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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cross01b.gif  사랑의 승리 cross01b.gif

 

공관복음서 설교인 "사랑의 승리"는 나의 사랑하는 평강교회 강단에서 1998, 1999년에 행한 주일예배 설교를 모아 엮은 것입니다. 본 설교집을 통해 다시 한번 여러분의 삶에 '사랑의 승리'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공관복음서 설교 "사랑의 승리"는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마태 복음서를 중심으로 설교된 것을 차례대로
        정리했습니다.
둘째, 마태 복음을 성경본문으로 취했으며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는 참조로 했습니다.
셋째, 마태 복음이 성경본문으로 되어있지 않은 부분은
        이미 요한 복음 설교 등에서 설교되어진 것임을
        밝혀둡니다.
넷째, 공관복음서 설교는 각 장별로 공통된 부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관복음서 전체가
        빠짐없이 설교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본 설교집 발간을 위해 사랑과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신
영기획 구영순 사장님과 직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00년 2월 16일

야음산 기슭에서   이 동 희

 anii33.gif  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네 믿음이 크도다 (마 15:21-28)    
 
2.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20)    
 
3.예수를 넘어지게 하지 말라
   (마 16:21-28, 막 8:31-9:1, 눅 9:22-27) 
 4.신앙과 현실 (마 17:1-20, 막9:2-13, 눅 9:28-36)  
 
5.실족케 하지마라 (마 18:1-14, 막 9:33-48,
                            눅 9:46-48, 15:3-7, 17:1,2)
   
 
6.잃은 양을 찾으라 (마 18:12-14, 눅 15:1-7)
 7.중심으로 용서하라 (마 18:15-35)    
 
8.부자와 하나님 나라 (마 19:16-30, 막 10:17-31,
                                 눅 18:18-30)   
 9.포도원에 들어가라 (마 20:1-16)    
10.평화의 왕 (마 21:1-11)  
11.사랑과 분노 (마 21:12-17, 막 11:15-19, 눅 19:45-48)  
12.열매 맺는 백성이 되라 (마 21:33-46, 막 12:1-12,
                                      눅 20:9-19)    
13.택함을 입은 자가 되라 (마 22:1-14, 눅 14:15-24)    
14.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마 21:23-32)
15.제일 크고 좋은 열매 (마 22:34-40)    
16.짐, 외식 그리고 종교 (마23:1-39,막12:38-40,
                                    눅 11:37-52, 20:45-47)   
17.그날과 그 때 (마 24:1-44)    
18.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 (마 24:45-51, 눅 12:42-48)    
19.슬기로운 다섯 처녀 (마 25:1-13)    
20.작은 일에 충성하라 (마 25:14-30, 눅 19:11-27)  
21.사랑의 향유 (마 26:6-13, 막 14:3-9, 요 12:1-8)   
22.사랑과 배반 (마 26:14-35, 막 14:10-31,
                        눅 22:3-34, 요 13:21-38) 
23.예수여,나를 생각하소서(마 27:32-44,막15:21-32,
                                        눅 23:39-43)  
24.사랑의 승리 (마 28:16-20, 막 16:14-18, 눅 24:36-49)  
25.사랑의 영을받으라(마28:16-20, 막 16:14-18, 눅 24:36-49)    
26.나약한 인간 (막 14:66-72, 눅 22:56-62, 요 18:15-27) 
27.하나님의 혁명 (눅 1:46-56) 
28.새벽을 향한 황혼의 길 (막 16:12-13, 눅 24:13-35)  
29.사랑과 죄 (눅 7:36-50)  
30.선한 이웃이 되라(1) (눅 10:25-37)    
31.선한 이웃이 되라(2) (눅 10:25-37)    
32.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 (눅 12:13-21)    
33.말석에 앉으라 (눅 14:7-11)    
34.망대를 준공하라 (눅 14:25-33)    
35.돌아온 탕자 (눅 15:11-32)    
36.불의한 청지기 (눅 16:1-13)  
37.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38.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39.다시는 범죄치 말라 (요 8:3-11)    
40.의의 나무가 되라 (사 61:1-3)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 네 믿음이 크도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5:21-28)

만약 오래 동안 병들어 고생하는 딸을 둔 여러분에게 "너 같은 사람을 위해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 아니야, 사람이 어디 사람같아야지, 개보다 못한 주제에 무슨 예수를 믿는다고?"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래도 예수 믿고 우리 평강교회에 나오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디 종교가 기독교뿐이냐? 어디 교회가 평강교회 하나 뿐이냐? 그 보다 능력많고 용한 종교도 많고 교회도 쌔고 쌨다."며 발길을 돌려 버리겠습니까?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였습니다. 어떤 이방 사람,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께 소리질러 간청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7절). 그러나 예수는 들은 채 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줄기차게 귀찮을 정도로 따라오며 제발 도와 달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보다 못한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저 여자를 어떻게 해서 돌려보내시지요?" 그러자 예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냉정하게 그 간절한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습니다. 아마 동족이 아니어서 안 된다는 말에 암담했을 것입니다. 병 좀 고쳐 주는데 무슨 인종을 차별하느냐 따지며 대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귀신들린 딸이 너무나 불쌍할 뿐만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 발 앞에 바짝 엎드려 다시금 간청했습니다. "주여, 제발 저를 도와주소서." 라며 비명에 가까운 절규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께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들의 떡을 어떻게 개한테 던져 준단 말이냐?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26절). 한 마디로 개같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딸 좀 고쳐보겠다고 참으로 참기 어려운 너무나 치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참담해졌을 것입니다. 흉악히 귀신들린 딸만 아니었다면, 네 눈에는 개밖에 안 보이냐? 살다 보니 재수 옴 붙었다며 침이 탁 ?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같은 예수의 말씀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나 체면도 불사한 채 기막힌 말로 간청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실로 그녀는 "주여, 당신의 말씀은 백 번 지당하십니다. 제가 개가 된다한들 어떻겠습니까? 제 딸만 고쳐주신다면 한이 없습니다. 제 딸을 살려낼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는 없습니다."며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매달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 말에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흉악히 귀신들렸던 가나안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개같은 취급을 받으면서도 예수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개같은 취급을 받을지라도 예수를 믿고 따를 만한 가치가, 아니 그보다 더 엄청난 보화가 그에게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그렇게 취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시험해 보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을 모두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시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칭찬하신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은 무엇보다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요즈음 여인들 가운데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도 먹여 살리기 힘들거나 정신과 지체에 장애가 있으면 거침없이 내다 버리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되는데, 이 가나안 여인은 그보다 더 심한 흉악히 귀신들린 딸이라도 너무나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이 여자는 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 여자의 심장에는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자식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예수의 무정한 침묵에도, 그보다 더한 멸시 천대를 받아도, 더 나아가 개같은 취급을 받아도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자존심과 체면을 몽땅 버리고 예수 앞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 그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사랑에서 비롯된 믿음이야말로 큰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이 하게 하고 더 강하게 역사하는 것은 없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자식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오직 예수에게만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뉴욕의 유명한 설교가인 노만 빈센트 필 목사가 후두염에 걸렸습니다. 의사를 찾아갔더니 "혹시 걱정되는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계속적인 걱정은 설교 때문입니다. 주일 설교 수요예배 설교, 초청 설교 등 무슨 내용을 준비할지 1년 내내 걱정이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이때 의사가 목사에게 설교했습니다. "당신의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착하시오.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까?(Don`t focus on your problems but on God)" 이 의사의 말 "당신의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착하시오" 는 나중에 필 목사의 설교가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오직 사랑하는 딸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에게만 집중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자식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먼저 예수에게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부모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먼저 예수에게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까? 먼저 예수에게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를 당한다 해도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개같은 취급을 받아도 절대로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개 취급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굽히지 않는 믿음을 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손해볼지도 모른다거나, 막연하게 기도하면 어떤 좋은 일이 생길거라는 생각으로 기도하지 마시고 전심전력을 다해서 기도하고 매달리는 믿음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가면 혹시나 귀신들린 딸이 고침받을지 모른다는 만일의 도움을 기대한 것이 아니고 오직 희망은 예수밖에 없다는 절대절명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어떠한 경우를 당하고, 어떠한 말을 듣는다 해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인내를 가지고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꿀벌이 1파운드의 꿀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5만6천 송이의 꽃을 방문해야 합니다. 가령 클로버 꽃인 경우 한 송이 안에 60개의 튜브가 있으므로 벌은 336만 번의 작업을 거쳐 1파운드의 꿀을 얻습니다. 우리는 그 꿀벌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1파운드(약 450g)의 꿀을 얻기 위해 <5만6천 송이의 꽃>을 방문하는 꿀벌의 인내와 집중력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가 보여준 것은 기도와 믿음이 의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뜨거운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영혼을 쏟아 붓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와 같은 치욕적이고 인격에 치명적인 말을 들었다 해도, 아니 그같은 냉대와 홀대를 받았다 해도, 그런 말과 대접에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흔히 교회 내에서 교우들간에 시험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가 상대방의 말 때문에 일어납니다. 험담이나 약점을 들어 얘기하거나, 멸시하는 말, 비인격적인 말을 듣게 되면 상당히 충격을 받고 교회를 떠나겠다느니 신앙생활을 그만두겠다며 협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됩니다. 금년 한 해 동안 교회 생활하는 중 교우들로부터 소위 <개 같은 취급>을 받는다 해도 예수 앞에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마시고 가나안 여자처럼 불굴의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야 마는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라고 해서 여러분의 마음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던지는 돌에 넘어지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돌을 주워 기초가 튼튼한 인생의 집을 지으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번 옆 사람에게 "얼마든지 돌을 던져 보라"고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돌을 던질 때마다 그 분에게 "돌을 던져 주어 감사하며 영광입니다."라며 감사드리며 기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돌을 던지셔도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던진 벽돌에 걸려 넘어가도 그 벽돌을 주어 기초돌로 삼고 집을 짓기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데이빗 브린클린) 자식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그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큰 믿음으로 소원이 성취된 가나안 여인처럼, 여러분도 예수의 뜨거운 사랑의 심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여러분의 소원이 주안에서 성취되시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심장에 뜨거운 사랑이 있는 사람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같은 멸시천대를 받아도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않는 밝은 마음으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며 주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한해를 살면서 어떠한 경우를 당한다 해도 항상 밝고 소망이 넘치는 마음으로 신앙 생활하기를 원하십니다. 가나안 여인은 비록 집에는 흉악히 귀신들린 딸로 인해 어두움으로 가득차 있을지라도 예수를 만나고 나서 어두움을 밝게 비칠 수 있는 소망과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명랑한 신앙, 그 눈에는 언제나 소망의 빛이 가득찬 신앙, 어떠한 어두운 말을 들어도, 어떠한 힘들고 어려운 경우를 당해도 어두워지거나 절망하지 않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여자같은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그러한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예수의 태도와 말씀이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예수께서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크게 만들고자 그처럼 큰 시련을 주셨던 것입니다. 요컨대, 담금질 없는 제련은 없는 법입니다. 시련이 클수록 큰 믿음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서 여러분의 믿음을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어떠한 시련과 시험이 닥친다 해도 도리어 여러분의 믿음이 큰 믿음으로 자라 예수의 칭찬과 인정을 받으시고, 여러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시는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의 명절 중에 <하누카>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전 165년에 유다 마카바이오스가 로마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재건한 일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예루살렘을 탈환했다고 하지만 수만 명이 피를 쏟은 처참한 전쟁이었습니다. 폐허를 헤치고 예루살렘 성전에 오랜만에 들거간 유대인들은 메노라(menorah -- 일곱 개의 촛불을 밝히는 큰 촛대)에 불을 밝힙니다. 그러나 초는 구할 수 없고 누가 올리브유를 구해 왔습니다. 그나마 하루 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올리브유를 구하고 기름을 짜는 시설을 갖추어 제품이 나오기 시작하려면 최소한 8일은 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메노라에 불을 밝히는 것이 곧 하나님이 그 성전에 내려오시는 것을 의미하므로 하루도 지체할 수 없어 우선 오늘 기름을 쓰고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자는 믿음으로 성전의 불을 밝혔습니다. 놀라운 것은 기름이 8일 동안 마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8일간 하누카를 지키며 하누카 명절을 일명 "빛의 명절"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하루의 기름을 쏟을 때, 남은 7일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소원을 위해 남아 있는 하루 분의 기름을 다 쏟아 부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생애 내내 빛의 명절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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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16:13-20)

쉐인 (Shane)이라는 서부 영화가 있습니다. 작가가 주인공(Alan Ladd, 주연) 쉐인을 통하여 그리스도상을 부각하려고 시도한 작품입니다. 한적한 광야에 외딴 집 한 채가 있습니다. 어린 아들 하나를 둔 부부, 그들은 착하고 힘없는 개척민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조와 마리온(Joe and Marion)이라고 붙인 것도 요셉과 마리아(Joseph and Maria)의 은유라고 합니다. 무례한 총잡이들이 이들을 괴롭힙니다. 그 때 이 집에 흘연히 나타나는 인물이 바로 쉐인입니다. 그는 얼마 동안 이 집에 유하면서 그들을 격려하며 희망을 잃지 않게 하고, 어린 소년에게 참다운 용기와 사랑을 가르치며 자기의 목숨을 걸고 악한들로부터 이 가정을 보호합니다. 일이 해결되어 다시 평화롭게 되자 이 신비한 나그네는 정처없이 지평선을 향해 떠납니다. 다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가 구름을 타고 올라가듯 쉐인이 광야의 먼지 속으로 사라질 무렵 소년은 그에게서 구세주와 같은 거룩함을 보며, 그를 따라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는 광야에 머물러 쉐인과 같은 사랑과 정의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신 교회는 지금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쳐지고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10년전에 씌여진 글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한국 교회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귀담아 들을 만한 정진홍 서울대 종교학 교수의 <기독교의 두 얼굴>이란 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988년 12월 20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는 충현교회라고 하는 개신교의 한 교회가 건물을 준공하여 헌당식을 가졌습니다....순전히 돌로 지은 건물로는 개신교 교회 건물 중에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합니다. 대지 6,432평, 연건평 11,371평, 첨탑 구조물 두 개를 포함하여 높이가 150미터....78년에 기공 예배를 올렸고, 88년에 완공했으니 짧게는 10년 공사이고, 길게는 18년 공사인 셈입니다. 그 긴 세월 동안에 기울였던 정성이 얼마나 극진했을까 생각하면 눈에 선한 듯합니다. 어쩌면 그 교회의 1만 9천이 넘는 신도들은 그 일로 해가 뜨고 지는 세월을 살았음에 틀림없을 듯싶습니다...그 일에 부어진 돈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돈에 둔해도 100억은, 아니 몇백 억은 넉넉히 들었을 줄로 여겨집니다...그런가 하면 그 새 교회가 계획하고 있는 교육, 선교, 구제의 3대 사업 내용도 그 건물만큼이나 대단합니다. 한국 교회 성장 연구소를 설치하여 국내 목회자들을 재교육하고, 더 나아가 국적, 문화, 인종, 언어가 다른 세계 여러 나라 교역자들을 유치하여 교육을 시키겠다고 합니다. 또 방글라데시 난민 구호와 같은 국제적인 구호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정신 박약아, 농아, 장애자, 노인들에 대한 폭넓은 봉사 활동을 펼치겠다고 합니다....한국의 개신교는 이제 참으로 대단합니다. 신도가 많고, 그래서 돈이 많고, 그래서 이미 커다란 사회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런 겉모습만이 아니라 하는 일의 계획이나 실천이나 평가도 꽤 성숙해 있습니다. 이제는 어떤 면에서도 한국의 개신교를 소흘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그런데 88년 11월, 세계 개신 교회의 협의체인 세계 교회 협의회가 발표한 자원 공유 연감에 따르면 '기가 막힌' 사실이 담겨져있습니다. 새해 89년의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가 세계 교회 협의회에 956,151달러를 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살펴보면 더욱 기가 막힙니다....우리나라의 교회가 지원을 요청한 지원금은 정의와 봉사 프로그램 단위에 소속된 '도시 농촌 선교'와 '교회간 원조와 난민 및 세계 봉사 위원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가난하고 헐벗고, 난리가 나서 먹고 살기가 어려워 세계 교회가 서로 협력하여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없는 경우를 생각하여 마련해 놓고 있는 기금 중에서 돈을 좀 보태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거나, 농촌이나 도시의 변두리를 위한 선교 자금을 좀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아무튼 그런 자료로 보면 한국의 개신교는 가난하기 이를 데 없어 밖의 원조가 없으면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딱하기 그지없는 교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세계 최대의 석조 건물을 지은 개신교와 세계 교회 협의회에 하고 싶은 일 한 가지씩을 들고 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돈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손을 내미는 개신교가 서로 다른 종교도, 서로 다른 종파일 수도 없을 텐데 이런 두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한 쪽은 세계 제일이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고, 한 쪽은 어떻게 해서라도 돈 좀 받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부자와 거지의 대조도 이럴 수는 없습니다....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에서 꼭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개신교의 이 두 얼굴은, 그 두 얼굴끼리는 어떻게 서로의 모습을 이야기할지는 몰라도, 밖엔 있는 사람의 눈길에는 아무래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꼴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집안 되어가는 꼴이 형편없이 보여 공연히 옆에서 불안하기조차 합니다. 마구 이야기한다면, 죄의 용서니 영혼의 구원이니 또 하늘나라의 실현이니 하면서도 종국에 가서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교회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개신교의 목표가 아닌가 싶고, 인권이니, 빈민이니, 노동자니, 농민이니 하면서도 밖에서 그 일을 위한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꼼짝도 못 할 새로운 직업이 그러한 기독교 운동의 실상이 아닌가 싶은 씁쓰레함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사람들은 착해서 큰 교회를 세운 그 정성과 그 건물의 아름다움에 깊이 감탄합니다. 사람들은 또 착해서 그릇된 체제에 저항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려는 교회의 몸부림을 볼 때에 그 순교적 정열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착함은 바보스러움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입을 열 때에 세계의 최대 석조 건물은 그 못난 부자스러움과 그 못난 거지스러움을 모두 끌어안은 채로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신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비극일 것입니다.> "못난 부자스러움과 그 못난 거지스러움"이 여전히 한국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의 질문을 통해 우리 교회는 다시 한번 바른 신앙고백으로 새롭게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지금까지 자신의 교훈과 수많은 기적 등을 보면서 예수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혹자는 세례 요한과 같이 청렴하고 정의로운 분이라고, 어떤 이는 엘리야같이 존경받는 위대한 선지자라고, 또 다른 사람들은 고난에 처한 민족과 조국을 위해 눈물로 호소했던 예레미야같은 분으로 부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자들을 향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 신앙고백에 예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면서 그같은 고백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깨우쳐 주시며,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특권과 의무를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통해 볼 때, 먼저 복있는 사람은 바른 신앙고백으로 예수를 바로 알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복되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세주>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고백은 세상을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교회와 성도가 구세주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나라 민족을 위기에 빠지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위기에 처한 가정이나 직장에서 교회와 성도가 구세주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가정이나 직장을 더 어렵고 어둡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없어서는 안될 빛과 소금같은 존재가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예수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을만큼 교회와 성도는 그런 존재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을만한 남편과 아내로 살고 있습니까? 예수믿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을만한 정치가와 기업가 등 지도자로 살고 있습니까? 예수믿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을만한 공무원과 노동자로 살고 있습니까? 아무리 많은 돈도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원할 구세주가 되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크고 높은 권력도 궁극적인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최고, 첨단의 지식이라고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여러분 삶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가정과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구세주같은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는 한 마디로 하늘 나라 청지기라 되라는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란 사망권세를 말하는 것으로 교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않은 생명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말고 생명이 되시는, 구세주되시는 예수를 전하여 세상 부귀영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국의 문을 활짝 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는 권한이라기보다는 책임을 말하는 것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하늘 나라 문을 여는 것이지 닫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 보면, 천국 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3천명에게 예수를 전하여 그들에게 천국 문을 열어 주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고넬료에게도 하늘 나라 문을 열어 준 것을 시작으로 천국문은 모든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활짝 열렸습니다. 초대 교회 예루살렘 공의회는 모든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천국 백성이 되는데 가로막고 있는 율법조항들을 없애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사도행전 15:14-21)

이제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천국의 문을 열고 천국의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천국 열쇠가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반석위에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몸의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아니고서는 누구나 천국에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대부흥사 무디 (D.L. Moody)의 일화입니다. 한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는데 초만원이어서 16세 미만의 아이들은 입장을 금지하였습니다. 열두 살쯤 된 한 소년이 거절을 당하여 문가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이 때 마차로 무디 선생이 도착하였습니다. 무디는 우연히 이 소년을 발견하였습니다. "너 왜 우니? 집을 잃었니, 배가 고프니?" 야위고 헌 누더기를 걸친 소년이 대답하였습니다. "무디 선생님의 말씀이 듣고 싶은데 아이들은 못 들어가게 해요." 무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나의 외투 뒷자락을 꼭 붙잡고 따라와." 소년은 무디의 외투 자락을 잡고 따라갔습니다. 놀란 것은 성전의 입구를 무사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내려다보이는 강단위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어리둥절한 소년에게 무디가 말했습니다. "저 큰 의자에 앉아 있어도 좋다. 여기에는 내 옷자락만을 붙잡아도 들어올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 후 15년이 경과했을 때 이 시골 교회에 새로 부임해 온 목사가 위의 이야기를 하며 자기를 소개하였습니다. "그 때의 가난한 소년이 바로 저입니다. 제가 바로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실화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놀라운 계획을 진행하신다는 것, 교회는 누더기를 걸친 소년 하나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 천국 문이 좁지만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구세주이십니다. 세상은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구세주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예수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고백하므로 과거의 죄에서 구원받으시고 지금 천국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며 장차 천국에서 영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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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예수를 넘어지게 하지 말라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1-28, 참조 : 막 8:31-9:1, 눅 9:22-27)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네가 복이 있도다"는 주님의 칭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건전하고 건강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자칫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의 신앙생활에 실족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구세주)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메시야와 제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메시야는 크게 달랐습니다. 메시야로서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한 마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께 기대했던 메시야는 당시 로마제국을 둘러엎고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하는 정치적 혁명군 지도자,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한 경제적 메시야, 부정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를 새롭게 하는 사회 개혁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게 되리라며 메시야의 가는 길, 곧 십자가의 길을 가르쳤을 때,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했던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며 예수의 가고자 하시는 길을 극구 만류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자살이라도 하시는 것을 뒤에서 붙잡듯이 예수를 위해, 예수를 보호하려는 듯이 간청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며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셨던 것은 자기가 가는 길에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자신은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위하여 산다고 하면서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하는 일이 교회를 넘어지게 하거나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주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단'이란 문자적 의미로 볼 때 '반대자'를 말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은 베드로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고 인간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이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세력입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주의 책망을 받은 사람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 예수를 가장 사랑한다고 하는 베드로였습니다. '사단'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학자 오리겐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베드로여, 그대의 자리는 내 앞이 아니고 내 뒤다. 내가 선택한 길로 나를 따르는 것이 그대의 위치이지, 그대가 가고자 하는 길로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그대의 설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사랑하고 위한다고 하면서 예수 앞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의 뒤에서 예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가 가시고자 하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에 자신감을 가지고 찾아왔던 부자 청년에게도,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제자)와 사단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베드로는 부친과 배, 그리고 그물까지 몽땅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으나 사단은 결코 예수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생각을 하여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베드로를 책망하신 말씀은 "내 뒤로 물러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곁에서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뒤로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본심은 예수의 가는 길을 막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의 가시는 길, 곧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 뒤로 물러가라 그리고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로마에 들어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예수를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자신감을 보였던 돈 많은 부자 청년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심 어린 모습으로 예수를 따르지 못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일찍이 베드로는 부친과 배와 그물을 몽땅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 자신이 넘어졌어도 곧 다시 일어나 예수의 뒤를 따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를 따르고자 하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부인해야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지금 까지 자기 중심의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생활을 버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자기 생활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활은 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갇힌 자들을 위한, 곧 이웃을 위한 사랑과 희생,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자요,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의 삶입니다. 드오리아의 소설 중에 영화로 유명해진 <하이눈, High Noon>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보안관은 마을의 법질서를 사수하려 최선을 다합니다. 악당들과의 대결을 앞두고 보안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간청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총 잘 쏘는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은 '이 일이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명도 나서지 않아 결국 보안관 혼자서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일이 나의 일이다'고 믿는 사람이 온 동네에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일 잘 하는 사람이나 능력있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이, 교회 일이 나의 일이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삶이 곧 자신의 삶,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가 구원받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곳은 성문 밖 골고다입니다. 성(城) 안에 부촌(富村)이나 권력의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흉악범에 대한 가장 참혹한 사형이 집행되는 자리입니다. 골고다는 사람들의 멸시, 천대와 버림받는 자립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자리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이름도 빛도 없이 달게 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데는 어떠한 보수도 보상도, 영광도 명예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초청받은 곳은 즐거운 잔치 자리, 누구나 좋아하는 영광과 명예스러운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자리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사람들의 멸시 천대를 받는 자리요, 결국에는 이웃을 위해 죽임을 당하는 희생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부활과 생명이 약속된 자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 생명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지고 가야할 것이 있다면, 십자가뿐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예수를 위해, 예수를 따르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자기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생명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예수께 드릴 것이 있다면 여러분의 생명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입술로는 예수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봉사에는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다는 것은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도, 십자가 없는 봉사, 십자가 없는 사랑, 십자가 없는 전도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생명이 없습니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이나 사회에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이나 사회에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넘어지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시대마다 위기를 극복하는데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인도가 낳은 대전도자 선다 싱의 회심 경험담입니다. 그는 1889년 9월 3일 인도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힌두교도로 선다 싱이 14세 때 세상을 떠나며 훌륭한 종교가가 될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그는 15세 때 이미 어려운 철학이나 종교서적을 읽었고 자기의 인생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며 고민하는 소년이었습니다. 1904년 12월 18일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기독교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기독교에 관계된 모든 책과 성경을 불태우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힌두교에도 기독교에도 해결책이 없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인생은 허무하고 절망만이 그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욕을 하고 새벽 5시 급행열차가 집 옆을 지나가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힌두교의 신이든 기독교의 신이든 대답 좀 해주십시오.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때 꿈인지 생시인지 선다 싱은 예수의 모습이 자기 옆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는 힌두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나를 괴롭히느냐? 나는 이미 너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다. 이제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이다." 선다 싱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과 희생의 십자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체험한 선다 싱은 "오 주님, 이제부터는 오직 주님만을 따르겠습니다."며 신앙고백을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중 도마가 인도 땅에 복음을 전한 이래 영안을 뜨고서 예수를 체험한 사람은 선다 싱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에서 태어난 복음 전도자로서 기념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를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중심으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랑과 희생으로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교회가 넘어지지 않도록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후에 부활 생명이 있습니다. 인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실 그 때에 여러분이 행한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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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신앙과 현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14)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 `주여 !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1-20, 참조 : 막 9:2-13, 눅 9:28-36)

1. 오늘 본문을 유명한 화가 라파엘의 그림을 통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변화산상에서 기도하시다가 얼굴이 변화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그림 상단에 위치해 있고, 그 아래 잠에서 막 깨어난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있으며, 그림 하단 산 아래에는 귀신 들린 아이와 그 아버지, 그리고 군중들과 제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3단계로 구분하여 본문의 광경을 그린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산 밑에서는 고통과 절망이 꿈틀대며 신음하고 있고 혼란과 위기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산상에서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다가 깨어나서는 황흘하고 눈부신 주의 광채를 보고 마냥 좋아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그 광채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세 제자가 잊고 있는 산 아래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죄 속에 빠져 헤메이는 그들을 위해 몸소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모세, 엘리야와 함께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 심중을 모르는 세 제자는 그저 광채에 눈이 팔려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산상의 기쁨과 변화, 즐거움이 좋을 뿐 아니라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주께서 세 제자를 산상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 제자를 산상으로 데려가셨던 그 주님이, 그들이 그곳에 있기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산 밑으로 데리고 가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산상의 그 빛난 광채 속에서 주께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내뱉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말이 혹 오늘날의 교회가 하고 있는 말이 아닌지, 혹 여러분이 늘 하는 말은 아닌지? 제자들의 어리석음은 라파엘 시대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단과 싸우거나 불신자에게 멸시받기 보다는 교회 안에서만 찬송하며 성도와 교제를 나누며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산 아래로 내려오신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당신들을 산상으로 부르셔서 영광과 즐거움, 변화를 보여 주셨다면, 이제 그 주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심정으로 죄 속에 있는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간질에 걸려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발광하며 고통당하는 사람과 그런 아들을 둔 부모의 참담한 현실, 그리고 이들을 고쳐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던 제자들의 낭패스런 모습,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 낙심과 연민에 가득한 군중들의 모습, 이 모든 현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서 암담한 현실 속에 고통당하며 절망하고 있는 이들을 끌어안고 빛과 생명과 소망이 되신 예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산 밑으로 내려 가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 생명줄을 던져야 합니다. 기독교는 산 위에서 신비나 이상만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현실을 구원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예수께서 죄 많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포로된 자, 억눌린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은 현실과 동 떨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을 뜨거운 사랑으로 끌어 안는 것입니다.

2. 며칠전 한국 경제의 실패를 책임지고 물러선 강경식 부총리에 대한 어느 신문 기자의 평입니다. <시장경제에 실패한 시장경제론자. 이상 좇다 현실에 발목잡힌 이상주의자>. 그가 신봉했던 시장경제 이론은 우리 경제가 궁극적으로 가야할 이상적인 이론이었지만 우리의 경제 현실이 그 이상을 따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추구한 이론과 정책들은 금융개혁추진, 금융실명제보완, 벤처기업육성, 지방경제 활성화, 긴축예산의 편성 등 경제 체질을 바꾸기 위한 시도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의 잇단 부도로 얼룩진 우리 경제현실에 그 이상론이 뿌리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 속에 그는 현실 경제의 실패를 책임지고 대선을 한달 남겨놓은 시점에서 중도하차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문민정부는 개혁에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 경제도 부도내고 말았습니다.

어느 일간지 만화에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초기에 <임기중 한 푼도 안 받겠다.>고 공표하자 백성들은 <글쎄...>하면서 두고 보자는 태도였습니다. 그후 임기 3개월을 남겨 둔 김영삼 대통령의 모습은 IMF(국제통화기금)에 깡통차고 두 손을 싹싹 비비며 <한 푼만 도와줍쇼>라고 구걸하는 거지 모습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칼국수 먹더니 이제 수제비도 못 먹고 깡통 찬 거지가 다 되었습니다. OECD가입, 선진국 운운 하며 교만을 떨며 기고만장하더니 급기야는 소처럼 풀 뜯어먹는 신세가 되어버린 느브갓네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구촌의 세계화 물결을 타고 조만간 선진국 대열에 앞장 설 것처럼 떠들어 댓지만 모두가 다 허구였습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세계화의 덫>(독일 슈피겔지 기자 마르틴.슈만 공저)이 세계 29개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으며 독일에서만 3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합니다. 저자는 지구촌의 세계화 물결 속에서 오는 미래상을 "20대 80의 사회"라고 정의합니다. 21세기는 지구촌 전체에서 일할 수 있는 인구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회에서 배척된 80%의 사람들은 20%가 던져주는 약간의 오락물과 먹거리에 만족하며 조용히 살아갈 것이라고 그들은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상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저자가 분석한 <세계화 지구촌>의 모습은 곳곳에서 벌써부터 그 전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독일의 실업자는 6백만명을 상회했습니다. 이는 48년 서독 건국이래 가장 많은 실업자수입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안에 제조업에서만 1백5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화는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일자리를 급격하게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낸다는 세계화 지상론자들의 외침은 설득력을 잃은지 오래됐다는 주장입니다. 또 세계화는 세계를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로 양분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은 심각한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고 13억명은 하루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세계적 갑부 358명의 재산을 전부 합치면 25억명의 재산과 맞먹습니다. 주(州) 자체만으로 세계 7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미국 캘리포니아는 감옥 유지를 위해 쏟아붓는 돈이 주 전체 교육예산을 압도합니다.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최근 선정한 미국 400대 부자 랭킹에 따르면 10억달러 이상을 보유한 재산가(빌리어네어)는 지난해 135명에서 올해 170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1위-빌 게이츠, 2위-워런 버핏, 3위-플 앨런, 4위-로래리 엘리슨, 5위-고든 무어, 6위-스티븐 볼머, 7위-존 클러지, 8위-로니 퍼럴먼, 9위-짐 월튼, 10위-헬렌 월튼, 24위-루퍼트 머독, 26위-커코리언, 28위-테드 터너, 33위-로스 페로) 포브스가 부자 그룹을 선정하기 시작한 지난 82년에는 13명만이 이 '빌리어네어' 클럽에 속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지난 94년부터 올해까지 4년 연속 1위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인물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빌 게이츠(41). 빌 게이츠의 재산은 올해 무려 두 배 이상 증가, 398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같은 재산규모는 그가 올 한 해 동안 일주일에 4억달러 꼴로 벌어 들였음을 의미합니다.

400대 부자에 오른 화제의 인물로는 또 최근 동남아 통화위기를 배후 조정했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투자가 조지 소로스(27위), 90년대 들어 미 대통령 선거에 연거푸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실패한 텍사스의 거부 로스(33위) 등이 있습니다..... 400대 부자들은 백인들의 독무대가 되고 있는 가운데 흑인으로는 여성 방송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가 유일하게 349위에 기록됐다. 반면 아시아와 남미 계통의 재산가는 400위 안에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400대 부자 중에서 27, 33위가 동남아 통화위기를 배후 조정했다고 한다면, 이미 "20대 80의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빌 게이츠 한 사람의 재산만으로도 한국 경제를 살렸다 죽였다 할 수 있는 지구촌 현실 앞에 아연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하루를 연명하는 13억명의 지구촌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일주일에 무려 4억달러를 벌어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13,14세에 몸을 팔아 연명해가는 아이들, 거리에 버려져 구걸하며 겨우 겨우 살아가는 아이들이 무려 1억명이 된다고 합니다. 선진 강대국들이 끌고가는 세계화는 "20대 80의 사회"라는 가난과 질병으로 억눌려 고통받는 사람들만 늘려가는 허구에 불과합니다. 세계화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화는 살인적인 생존경쟁 속에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허구일뿐입니다. 세계화는 세계를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로 양분하는 인류의 덫일 뿐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를 강한 자로 만들고, 가난한 자를 부유한 자로 만들며,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만들며, 다수의 패배자들을 승리자로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의 복음화입니다.

3.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이 시대를 가리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질책하며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신앙은 산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산 아래로 내려와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골짜기는 메우고 높은 산은 깎아내려 평지로 만드는것입니다. "20대 80의 사회" 골짜기와 산을 평지화시키되 하향평준화가 아니라 상향평준화 하는 것이 신앙이요 세계 복음화입니다.

해같이 빛나는 모습으로 변형된 모습의 예수님께서 모세,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장면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크나큰 존경과 신망을 받는 인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초점은 그들의 위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증거하는 그들의 역할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보다도, 엘리야의 능력보다도 십자가의 예수만이 산 아래의 현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산 위에 계속 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엉겁결에 예수를 모세와 엘리야에 버금가는 인물로 파악하였을 뿐 모든 구약의 율법과 예언의 성취이신(5: 17, 18; 눅 24:44) 주님의 유일무이한 신분에 대한 무지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그러한 제안은 온갖 질고에 시달리는 무리들이 기다리는 산 아래의 목마른 부르짖음을 도외시한 도피적 태도를 반영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향해 내딛는 주님의 거룩한 고난의 걸음을 막아 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눈은 저 변화산상의 영광은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보게 하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 소망에로 향하게 합니다(요일 3:1-3). 하지만 눈을 산 아래 곧, 세상에로 돌려보면, 이 땅에는 온갖 죄악과 질병, 부조리와 모순이 판치고 있으며 고통의 절규가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의 사명이 저 억눌리고 빛을 잃은 무리들 속에 들어가 그들로 더불어 함께 살며 그들로 저 산 위의 영광에로 눈을 돌리게 하는 일임은 자명해집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초점은 무엇보다 믿음의 문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변화산의 경험은 분명 신비로운 일입니다. 기독교는 분명 신비와 기적의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신비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신비의 경험이 없이는 메마른 뼈와 같습니다. 그러나 자칫 산 위에 있는 사람은 산밑의 이성과 지성을 죄악시하기 쉽습니다. 산밑에 있는 사람은 산 위의 신비를 광신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이성을 무시한 신비는 공중에 떠있는 것이요 신비를 무시한 이성은 앞이 탁 막힌 소경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 생활에는 학자의 혀와 선지자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변화산의 경험은 우리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하고 매일의 복음 전도 및 봉사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들은 산 위에서 산 위로 떠다닙니다. 이 산 저 산을 떠들지만 현실은 비참합니다. 현실을 무시하면 기독교는 뜬구름처럼 되고 맙니다. 또한 현실에 집착하면 꿈이 없는 막힌 자가 됩니다. 기독교는 이상과 현실을 좁히는 종교요, 이상을 현실화하는 종교입니다. 신앙이란 지각이나 이성을 잃은 흥분이 아닙니다.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어나는 것이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에 흥분하여 예수의 참다운 모습을 놓쳤습니다. 예수가 지향하는 참다운 신앙에서 벗어났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장막 셋을 집시다." "여기가 좋사오니"는 예수가 가르친 신앙이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 다시말해 율법과 예언과 새로운 계명을 내가 독점하고 세속사회와 격리된 천국을 만드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는 반기독교 사상이며 신앙과 현실이 조화되지 못한 잘못된 신앙입니다. 베드로의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세 사람의 모습은 구름 속에 가리우고 그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절) 흥분하지 말고 똑똑하게 정신차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경청하며 그에 순종하라는 충고였습니다. 신앙이란 산 위에 장막치고 예수를 독점하여 "여기가 좋사오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여 예수를 따라 오히려 산에서 내려와 세속사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속사회에 들어갈지라도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오히려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영육간에 구원시키라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영광스런 모습의 예수님의 시선은 산 아래 고통받는 사람들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그 영광 중에 고통받은 이들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가슴에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변화산 이전의 제자들의 심정은 아직까지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멸시천대를 당하시고 죄인과 같은 대접을 받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되리라고 하는 예수님의 집념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들 앞에는 암담한 수모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산의 전 분위기는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났고 그의 옷은 빛과 같이 번쩍이고 찬란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까?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 영광 중에 나타나서 하신 말씀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영광 중에 계셨습니다. 하늘 높은 보좌에 계신 영광의 주이십니다. 그가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의 진정한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고난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오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영광이 없는 고난은 무익한 것이요 고난이 없는 영광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영광의 주 예수는 오늘도 고난의 현장을 방문하고 계십니다. 소외된 이들 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셨고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더 이상 영광 중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고난의 현장으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부활을 기대하지 맙시다. 그리고 영광이 없는 고난과 희생을 강요하지 맙시다. 우리에게도 산 위와 산밑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산 위의 신비와 이상과 영광은 단순하고 그곳에 머무르고 싶게 합니다. 그러나 산밑 우리네 현실은 죄와 악으로 가득하며 참담함과 큰 고통의 외침, 세상에서 풀지 못하는 맺힌 한과 고난이 있습니다. 간질병자의 좌절되는 노력, 뿜어 오르는 거품, 시든 육신이 울부짖음과 그들 부모의 통곡이 있습니다. 이 땅에 필요한 것은 모세의 율법도 엘리야의 능력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산밑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가슴을 풀어제치고 뜨거운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야만 합니다. 신앙은 주어진 모든 현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품어 생명을 잉태해야만 합니다. 신앙과 현실 사이에 십자가의 사랑으로 생명의 길을 닦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와 함께 산밑으로 내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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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실족케 하지말라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14, 참조 : 막 9:33-48, 눅 9:46-48,15:3-7,17:1,2)

러시아에 덕과 의로써 나라를 다스리기로 이름난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니콜라이 황제로서 그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들에게로 향해 있었으며 최대 관심사 또한 백성들의 생활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황제가 평민으로 가장하여 거리로 시찰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처음 가보는 길이라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차였는데, 때마침 갈림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지나가던 군인에게 다가가서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군인이 어찌나 교만하게 굴던지 괘씸하게 생각한 황제가 입을 열었습니다.

"군인이신가 본대, 계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자 군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나서,

"어디 자네가 맞춰보지 그래" 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닌가. 내심 아니꼬왔지만 꾹 참고서 황제가 말했습니다.

"상사이신가요?"

"아니"

"그럼 소위신가보군요?"

"아니, 내가 그렇게 밖에 안보이나!"

"중위신가요?"

"아니야"

"그럼 혹시 대위?"

"맞네, 내가 대윌세"

대위는 무슨 큰 벼슬이라도 한 듯이, 미련하리만치 나온 배를 앞으로 내밀며 자랑스레 웃었습니다. 황제는 그 모습이 하도 우스워,

"아! 그러시군요." 하며 재빨리 뒤로 돌아서 길을 가려고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런데 황제의 뒷모습을 보던 대위가 그 모습이 보통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던지 황제를 불러 세웠습니다.

"저......혹시 자네도 군인인가?"

"예"

"계급이 뭔가?"

"한 번 맞춰 보세요."

"일등병?"

"아닙니다."

"상병?"

"아닙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대위 계급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대위도 아니라고? 대답하자, 갑자기 대위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소령이십니까?"

