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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설교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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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머리에

이 책은 나의 사랑하는 평강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매주 발간되는 설교지 <말씀의 샘>에 실렸던 것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교회의 역동성은 물론 가장 중요한 인간성 회복에 있어 근거와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靈), 성령(聖靈)이 부어져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관계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세 가지 형상 즉, 하나님의 불멸성(不滅性), 지력(智力), 자유의지, 기타 여러가지 정서를 포함하는 자연적 형상과 인간 외에 다른 생물을 주관하는 정치적 형상, 하나님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순결성, 진실성 등이 인각(印刻)되어 있는 도덕적 형상 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웨슬레).

인간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나 범죄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성육(成肉)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한 인간의 죄를 십자가로 해결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 성령이 인간의 영에 거(居)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잃어버렸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 이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밝히며 의지와 감정을 바로 잡으며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영과 육을 아울러 정결케 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희열을 맛보게 하며 우리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연합을 실현시켜 주며 우리로 하여금 양자(養子)로서의 확신을 가지게 하며 창조주의 모습을 본받게 하십니다"(웨슬레).

진정한 인간성 회복은 성령이 몸과 혼, 그리고 영을 온전히 지배할 때 이루어집니다(The Spirit has more of me!). 누가복음 12:49의 "불"은 성령의 불로서 복음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처분(處分)하시는 그의 성역(聖役)을 가리키며 소멸시키며 정결케 하는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 책을 읽는 이 마다 성령의 불을 던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변화의 주체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책을 "성령의 불을 던지자!"는 표어 아래 세계 복음화의 기치를 높이 든 나의 사랑하는 평강 교회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삼가 바칩니다.

1996년 성탄절

야음(也音) 산 기슭에서

이 동 희 목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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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주 예수의 은혜(15:1-21)

2. 요긴한 것들(15:22-35)

3. 치료의 하나님(15:36-41)

4. 칭찬받는 자(16:1-5)

5. 우리를 도우라(16:6-10)

6. 복음의 길<1>(16:11-40)

7. 복음의 길<2>(17:1-34)

8. 이 성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18:1-17)

9. 성경에 능한 자(18:18-28)

10.성령을 받았느냐?(19:1-7)

11.말씀의 승리(19:8-20)

12.변화된 도시(19:21-41)

13.예수께 받은 사명(20:1-27)

14.사명자의 생활(20:28-38)

15.일사각오(21:1-16)

16.로마로 가는 길<1>21:17-40)

17.증인이 되라(22:1-30)

18.로마로 가는 길<2>(23:1-35)

19.로마로 가는 길<3>(24:1-27)

20.로마로 가는 길<4>(25:1-27)

21.나와 같이 되기를(26:1-32)

22.여러분이여, 안심하라!(27:1-44)

23.드디어 로마에!(2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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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 예수의 은혜

"(행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 (행15: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 (행15: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행15: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행15: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행15: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행15: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행15: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행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행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행15: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행15: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행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행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행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행15: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행15: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행15: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행15: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행15: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본장은 유대교와 기독교, 율법과 복음을 갈라 놓는 분수령입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로 계속 남을 것인가 아니면 세계를 구원하는 복음의 세계화로 발걸음을 내디딜 것인가 하는 결정적이고도 숨막히는 장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에 대한 전도로 초대 교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오게 됨으로 몇 가지 문제점들이 제기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전체 정신적 배경은 선민 사상입니다. 자기 민족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소유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자기들의 특별한 소유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선민의 가장 중요한 표시로 간직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바로 할례에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의 한 일원이 되기 전에 할례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가? 특히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를 유일한 참 종교로 생각했고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종교로 간주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행15:1)....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는 어린아이의 성기의 끝을 자르는 예식으로서 난지 팔일만에 행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할례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그 예식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창17: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창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헌신의 약속을 살 속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 할례의 시행은 피의 제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피로써 죄를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할례를 시행할 때도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어린아이의 양피를 자를 때 피가 쏟아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생명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헌신의 표시는 영원히 그의 살 속에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의 표시가 할례받은 자의 살 속에 영원히 남아 있어 그것을 기억하며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증표로서 처음 시행되었던 할례 의식은 할례 그 자체보다는 그 할례 속에 담긴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신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말라."

예레미야 선지자도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고 외칩니다.

"(렘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마음 가죽을 베라"는 말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렘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신약의 스데반도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행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할례가 가진 근본적인 계약의 의미는 망각하고 단순히 할례를 받았다는 그 사실로 만족하고 할례 표시만 있으면 무조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곧 영적 할례를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할례받은 성도들이지만, 고넬료는 이탈리아 장군으로서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를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할례를 받지 않았으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그 곁에 있던 강도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고백을 하고 죽었는데 할례는 고사하고, 성수주일이나 헌금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으로 간단한 신앙 고백을 통하여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나 율법 자체가 구원의 길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빌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같은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다음 성구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를 받음은 물 속에 옛 사람을 장사 지내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세례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의 깊은 뜻, 즉 거듭나는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그런데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주)로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고 유대교의 모든 전통으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전파했던 복음과는 확연히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이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세운 이방인 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런 이단 사상을 퍼뜨리며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었습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라든가 "세례받지 않았으면 구원받지 않았다."라든가 또는 극단적으로 "우리 교회만이 유일한 참 교회이기 때문에 당신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라든가 "우리 교회는 대학교로 치면 서울대학교와 같은 곳이어서 2, 3류 대학이나 지방대학교와는 다르다."라든가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옛날의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이 가르쳤던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이단 사상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잘못된 가르침들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일을 행해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모든 거짓된 종교들의 기본원리입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덧붙여서 이것이나 저것을 행해야만 한다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천국에 가려는 사람은 오직 주 예수의 은혜에 의해서만 그곳에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행한 행위(일, 노력, 공로)에 의거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직 한 가지 대답이 있을 뿐입니다.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례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이단사상을 가르치는 이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바울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속아서 주님으로부터 떠났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로 대단한 충격을 받았고, 아주 강력한 말로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갈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기독교 대신에 유대교를 가르치고 있었던 이런 거짓 교사들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대표자들로서 예루살렘에 파송되었고 예루살렘에서는 이 문제로 특별한 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변호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최초로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할 자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변호할 특별한 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변호합니다.

"(행15: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행15: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계속해서 베드로는 강변합니다.

"(행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베드로는 그 모든 문제를 위대한 한 마디로 결론을 맺습니다.

"(행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가 내린 복음의 영원한 결론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거듭남으로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구원얻은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것은 전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의 은혜를 감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의 거짓된 종교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Do and Live) 입니다. 바울의 참 복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믿으라 그러면 살리라!"(Believe and Live)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여러분이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을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막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막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막7: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부패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죄인으로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인 뉴턴(John Newto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늘 나라에서 세 가지의 놀라운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틀림없이 와 있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 놀라고, 둘째는 하늘 나라의 문턱에도 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사람이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셋째로는 나 같은 인간이 하늘 나라에 들어왔음을 알고 놀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관찰로는 누가 천국 시민이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덕적인 행위를 보고 선인과 악인을 판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전혀 각도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나는 착한 일을 했습니다." 하고 내세우는 자칭 선인보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는 태도(믿음)를 더욱 높이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기는 것인데 인간이 아무리 도덕적인 노력과 선행과 할례를 받는, 그런 겉 모양을 뜯어 고치는 일을 해도 그런 것으로는 절대로 죄를 씻어 내릴수 없습니다. 성령의 내적 역사로 십자가의 보혈의 생명이 우리 마음 속에 흘러 들어갈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 예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할례냐 무할례냐가 인간을 구원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갈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영원한 복음의 진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라는 이 한 마디는 루터의 결론이었고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루터는 이것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은혜란 말은 루터 이전에도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은혜에 대하여 바른 해석을 내렸던 것입니다. 은혜란 살 수도 없고 팔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공적에 의해서 포장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중세기의 카톨릭 교회가 믿고 있었듯이 교회의 성례전에 의해서 신비적으로 내려지는 성격의 은사도 아닙니다. 루터는 '은혜란 하나님의 가운데 이름(middle name: 서양인은 성과 이름 사이에 가운데 이름을 가짐)'이라고 불렀습니다. 은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은혜란 바로 말 구유에서 태어나신 하나님,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롱펠로우(미국의 시인)가 휴지를 집어들어 갑자기 떠오른 시상(詩想)을 적은 것이 6천 달러에 팔렸습니다. 휴지에 위대한 문학성이 더해진 값이었습니다. 롱펠로우는 보통 메모지에 사인을 해서 1백만 달러를 움직일 수도 있었습니다. 값없는 종이 조각의 배후에 든든한 서명이 더해진 값어치였습니다.

미국 정부가 종이 조각에 독수리 도장을 찍으면 그것은 백 달러짜리 지폐가 되며 전세계 가게에서 받아 줍니다. 종이 조각에 정부 보증이 더해진 값입니다.

피카소가 종이 조각에 데생한 것은 집 한 채 값입니다. 무가치한 종이에 천재의 이름이 붙어 엄청난 가치로 변한 것입니다. 루터가 깨달은 은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무가치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가해질 때,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가치가 생긴 것입니다. 내가 구원함을 받아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엄청난 가치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들이 되시었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충만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에 무한한 가치가 창조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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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긴한 것들

"(행15: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행15: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행15: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행15: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행15:26) (25 절과 상 동) (행15: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행15: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행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행15:30)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행15: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행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행15: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행15:34) (없 음) (행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여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공회를 통해 이 교회 지도자 야고보가 성령과 함께 내린 이방인 입교에 관한 아주 요긴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판단은 이방인이 아무런 제재나 누구의 방해도 없이 교회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몇 가지 요긴한 것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곤란한 문제 중 하나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8장에서 아주 상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전8: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고전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두 번째 요긴한 것은 목매달은 것과 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규례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17:12)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 하였나니 (레17:13)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 먹을 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지니라 (레17: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이 간단한 규례를 지킴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음행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부정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순결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음행을 멀리하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1) 우상에 바친 음식을 먹음으로써 범하는 영적 음행(Beza, Seldon).

2) 음행을 조장하고 매개하는 포주(抱主)의 죄(Salmasius).

3) 우상의 신전에서 행하는 육체적 음행(Stolz, Heinrichs).

4) 축첩 행위(J. Calvin).

5) 근친혼(Lightfoot).

6) 이교도와의 결혼(Teller, Bruce).

7) 재혼(Schwegler).

8) 돼지 고기(Bentry).

9) 금지된 혈족간의 결혼(Haechen).

우리는 음란한 사회(An X-Rated Society)의 한 복판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음란한 시대, 음란한 사회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승리할 수 있겠는가? 모세의 경우를 살펴봄으로 승리의 비결을 배워 봅시다.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하여 참았으며 (히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히11: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모세가 승리하기 위해 행한 세 가지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들도 모세와 같이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삶을 승리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승리하심으로 가정과 지역사회가 승리하시고, 영적이고 영원한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 승리를 위해 아무리 값비싼 대가를 치루더라고 단호한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내린 단호한 결단의 방법들을 다음 성구에서 볼 수 있습니다.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He refused> (히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He chose> (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He esteemed>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첫째,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He refused>", 즉 모세는 바로의 손자되기를 거절했습니다. 여기 바로(Pharaoh)는 누구입니까? 그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왕입니다. 모세는 그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애굽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왕자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등을 돌렸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누리고 즐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거절했습니다. 모든 기쁨과 보물과 그리고 권력과 특권 등에 대해 등을 돌렸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거절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모든 기쁨과 보물, 그리고 권력과 특권 등 만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He chose>" 는 것입니다. 애굽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했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모세가 애굽의 모든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He esteemed>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겼다"(esteemed)라는 말은 부기(簿記)에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모세가 회계 장부에서 손익계산을 했다는 것입니다. 애굽을 선택하게 되면, 부귀와 기쁨, 보물과 권력 그리고 모든 특권 등 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들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 잠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해서 주께서 모세 편을 들어주신다면 그것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모세는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모세는 희미하게나마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모세는 회계 장부의 손익을 계산하고 하나님 편에 있는 권세와 기쁨,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분 관계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선견지명이 없으나 성경은 우리에게 긴 안목을 가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안목, 믿음의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은 "잠시"이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엄청난 부요함들이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목, 믿음의 안목, 영안(靈眼)입니다.

예를 들어 개에게서 맛있는 뼈다귀를 뺏어보십시오. 그것은 개가 짖도록 하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스테이크를 던져보면 그 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개는 뼈다귀를 버리고 스테이크를 입에 물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부모들이 저지르고 있는 실수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많은 시간을 "이것을 하지마라", "저것을 하지마라", "저것은 나쁘다." 라는 등을 말하는데 허비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무엇이 나쁜것인가를 듣게 되지만 예수님의 부요함에 대해서 듣게하거나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 세상보다 더 귀하고 좋은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모세는 영원을 선택했습니다. 죄악의 낙을 택할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기쁨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결단을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확고부동한 결단입니다. 모세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거절하고 하늘의 영원한 기쁨과 부요함을 선택했습니다.

음란한 이 시대에 여러분들이 승리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값비싼 대가를 치룬다할지라도 먼저 모세와 같은 단호하고 철저한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죄악에서 완전히 떠나야만 합니다. 모세처럼 죄악을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히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모세는 먼저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고 다음으로는 완전히 애굽을 떠났던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바로는 악마, 사탄의 상징입니다. 바로는 모세가 애굽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몇가지 영특한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사탄은 영악한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타협안은 성도들에게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8장은 모세가 도전받은 사탄의 4가지 트릭(속임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 술수는 이런 것입니다.

"(출8: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한 땅은 물론 애굽 땅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애굽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의 첫 번째 속임수였습니다. 어둠의 땅에 가서, 노예의 땅에 가서, 타협의 땅에 가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 즉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같은 속임수를 사용합니다. 주일 날 예배당에 가서 서로 기독교인들과 교제를 나누되 세상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세련되고 품위있게 아주 좋은 옷을 입고 예배를 드려라 그러나 애굽을 버리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갈보리(고난의 십자가)보다 더 좋은 문화와 문명을, 그리고 중생보다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많은 교회와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 것은 사탄은 예배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땅에 가서" 예배를 즐기고 너희 하나님께 희생드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런것으로는 결코 중생하거나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 주일날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는 것을 사탄은 별로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이 이 세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떠나지 않고서는, 즉 포기하지않고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마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그곳을 완전히 떠나야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속임수는 이렇습니다. 바로의 두 번째 타협안입니다.

"(출8:28)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예배를 드리러 가긴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되 너무 열심히는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헌신적으로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믿고 적당하게 죄의 경계선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긴 가되 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고 죄의 주변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탄의 타협안대로 살게 되면 주님을 모독하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11: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고후6: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가 애굽 사람들, 즉 믿지않는 이방 사람들과는 구별되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계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죄의 경계선에서 적당하게 타협적인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불신자나 무신론자들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타협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10:8)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 되 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뇨."

이에 대한 모세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출10:9) 모세가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

바로는 다시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출10:10)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니 너희 남자들만 가도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린애들까지 데리고 가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악하다고 볼 것이라는 참으로 그럴듯한 속임수입니다.

"(출10:11)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너희가 가서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것은 좋으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위험하니까 너희 가족들은 애굽에 놓아두고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우리가 가족적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을 사탄이 증오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부모들이 아이들까지 천국에 데려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사탄의 이 타협에 속아 많은 아이들이 죽어 지옥에 떨어질 형편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이 속임수 전략에 속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가정 구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창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행11: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사탄이 원하는 바는 당신 혼자만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가족들은 버려두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나머지 가족들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구세군의 창시자인 캐더린 부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나는 나의 모든 자녀들 없이는 당신 앞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부모들이 자신들은 구원받을지 모르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죄의 경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자녀들과 가족들이 지옥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네 번째 타협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10:24)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이제 마지막으로 바로의 타협안은 너희 가족들을 다 데리고 가서 너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애굽에 두고 가져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족들은 모두 데리고 가서 예배를 드리되 물질이나 당신의 사업은 주님께 바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당신의 무엇이든지, 자녀이든 남편이나 아내이든, 부모이든, 재물이든간에 붙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네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모세가 바로에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출10:26)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곧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우리의 생명, 우리의 자녀들, 우리 재물이나 사업,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바쳐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같은 단호하고 확고부동한 결단을 내렸습니까? 모세와 같이 애굽을 완전히 떠날 때 모든 것들을 함께 가지고 떠났습니까? 그럴때만이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현명한 결단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역동적인 구원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그러한 결단과 애굽을 완전히 떠나는 생활로 하나님의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히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히11: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애굽을 떠난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세를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결단을 내려 완전히 애굽을 떠나야만 합니다. 단지 그럴때만이 역동적인 구원의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을 떠나기 전날 밤에 점도 흠도 없는 온전한 수양을 잡아 희생 제사를 드리고 양을 잡아 구워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양은 보호하심과 권세를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 희생되셨습니다. 그 분의 희생을 통해 죄의 형벌과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되었을 때 그 분의 피로써만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애굽에서의 첫 번째 유월절 전날 밤의 세 아들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두 아들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이고 세 번째는 애굽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 밤 죽음의 천사를 그 땅에 보내셨습니다. 천사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문설주의 어린 양의 피를 찾았을 것입니다. 만약 죽음의 천사가 문설주에서 피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집의 초태생은 모두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장남이 아버지에게 말하길,

"아버지, 우리는 아주 좋은 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장남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가르쳐준 것을 잘 시행해야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렇다, 아들아. 양을 한 마리 고르자. 이것은 어떻니?"

"아버지, 그것은 참으로 온전한 양입니다."

"좋다, 아들아 이 양을 희생제사로 드리자. 이 양이 너를 위해 죽어야겠다. 이 양이야말로 너의 대속물이다. 자 양의 피가 여기 있다. 문설주에 바르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바로 행했다."

아들이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정말 놀랍습니다."

그 후 아들은 그 밤에 자러가서 편히 푹 잣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스라엘 집에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저는 모세가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장남입니다. 우리가 아주 좋은 양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옳다, 아들아."

"아버지, 저는 온전한 양이 있음을 보기 원합니다. 저는 문설주에 피를 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는 동의했으나 이 아들은 그가 말한 것을 그 아버지가 그대로 시행할 것이라는 확실한 언질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아들은 엎치락 뒤치락하며, 걱정하기도 하며, 울기도 하며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해가 떠올랐을 때 그는 여전히 살아서 외쳤습니다.

"나는 해냈다. 할렐루야!"

자 어느 아들이 안전했습니까? 그들 둘 다 안전했습니다. 그 피, 어린양의 피가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2등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피가 우리를 안전하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확신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써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그 둘째 아들처럼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 번째 아들, 즉 바로의 아들을 생각해 봅시다. 바로의 아들이 바로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당신은 이 히브리인들을 아십니다. 그들의 지도자 모세가 말하길, 오늘 밤에 죽음의 사자가 온다고 합니다. 모세는 또 애굽의 초태생일지라도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나는 당신의 장남입니다. 아주 좋은 양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바로는 말하길,

"아들아, 너 미쳤냐? 그것은 히브리 종교란다. 우리에게는 애굽의 제사장이 있단다. 우리는 우리 문화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방식이 있다. 아들아, 애굽의 종교(신)는 우리를 위해 아주 선하시단다. 양의 피에 대해 쓸데없이 걱정하지 마라. 밤새도록 네 문 밖에서 너를 위해 보초를 서게 될 것이다."

성경은 바로의 아들이 그 날 밤 죽었다고 말합니다. 왜 바로의 아들이 죽었습니까? 어린 양의 피가 아니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어린 양을 십자가에 희생시켜 그 피로써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예수의 피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확신하게 만듭니다.

음란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단호한 결단을 내리고, 죄로부터 완전히 떠나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신실한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약속하십니다. 오늘날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는 언젠가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천당아니면 지옥입니다. 교회에 가입했다고, 세례받았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당신의 심장에 흐르게 될 때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육간에 음란한 사회, 음란한 시대에 이 요긴한 것들을 잘 지키시므로, 그리고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여러분의 삶에 강같이 흘러 넘치시므로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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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치료의 하나님

"(행15: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행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하여 (행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행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어느 날, 목공소의 연장들이 회의를 열었습니다. 사회는 평소와 같이 <망치>가 맡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회의 도중 회원 중 몇몇이 반기를 들고 사회자 망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망치는 항상 깨고 부수는 자요, 늘 소란을 피우는 자니 여기서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망치가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 스스로도 나의 결점을 인정하므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나와 함께 떠나야 할 자가 있으니 바로 <대패>입니다. 왜냐하면 대패가 하는 일에는 전혀 깊이가 없고 늘 남의 껍질을 감싸기보다는 벗기기 때문입니다."

이에 화가 난 대패가 말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자(尺)>도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는 자기만 옳은 듯이 항상 남을 측량하므로 모두에게 덕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조용히 듣고 있던 <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톱>을 지적하면서,

"톱은 연합 운동보다 분리 운동만 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가장 불필요한 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톱은 사포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사포(sandpaper)! 너도 너무 거칠어."

이렇게 서로가 한창 다투고 있을 때 목수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연장들을 총동원하여 순식간에 아름다운 설교단을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닌가! 서로 약점만을 들추며 다투던 그들은 결점 많은 자신들이 이처럼 좋은 일에 쓰임받은 사실에 감탄하면서

"우리가 나사렛 목수의 동역자들이구나!"

하며 좋아했습니다.

바울은 버가의 일로 해서(13:13) 마가를 그와 함께 일할 일꾼으로 동행시키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바나바와 심히 다투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모든 면에서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즉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버린 채 상대방이 완전하기만을 기대합니다. 따라서 결점을 하나라도 발견하게 되면 상대방에 대해 실망을 금치 못하며 또한 그것을 가지고 심하게 질책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바울이 그 중요한 사역에서 마가를 제하여 버린 것처럼 자신의 일이나 삶의 중요한 부분에서 그 사람을 제외시켜 버립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의 특성을 가진 한 사람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닌 여러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결점이 많은 제자들만을 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그 결점을 들어 제자들을 질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분은 그 제자들을 들어 당신을 증거하는데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는 이방 교회 중에서 막강한 교회로서 교사 및 전도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지역에 설립한 교회들은 매우 미약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에게 안디옥을 떠나 다른 이방 교회들을 돌아볼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러자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갈 것을 주장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이 자기의 사랑하는 조카이고 한 번의 실수는 누구나 있는 법이니 용서하고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함께 가겠다고 우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완강하게 마가를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로서 제1차 선교 여행 때에 성경읽는 것을 도와 바울 사역에 동참하였으나 도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이방선교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한창 어려웠던 선교 사역의 초기에 고난을 함께 나누지 아니하고 도중 이탈한 마가 요한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와 불신감을 가지고 그를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로 인해 심히 다투어 서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이들은 남다른 성령 충만함과 은사를 경험한 사람들이지만 바울 자신의 고백처럼 육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 14:15)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성령 은사를 체험했다고 해서 얼굴에 광채가 나고 어깨에 날개가 돋아서 하늘을 날아 다니는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육의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다투고 영원히 갈라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인간적인 냄새를 발견하게 될 때 굉장한 실망과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변화받지 못한 육의 본성, 고집, 자존심, 욕심, 편견들 때문에 고통을 경험할 때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희생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또한 타인에 대하여 이해와 동정심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의 허물을 덮으며 변화를 위해서 함께 힘써가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충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비록 다투고 헤어졌으나 그 누구도 복음 전도의 사역를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들이 비록 인간적으로는 충돌했지만 주님의 일은 끝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해 나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우리의 생각과 주장을 고집한 나머지 신앙의 자해 행위를 하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도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많은 허물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가진 그 많은 실수와 헛점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 복음 전도의 사역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하게 다투어 갈라지게 하고 그래서 양쪽이 모두 약화되어서 능력있게 복음 전도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의 실수를 치료하사 도리어 악을 선용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말미암아 두 개의 선교팀이 생겨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실수를 치료하시며 도리어 두 개의 선교팀으로 일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저지르는 실수도 치료하시고 두 배로 축복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들은 신앙이나 교리에 관한 문제 때문이 아니라 성격 문제와 실제적인 필요성 때문에 결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에게는 각기 마음에 맞는 동역자가 필요했으며 그것이 사역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동역자를 주셨으니 바나바에게는 마가 요한을, 바울에게는 실라를 동행케 한 것입니다.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회중 가운데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헬라말을 유창하게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과 수리아 안디옥에서 실라와 교제하며 훌륭한 동역자로서의 호감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새로운 동역자는 앞으로 펼쳐질 바울의 이방 선교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본문의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사건을 통하여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바나바를 중심으로 한 선교팀과 바울을 중심으로 한 선교팀, 이렇게 두 선교팀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복음이 더욱 확산될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불화를 이용하시어 이방 선교 사역을 갑절로 이루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그들의 친척이 많이 살고 있었던 구브로로 돌아가 전도하였으니 마가 역시 바나바의 새로운 동역자로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실라와 함께 안디옥 교회의 후원을 받으며 수리아와 길기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으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하는 실수를 하나님은 치료하시므로 교회들을 더욱 강성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도망자 마가 요한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투철한 소명 의식이 있어서 바울의 선교 여행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선교팀의 지휘자인 바나바와는 친척관계이고 그리고 마가의 어머니도 자기 외아들이 이제는 자기 주변을 떠나 장부로서 성숙하여질 시련과 단련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는 판단에서 은근히 격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중도에서 이탈한 마가를 바울은 <쟁기를 잡고 뒤를 보는 자>로 정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가의 이탈은 커다란 실수였습니다. 사실 신약에서 이 사건 이후 10년간 다시는 마가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노년에 로마 감옥에 갇혀 지낼 때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마가를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딤후4: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딤후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도 이제 마가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부탁대로 마가는 감옥의 바울을 찾아가서 그의 시중을 든 것이 분명합니다.

"(골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이러한 바울의 간곡한 당부가 있기 전 골로새 교우들이 마가를 냉담하였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마가를 높이 천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과 마가 두 사람 모두가 원숙해졌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언제는 쓸데 없다고 버리더니 이제는 와서 도와 달라고 그래. 달면 삼키고 쓰면 ?어버리긴가?>

<이를 두고 토사구팽(?死狗烹)이라고 하지 않았든가?>

이렇게 마가 요한은 말할 법도 하지 않습니까? 한 번 절교한 사이지만 그러나 마가가 주를 위해 일을 잘하는 것을 볼 때 주저하지 않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기꺼이 응답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의 용서인 것입니다.

마가는 이 감옥에서 바울을 시중드는 동안 로마 감옥에서 베드로의 시중도 들어 베드로를 통해 주님의 이야기를 듣고 마가 복음을 기록하는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마가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벧전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마가 요한이 줄곧 바나바에 충실하였고 베드로의 충성스러운 동행자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가공할 로마의 마멜틴 감옥은 감옥이 아니라 습기 차고 어두운 바위를 뚫은 땅굴이었습니다. 이러한 감옥에서 마가는 바울과 베드로를 시중들며 위대한 마가복음을 기록했기 때문에 마가복음은 예수를 <고난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가가 저질렀던 뼈아픈 과거의 경솔한 행동을 오래 전에 충분히 이해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자신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否認)하는 크나큰 시행착오에서 치유가 된 경험자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한 번의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가를 영원히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마가의 실수를 치료하시고 그를 기독교 역사상 제2 복음서를 기록하는 위대한 사역자로 변화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초기에 실패한 자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2복음을 마가의 복음이라고 알려진 이 마가를 보고 배워야 할 것입니다. 마가의 한 번의 실수를 치료하시며 주를 위하여 100배로 일하도록 축복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실수와 삶의 실패도 능히 치료하시며 영육간에 능력과 축복을 베푸시므로 주를 위해 100배로 일하는 능력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주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변화받지 못한 육의 약한 본성으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마가는 자기 자신의 약함으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좋은 결과까지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치료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는 데서 생기는 실수이건 스스로 약하여 저질러지는 실수이건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그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고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도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실수이건 어떤 약점이건,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신앙의 문제이든 생활의 문제이든, 가정의 문제이든 주님의 교회의 문제이든 구별없이 주님께 나올 때마다 허물과 상처투성이의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기면 하나님의 선하신 치료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낭패와 실수와 영육간의 병고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경험하는 믿음과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약하고 헛점이 많고 실수가 많은 인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홍해를 건너고 겨우 사흘 길을 와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을 때 저들에게는 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써서 찾은 물은 써서 마시지도 못하는 물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서 한 나무를 지시하시고 물에 던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자기를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여호와 라파"라고 부릅니다.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 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그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역사를 통하여 지금도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물만이 아니라 환경, 몸, 질병, 영혼까지도 치료하시는 역사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의 몸과 영혼 그리고 삶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치료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치료하는 광선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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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칭찬받는 자

"(행16: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행16: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행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행16:4)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행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바울은 온갖 역경을 참고 견디어 내는 강철같은 강인한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진 태형(笞刑)에, 암울한 감옥 속에 수도 없이 들락날락했으며, 풍토병에 시달리기도 하며 춥고 굶고 도적에게 박탈당한 일도 수도 없었습니다. 불량배들과의 격돌과 음모가 쉬지 않고 기다리는 그런 인생 행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의 아들이라고 불리우는 디모데는 정반대입니다. 디모데는 몸이 여자같이 약했던 것입니다.

"(딤전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 말씀의 상황을 해석하여 보면 디모데는 신경성 위장장애를 일으키는 병약한 몸매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성격은 현저히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우정 관계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고귀한 인간 관계였습니다. 태산과 같은 장부의 의지와 만난(萬難)을 어거(馭車)하는 결단과 인내심이 있는 바울의 초인적 인격에 비하면 일견 디모데는 섬세한 인상의 지극히 소극적이고 유약한 인격이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곁에서 바울의 열화 같은 성격과 오래 동안 조화를 이루며 자기의 역할을 시종 충직하게 감당한 그의 인격성은 새삼 감탄할만 것이었습니다.

나이도 바울은 50세가 넘었고 디모데는 아직 10대의 소년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연령의 큰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주 안에서 한 번 맺은 우정은 지극히 이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 사이같이 긴밀한 것이었습니다.

"(빌2: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비록 능력과 개성, 그리고 연령의 차이는 크면서도 지극히 잘 조화되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절묘한 한 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쪽은 영적인 아버지, 다른 한쪽은 사랑받으며 칭찬받는 믿음의 아들입니다. 저희들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슬픔이나 기쁨이나 한 심장의 고동처럼 서로를 협력하고 서로를 열어 주고 나눈 놀라운 16년간의 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조화는 사랑과 성령으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디모데는 10대 소년 시절에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젖어 있었고 그의 모친과 조모가 그와같은 경건한 가정교육을 시켜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딤후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의 모친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는 경건한 유대인 부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이방인으로서 그의 아들 디모데가 할례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모친이 아들인 그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라는 뜻의 디모데라고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보아 경건한 유대인의 감화와 교육으로 아들을 양육하는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외조모 로이스의 경건은 바울을 그토록 감동시킨 모범이었습니다.

"(딤후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독일에는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할머니의 훈계는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할머니는 손자가 귀여워 교육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해학(諧謔)입니다. 그러나 순전한 신앙과 경건한 부녀인 로이스의 훈계는 디모데에게 그대로 전수되었습니다. 체격도 허약한 오늘날 '마마보이' 스타일의 디모데를 바울이 선교 사역의 동역자로 선택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디모데는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행16: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디모데는 그 주변의 교회 회중에게 그의 성실한 신앙과 예사롭지 않은 충성된 봉사로 널리 감명을 끼친 청년이었습니다. 훗날에 바울은 디모데 전서 3장 7절에서 "(딤전3: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 감독 자격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디모데가 참으로 족히 감독 자격이 있는 자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연령보다 30세나 어린 후배를 선택하여 훈련을 하였다고 하는 것은 선교 전략적인 의미에서 참으로 현명한 처사인 것이었습니다. 디모데에 대한 칭찬의 내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돕는 자였습니다.

