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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oss01b.gif 사랑의 기적 cross01b.gif
                             -공관복음서 설교 제1집-

 참조:이 설교집은 제1차 교정본을 올려 놓은 것입니다.


머리글

공관복음서 설교인 "사랑의 기적"과 "사랑의 승리"는 나의 사랑하는 평강 교회 강단에서 1998, 1999년에 행한 주일예배 설교를 모아 엮은 것입니다. 본 설교집을 통해 다시 한번 여러분의 삶에 '사랑의 기적'과 '사랑의 승리'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공관복음서 설교는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마태 복음서를 중심으로 설교된 것을 차례대로
        정리했습니다.
둘째, 마태 복음을 성경본문으로 취했으며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는 참조로 했습니다.
셋째, 마태 복음이 성경본문으로 되어있지 않은 부분은
        이미 요한 복음 설교 등에서 설교되어진 것임을
        밝혀둡니다.
넷째, 공관복음서 설교는 각 장별로 공통된 부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관복음서 전체가 빠짐없이
        설교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본 설교집 발간을 위해 사랑과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신
영기획 구영순 사장님과 직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00년 2월 16일

                                야음산 기슭에서   이 동 희

 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마 1:1-25, 눅 2:1-7, 3:23-38) 
 
2.세가지 예물 (마 2:1-12)
 3.예수는 누구인가? (마 3:1-12, 막1:7,8, 눅 3:15-17, 요 1:19-34) 
 
4.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마 4:1-11, 눅 4:1-13, 막 1:12-13)    
 
5.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마 4:18-22, 막1:16-20, 눅 5:1-11)  
 
6.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마 5:3, 눅 6:20-23, 사 66:2-4)  
 
7.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마 5:4, 눅 6:20-23)  
 
8.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마 5:5, 눅 6:20-23)  
 9.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마 5:6, 눅 6:20-23)  
10.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마 5:7, 눅 6:20-23)  
11.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마 5:8, 눅 6:20-23)  
12.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 5:9, 눅 6:20-23)  
13.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마 5:10-12, 눅 6:20-23)  
14.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마 5:13-16,막 9:50, 눅 14:34-35)  
15.옛법과 새법(마 5:17-34)    
16.이렇게 기도하라(1) (마 6:5-15, 눅 11:2-4)    
17.이렇게 기도하라(2) (마 6:9-15, 눅 11:2-4)    
18.이렇게 기도하라(3) (마 6:9-15, 눅 11:2-4)  
19.저 높은 곳을 향하여 (마 6:16-34)    
20.강청하라 (마 7:7-11, 눅 11:5-13)    
21.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7:13-14,21-23, 눅 13:22-30)  
22.주초를 반석 위에 놓으라 (마 7:15-29, 눅 6:47-49, 눅 13:25-27)
23.이만한 믿음이 있느냐? (마 8:5-13, 눅 7:1-10, 요 4:43-54)    
24.머리 둘 곳도 없도다. (마 8:14-22, 눅 9:57-62)    
25.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마 8:23-27, 눅 8:22-25, 막 4:35-41)
26.사람, 경제, 그리고 예수 (마 8:28-34)    
27.사랑의 기적 (마 9:1-8)    
28.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9-13, 막 2:13-17, 눅 5:27-32)   
29.예수를 영접하라
     (마10:1-42,막 3:13-19, 눅 6:12-16,51-53,14:26-27) 

30.너희가 무엇을 보느냐? (마 11:2-19, 눅 7:24-30)    
31.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마 11:28-30, 눅 10:21-22)  
32.어느 것이 옳으냐? (마 12:1-14,막 3:1-6, 눅 6:6-11)  
33.성령의 힘 입으라 (마 12:22-37)  
34.요나의 표적 (마 12:38-45, 막 8:11-12, 눅 11:29-32)    
35.옥토 같은 마음이 되라 (마 13:1-9, 막 4:1-9, 눅 8:4-8)  
36.알곡과 가라지 인생 (마 13:24-30, 36-43)    
37.겨자씨 한 알 같으나 (마 13:31-33, 눅 13:18-21,막 4:30-32)  
38.감추인 보화 (마 13:44-46)    
39.새것과 옛것 (마 13:47-58)    
40.삶을 풍요케 하시는 주님
    (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41.삶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
    (마 14:22-33, 막 6:45-52, 요 6:15-21)
 
42.성(聖)과 속(俗) (마 15:1-20, 막 7:1-23)   

 

 1.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대러라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1-25, 눅 2:1-7, 3:23-38)

힌두교의 본산인 인도에 젊은 선교사가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그 곳에서 생활하던 중에 힌두교 승려 한 사람을 알게 되어 가까이 지내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던 중 선교사가 개미굴을 건드려 본의 아니게 많은 개미를 밟아 죽였습니다. 이를 본 승려가 깜짝 놀라며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난 듯이 말했습니다. "아니, 이 일을 어쩌나. 어쩌다가 이렇게 많은 생명을 죽였소.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 가운데는 우리 조상이 있을지도 모르는데...혹시 우리 할아버지나 고모나 손자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 승려는 영혼 불멸과 윤회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선교사는 어쩔줄 몰라 하며 그 해결책을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죠? 모르고 저지른 실수인데.... 어떻게 해야 죽은 개미들한테 사과를 할 수 있을까요?" "......" 승려는 한참을 말없이 개미굴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음........,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이 죽은 다음에 개미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선교사는 어리벙벙하여 있다가 지혜로운 답변을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개미가 되어야 개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겠군요. 실로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로 오신 까닭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에 빠져 허덕이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직접 이야기하셔서 죄를 깨우쳐 주기 위해 사람이 되셨던 것이지요."

구약 성경의 첫 번 성경인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인류 역사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약 성경의 첫 번 성경인 마태복음 1장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보여 주며, 마태복음은 타락한 인류와 그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신음하는 만물을 재창조하기 위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타난 예수의 족보 이야기는 한 마디로 죄 많은 세상에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즉 예수의 족보를 살펴보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족보의 특성은 다섯 명의 여인이 끼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다말, 라합, 룻, 그리고 밧세바와 마리아 등입니다. 원래 유대인의 족보에는 여자들 이름이 오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여자는 법률상의 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하나의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물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여자는 단순히 그 여자의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 물건으로 그 주인의 원하는대로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매일 아침에 드리는 기도문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이방인으로나 노예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드리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 족보에 오른 5명의 여자 중 라합과 룻, 그리고 다말 등 3명은 이방인이었고, 밧세바와 마리아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게다가 마리아를 제외한 4명의 여인들은 혼인법상 불륜의 관계까지 저지른 타락한 여인들로 불명예스런 과거를 안고 있는 여인들이었습니다. <다말>은 원래 유다의 아들인 엘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이 죽자 아들을 낳기 위한 집념으로 시아비 유다까지 유혹해서 자식을 낳은 집요한 여인이었습니다.(창38:6, 대상 2:4) <라합>은 잘 알다시피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습니다.(수 2:1-7) 그리고 <룻>은 모압 여자인데 원래 모압 족속은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올 때 아내가 소금기둥되어 죽고 두 딸만 데리고 나왔는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그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우고 서로 교대하여 아버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큰 딸이 낳은 아들이 모압이고, 작은 딸이 낳은 아들이 벤아미로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 19:31-38) 그러므로 <룻>은 근친상간을 통해 퍼진 불륜의 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불륜의 씨인 룻은 남편을 잃자 시어미 나오미를 따라 유대 나라에 들어와 역시 자식을 낳기 위해 근친상간을 서슴지 않았던 여자였습니다. <밧세바>는 본래 충신 우리아의 아내로, 다윗이 비겁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우리아를 전쟁 일선에 내보내 파놓은 함정에 빠뜨려 죽이고 빼앗은 여자였습니다. 이들 네 여인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불륜을 저지른 수치스런 여인들이었습니다. 가히 이방 여자에, 그것도 명예스럽지 못한 타락과 불륜의 여인들이 들어 있는 세계(족보)에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은 예수는 과연 모든 인간의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죄 많은 이 땅에 태어나신 분이심을 말합니다. 이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나 여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 등 누구나 다 평등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는 인종간에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는 모든 인종을 뛰어넘어 남녀노소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유대인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십니다. 유대 족보에 들 수 없었던 여자들의 이름이 올라 있다는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서는 남녀의 차별이 없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다 소중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모두가 다 평등합니다.

어느 곳에 잘 지은 호화판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뭇 으리으리한 그 교회 앞에 남루한 품팔이가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아! 여긴 천당이야.'이렇게 생각한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그리곤 목사를 만나서 그 교회의 신도가 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아! 당신이 여기 신도가 되겠다고. 갸륵하군.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신에게 간청하시오. 석달 열흘 동안. 그리곤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시오. 응답이 있거들랑 재차 찾아오시오!" 그리고 나서 목사는 이 사내의 등을 떠밀어 내보내었습니다. 그 길로 만사 끝난 줄 안 목사 앞에 사내는 정확하게 석달 열흘 뒤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왜 왔소? 주님의 응답이 있었소?" 목사는 사뭇 퉁명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품팔이 사내는 능청스러웠습니다. "그럼요. 응답을 주셨소. 주님께선......" "뭐라고 하셨소?" "이 교회의 신도 되길 단념하라 하셨소." "그럼 그렇겠지! 한데 뭐 하러 왔소." "주님께서 당신께 전하란 말씀이 있어서요!" 사내는 입술에 침을 묻히고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그의 말의 요지는 주께서는 이 교회가 탐이 나서 여기 드시기를 바라 부디 받아 달라고 빌었으나 끝내 거절해서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는 거였습니다. 말을 마친 사내는 힘주어 마무리를 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꼭 당신께 전하라고 하셨소!" 이 이야기는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이라는 책에서 그릇된 기독교를 비판하는 일종의 욕설을 소개한 것인데 만약 이 이야기가 우리네 기독교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으며, 빈부의 차별이 없으며, 지위고하의 차별이 없는 세계입니다. 예수께서 타락과 불륜의 여인들로 더럽혀진 유대 족보 가운데 태어나신 것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그대로 취하여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신 겸손하신 분이심(빌 2:5-8)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말합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마 9:13)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는 성도와 죄인 사이에 장벽이 없습니다. 또한 있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여러분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팎에 있는 죄인들 모두를 다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의 족보에 온갖 종류의 죄인들이 다 올라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류의 역사가 죄악에 가득 찬 역사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죄인들의 혈통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것은 그만큼 죄인들 사랑하시고 죄인들과 함께 하시며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고자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모두에게 평등합니다. 십자가의 구원은 모두에게 평등합니다. 십자가 예수 앞에 나와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구원을 체험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나신 예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자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습니다. 성령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생명의 영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따라 살게 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입니다. 이같은 성령의 열매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게 하여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줍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그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이루게 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이 예수 믿는 여러분 가운데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게 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깨닫게 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분의 삶을 통해,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하시며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분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잘 보여 줍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인간의 모습과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고, 비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만듭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고양이와 쥐의 관계로 설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쥐가 고양이에게 붙잡힌 것은 힘 때문입니다. 그러나 붙잡히기 전에도 쥐는 고양이 앞에서 꼼짝 못합니다. 힘이 가해진 것은 아니지만 능력 권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능력인 성령을 소유한 자는 강합니다. 그것을 물리적으로 분석하여 설명하기 힘들지만 이 능력을 받으면 다니엘처럼 사자 굴속에 던져져도 불안과 공포에 떨지않고 태연하며, 요셉이나 베드로처럼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을 부르며, 다윗이나 엘리야처럼 피난 중인 굴속에서도 미래를 꿈을 꾸게 됩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뒤에서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시퍼런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 진퇴양난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앞에 놓인 홍해 가운데 고속도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사막 한가운데 반석에서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생수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스데반처럼 예수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예수의 마음으로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하며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처럼 삼킬듯한 풍랑 속에서도 평안히 잠들 수가 있습니다. 이같은 성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살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권능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날마다 성령으로 거듭나시며 성령으로 살아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며, 세상을 이기는 성령의 권능이 항상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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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 가지 예물          

(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 2:1-12)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 사랑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성탄절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성탄절을 맞이한 여러분의 표정을 보니 사랑하는 가족이나 형제들로부터,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사랑의 선물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설사 사랑의 선물을 받지 못했다해도 서운해 할 것 전혀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선물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크고 가장 기쁜 선물이 되시는 예수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예수님은 평화의 선물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헤롯왕이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유대의 왕이 될 예수께 자신도 경배하겠으니 태어난 곳을 알려달라고 한 것은 사실 태어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아예 처음부터 죽여 없애겠다는 의도에서 한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평화의 왕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인류에게 평화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평화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를 영접하고 경배하는 곳에 임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사라져 가는 새벽에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곳에 어두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를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경배하며 그에게 사랑의 예물을 드리십시오.

먼 옛날, 어느 나라에 오래된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그 예배당에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이 있었는데, 너무 높은 탑에 달려 있어서 좀처럼 사람의 힘으로는 종을 쳐서 소리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그 종은 크리스마스날 밤, 아기 예수께 귀한 예물을 바치는 사람이 있을 때에 저절로 움직여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껏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해 크리스마스 저녁에도 사람들은 종소리를 듣고자 저마다 귀한 예물을 가지고 예배당에 모여들었습니다. 피터와 그의 동생도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자 예배당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눈이 쌓인 길을 걸어가자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길가에 누군가 쓰러져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피터가 얼른 뛰어가 보니 한 아주머니가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피터는 동생에게 예물로 바칠 은전 한 닢을 건네주면서 먼저 교회로 보냈습니다. 자기도 예배를 드리고 싶었지만,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이 아주머니는 이미 얼어죽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당에는 사람들로 꽉차 있었습니다. 피터의 동생은 예배가 끝날 때쯤 예배당에 들어섰습니다. 그때는 마침 예물을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마다 훌륭한 예물을 들고 나왔습니다. 부자는 금전을, 학자는 그가 쓴 책을, 농부는 잘 앵글은 곡식 단을 한아름 안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임금님이 나올 차례였습니다.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며 바라보는 가운데 임금님은 그의 왕관을 벗어 제단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종소리 듣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름답고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제단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제단 앞에는 아무도 몰래 은전 한 닢을 올려놓은 피터의 동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눈밭에 쓰러져 얼어죽어 가는 사람을 돌보기 위해 동생에게 들려 보내 탄생하신 예수께 드린 은전 한 닢이 예배당의 종소리를 울리게 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이웃들을 섬길 때 사랑의 종소리로 멀리 멀리 펴져 울려 나가는 것입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곧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 이 표적 중의 표적이 되는 예수 님의 탄생,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는 찬송을 받으실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성탄절에 여러분들은 예물로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에서처럼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한과 몰 약을 드리시겠습니까?

크리스마스와 함께 항상 연상되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 예물을 예수께 드린 동방박사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의 이름과 출신은 알 길이 전혀 없습니다. 이방인들인 이들이 어떻게 예수를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늘의 별을 보고 탄생하신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임을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신비에 싸여 있을 뿐입니다. 일찍부터 있던 동방의 전설에 따르면 박사들은 열둘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셋이라는 전통이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이들이 셋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온 예물이 셋이라는 것을 보면 그들이 세 명이었다는 판단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훗날 전설은 그들을 왕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후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의 이름은 카스파르, 멜키올 그리고 발타잘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멜키올은 나이 많은 사람으로 백색 머리에 긴 수염을 가졌고 황금을 선물로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카스파르는 젊고 수염이 없었고 얼굴이 붉으며 유향을 선물로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발타잘은 새로이 기른 수염에 거므스레한 얼굴이었고 몰약을 선물로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아주 일찍부터 사람들은 이 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이 아주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특성과 그의 업적에 아주 특별히 잘 어울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 및 고귀한 사람을 만나거나 그에게 충성을 다짐할 때 특별한 예물을 바치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박사들이 바친 예물은 그보다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께 드린 첫번째 예물은 황금이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백발이 성성하며 수염이 하얀 멜키온이 예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황금은 동서 고금을 통해 최고 귀하며 불변하는 성질의 금속으로서 흔히 부(富)를 상징하며 왕께 드리는 예물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황금을 예물로 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을 세상 만물을 소유하실 정도로 부한 자요, 절대 권위를 가지신 왕으로서 인정하는 표시인 것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황금 반지를 예물로 주고받는 것은 서로의 사랑을 변치 말자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황금 예물은 하나님께 대한 변치 않는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황금 예물은 예수를 만왕의 왕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는 힘으로써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통치하십니다. 예수는 모든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시되 왕좌로써가 아니라 십자가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의 자리입니다. 예수는 곧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류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탄생하신 예수께 황금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만왕의 왕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왕에게 바치는 가장 좋은 선물은 무엇보다 순종과 충성입니다. 탄생하신 예수께 황금을 드리십시오. 불변하는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께 순종할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예물로 받으실 것입니다.

두 번째 예물은 홍안(紅顔)의 청년 카스파르가 드렸다고 알려지는 유향입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에서 채취한 향기로운 송진으로서 성전 제사나 헌물로 자주 사용되는 것입니다. 향기가 좋은 유향이 사용되는 곳은 성전 예배와 성전 희생제사였습니다. 예수께 이 유향을 드렸다는 것은 예수의 제사장(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임무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나타내는 라틴어 폰티펙스(pintifex)는 '다리를 세우는 자(bridge-builder)라는 뜻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량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를 성경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온 인류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십자가의 희생으로 다리를 놓으신 일이야말로 가장 향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은 상한 심령으로 통회 자복하는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참으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선물은 여러분의 유향, 즉 상한 심령, 통회 자복하는 회개의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검은 얼굴에 수염이 많았던 중년의 발타잘이 드린 예물은 몰약(沒藥)입니다. 몰약은 죽은 자를 위한 선물입니다. 몰약은 시체를 염(殮)하거나 시체가 썩지 않게 하기 위해 바르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매우 귀한 자의 시체에만 바를 정도로 고가품이었습니다. 탄생하신 예수께 이 몰약을 바친 것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예비하는 예물이었습니다. 예수는 실로 인류를 위해 희생의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홀만 훈트(Holman Hunt)는 예수에 대한 유명한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나사렛 목수집 문에 서 있는 그림입니다. 그는 아직 소년입니다. 기울어지는 저녁 햇빛이 문에 비치고 소년 예수는 벤치 위에서 갑갑했던 사지를 펴기 위해 문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문간에 서서 팔을 폈습니다. 그러자 그의 뒤편 벽에는 기울어 가는 석양이 비치어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그림자입니다. 배경에는 마리아가 서 있는데 그는 그림자를 보면서 다가올 비극의 공포를 그 눈에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사람을 위해 살다가 마침내 사람을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자신의 생명과 자기의 죽음을 바치려 오셨습니다. 탄생하신 예수께 몰약을 드리십시오.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고자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매우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아낌없이 예수의 몸에 부어 드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장사(葬事)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6-13)

예수를 위해, 곧 복음을 위해 여러분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몸(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쏟아 부으십시오. 그리고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여러분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의 장사(葬事)를 준비한다는 것은 복음 전파를 위해 옥합을 깨뜨린다는 의미입니다. 복음 전파와 관련이 없는 기념비들은 무의미한 것들입니다. 영원히 기념될 만한 예물, 몰약을 탄생하신 예수께 바치십시오. 결국 동방 박사들은 가장 위대하신 분께 가장 고귀한 예물들을 바치신 것입니다.

큰 기쁨의 계절, 성탄절에 여러분들은 예수께 예물로 무엇을 준비하여 오셨습니까? 황금을 바치십시오. 그리고 유한과 몰약을 바치십시오. 순종과 충성, 사랑과 희생, 그리고 상한 마음, 통회 자복하는 회개의 마음을 바치십시오. 또한 복음을 위해 옥합을 아낌없이 바치십시오.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되는 동방 박사들과 같이 가장 적합하고 가장 귀한 예물을 바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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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예수는 누구인가?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자라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요 1:18-28, 참조 : 마3:1-12, 막 1:7-8, 눅 3:15-17)

예수는 누구입니까? 예수를 만났던 저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아 : "나는 그 분의 곁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눅10:39)

바리새인 : "그는 더러운 여자의 접근을 허락한 인간이오."(눅7:39)

바디매오 : "그 분은 나를 보게 했습니다. 새 날을 주셨습니다."(막10:51)

강도 : "그 분은 나의 최악의 순간에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눅23:43)

가야바(대제사장) : "우리의 전통적인 종교를 파괴하는 자이다."(마26:65)

빌라도 : "정말 모를 사람이오. 난 개입하고 싶지 않소."(마27:24)

백부장 : "틀림없이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오."(마27:54)

거라사의 광인 : "그 분은 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막5:3)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5,16) 이에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여러분도 베드로같은 신앙고백으로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 앞에 나온 나다나엘은 한 번도 자기를 본 적도 없는 예수께서 자신의 속 사람의 됨됨이를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가리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 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자기 민족의 훌륭한 영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정치적인 '메시야'(구세주)로 예수를 파악한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 산에서 한 어린아이의 점심 도시락 하나로(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군중 5천명을 다 먹이고 남은 조각이 무려 열 두 바구니나 되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요6:1-15) 배고픈 유대인들은 경제적인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나라 안팎으로 경제가 어렵고 세계 정치가 혼란에 빠졌을 때 카리스마적인 구세주(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19세기의 프랑스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나폴레옹 전설'도 과거의 초상 속에서 당대의 메시아를 찾으려 했던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공화정의 비능률에 진절머리를 내며 나폴레옹1세 시대를 그리워하던 프랑스 국민들은 마침내 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을 황제로 떠받들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재림(再臨)'으로 기대했던 나폴레옹 3세의 등장은 프랑스의 영광을 되살리기는커녕 오히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 수도 파리가 함락되는 치욕을 안겨 주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에 지친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에게 대권을 안겨 준 것 역시 시대 착오적인 '메시야 콤플렉스'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의 어느 정부, 어느 나라이든 궁극적인 정부나 나라가 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의 제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 할지라도 궁극적인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제아무리 훌륭한 왕이었다 해도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될 수 없었습니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의 정부가 아니라면 그것은 영원할 수 없으며 당대 백성들의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이 세상)와 오는 시대(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메시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외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궁극적인 해결의 참된 "길과 진리"가 없습니다(요14:6). 예수께서 인류와 세계의 메시아가 되시는 이유는 그 분이 참된 인간이시며, 동시에 참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1:1,14,). 예수는 인류의 역사 이전에 이미 계신 분으로 인류의 역사 시작(알파)과 마지막(오메가)을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예수의 메시아 됨은 유대인이 생각했던 그러한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권능을 가진 메시아임이 여러 가지 표적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구약 성서가 약속한 모든 것을 성취하면서 전 인류에게 참 진리와 생명을 부여해 주고 보증해 주는 분으로서의 메시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전 인류를 포함한, 이 세상의 권세가 침범할 수 없는 영적 왕국을 건설하여 거기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가 참 하나님 되심과 참 인간 되심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1:1-3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고, 요한 복음1:1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바로 예수께서 창조 이전에 계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다는 것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흔히 <그리스도의 선재>(先在,The pre-existence of Christ)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해서는 성경 여기 저기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예수가 아브라함보다 나중에 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8:58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 자신의 기도문에서도 이를 밝히셨습니다. 요한 복음 17:5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2:6-8에서 그리스도의 선재를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골로새서 1:15-17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는 분명히 역사 이전에 계신 분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안으로 오신, 즉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바로 예수가 참 하나님 됨,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뜻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만이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인성(人性, 참 사람되심)과 신성(神性, 참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단(異端)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인간성을 무시하고 신성만을 강조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관계가 없는 존재가 될 것이며, 그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寶血)은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에 신성(神性)을 무시하고 인간성만을 강조하면 그의 생애와 부활은 전혀 우리와 무관한 것이 되어 인간에게 궁극적인 생명과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었습니다."(칼케돈 신조) 그러므로 예수가 누구인가를 바로 인식하는 것이 역사를 바로 인식하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되며,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바로 깨닫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미 역사 이전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참 인간 되심'(人性)과 '참 하나님 되심'(神性)은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역사적 소명의 내용이며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 골로새 교회의 상황을 에바브라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대부분은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그 열매를 맺게 된 것을 감사하고 칭찬을 했습니다. 또한 질서있고 견고한 신앙에 대하여 듣고 기뻐했습니다(골1:3-8,2:1). 바울은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일어난 이단적 사상에 대하여 교회가 상처받을 것을 염려하는 가운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으로 보존되기를 원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골로새서를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치료보다 예방이 좋다는 생각에 이단의 악한 사상이 만연하고 번성하는 기회를 가지기 전에 유비무환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와 주변 교회에 침투해 교회를 혼란시키고 무너지게 하려했던 이단 사상들은 대충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적 경향의 유대인들>, <이교도의 철학>, <미토라 신자>, <가현론(假現論)>, <엣세네 금욕주의>, <에비온 주의>, <영지주의파> 등 각종 이설(異說)들이 난무했습니다. 그 시대는 한 마디로 사상적 혼합주의(Syncretism) 시대였습니다. 헬라의 철학과 우상숭배, 동방의 신비주의, 성지 동편(聖地 東便)에 번영했던 금욕주의, 기타 미신적인 마술 행위에다 유대인의 율법주의 등이 뒤섞여 사상적인 일대 혼합주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교회가 사상적, 영적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골로새서입니다. 그 우월성의 첫째는 그리스도의 전적 충족성(全的 充足性)입니다. 골로새서 1:15,19,등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 안에 모든 것이 충만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특히 골로새서 2:2은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배가 감추어져 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골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골로새서 2:9은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과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지금도 잔재하고 있지만 고대 세계를 지배한 사상은 점성술이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이 점성술에 따른 철두철미한 숙명론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숙명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데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그 이상의 권세나 지식의 원조가 더 필요하다고 가르침으로 교회를 혼란시키고자 했던 것이 당시 각종 이단 사설들이었습니다. 이들 이단자들은 복음의 평이함을 들어 좀 더 치밀하고 깊이가 있는 지식(gnosis)을 더 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만으로 인류의 영육간의 모든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시기에 넉넉하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상이나 이론보다 우월하신 것은 예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6,17)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의 셋째는 그 분이 혈과 육을 가진 참된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인류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골1:22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참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참 인간이 되심을 골로새서 2:9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만큼 진실로 그리고 참으로 인간의 혈과 육을 가진 분이십니다.

이렇게 인류의 진정한 메시아가 되심에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되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부정하고 교회를 혼란시키고 붕괴시키려했던 당대의 대표적인 사상이 영지 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였습니다. 영지주의를 간단히 말하면 영은 선하고 물질(육체)은 악하다고 보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선하신 분인데 악한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오실 수 없다며 예수의 인간되심, 즉 인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이원론을 가지고 예수에게서 인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예수를 인류의 구주로 하는 것을 전연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의 육과 혈을 가진 몸을 강조하고 예수가 자기 몸을 통하여 인류를 구했다고 주장하는 것(골1:20-23)은 바로 이같은 영지주의 사상의 잘못된 것을 깨우쳐 배격하고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말대로 만일 물질이 악이라면 우리의 육체도 악이 됩니다. 육체가 악이라면 인간은 육체로 아무 짓을 해도 상관이 없게 됩니다. 영만이 중요하고 육체는 조금도 중요치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차피 구원받지 못할 육체를 가지고 별 짓을 다해도 무관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소위 윤리 도덕 폐기론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 영지주의 사상은 기독교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순결과 정절에 대한 관심을 버리게 하고 육체적 신체적인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3:5-8에서 이렇게 경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 3:5-8)

영지주의는 인간의 구성요소 중 육적 부분은 부정하고 영에 해당하는 부분인 엘리트(Elite)만을 인정하며 그를 독자적인 인간의 본체로 인정해 줍니다. 이들 사상은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영적인 인간은 지식(gnosis)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상 우리가 살펴 본 바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은 영지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기독교를 철학및 신지학(神知學)으로 변화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즉, 단지 하나의 종교 사상이나 철학으로 전락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성공했다면 기독교 신앙은 파괴되었을 것이고 기독교를 멸망시키고 세계에 있는 전 교회의 신앙에 치명적인 손해를 주었을 것입니다. 옛날 희랍 로마 시대는 영웅 숭배 시대로서 훌륭한 지도자란 절반쯤은 사람이고, 절반쯤은 신에 가까운 특수성을 지닌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이며 완벽한 지도자는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뿐이신 것입니다.

예수는 과연 누구입니까? 여러분과 세상의 구세주(그리스도)이십니다. 구세주로 참 인간이 되셔서 세상오신 예수를 영접할 때, 인간은 존재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삶의 목적을 바로 깨달아 창조적이고 영광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참 하나님 되심을 믿고 고백할 때 인간은 그 생명의 존엄성과 영원함, 그리고 역사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바로 인식하여 역사 속에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하나님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여러분에게는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예수가 여러분의 영육에 아울러 구세주(메시야, 그리스도)되심을 믿으시고,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영원한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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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리라(누가복음 4:1-13, 참조 : 마 4:1-11, 막 1:12-12)

1.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계적인 부호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초강대국으로 만들어 천하를 호령하려는 것도 아니며, 또는 세계 최고의 유명인사나, 주인공이 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이윤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이 되거나, 집단의 세력화를 형성한다면 이미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가야하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인간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고 희생하신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가 부귀 영광과 권세, 출세의 길을 물리치시고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광야 황막한 곳,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그런 곳에서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험하는 자가 예수를 이렇게 시험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그대를 따르기 원한다면 그대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서 그들에게 물질적인 욕망을 채워 주라." 경제 문제를 해결하여 줌으로 해서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교회의 사명은 나라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나 소위 재 테크(財 Tech)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정의, 분배 정의의 실천을 요구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16:8)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1:1)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잠21:6)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는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약6:1-6)

경제 정의, 분배 정의의 실천을 위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경제 성장이나 뛰어난 경제 이론과 사상에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의 관심은 정의롭고 공평인 경제생활, 그리고 주어진 것을 함께 나누는 생활에 있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세상의 부귀영화, 권세와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2. 다음으로 시험하는 자는 산꼭대기에 예수를 세우고 천하만국을 보이며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주리라며 자신에게 경배하기만 하라고 시험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천하만국을 호령하는 권세와 영광이 그 목표가 아닙니다. 교회가 지향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섬김의 자리입니다. 교회가 가야할 자리는 주인의 자리가 아니라 종의 자리입니다. 교회가 권력을 추구하게 될 때 교회는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가 택한 길은 주인의 자리가 아니라 종의 자리였습니다. 예수가 선택한 길은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는 권력을 향하여 몰려드는 무리들을 집단 세력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극소수의 제자들마저 이름도 빛도 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어린 조카 단종의 왕관에 욕심을 낸 수양이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는 양위식을 강제로 시행합니다. 이 때 국새를 안고 섰던 예방승지 성삼문이 터져오르는 분과 슬픔을 참다못해 그만 소리를 내어 대성통곡합니다. 성삼문은 그날 죽으려는 동지 박팽년을 말려 죽지 못하게 하고 때를 기다려 훗날 단종을 도로 임금자리에 앉히도록 하자고 의논합니다. 분을 품고 기다리기 2년, 세조 2년 6월에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가 열리는 날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모의합니다. 이에 가담한 사람들이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이개, 김질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질이 변심하여 세조한테 달려가 이 모든 것을 고자질합니다. 이로 인하여 온갖 악형을 받고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곧 사육신입니다. 이를 두고 함석헌 선생은 차라리 세익스피어를 못 읽고 괴테를 몰라도 이것은 알아야 한다며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 중에도 살아 있는 한 얼을 보기 때문이다. 겉에 말라붙은 더께와 썩은 살을 헤치고 오히려 뜨거운 피,- 뛰는 생살의 만짐이요, 풍화 부식된 지각을 뚫고 들어가 백열(白熱)의 지심(地心)을 엿봄이기 때문이다. 불의가 주는 녹은 입에 넣을 수 없다 하여 한 알을 다치지 않고 곳간에 쌓아두었으며, 승지의 안방에 거적자리 하나밖에 없었으니, 이것이 한 얼의 맑음이 아니며, 부젓가락으로 다리를 뚫고 배꼽을 쑤시며, 칼로 팔을 끊어도 낯빛이 까딱없었으니, 이것이 한 얼의 거셈이 아니냐? 마음이 바다같이 너그러우니 그 모진 형벌도 허허 웃으며 당하였고, 혼이 금보다 참되고 정성이 불보다 더 뜨거웠으니 나를 죽이는 사람을 보고도 "나으리가 선조의 이름있는 선비를 다 죽이어 한 사람이 남았고 사실 이 모계에는 참여치 않았으니 두어두고 쓰시오. 이는 참 어진 사람이오."하고 알뜰하게 권하였다. 조선 사람이 아무리 약해졌다기로서 내 살을 지지는 무사를 보고 "철편이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너라" 하고 그 혼이 제 속에 들어 있음을 안 다음에 근심할 것이 무엇이며, 조선 사람이 아무리 비겁해졌다기로서 내 등 껍질을 산 채로 세워놓고 벗기는 귀신을 향하여 "내가 한 자루 칼을 가지고 자네를 내쫓고 내 옛님을 도로 모시려다가 불행히 간사한 놈이 일러바쳐버렸으니 다시 무엇을 할꼬?" "연회하는 그날 내가 칼을 쓰겠다는 것을 너희 놈들이 만전지계가 아니라 하며 못하게 하여 오늘날의 화를 만들었으니...짐승과 다름이 무엇이냐? 다시 물을 것 있거든 저 선비 아이들한테나 물어라" 하는 기개가 자기 안에 있음을 안 다음에야 두려워할 것이 무엇일까? 5천 년 역사에 이 한 구절이 없으면 빛이 한층 떨리는 일이요, 5백 년 부끄러움의 시대에서도 이 한 사실이 있으면 다 갚고도 남을 수가 있다. 육신(六臣)은 우리를 위해 만장의 기염을 토하는 산 영들이다. 육신의 모복운동이 실패에 돌아간 것은 생각할수록 분한 일이다. 간악한 것이 이기고 충의가 도리어 패하다니, 충의의 그들은 천하가 다시 원해 할 일을 하려다가 한목숨을 보존 못하기는 그만두고 온 집이 멸족을 당하고 노량진두에 한줌의 흙이 되어버렸는데, 간악한 그들은 한세상 영화를 누렸을 뿐 아니라, 역사 위에까지 공신명상(功臣名相)으로 적히다니. 위하여 이를 갈자면 이가 모자랄 지경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육신의 사명은 처음부터 성공에 있지 않고 역시 죽는 데 있었다. 그들은 죽기 위해 뽑힌 것이었다. 그 실패의 원인은 김질의 배반에 있는 것도 아니요, 세조의 흉악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에서 허락 아니한다면 한 개 김질이 어떻게 의인을 죽일 수 있으며, 섭리가 원하는 것 아니라면 세조가 아무리 권세 있기로 충량을 어떻게 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육신을 정의의 제단에 제물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이 민족을 위하여 제물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어야 하였다. 죽어서 첫째는 한국을 위하여 불의의 빚을 물어야 하였고, 둘째는 의인의 씨를 살리어야 하였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처음부터 부귀영화, 권세에 있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예수 십자가는 교권주의자들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인류 구원을 위한 어린양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인류의 죄악과 불의에 대한 삯으로 그는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의롭게 변화시키기 위해 그는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가신 길은 권세와 부귀영화의 길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제물이 되는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3. 세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사나 능력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명성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능력은 이웃 사랑을 십자가에서 나타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이웃 사랑을 위해 십자가에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기독교인의 능력은 겸손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으로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6-8)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겸손이 없는 능력은 축복일 수 없습니다. 겸손이 없는 부귀는 축복이 아니라 불행과 재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나 능력을 헛되이 시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나 능력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거나 사람들을 끌어 모아 집단 세력화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나 능력은 이름도 빛도 없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존 웨슬리가 32세의 선교사로 조지아 주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그는 그레이스 머레이라는 아름다운 크리스찬 여성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녀와 결혼하기를 절실히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생과 친구들은 그의 결혼이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있는 감리회를 산산조각나게 만들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존 웨슬리에게 결혼 생각을 버리도록 서둘러 설득했습니다. "이봐, 존! 자네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일일걸세." 웨슬리가 이로 인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자 한 친구가 "우리 제비뽑기를 통해 자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어떤가"라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웨슬리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그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따라서 그 친구는 세 장의 종이를 준비하여 한 장에는 "결혼하라", 또 한 장에는 "올해는 생각지 말라", 마지막 장에는 "더 이상 생각지 말라"고 썼습니다. 웨슬리는 눈을 감은 채 조심스럽게 그 중 하나를 집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가 잡은 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였습니다. 웨슬리는 크게 실망했으며 그녀와의 결혼을 포기했습니다. 15년 후 웨슬리는 어떤 런던 상인의 부유한 미망인인 바제일 여사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미망인은 그와는 전혀 맞지 않는 배우자였으며, 오히려 전도 사역에 큰 장애 역할까지 하였습니다. 예로써 그녀는 남편인 존 웨슬리의 책상에서 함부로 서류나 편지를 가져가 편지 내용을 멋대로 바꾸거나, 남편의 서류나 편지들을 아무한테나 넘겨주어 곤욕을 치루게 했습니다. 또한 질투심이 많아서 누가 자기 남편과 여행하고 있는지 알고자 수백 마일을 따라가 복음 전도를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20년간에 걸쳐 비참한 결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비뽑기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늘날 우리 감리교회에서 감독 선거를 하는데 세상 못지 않은 타락상을 보이니까 일각에서 차라리 제비뽑아 결정하자는 주장이 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워 제비를 뽑아야 할만큼 진리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오늘날 은사나 능력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은사나 능력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교회들입니다. 교회는 그 중심에 십자가가 있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것을 높이 치켜 세우고 권력을 향하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자신의 어깨에 걸머지고 죽음의 장소 골고다로 가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세상의 부귀영화, 권세와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귀 영화, 권력과 성공 출세가 여러분의 삶의 목표라면 차라리 교회를 떠나서 사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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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 4:18-22, 참조 : 막 1:16-20, 눅 5:1-11)

오늘은 4.19혁명 38주년을 맞이 하는 날입니다. 사회나 정치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학업에 전념해야 할 학생들이 생명을 내놓고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궐기했다면 그 사회는 분명 병들어있는 사회고, 그 질환은 일부 정치인들의 주장대로 학생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망쳐놓은 무책임한 정치인들 자신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4·1학생궐기의 원인은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부통령 자리를 독점하여 영화를 죽을 때까지 누리려던 이승만과 이기붕, 그리고 그들의 주변에서 함께 부귀를 누리고자 한 자들의 국민주권 강탈행위 때문이었음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분수령을 이룬 4·19혁명은 이렇게 일어났습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있은 당시의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유세에 그곳 문교당국이 학생들의 참가를 막기 위해 일요일인데도 등교를 명해 이에 학생들의 불만이 폭발해 이를 거역하는 반대시위를 감행한 것이 바로 발화점이 되었습니다. 이 대구 학생의 데모는 3월 6일의 서울 고교생으로 대전지방으로 다시 수원, 충주, 부산으로 점차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유당 정권은 대구 고교생들의 데모에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 대로상에서 어린 학생들을 사정없이 때려눕혀 20∼30명의 중경상자를 내게 하는 한편 수백 명을 체포, 연행해갔습니다. 자유당 정권은 단호한 탄압을 가하면 학생들이 겁에 질려 조용해질 줄 알았으나 이것은 그들의 오산이었습니다. 오히려 고교생들이 전국적으로 대구 데모에 호응하고 나섰습니다. 그 무렵 자유당 정권은 이미 민심을 잃고 물러서야 할 상황이었으나 권력에 연연한 그들이 물러설 까닭이 없었고 정상적 절차로는 선거에 승산이 없다고 보자 그들은 이른바 3인조, 5인조의 협잡술로 전국적 규모의 부정을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이같은 강도선거에 불만이 가득한 국민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 첫 항쟁이 마산에서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대구 데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마산에서도 항의하는 학생과 민중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서도 시체를 아무렇게나 처리하고 시위하는 시민들을 공산주의자 취급을 해서 전국민의 분노를 샀고 이에 대한 경찰의 강압적 탄압은 계속되었습니다. 자유당 정권의 이같은 단호한 탄압결의에도 불구하고 4월 6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 규모의 항의시위는 그치지 않았으며, 3월 11일 총에 맞아 숨진 한 중학생인 김주열군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두 눈에 수류탄이 박힌 채로 발견됨으로써 점차 마산 시민의 항쟁이 폭발하고 전국민의 분노를 샀습니다. 국민의 반정부투쟁은 점차 격렬해지고 "자유당 정권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전국적 규모로 산만하게 벌어지고 있던 민중의 반자유당정권 투쟁은 마침내 4월18일 서울에서 고대생이 귈기함으로써 항쟁의 불길은 대학가에 번지게되었고 고대생에 대한 자유당 정권의 깡패 동원 사건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길가에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서울의 각 대학생들이 4월 19일 총궐기하여 경무대로 몰려갔고 이에 경찰은 사정없이 총격을 가해 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으며 그날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이런 중 25일 계엄하에서 대학 교수단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가두시위를 감행했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자유당 정권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닫고 26일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자유당 정권은 당초 전국민의 빗발치는 "물러가라!"는 요구에도 권력에 대한 집착이 끈질겨 4월 23일 부정·불법으로 당선된 이기붕이 "부통령의 사임을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오히려 국민들을 격분시켰고 마침내 24일 부통령을 포함한 모든 공직으로부터 사퇴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양처럼 온순하다 해서 이른바 기성세대에 의해 개탄의 대상으로까자 여겨졌던 학생들이 전국적 규모로 2개월에 걸쳐 권력에 항쟁하여 마침내 국부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4.19 이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겠습니까? 일제시대만 해도 젊은 남녀가 비록 부부간이라 하더라도 동반해서 거리를 다니는 것을 볼 수 없었는데, 해방과 더불어 갑자기 불어닥친 미국 바람으로 남녀관계가 크게 개방되었습니다. 남녀관계가 개방되면서 성도덕도 크게 문란해졌습니다. 술집마다 기생들이 들끓고 있었으며 해방과 더불어 불어닥친 춤바람은 많은 가정주부들을 파탄에 몰아넣었습니다. 거리마다 술집이 늘어나 시골에서 젊은 여성들이 많이 올라와 서울에서 윤락의 구렁으로 떨어졌습니다. 또 외국군의 진주와 함께 양부인이라고 하는 새로운 여성 계층도 생겨났습니다. 지금은 보통이 되었지만 이때 립스틱 짙게 바르고 짙은 화장을 하는 여성들은 예외없이 양부인이었습니다. 좋게 말해 '유엔군 사모님'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사회에서 당시의 기독교는 서민생활에 광범위하게 파고 들어갔으나 방황하는 대중들의 정신을 구원할 힘은 약했고 미국에서 보내주는 구호물자를 분배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기독교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으나 방황하는 시대를 이끌만한 정신적인 힘이 부족했습니다. 하여간 기독교는 50년대에 이르러 수량적으로는 대단한 성장을 이루었으나 사회구원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철저한 이승만 지지로 기울어진 어용(御用)단체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교회는 보수주의에 젖어 있어서 진보성향을 띠고 사회구원을 부르짖는 진보자유주의 교회는 발디딜 곳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미국이 갖다 주는 구호물자에 정신을 잃고 교회는 개인 영혼구원 터전이기보다 구호물자에 더욱 관심을 두므로 교회에 신자들은 많아졌을지 모르나 소위 나일론 신자들만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4.19를 전후한 이 역사적 비약기에 기독교계는 단지 자유당 부패·독재정권의 종범자 구실을 하는데 급급했을 뿐 아무런 역사적 기여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IMF시대를 맞아 경제의 구조개혁이 국가존망을 걸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IMF는 각계 각층, 사회 전반의 구조개혁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비대해진 한국교회에도 구조개혁을 요구하는 목청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교권장악을 위해 금품 살포를 서슴지 않는 교단정치가 구조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사회구원과 개인구원을 외면하고 있는 교회경제구조 역시 개혁되어져야만 합니다. 한국기독교회의 구조개혁이 선행되어져야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여 나라 민족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방황하는 시대의 정신을 바로 이끌어갈 수 있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앉은뱅이 같은 이 땅의 기독교, 앉은뱅이 같은 이 나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이름밖에 없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행3:2-10)

여기서 앉은뱅이가 구했던 것은 은과 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것은 "오직 예수의 이름"밖에는 없었습니다. 앉은뱅이가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께 찬미하게 된 것은 "은과 금"이나,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하는 한 인간의 권능과 경건으로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오직 예수 이름"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죽였으나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의 "그 이름"이 앉은뱅이를 성하게 하여 완전히 낫게 하였습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1-19)