"아닐세"

대위는 뜻밖에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되자 떨리는 목소리로 황제의 계급을 조심스레 묻는 질문이 소장, 대장, 원수까지 이를 동안 황제는 '아니'라는 대답만 거듭했습니다. 드디어 황제의 계급만이 남게 되었을 때, 대위는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이보게 대위계급이야 어떻든 우리는 다 마찬가지일세. 대위든 황제든 말이야. 자네나 나나 하나님 아래서 다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는 예수의 제자들의 주된 관심이 소위 '자리 다툼'과 세속적인 권력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간 제자들에게 수 차례에 걸쳐 가르치신 것은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하나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18:31-34)

이러한 예수의 생각과 달리 제자들은 예수께서 머지 않아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곳을 정복하실 것이며, 나아가 로마제국도 멸망시켜 새 왕국을 건설하고 자신들도 그 왕국에서 꽤나 힘쓰는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서로 보이지 않는 분쟁과 갈등을 드러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의 마음과 생각은 온통 십자가밖에 없는데,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제자들의 마음은 보다 더 '높은 자리'였습니다. 껍데기는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데 마음과 정신 사상은 속물이었습니다. 오늘 한일합방이 된지 89년째를 맞는 국치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방송기자가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 주위에 조성된 공원 나무들이 모두 일본나무 일색이라면서 이래가지고 나라꼴이 무엇이 되겠느냐며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보도했습니다. 또한 천안에 있는 독립 기념관에 조경된 나무들도 모두 일본나무들이며, 심지어 전직 대통령이 기념 식수한 것조차 일본나무라며 나라꼴(?)을 꼬집었습니다. 독립문과 독립 기념관 주변에 일본나무를 몽땅 뽑아버리고 대신에 무궁화만 심는다고 이 나라 민족이 독립 정신가지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나무가 무슨 일본나무 한국나무 미국나무 따로 있습니까? 일제 36년을 기억해서 일본제품을 사용해서 안된다면 자동차 타고 다니지 말아야합니다. 엔화가치가 높아져서 자동차 수출이 호조라고 좋아하지 마십시오. 엔고(¥高) 때문에 일본차가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잘 안팔린다해도 한국 자동차 수출 잘되면 될수록 실속 챙기는 것은 오히려 일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자동차 주요부품들은 모두 일제이기 때문에 자동차 많이 팔아봐야 정작 남는 것 별로 없고 대부분의 이익금은 모두 일본에다 바치는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을 능가할 수 있는 마음과 정신 사상이지 일본나무 심지 않는다고 독립정신이 충천해지는 것 결코 아닙니다. 껍데기가 중요한 것 아닙니다. 그 품고 있는 마음과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믿고 예수 따른다고 모두 예수 제자되는 것 아닙니다. 예수의 마음과 사상을 지녀야, 그리고 예수닮은 모습으로 행동하고 살아야 예수 믿는 사람이요 예수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뾰족탑 세운 교회라고 모두가 다 예수 믿는 교회 아닙니다. 십자가의 정신, 예수의 마음, 예수 닮은 모습과 생활이 있어야 참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말씀하시던 십자가에는 전혀 생각이 없고 그저 세상 높은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던 제자들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성경들고 예배당 출입한다고 천국시민 되는 것 아닙니다. 대문에 교패붙어 있다고 천국시민되는 것 아닙니다. 십자가 정신,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천국시민이라 할 수 있으며,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고 있으면서 정작 높은 자리에 연연하여 분쟁과 갈등이 "천국에서 누가 더 크냐?"며 추잡한 모습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그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에게 장차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대부분 '소방관'이나 '경찰'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불이 나서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도둑이나 강도를 잡기 위해서라고 거침없이 말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검찰총장이 얼마나 힘이 세고, 장관 부인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으며, 금융감독위원장이 재벌 총수보다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졌는가 등 사회적 지위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며 세속적인 자리 다툼에 연연해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며 권력지향적인 신앙으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지만, 제자들이 꿈꾸었던 길은 십자가 없는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은 낮은 곳이었지만, 제자들이 가고자 했던 곳은 '높은 곳', '높은 자리'였습니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들어 제자들을 깨우치고자 하신 것은 '자기를 낮추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는 길은 돈을 많이 벌거나, 줄을 잘 서거나, 혈연, 지연, 학연 등이 좋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길은 오직 한 길, 곧 '자기를 낮추는 것'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겸손의 자리입니다. 다음 성경은 십자가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예수께서는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다시 말해 십자가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거듭 거듭 자기를 낮추어 사랑으로 섬기는 겸손을 보여주시며 그 본을 따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당부와는 달리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는데만 점점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적어도 예수의 제자라면 남보다 높아지려는 교만과 세상적인 정욕이나 명예욕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을 낮추어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일에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나라의 예수 믿는 고관들이나 그 부인들의 모습은 끝없는 권력지향이었으며, 그들이 쳐놓은 울타리는 <낮은 울타리>(주:성경공부하는 모임으로 상류층이 대부분임)였으나 감히 <낮은 자>들이 넘볼 수 없는 사치와 향락의 높은 울타리였습니다. 그들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얼마나 실망과 실족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길에서 실족케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힘없고 낮은 자들을 섬기는 순결한 마음과 예수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 순수한 신앙의 길에서 넘어지게 하는 자들은 대부분 <높은 자들>이었습니다. 세간에 들리는 말로는 고관들 부인과 재벌들 부인들이 결혼할 때 손 얹고 서약하는 성경 다르고, 청문회에서 손 얹고 선서하는 성경 다르다고 합니다. 사실 그들은 이 시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0:45-47)

주제에 제일 깨끗한 척 하는 모습이 그렇고, 상류사회에서 대접받으며 이리 저리 몰려다니며 노니닥 거리는 모양새가 그렇고, 돈 되는 일이라면 과부의 땅 한 평도 주저 없이 삼켜버리는 꼴이 그렇고, <낮은 울타리>쳐놓고 동전 몇 닙 던져주며 길게 기도하는 손모가지가 그렇고, 그렇습니다. 예수만 부활한 줄 알고 믿었는데 요즈음 일부 기독교인들 행세를 보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버젓이 부활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활약상을 보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머저리 같은 국회의원과 검찰에서 그들에 대한 판결을 흐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과 함께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보아온 중에 '높은 자리'에 올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의 참 모습을 보여준 기독교인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돈 많이 벌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의 참 모습을 보여준 기독교인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과 삶으로 예수의 참 모습을 보여 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감동적인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배우지 못하고 남편도 없고 힘도 없고 가난하여 골목에서 깡통이나 줍고, 시장 골목에서 김밥 만들어 팔고, 바느질 품삯이나 하며 푼푼이 모은 돈, 돈없어 자기같이 배우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학비에 보태쓰라고 내 놓거나, 돈없어 병원 치료비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 병고치는데 쓰라고 내놓는 정말 우리 사회에서 낮은데 있는 사람들, <소자들>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지 아니하고 낮은 곳에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대가리들>과 함께 계시지 아니하고 <소자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그 이름을 욕되게 하며 남을 실족케 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연자 맷돌과 같이 큰 돌을 목에 매게 하여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형벌은 실제로 부모를 죽이거나 사회의 도덕을 문란케 하는 자를 처형하는 당시 로마 형벌제도 중 하나였습니다. 혹자는 여기 "깊은 바다"를 사해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사해는 염분이 너무 많아 그냥 던져 넣으면 가라앉지 않기 때문에 연자 맷돌같이 크고 무거운 돌을 목에 매달아 던져야 다시 떠오르지 않고 확실하게 처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염장(鹽藏)처리되어 더 이상 사람 사는 사회를 부패시키거나 악취를 풍기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여기 "소자"는 비록 세상에서 미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남대문 시장에서 몇 천원 짜리 옷 사는데 벌벌떠는 사람, 농약쳐 키운 콩나물일지라도 없어서 못 먹는 사람, 새끼들 고아원에 맡겨놓고 모자 깊숙히 쓰고 공공근로 다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소자 하나라도 실족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사들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마음만 낮추지 말고 생활까지 낮추시기 바랍니다. 물건하나 살지라도 이들 <소자들>을 한번쯤은 생각하시라는 것입니다. 물질은 독점하는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데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소자"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엄청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소자 하나일지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안전하고 평안한 곳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실족하여 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연약하고 병들고 힘없는 양을 더욱 더 불쌍히 여기시며 더 큰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압구정>이나 <신사동>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실족하여 길 잃어버린 <달동네>의 한 마리의 연약하고 병들고 힘없는 양을 더욱 더 불쌍히 여기시며 더 큰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소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세상에 대해 화가 있다며 경고하십니다.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는 이 말씀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의 본능을 여실히 보여주며, 또한 그것을 너무나 잘 이해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러한 죄의 본능을 지닌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죄를 범한 신체 부위를 즉각 즉각 찍어버린다면 지금까지 남아 있을 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을 것입니다. 손과 발은 유혹과 범죄의 수단, 범죄의 기능에 불과할 뿐 죄의 원인과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곳은 아닙니다. 범죄할 악한 생각이 나오는 곳은 손과 발 등 지체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부위를 찍어버리라는 것은 죄질 생각,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썩은 마음의 생각을 찍어 잘라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남을 실족케 한 죄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참뜻은 리턴(return),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를 찾는 마음과 생활에서 '돌이켜' 자기를 낮추어 낮은 곳에 내려가 낮은 자, 소자를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들을 찾는 마음과 생활에서 돌이켜 자기를 낮추어 소자들을 찾아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습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의 진정한 회개는 생활부터 낮추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셨지만 땅 한 평, 저금통장 하나 물려주신 것 없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지만 기도원세우고 수도원세우라 말씀하신 적 없습니다. 각종 부동산과 호화 건축자재, 온갖 상류층 사람들로 치장한 교회는 그 손과 발부터 찍어버리고 불구자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더 이상 소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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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잃은 양을 찾으라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1-7, 참조 : 마 18:12-14)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신 분명한 목적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다음 성구가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께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셨을 때 이를 제일 못마땅해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표적인 죄인, 세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세리는 로마 정부가 고용한 유대인으로 조국의 불행을 이용해 축재하는데 급급했던 매국노였습니다. 자기 동족들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로마 정부도 빈틈없이 속여가며 축재했고, 탈세하려는 부자들로부터 뇌물을 챙겨 막대한 재산을 긁어 모은 불결한 짐승처럼 취급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강도, 살인자와 같은 종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요즈음 말로 <왕따>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세리나 죄인들을 <땅의 백성>이라 부르면서 이들과의 어떠한 교제도 금지했습니다. 이들과 돈거래를 하거나 상거래를 하거나, 손님으로 맞아들이거나, 여행에 동행하거나, 혼인시키는 행위 등 일체의 교제가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더러운 행위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엄격한 유대인이나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죄인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죄인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말살되면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 하나를 구원하기보다는 죄인 하나 하나가 저주를 받아 멸망당할 것을 학수고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죄인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들에 대한 저주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양의 목자로 세상에 오신 예수의 관심은 의인보다 죄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병, 환자이며, 병,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바로 의사의 사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죄인들이었고 예수는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 자신은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예수가 필요치 않습니다. 스스로 선하다고 확신하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며 그 죄에서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을 찾으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도우려하기 보다는 그들과 장벽을 쌓고 접촉을 피하여 자신의 거룩함을 보존하는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전염병 환자로부터 병이 전염될까봐 진료를 거부하거나 왕진을 거부하는 의사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동정하거나, 위로하며 격려하기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선한 행동, 의로운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마치 질병을 진단하고 알아내는 데는 관심이 있으나 그것을 치료하여 도와주려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원하시는 바는 제사(예배)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 곧 긍휼(자비)입니다. 용서와 사랑이 없는 예배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죄인들을 대하실 때마다 그 죄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고 그 병든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료하여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인을 붙잡아 끌고 와 예수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런 여인은 돌로 쳐죽여야 하는데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시는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돌을 들었던 어른에서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고 오직 예수와 간음했던 여인만이 남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고 묻습니다. 여인은

"주여, 없나이다"

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 죄를 정하여 죽이는 것 일뿐 그 죄를 치료하고 새로운 삶을 베풀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죄를 정죄치 않고 용서와 사랑으로 그 여인에게 생명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새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태는 <왕따>같은 세리였지만 예수를 영접하여 12제자 중 하나가 되었고 마태 복음서를 기록하는 영광스런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불같은 성미에 과격한 성격이라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요한을 선택하셔서 사랑의 사도로 변화시켜 제자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 중의 괴수였던 바울을 불러 이방인의 복음 전도자로 삼으셔서 세계 복음화에 초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결국에는 인류가 당해야 할 저주와 심판을 친히 자신이 담당하시고 인류에게는 생명과 구원을 베푸신 분이십니다. 죄인을 정죄하며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받아 마땅한 저주는 십자가에서 자신이 받으시고 그 죄인에게는 생명과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당해야 할 아픔과 고통, 내가 당해야 할 불행과 저주, 사망을 전혀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당하시므로 나는 기쁨과 행복, 생명과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길 잃은 양을 찾아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도록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3에서,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는 내 골육 친척들을 구원받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생활이 바로 예수의 마음이요 우리가 가져야 할 생활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길 잃어버린 양과 같은 죄인 하나를 구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이란 한 마디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을 말합니다. 양이 목자 곁에 있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 상태, 즉 목자가 되신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바로 죄라 하는 것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있는 상태가 바로 길 잃은 양의 모습이며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도둑질, 살인 강도, 간음 등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관심은 인간이 "길을 잃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도둑질, 간음, 살인 강도 등의 죄나 마음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나 다 같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네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느냐, 무슨 죄를 지었느냐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네가 전과 몇 범이냐? 소위 별이 몇 개냐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모두 전과자입니다. 모두가 다 흉악범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길을 잃어서 벌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오직 길을 잃은 양을 찾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을 정죄하고 세상을 정죄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의 손발이 되어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얼싸 안고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곳입니다. 교회는 길을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서 생명을 구원하는 곳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다 양 같은 존재로 말합니다. 이사야 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은 원래 본능적으로 먹이를 따라 이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면 눈앞에 풀만 뜯어 먹으며 이동하다가, 자칫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그 본능대로 먹을 것을 따라가다, 다시 말해 욕심에 이끌려 생활하다 결국 길을 잃고 사망의 골짜기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을 잃고 사망의 골짜기에 빠진 양과 같은 우리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목자되신 심정으로 사방을 찾아 헤매이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소위 "먹이를 찾기 위해" 헤매이다 길을 잃고 <앵벌이 하는 아이들>이나 <몸을 파는 십대 소녀들이나 주부들> 등이 있거든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기보다는 먼저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 안으며 상한 마음과 몸을 치료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되신 예수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으십니다. 진정으로 참 목자라면 그 목자는 자신의 양무리 중의 어떠한 양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소흘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 양이 병들었건 절름발이건 간에 모두를 정성스럽게 돌봅니다. 특히 병든 양이 있다면 그 양이 나을 수 있도록 더욱 애정과 관심을 갖고 치료할 것입니다. 이러할진대 만일 양 가운데 잃어버린 양이 있다면 그는 그 양을 찾기까지 밤새도록 온 들녘을 찾아 헤매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1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이시며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목자되신 심정으로 양같은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시며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시 23편).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며 보호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어 갈 길 몰라 헤매일 때 황량한 들녘, 깊은 계곡 그곳이 어디든지 단숨에 찾아 나서십니다. 또한 그분은 길 잃은 우리를 찾되 중도에 포기하시지 않고 끝까지 찾으십니다. 심산유곡(深山幽谷), 장강대하(長江大河) 어느 위험 속에서든지 기어코 우리를 찾아내어 다시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길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는 일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목자 되신 예수처럼 어떠한 경우에도 용서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끝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길 잃은 양을 찾아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 주시기 바랍니다.

목자는 몸소 양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한 마리의 양을 잃게 되면 목자는 적어도 끝까지 찾아가 죽은 양의 털이라도 집으로 가져와야 했습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이유는 많은 양떼들이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소유로서 공동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책임은 둘 혹은 세 사람의 목자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들 목자들은 양떼들을 무사히 이끌고 시간 맞추어 집에 돌아와야 했고, 때로는 아직 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산에 있다는 소식을 들리면 온 마을은 끝까지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멀리서 어깨에 잃어버린 양을 매고 집으로 오는 목자를 보게 되면 온 마을은 기쁨과 감사의 환성을 지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목자가 되신 예수님의 마음이십니다.

그러나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길 잃은 양과 같은 세리와 죄인들을 더러운 짐승처럼 여기며 오직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로 단정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율법을 앞세워 죄인을 정죄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용서와 사랑을 모르는 짐승처럼 여기실 겁니다. 사람들은 죄인에 대한 소망을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병들고 상한 몸과 마음을 치료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축복하십니다.

고교시절 감명깊게 읽었던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소설, <빙점>이 있습니다. 아내의 부정한 행위를 용서하지 못하는 고상한 신앙을 가진 남편, 그 부정한 아내를 무섭도록 철저히 복수하고자 사랑을 가장하는 남편의 심리, 이러한 남편의 가장된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그 남편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아내, 그리고 사실은 전혀 용서받을 죄가 없으면서 모든 사람의 용서를 빌면서 죽어가는 천사같은 그들의 양녀 요오꼬의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모든 것이 있어도 용서가 없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 주는 소설입니다. 끝없는 용서는 끝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같이 강한 사랑이십니다. 십자가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을 보여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십자가를 지니고 어떠한 죄인이라도 영접하여 그들과 함께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길을 잃지 않은 양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길 잃은 양과 같은 죄인 하나라도 반드시 그를 찾아내어 구원하시고 이를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찾은 양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십니다. 팔레스타인의 양치는 목자들 사이에서는 양을 한번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다고 합니다. 잃은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그 양을 찾기까지의 고생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양에 대한 원망과 책망보다는 더욱 더 깊은 사랑과 애정과 따스함으로 맞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 나라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즉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예수님만의 기쁨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 전체에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죄인된 인간들이 돌아오기를 기대하시며 천국 잔치를 배푸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믿음을 지키기 어렵고 신앙생활을 하기 힘든 세상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처처에 수많은 유혹과 어려움과 시험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양을 잡아 먹고자 하는 늑대나 이리의 위험과도 같은 위협들이 우리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태복음18:12-14)

우리의 목자되신 주님 마음을 가지고 길 잃고 헤매이는 이 땅의 수많은 양무리를 찾아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크신 기뻐하심을 입으시고 하늘 나라 생명 잔치가 날마다 베풀어지는 우리 교회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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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중심으로 용서하라!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21-35)

1. 이제 한해를 보내면서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 용서함을 받으시고 형제의 모든 죄에 대해서도 용서하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새해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라고요? 농담하는 건가요? 그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알고서도 말입니까?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나를 용서한다고요?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저지른 일들을 당신은 몰라요.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요." 이같이 남이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에 한을 품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 물어 보면 대부분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바는 여러분의 모든 죄가 이미 완전히 용서되었다는 것을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죄사함받는 방법은 자신의 죄를 대신할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죄가 그 동물에게 전가되고 사람의 죄를 뒤집어 쓴 동물은 죽어 태워져야했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그 사람의 죄가 완전히 속죄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 속죄함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에는 동물에게 죄를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희생양으로 생각하여 예수 앞에 모든 죄를 고백하면 예수가 그 죄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자신의 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속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 대한 믿음이 구약시대의 동물에 대한 안수(按手, 손을 동물의 머리에 얹고 죄를 고백하는 행위)를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용서는 예수를 믿는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 대한 믿음의 고백만이 용서받는 길입니다. 믿음의 고백이 필요한 이유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시계를 깜박 잊고 교회 사무실에 놓고 나왔습니다. 누군가가 그 시계를 훔쳤습니다. 이를 엿본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습니다. 시계를 훔친 사람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척 실망스러웠지만 그를 용서하고 그가 도둑이라는 생각을 마음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전의 친구 관계로 생각했습니다. 비록 그가 나의 하나밖에 없는 시계를 훔쳤지만 나는 그를 이미 용서했기 때문에 여전히 그는 내 친구였습니다. 다음에 예배당에서 그를 보더라도 "이봐요, 당신이 내 시계를 훔쳤지요?"라고 다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미 그를 용서했고 하나님께서 그의 죄에 대해 나무라실 것을 믿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계를 훔친 친구가 자신의 범행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가정해 보겠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그를 만나 "안녕하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이렇게 편안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미 그를 용서한 나는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훔친 사람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들통났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수치심, 두려움을 느낌과 동시에 당황하고 또한 후회 할 것입니다. 나로서는 그에게 예전처럼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를 점심에 초대하여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불안 초조하고 좌불안석이 되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참담한 모습으로 황급히 자리를 피하고 말 것입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몹시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가 예전처럼 모든 사람에 대해 편안해지고 나와 다시 관계를 맺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범행을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만약 그가 죄를 고백하게 되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누가 가지고 갔는지 알기 이전부터 그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를 구하러 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스스로의 양심을 깨끗이 하고 이전에 가졌던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에 대한 고백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앞에 나온 그것으로 이미 용서된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오는 그것으로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한 적이 없으시며, 우리의 죄 때문에 등을 돌리신 적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여러분에 대한 사랑은 여러분의 죄 때문에 변하거나 실망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분은 항상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앞에 나온 너는 이미 용서되었다."> 그러므로 믿음의 고백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기 위해서이며, 변함없는 하나님과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모든 죄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 믿음의 고백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함으로 죄로부터 오는 죄책감, 긴장, 고통 그리고 정신적 억압 등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여전히 그 죄책감에 눌려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예수는 여러분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서 이미 용서하셨다는 것을 받아 드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받아드리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어찌 나같이 끔찍한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하시겠는가?" 며 여전히 기뻐하지 못하고 무거운 죄의 짐을 짊어진 채 힘겹게 살고 있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나와 가장 친하게 지내던 '유다'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사업을 하던 그는 경제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어 단기 융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내게 돈을 빌려 달라 해서 가진 돈 전부를 빌려 주었습니다. 꽤 많은 돈이었는데 그는 그 돈을 자신의 사업에 투자하지 않고 다른데 다 써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그는 교회에도 나오지 않고 전화도 끊었습니다. 나중에 안일이었지만 그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실망과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의 빚을 용서합니다. 그가 그것을 돌려주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친구로서 사랑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유다'와 만났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미 용서했으며 이제는 그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예전의 친구로 그냥 지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적반하장으로 나를 비방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고소까지 들먹이며 파산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용과 명예, 우리 교회와의 관계 등 하나님 앞에 요긴하게 쓰임받을 만한 자신의 재능들마저 파괴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참담한 결과는 사랑하는 친구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큰돈을 잘못 쓴 것에 대한 어느 누구의 용서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의 용서를 받아드리지 않음으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친구의 용서를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죄를 지었을 때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그 죄를 깨닫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죄를 인정하며 책임있는 믿음의 고백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이미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피해 당사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가능한 빨리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당신의 믿음의 고백이 당신 자신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책임있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 누구와도 편안하고 즐거운 관계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믿음의 고백으로 사는 사람은 이제 형제의 죄에 대하여 중심으로 용서해야만 합니다. 형제를 용서하기 전에 자신도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었음을 잊지 말고 기꺼이, 그리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해야만 합니다. <코죠라는 프랑스인은 자기가 골드버그란 유태인임을 알게 됩니다. 2차 대전 중 여덟 살 때,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어느 기독교인 가정에서 그를 데려다 키웠던 것입니다. 그 후 이 소년의 친부모는 나치 독일에 의해 체포되어 수용소에 끌려가 죽었습니다. 프랑스인으로 성장한 코죠는 우연하게 자기가 유태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자라면서 다른 프랑스 인처럼 유태인을 멸시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이 사실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오른손은 붓고 아팠으며 의사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열등감이나 화를 품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 현상처럼 그도 악착같이 노력하여 은행가로서 성공했습니다. 그는 볼리비아 라파즈의 프랑스 은행 지점장이 되었는데, 그 곳에 나치당의 프랑스 지구 책임자였던 클라우스 바비 (Klaus Barbie)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비야말로 부모들을 죽인 총책임자라고 지목하고 그를 살해할 것을 결심하고, 오른손이 여전히 아팠지만 사격 연습을 합니다. 어느 날 날이 저물어 가는 오후에 그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바비에게 접근합니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권총을 잡았지만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습니다. 코죠 자신은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나는 두려워 떨거나 흥분한 상태가 아니었다. 내가 발사를 하지 못한 이유는 나 자신이 저 노인을 죽일 자격이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날 나는 나치를 죽일 수 있었다. 클라우스 바비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나치의 그림자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바비 살해를 계획한 것은 부모에 대한 효도심도 아니고 유태인 전체를 위한 애국심도 아니었다. 오직 나의 문제, 즉 나의 열등감이나 증오심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상한 것은 코죠가 자기의 참된 모습을 발견한 뒤에는 오른손의 통증이 멈추고 부기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결국 코죠가 발견한 자기 아이덴티티(정체성)는, 미워하고 싫어하고 죽이려 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나치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죄된 인간으로서의 자기였습니다.> 자기 자신도 용서받아야 할 죄인된 인간인 것을 깨닫고서야 그 병에서 치유된 것이었습니다. 유대 랍비의 교훈에 따르면 형제의 죄에 대하여 세 번까지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만약 네 번째 죄를 범하게 되면 용서하지 않고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관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용서의 한계를 세 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될까요? 넉넉하게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되지않을까요?" 일곱 번이나 용서하는 자신의 관대함에 대해 푸짐한 칭찬을 기대했던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끝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말씀하신 것이 본문의 탕감 받은 종의 비유입니다. 그 종 자신은 거액의 빚을 탕감 받았으나 자기에게 극히 작은 빚을 지고 있는 동료에 대해서는 아주 무자비한 빚독촉과 그에 바로 응하지 못한데 대한 무자비한 감금행위로 그 주인으로부터 자신도 무자비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하신 말씀의 중심은 너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이웃의 죄에 대해서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 15)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고 말합니다.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 비유에 나타난 큰 요점의 하나는 두 사람의 부채 금액의 비교입니다. 처음 종은 자기 주인에게 10,000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한 달란트는 거의 240파운드(한화 446,000원)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10,000달란트는 2,400,000파운드(한화 44억 6천 5백 만원)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빚입니다. 이것은 보통 한 지방의 전체 예산보다도 큰 금액입니다. 예수 당시 팔레스틴의 이두메,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를 포함한 전체 지방의 수익이 단지 700달란트(한화 3억 1천 만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와 같은 부유한 지방의 전체 수익도 300달란트(한화 1억 1천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탕감 받은 것이 45억원에 가까운 거액이었습니다. 그 동료가 그에게 진 빚은 극히 사소한 금액이었습니다. 그것은 100데나리온인데 한 데나리온은 지금 화폐로 약 9페니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그 전체 빚은 5파운드(한화 9,300원)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약 50만배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요는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빚진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은 도저히 비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부채, 자신과 처자식을 몽땅 팔아서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지 아니하면 안될 정도의 엄청난 죄를 용서함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함같이 우리도 이웃을 중심으로 용서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이웃에 대해서도 먼저 중심으로 용서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오시면 모든 죄사함받게 되고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웃에 대해서도 중심으로 용서를 베풀어 그 자유와 기쁨, 평안함과 생명을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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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부자와 하나님 나라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16-30, 참조 : 막 10:17-31, 눅 18:18-30)

천국문이 열리자 사람들의 영혼이 일렬로 하늘 재판정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장 먼저 유대 랍비(율법교사)가 나왔습니다.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율법에 아주 밝습니다. 저는 밤낮 하나님 말씀만을 팠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자 "잠깐만" 하고 기록하는 천사가 말했습니다. "먼저 우리는 조사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공부한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성경 그 자체를 위해 연구에 몰두했나요? 아니면 명예나 돈을 위해서 성경을 연구했나요?" 다음에는 세상에서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내가 세상에 살 때에는 얼마나 많은 금식을 했는지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나는 600여 가지의 종교적 의무사항을 꼼꼼히 다 지켰습니다.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목욕했고 쉬지 않고 신비주의에 몰두했습니다." 이번에도 "잠깐만" 하고 기록하는 천사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그렇게 행한 동기를 먼저 조사해 봐야 합니다." 다음에는 여관 주인이 나왔습니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저의 집 문을 항상 열어 놓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정성껏 대접해드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천사가 말했습니다. "어서 천국문을 열어라. 이 사람은 더 조사할 게 없다." 성경에 능통하다는 것만으로 하나님 나라 문이 열리는 것 아닙니다. 기도와 금식 많이 한다고 해서,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다고 해서, 목사 장로 권사라고 해서 하나님 나라 문이 열리는 것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예수처럼 살아야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도 정통할 뿐만 아니라 돈도 많은 어느 젊은 부자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 무슨 선한 일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네가 잘 알고 있는 계명들을 지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계명들은 다 지켰는데요.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명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의무들이었습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계명들은 적어도 인간이면 마땅히 지켜야 할 사항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네가 소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네 많은 형제들이 누더기를 걸치고 굶어 죽어가는데 네 집 금고에는 엄청난 달러와 증권, 각종 금은보석들, 수많은 부동산 증서들이 가득해도, 그것도 모자라 저 멀리 스위스 은행 비밀구좌에 수억 달러 밀반출해놓고도 형제들에게 그 어느 것 하나도 내놓지 않고 사람에게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북한 동포들은 차치하고라도 경제난으로 직장 잃고 가정이 파괴되어 어린 자식들과 생이별 속에 거리에서 노숙하고 있는 이 나라 동포들이 수 십만 명인데, 네 돈이라고 해서 자식 결혼식에 70만원짜리 부침개, 400만원짜리 구절판, 수십만원을 홋가하는 이불보에 1000만원이 넘는 혼수이불, 이것 저것 해서 결혼식 비용으로 자그마치 8000만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 쓰듯 한다면 네가 과연 사람의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느냐? 너 혹시 무늬만 한국 사람 아니냐? 너 혹시 무늬만 기독교인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부자들은 배울만큼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냄새나는 돈으로 해외 나가 달러 펑펑써대며 배웠지만 그래도 서양에서 배웠으면 그들의 자본주의 배경에는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사상을 접했을텐데 이 땅에 돌아와서 하는 짓들은 공산당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을 존중하기는커녕 노동자를 노동가치로만 평가하는 모습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영생, 구원에서 멀어져 간 그 부자 청년은 사람을 사랑하기보다는 재물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사랑하는 극히 이기적인 동물이었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그 부자 청년이 떠난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였습니다. 이 말씀에 화들짝 놀란 것은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사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도대체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물질의 혜택을 입고 돈맛을 보거나 돈께나 가진 사람들은 무엇이나 돈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사는 무리들입니다. "부자는 돈만 있으면 사람에게 무슨 짓이라도 시킬 수 있으며, 무엇이나 다 값이 정해져 있어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은 물질이든 권력이든 사람까지라도 얼마든지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는 망상으로 사는 족속입니다. 재벌이나 그 아류들은 자기 회사 자금 대출 받는데 은행장은 얼마면 매수할 수 있고, 관련 고위 공무원 하나 매수하는데 얼마 들고, 해당 국회의원 하나 매수하는데 얼마가 필요한 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 직분과 직위에 따라 몇 천만 원, 몇 십억 원 등 값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재벌들은 이 나라에서 최고의 전문 법률 자문단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법망을 얼마든지 뚫고 돈을 단숨에(?) 긁어 모을 수 있습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돈 지키는 일이라면 미국 전직 장관까지도 엄청난 금액을 주고서라도 사들이는 것이 재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래서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으며, 심지어 돈만 있으면 인간의 생노병사, 희노애락까지도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다고 착각 속에 삽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과 구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인생 철부지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생(永生), 하나님 나라는 재벌 그룹 회사를 몽땅 팔아서도 살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다 털어 주고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예수를 좇을 때 영생,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부자들이여, 돈 가지고도 안 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하게 예수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부(富)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하셨습니다. 만약 사람이 욕망하는 모든 것이 이 세상에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 있다면, 결코 다른 세상,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희망을 걸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그다지 소중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 나라를 잊고 살고픈 것입니다. 하루라도 더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자 할 것입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살면 너무나 좋은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 미국 프로보틱스사가 음식을 나르고 카펫 청소를 하는 등 가사를 돕는 로봇 「사이에(Cye)」를 800달러에 팔고 있습니다. 「사이에」는 몸체 안에 PC 프로그램이 들어 있어 무선으로 명령을 내리면 시키는대로 집안일을 불평하나 하지 않고 척척 해냅니다. 바퀴에 부착된 센서기능은 이동 중에 장애물을 피해다니며 화분 하나 깨트리지 않고 가사를 담당합니다. 돈만 있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의식주 생활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1세기는 이뿐 아니라 <날아다니는 자동차, 스카이카>를 타고 최대 시속 620㎞로 9,140m 상공까지 날아 자가용을 몰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40분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자동차는 현재 4인승과 1인승 2종이 개발되었으며 직경 11m의 공간만 있으면 수직 이·착륙이 가능하고 휘발유 1ℓ당 8㎞를 주행할 수 있습니다. 이 자동차를 개발한 미국 몰러사는 미국 연방항공국(FAA)의 인증을 받아 곧 시판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자동차 한 대 값은 무려 99만5천달러(약 12억원)로 고액이지만 대량생산에 들어갈 경우 보통승용차 수준까지 낮출 수 있다고 합니다. 평균 시속 563㎞로 비행하는 이 스카이카는 교통체증이나 신호등에 구애받지 않고 속도위반 스티커를 떼일 염려도 없다면서 벌써부터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돈만 있으면 하늘을 날아 다니는 자동차, 스카이 카를 타고 자유롭게 세상 어디든지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하나님 나라가 부럽겠습니까? 어찌 자동차 뿐이겠습니까? 2002년이면 지구상 어디든지 2시간내에 주파할 수 있는 꿈의 비행기라 일컬어지는 초음속 항공기 「하이퍼소어」가 개발됩니다. 이 꿈의 비행기 하이퍼소어의 최대속도는 마하 10, 시속 1만7백32㎞의 속도로 미공군 최정예 정찰기 「블랙버드」보다 2배나 빠릅니다. 서울에서 뉴욕까지 1시간30분이면 갈 수 있고 뉴욕에서 파리까지는 4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특히 마하 2의 콩코드항공기가 100명밖에 태우지 못하는 데 비해 하이퍼소어는 500명까지 태워 경제성도 큰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하이퍼소어가 이처럼 짧은 시간안에 먼 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것은 이륙 후 로켓엔진을 이용해 대기권 밖 우주공간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우주공간에서는 공기저항이 없어 2분에 350㎞를 날아갈 수 있습니다. 목표지점에 도달한 하이퍼소어는 다시 대기권으로 진입, 착륙하게 됩니다. 참으로 돈만 있으면 이런 꿈의 항공기 하이퍼소어를 자가용 비행기로 구입하여 해외여행을 하면서 잠깐이나마 우주여행까지 할 수 있는 시대가 곧 이르게 됩니다. 그토록 가고 싶은 예루살렘 관광도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할머니 할아버지는 앞으로 틀니를 끼울 필요도 없어집니다. 영국 가이스 병원의 폴 샤프 교수가 유전자를 조작함으로 손상된 이를 원하는 대로 재생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샤프 교수는 최근 치아형태를 관장하는 유전자(Barx-1)를 밝혀내고 이를 이용해 생쥐의 어금니를 재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따라서 유전자 젤로 충치 먹은 부분을 자라게 하거나 빠진 어금니를 다시 돋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돈만 주면 얼마든지 튼튼한 이를 다시 나게 해 전혀 식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된 것입니다. 아예 사람의 머리를 통채로 이식하는 의술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돈만 있으면 세상은 너무나 좋은 것이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을 모르는데 인간의 비극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것은 잠간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자들이여, 이 세상은 제아무리 좋아보여도, 그리고 돈 가지고 별별 짓을 다 해보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부(富)는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들어 인간의 가치를 추락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흔히 아는 바대로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한번 사치에 물들면 사치에 끝을 모르고 사치하게 됩니다. 100만원짜리 오디오를 듣다가 500만원짜리 오디오를 듣게 되면 그 기막힌 음향에 반하게 됩니다. 그런데 스피커 하나만해도 1000만원이 넘고, 오디오 라인 하나만 해도 기 백만 원하는 오디오를 듣게 되면 환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귀뿐만 아닙니다. 입는 것 하나도 요즈음에는 황토옷이 몸 건강에 좋다며 값을 묻지 않고 사 입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아예 황토바닥에서 뒹굴며 살았으니까 아마 선견지명이 있었는가 봅니다. 심지어 몸의 체형을 맵씨있게 하기 위해서 속옷까지 맞춤으로 해 입는데 맞춤 속옷 한 벌에 400만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400만원씩이나 들여 폼나는 체형으로 죽으면 염라대왕이 정신 못 차린다고 합니까? 남들이 굶든 헐벗든 어디에서 자든 말든 나만 잘 먹고 나만 잘 입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극히 동물적인 이기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바로 부입니다. 결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행복을 모르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된 것임을 모르는 불행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인생의 참된 행복을 모르는 고독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운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들이 한결같이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멀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리고에서 제일가는 부자 삭개오는 예수를 자기집에 즐거운 마음으로 영접하며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일 뉘게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는 생활로 예상외로 하나님 나라의 길을 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도 쟁쟁한 유대의 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번도 써보지 아니한 값비싼 무덤을 예수의 장례를 위해 아낌없이 제공했으며, 왕의 몸값에 해당되는 값진 향료를 예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해 가져왔습니다. 부자라고해서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고 해서 누구나 죄인이란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부자의 소유는 그 부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집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하나님 없이도 생활이 편안하며, 하나님이 그다지 필요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거나 거의 없는 사람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은, 있어도 모두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것으로 알고 주인되시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람은 세상에 그 어느 곳에도, 그 어느 것도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게 됩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좋아보여도 하나님 나라와는 비교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난하게 살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에게 부족한 것이 있음을 깨닫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부족을 체험하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예수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을 위해 썩어질 것을 버릴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예수의 이름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이 세상의 있는 어떤 것이라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생과 영원한 행복을 주는 이름 예수밖에는 필요치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했던 재벌들이나 부자들의 이름은 풍수좋은 값비싼 땅에 값비싼 비석에 그 이름이 새겨질지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의 이름을 소유한 사람은 그 이름이 하나님 나라에 새겨질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던 초대교회처럼 신앙생활하므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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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포도원에 들어가라

(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3)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 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16)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권세가 있던 자들이 천국에서도 역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석, 박사했던 사람들이 천국에서도 '선비' 자리에 앉거나 화이트 칼라 행세를 하게 될 것이라면, 모르면 몰라도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천국이라면 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장차 '천국 입구에서' 벌어질 광경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13:24-30)

"주여, 문좀 열어 주소서!"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또한 주께서는 길거리에서 저희를 가르치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노라. 행악하는 자들아 떠나가라."

여기 "행악하는 자들"로 천국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난 자들은, 자신들은 이미 천국 백성이라고 믿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등 유대의 교권주의자들로 종교로 살찌운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한꺼번에 누린 자들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 등과 같이 스스로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주님을 따른 사람들은 스스로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도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에는 복음을 위해 열심과 충성을 다 하다 순교를 당한 열 두 제자들이나, 평생 강도짓만 하다 예수 십자가 옆에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죽음 직전에 주님을 고백한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를 먼저 믿었거나 나중에 믿었거나, 그래서 일을 많이 했거나 적게 했거나 상관없이 천국은 평등하게 들어가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즈음 같이 일자리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더 힘든 세상에 아무에게나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너무나 <기쁜 소식, 복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새벽 인력 시장>에 나가 품군들과 일당 5만원에 약속을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전 9시에 또 장터에 나가보니 놀고 섰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계속해서 낮 12시에도, 오후 3시에도 여전히 놀고 섰는 사람들을 불러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게 했습니다. 이제 파장 시간 1시간 전인 오후 5시에도 나가보니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어찌하여 너희는 종일토록 놀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습니다."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도 역시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도록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오후 6시가 되어 일을 마치고 청지기를 불러 품군들에게 품삯을 나눠주되 맨 나중에 와서 겨우 1시간 일한 사람부터, 그 다음 3시간 일한 사람들, 6시간 일한 사람들, 9시간 일한 사람들, 뙤약볕에 하루 종일 땀흘려 일한 사람들 순으로 똑같이 일당 5만원씩을 주라고 지시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 주인의 이러한 처사에 일당을 놓고 원망하며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임금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노사관계나 공정한 임금을 책정하는 경제원리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원 주인이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 약정한 일당을 준데 대해서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품군들이 받는 일당 5만원은 누구에게나 하루 생활에 필요한 최저 생계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날 벌어 그날의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일한 만큼의 대가만을 받게 했다면 살아가기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포도원 주인의 처사는 일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복음>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포도원 주인이 일당을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었다는 사실이 악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선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선한 모습은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는 품군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포도원에 들어가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천국에 관한 비유의 말씀인 본문에 나타나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포도원"은 <천국> 또는 <교회>를, "품군"은 <하나님의 부름받은 성도들>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놀고 섰는 사람들을 찾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복음 전파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나타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는 말씀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 복음 6장 29절에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곧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는 것이요,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일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할 수 있는 것은 무슨 기술 자격증이나, 학력을 갖추거나, 자랑할만한 경력이 있어야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가는데 무슨 자격요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포도원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실 때, 다시 말해 예수 믿으라 하실 때 거저 믿기만 하면 들어가는 곳입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천국(영생)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천국에서 네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러자 돈이 많은 그 청년은 근심이 되어서 예수곁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에 제자들이 심히 놀라서

"그렇다면 천국(구원)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좇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결론의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태복음 19장 17절 -30절)

이 말씀은 예수를 위해 부모나 형제 자매를 팽개치고 논밭 몽땅 다 팔아치웠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주님을 좇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데 그 대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인간이 힘쓰고 애써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불러 주시지 아니하면 포도원에 들어가 일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지극 정성, 치성(致誠)을 드려야 소원이 성취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발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많은 시간을 기도에 사용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좋을지 모르나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조건은 아닙니다."

이는 기도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까지도 인간의 노력 중의 하나로 볼 때 구원의 조건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칼 발트는

"오직 한 개의 기도만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 주님의 은혜를 믿습니다."

하는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구원(천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며 내가 노력해서 그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구원)은 일을 해서 버는 것도 아니고, 내가 노력해서 쌓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사들이는 것도 아니라 값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며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기독교는 또한 고행(苦行)이나 심신수련 등을 통해서 구원(천국)에 이르는 종교가 아닙니다. 마틴 루터는 그 어느 수도사들보다 더 많이 금식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성경을 읽고, 더 많이 금욕생활하고 남 보다 더 많이 노력하였으나 그런 생활에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죄책감은 더 심각해지고 하나님 앞에 두려운 생각만 더해갔습니다. 이런 수도생활을 7년씩이나 하다가 로마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로마에 가서 많은 성직자와 교황을 만나고 대성당들을 순례하게 되면 큰 은혜를 받고 자신의 고민과 죄책감의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로마에 가보니 교황청 권력의 부패와 교회의 물질적 부패상을 목격한 루터는 더 심각한 혼란과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성당의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그 돌계단에 입맞추고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 죄를 회개하며 자신의 고민거리를 부르짖었습니다. 몇 계단을 오르자 무릎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피가 흐르는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 성경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루터는 깨달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 돌계단을 무릎에 피를 맺히며 올라가야 하나?

내가 왜 이렇게 고행하고 고민해야 하는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이 말씀을 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루터는 이 순간이 하늘이 열려 천국에 들어가는 심정이었다고 감격어린 고백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여러분에게 천국의 문이 열립니다. 천국의 문은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으로, 힘으로 열려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천국의 문을 열려집니다.

먼저 예수 믿은 성도 여러분, 먼저 와서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땀 흘려 있했다고 해서 품삯을 놓고 불평하지마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을 거저 포도원에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하며 열심히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루 품삯에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포도원에서 어떻게 일했는가에 대해서보다 포도원 밖에서 아직도 놀고 섰는 사람들을 노동시간에 관계없이 불러들이시는 포도원 주인의 선하심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107:1)

예수 믿으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목자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천국에 있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이 세상의 죄인 하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길 잃은 한 마리의 어린 양, 일자리가 없어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놀고 섰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일자리가 필요한 품군들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찾으시는 목적은 일을 시키고 품삯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원에게 들어가 일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인류가 포도원되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예수 믿고 금세와 내세에 아울러 영원한 천국의 맛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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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평화의 왕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마 21:1-11)

예수께서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눅19:30)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는 특별히 성스러운 목적, 정결케 하는 결례식(민19:2)에 사용되었었습니다. 거룩한 여호와의 법궤를 태울 수레와 소 역시 "새 수레에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소"(삼상6:7)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더럽히며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장사꾼들을 추방하시고 성전을 청결케(마21:12)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때는 유월절 절기였습니다. 유월절에는 유대인이라면 세계 어느 곳에 살든지 생애 단 한번만이라도 예루살렘에 와서 그 절기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외국 땅에서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면 그들은 "금년에는 여기에서,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라는 말로 예루살렘을 동경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바로 이 유월절이어서 예루살렘은 물론 주변 마을들은 온통 순례자들로 가득했습니다. 이 때 마침 인구 조사가 행해졌는데 유월절에서 제물로 죽임당한 어린 양으로 측정했던 것입니다. 기록에는 256,500마리로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규정에 의하면 어린 양 한 마리에 최소한 10명을 단위로 바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숫자대로 계산한다면 당시 유월절에 약 260만여명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약 30km이내에 사는 모든 성인 남자 유대인은 반드시 유월절을 지키러 와야 했었습니다. 지형적으로 가까운 팔레스틴에 살고 있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 가장 큰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이 유월절에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인류 구원을 위해 겸손하여 작은 나귀 새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슥9:9)하신 것입니다. 이 뜻깊은 유월절에 자신이 메시야, 즉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겸손과 평화의 왕이란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시는 방법으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이같은 행동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 용기있고 영광스러운 도전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교권을 장악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 체포 명령(요11:57)을 내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은밀히 예루살렘성에 숨어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겸손과 평화의 왕의 입성"을 상징하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수많은 군중들의 시선과 환호를 받으시며 당당하게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이같은 용기있는 행동은 십자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나귀는 조롱을 받고, 경멸받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왕의 동물이었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의 모습은 어떻했습니까?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하여,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꿈꾸고 있던 용사나 웅장한 정복자가 아니라 평화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당시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하면서 호산나! 호산나!를 부르짖었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참 메시야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군중들은 이 세상의 악의 세력을 부수고, 부정과 불의를 박살내며 파괴하는 강력한 정복자로서 예수를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심판하고 파괴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서하고 구원하시려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는 인류 구원의 능력이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보이기 위해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군중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곳에서 호산나"(10절)를 외치며 예수를 환호했습니다. "호산나"라는 히브리 말은 "지금 구하소서."라는 뜻으로 왕의 원조와 보호를 급히 구하는 사람이 사용했던 단어였습니다. 그러므로 군중들이 예수를 향해 "호산나"하면서 환호하는 것은 메시야가 왔으니, 하나님이 개입하여 이 백성들을 구원해달라는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이었던 것입니다.