"(행19: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잘 알고 진실하게 생각하는 자였습니다.

"(빌2: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빌2: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디모데는 많은 연단을 받아서 인격적으로 준비된 사람일 뿐 아니라 자기 유익보다는 교회와 하나님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 하였고, 바울과 함께 감옥에도 갇혀서 고생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히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디모데는 눈물이 많았던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른 사람들로 인하여 눈물을 많이 흘렸던 것입니다.

"(딤후1: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러한 디모데는 믿음의 형제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고 또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형제들은 그를 칭찬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집사를 뽑을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할 뿐만 아니라 "칭찬받는 사람"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을 사람은 무엇보다도 성도들 가운데서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비판을 받거나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은 제아무리 은사의 체험을 가졌어도 영적인 지도자가 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비록 신앙의 연조는 길지 않고 강한 지도력은 없어도 교회 안에서 좋은 소문이 나고 누구든 추천하기를 꺼리지 않는 사람이 직분을 받게 되면 교회에 덕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칭찬받는 사람들이 많아 질 때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행16:5)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해가는" 참된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부친은 헬라인(이방인)이어서 아들 디모데는 할례를 받지 않았고 또 할례를 받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기 때문에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 때문에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준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되게 하기 위하여 "(고전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는 바울의 의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죄인이 아니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연히 유대인들에게 장애가 되지 않게 하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죄인과 하나가 되시기 위하여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장애가 되지않고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시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 걸머지셨기 때문에 죄인처럼 행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기독교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보탬이 되는 것이라면 자기의 권한도 유보하고 율법에 속한 자처럼 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과는 접촉하기를 꺼려하였고 따라서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그들과 접촉하여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게 되기 때문에, 복음에 손상이 가지 않는 범위에서 율법의 요구를 들어준 것입니다.

"(고전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고전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로 이것이 성숙된 기독교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스위스인인 아브라함 버닝거는 어렸을 때, 온 식구들과 함께 존 웨슬리가 탔던 배를 같이 타고 항해를 하다가 풍랑에 부모를 다 잃은 고아였습니다. 그는 젊은 기독교인이었고 그가 살던 곳은 덴마크의 식민지였는데, 그는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법에 의하면 노예끼리만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버닝거는 생각 끝에 총독에게 편지를 써서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자기를 노예가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는데, 그의 간절한 편지에 감동을 받은 총독은 덴마크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감동을 받은 왕은 버닝거를 노예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만 특혜를 주어 평생토록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노예들과 접촉할 수 있게 하여 그곳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용감한 헌신적인 결단이 그로 하여금 복음 전할 기회를 갖게 한 것입니다. 디모데는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었지만 의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기 싫은 일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도 참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기의 특권이나 권한을 유보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을 절제하는 일이 있을 때 교회는 더욱 굳은 믿음을 갖게 되어 부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많지만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조금이라고 장애가 된다면 스스로 자신을 쳐서 복종하게 하고 절제하는 용기를 가져하는 것입니다.

"(고전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고전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디모데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함은 율법대로 하고자 함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은혜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교회내에도 율법적인 성도가 있고 은혜로운 성도가 있습니다. 율법적인 성도은 무엇인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죄짓는 것 같아서 불안해 하고, 남의 잘못에 대하여 예민하며, 자신은 실수하지 않으려고 늘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잘할 때에는 으스대기 쉽고 잘못하면 실망도 잘하는 사람은 대개 얼굴이 굳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은혜 중에 사는 사람은 남의 실수에 대해서 잘 용납하고 자기의 실수도 스스럼없이 드러내며, 상대방을 격려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대부분 부드럽고 따스함이 있습니다. 율법적인 사람은 마치 군대 계급 사회에 속한 사람과 같아서 자기 일은 잘하지만 인간미가 적은 반면에, 은혜로운 사람은 사랑이 풍성한 가정에 속한 식구 같아서 푸근함이 있습니다. 율법적인 교회보다 은혜로운 교회가 결국은 더 견고해지고 뿌리깊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강건해지기 때문입니다.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어느 수도원에 유명한 수도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수도자는 단식도 자주하고 기도 역시 꼬박꼬박 했으며, 자신의 수입 중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고 신도들이 찾아오면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그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난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했고, 집안 살림도 꾸려가야 했는데 배운 것이 없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도둑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수도자는 어느 날 과부를 불러 호되게 꾸중했습니다.

"이 나쁜 여자야,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지도 않느냐?"

과부는 계속되는 꾸중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과부는 시간이 흐르자 또 먹고 살기 위해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수도자는 과부가 죄를 지을 때마다 돌을 하나씩 쌓았는데, 마침내 그 돌이 커다란 돌무더기로 쌓여지게 되자 다시 과부를 불러 꾸중했습니다.

"이 죄악의 여자야! 이 돌무더기를 보았느냐? 이것은 네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내가 던져 놓은 돌이다. 천벌을 받아도 시원찮을 이 죄인아! 아직도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단 말이냐?"

그러자 과부는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께 이토록 비참한 자신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날 밤 죽음의 천사가 수도자와 과부의 영혼을 거두어 갔습니다. 그런데 수도자는 지옥으로, 과부는 천당으로 갔습니다. 수도자가 천사에게 항의하자 천사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너는 명예를 위해 살았고 자존심과 교만에 가득 차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기는커녕 아픈 상처만 주었고, 이웃의 환경이 좋아지도록 노력하지 않았느니라. 그래서 너를 지옥으로 보냈다."

우리는 율법적인 사람이 되어서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요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 은혜로 사는 것이지 율법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칭찬받는 성도들이 많을 때 교회는 더욱 견고해지고 믿는 자의 수가 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주변의 분위기와 환경을 좋아지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디모데처럼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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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를 도우라

"(행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행16: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행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행16: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오늘 본문의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시아에 복음 전하는 것을 막이신 이유를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일본 철학자 와즈쯔 데쯔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세 가지 풍토를 설명하면서 각 풍토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고 신앙의 형태도 조금씩 다르게 형성된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첫 번째 풍토로서 사막풍토를 말합니다. 이 사막풍토는 모래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극심한 메마름이 있습니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풍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땅보다는 늘 하늘을 바라보고 우러러 보면서 희망을 찾아내곤 했습니다. 이 풍토에서는 하나님이 언제나 조물주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창대케 되리라(창 12:2)'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막풍토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사막풍토에서는 민족을 이루어 힘을 합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살아가기에 적합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땅에서 먹을 것을 생산하는 게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에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하나님 개념, 종교 개념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유수한 유일신 종교들의 대부분은 사막풍토에서 발생했습니다. 유대교를 비롯하여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이 사막풍토에서 생겨난 종교들입니다.

두 번째는 목장풍토입니다. 목장풍토는 유럽대륙을 말합니다. 양들을 키우기에 알맞은 풀과 온화한 기후를 가진 구라파의 풍토를 말합니다. 특별히 복음이 세계적인 것으로 발전되게 한 남유럽은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곳은 사막과 같이 메마르지 않고 모래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강도 있고 풀도 자랍니다. 그러므로 양도 잘 키울 수가 있으며 자연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이들은 희랍사람들이 좋아하는 관념, 즉 '이데아'라는 철학적인 개념을 찾아냈습니다. 이 목장풍토에서 기독교는 굉장히 많은 뿌리를 내리고 세계적인 종교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이 희랍적인 문화풍토를 이용해서 이탈리아를 로마 카톨릭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세 번째는 몬순풍토입니다. 이 풍토는 아시아 대륙을 말합니다. 계절풍 기후인 이 풍토는 인도양과 중국 연안에 특수한 관계를 갖게 했습니다. 일년 중 육 개월 동안 이곳은 열대의 서남방으로부터 몬순계절풍이 내륙쪽으로 불어와 지독한 습도와 열기를 뿜어냅니다. 따라서 이 여름 계절풍은 식물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고 정글을 만들어 냅니다. 계속해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수목이 나고 죽습니다. 이 몬순풍토 속에서 자연은 끝없이 계속되는 계절풍처럼 살고 죽는 일을 되풀이 합니다. 이 풍토에서 제일 적합하게 태어난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는 그 결과 삶은 기독교의 삶처럼 유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출생과 죽음의 윤회가 끝없이 되풀이 되는 것으로 봅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종교는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사는 삶에 종지부를 찍어 두느냐'를 고민하게 됩니다. 따라서 불교의 목적은 이 윤회라고 하는 삶에 종지부를 찍어서 삶, 죽음, 탄생을 뛰어넘는 열반의 세계를 올라가는 것이 되었습니다.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사건을 기록할 때 '때가 차매'라는 말을 썼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때가 차매'라는 말씀을 이 풍토에 적용하여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막이라는 메마른 풍토에서 탄생한 기독교가 직접 이 아시아 대륙인 정글지대로 오게 된다면 살지 못하게 됩니다. 모래에서 살던 사람을 무작적 정글 속에 집어 넣으면 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모래 속에서 태어난 이 복음의 씨앗이 구라파로 넘어 갔습니다. 목장풍토입니다. 풀이 발꿈치만큼 자라는 풍토이므로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 씨앗은 구라파에서 뿌리를 내리고 구라파 사람들의 혼 속에 들어가서 그 삶의 주체가 되어 훈련을 받은 다음에 다시 아시아쪽으로 들어와 밀림 속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목장풍토에서 생긴 생명력 덕분에 시들지 않고 왕성하게 자라게 됐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역사 섭리입니다. 사막에서 태어난 복음의 씨를 목장풍토에서 잘 자라게 하시어 잘 자란 복음의 씨를 다시 아시아 대륙의 몬순풍토에서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엄청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복음이 유럽으로 들어간 사건입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성령께서 그것을 막고 유럽쪽으로 인도하신 사건입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아시아를 정복하려는 욕망이 간절했으나 성령,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유럽 전도가 더 시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행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이로써 복음은 아시아에 머물지 아니하고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뜻이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베드로가 3천명을 회개시킨 사건이나 그가 베푼 많은 표적과 기사들도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교회가 흩어진 것도 복음을 더욱 확장시키려는 성령의 강권적 역사하심에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핍박자 사울을 회심시켜 이방인을 위한 복음 증거자로 세우신 것도 성령의 역사였고, 바울의 선교 사역에 함께 하사 능력을 베푸시고 방향을 제시하시며 유럽으로 인도하신 분도 바로 성령이시었습니다. 이제 바울을 유럽으로 인도하신 성령께서는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로 인도하셔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셨습니다.

"(행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성령께서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교회를 설립하시고(행 2:1-4), 그 교회를 성장 발전케 했으며(행 2:43-47) 더 나아가 전세계로 복음을 확장하는데 있어 그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확실히 복음 전파의 과정에 있어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개입하사 이끌어가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행전 전체를 두고 볼 때 바울은 어쩌면 먼저 소아시아의 중심 수도인 에베소를 중심으로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대도시에 복음을 먼저 전하는 것이 확실히 효과적인 복음 선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순서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번번히 바울은 성령을 통해 저지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전도 계획과는 관계없이 자기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쪽도 저쪽도 막으시는 하나님의 손길 때문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주춤거리고 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바울에게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행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이때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곧장 마게도니아로 떠났습니다. 바울의 이같은 지체하지 않는 순종으로, 주의 성령께서 이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는 순종으로 오늘날 구원의 복음이 전세계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 도중에 얼마나 심한 고난을 당했는지 이루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고후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나 그가 이 모든 고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일편 단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낌없이 그리스도께 바친 사람입니다. 핍박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더 오래 살고, 더 편안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도하는 데 덜 위험하고, 핍박이 덜한 지역을 선택하는 인간적인 타산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을 기다리고, 성령의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 사람이었습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따라서 그는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하나님께 절대 의존함으로 문제의 해결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인생을 가장 지혜롭게 살았던 솔로몬 왕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시편 기자도 우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시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시37:6)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우리가 원하는대로 될 때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삶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우리의 삶의 길을 하나님께 맡김으로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기쁨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틴 루터는 본래 법률가를 지망한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나 1505년 7월 2일, 에르푸르트 교회에서 나와 친구와 같이 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비를 맞습니다. 소나기가 와서 나무 밑에 피했는데 벼락이 떨어지면서 친구가 새까맣게 타서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이제는 두 번째로 사는 생입니다. 일생을 바쳐서 주님을 섬기겠나이다."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이후 주님을 위해서 평생을 종교 사역자로 살게 됩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다음으로, 바울이 마게도니아로 곧장 떠나게 된 이유는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요청때문이었습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말은 영혼의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이는 복음을 직접 들려 달라는 요청의 소리입니다. 마게도니아는 그리스, 알바니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를 잇는, 바로 유럽의 관문입니다. 지금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유고 지역이 바로 마게도니아입니다. 마게도니아의 중심지는 빌립보로서 로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발전되었고, 사회 질서나 군사면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떨어지지 않을지 모르나, 바른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여 우상을 섬기고 인본주의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바른 신앙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멀리서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건너와서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사회적인 실패, 그리스, 곧 헬라의 문화적이며 지식적인 실패, 그리고 유대교의 종교적인 실패가 이렇게 마게도니아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깝게 부르짖게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마게도니아와 같은 곳입니다. 당시 유럽에는 아름다움, 철학, 예술,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지 않았던 그 어떤 것을 바울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줄 수 있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영적인 면이 가장 결핍되어 있었고 그들에겐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사람은 오늘날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지구촌의 한편에서는 쏟아지는 물질의 풍요 속에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먹고 마시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생존을 위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생필품마저 없어 헐벗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신문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인의 하루 소비량이 인도 사람 60명의 하루 소비량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단 이러한 물질적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혼에 대한 사랑이 메말라 있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의 상황을 성서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또한 우리 사회를 주름잡고 있는 탐욕은 새삼 놀란만한 일이 아닙니다. 보다 높은 임금을 얻어내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장애가 얼마나 큰가를 전혀 생각지 않고 끝없는 파업을 일으키는 행위에 대해서도 너무나 익숙해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돈과 소유물에 대한 끝없는 추구가 심지어는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게 되고 인간의 인격적 관계들을 파괴한다 하더라도 계속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정치가들은 하나 같이 "삶의 질의 향상"을 약속하지만, 그 "삶"이란 말은 사실상 '돈벌이'와 같은 말로 은연 중에 통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시대적 상황을 설명하는 성구입니다.

"(딤전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이러한 상황들과 더불어 이 시대에는 영적인 굶주림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영적 실체나 능력을 향한 굶주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난 십수년간에 걸쳐 일어난 부적, 점치는 카드, 점술, 점성술, 백색마술, 흑색마술, 마법 등의 신비주의의 극적인 성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분야에 대해 추구하는 값비싼 서적들이 폭리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영적인 체험에 대한 대중적 요구와 그에 대한 갈망을 잘 나타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는 굳이 본문에서와 같은 환상을 보지 않더라도 사랑과 동정에 굶주린 사람들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시아의 30억 인구가 이 생명과 사랑의 복음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구 9억의 인도, 14억의 중국에 복음을 모르는 그 많은 사람들, 일곱 교회가 있었던 터키 지방에 지금은 교회의 씨가 말랐습니다. 선교사가 제일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 바로 터키입니다. 또한 러시아의 엄청난 인구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건너와서 도와달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까?

세계 인구가 지난해 57억 8천만입니다(독일 세계 인구재단의 최근 보고). 그 중에 60%가 아시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은 1%도 안될 정도입니다. 99%가 아직도 복음을 모른채 있는 것입니다. 한국만이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약 10여년 전의 통계입니다만, 세계의 인구 중 매 시간마다 기아(飢餓)나 다른 원인들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약 6,000명정도이며 매 시간마다 14,000명이 태어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세계 인구가 매 시간마다 대략 8,000명씩, 매일 약 200,000명씩 증가하고 있다는 것과 그 중에 대다수가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거나 거의 알지 못하는 지역에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영국과 같은 몇 개의 나라들에서는 매년마다 교회에 나오는 신자의 수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비록 한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회의 놀라운 성장에 의해 격려를 받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유럽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비율은 겨우 5%에도 미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전세계가 죄악 속에 빠져 있습니다. 스페인은 선진국중 가장 <죄많은 나라>로 조사되었습니다. 스웨덴의 수출전문지 스벤스크 엑스포트 스트라테기가 실시한 국제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19개국 중 흡연, 음주, 마약, 도박, 포식(飽食), 야간 유흥, 매춘 등 부문에서 스페인이 단연 종합 1위를 차지해 스페인이 프랑코시대 이후 <죄의 소굴>로 전락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스페인은 야간 유흥과 도박 부문에서 1위를 점령했습니다. 이어 프랑스, 미국, 영국, 네델란드, 덴마크,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이탈리아까지 10위를 기록했습니다. 2위인 프랑스는 1인당 술 소비량이 가장 높았고, 3위의 미국은 마약문제가 19개국 중 최악의 상태로 지적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들나라에 못지않게 <죄가 가장 많은 나라> 가운데 한 몫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목마른 심령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과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 죄 용서를 갈망하는 사람들, 구원의 소망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모든 문제와 소망을 풀어줄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해답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건너와서 도와달라"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사랑과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수많은 책들이 있어도 우리의 길에 빛되는 성경이 없고, 수많은 날은 있어도 주일이 없으며, 호화 주택은 있어도 평안이 없으며, 지식은 있어도 참 지혜가 없고, 할 일은 많아도 안식이 없고, 경제적 풍요는 있어도 마음의 부요가 없고, 귓가에 음악이 있어도 마음의 노래가 없으며, 마음에 상처가 많아도 치유가 없고, 오늘은 있어도 영원이 없다."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는 인생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계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건너와서 도와달라"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가 더욱 더 크게 열려지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더 넓게 열어서 그들을 가슴에 품고, 또 손을 더 넓게 펴서 사랑의 손길을 크게 펴 돕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린아이의 작은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선교를 위한 작은 헌신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축복하셔서 수 천명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마스터 키가 되는 것입니다.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진실로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땅 끝까지 전파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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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복음의 길<1>

"(행16:11)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행16: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행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행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행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행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행16: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행16: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행16: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행16: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하여 (행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행1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하여 (행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16: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행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16: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행16: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행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행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행16: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행16:35) 날이 새매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행16:36) 간수가 이 말대로 바울에게 고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행16: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 (행16:38)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행16:39)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행16: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바울과 실라의 유럽 전도의 최초 지역은 마게도냐의 중심도시 빌립보였습니다. 이곳에서 전도의 첫 열매는 성공적인 여성 사업가 루디아로서 상류 계급의 출신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준비시켜 놓으셨고, 루디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루디아의 영향으로 그녀의 가족들도 모두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였습니다. 큰 도시에 사는 부유한 상류층 여인의 열린 마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전도의 발판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전적으로 주께 복종하기만 하면 주께서는 이 교두보를 바탕으로하여 더욱 더 큰 승리를 쟁취해 나아가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빌립보에 그가 유하며 그 일원을 복음화하기 위한 전초기지를 필요로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여인의 마음과 그녀의 집을 그 기지(基地)로 얻으셨던 것입니다.

"(행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루디아의 마음이 열리고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녀의 집을 열었을 때 빌립보 선교는 그 기반이 날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본문 11절 "(행16:11)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에서 "직행길"을 직역하면 '순풍에 돛을 달고 항해하다'는 뜻을 가진 뱃사람들의 표현입니다. 바울 일행의 항해는 단지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순풍에 돛을 달고 항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 우리는 이 동일한 항로의 항해가 역풍(逆風)으로 인하여 닷새나 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우리는 순풍을 타고 나아갈 때도 있고 때로는 역풍에 부딪칠 때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유럽 전도에 있어 최초로 복음을 방해하는 사탄의 도구는 귀신들려 점치는 한 여인이었습니다. 유럽 복음화의 비젼이 크고 희여져 추수할 고개를 숙인 영혼의 들판이 그만큼 넓고 풍요한 반면에 그 복음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도 만만치않게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귀신들려 점치는 여인'은 바울의 일행을 좇아와서 소리지르기를 "(행16:17)...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고 했습니다. 이같은 말을 여러 날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심히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바울이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귀신들려 점하는 여인의 증거가 진실하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사탄의 음흉한 계획이 숨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자기 백성들에게 바울 전도단을 소개시킴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치 악령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듯이 보이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이 점쟁이의 귀신과 연합된 것처럼 위장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하락시키고 백성들로 하여금 바울을 믿게도 하지만 그것을 알아맞춘 자신도 믿도록 유혹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은 사탄이 선전해 주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사탄은 대단히 영악해서 사람들을 이용하여 복음에 대한 신뢰감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려서 믿지 못하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사탄의 목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바울은 그 여자를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에게 외쳤습니다.

"(행16:1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귀신들려 점하는 여인이 치료된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악령도 예수의 이름 앞에서 모두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가는 길에 사탄의 세력이 쫓겨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3-27을 보겠습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 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여기서 보면 천국 복음과 주님의 사역은 '치유', 그리고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귀신을 추방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지는 것입니다.

해외선교회(Overseas Crusades)의 부총재이며 미국 비올라 대학에서 수 년동안 교수 생활을 했던 에드워드 머피(Edward Murphy)는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를 갖고 있었고 마귀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사역에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는 종입니다. 그의 영적 전쟁이라는 강의는 아주 탁월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떠나가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굉장히 지적인 귀신과 생생한 대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머피는 "우리 주께서 너의 주인을 패배시킨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귀신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드워드는 그 귀신을 조금은 희롱하는 자세로(그는 절대로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우리 주께서 네 주인을 패배시킨 곳이 어디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 질문을 하면서 대답은 갈보리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귀신은 '광야의 시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광야의 시험'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으로 사탄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심으로 천국 복음을 증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몰아내시는 천국의 능력을 행하셨으며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마12:24)

고 했다.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5-28)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그 일은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눅11:20)....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의 손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천국 복음은 무엇입니까?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지금 여기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The Exorcism of demons), 이것이 바로 천국이 사람들 가운데 임했으며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축귀 능력(逐鬼能力)은 천국의 권능이 이 악한 세상에 침입했다는 선포였습니다. 사탄이 아직 무저갱속에 결박되지 않았으나 천국은 이미 이 세상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절)

축귀(逐鬼)는 천국의 현재성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20여 년 전에 중국에서 어떤 여자가 귀신을 부리어 당시 사람들을 미혹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문을 외워 귀신을 불러서 갖은 재간을 다 부리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를 진실히 믿는 어떤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구경삼아 그 집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귀신 부리는 여자가 귀신을 아무리 불러도 웬일인지 아무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가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는데 한 아이가 와서 예수 믿는 부인에게 집에 손님이 왔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집으로 돌아가자 당장에 귀신이 나와서 그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귀신 부리는 여자가 "조금 전에는 왜 나오지를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귀신은 "오기는 벌써 왔는데 예수 믿는 여자와 같이 있는 성령이 무서워서 못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29절)

이 구절은 천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약 성구중 하나입니다. "강한 자"는 사탄을, "그 강한 자의 집"은 이 세상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강한 자의 세간"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뜻합니다. 문제는 누가 사탄의 영역에 들어가 먼저 "그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 세간"을 늑탈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지금 결박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지금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자", 사탄을 결박한다는 말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혈과육의 피조물이 아닙니다. 영적 세계의 존재입니다. 어떤 종류의 쇠사슬로 천사나 영물(靈物)들을 결박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사탄의 결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권능의 역사(役事)로 사탄의 세력이 꺾여 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여기에서 의미하는 "결박"과는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이제 사탄은 패배당한 원수인 것입니다. 누가 복음 10:9-14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천국 복음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도시들에 대해 왜 이처럼 두려운 심판을 선포하셨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천국이 그들에게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현재 임하고 있다는 증거가 곧 병든자의 고침이었습니다. 천국 도래의 징조가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천국의 권능이 고라와 벳새다같은 도시들 가운데 역사(役事)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패배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곧 천국을 거절하는 것이었고, 이는 두려운 심판을 초래할 뿐이었습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누가 복음 10:17, 18의 이 말씀은 사탄이 그 권세의 절정에서 떨어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태 복음 12:28의 말씀도 위와 동일한 의미로서 사탄이 결박된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지금 현존(現存)하며, 그 권능의 역사(役事)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축복들을 완전히 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완전한 천국은 앞서 살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구속 역사(救贖役事)의 완성을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첫 단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하셨습니다.

사탄이 이 세상의 신(神)이지만 그의 세력은 이미 꺾여졌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맛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악한 시대'는 계속되고 있지만 '오는 세상'의 권능이 지금 사람들 가운데 역사(役事)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 세상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어 보이나 사탄의 왕국이 붕괴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렇게 사람들 가운데 임하고 있습니다.

천국 복음을 영접하는 자들은 이미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신 구속 사역이 마쳐지는 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 복음입니다.

귀신이 떠나간 여인의 마음은 귀신의 속박에서 벗어난 마음의 천국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이 여인에게서 떠나자 "그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관원들에게 끌고 가 고발했습니다. 고발한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행16: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하여 (행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이렇게 하여 바울과 실라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옷이 찢겨 벗겨지고 채찍질을 당했으며 심한 상처를 입고 감옥게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했습니까?

"(행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매를 맞아 온몸이 상처투성이, 피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통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 어두운 감옥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던 것은 영적인 기쁨이 솟아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미"는 구원의 기도와 찬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속박되어 있으면서도 완전히 만족하는 가운데 나오는 기도와 찬송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정신과 복음의 경이적(驚異的)인 승리인 것입니다. 옥문이 열리고 석방될 때는 누구라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쾌청하고 태양이 빛나며 생활이 웃음으로 가득할 때에는 누구든지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감옥 안에서, 즉 고통과 고난, 시련과 핍박의 한가운데서도 노래하며 즐거워하며 감사와 만족의 "기도와 찬양"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낮에는 어떤 바보라도 노래할 수 있다. 우리가 태양빛 아래서 악보를 읽을 수 있을 때 노래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재주있는 가수는 악보를 비춰 주는 빛이 한 줄기도 없을 때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다......밤중의 노래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인간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

바울과 실라는 불평하거나 하나님께 원수들을 심판해 달라고 호소하는 대신,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렸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한 밤의 시간은 신령한 연주를 위한 편안한 시간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밤중에 노래를" 주십니다.

"(욥35:10)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시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기도와 찬양은 강력한 무기입니다.

모압과 암몬이 여호사밧을 치고자 할 때 여호사밧은 찬양대를 조직해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창과 칼 한 번 쓰지 아니하고 대승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전리품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대하20:21)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대하20: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대하20:25) 여호사밧과 그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취할새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는 고로 각기 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취하고."

하나님은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양에 대해 옥터를 뒤흔드시고 모든 옥문을 여시며 죄수들의 사슬을 풀어버리심으로써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그 때 다른 죄수들이 그들의 찬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의 찬미 소리는 그 감옥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홀연히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행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지진으로 잠이 깬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친 줄로 생각하고서 자신의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문제에 빠지면 자살하므로 현실에서 도피하여 그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작년 일 년 동안에 영국에서는 주택과 광열비에 쓴 전체 비용보다도 담배와 술에 소비한 돈이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작년도 통계에 의하면 나이트크럽 같은 데서 춤을 추는 무희(舞姬)들의 수입은 9파운드 9실링(12,500원)에서 29파운드 8실링(37,500원)까지 올랐는데도 큰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의 수입은 겨우 2파운드(2,,500원)밖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수입면에서 본다면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 보다는 유흥업소에서 춤추는 일이 훨씬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인기있는 가수의 일년 동안의 총수입이 80,000파운드(약 1억)로 국무총리의 수입의 8배나 됩니다. 최근 뉴스에서 우유협동 조합이 금년 봄에 사용치 못하고 버린 우유가 25만 가론(약 6만6천ℓ)에 달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만일 사용치 못하고 버린 이 우유들을 분유로 만들어 아프리카로 보낸다면 아프리카에서 영양실조로 불구자가 되는 20,000명의 어린이를 치료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통계 숫자를 읽으면서 여러분은 완전히 미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통계 숫자는 우리들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세상 안에서 살고 있는가를 아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연예인들에게 최고의 보수를 주고 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또 사람들의 삶을 유용하고 가치있게 만드는 가장 필요한 일에 종사하는 간호사나 의사나 정치인이나 목사에게 보다는 연예인들에게 훨씬 더 많은 물질적 보수를 주고 있는 것이 하나의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달리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피(逃避)를 찾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합니다. 영화관과 댄스홀은 어려운 현실의 세계로부터 낭만과 환상의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줍니다. 연예인들은 우리로 하여금 잠시동안 현실을 잊고 웃음 속으로 도피할 수 있게 합니다. 연예인들이 큰 대접을 받고 최고의 보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오늘날 남녀들이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이 원하고 있는 것은 현실 도피입니다. 바로 여기에 현대인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도피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한 두 시간 내지 한 두 주간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결국 현실에 다시 직면하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현실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을 용감하게 대결하게 만드는 데 크게 공헌하고 있는 것은 바로 기독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의 삶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을 정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세상은 도피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크게 외칩니다.

"(행16: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그러자 간수는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행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바울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리하여 간수는 물론 그의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행16: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오늘날은 유럽이 많이 황폐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특히 유럽의 건축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세워진 교회당들을 유럽의 건축에서 제거해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화랑(畵廊)에 가 보십시오. 기독교 운동에 의하여 영감을 받은 그림들을 제거해 보십시오. 무엇이 남겠습니까? 음악당에 가서, 메시야에 관한 사실들에서 영감을 받은 모든 것들을 제거해 보십시오. 과연 가치있는 것들이 얼마나 남겠습니까? 문학 작품들을 살펴보십시오. 기독교 운동에 의하여 영감을 받아 탄생한 문학 작품들을 제거한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아마도 그렇게 제거 작업을 한 후에 남는 것들은 우연적이고 부수적인들일 것입니다.

사실상, 유럽이 얼마만큼의 자유를 획득했는가는 그것이 기독교의 원리들에 얼마큼 순종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유럽이 얼마만큼 순결한가는 유럽이 바울의 말, 즉 그가 간수에게 한 말 "(행16:31)..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에 얼마만큼 순종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유럽이 아직도 속박과 불의가 남아 있는 것은 유럽이 하늘의 환상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순결과 구원을 위한 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사도 바울이 했던 것처럼 위대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취할 수 있는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도 바울의 의식(意識)과 동일한 의식을 갖고 다음과 같은 진리를 깨달을 때입니다. 그 진리란, 밤이 깊고 감옥의 빗장이 굳게 잠겨 있을 때에라도, 악한 것들이 결국 하나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복음의 승리를 말합니다. 복음이 가는 길에 반드시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항상 복음의 길이 대로(大路)로 열리므로 영육의 모든 감옥에서 해방되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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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복음의 길<2>

"(행17: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행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행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17: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행17: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행17: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행17: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행17: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행17: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행17: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행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17: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행17: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행17: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행17: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행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행17: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행17: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행17: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행17: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행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행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17: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17: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17: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행17: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사도 바울의 전도 대상 지역 가운데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로서 마게도냐에서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그곳은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의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키케로에 의해 "우리 영토의 심장"이라 불리기도 했던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이곳에서 3주동안 전도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는데, 그 중에는 그 도시의 귀부인들도 많았습니다.

