 협력 관계의 특성도 있습니다.

"(고전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전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주안에서 영적으로 하나입니다. 남자 없이 여자만 있을 수 없으며 여자 없이 남자만 있을 수도 없습니다. 창조 당시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지만, 그 후 오늘날까지 모든 남자는 다 여자에게서 나옵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5. 여성은 여성다워야 하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령한 일이라도 여성은 여성다워 하고 남성은 남성다움을 잃지 않아야 되는 것이 신앙적으로 지켜야 할 첫 번째 책임입니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신령한 일에 본보기와 지도자가 될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못해서 아내에게 괄시를 받는 것은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유한 특권으로, 영광으로 준 그 일을 본인이 놓친 것은 부끄러운 일인 줄 알고 남자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도록 열심히 신앙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는 남자로 지음 받은 책임을, 여자는 여자로 지음 받은 책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 책임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창조질서가 영광스럽게 회복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문제에 앞선 어떤 여성들이 그 성경지식이나, 믿음이나, 신앙이나, 행위에 있어서 앞섰다는 이유로 창조질서를 깨는 것이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인데 그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된 모습을 가지려면 누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여자가 있어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자 없이 남자는 영광을 갖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여자의 역할이 바로 남자를 돕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자 혼자 예수 믿었다고 다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믿는 예수를 남편도 똑 같은 수준으로 믿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남편과 함께 하나님 앞에 들어오지 않고서 혼자 신앙을 가진 것으로 잘난 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아무리 아내가 잘한다고 해도 남편이 예수 믿는 것을 끝까지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여성들 위주로 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남편들이 나이가 들어서 아내에게 지기 때문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끌려 나왔지, 남편들이 신앙의 가장으로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가정은 사실상 많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들은 아내의 지도력 밑에서 주눅이 들어 가지고 당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회에 분명히 A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다음 주일날 오면 다 B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가서 결제를 받았는데 싹 바뀌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여성은 남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와 신앙 생활할 수 있도록 전심 전력을 다해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남편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가장 중요한 사명에서 빗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목사한테 너무 잘하지 마십시오. 우리 나라 교회마다 여자 성도들이 목사한테 하는 정성은 지극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먼저 목사에게 가져다 드리는 것이 목사를 섬기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남편을 섬기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심각한 문제일수록 남편에게 먼저 알려 주어 남편으로 하여금 가장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질서를 지키는 신앙생활입니다.

6.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유명한 유대 랍비 메이르는 그런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어느 안식일 내내 공립학교에 앉아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집을 비웠을 때 잘 생기고 율법에 밝았던 비범한 그의 두 아들이 죽어 버렸습니다. 그의 아내는 죽은 아들들을 침실로 옮기고 부부가 사용하는 침대 위에 눕혔습니다. 그러고는 하얀 천을 그 시체 위에 덮어놓았습니다. 저녁이 되어 랍비 메이르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물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들이 어디에 있소? 내가 그들에게 축복해 주어야겠소." 이에 부인은 "그 애들은 학교에 갔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학교를 거듭 둘러보았지만 그곳에서 아이들을 발견할 수 없었소." 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잔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바깥에 갔다 온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고는 잔을 비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 아들이 어디 있소? 내가 그 애들에게 축복의 잔을 주어야겠소." 라고 했습니다. "멀리 가지 않았을 거예요." 라고 부인은 대답하고 그가 먹을 음식을 내놓았습니다. 그가 좋은 기분으로 식후 기도를 마쳤을 때 그녀가 말했습니다. "랍비여, 허락하시면 제가 한 가지 물어보려고 합니다." "여보, 물어보시오." 라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저에게 보석 몇 개를 보관하도록 맡겼어요. 그런데 이제 달라고 하네요. 제가 그것을 돌려주어야 합니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시오? 그것은 물을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 아니오? 도대체 남의 소유물을 돌려주는 데 왜 머뭇거리며 망설인단 말이오?" "그게 아니랍니다. 저는 단지 당신에게 알려드리지 않고는 돌려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남편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 아들들의 시신을 덮은 하얀 천을 벗겼습니다. "아! 내 아이들아!"라고 아버지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내 아이들아! 너희들은 내 눈의 빛이요 내 이해력의 빛이 아니더냐? 나는 네 아버지이건만 너희들은 나의 율법 교사가 아니었더냐?" 그의 부인은 돌아서서 슬피 울었습니다. 한참 뒤에 그녀는 남편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랍비여, 당신께서는 우리가 맡은 물건을 돌려주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보세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이들을 주셨어요. 그리고 도로 가져 가셨어요. 주님의 이름이 찬양받으실지어다." 랍비 메이르도 화답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찬양받으실지어다. 당신 때문에도 주님의 성호를 찬양해야겠소. 왜냐하면 성경에는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느니라'(잠 31:10,26)고 쓰여 있기 때문이오."

7. 마크 트웨인의 작품 중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엮은 것이 있습니다. 하와가 걸아가는 모습을 보고 아담이 읊조립니다. "그녀가 있는 곳에 에덴이 있도다. 낙원! 그것은 바로 하와가 있는 곳이로다." 아내와 파라다이스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아내는 신의 귀중한 선물이며 그녀에게는 낙원의 조건, 즉 좋은 점을 관찰하는 사랑의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지위나 권리는 여성 자신보다는 남성 쪽에서 지켜 주어야하는데, 그것은 창조의 동등성의 인식과 사랑의 이념에서만 출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작가는 외칩니다. 한국의 여권 운동가가 영국의 유명한 여성 지도자에게 "여권 운동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영국의 여성 지도자는 여자는 먼저 세 가지 바른 질서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는데 첫 번째는 '교회'와의 바른 관계를 맺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부엌'의 질서가 잡혀야 된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어린이'라고 했습니다. 성의 차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복의 수단이고, 성의 동등,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요 참된 인간회복을 위한 진리요 이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 남녀의 성차(性差)를 분명하고 바르게 할 때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 남녀의 평등이 이루어질 때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가 진정한 행복과 건전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바르게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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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피로 세운 새 언약

"(고전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고전11: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전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고전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고전11: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전11: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전11: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고전11: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1: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고전11: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주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신 성만찬의 참된 뜻을 깨달아 신앙생활이 항상 새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1. 성만찬(Eucharist)이라는 낱말은 감사를 뜻합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eis eucharistian) 그리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가능한 한 좀더 자주 모이도록 하자." 최초의 성만찬 기도들은 거의 전부가 감사의 기도들이었습니다.(디다케) 잔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아들인 다윗의 거룩한 포도나무에 대하여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신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하여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떡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과 지식을 알게 해주신 데 대하여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세세토록 영광이 있을 지어다." 그러므로 먼저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었고, 그 앎으로 영생과 삶의 지혜를 얻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는 주일 예배 설교 때 빈 새장을 들고 강단에 올라섰습니다. 주일 이틀 전에 거리에서 $100(9만원)을 주고 산 것이었습니다. 거리에서 한 소년을 만났는데 참새 한 마리가 들어 있는 새장을 들고 있었습니다. 난폭한 이 아이는 가끔 새장을 흔들어 참새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스펄젼 목사가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너 그 새를 어떻게 할 셈이냐?" 라고 묻자 "조금만 더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릴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는 "그렇다면 나에게 팔지 않겠니?"라고 제안했습니다. 소년은 스펄젼 목사를 훑어보더니 웃으며 농담을 했습니다. "$100 준다면 팔죠." 스펄젼 목사는 그 자리에서 $100을 내주고 새장을 사서 문을 열어 새를 하늘로 날려보냈습니다. 이튿날은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강단에서 스펄젼 목사가 행한 새장 설교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라는 악마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인간들을 어떻게 할 셈이냐?" 그러자 죄가 말했습니다.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을 가르쳐 잠시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리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고 싶은데 값을 얼마나 주면 되겠느냐?" 악마는 웃어버렸습니다. "이것들을 사서 뭐하게요. 그들은 당신을 배반하고 침?고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그래도 사겠다면 당신의 눈물과 몸과 피를 내놓으시오." 스펄젼 목사는 설교를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요 부활입니다." 성만찬은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엄청난 값을 지불하신 성만찬을 진실로 감사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성만찬은 연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연합을 강조하는 기도를 <디다케>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깨진 떡이 산(山)들 위에 흩어져 있다가 한데 모여 하나가 되듯이, 당신의 교회가 땅 끝에서 모여와 하나가 되어 당신의 나라 안에 들어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과 권세가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이 기도를 흠정역에서는 "(고전11: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죄를 받는 사람은 성도들이 주의 몸이라는 것을 분별치 못하고 그리고 그들이 성만찬에 참석할 때에 그들이 하나로 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교회 안에 분열과 당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분열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식탁이 주님의 식탁이지 결코 어떤 교회의 식탁이나 사사로운 개인의 파티가 아니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주의 만찬(성만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심각한 분열과 성만찬의 신성함을 모독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헬라 사회에서는 친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식사를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를 '에바노스(Evanos)라고 불렀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성도의 교제를 위하여 '아가페 밀'(Agape meal)이라는 이름의 애찬(愛餐)을 즐겼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각자의 형편에 따라 먹을 것을 가져왔고 그것들을 전부 한데 모아 놓고 다시 나누어 먹으면서 함께 교제를 즐겼습니다. 이와 같은 애찬은 성도의 참된 친교를 도모할 뿐만 아니라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애찬의 본래 의도가 상실되고 왜곡되어 성도간에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부한 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었습니다. 음식을 잔뜩 가져올 수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거의 아무 것도 가져 올 수 없는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실제 많은 노예들에게 있어서 애찬은 한 주간에 한 번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각자 가져온 음식을 자기들만 먹었습니다. 부자들끼리 재빨리 먹어치웠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거의 먹을 것도 없이 고픈 배를 쥐고 있던 형편이었고, 부자들은 그 식사시간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자랑함으로써 가난한 형제에게 마음에 치욕적인 상처까지 입혔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교인들간의 사회적인 격차를 없애려던 애찬이 오히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과 계급을 형성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가난한 자와 부자로 패가 갈라지게 되었고 두 계층간에 갈등과 긴장이 생겼습니다. 초대 교회는 세계를 갈라놓았던 장벽, 인종과 계급, 성의 장벽 등을 타파한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고대 사회는 자유인과 노예, 헬라인과 야만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과 여 등등의 차별이 철저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모든 인간이 자유로웠던 유일한 장소였습니다.(고전 12:12-13, 갈 3:27,28, 골 3:9-11) 사회적인, 계급적인 차별이 존재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참된 교회란 그리스도와 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다 하나여야 합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초대 교회는 애찬을 통해 참된 교제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가진 것을 서로 나누어주는 참다운 교회였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어주는 사랑으로 하나된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물건을 혼자 독점하거나 자기들만의 모임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크리스챤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참다운 크리스챤은 다른 사람이 빈곤에 처했을 때 자기만 가지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특권은 단지 간수하는데서가 아니라 오히려 나누어주는 데 있습니다.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인류에게 모든 것을 베푸셨습니다. 피로 세운 새 언약을 기념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해가며 이웃에게 베풀며 살라는 것입니다.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예하는 사람이란 떡과 잔이 나타내는 사랑과 그 사랑의 의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전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예하는 자는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깨닫지 못하며, 형제와 싸우며, 그를 경멸하며, 그 이유야 어떻든 형제들과 마음이 하나 될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형제에 대하여 증오나 원한이나 경멸하는 마음을 가진 채 주님의 식탁에 임하는 자는 합당치 않게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시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형제와 불화하면서 성만찬을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성만찬이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죄가 사하여졌음을 믿고 회개하며, 항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의식(儀式)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처럼, 예수의 피는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새 언약입니다. 예수의 피가 없이는 새로운 계약, 인간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절대로 실현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 성만찬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 새 언약의 상징입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였던 관계가 화목한 관계로 새롭게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교회는 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죄인을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성만찬은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 죄가 비록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에게 성찬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사랑의 애찬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은사를 받았느냐, 얼마나 축복을 받았느냐, 누가 믿음이 좋으냐 등으로 성도를 구별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약해도 성도는 성도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도 있고 믿음이 강한 성도도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성도의 우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무슨 일을 할 때 의견 차이가 생기면 옳고 그른 것보다 하나 됨이 깨지지 않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아무 것도 못하더라도 싸우지 않고 화목해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저 사람이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 가지 않고 차라리 지옥에 가겠습니다." 이는 자기 신앙이 잘났다고 뽐내는 교만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 사람의 죄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서로 화목하여 하나가 되지 못하는 자는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을 욕되게 하는 자요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말하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없는 자입니다.

"(요일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일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몸과 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전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제아무리 열심과 충성을 다 한다해도, 제아무리 능력과 은사가 많다고 해도, 제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해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되기 위해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함으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며 덕을 세우는 것이 주의 몸과 피, 성만찬에 바르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롬15: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롬15: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15: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3. 성만찬은 복음의 선포입니다.

"(고전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만찬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는 성만찬에서 주님의 과거의 희생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의 당당한 재림의 확실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와 재림, 복음 전도의 사명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성만찬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언약으로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대할 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는 높은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인생을 바치고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임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개인적인 일을 하나님의 일로 믿는 사람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어두운 시간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을 확인하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주의 재림 신앙을 소망하는 성도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생명을 다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4. 성만찬은 주님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먼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고난받고 죽으셨다는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지 십자가에 죽으신 것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광스럽게 살아 계신 분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기억은 경험과 만남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사신 예수님은 온 우주 안 어디에나 계십니다. 성만찬을 통해서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 모든 곳에 주님은 현존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 항상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믿고 사는 것이 주님을 기념하며, 기억하며 사는, 성만찬의 생활인 것입니다.

