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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 빛을 발하라!(사 60:1-9) - - - <신년주일>
 2. 제단의 불을 끄지 마라(레 6:8-13) - - - <신년주일>
 3.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1-19) - <신년주일>
 
4. 빛의 열매(엡5:7-9) - - - <신년주일>
 
5. 나귀새끼를 타신 왕(슥9:9-10) - - - <종려주일>
 
6. 평화의 왕(마21:1-11) - - - <종려주일>
 7. 예수의 부활(요20:26-31) - - - <부활절>
 
8. 새벽을 향한 황혼의 길(눅24:13-35) - - - <부활절>
 9. 성서적 아버지 상(살전 2;8-12) - - - <어버이주일>
10. 사랑의 가정(엡5:22-33)  - - - <어버이주일>
11. 삶의 영(겔37:1-14) - - - <성령강림절>
12. 맥추절을 지키자(출23:14-17) - - - <맥추절>
13. 복으로 심는자(고후8:1-24) - - - <맥추절>
14. 진정한 감사(합3:16-19) - - - <추수감사절>
15. 하나님의 혁명(눅1:46-56) - - - <성탄절>
16. 평강의 왕(사 9:1-7) - - - <성탄절>
17. 세 가지 예물(마 2:1-12) - - - <성탄절>
18.한국전쟁과 통일지향의 기독교(계 13:1-18)
19. 한국 전쟁과 사명자(습 3:1-7) - - - <6.25설교>
20. 통일 주체 - 성령(행 2:1-13) - - - <6.25설교>
21. 개혁자의 삶(대하 34:1-33) - - - <국가>
22. 우상숭배 정권의 불행(왕상 12:21-33) - -<국가>
23. 너희는 거룩하라(히12:14) - - - <국가>
24. 자신을 깨끗이 하자(고후7:1-4) - - - <국가>
25. 사라지지않는 불꽃(출3:1-12) - - - <광복절>
26. 우리의 소원(롬9:1-5) - - - <국가>
27. 국가와 민족이 사는 길(삼하 24:10-24) - -<국가>
28. 개혁의 원리(히4:12-13) - - - <국가>  
29. 의인 하나면 족하다(창18:22-32) - - - <국가>
30. 신앙과 현실(마17:1-20) - - - <국가>
31.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라(암5:1-27) - - - <국가>
32. 성결케하여 내일을 기다리라(수7:1-26) - - <국가>
33. 쌓을 곳이 없는 복(말 3:7-12) - - - <십일조>    
34.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19) - - -<신년주일>   
35. 목자와 스트레스(시 23편)  
36.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욘 1:1-15) - - <국가>
37. 겨울에 피는 꽃(렘 1:11-12)  - - -<국가>
38. 빛과 소금이 되라(마 5:13-16) - - -<1월>
39. 성전 기둥이 되라(계 3:7-13) - - -<1월>
40. 가시나무를 대신하여(사 55:1-13) - - -<1월>
41. 네 뒷맛이 쓰지않겠느냐?(삼하 2:24-28) - -<1월>
42. 하나되게 하신 것(고전 11:23-29, 엡 4:1-6)<1월>

 

1. 빛을 발하라!          


"(사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60: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사60:3) 열방은 네 빛으로,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사60:4)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사60:5)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옴이라 (사60:6) 허다한 약대,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사60:7)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 느바욧의 수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사60:8) 저 구름 같이,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 오는 것 같이 날아 오는 자들이 누구뇨 (사60:9)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원방에서 네 자손과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빛을 발하라!" 라는 성구는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 성구입니다.빛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요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여기 "참빛"은 바로 어두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어두움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빛밖에는 없습니다.어두움은  환란(사45:7)과 불의(사45:19)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또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캄캄해진 세상의 모습을 말하기도 합니다.(사59:1-15) 이사야 당시 사회적,도덕적 무감각 상태(도덕 불감증)의 죄악상은 이스라엘의 총체적 부패 상황을 말하며 이는 한  마디로 어두움이었습니다.

  "(사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사59:3) 이는 너희 손이 피에,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사59: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사59: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사59: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사59: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사59: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사59:9)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 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사59:10)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빛되시는 메시야(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예수님은 곧 세상을 구원할  구원의 빛,복음의 빛이십니다.세상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의 빛뿐입니다.
  학동들이 글방에서 공부를 하던 중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선생님께 "오늘도 옛날 이야기를 해주세요."하며 졸랐습니다.쉬는 시간이면 옛날 이야기 때문에 시달림을 당하던 선생님이 그 날은 수수께끼 하나를 내기로 했습니다.선생님은 자기 곁으로 우르르 모여든 아이들에게 엽전 한 닢을 꺼내 보이며 물었습니다.
  "이게 무엇이냐?"
  "엽전이지 뭐예요?"
  "그래 맞았다.잘 들어 보아라.누가 이 엽전 한 닢으로 이 방안에 가득 찰 물건을 사올 사람이 있느냐?"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불가능한 일 같았습니다.모두들 안된다고 고개를 가로젓자,평소에는 말이 별로 없던 한 아이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선생님,제가 사오겠습니다.그 돈을 이리 주세요."
  돈을 받아들고 나간 아이가 잠시 후에 다시 나타났는데 그의 손에는 양초 한 자루가 들려 있었습니다.아이가 성냥불을 켜 양초에 불을 당기자 어둡던 방안이 구석구석까지 그야말로 빛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선생님은 물론 그 아이를 비웃던 다른 아이들도 모두 칭찬해 마지 않았습니다.
  복음만이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충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금년에 우리는 복음의 빛을 비춰 세상을 밝게 합시다.복음 즉,하나님의 말씀만이 세상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사도 바울은 빛되신 이 복음을 위하여 태어났고 복음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며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은혜와 은사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세상의 빛되신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빛의 사자(使者)들입니다.

  "(롬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오늘 본문 "(사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에서 "일어 나라"는 말씀은 복음을 위해 "깨어나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롬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롬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죄의 잠에서,육의 안일한 잠에서,게으름과 태만에서,영적 사망의 잠에서 깨어날 때가 가까왔다는 말씀입니다.'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뜻은 곧 네 영혼과 내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라,죄를 조심하고 선한 일을 하도록 힘쓰며 언제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두고 볼 때 지금이 몇 시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실패자가 될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에서 지금이 어느 시점에 놓여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지혜있는 생애를 보낼 수 없을 것입니다.크리스챤은 깨어서 역사의 시간을 보고 온 세상에 시기를 알리는 파수꾼입니다.
  혁명 이전의 제정(帝政) 러시아 교회는 부패하였습니다.농민들은 굶주렸는데 교회는 귀족들과 함께 살이 쪄서 민중들의 필요에 호응하지 못하였습니다.교회의 수적인, 양적인 풍요함이 영원히 갈 것 같았으나 하루 아침에 무너져 불타고 깨지고 죽어가지 않았던가! 그들은 그 때가 몇시인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도 똑같은 배경입니다.온 백성이 굶주렸는데 루이 16세와 그를 추종하는 소수의 부패 세력만이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그러나 하루 아침에 그들의 욕심과 타락은 피바다 속에 흘러 내려갔습니다.그들은 그 때가 몇시인지를 생각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역사의 교훈을 받고 눈을 떠야 합니다.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그리고 진리가 찬란히 빛나고 있는 시대입니까? 오히려 '황금의 송아지'가 신(神)이 되고(황금만능주의),'바로의 힘'이 믿음직스럽고(권력지상주의), '요부(妖婦) 이세벨'을 따라 그 숱한 잡신(雜神)들,무기(武器)와 달라($,弗)와 섹스(SEX,性)를 찾아 헤매는 휘청거리는 역사가 아닙니까?
  민족의 사명자들은  이 나라 민족의 역사적인 시간이 몇시라고 경고의 나팔을 불 수 있어야 합니다.밤이 깊어지면 낮이 가까와지는 법입니다.죄악이 극도에 이르는 때는,하나님의 심판적 간섭이 임합니다.
  옛날에 죄악이 온 땅에 관영한 뒤에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왔고,사사 시대의 암흑이 있은 후 다윗 시대의 광명이 왔습니다.다시,말라기 선지 이후 400년간 선지자의 음성이 끊어지고 암흑시대를 이루었으나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광명이 유대를 위시하여 세계에 비췬 것입니다.그리고 제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교회는 교권주의(敎權主義)의 흑암 속에 빠졌으나 16세기에 종교 개혁의 대광명이 세계에 비췬 것입니다.  그처럼 주님의 재림 직전에도 이 세상에 죄악의 밤은 깊어질 것입니다(롬13:12).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요1:1-9).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생활이 곧 어두움의 생활입니다.그리스도가 없는 생활 곧 어두움의 죄된 생활상 여섯가지가 로마서13장 13,14절의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호색,쟁투,시기 "등입니다.
  육신의 일을 도모했던 어거스틴이 바로 이 성구 말씀을 통해 회개하고 기독교 역사에 찬란한 빛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그는 그의 '참회록'에서 그 이야기를 합니다.그가 정원에서 거닐고 있었습니다.그의 마음은 그가 선한 생활을 하려던 계획의 실패로 절망 중에 있었습니다.그는 비참하게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더 오래? 얼마나? 내일,그리고 또 내일? 왜 지금은 안 될까? 왜 이 시각에 내 타락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나?"그가 갑자기 "들어 읽어라,들어 읽어라" 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까지는 그가 이같이 말하고 생각하고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그 소리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 같았습니다.그는 이런 말이 나오는 아이들의 장난을 생각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 짜보았으나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그는 자기가 바울 서신 한 권을 두고 왔기 때문에 자기 친구 알리피우스(Alypius)가 앉아 있던 자리로 급히 되돌아 갔습니다.
  "나는 그 책을 날세게 집어 내 눈이 닿은 첫 귀절을 조용히 읽었다.'방탕이나 술 취함과 부도덕과,파렴치와 쟁투와 반목속에 행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이 옷 입듯 입을 것이요,네 첫째 생각이 그리스도없는 인간 본능의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생활을 중지하라.'
  나는 더 읽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그 문장의 끝과 함께 내 마음 속에 보증의 빛이 쏟아져 들어 오듯이 모든 의심의 그늘이 흔들리었다.나는 내 손가락을 그 페이지에 넣고 책을 덮었다.그리고는 고요한 얼굴로 알리피우스에게 향하여 말했다"(C.H.D odd의 번역)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어거스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방탕과 술주정"을 금해야 합니다.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과식 과음을 금해야 합니다.방탕과 술주정으로 마음을 어둡게 해서는 안됩니다(눅21:34).
   잠언23:19-30에,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 분쟁이...원망이 뉘게 있느뇨 ...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참으로 술취함은 만가지 악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주색잡기는 만가지 악의 근본'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술에 취해서 살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을 때 어느 한 가지도 잘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술에 잠긴 자들에게 분쟁이 있고 까닭없는 상처가 있으며(29절) 그들의 눈에는 이상한 여인들이 보일 것입니다(33절).
  다음으로,음란과 호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제7계명에서 금하는 육신의 정욕 곧 어둠의 일은 하나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음란한 생각과 애정,음란한 표정,말,책,노래,몸짓,춤 곧 불결하게 만드는 이 모든 것은 여기서 금하는 호색에 속합니다.정숙과 검소라는 순결하고 신성한 법을 어기는 것은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끝으로,"쟁투와 시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쟁투와 시기 역시 흑암의 일입니다.스스로 쟁투하고 시기하는 것은 겸손하고 평화로운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두움의 일입니다.
  인디언의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해'가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이 '해'를 데리고 아주 캄캄한 굴로 갔습니다.그러나 그 굴에 '해'가 들어서자마자 '어두움'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역시 '해'에게 흑암을 보여 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우화가 말하려는 것은 흑암을 해결하는 길은 어두워진 원인을 분석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희생의 빛 자체가 되신다.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이사야 42:5-9에서,   "내가 너를 세워 이방의 빛이 되게 하겠다" 고 했습니다.  
  '이방'이란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 '세계의 빛'이 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기독교인들은 어두움의 세상가운데  등대와 같은 길잡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50년 전 뉴욕의 이야기이다.한 처녀가 등대지기에게 시집왔다.총각의 이름은 제이콥 워커(Jacob Walker)였다.이 두 젊은이는 등대 하나만 있는 외딴 섬 로빈스 리프(Robins Reef)에 살아야만 했다.신부는 이런 데서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1개월간이나 짐을 풀지 않았으나 혼자 떠날 수도 없어 그럭 저럭 정착하였다.그러나 3년 뒤에 남편 제이콥은 폐염이 되어 스태튼 아이랜드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다.임종하기 전에 제이콥이 남긴 마지막 말은 "등대에 마음을 써달라(Mind the light)"는 것이었다.남편의 시체를 등대에서 보이는 언덕 위에 묻고 아직도 20대인 워커 부인은 등대를 지키기 시작했다.수백 번 섬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복바쳐 오르는 고생과 고독의 연속이었으나 만 70세까지 41년간을 이 여성은 혼자서 등대를 지켰던 것이다.마음이 변하려는 때마다 언덕 위에서 "등대에 마음을 쓰라"는 남편의 음성이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고 한다.
  제이콥 워커와 같은 말을 바울이 본문에서 말했다.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롬13:12).

  이 말씀은 기독교인의 무장을 가리킵니다.흑암의 세력이 강하게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기독교인은 빛의 갑옷을 입고 빛을 발함으로서 역사의 방향을 알려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두움을 만드는 인간입니다.그 사람 때문에 사회의 한 모퉁이,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혹은 한 나라와 세계에 문제가 생기고 싸움이 생기고 불행이 생기는 어두움의 이유가 되는 인간입니다.
  둘째는 어두움 속에 묻혀 사는 사람입니다.자기가 어둠을 만들지는 않지만 어두운 상태가 편리하기 때문에 처세와 재미와 자기 보호를 위해 어두움을 묵인하거나 어두움에 협조하는 인간입니다.간접적으로 어두움을 만드는 인간입니다.
  세째 부류는 빛 속에 안주하는 사람입니다.남의 수고,남의 땀,남들이 만들어 놓은 평화와 좋은 제도와 안전 장치를 이용하고 즐기면서 사는 인간입니다.나쁜 일도 하지 않지만 좋은 일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어둠을 만들거나 어두움에 협조하지도 않으나 자기 자신이 빛을 발하지는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네째는 빛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등대를 지키고 어두운 바다에 방향을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역사의 밤은 점점 더 깊어가고 있습니다.그리고 새 하늘,새 땅의 새 아침이 더욱 더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칠흑 바다같이 어두운 세상에 등대와 같이 한 줄기 빛을 비춰 항해하는 인생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천국의 항구에 인도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역사적인 사명인 것입니다.
  로젠달박사(Norman Rosenthal-미 국립정신 건강 연구소)는 '어두움'에 해당되는 우울증에 대한 기발한 치료법을 개발했습니다.전등을 평소의 10배 정도로 밝게 해서 하루 다섯 시간씩 그 불빛 아래에 있게 하면 우울증을 해소하는 효과를 냅니다.이것은 단순히 낮을 연장시키는 방법입니다.겨울에 봄을 느끼게 하는 치료법입니다.밝음이 곧 치료제입니다.복음은 곧 치료제입니다.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사랑하는 자는 밝아집니다.침울하고 음산한 사람은 사랑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분이 날 때 더 어두워지고,질투할 때 점점 더 어두워지고,미워할 때 아주 어두워집니다.밤을 사는 사람과 낮을 사는 사람이 있는데,그 차이는 결국 사랑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7:36-50에 보면,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인이 와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우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엄청난 가치의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은 일이 있었습니다.이 여인을 향하여 예수께서 "저의 사랑이 많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과 제자들의 마음은 그 여인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난을 일삼았습니다.이들의 마음은 어두움입니다.예수께서 문제삼은것은 이들의 어두운 마음이었습니다.
  사랑은 밝음입니다.
  사랑은 태양입니다.
  제자들의 비난 속에는 질투가 있습니다.행동은 없으면서 부정적으로 평가만 했습니다.어두운 마음은 어둡게만 봅니다.병든 마음이기 때문입니다.시몬은 비평했고 여자는 행동했습니다.시몬은 예수께 식사대접을 하였으나 여자는 진실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시몬은 자랑스러운 바리새인이었으나 어둡게 살고 어둡게 생각했습니다.여자는 사회에서 떳떳하지 못한 어두운 과거를 가졌으나 이제 예수를 만나 밝은 생각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밝은 내일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 유모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아담이 아름다운 동산과 아름다운 아내를 보고 즐겁게 노래합니다.하와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아담이 잠든 사이에 아담의 갈비뼈를 세어 봅니다.혹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더 빼내 여자를 또 하나 만든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갔기 때문입니다.이 재담은 밝게 사는 사랑의 인생과 어둡게 사는 질투의 인생을 그려 낸 것입니다.
  예수는 시몬에게 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500데나리온 빚진 자와 50데나리온 빚진 자가 모두 탕감받았을 경우 누구의 사랑이 더 크겠느냐 하는 비유입니다(눅7:40-43).물론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이 감사도 크고 사랑도 큽니다.용서받은 사람,용서할 줄 아는 사람,감사하는 사람,사랑을 주고 받을 줄 아는 사람은 밝음입니다.그는 빛가운데 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 자신과 가정,그리고 이웃과 사회를 밝게하는 용서와 감사와 사랑의 빛,빛의 갑옷을 입으시기를 축원합니다.그리고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세상을 밝게 합시다.
  어떤 목사가 새로 신자가 된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몇 사람이나 예수께 인도하였소?"
  "나는 새로 믿어서 아무것도 몰라 남을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초가집이 절반쯤 타야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시오?"
  "아닙니다.불이 붙기만 하면 곧 빛이 나지요."
  그때서야 청년은 비로소 목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으며,반년이 지나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였습니다.예수 그리스도만이,복음만이 세상의 빛입니다.그외의 것들은 제아무리 빛처럼 보일지라도 참빛이 될 수 없습니다.
  알래스카 지방에서는 일년 중 6개월 동안은 밤이 되고 6개월은 낮이 됩니다.밤이 될 때에는 북극에서 발하는 극광(極光)이라는 아름다운 빛이 생기는데 그 밝기가 때로는 햇빛보다 더 밝습니다.이 극광은 북극에서만 생기는 현상인데 증기의 작용이라고도 하고 대기의 작용이라고도 합니다.다만 이상한 것은 그 빛이 아무리 밝아도 열기는 없다는 것입니다.이와 같이 이 세상 영광이 극광처럼 아름답고 밝을지라도 참된 유익은 주지 못합니다.그러나 복음의 광명은 밝게 하고 또한 더운 열을 줍니다.이는 그 가운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밝게 할 뿐만 아니라 병든 몸과 마음,그리고 영혼까지도 치료하여 생명을 주는 복음의 빛을 발하시는 평강 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결의 빛을 발합시다!한국 성결교회의 제1대 목사인 이명헌은 초기 성결교회의 목회자로 크게 활약하였습니다.그는 1922년 창간된 성결교회 기관지<활천>2호에 게재한 "성결의 빛"이라는 글에서 성결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습니다.
  "완전한 성결은 잘 익은 과실과 같다.어떤 과실이든지 맺고 자랄 때에는 어느 방면이든지 별로 취할 것이 없지만 장성하는 시기가 다 지나가고 잘 익으면 세 방면의 아름다운 점이 있으니 첫째는 눈에 보이는 좋은 빛이요,둘째는 코로 들어가는 좋은 냄새요,셋째는 입에 적당한 좋은 맛이다.성결도 이 세 방면의 빛과 냄새와 맛이 있다."     금년도 우리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성결의 은혜가 충만하여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성결 생활의 빛을 발하시기를 기원합니다.또한 성결 보존을 통해 생활과 인격(성품)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항상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그리고 과실이 잘 익었을 때 맛이 있는 것 처럼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입니다.

  "(벧전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아담은 범죄하므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동산 숲 어두운 곳으로 숨었습니다.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히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히12: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성결의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첫째,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 즉,회개하는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면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가를 두려워하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둘째,마음에 쓴 뿌리가 나서 더러워지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한다는 말은 우상숭배에 의해 이스라엘이 큰 손실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또한 쓴 뿌리는 완고한 기질로 인한 불신앙과 배교(背敎)를 말합니다.

  "(신29:18)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신29:19)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쓴 뿌리는 전염병과 같아서 전 교회에 순식간에 퍼질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1,500명이 모인 어떤 모임에서 목사가 청중들에게 말했습니다."솔직히 말해주십시오.여러분들이 느끼는 기독교에 대해서 말입니다.모든 의심이나 반감을 허심 탄회하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그러자 맨 앞에 앉아 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그리스도인들은 모순된 생활을 합니다.한마디로 위선자입니다.말과 행동이 다르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목사들은 그들의 받은 바 소명대로 행하지 않으며 사욕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뒷줄 문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는 말했습니다."교회 안에 악한 자가 훨씬 많소."여기 저기서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모두 스물 여덟 가지의 반론이 제시되었습니다.그때 목사가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대답했습니다."여러분이 말씀하신 것 모두가 맞습니다.교회 안에서도 위선자가 있으며 목사 중에서는 사심을 가지고 목회하는 이들이 있기도 합니다.그러나 제가 여러분의 말을 들으며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습니다.다름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정작 교회 안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앙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쓴 뿌리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자라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한 그릇 식물(음식)을 위하여 장자(長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행실을" 가져서는 안됩니다.이 말씀의 뜻은 맡은 바 여러분의 직분과 사명은 장자의 명분과 같이 "축복의 기업"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하나님의 자녀된 명분을 소흘히 여기는 망령된 삶의 태도를 버리시기 바랍니다.성가대,교사,집사,권사,속장,장로,목사 등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지 말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기업으로 받으시고 여기서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결의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만 합니다.

  "(겔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새 영" 곧,성령으로서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을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촌에서 전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선교사가 며칠간 묵었던 성도의 집에 쓰다 남은 세탁비누를 주고 갔습니다.그런데 비누를 처음 본 그 집주인은 떡인줄 알고 식구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통 맛이 없었습니다.도리어 불쾌하게 여겨져 주인은 선교사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해가 지나서 선교사가 다시 오자 주인은 비누 먹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선교사는 웃으면서 "그것은 더러워진 옷을 깨끗이 세탁하여 입으라고 드린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주인이 "그것으로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면 희어지는가요?"라고 묻자,선교사는 "그렇다."고 하였습니다.그 때에 주인은 대단히 기쁜 표정으로 춤을 추었습니다.이번에는 선교사가 주인에게 "왜 그렇게 기뻐하시오?"하고 물었습니다.그러자 주인이 대답하기를 "그 비누를 우리 집 식구들이 다 먹었으니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졌을 것이 아닙니까?나는 정말로 기쁩니다."라고 하였습니다.더러워진 마음은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그리고 예수의 피로써만 깨끗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 웨슬레는 "가장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를 자기의 선지자로서 <세상의 빛> 으로서 여전히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순간 순간의 빛만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물러가시면, 모든 것은 흑암이다.하나님은 성결에 대한 저축을 주시기 않는다. 사람들이 순간 순간 공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불결(不潔)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성결 보존은 신의 성품을 산출(産出)케하는 성령의 역사(役事)입니다.
  구약의 요셉은 성결 보존의 생활을 통해 빛나는 삶을 살았습니다.다니엘도 성결 보존의 생활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성결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살전4: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살전4: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살전4: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살전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예수로 충만하여 복음의 빛을 발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결의 빛을 발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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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단의 불          


"(레6: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6:9) 아론과 그 자손에게 명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단 윗 석쇠 위에 아침까지 두고 단의 불로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레6:10)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고의로 하체를 가리우고 단 위에서 탄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단 곁에 두고 (레6:11)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 갈 것이요 (레6:12)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레6:13)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 집니다.부모를 만나고 형제 자매를 만납니다.친구를 만나고 배우자를 만나며 스승을 만나고 동업자를 만납니다.잘 만나면 복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평생 고통을 당하고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그런데 그 많은 만남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아무리 이 세상에서 부모와 형제.친구와 스승,배우자와 동업자를 잘 만나서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해도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일 수 밖에 없습니다.비록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만족스럽거나 행복하지 못했더라도 하나님만 만났다면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하나님은 인간의 불행한 모든 것과 불행한 모든 종류의 만남을 행복과 축복의 만남으로 변화시키는 능력과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이스라엘 백성이 축복을 받은 민족인 것은 바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그들은 불 속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주 하나님을 만나고도 생존한 민족입니다.

  "(신4: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신4: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시33: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실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는 나라 백성은 복된 백성입니다.복 중의 복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만나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며 주시는 양식을 먹고 그 분을 섬기는 것입니다.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는 곳을 "회막"(會幕,만나는 장막)이라고 했습니다.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성막(聖幕,Tabernacle)이라고 부릅니다.성막은 길이 45m, 폭 22.5m의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둘레에 흰세마포가 쳐 있고 동쪽 폭에 문 하나만 나 있습니다.성막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만나는 것이 번제단이며 그 뒤 편에 "물두멍"이 있습니다.물두멍 뒤편으로 길이 13.5m, 폭 4.5m의 성소가 있는데 지붕은 검은 막으로 덮여 있습니다.또한 성소는 지성소와 성소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성소에는 들어가면서 왼편으로 "등대",오른편으로 "진설병 상"이 있고 지성소 바로 전면에 "향단"이 놓여 있습니다.지성소에는 "언약궤"가 놓여 있습니다.이같은 성막은 밖에서 보면 보잘 것 없습니다.이방의 신전이나 우상의 전각처럼 결코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고 소규모의 소박한 모습입니다.마치 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 처럼 말입니다.성막 안에는 유대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었고 유대인 가운데서도 제사장이 아니면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제사장 가운데서도 대제사장에 아니면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이 성막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셨던 것입니다.즉,성막은 임재(臨在)의 처소입니다.

  "(출29: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성막은 죄인인 인간과 만나주시는 장소입니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 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성막은 제사(예배)드리는 장소입니다.

"(레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레1: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레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레1: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성막은 죄 씻음을 받는 곳입니다.

  "(레4:20) 그 송아지를 속제죄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성막 제사(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구약의 성막은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까지만 유용했던 제도였습니다.

  "(히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히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이제는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지성소에 들어가 단번에 속죄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히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9: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히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히9: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히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히9: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히9: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 성막뿐만 아니라 성막에서 드려진 5대 제사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형(類型)입니다.그 5대 제사의 제물은
  첫째,번제물(Burnt Offering)입니다.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그의 백성을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써 하나님께 완전히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향기로운 제물이 되심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둘째,예수 그리스도는 소제물(Meat Offering)이십니다.그것은 전혀 흠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사,그의 인성(人性)이 완전히 부서지신,인성의 고난을 나타냅니다.
  셋째,예수 그리스도는 화목제물(Peace Offering)이십니다.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피를 통해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즐거운 영적 교제를 나누게 됨을 의미합니다.
  넷째,그리스도는 속죄 제물(Sin Offering)이십니다.그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나무 위에 달리심으로써 속죄 제물이 되사 죄인의 대리자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다섯째,예수 그리스도는 속건제물(Trespass Offering)이십니다.그것은 그의 피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룩한 왕과 제사장 그리고 백성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막은 영적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다음의 성구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막에 나아가야 했는데 오늘날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을 믿으면 됩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제 예수를 만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예수를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비록 이 세상에서 인간들과의 만남이 불행하더라도 결코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행복한 자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문둥병자,혈루병자,귀신들린 자들,소경들,앉은뱅이들,세리들,창기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신약성경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마21:31) 그 둘 중애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21: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요 복된 장소입니다.예수를 진실로 믿으시므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만나시는 성막(성전)을 세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막 문을 열고 들어가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번제단입니다.번제단은 길이와 넓이가 각각 225cm,높이가 135cm의 정사방형의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단(壇) 위의 네 모퉁이에는 각각 네 뿔이 있습니다.번제단 속은 조각목으로 되었고,정방형으로 되어있는 제단(祭壇)은 모두 놋(The Brazen altar)으로 만들어 졌습니다.그래서 놋제단이라고 부릅니다.놋제단 속에 있는 나무는 우리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즉 부패하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표현하는 것입니다.놋제단은 놋으로 싸지 아니 하였더라면 매일 제물을 태우는 뜨거운 불로 인하여 번제단은 다 타서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단"(Altar,place of sacrifice,희생의 자리)이라는 말은 "들려지다"(high)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높이 들려진 놋뱀을 쳐다 본 자마다 살더라는 민수기 21장 9장의 말씀은 요한복음 12장 32절의 십자가에 달려 들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救贖事役)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민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제단은 바로 십자가를 가리킵니다.대속(代贖)의 죽음을 당하는 희생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인 지성소(至聖所)에는 이 제단에서 희생된 피를 가지지 않고서는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功勞)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제단 속에 있는 나무는 아무리 뜨거운 불일지라도 절대로 손상을 입지않게 되어있으며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뜨거운 불을 십자가 제단에서 받으셨으나 끝까지 견디심으로 부활생명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합니다.
  이 제단에 불은 레위기9장23,24절을 보면 사람의 손에 의해 붙여진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붙여 주셨습니다.

  "(레9: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레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그런데 아론의 두 아들은 다른 불을 가져왔기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인해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레10:1-2).
 
  "(레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레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다른 불 즉,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행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여기 "다른 불"은 인위적(人爲的)인 불,마귀적인 불을 의미합니다.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주시는 힘(불)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성령의 불(힘)을 받아야 주어진 사명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성령의 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제단의 거룩한 불입니다.
  제단의 불을 하나님께서 붙이심은 인류구원이 전체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여호와께 속한 역사(役事)임을 말합니다(욘2:9).

  "(욘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아벨과 엘리야의 제물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심으로 그들의 믿음에 응답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불로 응답하시는 신이십니다.

  "(왕상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이 시대의 바알 숭배자들(우상 숭배자들)을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능력과 권능의 불을 받읍시다.  
  한 번 하나님께서 붙이신 불은 절대로 꺼쳐서는 않되며 두 번 다시 붙이시지 않았습니다.

  "(레6:12)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레6:13)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이는 항상 인간의 죄가 사(赦)하여지는 제물(祭物)이 태워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죄인들을 위한 구속사역이 중단되지 아니하고 영속(永續)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이처럼 멸망받을 죄인,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불이 항상 쉬임없이 지속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번제단에는 다섯가지 필수적인 부속물이 있습니다."재 담는 통","대야","부삽","고기 갈고리","불 옮기는 그릇" 등 입니다.
  "재 담는 통"은 매일 번제단으로부터 드려지는 제물로 인해 나온 많은 재들을 담아서 버리기 위해 사용된 그릇입니다.재는 번제단 위해 버려진 희생 제물이 다 타고 남은 흔적입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희생의 제물이 되셔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제단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불로 태움을 받으셨습니다.그의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하는 것으로 "십자가의 흔적","사랑의 흔적","고난의 흔적" 등을 의미합니다.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스스로 죄인 중에 괴수임을 자처하던 바울이 주님의 전적 희생을 통한 사랑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본 모습인 것입니다.지금도 바울처럼 주님의 흔적을 가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가장 성숙된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성숙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조그마한 봉사나 사랑이나 희생을 자랑으로 삼고 다닌다면,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만약 재가 사방으로 날려 사람들의 눈에 들어 간다면 눈을 아프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끔 할 것입니다.마찬가지로 교회 안의 성도들도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나타내기를 즐겨 한다면,교회 안은 온통 재가 날려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나게 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또한 성막 안에서 재가 날린다면 거룩한 성막은 온통 더러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자신을 불태워 사랑과 고난,십자가의 흔적을 교회에 남길지언정 그 재를 날려 교회를 어지럽히거나 더럽히는 일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오히려 다른 사람의 재까지도 담을 수 있는 재담는 통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대야"가 있습니다.대야는 번제단에 드려질 희생의 고기와 피를 담아 운반하는 도구로 사용되며,때로는 제단 밑에 희생 제물의 피를 붓기 위하여 사용된 그릇입니다.성경에서는 고기는 신자로,그물은 사람을 낚는 도구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눅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그러므로 교회는 그물,즉 전도의 대야가 많아야 교회가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고기 대야,사람 낚는 그물이 되어서 교회를 풍성하게 채워야 할 것입니다.또한 대야는 희생의 피를 담는 그릇으로 그 피는 제단 밑에 부어졌습니다.교회 안에 있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육신의 생각과 정욕들이 죽어야 참다운 희생물이 되며,그 피기 교회 제단 아래 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부삽"이 있습니다.부삽은 재를 긁어 모으기 위해 사용된 도구입니다.부삽은 재가 쌓이게 되여 번제단 불이 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재를 긁어 모으는 도구로 사용되며 또 불이 꺼지지 않도록 제단 위의 불을 관리하는 용도로도 쓰여졌습니다.교회는 부삽과 같은 신자가 꼭 필요합니다.교회는 인간들이 모이는 곳으로 학식,연령,개성,취미,생각이 모두 다르기 마련입니다.이런 저런 사람들이 다 모이다 보니 자연히 잡음이 있게 되고 불평도 있게 마련입니다.이런 문제가 나오면 부삽과 같이 조용히 긁어 모아 재통에 담는 신자가 필요한 것입니다.이런 신자가 없다면 교회는 재가 쌓여 성령의 불이 꺼지고 말 것입니다.또한 부삽은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도구로,마치 믿는 신자 가운데서 믿음이 어리고 시험을 당해 믿음이 식어지는 신자들의 신앙의 불이 꺼지지 아니하도록 잘 보살펴 주는 부삽과 같은 사명을 다 하는 성숙한 신자를 말하는 것입니다.우리 교회에 부삽과 같은 사명을 다 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네번째,"고기 갈고리"가 있습니다.갈고리는 번제단 위에 드려질 고기를 가지런히 올려 놓기 위해 사용된 기구입니다.갈고리에 고기가 꿰이면 빠져나가지 못합니다.교회 안에서는 고기 갈고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신자도 필요합니다.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 오기도 하며 나가기도 합니다.나가는 이유는 갈고리 같은 역할을 하는 신자가 없기 때문입니다.갈고리의 역할은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는 것으로 자기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연결되고,다른 사람도 하나님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이 사랑의 갈고리,친절의 갈고리,봉사의 갈고리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이러한 갈고리가 많을수록 교회는 자연적으로 부흥되는 것입니다.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갈고리가 되지 말고 빠져 나가는 고기들을 붙들어매는 갈고리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섯번째,"불 옮기는 그릇"이 있습니다.제단 위의 불은 불 옮기는 그릇에 의해 어디에나 불을 붙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역시 교회도 불 옮기는 신자가 꼭 있어야만 그 교회가 뜨거워질 수 있습니다.교회는 안으로 뜨거워야 할 불이 있는데 전도의 불,기도의 불,찬송의 불 등입니다.  
  오늘날 이 제단의 불은 바로 성령의 불을 상징한다.세례 요한이 이를 예언하였습니다.

