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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01b.gif   사랑의 노래들   cross01b.gif

<사랑의 노래들>는 이동희 목사의 설교 중 사랑을 주제로 한 설교들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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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사랑의 기적(막2:1-12)

2. 사랑과 분노(마21:12-17)

3. 사랑의 향유(요12:1-8)

4. 사랑과 배반(요13:21-38)

5. 사랑의 승리(마28:16-20)

6. 사랑의 영을 받으라(요20:19-23)

7. 사랑과 죄(눅7:36-50)

8. 사랑과 심판(요3:16-21)

9. 사랑의 섬김(요13:1-20)

10.사랑의 표준(요14:12-24)

11.사랑과 사명(요21:1-25)

12.사랑의 공동체(행5:1-11)

13.끊을 수 없는 사랑(롬8:31-39)

14.사랑의 빚(롬13:8-10)

15.사랑의 권면(고전4:6-21)

16.사랑과 지식(고전8:1-13)

17.사랑의 찬가(고전13:1-13)

18.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24)

19.사랑과 용서(몬1:1-21)

20.빛과 사랑(요일2:7-17)

21.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4:7-19)

22.법과 사랑의 딜레마(요8:1-11)

23.사랑과 진리(요한2서)

24.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14:1-19)

25.처음 사랑을 가지라(계2:1-7)

26.사랑을 증거하라(요한3서)

27.사랑의 가정(엡5: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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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의 기적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마가복음 2:1-12)

세관에서 유대인이 큰 병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 세관원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묻자 성지에서 나는 물로 영험이 있다고 알려진 성수(聖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세관원이 병을 열어보자, 그 속에서는 고급양주 꼬냑이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야! 기적이 일어났다."

오늘날 기적을 빙자하여 종교를 팔아먹는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기적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중병을 앓다가 회복되었을 때 흔히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축구 골키퍼가 상대방의 멋진 슛을 보기 드문 솜씨로 선방했을 때, 그것을 기적적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골키퍼 손을 가리켜 신의 손이라며 극찬하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전화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그것 역시 기적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10년전에 살던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로 8시간만에 미국에 갈 수 있는 <스카이카>에 대해 들었다면 그 사람 역시 예외 없이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기적(miracle)이라는 말은 <놀라다>라는 라틴어 동사 <미라리, mirari>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에 놀랐다 해서 기적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기적이라는 말은 능력을 뜻하는 <두나메이스, dunameis>로 표현되는데 이는 다이나마이트(dynamite,폭발물)에서 나온 말입니다. 기적(두나메이스, dunameis)속에는 인간이 소유하지 못하는 능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기적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서 특별하게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난 사건을 말합니다. 특히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기적을 표적(sign)이라는 말로 자주 표현합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자신의 뜻을 보여주신다(sign)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의 기적의 초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인간의 삶 속에 들어가 인간을 향하신 궁극적인 뜻인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타나는 기적을 볼 때, 항상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만을 보는데 그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서에는 각 장마다 수많은 병자들, 시각장애인들, 청각장애인들, 신체장애인들, 정신병 및 귀신들린 자들이 치료되었던 기적들, 죽었다가 살아났던 많은 기적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 한 마디로, 또는 단 한 번의 접촉으로 완치되는 기적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그같은 기적들이 여기 저기서 수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 하나 하나에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캘리포니아에서 교통사고로 목 아래로 전신이 마비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돈을 모아 그 소년에게 강아지를 사다 주었습니다. 소년은 본래 개를 좋아하는데다가 꼼짝없이 앉아 있는 답답한 상태였으므로 강아지와 함께 지내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강아지를 만지고 싶었습니다. 그 집념으로 계속 시도했습니다. 놀랍게도 약 1개월 후에 소년은 오른 손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강아지를 손으로 쓰다듬어 줄 수 있게 되었고 온 몸의 신경이 되살아났습니다. 강아지에 대한 사랑이 의욕을 일으키고, 의욕은 집념으로 강화되어, 신체의 기능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강아지에 대한 사랑이 놀라운 기적을 낳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중풍병 치유의 기적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영적 치유의 기적을 말한다고 해서 의학적 치료를 부정하거나 그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치유 역시 의술을 도외시해서 안되며, 의술 역시 영적 치유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영적 치유와 의술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의학의 역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원시 시대에 환자는 으레 제사장(부족 신을 숭배하는 일을 맡은 사람)에게 갔으며, 아직도 문명밖에 사는 부족들 가운데는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병에 걸리면 율법 선생(랍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환자들은 애스쿨라피우스(Aesculapius)신전으로 갔습니다. 신학자 하르낙은 매우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전해 줍니다. 최초의 희랍 의사가 로마에 온 것이 주전 219년의 일이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그에게 시민권을 주고 그의 의술을 활용할 수 있는 건물도 제공해 주면서 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살을 자르고 뜸을 뜨고 하는 치료 과정을 잔인하게 본 그들은 의사라는 이름을 백정으로 생각하였으며, 그 직업과 모든 의사들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취가 알려져 있지 않던 시대였으므로 그런 결과는 당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견해로 인하여 환자는 의사에게 가기보다는 사제에게로 가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점차로 의학이 발전되었고, 의사는 존경받고 널리 사랑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학과 종교간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과학이나 의학의 새로운 발견들이 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서, 그것들에 대해 수용을 완강히 거부해 왔었습니다. 그러한 영향 때문에 6세기 중엽에 유스티니안(Justinian) 황제는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의 병원을 모두 철폐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안에서는 수도사들이 의학 서적의 사본을 뜨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충돌은 13세기에 터졌습니다. 1215년에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외과 수술과 그것을 집도하는 모든 사제들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1248년에는 인체 해부가 신성 모독죄의 판결을 받았고, 해부학 연구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비극적인 갈등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19세기에 제임스 심프슨(James Simpson) 경은 해산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클로로포름(마취제)을 사용하자고 제안하면서 일부 교회와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클로로포름은 성서에 언급되어 있지 않고, 창세기에 따르면 여인은 고통중에 아이를 낳아야 마땅하므로 심프슨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영적 치유를 일반적인 의학과 경쟁하고자 하거나 그것을 대신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치유 사역이나 의학의 의술 모두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선물(은사)로 각기 나름의 활동 영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학이 한계에 도달하여 치유할 수 없을 때 의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영적 치유 사역이 이루어지기도 하며, 때로는 의술 이전에 영적 치유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의술이나 영적 치유 모두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느 유명한 의학박사가 소생 가능성이 거의 없는 불치병 환자를 수술하게 되었는데 수술하기 전에 평소처럼 기도를 드렸습니다. 환자를 사랑하는 간곡한 기도였습니다. 장시간에 걸친 수술은 대성공을 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수술을 참관한 의학도들은 수술을 성공시킨 것이 기도의 능력인지 의학박사의 기술의 결과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은 환자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또한 환자를 사랑하는 의사의 사랑이 합쳐진 결과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 어느 가난한 집에 가셨을 때, 그의 소문을 듣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용신할 틈 없이 꽉 들어 차 그야말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행한 놀라운 기적들에 대한 소문을 익히 알고 있던 사람들이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당도했을때에는 도저히 예수께 가까이 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재치 있게 움직여 집 밖 지붕에 오르는 계단을 이용해 지붕으로 올라 갔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방의 지붕은 전체가 진흙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흙 지붕으로 뜯고 중풍병 친구를 그곳으로 달아 내려 곧 바로 예수의 발 앞에 내려 놓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네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즉각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로 중풍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 친구들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중풍병에 걸린 친구는 온 몸이 마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절망감에 사로잡혀 삶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께 들려 온 것도 그 자신의 뜻이 아니라 친구들의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는 친구들의 믿음에 의해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좋은 친구들 덕택에 몸과 마음, 영혼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해주는 사람은 우리를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후에 위대한 성자이자 설교가가 되었던 어거스틴(Augustine)도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근심과 눈물로 기도하며 한평생을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녀는 참다못해 자신의 근심과 눈물과 기도에 대해 그 교회 주교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 때 주교는 이렇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눈물과 기도로 기른 자식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을 어거스틴으로 만든 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가 흘린 사랑의 눈물과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를 의의 바른 길로 인도하여 준 것은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의 영향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삶에 기적을 체험하도록 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리 감사를 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본문의 중풍병자는 참으로 좋은 친구들을 두었던 덕택에 사랑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에 하신 말씀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픈 사람이나 재난을 당한 사람은 모두 그들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욥이 병들고 재난을 당하자 그의 친구 엘리바스가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랍비 알렉산드라이(Alexandrai)는, "하나님께서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시지 않는 한 병에서 완치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랍비 키야 벤 압바(Chija ben Abba)도, "모든 죄가 사해질 때까지는 아무도 병에서 회복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병에 걸렸거나 재난을 당했을 때 그 원인을 무조건 죄와 관련시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물론 그 중풍병자도 자신의 병을 죄와 관련지어 생각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예수의 말씀을 미루어 볼 때 그 중풍병자는 실제로 어떤 도덕적 죄를 범했고 그 죄의식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가 중풍에 걸려 온 몸이 마비된 것도 심각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서였습니다. 마음에 병이 온 몸을 마비시킨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질병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투르니에는 <한 의사의 사례서>에서 여러 가지의 감동적인 예화를 보여줍니다. "내 친구들 중의 하나가 여러 달 동안 빈혈증의 소녀를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결국 소녀를 산에 있는 요양원으로 보내도록 허락을 요청하기 위해 요양원 의료 담당관에게 소녀의 피를 채혈하여 보냈습니다. 일 주일 후 답장이 왔습니다. 내용인즉 요양원에 와서 요양하는 것은 수락하겠으나 소녀의 피를 분석해 본 결과 전혀 빈혈 증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소녀의 피를 다시 검사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백혈구의 수가 갑자기 변해 있었고 전혀 빈혈 증세가 없었습니다. 의아스럽게 생각한 의사는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지난번 이 곳에 온 이후에 네게 무슨 이상한 일이 있었느냐?' 소녀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심한 원한을 품어 왔던 사람을 갑자기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 나갈 수 있다는 느낌을 얻었습니다!' 소녀의 마음이 변하자 백혈구의 수가 더불어 변했던 것입니다. 소녀의 마음이 치료되었을 때, 몸과 영혼이 아울러 회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은총은 영혼에서 육신으로 흐르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예수의 말씀 한 마디가 심각한 마음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했고 결과 온 몸이 마비된 중풍에서 치유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 죄는 그를 사로잡았으며, 그 결과 육신의 마비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죄 사함 받았음을 깨달았을 때 이미 병은 나아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마다 안고 있는 질병의 원인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증상에 따라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털 하나까지 헤아려 아시는 예수께서 여러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와 질병의 원인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예수 앞에 나와 사랑의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보고 나타난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며 오히려 시비를 거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문제 삼아 율법을 잘 알고 있다는 서기관들이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게 아닌가?" 그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그가 분명히 죄를 지었다고 믿는 것이 너희들 아닌가?" 그들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중풍병자는 모든 사람 앞에서 곧장 일어나 침상을 들고 똑바로 걸어나갔습니다. 서기관들은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에 의하면 죄가 사해지지 않고는 병이 결코 치유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치유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가 죄 사함을 틀림없이 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께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만이 인류의 죄를 사해 주실 수 있으며, 그 사죄의 은총으로 우리 모든 인류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사죄의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을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너는 오래 전에 죄를 지었구나. 너는 그 죄의 무거운 짐을 견디지 못하여 중풍에 걸렸구나. 그러자 너는 하나님께서 네 죄에 대해 진노하여 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왔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으시다. 그분은 오로지 너를 용서해 주기만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 변함없이 너를 사랑하고 계신다." 그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깨닫자 죄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었고 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죄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이 기적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주홍빛 같을지라도 흰눈같이 희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고 사랑의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이르는 질병에 걸려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치유되는 길은 오직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예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사랑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부딪칠 때 일어나는 아름다운 불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난 기적은 중풍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병든 친구를 사랑하는 네 친구의 사랑이 부딪쳐서 일어난 사랑의 기적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여러분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신 예수를 전하시므로 사랑의 기적을 만들어 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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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랑과 분노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마 21:12-17, 참조 : 막 11:15-19, 눅 19:45-48)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신 일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면서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서 소경(시각장애자)과 다리 저는 자(지체장애자)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내 집"이라고 말씀하시므로 그가 얼마나 성전을 사랑하셨던가를, 성전과 자신과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 보신 광경은 한 마디로 "강도의 굴혈"이었습니다. 소들의 울음소리, 양들의 울음소리, 비둘기가 구구 거리는 소리, 행상인들이 물건 사라고 외치는 소리, 동전 바꾸는 쩔거덩거리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등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서 성전을 아무도 예배 드릴 수 없는 장소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정작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 드리며 예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전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성전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에 예수께서 당연히 분노하셨습니다. 분노하신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질된 성전의 모습에 분노하셨지만 곧 성전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 성전을 참 모습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신 것입니다." "강도의 굴혈"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사랑의 집>으로 되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곳저곳에 흩어진 동전, 내팽개쳐진 의자와 부서져버린 파편들이 널려져 있었습니다. 의분에 불타던 예수께 "소경과 다리 저는 자" 등 신체 장애자들이 나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성전을 모독하는 사람들을 꾸짖어 내어쫓고 그 상들을 둘러엎으시며 분노하시는 한편, 병들고 힘없는 자라고 해서, 장애자라고 해서 쫓겨난 자들을 모아들이시고 그들을 치유하시므로 사랑을 나타내시었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 구원받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과거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내가 다시 짓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므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 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마가복음 14:5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시대는 끝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요4:20-24) 이제 구약시대처럼 소나 양 등 모든 동물들을 죽여서 드리는 복잡한 제사의식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성전이나 사람의 손으로 드려지는 분향이나 제사의식 등이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주인되시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희생당하시므로 성전 예배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여러분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영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산 예배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산이나 어떤 잘 지어진 예배당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브리서 10:18-22)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전 휘장을 열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면 됩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제사 의식이나 눈에 보이는 성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의 공로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성령에 이끌려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성은 성벽과 성곽이 온통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각종 보석으로 되어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안에 성전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며 그 이유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시기"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계21:10-22) 하늘나라 예루살렘 성에는 구약시대 성전처럼 지성소, 성소, 그리고 성전 뜰로 구분되어있는 성전이 없습니다. 또한 성전 뜰이 이방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과 여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여인의 뜰',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유대인의 뜰'로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죄 사함을 입은 사람들은 어느 인종, 남여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하늘나라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예루살렘 성에는 성전이 따로 없고 성 전체가 성전이며 성안의 모든 거리가 다 예배하는 성전 뜰입니다. 그곳에는 유대인, 이방인이 따로 없습니다. 바리새인, 장로, 목사, 권사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거룩하신 성직자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나라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인간은 예수 믿고 마음에 성전을 이루어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삶은 불행한 것입니다. 예수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믿어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의 성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 전서 3:16)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으시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과 인격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의식(儀式)에 치우친 성전과 장사하는 성전, 형식적이고 외식적(外飾的)이고 교만하며 탐욕하는 마음의 성전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남김없이 헐어버려야만 합니다. 헐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헐어버리고 맙니다. 당시 성전에 대한 책망을 듣고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후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깨끗이 헐어버렸습니다. 나의 인격과 마음의 죄악들을 헐어내야만 합니다. 우리들의 교회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이웃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 즉, 속물 근성, 배타성, 냉담, 불친절과 닫힌 마음, 오만하고 까다로운 단체로 만드는 태도 등은 없습니까?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이웃들이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어렵게 하거나 할 수 없게 하는 자들을 향하여 분노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이,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이 장사의 소굴로 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본래 목적대로 선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자유롭게 나와 하나님을 만나 병들고 소외된 아픈 몸과 마음이 사랑으로 위로 받고 치유받을 수 있는 교회가 되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교회를 향하여 분노하사 친히 채찍을 드시고 둘러엎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입니다(고후6:16). 여러분은 그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거하실 그 성전을 탐욕으로 더럽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사리 사욕에 얽매여 신앙과 사랑과 도덕성을 져버린 채 장사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병들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는 예수의 마음으로 준비되어 있습니까? 만약 교회와 예수 믿는 여러분의 마음이 기도하는 집으로 성전이 되지 못하고 있다면 타락상을 둘러엎을 수 있는 과감한 예수의 의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 당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비둘기파는 자들"은 모두 바리새인과 제사장, 장로들의 수하에서 자릿세를 내고 돈벌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 장로들은 이스라엘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의 의원들로 종교, 경제, 사회, 교육 등의 각 방면에서 특권을 누리면서 개혁을 가로막고 있었던 수구세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성전의 모습이 변화되거나 개혁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야만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그들의 졸개들을 성전 안에서 몰아내었던 예수의 행동은 그들 수구세력들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변화와 개혁을 싫어했던 이들이 결국 기득권 수호를 위해 본격적으로 개혁의 기수 예수를 잡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사람들의 마음에 무너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성전을 세우셨고, 그들 수구세력들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나라 각계 각층에 변화와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수구세력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바리새인이 아닌 척 하는 바리새인,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바리새인, 영리하고 묘한 바리새인, 바리새인을 비난하는 초(超)바리새인 등이 이곳 저곳에 자리 깔고 판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 가운데 바리새인이 많고, 성직자일수록 더욱 바리새인들이 많아 자리 깔고 개혁의 판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정치계 바리새인들의 자리와 상이 둘러엎어져야 합니다. 경제계 바리새인들의 자리와 상이 둘러엎어져야 합니다. 이 나라 지도층 바리새인들의 자리와 상이 둘러엎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종교계 바리새인들의 자리와 상이 둘러엎어져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 바리새인들의 자리와 상이 제일 먼저 둘러엎어져야만 합니다. 죽은 사자 같은 수구 세력이 되어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 바리새인들이 나귀새끼 타는 겸손한 예수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져야만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있는 바리새인들도 나귀새끼 타는 모습으로 변화되어져야만 합니다. 변화와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수구세력들에 대해 예수처럼 의분을 가지지 아니하면 예수 믿는 의인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변화와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이 시대 이 나라의 바리새인들의 상을 둘러엎을 수 있는 예수의 분노, 의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상을 둘러엎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성전을 변화시켰고 개혁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변화시켰고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는 성령으로 하는 사랑의 기도여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기도는 주문(呪文)에 불과합니다.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의 마음이 기도하는 집, 사랑의 집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라와 민족,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시는 예수의 사랑과 분노가 여러분의 마음에도 항상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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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랑의 향유(香油)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 12:1-8, 참조 : 마 26:6-13, 막 14:3-9)

터어키의 반체제 영화감독인 일마즈 귀니가 옥중에서 원격 조종으로 제작했다는 <욜,YOL>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군사정권 하의 터어키 형무소에서 5명의 죄수가 5일간의 휴가를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영화에서 특별히 관심을 끈 사람은 세이트(Seyit)라는 죄수였습니다. 그는 출옥할 때까지 자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던 아내가 생활고 때문에 창녀가 되었다가 잡혀와서 쇠사슬에 매여 헛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집으로 갑니다. 아내는 자신을 벌해 달라고 애걸하지만 세이트는 그녀가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 만큼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자기의 명예가 손상되었다는 터어키 사회의 통념 때문에 아내를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딸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이트의 장인은 혹시 사위가 마음이 약해져서 딸을 용서할까 보아 "신이여!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세이트는 아내의 운명을 신에게 맡길 것을 다짐하고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 넣기 위해 얇은 옷만 걸치게 한 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들짐승이 들끓는 산 속에 내버려 두어 동사(凍死)하도록 합니다. 8개월의 유폐생활로 쇠약해진 아내가 얼어붙어 마비가 된 다리를 끌며 "세이트! 나를 버리지 말아요"라고 절규하는 마지막 소리에 명예보다 사랑이 중요함을 깨닫고 그녀를 구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지만 이미 아내는 죽은 후였습니다. 서구 사회의 사고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가부장적인 질서가 엄격한 터어키 사회로서는 종교가 곧 국법이고 동시에 생활규범인 것입니다. 종교를 위해서 인간이 죽어야 하는 종교는 종교의 주인인 인간이 소외된 종교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이 생명력 있게 살기 위한 것이지 종교를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삶을 생명력 있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고,'생명' 그 자체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1,2)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인간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마리아가 노동자의 1년 임금에 해당되는 값비싼 나드 향유 한 병을 깨뜨려 예수께 부은 사건은 예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과 존경의 표시입니다.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의 교훈과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였으며(눅10:39), 예수를 누구보다도 훌륭한 스승으로 여겨왔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신 기적과 축복을 인하여 자신이 소유한 최고의 것으로 예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존경을 표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 이상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는 예수께 대한 겸손과 헌신의 표현입니다. 엎드려 발을 씻는 행위는 자신을 최상으로 낮추는 표현입니다. 당시 손님의 발을 씻는 일은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일로 주인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섬김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1-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참다운 사랑은 섬기기 위해 이처럼 자신을 대속물(代贖物), 희생의 제물로 내어 주는 것입니다. 단편 소설의 거장 오 헨리(O.Henry)는 <현자(賢者)의 선물>이라고 하는 감동적인 한 편의 소설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델라와 짐이라고 하는 젊은 미국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가난하였지마는 서로가 깊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한 가지 보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델라의 머리칼은 그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머리를 밑으로 내리면 그것은 마치 긴 드레스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짐은 아버지께로부터 이어받은 금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바로 크리스마스 전 날 델라는 짐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분명히 1달러 87센트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을 했습니다. 즉 그녀는 밖으로 나아가서 20달러에 자신의 머리털을 팔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짐의 귀중한 시계를 위해서 백금 시계줄을 샀습니다. 짐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델라의 깎인 머리를 보고는 정신나간 사람 마냥 멍청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든가 또는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더욱 귀여웠던 것입니다. 짐은 천천히 자기의 선물을 그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의 선물은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를 위한 보석으로 가장자리를 수놓은 거북 껍질로 만든 값진 머리빗 한 세트였습니다. 그는 델라를 위하여 그 셋트를 사 주려고 자기의 금시계를 팔았습니다. 그 두 사람은 각기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것, 최상의 것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향기(香氣)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은....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13:5)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사르밧 과부는 자기와 자기 아들이 한끼 먹으면 없어질 양식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위해 믿음으로 바쳤습니다. 그 결과 그 과부와 자식은 기근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17:8-16)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기시는 성도 여러분, 사르밧 과부나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사랑과 헌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사랑과 헌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마음에 참 평안과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축복도 아울러 받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아름다운 사랑의 섬김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시고 축복하시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그러나 예수를 은 30냥에 팔아먹을 가롯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12:5)면서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을 돈으로 계산하며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신본주의적 사고 방식과 평가, 그리고 가롯 유다의 인본주의적인 사고 방식과 평가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시골 농가에 큰 마차가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대도시로 물건을 팔러 가던 중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짐마차를 끄는 말 주위에는 그 마을의 모든 가축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대도시를 수없이 다닌 말에게서 여러 가지 진귀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여왕이 살고 있는 궁전이었단다. 수 백 가지 종류의 꽃들로 장식된 정원, 수많은 보석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옷들...." 그 말(馬)은 그 궁전의 아름다움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듯 도취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후로 단 한번도 이 마을을 나가본 적이 없는 가축들로서는 도무지 그 아름다움이 상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 자리에 남아 그 궁전에 대해 서로 상상한 바를 토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한 바가 너무 달라서 도대체 궁전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두고 며칠을 의논한 결과 그들 중의 하나가 직접 궁전을 보고 오기로 하였습니다. 그 임무는 젊고 힘이 있는 고양이에게 맡겨졌습니다. "궁전을 샅샅이 살펴보고 와야 해." 화창한 어느 날 주위 가축들의 격려와 충고를 뒤로하고 고양이는 궁전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그 고양이는 궁전을 방문하고 의기양양하게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 마을의 모든 가축들은 환호로 그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빙 둘러싼 채 무척 궁금한 표정으로 그의 얘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래, 궁전은 얼마나 아름답니?" "여왕은 만나봤어?" "..... " 쏟아지는 질문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고양이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다만 여왕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만을 보았을 따름입니다." 고양이는 그 아름다운 궁전에서 여왕이나 아름다운 물건을 보지 못하고 겨우 여왕의 의자 밑에 기어다니는 생쥐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위 속에서 참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겸손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가롯 유다는 바로 이 고양이와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이익(생쥐)만을 탐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희생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의 발에 향유를 쏟아 붓는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 속에서 복음을 위한 아름다운 헌신과 사랑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복음을 위한 성도들의 희생과 봉사 속에서 참된 사랑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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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랑과 배반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21-38, 참조 : 마 26:14-35, 막 14:10-31, 눅22:3-34)

어여뿐 소녀가 가족들과 나들이를 하다가 잠시 혼자 돌아다니는 바람에 길을 잃었습니다. 이리저리 헤매던 소녀는 한 우물가에 다다랐습니다. "아이! 목말라,...." 그러나 그 우물은 물이 조금밖에 차 있지 않아서 도저히 두레박으로 떠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소녀는 두레박을 따라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목을 축이고 난 후에야 그녀는 자신을 위해 두레박을 끌어 올려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청년 하나가 소녀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구출해 내었고, 둘은 사랑을 맹세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하던 일이 있어서 아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나게 되었고 따라서 소녀와 작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헤어지던 날 그들은 처음 만났던 우물가에서 손을 맞잡고 서서 자기들이 결혼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리며 성실을 지키자고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약혼에는 증인이 없었습니다. 청년이 누군가에게 증인을 서달라고 하자고 말하는데, 마침 족제비 한 마리가 그들의 곁을 지나치며 저편 수풀로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본 소녀가 얼굴을 빛내며 말했습니다. "족제비와 우리 옆에 있는 이 우물이 증인이예요." 계절이 바뀌고 여러 해가 지나갔습니다. 청년은 멀리 이역 땅에서 우여곡절 끝에 출세를 했고, 그곳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얻었습니다. 그렇게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의 아이가 놀다가 잠시 풀밭 위에서 잠들어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족제비 한 마리가 덤벼들어 아이의 목을 물었습니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그는 이 일로 인해 몹시 슬퍼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또 한 아이를 얻었는데, 이번에는 아이가 제법 뛰어 놀기 시작할 무렵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비치는 갖가지 물 그림자를 구경하다가 그만 우물 속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옛날 소녀와의 맹세를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운 두 증인도....., 그곳에서의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그는 자신의 신부를 찾아 예전의 그 소녀가 있던 마을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는 꽤 나이가 들은 그 처녀는 아직도 그를 기다리며 약속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제자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스승 예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배신한 가롯 유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인물입니다. 사랑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자들의 이야기를 비유(마태 복음 21장 33절이하)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 농사를 짓고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수확 때가 되어 주인은 자기의 몫을 받으려고 농장으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종들을 때리고 돌로 쳐죽여 버렸습니다. 주인은 다시 더 많은 종들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도착하는 대로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기의 아들을 직접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이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이야기의 결론을 제자들에게 내리게 했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마21:40)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마21:41)

사랑을 배반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멸망밖에 없으며, 그나마 소작 농지마저 빼앗기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농부들이 배척하고 돌을 던지고 살인한 것은 실제로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주인의 사랑에 대하여 돌멩이를 던진 것입니다. 사랑의 배신자들입니다. 주인은 그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참고 또 참고 거듭 거듭 종들을 다시 보냈습니다. 두 번째 배반을 당하고서도 자기의 사랑을 대표하는 아들까지 보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들은 주인의 사랑의 심장에다가 칼을 꽂았습니다. 사랑에 대한 배신처럼 악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님이 그토록 희생하며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향기로운 사랑을 깔아 뭉게고 더럽힌 일은 없습니까?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가장 사랑받은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를 반역한 결과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됩니다. 그토록 자기를 배반한 아들이지만 다윗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여전하여 그의 죽음을 놓고 울부짖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18:33)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하였을지라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미워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가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하는 심정입니다. 친구의 우정과 사랑을 돌멩이로 갚은 일은 없습니까?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을 배웁시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1:26)

요나단은 다윗을 목숨보다 사랑함으로써 이들의 우정은 성경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을 잊지않고 요나단 사후 그 아들 므비보셋을 항상 왕의 상에 앉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삼하9:7)

지성 어린 아내나 남편의 사랑에 잔 못을 박아 괴롭힌 일은 없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지는 않았습니까? 앞의 비유의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사랑의 책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사랑의 끈으로 맺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호세아는 고멜이 부정한 여인인 줄 알면서도 결혼했고, 지순한 남편의 사랑을 배반하고 음란한 가운데 빠진 부정한 아내를 또 다시 데리고 와서 사랑하려고 하였습니다. 호세아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여인, 사랑해서는 안 되는 부정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합니다. 결혼하여 자식을 셋씩이나 낳았지만 하나도 하나님의 축복받은 자식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내 또한 자식까지 낳아놓고 눈이 맞아 도망 나갔습니다. 남편의 뼈아픈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거듭 고멜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3:1-5)

부정하고 음란한 아내, 사랑을 헌신짝처럼 배신한 아내이지만 끝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결국 아내는 제자리에 돌아오게 되고 자식들도 축복의 자녀들이 됩니다. 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여인, 법으로서는 도저히 새롭게 할 수 없는 여인, 남편의 사랑을 깡그리 짓밟은 배신자, 그 고멜을 결국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인간의 배반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우세함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하나님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러한 자신의 비극적인 경험에서 하나님과 백성과의 사랑의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음란하고 자기를 버리고 다른 신을 향하여 도망갈 여인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결혼하셨고 사랑하셨고 또 부르셔서 다시 사랑하셨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이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 그 고통과 연민, 그리고 사랑의 배반이 가져온 쓰라린 슬픔, 마침내 배반한 자를 찾아 나선 사랑의 승리의 기쁨 등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고멜의 죄와 같이 이스라엘의 죄는 사랑을 저버린 죄입니다. 사랑이 짓밟히고 은혜에 침 ?어지고 호의가 무시를 당합니다. 단순히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짓밟는 일이요 거룩한 혼인의 언약을 모독하는 일이 자행됩니다. 이렇게 지극한 사랑을 베푼 자에게 배신을 당할 때 그 분노는 더욱 극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서는 사랑을 배반한 죄를 꾸짖고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배반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우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랑의 복음서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한 사랑을 배신한 고멜의 위치가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가롯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여 은 30냥에 팔 것을 아시면서도 그 가롯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의 사랑을 잊지 맙시다. 십자가에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지 맙시다. 가롯 유다가 사랑을 배반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여도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랑을 배반하고 우상 바알을 숭배하는 의식을 따라 모압 여인과 행음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24,000명을 염병으로 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하는데 인간의 고통과 아픔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배반한 가정과 사회에 기쁨과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7-19)

세상이 우리를 배반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합니다. 세상이 여러분의 사랑을 배반할지라도 사랑이 승리합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되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어 사랑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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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랑의 승리

(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6-20, 참조 : 막 16:14-18, 눅 24:36-49)

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성경은 구구절절이 하나님과 인간의 '러브 스토리', 사랑 이야기입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 바로 예수 탄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보라 !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마 1:23)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립니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품으로 뛰어듭니다. 이것을 본 아버지가 벼락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아이에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안심과 평화를 주는 것은 아버지의 '설명'이 아니라 엄마의 '품속'입니다. 그곳은 피부가 접촉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love with skin on'인데 이는 피부를 통한 사랑 혹은 몸으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물질이나 이론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피부 접촉을 통해 전달되는 따뜻한 체온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예수의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으로 곧 인간을 몸으로 품으시므로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면회를 갔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보지 않겠다고 면회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토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면회 신청을 했고, 그때마다 거절당하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 아버지의 25번째 면회에서 반년만에 아들은 눈물로 아버지를 맞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 속에는 이렇게 끝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찾아오실 뿐만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아니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삶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 인간이 아는 사랑은 모두가 다 조건적입니다. 그래서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아니하면 그 사랑의 관계는 파괴되고 아프고 슬프며 견디기 힘든 사랑의 흔적만이 남을 뿐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대부분 비극적입니다. 하나님은 참다운 사랑이 무엇인지를 직접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율법사와 주고받은 얘기입니다.