앉은뱅이같은 교회, 앉은뱅이같은 기독교, 앉은뱅이같은 이 나라가 힘을 얻어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여 성하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경제위기를 당하여 온통 나라 백성이 "은과 금"을 구하고 있으나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은 "은과 금"이나 구호물자가 아니라 바로 예수의 "이름"입니다. "은과 금"으로 인간이나 사회가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 백성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는 선교야말로 이 나라 백성에게 "유쾌하게 되는 날"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선교는 "은과 금"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오직 예수의 이름만을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 길만이 가정과 교회, 나라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쉽게 구할 수 있는 성경의 시초는 1882년 가을. 중국 심양에서 '문광서원'의 이름으로 간행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었습니다. 이 한국 최초의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한 사람은 존 로스 선교사와 한국의 다섯 청년들이었습니다. 평안북도 의주 사람인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서상륜 등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들이었고 민족 복음화를 위해 파송받은 최초의 한국선교사들이었습니다. 1883년 봄, 이성하는 조국을 복음화할 웅대한 뜻을 품고 인쇄된 복음서를 등에 지고 중국 봉천을 출발, 압록강 대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복음서를 구연성이란 여관에 숨겨놓고 잠시 방을 비웠는데 그 사이에 주인이 들어와서 짐을 풀어보고 이 책이 나라에서 금하는 사서(邪書)임을 알고 대경실색하여 일부는 압록강에 흘려보내고 일부는 불에 태워 모조리 없애버리고 말았습니다. 후에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로스 목사는 "성경책이 던져진 강물을 마시는 한국인들은 생명수를 얻을 것이며 불에 탄 성경의 재는 한국교회를 자라나게 하는 거름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한반도의 민족 구원을 위해 그 모진 핍박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선지자들의 희생과 순교의 피는 그 때 압록강에 뿌려진 성경책처럼 이 땅에 복음의 생수와 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000만 성도로 성장한 한국교회의 교세와 선교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5개 교단만 살펴보겠습니다. 135만명 교인, 4,500교회를 가진 예장 합동측(1)이 55개국에 250명의 선교사를, 209만명 교인, 5,584교회를 가진 예장 통합측이 67개국에 429명의 선교사를, 230만명 교인, 5,800교회를 가진 예장 합동측(2)이 74개국에 720명의 선교사를, 45만명 교인, 1,500교회를 가진 기장측이 12개국에 25명의 선교사를, 80만명 교인, 2,000교회를 가진 기성측이 33개국에 201명의 선교사를, 그리고 135만명 교인, 4,500교회를 가진 기감측이 55개국에 25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합해보면 834만 교인, 23,884교회에서 약 80여 개국가에 1,875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2000년에는 약 900만 교인, 25000여 교회에서 대략 2,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 교회에서 창립 24주년을 맞는 2000년에 국내에 1교회를 개척하고 해외에 선교사 1명을 파송하는 계획을 세워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합니다. 거듭 말씀드려 이 나라 민족이 사는 길, 앉은뱅이같은 이 나라 민족이 힘을 얻고 일어나 걷기도하고 뛰기도하여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며 유쾌하게 되는 날을 볼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분명하고 명백한 명령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교회가 예수께로부터 받은 확실하고 분명한 사명은 먼저 네 민족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마10:5-7)

더 나아가 네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족속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 삼고 그들의 입으로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세주라 시인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1)

우리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영역은 바로 온 세상입니다. 교회가 지향해야 할 선교의 목표는 바로 온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전체를 구원하지 않고는 결코 만족해하시지 않습니다. 월리암 템플(William Temple)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교회는 아직 교인이 되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 우리 평강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은 100만 울산 시민가운데 아직 복음화되지않은 90만명을 예수 믿게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 평강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은 전세계에 아직 복음화되지않은 수 십억의 하나님의 사랑하는 인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선교 명령의 영역은 바로 온 세상 온 인류입니다. 군대 속어 가운데 사병을 나타내는 지아이(G.I.로 Government Issue의 약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병을 정부 "소모품"으로 간주한다는 말입니다. 군 작전시에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사병들을 소모품처럼 사용해서 전사케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작전에 있어서는 소모품과 같은 인간은 존재치 않습니다. 폴 토우르니에(Paul Tournier)는 그의 저서 <성서와 의학>에서 어떤 환자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환자는 한 대가족의 막내딸이었습니다. 이 가족의 가장인 아버지는 힘겹게 그의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의 딸을 가리키면서 "이 애만 없어도 우리 가정 형편은 좀 나아질텐데"라고 절망적인 어조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그의 딸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비록 부모가 내다버린 사생아일지라도, 아니 지체장애자나 정신박약아 그 이상일지라도, 어쩌다 실수로 태어난 아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고 그들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레투스(Muretus)의 옛 이야기는 위대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레투스는 방랑하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깊은 학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그는 방랑하는 중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극빈자 수용소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학자라는 것과 학자들만이 사용하는 라틴어를 이해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그의 병세에 관하여 라틴어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그가 알아듣지 못할 것으로 알고 무레투스는 더 이상 비싼 돈 들여 돌봐주거나 치료할 가치가 없는 아무 쓸모 없는 가련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무레투스는 의사들을 쳐다보면서 라틴어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돌아가신 사람을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세실 정도로 한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눅12:6,7)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여겨 그 하나라도 소흘히 여기지 말고 선교에 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일으켜 세워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어리석은 자를 일으켜 세워 지혜있다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자를 일으켜 세워 가진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요한 웨슬레를 일으켜 세워 부정부패하고 기울어져가는 영국을 구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제자삼으시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어부는 고기가 미끼에 걸릴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만일 어부가 참지 못하여 서두른다면 그는 결코 좋은 어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선한 어부>는 인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급히 결과를 거두려는 것은 선교에서나 교육에 있어서는 거의 불가능한 기대입니다. 우리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킴볼이란 시카고의 한 주일학교 교사가 거리의 부랑아이며 거지처럼 더러운 한 소년을 교회에 인도했습니다. 킴볼씨는 예수 믿은 뒤 10년만에 겨우 한 사람 그것도 부랑소년 하나를 인도할 수 있었는데 이 소년이 그 유명한 부흥전도자 무디 목사였습니다. 무디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수십만명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세계적 대전도자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3:17)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열심히 인내를 가지고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추수하기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처럼, 전도의 열매를 거두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도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라의 경제문제를 해결할 요셉같은 인물이 나올지 어떻게 압니까? 아니 나라 전체를 복음화시킬 이 시대의 다니엘이 나올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는 불굴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부는 어떤 경우에서도 결코 실망하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나는 불굴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좋은 설교자와 교사는 가르친 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어 보이는 듯할 때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항상 다시 시도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PC통신에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설교문을 매주 여러 곳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전 <람비>라는 아이디를 가진 어떤 대한 예수교 통합측 교인이 전자우편을 보내왔습니다. 제발 좀 PC통신에 설교문을 올려놓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그랬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겠지만 대한 민국에서 제일 큰 교단의 교인이 보낸 비아냥거리는투의 편지를 보았을 때 <람비>는 과연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고 예수믿는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람비>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람비>가 설사 복음을 가로막는 <람보>가 된다할지라고 하나님의 선교는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어부는 바다의 광풍 노도를 직면하여 극복해 나갈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설교자와 교사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할 때는 언제나 모험이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외치는 사람은 이따금씩 자기의 명예나 생명을 걸고 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항상 진리를 환영하지는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 항상 빛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본래 세상은 어둠이었습니다. 그래서 빛을 싫어합니다. 진리가 사람들을 감동시킬 때가 있고 사람들이 진리의 대적자가 되어 완고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가 항상 환영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죽이고자 덤벼들기도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제일 잘 섬긴다는 동족들이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딤후4:2) 시간의 핑계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화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탄이 부하들에게 현상문제를 냈습니다. 기독교인을 지옥으로 가게 하는 술책을 묻는 것이 현상문제였습니다. 이론이란 이름의 작은 악마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득하면 됩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안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어." 의심이라는 이름의 악마가 말했습니다. "의인이 고생하고 악인이 잘 사는 것을 계속 보여주면 신앙을 버릴 겁니다." "안된다. 그들은 조만간 의인의 승리를 알게 되니까." 나태란 이름의 가진 작은 악마가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을 지옥으로 보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서둘지마. 서둘지마라고만 말하면 됩니다." 이 대답이 당선작이었다는 우화입니다.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시급한 일입니다. 초대교회가 기적적 성장을 가져온 것은 바로 이 종말신앙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 오실 날이 임박했으니 어서 빨리 한 영혼이라도 더 살려내야 한다는 신앙으로 살았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불과 400년 동안에 유럽 전체가 복음화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전세계에서 복음을 제일 열심히 전하여 성장하는 교회의 공통점가운데 하나는 종말신앙으로 무장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종말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구원과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나의 종말을 맞이할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전화로, 편지로, PC통신으로, 인터넷으로, 문서전도로, 선교사 파송으로, 교회개척으로 전도 기회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문제는 전도를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실천하는 것입니다.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엄 부드 대장이 1904년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왕은 부드의 영국 사회에 끼친 많은 자선사업을 극찬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왕이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나 도아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드 대장은 "국왕 폐하, 내가 바라는 것은 한 명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나의 야망이요 희망입니다. 노동자 급식사업도, 부랑 교육사업도, 모두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돕는 일들입니다."고 대답하고 일체의 표창장을 거절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목적과 살아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여러분의 삶이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어느 시기에든지 가난한 자와 눈 먼자와 눌린 자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시달리고 갇히고 억눌린 자들에게 날마다 은혜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1세기를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의 원년으로 삼고 새롭게 거듭나 성장하는 평강교회가 되기 위해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이 민족의 영혼을 구원하고(개인구원) 국가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는(사회구원)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라를 사랑하십니까?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십시오. 민족을 사랑하십니까? 은혜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십시요.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 민족이 "유쾌하게 되는 날" 보기를 원하십니까? 오직 예수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낚을 수 있는 것은 은과 금으로 되지않습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사람을 낚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 나라 민족을 위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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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참조 :눅 6:20-23, 사 66:2-4)  

1. 예수의 산상수훈은 인간이 행복해지는 8가지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덟 번에 걸친 "복이 있도다"는 말은 "행복하여라"는 뜻을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행복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류는 고통과 가시밭에서 살아야 하는 불행을 겪어야 했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는 이러한 인생들을 보시고 그 마음이 행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마음은 크나 큰 고뇌로 가득 차 있었고 무한한 연민과 슬픔가운데 있었습니다. 이 이유는 예수께서 인간의 슬픔과 비극, 불행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여기 "민망히 여기신다."는 말은 "마음 속 깊이 동정하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병든 사람, 소경, 귀신들린 자 등 각종 병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민망히 여기시고" 그들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슬픔에 빠진 사람을 동정하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시체를 메고 나갈 때 울부짖는 과부를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독자를 살려주셨습니다.(눅 7:11-17) 죽음으로 인한 불행을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는 이처럼 지금도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굶주린 사람을 그냥 보내지 아니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 15:32) 또한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고독한 사람들을 민망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둥병자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격리되어 홀로 고독하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웠던 가족들과 이웃들과 더불어 함께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의 소외되고 고독한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막 1:41) 예수께서는 죄 가운데 방황하며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무지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병으로 인해 불행한 사람, 죽음으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 굶주림으로 인해 불행하게 사는 사람, 소외되고 갇힌 자되어 불행한 사람 등 모든 불행을 겪고 있는 인류를 위해 산상수훈을 통해 행복해지는 삶의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류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불행이 죄에서 비롯되었음을 아시고 그 인간의 모든 죄악을 자신이 걸머지고 십자가에 희생당하시므로 인류에게는 행복을 안겨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고독과 죄의 무거운 짐을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에는 인간의 행복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시고 그 곳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모든 불행이 치유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이 행복해지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깨달으시고 십자가 예수를 마음 깊이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인간의 행복은 어떤 행함이나 소유가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being)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 행함이나 소유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마음이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행복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란 말은 원래 행복을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가난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닙니다. 빈민굴에서 굶주리며 병들어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빈곤은 기독교가 제거해야 할 목적 대상입니다. 기독교가 지향하는 곳은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이란 말은 절대적인 빈곤 상태로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의 슬픔과 고통을, 그리고 소외당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늘만을 쳐다보고 하나님만을 의존해서 사는 사람을 "가난한 자"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고 사는 사람,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해도 예수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 믿고 사는 사람, 이러한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결코 잊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영영히 실망시키지 아니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항상 하나님의 기억되신 바가 되며 결코 실망 당하지 아니하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시9:18)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시68:10)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72:4) 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지거나, 무엇을 소유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그 행복을 인간에게 열어주신 분은 십자가 예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은 예수 믿고 예수 안에 사는 데 있습니다. 예수 믿고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되어 여러분의 인생이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심령이 가난해지면 하나님 나라를 주어서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나,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미 천국을 가졌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며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행복이란 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힘, 또는 어떤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얻어지는 행복은 결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이라야만 영원히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의 환경을 행복하게 조성해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마음의 행복을 통해서 주변 환경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 살든지 변함없는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행복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마음에 하나님을 받아드리는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얻어지는 행복은 쉽게 얻을 수도 있고 또 쉽게 잃을 수도 있습니다. 환경이 바뀌었을 때, 건강을 잃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계획이 무산되었을 때 즐거움과 행복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 행복은 믿음을 잃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 또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우리 나라의 기독교 역사상 초창기의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에 대한 고전적인 실화 한 토막입니다. 이 목사님은 6.25동란 무렵에 목포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공산당에 붙잡혔습니다. 끌려가서 심한 고문과 조롱을 당하며 나날을 보내었는데 어느 날 한 공산당원이 이 목사님을 끌고 가서 또 고문을 하다가 아주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영감, 내한테 천국 좀 보여 줄 수 있어?"

하고는 발길로 걷어찼다. 이 목사님은 발길에 채이면서도

"예, 보여드리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야, 죽어서 가는 천당 말고 지금 당장 보여주란 말야."

하고는 또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예, 지금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라는 이 목사님의 말에 공산당원은,

"어떻게 보여 주냐?"

고 하며 또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은

"예, 천국 본점이야 내 소관이 아니니까 보여 드릴 수 없지만 지점이야 내가 보여 드릴 수 있지요. 그 천국 지점이 바로 제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천국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마음에 있는 천국이 발길로 채인들 빼앗길리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등 팔 복에서 나타나는 품성들은 하나나님 나라 백성이 가져야 할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무엇보다 "진실하게 순복"하는 품성을 지녔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기꺼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 말씀에 반항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합니다. 천국이란 결코 어떤 땅이나 영토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마음과 심령, 그리고 인간의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 하나님의 지배를 말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어떤 일로 친구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마침 그때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는 여러번 시도했으나 예수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림이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림 제작을 중단하고 며칠 동안 명상에 잠겼다가 실패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재주있는 손을 가졌다고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가졌다고 가치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을 때 나는 예술가도 될 수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될 수 없다."

다 빈치는 즉시 친구를 만나 화해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전에 얽혔던 분한 생각을 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 뒤 며칠이 지나 다시 작업실에 들어가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얼굴을 아주 만족스럽게 화폭 위에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찾는 것이 성한 눈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뜻합니다. 내 성격이나 내 욕심이 다스리는 세계가 아닙니다. 걱정과 불안과 나의 좁은 생각을 몽땅 묶어 하나님이 관리하시도록 맡기는 믿음의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할 때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행복은 먼 미래에, 죽어서 천당에나 가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마음속에 영접하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4. "마음이 가난한 자"(사66:2)는 단순히 재산이 없는 자가 아니라, 자신은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죄인임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 오는 사람을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 가를 분명히 말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 인간이 저지른 허물마다 지은 죄마다 모두가 다 드러난다면 이 세상은 쑥밭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모든 허물과 죄가 사함과 가리움을 받지 못한다면 결국 불행해지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그 허물과 죄가 가리움을 받은 자가 행복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사 66:2)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유대들은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때, 율법에 정한 소나 양을 희생시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제사드리기 위해 소를 잡는 것을 살인으로 간주할 것이고, 어린양을 잡아 제사드리는 것을 개의 목을 꺾는 것으로 여기시겠다는 것이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하는 것으로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사66:3) 이는 한 마디로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지 않고 그냥 동물만 잡아 제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심각한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에 대한 상한 심령,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가난한 심령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며, 오히려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천국이 임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예수 믿고 회개하는 자의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가난한 심령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철학 교수로 있는 클레이풀(John Claypool)박사의 간증입니다. 그는 대학교에 다닐 때 철학도로서 이론에 강하고 아는 것이 많아 모든 사람이 인정해 주는 수재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 집에 가서 친구의 여동생을 보았습니다. 19세의 소녀는 모든 것이 완벽하였는데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출생 시부터 기형아였습니다. 소녀는 특히 아름다움에 대한 정서가 발달하여 음악, 미술, 문학 등을 좋아했습니다. 클레이풀은 그녀에게 참고 있던 질문을 쏟아버렸습니다. "내가 당신의 처지였다면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은데 무엇이 당신을 미소짓게 하고, 신나게 하고, 명랑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누구나 가지지 못한 것이 있죠. 나의 경우는 팔과 다리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요. 맛을 볼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세계 명작을 읽을 수도 있으며, 친구들과 가족의 사랑이 있고, 무엇보다도 나는 예수님을 알게 되어 천국이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만큼 보물들을 가졌는데 내가 왜 슬퍼해야 합니까?" 클레이풀 교수는 그 날 하루의 체험이 철학과 2년의 공부보다 더 귀중한 진리를 배우게 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진리, 평화의 복음을 깨닫고 그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행복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시는 환경이 어떠하든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시고 마음에 천국을 이루어 참된 행복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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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참조 : 눅 6:20-23)   

1. 기독교는 인간의 삶을 해피 엔딩(Happy ending)으로 만들어 줍니다. 기독교의 끝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해피 엔딩이 되도록 하나님께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 복의 내용들, 즉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 등을 살펴보면 인간의 행복은 밖에(out)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in)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들이지 인간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인간은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행복하게 하시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야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이 사는 백악관에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애덤스(John Adams) 대통령부터 시작하여 40여명의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에 살았던 주인공들은 그다지 행복한 인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이 집을 "호화로운 감옥"이라 불렀고, 포드 대통령 부인인 배티 포드(Betty Ford) 여사는 이 집을 "금붕어 항아리"라고 백악관의 별명을 붙여 그 외로움과 불행을 표시하였습니다. 존슨 대통령 부인 루시 (Luci Johnson)는 "도대체 숨을 곳이 없는 집이다."라고 불평하였으며, 클리블랜드(Clover Cleveland) 대통령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라고 하며 아예 백악관을 비워 놓고 워싱턴 시내에 전세방을 얻어 살았습니다. 대통령은 반드시 백악관에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싫으면 나가 살 수 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장터에 사는 것 같다."라고 불평했습니다. 이런 평들이 모두가 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말들입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에 들어간 것이 오히려 자신과 자신의 가정에 불행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청와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그 끝이 불행했던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청와대에서 살다 나온 사람들이나 청송 감호소에 살다 나온 사람들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청송 감호소에 나온 사람들은 죄에 대한 자신의 형기를 다 마치고 나온터여서 홀가분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떠한 사람이 되느냐에 인간의 행복이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행복한 자는 "애통하는 자"입니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은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같이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지혜서인 전도서 7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을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여러분은 애통하는 자가 되어 금세와 내세에 행복하며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먼저 무엇을 위해서 애통하는 것이 복된 사람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슬퍼하는 자, 고통을 당하는 자와 더불어 함께 슬퍼하고 함께 고통당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치료 불가능한 특수한 병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병은 전혀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부딪쳐도 손을 데어도 울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곪은 데를 수술 칼로 베어내도 전혀 아파하지 않습니다. 단지 배고프거나 화가 났을 때만 우는 것입니다. 아파서 우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의사들은 중추신경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치료방법이 없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울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샴 쌍둥이에 대한 얘기입니다. 머리가 둘인데 몸통은 하나인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한 사람인지 아니면 두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그 아이의 한 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 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다른 한 쪽 머리의 아이가 똑같이 뜨겁다고 야단하면 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한 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었어도 다른 한쪽 머리에서 전혀 뜨겁다고 반응이 없으면 이 아이는 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류는 하나이고 하나이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온 인류가 하나되기 위해 기도하셨고,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걸머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추석선물로 수 백 만원 짜리 핸드백에서 10마리에 42만원하는 조기까지 서슴지 않고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찾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양노원 창가 넘어로 희미해져가는 고향을 떠올리는 이 땅에 버림받은 노인들이 있습니다. 1마리에 4만 2천 원하는 조기를 밥상에 올리는 사람을 놓고 애통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미국에 수 십억 수 백억하는 호화주택을 마련해놓고 스위스 은행에는 엄청난 달러를 유출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겨울이 멀지 않은데 구청에서 내린 철거명령에 수재민 보호소에서 한밤을 뒤척이며 잠못 이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도 없는 호화주택과 만질 수도 없는 달러를 놓고 애통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족집게 과외비로 수 천만원을 쓰는 가정이 있는가하면, 실직자 자녀로, 수재민 자녀로, 생활보호대상자 자녀로 학비를 내지 못하고 있는 42만명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있습니다. 족집게 과외시키는 사람들을 놓고 애통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지키지 않는 국회의원들이 있는가하면, 체불노임으로 허탈한 가슴 쓸어안고 맥없이 여기 저기 맴도는 사람들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세비를 축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정축재한 국회의원들을 놓고 애통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이북5도민회에서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금강산관광에 대해 정작 이북출신 실향민들의 생각은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대부분 "다녀올 생각이 없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시중 여론과 일반 국민들의 예상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설문조사 결과 금강산 관광에 대해 찬성은 8.8%에 불과했습니다. "매우 반가운 일이며 기필코 다녀오겠다."는 사람은 1.4%, "형편을 보아 다녀오겠다."는 사람은 7.4% 였습니다. 반면 부정적인 응답자는 80%에 달했습니다. 실제 지금까지 금강산 관광을 신청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실향민 1세대들은 북한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강제로 <퇴출>당한 이들 입니다. 직접 공산주의의 악몽을 겪은 이들로서 북한의 태도변화가 없는 한 김정일의 본심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향민들은 무엇보다 경제환난을 당해 실업자 200만명에 육박하고 있는 형편에 1인당 금강산 입산료로만 300달러라는 막대한 외화를 유출해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북 가족 및 친지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한가롭게>유람할 수 없으며 만에 하나 북한이 관광객을 선전에 악용할 때 북한의 혈육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기아로 고통당하는 북한 동포들의 아픔을 헤아리며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실향민들이 금강산관광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해선 결코 안 됩니다. 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도 절실한 사람들입니다. 실향민들이 죽기 전에 원하는 바는 무엇보다 이산가족의 생사를 확인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면 편지나 전화로라도 이산의 아픔을 달래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추석이 되어도 돌아갈 고향길이 막혀 철조망을 붙들고 통곡하는 사람,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생사를 모른 채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 실정에 가슴을 저미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내 나라 내 땅 금강산을 장사 밑천으로 삼아 한 몫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민족통일의 그 날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나라 어느 백성들 보다 애통해할 일이 많은 땅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 우리의 현실을 놓고 애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없는 백성은 불행합니다.

3. 마지막으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비통한 마음으로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같은 죄인된 자신의 존재가 "한 줌의 흙"에 불과하며,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야고보서 4:14)같음을 절통해 하는 자를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비통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어야할 만큼 자신의 죄가 중대함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위대한 힘은 인간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공포를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에 대한 공포 속에서 죄를 보게 될 때 그는 죄에 대한 강한 비애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가정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거든 그 십자가를 철거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부적이나 수호신이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마다 자신의 죄인됨을 애통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죄의 의식에서 출발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깊이 슬퍼하는 자이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범한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애통하는 사람이며 십자가를 보고 죄로 인하여 다가올 파멸로 인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죄의 공포를 경험하는 사람만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험이 회개의 경험이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인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몸둘 바를 모르며,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인 토마스 무어(Thomas Moore)의 작품에 <낙원>이 있는 데 그 내용을 각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책벌을 받고 세상으로 쫓겨난 한 천사가 다시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가 풀어야 할 한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것'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시장 바닥과 골목들을 누비며 이것을 찾아 헤매다가 어느 따스한 봄날의 아침, 한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동네 입구에 세워진 지계표 위에서 한 아낙네가 칭얼대는 아이를 가슴에 품고 젖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생각했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그림자로 일컬어지는 모성애가 듬뿍 깃든 저 엄마의 젖 한 방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 젖 한 방울을 얻어 낙원 문에 다달았으나 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낙심 속에 또 다시 방랑의 길에 오른 그가 어느 무더운 여름 한낮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한 전쟁터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생각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의 목숨 초개와 같이 사르는 애국지사, 그가 흘린 마지막 피 한 방울이야말로 가장 존귀할게야!" 식어 가는 피 한 방울을 조심스럽게 찍어 낙원 문에 도달했으나 대답은 "아니오!"였습니다. 실망을 안고 또 한번 여행길에 오른 그가 어느 겨울날 저녁 산등성이에서 있는 조그만 시골 교회를 들르게 되었습니다. 주일도 수요일도 아닌 평일 저녁, 약한 불빛 사이로 새어 나오는 사람의 말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제단 앞에 엎드려 통한과 함께 회개의 눈물을 쏟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깨달았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어머니의 젖과 애국지사가 흘린 피는 이 세상에서 더 없이 귀한 것이지만 노인의 참회하는 눈물 한 방울이야말로 낙원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 참회하는 노인의 눈물 한 방울을 들고 가 비로소 낙원으로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스펄죤도 "메마른 눈으로 천국에 올 자는 아무도 없다."고 갈파했듯이 한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데는 오직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앞에 회개하는 눈물 한 방울 뿐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찾으시는 것은 죄인의 상태를 용납해서가 아니라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며 회개 후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 보시기에 부지런히 찾고 또 찾으시는 것입니다. 성서는 그래서 "회개할 것"을 거듭 거듭 경고하며,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12사도들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느니라"며 회개의 복음을 힘있게 전했던 것입니다. 회개하는 영혼이 이 지상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회개의 역사야말로 천국에서는 가장 귀한 일입니다. 눈물로 회개하며 애통하는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천국"(계 21:4)에서 영원히 살게 하실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라 민족을 위해, 자신의 죄를 위해 애통하는 여러분이 되시므로 복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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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참조 : 눅 6:20-23)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하다는 말은 우유부단이나 아첨, 비열, 무력하고 굴종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유명한 성서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본문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분노할만한 때에 노하고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 노하지 않으며 자기의 본능과 충동과 정욕을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라 억제하며 자기의 무지와 연약함을 아는 겸손을 가진 자는 복되도다. 이 사람은 사람들 중 왕이로다."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며,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비겁하거나 비열하거나 무기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어느 때가 분노할 때이고 어느 때가 분노해서 안 될 때인가? 분노에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욕된 것이나 피해가 온다면 화를 내어서는 안 될 때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웃이 불편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비이기적인 분노여야만 합니다. 이기적인 분노는 항상 죄가 되지만 비이기적인 분노는 도덕과 정의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직을 모독하는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분노를 사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10:1-2)

하나님은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맹렬한 노를 발하여 그들을 멸망시키려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 어찌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32:11-14)

하나님은 불쌍한 사람을 돌보아주지 아니하면 분노하십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 22:21-23)

하나님은 사회의 부정 부패와 불의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아모스5:7-12)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10:1-20)

하나님은 나라가 외국의 원조나 힘, 군대만을 의존하는 하나님 불신행위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31:1-3)

예수님께서도 마음 중심은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서 형식만을 지키려는 사람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종교 모리배들에 대해 분개하시며 질책하셨습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11:15-17)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과 사회의 죄악을 없이 하고 혼돈과 어둠에 질서와 광명을 주는 생명력이 있는 창조적 분노, 거룩한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을 증오하며 심판을 목적으로 하는 분노가 아니라 인간을 새롭게 하며 구원하고자 하시는 사랑의 분노입니다. 그러나 분노해야 할 때에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분노할 까닭이 없을 때 화를 내는 것은 파괴적인 분노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년 365일 매일 매일 반복되는 부정부패, 살인 강도, 답답하고 지루한 내용들을 되풀이는 하는 매스컴들, 나날이 증가하는 실업률, 사이비 종교인들의 온갖 추태, 정권만 바뀌면 잡아들였다 놓아주는 작태들, 먹을 것을 찾아 탈출하는 수많은 북한 동포들과 세계 최고급 승용차 벤츠를 200대씩(약 300억원)이나 구입하는 북한 지도자들, 세계화의 허구 속에 날뛰며 춤추는 부자들과 멍들고 병들어가는 가난한 사람들...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들은 끝간데 없습니다. 분노하다 지쳐 슬프기까지 합니다. 분노의 소용돌이가 지난 뒤에 허전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비애와 슬픔뿐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인 분노, 타락과 퇴폐로 얼룩진 사회를 일신하는 거룩한 분노, 증오로 가득 찬 상한 마음에 아름다운 향기로 채우는 사랑의 분노일 것입니다. 매를 맞고 또는 꾸중을 듣고 아니면 욕을 먹고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감싸주는 온정 속에서 나오는 사랑의 분노로 우리를 새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극히 작아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천하보다 귀하고 소중히 여기며 돌보는 거룩한 분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참으로 온유한 자들입니다.

《아름다운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남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이 시는 남강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죽은 논개를 추모하는 변영로의 "논개" 시입니다. 임진왜란을 맞은 국민의 도리로써, 또한 사랑하는 님인 황진을 먼저 왜적에게 잃은 아낙으로서 논개의 분노를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를 탄식하고 한탄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분노를 행동화했던 것입니다. 이 시의 "더 푸른 그 물결"은 흘러가는 역사의 물결인 청사(靑史)를 뜻하며, "더 붉은 그 마음"은 애국충정이요 일편단심을 뜻하는 상징이 들어 있어서 "청사에 빛나는 일편단심의 논개여"라는 해석을 붙일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분노는 이처럼 청사에 빛이 나는 법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져있는데 분노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요 "온유한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자는 "분노할만한 때에 노하고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 노하지 않으며 자기의 본능과 충동과 정욕을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라 억제하는 자"입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해주신 생활감정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라 억제되지 아니하면 파괴적인 분노가 될 뿐이며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노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잠언 22:24-25)

"대저 젖을 저으면 뻐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잠30:33)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4:26)

분노를 억누르는 것은 자신을 계속 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분노를 해소하지 않고 억누르기만 하고 계속 가슴에 품고 있게 되면 인격을 부정하게 만들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파괴적인 분노로 분출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의 존재를 인정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분노를 피하고 절제하라고 충고는 하면서도 분노의 감정을 무시하라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온유가 성령의 열매이듯이 의분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며, 성령은 우리들에게 건전한 열기의 의분을 심어 주셨습니다. 분노가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자가 온유한 자이며 복있는 자입니다. 그러한 성령에 의한 의분이야말로 창조적인 분노, 거룩한 분노, 사랑의 분노인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분노를 완전하게 자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의분강개(義憤慷慨)의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허만 멜빌의 <백경>에 말향고래 중 하나인 흰 고래 모비딕이 있습니다. 일본 근해에서 이 모비딕에게 한 쪽 다리를 잃은 주인공 에이헤브는 그 고래와 똑같은 종류의 고래를 잡아 그 턱뼈를 갈아 흰 의족(義足)을 만들어 달고 다닙니다. 그는 의족을 배에 걸친 채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 그 거대한 흰고래를 추적합니다. 결국 에이헤브는 흰고래를 발견했고 분노를 다해 추격합니다. 마치 희고 견고하고 거대한 성벽같은, 인간의 완력으로는 대적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흰고래와 마주 섰을 때, 에이헤브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험난한 파도여, 끝없는 저편에서 몰려와 내 숭고한 죽음의 정수리를 더욱 치켜올려다오. 모비딕! 난 네 놈과 싸워 널 지옥의 한가운데서 찔러 죽인 후, 내 가슴에 쌓여 있던 증오의 마지막 숨을 내뱉을 것이다." 결국 분노라는 증오의 독약이 묻어있는 에이헤브의 작살은 던져지고 고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마지막 질주를 시작합니다. 충격적인 것은 바로 이 철저한 복수의 순간, 에이헤브는 밧줄의 고리에 목이 감겨 보트로부터 바다에 굴러떨어집니다. 에이헤브는 마치 터어키의 망나니가 처형자의 목을 형틀에 매단 것처럼 그렇게 밧줄에 감긴 채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결국 에이헤브는 자신의 손에 들려져 있는 분노의 작살이 고래의 목숨을 관통하는 그 순간이 자신에게도 똑같은 파멸의 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에이헤브의 분노의 작살은 흰고래 뿐만 아니라 그의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선원 중 오직 한 사람의 생존자만 남긴 채, 모두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데 더 큰 비극이 있습니다. 에이헤브는 그의 분노 때문에 그 분노와 아무 상관도 없는 선량한 선원들을 간접 학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포경선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증언자인 이스마엘은 에이헤브의 분노의 작살이 흰고래에게 던져지기 전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늙은이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분노의 존재를 창조해서 스스로 프로메테우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분노의 독수리는 바로 그 자신이 만들어낸 분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통제, 성령의 통제를 받지 않은 분노는 파괴적인 분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창조적 분노, 거룩한 분노, 사랑의 분노로 인간의 죄악과 사회의 무질서와 혼돈, 어둠을 광명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온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 예수 믿으시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 온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온유한 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받아들여 결실하는 옥토와 같습니다. 옥토는 말씀의 씨가 떨어질 때 잘 자라서 100백, 60배, 3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가르침 받기를 잘 하는 마음이야말로 진리를 속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여는 자가 참으로 온유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여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가장 교만한 자를 가장 겸손하게 만들 수 있고, 가장 완악한 자를 가장 온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라 불리웠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도 복음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18-23)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라면 가장 큰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장 큰 온유와 겸손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분노를 성공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분노에 대한 최고의 해방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사로잡아 돌처럼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겔11:19)

성령은 여러분의 마음을 온유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죄가 하나 없으신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가시면류관 쓰시고,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다 받으시고, 십자가를 걸머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그리고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도 그 인간 군상들을 향해 한 마디 분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을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분노이며, 인간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인 분노의 표현입니다. 예수 믿고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온유한 자가 되시므로 자신과 더불어 이웃을 행복하게 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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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참조 : 눅 6:20-23)

1.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기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을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편143:2)

그래서 의로운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목마름"은 당장 마시지 않으면 죽게 될 정도의 갈증을 뜻하고, "굶주림"은 당장 먹지 않으면 죽게 될 정도의 굶주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자가 먹을 것을 찾는 것만큼, 목말라 죽어가는 자가 마실 물을 구하는 것만큼 강렬하고 절실하게 의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노래가 서투른 음치인 사람일지라도 음악을 열렬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죄인일지라도 의를 강렬하고 열렬하게 사모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를 원했지만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다윗의 성전 건축에 대한 뜨거운 마음만으로도 하나님은 기쁘게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가 성취한 것만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비록 성취하지는 못했다해도 간절한 마음으로 강렬하게 소원하며 노력했던 것까지도 높이 평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지 못했다할지라도 죽기까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주리고 목말라했다면 복이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다 맺지 못하고 비록 한 두 개 정도만 맺었다해도 그 열매들을 맺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했다면 그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그러면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의, 우리가 "주리고 목말라"해야 하는 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결코 묵과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의 재판은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형벌과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는 곳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는 저주받아 죽임을 당해야 할 만큼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며, 그 죄는 반드시 처벌받아야된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저주받은 십자가 형벌을 당신의 독생자 예수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고 있는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가 전혀 없는 의로우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므로 우리가 당해야 할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구원과 평화를 누리게 하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를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가 우리의 의의 근거이며 우리의 의이십니다.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내 죄가 용서함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요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이제 누구든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십자가에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주리고 목마른 자"의 뜨겁고 강렬한 심정으로 의(義)를 사모하는 자가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로도 이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야만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바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워졌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3.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정확하게 바치고 안식일을 근엄하게 지키는 자신들이 의롭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율법의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는 줄로 잘못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고 감사드렸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9-12)

그런데 스스로 죄인임을 잘 아는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눅 18:14)

자신의 의를 내세운 바리새인들은 결코 의롭다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의인이 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을 의지한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의 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유일한 관심은 의의 성취였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이들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 복음 5장 21절 이하를 살펴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먼저 화내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마5:21-22)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은 "노(怒)는 죄"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우리 가운데 한번도 화내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 즉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라가"는 히브리인의 욕설로 "골빈 녀석"(empty head)이라는 뜻입니다. "라가", 미련한 놈이라는 욕설은 일종의 강한 화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에 욕 한번 안 해 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화는 과연 살인만큼 나쁜 것이어서 "심판받게 되고" "지옥 불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뜻하시는 바는 "살인은 정말 죄이다." 그러나 "화도 역시 죄다."라는 것입니다. 화가 치밀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도 있지않습니까? 화가 폭발하게 되면 험악한 짓을 얼마든지 저지르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화가 성숙하게 되면 살인이 되는 것입니다. 화는 이미 마음속에서 폭행과 살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서기관은 외적 행동을 강조하여 마음속에 아무리 화를 품고 욕설을 퍼부어도 살인치만 않으면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이것은 참된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외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인 것입니다. 마음에 화를 끓이고 있으면서 욕하며 죽이고 싶은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실 때 이미 그는 죄인이며 "지옥 불에 들어갈" 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죄의 드러난 결과만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너희가 무엇을 행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형제들에 대하여 마음속에 악의를 전혀 품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을 따라 살게 될 때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신밧드의 모험>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높은 나무에 달려있는 코코넛을 따는 방법을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그 나무에 있는 원숭이에게 돌멩이를 마구 던져 화가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깔 난 원숭이는 코코넛을 따서 던지게 됩니다. 그래서 손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습니다. 성질 부려 보았자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하나도 없고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19-20)

2) 다음으로, 순결을 지키며 살라는 것입니다.

"(마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율법은 불법적인 성관계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보다 더 높은 수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간음은 분명히 죄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육욕을 품는다면 이미 간음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간음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존재의 깊은 곳을 살피고 계십니다.

폴 레프(Paul Rep)의 저서 <선과 살과 뼈(Zer Flesh, Zen Bones)>에 이런 우화가 나옵니다. 선(禪)을 공부하는 두 중이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습니다. 물이 많아 시내를 못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한 중이 성큼 그 여자를 안아 물을 건넜습니다. 그러자 다른 중이 비난했습니다.

"수도승으로서 여자를 가까이 해서 되겠는가! 위험하네. 특히 저런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안다니."

상대 중이 말했습니다.

"나는 안았다가 곧 내려놓았지만 자네는 마음 속으로 저 여자를 안고 아직 안 내려놓고 있지 않은가?"

천국의 의, 성적 순결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다음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마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예쁜 여자를 보고 "참 아름답다!"라고 말하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예쁜 여자와 한번 잠자봤으면 좋겠다."고 하면 음욕을 품은 간음죄가 성립됩니다. 그래서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으니 눈을 빼어버린다면 아마도 이 세상의 남자들 가운데 성한 눈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설사 눈을 빼버렸다고 하여 근본적으로 의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간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마음에 머무는 것이지 눈이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눈이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문제의 근본 해결책을 찾아 필요하다면 어떤 댓가를 치루고서라도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문제 해결을 위해 눈을 빼고, 손을 찍어 버려서 깨끗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렇게 해서라도 죄를 짓고 멸망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이 높은 수준의 의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겠습니까? 순결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삶의 영"이 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을 따라 살게 될 때 마음에서부터 순결한 하나님의 의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의 강렬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여 성결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3) 다음으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마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유대인들은 맹세에 사용되는 대상물이 어느 정도 거룩하느냐에 따라서만 맹세는 구속력을 지닐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전통에 따르면 그 대상물이 별로 거룩치 못하면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정직의 윤리를 모욕하는 처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아시고 위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신뢰받을 수 없을 만큼 꼭 맹세해야 한다면 그 사실 자체가 벌써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은 전혀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 그대로가 진실되고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 그대로 나의 맹세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말이나 마음, 그리고 글이나 약속들을 우리 이웃들이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도록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직의 법입니다. 오늘날 불신 사회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정직의 법을 가정과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삶의 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거짓말이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입니다. 거짓말 안 하고 장사할 수 있느냐? 세금 안 속이고 돈 벌 수 있느냐? 남편과 아내는 서로 속고 속이고 살며 판매영업사원의 역량은 얼마나 소비자에게 거짓말을 잘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다 할지라도 "주리고 목마른 자"의 강렬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여 정직과 진실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4) 다음으로, 사랑의 법(the Law of Love)이 있습니다.

"(마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사악한 시대에 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사업이나 국제 정치 사회에 적용한다면 스스로 엄청난 파멸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살피시는 것은 인간의 마음 상태와 중심인 것입니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마음의 의인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바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지라도 전혀 복수할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에 대해 사랑에 동기된 마음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원수에게까지 넓혀가라는 말씀입니다.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원수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인이 거쳐야 할 최고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란 뜻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부지수불여공여천(父之?弗與共戴天)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지수불반병(兄弟之?不反兵)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리>

교유지수부동국(交遊之?不同國)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합니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든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은 무엇인가?

교회 안팎에서 자신에 대해 호의나 적의 등 어떤 태도를 취하든 항상 사랑의 동기를 지니고 상대방을 대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참 기독교인의 정신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실제 관심입니다. 사랑은 관심 대상의 최고 번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실제 호의를 베풀고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된 처녀는 아름답기는 해도 아주 표독스럽고 잔인한 취미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처녀는 청년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어머니에게서 심장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심장을 가지고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다가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그의 손에서 빠져 나와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그렇게 굴러가면서 어머니의 심장은 말했습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이 어머니같은 마음의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입니다. 사랑은 원수까지일지라도 그의 최고의 번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원수에게 구했던 축복이 저주로, 온유함이 폭력으로, 친절이 나쁜 것으로 원수에게 응답될 수 있습니다. 복수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관심 속에서 그렇게 했을 경우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완전한 순결성, 완전한 정직, 완전한 사랑 등입니다. 누가 이런 수준의 의로운 생활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의 강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여 보다 더 깨끗하게, 보다 더 정직하게, 보다 더 사랑하며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주리고 목마른 자"의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여 믿으시므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인정을 받으시고 금세와 내세에 아울러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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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참조 : 눅 6:20-23)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가 여러분에게 돈을 빌리거나 먹을 것을 요구할 때 그 요구하는대로 넉넉히 꾸어주지 않거나 구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는 것을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남을 해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지 아니하는 것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려운 이웃에게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고 넉넉한 마음으로 긍휼을 베풀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으시고 범사에, 그리고 손으로 하는 바에 복있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단순히 남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우리가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 입장에서 그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며 그의 느낌으로 느끼는 공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물과 사건을 경험하고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느낌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남을 동정할 때도 동정받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동정을 베풂으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일공동체의 최일도 목사의 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청년이 사무실로 올라왔습니다.

"저‥‥ 사진 촬영 좀 하면 안 될까요?"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사진과를 지망하는 고3 수험생이었습니다. 입학작품으로 사진을 제출해야 하는데 테마를 밥상공동체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런 친구들이 올 때마다 약간은 미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밥상공동체 가족들도 아무에게나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 일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밥을 먹는데 생판 처음 보는 친구가 사진기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내 얼굴을 찍어 댄다면, 나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일 식당에 발을 끊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거절하는 다일 가족들의 태도가 너무 단호했던지 더 이상 말도 못 꺼내고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 집으로 가지 않고 공동체에 남아서 이것저것 궂은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한 주일 두 주일 세 주일‥‥ 이 청년의 봉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몸을 던져가며(?) 섬기는 형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사진 촬영을 허락했습니다. 다일 교회 입당감사예배에도 와서 사진기를 들고 맹활약을 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교회예배에 참석하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방학 내내 공동체에서 봉사를 하더니만 밥상공동체 가족들과 아주 친해졌습니다.

밥상공동체 최고의 터프가이 할아버지 왈

"너 사진 잘 찍는다면서?"

"예‥‥‥ (쭈뼛쭈뼛)"

"그럼 내 얼굴 좀 박아봐. 영정으로 보관 할껴. 그리 알고 잘 박아 봐."

"예, 예"

"그럼, 나도 찍어 줘 봐."

"나도."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소리를 칩니다. 이 분들은 공짜라면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꺽다리 학생은 밥상공동체 가족들의 전속 사진사가 되었습니다. 매일 새로운 사진들을 한 아름 안고 와서는 여기저기 나누어 드립니다. 사실 밥상공동체 가족들만 허락을 하면 사진이 아니라 영화를 찍어도 화기애애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평상시 천막식당 안에서 플래시가 펑펑 터지면 긴장해서 카메라 반대쪽으로 눈길을 보내는데 꺽다리 학생을 통해서 번쩍거리는 사진기 조명은 밥상공동체 가족들이 신나게 즐기는 불꽃놀이 같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역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것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덕분에 밥상공동체 가족들은 영정을, 봉사자들은 독사진을 성경 책갈피에 꽂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밥 한끼 얻어 먹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마구 사진을 찍어댄다면 상대방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진기를 치워두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먹는 밥을 같이 먹고 그들이 자는 곳에서 함께 자고, 그야말로 동고동락할 때 사진을 찍어도 좋고 영화를 촬영해도 좋다며 마음을 열게 됩니다. 얻어먹고 사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고 절대로 소흘하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나그네, 고아, 과부, 그리고 병들고 갇힌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성경에서 양은 복받을 자들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고, 염소는 저주받을 자들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들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영광의 보좌에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태복음 25:35)

영광의 보좌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복받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복음 25:36)

그러자 오른편의 양들(의인)이 의아해하며 이렇게 반문합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으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임금되신 주님께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제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을 높은데서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는 분이 아니라 낮은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을 <여의도>에서 찾지 마시고 <달동네>에 가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골프장이나 헬스클럽에서 찾지 마시고 병원이나 감옥에 가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해 신년 초에 목사들이 모여 교회를 상대로 동냥을 하러 오는 사람들에 대해 대처하는 이른바 <거지 대책회의>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온 경험담을 간추려 보면 거지들을 몇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었습니다.

첫째, 사기형이 있습니다. 집을 떠나서 어디를 가는 중에 몽땅 쓰리를 당했다고 차비를 구걸하는 경우. 노방 전도를 하러 다니는 목사인데 전도지 값이라도 달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대접을 특별히 잘해 주어야 합니다. 무슨 검사라든가, 혹은 지방에 있는 아는 목사의 이름을 사칭하여 이러이러한 사람이 찾아가니 잘 부탁한다는 전화를 해놓고 얼마 후에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돈을 요구하는 경우 등등입니다.

둘째, 공갈 협박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동정심에 호소하다가 돈이 적다고 생각되면 은근히 공갈 협박, 혹은 훈계쪼로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이게 뭐냐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 등입니다.