  "(행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성령 세례를 불 세례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는 이 시대 교회들의 표상들입니다(계2:1-3:22).에베소 교회는 처음에는 성령의 불로 뜨거운 교회였으나 "처음 사랑"을 버리므로 책망을 받았다.이는 성령의 불,곧 사랑의 불이 꺼졌다는 증거입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의 불이 식어져 이단을 용납하므로 책망을 받았습니다.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도 불이 다 꺼져가는 교회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계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위의 다섯 교회들의 공통된 점은 모두 뜨겁지 아니한 결과로 생겨진 책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90년대부터 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습니다.성령의 불을 받아 뜨거워지는 교회가 됩시다.이 불을 받고자하면 먼저 예수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렘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우리 교회 안에 세상을 녹이는 사랑의 불을 피웁시다.
  우리 교회 안에 죄를 태우는 회개의 불을 피웁시다.
  우리 교회 안에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의 불을 피웁시다.
  우리 교회 안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전도의 불을 피웁시다.
  우리 교회 안에 삶의 힘과 기쁨을 주는 찬송의 불을 피웁시다.
  우리 교회 안에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감사의 불을 피웁시다.

  불은 에너지(힘)입니다.에너지(자연의 불)를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나라가 강하고 문화,문명이 발전하는 나라입니다.삶의 진정한 수준높은 문화와 문명은 성령의 불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참된 기독교의 문화 문명은 성령의 불로써 이루어집니다.성령의 불이 바르게 역사(役事)하는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입니다.
  멸망받을 죄인들을 위해 끊임없는 사랑과 구원의 불이 항상 지펴진 십자가 제단에 감사함으로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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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고후5: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고후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구 소련 공산당이 작성하여 전 세계에 수출한 다섯가지의 간교하고도 치사스러운 혁명 전술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첫째, 청년들을 타락시켜라.
둘째, 종교를 멀리하게 하라.
셋째, 성(Sex, 性)에 탐닉케 하라.
넷째, 정신을 혼란케 하라.
그리고 다섯째, 사치 풍조를 조장시켜라.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이와같은 혁명 전술에 휘말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그리고 진리가 찬란히 빛나고 있는 시대는 분명 아닙니다. 오히려 '황금의 송아지'가 신(神)이 되고 (황금만능주의), '바로의 힘'이 믿음직스럽고(권력지상주의), '요부 이세벨'을 따라 그 숱한 잡신(雜神)들, 무기와 달라($, 弗)와 섹스를 찾아 헤매는 휘청거리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대적 상황과 흡사한 이사야 당시 사회적, 도덕적 무감각 상태 즉 도덕불감증의 죄악상은 이스라엘의 총체적 부패 상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사59: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사59: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사59: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사59: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사59: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사59: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사59:9)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사59:10)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사59:11) 우리가 곰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사59:12)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사59:13)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하며 우리 하나님을 좇는 데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발하니 (사59:14)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 (사59:15)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은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유대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이유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학교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군대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찾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멸망당한 것입니다.

"(렘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이사야 선지자가 받은 명령은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58:1)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나라 민족이 새롭게 되려면 백성들의 죄상을 아낌없이 크게 외쳐대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고발당한 죄상은 첫째, 주일을 성수(聖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수주일(안식일 계명 준수)하지 않으면 나라가 재건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수주일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라 민족이 새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56: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둘째, 그들이 고발당한 죄상은 의로운 사람이 죽임을 당해도 땅을 치고 가슴 아파하는 이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의 죄상을 놓고 통회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57:1)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이는 한 마디로 도덕 불감증, 정의감의 상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이 바로 되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의인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선량한 사람, 양심적인 이들이 발붙일 곳이 없는 사회 현실에 안타까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이 세대는 예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 입니다.

"(마11:15)....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마11: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셋째, 이 나라 민족들에게 고발해야 할 죄상은 정치적인 죄입니다.

"(사56:10)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파숫군이란 백성들이 잠자고 있을 때 깨어 있어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적의 침입이 보이면 나팔을 불어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그들 파숫군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이 당리당략과 '바로의 힘' 즉 권력에 도취되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라 민족이 새롭게 되려면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여 파숫군의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외쳐댄다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고 부르짖는다고 어느 누구하나 귀담아 듣겠느냐마는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나라 민족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없이는 아무리 부강한 사회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느 시인은 신년 시에서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새해 우리가 신비의 샘인 나날과
목숨의 시간들을 흐리고 더럽혀서
폐수로 흘러 보내지 않으려면

우리가 사람으로서의 유일한 증표인 저마다의 마음 속 밑둥에서 울려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기우리고 살아야 한다.

아무리 오리무중과 같은 시대 속에서도, 아무리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인간의 양심은 꺼지지 않는 등불이요
아무리 실패와 좌절의 수렁 속에서도, 아무리 파탄과 절망의 구렁 속에서도, 인간의 양심은 구원의 동아줄이요

아무리 풍랑과 격동의 와중에서도, 아무리 미혹과 방황의 표류 속에서도, 인간의 양심은 최후의 보루이다.

권세가는 그 양심의 소리에 따라 불법과 횡포에 나아가지 않고
기업가는 그 양심의 소리에 따라 사리사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성인은 그 양심의 소리에 따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르지 않고
종교인은 그 양심의 소리에 따라 영원히 사는 모습을 보여 주며
기술자는 그 양심의 소리에 따라 가짜와 불량품을 만들어 내지 않아서."

사람들은 양심대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라고 불평합니다. 스스로 낙오자가 되고 패배자가 된다고 자신의 양심을 저주합니다. 그러나 양심은 꺼지지 않는 등불이요, 구원의 동아줄이요, 최후의 보루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양심이 살아 있을 때만이 나라 민족 위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권세가들이 불법과 횡포를 일삼고, 기업인들이 저마다 사리사욕대로만 살아가고, 지성인들이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성직자들이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연연하며, 기술자들이 가짜와 불량품을 만들어내는 일들이 일소(一掃)되는 길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1975년 4월 30일은 월남이 베트콩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 당한 날입니다. 그 날 월남의 수상은 백기를 들고 베트콩 앞에 항복하러 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이공 대학 철학과 4학년 학생이던 레 디 땅이란 젊은 청년이 우리나라 <문학 사상>에 글을 투고했습니다. 내용은 그 백기에다가 글을 쓴다면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그 백기에 세 마디 글을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첫째가 "후회"라는 말을 쓰고 싶다는 것입니다. 월남 사람들이 적의 침략 앞에서 일치단결하여 조국을 수호할 생각은커녕 위정자와 백성 모두가 자신의 살 길만 찾으려 궁리하다가 나라를 송두리채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이제 그것을 후회한다는 말입니다. 다 망한 뒤에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 청년은 말합니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다음 자식은 그때야 비로소 효도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부모가 돌아가서야 살아 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잘못을 후회합니다. 후회하는 동안에는 그런 어리석음을 반복하지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라도 뒤늦게나마 후회라는 말을 쓰고 싶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는 "사랑"이라는 글씨를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월남은 베트콩이 강해서 망했는데 그 베트콩의 강한 힘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증오심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증오심 때문에 베트콩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월남을 재건하려면 증오심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증오심은 파괴하는 데 소용될 뿐이요, 재건하는 데는 사랑밖에는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의 마음에 이제라도 서로 사랑이 깃들여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유"라는 글을 남기고 싶다는 것입니다. 월남이 남북 간에 30년 간이나 전쟁을 계속해 왔는데 그 이유는 자유를 수호하고 쟁취하기 위하여 싸웠다는 것입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그들은 자유를 위하여 전쟁을 일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30년이나 자유를 위해 싸우면서도 그 자유의 뜻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정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공산당에게 나라를 잃어버려 월남인이 공산화되고, 그런 공산주의의 치하가 되었기 때문에 월남인들에게는 더욱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유를 써 넣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 월남 청년 처럼 나라 민족을 잃고,  "자유"를 잃고 나서 "후회"라는 글씨를 남기지 않도록 진정한 나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부르짖으며 이 나라 민족의 죄상들을 이 백성들에게 고발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나라 민족의 파숫군이 되어 부르짖지 않으면 우리에게 <역사의 내일>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는 <여호와의 정부>를 구하고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이를 놓고 우리를 미쳤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부르짖고 하나님께 간구해야만 이 나라 민족의 <내일>, <내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하루 종일 논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어오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이젠 저녁이 다 되었어.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이 말을 들은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습니다.
"메뚝아, 내일이 뭐니? 어떻게 내일 또 놀자고 하니?" 메뚜기는 잠시 후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모든 동물이 다 잠을 자게 되는데 잠자는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일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뚜기를 보고 날씨기 무더워서 정신이 나갔나보다고 놀렸습니다. 그후 메뚜기는 개구리와 온 여름을 함께 놀고 지냈습니다. 가을이 오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뚝아, 내년에 다시 만나서 놀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냐고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개구리는 흰눈이 천지를 뒤덮고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모든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서 오래오래 겨울잠을 자고 나면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때가 내년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구리를 보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놀려댔습니다. 하루살이나 메뚜기는 내일 혹은 내년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일이나 내년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이나 내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나 내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세나 하나님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하나님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 민족의 역사가 <내일>, <내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변화를 받아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이 나라 민족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져만 합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졸업생들에게 들려주는 무척이나 감명적인 권면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 대학의 전통적 정신은 변화를 추구하는 데 있었습니다. 개인도 변화하고 사회도 변화시켜야 합니다. 변화만이 발전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변화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이웃과 사회에 공헌을 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의미있는 인생은 반드시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구원이란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등 수 많은 곳에서 새로워져야 하며 새로 태어나야 하며 새로운 인간성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 산재해 있습니다.
히틀러는 네 가지 덕을 독일 국민에게 말했습니다. 첫째, 애국심 둘째, 역경을 이기는 인내 셋째,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 넷째, 법을 따르는 정신입니다. 모두가 좋은 말입니다. 독일 국민은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히틀러가 가장 악독한 인류의 적으로 규정된 지금 그의 네 가지 덕은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애국심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고취한 것이고, 인내는 잘 살게 될 때까지 군소리 말고 참으라는 억압책이었고, 충성심은 물론 히틀러 자신에 대한 복종을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준법 정신은 오직 자기의 명령만을 지키라는 독재자의 상투적인 수법이었습니다.
만일 개인적인 욕심이 없이 인간을 정말 사랑했던 간디 옹이나 슈바이쳐 박사가 같은 말을 했다면 전연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우리의 가슴을 울렸을 것입니다. 같은 말이라고 누구의 입술을 통하여 나왔느냐에 따라 뜻도 달라지고 미치는 영향력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동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해방의 지팡이를 높이 든 모세의 손과, 동족의 손톱을 뽑아 고문하는 손과는 같은 손이지만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승을 팔아 감쪽같이 돈벌이하는 지혜를 짜낸 가롯 유다의 두뇌와 아들을 죽인 공산상 청년을 양자로 삼아 교육하겠다는 손양원 목사의 머리는 똑같은 신경구조의 두뇌이지만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피아노의 상표도 중요하긴 하지만 누가 연주하느냐 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겉사람의 가치는 속사람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챤 생활을 하나의 고상한 장식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속사람을 새롭게 함으로 나의 역사를 가치있게 하자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아름다운 정신이 참다운 매력있는 여성을 만들고 훌륭한 사상이 빛나는 남성을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겉사람은 늙고 병들고 쇠잔해 간다 할지라도 성경말씀대로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싱싱하고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정치가들의 속사람이 새 것이 되어져야 합니다.
기업가들의 속사람이 새 것이 되어져야 합니다.
노동자들의 속사람이 새 것이 되어져야 합니다.
지성인들과 학생들의 속사람이 새 것이 되어져야 합니다.
종교인들의 속사람이 새 것이 되어져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속사람이 새 것이 되어져야 합니다.
고양이가 어느 날에 십자가를 목에 걸었습니다. 나이 많은 쥐가 이를 보고 몹시 기뻐하여 다른 쥐에게 말했습니다.
"고양이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구나. 이제 그는 살생을 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어린 쥐들을 데리고 고양이를 찾아가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순식간에 몇 마리의 쥐을 잡아먹어버렸습니다. 나이 많은 쥐는 간신히 위험을 벗어나 혀를 내두르며 말했습니다.
"고양이가 예수를 믿더니 더 독해졌구나."
고양이는 육식동물입니다.
그가 목에 십자가를 걸었다고 초식동물로 변할 수는 없습니다.
검은 피부가 원한다고 해서 흰 피부가 될 수 없고 표범의 얼룩 점들이 바뀔 수 없는 것과 같이 유다의 죄악은 변할 수 없는 제2의 천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죄악에 익숙해 있었으며 습관화된 그것이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취득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한 것입니다.

"(렘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속 사람이 변화되려면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예수를 믿어야만 합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 플로리다의 감리교 목사인 빌리 류터는 감리교 기도서인 <다락방>에 자기 아버지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대공황 때(1930년대) 먹을 것이 없어 어머니와 삼 남매는 구세군 급식소에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에다가 도박꾼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여섯 살이었던 자기와 밑으로 두 남매를 바라보며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 같군." 하는 한 마디를 남기고 집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는 도박하다 진 빚을 갚기 위하여 도둑이 되었고 경찰서에도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자살하려고 하는 것을 어머니가 발견하여 눈물을 흘리며 함께 교회에 나갈 것을 애원했습니다.
그 후의 이야기는 오직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못된 어버지,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쓰레기 인간이 예수를 믿고 자기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고백하였으며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국민학교를 2년밖에 다니지 않은 무학이었으나 성경 말씀 5백 구절을 암송하고 매일 저녁 유치장, 교도소, 병원을 방문하여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아들을 미국 대 교회의 목회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를 회상하는 류터 목사는 "오직 기적이다. 성령을 받을 때 이런 권능이 주어졌다고 하는 말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라고 간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만 독특하게 그리고 특별하게 관련을 가진 말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은 영적인 관계, 언제 어디서나 살아 계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리고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갈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롬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갈라진 우주를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시며, 그 통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의 통일의 원리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형제와의 참된 화목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서로 싸우고 있던 빌립보 교회의 두 여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빌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참된 교회들 간에는 결코 불일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참다운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결코 장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기독교인의 은사와 모든 위대한 기독교인의 자질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빌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몬1: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갈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엡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하나님의 이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되었으며 보증되었습니다.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습니다.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입니다.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튼튼히 서게 됩니다.

"(고후1: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갑니다.

"(골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고 계속되고 끝이 나는 것입니다.

박해와 위험을 당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살전3: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빌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슬픔을 당할 때도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빌1: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빌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여기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안에"<엔 크리스토, en christo>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하여"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며, 그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기 속에서 살고 있는 것같이 그리고 공기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는 것같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기가 모든 생물의 속에, 인간의 폐와 인간의 몸 속에 있는 것같이 그리스도도 인간의 속에 계시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공기 속에서 사는 것 같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삽니다. 그들 속에 있는 공기가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주듯이 그의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숨쉬는 대기가 되는 그러한 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옷을 입듯이 그리스도 안에 쌓여 있으며 덮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롬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의 생명이 차고 넘칠 때까지 그리스도는 그 사람 속에 태어나심을 말합니다.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바울에게 있는 생명의 주체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에 있는 생명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자아는 죽었습니다. 그대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 사시고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 때 그는 박해자였으며, 침략군이 도시를 약탈하듯, 멧돼지가 포도원을 약탈하듯 교회를 약탈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늘로서 빛이 그를 비추었던 것입니다.

"(행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그 한 순간에 그리스도의 원수였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때 한 인간이 죽고 다른 인간이 태어났다고 밖에 달리 말할 길이 없습니다. 옛 바울은 죽고, 새 바울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변화는 누구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깊은 밤 어두움 속에 잠겨가고 있는 이 나라 민족이 사는 길은 역사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부정 부패, 사치와 허영, 음란를 추방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추방하고 그 세력을 꺾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역사의 찌꺼기 사회주의 세력을 일소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여호와의 정부>를 세우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 민족의 역사가 새로워 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새로워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의 내일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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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빛의 열매


"(엡5: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바울은 이방인은 어두움의 자녀들이요,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자녀들이라고 하지 않고 이방인들은 어두움이요, 그리스도인들은 빛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생활을 어두움 가운데 사는 생활이라고 보았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빛 가운데 사는 생활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두움의 자녀는 불순종의 자녀로서 극심한 죄악 속에 휩싸여 전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엡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살후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히4: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어두움의 자녀들의 행실은 죄악된 것들로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세속 문화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로 육체는 무가치하며 악하다고 말하면서 죄를 경홀히 여기며 하나님을 떠나 탐욕적인 우상숭배를 즐기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입니다.
반면에 복음 안에서 새롭게 된 자들을 "빛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빛의 자녀는 빛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빛의 열매는 곧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거니와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과 의와 진리를 추구할 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빛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낳습니다.
착함은 일종의 관대한 정신을 말합니다.
의로움은 인류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진실함은 도덕적인 진실함으로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바를 실제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시는 빛은 우리로 하여금 진실하다고 아는 바를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무는 빛을 받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인생도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지 못하면 열매 없는 삶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빛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과를 분간하게 합니다.
빛은 악한 것을 폭로합니다. 악한 사회나 악한 세계를 제거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빛 가운데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을 깨끗이 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활동을 깨끗이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들을 그리스도의 빛 아래 드러내는 것입니다.
빛은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질병이 단지 햇빛을 쪼이게 하는 것만으로도 정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죄를 고발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결케 하는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빛이 있으면 좁은 길도 잘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없으면 아무리 넓은 길도 제대로 갈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8:12) .......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또한 예수께서는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있음으로 세상 사람들이 생명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생명을 주고 기쁨과 소망을 주고자 한다면 "빛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첫째,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착하다"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마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마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마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마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마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마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착한 사람은 주인이 맡긴 달란트(소유)를 가지고 곧 바로 가서 장사하여 더 남긴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고, 두 달란트를 맡은 자도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또 이와같이 그 맡긴 바를 가지고 곧 바로 가서 장사하여 남겼다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소유를 맡긴 주인의 뜻을 바로 알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은 먼저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뜻대로 행하여 자기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것을 맡기셨습니다. 건강과 재능, 물질과 지식 등을 맡기셨습니다. 이것들을 가지고 주인되시는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여 주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남겨야만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빛의 열매를 맺고자 하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착한 사람의 모형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눅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가 말하는 선이란 모든 사람이 하자는 대로 줄줄 따라 다니는 무골호인(無骨好人)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 착한 사람이란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면 무한한 동정심을 품고, 그의 위험에 뛰어들며, 그의 상처를 닦아주고, 그의 불완전한 것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시간과 소유를 내어줄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남의 어려움에 뛰어드는 마음, 그리고 남의 상처를 싸매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빛의 열매는 의로움에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최초로 말씀하신 것도 천국,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들도 모두 천국,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 물질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고 천국에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눅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마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복있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인 것을 산상수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종교와 경제의 기초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분명 정의에 있습니다. 정의가 없이는 아무리 부유해졌다 하더라도 올바른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정과 부패, 불의가 판치는 경제는 오래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가 정의감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무속 종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먼저 그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기 위하여 부르짖고 간구하며 경제 정의, 사회 정의 실천을 위해 핍박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질이 향상된 복지 국가 사회는 경제 정의, 사회 정의가 실천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생활을 하여야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지상에서 행복을 누리는 길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평화요 둘째는 빵입니다. 잠언은 참된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평화가 없으면 아무리 먹을 것이 많고 사회적 명성이 높다 하더라도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평화와 빵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평화는 의의 결과로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32:17)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의해서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이 해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이 땅 위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독교가 되어져야 하며, 이 땅 위에 먼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도록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에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이것은 가수 양희은씨가 부른 '작은 연못'이란 노래의 첫 소절이다. 아주 먼 옛날, 깊은 산 속에 자그마한 연못 하나가 있었다. 그 연못에는 어여쁜 붕어 두 마리가 그 속에서 사이 좋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슨 일인지 붕어 두 마리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어찌나 치열한지, 서로 물고 뜯고 하더니 ......
결국 한 마리가 죽어 물 위에 떠올랐다.
그러자 연못의 맑았던 물도 죽은 한 마리의 붕어와 함께 썩기 시작했다. 승리감에 도취되었던 붕어, 영원히 혼자 잘 살 줄 알았던 붕어도 썩은 물을 먹게 되어 얼마 후에 죽고 말았다. 이젠 그 작은 연못에는 더러운 물만 고인 채 아무것도 살지 않는다.
우리 나라의 외채가 1,000억불이 넘는다고 한다. 4,200만 남한 국민 한 사람이 2억원을 외국에 빚지고 사는 셈이다. 노.사.정의 싸움으로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가 20일 동안 입은 손해는 1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노동자 측은 전면 파업을 금년 가을까지 끌고 가겠다고 한다. 야당 측은 이를 대선에 이용하겠다는 당리당략을 앞세우고 파업을 부추기고 있다. 서로 물고 뜯으면 피차 망하는 법이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싸움인지, 아니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싸움인지? 노(勞).사(使).정(政)은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싸움인지 아니면 나라를 망치고자 하는 싸움인지 그 싸움의 본질을 다시 한번 깨닫고 다 함께 사는 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 '너 살고 나 사는 법'이 있다.  
"(잠15:17)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셋째, 빛의 열매는 진실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는데 있어서 첫째 단계는 예배입니다. 기독교인은 예배로부터 시작해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참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자는 빛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삼으실 때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진실한 사람을 선택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요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시32: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진실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과 그의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진실된 것입니다.

"(시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눅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5: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사람들은 다 지식에 의해 살아가고, 풍부한 경험과 부지런한 노력에 의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진실 무망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세상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노력에 의지한다면 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신앙으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으며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것이란 약속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는 것이요 쓸데없이 남을 오해하거나 중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진실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시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진실한 사람만이 세상에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시15: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15:4)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시15:4)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시15:5)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유럽의 종교 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공시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480여 년 전의 일이지만 그의 용기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길이 빛날 것입니다. 권위에 대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때, 특히 그 권위가 나에게 죽음을 줄 수 있는 상황 아래서의 항거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진실의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마을의 모든 기왓장이 나를 거스를지라도 나는 진실을 추구하겠다." 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학문도, 종교도 진실의 추구라고 하지만 실제적인 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란 순간마다 진실과 거짓을 두고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진실을 선택하며 사는 것이 바른 생활이지만 욕심과 무지와 교만이 앞을 가려 거짓을 선택할 경우가 많습니다. 진실의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기의 자리를 유지하려는 사람이나 물질적 손실을 염려하는 사람이나 어떤 종류이든 위험을 느낄 때  내 몸을 도사리는 사람은 한평생을 살아도 진실을 위한 바른 결단을 한 번도 내리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애굽 왕은 심한 노역을 시켜도 이스라엘 인구 팽창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영아 살해의 극악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이스라엘 산파들에게 왕명을 내려 남자 아이는 출산과 동시에 죽이게 했습니다. 잔인한 법이었습니다. 동족 살해의 괴로움까지 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왕명에 복종하지 않고 이스라엘 남자 아이를 살렸습니다.

"(출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라고 성경은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이 왕명을 어긴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는 표현은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뜻보다는 경외 즉 존경하고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산파들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 왕명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왕명을 따르는 길은 무사하고 무난하고 상급을 받을 수도 있는 넓은 길이었습니다. 왕명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위험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좁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좁을 길을 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좁을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정과 부패, 불법과 불의, 사치와 허영, 음란과 거짓이 판을 치고 이 어두운 사회에 성도 여러분들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빛의 열매를 맺으시므로 나라의 생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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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귀새끼 타신 왕

<구약 성서>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신약 성서>
"(눅19: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눅19: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눅19: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눅19: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눅19: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눅19:33)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눅19: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눅19: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눅19: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눅19:37)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눅19: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눅19: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눅19: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든 군중들로부터 환호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3번에 걸쳐서 있었습니다.
첫 번째 입성은 안식일에 있었는데 그날 주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셔서 곧장 성전으로 가시고 거기서 벌어지고 있던 모든 일을 보시고는 한 마디 말씀도 없이 그냥 성전을 떠나셨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아마 장사하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입성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삶의 중심이었던 성전을 왕으로서 입성하셔서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 보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입성은 안식일 다음날로 오늘의 주일인데 이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잘 보이는 감람산의 한 장소에 가셔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을 쫓아내시고 그들의 탁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예배를 위해서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거룩한 대제사장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입성은 오늘날 월요일로써 이날에는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이 벌임으로 선지자로서 입장에서 입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나귀는 동방에서는 왕이 타던 짐승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왕들은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탔습니다.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입성을 성경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왕되심을 상징하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귀타신 모습이 로마 귀족들이 볼 때는 비천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보였을지라도 이는 분명히 영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이 스가랴서의 예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귀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환호성을 듣고 심상치않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교권을 장악한 무리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던 것입니다.

"(요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눅19: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마21: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마21: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이 겸손한 모습이 아니라 주님이 겸손하시지만 왕으로서 나귀를 타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런데 교권을 장악한 무리들(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 장로들)을 화나게 했던 것은 군중들의 환호성이었습니다.

"(눅19:37)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눅19: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눅19: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군중들의 이 환호성대로라면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이는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에 가까운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권을 장악한 무리들이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하면서 예수에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거절하셨습니다.

"(눅19: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기치창검(旗幟槍劍)의 군대를 거느린 무력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화평을 선포하는' 평강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나귀새끼를 타신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통해 이 시대에 흐트러진 우리 기독교 사명의 참된 모습을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사명의 목표는 성공(success)가 아니라 신실한 증인(gaithful witness)이 되는 것이요, 능력, 권력(power)가 아니라 선포(proclamation)요, 기술(technique)이 아니라 진리(Truth)요, 방법(method)이 아니라 메시지(message)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의 가장 강력한 행동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핍박을 초래할지라도 진리를 사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아테네의 주종을 이루었던 우상제조업자들에 대해 보이콧운동을 벌일 수도 있었습니다(행 17장). 그러나 그는 그보다 강력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정치적 경제적 압력단체를 조직하는 것은 복음의 궁극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장로교 목사인 피터 리이다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교회를 정치력 신장을 꾀하는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분명 총체적인 왜곡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준다. 그것은 곧 세상이 가지고 있는 착각뿐만 아니라, 교회가 세상에 보여 주고 있는 "얼굴"에 대해서도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옛날의 비난은 이교도들이 교회에 관해 그 무엇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곧 교회가 모여서 구세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으며 평안의 키스로 서로 인사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세상은 교회를 하나의 예배의식 공동체로 인식했지, 정치적 공동체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예배가 교회의 우선적 임무로 세상에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명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지 이익단체나 세상 권세에 대한 압력단체가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는 타 종교와 종교단체를 형성하여 정부와 사회에 대하여 한 목소리를 내자는 압력단체를 결성하고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가 결성한 십자가군은 약 200년에 걸쳐 8번이나 형성되었지만 여지없이 실패하여 멸망당하고 교회의 위신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군이 실패한 자리에 지금 이방 종교 터키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교회가 받은 권력(능력)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전파의 능력(권력)입니다. 복음 전파의 영적인 능력은 세상에서 말하는 권세나 권력과는 무관한 권력, 능력을 말합니다. 마태 복음 28장 18절에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복음 전파를 위한 영적인 권세를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나 예수님께 던진 제자들의 질문은 "(행1:6)....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였습니다. 제자들은 회복된 나라에서 얼마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그런 나라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왕국을 회복하여 권위와 지위를 가지고 로마인들에게 권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줄 수 있는 때가 지금입니까?" 그러나 그런 나라에 관한 것은 알 바가 아니고 대신에 그는 능력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전파의 영적인 능력이었습니다.

"(행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나라가 없는 권세를, 지위가 없는 권력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다른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위는 인간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어서, 아무런 학위도 없었으며 저명한 직함도 없었고 인간적인 권세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들이 외치는 "힘찬" 선언을 볼 수 있습니다.

"(행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세상적인 권력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무학력", "무능력"의 제자들이 당시 교권을 장악한 종교지도자들과 공권력을 장악한 관리들과 대결하여 거듭 승리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는 바로 위로부터 내리는 영적인 능력이 역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우리 종교"를 가진 신자가 정권을 잡았으니 이 판에 선교도 하고 교세를 확장할 뿐만 아니라 우리 종교를 크게 떨치는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록 있음직한 일이긴 해도 종교다운 발상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종교를 종교가 되지 않게 해버리기 때문에 현실적인 효용의 측면에서 보아도 결코 득이 되는 일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정치인이 자기네 신자라고 희희락락한다거나 어떤 정치인이 자기네 신자도 아닌데 자기네 종교를 찾아왔다고 해서 즐거워한다거나, 고위층 인사나 국회의원 등 권력층이 자기네 교회에 많다고 긍지를 가지거나, 자기네 종교 신자인 정치인이 다른 종교에 찾아가 축복을 받으러 왔다고 해서 토라진다거나 하는 것은 한결같이 종교가 참으로 비굴할 정도로 정치 세력 앞에서 맥을 못 추는 추잡한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정.종유착(政.宗癒着)의 부패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부패한 정치 세력에 대해 크게 비판적이어야지, 그 힘의 그늘에서 어떻게 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라면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정치 집단일뿐입니다. 인류의 종교 역사는 종교가 그 시대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했을 때는 그 존재 의미가 확연했지만, 세력과 돈 주머니를 잔뜩 거머 쥐고 이른바 그 영화로움을 누리게 되면 이미 그 존재 의미가 탈색되고, 마침내 얼마 가지 못해서 사실상 소멸될 수밖에 없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랑곳없이 오늘의 종교들은 그 아픔과 고난의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면서도 권력과 금력의 그늘 아래서 오히려 영화로움을 누리려는 듯한 종교 타락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크리스챤이 권력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권력의 검을 정부기관에 허락하셨기 때문에 크리스챤도 얼마든지 선한 양심을 가지고 그 검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 권력(검)사용 동기와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바는 영적 무장하라는 것이지 총칼로 무장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기독교인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법과 질서를 위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지켜 나아가는 데 권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주어진 권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겸손하게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그 모델입니다. 모세는 200만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성경은 그를 가리켜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온유함"은 다른 성경에서 "겸비함"으로 번역하여 모세가 섬기는 지도자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결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권리로서의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어진 권력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은 지금까지 세상 권력에 편승해서 전파되어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세상에 전파되어지고 있습니다.
혹자는 나라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정부를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이 방법이 한 국가와 백성의 도덕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지름길같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순진무구하고도 위험천만한 승리지상주의의 발로(發露)입니다. 기독교인들을 고위 공직에 세우면 모든 사회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주제넘은 생각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으며 진실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일찌감치 로마 원로원을 점령했을 것입니다.
권력이란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는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주장은 선지자의 몫이지 정치지도자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자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떠들어 대는 소리는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無知蒙昧) 것입니다. 다른 전문분야와 마찬가지로,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품성뿐만 아니라 각자의 자질과 능력을 근거로 선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정정치에서조차 볼 수 있었던 사실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를 권하여 "(출18:21)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도록 했습니다. 루터는 무능한 크리스챤보다 유능한 터키 사람에게 통치받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권력의 매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의지가 강한 크리스챤이라도 한번 권력의 맛을 보면 섬김의 도리에서 쉽게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랫 사람의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도 바로 권력에 대한 미혹 그 자체였습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께 속한 권력(power)을 획득할 수 있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에덴 동산의 죄는 권력(power)의 죄"라고 말했습니다. 권력은 처음부터 사탄의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가 되어 왔습니다. 예수께서 사탄으로부터 받은 시험도 바로 그 권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마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4: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밀턴은 그가 쓴 <실락원>에서 루시퍼에 대해 말하기를 "다스리는 일은 지옥에서라도 해 볼 만한 것이다. 천국에서 섬기는 것보다는 지옥에서 다스리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인류 구속의 사역을 하시면서 권력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철저하게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마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20: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눅2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막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언행이 일치하셨습니다. 그는 몸소 섬기는 종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요13: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요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요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계급의식이 강했던 당시 문화 속에서는 혁명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회당의 특별석에 앉고, 주인들은 노예를 지배하고, 남자는 여자 위에 군림함으로써 신분과 특권이 엄격하게 분리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권력과 돈, 명성과 영향력이 다양한 형태로 우상화되고 있는 오늘날 동서양의 계급의식 문화 속에서도 거의 혁명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계급 파괴', '신분 파괴', '권력 파괴'의 폭탄 선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힘없는 자들에 대해서 특별한 사랑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력한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연약한 자들, 힘없고 무지한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가장 강력한 사역을 이루심으로써 세상의 권력과 지혜를 혼란케 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권위와 권력의 원천은 겸손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진정한 리더쉽의 원천은 겸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저질러졌던 교만죄, 권력의 죄는 모든 관계를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꿈꾸었던 권력은 결국 인간 관계와 더불어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파괴시키고 말았습니다. 권력은 우리의 대인관계와 사회적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선악간에 이보다도 더 우리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권력은 파괴를 가져올 수도 있으며, 창조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파괴하는 권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삶을 위한 필요한 모든 것이 풍요롭고 완벽한 에덴 동산, 그야말로 낙원에 살았지만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 금단의 열매를 먹어치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 죄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한 것 이상의 존재가 되려 했고, 그 이상을 갖고자 했으며, 알려고 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피조물임을 알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종교는 종교 이상의 것을 차지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복음 전파이외의 다른 사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능력, 성령 이상의 것을 차지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이 권력의 죄는 먼저 하나님과 관계에 단절을 가져왔으며, 더 나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소원(疏遠)함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나와 그것과의 관계' 즉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환경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또 하나의 다른 예를 들어보면, 사울왕의 경우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쳐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낸 일로 백성들의 다윗에 대한 사랑과 존경, 인기가 상승하자 질투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모든 권력을 총동원하여 다윗을 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그 아들 요나단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처럼 권력은 그것이 파괴적으로 작용할 때, 모든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지위 다툼과 반목으로 제자들의 조화를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마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20: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드린 기도에서 무엇보다 제자들이 하나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파괴하는 권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시몬의 죄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축재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행8: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행8: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여기서 보면 종교적인 권력은 어떤 면에서 다른 어떤 권력보다도 더욱 파괴적일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은 타락하게 마련이고,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하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에 있어서 특히나 그렇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자기가 율법인 양 마음대로 행세하면서도 경건의 옷을 입은 자들은 특히 타락하기 쉬운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자만심으로 가득 찼으며, 심지어 자만을 넘어 거만으로 가득 찼습니다. 삼손은 대적들 앞에서 자랑하기를, "(삿15:16)...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만과 자존심, 그리고 권력이라는 이 불경스러운 것들이 어우러져 삼손의 멸망을 초래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허영의 시대에 빠져 대중매체에 열광적으로 미치고 있습니다. TV에 출연하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고 TV를 비롯하여 대중매체에 출연 여부가 그 사람의 지명도와 능력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기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머거리지는 <그리스도와 대중매체>에서 만일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던 시험을 오늘날 당하게 되었다면 사탄은 네 번째의 시험, 즉 국영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것을 제의했으리라고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재물(Mammon)이 또 하나의 권세로 그 위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폴 트르니에는 "GNP가 현대의 금송아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Sex), 종교적 율법주의, 기술문명, 자기 도취, 군국주의, 절대적 회의주의 등도 이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권세들입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는 이들 권세들을 어떻게 멸망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골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일만 천군천사를 불러 세상 정사와 권세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 분은 힘의 논리를 사용하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이 세상 정사와 권세들을 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야만 그 권세들을 깨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엡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엡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엡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엡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강력한 무기인 것입니다.