율법사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 : "네가 잘 아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 :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 :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사 :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에 예수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로 이웃 사랑을 깨우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리고 그 율법사에게 물었습니다.

예수 :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 :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는 이렇게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10:25-37)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 이웃을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랑, 친구를 위해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는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참된 사랑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3. 예수 십자가에 죽으심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톨스토이의 동화에 <황제와 청소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냈습니다. 이 날 참석자들 중 한 명을 뽑아 왕과 왕후 사이에 앉게 하고 푸짐한 상품을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손님들이 궁전에 도착하자 왕의 신하들은 손님들의 손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 왕의 옆자리에 앉도록 당선된 사람은 궁전의 청소부 할머니였습니다. 평생 힘든 노동에 종사한 청소부 노파의 손은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도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 손과 발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알아보게 하려면 "내 얼굴을 보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내 손과 발을 보라는 말씀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손과 발에는 십자가에 달렸던 못자국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손과 발의 상흔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확증인 것입니다. 미국 농아인들은 수화로 예수를 뜻할 때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왼손 손바닥에 찍어 못박힌 것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예수의 대표적 이미지는 못박힌 손과 발입니다. 거기에서 흐르는 피는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확증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확인해주고 끝나는 슬프고 비극적인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패배가 없고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4. 예수의 부활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새 천년의 문턱에서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지난 천년을 되돌아보자는 뜻에서 인터넷 사이트 '2000년의 모든 것'(everything2000.com) 은 <밀레니엄 러브 스토리 톱 10>을 올려놓았습니다. 그 1위는 세익스피어의 1596년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없이 홀로 사는 것보다 죽음을 택한 불행하며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입니다. 2위는 12세기 17세 소녀와 그녀의 교사와의 <몰래한 사랑>을 그린 아벨라르와 엘로이드(Peter Abelard and Heloise)입니다. 그들은 몰래 결혼했으나 소녀의 아저씨가 찾아내 그 교사를 거세해버립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가족들과 교회에서 그들을 떼어버리고 여자는 수녀원에 보내고, 남자는 수도사가 되게 합니다. 이들의 주고받았던 사랑의 편지들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파리에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미국의 인형극 주인공 커미트와 미스 피기의 <어긋나는 사랑>이 4위에 올랐습니다. 고대 켈트족 전설에 근거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못다한 사랑>을 6위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와 스칼렛의 <만남과 헤어짐>을 7위로,.. "신곡"을 쓴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영적인 사랑>을 9위에, 영국 아더왕의 기사 랜슬렛과 왕비 귀네비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마지막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쉽게도 우리 나라 이몽룡과 성춘향의 <절개있는 사랑> 이야기는 홍보 부족(?)으로 끼지도 못했습니다. 인터넷 사이트가 보여준 <사랑 이야기>들은 지난 천년이 "비극적 사랑, 몰래한 사랑, 어긋난 사랑, 못다 한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 모두가 다 불행한 사랑"으로 얼룩져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실패한 사랑이야기들입니다.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쳐 결국 아픔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을 안은 채, 깊이 패인 상흔만이 남아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안타까운 얘기들입니다. 지난 천년동안 인류의 가슴에 남긴 것은 그 부질없고 슬프며 고통스런, 그리고 무기력한 사랑 이야기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결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사 가장 고통스런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 사랑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주었습니다. 인생들에게 새 생명과 영원한 기쁨과 승리를 안겨주는 지고 지순한 십자가 사랑이 상처받고 있는 인간의 사랑을 치유하기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고 부활 신앙을 가지시므로 상처받고 고통스런, 그리고 무기력한 여러분의 사랑 이야기가 영원히 행복하고 승리하는 사랑이야기로 기록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새 천년의 맞이하는 인생들에게

부활 신앙을 가지게 하사

사랑의 승리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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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랑의 영을 받으라!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19-23, 참조 : 마 28:16-20, 막 16:14-18, 눅 24:36-49)

1. 부활절에 읽어 볼만한 책이 있다면, 1866년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만 45세 때 써낸 대장편 소설 <죄와 벌>을 들 수 있습니다. <죄와 벌>은 가난하지만 머리 좋은 대학생의 살인행위를 통해 인간심리의 복잡 다양한 변화과정을 그린 명작입니다. 대학생 라스꼴리니꼽이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쳐죽이고 돈을 강탈합니다. 그런데 이 살인강도행각에는 절박한 동기와 정당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 노파는 이잣돈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며,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귀한 돈을 혼자 차지하는 버러지이며 인간 쓰레기이기 때문에 죽여서 아까울 게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돈이 몹시 필요했습니다. 자신과 어머니를 위해 하기 싫은 결혼을 하겠다는 여동생의 편지를 받고 그의 마음은 더 다급해졌습니다. 그 노파는 없앨 만 했고 그럴만한 명분과 논리를 갖춘 그의 철학은 역시 젊고 멋있었습니다. 그의 살인의 동기를 약간 병적이었지만 그는 당당했습니다. 그래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지만 얼떨결에 노파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방문을 닫지도 않은 채로 돈 궤짝을 뒤지다가 지갑 한 개와 장신구 몇 개만 집어들고 허둥지둥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뒤뜰의 돌 밑에 숨겨 놓고서는 다시 찾아 쓸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범행 후의 사정은 예상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는 자꾸 불안해졌습니다. 이상하게 자꾸 외로워졌습니다. 그 범행으로 인하여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과 격리되어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그 고립된 느낌, 그 절대적인 고독을 달래보려고 그는 마음 착한 창녀 쏘냐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직업은 천했지만 마음만은 순결했습니다. 그는 쏘냐의 겸손과 인정과 자기희생의 생활을 접하면서 차차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책감이나 후회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범죄라니? 쓸모 없는 노파하나 죽인 게 뭐가 죄야? 난 보상할 생각 없어. 그건 절대로 범죄가 아니라구." 그는 여동생 두냐의 자수 권유를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살인 논리와 명분이 이처럼 확고한데 결국에 그는 제발로 찾아가 자수하고 형벌을 달게 받습니다. 그리하여 시베리아로 유형되어가게 되어, 그곳에서 강제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쏘냐의 영향이 컸습니다. 자기 한 몸을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남을 위하는 착한 쏘냐를 보고 그는 자기의 어설픈 수작이 허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무책임한 자신을 믿어주며, 계속적인 연민과 사랑을 쏟아주는 쏘냐에게 감탄하여 겸허와 용기를 되찾아 결국 자수하여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쏘냐는 냉대를 받으면서도 시베리아 유형지로 그를 따라갑니다. 그런데도 라스꼴리니꼽은 자신의 궤변철학(?)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그러나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감옥에서 맛본 고통을 통해 그 완악하고 강퍅한 살인 명분과 논리는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감옥의 병실을 잠시 나와 강가에 앉아 있는 그에게 쏘냐가 찾아옵니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무릎을 껴안습니다. 때는 부활절의 새봄. 그는 그때부터 변하기 시작합니다. 성경 속의 나사로의 소생이 여기서 다시 재연된 것입니다. 7년을 7일같이 지내왔던 쏘냐의 사랑 앞에 살인죄에 대해 철학적 논리로 당당한 명분을 내세워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던 그 대학생의 마음이 녹아지고 부활의 새 생명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가장 강렬하고 가장 내적인 관계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삶을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며, 새로운 삶이 솟아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쏘냐의 사랑이야말로 청년의 삶에 부활의 새 봄을 맞게 해 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을 통한 생명의 승리를 말합니다.

2. 바르트는 말하기를 "교회는 강하게 보일 때 오히려 약하고 약하게 보일 때 오히려 강하다."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강하게 보일 때가 언제입니까? 교세가 확장되고 교회 건물이 높이 올라갈 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고 헌금도 많이 하며 건물도 좋고 하니까 그럴 듯하게 보입니다. 그때는 오히려 약합니다. 왜냐 하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그만큼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스스로 뭐든지 할 만하다고 우쭐대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성도간의 관계가 붕괴되고 더 나아가서 단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교회론적인 면에서 볼 때 약한 교회요, 죽어 가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약하게 보일 때는 오히려 강합니다. 교인의 숫자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헌금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교회 건물도 임시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개척 당시의 목회자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강단에 나와서 계속 울부짖으며 "주여! 주여!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수가 없습니다."하며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성도간의 관계가 밀착되면 비록 보기에는 시원치 않게 보이겠지만 무서울 것이 없는 가장 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보호하고 살펴주시지 않는 교회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장해나가며 이웃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으로 성장해 가는 교회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무엇보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엡5:25)....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역사 하심에 의하여 개인적으로 사랑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을 통해 유기적인 공동체가 되어서 계속 성장할 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사회에 변화를 주며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 민족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약 6,100개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신구약이 번역된 언어는 겨우 262개, 그리고 신약만 번역된 언어는 562개입니다. 또한 선교사를 미리 파송하여 그곳의 언어를 배운 다음에 성경을 번역하고 있는 언어는 1,167개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지고 있거나 조금이라도 구경을 한 언어는 2,000개의 언어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계 언어가 6,100개인데 겨우 1/3의 언어로만 성경이 번역되었을 뿐입니다. 전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앞으로 4,100개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보급될 수 있도록 부단히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해야만 합니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 파송된 선교사 수는 대략 20여만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중 90%가 미국에서 파송한 선교사라고 합니다. 앞으로 90여만명정도의 선교사를 더 파송해야 전 세계가 복음화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전 세계에는 254개의 국가가 있고, 전 세계에 대략 100만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500만개의 교회가 필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400만개의 교회가 더 세워져야만 합니다. 인도의 9억 인구 중에 8억이 힌두교입니다. 힌두교는 3억 3천 개의 신을 섬기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암소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800만 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 세계에 모슬렘이 10억, 중국 공산당이 10억입니다. 이들 수만 합해도 30억이 넘습니다. 세계의 절반 이상이 구원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런데 회교의 선교사 수는 100만이 넘는데 비해 기독교의 선교사 수는 20만에 불과합니다. 회교 국가 중 하나인 터키의 인구가 6천만인데 그 중에 기독교인은 겨우 400명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18세기에 영혼 구원을 제일 많이 했던 영국의 스펄젼 목사는 한번도 교회를 성장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구령열(救靈熱)에 불타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만 했을 뿐입니다. 영혼 구원을 하다가 나오는 부스러기가 교회성장이지,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영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은 영혼구원이며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교회 성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면서 교회 자체가 성장하지 못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교회 성장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지 교회 성장이 죽은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해골떼 같은 이스라엘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야말로 사랑을 완성시키는 생명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처럼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신 것은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경험은 세찬 바람의 포효와 강한 불길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2-4)

이 세찬 바람과 강한 불길이야말로 제자들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며 생동하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경험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찬 바람과 강한 불길을 통한 하나님 사랑의 경험인 것입니다. 성령(바람, 불)은 인간을 생동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입니다. 불은 우리를 뜨겁게 하며, 따뜻함을 전해줍니다. 불은 우리를 밝게 비추고, 우리 자신도 빛나게 합니다. 불은 우리를 태우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불태우는 불길이 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본질은 '삼키는 불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사랑"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신4:24)

"....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하나님은 열정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노기(怒氣)는 불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시79:5)

불이 '삼키는 불길'로 불리울 때,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분노는 그의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거부당하고 상처받은 그의 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과 그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열정적 사랑은 치명적인 분노로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랑은 사랑으로 존속하기 위하여 분노의 형식을 취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분노 속에는 그가 끝까지 지키는 사랑이 숨어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 속에는 그의 은혜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키는 불길'처럼 활동하시는 그의 분노 속에는 하나님 사랑의 정열이 나타나고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의 "불길"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하고 그 새 삶을 뜨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

여기에서는 불은 정화(淨化)의 불이요, 모든 사물들을 녹이는 불이며, 세계의 새 창조의 불을 말합니다. 세찬 바람과 뜨거운 불길로 나타나는 성령은 무가치한 인간의 삶을 무한하게 가치 있는 삶으로 발견되게 하여 새 생명을 창조하고 그 삶을 생동케 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인 것입니다. 왜 사랑은 '죽을 만큼' 강한 것인가? 그것의 열화는 불과 같으며 사랑 자체가 '주님의 불길'이라 불려지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8:6)

오순절 찬송가라 할 수 있는 찬송가 173장 <불길 같은 성신여>는 흔히 한국 교회 강단에서 부흥회 인도 찬송으로 애용되며, 소위 은사를 받는 수단으로서 '불길 같은 성령'을 간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우리 안에 "뜨거운 사랑"을 깨워달라고 성령께 간구하는 찬송가입니다. "불길 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줍소서 성신이여 임하사 내영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합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합소서." 힐데가르트 폰 빙언이라는 사람은 여기 "불길 같은 성령"을 "불의 영", "사랑의 불길"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 불길과 같은 성령이여, 찬양을 받으소서..." "오, 사랑의 불길이여..........."

3.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불길 같은 사랑의 영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행했던 다락방에 모여서 전전긍긍하며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독기를 품은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 다락방 문을 굳게 닫고 행여나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떨어지지는않나 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 한 가운데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20:19,20)

죽음보다 강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그러므로 두려워 떨며 삶이 위축된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불길 같은 사랑의 영"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불길 같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에 '그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의 불길로 태워 정화시키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이 가치있는 것으로 발견되게 하며,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경험하게 하여 생동하는 삶으로 변화시키며, 죽은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21,22)

그래서 일찍이 "불길같은 사랑의 뜨거운 성령"을 다메셋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체험했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4-39)

세상의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시대에 "불길 같은 성령"으로 나타나고 경험되어지고 있습니다. "불길 같은 성령"은 불같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랑의 주체요 선교의 주체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인류에 대한 뜨거운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교도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의 가슴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가슴이요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 되는 곳에 사랑이 불길처럼 번져나갑니다. 그리고 죄악이 불태워지고, 인간이 생존해야 할 가치를 경험하게 하고, 잠자는 영혼, 죽은 영혼을 깨워 생명을 약동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죽기까지 하나님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이 항상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땅 위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사회 등등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불길 같은 성령을 받아야 죄악이 불태워지고 삶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그대로 있느냐 아니면 사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을 부어주시는 예수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부활의 예수를 증거 하는 제자들에게는 마음으로부터 깊이 참회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용서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이 위임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회개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용서를 선언하는 능력이 위임되어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경고하는 권한도 위임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인 것입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행3:1-10)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서 은과 금보다 백 번 더 나은 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부활하신 예수였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있어 당장 필요했던 것이 은과 금이라고 생각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과 금이 전부가 아닌 더 중요한 영적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은과 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분의 문제들과 이 나라 민족의 문제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일(선교)만이 자신과 나라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를 가지고 5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나 되는 기적, 물이 포도주가 되는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등등은 그 기적들을 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예수의 부활은 생명의 승리입니다. 사랑과 진리의 승리입니다. 예수를 무덤에 가둬둘 수 없듯이 생명과 진리와 사랑은 가둬둘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이 나라 민족 위에 생명과 진리와 사랑이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금과 은, 그리고 세상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분이 보내신 성령은 그 힘과 능력, 그리고 사랑의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부어주시는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어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은 사랑의 주체요 선교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인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로 나타내는 여러분이 되도록 성령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세상에는 이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삶의 가치를 상실하고 삶을 포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우리를 향해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불길 같은 사랑의 영을 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격렬했던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샌디에이고의 외곽지대에 있는 어느 화려한 저택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집주인 되는 부인이 전화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엄마, 저예요. 제가 죽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아들의 음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한시바삐 그 아들이 보고 싶어 볼멘소리를 합니다. "당장에 달려오지 않고 전화는 무슨 전화냐?"그러자 아들은 자못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가겠습니다. 그런데 불쌍한 내 친구와 함께 갈까 합니다. 이 친구는 함께 싸우던 전우인데 지금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으며, 다리 하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는 친구라서 저와 같이 있으려고 데려왔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며칠동안만 같이 있으려므나." 그러자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오랫동안입니다." 어머니는 다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한 일년 함께 있으려므나. 처음에는 그럭저럭 함께 지낼 수 있겠지만 세월이 가면 무거운 짐이 되어 괴로울 거야." "아니에요. 일생동안 같이 살 겁니다." 이것이 아들의 대답이었습니다. "너, 전쟁에 나가더니 감상주의자가 되었구나. 그런 사람을 길게 사랑하기 쉬운 줄 아느냐?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아도 얼마간 지내보면 싫증이 나고, 나중에는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이 말에 "그럴까요?" 하고 아들은 수화기를 놓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군 본부로부터 발송된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투신 자살했습니다. 시체를 찾아가십시오" 어머니는 허겁지겁 달려가 시체를 확인해봤습니다. 시체는 틀림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고, 다리 하나가 없었습니다. 아들은 "이토록 불구자가 된 나를 어머니가 어떻게 사랑해 줄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확인해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짐이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만 것입니다. 누가 아들을 죽인 것인가? 그는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그렇더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아도 장차는 짐이 될 것이라고 하니 무슨 용기로 살수가 있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누가 '눈 하나 없고, 팔 하나 없고, 다리 하나가 없는 불구 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겠습니까? 누가 불구되어 삶의 가치를 상실하고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의 하나님 심장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길 같은 뜨거운 사랑의 영", 성령을 받으라고. "(요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성령을 받으라."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젊은 선교사 죠지 애틀리는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손에 들려 있는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저들을 죽이고 자기는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방아쇠 한번 잡아당기면 끝날 일인데,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 그 마을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는 영영 끝이 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남을 죽인 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가 믿으려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그대로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찢기며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보니 그에게는 그런 놀라운 총이 있었고, 탄환도 열 발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원주민들은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3:16)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데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 주실 만큼 충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레바논의 유엔대사 찰스 말릭씨는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국의 공헌이 무엇이냐? 돈을 준 것이냐? 먹을 것을 준 것이냐? 의료기술이나 약품을 준 것이냐? 군사원조인가? 산업원조인가? 그렇지 않다. 내 생각에는 선교사를 많이 파견한 것이 정말 세계를 돕는 결과를 가져왔고, 20세기의 미국을 훌륭하게 평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여러 나라의 민족주의 앞에서 욕도 많이 먹고, 공산주의자를 위시한 유물론자들에게 악평도 많이 받았으나, 수없이 많은 순교자의 피를 전 세계에 뿌리며 신교육·신 문화사업·신 의료활동 등을 펼쳤고, 새 시대 새 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게 하는 개화 운동·독립 운동·빈민 구호·여권 신장·YMCA 등 청소년 운동·스포츠 보급·계급 타파·노예 폐지 등 헤아릴 수없을 만큼 엄청난 일을 전세계 각지에서 벌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백 년, 빛나는 미국의 20세기는 선교 운동의 열매라고 담대히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랑스럽고 빛나는 대한민국의 21세기는 한국교회의 선교 운동을 통해 이룩할 수 있도록 성도 여러분에게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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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랑과 죄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36-50)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다는 시몬이라 하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집에 들어가 앉자마자 그 동네에서 행실이 불량한 한 여인이 따라 들어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이를 보고있던 바리새인 시몬은 마음에 "예수가 만일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행실이 불량한, 죄 많은 여자임을 알아보고 자신에게 하는 행위를 못하게 하고 물리쳤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시몬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고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시며 질문하셨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네 판단이 옳다." 말씀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라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관습에 손님이 자기 집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손과 발을 씻을 물을 주고, 그 손님을 반가운 마음으로 환영한다는 표시로 입을 맞추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리고 식사 전에 손님을 존경한다는 표시로 머리에 향유를 발라드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은 이 모든 절차와 예의를 하나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 중심으로 예수를 초청하고 영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청해서 오면 그만이고 오지 않아도 그만인 태도였습니다. 시몬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초청하여 영접하고자하는 뜨거운 마음과 열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 많은 여인은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이 여인은 마음 중심에서 예수를 존경했습니다. 이 여인은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이 여인은 극진한 마음으로 예수께 헌신했습니다. 이 여자가 눈물로서 예수의 발을 닦은 것은 사랑의 진실이었고, 그 발에 입을 맞춘 것은 복종과 헌신의 진실이었고, 향유를 부은 것은 최선을 다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예수를 따르는 죽음의 진실이었습니다. 이런 진실을 예수는 자기 곧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받아드리시고 그 여자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또한 이 여자의 행위야말로 참된 신앙의 모범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 여자가 한 일은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알려져야 하고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14:9).

미얀마의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브라에 물려 죽어 가는 아이를 데리고 부모가 늙은 고승에게 가서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중은 가슴을 치며 말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아이를 구할 힘이 없소이다. 그렇지만 내가 숨겨 두었던 정직한 말을 하면 혹시 천지 신명께서 자비를 베풀지도 모르오. 사실 나는 지금까지 50년 동안 중노릇을 하고 모두가 나를 존경한다고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중이 되었을 당시 7년 동안만 행복했고 그 나머지 세월은 줄곧 불행했소이다." 이 말이 중의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아이의 머리에 있던 코브라의 독이 가슴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저도 평생 불교 신자로서 스님이 오실 때마다 시주를 드리고 절에도 계속 시주를 바쳤지만 사실은 기쁨으로 바친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런 말이 아버지의 입에서 떨어지자 아이의 가슴에 있던 독기가 허리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저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15년이 되는데 모두들 저더러 행복한 여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결혼의 행복을 느낀 것은 1년에 이틀 정도뿐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아이 어머니의 입에서 떨어지자 아이의 허리에 머물러 있던 독기는 발바닥을 거쳐 완전히 몸에서 나가버렸다는 우화입니다. 진실이 밝히 드러나야 구원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 중은 성공적인 승려였습니다. 아버지도 훌륭한 종교인이었습니다. 어머니도 행복한 주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감춰진 내면에는 독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 독은 불원간 자기 자신과 가정과 사회를 넘어지게 하는 독입니다. 이 아이의 몸 속에 있는 숙명적인 독기가 주변 사람들이 각자의 마음 중심을 진실하게 털어놓았을 때 조금씩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 중심의 진실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마음 중심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진실로 예수를 사랑하시므로 참된 믿음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 대한 진실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예수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뜨겁고 진실한, 그리고 희생적인 하나님 사랑의 자기 폭로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진실한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수를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나를 믿느냐?"고 질문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번이나 따져 물었습니다(요한 21:16). 진실한 믿음이란 진실한 사랑으로만 표현되는 것입니다. 예수께 대한 여러분의 사랑과 진실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이 여인처럼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어드리며,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이 여인의 진실한 마음의 행동을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그 "사랑함이 많음"이 그 죄 많은 여인을 구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 마음의 진실함을 보십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은 그 죄 많은 여자에게 "왜 값진 향유를 허비하느냐.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할 것이 아니었느냐?"면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정말 빈민구제의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입바른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사랑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입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사랑 대신 질투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차 있으면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쪽이 진실한 믿음과 사랑인가를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여자가 예수의 발을 머리털로 닦았건 손수건으로 닦았건 그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그 향유의 가치가 3백만 원이든 3천 원이든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자의 눈물, 그 마음의 표현, 그 진실의 표현에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용서와 구원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건에서 예수가 문제로 삼은 것은 바리새인 시몬과 제자들의 어두운 마음이었습니다. 사랑은 태양과 같이 밝은 것입니다. 제자들의 비난 속에는 질투가 있었습니다. 행동은 없으면서 그 여인의 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만 했습니다. 시몬과 제자들의 어두운 마음이 죄 많은 여인의 어두운 과거만을 보고 모든 것을 어둡게만 판단했습니다.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죄 많은 여인의 행동을 비판했지만 그 여자는 진실한 마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시몬은 자랑스러운 바리새인이었으나 어둡게 살고 어둡게 생각했습니다. 그 죄 많은 여자는 사회에서 떳떳하지 못한 어두운 과거를 가졌으나 이제 예수를 만나 진실되고 밝은 마음으로 사랑을 표현했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진실된 마음을 드러내어 밝은 내일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는 여자의 기름붓는 행동을 식사준비가 아니라 자신의 장례준비로 해석하셨습니다. 즉 함께 있을 기간이 많지 않은 예수를 위하여 살아 계신 동안에 자기의 최선을 다한 사랑의 표시가 옥합을 깨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행동과 실천이 있는 사랑, 내일을 바라보는 밝은 사랑을 예수는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불렀고, 그런 사랑이 예수의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받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죄 많은 여인임을 알고 계셨지만 그 지은 죄에 대해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그 여인의 진실한 마음과 행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과거로부터 밝고 새로운 구원받은 삶을 선포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 여인은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여인의 진실한 마음의 사랑과 예수의 사랑의 은총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사랑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시몬 게벨이란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가 어렸을 때의 체험담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이웃집의 배나무에서 몰래 배를 땄습니다. 그 이튿날 이웃집 할머니가 소년을 방문하여 큼직한 배 하나를 손에 들려주고 들고 온 장미꽃으로 부드럽게 소년의 뺨을 톡툭 두드렸다는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맞은 매가 아니었으나 장미꽃으로 맞은 소년의 뺨은 부끄러움으로 빨개졌습니다. 그는 울면서 말없이 할머니의 품에 안겼습니다. 잘못했을 때 반드시 매를 맞아야만 잘못을 깨닫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장미꽃으로 부드럽게 뺨을 맞았을지라도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하여 얼마든지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실을 자신의 어두운 마음속에 감추고 살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대해서는 혹독하게 질책하신 예수였지만 자신의 마음과 몸의 병든 것을 예수 앞에 솔직하게 드러낸 사람들에게는 '장미꽃 사랑'으로 그들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500만 원 빚진 자와 50만 원 빚진 자가 모두 탕감 받았을 경우 누구의 사랑이 더 크겠습니까? 물론 많이 탕감(용서)받은 사람이 감사도 크고 사랑도 큰 법입니다. 죄인인 여자를 비난하고 있는 바리새인 시몬이나 제자들은 자기 자신은 바르게 살았으므로 하나님께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단돈 5만원도 빚진 것이 없고, 그 죄 많은 여인은 500만원, 아니 그보다 더 엄청난, 그래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지 않았으니 하나님께 용서받을 빚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빚은 사랑의 빚입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이 그 모든 계명을 어긴 것보다 더 큰 죄인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고 선언하시고, 새 계명은 곧 사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랑의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이 여인의 많은 죄와 허물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원과 새 생명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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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랑과 심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16-21)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복음3:16)는 성구(聖句)는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웁니다. 이 성구는 신구약성경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 성구는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참조:본문의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kosmos>'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성구는 "모든 사람의 성구"라고 불리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은 "세상"입니다. 그것은 단지 한 민족, 이스라엘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든 대적하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든 거역하든,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가슴에 품으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은 마치 사랑할 사람이라고는 단지 한 사람뿐인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는 마지막 주간에 제사장들과 백성의 원로들 즉 종교, 정치, 사회의 권위들과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삼엄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따졌습니다. "네가 누구냐? 도대체 누가 너에게 권위를 주어 이런 일들을 하느냐?"(마태 복음21:23) 이에 예수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외국으로 떠난 주인이 수확 때가 되어 배당을 거두기 위하여 종들을 파견합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주인을 무시했고 모욕했고 배반했습니다. 처음 파견된 종은 구타당하고 둘째 종은 살해되고 셋째 종은 돌로 맞아 죽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주인은 참았습니다. 이번에는 더 많은 종들을 파견했는데 그들 역시 모욕당하고 학살되었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참았습니다. 힘이 없거나 법적 근거가 없어서 참은 것은 아닙니다. 농부들의 회개를 기다린 것입니다. 주인은 최후의 방법으로 외아들을 파견합니다. 그러나 악한 농부들은 "후계자를 없애면 완전히 농장을 삼킬 수 있다."는 엉뚱한 계산으로 그의 외아들도 살해해 버리고 맙니다. 결국 주인의 뜻을 저버리고 주인의 외아들까지 죽여버린 소작인들, 농부들을 모두 다 진멸하고 다른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어 버립니다(마21:33-41).》 이 비유는 한 마디로 외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면서 보여준 하나님의 인내의 사랑과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거절한 농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첫번째 문제는 인간의 완고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의 고집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예수는 제사장과 장로 등 권력 앞에서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리라."고 선언(마21:43)했고 "세리와 창녀들은 너희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다."고 말씀했습니다. 왜냐하면 세리와 창녀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사랑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마21:31-3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항과 도전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는 <왕자의 혼인잔치>비유(마22:1-14)에서도 말했습니다. 임금이 아들의 성혼을 함께 축하하자고 특별한 은사로서 초대장을 냈는데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임금은 재차 종들을 보내 축하 잔치의 요리 메뉴까지 알렸는데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청받 은 사람들은 임금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들은 장사하러가고 어떤 사람들은 임금의 종을 붙잡아 때려 주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마태 복음22:5)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아픔인 것입니다. 전람회에 참여한 한 사람에게 안내를 받아 들어 와서 미술 전람실을 둘러본 한 관람객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미술실에는 값으로 정할 수 없는 만큼 귀중한 걸작품들과 영원한 미(美)를 가지고 있고 논박의 여지없이 천재를 발휘한 걸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관람을 마치면서 그 방문객은 "좋습니다만 당신의 이 낡은 그림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는 것 같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수행했던 사람이 조용히 말하기를 "선생님, 이 그림들이 이미 심판할 필요가 없으며 심판받는 것은 오히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인 것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한심스러운 무식만 드러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도 매 한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의 십자가를 직면할 때 만일 그의 영혼이 그 놀라움과 십자가의 사랑의 아름다움에 감동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향하는 도상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예수의 십자가를 대할 때에 어떠한 놀라움과 아름다운 사랑의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정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반응이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에게는 하나의 정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정죄하신 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를 사랑하실 뿐입니다.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정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한 인간의 반응 여하에 따라 그 사람은 밝혀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반응에 의하여 그의 영혼은 발가벗겨지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더 나아가서 열렬한 동경의 대상으로 간주하면 그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어떤 사랑의 아름다움도 깨닫지 못한다면 스스로 정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보내심을 받은 그가 그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하나님의 내 자신에 대한 놀랍고 아름다운 사랑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을 때 구원의 역사(役事)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민수기21:4-9의 말씀이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21:4-9)