셋째, 실무형이 있습니다. 어차피 목사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교회예산에 구제비가 책정되어 있는 것을 수금하러 왔다는 듯한 당당한 태도 등등입니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여러가지 경우가 있었는데 아마도 동냥꾼들도 모여서 새로운 방법들을 개발해 내는지 생각하기도 어려운 기상천외의 방법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대비책은 어떤 것이 좋겠는가? 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방법 중에 가장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골라 보았습니다.

첫째, 계속해서 찾아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너무 자주 찾아 오는 사람에게 왔다간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자주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 내가 언제 왔었느냐고 오리발을 내민다고 합니다. 이런 유형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는 돈을 줄 때마다 영수증을 써달라고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영수증을 쓰기 싫어서 자주 오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성자형입니다. 돈을 얻으러 오는 사람이 아이일 경우에 이렇게 고생을하면서 다니지 말고 우리 집에 아주 들어와서 살라고 하면 대부분 형이나 동생이 있어서 안 된다는 등 요리조리 이유를 대면서 절대로 안 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왕초가 있기 때문에 들어와 살고 싶어도 못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한번 그러고 나면 왕초가 목사에게 잡힐까 봐서도 그 집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실무형입니다. 1000원을 주었는데 돈을 더 달라고 하면 "무슨 소리냐?거지도 분명한 직업인데 한 집에 백원씩 100집이면 10000인을 버는 것이니까 부지런히 100집을 다녀서 하루 일당 10000원을 벌어라.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당신만 편하게 살려고 하느냐?"고 오히려 큰소리쳐서 보내는 방법 등등이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목사들이 어떻게 하면 불쌍한 사람들을 덜 도와 줄 수 있을까 하는 일에 머리를 짜고 있으니 참으로 모순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어서 안타깝게도 도와줄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안심하고 믿고 사랑으로 동정을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어떤 순진한 전도사가 버스에서 동냥을 하는 전과자를 집에 데려가서 함께 생활하려고, 집까지 따라갔더니 없는 것 없이 잘해 놓고 살면서 하는 말이 "동냥도 엄연한 하나의 직업이고 내가 당신보다 돈을 잘 벌고 있으니 당신도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아보라."고 오히려 격려를 받고 온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육교 위에서 꾸부리고 있는 여자 옆에 하루종일 잠자고 있는 아기는 수면제를 먹여 재우기 위해서 빌려온 아이라는, 소름이 끼치는 끔찍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대단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실상이 그런 것을 어찌하랴. 아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진짜로 도움을 받아야만 할 사람들조차 도울 수 없는 저주받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다할지라도 성도 여러분은 <거지대책>을 구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고린도 전서 6:8)는 자세로 사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나는 손해를 보아도 너에게 유익하다면 그렇게 살겠다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나는 잘못되어도 너는 잘 되어야겠다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병들고 갇힌 자, 세상에서 지극히 작게 여김을 받는 자들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속아도 하나님에게 속았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한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와 영벌을 선고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신 것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태복음 25:41-43)

왼편에 있는 <염소>들이 항변합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작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최근 어느 소책자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아‥‥배 고파. 엄마, 뭐 먹을 것 좀 없어요?"

오늘도 밤 10시가 넘어서야 학교에서 돌아온 지연이는 책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어 젖히며 수선을 피웠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먹으면 뭐든지 다 살로 간댄다. 좀 참지 그러니?"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지연이는 결국 커다란 양푼에 밥을 한 가득 담 아 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비비기 시작했다. 참기름에 김 부스러기까지 얹어 완성된 비빔밥은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갈 정도록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엄마도 좀 드실래요?"

한 술 가득 떠서 입으로 가져가다가 불쑥 숟가락을 내미는 지연이.

"너나 많이 먹으렴"

딸아이의 저녁 만찬이 계속된 지 벌써 두 달째이다. 전에는 매일 두 개씩 가져가는 도시락도 남겨와서 걱정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싹싹 비워 오는 가 싶더니 급기야 매일 저녁, 한 끼의 식사를 더 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이어트를 한다며 오후 여섯시 이후에는 사과 한 조각 안 먹으려 했던 아이였기에 그런 변화가 더욱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그만큼 공부가 고된 것일까, 갓 피어난 꽃잎처럼 한창 싱그러워야 할 나이에 밤 늦도록 책상 앞에 앉아 딱딱한 수학공식과 지겨운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을 딸아이가 애처로워 가슴 한 구석에 뜨거운 것이 밀려들었다.

"엄마, 왜 그래요?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연이가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아, 아니야. 잠시 네 생각을 했어."

나는 얼른 일어나며 딸아이의 가방에서 빈 도시락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도시락의 뚜껑을 여는 순간, 작은 쪽지 하나가 툭 떨어지는 게 아닌가.

"어머니, 고맙습니다."

쪽지 겉면에 쓰여져 있는 꼭꼭 눌러 쓴 글씨. 분명 딸애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쪽지를 펼쳐 보았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지연이 친구인 희정입니다. 그 동안 제 도시락까지 싸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편지로 대신하는 걸 용서해 주세요. 처음에는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저도 언젠가는 나누면서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지연이가 하루에 네 끼를 먹으면서도 오히려 핼쑥해져 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랑스런 내 딸은 학교에서 수학공식과 영어단어 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더 중요한 것들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요즈음 학교마다 결식(缺食)학생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도시락하나 마련하지 못하는 친구와 친구집안의 어려운 형편을 이해하고 자신의 도시락을 친구에게 주고 자기는 집에 가서 허기진 배를 채우는 갸륵한 마음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의로운 삶이요, 굶주린 예수님에게 먹을 것을 드린 복 받을 자의 거룩한 생활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며 기독교인의 실천적인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서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자는 심판을 이기고 자랑할만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 2:13)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작은 것 하나 소흘하게 여기지 마시고 넉넉한 마음으로 손을 펴 긍휼을 베푸심으로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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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참조 : 눅 6:20-23)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3)는 말은 이 세상에 깨끗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깨끗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더러운 죄인입니다. 죄인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더러운 죄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렘2:22)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음으로 나의 더러운 죄가 용서되고 깨끗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 사실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1-5)

여기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은 바로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또한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한 마음으로 일편 단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의 마음을 가지고 일편단심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될 때 그리스도를 닮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사람의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데 있습니다.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자 하나를 끌고 예수께 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돌을 들었던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하나 둘씩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와 그 여자 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마라!'(요8:1-11)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도, 그 어느 누구도 그 여자를 정죄한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자의 과거를 묻지도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정죄하지 아니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는 예수를 만나 불행했던 삶의 종지부를 찍고 행복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질 만큼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여인을 향해 돌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 여인보다 몸은 깨끗했을지 몰라도 그들의 마음은 죄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 둘씩 모두 자리를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을 정죄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를 대신 걸머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시면 그 사람은 깨끗한 사람이요 의로운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였습니다. 마귀가 그에게 나타나 루터의 죄가 낱낱이 기록된 종이를 건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루터를 비웃으면서 '너같이 죄많은 녀석이 어떻게 종교를 개혁해? 너나 좀 바로 살아라!'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말도 못하고 힘없이 앉아 있는데 뒤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는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제서야 그는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오늘의 기독교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과거가 어떠하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함받아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옛날 유대인들은 몸의 정결을 유지하는 것이 삶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몸의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생활부터 정결하게 구별된 음식을 먹어야만 깨끗해지는 것으로 알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몸의 정결을 위한 정결법에 따르면, 정결한 음식은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약대나 토끼 등은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부정한 음식입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지만 새김질을 못하기 때문에 부정한 음식입니다. 또한 물에 있는 것 중 정결한 생물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징어나 문어 같은 생물은 부정한 음식입니다.(레위기 11:1-23)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깨끗해지거나 더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은 모두가 깨끗한 것이며, 사람을 더럽게 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15-23)

그러므로 몸의 정결보다 더 크고 긴급한 문제는 마음의 청결입니다. 몸만 깨끗하면 마음이야 어찌되었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몸의 정결을 가장 중요시하고 그 정결법에 따라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역시 몸의 정결법을 버리지 못했었습니다. 베드로가 환상 중에 하늘에서 큰 보따리 하나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니까 그 안에는 정결법에 모두가 부정한 음식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며 먹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늘에서 두 번째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9-16)

사람이 깨끗해지는 기준이 구약의 정결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여전히 구약의 정결법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향해,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11:17)고 반문함으로써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시면 그것은 곧 깨끗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면 곧 그 사람은 의로운 것입니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원래부터 아예 각각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소위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온 것들도 정결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나 속되게 여기는 자에게는 속되니라."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몸보다도 마음 자체가 정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했습니다. 소유욕이나 감각욕, 명예욕이나 인정받고 싶은 욕망 등 인간의 각종 욕망과 욕심이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청결을 유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란 마음이 욕심에 의해 출렁이지 않는 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청결한 마음' 이것은 욕심이 완전히 걷혀진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낮추어 남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청결한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인가? 요한복음 1장 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어디에서 어떻게 본다는 것인가? 왜 애통하는 자나 온유한 자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 보상으로 하나님을 보는 특권 대신, 다른 품목을 받는가? 왜 긍휼히 여기는 자나 화평케 하는 자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얻지 못하는가? 왜 오직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마음이 청결한 상태야말로 바로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 상태를 가장 적절히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때 '형상'은 외형이 아니라, '마음'을 뜻합니다. 청결한 인간의 마음은 청결한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82편 6절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은 신들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볼 수 있다고 한 것은,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보여준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으며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과연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이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을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흔히 "마음을 곱게 먹어라."는 말을 합니다. 마음을 곱게 먹으면, 아무리 미운 사람도 고운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원래부터 고운 사람과 미운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시각과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찬송가 495장 가사처럼,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귈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그 곳은 환경이 나빠도 천국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주님이 지옥에 계시다면 나는 기꺼이 지옥을 가고 싶다." 문제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분별력이 뛰어난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그가 그들과 함께 식사하려고 식탁에 앉았을 때 그에게 성령이 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꿀을 먹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빵을 먹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대변을 먹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속으로 매우 놀라면서 "주여, 나에게 이러한 신비를 계시해주소서!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그들 모두 앞에는 다 똑같은 음식이 놓여 있는데, 왜 그들이 각각 다른 음식, 곧 어떤 이들은 꿀을, 다른 이들은 빵을, 또 다른 이들은 대변을 먹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까?"라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한 목소리가 위에서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꿀을 먹고 있는 자들은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 그리고 영적인 기쁨을 가지고 식탁에 앉으며 또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기도는 향기처럼 하나님께 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꿀을 먹고 있는 것이다. 빵을 먹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일에 참여케 된 것을 감사하는 자들이다. 대변을 먹고있는 자들은 불평하면서 '이것은 좋은 것이며 저것은 불쾌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게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됩니다. 마음의 청결을 위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기 비어 종의 모습으로 이웃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속에 욕심을 제거해주시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소유에 가치를 두고 살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데서 행복과 기쁨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남을 섬기며 사는 사람치고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그의 마음, 자기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져 남을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사시므로 하나님의 얼굴 모습을 보여주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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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참조 : 눅 6:20-23)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본래 에덴 동산에는 하나님, 그리고 아담과 이브, 모든 생물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동산 숲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평화의 동산,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의 큰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평화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므로 이제 인간과 자연사이의 평화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생존원리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간 사회도 어느 정도까지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에덴 동산의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도 에덴 동산의 평화를 소망하며 그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사야 11:6-9)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세상에 충만할 때" 평화가 이룩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죄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는 평화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난 3000년 동안의 인류의 역사에 3500번이 넘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지진, 홍수, 가뭄, 태풍 등의 자연재해는 지금도 계속되는 가운데 인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한 인간의 부단한 노력가운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첨단을 달리고 있는 과학과 의학이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월등한 경제 이론이나 정치이념이 인간에게 평화를 안겨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평화는 이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평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14절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늘의 천군 천사가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했습니다. 다시말해 인류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14:27)

과연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인류 평화를 위해 행하신 일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로새서 1:20)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8)

이제 인간은 평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시한 평화의 길입니다. 예수 십자가가 없는 곳에 인류의 평화는 없습니다. 인류 평화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눅 19:41-42)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평화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고 며칠 뒤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길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평화의 길을 트게 하신 십자가의 예수를 거절할 것을 미리 아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잔을 나누어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과 피이므로 너희도 성찬을 받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내 몸 속에 넣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뜻대로 내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칼타고(Cathage)의 감독 키프리언 (Cyprian)은 258년에 순교당했습니다. 사형선고문이 낭독되자 그는 희열에 찬 밝은 낯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감사합니다. 이제야 주님과 완전한 화목을 이루었습니다."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에게 죽음도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자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해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형편에 처해 있다해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시는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바로 십자가의 예수를 전파하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자들을 말합니다. 인류의 평화는 예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평화의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막힌 담도 허무는 화목의 길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간곡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바로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것을 아뢰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가운데 차고 넘치게 하려 함입니다."(요한 17:11-13)

예수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는 우리들이 하나가 되고 우리 마음속에 기쁨과 평화가 차고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서로 하나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십자가 못박는 정신을 가지고 서로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십자가로 하나되는 것, 인간과 인간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십자가로 우리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 5:18)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지 못하면 평화의 세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하나님은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형제와 화목을 이루고 나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5:23-24)

깊은 산 오솔길 옆의 자그마한 연못에 예쁜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싸움이 벌어져, 두 마리의 붕어는 서로 물고 뜯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결국 한 마리가 죽어 물 위에 뜨고 몸이 썩었으며, 연못의 물도 부패되었습니다. 살아 남은 붕어는 혼자서 영원히 잘 살 줄 알았지만 썩은 물을 먹게 되자, 곧 그도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로 물고 뜯으면 피차 망하게 되는 법입니다. 인간관계의 화평을 위해 서로가 마음 상하는 말이나 행위를 삼가고 위로와 격려, 사랑과 용기를 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사이, 인간과 인간사이, 민족과 민족사이, 인간과 자연사이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랑으로 희생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마음속에 평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속에 십자가를 통한 평화, 자유, 해방을 체험함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 평화, 자유,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면류관에 찔리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시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평화, 인류의 평화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예수를 전파하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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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참조 : 눅 6:20-23)

본문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의"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의로우신 분은 한 분 예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롬3: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러므로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다른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본문의 말씀을 정리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믿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게 되면 애매하게 고통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는 증거는 출세하고 성공하거나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을 받았다거나, 손해를 입었다거나, 고통을 당했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의 축복의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축복이라고 하는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신앙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갈 바를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히 11:8)입니다. 성경은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나아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믿음이나 의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거나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대로 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생각보다 더 높기 때문입니다.

"(사55:9-10)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복이라고 하시는 것과 사람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방법과 인간이 복이라고 누리는 방법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욕을 먹었거나, 손해를 보았거나, 핍박을 받은 것을 축복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출세하거나, 성공하며, 부귀영화를 누려야만 축복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잘 믿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출세하거나 성공하거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이 제시한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복 주시는 방법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사는 길을 세상에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복을 세상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사한 인류가 복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은 구원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마음을 지니고 사셨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복된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8복에 대한 교훈은 인간의 행복이 어떤 행위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 다시 말해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8복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며, 8복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8복에 나타난 8가지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마음과 성품을 보여줍니다. 8복에 나타난 8가지 사는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는 방법 8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8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데반은 가장 많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며 돌멩이를 던져 죽이고자 하는 살기등등한 군중들을 위해 예수님처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천사의 얼굴을 보여주었다고 했습니다.

"(행7:54-60)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노예처럼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손해를 본다해도, 아무리 고통이 심하다할지라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한다해도 가해자를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축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가 잘 되기 위해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14-21)

이렇게 말한 사도 바울은 참으로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그를 두고 불행했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후11:23-28)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환난을 수 없이 당했으면서도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항상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할 수 있었으며 자신도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고후4:16-18)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輕)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환난을 일시적이고 가볍게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난으로 인해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축복을 영원하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확신한 것입니다. 출세나 성공이나 건강이나 부귀영화 등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잠간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고 손해를 보고 고통을 받았던 것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복과 상급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시편 기자도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하다며 그 유익함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119:71-72)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이 비록 험하고 많은 고통과 손해보는 일이 생긴다해도 그 길이 곧 "천천 금은보다 승한" 복된 길임을 믿으시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선정한 <세계를 변화시킨 가장 극적인 세계사 100대 사건>가운데 하나가 서기 60년대의 기독교 대 박해입니다. 비록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사후 300년 동안 모든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뿌리를 내렸지만 신자수는 불과 로마제국 인구의 10분의 1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신앙이 확고한데다 소수의 사람들의 종교라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는 자연히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을 유태인들과 동일시하여 똑같은 취급했으나 예수가 죽은 후에 곧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서로 다른 점들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상징인 황제에게 희생제물을 바치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행동은 반역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인들의 편견은 그런 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유태교도들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 많았던 반면 기독교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쉽게 박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이 성찬식을 하면서 사람의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신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기독교도들의 이런 끔찍한 의식의 결과로 재난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생겨나 "기독교인들 때문에 비가 안온다."는 말이 속담처럼 로마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서기 60년대에 네로 왕 치하의 로마 대 화재 당시 최초의 대규모 기독교도 박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인망이 없었던 네로 황제는 화재의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으로 기독교인들을 선택했습니다. 기독교인들 수 백명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습니다. 또한 황소에 받히거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인간횃불"이 되어 불타 죽기도 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울도 로마의 기독교인 대량 학살 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서기 2세기경에는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었으나 98년에서 117년까지 재위한 트라야누스 황제는 기독교인들도 정식 재판을 받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금지했습니다. 로마황제들은 순교자들이 생겨나도 기독교가 위축되기보다 오히려 번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위기가 닥치면 대부분 숨어 지내면서 고비를 넘겼습니다. 대체로 순교자들은 사람들의 편견이나 야만적 관습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순교자들은 종종 관료들의 분노를 돋우었으며, 심지어 어떤 순교자들은 고문을 당하면서 기뻐하기도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원형경기장에서 로마시민의 오락을 위해 야수들에게 던져지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들은 곧 기독교역사에 기록되어 그리스도가 몸소 겪었던 고통을 견디어 낸 본보기로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었습니다. 3세기에 테시우스 황제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로마인들이 로마의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하며 이를 확인하는 증명서를 받아야한다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곧 가짜 증명서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칙령은 효력이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발레리아누스 황제 (257∼9)가 비슷한 칙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303년 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소위 "대 박해"를 시작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는 이들은 고문, 투옥, 또는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수 천명이 죽었지만 전체 기독교인 수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은 사람들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곧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하늘에서 상급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로마의 콜로세움 원형 경기장 높은 곳에 지금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무엇을 상징합니까? 로마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숨져간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승리를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길바닥에 끌려다니다 죽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에서 올리부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진 후 매맞아 죽었습니다.

안드레도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설교했습니다.

맛디아와 바나바는 모두 돌로 맞아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네로에 의해 로마에서 교수형을 받았습니다.

이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이들 순교자들을 두고 불행하게 살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들로 천국을 소유한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는 세계사를 변화시키는 가장 극적이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체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만큼 가정과 교회, 나라와 세계는 극적인 변화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정이 변화되기 원하십니까? 교회가 변화되어 부흥되기를 원하신다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극적으로 변화되는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복 받고 사는 방법입니다.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그리고 생명의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감수하시므로 천국을 소유하고 하늘 나라에서 상급이 크신 최고의 복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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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참조 : 막 9:50, 눅 14:34-35)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겠습니까?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해서, 일류 대학에 입학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구약 요셉이나 다니엘이 이국(異國)에 가서 국무총리가 되는 출세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성서 기록은 없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서 국무총리가 된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번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국무총리가 된 배경에는 일찍부터 우상숭배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을 확정하고 어떠한 생명의 위험이 있어도 깨끗하게 산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질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최고의 찬사, 최고의 칭호를 성도들에게 붙여주셨습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호는 "빛과 소금"입니다. 본질적으로 세상은 "어둠"이며, 죄악으로 부패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빛이며, 죄악에 썩어져 가는 세상에 없어서 안될 것이 소금인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대통령을 인종차별의 높은 벽을 부순 아프리카의 자유의 등불이라고 부르는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투옥되어 무려 27년간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서도 <아파르트헤이트>로 불리우는 악명 높은 인종차별정책의 철폐를 위해 끝없는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그의 옥중생활은 어둠을 자유 아프리카의 빛으로 탈바꿈시킨 동력으로서의 순결한 투쟁 그 자체였습니다. 빗발치는 국제여론과 세계 각국의 경제봉쇄 등에 시달린 백인정부는 결국 1990년 2월 11일 조건 없이 만델라를 석방했고, 1994년 4월에 실시된 최초의 자유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만델라는 드디어 남아공의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그는 반인간적인 인종차별의 어둠을 몰아내고 인종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빛을 보게 했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넘나들면서도 자유와 평등을 위한 꺼지지 않는 그의 투쟁의지가 결국 어둠을 추방하고 빛의 승리를 입증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 사람들은 소금을 "신(神)과 같은 것"(theion)이라고 부를 만큼 귀중히 여겼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태양과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Nil utilius sole et sale)라는 노래까지 불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소금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첫째, 소금은 순결을 연상케 합니다. 소금의 반짝이는 백색이 바로 순결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소금이 제일 순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 하면 소금은 순수한 태양과 바다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깨끗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미래의 소망을 가지려면 깨끗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딤후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다니엘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마음을 확정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으므로 결국 느브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토록 만들었습니다.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여러분도 다니엘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항상 깨끗이 하는 생활로 이웃들을 거룩한 하나님 앞에 인도할 수 있는 능력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도의 참된 능력은 깨끗함에 있습니다.

둘째, 소금은 부패방지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이 더 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방부제의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세상은 부패하기 쉬운 곳이기 때문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되지 아니하면 세상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는 권력이나 물질이 아니라 소금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소금이라고 불러주신 곳은 교회 외에는 아무 곳도 없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세상의 소금이기 때문에 교회가 소금이 되지 못하면 세상은 당연히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어느 곳에 있든지 소금이 되어 부패를 방지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성도가 정치를 하면 정치가 부패하지 않아야 하고, 기업을 경영하면 기업이 부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가 사법부에 있으면 사법부가 부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어느 곳에 있든지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사명을 다 해야 합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가 부패되지 않도록 하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은 단지 부패를 방지할 뿐이지 이미 상한 것을 성한 것으로 되돌려놓지는 못합니다. 소금은 다만 부패의 방지와 확산을 막아 그 신선도를 유지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성도가 소금이라 해서 이미 부패한 사람을 깨끗한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죄악에 썩어 부패한 사람을 의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아무리 더럽고 부패한 사람일지라도 한 순간에 흰 눈같이 정결하게 만드시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 능력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예수의 피가 인간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죄악에 썩어져 가는 세상에 소금이 되고자 하시는 성도 여러분에게 죄를 정케하는 십자가의 능력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셋째, 소금의 가장 크고 가장 분명한 특성은 음식에 맛을 주는 것입니다. 소금이 들지 아니한 음식은 좋아 보여도 맛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인생에 맛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맛'이라고 해서 흔히 말하는 쾌락이 아닙니다. 진정한 '인생의 맛'이란 어둠 속에 빛을 발하며,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며, 좌절과 절망 가운데 희망을 심어주며, 불안과 혼동 속에 삶의 평안과 질서를 심어주며, 진실 앞에 거짓이 무릎을 꿇게 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기독교는 모름지기 이러한 맛을 내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이러한 소금의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도 없으며 밖에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용지물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성도가 소금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면 당연히 버림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 구약시대 유대인중 배교했다 다시 돌아온 유대인은 회당에 정식으로 받아 드려지기 전에 참회하는 의미에서 회당 문에 가로누워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갈 때에 밟고 가게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관습을 지키고 있는 일부 지역이 있다합니다. 규칙상 교회에서 제적되었던 자가 다시 용서함을 받기 전에 교회 문에 누워서 사람들이 들어갈 때 "나는 맛을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라고 하게 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버리워 짓밟히지 않도록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본문 14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찬사입니다. 왜냐 하면 본질적으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은 예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요1:4)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도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명하신 것은 바로 예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참 빛이 되시는 예수를 믿고 예수처럼 살 때에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오직 참 빛이 되시는 예수를 마음과 생활 속에 받아들을 때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의 요구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빛을 비춰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신부 얼굴의 광채는 신랑의 사랑에서 반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간직되고 반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처럼 십자가를 통해 그 사랑을 나타내게 될 때 진정한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믿는 자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빛은 어두운 곳을 비추어야 합니다. 어두운 방안을 밝혀 집안 모든 사람 앞에 비취게 하기 위해서는 등불을 등경 위, 곧 높은 곳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란 착한 행실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빛을 비취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만 교회 안에서만 빛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 문안에서만 효력이 머물러 있는 기독교라면 누구에게도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교회 밖, 세상 생활에서 더 많은 빛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교회의 빛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빛이 존재하는 목적은 어두운 곳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목적은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 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을 밝게 하는 빛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는 빛을 발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빛이 되시는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발등상의 등불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으면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중세 암흑기의 기독교에 불을 밝힌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2차대전 중 미국 해군의 역사 중에 가장 용감했던 지휘의 사례가 남아 있습니다. 1944년 6월 20일에 있었던 필리핀 바다의 전투였습니다. 지휘관은 미쳐(Marc Mitscher)제독이었습니다. 대규모의 일본 함대를 미군 항공기들이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출격했던 전투기들이 항공모함으로 귀환할 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파도는 높았으므로 착륙이 위험했습니다. 전투지구에서 함정들은 적의 공격을 피하여 등화관제를 실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쳐 제독은 그 유명한 "불빛을 밝히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험을 강행한 것입니다. 적의 표적이 되더라도 아군 항공기들을 무사 귀환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종사들은 뒤에 그날의 감동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우리 군함들은 너무나 찬란하고 분명하고 아름다웠다. 할리우드 개봉축하연과 중국인의 설날과 독립기념일을 합친 것처럼 우리 군함들은 밝게 드러나 마치 지옥에서 오아시스를 보는 것 같았다." 이날 80대가 무사귀환 착륙하고 불과 세 대만이 희생된 것은 기적이라고들 합니다. 미쳐 제독의 과감한 작전이 성공한 것입니다. 성도는 아무리 위험부담과 희생이 뒤따른다할지라도 분명히 불을 밝혀야 합니다. 둘째, 빛은 인도자의 역할을 합니다. 빛은 길을 분명하게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분명하게 밝혀 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세상은 무엇보다도 선을 위해서 굳세게 서서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할 선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부정 부패를 보고서 그대로 방치한다면 엄격히 말해 그 사람은 부정 부패 방조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정 부패에 대한 분명한 지적과 더불어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진리와 정의를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 혼자서는 일어날 수 없을 만큼 도덕적 힘과 용기가 결핍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한 사람이 먼저 이끌고 가면 그들은 따를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의지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어떤 힘있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그들은 곧 어떤 일이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약한 형제가 지탱할 수 있고 솔선해서 용기가 부족한 자들이 따를 수 있도록 강하게 일어서는 것이 성도가 받은 빛의 사명입니다. 세상은 진리와 정의와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빛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 스스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가 솔선해서 용기 있게 행하고 태도를 명확히 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어두운 사회를 빛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생명을 걸고 감당해야 합니다.

밝은 세상을 위하여 짐 맥클로스키(Jim Mcclosky) 씨는 특별한 일에 평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거짓말쟁이들을 가려내는 일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세 명이 무죄 판결을 받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뉴저지 프린스턴에 '센추리온 미스트리스'(Centurion Mistries)란 작은 간판을 걸고 혼자 일합니다. 그는 거기서 억울한 판결을 받았다는 심증이 가는 복역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하여 무보수로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정 증인들의 거짓 증언 때문에 억울한 죄명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맥클로스키 씨는 증인들을 다시 만나보고 배후 조사를 하고 끈질긴 설득을 통하여 진실을 가려내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한 가지라도 바로잡는 것이 온 세상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며칠 전에도 그는 기쁨의 개가를 올렸습니다. 1976년에 경찰관을 살해한 죄로 복역중이던 제임스 란다노의 무죄를 증명한 것입니다. 뉴욕 법정에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과 절망 속을 살던 란다노 씨는 눈물의 포옹을 했습니다. 그는 또한 두 명을 살해한 죄로 평생 감옥에 있어야 할 산토스 씨의 무죄를 증명하여 6년 만에 광명을 보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강간 살인죄로 12년간 복역중이던 사람의 무죄를 증명하여 자유를 안겨 준 일도 있었습니다. 현재 그가 매달리고 있는 사건은 열 건에 달합니다. 맥클로스키 씨는 개인 사업을 하다가 중단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 들어가 1984년에 졸업하여 교도소 목사로 사역하던 중 자기의 무죄를 호소하는 한 죄수를 돕기 시작하면서 이런 일에 평생을 바칠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돈벌이도 되지 않고 숨어서 하는 일이지만 정의를 추구하고 거짓말쟁이들을 가려내는 것이 밝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랑과 정의의 정신은 인종을 초월합니다. 그는 텍사스 주에서 여고생 강간 살인으로 역시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흑인 브래들리의 무죄를 증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죄수는 고등학교 청소부였는데, 백인 동료 청소부 네 명의 위증으로 꼼짝할 수 없이 죄를 뒤집어쓴 것입니다. 그런데 맥클로스키 씨의 사랑과 정열에 넘친 설득이 효과를 거두어 네 명의 증인 모두가 위증을 자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실만이 사회를 밝게 한다."는 그의 좌우명은 혼탁한 전세계에 퍼져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을 때 내일의 세계는 밝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본문의 "착한 행실"은 선하며 매력있고 아름다우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행위를 뜻합니다. 성도의 "착한 행실"은 단순히 선할 뿐만 아니라 역시 마음을 끄는 매력과 힘,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선이 있고 사람에게 반발을 느끼게 하는 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은 아름다운 것이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선을 베풀면서도 추한 모습과 주위의 반발을 사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지극히 작은 선을 베풀고서도 사람을 이끄는 매력과 호감, 그리고 인정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사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선한 행실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경우들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착한 행실"로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게 해야만 합니다. 성도는 사람들의 눈을 자기에게 집중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게 해야만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세상에 그만큼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 영향력의 성격은 진실무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됨됨이가 예수님을 닮아야만 참다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으로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공부 잘 해서 잘 되라는 말을 통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간됨됨이를 통해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감화력은 바로 인격에 있습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성도의 영향력은 얼마만큼 예수의 인격을 갖추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소금이 되지 않으면 이미 방부제의 기능을 발휘할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지 아니하면 세상을 비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 소금의 영향력도, 빛의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발휘해야 하는 영향력은 바로 됨됨이의 영향력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공시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480년 전의 일이지만 그의 용기는 인류 역사와 더불어 길이 길이 빛나고 있습니다. 권위에 대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때, 특히 그 권위가 자신에게 죽음을 줄 수 있는 상황 아래에서의 항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진실의 편에서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서는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마을의 모든 기왓장이 나를 거스를지라도 나는 진실을 추구하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선두에 섰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바로 진실을 추구한 마틴 루터의 빛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과 지역사회, 그리고 교회에 영향력있는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인간됨됨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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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옛법과 새법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또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17-48)

요즈음은 회사원 채용할 때 주로 면접시험으로 결정한다고 합니다. 어느 회사 사장이 응시자들을 직접 면접하게 되었습니다. 사장은 응시자들에게 어느 학교 출신이냐, 전공이 뭐냐, 자격증은 몇 개나 가지고 있느냐, 외국어는 몇 가지나 가능하냐 등등은 전혀 묻지 않고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가? 그리고 당신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가?"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 사장은 사람의 됨됨이를 아는데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믿지 않는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항상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생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월급을 받기 위해서나 고용주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일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활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일에 정직하고 진실하며 근면 성실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매우 진취적이고 창의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즈음 우리 한국 사회에서 '예수 믿는가 믿지 않는가'를 놓고 사원 채용을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으며, 예수 믿는 사람들의 됨됨이를 높게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하고 슬픈 일이지만 아마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예수 제대로 믿고서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믿고 부자가 된 사람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예수 제대로 믿으려면, 우선 정직하고 진실해야 할뿐만 아니라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도 돌려 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아야 되는데, 그리고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는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장사해서 돈 벌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예수 믿어 부자되고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본인과 한국 교회를 위해서라도 교회를 떠나서 양심에 부담없이 사는 편이 나을 겁니다. 한국 기독교를 저급한 종교로 추락시킨 것은 소위 <예수 믿어 부자 되고 높아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종교이든 그 종교의 참된 정신을 망각하고 종교를 탐욕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 때문에 종교는 왜곡되고 종교인이 신뢰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부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가진 것을 몽땅 다 가난한 자들에게 퍼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네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내어 주고 하늘나라에 부요한 자가 되라." 인류를 위해 어느 것 하나 아낌없이 다 내어 주시고 마침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신 예수를 두고 가난하다고 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기도원 하나, 수도원 하나, 교회 묘지 하나, 부동산 증서 하나 남기지 않으셨으나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하신 만유(萬有)의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자가 같으나 부요하신 분이며,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친히 가난하게 되신 분이십니다. 이 땅에서 부자가 된 한국 교회, 그리고 그 부자가 된 교회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목사들을 하늘에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것이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신 예수님의 뜻입니까? 자식에게 물려줄 만큼 부요하여 탐이 나는 교회가 신뢰받을 수 있는 교회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회는 이미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굴 하나 두지 않으셨던 것을 본 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셔서 어느 곳 어디서나 신뢰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예수 마음을 가지고 예수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삶의 양식으로 주신 새 법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옛법으로 일컬어지는 율법으로는 결코 천국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법인 율법의 근본은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등등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법을 지키는 정도의 수준을 바리새인의 율법 수준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정신을 버리고 율법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데만 정신이 팔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그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아무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일>, 즉 노동이란 무엇이냐를 정의를 내려야 했습니다. <노동>에 대해 정의를 내리다보니 노동이란 <짐을 운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짐>은 무엇인가? <짐>이란 마른 무화과 한 송이 무게를 옮기는 것, 상처에 바를만한 소량의 꿀을 바르는 행위, 한 모금 정도의 우유를 마시는 것, 알파?의 글자 두 개를 기록하는 행위, 안식일에 여자가 가슴에 부로치를 다는 행위, 안식일에 가발을 쓰는 행위 등등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참된 종교이며, 하나님께 대한 참된 봉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를 내린 수 천가지의 율법을 기원 3세기에 법전으로 성문화한 것이 바로 미슈나(Mishnah)이며, 이를 후에 유대 학자들이 해설해 놓은 것이 그 유명한 탈무드(Talmud)입니다. 예수 당시 엄격한 정통 유대인은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정의를 내린 수 천가지가 넘는 율법들을 지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모든 율법의 본질이며 기반인 십계명은 한 마디로 경외(敬畏)와 존경(尊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날을 경외하며 부모를 존경하며 생명을 존경하며 인격과 그 소유물을 존경하며 진리와 다른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로 하나님을 사랑으로 섬기며,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율법은 옛 법이며, 사랑은 그 옛 법을 완성하는 새 법입니다. 수 천 가지의 율법을 다 지킨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 율법의 근본 정신과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주께서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긍휼을 원하신다는 말씀은 수 천 가지의 율법에 따른 제사보다는 긍휼, 사랑의 삶을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바리새인들이 내린 율법을 충족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삶으로 율법을 완성하는데 있습니다. 율법을 능가하는 사랑의 삶은 첫째로 형제에게 분노를 품거나 멸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20)고 했습니다. 진실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정당한 분노일지라도, 분노를 마음에 오래 동안 품거나 그 분노를 잊지 않거나 화해를 거절하며 분노하거나 복수하려고 분을 품고 있거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보다 더 죄질이 나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웃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좀 많이 배웠다는 교만에서 나오는 멸시는 추악한 것입니다. 남보다 지위가 좀 높다거나 좀 더 많이 가졌다 해서 이웃을 멸시하는 것은 더러운 죄악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중한 죄는 사람의 명예와 그의 신용을 파괴하거나 탈취하는 것입니다. 악담을 지어내어 이웃의 명예를 더럽히고 뒷공론을 일삼아 이웃을 멸시하는 행위는 살인 못지 않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분노와 멸시로 가로막힌 인간관계를 하나님 사랑으로 회복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화내지 않고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도록 화를 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화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겠는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그 가능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시지만 인류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 고통, 옆구리에 창으로 찔리는 아픔,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히는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을 다 받으시면서도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시거나 조롱하는 강도를 향해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스데반은 과연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돌을 던져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군중들을 향하여 전혀 분노하여 저주하거나 그들을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처럼 그들의 죄사함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화가 날 때마다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를 더욱 더 마음 속 깊이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의 마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여성의 인격에 대한 모욕이며, 자신의 인격을 더럽히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폴 레프(Paul Rep)의 저서 <선과 살과 뼈(Zer Flesh, Zen Bones)>에 이런 우화가 나옵니다. 선을 공부하는 두 중이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습니다. 물이 많아 시내를 못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한 중이 성큼 그 여자를 안아 물을 건넜습니다. 다른 중이 비난했습니다. "수도승으로서 여자를 가까이 해서 되겠는가! 위험하네. 특히 저런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안다니." 상대 중이 말했습니다. "나는 안았다가 곧 내려놓았지만 자네는 마음 속으로 저 여자를 안고 아직 안 내려놓고 있지 않은가?" 죄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지켜 주며 존중할 때 인생이 아름다워지고 매력있는 인생이 될 뿐만 아니라 건강한 가정,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성과 그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쾌락의 도구로 삼는 것은 인권 침해와 동일한 범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범죄를 저지른 사지백체를 찍어버리라고 할만큼 중한 죄악입니다. 아름다운 꽃도 꺾어버리면 곧 향기를 잃어버리고 시들어 악취가 나게 됩니다. 아름다운 꽃은 잘 가꾸고 보살펴 지켜 줄 때 향기 가득하며 그 아름다움으로 모두가 다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던지신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던져 여성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더러운 죄로 얼룩진 나를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항상 마음에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깨끗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자신의 성결뿐만 아니라 이웃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지켜줄 수 있는 성령이 여러분에게 항상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누구 앞에서나 맹세할 필요가 전혀 없는 진실한 인격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도 점점 신용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IMF이후 전국에서 230만명 정도가 은행거래 신용불량자로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어쩔 수 없이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겠으나 자기 생명을 걸고 신용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행에 가서 교회 담임목사인데 돈 좀 빌려달라하면 절대로 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간 은행거래 내용을 살펴 신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조사해서 대출가능 한도액에서 대출해줍니다. 만약 그간 신용카드 이용대금이 연체된 적이 있거나 대출금 상환이 연체된 적이 있으면 신용대출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생활에 정직과 진실로 어디에서나 신뢰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은행에서조차 저 사람정도라면 얼마든지 믿고 대출해줄 수 있다고 할만큼 신뢰할 수 있는 기독교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국제 사회에서도 국가에 대한 신인도가 떨어지면 돈 빌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던 것을 잘 보셨을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시키는 사랑의 삶을 위해서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미움이 없어야 합니다. 미움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가 미워지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왔는데 눈 앞에 가로 놓인 것은 파도가 넘치는 홍해바다였습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애굽의 바로 왕이 군대를 이끌고 풀어 놓아 주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들이기 위해 먼지를 날리며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내려쳤습니다. 꿈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다가 갈라져 육지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급히 홍해를 다 건넜습니다. 문제는 곧 이어 애굽 군대가 그 뒤좇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다 홍해를 막 건너고 난 뒤 갈라졌던 홍해가 다시 합해져 그 뒤를 바짝 좇고 있던 애굽 군대가 그만 바다 물속에 잠겨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하늘의 천사들이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슬픈 빛으로 말씀하시기를 "내 손으로 지어 만든 것이 바다에 가라앉거늘 너희들은 내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합당한가?"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이 손수 만드신 피조물 중의 어느 하나라도 멸망되는 것을 결코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고 위대하심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처럼 모든 사람에 대해 깊은 사랑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 가는 길은 모든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같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될 때 참된 인간이 되고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옛 법인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의 새 법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새로워지록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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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1)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5-15, 참조 : 눅 11:2-4)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으로 기도가 없으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생활이 없으면 참된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는 자는 위대하고 선행보다도 존귀하다. 자기 집에서 기도하는 자는 그 집을 강철보다 강한 담으로 두름과 같다." 그러나 기도생활이 올바르지 못하면 위험한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각각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데 대부분 형식화, 관습화된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과 비슷한 경향의 모하멧 교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원수를 찔러 죽이려 뒤쫓아가고 있는 한 모하멧 신자가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그 자리에서 딱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두루마리 기도서를 꺼내 펴놓고 무릎을 정중히 꿇고 일사천리로 기도문을 읽어버리고 곧 벌떡 일어나 다시 원수를 추격했던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을 기억하여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지만 마음에 전혀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 생각은 없으면서 입술로만 중얼거린다면 극히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위험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믿는다는 사람들의 잘못된 기도생활을 가르치시면서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받아서는 안될 잘못된 기도는 먼저, 외식(外飾)하는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위선적으로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는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하나님께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꾸며서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유창한 웅변조로 열변을 토하면서, 때로는 포효하는 사자처럼 하나님을 향해 호령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인들을 호령하는 것인지 분별이 가지 않는 기도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대단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대단히 헌신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들으라고 웅변을 토하거나 호령하거나 설교하는 듯한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위선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오늘 대표기도는 나 들으라고 한 기도구나." 라고 판단된다면 이미 그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정직하고 진실한 기도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옆구리 찌르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기도가 아무리 유창하고 화려하고 논리 정연하다할지라도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참된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일어나 은밀한 중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긴 밤에 드리는 기도의 내용은 "오 나의 주님!" 이 한 마디였고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기도 내용은 없었고 눈물을 흘리며 "오 나의 주님!"만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실한 기도에는 많은 말이 필요없습니다. 진실한 기도에는 소리가 클 필요가 없습니다. 진실한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마디일지라도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원하시고 들으십니다. 미국에 어느 교회가 이웃 사람에 의해 고발되었습니다. 예배드릴 때 너무 시끄러워 이웃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방 판사는 50달러의 벌금과 즉시 창문, 벽 등 교회당 전체에 방음장치를 하도록 명령을 내리며 담임목사에게 말했습니다. "방음장치를 해도 기도 소리가 하나님께 들리겠죠?" 기도는 진실에 그 생명이 있습니다. 진실은 소리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통 사고시에 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단 한 마디의 기도를 드린다해도 마음을 드리는 진실하고 정직한 기도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혼란에 빠져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는 이유는 진실 부재에 있습니다. 나라 전체가 위아래 할 것 없이 서로가 속고 속이는데 능숙하여 오히려 거짓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사람'의 큰 소리에는 끄떡도 아니하시고 낮은 곳에서 은밀한 중에 자기 가슴을 치며 자신의 진실을 털어놓은 낮은 자의 기도에 감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자신과 더불어 이 나라 민족을 불쌍히 여겨 달라며 자기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길게 기도해야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며, 기도가 응답받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성가실정도로 귀찮게 해야 응답을 받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몇 날 몇 일이고 밤을 새워가며 철야기도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성경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도서 5:2) 족보에도 없는 '0 0 0 0을 위한 100일 새벽기도회'를 해야 능력있는 목사, 능력있는 교회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0날을 새벽부터 하루 종일 교회 기도실에 자리 깔고 앉아있다 해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주문(呪文)에 불과합니다. 주일학교 유치부 교실에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공부를 끝내고 마치는 기도를 하기 위해 모여 앉았을 때였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려는데 한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습니다. "아가, 왜 울지? 기도는 하나님께 얘기하는 거란다. 울지 말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얘기하렴, 착하지?" "아니예요. 선생님, 그게 아니예요. 지금 기도하려니까 생각이 났는데요. 어젯밤 우리 아빠를 위해 기도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미키 마우스'만화 영화를 보느라고 잊어 버렸지 뭐예요. 우리 아빠가 아프거든요. 하나님이, 내가 기도를 안해서 우리 아빠의 병을 낫게 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선생님?" 아이의 말에 선생님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가, 울지 말고 내 말을 들어 보렴. 하나님은 네 마음을 모두 아신단다. 네가 기도하지 않아도 네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셔. 그리고 아빠를 걱정하는 네 마음을 예쁘게 보신단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도 이 아이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이 아프다거나 일이 잘 안되면 자신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성경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옹졸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면 주고 구하지 않으면 주지 않는 그런 분이 아니신 것입니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실 만큼 적극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행하지 않아서 그에 대한 벌로써 하나님께서 일이 안되게 하신다거나 우리가 무언가 잘 한 것이 있어서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일이 잘 되게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하시는 하나님이 결코 아니십니다. 기도는 치성(致誠)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인격적인 대화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머리털까지도 헤아려 세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 깊은 것까지일지라도 살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또아리틀고 길게 앉아 길게 늘어 놓치 마시고 여러분의 진실한 삶을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3. 또한 기도는 어느 특정한 장소, 성전이나 기도원, 수도원 등에서 해야만 한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고, 기도의 효과가 더 큰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느 기도원이 용하고, 어느 교회가 용하고, 어느 목사가 용하다는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은 용하신 분이 아닙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어느 특정한 장소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무소부재(無所不在), 다시 말해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정에도, 청량리 굴다리 밑에도, 노숙자들의 거처에도, 여러분의 일터에도 계시는 분이십니다. 간혹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숫자나 그 회수로 한 개인의 신앙과 교회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권사나 장로이면서 새벽기도회에 한번 나오지 않는다면 무슨 권사고 무슨 장로야,... 그런 교회가 어떻게 부흥될 수 있겠어?..."하는 식의 발상은 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새벽에 반드시 교회에 나와 기도회에 참여해야 하는 <새벽 기도회>보다는 장소가 어디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는 새벽기도가 더욱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장소야 교회이든 골방이든 산이든 여러분의 일터이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마음과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거나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어느 특정한 교회나 기도원 수도원 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이 무슨 효험이 있는 것처럼 성전을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길게 '기도'를 늘어놓았지만 예수님는 그 바리새인의 '기도'를 의롭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늘을 감히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는 죄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며 평안히 집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포로 생활 중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습니다. 다니엘은 참으로 나라 민족의 해방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기도하실 때 은밀중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여러분이 구하기 전에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진솔한 마음을 먼저 드리시므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여러분이 되시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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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2)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9-15, 참조 : 눅 11:2-4)

1.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주기도문>이라고 합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생활이 필수적입니다. 이 주기도문은 크게 두 가지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부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절)는 무엇보다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만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위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도드리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 어떤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을 <아버지>로 삼고 삽니다. <돈>을 보고 아버지 해보십시오. 돈이 '오냐 무엇을 도와줄까? 돈 더 줄까? 돈이면 다 되지? 권력도 사고 지식도 사고 사람도 사고 뭐 못 사는 것이 없지?' <권력>을 아버지라 불러보십시오. '암, 권력 하나면 돈은 물론 못하는 것이 없지!' 혹 어떤 사람들은 우상을 <아버지>로 섬기며 살기도 합니다. 돈이나 권력, 우상 등이 진정 참된 아버지 구실을 하고 있습니까? 돈이나 권력, 우상 등은 인격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인간보다 못한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의 아버지나 물질이나 권력, 그 어떤 존재도 그 사람의 금세와 내세를 끝까지 함께 하며 책임질 수 없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러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이를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로마서 8:14-16)

올바른 기도생활을 통해 기도에 응답을 받고자 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인간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였을 경우,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집니다. 세상에 살 동안 때로 아픔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아버지>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것들을 견디고 감당하기가 쉬워지는 것입니다. 주어진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것들은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 주어진 시련과 고통은 자신을 더욱 더 성숙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채찍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로마서 8: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참 아들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주어진 삶에 만족하시며, 주어진 고난과 징계가 어떠하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7,8)

예수 믿는 여러분은 사생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참 아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 보스턴에 살던 유명한 여류시인 실비아 플래스가 30세의 젊은 나이로 런던 여행 중에 자살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시집은 죽기 일주일 전 런던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는데 제목이 <아버지, Daddy>였습니다. 실비아는 엄마없이 보스턴 대학 교수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녀는 3세부터 라틴어를 배울 정도로 천재였는데 아버지마저 11세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녀는 몹시 허탈해졌습니다. 그 후 그녀는 시인이 되고 결혼하여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편이었으나 이것이 그녀의 마음의 진공상태를 메우지는 못했습니다. 실비아가 자신의 진공상태를 메우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육신의 아버지로만 생각한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그녀는 인생을 충만하게 해줄 수 있는 존재가 하늘 아버지임을 모르고 죽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설사 오래 동안 여러분과 함께 살게 되더라도 늙어 가는 육신의 아버지가 여러분의 삶에 허전함을 메워 주거나, 여러분을 보호하고 사랑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거꾸로 여러분이 그 육신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보호하고 사랑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육의 아버지를 책임져야만 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영광과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끝까지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며 함께 하실 것입니다. 미국 어느 범죄 소년들을 지도하는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다가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럼 뭐라고 부르면 좋겠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순경님이 적당합니다."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묻자 동네 사람들과 아버지까지 자기를 나쁜 놈으로만 취급할 때 오히려 순경 한 사람이 자기를 이해하고 편들어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얘기가 나온 김에 다른 소년들의 의견도 발표하게 했더니 <하늘에 계신 우리 외할머니>, <하늘에 계신 우리 축구 코치>, <우리 반 친구 톰> 등 의견이 쏟아졌는데 모두 자기를 정말 위해 준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을 내세웠습니다. 이 목사님은 "범죄 소년들에게 아버지의 인상은 사랑과 이해를 주는 자보다 간섭하고 막아서는 폭군의 인상이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정상적인 관계는 이해와 사랑과 보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가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은 그만큼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깊이 이해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2) 고 말씀하시었습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주기도문의 핵심은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기도의 주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기도에 대한 교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이 예수 믿고 하나님께서 다스리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하나님 나라는 결코 어떤 땅이나 영토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마음과 심령, 그리고 인간의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 하나님의 지배를 말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어떤 일로 친구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마침 그때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는 여러 번 시도했으나 예수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림이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림 제작을 중단하고 며칠 동안 명상에 잠겼다가 실패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재주 있는 손을 가졌다고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가졌다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을 때 나는 예술가도 될 수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될 수 없다." 다 빈치는 즉시 친구를 만나 화해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전에 얽혔던 분한 생각을 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 뒤 며칠이 지나 다시 작업실에 들어가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얼굴을 아주 만족스럽게 화폭 위에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찾는 것이 성한 눈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뜻합니다. 내 성격이나 내 욕심이 다스리는 세계가 아닙니다. 걱정과 불안과 나의 좁은 생각을 몽땅 묶어 하나님이 관리하시도록 맡기는 믿음의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정치적인 왕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랑의 왕국인 것입니다. 마드리드(Madrid)에서 1958년에 개최된 세계 마라톤 대회에서 감격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결승점을 불과 1마일 앞두고 1등으로 달리고 있던 선수의 다리에 심한 쥐가 일어났습니다. 2등으로 달리다가 이것을 본 선수는 1등으로 달리던 선수를 부축하여 일으켜 함께 천천히 달렸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둘 다 등수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기장에 입장하여 마지막으로 운동장을 돌 때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1 등을 하느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믿고 지금 여기서 그 사랑과 축복, 행복을 부분적으로 맛볼 수 있는 것이며, 장차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완전한 사랑과 행복을 누리게 될 미래 영역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영광스러우며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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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9-15, 참조 : 눅 11:2-4)

최효섭 목사는 기독교인의 그릇된 기도생활을 다음과 같이 꼬집었습니다.