"(고후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참으로 십자가는 모든 관계를 치료하는 창조적인 권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먼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었으며, 다음으로 인간과 인간과의 파괴된 관계가 회복되었으며, 더 나아가 나와 그것, 즉 자연과의 관계도 회복된 것입니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그러므로 진정한 권력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세상을 점령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권력에 대해 맞불작전으로 세상 권력을 동원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어 보여도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참된 권력은 십자가에 보여준 종의 형체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참된 권력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에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권력에는 파괴하는 권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창조하는 권력도 존재합니다. 창조하는 권력은 생명과 기쁨 그리고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창조하는 권력은 관계를 소생시켜 주며 참된 자유와 변화를 가져옵니다. 창조하는 권력은 영적인 능력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면 요셉의 경우입니다. 노예로 팔려 가서 소망도 없이 감옥 생활을 했던 요셉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므로 당대 최강의 나라에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지닌 총리의 권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권좌에 있을 때 나라에 기근으로 인한 재난이 닥쳐왔습니다. 그 때 그는 영적인 분별력을 발휘하여 나라에 몰아닥친 기근의 재난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바로 그 형들이 기근을 당해 식량 구호를 받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요셉이 지닌 권력은 커다란 시험대 위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은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것은 그의 권력을 가지고 화해의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45: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창45: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창45: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45: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창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창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45: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창45: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창45: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창45:12) 당신들은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창45:13) 당신들은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의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고하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창45: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창45: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

이 장면은 창조적인 권력이 깨졌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또한 창조하는 권력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줍니다. 모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그 권력으로부터 도망칠 것을 강요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는 새로운 경험을 했는데 곧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에 돌아와 바로의 권세에 대항하여 호령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는 이미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손에 들려진 것은 양을 치는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옛날의 교만은 간데 없고 그 자리에는 온유함과 겸손 그리고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내 백성을 내어 보내라."는 힘찬 그의 명령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하의 바로 조차도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창조하는 권력은 이처럼 참된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창조하는 권력은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사도와 장로들)이 바로 그 예입니다(행 15장).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느냐하는 문제를 놓고 초대교회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초대교회 사도들과 장로들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능력 가운데 그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하여 교회의 일치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행15: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적인 권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파괴적인 권력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바로 이 창조적인 권력인 것입니다. 이 창조적인 권력이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 전도의 능력(권능)인 것입니다.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된 모든 인간관계, 신음하는 자연과의 관계 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창조적이고 복음적이며 영적인 능력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성도의 무기가 있다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진정한 능력(권력)은 십자가의 희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능력(권력)은 십자가의 겸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능력(권력)은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끝까지 지고 가야할 것이 있다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나라 민족을 위해 끝까지 지고 가야 할 것이 있다면 십자가입니다. 이 나라 통일을 위해 끝까지 지고 가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이 나라 민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고전 1;23)가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여도 구원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사명자는 십자가를 구하여야 합니다. 사명자는 십자가만을,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만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충청도 어느 군수는 군청 직원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군민을 예수 믿게 만들었습니다. 군수라고 하는 권력을 이용하여 강제로 동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군수이면서 군청 직원들에게나 군민들에게 십자가의 겸손과 사랑, 희생 정신으로 섬기고 봉사하다보니 예수 믿으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도 복음으로 군 전체를 점령했던 것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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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화의 왕


"(마2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마21: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마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마21: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하여 (마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마21: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마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21: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마21: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예수께서 한 번도 사람을 태운적이 없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눅19: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한 번도 사람을 태운적이 없는 나귀는 특별히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결례식에 사용되는 붉은 암송아지는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짐승이었습니다.

"(민19:2) 여호와의 명하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 오게 하고."

"(신21:3) 그 피살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 곧 그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우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고."

여호와의 법궤를 태울 수레는 한 번도 사용되어 본적이 없는 수레이어야 했습니다.

"(삼상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과연 성전을 청결케 하는 성스러운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때는 유월절 절기였습니다. 유월절은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의무적인 3대 명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 끝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던 것입니다. 어느 곳에 살든지 간에 유대인들의 소원은 단 한 번만이라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외국 땅에서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면 그들은 "금년에는 여기에서,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바로 이 유월절로 예루살렘과 더불어 주변 마을들은 모여온 순례자들로 메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마침 인구 조사가 행하여졌는데 그것은 유월절에서 제물로 죽임당한 어린 양으로 측정했던 것입니다. 기록에는 256,500마리로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규정에 의하면 어린 양 한 마리에 최소한 10명을 단위로 바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숫자대로 계산한다면 유월절에 약260만여명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30km이내에 사는 모든 성인 남자 유대인은 필히 유월절을 지키러 와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에 있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민족의 가장 큰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좋은 극적인 순간은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대망으로 잔뜩 고조된 사람들이 붐비고 몰려들어왔을 때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 순간을 택하신 것은 예수님의 돌변적인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미리 준비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마2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마21: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마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마21: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이같은 극적인 행동은 그가 메시야임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서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왕상11:29)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왕상11:30)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왕상11: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왕상11: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르호보암의 난폭과 사치한 낭비로 왕국이 기울어가고, 여로보암이 새로운 세력으로서 대두했을 때, 실로 사람, 예언자 아히야가 미래를 예언하기 위해 극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아히야는 새 옷을 입고 나아가 여로보암을 만났는데 그는 새 옷을 벗어 열 두 조각으로 찢어 그 중 열 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고 두 조각은 자기가 취했습니다. 이 극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는 열 두지파 중의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도와 일어날 것이며 단지 두 지파만이 르호보암에게 충성을 그대로 바치고 있을 것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은 극적인 행동으로 전달하는 예언자적인 메시지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온 나라에서와, 전 세계에서 모여와 예루살렘이 붐비고 있을 때를 택하여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 즉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이란 것을 명백하게 주장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행동을 취하기 위해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행동은 일종의 영광스러운 도전 행위였으며 그 위에 더 없는 용기가 필요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때에는 예수님의 목에 현상금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11: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려고 한다해도 뒷길 어느 은밀한 장소를 택해서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현상금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서 오시는 분의 당당한 용기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용기를 보이시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최고의 사랑을 보이시는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랑의 최후의 호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은 구약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예언의 요점은 메시야가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틴에 있어서 나귀는 경멸받는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나귀는 고상한 동물이었습니다. 왕이 전쟁에 나갈 때에는 말을 타고 평화로울 때에는 나귀를 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사사인 야일의 아들 30명은 30마리의 나귀를 탔습니다.

"(삿10:4) 그에게 아들 삼십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두었었는데 그 성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칭하더라."

사울의 아들인 왕자 므비보셋은 나귀를 타고 다윗에게로 갔습니다.

"(삼하16:1) 다윗이 마루 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 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삼하16:2)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 왔느뇨 시바가 가로되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나귀를 타시고 성에 입성하시는 행위는 예수께서 평화가운데 오시는 것이라고 하는 증표인 것입니다.
G.K.체스터튼(Chesterton, 영국 작가 1874-1936)의 시 가운데 현대의 나귀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물고기가 날고, 숲이 걸으며,
무화과가 가시떨기 위에서 익어가고,
달이 피 빛처럼 붉을 때,
바로 그 때 나는 태어났다.
괴물같은 머리, 듣기 싫은 울음소리,
잘못 만들어진 날개 같은 귀를 가지고,
네 발 가진 짐승의 흉내를 내며,
악마는 비틀거린다.
갈가리 찢긴 땅 위의 무법자,
옛날부터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주인이,
나를 굶기고, 괴롭히고, 비웃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는 침묵만 지킨다.

어리석은 자여! 나도 좋을 때는 있었다.
맹렬하고, 감미롭던 때가,
나의 귓전에서 환호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종려나무 가지가 내 발 밑에 쌓였다."

오늘날의 나귀는 조롱을 받고, 경멸받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왕의 동물이었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의 모습은 어떻했습니까?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하여, 평화 속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꿈꾸고 있던 용사나 웅장한 정복자가 아니라 평화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당시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하면서 호산나! 호산나!를 부르짖었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참 메시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군중들은 이 세상의 악의 세력을 부수고, 부정과 불의를 박살내며 파괴하는 웅장한 정복자로서 예수를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파괴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러 오셨으며,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와 주려고 오셨으며, 무력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보이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여 그가 가시는 길에 자기들의 옷을 펼쳐 깔았습니다. 이것은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행한 것이었습니다.

"(왕하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무리들은 이같이 환호합니다.

"(눅19: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마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본문 10절의 "호산나"라는 히브리 말은 "지금 구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시편 118편 25절에서 인용해온 구절입니다.

"(시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이 말은 다음 성구에서도 똑같이 사용되었습니다.

"(삼하14:4)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할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가로되 왕이여 도우소서."

"(왕하6:26)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왕의 손에 원조와 보호를 구하는 사람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군중들이 "호산나" 라고 소리지를 때, 이는 메시야가 왔으니, 하나님이 개입하여 이 백성들을 구원해달라는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이었던 것입니다.  
유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재난 중의 하나가 B.C. 175년경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일입니다. 안티오커스는 유별난 왕으로 헬라의 사상과 문화에 심취된 자로서 유대주의를 박멸하고 팔레스틴에 헬라의 생활과 문화, 헬라의 사상과 종교를 어디서든지 될 수 있는대로 필요하다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이식(移植)시키는 것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소위 헬레니즘 매니아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팔레스틴을 정복한 그는 고의적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하기 위해 올림피아의 신 제우스에 제물을 드릴 때와 같이 성전 제단에 돼지 고기를 헌물로 드리고 성전에 있는 각 방들은 공인된 매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사본을 가지고 있거나 어린아이에게 할례를 베풀면 사형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지워버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침없이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마카비 형제들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B.C. 167년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게 되었고 안티오커스를 추방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고, 다시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다시 신성한 것으로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마카비 제2서 10장 7절에서 이 큰 날의 기쁨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려나무의 작은 가지들과 곧은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주의 성전을 청결하는데 성공을 그들에게 베푸신 여호와를 찬미했다." 그 날에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들의 시편을 노래 불렀던 것입니다. 시편 118편은 아마도 위대한 정결의 날, 유다 마카비가 안티오커스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썼거나 지은 것 같습니다. 이 시편은 정복자의 시편입니다.

"....(시118:11)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시118:12)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시118:13)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시118:14)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시118:15)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시118:16)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시118:24)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시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했지만 그 메시야는 마치 마카비 형제같은 모습으로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한 그들의 이같은 환영은 이스라엘의 적을 분쇄해 버리는 정복자에 알맞는 환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시고 오시는 예수님은 무력, 대단한 군사력을 동원해서 오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대한 최고, 최후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며 겸손과 온유, 사랑을 통한 평화의 왕이심을 선포하시고자 극적인 방법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입성 당시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는 한 예수님의 지상운명은 비참하게 끝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때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2-34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될 일을 알고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데 모든 면에서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벳바게로 나귀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도 다 아시면서 이 일을 진행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으러 가는 인생길을 걷고 있는데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가진 사람이요 진리를 가진 사람은 진정한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요한복음 12장 15절에 인용하시면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살인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신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말씀에 붙잡힌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여러분들도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려고 한다해도 뒷길 어느 은밀한 장소를 택해서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현상금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서 오시는 분의 당당한 용기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용기를 보이시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최고의 사랑을 보이시는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랑의 최후의 호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흐루시쵸프와 존 에프 케네디와 골다 메이어가 천국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정상 회담을 했다는 재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 사람에게 질문 한 가지씩을 허용했습니다. 먼저 흐루시쵸프 전 소련 수상이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소련과 미국의 사이가 좋아질 날이 있을까요?" 그러자 하나님은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안 될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질문했습니다. "미국과 세계에서 흑인과 백인이 화목하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 그러자 그 질문 역시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메이어 전 이스라엘 수상이 질문했습니다. "유태인과 아랍인이 정답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대답 내용이 조금 달랐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니까 유태인과 아랍인의 평화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는 농담입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무너졌지만 우리는 아직 분단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인종 문제로 인한 것이며, 만일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다면 종교 전쟁일 것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오랜 싸움은 개신교와 천주교의 전쟁이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전쟁도 종교적 대립이며, 인도와 파키스탄 역시 그렇습니다. 또한 얼마 전의 이란과 이라크는 미국에 대해 '거룩한 전쟁(Holy War)'을 선언했습니다. 중세기 십자군 때부터 종교를 앞세운 전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말하는 나라들이 많았으나 그것은 국민을 전쟁터로 몰아내는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요즈음처럼 신께서 어지러울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부시 대통령은 종교 방송인들의 집회에서 "페르시아만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전쟁이므로 반드시 이긴다." 라고 연설하였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부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능하신 신이 우리 편이므로 어떤 사탄의 세력에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후세인과 같은 회교도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왕 파드는 "후세인을 대적하는 전쟁이 곧 신의 뜻이다." 라고 국민에게 선언하였습니다. 알라신도 어느 편을 들어주어야 할지 입장이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부시는 중동 전쟁을 선포하던 날, 백악관에 부흥사인 빌리 그래이엄 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속한 교단인 성공회의 에드워드 브라우닝 신부를 초청해야 자연스럽지만 브라우닝 주교는 페르시아만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에 침례교 목사 그레이엄을 불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기독교, 같은 하나님은 어느쪽 기도를 들어야 할 것입니까? 중동 지방은 종교를 내세우며 싸우는 전통이 있습니다. 지난 3천 년 동안 종교의 깃발 아래 군대들이 사람들을 살육한 곳이 중동 지방입니다. 모두가 다 신이 자기 편이라고 주장하고 신의 살인 결재를 받은 것처럼 큰 소리치며 싸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거룩한 전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율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지체없이 대답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래서 초대 교회는 예배와 친교시에 포도주와 빵으로 주의 애찬을 나누게 되었고, 그 사랑의 나눔을 아가페라고 불렀습니다. 떡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몸 곧 인류를 하나로 묶으신 그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잔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피 곧 인류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자신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극적인 상황 속에서 극적인 방법, 겸손과 온유, 그리고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므로 인류에 대한 최고, 최후의 사랑을 나타내신 고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 깊이 영접하시는 여러분과 가정, 이 땅 위에 참된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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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예수의 부활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타임(Time)지의 기사(1962.11)에 의하면 4월은 자살이 가장 많은 달입니다.그 이유는 만물이 싱싱하게 소생하는 생명에 대하여 자기의 인생은 너무도 허무하다고 느끼는 탓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 엘리옷(T.S.Eliot)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신앙인들에게는 꽃망울이 열리는 달이고,생명이 움돋는 부활의 달입니다.  눈이 죽어버린 소경이 눈을 뜨고,귀가 죽어버린 귀머거리가 듣고,사지(四肢)가 죽어버린 중풍병자가 일어나는 기적(奇蹟)의 달입니다.  심장이 몽땅 죽어버린 '나사로'(요11:43) 인생들이 무덤을 열고 생명의 나팔을 불면서 부활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생명에는 살았으나 죽은 생명이 있고,죽었으나 산 생명이 있습니다.그리고 세상에는 살기 위해서 온 생명이 있고 죽기 위해서 온 생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생명은 살기 위해서 오신 생명이 아니라 실존(인간)을 위하여 죽으러 오신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무덤이 그를 가두지 못하였습니다.그는 죽음의 원수를 이김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울은 외칩니다."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실로 그에게는 무덤이 없습니다.비석도 없습니다.다만 천사의 입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28:6)고 비문(碑文)이 한번 낭독되었을 뿐입니다.  
  부활! 부활! 무덤을 파헤친 생명! 생명! 그리고 이 감격!   이 기쁨! 누구에게 전할 것인가?   
  어느 가슴에다 심을 것인가?    
  이 땅에 메말라버린 지식인의 사상 속에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땅에 비틀어진 정치인의 양심 속에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땅에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버린 도덕과 윤리 가운데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땅에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교육계에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땅에 천민 자본주의로 곰팡이 냄새나는 기업인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심으소서!.   
  이 민족의 가슴마다 죽음의 무덤을 파헤친 부활의 생명을 주옵소서!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긴 월남 이상재(李商在,1850-1927) 장로님에게 한 번은 일본 신문 기자가 질문하기를 "간디는 평소에 100세를 산다고 하였고 누구는 몇 세를 산다고 하였는데,선생님은 몇 년이나 사실 작정이십니까?" 하였습니다.  이상재 장로님은 그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사람이 한 번 났으면 영원히 살지,죽기는 왜 죽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로 정치가로 외교관으로 교육가로 그리고 교회 봉사자로 다양한 일생을 보내신 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생의 비결은 이와같은 "부활의 신앙"이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이 부활의 생명을 확실히 바라볼 때 현세를 건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재 시인 괴테는 "너 아무리 성공의 정상에 서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죽고 다시 산다는 진리를 알기까지는 처량한 나그네"라 하였고,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14,19,20)고 했습니다.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의 지상 활동(地上活動)을 총결산해주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신(神)의 계시 사역(使役)의 정점이 되는 동시에 인류 역사와 존재의 결정적 전환점을 가져다 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도 중요한 부활 사건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이 없이는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營爲)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태계 미국인 작가 아이색 씽어(I.B.Singer)의 작품 중 '바보 김펠'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펠은 부모를 일찍 여윈 채 고아로 자라났습니다.워낙 천성이 착한 데다가 사람들의 말에 잘 속아넘어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바보 김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결혼 적령기에 이르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사생아까지 있으며 성격이 포악한 창녀 엘카에게 장가들게 하였습니다.그는 그녀가 행실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혼을 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결혼한 지 4달만에 부인 엘카가 아이를 낳았습니다.김펠은 고민했습니다.그도 아이는 10달만에 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곧 그는 아내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세상에 의심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어.' 따라서 그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갓 태어난 자기의 아기를 위해 그리고 아내를 위해 황소처럼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다른 남자와 누워자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습니다.'멍텅구리 노릇도 이젠 그만해야지,평생 동안 남에게 당하면서만 살 순 없어.'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은 순결하며 따라서 김펠이 헛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아내의 말을 또다시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후 김펠은 20년 간을 그런 식으로 살면서 네 딸과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물론 그들 모두는 그의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병으로 갑자기 죽게 됩니다.그런데 상(喪)이 끝나는 날 밤,꿈에 악마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온 세상이 너를 속이는데 너는 언제까지 그들을 믿을 작정이냐? 그들은 거짓으로 뒤범벅이 된 사람들이다.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바보처럼 그들을 믿지 말고 너도 그들을 속이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나?' 꿈에서 깨어난 김펠은 악마의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아 괴로워하다가 드디어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난 모든 사람들을 믿어 주었지만 나에게 돌아온 것은 '바보'라는 별명뿐이었어.이제 나의 믿음을 배반한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 해."   
  그는 20여년 동안 빵 가게를 운영해 왔는데 정직과 성실로 일해 왔으므로 온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빵을 즐겨 먹어 왔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복수로 밀가루 반죽에 오줌을 한 통 부었습니다.그리고는 곧 빵을 구울 준비를 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온몸을 검게 그을린 아내 엘카가 나타나 매우 슬픈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바보같은 사람... 지금까지 쌓아온 믿음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려하다니! 몇 사람이 거짓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거짓된 것은 아니야.제발 믿음을 저버리지마.난 지금 다른 이들을 속이고 의심한 죄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단 말야."   
  그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었습니다. "아차 했으면 난 영원한 삶을 잃을뻔 했어.믿음이란 가장 중요한 거야.  작은 일 하나부터 의심하다 보면 나중엔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될거야.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할지도 몰라.  그래 누가 뭐래도 나는 그 모든 것을 믿어야 해."    
  여러분은 김펠이 정말 바보로 여겨집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본문의 의심많은 '도마'보다 바보 김펠의 단순한 믿음이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본문27-2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기를 원합니다.이러한 바램들은 불신자 뿐만 아니라 신자들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한 번 보여 준다면 교회 나가겠다고 하고,신자들은 하나님께서 한번 나타나 주신다면 더욱 더 신앙 생활을 잘 할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분명히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현대의 우상이 되어 버린 과학만능주의의 영향으로 신앙조차도 실험실에서 분해하려고 드는 경향에 대해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의 출애굽 사건 기록은 보고도 믿지 못한 자와 보지 않고도 믿었던 자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주는 현대의 과학주의적 신앙관에 일침을 가하는 좋은 실례(實例)입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다가 해방을 받은 출애굽 1세대들만큼 하나님의 이적(異蹟)을 체험한 세대가 없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무수히 겪어 왔습니다.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사막의 지열(地熱)을 식혀주었고,밤에는 불기둥으로 혹독한 추위와 짙은 어둠을 물리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인 이동식 여행과 사막의 열악한 기후로 농사를 짓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여년 간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셔서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게다가 수시로 반석의 물을 끌어내어 식수로 공급하시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들을 노예로 부려먹던 당대의 막강한 권세자인 '바로' 왕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홍해의 이적도 친히 목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던 사람은 과연 몇 명이었습니까?   
  믿음을 지킨 여호수아와 갈렙,두 사람 뿐이었습니다.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보고도 믿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보지 못하고 믿었던 대표적인 기생 '라합'을 우리 믿음의 귀감(龜鑑)으로 삼읍시다. '라합'은 가나안 여인으로서 당시의 잡다한 혼합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세속화의 첨병으로서 부초처럼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라합은 믿음을 받아들이기에 가장 부적합한 조건과 환경 가운데 살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녀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1세대처럼 하나님의 이적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라합의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성경의 말씀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에 대한 소문만으로 믿음을 가진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마1장). 도마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간 예수님의 무수한 행적을 보았으면서도 드러낸 불신앙의 태도를 경고 삼고, 보지 못하고도 믿음을 가진 라합의 영광된 결말을 믿음의 사표(師表)로 삼아 예수 부활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영광된 첫째 부활에 참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위대한 진리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허위(虛僞)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에게 오셨습니다.그러나 인간은 그 진리를 제거하고,말살하고,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진리가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임을 궁극적으로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선이 악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선이시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그 선을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선이 궁극적으로는 악에 대해 승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셋째,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단번에 완전히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생명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죽음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모든 생명은 죽음과 함께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죽음의 한계를 깨뜨렸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하나의 한계일 수 있으나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될 수 없습니다.없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창조의 하나님은 죽은 예수를 살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삶에 의해 삼키어졌습니다.죽음의 독침 곧 죄의 세력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결정적으로,단 한번에 극복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영원한 삶의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넷째,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싸움은 결국 인간의 미움과 하나님의 사랑 사이의 싸움이었습니다.  인간은 그 사랑을 취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영원히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모든 미움 보다 강하며,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미움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위대한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면 인생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인간과 세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새로운 삶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예수가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받은 사건이라면, 부활은 심판을 받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그 외형(外形)에 있어서 하나님의 분노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과 수난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하나님의 자기 높이심과 영광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예수의 역사적 존재를 나타낸다면, 부활은 모든 역사적 제한성을 벗어난 예수의 영원하고 현재적인 존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만일회적(萬一回的,ein fur allemal)사건이라면, 부활은 이 사건의 영원하고 현재적인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J.Moltman).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이전에 있었던 제한된 인간의 삶으로 되돌아가서 이 삶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제한되지 않은 하나님의 새로운 삶으로의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삶은 "한 새로운 몸의 새로운 삶", "하나의 질적으로 새로운 삶,죽음을 더 이상 알지 못하며,그러므로 이 사멸할 삶의 연장일 수 없는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삶이 아니라,새롭고 다른 삶인 것입니다."(J.Moltman).  
  사도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마음과 생활로 믿으시고 "새로운 삶으로의 생명"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그러나 그것은 영원으로 통한다."고 말했습니다.물론 인생은 그 날이 풀입니다.그 영화는 들의 꽃입니다.  "(시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러나 세상에는 죽을 생명이 있고,죽어서 영원히 살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으시고 죽어서 영원히 사는 생명을 '지금 여기서'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중세 시대에 어떤 수도사가 성지 순례를 갔습니다.갈보리 산 근처에 돌아다니던 중에 뜻밖에 이 수도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쓰셨던 가시 면류관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가시 면류관은 보기에도 험상스러운 가시로 되었고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볼품은 없지마는 주님께서 쓰셨던 가시 면류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지극한 보배로 여겨져 그 면류관을 고이 자기 나라까지 가져 갔다고 합니다.그리고서는 자기가 있는 수도원 예배당의 강대상 위에다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부활절 아침을 맞아 수도사들이 일찍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그 예배당 문을 열었더니 온 예배당이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차 있더랍니다.  이게 웬 일이냐고 사방을 둘러 보니 그 험상스러운 면류관의 가시에 아름다운 장미꽃이 많이 피었더랍니다.  물론  얘기에 불과하지만 여기에는 뜻이 있습니다.  
  부활 생명을 의미합니다.  
  승리를 의미합니다.  
  향기를 의미합니다.  
  기쁨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그를 영접하는 이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생깁니다.   
  새로운 능력이 생깁니다.  
  향기가 나는 생활로 변합니다.    
  기쁨이 충만하여지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심으로 참된 생명과 승리와 향기과 기쁨을 얻었습니까? 이 기쁜 주님의 부활의 날에 충심으로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영접해서, 이 시간부터 여러분의 생활이 새로운 생명,새로운 승리의 생활, 향기를 뿜는 생활, 기쁨이 충만한 생활로 변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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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새벽을 향한 황혼의 길


"(눅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눅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눅24: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눅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눅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눅24:19)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눅24: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눅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눅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눅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눅24: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눅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 같이 하시니 (눅24: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눅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눅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3)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눅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눅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봄 처녀"란 이름의 가곡이 있지만 처녀에 가을 처녀, 봄 처녀의 구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가곡에서 봄 처녀란 내일을 향한 희망 때문에 가슴이 부푼 소녀를 말합니다. 봄 처녀란 대명사를 받기에 합당한 안네 프랑크는 어느 날 일기에 이런 글을 담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속에 기쁜 소식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봄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당신은 얼마나 위대한가! 당신은 마음껏 사랑할 수 있지 않은가! 당신은 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꽃 소식이 남쪽으로부터 올라오듯 잃었던 봄의 소식, 희망의 속삭임을 봄바람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인권 운동을 위해 앨마바마를 방문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가난한 흑인 청중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온 것은 봄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당신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고귀하고 훌륭하고 귀중한 생명이라는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봄은 부활의 계절입니다. 예수께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친히 가지고 엠마오로 낙향하던 황혼 길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예수님의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내려가면서 그 날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서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물으시자 그들은 슬픈 얼굴 빛으로 멈춰서서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단 말입니까?"
예수께 되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무슨 일인지 물으시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 분에 소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오늘 아침 새벽에 그의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그의 시체를 보지 못하고 예수께서 살아 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무덤에 가보았는데 여인들의 말이 사실이나 그 분을 보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그 모든 것을 왜 그렇게 더디 믿느냐? 그리스도가 마땅히 고난을 받아야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자신에 대한 기록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엠마오에 가까이 이르자
"날이 이미 어두웠으니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지요"
라고  예수께 권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식사할 때 예수께서 떡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린 후에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보았으나 그 순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길
"길에서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의 속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고 했습니다. 그들은 곧 바로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들 말하기를 "주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두 사람도 엠마오 도상에서 겪은 일과 떡을 떼실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치적 회복을 갈망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것이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결코 상상해본 적도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제자들 보기에 맥없이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목자 잃은 양떼들처럼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 입니다.

"(막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본문에 엠마오로 낙향하고 있는 두 제자 역시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대화 내용을 살펴보면 이들은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의 증거뿐만 아니라 그들의 동료들도 부활의 증거가 될 만한 현장을 방문했던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불신은 여인들의 증거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린 제자들의 반응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의 의심과 불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서도 당분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열 제자들이 모여 있는 다락방에 나타난 예수를 영(靈)으로 생각한 것은, 갈릴리 바다의 폭풍 가운데서 걸어오신 예수님을 유령으로 취급한 사건에서의 제자들의 행동과 같은 것입니다.

"(눅24: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마14: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제자들의 의심은 못박히신 예수님의 손과 발을 만지고 잡수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해소가 되었습니다.

"(눅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눅24: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눅24: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눅24: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십자가 죽음 이전에 여러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 입니다.

"(막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마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불신의 깊은 수렁에 빠져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눅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생전의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의 좌절 때문에 부활도 믿지 않고 서둘러 자기의 생업을 찾아 엠마오로 낙향한 제자들이었건만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그냥 버려두시지 않고 다시금 그들이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여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돌이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들의 엠마오 여행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전환되는 예루살렘 여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의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핍박자, 살인자의 발걸음을 복음 전도자의 발걸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삶의 변화를 가져 오게 되는 것입니다.