우리는 여기에 나타난 사건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여러 해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고생을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는 길이면 만사 형통할 것인데, 왜 이토록 어려운가를 여러 가지로 불평했습니다. 첫째는 길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가나안으로 바로 들어가려면 금방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멀리 돌고 돌아서 40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먹는 것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건만, 왜 이것만 먹어야 하느냐고 먹을 것이 신통치 않음을 불평했습니다. 셋째는 시간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긴 세월을 방황하게 되니 초조하고 원망스러워 왜 이렇게도 오랫동안 고생하게 하시는가 하고 불평했습니다. 이 불평들이 모여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마침내 모세를 죽이겠다고 야단할 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사람들이 물리기만 하면 죽어 넘어졌습니다. 광야의 불뱀에 물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이 백성들은 이같은 불행의 사건의 원인이 바로 자신의 원망과 불평에 있음을 깨닫고 모세를 찾아와서 잘못되었으니 하나님께 기도해서 살려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온유한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 하여 살 수 있는 방법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끝에다 높이 매어 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뱀을 쳐다보는 자만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냥 용서하시고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쳐다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쳐다보는 자는 살 것이라."그런데 그 말을 듣고 믿지 못해 쳐다보지 않고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한 번 쳐다보기라도 했으면 살 수 있는 일을 고집스럽게도 쳐다보지 않고 죽어간 미련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이 곧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요한 복음3:14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리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지금 나의 죄 때문이라고 믿고 십자가를 쳐다보면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리뱀을 쳐다보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건을 자신과 직접 관련된 사건으로 받아들여 십자가를 쳐다보고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본문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으므로 독생자를 보내사 높이 들리어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즉 쳐다보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산다는 말씀입니다. 구리뱀을 높이 든 것처럼 예수께서 매달리시고, 이미 뱀에 물린 우리들로 하여금 쳐다보기만 하면 영원히 산다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4:8에,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하나님의 사랑이 내 자신의 허다한 죄를 가리운 것입니다. 예수는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보면 심판이 물러가고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을 때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밖에 있는 사람은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사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것이 영생이며 천국이며 구체적인 구원받은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본문17-18절)

어느 교수 한 분은 "시편 139편을 읽고 가슴이 뭉클하지 않은 사람은 정말 하나님과 멀리 살고있는 사람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은 동산 그늘에 숨은 아담의 뒤를 쫓으셨습니다."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 더 이상 도망가지 맙시다!. 더 이상 숨으려고 하지 맙시다!. 더 이상 말라버릴 나뭇잎으로 나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지 맙시다!. 주님은 이미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십니다!. 오직 우리가 할 일은 그 놀라우신 사랑 앞에 나를 놓는 일뿐입니다!. 십자가의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복이 되며, 믿지 못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사랑 자체가 저주가 되고 부끄러움이 되고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빛과 사랑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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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랑의 섬김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요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요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요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요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13: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요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요13: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요13: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요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요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요13: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요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앗시시의 성 프랜시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 매우 부유하였습니다. 무엇이든 간에 최고급이 아니면 그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귀공자 중의 귀공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안으로 그의 영혼은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홀로 말을 달려 교외로 나갔습니다. 그가 말을 달리고 있는 길에 한 사람의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그 문둥병자는 온 몸이 문드러지고 있어 몸서리날 만큼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까다로운 성미의 프랜시스였던고로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일그러지고 소름끼치는 이 문둥이를 보고는 무서워서 뒤로 물러서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속에 내재하는 그 무엇이 그를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서는 거의 본능적으로 두 팔로 그 문둥병자를 껴안았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보십시오! 그가 그 문둥 병자를 껴안는 순간, 문둥이는 예수의 모습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고 하는 것이 사람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누구보다 병든 사람들과 죄인들에게 가까이 가심으로 더욱 더 가까이 하나님께 가셨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며 죄인들을 품으심으로 하나님을 품으신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에게 가까운 사람만큼 인간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 진리를 예수께서 친히 보여 주신 모습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 인간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이제 그 사명을 다 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의 절정이 '섬김', 즉 겸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표현이 바로 '종의 형체', 겸손인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겸손을 기독교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위의 말씀을 보면 인간을 사랑하사 구원하시는 방법이 결국은 겸손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은 하나의 도덕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기독교 핵심 진리이며 구속의 원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의 겸손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이 겸손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알 수도, 모실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총도, 성령의 능력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겸손이란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그러므로 겸손을 기도와 신앙과 훈련의 목표물로 삼고 예수의 삶을 통해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겸손의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 40여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

이같은 하나님의 겸손의 훈련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8:16)

삶의 모든 것을 겸손에 대한 훈련의 재료로 삼아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겸손은 예수의 성품이며 교만은 마귀의 성품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 예수의 겸손은 이렇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겸손한 자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천국에 있어서 가장 귀한 자리는 가장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곧 겸손인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6-28)

4.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 그 분의 겸손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 생활의 뿌리를 바로 이 겸손에 두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며 마침내 구원을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의 사역이 예수의 겸손으로 시작하여 겸손으로 마침을 본문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5. 겸손은 곧 십자가의 죽음, 곧 자아부정을 말합니다. 예수는 하나님만이 전부이기 위하여 그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고백합니다(요5:19).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역사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의사와 능력은 물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자신의 능력, 그 자신의 뜻, 그 자신의 영광, 그의 모든 역사와 가르침과 더불어 그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그는 거듭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가 아니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일하시기 위하여 나 자신을 아버지께 바쳤으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아버지만이 전부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적인 자기 부인과 절대적인 복종 및 아버지에게만 의지한 그의 생활이 온전한 평안과 기쁨의 근원임을 그리스도는 아셨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침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고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하셨습니다. 마침내 그를 높여 그의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겸손이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만유의 통치자가 되신다는 지식과 그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인 우리 인생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요, 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만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며 거기서 겸손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6. 이러한 겸손의 생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셔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물이 가장 낮은 골짜기를 찾아 채워지듯이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비어 있고 스스로 낮은데 처해 있는 피조물을 끊임없이 찾으십니다. 그를 찾아서 그의 영광과 그의 능력을 부어 그를 높이기도 하며 축복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큰 은혜를 갈급해 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는 일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높이는 일을 항상 즐겨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항상 겸손한 사람입니다.

7. 겸손은 무엇보다도 으뜸되고 가장 높은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겸손이 없이는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

"형제들아 너희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3-15)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생활을 통해 우리의 이웃에게 나타내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맙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그리스도의 정신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작은 자라도 높히는 일, 즉 다시 말하면 피차에 종이 되는 일을 하게 합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시기와 질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섬김과 존경받을 때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른 사람은 칭찬을 받고 자기는 오히려 멸시 천대를 받고 무시를 당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8. 겸손한 사람에게 "쉼", 즉 평안함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교회가 평안하고자 하면 성도들이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비난과 말썽거리가 생기는 원인은 겸손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역사하고 있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지속되지 못하는 것은 겸손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딤후3:1,2)

교만은 자신과 아울러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에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교만이 유대인들과 그 사회에 고통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결국 겸손의 주가 되신 예수를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9. 겸손한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가장 거룩한 자처럼 여겼으나 회개가 없는 가장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은 가장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성결의 근원이 됩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914)

겸손한 사람은 구원받은 죄인임을 자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지극한 겸손은 일상적인 범죄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뇌리에서 떠날 수 없는 심각한 죄의식에서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가 과거에 어떠한 죄인이었나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죄의식에서 겸손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죄의식은 죄가 아니라 오히려 은혜인 것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

10. 마지막으로, 겸손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겸손은 이처럼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곧 자아의 죽음을 말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은 사람을 겸손하다고 말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었다는 확실한 증표는 겸손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겸손은 위선에 불과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8-1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6,17)

브라질의 성자로 불리었던 미국 선교사 멜랜드(Doug Meland)내외는 깊은 산골에 들어가 선교하며 평생을 사는 중에 네 번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곳 주민인 풀리오 인디안들은 처음에 멜랜드 내외를 <백인>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그들을 무기로 괴롭혔던 그 허다한 <백인>을 부르던 증오에 찬 명칭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후 멜랜드 내외는 의료봉사로써 주민들의 목숨을 구하며 병을 치료하는 헌신적인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를 부르는 명칭이 어느새 <존경하는 백인>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멜랜드 내외는 풀리오 인디안들의 언어를 열심히 배워 10년 뒤에는 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유창한 말을 구사하게 되었고 생활도 그들의 풍습대로 묻혀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멜랜드 내외를 <백인 인디안>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부상당한 인디안 소년의 발을 씻어 주고 있었더니 구경하던 인디안들이 "인디안의 발을 씻는 백인을 보았는가? 이 사람들은 하늘이 보내준 사람들이다."고 말했으며 그 때부터 멜랜드 부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사랑의 종이 된 사람에게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겸손한 가정이 수준 높은 가정입니다. 겸손한 교회가 수준 높은 교회입니다. 겸손한 사회가 수준 높은 사회입니다.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가 수준 높으며 깨끗하고 평안하여 살기 좋은 곳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가까이 하는 것처럼 사랑의 섬김은 서로를 가까이 하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지는 거룩한 생활입니다. 사랑의 섬기는 생활로써 영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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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랑의 표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12-24)

예수께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순종으로서 표시하셨습니다. 사랑의 표준은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말로만 표현하고 행함이 없으면 거짓된 사랑입니다. 거짓된 사랑에는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은 진리(진실, 참)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수반되지 않는 사랑 또한 거짓된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사랑하고, 성령으로 봉사할 때 참 사랑이요 참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18-24)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상대방에게 아픔과 괴로움, 비통함을 안겨주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게 한 적은 없습니까? 예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예수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은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며 교회의 성장을 방해한 적은 없습니까? 부모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부모의 마음에 못 박은 것은 없습니까?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고 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미움 쪽에서는 떠나고 사랑 쪽에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삼상18:12-28)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랑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미움과 질투, 증오와 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께서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원수까지일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예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자기를 사랑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던 것입니다. 사랑은커녕 오히려 증오하여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 적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음악 영화 <지붕 위의 제금사>(Fiddler on the Roof)에서 남편 테부이가 아내 골디에게, "나를 사랑하오?"하고 묻습니다. 골디는 기가 막혀 한참동안 말을 못하다가 대답하는 독창을 합니다. "25년 동안 당신의 옷을 빨고 식사준비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당신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소젖을 짜고 내 있는 것을 다 드렸는데 25년 후에 한다는 소리가 사랑하냐구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진정한 사랑은 온전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나타나는 사랑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끝까지 순종하는 십자가의 길이 그토록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처럼, 사랑의 순종은 그 길이 힘들고 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 없습니다. 사랑에 따르는 순종의 어려움을 예수께서 아시고 우리에게 "보혜사(Helper)"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보혜사(保惠師,Helper)"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인데 이는 <청함 받은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고소, 고발을 당해 형벌을 받게 될 누군가를 위해 변호하기 위해서 <청함 받은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곤란이나 고민, 의혹 또는 당황하는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도웁기 위하여 <청함 받은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의 일을 잘 처리하여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보혜사"입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보혜사"가 바로 성령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들의 불완전한 것을 제거해 주시고 우리들이 인생을 잘 처리할 수 있게 하여 주십니다. "보혜사"되시는 성령께서는 패배의 삶을 승리의 삶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삶의 모든 것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진리를 위한 싸움을 잘 싸울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세상에서 사랑에 실패한 사람을 참 사랑으로 인도하여 아프고 괴로웠던 사랑을 치유하시고 기쁘고 즐거운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십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통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있음에도 고멜은 정부와 눈이 맞아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다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정부와 놀아난 네 아내를 찾아가 다시 사랑해 주어라." 호세아는 은 15세겔과 보리 한 호멜을 가지고 가서 창부가 된 고멜을 산 후에 이렇게 일렀습니다. "당신은 내 아내니 다시는 다른 남자와 어울려 불의한 관계를 갖지 마시오." 이렇게 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거듭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결국 고멜을 사랑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호세아의 이러한 순종은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암시하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사랑을 성공시킨 호세아의 사랑의 승리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보혜사" 성령을 깨닫지 못합니다.왜냐면 세상은 마치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고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보혜사" 성령이 거할 수 있는 성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의 전(殿)>이 되어져야만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우상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의 사랑은 땅에 있는 것들에 집착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 "보혜사" 성령이 그의 마음에 거처를 정할 수 있으려면 먼저 부정한 영(靈)이 나가야만 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마12:43)

예수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 말씀과 성령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나갔던 세상의 영, 마귀는 더 많은 악신들을 불러들여 이전보다 더 악한 형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들, 이전보다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마음은 세상의 영들로 가득 차게 되어 거짓된 사랑과 거짓된 것에 속아 실패한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는 마음속에는 거할 수 없습니다. 천문학자들은 우리 일반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먼 거리까지 하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식물학자는 식물학을 모르는 사람보다 휠씬 더 관목(灌木)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보다 휠씬 더 정확하게 진단하고 병을 고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미술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분야에 무식한 사람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그림 가운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음악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교향곡을 듣고서 전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보다 더 "보혜사" 성령을 잘 알고 깨닫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은 누구의 마음속에라도 청함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처럼 분주하고 시끄러운 소용돌이 생활 가운데서도 성령과 그 능력이 임하시기를 조용히 바라며 기다리는 시간을 특별히 별도로 설정해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령을 구하지 않으면 참 사랑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런던의 유명한 샤프츠버리 경이 길을 지나가는데 어린아이가 횡단 보도를 지나가다가 자기의 힘으로 걸어 갈 수 없으니까 "아저씨, 나를 도와주세요." 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샤프츠버리 경은 이 아이를 안고 길을 건너가 내려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샤프츠버리 경은 어린 소년으로부터 위대한 신앙의 교훈을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즉 우리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하며 소년처럼 도움을 요청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삶의 에너지를 공급받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가 "나를 도와주세요."하고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9-13)

예수 믿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을 진심으로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 사랑을 구하면서도 성령을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바른 신앙 고백과 바르고 참된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이 말씀들은 오직 예수를 구세주로 마음속에 영접하여 받아들이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보혜사" 성령이 임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가장 큰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을 받고 나서는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 "소멸"이라는 말은 불을 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억제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법궤가 들어올 때 너무 기쁜 나머지 옷을 다 벗고 춤을 추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간증이요, 고백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일어날 때는 성령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을 소멸시키는 결과가 됩니다. 성령을 소멸시키지 않는 방법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양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실 때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비록 내게 손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불 보듯이 뻔하게 자신에게 유익이 없을지라도 자신의 의지와 생각, 고집을 꺾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고 어떤 경우에도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예루살렘에 혹독한 박해와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사도들과 하나님의 종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곳을 떠날 수밖에 없어서 이방 나라인 안디옥, 빌립보, 고린도 등 등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결과 세계 복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환난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슬픔과 고통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어지게 하심으로써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성령을 소멸치 않을 때 사랑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언제 슬퍼합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더러워질 때 성령께서는 슬퍼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그리고 사랑하려면 우리 역시 거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항상 깨끗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영육간에 더러워졌을 때 떠나십니다. 그는 거룩하신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회개하는 생활로 성결을 보존해야만 합니다. 성결을 보존하게 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거룩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성결 보존하게 될 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참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비둘기는 결코 쓰레기통에 가서 뒤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도 깨끗한 곳에 임하지 추한 곳에 임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생활, 성별된 생활, 이것이 바로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 태도입니다.

다음으로, 성령과 동행하는 생활이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는 능력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수 한 분이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논문을 내게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학위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만 그의 학위 논문 심의가 다음 해로 미루어지게 되었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마감일에 이틀 늦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알아보니까 그의 논문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도 아닌데 일 년 동안 미국에서 목회를 하면서 그의 지도 교수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서로 원만한 연락을 취하며 관계성을 유지하면서 지냈더라면 그 교수가 이해를 했을텐데 일 년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논문을 제출하니까 지도 교수는 그의 논문이 마감보다 이틀 늦었다고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관계성을 맺을 때에는 "이해할 수 있어요. 열심히 노력하시오." 라고 오히려 격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관계성을 맺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과 끊임없이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문을 두드릴 때에, 때에 따라서 우리에게 후하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과의 교통을 지속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사랑을 지속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성령과의 지속적인 교통함을 이룩할 때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게 되므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과의 지속적인 교통함이 두절되게 되면 자연히 인간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게 마련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삶은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7-21)

미국에 사는 이사벨이라는 부인은 해산을 하다가 갑자기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불치의 병에 결렸습니다. 그 부인은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많은 재산을 허비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병 치료를 포기하고 나머지 돈으로 당시 한국 동란 중에 고생하는 전쟁 고아를 위하여 보내 주었습니다. 그것을 기금으로 해서 부산에 고아원이 생겼는데 후일 그 고아원은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사벨 부인은 그 후로 1년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모인 가족과 친지들은 이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치료비를 한국에 보내서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놀랐습니다. 부인의 최후의 치료비에 의해서 세워진 그 학교가 창립된 지 2주년이 되던 날 그의 남편인 데이비드씨가 초청을 받고 창립 기념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아내가 치료비를 모아서 보내 세워진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그는 매우 감격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 학교의 교사가 건축 중에 재정이 부족하여 곤란을 당한다는 사정을 들은 데이비드씨는 미국에 있는 자기의 집과 재산을 저당 잡혀서 약 6만불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오늘날 4,500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부산의 이사벨 여자 중고등학교입니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보다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사랑하시고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예수도 또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사람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서로가 사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사랑은 순종에 기초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할수록 그 만큼 우리들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는 마음속에는 거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진실한 가를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은 그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보혜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 약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결심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시험에 빠지게 되면 그 결심을 포기할 가능성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이렇게 세 번씩이나 사랑을 다짐하고 결심하고 고백했지만 그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체험을 하고서야 비로소 그가 고백한 사랑, 그가 결심한 사랑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시고자 하는 여러분들에게 사랑의 능력이 되시는 "보혜사"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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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랑과 사명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요21:1-25)

갈릴리 바다에서 일곱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려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대로 순종하였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요한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명령하신 분이 바로 예수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순종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어두운 모습의 일곱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크론 대학 교수 텅크스(Tunks)박사의 말에 의하면, 유사 이래 문명시대가 21회나 있었는데, 그 모든 멸망의 원인들이 하나님을 거스린데 있다고 밝혔습니다.("무화과 나무 열매") 일곱 제자들처럼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면 비록 예수를 배반하고 낙향했지만 그의 용서와 은총을 입어 그의 사랑을 깨달아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부활의 예수를 체험하실 뿐 아니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가 되시므로 제일 먼저 예수를 알아 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는 예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1-23)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 베드로에게 제일 먼저 주고받으신 대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여기 세 번에 걸친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는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는 예수의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각기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질문,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여기 네 형제 자매 부모 친구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며, 두 번째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은 여기 네가 가지고 있는 배와 그물, 고기, 고향 갈릴리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며, 세 번째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은 네 자신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확인하고 나서 예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사명을 말합니다.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양을 먹이는데 너의 생애를 다 바치라."는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의 말씀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세상에서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세상에서도 가장 큰 책임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로 사랑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은 사명만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이어서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로마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죽는 날이 돌아 왔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십자가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에 못박으려 했을 때 그는 그 곳에 거꾸로 달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죽을만큼 가치있는 사람이 못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었고, 사랑은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책임이 따르고 또한 사랑은 언제나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위해 십자가를 질 각오가 없는 한 참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명 완수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사명은, 곧 "양을 치고 먹이는 것"과 최후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직분(사명)은 예수를 증거하고 장수하여 평안한 가운데 죽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받은 바 사명의 우열과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기 주어진 사명에 따라 정해 진 곳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요21:22,23)

예수께서 오늘날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광은 단연코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영광은 우리들에게 할당된 능력이 어떠하든 간에 그것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명예를 서로 쟁탈하는 사이가 아니라 베드로는 위대한 목자이며 요한은 위대한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15:40,41)

베드로에게 주어진 "양을 치고 먹이는" 목자의 사명은 양의 특성상 성결 보존을 위해 죽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미워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양들을 목양하는데 있어서 죄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말하기를, "만일 나에게,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죄만을 두려워하는 사람 백 명만 있다면, 나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 시대에 역사의 운명을 가늠하는 천국 복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마땅히 성결하지 아니하면 역사에 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에 교회는 성결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양과 염소를 분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1-34)

경향신문 5월 31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청각장애 발레리나 강진희,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소리를 듣지 못한 스물 네살, 그녀는 어떻게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음악이 몸에 감겨들까, 그녀의 공연에서는 그래서 관객들이 숨을 죽인다. 음악이 춤속으로 스며들어 완전히 하나가 될 때 객석은 무대 위보다 더 격정에 휩싸인다. 춤동작은 또 어떠한가, 관객들의 경탄 속에 우뚝 솟아올라 힘차게 비상한다. 활달하고 시원하다. 내면에서 우러난 표정연기는 너무도 당당하다. 우아한 자태에 당당한 표정. 자칫 교만하게 보일 정도의 자신감. 그녀를 감싸고 있는 신비로운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무엇이 영혼 속을 흐르기에 침묵의 세계에서도 노래를 듣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부모가 자신의 딸이 농아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생후 10개월 때였다. 놀라지 않는 아이. 울음소리가 이상한 아이. 어머니는 기도하며 울었다. 말 못하는 딸을 위해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농아에 맞는다는 미술, 테니스, 육상,.... 그러나 딸은 무용만을 고집했다. 그렇다고 듣지 못하는 딸에게 무용을 시킬 순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농아 소녀의 담임선생은 마침 무용교사였다. 소녀는 담임선생에게 매달렸다. 선생은 단호히 뿌리쳤다. 그러나 뜻밖에 어머니가 소녀의 편이 되었다. 어머니의 기도 속에 춤추는 딸이 보였던 것이다. 기도의 응답이었다. 이번엔 모녀가 함께 졸랐다. 이렇게 해서 소녀의 바람은 이뤄졌다. 선생은 농아라고 봐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가르치고 따라오지 못하면 가혹하게 나무랐다. 매도 들었다.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울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음악을 따라갈 수 없었다. 자신보다 앞서거나 뒤에 처지는 음악과 간격을 좁힐 수 없었다. 다른 아이가 다섯 번 연습하면 꼭 4배인 스무 번을 했다. 발가락에 피멍이 가실 때쯤 되면 선생은 연습량을 더 늘렸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솔로 콩쿠르에 참가했다. 탁월한 기량으로 예선을 통과했지만 본선에선 탈락했다. 역시 음악이 문제였다 음악을 타지 못하는 발레리나. 듣지 못하는 음악을 눈으로 헤아려 외우고 리듬을 타는 연습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신의 몫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녀에겐 음악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소리의 작은 입자--진동이 느껴졌다. 끝내 이듬해 참가한 콩쿠르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그 후 그녀는 대학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 연기를 배웠다. 거친 동작들은 하나씩 시어(詩語)로 변했다. 그녀의 춤은 갈수록 무르익었다. 92년 전국대학 콩쿠르 금상, 93년 마카오 초청공연 북큐수 국제 양무 콩쿠르 준우승. 마침내 대학 졸업을 앞둔 95년 2월 그녀는 조승미 발레단이 공연하는 <삼손과 데릴라>에 주연으로 발탁됐다. <기적의 발레리나 강진희. 청각장애인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발레리나인 강진희양은 천부적인 예술성과 고도의 테크닉, 그리고 예민한 감성으로 강렬한 인상을 줄 것이다.> 필담을 통해 그녀와 얘기를 나누었다. "발레를 통해 무엇을 얻는가?" "평강이다. 마음에 알 수 없는 것들이 흐른다. 난 느끼지 못하지만 아마 노래인지도 모른다." "감명 받은 영화가 있는가?" "십계명과 작년에 본 쉰들러리스트다. 십계명에서 기적의 하나님을 확인했고 쉰들러리스트에선 인간 사랑이 감동적이었다. 쉰들러의 자기 본성 고백은 잊혀지지 않는다." ----- 그녀의 삶은 사랑이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녀를 위해 새벽기도를 올린다.》

청각장애자의 발레리나 성공은 딸에 대한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과, 무용에 대한 청각장애자의 사랑의 역사(役事)인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할 때 즐겁고 기쁘게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지난 15년간 복권 당첨으로 백만장자가 된 139명을 추적, 조사해 보았더니 약 6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1년 후에는 다시 직장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행복해지려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은 일(사명)을 가질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서는 행복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가장 큰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일찍이 무자극 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아무런 치장도 되어 있지 않은 방에서 아무 하는 일없이 먹고 자기만 하면 일정한 돈을 지급하겠다는 실험을 해 본 결과 대부분 2-3일만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고 합니다. 일(사명)은 자기 자신이 가치를 느껴서 자발적으로 일을 해야 즐겁고 성과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강제로 시키면 똑같은 일이라도 재미가 없어지고 성과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직장인 중에는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면서도 좋은 건강을 유지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피로를 느끼며 지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자기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느냐 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양을 치고 먹이는 일"은 영원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사명)입니다. 때문에 사도(제자)들은,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순교하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음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던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사함으로 주어진 사명과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끊임없이 출렁대는 가슴의 번민을 안고서 그의 고뇌처럼 얽히고 설킨 그물을 하염없이 던지고 또 던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여윈 슬픔에서 그가 도망쳐 갈 수 있는 곳은 이전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바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허탕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손금보듯 환하게 알고 있는 그였지만........ 마침내 그물질을 포기하고 텅 빈배를 저어 해변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해변가에 서 계신 예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폴란드 소설가 셍케비치의 소설 <쿼바디스>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이후로 네로 황제는 더욱 더 잔인한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학살합니다. 그 때 기독교인이던 <기리아>가 수많은 시민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들소가 들어있는 원형 극장 안으로 들여 보내집니다. 그러나 당시 노예였던 <우르서스>가 원형 극장 안으로 뛰어들어가 들소의 머리를 비틀어 가까스로 <기리아>를 구출해 나옵니다. 이처럼 구사 일생으로 살아남은 <기리아>와 <우르서스>는 지하 교회에 숨어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 한시 바삐 이 죽음의 도시인 로마를 탈출한 것을 종용합니다. 신도들의 요구에 의해 베드로가 로마를 빠져나와 캄파니아 들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갑자기 환한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옵니다.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안 베드로는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그러자 그 빛이신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지 않겠는가?"