5. 성만찬은 성례전(sacramentum)인데 이 성례전이란 말은 본래 군인이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주님께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할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만난 복된 주님께 보다 충성된 마음가짐으로 헌신을 다짐하지 않고서는 이 성찬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은 주의 몸과 피를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축복에 자리에 참여하기 위해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날마다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억하여 감사함으로 복음 전파에 충성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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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은사의 원리

"(고전12: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고전12: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고전12: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고전12: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12: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고전12: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고전12: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고전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고전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고전12: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고전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고전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고전12: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고전12: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고전12: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고전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고전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12: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고전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 초대 교회의 특색은 강렬한 성령의 역사(役事)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거기에는 참된 것들도 있었던 반면 거짓된 것들도 많이 일어났었습니다. 자칭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 중 어떤 이들은 흥분과 망상에 빠져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교회 분열을 조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떠한 영적 은사가 더 중요한가? 누가 더 우위에 있는 은사자(恩賜者, 은사받은 사람)인가?" 등의 은사 문제로 영적 우월주의의 교만과 분파주의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저마다 참된 영을 가졌다고 주장하지만 성령과 거짓 영을 구분하는 기준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영이 참 영이고 그렇지 않은 영은 악령이요 거짓영이며 우상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각양 은사들의 나타남이 과연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이것보다 더 신령한 것이 없고, 어떤 신령하고 놀라운 은사와 아무리 큰 능력을 받았다해도 예수를 믿는 것과 대등하거나, 그것보다 큰 것이 없다는 것이 본문의 가장 중요한 초점인 것입니다. 먼저 은사에 대한 개념부터 바르게 해야만 합니다.

"(롬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롬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위 성구들에서 나타난 "신령한 은사", "하나님의 은사" 등은 모두 성령의 은사를 말합니다. 우리가 은사 하면 방언, 신유, 예언 등을 먼저 생각하지만 "신령한 은사", "하나님의 은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그 자체를 말합니다. 예수를 자신의 주님, 메시야 즉 구세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여 구원받은 것을 "신령한 은사", "하나님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아 영생을 얻었으면 바로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은사는 어떤 특수한 계층의 사람만이 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예언하고 방언하며 영들을 분별하는 것만 은사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고 남을 긍휼히 여기며 섬기고 구제하는 것도 은사를 가졌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롬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롬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내가 가진 은사는 아무나 가지지 않은 특수한 것이고 누가 가진 것은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것이어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은 극히 위험한 발상이고 그야말로 교회를 파괴하는 악령의 역사입니다. 눈(영 분별의 은사)이라고 해서 발바닥(남을 섬기고 구제하는 은사)을 멸시할 수 있습니까? 두 눈만 붙어있고 발바닥이 없는 반병신이 고급한 인간입니까? 몇 가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은사운동이나 은사집회 등을 하면서 영적 우월주의나 분파주의에 빠지는 것은 정면으로 성령의 참 뜻을 거스르는 것들입니다. 은사운동이나 은사집회 등은 더 열심히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므로 교회에 덕을 세우고, 더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사는 생활을 보여주며, 보다 더 바르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은사의 뜻은 구원받은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은사의 방향과 목적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목회 초기에 묘하게도 기도하기만 하면 병이 낫는 신유의 은사를 가지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나다 보니까 점점 소문이 났습니다. 이 목사님이 직접 가서 기도를 하면 정말로 낫는 것입니다. 당장이 아니라 며칠 있다가 다 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하나님께 그 은사를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왜냐? 목회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문을 듣고 누구나 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알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기 위하여 달라는 대로 다 줄 테니까 내 딸을 고쳐 주시고, 내 아내를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완전히 병원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기도하여 그 은사를 반납했습니다. "하나님, 저 이거 싫습니다. 저는 말씀을 맡은 종입니다. 저들의 영혼을 치료하도록 말씀을 맡겨 주셨는데 이 일로 인하여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은사의 사용 목적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목표는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되어 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의 성품을 이루어나가는 데 은사의 목적과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신의 성품을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1: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벧후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벧후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벧후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신의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은사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이룩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성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사는 이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성경에 있는 계시보다 더 나을 것이 하나도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하나님께서 직접 다시 한번 말씀해주신다면 우리에게 더 큰 힘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더 붙여질 것은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가감할 필요가 전혀 없는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전4:6) 형제들아....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그러므로 백부장의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백부장은 은사가 없었어도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는 믿음으로 자기 하인이 병고침을 받게 했습니다.

2.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와 그에 따른 직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12: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롬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롬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위에 열거한 은사와 그에 따른 직분들은 모두가 다 먼저 교회의 유익과 덕을 위하여, 교회 봉사를 위하여(섬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교회 성장과 복음 전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 확장), 신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기 위하여(신의 성품)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허락하신 이유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바로 분명히 알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아 자신의 신앙에 더 구체적으로 도우심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은사는 허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이 은사를 주셨다고 해서 방자하게 행동하거나 나를 분리시켜 계급화한다면 그것은 은사의 목적이 분명히 아니라는 것을 알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은사를 사모할 때 그 은사가 주님을 닮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은사는 구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하나이십니다. 하나님도 성령도 하나, 믿음도 세례도 하나입니다.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은 하나이신 성령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되기를 원하십니다.

"(고전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고전12: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고전12: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나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신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보다 더 높거나 다른 신이 아니라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그 은사들을 베푸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목적하는 바는 은사의 다양함을 열거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다양한 은사의 역사 속에 교회가 성령으로 하나되는데 있습니다. 은사 충만, 성령 충만은 모두 교회에 덕을 세우며 유익함을 주어야 합니다. 이는 또한 우리 신앙의 진보와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나는 너와 다르다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모든 신자로 하여금 유익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은사는 자기의 영성이 얼마나 깊고, 하나님과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은 은사의 다양성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들이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해서 어떻게 다양하게 쓰여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교회장(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몸에 비유하면서 그 은사들을 몸에 붙어있는 다양한 지체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 몸을 보면, 여러 지체가운데 눈에 보이는 지체가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지체도 있습니다. 보이는 지체보다 오히려 몸 속에 들어있어 보이지 않는 지체가 더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덜 귀한 것이 결코 아닌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은사라고 해서 천한 것이고 남의 눈에 잘 보인다고 해서 더 고급한 은사가 결코 아닙니다. 나타나는 은사만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는 구제는 참으로 귀한 은사인 것처럼 모든 은사와 직임은 다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소중하고 귀한 것들입니다.

3. 은사와 직분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그것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12: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고전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첫째가 사도라고 해서 사도가 선지자보다 높고 교사보다 높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봉사의 직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 사명이라고 해서, 선지자 사명이라고 해서 일반 성도보다 그가 더 자질이 뛰어나거나 인격이 월등하다거나 하나님이 더 사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은사와 직분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특별히 사랑하고 특권 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들 직분과 은사를 주신 것은 교회를 세우며, 그 교회에 덕을 세우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은사와 사명을 받은 사람은 이웃과 성도를 유익케 하기 위하여 기꺼이 희생 봉사할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모든 직분과 은사의 기본적인 원리는 섬기는 것입니다.

"(엡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고전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섬기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고전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이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며 신앙의 본질입니다. 사랑으로 남을 섬기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몸소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빌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므로 은사와 직임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종의 형체를 입고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일류 대학에 합격해야 하고, 남편이 승승장구 승진해야 하고, 사업이 일취월장 번성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그렇다면 일찍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돌들을 들어 떡덩이가 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꼭대기에서 사뿐히 뛰어내려 능력을 나타내셨을 것이며, 마귀에게 경배하여 천하만국과 영광을 받아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경제적 성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나타나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능력의 종교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권세와 권력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의 형체를 입고 남을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섬김의 종교입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창시자인 아씨시의 프란체스코는 멋쟁이 귀공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과 가족을 버리고 나병환자들의 친구가 되었으며 사도적(使徒的) 빈궁과 전도를 생활의 이상으로 삼고 실행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을 가까이 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며 그 속에서 신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날 많은 명문가의 처녀들이 모인 무도회에 그가 참석했을 때 옆에 있던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여보게, 프란체스코! 머지않아 자네는 저 미인들 중에서 한 여자를 선택하겠지?"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미 훨씬 더 아름다운 것을 골라놓았다네!"

친구가 다그쳐 물었습니다.

"아니, 그 미인이 누구란 말인가?"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바로 가난이라네!"

프란체스코는 가난한 자를 섬기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는 똑같은 두 신자가 있는데 돈이 많은 사람과 돈이 없는 사람 중 둘의 신앙이 똑같으면 누가 주를 위해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습니까? 아마 서슴없이 똑같은 신앙이라면 기왕이면 돈 많은 쪽이 낫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돈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이것만큼 큰 시험이 없습니다.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앙의 기본 원리인 것입니다. 똑같은 신앙인 인데 왜 누구는 돈을 주고 누구는 가난하게 하는가?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는 돈을 책임으로 주셨고 한 사람에게는 가난을 책임으로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은 똑같이 하나님에게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엇으로 쓰시는가는 하나님의 권리이고 하나님의 권위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충성뿐입니다.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은사와 직분을 받은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시고 서로 사랑하고 섬김으로 하나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교회에 덕을 세워 교회가 유익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는 여러분과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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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제일 좋은 길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12: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고전12: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고전12: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고전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고전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고전12: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고전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고전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고전12: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고전12: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고전12: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고전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고전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12: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고전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린도 교회에는 초대 교회의 특색인 성령의 역사(役事)가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된 것들도 있었고 반면 거짓된 것들도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자칭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어떤 이들은 흥분과 망상에 빠져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분쟁을 조장함으로 교회 내에 당파를 형성하여 교회 분열을 야기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떤 영적 은사가 더 중요한가?"

"누가 더 우위에 있는가?"

등의 문제를 야기함으로 개인적으로는 교만에 빠져 있었고 교회 내에는 영적 우월주의 및 분파주의를 형성하여 교회의 덕을 해치며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해치고자 하는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성령의 은사로 지혜, 지식,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의 분별, 방언 통역 등을 열거하고 있으며, 교회의 직분으로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사하는 자, 병고치는 자, 방언 하는 자, 통역하는 자 등으로 구분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든 은사와 직분은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들로서 성도들은 이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통해서 한 몸은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사도 바울은 영적 은사의 다양성을 세 가지 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은사의 다양성입니다. 은사가 이처럼 다양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각 사람에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봉사의 다양성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도간에 서로를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하며 나아가 이웃과 하나님께 대하여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셋째는 역사(役事)의 다양성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는 성도들을 통해 역사하며 교회 공동체의 삶 속에 끊임없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각 지체는 많으나 몸이 하나이듯 성도들이 받은 은사가 아무리 많을 지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것입니다. "내 손가락이 아프다."고 하지 않고 "내가 아프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이 세상에 육신의 형체를 가지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을 때는 자기를 위해 그 일을 대신해 줄 인간을 찾아내야 합니다. 아동을 가르치고자 할 때는 그 아동을 교육하는 교사를 찾아내야 합니다. 병자를 고쳐 주고자 할 때는 그러한 자기의 일을 맡아줄 의사를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일을 하여야 할 손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심부름하기 위하여 뛰는 발이며 그리스도를 위해 말하는 목소리인 것입니다.

우리의 손 아니면,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할 손이 없으며,

우리의 발 아니면,

주의 길로

사람들을 이끌 발이 없으며,

우리의 목소리 아니면

주님의 죽으심을 전파할 목소리 없으며,

우리가 도움이 되어주지 않으면

사람을 주님께 이끌 도움이 없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자들은 각 기관이 모여 하나의 몸을 이룬다는 것을 깨달아 어느 한 기관을 보잘 것 없다고 멸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대신할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여 서로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특히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몸에 더 요긴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교인들 중에 보잘 것 없이 약하게 보이는 성도들이 오히려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우리는 서로의 필요성을 알고 서로를 존경해야 합니다.

"(고전12: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고전12: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몸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특별한 은사를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들은 모두가 다 존귀함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몸의 각 부분은 서로 질투하거나 상대의 기능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각 부분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만을 하며 또 그럴 때에만 몸은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누가 누구를 판단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서로 연약한 부분을 짊어짐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아가야 합니다 개인의 자유와 특권을 제한함으로써 약한 형제를 일으켜 세우고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워 나아가야 합니다.