유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재난 중의 하나가 B.C. 175년경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일이었습니다. 안티오커스는 유별나게 헬라의 사상과 문화에 심취된 자로서 유대주의를 박멸하고 팔레스틴에 헬라의 생활과 문화, 헬라의 사상과 종교를 이식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어떠한 폭력이라도 서슴지않겠다는 소위 헬레니즘 매니아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팔레스틴을 정복한 그는 고의적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하기 위해 올림피아의 신 제우스에 제물을 드릴 때와 같이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 돼지 고기를 헌물로 드리고 성전에 있는 각 방들은 공인된 매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사본을 가지고 있거나 어린아이에게 할례를 베풀면 사형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지워버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침없이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마카비 형제들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B.C. 167년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게 되었고 안티오커스를 추방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고, 다시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다시 신성한 것으로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 날의 큰 기쁨을 그들은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의 작은 가지들과 곧은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주의 성전을 청결케 하는 성공을 그들에게 베푸신 여호와를 찬미했다."(마카비 제2서 10:7) 정복자의 시편이라고 알려지고 있는 시편 118편은 바로 유다 마카비가 안티오커스를 정복하고 성전을 정결케 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시118:11-26)

군중들이 예수를 '호산나'로 부르며 메시야 구세주로 환영했지만 사실 그를 마치 마카비 형제같은 구세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그들의 이같은 환영은 이스라엘의 적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정복자에 걸맞는 환영이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시고 오시는 예수는 무력, 대단한 군사력을 동원해서 오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대한 최고, 최후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며 겸손과 온유, 사랑을 통한 평화의 왕이심을 선포하시고자 작은 나귀 새끼 타시고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예수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달한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 체포령을 내려 예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는 한 예수의 운명은 비참하게 끝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때에 예루살렘 입성은 사실상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이렇게 될 줄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10:32-34)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으로 십자가의 고난이 시작됨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류 구원의 길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으러 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가진 사람이요 진리를 가진 사람은 진정한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신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말씀에 붙잡힌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가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해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강도의 소굴같은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에 희생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류가 구원을 얻으며 영원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기에 그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가신 것입니다.

흐루시쵸프와 존 에프 케네디와 골다 메이어가 천국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정상 회담을 했다는 재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 사람에게 질문 한 가지씩을 허용했습니다. 먼저 흐루시쵸프 전 소련 수상이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소련과 미국의 사이가 좋아질 날이 있을까요?" 그러자 하나님은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안 될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질문했습니다. "미국과 세계에서 흑인과 백인이 화목하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 그러자 그 질문 역시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메이어 전 이스라엘 수상이 질문했습니다. "유태인과 아랍인이 정답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대답 내용이 조금 달랐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니까 유태인과 아랍인의 평화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는 농담입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무너졌지만 우리는 아직 분단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인종 문제로 인한 것이며, 만일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다면 종교 전쟁일 것이라고 합니다. 북아일랜드의 오랜 싸움은 개신교와 천주교의 전쟁이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전쟁도 종교적 대립이며, 인도와 파키스탄 역시 그렇습니다. 또한 얼마 전의 이란과 이라크는 미국에 대해 '거룩한 전쟁(Holy War)'을 선언했습니다. 중세기 십자군 때부터 종교를 앞세운 전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말하는 나라들이 많았으나 그것은 국민을 전쟁터로 몰아내는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요즈음처럼 신들께서 어지러울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부시 대통령은 종교 방송인들의 집회에서 "페르시아만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전쟁이므로 반드시 이긴다." 라고 연설하였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부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능하신 신이 우리 편이므로 어떤 사탄의 세력에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후세인과 같은 회교도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왕 파드는 "후세인을 대적하는 전쟁이 곧 신의 뜻이다." 라고 국민에게 선언하였습니다. 알라신도 어느 편을 들어주어야 할지 입장이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부시는 중동 전쟁을 선포하던 날, 백악관에 부흥사인 빌리 그래이엄 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속한 교단인 성공회의 에드워드 브라우닝 신부를 초청해야 자연스럽지만 브라우닝 주교는 페르시아만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에 침례교 목사 그레이엄을 불러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기독교, 같은 하나님은 어느쪽 기도를 들어야 할 것입니까? 중동 지방은 종교를 내세우며 싸우는 전통이 있습니다. 지난 3천 년 동안 종교의 깃발 아래 군대들이 사람들을 살육한 곳이 중동 지방입니다. 모두가 다 신이 자기 편이라고 주장하고 신의 살인 결재를 받은 것처럼 큰 소리치며 싸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거룩한 전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없이는 진정한 평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율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지체없이 대답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래서 초대 교회는 예배와 친교시에 포도주와 빵으로 주의 애찬을 나누게 되었고, 그 사랑의 나눔을 아가페라고 불렀습니다. 떡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몸 곧 인류를 하나로 묶으신 그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잔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피 곧 인류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과 평화를 위해 겸손하시어 나귀 새끼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를 마음속 깊이 영접하시고 예수의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과 평화를 이루어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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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랑과 분노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마 21:12-17, 참조 : 막 11:15-19, 눅 19:45-48)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받으시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신 일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모두 매섭게 쫓아내시며 "너희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면서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서 소경(시각장애자)과 다리 저는 자(지체장애자)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내 집"이라고 말씀하시므로 그가 얼마나 성전을 사랑하셨던가를, 성전과 자신과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 보신 광경은 한 마디로 "강도의 굴혈"이었습니다. 소들의 울음소리, 양들의 울음소리, 비둘기가 구구 거리는 소리, 행상인들이 물건 사라고 외치는 소리, 동전 바꾸는 쩔거덩거리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등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서 성전을 아무도 예배 드릴 수 없는 장소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정작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 드리며 예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전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성전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에 예수께서 당연히 분노하셨습니다. 예수의 분노는 성전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도의 소굴로 변질된 성전의 모습에 분노하셨지만 곧 성전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 성전을 참 모습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신 것입니다." "강도의 굴혈"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사랑의 집으로 되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곳 저곳에 흩어진 동전, 내팽개쳐진 의자와 부서져버린 파편들이 널려져 있었습니다. 의분에 불타던 예수께 "소경과 다리 저는 자" 등 신체 장애자들이 나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성전을 모독하는 사람들을 꾸짖어 내어쫓고 그 상들을 둘러엎으시며 분노하시는 한편, 병들고 힘없는 자라고 해서, 장애자라고 해서 쫓겨난 자들을 모아들이시고 그들을 치유하시므로 참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 구원받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과거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내가 다시 짓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므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 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마가복음 14:58)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이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시대는 끝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요4:20-24) 이제 구약시대처럼 소나 양 등 모든 동물들을 죽여서 드리는 복잡한 제사의식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성전이나 사람의 손으로 드려지는 분향이나 제사의식 등이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주인되시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희생당하시므로 성전 예배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여러분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영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산 예배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산이나 어떤 잘 지어진 예배당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브리서 10:18-22)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전 휘장을 열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면 됩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제사 의식(儀式)이나 눈에 보이는 성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의 공로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성령에 이끌려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성은 성벽과 성곽이 온통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각종 보석으로 되어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 안에 성전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며 그 이유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시기"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계21:10-22) 하늘나라 예루살렘 성에는 구약시대 성전처럼 지성소, 성소, 그리고 성전 뜰로 구분되어있는 성전이 없습니다. 또한 성전 뜰이 이방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과 여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여인의 뜰',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유대인의 뜰'로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 인종, 남여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하늘나라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예루살렘 성에는 성전이 따로 없고 성 전체가 성전이며 성안의 모든 거리가 다 예배하는 성전 뜰입니다. 그곳에는 유대인, 이방인이 따로 없습니다. 바리새인, 장로, 목사, 권사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거룩하신 성직자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나라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인간은 예수 믿고 마음에 성전을 이루어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삶은 불행한 것입니다. 예수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믿어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의 성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3:16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으시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과 인격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의식(儀式)에 치우친 성전과 장사하는 성전, 형식적이고 외식적(外飾的)이고 교만하며 탐욕하는 마음의 성전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남김없이 헐어버려야만 합니다. 헐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헐어버리고 맙니다. 당시 성전에 대한 책망을 듣고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후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깨끗이 헐어버렸습니다. 나의 인격과 마음의 죄악들을 헐어내야만 합니다. 우리들의 교회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이웃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 즉, 속물 근성, 배타성, 냉담, 불친절과 닫힌 마음, 오만하고 까다로운 단체로 만드는 태도 등은 없습니까?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이웃들이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어렵게 하거나 할 수 없게 하는 자들을 향하여 분노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이,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이 장사의 소굴로 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본래 목적대로 선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자유롭게 나와 하나님을 만나 병들고 소외된 아픈 몸과 마음이 사랑으로 위로 받고 치유받을 수 있는 교회가 되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교회를 향하여 분노하사 친히 채찍을 드시고 둘러엎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입니다(고후6:16). 여러분은 그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거하실 그 성전을 탐욕으로 더럽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사리 사욕에 얽매여 신앙과 사랑과 도덕성을 져버린 채 장사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병들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준비되어 있습니까? 만약 교회와 예수 믿는 여러분의 마음이 기도하는 집으로 성전이 되지 못하고 있다면 타락상을 둘러엎을 수 있는 과감한 예수님의 의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비둘기 파는 자들"은 모두 바리새인과 제사장, 장로들의 수하에서 자릿세를 내고 돈벌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 장로들은 이스라엘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의 의원들로 종교, 경제, 사회, 교육 등의 각 방면에서 특권을 누리면서 개혁을 가로막고 있었던 수구세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성전의 모습이 변화되거나 개혁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야만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그들의 졸개들을 성전 안에서 몰아내었던 예수의 행동은 그들 수구세력들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변화와 개혁을 싫어했던 이들이 결국 기득권 수호를 위해 본격적으로 개혁의 기수 예수를 잡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사람들의 마음에 무너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성전을 세우셨고, 그들 수구세력들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나라 각계 각층에 변화와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수구세력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바리새인이 아닌 척 하는 바리새인,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바리새인, 영리하고 묘한 바리새인, 바리새인을 비난하는 초(超)바리새인 등이 이곳 저곳에 자리 깔고 판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 가운데 바리새인이 많고, 성직자일수록 더욱 바리새인들이 많아 자리 깔고 개혁의 판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정치계 바리새인들의 자리와 상을 둘러엎어져야 합니다. 경제계 바리새인들의 자리와 상을 둘러엎어져야 합니다. 이 나라 지도층 바리새인들의 자리와 상을 둘러엎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종교계 바리새인들의 자리와 상을 둘러엎어져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 바리새인들의 자리와 상이 제일 먼저 둘러엎어져야만 합니다. 죽은 사자 같은 수구 세력이 되어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 바리새인들이 나귀새끼 타는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져야만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있는 바리새인들도 나귀새끼 타는 모습으로 변화되어져야만 합니다. 변화와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수구세력들에 대해 예수님처럼 의분을 가지지 아니하면 예수 믿는 의인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변화와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이 시대 이 나라의 바리새인들의 상을 둘러엎을 수 있는 예수님의 분노, 의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는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상을 둘러엎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성전을 변화시켰고 개혁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변화시켰고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는 성령으로 하는 사랑의 기도여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기도는 주문(呪文)에 불과합니다.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의 마음이 기도하는 집, 사랑의 집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라와 민족,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분노가 여러분의 마음에도 항상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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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열매맺는 백성이 되라

(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 (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마 21:33-46, 참조 : 막 12:1-12, 눅 20:9-19)

어떤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재배에서부터 추수 생산에 이르기까지 그에 필요한 온갖 시설들을 제대로 갖추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추수 때가 되어 소작 실과를 받기 위해 자기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소작받으러 갔던 주인의 종들을 심하게 때려 중상을 입히기도 했고, 또 하나는 돌에 맞아 중태에 이르기도 했고, 또 하나는 아예 죽여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인이 더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보내는 족족 핍박하여 죽이기를 일삼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주인의 아들에게는 감히 그렇게 하지 않고 잘 대접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집 주인의 아들을 보고 잘 되었다며 주인의 재산을 몽땅 차지하기 위해 그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고 나가 죽여버렸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포도원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 농부들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누구라도 분명히 대답할 것입니다. 그 악한 농부들을 단번에 처단하고 그 포도원은 다른 소작 농부들에게 줄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비유입니다. 이 비유 가운데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말하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리고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뜻하고, 주인이 보낸 종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낸 선지자들을 나타냅니다. 또한 집 주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성경 이사야에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5:1,2)

........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5:7)

여기 성경에서도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후손을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었을 때 모세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극상품 포도 열매를 기대하며 필요한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다 쏟으셨습니다. 여기 "좋은 포도"는 "공평과 의로움"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들포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문어발처럼 기업을 늘려 부를 독점하려는 탐욕과 술취함, 온갖 허영과 사치, 거짓과 교만, 그리고 뇌물 재판과 학대 등을 일삼았습니다.(이사야 5:8-22) 온갖 혜택에도 불구하고 들포도를 맺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것은 오직 심판과 멸망이었습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을 죽이고 심지어 주인 집 아들까지 죽여 버리고 들포도를 맺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부의 독점은 결국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착취를 일삼게 되어 사회 공동체를 파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몇 몇 재벌들이 나라의 부를 독점하도록 하는 부추기는 권력이라면 필연적으로 한국 공동체 파괴라는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권력을 장악한 자나 부를 독점하려는 자들이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기 도취에 빠져 공평과 의를 저버리고 부정부패와 사치 허영을 일삼으며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한다면 필경은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책 <뜻으로 본 역사>중 "하늘에 귀 있다"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슬픔의 소년 단종이 영월 있을 때에 자규시(子規詩) 한 편을 읊은 것이 있다. 자기 신세도, 원통하게 죽어서 그 원혼이 두견이 되어 지금도 밤마다 피를 뱉으며 운다는 저 옛날 촉왕과 같다고 생각해서 지은 것이다.

원통한 넋 새 되어 집 잃고 나온 뒤에

외론 몸 짝 그림자 헤매느니 푸른 산속,

밤마다 밤마다 속이는 잠 잠 아니 속고,

해마다 해마다 다하는 한 다하지 않네.

소리 죽은 새벽 재에 기우는 달 희었고,

피 흐르는 봄 골짜기 지는 꽃만 붉고나.

하나님 귀먹어서 내 하소연 안 듣는데

수심 많은 사람 귀는 어이 그리 밝은고.

이것은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서 한 말이다. 죄 없는 자기는 종내 설움 속에 날을 맞게 되었는데 자기를 짓밟은 그 악인들은 날로 잘되어만 가는 것 같아서 하늘도 무심하다 원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잘못을 알았다. 열 일곱 살의 소년으로 이슬처럼 사라지는 그 눈에 하나님도 귀먹었다고 본 것은 무리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귀먹은 것은 아니었다. 천고청비(天高聽卑), 하나님은 낮은 자, 눌린 자의 하소연을 반드시 듣는다. 수난의 한국을 상징하는 이 슬픔의 소년이 견디다 못해 발하는 그 비명을 아니 들었을 리가 없다. 하나님이 귀가 먹고 그 슬픈 부르짖음을 못 듣는 것 같이 보인 것은 저 자신이 슬픔의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었다. 저 자신은 어디까지나 버리운 사람으로 오직 잠잠히 그 짐을 지고 가는 것 뿐이요, 그것을 풀고 갚아주는 날을 보는 것은 허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슬픔의 사람 중의 슬픔의 사람인 그도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믿었기 때문께 '다 이루었다'고 하였다. 단종도 가는 그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께, 하나님은 귀먹어서 원통한 하소연을 못 듣는 것같이 보였지만, 얼마가 못 되어서 그 갚음은 왔다. 성종의 태평성세에 대하여 악마 같은 비웃음을 웃는 연산의 채청사(採靑使), 채홍사(採紅使), 천과흥청(天科興淸), 지과흥청(地科興淸) 하는 미친 노름에 죄 없이 죽은 수많은 백성들, 무오사화, 갑자사화, 명종 때에 들어가서 기묘사화, 을사사화, 무슨 옥(獄), 무슨 옥으로 헤아릴 수 없이 죽은 사람 생각할 때 '내가 속히 갚으리라'하는 성경의 구절을 누가 아니 생각할 수 있을까? 만일 누가 있어서, 세조 저 자신에 임하지 않고 단종 저 자신의 눈에 보이게 갚지 않았다 하여 정의의 심판을 부인하려는 이가 있다면 저는 섭리가 어떤 것임을 모르는 자요, 역사를 보는 눈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대는 정신세계의 일을 지상의 논리로 힐난하려는가? 역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개인적 시간적 상대 도덕의 표준에 비추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절대의 자리에서는 개인이 있으면서도 또 전민족 전인류가 한 사람이다....개인의 일은 개인적으로 그 책임을 묻지만, 역사적 사건의 책임은 민족적 사회적으로 묻는다. 그러므로 하늘의 갚음은 필요한 때면 그 사람에게 당장에 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몇 대 혹 몇십 대 후에 오는 수도 있다. 입으로 먹은 것의 결과는 몇 시 몇 날 후에 내장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손으로 지은 것의 값은 일생을 두고 정신상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세조의 죄의 값은 40년 후, 연산에게서 받아냈다고 해서 의심할 것이 무엇인가?》

온갖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지도자들이 '공평과 정의'라는 좋은 포도를 맺지 못하고 탐욕과 부정과 부패, 사치와 허영의 '들포도'를 맺는다면 "돌이 머리에 떨어져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역사의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탐욕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없앴지만 예수는 부활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5공, 6공 정권의 열매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니 과거 이 나라 정권들의 열매들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역사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마는 법입니다.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모든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이며,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라는 말씀은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고자 율법을 주시고 나라를 세우게 하시고 성전을 짓도록 하셨으며 각종 혜택과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탐욕에 치우쳤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산울을 두르고, 망대를 세우고 그 열매를 기다리는 것처럼"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허락하셨으며, 모든 필요한 것을 다 갖추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든 안 믿든 모든 사람에게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모습 그대로에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고 그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가난합니까? 병들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갇혔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불공평하고 악하다고 보십니까?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가난과 병고, 실패와 갇힘을 하나님의 은혜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열매를 맺는 방편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건강하십니까? 부유하십니까? 성공했습니까? 자유롭습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것들을 자신만을 누리라고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들로 좋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사지백체 멀쩡하여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탐욕에 눈이 어두워 자기 부모를 죽여 불태운 아들이 있는가 하면, 오토다케(최근 베스트셀러 '오체불만'의 저자)처럼 사지가 없이 태어났어도 당당하게 경쟁하여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며 수많은 장애인들의 삶에 용기와 희망을 던져 주어 삶의 좋은 열매를 맺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이 어떠하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가장 좋은 것들입니다. 그 모습 그대로 좋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어느 뜻 있는 분이 우리 사회에 대해 이렇게 분노했습니다.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없고 학생은 많으나 제자는 없고 정치가는 많으나 정치는 없고 군중은 많으나 사람은 없고 국가는 있으나 국민은 없고 집은 있으나 가정은 없고 종교는 있으나 진리는 없고 학교는 있으나 배움은 없고 신하는 많으나 충신은 없고 모임은 많으나 목적은 없고 물은 있으나 생수는 없고 의사는 많으나 인술은 없고 구제는 있으나 자선은 없다." 이에 대해 어느 목사는 우리 기독교에 대해 자신의 분노를 이렇게 나타냈습니다. "신자는 있으나 제자는 없고 예배는 있으나 은혜는 없고 설교는 있으나 변화는 없고 십자가는 있으나 십자가 정신은 없고 성직자는 많으나 사도는 없고 집사는 있으나 스데반은 없고 선교사는 있으나 선교는 없고 삯군은 많으나 목자는 없고 통곡은 많으나 회개는 없고 직분자는 많으나 전도인은 없고 세미나는 많으나 기도는 없고 믿는 자는 많으나 예수를 사랑하는 자는 없고 권리, 주장은 많으나 의무는 없고 불평은 많으나 감사는 없다." 알곡은 없고 쭉정이만 있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포도 열매를 없고 들포도 열매만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열매맺는 백성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포도 열매 중 가장 좋은 열매, 극상품 포도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 화평과 오래 참음, 겸손과 자비, 양선과 충성, 온유와 절제 등입니다. 그러나 맺어서 안 되는 열매는 들포도입니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육체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육체의 열매는 곧 "육체의 일을 말합니다. 이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삼천리 금수강산에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나라 백성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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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택함을 입은 자가 되라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14, 참조 : 눅 14:15-24)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최초로 기적을 베푸신 곳은 혼인 잔치집이었습니다. 그 혼인 잔치집에 가셔서 항아리에 담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잔치집의 기쁨을 더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라고 반문하며 신랑되신 예수께서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하며 슬퍼할 것이 아니라 신랑과 함께 기뻐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는 동안'을 가리켜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이라고 비유하셨습니다. 지금 예수 믿고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은 신랑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신랑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혼인 잔치집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 다시말해 신랑과 함께 사는 신부들이 모인 곳입니다. 과연 교회는 혼인 잔치집과 같은 곳입니다. 여러분의 교회생활이 혼인 잔치집처럼 항상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신랑 신부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혼인 잔치집의 기쁨은 천국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천국을 혼인 잔치로 비유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을 이 혼인 잔치에 초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처음에 '시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1000년쯤 다윗이 건설한 도시인데, '시온'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히브리어로 '사막'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오랫동안 바라던 수도 예루살렘을 완성하고 사막이라는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이사야 35장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이사야 351:10)

이 말씀은 흔히 '사막의 노래'라고 불리우는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인간 구원의 역사를 '사막에서 물이 솟아나게 한다'는 표현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즉 환난과 죽음의 "사막에 물이 솟아나게 되니 땅이 기뻐하며 백합화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고,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어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메마른 광야 사막도 물이 솟아나 시내가 흐르게 되면 영영한 희락의 도성 '시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온'에 물이 솟아나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듯이 시온 성, 즉 이 새로운 도시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는 장소가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이 이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장차 구원받은 성도들이 들어가 영원히 사는 곳을 '시온성'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계14:1) 그리고 구약 시편에서는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시온'에서 복을 주시며, 예루살렘의 복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시128편) 오늘날 인류에게 '시온'과 같은 곳이 바로 주님께서 세우신 '시온성과 같은 교회'입니다. 메마른 광야같은 세상에서 여러분의 삶에 백합화 만발하여 웃음꽃이 피어나기 원하십니까?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생물이 살 수 있는 연못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생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부어주시는 생수는 영원히 마르지 아니합니다.

임금으로 비유된 하나님께서 그 종들을 보내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소를 잡고 살진 짐승들을 잡아 만반의 준비를 다 했으니 잔치에 오라고 거듭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가기를 싫어하며, 농사지으러 가고, 장사하러 가고, 심지어는 임금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며 죽이기까지 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화가 난 임금은 군대를 보내 이들을 모두 진멸하고 그 동네를 몽땅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종들을 시켜 사거리 길에 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게 했습니다. 과연 혼인잔치집에는 손님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흐뭇해서 잔치 자리를 둘러보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이에 임금이 사환들을 시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케 해서 바깥 어두운 곳에 내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사람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 마지막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임금의 초청으로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임금께서 내주신 예복을 입으시고 모두 택함받은 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교회에 초청되어 예복을 입고 택함을 입는 것은 삶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초청을 거절한다면 그는 인생의 행복과 즐거움을 놓치는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의 초청을 싫어하거나, 그 초청에 응하지 못하고 밭에 나가 일하거나, 장사하러 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인생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사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바쁘게 열심히 산다해도 삶의 기쁨을 상실하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여기 혼인잔치 초청에 응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초청에 응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불행은 임금이 보낸 군대에 의해 진멸 당했다는 것과, 그 살고 있는 동네는 불타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임금되시는 하나님의 초청, 다시 말해 예수 믿고 하늘 나라 잔치에 참여하라는 혼인 잔치에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이미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6-18)"

그러므로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실제 사업에 분주하여, 또는 세상 일에 몰두하다보니 혼인잔치 초청이 귀찮고 싫어져서 그 초청에 응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기쁨과 행복,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세상일이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것 같아도 그것들은 건강하고 생명이 있을 동안만 가질 수 있는 한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바쁜 사업과 일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실 수 있습니까? 이 땅의 재벌들이라고 해서 문어발처럼 벌여놓은 그 많은 회사들중 하나라도 죽어서 무덤에까지 가지고 갔습니까? 그들 죽음 앞에 놓인 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즉 하늘 나라 혼인잔치 초청에 응하는 삶을 살았느냐? 아니면 그 초청을 거절하는 삶을 살았느냐?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여기 혼인잔치에는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구분 없이 모두 초청되었습니다. 천국 잔치에 참석하는데는, 다시 말해 예수 믿는데는 악한 자나 선한 자 구분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과거 생활을 묻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아무런 자격 조건 없이 그 잔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종교화가 러스킨 씨는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를 현대화로 표현하기 위해 모델을 찾는데 교도소, 빈민굴, 마약굴까지 헤매였으나 마음에 드는 모델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거리에서 우연히 거지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탕자의 모델로서 적임자였습니다. 낡은 옷에 더러운 얼굴, 희망없는 표정 등 가장 어울리는 탕자의 모델이었습니다. 화가는 거지에게 일당을 주고 모델이 되어 준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집에 찾아온 사람을 보고는 화가는 실망했습니다. 자기의 초상화를 그려 준다는 말에 흥분한 거지는 깨끗이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어디서 구해 왔는지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화가는 "내게 필요한 것은 거지 그대로의 당신이오"하며 거지를 쫓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죄인 그대로의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사람이 자기를 깨끗이 하고 꾸며 봐야 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돌아온 탕자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여 천국 잔치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가리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초청에 응하여 다만 예복만 입으시면 됩니다. '주는 나의 구세주이십니다.'고 입술로 예수를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시면 됩니다.

아버지 재산을 탕진한 탕자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있는 모습 그대로 얼싸안고,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온 것에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종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런데 밭에서 일하다 집에 돌아온 맏아들이 웬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었다는 얘기를 듣고 화가 치밀어 그 잔치를 기뻐하지 않고 잔치에 참가하는 것 조차 거절하고 아버지께 항의합니다. 그가 항의한 것은 자기의 공로와 자기의 선행, 그 보잘것없는 작은 자기를 내세우며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다시 말해 이미 교회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를 내세우며 이 천국 잔치에 참가를 거절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천국 잔치에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 초청에 응하신 분들은 다만 예복만 입으시면 그 초청되신 분들 중에 택함을 입은 자가 됩니다. 예복이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죄가 깨끗이 사하여졌다는 것을 마음에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천국 잔치 초청에 응하셔서, 그리고 예복을 입으셔서 여러분의 삶이 금세와 내세에 아울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이 낳은 위인 부커 워싱턴은 어려서 노예로 있을 때 낡은 오막살이의 청소를 맡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깨끗이 청소를 해도 주인은 더 잘 하라고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부커는 세 번 퇴짜를 맞은 후에 이제는 자신을 가지고 주인을 오막살이로 데려왔습니다. 주인은 들어서자마자 고함을 질렀습니다. "창문은 왜 닦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있으면서도 그 오막살이에 유리 창문이 있는 것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부커는 나면서부터 유리 창문이 있는 집에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 창문에 너무 먼지가 많이 앉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커는 부지런히 유리창을 닦았습니다. 그 순간 찬란한 석양빛이 오막살이의 어둠침침한 방안을 환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이 경험이 부커 워싱턴에게 유명한 말을 남기도록 했습니다. "창문을 닦읍시다. 창문을 닦읍시다. '미래'라고 하는 창문을 닦읍시다. 마음의 창문, 믿음의 창문 거기에 먼지가 앉으면 암담할 뿐입니다. 미래도 보이고 현재도 밝아지도록 빛을 받아들이는 창문을 닦읍시다." 여러분, 예수님은 어두운 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빛이 어두움에 비추이고 있지만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창문, 믿음의 창문을 깨끗이 닦으시고 빛이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미래가 밝아 올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여러분의 삶이 날마다 혼인잔치의 기쁨, 천국의 행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오막살이 같습니까? 마음의 창문을 여시고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시므로 어두웠던 삶이 밝아져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메마른 사막과 같습니까? 생수와 같은 예수님을 영접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에 백합화 만발하고 영영한 희락으로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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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1:23-32)

예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나 그가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그의 권세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 그러자 예수께서 되물었습니다. "너희가 먼저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 말은 사람들이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것이 성령에 이끌린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인간적인 충동에 따른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종교 지도자들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요한의 증언을 사실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증언한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시라는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1:29-34)"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단순히 인간적인 충동에 따른 것이라 하면 백성들의 분노가 두려웠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백성들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비겁하게도 "우리는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알지 못한다는 얘기는 자신들의 책임을 저버리는 행위였습니다.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의무는 선지자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는 것이었는데 알지 못한다는 얘기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라를 전혀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증인과 증언을 통해 진실과 진리를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체면과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비겁하게 모른다고 답변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진리편에 서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두 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두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맏아들은 "네, 아버지, 가겠습니다."며 대답했지만 실제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며 거절했지만 이내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먼저, 맏아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네, 아버지, 가겠습니다."고 대답해놓고 불순종했습니다. 말만하고 행하지 않았던 영락없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지적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세는 이렇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7:21-27)

성경은 잘 아는데 자신은 전혀 성경대로 살지 않고, 백성들이 성경을 지키기 힘들만큼 세분화하여 무거운 짐이 되게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앞에 헌신과 봉사를 약속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여기 <맏아들>은 오랜 신앙 경륜을 지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잘 섬긴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물론 <아버지>는 하나님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을 뜻합니다. <두 아들>은 하나님 교회의 일군들, 오늘 교회의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아들 중 <맏아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며 책임감이 없는, 그러면서도 상석, 즉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교인들을 나타냅니다. 이런 교인들의 결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1-27)"

유대인 외경에 있는 얘기입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일군을 찾기 위해서 천사 가브리엘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세상을 두루 살피고 난후 하나님께 보고 하길, "하나님의 일군될 사람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눠지는데 첫째 부류는 사람은 아주 유능하고 지혜도 있으나 진실성이 좀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고, 둘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좀 미련하고 우둔하지만 진실하고 성실한 면이 있었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미련하고 우둔한 자를 데려오라. 내가 그에게 지혜와 재능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결국 뛰어난 재능과 능력, 지혜와 지식이 아니고 진실한 믿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이렇게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고린도 전서 15:10) 이 말은 자신이 잘 나고 똑똑하고 재능이 많고 은사가 많아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든 전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의 자세가 진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달으시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게 된 것도, 집사 권사 장로 목사된 것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만하고 행치않는 자요, 자신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워주는 사람,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자,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성경보고 기도하고 전도하라면서 자신은 전혀 하지않은 사람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며, 남에게 짐을 지워주는 자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거나 가볍게 해주어야 하며, 높은 자리보다 낮은 곳을 찾아가 낮은 곳에 처할 줄 알아야 하며, 칭찬받기를 좋아하기 보다는 남을 칭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 은사를 받은 자, 신앙이 깊은 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며 맡은 만큼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인류에게 전파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항상 "예"하시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언제든지 진실무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항상 "예"(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고린도 후서 1:18-22)

다음으로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로부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당장 "싫소이다."라고 대답했읍니다만 곧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여기 둘째 아들은 당시 멸시와 천대받는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인물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후회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다시 돌아왔다는 말씀입니다. 나중에는 회개했다 할지라도 처음에 행한 불순종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은 죄는 어디 까지나 죄이지 죄를 회개했다고 해서 그 불순종했던 죄 자체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둘째 아들의 행위를 놓고 아비의 뜻대로 행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뒤 늦게나마 회개했다는 점에서 맏아들보다는 좀 낫다는 평가받을 정도인 것입니다. 창기와 세리들이 주님 앞에 돌아온 것은 그들이 그 전에는 그 죄를 죄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 그것을 기뻐한 것이지, 그들이 그것을 죄로 안 다음에도 그 노릇을 계속하고 그 뒤에 주님께 돌아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말씀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일과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던 그 모습 그대로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각자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와 재능, 능력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여러분은 자신이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에서 세상에 보냄을 받았고, 그에 따른 크고 작은, 많고 적은 은사와 재능을 각각 부여받았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주어진 직분과 사명, 은사와 재능을 소중히 여겨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 "바닷가에 놓여진 조약돌도 무의미하게 놓여진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닷가에 조약돌 하나도 놓인 위치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인생들에게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사명이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명자들입니다. 사람에 따라 의롭게 쓰임받든, 불의의 병기로 쓰임받든 인류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1:14-27)"

눈은 눈의 사명이 있고, 귀는 귀의 사명이 있으며, 발은 발의 사명, 손은 손의 사명이 있인데 모두가 다 한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체들중에는 약하게 보이는 것도 있고 천하게 보이는 것도 있겠으나 모두가 없어서는 안될 귀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는 마음과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바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너희는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각지체들입니다. 각 지체는 그 지체에게 주어진 바 사명을 다할 때 온전한 몸이 되어 질 수 있습니다. 지체는 그것이 크든 적든 다른 사람이 보기에 사소하든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다 요긴하고 존귀한 것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직분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모두가 다 존귀하고 소중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각각 다릅니다. 손은 손의 할 일을 해야 하고, 발은 발의 할 일을 해야만 합니다. 눈은 눈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입은 입이 해야 할 일을 해야만 몸은 조화를 이루어 온전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천하든 귀하든,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위해 일하며 살고 있습니까? 단순히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까?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을 하되 누구를 위한 일이냐, 자신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진실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자가 사람 앞에서 진실한 것이요 가슴에 하나님이 없는 진실은 속임수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여러분 오늘 집에 돌아가시면 여러분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일로 알고 하시기 바랍니다. 가족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거나 가족들을 위해 일터에 나가 돈을 벌거나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자세로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일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해야 합니다. 회개할 것은 당장 회개하고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는 영원한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마지막 결단의 시간으로 알고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포도원에 가서 일한 둘째 아들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으나 맏아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명령에 즉시 아멘하고 즉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명령하십니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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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제일 크고 좋은 열매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4-40)

사랑을 노래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으로써 마땅히 가져야 할 성품을 말할 때 성령의 열매들(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을 열거합니다. 이 성령의 열매들 중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을 만큼 가장 중요한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없으면 소경이라 인생을 멀리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삶에 실족할 가능성이 많으며 결국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베드로 후서 1:4-11) 그러므로 사람이 맺어야 할 제일 크고 좋은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역시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가 끊임없이 불려지고 있으며, 그 시대마다 표현 양식이 구구 각색입니다. 요즈음에 불려지고 있는 사랑을 표현하자면 <와!>와 <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의 가사는 핑클이 최근에 부른 <가!>입니다.

똑같은 얘길 자꾸하면 뭘해 너만 더 피곤할텐데

이렇게 내게 매달리는 동안 엉망이 된 니 모습 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니가 더 잘 알거 아냐

더 이상 길게 시간끌거 없어 나까지도 한심해져

너를 미치도록 사랑해 그저 참아온 나를 기대하지마

더는 잘난 니맘대로 이끌려 다닌 지난 날은 끝이야

가버려 제발 나를 떠나줘 잊어줘

미련 따윈 내게 없어 완전히 끝내

더는 생각도 하지마 내가 너를 버린거야

얼마나 나를 사랑했었는지 그딴건 중요치않아 단지 집착일뿐야

너완 상관없는 나를 찾고 싶어 이젠 편히 쉴거야

내손을 놔줘 제발 뒤돌아 보지마

그것만을 바랄뿐이야 사랑은 없어

그냥 혼자가 되어도 나의 자율 찾을거야

이 노래는 "잘난 니맘대로 이끌려 다닌 지난 날은 끝이야...너완 상관없는 나를 찾고 싶어 이젠 편히 쉴거야...가버려"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을 강하게 부정하지만 "내손을 놔줘 제발 뒤돌아 보지마"에서 처럼 못내 그 사랑을 놓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핑클은 이 노래를 멤버 4명 모두가 한번도 웃지 않고 아주 단단히 화난 모습에 단호한 음성으로 끝까지 부르고 무대에서 사라지는데 관중들은 좋아라 하며 함성을 질러댑니다.

그런가 하면 요즈음 테크노 노래로 상당히 주목받고 있는 이정현의 <와!>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사실이 아니길 믿고 싶었어 널 놓치기 싫었어

혹시나 우리의 사랑이 잘못돼 끝나면 어떡해

가슴은 아프지만 모른척 해야 해 이별보단 덜 아플테니까

설마했던 네가 나를 떠나 버렸어

설마했던 네가 나를 버렸어

깊었던 정을 쉽게 잊을 수 없어

늦었어 이미 난 네 여자야

오오오오 오오오오

독한 여자라 하지마

오오오오 오오오오

사랑했으니 책임져

다시는 사랑에 속지않기를 나 간절히 바랬어

네가 내 인생의 마지막 남자가 돼 주길 바랬어

하지만 이게 뭐야 눈물뿐이야

이제 남은 건 절망뿐이야

설마했던 네가 나를 떠나 버렸어

설마했던 네가 나를 버렸어

깊었던 정을 쉽게 잊을 수 없어

늦었어 이미 난 네 여자야

오오오오 오오오오

독한 여자라 하지마

오오오오 오오오오

사랑했으니 책임져

날봐 잘봐 내 사랑을 다시 봐

와와 와와 이번이 마지막

날 뭣하러 뭣하러 떠나

날 뭣하러 뭣하러 버려

이젠 잔소리말고 내게로 다시 와줘 와줘

이 노래는 처음에는 동양적인 멜로디에, 처녀 귀신이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 그리고 로봇 인간의 멘트와 테크노 춤으로 이어지면서 마지막 가사 "이젠 잔소리말고 내게로 다시 와줘 와줘"에서 느낄 수 있듯이 자기를 버리고 떠나버린 사랑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신상에 해롭다는 강한 인상을 남겨 줍니다. 남녀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보다는 실패한 사랑을 노래한 것들입니다. 여기 어떠한 사랑이든, 즉 남녀간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든, 친구간의 사랑이든 모든 사랑에 실패하지 않을 사랑, 그리고 반드시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니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호세아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창녀 고멜을 데려다 아내를 삼으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기가 막힌 얘기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명령대로 고멜을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식까지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가출해서 다시 사창가로 빠집니다. 하나님은 돈을 주고서라도 그 아내를 다시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기를 얼마든지 반복해서라도 고멜을 데려다 아내를 삼아 살라는 것입니다. 결국 고멜을 아내로 사랑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백성을 사랑하되 고멜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는 여인을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고야 마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같은 사랑으로 하나님은 오늘도 인류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섬김입니다. 사랑은 희생하면서까지 섬기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배신자인 것을 알면서도 그의 발을 씻어 섬기며, 제자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사랑은 한 마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의 사랑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십자가 사랑이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사랑입니다. 종교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부터 시작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나타나야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는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종교가 결실하여 완성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김과 희생으로 사랑해야만 합니다.