1920년대 후반 메사추세츠 주(州)의 법정에서 흥미진진한 사건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부둣가를 거닐던 한 사람이 로프에 걸려 그만 차갑고 깊은 바다 속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헤엄을 칠 줄 모르던 사람인데다 갑자기 차가운 물이 닿는 바람에 다리에 쥐까지 나서 그는 물 위에 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살려줘요!" 그는 잠시 동안 허우적대며 도와 달라고 소리치다가 그만 물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그의 친구들이 달려 왔을 때는 너무 늦어 이미 그의 생명은 끊어진 뒤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에 빠진 사람으로부터 불과 몇 미터도 못되는 거리에 젊은이 한 사람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분명히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줘요!" 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수영에도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심하게도 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일광욕을 즐기며......이것을 알게 된 익사자의 가족은 그의 이러한 행동에 분개한 나머지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이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다니요! 그것도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러나 결과는 익사자의 가족이 패소한 것으로 끝났습니다. 법정의 판결은 부둣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할 법적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대한 영적 책임을 묻습니다. 결코 죄 없다 하지 않습니다.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56:9-12)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겔3:17-21)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린양을 찾으려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3-7)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지옥으로 빠져 가는 이웃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영적 흑암에서 꺼내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명령하고 계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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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랑의 공동체

"(행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행5: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행5: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행5: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행5: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행5: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곁에 장사하니 (행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초대교회는 탄생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서 순전하고 참된 사랑의 공동체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랑은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기꺼이 함께 나눌 정도였습니다.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위의 성구들을 통해 보면 유무상통하는 일과 물욕이 없어지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소유를 내놓고 이기심과 소유욕에서 벗어난 성도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요셉은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사람으로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 상당히 부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헌금하므로 초대교회에서 아주 긴요하게 쓰임받았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요셉의 별명이 바나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권위자"(勸尉者)란 뜻입니다. 다시말해 요셉은 초대교회에서 상당한 칭송과 영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자극하여 자신들도 돈을 갖다 내는 방법으로 영광과 칭송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 팔아 일부만을 내놓은 채 전체를 내놓은 양 교회를 속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순수한 교회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나눔의 공동체)에 먹칠을 한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초대교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탄생과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성령을 훼방한 죄로, 또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만홀(漫忽)이 여긴 죄로 회개의 은총도 받지 못한 채 중징계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행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아나니와 삽비라는 하나님 앞에서의 칭찬이 아니고 사람 앞에서의 칭찬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한 믿음을 쏟아냈더라면 이렇게 속일 수 없습니다.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속이고 사람 앞에 받는 박수를 얻어내기 위하여 돈을 동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은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돈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 헌금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눅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18: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기도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응답되지 못하였고,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한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탐심을 우상숭배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엡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엡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탐심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다시말해 자신의 욕심,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일 많이 등장하는 우상이 바알 신입니다. 바알, 아세라, 몰록, 밀곰 등 여러 우상 중에 바알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바알이 생산의 신, 풍요의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들의 방법으로 요구하는 대상이 우상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권세, 명예 등 입신양명과 세상에서의 쾌락 등 등 전부를 돈으로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물질만능인 것입니다. 돈으로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매수되지 않고 구원을 얻는 방법을 돈의 액수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넘어가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헌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엄청난 저주를 받아 즉사했던 것은 바로 우상숭배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민11: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민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민11: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탐욕을 품게 되므로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생기다 보니 자연히 우상 숭배의 애굽이 생각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탐심은 영원한 축복의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하고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하여 우상숭배로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것은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의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 아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친 물건 중에서 은과 외투와 금을 얼마간 취했습니다. 아간의 이 행위는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온 가족이 모두 멸절되는 심판을 자초했습니다.(수7:1-26)

"(왕하5: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 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 (왕하5:21) 나아만의 뒤를 쫓아 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왕하5:22)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왕하5:23)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왕하5:24) 언덕에 이르러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저희를 보내어 가게 한 후 (왕하5:25)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왕하5:26)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왕하5: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탐심에 눈이 어두워 그의 스승 엘리사를 속이고 거짓말을 했던 게하시가 결국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죽임을 당한 이유를 알아보면 참으로 치사하고 더러운 내막이 있습니다. 죤 부스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형과의 많은 컴플렉스를 느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형은 아주 똑똑했고 나중에 그는 아주 훌륭한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부모한테 야단만 맞으며 "나같이 못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의 마음 깊은 속에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몰두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유명하게 되기 위해서는 유명한 사람을 죽이면 나도 유명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링컨을 향해 총을 쏜 것이었습니다. 한 시대가 낳은 위인을 죽였던 죄가 바로 탐심의 범죄였던 것입니다. 풍요로운 물질과 안락한 생활을 누릴수록 참과 거짓에 대한 구별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치관이 전도(顚倒)되기 때문이며, 인간의 죄가 더욱 더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지 중에 거짓을 말하게 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출세와 성공과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하나의 수단으로서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것은 너무도 일상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 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거짓은 인간의 온갖 범죄에 작용하며 거기에 사단의 세력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거짓을 행하는 자마다 또한 거짓의 악습에 빠질 위험이 다분한 것입니다. 거짓은 인간의 품성을 해치는 도덕적 해악 요소일 뿐만 아니라 인간 전체를 파멸시킬 수 있는 영적 악의 세력이 속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을 행하며 악한 행동을 일삼는 자들에게 성경은 결정적이고 단호한 종말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에 속한 자들은 모두 불못에 던지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잠19:5)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

거짓은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의도에서 한 말뿐만 아니라 가식과 위선에 찬 행동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우상숭배와 그릇된 가르침도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잘못 하는 것도 역시 거짓이라고 합니다.

"(요일2: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성경이 이처럼 거짓에 대해 정의(定意)를 내리는 것은 그 모든 거짓된 언행들이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모든 인간은 죄의 세력 아래 있으며 거짓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께 범죄하였으나 자신들의 지은 죄를 은폐하려고 동산 나무에 숨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죄과를 변명하였거니와 이들의 행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거짓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실로 인간의 모든 범죄 행동 구석구석에는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고 있으며 이런 행동은 인간을 극심한 파멸의 구렁으로 몰아감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은 또한 간교합니다. 거짓은 겉으로 듣거나 보기엔 거의 진실인 것 같습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나(창 3:1-6) 가인이 아우 아벨을 살해하고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하나님께 거짓말하였을 때나 요셉을 구덩이에 가두어 놓은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안부를 묻는 야곱에게 요셉의 채색 옷을 보이며 대답한 거짓말은 한결같이 거짓을 행하는 자들의 간교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창37: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창37:32) 그 채색 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은 이처럼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참된 교회를 해치며 하나님과의 관계성까지 파괴하는 해악한 것임을 볼 때 성도는 마땅히 거짓된 행위를 경계하며 자신이 거짓으로부터 구함받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탐심과 거짓은 초대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어느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하루에 3만 마디의 말을 하면서 산다."고 했습니다. 그 3만 마디 중에서 우리가 진실이 담긴 말을 하는 것은 얼마나 되며, 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요? 사랑의 공동체에는 탐심과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옛날 어느 형제가 아주 우애 깊게 살았습니다. 하루는 그들이 함께 길을 걷다가 동생이 우연히 금덩이 두개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우선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지만 막상 형에게 한 덩이를 주고 난 아우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이 길을 나 혼자 갔더라면 내가 둘 다 가질 수 있었는데, 내가 주웠으니까 형님에게는 안 주어도 되는건데" 형제는 저마다 딴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길을 가면서도 마음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저 녀석이 필경 자기는 큰 것을 갖고 내게는 작은 것을 주었으렸다. 내 눈에 먼저 띄지 않고 하필 녀석이 주울게 뭐람. 내가 먼저 봤더라면 둘 다 내 것인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이나 동생 모두가 "내가 왜 이런 마음을 먹지. 이러다간 천벌을 받지."하면서 뒤숭숭해지는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침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이때 동생이 갑자기 강물을 향해 금덩이를 힘껏 던져버렸습니다. 형이 깜짝 놀라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형님을 우애하고 존경했는데 저 금덩이를 나눠 가진 순간부터 별 불경스런 생각이 다 떠오르니 필경 저 물건이 상서롭지 못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까 마음이 심란하던 형도 "그래, 네 말이 맞다." 하면서 자기 손에 들었던 금덩이도 함께 물 속에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탐욕과 거짓 대신에 사랑과 진실함으로 충만하여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가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세상에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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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끊을 수 없는 사랑

"(롬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젊은 선교사 죠지 애틀리는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손에 있는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대로 쏘면 저들을 죽이고 자기는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로 방아쇠 한번 잡아당기면 끝날 일인데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 이 마을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는 영영 끝이 나고 말기 때문이다. 남을 죽인 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가 믿으려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그대로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찢기며 비참하게 죽었다. 죽은 다음에 보니 그에게는 그런 놀라운 총이 있었고 탄환도 열 발이나 남아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원주민들은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데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다. 확실히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 주실 만큼 충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보증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격렬했던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샌디에이고의 외곽지대에 있는 화려한 어느 저택에 전화벨이 울렸다. 집주인되는 부인이 전화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이러하다. "엄마, 저예요. 제가 죽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아들의 음성이었다. 어머니는 한시바삐 그 아들이 보고 싶어 볼멘소리를 한다. "당장에 달려오지 않고 전화는 무슨 전화냐? "그러자 아들은 자못 심각하게 말했다. "이제 가겠습니다. 그런데 불쌍한 내 친구와 함께 갈까 합니다. 이 친구는 함께 싸우던 전우인데 지금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으며, 다리 하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는 친구라서 저와 같이 있으려고 데려왔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며칠동안만 같이 있으려므나."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아니예요. 오랫동안 입니다."어머니는 다시 이야기 했다. "그러면 한 일년 함께 있으려므나. 처음에는 그럭저럭 함께 지낼 수 있겠지만 세월이 가면 무거운 짐이 되어 괴로울 것이다." "아니예요. 일생동안 같이 살겁니다." 이것이 아들의 대답이었다. "너, 전쟁에 나가더니 감상주의자가 되었구나. 그런 사람을 길게 사랑하기 쉬운 줄 아느냐?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아도 얼마간 지내보면 싫증이 나고, 그리고 나중에는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이 말에 "그럴까요?" 하고 아들은 수화기를 놓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군 본부로부터 발송된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다. 전보의 내용은 청천벽력이었다. "당신의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투신 자살했습니다.시체를 찾아가십시오." 어머니는 허겁지겁 달려가 시체를 확인해봤다. 시체는 틀림없는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고, 다리 하나가 없었다. 이토록 불구자가 된 나를 어머니가 어떻게 사랑해 줄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확인해보았건만 결국은 짐이 될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했던 것이다. 그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만 것이다. 누가 아들을 죽인 것인가? 그는 사랑 하나를 확인하고 싶었던 던 것이다.'그렇더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아도 장차는 짐이 될 것이라고 하니 무슨 용기로 살 수가 있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확증된다면 현재 나에게 주어진 상황과 그 모든 것이 어떠하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중에도 사단은 성도들을 공격할 틈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단의 대적 행위 앞에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사단이 성도에 대해 대적하는 행위는 첫째, 송사하는 행위(33절), 둘째, 정죄하는 행위(34절), 셋째, 그 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는 행위(35절) 등이다. 욥의 경우에도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송사하고 정죄한 후(욥1:9-11,2:4,5) 욥에게 갖가지 환난을 가함으로서 욥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며 인정하시며 사랑하시는 한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대적할 수가 없다. 그러나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송사하리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사단의 대적 행위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당하게 되는 어려움들이 일곱 가지로 열거되고 있다(35절). 바울이 생전에 체험하게 되었던 것들이다. 그 종류와 의미는 다음과 같다. "환난"---모든 종류의 고통이나 손실, "곤고"---내면적으로 당하는 곤경, 불안, 걱정 등, "핍박"---부당하게 폭력으로 고통받는 상태, "기근"---굶주림과 가난, "적신"---헐벗음과 수치, "위험"---사람과 자연으로부터 당하는 예기치 못한 피해, "칼"---세상 사람들의 무력, 등이다. 이러한 사단의 대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튼튼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사랑의 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으면 이 모든 것들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스런 영화에 참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요 축복인`것이다. 사랑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마귀는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우리를 괴롭힐 수는 있으나 정죄하고 심판할 권세가 없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정죄와 심판하지 않으시며 사랑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비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된다. 이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떤 세력도, 어떤 극한 상황도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선언이 본문 37절 말씀이다. "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줄을 끊으려는 세력들이 38,39절에 열거되고 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망(육체로 사망케하는 세력)과 생명"은 존재에의 극한 상황을, "천사들(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과 권세자들(성도들을 대적하는 악령과 세력들)"은 피조된 영적 존재들의 극한 상태들을, "현재 일(현재 역사하고 있는 모든 세력)과 장래 일(미래에 역사할 모든 세력들)"은 시간적인 극한 상황을, "능력(천사, 권세자들과 같은 영적 존재)"은 영적인 적들을, "높음(지상, 하늘 위에 있는 모든 세력)과 깊음(지하, 물속에 있는 모든 세력)"은 공간의 극한 상황을, "아무 피조물"은 피조 세계 전체 상황 등을 뜻한다. 사랑은 이 모든 것들을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세상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나를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마귀는 패배한 것이다. 한 수도사가 리비아의 어느 사막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수도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경건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사막에서 금식을 하며 극기와 고행으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마귀가 다가와서 이 수도사를 시험한다. 육체적인 욕망을 비롯하여,물질로,의심으로,공포로,아무튼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시험을 해 보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마귀는 고민에 빠졌다. 그 때에 지나가던 친구 마귀가 "내가 한번 해볼께"하더니 그 수도사에게 다가가서 "당신의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답니다."라고 했다.그 말에 수도사의 낯빛이 대번에 변하더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잘 이겨나가다가 끝내는 질투에서 넘어지고 만 것이다. 이는 특별히 믿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이다.선하게,의롭게,깨끗하게,진실하게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는 질투에서 넘어지고 만다. 마귀의 최고의 수단이 질투이다. 기도로써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변화되지 않는다. 기도로써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변화되지 않는다. 사단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십자가의 사랑이다. 기도의 능력은 알면서도 사랑의 능력을 모른다면 그 기도는 주문에 불과 한 것이다. 원수를 이기는 비결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매를 맞아도 핍박을 받아도 모든 일에 실패를 해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만 하면 성공자요 승리자요 행복한 자이다. 어려움과 사단의 대적이 강할 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감사하며 찬양하자! 생활 속에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이 사랑을 노래하며 세상을 이기는 사랑의 실존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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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랑의 빚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롬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본문은 성도가 사회와의 관계, 즉 이웃에 대한 성도의 의무를 말씀하고 있다. 이웃에 대한 성도의 의무는 한 마디로 '사랑'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레위기 19:18에서 명하신 바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강령으로 말씀하신 바이다(마22:37-40). 이와같이 성도들에게 최고의 요구로써 사랑이 강조된 것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그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성도들에게 베풀어졌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벧전2:24).즉 성도들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에 빚진 자들"이다. 그 사랑의 빚은 그 본연의 성질상 다 갚을 수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마7:12). 유대인들에게는 614개조문의 율법이 있다. 이 중에 365개항은 '...하라'는 긍정적 형태이고 나머지 248개항은 '...하지 말라'는 부정적 형태로 되어 있다.이 율법 전체의 내용을 종합 요약한 것이 바로 십계명이며 이 율법의 조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및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규정으로써 인간에게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경고해 주는 소극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율법에 비해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사랑은 소극적으로 '하지 말라','하라'는 규범을 넘어 적극적으로 남을 향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열어 보이고 내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개별적 윤리, 법 조항을 넘어 그 윤리와 법의 강령을 완성하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율법의 완성자로써 사랑 그 자체이시다(마5:17-19). 그러므로 온전히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전13:1-13).성도들은 이와같이 포괄적이요 적극적인 '사랑'을 삶의 가장 귀중한 원리로 삼아야 한다. 사랑의 대상을 추상화시키지 말고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모든 사람을',자기 마음에 들든 아니들든 그가 어떤 성품의 소유자이든 아니면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 있든 일단 나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나의 이웃'으로 여겨야 한다(눅10:37). 인간은 본래부터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타자(他者)와의 관계를 추구한다. 사람을 보통'인간(人間)'이라고 한다."사이"에서 사는 존재,"타자와 타자 사이"에서 사는 존재가 곧 사람이란 뜻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해서 두 사람이 같이 살도록 했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잘 규명해주는 말이다. 성도들은 신앙 공동체의 삶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그의 제자들을 양떼와 포도나무 가지에 비유해서 가르쳤다. 예수 자신을 양떼를 치는 목자와 포도나무에 비교했다. 예수 당시에 목축업자들은 한 마리의 양을 먹이지 않았다. 언제든지 한 무리, 한 떼로서의 양을 길렀다. 양들은 언제든지 떼를 지어서 다녔다(요10:1-18,21:15-17).하나의 공동생활을 했다. 그 무리에서 떨어지면 길을 잃어버린 양이 되고 만다(눅15:3-7). 반드시 다른 양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의 생활 양식의 특징은 이처럼 목자이신 주님과 영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동시에 이웃과의 관계를 가지는 데 있다. 시편 133편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구절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주체가 되시는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연합하여 뜻을 합해서 공동 생활을 한다면 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일인가라는 뜻이다. '성도'는 독특한 관계 속에서 삶의 양식을 가지고 산다.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수평적으로 인간(이웃)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다음과 같은 성구에서 보여 주는 인생관을 가지고 수직적인 삶을 산다. 빌립보서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고린도 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생사를 걸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자신이 이 지상의 어느 곳에서 살든지 자신이 사는 그 곳에서 자신의 이웃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다. 즉 '사람끼리' 구체적인 삶의 장소에서 구체적인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끌려 들어가게 되었으나 거기서도 하나님께 찬미한 결과 지진이 일어나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나오게 되자 오히려 간수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건은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바로 내가 사는 '이 자리에서'구체적인 생활을 통해서 돌릴 수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기독교의 신앙 생활은 구체적이요 실제적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사회 지향적이고 타인 지향적이다. 요한 일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하나님은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신앙의 훈련 장소로 주셨다. 칼빈의 말을 빌린다면 신앙의 학교로 우리에게 주셨다. 이러한 성도의 생활양식을 수평적인 삶이라고 한다. 가장 아름다운 신앙 생활,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산 속에 들어가서 이 속세(俗世)와는 관계를 끊고 한평생을 기도와 묵상의 생활을 하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것은 오히려 매우 이기적이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단성적(單性的)으로 만들지 않았다. 두 사람을 만들어서 같이 살게 했다. 그러므로 같이 살아야 한다. 공동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혼자서 조용한 가운데 신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 생활을 함으로써 신의 뜻에 어긋나는 생활을 피할 것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나의 상대자와 내 이웃과 아름다운 공동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추구하는 데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공동체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 이러한 말이 있다. "천당은 혼자 가는 곳이 아니라 반드시 누구와 같이 가는 곳이다." 이 말의 뜻은 반드시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천당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오리겐(Origen)은 말하기를 사랑의 빚은 영구히 우리와 함께 남아 있고 절대로 우릴 떠나지 아니하며 이것은 우리가 매일 주고 영원히 받는 것이다."라고 했다. 본문의 사랑의 빚 외의 빚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지세(ground tax,국민이 자기 땅의 소출중 곡식의 십분의 일과 포도주와 실과의 오분의 일로 현금이나 물품으로 지불해야 하는 세), 소득세(income tax,국민 각자의 소득의 백분의 일), 인두세(poll tax,14세로부터 65세까지의 모든 사람이 내는 것) 등의 조공과 ,수출입 관세, 대로(大路) 사용세, 교량세, 시장세, 입항세, 동물 소유세, 차량운행세 등의 지방세가 있었다. 바울의 주장은 이 조공과 세들을 그것이 아무리 괴로울지라도 기독교인은 국가와 지방 관서에 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부채는 물론이고 이같은 여러가지 세금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빚을 다 갚거나 지지 아니하고 살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누구나 반드시 져야 하고 반드시 갚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절대로 지지 않고 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것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남을 도울지언정 남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로서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사랑은 받을 줄을 알아야 베풀 줄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줄 알아야 이웃에 대해 그 사랑을 베풀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사랑의 빚을 지고 그리고 그 빚을 갚아가면서 살라"는 것이다. 사랑을 주고받게 될 때 인간 관계는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고 하는 것이다. 만일 사랑의 빚을 갚는 자세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는 간음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면 그의 인격을 존중하게 되고 그의 순결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일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두 사람이 그들의 육적인 열정이 그들을 지배하게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그들이 서로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너무 적게 사랑해서이다. 참 사랑에는 곧 존경이 있고 사람이 죄짓지 않게 하는 자제가 있는 법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비천한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성결하게 보존할 뿐만 아니라 남의 성결 또한 보존코자 하는 속성을 지녔다. 또 사랑의 빚을 갚는다면 살인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절대로 무엇을 파괴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건설하려고 한다. 미움은 분열시키고 파괴시키나 사랑은 연합하게 하고 건설하게 한다. 사랑은 절대로 미워할 수 없다. 사랑은 언제나 유순하다. 사랑은 자기 원수를 죽임으로 없이하려 하지 않고 언제나 그를 자기 친구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사랑의 빚을 갚는다면 그는 절대로 도적질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사랑은 언제나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관심이 깊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사랑의 빚을 갚는다면 그는 절대로 탐내지 않을 것이다. 탐심은 금지된 것과 욕심내서는 안될 것에 대한 과도하고 자제하지 못하는 욕망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 욕심이 사라질 때까지 마음을 깨끗이 씻어 준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다."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하고는 네 하고 싶은 대로 하라."사랑하는 자에게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할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의 삶을 자유롭게 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지배하고 그 사랑의 힘이 이웃과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면 다른 모든 법이 불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사랑을 떠나서는 인간의 실존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랑이 지배되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너와 나의 삶'에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되는 사랑의 실존이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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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사랑의 권면

"(고전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고전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고전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고전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4: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고전4: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고전4:19)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두 번째 전도 여행을 하면서 직접 개척한 교회입니다. 바울은 많은 어려움 속에 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더욱 더 애착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교회가 서로 파당을 짓고 서로 잘났다고 서로를 향하여 비난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 주위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지닌 교회가 교만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바울의 마음은 잘못된 길로 빠져 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던 것입니다. 본문의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이 성구를 어떤 번역에서는 "누가 너희를 잘난 사람으로 만들었느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잘난 척하는 교만한 사람들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분당을 이루게 된 것이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라고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날카롭게 추궁합니다. 재물이나 지식이나 재능이나 건강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 것들을 마치 자기가 잘나서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교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13절까지의 말씀은 바울과 아볼로의 겸손과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너희는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고 너희는 강하고, 우리는 비천하고 너희는 존귀하고, 우리는 주리고 목마른데 너희는 이미 배부르고, 우리는 헐벗고 정처없는데 너희는 이미 부요하고, 우리는 미말에 처한 세상의 구경거리요, 세상의 더러운 것이며, 만물의 찌끼같은데, 너희는 왕노릇하고, 우리는 매맞고 후욕당하고 핍박당하고 비방당하는데 너희는 서로 대적하고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자부심과 특권과 자랑하며 자기의 공적을 내세우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스스로 낮춰 사람들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기쁨으로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생활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한마디로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것입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아버지된 심정으로 사랑이 담긴 권면 즉 영적으로 겸손해질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의 영적 아버지로 표현함으로써 다른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직접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행 18:1-11) 그 교인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했으며(고전 1:3, 3:2) 그들이 어그러진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이렇게 사랑의 편지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과 사랑의 권면이 진실된 것이며 책망의 동기 역시 아버지 같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스승은 나이가 많고 믿을 수 있는 노예로서 자녀들을 매일 학교에 데리고 다니며 자녀의 도덕적인 면을 훈련하며, 품성에 주의를 기울여 남자다운 남자로 만들어내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많은 스승이 있을는지 몰라도 아버지는 한 분뿐입니다. 이와 같이 고린도 교인들은 앞으로 많은 스승이나 교사의 지도를 받을는지 몰라도 그들 중 아무도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바울이 한 것 같은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는 생명으로 낳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맹목적이거나 감상적인 가벼운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고전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장군과 타냐의 대화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 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 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신을 좇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예의 신도 물질의 우상도 조만간 내 손을 놓을 것입니다. 평생이라는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다 기울였던 그 안개 같은 나의 우상들은 코마로프가 불붙은 거리에서 어린 타냐를 떼어놓았듯이 얼마 뒤에 나를 배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허무한 우상들을 좇던 우리는 외로운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사랑은 때로는 징계도 필요한 것을 아는 사랑 또 징계를 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눈감아 줌으로 그 사람을 파멸케 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밝히 봄으로 그 사람을 개선시키는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은 상대방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상처를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잠20:30)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히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12: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히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사도 바울은 '진짜 아버지'의 심정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어찌 보면 이처럼 교만하고 불손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한 바울의 삶을 생각할 때, 그리고 주리고 헐벗고 매맞으면서도 온갖 핍박과 고통을 참으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사도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은 복음의 자녀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은 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의 실천을 보이라는 것, 바울의 겸손과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 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 안에서 화합하라는 것, 마음 중심으로 충성된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을 보여준 삶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위해 당한 다음과 같은 그의 고난의 모습을 통해 역력히 알 수 있습니다.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바울이 당한 고난의 목록은 고린도 후서 11장에도 나와 있듯이 그는 수많은 고통을 뚫고 살았습니다.

"(고후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사(선물)에는 <믿음>뿐만 아니라 <고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겸손과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새로운 삶과 그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마땅히 말로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고백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고 인정하는 자가 진정 성령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 말에 열중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앙의 형식은 거룩한 모양으로 지키고 있으나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영적 성숙됨이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사랑의 권면의 말씀입니다. 복음의 진실한 핵심은 멀리 하고 사소한 것들로 논쟁하기를 일삼는 편협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권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현실 생활을 지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가 복음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가는 도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장터에서 말을 사려고 흥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 타는 말인가요?" "이 말은 등에 안장을 올려놓으려면 뛰고 차고 난리를 쳐서 타지는 못합니다." "그럼 달구지를 끄는 말입니까?" "달구지만 지우면 그냥 앉아 버립니다." "그렇다면 뭣 때문에 팔려는 거죠?" "모양이 좋지 않습니까? 스타일이죠."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 이 말과 같은 신자들은 없겠습니까? 안장도 못 올려놓게 하고, 짐도 지지 않고, 스타일만 갖추려는 기독교인은 없겠습니까? 우리는 스타일만의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하여 선택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오직 "겸손과 충성"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겸손과 충성을 다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여 주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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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랑과 지식

"(고전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전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고전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고전8: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고전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전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고전8: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고전8: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8: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고전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고린도같은 도시에서는 이교(異敎)의 생활권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시장에서 팔고 있는 고기는 모두 각종 이교 신전에서 제물로 바쳤던 것들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사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있던 영지주의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모든 것이 가하다(6:12)"고 했고, 우상을 무시하는 자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4절). 우상 제물과 관련된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네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상에 대한 상당한 신앙 지식을 가진 믿음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상은 원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무슨 문제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 제물을 떳떳이 먹는 것입니다.

"(고전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고전8: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고전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둘째, 식물 먹는 것은 죄도 아니고 영적인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전8: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믿음이 강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들이 우상을 섬기는 신전에 들어가서도 먹는 것입니다. 신전에 들어가서 먹으면 어떻고, 제단 앞에서 먹으면 어떠냐? 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안 된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어디서 먹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셋째, 성례(성찬과 세례)를 받는 것이 어떤 마술적인 보호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찬을 받으면 귀신의 살을 먹어도 괜찮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상 제물 같은 것은 성찬에 참여한다면 문제도 안되며, 뭘 먹든 무슨 일을 하든 괜찮다는 어떤 마술적 효과가 성찬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고전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신앙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는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최고 기준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네가 알고 있는 지식이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는가, 교회에 유익이 되는가를 따져야지 네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이 신앙의 최고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믿음이 약한 형제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8: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따라서 자신의 신앙의 중요한 기준을 신앙 지식에 두지 말고 사랑에 둔 후에 그것이 남에게 덕이 되는가 교회에 유익함이 되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문제, 즉 음식은 신령한 일과 무관한 것이므로 무엇을 먹거나 어디서 먹거나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고전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고전10: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10: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고전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우상의 제물 중에서 시장에서 산 것이나 개인 집에서 초청 받았을 때는 먹어도 좋고 우상을 섬기는 신전이라고 해서 먹지 못할 것은 없지만, 만약 예수 믿는 성도가 우상을 섬기는 곳에 들어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제 삼자가 볼 때 분명히 그 우상을 섬기는 행위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다른 신을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장이나 개인 집은 우상에게 제사하는 곳이 아니라 먹고 교제하는 장이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먹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문제에 대한 답은 성찬이나 세례가 마술적인 보호 구실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찬에 참여했다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교훈이 고린도 전서 10장에 있습니다.

"(고전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10: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고전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10: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10: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고전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전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을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물로 세례 받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만나와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신 것을 성찬 받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순종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두가 멸망당했습니다. 이를 보건대 성례에 참여했다고 불순종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례에 참여했다고 우상숭배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음식물과 관련된 각종 규제 사항을(레 19:26, 신 12:26, 23-25, 15:23 등) 오늘날에도 지켜 부정한 짐승 및 짐승의 피를 먹어서는 안 되는가? 사실상 구약의 율법을 완전케 하려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선언함으로 음식물에 관한 율법적 금지 규례들을 파하셨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막7: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왜냐하면 "(히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들은 더 이상 음식물을 취하는 것에 대하여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사도 베드로가 보았던 부정한 짐승의 환상에서도 간접적으로 시사되고 있습니다. 또한 다음의 성구에서도 분명히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딤전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히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 구약과 예루살렘 공회에서조차 피를 멀리하라고 금한 근본 의미는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는 만큼 짐승이든 사람이든 간에 그 생명을 귀히 여기라는데 있으므로 그 정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음식물을 먹되 부정하다고 여기면서 먹거나 자신이 음식물을 먹는 것으로 인하여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시험에 들게 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상대방의 마음을 상케 하는 것은 사랑으로 행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서로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주고받아야 하며, 자신에 대해서는 정당하다해도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하여 절제하므로 신앙 공동체에 덕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참을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 문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의 믿음을 자기 믿음과 동등하게 존중해 주는 사랑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록 자신은 좀 답답하고 덜 자유로울지 모르나 개개인의 적극적인 사랑 속에서 신앙 공동체 전체의 성장과 성숙이 촉진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 특히 교회 생활에는 지식이 전부가 아니며 늘 사랑의 요구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만을 최대한대로 고집할 때 교회는 쉽게 분열될 위험에 처하게 되지만, 자신의 자유를 사랑의 원칙에서 스스로 제한할 때 교회는 진정한 본질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바른 교리의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형제들이 아니라 그 지식과 함께 교회의 평화를 원하고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충심으로 바라고 그것을 위해 기쁨으로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즉 자기의 이익보다는 교회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디아포라(adiaphora)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란 뜻으로 기독교 윤리사(倫理史)에서 있어서 하나님께서 명하시지도, 금하시지도 않은 행동들을 말합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선악에 관련된 것은 아닌 것으로 성경이 직접 금하거나 행하라고 밝히지 않은 것, 그러므로 성도 각 개인이 자신의 판단과 신앙 양심의 자유에 맡겨야 할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악에 관련 없는 주초(酒草) 문제로서 이는 각 개인의 책임감 있는 판단과 양심의 자유에 맡겨진 것이므로 독선이나 독단에 치우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우며, 유대인들의 음식과 음료를 관장하는 의무로부터 자유로우며, 율법적인 노예의 신세로부터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책임감에 의하여 조정이 되고 사랑에 의하여 제약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기독교적인 자유의 통제 수단이고 조건인 셈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주어진 환경에서 특정한 행위가 그리스도인 자신에게 허용되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그 행위가 "내가 현재의 상황에서 그것을 행하는 것이 잘못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되면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성경은 나에게 이 행위를 금하는가? 만일 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행위를 금하는 절대적인 명령을 했다면 그 행위를 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살인은 나쁜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 답변은 반드시 "예"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분명하게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비록 그것이 본질적으로 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가 행함으로 시험에 빠지거나 혹 죄를 지을 수도 있는가? 그 예로 다음과 같은 성구를 들 수 있습니다.