"(롬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롬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롬15: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갈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우리 모두가 다 은사를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합당한 은사와 직분을 주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어떠한 특정한 은사를 자랑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은사와 그에 따르는 직분의 참된 목적은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봉사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영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그것을 받은 사람이 그 은사로 말미암아 자랑을 하거나, 자기의 영성(靈性)을 증명하거나, 하나님과 자기와의 특별한 관계를 증명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은사는 다양한 봉사를 통해 교회들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은사란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자기를 증명하기 위하여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본인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 가를 더 분명히 알고, 그래서 신앙이 더 튼튼해지고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되어 자신의 신앙생활에 구체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 은사는 허락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사모할 때 그 은사가 주님의 형상(인격)을 닮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은사는 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이미 족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은사를 받는다고 해서 그 은사가 성경에 있는 계시보다 더 나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이라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하나님이 직접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신다면 우리에게 더 큰 힘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용이 더 붙여질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만 이것을 주었다고 해서 방자하게 행동하고 남과 나를 분리시켜 계급화한다면 그것은 은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우리는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자랑하려는 이런 시험으로부터 자신을 경계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모두의 유익을 위하여 주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은사의 활동을 통해 모두가 하나가 되어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은사의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떤 은사를 받은 것이 더 세냐? 이런 은사를 받았으면 받지 않은 사람보다 더 높고, 은사 중에서도 어떤 은사를 받은 것이 다른 은사를 받은 것보다 더 높다라는 개념 등은 은사의 개념 속에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거나 더 높였거나, 그가 더 귀하다는 표현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신자들끼리 어떤 은사나 체험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어떤 신자는 열등감을 갖고 어떤 신자는 좀 더 낫다는 우월감을 갖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 자체의 근거를 뒤흔드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 방언이라는 은사를 주신 하나님은 나에게 구원을 준 하나님보다 더 높거나 다른 신이 아닌 것입니다. 태권도 유단자가 되는 것처럼 예수 믿고 구원 얻으면 초단이고, 방언 하면 2단이 되고, 그 다음 신유의 은사를 받으면 3단이 되고, 예언을 하면 4단이 되는, 이렇게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전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고전12: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고전12: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한 몸이라는 통일성, 즉 은사의 통일성이지 은사의 다양성이 아닙니다. 다만 은사의 다양성은 인정될 뿐입니다.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12: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고전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 본문에 보면 보통 은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즉 사도, 선지자, 교사라는 것이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보통 은사라고 알고 있는 것들, 다시 말해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 등은 그 다음에 나오고 있습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는 분명히 자기를 위해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를 이해할 때 목사가 평신도보다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목사가 더 많은 신앙 훈련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목사가 일반 성도보다 자질이 더 뛰어나거나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피로 값주고 사신 모든 영혼들을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지까지 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선지자, 교사 등을 세운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데까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은사를 주신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28절에 기록되어져 있는 순서는 일고의 가치가 없습니다. 다만 봉사적 차원에서 그 순서대로 열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 등이 분명히 봉사적 성격이 강한 것입니다. 즉 능력,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 등에 비해 사도, 선지자, 교사 등이 더 남을 위한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고전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는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 유익이 되는 차원에서, 봉사적 차원에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이며 그것이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데 있어 제일 좋은 길, 즉 방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제일 좋은 길이 다음 장인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봉사적 성격에 가장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여기 사랑은 자기를 증명하지 않고, 상대방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5절에 있는 것처럼 사랑은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상대방에게 피해 끼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은 이웃과 성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을 소원해야 하며 그 일을 위하여 기꺼이 봉사,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인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이 왕노릇하기를 원한다면 그 왕노릇하는 왕도를 배워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고 세상의 미말에 두어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나중이 되어라.", "섬김을 받고자 하거든 섬기는 자가 되라." 이것이 모든 교회 직분과 은사의 기본적인 원리인 것입니다.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남을 섬기는 것, 자기를 낮추고 복종하는 것은 십자가에 죽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전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고전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어떤 높은 직분을 가졌든지 어떤 기가 막힌 은사를 소유했든지 그것은 아무 것도 쓸모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고전13:1)...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고전13:2)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 이것이 은사를 이해하는 최고의 시각이어야 합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며, "제일 좋은 길"을 보여주는 것은 더욱 큰 봉사의 길로, 더 큰 희생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길, 그것이 제일 좋은 길인 것입니다. 남에게 유익과 도움을 주고 그들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희생하고, 낮추고, 봉사하는 자리에서, 십자가의 자리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 믿음이란 결국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원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무엇 때문에 종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 봉사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종의 형체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희생 봉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제일 좋은 길은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은 희생과 사랑의 길입니다. 그 희생적인 사랑의 길에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천대를 받으셨지만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에 <어거스터스>가 있습니다. 어거스터스가 탄생되었을 때 이상한 노인이 산모를 찾아와서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뜻으로 이 아이를 위한 소원 한 가지를 이루어 주겠소" 라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이 아이가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어거스터스는 그 희망대로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에 도취되어 교만해지고 남을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결국 그의 말년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늙은 어거스터스에게 이상한 노인이 다시 방문하여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 한번 더 소원을 들어주겠소"하고 말합니다. 어거스터스는 서슴치 않고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인간이 아니라 누구나 사랑해 줄 수 있는 인간이 되게 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했습니다. 행복과 축복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데 있습니다.

성도가 가야 할 제일 좋은 길은 희생적인 사랑의 길입니다.

성도가 가야 할 제일 좋은 길은 희생적인 봉사의 길입니다.

성도가 가야 할 제일 좋은 길은 희생적인 십자가의 길입니다.

제일 좋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감사와 기쁨으로 가시므로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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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사랑의 찬가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1. 어떤 진정한 연인, 정직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 년 내내 사막의 동굴 속에서 명상했습니다. 그러고 난 뒤 자기 애인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닫혀진 문 뒤에서 애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구신가요?"

"나요."

하고 남자가 말했습니다.

"지금 문밖에 있소."

"집안에 당신과 나 두 사람이 있을 자리는 없어요."

하고 닫힌 문 뒤에서 애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이 정직한 사내, 진정한 연인은 다시 사막으로 돌아가 일 년 동안 명상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같은 집에 와서 또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다시 애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또 묻고 있었습니다.

"누구신가요?"

충직한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대 자신이오."

문은 곧 열렸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입니다.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통일하시고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만유가 하나되는 방법으로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 그리고 평안 등 성령의 열매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이신 하나님, 하나이신 성령은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하나되게 하십니다. 고린도 전서는 무엇보다 분열된 고린도 교회를 염두에 두고, 교회가 하나되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교회를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사랑을 제시하면서 영적으로 무지와 교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교회 분쟁을 해결하고 영적 은사들을 올바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랑을 제시한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다면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영적 은사들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영적 은사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사용되어지는 "제일 좋은 길"로써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지나치게 강조했던 예언과 방언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교회 분열은 그 원인이 사랑의 부재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결여된 모든 영적 은사는 거짓이며 공동체에 아무런 유익를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은사들은 비로소 빛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어떤 비상한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만일 거기에 사랑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영적 은사와 능력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은사의 활동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무관한 은사의 활용은 거짓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 중에 가장 으뜸 되고 그리스도의 마음에 가장 부합되는 것이 사랑일진대 모든 은사와 능력들이 사랑이라는 근본 정신에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와 능력들도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천사의 방언을 한다해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방언을 말하는 것은 이교도들이 축제 때에 떠들며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방언뿐만 아니라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진정한 효력은 바로 사랑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악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태도가 없을 때 그것은 이교도들이 우상 숭배할 때 악기들을 사용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관현악단을 동원한 예배라고 해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변화된 마음이 없다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결코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2.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여러분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교회에서 제일 많이 없어진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것은 경쟁뿐입니다. 경쟁적으로 교회를 키우고, 경쟁적으로 교회를 자랑하고, 경쟁적으로 은사와 능력을 자랑하고, 경쟁적으로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능력을 찾아다니며 성공을 추구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20: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서로 으뜸이 되고자 다투어 경쟁하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희생하며 섬기는 종이 되며 대속물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소망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지식이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이 모든 은사들과 능력들은 사랑을 만들어 내기 위해 보조 수단으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지 아니하고 은사나 능력 자체를 가지고 자신을 증명하거나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 경쟁적으로 은사나 능력을 추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하고 내려와서는 겨우 한다는 말이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우리 교회는 기도가 없어, 우리 교회 목사는 은사도 없고 기도도 없고 사랑도 없어, 누구누구는 교만해, 이와 같은 것은 금식 기도한 것이 아니라 굶주리고 와서 우는 사자처럼 공격하며 대드는 것이지 주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 금식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율법 중의 첫째 율법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선지자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드러내고 공격하고 찌르고 하는 것이 대강령인줄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선지자 사명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믿음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를 부르셨고,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은사가 왜 주어지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어 가는 데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되라고 은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보조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이 은사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은사가 많다, 너희 교회는 은사가 적다, 나는 은사가 여러 가지다, 너는 은사가 별로다 하는 것은 어린애들이 골목에서 서로 자기 집 자랑하거나 자기 자랑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은사는 이처럼 자기 자랑이나 자기 증명을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제일 좋은 길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방언은 기본이고 방언 통역이나 예언 등을 해야 신령하며 영권(靈權), 즉 영적 권위를 지닌 것처럼 여긴다고 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여러분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사랑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실패한 것은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3. 오늘날 영적 권위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는 은사 충만과 영성의 표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한국 교회는 오순절 계통의 은사집회에 깊은 영향을 받아 신자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하는 성령의 내면적이고 은밀한 역사보다는 외적으로 현저하게 나타나 보이는 방언, 예언, 신유와 같은 은사들을 일방적으로 치켜세우고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격이 훌륭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목회자보다는 기적을 행하고 신유의 능력이 있는 목사가 보다 신령한 분으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비록 영적인 충만함을 소유하고 여러 비상한 은사들을 받았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분쟁과 싸움, 사랑의 결핍, 비평, 불화 그리고 부도덕과 같은 거짓 영들의 지배를 받아 도덕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으나 바울이 볼 때는 어린아이들에 불과 했고 육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은사를 소유했다고 해서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은사들을 사용하여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그 은사들을 사랑을 따라 사용하는 사람이 바로 신령한 사람인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입니다.

"(고전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고전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고전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 즉 사랑의 마음을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신령한 은사들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할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망각하고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였습니다.

"(고전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진정한 영성의 표지는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성도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보이는가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수많은 문제들은 모두가 다 사랑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분당을 지어 분쟁하고 싸우는 문제도 사랑의 마음을 따라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온전히 합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교우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면서 불신 법정 앞에서는 것도 사랑이 없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습니다. 약한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도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보다 비범한 은사들을 소유하려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도 결국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선지자 노릇하면 최고라고 생각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은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매를 보라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행위의 열매가 참 선지자면 참 선지자 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참 선지자의 직분은 열매가 아닙니다. 선지자 직분을 행하면서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서 그가 참이냐, 거짓이냐가 판명되고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면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진짜냐 가짜냐를 분별하는 것은 은사나 직분 자체가 아니라 그 주어진 은사와 직분을 따라 어떤 열매를 맺었냐에 달려 있습니다. 가짜 선지자, 가짜 목사, 가짜 집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짜도 얼마든지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기도 합니다. 진짜 성령의 열매는 "(갈5:22)...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 등입니다. 아무리 신령한 일을 행한다고 해도 성령을 쫓고 있지 않고 육체를 쫓으면 가짜입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를 쫓는 것은 무엇입니까?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사도 바울은 삼층천을 올라갔다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을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아무에게도 그것은 유익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본인으로 하여금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체험을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이지 남에게 그것을 자랑하고 자신이 사도이며 선지자인 것을 증명 받고 이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사와 그에 따르는 능력과 권능이 그 사람의 직분을 증명하거나 그 사람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나타내고 증명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어진 성령의 능력과 권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자신의 직분을 증명하라고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랑한 것이 있다면 오직 그 자신의 약함이었습니다.

"(고후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아씨시의 성프란시스는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번 금식을 한 사람들입니다만 40일 금식기도를 하기로 했는데 제자 중의 하나가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그냥 하는 것은 맥이 좀 빠지니까 먹을 것을 앞에 놓고 하자고. 그래서 매일 죽을 쑤어서 떠놓고 둘러앉아서 금식을 했습니다. 고약한 금식을 한 것입니다. 한 20여일이 지나서 그 제자 중의 하나가 배고픔을 못 참고 그 죽을 떠먹었습니다. 그 제자를 지켜보고 있던 모든 제자들이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스승인 프란시스가 죽을 통째로 들고 마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금식하는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금식은 회개를 통해서 거룩해지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금식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할 것이고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신의 성품을 이룩하는데 금식의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이란 궁극적으로 신의 성품을 이루어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룩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요 그리스도의 모습을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 이러한 삶을 사랑하는 것이 신령한 것입니다.