"(행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행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행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행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행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장로교 선교사인 벤자민 웨어목사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국제 테러단에 납치되어 16개월 동안 세상과 격리된 감금생활을 하고, 살아 나온 뒤에 자기의 경험을 써서 <갇힌 인질, 풀린 인질(Hostage Bound, Hostage Free)> 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고문당하고, 소식이 끊기며, 세뇌당하는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는 중 위로가 있다면 새벽에 변소에 가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창문 밖을 내다보고 싶어 변기 위에 발을 딛고 올라섰습니다. 그곳은 높은 곳이어서서 마침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고 숲과 산의 능선과 찬란한 구름들, 새벽을 맞는 대자연, 벡카 골짜기와 멀리 눈에 덮인 높은 산맥이 보였습니다. 웨어 목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창조자의 이 장엄한 선물은 하루 종일 나의 기억 속에서 천사의 음성이 되었습니다. 그 음성이 나에게 살아야 한다는 희망과 살아서 무엇인가 창조자를 위하여 그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분명한 생명의 의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역시 변소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던 웨어 목사를 발견한 테러단은 그것마저 못하도록 변소를 옮겼으나, 그는 이젠 눈으로 보지 않아도 기억 속에 남은 그 장엄한 감격과 천사의 음성을 언제나 보고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웨어 목사는 천상의 음성을 대자연을 통해 화장실에서 들었지만, 천사의 음성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며 주님의 음성에 접하고 힘과 용기를 얻는 이도 많고 예배 찬송에서, 혹은 성가대의 찬양에서 주의 음성을 접하고 감격과 희망을 갖는 이도 많습니다.
석양 길로 가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경 전체에서 자신에 관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마음 속이 뜨거워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떡을 떼어 주실 때 그들은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황혼에 낙향했던 발걸음을 돌려 벅찬 감격과 소망을 가슴에 안고 부활의 새벽이 있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마음 속이 뜨겁지 못하거나, 좌절하고 절망가운데 있거나, 아직도 여전히 의심과 불신 가운데 신앙의 황혼 길로 내려 가고 있습니까? 이 부활의 계절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시므로 삶의 새벽을 여는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여류 시인인 패트 반즈 씨는 어느 부활절 아침의 체험을 소개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교회 대문 곁에 꽃파는 노파가 있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주름살이 깊게 패인 노인이었으나 얼굴 전체에 웃음꽃이 피고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반즈 씨는
"그렇게 웃고 계신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꽃 파는 할머니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내 나이만큼 살면 슬픈 일, 가슴 아픈 일을 많이 겪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럴 때 마다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고통의 금요일은 끝이 아닙니다. 겨우 사흘만에 부활의 새벽이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괴로울 때면 사흘만 기다리자고 말합니다."
이 노파의 지혜가 바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눅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십자가에 예수께서 죽으신 것만 확인하고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신앙과 삶의 황혼 길이 새벽을 향한 벅찬 감격과 소망이 넘치는 발걸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대설교가 스펄전이 대예배 설교 때 아동 설교를 할 때처럼 물건을 들고 나와 회중에게 보이며 소위 '실물설교'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빈 새장을 들고 강단에 올라섰습니다. 그 새장은 2파운드(약8만원)를 주고 산 것이었습니다.
스펄전 목사가 거리에서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소년은 참새 한 마리가 들어 있는 새장을 들고 있었습니다. 난폭한 이 아이는 가끔 새장을 흔들어 참새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스펄전 목사가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너 그 새를 어떻게 할 셈이냐?"
라고 묻자
"조금만 더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릴 거예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그렇다면 나에게 팔지 않겠니!"
라고 제안했습니다. 소년은 스펄전 목사를 훑어 보더니 웃으며 농담을 했습니다.
"2파운드 준다면 팔죠."
스펄전 목사는 그 자리에서 2파운드를 내주고 새장을 사서 문을 열어 새를 하늘로 날려 보냈습니다.
이튿날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대성전 강단에서 스펄전 목사가 행한 새장 설교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라는 악마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인간들을 어떻게 할 셈이냐?"
그러자 죄가 말했습니다.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을 가르쳐 잠시 가지고 놀다 죽여 버리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고 싶은데 값을 얼마나 주면 되겠느냐?"
악마는 웃어버렸습니다.
"이것들을 사서 뭐하게요. 그들은 당신을 배반하고 침밷고 십자가에 메달 것입니다. 그래도 사겠다면 당신의 눈물과 피를 내놓으시오."
스펄전 목사는 이 새장 설교를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요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신앙과 삶의 황혼 길이 아니라 부활을 향한 새벽을 깨우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신앙과 삶이 항상 부활의 새벽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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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서적 아버지상(像)        


"(살전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살전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살전2: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살전2: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살전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1차 사회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인간 사회의 중심이자 기본 단위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정의 신앙의 성패가 전 사회에 영향을 끼치게 되며, 따라서 한 가정의 신앙 성공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데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1889년,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한 아이는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들은 사촌 남매였기 때문에 불법 부부였습니다.아버지는 몹시 성미가 급했고, 어머니는 주부로서의 일이나 엄마로서의 일에는 흥미가 없고 바깥 사교생활에만 흥미를 느껴 나다니기만 했습니다.그러다가 아버지는 죽고,어머니는 이 아이를 알콜 중독자인 숙모에게 맡기고 달아났습니다.16세가 된 소년은 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했습니다.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연명하다가 결국 독일 군대에 들어갔습니다.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한 후 그는 정치계에 투신하여 극렬분자가 되었습니다.반란음모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어, 다시는 정치계에 나서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감형 출옥의 혜택을 받았으나 더욱 맹렬히 정치 활동을 했고, 결국 1933년 독일 국민의 절대 영도자인 총통이 되었습니다.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로 그로 인해 독일과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렸고, 그 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수 많은 인류가 이 아이가 내뿜은 독기의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같은 1889년에 다른 한 아이가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소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흡족히 받고 자라났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데리고 캔자스 농촌으로 이사했는데, 그 이유는 농촌 생활이 아이의 신앙 교육에 유익하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는 가훈을 전해 주었고, 가족 모두가 교회의 가장 적극적인 봉사자로서 이름이 높았습니다. 소년은 어른으로 성장해서도 어머니의 두 팔에 안겨 간곡하게 기도하던 매일 저녁의 일과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도 군대에 흥미를 느끼고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 졸업하였습니다. 1944년 6월 6일, 이들 동갑내기는 전투에서 대면하였습니다. 11개월에 걸쳐 히틀러는 연합군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싸웠습니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지하 방공대피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 소식을 접한 전 세계는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한편 아이젠하워는 1969년 80세에 평화롭게 눈을 감았고, 그의 죽음을 전 세계가 애석해했습니다. 이 두 동갑내기의 이야기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교육은 돌멩이 국(stone soup)과 같다."는 고대 희랍인들의 교훈이 있습니다.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주 인색한 4형제가 살았습니다. 어느 현인(賢人)이 이 형제들을 교훈하기 위하여 손님으로 가장하고 방문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손님을 대접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현자는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국을 끓일 수 있는 재료를 자기가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아주 예쁜 차돌 몇 개를 주머니 속에서 꺼냈습니다. 이들은 호기심으로 손님에게 냄비 하나를 빌려 주기로 하였습니다. 현자는 냄비에 물을 넣고 차돌을 넣어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끓을 무렵 현자는 여기에 된장 한 숟가락이 들어가면 더 맛있는 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맏형이 집에 가서 된장을 가지고 왔습니다.현자는 조금 후에 여기에 배추 한 포기만 들어가면 거의 완전한 국이 될거라고 말했습니다. 국이 먹고 싶은 둘째 형이 얼른 배추를 가지고 왔습니다. 현자는 셋째를 바라보며 두부 한 모만 여기에 넣으면 이제는 완전한 국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이 진귀한 국을 먹고 싶은 셋째가 두부를 제공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자는 넷째를 보면서 이 국에 고기 한 점만 들어가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넷째가 고기를 제공했습니다. 이것은 희랍 우화를 한국 식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결국 이 우화가 말하려는 교훈은 어린이 교육이란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주변에 있는 여러 사람이 힘을 모으고 재력을 모으고 가진 것을 합하여 투자할 때 건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학자 에릭 프롬에 의하면, 성장과정에서 자녀의 정서에 어머니가 끼치는 영향과 아버지가 끼치는 영향이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따뜻함, 도와주고 감싸주는 마음, 동정심, 이해심, 정서적 안정 등 부드러운 면을 심어주는 반면에 아버지는 성취욕구, 지식, 긍지, 단련, 선악의 분별, 권위 등 강한 면을 심어준다고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남자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이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농경사회에서의 남자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강한 아버지를 보고 닮고 싶어하면서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남자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단계적으로 배우고 알아야 할 기술, 예의범절, 지켜야 할 가치관, 신앙 등을 말과 삶을 통하여 전수하는 개인교사의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남자아이들을 자기의 작품으로 빚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거장 사회학자 콜먼(James Coleman)은 "가장 강력한 교육기관은 정부의 손에 있지 않으며, 교육의 성패는 학교보다 가정에 의해 좌우된다."고 역설했습니다. 건강한 가정이야말로 사랑이라는 안정된 반석위에서 인간화와 전인교육을 무리없이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적절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교육자인 부모가 자식들에게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 때 좋은 교육 성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주위에서 "세상에 뜻대로 안되는 것이 자식 농사"라고 한탄을 늘어놓는 부모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도무지 요즘 아이들은 X세대니 뭐니 하면서 부모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의 말을 전적으로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가슴아프게 노래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아들아 너를 보고 편하게 살라하면
   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
   너더러 정직하게 살라하면
   애비같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 땅의 논리가 무서워서
   애비는 입을 다물었다마는...."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출근하고 아이들이 잠든 후에 돌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남자 아이들은 닮고 싶은 아버지상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아버지 상실은 남자아이들의 정서에 열등의식과 무기력증을 유발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결국 남자아이들에게 필요한 강한 측면의 정서는 이상하게 왜곡된 TV 프로그램을 통하여 형성됨으로써 남자아이들의 인격과 정서발달에 많은 문제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시카고 청소년 문제 상담소의 연구에 의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청소년의 상당수가 강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어머니 밑에 자랐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고유의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그것이 자녀들의 올바른 정서발달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아버지는 자기 자리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특히 요즈음은 아버지 수난의 시대라고 할 만큼 존속살해가 빈번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부모들이 자식들에 의해 시해(弑害)당한 수는 93년에 36명, 94년에는 41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올해들어 대학 교수까지 부친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잘 산다고 하는 미국, 일본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왕과 왕세자가 다닌 명문 학습원(學習院)대학에 재학 중인 일본 여대생이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라는 등 잔소리하는 할머니를 칼로 찔러 숨지게 했다고 도쿄 경찰이 4월 2일 발표했습니다. 야마다 카쓰미라는 21세의 이 여대생은 지난 1일 82세의 할머니와 점심을 먹은 후 함께 설거지를 하다가 할머니가 식탁 습관 등에 관해 야단을 치자 화가 나서 일을 저질렀다는 데 그는 경찰에서 "할머니가 젓가락질을 못한다고 야단을 쳐대다가 방의 전기 스위치도 제대로 켜고 끄지 못한다는 등 잔소리를 시작해서 그만 정신이 돌아 칼로 찔렀다."고 토로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삐삐를 구입했다고 꾸중하는 아버지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경기도 수원에서 있었습니다.(동아일보 95.2.26일자)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친자식들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부모들의 모임이 최근 결성돼 유사한 처지에 놓인 40여명의 부모들이 회원으로 가입, 매주 월요일 정신과 치료를 병행해 서로의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자녀들의 학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정신과 상담도중 자녀들로부터 매맞는 부모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8개월전 이 모임을 결성한 여성 정신심리분석학자 실비아 베인스텐은 "이 모임은 무엇보다 이같은 불행의 근본적인 책임이 가해자인 자녀가 아닌 부모 자신의 무분별한 애정에 있음을 인정토록 하면서 해결점을 찾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들 부모의 대부분은 자녀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무조건 충족시켜주는 그릇된 교육관을 갖고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조선일보.95.3.24일자)  
  오늘날 적지 않은 아버지들이 자녀들의 진정한 필요는 외면한채 아버지의 역할을 돈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아니면 아내에게 떠맡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풍요가 아니라 아버지 자신입니다. 물론 자녀들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영향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의 머리이기 때문에 사실 자녀들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과 권한은 어떤 의미에서 어머니보다 더 크며, 그 책임 또한 더욱 중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집은 있지만 가정은 없고, 아버지는 있지만 아버지의 역할은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자녀들은 미아 아닌 미아가 되어 실종된 아버지의 따스한 품을 찾기까지는 기나긴 방황을 하면서 지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의 위기를 맞은 이 시대에 모든 삶의 표준이 되는 성경에 돌아가 바람직한 아버지 상(像)을 살펴 봅시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使役) 속에서는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고 선지자 사무엘을 제자양육까지 시키면서 살았지만 정작 자기 자녀들은 올바로 양육시키지 못함으로 인해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삼상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삼상4:12)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나와 그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삼상4:13)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에 들어오며 고하매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 (삼상4:14)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찜이뇨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 (삼상4:15) 때에 엘리의 나이 구십 팔이라 그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삼상4: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가로되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 (삼상4: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삼상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 년이었더라."
  
  엘리는 요즘의 현대 부모들처럼 자녀들을 과잉보호하면서 자녀들이 그릇 행할 때에도 징계하지않고 오로지 자녀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성경은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잠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때로는 합당한 징계가 필요함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죄를 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부모가 자녀들이 지은 죄를 징계하지 않고 그냥 가볍게 넘겨버리는 것은 더욱 큰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제물을 가볍게 여기면서 의도적으로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더니, 더 나아가서는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삼상2:12-22) 그러나 엘리는 범죄한 아들들을 합당하게 징계하는 대신에 단지 가벼운 책망만으로 일을 마무리 짓습니다.

  "(삼상2: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삼상2: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삼상2:24)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삼상2: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폴 디 마이어박사는 '그리스도인의 자녀교육과 인격계발'이란 저서에서 정상적인 자녀를 마약과 알콜로 중독시키려면 부모는 다음의 몇 가지 일들만 행하면 된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 아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라.
  둘째로,아이가 잘못하였을 때 꾸중만 하고 절대로 매를 들지 말라.
  셋째로, 아이가 모든 결정들을 항상 혼자서 하도록 하라.
  넷째로, 언제나 그 아이가 어려움을 회피하도록 도와주라.그리하면 반드시 당신의 자녀들은 마약과 알콜에 중독될 수 있을 것이다."    조금은 풍자적으로 표현된 이 글은 자녀들을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그냥 방치해두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일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 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아이들을 문제아로 키우는 12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1.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주십시오.
  2. 나쁜 단어를 배워서 쓰기 시작하면 고쳐주는 대신 웃어 주십시오.
  3. 영적인 교육은 전혀 하지 마십시오.
  4. "안돼" 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5. 어질러 놓으면 따라다니면서 사랑으로 치워 주십시오.
  6. 아무 책이나 상관없이 읽고 싶은대로 읽게 하십시오.
  7. 아이들 앞에서 부부가 자주 싸우십시오.
  8. 용돈을 달라는 대로 주십시오.
  9. 먹고 싶은 것은 다 먹게 하십시오.
 10. 언제나 아이 편을 드십시오.
 11. 언제나 큰 문제를 일으키면 "쟤는 어릴 때부터  저 모양이었기 때문에 별 수 없어"라고 한탄만 하면서 포기하십시오.
 12. 인생은 어차피 한스럽게 살 수 밖에 없으니 그런 식으로 계속 살라고 가르치십시오.(목회시사정보95.3월호)
  우리나라 중 고등학생들은 4명 중 1명이 무엇을 하고 놀아야 할지 몰라서 여가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화투나 카드 등 사행성 놀이를 해본 경험이 있는 학생도 10명중 8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이들의 73%가 이런 사행성 놀이를 건전하거나 보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입시준비로 시간이 없어서 여가시간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며(42.6%), 가족들의 이해부족(27.6%)과 기구-시설 부족(21.4%)도 여가를 가지지 못하는 큰 이유로 나타났습니다.(부산광역시 아동청소년회관이 부산시내 중고등학생 8백 2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임)이들은 주로 TV 시청(43%), 음상감상(29%)으로 여가를 보내고 있으며, 여가 시설로는 노래방과 오락실(47.1%)을 가장 많이 이용했습니다.반면에 체육시설(10.3%)이나 도서관(3.8%)-청소년 시설(3%)등은 이용자가 적어 청소년들의 건전한 여가생활을 위한 여건이 크게 미흡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최근 극중 무술.살상장면이 빈번한 TV무협물<판관 포청천> <칠협오의>와 범행.폭력장면이 빈번한 <경찰청 사람들>, 폭력 살인을 미화(美化)시킨 <모래시계>, 존속 폭력 살해를 서슴없이 다룬 <아들의 여자> 등 의 4-9세 어린이 시청률(30.7%)이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협물은 아니나 상류층 행태를 소재로 한 <호텔>(한 여자를 두고 형제간의 사랑 싸움을 벌이는 불륜 조장 드라마)과 연예계 내막을 파헤치는 <갈채> 또한 4-9세 어린이 시청률이 21.4%,17.5%로 전 연령대별 2위를 기록,성인 프로에 대한 어린이의 무차별시청 양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증앙일보 95.4.3일자)
  "10대들의 해방구"라고 불리는 서울 돈암동 거리에는 10대 <삐끼>(일본어 '히끼'로서 당긴다는 뜻) 들이 오후 6-9시까지는 주로 소주방과 비디오방을 대상으로,  밤 9시가 넘어서면 락카페나 노래방, 자정을 넘어서부터는 심야영업을 하는 술집을 대상으로 호객 행위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들은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술을 마시면서 매상을 올리는 역할을 하며 매춘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들 10대 삐끼들이 가출한 대부분의 원인은 그들을 억압하는 학교 교육과 가정의 불화에 있다고 합니다. 서울 부산 등 7개 대도시 남녀 고등학교 5천 2백 32명을 대상으로 가출에 대한 설문조사결과 대상자의 14.3%가 직접 가출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21.9%만이 '절대 가출해서는 안된다.'고 대답한 반면 78.1%는 '가출할 수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또한 가출 경험이 있는 학생들의 경우 23.8%가 레스토랑, 카페, 술집 등 유흥업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습니다.(YMCA청소년 상담실) 이들의 가출 동기(가출 청소년 100명-남50명,여50명을 대상으로 함)에 대해 순위별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부모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남50명,여32명)
  (2) 간섭받기 싫어서(남43명,여29명)
  (3) 공부가 싫어서(남39명,여41명)
  (4) 친구의 꼬임(남28명,여49명)
  (5) 가정불화(남25명,여34명)
  (6) 부모기대와 공부에 대한 중압감(남21명,여17명)
  (7) 이성문제(남15명,여8명)
  (8) 부모의 이혼(남7명,여6명)

  "(잠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17)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잠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우리 나라 주부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여성의 95.8%가 '매를 때려 가르친다.'였고 불과 4.2%만이 '어떤 일이 있어도 매를 들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여성동아 94.12월호,pp 608-611) 가능한대로 매를 들지않고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1. 본인이 매를 맞는 이유를 분명히 알려 주어야 합니다.
  2. 체벌을 가할 때는 그 분위기가 엄숙하고 가급적 아버지가 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별히 국민학교에서 남자 선생님이 여자 아이를, 여자 선생님이 남자 아이를 체벌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체벌이 심한 경우 이성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6세 이하의 아동에 대한 체벌은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때는 선악과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 기준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막무가내로 떼를 쓸 경우에는 떼를 무시하거나 받아주지 않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부득이 체벌할 때도 1년에 1-2회를 넘기지 않아야 합니다.
  4. 중학생 이상일 경우에는 매를 맞을 것인지 본인에게 묻고 매를 스스로 가져오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단 매를 때린 후에는 마음의 앙금을 청산하는 절차를 밟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때 장황한 설교가 아닌 간단한 표현이 좋습니다.
  5. 매를 드는 대신에 꾸지람을 할 때도 유의해야 합니다. 미주알 고주알 잘못을 따지는 '설교형', 너는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니 대책이 없구나 하는 '사방포위형', 과거의 잘못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소급형', 행동을 나무라면서 공부 문제까지 비난하는 '복합형', 누구누구는 잘하는 데 너는 왜 이 모양이냐 하는 '비교형', 이런 짓을 하다니 참 똑똑하구나 하는 '냉소형', 네가 착한 짓을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식의 '무능예언형', 한번 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는 '강압형' 등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꾸지람은 해당 사유에 대한 질책에 국한해야 하며, 반드시 잘못을 저지른 이유에 대한 변명을 듣고 '위엄있고 짤막하게 처분을 내릴수록 효과적입니다.
  반면에 다음과 같은 종류의 부모들도 있다고 합니다. 만점짜리 학부모가 되는 길(목회시사정보94.12월호)을 소개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야단치는 부모가 의외로 많습니다.
  1. 화풀이형(型) 부모---공부를 잘 하라고 타이르는 자세라기 보다 부모 자신의 울분을 터뜨리는 의도가 다분히 있습니다.이런 부모는 낙제점입니다.이런 부모 밑에서는 영락없이 낙방합니다.공부가 잘 안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 죽을 지경인데 부모마저 야단치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반발심에서 부모가 보는 앞에서 더 공부를 하지 않고 놀기도 하고 용기를 잃고 주저않고 맙니다.
  2. 설교형의 부모---자극을 주려고 옆집 학생은 이러저러하게 열심히 공부한다고 간접적으로 압력을 넣는 부모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대학에 가야 한다고 격려해주는 부모도 있습니다.이런 부모는60점짜리 밖에 안됩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는 입시에 성공하기는 아주 힘듭니다. 백해무익한 말입니다. 누가 그걸 모릅니까? 다만 공부가 안돼서 걱정인데 그런 마음은 몰라주고 설교만 하니 쓸데 없는 간섭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짜증을 불러 일으키고 급기야는 자포자기하기 십상입니다.
  3. 침묵형 부모---아무 말도 하지 않는 부모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속만 태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나 조심스럽게 살핍니다. 이런 부모는 70점짜리입니다. 해로운 말을 하여서 수험생을 자극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수험생의 고충을 알아주는 자세가 없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부모의 침묵과 감시가 오히려 부담을 주게 됩니다.
  4. 위안형 부모---"마음을 크게 먹어라.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 않니?", "꼭 일류에 갈 것 없다.네가 원하는 공부만 할 수 있으면 된다." 는 식으로 안심을 시켜주는 부모로 80점짜리 부모입니다. 수험생에게 해를 끼치는 말은 아니지만 결코 도움을 주는 말도 못합니다. 불안한 수험생의 심정에서는 그런 부모의 말이 진심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속과 겉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일류에 들어가기를 부모가 속으로는 기대하고 있지만 자기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습니다. 좋은 상급학교에 못들어가면 자기에 대해 부모가 몹시 실망할 것이라는 점을 꿰뚫어 봅니다. 부모가 위선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5. 친절한 안내형 부모---불안해하는 학생과 자상한 대화를 나누는 부모입니다. 왜 공부가 안되는가? 기분은 어떤가? 성적은 어느 정도인가? 상급학교는 어디를 지망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알아보고 이런저런 방침이 좋겠다고 의견을 말해주는 부모입니다. 이런 부모는 90점입니다.아이의 문제를 일일이 함께 상의하고 걱정해주고 안내해 줍니다.그러나 이런 부모의 자상한 배려와 관심을 오히려 부담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6. 고통을 함께 나누는 동참형 부모---"너 요새 힘들지? " 혹은 " 너 요새 불안하겠구나!"하는 한 마디를 던지면서 어깨에 손을 살며시 얹어보는 부모로써 100점짜리입니다. 그밖에는 아무 말이 필요없습니다. 아이는 그저 빙긋이 웃음을 지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고충을 이해해준다고 느끼고 마음을 가다듬어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더러는 이런 때 이러니 저러니 자기 고충을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그냥 귀담아 들어주면 됩니다. 말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들어주는 그 자체가 훌륭한 치료인 셈입니다. 아이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부모 밑에서는 입시에 성공하기 마련입니다.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다음 기회에 자신있게 도전하는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아이들이 입시에 성공하느냐는 전적으로 부모의 지혜와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부모가 불안해하면 아이는 마음을 가다듬지 못합니다. 부모가 대범할 때 아이는 차분히 공부할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 아이를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부모보다 "축 늘어진 아이의 고달픈 마음을 포근히 감싸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롯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은 숙부인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삶을 배울 수 있는 좋은 환경 속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한번의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 영원히 그릇된 인생을 살게 되는 성경 속의 비극적인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갈라서게 될 때 자신과 자녀의 영적인 생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물질적인 풍부함만을 구하면서 기름진 요단 들판을 택하였고 종국에는 소돔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창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창13: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창13: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창13:13)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롯은 소돔의 성문에 앉을 수 있는 지도자적인 지위도 얻었고 재물도 얻게 되었습니다.

  "(창19: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그러나 롯은 영적인 면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 육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여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두 딸들은 소돔의 사고방식에 젖어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일을 스스럼없이 행하여 아버지 롯에게 술을 먹이고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손을 잇는 일을 하였습니다.

  "(창19:30)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창19:31)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창19:32)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창19:33)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자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창19:34) 이튿날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창19:35)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창19:36)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창19:37)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창19:38)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이는 모두 다 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헌신하면서 살기를 거절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모든 것이 소돔처럼 죄로 오염되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올바른 선택을, 가장된 아버지가 앞장서서 행하면서 말씀의 원리대로 자녀들 앞에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세번째로,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를 살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으로 알려진 삼손은 경건한 아버지 마노아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마노아는 자녀교육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하였습니다.

  "(삿13:8)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마노아의 관심사는 "(삿13:12)....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였습니다. 마노아는 나실인이었던 아들 삼손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아버지가 훈계한 대로 바르게 자라지 않고 점차적으로 나실인의 규례를 어기다가 마침내는 머리까지 깍이고 두 눈이 뽑히어 연자멧돌을 돌리는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삿16: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삿16: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삿16:18) 들릴라가 삼손의 진정을 다 토함을 보고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을 불러 가로되 삼손이 내게 진정을 토하였으니 이제 한번만 올라오라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삿16:19) 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삿16:20)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삿16:21)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어버지 마노아는 어릴 때부터 아들인 삼손을 하나님 말씀대로 길렀지만 아버지에게서 독립을 하면서부터 삼손은 죄의 길로 들어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녀교육이 경건한 아버지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는 경우을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녀는 아버지와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삼손이 다시 힘을 얻은 후에는 그 힘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한 것을 보면서 어릴 때 받은 경건한 아버지의 영향은 결코 헛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네번째 아버지 상은 에녹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하다가 들림을 받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에녹은 이 땅에서 365년을 살았는데 하나님과 동행한 연수가 300년이니 처음 65년 동안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 함께 깊이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65세가 됐을 때 어떠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성경은 에녹이 65세 때에 므드셀라를 낳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창5:21)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5:22)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5:23) 그가 삼백 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패역한 세상에서 자기의 믿음을 지키면서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녀의 믿음까지는 지켜줄 수가 없음을 알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하나님과 밀접하게 동행하면서 본을 보여주는 것만이 최선의 자녀교육임을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여하튼 에녹은 므드셀라가 태어나는 그때부터 므드셀라 앞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300년 동안이나 일관되게 보여주었습니다.
  다섯째,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가 있습니다. 엘가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한 절차에 의해 규정된 제사를 합당한 장소에서 규칙적으로 드리는 가정이었습니다.

  "(삼상1: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은 엘가나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 엘가나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전체가 하나님의 절기 준수 명령(출23:14-17)에 순종하여 함께 실로에 올라간 것입니다. 이는 엘가나의  온 가정이 하나님 말씀을 중히 여겼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가면 따라가고 말씀이 멈추면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서는 순종의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엘가나의 가정은 이처럼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할뿐만 아니라 전 가족이 함께 신앙 생활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삼상1: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가족 중 어떤 한 사람이나 일부분만의 믿음이 전 가족의 구원을 약속받을 수 있게 하거나 전 가족의 신앙 생활을 대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온 식구가 믿음이 하나 되어 서로 아끼고 돌아보며, 주 안에서 사랑으로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을 함께 하는 가정이 진정 모범적이며 복된 가정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일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사무엘을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과 약속한대로 여호와의 전, 곧 성전에 바치는데 남편과 아내가 뜻을 같이 했던 것입니다.

  "(삼상1: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삼상1: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삼상1: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삼상1:25)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삼상1:26)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삼상1: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삼상1: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엘가나의 가정은 하나님과 약속(서원)한 것을 반드시 지키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해서 그의 아들 사무엘은 성전에서 자라게 되었고, 그는 말을 배우기도 전에 성전 생활 속에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일찌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익숙하게 배우게 된 것입니다.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아버지,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아버지야말로 이 시대에 추구하고 따라야 할 가장 모범적인 아버지상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아버지로 불려지는 바울을 통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살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영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유순한 유모와 같이 애정을 나타내 보이면서 성도들을 사모하며 살았던 영적 아버지였습니다.

  "(살전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둘째로, 그는 목숨까지도 주기를 즐겨하는 투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살전2:8)...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셋째로, 바울 사도는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는 근면한 삶을 살았습니다.

  "(살전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넷째로,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하는 영적 생활의 진실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는 본을 보인 삶을 살았습니다.

  "(살전2: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다섯째로, 그는 아비가 자녀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듯이 적극적인 영향을 주면서 살았습니다.

  "(살전2: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살전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일반적으로 아버지들 중에는 권위주의형이 있고, 그와는 정반대로 자녀가 원하는 대로 개방적으로만 키우는 자유 방임형이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주의형이나 자유방임형은 모두 한쪽으로만 치우친 그릇된 방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녀교육과 관련해 아버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들은 자녀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대하기보다는 자기의 소유물처럼 함부로 대하기 때문에 그 밑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은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속으로 쌓아가면서 생활하게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지나친 꾸지람만을 받으며 자란 자녀들은 위축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매사를 비관적으로만 바라보거나 아니면 아버지처럼 다른 사람을 향하여 독선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일그러진 인격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골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그와는 정반대로 자유방임형의 아버지는 자녀의 삶 속에 바른 동기와 자세를 갖도록 도와주지는 않고 오로지 자녀의 마음만을 평하게 해주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그 밑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은 고집이 세고 순종할 줄 모르며 자기 자신만 아는 극히 이기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매사에 절제하거나 인내하지 못하고 책임이 주어지는 일은 회피해가면서 무사안일한 삶을 살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중심적인 아버지는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그 밑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은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서 자신과 남을 이해하며 인정해주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삶을 살게 되며,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양과 훈계로 양육을 받으며 자라기 때문에 진리의 터 위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중심의 아버지는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지혜를 가진 사람이란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사모하며 모든 일을 하나님과 상의하는 자, 둘째 삶의 목적과 보람을 알고 있는 자, 셋째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자, 넷째 물질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쓰는 자, 다섯째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결정하는 자, 여섯째 자제할 줄 아는 자, 일곱째 스스로의 약점을 알아 겸손하고 약점을 피해 일할 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삶의 지혜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먼저 자녀들이 신앙을 가지도록 교육해야만 합니다. 어버지는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신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자녀들에게 신앙을 넣어 주기 위해서는 말씀을 강론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의 본을 보이라고 아버지들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생활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6장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다한 이방인의 가치관이 우굴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광야에 있을 때 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의 가치관과 생활태도를 확고히 다져놓아야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말씀을 지켜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이와같이 우리 아버지들도 자녀들이 어릴 때에 말씀과 생활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을 다져주어야만 합니다.

  "(잠3: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잠3:2)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잠3: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잠3:4)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잠3: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잠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잠3: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잠3: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 하지 말라 (잠3: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3:13)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잠3:14)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잠3: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수 없도다 (잠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잠3: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잠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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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랑의 가정


"(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엡5: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엡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엡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이어령의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사랑을 음료수의 성질로 바꿔 본다면 우유와 포도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유의 사랑은 영양가만 있어 그냥 맹숭맹숭하게 살만 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담그자마자 마셔서는 안됩니다. 어두운 지하실에서 묵힐수록 제맛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시간과 함께 발효하게 됩니다. 포도주는 우리에게 기다림과 참을성을, 그리고 한방울의 가장 값진 한순간의 그 도취를 위해서 오랜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우유는 짜내는 그 순간이 가장 신선한 것입니다. 조금만 묵혀 두어도 변질되고 썩어 버리고 맙니다. 보자마자 마셔 버려야 불안하지 않은 것이 우유의 특성입니다.
미국 문화로 상징되는 현대의 우유문화는 빨리 소비해 버리는 것, 먹어 없애는 것, 발효를 거부하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란서적인 것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포도주의 문화는 소비보다 발효되는 창조의 그 시간이 더 길고 묵을수록 완전하다는데 그 특성이 있습니다.
요즈음의 인스턴트 러브는 우유의 문화, 녹기 전에 먹어버리는 아이스크림 문화의 대표적인 풍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경주의 석굴암을 구경하던 미국 관관객들의 말이 생각납니다. 석굴암의 부처는 과연 파란 눈으로 보아도 여전히 아름다움과 자비의 극치를 나타낸 <기적의 돌>로 비칠 것인가? 나는 호기심을 품고 그들의 말을 몰래 엿들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닙니다. 무엄하게도 말입니다. 금발의 파란 눈의 한 여인은 부처의 엉덩이쪽을 손가락질하면서 킬킬거리고 웃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투 패트!(too fat, 야! 너무 살쪘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투 패트--. 지금도 나는 그때의 충격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상과 비교해보면 분명히 불상은 너무 살이 쪄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 당신도 생각해 보십시오. 연화대에 앉은 부처를 십자가에 매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 뚱뚱한 예수, 배가 나온 예수, 체중이 레슬러처럼 100kg이 되는 예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에서 보듯이 그 분은 뒤틀린 철사처럼 야위어 있습니다.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아파하고 슬퍼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사랑>은 자비와도 또 다른 것입니다. 자비는 연민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연민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희열만이 아니라 위험과 비탄과 어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것은 편안함보다 <야윈> 모습으로 상징되는 세계입니다.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초상집을 잠시 들여다 보십시오. 제일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사람이야말로 생시에 그 고인을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입니다. ..... 나는 예수님의 모습만을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에게는 원죄의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 전체가 초상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손바닥의 못자국을 보였습니다. 고통의 못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사랑을 증명해 보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손바닥에 찍힌 그러한 못자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옆구리에 창자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예수의 것보다도 작고 희미할 망정, 누군가를 절실히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고통의 상흔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선택한 사람은 누구나 마굿간에 태어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같은 괴로운 삶을 선택한 사람인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편안한 삶, 살쪄가는 삶, 부유한 삶을 원한다면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그 못자국을 보여주는 것으로만 서로의 마음을 열어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보면서도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는 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당신머저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준 그 분이 이따금 예고없이 나타나는 까닭입니다.....

