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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01b.gif 사랑의 향유 cross01b.gif

              
(이동희목사요한복음설교Ⅱ)

※2002.9.15부터 매주 2편씩 교정된 설교로 올리고 있습니다.※

                   머  리  말  

  이 책은 나의 사랑하는 평강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매주 발간되는 설교지 <말씀의 샘>에 실렸던 것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20장 30, 3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공관 복음서(마태 복음, 마가 복음, 누가 복음)의 주요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인 반면, 요한 복음의 경우는 '영생'(Eternal Life) 즉, 사람들로 하여금 "빛과 생명"이신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독수리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모든 생물들 중에서 오직 독수리만이 태양을 직시할 수 있으면서도 눈이 부시지 않는 것처럼 의(義)의 태양이신 하나님을 바로 직시(直視)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모든 신약 성서의 저자들 중에서 영원한 신비와 영원한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바로 그것에 대하여 가장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책에서 보다도 요한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더 가까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빛과 생명"이신 하나님을 직시할 수 있는 복음이 바로 요한 복음인 것입니다.
  요한 복음 설교 제1집 <빛과 사랑>에 이어 제2집 <사랑의 향유> 발간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몇몇 성도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요한 복음서 설교 제2집 <사랑의 향유>를 통해서 "사랑의 향유"가 독자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995년 8월 광복절에
                                 야음(也音) 산 기슭에서
                   
                                            이 동 희 목 사

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 사랑의 향유(12:1-8)
 2. 겸손과 평화의 왕(12:9-19)
 3. 생명의 법칙(12:9-36)
 4.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12:37-50)
 5. 사랑의 섬김(13:1-20)
 6. 사랑과 배반(13:21-38)
 7. 예수가 계신 곳(14:1-3)
 8. 생명을 지향하는 길(14:4-6)
 9. 믿음으로가는 길(14:7-11)
10.사랑의 표준(14:12-24)
11.나의 평안(14:25-31)
12.삶의 열매(15:1-10)
13.
기쁨에 이르는 길(15:11-17)
14.
교회와 세상<1>(15:18-21)
15.교회와 세상<2>(15:22-27)
16.성령의 역사(16:1-11)
17.진리의 성령(16:12-15)
18.해산의 기쁨(16:16-24)
19.세상을 이기었노라(16:25-33)
20.십자가의 영광(17:1-5)
21.제자들을 위한 기도(17:6-19)
22.성도들을 위한 기도(17:20-26)
23.고난의 잔(18:1-11)
24.나약한 인간(18:12-27)
25.인간 군상(18:28-19:16)
26.십자가의 길(19:17-24)
27.보라, 네 어머니라(19:25-27)
28.다 이루었다(19:28-42)
29.부활과 성령(20:1-23)
30.예수의 부활(20:24-31)
31.사랑과 사명(21:1-25)


1. 사랑의 향유   

 "(요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요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 (요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요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터어키의 반체제 영화감독인 일마즈 귀니가 옥중에서 원격 조종으로 제작했다는 <욜,YOL>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군사정권 하의 터어키 형무소에서 5명의 죄수가 5일간의 휴가를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영화에서 특별히 관심을 끈 사람은 세이트(Seyit)라는 죄수였습니다. 그는 출옥할 때까지 자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던 아내가 생활고 때문에 창녀가 되었다가 잡혀와서 쇠사슬에 매여 헛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집으로 갑니다. 아내는 자신을 벌해 달라고 애걸하지만 세이트는 그녀가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 만큼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자기의 명예가 손상되었다는 터어키 사회의 통념 때문에 아내를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딸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이트의 장인은 혹시 사위가 마음이 약해져서 딸을 용서할까 보아 "신이여!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세이트는 아내의 운명을 신에게 맡길 것을 다짐하고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 넣기 위해 얇은 옷만 걸치게 한 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들짐승이 들끓는 산 속에 내버려 두어 동사하도록 합니다. 8개월의 유폐생활로 쇠약해진 아내가 얼어붙어 마비가 된 다리를 끌며 "세이트! 나를 버리지 말아요"라고 절규하는 마지막 소리에 명예보다 사랑이 중요함을 깨닫고 그녀를 구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지만 이미 아내는 죽은 후였습니다. 서구 사회의 사고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가부장적인 질서가 엄격한 터어키 사회로서는 종교가 곧 국적이며 법률이고 동시에 생활규범인 것입니다. 종교를 위해서 인간이 죽어야 하는 종교는 종교의 주인인 인간이 소외된 종교입니다.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이 생명력있게 살기 위한 것이지 종교를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삶을 생명력있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고, '생명' 그 자체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인간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마리아가 노동자의 1년 임금에 해당되는 값비싼 나드 향유 한 병을 깨뜨려 예수께 부은 사건은 예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과 존경의 표시입니다.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의 교훈과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였으며(눅10:39), 예수를 누구보다도 훌륭한 스승으로 여겨왔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신 기적과 축복을 인하여 자신이 소유한 최고의 것으로 예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존경을 표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 이상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는 예수께 대한 겸손과 헌신의 표현입니다. 엎드려 발을 씻는 행위는 자신을 최상으로 낮추는 표현입니다. 당시 손님의 발을 씻는 일은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일로 주인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마리아 자신의 추악했던 과거 삶을 새로운 인생으로, 자신의 죽은 오라버니를 부활 생명으로 구원하신 예수께 최상의 사랑과 섬김을 베풀어 드린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섬김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요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요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요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참다운 사랑은 섬기기 위해 이처럼 자신을 대속물(代贖物), 희생의 제물로 내어 주는 것입니다. 단편 소설의 거장 오 헨리(O.Henry)는 <현자(賢者)의 선물>이라고 하는 감동적인 한 편의 소설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델라와 짐이라고 하는 젊은 미국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가난하였지마는 서로가 깊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한 가지 보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델라의 머리칼은 그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머리를 밑으로 내리면 그것은 마치 긴 드레스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짐은 아버지께로부터 이어받은 금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바로 크리스마스 전 날 델라는 짐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분명히 1달러 87센트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을 했습니다. 즉 그녀는 밖으로 나아가서 20달러로 그녀의 머리를 팔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그녀는 짐의 귀중한 시계를 위해서 백금 시계줄을 샀습니다. 짐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델라의 깎인 머리를 보고는 정신나간 사람마냥 멍청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든가 또는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더욱 귀여웠던 것입니다. 짐은 천천히 자기의 선물을 그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의 선물은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를 위한 보석으로 가장자리를 수놓은 거북 껍질로 만든 값진 머리빗 한 세트였습니다. 그는 델라를 위하여 그 셋트를 사 주려고 자기의 금시계를 팔았습니다. 그 두 사람은 각기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것, 최상의 것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향기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은 그 자신의 사랑과 섬김에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고전13:5) 사랑은....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왕하4:8)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왕하4:9)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왕하4:10)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하였더라 (왕하4:11) 하루는 엘리사가 거기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서 누웠더니 (왕하4:12)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이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곧 부르매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왕하4:13)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저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왕에게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것이 있느냐 여인이 가로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나이다 하니라 (왕하4:14)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저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꼬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왕하4:15) 가로되 다시 부르라 부르매 여인이 문에 서니라 (왕하4:16) 엘리사가 가로되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왕하4:17)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돐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대로 아들을 낳았더라."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섬겨 자기 집을 지날 때마다 정성껏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숙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엘리사에게 그 무엇을 바라고 섬긴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엘리사를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섬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여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식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사자들을 영접하여 가장 좋은 송아지를 잡아 대접하였습니다.

"(창18: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18:8)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창18: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창18: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위 역시 그 사자들에게서 무엇을 바랬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을 대접하고자 했던 그의 헌신적인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과 번성의 축복을 사자들을 통해 다시 확증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이익을 바라고 헌신하거나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아무런 사심없이 하나님께 헌신할 때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르밧 과부는 자기와 자기 아들이 한끼 먹으면 없어질 양식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위해 믿음으로 바쳤습니다. 그 결과 그 과부와 자식은 기근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왕상17: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왕상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왕상17:10)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왕상17:11)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왕상17: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왕상17:13)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왕상17: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왕상17: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왕상17:16)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기시는 성도 여러분, 수넴 여인이나 아브라함,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아니하며 사랑과 헌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사랑과 헌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마음에 참 평안과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축복도 아울러 받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아름다운 사랑의 섬김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시고 축복하시었습니다.

"(마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를 은 30냥에 팔아먹을 가롯 유다는,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면서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을 돈으로 계산하며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신본주의적 사고 방식과 평가, 그리고 가롯 유다의 인본주의적인 사고 방식과 평가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시골 농가에 큰 마차가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대도시로 물건을 팔러 가던 중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짐마차를 끄는 말 주위에는 그 마을의 모든 가축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대도시를 수없이 다닌 말에게서 여러 가지 진귀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여왕이 살고 있는 궁전이었단다. 수 백 가지 종류의 꽃들로 장식된 정원, 수많은 보석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옷들...." 그 말(馬)은 그 궁전의 아름다움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듯 도취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후로 단 한번도 이 마을을 나가본 적이 없는 가축들로서는 도무지 그 아름다움이 상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 자리에 남아 그 궁전에 대해 서로 상상한 바를 토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한 바가 너무 달라서 도대체 궁전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두고 며칠을 의논한 결과 그들 중의 하나가 직접 궁전을 보고 오기로 하였습니다. 그 임무는 젊고 힘이 있는 고양이에게 맡겨졌습니다. "궁전을 샅샅이 살펴보고 와야 해." 화창한 어느 날 주위 가축들의 격려와 충고를 뒤로하고 고양이는 궁전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그 고양이는 궁전을 방문하고 의기양양하게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 마을의 모든 가축들은 환호로 그를 맞이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빙 둘러싼 채 무척 궁금한 표정으로 그의 얘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래, 궁전은 얼마나 아름답니?" "여왕은 만나봤어?" "..... " 쏟아지는 질문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고양이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다만 여왕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만을 보았을 따름입니다." 고양이는 그 아름다운 궁전에서 여왕이나 아름다운 물건을 보지 못하고 겨우 여왕의 의자 밑에 기어다니는 생쥐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위 속에서 참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겸손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가롯 유다는 바로 이 고양이와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이익(생쥐)만을 탐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희생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의 발에 향유를 쏟아 붓는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 속에서 복음을 위한 아름다운 헌신과 사랑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복음을 위한 성도들의 희생과 봉사 속에서 참된 사랑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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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겸손과 평화의 왕

"(요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요12: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요12: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요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요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요12: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것인줄 생각났더라 (요12: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요12: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요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파스칼은 "왕자 앞에서는 머리를 숙여야 한다. 학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도 좋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앞에서는 가슴을 조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필리핀의 막사이사이(Romon Magsaysay)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가난에 지지 않고, 역경에 꺾인 일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의 직책은 대통령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항상 이 나라의 한 병사다'라고 하면서 겸손하기만 했습니다. 실로 지도자는 겸손해야만 합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하여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 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습니다.'(단5:18-21) '그의 아들 벨사살 왕은 부왕이 교만하여 한 때 짐승처럼 들에서 살았던 것을 알고도 거룩한 성전의 기물들을 가지고 술잔치를 벌이며 우상을 숭배하고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고로 ...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했습니다.'(단5:22-31) 참으로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요(잠언15:33),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언16:18)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도성'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겸손하신 왕의 모습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도 천박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시더니 세상에 사시는 동안도 겸손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으러 가시는 마당에까지 겸손의 상징인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삶의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시고 몸소 실천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참된 평화를 이룩하시는 방법은 바로 남을 섬기는 '겸손'인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겸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이십니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기점이자 중점이며 종점"인 인간사, 바꿔 말해 인간사의 기점이자 중점이며 종점이기도 한 종교사엔 사랑과 용서보다는 그 반대가 먼저였다고 말했습니다. 미움과 살인이 앞장섰습니다. 동생 아벨에 대한 카인의 인류 최초의 살인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인류최초의 살인자에게 표시를 줘 아무도 그를 죽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 표시가 인류 최초의 면죄부 아닌 면살부(免殺符)였고 사형폐지론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교의 기점이 살인으로 낙인찍혔듯이 그 중점(中點)도 종점도 끊이지 않는게 살인입니다. 인류사, 즉 종교사는 반목과 살인의 역사입니다. 13세기초 이래 중동 종교전쟁사를 비롯한 숱한 종교전쟁, 그것은 곧 대량살인극을 뜻합니다. 이슬람법과 같은 종교법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살인자를 살인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레바논의 한 16세 미성년 강도 살인범에게 형법이 아닌 이슬람법(종교법)에 의해 지난 3월 4일 총살형에 처한 것만 봐도 무서운 법이 종교사를 전쟁사로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겸손과 사랑의 법으로 세계 평화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 속에서 그것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38-44)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식으로 못된 인간의 이마에 교만의 뿔이 돋히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성경에도 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입니다. 정말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바리새인이 허다합니다. 바리새인이 아닌 척 하는 바리새인,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바리새인, 영리하고 묘한 바리새인, 바리새인을 비난하는 초바리새인 등 말입니다. 그런데 철인 파스칼은 "종교인 가운데 '바리새인'이 많고, 성직자일수록 더욱 '바리새인'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최고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대제사장은 바로 나귀를 타시고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를, 그리고 그분께서 살리신 나사로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들은 경제적으로 부를 누렸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종교적 지도자들이 아니고 매우 귀족적인 지도자들이요 사회적으로는 특권층으로 최고의 대접을 받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안정을 원한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 사회의 개혁을 가로막는 죽은 사자와 같은 수구세력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를 정치 혁명가로 보았던 것입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등장해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세상을 뒤집어엎으려고 하는 줄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이유로 대제사장들은 '나사로' 역시 죽이기로 모의했고 예수의 추종자는 모두 반란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또한 예수로 말미암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대제사장들의 신앙과 신학적인 면에서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대제사장들 가운데 구약 시대의 '사독'이라는 제사장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그들의 교리에 근본적 도전이 된 것입니다. 나사로와 그를 부활시킨 예수를 그냥 두었다가는 사두개파가 없어질 위험에 처하는 상황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의 증거자인 나사로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죽일 수가 없습니다. '돈은 강하다. 왕은 더 강하다. 여자는 좀 더 강하다. 그러나 진리는 가장 강하다.' 이것은 말틴 루터(M.Luther)의 말입니다. 참으로 인생의 행복은 진리와 더불어 있습니다. 또 참된 기쁨도 진리와 더불어 있습니다. 진리가 떠나는 날 행복도 기쁨도 함께 인생의 곁을 떠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독일의 휴매니스트 렛싱(Theodor Lessing)은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할 때 진정한 인생이 시작된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진실, 진리를 매몰시켜버리고 그 진실과 진리의 흔적을 없애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진리 발견의 역사요 정의 실현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갈릴레오의 비극이 진리의 수난사이듯이 말입니다. 물론 인간을 죽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죽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진리는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절대로 죽일 수가 없습니다. 진리는 용기를 낳습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입성 당시 예수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는 한 예수의 지상운명은 비참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때 예수는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2-34을 보면 예수께서는 이미 될 일을 알고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데 모든 면에서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벳바게로 나귀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신 분도 예수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도 다 아시면서 이 일을 진행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처럼 죽으러 가는 인생길을 걷고 있는데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가진 사람이요 진리를 가진 사람은 진정한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본문 15절에 인용하시면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살인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신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말씀에 붙잡힌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용기의 사람은 신앙의 사람이다. 곧 신앙은 용기이다."(시세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옛날 신앙인들의 용기는 로마의 무력이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카타콤(catacombs)은 그 용기의 꽃이요, 많은 순교자의 십자가는 그 용기의 열매입니다. 시인 괴테는 "재물을 잃는 것은 손해요. 명예를 잃는 것은 큰 손해다. 그러나 용기를 잃는 것은 만사가 끝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용기는 '진리'(요14:6)를 위하여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할 수 있는 진리 사모에의 열정이요,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고 할 수 있는 순교자적 신앙에의 용단입니다. 그것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2:24)고 일어서는 일사각오의 자세이고, '한 알의 밀알'(요12:24)같은 희생의 표본인 것입니다. 목숨이란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4:14)와 같습니다. 안개(mist)는 헬라어로 '아트미스'(atmis)인데 그것은 '짧고 허무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시103:15) 또한 '그림자'(욥8:9)요, '풀의꽃'(약1:10)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오늘의 성도들이 비굴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용기 있는 자라야 참을 위하여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순교자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세상에서 으뜸가는 인생의 용기인 것입니다. 1943년 11월 5일 '런던 타임스'(London Times)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산다'고 크게 경고한 일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 하나의 실존이 꼭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용기는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곧 신앙은 용기입니다. 영원한 절망이 영원한 생명을 만나는 꼭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절대와 유한이 부딪혀서 제3의 새로운 통로를 만드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좁은 길'(마7:14)입니다. '생명의 길'(잠6:23)입니다.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용기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20)고 고집을 부리는 용기와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히12:1) 그러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용기란 무엇입니까? 제 아무리 무서울지라도 악마를 향해 '너는 악마다.'라고 갈파할 수 있는 것이 용기요, 험준하기 그지 없을지라도 그것이 옳은 길이기에 피와 땀을 흘리면서 '겟세마네'를 오르는 것이 용기입니다. 물맷돌 다섯을 들고 '골리앗'괴물 앞에 늠늠히 나선 목동 '다윗'처럼 용감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유명대신에 '고독을 더욱 사랑하고,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목숨을 팽개칠지언정 죽음 앞에서 결코 비굴하지 않으며 참으로 겸손하기를 우리 서로 기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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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생명의 법칙

 "(요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요12: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요12: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요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요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요12: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것인줄 생각났더라 (요12: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요12: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요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요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요12: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요12: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요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12: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요12: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요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요12: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요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어두운 이야기입니다만 최근 들어 우리 사회가 황금만능, 인명경시, 도덕과 윤리의 실종 등 중병을 앓고 있다고 야단들입니다. 친부모를 잔인하게 죽인 존속살인사건, <살인공장>을 차려놓고 소위 '있는 자'에 대한 '없는 자'의 갈등이 표출된, 부유층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해온 <지존파>일당의 범행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군대에 5.16, 12.12 사건같은 하극상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병들이 소대장에게 반말을 지껄이며, 소대장을 길들인다며 소대장을 집단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어서 사격장에서는 사병이 지휘관들 향해 K2 자동 소총을 무차별 발사하여 장교 3명이 살해된 사건이 터졌습니다. 동국대학교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폭행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들 사건을 놓고 분석한 결과 소위 '낮은 자', '못 배운자'의 '높은 자', '배운 자'에 대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회 각계 원로와 시민 단체등이 도덕성 회복운동에 앞장서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최근 반인륜적 범죄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 원인이 우리의 전통적인 효사상이 실종된데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데 있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고 윤리의식을 회복하자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없는 자'의 '있는 자'에 대한 갈등, '낮은 자'의 '높은 자'에 갈등, '못 배운자'의 '배운자'에 대한 갈등 등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심각하게 범죄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경제의 급속한 고속 성장에 그 원인이 있는듯 생각됩니다. 빈부의 격차는 어느 나라 사회든 항상 있어 왔으나 기독교인은 그 빈부의 격차가 갈등 요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달란트의 비유(마25:14-30)에서 밝혀 주듯이 물질이란 근본적으로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주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것'이라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기가막힌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뿐만 아니라 자아인식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자아인식을 가지고 삽니다.

"(고후6:8)....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올바른 삶의 가치관 형성과 자아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간성 회복과 도덕성 회복의 "길"은 오직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작금 인간성 회복, 도덕성 회복을 위해 기독교, 천주교, 불교, 광복회 등 사회 각계 원로들 50여명이 <孝 세계화 운동 본부>를 발족시켰습니다.<孝 세계화 운동 본부> 김삼열 본부장은 사회의 이같은 병리현상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효>라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부모를 모시는 사람에 대해서는 세제감면, 특별수당지급, 휴가 등의 혜택을 주어 효도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로 만들자는 취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추진하기 위해 효도세를 신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청 세무계 직원들이 국민들의 혈세를 수백억원씩(앞으로 얼마나 더 밝혀질지 모르지만) 횡령하여 온통 나라가 시끄럽고 문민정부에 대해 불신과 배신감이 팽배한 이때 또 <효도세>를 신설한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효도세>가 될지 뻔한 이치입니다.<孝 세계화 운동 본부>를 만들어 <효도세>를 거두어 들인다고 인간성과 도덕성이 회복되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습니까? 세금에는 명수들인 선진국들 가운데 도덕과 소위 "윤리 지수(공생공존해야 하는 인류사회는 고도의 지능보다 남을 배려하고 남과의 관계덕목을 고양시키는 윤리적 성숙이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데 이것을 측정하기 위해 지능지수, IQ처럼 각 개인의 윤리적 성숙도를 측정하는 EQ<Ethic Quotient>를 말합니다.)가 날로 높아지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까? 고려대학교 총장은 도덕재무장만이 사회의 이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소학 등 유교의 경전을 대학 교육 필수과목으로 하겠다고 합니다. 유교나 불교는 이미 이 나라에서 실패한 종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는 오직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창조주는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모두 마귀(사탄)의 역사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생명을 잃도록 미혹한 것이 마귀입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인 것이 마귀의 역사입니다. 마귀(사탄), 죄, 사망 이 세 가지는 지옥의 삼총사입니다. 마귀는 죄를 짓게 하고 죄는 사망을 가져오게 하므로 함께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고 죽이며, 절망시키며, 분열시키며, 혼란을 야기시키며, 파괴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를 없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요20:31)....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또한 마귀를 없애려 오신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을 없애는 길은 오직 생명이신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 시대적인 상황을 성서를 통해 바로 인식해야만 합니다.

"(마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 (마8: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8: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마8: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마8: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마8: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마8: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귀신들려 심히 사나와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를 만나게 되므로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동네에 무덤 사이에서 동네 사람들을 두렵게 하며 괴롭힌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으나 그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 귀신들린 돼지 떼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몰사하게 되므로 재산의 큰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귀신들린 자의 고침과 돼지 떼의 몰사를 두고 동네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 동네를 떠나가 주기를 간구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으로 인해 두려워하며 살던 것이 예수 때문에 이제 안심하고 살게 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몰사 당한 돼지 떼만을 아깝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귀신들려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예수를 만나 그 <인간성이 회복>된 것을 기뻐하지 못하고, 그리고 그 동네에 참 평화가 오게 된 것을 망각하고, 단지 몰사 당한 돼지 떼, 물질에만 눈이 어두워 예수를 추방하는 것이 <생명>을 잃어버린 현대 사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보다 물질(돼지 떼)을 더 중시하는 사회에 결코 사망의 세력인 귀신들이 떠나갈리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보다 물질을 더 중시하는 것은 공산주의 사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북한의 공산당으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을 잃었고, 또 지금 생명의 위험을 가져오고 있지만, 남한의 인명경시 풍조의 만연, 물질만능주의의 사회 현상 등은 역시 공산당 못지않게 이 사회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생명>의 예수를 잡아죽이고,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는 것이 인간 사회입니다.인간성의 회복과 도덕과 윤리의식의 회복은 이 사회에 <예수>가 살아나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엄성 회복("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예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사는 것은 땅에 떨어져 죽으므로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처럼 사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죽어지내는 사람이 많아질 때 그 사회에 생명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칙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죽음으로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며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히게 되는 것은 차가운 땅에 떨어져 무덤 속에 매장되는 것처럼 그 곳에 묻힐 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은 많은 순교자의 죽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들이 죽었기 때문에 교회는 산 교회가 된 것입니다.

전라북도 하리 성결교회에 문형일집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성결교회의 역사는 비록 오래 되었으나 발전하지 못한 채 초가 삼간 예배당의 지붕이 낡아서 비가 새고 형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 문집사는 이런 형편을 보고 교인들에게 성전을 새로 지어보자고 권유했더니 교인들은 지레 겁을 먹고 하나 둘 교회를 떠나기 시작해 나중엔 몇 명만이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문집사는 자기의 전 재산인 논 서마지기를 팔아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문턱 아래까지 겨우 짓고 나니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는 제단 예정지에 엎드려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때는 마침 장마철이라 그 장마가 다 끝나도록 기도한 후에 어느 날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는데, 며칠 전에 신문에서 과학이 발달하여 사람의 눈알도 이식할 수 있다는 내용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웬일로 그런 생각이 스쳐갔는지 곰곰 생각해 보다가 "아마 눈을 하나 팔아서 예배당을 다시 지으라는 지시인가 보다"하고 전주 예수 병원 안과에 가서 그런 말을 하니 그 갸륵한 마음에 간호원도 울고 의사도 울고 또 그 소식을 들은 원장인 선교사도 너무 감동되어 울며 교회를 그처럼 사랑하는 문집사를 위해 악수하고 사진을 찍은 후에 미국의 신문에 소개하길, "한국에는 자기의 눈알을 팔아서 예배당을 지으려는 성도가 있다. 누구든지 이런 일에 참여하고 싶은 이들이 있으면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사방에서 성금이 걷혀지고 선교사는 그것으로 예배당과 주택을 지어주고 또 문집사에게는 논 여섯마지를 사서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밀알이 있을 때 교회와 사회는 꽃이 피고 생명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8.15해방 후 김구는 새 나라의 방향은 나라를 세우는 건국과 교회를 세우는 건교(建敎)에 있다고 역설하며, "즉 건국과 건교를 동시에 함이다....경찰서 열을 세우지 말고, 교회 하나를 세우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이승만은 "이제 우리는 신국가 건설을 할터인데 '기초없는 집을 세우지 말자.' 곧 만세반석되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고 역설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규식도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가 서로 서로 붙잡고 나가자"며 신앙을 중심으로 단합을 호소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나라 민족의 생명은 예수믿는 성도, 교회에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고, 덴마크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유대인에게 가슴에 노랑 별을 달게 했습니다. 그 당시 덴마크 왕이 있었는데 크리스챤 10세이었습니다. 이 왕은 국민들, 곧 기독교인들에게 우리도 가슴에 노란 별을 달자고 호소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노란 별을 달아야 하는 그 날이 밝았을 때, 가슴마다 별을 단 덴마크 국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유대인도 덴마크 시민인데, 차별하려면 우리도 차별하고, 죽이려면 우리도 함께 죽이라는 시위였습니다. 나치의 학살이 가장 적었던 점령지가 바로 덴마크였습니다. 크리스찬 10세 국왕을 선두로 기독교인들이 일치단결하는 사랑의 실천으로 유대인들을 최대한으로 보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우리 사회를 예수화(복음화)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예수가 살고 내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살기 위해서는 자아(ego)가 죽어야 합니다. 예수를 죽이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는 제아무리 많은 운동본부를 세워본들 그 사회 국가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살리는 정치, 예수를 살리는 경제, 예수를 살리는 종교, 예수를 살리는 문화, 예수를 살리는 교육, 예수를 살리는 운동이 일어나야만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되고 아울러 도덕과 윤리의식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를 살립시다! 내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내가 죽고 예수를 살립니다. 자아(ego)가 죽을 때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자아가 죽을 때(self-denial) 자기 중심주의(ego-centric)에서 하나님 중심주의(God-centric)로 변화되어 삶의 가치관이 바뀌게 됩니다. 죽음은 누구나 싫어합니다. 어느 팝송가사에서도 "천당을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나 천당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천당은 모두가 좋다고 하지만, 천당에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죽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김익두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높은 산 위에 있는 광산을 방문하셨습니다. 아주 높은 곳이어서 광산까지 올라가려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실어나르는 조그마한 케이블 카를 타야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가시어 전도를 하시자, 어느 광부가 여기서는 전도하지 말라고 장난기가 섞인 농담을 했습니다. 이유를 알아 본 즉, 얼마 전에 미국 선교사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케이블 카를 타고 광산에 올라가던 중 그만 고장이 나서 케이블 카가 잠깐 멈추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황하여 아래를 내려다보니 천길만길 깊은 계곡이라 그 줄이 끊어지는 날이면 정말 끝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선교사는 얼마나 놀랐던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광부는 "당신들은 예수 믿으면 천당간다고 전도를 잘 하면서도 죽는 것은 우리와 똑같이 싫어하고 무서워한다"고 비꼬았습니다. 입장이 난감한 목사님은 돌아서서 잠깐 기도를 하셨답니다. "하나님, 급합니다. 지혜를 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그랬더니 선뜻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광부에게 말했습니다. 그 당시는 학질이 유행하던 시기여서 "당신네들 학질을 앓아 본 경험이 있소?"하고 물었습니다. 학질이란 병은 묘하게도 하루 건너뛰면서 증세가 나타나는데, 대단히 추워서 벌벌 떠는 무서운 병입니다. 광부가 앓아본 경험이 있다고 하자, 학질에 반드시 먹어야 하는 키니네 약 맛이 어떠냐고, 그리고 먹을 만 하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 약은 쓴 맛으로 유명해서 먹으면 나을 줄 알지만 다들 먹기 싫어하는 약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것을 응용해서 설명하시기를 천당가는 것이 좋은 줄 알지만 죽는 맛이 쓰기에 죽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고 잘 설명을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천당이 확실해도 죽음의 고통을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부활의 아침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썩는다는 것은 아픔이요 고통입니다.

"(요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그러나 십자가 후에 부활 승리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고통과 아픔을 이겨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자아가 죽을 때 십자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누가 죽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죽으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요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자아(ego)가 죽어야 하는 곳입니다. 자아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바로 여기에 십자가에 생명의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가 생명으로 넘치는 길은 한 알의 밀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5천년 전의 볍씨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 썩지않으면 5천년 아니라 수십만년이 된다 할지라도 한 알 그대로 입니다. 교회 생활을 10년, 20년, 아니 평생을 했어도 십자가에 자아가 죽지 아니하면 아무런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 교회 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째 달구지같은 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밀어야만 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둘째 연(鳶,kite)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끈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언제 어디로 날아갔는지 날아가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셋째 고양이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줄곧 토닥거려줘야 만족하는 교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넷째 풋볼(미식축구)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다음 순간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는 교인'을 말합니다. 다섯째 풍선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잔뜩 부풀어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교인'을 말합니다. 여섯째 전구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쉴새없이 켜졌다 꺼졌다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교인들은 모두가 자아가 십자가에 완전히 죽지 않아서 자기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 사이를 왔다 갔다하는 사람들입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믿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생명의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영광된 가정과 교회, 그리고 생명력 넘치는 사회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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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요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요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요12: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요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요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요12: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요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요12: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요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요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 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12: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작가인 제임스 미케너(James Michener)는 미국 상원의 <과학, 기술, 우주 개발 분과위원회>에서 행한 명연설에서(1979.2.1) 신대륙을 발견하고 세계로 뻗어 나가던 15세기의 유럽 국가들을 세 종류로 분류하였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새로운 가능성을 내다보지 못하고 바다 건너편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눈을 뜨긴 했지만 결심을 하고 모험을 시작할 때까지는 무척 느리고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보이지 않는 새 세계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과감하게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진국이 되고 부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도 15세기 유럽처럼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을 때까지 배를 바다에 띄워보지도 못하고 육지에 앉아서 바다 저편에 대하여 생각만하다가마는 신자입니다. 보는 것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중세기의 독일, 이탈리아 형입니다. 둘째는, 영국, 프랑스형으로 결심이 느립니다.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지만 바다를 향하여 배를 띄우기까지는 남의 경험 등을 오래 분석해 보고 어느 만큼 증거가 보여야 결심을 내려 봅니다. 세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중세기로 말하면 포르투갈, 스페인형입니다. 300여 년전 미대륙을 발견하기 까지는 미국은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콜럼브스가 신대륙을 향하여 배를 띄울 때만해도 탐험이나 신대륙에 대한 지식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콜럼브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30년 전에 포르투갈의 황태자 헨리가 죽었는데 그는 죽는 순간까지 바다 건너에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역설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황태자의 예언을 미친 과학자의 잠꼬대로 여겨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콜럼브스는 믿었습니다. 그는 신념을 가지고 배를 띄웠으며 1492년 아름다운 새 세계를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을 가질 때 처음에는 보이지 않고 막연하게 마음 속으로 바라기만 하던 것이 보이는 실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발명왕이 된 토마스 에디슨은 성적이 나쁘고 엉뚱한 질문만 하여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못 보는 것을 내 아들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안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하여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가지고 출발한 아브라함의 행위를 성경은 믿음이라고 규정하고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떤 점을 보시고 기뻐하실까요? 성경은 그 해답을 믿음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믿음으로써만 의롭다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죄를 없이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는 의인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만족은 오직 인간의 믿음입니다. 인간의 삶의 정황이 어떠하다할지라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굳게 서서 찬양과 감사가 넘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은 엄청난 가정의 재난과 환란,그리고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믿음을 지닌 하나님의 인정받는 의로운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이스 북부 산악지대에 가면 큰 수도원 20개가 관광지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모두 1천년 전에 건축된 것으로 그 당시 기독교(희랍 정교회)는 열렬한 기도운동이 일어났고 양적인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교인들은 모두 직업이나 가정 등 사회적 책임을 이탈하고 산에 들어가 금식철야기도회를 가졌고 대규모의 수도원도 모두 높은 산 꼭대기에 지어 하나님과 가깝게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도사의 시대는 기백년도 가지않아 쇠잔하고 오늘날 그 웅장한 기도원들은 옛 건축양식을 보는 관광지에 불과합니다. 열렬한 기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산의 기도원이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여하한 노력으로도 하나님께 이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요20:27)...너희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그리고 이 믿음을 위해 많은 표적을 직접 나타내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본문 37절의 말씀처럼 그렇게 많은 표적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믿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기적(요2:1-11), 직접 가지않고 말씀만으로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 기적(요4:46-54), 38년간이나 반신불수였던 난치병자를 고쳐주신 기적(요5:1-9), 오병이어(五餠二魚)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의 부스러기를 남긴 기적(요6:1-14), 물위로 걸어가신 기적(6:16-21), 태어날 때 부터 소경된자의 눈을 뜨게 한 기적(요9:1-12),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요11:1-46) 등 인간이 도시 어떻게 극복할 수 없는 한계정황에서 오직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이루어지는 기적들을 직접 목격했으면서도 믿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표적이 부족해서 믿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아예 예수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않았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9월 28일 발트해에서 스웨덴 여객선 에스토니아호가 시속 90km의 강풍과 6m의 높은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5분만에 완전 침몰되었습니다. 약 1500여 명의 승객중 대부분이 스웨덴 사람들로 그 중 약 1000여 명이 사망한,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사고였습니다. 제가 선교 업무차 유럽과 이스라엘을 여행 중에 접한 보도에 따르면, 구소련 붕괴 후 독립한 에스토니아의 악화된 경제력을 틈타 돈 많은 스웨덴 사람들이 자국과 에스토니아를 왕래하는 여객선을 이용하면 모든 물건이 면세가 될 뿐만 아니라 값싸게 에스토니아 여인들과 즐길 수 있기에 소위 기생관광을 하다가 이러한 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익일 헤럴드 트리뷴지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놓치지 않고 싣고 있었습니다. 생존자 중에 독특한 19명의 젊은 복음 주의자들(evangelist)이 모두 살아남았는데 이들은 모두 성경 공부 여행(Bible Study Tour)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스웨덴의 세속적인 목회자들(secular ministers)과 심리학자들이 방송에 나와 하는 일이라고는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정신적인 충격을 치료하는 구구한 얘기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경제력의 축복을 오히려 방탕과 타락으로 일삼는 국민들에 대한 경고 한 마디가 없었습니다. 재난과 환란 중에도 의인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역사를 보고서도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엉뚱한데서 그 사고 원인을 찾으려는 안타까운 모습이 오늘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표적이 부족하거나 말씀이 부족해서 믿지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눈이 멀고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해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구소련의 우주항공사 티토브(Titov)가 우주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나는 하나님을 보려고 찾았지만 우주에는 하나님이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 온 미국 항공사 맥디비트(McDivitt)는 "하나님의 모양은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천체의 신비 속에서 나는 창조자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함을 믿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우주를 보아도 육안으로 보는 자와 영의 눈을 뜨고 보는 자는 이처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영의 눈을 뜬 자만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K목사님에게 와서 토론을 하자고 덤볐다고 합니다. "목사님, 기독교는 불필요합니다. 2천년 동안이나 전도했지만 이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나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K목사가 답변했습니다. "물은 이 지구상에 수십만 년 동안 있는데 당신의 와이셔쓰 깃에 때가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이오?" 물이 있어도 빨지 않으면 때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이 이론에 머물러 있는 한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고 생각하는 이들 유식한 불신 유대인들에게 "그렇지않다.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먼저 신앙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라. 그러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73: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인간은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유태교는 여전히 지금도 예수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를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자기 폭로(Self-discloser)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시고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종교로도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마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 시대에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를 '기록된 말씀', 성경을 통해서 만날 수 있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그 분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마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말씀을 듣고서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길 가와 같이 마음이 닳고 닳아서 말씀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밭처럼 마음이 황폐해졌기 때문입니다. 가시떨기 밭처럼 세상의 염려와 물질(재리)의 유혹으로 말씀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닳고 닳은 묵은 땅은 갈아 엎어야 성령의 단비가 내려 참된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됩니다.