4.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과 같은 은사들은 일시적이며 불완전하며 하늘의 완전한 것이 올 때는 폐하여질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어린 시절의 일을 버리게 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받는 지식과 예언, 그리고 방언과 같은 영적 은사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될 완전한 은사로 대치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아니하며 영원토록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처럼 예언과 방언과 같은 은사들에 집착하여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현재의 모든 영적 은사들은 미래에 완성될 사랑에 비교할 수 없으며 종말에 가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불완전한 은사들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견디는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케 하는 본질적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보다 사랑의 가치가 더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인데 비해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신앙적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 성취해야 할 덕목들 중에 하나는 아닌 것입니다. 사랑이 위대한 것은 바로 사랑의 영원한 위대성입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5.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그들이 회개하며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바라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 성도로 부름 받거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믿어 변화되어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원수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원수들에 대해 참으셨습니다. 그야말로 그분은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상대방이 구원받을 때까지, 상대방이 변화될 때까지 성내지 아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그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가 잘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미국의 고전적 우화 작가 밀레가 쓴 <바보 위니>(Winnie the Fool)가 있습니다. 이 우화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부엉이는 머리가 좋고 지식이 많아 자기의 지혜에 의지하여 행동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토끼는 활동적이고 계산에 밝지만 문제가 여전히 계속됩니다. 당나귀는 초조하고 급하고 모든 문제를 남의 탓으로 여기고 불평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보스럽고 조롱 받는 위니는 기다리고 생각하여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기 때문에 늘어진 것 같아도 결국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6. 예수님은 이 세상에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질문을 던졌습니다.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마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22:37).....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을 다 지켜야 의롭게 되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義)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과 완성은 사랑이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로써 천국에 들어가려면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인이 거쳐야 할 최고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란 뜻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부지수불여공여천(父之?弗與共戴天)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지수불반병(兄弟之?不反兵)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리>

교유지수부동국(交遊之?不同國)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합니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던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팎에서 자신에 대해 호의나 적의 등 어떤 태도를 취하든 항상 사랑의 동기를 지니고 상대방을 대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참 기독교인의 정신입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의 의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실제 관심입니다. 사랑은 관심 대상의 최고 번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이 어떻게 역사(役事)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이처럼 실제 호의를 베풀고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된 처녀는 아름답기는 해도 아주 표독스럽고 잔인한 취미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처녀는 청년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에 눈이먼 청년은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어머니에게서 심장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심장을 가지고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다가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와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그렇게 굴러가면서 어머니의 심장은 말했습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사랑은 원수까지일지라도 그의 최고의 번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원수에게 구했던 축복이 저주로, 온유함이 폭력으로, 친절이 나쁜 것으로 원수에게 응답될 수 있습니다. 복수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관심 속에서 그렇게 했을 경우입니다. 사랑은 바로 천국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냉랭하며, 사랑 없는 소망은 암담한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불태우는 불이며, 소망을 현실로 변화시키는 빛입니다. 꽃은 제아무리 화려해도 시들어 떨어지고 사라지지만, 그 열매는 영원한 것입니다. 기도로써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날이 되면 모든 은사는 없어지나 사랑의 열매는 영원히 남습니다. 기도로써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단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알면서도 사랑의 능력을 모른다면 그 기도는 주문에 불과 한 것입니다. 원수를 이기는 비결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도 핍박을 받아도 모든 일에 실패를 해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만 하면 성공자요 승리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려움과 사단의 대적이 강할 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감사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생활 속에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이 사랑을 노래하며 세상을 이기는 사랑의 실존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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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사랑을 따라 구하라

"(고전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고전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전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고전14:8)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고전14: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고전14:10)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고전14: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고전14: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고전14: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 하는 사람도 많고 예언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서로 자기가 받은 은사가 더 크며, 교회에서 더 큰 일을 한다고 자랑하며 자기와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특히 여러 은사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가장 부러워하며 최고로 선망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알아들을 수 없고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말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어 방언 이외의 은사들을 무시하기까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공중 예배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여 교회를 무질서의 도가니로 몰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도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사랑을 따라 은사를 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여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려는 유치한 생각을 버리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자유와 권리를 절제하는 성숙한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고전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방언은 개인의 신앙에 확신과 기쁨을 심어주며, 예언은 교회 공동체에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 그러나 방언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방언을 통해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도움을 받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방언을 통해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방언을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어야 영적인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할 때는 통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통역을 할 수 없을 때는 혼자 있을 때 방언 하라는 것입니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보다는 예언이 유익한 것입니다. 방언은 통역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그 내용이 전달되지 않아서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않는다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공중 예배시에 대표 기도하는 사람이 방언 기도를 하고 그 기도에 대한 통역이 없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에 화합하는 아멘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중 예배시 대표기도는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고전14: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대부분의 교인들은 강해 설교보다는 간증 설교나 간증을 듣기를 더 원하고 더 감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유명한 배우나 탤런트, 가수 등의 신앙간증 집회에는 훨씬 더 많이 모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 신자들은 다분히 감성적이어서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간증 설교를 선호합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일어난 예기치 않은 신앙적이고 기적적인 사건의 전말(顚末)에 더 흥미 있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내용보다는 그 간증 속에 나타난 신비스러운 요소에 만족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을 가장 선호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교인이 방언을 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아주 신령한 사람으로 간주하며 영적 권위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외면한 자요 하나님의 간섭이 없는 신령치 못한 사람으로 매도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신앙체험을 했다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불에 태워질 쭉정이요 가라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유창하고 신령한 방언을 많이 한다 해도 신앙 생활에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교과서만으로 충분한 사람은 여타의 참고 도서나 보충 교재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만으로 충분한 사람은 그 말씀만으로도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신자가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골2: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골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고전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성도가 먹고 자라게 되는 생명의 양식, 생명의 떡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성숙해지는 것이며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때로 핍박과 고난과 역경이 있다해도 인내의 믿음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게 될 때 구원에 이르게 되며,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딤후3: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딤후3: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참으로 성경이야말로 성도를 온전케 하는데 넉넉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언입니다. 어떤 신통한 은사를 받아서 삶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시원하게 해결하려고 은사 위주의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도 상당히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면서 고난과 역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삶의 지혜와 힘과 용기를 얻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건실한 열매를 맺어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신앙 생활입니다.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골고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부활 승천의 영광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성경(예언)대로 나시고 성경(예언)대로 죽으시고 성경(예언)대로 다시 사셨습니다.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성경대로 사실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신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신8: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가나안 땅에 이르는 지름길, 왕도는 없습니다. 천국 가는 길에 왕도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길과 진리,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천국에 갈 자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신자의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비례하여 성숙해지는 것이지 은사의 소유에 비례하여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그의 부르심의 소망,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부르시며, 부르신 지위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을 아는 것이 예언입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 중에서도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열심과 충성을 다하며 희생하므로 열매를 맺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하여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때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를 통해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므로 세계 통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골1:25)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골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골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하나님의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안에 모든 부요와 지혜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비밀이 아니지만 믿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비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 비밀의 영광의 풍성함과 소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에도 위축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차 누릴 그 영광의 풍성한 소망으로 인하여 항상 감사하며 기뻐하며 승리 생활을 하게 됩니다.

"(골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골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엡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앞날을 하나님이 자신한테만 보여 주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며, 복음을 전하며 장차 누릴 영광의 소망이 풍성함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예언입니다. 옛날 남북 전쟁 때 남부군이 군자금으로 감추었던 금괴를 찾으러 서부로 갔다가 금괴를 찾게 되었는데 둘이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둘 다 변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은 똑같이 나누기로 했는데 다른 한 동료가 배신을 한 것입니다. 그 친구가 먼저 권총을 뽑았고 우리가 아는 시나리오대로 주인공이 재빨리 돌아서 먼저 쏘았습니다. 정당방위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배신하고 자기를 먼저 쏘려는 악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동지였던 친구를 쏘았다는 자책감에, 가서 부둥켜안고 '아니, 내가 어쩌다 자네를 쏘았나. 세상에 이런 비극이 있나, 미안하네.' 그러자 배신했던 친구가 죽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야, 자책하지 말게. 이 세상에 가장 사랑하는 친구 손에 죽는 축복을 나 외에 누가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말을 하고 죽습니다. 죽는 마당에 이를 악물고 악악거리고 죽으면 죽은 다음에 발길질이나 한 번 더 당하지 이익 볼 게 뭐 있겠습니까? 기왕 죽게 되었으니 선심을 쓰는 것입니다. 나 같은 행복한 사람은 없네. 친구 손에 죽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울 수 있겠나? 사람은 한번 세상에 태어나 한번 죽는 것이 하나님의 정한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창3:19)......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왕 태어나 한 번 죽을 인생,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비록 고난과 역경, 핍박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과 불의한 세력이 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을 망칠 것 같고 내가 복을 받지 않으면, 내가 나서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예언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누가 어떻게 하든 세상은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갑니다. 사로 잡혀간 이스라엘 포로들이 바벨론에서 이제 하만의 악독한 꾀로 인하여 다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모르드개가 당시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된 에스더에게 구원을 청합니다. '너는 왕비이므로 우리 민족 중에는 네가 제일 높은 자리에 있다. 네가 힘을 써서 우리 민족을 구원시키도록 해라.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네게 왕비의 자리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서를 붙입니다. '네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일랑 아예 버려라.'

"(에4: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에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네가 안하면 안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세가 없으면 출애굽 사건이 없고 엘리야가 없으면 갈멜산 전투의 승리가 없고 세례 요한이 없으면 예수님이 오시지 못하고 사도 바울이 없으면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가 없고 하는 이런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없습니다. 모세가 없어도 이스라엘은 해방될 수 있고, 엘리야가 없어도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세례 요한이 없어도 얼마든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며, 사도 바울이 없어도 세계 복음화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이 세상 역사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만이 시행되는 것입니다.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것이 예언입니다. 예언을 하려고 하거든 이러한 예언을 하시기 바랍니다.

"(마24: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마24: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눅16: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그러므로 덕을 세우는 사랑의 관점에서 볼 때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은사가 풍성하시되 덕을 세우는 사랑을 따라 각양 은사가 풍성하시길 기원합니다.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한 가지라도 말씀대로 생활하여 열매를 맺어 자신과 교회에 덕을 세우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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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교회의 덕과 질서

  "(고전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고전14: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고전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14: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고전14: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고전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전14: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고전14: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고전14: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고전14: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고전14: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고전14: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고전14: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고전14: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고전14: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고전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인도의 썬다씽은 "인도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까? 기독교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을 모른다면 내가 살 의미가 없습니다. 내일 새벽까지 나에게 당신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나는 차라리 죽겠습니다."하고 생명을 걸고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구도자였습니다. 그러한 썬다씽에게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나타나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라고 했기 때문에 그날부터 그는 주를 위해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를 찾기 위하여,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그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모르고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모르고서 사랑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고전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마땅히 알아야 할 그 무엇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작 알아야 할 하나님의 사랑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전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사를 받았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두 아들이 있습니다. 맏아들은 효자요, 둘째 아들은 부모에게 불효한 이른바 방탕아입니다. 그래서 형은 언제나 그 동생을 구박하고 멸시합니다. 이유는 부모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맏아들은 자기가 부모의 뜻을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런 탕자는 없어지던가, 나가 죽어야 한다고 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 즉 그 부모가 그 못난 자식도 똑같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아니 자기보다도 오히려 그 동생에게 더 큰 연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는 부모를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부모를 잘 안다는 대 전제에서 자기와는 다른 그의 동생을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와 똑같은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만이 하나님의 법을 잘 알고 있고, 받은 바 은사를 통해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 사랑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구하되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것입니다. 은사의 목적은 자기증명이나 자기 신앙의 우월성, 하나님과의 남다른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은사의 목적은 자신에게 덕을 세우며, 교회에도 덕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은사의 공통적인 목적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덕목 중에 가장 큰 덕목을 말한다면 무엇보다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 중에 첫째는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서는 통역하지 않으면 예언하는 자만 못한 것입니다. 나팔은 확실하게 불지 않으면 전쟁에 대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통역 없이 하는 방언은 가치 없는 것입니다. 은사의 지배원리는 사랑입니다. 은사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은사를 가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따라 은사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자기 중심적이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형제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영적 은사를 사용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신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은사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했던 것이 아닙니다. 참 사랑은 가정을 하나되게 하며 가정의 진정한 질서를 세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은사도 사랑을 따라 구하고 활용되어진다면 은사는 교회를 화평가운데 하나되게 하며 아름다운 조화의 질서를 가진 향기로운 교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자인 무디가 한번은 예배를 인도하면서 어떤 남자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기도할 기회를 얻은 그 남자는 너무나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무디는 그 기도가 예배에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 분위기를 망치고 말았다고 판단하여, "우리의 형제가 기도를 마칠 때까지 다같이 찬양합시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기도를 중단시켰습니다. 공예배의 인도를 맡은 사람은 분별력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질서 있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공예배는 적당한 방식, 즉 아름다움, 질서, 영적 동기와 내용이 있는 가운데서 드려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무시하고서는 결코 교회의 덕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를 억제하고자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가 목적하는 바는 오직 하나, 교회의 덕과 질서를 세우는 것이며 이를 위해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는 사랑을 베풀기 위해 주어진 것뿐이기 때문에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받은 은사는 자기를 위한,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보다 크신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랑의 동기로 사용되어질 때 교회의 덕과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교회에 질서가 없으면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합니다. 화평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이기주의는 남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덕과 질서를 파괴시키는 악입니다. 교회의 덕과 질서를 위해서 본문에서 내린 결론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여기 "적당히"라는 말은 원칙대로 하지 말고 대충대충 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문자 그대로 타당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극단으로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은사에 치우치거나, 은사를 받았다고 그것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우월감에 빠져 교회 분열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들에 대하여 절제하고 너무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고 적당히 질서대로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 봉사는 적당히 하고 질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을 내되 지나치게 인간적인 열심은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열심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철야하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봉사하는 사람이 오히려 교회의 가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질서라는 것은 순서를 알아야 되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자제할 줄 아는 열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나친 열심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교회 봉사를 한다고 해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물론 하나님의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합니다. 희생 없는 봉사는 교회 봉사가 될 수 없습니다. 시간과 물질과 몸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적당히 해야 하고 질서대로 해야 합니다. 혼자서 교회 일 다 한다고 집안 일 내팽개쳐 버리고 교회에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당 안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하나님이요, 직장의 하나님이요, 국가의 하나님이요, 온 세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정에서는 훌륭한 남편과 아내가 되어야 하고 훌륭한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가정을 위해서 교회 봉사를 다 그만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가정을 희생하고 직장도 희생해야 하고 어느 정도는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하여 가정과 직장을 무시해 버리는 열심은 결단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훌륭한 자식을 키워야 합니다. 가정을 내팽개쳐서 자녀들이 정상적으로 자랄 수 없다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 교회 봉사를 한다고 열심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조금씩 나누어 봉사를 해야지 한 사람이 지나치게 교회를 위해 희생하게 될 때 가정에 끼치는 영향이 심각할 수가 있습니다. 또 교회 봉사한다고 지나치게 하여 자기 건강을 해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다고 해서 봉사를 하다가 몸이 아파서 죽는 것을 순교자적인 것인 양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도록"이라는 말은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전적 헌신을 말합니다. 몸에 병이 날 정도로 교회에서 철야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지혜 없이 교회 일하다가 죽는 것이 충성이 아닙니다. 절제하고 적당히 하나님 말씀대로 균형을 취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게 일할 수가 있습니다.