『<하늘에 계신>하면서 땅에 붙은 것만 좇아다니고 있으니...

<우리>하면서 나밖에 모르니...

<아버지>하고 하나님을 부르면서 아버지의 말은 듣지 않으니...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하면서 욕돌릴 행실만 하고 다니니...

<나라가 임하옵시며>하면서 돈 주머니가 임했으면 하는 생각만 하고 있으니...

<뜻이 이루어지이다>하면서 사실은 내 뜻과 내 욕심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으니...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면서 사실 마음 속으로는 "양식은 몇 년 먹을 것을 이미 해결했으니 기왕 주시려면 복권이 맞게 해주시든지 최소한 집 한 채는 주옵시고"라고 기도하고 있으니...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뻔뻔스러워 옆 사람에게는 안 들릴 만큼 어물어물 입술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처지이면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하면서 유혹을 이길 노력을 안 할 뿐더러 재미있는 유혹이 없나 하고 찾아 다니는 주제에...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하며 그래도 구원받기를 구하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하는 말은 말짱 헛소리이고 영광도 나에게, 힘도 나에게, 모두가 다 나에게 초점을 맞추어 주기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주기도문을 끝낼 때 <아멘>하는데 하나님께 아멘하는 것인지 나 자신에게 아멘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주기도문을 자주 드리지만, 깊이 생각하고 드릴 기도이다. 주문처럼 외울 기도가 아니라 행동과 밀착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기도이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번째 부분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의 필요와 소원을 기도하는데 그 내용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여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으로, 주어진 현재 삶에 일용할 양식으로 족한 줄 알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풍부에도 궁핍에도 족한 줄 아는 삶의 태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는 우리 과거의 삶을 하나님께 고백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과거의 삶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을 때만 삶의 가치가 있으며 현재와 미래에 생명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앞으로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으로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며 사는 기도생활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 삶을 위한 기도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밖에 없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교부였던 클레멘트는 "재물은 구두와 같다."고 했습니다. 구두는 무작정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발에 맞아야 편하고 좋은 구두입니다. 마찬가지로 재물을 많이 가졌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분수에 맞아야 합니다. 사치스럽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각자의 분수에 맞는 생활수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흔히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저에게 풍성한 물질을 축복하사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넉넉하게 쓰임받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그다지 합당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현재 물질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쓰임받는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으면 적은대로, 약하면 약한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쓰임받고자 할 때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낼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먹을 양식을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주셨습니다.

"(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출16:4,5)

그런데 그 양식을 거둘 때에 1인당 한 오멜씩, 다시 말해 하루에 필요한 양식만을 거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여 일용할 양식 외에 다음 날 먹을 양식까지 거두어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양식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16:15-20)

중요한 사실은 제육일, 다시 말해 안식일 전날에는 각 사람마다 갑절의 양식인 두 호멜씩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에는 일용할 양식을 하늘에서 내리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안식일 전날에 이틀 분의 양식을 거두었지만 그 양식을 벌레가 먹거나 냄새가 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칠일, 곧 안식일에는 일용할 양식을 거두러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백성중 더러는 안식일에 양식을 거두러 나가 보았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22) 제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두목이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 (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25) 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26)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들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30)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출16:22-30)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다음날까지 남겨 놓은 자의 만나를 썩게하신 것은 첫째, 내일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살라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지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나>를 하루 세끼 먹을 일용할 양식만을 거두라는 것은 소유욕,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물질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재물의 노예가 되어 그 인생이 추하고 비참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물질축복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물질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버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욕심을 죄의 근본으로 정하고 그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죄는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많이 하면 할수록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이 되어야 하며, 기도 많이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올바른 기도응답이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면 할수록 가난뱅이가 되어야 바른 기도생활, 바른 신앙생활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어야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되어 하늘나라에서 부유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은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시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함께 나누심으로 하늘나라에 부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할 중요한 기도는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형제를 용서해야만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분명한 교훈이 마태복음 18:21-35에 있습니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중심으로, 다시 말해 마음 중심으로 형제를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1700년전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크리소스톰이 목회하던 교회 신자들은 주기도문을 외우다가 바로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긍휼하심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마음 중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고 하나님 앞에 뻔뻔스럽게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없이 이 기도하는 사람은 시편 109편 7절에 있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 시편 109편 7절에 나오는 저주는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형제의 죄를 용서하되 아무런 찌꺼기 하나 없이 깨끗이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는 용서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용서하고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이 미친 개를 땅에 묻을 때 꼬리만 땅위러 기념탑처럼 남겨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미친개를 끌어다가 산채로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위험한 개를 묻을 바에는 완전히 묻어야지 꼬리만 땅위에 남겨 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의 죄도 용서하려면 깨끗이 묻어버리듯 용서해야지 일부분을 남겨놓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의 피는 제아무리 흉악한 죄일지라도 흰눈같이 희게 하시며, 그 지은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게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덮어두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지워버려 영원히 기억조차 되지 않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해야할 것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게 자신의 연약함을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사단의 시험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믿기 때문에 사단의 시험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시지만 십자가에 죽는 그 순간까지 사단의 시험은 계속되었습니다. 기도많이 한다고 사단이 시험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성경 많이 본다고 사단의 시험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고 사단이 시험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죽을 때까지 해야만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단의 시험이 많은 곳이며, 우리는 그 시험에 넘어져 악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연약한 인생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시험을 이길만한 힘과 지혜가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결코 사단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이렇게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와 같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람기도 유전자 처리로 없앨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미국 에모리대 연구팀은 한 마리의 암쥐에 충실한 프레리 들쥐 유전자를 혼교하는 숫쥐에게 투여한 결과 숫쥐가 한 마리의 암쥐만을 찾는 성향으로 변했다고 영국 과학잡지 네이처 최신호에서 밝혔습니다. 에모리대 연구팀은 인간 외의 다른 영장류를 상대로 유사한 실험을 최근 실시했으며 곧 인간 실험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영국 BBC 방송이 18일 보도했습니다. 프레리 들쥐의 유전자를 받은 숫쥐들은 때때로 다른 암쥐와 교미하기는 했지만 결국 한 마리 암쥐만을 찾는 성향으로 변했다고 연구팀은 강조했습니다. 연구팀은 유전자 하나로 바람기와 같은 복잡한 성향을 바꾸는 것이 가능함을 입증한 실험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유전자를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성향의 배우자나 자식을 만드는 일도 가능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남편이나 아내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다른 여자나 남자를 보고서도 전혀 시험들게 되거나 악에 빠지지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주기도문 가운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부분을 빼버려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자신이 원하는대로 만들어 시험받을 일이 전혀 없으며 악에 빠질 가능성도 전혀 없게 된다면, 결국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며 인간의 존재가치는 상실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시험을 받되 그 시험을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과 지혜, 말씀으로 이기며 악에 빠지지 않게 되었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 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지켰을 때 인간의 가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생활을 통해 마음과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지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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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동록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태복음 6:16-34)

지난 14일 KBS 뉴스에서 보도된 내용입니다.

<초고속 승진 가두를 달리던 한 외국계 은행의 30대 지점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일에 대한 압박감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는 것이 그의 유서 내용입니다. 2년전 34살 나이로 입사한지 10년만에 회사의 최연소 지점장이 된 김모 씨, 외국계 은행이라지만 김씨의 승진은 그야말로 초고속이었습니다. 아내와 두 자녀로 단란한 가정까지 꾸린 김씨는, 모든 동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김씨가 갑자기 실종된 것은 지난 6일 새벽, 집 식탁에는 김씨가 직접 쓴 편지 1장만이 놓여 있었습니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는 후회와 과도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다는 고통이 적혀 있었습니다. 김씨가 그 동안 혼자 감당했던 괴로움과 외로움이 편지에 가득했습니다. 유서가 돼 버린 편지 한 장을 남기고, 김씨는 스스로 한강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습니다. 회사 동료는 김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말도 없었고 평일에도 거의 자정 가까이 돼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러다 보니까 엄청난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난해 회사측과의 오해로 명예퇴직을 권고 받고는 커다란 심적고통에 시달렸다는 김씨, 능력과 실적만으로 평가받는 회사생활을 김씨는 더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까운 죽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먹어도 마셔도 주를 위해, 하는 일이 천해도 귀해도 주를 위해, 일하는 자리가 높든 낮든 주를 위해, 일하는 보수가 많든 적든 주를 위해, 살든 죽든 오직 주를 위해서 산다면 그 아까운 생명을 그렇게 괴로워하며 고통을 견디다 못해 죽음을 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인간의 실패와 불행이 오히려 성공과 행복의 재료가 되게 하며, 불만과 허무로 가득한 삶을 소망과 무궁한 가치있는 삶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가난하고 병들고 낮고 천한 곳에 살고 있다해도 비겁하거나 불행하지 않으며 높고 부요하며 건강하다고 해서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를 잘 알기 때문에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먹고사는 낮은 곳을 향하지 마시고 저 높은 곳을 향하시기 바랍니다.

경제(economy)란 경세제민(經世濟民)에서 나온 말로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을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경제 행위는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 모두 서로의 유익을 얻는 사회적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해 오직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벌이는 경제 행위는 경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수치스러운 탐욕의 행위인 것입니다. 한 집안에 가장이 병들고 직장을 잃게 되면 가족 모두가 다 어렵고 힘들게 살기 마련입니다. 자녀 중 유능한 아들이 나서서 장사로 돈을 벌었다면 그 돈은 자기가 벌었으니까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늙어 힘이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 잠시 일자리를 잃고 쉬고 있는 아버지, 공부하는 동생, 홧병에 병들어 입원한 어머니 등 가족 모두를 위해 함께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라 경제도 마찬입니다. 자신이 유능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 해서 독점하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힘없고 무능해서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빵부스러기나 던져주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결국 피차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경제 논리는 오직 경쟁에 있습니다. 경쟁에서 지는 기업이나 사람은 도태되고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살벌한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제 원리는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공유에 있습니다. 서로 제 것을 제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을 분배하고 나누는데 기독교의 경제 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탐욕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탐욕은 우상 숭배 행위와 같이 사람의 가치를 타락시키며 어리석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그의 끝없는 욕심 때문에 만족할 줄 모르고 이기적이어서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과도 평화스런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인색한 사람 역시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평화가 없습니다. 피나는 노력의 땀으로 세계 선수권 대회 등에서 우승하므로 유명세를 타고 엄청난 돈방석에 앉게 된 운동선수 중 어려운 이웃을 돕는 활동에 인색한 선수는 그 운동방면에서는 가치가 인정될지 몰라도 인간의 가치에는 그다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아까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덕을 상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때로 악한 모습이 들어 날지라도 사랑을 받을 수 있으나 인색한 사람은 아무리 선한 곳이 있어도 모든 사람이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도 평화가 없습니다. 사랑으로 불타는 마음을 가진 하나님과 인색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가진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사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인색한 사람은 그의 눈마저 인색하여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는 사람보다 물질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모든 소유, 즉 부와 돈과 물질의 소유를 죄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엄숙한 책임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기뻐하는 것보다는 엄숙한 책임을 느끼고 기도의 대상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풍성한 물질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사용하여 그 맡기신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어떻게 돈을 벌었느냐가 중요합니다. 과연 예수께서 보시기에 좋다고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돈을 벌었는가? 아니면 예수께서 원치 않는 방법이었는지? 제아무리 많은 돈을 번다해도 수고하고 땀을 흘리지 않은 것은 정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자신의 진실과 정직을 바탕으로 땀을 흘린 것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다른 사람을 짓밟았거나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렸다면 그 사람은 제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 거부가 되었다 해도 어리석고 가난한 영혼에 불과할 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미국 도박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 돈 벌었다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설사 도박으로 일확천금을 벌었다해도 대부분 그후 심각한 정신장애, 정신 분열 등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불행한 삶을 살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탈세, 주가조작, 뇌물공여를 통한 특혜 등으로 단번에 엄청난 돈을 긁어모았거나, 교묘한 방법으로 법망을 피해 상속세 한 푼 안내고 떼돈을 물려 받았다해도 그같은 경제행위는 스스로를 비천하게 만드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같은 행위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갉아 먹는 행위로 영적 빈곤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갑부들은 사람 취급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돈벌레>로 취급받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할지 몰라도 자신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자신의 소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그저 소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수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소유는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결국에는 자신을 파멸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큰 집, 더 큰 차, 더 크고 화려한 가재도구, 더 즐거운 일들만을 찾아 소비하는데 자신의 행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재물을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당하게 벌어들인 돈으로 뇌물을 주거나 그 돈으로 이권과 권력을 사거나 해서 국가 사회를 어지럽게 하고 남을 부패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소유를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사용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받는 데 있는 것보다 주는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은 독점하는데 있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 함께 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원칙대로 산다면 누구든지 그 소유가 많든지 적든지 그 소유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라진 풍속 가운데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의료 가방들고 왕진나가시는 의사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힘들게 병원을 찾아가 무려 3시간 이상을 기다려서 겨우 3분 진료를 받고 말 한 마디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데, 전화 한 통이면 환자의 집까지 달려가 홈케어 서비스(home care service)를 베푸는 의사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불편한 환자' 찾아다니는 '건강한 의사'로 알려진 사당의원 방문진료센터 원장 백인미씨입니다. 그의 병원 출입문에는 <사당의원은 왕진도 갑니다>라고 구호가 붙어있다고 합니다. 가방 들고 여기 저기 환자를 찾아 돌아다니는 걸 보고, 가운만 걸쳤지 그게 어디 의사가 할 짓이냐는 냉소를 받으면서, 소형 승용차를 직접 몰고 동네병원에도 갈 형편이 못 되는 환자들, 거동이 불편해서 병원에 갈 엄두를 못 내거나 진료비가 부담돼서 못 가는 노인들을 겨우 돈 1만원받고 진료하는 의사 백인미씨는 하루 종일 뛰어봐야 5명 정도 밖에는 진료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루 300명 넘게 특진하는 의사에 비하면 그의 수입으로 도저히 병원 운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월 1회 정박아 수용시설, 무의탁 노인들, 등 의료 사각지대를 찾아가 무료 진료를 아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돈도 되지 않는 임종진료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작구 의사회로부터도 "환자가 오라고 한다고 의사가 쭈르르 달려가는 것은 문제다. 의료를 덤핑쳐서 팔아먹느냐?"는 질타를 듣기도 했다 합니다. 그때 의사 백인미씨는 "덤핑이라니? 나는 한국에서도 알아준다는 서울 중앙병원에서 트레이닝 했다. 내 의료수준은 결코 싸구려가 아니다!"며 "건강한 의사가 불편한 환자를 찾아간다"며 뼈있는 한 마디로 문턱 높은 병원, 높은 자리만 찾는 의사들을 깨우치고자 합니다. 그가 돈벌이에 무능해서, 그의 의료기술이 미천해서 왕진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간에도 높은 자리, 높은 보수를 제시하는 병의원들이 많았지만 한결같이 거절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보이는 것이 높은 자리나 높은 보수가 아니라 돈 없고 병들어 거동이 불편하여 앉아서 죽기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진 가방에 의약품만 담고 의사의 권위는 몽땅 비우고 진료에 나선다고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방문진료를 전문적으로 하는 의사는 대한민국에서 백씨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백인미 의사는 돈 많은 병환자들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돈 없어 보건소조차 갈 힘이 없는 사람들도 소중하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의사는 돈보다 돈 없고 병든 사람이 더 높아보인 것입니다. 백 의사야말로 빛과 사랑이 넘치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 로마 관원이 교회를 박해하며 교회를 부수고 쳐들어왔습니다. 로마 당국은 교회에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약탈하러 왔던 것입니다. 로마군 사령관이 교회 집사인 라우렌티우스에게 "보물을 당장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교회 집사는 교회에서 돌보고 있던 과부와 고아, 각종 병환자들, 그리고 극빈 생활보호 대상자들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보물들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스페인 격언에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많은 돈 벌어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죽어 하늘 나라에 갈 때 보화를 가져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들을 보물로 여기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세상의 높은 자리, 호화 주택, 부자들의 금고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돈 없고 갇혀 있으며 병든 사람들이 있는 낮고 천한 곳에 함께 계십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이웃의 행복을 위해, 이웃과 모든 것을 함께 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은 그 버는 돈이 많든 적든 의로운 경제 행위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행위는 제아무리 많은 돈을 긁어모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의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경제생활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지혜로운 성도, 빛과 사랑이 넘치는 저 높은 곳을 향하시는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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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강청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5-13, 참조 : 마 7:7-11)

페이건이란 사나이가 감히 버킹엄 궁전에 침입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의 침실에 들어갔습니다. 여왕이 잠에서 깨었습니다. 사나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여왕 폐하,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탄원을 들어 주십시오" 여왕은 침착하게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앉았습니다. 호위병을 부르지 않고 침범한 사나이의 말을 듣겠다는 자세였습니다. 페이건에게는 4남매의 어린 자녀들이 있는데 아내는 가출하고 직업마저 회사의 감원 정책 때문에 나오게 되고 사회복지기관에 호소하였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자기를 정신병자로만 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나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여왕은 호위병을 불렀으며 사나이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직업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있을 수도 없는 엉뚱한 사건이었습니다. 창조자 하나님은 우리의 탄원과 호소와 간구를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마이클 페이건은 엄청난 무례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탄원의 길을 추진한 그 간절함에 여왕이 감동하여 그의 탄원을 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마치고 나니 제자 중 요한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눅가복음11:1). 이에 예수께서 기도의 모델로 가르쳐주신 기도가 곧 <주기도문>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누가복음 11:1-4)

이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내용으로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도의 방법으로 본문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하다가 배가 너무 고파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밤이 늦었지만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문을 두들겨 이미 곤하게 잠에 떨어진 친구를 깨웠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남은 밥이 없다며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밥 좀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친구라는 이유로는 네 요청을 들어줄 수는 없지만, 강청(强請)하기 때문에 일어나 네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기도의 방법에 대한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9-13절)

여기서 제시한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은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열심히 끈기를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인색하거나 무관심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고 계십니다."(시34:15)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가 무엇을 구하든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겠습니까? 기도에 있어서 성령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통달하셔서 우리가 잘못 기도한 것이나 알지 못하여 구하지 못한 것이 있을지라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바르게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시51:11) 간구했던 것입니다.

병낫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낫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것은 왜 그럴까? 생활이 좀 더 부유해지기를 위해 기도했는데 점점 더 쪼들리게 되는 것은 왜 일까? 부모 형제와 화목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눈물로 기도했건만 오히려 불화의 골이 더 깊어지는 것은 왜 그럴까? 어찌해서 저의 기도에는 응답해 주시지 않으십니까? 누구 못지 않게 눈물과 정성으로 기도했음에도 기도의 열매가 없어 기도하기를 포기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까? 기도의 목적과 기도의 자세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즐겨 쓰던 농담이 있습니다. 한 주일 학교 어린이가 산에서 곰을 만났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어 아이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 곰에게 착한 마음을 주세요" 눈을 떠보니까 곰도 마주 앉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야아! 기도가 이렇게 빨리 효과가 날줄은 몰랐어!"하고 기뻐하니까 곰이 말했습니다. "너는 무슨 기도를 했는지 몰라도 나는 식사 기도를 한거야." 레이건은 '사람의 속은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이 농담을 사용하였으나 기도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 곰처럼 식사기도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요구만을 위한 기도라면 얼마나 초라한 기도인가? 기도의 결론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히 나타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경적이어야만 합니다. 성경적이 아닌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TV프로에 나온 어떤 할머니가 60년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날마다 새벽기도했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 남편이 놀음하러 갔을 때도 놀음해서 돈 따서 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바이런 자니스(Byron Janis)는 세계적 피아니스트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교통 사고를 당해 손에 심한 신경통과 신경마비 증세가 있었습니다. 한 때는 열 손가락 중에 왼손 중지 하나만 제대로 움직였고, 새끼손가락은 완전히 마비된 적도 있었습니다. 오른쪽 손목은 40퍼센트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고통과 싸우며 어떻게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을까? 그는 <퍼레이드, Parade>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 의사도 수고하였고, 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기도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싸울 용기를 주셨습니다. 나에게 문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나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쓴잔이 오지 않게 해주소서." 하는 기도보다 "하나님 내가 쓴 잔을 마실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이같은 기도는 바로 성경적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바른 생각을 가지게 되어야 하며, 기도를 많이 할수록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기도를 깊이 할수록 남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많이 용서하며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깊이 할수록 더욱 더 생활이 깨끗하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한 마디로 기도는 하면 할수록 성경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기도를 깊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뜻이 더욱 더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표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웃 구원을 위해 선교헌금해야지, 십일조 드려야 하지, 감사헌금 바쳐야 하지, 구제헌금드려야 하지, 이것저것 다 내어주고도 못 다 준것처럼 여기며 몽땅 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십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을 보면 물질에 대한 것은 오직 일용할 양식밖에 없습니다.

<붙이는 도시락>이 멀지 않아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 국방부는 첨단 기술력을 이용해 군용식량(MRE)을 민간회사와 합작생산해 일반인에게 본격적으로 시판할 계획입니다. 이에 따라 몸에 붙이기만 하면 인체에 필요한 모든 필수 영양소를 피부를 통해 공급해주는 <패치형>식량도 개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미국방부 식량프로그램의 제럴드 다쉬 수석 연구원은 "군인들이 다음 세기에는 뭘 먹고 전투하면 효율적일지 생각하다 갑자기 니코틴 패치가 생각나 이 <붙이는 도시락> 계획을 착수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가족이 밥상 앞에서 "어서 붙여!" "마저 붙여" "더 붙여" "많이 붙여"라고 말하게 되는 날이 곧 오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라는 성구를 이렇게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붙일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주기도문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를 "우리에게 일용할 파스 한 장을 주옵시고..." 이제 앞으로 우리에게 파스 한 장이면 족한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이 기도 많이 해서 부귀영화, 고대광실을 누린다는 것은 기도와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는 내가 희생해서일지라도 남이 잘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 남이 희생되도록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요즈음 한 무당이 충무공 이순신장군 등의 묘소에 쇠말뚝, 식칼등을 박아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묘소 훼손은 충무공 묘소에만 그치지 않고 태조..태종.세종 등 조선조 왕릉 등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모든 묘소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무당의 저주기능에 따라 남을 저주함으로써 자신의 행복과 건강, 부귀와 출세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현재 활동중인 무당수는 2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가는 돈도 무려 1조4천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무당과 엄청난 돈 거래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만, 내 후손만 잘 되면 된다는 망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전진하여 모압으로 진격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모압 왕 발락은 위기를 느낀 나머지 메소포타미아의 점쟁이 발람을 초청하여 저주하여 이스라엘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발람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저주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메시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순간마다 성령이 강권적으로 그를 사로잡아 이스라엘의 번영과 축복을 기원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민수기 22,23장) 하나님은 결코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배은망덕한 인간일지라도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저주한다고 남이 저주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남을 저주해서 자기 뜻대로 될 것이라면 세상은 벌써 끝장났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제대로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웃의 축복을 위해, 아니 원수까지일지라도 그의 축복을 위해 간절히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잘 되는 것, 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것은 오직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자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잘 되신 분들이며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 받으신 분들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며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내가 다 이루었다"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주안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출세했고, 성공했고,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보증으로 주신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전도,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문을 외우는 교회에 불과합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으며 예수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교회는 열매없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 강청하여 기도하되 성경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강청하여 간구하시면 여러분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것은 오직 성령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시고 성령을 따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따라 하는 기도는 성경적입니다. 성령을 따라 기도 생활하는 사람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성령을 따라 기도 생활하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 예수 처럼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강청하는 기도 생활로 인류에게 가장 좋은 성령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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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22)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 저희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29)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눅 13:22-30, 참조 : 마 7:13,14,21-23)

예전에 이 세상에서 사치란 사치는 다 하고 많은 존경을 받던 한 여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여자가 죽어 하늘 나라에 도착했을 때 그녀에게 할당된 집으로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 한 천사가 파송되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저택을 여러 개 지나쳤으며 그 여자는 한 집 한 집 지나칠 때마다 그것이 자기에게 할당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하늘 나라의 중심 도로를 지나 교외의 변두리 지역에 이르게 되었을 때 거기에는 훨씬 적은 집들이 총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변두리에 있는 오두막집보다도 작은 집에 이르렀습니다. 안내하는 천사는 "이것이 당신의 집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자는 "무엇이라고요? 이것이 내 집이라고요? 나는 여기서 살수가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천사는 말하기를 "안됐소마는 우리는 당신이 올려보내 준 물자로서는 고작해야 이것밖에 지을 수가 없었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늘 나라가 지상에서 올려보낸 물자로 각자의 집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면 천국은 역시 부자들의 천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 하늘 나라는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표준은 세상의 표준과 다릅니다. 세상에서 먼저 된 자가 종종 하늘 나라에서는 나중 되고 세상에서 나중 된 자가 종종 하늘나라에서는 먼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랑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 잔치에 모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실 때 그토록 사랑했던 제자들 모두가 하나 같이 다 흩어지고 예수 홀로 남으셨습니다. 예수의 수제자로 일컫는 베드로마저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며 발뺌을 하고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두고 일찍이 예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과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끝까지 따라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하나 둘씩 예수곁을 떠나자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에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두고 마태복음 7장 13절-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사람이 적어도 그 문은 사는 길이고, <넓은 문>으로 가는 길은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 문은 죽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은 비록 고난과 아픔의 길이었지만 부활과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생명의 구원을 주신 길, <산 길>이었습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가로막힌 성전 휘장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인류가 사는 <좁은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가시기 원하신다면 예수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예수께 나아가는 길이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좁은 문>은 예수께서 가신 길, 곧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 동족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천사의 얼굴로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자신을 해롭게 하거나 원수에게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잘 되기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며 사는 길이 좁은 문으로 가는 생활입니다. 가시면류관을 받으시고 멸시 천대 조롱을 받으면서 급기야는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이 좁은 문으로 가는 생명의 길입니다. 원수를 사랑으로 섬기는 길이 생명에 이르는 좁은 문으로 가는 생활입니다. 역경 중에도 기뻐하며 감사하는 생활이 좁은 문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듯이 자기를 낮추어 겸손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이 바로 좁은 문으로 가는 생명의 길입니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사랑으로 섬기고, 배운 자가 못 배운 자를 사랑으로 섬기며,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사랑으로 섬기며, 건강한 자가 병든 자를 사랑으로 섬기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며 사는 길이 바로 좁은 문으로 가는 생활입니다. 예수 믿고 환상을 보았다거나 천국을 경험했다거나 하면 신령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낮고 천한 곳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에 대해서는 신령하다거나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 경험담을 그토록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얘기할 때만 예수 믿고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 같고 다른 때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보다 더 못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사람은 떡(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사람은 엄연히 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는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여러분 남편과 아내가 밥으로만 삽니까? 남편과 아내사이에 밥도 있어야만 하지만 사랑이 있어야 남편과 아내로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기도만 한다고 저절로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밥을 잘 먹고 건강해야 기도생활도 건강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밥을 먹기 위하여 일하는 것 보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욱 거룩한 일처럼 잘못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느니라"는 말씀에서 "하나님 입에서는 나오는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요 바로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이동철의 실화 소설에 보면 주위의 창녀들 때문에 교회에 지장이 있다고 경찰에 신고하여 창녀들을 쫓아 버린 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업을 못하게된 한 용기 있는(?)창녀가 술에 취해 알몸으로 교회 철문에 매어 달려 "이 개새끼들아! 우리가 너희들보고 밥 달라고 했니? 떡을 달라고 했니? 내 몸 팔아 내가 먹고사는데 너희들이 웬 상관이냐? 우리들 다 먹여 살려라!"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창녀의 처절한 몸부림은 더럽고, 창녀를 신고하여 쫓아버린 교회는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창녀를 더럽다고 그들의 밥그릇을 차버린 교회는 과연 <좁은 문>으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남의 밥그릇 차버리라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까? 이러한 교회가 장차 천국 문에서 환영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속칭 <청량리 588>, 창녀촌 마당 한복판에서 창녀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노숙자들과 결식 부랑인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 지어 대접하며 그 마당에서 예배드리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 <청량리 588>에서 예배드리는 교회는 더러운 교회요 넓은 문으로 가는 교회입니까? 창녀들 밥그릇 차버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교회입니까? 아니면 창녀촌 마당에서 밥 퍼주며 그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교회가 하나님 뜻대로 하는 교회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천국의 문전에서 거절당한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와 안면이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이 말은 예수와 친분을 구실로 구원을 보장받으려는 유대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친밀한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와 함께 식사한 적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배척하고 멀리했던 세리나 창기들과 한번도 식탁을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며 분명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와 유대인이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란 서로의 기쁨 뿐만 아니라 고통과 아픔, 배고픔을 함께 나누어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를 말합니다. 유대인이 구원을 주장하는 또 하나의 관계는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는 것입니다. 예수께 배웠다는 이유로 구원을 보장받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거절당한 이유는 "행악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여기 "행악"은 다음 성구에서 그 분명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장 21절-23절)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다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해서 그런 것이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지자 노릇한다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를 잘 알고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는 피차에 서로 아는 관계여야 합니다. 서로를 안다는 것은 참된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내 자신이 하나님께 알려지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내가 하나님을 아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실 때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신다는 데서 나의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데서 시작됩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천국 문턱에서 거절당하지 않는 하나님의 아는 자가 되어 천국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십자가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고 궁극적으로 심판과 두려움을 벗어 던지게 하고 구원의 생명에 이르게 했습니다. 여기 분명히 나타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바로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인류 사랑의 길입니다. 제아무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사랑으로 섬기는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가는 생활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리고 금식기도를 밥먹듯 한다할지라도 그리고 성경을 수도 없이 읽었다해도 사랑으로 섬기는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가는 생활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귀신을 쫓아내며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해도 사랑으로 섬기는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가는 생활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혹시 율법대로 산다고 신앙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율법은 죄를 정하여 죽이는 것이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 십자가의 길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입니다. 예수 믿고 그가 보여주신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로 생명에 이르는 <좁은 문>으로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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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주초를 반석 위에 놓으라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 주여 !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15-29, 참조 : 눅 6:47-49, 13:25-27)

며칠 전 교회 근처에 살고 있는 이 모씨가 제게 전화했습니다.

"목사님,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금 저는 그간 35년 동안 사용했던 부적이며 우상숭배하던 기구들을 몽땅 들고 나와 교회 근처 공터에서 불태워버리고 전화드립니다."

그가 제게 들려 준 얘기는 이렇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행하는 축호전도를 받고 지난 주일에 우리 교회를 찾아왔는데 차마 예배드리는 시간에 출석은 하지 못하고 다만 그 예배시간에 2층 계단에 앉아있었는데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기쁨과 평안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금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 신앙생활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4살 때 어느 서커스단에 끌려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35년 동안 몸의 유연성을 위해 식초를 마셔왔는데 이제 더 이상 서커스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엉망진창이 되어 이틀에 한번씩 병원에 가서 링거주사를 맞지 아니하면 도저히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도 없고 뼈 전체에 이상에 생겨 주사액을 투입하지 않으면 걷는 것조차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손등이 90도 이상 휘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지난 35년 동안의 삶은 오직 서커스단을 위해 너무나 비참한 생활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무너져 내린 39년의 처참한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축호전도를 통해 한 인생이 예수를 영접하고 이제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지어 가는 아름답고 희망찬 삶의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함께 간곡히 기도했습니다.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방법은 그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이 이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무는 그 체질과 성품에 반대되는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속에 자리잡고 있는 거짓은 그 행위를 통해서 반드시 드러나는 법입니다. 즉 아무리 말과 행동을 조심한다 할지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정체를 여실히 폭로시키고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거짓 선지자는 그의 인격, 품성으로 그 진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격과 품성 중에 최고의 인격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도 사랑의 은사입니다. 품성을 나타내는 성령의 열매 중에 최고의 열매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이타주의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이리떼와 같이 오직 자기 배를 채우겠다는 탐욕과 이기주의가 그의 본성입니다. 참된 목자는 양떼를 자기 생명보다 더 귀중하게 돌봅니다. 성령으로 예언한다면서 선지자의 대접을 요구하거나 돈과 필요한 물건을 요구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가르치는 일도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행합니다. 종교란 의식(儀式)이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종교를 의식화해서 그들의 돈벌이 내지는 권세 보존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만일 사람이 손씻는 규례를 바르게 잘 지키고, 안식일에 무화과 두개 이상의 무게가 되는 것은 운반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에 규정된 거리 이상을 걷지 아니하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고 채소밭의 소산까지도 그렇게 한다면, 그리고 부정한 음식, 예를 들어 돼지고기나 메기, 미꾸라지 등을 먹지 않는다면 그는 선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종교와 종교 의식을 쉽게 혼동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에 출석하는 것, 주일을 지키는 것, 교회에 대한 재정적인 의무를 감당하는 것, 성서를 읽는 것, 지금도 구약처럼 돼지고기 등을 먹지 않는 것 등이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모든 것을 실행한다고 해도 그는 참 종교인 참 신자가 되지 않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믿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인류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류를 섬김으로 구원코자 하시는 그의 겸손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 600여 가지를 제아무리 다 지킨다해도 예수 믿고 예수의 마음을 품어 예수의 인격, 곧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아니한다면 그는 참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 기독교인은 그 열매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지금부터는 당신은 영화관에 가지 마시오, 지금부터는 춤도 추지 마시고 노래방같은데도 출입을 금하시오, 지금 부터는 담배를 피우거나 화장을 하지 마시오, 지금부터는 연애소설이나 선데이 서울같은 것을 읽지 마시오, 팝송이나 흘러간 노래를 부르지 마시오" 라고 한다면 그런 기독교나 종교는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이러한 것들을 삼가함으로써 만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면 기독교는 실제 그 자체보다 훨씬 더 믿기 쉬운 종교가 될 것이며, 종교라기 보다는 오히려 도덕 윤리에 불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온전한 본질을 말한다면 행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섬김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소극적인 기독교인은 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현실을 도피하는 종교가 아니라 미움과 증오, 부정과 부패, 음란과 타락, 혼돈과 공허가 난무하는 세상에 더욱 더 깊숙히 들어가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예수님처럼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인류를 사랑으로 섬기는 표상입니다. 십자가는 참된 생활이며 아름다운 삶의 열매입니다. 생활과 동떨어진 종교나 교훈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거짓된 것입니다. 수도승들과 은둔자들이 저지른 오류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자로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사막이나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되며 유혹많은 세속의 생활로부터 떠나서 세속의 삶을 중단하지 아니하면 참된 크리스찬의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말하기를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고 했습니다. 유명한 영화 <사운드 어브 뮤직>에 보면, 폰 트랩 대령 가정에 한 수녀가 가정교사를 들어갔다가 아내가 없는 그 대령과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 수녀(줄리 앤드류 분)는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기로 서원했기 때문에 남녀간의 사랑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말도 없이 그 집을 뛰쳐나와 수녀원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수녀원 원장이 이를 알고 그 수녀를 불러 책망합니다. 수녀원은 세상에서 살다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를 피하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녀원에 기어 들어오는 것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많더라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펴나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랑하며 섬기는 생활입니다.

종종 오만해서 배타적인 종교집단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협소한 종파에 몰아넣고는 그 외의 세계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가르치는 무리들입니다. 자신들만이 의롭고 참되며 자신의 종교 집단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모두가 죄인이며 심판을 면할 길이 없으며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무리들은 모두가 다 한결같이 거짓된 종교입니다. 종교의 기능은 양쪽의 가운데다 장벽을 세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헐어버리는 일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인류와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는 유대인과 그들이 원수처럼 여겼던 이방인들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2:13-18)

포스틱(Fosdick)은 다음과 같은 엉터리 시 네 줄을 인용해서 배타적인 종교집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선택된 소수의 무리,

그 외 모든 인간들은 저주를 받고 있다.

천국에는 너를 위한 장소는 없다.

천국이 만원되어선 곤난하다."

종교는 사람들을 서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대립하는 클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가족으로 모아들이는 것입니다. 특정한 교회 또는 교파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하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는 분리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연합시키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모두가 다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되는 비결이 바로 예수의 마음을 지니고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입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치 않는 자들은 어리석은 건축자와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집의 기초를 모래나 흙 위에 세운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 지혜로운 사람이 집을 세울 기초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이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린도 전서 3: 10,11)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집이 무너지듯 그 신앙이 무너지고 말게 됩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 물질이나 부귀공명이 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주초,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사상에 집을 지었던 나라나 인생들이 처참하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민족주의나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 무너지지 않는 주초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시대에도 어떠한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터>는 "주께서 아시는 백성"(디모데 후서 2:19)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백성이 되기 원하신다면 그래서 인생의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인도의 썬다씽은 "인도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까? 기독교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을 모른다면 내가 살 의미가 없습니다. 내일 새벽까지 나에게 당신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나는 차라리 죽겠습니다."하고 생명을 걸고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구도자였습니다. 그러한 썬다씽에게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나타나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라고 했기 때문에 그날부터 그는 주를 위해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를 찾기 위하여,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그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모르고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모르고서 사랑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아 주시는 것입니다.