"(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10:13) 너희는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은 회개하므로 닳고 닳은 마음을 갈아 엎어 부드럽게 하고, 회개하므로 마음의 돌뿌리들을 뽑아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회개할 때 성령의 단비, 의롭게 하는 단비가 내려 마음이 부드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또한 가시떨기도 성령의 불로 태워야만 좋은 밭이 됩니다. 물과 불로 임하시는 성령이 회개를 통하여 충만하시므로 말씀가운데 예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을 가지려면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해야만 합니다.

"(요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면 자아(自我)가 죽어야만 합니다. 자기 교만, 자기 자랑, 자기 욕망, 자기 생각, 자기 주관, 자기 사랑 등이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어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고 참다운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은 신앙생활에 갈등이 많고 시끄럽고 복잡합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은 교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은 원망과 불평이 많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은 비겁해지기 쉽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에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에는 참다운 봉사와 헌신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봉사와 헌신에는 인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으로는 영안이 열리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시므로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시는 승리의 생활을 기원합니다.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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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사랑의 섬김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요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요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요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요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13: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요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요13: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요13: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요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요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요13: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요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앗시시의 성 프랜시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 매우 부유했습니다. 무엇이든 간에 최고급이 아니면 그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귀공자 중의 귀공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안으로 영혼에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홀로 말을 달려 교외로 나갔습니다. 도중에 문둥병자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문둥병자는 온 몸이 문드러지고 뒤틀려 몸서리날 만큼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깔끔하고 까다로운 성미의 프랜시스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지고 소름끼치는 이 문둥이를 보고 평소 같았으면 그만 무서워 뒤로 물러서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그 무엇이 그를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서 거의 본능적으로 두 팔을 벌려 그 문둥병자를 껴안았습니다. 그렇게 문둥병자를 껴안는 순간, 문둥이가 예수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간다고 해서 사람을 멀리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됩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고서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실로 하나님에게 가까울수록 인간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진리를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1. 인간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이제 그 사명을 다 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의 절정이 '섬김', 즉 겸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표현이 바로 '종의 형체', 겸손인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는 방법이 바로 '종의 형체', 겸손이었습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인류 구원을 위해 인간에게 가까이 가는 길이 곧 종의 길, 겸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최고의 덕목이라기보다는 인류 구원의 가장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예수의 겸손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이 겸손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알 수도, 모실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총도, 성령의 능력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겸손이란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가장 중요한 생활로 겸손을 배워야만 합니다. 아무한테서나 겸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께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 외에서 배우는 겸손은 인생의 덕목은 될지언정 구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겸손의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 40여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같은 하나님의 겸손의 훈련은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신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삶의 모든 것을 겸손에 대한 훈련 재료로 삼아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인생으로 하여금 "마침내" 복을 받게 하는 겸손은 예수의 성품이고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하는 교만은 마귀의 성품입니다.

"(잠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종의 형체에 이르기까지 낮추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며 모든 무릎을 그 예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빌2:8-11) 이처럼 누구든지 자신을 낮출 때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겸손한 자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있어서 가장 귀한 자리는 가장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곧 겸손인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 그 분의 겸손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 생활의 뿌리를 바로 이 겸손에 두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며 마침내 구원을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함으로 구원을 온전히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겸손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한다."는 예수의 고백처럼(요5:30) 자기를 전부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곧 자아부정(self-denial)입니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만이 전부이기 위하여 그 자신의 전부를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목적만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역사하시기 위해 자기의 의사와 능력은 물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그 자신의 능력, 그 자신의 뜻, 그 자신의 영광, 그의 모든 역사와 가르침과 더불어 그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그는 거듭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가 아니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일하시기 위해 나 자신을 아버지께 바쳤으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아버지만이 전부이시다.'라는 고백으로 사셨습니다. 이러한 전적인 자기 부인과 절대적인 복종, 그리고 아버지에게만 의지한 그의 생활이 온전한 평안과 기쁨의 근원임을 그리스도는 아셨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침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고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하셨습니다. 마침내 그를 높여 그의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겸손이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만유의 통치자가 되신다는 믿음과 그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인 우리 인생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요, 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만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며 거기서 겸손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3. 이러한 겸손의 생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셔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다음 성경이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물이 가장 낮은 골짜기를 찾아 채워지듯이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비어 있고 스스로 낮은데 처해 있는 피조물을 끊임없이 찾으십니다. 그를 찾아서 그의 영광과 그의 능력을 부어 그를 높이기도 하며 축복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큰 은혜를 갈급해 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는 일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높이는 일을 항상 즐겨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여 항상 겸손한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신앙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쁨과 평안은 겸손한 마음에 채워지는 것입니다. 각자의 심령이 평안하고, 교회가 평안하려면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게 되면 평안이 사라지고 곧 고통이 임하게 됩니다.

"(딤후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교만은 자신과 아울러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에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교만이 유대인들과 그 사회에 고통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결국 겸손의 주가 되신 예수를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고서도 회개할 줄 모르는 것이 교만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회개하지 않는 것이며, 겸손한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가장 거룩한 자처럼 여겼으나 회개가 없는 가장 교만한 사람들입니다.(눅18:9-14) 가장 거룩한 사람은 가장 겸손한 사람입니다.

4. 마지막으로, 겸손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겸손은 이처럼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곧 자아의 죽음을 말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은 사람을 겸손하다고 말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었다는 확실한 증표는 겸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겸손은 위선에 불과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브라질의 성자로 불리었던 미국 선교사 멜랜드(Doug Meland)내외는 깊은 산골에 들어가 선교하며 평생을 사는 중에 네 번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곳 주민인 풀리오 인디안들은 처음에 멜랜드 내외를 <백인>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그들을 무기로 괴롭혔던 그 허다한 <백인>을 부르던 증오에 찬 명칭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후 멜랜드 내외는 의료봉사로써 주민들의 목숨을 구하며 병을 치료하는 헌신적인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를 부르는 명칭이 어느새 <존경하는 백인>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멜랜드 내외는 풀리오 인디안들의 언어를 열심히 배워 10년 뒤에는 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유창한 말을 구사하게 되었고 생활도 그들의 풍습대로 묻혀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멜랜드 내외를 <백인 인디안>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부상당한 인디안 소년의 발을 씻어 주고 있었더니 구경하던 인디안들이 "인디안의 발을 씻는 백인을 보았는가? 이 사람들은 하늘이 보내준 사람들이다."고 말했으며 그 때부터 멜랜드 부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사랑의 종이 된 사람에게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겸손한 가정이 수준 높은 가정입니다. 겸손한 교회가 수준 높은 교회입니다. 겸손한 사회가 수준 높은 사회입니다.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가 수준 높으며 깨끗하고 평안하여 살기 좋은 곳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가까이 하는 것처럼 사랑의 섬김은 서로를 가까이 하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지는 거룩한 생활입니다. 사랑의 섬기는 생활로써 영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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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사랑과 배반      

"(요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요13: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요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13: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요13: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요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요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요13: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요13:29) 어떤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요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13: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요13: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요13: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어여뿐 소녀가 가족들과 나들이를 하다가 잠시 혼자 돌아다니는 바람에 길을 잃었습니다. 이리저리 헤매던 소녀는 한 우물가에 다다랐습니다. "아이! 목말라,...." 그러나 그 우물은 물이 조금밖에 차 있지 않아서 도저히 두레박으로 떠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소녀는 두레박을 따라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목을 축이고 난 후에야 그녀는 자신을 위해 두레박을 끌어 올려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청년 하나가 소녀의 울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구출해 내었고, 둘은 사랑을 맹세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하던 일이 있어서 아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나게 되었고 따라서 소녀와 작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헤어지던 날 그들은 처음 만났던 우물가에서 손을 맞잡고 서서 자기들이 결혼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리며 성실을 지키자고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약혼에는 증인이 없었습니다. 청년이 누군가에게 증인을 서달라고 하자고 말하는데, 마침 족제비 한 마리가 그들의 곁을 지나치며 저편 수풀로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본 소녀가 얼굴을 빛내며 말했습니다. "족제비와 우리 옆에 있는 이 우물이 증인이예요." 계절이 바뀌고 여러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청년은 멀리 이역 땅에서 우여곡절 끝에 출세를 했고, 그곳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얻었습니다. 그렇게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의 아이가 놀다가 잠시 풀밭 위에서 잠들어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족제비 한 마리가 덤벼들어 아이의 목을 물었습니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그는 이 일로 인해 몹시 슬퍼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또 한 아이를 얻었는데, 이번에는 아이가 제법 뛰어놀기 시작할 무렵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비치는 갖가지 물 그림자를 구경하다가 그만 우물 속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옛날 소녀와의 맹세를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운 두 증인도....., 그곳에서의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그는 자신의 신부를 찾아 예전의 그 소녀가 있던 마을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는 꽤 나이가 들은 그 처녀는 아직도 그를 기다리며 약속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제자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스승 예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배신한 가롯 유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인물입니다. 거룩한 사랑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자들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고 멀리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수확 때가 되어 주인은 소작을 받으려고 농장으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종들을 때리고 돌로 쳐죽여 버렸습니다. 주인은 전보다 더 많은 종들을 보내면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더 많은 종들을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종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기의 아들을 직접 보내면 다를 것이라 여기고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버리고 아예 포도원을 차지하자며 주인의 아들을 가차없이 죽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이야기의 결론을 듣고 있던 제자들에게 내리게 했습니다.(마21:33-41)

"(마21: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마21: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사랑을 배반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멸망밖에 없으며, 그나마 소작 농지마저 빼앗기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농부들이 배척하고 돌을 던지고 살인한 것은 실제로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주인의 사랑에 대하여 돌멩이를 던진 것입니다. 사랑의 배신자들입니다. 주인은 그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참고 또 참고 거듭 거듭 종들을 다시 보냈습니다. 두번째 배반을 당하고서도 자기의 사랑을 대표하는 아들까지 보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들은 주인의 사랑의 심장에다가 칼을 꽂았습니다. 사랑에 대한 배신처럼 악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님이 그토록 희생하며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향기로운 사랑을 깔아 뭉게고 더럽힌 일은 없습니까?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가장 사랑받은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를 반역한 결과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됩니다. 그토록 자기를 배반한 아들이지만 다윗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여전하여 그의 죽음을 놓고 울부짖습니다.

"(삼하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하였을지라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미워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가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하는 심정입니다. 친구의 우정과 사랑을 돌멩이로 갚은 일은 없습니까?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을 배웁시다.

"(삼하1: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요나단은 다윗을 목숨보다 사랑함으로써 이들의 우정은 성경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을 잊지않고 요나단 사후 그 아들 므비보셋을 항상 왕의 상에 앉게 하였습니다.

"(삼하9:7)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지성어린 아내나 남편의 사랑에 잔 못을 박아 괴롭힌 일은 없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지는 않았습니까? 앞의 비유의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사랑의 책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사랑의 끈으로 맺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호세아는 고멜이 부정한 여인인 줄 알면서도 결혼했고, 지순한 남편의 사랑을 배반하고 음란한 가운데 빠진 부정한 아내를 또 다시 데리고 와서 사랑하려고 하였습니다. 호세아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여인, 사랑해서는 않되는 부정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합니다. 결혼하여 자식을 셋씩이나 낳았지만 하나도 하나님의 축복받은 자식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내 또한 자식까지 낳아놓고 눈이 맞아 도망나갔습니다. 남편의 뼈아픈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거듭 고멜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호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3:2) 내가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호3:3)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3: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호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부정하고 음란한 아내, 사랑을 헌신짝처럼 배신한 아내이지만 끝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결국 아내는 제자리에 돌아오게 되고 자식들도 축복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여인, 법으로서는 도저히 새롭게 할 수 없는 여인, 남편의 사랑을 깡그리 짓밟은 배신자, 그 고멜을 결국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인간의 배반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우세함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하나님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러한 자신의 비극적인 경험에서 하나님과 백성과의 사랑의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음란하고 자기를 버리고 다른 신을 향하여 도망갈 여인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결혼하셨고 사랑하셨고 또 부르셔서 다시 사랑하셨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이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 그 고통과 연민, 그리고 사랑의 배반이 가져온 쓰라린 슬픔, 마침내 배반한 자를 찾아 나선 사랑의 승리의 기쁨 등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고멜의 죄와 같이 이스라엘의 죄는 사랑을 저버린 죄입니다. 사랑이 짓밟히고 은혜가 조롱당하고 호의가 무시를 당합니다. 단순히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짓밟는 일이요 거룩한 혼인의 언약을 모독하는 일이 자행됩니다. 이렇게 지극한 사랑을 베푼 자에게 배신을 당할 때 그 분노는 더욱 극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서는 사랑을 배반한 죄를 꾸짖고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배반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우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랑의 복음서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한 사랑을 배신한 고멜의 위치가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가롯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여 은 30냥에 팔것을 아시면서도 그 가롯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잊지 맙시다. 십자가에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지 맙시다. 가롯 유다가 사랑을 배반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여도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랑을 배반하고 우상 바알을 숭배하는 의식을 따라 모압 여인과 행음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24,000명을 염병으로 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하는데 인간의 고통과 아픔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배반한 가정과 사회에 기쁨과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배반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합니다. 세상이 여러분의 사랑을 배반할지라도 사랑이 승리합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되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어 사랑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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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예수가 계신 곳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유재헌 목사님의 복음성가 <예수로 만족합니다>(찬송가 144장곡)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습니다.

1.예수 소유하여서 나는 부자되고 예수 한 분 잃어서 나는 거지되네

<후렴>예수여 예수여 내 중심에 오소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2.예수없는 문화는 사막같이 뵈고 예수없는 식탁도 맛을 잃게 되네

3.예수없는 천당은 내가 원치 않고 예수 있는 지옥도 나 싫지 않도다

4.아침에는 예수로 눈뜨게 하시고 저녁에도 예수로 잠들게 하소서

5.예수 함께 나아가 일하게 하시고 예수 함께 들어와 감사케 하소서

6.나의 혈관 그 속에 주님 피 부시고 나의 심장 그 속에 주님 힘 넣소서

7.사랑하는 예수로 나 아주 미치고 그 예수님 위하여 죽어 시원하네

철두철미하게 예수 중심의 신앙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양식이 오직 예수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없는 인생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없는 삶, 예수없는 문화, 천당까지일지라도 예수가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찬송가 495장 3절)

예수가 계신 곳이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천국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두 가지 측면 즉, 천국의 미래성과 현재성 중에서 천국의 현재성을 노래로 신앙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 모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면 바로 그곳이 천국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인류가 꿈꾸는 미래의 천국을 성경 이사야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11: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현대 과학과 의학 그리고 물질 문명이 놀라우리만치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복과 안전은 그에 비례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더 두려운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의 라이트 교수(Quincy Wright)가 <전쟁 연구>(Study of War)라는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거기에는 1480년부터 1941년까지 461년 동안에 각 나라가 전쟁을 한 횟수가 발표되었습니다. 영국 78회, 프랑스 71회, 스페인 64회, 오스트리아 52회, 터키 43회, 스웨덴 26회, 이탈리아 25회, 화란 23회, 독일 23회, 덴마크 20회, 중국 11회, 일본 9회 등입니다. 미국은 지난 150년 동안에 13회 전쟁에 가담했습니다. 이 모든 숫자를 합치면 461년 동안에 278회의 전쟁을 각 나라가 한 것입니다. 사람의 역사는 싸움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싸워서 서로 죽이고 시설을 파괴하고 고아와 과부와 불구자를 산출하는 비극은 둘째로 미루더라도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백성의 살림이 위협당하고 다른 방면의 건설적인 발전에 막대한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무기 통제연구소(World Arms Control Agency)의 시바드(Ruth Sivard)박사는 1987년 일 년 동안에 세계는 군사비로 9천억 달러를 소비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미국과 소련 두 나라만의 군사비만 합친 것만이 5천억 달러입니다. 1987년 한 해 동안 세계에 22개의 전쟁이 터져 역사를 깼고, 죽은 자가 220만명이며 그 중 80%는 민간인들입니다. 9천억 달러가 얼마만큼이나 되는 금액인지를 간단히 소개하면 밤낮 자지 않고 매초마다 1달러 지폐를 내버리는 것을 3만2천 년 동안 계속해야 9천억을 다 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돈을 불과 한 해 동안에 인류를 죽이는데 버리고 있습니다. 그 반면 현재 10억의 인구가 빈곤에 처해 있고 그 중 5억은 심한 영양 실조로 허덕이며 연명하는 실태입니다. 원자력 잠수함 한 척을 만드는 비용이 소위 발전했다고 하는 나라 12개국의 교육비와 맞먹는 것입니다. 20세기는 "죽음의 세기"였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1980년까지 80년 동안에 전쟁으로 죽은 자가 1억5천만 명입니다. 금세기 말까지는 1억6천만이 넘을 것입니다. 남한 인구의 네 배가 전쟁으로 죽었습니다. 전쟁광들은 아이들까지 싸움을 시켜 죽게 하고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은 15세 미만도 모병하고, 이란은 13세까지 징집하며, 니카라과 정부군은 3천명의 어린이 군인을 가졌고, 콘트라 반군도 12세의 어린이까지 총을 잡게 했습니다. 현재 세계에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군대가 20만명이나 됩니다.(영국 Friends World Committee의 보고서)

지금까지 인류가 이상적인 사회와 국가를 꿈 꾸어왔지만 현실은 이렇게 천국과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께서 인류의 이상향, 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친히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 천국을 소유하는 방법이 물질이나 권력, 힘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 역사상 초창기의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이 6.25동란 무렵에 목포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공산당에 붙잡혔습니다. 끌려가서 심한 고문과 조롱을 당하며 나날을 보내었는데 어느날 한 공산당원이 이 목사님을 끌고 가서 또 고문을 하다가 아주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영감, 내한테 천국 좀 보여 줄 수 있어?"하고는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이목사님은 발길에 채이면서도 "예, 보여드리지요."하고 말했습니다. "야, 죽어서 가는 천당말고 지금 당장 보여주란 말야." 하고는 또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예, 지금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라는 이 목사님의 말에 공산당원은, "어떻게 보여주냐?"고 하며 또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그 때 이목사님은 "예, 천국 본점이야 내 소관이 아니니까 보여 드릴 수 없지만 지점이야 내가 보여 드릴 수 있지요. 그 천국 지점이 바로 제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천국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롱과 심한 고문을 받고 아들같은 사람에게 발길질을 당해도 마음에 분통함이나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더욱 불쌍히 여기며 축복하는 마음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그 분의 말씀대로 생활할 때, 예수처럼 생활할 때 천국 생활의 기쁨을 지금 여기서 누릴 뿐만 아니라 장차 임하게 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꿈꾸는 천국을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생활로 보여줄 수 있는 예수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미국 남북 전쟁시에 어느 장군을 죽이기 위해서 그 장군의 딸에게 한 간첩이 아주 좋은 보석 상자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물론, 보석 상자 안에는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너무 예쁜 상자라 아버지께 자랑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누가 주더냐?' 고 물었더니, 지나가던 좋은 아저씨가 주고 갔다며 어린 딸은 아주 기뻐했습니다. 이 때, 아버지는 딸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아느냐?" "네, 압니다." "그러면, 그 상자를 갖다 버려라." 영문을 모르는 아이는 이 좋은 것을 왜 버리라고 하시는지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좋은 것을 사 주시지도 않으면서 버리라고만 하시니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엄하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아느냐?" "네. 압니다." "그러면, 네 손으로 저 멀리 갖다 버려라." 아이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멀리 내다버리고 돌아서는데, 그 상자는 "꽝!" 하고 터졌습니다. 장군의 딸은 아버지를 믿고 인격을 믿었기에 버렸습니다. 내가 다 알고, 다 경험하고, 그리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천당을 가 보고 믿겠다고 말합니까? 가 보고 알 때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믿음으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찬송가 545장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는 1892년 초창기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48년 동안 일하다가 미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인에게 추방된 윌리암 스왈렌(William Swallen)목사의 시입니다. 백 년 전의 한국입니다. 너무나도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 한국인들, 특히 초대 한국 교회에는 가난한 층과 부녀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한국 여인들의 한에 맺힌 눈물의 생활(三從之道 등)을 보고 이 가난과 눈물을 견딜 수 있는 힘은 "하늘 가는 밝은 길, 저 높은 곳을 바라보는 데"서 올 수밖에 없음을 알고 한국 교인들이 찬송으로 부르게 하기 위하여 지어서 급한대로 애환의 민요 애니 로리(Annie Laurie)곡에 붙여 보급시켰던 것입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보고 있는 자, 그리고 방향을 확정한 자, 그 밝음을 향하여 올라가는 자는 슬픈 일과 고생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문제를 사소한 일로 여겨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어둠 속에서도 항상 빛을 볼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항상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천국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할 때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천국은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팀이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병원에서 도와주는 사랑의 모습을 찍은 기록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그 학생들의 IG-A(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를 검사했습니다. 일주일 후 같은 학생들에게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잔인한 기록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IG-A를 조사했더니 사랑의 영화를 본 뒤의 IG-A수치가 훨씬 높았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각이 어떤 사랑의 능력에 연결될 때 병균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어찌 병균뿐이겠습니까? 세상과 싸우는 힘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위력을 가졌습니다. 상식과 지식을 넘어선 놀라운 힘이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내가 연결될 때 그 능력과 권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UCB(바클레 대학)에서도 비슷한 실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쥐에게 먹이를 줘서 키우는데 세 종류로 분류하였습니다. 1번 쥐는 혼자 먹게 하였습니다. 2번 쥐는 다섯 마리가 함께 먹게 하였습니다. 3번 쥐는 사람이 손에 들고 먹이를 먹여 주며 키웠습니다. 즉 사람의 사랑을 느끼며 먹고 자라게 한 것입니다. 1번 쥐는 600일을 살고 2번 쥐는 700일을 살았으며 3번 쥐는 950일을 살았습니다. 1번 쥐는 뇌가 가장 가벼웠고 2번 쥐들의 뇌는 1번보다 더 무거웠으며 3번 쥐의 뇌세포는 사방의 세포들과 많은 연결을 맺으며 뻗고 발달하여 훨씬 무거운 뇌가 되어 있었습니다. 쥐에게 사람을 알거나 이해할 능력은 없지만 쥐의 지락을 초월한 어떤 큰 존재의 사랑과 연결될 때 생물학적으로 뇌하수체 속의 성장 호르몬 인자를 얼마나 자극하여 건강하게 살고 오래 사는 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지배를 받고 살게 될 때 진실로 천국의 기쁨과 행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확인하고 느끼며 살게 될 때 죄악 세상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져 세상을 이기고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은 천국에서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더 원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서구세계를 움직여 나갔던 힘은 장차 도래할 저 세상에서 주어지는 행복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천국에 대한 희망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한 삶에 대한 희망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것이 자신의 생존시에 아니면 자기의 후손들에게서 충족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종말론적 개념들이 정치. 경제. 사회라는 세속적인 영역 속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천국이라는 개념은 이 세상에서 건설되는 유토피아라는 사상으로 세속화되었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활력뿐만 아니라 불화를, 열렬한 희망뿐만 아니라 엄청난 공포까지 가져다주었습니다.""(칼럼니스트 시드니 해리스) 영국의 도덕적 타락에 대하여 윈스턴 처칠경은 "대영제국의 도덕이 이렇게 까지 타락하고 문란한 상태에 이르게 된 이유는 이 나라에 천국과 지옥이 더 이상 선포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라고 논평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가야 할 천국도 없고, 피해야 할 지옥도 없다면 왜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으며, 왜 먹고 마시고 즐기지 않겠는가?" 천당이 있습니다.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 믿는 믿음으로서만 가는 나라입니다. 예수 없는 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예수 계신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여러분의 가정에 예수께서 항상 계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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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생명을 지향하는 길      

"(요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요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슬람교를 믿던 터키 사람이 성경과 예수교 서적을 읽다가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교사에게 들켜서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심문하는 교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게 질문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질문인데?" "일전에 내가 어디를 가다 길을 잃었는데 옆을 보니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두 명이 있었습니다. 내가 길을 물어 본다면 어떤 사람에게 물어봐야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지." "그런 줄 알면서 왜 당신은 죽은 사람에게 길을 물어 보라고 하십니까?" "아니 이 사람, 누가 죽은 사람 보고 길을 물으라고 했나?" "당신들이 믿으라고 하는 마호메트는 죽은 사람이요, 내가 믿으려고 애쓰는 예수는 산 예수입니다. 어찌 죽은 마호메트를 의지하겠습니까? 길 되신 예수를 따라야 할 것이 뻔한 노릇인데 인도자를 찾아 가는 나를 왜 괴롭히십니까?" 그러자 교사는 아무 대답도 못하다가 한참 후에, "네 마음대로 하라."라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에 이르는 참된 길입니다. 인간은 저마다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는 길은 생명에 이르는 길이냐 아니면 사망에 이르는 길이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제껏 과거의 많은 철학자들, 많은 종교가들, 많은 사상가들은 저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하여 왔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진리를 가르치고 절대자에 대하여 수많은 논란을 벌여왔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확실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말세가 되었다고 개탄합니다. 그렇지만 길을 잃고 방황하며 고생하는 사람은 많지만 참 생명의 길을 찾아 나서는 사람은 의외로 적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그들이 참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지 않고 자신들이 가고 있는 돈의 길, 쾌락의 길, 명예의 길을 조금만 더 가면 거기 진정한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느 길로도 생명에 이르지 못합니다. 천국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놓으시고 그 길로 직접 우리를 인도해 가기 위해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도에 파송된 선교사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새벽 3시에 인도 사람을 데리고 사람 없는 들로 나갔습니다. 구름까지 덮여 있는 새벽 하늘은 몹시 캄캄했습니다. 게다가 앞서 가던 인도 사람이 검은 옷을 입어서 다만 음성만 들으며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따라가던 선교사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소리쳤습니다. "어디가 길입니까?" 그러자 인도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기는 길이 없습니다. 나를 따라 오십시오. 내가 곧 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캄캄한 세상에 생명의 길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그 외 다른 길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만이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교회는 바로 그 천국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천국 가는, 길잡이 안내소(Welcome Center)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친구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산간지방에서 자라서 그 지역의 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산에 올라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미국의 산은 매우 거대하기 때문에 산 속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곧 목숨을 잃는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그는 힘을 다해서 길을 찾고자 노력하던 중에 다행스럽게도 산 속에 있는 오두막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오두막에는 혼자 사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인이 한 말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젊은이, 산에서 길을 잃으면 사람들은 보통 얼른 내려가서 동리나 길을 찾겠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것은 죽는 길이라오. 산 속에서 길을 잃으면 반대로 위로 올라가야만 사는 것이라오. 산꼭대기에 서서 자기가 있는 위치를 파악하고 어디에 길이 있는지, 어떤 쪽에 마을이 있는지를 분명히 확인하고 내려가는 것이 사는 길이라오." 인생이란 때로는 사는 길을 잃어버리고 막막한 지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살아나는 길은 성산(교회)에 오르는 것입니다.

"(시87:1)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시87:2)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이르는 성전 <휘장> 가운데로 우리 앞에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두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생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런던의 지리적인 중심부는 <체어링 십자로>입니다. 모든 거리는 여기서부터 측정됩니다. 그래서 이곳을 그냥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 길을 잃은 꼬마아이가 런던의 순경에게 발견되었는데 이 아이는 너무도 무서워 집의 위치도 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순경이 아이를 달래면서 물어보자 이 꼬마는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로 데려다 주면, 거기서부터는 찾아갈 수 있을거예요."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십자가로 와야만 합니다. 생사의 갈림길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사는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는 햄릿의 독백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숙부와 재혼하여 정욕의 허기를 채우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덴마크 왕자 햄릿의 고뇌에 찬 절규가 바로 나타난 명언입니다. 사실 생명을 끊음으로 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햄릿은 뜻밖의 구원을 만난 양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고 자칫하면 고민만 영원 가운데 주입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게다가 자살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햄릿은 스스로 죽지 못했습니다. 햄릿의 이말은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결정하기가 어려운 것은 생사의 나눔이다."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존재치 않을 것인가, 문제는 그것이다." "산다 못산다, 그것이 문제로다." "오래 갈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의문이다." "생과 사 그것이 문제다." "사는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생이냐 죽음이냐 그것이 의문이다." 어떤 미국 학생이 어감을 살려 만든 재미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TV or not TV, that is the question" '텔레비젼을 볼까 아니면 보지 않고 일어나 공부를 할까.' 비록 이것은 햄릿의 중차대한 갈등과는 비교도 안되지만 어쨋든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갈등입니다.

"(렘21: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또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 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뉴저지주에는 한지붕 밑에 열 개의 영화관이 있는데, 미시간에는 28개의 영화관이 한 건물 속에 있는 "studio 28"이 생겼습니다. 극장 앞 간판에서 28개의 영화 중 하나를 고르려면 상당한 시간과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슈퍼마앛 진열장에는 2만 5천 종의 상품이 놓여 있습니다. TV는 53개 방송국이 있습니다. 주.월간 잡지는 1만1천92 종입니다. 헬스클럽 등 취미별 그룹은 수천을 헤아립니다. 그 속에서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소위 미국식 생활(American Way)입니다. 좋은 점도 있지만 골머리가 아프고 피곤해지기도 합니다. 보스톤의 대학생 톰 프랭클린은 시내 37개의 식당과 슈퍼마켓 몇 군데를 순방하며 커피의 종류를 조사했더니 54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커피 한 잔 마시는 데도 위협을 당하는 느낌이다."라며 톰은 너무 많은 선택 속에서 위축감을 느끼고 있다고 실토했습니다. 학교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결혼을 할 것인가? 독신으로 지낼 것인가? 결혼생활을 억지로 지속할 것인가? 헤어질 것인가? 재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이를 가질 것인가? 안 가질 것인가? 고향 가까이 살 것인가? 떠날 것인가?...등 선택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번에 미국 유대교는 8백쪽에 달하던 전통적 기도서를 개정하여 되도록 단순한 책으로 엮어 냈는데 40년만에 개정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회생활에서 너무 선택의 종류가 많아 종교에서는 단순하게 믿는 것을 사람들이 원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교리문답 등 간편한 음식을 준비해서 받아먹기만 하면 되게 만들어졌습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선택의 기회가 많은 것처럼 살아가는 길이 무척이나 다양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갖고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옳은 길을 바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을 수 있지만 크게 나눠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의 길입니다. 먼저 악의 길(잠1:15.16)의 성격을 보면, 굽은 길(잠10:9), 허무한 길(사59:7), 어둠의 길(욥24:13), 죄의 길(호2:6), 황폐케 되는 길(사59:7), 사망의 길(잠14:12) 등으로 나타납니다. 다음 의의 길(시23:3)은 진리의 길(시25:10), 평탄한 길(시27:11)이요, 부요한 길(시65:11)이요, 정직한 길(잠2:13)이기에 생명의 길이요(잠2:19), 평강의 길로 설명이 됩니다(잠3:17). 이사야 35:8에서는 이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사35:8)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그러나 인류는 "거룩한 길"을 걸어오기보다는 "피 묻은 길"을 달려왔습니다.