"(빌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다른 사람의 일도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교회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각각의 지체는 지체대로 중요한 것입니다. 흔히 집사가 열심히 일하면 장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치 눈이 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일하여 발이 눈이 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는 사람마다 각기 받은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직분이 다양한 것입니다. 집사인 사람이 열심히 봉사한다고 해서 다 장로 권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세상 방식을 그대로 교회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장로는 권사 위에 있고, 권사는 집사 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는 계급이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됩니다. 직분에 따라 은사에 따라 계급이 형성된다면 이미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주어진 직분과 그에 따른 은사는 교회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 계급을 형성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장로가 되어야 신앙생활에 성공한다는 사고 방식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너는 언제부터 신앙생활을 했는데 여태껏 그 흔한 집사도 못되고, 집사를 몇 년째 했는데 아직도 권사도 못되고, 장로도 못되느냐고 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장로가 할 일 따로 있고, 권사가 할 일 따로 있고 집사가 할 일 따로 있습니다. 그 직분에 따라 주어진 은사와 달란트가 많고 적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맡은 바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얼마나 열매를 맺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즈음 회사는 '능력위주'로 사원들을 뽑고 진급시킵니다. 능력이 없으면 자연히 명퇴 당하거나 조퇴 당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능력 위주의 사회가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감싸주고 돌봐주며,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봐주어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에는 "(고전1:26)...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합니다....(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 곳입니다..." 이는 "(고전1:29)...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롬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롬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롬15: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바로 이것이 교회 건덕(健德)생활인 것입니다. 교회는 능력위주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봉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인 수를 늘리는 것, 헌금액수를 늘리는 것, 훌륭한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고 그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사랑의 향기를 풍기는 교회로 만드는 것이 교회 봉사를 올바로 하는 것입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덕이라는 것은 건물을 세우듯이 덕으로 교회를 세운다는 말입니다. 은사는 교회 건덕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사와 직분을 통한 교회 봉사가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 되지 못한다면 향기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가 사랑이 없으면 악마가 되고, 사람에게서 사랑을 제하면 짐승으로 되지만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제하여 보아라. 거기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제아무리 다양한 은사를 받았다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시끄러운 "꽹과리가 되고", 신앙생활에 거둘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며", 자신과 더불어 남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때는 빈손으로 오시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쥐고 오십니다.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께 사랑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의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하므로 교회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며, 온전한 사랑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어느 부인이 한 손에는 불을 들고 한 손엔 물을 가지고 지금 곧 루이스 성으로 떠나려는 찰라 아이봐라는 청년이 나타나 그 목적을 물은 즉 부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 불로 천국을 사르고, 이 물로는 지옥의 불을 끄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천국에만 들어가겠다는 욕심이 없어질 것이며, 지옥에도 떨어질 공포심이 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도록 하렵니다." 하더라는 말이었습니다. 천국을 부러워할 마음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공포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이 차있으면 그는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진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제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요한일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에 요한이라는 이름이 흔합니다. 영국식, 미국식으로는 존(John)이고 독일어로는 요한이고, 불어로 하면 장이고 이태리어로 하면 주앙이고 스페인으로 하면 후안이고 러시아로 하면 이반인데 이것들이 다 요한입니다. 이처럼 요한을 좋아하고 높게 평가합니다. 요한 복음을 기록했고 요한 복음 자체가 생명과 진리와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요한이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있는데 실제로 복음서를 보면 요한은 대단히 성미가 급하고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레의 아들, 천둥 같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마을을 지나가려 하는데 못 지나가게 하자 '주님, 하늘로 좇아 불을 내려서 저 마을을 태워버릴까요?' 이렇게 제안했던 사람이 바로 요한입니다. 그 요한이 나중에 바뀌어서 어느 사도보다도 생명과 진리와 빛과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더 많이 언급하고, 권면하고 요한 1,2,3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랑을 논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로 변한 것입니다. 사랑을 따라 은사를 구하시고 활용하시므로 사랑의 실존으로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에 여러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사가 사랑과 더불어 역사함으로 교회에 덕과 질서를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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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구원의 복음

"(고전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고전15: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전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전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고전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15: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고전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15: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고전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1. 신앙의 핵심은 은사가 아닙니다. 신앙의 핵심은 고린도 전서 15장에 나타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우리를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은 은사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며, 이것이 신앙의 원리이며 목적이고 근거인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을 때, 고린도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여 삶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 복음은 곧 "(고전15:3)...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가 자신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금세(今世)와 내세(來世)에 있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며 인간을 구원하는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2. 기독교 역사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서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自己啓示)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신들처럼 자기를 높이는 분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인간 세계로 오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그 인간 사회에서 버림과 멸시를 받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죄의 심판 자리에까지 자기를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홀로 계시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계시고자 하며, 그 인간을 섬기시고자 자기를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무감각한 분이 아니라 사랑의 정열을 가진 분이시며, 의로운 분인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자유로운 분이시지만 인간을 섬기기 위해 자유를 유보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을 율법에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심판을 자기가 대신 당하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된 인간을 높이시는 분이심을 십자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내가 어떻게 신령한 체험을 했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기쁘고, 내가 얼마나 사명감에 불타는 가로 자신의 신앙을 측정하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신앙이 좋은 자는 항상 남을 위하여 기도하고, 자신이 당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털 깎는 자 앞의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고, 남의 죄를 대신 지고, 남을 위하여 대신 기도하고, 마치 그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묵묵히 지키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않고, 남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참으로 좋은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병폐는 능력이 그 척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예언을 해주고, 한 번 설교에서 수 천명씩 회개하는 것 등이 그 사람의 영성과 영력을 증거 해주지는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영성과 영력은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신의 성품에 있는 것입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십자가를 연료로 하고 있으면 사랑의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왜 사랑의 불이 일지 않거나 쉽게 꺼지는 것인가? 그것은 연료를 잘못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결심, 인간의 맹세, 인간적인 열심과 노력, 물질 등은 사랑의 연료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곧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해주셨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에너지로 할 때 비로소 사랑의 불이 계속 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연료로 하는 전도의 불이 인간을 구원하며,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연료로 하는 봉사의 불이 교회를 변화시키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연료로 하는 사랑의 불이 인간을 변화시키며, 인간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 핼록(G.B. Hallock) 목사의 목격담입니다. 그가 서인도 제도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기선 갑판에서 한 아이가 개를 데리고 놀고 있었습니다. 공을 던지면 개가 그 공을 물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공을 잘못 던져 바다로 굴러 떨어졌고 개도 공을 따라 파도로 뛰어든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얼른 선장에게 달려가 배를 돌이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커다란 배의 스케줄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제야 선장도 할 수 없이 배를 돌이켰다고 합니다. 희생의 크기에 따라 변화의 규모도 달라집니다. 작은 보트라면 개 한 마리를 위해서도 진로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기선의 진로 변경은 한 인간의 생명이 달려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열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3. 예수께서는 한 번도 부활을 말하지 않고는 자기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승리 없는 수치를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부활의 승리와 광채를 생각지 않고는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 죽음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막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빌2:8)....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십자가가 인간과 세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새로운 삶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예수가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받은 사건이라면, 부활은 심판을 받은 예수를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그 외형에 있어서 하나님의 분노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과 수난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하나님의 자기 높이심과 영광의 사건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말합니다. 어떠한 인간도 죽음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하나님이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죽음의 한계를 깨뜨렸음을 뜻합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하나의 한계일 수 있으나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될 수 없습니다. 없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창조의 하나님은 죽은 예수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죽음은 이제 예수 안에서 시작된 삶에 의해 삼키어졌습니다. 죽음의 독침 곧 죄의 세력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단 한 번에 극복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영원한 삶의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그의 부활로 새 하늘 새 땅, 새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부분적이지만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과 함께 인간은 이제 새로운 삶,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며, 세계는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거짓과 죄와 무의미와 죽음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모습을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의 여류 시인인 패트 반즈 씨는 어느 부활절 아침의 체험을 소개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교회 대문 곁에 꽃파는 노파가 있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주름살이 깊게 패인 노인이었으나 얼굴 전체에 웃음꽃이 피고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반즈 씨는 "그렇게 웃고 계신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꽃 파는 할머니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내 나이만큼 살면 슬픈 일, 가슴 아픈 일을 많이 겪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럴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고통의 금요일은 끝이 아닙니다. 겨우 사흘만에 부활의 새벽이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괴로울 때면 사흘만 기다리자고 혼자 말합니다." 이 노파의 지혜가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겨울 가지들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은 것 같을 뿐입니다. 봄이 오면 대지가 다시 활동을 시작합니다. 부활 신앙은 삶의 질(質)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부활 신앙은 삶의 어떠한 내용도 창조적 삶으로, 새 생명의 삶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 절대 패배할 줄 모르는 완전하고 결정적인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깨끗하게 하며 아름답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인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부활은 진리가 거짓보다 강하며, 선이 악보다 강하며,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며,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로 하여금 진리와 선, 생명과 사랑을 따라 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카타콤의 순교자>라는 감동적인 실화가 있습니다. 로마가 황제 숭배를 점점 더 악랄하게 강요하자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땅 위에서 버틸 만한 능력이 없어서 지하의 땅굴 속으로 숨게 되었습니다.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이 땅굴은 로마 건축을 위해 오랫동안 토공들이 흙을 파내기 위해 시작된 곳이었는데, 수 백년을 지나면서 이 땅굴은 끝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천혜의 요새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이곳으로 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습기차고 어두운 이곳은 정상적으로 살만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피신하면서 조악한 환경으로 인해 병약해지고 때로는 죽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땅굴 속에 무덤을 파고 벽에다 내세의 소망을 말하는 성구와 자신들의 소원을 새겨 넣었습니다. 때로 바깥 세상에 나왔다가 체포되어 큰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가 며칠씩 굶긴 사자들의 밥으로 사라져 갈 때도 하늘을 바라보고 기쁨으로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원형경기장의 사자들 앞에서 부른 고린도전서의 다음 찬송시는 도저히 잊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들의 밥이 될 순간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사망을 조소하듯 찬송가를 부를 수 있었던 사람들은 미래 부활의 소망을 가진 카타콤의 순교자들이었습니다. 미래의 이 소망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어려움과 무의미를 이길 수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수고를 진력할 수 있습니다. 한 때 미국의 팝송 가운데 젊은이들이 세태를 풍자한 노바디(Nobody)라는 노래가 유행이었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 감이 있는가? 노바디(Nobody). 전쟁을 쉬게 할 사람이 있는가? 노바디(Nobody). 존경할 사람이 있는가? 노바디(Nobody). 이 노바디(Nobody)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도대체 믿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신조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노우(No)족속"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無)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모든 것이 가치가 없고 의미가 없고 목표도, 초점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눈을 보면 초점이 없습니다. 초점을 잃은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부활 신앙은 목적 없이 방황하며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인간의 삶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며 그의 삶 하나 하나에 위대하신 하나님의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제아무리 얼어붙은 대지일지라도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는 것처럼,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되면 생명의 의미를 깨우치며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삶이 비록 무의미했을지라도 예수 믿고 부활 신앙을 가지심으로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생명의 소중함 깨우치시고 영생을 향한 분명한 삶의 목표 가운데 하나 하나의 삶에 무한한 가치가 부여된 삶을 창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 그러나 유대교의 분파인 사두개인은 영혼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모두 부인했습니다.

"(행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헬라인들은 영혼 불멸은 믿었으나 육신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생이란 육신을 벗어버리고 영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교와 헬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린도 교회에는 육신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육신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 부활 사건을 부인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복음의 진리와 신앙의 근본에 대한 부정이라고 지적하면서 참된 부활의 의미와 신앙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라우폴의 '꿈'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라우폴 공이 예수님께서 성만찬에 쓰신 은잔을 찾기 위해 자기가 살던 성을 떠날 때 말에 채찍을 가하여 막 성문을 나가고 있는데 아주 남루한 거지가 라우폴 공에게 자선을 청했습니다. 그는 그 내미는 손을 재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돈 한 푼을 던져 주고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그 잔을 찾는 것인 줄로 생각하고 멀리멀리 그 은잔을 찾아다녔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가 가진 돈도 다 떨어지고 건강도 쇠하여졌으며 그는 지쳐서 기진 맥진하였습니다. 백발이 성성하여 이제는 성화된 마음,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라우폴 공이 자기의 성을 향해서 쓸쓸히 돌아올 때 그는 무르익은 곡식처럼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그 동안 그에게는 깊은 죄의식과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가 출발했을 때 손을 벌렸던 그 거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구걸을 하자 그는 "네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지만 내가 먹을 빵이라도 나눠 먹자."며 빵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그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또 그 거지가 목말라 보여서 자기의 표주박을 가지고 손수 우물에 가서 물을 한 잔 떠다가 그 거지를 대접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거지가 홀연 예수님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찾는 은잔은 바로 이 표주박이고 이 냉수는 나의 피이며 네가 나눠준 이 빵조각이 나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고통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 실천적인 성만찬의 삶이며 부활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께서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사신 것은 과거의 역사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찢기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은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켜왔으며 구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 신앙은 우리 미래의 삶까지도 변화시키며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며 구원하는 구원의 복음이 이 땅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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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부활 신앙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고전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15: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15:27)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고전15: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고전15: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전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전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전15: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15: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전15: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고전15: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고전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전15: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15: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1. 뉴욕에서 신문에 보도된 재미있는 토픽 한 토막입니다. 뉴욕 써니사이드에 있는 한 공장에서 사장이 자기 얼굴을 닮은 고무 인형을 매달아 놓고 "누구든지 화가 나면 이 인형을 두들겨 패라."고 써 붙였습니다. 직공들이 그 인형을 하도 많이 두들겨서 일 주일에 한 번씩 새 것으로 갈아 놓아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작업능률이 올라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누군가 맞아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먼저 눈 위를 밟고 지나가야 길이 생기는 법입니다. 누군가 십자가를 져야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만 달면 모든 쥐는 안심하고 살 수 있다."라는 이론은 누구나 압니다. 문제는 이론이 아니라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다느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없이는 인간에게 참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다음 성구에 있습니다.