"(고전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마땅히 알아야 할 그 무엇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작 알아야 할 하나님의 사랑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사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별별 은사나 능력을 받았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두 아들이 있습니다. 맏아들은 효자요, 둘째 아들은 부모에게 불효한 이른바 방탕아입니다. 그래서 형은 언제나 그 동생을 구박하고 멸시합니다. 이유는 부모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맏아들은 자기가 부모의 뜻을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런 탕자는 없어지던가, 나가 죽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 즉 그 부모가 그 못난 자식도 똑같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아니 자기에 대해서보다도 오히려 그 동생에게 더 큰 연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는 부모를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부모를 잘 안다는 대 전제에서 자기와는 다른 그의 동생을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와 똑같은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만이 하나님의 법을 잘 알고 있고, 받은 바 은사를 통해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 사랑과 섬김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구하되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것입니다. 은사의 목적이 자기증명이나 자기 신앙의 우월성, 하나님과의 남다른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은사나 능력의 목적은 자신에게 덕을 세우며, 교회에도 덕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덕목 중에 가장 큰 덕목을 말한다면 무엇보다도 사랑과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첫째는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가정과 교회, 더 나아가 나라 민족을 하나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이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0-15)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어떠한 어려움과 환난이 있어도 말씀대로 살며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나무나 풀이나 짚"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는 믿지만 유명무실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화하지 못하는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무너지지 않은 인생의 집을 지으려면 무엇보다 그 마음이 무너지지 않아야 합니다. 사업에 실패해도, 어떠한 역경과 환난이 불어 닥친다해도 그 마음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재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기 원하신다면 예수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인류를 사랑으로 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의 조롱과 비난과 멸시 천대를 받으면서도, 아니 급기야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지라도 무너지지 않으셨습니다. 무너지지 아니하는 견고한 터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이 자신의 집을 견고하게 세울 터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무너지지 않은 견고하고 지혜로운 인생의 집을 짓고자 한다면 예수 믿으시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대로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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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만한 믿음이 있느냐?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 8:5-13, 참조 : 눅7:1-10, 요 4:43-54)

어거스틴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선생님 어떻게 해야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대답하기를 "겸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제자들은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두 번째 비결과 세 번째 비결을 물었고 그때마다 어거스틴의 대답은 한결같이 겸손을 말하였습니다. 믿음 중에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믿음은 사랑을 겸한 겸손한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의 형체로 오셨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보여주신 가장 모범적인 신앙의 형태는 사랑을 겸한 겸손한 믿음인 것입니다. 교회가 대형화, 비대화되는 가운데 교회 본연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겸손입니다. 교회가 작든 크든 끝까지 간직해야 할 모습은 사랑을 겸한 겸손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은사중심의 교회, 은사중심의 믿음생활은 대부분 그 열매가 전무합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그 신앙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겸한 겸손한 믿음의 교회는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이원규 교수의 갤럽조사에 따른 종교분석에 의하면, 한국의 종교가 이 땅에서 계속 실망을 주다보니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도 거세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종교에 관한 무관심이 9.1%(1984년)이던 것이 26.4%(1997년)로 껑충 뛰었고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은 9.6%(1984년)이던 것이 22.7%(1997년)로 종교에 등 돌리는 국민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를 가진다면 개신교로 개종하겠다는 사람은 21.4%(불교의 41.8% 카톨릭의 36.7% 보다 훨씬 낮다.)로 개신교의 전망은 심히 어둡기만 하다고 말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대체 무엇 때문일까? 한 마디로 교회가 좋은 열매를 보여 주지 못해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도할수록 더욱 더 겸손하여 사랑으로 섬기는 일이 깊어지고 넓어져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알수록 더욱 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져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처럼 십자가를 지고 참된 사랑으로 이웃을 섬겨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간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량적으로 대형화, 비대화되면서 그것이 한국 교회의 성공사례인양 행세하면서 예수의 참 모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인공인 로마의 백부장(1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로마군대의 중견 지휘관)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신 백부장은 사랑을 겸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하인(노예)이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백부장은 자신의 종이 병든 것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여 고쳐주고자 했습니다. 이같은 마음 씀씀이는 당시에 주인이 노예에게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의 노예는 사람 축에 들지도 못했습니다. 노예들의 생노병사 희노애락 등은 주인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예는 살아 있는 도구에 불과했고 물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법적 권리라고는 하나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 주인은 자기가 좋은대로 노예를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든지 학대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저술가 바로(Varro)는 농업에 대해서 쓰되 농기구를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언어를 가진 도구, 언어가 없는 도구, 소리 없는 도구 등인데 <언어를 가진 도구>란 노예를 의미하며, <언어가 없는 도구>란 가축을 말하며 <소리 없는 도구>란 운반수레들을 말합니다. 노예와 짐승 혹은 마차와의 유일한 차이란 노예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낡아서 못쓰는 농기구는 내다 버리는 것처럼 늙고 병든 노예는 주인의 뜻대로 얼마든지 내다 버려 죽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 병든 노예를 불쌍히 여겨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이 백부장은 특별한 인격자였음이 분명합니다. 평소에 노예들을 인격적으로 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감동했던 것은 바로 이 부분, 즉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던 하찮은 노예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중풍병에 걸려 쓸모도 없는 노예를 얼마든지 내다 버리든가 아니면 죽여도 그만인데 그를 소중한 한 생명으로 여겨 사랑으로 섬긴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큰 사람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찮은 사람에 대해 사랑을 베푸는 사람 곁에 예수는 항상 계십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머리털까지 다 세실 정도로 그 사랑이 지극하십니다. 예수께서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태복음18:10-14)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의 이 백부장은 소자 중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랑을 겸한 믿음을 가진 진정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이 백부장은 신앙에서도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자기 종이 낫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직접 그 집에서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며 그의 거침없는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신앙을 기뻐하시고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어 유대인이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 백부장처럼 아무리 이방인일지라도 예수의 말씀 한 마디를 믿고 사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천국가는데 필요한 것이 국적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기가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름 하나로 하나님의 특별한 가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라는 족보만으로도 구원을 얻어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바는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특수한 민족이나 특별한 계층만의 소유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민족에 관계없이 마음속에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3:16) 백부장은 유대인이라 아니라 유대인이 멸시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바로 이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이 자기의 종을 그처럼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것을 보고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는 다른 어떤 것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께서 자기 종에게 "일어나라"고 다만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시기를, 중풍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자기 종에게 가시지 않으시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다만 말씀 한마디만 해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백부장은 주의 말씀을 의심치 않고 믿었고 그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권세있는 명령을 발하실 때 종의 질병이 그 한 마디의 명령으로 곧 떠나가고 말 것을 확실히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백부장은 눈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시는 주님을 전인격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믿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귀하고 숭고한 형태의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마라하는 제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말에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후 8일이 지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20:24-29) 어떤 신체적 접촉을 한다거나 환상을 보는 따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 증거에 의지하지 않은 믿음이야말로 복된 믿음, 칭찬받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려 하지도 않았고, 예수의 몸이 닿은 손수건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의 말씀 한 마디면 충분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러한 백부장의 태도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우주의 통치자, 천지 만물의 주관자로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당시의 많은 군중들이 예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던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그 무엇을 보여 달라는 그 요청 또한 오늘날 우리들의 요청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감각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요한복음1:1)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인격적인 믿음입니다. 말씀 한 마디에 생사를 걸고 사는 사람이 흔하지 않습니다. 과거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간주 단호히 생명을 걸고 거절하다 순교당한 주기철 목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한 마디를 그대로 실천하여 자기 아들을 무참히 죽인 공산당원을 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 등이 바로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말씀 한 마디를 그대로 생활에 옮기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 2:26). 과연 본문의 백부장은 '살아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철두철미한 계급 사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구태의연한 권위 의식에 물들지 않고 종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랑의 인격을 소유한 보기 드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그 종을 사랑하고 아꼈으니 종의 병을 낫게만 할 수 있다면 어떤 수고라도 기꺼이 감수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신의 성품, 곧 사랑과 온유, 친절과 겸손을 구체적으로 생활 속에서 나타내는 살아있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믿노라 하면서 이러한 실천적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 가운데 그와 같은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믿음이요 헛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확증할 수 있는 길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의 참된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믿음의 삶은 이렇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4-21)

여러분에게 여기 이 백부장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사랑을 겸한 겸손한 믿음, 살아있는 믿음'으로 예수께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노라"는 칭찬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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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머리 둘 곳도 없도다

 (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57-62, 마 8:14-22)

1. 예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소경이 보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어나 뛰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 수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눈꼴 사나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꼼짝 못하게 하시는 권세있는 교훈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몇몇 사람이 저 정도이면 자신의 인생을 한번쯤 맡겨도 되겠다 생각해서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 사람의 의중을 꿰뚫어 보신 예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나를 따른다해서 네게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예수믿는다고 해서 장사가 잘 된다거나, 이름을 날리게 된다거나, 높은 자리에 앉게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 예수믿더니 집안 꼴딱 망해버리고,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결국 병까지 걸렸구나 하는 소리를 들어도 좋으냐는 말씀입니다. 예수 제대로 믿으려면 세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흔히 교회나 기도원 주변 광고에 보면, <수능 수험생들과 본 고사를 위한 축복 성회> 운운하는 부흥회 광고를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기 광고입니다. 속지마시기 바랍니다. 그 집회에 참석해서 기도하게 되면 시험보는 자녀들의 <찍기> 하는 손가락에 무슨 성령이 감화감동이라도 해서 기막히게 수능점수가 올라가는 것처럼 열을 올리는 무리들은 항간에 무슨 무슨 파이낸스 차려놓고 고금리 보장한다 하며 투자를 유혹하는 사기꾼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결국 고금리 보장에 속아 땀흘려 번 돈 하루 아침에 날려버린 사람들이나 그 <축복 집회>에 참석하여 고득점을 바라는 사람들이나 똑 같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벌지 않은 돈은 아무리 많아도 복이 될 수 없으며, 정직하게 땀흘려 번 돈은 아무리 작아도 엄청난 가치를 창조하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비결, 축복받는 비결, 성공하는 비결을 가르치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곳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가느냐? 예수믿고 예수를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의 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네 가진 것 모두 다 없는 사람들에게 퍼주고, 심지어 네 생명까지도 나눠주고 자신은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을 아주 슬프게 하는 사건이 <옷 로비> 사건입니다. <옷 로비>사건에 연루된 여자들은 모두가 교회 직분자들로 횃불선교센타 성경공부 회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모여 성경공부한다는 것이 <로비>를 연구한 것입니다. 범법한 행위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그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히 모여 회개하는 성경공부가 되어야지 대통령 부인이 장로이고 불법한 기업체 회장도 장로니까 <로비>나 연구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할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이 십자가의 길인 것을 알지 못하는 가짜 기독교인들에 불과합니다. 한마디로 기독교를 앞세워 축복으로 치장하려는 사기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도다"시는 예수를 따르려거든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야말로 머리 둘 곳이 없어 호피코트 뒤집어쓰고 자진해서 철창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축복받는 비결, 성공하는 비결을 배우려고 하지말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는 사도 바울의 삶의 비결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애굽 궁전에서 호의호식하며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으나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히브리서 11:24-26) 이 땅의 기독교 지도자들, 기독교인 지도자들이여,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던" 모세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생애는 빌린 마구간에서 시작하시어 빌린 무덤에서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생애에 저금통장 하나, 땅 한 평, 집 한 채 남기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서 교회 묘지 만들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기도원 세우라는 말씀 한 마디 남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 분은 여러분이 영원히 거할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러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요한복음14:1-3)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는 주의 음성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이번에는 예수께서 또 다른 사람에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좇으라."그 사람은 단호한 결심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에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평상시 친분이 있는 신앙심 깊고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는 터키 청년에게 영국 유학을 권했습니다. 원한다면 모든 학비며 생활비 등을 다 지원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터키 청년은 "나는 우선 나의 아버지를 장사해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선교사는 그 청년의 아버지가 죽은 줄로 알고 심심한 동정을 표시했더니 이 청년은 자기 아버지가 아직 나이도 젊고 건강하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우선 나의 아버지를 장사해야 합니다." 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유학을 떠나기전에 부모양친과 친척에 대한 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가 죽지 않으면 집을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부모양친께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지만, 일단 부모가 돌아가시고 자유롭게 되면 당신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예수 따라가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긴 한데 예수 믿는 것을 부모 사망 이후로 미루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사람의 이러한 생각을 예리하게 통찰하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하게 되면 기독교 복음이 도덕이나 윤리를 소흘히 여기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도덕이나 윤리를 결코 등한히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다 더 높은 도덕과 윤리 생활을 요구합니다. 도덕과 윤리는 생명의 가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도덕과 윤리는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고 지키기 위한 것이지만, 복음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죽음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 어떤 불의에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명한 제인웨이(Zanway) 목사는 목사가 되어 너무 큰 확신을 가지고 설교하다가 목사로서 두번 설교하고 폐가 상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너무 기뻐서 말하기를, "아! 나는, 내가 지금 느끼는 기쁨의 1000분지 1이라도 발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별세 시에 말하기를, "은혜 안에서 죽음은 내게 대하여 아무 것도 아니다....눈을 감는 것과 같이 쉽게 죽을 수 있다. 내가 보는 저 영광 때문에 나는 웃을 수 밖에 없다." 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생명을 주기 때문에 이 복음을 진실히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무디 목사는 말하기를, "어떤 날 디 엘 무더(D.L. Moody)가 죽었다는 신문을 읽을 터인데 당신들은 그 말을 믿지 마시오. 그 때에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잘 살게 된 것 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은 실로 죽는 것이 아니고 창조자의 품에 돌아가는 즐거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어떤 순교자는 그를 죽이는 자를 향하여 말하기를, "당신은 내가 지킬 수 없는 생명은 빼앗고 내가 잃을 수 없는 생명을 주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무엇보다 귀중한 것입니다. 사비에는 말하기를,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 얻게 하는 일이라면 만번 괴로움을 당해도 싫지 않다." 라고 하였고, 빌리 산디는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지옥에 가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보다 먼저 죽을지 여러분보다 부모가 먼저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살아생전 부모공경하고 부모 돌아가시면 장례 치루고 나서, 그리고 아이들 공부 다 시키고 시집 장가 보낸 다음, 아들 손자 며느리 찾아오면 다 함께 지낼 수 있을만한 집 한 채 마련하고 나서 어느 정도 내 할 일 다 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가서 예수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죽는데는 순서가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방화살해범의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받아 10년째 감옥살이하고 있는 재미 교포 이한탁씨가 있습니다. 딸의 우울증 치료를 위해 기도원에 갔다가 전기 누전으로 화재가 나 하나 밖에 없는 딸은 타죽고, 그것도 통탄할 일인데 불을 질러 딸을 죽였다는 누명까지 쓰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감옥에서 10년 세월을 보내고 이제 머리가 하얀 65세 노인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병까지 얻어 그 고생이 말이 아닙니다. 아메리카 드림을 가지고 미국에 이민갔지만 그 꿈은 하루 아침에 풍지박산되고 말았습니다. 이한탁씨는 "딸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갔지만 자신은 이 누명을 벗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펜실베니아 주지사에게 탄원서를 내고, 교민들은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아직 석방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지금 형편처지가 최상의 기회인줄 아시고 지금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하나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합니다. 너는 복음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 후서 4:1-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회개에 필요한 반성이나 회고를 금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뒤에 버린 죄악이나 인정이나 세상에 미련을 두고 애착하는 마음으로 뒤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애굽에서의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들을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다 광야에서 죽고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하나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 믿고 예수 따라가는 길, 신앙의 길은 머리 둘 곳 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길이지만, 비록 그 길은 가시밭 십자가의 길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과 영생의 길입니다. 예수 믿고 예수 끝까지 따라가는 신앙생활로 넉넉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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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눅 8:22-25, 참조 : 마 8:23-27, 막 4:35-41)

<가족>이라는 제목의 어느 삽화에 실린 글입니다.

"한 사람의 한숨에

다같이 흔들리고

한 사람의 눈물에

다같이 젓는 것이 가족이다.

한 사람의 콧노래에

다같이 즐거워하고

한 사람의 희망에

다같이 가슴 부푸는 게 가족이다."

다음 글은 가족 한 사람으로 인해 가정이라는 작은 배가 난파당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날 밤 우리 세 모녀는 떨고 있었습니다. 저는 계속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었지요 '제발, 제발...오늘만이라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갔으면...' 드디어 초인종 소리가 울렸습니다. 남편은 역시나 술에 만취한 채 들어왔고, 그 때부터 우리 세 모녀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물건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우리의 각본대로 일은 벌어졌고, 저는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119에 신고한 뒤, 남편을 병원에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격리 수용이라는 단어 때문에 남편은 주위 사람들의 입원 제의를 거부해 왔던 것이지요. 신고를 받고 달려온 119 대원들은 발버둥치는 남편을 끌고 갔습니다. "여보, 용서하세요." 사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 우리 세 모녀는 교회 바닥에 꿇어앉아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주님, 오늘도 아이들 아빠가 약속을 어기고 술에 만취 또 때린다면 이제는 그를 위해서라도 병원으로 보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멀쩡한 정신으로 들어온다면, 주님이 그 방법을 원하고 계시지 않는다 생각하고, 다른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주님.' 결국 남편은 정신병동과도 같은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이젠 밤마다 그로 인해 두려워 떨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면회 때, 남편은 내 얼굴 보기를 거부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이 방법밖에는 당신과 우리들을 살릴 방도가 없었어요." 남편은 참기 힘든, 특히 술을 먹으면 안 되는 병원생활 속에서 저를 무척 원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우리 세 모녀에게 잘못을 저지른 건 인정하면서도 가장인 자기를 격리 수용한데 대한 분노가 더 컸던 모양입니다. 그는 저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발버둥치며 병원으로 끌려가던 그 때의 일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합의이혼' 까지 가야만 했지요. 결혼생활 18년째였습니다. "엄마, 잘 생각하셨어요. 저희는 엄마 이해해요. 우리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저희도 다 컸잖아요." "얘들아..." 아이들과 또 부둥켜안고 마냥 울었습니다. 정말 이렇게까지는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정을 파괴해버린 그 '술'이란 게 너무 미웠습니다. 술만 취해있지 않으면 그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이혼을 하고 우리 세 모녀는 방을 얻어 나왔습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고, 다행히 남편은 통원치료만 할 정도로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미안하오. 다 내 잘못이오. 건강한 모습이 되면 아이들과 당신 앞에 다시 나타나리다. 그 때는 날 다시 받아 주구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각자 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립니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라도 우리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우리 네 식구가 모이기만 하면 피아노 앞에 서서 멋진 화음을 연출했던 그 시절...오늘도 우리 세 모녀는 기도를 마친 후에 그 노래를 불러보곤 한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낮은 울타리6월호에서)

사람이 태어나서 한 평생을 살아갈 때 삶의 크고 작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 풍랑을 만나서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무사히 극복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난파당하여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내용은 풍랑을 만난 사람들에게 그 풍랑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서 갈릴리 바다 중간쯤 이르렀을 무렵이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거센 풍랑이 일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광풍으로 돌변하면서 마치 천지를 삼킬 듯한 무서운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배는 당장 박살날 것만 같았고, 제자들은 물벼락을 맞으면서 실신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잠들어 계셨고, 제자들이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자 태연히 일어나서 '잔잔하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그토록 무섭던 바다의 광풍을 아주 고요하게 만드셨습니다. 광란하는 폭풍과 파도, 그리고 깨어져 갈듯이 요동하는 작은 배 등, 그것은 분명히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는 가장 극한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 중에서도 예수께서는 작은 배의 고물에서 조용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목숨들이 경각에 달려 있는 그런 급박한 시간에 어떻게 그처럼 조용히 잠들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제자들이 황급하여 제발 살려 달라고 소리쳐 일깨우자, 그분은 조용히 일어나서 곧 잔잔하라 하시면서 저토록 광란하는 바람과 파도를 아주 평온하게 잠재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지니신 평화였습니다. 여러분 삶에 풍랑이 일고 있습니까? 예수 믿으시고 예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고물에서 조용히 주무시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풍랑이 들이치자 제자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습니다. 할 수없이 그들은 고물에서 예수님을 찾아 낸 다음 흔들어 깨우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는 구원을 호소하는 것이라기보다 그냥 체념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함께 계시다는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삶의 평강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을 때, 갈릴리 호수에서 수 십 년 동안 고기잡이하며 살았던 제자들은 당시 호수를 배로 건너가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니 거절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도 그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에 크고 작은 풍랑, 광풍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걱정하실 것 하나 없습니다.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재난이 없이 모든 일이 다 잘 되어 갈 때에는 마치 한 척의 돛배가 순풍을 타고서 잔잔한 물결 위로 미끄러져 나아가듯 행복을 노래하다가도, 자기 삶의 현장에 예기치 않았던 재난이 떨어지면, 마치 돌풍을 만난 돛배처럼 저 행복의 노래는 속절없이 깨어져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폭풍이 일지 않는 바다가 어디 있고, 사철 잔잔키만 하는 호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참된 평안은 환경이나 다른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전해지는 평안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광풍노도 가운데서도 평안히 잠드셨던 예수님의 평안이 바로 그런 평안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하늘의 평화, 곧 근원적이고도 원천적인 평화는 바깥 환경을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여러분의 깊은 내면을 통하여 항상 내려질 것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리하면 주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명령하십니다. "고요하라, 잔잔하라." 이 한마디 말씀에 그처럼 무섭던 광풍노도가 꿈처럼 사라지고 배 안에 평안이 찾아 들었습니다. 그 한 마디는 분명히 하늘의 음성이었고. 그 음성이 무서운 바람과 파도를 평정시켰습니다. 그런 평화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고.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평안을 소원하시는 여러분,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 부닥치는 환경에서 눈을 돌려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를 믿고 하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진정한 평안이 깃들게 될 것입니다.

장로교 선교사인 벤자민 웨어(Benjamin Weir) 목사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국제 테러단에 납치되어 16개월 동안 세상과 격리된 감금 생활을 하고, 살아 나온 뒤에 자기의 경험을 써서『갇힌 인질, 풀린 인질(Hostage Bound, Hostage Free)』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고문당하고, 소식이 끊기며, 세뇌당하는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는 중 위로가 있다면 새벽에 변소에 가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창문 밖을 내다보고 싶어 변기 위에 발을 딛고 올라섰습니다. 그 곳은 높은 곳이어서 마침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고 숲과 산의 능선과 찬란한 구름들, 새벽을 맞는 대자연, 벡카 골짜기와 멀리 눈에 덮인 높은 산맥이 보였습니다. 웨어 목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창조자의 이 장엄한 선물은 하루종일 나의 기억 속에서 하늘의 음성이 되었습니다. 그 음성이 나에게 살아야 한다는 희망과 살아서 무엇인가 창조자를 위하여 그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분명 한 생명의 의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역시 변소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던 웨어 목사를 발견한 테러단은 그것마저 못하도록 변소를 옮겼으나, 그는 이젠 눈으로 보지 않아도 기억 속에 남은 그 장엄한 감격과 하늘의 음성을 언제나 보고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웨어 목사는 천상의 음성을 대자연을 통해 화장실에서 들었지만, 하늘의 음성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며 하늘의 음성에 접하고 힘과 용기를 얻는 이도 많고 예배 찬송에서, 혹은 성가대의 찬양에서 하늘의 음성을 접하고 감격과 희망을 갖는 이도 많습니다. 예수 믿고 예수의 말씀 가운데 삶의 참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인생의 폭풍이 잔잔해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함께 하시면 가장 무서운 폭풍도 잔잔케 됩니다. 예수가 계시는 곳에는 어떤 폭풍이 불어 닥쳐도 평화가 있습니다. 차고 쌀쌀한 슬픈 바람이 불어닥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참된 평화와 위로가 있습니다. 격정의 열풍이 불어와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평화와 안전이 있습니다. 의심의 폭풍이 신앙의 토대를 흔들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굳건한 안정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요동시키는 모든 폭풍 속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계시는 곳은 어디나, 어떠한 광풍노도일지라도 잔잔하게 되어집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있느냐?"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예수를 굳게 믿으시고 광풍노도가 이는 바다같은 인생항해에 평강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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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사람, 경제, 그리고 예수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 (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마 8:28-34)

영국의 서평 잡지 <로고스>가 금세기 100년(1900 - 2000)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들을 선정 발표했습니다. 선정 기준은 "인류의 휴머니즘을 고양시키고 세계사의 변화에 강한 영향을 끼친 책"이었습니다. 여기에 선정된 책들은 <20세기를 형성시킨 책 100권>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이 중에는 1994년 남아공 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쓴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을 비롯하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이 있는데 사상 서적으로 선정된 책은 자본주의를 기독교적 윤리관으로 해석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즘(기독교)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서적 경제윤리가 사람을 부유하게 했다. 18세기에 감리교를 창설한 웨슬레는 교인들에게 돈을 많이 벌라는 권고를 하거나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단지 정직하게 상도(商道)를 성서적 윤리 행위에 따라 지킬 것을 각성시키는 설교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말년의 설교는 대부분이 부자들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충일했던 바, 그 이유는 그의 교인들이 정직하게 상도덕을 지키면서 사업을 한 결과로 모두 부유하게 됐었기 때문이다." 요한 웨슬레가 교인들에게 강조한 것은 돈을 열심히 잘 벌어라, 그리고 잘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잘 쓰라는 것은 자기 좋은대로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남김없이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부자가 되기보다는 하늘나라에 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부자를 두고 자본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본가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돈을 열심히, 정직하게 벌고 그것을 정당한 곳에 재투자할 뿐 아니라 유익한 사회복지를 위해 바칠 수 있는 사업가를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나라의 소위 재벌들은 엄격히 말해 자본가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정직하게 벌었다거나 정당한 곳에 재투자해서 자본가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본주의를 받드는 정신은 탐욕이 아니라 금욕주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자본가에게 요구되는 금욕주의는 고행을 통한 단순한 금욕생활이 아니라 사업가가 가지는 일종의 소명의식으로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키기에 앞서 자기자신에게는 인색하면서도 공익을 위해서는 관대한 마음가짐 곧 사업을 공익을 위한 사명으로 여기고 헌신하는 정신을 말합니다. 막스 베버는 그러한 자본가의 소명의식의 기초를 기독교 신앙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이를 프로테스탄트의 자본주의 정신, 또는 직업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직업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소명을 위한 헌신의 방편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의 자본주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는 비윤리적인 상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기업인이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일시 위탁받은 청지기라는 관리정신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돈을 열심히 벌고 또 공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는 마음가짐을 지닐 때 참된 경제 성장을 이룰 있는 것입니다. 극기심을 가지고 자기의 욕심을 억제하면서 항시 많은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자본가의 정신에는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가 깊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을 자기의 안일과 쾌락을 위해서 쓰지 않고 금욕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본가는 자신의 삶을 검소하게 영위하고 사회에서 불쌍하게 버림받은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데 온 힘을 다했습니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경제사상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극기와 봉사의 양면성을 지닌 생활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근대경제체제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자본주의 정신이 오늘날 근대 경제의 발전을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앞으로 인류의 미래 사회가 어떠한 경제제도나 사상을 만들어 낸다해도 성서적 세계관이 그 경제윤리를 지배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될 것입니다. 제도보다는 그것을 받드는 정신적 초석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열심히 벌어서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베푸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정신을 예수의 삶과 예수의 말씀에 두고, 사람을 경제의 도구로 삼지않고 자본주의 목적을 삼아 경제활동을 전개해나아갈 때 건전한 사회, 건강한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건전한 사회>에서 현대인은 우주의 중심위치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였기 때문에 내적으로 삶의 싫증을 느끼는 불안과 불만 속에 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돈버는 방법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고양이 목장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한 마리에서 시작합니다. 고양이 한 마리는 1년에 12 마리의 새끼를 낳습니다. 그 많은 새끼들이 얼른 커져서 또 열두 마리씩 해마다 늘려 줍니다. 5년 뒤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통의 수학 실력으로는 계산이 안 되지만 다행히 야심만만한 한 청년이 컴퓨터로 계산한 바 약 249,000마리에서 날마다 5천 마리의 고양이 가죽을 벗길 수 있다고 합니다. 가죽 한 장을 1000원으로 계산한다고 해도 연간 18억 2천 5백만원의 수입이 됩니다. 그럼 이 많은 고양이를 무엇을 먹여 사육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무척 간단합니다. 고양이 목장 옆에 쥐를 사육하는 것입니다. 쥐의 번식률은 무려 고양이의 4배나 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쥐 네 마리를 한 마리의 고양이에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먹이는 남아 돌 것입니다. 그럼 이 쥐들에게는 무엇을 먹이느냐 하는 문제가 나올 것입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것은 공짜로 해결됩니다. 가죽 벗긴 고양이의 내장만으로도 쥐의 먹이는 남아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고양이에게는 쥐를 주고 쥐에게는 고양이를 주어 그 과정에서 남는 이윤은 주인이 독차지하는 경영 방법입니다. 이것이 역대 독재자들과 그 주변 무리들이 권력과 돈을 뽑아 낸 방법이었습니다. 불쌍한 것은 가죽이 벗겨진 고양이들과 먹이가 된 쥐들입니다. 이러한 방법을 쓰고 있는 무리들이 한국의 재벌들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고양이 내장으로 쥐를 먹이고 그 쥐를 잡아 고양이 먹이로 삼아 결국 돈 버는 것은 재벌들이나 재벌들과 결탁한 권력 계층이고 먹고 먹히어 결국 가죽이 벗겨지는 것은 힘없는 국민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되거나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이 나라는 <동물의 왕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재벌 총수들이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로, 그들이 거느린 회사가 많다는 이유로 그래서 불법이 드러났다고 구속하면 나라 경제가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면, 결국 피차 멸망당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권력을 강탈하여 긁어모은 돈 한 푼 회수하지 못할 정도로 뒤가 구린 정부라면 강도에게 순경복을 입혀 놓고 민중 때려잡는 몽둥이 들려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강도짓해서라도 땅 사고 집 사서 잘 살면 되고 그것이 합리화되는 국가 사회라고 한다면 이미 그 나라는 강도의 소굴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이미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도 전과자들과 미결수들이 정치와 경제계에 판치고 있습니다. 도입한 경제 이론은 기독교 정신에 근거한 서양 자본주의인데 껍데기일뿐 그 자본주의의 참된 사상과 정신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희한한 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 앞에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만 이용, 착취당하고 짓밟히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그 마을 변두리 공동묘지에서 아주 사납게 귀신들린 사람 둘을 만났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흉악하게 귀신들린 사람들 때문에 아무도 그 길을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게 된 귀신들린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이 말은 사실상 귀신들린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들 속에 들어간 귀신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두려워하는 말입니다. 귀신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귀신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그들을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넣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귀신들인지라 아직 세상 종말이 멀었는데 왜 벌써 오셔서 자기들을 괴롭게 하느냐며 소리를 질러 댄 것입니다. 이 귀신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예수로 인하여 그 마을에 경제적인 큰 타격을 입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보였습니다.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했습니다. "만일 우리를 이 마을, 이 사람들에게서 쫓아내시려거든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예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 더러운 귀신들아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게로 가라" 그러자 귀신들이 그 사람들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귀신들린 온 돼지 떼들이 미친 듯이 비탈길을 내리달아 갈릴리 호수에 빠져 몰사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놀란 것은 돼지 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곧장 마을에 들어가 이 모든 사실들을 알렸을 때 순식간에 경제적 큰 타격을 입은 온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나왔습니다. 공동묘지를 배회하며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귀신들린 사람들이 멀쩡하게 된 것은 당사자나 당사자 가족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이었지만 그 마을이 입게된 경제적 손실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권보다는 경제 논리가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예수 영접하기를 거절하고 자기 마을에서 떠나 줄 것을 간청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이웃들이 귀신들린데서 해방되어 이제 자기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보다는 단지 돼지 떼를 잃었다는 경제적 손실 때문에 예수를 배격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좀더 많은 물질이나 좀더 나은 세상 지위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진리를 유보하거나 거절하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귀신들린 두 사람이 사람 사는 사회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을 함께 기뻐할 줄 모르고 오직 돼지 떼가 죽었다는 것만을 문제삼는 사회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보다는 경제 논리가 앞서는 시대를 말합니다. 예수보다는 경제적 실리가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소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며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것임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섬머셋 모음의 대표작으로 <달과 6펜스>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 고갱을 모델로 한 이야기입니다. 달과 6펜스란 제목은 영국인에게 무엇인가를 얼른 느끼게 하는 대조되는 단어입니다. 6펜스란 영국 은화 중 최저액입니다. 따라서 달은 고상한 것을 대표하고 6펜스는 저속한 것의 대명사로 사용된 것입니다. 달과 6펜스는 둘 다 은색으로 빛나는 둥근 모양이라는 점에서 더 재미있는 대조가 됩니다. 작가는 작품의 주인공이 순수하게 추구하는 예술을 달로 표현했고 명예나 돈을 인생의 최고의 것으로 삼는 세속적 인간상을 6펜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달의 사람이 되느냐 6펜스짜리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선택은 누구든지 직면하는 사항입니다. 달을 택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택한 마을은 예술과 문화가 꽃을 피우는 진정한 사람 사는 마을이 되겠으나, 6펜스 동전 한 닢을 선택하듯, 예수를 거절한 마을은 돼지떼로 가득하여 잠시 경제가 넉넉할지 모르나 돼지에 매여 사는 마을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다라 지방의 비극은 경제적 손실을 이유로 예수를 거절한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마을에서 추방하여 잠시 경제적으로 호전되었을지 몰라도 그들은 결국 <6펜스>짜리 마을, <6펜스>짜리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경제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경제의 바탕에는 예수가 있어야 진정한 경제 발전과 건강한 경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제는 결코 <분홍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유명한 안데르센의 동화에 <분홍신>이 있습니다. 이 신발은 마술사가 만든 분홍신이었습니다. 이 신을 한 번 신으면 춤을 계속 추어야만 합니다. 너무나 예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가 이 신을 신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끌려 한 소녀가 분홍신을 사서 신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부터 소녀는 추기 싫은 춤을 억지로 추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이상의 행복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갈채로 받고 많은 총각들의 동경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피로가 왔습니다. 즐거운 춤은 고통의 춤이 되었습니다. 이제 누구를 위해 춤을 추는지 자기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추어야 하니까 추는 그 춤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었습니다. 번화한 도시를 돌고 한적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한때는 고향 마을을 춤을 추며 지날 때 정든 옛집에서 딸을 부르는 애절한 엄마의 음성을 들었지만 춤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에 소녀는 자기 집 앞을 그냥 지나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묘지에서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죽었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보고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은 모두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경제를 구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이 어찌 귀신들려 공동묘지를 배회하며 소외된 가운데 고통스럽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가족 중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냥 버려두겠습니까? 돼지떼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수 많은 돼지떼보다 귀한 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경제가 하나님께서 입히시는 들에 핀 백합화 하나만 같지 못함을 깨닫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 하나에게도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우선하고 사람을 구하는 이 나라의 경제가 이루어지기 위해 진실로 예수를 영접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열심히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은과 금(경제)을 주는 곳이 아니며, 또한 은과 금이 쌓여 있어서도 안되며, 오직 예수 이름을 주는 곳이며 그래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사람과 경제를 구하는 보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에 중심이 되어 이웃을 구하고 나라 경제를 바로 세워 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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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사랑의 기적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마가복음 2:1-12)

세관에서 유대인이 큰 병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 세관원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묻자 성지에서 나는 물로 영험이 있다고 알려진 성수(聖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세관원이 병을 열어보자, 그 속에서는 고급양주 꼬냑이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야! 기적이 일어났다." 오늘날 기적을 빙자하여 종교를 팔아먹는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기적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중병을 앓다가 회복되었을 때 흔히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축구 골 키퍼가 상대방의 멋진 슛을 보기 드문 솜씨로 선방했을 때, 그것을 기적적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골 키퍼 손을 가리켜 신의 손이라며 극찬하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전화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그것 역시 기적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10년전에 살던 사람이 하늘을 날아 다니는 자동차로 8시간만에 미국에 갈 수 있는 <스카이카>에 대해 들었다면 그 사람 역시 예외없이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기적(miracle)이라는 말은 <놀라다>라는 라틴어 동사 <미라리, mirari>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에 놀랐다 해서 기적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기적이라는 말은 능력을 뜻하는 <두나메이스, dunameis>로 표현되는데 이는 다이나마이트(dynamite,폭발물)에서 나온 말입니다. 기적(두나메이스, dunameis)속에는 인간이 소유하지 못하는 능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기적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서 특별하게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난 사건을 말합니다. 특히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기적을 표적(sign)이라는 말로 자주 표현합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자신의 뜻을 보여주신다(sign)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의 기적의 초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인간의 삶 속에 들어가 인간을 향하신 궁극적인 뜻인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타나는 기적을 볼 때, 항상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만을 보는데 그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서에는 각 장마다 수 많은 병자들, 시각장애인들, 청각장애인들, 신체장애인들, 정신병 및 귀신들린 자들이 치료되었던 기적들, 죽었다가 살아났던 많은 기적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 한 마디로, 또는 단 한 번의 접촉으로 완치되는 기적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그같은 기적들이 여기 저기서 수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 하나 하나에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캘리포니아에서 교통사고로 목 아래로 전신이 마비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돈을 모아 그 소년에게 강아지를 사다 주었습니다. 소년은 본래 개를 좋아하는데다가 꼼짝없이 앉아 있는 답답한 상태였으므로 강아지와 함께 지내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년을 강아지를 만지고 싶었습니다. 그 집념으로 계속 시도했습니다. 놀랍게도 약 1개월 후에 소년은 오른 손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강아지를 손으로 쓰다듬어 줄 수 있게 되었고 온 몸의 신경이 되살아났습니다. 강아지에 대한 사랑이 의욕을 일으키고, 의욕은 집념으로 강화되어, 신체의 기능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강아지에 대한 사랑이 놀라운 기적을 낳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중풍병 치유의 기적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영적 치유의 기적을 말한다고 해서 의학적 치료를 부정하거나 그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치유 역시 의술을 도외시해서 안되며, 의술 역시 영적 치유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영적 치유와 의술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의학의 역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원시 시대에 환자는 으레 제사장(부족 신을 숭배하는 일을 맡은 사람)에게 갔으며, 아직도 문명밖에 사는 부족들 가운데는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병에 걸리면 율법 선생(랍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환자들은 애스쿨라피우스(Aesculapius)신전으로 갔습니다. 신학자 하르낙은 매우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전해 줍니다. 최초의 희랍 의사가 로마에 온 것이 주전 219년의 일이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그에게 시민권을 주고 그의 의술을 활용할 수 있는 건물도 제공해 주면서 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살을 자르고 뜸을 뜨고 하는 치료 과정을 잔인하게 본 그들은 의사라는 이름을 백정으로 생각하였으며, 그 직업과 모든 의사들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취가 알려져 있지 않던 시대였으므로 그런 결과는 당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견해로 인하여 환자는 의사에게 가기보다는 사제에게로 가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점차로 의학이 발전되었고, 의사는 존경받고 널리 사랑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학과 종교간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과학이나 의학의 새로운 발견들이 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완강히 수용을 거부해 왔었습니다. 그러한 영향 때문에 6세기 중엽에 유스티니안(Justinian) 황제는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의 병원을 모두 철폐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안에서는 수도사들이 의학 서적의 사본을 뜨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충돌은 13세기에 터졌습니다. 1215년에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외과 수술과 그것을 집도하는 모든 사제들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1248년에는 인체 해부가 신성 모독죄의 판결을 받았고, 해부학 연구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비극적인 갈등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19세기에 제임스 심프슨(James Simpson) 경은 해산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클로로포름(마취제)을 사용하자고 제안하면서 일부 교회와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클로로포름은 성서에 언급되어 있지 않고, 창세기에 따르면 여인은 고통중에 아이를 낳아야 마땅하므로 심프슨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영적 치유를 일반적인 의학과 경쟁하고자 하거나 그것을 대신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치유 사역이나 의학의 의술 모두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선물(은사)로 각기 나름의 활동 영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학이 한계에 도달하여 치유할 수 없을 때 의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영적 치유 사역이 이루어지기도 하며, 때로는 의술 이전에 영적 치유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의술이나 영적 치유 모두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느 유명한 의학박사가 소생 가능성이 거의 없는 불치병 환자를 수술하게 되었는데 수술하기 전에 평소처럼 기도를 드렸습니다. 환자를 사랑하는 간곡한 기도였습니다. 장시간에 걸친 수술은 대성공을 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수술을 참관한 의학도들은 수술을 성공시킨 것이 기도의 능력인지 의학박사의 기술의 결과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은 환자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또한 환자를 사랑하는 의사의 사랑이 합쳐진 결과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 어느 가난한 집에 가셨을 때, 그의 소문을 듣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용신할 틈 없이 꽉 들어 차 그야말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행한 놀라운 기적들에 대한 소문을 익히 알고 있던 사람들이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당도했을때에는 도저히 예수께 가까이 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재치 있게 움직여 집 밖 지붕에 오르는 계단을 이용해 지붕으로 올라 갔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방의 지붕은 전체가 진흙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흙 지붕으로 뜯고 중풍병 친구를 그곳으로 달아 내려 곧 바로 예수의 발 앞에 내려 놓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네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즉각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로 중풍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 친구들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중풍병에 걸린 친구는 온 몸이 마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절망감에 사로잡혀 삶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께 들려 온 것도 그 자신의 뜻이 아니라 친구들의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는 친구들의 믿음에 의해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좋은 친구들 덕택에 몸과 마음, 영혼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해주는 사람은 우리를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후에 위대한 성자이자 설교가가 되었던 어거스틴(Augustine)도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근심과 눈물로 기도하며 한평생을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녀는 참다못해 자신의 근심과 눈물과 기도에 대해 그 교회 주교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 때 주교는 이렇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눈물과 기도로 기른 자식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을 어거스틴으로 만든 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가 흘린 사랑의 눈물과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를 의의 바른 길로 인도하여 준 것은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의 영향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삶에 기적을 체험하도록 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리 감사를 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본문의 중풍병자는 참으로 좋은 친구들을 두었던 덕택에 사랑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에 하신 말씀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픈 사람이나 재난을 당한 사람은 모두 그들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욥이 병들고 재난을 당하자 그의 친구 엘리바스가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랍비 알렉산드라이(Alexandrai)는, "하나님께서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시지 않는 한 병에서 완치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랍비 키야 벤 압바(Chija ben Abba)도, "모든 죄가 사해질 때까지는 아무도 병에서 회복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병에 걸렸거나 재난을 당했을 때 그 원인을 무조건 죄와 관련시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물론 그 중풍병자도 자신의 병을 죄와 관련지어 생각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예수의 말씀을 미루어 볼 때 그 중풍병자는 실제로 어떤 도덕적 죄를 범했고 그 죄의식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가 중풍에 걸려 온 몸이 마비된 것도 심각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서였습니다. 마음에 병이 온 몸을 마비시킨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질병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투르니에는 <한 의사의 사례서>에서 여러 가지의 감동적인 예화를 보여줍니다. "내 친구들 중의 하나가 여러 달 동안 빈혈증의 소녀를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결국 소녀를 산에 있는 요양원으로 보내도록 허락을 요청하기 요양원 의료 담당관에게 소녀의 피를 채혈하여 보냈습니다. 일 주일 후 답장이 왔습니다. 내용인즉 요양원에 와서 요양하는 것은 수락하겠으나 소녀의 피를 분석해 본 결과 전혀 빈혈 증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소녀의 피를 다시 검사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백혈구의 수가 갑자기 변해 있었고 전혀 빈혈 증세가 없었습니다. 의아스럽게 생각한 의사는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지난번 이 곳에 온 이후에 네게 무슨 이상한 일이 있었느냐?' 소녀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심한 원한을 품어 왔던 사람을 갑자기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 나갈 수 있다는 느낌을 얻었습니다!' 소녀의 마음이 변하자 백혈구의 수가 더불어 변했던 것입니다. 소녀의 마음이 치료되었을 때, 몸과 영혼이 아울러 회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은총은 영혼에서 육신으로 흐르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예수의 말씀 한 마디가 심각한 마음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했고 결과 온 몸이 마비된 중풍에서 치유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 죄는 그를 사로잡았으며, 그 결과 육신의 마비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죄 사함 받았음을 깨달았을 때 이미 병은 나아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마다 안고 있는 질병의 원인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증상에 따라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털 하나까지 헤아려 아시는 예수께서 여러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와 질병의 원인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예수 앞에 나와 사랑의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보고 나타난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며 오히려 시비를 거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문제 삼아 율법을 잘 알고 있다는 서기관들이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게 아닌가?" 그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그가 분명히 죄를 지었다고 믿는 것이 너희들 아닌가?" 그들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중풍병자는 모든 사람 앞에서 곧장 일어나 침상을 들고 똑바로 걸어나갔습니다. 서기관들은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에 의하면 죄가 사해지지 않고는 병이 결코 치유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치유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가 죄 사함을 틀림없이 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께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만이 인류의 죄를 사해 주실 수 있으며, 그 사죄의 은총으로 우리 모든 인류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사죄의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을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너는 오래 전에 죄를 지었구나. 너는 그 죄의 무거운 짐을 견디지 못하여 중풍에 걸렸구나. 그러자 너는 하나님께서 네 죄에 대해 진노하여 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왔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으시다. 그분은 오로지 너를 용서해 주기만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 변함없이 너를 사랑하고 계신다." 그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깨닫자 죄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었고 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죄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이 기적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주홍빛 같을지라도 흰눈같이 희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고 사랑의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이르는 질병에 걸려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치유되는 길은 오직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예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사랑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부딪칠 때 일어나는 아름다운 불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난 기적은 중풍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병든 친구를 사랑하는 네 친구의 사랑이 부딪쳐서 일어난 사랑의 기적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여러분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신 예수를 전하시므로 사랑의 기적을 만들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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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9-13, 참조 : 막 2:13-17, 눅 5:27-32)

예수 당시 세리는 권력에 빌붙어서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강제 부과하거나 부당하게 착취하는 일에 앞장서고, 부자들의 세금에 대해서는 뇌물을 받고 탈세를 조장하거나 감면해주는 등 악행을 서슴지 않음으로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악질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누구에게서나 멸시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마태 역시 세리로서 누구나 꺼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러한 세리 마태를 향해 "나를 좇으라"고 명령하시자 그는 곧 일어나 예수를 좇았습니다. 이는 좀 욕은 먹더라도 돈벌이가 괜찮은 자리인데 그 자리를 박차버리고, 다시 말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악하고 추하고 더러웠던 자신을 불러 그 소문에 듣던 예수의 영광스런 제자로 삼으신 것에 너무 감격스러워 예수를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마침 바리새인들이 이를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어찌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기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의인>은 영적, 윤리적으로 완전무결하다는 의미에서 의인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율법주의자 같은 교만한 자들을 나타냅니다. 한번은 <의인>과 <죄인>이 바다 여행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배는 곧 가라앉을 듯이 보였습니다. 그때 모든 선원과 승객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인>은 "오, 주여! 우리를 구해주십시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의인>은 "쉬, 쉬"라고 경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을 모르시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끝장이다!" 스스로 의인인 체하는 교만한 <의인>을 부르러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 때문에 모두가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옳다 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누가복음 16:15)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사람은 사람 중에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은 율법을 다 지키었다고 하면서, 일주일에 금식을 두 번씩이나 했다고 하면서,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했다고 하면서 스스로 의롭다며 자신을 세리와 비교하여 자신을 높이는 바리새인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의 연약하고 부족하며 허물과 죄 많은 모습을 바로 보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져 가슴을 쳤던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8:9-17)

죄는 한 마디로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며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으로 가장한 사탄이 와서, "선악과를 먹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네가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며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리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에 넘어가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피조물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높아진다는 말에 넘어가 그만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스스로를 높이려는 교만이 바로 죄입니다. 교만이 바로 죄의 뿌리입니다.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은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은 남과의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며 무엇이 죄인가를 바로 깨닫고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바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의 마음을 품어 참된 의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다시 말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죄인의 모습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섬기는 하나님의 겸손이며 예수 십자가는 그 겸손의 완성이요 극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는데 반해 인간은 십자가에 예수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자기를 높이려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섬기는데 반해 인간은 예수를 경쟁 대상으로 삼아 그를 이용하기도 하며 지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고 그 자리에 자신을 세우려 합니다. 이제부터는 세계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합니다.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자기 생각이 옳고, 자기 판단이 옳고, 자기 행동만이 옳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은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과 인간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오직 인간을 섬기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는 오직 한 분 의로우신 분이시지만 이 세상에서 죄인처럼 사셨습니다. 실로 의인이 죄인처럼 사신 것을 보여준 것이 바로 십자가 예수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하는 바리새인은 정작 자신이 죄인이면서 의인인체하며 의인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뿌리 깊고, 얼마나 큰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받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눈을 들어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며 스스로 그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호세아도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주일날 예배드리려 교회에 가는데 길가에 굶주려 허덕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불쌍해서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정성껏 대접하느라 예배시간을 어겼다면 안식일을 규례를 범한 죄입니까? 그래서 그 사람의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그 굶주린 사람을 그냥 모른 채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교회에 와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예배드렸다면 그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겠습니까? 이에 대한 확실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12:1-8)

구약시대 다윗과 그 무리들이 너무 배가 고파 성전 안에 들어가면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들어가 제사떡 진설병을 단숨에 먹어치웠습니다. 이는 분명히 안식일 율법을 범한 것이지만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배가 고파 길가에 밀 이삭 좀 뜯어먹었기로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바로 인애를 원하신다는 확실한 말씀이십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며 "따로 서서" 스스로 깨끗한 체하며 회개할 줄 모르는 바리새인의 예배를 하나님은 원하지 않습니다. "성전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며 회개할 줄 아는 죄인의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리새인과 같이 스스로 의롭다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할 줄 아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두 명의 율법 연구생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율법사에게 와서 울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을 했느냐?" "저희는 여인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율법사는 "주여, 지켜주소서! 너희들은 참으로 끔직한 죄를 저질렀구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회개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너희에게 신발 속에다가 콩을 넣고 일주일 동안 다니도록 명령한다.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율법 연구생은 가서 율법사가 말 한대로 했습니다. 며칠 뒤 그 둘이 길에서 만났습니다. 한 학생은 고통스럽게 절룩거리며 바싹 야윈 모습이었지만, 다른 학생은 태연한 표정으로 얼굴에 미소까지 짓고 있었습니다. 절룩거리는 친구가 그를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너는 이런 식으로 회개해도 되느냐? 나는 네가 율법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너는 신발에 콩을 넣지 않았지?" 다른 학생은 말했습니다. "물론 넣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먼저 삶은 다음에 넣었을 따름이다."