가인의 때로부터

온 세기를 통하여

인류는

미움과 권력의 길을

활보하였다.

이 얼마나

피묻은 길이었던고.

93년도 미스 트레이시 리퍼드양이 94년도 미스 윌리엄스버그양에게 왕관을 물려 줄 때 관객들은 지난 1년 동안 미(美)의 사절로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그녀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1m 83cm, 금발의 이 미녀는 그 다음날 아침 일찍 4백km 떨어진 웨스트 버지니아주 루이스버그로 출발했습니다. 그녀의 차 안에는 권총 망치 푸주칼 휘발유 성냥이 준비돼 있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과속으로 교통경찰에 적발되자 어디서 훔친 뉴욕주 차 번호판으로 바꿨습니다. 리퍼드는 목적지에 도착해 로드니 웨이클씨 집을 노크했습니다. <차가 고장나 전화 좀 사용해도 되느냐>고 묻곤 물 한 컵 달라고 했습니다. 웨이클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망치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20여년간 백악관 경호원 생활을 한 웨이클은 재빨리 리퍼드의 머리를 팔에 끼어 눌렀습니다.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부인 카린과 함께 그녀의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뺏은 뒤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경찰에 넘겨진 리퍼드는 자신의 애인을 빼앗아 간 웨이클 부부의 딸 멜리사와 애인 토드 스코트를 살해 할 계획이었다는 끔찍스런 범행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녀가 스코트에게 물어 볼 <너, 지금도 멜리사에 폭 빠져있니> <언제부터 만났니> 등 심문 리스트가 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6일 살인 미수, 흉기 은닉소지 등 혐의에 대한 리퍼드의 첫 공판이 열렸습니다. 스코트는 법정에서 리퍼드가 대학 4년때인 작년 12월 처음 만나 두 세번 데이트하다가 그전부터 교제해 온 멜리사가 임신 5개월인 사실을 알고는 곧바로 리퍼드와 헤어졌다고 진술했습니다. 스코트의 아내가 된 멜리사는 7개월된 딸을 안고서 연적(戀敵)의 공판을 지켜봤습니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미녀일지라도 사랑하는 방법(길, Way)을 모르기 때문에 <피묻은 길>을 선택하여 가장 추하고 악한 모습의 인간으로 전락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I am the Way) "길" 즉, the Way는 방법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the way how to love) 사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the way how to live) 성공하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the way how to success) 행복해지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the way how to be happy) 돈 버는 바른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the way how to make money) 공부하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the way how to study) 용서하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the way how to forgive) 예수가 바로 그 방법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 방법입니다. 개인의 삶과 가정, 그리고 나라 민족의 사는 모든 방법이 예수 십자가에 있습니다.(Master key) 생명에 이르는 예수 끝까지 믿으시고 모든 삶의 천국 열쇠를 받으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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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믿음으로 가는 길          

"(요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칼 바르트는 "하나님은 알 수 있는 분이지 볼 수는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나 예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입니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고전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말씀에서 '본다'는 말과 '안다'는 말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지만 궁극적인 천국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온전하게 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보고 싶다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알자는 것이지 보자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영원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영생에 대한 소유와 모든 것을 아는 것, 그리고 능력과 권능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말씀 속에서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길 즉,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육신으로 만날 수 없는 예수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방법을 이렇게 말합니다.

"(골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연합하여"란 헬라어는 "숨비바조(?????????,sumbibazo)"로서 "짜여진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색깔의 털실로 스웨터가 짜져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주듯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도 사랑으로 연합할 때 아름다워진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의 짜짐, 사랑의 연결 속에서 예수를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도 마찬가지로 말합니다.

"(요일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예수를 알 수 있는 길 즉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헨리 누엔(Henri Nouwen)박사가 교수직을 사임하고 매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정신박약자 시설인 데이브레이크(Daybreak) 학원의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신학자가 하버드 교수의 많은 보수와 명예를 버리고 정신박약자들의 용변 지도와 행동 교정과 식사. 세수. 옷 입히는 훈련 같은 구질구질하고 고생스러운 일에 작은 보수를 받고 종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신학자가 학생들을 가르쳐 훌륭한 목사와 학자들을 길러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왜 하버드를 떠나 정신박약자 시설에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누엔 박사는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란 책입니다. 여기에서 누엔 박사는 "예수를 정말 아는 길이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나아가서는 "예수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길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의 결론은 예수를 아는 길은 <내리막길을 살아봐야 한다.>(downward mobility)는 것입니다. 예수가 보였던 종의 모습에서, 곧 내리막길에서만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엔 박사 자신은 그 동안 올라가는 길만 추구해 왔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천재신동이라 추앙되었고, 하버드 대학의 교수까지 이르는 정상에 올랐으며, 20여 권의 저서는 모두가 베스트 셀러이고, 그의 얼굴은 한 번만이라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전세계에 깔려 있습니다. 누엔은 말합니다. "나는 그 동안 작은 성공의 외로운 꼭대기를 향하여, 작은 인기, 작은 권력의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만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어느 날 아담(정신박약자 중 한 청년)군 곁에 앉았을 때 이런 인간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예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안 보인다. 내리막길에서만이 진정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오늘 우리들은 높고 큰데서 예수를 만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진급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성공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시험에 합격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출세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건강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가정은 가난한 목수 직업의 아버지 요셉과 농부의 딸 어머니 마리아의 가정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문명에서 소외된 작은 목동의 마을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나시고자 하면 높아지고 커지려고 하지 말고 낮아지고 작아져야만 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게 될 때 예수를 볼 수 있으며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높고 큰 데에 계시지 않고 낮은데 작은 모습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랑은 겸손으로 성취됩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높은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낮은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표적을 베푸신 곳들은 모두가 다 낮은 곳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만나서 새 생명을 베푸셨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낮고 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된 불구자,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 세리 마태, 아니 예수의 제자들 모두가 다 가난한 어부 출신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다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며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사회에서 가장 높은데 있었던 바리새인, 서기관들, 제사장들은 오히려 예수를 만났지만 그리고 많은 표적과 말씀을 들었지만 지위와 명예, 부귀 영화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고 사랑의 표현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알고 있고 연구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사랑을 모르고 행하지 못하므로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표적들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못한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표적,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표적,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들 눈뜨게 하신 표적,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등등을 보여주셨건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고 빌립이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요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답답한 심정으로 말씀하십니다.

"(요14:9)....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그토록 많은 표적과 권능있는 예수의 말씀들을 보고 들었으면서도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그 여러 표적들과 말씀들만 보고 들었을 뿐 그것들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많은 표적들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사람의 생명인데 그 생명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많은 표적들을 나타내 보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표적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볼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표적 중에 표적은 무엇보다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시기 원하십니까? 낮고 천한 인간이 되신 예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보시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십시오. 서부 영화에 <쉐인>(Shane)이 있습니다. 작가가 주인공 쉐인을 통하여 그리스도상을 부각하려고 시도한 작품입니다. 한적한 광야에 외딴 집 한 채가 있습니다. 어린 아들 하나를 둔 부부, 그들은 착하고 힘없는 개척민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조와 마리온(Joe and Marion)이라고 붙인 것도 요셉과 마리아(Joseph and Mary)의 은유라고 합니다. 이들을 무례한 총잡이들이 괴롭힙니다. 이 집에 홀연히 나타나는 신비한 인물이 바로 쉐인입니다. 그는 얼마동안 이 집에 유하면서 그들은 격려하며 희망을 잃지 않게 하고, 어린 소년에게 참다운 용기와 사랑을 가르치고 자기의 목숨을 걸고 악한들로부터 이 착한 가정을 보호합니다. 일이 해결되어 다시 평화롭게 되자 이 신비한 나그네는 정처없이 지평선을 향해 떠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쉐인이 구름을 타고 올라가듯 광야의 먼지 속으로 사라질 무렵 소년은 그의 구세주와 같은 거룩함을 알며, 그를 따라가고 싶지만 광야에 머물러 자기도 쉐인과 같은 사랑과 정의의 사람이 되고자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랑입니까? 지저분한 얘기에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고 도움이 필요한 구석에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높고 큰데 계시지 않습니다. 낮고 작은 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환난 중에서도, 실패와 낭패 중에서도, 가난과 병고 중에서도, 고독과 아픔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시고 예수보다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의 길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높고 크신 사람들은 마음을 낮추시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사랑을 베푸심으로 하나님을 보시고 믿음의 능력과 권능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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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랑의 표준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요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순종으로서 표시하셨습니다. 사랑의 표준은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말로만 표현하고 행함이 없으면 거짓된 사랑입니다. 거짓된 사랑에는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은 진리(진실, 참)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수반되지 않는 사랑 또한 거짓된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사랑하고, 성령으로 봉사할 때 참 사랑이요 참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일3: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상대방에게 아픔과 괴로움, 비통함을 안겨주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게 한 적은 없습니까? 예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예수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은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며 교회의 성장을 방해한 적은 없습니까? 부모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부모의 마음에 못 박은 것은 없습니까?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고 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미움 쪽에서는 떠나고 사랑 쪽에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삼상18: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18:14)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삼상18:28)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랑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미움과 질투, 증오와 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한 곳에는 예수께서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원수까지일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예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자기를 사랑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던 것입니다. 사랑은커녕 오히려 증오하여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 적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음악 영화 <지붕 위의 제금사>(Fiddler on the Roof)에서 남편 테부이가 아내 골디에게, "나를 사랑하오?" 하고 묻습니다. 골디는 기가 막혀 한참동안 말을 못하다가 대답하는 독창을 합니다. "25년 동안 당신의 옷을 빨고 식사준비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당신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소젖을 짜고 내 있는 것을 다 드렸는데 25년 후에 한다는 소리가 사랑하냐구요?"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진정한 사랑은 온전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나타나는 사랑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끝까지 순종하는 십자가의 길이 그토록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처럼, 사랑의 순종은 그 길이 힘들고 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 없습니다. 사랑에 따르는 순종의 어려움을 예수께서 아시고 우리에게 "보혜사(Helper)"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보혜사(保惠師,Helper)"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인데 이는 <청함 받은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고소, 고발을 당해 형벌을 받게 될 누군가를 위해 변호하기 위해서 <청함 받은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곤란이나 고민, 의혹 또는 당황하는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돕기 위하여 <청함 받은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의 일을 잘 처리하여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보혜사(Helper)"입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보혜사(Helper)"가 바로 성령입니다. "보혜사(Helper)"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들의 불완전한 것을 제거해 주시고 우리들이 인생을 잘 처리할 수 있게 하여 주십니다. "보혜사(Helper)"되시는 성령께서는 패배의 삶을 승리의 삶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보혜사(Helper)" 성령은 삶의 모든 것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진리를 위한 싸움을 잘 싸울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보혜사(Helper)" 성령은 세상에서 사랑에 실패한 사람을 참 사랑으로 인도하여 아프고 괴로웠던 사랑을 치유하시고 기쁘고 즐거운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보혜사(Helper)" 성령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십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통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있음에도 고멜은 정부와 눈이 맞아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다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정부와 놀아난 네 아내를 찾아가 다시 사랑해 주어라." 호세아는 은 15세겔과 보리 한 호멜을 가지고 가서 창부가 된 고멜을 산 후에 이렇게 일렀습니다. "당신은 내 아내니 다시는 다른 남자와 어울려 불의한 관계를 갖지 마시오." 이렇게 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거듭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결국 고멜을 사랑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호세아의 이러한 순종은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암시하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사랑을 성공시킨 호세아의 사랑의 승리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보혜사(Helper)" 성령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면 세상은 마치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고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보혜사(Helper)" 성령이 거할 수 있는 성소(聖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의 전(殿)>이 되어져야만 합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우상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의 사랑은 땅에 있는 것들에 집착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그리스도의 영, "보혜사(Helper)" 성령이 그의 마음에 거처를 정할 수 있으려면 먼저 부정한 영(靈)이 나가야만 합니다.

"(마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예수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 말씀과 성령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나갔던 세상의 영, 마귀는 더 많은 악신들을 불러들여 이전보다 더 악한 형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들, 이전보다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마음은 세상의 영들로 가득차게 되어 거짓된 사랑과 거짓된 것에 속아 실패한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는 마음속에는 거할 수 없습니다. 천문학자들은 우리 일반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먼 거리까지 하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식물학자는 식물학을 모르는 사람보다 휠씬 더 관목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보다 휠씬 더 정확하게 진단하고 병을 고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미술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분야에 무식한 사람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그림 가운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음악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교향곡을 듣고서 전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보다 더 "보혜사(Helper)" 성령을 잘 알고 깨닫게 됩니다. "보혜사(Helper)" 성령은 누구의 마음속에라도 청함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처럼 분주하고 시끄러운 소용돌이 생활 가운데서도 성령과 그 능력이 임하시기를 조용히 바라며 기다리는 시간을 특별히 별도로 설정해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믿는다고 하면서 성령을 구하지 않으면 참 사랑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런던의 유명한 샤프츠버리 경이 길을 지나가는데 어린아이가 횡단 보도를 지나가다가 자기의 힘으로 걸어 갈 수 없으니까 "아저씨, 나를 도와 주세요." 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샤프츠버리 경은 이 아이를 안고 길을 건너가 내려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샤프츠버리 경은 어린 소년으로부터 위대한 신앙의 교훈을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즉 우리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하며 소년처럼 도움을 요청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삶의 에너지를 공급받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가 "나를 도와 주세요." 하고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눅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11: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눅11: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눅11: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믿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을 진심으로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 사랑을 구하면서도 성령을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바른 신앙 고백과 바르고 참된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말씀들은 오직 예수를 구세주로 마음속에 영접하여 받아들이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보혜사(Helper)" 성령이 임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가장 큰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을 받고 나서는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살전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소멸"이라는 말은 불을 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억제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법궤가 들어올 때 너무 기쁜 나머지 옷을 다 벗고 춤을 추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간증이요, 고백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일어날 때는 성령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을 소멸시키는 결과가 됩니다. 성령을 소멸시키지 않는 방법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양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실 때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비록 내게 손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불 보듯이 뻔하게 자신에게 유익이 없을지라도 자신의 의지와 생각, 고집을 꺾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고 어떤 경우에도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예루살렘에 혹독한 박해와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사도들과 하나님의 종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곳을 떠날 수밖에 없어서 이방 나라인 안디옥, 빌립보, 고린도 등 등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결과 세계 복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환난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슬픔과 고통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어지게 하심으로써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성령을 소멸치 않을 때 사랑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언제 슬퍼합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더러워질 때 성령께서는 슬퍼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그리고 사랑하려면 우리 역시 거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항상 깨끗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영육간에 더러워졌을 때 떠나십니다. 그는 거룩하신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회개하는 생활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만 합니다. 몸과 마음이 깨끗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거룩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이 깨끗할 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참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비둘기는 결코 쓰레기통에 가서 뒤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도 깨끗한 곳에 임하지 추한 곳에 임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생활, 성별된 생활, 이것이 바로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 태도입니다. 다음으로, 성령과 동행하는 생활이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는 능력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수 한 분이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논문을 내게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학위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만 그의 학위 논문 심의가 다음 해로 미루어지게 되었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마감일에 이틀 늦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알아보니까 그의 논문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도 아니데 일 년 동안 미국에서 목회를 하면서 그의 지도 교수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서로 원만한 연락을 취하며 관계성을 유지하면서 지냈더라면 그 교수가 이해를 했을텐데 일 년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논문을 제출하니까 지도 교수는 그의 논문이 마감보다 이틀 늦었다고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관계성을 맺을 때에는 "이해할 수 있어요. 열심히 노력하시오." 라고 오히려 격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관계성을 맺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과 끊임없이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문을 두드릴 때에, 때에 따라서 우리에게 후하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과의 교통을 지속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사랑을 지속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성령과의 지속적인 교통함을 이룩할 때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게 되므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과의 지속적인 교통함이 두절되게 되면 자연히 인간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게 마련입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삶은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미국에 사는 이사벨이라는 부인은 해산을 하다가 갑자기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그 부인은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많은 재산을 허비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병 치료를 포기하고 나머지 돈으로 당시 한국 동란 중에 고생하는 전쟁 고아를 위하여 보내 주었습니다. 그것을 기금으로 해서 부산에 고아원이 생겼는데 후일 그 고아원은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사벨 부인은 그 후로 1년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모인 가족과 친지들은 이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치료비를 한국에 보내서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놀랐습니다. 부인의 최후의 치료비에 의해서 세워진 그 학교가 창립된 지 2주년이 되던 날 그의 남편인 데이비드씨가 초청을 받고 창립 기념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아내가 치료비를 모아서 보내 세워진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그는 매우 감격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 학교의 교사가 건축 중에 재정이 부족하여 곤란을 당한다는 사정을 들은 데이비드씨는 미국에 있는 자기의 집과 재산을 저당잡혀서 약 6만불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오늘날 4,500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부산의 이사벨 여자 중고등학교입니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보다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사랑하시고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예수도 또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사람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서로가 사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사랑은 순종에 기초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할수록 그 만큼 우리들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는 마음속에는 거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진실한 가를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은 그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보혜사(Helper)"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 약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결심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시험에 빠지게 되면 그 결심을 포기할 가능성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요21:15)...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세번씩이나 사랑을 다짐하고 결심하고 고백했지만 그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체험을 하고서야 비로소 그가 고백한 사랑, 그가 결심한 사랑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시고자 하는 여러분들에게 사랑의 능력이 되시는 "보혜사(Helper)"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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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의 평안          

 "(요14: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요14: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요14: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요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1. <키노>와 <쥬안나>는 가난하지만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착한 인디안 부부입니다. 그들은 사이에 한 아들을 두고서 단란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전갈에 물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경을 헤매는 아이를 업고 병원문을 두드려 대지만 어느 곳 하나 이 가난한 인디안 소년을 받아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절망과 분노 그리고 애원이 뒤섞인 마음을 쓸어안고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민간 요법으로 아들을 응급처치만 해주고 진주 잡이를 나갔습니다. "기필코 진주를 캐야 합니다. 우리 아들을 살리게 도와 주소서." 그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마침내 그들은 갈매기 알만한 커다란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키노 부부가 진주를 캤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시는 온통 술렁거렸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치료를 거부했던 의사들은 키노의 아이를 맡겠다고 하고 거지들까지 자선을 기대하며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의 기쁨도 잠시, 그날 밤 그들은 진주를 탐내는 괴한의 침입을 받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점차 진주를 복이 아니라 화근으로 느끼게 된 쥬안나는 어느 날 남편 몰래 진주를 바다에 던지려 나가다 뒤따라온 키노의 만류로 결국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키노는 또 괴한의 습격을 받고 격투 끝에 괴한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아! 이를 어떻해요? 우리가 사람을 죽이다니...." 결국 그들은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집은 불타고, 타고 가려던 배마저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산으로 도망하는데 거기까지 진주를 탐내는 악당들이 쫓아와 다시 일대 격투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서 키노는 오발로 자기 아들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럴 수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캐낸 진주가 오히려 아들을 죽이다니..." 예전의 초라한 오막살이로 돌아온 그들 부부는 한동안 넋을 놓고 손바닥의 진주만 쳐다보았습니다. 어둠이 깔려갈 무렵 키노는 힘껏 바다로 나가 진주를 던졌습니다. 그러자 진주는 검푸른 물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는 죤 스타인백(1902-1968)의 <진주>라는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곧 근심과 두려움, 그리고 마침내는 사망입니다.

예레미야의 시대에 유다 땅 전역에는 심각한 문제가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대규모의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기 위하여 진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멸망의 그림자가 그들 위에 드리워지고 있었을 때에, 그들의 악한 행위를 본질적으로 고치는 않으면서 "평안하다, 평안하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렘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진정한 평안은 없는데도 평안을 이야기한 유다 백성들의 예는 세상의 평안이 거짓된 것임을 잘 말해 줍니다. 세상에는 참 평안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이며 환상에 불과합니다. 세계의 정치인들은 권력을 잡을 때마다 세계 평화를 약속했고 사람들은 이같은 약속이 실현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무솔리니는 로마의 영화를 이탈리아 국민에게 회복시킨다고 하면서 에디오피아를 침공, 2차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 통치와 전 유럽 평화를 약속하면서 튜튼 족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레닌과 스탈린은 평화와 계급없는 사회를 약속했으나 음모, 배신, 폭행, 대학살, 예속, 세계정복이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2차세계대전 이전에 <타임>지에 레닌과 스탈린, 처칠, 루스벨트 등의 평화구상이 나왔으나 그들의 구상은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에 주는 것 같지 않은 평안, 곧 "나의 평안"을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류가 만들어 가는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안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주시는 평안'으로 세상이 주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문제(십자가)를 도피하는 평안, 현실을 피해가려는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문제(십자가)를 극복하는 평안입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일도, 슬픔이나 위기나 박해라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평안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환경에 의해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변화시키는 초자연적이고 영속적이고 적극적이며 부작용이 전혀 없는 실로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이러한 평안, 곧 "나의 평안", 예수의 평안, 하나님의 평안은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아낌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2. 평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에게는 본질적으로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과 지식과 권세, 부귀 영화가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과 불화 상태에 있는 사람은 평안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서만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클라크는 42세된 재판관인데 정신의학자 크레인 박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불안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또한 그런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런 정신 의학적인 문제들을 제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크레인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매일매일의 삶의 동반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삶의 긴장이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거의 정신적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얼마 못 가서 수많은 걱정과 근심에 짓눌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궤양, 암, 정신병과 같은 질병으로 건강을 헤치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늘 안달하는 전형적인 건강염려증(hypochondriac) 환자가 됩니다. 만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을 배운다면, 인간 질병의 50%를 정신 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의학 교육자들의 처방은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협력하는 방법은 바로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서는 근본적으로 예수가 임해야만 평안이 있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사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는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놓고서도 평안하실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시25: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시25: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그러나 이 보혜사는 독자적으로 계시나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고 그것을 다시 새롭게 깨닫게 하는 차원에서 교사의 기능을 수행하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인간은 진리를 깨달을 수 없으며 생명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이 임하시는 결과 바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불안은 모르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까지라도 통달하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자연히 모든 불안은 사라지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할 때 인간은 진정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27절을 보십시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눈 앞에 둔 초상집 같은 상황이며, 사랑하는 제자들 가운데 자신을 배신할 가롯 유다가 끼어 있는 그야말로 어떤 면으로 보아도 기쁨과 평안을 얻을 일이 전혀 없는 처지였습니다.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과 평안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데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다 하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십자가에 죽어갈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 기쁨과 평안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진정한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거역하고서는 평안이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사시므로 참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될 때 평안이 주어지는 것이지 평안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가르치시고 또한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을 평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평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까지일지라도 두렵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신랑되시는 부활의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확실한 약속과 믿음을 가진 신부된 성도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기뻐하고 평안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데 진실로 이 예수를 사랑한다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기뻐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면 예수를 믿을 수 있으며 또한 예수를 믿는다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아브라함에 관한 영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하나님 앞에 바치려는 장면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숨막히는 순간입니까? 작가는 성경에 없는 자기 상상으로 이 장면을 잘 처리하고 있기에 여기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삭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아느냐?" "네, 압니다." "얼마나 사랑하는 것 같으냐?" "아버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줄 압니다." "그렇다. 그러면, 이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든지 이것 모두가 너를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느냐?" "네, 믿습니다." "좋다. 여기 누워라." 이삭은 순종하여 그대로 눕고, 아버지는 제물을 위해 아들을 향해서 칼을 높이 듭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 죽이는 것까지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므로,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앞에 전개되는 사건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므로 있어진다고 믿고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아버지께 감을 기뻐하였으리라."며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모든 환경에서 기뻐하고 평안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실패 가운데서도, 병든 가운데서도, 아니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소화하게 되고 평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믿어지고 믿어지면 평안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시고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평안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한다할지라도 평안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 앞에서도 평안하셨던 예수의 평안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항상 평생동안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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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삶의 열매          

   "(요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요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어느 조그마한 도시에 구두 가게를 운영하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평생 동안 바라던 꿈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살아 생전에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 속에 예수님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내일 내가 너의 집을 방문하겠다." 다음날 아침 꿈을 깬 할아버지는 뛸듯이 기뻐하며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마련하는 등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벌써 정오인데...., 조금 늦게 오시려나?" 바로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너무도 지저분한 거지가 들어 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위해 깨끗이 청소를 해둔 집이 지저분해질까봐 잠시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배고품에 지쳐 있는 거지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아프게 들어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기꺼이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거지가 돌아간 뒤에도 그는 예수님을 기다렸으나 밤이 늦도록 예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청소부 영감과 사과 장수 아주머니만 다녀갔을 뿐이었습니다. 구두방 할아버지는 이들에게도 기꺼이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날 밤 꿈에 다시 예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나는 너를 세 번 찾아갔단다. 그런데 너로부터 세 번 다 후한 대접을 받았구나. 진실로 나를 사랑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의 열매를 맺는 자로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무화과 나무가 가시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또한 포도나무에서 엉겅퀴를 구할 수 없듯이 나무는 그 맺는 열매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는 없지만 다만 그 사람의 외적인 생활로써 그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외적인 생활은 그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타나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의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열매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까? 이러한 열매는 겉모습으로부터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된 본성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실로 의로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그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지 않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므로 곧 찍혀 불에 던져질 화목에 될 뿐입니다.

"(겔15: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15:2)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겔15:3)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겔15:4)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겔15:5)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겔15:6)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내가 수풀 가운데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화목이 되게 한 것같이 내가 예루살렘 거민도 그같이 할지라 (겔15:7)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겔15:8) 내가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오늘 본문 어두에서 "(요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참 포도나무"는 예수 자신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위 자기 선언(自己宣言, "내가 생명의 떡이다."-6:48,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등 등)은 오직 예수만이 참 종교요 예수만이 참 진리되심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지가 되는 모든 성도들은 참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와 연합할 때만이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타락한 포도나무입니다. 참 포도나무는 오직 예수뿐이십니다. 구원(생명)에 이르는 길은 이제 타락한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니라 참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를 믿는 신앙뿐입니다. 어떠한 외적인 자격으로도 인간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할 수 없습니다. 참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와의 친교만이 하나님(농부)과 바른 관계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와 지속적인 관계(친교)를 가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가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수액과 영양분을 줄기를 통해서 공급받듯이 성도들 역시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생명되신 예수로부터 생수를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5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말합니다. 다시말해 믿음(빌3:8,9)과 순종(갈5:24)으로 그의 지체가 됨으로써(골1:18, 엡5:30)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식의 열매, 사업의 열매, 권세의 열매, 명예의 열매, 선한 일의 열매 등 등 모든 열매들이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지 않으면 좋은 열매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참 포도나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없는 지식은 무용한 것입니다. 예수없이 배운 지식은 오히려 악용될 소지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없이 번 돈 역시 악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없이 돈 버는 사람이 나라의 경제를 망치는 수도 있습니다. 예수 없이 다스리는 권세는 국가 멸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우시는 나라가 영원한 나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예수 없는 것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예수 없는 사람들의 출세와 성공, 번영을 부러워하시 마십시오. 인생의 추수 때에 보면 빈 껍데기뿐입니다. 시편 73편을 보면, 예수 없이 악행하는 자들이 건강하고 고난이나 재앙도 당하지 않고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소원하는 것보다 더 수입되는 것 등 악인들이 형통한 반면, 예수 믿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은 오히려 아침마다 징책을 당하며 종일토록 재앙을 당하며 사는 것을 보고 거의 실족할 뻔했노라는 갈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악인의 결국이 파멸임을 깨닫고서야 갈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믿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았어도 잘 되었다고 기뻐하지 마십시오. 빛좋은 개살구같은 것입니다. 예수 믿고 말씀대로 했더니 더 힘들고 어렵고 별로 좋아진 것이 없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비록 적고 작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말씀에 대한 순종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에서 볼 때 축복인 것입니다. 어느 어촌의 조그마한 배들이 고기잡이를 떠났습니다. 이 어촌에는 고기잡는 일 외에 다른 직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기잡이 나간 배들이 돌아와야 할 시간에 돌아오질 못했습니다. 풍랑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온 동네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바닷가에 나가서 남편 혹은,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파도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때에 설상가상으로 어느 집에서 어린 아이가 집을 보다가 촛불을 넘어뜨려 불이 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합심해서 이 불을 끄느라고 남편, 아버지를 기다리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물동이를 다 동원해 정신없이 몇 시간을 싸우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는 중에 배가 돌아왔습니다. 무사히 풍랑을 이기며 돌아온 것입니다. 아침이 밝아왔고, 어젯밤의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불끄는 데 누가 가장 애썼고, 풍랑은 또 어떠했느냐, 얼마나 서로가 힘이 들었느냐 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어느 어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웬 불인지는 몰랐으며 어쨌던 불이 보여서 그것을 바라보고 목표를 정해서 결국 집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집에 불이 나지 않았으면 우리 배는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고 두 손을 모았다고 합니다. 집에 불난 것이 실패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어느 것이고 실패가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해도 예수 없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었다해도 예수 안에만 있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만 인생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예수는 추수의 낫을 드시고 알곡들을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계14: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계14: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계14: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계14: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마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인생의 추수 때가 있습니다. 이 한낫을 들고 인생들을 추수할 때(심판의 때) 알곡들이 다 되어 있기를 축원합니다.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예수께 끝까지 남아있고 머물러 있고 붙어있는 사람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열매를 더 풍성히 맺도록 하기 위해서 가지치기하는 아픔이 있다해도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본문 2절>) 끝까지 말씀대로 살며, 성령을 따라 행하시고 사시는 믿음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과 성령을 따라 행할 때에 영적인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자신을 괴롭히는 교인 하나 때문에 새벽마다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 다음과 같은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종이 저 사람 때문에 괴롭고 힘들어 목회를 못하겠으니 다른 곳으로 보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종아, 그 사람을 꼭 내보내야 되겠니?" "그렇사옵니다." "그 사람은 갈 곳이 없다. 내가 구원시켰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교회로 가야 되는데 네가 맡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 아버지, 이 종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주여, 하늘 나라로 데려가 주시옵소서." "아직 때가 안 되었다." "그러면 그의 버릇을 고쳐 주시옵소서. 그 버릇 때문에 이 종이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나도 그 사람 버릇은 못 고친다." "주여, 주께서 왜 못 고치옵니까?" "나도 못 고치기 때문에 내가 죽었다. 나도 그 사람 못 고치겠기에 내가 대신 십자가에 죽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흘린 피로 덮어서 심판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하늘나라로 데려갈 것이다. 너도 고칠 생각 하지마라. 나도 못 고치는데 네가 왜 고치려고 하느냐? 사랑하는 종아, 그 사람 버릇 고치려고 하면 심장이 굳어질 것이다. 그리고 명대로 못 산다. 네가 죽어 내 곁에 오는 것은 좋지만 그 사람 버릇 고치다가 와서야 되겠니?"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책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종아, 그 사람 버릇 고치려고 하지 마라. 버릇 못 고친 채로 내가 데려갈 것이니 너는 조용히 참고 기다려라. 네가 그 사람 구원시킬 것도 아니고, 또 천국으로 데려올 수도 없다." 사람의 성품 변화는 성령의 역사(役事)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맺어지는 성품을 신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벧후1:4)........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1: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인내에 경건을, (벧후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벧후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벧후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열매가 있어야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축복들의 열매들만 요구하지 말고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열매,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야 영원한 축복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영적인 영원한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참 포도나무는 예수이십니다. 농부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지는 우리 인생들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농부가 그 가지를 제해 버리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도록 하기 위해 가지를 깨끗케 하십니다. 예수를 믿으시므로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들이 되기 위하여 그 나무의 수액을 받아야 되는 것처럼 그 분의 말씀과 성령을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많은 열매를 맺어 삶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인생의 알곡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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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기쁨에 이르는 길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기쁨은 인간의 마음에 양약(良藥)과 같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예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므로 기쁨이 충만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목적이 신앙생활에서 기쁨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얻어지는 것은 기쁨(喜樂)인 것입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기독교인은 기쁨의 사람이어야 하고 항상 웃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침울한 기독교인은 진정한 기독교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기독교인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참된 기쁨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즐거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과 기쁨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기쁨이 없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즐거움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입니다. 기쁨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삶의 기쁨이 충만하시고 인생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일 뿐입니다. 예수 믿으시고 영원한 기쁨을,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영원한 즐거움을,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시기 기원합니다. 미국의 한 심장전문의는 어른과 어린이의 웃음을 비교 연구한 결과, 어린이는 하루에 평균 4백번 정도 웃는데 비해 어른은 고작 15번 정도 웃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린이가 어른처럼 잘 웃지 않으면 성장이 늦을 뿐 아니라 각종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습니다. 웃음의 효과에 대해 연구한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윌리엄 프라이 박사는 웃음은 심리적 조깅(jogging)이며 에어로빅이라고까지 말합니다. 프라이박사는 20초동안 크게 소리내어 웃으면 5분간 에어로빅을 하며 몸을 뒤흔든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한번에 5초씩 하루 1백번 웃을 경우 보트의 노젓기를 10분 동안 한 것과 맞먹는 운동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크게 소리내 유쾌하게 웃으면 세포가 활성화하고 신체의 면역능력이 증진된다고 합니다. 실제 건강한 사람은 하루에 1백번 이상 웃는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웃을 일이 없을지라도 예수 믿음으로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신앙 안에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롬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세상에서의 삶에 웃을 일이 없다해도, 나를 구원하신 예수만 생각해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 안에서 기뻐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과실을 맺기 위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하는 것처럼(요15:1-10) 사람의 진정한 기쁨의 열매를 맺는 삶을 위해서는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해도, 어떠한 일을 당한다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궁극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 육신의 유익을 위하심보다 경건의 유익을 위하신 것입니다. 기쁨이 있어야 신앙이 성장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은 믿음을 쇠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어야 감사하게 되고 감사해야 하나님의 축복과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기쁨이 있어야 생활에 힘과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세상일은 물론 하나님께 대한 봉사생활에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죠지 뮬러는 설교를 맡은 경우에 먼저 기도를 많이 하여 기쁨을 얻은 후에야 설교하러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기쁨이 충만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하므로 그물이 찢어질만큼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낚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5: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였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요2:1-11)