오늘 본문 중 "(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는 말씀에 기초되는 것은 바로 남편이 아내에게 나타내 주어야 할 사랑인 것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사랑은 첫째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마치 그리스도게서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를 위해 그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이기적인 사랑이어서는 안됩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은 사실이나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결코 폭군과 같이 통제하지 않는 사랑과 아내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처한 남자가 50세에 재혼했습니다. 신혼 여행 때 가게의 진열장에 진열된 진주 목걸이를 구경하며 부인이 "저렇게 예쁜 목걸이는 굉장히 비쌀텐데,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으니 진열하겠지요?" 하고 불쑥 말했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났을 때, 이 부인은 불치의 병에 걸렸으며 의사는 남편에게 그녀가 6개월 이상 살 수 없다는 상황를 알려주었습니다. 마침 결혼 10주년 기념일이 되어, 이들 부부는 자기들의 결혼식 때 주례를 맡아 주었던 포터 목사를 집에 초청했습니다. 남편은 이미 60세인데 실제로는 70세 정도로 늙어 보였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농사꾼, 그것도 몹시 가난한 농사꾼이었습니다. 조촐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이 남편은 부인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숨겨 두었던 진주 목걸이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부인의 목에 걸어 주었습니다. 목걸이를 본 부인은 몹시 놀랐습니다. 그것을 살 돈이 남편에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 훔쳐온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때 남편은 설명했습니다. 그는 결혼 당시 아내에게 진주 목걸이를 사 줄 결심을 하고 좋아하던 담배와 맥주를 끊었고, 심한 노동을 하면서도 콜라 한 병 마시지 않았으며, 푼돈을 10년 동안 모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What made you do it?)"라고 묻는 아내에게 백발이 된 남편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포터 목사는 "그 큰 남자가 유난히 작은 부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없이 함께 울던 장면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라고 술회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안 먹고 1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그 인내와 절제와 희생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단 하나의 동기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깨끗이 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위대한 고전 학자인 버랄(A.W.Verrall)이 말하기를 고대문명이 사멸한 중요한 병폐의 하나는 여성을 낮추어본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성을 매우 낮추어 보았습니다. 유대인의 아침 기도문 가운데는 유대인 남자들이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방인이나, 노예나, 여자로 만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여성에 관한 유대인의 모든 율법을 저하시킨 것은 유대인의 법에서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한 것 때문입니다. 여자는 아무런 법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여자는 전적으로 남편의 소유물이었으며 남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혼도 남편의 마음대로였습니다. 이혼법은 신명기 24:1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신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유명한 샴마이가 주동이 된 엄격한 랍비들은 "수치되는 일"이란 구절이 오직 간음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그 아내가 이세벨과 같은 악처라 할지라도 간음한 사실이 아니고서는 남편이 그 아내를 이혼시킬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보다 더 우세한 자유주의적 학파의 아키바라고 라는 랍비는 "기뻐하지 아니하거든"는 구절을 만일 남편이 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를 발견하면 그는 자기 아내와 이혼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율법을 더욱 더 악화시킨 것은 다음과 사실들입니다. 첫째, 아내는 그 남편이 문둥이나 배교자나 아주 흉한 직업을 가지게 되거나 하지 않는 한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유대법에 의하면 남편은 어떤 이유로든지 아내와 이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어떤 이유로든지 남편과 이혼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결혼법에 있어서 여자는 아무런 힘도 없으며 보호받을 수도 없습니다. 둘째로, 이혼 수속은 비참할 정도로 용이합니다. 어떤 남편이 그 아내와 이혼하기를 원하면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주기만 하면 됩니다. 한가지 조건이 있다면 아내가 가져왔던 지참금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시작될 당시 결혼제도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헬라의 형편은 더욱 더 심각했습니다. 헬라인의 생활에서 불가결한 요소가 바로 매춘행위였습니다. 그들은 합법적인 자녀를 얻기 위해 아내를 얻었고, 또 모든 집안 일을 충실히 관리하도록 하기 위해 아내를 얻었습니다. 헬라 상류 사회의 부인들은 완전히 격리된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부인은 절대로 공적인 생활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절대로 혼자서 거리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식사시간이나 사교적인 모임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헬라에는 법적인 이혼 수속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헬라에 있어서는 가정생활이나 가족생활이 거의 소멸될 단계에 있었으며 절개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바울 당시의 로마는 어떻했는가? 로마의 가정생활은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세네카는 부인들은 이혼하기 위해 결혼하며, 결혼하기 위해 이혼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의 분위기는 간음으로 꽉차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순결은 증대하는 사치 문명 속에서의 하나의 조난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가정의 참된 사랑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이들 말고는 여자들처럼 그리스도께 신세를 진 사람들이 또 없다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인들 하나하나가 신앙고백을 할 때 물로 씻어 주는 것으로 교회를 깨끗케 하셨으며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세례의 물로 씻고, 신앙고백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자신에게 합당하게 깨끗하고 흠이 없고 성별된 것으로 티도 없고 주름잡힌 것도 없도록 돌봐 주셨습니다. 사람을 끌어내리는 사랑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거짓된 사랑입니다. 인격을 순화시키는 대신 거칠게 하는 사랑, 거짓을 말하게 하는 사랑, 도덕적인 기질을 약화시키는 사랑, 인간을 더 악한 인간으로 만드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모든 생명을 깨끗케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돌봐주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을 사랑하듯 하여야 합니다. 참사랑은 언제나 사랑하는 자를 소중히 하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봉사를 시키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육체적인 위로를 보증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자기의 편의를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사랑하는 자를 소중히 하는 것입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남편이 아내를 단지 밥을 짓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집안을 청소하는 사람,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일종의 영원한 종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소중이 돌봐주어야 할 책임을 진 사람으로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옵니다. 거실에는 아이들의 옷이랑 장난감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습니다. 부엌에는 아직도 씻지 않은 접시와 컵들이 쌓여 있습니다. 피로한 남편은 불쾌한 낯으로 소파에 몸을 던집니다. 남편은 자기가 직장에 가 있는 동안에 아내이자 아이들 엄마인 부인이 하루 종일 낮잠을 자거나 TV를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남편이 보지 못하는 사이에 엄마는 무척 바빴습니다. 한 살, 세 살, 다섯 살난 세 아이를 돌보며 32회 기저귀를 갈았고, 71회 숟가락을 아이들 입에 대주었으며, 화장실 변기에서 노는 아이들을 13회 밖으로 끌어냈고, 우는 아이들의 눈물을 49회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습니다. 상처난 아이들의 손가락에 9회 반창고를 갈아 붙였고, 32회 손을 씻어 주었습니다. 속옷, 겉옷 등 옷을 입히고 벗기고 한 것이 64회였는데 세 아이가 18회 옷을 더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네를 밀어준 것이 623회입니다. 남편이 돌아올 무렵 엄마는 무척 지쳐 있었습니다. 평화스럽게 잠든 아기의 얼굴만이 땀에 대한 유일한 보상인 이 젊은 아내에게 남편이 찌푸린 얼굴로 돌아 앉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행동입니다. 아기 엄마의 작업량에 대한 위의 숫자는 교육학자 쿠즈마 박사가, 젊은 엄마로서 직접 세 아이를 키우며 어느 날 통계를 내 본 자신의 경험이었습니다. 세 아이를 18세까지 키울 경우, 엄마가 이 아이들을 위하여 바치는 시간은 1만 8천 시간입니다. 코넬대학의 두 교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이 둘을 키우는 가정의 경우 직장을 가진 주부는 하루 평균 4시간을 가사와 양육에 할애하고 있었고 남편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시간당 노동의 가격을 8달러로 치면 어머니는 두 아이와 청소, 부엌 일 등을 위하여 연간 1만 2천 달러의 일을 자기의 직업 이외에 하고 있는 셈입니다. 못 아버지들이 고개를 숙일 만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니콜리 교수는 "두 아이를 18세까지 양육하는 어머니는 그녀의 전생애의 3분의 2라는 시간을 바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란 이름은 과연 희생의 상징입니다. 이러한 아내를 돌봐주는 남편의 마음이 참사랑인 것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로서 남편과 아내의 모든 관계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주님 앞에서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있을 때 참사랑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가정을 사랑의 눈동자로 바라보시며 가정의 평화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신 가정들이 되시므로 건강한 가정, 건강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알베르트 카뮈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기를 썼습니다. 아버지는 카뮈를 낳은 지 1개월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하며 카뮈를 키웠는데 그녀는 거의 평생을 알제리에서 가정부로 일을 했습니다. 아들 카뮈는 세계 정상을 달리는 지식인이 되었으나 어머니는 교육도 받지 못한 노동자였으며, 더구나 남편이 죽을 때쯤부터 완전히 귀가 먹어 아들과의 대화조차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카뮈는 다음과 같이 어머니를 회상했습니다. "어머니의 눈동자가 없었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랑의 눈동자는 잠시도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에게 만족과 용기를 주었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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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삶의 영


"(겔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37: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겔37: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겔37: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37: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이스라엘은 B.C. 586년 바벨론의 침공으로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당시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침입하여 성전 안에서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목베어 죽였습니다.

"(대하36:17)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유다 왕 여호야긴은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 역시도 포로로 바벨론 땅에 잡혀갔습니다. 행여 고국에 남겨졌던 사람들도 죽임을 당하거나 애굽 등지로 피난해야 했습니다. 이역 만리에서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 성령에 이끌려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골짜기에 "아주 마른 뼈들"로 가득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에스겔은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본문에서 "마른 뼈"는 바로 이같은 그들의 절망적인 상태를 비유한 것입니다. 2절 하반부에 "이 뼈들이 아주 말랐다."는 표현은 완전한 절망, 회복 불가능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이 현재 기거하고 있는 바벨론 땅은 "골짜기"(2절)입니다. "무덤"(12절)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지(死地)에서 죽은 자와 같은 생활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 환상은 우리가 예수 믿기 전 상황과도 같은 것을 뜻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기 전에는 우리 모두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말라 죽은 뼈들"에 불과 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성령을 통해서 회복 불가능의 절망적인 이스라엘이 큰 군대로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도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이미 문민 정부는 붕괴되었습니다. 2,500년 전 이스라엘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골짜기에 마른 뼈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번만 명령하시면 이 나라 민족이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며" "생기가 사방에서 불어오게 되면" 회복되어 살아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바람아, 대한민국의 사방에서 불어라!' 이렇게 한번만 명령을 내리시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새롭게 창조될 줄 믿습니다.

1. 성령은 생명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인간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인간에게 생명의 숨, 하나님의 입김, 성령을 불어넣자 인간은 살아있는 영, 즉 생령이 되었습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욥33:4)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하나님의 입김을 통해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전3: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전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전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이처럼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하나님이 그의 생명의 영을 불어넣음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고 그 영을 거두시면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시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시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욥34:14)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욥34:15)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   

이와같이 성령은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 삶의 힘이며 그들을 새롭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과 삶은 성령이 함께 하는 한 그 생명을 유지하며 그의 삶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육에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며, 육의 열매를 맺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은 미래에 성도들이 가지고 살아야 할 신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불트만의 말대로 성령은 "미래성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은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기쁨, 실망과 증오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사랑 가운데 일어나는 미래의 희락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현재를 결정하는 삶의 능력입니다. 성령 가운데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말합니다. 성령 가운데 사는 사람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생활 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국 애리조나 주에 인디언을 보호하는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인디언들에게 세금을 면제해주고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국가적인 보호와 혜택을 받아서 살고 있는 인디언들이 거의 알콜 중독에 걸려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그곳에 사는 백인들은 혜택이 없어도 윤택하게 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의 집이나 거리는 더럽고 추하고 무질서했습니다. 술병을 하나씩 손에 들고 비틀거리면서 거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미국 사람들이지만 세금도 내지 아니하고 보호구역에 사는 인디언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것은 조건과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제도와 사회보장 제도가 아무리 잘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자유와 정의의 사회를 이룩할 수 없습니다. 선거제도를 바꾼다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실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수 있는 길은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지식이나 경험을 통해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은 오직 성령의 능력 뿐입니다.   
성령은 "골짜기의 마른 뼈들"같은 죽은 백성, 죽은 나라에 생명을 불어넣어 살려내 새롭게 창조할 뿐만 아니라 위기 가운데 빠진 나라 백성을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신, 성령은 사사들을 일으키며, 그 사사들은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싸우고 그의 백성을 위기에서 구원하십니다.

"(삿3:10)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삿6: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여호와의 신, 성령은 왕과 함께 하시므로 왕에게 지혜와 힘과 능력을 부어주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게 하기도 하며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왕의 소유물이 되어서 왕가(王家)에 세습적으로 전승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하나님을 버릴 때 그 왕을 떠나게 됩니다. 성령이 떠나간 왕은 모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패하고 맙니다. 성령이 떠나간 사울 왕은 결국 다윗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삼상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성령은 위기 가운데 있는 나라 백성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마른 뼈들"처럼 죽어버린 나라 민족까지도 생명의 바람을 불어넣어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성령의 바람이 "마른 뼈들로"로 가득찬 삼천리 강산에,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충만하게 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불면 황폐한 땅도 살만한 거룩한 동산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사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11: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영, 성령은 땅 위의 모든 생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실 것입니다. 황무지와 같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세계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아름다운 동산으로 만들것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 삼천리 금수강산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더럽혀진 이 남한 땅을 깨끗이 씻으시며, 피로 얼룩진 저 북한 땅을 청결케 하시므로 대한 민국이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사4:4)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겔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겔11: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18:31)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겔18: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이는 힘과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슥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성령의 역사가, "마른 뼈들"을 "이스라엘의 큰 군대"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무엇보다 먼저 우리 가정에서부터, 우리 교회에서부터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강림의 성령의 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의 가정에 죽은 생명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이 나라에 죽은 생명들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2. 성령은 죄악을 심판하며 소멸하는 영으로 역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좌절과 실망에 빠진 나라 백성을 다시 소생시키며 위로하시고 희망과 용기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성령은 참으로 성령은 위로와 희망의 능력입니다.
시카고의 어느 상점이 화재가 나서 다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그 상점이 이제는 폐업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잿더미가 된 상점 앞에 간판이 나붙었는데,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집의 모든 것은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와 자식들과 희망은 타지 않았습니다.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영업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실망하고 슬퍼할 때도 성령의 사람들은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언제나 새로운 소망을 주시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믿음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살후2: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살후2: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령은 위로의 근원이시며,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고후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령은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위로와 희망 속에서 삶의 승리자가 되도록 하는 능력이십니다. 성령은 시련과 고통, 실망과 좌절에 빠진 성도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은 배반과 버림, 시련과 고통, 좌절과 절망을 체험하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세상을 이기신 하나님께서 지금 성령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시련과 고통, 실망과 좌절은 예수의 십자가 고난 속에서 해결되고 그의 부활의 영광 속에 극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성도들의 위로와 희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28:20)..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도들을 위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간섭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하나님의 장중에 두고 계십니다.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그러므로 성도들은 시련과 고통, 실망과 좌절이 아무리 클지라도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고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매우 연약하고 역사의 어두움은 깊지만, 그리스도는 이 어두움을 극복하였고, 이 어두움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기 때문에 미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깊은 밤에 나타나서 이 밤을 이겼기 때문에 우리의 밤이 아무리 어두워도 우리는 실망과 좌절로 끝날 수 없습니다. 밤은 깊지만 낮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롬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롬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롬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롬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롬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성령의 위로는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의 평안과 내적인 자기만족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도록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위로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시련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위로를 전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를 받은 사람의 마음은 사랑의 영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영으로 가득한 성도는 다른 사람들의 시련과 고통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게 합니다. 위로의 성령은 바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성령의 위로를 받은 사람은 역사의 도피자가 되지 않고 역사의 창조적 주체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주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가난하고 병든 자, 눌리고 갇힌 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도록하기 위해서입니다.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땅의 지도자들에게서 쓰라린 실망과 좌절감을 느끼고 사는 이 나라 백성들에게 성령의 위로와 희망과 용기가 충만하시므로 역사의 깊은 어두움이 사라지고 희망의 새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원합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소생할 희망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가 거듭날 소망이 있습니다. 성령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3. 성령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성령은 "사랑의 영"이십니다. 사랑에는 고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사랑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시는 영이십니다. 참된 기쁨과 행복은 소유와 향락에 있지 않고, 고난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랑에 있습니다. 참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 속에 나타납니다. 성령은 예수를 슈퍼맨(Super man)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참 사랑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상대방의 조건이나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나 조건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은 자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랑의 극치는 죄인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성령은 이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았는지 아니면 악령이나 인령(人靈)이나 잡령(雜靈)을 받았는가의 여부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가 나타나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것 같고 신통한 기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고난당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지 않으면 그가 참 성령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도의 생활에 "예수의 흔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갈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돈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어느 미국인 부자의 부인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부터 가난한 사람에 대해 큰 책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수수한 옷을 입고 먹을 것, 입을 것, 약품 등을 싸 가지고 빈민촌을 찾아가 나누어 주는 생활을 했습니다. 한 번은 그런 부인의 모습을 한 소녀가 가만히 쳐다 보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예수님의 부인이셔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고 성령과 함께 동행할 때에 이웃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같은 삶이 바로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랑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령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함으로써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만드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사랑하므로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경험한 무한한 십자가의 사랑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면서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며 그를 자유롭게 하며 그와 정당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1946년에 독일 변방에서 고트레브스키란 깡패가 한 농장에 들어가 하멜만 씨의 열 식구를 다 죽이는 가운데, 하멜만 씨는 총 네발을 맞으면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 살인범이 20년 형을 살고 나서, 석방하려고 하는데, 받아 줄 사람이 없어서 출감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그 소식을 들은 하멜만 씨는 자기가 받아서 돌봐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자기 가족을 몰살시킨 사람에게 이렇게 대우할 수 있느냐고 하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용서해 주셨으니, 나도 이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같은 사랑의 용서는 성령의 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소년이 "용서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그것은 꽃이 짓밟힐 때에도 향기를 내뿜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바로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밟힘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억울함을 당해도, 독소를 내뿜지 말고 사랑의 향기를 뿜어야 합니다. 이는 성령의 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올바른 삶의 태도와 자유와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5:19) 육체의 일...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을 경계하고 버리며, "(갈5:22) 오직....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갈5:23) 온유와 절제" 등의 성령의 열매를 맺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새로운 존재로서 신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힘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십니다. 사랑은 우리 모두를 하나되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 모두를 하나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은 유대인들에게만 오지 않고 이방인들에게도 왔습니다.

"(행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행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리하여 성령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사이의 담을 허물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만들었습니다.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

성령은 이처럼 모든 분리된 것을 하나되게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로 상처받은 사랑과 평화를 치유하는 능력이십니다. 분열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요, 사랑 가운데서는 모든 것이 하나이고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는 위 아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여러 가지 직분들이 있지만 이 직분들에 있어서 위와 아래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녀의 차별이나 사회적 지위의 차별이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입니다. 성령은 왕이나 제사장, 예언자 등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부어지고 있기 때문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모두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렘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성령의 바람이 이 땅에 불어 이 나라 백성들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 여러분 가정과 우리 교회가 사랑과 진리로 하나되기를 축원합니다.

4. 마지막으로 성령은 거룩하며 거룩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생활은 세상을 등지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종교적 집단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어떤 형태로든지 등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성화는 가정과 사회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는 것은 성(聖)과 속(俗)을 분리하고 소위 종교적 은둔 생활을 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속(俗)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인간의 죄된 세상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성화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과 속(聖과 俗)의 한계를 깨트렸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병든 사람들, 문둥병자들, 정신병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예수는 '인류의 찌꺼기'라고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며 이 땅에 새 역사를 창조해가셨습니다. 성령은 단순히 방언이나 예언이나 환상이나 병고침 등의 기적을 일으키는 소위 신통하고 신비한 능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사랑, 하나님의 평화와 자유를 이 땅에 일으키는 창조적 능력입니다. 이와같은 창조적 역사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성령은 복음을 증거하는 진리의 성령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은 복음을 통하여 죄와 죽음의 세계 속에 새 역사를 창조합니다. 성령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 새 삶, 새 공동체, 새로운 관계와 사회, 세계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해방시키며 변화시키며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참으로 성령은 인간의 모든 삶을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리처드 버크의 <조나단 시걸>(갈매기의 꿈)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많은 갈매기들은 모두 부둣가만 맴돌면서 먹이를 찾고 있습니다. 좁은 부둣가에서 먹이를 찾다 보니 자연히 동료 갈매기들끼리 피나는 생존경쟁을 벌입니다. 또 부둣가라는 데가 온갖 오물을 버리는 곳이기 때문에 비린내가 많이 납니다. 이 비린내나는 환경 오염 속에 살게 됨으로써 그 오염된 먹이를 먹은 갈매기들은 결코 깨끗한 갈매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시걸이라는 이름을 가진 갈매기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른 갈매기들처럼 이 부둣가를 맴돌며 먹이나 찾아 다니는 그런 갈매기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다른 갈매기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서 수평선 너머 더 먼 바다를 바라보며 그 바다의 깨끗한 먹이를 먹으며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그는 열심히 날으는 연습을 해서 다른 동료 갈매기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높은 데로 올라가 "가장 높이 날아 올라간 갈매기는 가장 먼 바다를 볼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먼 바다, 수평선 너머 바다에 무슨 배가 지금 떠오고 있으며, 거기에 무슨 파도가 일고 있으며, 거기에서 무슨 고기들이 이쪽을 향해 지금 헤염쳐 오고 있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다른 갈매기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기 때문에, 오늘 이 시점에서, 자기가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다가오는 세계, 곧 미래의 세계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역사 저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다가올 미래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멀리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러운 세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성령충만하시고 이 땅에 삶의 영이 되신 성령의 바람이 불어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가정과 사회, 나라 민족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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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맥추절을 지키라


"(출23:14)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출23: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출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출23:17)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어도 일년에 세 번씩 큰 절기를 지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세 가지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로서 우리나라의 광복절과 같은 것입니다. 수장절은 지금의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리고 맥추절이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43년 동안 광야 생활을 거쳐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처음으로 보리를 심고 거두어 들인 그 축복을 잊지말고 지키라는 절기였습니다. 이 절기는 가나안 땅에서 처음 농사지어 거두어 들여 하나님께 먼저 바치었다해서 초실절이라고도 했습니다.

"(출34: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농사도 짓지 못할 황무지 광야에서 방랑과 질병과 기근과 기갈을 다 겪고 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농사지어 추수했을 때 그 감격이야말로 감개무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맥추절은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맥추절은 히브리어에서 50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을 지난 뒤 제 50일째 되는 날에 맥추절을 지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라"고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칠칠절, 맥추절, 초실절은 다 같은 날입니다. 칠칠절이라고 부를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던 날, 즉 유월절로부터 시작하여 7 주간(7일×7주) 후에 지켰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고, 초실절은 그 때가 마침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처음 농사지어 거두어 들인 것을 하나님께 바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으며, 맥추절은 그 처음 농사지어 거두어 들인 작물이 보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칠칠절이 주는 의미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칠칠절, 즉 유월절 후 7주간 후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간 금식 기도하면서 십계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십계명을 통해 비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을 맺게 된 것입니다. 소위 언약 백성이 된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며 율법이 없는 것을 통탄했습니다.  

"(애2:9)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꺾여 훼파되고 왕과 방백들이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 그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개인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마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좋은 열매를 맺으며, 주초를 반석 위에 지은 인생의 집, 주초를 반석 위에 지은 튼튼한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새로워지고 나라가 새로워지려면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도 인간이나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맥추절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말씀을 통해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복된 백성이 된 것을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을 초실절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초실절이란 바로 첫 열매를 뜻합니다. 맥추절도 마찬가지로 한 해 농사 중 첫 작물의 첫 열매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맥추절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첫 열매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가야 지방에 가서 전도를 했는데 그 가운데 제일 먼저 결신한 사람이 스데바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데바나를 가리켜 첫 열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고전16: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도 전도의 첫 열매를 무한히 감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여 내보내시면서 추수하러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말해 영적 추수의 소중함과 시급함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눅10: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눅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요4: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한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얻게 하는 것은 추수 가운데 가장 큰 추수이며 가장 시급하며 큰 추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을 가리켜 추수 때로 말씀하시었습니다.

"(마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13:27)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13: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알곡은 모아 천국 창고에, 쭉정이는 불에 던져 태워 버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추수는 성령으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으로 한 것은 바로 전도의 열매, 즉 영혼의 추수는 오직 성령의 나타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오늘 여러분에게 전해드린 전도 편지 <애플 편지>(숲 속의 사과나무 전도 편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샬롬! 목사님께 올립니다.
시간은 흘러서 어느덧 장마철이군요.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은혜속에서 평안히 잘 계신지요. 저는 목사님이 염려해주신 덕에 건강히 잘지내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항상 보내주시는 주보와 말씀의 샘을 감사히 받아서 잘 읽고 있습니다. 목사님께 편지라도 자주 올려야 하는데 정말로 죄송합니다.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목사님 제가 갑자기 펜을 들게 된 것은 제 마음이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목사님께 기도부탁하기 위해서 입니다. 목사님 저의 장인 어른이 계시는데 올해 61세, 성함은 이학선인데 현재 위암 말기라고 합니다. 또 가슴 아픈 것은 제 처 이보국, 나이는 39세입니다. 그런데 제 처도 간암 말기같습니다. 저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면 12살인 제 아들 정민이 얘기입니다. 우리 정민이는 7월에 태권도 3단을 딴다고 합니다. 현재 제 아내는 강원도 원주에 있는 유성제면이라는 공장에서 그곳 기숙사에서 아들과 함께 생활을 하고 있는데 몸이 많이 아파서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아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목사님 제 마음이 많이 아픈 것은 제 아내가 예수님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 처가 있는 주소는 이렇습니다. 강원도 원주시 우산동 296-11 유성제면이고 전화번호는 48-2409입니다. 목사님 시간이 허락되시면 제 처와 통화를 하셔서 예수믿고 거듭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해서요. 하나님께서는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만주의 주되시며 만군의 하나님이 되시쟎아요. 주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의로운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실 것을 저는 믿음으로 확신합니다. 목사님 저는 7월 7일부터 3일간 금식하면서 기도와 간구하는 삶을 3일간 작정하였습니다. 목사님 장인 어른과 처는 지금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부흥회를 하는 교회에 가서 예수 이름으로 안수를 받으면 병이 완치 될 것을 믿습니다. 아니면 기도원에 들어 가서 주님께 기도로 매달리면 병고침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이 하루 빨리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일이 급선무인데 큰 걱정입니다. 그리고 주님외에는 병에서 놓아줄 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군요. 베드로 전서 5장 7절 말씀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아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아멘 목사님 저는 이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기도하여 주십시오. 두서없이 올린 글 용서하세요.
목사님 이만 안녕히 계십시요.   
                  7월 7일 조경주 올림  

이 분이 가장 가슴아파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가족들이 예수를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지금 감옥에 갇혀 어찌 할 수 없는 몸이라 제발 자기 아내한테 전화라도 해서 하루 빨리 예수믿고 구원받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61세된 그의 장인이 위암 말기, 39세된 그의 아내가 간암 말기인데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병에서 놓임받는 것도 오직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것을 믿고 어서 빨리 예수님 앞에 돌아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급선무라는 것입니다. 조경주씨의 요청에 따라 시급히 원주에 전화했더니 돈이 없어서인지 전화가 결번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전도 책자와 <말씀의 샘>을 보내고 피차에 기도하고 있으므로 분명히 그 결실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매월 발행하는 전도 책자 <숲 속의 사과나무>가 얼마나 많이 전도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 매주 마다 날아오는 전도 감사 편지들입니다.

"(눅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세상에 농사는 풍년이 들기도 하고, 흉년이 들기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물질은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없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물질이나 곡식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하늘나라에 가서는 아무런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 하나가 하나님 품 안으로 돌아오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잔치가 벌어집니다.
1903년 1월 27일에 런던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불이 났는데, 300명 수용자 중에 50명이 타 죽고 250명이 구출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다 억지로 불에서 끄집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조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이 불쌍한 정신병자들이 취한 행동은, 마치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할 때, 저들이 취한 행동과 같았습니다.
1) "어떤 사람은 불났다는 것을 비웃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죄인들은 정신나간 사람들과 같아서, 위험을 위험인 줄 모르고 지옥불이나 죄의 불을 비웃습니다.
2) "어떤 사람들은 밤중인데 어디를 가느냐고 침대를 부여잡고 안떠나려고 하더랍니다." 이와같이 죄인들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하면, 현재 죄의 쾌락의 자리에서 떠나려 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람 못 피울까봐, 술 담배 끊으라고 할까봐 예수 안 믿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구원의 기쁨보다 저주의 상태에서 쾌락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3) "어떤 사람들은 구조 대원들을 물어 뜯고 머리칼을 잡아 뜯으며 싸우더랍니다." 얼마나 가련한 모습입니까? 정신병자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죄의 불, 지옥 불에서 끄집어 내려는 사람과 싸우려고만 드는 사람들은, 영적인 정신 병자들로서 마귀의 조종을 받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4) "어떤 사람들은 불이 다 붙어서 이미 문이 닫히고 손을 쓸 수 없을 때, 문을 두드리며 안타까와 하더랍니다." 불이 이미 그들을 집어 삼킨 다음에는 너무 늦은 것과 같이, 너무 늦게야 자신의 멸망 상태을 자각하고 안타까와 합니다.
이 큰 구원을 등한히 하다가 어떻게 하려 합니까?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은 불 속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고난이 있어도, 어떤 오해와 핍박을 받아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모든 다른 것은 뒤로 돌리고, 영혼 구원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자나 깨나 지옥불을 바라보면서, 죄의 불 속에서 타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구출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일이며, 가장 중요하며 시급한 일입니다.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씨는 10일 기자 회견에서 <북한특수부대원들에게 한국군 군복을 입혀 북침으로 위장한 뒤, 서울에 5, 6분동안 포를 쏘아 잿가루로 만든 다음 미군이 증원되기 전에 부산으로 밀고 내려간다>고 설명하고 <북한은 또 동경 등 몇 개 일본 도시를 미사일로 타격하여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함으로써 미군의 개입을 저지한다는 전략을 수립해 놓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북한은 결코 남한 혼자 잘 살게 놓아두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이어 자신마저 풍요에 젖어 귀순 당시의 각오가 흐트러질까 걱정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는 북한 김정일의 전쟁의지를 누누이 강조하면서 <북한이 설마 전쟁이야 일으키겠느냐>는 남쪽 사람들의 전쟁 불감증이 바로 물질적 풍요에서 온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이 <전쟁 불감증>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도덕 불감증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부정 부패가 만연하고 타락과 사치, 허영과 음란으로 말미암아 죄의 불이 곳곳에 붙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천당도 확실하게 있지만 지옥도 분명히 있습니다. 요즘 우리 나라 사람들은 지옥 불감증에 걸려 흥청망청,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지옥불에 대해서 누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어 하늘 나라에 그 이름이 녹명되지 못하면 지옥의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예수 믿지 아니하고 우상숭배하며 세상과 벗하며 사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불과 유황으로 영원토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난받는 지옥불에 들어갈 것입니다.

"(계14: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계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누구든지 예수믿어 알곡이 되지 못하고 불법을 행하는 가라지 같은 인생은 풀무불 지옥에 들어갈 것입니다.

"(마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마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13:42) 풀무 불에 던져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또한 사지가 멀쩡하여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사지백체가 떨어져 나간다해도 예수믿어 죄의 가리움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막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지옥은 영원토록 이를 부득부득 갊며 슬피 울며 물 한 방울을 애타게 호소하는 영벌의 장소입니다.