몸과 마음, 영혼이 병들었다고 생각되십니까? 예수 앞에 나와 의롭다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예배를 배우기 전에 먼저 긍휼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도둑질, 강도 짓, 살인한 것 전혀 없고, 뇌물 먹은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주일 날 예배드리는 것 빠진 것 전혀 없고, 십일조, 감사헌금 꼬박꼬박 바쳤고, 적어도 일년에 성경 한 번 정도는 꼭 읽었고, 금식도 며칠씩 했다고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라고 자처하십니까? 여러분 눈에는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갇힌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눈에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깨끗하고 세상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다 더럽게 보이십니까? 의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는데도 스스로 의인인체 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하나님 행세하는 교만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하나님 행세하지 마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죄인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앞에 무릎을 꿇으시는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높이시며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으며 배우시므로 하나님 앞에 의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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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예수를 영접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1-42, 참조 : 막 3:13-19, 눅 6:12-16,51-53,14:26,27)

다가오는 21세기엔 새롭게 정치와 종교분쟁이 심화될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종교전문가 리처드 치미노와 돈 래틴은 최근 펴낸 책 「믿음 끌어모으기(Shopping for faith)-새 천년 미국인의 신앙」에서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교회와 국가가 심각한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습니다. 21세기형 정치와 종교 분쟁의 가장 큰 원인으로 국가의 사회복지정책 후퇴가 꼽히고 있습니다.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복지재정이 줄어들면서 교회는 소외계층을 끌어들여 사회복지의 주체로 나서려 할 것이고 국가는 교세가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 하게 돼 마찰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미국 교계는 교회가 사회봉사에 효과적인 만큼 국가를 대신해 사회복지의 주체가 되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정부나 비종교 사회단체들은 신앙과 무관해야 할 사회복지를 종교단체가 맡는 것은 정·교(政敎) 분리원칙에 어긋난다고 맞섭니다. 지방정부는 세수(稅收)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교회의 신설에 거부감을 숨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세확장을 위해 방언이나 기적 등 비정통적인 방식이 늘어나면서 교회 규제론 마저 고개 들고 있다고 이 책은 지적합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소외계층이 더 두꺼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교분쟁에 대해 염려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목적은 사회복지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영접하게 하여 금세와 내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죄악된 사회를 변화시켜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받을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는 세상에 오셨고, 세상에 오신 예수는 인류구원을 위해 비상하거나 출중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그들이 과거 경력이 얼마나 뛰어나고 화려한가, 지금 얼마나 귀중한 일을 하고 있는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장차 무엇을 해나갈 수 있는가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선택된 제자들을 당대 유명인사들과 비교해보면 극히 보잘것없는 겨자씨 같은 하찮은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그 제자들 가운데 흔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학자 하나 없었고, 재벌은커녕 중소기업체 사장 하나 없었고, 정치가는 물론 종교지도자이었던 제사장 하나 없었습니다. 혈통으로보나 가문으로 보나 학벌로 보나 지연으로 보나 모두가 형편없는 출신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주목할 제자는 세리 마태입니다. 세리는 당시 백성들을 등쳐먹고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열심당원 시몬도 있었습니다. 당시 열심당은 나라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폭력도 서슴지 않는 가장 극단적 국수주의자들로 오직 하나님만을 자신들의 왕으로 섬기며 세상의 어떤 왕도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국의 자유와 해방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누구라도 살해하는 극히 위험한 애국자(?)들이었습니다. 만약 바로 이러한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이 마태를 예수를 중심으로 모인 제자공동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열심당원 시몬은 세리 마태를 전혀 죄책감 없이 단숨에 살해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매국노와 애국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용해시켜 하나되게 하여 변화와 개혁의 주체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참된 종교란 사람을 구분하여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해시켜 하나되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극히 보잘것없는 하찮은 존재들이었지만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하나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참된 개혁과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매국노 세리 마태나 삭개오는 그들이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고 자신의 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놓음으로 과거 수치스럽고 어두웠던 과거를 만인 앞에서 깨끗이 청산하고 변화와 개혁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 바로 구원공동체인 교회입니다.

역사학자 신용하 교수는 우리 나라 부정부패의 가장 큰 원인이 매국노 친일파들에 대한 응당한 처벌이 없었다는 데 있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컨대 친일 매국노의 원흉 이완용이 매국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받은 소위 은사금으로 조성한 토지재산을 그 증손이 찾겠다고 소송을 제기하여 대한민국 법정이 여러 건 승소판결을 내렸습니다.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 후에 실행할 요강으로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에는 "친일파 부일파 민족반역자의 재산은 국가에서 몰수한다."고 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면 당연히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매국의 장물인 이완용 명의 토지를 국가가 환수해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바로 잡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까지도 나라의 주요 직위를 친일파들과 그 일당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주석은 백범 김구선생입니다. 일제가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놓고 수많은 군대와 첩보대를 동원해서 백범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했습니다. 해방 후 조국 땅에서 백주에 백범선생을 암살해놓고 암살범 안두희를 특진시키고 백주에 활보하게 특혜를 베풀고서 오히려 백범 암살 진상을 밝히는 것조차 박해했습니다. 백범을 암살한 음모의 책임자 김지웅은 일본 관동군 정보장교였고, 안두희는 그의 일본군 정보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임시정부 주석을 시해당하고도 처벌은커녕 그 진상조차 밝히지 못했던 것이 과거 초대정부였으며, 지금까지의 정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건국 직후 제헌의회는 48년 9월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여 나라의 기강을 반듯하게 세우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친일파들이 이승만 정권의 일부세력과 결탁하여 반민특위를 해체시킴으로써 민족 반역자를 단 한 사람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부정부패와 부조리의 근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독립지사와 그 가족들은 박해와 가난에 시달리고 친일파와 그 일당 자손들은 일제하에서 일제의 관리, 군수, 서장, 면서기 한 것까지 자랑하면서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국민의 정부가 부정부패를 망국병(亡國病)으로 보고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사정(査正)의 칼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먼저 친일잔재와 민족반역의 잔재에 사정의 칼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토색하거나 수탈한 재산의 4배를 갚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간 권력과 결탁하여 국민을 우롱하며 국가와 국민의 재산을 수탈한 이 나라의 권력층과 재벌들로 하여금 4배나 갚도록 한다면 단숨에 경제가 회복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늘 본문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멸망케 하는 죄악에 대해 사정의 칼을 던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중병에 걸린 환자가 있는데 그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진수성찬에 금은보화, 아니면 권세있는 자리나 지식의 최고봉인 박사학위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환부를 정확히 진단하여 바른 시술로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가 필요하겠습니까? 환자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사람을 죽게 하는 환부를 치료하던가 아니면 절단해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검을 던지러 왔노라>도 마찬가지로 세상을 죽이기 위한 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죄로 병든 세상을 수술하여 살리기 위해 <검을 던지러 왔노라>는 것입니다. <검을 던져야> 할 곳이 어디 이 사회뿐이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검을 던져야>할 것입니다. 어미가 모르는 아비의 죄, 아비가 모르는 어미의 죄, 어미가 모르는 딸의 죄, 딸이 모르는 어미의 죄, 며느리가 모르는 시어미의 죄, 시어미가 모르는 며느리의 죄, 이 죄악들이 예수께서 던지시는 검으로 수술되지 않으면 몽땅 다 죽습니다. 서로 원수가 되기 전에 예수의 검으로 수술되지 않으면 피차에 멸망당합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우리네 가정이 검을 던지지 아니하면 안될 만큼 심각하게 죄로 병들어 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들 가정은 대부분 온갖 방탕과 음란, 사치와 허영, 탐욕과 정욕, 그리고 각종 우상숭배로 심각하게 병들어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말씀에 십자가는 사형방법을 말합니다. 죄로 병든 자신을 예수의 검으로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죄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 것입니다. 목숨을 건지시기 원하십니까? 예수께서 던지시는 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던지시는 검은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여 우리들 죄로 병든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히4:12-13) 경제 범죄의 전과자들인 재벌들과 권력층들에게 사정의 칼을 들이대면 나라 경제가 위태해지고, 그들 하수인들에 불과한 문어발 사장이나 회장 몇몇 잡아들이면 나라 경제가 안정됩니까? 남편은 돈 벌어오니까 무슨 죄를 지어도 덮어두고 그냥 지내는 것이 낫다고 한다면 그 가정은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아내가 과연 행복합니까? 그 가정의 자녀들이 과연 무엇을 보고 배우겠습니까? 그런 가정의 미래가 밝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나라 경제가 바로 살리기 위해서는 죄악을 과감히 근절하는 예수의 검을 받아야 합니다.

<눈 달린 수술칼>이 개발되어 수술해야 하는 병환자들에게 희소식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 위스콘신대 아밋 랄 박사가 최근 실리콘 수술칼을 개발해서 기존의 금속 메스(mes)를 대체해 외과 수술에 혁신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반도체 회로판에 쓰이는 실리콘 웨이퍼로 만들어진 실리콘 메스는 놀라운 정밀도로 수술 성공률을 높여준다는 것입니다. 실리콘 메스는 붙어 있는 조직을 절단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과 조직 사이를 벌리는 것입니다. 기존의 초음파 티타늄 수술칼에 비해 실리콘 메스는 값도 싸고 과열되지도 않으며 8배 이상의 진동을 얻을 수 있어 훨씬 정밀한 수술이 보장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실리콘 메스 끝에 정밀한 센서(감지기)가 달려 있어 눈의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개발된 모래알 크기만한 컴퓨터가 부착되어 건강한 조직과 손상된 부분을 구분해 의사에게 도려내야 할 환부를 정확하게 알려준다는 얘기입니다. 21세기엔 사람의 어떠한 환부일지라도 이 <눈 달린 똑똑한 칼>로 수술하여 고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눈 달린 똑똑한 칼>이라도 사람의 마음과 혼과 정신의 병든 것까지는 수술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의 병든 것을 수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께서 던져주시는 검밖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던져주시는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브리서 4:12-13)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여러분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이 병든 국가 사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예수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병든 채 그대로 사는 것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물론 우리 가정, 우리 사회, 우리네 정치와 경제, 모든 분야에 걸쳐 변혁의 수술칼을 가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심각할 정도로 병들어 있습니다. 가정에는 진실과 사랑의 칼이 필요합니다. 직장에는 정직과 성실의 칼이 필요합니다. 사회에는 정의와 공평의 칼이 필요합니다. 경제에는 평등과 공평한 분배의 칼이 필요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는 겸손과 섬김의 칼이 필요합니다. 기독교는 이론이 아니라 죄악을 도려내어 생명을 구하는 종교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스탠퍼드 호텔은 방마다 성경을 놓아두었는데 15년간 한 권도 분실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어 사전을 놓아두었더니 한달 사이에 14권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호텔 사장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의 언어에는 훔쳐갈 정도로 관심이 많다."라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요시야 왕은 먼지 속에 잃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찾아 나라를 새롭게 개혁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혀 듣게 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의 중함을 깨닫고 마음을 찢어 회개하는 뜻으로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통회했습니다. 멸망을 재촉하던 나라 백성이 소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진실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선과 악이 분별되며 진실과 거짓이 분별될 것입니다. 예수를 진실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감취었던 죄가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악이 용서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진실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에 어둠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태양보다 밝은 빛이 들어올 것입니다. 예수를 진실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거짓과 부정, 부패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검찰, 아니 특별검사라도 수술하지 못하는 그것들이 예리한 검으로 수술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검, 성령의 검은 죄로 곪은 인간의 마음에 예리하게 파고들어 그 곪아 부패된 곳을 깨닫게 할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치료합니다. 이 나라의 정부는 지금까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정부패, 부조리가 여전히 판을 치고 있으며 이를 알면서도 자기 살을 칼로 도려내야 하기 때문에 감히 나서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진실로 예수를 영접하게 하면, 예수께서 던지시는 예리한 검이 그들의 환부를 깨끗이 도려내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병든 사람, 병든 가정, 병든 사회 수술하지 않으면 살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던져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검, 성령의 검만이 죄로 병든 곳을 깨끗이 치료하여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진실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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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너희가 무엇을 보느냐?

(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 선지자냐 ?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다(눅 7:24-30, 참조 : 마 11:2-19)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써 화제가 되고 있는 김경일교수(상명대학교)는 그 책을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썼다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이미 100년 전부터 유교가 나라를 패망치는 것, 유교는 사람을 잡아먹는 것으로 단정하고 수많은 사람을 희생해가며 유교를 버렸습니다. 일본 역시 1868년 출범한 메이지 정부에서 새로운 일본 건설을 위한 연구를 착수했습니다. 그 연구 결과 유교는 국가와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적으로 간주하고 유교에 대해 대단한 증오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메이지 정부는 근대 국가 건설의 성공을 위해 중국 문화의 잔재를 최대한 깨끗이 씻어버리고 철저히 서구화(기독교 문명과 문화)를 이루는 것이고, 시민의식을 불러일으키자는 것이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은 철저한 신분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쇼군을 정점으로 270명의 번주인 다이묘, 그 아래의 사무라이, 그리고 평민과 천민으로 구성되어있던 신분사회가 천황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일한 신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모두 평등해진 것입니다. 이제 신분과 지위의 고하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의 자유스러운 자기 개발 분위기가 조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일본을 세계 열강에 올려놓게 된 메이지유신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이 한 일은 유교 사상을 붙들고 끊임없는 당파싸움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습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딛고 선 유교 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적 우월'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방인의 문화(유교)는 조선 왕실의 통치 이념이 되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신분사회, 토론 부재를 낳은 가부장 의식, 위선을 부추기는 군자의 논리, 끼리끼리의 협잡을 부르는 혈연적 폐쇄성과 그로 인한 분열 본질, 여성 차별을 부른 남성 우월 의식, 스승의 권위 강조로 인한 창의성 말살 교육 따위의 문제점들을 오늘날까지 지속시키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들 삶의 공간에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번득이는 창의력, 맑은 생명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들입니다. 유교의 유효 기간은 이제 끝난 것입니다....공자의 도덕은 '힘있는 자'와 '돈 가진 자'를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유교의 폐단성과 그 실패는 이미 조선 왕조의 긴 역사와 중국 왕조들의 반복된 실패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여러 가지 우스꽝스런 공자의 유교 문화 속에 우리 사회에는 세 가지 세대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유교 문화의 마지막 진수를 맛본 사람들입니다. 이제 천수를 다해가고 있는 그들이지만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유교의 마지막 그림자를 붙들고 놓지 않고 있습니다. 권위와 복종을 인간 사회의 마지막 이데올로기로 착각하고 있는 유교 근본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명령에 익숙하며 토론에 약합니다. 입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고, 눈꼬리는 여간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심각합니다. 이들에겐 공자가 절대 수호신입니다. 이들은 붓으로 글씨를 배웠습니다. 다른 하나는 유교 사회의 폐해를 심각하게 입은 세대들입니다. 6.25를 전후해서 태어난 이들 세대들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유교 교육만이 교육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세대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6.25 이후, 태평양을 건너온 초꼴릿, 옥수수 빵, 우유 가루 등의 구호품을 먹으며 자라야 했다 해서 이들 세대의 옆구리에는 언제나 두 권의 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한문책과 영어 책이었습니다. 이들은 영어 책을 한문책처럼 읽었고,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에만 몰두했습니다. 영어가 '말' 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단어들의 깊은(?) 뜻은 알지만 말은 못하는 쪼다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글에는 강하지만 기계에는 젬병입니다. 그 결과 컴퓨터와 영어가 인간 가치의 척도가 된 오늘날 길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말았습니다. 이젠 재교육의 기회도 시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인생은 많습니다. 이들은 공자와 유교가 자신을 얼마나 망쳐놓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연필을 깎아 글씨를 썼습니다. 마지막은 잘 나가는 요즘 세대들입니다. 이들에게는 한문책도 영어 책도 없습니다. 그들의 옆구리에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그들은 강의 시간에도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책가방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핸드폰이 울려댑니다. 그들은 칠판 글씨를 싫어하며 설명을 싫어합니다. 15초 꼴로 한 번씩 웃겨주지 않으면 다음 학기에는 폐강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성별이 없습니다. 이놈 저년 끌어안고 밀치며 장난에 빠져듭니다. 이들은 컴퓨터에 익숙합니다. 그들은 빠른 컴퓨터 커서에 익숙합니다. 책을 읽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컴퓨터로 쳐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글씨를 거의 쓰지 않습니다. 때로 샤프로 글씨를 쓰긴 하지만 주로 핸드폰에 메시지를 남깁니다. 이 세대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생각과 삶의 형태로 포맷된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세대들입니다. 이들은 어느 항구에도 정박하지 않으며 어떤 폭풍우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사소한 자유의 한 조각일지라도 그것을 위해 목숨을 버릴 만큼 자유론자들입니다. 이들은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습니다. 남녀 교제에 있어서도 기존의 굴레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대학 간판에도 크게 마음 두지 않습니다. 두세 개의 외국어에 능통하며 장롱 대신 멋진 배낭을 사놓을 세대들입니다. 개인적 삶의 자유를 만끽하겠다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바로 네오리버럴리즘의 시대로 돌진해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공자를 모릅니다. 그들에겐 이미 공자는 죽었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에는 낯설기 그지없습니다. 이것은 큰일입니다.》

저는 "유교의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하고 있는 세대"로서 김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오늘 주어진 성경 말씀을 통해 교회가 지녀야 할 참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 요한은 예수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인가 아니면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제자들을 예수께 보냈습니다. 마침 그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악귀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는 기적을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누가복음7:21-23) 그리고 요한에게 가서 본 그대로 전하라고 했습니다. 즉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한이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지금 당장 군사들을 동원하거나 의병을 일으켜 감옥에 갇혀있는 자신을 먼저 풀어주고 중앙청과 신문사 방송국 등을 점령하고 있다는 소식을 기대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지금 로마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시작되고 있다."고 하는 말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 대해 들려오는 소식의 내용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사랑이 이 땅에 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전하라는 내용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에 대한 그의 신앙이 흔들리거나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에 대한 예수의 증언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이는 세례 요한이 결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 말씀으로 바람결에 흔들리는 파도와 같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아무런 줏대 없이 까마귀떼처럼 몰려다니는 충동적인 무리들을 향해서 일격을 가하셨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요한의 주변에 구름떼 처럼 몰려왔으나 그가 헤롯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다 감옥에 수감되자 모두 철새(?)같이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무리들이 예수에게 몰려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다 떠나갔듯이 지금 자신에게 모여든 그들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장차 떠나갈 것이며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고함을 질러댈 것이라는 것을 훤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웃 사랑의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가 사는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예수 십자가는 그 사랑에 대한 확증입니다. 예수가 증거되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으로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17-19)

이 시대에 교회가 아무리 물량적으로 비대해지고 있다해도 그것이 세력화되어서는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세확장을 이루어 세력화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는 권익을 수호하기 위한 노동조합이나 이익단체가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는 '힘 있는 자', '가진 자'를 위한 도덕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지녀야 할 모습은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 시대의 한국교회는 십자가 사랑을 배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전쟁에 쓰는 무기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위한 삶의 방법이요 그 내용입니다. 여기 저기 기적과 능력이 나타난다해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같은 무리들이 종교판(?)이나 정치판에 날뛰고 있습니다. 십자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깊이 뿌리박고 터가 굳어져서 그 사랑을 넓고 길게, 그리고 높고 깊게 펴나가시는 여러분과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께서 또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예수를 믿고 따르고자 한다면 크게 실망하실 것입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일찌감치 세상 권력에 야합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 화려한 백화점의 진열장, 거리마다 빛나는 쇼 윈도우, 실로 오늘의 세대는 화려함과 안락함으로 인해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풍요로운 삶을 누리면 누릴수록 그 속에 거하는 사람들도 더욱 멋있게 더욱 아름답게 나타내기 위하여 자신을 꾸미고 삽니다. 이런 류의 소위 상류층 사람들을 보려면 서울 압구정에 가면 됩니다. '너희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러 나왔느냐? 그런 자는 재벌 2세들이 판치고 있는 압구정에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고 있는 무리를 향하여 세상의 화려함과 사치함을 구하는 자는 자신에게 나올 것이 아니라 왕궁에나 가면 적합하다고 경고하는 의미에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세상 권력과 세상 영화를 구하기 위해 모이는 세계가 아니요 화려한 장미 빛 꿈을 꾸는 세계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야성(野性)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외쳤습니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를 찾아 광야를 나섰던 유대인들에게 세례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나타났습니다. 오늘의 성도와 교회도 그처럼 세상의 허영된 꿈을 안고 모여드는 군중들 앞에 그와 같은 순수한 세례 요한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교회는 왕궁이 아니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한 처소이기 때문입니다.(요4:23) 세례 요한의 모습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세례 요한처럼 때묻지 않은 '광야의 소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권력과 부귀 영화를 누리기 위해 탐욕을 일삼아 힘없는 자와 못 가진 자를 짓밟는 이 시대의 독사같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7-12) 사랑과 정의를 볼 수 있는 이 시대의 참된 교회 모습이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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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참조 : 눅 10:21,22)

일본 도요(東洋)대학 철학과에 다니던 방정환은 동료 유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자네 출세하면 뭘하나. 우리 세대는 말과 노래를 잃고 이렇게 울며 지내더라도 다음 세대에게는 우리나라, 우리 문화, 우리 역사를 다시 찾아주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던 그는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어린이들을 잘 가르치고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이렇게 공언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의 어린이들을 일본인으로 교육하겠다. 일본 천황의 은혜에 감읍하도록 조선인을 세뇌시켜야 한다." 그러자 1923년 3월 16일 방정환, 윤극영, 조재호, 손진태, 정순철 등은 소년운동을 위한 단체를 만들기로 합의했습니다. 단체 이름은 색동회였습니다. 이 색동회 회원들은 어린이들에게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가르쳐주는 운동의 일환으로 어린이날을 정해 기념행사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에서 색동회 창립식이 열리는 5월 1일 제1회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날은 본래 5월 5일이 아니라 5월 1일이었습니다. 이날이 5월 5일로 바뀌게 된 것은 5월 1일이 노동자들의 기념일인 메이 데이와 겹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이 집회 허가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방정환은 색동회를 창립하며 "젊은이나 늙은이는 일의 희망이 없다. 우리는 오직 나머지 힘을 다하여 가련한 우리 후생 되는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의 길을 열어주자."며 그 취지를 밝혔습니다. 그가 밝힌 <소년운동의 기초조건>을 보면, 첫째,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둘째,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셋째,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어린이날 제정 75주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동들에 대해 인격적 예우를 다 하고 있습니까? 아동들을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있습니까? 아동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습니까? 전혀 거리가 먼 이야기들입니다. 어머니는 가출하고 병든 아버지를 리어카에 싣고 어린 동생들과 함께 움막집으로 이사가는 이윤복군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30여 년이 지난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아 새삼 마음에 떠오릅니다. 술주정하는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발가벗긴 채 골목길로 도망하기도 숱하게 하며, 어린 동생들과 함께 깡통을 들고 밥을 얻으러 다니던 윤복군의 무거운 발걸음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부모가 저버린 가족 부양의 무거운 짐과 병든 아버지의 행패라는 멍에를 견디지 못하고 요절해버린 윤복군을 지금 이 시대에도 수 없이 보는 듯합니다. IMF시대를 맞아 "여보, 어디계세요?" "아빠, 어디계세요? 빨리 집으로 돌아오세요. 사랑해요."라면서 가출한 부모들을 애타게 부르며 멍든 가슴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나이 어린 새싹들, 이들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리지는 않을까 안타깝습니다. 실직해서 집에만 계시는 아버지의 눈치가 보여 그냥 학교만 다닐 수가 없어 유흥가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14세 소녀는 지금도 술집에서 영계만을 찾는 어른들의 타락을 어떻게 볼까? 그 소녀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날의 어른들에게서 우리 나라, 우리 문화, 우리 역사를 어떻게 바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피곤한 곳입니다. 애나 어른이나 모두가 다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삶에 주는 것은 피곤함밖에 없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참된 안식과 기쁨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사는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경제 사회의 구조 개혁에 따라 억지로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있는 사람, 죄와 염려 걱정으로 심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 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다가 자포자기한 사람, 선해지려는 노력을 하다가 좌절한 사람, 자기 사명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사람, 기타 삶에 지치고 절망가운데 빠진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특히 전통적으로 부과되고 있는 율법과 유전(遺傳)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의 어깨에 율법과 유전의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다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그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1-4)

정통 유대인에게 있어서 종교란 일종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계명까지도 다 지키며 믿음이 좋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 이제 갓 예수를 믿거나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짐, 율법적인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문턱을 높여 아무라도 쉽게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을 가로막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다음은 우리 교회가 만약 이렇게 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염려되어 가상(假想)해서 만든 이야기입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울산에 이사와서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어느 교인 집에 저녁 식사 초청을 받았습니다. 여러 권사님들, 집사님들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심방예배를 마치고 곧 이어 정성을 다해 준비한 식사가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차려져 나왔습니다. 식탁 중앙에는 불고기판이 올려져 있고 이어서 양념된 돼지갈비가 푸짐하게 올려졌습니다. 그 외 식탁에 차려진 음식 종류는 대략 이렇습니다. 장어 구이, 오징어회 무침, 낙지 볶음, 갈치구이, 삶은 문어, 시금치 무침, 고사리 무침, 김치, 콩나물 무침, 돼지머리 누른 것, 국으로는 추어탕 등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식사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몇몇 사람의 눈이 뚱그래졌습니다. 정성을 다한 음식을 대접하는 믿음의 봉사를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막상 식사를 하려고 하니 한 두 가지 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결한 식생활 법에 대한 레위기의 계명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레11:3-10)

돼지갈비를 뜯어보려고 하니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지만 새김질을 못하므로 부정한 짐승인지라 먹을 수가 없고, 장어 구이나 오징어 회 무침, 낙지볶음, 추어탕을 먹어보자니 이들은 지느러미는 있어도 비늘이 없어 가증한 것이라 먹을 수가 없고, 고사리 무침은 정력에 안 좋다고 하니 먹을 수 없고, 그래 할 수없이 서로들 시금치 무침과 콩나물 무침, 그리고 김치에다 그 여러 사람이 집중 공격을 가하다 보니 순식간에 채소밭이 밭떼기 채로 팔려버리고 흰 접시만 뎅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저녁식사에 정성을 다해 우리들을 초청한 그 교인은 자신이 무슨 잘못한 것이 있나 의심하면서 얼굴이 붉어져 편치 못한 표정이었습니다. 우상의 제물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 그리고 음행 등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 짐도 지우지 아니하기로 예루살렘 공회에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가결하였습니다. 이것들을 삼가시므로 여러분의 하시는 일이 잘 되고 평안해지시기를 기원합니다. 교회는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짐을 지워주는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그 무거운 짐과 멍에를 쉽고 가볍게 덜어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 문턱을 높이는 사람들은 대개가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입니다.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분은 교회 문턱을 높이자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의 그 무거운 짐과 멍에를 쉽고 가볍게 나눠지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주어진 교회 직분으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15:19-29)

예수께로 와서 율법의 멍에를 던져버리고 예수의 가볍고 쉬운 은혜의 멍에를 지라는 것입니다. 여기 쉽고 가볍다는 말은 부드러운 새의 깃털만큼 가볍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멍에는 새의 깃털과 같아서 창공을 가벼웁고 자유롭게 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메라고 하신 멍에는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깃털처럼 부드럽고 가벼워서 하늘을 나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계명은 사랑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도덕이나 율법보다 무가치하거나 경박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보다 더 준엄하고 숭고하며 엄정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소년 하나를 만났는데 그 소년은 절름발이인 더 작은 소년 하나를 등에 업고 가는 것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업고 가기에 퍽 무겁겠군"하고 그 사람이 말하자 "무겁지 않아요. 얘는 내 꼬마 동생인 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랑으로 지고 사랑으로 운반하는 짐이란 언제나 가벼운 것입니다. 사랑은 가장 무거운 짐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의 짐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 때 그 짐은 짐이 아니라 "노래"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울산복음화, 세계복음화를 위해 벌이는 2+1000복음화 운동은 여러분에게 무거운 짐을 져주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운동은 위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아래로는 우리의 이웃을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랑의 운동, 사랑의 노래입니다. 2+1000복음화운동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의 무거운 짐과 멍에를 십자가의 은혜로 덜어주자는 이웃 사랑의 운동입니다. 피곤한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여러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참된 안식, 마음의 쉼을 얻고자 하면 예수 앞으로 나와야만 합니다. 양은 털을 제 때에 깎아주지 않으면 무척 길어집니다. 털이 너무 길어지면 먼지도 묻고 진흙도 묻게 되어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됩니다. 그런 상태로 진흙을 밝게 되면 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중심을 잃어 넘어지기 쉽습니다. 양이 무거운 털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게 되면 제 힘으로 일어서지 못합니다. 이 때 목동이 넘어진 양을 도와 일으켜 세워주는 것을 시편 23편에서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야같은 세상에 살다가 먼지도 묻고 진흙도 묻어 무거워진 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잘 달리지도 못하며 쉽게 쓰러지는 양들을 위해 우리의 목자가 되신 예수님께서 그 길어진 털을 깎아주십니다. 흙먼지 등으로 치렁치렁해진 털 때문에 둔해진 양을 잡아 그 털을 깎아주면 당장 보기는 민망스러울 정도로 흉하지만 금새 날아갈 듯이 초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시원해 보입니다. 온갖 죄악과 질병, 고통이 만연한 거친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순간적인 도피나 쾌락이 아닌 영원한 참 마음의 기쁨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있는 그대로 예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그 세상의 찌든 먼지와 진튊으로 더러워지고 무거워진 털을 깎이시고 영혼이 소생되시며 세상을 하나님의 은혜로 쉽고 가볍게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찬송가 205장 <예수 앞에 나오면>을 다같이 불러 봅시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예수 앞에 나와서 은총을 받으며

맘에 기쁨 넘치어 감사하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죄의 무거운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무거운 짐과 멍에를 쉽고 가볍게 덜어주는 것입니다.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크고 작은 짐과 멍에가 있습니다. 남이 져주지 못하고 자신만이 져야할 병고나 고독, 또는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무거운 짐, 사회적 책임이나 주님을 위하여 교회에서 섬기는 멍에들이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져야 할 가장 크고 최종적인 멍에일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여러 가지 무거운 짐과 멍에들을 젊었을 때 짐이나 멍에로 생각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것을 나에게 지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애3:27,28)

그러므로 할 수 없이 진다거나 누가 억지로 지워준 짐이라면 몹시 고통스러운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짐이라고 믿을 때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는 목적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므로 그것은 이미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보람있고 뜻깊은 가벼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30) 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내리막길이 있고 오르막길이 있는데 예수의 짐이 무겁게 느껴질 때는 내리막길이요 예수의 멍에가 가볍게 느껴질 때는 오르막길입니다. 피곤한 일요일을 교회당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그것이 오히려 안식과 기쁨을 주는 예수님의 멍에로 느껴진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는 약속을 지니고 약속 장소에 나가는 사람은 소망과 기쁨이 충만하고 채권자를 만나야 할 채무자의 발걸음은 무겁기가 그지없을 것입니다. 매주 마다 전도하는 것이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전도하는 기쁨이 충만할 것이고 채권자를 만나러 가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되어진다면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에게 베풀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남으로부터 받는 것 보다 얼마나 마음이 가벼운 것인가는 남에게 주어 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훨씬 마음이 가볍다는 것은 정말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준 예수님의 멍에는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무겁고 힘든 멍에를 주님께 맡겨버리시고 주님이 주시는 쉽고 가벼운 십자가 사랑의 멍에를 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짐이라면, 주님께서 주신 멍에라면 사랑의 짐이요 사랑의 멍에입니다. 겸손함으로 그 멍에를 메시기 바랍니다. 실로 우리 인간은 율법과 세상의 멍에가 아니면 예수님의 사랑의 멍에를 메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괴로움과 사망을 안겨다 주는 세상과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방법, 곧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새롭고도 가벼운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 인생들이 질고(疾苦)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내게 배우라"는 말씀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께 와서 배우라는 것으로 하나님 말씀을 배워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쉼, 참된 안식은 노력해서 누리는 것이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함과 사랑으로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참된 안식과 기쁨을 얻으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그 분의 겸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실로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분이십니다(빌 2:6-8).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의 겸손을 배울 때 사람이나 환경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참 평안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사에 널리 알려진 고전적인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한국의 간디'라고 불리우는 조만식 선생과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인연이 깊은 관계였습니다. 조 선생이 오산학교의 교장직을 맡고 있을 무렵에 주 목사는 그 학교의 학생이었고, 또 주 목사가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을 때 조 선생은 그 교회의 장로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조만식 장로가 교회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급한 손님이 찾아와 한 10여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대화를 마치고서 조 장로는 황급히 교회로 왔습니다. 헐레벌떡 도착한 조 장로가 뒷문을 살짝 열고 보니 벌써 설교 시간이었습니다. 이크, 설교가 시작되었구나. 그렇다고 안 들어갈 수도 없지‥‥‥ 이렇게 생각한 조 장로는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주기철 목사가 설교를 하다말고 갑자기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조 장로님 ! 오늘은 서서 예배를 드리세요! "조 장로는 깜짝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에 보통 사람 같으면 아무리 예배시간이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나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 장로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자가 호통을 치는 대로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꼬박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 시간의 예배 시간이 조 장로에게는 끔찍이도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제 예배를 다 마치자, 주 목사가 조 장로에게 대표 기도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조 장로님, 예배 마치기 전에 기도를 해주십시오."그러자 조 장로는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히 여긴 이 못난 죄인을 용서하옵소서‥‥또한 이 일로 주의 종을 마음 아프게 하였사오니 이 어찌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흐흐흑‥‥" 조 장로는 더 이상 말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교인들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마음이‥‥겸손하니‥‥내게 배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겸손의 본을 보인 조만식 선생은 이로 인하여 더욱 존경받는 스승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겸손함으로 예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야만 주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멍에를 멘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 우리는 당시 근동 지역의 농경 풍습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흔히 두 마리 소에 같은 멍에를 메우고 쟁기를 끌게 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그 소들에게 멍에를 메우기 전에 먼저 두 소를 싸움 붙였습니다. 그래서 싸움에서 이긴 소를 인도자로 두고 진 소가 함께 보조를 맞추도록 했던 것입니다. 실로 이것은 우리에게 큰 영적 교훈을 줍니다. 진정 우리가 참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전적으로 굴복할 때만 비로소 그분의 멍에를 멜 수가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인도에 함께 보조를 맞추어 순복할 때만 우리가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의 멍에를 메고 계십니까? 성도 여러분! 이 환난 많은 세상에서 자기 마음에 평안을 얻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특히 현대는 어떤 이의 말대로 불확실성의 시대여서 잠시도 불안과 긴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화가 늘 갈망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견디기 어려운 짐을 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즉,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예수께 나아가지 못하고, 그분의 겸손을 배우지 못하며, 그분의 멍에를 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은 평안을 얻는 참 비결을 실천함으로 삶의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얻으시는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삶에 피곤하고 지치신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시는 여러분, 겸손히 예수 앞에 나오셔서 참된 마음의 쉼과 기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겸손히 예수 앞에 나와 자신의 무거운 짐과 멍에를 벗어버리고 십자가 사랑의 멍에를 메심으로 자녀들의 무거운 짐과 멍에도 벗겨주시고 마음에 쉼과 기쁨을 누리시는 여러분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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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어느 것이 옳으냐?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막 3:1-6, 참조 : 마 12:9-14, 눅 6:6-11)

1.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호랑이 죽이기"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한말(韓末)에만 해도 호랑이가 북악산 타고 경복궁까지 곧잘 침범했었다. 태종 때 일이다. 김덕생이라는 공신이요 명사수가 임금의 경호를 맡고 있었다. 어느 날 태종이 후원을 거니는데 맹호가 발소리를 죽이며 접근해 가는 것을 김덕생이 보게 되었다. 김덕생이 단 한발로 적중시켜 위기일발에서 임금을 구하였다. 두 번 공신이 될 뻔한 김덕생은 오히려 이 호랑이 사살로 대역죄에 몰렸다. 아무리 임금이 위기에 처했더라도 임금을 향해 활을 쏜다는 것은 시해 행위에 해당된다는 조정의 법리론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그는 호랑이 그림을 도처에 놓게 하여 백발백중 일실도 없음을 입증하였으나 끝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실리보다 도리에 더 비중을 두었던 시대의 '호랑이 사살사건'이다. 엊그제 진주 동물원 우리를 뛰어넘어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벵골산 암호랑이를 긴급 출동한 20명의 무장경찰이 실탄을 여섯 발이나 쏘아 사살했다는데 이것은 실리도 못 구하고 도리도 못 구한 처사가 되고 말았다. 인도 벵골지방의 밀림에서 두 아기가 놀고 있는 곳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을 앨런이라는 동물학자가 목격하게 되었다. 무서운 맹수인줄 모르고 놀고있는 이 두 아기와 어울려 엎치락뒤치락 놀던 호랑이의 앞발에 밀려 한 아기가 울자 다른 아기가 작은 막대기 하나를 주워 호랑이 머리를 탁 치자 호랑이는 힐끔힐끔 돌아보며 밀림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이 사례를 들면서 1천 마리 호랑이 가운데 사람을 해치는 식인호랑이는 3마리 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를 뛰어넘은 진주의 벵골 호랑이가 1천 마리 중의 3마리에 속한다 하더라도 사살 아닌 마취나 망을 쳐서 생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노력도 없이 날뛰거나 질주하는 것도 아닌 놈을 그렇게 집중 사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태종 때 사호(死虎) 사건이 도리의 과잉이라는 교훈을 남겼다면 진주의 사호 사건은 생명 파괴의 과잉이요 저 편할대로 행동하고 보는 이기주의의 과잉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것이 오늘 본문의 제목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날 회당에서 한 쪽 손이 불구가 된 자를 고쳐 준 것이 문제가 되어서 논쟁을 벌인 사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이를 "지키면 너희는 내 소유가 되겠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그 언약을 맺은 것이 바로 모세가 받은 십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관계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과 언약이 파괴된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은 물론 모든 축복마저 상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신7:11-13)

그래서 주어진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기 위해 율법을 구체화시켰던 것입니다. 그 여러 율법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제4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안식일에는 모든 일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병을 고친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의 율법은 이 일을 아주 명확하게 또는 상세하게 정하였습니다. 의학적인 배려는 생명이 위험했을 때에만 주어졌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만일 벽이 사람 위에 무너졌다면,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아볼 정도만큼 벽을 치워버릴 수 있었습니다. 만일에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구원함을 받았겠지만 만일에 죽었다면 그의 시체는 다음날까지 그곳에 방치되어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골절은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수족이 삔 곳에 찬물을 붓지 못하였습니다. 손가락 벤 상처에는 고약을 바르지 않고 붕대를 감을 수는 있었습니다. 즉 대개의 상처는 그것이 악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는 있었으나 좋아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엄격한 정통파의 안식일에 대한 견해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엄격한 유대인은 안식일에는 자기의 생명마저도 지키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카비(Maccabees)전쟁에서 방위전에 패했을 때, 유대의 반란군 몇 사람이 동굴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수리아 병사들이 그들을 추격했고, 그들이 유대인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었으나 유대인들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그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유대인들과 싸웠다. 그들은 동굴 속에 있는 유대인들을 불태워 죽였다. 유대인들은 동굴의 입구를 막으려 들지도 않고 저항도 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그 날에는 자신들을 지키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위기에 처해 있어서도 안식일이 지니고 있는 명예를 깨뜨릴 마음은 없었다. 우리의 율법은 우리에게 그 날에는 쉬어라고 요구한다." 로마의 장군 폼페이(Pompey)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방어자들은 성전의 경내에 피난하였습니다. 폼페이 장군은 그보다 높은 작은 산을 구축하여 그 위에서 공격하도록 공사를 진행시켰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신앙을 알고 있었으므로 안식일에 그것을 구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안식일의 무활동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죽음의 허가증에 서명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을 지키기 위하여 손을 들려고 하지도 않았고, 적군이 작은 산을 구축하는 일을 방해하려고도 아니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징병제도를 채용하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유대인들을 병역에서 면제하였습니다. 왜냐 하면 엄격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철저하고 엄격한 율법준수 관념은 안식일 자체를 절대화시키거나 신화화(神化化)시키는 것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안식일보다 귀한 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죽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는가 여부를 눈여겨 보았지만 예수께서는 손 마른 불쌍한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옳으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법보다 중요한 것이 생명인 까닭에 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 일어서게 하시고 그들에게 묻기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3:4)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안식일이라고 병든 사람을 내버려 두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 는 질문을 함으로 법리론을 내세워 <도리>에 비중을 두지 않고,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는 질문으로 법리보다는 <실리>에 더 무게를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반문은 굳이 안식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에 적용되는 물음이었습니다. 사실상 예수는 이 물음으로써 다른 날과 안식일을 구분하려는 전통적인 관념을 철폐해 버렸습니다. 더 이상 거룩한 날 거룩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반문은 안식일을 상대화하고 비신화화하고 있습니다. 이 날만 지키면 특별한 복이 있다거나 이를 지키지 않으면 특별한 화가 있으리라는 사고는 안식일을 신화화한 것입니다. 유대교의 한 랍비는 안식일을 두 번만 철저히 지켜라 그리하면 네 구원이 보장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신화화하고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 반문은 안식일뿐만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 어느 날에나 다 해당되는 질문인 동시에 해 아래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만 거룩해야 된다면 다른 날에는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안식일의 특수성을 철폐해 버린 것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그날의 의미를 모든 날에, 삶 전체에 확대시킨 것이 됩니다. 흔히 우리는 다른 날에 비해 주일이 거룩하고 다른 직업에 비해 목회하는 직업이 거룩하다고 해서 성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가 자칫하면 우리의 인격과 생활에 분열 일으켜서 우리의 삶을 병들게 할 수 있다는데 그 위험성이 있고 실제로 우리가 그런 위기에 빠져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주일이 거룩하다.'는 사실에만 집착하고 그것만 강조하면 주일에만 성스러우면 되고 다른 날에는 개판 쳐도 좋다는 사고방식으로 쉽게 흐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든 아니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거룩하며 옳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며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도하기 위해서 올려진 성직자의 손이 거룩하다면 마찬가지로 삽 자루를 쥔 노동자의 손이나 연필을 쥔 학생의 손이나 걸레질하는 주부의 손이 생명이 되신 예수님과 복음을 위한 것이라면 거룩한 것입니다. 얼마 전 전국 트럭 운송협회 운전자들 50여 명이 경주 톨게이트에 모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시위방법으로 경주에서부터 서울까지 고속도로를 교통법규가 허용하는 최저 속도로 일제히 운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경찰당국은 경찰 50명을 동원, 트럭마다 동승하여 트럭 운전자들에게 "평상시대로 달리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통법규가 허용하는 고속도로 최저 운행속도로(60km/h) 50여대의 트럭이 일제히 운행한다면 경부고속도로가 완전히 마비된다는 것은 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속도를 위반해도 괜찮으니까(최고 속도인 80km/h를 위반해서) 평상시대로 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통법규는 교통의 원활한 소통을 통해 인간의 삶에 편리를 도모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미국의 교통경찰은 원활한 차량 소통을 위해 있지만, 한국 교통경찰은 단속을 그 목적으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3:4)