"(요2: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주신 계명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행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여 두려움을 몰아내고 기쁨이 충만해지게 됩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기쁨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임하시므로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16)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 본질이십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쁨은 영원히 변치않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계명을 지켜 순종의 오묘함을 배워야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결코 무거운 짐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말씀을 지키는 것이 무겁게만 느껴진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계명,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믿음이 강해지며 영안이 밝아져서 모든 것을 바로 해석하며 기쁜 생활을 항상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계명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요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계명을 사랑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계명에 순종할 때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잠4:13)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하나님의 계명,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자기 생명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한 번은 미국의 큰배가 남태평양에서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큰고래 한 마리가 여러 차례 배에 부딪혀 오므로 해서 배에 구멍이 뚫려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파선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선원들은 작은 보트들을 내려 타고 대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물에 뛰어 들어가 헤엄쳐 큰배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선원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그들이 배에 있던 나침반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하여 큰 모험을 하였으니 그 이유는 항해할 때에는 나침반을 생명과 같이 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에 이르게 하는 나침반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걸고 계명을 지켜야만 합니다. 이렇게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계명은 결코 무거운 짐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의 계명, 말씀은 우리에게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새의 날개가 무거운 것 같아도 그 날개가 창공을 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계명을 지키므로 유쾌해지고, 기쁘고, 은혜를 받으며, 영적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생활에는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계명을 지켜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께서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과 자기 사이에 장벽을 두지 않으셨으므로 죄인들을 친구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도 불신자들과 사이에 장벽을 두지 않아야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죄를 가장 미워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인들과의 장벽이 되는 죄를 제거하심으로 우리 죄인들을 자신의 친구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 친구의 죄의 장벽을 없애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분의 말씀, 계명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에 맞는 친구를 구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친구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친구를 만드는 방법은 예수의 계명을 지키므로 예수를 영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친구를 만드는 것, 이것이 계명을 지키는 자가 맺게 되는 아름다운 열매인 것입니다. 곧 사랑의 결실인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생활의 결실인 것입니다. 기쁨에 이르는 길, 그것은 바로 계명을 지켜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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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교회와 세상(1)         

   "(요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요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예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요한 복음 15:1-8)에서 하나님을 농부로, 예수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그리고 사람을 포도나무 가지로 설명하시면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음같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합되어질 때 인생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 열매 중에 가장 큰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성경을 통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머리로, 그리고 예수 믿는 성도를 그의 여러 지체들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몸과 지체의 연합이 사랑의 영, 곧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처럼 성령으로 이루어진 예수의 몸된 교회의 특성은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특성은 하나되게 하는 것(To be One)입니다. 사랑의 산술은 1+1=1입니다. 1+1+1......+1=1 즉 아무리 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 전도하러 갔습니다. 한 가정에 가니 3형제가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까닭을 묻자 큰 형이 설명하기를 "아버지가 말 17필을 유산으로 주시면서 장남은 1/2, 차남은 1/3, 삼남은 1/9을 가지라고 유언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따르자니 장남인 저는 8과 1/2필이요, 차남은 5와 2/3필이요, 삼남은 1과 8/9필이 되어 말을 산채로 나누어야겠는데 아무도 양보하질 않아서 서로 양보하라고 싸우는 중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렇습니까? 그러면 내가 타고 온 말을 여기에 보태 드릴테니 산채로 나누도록 하십시오."하고 자기가 타고 온 말을 제공하였습니다. 18필이 되니 나누기가 쉬웠습니다. 그리하여 장남은 9필, 차남은 6필, 삼남은 2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말을 합하니 교묘하게도 17필이 되었고, 선교사가 제공한 1필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17필로 싸우면서 나누려던 때보다 장남은 1/2필, 차남은 1/3필, 삼남은 1/9필을 더 가졌는데도 1필이 그대로 남았으니 도무지 이상했습니다. 이 때 선교사는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드린 한 필은 사랑의 한 필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원만하게 잘 해결될 뿐만 아니라 더욱 풍부해집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정의(定意)되나 세상은 미움으로 정의됩니다. 이같은 세상의 특성을 다음 성구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일3: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요일3: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일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일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우리가 사는 세계를 둘로 나눈다면 빛과 어두움, 사랑과 미움, 교회와 세상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과 빛이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 아니면 예수를 거부하는 자, 빛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 아니면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사랑하는 자 등 두 가지로 분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받아들인 자는 이미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한 자입니다. 세상이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실체를 말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로마의 행정 장관은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죄를 범했는가 하는 것을 재판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것만으로 죽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범죄 행위를 했든 그것은 문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문제시 삼고 적대시했던 것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사실은 당시 뿐만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그와 같이 마찬가지일 것을 예수께서 미리 아시고 다가오는 시대에 그의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에 대하여 사전에 경고하셨습니다.

"(막13: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막13:13)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초대교회 당시 로마 제국은 거대했습니다. 유프라테스로부터 영국에까지, 그리고 독일에서 북아프리카까지 뻗쳐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민족과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잡다한 집단을 하나로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통일적인 사상과 힘을 찾아내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통일적인 힘을 황제 숭배 가운데서 찾아냈었습니다. 다수의 민중들은 로마의 정신인 로마라고 하는 여신이 황제 속에 성육(成肉)하고 상징화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로마를 위해서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를 구현했습니다. 로마에 종속되어 있는 민족들은 이러한 로마에 대하여 원망은커녕 오히려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로마는 정의를 가져 왔고 변덕스러운 왕들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는 정치적인 평화와 번영을 가져 왔습니다. 로마 제국 당시 육지나 바다에는 도적들이 없었습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는 온 세계에 걸쳐 뻗어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에서도 가이사(Caesar) 즉 황제가 로마를 구현한 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가져 온 축복(정치적인 평화와 번영)을 마음으로부터 감사하여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황제들은 이러한 숭배를 저지하고 반대했습니다. 즉 그들은 인간이며 신들처럼 숭상받을 것이 못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것을 이용할 적절한 것을 찾아 냈습니다. 바로 황제 숭배에서 통일의 원리를 찾은 것입니다. 이리하여 제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은 황제를 신성시 하여 일년에 한 번씩 황제 숭배 신전에 가서 "가이사(Caesar,당시 황제)는 주(主)이시다."라고 충성을 표시해야만 로마의 일원이 되게끔 했습니다. 이것이 로마 제국의 통일의 원리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구도 황제를 주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라고 믿으면서 로마의 황제 숭배 제도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정부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외에는 임금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핍박을 당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첫째로(예수 그리스도 중심주의)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핍박은 항상 그렇게 예수 중심주의, 하나님 중심주의(God-Centric)로 사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황제 숭배를 통한 정치적인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는 상징적으로 오늘날 교회의 적대 세력, 즉 세상을 말합니다. 궁극적으로 로마는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핍박을 받았던 교회는 날로 그 세력을 더해 갑니다. 오늘날 세계가 구현코자 하는 평화는 모두 정치적인 평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권력지향적인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참된 평화는 오직 "오는 세상", 즉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천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정의되고 로마, 즉 세상은 전쟁과 분열, 미움으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 12:32, 에베소서 1:21, 마가 복음 10:29,30 등을 보면 세상을 "이 세상(금세)" 과 "오는 세상(내세)" 둘로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세상"은 종말을 고하고 "오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엡 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막 1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두 세상의 특성을 보면,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시대이며, "오는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 시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갈 1:4)

이 세상을 "악한 세대", 죄와 불의의 세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필요한 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 즉 사탄을 따라가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불가피한 세상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마태 복음 13:7, 22의 비유 말씀을 보면 "이 세상"의 특징은 부귀, 번영, 성공, 권세, 생활에 대한 염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치 못하게 각종 염려들로 가로 막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이처럼 "이 세상"은 복음에 대해 적대적이어서 신앙생활에 열매를 맺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여기 "이 세상 신"은 사탄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어두움가운데 살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이루며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스스로 독립을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혼미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눈먼 상태를 말합니다. 사탄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빛과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특징은 바로 불신과 어두움 그리고 혼미함 등입니다. 사탄은 세상에 이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유의 주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이 세상"에는 알곡과 가라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여 사탄이 "이 세대의 신"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결국에 사탄을 파멸시키고 가라지와 악인은 불에 태워 없애고 알곡과 의인은 천국 창고에 들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악한 이 세상에서, 사탄의 도전과 영향력 아래에서 알곡과 의인으로 살아가기가 힘들고 고난이 많을지라도 결국에는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 가운데 교회를 통해 역사하며 악의 세력과 불가피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악한 영에 대한 싸움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자손들인 교회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빛이 비추이는 한 밝아지는 것은 자명하며, 소금이 그 짠맛으로 역할을 다 하는 한 그 만큼 부패하지 않고 보존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패방지를 위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며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여 이 시대에 나타나는 모든 형태의 악과 사탄의 세력을 대항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 기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교회로서의 우리의 특성을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빛이 어두움을 물리치듯, 사랑이 미움을 이기듯, 예수의 빛과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시는 교회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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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교회와 세상(2)         

   "(요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요15: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요15: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요15: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우리 한국의 전통신앙은 다신교이기 때문에 온갖 잡신들을 다 불러 모아 그 소원을 빌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신명(神明)들을 부르는데만 해도 그저 숨이 가뿔 정도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속칭 1만 8천 신명의 역학과 함수에 맥락되어 그 신명의 성미와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했습니다. 집을 수리하고 개축하고 이사하려 해도 없는 곳 없이 도사린 이 많은 신명의 안테나에 저촉되지 않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신명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동안에 이사도 하고 집도 수리하는 민속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신들의 법정 휴가가 매년 대한(大寒)후 5일째부터 입춘전 사흘까지의 이렛동안으로 이 달 말까지가 이에 해당됩니다. 구정마다 이 신명들은 주신(主神)인 옥황상제(玉皇上帝)에게 소환되어 신관 구관이 바뀌는 인사발령을 받기에 자리를 비우게 됩니다. 육지에서는 조왕신만이 소환된다던데 제주도에서는 신구간(新舊間)이라 하여 1만 8천 신들이 모두 자리를 비웁니다. 그래서 이 휴가동안에 이사를 하고자 하는 가정이 2만여 세대나 되어 지금 이삿짐 센터가 때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신정, 구정 연휴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설악산 등 휴양지로 가족들과 함께 떠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휴양지 콘도미니엄이나 호텔 등에서는 몇 십만원 짜리 제사상을 차려 놓고 합동으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귀신들이 제사상 받아 먹으려고 모두 휴양지로 떠났기 때문에 은혜받기에 얼마나 조용하고 좋습니까? 신구간에 되는 이 기간, 귀신들이 법정휴가를 받아 인사발령을 받기 위해 소환된 이 기간 동안 여러분들은 성령 충만을 위한 영적 집회를 갖게되니 이 얼마나 기회가 좋습니까?

1. 성경은 두 세계를 보여 줍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세계입니다. 이 두 세계는 동시에 같이 존재합니다. 소경의 눈에 빛나는 태양과 흰 구름이 안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 눈에 안보인다고 초자연적인 세계, 즉 영적 세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소경은 앞에 자기를 죽일 자가 서 있어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 소경인 인간은 현존하는 영의 세계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인간의 눈에는 영적인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만을 위해서 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부요하다 하여도 영적인 세상에서는 말할 수 없이 가난하고 병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세상 사람의 눈에는 의로운 한 젊은이의 죽음에 불과하나 그것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영의 세계에서는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계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해도 영적 세계는 실재하여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변화산에서 그리스도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만나는 장면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자연적인 세계와 초자연적인 세계, 육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장면이 사라졌다고 해서 영적인 세계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영의 세계는 여전히 존재 하고 있습니다.

"(마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마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마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마17: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마17: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마17: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창세기 32:1도 마찬가지의 예입니다.

"(창3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창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의 무리들과 함께 진행하는 하나님의 군대들을 말합니다. 열왕기하 6:16도 그렇습니다.

"(왕하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왕하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

적군에 둘러싸여 멸망이 임박한 것처럼 보였을 때 이스라엘인들은 절망했지만 엘리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기도해서 사람들이 함께 있는 초자연의 세계를 보게 했을 때 그들은 적군의 수 보다 더 많은 하늘의 군대의 위용을 보고 담대해졌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다고 해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바르게 살아간다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 볼 때는 역사에 기록된 유명한 왕이라 해도 성경에는 단 한 줄 "저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였더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흥하고 번영하고 부귀공명을 누렸다 해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저 악하기만 한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과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지식과 세상의 역사 외에는 제공되지 않으니 별 수 없으나 믿는 사람들에게는 본받을 만한 다른 역사와 삶의 방법이 성경을 통해서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의 삶이 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성공한 사람이었습니까? 저는 자신의 인간적인 자랑할 거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분토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자처하여 가난과 궁핍과 자지 못함과 억울함과 오해와 핍박과 위험 속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완전히 망한 대표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준으로 보면 이처럼 위대한 삶이 어디 더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 의해 생명을 얻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으며 그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훌륭하게 확장되어 나갔습니까? 이러한 삶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가 어디인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능력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지만 대체로 세상 사람들에게 바로 인식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는 기준이 있고 삶의 힘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위대한 삶 역시 세상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 무엇이든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다윗의 정치는 백성을 위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 가장 백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을 위대한 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많은 왕들은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산당을 그대로 두고 우상 섬기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 결과 국가도 망하고 자신도 망했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 그 원죄로 말미암아 육체적 방종이 빠지고 쾌락을 쫓는 육욕적인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으로써만 그 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세상 나라는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그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세상 좋은 것들은 고통을 겸해서 줍니다. 뿐만 아니라 소송과 전쟁과 다툼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로부터 얻어지는 승리는 짧은 것일 뿐 아니라 서로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죄인들이라고 해도 얼마나 세상의 평화를 추구하면서 세상의 덕을 사모하면서 싸웁니까? 세상의 기준으로도 극도로 악한 자들과 피나게 싸우면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2. 아담(사람이란 의미)은 세상 나라를 대표하는 가인(소유란 의미)과 하나님 나라 백성을 대표하는 셋의 조상입니다. 가인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만 장차 사라질 나라요 셋의 나라는 장차 올 영원한 나라였습니다. 영원한 의의 나라는 셋의 후손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 다윗의 계보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 이 두 나라는 두 종류의 사랑의 원리로 운영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서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구분되는 것입니다. 두 나라는 두 종류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자신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한마디로 전자는 자신의 영광을, 후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합니다. 한 쪽은 인간에서 영광을 찾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가장 큰 영광이 양심의 증인인 하나님 자신입니다. 세상 나라가 교만에 의해서 이끌리어진다면 하나님 나라는 그 왕인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지극한 겸손으로 사는 곳입니다. 세상 나라 사람들은 육신을 위해 삽니다. 그들은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교만하게 되어 자신의 지혜를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는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현대에 사는 세상 나라 백성들 역시 하나님 대신에 썩어질 영광과 재물을 추구하는 점에서 같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여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경배합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기껏해야 도덕을 가장 훌륭한 덕으로 말합니다. 정의라든가 충성이라든가 우정 따위도 아름다운 도덕의 한 부분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덕이라든가 선에 대한 차원이 다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영원한 삶이요 제일 나쁜 것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앞의 것을 얻고 뒤의 것을 피하자면 예수 믿고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우리의 선이 없기에 선을 행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서 선을 행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고통을 안겨주는 곳이며 어느 곳에도 평화가 없는 곳입니다. 이 세상 나라 사람들은 이생에서의 유익을 위한 평화를 추구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그러한 평화를 육체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영원한 평화를 얻는 데 사용합니다. 믿지 않는 세상 나라 사람들은 세상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모든 덕을 사용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유익들이 증진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들은 세상 나라의 질서와 안정에도 힘을 쓰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하늘의 평화를 향해 육신이 순례하기에 편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분명히 지적합니다. 참된 종교가 없는 곳에는 참된 덕이 없다고 말입니다. 세상에는 참된 정의와 덕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과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복된 삶을 주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로 경배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배우는 것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교만과 무익한 덕만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최후의 심판까지 유지될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는 다시 오십니다. 모든 역사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무서운 눈에서 피할 자 없습니다. 그의 앞에서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무서운 날이 지금 당장이라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박해하고 핍박하기도 하나 교회는 세상의 역사를 사랑으로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결국은 종말이지만 교회의 결국은 구원과 생명입니다.

3-1. 어거스틴(Augustinus)은 그의 저서 <신의 도성>(De Civitate Dei)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두 도성을 보라, 신의 도성과 악마의 도성....그들 중 하나는 세상에 복종하기를 원하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기를 원한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세계 역사는 신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인간은 어느 하나에 반드시 소속되는데 ---의 갈등 가운데 있습니다. 두 도성을 구분하는 기준 즉 소속원이 되는 선택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 차이입니다. 신의 도성이란 "하나님 사랑"(amor Dei)을 근거로 이룩된 사회이며 지상의 도성이란 "자기 사랑"(amor sui)를 근거로 이룩된 사회입니다. 전자를 사랑(caritas)으로, 후자를 탐욕(cupitas)으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탐욕(cupitas)이란 목적(frui)할 것을 수단(uti)으로 하고, 수단으로 할 것을 목적하는 '사랑의 왜곡'을 말합니다. 사랑을 목적으로 돈을 수단삼아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돈을 수단삼아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 돈을 목적으로 사랑하며, 돈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수단삼는 삶의 왜곡된 모습들이 이 시대의 모습들입니다. 말세의 이러한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딤후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러므로 "각 개인인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어떤 종류에 속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3-2. 루터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철저히 구분지었습니다(마22:21). 세속권력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와(롬13:1), 하나님 말씀에 복종해야 할 책임(행5:29)을 철저히 구분지었습니다. 정치와 종교, 하나님 나라와 세상 왕국을 구분지었습니다. 교회는 사랑과 용서로 다스려져야 하고, 세속국가는 칼과 정의의 힘으로 다스려져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율법의 정의가 필요합니다(딤전1:9). 좋은 나무는 저절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마7:18). 따라서 기독교인은 두 왕국에 모두 속한 자입니다. 세속권세에도 복종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권세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까닭에 그리스도의 왕국의 시민으로써 산상수훈대로 살아야 하고, 세상왕국의 시민으로써 세속 법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질서를 파괴하고 무정부 상태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세속왕국도 사탄의 도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뜻을 실현하는 도구입니다(롬13:1-7). 곧, 악한 자를 칼과 정의로 다스려 창조 질서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왼손 왕국(left hand kingdom)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지는, 사랑의 뜻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오른손 왕국(right hand kingdom)입니다.

3-3. 칼빈은 아무리 세속왕국의 법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뜻과 법에 어긋날 때는 복종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계속 왕권을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뜻과 법에 거슬리는 통치자에게 복종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인은 고귀한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몸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니엘이 왕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끝까지 기도한 것처럼(단6:22), 여로보암왕이 황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을 때 선지자 호세아가 혹독하게 꾸짖었던 것처럼(호5:11), 예레미야와 사무엘이 각각 느브갓네살왕과 사울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선지자적 사명감으로 왕에게 항거하고 불의한 권세에 불복종해야 하는 사명을 교회는 지니고 있습니다.

4. 니므롯이 세운 도성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바벨이고, 다른 하나는 니느웨였습니다. 바벨탑은 홍수 심판을 막기 위한 인간들의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회개함으로 용서함 받기보다는, 반대로 성과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인간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저항의 동기에서 세워졌습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인간 최후의 방어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결을 선언한 인간의 항거였습니다. 하나님과 힘을 견주어 보려는 인간의 오만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역시 니므롯이 세웠다는 니느웨성은 이스라엘을 괴롭혀 온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니느웨는 침략과 피로 먹고 사는 세속도시였습니다. 왕이든 백성이든 하나님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니느웨성은 오랫동안 사회악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니느웨는 무력으로 지탱하는 피의 도성이었습니다. 이처럼 바벨과 니느웨는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히 세속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도성의 운명이 둘로 갈렸습니다. 세속도시였던 바벨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인간과 인간의 언어의 단절, 즉 인간성의 철저한 파괴와 흩어짐의 비극적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바벨 못지않게 세속도시였던 니느웨는 갑자기 나타난 요나의 선포 "회개하라,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지리라."라는 경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칼로 요나 하나쯤 치고, 침묵할 수도 있었던 세속도시 니느웨는 오히려 백성과 왕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금식하며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온 도시가 회개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가 바뀌었습니다. 세속도시 니느웨가 구원받은 거룩한 도성으로 바뀌었습니다. 궁극적인 생명의 길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믿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골든 글로브 상을 휩쓸었던 영화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는 미국의 현대사를 조명한 것입니다. 다른 영화들처럼 확실한 이념적, 도덕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어떤 강력한 이념 또는 도덕관, 신념으로 무장한 투사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평균적인 지능지수도 갖고 있지 못한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남이 자기를 놀리고 핍박해도 그들이 왜 그러는지도 모를 뿐더러 '복수'를 하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합니다. 무슨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의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행동합니다. 이러한 그는 미식 축구의 영웅이 되고 탁구를 잘 쳐서 중국과의 핑퐁외교에 일조를 하고 흑인인권운동, 월남전, 정치인 암살, 위터게이트, 참전 상이군인들의 애환 등 미국 현대사의 가장 혼란하고 아픈 현장을 모두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또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삶을 통해 미국사회에 아동학대, 히피문화, 마약문제, 그리고 에이즈문제까지도 모두 겪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주위에서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들, 현장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관, 이념도 없습니다. 그가 이 과정에서 받게 되는 수 많은 훈장, 상, 재산, 그리고 명망을 그 자신은 전혀 이해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에게 아무런 가치관도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이 무수한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인 문제들을 오직 한 여인에 대한 변하지 않는 사랑과 친구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헤쳐 나아갑니다. 즉 그는 아무리 '모자라는 사람'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랑과 신의로 모든 상황에 대처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영화가 그처럼 많은 관객을 감동시킨 이유는 결국 역사와 화해하는 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역사의 아픈 문제들을 가장 '현명'하게 헤쳐나온 사람이 바로 주인공과 같이 모자란다고 생각할 정도로 '단순'하고 '순진'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가장 현명하게 사는 방법, 가장 올바르게 사는 방법은 거창한 이념적, 도덕적 구호도 아니요, 가치체계도 아닌 가장 평이한 것, 남을 변치 않고 사랑하고 신의를 지켜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남는 것 역시 바로 이런 평범한 가치들이라는 것입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단순한 진리를 바탕으로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고 배반하는 여인을 끝까지 사랑하고 그가 상처 투성이로 돌아오면 언제나 받아줍니다. 그리고 그 여인과의 사랑의 결과로 탄생한 아들에게 역시 자기의 단순한 가치관을 전달해 줍니다. 물론 그 자식은 주인공처럼 바보스럽지는 않습니다. 그 고통의 과정이 보다 나은 미래를 낳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함께 걸어온 우리의 역사를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그 아픔까지 사랑'할 줄 아는 것이 곧 역사와의 화해일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남는 것,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가장 소박한 것들, 변하지 않는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과 신의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으며 그것이 곧 역사와의 화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계속되는 역사와의 화해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환난과 재난의 소용돌이치는 역사와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므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역사의 환난과 재난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회개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교회는 회개시켜 겸손하게 만들며 온유하게 변화시키는 곳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을 교만하게, 강퍅하게 만드는 곳입니다. 물질로, 권력으로, 지식으로, 명예로 사람을 교만과 거만케 만드는 것이 세상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곳이지만 세상은 미움을 키워 분열과 증오, 전쟁과 파괴로 말미암아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곳입니다. 세상은 물질과 권력, 그리고 명예, 지식 등의 미끼로 인간의 가치를 추락시키며 결국에는 사망을 가져다 줍니다. 세상은 넓은 문, 넓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회개로, 사랑으로 인간의 가치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데까지 높이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합니다. 교회는 생명에 이르는 좁은 문,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 말고 교회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므로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의 사명은 교회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이나 교회의 사명은 세상을 사랑으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낮은 산골에서 개척하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네살된 딸과 아직 돌도 안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일주일 한 번씩 장을 보러 읍내에 가야 했는데 너무 멀다 보니 하룻밤을 묶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남편이 없는 동안에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꼬박 이틀을 지내야 했지만 별로 무서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을 보러 나가는 남편은 밀린 일거리가 많아서 이틀 정도 더 걸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을 보낸 아내는 장작을 마련하기 위하여 뒤뜰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장작더미를 향하여 손을 내미는 순간 그 속에 움추리고 있던 독사가 순식간에 그녀의 다리를 물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옆에 있는 도끼를 들어 독사를 내리 찍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몸에는 강한 독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돌아오려면 2,3일이나 있어야 했고, 주위에 가까운 이웃도 없었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죽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은 물론이지만 어린 자식들마저도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녀는 독이 더 퍼지기 전에 아이들을 위해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먹을 것을 준비해서 손닿는 곳에 놓고 아궁이에 장작을 모아놓고 어린 딸에게 불이 꺼지지 않게 계속 나무를 넣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는 "얘야, 이제 엄마는 곧 깊은 잠을 자게 된단다. 너는 동생을 잘 돌봐주어야 해. 우유도 먹여야 하고....엄마가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무서워하지마...동생을 잘 돌보고 있으면 곧 아빠가 오실거야"라고 딸에게 일러주었습니다. 한 낮의 뜨거운 햇살과 아궁이의 불길,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녀를 위하여 애쓰는 그녀의 온 몸에서는 땀이 물 흐르듯 흘렀습니다. 그러나 줄줄이 흘러내린 땀이 그녀의 몸 속의 독을 제거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된 줄은 자신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계속 불을 지폈고 구수한 냄새와 함께 밥이 다 되었습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녀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비로소 깜짝 놀랐습니다. 뜨거운 사랑의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세상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원합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더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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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성령의 역사         

 "(요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요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16: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요16: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요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요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요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20세기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조제프 토인비는 40여년에 걸친 그의 역작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는 신의 창조가 진전되는 모습"이라면서 문명의 발생, 성장, 소멸과정을 "도전과 응전"이라는 구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막에서 꽃 핀 이집트의 문명을 이 이론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빙하지대가 축소함에 따라 아프라시아(북아프리카와 남아시아)지역은 건조화가 진행됐다. 그때까지 수렵생활을 하던 주민들에게 열려진 길은 3개였다. 익숙해진 기후대를 따라 북으로 이동하거나, 그 지역에 남아 수렵생활을 하며 근근히 살아남거나 역시 그 지역에 남기는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맞는 유목과 농경을 새로 개척해 나가냐 였다. 거주지도 생활양식도 바꾸지 않았던 무리는 건조화라는 도전에 응하지 않았던 셈으로 전멸이라는 벌을 받았다. 생활양식을 바꾸어 수렵자로부터 양치기로 변신한 무리는 아프라시아 스텝의 유목민이 되었다.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고 거주지를 변경한 무리들은 새로운 환경의 도전을 받아 이에 굴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또 다른 응전을 불러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건조화라는 도전에 대해 거주지와 생활양식을 모두 변경하며 응전한 집단이 있었다. 이 보기드문 이중의 반응이야말로 소멸돼 가는 아프라시아 초원지대의 몇개 미개 사회에서 이집트 문명과 수매르 문명을 창조한 역동적인 행위였다."

토인비는 이러한 이론으로 이집트문명 뿐만 아니라 마야문명. 미노스문명. 중국문명 등의 발생과 성장, 쇠퇴, 해체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론은 그 후 다양한 각도에서 재조명되고 비판도 받았지만 인종설이나 환경설에서 벗어나 역사를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역사학 연구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또한 문명의 대부분이 이미 사멸했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모든 문명 앞에 죽음의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끊임없는 세상의 도전에 대해 교회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응전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인류를 구원하였으며 영원히 쇠퇴하지 않는 진정한 기독교 문명을 창조해 왔습니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이미 교회가 심하게 핍박을 당하던 시대였습니다. 트리야누스 황제 시대에 비두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는 사람들이 크리스챤인지 아닌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심문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가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초대 교회 전성시대에도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핍박에 대해 끝까지 저항하지 못하고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도전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 사수로 응전한 사람들에 의해 꽃이 피고 그 열매를 맺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 권력과 유대 교권 세력이 합세하여 예수와 그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소위 정통파(?)로 자처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울(후에 사도가 된 바울의 이전 이름)이 예수의 이름을 말살하고 교회를 근절시키려고 하고 있었을 때 사울 만큼 진정으로 그것이 신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행26: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줄 스스로 생각하고 (행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행26: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행26: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적어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행26: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행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26:1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와같은 일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16: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교회의 비극은 자기들만이, 자기 교회만이 하나님의 진리와 은총을 독점하고 매수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만이 참 신앙을 가지고 있고 참 교회라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생각이 매우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단을 교회에서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얼마 전 17세된 고교생 아들과 22세의 숙성한 처녀 딸을 공기총으로 쏘아 아들은 죽고 딸은 예측불허의 중태에 빠진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자녀를 이 꼴로 만든 비정의 아버지 장판권씨는 서늘한 수갑을 찬 채 철창에 매달려 절규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까?' 살인범의 외침으로는 너무나 생경스러운 소리이겠지만 사이비 이단 종파들에게 아내와 자녀들을 빼앗겼던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어쩌면 이해가 가는 절규입니다. 그 자신 조실부모하고 외롭고 어려운 소년, 청년 시절을 보냈기에 남달리 가정에 애착을 갖고 살아온 착실한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습니다. 세상에 한 눈 팔지않고 가정에 대해 성실했던 그였지만 그의 아내가 안상홍 이단 집단에 유혹되어 결국 자녀들까지 그 이단 집단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이비 이단 집단이 한 가정을 파탄시키고 또 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었으며 두 젊은이의 생명을 앗아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이비 이단 집단들은 더욱 더 경계하여야 합니다. 박태선의 전도관 운동이 한참 발흥할 때의 일입니다. 인천 제2장로 교회를 담임하던 이승길목사(1887-1965, 독립운동가)가 전도관 때문에 걱정하던 목회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허참, 모를 일이지. 부산의 18금과 인천의 18금이 다르다니 말이야." 목회자들은 어리둥절해서 무슨 말인지 물었습니다. "분명히 18금이라면, 거짓없는 금이라면 부산엘 가나 인천엘 가나 항상 금이 아니겠소.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그건 가짜겠지요. 진짜 금은 변치 않는 색을 유지하며 반짝입니다. 그런데 가짜 금은 처음에는 순금보다 더 유난히 반짝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색하여 흉하게 됩니다. 전도관이 이와 같습니다. 오래 가지는 않을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빛을 잃지 않는 순금의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 무장은 성서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고후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단순히 축적하는데 그쳤을 뿐 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분별된 진리를 생활 속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죽은 지식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외형적인 죽은 지식의 소유자들이 진리의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은 생명없는 지식을 소유한 자의 무지한 열심이 빚어 낸 결과인 것입니다. 또한 좋은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사이비 이단 종파는 한 때 그 잎사귀가 무성하여 흥하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그 진위가 성령의 열매를 통해 밝혀지는 것입니다.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마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께서 조만간에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것만을 생각하고 당황하여 비탄에 빠져 근심이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요16: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요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요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가면 성령 즉 보혜사(保惠師)가 오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계시는 동안에는 사람들은 어느 곳이든지 예수와 함께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셨을 때에는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정신과 마음과 양심 속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육신을 입고 계시는 동안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靈)에는 제약이 없습니다. 사람이 어느 곳에 가든지 성령은 그와 함께 있습니다. 성령은 온 세상을 통하여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 영혼에 호소합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은 "(마28:20).....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예수를 믿는 데 박해와 핍박이 뒤따르기 때문에, 그리고 많은 사이비 이단의 무리들이 날뛰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 진리의 성령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데 있어서 반드시 요구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도전에 대한 성도들의 응전하는 방법은 바로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먼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해 말하면 대부분 고전12:4-11에 나타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 즉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을 생각하거나 마음이 뜨겁고 눈물이 나고 하는 것들을 머리에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를 짓게 하여 망하게 하나 성령은 죄를 깨닫아 회개하여 구원(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갈릴레오가 이전의 학설을 뒤엎는 실험을 피사의 사탑에서 했습니다. '무거운 물건일수록 먼저 떨어진다.' 갈릴레오가 이 학설을 부정하는 증명을 하기 위하여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서 가벼운 물건과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는 실험을 했습니다. 동시에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중력은 무게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했습니다. 갈릴레오가 그런 실험을 한다고 하니까 장안에 있는 모든 호사가들이 다 모였습니다. 무거운 돼지와 가벼운 학을 동시에 떨어뜨렸는데 동시에 떨어졌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별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앞으로 과학을 전개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근거가 되며, 그 다음에 쌓아야 하는 모든 판단과 분별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기초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중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성령의 사역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때 자기들이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예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이 십자가에 너희가 죽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2000년 전 팔레스틴에서 범죄자로써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어떻게 여러 세기를 통하여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마음과 양심을 꿰뚫어 죄를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은 성령이 그 마음속에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시인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 죄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은 의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요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라는 말씀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범죄자로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예수는 심문을 당하고 유죄가 되어 유대인들에게는 사악한 이단자가 되었으며 로마인에게는 위험 인물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가 극악무도한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받고 흉악범과 하나님의 적이라고 하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생각되었던 것이 바뀌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았던 백부장과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이 십자가의 예수 모습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마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성령의 안목에서 볼 때,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죄가 전혀 없으신 즉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의로우신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번째 역사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확신시키는 것입니다.