"(눅16: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천당가는 길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가라지 인생이요 틀림없이 지옥행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죽어도 천당에 가지만, 예수 믿지 아니하면 살아도 생지옥, 죽어도 불지옥입니다.
전쟁 불감증, 도덕 불감증, 지옥 불감증으로 죄의 불이 맹렬히 붙고 있는 이 땅을 하나님께서 <5,6분내로 불바다로,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지 모를 이 시급한 때에 우리 성도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깨어 경성하여 예수 전하는 것 밖에는 사는 길이 없습니다. 죄의 불 세력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불로 맞불 작전을 쓰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금년도 맥추감사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로, 전도하는 생활로 절기를 지켜야 나라 민족이 사는 때입니다. 맥추감사절기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키시는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 위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의 불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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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복으로 심는 자


"(고후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고후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8: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고후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후8: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고후8: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고후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후8: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8: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고후8: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고후8: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후8: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고후8: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8:15)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후8: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후8:17)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고후8:18)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고후8:19)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고후8: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고후8:21)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고후8:22)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은 고로 더욱 간절하니라 (고후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고후8:24)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

 

존 웨슬리 목사님이 어느 날 설교하는데 그 마을에 유명한 구두쇠 부자가 참석을 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여러분, 돈을 벌 수 있는대로 많이 버십시오." 하니까, 그 부자는 좋아서 "야, 그 사람 설교 참 잘 한다." 라고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 다음 "저축할 수 있는대로 많이 저축하십시오."했더니 이번에는 손을 싹싹 비비면서 "이렇게 설교 잘 하는 사람 처음 보았다."고 하며 좋아했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대한 쓰십시오." 하니까, 그 구두쇠는 "아이구, 좋은 설교 다 잡쳤다."고 하면서 일어나 나가더랍니다. 재물은 열심히 모으고 열심히 저축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써야 할 때는 아낌없이 써야 합니다. 최대한 벌어서 최대한 선한 일을 위해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 전도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 이상 선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이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끝날까지 전파는 지상 유일한 구원선입니다. 때문에 복음 전파를 통한 인류 구원의 사명을 가진 교회는 막대한 선교 헌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은 성도들은 다른 어떤 일에 보다도 선교를 위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기쁨으로" 헌금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그리스 북쪽 곧 현재의 발칸 반도에 위치해 있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 등의 교인들)은 로마의 정복자들에게 많은 천연자원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심한 학정(虐政)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극한 가난"가운데 처해있었다고 했습니다. "극한 가난"은 "밑창까지 내려간 빈핍(貧乏)"을 말하는 것으로 그릇에 담긴 물건이 소진되어 그릇의 밑바닥이 드러난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이렇게 극빈 상태에서도 헌금열(熱)은 오히려 부자들보다 뜨거웠습니다. 이와같은 그들의 뜨거운 선교 헌금열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신본주의(神本主義), 즉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적지근한 교인들의 생활원리와 참된 교인들의 생활원리는 각기 그들의 헌금열에서도 다른 것입니다. 미온적(微溫的)인 신자들(계 3:15-19)은 언제나 헌금을 등한이 여기면서 부요할 때에는 인색해서, 그리고 가난한 때에는 걱정이 많아서 "기쁨으로, 자원해서, 풍성하게" 헌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교인은 환란의 시기를 도리어 기쁨과 축복의 기회로 알고 빈곤의 시기를 헌금의 호시절(好時節)로 알아 더욱 뜨겁게 헌금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은 믿음의 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마게도냐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풍성한 선교 헌금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먼저 주님께" 바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가 자기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나면 다른 모든 것들도 아낌없이 주님께 바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주님께 바치지 않는 자는 자기의 소유도 자기와 함께 안 바친 대로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치기 전에는 물질 문제에 대하여 바치는 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면, 물질 문제에 관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잠15:16)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희망하던 헌금의 분량은 그렇게 거액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처럼 거액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의 뜻이면 무엇이든 행하려고 하는 성도는 교회를 봉사하는 일이나 선교를 헌금하는 일에 있어서 어떤 일정한 제한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을 요구하지 않고 먼저 우리 자신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거액의 재산을 가져 선교 헌금하면서도 그 마음과 몸을 바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삼상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또한 그들이 많은 헌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헌금할 때는 아무런 복잡한 마음이 없이 단순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목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헌금의 표준은 그 드리는 물질의 다소에 있다기 보다는 그 헌금자의 품은 목적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려는 단순성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박해와 극한 가난 중에서도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들의 '기쁨'과 '관용'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알 때 구원의 은총이 임하는 것입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모두 예수님을 통해 병고침을 받았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린 그 사람만이 구원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눅17: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눅17: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17: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17: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17: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17: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눅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17: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눅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에드워드 스펜서는 미국 교과서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1860년 9월 8일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게렛 신학교 학생으로 있었던 스펜서 군은 밤중에 친구의 고함소리를 듣고 눈을 떴습니다. 가까운 미시간 호수에서 큰 연락선이 조난되었다는 것입니다. 스펜서는 더 생각할 것 없이 미시간 호수까지 달려갔습니다. 385명을 태운 여객선이 암초에 부딪쳐 침몰한 것입니다. 그 중 287명이 익사하는 큰 사고였습니다. 스펜서는 고등학교 시절 수영 선수였으므로 수영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심한 바람과 높은 물결을 뚫고 호수로 뛰어들어가 한 사람씩 구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열여섯 명을 쉬지 않고 육지로 끌어냈습니다. 아무리 수영 선수라도 그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는 너무 지쳐 육지에 쓰러졌으며 최후의 힘까지도 다 소비한 상태였습니다. 그 때 곁에서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파도 속에 허우적거리는 또 한 명의 조난자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스펜서는 정신없이 일어나 다시 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의 무리가 화근이 되어 그는 병상에 눕게 되었고 7년 후 3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신문 기자의 방문을 받고 그 날의 소감을 질문받았을 때 그는 힘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날 밤 내가 물에서 건져내어 생명을 되찾아 준 사람은 17명인데 나에게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그중 한 소녀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 소녀는 지금까지 7년 동안 크리스마스마다 감사의 카드를 보내왔습니다. 나는 감사할 줄 모르는 16명보다도 이 한 명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위로를 받습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선물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 내지는 그 관대하신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영원하고 충만한 것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받은 것을 항상 감사하시므로 은혜가 더욱 더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화(成肉化)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으로서 부요하셨지만, 그의 희생을 통하여 세상을 부요케 하시려고 그 모든 것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시104:24)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실 때에는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낮은 인간 상태에 들어오심으로써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는 부(富)를 소유해 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는 머리 둘 곳도 없으셨습니다. 그가 이렇게 가난해졌으므로 그를 믿는 자들은 영적으로 부하여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신 은혜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감사하여 극한 가난 중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넉넉한 마음으로 넘치는 감사의 헌금을 드렸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비천한 말 구유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태어나셨지만 그 무한하신 사랑으로 완악한 우리를 변화시켜서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하셨음을 감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이 심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한 헌금을 드린 것은 바로 이 "넉넉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넉넉한 마음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비록 물질적으로 빈곤했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풍요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전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가난한 과부도 마찬가지로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로 비록 가난하였지만 풍요한 삶을 누린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눅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눅21: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눅21: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눅2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은 어느 누구도 강요에 의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능력 이상으로 자원하여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선교 구제 헌금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 같은 마음에서만이 참다운 선교 구제가 이루어지며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8:3)...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헌금했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 전체를 헌신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바치는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준 것과 같은 헌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의 이같은 정신은 우리의 모든 소유는 물론 우리 자신마저도 하나님의 소유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색함은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한 절대 소유자라는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인들에 비하면 아주 탁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나 언변에 있어서 또 지식과 진지함과 간절함에 있어서 고린도 교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탁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인들에 비해 그들은 아주 인색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인들보다 훨씬 풍부한 삶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풍성한 선교 구제 헌금을 바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은사면에서도 여러 가지 많은 은사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훨씬 가난한 마게도냐 교인들에 비하면 인색하기 그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인들은 "(고후8:3)...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거액의 헌금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막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14: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막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막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막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막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막14:10)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막14:11)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여기 마리아는 자기 오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가 예수님이 살려 주신 것과 자신이 죄사함받고 구원받은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보통 사람이 일년 이상 품팔이 해야 벌 수 있는 돈 값에 해당되는 진귀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몽땅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이 엄청난 마리아의 감사행위에 대해 놀란 제자들은, 그 가운데서도 특히 가롯 유다는 마리아를 비판하면서,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막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마리아를 책망하기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을 배신자 유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 엄청난 물질이 허비되는 것으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중직(重職)을 맡았다고 해서 다 올바른 믿음과 판단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오히려 교회에 오래 다닌 중직들이 잘 믿으려고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며 헌금도 풍성히 하는 초신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값비싼 옥합을 아낌없이 깨트려, "자기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처럼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삼상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8:18)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혹자가 말하길, 하나님께 어떤 헌금할 일을 놓고 기도할 때, 제일 큰 금액은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요, 중간 금액은 인간의 생각이요, 제일 작은 금액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라고 합니다. 작고 큰 금액을 놓고 마음에 싸움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큰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가장 값비싼 것을 주님께 아낌없이 "힘을 다하여" 드렸습니다. 무엇이든 주님께 드리는 것은 제일 좋은 것, 제일 귀한 것, 최고의 정성이 담긴 것들을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worship, worth+ascribe)는 최상의 것을 주님께 돌려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봉사도 헌금도 너무 귀해서 드리기 어려울 때 그것을 드려야 하나님께서 귀한 것으로 기뻐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말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못 팔아 먹을 것, 상품 가치가 없는 것, 눈 먼 것, 다리 저는 것, 병들어 죽어가는 것들을 드리는 것을 보시고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갖다줘도 불쾌해서 안 받을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복을 받겠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또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말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1: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돈이 만능인 것 같아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서양의 어느 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는 있으나 잠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책은 살 수는 있지만 두뇌를 살 수 없고,
돈으로 음식은 살 수 있으나 입맛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집은 살 수는 있지만 가정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약은 살 수는 있으나 건강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사치품은 살 수는 있지만 교양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오락은 살 수는 있으나 기쁨을 살 수 없고,    
돈으로 멋진 옷은 살 수 있지만 미를 살 수 없고,
돈으로 향락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십자가는 살 수 있지만 구세주를 살 수 없고,
돈으로 교회는 살 수 있으나 천국을 살 수 없다.
 마음의 평화, 구원, 천국은 돈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돈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노이로제 걸리고 자살하는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 중에 더 많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물질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하늘 나라에 저축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조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므로 돈이 필요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정성이 얼마나 하나님께 있는가를 보시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눈여겨 보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 은행의 이자가 가장 높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투자할 줄 모르는 사람은 생전 예수를 믿어도 믿음이 안자라고 체험도 생기지 않습니다.
클론다이크 광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탐사단이 그 광산을 탐사했더니 어느 오두막 집에 두 사람의 해골이 누워 있고 그 해골들 사이에 많은 황금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칠은 탁자 위에는 편지가 놓여 있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금을 발견하려고 북쪽 땅에 찾아가서 많은 황금을 발견했으나 그 곳에는 추운 겨울이 빨리 온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눈이 쌓이고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얼마간의 양식도 다 떨어졌습니다. 결국 많은 금 덩어리 사이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었습니다."
그들은 금을 찾는 일에는 성공했으나 조만간에 닥쳐올 겨울은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앞에도 죽음의 겨울이 닥쳐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최선을 다하여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눅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벌써 속회가 돌아왔나, 벌써 주일이야, 벌써 추수감사절이야 하며 귀찮아하는 마음으로 무성의하게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않으십니다.

"(출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힘대로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기쁨으로 복을 심어 풍성한 하늘의 복을 거두시는 지혜로운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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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진정한 감사


"(합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1.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갈대아(바벨론)의 원수들에게 붙여지리라는 소식을 듣고 놀랄 뿐만 아니라, 본문의 말씀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또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고 했으며, 또 "내 뼈에는 썩이는 것이 들어 와서" 뼈가 아프고 또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고 했습니다. "내 처소"란 말은 '나의 선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선 자리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함이요 선 그대로 떨고만 있는, 공포의 극한 상태를 말합니다. 하박국은 바벨론의 임박한 침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침공으로 유다의 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농작물의 소출과 목축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 결과는 자연 재해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침공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정복민의 농작물과 가축을 멸절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그 상황이 극한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박국은 이런 극한 상태에 들어갈지라도 여호와의 구원을 인하여 즐거워하겠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의 열매가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소와 양이 없다면 이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양식이 끊어진 것을 의미함이요, 어떻게 보면 징계와 저주의 극한 상황을 말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외쳤습니다. 그래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환란과 고통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을 빼았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오직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찬미하는, 신자자의 위대한 신앙을 우리는 옷깃을 가다듬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노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 진정한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무엇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 안에서 발견됩니다. 이것이 참된 즐거움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이시기 때문에 하박국은 현재의 위기에서도 미래를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이신 하나님은 하박국의 삶에 있어서 "힘"이 되었습니다.
"(합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하나님은 힘의 원천이며, 그 이상이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하박국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선지자 하박국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여 위험한 처지에서라도 신속히 피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힘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그는 높은 곳에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그가 나의 발을 사슴 같게 했으니 나는 높은 산 높은 바위도 뛰어 오를 것이라고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스룹바벨 앞에서는 태산도 평지가 되리라는 기록이 있거니와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우리 앞에 거칠 것이 무엇이겠는가. 독수리는 땅을 떠나 하늘 높이 오르지만, 사슴은 땅을 딛고 땅을 정복합니다. 그것들은 태산을 넘고 험한 바위를 박차고 뛰어 갑니다. 강 건너 또 강이요, 산 넘어 또 산이라는 말이 없지 않지만, 사슴 같은 우리의 발이라면 '산 넘어 산'이라고 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또 특별히 '나의 높은 곳'이란 말이 눈에 띄입니다. 그는 벌써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울고 웃는 인간의 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마는, 그의 마음은 벌써 '나의 높은 곳'에 서 있는 자였습니다. 나에게는 힘이 없으나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했고, 그가 나로 '나의 높은 곳'에 서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벌써 현실과 자기를 객관할 수 있는 '나의 높은 곳'에 서 있는 자였습니다. 끝에서 '이 노래는 영장으로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는 이 마지막 말은 또 다른 번역에서는 "나는 그의 노래로 승리하리라' 했습니다. 환난 중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의 발을 사슴 발 같게 하여 높은 곳에 다니게 하여 궁극적으로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할 것입니다.

2.  신약성서 사복음서에는 치유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예수님은 수 많은 병자들, 가난한 자들, 그리고 소외당하고 그늘진 곳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기독교가 이들을 도외시하고서는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병든 사람이라고 모두 다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병든 사람의 치유가 그 사람의 지극 정성이나 돈독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들 생각합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정성이 지극하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치유의 기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믿음이나 정성, 또는 공로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받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는 정성이 부족했다느니, 아니면 믿음이 부족했다느니 하면서 당사자의 말할 수 없는 아픔과 몸부림을 매도해버리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병과 불치의 원인이 그 당사자에만 있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비참한 것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자신의 아픔과 몸부림이 매도당하여 당하는 영혼의 절망감이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이 모두가 다 고침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 많은 기도원, 수도원 등에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몸부림치다 입을 다물고 쓰러져가는 사람들이 어찌보면 치유의 기적을 맛 본 사람들 보다 더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고 감격어린 증언 속에 이들의 아픔과 고통이 외면당하거나 파묻혀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순수한 마음에서 하는 치유의 증언일지라도 많은 사람들을 공감시킬 환희를 주는 한편으로 심각한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는 그것이 아무리 순수하다고 할지라도 독설의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장마에 시달리는데 저희는 무사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북한에는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기근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남한에는 사상 최대의 풍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30여명이나 되는데 나는 무사하게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수많은 기업들이 부도내고 도산하는데 내 직장과 기업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감사가 아니라 <변형된 저주>입니다. 참된 감사는 조건을 미리 알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저 아무런 조건 없이 본연을 긍정하는 태도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여야 합니다. 감사는 크게 드러내어 북치고 장구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마음 바탕에 감추어져 옹달샘처럼 소리 없이 흐르는 것입니다. 겨우 물맛을 본 사람에게나 확인되는 그러한 것입니다. 더구나 아픔의 치유를 경험한 그 기적에 대한 감사는 요란한 선포에 의해서 전달되기 보다는 그 치유된 몸이 행하는 새로운 봉사의 삶을 통해 확인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치유의 기적을 증언하는 목소리는 결코  '전쟁에서 돌아온 승전 장군'의 큰 소리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순수한 환희와 감격이 무의식 중에나마 다른 아픈 이들의 아픔에 또 다른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감격의 소리를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이 땅에 고난받는 형제들과, 아픔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환난과 재난 가운데 절망과 좌절 속에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병들고 쇠약하여 상륙할 기력조차 없었다. 이들을 발견한 왐파노그(Wampanoag) 인디언들은 배로 메이플라워 호까지 가서 낯선 백인들을 상륙시켰으며 플리머스 마을을 건설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백인의 출현을 싫어한 인디언 부족도 있었는데 왐파노그들은 그들의 공격에서 청교도들을 지켜 주었고 옥수수 농사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처음 수확을 거둔 후 청교도들이 왐파노그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만찬을 베푼 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절 식탁의 유래가 되었다. 그러나 백인들의 감사는 너무 짧았다. 백인들은 토지를 확장해 나갔고 부유한 나라를 만드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는 생명의 은인이며 착을 도와 준 왐파노그 부족을 완전히 도외시한 처사다. 미국 정부 인디언 관리국은 "왐파노그는 없어진 부족이다. 그들의 땅은 없으며 그들의 언어나 문화도 찾을 길이 없다. "라고 염치없는 발표를 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수 년 동안 추수감사절이 되면 왐파노그를 자칭하는 인디언 엘스워드 오클리(Ellsworth Oakley) 씨가 인솔하는 수십 명이 플리머스에 모여 조상들을 애도하는 추도회를 갖고 있다. 그들은 미국인이 즐겁게 먹고 노는 이 날을 '통곡의 날(The Day of Mourning)'로 선포하고 울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들이 순종 왐파노그냐 아니냐를 따지지 전에 그들의 통곡이 뜻하는 교훈을 미국인들은 겸손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백인들의 추수감사 이면에는 인디언들의 <통곡의 날>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3. 시편기자는 역경 속을 걸어오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늘에 이른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막 길에서 방황하고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피곤하였던 일들"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시 107:4) 지난날을 기억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닫는 것이 감사입니다.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소망을 발견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감사절을 국가 공휴일로 선포하고 전국민이 감사할 것을 호소한 것도 그 당시 미국으로서는 가장 치열한 남북전쟁의 와중이었습니다. 링컨은 감사절 선포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가 오면 나무는 과일을 맺고 넓은 들에는 곡식이 여뭅니다. 이 맑은 하늘과 공기, 우리의 죄를 참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고통이 다소 있어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미국 역사에 기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미네소타 주의 이야기입니다. 1874년부터 77년까지 3년에 걸친 가뭄과 심한 메뚜기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대 경제공황에 빠졌습니다. 1877년 4월 27일 주지사 필스베리(Pillsbury)씨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 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기도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은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은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시도하나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건지사 동서남북 각지방에서 모으셨도다."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각 처로 흩어져 생사도 모르던 가족이 살아남았다가 사방에서 모여오는 기적을 보고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으시는 하나님, 일으키시고 내일의 축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계의 경제전문가들은 한결같이 한국 경제가 위기를 맞고 있으며 조만간에 세계통화기금으로부터 구제받아야 할 굶주린 국가가 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 지도자들도 경성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앞으로 주실 축복을 인하여 전 백성이 감사기도를 드리자고 선포한다면 얼마든지 제 2의 한강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는 역경 중에서도 역경과 고난 중에 있는 형제들과 함께 해야 진정한 감사요, 내일의 축복을 기약하는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한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에 사탄이 지구에 내려와 하필 노르웨이에다가 창고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창고에는 각종 씨들, 미움, 슬픔, 눈물 등의 씨들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이 씨들은 누구의 마음속에 뿌려도 잘 싹이 나는데 한 동네만은 효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동네의 이름은 '기쁨'이었는데 어떤 슬픈 상황과 절망적인 처지에서도 그들은 언제나 감사했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씨를 뿌릴 수 없다."는 노르웨이 속담이 나왔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아주 긍정적인 생각입니다. 불만을 갖자면 잔이 얼고 많은 사탄의 씨가 발육할 것입니다. 꽃을 세는 사람은 잡초 세기를 멈춥니다. 축복을 세는 사람은 불만의 명단을 버립니다. 기쁨의 추억을 세는 사람은 눈물의 양(로)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세는 사람은 미움을 저축하지 않습니다.  
NY Times 잡지(1992. 11. 21)에 프랜크 알렌(Frank Allen)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알렌은 영국 옥스포드 대학시절 빌 클린턴과 기숙사 한 방 친구였습니다. 71년에 그는 자살하였고 21년 후 클린턴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알렌은 신문학전공으로 수재였으며 집안 경제 배경은 클린턴보다 훨씬 나았었습니다. 무엇이 이 두 젊은 친구들의 장래를 그토록 다르게 만들었을까? 알렌은 너무나 심각하고 환경변화(특히 60년대의 월남전 쇼크)에 민감하였으며 부정적이며 비관적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똑같은 환경과 역사 속에서도 클린턴은 미래를 믿고 현재의 여건을 감사하며 희망적이고 긍정적이었습니다. 그 차이뿐입니다. 클린턴은 어려서부터도 희망적이고 건설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복동생이지만 일하는 흘어머니를 도와야 하기 때문에 줄곧 동생을 자전거에 태우고 운동장 잔디에서 돌보며 야구와 풋볼을 하였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동기간의 의가 좋기로 유명하며 동생들은 "형의 격려와 도움이 없었으면 공부도 계속 못했을거다."고 술회합니다. 무너져가는 한 집안에 오직 한 사람, 불운한 과거와 신세를 탓하지 않고 현재를 감사하며 미래를 믿고 역경을 돌파하는 신념과 꿈의 사람이 있을 때 온 집안이 달라진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수학은 내가 받은 은혜를 계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보다 더 아름다운 예배(제사)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의 최고의 예물은 감사입니다.(시 95:2)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위대한 덕일 뿐만 아니라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가치있는 인간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편은 반복해서 여러 시에서 말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성경은 감사를 믿음의 최고의 표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기도는 감사가 동반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는 말씀은 진정한 감사야말로 곧 반석같은 믿음을 하나님과 사람앞에 증명한다는 말씀입니다.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는 말씀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기도와 감사의 생활로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하루 앞두고 자기의 피와 살을 내주게 된 사실을 감사하셨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 뜻에 깨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눈 앞에 두고도 감사드렸던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십자가를 지고서도 부활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며 자신을 바치는 감사입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고난 중에 있는 형제들과 함께 하는 감사, 십자가의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므로 힘이 되신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발을 사슴같게 하사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는 승리의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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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하나님의 혁명


"(눅1:4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1: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1: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1: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1: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1: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눅1: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본문은 사가랴의 축가(Benedictus) 및 시므온의 고별송(Nunc Dimittis)과 더불어 초대 교회의 예배 때에 찬송시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 영국 국교회의 저녁 예배 시에 부르는 찬송의 일부로도 사용되는 유명한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입니다.
이 마그니피카트(Magnificat)는 구약의 한나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삼상2:1)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삼상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삼상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삼상2:4)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삼상2:5)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삼상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2: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삼상2:9)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삼상2: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스탠리 죤스(Stanley Jones)는 이 마그니피카트(Magnificat)를 가장 혁명적인 문서라고 말했다. 이 마그니피카트(Magnificat)는 하나님에 의한 세 가지 혁명을 말해 주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신다. 이것은 도덕적 혁명이다. 기독교는 교만함을 죽이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을 따라 살아 나아가고자 하면 그의 교만은 그 마지막 가면까지도 벗겨 버리기 때문이다. 때때로 사람들에게는 강렬한 빛에 비추여서 자기 스스로를 깊이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 헨리(O. Henry)의 단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시골에서 자라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그는 언제나 어떤 소녀와 나란히 앉아 있게 되었는데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습니다. 후에 그는 도시로 나가 악한 길에 빠져갔습니다. 그는 소매치기와 좀 도둑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어떤 늙은 부인의 지갑을 나꾸어챘는데 그것을 잘 해냈기 때문에 그는 혼자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가 전에 좋아하던 여자가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녀는 아직도 귀엽고 천진난만한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기 자신이 보잘것 없는 비열한 존재로 보였던 것입니다. 부끄러운 마음이 온 몸에 화끈거려 가로등의 차디찬 쇠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하나님, 저는 죽고 싶습니다."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볼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교만에 대해서는 치명적인 타격입니다. 이리하여 도덕적인 혁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4장 1절-26절에 보면,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수가성의 행실이 불량했던 한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대화를 주고 받는 중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심각한 심령(心靈)의 갈증(渴症)을 겪고 있는 파괴된 인간성(人間性)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일시(一時)에 그 갈한 것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사랑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여인에게 참 생명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목마른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 4:13-1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 7:37-39)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6-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는 곧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자면 누구든지 값없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인간은 도덕적 혁명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그것을 바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땅의 진정한 도덕적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 성령의 바람이 맹렬하게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이 나라의 정치, 경제계에 도덕적 혁명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靈)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예수 없는 인생은 사실 죽은 인생입니다. 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는 영'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한 삭개오의 도덕적 혁명은 그의 구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눅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눅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눅19: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눅19: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눅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눅19: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눅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노태우씨 자신이 밝힌 부정축재한 5천억은 1만원짜리 지폐로 환산하면 잠실종합운동장 크기의 축구장을 123개나 덮을 수 있는 돈입니다. 이것을 길이로 늘어 놓으면 서울 부산간 경부고속도로를 9번이나 왕복하고도 남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돈을 차곡차곡 쌓으면 백두산(2,744m)보다 약 3배나 높고 63빌딩(249m)보다는 30배 높은 것입니다. 이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최소한 자신이 밝힌 토색한 돈의 4배인 2조원을 1만원권 지폐로 1톤 짜리 트럭57대에 싣고와 청산하고 예수 믿어야 합니다. 이 땅에 교만하고 거만한 자들이 청산되는 회개의 바람이 불어야 할 것입니다.
파스칼은 "왕자 앞에서는 머리를 숙여야 한다. 학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도 좋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앞에서는 가슴을 조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필리핀의 막사이사이(Romon Magsaysay)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가난에 지지 않고, 역경에 꺾인 일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의 직책은 대통령이다.그러나 나의 마음은 항상 이 나라의 한 병사다'라고 하면서 겸손하기만 했습니다. 실로 지도자는 겸손해야만 합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하여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 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습니다.'(단5:18-21)  '그의 아들 벨사살 왕은 부왕이 교만하여 한 때 짐승처럼 들에서 살았던 것을 알고도 거룩한 성전의 기물들을 가지고 술잔치를 벌이며 우상을 숭배하고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고로 ...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했습니다.'(단5:22-31)  
참으로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요(잠언15:33),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언16:18)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도성'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겸손하신 왕의 모습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도 천박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시더니 세상에 사시는 동안도 겸손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으러 가시는 마당에까지 겸손의 상징인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삶의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시고 몸소 실천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참된 평화를 이룩하시는 방법은 바로 남을 섬기는 '겸손'인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겸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들을 낮추시며 비천한 자를 높이신다. 이것은 사회적 혁명이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간판과 지위에 대해 그 종언(終焉)을 고(告)한다.
뮤레테스(Muretes)는 중세의 방랑학자였습니다. 그는 가난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어느 마을에서 그는 병이 들어 무의탁자들과 방랑자들을 위한 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사들은 그가 알아들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라틴어로 그의 병세에 대해서 서로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같이 보잘것 없는 방랑자는 의학 실험에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고 있었습니다. 뮤레테스는 그들을 쳐다보며 그들과 같이 학자적인 라틴어로 "어떠한 인간이라고 쓸모 없다고 하지 말아라.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우리들이 깨닫게 될 때 더 이상 하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따위의 말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7: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눅17:2)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마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18: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마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18:11) (없 음) (마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18: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마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회적인 계급과 지위는 사라졌다.
어느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매독에 걸려 있고 아내는 심한 폐결핵에 걸려 있다. 이 가정에 아이들 넷이 있는데 하나는 며칠 전에 병으로 죽었고 남은 세 아이들도 결핵으로 누워 살아날 것 같지 않다. 이 부인은 현재 임신중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러자 그 학급의 한 학생이 "낙태 수술을 해야 합니다!" 하고 대뜸 소리쳤습니다. 그 때 교수는 "자네는 지금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하고 말했습니다. 이 불행한 환경에서 다섯 번째 아이로 태어난 것이 베토벤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른 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땅에 지극히 작고 적은 무리일지라도 그들이 존중되는 사회적 혁명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주린 자들을 배불리시고, 부자를 빈 손으로 돌려 보내신다. 이것은 경제적인 혁명이다. 비 기독교적 사회란 각자가 이익을 취하면 취한 만큼 부(富)를 축적하는 탐욕 중심의 사회이다. 기독교적 사회란 다른 사람들이 조금 밖에 갖지 못하였을 때에는 자기도 많은 것을 가지려 하지 아니하는 사회이며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단지 주기 위하여서만 소유하는 사회이다. 이것이 마그니피카트(Magnificat)에 있는 아름다운 면인데 이 아름다움에는 일종의 다이나마이트가 내포되어 있다.
기독교는 이처럼 각 사람 속에서 혁명이 일게 하며 따라서 그것은 세계에 혁명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트리지 윤리(Ethics of Trige)'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수 많은 부상자가 야전병원에 실려 들어왔는데 의약품이 부족해서 그 사람들을 다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그리하여 약간의 치료로써 살 만한 사람은 치료하여 주고 못 살 것같거나 애매한 사람은 아예 치료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선택을 '트리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는 강자 생존의 '구명 보트 윤리'도 배격합니다. 또한 생명의 가능성을 선택하는 '트리지 윤리'도 배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민중 5천 명이 앞에 있을 때 빵은 다섯 개뿐이니까 가장 강하고 우수하고 장래성이 있는 다섯 명만 골라서 그들만 먹이고 4,995명은 내버려두자는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똑똑한 사람이든 바보이든, 건강한 남자든 불구의 여성이든 굶고 있는 것은 똑같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덩어리라는 작은 희생과 사랑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즉 '사랑의 기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다 살릴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의 계산이며 강자의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은 '다 살릴 수 있다.'는 사랑의 낙관주의를 가진 분이십니다. 문제는 작은 사랑이 가장 중요한 천국의 씨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정치, 경제, 사회에 하나님의 혁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가 사라지고 겸손한 자가 대접받는 도덕적 혁명, 누구나 평등하게 대접받는 사회적 혁명, 탐욕이 사라지고 다 함께 사는 경제적 혁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혁명을 일으키는 예수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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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평강의 왕


"(사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9: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사9:4)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사9: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사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인류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시작과 마지막을 주장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인간과 역사의 근본적인 변화는 하나님을 통해서 비롯된다.인간과 역사에 개입하셔서 인간의 삶과 인류의 역사에 변화를 가져 오신 사건이 예수의 탄생이다.
 삶과 역사의 모든 변화는 '한 아이의 출생'(6,7절)과 더불어 비롯된다.
 흑암의 땅으로 불리우고 있는 스블론,납달리 땅과 해변 길,요단 저편,이방의 갈릴리 지역 등은 대대로 전쟁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았던 곳들이다.특히 앗수르 군대의 침략으로 근방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하였다.'멍에'와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로 상징되는 애굽으로부터 속박을 당해왔다.
 이들 지역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장 직접적으로 철저히 받았던 지역들이다. 한 마디로 '고통과 흑암으로 가득찼던'곳들에 '한 아기의 탄생',즉 예수의 탄생으로 국면의 대전환을 가져 오게 된 것이다.
 메시야되신 예수로 말미암아 기쁨과 자유와 광명을 선포하고 있다.그래서 '한 아기'로 예언된 예수님을 "큰 빛"(2절)으로 말씀하고 있다.
 "큰 빛"은 바로 세상의 빛이요(요8:12)참된 빛이며(요1:9) 의의 태양이신(말4:2)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한다.이 빛은 맨 먼저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마을에서부터 비취기 시작했다(마4:13).그가 처음 이적을 베푸신 곳도 갈릴리였으며(요2:11) 맨 처음 가르치신 곳도 그가 자라나신 갈릴리의 나사렛 회당이었다(눅4:14-17).천국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곳도 바로 갈릴리 해변가였다(마4:17,막1:14,15).이로써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본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테니슨의 시 <In Memoriam>에 나오는 한 귀절처럼,
 
  "밤을 뚫는 아기의 울음소리
   빛을 부르는 아기의 울음소리
   말도 없었다.설명도 없었다.
   한 아기의 울음 소리뿐.
   그러나 그 울음 소리는
   새 날을 밝혔느니."

  예수 믿는 여러분의 가정에서부터,아니 여러분의 심령에서부터 '삶의 밤과 역사의 밤을 뚫는,그리고 큰 빛을 부르는 예수 탄생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1993년도의 성탄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새 날'을 밝혀주시기를 기원한다.
  다음으로,'한 아기의 탄생'은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신다."(3절) 한 나라의 창성과 즐거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전 세계가 '21세기 경제 전쟁'에 민족마다 온통 즐거움이 사라지고 있다.가정마다 즐거움이 증가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오직 예수만이 인생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고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오고 더욱 더 그것들을 증가시킬 수가 있다(마11:28-30). 더 나아가 "한 아기"는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을 즐기게 하신다(3절).'추수하는 즐거움'이란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시128:2)을 뜻한다.어떤 사람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결실인 부요와 재물 등을 누리지 못하거나,오히려 그것이 기쁨보다는 오히려 고통과 아픔,그리고 심지어 생명을 잃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누가복음12:20-21,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추수하는 즐거움"을 즐기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즐거움을 더해주시는 "한 아기",예수를 위하여 수고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목적과 삶의 목적을 가지므로 그 "추수의 즐거움"과 삶의 승리의 즐거움을 상징하는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을 충만하고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축원한다.
  다음으로,"한 아기의 탄생"은 "무겁게 맨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꺽어주시는"(4절) 해방과 자유의 축복을 주신다.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눅11:13).
 고린도후서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성령의 감화 감동을 소멸치 말며,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삶의 진정한 자유를 누리시기를 축원한다."한 아기"는 "모사"가 되신다(6절)."모사"란 성령에게 붙여진 별칭 "보혜사"와 비슷한 말이다.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까지 다 아시기에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완벽한 보혜사의 사역을 수행하셨다.즉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셨으며 또한 인간이 고통당하는 원인을 알고 계시기에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을 제시하셨으며 어두워진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진리를 가르치셨다.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하신다.
  마지막으로,"한 아기의 탄생"은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는 축복을 가져다 준다.'갑옷'과 '군복'이 불에 태워지리라는 것은 적들의 패망과 더불어 '평강'의 축복을 의미한다.우리의 원수가 사라지게 될 때 참 평화가 오는 것이다.예수를 믿으면 모든 원수가 다 사라지게 된다.그리고 마음에 묻은 피가 씻어진다.탄생하시는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의 모든 원수가 친구로 변하는 삶의 일대 변혁이 일어나시를 축원한다.그리고 마음에 얼룩져 씻기지않은 '피'들이 성령의 불로 완전히 태워 없어지시를 기원한다."한 아기"는 "기묘자"이시기에 능히 이루실 수 있다.
  기묘자란 놀라우신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흠모와 놀라움의 대상이 되셨다.
  예수는 인간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보이심으로써 놀라움의 대상이 되셨다.
  예수는 그의 속성과 사역이 그 어떤 피조물보다 뛰어나셨기에 놀라움의 대상이 되셨다.
  예수는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그를 따르는 사람들뿐만아니라 그의 반대자들에게도 말씀으로나 행동으로 놀라움을 던져 주셨다.기묘자되시는 예수를 마음 속에 탄생시키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 삶의 놀라운 복된 변화가 날마다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1993년도 성탄절에는 기묘자와 모사이시며 전능하시고 영존하시는 평강의 왕이신 예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그리고 우리 교회위에 더욱 더 충만하게 역사하시어 새 날을 밝히는 자유와 기쁨과 광명으로의 복된 변화가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1993년 성탄절 설교>
    이  동  희 목 사
단상(斷想)

    <오 거룩한 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저희가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더라."(마2:9-10)

 별과 더불어 탄생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날 빛이라 부르면서
어둠을 사랑하고
너희는 날 소망이라 부르면서   한숨을 쉬고
너희는 날 스승이라 부르면서
허무를 쫒고
너희는 날 구원이라 부르면서
믿지 아니하고
너희는 날 목자라 부르면서
따라오지 아니하고
너희는 날 길이라 부르면서
딴 길로 달려가니

  베들레헴의 별은 과연 누구의 별이냐.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밤이 정말 너에게 거룩한 밤이 될 수 있느냐.