예수께서는 법 이전의 차원에서 그들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법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나 성전 등 날이나 장소를 절대화시키거나 신격화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생명을 오히려 절대화시켜 그 생명의 존엄성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해야 구원받는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교회당 건물을 특별히 성전이라고 불러 다른 교회당과 구분한다고 그곳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안식일이나 성전이 아니라 "우리"(사람)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2. 아무튼 안식일에 대한 그런 물음과 불구자를 고친 행위는 결국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분노를 샀는데 본문 6절을 보면 이로써 유대인들이 헤롯당과 더불어 예수를 처치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대로 우리는 그들의 분노를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의 행위가 공적인 질서를 깨뜨렸다는데 대한 의분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수의 행위가 분명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행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그 행위가 기존질서를 유린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범법은 사랑의 행위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안식일법의 궁극적인 의미를 물었던 예수님의 반문은 실로 타당했으며 그런 면에서 당시 그 안식일법은 반드시 변혁되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변혁되어야 한다는 전제로서의 현행법의 파괴에 대한 책임은 안져도 좋은가? 비록 현행법이 잘못된 면이 있다하더라도 만약 그것을 파괴해버리면 그 질서에 의존하여 세워진 다른 많은 선한 것들이 본의 아니게 희생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의 희생과 책임은 누가 질 것이냐는 것입니다. 자, 이런 문제들을 제기해 놓고 보면 예수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서 사랑을 결행했다는 것은 실로 그것이 비장한 결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랑의 결단이 부득이 다른 하나를 유린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과 또 그것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 행위를 보고 그를 죽일 음모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실제로 죽을 각오마저도 했어야 했습니다. 무책임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질 각오가 없는 사랑은 감상일 뿐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마저도 다른 것을 희생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불 다른 것을 희생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마땅히 그 희생에 대해 책임질 각오를 해야합니다. 사실 사랑의 행위란 희생이나 수난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며, 사랑하려고 하면 이내 그것에 대립되는 또 하나의 이질적인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다른 현실을 모르고 덤비는 사랑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도 바로 이 사랑에 대한 책임의식이 박약해서입니다. 내가 내 민족과 내 나라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에도, 내가 가난한 소외자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에도, 수난에 대한 각오와 투철한 책임의식이 없으면 괜히 감상에 사로잡혀 날뛰다가 예상치 않았던 다른 현실을 만나면 그 사랑은 허무하게 변절해 버리고 맙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신앙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만 생각했지 수난의 각오라든지 책임의식 같은 것은 아예 염두에도 없기 때문에 갑자기 어려운 십자가의 현실이 닥치면 줄행랑을 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가 만일 그 불구자를 살리기 위해 안식일법을 범했을 때 그 결과 죽음에까지도 이를 수 있다는 각오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한낱 무책임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로서는 당시 예수가 그런 결단을 하면서 실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그 행위가 바로 그의 죽음의 이유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그 행위를 숨어서 한 것이 아니라 마치 거기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흘로 짊어지려는 듯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했습니다. 사랑을 내세우면 무언가가 희생될 것을 보고 그 희생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종교는 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규칙, 법칙, 그리고 규율에 복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는 이런 규율을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악인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들은 종교란 교회에 출석하는 것, 성서를 읽는 것, 식사 때 감사하는 것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 그리고 종교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외면적인 행위를 실행하는 것으로만 알았을 뿐이고, 그들의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동정도, 희생할 의사도 없고 엄정한 정통주의에 빠져, 사랑의 호소에 대하여는 귀머거리가 되고, 세계의 눈물에 대해서는 장님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1-18)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종교는 봉사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었습니다. 의식과 행동을 수반하는 사랑과는 아주 다른 식으로 비교됩니다. 나의 친구, 나의 형제, 나의 주여, 당신의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이름도 형식도 그리고 의식적인 언어도 아닙니다. 오직 당신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의 정확한 실천이 아니라, 인간 요구의 부르짖음에 대한 자발적 응답으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파기하려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해 무책임한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그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책임질 줄 아는 사랑의 봉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완벽한 율법주의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서툴러도 하나님 사랑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습니까? 생명을 구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옳은 것입니다. 작은 사람 하나라도 업신여기거나 소흘히 하지 않고 귀하게 여겨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교회는 주일 성수하고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구하고자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정죄하고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적인 사랑의 봉사를 통해 세상을 구하고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화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목표하고 있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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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성령을 힘입으라

(22)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태복음 12:22-37)

이규태의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 한국 사람들은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은 완전히 못 죽고 저승과 이승의 중간계에서 귀신으로 방황하여 이승에 원한 풀이를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 같은 생각들이 우리 나라에 많은 귀신들을 탄생시켜 왔습니다. 원한이 클수록 그 귀신 '파워'는 크고 '파워'가 클수록 해(害)를 많이 끼쳤으며 신술(神術)도 잘 부릴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승) 허공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귀신들이 방황하고 있으며 그 귀신 가운데 어떤 한 귀신이 인체에 들어오면 어떤 병이 되고 그 귀신이 나가면 병이 사라지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이 병귀(病鬼)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며 병이 들면 이 병귀를 나가도록 작동을 부려야 합니다. 그 제귀퇴귀(除鬼退鬼)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푸닥거리입니다. 다시 말해 무당이 음식을 차려놓고 귀신들을 잘 먹여서 내보내는 굿거리입니다. 병귀를 추방하는 방법에는 푸닥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직접 구타해서 내쫓는 방법도 있습니다. 곧 병귀가 환자의 몸속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서 그 병귀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환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행위입니다. 자기 아내가 정신병이 들었다 해서 사람들을 시켜 2주 동안 한숨도 못 자게끔 복숭아 가지로 계속 환자를 구타함으로써 전신에 상해를 입혀 결국 죽게 만든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있어 왔습니다. 환자의 몸 속에 들어간 병귀를 이 같은 폭력으로 고통을 줌으로써 내쫓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구타의 도구로 복숭아 나뭇가지를 이용한 것은 복숭아나무를 귀신이 제일 무서워한다는 속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축귀(逐鬼)에는 이러한 구타형말고도 병귀를 포박하여 감금하므로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봉박형(封縛型), 병귀가 든 인체에 직접 자상(刺傷)하는 자상형, 귀신을 놀라게 하거나 협박을 해서 병귀를 내쫓는 경압(輕壓)형, 귀신들이 붉은 빛을 무서워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20년 전 전국에 유행했던 여자의 붉은 속바지를 입는 화기형(火氣型) 등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한을 품고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쫓겨난 악령들이 귀신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탄을 하늘에서 세상으로 쫓겨난 신(神)으로 말하며, 그 사탄이 지금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사탄, 악한 영이 역사하는 곳입니다. 사람은 죽게 되면 천당에 가든지 지옥에 가든지 둘 중에 하나이지 혼령이나 귀신이 되어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일부 이 귀신들이 사람 몸에 들어가 병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예수께 고쳐 주셨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며 예수를 메시야처럼 여겼습니다. 그러자 심사가 뒤틀린 바리새인들이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며 예수의 메시야됨을 부정하고, 예수를 '파워'가 약한 귀신들을 억누를 수 있는 소위 '파워'가 센 무당정도로 비아냥거렸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귀신이 귀신을 쫓아내면 어찌 귀신 동네가 제대로 서겠느냐?'면서 그들의 말을 일축하고,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병을 고치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5-28)는 예수의 이 말씀은 귀신을 쫓아내는 힘이 성령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같은 성령의 역사가 임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천국 도래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지금 여기서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The Exorcism of demons)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임했으며 그들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탄이 세상을 지배하여 죄와 사망 가운데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의 힘, 성령의 권능이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여 년 전에 중국에서 어떤 여자가 귀신을 부리어 당시 사람들을 미혹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문을 외워 귀신을 불러서 갖은 재간을 다 부리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를 진실히 믿는 어떤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구경삼아 그 집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귀신 부리는 여자가 귀신을 아무리 불러도 웬일인지 아무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가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는데 한 아이가 와서 예수 믿는 부인에게 집에 손님이 왔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집으로 돌아가자 당장에 귀신이 나와서 그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귀신 부리는 여자가 "조금 전에는 왜 나오지를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귀신은 "오기는 벌써 왔는데 예수 믿는 여자와 같이 있는 성령이 무서워서 못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귀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무서워하는 것은 오직 성령밖에는 없습니다. 귀신에 붙잡힌 사람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29절)라고 말씀하셨는데 "강한 자"는 사탄을, "그 강한 자의 집"은 이 세상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강한 자의 세간"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뜻합니다. 문제는 누가 사탄의 영역에 들어가 먼저 "그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 세간"을 늑탈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지금 결박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지금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자", 즉 사탄을 결박한다는 말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혈과 육의 피조물이 아닙니다. 영적 세계의 존재입니다. 어떤 종류의 쇠사슬로도 천사나 영물(靈物)들을 결박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사탄의 결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므로 사탄의 세력이 꺾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 살지 않고 사탄의 결박에서 벗어나 의와 생명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는 세상에서 이제 사탄은 패배당한 원수에 불과합니다. 주목해야 할 성경 구절을 보겠습니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누가 복음 10:9-14)

여기 복음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도시들에 대해 왜 이처럼 두려운 심판을 선포하셨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에게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하고 있다는 증거가 곧 병든 자의 고침, 귀신들린 자의 고침 등이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귀신들이 쫓겨나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 임하였다는 징조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패배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는 것이었고, 이는 두려운 심판을 초래할 뿐이었습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누가 복음 10:17,18) 이 말씀은 사탄이 그 권세의 절정에서 떨어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 말씀도 바로 사탄의 패배, 사탄의 결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성령의 권능이 임하므로 사탄이 여전히 이 세상 신(神)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지만 그의 세력은 이미 꺾여졌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힘입어 하나님의 통치를 맛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악한 시대'는 계속되고 있지만 '오는 세상'의 권능인 성령의 힘이 지금 사람들 가운데 역사(役事)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 세상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어 보이나 사탄의 왕국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부분적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라는 성령의 권고를 소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적으로 매우 담대했던 오스틴 딥 목사에게 임종이 다가왔습니다. 그의 임종의 병상에 마귀가 찾아와서 "오스틴 목사, 그대는 평생 동안 나의 원수였소. 이제 그대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소. 나는 이제 그대를 꼼짝 못하게 하고 그대에게 복수를 퍼부을 작정이요."라고 잔인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틴 목사는 여전히 담대하게 "사탄아, 네가 나에게 복수를 퍼붓기 전에 우리 주님께서 나의 주위에 성령의 울타리를 두르고 계시는 것이 보이질 않느냐?" 이 담대한 말에 사탄은 마지막 기회마저 놓쳤다고 한탄하면서 물러가고 오스틴 목사는 평안히 임종을 맞아 하늘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은 평생토록 마귀의 세력과 싸우며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기회만 있으면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공중으로 이륙하지 못하도록 온갖 힘을 기울여 세상으로 잡아당깁니다. 마치 비행기가 하늘을 날기 위하여 이륙할 때가 가장 어려운 모험이며 지구의 인력을 많이 받듯이 사탄은 우리의 영혼이 하늘을 향해 이륙하는 순간에 가장 많은 힘을 경주합니다. 그러나 이륙하여 이 땅과 멀면 멀어질수록 지구의 인력을 적게 받는 비행기처럼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 울 때에야 비로소 사탄의 인력이 작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지만 사탄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믿고 성령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악령이 지배하는 죄와 사망의 세상에서 의와 생명 가운데 살기 위해 예수 믿고 성령의 힘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푸닥거리를 해서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광야에 가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을 주야로 금식하신 후였습니다. 이때 마귀가 예수께 와서 시험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는 두 번째 시험을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전혀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도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마귀는 세 번째 시험으로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영광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며 시험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모든 간계와 능력으로 예수를 유혹하고 공격했지만 결코 예수를 시험에 넘어지게 하거나 그를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하거나 정복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은 이제 예수 앞에서는 죄를 짓게 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이 완전히 정복된 것은 아니지만 그 능력에 치명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을 힘입어 예수처럼 사탄의 모든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오늘 본문에서 하신 말씀이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표징은 교회에 교인이 꽉 들어찬 교회나 거대한 부흥회를 하는 교회가 아니라, 실로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어 삶의 고통을 제거하고 어떠한 유혹과 시험에도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의롭게 살기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성령의 힘입어 사시기 바랍니다.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성령의 힘입어 영생을 맛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삶에 고통이 있습니까? 예수 믿고 성령의 힘입어 삶에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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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요나의 표적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38-45, 참조 : 막 3:1-6, 눅 11:29-32)

기적(miracle), 기사(wonder), 표적(signs) 등은 성경에서 다 같은 의미로 사용되며, 그 뜻은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삶 속에 뚫고 들어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삶 속에 파고 들어가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없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나타난 곳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적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사기행각을 벌이는 가짜 무리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적 만들기(Leap of Faith)>라는 흥미진진한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요나 나이팅게일 목사는 미국 전역을 돌며 가짜 치병 집회를 이끄는 사기꾼 목사입니다. 그는 사람을 사서 미리 짜고 기도로 병을 고쳐주는 척하기도 하고, 예수상(像)의 눈에 소금물을 발라 기적을 꾸며내기도 합니다. 또 이어폰을 사용해 마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쪽집게 예언자 노릇도 합니다. 비록 기만하는 행위일지라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 대가로 돈을 좀 받는 게 무어 그리 나쁘냐며 당당히 사기행각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소아마비 소년 보이드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소년은 가짜 목사 요나를 진심으로 신뢰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다리를 고쳐줄 거라고 믿습니다. 식은 죽 먹듯이 사기를 쳐온 요나도 소년의 순수함 앞에서는 잠시 주춤하면서 이제 자신에게 안수의 권세가 다 떨어져 나눠 줄 것이 없다며 춤과 찬양으로 얼버무립니다. 그러나 소년 보이드의 병치료를 위해 군중들은 "한번 더, 한번 더" 안수 기도해주라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다시 등장한 요나는 자신의 사기행각을 이미 알고 있는 보안관의 믿음에 달려 있다며 사기행각을 감추려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말로 기적이 일어납니다. 보안관에게 치유의 책임을 떠넘기는 엉터리 기도였는데도 소년이 목발을 치우고 스스로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미하고 가짜 목사 요나를 더욱 신뢰하며 더 많은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들판에서 새우잠을 자며 다음날 집회를 기다리게 됩니다. 하지만 진실한 소년 보이드의 치병(治病) 사건과 들판에 운집한 군중들의 진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요나는 사기극을 청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병고침을 받은 소년 보이드가 가짜 목사 요나를 따라가고자 나섭니다. 이를 만류하는 요나와 소년이 주고받은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하는 건 다 쇼야, 멍청이들을 위한 거라구"

"목사님이 가짜라는 거예요?"

"난 가짜다"

"일만 잘하시면 됐지 가짜면 어때요?"

병 고침을 받은 소년 보이드의 이 한 마디 말 "일만 잘하시면 됐지 가짜면 어때요?"가 이 시대의 우리 기독교의 왜곡된 모습을 비춰주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 정신의 삶은 없어도 어떻게 살든 열심히 기도하고 안수 받고 병 고치고 성공하고 출세하며 돈만 많이 벌면 그 신앙이 합리화되는 것이며 그러한 목사와 교회는 성공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없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이 영화는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론 영화에서와 달리 현실에서 목사는 사기죄로 구속되었고, 얼마 전 실형을 살고 나오자마자 다시 치병집회를 시작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을 끌어 모아 돈을 챙기고 있습니다. '거짓으로라도 희망을 주는 게 뭐가 나쁘냐?'고 말하는 가짜 목사 요나의 말에 오늘날도 영적 사기를 당하는 멍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며 희망을 주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주목적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고 그리하여 천국 백성으로 삼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를 비롯하여 유대인들은 표적 그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드러나는 표적으로 종교와 그 가르침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하나님 자녀답게 살려는 자세는 전혀 없고 완악하고 강퍅하여 예수께서 전하신 천국복음을 배척하거나 냉담하게 거절하고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영적 상황을 예수는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된 귀신 들린 자의 상태에 비유했습니다(43-45절). 예수께서 이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오직 요나의 표적밖에는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시며 그들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냈다 살아 나온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나의 표적이란 십자가의 표적을 말합니다. 표적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나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표적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을 구하나니 내가 곧 하나님의 표적이니라.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였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를 보고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알았고, 시바 여왕은 솔로몬을 보고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느니라. 너희들에게는 나를 통하여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가 나타났고, 요나가 전파했던 소식보다 더 큰 소식이 나타났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눈이 가리워서 진리를 보지 못하였고, 귀가 먹어서 그 경고하심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고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알아 본 옛 사람들이, 이보다 더 큰 기회를 가지고도 그를 영접하기를 거절할 너희들을 정죄하는 증인으로 설날이 오리라." 여기에 바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가 곧 하나님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듯이, 그리고 솔로문의 지혜를 보고 시바 여왕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듯이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 예수를 보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여 영접하지 아니하며 다른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심판 때에 정죄를 선언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표적은 가시면류관에 찔려 피흘린 자국, 못박혀 찢겨진 손과 발, 창에 찔려 터진 옆구리, 후려진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등허리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고난의 흔적, 고난받으신 사랑의 흔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으니.....그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4-5) 과연 나를 위하여 대신 욕을 받고 대신 아파하고 대신 죽을 사람이 있을까?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작곡가 멘델스존 가문에 전해 내려온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곱사등이었습니다. 한 여자를 짝사랑하였으나 워낙 미녀여서 자기 같은 곱사등의 사랑을 수락할 이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부유한 실업가의 딸이었으므로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이 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등을 곱사등으로 만든 것은 특별한 것들을 지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허락만 한다면 지금부터 평생동안 당신의 한숨과 눈물과, 당신의 걱정과 고독과, 당신의 아픔과 가시를 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대신 짊어지겠다, 책임지겠다는 이 말에 처녀는 몹시 감동되어 몇 달 후에는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흘리신 피야말로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이 하나님의 표적인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표적이 있다면 십자가의 표적밖에는 없습니다. 이를 구하는 생활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고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로 부요케 하시는 은혜를 감사드리나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 되게 하시기 위해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셨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와 슬픔을 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나이다.

가시에 찔리시고 채찍과 매를 맞아 상하며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하시며,

나음을 입게 하시는 은혜를 감사드리나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신 주님의 삶을 배우게 하옵소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예수님처럼

주님을 닮은 <사람의 모양>으로 살게 도와주옵소서. 아멘

여러분의 손과 발에 사랑과 섬김, 그리고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 흔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십자가 표적이 묻어나고 있습니까? 톨스토이 동화에 <황제와 청소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냈습니다. 이 날 참석자들 중 한 명을 뽑아 왕과 왕후 사이에 앉게 하고 푸짐한 상품을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손님들이 궁전에 도착하자 왕의 신하들이 손님들의 손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 왕의 옆자리에 앉도록 당선된 사람은 궁전의 청소부 할머니였습니다. 평생 힘든 노동에 종사한 청소부 노파의 손은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도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 손과 발을 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을 알아보게 하려면 '내 얼굴을 보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표적, 손과 발을 보이시며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체험하고 예수를 증거하며 살았던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부적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야 할 삶의 시작이요, 삶의 내용이며, 삶의 목표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2-25)

십자가에 나타난 표적의 흔적은 사랑과 섬김, 고난과 희생의 흔적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러한 십자가의 표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표적을 구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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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옥토같은 마음이 되라

(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 13:1-9, 참조 : 막 4:1-9, 눅 8:4-8)

예수님 당시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오정>같은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여 그 귀는 듣기에 둔한"(마태복음13:14-15)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과 무관하지 않은 재미있는 <경상도 사오정> 이야기 한 토막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성경암송퀴즈대회가 열렸습니다.

사회자 : 창세기 2장 23절을 외워 봅시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봉독한 후 시킬 사람을 두리번거리며 찾았습니다.

김 집사 : (보통소리로)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사회자 : 아주 잘 외우셨습니다. 누구 또 암송하실 계십니까?

경상도 사오정 집사 : (큰 소리로) 이는 벼 중의 벼요. 쌀 중의 쌀이라.

예수께서는 본문(3-9절)의 천국에 대한 비유 말씀을 잘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18절-23절에서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그 해석에 따르면 씨는 하나님의 말씀, 밭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길가에 씨가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밭에 떨어졌으나 흙이 얇고 깊지 않아 해가 뜬 후 곧 씨가 말라 타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말씀의 뿌리가 없어 환난이나 핍박을 받게 되면 곧 믿음에서 넘어지는 사람을,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으나 가시가 씨보다 더 빨리 자라서 그 가시에 막혀 더 이상 자라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으나 세상 염려, 재리의 유혹 등에 막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결실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여 결실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옥토같은 마음 밭에 떨어져 100배, 60배, 30배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삶의 모습을 하나 소개합니다.

2월 4일 부산에서 김남 자매가 보내온 편지입니다.

『....목사님, 주안에서 평안하셨습니까? 저희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입게 하여 주시며 능력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목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부산에 사는 김남 자매입니다. 저의 아시는 분에게 선물로 받은 이동희 목사님께서 쓰신 책을 읽고 은혜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말씀 속에서 전하고자 하는 주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 일화를 통하여 가슴속 깊이 남게 하여 주시며 깨닫게 하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저는 21살 때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10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목, 팔, 다리 등 온 몸에 관절들이 굳어서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힘든 몸이지만 그래도 아직도 잃어버린 것보다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며 아름다운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기에 감사하며 팔과 손가락의 관절들이 굳었지만 아직 두 마디의 손가락 관절이 덜 굳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글씨를 쓰게 해 주심에 감사하고 또 다리를 걸을 수 없기에 세상에 나가 죄를 지을 수 없음에 감사하며 이렇듯 감사하지 못할 것 보다 감사할 조건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의 육신의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게 해 주시고 알게 해 주셔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저의 영혼을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속의 은혜를 얻게 하시니 이 세상 그 어느 것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오늘 이 하루도 아픔 속에서 걸러지는 감사와 숨결 속에 내 마음의 등불이 항상 빛나게 하여 비록 육신은 병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 같지만 내가 하나님을 소유한 것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날 저에게도 육신의 고통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을 땐 많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병으로 육신의 장애를 가져 평생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해버리려고 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어찌 나는 왜 나의 삶이 이렇게 험난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며 사람은 얼마만큼 불행해질 수 있는 것인가? 등 타인의 불행의 이야기가 나의 현실의 삶이 되었다는 사실에 절망의 늪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었던 나를 주님은 성경말씀 속에서 만나주셨습니다. 세상과 인생을 무엇을 보느냐, 또 어떻게 보느냐는 각자의 인생의 향하는 길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부터는 육신 속에 갇혀서 어둠 속을 방황하던 내 영혼이 암울했던 현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향해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모습 안에서 무언가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손가락 두 마디 관절이 덜 굳어 글씨 쓰는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노력 끝에 알아 볼 정도의 글씨로 여러 어려움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부족하지만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복음의 빛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도 병원생활을 오래 하였기에 병상에 있는 환우들에게 작은 위로와 기쁨이 되고자 주의 서신을 전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저의 부탁 한 가지 들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목사님 쓰신 책에 언제나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저서 중에 <끊을 수 없는 사랑, 로마서 설교집>과 <사랑의 향유, 요한복음설교2집>이 두 권이 없어 꼭 읽고 싶습니다. 어머니께서 연로하시고 저와 단둘이 살다보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신앙서적을 사 볼 여유가 없어 이렇게 목사님께 서신으로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월간 책자인 <숲 속의 사과나무>인지 정확한 제목은 모르지만 그 월간 책자도 꼭 매달 받아 보기를 원합니다. 목사님, 어려운 부탁인지 모르지만 저의 이 간절한 부탁을 꼭 들어주시기를 주님께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그럼 항상 평안하시며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평강교회와 목사님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늘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9.2.4. 부산에서 김남 자매』

지금 여러분은 온 몸이 다 굳어버리고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 두 마디로 쓴 김남 자매의 믿음의 글을 들었습니다. 이 분을 위해 잠시 함께 기도드립시다. 38년 동안 병든 환자도 고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김남 자매의 굳어져 가는 몸을 고쳐 주시옵소서. 그래서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게 하옵소서.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한 사실은 씨를 뿌리면 다는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거둔다는 것입니다. 씨를 뿌렸을 때 더러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주어먹어 버렸고, 더러는 돌짝 밭에 떨어져 결실치 못했으며,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져 질식해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씨뿌리는 농부가 씨뿌리는 것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좋은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자기가 뿌린 씨 모두가 다 잘 자라서 열매를 맺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농부는 비록 얼마간의 씨앗이 이래저래 없어진다 해도 얼마는 좋은 땅에 떨어져 100배, 60배, 30배의 많은 결실을 맺게 됨을 알고 파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젊어서부터 함께 교회생활하며 외롭게 늙어 가는 두 노인, 이씨와 김씨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젊은 시절 친구들은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나서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인 김씨가 먼저 죽게 되자 평소 같이 지냈던 이씨 노인은 그 장례식에 찾아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장례식에 자기만이라도 참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날 날씨는 궂고 비가 내리고 있어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관이 공동묘지에 다달았습니다. 성문 곁에 기다리고 있는 한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전쟁 때였습니다. 그는 장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우의에는 계급장이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군인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묘지까지 왔습니다. 식이 끝났을 때 그는 앞으로 걸어나와 묻지 아니한 무덤 앞서 서서 손을 번쩍 들어 일국의 대통령에게 하는 경례를 붙였습니다. 이씨 노인은 이 군인과 함께 걸어나왔습니다. 그들이 걸을 때 바람이 불어 그 장교의 우의가 벗겨지며 어깨 위에 붙은 계급장이 보였습니다. 그는 바로 별을 단 장군이었습니다. 그 군인은 노인 이씨에게 "당신은 아마 내가 여기서 하고 있는 짓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 해 전 김씨 노인은 나의 주일 학교 선생이었읍니다. 나는 그때 개망나니같은 소년으로 그를 몹시 괴롭혔읍니다. 그는 결코 나를 위해 자기가 무얼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날 나 된 것이 바로 그 늙으신 김씨 노인의 은혜입니다. 나는 일생 그의 은혜를 잊을 수 없읍니다. 그래서 오늘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사를 드리러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씨 노인은 주일학교 교사시절 자기가 뿌린 복음의 씨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매주 뿌리는 복음의 씨앗들이 어떻게 어디서 자라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복음의 씨를 뿌릴 따름인 것입니다. 더러는 길가나, 가시떨기나, 돌밭에 떨어진다 해도 실망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그 이상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뿌린 씨를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들려주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여러 가지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길바닥 같은 마음, 돌밭 같은 마음, 가시밭 같은 마음, 그리고 좋은 땅 같은 마음이 곧 그것입니다. 물론 앞서 세 가지 상태의 마음에서는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고, 오직 좋은 땅 같은 마음에서만 백 배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그렇다고 앞서 세 가지 상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상태의 미음이더라도 그것을 좋은 땅, 옥토 같은 마음이 되게 하는 데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길바닥 같이 굳어져 딱딱한 마음은 깊이 갈아 뒤엎으면 옥토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길바닥 같은 마음은 강퍅하고 완악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도무지 깨닫지 못한 마음을 가리킵니다(19절). 이런 사람은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죄가 그 사람 마음을 가리워 복음을 아무리 들려주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죄된 생활에 뻔뻔하며 전혀 생활에 변화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길바닥을 깊이 파고 뒤엎어 좋은 밭을 만들듯이, 아무리 완고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그것을 깊이 파고 뒤엎어 고르면 좋은 마음 밭이 되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좋은 밭이 없었듯이 본래부터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좋은 밭이란 다 굳은 땅을 갈아 일구어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완고한 철벽이더라도 그것을 갈아 일구면 좋은 마음 밭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을 때만 옥토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복음에 훼방자였으며, 죄인 중의 괴수였던 사울을 변화시켜 복음 전도자 바울이 되게 하셨던 예수께서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갈아엎어 옥토 같은 마음이 되게 하시는 회개의 영이 길가와 같은 마음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돌밭 같은 마음은 마음에 박힌 돌들을 다 파내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돌밭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듣고서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잠깐 견디다가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곧 넘어져 버리는 경우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도 빨리 받고 흥분도 빨리 하고 결심도 빨리 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뿌리가 없어 환난, 핍박을 당하게 되면 곧 넘어지고 마는 사람의 마음으로 극히 감정적 신앙, 기분파 신앙을 가진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감정과 기분이 좋으면 무엇이든 열심히 행하다가도 기분이 나빠지면 금새 시들해져 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금새 잘 시작했으나 성실하고 일관성있게 하지 못하여 그 신앙인격이 천박하고 경박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돌밭은 그 껍데기는 부드럽지만 그 속은 아직도 채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상태의 마음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그 속마음이 성령으로 부서지지 않고 자기 아집과 주장으로 가득찬 상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마음의 밭에는 복음의 뿌리가 깊이 내려지지 않아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돌밭처럼 거칠고 완고하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아져서 그런 방해 요소들이 제거되고 나면 결국 좋은 밭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 사랑의 길이와 높이, 깊이와 넓이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가시밭 같은 마음은 그 가시들을 제거하면 옥토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가시밭 같은 마음이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에 대한 염려와 재리에 대한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고 마는 경우라고 하였습니다(22절). 그 가시가 기운을 막았다는 말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 나가는 모든 영적 생활을 훼방하거나 혼돈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 근심과 걱정, 염려, 그리고 물질의 유혹은 이처럼 성령의 역사를 가로 막아 신앙이 성장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에서는 배고픔, 다시 말해 당장의 물질 유혹에 못이겨 장자의 명분을 손쉽게 팔아 치우고 평생 후회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물질과 출세, 여자의 유혹을 물리침으로 평생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결국 자기 가족, 자기 민족 전체를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유혹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시가 많은 땅에 뿌려진 씨가 결실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땅도 거기에서 가시덤불을 잘라내고 그 뿌리까지 뽑아낸 다음 흙을 갈아엎으면 좋은 밭이 되어 여러 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한들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성령을 통해 여러분의 심령을 주장하여 마음의 가시가 모두 제거되고 옥토 같은 마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열매가 없이는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천사의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일만 마디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깨닫는 마음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열매를 맺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제아무리 능력 있어 보여도 열매가 없으면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겸손히 복음을 영접하여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 묵은 밭을 갈아 엎고, 마음에 돌과 가시를 제거하여 좋은 마음의 밭, 옥토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의 심지가 깊고 신앙적 줏대가 있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러분의 삶에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케 하는 성령의 감화감동하심이 항상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성령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의 밭을 부드럽고 깊게 기경하도록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너희는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호세아 10:13)

이스라엘의 척박한 광야, 사막일지라도 갈릴리 호수의 물이 가 닿기만 하면 옥토로 변합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됩니다. 여러분에게 생수같은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여 옥토같은 마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100배,60배,30배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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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알곡과 가라지 인생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4-30,36-43)

천국에는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가라지는 들어갈 수 없고 알곡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좋은 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알곡들이 되시므로 장차 천국에 들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남들에게 짓밟히거나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고 살다가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이겠습니까? 도둑이나 강도짓, 사기나 부정부패해서 잘 사는 세상으로 끝이나고 내세가 없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나 확실히 천국이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하여 알곡은 천국 곳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거두어 불사르는 최후의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반드시 성공하고 출세하며 부귀를 누려야만 알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패하고 가난하며 병든 사람은 가라지라고 보아도 괜찮은 것이겠습니까? 세상에서 보는 알곡의 기준은 그럴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알곡의 기준은 <좋은 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의 아들들>이 되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실패하고 가난하고 병들었어도 <좋은 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의 아들들>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알곡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가 알기 쉽게 37절-39절에서 해석해주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마태복음 3:37-39)

여기 보면,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 곧 진리가 되시는 예수 자신을, <밭>은 <세상>을,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곧 예수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 <추수 때>는 <세상 끝>, <추수꾼>은 <천사들>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밭>과 같은데 <좋은 씨>를 받아들여 "알곡"들이 되는 사람들과 <가라지>같은 <악한 자의 아들들>이 함께 섞여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앓던 이를 뽑아내듯이 <가라지>를 다 뽑아 내버리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가라지>를 <추수 때>, 다시말해 최후의 심판 때까지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병원 입원 환자 중에는 병원비가 없어서 밤중에 몰래 도망가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병원 측에서도 도망환자를 찾아보아야 돈이 없으니 별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경제난 속에 어지간해서는 병원에 갈 수 없는 판국에 의대교수가 <양심선언>을 해서 화제입니다. "대학교수로서 애써 가르친 제자들이 도둑질하는 의사가 되는 것을 더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며 서울대 의대 김용익 교수가 <양심선언>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의약품비리로 연간 1조3천억원의 손실이 초래되고 있다며 제약업계와 병원간의 비리를 고발하고 반성하는 공개서한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의료윤리와 의료정책을 가르치는 의료관리학 전공인 김 교수는 편지에서 "의약품의 보험가격이 실거래 가격보다 최고 9배까지 높게 책정돼 있다."며 "제약협회가 의료보험약가를 직접 결정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 교수는 또 "병원에서 약을 구입할 때 기부금, 장학금, 학회참가 보조금 등 제약회사와 다양한 비밀거래들이 오간다."며 "어떤 약이 새로 병원에 들어가려면 <랜딩비>, 그 후에는 <리베이트>라고 불리는 상납이 이뤄진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의사들이 약을 선택할 때 병에 적합한 약이 아니라 이윤이 많은 약을 고르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전공의나 공중보건의 등 20대 의사들이 제약회사들의 이러한 관행에 처음에 놀라다가도 30대가 되면 필수불가결한 요령으로 보는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말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병원에 갔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터무니없는 진료비, 치료비, 약값을 지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몸이 아픈 것만해도 고통스러운 것인데 병에 적합한 약은커녕 의료비까지 바가지를 썼다고 생각하니 돈 없는 서민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수배중인 폭력배와 함께 도박하는 경찰, 나라의 세금을 도둑질하는 <세도, 稅盜>, 병환자들의 의료비 도둑질하는 <의도, 醫盜>, 경제환난의 와중에서도 외화빼돌리는 재벌, 등등 헤아리자면 우리 나라는 도둑놈이 판치는 형국이 아니라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난리 통에 여전히 고통을 당하는 계층은 힘없고 돈 없어도 정직하고 진실하며 열심히 살고자 하는 서민들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용어를 빌리자면 <가라지>같은 인간들 때문에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알곡>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 하박국 선지자의 관심은 '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가?'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강포와 간악이 난무하여 도처에 변론과 분쟁이 그치지 않는 혼란으로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이행되지 않아 의인이 악인에게 쫓겨나가게 되는 사회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 무법자와 악덕자들을 그냥 두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살려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하박국 1:2-4)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하박국 선지자는 불평하며 다시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조용히만 계십니까?"

하박국은 성질이 급해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확 뒤집어 엎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하늘에서 철퇴를 내려 악한 자들, 가라지 인간들을 콩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박국이 하나님에게 요청한 것은 가만히 계시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맑으시므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고 그냥 계시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보고만 계십니까? 악한 민족이 착한 백성을 삼키어도 조용히만 계십니까?" (하박국 1:13).

하박국의 이러한 질문에 하나님은 "비록 더디더라도 그때를 기다려라."(하박국 2:3)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하박국 2:2-3)

하나님의 이같은 답변은 불 같은 성미의 하박국 선지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박국은 지금 당장 눈 앞에서 의인이 희생당하는데 단 1초도 꾸물거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하늘 문을 열어 날벼락을 내려 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은 그야말로 만만디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것인지도 모르고 또 왜 잠잠히 계시는지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으니, 하박국의 속마음이 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라지를 불태워버리는 심판의 그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심판은 주께 맡기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대해 불평을 하자 그 불평을 들은 한 사람이 이렇게 충고해 주었다고 합니다.

"완전한 교회를 다니고 싶으시겠죠? 찾아 나서십시요. 혹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찾게 된다면 당신은 그 교회에 절대 들어가지 마십시요. 왜냐하면 당신은 불완전한 사람이고 불완전한 당신이 들어감으로 인해 그 교회가 더 이상 완전하지 못할 테니까요."

이 세상에는 완벽한 교회가 없습니다. 가라지는 이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가라지라고 판단되면 뽑아서 완전을 이루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가라지를 분명하게 가려낼 능력이 없습니다. 곧 완전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완전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행여 가라지라고 판단한 것이 잘못된 판단이면 어찌 할 것인가? 형제를 실족케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에 매어 깊은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고 성경은 말합니다.(마태복음 18:6).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밭의 주인이신 주께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추수밭의 주인이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면 주인이 그 말에 책임을 질 것입니다. 추수밭의 주인이 가라지를 염려치 않는다면 우리도 염려할 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라면 가롯 유다를 조급히 쫓아내고 싶었겠지만 주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라지라고 규정짓는 동료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을 가라지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혹 그들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우리와 행동을 같이 하지 않더라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존재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한 동료의 허물에 분내는 우리 자신도 똑같은 존재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라지라고 생각된 사람들에게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성장과 발전이 조금 더디다할지라도 가라지를 뽑아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알곡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바라보고 기다리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그 깊고 깊은 뜻을 한번쯤은 헤아리면서 기다릴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끝까지 가라지들은 때가 되면 심판의 불에 던져 넣겠노라는 말씀을 믿고 기다려줄 줄 아는 진실한 믿음의 알곡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뿌려진 <좋은 씨>가 알곡들이 되어가는 사람들의 생활은 이렇습니다. 먼저, 예수님처럼 겸손하며 항상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모두가 하나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는 인간의 가치를 하나님의 형상을 이룩하는데 두고 성령의 열매인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다섯째는 좁은 문, 좁은 길로 행하여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가라지>인생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첫째, 교만하고 거만합니다. 물질과 지식, 명예와 권력, 능력 등으로 교만해지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미움을 키워 분열과 증오, 전쟁과 파괴를 일삼아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는 사람으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부귀영화, 성공, 의식주 등의 생활에 대한 근심 걱정 염려로 일관하며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며칠 전 부산교도소에서 출감한 김 0 0 씨가 저에게 편지와 더불어 전화를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인도한 96년 9월 6일 교도소 집회에서 은혜 받은 후 <숲 속의 사과나무>를 통해 믿음이 성장하여 자신의 변화된 삶에 너무나 감사하다는 편지와 전화였습니다. 김씨는 <숲 속의 사과나무>와 우리 평강교회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며 여러분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출옥해서 그간 하나님의 은혜와 <숲 속의 사과나무>에 보답하고자 지금은 서울에서 문서선교 중인데, 저희 교회에서 발간한 설교집을 이용해서 소책자를 발간하고 문서전도하고자 하는 일에 허락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신장병으로 꺼져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신장 하나를 기증하기까지 했다는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전국39개 교도소와 종합병의원에 매주 전하는 <숲 속의 사과나무>는 이처럼 전국 곳곳에서 <좋은 씨>를 뿌리고 있으며, 가라지같은 인생들을 알곡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교도소에 있다고 해서 가라지라고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얼마든지 가라지도 알곡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요지경이라고 성급해 하거나 하나님을 향해 원망 불평할 것이 아니라 추수 할 때를 바라보면서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분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박국과 똑같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 좋은 밭에 가라지가 난 것을 보고, 그것을 뽑아 버리려고 했더니 주인은 추수 때까지 기다려보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답변은 가라지를 뽑다가 좋은 알곡도 뽑힐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종기가 아주 커질 때까지는 아프지만, 조금 더 참다가 째는 것과 같은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악에 대한 최종적인 징계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수할 그 때를 기다리면서 믿음을 가지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라지에 대한 심판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하박국에게 주어진 하나님 답변은 "그들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할지라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하박국 2:4)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믿음으로"는 "진실함으로"라고 말과 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진실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요지경 속 같고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악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은 요지부동하게 믿음에 굳게 서서 끝까지 진실하게 살아야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다지 멀지 않은 추수의 날에 <알곡>처럼 살았던 여러분의 생애가 허무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면, 의인을 찾으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믿으시고, 시대적 상황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믿음에 굳게 서서 끝까지 진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알곡이 되고자 하면 씨가 좋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알곡이 되도록 <좋은 씨>를 뿌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 깊이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 가라지와 알곡을 분별하는 추수의 때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좋은 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어 장차 천국의 축복을 누리시는 알곡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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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겨자씨 한 알 같으나

(18)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눅 13:18-21, 참조 : 마 13:31-33, 막 4:30-32)

지난주간 도착한 수 십 통의 편지 중 하나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부민병원에서 <숲속의 사과나무>라는 책자를 읽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아프셔서 기다리는 시간에 읽은 이 책으로 저는 잔잔한 감동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저는 31살된 주부입니다. 연년생을 둔 관계로 모든 일이 아이중심이라 신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더구나 아직 어린 3,4살된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후-- 내가 왜 이리 살까하고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약간의 우울증도 생깁니다. 그렇게 피곤한 일상에 소책자는 단비가 되어 제 정신에 힘을 주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글이 되기도 합니다. 목사님, 저도 매월 이 책자를 집에서 받아보고 싶습니다. 책자를 주변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작지만 향기 나는 책이라 혼자 읽기 너무 아까운 책이더군요. 저희 동네에 교회가 세 군데 있지만 나오는 책자는 없어서 저처럼 아이들에게 매인 주부가 교회 가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책자를 보내주신다면 주변 사람들과 같이 어울릴 때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는 서적이 될 것 같습니다. 두서없는 글을 써보냅니다. 저의 마음에 단비가 되는 책을 기대하면서... 목사님의 건강과 하나님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산 O규 O정 엄마 박 O O』

박 O O씨의 편지를 읽노라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있음"(마12:28)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했습니다. 그 분 안에 이미 믿음(의)이 역사하였고, 마음에 평강이 임하였고, 우울했던 삶에 기쁨(희락)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발간했다가 재정난으로 지난해 1월에 휴간한 <숲 속의 사과나무>는 겨자씨 한 알같이 작지만 지금도 전국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에 변화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누룩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삶에 단비가 되어 주기도 하고, 정신에 힘을 북돋아 주기도 하고, 마음을 다스려 평안을 찾아 주기고 하여 향기 나는 삶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1. 겨자씨는 씨 중에서 아주 작은 씨입니다. 그러나 자라게 되면 거의 4m가까이 되는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겨자씨 한 알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겨자씨 한 알은 비록 그것이 작고 하찮은 것이지만 이미 마음에 천국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작은 데서,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천국을 이루지 못하면 불행한 것입니다. 또한 누룩은 소량이라도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 것처럼 대단한 영향력,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비유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비록 작고 하찮아 보여도 엄청난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대단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은 무엇이나 크고 많은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할 수 있는 대로 더 많이, 더 큰 것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물량이나 크기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물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믿음이란 분량이 아니라 그 질로써 결정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반드시 천국에서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42) 믿음으로 베푸는 작은 사랑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어령의 책 《축소지향의 일본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마침내 자동차 왕국의 자리를 가로챈 것도 소형 자동차의 전력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도요다의 크라운이 미국에 상륙할 때의 슬로우건은 다름아닌 <작은 캐딜락>이라는 것이었다.... 독일제의 폭스바겐은 그냥 작은 차에 불과하지만 일본의 그것은 대형차를 축소한 차였기 때문에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차는 작지만 큰 차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성능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도 시계도 소형휴대품에서 일본 제품들은 거의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카메라 역시 전자장치를 붙여 몸뚱이는 작아지고 성능은 거꾸로 높아져 가고 있다. 상품만을 소형으로 축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만드는 회사 그 자체의 경영방식도 또한 '축소지향적'이다. "나는 우리 회사를 소위 대기업으로 육성하려고 하지않는다. 회사를 크게 해서 이익될 일은 하나도 없다. 스케일의 메리트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변화를 센시티브하게 받아들이려면 그 몸집이 커서는 안된다. 유연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니의 이브까씨의 말이다...여기서 나온 것이 "소규모, 소인원"주의의 소니 법칙이다. 보통 나라에서는 "힘은 언제나 거대한 것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었으나 일본에서는 "힘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부터 나온다."라는 이상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지금 일본에서는 <경제대국>이라는 말이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국(國)자 앞에 대(大)자가 붙으면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생겼었다. 2차대전 때의 일본군국주의자들의 꿈은 거함거포주의였다. 그런데 지금 <재팬 이즈 넘버 원>, <초대국일본>, 또는 <일본의 시대가 온다-- 경제대국에서 정치대국으로의 길> 등 수상한 제목의 책들이 국내외에서 빈번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도 일본인에게는 그리 반가운 일이 못된다. 무엇을 위한 대국이며 무엇을 위한 세계 제일인가. ...일본인은 큰 것을 오니(귀신, 도깨비)라고 생각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는 경제대국, 정치대국, 군사대국을 지향하는 일본에 대한 불길한 조짐을 예견하는 글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제환난을 초래케 한 주범 중 하나를 대기업들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대형교회, 초대형 교회가 되어 <큰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찾아가는 <작은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가 제아무리 대형교회가 된다할지라도 주어진 사명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하찮은 자들로 여겨지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며, 갇히고 눌린 자들을 찾아가는 <작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은 유대 고을 중 가장 작은 베들레헴, 그곳에서도 보잘것없는 말구유였습니다.(마2:6)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목적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 성령이 임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로 일컬어지는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자, 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눅4:18-19) 예수께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마25:21) 또한 예수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10) 그리고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7:20)

미국의 부흥사요, 노래선교에 이름났던 빌리 썬데이가 소년시절 교회에 등록했을 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매일 15분씩 말씀을 들으라(성경 읽기), 15분씩 하나님과 얘기하라(기도), 15분씩 하나님께 대하여 얘기하라 (전도), 15분씩 작은 희생적인 사랑의 행동을 보이라(사랑의 실천). 그러면 너는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이다."