"(요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세상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있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장차 심판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확신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확신을 주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빌라도가 의인이신 예수를 심판했을지라도 성령의 눈으로 볼 때 심판을 받은 것은 바로 빌라도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의 임금들을 심판하시고 역사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들을 어떻게 심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최종적인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확신하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믿는 신앙 때문에 박해와 핍박을 받든, 환난이나 역경을 당한다해도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같은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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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진리의 성령         

 "(요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지금 예수를 3년간 쫓아 다신 제자들마저도, 말하자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기적,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눈뜨게 하신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 등등을 목격한 제자들마저도 예수가 이 땅을 떠나셔야 된다는 데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죽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 쪽에서도 보면 얼마든지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께서 왜 이 땅에 승리의 나팔을 불며 그를 추종하는 자들과 그의 민족을 위하여 승리로, 영광스러운 나라를 만들어 내시지 않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언제나 적용되는 의문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전능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면서도 예수 믿는 것이 오히려 이렇게 어려우며, 신앙인들이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데 대한 보답이 도리어 고난과 역경일까?" "왜 교회들이 그 모양 그 꼴이며 왜 꼴같지 않은 사람들이 목사, 장로를 하는가?" 그런 것들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괜찮은 사람이 일을 맡지 않는다는 것이 대부분 공통된 통계입니다. 예수의 12제자들을 살펴봐도 그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장로가 평신도보다 꼭 낫지 않으며, 목사가 평신도보다 꼭 낫지 않으며, 잘난 평신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똑똑한 사람들은 똑똑한 대신 교회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열심을 부리는 사람들은 좀 모자란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고 교회 밖에서 비평하는 사람들 쪽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그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히브리 민족이 잘나고 똑똑하여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팔레스틴의 작고 보잘 것 없으며 하찮은 떠돌이 빈민들이었습니다. 진리의 영은 똑똑한 사람들에게보다는 좀 모자라지만 예수를 영접하고 그 분의 말씀(진리)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 진리의 영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영광된 삶을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지혜는 미련한 자가 예수의 보내신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자랑스런 능력은 예수의 보내신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약한 자가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랑스런 문벌은 예수의 보내신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문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진리의 영이 충만하시어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운 인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위대한 역사는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져오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져다주는 것을 계시(Revelation)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계시의 원칙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계시(Revelation)는 점진적인 과정으로 임하게 됩니다. 예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예수는 전지(全知,omni-science)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알고 계시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제자들이 그 많은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밖에는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가르침이나, 어떠한 계시라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능력에 합당한 것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국민학교 학생에게 고등학교 과정의 함수나 미분 적분들을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하나 하나 과정을 밟아 나아가야만 합니다. 다른 과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도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배울 수 있는 것과 배우는데 합당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 중국선교여행 중에 만난 조선족 및 한족들에게 제가 쓴 설교집 "빛과 생명"을 한 권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들이 그 책을 읽고 나서 하는 말이 책 속에 나오는 성경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 본문을 풀어서 설명한 설교 내용을 읽고 나니까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낀 것 가운데 하나는 그저 성경책을 전해주는 것으로는 별 의미가 없고 그 성경책을 그들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게 풀어 쓴 설교집이나 강해집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면 직접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약 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될 때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적들을 완전하게 소탕해 버리고 가축과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몽땅 멸절시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같은 명령은 구약성서 도처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들은 그 배후에 가장 중요한 사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여하한 이교의 저속한 종교에도 감염되는 위험을 범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그러한 것에 감염되고 악 영향을 받을 위험을 생각할 때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는 이들 도당들을 멸망시켜버리는 편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종교의 순수성을 고수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단계에 있어서, 이교도를 말살시켜 버리는 것으로서 그 순수성을 지켜나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삼상15: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삼상15: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삼상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후에는 그 순수성을 지켜 나아가는 길은 이교도들을 개심시키고(convert), 그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구약 성서의 세상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한 가지 중대한 진리(즉 신앙의 순수성)만을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진리의 한 측면, 한 단편만을 파악한 것에 불과합니다. 계시는 바로 그러한 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법전인 레위기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신약의 히브리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예수에 대한 이해를 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밖에는 계시하실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자라가라."고 말합니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어린아이가 밥을 먹기까지는 여러 이유식 단계가 필요한 것처럼 계시의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또한 하나님의 계시에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중의 한 가지는 하나님의 계시는 단지 성서에만 나타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주후 120년에 신약성서의 제일 마지막 책이 쓰여진 때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중단하셨으며, 그 때부터 하나님의 계시는 끝나고 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 진리의 성령은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활동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지상적인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책 중에 나오는 한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시는 분이시며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도 계속하여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아직 예수께서 의도하신 바를 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끔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후 120년에 말씀하시는 것을 그치고 그 이후 줄곧 침묵하고 계시는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인간에게 그 진리를 계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둘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모든 진리, 진리 그 자체에 대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신학상의 진리라고 하는 것에 한정해서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입니다. 신학자와 설교가들만이 영감을 받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위대한 시인이 시간을 초월하는 말로서 인간들에게 훌륭한 메시지를 가져다 줄 때 그도 역시 영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헨리 프란시스 라이트(H.F.Lyte)가 찬송가 531장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의 가사를 지을 때 그는 전혀 작사할 기분에서가 아니었으며 그대로 받아쓰기 식으로 그것을 썼던 것입니다. 위대한 작곡가도 영감을 받는 것입니다. 헨델은 그의 "메시야" 중의 할렐루야 코러스를 어떻게 작곡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했을 때 "하늘이 열리고 희고도 장엄하신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과학자가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고 보다 나은 생활에 공헌하는 것을 발명할 때, 의사가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 고통을 덜게 하는 새로운 의술을 발견할 때, 어떤 사람이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치료법과 약을 발견할 때,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의 일종입니다. 인류에게 유익한 모든 과학과 의학, 문명의 모든 기술들, 심지어 음악, 미술 등 모든 예술의 분야에 까지도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들이 실제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며 실험에 실험을 다 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한계점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는 그 이상 더 나갈 수가 없습니다. 폐쇄된 문 앞에까지 다다른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섬광과도 같이 번쩍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가 그것을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사고의 그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들어오신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모든 진리의 계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인 것입니다. 진리는 본래 인간이 창조하거나 발명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인 것입니다. 인간의 구하고 찾는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이며 발견되어지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모든 첨단 과학이나 의학 등으로 인간이 교만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선물)에 대한 감사와 겸손한 수용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계시받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소유자이신 동시에 진리의 부여자이기도 합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발견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이 우리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들이 스스로의 정신 과정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발견되게끔 대기하고 있는 것, 즉 우리들이 취득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예수에 관한 것을 끄집어내어 그 중요성을 우리들에게 계시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위대함은 다 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것을 모두 파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참뜻에 완전히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삶과 신앙에 대해서, 개인과 세계에 대해서,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뜻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계시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지니고 있는 뜻과 그 중요성을 계속적으로 파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 역사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 참다운 삶의 가치관과 의미 등등은 모두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은 여러분들을 진리가 되시는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 아는 만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 아는 만큼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 아는 만큼 여러분의 삶의 가치와 깊이가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에 대해 아는 만큼 삶의 능력이 달라집니다. 계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책이나 신조나 인쇄된 글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는 살아 있는 인간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가까이 살면 살수록 그 만큼 더욱 많이 우리들이 예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에 대해 아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계시를 누리면서 이 어두운 시대를 밝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예수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그에 순종하는 것만큼 예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 믿고 그에 순종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를 계시하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서 뿐입니다. 짐승이 아닙니다.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받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를 받지 못하는 인생을 성경은 짐승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시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우리의 사고 방식을 그로 하여금 주장하게 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하게 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언제나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점점 더 죄악에 대해서 민감해지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동참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요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진리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항상 충만하시므로 삶의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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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해산의 기쁨         

"(요16: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요16: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요16: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요16: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요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요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요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옛날 요르단 계곡에 세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세 나무는 각기 갖고 있는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나의 꿈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이 되는 것이야. 그렇게 되면 평생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을테니까...." 첫 번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나무도 나뭇잎을 흔들며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섬기고 싶어. 나의 몸으로 큰배를 만들어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것 말야." 두 나무의 얘기를 듣고 있던 세 번째 나무도 가지를 높이 쳐들며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남아 있을테야. 그 무엇보다도 높게 그리고 넓게 가지를 칠거야. 그래서 뜨거운 한낮, 피곤한 길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싶어." 얼마 후 드디어 세 그루의 나무는 이름모를 도끼에 의해 잘려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는 줄 알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기쁨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는 성전의 제단이 된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 어느 집의 냄새나는 말구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겨우 구유가 되다니..."하며 그는 심한 모욕감에 눈물까지 글썽였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소원대로 배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졌으나 큰배가 아니라 갈릴리 호숫가에 머무는 작은 고깃배가 되었습니다. 그 역시 자신의 큰 꿈이 깨어진 것에 대단한 절망을 느꼈습니다. 세 번째 나무 역시 잘려서 큰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 형틀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나무는 자신의 옛 꿈과 현실을 비교해 보고는 크게 슬퍼하며 수치감에 몸을 떨었습니다. 세 그루의 나무들은 자기들의 짧은 생각 끝에 그들의 생이 무의미하며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의 불행이나 고통에 너무 쉽게 좌절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들의 현재의 고통 속에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숨겨져 있었던 것을....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미래를 준비해 놓은 것을 말입니다. 첫 번째 나무는 심히 냄새나고 누추한 말구유가 되었으나 어느 날 밤 가장 거룩하고 성스러운 아기 예수가 눕혀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갈릴리 호숫가의 조그만 고깃배가 되었으나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 배에 오르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어떤 범선보다 더 큰 명예를 얻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나무는 인류를 대신하여 희생을 당하신 예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가 되어 그 후 영원한 믿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요르단 계곡에 서 있던 세 그루의 나무들은 한 때 자신들의 꿈이 좌절되는 듯한 고통을 겪었으나 그 고통 이후에 참으로 영광이 넘치는 기쁨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현재 어려움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좌절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 그루의 나무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고통 이후에 반드시 그 이상의 기쁨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도래하게 될 새 시대를 전망하고 있습니다."(요16:16)....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은 조만간에 다가올 새 시대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역사를 두 시대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현재라는 "이 시대"와 미래라는 "오는 시대"로 나누어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는 아주 사악한 시대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놓인 시대를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 "오는 시대"는 하나님의 황금 시대로 다음의 성구가 증거하는 시대입니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러나 이 황금의 시대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메시야(구세주)가 앞서 세상에 오셔야만 하는 소위 "주의 날" 혹은 "여호와의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날"은 무서운 날로 생각되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이 흔들리고 산산조각으로 붕괴되는 날이며, 세상 만물이 몸부림치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황금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와같은 무서운 시대를 관습적으로 "메시야의 진통"이라고 불렀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이 세상에 들어오기 앞서서 겪는 산고라고 하는 표상을 그들은 실제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13:9)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욜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나 (욜2: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와같은 성구들은 모두 메시야가 임하실 때 수반하게 되는 진통의 묘사들인 것입니다. 이같은 내용들을 모두 다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들로부터 떠나고자 한다. 그러나 내가 다시금 돌아 오느니라. 내가 지배하는 날이 시작되며 내 나라가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너희들은 갖가지 무서운 일을 겪게 되며 진통과도 같은 괴로움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러나 너희가 충실하게 참고 견디고 그 무서운 시대를 이겨 나가면 풍성한 축복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흔히 교회시대라고 일컫습니다. 이 교회 시대가 바로 새 시대, "오는 시대"를 해산하기 위한 산고가 뒤따르는 시대인 것입니다. 교회는 슬픈 일을 없게 하고 기쁜 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만드는 곳입니다. 해산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면 처음부터 근심하고 애통하고 걱정하던 것들이 한꺼번에 기쁨의 환경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생의 운명과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신가를 알게 하시는 경험으로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시거나 갑자기 잘 살게 하시거나 어떤 기적을 이루어 그의 당한 난관을 풀어 주시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애들도 잘 되고 남편도 잘 되고 사업도 잘 되고 우리 모두 다 잘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믿게 되면 처음부터 근심하고 애통하고 걱정하던 것들이 한꺼번에 기쁨의 환경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시각이 영적으로 달라지는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데 이것을 바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 중에는 예수 믿는다는 것을 예수께서 대속 사역 즉 십자가에 죽으시기 이전처럼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먹을 것을 주고 광풍을 잠잠케 하는 등등의 삶의 기적과 형통함만이 지속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하신 말씀이 정확히 바로 그와 같은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그 많은 기적과 표적들을 통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가 전부가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 세계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주를 믿었더니 그냥 직장이 생기고 승진을 하고 애가 공부를 안 했는데도 그냥 학교에 붙고 길 가다가 넘어졌는데도 눈은 안 다치고 이마만 다치고,.... 이런 "먹고 배부른 까닭"식으로 신앙을 물질 세계의 축복의 연속으로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여러분이 사는 삶의 환경과 조건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먼저 자기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져야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믿음으로 자아가 변화받게 될 때 보이는 삶의 환경과 조건에 대한 시각이 영적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삶의 환경과 조건이 당장 변화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환경과 예수 믿는 조건들이 이전 보다 더욱 힘들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5-30을 보면 바로 이와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행4:5)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행4: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행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행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행4: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행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행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4: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행4: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행4: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행4: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행4: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행4: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행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행4:21)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행4: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 세나 되었더라 (행4: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행4: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행4: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행4: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행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행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행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지만 이들의 조건과 환경과 분위기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은 그 시대의 권세잡은 자들 앞에 붙잡혀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하는 일에 협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도들을 이제 근심케 하지 못하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너희의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리라." 저들이 일어나는 모든 나쁜 환경에 대하여 오히려 기뻐합니다. "옳소이다. 주께서 예언하신 것같이 과연 헤롯과 빌라도가 모여 그 일을 하고 있나이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나 이런 나쁜 환경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이제 믿사오며 그 일에 우리가 부름받은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된 것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을 통해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예수 믿는 일을 어렵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 믿는 환경과 분위기가 지금보다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바는 세상의 환경과 분위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영적 변화인 것입니다.

신혼 초에 사랑하는 아내가 아플 때는 "어서 옷 입어 병원에 가야지." 1년 후에 아프다고 전화하면 "여보, 지난 번 간 병원 알지? 택시 타고 다녀와 오늘 빨리 갈께." 2년 후 아프다고 전화하면 "집엔 약도 없어? 약 먹고 누워서 쉬라고 또 몸살이 난 모양이구먼." 5년 후 몸이 불편하다고 전화하면 "도대체 뭘 한다고 당신은 맨날 아프다는 거야? 나 원참, 원래 당신은 좀 약한 체질이었던 같애." 10년 후 전화도 못하고 누워 있는 아내를 본 남편 왈 "아무리 몸이 좀 아파도 집안은 정리해 놓고 있어야지. 나 원참, 이러니 밖에서 되는 일이 있겠어!" 라고 소리치면서 저 혼자 밥 사 먹으러 밖으로 나가는 남자. 아내는 겉으로 보이는 외모는 변해도 마음만은 변덕쟁이가 아닌 신혼 초의 기분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옷을 입은 남편을 아내는 좋아한다고 합니다. 아내와 가정의 환경과 분위기가 달라지기를 바라지 말고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질 때 아내와 가정의 환경이 변화되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주변의 환경과 분위기가 달라지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이 변화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적으로 곤란스러운 환경 속에 보내셨어도 믿음으로 눈으로 "오는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며, 해산의 기쁨을 생각하며,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충만한 기쁨의 생활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벧전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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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요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요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요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요16: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요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요16: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본문 30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펼쳐놓은 책을 읽듯이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요16: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예수께서는 무슨 일이고 누구에게나 물어보실 필요없이 그들이 이야기하기 전에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와같이 예수께서 인간의 마음을 투시할 수 있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요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것을 모두 아시고 계시다는 것을 통해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케 되었습니다. 예수만큼 하나님과 인간을 알고 있던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의 연약함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실패와 배반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장차 극도의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들이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것을 예수는 알고 계셨습니다.

"(요16: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요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장차 자기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하고 모두 떠나가 버릴 것임을 알고서도 예수는 그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을 놓고 한 마디 원망하거나 섭섭하게 생각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신뢰하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최악의 상태를 알고 계시면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시고 신뢰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어느 누구를 용서해 줄 수는 있지만, 다시는 그 사람을 신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 연약함으로 인해서 나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 그래도 너희는 반드시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아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이와같은 사랑과 용서, 그리고 신뢰가 함께 이루어지는 예는 없습니다. 사람을 용서하고 과오를 범한 인간을 신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예수이신 것입니다. 실수하고 과오를 범한 사람을 용서하기는 하여도 계속해서 그 사람을 신뢰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의 용서와 사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상대방을 믿어주므로 해서 창조적인 삶을 이룰 수 있도록 밀어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버릴 때까지 그들을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버리고 나서도 그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는 인간의 연약함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셨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총명하여야 합니다. 총명한 사랑은 바로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우상화하고 상대하는 남자나 여자를 결점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실망으로 끝나고 말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우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총명한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아주 똑똑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해타산이 아주 빠르고 함께 살고 있는 상대방이 싹수가 노랗게 보이면 아예 일찌감치 결판을 내버립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남편이요 아내이면서도 실수와 과오가 있을 때 있는 그대로의 남편과 아내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데는 그지없이 인색하기 짝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남편이나 아내를 계속해서 신뢰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인간의 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총명한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것이며, 실패한 삶을 성공으로 이끌며, 버림받은 인생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쓸모있는 인생으로 변화시키기에 총명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랑은 이해타산이 맞지 아니하면 얼마든지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똑똑한 것 같으나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세상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혜와 총명이 되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총명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총명하기 위해 예수의 용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예수의 사랑과 용서에는 고독함이 있어 보이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각각 제 곳으로 흩어져 갔지만 그는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의 의(義)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은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의인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버리시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예수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과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세상의 친구들이 모두 자신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요점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연약함을 미리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후에 가서 그들이 예수를 실망시키고 예수를 버리고 도망해 가버린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사실들이 그들 자신을 얼마나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 넣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장차 너희들 앞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나는 알고 있다. 그 일을 이제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겠다. 너희들의 불충실과 나에 대한 배반이 나에게 큰 충격을 주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흩어져 버릴 것을 내가 알고 있다. 나 혼자만 남게 될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너희들이 비록 내 곁을 모두 떠난다해도 나의 너희들에 대한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 나중에 가서 너희들이 나를 배반한 사실을 생각할 때 자신을 비관하거나 낙담해서는 안된다." 바로 이와같은 말씀 속에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동정과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인간의 죄가 어떻게 자기를 상하게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인간들을 해치는가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사람이 얼마 만큼이나 자기를 해쳤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쳤다고 하는 사실이 얼마나 그 사람의 마음을 찌르고 얼마나 그 사람을 가책과 후회와 슬픔으로 돌아가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삶의 차원에 있어 대단한 차이를 가져올 것입니다. 조금만 자기 마음에 고통과 상처를 주게 되면 참지 못하고 울며 불며 난리를 치고 따지고 덤벼드는 것이 상례인데 예수는 오히려 자기에 고통을 안겨준 사람이 앞으로 당하게 될 마음의 상처까지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도리어 평안하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마음을 잃지않는 지혜로운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뿐만 아니라 배반당한 사람이 그 배반당한 사실에 가슴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자기를 배반한 사람이 그 배반으로 인해 당하게 될 마음에 괴로움과 상처를 염려하여 "평안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

실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예수 곁을 멀리 떠나 낙향했던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반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마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26: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26: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26: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중략).........................

"(마26: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중략)........................

"(요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요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과연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을 면밀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을 확인하며 어디에서나 평안함을 누리며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예수님의 사랑은 이와같은 평안함을 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용기와 승리를 안겨 주는 것입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세상이 예수에 대해 최악의 일을 다 저지른다해도 결코 예수를 패배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그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끝없는 사랑이 여러분의 실패한 배반의 삶을 부활시켜 심령에 평안함과 삶에 승리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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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십자가의 영광         

"(요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본문은 예수의 기도로써 주기도문(마6:9-13),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마26:36-46)와 더불어 예수의 대표적인 기도 중의 하나입니다. 요한 복음 17장은 전체가 예수의 기도로써 1절-5절은 예수 자신을 위한 기도이며, 6절-19절은 제자들의 보존과 일치를 위한 기도이며, 20절-26절까지는 성도들의 영생과 일치를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 자신과 그의 제자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성도들을 위한 예수의 '대제사장적인 중보의 기도'인 것입니다. 본장의 기도 주제와 목적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요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여기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나타나게 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고난을 통한 하나님 사랑의 계시와 복음의 전파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이 인식될 수 있으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신학이요, 인간의 참된 하나님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십자가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영광"을 구하는 예수의 기도인 것입니다.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과 아들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떠한 어려움이나 고난이 없이 출세하거나 사업이 잘 되거나 잘 살아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여주는 진리는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이 없이는 영광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진리를 바로 깨달아 삶의 어떠한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며 삶의 목적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 주어진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면 반드시 희생이 따르기 마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본문 1절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달라는 예수의 기도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에 그 십자가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인생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광", 곧 죽음을 통한 영광을 말합니다. 대개 위인들은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쟌 다크는 영국인에 의해서 마녀 또는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쟌 다크를 화형에 처할 때 그 군중 속에는 전에 그녀를 처형할 때는 자기도 불피울 나뭇단을 보태겠다고 맹세했던 영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에 이르러서는 "저 여성의 영혼이 있는 곳에 나의 영혼도 있게 하소서."라고 그는 외쳤던 것입니다. 영국왕의 측근인 한 사람은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노라. 한 사람의 성자를 화형해 버렸으니 말이다."라고 말하면서 쟌 다크의 화형장을 떠났던 것입니다.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가 처형된 십자가 밑에 서 있던 백부장도 같은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마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십자가는 예수의 영광이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는 하나님께로 받은 사명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질 때 나타나는 영광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신 것처럼 자아의 부정 즉, 자신이 십자가에 죽을 때 하나님께 영광스런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자신은 십자가에 죽노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 스스로 구하는 영광은 냄새나는 영광이요, 썩어질 영광인 것입니다. 썩지 않고 영원한 영광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자아를 십자가에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아를 부정하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타내고자 할 때 자신의 삶이 가치를 창조하며, 존귀하고 영광스런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므로 오늘날 영원히 영광스런 존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비록 당시에는 사람들로부터 미련하게 산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타내는 삶의 결과 참수형을 당했을지라도 결국 그의 삶이 가장 지혜로웠으며 영광스런 삶이었던 것임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의 뜻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서 영광을 돌리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입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의 순종함을 배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우셔서" 하나님께 영광되셨습니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독립선언문과 3.1만세운동의 정신 속에는 예수의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3.1만세운동이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무저항의 사랑으로 일관한 것은 당시 조선의 지도자들 중 많은 사람이 예수의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지도자 중 철저한 사랑의 사도인 길선주 목사와 월남 이상재 선생의 무저항주의의 영향이 컸던 것입니다. 길선주 목사는 당시 유명한 부흥사로 가는 곳마다 예수의 사랑을 전했으며 취조하는 일본 관헌들에게도 털 깎이는 양같이 겸허하게 사랑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천도교측에서 강력하게 무력저항을 주장했으나 끝까지 만세 운동을 무저항운동으로 이끌었습니다. 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양주에 있는 묘비에 변영로씨가 이렇게 써넣었습니다. "당시 천도교주 손병희 선생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실새 다수인이 한결같이 살육을 주장했으나 오직 이상재 선생은 살육하느니보다 우리가 죽음으로 항거하여 대의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 제의하시었다."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예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한 순종으로 나타내었기 때문에 3.1운동은 가장 성공적인 독립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들 지도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어린양으로서 그 사명을 다 하였던 것입니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는 작곡이 끝나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오선지에 "SDG"(Soli Deo Gloria의 두문자) 즉,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적어 넣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죽음으로 다 하기까지 여러분의 인생 오선지에도 "SDG",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말이 기록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이러한 "십자가의 영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원함', '영생'을 헬라어로 '아이오니오스'(aionios)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생명의 지속 기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면 생명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반드시 축복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 바람직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인으로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불행한 것입니다. 병들어 고통 중에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은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무의미한 삶의 장수는 별 가치가 없습니다. 영생 즉, '아이오니오스'(aionios)의 주요한 뜻은 생명의 질입니다. 이 단어를 올바로 적용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영생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영생을 소유하는 것,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특질인 빛과 희락과 화평과 거룩함 등을 어떠한 형태로든지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삶의 지속은 생명의 의미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일본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는 나라 민족은 장수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33년이란 짧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영원한 영광스런 삶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그 분 스스로 생명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나 죽으나 힘들거나 고통스럽거나 어떠한 형편에서도 오직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시는 자가 되시므로 영원히 영광스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부인이 저녁에 퇴근한 남편에게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낮에 심방다녀가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래, 그 분이 뭐라고 말씀하셨지?" 남편이 묻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이 매우 이상한 질문을 하셨어요. '이 집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가요?' 라고 묻지 않겠어요." "그래? 목사님께서 우리는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또 주일에는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고 있다고 말씀드렸어?" "웬걸요. 그런 것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으시고 단지 '이 집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가요?' 라고 질문만 하셨어요."

여러분이 예수와 함께 살고 있다는 증거, 여러분 가정에 예수께서 함께 살아 계신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처럼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친교는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말씀대로 사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희락과 평화 등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영어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어를 쓰는 사회 속에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영어이고, 하는 것이 영어일 수밖에 없는 사회, 눈만 뜨면 온통 영어인 사회, 영어를 쓰지 않으면 빵 하나 사먹지 못하는 사회에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확실하게 잘 아는 것은 그 분의 말씀 속에 사는 것입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줄줄이 암송하며 십계명을 외우고 있다고, 성경 구절을 많이 알고 있고 신학과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영생에 이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인간의 삶, 생명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며,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인격을 가장 고상하게 변화시키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영원한 가치와 의미있는 삶을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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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제자들을 위한 기도        

"(요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17: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요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요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17: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요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 (요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요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17: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의 보존과 일치를 위한 예수의 기도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위하여 기도하신 제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요? 본문 8절 말씀을 통해 그 제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요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첫째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며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 사람을 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한 마디로 하나님 자신의 자기 폭로(self-disclosure)인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요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말씀을 통해 예수를 알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고 믿었다는 것으로, 곧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코자하시는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구세주이심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자신과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 즉, 메시야(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어 하늘과 땅을 매고 푸는 천국 열쇠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본문 6절 말씀을 보면 예수의 제자는 예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말씀에 곧 순종하는 사람이 제자인 것입니다. 순종함이 없이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스승의 모든 가치관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스승의 교훈과 말씀이 자신의 삶에 그대로 반영되는 사람이 제자인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주권이 오직 예수께 있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살아도 죽어도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었던 것처럼 죽기까지 그 분의 교훈과 말씀에 순종하므로 참된 예수의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축복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첫째,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보호(보존)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요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17: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환난과 재난이 많은 세상에서 성도들은 언제나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인면에서 뿐만 아니라 영혼이 얼마든지 잘못될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육신까지도 보존하여 주십니다.

"(잠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시91:7)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어떤 군인이 전장에서 총에 맞아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중에 그가 정신을 차리고 총알 맞은 데를 다시 보니, 자기 품안에 품었던 성경을 뚫고 들어가다가 시 91:7의 말씀에서 멎은 것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환난과 고난, 재난이 많은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보존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의 어려운 일이나 곤란한 일 등을 회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대항하여 정면으로 맞서서 극복하여 승리하도록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인생으로부터 물러서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을 인생 여로에 대하여 보다 잘 갖추어 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삶의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모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길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분명히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기독교인으로서 끝까지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인은 언제나 세상을 이기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3:13)....(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수하는 사람만이 생명을 얻으며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신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28: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28: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28:7)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편한 생활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라. 자기 힘에 맞는 일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자기 일에 맞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라. 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믿는 바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라. 오래 살기를 기도하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전력을 다하고 최선을 다 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 진열대에 장식되는 밀알이 되도록 기도하지 말고 땅 속에 묻히는 밀알이 되도록 기도하라."

둘째, 예수께서 제자들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17:11)...거룩하신 아버지여...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는 평소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의 분열상을 친히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20: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상을 구원해야 할 사명을 위해 부름받은 제자들이 세상적인 세력 다툼을 벌이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속성상 각개전투식의 개개인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협조와 화평 그리고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 역시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되어져야 할 이유는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한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4:6)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위의 말씀들을 살펴보면 예수, 즉 진리를 떠나서 하나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 안에서의 일치를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서로 잘 단합하여 교회를 이룬다 하여도 거기 진리가 없으며,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음의 말씀을 보면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 말씀은 참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진리를 지키지 않는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딤전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교회는 진리 안에서 자라고 온전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예수의 이러한 제자들의 일치를 위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사는 분열과 반목의 역사로 점철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 일치를 위한 소위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s)이 이러한 성경적인 원리에 충실하지 못하고 혼합주의적(syncretistic)인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일치와 통일에 대한 노력은 정당하다고 보나 그 일치와 통일의 근거인 '진리'에서 일탈했기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결국에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s)은 교회사에 또 하나의 분열의 역사를 덧붙인 격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로 뭉쳐진 형제들의 무리가 아닌 집회에서 복음이 참되게 전파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분쟁하고 있는 교회로 말미암아 세상이 복음화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의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을 아버지 뜻에 복종시킴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데는 겸손과 복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빌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어떤 임금이 있었는데 눈이 하나 없었습니다. 한 화가를 데려다가 그리라고 했습니다. 눈 없는 채로 그렸습니다. 그래서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두 번째로 온 화가가 둘 다 온전하게 그렸습니다. 또 사형이었습니다. 이유는 아첨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화가가 왔습니다. 합격이었습니다. 눈이 있는 쪽 옆얼굴을 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내 친구가 애꾸라면 나는 그의 없는 쪽 얼굴은 말고 있는 쪽 옆얼굴을 보리라. 그 자세를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모두 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싸움으로밖에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겸손과 복종으로 교회와 가정을 하나되게 하시는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셋째, 예수는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17: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기도는 제자들의 육신의 건강이나 장수, 출세, 성공을 위하여 기도하시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범죄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주님을 위해서는 감옥에 갇히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 하지않고, 죄만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정녕 두려워 해야할 것은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왜냐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굴을 따다가 큰 굴 한 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껍질을 까 보았더니 속에는 고기가 한 마리 있을 뿐 굴 알맹이는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굴이 오래 전에 작은 고기를 껍질 속에 넣고 다물어 버렸으므로 그 고기가 그 속에서 굴을 먹고살게 되자, 굴은 죽고 고기는 자랐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 죄를 마음속에 용납해 두면 결국 자기는 죽고 죄만 자라는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에 참으로 우리가 기도할 제목은 바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해지기를 위해 예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다, 성별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을 성별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결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람의 몸은 물체이기 때문에 물로 씻을 수 있으나 영혼은 물체가 아니고 영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진리로야만 정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사람은 그 영육이 아울러 성별되어질 때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요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시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21세기를 앞두고 그 경축준비위원회가 열렸습니다. 거기서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긴 직업을 표창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변호사가 자기네 직업이 가장 역사가 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증거로 이브한테 한 뱀의 속삭임이 변호사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이를 반박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빼내어 이브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의학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기술자가 나타나서 반박하기를 아담과 이브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광명이 있으라>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이미 그때부터 전기기술자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정치인이 벌떡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성서에도 첫머리에 카오스(혼돈)가 있었나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정치가 없이 어떻게 그런 혼란이 생겨날 수 있었겠느냐.> 정치인은 두 사람만 있으면 여(與)와 야(野)로 갈라섭니다. 그리고 한 쪽이 물을 휘저으면 또 다른 한 쪽이 물을 맑게 한다면서 다시 한번 휘저어 나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계를 비롯하여 법조계, 학계, 경제계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부패되고 혼탁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 민족을 정화시키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밖에는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화의 역사를 하십니다.