  "박사들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2:11)

  박사들의 경배와 헌신을 받으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날 성자라 부르면서
순종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날 신이라 부르면서
산 제물이 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날 주라 부르면서
종이 되려 아니하고
너희는 날 순교자라 부르면서
희생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날 어린 양이라 부르면서
섬김을 받으려 하고
너희는 날 만왕의 왕이라 부르면서 높아지려고 하니

  너희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어디에 있느냐.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이 밤이 정말 너에게 거룩한 밤이 될 수 있느냐.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니라."(눅2:13-14)

  평화의 코러스(합창)와 더불어 탄생하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날 샤론의 장미라 부르면서 하늘의 향기를 뿜지않고
너희는 날 아가페라 부르면서
네 형제를 사랑하지않고
너희는 날 피난처라 부르면서
이웃을 불안하게 하고
너희는 날 의로운 가지라 부르면서 불의와 타협하고
너희는 날 새벽별이라 부르면서
친구에게 희망을 주지않고
너희는 날 생명이라 부르면서
빈 무덤을 찾고 있으니

  너희 노래가 천사의 찬양과 합창이 되고 있느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이 밤이 정말 너에게 거룩한 밤이 될 수 있느냐.

  말구유는 나의 가슴 속에 놓여져야겠고
  베들레헴의 별은 나의 욕심 속에 비쳐져야겠고
  천사의 코러스는 나의 고독과 불신앙을 뒤흔들어
  섣달 스므 나흔날 밤
  임마누엘 그 아기를 마리아의 품에서 이어받아 나에게도 거룩한 밤이 되어야겠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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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세 가지 예물          


"(마2: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2:3)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마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마2: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마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마2: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마2: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마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마2: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2: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 사랑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성탄절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오늘 아침 성탄절을 맞이한 여러분의 표정을 보니 사랑하는 가족이나 형제들로부터,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사랑의 선물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설사 사랑의 선물을 받지 못했다해도 서운해 할 것 전혀 없습니다.인간의 어떤 선물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크고 가장 기쁜 선물이 되시는 예수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예수님은 평화의 선물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헤롯 왕이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유대의 왕이 될 예수께 자신도 경배하겠으니 태어난 곳을 알려달라고 한 것은 사실 태어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아예 처음부터 죽여 없애겠다는 의도에서 한 말입니다.이것이 세상입니다.세상은 평화의 왕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인류에게 평화를 주지 못할 뿐만아니라 오히려 평화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진정한 평화는 예수를 영접하고 경배하는 곳에 임하는 것입니다.어두움이 사라져가는 새벽에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곳에 어두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평화를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경배하며 그에게 사랑의 예물을 드리십시오.  
  먼 옛날, 어느 나라에 오래된 예배당이 있었습니다.그 예배당에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이 있었는데,너무 높은 탑에 달려 있어서 좀처럼 사람의 힘으로는 종을 쳐서 소리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그런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그 종은 크리스마스날 밤,아기 예수께 귀한 예물을 바치는 사람이 있을 때에 저절로 움직여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것이었습니다.그렇지만 지금껏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그해 크리스마스 저녁에도 사람들은 종소리를 듣고자 저마다 귀한 예물을 가지고 예배당에 모여들었습니다.피터와 그의 동생도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자 예배당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눈이 쌓인 길을 걸어가자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그런데 길가에 누군가 쓰러져있는 것이 보였습니다.피터가 얼른 뛰어가 보니 한 아주머니가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피터는 동생에게 예물로 바칠 은전 한 닢을 건네 주면서 먼저 교회로 보냈습니다.자기도 예배를 드리고 싶었지만,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이 아주머니는 이미 얼어 죽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예배당에는 사람들로 꽉차 있었습니다.피터의 동생은 예배가 끝날 때쯤 예배당에 들어섰습니다.그때는 마침 예물을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저마다 훌륭한 예물을 들고 나왔습니다.부자는 금전을,학자는 그가 쓴 책을,농부는 잘 영글은 곡식단을 한아름 안고 나왔습니다.그러나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마지막으로 임금님이 나올 차례였습니다.사람들이 침묵을 지키며 바라보는 가운데 임금님은 그의 왕관을 벗어 제단에 내려 놓았습니다.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종소리 듣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습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름답고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습니다.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제단을 바라보았습니다.그런데 제단 앞에는 아무도 몰래 은전 한 닢을 올려놓은 피터의 동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곧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이 표적 중의 표적이 되는 예수님의 탄생,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찬송을 받으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성탄절에 여러분들은 예물로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처럼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시겠습니까?
  크리스마스와 함께 항상 연상되는 것이 바로 이 세가지 예물을 예수님께 드린 동방박사들입니다.동방박사들의 이름과 출신은 알 길이 전혀 없습니다.이방인들인 이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늘의 별을 보고 탄생하신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임을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그저 신비에 싸여 있을 뿐입니다.일찍부터 있던 동방의 전설에 따르면 박사들은 열둘이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셋이라는 전통이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신약성서에서는 이들이 셋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온 예물이 셋이라는 것을 보면 그들이 세 명이었다는 판단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훗날 전설은 그들을 왕으로 전하고 있습니다.더욱이 그 후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의 이름은 카스파르,멜키올 그리고 발타잘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멜키올은 나이 많은 사람으로 백색 머리에 긴 수염을 가졌고 황금을 선물로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카스파르는 젊고 수염이 없었고 얼굴이 붉으며 유향을 선물로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발타잘은 새로이 기른 수염에 거므스레한 얼굴이었고 몰약을 선물로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아주 일찍부터 사람들은 이 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이 아주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예수님의 특성과 그의 업적에 아주 특별히 잘 어울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고대 세계에서는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 및 고귀한 사람을 만나거나 그에게 충성을 다짐할 때 특별한 예물을 바치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박사들이 바친 예물은 그보다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드린 첫번째 예물은 황금이었습니다.전설에 따르면 백발이 성성하며 수염이 하얀 멜키온 이 예물을 드렸다고 합니다.황금은 동서 고금을 통해 최고 귀하며 불변하는 성질의 금속으로서 흔히 부(富)를 상징하며 왕께 드리는 예물로 간주되었습니다.따라서 황금을 예물로 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을 세상 만물을 소유하실 정도로 부한 자요,절대 권위를 가지신 왕으로서 인정하는 표시인 것입니다.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황금 반지를 예물로 주고 받는 것은 서로의 사랑을 변치말자는 약속의 상징입니다.교회에서 목사,장로에게 여러가지 경우를 당해서 예물을 드릴 때 황금을 드려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하나님께 대한 변치않는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흔히 꽃다발이나 화환을 주기도 하는데 이것은 의미상으로 볼 때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꽃은 화려하게 보이나 곧 시들고 마르게 됩니다.인기 배우나 탈렌트,가수들이 수 많은 꽃다발을 받는 것을 봅니다.그들의 인기가 곧 시들고 말것임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것입니다.또한 황금은 금속(金屬)의 왕으로서 사람의 왕에게도 가장 적합한 선물입니다.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그러나 예수님은 힘으로써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통치하십니다.예수님을 모든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시되 왕좌로써가 아니라 십자가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의 자리입니다.
  탄생하신 예수님께 황금을 드리십시오.그리고 만왕의 왕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왕에게 바치는 가장 좋은 선물은 무엇보다 순종과 충성입니다. 탄생하신 예수님께 황금을 드리십시오. 불변하는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께 순종할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예물로 받으실 것입니다.
  두번째 예물은 홍안(紅顔)의 청년 카스파르가 드렸다고 알려지는 유향입니다.유향은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에서 채취한 향기로운 송진으로서 성전 제사나 헌물로 자주 사용되는 것입니다.향기가 좋은 유향이 사용되는 곳은 성전 예배와 성전 희생제사였습니다.예수님께 이 유향을 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사장(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임무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제사장을 나타내는 라틴어 폰티펙스(pintifex)는 '다리를 세우는 자(bridge-builder)라는 뜻이 있습니다.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량을 세우는 사람입니다.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예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탄생하신 예수님께 유향을 드리십시오.그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대제사장으로 모시고 그 분 앞에 우리의 모든 죄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그리고 그 분의 긍휼하심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히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선물은 여러분의 유향,즉 상한 심령,통회 자복하는 회개의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검은 얼굴에 수염이 많았던 중년의 발타잘이 드린 예물은 몰약(沒藥)입니다.몰약은 죽은 자를 위한 선물입니다.몰약은 시체를 염(殮)하거나 시체가 썩지 않게 하기 위해 바르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매우 귀한 자의 시체에만 바를 정도로 고가품이었습니다.탄생하신 예수님께 이 몰약을 바친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예비하는 예물이었습니다.예수님은 실로 인류를 위해 희생의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홀만 훈트(Holman Hunt)는 예수님에 대한 유명한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그것은 예수가 나사렛 목수집 문에 서 있는 그림입니다.그는 아직 소년입니다.기울어지는 저녁 햇빛이 문에 비치고 소년 예수는 벤취 위에서 가깝했던 사지를 펴기 위해 문으로 나왔습니다.그는 문간에 서서 팔을 폈습니다.그러자 그의 뒷편 벽에는 기울어가는 석양이 비치어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그림자입니다.배경에는 마리아가 서 있는데 그는 그림자를 보면서 다가올 비극의 공포를 그 눈에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람을 위해 살다가 마침내 사람을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예수님은 사람을 자신의 생명과 자기의 죽음을 바치려 오셨습니다.
  탄생하신 예수님께 몰약을 드리십시오.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고자 안식후 첫날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매우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아낌없이 예수님의 몸에 부어드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사(葬事)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6:6)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26:8)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마26:9)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26:10)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마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위해,곧 복음을 위해 여러분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몸(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쏟아 부으십시오.그리고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여러분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되시기를 축원합니다.예수님의 장사(葬事)를 준비한다는 것은 복음 전파를 위해 옥합을 깨뜨린다는 의미입니다.복음 전파와 관련이 없는 기념비들은무의미한 것들입니다.영원히 기념될 만한 예물,몰약을 탄생하신 예수님께 바치십시오.결국 동방 박사들은 가장 위대하신 분께 가장 고귀한 예물들을 바치신 것입니다.
  큰 기쁨의 계절,성탄절에 여러분들은 예수님께 예물로 무엇을 준비하여 오셨습니까? 황금을 바치십시오.그리고 유향과 몰약을 바치십시오.순종과 충성,사랑과 희생,그리고 상한 마음,통회 자복하는 회개의 마음을 바치십시오.또한 복음을 위해 옥합을 아낌없이 바치십시오.크리스마스와 더불어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되는 동방 박사들과 같이 가장 적합하고 가장 귀한 예물을 바치십시오.

 1.동방 박사 세 사람 귀한 예물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 따라 왔도다.

<후렴>
오 탄일 밤의 밝은 별 명랑하고 귀한 별 아기 예수 계신 곳에 우리 인도하여라.

 2.베들레헴 임금께 나는 황금 드리네
  영원토록 모든 백성 다스려 주소서.

 3.거룩하신 구주께 나는 유향 드리네
   만국 백성 찬송드려 만유 주 섬기세.

 4.주의 죽을 몸 위해 나는 몰약 드리네
   세상 모든 죄인 위해 십자가 지셨네.

 5.다시 사신 구주님 왕의 왕이 되시네
   동방 박사 본을 받아 우리도 절하세.

                        <찬송가 1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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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한국전쟁과 통일지향의 기독교

"(계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계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계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계13: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계13: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계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계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계13: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계13: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계13: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계13: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계13: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계13: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계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


  독일 본 교외에 위치한 콘라트 아데나워 고등학교는 미국처럼 마약이나 총기류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학생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는 과거사(過去事)를 회개하는 독일 교육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학교 역사담당 교사 하인츠 빌름스는 학생들을 끊임없이 다그치고 있습니다. 2차대전 종전 50주년을 맞는 올해 1월부터 학생들에게 히틀러가 등장해 33년 권력을 잡아 대학살을 자행하기까지의 매우 민감한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거 독일 청년들이 세계 어느 나라 청년들보다 더 잔인하고 파괴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이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심어주자는 취지에서 입니다. 이는 언젠가 유럽 정치및 경제의 주인공이 돼야할 독일의 전후세대에게 왜 그같은 과거사가 재연돼서는 안되는가를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독일은 역사교과서에 전쟁범죄의 책임을 명기하고 히틀러자서전 <나의 투쟁>을 지금까지 판금시킬 정도로 역사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있습니다. 사죄 표명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70년 브란트 서독총리가 폴란드(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 유태인 희생자 기념비에서 무릎을 꿇고 그는 "과거를 잊는 자는 영혼이 병든다."며 사죄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올해 종전기념행사가 줄을 잇는 가운데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 등 참석자마다 망각증세에 대한 경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아우슈비츠 해방 50주년 기념식에서는 로만 헤르초크 독일 대통령이 참석해 희생자들을 추모했습니다. 최근에는 나치시절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젊은세대 역시 이 의무를 벗을 수 없다는 주문 한가지가 추가되었습니다. 독일은 이스라엘에게 배상하고 씻을 수 없는 나치독인의 죄악상을 만천하게 공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최선의 배상을 하고 있습니다. 95년 현재 순수배상총액은 3백 1억 달러에 이르고 있습니다. 연방배상법(56년발효 65년 종료)에 따라 정치적 인종족 종교적 이유로 박해를 받은 피해자와 그 유족 2백 20만명에게 7백 10억 4천 9백만 마르크를 배상했습니다. 연방반환법(57년 발효)은 나치정권에 몰수된 물건의 반환, 배상을 위해 39억 3천 3백만 마르크를 배상했습니다. 이스라엘조약(52년 이스라엘과 조인)은 독일에서 추방된 유태인들을 위해 34억 5천만 마르크를 배상했습니다. 포괄보상협정(56년부터 64년까지 유럽12개국, 60-70년대 동유럽 4개국과 체결)은 동서유럽 전쟁피해자 배상비로 14억 마르크를 제공했습니다. 기타 78억 마르크를 배상했으며 21세기까지 총배상예상총액으로 1천 2백 23억 마르크를 책정해 두고 있습니다. 이같은 독일 정부의 노력에 독일국민들도 합심함으로써 평화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독일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독일의 성의있는 회개와 배상정책은 주변국가와의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독일 국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국가 재정이 어려웠을 때에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독일 민족이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 배상한다는 국가적 행위는 독일 국민들을 죄많은 민족으로 남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승화시켜 주변국가와의 공존과 평화가 얼마나 귀중한 가치인가를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나치독일에 극심한 피해를 본 이스라엘은 독일의 배상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고 평가합니다. 피해국가로부터 만족한다는 평가를 얻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독일은 이같은 철저한 배상과 회개를 통해 과거를 청산하고 프랑스 영국 폴란드 등 주변국의 신뢰를 되찾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결과 2차대전때 독일의 적국이었던 서방 각국은 동서독통일과 독일의 유엔평화유지군참여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그런가 하면 대조적으로 일본은 어떠합니까? 일본은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진정한 신뢰를 받고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국가입니다. 일본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면서도 외국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국가로 낙인찍혀 있습니다. 2차세계 대전중 직접적인 피해를 본 아시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다수 국가들마저 불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임이 자명한데 민간업자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계속 발뺌을 해 온 일본입니다. 종군위안부에 대한 배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후세들에게 침략과 만행의 역사를 올바르게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한국에 수학여행을 온 일본 학생들은 독립기념관에 가보고나서야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알게 될 정도로 그들의 역사를 모릅니다. 일본은 사죄와 회개는 커녕 엉뚱한 망언(妄言)을 일삼고 배상도 독일의 겨우 8분의 1에 그치고 있을 뿐입니다.
  회개와 그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민족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과거 한국 교회의 잘못된 점들을 철저히 파헤쳐 회개하고 그의 합당한 청산의 노력을 다 함으로서 뼈아픈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참된 민족 통일을 이루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에 나타난 두 가지 주목해야 할 현상을 살펴보며 통일 지향의 기독교의 자세를 바르게 가지고자 합니다. 한국전쟁 전후 나타난 중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신사참배로 인한 교단의 분열이며, 또 하나는 신흥종교운동의 출현입니다. 아울러 기독교의 정치와의 밀착 현상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며, 기독교의 세상 권력에 대한 바른 자세를 확립하여 이 땅위에 참된 평화을 이룩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1. 1950년대는 교단분열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각 종교는 심각한 교단분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절대다수을 이루고 있는 장로교가 1950년대에 세 번의 큰 분열을 경험하게 되었고 두번째로 큰 교단인 감리교도 이 시기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장로교의 분열은 신사참배문제가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신사참배란 사상적. 정치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 일제에 의해 강요된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숭배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숭배행위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의식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에 대한 믿음을 간직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사참배행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무서운 범죄행위에 상응하는 참회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교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명분상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고신파의 경우, 자신들만 옳고 다른 모든 교회는 그르다는 극단적 논리, 즉 흑백 논리는 전쟁으로 인한 사회심리적 경직된 태도로서 교단에도 강한 영향력을 끼쳐 보수 진영의 강한 폐쇄주의적 성향으로 더욱 분열을 가속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가 상호 보완적인 작용을 하면서 경쟁과 협조를 이루는 이상적인 관계 구조를 만들지 못하고 상대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갈등적 관계 구조는 극복하기 어려운 한국교회의 성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 사회는 남북의 분열, 동서의 분열, 세대간의 분열, 계급 및 계층에 따른 분열 등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한국교회는 이러한 분열의 아픔을 치유하고 더 높은 차원에서 평화를 이루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기는커녕 교회 안의 문제조차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종교로서의 높은 이념과 사상에 충실하지 못할 때 사회적 조건들에 굴복하여 갈등과 분열과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조건들의 압력을 더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에 굴복하여 분열된 교회를 향하여 "교회분열 그것은 교회의 윤리적 패배이다."라고 한 니버의 말에 귀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치의 활동이란 기껏해야 찬송가의 통일, 부활절 공동 예배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한국전쟁을 우리 민족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김인서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있습니다.  
  "내가 불탄 성읍을 향해 우는 것이 아니라 이 백성의 죄악을 통곡하옵고, 무너진 예배당을 곡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통곡하나이다."

2. 한국전쟁이 가져온 위기감과 아노미상태는 민중들로 하여금 신흥종파운동에 몰두하도록 작용하였습니다.
  당시 중요한 신흥종파운동으로서는 나운몽 장로가 중심이 된 용문산운동, 박태선 장로가 중심이 된 전도관 운동, 문선명 교주가 중심이 된 통일교회운동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파운동이 나타나는 데는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로 이어지는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전통이 크게 작용하였고,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한국 종교문화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폐허, 정치적 혼란, 경제적 극빈, 기성종교의 무기력 등과 같은 상황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요구하게 하였고, 이러한 요구에 응하여 나타난 것이 당시의 신흥종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 그 당시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건 무엇일까? 먹지 못한 양의 몸부림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교회는 원조물자 오면 나눠먹을 생각만 하고, 목사들은 큰 교회 자리를 얻기 위해 싸움만 하고 세계정세는 호전되는 것도 없고, 산업은 날로 쇠해가고, 관리는 점점 썩어가고, 학교 선생님들은 고리대금없자로 화하고 민중은 실로 마음을 가져다 붙일 곳이 없다. 그렇게 갈급하는 심리에서, 궁금한 심리에서 나온 것이 성신받는다는 현상이다."
  용문산운동에 참여한 한 젊은이의 다음과 고백은 전쟁 후 도시에서의 삶이 얼마나 큰 아노미적 심리에 시달리게 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서울을 미워함은 농촌에서 서울 가 6년 동안 지은 죄가 내 30평생의 범죄의 대부분이었고, 죄악의 질이 극히 흉악하여 거기서 받은 죄의 독소는 쉬 빼낼 수도 없다. 회고컨대 나의 순수한 신앙절개가 서울에서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능욕당하고 첫 믿음을 도적맞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후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위기의식과 아노미가 한국민으로 하여금 신흥종파운동에 들어가도록 한 배출요인(pushing factor)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심리적 상태를 가진 사람들을 흡수한 흡입요인(pulling factor)이 무엇이겠습니까?
  첫번째로 신흥종파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성격을 들 수 있습니다. 용문산운동의 지도자 나운몽 장로가 안수를 하면 가지가지의 병이 나았고, 성령이 역사하여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인까지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렸으며 귀신이 쫓겨나가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박태선 장로 역시 안수를 통해 병 고치는 능력이 있어서 윤치영, 임영신씨 등 당시의 저명한 인사들이 그러한 체험에 대한 간증을 하는가 하면 그의 설교하는 외모는 다음과 같았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얼굴은 희고 맑고 키는 커다랗고, 정열에 빛난 눈으로 수만 군중을 노려보며 강단에 우뚝 서 있을 때는 마치 하늘 천사 미카엘이 거기 서 있는 듯, 마귀도 당장 물리칠 듯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안심고라 흥분을 준다.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때도 많다. 입을 열면 그의 입에서 불이 나온다. 인간의 입에서 불이 나오는 놀라운 광경에서 나는 눈으로 보았다."
  문선명 교주의 카리스마도 매우 강렬하여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가도 선생님이 나타나시어 일일이 지시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는 고백을 하는 신도가 있는가 하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을 다음과 같이 감격에 겨워 표현한 신도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증거해주신 그 분이었습니다. 너무너무 감격스러워 자력에 끌리듯 끌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 분의 발등을 문질러주고 싶고 그 분의 옷자락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습니다."
  이상 살펴본 내용들이 성령의 역사이든  악령의 역사이든 신흥종파의 지도자들에게 독특한 종교적 능력, 곧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한국전쟁 후의 위기상황에 처한 한국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카리스마를 요구하였고, 그러한 요구에 성공적으로 응한 신흥종파 지도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영역으로 흡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번째의 흡입요인은 신도들이 경험한 신비스러운 특수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자주 나타나는 그런 현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성령을 받아' 어떤 뜨거운 감정이나 방언 등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나운몽 장로는 자신이 집회를 이끈 어느 교회의 뜨거운 감정적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통성기도 시간에는 온 장내가 뒤덮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모두 꿇어앉아 드리는 기도이면서 엉덩방아를 안 찧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꾸두둥거리는 소리와 아울러 우는 소리, 가슴을 치는 소리, 이 모든 소리는 아집과 죄악성이 무너지는 소리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1955년 박태선 장로가 남산 부흥회를 인도할 때는 썩은 뼈 타는 냄새가 나다가 백합화 향기가 가득하고 이슬이 내리는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통일교 신도 가운데는 박해하는 아버지가 통일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로 소나무에다 한 처녀를 철사줄로 꼭꼭 묶어놓았는데 한 밤중에 사도바울이 홀연히 나타나더니 철사줄이 흐느적거리면서 풀어져버렸다는 신비한 체험 이야기가 당시의 통일교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그 진위를 떠나 자신이 믿는 신앙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며 이러한 확신은 전쟁 이후 무너져버린 규범이나 가치를 회복시켜줄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신흥종파에서 자주 등장하는 신비체험은 신도들을 종교로 끌어당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요인으로 당시의 신흥종파가 제공한 공동체적 분위기를 들 수 있습니다. 나운몽 장로는 일찍이 일제 말부터 용문산 아래 도치랑 마을에 야학당을 만들어 일본어를 가르친다는 핑계를 대면서 성경을 가르치는 신앙공동체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47년 4월 나 장로와 5명의 숙생이 모여 애향숙이라는 신앙공동체의 개숙식(開塾式)을 가진 이래 이 공동체는 꾸준히 성장하여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따뜻한 공동체적 분위기에 대하여 병든 몸으로 자살까지 기도했다가 용문산에 온 한 신도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지할 이 없는 몸이지만 주의 영을 받은 사람 모두가 부모되고 형제가 되니 주의 사랑 주의 은혜 더욱 넘친다." 면서
  "가련다 이 몸은 생명수 흐르는 곳 은혜의 비가 오고 사랑의 꽃이 피는 따뜻한 주님의 품 속을 찾아서 이 몸은 가련다. 그리운 용문산으로"
  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종교적 공동체 그 자체가 하나의 핵심적인 요소가 됩니다. 즉 문선명 교주는 한을 안고 가신 예수께서 영광으로 현현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가정과 종족과 전체가 하나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축복가정, 합동결혼식 등의 종교적 관행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박태선 장로의 경우 신약성경 계시록을 근거하여, 신앙촌을 세워 그 안에 14만 4천 명의 수를 다 채우게 되면 예수께서 재림한다고 하면서 공동체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신앙촌에 들어가게 되면 죽음이 없고, 살아서 주를 맞이하며, 낙원생활을 하고, 주와 함께 왕노릇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소사, 덕소 등에 대규모의 신앙촌을 설립하여 거대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인명의 손실과 인구의 이동 그리고 같은 마을사람끼리의 적대행위 등은 필연적으로 가족공동체와 지역공동체의 상실 혹은 약화를 초래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후 형성된 이들 신흥종파들은 공동체적인 성격을 강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상실감에 시달리는 많은 신도들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교단분열에 시달리면서 힘이 약화되고 위신이 추락한 기성교회들은 의미있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실패했다고 볼 수있습니다.
  당시 신흥종파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기성교회의 기독교인들(전도관에 온 신도의 89%가 기독교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음)로써 이들은 한결같이 기성교회의 냉랭함, 부패 등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네번째 요인은 한국민족의 자부심 혹은 사명을 강조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인간성의 추악한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비참한 경험을 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에 의해서 형성된 자기비하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한국민에게는 무엇인가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신흥종파운동은 한국민의 이러한 요구에 매우 잘 부응하였습니다. 박태선 장로는 하나님께서 옛 이스라엘 나라를 버리시고 새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셨는데 그것이 곧 한국이라고 했으며, 계시록 2장과 스가랴 4장 14절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메시야를 상징함)는 박태선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은 한계를 지닌 것이므로 재림하신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어야 하는데 재림하시는 동방의 나라가 곧 한국이며, 따라서 이 나라는 탕감복귀의 민족적 기대(基臺)를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일제하의 박해 40년, 국토의 분단은 탕감복귀의 일환으로 해석하므로 소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전쟁, 가난, 원조, 억압 등의 분위기 속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와 사명을 가르쳐주는 교리는 확실히 그 종파로 끌어당기는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부정적인 결과로 인해서 한국전쟁의 충격 못지않은 큰 충격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충격은 분명히 병리적인 사회심리로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종교를 포함한 여러가지 사회적 삶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현상에만 국한시켜 보아도 여러가지 병리현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92년 10월 28일의 시한부 종말론, 이웃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개별교회 자체의 확장에만 몰두하는 개교회주의, 포스토 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와의 관련되 신학논쟁으로 인한 갈등 등입니다.
 
3. 철저히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과 당시 가장 강력한 반공세력이었던 기독교는 자연히 밀착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자신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유당 국회의원이나 정부 요직을 많은 수의 기독교인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익의 3영수'로 불린 이승만. 김구. 김규식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신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익의 정치적 승리를 기독교인들의 승리로 동일시하기 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인의 신념체계와 부합되거나 기독교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즉 이 대통령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허리를 굽히는 대신에 손을 가슴에 얹고 주목하도록 했으며, 감옥전도와 옥중전도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1951년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종군목사제도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보수로 촉탁되었지만 1954년부터 현역장교로 임관되는 군목제도가 확립되어 1955년 현대 카톨릭 27명을 포함하여 352명의 군목이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들어온 적지않은 원조물자들을 교회들을 통하여 배급하게 하여 기독교인들이 많은 혜택을 입을 수 있기도 했습니다. 일시적 현상이긴 하였지만 이른바 '밀가루 신자(밀가루와 같은 해외 원조 배급품을 타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신자)가 급격히 늘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기독교 방송의 허용, 일요일의 공휴일화, 형무소 목사 임명, 크리스마스의 공휴일화 등 여러가지 특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사이의 밀착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약화되어 갔습니다. 이승만 정권과의 밀착에 따른 기독교회의 혜택은 외형적으로 기독교회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 전체로 보아서는 심각한 문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곧 교회가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는 태도는 기독교의 예언자적 사명과 도덕적 위상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교회들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민주화, 유신 반대, 인권 옹호 등을 외치다가 많은 고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들은 역사의 어두움 속에서도 침묵하였고, 그 중의 일부는 예언자적 사명을 담당하는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매도하였으며, 삼선 개헌 지지와 유신 지지를 표명하고, 군부 독재 정권을 정당화하는 조찬 기도회 등을 개최하여 국가 권력으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사회에 대한 영적, 도덕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교회는 국가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그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국가 권력과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으면 권력의 잘못된 사용을 비판하고 그 개선을 요구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4. 본문은 여자의 남은 후손과 싸우려고 바닷가에 서 있던 12:17의 용(마귀)의 모습과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용(마귀)이 바닷가에서 한 짐승을 불러냅니다.
  본문 1절-10절까지의 내용은 바다에서 나오는 한 짐승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짐승은 12장의 용(마귀)으로부터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부여받습니다. 다시말해 이 짐승은 마귀에 의하여 세움을 받고 마귀의 일을 수행하며 마귀의 이익을 높여주는 일을 행함에 있어 마귀의 도움을 받습니다. 마귀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이 짐승에게 주었습니다. 용(마귀)는 하늘의 전쟁에서 패함으로 하늘에서의 자신의 보좌를 상실하고 대신 '이 세상 임금'으로서의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일시적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용(마귀)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짐승으로 비유된 세상 권력에게 양도했기 때문에 이 짐승, 즉 적그리스도적인 세상 권력들은 사단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되어 교회와 성도들을 조직적으로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본서가 기록될 당시 이 권세는 이교국이었던 로마제국을 가리킨 것입니다.)
  여기 짐승은 역사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고 핍박하는 세상 권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치적 세력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자기를 높이거나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는 사단과 협력하는 세력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기만, 우상숭배, 영적 모독 및 간음 등을 통하여 사단의 제자로 유혹하는 자들은 구체적인 짐승의 모습들인 것입니다.
  이 짐승의 뿔에난 열 면류관은 세상의 왕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앙의 승리자들이 받게 되는 영광의 면류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머리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다고 했는데 "참람하다."는 말은 '훼방하다.' 또는 '모독하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짐승으로 비유된 세상 권세가 참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부인하고, 그 분에 대한 망언(妄言)을 일삼으며, 그리스도의 은혜을 비난하려고 모든 시도를 다 행하며, 하나님께 돌려야 할 존경과 경배를 자신(우상)에게 돌린다는 것입니다.
  이 짐승이 이러한 일을 행하기 위해 몇 가지 권세를 받았는데, 첫째는,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았다."(5절)고 했습니다. "큰 말"은 세상을 지배할 권세와 교만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참람된 말'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난하려는 모든 시도(試圖)를 나타냅니다. 다음으로,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권세를 받았습니다."(7절) 여기 싸운다는 것은 군사적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긴다.'는 것은 짐승이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육신적 생명을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각 족속과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7절). 이는 사단이 메시야처럼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권세를 지닌 짐승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13:4).......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용과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짐승의 목적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경배와 충성을 용과 짐승에게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짐승의 권세는 한시적(限時的)입니다. 즉 마흔 두 달 동안만입니다.

  "(계13: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여기 "마흔 두달"은 예수 그리스도 재림 전까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를 가지고 성도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게 될 제한된 시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박해는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전쟁에서 성도들이 승리하고 짐승은 패하여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짐승은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에게서만 경배를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짐승의 권세가 아무리 강력하고 위협적이라 해도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게서 참 생명, 즉 믿음과 진리를 빼앗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10절의 말씀입니다.
 