"(레23: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레23: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곡물의 첫 이삭 한 단" 즉 첫 열매를 하나님께 먼저 바치라는 것입니다. 바쳐진 "곡물의 첫 이삭 한 단", 즉 보릿단을 연한 방망이로 보리 알이 상하지 않도록 떨어서 껍질은 바람에 날려보내고, 알맹이는 방아에 찧어서 그 가루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첫 열매였습니다. 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기 전에는 햇보리를 상점에서 사고 팔지 못했으며, 햇보리에서 나온 가루로 떡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 열매는 앞으로 거두어들일 추수의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앞으로 있을 모든 신자들의 부활의 표시였습니다. 첫 열매를 정식으로 하나님께 바치기 전에는 햇보리를 먹을 수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생명의 새 추수는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후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우리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음에서 다시 살 것을 믿습니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에서 일어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인 것입니다. 부활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할 때 쉽게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성경 말씀에 뿌리를 깊게 내린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살기도 하고 성경대로 죽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카톨릭 안동교구 정호경 신부가 불교의 대표적 경전, 반야심경을 번역 출판했습니다. (책명, 가자! 가자! 함께 가자!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정신부는 <반야심경과의 만남을 소중한 인연으로 삼고 있다.>며 <좀더 사람다워지고 함께 하나가 되려 하는 것에 종교간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말했습니다(경향신문. 1997.6.6일자). 기독교는 착하게 살거나 사람이 사람다워지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는 것이 "(고전15:19) 만일.....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그 믿음이 유익 되지 못한 것은 그 들은바 말씀이 믿음과 화합하여 순종치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약속 받았을지라도 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한 사람은 한 사람도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히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히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히4:4)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히4: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히4: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히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히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히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히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기독교는 하나님 말씀, 명령에 대한 순종의 싸움인 것이지 착해지려는 싸움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진리 사수(眞理死守)의 생활입니다. 부활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은사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부활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느 교회보다 은사와 지식이 앞섰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활 신앙을 저버리므로 분파가 생기고 부활 신앙까지도 부인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고전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고전1: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고전1: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린도 교회의 특징은 지식과 지혜와 은사가 넉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사를 장차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신앙 생활로 나타나지 못하고, 현세에서 자기들을 증명하는 우월하고 형통한 보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자주 충돌하는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가장 신령한 자이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자이어야 하는데 왜 늘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늘 실패하고 어려움 속에 있느냐며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가 생긴 것도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예수 믿고 고난받으며 만물의 찌끼처럼 대우받는 것은 신령하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의 종으로 의심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는 일마다 앞길에 대로가 열려 승승장구 성공하고 출세하여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어야 신령한 것이며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것은 무엇입니까?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고전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고전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어 "부요하고 왕노릇하고 강하고 지혜롭고 존귀하게" 되는 것이 신령한 신앙생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사용하시는 방법이고 세상에서 걷게 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겠습니까? 우리의 영원한 상급과 지위는 결국 내세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훈련되고 만들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령하며 믿음이 좋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판단, 올바른 믿음을 가진다면 병에 걸리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바울은 배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부활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목표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환란과 고난을 피하지 않기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날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신자란 누구입니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할지라도 복음 증거 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이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진정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난과 환란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후11: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고후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고후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고후11: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조지 워싱턴 장군이 1776년 겨울 펜실베이니아 주의 포지 계곡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그 겨울은 몹시 추웠으며 식량은 떨어지고, 옷과 신발이 해어졌으며,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군인들이 쓰러지는 비참한 겨울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웃 동네 사람들은 워싱턴 장군의 군대에 대하여 몹시 불친절했습니다. 이 때 워싱턴 장군은 군병들에게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여름철 군인과 햇빛 날 때의 애국자는 아무 일도 못한다. 장차 민족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고통의 날을 이겨내는 사람들이다."'여름철 군인' 즉 추위도 없고 괴로움도 없는 좋은 계절에 사는 편안한 군인, 그리고 '햇빛 날 때의 애국자' 즉 세상이 편하고 별 위험이 없을 때에 애국을 부르짖는 애국자는 인류의 역사를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고통이 있을 때, 그리고 십자가를 져야 할 때, 욕을 먹고 비난을 받고 희생의 피를 흘려야 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고 갈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승리와 영광은 십자가로 얻는 것입니다.

"(골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3.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은 '여름철의 군인'이나 '햇빛 날 때의 애국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의 삶은 한 마디로 부도덕함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까지도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부활의 진리를 부정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생명이 전부이며,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내일은 죽을 터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고 즐겁게 놀자"고 말할 것입니다.

"(사56:12)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이는 어리석은 부자의 생활과도 같은 것입니다.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내세의 생각을 버리면 현세의 가치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현세의 삶은 보다 위대한 내세의 생명을 위한 훈련이요, 준비라는 생각을 버린다면 지조도 도의심도 해이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수를 바라고 선을 행하거나 지조를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현세의 존재만을 믿는 사람은 현세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활이 없다는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상종하면 어쩔 수 없이 생명을 더럽히는 악 영향에 물들게 마련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부활 신앙 없이는 새로운 삶이 없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앙 위인은 가가와 도요히꼬입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맥아더 장군이 군정관으로 일본에 상륙하기 전 미주리 전함으로 가가와를 초청하여 자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만큼 가가와는 세계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보면 무척 단조롭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믿게 된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21세 때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색과 고민에 잠겼는데, 갑자기 그의 머리에 들어온 빛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종말의 상징이 아니라 새 출발의 표라는 진리였습니다. 이튿날 새벽, 청년 가가와는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빈민굴로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깨달은 진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한 번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자기는 죽고 사선(死線)에서 재출발하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그 후의 생명은 덤으로 사는 것이므로 아까울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박애정신과 희생은 사선을 넘어 재출발한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4.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위해 있는 것이며, 그의 부활은 장차 있을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과 나의 부활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과의 관계 속에서 신앙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고전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예수의 부활이 있어야만 우리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과 영생을 누리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가 사망"하는 그 날에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을 기다리는 삶이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체를 닮아서 변하는 자리까지 가야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뿐만 아니라 육신에 이르기까지 거룩함과 생명과 진리로 충만해져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완성인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장차 누리게 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로드 아일랜드주의 창건자인 로저 윌리암스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곁에 있던 사과나무의 뿌리가 관속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과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윌리암스의 몸을 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썩어서 흩어진 몸이 어떻게 다시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추론(推論)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자여!" 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은 육체가 재구성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부활 때에 하나님께서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모아 우리의 이전의 몸으로 돌이킨다고 말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몸은 욕된 것으로 묻히나 장차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영광된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땅에 묻히는 몸은 연약하나 부활 때의 변화된 몸은 강합니다. 예수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적 환경에 적합한 신령한 몸, 영광스러운 몸으로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사람 죽이는 것을 이 한 마리 죽이는 것쯤으로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애인의 권면으로 경찰에 자수한 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를 읽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기사에는 이미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한 사람의 인간이 한 걸음 한 걸음 갱생의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단순한 살인자였든지 혹은 사회 혁명가였든지는 상관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인간의 삶이란 한 인간을 한 걸음 한 걸음 갱생의 길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100년 전 부활주일에 헨리 아펜젤러 목사가 이 땅에 왔습니다. 그는 상륙하자마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 드렸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여기 도착했습니다. 이날 죽음의 철장을 꺾으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쇠사슬을 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광명과 자유를 얻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부활절 아침에 이 땅을 찾아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어둡고 괴로웠던 식민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나라는 어떻습니까? 부정과 부패, 허영과 사치, 향락과 음란, 우상숭배와 각종 미신 등으로 가득차 어둡고 혼란스러우며 죄악으로 관영한 땅이 아닙니까? 이 땅에 한 걸음 한 걸음 갱생의 길, 소생의 빛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부활 신앙으로 재무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실주의적 기복신앙을 벗어 던지고 자신과 나라 민족을 새롭게 하는 부활 신앙으로 재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비록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진리 사수하며, 성결 보존하며, 신의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사는 사명자입니다. 십자가를 진다할지라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성경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죽인 로마 제국은 온갖 권위와 횡포로 박해와 핍박을 서슴지 않았지만 300년이 지난 뒤 로마의 황제는 스스로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차와 대포를 가진 로마가 빈주먹으로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만을 가르치며 전하던 사람들 앞에, 그 힘없고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의 아이러니, 복음의 승리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까? 교회의 역사는 감히 증거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라고. 영광의 그날, 부활의 그 날, 그 기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그 날, 홀연히 신령하며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을 바라보며 산 소망이 충만한 부활 신앙으로 이 땅의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나라 민족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이 땅에 부활의 복음,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자신과 더불어 나라 민족이 다시 태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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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

"(고전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15: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지난 2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39명의 사교 집단 자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자살 사건은 종말론에 경도(傾倒)된 한 사교지도자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현지 경찰이 밝혔습니다. <천국의 문, Heaven`s Gate>으로 알려진 이 사교집단은 특히 인터넷을 활발히 이용해온 것으로 드러나 이 사건은 첨단과학과 미신의 합작 품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사교집단은 현재 지구 근처를 통과중인 헤일 - 봅 혜성의 출현을 지구를 졸업하고 다음 세계로 갈 때가 됐다는 표지(標識)로 간주하여 종교의식의 하나로 집단 자살을 택한 것으로 경찰과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애플 화이트는 음악교수출신이지만 70년대부터 말세론에 경도 되었으며 그가 내세운 교리는 전형적인 사교집단의 종말론 이론을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종교학자들은 진단했습니다. 이 사건은 20세기말을 맞아 구원을 열망하는 광신집단들의 발호(跋扈) 징조로 해석된다고 타임스는 진단했습니다. <천국의 문> 신도들이 고통 없이 사망한 듯 평온한 자세로 나란히 누워 있었다는 점과 자살동기가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는 사실이 지난 3년간 유럽과 캐나다 등지에서 74명이 집단 자살한 <태양의 신전>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고 밝혔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발생한 <오대양 사건>도 이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한 마디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해서 비롯된 것입니다. 타임즈 지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회의 쇠퇴가 광신적 종교집단들의 세기말적인 집단 자살 사건을 발생케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감리교 삼남연회에서 밝혀진 교세 통계에 따르면 교인은 지난해 비해 0.4%가 감소한 7만 2천명이며, 교회는 12개 교회가 증가한 5백 2개였습니다. 교인수 0.4% 감소는 약 3,000명이 감소한 숫자로 100명 출석 교회가 30개가 1년 동안에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수는 증가한 반면 교인수가 감소했다는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교인수가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교인들의 수평이동만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밝히면 목사 안수만 받기 위해 교회 수만 늘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80년대 이후 계속 나타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모습입니다. 기성 기독교회의 쇠퇴는 사회 전반에 걸쳐 부정 부패, 우상숭배 등을 초래하며, 첨단과학과 맞물린 광신 사교집단의 출현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호주는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입니다. 그러나 교인수 감소 현상과 더불어 불교 교인수가 무려 30만 명에 이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오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심각할 정도로 그 성장 추세가 둔화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거 구미 교회가 겪었던 교회 쇠퇴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 사회는 전반적인 부정 부패, 사치 허영과 음란, 그리고 각종 우상숭배와 미신 숭배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팽배한 위기의식 가운데 나라 전체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예수 부활의 소식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부활의 계절에 부활이 주는 참된 의미를 통해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 민족이 새롭게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거짓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진리의 승리를 말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세상은 온통 거짓으로 가득하여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거짓된 교권의 세력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어가며 예수의 부활을 은폐시키려 했지만 결코 예수 부활의 진실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27:62)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마27:63)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마27:64)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마27:65)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마27:66)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마28:11) 여자들이 갈제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마28: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마28:13)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마28: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마28:15)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선이 악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세상에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밖에 없으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벌써 악마의 발작으로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세 번씩이 심문했으나 전혀 죄를 찾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들의 선동을 받은 군중들은 악한 자로 유명한 바라바를 선택하고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결코 악이 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27: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마27:17)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마27:18)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마27: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마27:21)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마27:22)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마27:23)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마27: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27: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마27: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과 장로들은 예수를 증오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증오를 이긴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증오의 불길이 세상을 삼켰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며 진실 되게 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선하게 살며 선을 베풀며 살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악하게 사는 것이 세상에서는 지혜로울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사랑은 언제나 아픔과 패배로 끝날 것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의 생명이 전부이고 내세가 없다면, 다시 말해 부활 생명이 없다면 "내일은 죽을 터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고 실컷 즐겁게 놀자" 라고 말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말한 사람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56:12)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예수께서도 영원한 생명을 잊어버리고 "먹고 마시자"는 것을 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어리석은 부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눅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맹수와 더불어 싸우면서까지 진리를 사수하며 복음을 전파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생이 금생 뿐이라면 무엇 때문에 모든 고통과 고난과 상처를 받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내세의 생각을 버리면 현세의 가치도 없어집니다. 현세의 삶은 보다 위대한 내세의 생명을 위한 훈련이요, 준비라는 생각을 버린다면 지조도 도덕과 윤리도 해이해집니다. 부활은 확실히 진리와 선, 사랑과 생명의 보루(堡壘)입니다. 거짓이 난무하고, 악이 성행하며, 미움과 증오가 가득하고 죽음이 세상을 지배한다해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를 전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의 부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신앙을 가졌다면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고전 15:58)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할 양식 곧 주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에 대하여 성경은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렘48:10)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

주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맡기신 일(사명)은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이며, 지켜야 할 계명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 전도 책자 "숲 속의 사과나무" 4월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나의 왼쪽 눈은 지독한 원시(遠視)가 되었는데다가 각막염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각막 이식 수술을 받으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의사의 놀라운 말을 들었다. 아내에게 이 말을 했더니 그녀는 얼굴이 환히 밝아지면서 아무 말 없이 통장을 꺼내 내게 내 밀었다. 대만 달러로 2만 달러 가량 들어있는 통장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가내 부업으로 아내가 남몰래 모아온 피와 땀의 결실이었다.