"(행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성공을 시기했고, 바울을 반대했으며 핍박이 뒤따랐습니다. 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시장으로 가서 깡패(종교를 빙자한 테러분자, 암살단원)들을 고용해서는 그 도시의 전지역에 보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과 그의 일행을 대적하도록 선동시키며, 바울 일행에 대해서 거짓된 비난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일고 있는 소위 <이단 감별집단>(CAN-Cult Awareness Network-겉으로는 이단감별을 내세워 기존교회와 기독교 단체에 깊숙히 파고 들어 종교를 말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사단적인 단체로서 폭력과 납치, 폭행, 감금, 강간 등을 일삼고 있는 반종교적, 반사회적인 단체)과 같은 행동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폭도들은 야손의 집에 쳐들어갔는데 야손은 바울의 전도로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한 사람으로서 바울과 그 전도 일행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폭도들은 야손을 읍장들 앞에 끌고 가서 말했습니다.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악당들을 야손이 제 집에 머물게 했다." "이 작자들은 가이사를 거역한다. 그들은 예수가 왕이라고 거짓된 주장을 한다."

야손은 믿음의 형제들을 영접하였다가 봉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대로 믿음의 형제들을 대접하였고, 나그네로 지나는 사람이라도 노숙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한 것 뿐인데 지금 고통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적이 있으며 롯도 그런 친절을 베푼 적이 있습니다. 수넴 여인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나그네인 엘리사를 접대하였다가 그가 평생에 소원하던 잉태하는 복을 받은 일이 있고 빌립보의 루디아도 바울 일행을 대접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을 대접한 사건을 통해서 야손은 믿음이 굳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을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박해받던 시대에 위험을 무릎쓰고 그런 선한 일을 했으니 하나님의 나라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헌신과 수고와 고생은 정말 가치있는 일입니다.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폭도들이 가이사를 위해서 걱정하는 것은 기실 아무것도 없었고, 단지 읍장들에게 압력을 넣어서 바울을 죽이도록 하려는 것 뿐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야손의 집에서 찾아내지 못한 폭도들은 야손으로부터 돈을 받아먹고, 바울과 실라를 다시 그 도시에 들여놓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말씀을 전파하여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일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살전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살전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살전1: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북청사변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선교사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여선교사가 잡혔는데 망나니에게 목이 달아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 선교사는 망나니가 춤을 추는 얼마간은 두렵고 떨려 정신이 없었는데 돌이켜 주님을 생각하니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여선교사는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망나니가 선교사를 보자 칼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망나니가 하는 말이 자기를 바라보는 선교사의 웃는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그 상황에서 자신이 웃었는지 울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답니다. 신앙은 꾸밀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꾸며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 헬라의 귀부인들과 경건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니까 진정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야음(夜陰)을 이용하여 그 도시를 떠나 약 72km 떨어진 베뢰아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지만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볼 때 그다지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베뢰아 사람들은 다른 도시 사람들보다 훨씬 신사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커다란 전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그 전도단 일행이 베뢰아에서 누렸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베뢰아에 있다는 소식을 데살로니가의 악한 유대인들이 듣고서 베뢰아로 내려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단의 조종을 받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오늘날도 사람들을 이용해서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종종 교인들을 이용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단도 그들 나름의 '선교사들'이 있으며, 나름대로 바쁘게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베뢰아에 있는 신자들은 원수의 계략을 넘겨 짚고 바울을 바다로 데려가 아덴으로 가는 배에 승선시켰습니다. 또 한 번 바울은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지역을 떠나야 했고 자기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의 수도 아덴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웅장한 건물이나 아름다운 예술 때문이 아니었고, 뛰어난 철학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 숭배 때문이었습니다. 그 도시는 우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떤 재사(才士)는 아덴에서는 사람보다 신을 찾기가 더 쉽다고 농담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언덕마다, 거리마다, 상점마다, 집집마다 온통 우상이었습니다. 바울은 한 분 하나님,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의 마음은 모든 우상숭배에 대해서 치를 떨며 격분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마음도 우리 주위에 있는 우상숭배를 볼 때 '거룩한 분노'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희랍의 조각과 건축을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찬미하지만, 바울 시대에는 그 대부분이 그들의 종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 숭배가 귀신의 일이라는 것과(고전 10:14-23) 헬라인들의 많은 신들은 사람들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없는 이야기 속의 인물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고전 8:1-6)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문화와 지혜를 가지고도 헬라인들은 참되신 하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고전 1:18-25).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했고 시장에서도 전도했습니다. 그 장터에서 바울은 두 부류의 철학자들을 만났습니다. 하나는 에비구레오(에피쿠로스파, 쾌락주의)였습니다. 이들은 세상이 우연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믿는 유물론자들이요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이 많이 있는데 바로 진화론과 공산주의와 무신론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좌우명은 "먹고 마시고 즐겨라. 내일이면 우리가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그들이 목표는 쾌락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쾌락이란 주로 육체적인 것을 의미하였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고통과 염려에서 해방되어 순수한 평정을 누리는 삶을 의미하였습니다. 진정한 쾌락주의자들은 극단을 피하고 매사에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생을 즐기려 했지만 최고의 목표는 여전히 쾌락이었습니다.

다른 부류는 스도이고(스토아학파, 금욕주의)였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세상이 운명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운명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어느 것에 대해서든 희로애락을 나타내는 일, 곧 슬피 울거나 혹은 기뻐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일어날 것은 일어나므로 인간이 어떤 일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스도이고 철학자들은 이교의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하나의 "세계신(世界神)"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범신론자들이었고, 개인적인 수양과 극기(克己)를 강조하였습니다. 쾌락은 좋지 않고 고통은 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성을 따르며 자족하여 내적인 감정이나 외부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스도이고 철학은 자존심을 부채질하였을 뿐이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없다는 가르침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도이고 철학파의 처음 두 지도자가 자살한 것은 흥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철학자들은 사도 바울을 말쟁이(수다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가서 말하기를 "너의 종교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에게 "(행17:22) ...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종교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태양이나 또는 별에게 예배드리는 자도 종교적입니다. 불상 앞에서 엎드리는자도 종교적이며, 메카(이슬람교의 성지)를 향하여 하루에 다섯 번씩 절하며 기도하는 자도 종교적이며, 동정녀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자도 종교적이며, 종교적인 많은 장로교인들, 감리교인들, 침례교인들, 성결교인들이 있지만, 그러나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참된 평화, 행복, 죄용서, 미래의 희망을 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종교체제에 헌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들을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하는 교만한 철학자들, 온갖 지혜를 모두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담대하게 외칩니다.

"(행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바울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뽐내는 헬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본질을 선포했습니다. 즉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셔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모든 사람은 한 혈통이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가까이 계시며 신상(조각한 형상)이나 신전 안에 속박되지 않고 하늘과 땅에 충만하시다는 것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마치면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최고의 교양을 갖추고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바울이 헬라 철학자들에게 회개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들 모두가 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심판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후의 심판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지금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우리는 결단코 최후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이 행한 설교의 결과는 세 가지 부류로 나타났습니다. 한 가지는 바울을 비웃으면서 회개하지 않고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또 한 가지 부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네게 다시 듣겠다. 우리가 좀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반응했습니다. 이 부류는 주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나와서 믿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덴에서의 외견상 빈약한 전도 결과를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큰 수확에 비교하면, 바울의 사역은 형편없는 실패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을 것입니다. 교만하고 세련되고 현명한 아덴 사람들은 겸손을 요구하는 바울의 복음의 말씀을 쉽게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곳의 흙은 깊지 않았고 잡초가 많았지만 조그마한 수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지 아니한가! 우리는 여전히 "상아탑(象牙塔)"에 침투하여 이 세상에서는 지혜로우면서 오는 세상의 참된 지혜에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증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불순종하면 얼마나 손해보는 인생이 되는지를 어떤 의사가 이야기 합니다. 소문난 외과 의사 퍼시발(Percival)에게 키티라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녀가 선교사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 그는 딸에게 말하기를 "내 눈 앞에서 사라지면 안된다."하며 말렸습니다. 딸은 순종하여 선교사로 갈 것을 포기하고 평범한 주부가 되었습니다. 얼마 후 이 의사는 심한 눈병을 앓게 되어 결국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자기의 담임 목사를 보면서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친구에게 고백하기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선교사의 소명을 받을 딸을 내 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내 시력을 빼앗아 간 것은 아닐까?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의 일에 부르시면 거절하지 말고 보내도록 하게나." 하면서 슬퍼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아무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장 원인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었습니다.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영혼 구하는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자주 결석하는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오랜만에 나온 성도의 손을 잡고 "교회에 잘 나오셔야죠."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남자 성도님이 하는 말이 "목사님, 새벽부터 밤까지 뛰면서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들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죠."했습니다. 그러자 그 성도의 변명은 "제가 떡만 살 것이 아니고 채소랑 고기랑 과일도 사야 하거든요."하는 것입니다. 이 귀한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시고 있습니까? 쓸데없는 말싸움이나 갈등으로 세월을 허비하지는 않습니까? 남의 허물을 말하고 비난하고 다투면서 금쪽같은 시간을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생은 세 권의 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 1권은 "나의 과거"라는 제목으로서 이미 된 일이 기록되어 있고 절대로 수정될 수 없습니다. 제 2권은 "나의 현재"라는 책인데 날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번 쓰면 지울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잘 기록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 3권은 "나의 미래"로서 마지막 책인데 우리 눈에 전혀 보이지 않고 그 열쇠는 하나님께서 갖고 계십니다. "현재"라는 책을 잘 기록하는 사람만이 "미래"라는 책을 부끄럽지 않게 쓸 수 있습니다.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담대한 빛의 사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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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 성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행18: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행18: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행18: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행18: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행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행18: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행18: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행18: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행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행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18:11)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행18: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행18: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행18: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행18: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행18:16)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니 (행18: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

본문은 바울의 제 2차 선교 여행의 마지막 시기에 고린도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발칸 반도 남단에 위치한 상업과 무역의 요충지로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이전 선교지 아덴이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하는 어두움의 중심지였다면 고린도는 부패한 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아덴이 우상으로 가득찼다면 고린도는 음란으로 가득 찼습니다. 특히 고린도는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헬라의 대도시로서 이른바 '헬라의 빛'이라고 불릴 정도로 헬라 문화가 화려하게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국제적인 항구 도시가 그러하듯이 고린도에도 온갖 비행(非行)과 타락 행위들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중심부에 세워졌던 아프로디테 신전(神殿)은 고린도의 부패와 타락상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이 신전에는 천여 명의 여승이 있었는데 이들은 종교 창녀로서 저녁이면 그들의 직업을 위하여 도시 거리로 내려가곤 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의 이러한 타락한 모습은 마치 구약 시대 성적, 도덕적으로 타락의 첨단에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창 18:20, 19:1-22)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도 '고린도인처럼 산다.'는 격언이 있는데 이는 매우 음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사는 사람에 대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영어로 '고린도인'(Corinthian)이라고 하면 '난봉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의 부패한 모습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라고 하면서 그 도시의 온갖 지저분한 죄악들을 열거한 데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고전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전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또한 바울은 고린도에서 쓴 로마서를 통하여 고린도의 부패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처럼 타락과 우상 숭배가 만연한 도시인 고린도에 이른 바울은 두려워하는 심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가 훗날 고린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를 기억하며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술회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전도를 목전에 두고 두려워했던 원인을 세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복음 전도 사역이 미궁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게도냐에서 자신을 부르는 환상을 보고 확신에 찬 발걸음을 내딛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덴에서의 전도(행 17:16-34)를 전후하여 그의 전도 사역은 좀처럼 자신의 기대대로 되어지지 않았으며,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 지를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빌립보 등지에서 심한 매를 맞았기 때문에(행 16:19-40) 오랫동안 건강이 나빴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감정적으로 의기 소침해졌을 것입니다. 셋째,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염려로 거의 병이날 지경이었습니다.

"(살전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살전2: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3: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이처럼 안팎으로 답답한 상황에 처한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준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을 위해 자기들의 생명이라도 내어놓을 정도로 신실한 동역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롬16: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롬16: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그리고 얼마 후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합세함으로써, 바울은 새 힘을 얻어 복음 사역을 수행해 나갔던 것입니다.

"(행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여기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는 말씀의 뜻은 빌립보 교회의 헌금으로 바울은 더 이상 생계 유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오로지 말씀 전파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헌금 덕분으로 장막 만드는 일에서 벗어나 말씀 준비에만 몰두했고 또 그 준비한 말씀을 전하는데만 전력투구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크고 번창한 도시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이 새로이 전도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계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 여행 중에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던 것입니다.

"(행20: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고후11:9)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

"(살후3:8)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살후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살후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유대 풍습에 따르면 랍비는 전문직을 가져야 했습니다. 바울은 랍비였습니다. 그는 전도하거나 가르치는 것으로 돈을 벌지 않고 자신의 직업과 노력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노동을 신성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아들에게 직업을 안 가르치는 자는 도둑질을 가르치느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세상 직업을 가지고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최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를 다 이행하면 죄를 잊게 하나 노동이 없는 율법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범죄케 한다."고 그들은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랍비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학자가 되지 않고 항상 노동하는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천막제조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천막 제조자로서 그는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는 것을 자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라와 디모데가 도착하였을 때 빌립보 교회의 헌금을 가져왔기 때문에 이제 오로지 말씀 준비와 전파에만 전념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최선을 다해 생명의 말씀을 준비하여 전파했으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끝내 거부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사악하고 완악한 행동으로 복음 전파를 방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 전파에서 방향을 바꿔 이방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입니다.

"(행18: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바울의 이 말씀은 에스겔 3:18-21에 있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영적 생명에 대한 책임은 이제 그들 스스로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은 생명의 복음을 거절하므로 자멸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겔3: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겔3: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겔3:20)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겔3: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여러분의 직장 동료나 이웃 사람에게 전도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전도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지 못하고 사망했을 경우, 구원받지 못한 그들의 피값을 전도하지않은 여러분들에게서 찾겠다는 준엄한 말씀인 것입니다. 만약 전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경우에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말씀에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딤후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에는 항상 승승장구(乘勝長驅)한 것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 또한 때때로 피곤하여 낙심하며 넘어지기도 하는 연약한 인간이요 더욱이 외부로부터의 어려움도 극심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곳마다 그를 방해하는 대적들의 온갖 음모와 훼방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고후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11: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특히 동족인 유대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의 강렬한 동족애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핍박한 열혈 유대인들의 적개심은 찌르는 가시요 채찍과 같이 늘 바울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혼신의 정열을 다해 설교했건만 단단한 바위 덩어리처럼 냉담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바울이 가졌던 심정은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궤멸시킨 갈멜산 대첩에도 불구하고 대적 이세벨의 보복 맹세를 들은 엘리야가 도피했을 때 가졌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왕상 19:1-9). 그러나 인간적 공포와 불안으로 좌절에 빠진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강한 능력이 함께 하셨듯이(왕상 19:9-21)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환상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희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9-10절)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 때로 피곤하고 지쳐 쓰러지거나 낙심할 일이 왜 없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생을 무거운 짐을 지고 사람들로 바라 보시고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그 성품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말합니다.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러나 그도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백성을 이끌고 광야를 갈 때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 거역하여 자기에게 대드는 이 피곤한 상황을 계속적으로 경험하게 될 때 지친 일이 있습니다.

"(민11:11)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민11: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민11: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민11: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민11: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가 얼마나 지치고 피곤했으면 이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고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자기의 사랑하는 성도들이 피곤하여 지쳐 쓰러져 그대로 나가 떨어지도록 버려 두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곤한 모세에게 그 일을 분담할 사역자들을 주시며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보여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모세도 생각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민11: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지쳐 쓰러진 엘리야를 하나님은 절대로 못 본 체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찾아오시어 그에게 필요한 음식을 공급해 주시고 그의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치료해 주시며 새 힘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왕상19: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엘리야에게 임하셨던 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님의 뜻을 찾고 그를 따르느라고 피곤하고 지칠 때 친히 우리에게도 찾아오시며 우리의 피곤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치료해 주시고 우리의 인생길 가는 동안 쓰러지지 않도록 성령으로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 중에, 사명 감당하는 중에 지치고 피곤하여 밤 같은 처지에 있을 때 환상 중에 들려지는 주님을 음성을 들으시고 힘과 능력을 얻으시기 축원합니다. 바울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며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일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사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사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복음 전도의 사명을 다시 한 번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행18:10) ......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음란하고 타락한 고린도 시에도 무엇인가 옳고 선한 것을 찾으려고 갈망하는 사람들이 그 시의 도처에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완전히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진 대도시에서 일해야 하는 복음 전도자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홀로 고린도에 도착했으며, 즉시 고린도의 부패상을 날카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도가 단 한 명도 없는 고린도 시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인내심을 가지고 열심히 그곳에서 일하였을 때 결국 주께서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후에 바울에게 들린 말씀이 아니며, 또한 고린도에서 이미 성도가 된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의 복음 사역의 한계에 봉착한 것 같았던 때에 즉, 그가 비록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떨림을 느끼고 있었던 때에 주께서 그에게 들려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고린도 시 복음화가 이제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끼며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들려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극도로 타락한 도시에서도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진리와 생명과 깨끗함을 구하며 복음에 순종한 사람들을 구원하는데서 나타났으며, 또한 그 복음을 거절한 자들의 궁극적인 멸망 가운데서도 역사했던 것입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마치 주님의 마음이 결국 그에게 복종하여 고린도 교회를 이룬 사람들에게만 향한 것인양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들이든 종들이든 고린도의 모든 사람에게 향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우리는 모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면서 이 울산 도성에 성도를 찾으려고 힘쓰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성도들을 찾아서 주님에게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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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경에 능한 자

"(행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행18: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행18: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행18: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행18:22)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행18: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행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행18: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행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행18: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행18: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약 백만의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알렉산드리아의 5개구 중 2개가 유대적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도시였습니다. 알렉산더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중심도시로서 상역과 재부와 유명한 도서관과 교육과 철학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이곳은 희랍과 유대인의 문화가 교류하는 곳으로 플라톤과 모세의 교훈이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고유의 신앙을 고수하면서도 자기들 자녀들에게는 알렉산드리아 최고의 교육과 사상에 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대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는 헬라주의와 유대주의를 화해와 종합시키려고 시도한 위대한 학자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철학과 신학 이외에도 어법, 수사학, 수학, 지리학 그리고 약학에 뛰어난 석학과 학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난 곳이었습니다. 아볼로는 바로 이러한 곳에서 지성을 호흡한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천부적으로 학문의 호기심과 정열이 남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행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행18: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라고 그에 관한 간결하고 적절한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놀라운 언어 구사와 그리고 열의 넘친 웅변은 듣는 사람마다 숙연해지게 만드는 해박한 지식과 남을 쉽게 사로잡는 천부적인 의사전달의 기술을 지니고 있는 놀라운 성경 교사였습니다.

모세도 말의 솜씨는 약한 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아론을 대변자로 옆에 두셨습니다(출 4:10-16). 당시의 바울 역시 말솜씨가 석연치 못한 자라고 하는 평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고후 10:10). 그러나 아볼로는 그야말로 웅변가였습니다. 모세는 구약의 대표자, 바울은 신약의 대표자이지만 각기 자기의 심오한 사상과 심증을 유루함 없이 자기의 말솜씨로 표시하지를 못한 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자기 재량대로 자기의 의도하는 바를 적절한 때에 의도하는 강도(强度)로 청중을 사로잡고 이끌어 가는 말솜씨가 있는 귀재였습니다. 그의 논지는 명쾌하고 그의 주장은 강력하며 그의 결론은 모두가 수긍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짐작컨대 아볼로는 초대교회의 제일가는 설교가였을 것입니다.

이곳 알렉산드리아는 특히 구약의 비유적 해석을 믿는 학자들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모든 사건이 각기 역사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숨겨진 그리고 내면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아볼로는 구약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었고 유대인들에게 구약은 항상 예수의 오심을 내다 보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매우 요긴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훈련되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지 요한의 세례 밖에는 몰랐습니다. 그는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메시야로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예수를 인간의 구주로 알지 못했고 성령이 권능 안에서 임하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성령 시대의 도래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구약 성경에 능한 자였으나 다음과 같은 예언이 성취된 성령 시대를 몰랐던 것입니다.

"(욜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욜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18세기 중엽까지 버지니아에서 살다가 새로운 개척을 꿈꾸며 서부로 포장마차를 끌고 끝도 없이 이동하여 오늘의 테네시 주나 켄터키 주에 정착한 동부인들은 아직 영국 식민지의 시민이었습니다. 1770년에 저희들이 버지니아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인사는 "하나님이 왕을 도우소서." 라는 영국 국가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그후 찾아 오는 손님도 없고, 소식이 단절된지 15년이 지났습니다. 그런 후에 계곡을 뚫고 험로를 달려 다른 포장 마차가 또 왔습니다. 저희들의 흥분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푸짐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의 꽃이 피어,

"지금 누가 왕이신가. 지금도 죠지 3세인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천만에 우리는 지금 영국 시민이 아니라 미공화국의 시민일세. 왕이 아니라 초대 대통령이 죠지 워싱턴이라네."

저희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생 미국의 시민이라니, 하나님이여 대통령을 복주소서!"

환호를 올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볼로의 이해와 지식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승천에 이은 오순절 성령강림이라는 변화의 성숙에 이르지 못하고 구약의 예수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영역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예수의 사회정의와 윤리만을 설교한 설교자가 어찌 아볼로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이러한 설교가는 예수가 한 모범일 뿐 구주가 아닙니다. 복음서의 의도는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신앙고백이 첫째요 그 다음이 그의 규범에 따른 신앙 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볼로의 지식은 잘못이 아니라(not erraneous) 부족(incomplete)인 것입니다. 그는 이단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의 충만함과 인도를 받지 못하면 언제나 인간적이며 육신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머리를 짜내고 경험을 동원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결코 깊은 영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인간 삶의 변화의 주체는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께 붙잡힌 바가 될 때, 혹 비합리적이고 비조직적이며 어설프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슥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내 힘으로나 실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영적인 일이 되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게 될 때, 사람들은 육신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되고,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며 육신적인 열매밖에 맺지 못하게 됩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감격을 경험하게 하는 놀라운 이 웅변가,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한 구약의 석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천막 제조와 매매가 본업인 이 평신도 내외(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유연한 접촉은 오늘까지도 우리 모두의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정식으로 사역에 관한 고도의 교육이 있는 사람이라할지라도 평신도에 의해(그리고 그 중의 한 사람은 여자의 경우라고 해도) 바로 잡고 시정이 되어야 할 것은 시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교리와 신학적인 근본문제는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아볼로는 이들 평신도에게서 자기에게 없었던 복음의 진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정중한 접근으로 일러준 선의를 감사합니다.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학사, 그리고 웅변상(雄辯賞)의 트로피를 찾이한 자, 그러한 그는 비록 평범한 그러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장사꾼인 내외의 발밑에 자기를 낮추고 그러한 자세로 이 놀라운 완전한 복음의 지식을 경청합니다. 비로서 그는 예수의 지식에 더욱 성숙하여 집니다. 학문적으로 월등한 자기 학문과 무관한 사람에게서 이러한 교육에 접하는 경우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나, 그러나 그런 선례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마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하신 기도가 있습니다.

존 번연이 쓴 <넘치는 은총>에서 그는 보잘 것 없는 여인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를 엿듣고 큰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번연은 하나님의 섭리로 '베드포드'거리에서 집일을 하다가 보니.... 서너명의 부인들이 햇살이 쪼이는 문턱에 같이 앉아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 종교 문제에 관해서 근자에 깊은 관심이 있는 터라 저희들의 이야기를 엿듣고자 접근을 하였다. 나는 저희들의 말을 엿듣기는 해도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저희들의 이야기의 수준이 월등하여 나의 지각이 미치지 못할 수준의 것이었다. 저희들은 다시 태어나는 일에 관해서, 저희들 심중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관해서 그리고 자연인 그대로의 심령 상태가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를 말하는 중이었다. 저희들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의 사랑으로 저들의 심령을 찾아주신 일과, 어떤 말씀으로 저희들의 영혼을 새롭게하여 주셨으며 위로와 격려와 악에 대항하여 서게 하셨는가를 서로 간증한다. 내가 듣고 있노라니 마치 저희들이 기쁨이 넘쳐 그래서 간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심경인 것처럼 보였다. 저희들은 즐거움으로 성경 말씀을 들어 이야기하며 이 모든 이야기를 하는 저희들의 모습이 이처럼 은혜에 넘쳐 있었다. 그러한 저희들의 인상은 저희들이 모두 새로운 세상을 찾은 사람처럼, 그 새 세상 안에 거하여 사는 사람들이며 여기 이웃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나는 평범한 그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곳을 자주 찾아가기로 하였다. 저희들을 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시 나는 두 가지 마음을 먹었다. 하나는, 심정을 유순하고 온유하게 갖는 것 그리고 또 하나, 그 여인들이 이야기를 계속 명상하기로 굳은 마음을 먹는 일이었다.

아볼로는 이미 저희들의 친절한 대접으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하나님의 영이 그의 심정에 접촉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확실한 지식과 예수가 구주이심이 그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확실한 것이 되었습니다.

아이어 박사는 이러한 아볼로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자기들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 양손들을 모두 얹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시어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사죄의 지식을 얻게 하시고 복음을 위하여 그를 다시 일으키시사 크게 역사하심을 구하였다. 저희들이 다같이 간구의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자 아볼로의 얼굴은 새로운 빛으로 가득하였다. 그는 거듭난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아볼로의 심중에 거하신 것이다.

아볼로와 같은 유사한 경험을 한 지식인과 학자는 많습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봉사하여 온 주교사나 집사들이나 심지어는 장로들까지 신앙과 성서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은 후에 "나는 그리스도를 내 마음 속에 모시기를 원한다."라고 하는 간절한 소원이 성취되어 중생과 성결의 은혜로 이어진 성도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역사의 한 인물로 알고 있었던 아볼로가 이제는 예수를 살아계신 존재로 알게 되고 전도자로서의 그의 지식에 능력이 가하여졌으므로 백배나 더 강하여졌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행18: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1905년 평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선교사들이 목사님이고,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목사님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세례를 줄 때에는 주로 선교사가 세례문답을 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례문답이 아주 까다로왔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질문을 많이 받는데 거기에 합격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칠십 넘은 노인장 한 분이 예수를 믿어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데, 번번이 불합격입니다. 선교사는 할 수 없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는 다른 것은 묻지 않을 테니까, 사도신경과 십계명, 주기도문만 외어가지고 오세요. 그러면 합격시켜드리겠습니다."

노인은 열심히 외웠습니다. 그런데 일껏 외웠다가도 선교사 앞에 딱 서면 갑자기 깜깜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2년 동안을 줄곧 낙제했습니다. 세례는 당연히 못받았습니다. 3년째 되는 해에 노인은 또 세례 받으려고 문답하러 갔는데, 보나마나 또 못외울 것 같은지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목사님"

"왜요?"

"유아세례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른 세례는 그만두고 유아세례를 주시지요."

선교사님이 너무 좋아가지고

"그렇게 합시다."

하고는 당장에 세례를 주었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학문없는 경험이 경험없는 학문보다 낫다." 사도신경, 주시도문, 십계명, 성경 몇구절 외운다고 다 되는 것 아닙니다. 물론 성경을 많이 알고 많이 외우고 많이 읽고 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한 체험적인 신앙, 신앙고백이 신앙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적 성령 체험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16:16)...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말씀은 예수는 지금도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나를 위해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성령을 통해 나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때 성령적 체험을 가졌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적 체험 속에 성경에 능한 자가 되어질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검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힘과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볼로처럼 성경에 능한 자들이 되실 뿐만 아니라 성경으로써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 증거할 수 있는 성령의 체험과 권능으로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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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성령을 받았느냐?