"(마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우리 몸을 실제로 절단하면서 죄를 피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참뜻은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질 위험이 있는 모든 기회를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이 행위를 하는 것이 약한 형제를 자극하여 그를 실족하게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성경에서 금한 범죄 행위와 그 안에 죄는 없으나 죄를 범하게 하는 행위를 피할 의무가 있을 뿐 아니라 약한 형제를 자극해서 그가 실족 당하는 것을 피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찬에 초대된 세 명의 교인이 있습니다. 이들을 갑, 을, 병이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이들은 제각기 포도주 한 잔씩을 대접받았습니다. 갑은 하나님 앞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자유롭습니다. 성경은 술마시는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그에게 있어서 술은 유혹거리도 아니고 물론 포도주 자체는 죄도 아닙니다. 을의 경우엔 비록 포도주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과거의 알코올 중독 경험의 예로 보아서 술마시는 것은 그에게 안전한 일이 못됩니다. 그러나 병은 믿음이 약한 자입니다. 그는 어떤 순간이라도 술 한 잔을 마시면 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 갑이 술을 마시면 병으로 하여금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병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따라 마시게 됨으로 점점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될 소지가 있거나 혹은 갑에 대하여 독단적인 편견을 갖게 될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갑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가? 성경은 "아니다"라고 답변하는 것입니다. 갑이 포도주를 마시면 안 되는 이유는 포도주 마시는 것이 죄가 되어서가 아니며, 그것이 갑으로 하여금 취하게 해서 그런 것도 아니며, 정작 그것이 약한 형제인 병을 자극해서 그를 실족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결정하려는 이들 세 가지 원리를 사용하는데는 각기 신자가 스스로 성경을 아는 것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양심을 비판하는 일을 어떤 사람이나 교회에 맡겨서는 안 됩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루터와 같이 "나는 성경의 내용에 매였고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가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각기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를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에 관해서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남의 자유나 결정에 대하여 판단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자신이 결정한 모든 것에 대해서만 하나님 앞에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하며 마지막 날에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셋째 원리, "내가 이 행위를 하는 것이 약한 형제를 자극하여 그를 실족하게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자신의 자유를 통제하는 자들은 많은 것을 맡긴이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성구를 보면 지식이 한 생명을 자라나게 하지 않고 한 생명을 밟아 버리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8: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고전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참으로 사랑은 '세우는 것"입니다.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란 말은 바로 사랑 안에서란 말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예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랑 안에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틀렸다고 해서 그 순간에 잘라 버리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세워질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이 사랑의 요소가 없을 때는 지식은 언제나 잘라 버리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교회 생활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지혜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은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랑과는 정반대입니다. 우상을 가서 공격하는 것으로, "난 제사 안 지내, 난 주일엔 아무 것도 안 사먹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 지식을 증명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사도 지내고 주일성수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와 어떻게 이야기하다가 신자라는 것이 탄로가 났습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인상을 쓰더니 "한 말씀 물어 봅시다." "예, 하시죠." "예수 믿는 사람 왜 그래요?" "왜요?" 한번은 어떤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넷이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린 다음에는 차비 때문에 두 시간 동안이나 싸웠다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덕을 세우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신앙 지식은 교만하여 덕을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될" 만큼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을 먹느냐에 대한 신앙적 율법적 지식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증거인 것을 깨달아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해 역사적인 산 증인으로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암흑의 대륙에 가서 그 평생을 헌신했던 대단한 신앙의 실천가였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어떤 아이하고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싸움 도중에 이겼습니다. 그 아이를 눕혀 놓고 때려주는데, 그 깔린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너같이 일주일에 한번만이라도 고기를 먹으면 너에게 지지 않을텐데." 이 말에 슈바이처가 충격을 받아서 그 다음부터 평생 고기를 안 먹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의 원리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롬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롬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어떤 가정에서 어린아이가 놀다가 잘못해서 방바닥에 두었던 유리컵을 깼습니다. 이것을 본 어머니가, "너는 눈도 없느냐?" 며 심하게 아이를 꾸짖었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본 아이의 아버지는 "아니 당신은 그걸 여태 치우지 않았소?" 라며 아내에게 화를 냈습니다. 시어머니가 그런 광경을 보고 시끄럽다며 며느리의 평소 게으름을 나무랐습니다. 깨진 컵조각에 발이 찔린 아이는 어른들이 화를 내자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날 저녁 그 가정에서는 유리컵 하나 때문에 심각한 불화가 생겼습니다. 한편 그 이웃집에서도 어린아이가 방바닥에 두었던 접시를 깨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는 한꺼번에 아이에게로 달려와 다친 곳이 없는지부터 살폈습니다. 어머니는 얼른 깨진 접시 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구나. 이 늙은 것이 집에서 빈둥빈둥 놀면서도 방바닥에 돌아다니는 접시 하나 치우지 못했구나." 이 말에 며느리는 송구스러워하며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어머님, 제가 게을러서 그만......,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떡을 맛있게 먹은 제가 당연히 치워야 했는데......." 이런 대화를 들은 아이는 "죄송합니다. 제가 조심을 했어야 하는데.......,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라고 미안한 듯 말했습니다. 이 두 가정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세우는 것입니다.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율법에 대한 지식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시므로 자신에게는 보다 더 성숙한 신앙 생활이 되시고, 가정과 교회에는 덕을 세우는 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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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랑의 찬가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1. 어떤 진정한 연인, 정직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 년 내내 사막의 동굴 속에서 명상했습니다. 그러고 난 뒤 자기 애인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닫혀진 문 뒤에서 애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구신가요?"

"나요."

하고 남자가 말했습니다.

"지금 문밖에 있소."

"집안에 당신과 나 두 사람이 있을 자리는 없어요."

하고 닫힌 문 뒤에서 애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이 정직한 사내, 진정한 연인은 다시 사막으로 돌아가 일 년 동안 명상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같은 집에 와서 또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다시 애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또 묻고 있었습니다.

"누구신가요?"

충직한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대 자신이오."

문은 곧 열렸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입니다.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통일하시고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만유가 하나되는 방법으로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 그리고 평안 등 성령의 열매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이신 하나님, 하나이신 성령은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하나되게 하십니다. 고린도 전서는 무엇보다 분열된 고린도 교회를 염두에 두고, 교회가 하나되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교회를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사랑을 제시하면서 영적으로 무지와 교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교회 분쟁을 해결하고 영적 은사들을 올바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랑을 제시한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다면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영적 은사들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영적 은사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사용되어지는 "제일 좋은 길"로써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지나치게 강조했던 예언과 방언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교회 분열은 그 원인이 사랑의 부재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결여된 모든 영적 은사는 거짓이며 공동체에 아무런 유익를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은사들은 비로소 빛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어떤 비상한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만일 거기에 사랑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은사는 무익한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영적 은사와 능력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은사의 활동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무관한 은사의 활용은 거짓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 중에 가장 으뜸 되고 그리스도의 마음에 가장 부합되는 것이 사랑일진대 모든 은사와 능력들이 사랑이라는 근본 정신에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와 능력들도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천사의 방언을 한다해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방언을 말하는 것은 이교도들이 축제 때에 떠들며 우상 숭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방언뿐만 아니라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진정한 효력은 바로 사랑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악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태도가 없을 때 그것은 이교도들이 우상 숭배할 때 악기들을 사용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관현악단을 동원한 예배라고 해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변화된 마음이 없다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결코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2.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여러분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제일 많이 없어진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것은 경쟁뿐입니다. 경쟁적으로 교회를 키우고, 경쟁적으로 교회를 자랑하고, 경쟁적으로 은사와 능력을 자랑하고, 경쟁적으로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능력을 찾아다니며 성공을 추구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20: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서로 으뜸이 되고자 다투어 경쟁하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희생하며 섬기는 종이 되며 대속물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소망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지식이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이 모든 은사들과 능력들은 사랑을 만들어 내기 위해 보조 수단으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지 아니하고 은사나 능력 자체를 가지고 자신을 증명하거나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 경쟁적으로 은사나 능력을 추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하고 내려와서는 겨우 한다는 말이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우리 교회는 기도가 없어, 우리 교회 목사는 은사도 없고 기도도 없고 사랑도 없어, 누구누구는 교만해, 이와 같은 것은 금식 기도한 것이 아니라 굶주리고 와서 우는 사자처럼 공격하며 대드는 것이지 주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 금식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율법 중의 첫째 율법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선지자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드러내고 공격하고 찌르고 하는 것이 대강령인줄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선지자 사명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믿음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를 부르셨고,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은사가 왜 주어지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어 가는 데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되라고 은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보조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이 은사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은사가 많다, 너희 교회는 은사가 적다, 나는 은사가 여러 가지다, 너는 은사가 별로다 하는 것은 어린애들이 골목에서 서로 자기 집 자랑하거나 자기 자랑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은사는 이처럼 자기 자랑이나 자기 증명을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제일 좋은 길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방언은 기본이고 방언 통역이나 예언 등을 해야 신령하며 영권(靈權), 즉 영적 권위를 지닌 것처럼 여긴다고 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여러분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사랑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실패한 것은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3. 오늘날 영적 권위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는 은사 충만과 영성의 표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한국 교회는 오순절 계통의 은사집회에 깊은 영향을 받아 신자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하는 성령의 내면적이고 은밀한 역사보다는 외적으로 현저하게 나타나 보이는 방언, 예언, 신유와 같은 은사들을 일방적으로 치켜세우고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격이 훌륭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목회자보다는 기적을 행하고 신유의 능력이 있는 목사가 보다 신령한 분으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비록 영적인 충만함을 소유하고 여러 비상한 은사들을 받았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분쟁과 싸움, 사랑의 결핍, 비평, 불화 그리고 부도덕과 같은 거짓 영들의 지배를 받아 도덕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으나 바울이 볼 때는 어린아이들에 불과 했고 육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은사를 소유했다고 해서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은사들을 사용하여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그 은사들을 사랑을 따라 사용하는 사람이 바로 신령한 사람인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입니다.

"(고전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고전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고전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 즉 사랑의 마음을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신령한 은사들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할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망각하고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였습니다.

"(고전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진정한 영성의 표지는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성도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보이는가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수많은 문제들은 모두가 다 사랑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분당을 지어 분쟁하고 싸우는 문제도 사랑의 마음을 따라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온전히 합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교우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면서 불신 법정 앞에 서는 것도 사랑이 없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습니다. 약한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도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보다 비범한 은사들을 소유하려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도 결국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선지자 노릇하면 최고라고 생각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은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매를 보라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행위의 열매가 참 선지자면 참 선지자 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참 선지자의 직분은 열매가 아닙니다. 선지자 직분을 행하면서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서 그가 참이냐, 거짓이냐가 판명되고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면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진짜냐 가짜냐를 분별하는 것은 은사나 직분 자체가 아니라 그 주어진 은사와 직분을 따라 어떤 열매를 맺었냐에 달려 있습니다. 가짜 선지자, 가짜 목사, 가짜 집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짜도 얼마든지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기도 합니다. 진짜 성령의 열매는 "(갈5:22)...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 등입니다. 아무리 신령한 일을 행한다고 해도 성령을 쫓고 있지 않고 육체를 쫓으면 가짜입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를 쫓는 것은 무엇입니까?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사도 바울은 삼층천을 올라갔다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을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아무에게도 그것은 유익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본인으로 하여금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체험을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이지 남에게 그것을 자랑하고 자신이 사도이며 선지자인 것을 증명 받고 이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사와 그에 따르는 능력과 권능이 그 사람의 직분을 증명하거나 그 사람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나타내고 증명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어진 성령의 능력과 권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자신의 직분을 증명하라고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랑한 것이 있다면 오직 그 자신의 약함이었습니다.

"(고후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아씨시의 성프란시스는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번 금식을 한 사람들입니다만 40일 금식기도를 하기로 했는데 제자 중의 하나가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그냥 하는 것은 맥이 좀 빠지니까 먹을 것을 앞에 놓고 하자고. 그래서 매일 죽을 쑤어서 떠놓고 둘러앉아서 금식을 했습니다. 고약한 금식을 한 것입니다. 한 20여일이 지나서 그 제자 중의 하나가 배고픔을 못 참고 그 죽을 떠먹었습니다. 그 제자를 지켜보고 있던 모든 제자들이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스승인 프란시스가 죽을 통째로 들고 마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금식하는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금식은 회개를 통해서 거룩해지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금식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할 것이고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인격을 이룩하는데 금식의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이란 궁극적으로 예수의 인격을 이루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룩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요 그리스도의 모습을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 이러한 삶을 사랑하는 것이 신령한 것입니다.

4.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과 같은 은사들은 일시적이며 불완전하며 하늘의 완전한 것이 올 때는 폐하여질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어린 시절의 일을 버리게 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받는 지식과 예언, 그리고 방언과 같은 영적 은사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될 완전한 은사로 대치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아니하며 영원토록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처럼 예언과 방언과 같은 은사들에 집착하여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현재의 모든 영적 은사들은 미래에 완성될 사랑에 비교할 수 없으며 종말에 가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불완전한 은사들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견디는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케 하는 본질적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보다 사랑의 가치가 더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인데 비해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신앙적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 성취해야 할 덕목들 중에 하나는 아닌 것입니다. 사랑이 위대한 것은 바로 사랑의 영원한 위대성입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5.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그들이 회개하며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바라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 성도로 부름 받거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믿어 변화되어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원수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원수들에 대해 참으셨습니다. 그야말로 그분은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상대방이 구원받을 때까지, 상대방이 변화될 때까지 성내지 아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그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가 잘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미국의 고전적 우화 작가 밀레가 쓴 <바보 위니>(Winnie the Fool)가 있습니다. 이 우화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부엉이는 머리가 좋고 지식이 많아 자기의 지혜에 의지하여 행동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토끼는 활동적이고 계산에 밝지만 문제가 여전히 계속됩니다. 당나귀는 초조하고 급하고 모든 문제를 남의 탓으로 여기고 불평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보스럽고 조롱 받는 위니는 기다리고 생각하여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기 때문에 늘어진 것 같아도 결국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6. 예수님은 이 세상에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질문을 던졌습니다.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마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22:37).....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을 다 지켜야 의롭게 되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율법은 좋아하는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義)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과 완성은 사랑이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로써 천국에 들어가려면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인이 거쳐야 할 최고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란 뜻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부지수불여공여천(父之?弗與共戴天)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지수불반병(兄弟之?不反兵)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리>

교유지수부동국(交遊之?不同國)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합니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던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팎에서 자신에 대해 호의나 적의 등 어떤 태도를 취하든 항상 사랑의 동기를 지니고 상대방을 대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참 기독교인의 정신입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의 의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실제 관심입니다. 사랑은 관심 대상의 최고 번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이 어떻게 역사(役事)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이처럼 실제 호의를 베풀고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된 처녀는 아름답기는 해도 아주 표독스럽고 잔인한 취미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처녀는 청년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에 눈이먼 청년은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어머니에게서 심장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심장을 가지고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다가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와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그렇게 굴러가면서 어머니의 심장은 말했습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사랑은 원수까지일지라도 그의 최고의 번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원수에게 구했던 축복이 저주로, 온유함이 폭력으로, 친절이 나쁜 것으로 원수에게 응답될 수 있습니다. 복수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관심 속에서 그렇게 했을 경우입니다. 사랑은 바로 천국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냉랭하며, 사랑 없는 소망은 암담한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불태우는 불이며, 소망을 현실로 변화시키는 빛입니다. 꽃은 제아무리 화려해도 시들어 떨어지고 사라지지만, 그 열매는 영원한 것입니다. 기도로써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날이 되면 모든 은사는 없어지나 사랑의 열매는 영원히 남습니다. 기도로써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단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알면서도 사랑의 능력을 모른다면 그 기도는 주문에 불과 한 것입니다. 원수를 이기는 비결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도 핍박을 받아도 모든 일에 실패를 해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만 하면 성공자요 승리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려움과 사단의 대적이 강할 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감사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생활 속에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이 사랑을 노래하며 세상을 이기는 사랑의 실존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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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16: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고전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전16: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고전16: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고전16: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고전16: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고전16: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하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고전16: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고전16: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고전16: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고전16: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고전16: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고전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고전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16: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고전16:16) 이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고전16: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고전16:18)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고전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고전16: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전16: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고전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고전16: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고전16: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1. 토마스 아 캠피스는 "죽어 없어질 부를 추구하며 그 안에 소망을 두는 것은 허영이다. 명예를 열망하며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것 또한 허영이다. 육신의 정욕을 좇는 것도 허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윤리적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돈, 성(sex), 그리고 권력 추구의 허영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 돈, 성 그리고 권력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얽히고 설켜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돈은 곧 권력임을 자처하고, 성은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은 곧잘 "최상의 최음제"로 불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허영의 거리(Vanity Fairs)"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세 가지 윤리문제를 모두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 가운데 먼저 돈, 즉 연보(헌금)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사랑으로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가장 중요시했던 일의 하나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특별 구제 헌금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원래 가난한 성도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박해와 기근으로 인해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영적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물질적으로 유대인들을 돕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므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를 하나로 결합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특별 구제금(연보)을 통한 이방인들의 사랑으로 두 교회간에 있었던 상처가 치료되고 교회의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은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깨우쳐주고자 했습니다. 인종이 다르더라도 사는 지역이 다르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돌보고 도울 책임이 있음을 깨우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헌금은 예배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헌금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예배행위라는 것입니다. 참된 헌금의 정신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미리 준비하여 드리는 것이며, 예배의 생활로써 하나님 앞에 바치는 헌금 외에 연보(구제금이나 선교비 등)를 의무를 뛰어넘어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성도는 먼저 돈에 올바른 개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마틴 루터는 "세 가지 회심이 필요하다. 가슴의 회심, 정신의 회심, 그리고 돈지갑의 회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우리 현대인들이 돈지갑의 회심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말씀하신 주제가 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돈 문제에 대해서 유별나게 시간과 정력을 쏟으셨습니다.

"(막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막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12: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여기서 보면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연보궤 앞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을 드리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짐짓 사람들이 바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영적 상태를 분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돈 문제에 대한 가르침은 명백하면서도 엄격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의 성구들에서 그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눅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눅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마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마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눅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눅6:30)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처럼 돈에 대한 가르침은 그 어떤 주제들보다 그 방향이 분명하고 직선적입니다. 돈을 잘못 사용하였을 때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진시키고 인류에게 복을 주는 데에 사용될 수 있기도 한 것입니다.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은 기도와 헌신의 삶을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기의 재물을 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 쌓기 시작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을 때 예수님은 기뻐서 "(눅19:9)...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거침없이 부어드린 여인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마26:6)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26:8)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마26:9)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26:10)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도 돈을 후하게 썼으며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눅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4. 돈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을 바로 잡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 잘못된 견해 중 첫째는 돈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의 표시요 따라서 가난은 하나님이 불쾌해 하시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곡해로 말미암아 기독교를 개인적인 평안과 번영의 종교로 전락시키는 무리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막말로 "예수님을 사랑해서 부자가 되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수학 공식은 다양합니다. 백배, 삼십배, 칠 배나 복을 주시리라는 것 등입니다. 이 같은 왜곡된 생각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19: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놀란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젊은 부자 관원의 부가 하나님의 그에 대한 특별하신 은혜의 표시라고 제자들은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외쳤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5. 하나님의 경제에 있어서는 가난하고 상처받고 낭패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주심과 관심의 특별한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팔복에 관한 산상수훈에서 그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눅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6. 예수께서 부를 지칭할 때 아람어인 맘몬(mammon)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단어에는 인격적이고 영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 말씀에서 보면 맘몬(mammon)을 하나의 경쟁신(a rival god)으로서 인격화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돈이란 단순히 어떤 비인격적인 교환의 매개물이 아니며, 또한 그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만 좋거나 나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자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맘몬(mammon)은 우리를 지배하려고 추구하는 하나의 힘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신약성경의 돈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돈의 배후에는 아주 실질적인 영적인 힘이 있어서 돈을 활성화시키고 돈에게 고유한 생명을 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돈은 활동적인 행위자요, 그 자신에 대한 법이요, 돈은 인간으로 하여금 돈에 헌신하도록 영감을 불어 넣어줄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맘몬(mammon)의 유혹하는 힘인 것입니다. 돈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맘몬(mammon)으로부터 돌아서라고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제자 지망생이 예수께 와서 자기가 예수님을 따를 결단이 되어 있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8:20)....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마19:16)...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놀라운 대답을 들었습니다.

"(마19:21)...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 부자 젊은이는 슬픈 표정을 짓고 맘몬(mammon) 신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러한 삭개오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눅19:9)...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그 제자가 되는 길에 드는 비용을 셈해 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눅14: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14: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눅14: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눅14: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눅14: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눅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돈이란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맘몬신을 거부하는 일이야말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입니다. 돈이란 실제적으로 많은 신적(神的)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은 우리에게 안일함을 주고 죄의식을 유발시킬 수 있으며, 자유를 가져다주고, 힘을 주며, 무소부재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사악한 것은 전능성(全能性)을 가지려는 점입니다.

7. 돈의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돌보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풍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창13:2)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이삭도 아브라함과 비슷한 복을 받았는데 하도 많이 받아서 시기까지 받았습니다.

"(창26: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욥은 동방의 큰 부자였는데 그가 시험을 받은 후에는 갑절이나 회복되었습니다.

"(욥42: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솔로몬의 엄청난 부요함은 하나님의 호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왕상10:23)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

"(왕상3:13)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시바 여왕은 솔로몬의 번성함에 대해 탄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왕상10:7)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십일조 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것들이 우리의 행위의 결과도 아니고, 우리가 애써 얻지도 않았고 얻을 수도 없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신6: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신6: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그들이 건축하지 아니한 성읍들, 그들이 파지 아니한 우물들, 그들이 심지 아니한 과수원들,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영리하게 계획을 짜내도 별 성과가 없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전혀 예상 밖의 근원으로부터 좋은 일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열심히 농사를 지었지만 자기들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뭄과 불과 역병(疫病)과 그밖에 수많은 원인들로 인해서 곡식은 순식간에 휩쓸려 나가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깊은 의미에서 풍성한 수확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이해했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며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권입니다.

"(욥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출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시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레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바로 알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향상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소유욕과 욕망의 영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자기 집이 불에 타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주님의 집이 타버렸구나. 나는 한 가지 책임을 덜었다!"

칼 메닝거 박사는 언제가 한 부유한 환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그 환자의 대답이

"나도 그것 때문에 걱정이외다!"

메닝거 박사가 또 묻기를

"그렇다면 그걸 걱정하는 만큼 마음이 기쁩니까?"

그 환자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하지만 내 돈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준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공포에 휩싸입니다."

이 같은 공포는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내어 줄 때 우리는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이며 우리의 안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 같은 일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지옥의 저주를 피하고 싶거든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내어주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의 구원을 위하여 가롯 유다의 희망 이상의 희망을 가질 수가 없다." 베푸는 것은 우리를 돈의 횡포로부터 자유하게 해줍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 크리스챤 공동체는 돈뿐만 아니라 필요한 자들에게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서 집과 땅을 내어놓았습니다.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돈에 대한 바른 사용법과 훈련을 받은 성도들은 부패하지 않은 채 재산을 소유할 수가 있으며, 그들의 소유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돈을 온전히 포기해 버리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로서는 아주 형편없는 방법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분명 자원을 적절하게 관리하고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등한 방법입니다. 부와 자원이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적절하게 훈련되고 지식을 얻은 사람들의 손에 있는 것이 맘몬의 종들에게 내어 던져지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은 일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의 많은 소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더 큰 공적인 유익을 위하여 활용했습니다. 욥도 그러했고 다윗과 솔로몬도 그러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의 부와 높은 지위를 기독교 공동체를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요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바나바도 그의 소유 재산을 잘 처리했기 때문에 아주 궁핍했던 초대교회를 도울 수가 있었습니다.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9. 성경은 불의한 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라고 하십니다.

"(눅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한 부자가 그의 청지기가 자기의 재산을 잘못 관리해 온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그를 해고시킵니다. 그러나 그 청지기는 쫓겨날 시한이 되기 전에 머리를 써서 자신의 장래를 확보해둡니다.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서 하나씩 그 빚진 돈에서 20%에서 50%를 깎아서 기록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채무자들은 그 청지기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것이기 때문에 그가 직장에서 쫓겨나면 그를 도와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계획은 분명히 영리하면서 또 그만큼 부정직한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 청지기가 한 일을 알아내고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는 대신에 오히려 그 사람의 영리한 처신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의 분별력을 칭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 말씀에서 청지기의 부정직한 것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은 그 청지기가 경제적인 원천을 가지고 비경제적인 목표를 위하여 사용하는 영리한 면, 즉 돈으로 친구를 사귐으로써 그가 필요한 때 갈 곳이 있도록 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판단을 내리십니다.

"(눅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거듭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눅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돈은 약한 사람들을 못 살게 굴고 그들을 억누르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돈은 위신과 명예를 사기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돈은 다른 사람들의 충성심을 얻기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돈은 사람들을 부패시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돈은 이처럼 여러 가지 일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돈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큰 힘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불의한 재물"로(소유) 친구를(존재) 사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돈을 거부하기보다는 우리는 돈을 정복하고 그것을 비경제적인 목적들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위대한 일에 사용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주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마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왜냐하면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기 때문입니다."

땅에다 투자하는 것은 안전한 투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늘에다 투자해야만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만이 여러분의 존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마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늘 은행에 투자된 보물은 높은 보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화폐의 전부를 몽땅 달러화로 바꾸는 화폐개혁이 단행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그것이 발효되는 즉시 모든 한국 통화는 쓸모 없게 된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은 가진 돈을 모두 달러화로 바꾸어 놓고 한국 통화는 매일매일 살아갈 만큼만을 보유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 하시고 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은 아직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불의한 재물"로 하나님 나라를 사귀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돈은 이처럼 비경제적인 목적인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그 돈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집을 살 때나 차를 살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해서 사들입니까? 아니면 그만한 돈이 있기 때문에 사들입니까? 만일 무슨 일을 행할 때 돈이 결정한다면 돈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 돈이 나에게 "자네는 살만큼 충분한 돈이 있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은 나에게 "나는 네가 그것을 가지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 때에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집을 살 때 아내가 "교회가 좀 멀어도 우리 경제 사정에 맞고 살기에 넓고 편한 이 집을 삽시다."라고 말했을 때, 남편이 "우리 같이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먼저 알아봅시다."라고 말하지 않고 결정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돈이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돈이 자신의 주인입니다. 따라서 그는 돈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패트릭 헨리는 자신의 유언서에다 쓰기를 자신이 이 땅의 재물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해도 상속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유산으로 남긴다면 그들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그는 덧붙이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의 재물을 남기게 된다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궁핍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나의 전 재산을 자녀들에게 남겨 줄 것인가? 아니면 일부분만을 줄 것인가? 그리스도의 뜻을 최선으로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펼칠 기관은 어떤 곳인가? 살아서 할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자신의 영원한 처소를 위해 지혜로운 투자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10. 이렇게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부요한 자가 된 사람들이 여기 소개되고 있습니다.

1) 디모데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나서 바울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전도가 가장 힘든 지역인 에베소에서 바울을 대신하여 사역한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항상 가장 험난한 지역으로 파송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후계자가 될 만큼 "주의 일에 힘쓰는 자"였습니다. 디모데는 본래 수줍음이 많은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담대한 복음 사역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가 걸어가는 사역의 길에서 당할 어떤 시련과 고난도 마다 않고 앞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이러한 디모데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격려와 용기였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복음이 달려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멸시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2)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복음을 철저하게 배운 겸손한 달변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한 구약의 석학이었지만 지극히 평범한 장사꾼 부부의 발 밑에 자기를 낮추고 복음의 지식을 경청하여 예수에 대한 지식이 더욱 성숙해지는 겸손한 사역자였습니다.

"(고전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고전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은 성숙하고 견고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남자답게 강건하여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처럼 행동하라는 뜻으로 사랑과 조화를 이룩한 성숙한 지도력, 겸손한 지도력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3) 스데바나의 집사람들은 아가야에서 첫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직접 세례를 주었고, 그들은 복음 사역에 헌신함으로서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바나의 집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에 없을 때 부족한 것을 메웠을 뿐만 아니라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었습니다. 스데바나 사람들은 이처럼 목회자의 영혼을 신선하게 해주었고 마음을 새롭게 해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흔히 신자들은 문젯거리나 고민은 목사와 함께 나누지만 기쁨이나 축복은 좀처럼 함께 나누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들의 문제나 고민,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목사를 걸고넘어지기까지 합니다. 성도들은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목사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목회에 힘과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목사의 짐을 덜어 주어 복음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스데바나의 가정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충성된 성도들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4)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주님께 헌신한 부부였습니다. 브리스가는 남편보다 더 강했고 헌신적인 지도자이자 복음 전도자였지만 남편을 불편하게 한 적이 없이 남편과 함께 주님을 섬기고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왔습니다. 성도들은 이처럼 주님을 섬기며 복음 사역을 위해 목회자를 돕는 부부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롬16: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오늘날 이들 부부처럼 헌신과 희생을 지닌 성도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한 성도들은 정말 교회의 위대한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11. 조선일보.97년 6월 10일자 만물상에서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요즘 우리 경제계의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재벌 2세들의 <선대(先代)기업 까먹기>다. 아버지의 대기업을 물려받은 2세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과시를 위해 마구 기업을 확장하다가 꽈당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밑바닥에는 <아버지 돈은 내 돈>이고 <나는 아버지보다 나은 기업가>라는 오도된 의식들이 깔려 있다. 이것이 정치권에서 <아버지 선거 때 들어온 돈은 내 돈>이고 <나는 아버지 보다 더 잘난 정치인>이라는 이른바 <김현철 증후군>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미디어 황제사(社) 회장의 아들 조나단 레빈에게는 <아버지 돈은 내 돈이 아니며> 그가 가는 길은 아버지와는 아무 관계없는 그 자신만의 길이었다. 마약과 범죄로 이름난 뉴욕 브롱스의 한 고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다 지난 주초 자신의 제자에 의해 살해당한 그의 짧은 인생역정은 두 가지 점에서 지금 미국 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재벌 아들이면서 방 하나 짜리 싸구려 아파트에서 살았다. 재산이라고는 봉급을 저축한 약간의 은행예금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가난한 학생들을 도왔고 성적이 오른 학생에게는 야구 표를 사주었다. 범죄의 소굴 같은 곳에서 범죄와 싸워 학생들을 선도했던 것이다. <선생님께 사랑을....>이라는 영화 그대로다. 그러나 그런 참스승이 몰랐던 것도 두 가지가 있었다. 미국에서조차 <아버지 돈은 내 돈이 아니다>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는 선도할 수 없는 인간도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조나단 레빈같은 바른 경제관과 사랑의 삶이 오늘날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돈과 성, 그리고 권력으로 멍들어가고 있는 이 땅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 성도들이 먼저 각기 처해 있는 환경과 처소에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남긴 것은 부귀 영화가 아니라 구원 얻는 믿음과 사랑이었습니다. 교회와 이웃에 봉사를 하려거든, 남을 구제하려거든, 헌금을 하려거든,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려거든 사랑으로 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고예화1>

오 헨리의 단편 중에 <묵은 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빵집에서 싸게 파는 묵은 빵만을 사 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빵집 여주인은 매일 묵은 빵만 찾는 그 남자를 동정하여 빵 속에 버터를 듬뿍 넣어 주었습니다.