"모자라면 또 어떻게 마련해 보겠어요."

아내는 짐짓 웃어 보였는데 그것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신은 저하고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인간은 눈뜬장님이니까요. 당신은 눈을 되찾아야 해요."

대만에서 각막이식 수술의 개척자요 권위자인 주도향 박사를 찾았을 때 내 이름은 즉시 수술 희망자 명부에 올랐다. 그리고 채 한 달이 못되어 주 박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교통사고로 죽은 운전사가 있는데 죽기 전에 자기 몸의 여러 부분을 팔아서 쓰라고 아내에게 유언을 했답니다. 아이가 여섯이나 된다니까 그 살림장만이야 알 만하잖겠어요. 그쪽에서는 각막을 양도하는 대신 1만 달러를 달랍니다. 어떻습니까? 수술을 하시겠습니까?" 수술비용과 입원비를 합쳐 대략 8천 달러 이상은 되지 않겠지 싶어 나는 그 각막을 양도받기로 결심하고 그 이튿날로 입원했다. 나는 행운아인 셈이었다. 각막을 얻기 위해 몇 해씩 기다렸다는 수술 희망자들의 이야기를 나는 여러 사람에게서 들어왔던 터이다. 수술이 끝나고 나서 회복실로 들려져 갈 때 딸애가 내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만사가 순조로웠어요. 아빠, 엄마는 오고 싶지만 왠지 두려워서 못 오겠다고 했어요."

"괜찮다고 전해라. 아무 염려말라구."

나는 19세 때 부모의 권유에 따라 결혼했다. 나의 부친과 장인은 오랜 친구 사이로 만일 두 사람이 각각 아들과 딸을 두게되면 결혼시키자고 총각시절에 이미 약속을 해두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것은 바로 결혼 당일이었다. 첫날 밤 신방에서 신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굴이 온통 우박 맞은 잿더미 모양의 곰보인데다 주먹만한 들창코, 그 허공으로 뻥 뚫린 두 구멍이 추악하게 벌름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갑내기인데도 40여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지독한 박색이었다. 나는 그 길로 도망 나와 다시는 아내의 방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물론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어머니는 운명이려니 하고 체념하라고 타이르며 오히려 복은 박색한데 붙는다고 위로했다. 그러나 나는 학교 기숙사로 도망쳤고 여름 방학에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아버지의 당부를 받고 사촌형이 나를 데리러 왔다. 억지로 집에 돌아왔지만 나는 아내와 마주칠 때마다 외면해 버렸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어머니가 나를 넌지시 불러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네가 너무 심한 것 같다. 저 애는 얼굴은 비록 박색이라고는 해도 겪어보니 그렇게 마음이 어질고 착할 수가 없더라."

나는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지 못하고 어머니를 흘겨보며 볼멘소리를 질렀다.

"마음마저 흉측하다면 어찌 부모님께서 저런 계집을 내게 떠맡겨 주셨을라고요. 저렇게 가년스럽게 능청을 떠는 천상의 여자를 말입니다."

어머니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얘야, 저 애는 심지가 깊고 식구 누구에게든 헌신적인 여자란 말이다. 네게 소박을 당하고도 조금도 쉴 틈이 없이 부지런히 일을 찾아 하고 또 깔끔하기가 이를 데 없단다. 네 태도가 그렇게 쌀쌀맞아도 원망은커녕 눈살 한 번 찌푸린 적이 없다. 눈물을 보인 적도 없고. 그렇지만 그 심정이 어떻겠니? 한 세상 살다가는 것, 남편 시중 잘 들고 순종하며 자식들 훌륭히 키워준다면 여자로선 더 바랄게 없는 거야. 너는 저 애가 가엽지도 않니? 생으로 젊은 나이를 과부로 보내다니."

그 후 나는 눈 질끈 감고 아내와 한 방에 들기는 했으나 얼어붙은 마음은 여전히 녹을 줄 몰랐다. 아내는 어려운 살림의 여가를 틈타 밀짚모자를 만들고 돗자리를 짜며 그물을 손질하고 도기(陶器)에 그림을 그려 넣는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억척스레 일거리를 맡아다 했다. 정말 뼈가 부스러지는 노력이었다. 애들도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 덧 딸애는 대학을 나와 교편생활을 시작했고, 아들 녀석은 육사에 재학 중으로 우수한 성적을 올리고 있는 터이다. 수술 후 두 주일이 지나 실을 뽑게 되었다. 그 두 주일은 불안 속의 나날이었다.

"완쾌한다면……" 하고 나는 딸애에게 말했다. "각막을 제공해준 분의 무덤에 찾아가야겠다."

이윽고 눈에 감긴 붕대가 풀려졌다. 나는 눈을 뜨기가 몹시 겁났다.

"빛이 보입니까"

주치의가 물었다. 나는 눈을 껌벅이며 대답했다.

"네! 위쪽으로요"

"전등빛입니다."

주 선생은 내 어깨를 툭 치고 힘주어 말했다.

"성공입니다. 1 주일 후엔 퇴원해도 좋소!"

그로부터 1 주일,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력 검사를 받았다. 처음엔 시야가 그저 희끄무레하기만 하더니 마침내 주치의가 내밀어 보이는 손가락도 알아볼 수 있게끔 되었다.

퇴원하는 날엔 창문이며 침대,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까지도 모두 또렷하게 보였다.

"엄마가 아빠 좋아하시는 음식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퇴원하는 날 딸애는 병원으로 나를 데리러 와 이렇게 말했다.

"응, 고맙구나"

우리는 택시로 집에 돌아왔다. 택시 안에서 딸애는 웬일인지 그애답지 않게 새침하니 말이 없었다. 아내는 부엌에서 요리를 내오고 있는 중이었는데, 내가 들어서자 무슨 까닭인지 고개를 떨구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제 오십니까?"

하고 말했다.

"고마워, 고생 많이 시켰어"

나는 식탁 앞으로 가 앉았다. 아내는 상을 다 보고 나더니 벽쪽으로 돌아앉아 훌쩍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조금 전 하신 그 말씀……그 말씀만으로 저는 기뻐요. 제 인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내는 울먹이며 더듬더듬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딸애가 심상치 않은 기세로 방에 뛰어 들어왔다. 그 애의 얼굴도 제 엄마처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엄마!"

딸애는 엄마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격렬하게 부르짖었다.

"아빠에게 모두 털어놔요! 엄마가 아버지에게 눈을 뽑아 드렸다고! 자아, 얼른 보여드리란 말이에요. 이렇게……"

"얘야, 너무 목소리가 높구나. 엄마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란다."

아내는 여전히 벽쪽으로 돌아앉은 채 말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아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어깨를 잡아 얼굴을 돌리게 했다. 아내의 왼쪽 눈의 홍채(虹彩)는 수술전의 내 눈처럼 흐려져 있었다.

"금화!"

내가 아내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왜, 왜 이런 짓을 했소!"

나는 아내의 어깨를 쥐어흔들며 소리쳤다.

"당신은……당신은 소중한 제 남편인걸요"

아내는 그렇게 말하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격정이 화닥화닥 불꽃을 튀기며 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털썩 마룻바닥에 무너져내리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아내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묘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빛과 생명, 그리고 기쁨과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1997년 부활절을 맞아 무엇보다 힘써 서로 사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보여주신 희생적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을 항상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여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일은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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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16: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고전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전16: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고전16: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고전16: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고전16: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고전16: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하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고전16: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고전16: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고전16: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고전16: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고전16: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고전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고전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16: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고전16:16) 이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고전16: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고전16:18)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고전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고전16: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전16: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고전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고전16: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고전16: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1. 토마스 아 캠피스는 "죽어 없어질 부를 추구하며 그 안에 소망을 두는 것은 허영이다. 명예를 열망하며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것 또한 허영이다. 육신의 정욕을 좇는 것도 허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윤리적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돈, 성(sex), 그리고 권력 추구의 허영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 돈, 성 그리고 권력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얽히고 설켜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돈은 곧 권력임을 자처하고, 성은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은 곧잘 "최상의 최음제"로 불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허영의 거리(Vanity Fairs)"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세 가지 윤리문제를 모두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 가운데 먼저 돈, 즉 연보(헌금)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사랑으로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가장 중요시했던 일의 하나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특별 구제 헌금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원래 가난한 성도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박해와 기근으로 인해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영적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물질적으로 유대인들을 돕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므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를 하나로 결합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특별 구제금(연보)을 통한 이방인들의 사랑으로 두 교회간에 있었던 상처가 치료되고 교회의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은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깨우쳐주고자 했습니다. 인종이 다르더라도 사는 지역이 다르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돌보고 도울 책임이 있음을 깨우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헌금은 예배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헌금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예배행위라는 것입니다. 참된 헌금의 정신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미리 준비하여 드리는 것이며, 예배의 생활로써 하나님 앞에 바치는 헌금 외에 연보(구제금이나 선교비 등)를 의무를 뛰어넘어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성도는 먼저 돈에 올바른 개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마틴 루터는 "세 가지 회심이 필요하다. 가슴의 회심, 정신의 회심, 그리고 돈지갑의 회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우리 현대인들이 돈지갑의 회심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말씀하신 주제가 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돈 문제에 대해서 유별나게 시간과 정력을 쏟으셨습니다.

"(막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막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12: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여기서 보면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연보궤 앞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을 드리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짐짓 사람들이 바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영적 상태를 분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돈 문제에 대한 가르침은 명백하면서도 엄격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의 성구들에서 그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눅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눅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마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마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눅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눅6:30)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처럼 돈에 대한 가르침은 그 어떤 주제들보다 그 방향이 분명하고 직선적입니다. 돈을 잘못 사용하였을 때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진시키고 인류에게 복을 주는데 에 사용될 수 있기도 한 것입니다.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은 기도와 헌신의 삶을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기의 재물을 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 쌓기 시작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을 때 예수님은 기뻐서 "(눅19:9)...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거침없이 부어드린 여인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마26:6)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26:8)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마26:9)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26:10)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도 돈을 후하게 썼으며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눅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4. 돈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을 바로 잡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 잘못된 견해 중 첫째는 돈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의 표시요 따라서 가난은 하나님이 불쾌해 하시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곡해로 말미암아 기독교를 개인적인 평안과 번영의 종교로 전락시키는 무리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막말로 "예수님을 사랑해서 부자가 되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수학 공식은 다양합니다. 백배, 삼십배, 칠 배나 복을 주시리라는 것 등입니다. 이 같은 왜곡된 생각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19: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놀란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젊은 부자 관원의 부가 하나님의 그에 대한 특별하신 은혜의 표시라고 제자들은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외쳤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5. 하나님의 경제에 있어서는 가난하고 상처받고 낭패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주심과 관심의 특별한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팔복에 관한 산상수훈에서 그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눅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6. 예수께서 부를 지칭할 때 아람어인 맘몬(mammon)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단어에는 인격적이고 영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 말씀에서 보면 맘몬(mammon)을 하나의 경쟁신(a rival god)으로서 인격화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돈이란 단순히 어떤 비인격적인 교환의 매개물이 아니며, 또한 그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만 좋거나 나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자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맘몬(mammon)은 우리를 지배하려고 추구하는 하나의 힘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신약성경의 돈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돈의 배후에는 아주 실질적인 영적인 힘이 있어서 돈을 활성화시키고 돈에게 고유한 생명을 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돈은 활동적인 행위자요, 그 자신에 대한 법이요, 돈은 인간으로 하여금 돈에 헌신하도록 영감을 불어 넣어줄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맘몬(mammon)의 유혹하는 힘인 것입니다. 돈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맘몬(mammon)으로부터 돌아서라고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제자 지망생이 예수께 와서 자기가 예수님을 따를 결단이 되어 있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8:20)....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마19:16)...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놀라운 대답을 들었습니다.

"(마19:21)...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 부자 젊은이는 슬픈 표정을 짓고 맘몬(mammon) 신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러한 삭개오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눅19:9)...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그 제자가 되는 길에 드는 비용을 셈해 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눅14: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14: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눅14: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눅14: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눅14: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눅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돈이란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맘몬신을 거부하는 일이야말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입니다. 돈이란 실제적으로 많은 신적(神的)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은 우리에게 안일함을 주고 죄의식을 유발시킬 수 있으며, 자유를 가져다주고, 힘을 주며, 무소부재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사악한 것은 전능성(全能性)을 가지려는 점입니다.

7. 돈의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돌보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풍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창13:2)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이삭도 아브라함과 비슷한 복을 받았는데 하도 많이 받아서 시기까지 받았습니다.

"(창26: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욥은 동방의 큰 부자였는데 그가 시험을 받은 후에는 갑절이나 회복되었습니다.