"(행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행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19: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행19: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행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진정한 기독교인인가 아닌가 하는 판가름은 '성령을 받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스테인드 글래스(彩色窓)의 거장인 찰스 코닉(Charles Connick)은 어느 날 젊은 미술학도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 학생은 말하기를 "선생님의 화구(畵具)를 며칠만 빌려 주십시오. 제가 찰스 코닉이 된 기분으로 스테인드 글래스 하나를 그려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궁금히 여긴 코닉은 자기 제자의 화실을 찾아 갔습니다. 그때 그 학생은 스승의 화구를 써도 역시 그림은 잘 안된다고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코닉은 말하기를 "스승의 도구가 자네를 변화시킬 수는 없네. 오직 스승의 불을 받아가야 한다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색유리(스테인드 글래스) 한 장을 만드는 데도 괜찮은 작품을 내놓자면 불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성도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 할 때 그리스도의 불,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불 같은 성령은 설명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내 몸을 주를 위해 불 사를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에 들어가려면 성령을 받아야만 합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처럼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질문은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멸망이냐? 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가 성령을 받으리라고 예언하셨고 또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에베소는 우상숭배로 악명높은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극심한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Artemis), 즉 다이아나(Diana)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종교와 상업이 굳게 결탁해 있었는데, 대상인들은 아데미 신전을 끼고 돈벌이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헬라가 이상(理想)으로 삼아 숭배하던 것들 중에 순수함이나 덕과 같은 것들이 에베소에서는 부패되고 말았는데 이는 상인들의 상업주의의 영향을 받을 결과였습니다. 더욱이 당시 에베소에는 귀신 신앙. 마술. 마법에 크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곳에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질문에 에베소 제자들은 성령의 있음도 듣지도 못하였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고 묻자 "요한의 세례"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의 아볼로의 상태와 동일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버릴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를 버리는 것이 곧 신앙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가슴을 치고 통회하며 뉘우친다고 해서 그가 곧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뿐만 아니라 그 단계에서 더 나아가 그 죄를 용서하시고 또 받아주시는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 곧 구세주(주님)로 믿고 영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주 회개를 해도 또 죄에 빠지며, 거기서 헤어날 방도가 없게 됩니다. 죄를 뉘우치는 사람은 많습니다. 감옥살이를 하는 죄수 중에 죄를 뉘우치는 사람도 있고, 경찰 앞에서 심문을 받는 범인 중에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곧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도 진정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지난 죄를 버리고 예수를 붙잡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음 성구는 회개가 반드시 예수를 믿는 것과 연관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마12: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마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말씀은 회개는 하였지만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지 않을 때, 그 회개는 아무 쓸모가 없고 더욱 강퍅한 마음이 될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회개한 연후에는 반드시 예수를 자신의 삶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순절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을 받고나서 그들 에베소 제자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19:5)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안수했고 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에게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그들이 성령을 받자 즉시 나타났습니다. 즉 그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방언을 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신앙이 내부적으로 불붙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고, 그들이 예언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지성이 계발(啓發)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의 제자들은 알고 있던 계시보다도 더 밝고 더 풍부한 계시와 또한 풍성한 생명을 성령을 받으므로서 경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현재 로스엔젤레스의 시펄버다(Sepulveda)감리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에드워드 맥래(Edward McRae) 목사의 간증입니다. 1982년 여름, 18세의 외아들 스튜어트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의 외아들은 죽기 2주 전에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맥래 목사는 아들의 졸업식이 거행된 학교 운동장에 가서 마구 달리며 아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대여섯 바퀴쯤 운동장을 달렸을 때 였습니다. 갑자기 눈 앞에 금빛나는 두 개의 별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그것은 환상이었습니다. 아들이 받은 상은 '투 스타'라고 해서 금빛 나는 두 개의 별이 박힌 상장이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땅에 엎드리며 외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스튜어트를 위하여 죽으셨고 스튜어트를 위하여 부활하셨군요!" 그는 이 순간 바로 자기에게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재현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지금 까지 막연하고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하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와 관계가 있다고 깨닫는 순간이 바로 성령을 받는 순간입니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도 신약성경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즉 요한의 세례만을 알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형식상 물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심과 우리를 변화시키는 역사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지한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메튜 헨리는 "아무 목적없이 세례를 받고 이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고 성령을 받지도 않았으며 성령에 복종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하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 사실 심각한 질문이다. 성령이 모든 믿는 자와 구하는 자에게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잘못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상 성령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성령의 은사가 있는 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성령의 은혜와 위로를 받고 있다고 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엄격하게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는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그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는 법이다. 과연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갖고 있는가? 또한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가?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우리는 성령의 통치 아래 있는가? 물어야 한다."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고 신앙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다시말해 성령이 임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수준에 한해서 남들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도달한 경지 이상으로 남들을 끌어올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유대인으로서 학식이 많고 성경에 능하고 열심 있고 신중하게 가르치고 담대히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그가 이르른 수준까지밖에 남들을 인도할 수 없었으며, 그 이상으로는 한 치도 더 끌어올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곧 그의 제자들은 오직 요한의 세례만을 알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이 그들에게 찾아왔습니다. 바울은 그가 아볼로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폭 넓은 지식과 더 깊은 체험을 가졌기 때문에 에베소에 제자들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그 결과 결국 아름답고 정직하고 정확하지만 차가운 그들의 도덕성이 성령께서 주시는 뜨거움과 정열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아볼로는 그 자신이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그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가 보다 깊은 체험과 지식을 얻게 되었을 때 그는 고린도로 갔으며, 바울이 에베소에서 아볼로를 위하여 한 일을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바울을 위하여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심는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으며,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바울이 에베소에 온다면, 그는 아볼로가 심은 것에 물을 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시는데, 때로는 안수를 통하여, 때로는 안수 없이, 때로는 물세례에 응하여, 때로는 물 세례 전에 오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에게 성령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의 임재와 조명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지도 못하고 그에 대하여 가르치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근본적인 역사가 거듭나게 하는 역사라면 성령의 두 번째 역사는 거듭나는 영혼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더하사 주를 위해서 일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일하기 원하는 제자들에게 무턱대고 나가서 일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너희가 권능을 받은 후에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이들 말씀을 통해 보면,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주를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주님의 증인이 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되며 더 나아가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미국의 저명한 교육자인 레이니(Rainy) 교장은 "기쁨(희락)은 왕궁의 깃발과 같다."고 강조하고 아이들에게 즐거운 생활을 하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성에 왕이 계시면 왕을 상징하는 깃발이 휘날렸습니다. 왕이 외출중이면 깃발이 꽂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얼굴과 행동은 이 왕궁의 깃발 같습니다. 즐겁고 활기차고 그 행동에 기쁨이 넘치면 그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레이니 교장의 교훈은 성령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 사람은 그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은 성령의 존재를 증명하는 깃발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됩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또한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참된 영적 자유함이 있습니다.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사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다음으로, 성령은 충만하게 역사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당시의 에베소는 번화한 도시로 방탕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술에 취하는 일은 오히려 그 사회에서 자랑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술을 많이 마시는 자에게 상을 주었고, 이러한 경기에서 술을 마시다가 죽은 사람이 3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행여라도 술취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대신에 성령에 취해야 합니다. 사실 오순절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을 말하니 듣는 자들이 "저희가 새 술(Spirit)에 취하였다."(행 2:13)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함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목적, 감정, 사상, 언어, 행동을 성령이 지배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곧 성령의 완전한 삶의 지배를 말합니다. 그 때에 우리의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유명한 전도자였던 무디는 자신의 신앙과 성령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치 번갯불이 번쩍이듯이 나에게 놀라운 축복이 쏟아졌습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봉사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갈급하고 목말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내 힘으로 했기 때문에 지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내 맘에 충만하게 임하신 이후로 나는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곧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번화한 거리를 걸으면서도 내 마음에는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나에게 임하셨을 때, 나는 그의 큰 손이 내 위에 머무는 것을 느꼈고, 그 순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충만하게 하셨으며, 온 세상을 내 마음에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풍성한 삶의 비결이요 열매있는 사역의 비결인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함을 받으시고 자신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여러분의 이웃을 변화시키는 삶의 아름다운 열매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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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말씀의 승리

"(행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행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행19: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행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행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행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행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19:16) 악귀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행19: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행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행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행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도 바울이 복음 사역에 가장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아부은 곳이 바로 에베소입니다.

에베소는 세계 각지의 문명국에서 모여 드는 배들이 운집하는 지중해의 여러 항구들 중에서 가장 넓고 큰 항구였습니다. 에베소의 바다들과 강들에는 물고기가 풍부했으며, 공기는 맑고 깨끗하여 건강에 좋았으며, 위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으며, 여러 종족이 모여서 사는 대도시였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모아 온 화려한 예술품들로 가득 찬 에베소의 시장들은 아시아의 허영의 시장(Vanity Fair)이었습니다.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은 에베소의 시장들에서 거래되는 것들로 그의 계시록의 일부를 다채롭게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18:12)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18: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이 큰 에베소 시의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아데미(Artemis)를 숭배하기 위하여 세워진 신전이었습니다. 이 신전은 상인들에게 돈벌이를 시켜주는 곳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에베소의 상업의 번성과 이 거대한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데미 신전 주위에는 아시아의 불결한 것들이 잔뜩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아데미 신전에서의 경배는 말할 수 없이 추하고 악한 것이었습니다. 마술과 귀신을 쫓아 내는 사람들과 온갖 종류의 마술하는 사기꾼들로 인하여 에베소 시의 분위기는 들뜨고 흥분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초자연적이고 불가사의한 것들과 마술과 악령에 의한 마법이 횡행했습니다. 현대인들도 여전히 마술과 악령에 의한 마법을 행하는데, 이는 그들이 이런 것들을 극복할 만큼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깊은 종교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차라리 전혀 없는 것만 못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이 부유한 에베소 시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에는 사도 바울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많았습니다. 먼저 그의 동족들이 회당에서 그를 대적했습니다. 또한 그곳의 지배 계급들보다는 오히려 상인들이 그를 대적했는데 이는 자기들의 장사를 바울이 방해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자 제사장들(鼓子, eunuch-priesters)과 처녀 제사장들(virgin-priestesses)이 온갖 악한 짓들을 벌이곤 했던 아데미 신전에서의 경배가 바울에게는 큰 대적의 세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형편의 에베소 교회에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참으로 에베소 시는 악의 세계의 모든 세력들이 한데 모여서 노골적으로 횡행하던 곳이었습니다. 극악한 온갖 종교들의 영향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서서 영적 대적자들의 적대 세력을 날카롭게 느껴야 했던 사도 바울은 에베소 시에서 장막 만드는 일을 하여 자신과 자신의 일행의 쓸 것들을 해결하면서 복음 전도사명을 완수했던 것입니다. 물질적인 소득을 얻고자 하는 동기에서 온갖 형태의 종교 활동이 벌어지던 에베소 시에서 바울은 그 누구로부터--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로부터도-- 금이나 은이나 의복을 받기를 거절하고, 대신 장막 만드는 일을 해서 손수 자신의 쓸 것들을 마련하면서 사명 감당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두란노 서원을 사용했는데 이 시간은 대개 무더위를 피해 쉬는 때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자신의 생계를 해결함과 동시에 쉬는 여가를 이용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여하튼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주의 말씀을 강론했는데 무려 2년여 동안 계속하여 꾸준히 복음을 증거한 결과 에베소는 물론 그 주변의 성읍에 까지 복음이 확장되어 나가는 풍성한 결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행19: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복음 전도 사명에 열심과 충성을 다하는 바울에게 기적을 통하여 능력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행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행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마술과 갖가지 사상들과 주문(呪文)들과 구마(驅魔)의식들로 가득 찬 에베소 시에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일할 때 사용하는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가 쫓겨났습니다. 에베소에서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이적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스스로를 낮추사 눈에 보이는 이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이적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이적이 더욱 중요하고 한 차원이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병들을 고쳐주는 것도 복음의 승리이지만, 이것들 보다 더 큰 승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도덕적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는 이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에베소는 여러 질병들 특히 정신병을 귀신의 침입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마술은 정상적이며, 보편적인 직업에 속했습니다. 즉 마술사가 어떤 사람에게 들어 있는 귀신보다 더 강한 귀신을 부르게 되면, 먼저 들어 있던 약한 귀신이 쫓겨난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이러한 전이해(前理解)를 바탕으로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을 전혀 모르는 이들의 행위는 도리어 화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믿지도 않는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인기와 명예를 얻고 돈벌이를 해보고자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행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이에 제사장 스게와의 아들들도 따라 행하다가 봉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행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행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19:16) 악귀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결과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했다가 큰 봉변을 당한 이 사건으로 예수의 이름이 높아지고 교회는 정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이 큰 위엄과 영광을 얻는 결과와 더불어 복음이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이어서 마술을 위한 책들을 불사른 사건이 생겼습니다.

"(행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그런데 이 책들은 여전히 우상숭배 가운데 머물러 있는 에베소 사람들의 책들이 아니라 교회 내의 신자들의 책들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 내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마술을 행하여 거룩하지 못한 것들과 거래했다고 자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책들이 불살라졌던 것입니다. 미신 지배하에 있었던 에베소에서 저들이 자기들에게 그렇게도 유익하던 책과 주문을 기꺼이 불살은 것보다 변화의 실감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생계수단을 버리고 나면 앞으로 어찌 살꼬? 하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들은 날카로우며 돌연한 삶의 수술을 가한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의 생계수단이 되는 그물과 배, 그리고 부친까지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하므로 그들의 삶에 일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한낱 고기잡는 어부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많은 사람이 죄를 미워하면서도 거기서 떠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떠나려고 할 때에도 머뭇거리거나 뒤돌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불살라진 책들의 값이 은으로 따져 오만냥이나 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노동자의 품삯으로 계산하면 138년간의 임금에 해당됩니다.

죄는 그것이 아무리 비싼 대가를 요구하더라도 처리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로 태워져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단호합니다.

"(마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팻 로벗슨 목사는 예일대 법학과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버지니아주 상원의원이며 은행 통화위원장이었습니다.

팻 로벗슨 목사는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날 퇴근 시간에 한 잔 하러 가자는 친구의 요청을 뿌리치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여보, 나 구원받았소."

하고 외쳤습니다.

"당신 미쳤군요."

하는 아내의 소리에,

"난 미치지 않았소. 난 구원을 받았단 말이오."

그리고 그는 취침시간 쯤에 아무 말도 없이 찬장문을 열고 거기 있던 위스키병을 내려놓고 하나씩 마개를 열고 하수도에 쏟아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콸... 콸... 콸....

"당신 왜 이래요? 얼마나 비싼 것들인데!"

하면서 아내가 달려와 마지막 술병을 움켜 쥐려 했지만, 그는 그것을 빼앗아 다 쏟아 버렸습니다. 구원의 기쁨은 버리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무엇을 버렸습니까? 하나님의 일과 복음을 위해서 무엇을 버렸습니까?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을 위해서 나 자신을 버렸습니까? 구원과 신앙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20절 "(행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에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라고 한 것은 주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죄를 정결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의 말씀은 죄를 알려주고 회개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주의 말씀은 가르치는 능력, 권면하는 능력, 찬송과 감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의 말씀은 우리를 강하게 하는 성령의 힘입니다.

"(엡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주의 말씀은 제자가 될 수 있는 능력, 진리를 깨닫는 능력으로 삶의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성경에 정말 쓰인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유 회사인 스탠다드 석유 회사(Standard Oil Company, U.S.A.)가 이집트 즉 애굽에서 석유를 발견하게 된 것은 성경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회사의 간부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어렸을 때에 갈대 상자에 놓여서 나일강에 버려지게 되었는데, 성경을 보면 모세의 어머니가 그 상자에 역청과 나무진을 발랐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역청은 어디서 나온 것줄 아십니까? 석유의 원유에서 나오는 찌꺼기 중의 하나가 역청입니다. 그는 역청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석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지리학자요 석유 전문가인 찰스 위트 쇼트(Charles W. Shot)라는 사람을 그곳에 보내서 탐사를 시작했는데 결국 석유를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믿을 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잘 안 되더라도 있는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엄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계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성경책 종이로 담배를 말아서 피우던 인도 청년이 담배를 말기 전에 가끔 읽던 말씀으로 변화를 받아서 그리스도인이 된 실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시대에 성경책을 선물로 받은 어떤 여관집 주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한 장씩 떼어서 여관방을 도배하였는데, 그 후 어떤 나그네가 그 방에 머물다가 벽과 천장에 붙어 있는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되어 후에는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불량자 어거스틴은 방탕과 공허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담장 밖에서 떠드는 아이들의 말을 따라 성경을 펴게 되었는데 그것이 로마서 13:11-14의 말씀이었습니다.

"(롬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롬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롬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던 어거스틴은 가슴이 뛰었고 눈이 밝아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말씀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고 위대한 성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시는' 승리의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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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변화된 도시

"(행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행19: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행19: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행19: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행19:25)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행19: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행19: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행19:2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행19:29)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가는지라 (행19: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행19:31)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행19:32)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행19: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행19:34)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 동안이나 하더니 (행19:35)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행19:36)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행19:37)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왔으니 (행19:38)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행19: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지라 (행19: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행19:41)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었는가 하는 것은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색 조합장(순례자들에게 아데미 신상이나 신전의 작은 모형을 기념품으로 팔아서 수입을 올리는 자들의 조합)의 말(25절-27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업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보고 듣는대로, 바울이라는 이 사람이 에베소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온 아시아에 걸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을 설득해서 마음을 돌려 놓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이 사업이 명성을 잃을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아데미 여신의 신당도 무시당하고, 또 나아가서는 온 아시아와 온 세계가 숭배하는 이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 위험이 있습니다."

복음이 자기들의 문화를 파괴하고 전통을 깨트리며 나아가서는 자기들의 생업까지 위협을 주고 있다면서 강력하게 복음을 반대하며 그 자신이 주동이 되어 군중들을 선동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충돌하게 된 이 에베소의 이권단체는 에베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주도하고 있던 아데미 숭배자들의 조합을 말합니다. 당시 이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는 에베소의 북동쪽에 위치했던 아데미 신전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족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데미 전각(27절)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서 한 면의 길이가 120m이고 다른 면의 길이는 60m로 솔로몬 성전의 34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에베소는 이방 종교의 총본산이요 수 많은 순례자가 끊임없이 이곳을 방문하였고 에베소 사람들은 신전을 중심으로 경제생활을 이루었던 바, 이들의 근간을 형성하는 은장색(銀匠色)조합의 영향력은 에베소에서 가장 지대하였던 것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바로 이 은장색 조합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에베소에 복음을 전하자 이 은장색 조합은 경제적 큰 타격을 입음은 물론 그 기반까지 흔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 전파가 당장 그들의 생업을 위협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던 데메드리오는 자신의 지반을 옹호하고 이득을 지키기 위해 은장색들로 하여금 소동을 일으켜 바울을 대적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는 군중심리를 격발하여 아예 바울을 없애버리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데미 신전을 위하는 것처럼 빙자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행19: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얼음판에서 놀던 아이 하나가 얇은 얼음장을 딛다 물에 빠졌습니다. 곁에 있던 소년이 얼른 가서 그를 건져 주었습니다. 물에 빠졌던 아이의 어머니가 와서 칭찬을 했습니다.

"정말 너는 용감한 소년이다. 얼음물에 뛰어들어 내 아들을 건져 주다니...."

그러자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가 내 스케이트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웃기는 이야기로만 들을 것이 아닙니다. 양심적으로 따져볼 때 우리가 하는 소위 선행이라는 것은 결국 나의 유익이나 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가!

우상숭배에 불과했던 아데미 신전을 위하는 척하면서 탐욕에 눈이 어두운 데메드리오는 그의 악업을 버리기는커녕 복음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악업(惡業)을 버리라고 경고합니다. 아데미의 은감실, 즉 모조 은신상을 제조해서 파는 행위는 분명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악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사1: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돈을 많이 벌거나 직분이 높으면 좋은 직업이 아니라 그 직업 때문에 사회 분위기가 흐트러지고 청소년들이 타락한다면 악업인 것입니다. 음란 비디오를 만들어 판매하고 술과 마약을 팔고 도박을 조장하는 것은 아무리 수입이 많아도 그 직업은 천하기 그지없는 악업인 것입니다. 그러한 직업은 직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범죄일 뿐입니다. 더구나 우상의 형상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은 인간을 어리석게 만들기 때문에 악업 중에 악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의 헛됨을 성경은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

허망한 자들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우상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이런 우상을 신이라고 증언하는 자들은

눈이 먼 자들이요, 무지한 자들이니,

마침내 수치만 당할 뿐이다.

아무런 유익도 없는 신상을 만들고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드는 자가 누구냐?

그런 무리는 모두 수치를 당할 것이다.

대장장이들은 사람일 뿐이다.

철공은 그의 힘센 팔로 연장을 벼리고

숯불에 달구어 메로 쳐서

모양을 만든다.

목공은 줄을 늘여 나무를 재고

석필로 줄을 긋고

대패질을 하고

걸음쇠로 줄을 굿는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따라

우상을 만들어 신전에 놓는다.

그는 용도에 따라서

백향목을 찍어 오기도 하고

삼나무와 상수리나무를 베어 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저절로 튼튼하게 자란 것이지

그들이 키운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머금고 자라는 것이지

그들이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나무는 사람들에게

땔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서

그것에게 절하며

그것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 엎드린다.

우상을 만드는 것과 꼭 같은 나무

반 토막으로는 불을 피우고

그 불덩이 위에 고기를 구워먹고

그것으로 배를 불리며

또 몸을 따스하게 하며

'아, 불을 보니 따뜻하다' 하고 말한다.

불을 때고 남은 토막으로는

신상, 곧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숭배하고

그것에게 기도하며

'나의 신이여,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하고 빈다. (이사야 44:9-19)

예레미야 10:3-5은 다음과 같이 우상숭배의 헛됨과 우상을 두려워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방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풍속은

허황된 것이다.

그들의 우상은 숲 속에서 베어 온 나무요,

조각가가 연장으로 다듬어서 만든

공예품이다.

그들은 은과 금으로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망치로 못을 박아 고정시켜서

쓰러지지 않게 하였다.

그것들은 논에 세운 허수아비와 같아서

말을 하지 못한다.

걸어 다닐 수도 없으니

늘 누가 메고 다녀야 한다.

그것들은 사람에게 재앙을 내릴 수도 없고

복도 내릴 수가 없으니

너희는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에베소 도시가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아데미 은감실의 판매가 줄게 된 것은 당대 최고의 우상숭배 도시인 에베소의 변화의 물결을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데미의 은감실의 판매가 줄게 된 것은 바울의 일행이 은감실을 비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도록 그들을 변화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하여 승리가 얻어졌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전이 된 에베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아데미의 은감실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줄을 알게 된 에베소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돈을 아데미의 은감실을 사는데 쓰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은감실을 비난할 시간도, 은감실에 반대하여 공공연히 항의할 시간도 없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에서는 우상을 반대하는 시위가 없었으며, 단지 하나님과 교제가 시작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새롭게 솟아나는 새 생명의 세력은 옛 것의 온갖 세력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했던 사도 바울과 그 일행으로 말미암아 에베소는 변화되어갔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새 단체를 조직하기 위하여 그 간부 요원으로 열두 제자를 뽑고 경영 상담소에 그들의 자격 심사를 의뢰했다면 이런 회답을 받을 것입니다.

나사렛 목공소 요셉의 아들 예수 귀하

귀하가 의뢰한 12명의 이력서를 검토하고 심리 테스트와 직업 적성 검사를 모아 컴퓨터에 넣어 결과를 뽑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귀하가 계획하는 새 단체의 간부사원으로 자격 부족입니다. 학력이 너무 낮고 경험 부족입니다. 그들은 단체 관념이 없고 협조 정신이 약하여 경영 관리자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정서적으로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고 성격이 너무 과격합니다. 안드레는 한 마디로 무능력자입니다. 남을 지도할 사람이 못 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회사의 이익을 제쳐놓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사람들입니다. 도마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질문뿐이요 추진력이 없습니다. 마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무슨 짓이나 할 사람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이 두 사람은 사회 혁명을 노리는 과격한 불온 사상에 감염되어 있어 귀하가 생각하는 온건한 집단에는 해로울 것입니다. 귀하가 추천한 12명 중 긍정적인 해답을 드릴 유자격자는 1명뿐입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고 사회 지식도 풍부하며 예민한 실업인의 감각과 판단력이 있습니다. 사교성도 있어 상류 권력층과 접촉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강한 동기와 의욕에 차 있습니다. 따라서 본 경영 상담회사는 가룟 유다 1명만 추천하고 남은 요원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찾아보도록 권고합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 있어서 새 단체인 교회의 터를 닦고 2천년의 세계사를 주름잡은 사람들은 당연히 실격될 수밖에 없는 11명이었고 오히려 유능한 유다는 탈락했습니다. 이 모순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자격 부족이었으나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분부를 따라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 하나가 그들 자신을 변화시켰고 사회와 세계를 변화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사치와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과 음란과 악행과 악업이 판을 치고 있는 이 나라 민족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나라 민족을 변화시키는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1965년, 지금부터30여 년전의 통계로 영국에서 일년내 화장품 값으로 1조 5천억원이 소비되었고, 일년에 담배로 허비한 것이 대략 200조원이었으며, 남자 이발비에 6천억원, 여자 미용비에 1조원이 소비되었다고 합니다.

몇 년전 미국내 각 교파의 외국 선교비 총액은 연간 약 1천 600억원이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인이 입술연지에 소비된 돈이 3천 7백억원의 절반도 안되며, 샴푸에 소비된 돈 7조 6천억원의 50분의 1도 안되며, 문화생활(영화, 스포츠)에 소비된 돈 21조 6천억원의 1천분의 1도 안되는 돈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현실은 미국과 비교할 때,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우리 교회의 일 년 동안 선교비 총액은 약 3천만원 정도입니다. 이는 교회 전체 결산액의 약 20%에 해당됩니다. 3천만원의 대부분이 우리 교회 전도 책자 "숲 속의 사과나무"(1만부) 및 설교집 발간(2천부)을 통한 문서 전도비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매주 마다 배달되는 수 통의 편지들과 걸려오는 전화들은 전국 곳곳의 병원에서, 훈련소에서, 구치소에서, 교도소 및 감호소에서, 학원에서, 그리고 목회 현장에서 복음을 실은 작은 책자들을 통한 변화의 작은 물결이 일고 있음을 역력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풍요로운 사회라 불리워지고 있는 사회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손에 주어진 풍요함은 축복도 되고 많은 악의 근원이 되는 양면을 갖고 있습니다."(Brain K. Rice) 그러므로 풍요로운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기독교인의 "소명은 이제 부(富)를 성화(聖化)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F.R. Barry). "부(富)를 성화(聖化)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5천년 역사에 1백년 전 이 땅에 전파된 복음을 통해 누리게 된 이 나라 민족의 풍요로운 부요함은 다시 한 번 복음을 통해 그 풍요로움이 성화되지 아니하면 언제 제 2의 6.25같은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숲 속의 사과나무"발간을 위해 지난 15개월 동안 교회 임원 60여명이 후원하신 후원금 총액은 400만원이 채 되지 않습니다. 임원 한 사람이 전도 책자 발간을 위해 후원하신 금액이 월 평균 6,000원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축복의 재물들이 복음을 위해 쓰여지는 성화에 이르지 못하고 썩어질 육체를 위해 사용되어진다면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은 더욱 더 부패하고 타락하여 갈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가정 복음화를 위해, 주어진 부(富)를 얼마나 투자하십니까? 여러분 가정의 부가 성화되지 않고서는 가정과 자녀가, 나아가 나라 민족이 새롭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의해 움직인 은장색들은 지방색과 종교색이 짙은 우매한 군중들과 합세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자기 대신 동행자가 고초를 겪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연극장으로 뛰어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동료를 구하든 못구하든 생사고락을 함께 하려는 바울의 이러한 행동은 말만 앞세우고 행동은 따라가지 못하는 오늘날의 세대에 훌륭한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19:29)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가는지라 (행19: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행19:31)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행19:32)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이처럼 복음을 위해서라면 폭도들 앞에서 도피하지 아니하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사도 바울이 있었기에 에베소는 변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 소요사태를 통해 중요한 교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의 소요 사태에 대한 서기장의 태도는 정당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서기장은 시정에 대한 책임자로서 에베소 시의 평안을 위해서 기독교를 보호하려했던 것이지 그가 기독교를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서기장의 관심은 오로지 아우성치는 군중들로부터 바울의 동료들을 구하고, 소란에 빠진 에베소 시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요된 군중들의 종교를 높여주고 그들을 달래서 해산시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서기장은 에베소 시가 조용해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연유야 어떻든 서기장의 도움으로 기독교는 보호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외부로부터 보호와 후원을 받게 되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교회의 첫사랑이 식어버린다는 것을 교회사는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의 촛대는 수세기 동안 그곳으로부터 옮겨져 버렸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저분한 회교도 마을에 사는 보잘것없는 주민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을 정도입니다. 에베소의 사원은 볼품 없는 유적이 되었으며, 항구는 갈대가 무성한 웅덩이가 되었습니다. 물이 괴어서 썩고 있는 에베소의 더러운 저습지들에는 덤불 백로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모여듭니다. 고대 문명이 아주 저급한 미신과 극도로 타락한 죄악을 중심으로하여 번성했던 곳에는 이제 말라리아와 망각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에베소는 몰락한 도시와 몰락한 교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늘날의 에베소의 이러한 모습은 에베소 시의 보호와 후원을 받다가 그만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에 의하여 구원받을 수 없었던 도시의 모습인 것인 것입니다.

서기장이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해줄 때 교회는 가장 위험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복음을 반대하지않고 오히려 복음 전파를 허용하는 우호적인 환경에 도취된 나머지 우리의 힘을 낭비하고 우리의 고귀한 소명의 의미를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주의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성품이 연단을 받아 금과 같이 빛나게 되는 것은 박해의 고통을 통해서입니다. 박해를 받은 교회는 언제나 순수했으며 따라서 능력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세상으로부터 보호를 받은 교회는 늘 위험에 처했으며 아주 종종 무기력해졌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전도를 생명을 삼아 전도하는 사람인데 하루는 말을 타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 며칠 동안 핍박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깜짝 놀라서 말에서 내려와 땅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짓고 있나요? 왜 핍박이 없을까요? 제가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까?" 하고 소리를 내서 기도했더니, 옆 사람이 시끄러웠던지 요한 웨슬레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돌을 맞고는 다시 우러러 보면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젠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데 반대와 핍박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무사태평하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반드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순간에 변화되고, 어떤 사람은 점진적으로 변화되기도 하나 아무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변화하는 것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복음은 그것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변화시키며 또한 그들이 사는 가정과 사회, 나아가서는 나라 민족 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대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바울과 함께 사도들이 복음을 외칠 때 강한 박해와 핍박이 있어서 결국 예수의 제자들 대부분은 피흘리는 순교를 당해야 했고, 그것이 로마로 확산된 후에는 더 극심한 박해가 일어나서 악한 황제들 때문에 목숨을 잃은 성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다가 사나운 짐승에게 물려 죽거나 불 속에서 한 줌의 재로 화하기도 하고, 창과 칼을 무서워하지 않다가 장엄한 죽음을 당한 성도들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 복음이 유럽 대륙에서 카톨릭과 갈등하여 끊임없이 고통을 겪다가 미국 대륙과 호주 등으로 퍼졌고, 다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수많은 토속 종교들과 부딪쳐서 전도자들의 아까운 목숨들이 희생되기도 수 없이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해졌을 때에도 미신과 전통 종교의 세력 때문에 선교사들이 천대를 받거나 핍박을 받고 갖은 고난을 다 겪으면서 예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한 때 일부 선교사 사회에는 한국은 선교사의 묘지라고 한 무서운 기록의 일부가 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고난을 동반한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에 종교가 많고 또 주장도 많지만, 참으로 우리에게 참된 기쁨과 축복과 소망을 주는 것은 오직 예수 복음뿐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이요 나와 세상의 구세주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상을 철저하게 떠나고 악업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한 선교사가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행인을 만나서

"당신은 복음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복음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보았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즉 자기 동네에 소문난 깡패요 불같은 성격 때문에 동네 사람들도 무서워하고 아편 중독자에 짐승처럼 사나운 전과자가 있었는데, 그가 예수에 관해서 듣고 나더니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복음에 관해서 잘 듣지는 못했지만, 복음을 보았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복음을 증거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말할 수 없으면 자신의 생활로 복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들려줄 수 없다면 보여주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없으면 복음을 위해 주어진 부요함을 복음을 위해 투자하시므로 성화된 풍요로움을 변화된 나라 민족과 더불어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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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예수께 받은 사명

"(행20: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행20:2)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행20:3)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행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행20: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행20: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행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행20:8)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행20: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행20: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행20: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행20: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행20: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행20: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행20: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행20: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행20: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행20: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행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행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행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행20:2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행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1. 사도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에서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구브로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그리고 루스드라 등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으며(13:4-18), 제2차 전도여행은 마게도냐 환상을 통하여 유럽에서 이루어졌으니 곧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그리고 고린도가 선교의 중심지였습니다(16:6-18:23). 또한 약 3년간에 걸친 제3차 전도여행은 대부분 소아시아 서부 지방에서 이루어졌던 바, 바울은 주로 에베소의 복음화에 주력했습니다(19:1-21:16). 바울은 3차에 걸친 자유로운 전도 여행을 통하여 눈부신 이방 전도의 성과를 올렸으니 사도 바울로 인하여 복음의 불길은 강력하게 번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라틴 세계와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며(롬 15:24), 로마를 그의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본장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의 마지막 체류지였던 밀레도에서 고별설교를 통하여 자신이 세계 선교를 위한 전도자로서 "예수께 받은 사명" 감당을 위해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희생적인 삶을 살았는가를 역설함으로 후세대를 위한 모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20: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행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행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행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부딪치는 역경이 어떤 것이든 예상되는 위험이 어떤 것이든 바울의 선교사명의 행진은 멈추지 않습니다. 태산이 막으면 돌아갑니다(3절). 죽음이 부딪치면 피해서 갑니다(22-24절). 걸어서 가기 어려우면 무릎으로 갑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성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저들의 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믿음 때문에 당하는 환란과 역경이 어떤 것이든 앞으로 예상되는 위험이 어떤 것이든 우리의 신앙생활과 순례의 길은 중단됨이 없이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부름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천국을 향해 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처음부터 신앙생활의 역경은 예상한 것입니다. 공짜로 십자가를 자가용처럼 편안히 타고 천국으로 들어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택한 길, "예수께 받은 사명"의 길은 처음부터 좁은 길이요 험한 길입니다. 찾는 이가 적은 길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이 길은 생명의 길이요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멈추거나 뒤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오직 앞으로 나가는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은 분명합니다.