어느 조그만 시골 마을에 병자들 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과는 담을 쌓고 사는 부유하고 욕심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 부유한 유대인의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그저 욕심많은 '구두쇠'로만 통했습니다. 어느 날 거지 한 명이 그 구두쇠네 집 대문을 두드리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조금만 달라고 하자 "당신 어디서 굴러온 사람이야?" 하고 구두쇠가 물었습니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요."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말도 안돼" 구두쇠는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거지한테 동냥하지 않는다는 건 이 마을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구!" 구두쇠는 동냥 온 거지를 큰 소리로 돌려보냈습니다. 구두쇠는 그 거지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인심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 마을에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무척 넓어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도와주고 보살피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찾아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욕심 많던 구두쇠가 죽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마을 공동묘지 맨 구석지에 파묻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고 슬퍼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아주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구두 수선공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 이제는 거지한테 동냥을 주지 않는데."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움을 청하러 그를 찾아간 사람은 백이면 백 모두가 거절을 당했데"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연히 이 대화를 들은 그 마을 목사님은 이상히 여겨 이야기하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달라졌는지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럼요" 맨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자기는 이제 돈이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곧바로 구두 수선공을 찾아갔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어려운 이웃들을 잘 돌보시더니 하루 아침에 이렇게 마음이 갑자기 변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구두 수선공은 조심스럽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습니다. "여러 해 전 일입니다만 사람들이 구두쇠라고 부르는 그분이 나를 찾아와 많은 돈을 내놓으면서 이 마을에 불쌍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이 돈으로 그들을 도와주라고 부탁했었습니다. 그리고 나더러 자신이 죽기 전에는 절대 자신이 돈을 준 것을 말하지 말 것을 부탁하고서 말입니다. 그분은 매달 한 번씩 남몰래 나를 찾아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돈을 두고 가곤 했었지요. 덕분에 나는 훌륭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게 되었지요. 물론 나는 그분이 맡긴 돈을 다른 곳에 쓰지 않았습니다. 내가 놀라는 건 왜 사람들이 지금껏 의문을 품어 보지 않았느냐 하는 거지요. 도대체 구두를 수선하는 내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그 많은 돈을 어려운 곳에 쓸 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구두 수선공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웃 사랑을 비밀에 붙인 구두쇠야말로 성서의 말씀대로 산사람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목사님의 말을 듣고 모두 구두쇠의 무덤으로 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구두쇠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기도로 표시했습니다.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이웃의 어려움이나 불행을 자신의 어려움으로 느끼면서 서로 돕고 서로 아껴 주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그 구두쇠의 사랑을 본받아 남을 돕고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공짜로 그리고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분입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희생하면서 사랑하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이요 표현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할 가치가 있으며 사랑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남녀간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든, 친구간의 사랑이든 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든 모두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에 실패하여 가라, 와라 하면서 몸을 뒤틀지 말고, 뒤틀려 왜곡된 사랑들이 십자가 사랑으로 치유되며 그 사랑의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폴랜드의 귀족 출신인 캐서린은 스웨덴의 왕자 존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스웨덴 왕궁에서 권력 다툼이 생겨, 이에 휘말린 존은 형 에릭에 의해 평생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에릭이 국왕으로 있는 동안은 적어도 그때까지는 감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캐서린은 급히 왕이 있는 스톡홀름으로 달려갔습니다. 캐서린은 왕께 나가 간청했습니다. "폐하, 저를 제 남편이 있는 감옥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왕이 대답했습니다. "캐서린, 그대의 남편은 평생 동안 다시는 햇빛을 못 보게 되네. 그대는 그것을 알고 그런 간청을 하는가?" 캐서린이 말했습니다. "폐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죄이건 유죄이건 간에 존 왕자는 저의 변함없는 남편입니다." 왕은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캐서린에게 말했습니다. "짐의 생각으로는 그대의 남편이 감옥에 보내진 순간부터 그대는 그와의 언약에서 풀려났다고 여겨지는데..." 그러자 캐서린은 자기의 결혼 반지를 빼어 왕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폐하, 부디 이 반지에 새겨진 문구를 읽어 봐 주십시오." 왕은 <오직 죽음으로써만>이라는 글귀를 읽은 후 캐서린을 설득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은 캐서린을 존이 있는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그 후 캐서린은 17년 동안 감옥에서 그의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어둠 가운데서 보냈으며, 국왕 에릭이 사망한 후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여러분을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사랑의 언약이요 사랑의 열매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류는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를 영접하여 제일 크고 좋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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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짐, 외식(外飾) 그리고 종교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39, 참조 : 막 12:38-40, 눅 11:37-52, 20:45-47)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선생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많은 율법 지식을 가르치고자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자 한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마침 저녁 식사시간이 되어서 두 사람이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음식이 다 차려지자 율법 선생은 제자에게, "자, 이제 식사 기도문을 외우고 음식을 들자."라고 말하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절반 정도 외웠을 때 제자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율법 선생은 눈을 뜨고 그를 보며 말했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나? 무슨 일이지?" "...." 율법 선생은 제자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물었습니다. "왜 대답이 없는가?" "저, 실은 기도문을 끝까지 외우지 못했습니다." 제자는 머리를 푹 숙이고서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슬그머니 화가 나기 시작한 율법 선생은 그가 이때껏 가르친 율법들을 하나 둘씩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자는 시종일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자네는 이제까지 무얼 배웠는가! 집에 가서 책도 읽지 않고 무얼 했단 말인가!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율법 선생은 소리를 쳤고, 제자는 얼굴이 땅에 붙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문을 나서고 말았습니다. 즐거워야 할 식사시간이 기도문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뒤, 율법 선생은 회당으로 가는 길에서 같은 마을에 사는 상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장사는 잘 되나요?" "예,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요즘 우리 마을에 떠도는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아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모르고 계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아주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누가 무슨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글세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품이 자주 고운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아! 글세 지난번 혼자 살고 있는 대장장이가 팔이 부러져 자리에 누워 있을 때 저녁때마다 그 집에 가서 밥도 지어주고 병간호도 해주었다지 뭡니까! 그 뿐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아랫마을에 홀로 아이들 셋을 데리고 사는 부인이 있지 않습니까? 글세 그 부인이 아이들 돌보랴, 돈 벌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머니 대신 일을 해서 돈을 갖다 주었답니다. 정말 보기 드문 사람이지요." 상인은 침이 마르도록 율법 선생의 제자를 칭찬했고, 율법 선생은 어리벙벙한 상태로 그와 헤어져 회당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마침 문 앞에서 제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율법 선생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선행을 행한 제자가 누구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름 아닌 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던 바로 그 제자였습니다. 순간 율법 선생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경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14-26)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십계명을 받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지만 전혀 행함이 없는 사람들로 본받을 것이 하나 없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종교는 분명히 죽은 종교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은 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에게는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메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여호수아에게 넘겨주었고, 여호수아는 장로들에게, 장로들은 예언자들에게, 예언자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들이 넘겨받은 것은 십계명과 모세 오경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장로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게다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다 지키지도 못하는 수 천 가지의 규칙과 규례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대종교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과연 종교가 사람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어 삶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가? 아니면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무거운 짐이 되어 사람을 가라앉히고 마는 것은 아닌가? 사람이 종교로 말미암아 도움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가? 종교가 과연 넘어지는 사람을 붙들어 주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이 종교를 떠메고 가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종교가 사람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가? 종교가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살찌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이 종교를 살찌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종교가 인생에 무거운 짐이 되거나 수많은 계율들로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 될 때 그것은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세상에 평안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어주고 있다면 그것은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며 마음과 영혼을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살찌우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는 포로된 자와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는 인간을 부요케 하기 위해 친히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는 인류에게 죄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며 참된 평안을 주기 위해 자신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런 십자가를 친히 걸머지셨습니다. 참으로 기독교는 삶에 평안함과 강건함을 주는 종교여야만 합니다. 우리 평강 교회는 이름 그대로 삶에 평안함과 강건함을 주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국가 사회의 여러 가지 부패 중 종교적 부패는 가장 신랄한 비판과 지탄을 받아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양심은 그 사회를 지탱시키는 뿌리이자 마지막 보루가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부패 중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야말로 가장 더럽고 추악하게 보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그만큼 거는 기대가 크고 각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판과 지탄받아 마땅한 짓을 했으면 겸손히 받아들여 거듭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한국 종교의 대부분은 나라의 경제가 불어나면서 교권 장악을 위해 온갖 추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엄청난 이권 개입이 없다면 어찌 교권 장악을 위해 그토록 추악한 짓을 서슴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부패와 죄악상을 신랄하게 드러내면서 거듭 거듭 화(禍)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들에게 화를 선포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외식(外飾)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헬라어로 탈을 쓴 배우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일반 사람들과 구별된 복장, 소위 성직자임을 나타내는 복장을 하고 다녔는데 그 목적은 경건을 가장(假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장엄하게 차려진 성직자 가운 걸쳤다고 경건해집니까? 기독교는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며, 자신은 십자가에 죽이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게 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드러내고자 온갖 치장을 다하며, 항상 상석(上席)과 상좌(上座)를 즐겨했던 것입니다. 어느 종교이든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외식하거나 마음에 교만이 들어있는 종교는 거짓 종교입니다. 속에는 온갖 더럽고 추잡하며 사악한 것들이 썩어 문드러진 채 악취로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치장하는 외식주의자들의 실상을 예수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무덤에 회칠했다고 무덤이 아닙니까? 회칠했어도 무덤은 여전히 부패한 시체들로 가득한 무덤에 불과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실로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내면에는 각종 불법과 부정 부패가 득실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거룩함을 드러내는데 혈안이 되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목적은 간단합니다. 자신의 거룩함을 빙자해서 교권 장악을 수호하고 이권을 챙겨 축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지키지도, 지킬 수도 없는 수 천 가지의 율법 세칙들을 제멋대로 만들어놓은 것도 이러한 자기들의 뜻과 목적을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은 텃밭에 박하나 회향 혹은 근채를 양념이나 약재로 쓰기 위해 소량 재배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런 사소한 것에까지 철저한 십일조를 주장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태복음 23:23,24)며 그들의 탐욕을 책망하셨습니다. 하루살이는 불결한 곤충입니다. 약대도 마찬가지로 불결한 동물입니다. 유대인들은 불결한 것을 마시지 않고 깨끗하게 걸러내기 위해 무명천에 부어 짜서 마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작은 곤충 하나를 삼키지 않으려고 무명천으로 조심스럽게 걸러내면서 약대는 분명 불결한 것임에도 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걸러낼 것 없이 신나게 삼키는 모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내는 십일조나 헌금에 대해서는 몇 푼 되지 않으니까 깨끗한 돈인지 아닌지 가려내 자신들의 경건함을 드러내고자 하면서도 정작 부자들이 내는 액수가 큰 십일조나 헌금은 그 돈의 부정 유무를 묻지 않고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냥 집어삼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과연 부자들이 탈세 등 부정 부패한 방법으로 벌어 헌금하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고 봅니까?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살찌운 교회가 있다면, 그런 교회가 어찌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작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는 말씀으로 그들의 타락상을 지적하셨습니다.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닌다."는 말은 언뜻 들으면 자신의 종교에 얼마나 열심인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이 그렇게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은 목적이 다른데 있습니다. 바로 교세 확장을 통한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선교사가 빠지기 쉬운 가장 위험한 것들 중의 하나는 그가 사람들을 종교로 인도해 들이기보다는 한 종파로 이끌어 들이려는 데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는 의도보다는 자기네 교회에 불러 모은다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파주의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5,6)는 것입니다. 예수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교파를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 교회만을 세우셨습니다. 인간이 만든 교리나 교회법에 대한 이견 때문에, 또는 교회 정치 문제 때문에, 또는 예식에 대한 견해차이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어 만들어진 것이 각종 교파입니다. 그래서 자기들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치열하게 전도에 열을 올리기도 하는 것이 우리네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 사람들의 영혼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자신의 바리새주의 종파로 끌어들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지적받은 화받을 내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죄악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모든 이단 중에서 가장 큰 이단은 어떤 교회이든지 자기 교회만이 하나님을 독점했다거나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거나 자기 교회만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거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확신에 빠져 있는 교파나 교회입니다. 자신의 교파나 교회를 이와 같이 특별한 것으로 선전하는데 열을 올리는 것은 교세확장을 통해 힘을 과시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 가면 마치 지옥에라도 가는 것처럼 은근히 협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의치 못하거나 자신의 교파나 교회 확장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가차없이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도록 유도한 것도 바로 자신들이 교권을 수호하고 자신의 세 확장을 통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종교는 자신들의 종교를 살찌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종교요, 외식하는 종교에 불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위해 율법을 가르치지만 그 율법의 대강령,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사실 여러 율법들을 모자이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폭로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나 교권 장악과 이권에 눈이 어두워 소경된 바리새인들은 세상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 희생하시는 예수가 자신들의 생리에 맞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뜻과 목적 달성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끔찍하고도 엄청난 짓을 저질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아 죽였지만 예수는 십자가에 희생당하심으로 우리의 질고와 슬픔, 그리고 고통의 짐을 덜어주셨습니다. 예수는 인류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친히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는 인류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십자가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는 인류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십자가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믿는 예수가 여러분의 삶에 평안함과 강건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증거하는 예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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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날과 그 때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태복음 24:1-51)

우리 민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부잣집에 쥐가 대를 이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부잣집의 지붕이 조금씩 무너져 내려 그대로 두면 집안에 있는 주인 네 식구가 모두 죽을 위기였습니다. 그때 어른 쥐가 나서서 여태껏 자기네들을 잘 살게 해준 주인 식구를 구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훤한 대낮에 집안에 든 쥐를 모두 마당으로 불러모아 찍찍 소리치며 춤추게 했습니다. 그러자 집안 사람들이 그 괴변을 보러 모두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집이 무너진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이렇게 주인네 식구들이 구사일생했습니다. 실제로 쥐는 본능적인 예지력이 있어서 지진, 화재와 같은 위기를 미리 감지해서 일제히 그곳을 떠난다고 합니다. 과학기술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쥐만 잘 관찰했더라도, 타이타닉호의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터키나 대만의 지진참사도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연의 때에서 눈을 더 크게 돌려 역사의 때를 보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돌 하나도 남지않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게 되었습니다(1,2절). 예루살렘 성전각의 모퉁이 돌 하나는 무려 100톤이 넘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돌들로 성전과 궁전을 건축했다는 것은 고대 기술공학의 신비를 말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힘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루살렘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는 예수의 예언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한 개인은 물론이고 어느 국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로 가면 아무리 국력이 막강하다해도 멸망당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서 31절까지의 내용은 그 멸망의 처참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멸망에서 피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파멸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로 내어 주신 것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멸망에서 피하는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미혹하는 일들이 여러 모양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사람들을 어떻게 미혹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결코 사람들을 포기하거나 버리시지 않습니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사건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세상에 오신 날이 언제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자체가 세상의 운명에 중대한 의미를 던져 주는 것입니다. 흔히 청개구리를 보면 날씨를 알고, 달빛을 보면 한해의 강수량을 알 수 있듯이 유대 사람들은 무화과나무의 상태를 보면 계절의 변화를 압니다. 자연의 때와 역사의 때의 이치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홍수나 가뭄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면 임금이 나라를 잘못 다스리기 때문이라고 탓했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현상과 인간 역사의 모습이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보면 역사적으로 지금이 어떤 때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 말에 "때"를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이 크로노스의 때는 시계를 통해서 잴 수 있는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을 말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살이 되고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되고, 그리고 늙어서 죽어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이는 어느 한 개인이나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특정한 때를 말합니다. 8.15 광복절이나 6.25 한국전쟁 등은 이 나라 백성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 발생한 때입니다. 저절로 한 시간이 가고 하루가 가고 한 해가 지나가고 한 세기가 가고 천년(밀레니엄)이 지나가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갈릴리 어부 시몬이 예수의 제자 베드로로 변화되고,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로 거듭 태어나고, 탕자 어거스틴이 성자(聖者) 어거스틴으로 변화되고, 유럽을 변화시켰던 예수의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어 이 나라 운명을 변화시킨 사건 등을 <카이로스>의 때라고 말합니다. 세상 역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하는 성경 전체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의 기록들로 가득합니다. 세상이 언제 창조되었느냐? 지금부터 몇 만년 전, 몇 억년 전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건이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밝혀주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언제 창조되었느냐보다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사건 자체에 개인과 역사의 의미를 밝히는 열쇠가 있기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가 언제 발생했느냐 보다는 노아의 홍수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언제 탄생했느냐 보다는 예수 탄생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언제 죽었느냐보다는 그 십자가 사건이 인류와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언제 일어났느냐 보다는 예수 부활이 한 개인과 역사에 주는 의미와 그 사건이 현재와 미래에 어떤 영향력을 가졌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20세기 100대 과학사건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이들 사건들은 인류의 생활 환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인류와 역사의 궁극적인 운명을 바꿔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와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은 한 개인과 역사의 운명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6-18)"

예수의 탄생은 세상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 죄인들의 죄를 속죄하시어 의롭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사건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속죄함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에 대한 약속과 보증입니다.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생명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때 영생하는 <첫째 부활>에 동참하게 됩니다. 엄격히 말해 새 천년(밀레니엄)이라는 말은 바로 이 첫째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천년은 그 천년이 수 백 번 지나간다 해도 단지 <크로노스>에 불과합니다.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사람의 수명이 몇 백년이 된다해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크로노스>에 불과합니다. 새 천년이 밝아오는 일출을 보기 위해 벌써부터 동해안 일대는 대박이 터질 지경이라고 합니다. 2000년 1월 1일에 떠오르는 태양, 그 태양은 변함이 없습니다. 흐르는 시간(크로노스)속에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 뿐입니다. 그 날 그때 감옥에 갇혀 일출을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새 천년의 의미가 없습니까? 그 날 그때 병상에 누워 일출을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새 천년의 의미가 없습니까? 지구가 태양 주위를 몇 천년을 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과 세상이 구원받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세상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그 뜻대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5절에 보면 "내세의 능력을 맛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악한 세상에 살고 있다해도 내세 곧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세의 능력"은 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는 세상" 곧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사는 능력", 이것이 바로 내세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미래에 완전히 누리게 될 천국을 맛보게(경험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도행전 2:17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내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바로 이 성령입니다. 이 성령을 통해 세상을 구원할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서 맛보며 살 수 있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따라 살게 되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에 넉넉한 성령의 열매들을 맺으며 살게 됩니다. 이처럼 성령을 예수 믿는 누구에든지 부어주시는 이때를 "말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예수 믿고 성령을 경험하지 못하면 밀레니엄, 즉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체험하며 사는 천국의 맛을 모르고 사는 불행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세"라고 해서 언제 세상에 종말이 되느냐, 다시 말해 세상 종말의 <크로노스>가 언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 믿고 내세의 능력이 되는 성령을 경험하는 사건이 자신에게 영원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세상 종말의 <크로노스>, "그 날과 그때"는 자신이 예수 믿고 구원받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야말로 종말을 고하고 새 천년, 밀레니엄(그리스도의 천년통치)시대를 맞게 되는, "그 날과 그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때"가 앞으로 백년, 천년 후가 될지, 2천년 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지 못하면 내 자신에게 무의미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때"에 가서 누리게 될 영생을 지금 맛보며 살 수 있도록 그 보증으로 성령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여전히 죽어야 하고 썩을 몸 안에서 살아가지만, 지금 여기서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 믿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 죽고 썩어야만 합니다. 비록 몸은 죄로 인하여 죽지만 영은 예수의 의로 인하여 산 것이 되었습니다.(로마서 8:10) 다만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시는 "그 날과 그때"에 있을 부활(첫째 부활)에서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히 변화된 몸으로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능력은 단순히 미래에 우리의 썩을 몸을 변화시키는 미래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로마서 8:9)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시도록 당신의 신, 곧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 종말, "그 날과 그때"에는 그의 성령이 우리의 몸까지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악한 세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은 이 악한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죽고 썩을 것입니다. 우리는 죄 사함 받았으나 여전히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러나 죄의 세력은 이미 예수 십자가에 의해 꺾여졌습니다. 죄를 짓게 하는 사탄의 세력이 여전히 이 세상의 신(神)으로 행세하지만 그의 세력은 이미 꺾여졌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죄의 세력보다 더 강력한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그 능력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맛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악한 시대'는 계속되고 있지만 '오는 세상'의 권능이 지금 사람들 가운데 역사(役事)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 세상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어 보이나 사탄의 왕국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새 천년이 된다 하더라도 내가 예수 믿고 변화되어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천국 생활을 지금 여기서 경험하지 못한다면, 새 천년, 흔히 밀레니엄은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다가오는 새 천년이 그냥 흐르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더러움과 죄악을 십자가로 마감하고 부활과 참된 생명을 열어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카이로스>의 때가 되기 위해 의의 영원한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맞이하는 여러분과 이 나라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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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35-48, 참조 : 마 24:45-51)

청와대 주인은 누구이겠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입니까? 미국 백악관 주인은 누구이겠습니까? 클린턴 대통령입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란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산이나 재능, 지식, 생명 등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해서 하나님께 유익함이 되어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좋은 한 예를 보겠습니다. 구약 시대에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솔로문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하여 솔로몬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면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 "종", "작은 아이"에 불과하며 자신이 다스리게 될 "큰 백성"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 하지 않고 "주의 백성"이라고 표현하므로 자신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청지기"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솔로몬의 마음과 정신에 크게 만족하신 하나님께서는 "네가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며 "하나님의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릴 지혜뿐만 아니라 구하지도 아니한 "부와 영광"을 덤으로 주셨습니다.(열왕기 상 3:4-13) 나라의 대통령은 권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청지기입니다. 재벌들은 기업을 위임받은 청지기들입니다. 학자들은 지식과 지혜를 위임받은 청지기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이 모두 제것인양 제 맘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나라와 사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뿐만 아니라 주인의 뜻도 잘 알아서 주인의 재산과 소유를 잘 관리하며 적절한 때에 주인의 노예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2,43절) 그러나 악한 청지기는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는" 종입니다. 자기 신분을 망각하고 주인의 소유를 남용하는 사람으로 모든 것을 자기 것처럼 제 맘대로 처리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 뜻대로 사는 사람이 바로 악한 청지기입니다. 그는 주인의 뜻과 명령에 따라 그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주인으로 모셔 섬겨야 합니다. 청지기 의식을 제대로 가져야 우리 사회가 당면한 모든 문제들과 위기를 극복해나갈 수 있습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자기 자신과 이웃에 대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체를 위해 진실과 최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에게는 청지기에 대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인"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재림) 때에는 모든 인간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청지기는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돌아오신다는 사실을 알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주인을 맞을 준비를 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고자 하면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언제 다시 오실까? 보다는 예수는 반드시 다시 오신다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 죽을까 보다는 나는 반드시 죽는다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언제까지나 주인 행세하는 청지기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청지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의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약속하시고 반드시 그 약속을 지켜오셨습니다. 성경 신구약에 하나님의 약속이 3만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구세주로 세상에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초림). 예수 탄생 약 사천 년전에 주님이 오신다 오신다 하시더니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아브라함 자손, 유대 지파, 다윗의 계보에서 나신다 하시더니 그대로 나셨고 처녀 잉태하신다더니 그대로 처녀 마리아 몸에서 나셨고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더니 그대로 그곳에서 나셨고 애굽으로 피난 가신다더니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는 바람에 애굽으로 피난 가셨습니다. 나사렛 사람이라 하시더니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고, 성령이 그에게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고 약속하시더니 그대로 사셨습니다. 진리가 충만하신다더니 그 입술에서 진리의 생수가 강같이 흘러 나왔고 한 식탁에서 떡 먹던 자가 발꿈치를 들어 찬다 하더니 12제자 중 한 사람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았으며, 은 30에 판다고 하더니 그대로 은 30에 팔렸고, 죄인들 틈에 죽는다고 하시더니 두 강도 틈에 못박혀 죽으셨으며, 겉옷은 나누고 속옷은 제비 뽑는다고 하더니 그대로 겉옷은 로마 병정들이 나누어 가지고 속옷은 통으로 짰기 때문에 제비 뽑아 가졌습니다. 부자 무덤에 장사한다더니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내고, 주의 거룩한 자로 썩어짐을 보지 않는다고 하더니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위로 승천하신다더니 40일 만에 5백 여 명이나 보는 데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모든 약속은 다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둘째로 주신 약속은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올라가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더니 열흘만에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사 2천년 동안 성령의 시대로 각처에 교회를 세우시며 나 같은 죄인을 회개시키시고 거듭나게 하여 하늘의 생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사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셋째로 주신 약속은 말세에 신랑되시는 주님이 공중에 오시어 신부되는 성도들을 영접하시며 세상에 대해서는 심판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사르신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신다는 약속이 신약에만도 직접 간접으로 3백여 번이나 있습니다. 과연 그는 성경대로 이 세상에 오셨고 성경대로 사시다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부활하시고 성경대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 다시 오실 때 복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면 무엇보다 먼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은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잠자는 자"라고 말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비취시리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4-21)."

새 날 새 아침을 밝히는 참 빛으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아직도 캄캄한 밤인 양 어둠 속에 잠자고 있는 여러분, 예수 믿고 빛을 받아 잠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삶의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다시 오십니다. 깨어 일어나 등불을 켜고 "허리에 띠를 띠고" 지혜롭고 진실한, 그리고 복된 청지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6:14에 보면,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진실되라는 것입니다. 표리가 부동하고 외식하고 가면을 쓴 위선자는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십니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잠언 6:16-19)"

죄가 아무리 많아도 그대로 솔직히 고백하고 예수 앞에 나오는 세리와 창기는 사랑하시지만, 거룩한 것처럼 허위허식하며 지은 죄를 감추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바리새인과 제사장, 서기관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는(시편 15:1-3)"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종말을 예언하는 마지막 성경 책 요한 계시록에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구원받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여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거짓의 아비는 사탄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마다 어둠의 자식, 사탄의 자식입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그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여러분의 삶을 준비하시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실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시므로 하나님 앞에 발견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골로새서 3:14에 보면,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띠를 매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사랑>입니다. 좀 더 구체화시키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표현은 바로 <십자가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표는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증표는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받은 증거는 사랑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신구약의 지식과 정통과 이단의 교리 지식이 풍부할지라도 사랑 없는 지식은 인간에게 독약이 될 것이요, 산을 옳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는 신앙은 미신이나 이단에 불과합니다. 이단? 무엇이 이단이고 사교입니까? 사랑 없는 신앙이 미신이자 이단이며 사교집단입니다. 또한 내게 있는 것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자선 사업을 많이 할지라도 사랑 없는 자선 사업은 위선밖에 될 수 없습니다. 내 몸을 불사르는 순교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순교자는 지옥의 밑창 귀신밖에 될 것이 없습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시기 원하시면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띠>를 띠고 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섬김의 띠를 띠고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3:4에, 예수께서 제자의 발을 씻기려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고 말씀하신 주여,

이 나라 대통령이 백성의 발을 씻겨 섬김의 본을 보이므로

예수와 상관 있는 천국의 축복을 받게 하소서.

이 나라 국회의원들이 백성의 발을 씻겨 섬김의 본을 보이므로

정결케 하는 예수의 피와 상관 있는 자게 되게 하소서.

이 나라 재벌들이 노동자의 발을 씻겨 섬김의 본을 보이므로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김없이

온 인류에 베푸신 예수를 닮게 하소서.

이 나라의 스승들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섬김의 본을 보이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십자가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소서.

이 나라 교계의 지도자들이 신도들의 발을 씻겨 섬김의 본을 보이므로

종교 개혁에 한 알의 밀알처럼 쓰임 받게 하소서.

이 나라 큰 자들이 작은 자들의 발을 씻겨 섬김의 본을 보이므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 둘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는'

십자가 달게 지고 가게 하소서.

아멘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인간을 섬기기 위해 오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종입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이처럼 섬김의 띠를 띠고 산다면 행복한 가정, 행복이 넘치는 사회가 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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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슬기로운 다섯 처녀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 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유대인의 결혼은 삼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정혼단계로 신랑, 신부의 아버지가 서로 결혼을 합의하는 것입니다. 둘째, 약혼단계로 약혼 당사자들이 신부 측 집에 모여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로 서약을 하고 신랑이 신부에게 약혼 예물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약혼 1년 후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단계인 결혼식 하루 전날 신랑이 잔치를 베풀고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결혼식 날이 되면 신랑은 자기 친구들과 함께 열을 지어 신부집으로 행진해 갑니다. 그러면 신부집에서는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의 각별한 친구 10명을 들러리로 초청해줍니다. 이들 초청받은 10명의 처녀들이 잔치를 준비하고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이 결혼식은 밤중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릴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등잔과 충분한 기름(감람유)이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바로 이와같은 유대인의 결혼 풍습을 배경으로 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10처녀가 기다리는 <신랑>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10처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성도들>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10처녀가 준비해야 했던 <기름>은 슬기로운 5처녀와 미련한 5처녀를 분별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성령(불)>을 의미합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세상에 오셨을 때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실 것입니다. 여기 등잔과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게 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누가복음 12장 35절에,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켜진 등불"은 준비의 상징입니다. 계속해서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는 충분한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를 두고 슬기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랑되시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 슬기로운 처녀는 성령충만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고 부어주시는 성령이 충만하시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 슬기로운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지혜, 슬기는 두뇌의 명석함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믿고 성령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제아무리 지능과 재능이 뛰어나고 학식이 높으며, 부귀영화를 누려본들 결국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지 못하고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하신다면 그 인생은 미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며, 가진 것 없고 누리는 것 하나 변변치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 믿고 성령충만하여 신앙생활하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여 천국 백성이 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 영원히 슬기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은 모든 것을 통달하시기 때문에, 성령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충만이야말로 사람을 가장 슬기롭게 하는 것입니다.

불의 사용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확연히 구분지은 획기적 사건입니다. 처음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불을 몹시 무서워했습니다. 화산이 폭발하거나 번개로 인해 삼림에 불이 붙는 자연현상을 보고 인간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렇지만 타죽은 짐승 고기가 훌륭한 식량이 된다는 것을 깨닫자, 불붙은 나뭇가지를 동굴로 가져와 불씨로 사용하는 지혜를 보였던 것입니다. 불은 음식을 익혀먹는 데 유용할 뿐 아니라 추위로부터 몸을 지켜주어서 좋았습니다. 사나운 맹수들이 근접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인간은 천연의 불을 이용하는 데서 한발 나아가 인공적으로 불을 피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석기가 마주칠 때 불꽃이 이는 것을 보고, 마찰에 의해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불을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은 휠씬 나은 생활을 하게끔 되었습니다. 익힌 음식은 소화가 잘 되었으므로 전보다 풍부한 영양섭취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때문에 근력뿐 아니라 두뇌발달이 촉진되어 두뇌용적이 비약적으로 커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6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월등히 진화된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과 중국 북경 부근에서 발견된 화석에 의하면, 이들의 두뇌용적은 약 1천cc 정도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2배입니다. 자바에서 발견된 것은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 북경에서 발견된 것은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라고 불리며, 직립해서 살았다 하여 호모 에렉투스라고 통칭합니다. 그후, 자바 인이나 북경인보다 더 진화된 인간이 유럽 일대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독일의 네안데르탈 지방에서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통칭되는 이 인간은 약 20만 년 전 유럽 일대에 널리 퍼져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두뇌용적은 약 1,200cc 정도입니다. 이들은 불을 쓸 줄 알았던 인간들이었습니다. 불의 사용, 그것은 산업혁명을 일으킨 증기기관처럼 인류사를 한 걸음 앞으로 성큼 내딛게 한 중대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불과 같이 인간의 영적 두뇌발달을 촉진시켜 슬기로운 삶으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신령한 문화와 문명을 이루게 합니다. 성령은 불과 같아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밤중 같은 이 세상에서 빛으로 살게 합니다. 전능의 영으로써 성령은 불과 같아서 삶에 강력한 힘(에너지)을 불어넣게 됩니다. 성령은 인간의 죄를 태워 소멸시키는 거룩한 불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죄를 불에 태워 의인이 되게 합니다. 때문에 죄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고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예수 믿고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인생을 궁극적으로 슬기롭게 하는 성령은 사람의 노력이나,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은 예수믿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죄사함을 받기 위해 번제단 위에 제물을 불태워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제물을 불태우는 불은 사람의 힘으로 만든 불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께서 붙이신 불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레9:23,24)

하나님께서는 이 불을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하라고 제사장에게 명령했습니다.(레6:8-13) 이 불씨를 잘 담아 보관해 두었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각종 제사(예배)때마다 반드시 이 불,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불을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다른 불을 사용하게 되면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은 다른 불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제사드리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인해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도 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10:1,2)

여기 "다른 불"은 인위적(人爲的)인 불, 마귀적인 불을 의미합니다. 인위적인 불은 인간의 죄를 태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죄를 더할 뿐입니다.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없이 인간적인 힘이나 노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는 생활, 성령이 없는 교회 봉사는 열매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시끄러운 인간의 소리만 들릴 뿐 거룩한 봉사, 지혜롭고 슬기로운 봉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성령, 에너지, 불)을 가지고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과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여러분의 신앙생활, 봉사생활이 슬기롭고 영광스럽게 되기 원한다면 성령의 불을 받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불(힘)을 받아야 주어진 사명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한 번 하나님께서 붙이신 불은 절대로 꺼쳐서는 않되며 두 번 다시 붙이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레6:12,13)

그러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그 불을 어떻게 이 시대에 받아서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이 시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불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을 통해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이제 교회야말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불(성령)을 끄지않고 불씨를 보존하며 그 불을 지펴 인류의 죄를 태우는 성령의 불을 던지는 사명을 지닌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함이야말로 참된 교회의 시금석이며, 슬기로운 성도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꺼진 교회는 미련한 다섯 처녀요, 성령이 충만하여 항상 불을 피워 불을 밝히는 교회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인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는 이 시대 여러 교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계 2:1-3:22).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는 성령의 불로 뜨거운 교회였으나 "처음 사랑"을 버리므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는 성령의 불, 곧 사랑의 불이 꺼졌다는 증거입니다. 불이 꺼진 교회는 불을 붙이는 그 촛대마저 옮겨버리시겠다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성령은 사랑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습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습니까? 성령의 불이 소멸된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가 미련하게 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회개하시고 하나님께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두철미하게 지키지 못하여,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랑으로 섬기지 못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이단을 용납하므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사수의 불꽃이 꺼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를 상실하고 지켜지지 아니하는 교회는 성령의 불이 소멸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섬기지 않는 교회는 미련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도 불이 다 꺼져가는 미적지근한 교회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혹시 우리 교회에 불이 꺼져가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지금은 불이 켜져 있다해도 계속해서 불이 꺼지지 않을 만큼 충분한 기름, 성령충만함을 받았습니까? 성령의 불을 받아 뜨거워지는 교회,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불을 받고자하면 먼저 성령을 부어주시는 예수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예수 그리스도 믿으시고 불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심으로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성령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는 사랑의 불을 지속적으로 피울 수 있도록 성령의 기름을 충만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죄를 태우는 성령의 뜨거운 회개의 불이 충만하여 거룩한 교회, 거룩한 성도, 순결한 신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의 불을 꺼지지 않도록 성령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전도의 불을 계속적으로 지펴나갈 수 있도록 성령충만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 삶의 힘과 기쁨을 주는 찬송의 불을 항상 피울 수 있는 찬양대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감사의 불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불은 에너지(힘)입니다. 에너지(자연의 불)를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나라가 강하고 문화, 문명이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삶의 진정한 수준높은 문화와 문명은 성령의 불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참된 기독교의 문화 문명은 성령의 불로써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불이 바르게 역사(役事)하는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불이 바르게 역사하는 교회가 슬기로운 교회요, 슬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 할 준비는 오직 성령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라도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있는 슬기로운 처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실 수 있도록 성령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준비된 사람의 삶의 모습은 먼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6장 3절에,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교회봉사를 위해 택함받은 집사는 성령이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성령받았으나 칭찬받지 못하는 사람은 준비된 슬기로운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이웃들에게 칭찬받는 성도들은 성령충만한 슬기로운 처녀들과 같이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라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도행전 16장 19-34절에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역경을 당해도, 환난과 핍박을 당해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원망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찬송하며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성도입니다. 사도행전 13장 50-52절에서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생활이 어려워도, 환난을 당해도 믿음이 후퇴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찬송하며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두고 슬기로운 사람, 영적으로 깨어있어 언제라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슬기로운 처녀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스데반 처럼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증거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처럼 축복의 기도하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성도입니다. 성령충만한 성도는 자기를 해롭게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축복하고 그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며 그 이웃이 비록 원수일지라도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성령충만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성도는 오직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사는 사람, 오직 십자가 중심으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령은 자기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도록 역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남을 섬기며 사는 성도입니다. 남을 섬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몽땅 비우고 그 자리에 성령이 채워지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남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성령은 교만한 사람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충만할수록 사람을 더욱 더 온유 겸손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을 섬기게 합니다. 성령은 권세나 부리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들을 섬기도록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슬기로운 처녀는 성령충만하여 남을 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는 슬기로운 처녀와 같은 교회입니다.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며, 사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생활이야말로 성령충만 생활이며, 이 시대에 깨어있는 슬기로운 처녀같은 성도요 언제라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기름을 충만하게 준비한 깨어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므로 언제라도 다시 오실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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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작은 일에 충성하라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5:14-30, 참조 : 눅 19:11-27)

어떤 돈 많은 사람이 여러분에게 3억이나 6억, 또는 15억원을 주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돈 많은 주인이 멀리 타국으로 갈 일이 있어서 종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그 재능에따라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또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나머지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여기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인데,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요즈음 우리 나라 형편대로 노동자 하루 일당을 5만원으로 계산한다면 한 달란트인 6천 데나리온은 3억 원입니다. 두 달란트는 6억 원, 5달란트는 무려 15억 원이나 되는 돈입니다. 15억 원을 받은 종은 곧 바로 가서 열심히 장사하여 물경 15억 원이나 남겼습니다. 그리고 6억 원을 받은 종도 마찬가지로 장사해서 6억 원을 더 남겼습니다. 3억 원을 받은 종은 그 돈을 고스란히 항아리에 담아 땅 속에 묻어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종들을 불러서 맡긴 돈에 대해 결산보고를 받았습니다. 15억 원을 맡은 종은 열심히 장사해서 15억 원으로 15억 원을 벌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때 주인이 그 종을 칭찬하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6억 원을 맡은 종도 6억 원을 벌었다고 결산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도 똑같은 칭찬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3억 원을 맡은 종이 보고하기를, "주인님, 당신은 좀 딱딱하신 분으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알고 무서워서 당신이 주신 3억 원을 땅에다 숨겨 두었습니다. 여기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주인은 이 종에게 말했습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느냐, 그렇다면 너는 차라리 그 3억 원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라도 맡겨서 그 이자라도 받아왔어야 했을 것이다. 저 놈한테서 3억 원을 빼앗아 15억 원을 벌어온 종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마저 뻬앗을 것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여기 비유 말씀가운데 <주인>은 <하나님>을, <종들>은 교회의 <성도들>이나 일 맡은 <임원들>을, 더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말하고, 맡겨진 <달란트>는 그들에게 주어진 물질이나 재능, 능력,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모든 것>을 말합니다.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각기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 맡겨진 <달란트>가 많든 적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5달란트 맡은 자나 2달란트 맡은 자에게 주어진 칭찬이 똑같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은 15억 원을 맡은 자에게도, "작은 일에 충성했다." 6억 원을 맡은 자에게 "작은 일에 충성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한 달란트 뿐만 아니라 다섯 달란트 역시 '작은 일'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아무리 크고 위대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초라해 보일 뿐입니다. 우리 나라 외환보유고와 맞먹는 400억 달러 가까운 재산을 가진 세계 제일의 부자 빌 게이츠나 거리에서 붕어빵틀 놓고 붕어빵 팔아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 <작은 일>에 불과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이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맡은 사람은 어찌 보면 주인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사소한 일이라도 하지 않거나 미루는 일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일해야만 합니다.

옛날 어떤 여행객이 일본에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상감 세공(in-laidwood-work)의 전문가가 있었는데 특별히 식탁의 상감 세공을 전문으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여행가는 일본인 장인의 가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사고싶은 식탁을 거기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장인은 그 식탁을 팔기를 거절했습니다. 여행가는 돈을 더 많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본인 장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돈 문제가 아닙니다. 이 식탁에는 결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식탁을 팔수 없습니다."

그 여행가는 고집을 부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결점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도 결점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요. 있는 그대로 이 식탁을 사고 싶습니다. 아무리 많은 대가를 요구하더라도 그 값을 치르고 사고 싶습니다."

그 일본인 장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안 됩니다. 이 식탁을 팔지 않을 것입니다. 불완전한 물건을 우리 공방에서 출고시킬 수는 없습니다."

일본인 장인에게 그 식탁을 팔도록 도저히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양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현재의 상황의 비극들 중의 한 가지는 장인정신에서 긍지(pride)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봉사할 때도 장인정신을 가지고 임해야 할 것입니다. 안내봉사를 하든, 애찬봉사를 하든, 전도를 하든, 그 무엇을 맡아서 하든 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최고를 지향하는 마음과 정신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 일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정도로 충성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항상 맨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 일이 나를 만족시킬만큼 최선을 다했느냐?"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고용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다윗에 관한 위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삼하 24:18-25). 예언자 갓은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다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다윗이 그 타작마당을 사기 위하여 그 곳에 갔을 때에 아라우나는 다윗을 사랑하여 땅과 제물용 동물을 돈을 받지 않고 공짜로 주겠다고 다윗에게 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라우나의 제의를 사양하였습니다. 다윗은 대가를 완전히 치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단지 종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경건한 설교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경쟁 세계에서 고용인에게 임금을 속여 적게 지불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양심적인 고용주나 기업체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경쟁 사회 속에서 비양심적으로 부정직하게 일하는 고용인들도 역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종교와 경제는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와 경제는 모두 우리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했을 때에만 우리의 일은 하나님께 바치기에 적합한 제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의 이 칭찬 가운데서 종들이 주인이 보든 안 보든 하루 하루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과, 그것이 주인의 마음을 흡족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전직(轉職) 자문업체인 <챌린저, 그레이 앤드 크리스마스>는 구직 희망자들이 갖추어야 할 6가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인화(人和)능력이 있는가? 퇴직 - 신규채용이 활발해지면서 다양한 구성원을 조직원리로 다시 묶어낼 수 있는 조정자의 역할이 증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학력보다 기술이다. 컴퓨터 등 첨단기술 소지자라면 고졸자가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3) 풍부한 경력을 갖췄는가? 명예퇴직자의 경험과 지식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 외국어에 능통한가? 세계화의 진전으로 특정 지역과 언어에 대한 전문가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5) 성실한가? 능력도 있고 열심히 일하는 직원을 해고할 고용자는 없습니다.

6) 부전공이 있는가? 조직 통폐합이 활발해지면서 어느 부서로 옮겨도 적응을 잘하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팔방미인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두고 이 시대에 우리 교회에 요구되는 교회 봉사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첫째, 인화의 능력, 다시 말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교회 봉사에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학력보다 기술이 우선하는 것처럼 교회 봉사는 학력보다 재능을 살리는 봉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 익숙하다보면 때로 우리는 누구누구는 방언에 능하다던데, 혹은 교사 일 혹은 치유에 능하다던데 하며 부러움을 갖게 되기도 하며 나도 한번 해보았으면 하고 실제로 덤벼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과연 그러한 은사를 주님께서 내게 주셨는지, 그리고 내가 그 은사를 행할 때 주님과 타인들에게 유익이 될는지를 먼저 헤아려보아야 할 것입니다.

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쿠터를 탄 어느 어린이가 나무에 정면으로 머리부터 부딪히는 현장을 유명한 뇌수술 전문의가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어린이의 뇌에 심각한 상처가 있을 것을 예견하고 사람들에게 엠블런스를 불러 달라고 청했습니다. 겨우 병원에 도착해 침대에 누이고 막 응급 처치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어느 소년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아이는 제 친구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보이 스카웃 단원이므로 응급 처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아이에게 제가 응급 처치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그 소년은 자신의 무모한 행위가 어쩌면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에서 자기보다 더 신실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 있는데도 그 일을 굳이 자기가 맡아서 하겠다는 사람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믿음의 분량을 올바로 평가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교만해지는 것을 막고 주님의 교회 안에서 더욱 성장해가며 교회 공동체에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성도들이 지닌 은사나 능력을 부러워하기보다는 그들의 자랑스런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들의 성장을 위해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셨으나 무엇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사모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경으로 한 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가 무엇인지 나타내 보여주실 것을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셋째, 풍부한 경력을 갖추었느냐는 것인데, 이는 신앙의 여러 가지 연단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봉사할 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외국어에 능통해서 세계화를 추진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이는 교회의 세계 복음화 사업에 대한 비전과 그 비전을 달성할 수 있는 하나님 말씀에 정통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성실해야 합니다. 여섯째, 부전공이 있느냐는 것인데, 이는 교회의 어느 일을 맡겨도 원망 불평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하는 장인정신을 가지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지를 방문한 에반스 박사는 수술실에 들어서자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에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사는 조금도 힘들거나 귀찮은 기색이 없이 수술을 계속 해나갔습니다. 약 6시간 정도의 수술 끝에 그 의사 선교사가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수술이 이제 끝났다고 에반스 박사에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선교사 사무실로 돌아오는 중 에반스 박사가 그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미국에서 그러한 수술을 받으려면 돈을 얼마나 지불해야 하나요?"

"아마 500불 정도는 들겠지요"

"이건 궁금해서 묻는 것인타 이곳에서는 그러한 수술비로 얼마나 받습니까?"

선교사는 사무실 안 자기 책상 위에 있는 더러운 동전 한 닢을 주워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요, 이러한 동전 한 닢이라도 좋습니다. 오늘 수술을 받은 환자가 바로 이 동전을 들고 와서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선생님, 이 돈을 받고 수술해 주실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지요. 그때 나는 환자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의사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항상 이러한 수술을 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사하게 되는 것은 수술하는 몇 시간 동안 나의 손은 환자들을 어루만지시는 예수님의 손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성도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지체의 일부가 되어 대가를 바라지 말고, 그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그분의 사랑의 향기를 퍼뜨리게 될 것이며,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는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모두가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들입니다. 작은 일에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더 많은 일을 맡는 영광과 천국의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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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사랑의 향유(香油)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 12:1-8, 참조 : 마 26:6-13, 막 14:3-9)

터어키의 반체제 영화감독인 일마즈 귀니가 옥중에서 원격 조종으로 제작했다는 <욜,YOL>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군사정권 하의 터어키 형무소에서 5명의 죄수가 5일간의 휴가를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영화에서 특별히 관심을 끈 사람은 세이트(Seyit)라는 죄수였습니다. 그는 출옥할 때 까지 자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던 아내가 생활고 때문에 창녀가 되었다가 잡혀와서 쇠사슬에 매여 헛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집으로 갑니다. 아내는 자신을 벌해 달라고 애걸하지만 세이트는 그녀가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 만큼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자기의 명예가 손상되었다는 터어키 사회의 통념 때문에 아내를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딸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이트의 장인은 혹시 사위가 마음이 약해져서 딸을 용서할까 보아 "신이여!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세이트는 아내의 운명을 신에게 맡길 것을 다짐하고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 넣기 위해 얇은 옷만 걸치게 한 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들짐승이 들끓는 산 속에 내버려 두어 동사(凍死)하도록 합니다. 8개월의 유폐생활로 쇠약해진 아내가 얼어붙어 마비가 된 다리를 끌며 "세이트! 나를 버리지 말아요"라고 절규하는 마지막 소리에 명예보다 사랑이 중요함을 깨닫고 그녀를 구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지만 이미 아내는 죽은 후였습니다. 서구 사회의 사고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가부장적인 질서가 엄격한 터어키 사회로서는 종교가 곧 국법이고 동시에 생활규범인 것입니다. 종교를 위해서 인간이 죽어야 하는 종교는 종교의 주인인 인간이 소외된 종교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이 생명력있게 살기 위한 것이지 종교를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사람의 삶을 생명력있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고, '생명' 그 자체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1,2)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는 말씀은 사랑의 유무에 따라 인간의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인간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마리아가 노동자의 1년 임금에 해당되는 값비싼 나드 향유 한 병을 깨뜨려 예수께 부은 사건은 예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과 존경의 표시입니다.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님의 교훈과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였으며(눅10:39),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훌륭한 스승으로 여겨왔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신 기적과 축복을 인하여 자신이 소유한 최고의 것으로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존경을 표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 이상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는 예수님께 대한 겸손과 헌신의 표현입니다. 엎드려 발을 씻는 행위는 자신을 최상으로 낮추는 표현입니다. 당시 손님의 발을 씻는 일은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일로 주인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섬김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1-8) 예수께서는 섬김을 통해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참다운 사랑은 섬기기 위해 이처럼 자신을 대속물(代贖物), 희생의 제물로 내어 주는 것입니다.