"(고전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병들은 인간과 사회를 성화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북부 이탈리아에 특수한 습관을 가진 정신질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걸레로 무엇을 닦기를 좋아합니다. 마루를 닦으면 생산적이지만 자주 진흙바닥을 열심히 문지릅니다. 진흙은 닦아도 또 진흙입니다. 인간이 더럽고 병든 심장을 소위 도덕이나 소양으로 닦으려 하지만 어리석은 노력입니다. 새 마음을 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카멜레온이라는 희안한 도마뱀이 있습니다. 이 동물은 주변환경에 따라 피부의 색깔을 바꿉니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도록 누런 바위틈에서는 누런 색으로, 초록색 덤불 속에서는 초록색 피부로 바꿉니다. 사람도 그때그때 자기를 숨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검고 병든 심장, 마음의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라고 불리우는 인간의 병든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으시고 그 분의 교훈과 말씀대로 사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성별된 생활의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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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성도들을 위한 기도        

 "(요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17: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요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어느 외국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토요일 저녁에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데, 유치원 다니는 아들 녀석이 같이 놀아 달라고 자꾸 떼를 쓰고 설교 원고는 더디고 하여 헌 잡지 속에 있는 세계지도 한 장을 뜯어내서는 여러 겹으로 찢어 아이에게 내밀었습니다. 세계지도를 맞추어 가져오면 네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마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희색이 되어 설교 준비를 하는데, 10분도 안되어 녀석이 노크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화를 내면서 어째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아빠, 전 세계지도는 뭐가 뭔지 몰라요. 그런데 세계지도 뒤엔 사람 그림이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 그림을 맞춘 다음 뒤집으니까 세계지도가 되더라구요." 목사님은 준비하던 설교 원고를 당장에 찢어버리고 자신이 영혼의 소리를 설교하지 않았나를 반성하며 아이와 실컷 놀았다고 합니다. 이튿날 주일 설교는 빈손이었지만 그의 일생에서 가장 훌륭한 설교였고 그로부터 그는 세계적인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Knowledge of Jesus Christ)입니다. 세계의 모든 복잡한 문제들을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만을 안다면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풀려지는 것입니다.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먼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느냐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을 힘입어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같은 기독교 신앙을 다음의 성구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호6: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제사지내는 것만으로 그 분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쳐주었다고 해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을 하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고 그를 잘 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아무리 종교적인 행위를 많이 하고 큰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면 그의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귀며 사랑과 신비의 깊은 교제 속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은 누가 옳고 그르냐, 누가 선하고 악하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오직 하나님만이 옳으시고, 하나님만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 선하시고 절대 의로우신 하나님만을 아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의롭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선하고 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다음의 비유 말씀을 통해 그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20: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마20: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마20:3)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마20: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마20: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마20:6)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마20: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마20: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마20:9)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마20: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마20: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마20: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20: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마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루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디며 땀을 흘린 사람이 주인의 처사, 즉 겨우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임금을 자신보다 먼저 받은 것이 불공평한 처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 정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비유는 천국의 비유입니다. 천국은 곧 "집주인"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 집주인은 하나님을 말합니다. 집주인의 뜻이 곧 천국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집주인의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실업자들이었습니다. 집주인이 불러도 그만 안 불러도 그만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집주인의 행한 처사에 하등의 하자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을 불러준 주인과 임금 분배를 통한 주인의 뜻을 알려고 하지않고 오직 물질(경제)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한 낱 노동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주인의 처사를 통해 주인의 뜻을 알고 주인을 바로 알았다면 그들은 참으로 천국 백성으로, 그 주인에 속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되는 것(To be one)과 아는 것(Knowledge of Jesus Christ)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았다면 이들은 모두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역사의 목적은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되어지는 것입니다.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역사의 궁극적 목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역사의 피할 수 없는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입니다. "인간이 쓴 가장 신성한 작품", "기독교 구원의 위대한 광상곡(a great rhapsody of the christian salvation and church)" 등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서신서인 에베소서는 죄로 인한 만물의 부조화와 분열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궁극적으로 해결되고 회복되고 통일된다는 대화합의 진리를 명쾌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부조화와 분리와 분열이 가장 불행한 사실이며, 여기서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과의 분리, 분열, 부조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연계의 분리와 인간의 분리와 시간의 분리와 영원의 분리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분리 등 모든 분리는 다만 인간과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되어질 때만이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그리스도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교회는 전 세계적이며 전 우주적인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라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교회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라고 스코트(E.F.Scott)는 말했습니다. 통일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시대의 통일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통일의 주체가 되는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해야만 합니다. 역사의 완성은 통일의 주체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역사의 완성과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교회는 전파해야 합니다.

"(사11: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사11: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사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11: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는 말씀은 바로 역사의 완성과 통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처녀들은 맞선을 보아 시집가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맞선이란 청춘남녀가 만나 서로를 저울질하면서 서로를 잘 알고 나서 배우자를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처녀들은 한 명의 총각을 앞에 놓고 선택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맞선을 봐서 시집을 못가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처녀들 대꾸가 이랬다는 것입니다. "총각 네 명을 데려다주면 그 가운데 한 명을 찍겠습니다." 이쯤이면 눈치 빠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사지선다형 공부를 한 탓에 맞선을 봐서 시집갈 순 없고 적어도 네 명의 총각을 데려다주면 그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우리 교육현실에 대한 뼈아픈 풍자인 것입니다. 결혼은 적어도 상대방을 어느 정도는 바로 알고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하나되는 것은 인격적인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일치는 사랑과 복종의 일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과 복종을 통해서 예수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일치는 인간의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 가운데 사람들이 서로 결합하게 되는 그러한 일치를 말합니다. 참된 지식은 서로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참된 지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의 몸된 교회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교회에서의 봉사생활, 성경공부, 기도생활 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 생활 즉, 말씀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삶의 표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해도 끝까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다해도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시119: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시119:74)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 (시119: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시119:76)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시119:77)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나로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고난이 있어도 예수를 아는 데에 축복과 영광, 그리고 은혜와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과 하나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말씀과 하나되어질 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가정이 하나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하나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라가 하나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광된 통일의 모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러분들을 위한 기도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통해 이루어지시므로 은혜와 영광, 그리고 진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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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고난의 잔        

 "(요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요18: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요18: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요18: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요18: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요18: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요18: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요18: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요18: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요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그가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지난 몇년 동안에 편안한 날을 별로 못 가졌다. 알라바마 감옥에 다섯 번 투옥되었다. 내 집이 두 번 폭파되었다. 나와 내 가족을 죽이겠다는 위협을 거의 며칠에 한 번씩 받아왔다. 나는 칼에 찔려 거의 죽을 뻔하였다. 더 이상 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 있을지 정직하게 말해서 나 자신 의심스럽다. 정말 조용하고 쉽게 살고 싶은 유혹을 시간마다 받는다. 그러나 이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내가 힘을 얻고 굴하지 않는 원인은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나의 멍에를 메면 너희 짐이 가벼워질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 말씀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고통의 체험을 통하여 흑암이 얼마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가를 배웠다. 주님을 믿을 때 고통은 오히려 창조적인 능력으로 변한다는 것을 여러 번 체험하였다. 나의 개인적인 불행은 나를 변화시키며 다른 사람들을 고쳐줄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자랑스럽게 나는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다고 한 말을 실감있게 이해한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번 사순절 기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적 체험을 가지심으로 창조적인 능력이 충만하시고, 자신을 변화시키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영육간에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1절, "(요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요18: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은 겟세마네 동산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목전에 두고 가장 먼저 가지신 것은 바로 기도의 시간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보면, 기도란 하나님과 마주 앉아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촛점을 맞추는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단지 자신의 소원과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것입니다. 그와같은 기도는 차라리 주문(呪文)에 불과한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과 촛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을 명상하기도 하며 찬송을 부르기도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발견하고 확인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확신한 후에는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바람직한 기도생활이며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대한 기사는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고통의 길, 형극의 길을 선택하셨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편한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시밭길을 택할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택해야 할 것인가? 타협해서 무사하게 여생을 보낼 것인가? 오욕과 수치가 기다리는 그 좁은 길을 선택할 것인가?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고난의 잔"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본회퍼는 그의 <옥중서한>에서 예수의 이러한 선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였습니다. "명령에 따라 고통을 받는 것은 자의로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여럿이 함께 고통받는 것은 혼자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것은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그런데 예수는 자의로, 혼자서, 육체적 고통과 정신의 고통을 모두 선택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은 고통의 선택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시는 모습은 고뇌에 찬 처절한 고통보다는 오히려 당당하고 의연하며 기쁨이 넘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요한 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고난의 처절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마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막14:32)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막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막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막15: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눅22:40)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눅22: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눅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요한 복음에서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당당하고 의연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확고부동하면 어떠한 십자가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고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자원하고 계시며 적극적으로 그 수난에 참여하고 계시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가 자기를 팔 것을 알고 계시고 잡아가도록 유다가 잘 아는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고 내려 오셨던 것입니다.

"(요18: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요18: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요18: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요18: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능동적으로 맞이하실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를 좌절과 패배로 보신 것이 아니라 진리의 궁극적인 승리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능동적으로 맞이하실 수 있었던 것은 사랑과 진리가 증오와 거짓보다 강하며 결국에는 이긴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와 악의 세력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그것보다 더 강하며 하나님이 결국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죄 없이 당하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인간의 죄가 용서받으며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삶 전체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딸과 목수인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 태어나 가난 속에서 자라셨고 힘든 노동에 종사하셨습니다. 실망도 하고 울기도 하며, 배신도 겪으셨으며 버림을 받기도 하고 심한 상처도 입으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실 때까지 그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고난은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는 얼마든지 십자가의 고통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피할 수 없는 뜻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기쁨으로, 의연하게 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예수의 고통에 초대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처럼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선택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겪은 사람이 예수를 보다 더 깊이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사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대신 짊어지기 위하여 고통을 선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인의 사명은 나라와 민족, 더 나아가 세계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모든 슬픔을 함께 나누고 대신 짊어지는 자발적인 자세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바로 읽고, 그것을 바로 지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선택할 수 있어야 참된 기독교인이며 사명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말씀을 보면, 예수의 치유하시는 방법이 치료약을 던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그 고통 자체가 치료의 방법인 것이었습니다. 말만 가지고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눅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고 말하며 그 강도만난 자의 형편과 처지에 동참하는 마음과 행함을 가진 '상처받은 치료자'만이 참된 치료자인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맞는 채찍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 당하는 채찍을 자신의 채찍으로 삼게 될 때 "나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과 나라 민족의 "나음"을 위해 예수의 고난의 잔에 동참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고난의 잔에 참여하는 길은 순종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무리 십자가의 길이 험하고 고통스러워도 끝까지 순종하는 종의 길을 걷는 것이 성도의 길이며, 영광스런 승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시인 타골(Tagore)의 체험담입니다. 어느 날 아침 종이 출근하지 않아 타골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종은 오후 2시에 와서 자기의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었습니다."나가라! 너같은 놈은 필요없다!"고 외치자 종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지난 밤에 제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죽음과 주인의 분노를 다 짊어지고서도 하루의 책임을 완수했던 것입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의 이러한 삶의 자세를 배워가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십자가 종탑은 시카고 템플교회에 있습니다. 어느 날 수 많은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이 탑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번화가 네거리에 이 탑이 있지만 그 동안 쳐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날따라 주목거리가 된 것은 높은 탑의 십자가에 일군이 매달려 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빈 십자가는 관심밖에 있었으나 사람이 달려 있을 때 그 십자가는 세상의 눈길을 모았던 것입니다. 잘못지고 있는 자신의 십자가를 이번 사순절 기간을 통해 바로 수리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바로 자기 자신이 달려 있지 아니하면 자신의 가정과 이웃, 그리고 나라 민족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난의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려 질 때 가정과 나라 민족이 "나음"을 입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의 잔"은 우리에게 "삶의 치유와 축복의 잔"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받으시는 성찬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의 잔"에 동참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에 "치유와 축복의 잔"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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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나약한 인간        

 "(요18: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요18: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요18: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요18: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요18:16)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요18: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요18:18)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요18: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요18: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요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요18: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요18: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요18: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요18: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요18: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요18: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고난당하시는 예수께서 제일 먼저 끌려가신 곳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 앞이었습니다. 안나스는 당시 악명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안나스 자신이 주후 6년부터 15년까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가운데 넷이나 대제사장의 직위에 있었고 가야바는 그의 사위였습니다. 유대민족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는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정부의 개입으로 그 직분은 투쟁과 음모 그리고 뇌물수수와 독직(瀆職)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대제사장직을 정부에 적극 협조하고 추종하는 누구에게든지 뇌물을 받고 임기에 관계없이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로마 정부에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사들인 사람은 막대한 이권과 권력을 원하는 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엄청난 부귀를 축적한 방법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희생의 제물을 사고 팔아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구실로 성전의 이방인 뜰에서 희생제사에 쓰일 동물들을 매매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인들에게 소위 권리금을 받고 장사를 허락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되는 제물은 흠이 없는 깨끗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점을 이용해서 제아무리 흠없고 깨끗한 제물을 가져온다 해도 대제사장에게 매수된 검열관으로 하여금 어떻게 해서든지 트집을 잡게 했던 것입니다. 상인들은 뇌물을 준 만큼 그 이상의 잇속을 챙기기 마련이었고, 검열관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를 들면 성전 밖에서는 한 쌍의 비둘기가 불과 1000원 밖에 들지 않았는데 성전 내에서는 1800원이나 하듯이 엄청나게 폭리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실상 오늘날 힘으로 상권을 장악한 구소련의 마피아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성전의 모든 상권을 대제사장이 사유화했으며, 이로 인해 엄청난 축재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안나스는 이렇게 예배자들로부터 온갖 수단 방법을 다 해 착취하고 거룩한 제물을 이용한 악랄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안나스를 유대인들조차도 증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탈무드 가운데는 이러한 글귀가 있을 정도이었습니다. "화 있을지어다. 안나스의 집이여! 화있을진저 저들이 울리는 뱀같은 소리여! 그들은 대제사장, 그들의 아들들은 금고지기, 그들의 사위들은 성전의 관리인, 그리고 그들의 종들은 막대기로 백성들이 때리고 있도다!" 안나스와 그 일족들은 그처럼 악명이 높았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마피아같은 존재들인 그들이 예수를 마피아 두목격인 안나스 앞에 먼저 연행해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예수가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몰아낸 사람이며 그로 인해서 결국 안나스의 재원을 축내었고, 그를 '강도 두목'으로 정곡을 찔러 공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험악하게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추방하여 두려움 가운데 있던 가다라 지방 사람들을 평안하게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경제적인 손실만을 내세워 예수를 자기 마을에서 내몰았던 경우와도 매우 흡사한 것입니다.

"(마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 (마8: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8: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마8: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마8: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마8: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마8: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이러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시 안나스가 예수를 심문하는 것은 재판 자체를 조롱하는 것이었으며 재판 과정에서 볼 때 분명히 위법 사항이었던 것입니다. 우선 재판의 시기를 볼 때, 유대 소송법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야간 재판은 금지되었으며 특히 중요한 소송건일 경우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재판은 한 밤중에 그리고 하루밤 사이에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재판 장소가 위법이었습니다. 재판소는 엄연히 산헤드린 공회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 가야바 개인의 집 뜰에서 재판이 열렸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에게는 변호인이 마땅히 있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변호인을 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위법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허위 증거를 채택했다는 것이 위법이었습니다. 다음의 성구가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막14: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막14: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막14:59)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마26: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마26: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안나스가 얻은 대제사장직은 그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는, 즉 뇌물을 주고 로마 권력으로부터 얻어낸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과 재물에 손해를 입히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권력과 재물 앞에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권력과 물질 앞에 고난당하는 "진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진리가 고난당하는 사회는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잠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잠14:34)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말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물질)은 강하다. 왕(권력)은 더 강하다. 여자는 좀 더 강하다. 그러나 진리는 가장 강하다." 인간 예수를 죽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죽일 수 없으며, 죽을 수도 없습니다. 진리가 권력과 물질 앞에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진리는 수많은 수난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 걸어 온 진리의 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수난과 형극의 길을 걸어 온 진리가 불의에 대하여 승리한 것입니다. 당시 예수를 잡아죽인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 장로들은 그 시대의 소위 지성인들이었습니다. 지성이 돈과 권력 앞에 아부하는 모습, 지켜야 할 진리를 묻어버리려는 음모를 볼 수 있습니다. 실로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희곡<아테네의 타이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황금이야말로 신이다. 흑을 백으로, 추(醜)를 미(美)로, 악을 선으로 만드는 황금! 너 인류의 치사스런 창부이기도 하다." 권력과 황금지향의 가롯 유다는 결국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마27: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마27: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마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27: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마27: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마27: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라고 큰소리친 지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거듭해서.....,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입니까! 한때는 가장 자신 만만했던 그가 지금은 어두움에 몸을 숨긴 채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 "나는 그를 모른다."라고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당당하게 칼을 뽑아 감히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땅에 떨어트렸으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순순히 붙잡혀 가고 온갖 수모와 구타를 다 당하게 되었을 때, 즉 예수와 떨어져 멀어져 갈 때는 예수를 모른다고 완강하게 부인할 정도로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 비굴하기 그지없는 나약한 인간의 추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마26: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마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마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마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 하노라 하더라 (마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마26: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께서 낙향하여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시몬 베드로 찾아가시어 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이제 십자가 지향의 강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한 랍비가 어느 유대인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길에서 돈이 많이 들어 있는 지갑을 주웠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저에게는 딸린 식구가 많이 있으며 보시다시피 저는 매우 가난합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받아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도둑이다." 랍비는 두 번째 유대인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주운 즉시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그대는 바보이다." 랍비는 세 번째 유대인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그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제가 얼마나 약한 인간인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맞게 되면 그 지갑을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습니다." "그대의 대답이 옳은 대답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완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결코 완전할 수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폭풍과 비바람이 몰아치면 추풍 낙엽처럼 흔들리게 될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당신은 자신이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자만에 기인한 확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로 풀잎처럼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유명한 크랜머 대주교도 기독교를 박해하는 정부에 의해 체포당하자 처음에는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였습니다. 그 후 한 동안의 방황을 거친 후에야 그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위하여 화형틀로 걸어갔습니다. 쟌 다르크도 어려움이 닥치자 역시 처음에는 자기의 주장을 굽혔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나 신념에 대해 결코 완전한 장담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완전을 주장하기 전에 우리 생애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해주시기를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모든 면에서 주님을 배반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인간의 나약한 체질을 하나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시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시103: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103:16)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사도 바울도 자신의 나약한 모습, 몸과 마음의 갈등 구조 속에 갈팡질팡하는 자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능력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확신하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다음과 같은 승리로운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마다 시작과 끝에 "(살전5: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는 축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항상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 지향의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한 것입니다. 물질과 권력 지향의 인간과 국가는 결국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지만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은 세상 권력과 황금은 "피밭"(마 27:8)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어떠한 권력과 물질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으며 비굴해지지 않고 진리를 사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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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인간 군상(群像)

 "(요18:28)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요18: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요18:30)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18:31)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요18: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18: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1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요18: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요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18: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요18: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요18: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요18:40)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요19: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요19:2)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요19:3)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요19: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요19:5)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요19:6)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요19: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요19: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요19: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요19:10)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 (요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요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요19: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 (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요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19:15)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요19: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본문은 예수의 심문에 대한 가장 극적인 기사입니다. 이 극적인 내용을 한 묶음으로 해서 읽을 때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삶의 유익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유대인들, 빌라도, 그리고 바라바 등 세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백성들이었지만 로마 정부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허용받았습니다. 그러나 사형집행권은 그들에게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행악자로 몰아부쳐 빌라도에게 끌어갔던 것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돌로 쳐죽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구약 율법에 "(레24:16)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라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최초로 돌을 던질 자는 유죄를 입증한 증인이어야 했습니다.

"(신17:7)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여기 "땅에서 들린다."는 말씀의 뜻은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예수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돌로 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철두철미하게 빌라도를 이용하여 로마 법에 의해 예수를 죽이도록 획책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탐욕의 노예가 된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선동에 따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외쳐대는 광기어린 폭도들의 증오에 찬 모습에서 이성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증오만큼 인간의 판단을 뒤틀리게 하며 인간성을 상실케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도덕과 윤리 감각의 균형을 상실하는 중에서도 자신들의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빌라도 관정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유대의 유월절 절기를 맞아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의식적 정결법을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 정결법 중의 첫째는 "이방인의 거처는 부정하다."로 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발효시키지 아니한 빵을 먹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빵을 발효시키는 효모는 악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모든 집에서 깨끗이 소각해 버려야 했습니다.

"(고전5:6)....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그런데 빌라도 관정에 들어가는 것, 곧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효모가 있는 곳에 들어가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 의식의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했지만 사실상 그들은 사랑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 든 것입니다. 이와같은 처사는 어느 시대에도 행해지기 쉬운 일입니다. 교인들 가운데서도 지극히 사소한 일에 안달법썩을 떨면서도, 정작 사랑과 용서와 봉사라고 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매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 중에서도 예복이라든가 비품, 예전과 그리고 의식적 일에 대해서는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사랑과 친교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교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비극적인 일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정신이 지극히 간단하게 그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먼저 해야할 일을 먼저 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소한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조작한 것이었습니다.

"(마26: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이러한 고소 내용은 종교적인 분쟁이기 때문에 빌라도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발언을 정치적인 반란으로 몰아부쳐 예수가 자신을 왕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으로 고소를 날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증오심이 결국 허위 날조된 고소를 하게 되었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증오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쟁 시작의 불씨는 증오심입니다. 예수는 미움을 살인의 범주에 넣어 다루었습니다. 미움은 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하여 창고 전체를 불태우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미움은 엄청난 파괴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미움에서 해방되는 것이 사랑의 첫 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가는 길은 미움과 증오의 길이었지만 그 미움과 증오를 받았던 예수의 골고다를 향한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이란의 호메이니가 죽었습니다. 그가 남긴 인상은 증오와 복수심이었습니다. 7백 년 전에 이란 지방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는 현지에서 들은 "산 속의 노인"이란 이야기를 소개하였습니다. 한 노인이 자신이 신으로부터 계시받았다고 믿고 청소년들을 납치하여 세뇌하였습니다. 약물로써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어 놓고 "너는 지금 임시로 천당에 왔다. 세상에 다시 보낼테니 나의 원수들을 죽여라. 그러면 너는 영원히 이 천당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고 세뇌하였습니다. 호메이니만이 이 "산 속의 노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일본 토쿄 지하철 사린 집단 살인 사건에 관련된 옴진리교는 화학실험실과 공장을 차려 사린가스 등 여러 가지 신경 독가스를 대량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자동소총과 대포까지 제작 가능한 고도의 금속가공시설을 하여 국가에 대하여 전면전을 준비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정체불명의 "신비적인 체험을 할 수 있다.""수행의 레벨이 오른다." 등의 문구가 씌여진 약품을 특별 수행 요금으로 최소 1백만엔 이상을 받고 주사하여 육체와 정신을 소모시켜 인간의 존엄성을 저하시키는 방법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종교의 탈을 쓰고 이처럼 엄청난 살상을 일삼고 있는 오늘의 "산 속의 노인"들이 지구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봅시다. 빌라도에게 가서 하는 말이 "가이사 이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왕이시다는 신앙 고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상12:12)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의 너희를 치러옴을 보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실지라도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

왕관이 기드온에게 주어졌을때 그의 대답은 이러하였습니다.

"(삿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그런데 유대교 지도자가 "가이사 이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고 말한 것은 사상 최대의 경이적인 표변(豹變)이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유대인의 작태에 빌라도는 아마도 구역질이 낫을 것입니다. 영국 전래의 신화에 "두 얼굴의 하인 관리자"가 있습니다. 그는 두 개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자기가 관리하는 하인들을 보는 얼굴은 언제나 사나운 표정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상전을 바라보는 얼굴은 언제나 친절하고 웃는 낯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위선을 풍자한 신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두 얼굴의 신앙인은 아닐까요? 하나님께 부탁할 일이 있을 때면 웃는 얼굴이 되고 그런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을 때는 못 본 척하는 굳은 얼굴이 아닐까요? 하나님께 정직하다는 말은 나의 조건과 환경을 막론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신앙태도입니다. 우리 가운데 찬송도, 기도도, 간증도, 예배도, 헌금도, 봉사도, 이웃 사랑도 가면과 과장과 외식과 위선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하나님은 인간의 위선과 수단에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미국에서 교파의 장점을 들어 말하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실한 생활은 감리교인에게서 배우라. 체험적 신앙은 침례교인에게서 배우라. 교회 충성은 루터교인에게서 배우라. 교인의 긍지는 성공회를 통하여 배우라. 단순한 믿음은 퀘이커교도에게서 배우라. 종교를 높이는데는 유대교를 통해 배우라. 기도생활은 장로교인에게서 배우라. 봉사생활 구세군에게서 배우라. 기쁨에 찬 신앙은 흑인에게서 배우라. 만약 이상과 같은 것들을 모두 갖춘다면, 정말 잘 믿는 것이고 이상적인 교인이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유대인들의 위선과 증오는 그들을 악담을 퍼붓는 광기의 폭도, 미칠듯이 날뛰는 열광자의 무리로 변모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그들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마저도 다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엄청난 죄악에 빠지고 말았지만 진정 승리자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빌라도라는 인물을 살펴봅시다. 사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소가 일련의 허위 날조된 것이며 예수가 전혀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잠깐 예수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빌라도는 예수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사형으로 정죄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빌라도는 십자가 사형을 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 마디로 권력에 대한 욕심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빌라도에게 공갈을 퍼붓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 사람을 놓아준다고 하면 당신은 가이사(황제)의 충신이 아니오."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입니다. 자기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황제에게 상소하여 파면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반항하고서는 자신의 직책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 예수를 넘겨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올바른 일을 하려고 했지만 공갈 협박하는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그것을 행할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자신의 직책을 유지하기 위해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는 이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에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처리하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이 처한 함정에서 빠져나가려고 유월절에 죄수 한 사람을 석방하는 관습을 이용해서 예수를 석방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안되자 빌라도는 타협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채찍질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채찍을 맞을 때에는 등이 완전히 드러나도록 해서 기둥에 묶었습니다. 채찍은 긴 가죽끈으로 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납으로 된 알과 뾰죽하게 만든 뼈가 몇 개 박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사람의 등가죽을 획 벗겨 버리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채찍을 맞고서 기절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기도 하며, 대부분 많은 사람은 광란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예수는 그것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 후에 빌라도는 예수를 군중들 앞에 끌고 나와서 "이 사람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빌라도의 당초 의도는 유대인들의 광기어린 증오심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그들의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도록 가혹하게 채찍질을 하도록 명령했던 것입니다. "보라! 이 가련하고도 상처받고 피흘리고 있는 사람을 보라! 이 비참함을! 그래도 아직까지 너희들은 이와 같은 사람을 끈질기게 따라 다니며 전혀 필요없이 죽일 작정이냐?" 그렇게 함으로 해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평정해지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자신에게 넘겨진 예수에 대한 처리는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함에도 불구하고 군중들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도록 하려하는 책임 회피를 꾀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직책을 걸고 예수를 무죄로 석방하는 것이 올바른 결단임에도 불구하고 직책에 연연하여 예수를 유대 폭도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것임을 알았을지라도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럽의 종교 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논제를 비텐베르크(Wittenberg)교회 문에 공시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470여 년 전의 일이지만 그의 용기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길이 빛날 것입니다. 권위에 대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때, 특히 그 권위가 나에게 죽음을 줄 수 있는 상황 아래서의 항거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진실의 편에서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마을의 모든 기왓장이 나를 거스릴지라도 나는 진실을 추구하겠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학문도, 종교도 진실의 추구라고 하지만 실제적인 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란 순간마다 진실과 거짓을 두고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진실을 선택하며 사는 것이 바른 생활이지만 욕심과 무지와 교만이 앞을 가려 거짓을 선택할 경우가 많습니다. 진실의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기의 자리를 유지하려는 사람이나, 물질적 손실을 염려하는 사람이나, 어떤 종류이든 위험을 느낄 때 내 몸을 도사리는 사람은 한평생을 살아도 진실을 위한 바른 결단을 한 번도 내리지 못하고 맙니다. 한국인은 약 40년의 최근사를 통하여 수많은 아부꾼들, 폭력배들, 약삭빠른 축재자들, 거짓 증인들, 무관심한 냉소주의자들을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그런 혼탁한 물줄기가 끊어지고 맑은 샘이 솟기 시작해야 내일의 광명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진리를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 줌으로 해서 그는 그 기회를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 세상 표준으로 볼 때 꽤나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행정관 가운데서도 거의 상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속한 지방의 총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그가 질문한 "진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한 사람 갈릴리인, 불온 분자로서 미움을 받고 있는 이 갈릴리 사람을 앞에 두고 책임 회피, 그리고 직책과 타협하고자 하는 비겁한 행위로 인하여 진리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만약 빌라도가 비록 이방인이었을지라도 직책을 걸고 무죄를 증명하며 예수를 석방했더라면 그는 진리를 수호하는 자가 되었을 것이며 영광으로 가득찬 미래가 약속되었을 것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타협의 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진리를 받아드리든지 아니면 거절하든지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진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진리가 넘겨졌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수가 넘겨졌습니다. 양단간에 결단은 자신이 내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직책과 생명을 걸고 진리를 사수하는 것이 진정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애굽 왕은 심한 노역을 시켜도 이스라엘 인구 팽창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영아 살해의 극악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산파들에게 왕명을 내려 남자 아이는 출산과 동시에 죽이게 했습니다. 잔인한 법이었습니다. 동족 살해의 괴로움까지 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왕명에 복종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를 살렸습니다.

"(출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그들이 왕명을 어긴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뜻보다는 "경외" 즉 존경하고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산파들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 왕명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왕명을 따르는 길은 무사하고 무난하며 상급을 받을 수도 있는 넓은 길이었습니다. 왕명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위험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좁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좁은 길을 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좁은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산파들의 생명을 건 선택이 결국 나라 민족을 해방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라바'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라바는 매우 유명한 죄수였으며 도적이었습니다. 그는 도시 안에서 일어난 폭동에 가담했던 사람이었으며 살인자였습니다.(마 27:15-26, 막 15:6-15, 눅 23:17-25, 행 3:14) 바라바는 폭력과 냉혈한 폭력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그러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과 온유하신 분이시었으며 폭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예수를 버리고 바라바를 선택하였습니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사람들이 바라바의 길을 택하고 예수의 길을 거절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역사의 비극적 사실인 것입니다. "살인자를 놓아주고 생명의 주를 십자가에 죽이는데" 역사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행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행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행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폭도들의 선택으로 석방된 바라바는 그 후에 자기를 대신해서 죽은 그 예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를 따라가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어떤 것이 그를 매혹해서 그는 예수를 따라 나가서 그 최후를 보았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의 모습을 눈 앞에 보았을 때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 속에 불타 올랐습니다. "저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은 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나인데! 저 사람이 나를 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았을 때 바라바가 생각했던 단 한 가지 것은 "저기 달렸어야 하는 것은 저 사람이 아니라 이 나였던 것이다. 저 사람이 나를 구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라바가 바로 예수께서 죽음으로써 구하신 죄인의 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확실한 사실입니다. 폭력 살인범 바라바를 선택한 광란의 군중, 다수의 힘을 빌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진리는 결코 다수에 의해 매몰되거나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는 사흘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진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진리는 절대 다수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수를 원하거나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진리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도가 낳은 대전도자 선다 싱의 회심 경험은 우리에게 예수의 진리를 가늠케 합니다. 선다 싱은 1889년 9월 3일 인도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힌두교도로 선다 싱이 14세 때에 세상을 떠나며 훌륭한 종교가가 될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선다 싱은 천재적인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15세 때 이미 어려운 철학이나 종교 서적을 읽었고, 자기의 인생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며 고민하는 소년이었습니다. 1904년 12월 18일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기독교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기독교에 관계된 모든 책과 성경을 불태우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힌두교에도, 기독교에도 해결책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인생은 허무하고 절망만이 그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욕을 하고 새벽 5시 급행열차가 집 옆을 지나가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힌두교의 신이든 기독교의 신이든 대답 좀 해주십시오.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때 꿈인지 생시인지 선다 싱은 예수의 모습이 자기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는 힌두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나를 괴롭히느냐? 나는 이미 너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다. 이제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이다." 급행열차의 기적소리가 지나갔습니다. 그 기적소리는 죽음의 소리가 아니라 힘찬 결단의 외침으로 들렸습니다. 선다 싱이 깨달은 것은 인간의 고민 앞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사랑의 결단을 요구하며 기다리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대신에 죽음에서 풀려난 것은 바라바같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금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삶을 선택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폭력이 난무하는 것은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를 선택하지 않고 폭력 살인배 "바라바"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선택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심으로 가정과 사회에 생명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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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십자가의 길        