"(히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진실로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한 번 지기로 결심한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누가복음 9장 62절에서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눅17:32)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뒤돌아보지 말도록 경고하신 교훈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어떤 위기나 상황에 관계없이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을 계속해서 달려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이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을 쓰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바울은 드로아에 가서 여러 날을 머물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드로아 교회에서 설교했는데, 그 다음날 배를 타고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당연히 드로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참석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곳에 있었다면 참석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설교를 짧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정까지 계속 설교했습니다. 그가 자정에 설교를 멈춘 이유는 그 교회 청년 중의 한 사람인 유두고가 창문에서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날은 대단히 무더운 여름밤이었을 것입니다. 바람이 들어오도록 모든 창문을 다 열어 놓았습니다. 유두고는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바울이 설교하는 동안 점점 눈이 무거워지더니 끝내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3층 다락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바울이 설교를 중단하고 내려가서 유두고 위에 엎드려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유두고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교회에서 육신적으로는 결코 잠을 자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될 때 영적으로는 잠자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그들의 마음은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개인적인 일들과 문제를 생각하거나 혹은 세상적인 즐거움이나 쾌락을 꿈꾸고 있다면 유두고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았지만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유용한 존재인가 하는 점에서 보면 잠자리에 든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어둠의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일꾼들을 부르고 계시건만, 영적 잠에 취해서 "영적인 싸움은 다른 이들한테 시키고 나는 계속 잠자게 좀 내버려 두라." 면서 투덜거리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 앞에서는 그들도 잠을 깰 것이고 양손에 못자국 난 분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를 위하여 내 생명을 주었는데 너는 날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필요했건만 너는 다른 일들을 위해 네 생애를 바쳤고 나의 일은 내팽개쳐 버렸다." 그 순간에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잠자리에 들지도 모르지만 사단은 잠자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일을 합니다. 그는 예배시간에 교회에 들어와서 각 사람들의 마음에 속삭이며 유혹합니다.

어느 책에 이런 재미있는 글귀가 있었는데 모두 영적으로 병들고 잠들어 있는 교인의 모습을 나타낸 글입니다.

"나팔꽃 신자----아침에만 잠깐 얼굴을 비치고 저녁에는 텔레비젼 예배를 드리는 신자,

해바라기 신자----시대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교인,

감투교인----감투를 주어야 교회에 나오는 교인,

벙어리 교인----친구끼리 모이면 그렇게도 말 잘 하는 사람이 공예배 기도 한 번 못하는 교인,

시험 채점관 교인----설교 비평이나 하고 남의 흠이나 잡는데 이골난 교인,

유람선 교인----이 교회 저 교회 왔다 갔다하며 정착하지 못하는 교인,

묵상 교인----집에서는 불면증으로 고생하면서 예배만 시작하면 조는 교인,

국회의원 교인----한 가정에서 대표자로 나오는 교인 등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설교 시간만 되면 습관적으로 조는 그런 사람은 달고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의 맛을 모를 것입니다. 물론 재미없는 설교를 하기 때문에 조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일주일 동안 주일 30분 설교를 위해 적어도 20시간을 준비하지만 주일 설교를 엉망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후 강단을 내려올 때면 마음이 답답하고 무척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설교자가 성경을 말하고 있다면 비록 듣기에 달콤하지는 않아도 그 안에서 반드시 배우고 깨달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에 빠져 있어서 마음에 평안이 없거나, 귀신에게 잡힌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흔히 딴 생각에 빠질 때 곧 잠에 빠지기도 합니다. 성경은 잠들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여러 번 경고하고 있습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고전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계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어느 때 주님이 오실지 어느 때 순간적으로 오실지 몰라서 아무 준비 없다가 덜컥 가신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 귀하고 지혜로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일본 라디오 제작 회사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생산 제품에 하자가 많이 생기고 그 물건을 구입한 고객들로부터 불평이 자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사장이 "우리 제품에 하자가 있을 수 없는데........" 하면서 제품을 수거했습니다. 검사해 본 결과 특히 점심 식사 이후에 만든 제품이 그렇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공장의 많은 직원들이 졸면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혜로운 공장장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즉 30초 하품 휴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점심 식사 후에 가장 졸음이 많이 올 때쯤 되어 모든 공장 직원들이 다 함께 두 팔을 머리 뒤로 하고 30초 동안 큰 소리로 하품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후로부터 생산성이 훨씬 나아졌다는 것입니다.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위해 영적으로 깨어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때에 맞지 않는 잠은 실수를 범하게 되지만 알맞은 휴식은 우리에게 생기를 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활짝 깨어 있어야 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깨어 있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인 것입니다.

3. 유두고 사건 이후 바울의 선교 사역은 쉬지 아니하고 계속되었습니다. 과거에 겪었던 모든 어려움과 고통이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현재의 불안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갈망을 마음에 안고 사도 바울은 조용히 묵상하며 20마일(32km)을 혼자 걸어서 여행했습니다. 그는 앗소에서 제자의 무리와 다시 합류한 후 배를 타고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 마침내 밀레도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30마일 떨어진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그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와같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선교여행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는, 사도의 안식이며 또 하나는 휴식을 모르는 그의 끈질긴 노력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안식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온갖 속박의 끈을 다 끊어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사로잡히겠다는 열망을 갖고 그에게 온전히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빌립보로, 다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로 향했다가 그곳에서 헬라로 가서 3개월을 머물렀습니다. 다시 그는 마게도냐로 다녀서 누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드로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앗소까지 20마일을 혼자 걸어서 여행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혁신적인 전도의 여정을 볼 때 우리는 그의 삶을 지배한 열정을 표현한 그의 고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리스도께 지배받았던 사도 바울은 자신의 환경에 대해서는 지배자였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자신의 환경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는 자신의 환경(그것이 역경이든 순경이든)을 변화시켜서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으로 불탔기 때문입니다.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무리 앞에서나 홀로 있을 때에나, 헬라에서의 위험한 적대 앞에서나 드로아에서 사랑스런 형제들 앞에서나 그는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 굳은 신앙을 갖게 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굳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평안이 넘쳤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께 받은 사명" 감당을 위한 뜨거운 열심과 충성 속에서 심령의 안식과 평안을 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쉬지 않고 무던히 애썼습니다. 자기의 주인, 곧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한 그는 결코 시간을 낭비하며 꾸물거리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그는 그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경우에라도 그는 자신이 사랑과 봉사를 베풀어야 한다고 느낄 때에는 기꺼이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참으로 그는 쉬지아니하고 전진하면서 목전의 일들을 철저히 수행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렸으나,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있어서는 쉬지 않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입니다. 인생의 변덕스러운 열병을 주님의 치료의 손길을 통하여 고침받은 자는 늘 새로운 사명으로 이끄는 그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면서 마음 속에 감동과 열정을 품고 그의 일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에 매임을 받아" 일하지만 "은혜의 말씀"을 전하려 하는데는 전혀 매이지 않았습니다.

"(행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어느 부인이 남편의 지나간 이야기를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는 것 같지만요. 예수믿기 전에는요. 밥 먹다가도 자기 기분만 조금 나쁘면 '야' 하고 밥상을 대문짝에 집어던지기를 일주일에도 두세번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미안하고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이 새빨개져서 "목사님 오셨는데, 그건 다 지나간 이야긴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나오다가 무슨 이야기까지 나왔느냐 하면, 깡패 대장을 지낸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깡패 두목하면 어깨가 딱 벌어지고, 가슴이 떡 벌어지고, 덩치가 있고, 얼굴이 우락부락하고, 눈이 우락부락해서 눈만 부릅뜨면 우리같은 사람은 기절해 나가자빠질 정도로 그런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얌전해뵈고, 체구도 작고 얼굴이 가마잡잡한 분이 얌젼하게 생겨서 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서면 일대에서 두목으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말을 듣고 웃으면서 한 마디 했습니다.

"선생님, 생각보다 다르네요?"

"뭐가 달라요?"

"깡패 두목하면 인상이 이렇게 이렇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전혀 안그렇네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두목까지 할 수 있었나요? 두목하면 주먹이 무기인데 주먹을 쓸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두목을 하셨어요?"

"아이 참 목사님, 이것 참 창피한데 목사님이 물으시니까 말하지요. 대장 노릇하는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기술로 하세요?"

"기술도 아니에요. 뭐 기술이라고 할 것이 있습니까."

"그럼 힘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고 뭘로 하세요?"

"이걸 (목을)내놓으면 돼요."

그러면서 그는 '나보다 덩치가 큰 사람하고 싸울 때 내가 이 놈하고 싸워서 죽는다 죽는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결사적으로 붙어놓으면 키 큰 사람이 느낀다고 합니다. '이 놈이 싸우다 죽을 각오를 하고 붙었구나' 그것을 알면 덩치 큰 사람이 무릎을 딱 꿇는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기 전에는 자기 목을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두려운 환경 속에서도 두려움없이 담대하게 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 받은 사명"을 받은 자는 비록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하나 끝까지 사명감당하며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박해 시절에 로마 외곽의 어느 지하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숨어 살던 엄청난 굴이 발견되었습니다. 카타콤베라고 하는 지하굴입니다. 이 굴의 길이는 960km로서 서울 부산 왕복하는 거리입니다. 이 굴은 약 300년간 10세대를 이어 오면서 작게는 175만명, 많게는 400만명이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굴 속의 여기 저기에 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가장 많은 그림은 물고기 표시였습니다. 그것은 헬라어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말의 약자가 물고기라는 단어와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선명한 문구는 "하나님의 말씀은 묶이지 않는다."라고 쓴 것입니다. 우리들은 숨어 살고, 묶여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묶이지 않는다는 것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그 지하 동굴에서 대를 이어 가며 햇빛도 없이 살아간 그들에게 참 자유가 있었으며, 참 은혜가 있었으며, 그들 가운데 소리없는 찬송이 얼마나 가득했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의 빛과 복음의 빛만 의지하고 산 것입니다. 그래도 그 굴 속에 찬송과 감사와 기도가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명자는 그의 사명을 마치려함에 모름지기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울 수 있어야 참된 사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벵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부드러운 정서가 여기서 주장합니다. 눈물을 귀히 여기는 점에서는 성경을 당할 책이 없습니다. 눈물이 점점 없어지는 것도 그 후 시대들이 부패한 증거입니다. 전 세대에는 남녀, 심지어 영웅들도 쉽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은 눈물 흘리는 것이 여자들과 아이들에게만 남아 있습니다."

이사야는 백성이 파멸할 것을 생각하며 슬피 통곡했습니다.

"(사22:4) 이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예레미야는 자기 눈이 눈물의 근원이 될 만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울었기 때문에 그를 울보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렘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이런 많은 눈물이 우리들에게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행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도 겸손에 있고, 그것을 유지하는 비결도 겸손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눈물은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의 눈물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끓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으며 배척하는 사실로 인하여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9:2) (1절에 포함되어 있음)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는 신자들이 영적으로 병들었을 때에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예수께 받은 사명"자는 오직 성령의 매임바 되어 불타는 선교의 열정으로 어떠한 위험과 환난과 역경이 있다할지라도 사명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 받은 사명"자는 영적으로 깨어 시대를 일깨우는 사람입니다.

"예수께 받은 사명"자는 겸손과 눈물로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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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명자의 생활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행20: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행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행20: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20: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행20: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행20: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면서 밀레도에서 행한 그의 마지막 고별 설교는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핵심적인 설교로 사명자의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교회를 "(행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ecclesia), 즉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 불러냄을 받은 무리들과 세상 사람들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불러냄을 받은 무리들"이 값을 주고 산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회는 예수의 이상을 찬양하고 그의 고상한 윤리적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무리가 아닙니다. 기독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써 자기의 것으로 만드신 사람들의 무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회의 근본이 되는 진리입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명자는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의 종이 되지말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사명자인 것입니다.

"(고전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둘째, "(행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라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교회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방편(원천)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교회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은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모든 서신은 은혜란 말로 시작하고 또 끝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변화를 설명하는데도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재 창조되는가, 그러한 변화와 재 창조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설명이 가능한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자신에게 끼쳐준 변화의 결과를 결코 잊을 수 없으며,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의 속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음의 성구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속에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볼 때, 바울의 생의 원리는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은혜를 같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필연적으로 임하는 박해와 곤란 속에서도 오직 은혜만이 그 인생의 무서운 긴장을 뚫고 나가게 할 수 있게 하는 무기인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은혜란 인생의 요구, 책임, 그리고 의무에 대해서 용기를 가지고 적절히 대처하게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살후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살후2: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살후2: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는 주의 음성을 듣고 그 은혜 때문에 매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은혜는 날마다의 굳굳함과 힘으로 인간에게 무장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은혜는 인간의 생활을 아름다운 것으로 장식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은혜는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32절의 말씀 "(행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는 그 의미가 이렇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로 사신 그의 것이다. 너희를 위협하는 크고 극악한 위험들이 있는데, 밖으로부터는 흉악한 이리의 위험이고 안으로부터는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의 위험이다(30절). 그러나 너희에게는 너희를 구하고 너희에게 힘을 줄 수 있는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이 있다."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은 언제나 교회에게 생명과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삶의 힘과 능력의 원천으로 삼아야 합니다.

셋째, 사도 바울은 교회를 다스리는 참된 방법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즉 성령께서는 감독의 직무를 수행할 사람들을 택하신다는 것입니다. 감독은 영어로 오버시어(overseer)인데 이는 '지켜보며 감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감독은 그가 감독하는 대상을 가까이에서 보지 않고 멀리서 보며, 일부분을 보지않고 전체를 봅니다. 감독의 또 다른 기능은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마땅히 보아야 할 자들임에도 보지 못하고, 마땅히 양떼를 먹여야 함에도 오히려 먹기만을 탐하는 입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협하는 위험 가운데 외부로부터의 위협인 "흉악한 이리(29절)"와 내부로부터의 위험, 즉 "제자들을 이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30절)의 위험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양떼를 지키고 먹이는 감독이 자신의 중요한 임무를 잘 수행하는 것입니다. "흉악한 이리"는 거짓 선생들, 즉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가짜들을 말합니다.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교회 지도자라 하면서 자신의 이권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분별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영적인 상황은 이리 가운데 보냄받은 양과 같은 것입니다.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눅10: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벧후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벧후2: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벧후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러한 종교적 협잡꾼들을 찾아내어 물리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행20: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 내에서 자리와 권력에 야망을 품은 사람들로 인한 위험입니다.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교회사는 탁월한 위치에 있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 내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입니다.

"(요삼1: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요삼1: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도다 (요삼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의 예언과 같이 과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부겔로와 헤모게네, 또한 데마와 같은 자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딤전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딤후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지금도 교계는 거짓 선지자들의 무리와 수많은 적그리스도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분별의 은사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충만하시므로 이들을 분별하여 성결보존하며 예수께 받은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사명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일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일2: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본문 28절의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에서 감독자는 성직자 또는 교회 지도자를 말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라고 했습니다. "삼가라"는 말뜻은 깨어 지키며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삼가라는 것입니다. 남의 구원 문제를 가지고 힘쓰다 보면 자기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등한히 여기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바로 서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바로 할 수 없으며, 자기가 영적으로 살지 못하고는 남을 살릴 수 없으며, 자기가 영적으로 부요하지 못하고는 남을 영적으로 부요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챠드 백스터는 "많은 사람들이 남들을 가르쳐 지옥에 가지 말라 하고 자기 자신들은 지옥으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교회 지도자(성직)는 성령께서 세웠기 때문에 삼가야만 합니다. 교회 직분이 사람들이 세운 직분이라면 사람들의 눈에만 들게 일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성직은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직분자들은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기쁘시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교회 직분자가 흔히 주님을 기쁘시기 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착각에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성령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교회 직분자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치는 자이기 때문에 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이니 만큼 얼마나 소중한 것이겠습니까? 계시록에 보면 영광 얻은 사람들이 그 자신들의 선행을 찬송하지도 않고, 그들의 율법 지킨 일이나 충성한 것을 찬송하지도 않고, 다만 예수님의 피(어린양의 피)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계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그런데 교회 직분자들가 조심하지 않으면 자기의 어떤 노력이나 잘 한 것으로 교회가 될 것처럼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영국의 런던에서 세계적인 대형 백화점을 경영하는 고든 셀프리지라는 사람은 지도자와 보스(boss)가 되는 것은 다르다 것을 말하며 그 차이점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상관은 사람들을 몰고 가지만, 지도자는 그들을 인도합니다. 상관은 권위를 휘두르지만, 지도자는 선한 뜻을 잘 전달합니다. 상관은 위협적인 경우가 많지만, 지도자는 감동적입니다. 상관은 '나는'이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지도자는 '우리'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상관은 잘못된 것을 책망하지만, 지도자는 잘못된 것을 교정합니다. 상관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지도자는 그 방법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상관은 주로 '가라'고 명령하지만, 지도자는 '갑시다'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상관이라고하여 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상관이라고하여 다 옳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고 명령하는 상관이 되기 보다는, 그들을 인도하고 이끌며 솔선 수범하는 좋은 본을 보여 주는 지도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인도의 한 힌두교도가 마음에 변화가 생겨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낯선 환경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기도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다가 주변 사람들을 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큰 혼란을 주었습니다. 두리번거리는 사람, 턱을 고이고 있는 사람, 눈을 감고 있는 사람 등 가지 각색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고민 끝에 턱을 고이고 한쪽 눈만 감고 있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꾸며낸 이야기겠지만 처음 오는 사람들은 앞서 행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대로 배우기 쉬운 것입니다. 사명자는 삼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솔선수범하는 좋은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행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의 심령을 가진 사람 뿐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위하여 우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위해 울었습니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만 같습니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몹시 차겁고 형식적이고 예식적이고 눈물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셨던 그 동일한 사랑과 자비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행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쳤다." 고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훌륭한 의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약을 처방해야 합니다. 설령 그 약이 입에 쓰다 할지라도, 때때로 그는 칼을 들고 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일이 고통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모든 일은 반드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 전부를 사랑으로 가르쳤습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께 받은 사명"을 사랑의 눈물로 감당해나갔습니다. 사명자는 교회와 나라 민족을 위한 사랑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행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행20: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사명자는 재물을 탐하지 말아야 하며 생활이 깨끗해야 합니다. 특히 물질 생활이 깨끗지 못하면 양떼를 다스리거나 사명감당할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받기보다는 베푸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거지가 마을로 구걸을 나섰습니다. 집집을 기웃거리며 구걸을 하던 거지는 저만치서 다가오는 한 대의 황금 마차를 발견했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황금 마차를 바라보며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왕이 아니면 저런 마차를 탈 수 없을 거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갑자기 희망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는 이제 구걸 행각도 끝이라고 단정했습니다. 틀림없이 저 마차 속의 왕은 인자하신 분이라서 많은 보물을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면서 왕이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왕은 거지에게 인자한 눈길을 주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거지는 마침내 행운이 찾아왔다고 감격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왕이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면서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거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청한 표정이 되어 왕에게 말했습니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무엇을 달라는 말씀입니까? 임금님께서는 설마 농담을 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그러나 거지는 주삣거리면서 자기의 호주머니를 뒤졌습니다. 그의 동냥 자루에는 마을에서 구걸한 얼마의 돈과 갖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호주머니에서 아주 작은 곡식의 낟알 한 개를 꺼내어 왕의 손바닥에 올려놓았습니다. 왕은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그 곡식 낟알을 소중히 집어들고 돌아섰습니다. 늦게야 집으로 돌아온 거지는 종일토록 구걸한 물건이 가득한 자루를 방바닥에 쏟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초라한 무더기 가운데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낮에 왕에게 주었던 곡식의 낟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낟알은 웬 영문인지 반짝반짝 빛을 내는 황금 낟알로 변해 있었습니다. 거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 임금님께 나의 전부를 바칠 마음을 지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거지였던 것입니다. 그로서는 누구에겐가 얻어 오는 일만 경험했지 한 번도 남에게 어떤 것이라도 주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남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마음조차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명자는 참으로 "범사에 모본을 보여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베푸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에 지도자가 없다고 한탄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우리가 지도자가 되도록 힘씁시다. 세상에 선한 사람이 없다고 비난하지 말고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됩시다. 교회 안에 쓸 만한 인물이 없다고 투덜대지 말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일꾼, 사명자들이 됩시다.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나로부터 사랑을 나누는 사랑하는 성도, 사명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명자는 결코 비난과 시기의 대상이 되거나 갈등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존경과 사랑과 마음을 나누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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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일사각오(一死覺悟)

"(행21:1)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행21: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행21: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행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행21:5)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행21: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행21:7)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행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행21: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행21: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행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행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행21: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행21:15)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행21: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인들과 뜨거운 작별을 뒤로 하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행선(行船)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움없이 고스(Cos)를 통과하여 로도(Rhodes), 바다라(Patara), 베니게(Phoenicia)를 거쳐 두로(Tyre)에 도착하여 7일 동안을 그곳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 두로에서 머무는 동안 그곳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핍박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핍박이 있을 것이라는 것 만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성령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바울에게 명령하셨다면,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것은 성령을 거스리는 죄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이 두로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기다리고 있음을 바울에게 통보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을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을 계속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한 선택권은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말대로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계속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행21:13)...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당신의 마지막 여행이 십자가에 못박히러 가는 길임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헌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 받아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자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예루살렘 수난 예고는 예루살렘을 향하던 중 또 한 번 가이사랴에서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의 복음 전도자 빌립(초대교회 7집사 중 하나)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선지자 아가보가 찾아와 수난을 예고하였던 것입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묶음으로서 바울이 그처럼 결박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임을 상징적인 표현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행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이같은 예언은 구약성경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로 사람 아히야는 자기 새 옷을 조각조각 찢어 솔로몬 왕국의 분열을 상징적으로 계시했습니다.

"(왕상11:29)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왕상11:30)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왕상11: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왕상11: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왕상11:33)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왕상11:34)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왕상11:35)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왕상11:36)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왕상11:37)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왕상11:38)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왕상11:39)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지라."

애굽인들이 어떻게 앗수르인들에게 포로로 잡혀갈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이사야가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했습니다.

"(사20: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사20: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사20: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사20:5) 그들이 그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을 인하여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사20:6) 그 날에 이 해변 거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아가보 선지자는 예루살렘 교회의 예언자로써 극심한 흉년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행11: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행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아가보의 표현을 통한 예언, 즉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묶음으로써 바울이 그처럼 될 것임을 표현한 계시는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성도들은 이 표현 계시를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사랑하고 아끼며 염려하는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극구 말렸던 것입니다.

"(행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그러나 믿음의 형제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을 나무라며 자신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까지도 각오하였음을 선언합니다.

"(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행21: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참으로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일사각오의 신앙을 지닌 바울은 사사로운 인정(人情)이나 감상(感傷)으로 보다 큰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았습니다.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폴라드(Adelaide A. Pollrd)양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는 것이 그렇게도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당뇨와 신경계통의 병을 안고 침대를 딩굴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기도 모임에서, 옆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한 할머니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님이여,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사오니 주님의 뜻과 섭리만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할머니의 기도 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마음은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고집도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집념도 녹아 버렸습니다. 자기가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한없이 평안해짐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바로 이 때의 경험을 찬송시로 적었습니다. 그것이 217장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리니

나의 맘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펴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아멘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할 수 있는 고백은 이것뿐일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일사각오의 헌신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바울의 복음 사역은 죽음까지도 불사한 것이었고 그러한 비장한 결심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케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부딪쳐 올 위험을 알면서도 감정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서는 자신의 안전을 전혀 돌보지 않았던 바울은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명 받은 사명자는 사명을 위하여 일사각오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1934년 평양 신학교 사경회에서 이미 자신의 생명을 주께 바치기로 한 주기철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 있을 뿐입니다."

일제는 1935년부터 기독교 학교 및 교회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1938년에 접어들면서 교회에 대해 더욱 강력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정현 교회 강단에서 늘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교단의 신성을 수호할 것을 외쳐 왔던 주기철 목사는 교회 헌당예배를 드리던 날인 1938년 2월 8일 일본 경찰에 의해 검속됨으로 그의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5개월 구속 후 풀려난 후에도 신사참배가 십계명을 범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해 9월 일제의 강요에 굴복한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할 때 총회직전에 두 번째 검속되었으며 세 번째 1939년 7월에 경북 의성에서 농우회 사건이 터져 그 사건과 연루되어 또 다시 검속되었습니다.

7개월 후 석방되어 돌아온 후 목사 파면의 위협 속에도 굴하지 않고 강단을 지키다가 1940년 4월 네 번째 구속되었다가 잠시 가석방으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에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검속되었습니다. 황실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후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는데 그가 옥에 갇혀있는 동안 평양노회는 그의 목사직을 파면하였고 가족은 교회사택에서 추방당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도 주기철 목사의 옥중 투쟁은 계속되던 중 3년 7개월만에 병감으로 옮겨졌습니다. 끊임없는 고문과 형편없는 옥중 음식 때문에 병이 든 것이었습니다. 병감으로 옮겨진 후 1주일만에 "예수 사랑, 나라 사랑의 사람" 주기철 목사는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라는 마지막 기도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주기철 목사의 복음 성가 <일사각오>는 이렇습니다(복음성가 161장).

1. 깨어라 성도여 징조를 보라

신랑예수 구름타고 오시려한다.

환란과 핍박이 날 기다리니

믿음으로 이길 준비 어서 합시다.

(후렴) 깨어라 주 재림 가깝다

주를 위해 살다가 주 위해 죽자.

2. 우리의 힘으로는 옳게 못살고

네 신앙가지고는 순교못한다.

성령권능 나에게 충만케 하사

성경대로 살다가 죽게 하소서.

3. 마귀는 네 믿음을 빼앗으려고

사망권세 가지고서 위협을 하나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말라

승리자 예수님이 나의 편이다.

4. 주님의 이름 위해 옥에 갇히고

갖은 고생 다 하다가 죽을지라도

십자가의 큰 은혜 생각할 때에

아직도 내 고생이 부족하도다.

5. 성경과 기도로 무기삼으니

불타는 나의 소원 일사각오뿐

죽도록 싸우다가 쓰러진 후에

천국에 영광집에 편히 쉬리라.

세상에는 자기 가족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친구를 위해서 자신이 손해보는 의리있는 사람도 있으며, 민족을 위해서 험악한 삶을 걸어온 훌륭한 사람도 있는데 지금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는 비장한 결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살며 또 무엇을 위해서 죽을 것입니까?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한 어떤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참으로 멋진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처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 또 그를 위하여 죽기를 결단하는 헌신된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로마인으로서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이 된 소피아는 뛰어난 미모를 지닌 16세의 아가씨로서 당시 로마 총독의 아들로부터 청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소피아는 하나님의 사역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으므로 불신자인 총독 아들의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들어가 말씀 전파와 봉사 활동에 주력했습니다.

아들의 청혼을 거절당하여 화가 난 총독은 그녀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녀를 잡아다가 위협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내 아들과 결혼한다면 너를 용서해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를 마굴에 보내어 정조를 빼앗기게 하겠다."

그러나 소피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어찌 주님을 배반할 수 있겠소? 당신들이 나의 몸을 다치게 할 수는 있지만 이 몸은 주님께 봉헌한 것이므로 이를 더럽히지는 못할 것이오."

이리하여 소피아는 마굴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소피아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즉 그 사람의 손이 공중에서 석고처럼 굳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시장은 또 다시 그녀를 화형시킬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불 속으로 던져지는 순간 타오르던 화염이 좌우로 갈라져 그녀를 조금도 해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시장은 그녀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가장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러 그녀를 교수대에 세웠습니다.

소피아는 마지막으로

"나는 이미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이 너무도 기쁠 뿐입니다."

라고 하며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쳤습니다.

소피아의 이런 용기는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연약한 여인이 홍수나 화재가 났을 때 사랑하는 자녀을 구하기 위하여 놀라운 용기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여인이 평소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평범한 일상의 수준을 초월하는 놀라운 용기를 발하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며(아가서 8:6) 죽음의 공포보다 강한 것입니다. 소피아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것을 각오했노라."

고 했을 때, 이처럼 그녀로 하여금 생명을 무릅쓰게 하는 강렬한 동기는 바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즉 그녀는 그리스도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 사랑을 위해서 고통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처럼, 또한 소피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위해 여러분의 모든 것을 주님께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행동으로는 헌신은 고사하고 그리스도와 대화할 수 있는 잠시간의 시간조차 갖지 못할 때가 허다합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마음, 시간,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그 사랑을 나타내야 하며 심지어는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각오까지 지녀야 합니다. 나라 민족을 사랑한다면 나라 민족을 위해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모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노라고 확신합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존재의 목적이요,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갈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1: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인생의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영원한 가치있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일사각오의 삶을 사시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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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로마로 가는 길(1)

"(행21: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행21: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행21: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행21: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행21: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행21: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행21:23)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행21:24)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행21: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행21: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행21: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행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행21:29)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행21: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행21:31)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행21:32)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행21: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행21: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행21: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행21: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감이러라 (행21:37)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행21: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행21:39)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행21: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1. 바울의 선교 보고.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담대하게 선교의 주도권을 쥐고 소아시아와 헬라의 대부분을 복음화 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갑작스럽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공격당하고, 체포되고, 감금당하고 재판을 받는 수세(守勢)에 몰리게 됩니다. 바울과 그 동료들이 먼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뜨겁게 맞아들였습니다. 도착한 그 이튿날, 야고보와 장로들과 만나서 그가 선교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일들, 일어났던 일들을 체계적으로 소상히 보고했습니다. 바울의 선교보고를 듣고 이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형제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인 야고보와 그 교회의 장로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에 대해서 대단히 걱정했습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은 믿지 않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안전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일단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증오하고 비난하는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행21: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이방인들 가운데 있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말을 따르지 말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퍼졌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전혀 근거없는 소문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때이건 바울은 가능하면 유대인들에게 먼저 갔고, 그 다음에 헬라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곳이 아닌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불가피한 경우, 즉 회당이 없는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받을 만한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된 소문은 바울의 적들이 퍼뜨린 것이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오해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오해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오해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해는 다른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 해석할 경우에 일어나게 됩니다. 오해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릇된 인상을 가지게 합니다. 오해하는 사람은 사실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하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오해는 자신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그리고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이러한 오해로 인해서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대표적인 오해의 희생자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잘못 알고 그를 오해함으로써 처음에는 설전을 벌이다가 급기야는 육체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결과를 빚게 되었습니다. "피타고라스도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예수님과 루터,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와 뉴톤도...........위대하게 되는 것은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칭기즈 칸은 참으로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사냥을 하기 위해 아침 숲속으로 말을 달렸습니다. 그의 뒤를 많은 신하들이 줄을 이어 따랐습니다. 팔목에는 그가 유난히도 아끼는 매가 앉아 있었습니다. 매는 사냥을 할 때 꼭 필요한 새입니다.

칭기즈 칸 일행은 종일토록 숲속을 헤매다녔지만 사냥의 결과는 별로 신통치 못했습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궁전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왕은 숲의 지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지름길을 선택했습니다. 한참을 달리다가 심한 갈증을 참을 수 없어 샘물을 찾았지만, 왠일인지 언제나 넘쳐 흐르던 샘이 말라 있었습니다. 혼자 너무 빨리 달려왔기 때문에 주변에는 신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매도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었습니다.

문득 바위 틈에서 맑은 물이 한방울 두방울씩 떨어지는 게 눈에 띄였습니다. 왕은 물잔을 꺼내 물방울을 받았습니다. 한참 후 물잔에 거의 물이 차자 왕은 물잔을 입으로 가져 갔습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매가 날아와 물잔을 주둥이로 치고는 날아가 버렸습니다. 왕은 하는 수 없이 물잔을 주워 들고 다시 물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반쯤 채워졌을 때 그는 다시 물을 마시려 했습니다. 그 순간 또 다시 매가 날아와 물잔을 엎질러 버렸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올랐지만 하는 수 없이 다시 또 물방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매는 기다렸다는 듯 왕이 마시려는 순간에 어김없이 물잔을 엎질러 버렸습니다.