건축 설계가인 이 가난한 남자는 마침 현상 응모에 출품할 작품인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빵 속에서 흘러나온 버터 때문에 설계도를 버리게 되어 응모하지 못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그 남자는 설계 도면을 지우기 위해 묵은 빵을 사갔던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오 헨리는 여주인의 얄팍한 사랑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얄팍한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무심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고 먼 훗날이 되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은 결국 어그러진 우리의 모습을 바르게 고쳐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잴 인간의 자(尺度)는 없습니다. 우리의 소견이 좁고 짧으며 인간의 이해가 부족할 뿐입니다. 세월이 가고 경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도 한없이 연장됨을 깨닫게 됩니다.

<참고예화2>

다음 이야기는 우리가 시카고에서 라디오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 익명의 청취자가 들려 준 것입니다.

수지가 물었습니다.

"엄마, 지금 뭘해?"

.엄마가 말했습니다.

"이웃집에 사는 스미스 부인에게 갖다 주려고 볶음밥을 만드는 중이다."

이제 여섯 살밖에 안 된 수지가 물었습니다.

"왜?"

"왜냐하면 스미스 부인이 매우 슬프기 때문이란다. 얼마 전에 딸을 잃어서 가슴에 상처를 입었거든. 그래서 우리가 한동안 돌봐 드려야만 해."

"왜, 엄마?"

"수지야, 누군가 아주 아주 슬플 때는 음식을 만든다거나 집안 청소같은 작은 일들을 하기가 어려워진단다. 우리 모두는 함께 살아가고 있고 또 스미스 부인은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 때는 우리가 도와 드려야지. 스미스 부인은 다시는 딸과 얘기할 수도 없고 딸을 껴안을 수도 없고 엄마와 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신나는 일들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단다. 넌 매우 똑똑한 아이야, 수지. 그러니 너도 스미스 부인에게 도움이 되어 줄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거야."

수지는 이 새로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미스 부인을 돕는 일에 자신도 참여할 수 있을까 깊이 생각했습니다. 몇 분 뒤 수지는 스미스 부인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한참 지나서 스미스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안녕, 수지."

수지는 스미스 부인이 다른 때와 같이 귀에 익은 음악 같은 목소리로 인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스미스 부인은 또 울고 있었던 듯했습니다. 눈이 부어 있고 물기에 젖어 축축했습니다. 스미스 부인이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니. 수지야?"

수지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그러시는데 아줌마가 딸을 잃어서 가슴에 상처가 났고, 그래서 아주 아주 슬프시대요."

수지는 부끄러워하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손에는 일회용 반창고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가슴에 난 상처에 이걸 붙이세요. 그러면 금방 나을 거예요."

스미스 부인은 갑자기 목이 메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수지를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습니다.

"고맙다. 수지야. 이 반창고가 내 상처를 금방 낫게 해 줄 거야."

스미스 부인은 수지의 친절한 행동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상점에 가서 둥근 유리 안에 작은 사진을 넣을 수 있도록 된 열쇠고리 하나를 사 왔습니다. 열쇠를 갖고 다니면서 동시에 가족 사진을 넣고 다닐 수 있도록 고안된 고리였습니다. 스미스 부인은 수지가 준 일회용 밴드를 그 유리 안에 넣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상처가 조금씩 치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마음의 치료에는 시간과 주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열쇠 고리는 그녀에게 치료의 상징이 되었고 그녀가 딸과 함께 나눈 기쁨과 사랑을 언제나 기억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잠16: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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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사랑과 용서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13)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게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15)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 오, 형제여 !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빌레몬서 1:1-21)

빌레몬서에는 기독교 신앙의 중대한 교리나 이단에 대한 심각한 반박이 없으나 그 이상의 것인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가 감동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한 가족 앞에 보낸 유일한 편지입니다. 편지 수신인에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 그리고 "네 집에 있는 교회"가 언급되고 있는데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이고,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이며, "네 집에 있는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 있는 종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빌레몬은 자기 자신의 가족들과 종들을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키워 한 집안을 작은 교회가 되도록 한 본받을만한 기독교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편지 내용은 빌레몬의 종 가운데 탈주한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는데, 바울이 이 노예를 로마에서 만나 예수 믿게 해서 전에는 아주 쓸모없는 노예였지만 이제는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에 아주 유익한 일군이 되었으므로 노예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낼지라도 처형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오네시모가 탈주할 당시 돈을 훔쳐 나왔다면 바울 자신이 모두 변상해 줄 터이니 처형하지 말고 형제를 대하듯이 받아달라는 간곡한 청원이었습니다. 당시 노예가 도망하다 붙잡히게 되면 "도망자"를 뜻하는 "Fugitive"의 첫 글자인 "F" 자를 빨갛게 달인 인두로 이마에 낙인을 찍어 어디를 가도 금새 드러나게 해서 두 번 다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또는 도망하다 붙잡힌 노예가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십자가에 못박아 온갖 고통을 당하다가 죽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도망자 노예에 대한 형벌내용을 잘 알고 있던 바울이 도망자 오네시모를 노예 주인인 빌레몬에 돌려보낸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도망자 오네시모를 예수 믿게 해서 자신의 "아들"처럼 되었고, 바울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될 아주 유익한 심복이 되었다해도, 그리고 노예주인 빌레몬이 기독교인이라 해도 당시 노예를 처형하는 법에 따르게 되면 오네시모가 처벌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사실상 바울이 오네시모를 보내지 않고 빌레몬에게 편지만을 띄워 억지로 일지라도 승낙을 받아 곁에 두고 봉사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인이 아무리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흔쾌히 승낙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과거를 적당히 뭉개버리고 잊고 싶은 과거에서 도피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잘못을 철저히 시인하고 회개 청산하므로 사랑과 용서를 통해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당시 노예제도가 불의한 것이었다 해도 주인의 물건까지 챙겨 가지고 도망했던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안다해도 주인에게 반드시 돌아가 자신이 행한 바에 따라 주인이 죽이든 살리든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죄에 대한 책임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십자가에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 죽음으로 죄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예수의 십자가 사랑과 용서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그는 과거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 주인인 빌레몬에게로 돌아갑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요청한대로 형제를 영접하듯이 도망자 오네시모를 영접하기 전까지는 그는 도망자의 딱지를 벗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관습상 노예를, 더군다나 도망한 노예를 한 형제로 간주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빌레몬은 십자가의 사랑과 믿음으로 오네시모를 형제처럼, 사도 바울을 영접하듯이 받아들였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은 실수나 과오, 죄를 범한 사람을 언제든지 다시금 영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시대에 부잣집이나 세도가의 집들만을 골라 도둑질하여 속칭 "대도"(大盜), 심지어는 "의적(義賊)"이라고까지 불리웠던 조세형이 있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여러사람들의 도움으로 98년 11월 출소했습니다. 대도였지만 개과천선한 그를 많은 사람들이 환영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대도가 영웅시되는 사회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범죄예방활동에 협조하거나 선교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조세형은 자신의 인생 절반인 27년간의 감옥생활을 통해서도 그 도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외국인은 털지 말라는 자신의 도둑 계명(?)을 파기하면서까지 얼마 전 일본에 건너가 남의 집을 털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를 두고 일간신문들은 조세형이 도벽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좀도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이른바 좀도둑 "소도(小盜)"가 되어 버린 조세형이 다시 회개하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치루고 다시 돌아온다면 얼마든지 형제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과오를 범한 사람이나 탈선한 사람들을 너무나 지나치게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러한 사람을 두 번 다시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믿고 있으면서도 우리들 자신이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점은 실패의 밑바닥에 있는 바로 우리들을 믿어 주신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한 번 과오를 범하게 되면 옳은 길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은 죄를 회개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사랑으로 영접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인 것입니다. 비록 속는 줄 알면서일지라도 용서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데는 그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젊은 암사슴이 불행히도 자신의 귀여운 새끼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아직 젖이 불어서 유방이 여전히 탱탱할 때 숲 속에서 호랑이 새끼 두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암사슴은 불어서 새끼들에게 쏟지 못한 사랑과 정을 그 호랑이 새끼들에게 마음껏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어미 잃은 새끼 호랑이들에게 젖을 먹여 엄마의 몫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런 암사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노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지금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 걸세. 사랑과 정을 쏟는 데도 상대를 가려야 하네. 어쩌면 그 호랑이들이 자네를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러니 괜히 자신의 젖을 낭비하지 말게나." 이 말을 듣고 암사슴은 차근차근 대답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나는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또 생각하고 싶지도 않구요. 지금 나에게는 단지 엄마로서의 감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만일 내가 이 호랑이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지 않는다면 내 젖이 나를 몹시도 괴롭힐 거라구요."

바울이 무리없이 편한한 마음으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에 대한 선처를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은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빌레몬은 그 사랑과 믿음이 인정받고 칭찬받는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바울의 형편상 도망한 노예를 비호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더군다나 동역자 에바브라가 로마에 와서 보니 바울 곁에 심복으로 봉사하고 있는 오네시모를 발견하고 그가 바로 골로새에서 보았던 노예임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네시모에 대한 전모가 밝혀졌고 이미 기독교인이 된 오네시모는 생명을 걸고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를 낱낱이 고백하고, 기독교인 양심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바울의 뜻에 따라 주인에게 돌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약 50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순교자 중 하나인 이그나티우스가 처형당하기 위해 안디옥 교회로부터 로마로 연행되었습니다. 그 도중에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 앞으로 편지를 띄웠었는데 그 편지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의 첫장에 놀라울만한 그들의 감독에 대한 높은 평가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훌륭한 감독의 이름은 다름 아닌 바로 에베소 감독인 오네시모였던 것입니다. 한낱 도망자에 불과 했던 오네시모가 로마에서 바울의 전도로 바울과 빌레몬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고 에베소의 그 명망높고 훌륭한 오네시모 감독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적인 바울의 편지가 성경에 남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노예라고 하는 부끄러운 과거의 신분에다, 도망한 노예로 십자가에 못박혀 혹독하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수치스런 도망자였지만 바울의 전도로 그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훌륭한 감독이 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 처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노예들을 바라보며 불의한 노예제도를 공격하거나 노예해방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노예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변화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쓸모없는 무익한 노예였지만, 이제는 없어서 안될 아주 유익한 형제로 변화된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한 것입니다. 전에는 주인의 물건에 불과했던 노예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사실을 배우게 한 것입니다. 전에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도망자 노예였지만 이제는 사랑받는 형제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모든 불의한 제도나 구조 등을 무색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같은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가 베풀어져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교육학에서 유명한 '하아로우의 실험'은 온유한 마음이 이끌어내는 밝은 인간상을 제시해 줍니다. 이 실험은 심리학자인 하아로우 교수가 원숭이들을 상대로 한 것입니다. 젖을 먹는 두 마리 아기 원숭이들 앞에 철사로 만든 엄마 원숭이와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를 세워놓고 그 모조 원숭이들의 가슴에 젖꼭지가 달린 우유병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아기 원숭이들이 빨아먹을 수 있도록 젖꼭지를 내놓았습니다. 첫날에는 두 마리의 아기 원숭이들이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병을 모두 빨아 마셨습니다. 그러나 둘째 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원숭이 인형에게는 다가가지도 않고 부드러운 헝겊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가서 우유를 마셨고, 셋째 날에는 두 마리의 아기 원숭이들이 앞을 다퉈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에게 달려들어 우유를 빨고, 엄마 원숭이의 몸을 만지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실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좋아하고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자신만의 개성이 있으면서도 유독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부드러운 헝겊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처럼 부드러움과 온유함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기준에만 맞춰서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날카롭고 매정한 사람에게서 누가 사랑을 느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종종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까이에서 말을 붙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차갑고 딱딱한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우리의 하나님은 온유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것을 사랑의 부드러움으로 감쌀 수 있는 온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빌레몬은 그 사랑과 믿음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따뜻한 사랑과 믿음이 도망자 오네시모를 감싸안음으로 오네시모로 하여금 복음의 빛이 되게 한 것이었습니다.

햇볕이 따스한 창가에 인형 세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는 진흙으로, 또 하나는 유리로, 나머지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한곳에 있었지만 햇빛을 받아들이는 모양은 서로 달랐습니다. 진흙 인형은 햇살을 받아 그대로 간직했습니다. 유리 인형은 햇살을 받은 만큼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인형은 받은 빛을 수천, 수만으로 확산하여 주위를 온통 반짝거리게 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이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받은 만큼은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다이아몬드 인형처럼 크게 부풀려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유리 인형만큼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흙 인형처럼 받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이아몬드 빛같은 사랑의 빛을 받았던 사도 바울이 그 빛을 오네시모에게 비추어 오네시모로 하여금 에베소 지방에 찬란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게 했던 것입니다.

어느 나라 재상이 팔레스틴을 여행하다가 복음을 듣고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귀국 후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여러 사람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그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이 소식을 듣고는 재상을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라면 말 한 마디만으로도 모든 인생을 구원할 수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친히 사람의 몸을 입었는가?" 재상은 하루만 말미를 달라고 청했고 의기양양한 왕은 흔쾌 히 허락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재상은 곧장 재주가 빼어난 목수를 불러 왕의 외아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목각 인형을 만들게 하고 인형에 아름다운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왕자의 유모에게 그 인형을 안고 부두에 세운 다리 위에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재상과 함께 배에 앉아 있던 왕이 유모를 보고는 왕자가 유모 품에 안긴 줄 알고 팔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유모는 실수인 척하면서 일부러 인형을 물 속에 떨어뜨렸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물로 뛰어내리려고 했습니다. 재상은 만류했습니다. "폐하! 친히 내려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하지만 왕은 "안 된다. 안 돼. 내가 구하러 가겠다. 다른 사람은 마음이 안 놓여! 난 저 아이의 아버지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제야 재상은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왕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류를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어찌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를 받아들여야만 죽음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왕은 감동을 받고 하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지 않고 친히 사람이 되어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유일한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끝까지 달려가 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여 세상을 밝게 변화시키며 구원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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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빛과 사랑

(7) 사랑하는 자들아 !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12) 자녀들아 !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7-17)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하기 위해 입사시험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필기시험 문제 중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에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는 의사, 당신이 꿈에도 그리던 이상형, 그러나 지금 당신 차에는 단 한 명만을 태울 좌석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선택하시고, 그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이것은 아마도 성격 테스트의 일종일 것입니다. 어떠한 답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죽어 가는 할머니를 태워 그 목숨을 우선 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의사를 태워 그의 은혜를 갚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에게 보답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가능한데 반해,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응시자 중 200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최종적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도대체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차 열쇠를 드리죠. 할머니를 태우고 병원으로 모시고 가도록 간절히 부탁드릴 겁니다.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비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릴 겁니다." 가끔 우리는 자신의 것을 포기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제가 이번 미국 가족 방문 길에 어느 목사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지난 9월 미국 테러 대참사 사건은 5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비극적 사건이었지만 그 사건 속에 드러나고 있는 수많은 얘기가운데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그 일화의 주인공은 뉴욕 퀸즈 한인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있는 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세계 무역 센타> 건물 34층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납치 여객기 충돌로 이 건물이 불길에 휩싸여 붕괴 직전에 놓이게 되었고 빌딩 엘리베이터는 작동되지 않아 위기를 느낀 사람들은 저마다 살기 위해 비상 계단을 질주하다시피 했습니다. 이 청년도 사무실에서 나와 비상 계단을 타고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갑자기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건장했던 청년은 사력을 다해 발을 떼어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한 발자국도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청년을 뒤로하고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점점 불안을 느낀 청년은 그 와중에 선 채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살기 위해 계단을 질주하는 사람마다 이 청년을 귀찮다는 듯이 비껴갔을 뿐 어느 누구하나 그 청년을 돕질 않았습니다. 원망 섞인 듯한 눈으로 계단 위를 돌아봤을 때 사람들에 밀려 겨우 겨우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이 청년은 자신보다 그 할머니를 살려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고 다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할머니를 살려낼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을 때 떨어지지 않았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제법 체중이 나가는 미국 할머니를 등에 업고 계단을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청년의 말대로 혼자 뛰는 사람보다 배나 더 빨리 무려 34층이나 되는 계단을 내리달아 순식간에 붕괴직전의 빌딩 밖으로 나왔습니다. 빌딩을 빠져 나와서도 쉴 사이 없이 할머니를 등에 업고 100여 미터를 달렸을 때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무너지지 않으리라 장담했던 <세계 무역 센타> 빌딩이 그만 붕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110층 빌딩은 폭발음을 내며 검은 연기와 더불어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빌딩을 미처 빠져 나오지 못했던 5천여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최고층 건물 폭발과 붕괴로 말미암아 검은 연기와 건물 잔해로 캄캄해진 뉴욕의 중심 맨하턴 거리에서 이 청년은 하나님의 빛과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제아무리 힘이 장사라도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나가는 할머니를 등에 업고 무려 30여 계단을 순식간에 뛰어 내려와 100여 미터를 더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청년은 어둠 속에 한 줄기 구원의 빛을 경험했습니다. 그 청년은 그 빛을 이웃을 사랑하는데서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은 이웃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 아니며, 이웃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죄인을 정죄하는데 있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아니하고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그 여인을 어둠에서 생명의 빛으로 인도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그 여인을 잡아 끌고왔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처럼 그 여인을 정죄하고 용서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 죄많은 여인은 돌에 맞아 비참하게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 복수는 지혜가 아니라 어두움이며, 용서와 사랑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며 빛입니다.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미움과 증오 등의 죄악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회복하게 만드는 것은 용서와 사랑 등 하나님의 빛입니다. 한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어느 한쪽의 죄악입니다. 살다보면 실수가 있기 마련이고 예상치 못한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 남편이나 아내의 실수와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된다면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될 수 있지만 그 죄를 칼같이 단도질하여 정죄하고 미움과 증오로 치닫는다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걷잡을 수없이 파괴되고 결국 가정은 파탄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 어떠한 죄일지라도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가정을 파괴로부터 지키고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정죄와 미움, 증오는 가정을 어둡게 하는 것이지만, 용서와 사랑은 그 가정을 항상 빛으로 인도하여 온 가족을 밝게 만듭니다. 남편(아내)이 자기 아내(남편)를 안다면서 그 아내(남편)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기 아내(남편)를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빛과 사랑가운데 거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파괴시킨 것이 바로 인간의 죄악입니다. 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파괴된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며 인간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면서 이웃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하는 자요 하나님의 빛과 사랑가운데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C.H. 다드 교수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사랑을 체험하는 일이며 그 사랑을 보답하는 일은 그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웃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이웃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웃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십자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은 예수처럼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가 처음 들은 것이 아니라 옛부터 주어진 계명인데 다시 새 계명을 쓴다"는 말씀(7,8절)은 예수 십자가를 통해 사랑에 대한 새로운 표준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는 범위가 인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죄인에게까지 넓혀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이란 하나님께서 멸시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이번 미국 테러 대참사를 일으킨 이슬람 과격원리주의자들이 "미국인들과 유대인들을 하나라도 더 세상에서 없애는 것이 알라신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죄인이 한 사람이라도 죽어 없어지면 하늘에는 기쁨이 된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예수 십자가 앞에 유대인과 아랍인은 동일합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인이나 아랍인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솔직히 말해 아랍 사람들보다 믿는 신이 같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더 친밀하게 느끼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이시며 죄인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큰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예수의 사랑은 빈부를 따라 차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은 인종과 문화, 종교를 따라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품속을 벗어날 자가 하나도 없을 만큼 예수 십자가를 통해 그 사랑의 범위가 끝없이 넓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이러한 의미에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새 계명이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시므로 새 계명의 표준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마5:45)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아랍인, 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똑같이 미치는 것입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그러나 미움은 어둠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서는 물체의 유무와 진위를 분별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가운데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웃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자요, 그 신앙은 허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용서와 사랑은 인격적 관계를 성숙하게 만들지만 미움은 인간의 성장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를 파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미움과 쓴 뿌리, 쓰라린 기억과 원한,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 등을 그냥 지니고 있는 사람은 인격적인 성숙을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적 생활에 성장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용서와 사랑만이 인간관계를 밝게 하며 인격적인 성장과 영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빛과 어두움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 앞에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게되면 자연히 어두움은 물러가기 마련입니다. 빛이 어두움보다 강하며 인류 역사에 어두움이 빛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진리가 거짓보다 강하며 인류 역사에 거짓이 진리를 이긴 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며 미움이 사랑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예수를 증오한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십자가 예수의 사랑이 그 미움을 이기고 그들을 하나님의 품에 안았습니다. 빛과 사랑이 되시는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38-48)

빛이 되시는 예수께서 어둠으로 일컬어지는 세상을 적대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알곡이 잘 자라도록 가라지를 뽑아버리자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추수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라는 옛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미국 테러 대참사 사건으로 주목받고 있는 여러 책들 중 미국 메사추세츠(MIT)공대의 석좌교수로 세계적인 언어학자이며 정치 사회비평가인 노암 촘스키가 쓴 <숙명의 트라이 앵글Ⅰ>에 보면, 미국의 테러 대참사는 미국 외교정책이 빚은 당연한 결과라면서 다음과 같은 통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테러 대참사를 당한 『미국이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로 성숙되기 이전인 1967년 전부터 이스라엘을 지원한 경제적 원조는 GNP로 볼 때 어느 나라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최근의 원조는 이스라엘 시민 1인당 1000달러에 해당하는 정도의 액수에 이르고, 놀랍게도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78년부터 1982년 회계연도 동안 이스라엘은 미국이 전세계에 제공한 군사원조의 48%와 경제 원조의 35%를 받았습니다. 1983년 회계연도의 경우 레이건 정부는 전체 원조예산 81억 달러 중에서 거의 25억달러를 이스라엘에 배정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이 가운데 5억 달러는 조건없는 원조금이고 12억 달러는 저금리 융자였습니다. 게다가 특별히 값싼 가격에 무기를 제공하는 등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자비로운 기부금"을 제공했습니다. 미국의 이같은 편협과 편견 속에 이스라엘에 쏟아 부은 외교적,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지원이 미국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인 간의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물로서 이런 대화가 없다면 어렵고 뒤얽힌 평화 프로세스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당신들, 미국의 유대인들, 자유주의자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자들은 정부의 행동에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이곳의 파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미국이 국제사회에 정의와 공평을 부르짖으면서 어느 한 나라에 편중된 외교 경제 정책을 계속해서 펴나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위협과 어쩌면 세계 전쟁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숙명의 트라이앵글Ⅰ)

빛과 사랑은 공평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민족에게만 태양을 비추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나라에게만 비를 내리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태양을 비추이시고,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우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자기에게 기분 좋은 사람만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참된 빛과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이 땅위에 진정한 평화를 위해 모든 인류를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빛과 사랑이 항상 충만한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빛과 사랑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이웃과의 모든 관계가 더욱 더 성숙되고 평화로우며 풍요로워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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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7) 사랑하는 자들아 !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7-19)

오늘 성경본문 7절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는 말씀은 사랑은 본래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이며 사랑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또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사랑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같이 거룩한 사랑의 성품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5:8)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불같은 사랑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틴 루터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축소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말이 "만일 성경이 전부 갑자기 없어지고 요한복음 3장 16절만 남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복음의 본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문학가로 잘 알려진 최효섭 목사는 이 짧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는 최고(greatest)들만이 등장하고 있다며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애인이다.(greatest lover) <참조:최고의 사랑의 주체가 되신다는 의미.>

"세상을"...최고의 숫자이다.(greatest number) 시대와 인종을 초월한 모든 악인, 모든 선인을 포함하여 사랑하신다.

"이처럼 사랑하사"...사랑의 최고 수준이다.(greatest degree) 불가능한 상대를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랑하신 그 깊이와 그 넓이가 한량없는 수준이다. <참조: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대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시는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을 말한다.>

"독생자를"...최고의 선물이다.(greatest gift)<참조:인류에게 내리신 최대 최고의 선물이다.>

"주셨으니"...최고의 행위이다.(greatest act) 하나님이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놓수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행위이다.

"누구든지"...최고의 초청이다.(greatest invitation) 아무리 악하고 더러운 죄인도 이 하나님 사랑의 초청에 포함된다.

"저를 믿는 자마다"...최고의 단순함이다.(greatest simplicity) 믿는다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없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믿는 것처럼 하면 된다. <참조:이같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을 얻는데는 단순히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

"멸망하지 않고"...최고의 해방이다.(greatest deliverance) 죽어야 할 죄수가 석방되는 것 같다. <참조:하나님의 사랑은 사형수일지라도 용서하시고 해방하신다.>

"영생을 얻으리라"...최고의 소유이다.(greatest possession) 그 이상의 재산, 그 이상의 소유는 없다. <참조: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죄의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주신다.>이 위대한 성구, 요한복음 3장 16절에 표시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최효섭,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숱한 죄를 짓고 사는 인생들에게, 땅에서 난 썩어질 사랑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원한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를 두고 오늘 본문 성경 10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씻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그냥 내버려두고서는 사랑이 그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한 것처럼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지은 죄가 어떻하든 영원히 용서함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의 방해를 받거나 그래서 중단되거나 하지 않는, 그 누구,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하나님의 참되고 거룩하며 영원한 사랑을 체험하며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장군 동무와 타냐와의 대화 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질문합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 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이 차이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육신의 어미는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사랑하는 자녀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것처럼 자식이 아버지가 싫어 손을 놓아버릴지언정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식일지라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이같은 사랑을 예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그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겠습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 받은 바 사랑이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다 기독교인 아닙니다.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더글라스 메도 목사의 말대로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아니고, 피아노가 집에 있다고 해서 피아니스트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집에 바이올린이 있다고 해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든, 바이올린이 있든 있는 그 악기를 가지고 목적한 음악을 소리를 통해 나타낼 수 있어야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등 음악가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생활을 통해 나타나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 형제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안에 거하는 생활, 다시 말해 사랑을 나타내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져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 처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나타내시는 사랑을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람을 볼 수 없지만 바람이 하는 일을 볼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전기를 볼 수는 없지만 그 전기가 어떤 힘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궁극적으로 나타내시고 계시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참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완전하고 참된 사랑을 예수 십자가에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참된 성도의 모습,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한다해도 그것은 거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선 요한 1서 3장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6-18)

일본의 정신박약아 시설인 시요학원들은 후꾸이 목사가 창설하고 약 30명의 직원 전원이 크리스천으로 구성된 시설이라고 합니다. 어느 목사가 이 학원을 방문하여 한 여선생에게 어떤 일이 가장 힘드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을 목욕시키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너무 힘들어 처음에는 사표를 낼까 하였으나 "저 아이들이 예수님이다."고 격려하시는 후꾸이 원장님의 말씀을 들으며 1년을 견디었더니 이제는 정말 그 고된 일이 즐겁고 가볍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 다."(마 25:46)고 말씀하심으로서 이웃 사랑이 곧 진정한 예수 믿는 사람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전국 교도소에 문서선교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도소 수감자가 문서선교지 <숲속의 사과나무>를 보고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내용은 70가까운 노모가 장생포에 살고 계시는데 누가 돌볼 사람이 없으니 자기가 빨리 석방될 수 있도록 탄원서를 법무부 장관과 교도소장앞으로 제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형편을 살펴보기 위해 여러분께서 매주 마다 내주시는 <사랑의 성미>와 여선교회원들의 성금을 모아 가지고 장생포 주소를 들고 찾아가보았습니다. 편지 내용대로 장생포 골짜기 달동네같은 지역에서 전기세, 수도세 등을 내지 않아서 단전, 단수되어 저녁이 되면 촛불을 켜놓고 지내는 형편이었습니다. 만나뵙고자 했던 할머니는 안계시고 방문은 열쇠로 잠궈져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이웃에 계시는가 해서 이웃을 두리번거리는데 바로 아랫 집에 어느 젊은 아주머니 하나가, 우리가 할머니를 도우러 교회에서 온 줄을 어떻게 알고 투덜투덜거리며 우릴 보고 미쳤냐고 소리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처음 생각에는 이 집 아들이 동네에서 아주 몹쓸 짓을 하다가 교도소에 가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기를 작은 아들이 아무리 동네에서 몹쓸짓을 하다가 교도소에 갔다해도 큰 아들은 가출한지 6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자신을 돌보던 아들마저 교도소에 갇혀 있으니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단전 단수마저 되어 생계가 그토록 힘든데 7순 노인에 대한 동네 인심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여선교회원들이 다시 찾아가 할머니를 만났는데 방에 들어가보니 듣던대로 생활이 형편없고 아들들을 위해 윗방에 천신(天神)숭배단을 만들어놓고 지성을 드리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편견을 가지거나 하지 말고, 이웃 집에서 무슨 욕을 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말고 내 어머니처럼 여기고 월동에 필요한 것을 정성껏 마련해드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애타게 어머니 걱정하며 지내는 0 0 0 형제에게 걱정하지 말고 빨리 출소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건강하게 지내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들이 아무리 죄질이 나쁜 죄수라해서, 할머니가 우상숭배한다해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우리 속에 거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죄일지라도 용서하시고 인생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마땅히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미쳤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우상숭배하는 사람에게도,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에게도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은 죄의 질을 구별하여 차별된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널리 증거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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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법과 사랑의 딜레마

"(요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요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요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요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요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미국의 흔한 농담입니다. "2+2의 답이 뭐냐? 고 물었을 때, 수학 이론가는 "3과 5 사이 어디쯤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 대답할 것이고, 계리사는 "4입니다." 하고 대뜸 대답할 것이고, 변호사는 문을 닫고 아무도 엿듣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 "답을 어떻게 만들어 드릴까요?"하고 말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법과 그 실천은 거리가 먼 것을 풍자한 것입니다. 예수는 율법보다 인간을 더 중요시하셨고 그에 반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보다 율법을 더 우선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는 인간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임을 선언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본문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의 죄를 사하신 이야기는 예수께서 세상을 율법에 따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사랑으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요3:16,17)

예수님은 이처럼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 오셨으며(마5:17), 율법을 완성하는 근본 정신은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바리새인의 소위 준법생활에 대한 예수의 공격은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23:25)는 것과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눅11:42)는 것이었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법정신의 초석임을 밝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인 예수를 어떻게 해서든지 체포할 충분한 증거를 얻고자 올무를 놓았습니다. 그들의 올무는 다름 아닌 정치적, 종교적 함정이 깔린 간교한 음모에서 비롯된 바, 예수를 율법의 파괴자요, 하나님의 왕권을 침해하는 죄인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음모가 구체화된 것이 바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께 끌고 온 일입니다. 유대 율법의 집성인 미슈나(Mishnah)는 간음에 대한 형벌은 교살이라고 정해져 있으며 그 교살의 방법까지도 규정하고 있습니다."남자는 분뇨 속에서 무릎까지 흠뻑 둘러싸고 두 장의 수건이 부드러운 수건을 위로 거친 것을 밑으로 해서 그 남자의 목에 두른다(형벌은 하나님의 형벌인 고로 흔적이 남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 다음에 두 사람의 사나이가 각각 반대 방향으로 그 남자가 죽을 때까지 잡아 다니게 된다." 간음한 죄는 가장 더러운 죄라 하여 아주 더럽게 죽였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성경에 기록된 간음한 죄에 대한 벌은 온 동네 사람들이 동구밖에 나가서 돌을 던져 죽이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돌무더기 속에 집어넣는 참혹한 극형으로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동네 사람 전체가 참가하는 처형 방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마을에서는 다시 그와 같은 죄가 없도록, 악을 완전히 제거하자는 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3대 범죄는 첫째가 우상숭배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가장 처음 나오는 계명이 우상숭배를 절대 금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3-6)

우상숭배로 인해 따르는 모든 행위가 더럽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에는 항상 음란한 행위가 뒤따랐던 것입니다. 둘째는 살인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존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권을 침해하거나 인간의 생명을 침해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세째는 간음죄입니다. 이 세 가지 범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절대로 없도록 하자는 것을 하나님의 법 정신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간음이란 남녀간의 불법 성교를 뜻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주변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하는 국가들은 다산 종교에 의해 성적 방종을 널리 허용했으며 심지어 제사 의식을 통하여 이를 장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하여 간음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간음죄의 행위를 더욱 확대시켜 마음으로 범하는 음욕까지도 간음죄로 정죄하셨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이같은 개념은 다시금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도 적용되는데, 곧 하나님을 숭배하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 간음인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렘3:8)

예수께서는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혼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다시말해 남편이나 여자가 간음했을 때만이 이혼이 가능한 데 이는 간음한 사람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31,32)

이처럼 간음은 중범죄로서 율법을 적용시키면 이 간음한 여인을 처형하는데는 사실상 예수의 동의는 필요 없는 것이었습니다.