단편 소설의 거장 오 헨리(O.Henry)의 <현자(賢者)의 선물>이라고 하는 감동적인 한 편의 소설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델라와 짐이라고 하는 젊은 미국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가난하였지마는 서로가 깊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한 가지 보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델라의 머리칼은 그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머리를 밑으로 내리면 그것은 마치 긴 드레스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짐은 아버지께로부터 이어받은 금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바로 크리스마스 전 날 델라는 짐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겨우 1달러 87센트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을 했습니다. 즉 그녀는 밖으로 나아가서 20달러에 그녀의 머리털를 팔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그녀는 짐의 귀중한 시계를 위해서 백금 시계줄을 샀습니다. 짐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델라의 깍인 머리를 보고는 정신나간 사람마냥 멍청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든가 또는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더욱 귀여웠던 것입니다. 짐은 천천히 자기의 선물을 그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의 선물은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를 위한 보석으로 가장자리를 수놓은 거북 껍질로 만든 값진 머리빗 한 세트였습니다. 그는 델라를 위하여 그 셋트를 사 주려고 자기의 금시계를 팔았습니다. 그 두 사람은 각기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것, 최상의 것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소용없게 되어버린 미리빗 한 세트나 시계줄을 본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담긴 남편과 아내의 변함없이 깊은 사랑을 본 것입니다. 그 사랑을 선물한 것입니다. 사랑의 향기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사랑은 희생적인 섬김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섬겨 자기 집을 지날 때마다 정성껏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숙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엘리사에게 그 무엇을 바라고 섬긴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엘리사를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섬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여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식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넴 여인이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기쁘게 보신 것입니다.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하였더라 하루는 엘리사가 거기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서 누웠더니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이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곧 부르매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저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왕에게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것이 있느냐 여인이 가로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저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꼬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가로되 다시 부르라 부르매 여인이 문에 서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돐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대로 아들을 낳았더라."(왕하4:8-17)

성도들은 어떤 이익을 바라고 헌신하거나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아무런 사심없이 하나님께 헌신할 때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사르밧 과부는 자기와 자기 아들이 한끼 먹으면 없어질 양식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위해 믿음으로 바쳤습니다. 그 결과 그 과부와 자식은 기근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17:8-16)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기시는 성도 여러분, 수넴 여인이나 사르밧 과부, 그리고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사랑과 헌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사랑과 헌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마음에 참 평안과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축복도 아울러 받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아름다운 사랑의 섬김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시고 축복하시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그러나 예수를 은 30냥에 팔아먹을 가롯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12:5) 면서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을 돈으로 계산하며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본주의적 사고 방식과 평가, 그리고 가롯 유다의 인본주의적인 사고 방식과 평가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시골 농가에 큰 마차가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대도시로 물건을 팔러 가던 중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짐마차를 끄는 말 주위에는 그 마을의 모든 가축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대도시를 수없이 다닌 말에게서 여러 가지 진귀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여왕이 살고 있는 궁전이었단다. 수 백 가지 종류의 꽃들로 장식된 정원, 수많은 보석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옷들...." 그 말(馬)은 그 궁전의 아름다움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듯 도취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후로 단 한번도 이 마을을 나가본 적이 없는 가축들로서는 도무지 그 아름다움이 상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 자리에 남아 그 궁전에 대해 서로 상상한 바를 토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한 바가 너무 달라서 도대체 궁전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두고 며칠을 의논한 결과 그들 중의 하나가 직접 궁전을 보고 오기로 하였습니다. 그 임무는 젊고 힘이 있는 고양이에게 맡겨졌습니다. "궁전을 샅샅이 살펴보고 와야 해." 화창한 어느 날 주위 가축들의 격려와 충고를 뒤로 하고 고양이는 궁전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그 고양이는 궁전을 방문하고 의기양양하게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 마을의 모든 가축들은 환호로 그를 맞이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빙 둘러싼 채 무척 궁금한 표정으로 그의 얘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래, 궁전은 얼마나 아름답니?" "여왕은 만나봤어?" "..... " 쏟아지는 질문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고양이는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다만 여왕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만을 보았을 따름입니다." 고양이는 그 아름다운 궁전에서 여왕이나 아름다운 물건을 보지 못하고 겨우 여왕의 의자 밑에 기어다니는 생쥐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위 속에서 참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겸손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가롯 유다는 바로 이 고양이와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이익(생쥐)만을 탐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희생적인 섬김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쏟아 붓는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 속에서 복음을 위한 아름다운 섬김과 사랑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복음을 위한 성도들의 희생적인 섬김 속에서 참된 사랑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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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사랑과 배반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21-38, 참조 : 마 26:14-35, 막 14:10-31, 눅22:3-34)

어여뿐 소녀가 가족들과 나들이를 하다가 잠시 혼자 돌아다니는 바람에 길을 잃었습니다. 이리저리 헤매던 소녀는 한 우물가에 다다랐습니다. "아이! 목말라,...." 그러나 그 우물은 물이 조금밖에 차 있지 않아서 도저히 두레박으로 떠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소녀는 두레박을 따라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목을 축이고 난 후에야 그녀는 자신을 위해 두레박을 끌어 올려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청년 하나가 소녀의 울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구출해 내었고, 둘은 사랑을 맹세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하던 일이 있어서 아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나게 되었고 따라서 소녀와 작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헤어지던 날 그들은 처음 만났던 우물가에서 손을 맞잡고 서서 자기들이 결혼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리며 성실을 지키자고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약혼에는 증인이 없었습니다. 청년이 누군가에게 증인을 서달라고 하자고 말하는데, 마침 족제비 한 마리가 그들의 곁을 지나치며 저편 수풀로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본 소녀가 얼굴을 빛내며 말했습니다. "족제비와 우리 옆에 있는 이 우물이 증인이예요." 계절이 바뀌고 여러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청년은 멀리 이역 땅에서 우여 곡절 끝에 출세를 했고, 그곳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얻었습니다. 그렇게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이었습니다. 그의 아이가 놀다가 잠시 풀밭 위에서 잠들어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족제비 한 마리가 덤벼들어 아이의 목을 물었습니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그는 이 일로 인해 몹시 슬퍼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또 한 아이를 얻었는데, 이번에는 아이가 제법 뛰어놀기 시작할 무렵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 보며 그 안에 비치는 갖가지 물 그림자를 구경하다가 그만 우물 속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옛날 소녀와의 맹세를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운 두 증인도....., 그곳에서의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그는 자신의 신부를 찾아 예전의 그 소녀가 있던 마을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는 꽤 나이가 들은 그 처녀는 아직도 그를 기다리며 약속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제자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스승 예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배신한 가롯 유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인물입니다. 사랑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 21장 33절이하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자들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 농사를 짓고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수확 때가 되어 주인은 자기의 몫을 받으려고 농장으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종들을 때리고 돌로 쳐 죽여 버렸습니다. 주인은 다시 더 많은 종들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도착하는대로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기의 아들을 직접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이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의 결론을 제자들에게 내리게 했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마21:40)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마21:41) 사랑을 배반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멸망밖에 없으며, 그나마 소작 농지마저 빼앗기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농부들이 배척하고 돌을 던지고 살인한 것은 실제로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주인의 사랑에 대하여 돌멩이를 던진 것입니다. 사랑의 배신자들입니다. 주인은 그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참고 또 참고 거듭 거듭 종들을 다시 보냈습니다. 두번째 배반을 당하고서도 자기의 사랑을 대표하는 아들까지 보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들은 주인의 사랑의 심장에다가 칼을 꽂았습니다. 사랑에 대한 배신처럼 악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님이 그토록 희생하며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향기로운 사랑을 깔아 뭉게고 더럽힌 일은 없습니까?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가장 사랑받은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를 반역한 결과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됩니다. 그토록 자기를 배반한 아들이지만 다윗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여전하여 그의 죽음을 놓고 울부짖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18:33)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하였을지라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미워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가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하는 심정입니다. 친구의 우정과 사랑을 돌멩이로 갚은 일은 없습니까?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을 배웁시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1:26) 요나단은 다윗을 목숨보다 사랑함으로써 이들의 우정은 성경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을 잊지않고 요나단 사후 그 아들 므비보셋을 항상 왕의 상에 앉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삼하9:7) 지성어린 아내나 남편의 사랑에 잔 못을 박아 괴롭힌 일은 없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지는 않았습니까? 앞의 비유의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사랑의 책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사랑의 끈으로 맺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호세아는 고멜이 부정한 여인인 줄 알면서도 결혼했고, 지순한 남편의 사랑을 배반하고 음란한 가운데 빠진 부정한 아내를 또 다시 데리고 와서 사랑하려고 하였습니다. 호세아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여인, 사랑해서는 않되는 부정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합니다. 결혼하여 자식을 셋씩이나 낳았지만 하나도 하나님의 축복받은 자식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내 또한 자식까지 낳아놓고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나갔습니다. 남편의 뼈아픈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거듭 고멜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3:1-5)

부정하고 음란한 아내, 사랑을 헌신짝처럼 배신한 아내이지만 끝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결국 아내는 제자리에 돌아오게 되고 자식들도 축복의 자녀들이 됩니다. 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여인, 법으로서는 도저히 새롭게 할 수 없는 여인, 남편의 사랑을 깡그리 짓밟은 배신자, 그 고멜을 결국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인간의 배반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우세함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하나님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러한 자신의 비극적인 경험에서 하나님과 백성과의 사랑의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음란하고 자기를 버리고 다른 신을 향하여 도망갈 여인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결혼하셨고 사랑하셨고 또 부르셔서 다시 사랑하셨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이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 그 고통과 연민, 그리고 사랑의 배반이 가져온 쓰라린 슬픔, 마침내 배반한 자를 찾아 나선 사랑의 승리의 기쁨 등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고멜의 죄와 같이 이스라엘의 죄는 사랑을 저버린 죄입니다. 사랑이 짓밟히고 은혜에 침?어지고 호의가 무시를 당합니다. 단순히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짓밟는 일이요 거룩한 혼인의 언약을 모독하는 일이 자행됩니다. 이렇게 지극한 사랑을 베푼 자에게 배신을 당할 때 그 분노는 더욱 극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서는 사랑을 배반한 죄를 꾸짖고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배반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우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랑의 복음서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한 사랑을 배신한 고멜의 위치가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가롯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여 은 30냥에 팔것을 아시면서도 그 가롯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잊지 맙시다. 십자가에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지 맙시다. 가롯 유다가 사랑을 배반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여도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랑을 배반하고 우상 바알을 숭배하는 의식을 따라 모압 여인과 행음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24,000명을 염병으로 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하는데 인간의 고통과 아픔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배반한 가정과 사회에 기쁨과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7-19)

세상이 우리를 배반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합니다. 세상이 여러분의 사랑을 배반할지라도 사랑이 승리합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되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어 사랑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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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39-43, 참조 : 마 27:32-34, 막 15:21-32)

제2차 세계대전 때 악명 높았던 헐레스코스라는 지방에는 6백만의 유태인을 비참하게 집단 학살한 인간 가마솥이 있었습니다. 선민(選民)으로서의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유태 민족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나 개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남녀 노소할 것 없이 가마솥에서 연기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에 위제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죽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나는 원고요. 그는 피고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통탄해 하며 원고의 심정이 되어 하나님을 고소하였습니다. 죽어가는 가운데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당신은 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허용하셨는지요?'라는 말들을 무수히 되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연합군이 유태인들이 죽어갔던 수용소를 탈환하여 수용소의 벽을 검사하다가 벽의 외진 한 구석에 희미하게 씌여진 찬송가의 가사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느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으로 보여지는 찬송가의 한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404장1절)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404장3절)

저주와 지옥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글귀를 발견한 그들은 그 벽의 아랫 면을 발견하고는 더욱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의 상태, 지옥의 절규 속에서 무엇보다 더욱 두렵고 안타깝게 그들을 떨게 만들었던 것은 독일의 잔인한 고문과 학살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회의와 갈등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결국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들을 사랑하시며 자신들의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심을 확신하였기에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라고 고백하며 죽어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려고, 그리고 그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 그리고 세리 등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까지도 죄인, 흉악한 강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미리암 르페브르 크루즈(Miriam LeFevre Crouse)는 이 사건에 관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또한 언덕에서 세 사람이 함께 죽음을 맞이했네

하지만 오직 한 사람만 죽었다네

다른 두 사람

강도와 자신이 하나님이신 분,

그 둘이 만났다네

갈보리 언덕에는

아직도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다네

아직도 죄로 인하여 그 십자가들은 높이 서 있는데

하나는 저주하며 죽어가는

멸망받은 자를 품고 있고

다른 하나에는 기도하는 강도가 달려 있네

그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그 옆에 계시네."

너무나 아름답게도 이 모든 일이 다음의 두 행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강도와 자신이 하나님이신 분

그 둘이 만났다네."

죄인된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소망되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은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0-13)

오늘 본문은 복음서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장 극형인 십자가형을 받은 것으로 보아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고 저질러 댔던 흉악한 강도 하나가 예수님의 최후의 순간에 함께 함으로 극적인 구원을 받아 낙원에 들어간 사건입니다. 이 강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수를 만났을 것입니다. 강도가 목격한 예수의 마지막 모습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는 우선 아무런 저항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십자가의 잔인한 형벌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의인의 놀라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사53:7 )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강도는 관원들이 예수님을 비웃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눅23:35)

그리고 군병들의 희롱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눅23:36,37)

이에 뒤질세라 자기 동료 강도가 주제넘게 예수를 비방하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

이 모든 비웃는 소리, 희롱하는 소리, 비방하는 소리 등을 듣고 예수님의 기도 소리를 들은 한편의 강도는 참다못해 자기 동료 강도를 꾸짖어 외쳤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23:40,41)

이 말은 그 강도의 영혼 속에 일어난 혁명적인 삶의 변화를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이웃의 재산과 생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약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았을 흉악한 강도가 이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평생 동료 강도를 향해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며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받는 형벌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참회의 고백과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23:41)

이것은 아마 강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쏟아놓은 참된 회개와 신앙고백일 것입니다. 회개한 강도는 계속해서 예수께 이렇게 부탁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것은 한 순간의 회개와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삶을 약속받은 가장 극적인 삶의 변화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주님은 죽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강도도 마지막 고통의 순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도 그와 같은 상태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저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기도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권능과 권세가 있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실 것을 확신하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호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 십자가 처형을 내린 빌라도 법정보다도, 아니 로마 가이사의 왕좌보다 더 높은 영광스럽고 의로운 최후의 심판보좌가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강도 행각에 대해 십자가 처형을 내린 세상 법정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지만,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기도 내용을 보건대 한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강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께라면 그 최후의 심판보좌에 호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는 예수께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강도에게 그의 지난날의 죄악에 대해 한 마디도 묻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영원한 삶을 약속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어떤 경건한 사람이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당신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해야 하오. 당신은 자선을 베풀어야 하고, 병자를 돌보아야 하며, 죽은 자를 묻어 주어야 하오." 그 사람은 랍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다리를 절룩거리는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순간 그는 랍비의 말을 생각해 내고는 그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거지에게 풍성한 음식을 대접하고는 이로써 첫 번째 요건을 갖출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찬양드렸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걸인은 과식한 관계로 몸져 누웠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은 그를 침대에 눕히고는 약을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랍비의 두 번째 교훈을 생각해 내고는 그것도 이미 이루어졌다고 기뻐했습니다. 밤 사이에 걸인의 병세는 매우 악화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아침이 되자 그 경건한 사람은 그 걸인을 묻을 준비를 한 뒤,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고 기뻐 외쳤습니다. "이렇게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신 주님이여, 찬양받으소서!" 천국에는 누구라도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 행위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강도는 한 순간의 회개와 신앙고백으로 쉽게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 강도는 오직 죽는 순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회개하며 예수 믿은 것 밖에 없습니다. 또한 본문의 이야기는 그 언제라도, 무슨 죄라도 남김없이 용서받을 수 있음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저 우수(憂愁)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죄를 짓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기 죄를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라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굳이 이 십자가상의 강도들처럼 흉악한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일생은 크고 작은 죄악으로 가득하며 더구나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의 몸 속에는 원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모습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9-17)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믿고 회개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자신의 죄악이 너무 중하여 도저히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이제 돌이키기에는 너무 많은 죄악의 세월이 흘러갔다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죽음의 일보 직전에 회개함으로써 모든 죄악을 사함받고 천국에 들어간 십자가의 강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어떤 죄를 지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죄를 회개하느냐 하지않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 우편 강도의 회개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그것은 스스로도 고백하였듯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40절). 이제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이 흉악범은 지난날의 끔찍스런 범행을 되돌아보며 눈물겨운 회한에 잠겼을 것이며, 죽음의 터널을 지난 후 자신의 갈 곳은 어디일까에 대한 두려움과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무리들로 말미암아 날로 흉포해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주인의 자리에 올라 돈이나 권력 혹은 무력을 믿고 날뛰다가 급기야는 본문의 다른 한 강도와 같이 죽음의 자리에 이르러서까지 저주만 내뱉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듣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더없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청원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모든 것을 예수께 내어 맡긴다는 뜻입니다. 이 강도는 이제껏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죄의 종노릇하며 흉포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지금 회개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지금 천국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신앙고백으로 예수님을 믿으시고 자신의 삶을 맡기심으로 최후의 심판 때에 예수님의 기억된바 되어 천국에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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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사랑의 승리

(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6-20, 참조 : 막 16:14-18, 눅 24:36-49)

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성경은 구구절절이 하나님과 인간의 '러브 스토리', 사랑 이야기입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 바로 예수 탄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보라 !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마 1:23)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립니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품으로 뛰어듭니다. 이것을 본 아버지가 벼락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아이에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안심과 평화를 주는 것은 아버지의 '설명'이 아니라 엄마의 '품속'입니다. 그곳은 피부가 접촉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love with skin on'인데 이는 피부를 통한 사랑 혹은 몸으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물질이나 이론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피부 접촉을 통해 전달되는 따뜻한 체온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예수의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으로 곧 인간을 몸으로 품으시므로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면회를 갔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보지 않겠다고 면회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토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면회 신청을 했고, 그때마다 거절당하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 아버지의 25번째 면회에서 반년만에 아들은 눈물로 아버지를 맞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 속에는 이렇게 끝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찾아오실 뿐만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아니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삶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 인간이 아는 사랑은 모두가 다 조건적입니다. 그래서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아니하면 그 사랑의 관계는 파괴되고 아프고 슬프며 견디기 힘든 사랑의 흔적만이 남을 뿐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대부분 비극적입니다. 하나님은 참다운 사랑이 무엇인지를 직접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율법사와 주고받은 얘기입니다.

율법사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 : "네가 잘 아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 :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 :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사 :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에 예수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로 이웃 사랑을 깨우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리고 그 율법사에게 물었습니다.

예수 :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 :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는 이렇게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10:25-37)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 이웃을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랑, 친구를 위해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는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참된 사랑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3. 예수 십자가에 죽으심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톨스토이의 동화에 <황제와 청소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냈습니다. 이 날 참석자들 중 한 명을 뽑아 왕과 왕후 사이에 앉게 하고 푸짐한 상품을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손님들이 궁전에 도착하자 왕의 신하들은 손님들의 손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 왕의 옆자리에 앉도록 당선된 사람은 궁전의 청소부 할머니였습니다. 평생 힘든 노동에 종사한 청소부 노파의 손은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도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 손과 발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알아보게 하려면 "내 얼굴을 보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 손과 발을 보라는 말씀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손과 발에는 십자가에 달렸던 못자국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손과 발의 상흔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확증인 것입니다. 미국 농아인들은 수화로 예수를 뜻할 때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왼손 손바닥에 찍어 못박힌 것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예수의 대표적 이미지는 못박힌 손과 발입니다. 거기에서 흐르는 피는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확증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확인해주고 끝나는 슬프고 비극적인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패배가 없고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4. 예수의 부활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새 천년의 문턱에서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지난 천년을 되돌아보자는 뜻에서 인터넷 사이트 '2000년의 모든 것'(everything2000.com) 은 <밀레니엄 러브 스토리 톱 10>을 올려놓았습니다. 그 1위는 세익스피어의 1596년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없이 홀로 사는 것보다 죽음을 택한 불행하며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입니다. 2위는 12세기 17세 소녀와 그녀의 교사와의 <몰래한 사랑>을 그린 아벨라르와 엘로이드(Peter Abelard and Heloise)입니다. 그들은 몰래 결혼했으나 소녀의 아저씨가 찾아내 그 교사를 거세해버립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가족들과 교회에서 그들을 떼어버리고 여자는 수녀원에 보내고, 남자는 수도사가 되게 합니다. 이들의 주고받았던 사랑의 편지들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파리에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미국의 인형극 주인공 커미트와 미스 피기의 <어긋나는 사랑>이 4위에 올랐습니다. 고대 켈트족 전설에 근거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못다한 사랑>을 6위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와 스칼렛의 <만남과 헤어짐>을 7위로,.. "신곡"을 쓴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영적인 사랑>을 9위에, 영국 아더왕의 기사 랜슬렛과 왕비 귀네비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마지막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쉽게도 우리 나라 이몽룡과 성춘향의 <절개있는 사랑> 이야기는 홍보 부족(?)으로 끼지도 못했습니다. 인터넷 사이트가 보여준 <사랑 이야기>들은 지난 천년이 "비극적 사랑, 몰래한 사랑, 어긋난 사랑, 못다 한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 모두가 다 불행한 사랑"으로 얼룩져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실패한 사랑이야기들입니다.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쳐 결국 아픔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을 안은 채, 깊이 패인 상흔만이 남아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안타까운 얘기들입니다. 지난 천년동안 인류의 가슴에 남긴 것은 그 부질없고 슬프며 고통스런, 그리고 무기력한 사랑 이야기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결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사 가장 고통스런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 사랑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주었습니다. 인생들에게 새 생명과 영원한 기쁨과 승리를 안겨주는 지고 지순한 십자가 사랑이 상처받고 있는 인간의 사랑을 치유하기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고 부활 신앙을 가지시므로 상처받고 고통스런, 그리고 무기력한 여러분의 사랑 이야기가 영원히 행복하고 승리하는 사랑이야기로 기록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새 천년의 맞이하는 인생들에게

부활 신앙을 가지게 하사

사랑의 승리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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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사랑의 영을 받으라!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19-23, 참조 : 마 28:16-20, 막 16:14-18, 눅 24:36-49)

1. 부활절에 읽어 볼만한 책이 있다면, 1866년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만 45세 때 써낸 대장편 소설 <죄와 벌>을 들 수 있습니다. <죄와 벌>은 가난하지만 머리 좋은 대학생의 살인행위를 통해 인간심리의 복잡 다양한 변화과정을 그린 명작입니다. 대학생 라스꼴리니꼽이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쳐죽이고 돈을 강탈합니다. 그런데 이 살인강도행각에는 절박한 동기와 정당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 노파는 이잣돈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며,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귀한 돈을 혼자 차지하는 버러지이며 인간 쓰레기이기 때문에 죽여서 아까울 게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돈이 몹시 필요했습니다. 자신과 어머니를 위해 하기 싫은 결혼을 하겠다는 여동생의 편지를 받고 그의 마음은 더 다급해졌습니다. 그 노파는 없앨만 했고 그럴만한 명분과 논리를 갖춘 그의 철학은 역시 젊고 멋있었습니다. 그의 살인 동기는 약간 병적이었지만 그는 당당했습니다. 그래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지만 얼떨결에 노파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방문을 닫지도 않은 채로 돈궤짝을 뒤지다가 지갑 한 개와 장신구 몇 개만 집어들고 허둥지둥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뒤뜰 돌 밑에 숨겨 놓고서는 다시 찾아 쓸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범행 후의 사정은 예상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는 자꾸 불안해졌습니다. 이상하게 자꾸 외로워졌습니다. 그 범행으로 인하여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과 격리되어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그 고립된 느낌, 그 절대적인 고독을 달래보려고 그는 마음 착한 창녀 쏘냐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직업은 천했지만 마음만은 순결했습니다. 그는 쏘냐의 겸손과 인정과 자기희생의 생활을 접하면서 차차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책감이나 후회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범죄라니? 쓸모 없는 노파하나 죽인 게 뭐가 죄야? 난 보상할 생각 없어. 그건 절대로 범죄가 아니라구." 그는 여동생 두냐의 자수 권유를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살인 논리와 명분이 이처럼 확고한데 결국에 그는 제발로 찾아가 자수하고 형벌을 달게 받습니다. 그리하여 시베리아로 유형되어가게 되어, 그곳에서 강제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쏘냐의 영향이 컸습니다. 자기 한 몸을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남을 위하는 착한 쏘냐를 보고 그는 자기의 어설픈 수작이 허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무책임한 자신을 믿어주며, 계속적인 연민과 사랑을 쏟아주는 쏘냐에게 감탄하여 겸허와 용기를 되찾아 결국 자수하여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쏘냐는 냉대를 받으면서도 시베리아 유형지로 그를 따라갑니다. 그런데도 라스꼴리니꼽은 자신의 궤변철학(?)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그러나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감옥에서 맛본 고통을 통해 그 완악하고 강퍅한 살인 명분과 논리는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감옥의 병실을 잠시 나와 강가에 앉아 있는 그에게 쏘냐가 찾아옵니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무릎을 껴안습니다. 때는 부활절의 새봄. 그는 그때부터 변하기 시작합니다. 성경 속의 나사로의 소생이 여기서 다시 재연된 것입니다. 7년을 7일같이 지내왔던 쏘냐의 사랑 앞에 살인죄에 대해 철학적 논리로 당당한 명분을 내세워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던 그 대학생의 마음이 녹아지고 부활의 새 생명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가장 강렬하고 가장 내적인 관계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삶을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며, 새로운 삶이 솟아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쏘냐의 사랑이야말로 청년의 삶에 부활의 새 봄을 맞게 해 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을 통한 생명의 승리를 말합니다.

2. 바르트는 말하기를 "교회는 강하게 보일 때 오히려 약하고 약하게 보일 때 오히려 강하다."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강하게 보일 때가 언제입니까? 교세가 확장되고 교회 건물이 높이 올라갈 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고 헌금도 많이 하며 건물도 좋고 하니까 그럴 듯하게 보입니다. 그때는 오히려 약합니다. 왜냐 하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그만큼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스스로 뭐든지 할 만하다고 우쭐대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성도간의 관계가 붕괴되고 더 나아가서 단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교회론 적인 면에서 볼 때 약한 교회요, 죽어 가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약하게 보일 때는 오히려 강합니다. 교인의 숫자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헌금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교회 건물도 임시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개척 당시의 목회자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강단에 나와서 계속 울부짖으며 "주여! 주여!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수가 없습니다."하며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성도간의 관계가 밀착되면 비록 보기에는 시원치 않게 보이겠지만 무서울 것이 없는 가장 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보호하고 살펴주시지 않는 교회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장해나가며 이웃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으로 성장해 가는 교회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무엇보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엡5:25)....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역사 하심에 의하여 개인적으로 사랑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을 통해 유기적인 공동체가 되어서 계속 성장할 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사회에 변화를 주며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 민족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약 6,100개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신구약이 번역된 언어는 겨우 262개, 그리고 신약만 번역된 언어는 562개입니다. 또한 선교사를 미리 파송하여 그곳의 언어를 배운 다음에 성경을 번역하고 있는 언어는 1,167개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지고 있거나 조금이라도 구경을 한 언어는 2,000개의 언어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계 언어가 6,100개인데 겨우 1/3의 언어로만 성경이 번역되었을 뿐입니다. 전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앞으로 4,100개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보급될 수 있도록 부단히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해야만 합니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 파송된 선교사 수는 대략 20여만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중 90%가 미국에서 파송한 선교사라고 합니다. 앞으로 90여만명정도의 선교사를 더 파송해야 전 세계가 복음화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전 세계에는 254개의 국가가 있고, 전 세계에 대략 100만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500만개의 교회가 필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400만개의 교회가 더 세워져야만 합니다. 우리 평강교회는 창립 24주년을 맞는 2,000년에 창립 기념행사로 국내에 교회 1개를 개척 설립하고 해외에 선교사 1명을 파송할 목표를 세웠습니다. 이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 파송해야할 선교사 수 90만 명에 대해 90만 분의 1, 세워져야 할 교회 수 400만개의 400만 분의 1을 담당하는 것이 됩니다. 인도의 9억인구 중에 8억이 힌두교입니다. 힌두교는 3억 3천 개의 신을 섬기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암소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800만 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 세계에 모슬렘이 10억, 중국 공산당이 10억입니다. 이들 수만 합해도 30억이 넘습니다. 세계의 절반 이상이 구원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런데 회교의 선교사 수는 100만이 넘는데 비해 기독교의 선교사 수는 20만에 불과합니다. 회교 국가 중 하나인 터키의 인구가 6천만인데 그 중에 기독교인은 겨우 400명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이러한 세계 실정에 우리 교회가 세운 1 교회 개척, 1 선교사 파송, 1,000명 교회 성장 계획은 단순히 우리 교회를 확장하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18세기에 영혼 구원을 제일 많이 했던 영국의 스펄젼 목사는 한번도 교회를 성장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구령열(救靈熱)에 불타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만 했을 뿐입니다. 영혼 구원을 하다가 나오는 부스러기가 교회성장이지,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영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은 영혼구원이며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교회 성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면서 교회 자체가 성장하지 못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교회 성장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지 교회 성장이 죽은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해골떼 같은 이스라엘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야말로 사랑을 완성시키는 생명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처럼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신 것은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경험은 세찬 바람의 포효와 강한 불길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2-4)

이 세찬 바람과 강한 불길이야말로 제자들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며 생동하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경험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찬 바람과 강한 불길을 통한 하나님 사랑의 경험인 것입니다. 성령(바람, 불)은 인간을 생동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입니다. 불은 우리를 뜨겁게 하며, 따뜻함을 전해줍니다. 불은 우리를 밝게 비추고, 우리 자신도 빛나게 합니다. 불은 우리를 태우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불태우는 불길이 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본질은 '삼키는 불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사랑"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신4:24)

".........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하나님은 열정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노기(怒氣)는 불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시79:5)

불이 '삼키는 불길'로 불리울 때,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분노는 그의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거부당하고 상처받은 그의 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과 그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열정적 사랑은 치명적인 분노로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랑은 사랑으로 존속하기 위하여 분노의 형식을 취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분노 속에는 그가 끝까지 지키는 사랑이 숨어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 속에는 그의 은혜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키는 불길'처럼 활동하시는 그의 분노 속에는 하나님 사랑의 정열이 나타나고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의 "불길"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하고 그 새 삶을 뜨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

여기에서는 불은 정화(淨化)의 불이요, 모든 사물들을 녹이는 불이며, 세계의 새 창조의 불을 말합니다. 세찬 바람과 뜨거운 불길로 나타나는 성령은 무가치한 인간의 삶을 무한하게 가치 있는 삶으로 발견되게 하여 새 생명을 창조하고 그 삶을 생동케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인 것입니다. 왜 사랑은 '죽을 만큼' 강한 것인가? 그것의 열화는 불과 같으며 사랑 자체가 '주님의 불길'이라 불려지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8:6)

오순절 찬송가라 할 수 있는 찬송가 173장 <불길 같은 성신여>는 흔히 한국 교회 강단에서 부흥회 인도 찬송으로 애용되며, 소위 은사를 받는 수단으로서 '불길 같은 성령'을 간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우리 안에 "뜨거운 사랑"을 깨워달라고 성령께 간구하는 찬송가입니다. "불길 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줍소서 성신이여 임하사 내영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합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합소서." 힐데가르트 폰 빙언이라는 사람은 여기 "불길 같은 성령"을 "불의 영", "사랑의 불길"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 불길과 같은 성령이여, 찬양을 받으소서..." "오, 사랑의 불길이여..........."

3.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불길같은 사랑의 영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행했던 다락방에 모여서 전전긍긍하며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독기를 품은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 다락방 문을 굳게 닫고 행여나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떨어지지는않나 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 한 가운데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20:19,20)

죽음보다 강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그러므로 두려워 떨며 삶이 위축된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불길 같은 사랑의 영"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불길 같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에 '그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의 불길로 태워 정화시키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이 가치있는 것으로 발견되게 하며,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경험하게 하여 생동하는 삶으로 변화시키며, 죽은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21,22)

그래서 일찍이 "불길같은 사랑의 뜨거운 성령"을 다메셋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체험했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4-39)

세상의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시대에 "불길 같은 성령"으로 나타나고 경험되어지고 있습니다. "불길 같은 성령"은 불같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랑의 주체요 선교의 주체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인류에 대한 뜨거운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교도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의 가슴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가슴이요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 되는 곳에 사랑이 불길처럼 번져나갑니다. 그리고 죄악이 불태워지고, 인간이 생존해야 할 가치를 경험하게 하고, 잠자는 영혼, 죽은 영혼을 깨워 생명을 약동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죽기까지 하나님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이 항상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20:22)....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땅 위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사회 등등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불길 같은 성령을 받아야 죄악이 불태워지고 삶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그대로 있느냐 아니면 사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을 부어주시는 예수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부활의 예수를 증거 하는 제자들에게는 마음으로부터 깊이 참회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용서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이 위임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회개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용서를 선언하는 능력이 위임되어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경고하는 권한도 위임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인 것입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행3:1-10)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서 은과 금보다 백번 더 나은 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부활하신 예수였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있어 당장 필요했던 것이 은과 금이라고 생각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과 금이 전부가 아닌 더 중요한 영적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은과 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분의 문제들과 이 나라 민족의 문제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일(선교)만이 자신과 나라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를 가지고 5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나 되는 기적, 물이 포도주가 되는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등등은 그 기적들을 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예수의 부활은 생명의 승리입니다. 사랑과 진리의 승리입니다. 예수를 무덤에 가둬둘 수 없듯이 생명과 진리와 사랑은 가둬둘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이 나라 민족 위에 생명과 진리와 사랑이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금과 은, 그리고 세상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분이 보내신 성령은 그 힘과 능력, 그리고 사랑의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어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은 사랑의 주체요 선교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인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로 나타내는 여러분이 되도록 성령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세상에는 이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삶의 가치를 상실하고 삶을 포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우리를 향해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불길 같은 사랑의 영을 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격렬했던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샌디에이고의 외곽지대에 있는 어느 화려한 저택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집주인 되는 부인이 전화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엄마, 저예요. 제가 죽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아들의 음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한시바삐 그 아들이 보고 싶어 볼멘소리를 합니다. "당장에 달려오지 않고 전화는 무슨 전화냐?"그러자 아들은 자못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가겠습니다. 그런데 불쌍한 내 친구와 함께 갈까 합니다. 이 친구는 함께 싸우던 전우인데 지금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으며, 다리 하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는 친구라서 저와 같이 있으려고 데려왔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며칠동안만 같이 있으려므나." 그러자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오랫동안입니다." 어머니는 다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한 일년 함께 있으려므나. 처음에는 그럭저럭 함께 지낼 수 있겠지만 세월이 가면 무거운 짐이 되어 괴로울 거야." "아니에요. 일생동안 같이 살 겁니다." 이것이 아들의 대답이었습니다. "너, 전쟁에 나가더니 감상주의자가 되었구나. 그런 사람을 길게 사랑하기 쉬운 줄 아느냐?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아도 얼마간 지내보면 싫증이 나고, 나중에는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이 말에 "그럴까요?" 하고 아들은 수화기를 놓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군 본부로부터 발송된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투신 자살했습니다. 시체를 찾아가십시오" 어머니는 허겁지겁 달려가 시체를 확인해봤습니다. 시체는 틀림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고, 다리 하나가 없었습니다. 아들은 "이토록 불구자가 된 나를 어머니가 어떻게 사랑해줄것인가"를 마지막으로 확인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짐이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만 것입니다. 누가 아들을 죽인 것인가? 그는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그렇더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아도 장차는 짐이 될 것이라고 하니 무슨 용기로 살수가 있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누가 '눈 하나 없고, 팔 하나 없고, 다리 하나가 없는 불구 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겠습니까? 누가 불구되어 삶의 가치를 상실하고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의 하나님 심장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길 같은 뜨거운 사랑의 영", 성령을 받으라고. "(요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성령을 받으라."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젊은 선교사 죠지 애틀리는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손에 들려 있는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저들을 죽이고 자기는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인줄 알면서도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방아쇠 한번 잡아당기면 끝날 일인데,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 그 마을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는 영영 끝이 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남을 죽인 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가 믿으려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그대로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찢기며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보니 그에게는 그런 놀라운 총이 있었고, 탄환도 열 발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원주민들은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3:16)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데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 주실 만큼 충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레바논의 유엔대사 찰스 말릭씨는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국의 공헌이 무엇이냐? 돈을 준 것이냐? 먹을 것을 준 것이냐? 의료기술이나 약품을 준 것이냐? 군사원조인가? 산업원조인가? 그렇지 않다. 내 생각에는 선교사를 많이 파견한 것이 정말 세계를 돕는 결과를 가져왔고, 20세기의 미국을 훌륭하게 평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여러 나라의 민족주의 앞에서 욕도 많이 먹고, 공산주의자를 위시한 유물론자들에게 악평도 많이 받았으나, 수없이 많은 순교자의 피를 전 세계에 뿌리며 신교육·신 문화사업·신 의료활동 등을 펼쳤고, 새 시대 새 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게 하는 개화 운동·독립 운동·빈민 구호·여권 신장·YMCA 등 청소년 운동·스포츠 보급·계급 타파·노예 폐지 등 헤아릴 수없을 만큼 엄청난 일을 전세계 각지에서 벌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백 년, 빛나는 미국의 20세기는 선교 운동의 열매라고 담대히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랑스럽고 빛나는 대한민국의 21세기는 한국교회의 선교 운동을 통해 이룩할 수 있도록 성도 여러분에게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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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나약한 인간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요 18:12-27, 참조 : 마 26:57-75, 막 14:53-72, 눅 22:54-62)

고난당하시는 예수께서 제일 먼저 끌려가신 곳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 앞이었습니다. 안나스는 당시 악명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안나스 자신이 주후 6년부터 15년까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가운데 넷이나 대제사장의 직위에 있었고 가야바는 그의 사위였습니다. 유대민족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는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정부의 개입으로 그 직분은 투쟁과 음모 그리고 뇌물수수와 독직(瀆職)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대제사장직을 정부에 적극 협조하고 추종하는 누구에게든지 뇌물을 받고 임기에 관계없이 넘겨 주었던 것입니다. 로마 정부에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사들인 사람, 이른바 친로마파들은 막대한 이권과 권력을 원하는 대로 사용해서 엄청난 부귀를 축적했던 것이었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희생의 제물을 사고 팔아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구실로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희생제사에 쓰일 동물들을 매매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인들에게 소위 권리금을 받고 장사를 허락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되는 제물은 흠이 없는 깨끗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점을 이용해서 제아무리 흠없고 깨끗한 제물을 가져온다해도 대제사장에게 매수된 검열관으로 하여금 어떻게 해서든지 트집을 잡게 했던 것입니다. 상인들은 뇌물을 준만큼 그 이상의 잇속을 챙기기 마련이었고, 검열관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를 들면 성전 밖에서는 한 쌍의 비둘기가 불과 1000원 밖에 들지 않았는데 성전 내에서는 1800원이나 하듯이 엄청나게 폭리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실상 오늘날 힘으로 상권을 장악한 구소련의 마피아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성전의 모든 상권을 대제사장이 사유화했으며, 이로 인해 엄청난 축재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안나스는 이렇게 예배자들로부터 온갖 수단 방법을 다 해 착취하고 거룩한 제물을 이용한 악랄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안나스를 유대인들조차도 증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탈무드 가운데는 이러한 글귀가 있을 정도이었습니다.

"화 있을지어다. 안나스의 집이여! 화있을진저 저들이 울리는 뱀같은 소리여! 그들은 대제사장, 그들의 아들들은 금고지기, 그들의 사위들은 성전의 관리인, 그리고 그들의 종들은 막대기로 백성들이 때리고 있도다!"

안나스와 그 일족들은 그처럼 악명이 높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21:12,13)

성전에서 마피아같은 존재들인 그들이 예수를 마피아 두목격인 안나스 앞에 먼저 연행해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예수가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몰아낸 사람이며 그로 인해서 결국 안나스의 재원(財源)을 축내었고, 그를 '강도 두목'으로 정곡을 찔러 공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험악하게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추방하여 두려움 가운데 있던 가다라 지방 사람들을 평안하게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경제적인 손실만을 내세워 예수를 자기 마을에서 내몰았던 경우와도 매우 흡사한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마8:28-34)

이러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시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것은 재판 자체를 조롱하는 것이었으며 재판 과정에서 볼 때 분명히 위법 사항이었던 것입니다. 우선 재판의 시기를 볼 때, 유대 소송법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야간 재판은 금지되었으며 특히 중요한 소송건일 경우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재판은 한 밤중에 그리고 하루밤 사이에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집권 야당과 군부 독재 정권아래 사법부와 그 하는 짓이 아주 비슷합니다. 다음으로 재판 장소가 위법이었습니다. 재판소는 엄연히 산헤드린 공회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 가야바 개인의 집 뜰에서 재판이 열렸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에게는 변호인이 마땅히 있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변호인을 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위법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허위 증거를 채택했다는 것이 위법이었습니다. 다음의 성구가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막14:57-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마26:59,60)

안나스가 얻은 대제사장직은 그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는, 즉 뇌물을 주고 로마 권력으로부터 얻어낸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과 재물에 손해를 입히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위해(危害)를 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권력과 재물 앞에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권력과 물질 앞에 고난당하는 "진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진리가 고난당하는 사회는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잠29:2)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14:34)

말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물질)은 강하다. 왕(권력)은 더 강하다. 여자는 좀 더 강하다. 그러나 진리는 가장 강하다." 인간 예수를 죽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죽일 수 없으며, 죽을 수도 없습니다. 진리가 권력과 물질 앞에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진리는 수 많은 수난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 걸어 온 진리의 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수난과 형극의 길을 걸어 온 진리가 불의에 대하여 승리한 것입니다. 당시 예수를 잡아 죽인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 장로들은 그 시대의 소위 지성인들이었습니다. 지성이 돈과 권력 앞에 아부하는 모습, 지성이 지켜야 할 진리를 묻어버리려는 음모를 볼 수 있습니다. 실로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희곡<아테네의 타이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황금이야말로 신이다. 흑을 백으로, 추(醜)를 미(美)로, 악을 선으로 만드는 황금! 너 인류의 치사스런 창부이기도 하다." 권력과 황금지향의 가롯 유다는 결국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마27:3-8)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라고 큰 소리친 지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거듭해서.....,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입니까! 한때는 가장 자신 만만했던 그가 지금은 어두움에 몸을 숨긴 채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 "나는 그를 모른다."라고 고장난 레코드 판처럼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당당하게 칼을 뽑아 감히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땅에 떨어트렸으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순순히 붙잡혀 가고 온갖 수모와 구타를 다 당하게 되었을 때, 즉 예수와 떨어져 멀어져 갈 때는 예수를 모른다고 완강하게 부인할 정도로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 비굴하기 그지없는 나약한 인간의 추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요18:10)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 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69-75)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께서 낙향하여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시몬 베드로 찾아가시어 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이제 십자가 지향의 강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한 랍비가 어느 유대인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길에서 돈이 많이 들어 있는 지갑을 주웠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저에게는 딸린 식구가 많이 있으며 보시다시피 저는 매우 가난합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받아드리겠습니다."그러자 랍비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도둑이다."