그쯤 했으면 그토록 훈련 잘된 매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터였지만 화가 치민 왕은 분별력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다시 또 매가 물잔을 채뜨리자 왕은 단칼에 매를 찔러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물잔까지 잃어버린 왕은 하는 수없이 물줄기를 따라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바위 위에는 과연 고인 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털썩 엎드려 물을 마시려 했습니다. 그러다 순간 고인 물 속에 굉장히 큰 독사 한 마리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매가 독이 들어 있을 그 물을 못 마시도록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바위 밑으로 내려가 죽은 매를 어루만지면서 맹세했습니다.

"오늘 나는 매우 쓰라린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홧김에 결정을 내리지는 않겠다!"

이는 제임스 볼드윈의 우화 한토막입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오해의 행동에서 빚어진 화근입니까?

다른 사람을 오해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오해에 의해서 피해를 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오해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를 받는 것은 딜렘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오해해서 그릇된 말을 퍼뜨리는 것은 더욱 더 복잡한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해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약3: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약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약3: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약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3: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약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우리 자신이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위치에 있지 않은지를 판별하고,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오해하지 않고 사물을 정확히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해를 풀어서 바울이 당하게 될 위험을 넘겨보자는 대책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제시됩니다.

2. 나실인의 서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이 근거없는 소문으로 인해 비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자 바울이 유대인들의 관습을 파기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조처를 취했습니다.

"(행21:23)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행21:24)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그래서 바울은 억울하지만 묵묵히 참고 교회 지도자들의 조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처신했던 것입니다.

"(행21: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은 바울에게 충고하기를 본래 유대인으로 태어나 바울 자신이 모세의 전통과 율법을 버리지 않았음을 모든 유대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나실인의 서원을 한 4사람을 데리고 성전으로 가서 함께 결례(潔?)를 행하고 그들의 서원에 따라 머리깎는 비용을 지불하라고 했습니다. 이 나실인 서원에 드는 비용에는 희생제물을 위한 금액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4사람이므로 8마리의 어린양과 4마리의 수양 그리고 소제물(기름과 가루)을 위한 값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시아에서 온 믿지 않은 유대인들의 거짓된 고자질과 유언비어로 말미암아 오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모세의 적이 아니며 바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전통과 율법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그 교회의 장로들이 바울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나실인 서원을 한 4사람을 데리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비용을 지불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바울의 자세는 고린도 전서 9:19-20에 나타난 그의 개인적인 복음 전도관(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전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이 유대인들의 관습을 파기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소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울의 나실인의 서원 결례는 평화를 가져오기는커녕 도리어 소요사태를 유발시키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결국 죄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3. 폭동.

바울을 지독히 미워하는,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 있는 바울을 보고는 고함을 지르며 모든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행21: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행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바울을 증오하던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지독한 편견 속에 바울이 드로비모라고 하는 에베소 사람(헬라인)과 같이 있는 것을 보고는 바울이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줄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함을 질러대며 선동하자 무지한 군중들은 폭도로 돌변하여 바울을 성전에서 끌어내어 은밀한 곳에 두고는 바울을 폭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고 그곳을 지나서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유대인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성소를 분리하고 있는 벽에는 큰 팻말이 있었고, 거기에는 라틴어와 헬라어로 "성소에 들어가는 이방인은 사형에 처한다."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무 이방인도 성소에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고, 또 바울이 그렇게 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을 성소에 데리고 들어갔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고, 그들이 나가자 문히 닫혔으며, 그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는 의도로 두들겨 팼던 것입니다.

"(행21:29)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행21: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행21:31)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4. 바울의 체포.

로마군 경비대의 장교(천부장)가 야단법석하는 소리를 듣고, 또 요란한 군중을 보고서 그들이 누군가를 죽이려고 함을 알아챘습니다. 그는 즉시 일단의 병사들을 보내서 바울을 구출해 냈습니다. 이 소란스럽고 무서운 폭동이 시작되고 진행되는 동안 내내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외칠 수 있었습니다.

"(롬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는 자신을 증오하며 폭동을 일으키고 있는 성난 무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하나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보다 하나님이 훨씬 더 위대하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와 위험에 직면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구약의 엘리사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와 같이 했던 것입니다. 아람 왕이 엘리사를 포로로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심히 두려워하며 소리쳤습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그는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눈이 열린 사환은 산을 뒤덮고 있는 수많은 불말과 불병거들--하나님의 천군천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엘리사를 보호하려고 그곳에 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바울을 보호하려고 그곳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왜? 바울은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명이 있는 한 하나님의 사자들은 역시 우리도 보호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며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힘쓰고 있다면, 하나나님의 모든 능력은 우리 편에 있으며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임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이 살아있을 때나 죽을 때나, 심판 때에나 그 언제든지 영원무궁토록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5. 바울의 변명.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로마군인들을 사용하셔서 그 사건에 개입하셨고, 바울을 죽을 지경에서 구해 내셨습니다.

바울을 체포한 백부장은 바울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각기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무슨 일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로 하여금 바울을 폭도들로부터 격리시켜서 영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바울은 백부장에게 헬라어로 물었습니다. 바울은 헬라어로 대답했습니다. 이에 백부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키고 도망을 쳤던 애굽인 암살단에 속한 사람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시카리온(σικαριον)"이라고 불리우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무리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카리온(광신적인 민족주의자 자객들)"이라는 것은 옷 속에 작은 칼을 숨겨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정적(政敵)을 암살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숨어버리는 일당을 말합니다. 백부장은 바울이 이 암살단의 두목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백성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행21:39)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나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 언제나 주님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주어진 모든 상황을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초대 교부 중에 크리소스톰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 황제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황제가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을 독방에 집어 넣어라.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자 그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황제님, 크리소스톰은 기독교인입니다."

그 말에 황제는 화를 내며

"기독교인이라는 게 어쨌단 말이냐! 빨리 집어 넣어라"

고 호통을 쳤습니다. 신하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은 모르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감옥에 혼자 가두어 놓으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와서 같이 이야기한답니다. 그래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루 종일 중얼대지요. 그러니까 혼자 두게 되면 오히려 그에게 잘해주는 셈이 되지요."

황제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 그를 극악 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신하는 또 다시 고개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 그는 오히려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매우 좋아할 것입니다. 그 극악 무도한 죄인들이 그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면 어쩌시렵니까?"

극도로 화가 난 황제가 소리쳤습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그러자 신하는 더욱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저자들 중에 목 베임을 당하려 나올 때 우는 사람을 볼 수 없지요.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합니다."

"그러면 그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

바울은 '잡힌 바'된 자신의 처지를 오히려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에서의 체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보호하시고 마침내 그를 로마로 데려가기 위해 거대한 로마제국의 힘을 사용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딤후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받으신 여러분, 장차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서실 때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도록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파에 전심전력을 다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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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증인이 되라

"(행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행22:2)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행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행22: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행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가더니 (행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행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22: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행22: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행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행22:12)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행22: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행22: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행22: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행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행22: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22: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행22: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행22: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행22: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행22:22) 이 말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하여 (행22: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행22:24)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 대 (행22:25)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행22:26)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 사람이라 하니 (행22: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행22: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행22:29)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행22:30)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오늘날 첨단공학의 총아인 컴퓨터도 따지고 보면 하루 아침에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컴퓨터라는 것이 '프로그램'을 거쳐서 등장한 것은 1948년의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 연구팀이 개발해 낸 것이었고 그 후 본격적으로 컴퓨터가 일반으로 소개된 것은 미국의 '실리콘칩'이 개발되면서부터 입니다.

그러나 컴퓨터의 원조는 <팡세>라는 명상록을 쓴 그 유명한 파스칼이었다는 사실은 좀 의외인 것 같습니다. 파스칼은 원래 수학자였지만 1642년에 최초의 '계산기'를 발명해 내었습니다. 그 때의 나이가 불과 19세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팡세>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은총의 해, 1654년의 11월 24일(화요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철학자나 지식인의 하나님이 아니신 하나님, 확실, 감정, 환희, 평화 ............,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 것을 다 잊기로 하였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모르나 저는 당신을 참으로 아옵니다. 오! 기쁨, 기쁨, 기쁨, ........눈물, 눈물, 눈물."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명상록이기에 정확한 문장력은 없지만 그의 감격만은 읽을 수 있습니다.

이날 이후 파스칼은 새벽기도를 하며 성경과 어거스틴의 참회록만을 읽으며 성자의 삶을 살았다고 그의 변화된 삶을 후세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온몸이 멍과 핏자국투성이고 두 손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형편없는 모습으로 층대 위에 섰습니다. 유대인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바울을 향해 아직도 손가락질하고 "죽여라!" 하면서 외치는데 바울이 높은 층대 위에 나타났습니다. 이제 그곳이 바로 복음을 외치는 강단이 된 것입니다. 비록 잘 다듬어진 멋진 나무 강단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전한 곳도 아니지만 바울은 계단 위에 위엄있게 섰습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손을 흔들어서 무리들을 조용하게 진정시켰는데, 군중들은 천부장이 허락한 것이기 때문에 금방 조용해졌고 바울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귀담아 듣게 되었습니다. 정말 절호의 복음전도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는 "내가 이 복음을 외치는 것이 마지막이 될지라도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는 생각이 사무쳤던 것입니다. 이제 잡혀가면 다시 못 나올지도 모르는 일인데 이때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간증하러 나선 것입니다. 증오심으로 가득찬 성난 군중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에게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관해서 놀라운 간증을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리스도를 만난 후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증언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신이 예수 믿기전에 어떤 사람이었으며,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불신자들에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켰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난 유대 군중들 앞에서 먼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과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열심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으며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는 유대인으로 길기리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당시 가장 뛰어난 신학교수였던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배움으로 열성적 바리새인이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열심은 율법을 외적으로 준수하려는 열심으로 나타났으며, 그는 혈통 면으로나 생활 면으로 볼 때 철저한 바리새인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시시때때로 자신이 바리새적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자신을 극렬히 비난하는 유대인들과의 동질성을 재차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회심하기 이전의 자신은 이처럼 그들과 같은 유대인으로서 나사렛 예수를 가짜 메시야로 간주했었고 기독교를 이단으로 여겼었으며,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집에서 끌어내서 옥에 가두기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같은 바울의 생활은 스데반을 죽이기 위해 가편(可便) 투표를 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흩어버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교회를 잔멸하려고 각 집에 들어가 예수 믿는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던 행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 군중들 속에 있는 대제사장들이 바로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가더니."

그리고 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경험을 간증합니다. 기독교를 그렇게도 핍박하던 바울이 그 도(道)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울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와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습니다. 본문 6절이하 15절의 말씀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하늘로서 밝은 빛이 나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이 밝은 빛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나는 땅에 엎드려져서 말씀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고 하셨습니다. 이 음성은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쭙기를

'주여, 뉘시니이까?'

했더니, 그 음성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사렛 예수님이 참 메시야이시며, 나사렛 예수님에 대해서 내가 가졌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쭙기를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했더니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누가 이르니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밝은 빛 때문에 나는 시력을 잃었습니다. 나는 다메섹으로 이끌려 들어가서 장님으로 3일간을 그곳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아나니아라는 기독교인이 내게 와서 말했습니다.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나는 즉시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분께 말씀을 들은 경험에 관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한다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바울은 자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을 간증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구원받은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서 여러분의 인생이 사도 바울의 인생처럼 변화되었던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구원받은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후에 바울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 있었는데, 그가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행22: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22: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행22:21)....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바울을 구원하신 목적이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하려고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도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저 편안히 눌러 앉아 있기나 하라고, 얼쩡거리고 희희낙낙한 시간을 보내라고, 빈둥거리며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예수님께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에 대해서 갖고 계시는 목적은 사도 바울을 향해 가지셨던 그분의 목적과 똑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분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던 것을, 그리고 죄와 사단의 노예였다가 의와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화된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해 주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바울은 충성스럽게도 각처에 있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신분이 높은 사람들, 왕들과 여왕들, 일반 백성들 모두에게 간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도 여러분의 회심에 대해 간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짜로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으시다면 여러분이 그분을 만날 때까지 그분을 찾고 두드리고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을 더 이상 뒤로 미루지 말기를 권면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한 번밖에 기회가 없다면 과연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캐나다의 훼더스톤이라는 기독교인이 혀에 암이 생겨 혀를 자르는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의사는 환자에게 앞으로 그가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때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 사람은 "주님, 제가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가 쓴 찬송시가 우리 찬송가의 512장입니다.

[1절]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2절] 주 날 사랑하사 구하시려고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다 그 가시관 쓰신 내 주 뵈오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3절] 내 평생에 힘 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4절] 큰 영광의 구주 날 사랑하사 그 풍성한 은혜 더하시리니 금면류관 쓰고 늘 찬송할말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지금 이 기회가 아니면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형장의 이슬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불편하지만 자신을 죽이라고 소리치는 군중들에게 모국어로 복음을 외치려고 일어선 바울의 모습은 참으로 의연한 것이었습니다. 헬라어뿐 아니라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바울에게 있어서 이제 그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얼굴이 상기되면서 자신에 대한 변호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이 기회를 결코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의존하여 결연히 일어서서 간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마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기회는 항상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기회를 놓쳐서 슬픔을 경험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노아가 산 위에 큰 배를 만들고 1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이나 사람들에게 외치며 대홍수를 경고하였고 또 배에 들어오기를 강권하였지만, 그들은 그 기회를 코웃음 치면서 거절하더니 결국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비참하게 물 속에서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전도의 기회'를 놓치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고 하면서 모든 일에 근신하면서 고난을 각오하고 전도인의 직무를 다 하라고 권면합니다.

전도자 무디가 1871년 8월 8일 밤 시카고에서 "이 예수를 어떻게 할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여러분은 이 예수를 어떻게 하셨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계속하겠다고 하면서 설교를 마무리하고 "오늘 주께서 부르시네, 폭풍이 다가오고 죽음이 가깝네"라는 내용의 찬송가를 부르고 집회를 마쳤습니다. 그때 마침 밖에서 불자동차의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에 집회를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은 예수님에 대해 결단하는 시간을 갖고 마쳤는데 그날은 그냥 서둘러 끝냈습니다. 그런데 그날의 그 화재가 그 유명한 시카고 전역을 불바다로 만든 대화재였으며 다음주에 계속하자고 한 집회는 없었습니다. "다음 주에 오시면 신앙 결단을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말을 했지만 집회를 열 수가 없었고, 무디의 자서전에 보면 일생의 가장 큰 실패가 바로 그날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설교를 서둘러 마치면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 신앙 결단의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이 그의 마음에 깊이 찔려서 무디는 그 후로는 언제 어디서 복음을 전하든지 반드시 믿음의 결단을 하는 기회를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거리 버스 안에서 여러 시간 동안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 복음에 관하여 한마디도 못하는 것은 좋은 기회를 버리는 것이며, 한 직장에서 여러 해를 함께 지내면서도 동료 직원들에게 복음에 관하여 말하지 못하는 것도 좋은 기회를 버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우리에게 그의 피에 대하여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사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은혜의 때, 이 도우시는 때 그리고 이 좋은 때에 구원받고 섬기며 또한 복음을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엡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하여 (엡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지금 사람을 낚고 있지 않는 성도들은 자기가 정말 제대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마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의 가장 핵심은 그리스도를 전하여 다른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취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눅5:10)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십니다.

"(시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영혼)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잠11:30)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우선 순위와 목표가 우리 삶의 우선 순위와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로 말미암아, 바울과 같이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기를 예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마음에 무거운 짐과 끊임없는 애통을 가지고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영혼을 구원하는 일, 그것은 예수님과 하늘의 천사들도 기뻐하는 일입니다

"(눅15: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눅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사람들의 마음에도 기쁨이 넘치며, 우리 자신들과 교회 안에도 기쁨이 넘치게 하는 일입니다. 구원이 진정 우리 인생의 가장 중대한 사건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과 같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랑에 못이겨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여 그들을 죄와 지옥에서 건져내고자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를 얘기해주는 것에서부터 전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이 어떻게 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지를 말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켄사스에서 목회를 하는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맹인이라는 것을 빼고서는 모든 면에서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그는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즉시 뉴욕으로 달려가 화니 크로스비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당시 맹인으로서 많은 찬송가를 작사한 사람이었습니다.

"화니 크로스비씨, 당신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불평스럽지 않습니까?"

크로스비는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생후 6주만에 장님이 되었지만 조금도 고통스럽거나 불평스럽지 않습니다."

그 목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그렇게 많은 은사를 주셨으면서도 시력을 주시지 않은 것이 섭섭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다시 태어날 때 한 가지 청원을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장님으로 태어나게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아니, 왜그런가요?"

목사가 놀라며 물었습니다. 화니 크로스비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습니다.

"내가 눈을 떳을 때 제일 처음 보고 기뻐하게 될 것이 천국에서 뵐 주님 얼굴일테니까요."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었으나 그 후 그가 눈을 떳을 때는 참 메시야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삶의 변화는 다메섹 도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울이 바울이 된 사건 역시 그에게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극적인 사건들이 오늘날도 여기 저기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시는 바울의 체험이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도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예수님을 증언하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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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로마로 가는 길(2)

"(행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행23: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행23: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행23: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행23:5)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행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행23: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행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행23:9) 크게 훤화가 일어날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행23: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행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23:12)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행23:13)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행23:14)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행23:15)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행23:16)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문에 들어가 바울에게 고한지라 (행23:17)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가로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행23:18)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가로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행23:19) 천부장이 그 손을 잡고 물러가서 종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행23:20)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저희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행23:21) 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 (행23:22)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고하였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행23:23)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행23:24)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행23:25)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행23:26)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문안하노이다 (행23:27)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행23:28)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송사하는지 알고자 하여 저희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행23:29) 송사하는 것이 저희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건이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행23:30)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게 하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송사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를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행23:31)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행23:32) 이튿날 마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문으로 돌아가니라 (행23:33) 저희가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행23:34)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행23:35) 가로되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1. 바비도는 헨리 4세 때 이단으로 지목되어 화형을 당한 봉재 직공이었습니다. 당시는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도 부패되어 영역(英譯) 성경을 읽거나 '성경만이 진리'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단죄되어 사형을 당하던 무서운 시대였습니다.

바비도 역시 영역 성경을 읽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종교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근엄한 사제(司祭)는 가슴에 십자가를 엄숙히 그은 후 바비도에게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바비도는

"쉬운 우리말로 성경을 읽는 것이 왜 죄가 됩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이야말로 하나님께 회개해야 할 불쌍한 죄인이 아닙니까? 당신은 신앙의 양심이 썩은 산 송장이죠. 구더기가 가득 들어 있는......"

이라고 말하며 사제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는 화형 선고를 받고 곧 형장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형장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바비도의 재판을 처음부터 지켜본 당시의 태자 헨리도 있었습니다. 태자는 바비도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바비도, 너도 사람인 이상 죽고 싶지 않겠지?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면 살려 주겠다."

그러자 바비도는 대답했습니다.

"구태여 죽고 싶은 심정은 없지만 그렇다고 양심을 팔면서까지 악착같이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태자가 말했습니다.

"할 수 없다. 화형을 집행하라."

불은 순식간에 바비도를 삼키려고 타올랐습니다. 그 순간 태자가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자, 바비도! 이래도 마음을 돌리지 않겠느냐?"

바비도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거부의 몸짓이었습니다. 태자는 불 속에서 죽어가는 바비도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할 수 없구나, 잘 가거라. 나는 오늘까지 양심이라는 것은 비겁한 놈들의 겉치장이요, 정의는 권력의 버섯인 줄 알았는데, 그것들이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바비도 네가 무섭구나."

이야기는 김성한의 <바비도>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이는 영국 헨리 4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이단으로 몰린 한 봉제공이 목숨을 스스로 버리면서까지 신앙 양심을 지킨다는 실로 눈물겨운 사건입니다.

요즘 우리의 주변에는 조그마한 물질이나 쾌락, 권력을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온갖 파렴치한 부정과 패륜을 저지르면서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배반하면서도 회개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양심은 영혼의 뿌리입니다. 이 뿌리가 썩으면 우리의 영혼도 자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즉 양심이 파선되면 우리의 구원도 파선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행23:1)...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고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범사에 양심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양심"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양심과 뜻이 다른 것입니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선>, <진실> 등의 일반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양심은 이스라엘적 개념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선을 말합니다. 고린도 후서 1:12에 그 해석이 나옵니다.

"(고후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크리스챤의 자랑은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인데, 그 말은 인간들의 지혜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에 비추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에 이끌려 사는 소위 은혜생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 "(행23:1)....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자신이 인간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왔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의 "하나님을 섬겼다." 는 헬라어로 <페포리투마이, pepolitumai>인데 직역하면 "하나님께 시민노릇을 하였다."는 뜻입니다.(성경의 난외 주석 참고)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명료히 한마디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육신을 두고 살지만 이미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자격과 긍지,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던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7-21에서 천국 시민권자의 자세를 말했습니다.

"(빌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3: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이 말씀을 보면,

1)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 곧 그리스도의 피, 그 은혜, 예수의 사랑을 무시하는 자는 천국시민이 아닙니다.

2) 배를 신(최고의 보람)으로 삼는 자, 즉 쾌락주의,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는 자도 천국시민이 못됩니다.

3)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 곧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일인데도 자기의 영광으로 만드는 행위,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부도덕과 비윤리적인 일들을 서슴없이 즐기는 자는 천국시민이 아닙니다.

4)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 즉 본능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면서 세상적인 가치 기준을 따라 행동하는 자도 천국시민이 못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는 천국시민으로서 살아왔다는 신앙고백은 이러한 4가지 면에서 승리한 생활을 뜻합니다.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고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반면에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 산헤드린 회의를 주재(主宰)하고 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소위 '양심 선언'을 했던 바울의 "입을 치라." 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행23: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라고 예언자로서 준엄하게 그를 책망합니다. 민족 앞에 불의를 행하였던 아나니아는 결국 바울의 예언대로 주후 66년,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타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일개 사도로서 평생 진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부끄럼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유대 민족을 이끌어가는 종교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불의를 행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에 있어서 동등한 기회를 가진 두 인물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사는 고귀한 성도의 삶과 더불어 타락과 부패한 길을 걷는 신앙인의 위험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복음을 위해 수고한 사도 바울의 선한 양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을 다 듣기도 전에 "그 입을 치라"고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10여년 동안 대제사장으로 군림했던 아나니아는 잔인함과 탐심이 가득한 인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세(稅)를 받아 착복하였으며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로마 정권과 결탁한 권세자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를 "대단한 축재자"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성직자들의 소유인 십일조를 폭력을 행사하여 빼앗기까지"했습니다.

이렇게 타락과 비양심으로 점철된 그는 바울의 선하고 진실된 말을 들을 때마다 고통이 가중되었기에 더 이상 바울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복음을 그의 동족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좌우에 버티고 앉아 의인 바울을 재판했던 사람들을 보면, 한쪽에 있는 사람들은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혼의 존재도 내세도 부정하며 오로지 권력에 집착하고 있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권력과 결탁하여 백성의 소유를 빼앗고 오직 현실과 육체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그들인 것입니다. 또한 대제사장의 다른 한 쪽에는 바울을 정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외식자요 위선자로서 자신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율법 조문들을 만들어 백성들을 율법의 올무에 얽어매 놓은 자들입니다. 겉으로 그들은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일들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한 가지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고아와 과부 및 가난한 자들의 가산을 착취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무리들은 소위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라고 자처하지만, 속은 이미 썩을 대로 썩은 "회칠한 무덤"과 같았습니다. 이들이 위협적으로 바울을 공격하고 해하려고 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 7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존경을 받았다고 해서 다 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사악했으며, 또 일부는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전통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토라 즉 모세 오경(율법)을 삶의 규범으로 삼고 있었으며 거기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의 회원은 종신제였으며 사망하거나 탈퇴할 경우에만 보선이 되었습니다. 산헤드린은 두 파, 즉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소수파였습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고 부인했으며 천사, 영혼, 귀신들, 마귀 등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죽은 사람의 부활을 부인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큰 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숫적으로는 다수였으며, 사두개파보다 영향력이 컸습니다.

3. 그래서 바울은 바리새인임을 자처하였으며 자기가 이 재판을 받는 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위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로 산헤드린은 둘로 갈렸고 난폭한 살인적인 논쟁으로 바울은 거의 찢어질번 했습니다. 그를 난폭한 행동에서 구출하기 위해 천부장은 그를 다시 영문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를 유대인의 손에 방치하심으로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거나 대적자들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시2: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시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시2: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시2: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시37:12)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시37:13)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산헤드린에서 유죄가 입증되지 않고 유대인들 사이에 분열만 조장되자 바울에 대하여 극도의 적의감에 불타고 있었던 유대 열성 단원 40명은 더 이상 정식 재판 과정을 통해서는 바울을 처형하기 곤란하다는 인식을 같이 하고 산헤드린 공회와 합작하여 이제 바울을 살해할 무서운 음모를 세웠습니다.

그 살해 음모는 먼저 천부장에게 바울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볼 것이 있다는 구실로 일단 그를 로마인들의 요새 밖으로 유인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 좁은 길에 매복해 있다가 일시에 습격하여 바울을 살해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유대교의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던 그들이었으나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노라고 맹세했습니다. 이같은 증오심은 율법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목전에 악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눅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이러한 유대인들의 음모는 바울의 생질에게 알려졌고 그는 영문으로 들어가 바울에게 모든 사실을 고함으로써 음모를 좌절시키게 됩니다. 바울은 한 백부장에게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 데려다 줄 것을 요청했고, 천부장은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악랄함을 잘 알고 있었고 바울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으므로 생질의 말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4. 40명의 일당이 바울의 생명을 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을 비웃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바울이 예수를 증거하러 로마에 가는 것을 돕고 있었던 것입니다. 40명의 일당이 꾸민 음모는 결국 탄로되어 바울이 가이사랴로 호송되는 데 당시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해 있던 병력의 절반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유대교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으며 <로마로 가는 복음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단지 진리의 도를 증거한다는 이유로 무고하게 재판정에 수차례 서게 되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 앞에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족의 미움을 받아 야심한 밤에 유대교의 모태인 예루살렘을 떠나는 바울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나 그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며 또한 로마 전도에의 꿈을 간직한 채 담대하게 순례자의 길을 갔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전한 부활의 복음으로 인한 산헤드린의 분열과 그에 따른 살벌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영문으로 들어간 그 날 밤, 사도 바울은 주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행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바울의 전도 사역에 있어 중대한 순간마다 나타나셔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이번 사건에도 개입하시어 현실의 고난을 감내(堪耐)할 수 있도록 뚜렷한 목표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했듯이 로마에서도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암담한 현실 가운데 있던 바울에게 원대한 비젼을 주신 것입니다. 로마로 향한 더 큰 비젼과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사명까지 감당하도록 격려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서양 격언에 "인간은 자기 사명을 끝낼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Man is immortal until his work is done)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위해 로마로 가는 길은 하나님의 소원이요 바울의 꿈이었습니다.

"(행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로서 로마에로의 복음의 진출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러한 비젼과 확신은 바울로 하여금 앞으로 닥쳐올 많은 환난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격려하고 바울에게 용기를 준 것은 정보를 제공한 생질도 아니요 호송작전을 지휘한 천부장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로마 무대로 보내려는 하나님의 숨은 손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최대의 소원은 <복음을 로마에>입니다. 그는 체포되어 여기저기로 끌려다니면서도 자기의 무죄를 변명하여 석방될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군대에 의해 그대로 로마까지 호송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암살자의 위험을 피하여 로마에 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더 시끄러워지고 매맞고 고생해도 로마 시저에 대한 상소의 길이 열리면 로마행이 가능해지므로 바울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무렵 바울은 로마행을 하나님의 섭리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인생해석은 빌립보서 1:12에서 분명합니다.

"(빌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여기 "진보"는 전진을 뜻합니다. 바울의 인생관은 복음의 전진에 있습니다. 복음의 전진을 위해서라면 옥살이라도 의미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헤롯 궁에 홀로 감금당한 바울은 이제 또 다시 주어질 변증의 시간을 기다리며 타오르는 복음의 열정을 가다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복음 전도에 열정과 그의 따른 고난을 이렇게 말합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초대 교회부터 모든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전도의 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발가벗기우신 채로 십자가에 못박혀 온갖 수치, 창피, 부끄러움과 멸시 천대를,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면 처음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시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창피와 수치, 멸시를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를 위해 당하신 그 창피와 수치, 그리고 멸시와 고통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기면 예수님께서도 최후 심판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예수를 전파하다가 높아진 위신이 떨어질까봐 두려워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차라리 인생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의 환영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느 책자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만삭이된 어떤 여인이 무릎까지 눈이 쌓인 추운 어느 날 산길을 걷다가 너무나 힘이 들어 눈 위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기진맥진 쓰러져 죽게 됩니다.

때마침 이른 새벽 선교사 한 분이 새벽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짚차를 타고 눈길을 가는데 불빛에 이상한 물체를 발견하고 가까이 가 보았더니 아기 울음소리가 눈 속에서 들려오고 왠 여인이 나체로 눈 위에 죽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기를 낳고 아기를 살리기 위해 속옷까지도 다 벗어서 아기를 싸놓고 자신은 얼어 죽은 것입니다. 후에 이 아기는 선교사의 양아들로 훌륭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서양 선교사가 그 옛날의 상황을 그 양아들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네 어머니의 신분을 사방에 수소문 해 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어느 산 어디에 네 어머니를 묻었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네 어머니가 너를 살리고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청년은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두문불출합니다. 몇날 며칠을 방에서 드러 누워만 있던 이 청년이 눈이 펑펑 쏟아지자 미친 듯이 밖으로 달려나가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무덤을 부둥켜 안고는

"오 어머니 내가 당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다 벗어 어머니의 무덤을 덮어 놓고 한참이나 서 있다가는 또 웁니다.

"오 어머니 그때 이 만큼 추웠습니까?"

"이 만큼 부끄러웠습니까?"

여러분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무덤도 남겨 놓지 않고 이 땅에 자신의 몸된 교회만을 남겨 두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가셨습니다.

이 교회를 부둥켜 안고 주님께서 남겨놓으신 남은 고난을 감당하면서

"주여, 이만큼 고통스러웠습니까? 주여! 이만큼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까? 주여! 내가 주님을 위해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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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로마로 가는 길(3)

"(행24: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행24: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행24: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행24: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행24: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행24:6)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행24:7)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행24:8)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행24: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행24: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행24: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밖에 못되었고 (행24:12)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행24:13)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행24: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행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행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행24: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행24: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행24:19)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행24: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행24: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행24: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행24:23)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행24: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행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행24: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행24:27)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1. 예루살렘에서 어려운 위기를 벗어난 바울은 가이사랴에 도착한지 닷새만에 총독 벨릭스의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그 일행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든지 바울을 처단하겠다는 일념으로 직업적인 변사 더둘로를 대동하고 내려왔습니다. 더둘로는 헬라의 교육을 받은 자로서 그의 송사는 먼저 "거의 메스꺼울 정도의 아첨"으로 시작됩니다.

"(행24: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행24: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햄릿:"저기 저 구름은 마치 낙타처럼 생겼군."

포르니우스:"정말이지 맹세코 낙타 같습니다."

햄릿:"나는 족제비 같다고 생각되는데...."

포르니우스:"족제비처럼 후퇴하는군요."

햄릿:"아냐, 고래 같지 않아?"

포르니우스:"꼭 고래 같군요."