"처녀를 그 아비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 아비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22:2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자만을 예수께로 끌고 왔습니다. 그들이 노리는 함정은 예수가 여인을 용서하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율법의 권위와 가치를 무시하게 되거나, 여인에게 죽음을 선고함으로서 자신의 사랑의 메시지를 포기하도록 만드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원칙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음으로 예수가 만약 사형을 선고하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총독의 권한 침해라는 구실로 그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모든 죄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힘쓰신 예수이시지만, 유대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고 갖은 음모와 계책을 감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눈이 어두움에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무지한 영적 소경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법대로 하자면 간음한 여인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하며, 또한 사형을 선고하게 되면 로마법을 침해하게 되어 고발당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그 여인을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하면 유대의 율법을 위배하는 것이며 예수의 사랑의 정신은 무력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법과 사랑의 딜레마(dilemma)'에, 궁지에 몰아넣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딜레마를 두 차레에 걸친 초월적인 지혜의 행위와 말씀으로 간단하게 해결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판결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쳐죽이라는 법의 집행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증인이 먼저 죄인에게 손을 대어 그를 죽게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13:9) 너는 용서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신13:10)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한 자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17:7)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법에 따라 처형을 하되 처형하는 자 스스로가 죄 없는 자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는 일 없이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

그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돌을 던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 정신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돌을 던져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는 심판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돌을 던지므로 나로 하여금 그와 같은 범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계입니다. 한 사형수가 단두대로 끌려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 대신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형을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단두대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단두대에 올라가려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에서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사형당하기 전에 할 말이 있으니 잠깐만이라도 임금님을 뵙게 해 줄 수 없겠소?" 이제 곧 죽을 사람의 마지막 소원인지라 알현이 허락되었습니다. 임금님 앞에 선 그 죄수는 다짜고짜 품에서 금덩어리 하나를 꺼내 그 앞으로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 금덩이는 보통 금덩이가 아니라 죄없는 사람이 심으면 싹이 나서 나중에는 금덩어리 열매가 열리는 진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죄인이므로 심어도 소용이 없고, 또 이제 곧 죽어야 하니까 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죄 없으신 임금님께 바치고 세상을 떠나려 하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하게 금덩이를 받아들은 임금이 생각했습니다. '나도 죄가 있으니 심어도 싹이 안 나올거야, 또 만일 심었다가 싹이 나오지 않는 날에는 백성들에게 임금님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것이 아닌가?' 임금은 얼른 금덩이를 옆자리의 대신에게 넘겨주며 심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가 싶더니 옆에 있는 다른 대신에게 또 다시 얼른 넘겨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금덩이는 자꾸만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밀려갔습니다. 결국엔 누구 하나 심으려는 자 없이 핑계만이 무성해졌습니다. 이 광경을 본 죄수는 "이 중에도 죄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죽이려 하십니까?" 하면서 자신의 무죄함을 거듭 호소했습니다. 그의 호소에 임금 이하 모든 대신들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결국 이 죽을 죄인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흩어졌습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9)

이 때,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8:10-11)

간음한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돌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를 정죄치 않으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같은 예수의 행위는 자신을 죄인으로 동일시(Identification) 한 것입니다. 나는 의롭다고 의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을 사랑하셨으므로 스스로 죄인의 위치에 앉으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같이 낮아져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감상적이거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사랑하려면 나도 죄인과 동일시 되어야 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에게 이어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는 전제하에 사죄를 선언하시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임을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2,13)

그러나 다시 오시는 예수는 죄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은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죄의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간음한 여인을 죽음의 깊은 어두움 가운데서 예수 앞에 이르게 하였으나, 율법의 완성이시며 사랑의 실체이시고 세상의 빛이신 예수는 그 여인에게 새로운 생명과 빛으로 축복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법과 사랑의 딜레마를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18-24)

예수의 사랑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야말로 법이 할 수 없는 생명을 새롭게 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법보다 사랑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며 세상을 구원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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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사랑과 진리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5) 부녀여 !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13)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요한2서)

기독교 초기에 교회 지도자는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도>라는 직분이었습니다. <사도>란 예수의 12제자를 중심으로 예수와 함께 지내며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직무나 가르침과 편지는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권위있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들은 의심할 여지없는 초대교회의 확실한 지도자들로 그 활동영역은 어느 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았었습니다. 둘째는 직무상 순회 전도자라 불리우는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예언자>란 명칭은 이들이 성령의 뜻에 따라 어느 곳에든지 자유롭게 나가서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초기에 가정과 직업을 포기하고 안정된 생활의 즐거움도 포기하고 온갖 위험을 무릎쓰고 여행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었습니다. 셋째는 <장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이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세워진 교회에 임명한 지도자로 해당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연장자이었으며, 사도들의 가르침과 서신들을 전달하는 직무를 감당했었습니다. 이들의 직무는 임명받은 교회에 국한되었고 오늘날 담임목회자에 해당되는 지도자로 볼 수 있습니다. 장로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지역과 교회에 발생하는 이단과 거짓선지자들을 예방하거나 색출하여 교회와 진리를 수호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세가지 직제 중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예언자>, 즉 순회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자유롭게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성령의 음성이라며 복음을 전하면서 돈맛을 보자 점차 본래의 사명에서 벗어나 결국 타락하더니 의례껏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빙자하여 예수를 전하면서 사실상 예수를 미끼로 금전을 갈취하여 자기 뱃속을 채웠던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예수 십자가 사랑을 미끼로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교회헌금을 착취하여 호화생활을 누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성령을 빙자하여 교회를 갈취하며 자기들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교회 분열을 획책하므로 초대교회의 두통거리가 되다시피했던 것입니다.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헌금이 많이 나오는 교회를 발견하게 되면 그 교회를 아예 독차지하여 몇 년동안 안락생활을 누리기까지 했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장로>로 부르면서 교회 분열을 조장하고 교회를 혼란시키는 거짓 선지자 무리들의 거짓 사랑에 미혹되지 않도록 더욱 더 진리가운데 굳건히 서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미끼로, 성령과 사랑을 빙자하여 돈을 밝히는 <예언자>,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는 <순회전도자>, 성령 운운하며 교회분열을 획책하는 무리들,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적그리스도, 이들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근묵자흑(近墨者黑), 즉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미혹하는 자와 가까이 있으면 그 미혹의 마음에 감염되므로 요한은 처음부터 그들과의 접촉을 아예 금지시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신 목적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하려함(누가복음4:18)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과 은사를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배를 채우며 축복 운운하며 가난하고 병들고 갇히며 소외된 자들을 외면한다면 그들은 거짓 선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자신은 머리둘 곳조차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화생활을 누리며 하나님의 축복을 운운하는 것은 예수 팔고 복음 팔아 먹고 사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성공 출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출세 성공 지향적인 설교와 목회를 일삼는 무리들은 교회를 혼란시키며 신앙을 미혹케하는 <포도원을 허는 여우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와 목회, 신앙생활과 교회는 십자가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만이 인류 구원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곧 진리입니다. 십자가가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바로 진리를 아는 것이며, 십자가 예수의 삶을 깨닫는 것이 진리를 깨닫고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안에 거하는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시고 보내주신 성령은 곧 십자가의 예수를 가르치고 증거하시며 깨닫게하여 진리가 되시는 예수처럼 살게하는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십자가이며,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시고, 십자가 예수를 통해 사랑이 진리의 구체적인 삶인 것임을 증거해주시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곳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내가 죽고 너는 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자신은 얼마든지 희생될지라도 이웃이 최고로 잘 되는 것을 구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십자가 사랑은 이론이나 학문도 아니고 도덕이나 윤리, 종교의 경전도 아닙니다. 십자가 사랑은 필수 생활입니다. 십자가 사랑이 자신의 생활을 통해 증거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생명으로 부활되는 것입니다. 부잣집 출신의 젊은 간호사가 황홀하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오늘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습니다!." 이 말은 병원에 실려온 한 환자를 치료했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환자는 버려진 병상에 오래 누워 있었으며 그 몸에 구더기가 들끓는 비참한 남자였습니다. 병원 원목은 그 간호사를 대견하게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손이 닿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긴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랑은 말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희생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이 십자가 사랑은 숱한 희생가운데 생활로 증거되어 왔습니다. 사랑은 생활과 희생으로 증거될 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들은 당연히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 여러분을 구원하였듯이 여러분의 십자가 사랑이 이웃을 구원하는 생활로 증거되어야만 합니다.

부활절이 되면 어린이들에게 색계란을 주는 관습이 옛날부터 전해지고 있는데 그 유래는 이런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 때였습니다. 어느 귀부인이 한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 부인은 십자군으로 전쟁에 나간 후 소식이 끊긴 남편을 찾고 있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의 전사 소문이 떠돌자 약점을 이용한 부하가 귀족의 재산을 횡령하고 그 부인을 쫓아내는 바람에 다른 마을로 간 것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무척 친절했습니다. 거지꼴이 된 부인을 따뜻하게 맞아 그 마을에서 정착하도록 도왔습니다. 그 해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귀부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닭을 키워서 계란을 받아 색칠을 하여 아이들에게 선물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녀는 부활절 아침,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숲에 자기의 나무를 하나 씩 정해요. 그리고 버섯을 따서 그 나무 밑에 새둥지를 만들어 놓아요. 얼마 후에 하늘에서 이상한 새가 날아와서 여러분의 둥지에 알을 낳아 놓을 거예요." 아이들은 모두 신이 나서 숲에 들어가 자기의 나무를 정하고 둥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귀부인의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식사 후에 둥지를 찾아간 아이들은 정말 알록달록한 색깔이 칠해져 있는 예쁜 알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알에는 이런 글까지 씌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날 부인의 색계란을 받은 아이 중 한 명이 친척집을 가게 되었는데 산길에서 몹시 지쳐 쓰러져 있는 부상병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 아이는 아끼던 색계란을 그 부상병에게 주었습니다. 군인은 계란에 씌어진 글을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너 이 계란을 어디서 얻었느냐? 이 글은 우리 집안의 가훈이란 말이야. 그리고 이 필체는 틀림없이 나의 아내 로잘린의 것이야." 그 후의 이야기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사랑은 로잘린 부인에게, 부인의 사랑은 아이들에게, 어린 소년의 사랑은 부상병에게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생활과 희생을 통해 증거되는 가운데 행복과 평화, 그리고 생명이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리가운데 살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사랑으로 그 진리를 증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테레사 수녀가 젊었을 때 어느 날 빈민굴에서 어두운 방에 사는 환자를 발견했습니다. 더러운 방에 냄새가 지독한 남자인데 그 방에 램프(등잔)가 있는데도 켜지 않고 있었습니다. 테레사가 방 청소를 끝내고 램프를 켜자 사나이는 소리를 지르며 불을 껐습니다. 수녀도지지 않고 다시 키자 환자는 램프를 던져 버렸습니다. "난 등불이 없는 것이 좋아 1년 내내 램프는 키지 않았어!" 하고 버럭버럭 고함쳤습니다. 그는 육체의 질환뿐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 더 심했습니다. 이튿날 테레사 수녀는 새 램프를 사다가 불을 켜주고 돌아왔습니다. 그후 10년이 지났습니다. 젊은 수녀들이 빈민굴의 사나이에 대한 보고를 했습니다. 그는 같은 빈민굴 집에 살지만 깨끗이 개조된 집이요, 의젓한 직업을 가졌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키 작은 수녀님께 전해 주시오. 당신의 등불이 지금도 내 생활 속에 불타고 있다고." 이 환자는 어둠이 습관화되어, 어둠이 더 편했던 것이었습니다. 육신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 그의 영혼도 침체되고 가라앉은 상태가 당연한 일상생활처럼 습관화된 불쌍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테레사 수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사랑에 접하고 그의 영혼의 램프는 밝은 빛을 되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어둠의 생활을 당연한 일상생활로서 받아드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상에 직접 찾아오신 것처럼 십자가 사랑을 가지고 직접 찾아가 그 사랑을 삶을 통해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태워 진리의 불을 밝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사랑과 진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진리가운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된 진리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 증명되지 않는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사랑을 통해 증거되지 않는 진리는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십자가 희생으로 사랑하고 계시듯이 여러분도 이웃을 십자가 희생으로 사랑하여 진리를 생활로 증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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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사랑을 따라 구하라

"(고전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고전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전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고전14:8)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고전14: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고전14:10)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고전14: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고전14: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고전14: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 하는 사람도 많고 예언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서로 자기가 받은 은사가 더 크며, 교회에서 더 큰 일을 한다고 자랑하며 자기와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특히 여러 은사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가장 부러워하며 최고로 선망했었는데 이는 알아들을 수 없고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말로 기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어 방언 이외의 은사들을 무시하기까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공중 예배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여 교회를 무질서의 도가니로 몰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도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사랑을 따라 은사를 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여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려는 유치한 생각을 버리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자유와 권리를 절제하는 성숙한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고전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방언은 개인의 신앙에 확신과 기쁨을 심어주며, 예언은 교회 공동체에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 그러나 방언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방언을 통해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도움을 받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방언을 통해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방언을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어야 영적인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할 때는 통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통역을 할 수 없을 때는 혼자 있을 때 방언 하라는 것입니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보다는 예언이 유익한 것입니다. 방언은 통역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그 내용이 전달되지 않아서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않는다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공중 예배시에 대표 기도하는 사람이 방언 기도를 하고 그 기도에 대한 통역이 없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에 화합하는 아멘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중 예배시 대표기도는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고전14: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대부분의 교인들은 강해 설교보다는 간증 설교나 간증을 듣기를 더 원하고 더 감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유명한 배우나 탤런트, 가수 등의 신앙간증 집회에는 훨씬 더 많이 모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 신자들은 다분히 감성적이어서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간증 설교를 선호합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일어난 예기치 않은 신앙적이고 기적적인 사건의 전말에 더 흥미 있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내용보다는 그 간증 속에 나타난 신비스러운 요소에 만족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을 가장 선호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교인이 방언을 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아주 신령한 사람으로 간주하며 영적 권위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외면한 자요 하나님의 간섭이 없는 신령치 못한 사람으로 매도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신앙체험을 했다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불에 태워질 쭉정이요 가라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유창하고 신령한 방언을 많이 한다 해도 신앙 생활에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교과서만으로 충분한 사람은 여타의 참고 도서나 보충 교재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만으로 충분한 사람은 그 말씀만으로도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신자가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골2: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골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고전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성도가 먹고 자라게 되는 생명의 양식, 생명의 떡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성숙해지는 것이며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때로 핍박과 고난과 역경이 있다해도 인내의 믿음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게 될 때 구원에 이르게 되며,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딤후3: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딤후3: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참으로 성경이야말로 성도를 온전케 하는데 넉넉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언입니다. 어떤 신통한 은사를 받아서 삶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시원하게 해결하려고 은사 위주의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도 상당히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면서 고난과 역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삶의 지혜와 힘과 용기를 얻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건실한 열매를 맺어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신앙 생활입니다.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골고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부활 승천의 영광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성경(예언)대로 나시고 성경(예언)대로 죽으시고 성경(예언)대로 다시 사셨습니다.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성경대로 사실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신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신8: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가나안 땅에 이르는 지름길, 왕도는 없습니다. 천국 가는 길에 왕도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길과 진리,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천국에 갈 자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신자의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비례하여 성숙해지는 것이지 은사의 소유에 비례하여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그의 부르심의 소망,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부르시며, 부르신 지위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을 아는 것이 예언입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 중에서도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열심과 충성을 다하며 희생하므로 열매를 맺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하여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때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를 통해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므로 세계 통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골1:25)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골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골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하나님의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안에 모든 부요와 지혜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비밀이 아니지만 믿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비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 비밀의 영광의 풍성함과 소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에도 위축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차 누릴 그 영광의 풍성한 소망으로 인하여 항상 감사하며 기뻐하며 승리 생활을 하게 됩니다.

"(골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골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엡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앞날을 하나님이 자신한테만 보여 주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며, 복음을 전하며 장차 누릴 영광의 소망이 풍성함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예언입니다. 옛날 남북 전쟁 때 남부군이 군자금으로 감추었던 금괴를 찾으러 서부로 갔다가 금괴를 찾게 되었는데 둘이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둘 다 변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은 똑같이 나누기로 했는데 다른 한 동료가 배신을 한 것입니다. 그 친구가 먼저 권총을 뽑았고 우리가 아는 시나리오대로 주인공이 재빨리 돌아서 먼저 쏘았습니다. 정당방위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배신하고 자기를 먼저 쏘려는 악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동지였던 친구를 쏘았다는 자책감에, 가서 부둥켜안고 '아니, 내가 어쩌다 자네를 쏘았나. 세상에 이런 비극이 있나, 미안하네.' 그러자 배신했던 친구가 죽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야, 자책하지 말게. 이 세상에 가장 사랑하는 친구 손에 죽는 축복을 나 외에 누가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말을 하고 죽습니다. 죽는 마당에 이를 악물고 악악거리고 죽으면 죽은 다음에 발길질이나 한 번 더 당하지 이익 볼 게 뭐 있겠습니까? 기왕 죽게 되었으니 선심을 쓰는 것입니다. 나 같은 행복한 사람은 없네. 친구 손에 죽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울 수 있겠나? 사람은 한번 세상에 태어나 한번 죽는 것이 하나님의 정한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창3:19)......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왕 태어나 한 번 죽을 인생,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비록 고난과 역경, 핍박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과 불의한 세력이 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을 망칠 것 같고 내가 복을 받지 않으면, 내가 나서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예언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누가 어떻게 하든 세상은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갑니다. 사로 잡혀간 이스라엘 포로들이 바벨론에서 이제 하만의 악독한 꾀로 인하여 다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모르드개가 당시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된 에스더에게 구원을 청합니다. '너는 왕비이므로 우리 민족 중에는 네가 제일 높은 자리에 있다. 네가 힘을 써서 우리 민족을 구원시키도록 해라.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네게 왕비의 자리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서를 붙입니다. '네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일랑 아예 버려라.'

"(에4: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에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네가 안하면 안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세가 없으면 출애굽 사건이 없고 엘리야가 없으면 갈멜산 전투의 승리가 없고 세례 요한이 없으면 예수님이 오시지 못하고 사도 바울이 없으면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가 없고 하는 이런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없습니다. 모세가 없어도 이스라엘은 해방될 수 있고, 엘리야가 없어도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세례 요한이 없어도 얼마든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며, 사도 바울이 없어도 세계 복음화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이 세상 역사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만이 시행되는 것입니다.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것이 예언입니다. 예언을 하려고 하거든 이러한 예언을 하시기 바랍니다.

"(마24: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마24: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눅16: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그러므로 덕을 세우는 사랑의 관점에서 볼 때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은사가 풍성하시되 덕을 세우는 사랑을 따라 각양 은사가 풍성하시길 기원합니다.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한 가지라도 말씀대로 생활하여 열매를 맺어 자신과 교회에 덕을 세우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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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처음 사랑을 가지라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1-7)

1. 요한 계시록의 수신자인 일곱 교회는 역사를 통하여 앞으로 교회가 당면하게 될 전형적인 상황들을 대비하기 위해 특별히 선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는 당대의 교회들이었지만 또한 오늘날 우리 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보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보낸 계시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에베소의 시대적 정황을 파악해야만 합니다.

에베소는 로마로 가는 대로였으며, 아시아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아시아의 관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끊임없이 각 나라 사람과 각종 상품들이 흘러오고 흘러 나가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아시아 최고의 부유한 도시가 되었으며, 각 나라의 문화와 문명, 각종 이교 사상과 신비주의 종교가 성행하는 "세계 최고의 허영의 시장"이라 불리웠던 곳입니다. 특히 에베소는 세계 7대 불가사의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아데미(다이아나)신전이 있는데 이 신전은 파르테논 신전보다 무려 4배가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아데미 신전에는 수천명의 남녀 사제들이 종사했었고, 다산을 기원하는 제사의식으로 여사제들은 매음행위를 하여 신성한 창부노릇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도피중인 범인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에베소는 또한 미신이 만연한 곳으로 이름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에베소 문서>라고 불리우는 부적은 만병통치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아이를 갖게 하고, 운동선수에게는 승리를, 여행자에게는 행운과 안전을, 사업가에는 성공을 보장했기 때문에 이것을 사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에베소에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에베소는 각 나라의 범죄자들이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 몰려들었고, 각종 미신과 우상숭배에 따른 성적 타락과 부도덕이 넘실대는 곳이었습니다. 정신적, 영적, 도덕적 타락의 온상이며 모든 종교를 용납하여 종교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에베소에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에베소에 생명을 구원하는 거룩한 교회를 세운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하게 여겨질 정도로 복음 전파에 불리한 조건들만 눈에 띄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에베소의 이 모든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하고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를 두고 P.C. 트렌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땅은 다른 아무 곳에도 없다. 또한 여기처럼 깊은 뿌리를 내려서 믿음과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땅을 다른 데서 볼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처럼 기독교 신앙의 승리를 보여준 곳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에 교회를 개척하여 인근 지방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까지 간접적으로 전도하는 등 자신의 선교 절정기를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어 제3의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 이후에는 디모데가 이 교회를 관할하는 최초의 감독이 되었고 후에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이곳에 모셔 생활하다가 이곳에서 장사지냈다 합니다. 그만큼 이곳은 분명히 기독교를 대적하는 문화와 문명, 그 어떤 영적 세력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곳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복음 전도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다고 해도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 한 반드시 승리하여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2.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그 "그 행위와 수고"에 대해 칭찬받은 교회입니다. 여기 "수고"는 헬라어로 "고포스"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땀을 흘리기까지 일한다", "심신이 기진 맥진할 정도로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몸을 지나치게 아끼고 땀을 흘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칭찬받는 성도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심신이 기진 맥진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교회에 봉사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여 행위가 참으로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의 "인내" 또한 칭찬받은 신앙의 내용이었습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휴포모네"인데 고난, 환난, 손실을 씩씩하게 용기를 갖고 대항하여 그것을 은혜와 영광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환난은 인간 생활에 색채를 가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휴포모네" 즉 인내를 가지고 사는 기독교인은 그 당하는 환난과 고난을 인하여 예수 십자가를 통해 입혀주신 세마포 흰색이 더럽혀져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환난과 고난과 역경이 많다해도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회색분자가 되거나 아예 까만색으로 변질되어서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풀무에 단련할수록 정금이 되어 나오듯이 환난과 고난을 당할수록 더욱 더 순백의 광채를 발할 수 있어야 참된 교회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칭찬받은 것 가운데 또 하나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니골라 당'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로서 배교했던 니골라를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당시 만연했던 영지주의의 산물로 율법의 시대가 지났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으며, 육신은 악하고 구원받는 것은 영이기 때문에 육신으로 무슨 악한 짓을 범해도 영혼구원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치므로 극히 반도덕적, 비윤리적 생활을 했던 무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삼아 양심에 아무런 가책을 느낄 것 없이 죄악을 조장하는 이단 사상으로 교회를 파괴하려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니골라 당의 창시자 니콜라우스란 이름은 '백성'을 뜻하는 헬라어 '라오스'와 '삼키다', '없애다', '정복하다'는 뜻의 헬라어 '니카오'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해 "백성을 삼키는 자들"이란 뜻의 '니골라 당'의 실체가, 잘못되고 부도덕한 이단 사상의 가르침으로 백성을 삼키는 반기독교 집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계시록 2장 14절의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과 같은 무리들입니다. "발람"은 "삼키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발라'와 "백성"을 뜻하는 히브리어 '암'의 합성어로, "백성을 삼킨다"는 니골라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발람은 니골라의 다른 이름일뿐 아니라 구약에 실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직접 저주하지 않았지만 미디안 여인들을 미끼로 놓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음행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함으로 간접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망하게 만든 자였습니다.(민22-25장) 발람은 신약의 니골라였고 니골라는 구약의 발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이나 니골라의 교훈은 한 가지 이단에 붙여진 두 가지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발람의 시대에 일어났던 것이 요한의 시대에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이 오늘날에도 꼭 같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밖에 있는 불신 무리들보다 교회를 더 어지럽히는 악한 자들로서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세력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죄악을 끌어들이거나 교인들의 죄악을 눈감아 주거나 변명하거나 아예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방치하는 것은 건전하고 건강한 성도의 교제를 파괴하는 니골라 당의 무리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죄악을 무조건 용납하는 곳이 아니라 지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여 교회의 성결을 보존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회개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3. 에베소 교회는 무역의 중심지에 위치하다보니 교회 안에 뜨내기 신자들이 들끓었던 것입니다. 이들 뜨내기들이 교회의 자선과 사랑을 이용하여 교회마다 돌아다니며 성도들을 이용하여 돈을 모아 이들 중 일부는 상당한 재산을 긁어모아 호의호식하며 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무리들을 철저히 분별하여 교회 안에서 성도간의 교제를 금지시키거나 아예 교회 입교를 거절하거나 아니면 그 정도가 심하면 교회에서 아주 추방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입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뜨내기들을 분별하여 색출하고 각종 날뛰는 이단자들을 발본색원하다보니 사랑의 불이 식어진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잘못된 사람들을 일소하려던 열심, 교회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열심히 자칫 비판적인 신앙으로 기울었고 그러다 보니 사랑의 교제가 식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악을 용납하지 않고 교리를 수호하고 교회 정통 신앙을 지키려다 사랑이 식어지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정통주의는 생명력이 없는 껍데기만 남은 정통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단을 근절시켜려던 노력이 까다롭고 엄격한 정통주의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종적으로 수직적인 신앙은 좋았으나 횡적으로 수평적인 신앙을 등한시하므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차가운 이성은 차가운 가슴을 만들게 되기 쉬운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세워진 지 40여년이 지나자 성도들은 차츰 복음의 열정을 잃어 버렸습니다. 본문에 지적된 바와 같이 사실 에베소 교회는 진리에 대한 열심에 있어서 첫 사랑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바른 신앙이 있을지라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이 식어지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는 치명적인 결점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교회의 촛대를 옮기시고 말았습니다. 촛대가 옮겨졌다는 것은 더 이상 교회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만이 생명을 낳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내가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땀을 흘리며 심신이 기진맥진할정도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모든 환난과 고난을 용감히 견뎌내고, 어디 하나 나무랄데 없이 정통신앙을 지키려 했었으나 그만 사랑이 식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의 촛대를 붙잡고 계신 예수께서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처음 사랑으로 돌아 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세 가지 단계가 있음을 본문을 통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책망만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곧 이어 그들에게 문제 해결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첫 단계는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즉 신앙 생활 초기에 가졌던 뜨거운 사랑을 다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즉 현재 신앙생활의 모습이 처음에 가졌던 적극적이고 열성적이며 헌신적인 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돌이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신앙생활이 처음보다 진보하고 성숙한 모습이 없다면 이미 마음의 촛대가 불이 꺼져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집을 뛰쳐나간 탕자가 먼 나라에 가서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갑자기 아버지 집에서 누렸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잘못의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그것을 슬퍼하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결단을 말합니다. 탕자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충심으로 그것을 슬퍼하며 아버지께 가겠다는 결단이 곧 회개입니다. 회개하는데 가장 어려운 일은 죄와 허물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즉각적이고 단번에 이루어져야 하는 결단입니다. 탕자가 회개한 후에 곧 바로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던 것처럼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한 열매가 없으면 가라지 인생에 불과합니다. 변화된 행동과 삶을 통해 자신의 회개가 참된 것임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우리 평강교회가 에베소 교회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며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아주 작은 일이지만 엊그제 교회에 보내온 한 통의 편지는 우리 교회가 처음 사랑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었습니다. 바로 0 0 자매로부터 보내온 편지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동희 목사님, 평안 하셨습니까! 부산에 0 0 자매입니다.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로 이렇게 컴퓨터 e-메일로도 안부를 전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한해를 고이 접어 주님께 드리며 한해의 끝이라는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부끄러움과 아쉬움만 남는 것 같습니다. 이 한해도 주님 앞에 드린 것은 너무나 부족한데 받은 은혜는 너무 많아 주님께 책망이나 받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굳은 팔을 오른손으로만 계속 쓰다 보니 예전부터 어깨에 통증이 있어 조금은 힘들었는데 갈수록 심해져 그나마 이 모습 안에서 병상에 있는 환우들께 편지 보내는 이 작은 일도 못하면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무슨 말을 할까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는데 어느 날 책을 보니 '음성인식' 소프트 프로그램이 있어 키보드를 치지 않고도 음성으로 워드 같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뻤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무언가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또 남에게 기쁨을 주고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나의 삶에 큰 기쁨이었기에 그 소망이 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른 것을 제쳐놓고 그 프로그램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노트북 용량이 모자라 실행이 안되어 혹시 업그레이드시키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불가능하면 그 용량에 맞는 중고 컴퓨터라도 알아 볼까 싶어 0 0 0집사님께 컴퓨터 구입한데 연락처를 물어 본다는 것이 이렇게 새 컴퓨터를 받게 되어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께 폐를 끼쳐 너무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얼마 전 목사님의 추수 감사절 설교 말씀 중에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바이올리니스트 펄먼의 이야기에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아 제 자신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펄먼이 "때로는 모든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도 제게 남은 것만으로 연주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께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라는 그 말에 나 또한 통증이 조금 덜한 왼손으로 할 수 있는데 까지 하지 못하고 나에게 처한 상황만 보고 남아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주님 앞에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목사님, 도심 속 콘크리트 벽 사이에 그 틈새를 뚫고 피어나는 작은 풀잎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연약해 보이는 풀잎이라도 하나님께서 다 뜻과 의미가 있어 존재케 한다는 생각에 연약하고 볼품없는 나의 삶일지라도 내게 주어진 삶의 몫에 감사하며 때로는 불편한 나의 육신 때문에 기대만큼 채워지지 않고 또 남들보다 빨리 달리지 못한 나의 삶일지라도 결코 초조해 하거나 내 발걸음을 아쉬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있는 그대로 주님께 드리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목사님, '음성인식'프로그램은 책을 보고 익히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분 집사님께서 오셔서 컴퓨터 놓을 책상을 조립하고 또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시고 하는 모습에서 울컥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 주신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께 어떠한 말보다 깊은 기도로써 감사함을 전합니다. 다가오는 거룩하고 복된 성탄절에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가정 위에 충만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샬롬! -부산에서 0 0자매- 》