"(요19: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 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요19: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요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요19: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요19: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요19: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19: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요19: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셍케비치(Sienkiewicz)의 노벨상 수상작인 <쿠오바디스>는 너무나 유명한 초기 기독교의 야사입니다. 로마에서 전도하던 사도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여 압비아 가도(Appian Way)를 정신없이 도망하다가 공중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환상에 놀라 발길을 멈춘 것입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길을 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놀라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나는 배역하는 로마의 시민을 위해 두 번째 십자가에 달리려 간다마는 너는 어디로 가느냐?(Quo Vadis)"라고 반문하셨다고 합니다. 여기 주목할 것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주께서 "너는 어디로 가느냐?" 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말은 "주여 이 세상을 어디로 이끄시렵니까?, 또는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는 말이 됩니다. "너는 어디로 가느냐?"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상태이며 믿음은 어떠냐는 물음이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이 가는 길에 관심이 크고 심하면 주님에게까지 원망할 때가 있지만 나 자신의 가는 길은 살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나 자신을 먼저 살피고 나의 가는 길을 바로 정할 때 우리는 세상의 가는 길도 바로 볼 수 있고 또 주님의 뜻도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바로 이해하게 될 때 세상의 가는 길을 바로 이해하며, 세상과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이해할 때 자신의 십자가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마는 항상 마음 가운데 "내가 진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서..." 하는 불평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꿈을 꾸는데 역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올라 갔습니다. 올라가다 보니까 산 중턱쯤인데 십자가를 여러개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위로부터 소리가 들리는데 "네가 지고 올라오는 십자가 때문에 매우 고생스러울텐데 여기 십자가가 많이 있으니 네 마음대로 하나 택해 보아라."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옳다. 되었다. 다른 것 하나 얻어보자."하고서 살펴보니 참 자그마한 십자가가 하나 있었습니다. 빛이 번쩍 번쩍 나고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얼른 이 십자가를 한 번 져 보겠다고 했습니다. 허락을 받아 이 십자가를 어깨에 메니 조그맣기는 하나 전부 황금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무거워서 일어나기 조차 어려웠습니다. 겨우 일어나서 몇 걸음 걷다가 "이거 너무 무거워 못지겠습니다." 하고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걸 하나 골라 보라고 했습니다. 이번엔 조그마한 중 십자가인데 아름다운 장미꽃이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향기가 나고 아름답고 해서 이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져보니 처음엔 괜찮더니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지 않은가? 이 가시가 어떻게 잔등을 찌르는지 지고 갈래야 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건 너무 가시가 많아 못 지겠습니다." "그럼 벗어 놓아라. 어떤 십자가를 택하려느냐?" 잘 살펴 보다가 골라잡은 것은 처음에 벗어놓은 자기의 십자가였습니다. "그건 네가 벗어놓은 십자가가 아니냐?" "그래도 이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 "그럼 네 마음대로 해라." 자기가 벗어놓았던 십자가를 다시 지고가니까 한결 가볍더라는 것입니다. 남 보기에는 다른 사람은 별로 십자가가 없고 내가 진 십자가가 제일 무거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그 사람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이 진 십자가를 져보려고 하면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는 지혜있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각기 주어진 십자가인데 지금은 깨달을 수 없어도 그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것이 제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바로 이해하시므로 자신의 십자가의 길이 승리의 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슬픔의 길)은 지금의 엑시 호모 교회(Ecce Homo Church, 요 19:5, 빌라도 법정 자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 옛 도시의 좁고 꼬불 꼬불한 길을 따라 골고다 언덕까지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말합니다. 성지순례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소는 바로 이 십자가의 길, 비아돌로로사입니다. 십자가형에 의한 죽음만큼 무서운 죽음은 없습니다.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하고도 소름끼치는 사형"(키케로)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본래 페르샤의 사형제도인데 칼타고인들이 이어 받았고, 이것을 다시 로마인들이 칼타고인들로부터 배워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형은 로마 본국 이외의 영토에서만 사용되었고 그것도 노예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의 경우 반역죄에 해당되는 사람만이 사형을 당하지만 십자가 상에서 사형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가형의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죄가 선고되면 재판관의 "십자가 형으로 한다."는 언도와 함께 다음과 같은 명령이 집행관에게 내려집니다. "옷을 벗겨라, 그리고 채찍질하라!"(Summove, lictor, despolia, verbera=Remove him, lictor, strip him, and scourage him) 채찍질은 가장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한 가죽 채찍이 아니었습니다. 그 채찍의 긴 가죽끈에는 뾰족한 뼈조각과 날카로운 납조각 등이 촘촘히 박혀 있어 옷이 벗겨진 채로 그 등허리를 후려치게 되면 의식을 잃고 실신하거나 헛소리를 내며 미친 사람처럼되기도 합니다. 심하면 그 채찍에 그만 까무라쳐 거의 초죽음상태에 이르게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채찍에 맞고 나면 즉시 끌려 나와 4명의 로마 군인 가운데서 자신의 십자가를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 때때로 죄인은 일어나서 걸어가게 하기 위하여 채찍질을 받고 뭉둥이로 몰림을 당하여 비틀거리면서 십자가의 형장까지 걸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메고 가는 죄인 앞에서는 한 사람의 관리가 그가 사형을 받아야 할 죄상(罪狀)을 기록한 죄패(罪牌)를 들고 행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죄상을 보고 그같은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십자가형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 죄상을 기록한 것을 죄인보다 앞세워 긴거리를 가게함으로 그 죄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서 그에 대한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그 죄인에게 유리한 증언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면 십자가 행진은 즉시 중지되고 소송을 재심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를 높이 세우게 되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못이 뚫고 지나간 손과 발의 신경과 힘줄에 체중이 언쳐있으므로 극히 미미한 움직임만 있어도 온 몸이 전률하며 고통은 극에 달하여 가장 부자연스런 모습으로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점점 더 극심해지게 됩니다. 그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길은 전혀 없습니다. 그 못박힌 자리에는 염증이 점점 심해지고 종국에는 살이 썩어 문들어지고 맙니다. 이러한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면 피가 역류하여 혈관을 압축하게 되고 특히 머리에 피가 팽창하게 되어 그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고통에 더 한층 고통을 주는 것은 탈진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범죄인은 기아와 갈증과 볕에 노출시키는 것으로 인하여 완전히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달려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법에 따르면 시체는 해가 지면 내려서 묻어버려야만 했습니다. 로마법에서는 죄인의 시체는 매장하지 아니하고 독수리와 까마귀, 그리고 들개들이 처치하는 대로 방치해 두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오랜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 어머니, 처자, 교우들을 부탁합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5종목의 기도" 라는 주기철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에서)라고 기도하며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소서!"라고 외치며 1944년 4월 21일 병감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영문 밖의 길"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이 어떤 길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영문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2절)

십자가의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가오랴

주님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5절)

십자가의 길은 첫째 순종의 길(2절)이며, 둘째 사명의 길(5절)입니다. 첫째, 십자가의 길, 십자가를 지는 생활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생자(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가는 그 길이 바로 독생자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이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순종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순종의 길을 걸어가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란 영광된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 비아돌로로사도 순종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님이십니다. 모택동이 정권을 잡은 후, 예배 금지 명령이 내렸습니다. 기독교인들끼리 3백 명이 모여 공동 농장을 경영하는 부락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명령을 거스려 예배를 계속드렸습니다. 어느 날 당원들이 나아와 예배를 계속할 경우 매주일 한 사람씩 총살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이들은 여전히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총을 든 당원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 때, 장로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뛰어나가며 외쳤습니다. "제일 먼저 천국에 가는 영광을 나에게 주십시오." 장로는 즉석에서 총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동안 계속되었는지는 몰라도 이 기독교인들의 공동 농장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배고파도 올라가야 하는 길, 골고다의 좁은 길, 죽더라도 올라가야 하는 길, 그러나 이 길만이 생명과 영광, 영생복락의 길이기에, 아니 이 나라 민족을 살리는 길이기에 우리는 이 길을 가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만이 이 나라 민족의 병든 것과 상한 것, 반목과 분쟁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비시켜 피흘리게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연산군은 나중에 엄청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복수가 행해졌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피는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는 흘리면 흘릴수록 더 많은 사람의 죄가 용서되고 미움과 복수보다는 사랑과 평화가 더욱 더 흘러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의 길은 사명의 길입니다. <잠 못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카알 힐티는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과제에 속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가운데 <신 밖에 아무도 모른다.>는 제목으로 된 감명깊은 작품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어떤 잡화상을 경영하는 니콜데이 이와노비치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으로 모든 사람의 촉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점의 물품을 구하기 위해서 매달 한 두 차례씩 장을 보아야만 했는데 장이 있는 곳은 마차로 왕복 거리가 이틀 정도 걸렸습니다. 이제 그는 내일 떠나기로 작정하고 잠자리에 누었는데 자기가 백발이 되어 집에 돌아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그 꿈 이야기를 사랑하는 아내에게 했을 때 아내는 매우 불길하다고 말하면서 떠나지 않도록 만류하였으나 이와노비치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예정대로 떠났습니다. 날이 저물어 그는 여관에 투숙하여 하루종일 마차에 시달린 몸을 침대 위에 던지고 쉬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날 그는 길을 떠나려고 준비하는데 갑자기 경찰관들이 달려와서 지난 밤 그 여관에서 살인강도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하면서 수색을 벌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노비치 차례가 되었을 때 수사관들이 그의 가방에서 피 묻은 칼을 끄집어 내었습니다. 그는 아연실색하여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결국 그는 살인죄의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지게 되었습니다. 이와노비치는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사건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귀중한 인생을 형무소에서 희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평이나 저주나 실망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기의 삶을 인내와 성실로서 살았습니다. 그가 모든 동료 죄수들과 간수들이 신임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되어 모범수로 석방될 때 그의 머리는 이미 백발로 변하였습니다. 그가 왜 무죄한 인간으로서 비참하게도 살인자로 종신형을 지내야 했는가에 대하여 "신 밖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신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비아돌로로사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나의 사명이다."고 하는 확고부동한 신앙의 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은 실로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으시는 길이었습니다. 고전 7:22의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 를 사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명자는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서" 사명을 주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아모스(암 7:14-15), 이사야(사 6:8), 예레미야(렘 1:4-14), 그리고 에스겔(1:1-3) 등은 모두 하나님께서 부르고 그에 따른 소명체험을 통해서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암7: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암7:15)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겔1:1)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겔1:2) 여호야긴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겔1:3) 갈대아 땅 그발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만방에 말씀을 전할 사명자로 부르셨을 때 자기는 말을 잘 할 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입에 전할 말씀을 담아 주시며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가 주시는 말씀의 두루마리 책을 받아서 먹는 신비체험을 통해서 예언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울(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는 신비스런 체험을 통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예수를 전하기 위하여"(행9:4-15) 사명자로 선택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명자들은 부르심을 받는 체험 즉, 소명체험을 통해 사명의식을 갖게 되었고 강렬한 사명감으로 힘차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부르심을 받은 120명 모두에게 한꺼번에 부어주시는 사명체험이었습니다. 이 사명체험을 통해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성령 체험은 사명 감당의 기본 조건입니다. 베드로는 목자로서 사명을 받기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번씩이나 받았습니다. 이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사명 감당의 필수요건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는 사명으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 사명을 완전한 사랑과 순종인 십자가로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써붙인 죄장서(罪章書)가 히브리어와 라틴어, 그리고 헬라어로 쓰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 3대 언어는 당시 3대 위대한 민족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헬라는 조형의 미와 사상의 미를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법과 탁월한 정치를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는 종교와 참된 신이신 하나님의 예배를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의 극치는 바로 예수 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 안에는 그 위에 다시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최고의 사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진선미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이 탐구하고 획득하려고 추구해왔던 모든 것은 예수 안에서 그 극치를 찾아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삶의 최고 진선미를 이루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므로 여러분의 삶이 가장 진실되고 선하며 아름다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 밑에 있는 도박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살폈듯이 죄인은 4명의 군인들이 호송하여 형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죄수 처형 임무를 띠고 있는 이들 군인들은 죄인이 입고 있는 의복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통상적으로 다섯 가지 의복을 입었습니다. 신과 터번, 띠, 속옷, 겉옷이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4명이고 의복은 다섯 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비를 뽑아 취했던 것입니다. 제각기 자기가 뽑은 것을 취한 후에 속옷만이 남았습니다. 그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통채로 짠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네 조각으로 자르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그것을 취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제비를 뽑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군인들은 십자가 밑에서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을 이렇게 까지 나타내 보이는 정경은 없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가 고통 가운데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십자가 밑에서 군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듯이 즐겁게 주사위를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극은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적대심이 아닙니다. 그 비극은 이 세상의 무관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 것도 아닌듯이 취급하고 있는 무관심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여인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미워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인류를 사랑하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는 무관심하고 남은 옷가지 몇 벌에, 세상 썩어질 것, 물질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히덕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탈냉전시대를 맞아 사상과 이념, 문화의 벽을 뛰어 넘어 지금 세계는 소위 "빵"을 놓고 전쟁(경제 전쟁)을 벌이는데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경제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됩니까? 가져야 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관심, 무감각한 인생들에게는 결국 자아 상실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작가 중에 엔도 슈우사꾸라는 사람이 <바다와 독약>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본의 후방 기지 병원에 있던 젊은 군의관 로다는 일본 군부의 명령을 받아 미군 포로를 잡아다가 마취시켜서 생체 실험을 하는데 참가했습니다. 처음에는 미군 포로를 잡아서 진단하는 척하다가 그 포로들에게 병이 들었으니까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미군 포로가 처음에는 의심하고 거부해 보려고 했지만 적의 의사이든 아군 의사이든 혹은 전쟁 중이든 평화시이든 의사만은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의사에 대한 절대 신뢰로 수술을 승락했습니다. 일본 의사는 미국 포로의 몸을 해부해서 왼쪽 폐 전체를 잘라 내고 오른 쪽 폐의 상엽을 절단했습니다. 폐를 얼마만큼 남겨 놓았을 때 사람은 얼마 동안 살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리를 잘랐을 경우에는 얼마 동안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생체 실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로다라는 의사는 그 순간에 자기의 귓가에 반복해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죽였다. 죽였다."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또 "나는 책임이 없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누구도 안 할 수 없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이후로 의사는 거의 자아를 상실하고 망령처럼 삽니다. 자기가 잘라 낸 미군 포로의 폐를 보며 그 젊은 의사는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그는 미쳐 버렸습니다. 그가 무서워하는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사람의 폐를 보고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인 인간의 일부분을 보고도 무감각하고 괴로와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자기의 마음을 보고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가책이었습니다. 가슴의 고통이었습니다. 마음을 찢는 회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엡4: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눅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일본 도쿄 지하철 독가스 사건이 옴진리교란 신흥종교 집단의 조직적인 음모에 의해 저질러 진 사실이 확인되면서 신흥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일본 언론에 의하면 최근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신흥종교단체들은 일본 경제가 급성장한 지난 75년 이후 결성된 단체들입니다. 일본 당국의 집계에 따르면 현재 등록된 종교단체수는 1만 2천여개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들 신흥종교는 초능력에서부터 영능(靈能), 제영(除靈), 염력(念力), 텔레파시, 그리고 옴진리교 교주가 내세운 공중부유에 이르기까지 초자연적인 4차원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53년 결성된 진여원(眞如苑)은 영령개발을 내세워 현재 신도수만도 70만명이 이르고 있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는 것을 교의로 삼고 있는 숭교진광(崇敎眞光, 78년도 결성)도 무려 50만명 가까운 신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일본성도교단, 신명애심회, 광명회, 행복의 과학등도 적지않은 세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들 종교단체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신도층이 젊다는 것입니다. 특히 진여원(眞如苑)을 비롯한 옴진리교,행복의 과학 등에는 인기배우와 TV탤런트 등을 비롯해서 갓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들이 대거 입교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고령자라는 기존의 관념과는 정반대의 현상입니다. 이들 젊은층들이 종교단체에 빠져드는 동기도 과거와는 사뭇 다릅니다. 2차대전 패전 직후 가난과 병 고통등에서 탈피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종교단체에 가입한 것과는 달리 이들 젊은이들은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했다든지 신비에 매료됐기 때문이라는 언뜻 보기에는 너무나도 순수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신흥종교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발생하는 것은 일본만이 아닙니다. 미국의 유사종교는 워싱턴 대학 스타크 교수의 조사로는 4백25개나 됩니다. 그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에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유사종교의 낙원은 미국이 아니라 유럽입니다. 현재 밝혀진 것만도 1천 3백개가 넘습니다. 인구비례로 따져 가장 그런 것이 많은 곳은 이상하게도 스위스입니다. 그 작은 나라에 1백개가 넘는 유사종교가 있는 까닭을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신흥종교의 교주는 라엘입니다. 전직이 자동차 평론가겸 가수였던 그의 신도는 8천명쯤 됩니다. 이들은 수입의 7%씩을 바치고 교주와 함께 벌거벗고 명상을 하는 <혜택>을 받게 됩니다. 영국에서 지금 가장 급성장하고 있는 신흥종교는 <예스 군대>입니다. 2천명이 넘는 신자 대부분이 젊은이들인데 군복을 입고 완전히 금욕적인 집단생활을 합니다. 이들 신흥종교의 특색은 신자들이 중류 계급에 속하고 고등교육을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이들이 가장 정신적인 공허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전3: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외양적인 삶의 질을 볼 때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이들은 이러한 신흥종교집단에 입교 후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거나 아니면 집단 자살로 그 종말을 고하고 맙니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수학자 피타고라스, 로마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세네카, 여류시인 사포,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설국>의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 프랑스의 화가 빈센트 반 고호, 음각가 로버트 슈만 등 이들은 당대의 존경받는 지성인이었지만 모두가 자살했습니다. 지식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마저 악마에게 팔아넘긴 <파우스트>는 "나는 세상의 모든 학문을 통달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독백합니다. 인생의 행복과 인간의 문제가 인간의 지식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각종 경제 지표가 나타내는 경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해서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삶의 질은 눈에 보이는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 즉 사랑과 공의, 정직과 성실, 근면 등이 더욱 편만한 사회에 있는 것입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앗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 Francesco of Assisi,1182-1226)가 어떤 시골로 여행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시골 처녀가 우물에서 물을 긷고는 물위에 나무 조각을 띄워 메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히 여긴 성자는 그 이유를 물으니 물 위에 나무 조각을 띄워두어야 물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 때 프란체스코는 크게 깨닫게 되어 그 후 설교할 때면 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의 마음에도 십자가를 얹어 두면 동요가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풍랑은 너무 심하고 우리의 마음은 너무 약하여, 늘 흔들리고 늘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십자가가 건재할 때 마음의 동요는 진정되고 고요한 펑안을 느끼에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도취된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마음에 건재할 때 마음의 안정이 있고, 우리가 십자가에 도취될 때 우리는 강해지는 것입니다.

"(출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 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15: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 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마라의 물이 써서 사람들이 마시지 못하였던 것처럼 이 세상은 쓴물로 가득합니다. 이 쓴물을 마시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계8:10) 세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계8:11)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마라의 쓴물에 한 나무가 던져지므로 그 물이 달아졌으며, 그 단물을 마시므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라의 쓴물에 던져진 나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던져지는 곳에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던져지는 곳에 사람들에게 내린 질병, 영혼과 정신의 모든 질병까지도 치료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던져지는 곳에 세상의 많은 풍랑이 잔잔해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를 집시다. 자신과 가정, 그리고 나라 민족의 십자가를 집시다.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일지라도 십자가를 지고 갑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만이 세상의 풍랑을 잔잔케 하고, 세상의 쓴물을 달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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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보라, 네 어머니라        

  "(요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19: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문학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예리하게 통찰 분석하므로 선지자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어령 교수의 작품들 가운데 "이것이 여성이다."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소설가 몽테를랑은 그의 여러 작품 속에서 어머니 때문에 좌절하고 만 젊은이들의 운명을 그리고 있습니다. <올림픽>이란 그의 소설 속에서는 스포츠에 열중하려는 뜻을 가진 청년이 어머니의 소심한 이기주의에 의해서 차단됩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죄는 자기 아들을 영원히 자기 자궁의 암흑 속에 가둬두길 바라는 일입니다. 아들을 독점하고 그것에 의해 자기 존재의 막막한 공허감을 메우려는 나머지 어머니는 아들을 병신으로 만듭니다. 어머니만큼 가련한 교육자는 없습니다. 아들의 날개를 자르고 그가 오르고 싶어하는 산봉우리에 접근시키지 않고 아들을 바보로 만들고 못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는 몽테를랑의 어머니관을 이렇게 요약해 놓고 거기에 대해서 맹공격을 퍼붓고 있지만 그녀 자신도 <몽테를랑의 비난은 전연 무근거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라고 양보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사랑이 너무 많아서 그 남편을 그리고 아들의 날갯죽지를 분절러 놓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바다같이 넓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때때로 자녀들이 이 바다에서 익사하는 사실에 대헤서 우리는 너무나 소흘히 대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산처럼 높은 것도 분명하지만 너무 높기에 거기서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하는 수가 많은 것입니다. 동물학자들은 반드시 모성애는 암컷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례(事例)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령 펭귄새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암놈은 알을 수컷의 발등에다 낳습니다. 그러면 수컷은 그 순간부터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알이 깰 때까지 죽은 듯이 서 있습니다. 발에서는 털이 자라기 시작해서 알을 따뜻하게 덮어 줍니다. 물론 암놈은 알을 남편에게 맡겨두고 편안하게 놉니다. 적어도 펭귄새에 있어서는 모성애보다 부성애(父性愛)가 산이며 바다인 셈입니다.(오늘날에는 펭귄새가 같은 젊은 세대 아빠들이 점차 늘어 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르네상스 시대의 여수도원 근방의 연못에서는 으례 낚시금지의 푯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태아를 버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적 사실(史的 事實)을 놓고 보더라도 모성애를 일방적으로 절대신비시(絶對神秘視)하는 것은 하나의 맹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성애는 혹시나 하는 믿을 수 없는 구석이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 불변의 사랑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아니할 것이라 (사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현대 여성의 앞가슴은 아이의 양육이라는 실용적인 가치보다도 미학적인 악세사리로 더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어머니와의 육체적 접촉은 시대가 흐를수록 어렵게 되어 갑니다. <학사(學士)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자신의 체온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유모차의 포대기(강보)로 기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플래스틱 우유병을 빨리고 있는 광경을 우리는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미국의 통계로 보면 아이들 열 명 가운데 가장 불행한 아이가-----그것도 검둥이지만-----뜻밖에도 어머니 젖을 빨며 자라나는 행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아이들인 90%가 어머니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모르고 자라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의 촉감이 아닌 비닐제품의 그 대용(代用) 젖꼭지입니다. 그래서 현대 문명은 바로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아니라 <비닐 콤플렉스>에 걸린 2세들에 의하여 전개되어 가고 있습니다.(그래서 그런지 요새 아이들이 자꾸만 비닐 봉지에다 본드 접착제를 넣고 마셔대므로 환각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외부의 변화들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들의 심리 내부까지도 흔들어 놓습니다. 현대의 어머니들은 대부분이 자녀에 대해 무의식적인 죄책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옛날의 여성들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비로소 확고한 자신의 지위와 그 권한을 보장받게 됩니다...그러나 현대의 <학사 어머니>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옛날의 여성들은 아이를 낳는데서 자기 인생이 시작되었지만 현대의 여성들은 도리어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퀴리부인이 되려던 꿈, 로랑상이 되려던 꿈, 대학 캠퍼스에서 자라나던 모든 꿈들이 아이의 탄생으로 끝장이 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회가 달라졌기 때문에 자신을 <보장>해 주던 아이가 오늘날엔 장애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저 아이만 없었던들 이혼을 할 수 있을 텐데....>
  <저 아이만 아니었던들 지금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얻었을 텐데...>
  내부에서 이런 소리가 들릴 때 여성들은 갑자기 놀라며 귀를 틀어 막습니다.
  <내가 못됐지, 이런 생각을 하다니...>
  혹시 자기는 아이들을 미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 불안 때문에 반사적으로 자기가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으스러지도록 아이를 끌어안고 뽀뽀를 해주고 발작적인 소나기의 사랑을 퍼붓습니다.....가족계획으로 중절수술을 하고 있는 현대의 어머니들은 한번쯤은 낳을까 말까 하고 망설이다 그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고치면 죽일까 말까 하는 끔찍한 살인의식을 품고 애를 낳았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파티나 동창의 모임으로 집을 자주 비우는 파티형 어머니, 여권 운동에 바쁜 세미나형 어머니, 라디오나 텔레비젼에서 활약하고 있는 매스컴형 어머니, 직장에 나가 돈벌이를 하는 아버지형 어머니, .... 이 많은 현대의 어머니들은 자녀를 충분히, 그러니까 자신을 키워준 어머님처럼 그렇게 충분히, 사랑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빠진 죄의식을 씻어내기 위해 자녀들을 히스테리컬하게 껴안게 되는 것입니다.... 못다한 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오늘의 어머니들은 <눈물>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돈>을, 사치스러운 옷과 장난감을 안겨줍니다. 피아노 개인교수를 불러들이고, 미술연구소와 그리고 일류교에 아이들을 집어 넣으려고 극성을 떱니다. 이것이 바로 그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합니다....옛날의 아이들이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과 그 사랑을 서로 구별하지 못한 것처럼 요즘 아이들은 어머니가 주는 <물질>과 <사랑>을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엄마의 애정 표현은 곧 물질적 표현과 등가물(等價物)이 되고 맙니다....<학사 어머니>들은 물질 이외로 자녀를 사랑해 주는 모성의 본능적 방법을 잊어버린 카나리아들입니다. 라틴어와 히브리어를 자기 고장 사투리처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는, 그래서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어느 여류학자님은 처음 이 세상에서 어머니가 되시던 날 활명수를 서너 병이나 마셨다는 애화(哀話)가 있습니다. 저녁 식사가 갑자기 체한 줄로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는 알아도 아이를 낳으려면 진통을 하게 된다는 어머니의 소박한 그 본능적 언어는 그만 몰랐던 까닭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히피 여성들은 브래지어로 젖을 보호하고 어린아이에게는 분유를 먹이는 현대의 어머니들을 향해 일종의 선전포고를 하고 있습니다. 히피여성들은 <아기에 대한 최대의 사랑은 직접 젖을 먹이는 이외의 것은 없다.>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날 소위 배웠다고 하는 <학사 어머니>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시인 조병화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나는 소위 대학에서 배운 사람
  어머니는 산골에서 자란 여성
  어머니는 그저 평범한 한국 여성의 한 사람
  그러나 학교에서, 서적에서 배운 인생보다도
  이렇게 어머니 밑에서 배운 인생이 더욱 컷습니다.      
  요사이 신문지상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가정파탄, 이혼급증, 인신매매, 가정파괴범, 성폭력사범의 증가, 중년의 위기, 낙태, 동성연애, 사생아의 증가, 노인학대, 배우자 구타, 십대 미혼모 증가, 가출 청소년 증가, 존속상해및 살인 증가, 청소년 마약사범 증가,... 점점 붕괴되어가는 가정들을 연상케 하는 단어들입니다. 현대가정은 전통적인 가정에 비해 불안정합니다. 현대가정이 불안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징조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높아가는 이혼율, 부모와 자녀간의 괴리현상, 그리고 유동적으로 변해가는 부부역할 등은 우리의 가정을 혼란의 와중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말했습니다. "가정은 최상의 학교이다. 이 학교의 교과 과정은 사랑이다." 헨리 포드는 무척 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동차 산업으로 거부가 된 뒤에 고향 땅에 작은 주택을 지었습니다. "백만 장자의 집 치고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하는 친구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건물이 문제가 아닐세. 그 속에 사랑이 있으면 위대한 가정이고 사랑이 없다면 석조로 지은 대저택도 무너질 것일세."
  서양의 여성상(像) 중에는 셋의 전형(典型)이 있습니다. 이브와 비너스,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이브는 여성을 대표하고, 비너스는 미(美)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경건한 모상(母像)이며 구원(久遠)의 모상입니다. 어느 날 하늘의 천사가 가장 아름다운 것 셋을 구하려고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천사가 구한 셋은 <아름다운 꽃>과 <어린이의 미소>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하늘까지 가는 도중에 아름다운 꽃은 시들고, 어린이의 미소는 흉해지고,  오직 어머니의 사랑만 한결 아름다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꽃가루는 나비를 통해서 운반되게 하고, 그의 아가페(Agape) 사랑은 모성애를 통해서 전달되게 하셨습니다.
  빅톨 위고는 편모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어느 해 가을 앞집 감나무에 달린 탐스러운 열매를 보고 그는 배고픔을 참기 어려워 그만 따먹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집주인이 알고 노발대발하였습니다. 담장을 쌓겠다고 호통을 치며 화를 내었습니다. 빅톨 위고의 어머니는 주인에게 "우리 아이는 내가 한번 하지 말라 하면 절대로 같은 잘못을 하지 않습니다. 주의시키겠습니다." 하고 사죄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앞집 정원에 감이 떨어져 낙엽에 덮여도 그 집에 들어간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비록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어도 빅톨 위고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순종하며 자랐기에 그 마음 속에는 정의감이 불탔던 것입니다. 빅톨 위고가 나폴레옹의 독재에 항거하며 양심을 굽히지 않고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교육과 사랑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 배후에 위대한 어머니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무엘의 배후에 한나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배후에 요게벳이 있었고, 디모데의 배후에 유니게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배후에 엘리사벳, 어거스틴의 배후에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 웨슬레의 배후에 수산나가, 아브라함 링컹의 배후에 낸시가, 율곡의 배후에 신사임당이 있었습니다.
  조지 이스트맨은 뛰어난 발명가이며 코닥회사의 창설자입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몹시 가난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키우며 노동에 종사했습니다. 어머니가 밤낮 고생하는 모습을 그는 커 가면서 계속 관찰하였습니다. 특히 손가락 마디가 굵고 험해진 그 손을 모으고,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를 옆에 앉히고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 진실된 음성과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청년 이스트맨이 사진 기술을 개발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어코 돈을 벌어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려야겠다. 어머니의 기도가 헛되지 않게 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그를 사진 기술쪽으로 몰아넣었고 정말 억만 장자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미국 LA에 있는 페퍼다인대학교 교육대학원장인 스티네트 박사가 지은 가정 문제에 대한 좋은 책, <강한 가정의 비결>에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를 건강하고 좋은 가정이 될 수 있는 요소로 지적하면서 이런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행복한 장래가 보장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헌신(Commitment)---팀 의식이 강한 가정, 한 가족으로서의 단결과 화합이 강하다.
 2. 감사(Appreciation)---서로 칭찬하고 격려하여 붙들어 주는 가족, 피차의 감정을 보살펴주는 가정.
 3. 교통(Cmmunication)---대화가 많고 잘 들어주는 가족들, 고립감을 느끼지 않는 접촉이 잦은 가족.
 4. 동행(Time together)---먹어도 놀아도 일해도 되도록 함께 갖는 시간이 많은 가정. 집 바깥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지 않고 매사에 동행하는 가족들.
 5. 정신적 건강(Spiritual Health)---가족들이 함께 이웃에 대한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가정.
 6. 극복하는 기술(Coping Skill)---가족 중 누가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가족들이 이해하고 넓은 아량으로 힘을 주는 도움의 태도.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레는 19명의 자녀를 낳아 모두 훌륭하게 양육하였습니다. 그 녀는 훌륭한 신앙인이라면 훌륭한 가정을 만들어야 하고, 훌륭한 가정은 아이들에 대한 가정 교육에 달렸다는 신념으로 다음과 같은 교육 원칙을 실천하였습니다.
 1. 간식 엄금
 2. 전원 여덟 시에 취침
 3. 개인의 의사 존중
 4. 아이 전원을 하나님께 인도
 5. 말하기 시작하면 기도부터 가르침
 6. 가정예배 때는 절대 정숙
 7. 떼쓸 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8. 잘못을 고백하면 무조건 용서하고, 고백하지 않은 잘못은 반드시 벌한다.
 9. 부모나 아이들이나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
10. 부모의 채찍을 두려워하며 부모의 훈계를 고맙게 여기게 한다.
  수산나 웨슬레의 이러한 가정 교육이 가정의 방파제가 되어 성경의 진리로써 사나운 세상의 물결을 막아선 것입니다.
  마리아와 아들 예수 사이에는 깊은 신뢰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에게 이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의 반응은 "(요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하고 무관심을 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잔치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요2:5)...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 뒤 예수께서 시키시는대로 하인들이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워서 연회장에 갖다주니 모두 포도주로 변하게 된 최초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와의 신뢰가 놀라운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들이 이런 때에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 않을 것을 믿고 있었고, 아들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말로는 어떻게 반응을 보이든 그 마음 속에 있는 자비와 이웃의 곤란에 손발을 걷고 나서는 사랑의 정신을 알고 있었으며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과 신뢰의 줄로 이어져 있는 어머니는 아들 딸의 현재 상황이 어떻든 기쁘고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은 이런 어머니를 배신하는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이런 어머니와 아들 딸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는 어머니 아버지와 그 자녀가 멀어지는 비극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와의 이러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는 십자가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심에 있어서도 인륜(人倫)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대하여 하실 바 책임을 다 하셨습니다. 그는 모친 부양의 책임을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가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신 것은, 그의 보다 큰 사명, 곧 영적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혈육보다 영적 가족을 더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동생들보다 사도 요한에게 맡기셨던 것입니다.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영적 혈통은 영원한 것이며,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니만큼, 그것을 위주할수록 하나님이 가까와집니다.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라고 하였으며, 디모데와 디도를 자기의 참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딤전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딛1: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랑과 신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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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다 이루었다        