랍비는 두번째 유대인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주운 즉시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 주겠습니다."

"그대는 바보이다."

랍비는 세번째 유대인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그 돈을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제가 얼마나 약한 인간인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맞게 되면 그 지갑을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습니다."

"그대의 대답이 옳은 대답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완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결코 완전할 수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폭풍과 비바람이 몰아치면 추풍 낙엽처럼 흔들리게 될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당신은 자신이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자만에 기인한 확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로 풀잎처럼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유명한 크랜머 대주교도 기독교를 박해하는 정부에 의해 체포당하자 처음에는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였습니다. 그 후 한 동안의 방황을 거친 후에야 그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위하여 화형틀로 걸어갔습니다. 쟌 다르크도 어려움이 닥치자 역시 처음에는 자기의 주장을 굽혔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나 신념에 대해 결코 완전한 장담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완전을 주장하기 전에 우리 생애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해주시기를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모든 면에서 주님을 배반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인간의 나약한 체질을 하나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103:13-16)

사도 바울도 자신의 나약한 모습, 몸과 마음의 갈등 구조 속에 갈팡 질팡하는 자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18-25)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능력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빌4:11-13)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확신하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다음과 같은 승리로운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롬8:35-39)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마다 시작과 끝에 "(살전5: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는 축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항상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 지향의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한 것입니다. 물질과 권력 지향의 인간과 국가는 결국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지만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은 세상 권력과 황금은 "피밭"(마 27:8)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어떠한 권력과 물질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으며 비굴해지지 않고 진리를 사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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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하나님의 혁명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 가니라"(눅 1:46-56)

본문은 사가랴의 축가(Benedictus) 및 시므온의 고별송(Nunc Dimittis)과 더불어 초대 교회의 예배 때에 찬송시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 영국 국교회의 저녁 예배 시에 부르는 찬송의 일부로도 사용되는 유명한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입니다. 이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는 구약 한나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아주 비슷합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삼상2:1-10)

스탠리 죤스(Stanley Jones)는 이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를 가장 혁명적인 문서라고 말하며 여기에는 하나님에 의한 세 가지 혁명이 담겨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십니다. 이것은 도덕적 혁명을 말합니다. 기독교는 교만함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고자 하면 추호의 교만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예수의 빛 앞에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 그리고 비천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 헨리(O. Henry)의 단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시골에서 자라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그는 언제나 어떤 소녀와 나란히 앉아 있게 되었는데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습니다. 후에 그는 도시로 나가 악한 길에 빠져갔습니다. 그는 소매치기와 좀 도둑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어떤 할머니의 지갑을 나꾸어 챘는데 자신의 뛰어난 소매치기 솜씨에 스스로 놀라며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가 전에 좋아하던 여자가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녀는 아직도 귀엽고 천진난만한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보는 순간 자기 자신이 보잘것없는 비열한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이 온 몸에 화끈거려 가로등의 차디찬 쇠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하나님, 저는 죽고 싶습니다."라고 뇌까렸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진상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볼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교만을 버리게 만듭니다. 이것을 도덕적인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 4장 1절-26절에 보면,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수가성의 행실이 불량했던 한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대화를 주고 받는 중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심각한 심령(心靈)의 갈증을 겪고 있는 파괴된 인간성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나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일시에 그 갈한 것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사랑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여인에게 참 생명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목마른 인생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 4:13-1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 7:37-39)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6-7)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는 곧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자면 누구든지 값없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인간은 도덕적 혁명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그것을 바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2-24)

이땅의 진정한 도덕적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 성령의 바람이 맹렬하게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이 나라의 정치, 경제계에 도덕적 혁명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靈)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예수 없는 인생은 사실 죽은 인생입니다. 예수만이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는 영'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한 삭개오의 도덕적 혁명은 그의 구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10)

노태우씨 자신이 밝힌 부정축재한 5천억은 1만원짜리 지폐로 환산하면 잠실종합운동장 크기의 축구장을 123개나 덮을 수 있는 돈입니다. 이것을 길이로 늘어 놓으면 서울 부산간 경부고속도로를 9번이나 왕복하고도 남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돈을 차곡차곡 쌓으면 백두산(2,744m)보다 약 3배나 높고 63빌딩(249m)보다는 30배 높은 것입니다. 이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최소한 자신이 밝힌 토색한 돈의 4배인 2조원을 1만원권 지폐로 1톤 짜리 트럭57대에 싣고 와 청산하고 예수 믿어야 합니다. 이 땅에 교만하고 거만한 자들이 청산되는 회개의 바람이 불어야 할 것입니다. 파스칼은 "왕자 앞에서는 머리를 숙여야 한다. 학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도 좋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앞에서는 가슴을 조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필리핀의 막사이사이(Romon Magsaysay)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가난에 지지 않고, 역경에 꺾인 일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의 직책은 대통령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항상 이 나라의 한 병사다'라고 하면서 겸손하기만 했습니다. 실로 지도자는 겸손해야만 합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하여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 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습니다.'(단5:18-21) '그의 아들 벨사살 왕은 부왕이 교만하여 한 때 짐승처럼 들에서 살았던 것을 알고도 거룩한 성전의 기물들을 가지고 술잔치를 벌이며 우상을 숭배하고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고로 ...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했습니다.'(단5:22-31) 참으로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요(잠언15:33),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언16:18)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도성'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겸손하신 왕의 모습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도 천박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시더니 세상에 사시는 동안도 겸손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으러 가시는 마당에까지 겸손의 상징인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삶의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시고 몸소 실천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참된 평화를 이룩하시는 방법은 바로 남을 섬기는 '겸손'인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겸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들을 낮추시며 비천한 자를 높이십니다. 이것은 사회적 혁명을 말합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간판과 지위에 대해 깨끗이 버리고 살게 합니다. 뮤레테스(Muretes)는 중세의 방랑학자였습니다. 그는 가난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어느 마을에서 그는 병이 들어 무의탁자들과 방랑자들을 위한 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사들은 그가 알아들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라틴어로 그의 병세에 대해서 서로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같이 보잘것 없는 방랑자는 의학 실험에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고 있었습니다. 뮤레테스는 그들을 쳐다보며 그들과 같이 학자적인 라틴어로 "어떠한 인간이라고 쓸모 없다고 하지 말아라.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우리들이 깨닫게 될 때 더 이상 하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따위의 말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눅17:1-2)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6-14)

그리스도 안에서 사회적인 계급과 지위는 모두 의미가 없습니다. 어느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매독에 걸려 있고 아내는 심한 폐결핵에 걸려 있다. 이 가정에 아이들 넷이 있는데 하나는 며칠 전에 병으로 죽었고 남은 세 아이들도 결핵으로 누워 살아날 것 같지 않다. 이 부인은 현재 임신중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러자 그 학급의 한 학생이 "낙태 수술을 해야 합니다!" 하고 대뜸 소리쳤습니다. 그 때 교수는 "자네는 지금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하고 말했습니다. 이 불행한 환경에서 다섯 번째 아이로 태어난 것이 베토벤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른 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땅에 지극히 작고 적은 무리일지라도 그들이 존중되는 사회적 혁명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주린 자들을 배불리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혁명을 말합니다. 비 기독교적 사회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분배정의를 외면하고 부를 축적하는 탐욕 중심의 사회를 말합니다. 반면 기독교적 사회란 가진 자의 더 많은 소유가 목적이 아니라 못 가진 자들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사회를 말합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찬가에 있는 아름다운 면인데 이 아름다움에는 일종의 개혁을 폭발시키는 다이나마이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처럼 각 사람 속에서 혁명이 일게 하며 더 나아가 사회와 세계를 개혁하는 다이나마이트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트리지 윤리(Ethics of Trige)'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수많은 부상자가 야전병원에 실려 들어왔는데 의약품이 부족해서 그 사람들을 다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그리하여 약간의 치료로써 살 만한 사람은 치료하여 주고 못 살 것 같거나 애매한 사람은 아예 치료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선택을 '트리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는 강자 생존의 '구명 보트 윤리'를 배격합니다. 또한 생명의 가능성을 선택하는 '트리지 윤리'도 배격합니다. 예수께서는 굶주린 민중 5천 명이 앞에 있을 때 빵은 다섯 개뿐이니까 가장 강하고 우수하고 장래성이 있는 다섯 명만 골라서 그들만 먹이고 4,995명은 내버려두자는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똑똑한 사람이든 바보이든, 건강한 남자든 불구의 여성이든 굶고 있는 것은 똑같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는 떡 다섯 덩어리라는 작은 희생과 사랑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즉 '사랑의 기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다 살릴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의 계산이며 강자의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는 '다 살릴 수 있다.'는 사랑의 낙관주의를 가진 분이십니다. 문제는 작은 사랑이 가장 중요한 천국의 씨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정치, 경제, 사회에 하나님의 혁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가 사라지고 겸손한 자가 대접받는 도덕적 혁명, 누구나 평등하게 대접받는 사회적 혁명, 탐욕이 사라지고 다 함께 사는 경제적 혁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혁명을 일으키는 예수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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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새벽을 향한 황혼의 길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 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눅24:13-35, 참조:막 16:12,13)

"봄처녀"란 이름의 가곡이 있지만 처녀에 가을 처녀, 봄처녀의 구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가곡에서 봄처녀란 내일을 향한 희망 때문에 가슴이 부푼 소녀를 말합니다. 봄처녀란 대명사를 받기에 합당한 안네 프랑크는 어느 날 일기에 이런 글을 담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속에 기쁜 소식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봄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당신은 얼마나 위대한가! 당신은 마음껏 사랑할 수 있지 않은가! 당신은 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꽃 소식이 남쪽으로부터 올라오듯 잃었던 봄의 소식, 희망의 속삭임을 봄바람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인권 운동을 위해 앨라바마를 방문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가난한 흑인 청중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온 것은 봄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당신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고귀하고 훌륭하고 귀중한 생명이라는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봄은 부활의 계절입니다. 예수께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친히 가지고 엠마오로 낙향하던 황혼 길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예수의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내려가면서 그 날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슬픈 얼굴빛으로 멈춰 서서,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단 말입니까?"라고 예수께 되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무슨 일인지 물으시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 분에 소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오늘 아침 새벽에 그의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그의 시체를 보지 못하고 예수께서 살아 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무덤에 가보았는데 여인들의 말이 사실이나 그 분을 보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그 모든 것을 왜 그렇게 더디 믿느냐? 그리스도가 마땅히 고난을 받아야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자신에 대한 기록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엠마오에 가까이 이르자, "날이 이미 어두웠으니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지요"라고 예수께 권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식사할 때 예수께서 떡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린 후에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으나 그 순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길, "길에서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의 속마음이 뜨겁지 않더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곧 바로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 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들 말하기를 "주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두 사람도 엠마오 도상에서 겪은 일과 떡을 떼실 때에 비로소 예수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치적 회복을 갈망했던 제자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청천벽력같은 것이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결코 상상해본 적도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 보기에 맥없이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목자 잃은 양떼들처럼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막14:27)

본문에 엠마오로 낙향하고 있는 두 제자 역시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대화 내용을 살펴보면 이들은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의 증거뿐만 아니라 그들의 동료들도 부활의 증거가 될 만한 현장을 방문했던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불신은 여인들의 증거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린 제자들의 반응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의 의심과 불신은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하고서도 당분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열 제자들이 모여 있는 다락방에 나타난 예수를 영(靈)으로 생각한 것은, 갈릴리 바다의 폭풍 가운데서 걸어오신 예수를 유령으로 취급한 사건에서의 제자들의 행동과 같은 것입니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24:37)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마14:26)

제자들의 의심은 못박히신 예수의 손과 발을 만지고 잡수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해소가 되었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알라 또 나를 만져 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24:39-43)

예수의 부활은 그의 십자가 죽음 이전에 여러 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2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20:18,19)

불신의 깊은 수렁에 빠져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24:25,26)

생전의 예수께 대한 기대와 소망의 좌절 때문에 부활도 믿지 않고 서둘러 자기의 생업을 찾아 엠마오로 낙향한 제자들이었건만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그냥 버려 두시지 않고 다시금 그들이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여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돌이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들의 엠마오 여행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전환되는 예루살렘 여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의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핍박자, 살인자의 발걸음을 복음 전도자의 발걸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면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행9:1-9)

장로교 선교사인 벤자민 웨 어목사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국제 테러단에 납치되어 16개월 동안 세상과 격리된 감금생활을 하고, 살아 나온 뒤에 자기의 경험을 써서 <갇힌 인질, 풀린 인질(Hostage Bound, Hostage Free)> 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고문당하고, 소식이 끊기며, 세뇌 당하는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는 중 위로가 있다면 새벽에 변소에 가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창문 밖을 내다보고 싶어 변기 위에 발을 딛고 올라섰습니다. 그곳은 높은 곳이어서 마침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고 숲과 산의 능선과 찬란한 구름들, 새벽을 맞는 대자연, 벡카 골짜기와 멀리 눈에 덮인 높은 산맥이 보였습니다. 웨어 목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창조자의 이 장엄한 선물은 하루 종일 나의 기억 속에서 천사의 음성이 되었습니다. 그 음성이 나에게 살아야 한다는 희망과 살아서 무엇인가 창조자를 위하여 그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분명한 생명의 의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역시 변소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던 웨어 목사를 발견한 테러단은 그것마저 못하도록 변소를 옮겼으나, 그는 이젠 눈으로 보지 않아도 기억 속에 남은 그 장엄한 감격과 천사의 음성을 언제나 보고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웨어 목사는 천상의 음성을 대자연을 통해 화장실에서 들었지만, 천사의 음성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며 주님의 음성에 접하고 힘과 용기를 얻는 이도 많고 예배 찬송에서, 혹은 성가대의 찬양에서 주의 음성을 접하고 감격과 희망을 갖는 이도 많습니다.

석양 길로 가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경 전체에서 자신에 관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마음속이 뜨거워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떡을 떼어 주실 때 그들은 눈이 밝아져서 예수를 알아보고 황혼에 낙향했던 발걸음을 돌려 벅찬 감격과 소망을 가슴에 안고 부활의 새벽이 있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마음속이 뜨겁지 못하거나, 좌절하고 절망가운데 있거나, 아직도 여전히 의심과 불신 가운데 신앙의 황혼 길로 내려가고 있습니까? 이 부활의 계절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시므로 삶의 새벽을 여는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여류 시인인 패트 반즈 씨는 어느 부활절 아침의 체험을 소개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교회 대문 곁에 꽃 파는 노파가 있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주름살이 깊게 패인 노인이었으나 얼굴 전체에 웃음꽃이 피고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반즈 씨는, "그렇게 웃고 계신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꽃 파는 할머니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내 나이만큼 살면 슬픈 일, 가슴 아픈 일을 많이 겪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럴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고통의 금요일은 끝이 아닙니다. 겨우 사흘만에 부활의 새벽이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괴로울 때면 사흘만 기다리자고 말합니다." 이 노파의 지혜가 바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십자가에 예수께서 죽으신 것만 확인하고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신앙과 삶의 황혼 길이 새벽을 향한 벅찬 감격과 소망이 넘치는 발걸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대설교가 스펄전이 대예배 설교 때 아동 설교를 할 때처럼 물건을 들고 나와 회중에게 보이며 소위 '실물설교'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빈 새장을 들고 강단에 올라섰습니다. 그 새장은 2파운드(약8만원)를 주고 산 것이었습니다. 스펄전 목사가 거리에서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소년은 참새 한 마리가 들어 있는 새장을 들고 있었습니다. 난폭한 이 아이는 가끔 새장을 흔들어 참새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스펄전 목사가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너 그 새를 어떻게 할 셈이냐?" 라고 묻자, "조금만 더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릴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그렇다면 나에게 팔지 않겠니!"라고 제안했습니다. 소년은 스펄전 목사를 훑어보더니 웃으며 농담을 했습니다. "2파운드 준다면 팔죠." 스펄전 목사는 그 자리에서 2파운드를 내주고 새장을 사서 문을 열어 새를 하늘로 날려보냈습니다. 이튿날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대성전 강단에서 스펄전 목사가 행한 새장 설교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라는 악마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인간들을 어떻게 할 셈이냐?" 그러자 죄가 말했습니다.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을 가르쳐 잠시 가지고 놀다 죽여 버리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고 싶은데 값을 얼마나 주면 되겠느냐?" 악마는 웃어버렸습니다. "이것들을 사서 뭐하게요. 그들은 당신을 배반하고 침?고 십자가에 메달 것입니다. 그래도 사겠다면 당신의 눈물과 피를 내놓으시오." 스펄전 목사는 이 새장 설교를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요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신앙과 삶의 황혼 길이 아니라 부활을 향한 새벽을 깨우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신앙과 삶이 항상 부활의 새벽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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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사랑과 죄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36-50)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다는 시몬이라 하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집에 들어가 앉자마자 그 동네에서 행실이 불량한 한 여인이 따라 들어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이를 보고있던 바리새인 시몬은 마음에 "예수가 만일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행실이 불량한, 죄 많은 여자임을 알아보고 자신에게 하는 행위를 못하게 하고 물리쳤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시몬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고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시며 질문하셨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네 판단이 옳다." 말씀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라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관습에 손님이 자기 집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손과 발을 씻을 물을 주고, 그 손님을 반가운 마음으로 환영한다는 표시로 입을 맞추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리고 식사 전에 손님을 존경한다는 표시로 머리에 향유를 발라드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은 이 모든 절차와 예의를 하나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 중심으로 예수를 초청하고 영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청해서 오면 그만이고 오지 않아도 그만인 태도였습니다. 시몬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초청하여 영접하고자하는 뜨거운 마음과 열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 많은 여인은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이 여인은 마음 중심에서 예수를 존경했습니다. 이 여인은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이 여인은 극진한 마음으로 예수께 헌신했습니다. 이 여자가 눈물로서 예수의 발을 닦은 것은 사랑의 진실이었고, 그 발에 입을 맞춘 것은 복종과 헌신의 진실이었고, 향유를 부은 것은 최선을 다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예수를 따르는 죽음의 진실이었습니다. 이런 진실을 예수는 자기 곧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받아드리시고 그 여자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또한 이 여자의 행위야말로 참된 신앙의 모범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 여자가 한 일은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알려져야 하고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14:9).
미얀마의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브라에 물려 죽어 가는 아이를 데리고 부모가 늙은 고승에게 가서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중은 가슴을 치며 말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아이를 구할 힘이 없소이다. 그렇지만 내가 숨겨 두었던 정직한 말을 하면 혹시 천지 신명께서 자비를 베풀지도 모르오. 사실 나는 지금까지 50년 동안 중노릇을 하고 모두가 나를 존경한다고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중이 되었을 당시 7년 동안만 행복했고 그 나머지 세월은 줄곧 불행했소이다." 이 말이 중의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아이의 머리에 있던 코브라의 독이 가슴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저도 평생 불교 신자로서 스님이 오실 때마다 시주를 드리고 절에도 계속 시주를 바쳤지만 사실은 기쁨으로 바친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런 말이 아버지의 입에서 떨어지자 아이의 가슴에 있던 독기가 허리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저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15년이 되는데 모두들 저더러 행복한 여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결혼의 행복을 느낀 것은 1년에 이틀 정도뿐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아이 어머니의 입에서 떨어지자 아이의 허리에 머물러 있던 독기는 발바닥을 거쳐 완전히 몸에서 나가버렸다는 우화입니다. 진실이 밝히 드러나야 구원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 중은 성공적인 승려였습니다. 아버지도 훌륭한 종교인이었습니다. 어머니도 행복한 주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감춰진 내면에는 독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 독은 불원간 자기 자신과 가정과 사회를 넘어지게 하는 독입니다. 이 아이의 몸 속에 있는 숙명적인 독기가 주변 사람들이 각자의 마음 중심을 진실하게 털어놓았을 때 조금씩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 중심의 진실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마음 중심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진실로 예수를 사랑하시므로 참된 믿음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 대한 진실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예수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뜨겁고 진실한, 그리고 희생적인 하나님 사랑의 자기 폭로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진실한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수를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나를 믿느냐?"고 질문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번이나 따져 물었습니다(요한 21:16). 진실한 믿음이란 진실한 사랑으로만 표현되는 것입니다. 예수께 대한 여러분의 사랑과 진실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이 여인처럼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어드리며,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이 여인의 진실한 마음의 행동을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그 "사랑함이 많음"이 그 죄 많은 여인을 구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 마음의 진실함을 보십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은 그 죄 많은 여자에게 "왜 값진 향유를 허비하느냐.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할 것이 아니었느냐?"면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정말 빈민구제의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입바른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사랑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입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사랑 대신 질투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차 있으면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쪽이 진실한 믿음과 사랑인가를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여자가 예수의 발을 머리털로 닦았건 손수건으로 닦았건 그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그 향유의 가치가 3백만 원이든 3천 원이든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자의 눈물, 그 마음의 표현, 그 진실의 표현에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용서와 구원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건에서 예수가 문제로 삼은 것은 바리새인 시몬과 제자들의 어두운 마음이었습니다. 사랑은 태양과 같이 밝은 것입니다. 제자들의 비난 속에는 질투가 있었습니다. 행동은 없으면서 그 여인의 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만 했습니다. 시몬과 제자들의 어두운 마음이 죄 많은 여인의 어두운 과거만을 보고 모든 것을 어둡게만 판단했습니다.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죄 많은 여인의 행동을 비판했지만 그 여자는 진실한 마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시몬은 자랑스러운 바리새인이었으나 어둡게 살고 어둡게 생각했습니다. 그 죄 많은 여자는 사회에서 떳떳하지 못한 어두운 과거를 가졌으나 이제 예수를 만나 진실되고 밝은 마음으로 사랑을 표현했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진실된 마음을 드러내어 밝은 내일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는 여자의 기름붓는 행동을 식사준비가 아니라 자신의 장례준비로 해석하셨습니다. 즉 함께 있을 기간이 많지 않은 예수를 위하여 살아 계신 동안에 자기의 최선을 다한 사랑의 표시가 옥합을 깨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행동과 실천이 있는 사랑, 내일을 바라보는 밝은 사랑을 예수는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불렀고, 그런 사랑이 예수의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받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죄 많은 여인임을 알고 계셨지만 그 지은 죄에 대해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그 여인의 진실한 마음과 행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과거로부터 밝고 새로운 구원받은 삶을 선포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 여인은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여인의 진실한 마음의 사랑과 예수의 사랑의 은총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사랑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시몬 게벨이란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가 어렸을 때의 체험담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이웃집의 배나무에서 몰래 배를 땄습니다. 그 이튿날 이웃집 할머니가 소년을 방문하여 큼직한 배 하나를 손에 들려주고 들고 온 장미꽃으로 부드럽게 소년의 뺨을 톡툭 두드렸다는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맞은 매가 아니었으나 장미꽃으로 맞은 소년의 뺨은 부끄러움으로 빨개졌습니다. 그는 울면서 말없이 할머니의 품에 안겼습니다. 잘못했을 때 반드시 매를 맞아야만 잘못을 깨닫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장미꽃으로 부드럽게 뺨을 맞았을지라도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하여 얼마든지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실을 자신의 어두운 마음속에 감추고 살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대해서는 혹독하게 질책하신 예수였지만 자신의 마음과 몸의 병든 것을 예수 앞에 솔직하게 드러낸 사람들에게는 '장미꽃 사랑'으로 그들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500만 원 빚진 자와 50만 원 빚진 자가 모두 탕감 받았을 경우 누구의 사랑이 더 크겠습니까? 물론 많이 탕감(용서)받은 사람이 감사도 크고 사랑도 큰 법입니다. 죄인인 여자를 비난하고 있는 바리새인 시몬이나 제자들은 자기 자신은 바르게 살았으므로 하나님께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단돈 5만원도 빚진 것이 없고, 그 죄 많은 여인은 500만원, 아니 그보다 더 엄청난, 그래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지 않았으니 하나님께 용서받을 빚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빚은 사랑의 빚입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이 그 모든 계명을 어긴 것보다 더 큰 죄인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고 선언하시고, 새 계명은 곧 사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랑의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이 여인의 많은 죄와 허물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원과 새 생명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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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선한 이웃이 되라(1)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25-37)


간교하기 그지없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고자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고 되물었습니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며 율법의 핵심을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며 자신의 질문에 대해 스스로 대답을 찾게 하셨습니다. 율법에 대해서만은 자신만만했던 그 율법사는 잘난척하며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고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율법사의 교묘하고 간교한 의중을 꿰뚫어보셨지만 그를 비난하지 않고 진지하게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이웃에 대한 정의(正意)를 스스로 깨닫고 답변하게 하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사는 율법의 핵심이 되는 "이웃 사랑"(레위기 19:18)에 "이웃"이란 과연 누구인가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를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내린 결론은 "이웃은 오직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진 내 동족, 유대인뿐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임신한 이방 여인이 길을 가다가 출산하기 위해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여인을 도와주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이방 임신부가 산통 끝에 산모나 아이가 죽을지라도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 여인의 출산을 돕게 되면 또 다른 이방인 하나를 세상에 출생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씽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 때 그는 엄격한 시크교도인 가족들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집안에서 지체가 높은 그의 훌륭한 삼촌이 그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고 부탁을 하는데도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집에서 쫓겨나 어머니가 싸준 독약이 든 도시락을 먹고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인간들이 세운 종교적 전통, 즉 교리나 율법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가족이 신봉하는 시크교의 율법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낳은 자식이라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 안에 하나님이 제대로 숨을 쉬고 계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종교의 노예가 되어서는 인간다운 사고와 행동과 정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당시의 유대 종교의 노예가 되어 있던 사람들을 그 멍에에서 해방시켜려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독점하고 제멋대로 해석하여 유대인들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독점한 율법의 종교를 튼튼하게 보강시켜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메었던 무거운 율법의 멍에를 벗겨 평안함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다시 만들어 이 새로운 종교에 사람들을 다시 메이게 하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본훼퍼의 말대로 "예수는 인간을 새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신 것은 율법의 핵심이 되는 "이웃 사랑"을 통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세우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류를 구하여 자유와 평안을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 사랑"이란 인간의 선한 행위로 "영생", 다시 말해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구원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사가 구원얻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라며 어떤 행위를 물었기 때문에 행위의 길로써 대답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라"고 하셨을 때 율법사는 자신의 전적 무능함을 절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사는 인간의 어떤 선한 행위로도 결코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잘난척했던 것입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이웃에게 은혜를 베푸는 위치에 있는 자라도 된 것처럼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분명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 떤다"고 했습니다. 이는 귀신들이 사랑은 못해도 하나님에 대해 누구 못지 않게 잘 알고 두려워 떤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행함이 없는 귀신들의 믿음이 헛된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요일 4:20)라는 말씀처럼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참 신앙은 이론만이 아니라 말씀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과 통찰력이 있다할지라도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하면 그의 지식이나 삶까지도 헛것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약4:16-17)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서 "선한 이웃",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의 비유 중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당해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당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피해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 이유는 율법에 있었습니다.
<레위기 2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
<민수기 19:11-13>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 그는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있음이니라"
시체를 만진 제사장은 부정하여 칠일 동안 정결의식을 행하여 정결케 되지 아니하면 성전에 나가 거룩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전 예배 의식을 위해 죽어 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쳤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에 대한 "이웃 사랑"보다는 종교 의식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은 정확했으나 행함이 없는 죽은 지식에 불과 했습니다. 율법을 세우고 유대 종교를 세우는데는 일조 했으나 사랑으로 생명을 구원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사랑의 요구보다는 그 고통을 외면하며 종교와 율법의 요구를 우선하는 죽은 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한번은 동학의 교조인 최수운 선생에게 한 중이 유교과 불교, 선(仙) 등 세 종교 중에는 어느 것이 비교적 이치가 깊고 광대무량한가고 물었습니다.
"높고 낮은 것이 없지요. 비해서 말한다면 죽은 사람에 대해서야 적고 큰 것을 비교할 수 있겠소? 살아 있을 때에야 사자의 힘이 강하고 개가 약하다고 할 수 있으나 죽고 난 후에야 사자의 죽음이 개의 죽음보다 무섭다고 할 수 있을 게 무엇이겠소? 진리라는 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혼을 넣어줄 수 없게 되고 그 시대의 정신을 살릴 수 없게 되면 죽은 송장과 별 다름이 있겠소?" 최수운의 이러한 대답에 중은 할 말을 잃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대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지 못하는 기독교는 죽은 송장을 놓고 종교의 우월성을 논하는 것처럼 의미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최선을 다해 생명을 구한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고 멸시하는 인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가 유대인이든 자기 동족이든 가리지 않고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내는데 아낌없이 최선을 다 했습니다.어떤 민족, 어떤 사람이고 간에 도움이 필요 중에 있는 사람은 그 모두가 우리의 이웃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한(좋은) 이웃"이란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시에는 언제라도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아낌없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미국 백인들은 집을 살 때도 백인들만 사는 좋은 동네, 좋은 이웃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네가 좋은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교회를 찾아 갈 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교인이 되어 좋은 교회, 좋은 기독교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교인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좋은 교인은 무엇보다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전 모 방송에서 고셔병을 앓고 있는 세 살 박이 주혜가 고통가운데 죽어 가는 모습을 방송했습니다. 프랑스 의사의 이름에서 유래된 고셔병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38명의 환자가 발견된 희귀병입니다. 증상으로는 비장과 간이 비대해지고 뼈가 자주 부러지며, 성장이 지연될 뿐만 아니라 악성빈혈에 신경계 이상 증세까지 보이는 치명적인 병으로, 이 병에 걸리면 뼈가 녹아드는 극도의 통증을 느끼면서 서서히 죽어 가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런데 비싼 치료비를 마련할 수 없는 주혜 부모의 얘기가 방송된 뒤 수많은 성금과 격려의 전화가 쏟아졌고 주혜에겐 치료의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방송 11개월 후 방송 기자가 다시 찾아가 만난 주혜는 병원치료를 받지 못한 채 너무나 처참한 모습이 되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신앙의 힘으로 완치하겠다는 부모의 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에 '좋은 이웃의 사랑'으로 얼마든지 죽어 가는 어린 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을 고집하는 부모의 무모함 때문에 한 생명이 꺼져 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는 것이 될지 몰라도 좋은 이웃, 좋은 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자신의 믿음으로 자식을 구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식의 생명을 담보 삼아 자기 믿음을 보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들 부모는 왜곡된 신앙으로 누구보다 가까운 이웃인 자기 자식에게 좋은 이웃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에 '강도 만나 고통가운데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부산에 이유정(여, 6세) 어린이는 속옷도 입지 않고 바지와 겉옷만 입고 누워 있는 채로 이웃 주민의 신고로 별견되었습니다. 어린 유정이는 주로 몽둥이, 혁대로 맞아 양쪽 눈이 심하게 부어 거의 감겨져 있었고 양쪽 팔과 다리는 피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마도 몽둥이로 심하게 맞아 두개골이 금이 가 물렁물렁할 정도였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렇게 된 지 벌써 1주일이나 되었는데 주민들은 유정이가 이렇게 심하게 학대받고 있는지 조차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학대는 유정이의 어머니가 4년 전 가출하고 아버지가 실직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를 자극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가출은 유정이로 하여금 말을 잃게 했습니다. 유정이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여 급히 입원시켰고 신경외과치료를 거쳐 소아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당분간 아버지와 격리시켜 보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IMF(아이엠에프)사태 이후 가정이 파괴되며 거리에 내몰린 어린 아이들, 14만 명이 넘는 결식 아동들, 유정이와 같이 학대받고 있는 수 만 명의 아동들, 치매에 걸렸다고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은 수많은 노인들, 이들 모두가 우리가 찾아가 사랑으로 돌보아주어야 할 이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이들'을 찾아가 십자가 희생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좋은 이웃, 선한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왕따"는 어른들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청소년 사이에는 보편적으로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은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에게 말도 하지 말고 모른 척하자'는 뜻입니다.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는 "왕따 현상"이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3일 아침, 제주도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호출기에 반장인 현 양의 목소리가 녹음되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현 양은 그날 아침,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습니다. 현 양이 남긴 유서에는 자신을 따돌린 친구들에 대한 원망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70명이고 6학년 전체가 14명인 작은 분교로 자살한 현 양은 6학년 여학생이 6명 사이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아서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친구들로부터 "왕따"가 된 아이들은 차라리 몇 대 맞는 것이 훨씬 맘이 편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학교에서 "왕따"가 되어 전학이나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 아이, 대인 공포증과 피해의 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왕따"인 아이들이 학년 이 바뀌거나 기회가 생기면 그 친구를 "왕따"로 만들어 보복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따돌리고 괴롭힘으로써 즐거움을 찾는 아이들. 이것이 바로 아이들의 미래를 다듬어 주는 학교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생각하면 부모와 선생님이 함께 관심을 가지고 적극 나서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학원에서 강도 만난 자는 "왕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왕따"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 주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을 힘입어 생명을 얻은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의 '강도 만난 자들'을 찾아가 '좋은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만약 교회가 지역사회에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이웃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가시고, 좋은 교회가 되어 고통받는 사람과 사회에 사랑과 생명을 불어넣는 시대의 소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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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선한 이웃이 되라(2)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하시니라(눅 10:25-37)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율법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그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율법교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되물었습니다. "네가 알고 가르치고 있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그러자 이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웃>을 말할 때 자기 동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자기들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자기들과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자기들과 같은 성경을 가진 사람들만을 <내 이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좁은 소견에는 아무리 이웃해서 산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이 같지 아니하면 <내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에 예수 믿지 아니하는 임신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임신한 여인이 해산이 임박해서 극심한 출산의 고통으로 극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런 때일지라도 그 예수믿지 아니하는 임산부를 도와주면 율법을 어기는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임산부를 도와주게 되면 예수 믿지 아니하는 이방인을 하나 더 세상에 출생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는 율법교사가 이 지경이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내 이웃>이 다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율법교사를 깨우치고자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위험한 길을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습니다. 마침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하는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강도떼를 만나 피를 흘리며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람을 피하여 급히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 사람도 그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가 타고 가던 짐승에 태워 가까운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음 날 그는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잘 치료해주시지요. 치료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제사장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레위 사람도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며 그들과 같은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상종하지도 않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의 <선한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고 해서 영생을 얻어 천당가는게 아닙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 사람이라고 해서 영생을 얻어 천당가는게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만난 사람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주지 아니하면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제사장이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게 되면 부정(不淨)하여 일주일동안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며, 직무를 수행할 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민19:11)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리니 (민19:12) 그는 제 삼 일과 제 칠 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제 삼 일과 제 칠 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민19:13)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강도만난 사람을 돌보아주다가 그 사람이 죽어버리게 되면 시체를 만진 결과가 되어 7일동안 부정하게 되므로 제사장은 성전에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제사장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제사, 의식(儀式)을 더 중요시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아픔과 고통보다는 예배드리는 것이 더 우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주일날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에 오시다가 뺑소니차에 치여 길바닥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이 제사장처럼 구약성경 말씀대로 그 사람을 버려두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구약의 하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약은 예수님에 대한 그림자, 상징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산다면 사지백체(四肢百體)가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유부남(有婦男)이 지나가는 예쁜 여자를 보고 참 예쁘다 하면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으로 죄가 되지 않지만, 만약 저 예쁜 여자하고 한번 잠을 자봤으면 하는 생각을 품었다면 그것은 간음죄에 해당합니다. 두 눈이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 죄를 범하게 되었기 때문에 두 눈을 빼어 내버리고 장님으로 천국 가는게 낫다는 것입니다.

"(마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아마도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산다고 하면 사지백체가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죽은 시체를 만지게 되면 7일동안 부정하다는 말씀을 문자대로 해석해서 살지 말고 상징적, 영적으로 해석해서 살아야 합니다. 시체가 부정한 이유는, 시체 곧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빚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부정하다는 것으로 죄의 심각한 영향력과 결과를 깊이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나 이제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의식적(儀式的)인 부정(不淨)은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일날 교회에 오시다가 뺑소니 차에 치여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려 온갖 애를 다 쓰다가 설사 그 사람이 죽었다해도 결코 부정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했는데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게다가 부랑인(浮浪人)이어서 치료비도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헌금까지 몽땅 털어 대주었다면, 그 날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하더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죽은 시체를 만져 부정한 자는 성전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은 죄를 범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시체를 만져 부정한 자는 3일째 잿물로 씻어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의 성전이 되시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깨끗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7일째 되는 날에도 다시 잿물로 씻어야 부정한 것이 완전히 깨끗해져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예수 믿고 회개하면 누구든지 구원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처럼 주일날 뺑소니차에 치여 죽어가는 사람을 버려두고 지나쳤다면 그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지나치게 잘 믿어 자신은 구약의 말씀까지 지킨다는 구실로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는 <선한 이웃>이 되지 못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정통파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남을 돕는 일보다도 교회에 더 큰 관심을 표시하고, <선한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소위 주의 종에게 물질을 바치면 주의 종의 축복을 받는다해서 <선한 이웃>이 되어 주기 보다는 자신의 축복을 위해 주의 종에게 물질을 아낌없이 바치는 무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고자 주의 종에게 물질바치는 사람은 사기 당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축복을 받고자 하시면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가난하고, 힘없고, 갇히고, 병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곧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 즉 영생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25: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다음으로, 레위 사람도 <선한 이웃>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레위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남을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미국 뉴욕 어느 아파트 단지 한 복판에서 젊은 여인 하나가 괴한에게 칼에 찔리는 것을 아파트 창문에서 세 집이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괴한의 칼에 마구 찔려 살려달라고 부르짖는데도 어떻게 손을 써 보려고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구경만했지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발 벗고 나서서 괴한으로부터 그 여인을 구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최후에 우리들을 심판하는 것은 우리가 교리나 율법 등을 잘 지켰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생활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위해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 살았느냐, 아니면 남을 위해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닙니다. 아니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포기하고 남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뺑소니 차에 치여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교통법규를 뒤적이거나, 교리나 율법을 따지거나, 그 사람의 신앙 유무를 따지거나, 종교가 무엇이냐를 따지게 되면 <선한 이웃>이 되지 못하고 영생에 이르지 못합니다. 아파하고 고통당하고 죽어 가고 있는 <강도만난 자>가 누구이든, 그 과실이 누구에게 있든 사마리아 사람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털어서 자비를 베푸는 <선한 이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민족이든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 모두가 다 우리의 이웃입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누가 우리의 이웃이냐?"고 교회에 나와서 묻지 말고 세상에 가서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보이거든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의 이웃임을 알고, 그 사람을 하나님처럼 섬기시고 자비를 베푸는 <선한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장차 심판을 이기고 자랑스러운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자비, 긍휼을 베푸는 <선한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약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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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3-21)


1. 구약성서에 재산분배법에 대한 이런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 받는 자와 미움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미움 받는 자가 먼저 아들을 낳아 그녀의 소생이 장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재산을 그 아들들에게 상속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사랑 받는 자의 아들인 차남을 장자 삼아서 안되고 반드시 그 미움 받는 자의 아들을 참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며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1장 15절-17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 유산 상속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한 사람은 바로 이 구약 율법에 기록된 재산 분배법에 불만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움받는 자가 낳은 아들이 형이어서 그가 두 몫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가 낳은 아들이지만 차남이어서 한 몫밖에 받지 못한 것이 못내 불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로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그 사람에게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바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셔서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보실 때, 그 사람이 마음에 탐심을 버리지 아니하면 결국 파멸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하는 사람이나 탐색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골 3:5, 고전 6:9,10) 죄에는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는데 용서받지 못하고 죽을 죄는 다음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즉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호색 등입니다.(초오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에서) 여기서 보면 탐심은 기본적으로 용서받기 어려운 죽을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언에도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언 1:19)고 말하고 있습니다. 탐심의 결과 파멸에 이른 경우를 우리 주변에 실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문학을 통해 그 단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메리카의 비극,An American Tragedy>(드라이저,Theodone Dreiser)의 주인공은 가난한 여전도사의 아들 클라이드 그리피스(Clyde Griffths)입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가난한 가정의 종교적인 환경에 반발을 느꼈고, 정신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더 욕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약방의 점원 생활로부터 출발해서 호텔의 보이로 전환됨에 따라 그의 순진했던 마음은 점차 사라지고 온전히 세속적 욕망 속에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22세의 나이로 시카고에 진출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셔츠회사를 경영하는 숙부의 인정을 받아 얼마 뒤에는 과장으로 승진합니다.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그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직공 로베르타(Roberta)와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이 무렵부터 클라이드는 이 지역의 상류사회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서 갑부의 딸 손드라(Sondra)와 새로운 교제를 하게 됩니다. 한편 로베르타는 클라이드의 자식을 임신하여 정식결혼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출세와 성공의 꿈에 눈이 먼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나 자식 또는 도덕성 따위가 문제되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베르타는 그의 입신출세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요 그의 진로의 무거운 짐이 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베르타를 죽여 없애기로 결심하고 산 속의 호수로 그녀를 유인하여 뱃놀이를 하다가 사고를 가장 보트를 뒤엎어 그녀를 물 속에 빠뜨립니다. 구해달라고 애걸하는 그녀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못들은 척 호숫가로 헤엄쳐 나오고 맙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깨끗이 끝난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곧 경찰에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전기의자에서 22년의 짧은 생을 끝맺고 맙니다. 전통적 종교와 사회에 반항한 한 젊은이가 성공의 꿈이라는 욕망 때문에 비극적인 자멸을 초래하는 과정을 그린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믿음이나 도덕의 힘을 인정하지 않았던 주인공 클라이드는 성공 또는 출세만 할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을 딴 사람에게 주더라도 그것은 전혀 문제되질 않았던 것입니다. 갑부의 딸 손드라와 알게 되면서 입신출세의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다음과 같은 자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 미모! 그녀가 살고 있는 부와 사회적 지위의 그 세계!....나와 같은 가난한 청년이 그러한 지체높은 자와 접촉하는 것이 악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출세의 꿈과 성공의 야망 앞에 사랑과 도덕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지만 결국은 그로 인해 살인과 자멸을 초래한 것입니다. 이런 비극적 현상은 19세기 이후 아메리카의 청년들 사회에서 수없이 일어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풍조와 구조로 틀이 잡혀가고 있는 사회도 문제지만, 정신적 도덕적 목적과 창조적 명성을 내동댕이치고 물질적 욕구와 쾌락과 출세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우리 개체들도 문제입니다. 이런 욕심은 희생과 파멸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줄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람의 생사회복은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람은 그 존재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소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 소유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존재 가치가 평가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구하며 자기 중심, 자기 사랑에 치우쳐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맙니다.