"세계 최대의 허영의 시장"으로 군림하던 당대 아시아 최대의 항구 도시였던 에베소는 지금은 배가 닿을 수 없는 모래 해안선과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황무지와 폐허로 버려진 오늘의 에베소가 처음 사랑을 찾아가지 못하므로 "촛대를 옮기리라"는 예언의 성취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죄악된 세상을 이기는 길은 회개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촛대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길은 회개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했습니다. "생명 나무"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같이 에덴동산 한 복판에 있던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뱀으로 가장한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는 줄로 알아 그만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결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이들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여 화염검을 두어 그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기는 자에게는 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첫 번째 아담이 잃어버렸던 것을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으로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창세기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창조를, 요한계시록은 그 처음 땅과 하늘이 모두 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에덴 동산에 침투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범죄한 인간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형벌과 죽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에는 인간을 유혹했던 마귀와 죄와 사망의 영원한 멸망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창세기는 인간의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은 사망과 사단에 대한 정복과 회개와 사랑으로 세상과 죄악을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이켜보며 회개하는 성숙한 믿음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날로 더해가는 사랑이 충만한 성도와 교회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이 천사와 같은 여인을 잃게 되면 나는 미치광이가 되거나 일티시강에 투신하는 것,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네." 이것은 1856년 3월 26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친구 브란겔리를 통해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첫 사랑의 여인,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이 여인은 하급관리 이사예프의 아내로 일고여덟살된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폐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황제 타도 모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4년간 징역을 마치고 출옥하여 키르기스평원 부근의 자그마한 마을 세미팔라틴스크에서 군복무 중 이사예프 가족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사예프의 아내 마리아는 다정다감하고 정열적인 스물여섯살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죄수 신분으로 군복무중인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깊은 동정과 연민의 정을 보내었습니다. 4년간의 감옥생활에서 막 벗어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마리아가 보여준 따뜻한 친절은 그를 첫 사랑의 정열로 이끌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1년후 이사예프는 600km나 떨어진 곳으로 전근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넘볼 수 없는 첫사랑이었지만 이별해야한다는 사실에 비탄에 빠져 몸부림을 치다시피했습니다. 첫 사랑 마리아와 헤어져 있는 동안 수많은 편지들을 주고받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위의 편지밖에 없습니다. 이사예프가 이사간지 몇 달만에 술로 인한 병으로 죽어버리고 마리아는 어린 아들과 남편이 남긴 빚덩어리뿐 이었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소식을 알게 된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불행한 천사 마리아를 구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심하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마리아를 돕고 정식으로 청혼하게 됩니다. 아이가 딸리고 폐병을 앓고 있으며 빚더미에 앉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사랑의 열정에 마리아는 결혼을 승낙하게 됩니다. 결혼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근무지로 돌아오는 도중 심한 간질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간질환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 날 처음 알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권이 되어 아내 마리아와 함께 페테르브르크로 돌아왔지만 마리아의 폐병은 더욱 악화되었고 경제사정도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블라디미르, 모스크바로 옮겨가며 치료와 요양을 하다가 1864년 4월 서른 여섯 살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그런데 마리가아가 모스크바에서 요양생활을 할 무렵 도스토예프스키는 수슬로바라는 스물한 살의 젊은 여성과 밀애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여인과 재혼한 후에도 마리아의 아들을 끝까지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마리아에 대한 첫 사랑은 이미 그 열정이 식어진지 오랬지만 자신의 의무만은 다했다는 변명일 것입니다.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등 대작들을 발표한 러시아의 대작가였지만 첫 사랑을 저버린 그였기에 뒷맛이 씁쓸하고 개운치 않은 느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대부분 첫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지만 그 첫 사랑에 대한 추억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첫 사랑은 그저 추억으로만 간직되어져야만 하지, 첫 사랑을 찾으려해서는 피차가 망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을 첫 사랑으로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첫 사랑에서 멀어졌다면 회개하고 첫 사랑을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낙원을 이루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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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사랑을 증거하라

(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5) 사랑하는 자여 !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6) 저희가 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7)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9)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요한3서1:1-12)

초대 교회 시대 초기 <순회 복음전도자>는 오로지 복음 전파를 위해 아무런 보수도 없이, 또한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순수하게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열정적으로 봉사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순회 복음전도자>들을 잘 이해했습니다. 자신도 역시 <순회 복음전도자>의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달리 그들을 이해하면서 따뜻하게 영접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들을 정성껏 대접하고 후원하며 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해줌으로 해서 그들에게 복음전도에 힘을 얻게 하므로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에서는 오직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순수하고 깨끗하게 자신을 희생하며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고 심지어는 비방을 서슴지 않고 이들을 대접하려는 교인들까지 자신에게 집중하여 섬기지 아니한다해서 교회에서 내어쫓으려는 악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디오드레베가 바로 그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교인 중 독선적인 지도력으로 자기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쓸어버리려는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사도 요한의 권위까지도 무시하고 희롱하며 자신의 위치를 교회에서 가장 높은 데 두어 교권과 이권을 장악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하는 강력한 인물이었습니다. 소위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으로 교회를 지배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그같은 지도력을 따르는 세력이 있을지 모르나 사도 요한이 볼 때는 디오드레베는 분명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지도력, 카리스마는 사랑과 섬기는 겸손함에 있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해서 베드로나 가롯 유다를 가차없이 내몰아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므로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어느 한 개인의 성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랑과 섬김으로 인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목회자의 목회 성공 운운하는 것은 교회를 잘못 이해하거나 교회가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어느 한 개인의 지도력에 좌우되어서는 안됩니다. 초대교회의 카리스마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 자체에 있었던 것이지 어느 한 사람의 지도력이나 인격에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카리스마는 사랑과 섬김의 표상인 십자가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나는 신앙과 지도력이 참된 신앙이며 참된 지도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교회를 자신의 교권과 이권을 챙기기 위한 수단으로 순수한 복음 사역자와 자기들 편이 되지 아니하는 성도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려는 디오드레베같은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복음과 진리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카리스마를 두지 않고 자신의 지도력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휘둘러 자신을 추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감히 그 교회에 붙어있지 못하게 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세습제를 반대한다해서 그들을 교회에서 몰아내고 교회를 독차지하고 있는 한국 대형교회들의 모습들은 경계해야할 대상들입니다. 교회가 진리 안에서 하나되기 보다는 이권다툼으로 분열되고, 교회가 사랑과 의로 하나되기 보다는 뜻을 달리한다해서 반목과 질시를 일삼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하나이며 하나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자들을 경계하면서 교회 내부 질서를 파괴하고 교회를 혼란시키는 무질서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그의 사랑하는 친구 가이오에게 본 편지를 보냈습니다. 가이오는 신약성경에 셋이나 등장할 만큼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에베소의 난동 때에 사도 바울과 생사를 함께 있었던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행20:4)가 있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 연보를 전해주러 간 더베 교회의 대표 가이오(롬16:23)가 있으며, 사도 바울이 세례를 준 사람으로 나중에 데살로니가 초대 주교가 된 가이오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 복음을 위해 자신의 가정과 마음을 개방하고 복음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의 가이오 역시 복음과 순회 복음 전도자를 위해 마음과 힘을 다해 봉사하고 희생을 아끼지 아니했던 인물로 사도 요한은 그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마음도 건강하고 하는 일들이 잘 되어 더욱 더 복음 전도에 쓰임받게 되기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똑같은 기독교인이라도 디오드레베는 순수하고 희생적인 복음 전도자들을 거부하고 이들을 영접하려는 교회 교인들까지 몰아낸 악행을 서슴지 않은 인물이고, 데메드리오와 가이오는 복음 전도에 충성을 다 할 뿐만 아니라 순회 복음 전도자들을 정성껏 영접하고 그들의 복음전도에 필요한 물질을 아낌없이 제공했던 그야말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생활로 증거하며 살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요한 당시에 순회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 전도 사역에 종사하면서 아무런 삯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이용하여 부를 취하는 자라는 인상을 주지않기 위해서 그들이 전도하는 이방인들에게서 어떠한 물질적 도움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쓸 것은 틈틈히 자신이 벌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갈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생계를 위해 천막을 수리하는 일에 종사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순회 복음 전도자들에게 교회와 성도들의 물질적 후원은 그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고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을 복음 전도 사역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여러분에게 엊그제 선교비 지원을 요청해온 편지 하나를 소개해드겠습니다.

《이동희 목사님께,

목사님!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저는 0 0 0 전도사입니다. 전화도 못 드리고 갑자기 불쑥 글을 올리게 되어 죄송스럽습니다. 저는 지난 해 3월 중부연회 부평 동지방 소속으로 0 0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자그마한 개척교회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 덕분에 저희 가정과 부모님 가정 이렇게 두 가정이 시작한 교회가 이제는 모두 22가정 31명의 장년 재적 성도들로 늘어났습니다. 거의 다 초신자들이라 주일 성수하는 것조차 힘들기는 하지만 주일 낮 예배 참석 인원도 이제는 20명이 안정적으로 넘어섰습니다. 지난 주 추수감사주일에는 모두 27명의 성도들이 예배를 드려 창립예배 이후로 가장 많은 인원이 하나님 앞에 감사와 기쁨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학교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해 주셔서 160여명의 어린이들이 재적 인원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사인원의 절대 부족과 교사의 경험 부족 등으로 어린이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출석인원은 8,90명 선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며 열심히 목회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느닷없이 편지를 올리게 된 것은 선교비 도움을 받고자 해서입니다. 지금까지 교회의 재정적인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지난 해 1200만원 결산을 했는데 올해는 3천만원에 가까운 결산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내년 정도에는 자립 교회의 모습을 갖출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저희 가정의 생활비입니다. 그 동안 제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둽던 돈을 교회 개척에 절반 정도 사용하고, 지난 1년 8개월 동안의 생활비로 사용하다 보니까 가진 돈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는 마음에 교회에서는 지난해에는 사례비를 한 푼도 받지 않았고, 올해도 상징적으로 25만원만 받았습니다.(사택 관리비등은 전혀 받지 않고 있습니다.) 올해 정도의 결산이면 조금 더 받아도 가능한데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년에는 가진 돈이 없어 교회의 사례비를 조금 더 책정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갑자기 많이 올릴 수는 없을 것 같아 월 70만원 선에서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돈으로는 세 자녀를 키우는 생활비로는 많이 부족할 것 같아서 생각하다 못해 몇 몇 교회에 도움을 청하기로 하고 목사님께도 무례하지만 이렇게 편지를 띄우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내년도 선교예산을 책정해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시다면...무례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숲 속의 사과나무 사역 등 직접, 간접적으로 목사님께 배웠던 많은 가르침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힘쓰겠습니다. 평안하시고 건강하십시요. 샬롬!!

2001년 11월 26일

0 0 교회 0 0 0 전도사 올림 》

선교비 지원을 요청한 0 0 0 전도사는 편지내용처럼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가면서, 자신의 가정을 희생해가면서 지역 복음화를 위해 봉사하는 순수한 복음 사역자입니다. 요즈음같이 개척교회 복음 전도가 어려운 때에 개척한지 얼마 되지않아 22가정, 어린이 160명 전도의 결실은 그 전도사의 희생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믿습니다. 이와같이 한 달 평균 50만원도 되지 않는 생활비로 개척교회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우리 감리교회에만 45%정도나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개척교회의 복음 전도를 지원하고 있는 남선교회와 청장년선교회에서 이 개척교회의 더 풍성한 영혼구원의 열매를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교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요한처럼 되고 바울처럼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 복음을 들고 세계 곳곳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들의 복음 전도를 위해 정성껏 대접하며 선교여비를 마련해주는 복음 전도를 위한 물질 봉사자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0-42)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에 마케도니아 같은 교회와 성도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복음 전도의 판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은 극한 가난과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복음 전도하는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마케도니아 교회의 선교비 지원이 사도 바울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선교에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선교비 지원에 인색하기 그지없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형제들아 !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1-5)

고린도 교회는 마케도니아 교회에 비하면 돈 많은 교인도 많았고, 각종 은사와 능력을 받은 교인들도 많았고, 성경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말많고 은사와 능력의 우열을 따지며 분쟁을 일삼으며 복음전도와 선교비지원에 인색하기 그지없는 교회였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증거가 전혀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거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가장 큰사랑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15:12-13)

월간지 <기독교 교육>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같은 무대 위에 있게 된 어느 노인과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대 위에서는 특별한 순서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전체 순서의 한 부분에 이 두 사람이 시편 23편을 기억해서 낭송하는 것입니다. 먼저 젊은이가 낭송을 시작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최고의 웅변기술과 연기술을 훈련받은 자로 그는 고대의 웅변가가 장엄하게 말하는 언어로 시편의 구절들을 낭송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낭송이 끝나자 청중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습니다. 그에게 다시 한 번 그 놀라운 목소리로 시편 23편을 듣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때 지팡이에 무거운 몸을 의지하고 있던 노인이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으며 같은 무대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연약하고 고르지도 않은 목소리로 시편 23편을 낭송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이 노인이 낭송을 끝내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을 때까지 청중들로부터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청중들은 기도하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이 침묵 가운데서 젊은이가 일어나더니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청중 여러분, 지금부터 제가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시편을 낭독하자 여러분이 다시 나와서 한 번 더 낭송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 노인께서 낭송을 하고 나서 자리에 앉자 여러분은 아주 고요했습니다. 이 차이가 무엇일까요? 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시편 23편을 아는데, 저 노인께서는 그 안의 목자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알고 그것을 유창하고 뛰어난 웅변술로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인기를 얻어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목적은 사람들을 목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인도하여 참 안식과 평안을 얻으며 참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목자 잃은 양떼같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인류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곳입니다. 병들고 가난하며 갇힌 자들과 삶에 지치고 피곤한 인생들에게 참된 평안과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목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야말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무리들이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예수께서 보시니 여러 부자는 와서 많이 넣는데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과부가 구차한 중에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으므로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한 렙돈은 헬라 동전의 명칭으로 우리 돈으로 약 8원에 해당합니다. 두 렙돈이니 16원에 불과 합니다. 이것이 그녀의 생활비 전부이니 얼마나 구차한 생활이었겠습니까? 물론 그 때와 지금과의 구매력의 차이는 있으나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과부가 헌금한 두 렙돈 16원을 2천년 동안 연 8%로 미국의 제일국민은행 예루살렘 지점에 예치시켰을 때 발생한 이자를 계산해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이자 수입만 $4,800,000,000,000,000,000,000이나 된다고 합니다. 참으로 천문학적인 돈입니다.이 땅의 은행들이 계산해도 그렇게 많을진대 좀과 동록이 없는 하늘나라에 쌓아 놓은 그의 보화는 얼마나 큰 보화가 되었겠습니까? 돈이나 금은 보화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주머니에 있를 때는 검은 색이지만 남의 유익을 위해서 또는 선을 위해서 내어준 바 되는 순간 희고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검은 돈은 무거운 납과 같아서 세상을 어둡게 할뿐만 아니라 소유한 자를 땅속으로 가라앉게 하지만 흰색의 돈은 찬란히 빛나는 흰색의 돈이 되어 세상을 밝게 하고 그 사람을 땅에서 하늘로 끌어올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 사랑을 무엇으로 증거하시겠습니까?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희생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손과 발, 시간을 주님께 드려 민첩하게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음성과 보화, 물질을 주님께 드려 복음을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드려 십자가 예수의 삶, 사랑을 증거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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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사랑의 가정

"(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엡5: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엡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엡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이어령의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사랑을 음료수의 성질로 바꿔 본다면 우유와 포도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유의 사랑은 영양가만 있어 그냥 맹숭맹숭하게 살만 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담그자마자 마셔서는 안됩니다. 어두운 지하실에서 묵힐수록 제 맛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시간과 함께 발효하게 됩니다. 포도주는 우리에게 기다림과 참을성을, 그리고 한 방울의 가장 값진 한순간의 그 도취를 위해서 오랜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우유는 짜내는 그 순간이 가장 신선한 것입니다. 조금만 묵혀 두어도 변질되고 썩어 버리고 맙니다. 보자마자 마셔 버려야 불안하지 않은 것이 우유의 특성입니다. 미국 문화로 상징되는 현대의 우유문화는 빨리 소비해 버리는 것, 먹어 없애는 것, 발효를 거부하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란서적인 것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포도주의 문화는 소비보다 발효되는 창조의 그 시간이 더 길고 묵을수록 완전하다는데 그 특성이 있습니다. 요즈음의 인스턴트 러브는 우유의 문화, 녹기 전에 먹어버리는 아이스크림 문화의 대표적인 풍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경주의 석굴암을 구경하던 미국 관관객들의 말이 생각납니다. 석굴암의 부처는 과연 파란 눈으로 보아도 여전히 아름다움과 자비의 극치를 나타낸 <기적의 돌>로 비칠 것인가? 나는 호기심을 품고 그들의 말을 몰래 엿들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닙니다. 무엄하게도 말입니다. 금발의 파란 눈의 한 여인은 부처의 엉덩이쪽을 손가락질하면서 킬킬거리고 웃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투 패트!(too fat, 야! 너무 살쪘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투 패트--. 지금도 나는 그때의 충격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상과 비교해보면 분명히 불상은 너무 살이 쪄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 당신도 생각해 보십시오. 연화대에 앉은 부처를 십자가에 매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 뚱뚱한 예수, 배가 나온 예수, 체중이 레슬러처럼 100kg이 되는 예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에서 보듯이 그 분은 뒤틀린 철사처럼 야위어 있습니다.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아파하고 슬퍼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사랑>은 자비와도 또 다른 것입니다. 자비는 연민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연민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희열만이 아니라 위험과 비탄과 어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것은 편안함보다 <야윈> 모습으로 상징되는 세계입니다.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초상집을 잠시 들여다 보십시오. 제일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사람이야말로 생시에 그 고인을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입니다. ..... 나는 예수님의 모습만을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에게는 원죄의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 전체가 초상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손바닥의 못자국을 보였습니다. 고통의 못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사랑을 증명해 보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손바닥에 찍힌 그러한 못자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옆구리에 창자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예수의 것보다도 작고 희미할 망정, 누군가를 절실히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고통의 상흔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누구나 마굿간에 태어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 같은 괴로운 삶을 선택한 사람인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편안한 삶, 살쪄가는 삶, 부유한 삶을 원한다면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그 못자국을 보여주는 것으로만 서로의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보면서도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는 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당신 마저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준 그 분이 이따금 예고없이 나타나는 까닭입니다..... 》

오늘 본문 중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5:22-24)는 말씀에 기초되는 것은 바로 남편이 아내에게 나타내 주어야 할 사랑인 것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사랑은 첫째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를 위해 그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이기적인 사랑이어서는 안됩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은 사실이나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결코 폭군과 같이 통제하지 않는 사랑과 아내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처한 남자가 50세에 재혼했습니다. 신혼 여행 때 가게의 진열장에 진열된 진주 목걸이를 구경하며 부인이 "저렇게 예쁜 목걸이는 굉장히 비쌀텐데,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으니 진열하겠지요?" 하고 불쑥 말했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났을 때, 이 부인은 불치의 병에 걸렸으며 의사는 남편에게 그녀가 6개월 이상 살 수 없다는 상황을 알려주었습니다. 마침 결혼 10주년 기념일이 되어, 이들 부부는 자기들의 결혼식 때 주례를 맡아 주었던 포터 목사를 집에 초청했습니다. 남편은 이미 60세인데 실제로는 70세 정도로 늙어 보였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농사꾼, 그것도 몹시 가난한 농사꾼이었습니다. 조촐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이 남편은 부인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숨겨 두었던 진주 목걸이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부인의 목에 걸어 주었습니다. 목걸이를 본 부인은 몹시 놀랐습니다. 그것을 살 돈이 남편에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 훔쳐온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때 남편은 설명했습니다. 그는 결혼 당시 아내에게 진주 목걸이를 사 줄 결심을 하고 좋아하던 담배와 맥주를 끊었고, 심한 노동을 하면서도 콜라 한 병마시지 않았으며, 푼돈을 10년 동안 모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What made you do it?)"라고 묻는 아내에게 백발이 된 남편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포터 목사는 "그 큰 남자가 유난히 작은 부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없이 함께 울던 장면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라고 술회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안 먹고 1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그 인내와 절제와 희생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단 하나의 동기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깨끗이 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위대한 고전 학자인 버랄(A.W.Verrall)이 말하기를 고대문명이 사멸한 중요한 병폐의 하나는 여성을 낮추어본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성을 매우 낮추어 보았습니다. 유대인의 아침 기도문 가운데는 유대인 남자들이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방인이나, 노예나, 여자로 만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여성에 관한 유대인의 모든 율법을 저하시킨 것은 유대인의 법에서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한 것 때문입니다. 여자는 아무런 법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여자는 전적으로 남편의 소유물이었으며 남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혼도 남편의 마음대로였습니다. 이혼법은 신명기 24:1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신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유명한 샴마이가 주동이 된 엄격한 랍비들은 "수치되는 일"이란 구절이 오직 간음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그 아내가 이세벨과 같은 악처라 할지라도 간음한 사실이 아니고서는 남편이 그 아내를 이혼시킬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보다 더 우세한 자유주의적 학파의 아키바라고 하는 랍비는 "기뻐하지 아니하거든"이라는 구절을 만일 남편이 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를 발견하면 그는 자기 아내와 이혼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율법을 더욱 더 악화시킨 것은 다음과 사실들입니다. 첫째, 아내는 그 남편이 문둥이나 배교자나 아주 흉한 직업을 가지게 되거나 하지 않는 한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유대법에 의하면 남편은 어떤 이유로든지 아내와 이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어떤 이유로든지 남편과 이혼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결혼법에 있어서 여자는 아무런 힘도 없으며 보호받을 수도 없습니다. 둘째로, 이혼 수속은 비참할 정도로 용이합니다. 어떤 남편이 그 아내와 이혼하기를 원하면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주기만 하면 됩니다. 한가지 조건이 있다면 아내가 가져왔던 지참금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시작될 당시 결혼제도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헬라의 형편은 더욱 더 심각했습니다. 헬라인의 생활에서 불가결한 요소가 바로 매춘행위였습니다. 그들은 합법적인 자녀를 얻기 위해 아내를 얻었고, 또 모든 집안 일을 충실히 관리하도록 하기 위해 아내를 얻었습니다. 헬라 상류 사회의 부인들은 완전히 격리된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부인은 절대로 공적인 생활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절대로 혼자서 거리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식사시간이나 사교적인 모임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헬라에는 법적인 이혼 수속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헬라에 있어서는 가정생활이나 가족생활이 거의 소멸될 단계에 있었으며 절개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바울 당시의 로마는 어떠했는가? 로마의 가정생활은 이미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세네카는 부인들은 이혼하기 위해 결혼하며, 결혼하기 위해 이혼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의 분위기는 간음으로 꽉차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순결은 증대하는 사치 문명 속에서의 하나의 조난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가정의 참된 사랑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이들 말고는 여자들처럼 그리스도께 신세를 진 사람들이 또 없다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인들 하나 하나가 신앙고백을 할 때 물로 씻어 주는 것으로 교회를 깨끗케 하셨으며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세례의 물로 씻고, 신앙 고백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자신에게 합당하게 깨끗하고 흠이 없고 성별된 것으로 티도 없고 주름잡힌 것도 없도록 돌봐 주셨습니다. 사람을 끌어내리는 사랑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거짓된 사랑입니다. 인격을 순화시키는 대신 거칠게 하는 사랑, 거짓을 말하게 하는 사랑, 도덕적인 기질을 약화시키는 사랑, 인간을 더 악한 인간으로 만드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모든 생명을 깨끗케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돌봐주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을 사랑하듯 하여야 합니다. 참사랑은 언제나 사랑하는 자를 소중히 하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봉사를 시키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육체적인 위로를 보증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자기의 편의를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사랑하는 자를 소중히 하는 것입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남편이 아내를 단지 밥을 짓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집안을 청소하는 사람,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일종의 영원한 종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소중히 돌봐주어야 할 책임을 진 사람으로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옵니다. 거실에는 아이들의 옷이랑 장난감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습니다. 부엌에는 아직도 씻지 않은 접시와 컵들이 쌓여 있습니다. 피로한 남편은 불쾌한 낯으로 소파에 몸을 던집니다. 남편은 자기가 직장에 가 있는 동안에 아내이자 아이들 엄마인 부인이 하루 종일 낮잠을 자거나 TV를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남편이 보지 못하는 사이에 엄마는 무척 바빴습니다. 한 살, 세 살, 다섯 살난 세 아이를 돌보며 32회 기저귀를 갈았고, 71회 숟가락을 아이들 입에 대주었으며, 화장실 변기에서 노는 아이들을 13회 밖으로 끌어냈고, 우는 아이들의 눈물을 49회 손수건으로 닦아주었습니다. 상처 난 아이들의 손가락에 9회 반창고를 갈아 붙였고, 32회 손을 씻어 주었습니다. 속옷, 겉옷 등 옷을 입히고 벗기고 한 것이 64회였는데 세 아이가 18회 옷을 더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네를 밀어준 것이 623회입니다. 남편이 돌아올 무렵 엄마는 무척 지쳐 있었습니다. 평화스럽게 잠든 아기의 얼굴만이 땀에 대한 유일한 보상인 이 젊은 아내에게 남편이 찌푸린 얼굴로 돌아앉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행동입니다. 아기 엄마의 작업량에 대한 위의 숫자는 교육학자 쿠즈마 박사가, 젊은 엄마로서 직접 세 아이를 키우며 어느 날 통계를 내 본 자신의 경험이었습니다. 세 아이를 18세까지 키울 경우, 엄마가 이 아이들을 위하여 바치는 시간은 1만 8천 시간입니다. 코넬대학의 두 교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이 둘을 키우는 가정의 경우 직장을 가진 주부는 하루 평균 4시간을 가사와 양육에 할애하고 있었고 남편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시간당 노동의 가격을 8달러로 치면 어머니는 두 아이와 청소, 부엌 일 등을 위하여 연간 1만 2천 달러의 일을 자기의 직업 이외에 하고 있는 셈입니다. 못 아버지들이 고개를 숙일 만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니콜리 교수는 "두 아이를 18세까지 양육하는 어머니는 그녀의 전생애의 3분의 2라는 시간을 바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란 이름은 과연 희생의 상징입니다. 이러한 아내를 돌봐주는 남편의 마음이 참사랑인 것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로서 남편과 아내의 모든 관계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주님 앞에서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있을 때 참사랑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가정을 사랑의 눈동자로 바라보시며 가정의 평화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신 가정들이 되시므로 건강한 가정, 건강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알베르트 카뮈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기를 썼습니다. 아버지는 카뮈를 낳은 지 1개월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하며 카뮈를 키웠는데 그녀는 거의 평생을 알제리에서 가정부로 일을 했습니다. 아들 카뮈는 세계 정상을 달리는 지식인이 되었으나 어머니는 교육도 받지 못한 노동자였으며, 더구나 남편이 죽을 때쯤부터 완전히 귀가 먹어 아들과의 대화조차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카뮈는 다음과 같이 어머니를 회상했습니다. "어머니의 눈동자가 없었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랑의 눈동자는 잠시도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에게 만족과 용기를 주었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끊임없는, 그리고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눈으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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