아부한다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아부하는 말과 행위 속에는 자기라는 개체를 주성분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점점 소멸되어 가는 그 주성분으로 하여 마침내 자기라는 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거기 아부라는 치졸한 악덕이 존재하게 될 뿐입니다. 포르니우스는 한덩이의 구름을 두고 낙타에서 족제비로, 족제비에서 다시 고래로 세 번씩이나 자기를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세 번씩이나 죽인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햄릿이라는 한 사람에게 영합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무참히도 짓밟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첨하는 입술과 혀를 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1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러나 이러한 아첨 내용과는 달리 벨릭스는 몇 번의 반란을 너무나도 야만스러울 정도로 잔인하게 진압했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감사"가 아니라 혐오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송사 내용은 세 가지 혐의였습니다.

"(행24: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행24:6)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여기서 보면, 첫째 혐의는 "염병"(troublemaker, 재앙, 페스트를 의미함)이라고 표현된 소요에 대한 혐의였습니다. 바울은 백성을 정치적으로 선동하여 유대인에게는 물론 로마 당국까지 해를 끼치는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각 식민지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최대한의 힘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엄히 다스려 중죄를 받았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는 여러 소요 사건의 주동자들과 추종자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거나 학살했습니다. 그러므로 더둘로가 바울에게 적용한 소요죄 즉 반란 음모죄는 실로 사형을 당할 만한 중죄(重罪)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더둘로를 내세워 자신들의 종교적인 불만을 정치적인 선동죄의 명목으로 탈바꿈시켜 로마로 하여금 바울을 처형하도록 계략을 꾸몄습니다.

둘째 혐의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나사렛은 예수를 가리키는 말로, 당시 예수의 제자들 및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 말로서 그들을 무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가 거짓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이단이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볼 때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전통을 파괴하는 이단적인 당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예수의 도를 전하는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거짓 메시야들이 출현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민심을 소란케 함으로 로마 당국의 골치를 썩힌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거짓 메시야를 추종하는 이단의 우두머리라면 그는 로마에 의하여 반드시 처벌받아야 할 중죄인 임에 틀림없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혐의는 성전 모독죄였습니다. 성전을 더럽힌 자는 반드시 로마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고 유대 당국의 차원에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천부장 루시아가 바울을 이송(移送)한 사실 자체가 부당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더둘로는 바울이 로마법상으로나 유대법상으로 볼 때 반드시 죽어야 할 죄인임을 그의 완벽한 논리로 송사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마치 염병과 같이 무섭게 퍼져나가는 기독교가 유대교를 배신하고 나아가 유대 민족을 저버리는 악한 세력으로 커갈 것을 염려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말살시켜 버려야 할 집단으로 생각하면서 집요하게 기독교를 핍박했던 것입니다.

2. 이에대한 바울의 변증은 이렇습니다.

첫째(12-13절), 유대인들을 소요케 했다는 더둘로의 송사가 허위임을 밝히기 위해 자기는 예루살렘에 올라온지 12일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을 선동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과 성전에서 사람들과 변론하거나 회당과 성 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목격한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내세웠습니다. 바울이 성전에서 붙잡혔을 때는 혼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 중이 소동하고 천부장이 출동한 것은 바울을 이전부터 죽이려고 따라 다니던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한 것이었음을 내세웠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항변은 소란죄뿐만 아니라 동시에 성전 모독죄에 대한 무죄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14-16절),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혐의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이 나사렛 이단이라고 부르는 기독교를 믿고 있다고 담대하게 시인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좇는 도는 결코 유대교와 어긋나는 이단이 아니라 조상의 하나님과 율법 및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 즉 유대교와 같은 것임을 밝혔습니다. 비록 도(道)를 받는데 있어서는 아나니아나 장로들의 방법과는 달랐으나 도를 지키는데 있어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지켰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기독교가 결코 이단이 아니며 유대교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향한 소망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바울의 부활관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부활관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성경의 가르침과도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17-21절), 성전 모독죄에 대한 혐의에 대하여 바울은 그 당시 성전에서 결례의식을 행하며 조용히 지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목적은 소동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연보를 전달하기 위한 종교적인 목적이었으며(17절) 결례 의식대로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동안에 무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사실과(18절),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문책받을 때에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은 죄밖에 없음을 밝혔습니다. 다시말해 자신이 재판을 받는 이유는 오로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믿음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이로써 성전 모독죄라는 더둘로의 고소는 사실에 근거한 바울의 변증에 의해 무효화되고 말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신앙은 유대교의 신앙과 부합되는 것이므로 유대인들에 의하여 송사당하고 로마 당국에 의하여 처벌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바울의 변증을 듣고 총독 벨릭스는 재판을 연기했습니다. 천부장 루시아가 도착하면 그의 증언을 듣고 결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벨릭스는 천부장 루시아의 편지를 받고 이미 모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고 바울의 변증을 통해 그가 무죄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기 때문에 연기 결정은 바울에 대한 무죄판결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비교적 자유로운 연금상태이지만 석방시키지 않은 것은 총독 벨릭스가 마치 빌라도처럼 유대인을 의식했기 때문이며 또한 바울에게서 뇌물을 받고자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벨릭스는 연금 상태의 바울을 자주 불러 그의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드루실라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로서 유대인 출신이었습니다. 드루실라는 바울이 믿는 기독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고 남편 벨릭스에게도 기독교를 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단지 호기심에 의한 것이었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벨릭스 역시 바울의 설교보다는 돈에 더 관심이있었던 것입니다.

"(행24: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들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교를 면전에서 수차례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육신에 정욕에 눈이 어두어서 돈에만 관심이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이 어디에 관심을 가졌든지 복음 증거의 사명을 잊지 않았고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힘써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이 총독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에게 설교한 내용은 의(義)와 절제와 심판에 관한 것으로 이들의 실생활 속에 가장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시대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한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 자신의 문란하고 허영된 생활을 했던 이들은 마음에 찔려 두려워하며 바울을 아예 멀리하고 말았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벨릭스는 본디 로마 황제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글라우디오 황제의 모친이었던 안토니아에 의해 자유인이 되었고 황실의 어린 왕자의 친구였던 팔라스의 영향으로 사마리아의 하급 관직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아첨과 간교한 사술이 뛰어난 자로 후에 부정한 방법으로 유대 총독까지 되었던 자였습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 살인까지 하는 파렴치한 관리였습니다. 국가의 공복으로 국가와 사회의 공익을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온갖 짓을 자행했던 불의하고 부패한 관리였습니다.

연산조 때 윤석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풍기 군수가 된 그는 가족들을 고향에 남겨둔 채 혼자 임지로 부임했습니다.

그러자 고향에 남은 아내는 가난한 살림살이를 견디기가 어려워, 선대(先代)로부터 내려오던 몇 가지 물건을 팔아 밭 한 뙈기를 장만했습니다. 채소라도 가꾸어 먹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윤석보는 편지를 보내 아내를 책망했습니다.

"옛 사람이 촌척의 땅이라도 넓혀가지고 임금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국록 이외에는 탐을 내지 말라는 뜻이오. 이제 내가 관직에 올라 임금의 녹을 받으면서 전에 없던 밭을 장만했다 하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빨리 그 밭을 되돌려 주도록 하시오."

청렴 결백함도 여기까지 다다르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관직의 중요성을 대단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라의 일을 한다는 긍지와 나라로부터 그 보수를 받는다는 것은 굉장한 명예였기 때문입니다.

청렴한 사람에게서는 신중함과 근면함이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직(公職)에 임하는 가장 대표적인 몸가짐인 것입니다. 제 15대 국회에 당선자 중에 겨우 이틀간의 세비로 수백만원을 받을 수 없다하여 세비를 반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청렴은 그 뿌리를 양심에 두고 있습니다. 양심이 병들지 않는 한 청렴은 언제나 건강합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했습니다.

"명예는 밖에 나타난 양심이며, 양심은 안에 잠기는 명예이다."

성서의 지혜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시37:16)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탐관오리 총독 벨릭스는 그의 결혼 생활 역시 부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벨릭스는 이미 두 여인과 살았고 드루실라와는 세 번째 결혼하여 사는 부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에멘사 왕 아지즈의 아내였던 드루실라의 미모에 이끌려 마침내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드루실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야고보 사도를 살해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로서 아지즈와는 두 번째 결혼 생활을 했고 벨릭스의 유혹에 이끌려 세 번째 남편을 맞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한결같이 무절제하며 자기 욕망대로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듯 부정 부패 불의한 이들에게 의(義) 곧 정의를, 무절제하여 인간의 욕망을 이성과 양심에 의해 억제하지 못하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이들에게 절제를, 그리고 무엇보다 이처럼 물욕과 정욕에 사로잡혀 산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자신의 불의한 생활과 무절제함과 온갖 방탕과 방종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영히 죄의 짐에서 놓일 수 없으며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4. 본문의 벨릭스 부부는 바울의 이같은 설교를 듣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더 이상 설교듣기를 보류함으로써 그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상실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행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회개할 기회를 다음에 미루고 다음 기회에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은 곧 긍휼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 한 양치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을 하러 나가던 중에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집 마당에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던 것입니다.

"향기가 기가 막히게 좋군. 이렇게 아름다운 꽃은 난생 처음 보는 것 같다. 생각같아서는 이 꽃들을 보며 하루를 즐기고 싶지만 오늘은 양털을 깎아야 하니 빨리 털을 깎고 와서 이 꽃들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즐겨야지."

그러나 그가 양털을 깎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꽃들은 시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아름다운 새 소리에 잠을 깨며 생각했습니다.

"무척 아름답고 황홀한 소리구나. 하지만 지금은 우유를 짜야 하니까, 일을 마친 후 저 소리를 즐겨야지."

그러나 양치기가 우유를 짜고 와 보니 이미 새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또 다음 날 아침 양치기는 집 밖에서 들려오는 말 울음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창문을 열어 보니 아주 잘 생긴 백마 한 마리가 자신의 빼어난 몸매를 자랑하듯 천천히 울타리 주위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훌륭한 말을 타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데 지금은 울타리를 고쳐야 하니까....빨리 고치고 나서 저 말을 타봐야겠다."

그러나 그가 급히 일을 끝마치고 왔을 때는 이미 백마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양치기 자신이 원하던 일을 뒤로 지연시킴으로써 결국 한번도 실행해 보지 못한 채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불쌍한 인간입니까? 우리는 매사에 자신이 가장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모색합니다. 그렇다면 그 기회란 언제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지금 여기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지금 여기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것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친다면 이러한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벨릭스처럼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지 말고, 조금 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에드워드 영은 "지연은 시간의 도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연은 또한 영혼의 도둑인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이 구원받기에 가장 알맞은 때는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총독 벨릭스의 마음에는 밝은 빛이 비추었고(22절), 감정은 동요되었지만(25절), 그의 의지는 굴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을 얻으려고 애썼지만 그는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꾸물거리다가 지옥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25절 하반절).

"(행24: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행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수많은 현대인들도 벨릭스와 같습니다. 복음을 듣고 영접하지 않거나 아니면 깊은 죄책감으로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거스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언젠가 나중에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하지요. 지금은 좀 곤란하군요."

그런데 그들은 다른 기회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 그들의 마음의 문을 다시 두드리시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벨릭스가 그리스도께로 나온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모든 죄악들, 부도덕과 불결함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드루실라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교만했으며 자신들의 욕망과 쾌락, 이 세상의 것들을 선뜻 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벨릭스와 드루실라가 그들의 죄악을 버렸다면 하나님의 죄 용서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일에 유익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 땅에서의 생애를 마치는 날 그들은 하늘나라에 갔을 것입니다.

"(막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런데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의로움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리지 않고서 "언젠가 나중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결코 오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는 추방당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한 벨릭스는 하나님없이, 소망없이 죽었습니다. 2,000년 동안 그는 음부(지옥)에서 고통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는 아무런 변명도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에게 성실하게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 바울처럼 하나님께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틈이 있으면" 예수 믿는 것입니까? 틈이 있거나 없거나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 삶의 최우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밥은 못먹어도 성경은 읽어야 합니다. 다른 일은 다 못해도 주일은 지켜야 합니다. 예배시간은 지켜야 합니다.

"내가 틈이 있으면" 교회에 나오고,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겠다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최권능 목사님이 버스를 타고 그 복잡한 데서 예수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마침 채필근 목사님이 그 버스에 앉아 있었습니다. 최목사님은 채목사님이 앉아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앞에 가서 예수믿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최목사님이 채목사님한테도 배운 바가 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모를 턱이 없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진 채목사님 왈

"최목사! 나야 나!"

자기를 못 알아보고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최목사님 한마디 더하십니다.

"벙어리 교인이구만."

채필근 목사님이 그만 말문이 막혔다고 합니다. 채필근 목사님이 쓴 글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했노라'하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벙어리 교인은 없는 법입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금 먹은 녀석 물 안먹겠나"

복음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전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사람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즐거운데 어떻게 말 안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가장 좋은 때는 지금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통계청이 95년 11월 실시한 <전국 인구주택 총조사>에 나타난 종교별 신자수를 보면 지난 1985년부터 1995년까지 10년 동안 기독교 신자수는 2백 30만명이 늘어났습니다.

(1985년 기독교 신자수는 6,489,282명이었으며 1995년 기독교 신자수는 8,818,964명으로 통계됨).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가 이처럼 증가된 원인은 기독교의 저돌적인 전도와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가 급격한 변화와 사건 사고를 경험하면서 국민들이 종교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음에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 '지금'이 복음 전도의 가장 적기임을 깨닫고 사도 바울처럼 지금 보다 더욱 더 저돌적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 민족이 사는 길, 이 나라 민족을 향한 주님의 소원은 바로 민족 복음화입니다. 주님은 복음화를 위한 추수꾼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시대에 주님이 찾으시는 영적 복음의 추수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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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로마로 가는 길(4)

"(행25:1)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행25: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행25: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행25: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행25:5)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 (행25: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행25: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행25:8)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행25: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행25:10)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행25: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 대 (행25: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행25: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행25: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행25: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행25: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 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행25:17)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행25:18)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행25: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행25:20)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행25: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행25:22)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행25: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행25: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행25:25)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행25:26)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행25:27) 그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클라렌스 맥카트니 박사는 지옥에서 있었던 어떤 회의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단은 지도급 귀신 넷을 한 자리에 불러서 더 많은 영혼들을 넘어뜨릴 수 있는 새로운 거짓말을 생각해 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첫째 귀신: "좋은 생각이 있어요! 나는 세상에 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겠어요."

사단: <먹혀들지 않을걸?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 보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둘째 귀신: "나는 가서 그들에게 천국이 없다고 말하겠어요?"

사단: <죽음 후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리고 그들은 천국에 가기를 원해.>

세째 귀신: "그들에게 지옥이 없다고 말하지요!"

사단: <아니야. 양심은 그들에게 죄는 심판을 받는다고 말하지. 우리에겐 그것보다 더 훌륭한 거짓말이 필요해.>

넷째 귀신: "그 문제는 이렇게 풀면 될 겁니다. 나는 세상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서두를 필요 없다고 말하겠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가장 좋은 때는 지금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1.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서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국부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 구원을 위한 우주적인 것으로서 유대땅에서 사마리아,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고 로마로 전파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본문은 바울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거센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로마로 진출 확장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감옥 생활을 하면서 벨릭스(24장), 베스도(25장), 아그립바(26장) 등 세 사람에게서 각각 한 번씩 재판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연속되는 이같은 고위층 인물들과의 재판 과정에서 그의 신앙을 변호하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면서 반드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1장에서부터 시작된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에 대한 박해는 점점 심각해져 급기야는 사두개인들에 의한 암살단이 조직되기에 이르게 됩니다.(23:12-15) 그리하여 바울이 가이사랴로 호송되는 도중에 살해하려 했으나 그들의 간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23:31-35) 그 후 가이사랴에서도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여 죽이고자 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24:22,23) 그리고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이 지난 후에도 유대인들의 그 박해와 증오심은 가라 앉지 않고 오히려 가열되어 바울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총독이었던 벨릭스가 파면되고 새 총독으로 베스도가 부임한 후 유대인들은 그에게 다시 바울을 고소하여 자신의 살해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을 이미 약속하셨기 때문에 베스도로 하여금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게 함으로써 바울 살해 음모를 좌절케 하셨던 것입니다.(25장)

유대인들은 온갖 비열한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바울을 살해하여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음모를 꾸몄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을 비웃으시고 사도 바울을 로마로 보내기 위한 자신의 계획을 하나 하나 성취해 나가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과정에서 주어진 모든 기회와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의 끈질긴 핍박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의연하게 복음 전파의 사역을 감당해 나갔던 것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위기의 순간에서도 담대하게 진리,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며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적절한 시기에 불필요한 순교를 피하여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이는 바울이 열렬히 바라고 있었던 로마로 가는 소원을 이루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순교당하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결코 순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고난의 길에 뛰어드는 사람은 진정한 고난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피할 수 있은 경우라면 그것을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려면 반드시 가장 험하고 괴로운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고난의 길을 걷기를 원하신다면 그는 마땅히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평탄하고 기쁜 길을 걷기를 원하신다면 그는 찬송과 기쁨으로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를 고난의 길로 몰아 넣을 권리는 없습니다.

바울은 가이사에게 호소했습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그는 정의에 대한 의식을 상실한 자들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에 스스로를 넘겨 주는 길을 택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하라는 요구를 받지도 않았습니다.(그러한 길을 피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자세는 주님과 양심과 기존의 권세에 충실하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주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일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그 권세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그러한 자세였습니다.

바울이 가이사 황제에게 호소했던 것은(21절) 자기를 고소한 사람들 곧 자기 동족들을 가이사의 재판석까지 데려 가기 위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전도하고 싶어했으며 또한 전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로마 황제에게 전도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떠한 상황이라도 그것을 전도의 기회로 이용하던 사람이었으므로 로마 황제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 없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데 모든 여건을 이용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그의 모든 삶이 예수를 자랑하는 일에 할애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성도는 조그마한 어려움만 만나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호화로운 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큰 폭풍우가 몰아쳐 배가 걷잡을 수 없이 파도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어두움과 폭풍 가운데서 배가 질주하는 동안 그는 배멀미로 선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째지는 듯한 외마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사람이 갑판에서 떨어졌다!"

"저걸 어쩌면 좋아?"

하는 웅성거림이 들려왔습니다.

'정말 안됐군!'

선실 침대에 누워 있던 그는 혀를 끌끌차며 진심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내가 도와줄 일이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은가?'

그때였습니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들려 오는 작은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왜 없단 말이냐? 선창에서 간데라를 비춰주면 불빛을 보고 배로 돌아 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멀미를 참으며 침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곧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좇아 행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물에 빠진 사람은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잠시 후 여객선의 선장이 간데라를 비추고 있었던 이 사람에게 다가와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말하더군요. 피로와 절망에 지쳐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느꼈을 때 당신이 비추어 준 간데라의 불빛은 자신에게 구원의 희망이었다고요."

그는 덧붙였습니다.

"정말 그것은 희망의 불빛이었지요. 간데라 불빛이 선창으로부터 비추어져 캄캄한 바다에서 우리가 그를 발견하고 구출할 수 있었으니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한 각자의 위치에서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거부함으로써 귀중한 영혼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만의 흉계에 따라 유대 민족이 전몰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왕궁에 있던 에스더에게 모르드게가 말합니다.

"(에4: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에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가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해 주어진 소임을 다하지 않더라도 유대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구원될 것이나 구원의 도구로 소명된 자가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는 심판받아 멸망하리라는 것입니다.

2. 바울은 권세있는 통치자들 앞에 있으면서도 결코 비굴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행25:18)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유대인들은 벨릭스 총독에게 고소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선동죄, 이단죄, 성전 모독죄 등의 혐의로 베스도로 하여금 바울을 처형하도록 요청했으나 베스도는 바울의 유죄를 입증할 수 없었으며, 단지 종교적인 견해차가 문제시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채렸습니다. 베스도는 사건의 추이(推移)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비록 부활에 대한 무지한 이방인 불신자였지만 양심적 선언을 했습니다.

"(행25:25)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이같은 사실은 사도 바울이 자기 삶에 있어서 백성들로부터 비난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깨끗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수양으로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도덕적 윤리적 인간 이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산 것이 아니라 율법 이상의 것을 실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이 백성 앞에서 자신이 아무에게도 토색하거나 구박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성령의 능력을 따라 살았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참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혀 있으면 도덕적 윤리적 문제로 결코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 중에는 자신의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각 외로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당당한 삶의 자세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그같은 삶의 원동력은 바로 그의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의 권세자들이나 부유한 자들 앞에서, 그리고 물질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능력의 비밀, 부활의 신앙을 체험하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만이 그 같은 자세를 가지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오직 이론적으로만 믿었지 실제의 부활 사건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이미 성취된 사건이요 실재였습니다. 그는 예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부활을 단지 이론적으로만 믿는 과거 그의 바리새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진정한 의미의 활력을 부여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는 단지 부활이 가능하다고 믿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이미 성취된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녔던 정의에 대한 정열과 그로 하여금 예루살렘보다는 로마에 호소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예수가 살아 있다는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진리는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것입니다. 본 장과 사도행전과 예수 이후 이제까지의 역사에서 부활을 제거한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아마 십자가가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도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그저 있을 수 있는 한 인간의 비극적인 종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친숙한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고전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15: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고전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15: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고전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여기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 사실들 즉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는 사실과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는 사실을 분명히 구분해서 말했습니다. 기독교의 참 핵심은 예수의 부활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제거한다면, 십자가는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의 완전한 실수요 비극적 결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은 이 예수는 이제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참으로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예수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으로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번도 부활을 말하지 않고는 자기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승리없는 수치를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막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주님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승리와 광채를 생각지 않고는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엡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의 소산이며, 하나님의 손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사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으며, 절대로 패배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능력의 완전하고도 결정적이며 행위라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은 예수가 메시야였다는 결정적 증거였던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야임을 확증하는 바울의 증거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면 그것은 곧 기독교인들이 매일 매 순간 살아계신 그리스도 앞에서 그와 더불어 사귐을 가지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이 혼자서 임무를 담당하거나 슬픔도 혼자 감당하거나, 혼자서 문제와 씨름하거나, 혼자서 명령에 직면하거나, 유혹을 혼자 참아야 한다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을 내리시고 우리가 홀로 그것을 복종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명령을 준행할 수 있도록 항상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하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도, 신학적인 교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경험에서 얻은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의 사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으며, 모든 생활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의 현존 안에서의 삶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부활한 예수의 삶은 "한 새로운 몸의 새로운 삶", "하나의 질적으로 새로운 삶, 죽음을 더 이상 알지 못하며, 그러므로 이 사멸할 삶의 연장일 수 없는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삶이 아니라, 새롭고 다른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에게 기회가 주어질 때 마다 이 부활의 복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폴리탄이 쓴 <시대의 징조>라는 책 속에 다음과 같은 한국의 어느 교회의 목사님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서울역에서 여수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부흥회 인도차 가시는 길이었기에 앉자 마자 잠을 청했는데 잠은 오지 않고 옆에 앉은 영감님에게 전도하라는 성령의 음성이 자꾸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얘기로 말 문을 연 다음,

"영감님, 우리 인생이 사는 것도 이 열차를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 열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영감님도 저도 하차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육신의 몸을 벗고 인생 열차에서 하차하면 갈 곳이 있어야 됩니다. 죽고 난 다음 갈 곳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는

"이 양반 예수쟁이로구만. 아니 내가 뭐 답답해서 하나님을 믿어. 자식도 잘 살겠다. 나 또한 돈도 많겠다."

며 버럭 화를 냅니다. 그래도 끈질기게 전도를 하자 이제는 이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서서 순찰중이던 공안원을 불렀습니다.

"여보슈, 내가 내 돈 주고 편안히 가려고 특등칸을 탓는데 이 예수쟁이가 내 옆에 앉아 날 보고 자꾸 지옥에 간다고 공갈을 하니 더 이상 못참겠소. 이 차비를 물려주든지 이 예수쟁이 입을 막아 주든지 해 주시오."

이 영감님이 큰 소리로 소리를 질러 놨지요, 공안원으로부터 잔득 주의를 받아놨지요, 창피를 당한 목사님이 다시 얼굴을 숙이고 잠을 청하는데 이번엔 영감님이 소주를 받아왔습니다.

"여보, 젊은이, 아까는 미안하게 됐소. 소주나 한 잔 나누며 갑시다."

"영감님, 저는 술을 안 먹습니다."

"공짜로 주는 것도 안 먹어? 허 그럼 내가 실컷 먹지."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목사님 입에서 저주가 튀어 나왔습니다.

"영감님은 지금 지옥을 마시고 있는 겁니다. 그것 자꾸 마시면 죽습니다. 곱게 죽지 못하고 지옥갑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는

"내가 죽는다구! 지옥엘 간다구! 내가 당신보다 오래 살거요!"

하면서 더욱 완강히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시간이 흘렀습니다.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조금 전에 호통을 치던 공안원이 영감님의 가방을 뒤지며 야단입니다.

"아까 그 영감 아시오?"

"아니, 모르는 분인데 그냥 전도를 했지요?"

그 영감님이 술에 취해서 화장실에 갔다가 승강구에서 바람을 쏘이다가 떨어져 즉사했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금 이 시간 생각나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거룩한 성령의 음성이 지금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강권하는 분은 없습니까? 팔을 비틀어서라도 데려오라는 음성이 없습니까?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시대, 이 나라 민족을 위하여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응답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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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나와 같이 되기를

"(행26:1)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행26: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행26: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행26: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바라 (행26: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행26: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행26: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행26: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행26: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행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행26: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행26: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행26: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행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26:1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26: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행26: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행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26: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행26:20)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행26: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행26: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행26: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행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행26: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행26: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행26: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행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행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행26: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행26: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행26: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1.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정부에 반대하여 정치적인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무려 8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고생을 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독일 고백교회의 지도자인 마틴 리뮬러라고 하는 목사님입니다. 이분은

'이 나라를 건지려면 히틀러가 죽어야 된다. 저 히틀러는 적그리스도다. 2차대전을 일으킨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정치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 8년 동안이나 갇혀 있으면서 목사님은 아주 한이 맺혔습니다. 그야말로 히틀러를 향해서

"이 원수, 이 죽일 놈"

하며 있는대로 욕을 다 합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아무리 소리지르면 뭐합니까? 어쨌든 이렇게 원한을 품고 그 많은 고생을 하다가 2차대전이 끝나면서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감옥에서 나올 때, 얼마나 자유로워하고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히틀러는 이미 죽었습니다. 목사님은 <전쟁책임 고백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모든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다, 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목사님은 무려 일곱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이렇습니다.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 심판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습니다. 모두들 차례차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문득 큰 소리로 심판을 받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듣자하니 누가 자기보다 먼저 죽어서 온 모양인데 하나님께서 쩌렁쩌렁하게

"너는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는고?"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죄인 대답하는 말이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대답하는 목소리가 낯익더랍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심판받는 사람을 봤더니 바로 히틀러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꿈을 일곱 번이나 꾼 목사님은 마침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히틀러가 저렇게 된 것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같은 엄청난 일이 생긴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고백서의 내용을 바꿉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교회가 복음을 바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내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

이 나라 민족이 어렵고 잘못되면 이는 바로 나와 내 교회가 복음 전도의 사명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민족 복음화에 전심전력을 다 하는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 감옥에 있는대로, 핍박이 있으면 핍박이 있는대로, 재판받을 때는 재판받는대로, 어디서든지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애의 목적을 삼고 전심전력을 다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의 왕이었던 아그립바 앞에서 재판을 통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렉캄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들 일가의 창시자인 헤롯 대제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 애썼다. 그의 아들이며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안디바는 세례 요한을 목을 베어 죽였으며, 주님으로부터 '여우'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손자 아그립바 1세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아그립바의 아들 앞에 불려 나온 것을 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겸손한 사도 바울이, 대를 이어 진리와 의를 반대했던 이 세속적이고 도덕적으로 부패하기 그지없는 헤롯 일가의 대표자 앞에 서 있는 순간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로마인이 잘 알지 못하는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에 대한 권위자였으므로 비교적 바울의 문제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고 따라서 바울은 그로 인하여 로마 총독에게 자신의 무죄를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그립바 왕은 예수를 재판한 헤롯의 조카였고 야고보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서 유대교에는 정통하였으나 진리에 관하여는 무지한 자였기에 바울은 그에게 복음을 증거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에 이를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바, 바울은 죽음을 불사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외쳤던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변증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 자신이 현재 복음을 전하게 된 이유를 그의 과거 삶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동안 파노라마처럼 전개된 일련의 사건들을 마치 필름을 통해 영화를 보듯이 일목 요연하게 설명해 나갔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자신이 유대인에게 송사받은 이유를 먼저 설명한(4-7절) 다음, 개종 전의 삶과 개종하게 된 동기(8-15절) 및 개종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 전도의 사명(16-23절) 등을 자신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연관하여 조리있게 설명해 나갔습니다.

2. 먼저 바울은 자신이 예수 믿기 전에 살던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행26: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그는 철저히 유대 종교 옹호자로, 그리고 바리새파의 사람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서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인들을 가차없이 박해했던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행26: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사도 바울은 예수믿기 전, 변화받기 전에 저질렀던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딤전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과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자기를 생각하며 자기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이 그렇게도 놀랍고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했을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손수 운전을 하시며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을 태우고 심방을 가는 중에 오고간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차가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 동안 목사님은 장로님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장로님, 저 앞차의 번호판을 보니 옛날 믿지 않던 시절 화투하던 생각이 나는군요."

이에 장로님은 의아한 듯 쳐다봅니다.

"저 앞차 차번호가 아주 좋습니다. 992짓고 4가 둘이니 4땡이네요."

장로님은 그때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넙죽 받아 하는 말이,

"목사님, 저것은 992짓고 4땡이 아니라 442짓고 9땡입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집사님이 거들기를,

"그런걸 보고 쌍땡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고 하는 것이 아닌가!

세 분이 하던 얘기를 옆에서 조용히 들으시던 권사님이 웃으시며 입을 엽니다.

"다 과거가 있는 분들이군요."

하나님의 종 바울도 부끄러운 과거를 지니고 있었지만 기탄없이 자신의 과거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밝혔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에는 그 과거에서 온전히 벗어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부끄럽지 않은 변화된 현재의 모습이 있다면 과거의 변화받지 못했던 부끄러운 모습은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구원얻기 전의 상태가 없으면 구원얻은 후의 변화와 차이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다음으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행26: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행26: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행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26:1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주님의 빛을 본 것입니다. 자신이 박해하던 바로 그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거꾸러뜨려진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낮아지는 회개의 자세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되었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본문(12-18절)은 꿈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온전히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役事)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 당신도 이런 경험을 했더라면 이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듯 극악무도했던 내가 이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당신도 이런 경험을 했더라면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경험한 이 사건은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내가 이런 성령을 체험하게 된 것도 바로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을 지금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게 이런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사도 바울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록 하나의 사건이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확실한 경륜과 목적이 있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이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1: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갈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주님께서는 바울이 태어나기 전부터 벌써 어머니의 태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예정하시고 확정하셔서 다메섹 사건을 통해 은혜로 바울을 부르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행26:14)......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고생..."만 실컷했다는 고백입니다. 여기 '가시채'는 소나 말 등이 밭을 갈거나 달구지를 끌고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길들이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길들여지지않은 소나 말은 멍에를 매워 밭을 갈거나 달구지를 끌고 가고자 하면 그것을 매지 않으려고 자꾸 뒷발질을 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뒷발질해서 닿는 부분에 송곳같은 것을 박아두어서 뒷발질할 때마다 찔리게 만듭니다. 몇번 뒷발질하다가 찔리고 나서야 정신이 나서 비로서 고분고분하게 밭을 갈거나 달구지를 끌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사울아, 이제 내가 네게 멍에를 씌워 놓았으니 버둥대지말고 고분고분따라 오너라. 딴 생각먹고 뒷발질하다가는 너만 고생당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으신 여러분은 딴 생각가지고 벗어날려고 쓸데없이 뒷발질하지 마시고 순순히 직분과 사명에 순종하시므로 고생을 덜 하시기 바랍니다.