2. 이어서 예수께서는 사람의 행복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음을 깨우치기 위해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어느 부자가 곡간에 쌓아둘 곳이 없을 만큼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큰 곡간을 짓고 쌓아 두어 평생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리라고 마음 먹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경고하셨습니다. 비유 끝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기적인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욕심(탐욕)은 자기만을 이롭게 하고자 힘쓰는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 욕심(탐욕)을 억제하지 못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탐욕은 삶의 방향이 자신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썩어질 것으로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 믿게 되면 삶의 방향이 자신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의 삶은 빛 가운데 밝아지며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자신의 아픔과 고통, 자신의 괴로움과 슬픔, 자신의 불행한 처지만을 생각한다면 그는 어두움과 낙망, 우울증에 빠진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삶의 방향을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되면 이기적이 되며 몸과 마음, 영혼 마저 병든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 믿게 되면 자신을 생각지 않고 시야를 넓혀 하늘을 바라보며 이웃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이 예수 믿게 되면 자신의 무겁고 어려운 짐보다 인류의 무거운 짐을 대신 걸머지신 예수님과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무거운 짐을 운반할 때에 그 무거운 짐을 긴 막대 한쪽 끝에 매달고 그리고 막대기 다른 쪽 끝에는 그 짐과 비슷한 무게의 돌을 매달아 어깨에 매어 운반한다고 합니다. 양쪽 끝에 비슷한 무게의 짐이 있으면 한쪽에만 무거운 짐이 있을 때보다는 균형이 잘 잡혀 덜 무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여러분, 다른 사람의 짐을 져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무겁고 힘든 짐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이 가볍고 쉽게, 그리고 평안하게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무거운 짐들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이웃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는 생활입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의 삶이 한층 기쁘고 소망이 넘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부요한 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이 예수 믿게 될 때에 그의 삶은 위로 향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살게 됩니다. 그는 모든 일을 영원의 시각에서 봅니다. 즉 그는 사물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봅니다.  예수 믿게 되면 항상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어려운 일들이 쉬워지고 무거운 일들이 가볍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 믿게 되면 이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삶의 방향이 변화되었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은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삶의 방향을 낮은 곳에 처해 있는 이웃에게 바꿔 하늘 나라에 부요한 사람을 하나 소개합니다.(경향신문 2월 0일자)
100억 원대의 부동산 갑부의 막내아들로 곱게 자라 명문대를 졸업한 20대 젊은이, 김영진씨는 그의 장래가 보장된 사람으로 얼마든지 인생을 평안히 즐기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낮은 곳」으로 향했습니다. 지난해 8월 고려대 불문과를 졸업한 그가 부랑인과 장애인을 돌보는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며 가출해서 무작정 충북 음성 꽃동네에 들어갔습니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마흔이 넘어서 본「늦둥이」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너무나 귀한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69)는『차라리 꽃동네에 돈을 기부하고 남들처럼 살라』며『그 일을 하면 다신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꿈을 접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고통받는 이웃>들의 곁에서 평생을 살겠습니다. 나의 길을 가렵니다."며 올 3월 개교예정인 충북 음성 꽃동네 현도 사회복지대 (총장 오웅진 신부)에 입학했으며 학교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지만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꽃동네 인곡 자애병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신부전증으로 시력을 잃은 채 버려진 50대 아주머니, 폐결핵을 앓는 40대 아저씨, 중풍으로 말조차 못하는 할머니... 하루 10시간씩 환자들의 대소변 받아내기, 식사 수발, 목욕시키기.... 몸은 파김치가 됐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가벼웠습니다. 김씨는 대학 입학 직후인 91년 우연히 가입한 자원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소외된 이웃」에 눈을 뜨게 됐다며 이렇게 말합니다.『알코을 중독자인 아버지와 집나간 어머니 때문에 중2때부터 고학을 시작한 대학 친구, 자취할 돈조차 없어 친구 집을 전전하는 같은 과 동기, 고아원에 버려져「엄마」만찾는 네살배기를 보며 갈 길이 어렴풋이 보이더군요. 사실 그 전에는 봉사가 뭔지도 몰랐습니다』그의 손길이 닿고 그와 눈을 맞추던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며 보여준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는 갈수록 그의 갈 길을 뚜렷하게 비춰주었습니다. 김씨는 그들에 대해『내 삶의 스승』이라고 말하며,『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준 그들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한 자는 본문 성경의 부자처럼 삶의 목표와 방향이 오직 자신에게 집중되어 탐욕에 빠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에서 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찮게 보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일지라도 그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그가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영접하고, 그가 헐벗었을 때에 좋은 옷을 입혀 주고, 그가 병들었을 때와 갇혔을 때 평안하고 친절하게 돌보아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행한 것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의 삶의 모습이며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입니다. 주일성수생활, 십일조 생활, 절기 준수 등을 철저히 잘 지키는 사람을 두고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의인이라고 하지 않고 그 마음과 생활이 낮은 곳으로 향하여 사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스페인 격언에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래 전에 우리 나라 장례식 풍습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시체에 수의를 입히고 그 수의에 주머니 하나를 달아 주고서 그 주머니 속에는 시체의 손발톱을 깎아 담고 저승 가는 노자 돈으로 쓰라고 십 원 짜리 몇 개를 담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저승 가는데 노자 돈이 필요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땅 한 평, 기도원 하나, 은행통장 하나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땀방울 하나, 피 한방울 남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인류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눅 12:34)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작은 자 하나를 가장 큰 보물로 삼으시고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이 그 낮은 곳으로 향하므로 장차 하늘 나라에 부요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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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말석에 앉으라!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0:25-37)


1775년 가을이었습니다. 볼티모어 호텔에 허름한 농부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호텔 주인은 이런 사람을 받으면 호텔의 품위가 떨어질 것 같아서 방이 없다고 했습니다. 남자는 말없이 쫓겨나 더 작은 여관에 투숙했습니다. 볼티모어 시내에 곧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토머스 제퍼슨 부통령이 갑자기 볼티모어를 방문하여 어느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당황한 것은 호텔 주인이었습니다. 자기가 거절한 손님이 부통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부통령에게 지배인을 보내 사과하고 가장 좋은 방이 준비되었으니 불편한 여관에 있지 말고 오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제퍼슨 부통령은 "여기도 훌륭합니다. 허름한 농부를 거절하는 집이라면 부통령도 거절당해 마땅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1세기에는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너무나 초라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학문도 집안 배경도 없는 목수의 아들이 그나마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저항없이 죽었으니 그를 믿는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미련하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 초라함, 그 약함, 그 땀과 눈물과 피, 홍포에 쌓인 패배자 같은 그 예수가 곧 자기를 비우신 하나님, 낮은 데로 내려오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낮은 데로 내려오셨을 뿐만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지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기 위해 사람의 노예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빌2:9) ...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1950년대 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던 라인흘드 니버 교수는 인간의 타락은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권력의 교만이요, 그 다음은 지식의 교만이요, 그리고 덕망의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권력을 잡기까지는 가장 약한 위치에서 자신의 당선을 호소하며 매달리다가도 일단 권력의 정상을 정복하고 나면 자신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마침내 그것은 살아 있는 우상이 되어 자신을 그 자리에 치켜세운 사람들 앞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는 "사다리 꼭대기에 다 올라간 사람은 아래만 내려다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내려다본다는 말입니다. 절대화된 권력은 모든 영광은 자신에게 돌리고, 모든 과오와 책임은 수하 사람에게 추궁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는 절대 무오의 하나님 처럼 처신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권력이 절대화되면 될수록 더욱 신경질적이 되고 오만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민심을 외면하거나 민심과 동떨어진 판단과 행정을 자행하게 됩니다. 배운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학설이나 지식에 대해 절대적 확신을 가진 나머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지식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 살아 있는 지식이 되고 보다 진리에 가까운 지식이 될 수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식으로 인류에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지식의 노예가 되거나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오만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덕이 높은 사람들은 분명히 고매하고 존경할 만한 인격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만사를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볼 줄 알지만 자기 자신의 장단점은 예외로 여기거나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교만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게 하기 때문에 언제 폭발할는지 알 수 없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명 비평가들 중에는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과도한 성장에 있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도한 성장은 질의 저하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은 마침내 껍데기만 치장하고 속이 빈 인간과 사회를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이 저주에 합당한 결말을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소돔 성 멸망의 이유를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 행하였음이라."(겔 16:49-50) 즉 경제적인 풍요와 환경의 태평함이 그들을 교만하게 하였고, (곧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하였고) 이 교만 때문에 불의 심판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상좌에 앉지 않고 말석에 앉는 영적인 겸손을 가졌다면 멸망을 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나라 백성이 영광에 이르고자 한다면 지도자들은 물론 국민 모두가 말석에 앉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최상류 계층인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눅 14:1)에 초대받았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종교 생활면에서도 가장 바르게 산다고 공인된 바리새인 최고 지도자가 초청한 모임이었습니다.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도착하는 손님들이 자리를 잡는데 저마다 상좌를 택하는 장면을 보고 예수께서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4: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눅14: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눅14: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이 말씀의 핵심은 "말석에 앉으라."는 것으로 주어진 결론은 "(눅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석에 앉은 자'는 남보다 못하고 열세에 있는 자들입니다. 권력이나 경제 능력이 열세인 자, 지식이 열세인 자, 덕망도 열세인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라새인들은 "(마23: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마23:7)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이들을 두고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오늘 본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께서는 열세한 사람, 남보다 못한 사람, 낮은데 처한 사람들을 돕고 격려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비방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눅5:31)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눅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비방을 일축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석에 앉은 자 편에 서 있음을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병든 자들과 불구자와 죄인들과 창녀와 가난한 자들, 곧 남보다 못하고 불행한 조건에 있는 자들의 친구가 되시고 도와주고 격려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부족할 때, 죄를 지었을 때, 능력이 없을 때, 병들었을 때, 노쇠하여 지쳤을 때, 차별을 받고 핍박을 받을 때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한다."는 말씀도 같은 진리입니다. 야곱은 에서에 비해 못한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 회개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된 줄로 아는 자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말석에 앉는 겸손한 정신적 자세를 가질 때 변화가 있습니다. 예수의 8복을 한 마디로 종합하면 "말석에 앉은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이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8복에 나오는 마음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애통하는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은 실로 말석에 앉은 자들을 가리키는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마지막 심판하실 때, 그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양과 염소를 분별하실 때 양을 그 영광의 오른편에 두실 것입니다. "(마25:34) 그 때에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며 축복하셨습니다. 여기 "오른편에 있는 양들"을 축복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자 이번에는 그 "오른편의 양들"을 성경은 "의인들"로 호칭하며 그들이 의아해 하는 반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의인들"의 이같은 반문에 예수께서 "(마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곧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되며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등을 말합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율법과 계명,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자가 "의인"입니까? 주일성수, 십일조생활하며 예배를 잘 드리면 "의인"이라고 했습니까? "의인"은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며,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며, 헐벗은 자에게 옷 입히며,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아 준 낮고 천한데 거한 사람들이 바로 "의인들"입니다. 링컨의 일화 한 토막입니다. 옛날 백악관 곁에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가끔 울타리까지 나와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구경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몇 명의 아이들이 한 소년을 놀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몹시 허름한 차림이었는데 아빠는 전쟁에서 전사하고, 엄마는 청소부였습니다. 구두를 닦아 반질반질하게 해서 신고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으나 구두가 너무나 낡아 닦을 수도 없어 놀림감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겨우 아홉 살 난 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존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존의 새 옷과 새 구두, 여동생의 새 옷과 새 구두, 그리고 많은 식료품과 석탄을 링컨 대통령이 보냈던 것입니다. 존은 새 구두를 신고 자랑스럽게 등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학생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대통령이 존의 교실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 구절 하나를 소개하겠다면서 칠판에 다음의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말석에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허리가 낮은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두고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차별없는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나 그의 시선은 낮은데 처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석차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권력의 자리에 있었으나 권위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못하고 나라 살림을 거덜낸 김영삼 대통령을 높은 자라고 국민들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습니까? 최고 지성의 자리, 서울대학교에 재직하며 교수임용비리로 호화주택에 살며 미화 5만불, 일본돈 60만엔, 황금 원앙새 한 쌍, 한화 1억여원을 거머쥔 어느 치과대학 교수를 높은 자로 사랑하고 존경합니까? 자기 회사 사원들을 머슴으로 취급하며 부정대출로 나라의 경제를 멍들게 한 한보 그룹 회장을 높은 자로 사랑하고 존경합니까? 이들은 지금 국민들 발바닥 밑에 깔려 있습니다. 세상에서 권력이나 명예, 지성이나 경제 능력이 높은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높인다고 높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혜자는 말합니다.

"(잠25:6)...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미국의 역대 대통령 부인들 중에 국민의 존경을 가장 많이 받았던 사람은 제4대 대통령 매디슨의 부인 돌리 매디슨(Dolly Madison)이었습니다. 한 번은 신문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매디슨 부인은 가식이 아니라 정말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습니다. 사랑이나 존경을 받으려고 해본 일도 없습니다. 단지 젊어서부터 혼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교훈을 따라 되도록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해 보려고 힘쓰는 것뿐입니다." 이 평범한 대답 속에 사실은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비결, 다시말해 높아지는 비결이 들어 있습니다. 높은 자나 낮은 자, 큰 자나 작은 자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할 만한 대상을 고르지 않는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왜 높이 존경을 받고 있습니까? 철학, 신학, 음악, 의학 등의 네 부분의 박사 학위를 가졌기 때문입니까? 박사 학위를 네 개나 가진 사람이 아프리카 원시림에서 흑인들 속에 묻혀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꼭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이때 슈바이처는 "나를 동정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라고 했습니다.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수 십 만의 지극히 작은 자들의 생명을 위해 예수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인을 감동시킨 `코리아 마마' 김연응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 실려 있습니다. <적당히 거적을 둘러 만든 움막들이 산재해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사우스 센트럴. 미국에서도 대표적인 홈리스(노숙자) 밀집촌이다. 이곳에 사는 '코리아 마마' 글로리아 김(한국이름 김연응·57)선교사에게 지난 19일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2개월전 김씨의 교회에  화재가 났을때 불을 꺼준 로스앤젤레스 소방관들이었다. 소방관들은 김씨에게 1천달러 짜리 수표를 전달했다. 가난하고 위험한 동네에서 11년째 자선 사업을 벌이고 있는 '코리아 마마'가 화재로 집을 잃었다는 사연에 한 독지가가 보내온 선물이었다. 소방대장 스티븐 루다는 김씨에게 수표를 건네면서 "그가 아주  유명한 작가라는 것 외에는 말할 수 없다."며 웃었다. 김씨는 "너무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20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는  하얀 머리에 작은 몸집의 김 선교사가 소방관들에 둘러싸여 활짝 웃는 사진이 실렸다. 지난해  12월 26일 오전 발생한 원인 모를 화재로 김 선교사에게는 교회이면서 동시에 집이고 사무실이던 건물이 모조리 타 버렸다. 소중한 사진 몇장 외에는 세간살이까지 모조리 불길에 잃은 김 선교사는 "홈리스(노숙자)들을 위한 간이 휴게소가 없어졌다."며 안타까워 했다. 김 선교사는 매일 새벽 4시면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간다. 자원 봉사자 몇몇과 샌드위치와 따뜻한 수프 2백인분을 준비한다. 마련한 음식을 차에 싣고 나서면 거리에서 밤을 보낸 노숙자들이 '코리아 마마'를 부르며 김 선교사 일행을 맞이한다. 김 선교사가 돌보는 부랑자 식구들은 백인과 흑인, 히스패닉 등 피부색을 초월해 있다. 국제결혼에 실패했거나 해외입양후 불행해진 한국출신 동포들도 여럿 있다. 김 선교사는 지난 76년 홀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직업은  간호사였다. 너도나도 독일이나 미국으로 떠나던 시절이었다. 몇년 후엔 어머니(지난 90년 작고)까지 모셔갔다. 김씨는 "너무너무 외로워서 남을 돕게 됐다."고 말한다. 두 모녀가 함께 살면서 어머니 앞으로 나오는 연금을 꼬박꼬박 모았고 그 돈이 모이면서 자선사업을 시작했다. 이번에 불에 탄 시온복음선교교회는 허름한 창고를 개조한 것이었다. 당초 목표로 삼았던 노숙자 보호소를 시작하려면 30만달러가 필요하다. 샤워장까지 딸린 편안한 휴식장소를 노숙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김씨의 꿈이다. 사연이 알려지면서 성금도 2만달러 가량 모였다. 화재 이후 웨스트 136번가의 더욱 작은 교회로 거처를 옮긴 김씨는 현재 부랑자 2명과 함께 생활하며 힘찬 새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부랑자, 노숙자,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 해외입양에 적응하지 못하고 버림받은 사람들, 그들이 백인이든 흑인이든 인종을 차별하지 않고 11년 동안을 한결같이 따뜻한 스프와 샌드위치로 대접하며 잠잘 곳을 마련해 준 '코리아 마마'의 손발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코리아 마마'를 낮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코리아 마마'는 남을 섬기는 종이 되어 높이 사랑과 존경받는 그리스도의 작은 지체인 것입니다. 내가 약할 때, 죄인일 때, 말석에 앉았을 때가 큰 은혜받을 기회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잃은 양을 찾으러 왔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셨습니다. 울타리 속에 있는 안전한 양, 배부른 양이 아닙니다. 길 잃고 헤매는 양, 문제가 있는 양, 위험에 노출된 양, 혼자 길 잃고 외롭게 된 양, 지쳐서 우는 양, 이들 말석에 처진 양들에게 기쁜 소식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이 땅에 종의 형체를 입고 오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는 그의 지체들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곳은 골고다 십자가였지 로마 원로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권력을 지향하면 결국 땅에 떨어져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일용할 양식이나 구하라고 했지 은행으로 증권가로 달려가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이 남기신 것은 땅 한 평, 금붙이 하나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물질 지향적이 된다면 결국 버림받고 말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곳, 만나신 사람들은 로마의 상류사회나 이스라엘의 상류계층이 아니었고 병들고 가난하며 버림받은 소외계층의 낮은 데 거하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야할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낮은 곳입니다. 교회가 찾아가야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앉아야 할 곳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석입니다. 교회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말석에 앉아야만 주어진 사명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평강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항상 말석에 앉아 겸손히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되어 사랑과 존경받는 교회, 높이 들림받는 교회, 주님의 영광스런 오른편에 이르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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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망대를 준공하라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5-33)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께서 로마 제국을 둘러 엎고 영광스럽게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러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들의 잘못된 생각을 익히 잘 알고 계신 예수께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 자기의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할 각오와 십자가의 고난도 마다하지 아니하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드는 엄청난 대가와 비용을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농부가 농사기구와 곡식을 보관하고 도둑으로부터 자기 재산을 지킬 수 있는 망대가 필요했습니다. 이 농부는 망대를 세움으로 얻어지는 여러 가지 유익함만을 생각하고 망대 건축에 드는 재료와 비용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공사를 시작해서 기초 공사를 마치었습니다. 그런데 망대의 골조가 올라가기도 전에 공사비가 다 떨어져서 공사 자체를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짓다만 망대는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돈만 날리고 동네에서도 신망을 잃고 말았습니다. 비웃음거리만 되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예수를 믿는데 철저하게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다가 도중에 그만두게 되면 짓다만 망대처럼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비웃음거리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문제가 참으로 중대한 것이어서 또 다른 비슷한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군사 1만을 거느린 어떤 임금이 2만 군사를 거느린 이웃 나라와 전쟁이 하게 되었습니다. 현명한 임금이라면 과연 1만의 군사로 2만의 군사와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를 먼저 심사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 서게 되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신속히 사신을 보내 평화협상을 벌이든지 아니면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항복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이와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가가 되지 못하리라."
1. 예수 믿는 여러분, 이왕 믿으려면 철저히 믿으시고 참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이렇게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여기 검(칼,劍)은 분명 폭력의 도구입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것이 물질이나 인간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고통과 아픔을 주는 검이 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는 고통과 아픔을 각오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믿는데는 애정의 단절이라는 대가도 치룰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삶에 있어 가족간의 애정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보다도 가정을 창조하신 분이며 가정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결코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사랑으로 이룩한 부부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관계가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결국 예수 믿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관계, 가족 관계가 깨어진다 하더라도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가, 가족 관계가 인간의 생명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또한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가족관계, 남편과 아내, 부모 자식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지 천국에서는 가족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관계보다 우선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는 영원한 것이고 인간관계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영원을 위해서는 일시적인 것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 청년들은 결혼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는 것이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해 보다 더 현명한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후에 하나님이냐, 가족이냐를 선택해야하는 값비싼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경우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이왕에 예수 믿기로 작정했으면 전심전력을 다 하여 믿으라는 것입니다. 신학자 마틴 마티는 116년 된 성야고보 교회가 86년 교인수 불과 3명에 이르자 교회문을 닫는 마지막 예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박장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고 밤을 새워가며 온 정신과 있는 돈을 다 털어놓듯이 사람들이 자신의 귀중한 영혼과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정성을 기울인다면 이 교회는 문을 닫을 것이 아니라 차고 넘쳤을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철저히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다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질병, 사업의 문제, 남편 아내의 문제, 자녀 문제 등 이런 것이 십자가인가? 이러한 것들은 십자가가 아니라 "짐"들입니다. 때때로 짐은 벗어 던져 버릴 수 있으나 십자가는 짐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을 부인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의 것(my-self things)을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my-self)을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것을 부인하는 것(self-denial)은 자기 중심적인 것이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denial of self)은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죽음 외에는 다른 뜻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형의 도구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육체적인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 피흘릴 각오를 가지고 이 악한 시대에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예수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헌신, 일사각오의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남김없는 철저한 복종을 뜻합니다. 자신의 생명, 의지, 욕망, 꿈, 소망 등 모든 것을 주님께 두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살아 통치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으로서 근본적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가 있다면 이제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생명은 나의 모든 것과 더불어 모두 주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내가 나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까지는 예수께서 나의 삶에 통치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통치자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자신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냐 입니다.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수 있습니다. 값비싼 삶은 값비싼 희생을 요구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값비싼 삶은 영원한 삶입니다. 영원한 죽음에 처한 인간을 영원한 삶으로 이끌기 위해 그래서 하나님은 값비싼 희생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결코 값싼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값비싼 희생의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값없이 받는 값비싼 은혜요, 대가없이 받은 고가(高價)의 선물이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따라가는 참 제자가 되시어 여러분의 삶이 가장 값있게 변화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해서 모두가 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예수와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어도 참된 제자,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린 참된 제자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어느 사람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대단한 결심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9:58)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 믿는다고 방 한 칸, 쥐꼬리만한 권세 하나 보장해주기는커녕 있는 것 마저 몽땅 포기해야 되는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따를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부자 청년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의 중심을 보시고 중대한 결단에 방해가 되는 모든 소유물을 처분하고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이 가지고 있는 부(富)를 문제삼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있어 '장벽'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그 장벽이 돈, 명예, 가족, 지식 등 무엇이든지간에 예수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과감히 벗어던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이 가난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거짓된 안전'에서 구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사람들은 부의 축적이 생명을 안전 보장하고 근심 걱정을 없애주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축적된 부를 잃을까 하는 염려만 더 할 뿐입니다. 가난 그 자체가 덕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예수를 따라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가난도 불사하라는 것입니다. 부가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데 있어 장애물이 된다면 그 부는 악한 것입니다. 그 부자 청년은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소유를 다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된 사람의 아름다운 축복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의 만족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에 있지 않고 바로 주님께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축복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같은 경험들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앞선 그 부자 청년의 삶은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국에 대한 아는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그의 삶은 소유한 돈으로 살 수 있었던 '먹고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제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었고 또 만족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삼는 것은 부가 아니라 그 부에 대한 '사랑'입니다.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사람의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면 모든 것이 더하여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소유보다 존재를 더욱 더 귀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이왕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으면, 이왕에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눅9:62)고 했습니다. 결단을 내리려거든 지금 여기서 철저히 계산하고 단호하게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눅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보면, 예수 믿는데 주저하거나 뒤돌아보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습니다. 단호하고, 돌이킬 수 없는, 그리고 명확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혹한을 피해 남쪽으로 떠나려고 준비하는 오리떼들은 늦은 가을 밤에 모든 준비를 갖추고 파티를 마련했습니다. 큰 농장에 모여 곡식을 잔뜩 주워 배불리 먹으며 내일부터 펼쳐질 고통의 장도를 위해 힘을 축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출발의 순간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때 큰 오리 한 마리가 주저하며 말했습니다.
"이 곡식 알들은 참 먹기가 좋으니 나는 좀 더 남아 이것을 충분히 먹고 떠나기로 했어."
다른 동료들이 떠나고 난 뒤 맛있는 곡식을 마음껏 먹은 그 오리는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다가 며칠이 지났습니다. 오리는 매일 습관처럼 "내일 나는 남쪽을 향해 날아야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행은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세찬 겨울 바람이 천지를 뒤덮고 더 이상 거기에 머무를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오리는 그제서야 비로소 날개를 펴고 농장 마당을 가로질러 날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리는 날 수가 없었습니다. 살이 너무 쪄서 하늘로 날아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결단의 순간을 상실한 오리는 남쪽으로 향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입니다. 후회하는 오리에게 매서운 북풍만이 불어닥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농장 주인의 밥상에 오리요리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기를, 철저히 믿기를 주저하거나 하루 하루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없는 인생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 시대에 백성들에게 질책하여 부르짖습니다.
"(왕상18:21)...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여호수아가 여러분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2차대전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군들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포로들이 계곡의 큰 다리를 건설하는데 투입되었습니다. 포로 중 가장 높은 계급을 가진 니콜슨 대령이 부하들에게 모든 정성과 기술을 다하여 멋진 다리를 만들자고 독려했습니다. 그것은 성취의 기쁨을 포로들에게 가지게 함으로써 포로생활의 좌절감을 극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다리가 완성된 후 니콜순은 몹시 놀랐습니다. 동맹군인 미군이 이 다리폭파를 위한 특공대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포로 생활 중에 하나의 성취감을 만족시키는 작품으로 다리 건설을 가볍게 생각했고, 실의와 좌절감을 임시로 극복하는 방법으로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적군 일본의 군사 목적을 성공시키는 이적행위를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포로들에게 성취감을 안겨주었던 <콰이강의 다리>는 무참하게 폭파되고 맙니다. 니콜슨 대령은 뒤늦게나마 깨닫고 절규합니다. "내가 뭘 했지?" 일순간에 무너져내린 콰이강의 다리의 처참한 모습에 군의관이 비틀거리며 "미친 짓이야, 미친 짓이야"를 외치며 영화 <콰이강의 다리>는 막을 내립니다.
일생일대의 최선을 다해, 그리고 포로들의 생명을 희생해 가며 완공한 <콰이강의 다리>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다리를 완공했던 니콜슨 대령처럼 "내가 뭘 했지?"라며 후회막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일생을 통해 이루어놓은 일들이 <콰이강의 다리>처럼 일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마는 어리석은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선택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예수 믿고 예수의 참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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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돌아온 탕자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11-32)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부흥사인 이성봉 목사의 설교집에서 읽은 내용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떤 부자가 상처(喪妻)를 했는데 새 장가를 들어 젊은 색시를 데려 왔습니다. 여자가 시집 온 날부터 남편의 속을 많이 썩이는데, 밥을 하라면 죽을 쑤고 죽을 쑤라면 밥을 하고 가라면 오고 오라 하면 가고 앉으라면 서고 서라면 앉는 것입니다. 아마 나이가 어려서 그렇겠지 하고 모든 것을 참았더니 나이가 들고나니 꼴에 외간 남자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간부(姦夫)를 두고는 볼사납게 굴기 시작합니다. 여러 번 권면을 하나 조금도 회개하는 빛이 없고 오히려 이혼을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허락하지 않으니까 하루는 간부와 공모를 하고 남편의 밥에다 독약을 넣어 처치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남편이 하루는 밥을 먹다가 토하고 구사 일생하였습니다. 여자를 불러 책망을 하니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반항을 합니다. 할 수 없어 간부를 책망하고 어서 내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가서 잘 살라고 놓아주었습니다. 간부는 손에 손을 잡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가서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악으로 맺어진 사랑은 오래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나이는 그 여자를 술집 유곽에다 팔아먹었습니다. 그 여자는 불의의 씨를 배고 만삭이 되어서 술 단지를 부둥켜안고 오고 가는 뭇 사람에게 술을 팔고 육체를 팔아 비참한 고통의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본남편이 일본을 갔다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오랜만에 그 여자를 보고 너무 반갑고 감격하여 달려가서 "너 이거 웬일이냐?" 하고 손목을 확 잡으니 그 여자는 깜짝 놀래어 가만히 있다가 눈을 흘기며 "무얼 하러 왔소?"하며 퉁명스럽게 내뱉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를 보러 왔다." "이것을 보면 뭘 해요?" "너 내 품 떠나더니 잘 되었구나." "잘됐건 못됐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대관절 얼마에나 팔려 왔노?" "물어 보구려," "여보, 주인! 이 여자 얼마에 사 왔소?" "돈 많이 주었지요" "여보시오 이 여자 도로 물러 주시오. 이 여자는 내 아내요" 하고 많은 배상금을 치르고 찾아내었습니다. 그 여자 말하기를 "저는 데려다 무엇해요?" 했지만 "어서 가자.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아닌가?" 하고 데리고 한국에 건너 와서 그 간부(姦夫)의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그 남편은 그 아이를 제 아이보다 더 사랑하고 귀여워하며 그 더러운 여자를 전보다 더욱 사랑하여 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누구요? 이 여자는 바로 나를 비롯하여 모든 인생의 모습을 나타냅니다.》세상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여자의 삶은 불행 그 자체였으나 남편의 지극한 사랑으로 집에 돌아와 참된 행복을 찾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 역시 아버지 집을 떠난 자의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탕자의 비유만큼 널리 알려져 기독교의 진리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집 나간 탕자가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복음이요 신앙이요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집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또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맞아주는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눈물겨운 사랑의 모습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탕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 그 길이와 높이를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부모의 집에 거할 때가 가장 행복한 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로 우리가 부모님 품안에 있을 때는 그 편안함과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품을 떠나봐야 그 사랑을 알게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어떤 부모라도 자식이 고생하기를 바라는 분은 한 분도 안 계실겁니다. 부모님들께서는 그 자식들을 품안에 누이시고 곱게 길러 평안과 행복 속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 멀리 가서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은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이렇게 시골에서 썩을 수는 없습니다. 내 분깃을 가지고 도시에 가서 출세해 보겠습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을 주십시오."
세상에 대해 익히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로서 둘째 아들의 요구에 선뜻 응할 수 없었습니다. 출세는커녕 재산탕진에 생명까지도 위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득하며 말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깃을 받아 집을 나가겠다는 이 아들은 분명 문제아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재산이 축나는 것보다 그 아들이 철없이 집 나가겠다고 고집 피우는 것이 더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얼마 전 우리가 사는 울산에서 장애자 아들이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할 앞날이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농약을 야쿠르트에 타 먹여 독살한 비정한 아버지가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괴로움도 스스로 지고 싶어 것이 참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설령 가슴을 에이는 고통이 오더라도 그런 고통도 기꺼이 당하고 싶어하는 것이 참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자식이 병들었다 하여, 자식이 잘못되었다 해서 내다버릴 그런 아버지는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참된 아버지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의 아버지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습이 장애자이든, 가난하고 병들었든, 배운 것이 있든 없든, 전과가 있든 없든 그것들을 결코 가리지 않고 여러분의 모든 고통을 십자가 고통에 감추시며 여러분을 사랑의 뜨거운 가슴에 품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주자 그 길로 먼 나라로 훌쩍 떠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온갖 허랑방탕에 그 재산을 다 허비하고 아사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후 아버지의 관심은 오직 어서 빨리 아들이 돌아오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들이 방탕한 생활이나 재산탕진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살아서만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빨리 알거지가 되어서라도, 그놈이 왕창 망해서라도, 아니 성한 몸이 아닐지라도 살아서만 돌아오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동구밖에 나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자식에 대한 애끓는 사랑 때문에 도리어 자식이 낭패를 당하고서라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이러한 마음이야말로 죄인된 우리들이 어서 빨리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심정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의 존재유무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토론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한 중년 남자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는 없습니다. 누구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내가 5분내로 증명해 보이겠소"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계속 말했습니다.
"혹시 여기에 날카로운 칼이 없을까요?"
누군가가 그에게 칼을 건네주자 그는 더욱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이 칼로 나를 5분내로 죽이시오. 만일 5분내에 나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오."
1분, 2분,...5분,...그로부터 5분이 지났지만 그에게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거나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살아 있다면 또한 기독교인들의 표현대로 전지전능하다면 나와 같은 사람을 그대로 놔둘리가 있겠습니까?"
모임이 끝나자 그 종년 남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모임에 참석했던 할머니 한 분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한 행동을 잘 보았네. 그런데 자네에게도 자녀가 있나?"
"물론 있지요."
"그러자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그에게 할머니는 아까 그가 들었던 칼을 쥐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만일 자네의 자녀 중에 한 명이 이 칼을 들고 '나를 죽여주세요'한다면 자네는 죽일 수 있겠나?"
"할머니는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어떻게 내가 내 아이를 죽일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할머니는 그의 손을 잡고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것 보게,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라네. 어찌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찔러 죽이겠나?"
하나님은 죄를 지은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마침내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거지 중 상거지 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땅에 꿇어앉아 후회막급한 눈물만 흘릴 따름입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소서"(21절). 아버지는 잘못을 뉘우치며 돌아온 아들을 향해 "무슨 말이냐?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이로다."며 매우 기뻐하였습니다(24절). 아버지는 아들을 품꾼으로 대하기는커녕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온 동네 잔치를 벌여 아들의 돌아옴을 모두 다 함께 기뻐했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분명 탕자였지만 '탕자'를 문제삼지 아니하시고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위로와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똑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로 돌아오는 죄인의 과거 행악은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다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무한히 용서하실 뿐입니다. 간음하던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혀 왔으나 그녀가 눈물로 회개하였을 때 주님은 더 이상 그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요 8:11).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어서 돌아만 오라'고 외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떠나 죄악의 세상에 방황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믿으시고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 풍성한 복과 은혜를 누리길 원하십니다. 아버지 집을 나간 자식이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고 돌아오기만 하면 무조건 용서하며 잔치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먼저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 같은 아버지의 가슴으로 집을 나간 아들과 같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네델란드의 목회자 야게르가 쓴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월요일 아담과 하와처럼 선악과를 따먹고,
화요일 가인처럼 자기 동생을 죽이고,
수요일 야곱처럼 눈 먼 아버지를 속이고,
목요일 다윗처럼 남의 아내를 빼앗고,
금요일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토요일 바울처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주일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으면,
너희 죄가 용서함을 받겠느냐?
물론 받는다.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린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 내게로 오너라,
너희 죄는 모두 용서함 받았다.
일어나라!
그리고 걸어가라!'』
제아무리 죄와 허물로 얼룩지고 뒤범벅된 사람일지라도, 그 죄의 빛이 아무리 흉악하여 주홍빛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한이 없는 그 크신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을 눈과 같이 희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탕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과 축복의 잔치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리시는 아버지처럼 뜨겁게 열린 가슴으로 '돌아오는 탕자'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나간 아들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습니다. 어서 돌아만 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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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불의한 청지기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13)


어떤 부자가 자기 집을 관리하기 위해 청지기를 두었습니다. 청지기는 집주인의 식사 시중에서부터 그 집의 모든 종들에 대한 관리 감독, 모든 재물 관리 등의 업무를 관장했습니다.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청지기는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 일했던 요셉이었습니다. 보디발은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요셉에게 위임하여 주관하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보디발의 가정은 범사에 형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습니다.(창세기 39:1-6) 그런데 오늘 본문의 부자는 자기 집 청지기가 재산을 유용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허비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회계 감사를 실시했습니다. 소문대로 거품이 많았고 재정적자가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주인은 불가피하게 청지기에 대해 해고를 통보했습니다. 일자리를 잃게 된 청지기는 나이 늙고 힘이 없어 당장 할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에 나가 빌어먹을 것을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  집에서 쫓겨나 앞으로 살아갈 대책을 세운 것이 사문서 위조였습니다. 황급히 자기 집주인의 채무자들을 불렀습니다. 1천 만원 차용증서는 5백 만원으로, 2천 만원 차용증서는 1천 5백 만원으로 각각 바꿔 주었습니다. 청지기가 이렇게 집주인의 채무자들에게 선심을 쓴 이유는 자신이 해고된 후에 채무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문서 위조마저 들통이 나서 주인에게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청지기는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집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불의한 일에 대해 고소고발은커녕 칭찬이라니 참으로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집주인이 칭찬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자기 집 재산을 사문서 위조라는 부정한 방법으로 축내었지만 그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 앞으로 살아갈 궁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칭찬받은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청지기의 불가피한 사기행각을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청지기가 칭찬 받은 지혜는 아주 약삭빠르고 타산적이지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청지기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분명히 야고보서 3:17에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청지기는 구약의 요셉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대의 아들들"로 일컬어지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소위 어둠의 자식들로 이들은 하나님을 떠난 문화, 문명을 이루고 즐기며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에 의해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매사에 빈틈없고 약삭빨라서 자신에게 이익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소위 재테크(財 Tech)에 있어서 때때로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 재산을 늘려 가는 데 능수 능란합니다. 심지어는 교묘한 방법과 정통한 지식을 다 동원하며, 법망을 피하거나 사회적 규례와 제도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축재합니다. 그래서 "이 세대의 아들들"은 옳든 그르든 간에 고도의 지혜를 이용하여 현세에 누릴 수 있는 최대의 물질 문명을 향유하고 있으며 이러한 물질 문화에서 얻는 온갖 사치와 화려함과 부귀 영화를 즐기며 살아갑니다. "빛의 아들들"로 일컬어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사는 내용은 그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합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그렇게 사는 이유는 그들의 삶의 터전은 오직 현 세상에 제한되어 있을 뿐이고 내세에 대한 소망이나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이 세대'에서만 자신들의 꿈과 행복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세대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소망할 수 없는 절망의 무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들의 삶은 궁극적 의미에서 바라볼 때 허망한 것이지만, 그들의 현세적인 삶에만 국한시켜 볼 때는 그들 나름대로의 적절한 삶의 스타일과 지혜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반면 "빛의 아들들"인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비록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빛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세상에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세상 사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둡다고 할지라도 밝고 빛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흑암에서 방황하는 '이 세대의 아들들'과  이웃하여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 세대 안에 보내신 생명의 빛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요한 복음 3장 19절이하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예수 믿어 생명의 빛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빛의 아들들"은 그 미래의 천국을 밝히 볼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이 세대에만 집착해서 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는커녕 정직하고 진실하며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살고자 할 때 오히려 가난과 곤고함과 수많은 어려움이 있다할 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영원한 빛을 간직하고 미래의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輕)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 후서 4:16-18)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을 목적으로 삼고 살고 있기 때문에 천국을 목표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빛의 아들들" 보다 훨씬 약삭빠르고 영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빛의 아들들"된 사람들도 이렇게 살라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주신 것은 이 세상 사람(이 세대의 아들들)이 이 세상을 목표로 지혜롭게 사는 것처럼,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천국을 목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다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누구나 청지기와 같습니다. 인간은 그 모든 소유나 재능, 그리고 지혜와 능력, 건강 등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살지만 사실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생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해도, 또 아무리 많은 재산과 튼튼한 건강을 소유하고 있다해도 하나님께서 '오늘밤 여러분의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여러분이 예비한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습니까?'(누가복음 12:16-21)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소유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것일 뿐입니다.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밤 청지기된 여러분의 인생을 정리 해고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의한 청지기처럼 여러분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시기 바랍니다."(9절) 여기 예수께서 "불의한 재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재물 자체를 불의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그 재물을 불의하다 한 것은 주인의 뜻대로 그 재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의 뜻과 욕심에 따라 그 재물을 사용했으므로 그 재물은 불의한 재물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지지 아니하는 삶은 불의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건강, 지식, 재물, 심지어 여러분들에게 있는 모든 지혜와 기능, 가정, 생명,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용하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만약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하고 계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미래를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경제 위기는 잘도 대처하여 살면서 자신의 인생의 영원한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온갖 수단방법을 다해 축재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결코 인정하거나 칭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칭찬은 언제나 "빛의 아들들"에게 주어집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타락해져 간다해도 그 마음에 빛으로 선악을 분별하며,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여 항상 정직과 진실되게 살아 미래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몸과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는 봉사와 삶은 불행하며 어리석을 뿐입니다. 구약성경 학개 1:6에서 보면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 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없이 우리가 아무리 봉사하고, 천국의 소망이 없이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많이 뿌릴지라도 열매는 하나도 없고, 아무리 먹어도 배가 안 부르고, 아무리 마셔도 흡족하지 않고, 옷을 입어도 따뜻하지 아니 하며, 삯을 아무리 많이 받는 것 같으나 구멍 뚫린 전대같이 다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없는 봉사 생활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것으로, 다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가 하나님이 없이 행한 이 모든 일은 헛되고 헛된 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신 재물과 건강과 지혜와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천국을 위하여 사용할 때에 거기에 참된 삶의 지혜와 영원한  가치가 있으며 고귀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비웃은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누가복음 16:14)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사랑하는 자라 했습니다. 그들은 축재를 생의 고귀한 덕성으로 생각해서 돈을 가진 사람, 재물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 천대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멸시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심지어 물질을 받지 못한 사람은 불의한 자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천국은 의례히 들어갈 것으로 믿으면서도 세상, 재물을 사랑하는 두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들 바리새인들은 '위선자'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영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겠읍니까? 날마다 하루에 3번씩 기도했고, 때를 따라 금식을 하는 경건생활을 최고로 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축재를 위해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켜버리는" 가증되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라며  선언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하게 기도하고 부지런히 성경도 읽고 연구하며 열심히 봉사하는 것 같지만 그들 마음은 이미 콩 밭에 있었던 것입니다. 소망을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두지 않고 일시적인 세상과 재물에 두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두 마음을 품고 두 주인을 섬겼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3절) 여러분 인생의 주인은 세상이나 재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되십니다. 세상이나 재물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세상과 재물이 주는 기쁨은 잠시뿐이나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은 영원합니다. 세상과 재물이 인간에 주는 것은 기쁨과 유익함보다 오히려 근심과 걱정, 불안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세상과 재물은 때로 여러분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합니다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생명과 빛, 소망과 기쁨,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누구를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겠습니까? 구약 성서의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의 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히브리서 11:24-26) 결국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았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장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등불은 결국 꺼지고 말것이기 때문입니다.(잠언24장) "이 세대의 아들들"은 두 주인을 섬기며 살 수 있으나 "빛의 아들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주인으로 섬기며 충성을 다합니다.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마음이 둘로 나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3절) 세상과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어리석고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겨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얻는 지혜롭고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잠언 22:4)
여러분,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야 할 일을 망각한 채 하루하루 허송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의한 청지기도 자기의 현실 문제를 파악하여 자기의 다가올 미래를 대처하였듯이 예수 믿고 "빛의 아들들"이 되셔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재물과 재능과 건강, 여러분의 생업을 하나님의 뜻대로 활용하는 "빛의 아들들"이 되셔서 영원히 행복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시고 세상의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시므로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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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부자와 거지 나사로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19-31)