 "(요19: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19: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19:31)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 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요19: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요19: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요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19: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요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요19: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 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요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요19: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요19:41)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요19:42)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자유진영의 승리로 이끈 처칠 수상이 1940년 영국 의회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그 요지는 "인생의 3대 액체인 피와 땀과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리느냐에 따라서 모든 일의 성패가 결정되며 개인과 국가의 운명이 좌우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피를 흘려야 할 때가 있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으며, 땀을 흘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피를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으면 남의 노예가 되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으면 동물의 차원으로 떨어지며, 땀을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으면 빈곤의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몽땅 흘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가 죄의 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땀과 눈물을 흘리시므로 우리가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물이 인류와 역사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최후로 남기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끝"(omega point), 즉 역사의 완성을 가져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지 않은 삶은 모두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역사와 인간의 삶이 완성되고자 하면 오메가 포인트(끝, omega point)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어야 합니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인생은 끝나봐야 아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평가는 후세로 미루는 것이 좋습니다. 끝까지 잘 살면서 사랑의 제물로 나 자신과 나의 가장 중요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므두셀라는 969년이나 살았지만 성경에 쓰일 만한 가치가 있는 말을 단 한 마디로 남기지 못했으며 기록될 만한 한 번의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치 죽어버린 나무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 3년 동안 공생애를 살았지만 그의 이름은 찬양과 더불어 온 세계로 퍼져나갔고 그의 행위는 앞으로도 영원히 인류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바이런(G. Byron, 영국 낭만파의 대표적 시인)이 <나를 당혹하게 하는 것은 내가 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되었을 뻔한 것이다.> 라고 말한 것처럼 나중에 후회가 아닌 즐거움으로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으려면 당신의 삶을 도움과 친절로 채워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인생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그리스도가 그의 삶을 타인을 위한 고귀한 행동으로 가득 채웠듯이 당신의 삶을 그렇게 채워간다면 인생은 당신의 것이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Herber Evans)
 여러분들께서 오늘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어떤 말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세익스피어가 말했습니다. "이 세상 전체가 하나의 무대 그리고 인간은 모두가 배우, 그들은 각자 자기 문으로 들어와 자기 문으로 나간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무대로부터 퇴장하게 될 때, 절망에 빠져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삼상 26:21)라고 한탄할 것인가, 아니면 기쁨에 넘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웰스(H.G.Wells,문인)는 임종시 "저리들 가! 난 괜찮아."라고 말했습니다.
  칸트는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을 철학에만 힘썼습니다. 그는 16세부터 가정교사를 하면서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철학 등을 공부했고, 30세 때는 겨우 대학 강사자리를 얻어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다가 46세에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70세까지 대학교수를 지내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을 뿐 아니라 남과 교제를 하거나 그렇다고 여행을 하는 일도 없이 오로지 자기 서재와 학교 사이만 오가며 생활하였습니다. 매일 그가 다니는 시간이 어찌나 정확한지 이웃 사람들은 그가 지나갈 때 시계를 맞추곤 했습니다. 칸트는 학교에서 강의하고 집에서 연구하는 일을 되풀이할 뿐 다른 일에는 조금도 한 눈을 팔지 않았습니다. 흔히 학자들이 자기 연구에 몰두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아 인정이 메마른 사람이라고 지탄받는데 반해, 칸트는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면서 불행한 누이들의 생활을 돌보는 동기간의 정도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80세에 죽었는데, 임종시에 "이제 그만하면 됐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인 괴테는 죽을 때 "창문을 열어다오. 빛을....빛을..."하고 시인다운 최후의 말을 했습니다.  
  베토벤은 죽을 때 "친구여, 박수를....희극은 끝났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훌륭한 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레 미제라불>의 저자 빅토르 위고는 1885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사람들에게 '나의 일과를 다 마쳤소.'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 일생을 다 끝냈소.'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곧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면 나의 일과가 다시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어둠에 싸여 있는 미로가 아닙니다. 곧게 뻗어 있는 밝은 길입니다. 우리는 하루 해가 질 때 무덤 속으로 내려가지만 새벽의 여명과 함께 다시 깨어나게 됩니다."(W.C.푸울)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영원한 새 아침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는 가운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명작 <이반 일리히의 생애와 죽음>의 마지막 장면은 "억울하다!"하고 뇌까리며 화가 나서 죽는 것입니다. 이반 일리히는 정직한 남편, 정직한 아버지로서 정직하게 살고 평생을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이 다가온 시간에 생각해 보니까 참 행복을 느끼지 못했고 보람있는 시간들을 산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순간에 화가 난 채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살지 못하고 나의 시간만을 산 사람은 이반 일리히처럼 쓸쓸한 최후를 맞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동생이자 찬송가 작가인 찰스 웨슬레는 운명 직전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기쁩니다. 아, 만족하다. 만족하다." 이 얼마나 평화스럽고 행복한 죽음입니까? 그는 천국에서 자기를 맞이해 주시는 하나님의 기쁜 낯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죽음의 시간이,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으로 생각되지 않고 새로운 시작으로 믿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comma)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에 맨 마지막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헬라 원어로는 "테텔레스타이"라고 하는데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헬라의 도시를 발굴해 냈을 때 옛날의 세금 영수증을 발견해 냈는데 거기에 바로 "테텔레스타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금을 지불했다, 지불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신 고로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부터 죄값을 다 받으시고 하나님의 책에서, 하나님의 장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지워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東)에서 서(西)가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그렇게 멀리 옮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롬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인류 역사의 궁극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인류는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죄값을 다 지불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시 죄가 그의 삶을 지배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그를 지배했던 죄의 세력은 완전히 끝나고(omega point) 사랑의 역사(役事)가 시작(alpa point)됩니다.
  라틴어로 아모르(amor)라고 하면 <사랑>을, 모르(mort)라고 하면 <죽음>을 뜻합니다. 서양인들은 사랑과 죽음에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탕달은 서양인의 사랑은 죽음과 통한다 하여 이 라틴어를 서로 비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 교수가 한번은 학자들이 모인 세미나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교수께서는 성서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셨는데 한 마디로 성경의 진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르트 교수는 미소를 띠며 "성경은 결국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보았네.>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한 학자들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대답은 누구나가 알 수 있는 어린이 찬송가의 첫 절을 인용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 속에는 깊은 연구의 결과가 나타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단순한 사실은 어린이에게만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유일한 진리, 성경 전체를 묶어 놓은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인류 속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그 사랑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모두 불완전하고 미완성입니다. 에로스, 남녀간의 사랑도, 스톨게, 부모 자녀간의 사랑도, 필리아, 친구간의 사랑도 모두 불완전하며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면 모든 종류의 사랑이 완성되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에 대한 이어령 교수의 다음 얘기를 봅시다.
  플라토의 우화에 에로스(사랑)의 아버지는 풍족(Poros, 豊足, 知의 神)의 신(神)이며 그 어머니는 빈곤(Penia, 무지의 신)의 신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끝없는 충족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그 마음은 항상 결핍 속에 있습니다. 아무리 열렬한 사랑이라 해도 충족되지 못한 허전한 불만을 느낍니다. 19세기 유럽의 판화(版畵)에는 남녀의 사랑을 풍자한 만화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잠시 보겠습니다. 첫 장면에는 비오는 날 거만하게 걸어가는 여자에게 남자가 뒤따라오면서 우산을 받쳐줍니다. 기사풍의 이 남성은 그 여인에게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도록 우산을 씌워주고 있는 바람에 자기는 흠뻑 비에 젖고 있습니다. 둘째 장면은 우산으로 가리고 이 남녀는 열렬한 키스를 합니다. 이때는 우산이 공평하게 두 사람을 다 덮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이 다시 빗속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산이 처음과는 반대로 그것을 들고 있는 남자 쪽으로만 기울어져 있습니다. 여자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흘겨보면서 비에 젖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는 기사가 아닙니다. 이것이 에로스 사랑의 모든 과정입니다. 구애(求愛)할 때는 으례 남자가 저자세이고 여자는 고자세입니다. 그러나 일단 사랑을 손에 넣으면 그 자세가 전도(顚倒)되고 맙니다. 사랑의 우산을 잡은 손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입니다. 왜냐면 남자에겐 동정(童貞)이란 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자에게 처녀성이란 것이 하나의 신화처럼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사랑의 완성이 여자에게는 <몸을 버린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하는 것이 남자의 경우엔 <정복>이라고 말해지며 여자의 입장에선 <상실>이 되는 셈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같은 사랑이라 해도 여자는 하나의 핸디캡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사랑을 얻는 순간, 여성은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이른바 <이별 콤플렉스>입니다. <사랑의 장부>를 보면 남자는 언제나 흑자이고, 여성의 것에는 적자로 기록됩니다. 두번째, 세번째의 여성을 만나게 될수록 남성은 유리한 게임을 벌이게 됩니다. 여성의 심리를 환히 바라보고 있는 그 경험때문에 사랑의 작전에서는 언제나 유리한 고지(高地)를 점령할 수가 있습니다. 여성은 반대로 경험이 많을수록 그 값어치가 하락합니다. 첫번째 남성보다 두번째의 남성이, 두번째의 남성보다는 세번째의 남성이 보다 불리한 자리에서 선택됩니다. 처녀성과 정조라는 그 신화가 여성에게만 적용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4: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요4: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남편을 다섯이나 사랑해보았지만 모두가 빗나간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참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 사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에는 율법의 완성을 말합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율법의 대강령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말은 사랑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다음으로, "다 이루었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책임을 완수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요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지도자의 사명감당 요건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정치 경제 사회 등 각계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사랑하므로 그 주어진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마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신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 중에 제인 아담스(Jane Adams, 1860-1935)가 있습니다. 그녀는 시카고의 부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의과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척추에 병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의사의 권고로 휴양차 유럽을 여행하였습니다. 런던에 갔을 때, 그녀는 빈민굴을 방문하였다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녀는 비로소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다.>라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후 그녀는 런던 빈민굴에서 봉사의 삶을 결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한다는 헌신의 75세로 죽을 때가지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시카고 빈민굴의 낡은 집을 사서 빈민의 탁아소, 가출 소녀의 숙소로 삼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유명한 헐 하우스(Hull House)입니다. 제인은 죽는 날까지 척추병으로 고생하였으나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맡았기 때문이다."라는 20대 후반의 결심을 잊지않고 정력적으로 일했습니다. 그 당시 미국에는 16세 미만의 아동 노동자가 2백만 명이나 되었고, 수 많은 문맹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백악관 아동 회의>를 창설한 것도 제인의 노력이었습니다. 그녀는 1931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제인 아담스의 좌우명은 미가서 6장 8절 말씀이었습니다.

  "(미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나의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겸손하게 묵묵히 꾸준하게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도장을 맡은 자가 나아갈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고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을 지배했던 죄의 세력이 끝장나고 이제 사랑의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고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의 목적과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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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부활과 성령       

"(요20: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요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요20: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요20: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20: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요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요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20: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못하더라 (요20: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영광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돌아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많은 죄를 범했고 많이 용서함을 받았던 사람이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으로 그는 창부였으며 일곱 귀신들렸던 여자로써 예수님께서 개심시키고 용서하시어 영육간에 깨끗함을 입은 가장 존귀한 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결코 예수님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 갔다는 것은 그 만큼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이 성구의 난하주(欄下註)를 보면, "간절히"가 "새벽에"로 되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쓰면 "....나를 새벽에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새벽에 찾을 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요14:21).....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녀는 곧장 성내로 되돌아가서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 갔습니다.(본문 2절의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바로 요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 두 제자들이 묘지에 이르렀을 때 요한은 그 속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급한 성격을 감추지 못하고 묘지 속을 들여다 볼 뿐만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텅 빈 무덤을 보고는 대경실색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마음 속에는 어떤 생각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예수의 시체를 옮겼다면, 만일 묘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고 했다면 어찌하여 그들은 수의(壽衣)를 남기고 갔을까?' 요한은 그 어떤 생각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의는 전혀 흩으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접은 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신체가 있었던 곳에는 신체용의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 머리가 있던 곳에는 머리를 쌌던 수건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수의는 벗겨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애당초의 형상대로 개켜서 놓여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벗어나서 그것을 놓고 떠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광경이 요한의 마음을 꿰뚫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요한 믿게 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여기 중요한 사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무덤을 찾아 갔던 사람은 예수님을 그처럼 간절히 사랑하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예수의 부활을 믿은 사람은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셨고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던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그의 부활의 표적을 최초로 목격하게 했고(막달라 마리아), 그 표적을 읽어서 아는 눈과 이해하고 믿는 마음을 가지게 했던 것입니다(요한).
  삶의 위대한 법칙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위대한 해석자라는 것입니다. 지성이 모색과 불확실함 가운데서 혼매(昏昧)하고 있을 때에도 사랑은 진리를 파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연구로써 파악할 수 없는 때에도 사랑은 사물의 뜻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에 한 청년 화가가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 그리고 났을 때 그 유명한 화가 도레(Dore)에게 그의 비평을 부탁했습니다. 도레는 쉽사리 대답하려 하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단 한 마디만 했습니다.
  "자네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지 않군, 그렇지 않았다면 보다 잘 그릴 수가 있었는데."
  만일 우리들이 마음도 생각도 예수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 예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도와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이전 보다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시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시고, 자신의 인격과 삶 속에 예수님을 보다 잘 나타낼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보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은 가서 전하라(선교)는 것입니다.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그 때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행했던 다락방에서 모여 전전긍긍하며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여 목적을 달성한 유대인들이 이제 자기들을 잡아 죽이려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의 한 가운데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요20:21)....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요20:22)....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들을 새롭게 사명으로 창조하시는 것은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cultural mandate)을 가졌다면,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제자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선교)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복음 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과 권능입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제자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증거되는 복음이 생명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겔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37: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겔37: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겔37: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겔37: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여기 6, 9절의 "생기"와 14절의 "내 신(神)"은 바로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골짜기의 가득한 "마른 뼈들"(dry bones)에게 "생기", 즉 성령이 들어감으로 "이 뼈 저 뼈가 맞아서 서로 연락하고, 힘줄이 생기며,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덮혀 살아났습니다." 이 "마른 뼈들"(dry bones)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합니다.(10,11절) 나라 민족을 살리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인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죽은 것을 살리시는 생명의 영이십니다.

  "(고전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예수)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복음 증거의 사명을 지닌 교회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위에 임하실 때 그 사명을 위해 능력으로 덧입히울 것이며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선교입니다.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의 각각 끝나는 부분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 한결같이 선교 명령을 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눅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어주신 성령은 선교의 거룩한 주체(主體)인 것입니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선교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은 오직 성령인 것입니다. 선교의 역사(役事)는 인간의 역사(役事)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진리의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강한 선교의 힘은 항상 "(고전2:4)....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은 선교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교회는, 부활 신앙을 가진 교회는 선교를 사명으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여서 증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행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2: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기에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과 복음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용과 신앙의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증거되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한 개인과 나라 민족의 생명은 죄 사함받아 의롭게 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사회 등등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죄가 그대로 있느냐 아니면 사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 이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인 것입니다.

  "(행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행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행3: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서는 은과 금보다 백번 더 나은 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부활하신 예수를 전했던 것입니다. 앉은뱅이에게 있어 당장 필요했던 것이 은과 금이라고 생각됩니까? 결코 그렇지않습니다.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과 금이 전부가 아닌 더 중요한 영적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은과 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분의 문제들과 이 나라 민족의 문제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일(선교)만이 자신과 나라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시고 그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나 되는 기적, 물이 포도주가 되는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등등은 그 기적들을 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의 부활은 생명의 승리입니다. 또한 진리의 승리입니다. 예수를 무덤에 가둬둘 수 없듯이 생명과 진리는 가둬둘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이 나라 민족 위에 생명과 진리가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성령으로 체험한 사도 바울은 그 누구도 그를 가둬둘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행16: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행16: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행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행1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행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16: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행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16: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행16: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행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행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행16: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행12: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행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행12: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행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행12: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행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행12: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행12: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행12: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행12: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줄 알겠노라 하여 (행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행12: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행12:14)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행12: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행12: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행12: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행12:18)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행12: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구약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풀무불 속에, 사자 굴 속에 가둬둘 수가 없습니다.

  "(단3: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단3: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단3:21)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단3: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단3: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단3:24)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단3:25)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단3:26)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단3:27)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단3: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 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단3: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단6:19)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단6:20)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단6:21)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단6: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단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단6:24)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 (단6:25) 이에 다리오 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가로되 원컨대 많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단6:26)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 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단6:27)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 (단6: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금과 은,그리고 세상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분이 보내신 성령은 그 힘과 능력의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어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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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예수의 부활

  "(요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요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타임(Time)지의 기사(1962.11)에 의하면 4월은 자살이 가장 많은 달입니다. 그 이유는 만물이 싱싱하게 소생하는 생명에 대하여 자기의 인생은 너무도 허무하다고 느끼는 탓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 엘리옷(T.S.Eliot)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신앙인들에게는 꽃망울이 열리는 달이고, 생명이 움돋는 부활의 달입니다. 눈이 죽어버린 소경이 눈을 뜨고, 귀가 죽어버린 귀머거리가 듣고, 사지(四肢)가 죽어버린 중풍병자가 일어나는 기적(奇蹟)의 달입니다. 심장이 몽땅 죽어버린 '나사로'(요11:43) 인생들이 무덤을 열고 생명의 나팔을 불면서 부활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생명에는 살았으나 죽은 생명이 있고, 죽었으나 산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살기 위해서 온 생명이 있고 죽기 위해서 온 생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생명은 살기 위해서 오신 생명이 아니라 실존(인간)을 위하여 죽으러 오신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무덤이 그를 가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원수를 이김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울은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실로 그에게는 무덤이 없습니다. 비석도 없습니다.다만 천사의 입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28:6)고 비문(碑文)이 한번 낭독되었을 뿐입니다.  
  부활! 부활! 무덤을 파헤친 생명! 생명! 그리고 이 감격!   이 기쁨! 누구에게 전할 것인가?   
  어느 가슴에다 심을 것인가?    
  이 땅에 메말라버린 지식인의 사상 속에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땅에 비틀어진 정치인의 양심 속에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땅에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버린 도덕과 윤리 가운데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땅에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교육계에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땅에 천민 자본주의로 곰팡이 냄새나는 기업인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민족의 가슴마다 죽음의 무덤을 파헤친 부활의 생명을 주옵소서!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긴 월남 이상재(李商在,1850-1927) 장로님에게 한 번은 일본 신문 기자가 질문하기를 "간디는 평소에 100세를 산다고 하였고 누구는 몇 세를 산다고 하였는데, 선생님은 몇 년이나 사실 작정이십니까?" 하였습니다. 이상재 장로님은 그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사람이 한 번 났으면 영원히 살지, 죽기는 왜 죽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로 정치가로 외교관으로 교육가로 그리고 교회 봉사자로 다양한 일생을 보내신 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생의 비결은 이와같은 "부활의 신앙"이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이 부활의 생명을 확실히 바라볼 때 현세를 건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재 시인 괴테는 "너 아무리 성공의 정상에 서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죽고 다시 산다는 진리를 알기까지는 처량한 나그네"라 하였고,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4,19,20)고 했습니다.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의 지상 활동(地上活動)을 총결산해주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신(神)의 계시 사역(使役)의 정점이 되는 동시에 인류 역사와 존재의 결정적 전환점을 가져다 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도 중요한 부활 사건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이 없이는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營爲)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태계 미국인 작가 아이색 씽어(I.B.Singer)의 작품 중 '바보 김펠'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펠은 부모를 일찍 여윈 채 고아로 자라났습니다. 워낙 천성이 착한 데다가 사람들의 말에 잘 속아넘어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바보 김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결혼 적령기에 이르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사생아까지 있으며 성격이 포악한 창녀 엘카에게 장가들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녀가 행실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혼을 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결혼한 지 4달만에 부인 엘카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김펠은 고민했습니다. 그도 아이는 10달만에 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곧 그는 아내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세상에 의심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어.' 따라서 그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갓 태어난 자기의 아기를 위해 그리고 아내를 위해 황소처럼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다른 남자와 누워자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멍텅구리 노릇도 이젠 그만해야지,평생 동안 남에게 당하면서만 살 순 없어.'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은 순결하며 따라서 김펠이 헛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아내의 말을 또다시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후 김펠은 20년 간을 그런 식으로 살면서 네 딸과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는 그의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병으로 갑자기 죽게 됩니다. 그런데 상(喪)이 끝나는 날 밤, 꿈에 악마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온 세상이 너를 속이는데 너는 언제까지 그들을 믿을 작정이냐? 그들은 거짓으로 뒤범벅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바보처럼 그들을 믿지 말고 너도 그들을 속이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나?' 꿈에서 깨어난 김펠은 악마의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아 괴로워하다가 드디어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난 모든 사람들을 믿어 주었지만 나에게 돌아온 것은 '바보'라는 별명뿐이었어. 이제 나의 믿음을 배반한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 해."   
  그는 20여년 동안 빵 가게를 운영해 왔는데 정직과 성실로 일해 왔으므로 온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빵을 즐겨 먹어 왔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복수로 밀가루 반죽에 오줌을 한 통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곧 빵을 구울 준비를 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온몸을 검게 그을린 아내 엘카가 나타나 매우 슬픈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바보같은 사람... 지금까지 쌓아온 믿음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려하다니! 몇 사람이 거짓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거짓된 것은 아니야. 제발 믿음을 저버리지마. 난 지금 다른 이들을 속이고 의심한 죄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단 말야."   
  그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었습니다. "아차 했으면 난 영원한 삶을 잃을뻔 했어. 믿음이란 가장 중요한 거야.  작은 일 하나부터 의심하다 보면 나중엔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될거야.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할지도 몰라. 그래 누가 뭐래도 나는 그 모든 것을 믿어야 해."    
  여러분은 김펠이 정말 바보로 여겨집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본문의 의심많은 '도마'보다 바보 김펠의 단순한 믿음이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본문27-2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기를 원합니다.이러한 바램들은 불신자 뿐만 아니라 신자들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한 번 보여 준다면 교회 나가겠다고 하고,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한번 나타나 주신다면 더욱 더 신앙 생활을 잘 할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분명히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현대의 우상이 되어 버린 과학만능주의의 영향으로 신앙조차도 실험실에서 분해하려고 드는 경향에 대해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의 출애굽 사건 기록은 보고도 믿지 못한 자와 보지 않고도 믿었던 자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주는 현대의 과학주의적 신앙관에 일침을 가하는 좋은 실례(實例)입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다가 해방을 받은 출애굽 1세대들만큼 하나님의 이적(異蹟)을 체험한 세대가 없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무수히 겪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사막의 지열(地熱)을 식혀주었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혹독한 추위와 짙은 어둠을 물리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인 이동식 여행과 사막의 열악한 기후로 농사를 짓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여년 간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셔서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게다가 수시로 반석의 물을 끌어내어 식수로 공급하시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들을 노예로 부려먹던 당대의 막강한 권세자인 '바로' 왕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홍해의 이적도 친히 목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던 사람은 과연 몇 명이었습니까?   
  믿음을 지킨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보고도 믿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보지 못하고 믿었던 대표적인 기생 '라합'을 우리 믿음의 귀감(龜鑑)으로 삼읍시다. '라합'은 가나안 여인으로서 당시의 잡다한 혼합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세속화의 첨병으로서 부초처럼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라합은 믿음을 받아들이기에 가장 부적합한 조건과 환경 가운데 살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녀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1세대처럼 하나님의 이적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라합의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성경의 말씀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에 대한 소문만으로 믿음을 가진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마1장). 도마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간 예수님의 무수한 행적을 보았으면서도 드러낸 불신앙의 태도를 경고 삼고, 보지 못하고도 믿음을 가진 라합의 영광된 결말을 믿음의 사표(師表)로 삼아 예수 부활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영광된 첫째 부활에 참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위대한 진리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허위(虛僞)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진리를 제거하고, 말살하고,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진리가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임을 궁극적으로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선이 악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선이시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그 선을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선이 궁극적으로는 악에 대해 승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단번에 완전히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생명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죽음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모든 생명은 죽음과 함께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죽음의 한계를 깨뜨렸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하나의 한계일 수 있으나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될 수 없습니다. 없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창조의 하나님은 죽은 예수를 살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삶에 의해 삼키어졌습니다. 죽음의 독침 곧 죄의 세력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단 한번에 극복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영원한 삶의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넷째,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싸움은 결국 인간의 미움과 하나님의 사랑 사이의 싸움이었습니다. 인간은 그 사랑을 취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영원히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모든 미움 보다 강하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미움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위대한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면 인생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인간과 세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새로운 삶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예수가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받은 사건이라면, 부활은 심판을 받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그 외형(外形)에 있어서 하나님의 분노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과 수난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하나님의 자기 높이심과 영광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예수의 역사적 존재를 나타낸다면, 부활은 모든 역사적 제한성을 벗어난 예수의 영원하고 현재적인 존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만일회적(萬一回的, ein fur allemal)사건이라면, 부활은 이 사건의 영원하고 현재적인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J.Moltman).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이전에 있었던 제한된 인간의 삶으로 되돌아가서 이 삶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제한되지 않은 하나님의 새로운 삶으로의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삶은 "한 새로운 몸의 새로운 삶", "하나의 질적으로 새로운 삶, 죽음을 더 이상 알지 못하며, 그러므로 이 사멸할 삶의 연장일 수 없는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삶이 아니라, 새롭고 다른 삶인 것입니다."(J.Moltman).  
  사도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마음과 생활로 믿으시고 "새로운 삶으로의 생명"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으로 통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인생은 그 날이 풀입니다. 그 영화는 들의 꽃입니다.

  "(시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러나 세상에는 죽을 생명이 있고, 죽어서 영원히 살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으시고 죽어서 영원히 사는 생명을 '지금 여기서'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중세 시대에 어떤 수도사가 성지 순례를 갔습니다. 갈보리 산 근처에 돌아다니던 중에 뜻밖에 이 수도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쓰셨던 가시 면류관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가시 면류관은 보기에도 험상스러운 가시로 되었고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볼품은 없지마는 주님께서 쓰셨던 가시 면류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지극한 보배로 여겨져 그 면류관을 고이 자기 나라까지 가져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자기가 있는 수도원 예배당의 강대상 위에다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부활절 아침을 맞아 수도사들이 일찍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그 예배당 문을 열었더니 온 예배당이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차 있더랍니다. 이게 웬 일이냐고 사방을 둘러 보니 그 험상스러운 면류관의 가시에 아름다운 장미꽃이 많이 피었더랍니다. 물론 얘기에 불과하지만 여기에는 뜻이 있습니다.  
  부활 생명을 의미합니다.  
  승리를 의미합니다.  
  향기를 의미합니다.  
  기쁨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그를 영접하는 이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생깁니다.   
  새로운 능력이 생깁니다.  
  향기가 나는 생활로 변합니다.    
  기쁨이 충만하여지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심으로 참된 생명과 승리와 향기과 기쁨을 얻었습니까? 이 기쁜 주님의 부활의 날에 충심으로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영접해서, 이 시간부터 여러분의 생활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승리의 생활, 향기를 뿜는 생활, 기쁨이 충만한 생활로 변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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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랑과 사명        

 "(요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요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요21: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21: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21: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요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요21: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요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요21: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요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요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요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요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요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요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

  갈릴리 바다에서 일곱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려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대로 순종하였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요한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명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순종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어두운 모습의 일곱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크론 대학 교수 텅크스(Tunks)박사의 말에 의하면, 유사 이래 문명시대가 21회나 있었는데, 그 모든 멸망의 원인들이 하나님을 거스린데 있다고 밝혔습니다.("무화과 나무 열매", p.62) 일곱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비록 예수님을 배반하고 낙향(落鄕)했지만 그의 용서와 은총을 입어 그의 사랑을 깨달아 예수님을 알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부활의 예수님을 체험하실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가 되시므로 제일 먼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 베드로에게 제일 먼저 주고 받으신 대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여기 세번에 걸친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는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각기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첫번째 질문,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여기 네 형제 자매 부모 친구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며, 두번째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은 여기 네가 가지고 있는 배와 그물, 고기, 고향 갈릴리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며, 세번째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은 네 자신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확인하고나서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사명을 말합니다.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는데 너의 생애를 다 바치라."는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세상에서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세상에서도 가장 큰 책임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로 사랑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은 사명만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로마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죽는 날이 돌아 왔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십자가로 끌려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에 못박으려 했을 때 그는 그 곳에 거꾸로 달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죽기에는 가치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었고, 사랑은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책임을 수반하고 또한 사랑은 언제나 희생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의 사명을 대하고 그 십자가를 받아들일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다고는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자의 사명 감당 요건은 바로 사랑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사명은, 곧 "양을 치고 먹이는 것"과 최후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직분(사명)은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증거하고 장수하여 평안한 가운데 죽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받은 바 사명의 우열과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기 주어진 사명에 따라 정해 진 곳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요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예수께서 오늘날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광은 단연코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영광은 우리들에게 할당된 능력이 어떠하든간에 그것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명예를 서로 쟁탈하는 사이가 아니라 베드로는 위대한 목자이며 요한은 위대한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고전15: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15: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양을 치고 먹이는" 목자의 사명은 양의 특성상 성결 보존을 위해 죽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미워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양들을 목양하는데 있어서 죄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말하기를, "만일 나에게,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죄만을 두려워하는 사람 백 명만 있다면, 나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 시대에 역사의 운명을 가늠하는 천국 복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마땅히 성결하지 아니하면 역사에 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에 교회는 성결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양과 염소를 분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마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경향신문 5월 31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청각장애 발레리나 강진희,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소리를 듣지 못한 스물 네살, 그녀는 어떻게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음악이 몸에 감겨 들까, 그녀의 공연에서는 그래서 관객들이 숨을 죽인다. 음악이 춤속으로 스며 들어 완전히 하나가 될 때 객석은 무대 위보다 더 격정에 휩싸인다. 춤동작은 또 어떠한가, 관객들의 경탄 속에 우뚝 솟아올라 힘차게 비상한다. 활달하고 시원하다. 내면에서 우러난 표정연기는 너무도 당당하다. 우아한 자태에 당당한 표정. 자칫 교만하게 보일 정도의 자신감. 그녀를 감싸고 있는 신비로운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무엇이 영혼 속을 흐르기에 침묵의 세계에서도 노래를 듣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부모가 자신의 딸이 농아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생후 10개월 때였다. 놀라지 않는 아이. 울음소리가 이상한 아이. 어머니는 기도하며 울었다. 말못하는 딸을 위해 여러가지를 가르쳤다. 농아에 맞는다는 미술, 테니스, 육상,.... 그러나 딸은 무용만을 고집했다. 그렇다고 듣지 못하는 딸에게 무용을 시킬 순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농아 소녀의 담임선생은 마침 무용교사였다. 소녀는 담임선생에게 매달렸다. 선생은 단호히 뿌리쳤다. 그러나 뜻밖에 어머니가 소녀의 편이 되었다. 어머니의 기도 속에 춤추는 딸이 보였던 것이다. 기도의 응답이었다. 이번엔 모녀가 함께 졸랐다. 이렇게 해서 소녀의 바람은 이뤄졌다. 선생은 농아라고 봐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가르치고 따라오지 못하면 가혹하게 나무랐다. 매도 들었다.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울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음악을 따라갈 수 없었다. 자신보다 앞서거나 뒤에 처지는 음악과 간격을 좁힐 수 없었다. 다른 아이가 다섯번 연습하면 꼭 4배인 스무번을 했다. 발가락에 피멍이 가실때쯤 되면 선생은 연습량을 더 늘렸다. 중학교 2학년때 처음 솔로 콩쿠르에 참가했다. 탁월한 기량으로 예선을 통과했지만 본선에선 탈락했다. 역시 음악이 문제였다 음악을 타지 못하는 발레리나. 듣지 못하는 음악을 눈으로 헤아려 외우고 리듬을 타는 연습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신의 몫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녀에겐 음악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소리의 작은 입자--진동이 느껴졌다. 끝내 이듬해 참가한 콩쿠르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그 후 그녀는 대학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 연기를 배웠다. 거친 동작들은 하나씩 시어(詩語)로 변했다. 그녀의 춤은 갈수록 무르익었다. 92년 전국대학 콩쿠르 금상, 93년 마카오 초청공연 북큐수 국제 양무 콩쿠르 준우승. 마침내 대학 졸업을 앞둔 95년 2월 그녀는 조승미 발레단이 공연하는 <삼손과 데릴라>에 주연으로 발탁됐다. <기적의 발레리나 강진희. 청각장애인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발레리나인 강진희양은 천부적인 예술성과 고도의 테크닉, 그리고 예민한 감성으로 강렬한 인상을 줄 것이다.> 필담을 통해 그녀와 얘기를 나누었다.
  "발레를 통해 무엇을 얻는가?"
  "평강이다. 마음에 알 수 없는 것들이 흐른다. 난 느끼지 못하지만 아마 노래인지도 모른다."
  "감명받은 영화가 있는가?"
  "십계명과 작년에 본 쉰들러리스트다. 십계명에서 기적의 하나님을 확인했고 쉰들러리스트에선 인간 사랑이 감동적이었다. 쉰들러의 자기 본성 고백은 잊혀지지 않는다."
 ------- 그녀의 삶은 사랑이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녀을 위해 새벽기도를 올린다.
  청각장애자의 발레리나 성공은 딸에 대한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과, 무용에 대한 청각장애자의 사랑의 역사(役事)인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할 때 즐겁고 기쁘게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지난 15년간 복권 당첨으로 백만장자가 된 139명을 추적, 조사해 보았더니 약 6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1년 후에는 다시 직장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행복해지려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은 일(사명)을 가질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서는 행복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가장 큰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일찍이 무자극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아무런 치장도 되어 있지 않은 방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먹고 자기만 하면 일정한 돈을 지급하겠다는 실험을 해 본 결과 대부분 2-3일만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고 합니다.    일(사명)은 자기 자신이 가치를 느껴서 자발적으로 일을 해야 즐겁고 성과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강제로 시키면 똑같은 일이라도 재미가 없어지고 성과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직장인 중에는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면서도 좋은 건강을 유지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피로를 느끼며 지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자기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느냐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양을 치고 먹이는 일"은 영원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사명)입니다. 때문에 사도(제자)들은,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순교하기까지 십자가에 죽기 까지 복음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던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사함으로 주어진 사명과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끊임없이 출렁대는 가슴의 번민을 안고서 그의 고뇌처럼 얽히고 설킨 그물을 하염없이 던지고 또 던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여윈 슬픔에서 그가 도망쳐 갈 수 있는 곳은 이전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바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허탕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손금보듯 환하게 알고 있는 그였지만........ 마침내 그물질을 포기하고 텅빈 배를 저어 해변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해변가에 서 계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폴란드 소설가 셍케비치의 소설 <쿼바디스>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이후로 네로 황제는 더욱 더 잔인한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학살합니다. 그 때 기독교인이던 <기리아>가 수 많은 시민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들소가 들어있는 원형 극장 안으로 들여보내집니다. 그러나 당시 노예였던 <우르서스>가 원형 극장 안으로 뛰어들어가 들소의 머리를 비틀어 가까스로 <기리아>를 구출해 나옵니다. 이처럼 구사 일생으로 살아남은 <기리아>와 <우르서스>는 지하 교회에 숨어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 한시 바삐 이 죽음의 도시인 로마를 탈출한 것을 종용합니다. 신도들의 요구에 의해 베드로가 로마를 빠져나와 캄파니아 들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갑자기 환한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옵니다.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안 베드로는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그러자 그 빛이신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지 않겠는가?"

  1920년대 후반 메사추세츠 주(州)의 법정에서 흥미 진진한 사건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부두가를 거닐던 한 사람이 로프에 걸려 그만 차갑고 깊은 바다 속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헤엄을 칠 줄 모르던 사람인데다 갑자기 차가운 물이 닿는 바람에 다리에 쥐까지 나서 그는 물 위에 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살려줘요!" 그는 잠시 동안 허우적대며 도와 달라고 소리치다가 그만 물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그의 친구들이 달려 왔을 때는 너무  늦어 이미 그의 생명은 끊어진 뒤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에 빠진 사람으로부터 불과 몇 미터도 못되는 거리에 젊은이 한 사람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분명히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줘요!" 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수영에도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심하게도 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일광욕을 즐기며......... 이것을 알게 된 익사자의 가족은 그의 이러한 행동에 분개한 나머지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이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다니요! 그것도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  그러나 결과는 익사자의 가족이 패소한 것으로 끝났습니다. 법정의 판결은 부두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할 법적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대한 영적 책임을 묻습니다. 결코 죄 없다 하지 않습니다.

  "(사56:9)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사56:10)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사56: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사56:12)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겔3: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겔3: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겔3: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겔3:20)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겔3: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찾으려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눅15: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눅15: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지옥으로 빠져가는 이웃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영적 흑암에서 꺼내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명령하고 계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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