"(욥42: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솔로몬의 엄청난 부요함은 하나님의 호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왕상10:23)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

"(왕상3:13)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시바 여왕은 솔로몬의 번성함에 대해 탄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왕상10:7)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십일조 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것들이 우리의 행위의 결과도 아니고, 우리가 애써 얻지도 않았고 얻을 수도 없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신6: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신6: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그들이 건축하지 아니한 성읍들, 그들이 파지 아니한 우물들, 그들이 심지 아니한 과수원들,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영리하게 계획을 짜내도 별 성과가 없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전혀 예상 밖의 근원으로부터 좋은 일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열심히 농사를 지었지만 자기들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뭄과 불과 역병(疫病)과 그밖에 수많은 원인들로 인해서 곡식은 순식간에 휩쓸려 나가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깊은 의미에서 풍성한 수확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이해했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며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권입니다.

"(욥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출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시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레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바로 알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향상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소유욕과 욕망의 영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자기 집이 불에 타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주님의 집이 타버렸구나. 나는 한 가지 책임을 덜었다!"

칼 메닝거 박사는 언제가 한 부유한 환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그 환자의 대답이

"나도 그것 때문에 걱정이외다!"

메닝거 박사가 또 묻기를

"그렇다면 그걸 걱정하는 만큼 마음이 기쁩니까?"

그 환자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하지만 내 돈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준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공포에 휩싸입니다."

이 같은 공포는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내어 줄 때 우리는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이며 우리의 안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 같은 일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지옥의 저주를 피하고 싶거든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내어주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의 구원을 위하여 가롯 유다의 희망 이상의 희망을 가질 수가 없다." 베푸는 것은 우리를 돈의 횡포로부터 자유하게 해줍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 크리스챤 공동체는 돈뿐만 아니라 필요한 자들에게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서 집과 땅을 내어놓았습니다.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돈에 대한 바른 사용법과 훈련을 받은 성도들은 부패하지 않은 채 재산을 소유할 수가 있으며, 그들의 소유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돈을 온전히 포기해 버리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로서는 아주 형편없는 방법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분명 자원을 적절하게 관리하고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등한 방법입니다. 부와 자원이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적절하게 훈련되고 지식을 얻은 사람들의 손에 있는 것이 맘몬의 종들에게 내어 던져지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은 일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의 많은 소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더 큰 공적인 유익을 위하여 활용했습니다. 욥도 그러했고 다윗과 솔로몬도 그러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의 부와 높은 지위를 기독교 공동체를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요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바나바도 그의 소유 재산을 잘 처리했기 때문에 아주 궁핍했던 초대교회를 도울 수가 있었습니다.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9. 성경은 불의한 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라고 하십니다.

"(눅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한 부자가 그의 청지기가 자기의 재산을 잘못 관리해 온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그를 해고시킵니다. 그러나 그 청지기는 쫓겨날 시한이 되기 전에 머리를 써서 자신의 장래를 확보해둡니다.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서 하나씩 그 빚진 돈에서 20%에서 50%를 깎아서 기록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채무자들은 그 청지기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것이기 때문에 그가 직장에서 쫓겨나면 그를 도와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계획은 분명히 영리하면서 또 그만큼 부정직한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 청지기가 한 일을 알아내고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는 대신에 오히려 그 사람의 영리한 처신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의 분별력을 칭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 말씀에서 청지기의 부정직한 것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은 그 청지기가 경제적인 원천을 가지고 비경제적인 목표를 위하여 사용하는 영리한 면, 즉 돈으로 친구를 사귐으로써 그가 필요한 때 갈 곳이 있도록 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판단을 내리십니다.

"(눅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거듭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눅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돈은 약한 사람들을 못 살게 굴고 그들을 억누르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돈은 위신과 명예를 사기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돈은 다른 사람들의 충성심을 얻기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돈은 사람들을 부패시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돈은 이처럼 여러 가지 일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돈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큰 힘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불의한 재물"로(소유) 친구를(존재) 사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돈을 거부하기보다는 우리는 돈을 정복하고 그것을 비경제적인 목적들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위대한 일에 사용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주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마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왜냐하면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기 때문입니다."

땅에다 투자하는 것은 안전한 투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늘에다 투자해야만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만이 여러분의 존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마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늘 은행에 투자된 보물은 높은 보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화폐의 전부를 몽땅 달러화로 바꾸는 화폐개혁이 단행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그것이 발효되는 즉시 모든 한국 통화는 쓸모 없게 된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은 가진 돈을 모두 달러화로 바꾸어 놓고 한국 통화는 매일매일 살아갈 만큼만을 보유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 하시고 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은 아직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불의한 재물"로 하나님 나라를 사귀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돈은 이처럼 비경제적인 목적인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그 돈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집을 살 때나 차를 살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해서 사들입니까? 아니면 그만한 돈이 있기 때문에 사들입니까? 만일 무슨 일을 행할 때 돈이 결정한다면 돈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 돈이 나에게 "자네는 살만큼 충분한 돈이 있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은 나에게 "나는 네가 그것을 가지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말씀하실 지 모릅니다. 그 때에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집을 살 때 아내가 "교회가 좀 멀어도 우리 경제 사정에 맞고 살기에 넓고 편한 이 집을 삽시다."라고 말했을 때, 남편이 "우리 같이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먼저 알아봅시다."라고 말하지 않고 결정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돈이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돈이 자신의 주인입니다. 따라서 그는 돈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패트릭 헨리는 자신의 유언서에다 쓰기를 자신이 이 땅의 재물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해도 상속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유산으로 남긴다면 그들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그는 덧붙이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의 재물을 남기게 된다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궁핍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나의 전 재산을 자녀들에게 남겨 줄 것인가? 아니면 일부분만을 줄 것인가? 그리스도의 뜻을 최선으로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펼칠 기관은 어떤 곳인가? 살아서 할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자신의 영원한 처소를 위해 지혜로운 투자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10. 이렇게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부요한 자가 된 사람들이 여기 소개되고 있습니다.

1) 디모데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나서 바울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전도가 가장 힘든 지역인 에베소에서 바울을 대신하여 사역한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항상 가장 험난한 지역으로 파송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후계자가 될 만큼 "주의 일에 힘쓰는 자"였습니다. 디모데는 본래 수줍음이 많은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담대한 복음 사역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가 걸어가는 사역의 길에서 당할 어떤 시련과 고난도 마다 않고 앞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이러한 디모데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격려와 용기였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복음이 달려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멸시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2)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복음을 철저하게 배운 겸손한 달변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한 구약의 석학이었지만 지극히 평범한 장사꾼 부부의 발 밑에 자기를 낮추고 복음의 지식을 경청하여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더욱 성숙해지는 겸손한 사역자였습니다.

"(고전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고전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은 성숙하고 견고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남자답게 강건하여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처럼 행동하라는 뜻으로 사랑과 조화를 이룩한 성숙한 지도력, 겸손한 지도력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3) 스데바나의 집사람들은 아가야에서 첫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직접 세례를 주었고, 그들은 복음 사역에 헌신함으로서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바나의 집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에 없을 때 부족한 것을 메웠을 뿐만 아니라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었습니다. 스데바나 사람들은 이처럼 목회자의 영혼을 신선하게 해주었고 마음을 새롭게 해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흔히 신자들은 문젯거리나 고민은 목사와 함께 나누지만 기쁨이나 축복은 좀처럼 함께 나누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들의 문제나 고민,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목사를 걸고넘어지기까지 합니다. 성도들은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목사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목회에 힘과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목사의 짐을 덜어 주어 복음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스데바나의 가정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충성된 성도들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4)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주님께 헌신한 부부였습니다. 브리스가는 남편보다 더 강했고 헌신적인 지도자이자 복음 전도자였지만 남편을 불편하게 한 적이 없이 남편과 함께 주님을 섬기고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왔습니다. 성도들은 이처럼 주님을 섬기며 복음 사역을 위해 목회자를 돕는 부부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롬16: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오늘날 이들 부부처럼 헌신과 희생을 지닌 성도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한 성도들은 정말 교회의 위대한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11. 조선일보.97년 6월 10일자 만물상에서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요즘 우리 경제계의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재벌 2세들의 <선대(先代)기업 까먹기>다. 아버지의 대기업을 물려받은 2세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과시를 위해 마구 기업을 확장하다가 꽈당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밑바닥에는 <아버지 돈은 내 돈>이고 <나는 아버지보다 나은 기업가>라는 오도된 의식들이 깔려 있다. 이것이 정치권에서 <아버지 선거 때 들어온 돈은 내 돈>이고 <나는 아버지 보다 더 잘난 정치인>이라는 이른바 <김현철 증후군>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미디어 황제사(社) 회장의 아들 조나단 레빈에게는 <아버지 돈은 내 돈이 아니며> 그가 가는 길은 아버지와는 아무 관계없는 그 자신만의 길이었다. 마약과 범죄로 이름난 뉴욕 브롱스의 한 고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다 지난 주초 자신의 제자에 의해 살해당한 그의 짧은 인생역정은 두 가지 점에서 지금 미국 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재벌 아들이면서 방 하나 짜리 싸구려 아파트에서 살았다. 재산이라고는 봉급을 저축한 약간의 은행예금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가난한 학생들을 도왔고 성적이 오른 학생에게는 야구 표를 사주었다. 범죄의 소굴 같은 곳에서 범죄와 싸워 학생들을 선도했던 것이다. <선생님께 사랑을....>이라는 영화 그대로다. 그러나 그런 참스승이 몰랐던 것도 두 가지가 있었다. 미국에서조차 <아버지 돈은 내 돈이 아니다>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는 선도할 수 없는 인간도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조나단 레빈같은 바른 경제관과 사랑의 삶이 오늘날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돈과 성, 그리고 권력으로 멍들어가고 있는 이 땅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 성도들이 먼저 각기 처해 있는 환경과 처소에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남긴 것은 부귀 영화가 아니라 구원 얻는 믿음과 사랑이었습니다. 교회와 이웃에 봉사를 하려거든, 남을 구제하려거든, 헌금을 하려거든,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려거든 사랑으로 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고예화>

오 헨리의 단편 중에 <묵은 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빵집에서 싸게 파는 묵은 빵만을 사 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빵집 여주인은 매일 묵은 빵만 찾는 그 남자를 동정하여 빵 속에 버터를 듬뿍 넣어 주었습니다.

건축 설계가인 이 가난한 남자는 마침 현상 응모에 출품할 작품인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빵 속에서 흘러나온 버터 때문에 설계도를 버리게 되어 응모하지 못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그 남자는 설계 도면을 지우기 위해 묵은 빵을 사갔던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오 헨리는 여주인의 얄팍한 사랑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얄팍한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무심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고 먼 훗날이 되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은 결국 어그러진 우리의 모습을 바르게 고쳐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잴 인간의 자(尺度)는 없습니다. 우리의 소견이 좁고 짧으며 인간의 이해가 부족할 뿐입니다. 세월이 가고 경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도 한없이 연장됨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이야기는 우리가 시카고에서 라디오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 익명의 청취자가 들려 준 것입니다.

수지가 물었습니다.

"엄마, 지금 뭘해?"

.엄마가 말했습니다.

"이웃집에 사는 스미스 부인에게 갖다 주려고 볶음밥을 만드는 중이다."

이제 여섯 살밖에 안 된 수지가 물었습니다.

"왜?"

"왜냐하면 스미스 부인이 매우 슬프기 때문이란다. 얼마 전에 딸을 잃어서 가슴에 상처를 입었거든. 그래서 우리가 한동안 돌봐 드려야만 해."

"왜, 엄마?"

"수지야, 누군가 아주 아주 슬플 때는 음식을 만든다거나 집안 청소같은 작은 일들을 하기가 어려워진단다. 우리 모두는 함께 살아가고 있고 또 스미스 부인은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 때는 우리가 도와 드려야지. 스미스 부인은 다시는 딸과 얘기할 수도 없고 딸을 껴안을 수도 없고 엄마와 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신나는 일들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단다. 넌 매우 똑똑한 아이야, 수지. 그러니 너도 스미스 부인에게 도움이 되어 줄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거야."

수지는 이 새로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미스 부인을 돕는 일에 자신도 참여할 수 있을까 깊이 생각했습니다. 몇 분 뒤 수지는 스미스 부인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한참 지나서 스미스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안녕, 수지."

수지는 스미스 부인이 다른 때와 같이 귀에 익은 음악 같은 목소리로 인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스미스 부인은 또 울고 있었던 듯했습니다. 눈이 부어 있고 물기에 젖어 축축했습니다. 스미스 부인이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니. 수지야?"

수지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그러시는데 아줌마가 딸을 잃어서 가슴에 상처가 났고, 그래서 아주 아주 슬프시대요."

수지는 부끄러워하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손에는 일회용 반창고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가슴에 난 상처에 이걸 붙이세요. 그러면 금방 나을 거예요."

스미스 부인은 갑자기 목이 메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수지를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습니다.

"고맙다. 수지야. 이 반창고가 내 상처를 금방 낫게 해 줄 거야."

스미스 부인은 수지의 친절한 행동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상점에 가서 둥근 유리 안에 작은 사진을 넣을 수 있도록 된 열쇠고리 하나를 사 왔습니다. 열쇠를 갖고 다니면서 동시에 가족 사진을 넣고 다닐 수 있도록 고안된 고리였습니다. 스미스 부인은 수지가 준 일회용 밴드를 그 유리 안에 넣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상처가 조금씩 치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마음의 치료에는 시간과 주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열쇠 고리는 그녀에게 치료의 상징이 되었고 그녀가 딸과 함께 나눈 기쁨과 사랑을 언제나 기억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잠16: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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