1. 저는 언제 보고 또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신데렐라', '콩쥐 팥쥐', '춘향전' 등입니다. 그 중에 춘향전은 판소리로 듣거나 영화로 보아도 언제나 긴장감을 느끼며 감격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도해서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어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변사또 일행을 잡아들이는 장면입니다. 특히 춘향가 중에 어사되어 남원 변사또가 벌인 잔치에 나타난 이몽룡이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골(毛骨)이 송연( 然)하게 한 시를 읊을 때면 긴장감이 감도는 역전극이 예상되어 흥미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 흥미진진한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
<아름다운 술항아리에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반가효만성고(玉盤佳肴萬姓膏)
<고운 접시에 맛 있는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요>
촉루낙시민루락(燭淚落時民淚落)
<촛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
<흥겨운 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성이 높다>
백성들의 혈세로 온갖 사치와 음란을 일삼아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한 변 사또의 행각에 백성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떨어지며 피골이 상접하여 몰골이 말이 아니며 원성이 드높다는 암행어사의 통쾌한 고발입니다. 곧 이어 암행어사 출도 하여 목숨걸고 끝까지 절개를 지킨 춘향은 극적으로 구출되어 어사 부인되고 변 사또 일행은 한양으로 압송되고 맙니다. 인생에 역전 드라마가 펼쳐지지 않는다면 삶에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부자가 지옥 불에 들어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에 영원한 고통을 당하고, 거지는 천국에 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이 역전극이야말로 고달픈 이 세상의 삶에 소망과 희열을 느끼게 합니다. 기독교는 인생으로 하여금 역전(逆轉) 드라마를 연출케 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사람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여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세상의 천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있는 사람들을 폐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 전서 1:26-28) 십자가에 맥없이 죽어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은데 사흘만에 다시 살아 사망 권세를 깨뜨린 것이 기독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역전된 삶의 모습을 통쾌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어떤 부자가 있는데 한 벌에 1천만 원이 훨씬 넘는 호화스런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즐기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가 죽어 들어간 곳은 물 한 모금 없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고통 당하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라 하는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그 부잣집에서 구걸하며 병든 몸을 이끌고 고생스런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천사에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 즉 천국에서 아주 행복하게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끊임없이 태워지는 고통 중에 있는 부자가 눈을 들어 멀리 보니 생전에 안면이 있는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어 아브라함을 불러서 간청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대답합니다. 고통 중에 부자는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면서 지금 생존해 있는 형제들에게라도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네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으니 듣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고통 중에 부자는 어려운 부탁을 합니다. "어지간해서는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만일 죽었던 사람, 나사로를 부활시켜 내 형제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음 전하는 사람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복음을 받아드리지 아니할 것이다."며 거절합니다.
3.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부자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지옥불에 들어가 영원히 꺼지지않는 불꽃에 태워지는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까? 부자가 거지를 발길질하며 썩 꺼지라며 학대했습니까? 먹을 것을 구걸할 때 문전박대(門前薄待)하며 매질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거지 나사로에게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정죄를 당한 것은 굶주리고 헐벗으며 병든 거지 나사로에게 얼마든지 자기가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라도 주어서 생명을 연명하게 하고 병으로 죽어가는 몸을 조금이라도 돌볼 수 있었는데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외면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수 천만 원을 홋가하는 사치스런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잔치를 벌이면서도 고통받는 이웃을 전혀 외면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시대에는 나이프나 포크, 내프킨이 없었습니다. 음식은 손으로 먹었는데 아주 부유한 집에서는 두껍게 썬 빵덩어리에다 손을 닦았으며 그 후 그 빵은 내어 버렸습니다. 나사로가 목이 타게 바라고 있던 것이 바로 부자가 더러운 손 닦고 난 부스러기 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자는 혼자서만 온갖 사치와 허영에 인생을 허비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웃들은 그의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부자가 저 세상에서 고통을 받은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부를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하였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부 자체는 악이 아니요 인간이 피해야 할 죄도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부를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데에만 사용할 때 그에겐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이니 다른 생에서 쓰라린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부자를 지옥에 들어가게 한 것은 그가 강도짓이나 도둑질해서가 아닙니다. 그를 지옥으로 떨어지게 한 것은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의 죄는 이 세상의 고통과 궁핍을 방관한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들어 죽어 가는 거지를 보고서 마음 속 깊이 불쌍히 여기며 그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웃의 굶주림과 고통을 보고도 그것을 위하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고통지수(실업율에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더한데서 실질 GDP를 뺀 것)는 OECD가입 24개국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고통지수가 높을수록 국민들의 체감하는 삶의 고통과 불행이 가중되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고통지수가 아주 높다는 것은 국민 대다수가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기 보다는 고통 속에서 마지못해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중산층이 사라지고 못 가진 자가 극히 소수의 가진 자(권력, 금력)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는 말입니다. 우리 나라 실업자들 가운데 20.3%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22%는 사회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사회적 불안요인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1917년 10월 제정 러시아를 무너지게 한 볼쉐비키 당원은 4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몰락을 가져오게 한 공산당이 등장하게 된 것은 귀족들과 가진 자들이 행복을 독차지하고 농노들, 못 가진 자 등을 모른 체한 결과였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산 역사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춥고 배고픈 이웃을 못 본 체하는 사랑의 냉각현상이 그대로 계속된다면 언제 어느 순간에 무슨 불상사가 발생할지 모르는 불안지수가 높아질 것이 뻔합니다.
4.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부 다카쓰키시의 에무라 시장이 지난 10일 사퇴를 발표했습니다. 임기 1년을 남긴 시점이었고, 오는 4월30일 시청을 떠납니다. 사퇴 이유는 <병든 집사람을 돌보기 위해서>라고 일본 시사주간지 아에라는 보도했습니다. 한 살 연상인 부인 도미코씨는 94년 왼쪽 다리가 불편해졌고, 지난 해 봄부터는 대소변도 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됐습니다. 파킨슨씨병, 치매 증상도 나타났습니다. 에무라 시장은 바쁜 공무와 부인 간호를 병행했습니다.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기저귀를 갈아줬고, 대변은 며느리와 함께 처리했습니다. 변비 때는 40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밥을 따스하게 데워 부인에게 먹였습니다. 여기에 대략 2시간이 걸립니다. 점심때도 자전거로 돌아옵니다. 밤에 만찬 등이 있으면 집 부근에 사는 큰 딸에게 부탁합니다. 만찬이 있던 어느 날 밤 9시쯤 돌아와 보니 부인이 자고 있었습니다.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평화로운 부인 얼굴을 보고 깨우질 못했습니다. 결국 다음날 새벽 2시 부인의 신음에 잠을 깨 기저귀를 갈아줬습니다. 지역 기반이 더없이 탄탄한 에무라 시장은 지난 80년 오사카부 수도부 기술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했고, 84년 4월 주위의 권유에 떼밀려 출마,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 인물이었습니다. 15년간 시장직을 통해 육상경기장, 도서관, 문화회관, 평생 학습관 등을 잇따라 건설했습니다. 하수도 보급률은 그의 취임전 17%에서 76%로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첫 당선 뒤 치러진 3번 선거 결과는 압승이었고, 5기 당선도 확실했습니다. 그런 에무라 시장은 어느 날 관용차 타고 입원한 부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시장이 한가하구먼』이란 비판이 귀에 들렸습니다. 그래서 부인을 찾아갈 때의 교통수단은 즉각 자전거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시청-집-병원을 오가는 사이 『이러다간 공무에 지장이 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부인간호와 공무 병행이 한계에 다다랐을때, 시장은「남편」이 됐고 부인을 선택했습니다. 사퇴발표 뒤 부인에게 한 말은 『시장이란 정말 매력없는 자리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카쓰키시 주부들은 『내가 시장부인이라면 참 행복할 것』이란 반응을 보였다고 아에라는 보도했습니다. 에무라 시장은 사퇴선언을 계기로 기자들이 몰려오자 훈계했습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촌스럽게, 또 세상 변한 줄 모르고 소동들 떨지 말라.』(조선일보, 2월25일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 곧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하나를 돌보지 아니한 사람은 영벌에, 돌본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태복음 25:45-46)
5. 나사로는 전형적인 거지로 온 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이 살이 문드러져 고름이 흐르는 나창병에 걸려 그 병 때문에 제대로 얻어 먹지도 못한데다 동네 개들이 덤벼들어 살점을 뜯어 먹는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 땅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저 세상에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가 이처럼 구원을 받은 것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천대받던 소외 계층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 '나사로'의 뜻인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사실이 암시하듯이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가난 그 자체가 죄는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권장할 만한 것도 아니며 구원의 보상을 얻는 근거도 될 수 없습니다. 가난함이란 말은 절대적인 빈곤 상태로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의 슬픔과 고통을, 그리고 소외당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늘만을 쳐다보고 하나님만을 의존해서 사는 사람을 "가난한 자"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사는 사람이 복이 있는데 천국은 바로 이런 사람의 것입니다. 나사로 자기 이름대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날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화되는 시점에서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의 사정을 생각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을 품음으로써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져 가고 있습니다. 부자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 무관심하여 그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므로 결국 정죄를 당하여 물 한 모금 구걸 할 수 없는 영원한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비록 세상에서 거지에 병든 몸을 이끌고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아 천국을 소유한 영원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내세의 소망이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성도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시들어 없어질 들의 꽃과 같으나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이 성도에게 있을 것이니 이는 약속된 백성이 영원한 기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롬 8:18-21) 이 기업을 상속받을 자는 이 세상에서 부하든 부하지 않든 궁극적인 소망을 하늘에 두고 있으므로 진정한 부를 마음에 품은 자의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채프만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떤 거지가 노신사를 향해 "10센트만 동냥해 주십시오."하고 손을 내밀고 구걸했답니다.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던 거지는 그 신사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노신사가 바로 자기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너무 놀라 뒷걸음질치는 모습을 보며 그제야 노신사도 아들의 얼굴을 알아차렸습니다. "너 여기에서 뭘 하고 있니? 내가 너를 18년 동안 찾아다니고 있는데 10센트? 내가 가진 것이 다 네 것인데 10센트를 구걸하다니. 아무 말 말고 당장 나하고 가자." 그렇습니다. 부자 아버지를 모시고 있던 거지에게 10센트 동냥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은 세상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로, "징계를 받아 죽은 자 같으나 살고 죽임을 당하지 아니 한 자"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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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1-19)

일본 '나병 환자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다마끼 여인은 나병 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을 만들고 그들을 돌보다가 어느 날 자기도 감염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녀는 그 날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육의 눈이 가려지고 영의 눈이 열려 모든 것이 감사하다. 눈썹이 빠지면서 눈썹의 고마움을 깨달았다. 눈썹이 없으면 먼지가 눈에 들어가 이렇게 괴로울 줄은 미처 몰랐다. 하나님께서 눈을 지켜 주시려고 눈썹을 주신 것처럼, 나에게 병을 주어 감사를 알게 하시고 영생을 보게 하셨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어느 한 촌에 들어가시었습니다. 그 때 문둥병자 열 명이 멀리서 예수를 알아보고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만나보지도 아니하시고 `성전에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는 그 말씀대로 성전에 제사장한테로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마리아인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고 물으시며 이렇게 구원의 축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본문은 인간의 배은망덕을 신랄하게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면서까지 구원해주셨건만 하나님 앞에 나와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아니하는 인간의 망은(忘恩)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불어라 불어라 겨울 바람아
은혜 모르는 인간에 비하면
너는 그렇게 차갑지가 않구나.
다윗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103:2)"
범사에 항상 감사하는 생활은 여러분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한국에서 여러 번 설교하신 퍼어스 박사는, 은퇴하여 농촌에 들어가 처음으로 젖소를 산 한 도시 사람의 실패담을 즐겨 이야기했습니다. 이 도시 사람은 소를 산 지 얼마 안되었을 때 젖소의 젖이 마르자 이웃 농부에게 그간의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농부로부터 젖소의 젖이 마른 이유를 알고 도시 사람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그날 필요한 만큼의 젖만을 짰다는 것입니다. 한 병이 필요하면 한 병만 짜 마셨고 별로 우유 생각이 나지 않으면 짜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만 짜는 것이 젖을 마르게 하는 원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젖소는 젖을 짤 수 있는 만큼 매일 매일 최대 한도로 짜내야 계속 더 많은 젖을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범사에 항상 감사하지 아니하고, 기쁘고 좋을 때만 겨우 마지못해 감사하고, 괴롭고 힘들면 감사를 잊어버리고 원망 불평하게 된다면 젖소의 젖이 더 이상 우유를 생산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여러분의 삶은 메마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비가 올 때나 바람이 불 때 변함없이 범사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하여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묻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여기 병고침을 받고 돌아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사마리아 사람' 하나를 소개합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1년 365일, 4년여 동안 용산역 광장에서 매일 200명이 넘는 행려자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대접하고 있는 유연옥씨 이야기입니다. 유연옥씨는 용산역 광장에서 '밥퍼 아줌마'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 삼성동 집에서 용산 '하나님의 집'까지는 1시간. 8시까지는 가야 점심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200인분의 식사준비. 적어도 3시간은 걸립니다. 밥과 국을 드럼통에 담아 리어카에 싣고 용산역으로 향합니다. 저만큼 보이는 용산역 광장. 길게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손에 수저를 쥔 '거리의 사람들'. '밥퍼 아줌마' 유연옥씨(31). 주위에선 '괜한 고생'이라고 말하지만 3년째 변함이 없습니다. 죽을 뻔한 목숨, 덤으로 얻었으니 남을 위해 살자고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이벤트회사 대표로 1인3역을 하며 단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93년 말 갑자기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그냥 낫겠지 싶어 내버려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하더니 어느 날 아침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하반신 불구 집안은 졸지에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어린 두 딸의 꾀죄죄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꾹 참고 뒷 수발을 해준 남편에겐 고맙다는 말 대신 걸핏하면 짜증만 냈습니다. 미칠 것 같은 6개월, 자살까지 시도했으나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이웃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됐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남편은 매일 그를 업어 교회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꼬박4개월을 새벽마다 부르짖었습니다. 뜻이 하늘에 통했던가. 찾아올 때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병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약속했어요. 살려주기만 하면 앞으로 힘든 사람을 위해 살겠다고요. 정말 깨끗이 병이 나았고 숨돌릴 틈도 없이 봉사현장을 다녔지요" 초기엔 고아원, 소년원에서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남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한 끝에 마포  노인무료병원을 찾았습니다. 진료를 기다리는 노인을 상대로 강사 경험을 살려 레크리에이션 지도를 했습니다. 며칠간 방문한 그는 진료가 없는 점심 시간에 대부분 노인들이 돈이 없어 점심을 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깨달았습니다. 한끼 밥을 못 먹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날 밤 전철에 올랐습니다. 용산역에 내려 광장을 죽 돌아다니던 그는 한 귀퉁이 과자박스를 모아 놓은 곳에서 한 노인이 추위 속에 떨고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이튿날 도시락을 싸서 용산역으로 향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몇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1주일. 소문이 났는지 그 다음부턴 2명,3명 근처 행려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2개월 여만에 싸야할 도시락이 20개가 넘었습니다. 도저히 도시락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식판을사고 밥과 반찬을 해서 매일 차로 날랐습니다. 몇 달하다 보니 70명으로까지 늘었습니다. 이벤트 회사에서 생기는 수익금 2백만∼3백만 원은 모두 밥짓는데 쏟아 부었습니다.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돈이 없어도 더러 몸이 아파도 쉬지 못했습니다. 고사이 행렬은 200여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몸도 몸이었지만 마음이 피곤했어요. 사람들은 1년 전과 변함이 없었지요. 얻어먹는 게 타성이 돼서인지 감사하는 마음도 없었고 행패부리기도 일쑤였어요" 먼저 먹겠다고 줄 안 서고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 밥을 적게 준다고 술 먹고 와서 폭행. 폭언을 일삼는 사람, 쌓아놓은 식판을 뒤엎고 소주병을 깨서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사람이 의의로 많았습니다. 유씨는 그럴 때마다 "정신차리고 사람답게 살라"고 냅다 소리를 질렀지만 마음속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뭔가 이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일요일 오전 이들과 함께 용산역 광장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지요" 예배는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자신의 형편이 어떠한지 등을 담담하게 간증하는 식입니다. 사람들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감사'라는 말이 나왔고 놀고먹던 사람이 어느 날 말쑥한 옷을 차려입고는 "공사장에서 일해서 돈벌었다"며 그에게 밥하는데 보태라고 5만원씩, 3만원씩 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작년 말부터 나빠진 경기 탓에 이벤트 회사를 정리했습니다. 하루하루 빛을 얻고 간간이 들어오는 후원금으로 꾸려나갑니다. 올 초엔 용산역 근처 한강로3가에 4평 남짓한 공간을 얻었습니다. 2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밥을 도저히 삼성동에서 나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바쁜 생선장수. 야채장수들이 1박스씩 생선과 야채를 가져다주는 정성, 인근의 지체 장애인들이 틈틈이 모아 40만원씩 가져다주는 정성. 그래서 그는 죽을 때까지 행복한 '밥퍼 아줌마'가 될 자신이 있습니다. 유연옥씨야말로 감사하는 생활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잘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았으면 감사하는 생활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10명의 문둥병자들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러자 주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 가까이 가서 문둥병자들의 몸을 만지지도 않으셨습니다. 또는 누가복음 5:12-13에서처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아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을 고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신 이유는 레위기 13:45-46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문둥병에 대한 율법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제사장은 문둥병자들을 살피고 그들의 병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임무를 부여받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제사장은 만일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입으면 그가 깨끗하다는 것을 선포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사장이 그들이 깨끗함을 입었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모세의 율법에 따를 것을 명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열 사람의 문둥병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이 병이 낫기도 전에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간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가다가 열 사람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한 사람만이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입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 예수 믿습니까? 믿으시면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며 아담을 찾으시던 말씀과 똑같은 것으로, 사람이 자신이 서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지 못하고 이탈했을 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문둥병에서 고침받은 10명이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예수 앞입니다. 그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찾아와 사례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이방인 사마리아인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고 물으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축복의 말씀을 선언하셨습니다. 여기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은 더 이상 성전에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문둥병에서 깨끗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혼도 죄에서 구원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문둥병과도 같은 죄에서 예수 십자가 은혜로 이미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생각날 때만 아니라, 기쁘고 좋은 때만 아니라 범사에, 슬프고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에도 감사하는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가 조지 마테존(George Matheson) 목사는 맹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처자가 모두 빨리 죽었습니다. 그러나 마테존 목사는 어려운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문 하나를 소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받은 가시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였음을 용서하소서. 수백 번 장미 때문에 감사하였으나 가시의 은혜를 잊었나이다. 십자가의 가시를 거쳐 하늘에 올라가신 주님, 나는 나의 가시를 통하여 하늘에 올라갈 수 있음을 잊었나이다. 나에게 주신 눈물이 무지개가 됨을 깨달아 감사하옵나이다. 나에게 주신 아픔이 천성길이 됨을 깨달아 감사하옵나이다. 장미밭에 살지 않고 가시밭에 살게 됨을 감사하옵나이다."
장미 때문에만 감사드리지 말고 장미 가시가 주는 은혜를 깊이 깨달으시고 비록 가시밭에 살고 있다해도 감사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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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3-11)


1. 정부는 지난 13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을 맞아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인 5백 5십여만명에 대하여 형사범 특별사면, 형집행정지, 가석방, 징계사면 등 대사면을 단행했습니다. 저도 무인감시 카메라에 속도위반으로 벌점 30점을 받았었는데 전면 삭제되는 행정처분 특별취소조치 혜택을 받았습니다. 벌점 30점이 전면 삭제되는 사면조치를 받고 보니 기분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그러니 잔형 집행면제나 감형, 또는 복권, 형집행정지, 가석방, 가출소 등으로 사면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이번 대사면조치에 궁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름아닌 사형수들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가 내려졌는가 입니다.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컸습니다. 과거 사형수 출신인 이승만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당시 사형수 5명에 대해 감형 조치를 내린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30일 사형수 23명에 대한 형 집행이 전격 실시됐습니다. 문민정부 들어 세 번째인 지난 집행은 지난 77년 28명을 집행한 이래 최대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대규모 <사법  살인>에 대한 사회적 반향은 의외로 미미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사형폐지분과위원장 문장식 목사는 "IMF 한파가 인권침해에 대한  관심마저 위축시킨 듯하다. 무려  23명이 한꺼번에 처형됐는데도 언론과 시민들의 반응이 너무도 냉담하다."고 말합니다. 사형수들을 돌보는 종교인, 변호사 등에 따르면 이번에 집행된 사형수들은 15대 대선 결과를 보고 커다란 기대를 품었다고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간 사형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해 왔고,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세 번씩이나 죽을 뻔했던 사형수 출신이며, 야당시절 정치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사형폐지운동 행사에 화환을 보내는 등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 정부가 출범하면 사형제도가 폐지되거나 최소한 새 대통령 재임 5년간은 집행이 없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합니다. 특히 성탄절을 전후해 이뤄진 두 전직 대통령 등  5·18 및 비리 관련자들에 대한 사면조치는 이같은 기대를 더 부풀렸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난 연말 집행과 관련, 법무부 관계자는 "장기 미집행 사형수가 너무 많아 교도소의 수용부담이 커졌다."며 "앞으로도 오래 끌지 않고 집행할 방침"이라고 밝혔습니다. 현재 형이 확정된 사형수는 36명인데 국민의 4분의 1이 크리스천이고, 법무부 장관과 김대중 대통령이 가톨릭 신자이건만 이들 36명의 목숨은 여전히 바람 앞의 등불입니다.

2. 다음은 며칠 전에 TV에 방영된 사형수 관련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사형수들이 초기에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처음 1년간은 다른 재소자를 폭행하거나 자살하는 것을 막기 위해 24시간 수갑을 채웁니다. 잠도 수갑을 채운 채로 재우고, 식사도 수갑 찬 상태로 하게 합니다. 옷을 갈아입을 때와 세면할 때만 수갑을 풀어줍니다. 시간이 좀 흐르면 구치소를 드나드는 종교인들을 통해 종교에 귀의, 잘못을 뉘우치지만 여전히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해 때때로 자살충동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면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모범적인 수형생활을 하며 재소자들을 전도하기도 합니다. 지난번에 집행된 사형수 김용제(91년 여의도광장 승용차 질주사건 범인)는 감방에 재소자가 새로 들어올 때마다 통사정을 해서 발을 씻어줬고, 북한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금요일 점심을 굶었습니다. 사형수들은 형이 확정된 순간부터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죽음을 생각합니다. 사형수는 <미결수>신분(형의 집행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노역을 시키지 않으므로 죽음의 공포를 떨쳐낼 기회도 그만큼 적습니다. 또한 이들은 바깥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유난히 민감합니다. 대개 정치, 사회적 불안기나 흉악 범죄가 기승을 부릴 때 사형집행이 있어 왔기 때문에 신문, 잡지를 한자도 빼놓지 않고 정독합니다. 특정 범죄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를 집행한 예도 많아, 예컨대 유괴살인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은 <제발 유괴사건만은 없었으면…>하고  속을 태웁니다. 특히 사형 <시즌>인 부활절과 성탄절 전후에는 사형수들의 공포감이 극에 달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종교인들도 가급적 면회를 가지 않습니다. 집행이 있는 날엔 <면회>나 <상담>이 있다며 사형수들을 불러내 형장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꿈이나 영감으로 형 집행을 예감하는 사형수들도 많습니다. 이들은 집행 전날 신발을 바로 신고 나가도록 바깥쪽으로 돌려놓거나 주변을 정리하고 소지품을 재소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합니다. 특별한 느낌이 없어도 집행이 있는 날이면 구치소가 유난히 조용하고 사형수에게 청소나 운동을 시키지 않아 곧 낌새를 챕니다. 교도관들의 말만 믿고 <면회>를 나선 사형수는 교도관들에게 양팔이 붙잡혀 면회실과 다른 방향으로 끌려가면서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립니다. 대부분은 체념한 채 순순히 끌려가지만 더러는 죽기 싫다고 발버둥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형수를 형장으로 이끄는 교도관들은 주로 무술 유단자들입니다. 서울구치소 관계자는 "두려움과 초조함에 엉덩이를 뒤로 뺀 채 10cm가 될 듯 말 듯한 보폭으로 형장을 향해 걸음을 떼 놓는 모습은 눈뜨고 못 볼 정도다."라고 합니다. 끌려가면서 따뜻한 물 한잔과 담배를 거푸 청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만이라도 목숨을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형장에 들어선 사형수는 신체검사와 신원확인 절차를 마치면 유언을 남길 기회를 얻습니다. 12월30일 집행된 사형수 김용제는 교도관과 종교위원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깨우쳐 줘서 고맙다."라고 했습니다. 입회인들이 흐느끼자 "울지 말라."고 달래기까지 했습니다. 같은 날 처형된 임풍식은 "죄를 회개한다."며 "내 장기들은 필요한 이에게 주고, 남은 영치금은 소년소녀가장에게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85년에 집행된 한 사형수는 끝까지 범죄사실을 부인하다가 형장에서 "오판한 판-검사와 위증자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유언을 마치면 종교의식을 가진 뒤 곧 커튼 뒤로 옮겨져 흰 두건을 씌우고 목에 밧줄을 드리웁니다. 당당하게 죽음을 준비한 사형수라도 불과 몇 초 후 바닥 문이 열리고 허공에 매달릴 것을 생각하면 이 순간만큼은 떨리게 마련입니다. 두건을 덮어쓴 채 커튼 밖의 종교인들에게 "찬송가를 더 크게 불러달라."고 소리치기도 합니다. 한 사형수는 다리를 다친 교도관을 염려하면서 밧줄을 거는 순간에도 "빨리 나아서 목발을 던져버려라."고 하며 죽어갔습니다.

3. 사형을 둘러싼 찬반 양론은 점점 비등해지고 있습니다. 먼저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명분은 이렇습니다. 첫째, 동해(同害) 보복이라 불리는 응보의 법칙을 들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1:24, 25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는 구약에 근거합니다. 사람을 다치게 하여 피를 흘리게 한 자는 자신도 피를 흘려야 하며 사람을 죽이면 자기도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국민의 자연스러운 법 감정'으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형을 완고하게 변호한 임마누엘 칸트는 그의 <도덕의 형이상학>에서 "응보의 권리만이 형의 질과 양을 명시할 수 있다....그(행위자)가 사람을 죽이면 자기도 죽음을 당해야 한다. 정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은 이 방법밖에는 없다. 고통은 많아도 종신형에 복역하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둘째는 사형에는 위협의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범인에 대하여 엄격한 형의 선고를 내림으로 재범방지의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형제도를 폐지하면 사회는 혼란에 빠져 개인적인 복수가 횡행하는 사회로 역행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회가 폭력범들로부터 일시적인 안전이 아닌 계속적인 안전이 보장되기 위해서 사형제도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폭력범들로부터 계속적인 안전은 범인들을 처형 말살함으로써 달성된다는 것입니다. 폭력범의 하수인이 무기형에 처해진다면 살아 있는 한은 다시 사회에 나와 또 폭력범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납세자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게 되는 장기의 구금보다는 헐값으로 끝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납세자의 부담으로 평온 무사한 생애를 감옥에서 보내게 한다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형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어떤 것인가? 첫째, 사형제도를 주장하는 자들의 첫번째 논거인 응보의 법칙은 고대에서나 통할 법도로 원시적인 복수욕에 몸을 맡기는 것이며 현대의 법률관과는 합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응보의 법칙대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게 되면 정상적인 한도를 훨씬 지나쳐 흥분과 심한 증오심으로 끔찍한 린치가 가해질 것입니다. 다음으로 폭력 행위에 대한 형벌로 사형이 위협작용의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격정에 쫒긴 상태에서 사람을 살해할 때 그 후에 어찌되리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장래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위협도 아랑곳없다는 것입니다. 사형의 위협력을 정말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공개처형도 지지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형을 공개하면 그 선전 효과도 최고일 것이며 위협 효과 역시 최고가 될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처형 실황을 TV에서 방영하면 어떨까? 그런 프로그램 같으면 시청률이 기록에 남을 것입니다. 스웨덴, 노르웨이, 네델란드, 핀란드, 오스트리아 그 밖의 여러 나라의 통계 자료는 의문의 여지없이 사형제도 폐지 후에 살인죄가 증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감소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폭력 사범을 처형하면 사회가 안전하다는 주장도 근거가 빈약합니다. 출옥이든 특별사면에 따른 출소이든 간에 압도적인 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재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보통의 준법적인 시민이 되어 가고 있다는 통계입니다. 사형폐지운동협의회장  이상혁 변호사는 사형제도가 범죄를 예방한다는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형제도를 폐지하자는게 당장 사형수들을 풀어주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헌법이 보장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 생명권을 박탈하지 말고 교화를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자는 겁니다. 흉악범에겐 종신형을 선고하고 평생 노역의 짐을 지우는 게 훨씬 더 고통스러운 형벌일 수 있습니다." 사형을 존치한 나라에서 흉악범죄가  줄거나, 폐지한 나라에서 늘어난 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형제도를 종신형제도로 대체, 흉악범들이 평생 노동과 회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게 <예비 범죄자>들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 역할을 한다는 주장입니다. 교도소 안에서도 모범적인 <최고수>들이 일반 재소자들을 교화하는게 더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사법 살인이라고 불리고 있는 오판으로 처형하게 되면 그 뒷수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뉴욕 싱싱 형무소 소장이었던 라우에스는 재직중에 남자 409명과 여자 6명의 사형수를 취급했는데 이 가운데 여자 한 명을 포함한 261명이 처형되었습니다. 남자 53명과 여자 2명의 판결은 폐기되고 30명은 무죄로 석방되었고 나머지는 형이 경감되었습니다. 그래서 라우에스 소장은 원판결의 11%는 배심원과 재판관이 잘못하지 않았는가 싶다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런 오판이 한 건이라도 있으면 사형집행은 모두 불가능하다고 상정하는데 충분하지 않습니까? 장기 구금보다는 사형쪽이 비용이 덜 든다는 주장도 성실한 이론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가령 노인이나 불치의 병자를 납세자에게 과대한 부담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살해해도 좋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헐값론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 합니다. 사형을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국가가 사람에게 목숨을 부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는 신이 정한 제도가 아니며 신의 은총에 의해 계획된 것도 아닙니다. 국가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제도여서 인간적인 결함이 내포된 제도로 과오를 범한 경우나 약점을 드러낼 때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예나 지금이나 신성한 것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 신성한 인간의 생명을 좌우할 권리를 결함 투성이며 약점이 많은 국가 제도에 맡긴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국가는 독재자의 권력욕에 따라 권력이 남용될 때 저지할 길이 없습니다. 철학자 피히테는 범인을 처형하면 그 개전(改悛)의 가능성은 완전히 없어지므로 어떤 경우에도 사형은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소외 계층이나 문맹, 심지어는 인종상의 소수집단과 같이 출신 계층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사형수의 교육 수준은 수감자의 평균 수준보다도 낮고 보통 사회인의 평균보다 훨씬 낮다고 어느 교도소 소장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보다도 현명하고 유복한 사람들에게 폭력범이 적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자기를 변호하는데 능숙하고 훌륭한 변호사에게 돈을 많이 줄 수 있습니다. 흑인이 백인 여자를 강간하면 사형이 되는데....백인이 흑인을 살해해도 무죄 방면이 되는 수가 있다고 미국 어느 교도소 소장은 말합니다. 사형수의 죽기 직전의 불안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장치는 없습니다. 병사라든가 돌연한 사고사와 같이 보통의 죽음은 사형의 경우와 같이 예정의 시각에 맞추어 하는 의식적인 죽음과는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국가만큼 냉혹하게 사람을 죽이는 것도 없습니다. 이 냉혈적인 잔학성으로 현대 국가는 용서될 수 없는 비인간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사형제도가 존속되게 되면 한 독재자나 독재 정권은 이를 남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과거 군사 독재 정권 당시에 경험되었던 사례들이 있습니다. 사형수들의 교화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문장식 목사는 수 없는 사형 집행을 직접 목격하고 허탈하다고 말합니다. 흉악한 사형수를 교화하여 뒤늦게나마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새 생활의 기회가 주어져야 교화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인데 사형을 집행하면 교화 활동의 열매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허탈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정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은 돌에 맞아 죽어야만 하는,  즉결 처분 당해야 하는 사형수였습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판결문 앞에 집행관리들인 군중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며 그 여자 사형수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 사형수는, "주여 없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심으로 형집행정지 및 복권조치를 내리시고 변화된 새 삶의 기회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4. 썸머타임 킬러(Summer Time Killer)! 이것은 오토바이 맨으로 분장한 크리스 밋참 주연의 영화제목입니다. 백주에 시장 한 복판에 나타난 창백한 청년 뫼르소는 갑자기 품속에서 45구경 리벌버 권총을 빼들고 태양을 향해 연속 3발을 발사합니다. 태양이 관통상을 입고 즉시 어두워집니다. 청년은 곧 현장범으로 군주에 의해 체포되어서는 공판정으로 갑니다. 변호인 없는 피고에 대해 간단한 사실심리와 검사의 논고가 있은 뒤에 "무모한 행동으로 태양에 전치 1주의 상처를 낸 썸머타임 킬러에게 극형을 언도할 것"을 주장합니다. 피고가 최후진술을 합니다. "하늘과 바다와 태양은 당신들의 허영의 시장에서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공범자다! 진정한 썸머타임 킬러는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다!" 이 소리에 격분한 방청석에서 야유와 함께 술병들이 날아와 청년을 피투성이로 만듭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청년은 또 한번 외칩니다. "이 중에 죄 없는 자는 술병을 날려라!" 한 낮에 외간 남자와 통정을 나누던 여인이 현장에서 붙들려 예수의 공판정으로 끌려 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기 위해 군중들은 저마다 돌을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율법없는 예수가 되든지, 사랑없는 예수가 되든지 하는 진퇴양난의 자리에 주님은 말없이 몸을 굽혀 땅바닥에 글을 쓰셨습니다. 의기양양하게 윽박지르는 군중들을 향해 일어서신 예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몸을 굽혀 땅바닥에 글을 쓰셨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남녀노소 모든 군중들이 돌을 버리고는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간음한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를 정죄치 않으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같은 예수님의 행위는 자신을 죄인으로 동일시(Identification) 한 것입니다. 나는 의롭다고 의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을 사랑하셨으므로 스스로 죄인의 위치에 앉으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같이 낮아져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감상적이거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사랑하려면 나도 죄인과 동일시되어야 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세상의 타락을 정죄합니다. 한 순간의 죄의 올무에 갇혀버린 형제와 자매들을 향해 차거운 시선을 던지곤 합니다. 배신자들을 마음껏 비웃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이미 용서받은 신실한 회개자를 향하여서도 따뜻한 마음을 건네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깨끗한가? 우리도 공범자가 아닌가? 그들은 드러난 죄인들이고, 우리는 숨은 죄인들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두 여인이 노인 앞에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한 여인은 자신이 젊었을 때 남편을 바꾼 일에 대해 괴로워하면서 스스로를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여인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도덕적으로 큰 죄를 짓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앞의 여인에게는 커다란 돌을, 뒤의 여인에게는 작은 돌들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두 여인이 돌을 가져오자, 노인은 들고 왔던 돌을 다시 제자리에 두고 오라고 했습니다. 큰 돌을 들고 왔던 여인은 쉽게 제자리에 갖다 놓았지만, 여러 개의 작은 돌을 주워온 여인은 원래의 자리를 일일이 기억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노인은 말합니다. "죄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니라. 크고 무거운 돌은 어디에서 가져 왔는지 기억할 수 있어 제자리에 갔다 놓을 수 있으나, 많은 작은 돌들은 원래의 자리를 잊었으므로 도로 갖다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큰 돌을 가져온 너는, 한때 네가 지은 죄를 기억하고 양심의 가책을 겸허하게 견디어 왔다. 그러나 작은 돌을 가져온 너는, 비록 하잘 것 없는 것 같아도 네가 지은 작은 죄들을 모두 잊고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는 뉘우침도 없이 죄의 나날을 보내는 버릇이 들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죄는 이것저것 말하면서 자기가 더욱 죄에 깊이 빠진 것을 모르고 있다. 인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죄는 미워하더라도 죄인을 미워하지 말라는 구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죄인을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감싸고 덮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사함받는 죄인"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이어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는 전제하에 사죄를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임을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마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러나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은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죄의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5일 투데이 쇼에서 가진 NBC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턴이 전 백악관 여직원과 관계를 가진 것과 이에 대해 거짓말 한 것이 유죄로 판명되더라도 그를 용서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51세의 클린턴을 두고, "그런 멋진 성격을 가졌다면 여성들이 그를 좋아하기 마련"이라며, "나는 인간의 약함을 알기 때문에 그를 용서한다. 특히 그와 같이 강하고 정력적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고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9명의 대통령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져온 그레이엄은 "대통령은 직면하는 중압감으로 유혹에 빠질 수 있다."며 "대통령들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억된다."고 대통령의 중압감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그는 대통령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높은 도덕적 기준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한편, 오늘날의 중압감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문제지만 대통령의 중압감은 믿기 어려울 정도라고 재삼 강조하면서 스캔들 가운데서도 남편을 도운 힐러리를 훌륭한 퍼스트 레이디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구약의 법대로라면 클린턴과 그와 관계를 가졌던 여인들은 목격한 증인들이 던진 돌로 인해 벌써 돌무덤을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정죄와 심판의 구약시대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신약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정죄하여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죄인을 끝없이 용서하며 사랑하여 변화된 새 삶의 기회를 베풀고 죽은 자까지도 살려내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며 변화된 새 삶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정죄와 심판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감옥에 있든 감옥밖에 있든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 사형수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 대한 특별 대사면령이 내려졌습니다. 물론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한해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형집행정지 및 복권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예수께서는 갇힌 자를 해방하시고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형이 확정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36명의 형제들이여, 예수믿고 영원한 형집행정지를 받으시고 복권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믿고 대사면받으신 여러분, "다시 죄를 범치 말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변화된 새 삶으로 영원한 자유와 생명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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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의의 나무가 되라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3)

옛날 어느 나라에 진기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메마른 황야에 보이는 것이라곤 타들어 가는 밀밭과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에 넓게 가지를 벌리고 있는 나무 한 그루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 나무의 나이를 몰랐습니다. 또한 그 나무의 열매를 맛본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하늘을 향해 뻗은 두 팔과도 같은 커다란 나뭇가지를 따라 너무도 먹음직스럽고 너무도 황홀하게 황금빛으로 빛났습니다. 그 열매들은 때로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입과 손을 끌어 들이곤 했습니다. 아이들만이 감히 그것을 맛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기이하고도 오래된 진실을 가르쳐주곤 했습니다. 열매들 중 절반은 독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이 든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열매의 외양은 모두 똑같았습니다. 거대한 몸통 위로 넓게 펼친 두 개의 가지 가운데 하나는 죽음을, 다른 하나는 생명을 담고 있었으나, 그 중 어느 것이 사람을 먹이고 어느 것이 사람을 죽이는가를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매를 쳐다보기만 할 뿐, 만지지는 않았습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갔습니다. 건조한 가을과, 얼어붙는 겨울도 지나갔습니다. 눈과 바람은 헛간과 양 우리의 지붕을 날려 버렸습니다. 초봄의 서리는 새싹을 시들게 했고, 나라 안에는 큰 기근이 몰아닥쳤습니다. 오로지 평원의 나무만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열매들도 건재했습니다. 추위와 서리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별 만큼이나 무성한 숫자로 탐스럽게 열려 있었습니다. 굶어죽기 직전에 처해있는 사람들은 겁먹은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그 나무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빛나는 금빛의 화려한 열매들을 맛보고 나서 그 자리에 벼락을 맞은듯 쓰러지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맛보는 일없이 그대로 굶어 죽든가. 확실치 않은 논의로 분분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사내가 용기를 낸 단호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에게는 거의 굶어 죽기 직전인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내는 오른쪽 나뭇가지 밑으로 다가서서 열매를 하나 땄습니다. 그러고는 눈을 꼭 감고 그 열매를 깨물었습니다. 시간이 패 흘렀습니다. 그래도 사내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행복한 숨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도 서로 밀치며 달려나와 오른편 가지에 달린 열매들을 맛있게 따먹기 시작했습니다. 열매를 딴 자리에는 즉시 다른 열매가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끝없이 먹고 즐겼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의 두려움을 생각하고 웃으면서 팔 일 동안이나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날 이후 사람들은 두 개의 나뭇가지 가운데 어느 가지에서 해로운 열매가 열리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왼쪽 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지를 증오와 멸시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가지를 두려워하다가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곧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가지는 위험하기만 할 뿐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좋은 과실들과 전혀 구분이 되지 않았으므로, 멍청한 아이가 언제라도 독이 든 과실을 따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가지를 완전히 잘라 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복수를 하는 듯한 즐거움으로 그 일을 실행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오른쪽 가지에 났던 좋은 과실들이 전부 땅 위에 떨어져 썩고 있었습니다. 자기 몸의 반이 잘려 나간 나무에는 메마른 이파리 몇 장만이 간신히 매달려 있었고, 껍질도 검게 변해 있었습니다. 가지 위에서 지저귀던 새들도 어디론가 떠나갔습니다. 그 나무는 더 이상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니었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 동산 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먹어도 되는 "생명 나무의 실과"는 먹지 않고 <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린 인간은 "생명 나무의 실과"는 먹어보지도 못하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생명 나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이 범죄하여 잃어버린 생명 나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찾아주신 것입니다. 이를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 나무"를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에는 예수 믿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 사는 곳의 일부를 이렇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여러분은 예수 믿으시고 잃어버린 "생명 나무"를 다시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류에게 생명 나무를 찾게 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 성경은 "의로운 가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렘33:15-16)"  
"의(義)"라고 하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의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계보가운데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너희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사하여 진 것을 가리켜 의롭다고 하며 이를 가리켜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의의 나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의의 나무>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포도나무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1-5)"
인간은 가지와 같은데 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 스스로 과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가 되시는 예수를 믿어 그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 없는 허무하고 불행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다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가지 역시 제하여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열매는 의의 열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마음에 미움과 증오를 끓이고 있는 것은 죄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겉으로 나타난 결과만을 중시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마음에 미움과 증오를 끓이고 있다해도 살인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죄의 드러난 결과만을 보시지 않습니다.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의의 나무가 될 수 있도록 십자가 사랑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해도 여자를 범하지만 않으면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폴 레프(Paul Rep)의 저서 <선과 살과 뼈(Zer Flesh, Zen Bones)>에 이런 우화가 나옵니다. 선을 공부하는 두 중이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습니다. 물이 많아 시내를 못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한 중이 성큼 그 여자를 안아 물을 건넜습니다. 다른 중이 비난했습니다.   "수도승으로서 여자를 가까이 해서 되겠는가! 위험하네. 특히 저런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안다니." 상대 중이 말했습니다. "나는 안았다가 곧 내려놓았지만 자네는 마음 속으로 저 여자를 안고 아직 안 내려놓고 있지 않은가?" 천국의 의, 성적 순결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순결할 수 있도록 성결의 영이신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리 살기가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되게 사시기 바랍니다. 윤선도와 성삼문의 시조에 이런 글들이 있습니다.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다 구천의 뿌리 곧은 줄을 글로 하여 아노라>(윤선도)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성삼문)
<소나무>는 눈서리에 비유되어 어떠한 난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굳은 절개.절조.충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더럽고 혼탁하다하여도 마음 중심에서부터 깨끗하여 독야청청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살피시는 것은 인간의 마음 상태와 중심입니다. 아무리 원수일지라도 마음 중심에서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란 뜻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부지수불여공여천(父之 弗與共戴天)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지수불반병(兄弟之 不反兵)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리>
교유지수부동국(交遊之 不同國)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합니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든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은 무엇이겠습니까? 원수가 도리어 잘 되도록 마음 중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를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쇠하여도, 아니 십자가에 죽는다해도 상대방이 최고로 잘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랑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자신에게 가시면류관을 씌우며, 조롱하며, 옆구리에 창을 찌르며, 멸시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한 청년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된 처녀는 아름답기는 해도 아주 표독스럽고 잔인한 취미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처녀는 청년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어머니에게서 심장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심장을 가지고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다가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그의 손에서 빠져 나와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그렇게 굴러가면서 어머니의 심장은 말했습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하나님의 마음, 예수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목표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열매맺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예수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상의 예수의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 있는 심령을 치유하는 제사장이 되시기 바랍니다. 공의와 진리를 가르치며 그대로 사시는 왕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같은 삶이 바로 <의의 나무>가 되는 삶이요 예수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입니다. 나무의 이용가치는 목재를 생산하는 것 이외에 임산물 연료, 산소제공을 비롯하여 홍수조절, 소음방지, 온도유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태초부터 나무껍질이나 나뭇잎을 모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또한 열매를 식량으로 이용했고 나무를 잘라 집을 지어 살았습니다. 이처럼 나무는 옛부터 인간의 생활근거가 되어 왔으며 문화가 발달한 오늘날에 있어서도 인간생활에 기여하는 바가 큽니다. 미국 뉴욕 타임즈의 일요판 한 번 발행하는 데에 7만 7천 개의 나무로부터 얻은 펄프가 사용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70년 키운 나무를 360에이커로부터 잘라내야 하는 엄청난 수량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의의 나무>가 되어 하나님과 이웃에게 희락의 기쁨이 되며, 자신에게 많은 의의 열매를 맺으며, 이 나라 민족에는 유익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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