4. 다음으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생활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26: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행26: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행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엎드러진 것이 바울의 회개의 자세라면 "일어나 네 발로 일어서라"는 명령은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자세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방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선언은 너는 이제 어쩔수 없이 나의 종이 되어 나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26: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행26:20)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행26: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행26: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행26: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가릴 것 없이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자신에게 사명을 주신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사환처럼 순종하여 보내는대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안디옥에도, 고린도에도, 에베소에도, 데살로니가에도 갔습니다. 낮에도 갔고 밤에도, 육지로 바다로, 살든지 죽든지 가리지않고 명령이 떨어지면 어디든 어떤 방법으로든 순종하며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갔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감옥에 갇혀서도, 그리고 지금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복음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는 사명을 받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딤후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윌리엄 부드는 한때는 전당포 주인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서 1878년 구세군을 창설했습니다.

윌리엄 부드가 젊었을 때 일입니다. 하루는 그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또한 전도생활을 하던 중 매일 매일을 술에 취해 살며 그의 가족들을 전혀 돌보지 아니하고 인생을 헛되게 보내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윌리엄 부드는 그 남자를 몇 번 눈여겨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남자에게 교회에 다녀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남자는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윌리엄 부드는 포기한 채 그 남자를 잊고는 몇 날이 지났습니다. 윌리엄 부드가 급한 일로 길을 가다가 술에 취해 사는 그 남자를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술취한 남자가 빈정거리며 윌리엄 부드를 불러 세우더니 말했습니다.

"여보슈, 내가 정말 지옥과 천당이 있다는 걸 확신한다면 당신처럼 그렇게 소신없게 전도하지는 않을거요."

그 후 윌리엄 부드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그 때부터 열심히 전도하며 봉사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쫓겨나 이를 갈며 슬피우는 자가" 되지 않도록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5. 사도 바울의 간증 설교를 듣던 베스도는 바울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칩니다.

"(행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이는 바울이 경험한 변화의 과정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터져 나온 말입니다. 사실 베스도같이 세속적이고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사도 바울이 경험한 영적 중생의 사건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영적인 일이 이해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 하나님의 심판, 영원한 천국 등과 같은 이야기가 베스도와 같이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사람에게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맑은 물 속에 득실대는 대장균들을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물을 들여다 본 사람은 그것을 잘 압니다. 이 세상에는 육의 눈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내세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육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영적인 눈이 없는 베스도가 바울의 영적인 설교를 듣게 되니까 바울이 미쳐보이는 것입니다. 겨우 안다는 것이 고작 학문을 지나치게 많이 배운 탓에 바울이 미쳤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행26: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세상에 멀쩡한 사람을 두고 미쳤다고 몰아부친 일이 역사에 어디 한 두 번 있었겠습니까?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두고 미쳤다고 몰아다 부쳤습니다.

"(요10: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요10:21)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님의 가족들까지도 예수님이 미쳤다고 붙잡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막3: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막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이처럼 예수님을 미쳤다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야단인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세상이 왜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고후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여러분 가족 중에 예수 때문에 미쳤다고 여겨지시는 분들이 있거든 여러분 자신과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아시고 사람을 육체대로 알지 마시고 영으로 아시는 영적인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 베스도가 영적인 눈이 멀어 바울더러 미쳤다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해 복음을 전하며 신앙의 결단을 요청했습니다.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바울은 베스도에게 복음을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은무의미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방향을 돌린 것입니다. 사실 육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에게는 떡이나 몇 개 더 생기는 이야기나 출세담이나 쾌락의 이야기가 훨씬 더 귀가 번쩍 뜨이고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돼지에게 필요한 것은 거룩하고 깨끗한 옷이 아니라 시궁창의 짚더미이며 개에게 필요한 것은 진주가 아니라 썩어빠진 고기덩어리일 것입니다. 복음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적인 인간에게는 복음을 이야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를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행26: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행26: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그러나 아그립바 역시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었습니다.

"(행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죄수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왕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보다도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의 도덕성 때문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아그립바는 오누이가 같이 사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버니게는 바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던 자기 여동생입니다. 그는 그러한 불륜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들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들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그립바가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가 포기해야 될 죄들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게 된다면 이러한 죄악들을 끊어야만 합니다. 그는 이러한 쾌락과 죄악들을 끊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지 못하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도덕적인 이유가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부패하고 음란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내어 놓기가 싫어서 예수 믿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세상의 쾌락들을 끊어 버리기가 아까워서 영생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영적 생활의 기쁨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슬프게도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성령이 주는 기쁨과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고 불안한 삶을 사는 기독교인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사도 요한이 권면합니다.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의 순간적인 죄가 주는 쾌락들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영생을 놓쳐 버리는 아그립바의 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처에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아그립바에 대한 바울의 진심은 분명합니다.

"(행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사도 바울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변화를 받아 영생을 소유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주님의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정신없이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것입니다.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미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습니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래서 그는 주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어디든지 따라 갔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걸어가는 것이 세상에 가장 큰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에게 똑바로 미친 성도들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소원인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포로된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 불타는 사랑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심과 충성, 눈물과 감격과 열정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감격도 정열도 없는 싸늘한 고드름 같은 믿음으로는 어떤 변화도 역사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감각의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복음 전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마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마11: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계3:1)......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성도 여러분, "(행26:29)......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는 바울 사도의 그 뜨거운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과 감격, 그리고 그 불붙는 사랑이 여러분 가슴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던 최권능 목사,

"스코틀랜드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죤 낙스의 민족 복음화에 대한 뜨거운 정열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는 바울의 소원은 바로 주님의 소원입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13살난 김용기라는 소년이 이름 모를 깊은 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듣지 않았습니다.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고, 사람을 불러 경을 읽히기도 했지만 낫지는 않고 더욱 심해만 갔습니다. 소년의 부모는 날로 여위어가는 아들을 보며 안타까와했지만 방도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담장 너머로 하얀 쪽지 한 장이 날아 들어왔습니다. 그 쪽지에는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은 소년의 아버지 김춘교씨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라는 구절에서 혹시 내 아들을 살릴 길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종이쪽지를 넣은 청년을 수소문해서 찾았습니다.

전도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 받은 그의 가정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소년 김용기는 병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는 십리가 넘는 용진교회에서 믿음의 터를 닦기 시작하였고 드디어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창설하여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정신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사회 각계 각층의 정신적 영적 각성 운동을 일으켜 나라 민족을 변화시켜가는 신앙인의 모범인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소원을 이 땅에 이루어드리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이 땅에 새로운 믿음의 불을 붙이고 여러분의 삶과 나라 민족에 새로운 감격과 변화와 능력을 경험하는 역사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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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행27: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행27: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행27: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 (행27: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행27: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성에 이르러 (행27: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행27: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행27: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행27: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행27: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행27: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행27:12)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행27: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행27: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행27: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행27: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행27:17)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행27: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행27: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행27: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행27: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행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행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행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행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27: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행27:27)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행27:28)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행27: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행27: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행27: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행27:32)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행27:33)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행27:34)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행27: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행27:36)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행27: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인이러라 (행27: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행27:39)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행27: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행27: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행27:42)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행27: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행27: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소년 한스는 이웃 마을로 심부름을 다녀 오는 길이었습니다. 소년은 해안의 둑 위를 경쾌하게 걸으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순간 한스는 '앗!' 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둑 아래 수문(水門)의 한 곳에 구멍이 뚫려서 바닷물이 새어드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스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지만 땅이 해면(海面)보다 낮은 조국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바닷물을 막고 있는 둑에 구멍이 생겨 물이 샌다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도 알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부르러 갔다 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물은 아까보다 더 세차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던 한스는 웃저고리를 벗어 자기 오른 팔에다 휘어감고 뚫어진 구멍에 갖다 댔습니다. 이렇게 얼마간 막고 있으면 그 사이 누가 와서 도와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지만 1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도움의 손길은 없었습니다. 어느새 날은 저물고, 추운 겨울 바람은 웃저고리를 벗은 소년의 몸을 꽁꽁 얼어 붙게 만들었습니다. 배도 고팠습니다. 한스의 팔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습니다. 집에 돌아가고픈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만약 내가 집으로 가버리면 네델란드는 어찌 되는 거지?'

하는 생각에 한스는 다시 이를 악물었습니다.

"누구 없어요? 좀 도와주세요!"

소년의 외침은 밤사이 여러 번 울려 퍼졌지만 공허한 메아리만 되돌아 올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이 둑을 지나던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한스는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한 쪽 팔로 뚫어진 틈을 막고 있던 한스를 끌어 안으면서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참으로 수고했다. 너의 애국심과 용기가 네델란드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구나!"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로마 복음 전도의 사명을 받은 사도 바울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의 승객 전원이 구원함을 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증거하는 사람들이 생명의 위기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간섭하시고 보호하시는 역사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옥문을 열어 주셨습니다.(5:19, 12:7) 또한 바울과 실라가 투옥되었을 때에도 감옥에 큰 지진이 나게 하시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거해 주셨습니다.(16:2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시시때때로 위기에 처해 있는 바울을 격려하시며 보호하셨습니다.(18:9, 23:11) 오늘 본문 27장에서도 하나님께서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폭풍의 한 바다 가운데 위기를 만난 바울과 그 일행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재판이 끝나고 드디어 로마로 출항한 바울이 무라(Myra)를 거쳐 그레데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때 바울은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역사적인 사명자이었지만 그는 결박된 죄수의 몸으로 실려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동행한 사람은 누가와 아리스다고(마게도니아의 데살로니가 사람)였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여 기독교인이 된 이방인으로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체포된 적도 있고(19:29), 바울이 가이사랴에 2년간 투옥되었을 때에도 함께 갇혀 있었던 복음의 동역자였습니다(골 4:10, 몬 1:24). 이제 아리스다고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울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항로가 변경되는 바람에(6절) 바울과 함께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리스다고 역시 희생과 봉사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수난의 전도 여정에 동참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복음 전도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 혼자만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훌륭하고 희생적인 동역자들을 보내주셔서 협력하게 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비록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어가고 있었지만 바울의 호송 책임을 맡은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까지 한결같이 바울을 보호해 주며 불편하지 않도록 선대(善待)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죄수의 신분이면서도 로마인의 특별한 호의를 받게 된 것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로마 전도를 위해 로마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사 이방인의 사도된 바울의 길을 예비하신 것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을 태운 알렉산드리아호 배는 남풍이 순하게 불자 머물렀던 그레데 미항을 떠나 그레데 해안을 따라 항해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 때 바울은 백부장 율리오에게 충고합니다.

"(행27: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행27: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행27: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바울은 여행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대속죄일 금식(리16:29)이 지난 후인 초막절(레 23:34) 이후, 즉 늦가을에 역풍(逆風)을 무릅쓰고 항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항해를 멈추고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야 한다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 중 세 번에 걸쳐 파선당한 적이 있었습니다(고후 7:5). 그래서 그의 판단은 경험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충고는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靈感)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비록 항해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하나님과 영적 교통함을 통해 전문가 이상으로 상황을 꿰뚫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말보다는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고 바울의 충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계속 강행하게 합니다.

또한 그들이 머물렀던 라새아 미항은 조그마한 항구로 겨울철을 나기가 불편해서 번화한 뵈닉스까지 가서 과동하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 일행을 태운 알렉산드리아 호는 항해를 시작하여 때마침 불어오는 남풍을 만나 순풍에 돛을 달고 의기양양하게 뵈닉스를 향하여 출항합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서 바울의 말한 그대로 유라굴로라는 무서운 광풍을 만나 극심한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인간의 안목에 화려하고 편한 것을 바라다가 곤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인생 항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시적으로 부는 순풍에 인생들은 희희낙낙하며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모진 바람이 한번 불게 되면 그 순간 공포와 비애와 절망 속에 한탄하며 신음하게 됩니다. 인생은 일엽편주 같은 연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젊고 건강하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라고 장담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돈이 많다.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다."라고 호언합니다. 그러나 근력이나 건강은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은 날개를 달고서 멀리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겐 나를 도와줄 친구들과 친척들이 있다."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어느 한 날에 그들은 모두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폭풍 한가운데서 우리에겐 인간의 힘보다도 더 강력한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목적지까지 안내해 줄 수 있는 도선사(항로 안내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도선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생의 폭풍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신뢰해야만 합니다. 그 분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다. 나는 하늘과 바다의 주인이니 내가 너를 인도하겠다."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강행하여 위기에 빠지게 된 또 다른 원인은 1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행27:12)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다시말해 다수의 의견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다수의 의견은 중요합니다. 민주주의의 사회에서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되고 행동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의견도 마땅히 존중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소수의 진실이 말살되고 다수의 주장이 폭력이 될 때 그것은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수냐 소수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어느 것이 진리냐에 의해서 판단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은 다수의 소리에 눌려서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바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저들의 살 길이었습니다. 저들은 다수의 횡포에 희생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외로운 진리의 소수가 다수의 폭력 앞에서 묵살되어져 버린 경우을 여러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미가야의 소리는 시드기야를 위시한 400명의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서 짓밟혀졌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결과는 미가야의 예언이 진실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싸웠던 엘리야의 외로운 투쟁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어느 것이 더 진실이며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다수의 의견으로 기울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 엄청난 재난을 겪게 된 것입니다. 대한 민국이 사는 길은 이 땅에 진실과 진리, 하나님의 말씀이 존중되고 살아 역사(役事)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라굴로라는 태풍 속에 풍우대작(風雨大作)하는 바다 한 복판에서 승선한 모든 사람이 절망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오직 한 사람만이 담대했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소망을 가졌습니다. 태양과 별들이 가려져 있었지만 밝은 빛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던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네 번씩이나 로마에 가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19:21, 23:11, 25:12, 본문 24절).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극심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로지 이 약속을 굳게 믿고 능히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환상을 통해 그의 로마 전도에 대한 소명을 재차 일깨워 주심으로 구원의 소망을 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노련한 선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약속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행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행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행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행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27: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이 말씀을 보면, 바울과 함께 승선한 모든 사람들은 실제로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방인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생명을 건지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큰 폭풍에 시달려 구원의 여망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포착하여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소망의 빛을 주었습니다. 즉 바울은 바다와 바람을 지으시고 자연을 지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그들에게 소개했고 그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리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사도 바울이 그 배에 있었기 때문에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구조된 것이었습니다.

가이사랴를 떠날 때는 초라한 죄수에 불과했던 바울이 이제는 선중(船中)의 지휘관이 되어 활약하게 됩니다. 바울은 밤낮으로 깨어 있어 사공들의 도주 음모를 간파하고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경고했습니다.

"(행27: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행27: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사공들은 자기 자신들 외에는 승객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생명만을 부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거루(구명정)을 내려 놓고서 타고 도망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경고에 처음에는 거부했던 백부장과 군사들이 이제는 즉각 바울의 말을 받아들여 거룻줄을 끊어 버려 사공들이 도망치지 못하게했습니다.

"(행27:32)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사공들이 만약 거룻배(구명정)를 타고 자기들만 살고자 도망했다면, 바울의 말대로 "배에 있지 아니하면 그들은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사는 길은 거룻배를 타고 달아나는 길이 아니라 배 안에 머무는 길이었습니다. 사태가 악화되고 주변은 어둡고 갈 바는 몰라도 참으로 사는 길은 배 밖이 아니라 배 안이었습니다.

참으로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줄을 믿고 사는 사람은 거룻배 줄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세계가 어지럽고 삶의 물결이 거셀수록 참으로 사는 길은 배 안에 머무르는 길입니다. 실제로 오늘 교회가 이 땅 위에서 인류 구원의 사명을 감당해가는 동안 너무 많은 거룻배들을 만들어 달고 있습니다. 돈, 타협, 경영, 권력, 교리, 조직 등등의 얼마나 많은 거룻배들을 끌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이 거룻배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순수한 교회, 주님의 교회로서가 아니라 거룻배들을 많이 달고 다니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더 의지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순수한, 주님을 향한 사랑과 구원의 감격과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기보다는 이 거룻배들을 타고 살아보려고 날뛰게 되었습니다. 오늘 교회가 얼마나 복음의 외적인 것에 더 의지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숫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인 숫자의 거룻배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지 못한 교회는 자기들도 그러한 거룻배를 가지기 위해서 안달을 합니다. 거대한 예산의 거룻배를 자랑합니다. 세상의 권력과 타협하고 세상의 인정을 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그래서 섬기는 교회에서 다스리는 교회, 큰 소리치는 교회를 부러워합니다. 교회를 바로 지키기 위해서는 교리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바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건물이 필요합니다. 설교를 잘 듣기 위해서는 좋은 기재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것들을 거룻배로 너무 많이 만들어낸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자랑합니다. 그렇지 못한 교회들은 자기들도 이러한 거룻배를 하나라도 더 가지기 위해서 안달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거룻배를 끊어버려라." 참으로 교회가 주님의 교회가 되고 순수한 구원의 교회, 노아의 방주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거룻배 줄들을 끊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정없이 잘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격랑의 시대 속에서 주님이 맡겨 주신, 영혼을 구원하는 순수한 교회, 구원선으로서의 교회, 노아의 방주가 되기 위해서는 이 거룻배줄을 끊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순수한 신앙과 복음과 주님을 의지하는 데서 세상으로 눈길을 돌리게 하고 그것들을 더 의지하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고, 참으로 영혼이 사는 길은 이 모든 복음의 외적인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배 안에 머무르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때로 그것이 지루하고 지겹고 육신을 피곤하게 한다해도 교회 안에 머무르는 길만이 우리 영혼이 사는 길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성이, 때로는 우리의 감정이, 때로는 사랑이, 때로는 친구가, 세상의 쾌락이, 돈이, 식구가, 친척이, 사업이 우리를 예수 밖으로 불러냅니다. 그와같은 것들이 거룻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타고 살아보겠다고 구원선인 교회를 떠난 심령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를 예수 밖으로 불러내는 것은, 교회 밖으로 유혹하는 모든 거룻배들은 사정없이 끊어버려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이 거룻배를 타고 신앙과 교회와 예수를 떠난 사람들이 인생의 바다에서 그 영혼이 멸망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딤전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므로 성경은 "(히12:1)...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거룻배들을 끊어버리지 않고는 자기를 따를 수 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항구에 들어가 구원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의지하고 갈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요단강물에 뛰어드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끊어야 합니다. 이 험한 격랑의 바다같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힘든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죄인인 바울이 지휘관이 되고 죄수를 호송하던 백부장이나 군인들이 도리어 이제는 바울의 지휘를 받는 하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지금까지 바울의 말을 듣지 않던 백부장은 자신의 현명치 못함을 깨닫고 그대로 순종함으로 모든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풍랑을 만난 배가 사는 유일한 길은 이제 하나님의 종 바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난 대한 민국호가 살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의 통치권을 가진 대통령도 그리고 위정자도 국방을 맡은 군인들도 경제를 장악한 재벌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길밖에 다른 살 길이 없습니다. 그것만이 참으로 나라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행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영력(靈力)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반면 백부장과 군인들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의 한계와 어리석음과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로마인 백부장은 바울의 신앙적 초연함에 감동되어 죽을 고비에서 바울을 구해주는 최대의 호의를 베풉니다. 당시 로마 군법은 죄수를 지키거나 호송하던 군사가 그를 놓치거나 잃을 경우 죄수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의 수하에 있었던 군사들은 도망칠 우려가 있는 죄수들을 모두 살해하려고 했지만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살리기 위해 그 계획을 묵살시켜 버립니다.

"(행27:42)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행27: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행27: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약속하신 로마 선교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76명의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 것은 선장이나 선원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보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와 사랑이 그들을 구원한 것입니다.

바울을 돌보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명자들을 보살피고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폭풍 한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시련을 겪고 고난을 당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 분은 필요한 모든 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대한민국의 생명은 민족 복음화의 사명을 지닌 성도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세계 복음화의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한 이 땅의 성도 여러분의 생명과 이 나라 민족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의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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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드디어 로마에!

"(행28:1)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행28:2)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행28:3)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행28:4)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행28: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행28:6)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행28:7)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행28: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행28: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행28: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행28:11) 석 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라 (행28:12)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행28:13)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행28:14)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행28:15)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행28: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행28: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 바 되었으니 (행28: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행28: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행28: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행28:21)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행28: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행28: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행28: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행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행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행28:29) (없음) (행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1. 바울의 일행이 파선(破船)을 당하여 구사 일생으로 상륙하게 된 곳은 당시 카르타고의 점령지였던 멜리데 섬이었습니다. 거기서 원주민들의 동정을 얻어 따뜻한 영접을 받았습니다. 원주민들이 불을 피워준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한 아름의 나뭇단을 거두어 불 속에 넣었습니다. 그 순간 그 나뭇단에 숨어있던 독사가 불의 뜨거움으로 인하여 바울의 손을 물고 늘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토인들은 바울이 죄를 범한 자로서 저주를 받아 곧 죽을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독사를 불에 털어버리고 아무런 해함도 상함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에 토인들은 바울을 신(神)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같은 이적(異蹟) 외에 그 섬에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는 것을 바울이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이후에 그 섬에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었습니다.

이같은 이적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도 바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하나님을 믿는 바울에게는 어디에 가든지 표적이 따랐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막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은 시종 일관 초자연적인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신 사실이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실 등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길 없는 이적들인 것입니다.

이외에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기간 수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적을 행하신 목적은 먼저 예수의 초월적이고도 절대적인 주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예수의 이적들은 자연의 법칙을 자유로이 조종하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과 영혼까지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주권자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적을 행하시는 다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자기의 말을 믿을 수 없거든 자기의 행한 일들이라도 믿어 당신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깨달으라고 친히 권고하신 바 있습니다.

"(요10: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요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특히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육체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서 죄와 사단과 온갖 저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이심을 밝히 증거해 보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이적들은 단순히 인간애라는 인도적 차원에서 비롯되는 선행의 의미 이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거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그들의 육체적 질병만을 고쳐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그들에게 영혼의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이었습니다.

조난자들을 환대했던 멜리데 섬 원주민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좋은 전도 대상자였으며 바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뱀에 물리는 사건은 알고 보면 하나의 은혜입니다. 물론 물리고도 무사한 것 역시 은혜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믿게 하고, 그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들려오는 말씀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모두가 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주어진 사건들이었습니다.

2. 멜리데 섬에서의 이적들로 인해 후한 대접을 받은 바울 일행은 드디어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의 형편은 복음 전파에 전혀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죄인의 몸으로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하루 종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법을 준수하는지 예의 주시(銳意注視)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가 거처하고 있는 작은 집을 역동적인 복음전파의 선교본부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죄인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능한 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로마에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 선교전략은 바울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그에게 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자유의 몸일 때에는 회당이나 시장에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문서선교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로마에서 감금된 생활 가운데 네 개의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옥중서신), 빌레몬서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여 복음을 전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시도 좌절해서 부여된 사명을 저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2년 동안 체류하면서 하루도 태만하게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결박되어있는 몸이었지만 로마 사람들에 의해 결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결박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포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포로"였으며, "그리스도께 얽매인 종"이었습니다.

"(빌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몬1: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

우리는 비록 바울과는 달리 신체적인 고통을 당하지 않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신체적인 장애나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서 제약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은 우리의 선교사역을 더욱 확대시키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자기 처소에 초청한 사람들은 유대인들 중에 가장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 자신이 로마에까지 오게 된 경위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그렇게 쇠사슬에 매인바 되어 로마에 오게 된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증거합니다.

"(행28: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쇠고랑을 찬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까지, 죽음을 무릎쓰고 달려온 것인가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얻어 한치도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해 달려 온 그 험한 길은 오직 "이스라엘의 소망" 즉 온 인류의 소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진정한 소원은 자기 형제요 동족인 이스라엘이 이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고 구원얻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는 길이 이 길 뿐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이스라엘의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그외에 이스라엘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류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나라 민족이 살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류가 살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나라 민족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는 길만이 나라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문민정부가 나라 민족을 살리는 것 아닙니다. 대통령 직선제, 내각 책임제가 나라 민족을 살리는 것 아닙니다. OECD 가입으로 선진국 대열에 끼였다고 그것이 나라 민족이 살리는 것 아닙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 정책 제도 등이 나라 민족을 살리는 것 결코 아닙니다. 먼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거듭나야만 합니다. 한 나라 민족의 흥망성쇠는 전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 나라 민족은 결코 바로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만이 이 나라 민족의 소망이 있으며 사는 길입니다. 경제 강국이 되지 못하고 가진 것이 없다해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나라 민족은 복이 있습니다.

"(시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은 참 소망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라 민족과 온 인류의 산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주님이 주신 소망만이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가 어두워지고 세계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면 휘말릴수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은 더 찬란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의 소망입니다. 이 나라 민족의 소망이며 소망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령님을 통하여 이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4. 사도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증거한 복음의 내용은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행28: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옛날 궁중에서 왕을 즐겁게 하고 때로 왕이 잘못을 했을 때 풍자적인 놀이로 왕의 잘못을 깨우치게 했던 직업 가운데 광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광대의 바보 같은 익살을 보고 임금님께서 당신의 지팡이를 건네주며 "너보다 더 멍청한 사람을 만나면 이 지팡이를 주라." 고 말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임금님이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유언을 하며 임금은 "이제 나는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난다." 고 말을 하자, 광대가 앞으로 나서며 "폐하, 폐하께서는 다른 나라를 방문하실 때 꼭 사신을 보내 준비토록 하셨는데 이번 여행도 충분히 준비를 하셨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왕은 전혀 준비를 못했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때 광대는 가장 바보같은 사람에게 주라고 했던 그 지팡이를 임금님께 건네주며 "폐하, 나보다 더 멍청한 사람을 이제야 발견했습니다. 이 지팡이를 받으시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여러분,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한 사람이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좁은 사잇길로 가다가 그만 실수로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써도 자기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깨끗한 옷을 차려입은 어떤 젊잖으신 한 분이 그 옆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하고 소리치는 그 사람에게 지나가던 젊잖으신 분이 혀를 끌끌 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군자 대로행이라 했거늘 사나이가 왜 좁은 사잇길로 가다가 그 꼴을 당하는고. 또 설사 수렁에 빠졌기로서니 대장부가 젊잖지 못하게 꽥꽥 소리를 질러!" 그러고는 그냥 지나가더랍니다. 누구의 가르침이겠습니까? 바로 공자의 가르침입니다.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이 지나갑니다. 또 그 사람은 지나는 사람에게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도 구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인생은 어차피 고해이니라. 생노병사에 시달리는 또 하나의 중생이 있구나. 거기서 잠시 고행을 하여 지푸라기라도 잡고 나올 수 있는 힘을 기르시오." 하고 자기 갈길로 바삐 지나가 버렸습니다. 누구의 가르침입니까? 이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입니다.

잠시 후 세 번째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이번만은 꼭 살아야겠다는 신념으로 더욱 목청껏 죽을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이 세 번째 사람은 "너는 왜 넓은 길을 놔두고 좁은 길로 가다가 이 고생을 하느냐?" 하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불쌍하다고 동정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대로 수렁으로 뛰어들어 빠져서 다 죽게 된 그 사람을 강뚝에 건져내고는 자신은 나오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대신 죽어갔습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세계의 지배자인 로마에서 2년 동안 체류하면서 선포한 것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오늘날 증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가 전해야 하는 것은 "국민의 뜻"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군주제나 민주주의를 위하여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그가 만왕의 왕이시라는 진리, 그의 법이 모든 인간의 법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 오직 그의 뜻이 이루어질 때만이 비로소 사람들이 더욱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위하여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은 사도 바울의 로마 선교에 있어서 최고의 주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를 증거하는 데 있어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적들이나 감옥이나 쇠사슬이 있는 곳에서도 결코 방해를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연합하여 기독교의 증거를 대적한다 할지라도 결국 그들의 세력은 부서지고 파괴되고 망하여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과거에 이 증거의 말씀이 아닌 로마와 네로가 망하고 무릎을 꿇었듯이 말입니다. 이 세상의 세력들은 결국 망하고 말 것입니다.

5.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유대인들에게 전했으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이러므로 복음은 이제 이방인들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행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23절 "우거하는 집"과 30절의 "셋집"은 다른 집이었습니다. 처음에 바울은 로마 병사가 그의 곁에서 감시하는 상태로 손님으로서의 친구의 집에 우거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들을 불러 모아서 강론한 곳은 바로 이 '우거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후에는 자신이 세낸 집에서 2년 동안 기거하였습니다. 로마의 죄수로서 언제라도 황제 앞에 불려 나갈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로마 당국은 그가 로마에 머물 수 있도록 그의 숙식 비용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서의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 집을 세내었던 것입니다. 그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려면 로마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말아야 했습니다.

후에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를 신봉하게되어 기독 교회의 후원자가 되는 때가 왔습니다. 이 때 황제는 교회당을 세워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즉 로마가 교회를 후원했을 때야말로 기독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어둡고 파괴적인 시기였습니다. 황제가 교회를 위하여 교회당을 마련해 줄 때에는 그가 교회를 좌지 우지하기 마련입니다. 세속 권력이 교회의 일을 다스리게 되면 "교회"는 세속 권력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이용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 로마의 죄수가 로마의 재정적인 지원 하에 숙식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마다하고 자신의 비용으로 셋집을 얻어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은 짧고 간단하지만 아주 숭고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종결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행전 역시 아직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만약 사도행전이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의 전기(傳記)를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면, 그들의 죽음과 더불어서 사도행전은 역시 마무리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전기를 기록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지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어서 어떻게 성장해가는가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과거의 책이 아니고, 미래를 향해서 개방되어진 책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지금에는 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사도행전의 역사를 계속해 나갈 것인가? 사도행전을 계속 기록해나가는 사명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리우기 파라시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죽을 때에 이상하게 그 얼굴이 이지러지고 해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그는 바이올린 수집가였다고 합니다. 한평생 246개나 되는 바이올린을 세계 도처에서 수집했습니다. 그저 진기한 것이라면 사다가 자기 집 천정에 감춰놓고서 그 비싼 바이올린을 만져보고 쳐다보고 쓰다듬으면서 즐겼다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그는 바이올린을 즐긴 것 같으나 바이올린의 선율을 즐길 줄 몰랐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름다운 선율을 강탈하는 죄를 지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으로 좋은 음악을 연주해서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줘야 하겠는데, 전부 사들여서 꽁꽁 묶어 놓았으니 바이올린은 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좋은 바이올린이 썩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인도 바로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기독교인들은 그 수가 적지만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데 사실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잘 믿는다면 당연히 일본 기독교 교회가 부흥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말해 일본 기독교인들은 혼자서는 잘 믿을 지 몰라도 전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금년 1년 동안 나로 인해서 예수믿는 사람이 몇 사람이 있습니까? 봉사하느니 뭐니 했습니다마는 정말로 내가 전도해서 예수믿게 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됩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까? 그렇다면 완전히 공친 것입니다. 헛산 것입니다. 잘 믿는다는 것은 생산적인 신앙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해서 불화한 사람들이 화해하고, 나로 인해서 안믿는 사람이 예수 믿게 되고, 구원을 받는 사람이 생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행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는 성령의 역사가 이 나라 민족과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부여받으신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므로 사도 행전의 성령의 역사를 계승해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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