빌리 썬데이는 이 말씀을 평생 지켰다고 합니다.(하루 60분의 헌신) 위대한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작은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고 작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겨자씨 한 알, 작은 누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겨자씨 믿음, 겨자씨 사랑이 산을 옮기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매주 행하는 축호전도와 기도회, 그리고 선교회를 통한 작은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은 지금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2. 겨자씨 한 알이 자라 가는 과정과 누룩이 어떻게 부풀어 가는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마가복음 4장 26-29절)는 말씀으로 씨가 자라나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가 흙 속에서 싹이 나고 이삭이 오르고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지만 모든 과정은 자고 깨는 사이에 조용하고 신비하게 성장합니다. 겨자씨 비유와 마찬가지로 누룩도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데 거의 보이지 않게 작용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나라가 천지를 개벽하는 모습으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천국,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습니다. 물론 장차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지극히 작고 천한 모습으로, 그리고 오직 12명의 제자만을 두고, 결국 십자가에 죽어야만 하는 그런 모습으로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당시 로마제국과 악의 세력을 단칼에 무너뜨리고 단숨에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로마 제국의 주목받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역사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경력을 거의 언급치 않았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닙니다. 세계적 관점에서 예수의 인격과 경력 그리고 그의 선교는 얼마든지 무시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한 누룩처럼 온 세상이 천국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누룩과 같이 적고 하찮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천국을 경멸하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갈릴리 목수와 12명의 제자들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때가 이르면 누룩이 가루 서말 전부를 부풀게 한 것처럼 천국이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좌절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작고 하찮아 보이는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 소리 없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이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누룩과 같습니다. 자기를 선전하고 나팔을 불지 않습니다. 겸손하고 말없이 섬기고 사랑할 때 이웃과 사회는 복음화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됩니다. 우리들은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조용하게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어린아이의 초라한 도시락인 보리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가 주님을 위하여 조용히 바쳐질 때 5천 명이 먹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요 6:5-13) 누룩의 비유에서 "여자가 누룩을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었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누룩은 가루 속에 묻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물과 기름처럼 끼리끼리만 몰려있을 것이 아니라 세상 구석구석에 묻히고 섞여 누룩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1943년 2월 3일 미국 수송선 돌체스터 호가 그린랜드 근해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미군 4백여명이 죽는 참사가 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군목 4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개신교 목사인 폭스와 폴린 유대교 랍비인 구드 그리고 카톨릭 신부 워싱톤입니다. 그들은 모두 구명재킷이 있었는데 남에게 입혀주고 끝까지 구조작업을 돕다가 배가 침몰할 때 손에 손을 잡고 기도하는 모습을 몇 명의 생환자가 목격했던 것입니다. 종교를 넘어선 그들의 희생과 기도는 미국의 자유와 정신을 상징하는 예로서 오늘날까지 기념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산하는 것은 크고 많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은밀하게 짊어졌던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하나님이 계산하는 것은 여러분의 피나는 노력으로 쌓아올린 부귀영화같은 것들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소리 없이, 그리고 남김 없이 희생하며 나누어 준 작은 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부요함 가운데 너털거리는 웃음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고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 없이 흘리는 여러분의 뜨거운 눈물방울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위한 작은 희생은 아무리 작아도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고난받는 이웃을 위해 지극히 작은 희생이라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우울하고 슬프고 외로운 것은 이웃을 위해 지극히 작은 것일지라도 희생하는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무리 작은 고통과 고난일지라도 이웃과 함께 할 때 그 순간부터 아픔과 슬픔은 사라지고 기쁨이 샘솟는 하나님 나라가 체험될 것입니다. 희생적인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고 이기적 인간은 외로워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마음은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생활로 나타납니다. 십자가 없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질뿐만 아니라 이웃과 국가를 위한 십자가를 걸머질 때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부터 이루어가게 됩니다. 지금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지금 예수 믿으시고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나라 민족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17세기 영국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심각할 정도로 부패했을 때 영국사회를 오늘날의 사회로 변화시킨 것은 옥스퍼드대학의 대학생운동, 바로 그 유명한 요한 웨슬레의 속회를 통한 복음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감리교회의 시작이었고 초만원을 이루었던 감옥마다 텅텅 비우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의 부강한 나라를 이룩하게 만드는 겨자씨, 누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기도와 전도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이 역사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의 눈에 교회와 교회에서 행하는 것들이 작고 하찮아 보여도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겨자씨 한 알 같으나 지역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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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감추인 보화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4-46)

1.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말하므로 천국을 소유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천국을 소유한 바울은 참으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엄청난 박해와 핍박을 받았으면서도 가해자들에 대해서 전혀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 대해 축복하고 그들이 잘 되기 위해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참으로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같은 삶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그가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사는 사람은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고 사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나뉘어 집니다. 마치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릇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서 "선생님,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줘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그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여 안타깝게도 예수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마19:16-22) 그 부자 청년은 이 세상에서는 온갖 보화를 가득 소유했을지 몰라도 천국의 보화는 소유하지 못한 불행한 인생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같은 사례를 두고 제자들에게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그러나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가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국회의원 중에 윌리엄 글래드스턴이라는 농담을 잘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번은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을 넘을 때 손에 들고 있던 포도송이 하나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세관원은 그에게 "과일은 못 가지고 들어간다."라고 호령했습니다.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글래드스턴은 포도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다 먹은 후에 "지금도 안 되겠소?" 하고 따지니까 세관원은 웃으며 "이젠 포도와 당신이 일체가 되었으니 입국을 허가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하늘 나라 입국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빈 항아리에 기쁨의 포도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득히 채우시면 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마음의 천국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 원하신다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일보 28일자에 사회면 톱기사는 각국 장애아 7명을 입양해서 그들을 사랑으로 고쳐주며 건강하게 키우고 있는 미국의 찰스 킹 부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바로 그 톱기사 바로 밑에는 박스기사로 버려진 아이를 업둥이로 키우다가 자폐아라고 해서 법원에 자기 자식이 아닌 것을 확인해달라는 소송을 낸 매정한 30대의 한국인 부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참으로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먼저 찰스 킹씨에 대한 기사를 살펴봅시다.

그에 대한 머리기사는 "다리아픈 아이, 말못하는 아이…사랑으로 치료해주고 싶어요"였습니다. 일곱 살 아들인 애덤 군이 모국체험하도록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을 행복해 했습니다.

<빨강 파랑의 예쁜 티타늄 다리, V자를 그리는 손가락도 남다른 애덤은 고국의 아침이 즐겁기만하다. 27일 아침 일찍 경복궁 국립박물관을 찾은 애덤킹(7)군은 벽안의 부모와 누나, 형, 동생과 어울려 4년 만에 찾은 고국의 첫 아침을 만끽했다. 서울이 어떤 곳인지, 사람들은 무얼 하는지 쉴 새 없이 물어보고 즐거워하는 걸 보니, 한국 문화를 알려주었던 것이 역시 잘한 일 같다. 아버지 찰스 로버트 킹(56·엔지니어)씨와 어머니 다나(55)는 한국서 입양한 네 자녀 데이비드(11), 레베카(8), 애덤, 피터(6) 그리고 친딸 제시카(14)와 함께 26일 밤 서울에 내렸다.... {네살 때까지 애덤을 키워준 양어머니를 어젯밤 만났습니다. 한국말을 다 잊어버린 애덤이 "아이 리멤버 유" 하고는 엉엉 울더군요. 그 분과 우리 가족 모두 너무 행복하고 고마웠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빛, 거침없는 영어로 밝기만한 애덤은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손가락이 모두 붙어있었고, 무릎 아래로는 다리도 없었다. 친부모가 포기하고 입양을 요청한 것이 마침 {장애아를 입양하고 싶다}한 킹씨 부부와 연결됐다. 킹씨 부부는 친자녀 셋과 한국 아이 넷 외에도 인도에서 한 명, 미국 내에서 둘을 더 입양, 모두 10남매를 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 모레노 밸리의 이들 집은 스무살에서 네살까지 아들 다섯 딸 다섯, 10명의 자녀로 복닥거린다. {결혼 전 아이를 둘 낳고 둘 입양하자고 약속했지요. 셋째가 두살 되던 해 데이비드를 입양했습니다.}그 뒤로는 {그냥 이렇게 됐다}고 킹씨 부부는 웃었다. 91년부터는 장애가 있는 아이들만 데려왔다. 무릎 이상인 새라, 언어 장애가 있는 피터가 이들에게는 [사랑] 그 자체다. 아이들이 수술 받을 때가 이들은 가장 힘들다. {지난 7년간 스물 한 번 수술이 있었습니다. 애덤은 내년에 손 수술을 받고 예쁜 손을 갖게 될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로 밑 박스기사의 제목은 <자폐아라고 또 버림받아서야>였습니다.

<5살때 증세 나타나...양부모, 3년치료 허사, 포기소송 버려진 아이를 호적에 올려 길러온 30대 부부가 뒤늦게 아이가 자폐아라는 사실을 발견, 자신들의 자식이 아님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냈으나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 부부가 [잘 키워달라]는 쪽지와 함께 집 앞에서 유모차에 실린 아이를 발견한 것은 지난 90년 8월. 결혼 3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던 부부는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 친아들로 출생신고했다. 92년 태어난 딸까지 포함, 단란하던 A씨 가족의 행복이 깨진 것은 95년 9월 첫 아이가 자폐증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A씨 부부는 아이를 특수학교에 보내는 등 애를 써봤지만, 아이는 말귀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증세가 심했다. A씨 부부는 결국 올 1월 친부모를 찾기 시작했고, 법원에 자식이 아님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냈다. 그러나 서울가정법원 가사16단독 김정원 판사는 27일 {입양신고를하지 않았더라도 출생신고까지 마친 만큼 실제 입양한 것과 같은 효력을 가지며 자폐증은 파양 사유도 아니다}면서 A씨 부부의 청구를 각하했다. 김 판사는 {자폐아를 기르는 부모의 고통은 이해가 가지만, 아이가 A씨 부부를 친부모로 알고 있는 만큼 계속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 밝혔다.>

세계 각국에서 장애아들만을 7명이나 데려다 키우는 챨스 킹씨 부부는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를 아는 마음에 천국을 소유한 행복한 부부인 반면에, 키우다보니 자폐아라고 해서 아이를 두 번 버림을 받게 한 한국의 A씨 부부는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를 모르는 마음에 행복을 잃어버린 부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며 이 땅에 버려진 이웃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섬기는 마음은 이미 천국을 소유한 행복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없던 부부가 가정의 행복을 위해 집 앞에 버려진 아이를 업동이로 키우다가 그 아이가 자폐증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 아이를 버리는 마음은 천국의 보화를 상실한 부자의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천국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사들일 만큼 값비싼 것입니다. 천국은 <감추인 보화>, <극히 값진 진주>와 같아서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귀중한 것입니다. .

1947년 봄, 약 2000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성경사본이 사해근처 쿰란 동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보도가 타임즈지(1949.8.9)에 다음과 같이 실렸습니다.

"염소 한 마리가 와디 쿰란의 가파른 바위 언덕에서 풀을 찾다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베두인 족 목동이 길 잃은 염소를 찾다가 호기심이 가는 크고 캄캄한 동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목동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동굴 속에 던져보았습니다. 뭔가 부딪쳐서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쩌면 기대치않은 물건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싶어 돌아가 친구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용감하게 조그맣한 동굴 구멍을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희미한 햇빛에 꽤 큰 항아리들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조금전 던진 돌멩이에 깨져있었습니다. 깨진 항아리 조각들을 치우고 항아리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들을 조사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금덩어리대신에 그들이 알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었던 글씨로 덮힌 두루마리 몇 개를 끄집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는 어떤 금덩어리보다 훨씬 값지고 위대한 보물이었습니다."

그 베두인 목동은 베들레헴의 어느 한 골동품 상인에게 몇 천 원을 받고 몰래 팔아넘겼습니다. 저명한 성서고고학자에 따르면 그 두루마리야말로 현존하는 히브리 사본 중 최고본(最古本)으로 구약 사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사본을 값으로 치자면 대략 3억 5천만원 정도입니다. 사해사본 두루마리가 그렇게 엄청난 가치를 지닌 줄을 몰랐던 목동은 돈 몇 푼에 그것도 몰래 팔아 넘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목동이 자신이 발견한 두루마리의 가치를 알았더라면, 그야말로 <감추인 보화>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시쳇말로 유목민 팔자 고쳤을 것입니다. 천국은 <감추인 보화>입니다. 자기 소유를 몽땅 팔아서라도 살만한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그 가치의 귀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아는 그야말로 <감추인 보화>입니다. 여러분은 금세와 내세에 아울러 천국을 소유한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전 재산을 다 털어 넣고도 살 수 없을 만큼, 무궁하며 영원한 가치가 있는 <감추인 보화> 천국을 간단히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천국은 <감추인 보화>, <극히 값비싼 진주>를 찾듯이 구하고 찾는 자에게 천국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루드는 1905년 미국 조지아 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정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루드는 국민 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도시로 나갔습니다. 신문배달, 구두닦이, 공장 잔심부름 등등 닥치는 대로 일하기를 3년, 덕분에 집안 형편도 좀 나아지고 루드도 작은 병공장에서 정식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장 옆에서 자취를 하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의 일은 끓는 유리액을 금형에 부어넣어 병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친구도 생겼습니다. 이름은 주디였습니다. 어느 날 주디가 신문광고를 오려다 주었습니다.

"코카콜라 병 현상모집 최하 백만 달러에서 최고 천만 달러"

코카콜라는 그 무렵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새로운 음료였습니다. 그리고 회사가 내건 현상금은 루드가 평생 동안 공장에서 일한다 해도 손에 쥐기 어려운 거액이었습니다. 루드는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주디, 이건 하늘이 준 기회야. 공장을 그만두고서라도 내 손으로 꼭 이 병을 만들고 말테야!"

"루드, 그럼 안돼. 제발 부탁이야."

"6개월 후에 다시 찾아와. 어서 돌아가!"

한번 마음먹으면 끝내 이루고야마는 루드의 강한 집념을 잘 아는 주디는 말없이 돌아갔습니다. 코카콜라 회사가 제시한 조건은 퍽 까다로웠습니다. 우선 모양이 예쁠 것, 둘째 물에 젖어도 미끄러지지 않을 것, 셋째 보기보다 양이 적게 들어 갈 것. 루드는 회사측이 제시한 조건에 꼭 맞는 병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드디어 6개월째 되는 날, 주디가 찾아왔습니다.

"루드! 나야, 주디."

하지만 루드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병은 완성되기는커녕 아직 시작 단계일 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못 들은 체하다가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어 주디를 바라본 루드는 소리쳤습니다.

"잠간! 주디, 그대로 서 있어!"

"왜 그래, 루드?"

루드는 재빨리 주디의 모습을 스케치했습니다. 그때 주디는 최신 유행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엉덩이의 곡선이 아름답게 드러나는 통이 좁고 긴 주름치마가 그것이었습니다. 루드는 그 아름다운 곡선과 치마 주름에서 번개같이 스치는 영감을 얻었습니다.

"주디! 어때? 정말 예쁘지? 이제 됐어!"

이튿날 루드는 견본을 만들어 코카콜라 회사 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사장님! 이 병은 모양도 예쁘고 물에 젖어도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이 병의 권리를 채택해 주십시오"

그러나 사장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예, 참 좋은 병입니다. 그러나 가운데 볼록한 부분이 있어 양이 많이 들어갈 것이 틀림없소 유감스럽지만 이 병은 안되겠습니다."

루드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장님! 제발 한 가지만 더 보아주십시오"

"그럼 빨리 용건만 설명하시오"

"제 병과 사장님의 물컵 중 어느 것에 더 많은 물이 들어갈까요?"

루드는 사장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보이며 말했습니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당신의 병에 많이 들어가지 않겠소?"

루드는 침착하게 병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 다시 컵에 따랐습니다. 그러자 겨우 컵의 80%밖에 채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사장은 얼굴빛을 달리하며 무릎을 쳤습니다.

"루드, 내가 너무 경솔했구려. 당장 당신의 권리를 채택하겠소"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계약을 맺었습니다. 루드가 받은 돈은 6백만 달러. 그때 루드의 나이 불과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콜라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코카콜라의 트레이드 마크인 주름잡힌 여체 모양의 병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습니다. 하루아침에 백 만장자가 된 루드는 주디와 결혼하여 고향에서 유리제품 공장을 운영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감추인 보화>, <지극히 값비싼 진주>가 되는 천국의 보화를 얻으려고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는 사람마다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전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천국은 어떠한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손에 넣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와 삶의 행복이 천국을 소유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천하를 얻는다해도 예수를 믿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하를 잃는다해도 예수만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감추어진 보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의 보화가 충만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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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새 것과 옛 것

(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마13:52)

세기말을 맞아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 세상 종말에 대한 어떤 특별한 환상이나 계시를 받았다 해서 가정이나 직장을 팽개치고 산에 들어가거나 어느 특정한 장소에 모여 하루종일 찬송부르고 기도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예수 믿고 어떤 은사를 체험하게 되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직업과 일들을 모두 포기하고 소위 종교적인 일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인 체험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사로, 복음 전도자로, 예언자로 부르셨다는 소명체험으로 착각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소질이나 능력, 재능, 학문은 물론 자신의 현재 직업까지도 포기해야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노래 잘 하는 가수가 예수 믿다가 가수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목사가 된다든가, 배우나 코미디언이 예수믿다가 하던 일 그만두고 목사가 된다든가, 회사원이 직업을 포기하고 목사가 된다든가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같은 경우가 다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에서 시사하는 바는 예수 믿는다고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 능력, 지혜 등 여러가지 은사(恩賜)들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활용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 되라는 것입니다. 직업인은 자기의 직업이나 사업이 건전한 것이라면 그것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주어진 직업과 사업을 더욱 더 발전시켜 직장이나 사업장을 천국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노래를 잘 하든지, 춤을 잘 추든지, 연기를 잘 하든지, 그림을 잘 그리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과 능력, 그리고 여러 가지 은사들을 더욱 더 개발하고 발전시켜 건전하고 건강한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므로 기독교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축구 잘 한다고 기독교 축구팀 만들 생각하지 말고 축구를 더욱 더 잘 하되 기독교인답게 경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생을 공허하게 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하기 위해 오셨으며, 인생을 메마르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윤택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류에게 주어진 각종 음악이나 미술 등 모든 예술과 운동 경기 등 모든 문화를 몽땅 포기하고 오직 성경 읽고 기도나 하라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천부의 재능과 각종 은사를 주신 것은 바로 인류의 문화와 문명의 부흥과 발전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재능과 능력 등 모든 은사는 예수 믿는다고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더욱 더 개발하여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의 원형 지붕에 명작, <천지창조부터 예언자들의 시대까지>를 그렸습니다. 그린 기간은 1508년부터 1512년 까지 4년이나 걸렸습니다. 그에게는 본래 허리가 아팠고 호흡기 장애가 있어서 4년간 천장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단한 고역이었습니다. 한 제자가 그에게 "어떻게 그 몸으로 그리시려고 천장 벽화 같은 작품을 맡았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조용히 "내 작품이 아닐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일세. 돈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는데 어떻게 내 몸을 생각하겠나?"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믿음과 헌신에서 지금까지 5백년 동안 전세계 방문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위대한 예술 작품이 나온 것입니다. 만약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허리가 아픈 것이 하나님께서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하고 목사나 하라는 것으로 알고 목사가 되었다면, 그는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가 남긴 훌륭한 기독교 문화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신 것처럼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 재능의 완성을 이룩하여 천국의 기쁨을 인류에게 남긴 것입니다. 미켈란제로는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예수 당시 바리새식 서기관, 즉 모세 율법의 제자된 유대 서기관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천국의 비밀을 성령으로 깨닫고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예수의 참 제자들을 말합니다. 모세 율법의 제자된 유대 서기관은 율법을 지나치게 쪼개고 또 쪼개어 세분화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한다는 것이 도리어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작 자신들은 율법과 동떨어진 생활로 백성들의 영혼을 감동시키지도 못했고 그들을 전혀 새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옛 것"은 바로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며, "새 것"은 새 언약이시며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합니다. 이 "옛 것과 새 것"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 걸머지신 예수를 "옛 것" 즉 율법에 따라 처형한 곳이 십자가이며,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자신이 희생당하신 참 사랑, 즉 "새 것"을 보여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새 것과 옛 것"에서 새 것은 단지 새로운 것, 옛 것은 낡아빠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새 것이라 해서 옛 것보다 낫다거나, 옛 것이라 해서 새 것보다 낫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새로우면서 동시에 오래 된 것들을 뜻하는 것으로 원리는 오래되고 그 적용은 새로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뿌리는 옛 것이지만 그 꽃과 열매는 새로운 것이듯이 새 것과 옛 것은 모두 성장과 발전에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원이나 과수원에서 오래된 뿌리는 뽑아 버린다면 봄에 피는 새로운 꽃도 없고 가을의 열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만약 새로운 것이 없다면 옛 것의 생명 자체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새 순도 없고 꽃도 없고 열매도 없다면 그 나무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것과 옛 것은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라 서로 필연적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없는 옛 것은 죽은 것이며, 따라서 그런 것들은 일찍 제거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율법은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을 요구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너희들은 집주인되시는 예수님처럼 천국의 곳간에서 새로운 동시에 옛스러운 것들을 내어오는 일을 하라"는 뜻인데 이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이지 율법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법이 다스리는 것은 죄이며 법의 결과는 형벌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며 형벌이 아니라 끝없는 용서를 통한 새로운 삶인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옛 것"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옛 것"을 "새 것"으로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 "옛 것"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새 것"이 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옛 것"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으나 그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새 것", 새로운 관계를 이루게 만드는 것이 성령입니다. 여러분이 배워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생명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입니다. 성령은 바리새 서기관들이 죽인 율법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에스겔서 37장은 유명한 해골 골짜기의 해골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큰 군대를 이룩한 성령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에스겔 37:1-10)

성령이 에스겔을 데리고 에스골 골짜기로 가서 성령이 행하시는 새로운 일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넓은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희망이 끊어진 절망의 골짜기였습니다. 에스겔이 성령께서 명령하시는대로 마른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 말씀을 전했더니 그 마른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합하여 골격을 이루더니 곧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게 되어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생기는 없었습니다. 다시 성령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생기야 저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을 살아나게 하라." 그러자 생기가 그 속에 들어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에스겔의 성령 체험은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던 자들이 새로운 꿈을 꾸게 되고 무력한 뼈들이 강한 군대가 될 수 있는 새 것을 만드는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예수는 가는 곳마다 혁명을 일으켰는데 요즘 크리스챤은 가는 곳마다 커피를 마신다."고 농담한 일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커피를 즐긴다는 정도의 말이 아니라 "예수는 가는 곳마다 새 일을 일으키고 새롭게 하는 역사를 하셨는데 오늘날의 기독교인은 편히 앉아서 잡담이나 즐긴다."는 비평입니다. 성령은 새 일을 일으키는 혁명가이며 인간을 새롭게 개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나라 백성 모두가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국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여기 저기에 에스골 골짜기처럼 마른 뼈들이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에스겔 처럼 나부터 성령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날 것입니다. "옛 것"을 "새 것"으로 완성하시는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여러분의 삶이 날마다 새 것이 되기 위해 십자가 사랑 가운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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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삶을 풍요케 하시는 주님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14, 참조 : 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五餠二魚)의 점심 도시락 한 개를 가지고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양(量)의 주(The Master of quantity)가 되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성령은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성령은 힘과 능력, 그리고 권능이 충만합니다.성령은 지혜와 지식이 충만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육간에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 역사(役事)를 일으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것을 풍요롭고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너희 마음눈을 밝히사,..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7, 18-23)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할"만큼 지혜가 충만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실"만큼 힘과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을" 가장 귀하고 위대한 것들로 만드실만큼 권능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멸시 받는 것들"을 택하사 가장 존귀한 것들로 만드실만큼 권세가 충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택하사" 가장 부요한 것들로 만드실만큼 모든 것의 모든(All in all)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 천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부요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스스로 미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전지(全知, omni science)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스스로 슬프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기쁨이 충만하고 그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스스로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악을 선케 하시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삶의 기갈을 당해 목마르십니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가 되시는 예수 믿으시고 여러분의 삶에 생수의 강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신 교회의 이중표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훌륭하신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이목사님은 한국 땅에 태어난 훌륭한 인물들을 연구하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한국 땅에 태어난 훌륭한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큰 강물을 먹으며 자라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낙동강 물을 먹든지,대동강 물이나 두만강 물을 먹든지, 압록강 물을 먹든지,...어쨌든 큰 강물을 먹었던 것입니다.한경직, 김창인, 박조준, 김선도, 곽선희 목사님은 대동강 물줄기를 마시며 자랐습니다. 김재준, 강원용, 안병무, 문익환 목사님은 두만강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이종성, 이상근 목사님은 낙동강 물을 마셨습니다. '아하,그러면 나는 무슨 강물을 마셨나,나는 만경강 물을 마셨다. 그러니 짧은 강물을 마신 이 종자는 큰 인물이 되기는 영 글렀다. 짧은 강물을 마셔서 그런지 키도 작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고민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하나님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주여,한국 땅을 주름잡는 인물들은 다 긴 강물을 마시고 자랐는데 저는 만경강 물을 마시며 자라도록 하셨으니 슬프도소이다,주여, 이대로 두시려나이까?' 성령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감동하시기를 '종아, 낙심하지 마라. 대동강 물줄기가 길다 한들 얼마나 길겠으며 낙동강이 길다 한들 얼마나 길겠느냐? 진짜 긴 강수,성령의 강수를 마셔라. 길이를 잴 수 없는 무한한 하늘의 강수를 마셔라. 그 강수가 그대 가슴에 흘러들어갈 때 하늘도 땅도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국경을 넘고, 세계를 넘어 큰 인물이 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이 말씀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한많은 호남땅 갈릴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까 할 때 '성령의 강수를 마신 예수님의 혼을 담아 너도 살아라.'라는 감동을 받아 여기까지 뛰고 달려왔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 성령의 강수가 흘러 넘치게 될 때 여러분의 현재 위치와 존재를 뛰어 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존귀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뛰어난 지혜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가장 부요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시고 성령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은 강물마다 심하게 오염되어서 그런지 목사가 죽어 장사지내는데 절간의 중이 와서 조사(弔辭)를 하는 경우도 있고, 기독교와 불교, 천주교 희랍 정교 그리고 회교까지도 혼합하여 서로 강단을 주고 받으며 세계 종교 단일화를 위해 날고 뛰는 그야말로 오염도가 치사량(致死量)을 훨씬 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가하면 유신론자인 기독교의 지도자가 무신론자인 김일성과 남북 통일을 위해 국법을 어겨가면서 자리를 함께 하는, 강물만이 아니라 국민 대중이 마시는 공기까지도 오염시키는 불상사도 벌어졌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성령과 말씀'으로 영육간에 성결 보존하여 어떠한 '세상의 강물과 공기'에도 오염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병이어,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밖에 없습니까? 주님께 바치십시오. 그리고 오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풍성한 축복을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형편 없습니까? 있는 그대로 주님께 바치십시오. 여호와께서 새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지혜와 재능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기십니까? 주님께 바치십시오.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뱀같은 지혜를 얻으십시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7-31)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 믿으시고 여러분의 영육간의 삶이 풍성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누리고 있는 문화와 문명이 풍요로와도 사랑에 기갈을 느끼고 있습니까? 예수 믿으시고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시고 삶의 참된 희락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16-21)

인간은 '밤이 맞도록 수고를 다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다'는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십시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5:6)

이같은 축복은 자신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이 넘치도록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5:3-7)

미국 텍사스에 유명한 셀 포드라는 목사는 "성경 말씀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물질을 관리하며 살아갈 때 축복이 되느냐 하는 말씀이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예수 믿는 사람은 그저 가난하게 사는 것이 잘 믿는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렵게 살고 가난하게 살아서 남에게 누를 끼치고 남에게 원조를 받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풍성한 물질의 축복을 받아서 가난한 사람과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가는 곳마다 농사를 지으면 백배나 잘되어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기까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도 객지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객지 생활을 시작하는 길에 하나님께 십일조 생활할 것을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야곱의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교회 생활의 규례가 되어 지켜지고 성도들이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축복된 생활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기쁨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것을 드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물질 때문에 걱정하지 아니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가진 것을 무엇이든지, 물질이든 봉사이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온전한 마음으로 드리십시오. 그리고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의 어떤 왕이 궁전에서 나가다가 한 거지를 만났습니다. 손을 내밀고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왕이 거지에게 하는 말, "네가 나에게 무엇을 주면 나도 너에게 주겠다."거지가 뭐 있겠습니까? 옆집에서 강냉이 한 홉을 얻었는데 그 강냉이 주머니를 열고 "저는 이것밖에 없습니다."하며 강냉이 다섯 알을 내밀었습니다. 왕이 그것을 척 받더니 웃으면서 하인에게 "얘! 금주머니에서 이 강냉이 알만한 금덩이 다섯 개만 꺼내서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것을 대신 너에게 주니 받아라."물론 거지가 감사히 받았지요. 그러나 속으로 탄식하면서 갔다고 합니다. 왜? "내가 그 강냉이 주머니를 다 그대로 드렸으면 금주머니째 내가 다 받았을 텐데"하는 탄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처럼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믿음을 과감히 버리시고 가지고 있는 "오병이어" 전부를 주님께 드리시고 '너와 나' 모두가 함께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적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축사',즉 감사기도를 드리심으로서 일어났습니다. 주께서는 지금 '보잘 것 없는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지만 벌써 저 멀리 오천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은 것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이 오병이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축사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현재의 위치와 상황, 그리고 형편 처지가 어떠할지라도 미래를 바라보고 미리 감사할 수 있는 깊은 믿음으로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기도하는 방법을 설명하시면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감사기도를 해야 들으신다고 하셨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어느 부인은 자기도 남편 문제로 감사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하고 한 숨을 쉬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남편은 매일같이 술이 만취되어 늦게 귀가하는 술고래였습니다. 그 날도 다른 날과 같이 술로써 인사불성이 되어 겨우 집에까지 도착해 문앞에서 쓰러진 남편을 힘들게 끌어다가 겨우 눕혔더니 세상 모르게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니 자기 신세가 처량하고 화도 나서 기구한 팔자타령을 하며 "하나님,나는 왜 이런 남자에게 시집을 와서 고생을 합니까?" 하고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울면서 절반은 신세타령하고 절반은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감사기도하라는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한참 동안 감사할 조건을 생각하다가, 감사할 것이 없어서 그저 감사하다고 기도했답니다. 바로 그 때 성령의 감동으로 감사할 일이 생각났습니다.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을 생각하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앞으로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감사하고,저토록 취했어도 집을 찾아올 수 있음에 감사하고,토요일은 더욱 술을 많이 마셔 주일날에 집을 잘 봐주어서 교회나오는데 불편하지 않아 좋고, 계속 해서 감사해야 할 일들이 자꾸 생각나서 정말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남편은 갈증이 나서 잠을 깨고 보니 부인이 웃으며 기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남편은 무엇이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물었더니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렇다고 감사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나도 예수 믿어 줄께" 하며 선뜻 교회에 나갈 것을 약속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그 동안 왜 몰랐겠습니까? 또한 자기 아내의 소원이 무엇인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이 부인이 간증하기를 10년 동안 그렇게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 번의 감사기도로써 이루어졌다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어느 때 들으실 것 같습니까? 오천 명을 앞에 놓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하는 이런 감사기도에 기적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정황이 어떠하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지금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영육간에 삶이 풍요로와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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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삶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요 6:16-21, 참조 : 마 14:22-33, 막 6:45-52)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는 여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기적은 진짜로 있었던 것이 아니란 말이예요. 예를 들어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가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너 갔을 때 바다의 깊이가 6인치 밖에 안 되는 갈대밭을 건너간 것이지 어떤 기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거든요."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뒤에 앉은 학생 한명이, "기적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좀 기분이 좋지않은 선생님은, "무슨 기적이란 말이예요?"라고 묻자 학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오던 애굽의 큰 군대를 모두 홍해 바다물에 빠져 죽게 했는데 6인치 깊이의 물에다 애굽의 그 많은 군대를 다 빠뜨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 진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가신 표적으로서 주님께서 '자연법의 주'(the master over natural law)가 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가지 표적을 행하심은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신앙 가운데 빠져 생명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삶의 풍랑은 누구나 다 겪게 되는 일이지만 신앙인은 '예수를 배에 영접하여 인생의 진정한 목적지에 안전히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타고 언제 끝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넓은 바다를 쉬임없이 항해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 세상은 바다며 인간은 항해자이며 인생은 항해입니다. 항해를 하다보면 뜻하지 않는 시기에, 예기치 않는 장소에서 이유도 알 수 없는 폭풍과 거센 파도에 휩쓸려 고생할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석양이 물드는 잔잔한 저녁 바다, 혹은 힘차게 태양이 솟구쳐 올라오는 고요한 아침 바다는 참으로 멋있습니다만 별안간, 그것도 한밤중에 몰아닥치는 폭풍과 파도는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개인생활이나 가정생활 혹은 신앙생활에서 순풍의 돛을 달고 평탄하게 달릴 때도 있지만 때로는 예기치 않게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풍랑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풍랑 만난 이야기가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구약에 나오는 요나가 만난 풍랑입니다. 이 풍랑은 내 자신의 잘못과 죄로 인하여 만나는 풍랑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과 정반대되는 곳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요나서 1:11-15).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죄악의 길로 가는 인생에게 거센 풍랑이 일어납니다. 둘째, 사도행전 27장에 나오는 풍랑으로 사도 바울이 탔던 배가 풍랑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이 풍랑은 하나님 보다 인간의 경험을, 진리의 말씀보다 재물을 더 의지할 때 찾아오는 풍랑입니다. 하나님의 종 바울은 계시를 통하여 항해 도중 큰 고난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항해를 지연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는 항해를 늦추게 될 경우 입게 될 경제적 손실을 염려한 결과 바울의 계시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경험과 실력을 믿고 항해를 강행하다 결국 배와 모든 화물을 몽땅 잃고 겨우 생명만을 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계시한대로 순종했더라면 풍랑을 피해 아무것도 잃지않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셋째,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것으로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갈릴리 바다에서 만난 풍랑입니다. 이 풍랑은 인간의 잘못과 아무 관계가 없는 풍랑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당할 수 밖에 없는 숙명적인 풍랑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리하여 바다생활에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점점 거칠어져가는 거센 풍랑을 어찌할 수 없어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험한 세상 속을 살아가면서 삶의 전문가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부들도 큰 풍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듯이 아무리 풍부한 경험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어도 아무리 높은 권세와 넘치는 재물이 있어도 어찌할 수 없는 격렬한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배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에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고요하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풍랑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만유의 주이신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값으로 오는 풍랑이든 세상을 의지하다 만난 풍랑이든 어떤 풍랑도 예수님은 잔잔케 하십니다. 인생의 거센 풍랑이 여러분을 위협할 때 예수님을 찾으시고 그 분을 인생의 배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거센 풍랑속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아름다운 인생을 노래한 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비록 두려움의 밤에

신앙과 형식이 나누인다 할지라도

폭풍우가

아무리 노호하더라도

그 폭풍우를 가르며

들려오는

보다 굵직한 음성을

듣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아름답도다"

<테니슨>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나신 후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신 반면 제자들을 미리 가버나움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항해하는 중 큰 바람이 불어 풍랑를 만나 제자들이 큰 역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을 피하여 산에 가셔서 먼저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의 모습을 지켜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시도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시고 지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광풍노도에 시달리던 그 자초지종을 예수님의 사랑의 눈초리는 떠나지 않으시고 항상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물 위로 걸어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시련에 부딪칠 때도 예수께서는 지켜 보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너무 편안하게만 해주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가 싸워서 우리 자신의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운동경기에서 훌륭한 노력을 다하는 자녀를 보시며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부모와 같으며 비극적으로 낙망하여 옆으로 빠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는 부모와 같습니다. 인생은 우리들 위에 내려 비치는 예수님의 사랑의 눈빛으로 말미암아 활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안전하게 마른 육지에 상륙할 최후의 노를 젓게 하시려고 산에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담담하고 무감동적인 거리를 둔 태도로 우리를 지켜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가 우리를 관람석이나 울타리 밖에서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모자라고 우리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때에 예수님은 사랑의 눈빛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승리와 성공으로 이끄는 최후의 분발과 최후의 노력을 불어 넣어 주는 힘과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신앙생활의 위대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찌 제자들을 잊으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어찌 제자들에게 무관심하시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고난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격한 풍랑이 제자들의 탄배를 몰아치는 것을 볼 수 있으셨습니다. 어두웠을 때에 조차도, 예수께서는 볼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우리의 생각도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슬픔도 모두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모든 어려움을 다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으며, 그들은 바다에서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마음은 그들을 걱정하고 계셨으며, 그래서 마침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틀림없이 우리에게 베푸시려고 사랑으로 우리를 살피시는 가운데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요6:19)

이 본문에서 분명히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그와같이 예수를 보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눈으로 예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눈으로 예수를 볼 수 없지만, 봄으로 행치 아니하고 믿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삶의 풍랑이 어떠하든지 간에, 파도가 얼마나 높든지 간에, 소동이 얼마나 심하든지 간에, 예수를 신뢰하고, 예수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앞을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께서 파도 위로 걸어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과 우리 자신의 환경에 얽매여 있어서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의 정황과 다를 바 전혀 없습니다. 세계가 경제적으로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세계가 정치적으로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세계가 사회적으로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세계가 종교적으로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기독교도 예외없이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와 사회가 사는 길은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오늘 본문 21절에도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요6:21)

다시말해서 예수님을 배에 영접하자 제자들은 가려던 항구에 속히 도달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현대가 당면한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열쇠가 되는 말씀인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가 없었을 때에는 위험했으나 일단 그를 배 안에 영접하자 풍랑이 잔잔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 '배'는 작게는 '나 자신'을 뜻하며, 크게는 '가정' '교회'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나의 문제나, 가정의 문제나, 교회의 문제나, 국가의 문제는 오직 예수님을 영접할 때만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말씀인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고 했습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하기까지는 언제 어떤 풍랑에 밀리고 요동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다와 바람을 창조하시고 자연법의 주가 되시는 주님을 모시면 목적한 항구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풍랑을 잔잔케하실 뿐만 아니라 삶의 참된 목적지까지 우리를 평안하게 이르게 하시는 예수님을 진실로 진실로 영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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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성(聖)과 속(俗)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20, 참조 : 막 :7:1-23)

가장 중요한 성례식 가운데 하나인 성찬식 도중에 파리 한 마리가 거룩한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성찬 포도즙이 담긴 잔에 빠졌습니다. 이 경우 더러운 파리로 인해 그 성찬 포도즙이 더럽혀진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더러운 파리일지라도 거룩한 성찬 포도즙 잔에 빠졌기 때문에 그 파리가 거룩해진 것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성(聖)과 속(俗), 즉 거룩한 것, 속된 것, 또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무엇인가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성(聖)과 속(俗)에 대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한 마디로 불결은 전염된다는 것입니다. 불결한 파리가 성찬 포도즙 잔에 빠졌으면 당연히 그 잔이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그 포도즙 잔이 더러워진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만약 그 포도즙 잔에 다른 음료를 담아 마시게 되면 그것을 마신 사람까지도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리가 빠진 포도즙 잔은 깨트려버려야만 그 더러움이 전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 외에 이방인은 모두 다 더럽기 때문에 이방인과 교제하는 사람은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가셨을 때 여행에 피곤하여 우물곁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고 물었습니다. 사마리아는 분명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었지만 오래 전에 이방인과의 교제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유대인들로 그들과는 상종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유대인이지만 당신네들이 더럽다고 상종도하지 않는 우리네한테 왠 물을 달라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종교는 더러워진 물건이나 사람에 접촉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접촉이 되면 그 더러워진 것을 성결케 하기 위해서 의식을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성경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정결법입니다. 이 정결법에 따르면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먹을 수 있으나 이 두 가지 요건을 동시에 갖추지 못한 것은 부정하기 때문에 그런 짐승을 먹거나 그 짐승의 시체는 만져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지만 새김질을 못하기 때문에 부정한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선 중에서도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는 것은 먹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가증하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한 것들의 시체가 옷에 닿든가, 그릇에 닿든가 더러워지기 때문에 하루 동안 물에 담가 정결케 하고 그릇 종류는 깨트려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것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 화덕이든지, 질탕관이든지 깨뜨려 버리라 ! 이것이 부정하여져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 되리라."(레위기 11:35)

유대인들의 정결례는 이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 신성시하는 동물들은 모두 불결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와 악어는 애굽 종교에서 신성시 여겼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볼 때 애굽 종교는 우상숭배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애굽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동물들 역시 더럽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이란 바로 이러한 정결법과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돼지 삼겹살이나 오징어를 먹음으로 죄 짓는 것이나 간음하거나 도둑질하여 죄 짓는 것이나 그 죄의 비중이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결법을 비롯하여 율법을 연구해서 밥 먹고 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있어서 이방인과 접촉한다든가, 돼지고기를 먹는다든가,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다든가 하는 문제는 간음이나 도적질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정결법은 십계명만큼 중요하고 그만큼 구속력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음으로 율법보다 더 구속력을 가진 <장로들의 유전(遺傳)>, 정결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예수께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있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 등이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20절)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지켜왔던 정결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깡그리 뒤집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 예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이었습니다. 이 계명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장로들의 유전은 <고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가 치매에 걸리거나 병들어 공경하기 힘들어지면, 그리고 그 뒤치닥거리에 돈이 많이 들어갈 것 같으면 성전에 가서 돈 몇 푼 바치고 <고르반>하고 외치면 모든 책임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자기 부모에게 "나는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제 저는 부모님을 공경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자기 부모를 내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가 길바닥에서 병들어 죽거나 해도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결론의 말씀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8-11절)였습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너희들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피를 뽑아 팔아서라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지 늙은 부모 모시는 것이 짐된다고 돈 몇 푼 성전에 바치고 자기 할 도리 다 했다며 자기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것은 악독하고 더럽기가 그지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정결법에 따르면 뇌사자의 장기이식을 하면 살 수 있는 경우일지라도 절대로 이식 수술을 할 수 없습니다. 시체는 만지는 것만으로도 부정해지는데 그 시체의 간을 옮겨 붙인다는 것은 차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이 좀 들더라도 장기 이식을 통해 부모를 살릴 생각은 꿈에도 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종교는 한 마디로 음식 먹기 전에 반드시 정결법에 따라 손을 씻는 것, 돼지 고기 먹지 않는 것, 시체를 만지지 않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외식적(外飾的)이고 형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종교는 율법이나 정결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친절, 긍휼이야말로 율법과 정결법을 능가하는 것으로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예배는 성결한 마음, 성결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예배란 어떤 특정한 전통이나 전통적 의식에 따라, 어떤 특정한 성직자에 의해, 어느 성별된 장소에서, 행하지 아니하면 참된 예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입니다. 윌리암 템플은 예배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힘입어 양심을 민감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로서 심령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생각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뜻을 받들어 봉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한복음 4:23-24) 종교란 결코 어떤 예식이나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위에 이웃들을 사랑과 긍휼로 섬기는데 있습니다. 이를 모르고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예식과 의식에서 참된 종교를 찾는다면 그 사람은 소경에 불과합니다. 수 억원이 넘는 파이프 올갠의 반주와 수 천만짜리 성찬대에서 나누는 성찬식과 세상을 능가하는 관현악, 오케스트라와 최첨단의 비디오 오디오 시설 속에서 수 천, 수 만명이 드리는 예배만이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그와 같은 것들은 단지 예배드리는 수단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 상태입니다. 대궐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한다할지라도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 등으로 일삼는다면 더럽다 못해 악취까지 풍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달동네 단칸방에서 고물 주워 생활하면서도 남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버려진 아이들 데려다 자기 자식처럼 오순도순사는 것은 지극히 성스럽고 그 향기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맑게 만들어 줍니다. 청각 장애자들은 울려나는 북소리가 피부에 부딪치는 파장에 맞춰 말도 제대로 안 되는 소리를 내며 온 정성과 힘을 다해 드리는 찬양과 예배를 드립니다. 이들의 찬양과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전통에 따르면 장애자들은 신체에 흠이 있는 자들로 하나님 앞에 찬양과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신체에 흠이 있는 자들을 성전에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과 정결법을 단번에 뒤집었습니다. 바로 성전에서 그것도 안식일에 병든 사람, 눈 먼 사람, 중풍병자 등 온갖 종류의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종교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전통과 의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11-20절)

이는 분명히 종교란 인간의 마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고집하는 전통과 의식, 그리고 형식에 따른 율법과 정결법은 참된 종교인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새김질하지 않아 부정한 돼지 삼겹살을 구워먹거나, 비늘 없는 오징어 다리를 씹거나, 부정한 짐승인 악어 가죽으로 만든 핸드백이나 들고 다니는 사람은 더럽고 추하고, 죄인 취급받는 세리나 창녀들, 다시 말해 사랑할래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더럽고 가증스럽기 때문에 이들과는 아예 상종치도 않겠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이나 정결법은 종교를 향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들이 바로 종교 자체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죄인들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는 인간의 모든 더러운 죄를 다 뒤집어 쓰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씻으시는 분이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종교는 죄인들을 더럽다고 상종하지 않는 것이고, 예수는 그들이 더럽다고 하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해(태양)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6-48)

하나님은 건강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힘있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을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진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못 가진 사람을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내가 땅에서 피하며 우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며 하나님께 호소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시며 가인에게 표를 주어서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힘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섬기는 것이 성스러운 것이며, 힘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속물입니다. 높은 사람이 낮고 천한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성스러운 것이며, 높다고 낮은 곳을 멸시하는 것은 속된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성스러운 것이며, 병들었다고 멀리하는 것은 추한 것입니다. 더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성스러운 것이며, 더러운 사람을 더럽다고 멀리하는 것은 속된 것입니다. 세상이 더러울수록 더욱 더 세상에 가까이 다가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녀가 더럽다고 멀리하는 부모가 없으며 자녀가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깨끗이 씻겨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듯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과 긍휼하심이 더럽기 한량없던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겨 더러운 세상을 성스럽게 변화시켜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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