  "(계13: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여기 "인내"란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어떤 일을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용감하게 인생의 최악의 경우를 받아들여 이를 영광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믿음"이란 자기 주인에게 대한 최상의 충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신의를 말합니다.
  두번째로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에 대해 11절에서 18절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은 인간의 종교 생활, 즉 예배와 관련되는 짐승으로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합니다. 자칭 선지자로 자처하며 여러가지 이적을 행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데 그들의 종교가 거짓종교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첫번째 짐승을 사회를 타락시키는 사단의 활동이라고 한다면, 땅에서 올라온 이 두번째 짐승은 기독교를 타락시키는 사단의 활동을 말합니다. 이 짐승의 주된 임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진리를 떠나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이 짐승은 먼저 나온 바다 짐승의 모든 권세를 행하는데 이는 거짓된 종교 지도자 및 거짓예언자들이 세상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악행을 자행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짐승은 세상의 권력을 등에 업고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사람들을 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게 경배하게 만들 것입니다.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이 목적 달성을 위해 짐승은 이적을 행하고, 우상을 만들게 하고 이 우상에게 생기를 줍니다. 즉 적그리스도의 활동 가운데 생명력과 실재성 그리고 큰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생명과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자신을 우상화하여 곳곳에 우상을 세웠습니다. 모든 북한 주민들이 자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 하도록 요구합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눈을 감게하여 어버이 수령님을 찾게 한 후 그들의 책상 위에 빵이나 과자를 두고 그것을 누가 주셨느냐고 선생이 물으면 학생들은 큰 소리로 어버이 수령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 아들 김정일은 이 우상화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짐승의 손에 사로잡힌 자들도 짐승만을 절대시하며 그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이처럼 사단은 이적을 통해 사람을 미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짐승이 '어린양 처럼 두 뿔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가장(假裝)하며 사람들 앞에 큰 이적을 행하므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언급된 일곱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와 버가모 교회,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 가운데서도 광명의 천사의 탈을 쓴 사단이 은밀히 활동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2:8-11, 12-17, 18-24).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양 온갖 능력과 신비한 역사를 동원하여 미숙한 성도들을 유혹하는 거짓 선지자, 사이비 종교인들이 종종 있습니다. 마치 출애굽기 7:11,12에서 애굽의 술객들이 모세가 행한 것과 같은 이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의 치부와 명예를 위해 활동하는데 이는 결국 용과 사단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온 짐승에게 미혹되어 우상을 숭배하고 짐승을 경배하게 되는 사람들은 이 짐승에게서 '이마'나 '오른 손'에 짐승의 표를 받게 됩니다. 여기 '오른 손'은 신체적 활동의 대표하는 것이며, '이마'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지위, 신분 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진정한 소유권과 충성심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인 것입니다. 즉 성도들이 그 몸과 마음에 하나님의 소유라는 낙인이 있듯이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도 사단의 소속이며, 짐승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다는 낙인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박태선이란 사람이 굉장한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보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든 재산을 팔아 그를 따라서 신앙촌에 들어갔습니다. 그를 따라 들어간 사람들은 오직 박태선만을 신봉하면서 그를 위한 하수인 노릇을 했습니다.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에 그 소굴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습니다.사람들이 박태선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곳을 빠져 나오지 못했던 것은 생계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이 이와 유사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종말이 어떤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14:9)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계14: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계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계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붙는 못에 던지우고 (계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지금 이 시대에 사단은 종교와 학문을 통합시키는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통합의 작업을 위해 과학까지 동원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동양의 기 철학(氣 哲學)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려고 하는 시도도 역시 사단의 짓거리에 불과합니다.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을 찾아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신앙생활, 이적과 기적이 나타나는 교회라야만 능력있는 교회라고 따르는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없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시키는데 더욱 더 열심과 충성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이적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이었지 그 자체가 기독교를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존귀케 되어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지 인간이나 인간의 가르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외부적인 박해와 핍박에 대해서도 인내할 준비를 해야 되지만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이적, 기적 등의 능력행함과 같은 내부적 도전에 동요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씀에 근거한 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롬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고후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5.  이제 세상에 대한 비밀을 파악한 바탕 위에 통일 지향의 기독교 자세를 바르게 하고자 합니다.
  오늘날의 평화전략은 힘의 지배 논리에 입각한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자신의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만든 지배 전략을 총괄하여 "팍스 로마나"(로마제국의 평화)라고 부릅니다. "팍스 로마나"는 크게 보아 세 가지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군사적 측면에서 말하는 평화입니다. 군사력의 우위를 전제로 하고 그 군사력을 동원한 무력적 평정이란 의미의 평화입니다. 군사행동을 통한 평화달성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자만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지 패자는 평화를 빼앗긴 채 좌절하고 고통당하며 분노의 소리를 발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쟁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당연히 힘의 우위 확보, 곧 군비 확장이라는 것입니다. 군비 경쟁의 최첨단을 장식하는 핵무기의 개발과 핵 대결이 바로 한반도의 현실에서까지 반평화의 분명한 원인 제공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핵 갈등이 엄청나게 위험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핵 전쟁 발발하게 되면 승자와 패자가 영원히 확연하게 갈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하 24장을 보면, 다윗이 인구 조사를 강행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인구조사의 목적은 단순히 인구조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의 강화와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시행됩니다. 성경은 이같은 다윗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 큰 범죄행위로 고발하고 그에 대한 엄청난 댓가를 치루게 됩니다. 다윗이 즉위 초기에 미미한 군사력으로 주변 모든 나라들의 대군을 격파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승리이시며 나의 방패시며 나의 요새시며 나의 등불이라고 겸손해 하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인구 조사를 통해 군사력 강화를 꾀하는, 다시말해 하나님 보다 인간들의 힘을 더욱 의지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구 조사 결과  병력수가 130만 명이나 되어 다윗은 크게 만족했습니다. 허나 그 만족도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자랑하고 만족해 하던 군사력은 하루 아침에 7만 명이나 줄어 들고 말았습니다. 군사력을 의지하려했던 다윗의 불신앙을 꺾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라에 온역을 내려 7만 명을 죽였던 것입니다.

  "(삼하24: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인이라."

  인간이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더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이며, 인간이 하나님 외에 다른 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신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 왕국의 번영과 평화는 아름답게 들립니다. 그런데 그 평화 유지정책 중 하나는 결혼동맹이었습니다. 즉 주변 국가들과 동맹 관계를 맺기 위하여 정략상(政略上)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조차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이것이 나라 민족에 어떠한 파멸을 초래했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왕상11: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왕상11:2) 여호와께서 일찌기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왕상11:3)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왕상11:4)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왕상11: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왕상11: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같이 좇지 아니하고 (왕상11: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왕상11:8)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뿐만 아니라 부강한 나라만이 가질 수 있는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 솔로몬의 많은 말병거들의 수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왕상4:26) 솔로몬의 병거의 말의 외양간이 사만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며."

  이러한 아내를 많이 두는 것과 말병거(군사력)를 많이 두는 것은 분명 모세의 율법에 금지되어있는 것입니다.

  "(신17: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신17:17)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이러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솔로몬 왕국은 오래가지 않아서 나라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핵 무기의 소유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군사력을 동원한 평화는 참 평화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막강한 화력의 유엔군이, 그것도 16개 연합국이 공산세력을 물리치고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주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 민족이 하나님의 능력의 장중(掌中)에 잡히게 되기만 하면 핵 무기가 결코 두려운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한국교회가 신앙고백적으로 반핵 평화운동을 펴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한국교회가 과거를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갱신과 개혁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식의 평화는 두 번째로 정치적 차원의 두 가지 이데올로기와 밀착되어 있습니다. 곧 팍스(pax, 평화)는 제국 안보와 제국 국민의 획일적인 총화를 전제로 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말하는 국가 안보의 이데올로기와 국민 총화라는 유신 시절 및 그 후에 지속된 군사독재체재의 한국 상황을 바로 이와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우리의 암울했던 독재 시절의 역사를 자가비판적인 눈으로 돌이켜 볼 때 국가 안보는 실제로 정권 안보에 불과했고, 국민 총화는 국민의 민주적 자유와 정의로운 생존권을 유린한 것이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안보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위에 이루어질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총화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룩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냉전 체재의 종언(終焉)으로 동구권이 붕괴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승리요,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패배라는 식으로 단순 도식화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싱가폴의 경우는 사회주의의 성공한 한 예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제도상의 통일이 구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통일 이 후 독일의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갈등과 또 다른 반목이 바로 이를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팍스"(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다음으로 "팍스 로마나"의 종교적 측면이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군사적 평정과 정치적 제국 수립을 완료하면서 '아우구스투스 평화'라 하는 신전(神殿)을 만들었습니다. 팍스의 주인공인 황제가 신격화되면서 정치적으로는 국가권력의 절대화 상징인 '황제 숭배'가 국민들에게 생활화된 것입니다. 로마 당시 통용되던 화폐인 동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상이 인각되어 있습니다. 황제 숭배라는 전체 로마 제국의 황국 신민화 정책의 틀에 세금바치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납세거부는 단순히 정치적 저항 행위일 뿐 아니라 동시에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일종의 반역죄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막12:13)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막12: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막12: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막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 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12:17)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팍스 숭배는 일종의 정치 종교의 극치이며, 정치 종교는 실제로 국민의 총화적 획일주의와 함께 지배 체재의 종교적 정당화를 꾀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기본적으로 평화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평화가 있고, 그 평화는 세상(로마)이 주는 평화처럼 속박하고 전쟁하고 지배하는 거짓 평화는 아닙니다. 그 평화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평화인 것입니다.

  "(눅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복음을 전파함으로 참된 자유와 평화를, 즉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를 보게하는 영육의 자유를, 눌린 자에 자유를(정치적인 자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경제적인 자유) 누리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자유와 평화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와 평화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엄청난 댓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지불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 땅에 충만할 때 진정한 자유와 평화, 평화적인 민족의 통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황제 숭배 문제는 우리 역사에서도 비극의 극치를 이루었음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일제 시대의 신사참배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종교적 차원의 우상숭배만이 아닌, 민족 말살이라는 극악의 정치 행위였습니다. 독일 교회가 히틀러의 교묘한 반공주의에 덫에 걸려 무자비한 히틀러 독재를 앞장서서 도왔던 비극을 우리도 한국의 군부독재상황에서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야말로 참된 평화인 것입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러므로 진정한 나라 민족의 평화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므로 한국 교회는 현대판 우상숭배의 굴레에서 먼저 해방되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해방 이 후에 태어나 서로간의 체재를 전혀 접해보지 못한 채 살아온 연령의 인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함은 물론, 우리 민족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의 참화 그리고 그에 따른 생래적인 적대감을 지니지 않은 채 흑백 논리의 정치 체재를 살아온 6.25 이 후의 세대 역시 엄청난 인구 비율을 차지하는데, 이들이 바로 통일 조국의 살림살이를 주도적으로 맡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남한 교회의 다듬어지지 않은 우월주의적 교만을 버리고 북한 교회나 사회가 열등주의적 자기 비하를 하지 않는 선교의 주체가 되므로 해서 참된 평화 통일을 이룩하는 통일 주체의 교회 사명을 다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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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한국전쟁과 사명자        


"(습3: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습3: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습3: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습3:4)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습3: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 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습3:6) 내가 열국을 끊어 버렸으므로 그 망대가 황무하였고 내가 그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 모든 성읍이 황폐되며 사람이 없으며 거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습3: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어느 작가는 문민정부를 가리켜 '사고 공화국'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문민정부 출범 후 잇달아 일어나 사건 사고를 두고 붙여진 말입니다.
  93년 1월 청주우암상가 붕괴 사건(27명 사망),
  93년 3월 헬기 추락 사고(7명 사망),
  93년 3월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78명 사망),
  93년 6월 예비군 부대 폭발 사고(19명 사망),
  93년 7월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사고(66명 사망),
  93년 8월 헬기 추락 사고(10명 사망),
  93년 10월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292명 사망),
  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사고(32명 사망),
  94년 10월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건(25명 사망),
  94년 12월 아현동 가스 폭발 사건(12명 사망),.....
  95년 4월 28일 대구 가스 폭발 사건(110명 사망).... 등

  김홍신의 세태 만필을 통해 보면 그야말로 우리 사회는 총체적인 부정 부패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위기감이 팽배해 있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농약투성이인 채소와 콩나물을 먹어야 하고 오염된 물만 마시며 언제 다리가 무너져 죽을지, 어느 때 가스가 폭발해 시신도 못 찾게 될지, 언제 비행기가 추락하고 지하철이 흙더미에 묻힐지 모르는 곳에서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하는 이 기구한 팔자가 싫어졌다. 억척스럽게 벌어서 세금 내면 죄다 떼어먹는 판이요, 큰 죄 지은 자는 잘 먹고 잘 살고 작은 죄 지으면 가차없이 감옥행인 세상, 사건사고 터지면 조무래기들만 두름으로 엮듯 잡아가고 거물을 알아서 내버려두는 사회. 썩고 썩어서 거대한 고름덩어리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정치판 사람들은 권력의 핵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지 멀쩡하게 살아가고, 과거의 죄상이야 어쨌거나 핵심세력을 도왔다 하여 오장육부 터지게 잇속 챙긴 걸 토해내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 세상 이치가 되어버렸다. 산행을 하다가 만난 점잖고 곱게 나이든 노인들은 서슴없이 "망할 놈의 세상, 이렇게 엉망진창은 없었을거야"라고 한탄했다. 다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갈 생각을 하자 걱정거리 또한 태산이었다. 도둑과 강도떼가 극성인 판이요,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강도나 도둑의 피해를 입었다는 치안부재인 세상에, 시골로 내려간다고 피할 재간이 있겠는가. 어느 날 아현동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하여 수라장이 된 장면을 TV로 지켜 보던 딸아이가 한탄하듯 내밷는 소리일까마는, 어린 속에도 하도 자주 터지는 사건사고에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차마 어린 것에게 왜 우리나라가 망할 거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하늘, 땅, 바다, 지하, 어디 한 군데 성한 데가 없네요. 이제 남은 건 산이 무너지는 것밖에 없네요." 딸아이의 말을 받은 것은 중학교 3학년짜리 아들녀석이었다. 틀린 말 같지 않았다...........최근에 시공되었던 터널 공사의 부실 현장이 종종 TV 화면에 공개되는 걸 보면 ..... 지금이라도 빨리 전국에 산재해 있는 터널의 안전진단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생태계의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한강 개발로 인해서 샛강이 줄고 고수부지가 떠억 버티고 있는 것은 언젠가는 서울 전체를 물바다로 만드는 대참사의 가능성을 예측케 하는 졸렬한 개발정책이라고 한다. 50년이나 100년에 한번 대홍수가 생기기 때문에 그 화를 후손이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기상이변이 세계적인 추세이고 환경파괴가 날로 심해진 탓에 50년이나 1백 주기의 대홍수는 더욱 당겨질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전문가의 이런 지적을 들으면서 한 가지 쉽게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어차피 대홍수가 난다면 그 때는 자기가 그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고, 언제일지 모르는 대홍수를 미리 예방하자고 건의해봐도 위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할 게 뻔하기 때문에 모르는 체하는 것이 상책일 거라는........"대한 민국 전체가 썩었다." 이렇게 절규하듯 말할 수 밖에 없는 우리네 현실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어느 고위공직자는 자식의 부정입학을 위해 2억 원을 내놓았다. 그의 월급액은 1백 60만 원이었다. 현재의 직위로만 따져도 2억 원을 모으기 위해선, 한 푼도 쓰지 않고도 무려 10년 5개월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낮은 계급의 옛날 월급에서부터 생활비와 교육비와 잡비 등을 계산에 넣어 보면 공직생활 20여 년을 통털어도 그만큼 모을 수 없다. 아니 그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여 월 1백만 원씩 받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20여 년이나 모아야 할 액수를 부정입학자금으로 쾌척할 수 있다니. 대한민국에서 평생토록 2억이란 거금을 만져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국민들이 분노하고 한편으로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이 같은 국민 모독죄가 도처에서 창궐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뒷짐을 쥔 자들과 이 따위 경제를 흔드는 자들이 부정부패의 세균들이란 사실을 어찌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몇 차례의 선거양상만 건성으로 훑어보아도 한국의 지하자금 규모가 정상적인 경제구조를 압도한다는 걸 짐작하고도 남는다. 국회의원의 세비나 장관의 월급액수로는 지역구 관리와 생활비를 댈 수 없다는 건 이미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 어떤 도깨비 방망이를 가졌기에 수십억 원씩의 선거자금을 융통했으며, 대통령 선거에서는 무슨 재주로 수백 수천억 원씩을 뿌릴 수 있었는지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설명이 불가능한 돈은 음험한 돈이고, 그런 돈은 음험하게 쓰여질 수 밖에 없다. 경제계와 정치계 사이에 주고받는 돈과 이권은 분명 음흉한 거래이자 부정부패의 표본인 것이다. 윗물이 그 모양인데 그보다 아래에 있는 물은 어떨꼬......>
  광주지검이 광주. 전남지역의 4대선거 후보자 1천 7백45명의 전과(前科)를 조회한 결과 후보자의 44.8%가 전과자(前科者)였습니다. 이들 중 행정범죄 전과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유형별로 보았더니 폭력 전과자가 2백 63명, 사기와 횡령 등 재산범죄가 79명, 절도 17명, 문서위조 17명, 심지어 강간 등 파렴치한 성범죄 전과자가 4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나타나 유권자들을 당황케 하고 있습니다. 이건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부산 지역의 경우는 72%나 된다는 것입니다. 4명 중 3명이 전과자이고 그 중 상당수가 무시무시한 범죄 전과자이니 이들이 당선되어 지방살림을 도맡게 되는 날은 결국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긴 꼴이 될터이니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닙니다.  
  검찰당국이 밝힌 바에 의하면 울산. 양산 지역 출마자 2백48명 중 67%에 달하는 1백 90명이 한 개 이상의 별(전과자에 붙여 이르는 말)을 갖고 있는 전과 보유자라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4범 이상이 42명으로 15%에 이르고, 혼인빙자 간음, 뇌물독직, 무고, 사기, 공갈 등의 파렴치범이 1백여 명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죄를 짓지 않고 살기란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법에 의해 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은 전과 기록 보유자들은 상대적으로 부도덕했다할 것입니다. 더구나 혼인빙자 간음, 뇌물 등의 파렴치행위로 인한 전과기록 보유자란 우리 사회에서 '지도급'으로 분류될 수 없는 부류라 할 것입니다. 한데도 이들 부도덕 파렴치 전과 기록 보유자들이 지역 살림을 일궈나가겠다며 지방의회 의원후보로 출마한 것은 지역민을 우롱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전과자들이 아니면 지도자가 없다는 말인가.
  이는 한 마디로 총체적인 부정 부패, 총체적인 위기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봅시다.

  "(습3: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 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위에 열거한 수 많은 사건사고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었건만 완악한 무리들은 자신의 죄악에 대해 수치를 모르는 죄에 대한 불감증에 걸렸다는 지적의 말씀입니다.
  당시 예수살렘의 죄악상, 부정부패한 모습을 한 마디로 본문 1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습3: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먼저, "패역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한 것을 말합니다. 2절 말씀에서 바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습3: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다음으로 "더럽다."는 것은 이교도들이 우상숭배하는 것과 같은 의식적인 불결을 말합니다.
  셋째, "포학하다."는 말은 타인의 권리와 위치를 무시하고 광포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들이나 과부들 혹은 고아들과 같은 힘없는 백성들이 그들의 권리가 무시당하고 함부로 취급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습3: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여기 "방백들"은 백성의 지도자, 귀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라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잘 인도하기보다는 먹이를 찾아 부르짖는 사자처럼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재판장들"은 배를 곯은 짐승이 먹이를 남겨 두지 않고 한꺼번에 먹어치우는 것처럼 불의한 재물을 축적하기 위해서 재판을 굽게 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습3:4)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이며 오직 하나님께 충성을 다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스바냐 당시 선지자들은 간사하여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하지 않고 오직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거짓 예언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혔다고 고발합니다. 제사장들은 제사 의식을 행함에 있어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여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바침으로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것입니다.
  각계각층의 부정부패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습3:6) 내가 열국을 끊어 버렸으므로 그 망대가 황무하였고 내가 그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 모든 성읍이 황폐되며 사람이 없으며 거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습3: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습3: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한국전쟁이 가져온 중요한 구조적 변화는 냉전체제에 걸맞는 억압적인 국가기구가 형성되었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해방정국에 나타났던 좌파나 중도 우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우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파의 반공이데올로기는 1980년 중반에 이를 때까지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되어서 이른바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기후(social climate)가 되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60, 70년대 학교 미술시간에 6.25를 주제로 한 그림은 주로 "상기하자, 6.25. 멸공 통일. 반공. 승공" 등 이었으며, 흔하게 볼 수 있었던 포스타나 표어는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시자 공산당" 이었습니다.
  전쟁이란 목숨을 건 싸움으로 적과 아군만이 존재할 뿐 그 중간에 다른 어떤 것도 개입할 여지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흑백논리에 의한 이분법이 인간의식을 지배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매우 경직된 사회 심리구조를 형성하는 데 크게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 정권형태를 띠게 되고 이 역시 경직된 사회의식구조를 형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상황을 두고서 그 당시의 한 정치가는 다수의 횡포와 폭력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적인 테러리즘'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극심한 생존경쟁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들은 기존의 규범을 파괴하였고 적과 아군이 뒤바뀌는 상황에서의 앞잡이, 밀고, 복수 등의 악순환적 형태는 인간관계와 행동규범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여기에다 외국군의 진주와 함께 외래문화, 특히 미국의 대중문화가 광범위하게 침투되어 문화적 교란과 가치관의 혼란, 곧 아노미(anomie)상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전쟁을 통해 강화된 반공을 앞세운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타락은 사회적 위기감과 아노미를 더욱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엄요섭은 사회변천의 가장 중요한 요인을 전쟁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국사회는 일제에서 해방된 이후 사회의 모든 현상이 무질서에 빠지면서 사회생활은 어떤 형을 잡지 못하고 그때그때 혼돈을 계속해왔고 또 전쟁이 발생하면서 이 사회생활은 더욱 무질서에 빠지고 말았다."
  북한 당국의 혹심한 탄압으로 해방 전 한국교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하여 한국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연히 한국교회는 반공의 기수가 되었고, 기독교의 한국에서의 가장 큰 사명은 "멸공구족 민주건국(滅共救族 民主建國)"이며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기독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 한국교회는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반공주의에 완전히 침잠되거나 더 나아가서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50년대 초중반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극단적 반공주의)선풍까지도 어느 정도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철저히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과 당시 가장 강력한 반공세력이었던 기독교는 자연히 밀착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자신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유당 국회의원이나 정부 요직을 많은 수의 기독교인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익의 3영수'로 불린 이승만. 김구. 김규식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신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익의 정치적 승리를 기독교인들의 승리로 동일시하기 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인의 신념체계와 부합되거나 기독교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즉 이 대통령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허리를 굽히는 대신에 손을 가슴에 얹고 주목하도록 했으며, 감옥전도와 옥중전도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1951년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종군목사제도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보수로 촉탁되었지만 1954년부터 현역장교로 임관되는 군목제도가 확립되어 1955년 현대 카톨릭 27명을 포함하여 352명의 군목이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들어온 적지않은 원조물자들을 교회들을 통하여 배급하게 하여 기독교인들이 많은 혜택을 입을 수 있기도 했습니다. 일시적 현상이긴 하였지만 이른바 '밀가루 신자(밀가루와 같은 해외 원조 배급품을 타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신자)가 급격히 늘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기독교 방송의 허용, 일요일의 공휴일화, 형무소 목사 임명, 크리스마스의 공휴일화 등 여러가지 특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사이의 밀착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약화되어 갔습니다. 이승만 정권과의 밀착에 따른 기독교회의 혜택은 외형적으로 기독교회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 전체로 보아서는 심각한 문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곧 교회가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는 태도는 기독교의 예언자적 사명과 도덕적 위상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교회들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민주화, 유신 반대, 인권 옹호 등을 외치다가 많은 고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들은 역사의 어두움 속에서도 침묵하였고, 그 중의 일부는 예언자적 사명을 담당하는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매도하였으며, 삼선 개헌 지지와 유신 지지를 표명하고, 군부 독재 정권을 정당화하는 조찬 기도회 등을 개최하여 국가 권력으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사회에 대한 영적, 도덕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교회는 국가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그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국가 권력과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으면 권력의 잘못된 사용을 비판하고 그 개선을 요구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롬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13: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롬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롬13: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롬13: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롬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기독교인은 두 가지의 통치 영역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 통치(靈的 統治)로서 하나님의 통치이며, 다른 하나는 외부적 행동을 관할하는 육적 통치(肉的 統治)로서 곧 국가의 통치입니다. 본문은 기독교인이 사회 생활함에 있어서 취해야 할 국가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 국가 권력과 사회 속에서 영육간(靈肉間)에 성결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국가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순결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하는 시민이기 때문에 재림의 날을 대망하며 "고요하고 단정한 중에 평안한 생활을 하려"(딤전2:2)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확고한 종말론적인 신앙 때문에 바른 국가관을 가지므로서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성결을 보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 교회에서 콘스탄틴 대제(大帝)가 기독교로써 정치를 포섭하려 했으나 결국 교회가 세속화(世俗化)되고 말았습니다. 중세에는 교권(敎權)이 국권(國權)까지를 좌우하려고 하는 혼동에 빠져 결국 둘 다 부패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본문 1절은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독일 국민들에게 나치 정권의 살인마적 행위에 가담하는 구실을 주었고, 일제 시대에는 신사참배(神社參拜)가 국민 모두의 당연한 의무라는 변명의 구실을 준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가운데 올바른 국가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은 분명히 국가 권력에 대한 복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같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2:1-2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디도서 3:1에서는 목회자에게 주는 충고로써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 전서 2:13-17에서는,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는 어디까지나 신본주의 윤리(神本主義 倫理)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곧, 국가 권력에 대한 순종의 이유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1절) 그렇게 때문에 본문1절 상반절에 "굴복하라"는 말씀은 무조건적 복종이나 절대적 복종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건적이며 상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위에 있는 권세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가 될 때에는 거기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29절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요한 계시록 13장에 나타나는 적 그리스도적인 독재 정부에는 굴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치 독일이나 일제 군국주의자들이나 북괴 김일성은 바로 적 그리스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거기에 절대 굴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정부 형태라면 비록 그들이 소위 민주적이 아닐지라도 굴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최고의 정부 형태로 생각하나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주권재민, 主權在民)하나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미국의 상하 양원제는 사사시대(士師時代)의 형태를 모방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민주주의 정부의 권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하는 것이라면 굴복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양심을 거스리는 불의한 권력자들이나 그 권력자들의 시책에 대해서 무조건적이요 맹목적으로 복종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경우에 성도들은 마땅히 자신의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왕상18:1-46,단3:13-18).

  "(단3:13)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단3: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단3:15)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단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단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3: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즉 우상 숭배와 같이 극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통치자들의 불의한 행위를 묵인하고 그대로 굴종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거스려 하나님을 배반하는 어리석은 행위인 것입니다(잠15:9, 10,딤후3:7, 8). 다니엘처럼 하나님께 뜻을 정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단1:8).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권력 행사를 허락하셨지만 권력을 남용하는 죄까지 허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한 시민으로써 통치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아울러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통치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기독교인이 취해야 할 자세로써 폭력적인 투쟁을 정당화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박해를 가하는 사악한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마5:44).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바울 당시 팔레스틴 특히 갈릴리 지역은 계속적으로 폭동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님밖에는 왕이 없다고 믿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조공을 바쳐서는 안된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들 자신을 돕기 위한 폭력 행위를 시작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돕지 않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직업적으로 살인과 암살을 서약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여하한 정부의 존재도 불가능케하는 것입니다. 소위 광신적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폭력적인 유대주의로부터 기독교를 완전히 분리시키고 올바른 국가관속에 선량한 시민 생활을 목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 국가를 폭군에게서 건져내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국가 권력이 불의를 행할 때 성도는 야합하거나 굴종할 것이 아니라 적법한 절차를 거쳐 공의의 회복에 앞장서서 불의의 세력을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칼빈). 정당한 정의와 권위에 대한 순응이 성도의 덕목이듯이 불의에 대한 비판과 개혁 또한 성도의 의무인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본질적인 사명은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행1:8).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각기 주어진 삶의 터전에서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삶을 변화시킨 성령은 그의 생활을 통해 영국 사회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므로서 부패한 영국 사회를 정화하고 부강한 산업사회로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따라서 한 인간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도는 개인적으로 사회 참여를 할 수 있으나 이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각기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인 견해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인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이름을 걸고 단체적으로 사회 참여를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므로 변화 많은 세상에 의해 영향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향해 거룩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롭게 하고 더욱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를 견고히 세우는 심부름꾼으로서의 국가 권위(정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도의 의무를 등한시해서는 안됩니다.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기울어 가는 그의 조국을 위하여 극한적인 위기 상황에 처해서도 눈물로써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렘20:7-18).

  "(렘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렘20: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렘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20: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렘20: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하시는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렘20: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 (렘20: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렘20: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렘20:15)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렘20: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렘20: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렘20: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반면에 통치자들은 자신이 가진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시2:10, 11)

  "(시2: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시2: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겔45:9).

  "(겔45: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아 너희에게 족하니라 너희는 강포와 겁탈을 제하여 버리고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토색함을 그칠지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바울이 본장에서 천명하고 있는 국가관은 예수께서 주신 사명, 곧 복음의 선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마28:19, 20).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어떤 정부 또는 권세 아래있는 성도는 교회의 질서 못지않게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왜냐면 본질적으로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 질서 보존속에서 성도의 보존과 복음이 전진적으로 선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악을 억제하고 선을 증진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의 빈곤이나 무질서를 퇴치시키는 일 등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잠16:12,29:4).

  "(잠16:12)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잠29: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교회가 내적인 일을 한다면 국가는 외적인 일을 합니다. 국가란 본래 서로 법령을 준수함으로써 어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결속하고 서약한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국가가 없이는 그리고 이 법률과 이 법률을 준수하겠다는 상호 약속 없이는 악하고 이기적인 강자만이 최고가 될 것입니다. 약한 자들은 발붙일 데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정글의 법칙에 따라 지배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국가에 자기의 안전을 빚지고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누리고 국가에 대한 의무는 지키지 않으려 한다면 옳지 못한 것입니다. 국민이 국가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 납세의 의무를 다해야 하며,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병역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중에 전시(戰時)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 적(敵)을 죽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십계명 중에 제6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위반하지 말라는 것으로 개인적으로 살인을 금한 것입니다. 법적 재판에 의한 사형(死刑)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출21:14-17).

  "(출21:14)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 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출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21:16)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 지니라 (출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

  기독교인이 전쟁이 나가는 것은 기쁜 일은 아니지만 전쟁에 나가는 것이 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어거스틴). 기독교인으로서 전쟁때에 개인의 생명을 아껴 어디까지든지 기피할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 무책임할 뿐 아니라 인류의 불행에 대하여 수수 방관하는 불의한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혹 불행하게 침략주의 국가의 국민이 되어 어떤 침략 전쟁에 군인으로 강제적 징발(徵發)을 당할 때, 그는 그의 양심의 자유로 할것이로되 혹시 거기에 응하지 않을 경우도 있을 것이며, 그런 경우에도 그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강도 행위를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로써 국가는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본문4절). 기독교인들은 권세 잡은 자를 존경하되 하나님을 위하여 할 것이며, 다스리는 자가 백성을 양선하게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권세를 존중히 여긴 다윗은 끝까지 형통하였으나, 다윗의 세력을 반대한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전쟁하다가 머리카락이 상수리 나무 가지에 걸려 그 원수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삼하18:9-15).

  "(삼하18:9)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간지라 (삼하18:10)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삼하18:11) 요압이 그 고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삼하18:12)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삼하18:13) 아무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 생명을 해하였다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삼하18:14) 요압이 가로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삼하18:15)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높일 자를 높히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합니다(롬13:7, 벧전2:13-18).

  "(벧전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벧전2: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벧전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벧전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하라 (벧전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벧전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하나님의 도구로써 국가 권력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양심에 따라 순종하여야 하며 또한 우리의 신앙 생활의 성결 보존을 기하고자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기 위해 우리는 나라와 민족, 그리고 위정자들을 위해 사명적으로 열심히 기도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나라 민족을 통해 궁극적인 천국 복음(마24:14)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한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사명자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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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통일의 주체-성령        


"(행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행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2: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행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본도와 아시아, (행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행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2: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행2:13)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금년은 한국전쟁 발발 4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물질(경제)에 가리워 "잊혀진 전쟁"(forgot war)이 되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야드베쉼이란 유대인의 민족박물관이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시 독일의 히틀러 정권이 서울 인구의 절반이 넘는 유대인 6백만 명의 귀한 생명을 처참하게 학살한 전시관이었는데, 유대인은 그 전시관에 "과거를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 말라."고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미국에서는 휴전 42주년(1995년 7월 27일)을 기념하여 위싱톤에 '한국전쟁 기념 전시관'을 10여 년 전부터 준비하여 설립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을 영원히 잊지않기 위해서 금년 7월 27일을 기하여 뉴저지주 287번 도로를 '한국전쟁 기념 도로'로 개명하기로 의회에서 결정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선 민족 분단을 초래한 전범(戰犯) 김일성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떻했습니까?
  김일성과 호네커(구동독 공산당 서기장), 이 둘은 다 분단 체재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최고권력을 누린 인물이지만 말년의 인생은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에리히 호네커는 1971년 구동독 권력구조의 정상에 올라섰지만 1994년 5월 29일 81세의 나이로 남미 칠레에서 암으로 고생하던 중 외로이 죽었습니다. 자신의 유해가 고국땅에 묻히기를 원했다지만 끝내 그의 고향인 비헬즈키르헨이나 그의 여동생이 가족묘지를 갖고 있는 노인키르헨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산티아고에 묻혔습니다.
  이에 반해 김일성 장례식은 북한 주민의 오열과 대대적인 추모 속에 성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호네커가 죽었을 때 독일언론들은 냉정했습니다. 짤막한 보도를 통해 그가 젊은 시절 반파시즘운동을 했고 감옥생활을 했으며 양독 관계개선과 긴장완화에 공헌한 점 등을 인정했습니다. 동시에 그가 소련의 지지를 업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 베를린장벽 건설의 총책임을 맡았으며 비밀경찰 제도를 강화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베를린장벽 탈출자들에게 총을 쏘도록 한 점 등에 대해 과오를 지적했습니다. 김일성에 비하면 호네커는 그 만큼 피를 흘리게 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호네커 인생의 황금기는 아마도 1987년 9월 그가 정상회담차 서독을 방문한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그는 국빈대우를 받았습니다. 서독언론도 그의 화해와 공존정책을 추켜세웠습니다. 그러나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그의 운명은 천길 아래로 굴러떨어졌습니다.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린치위협을 피해 베를린 주재 소련군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호의로 소련군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을 탈출한 뒤 독일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러시아마저 옐친시대가 열리자 그는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1992년 6월 독일로 이송됐습니다. 그 뒤 그는 베를린 지방법원 법정에서 곤욕을 치렀습니다. 베를린장벽 희생자 가족들이 그를 살인혐의로 고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서 유치장 신세도 졌습니다. 그는 곤혹스러운 심문에 건강을 이유로 대답을 회피하던 중 간신히 병보석을 얻어 1993년 3월 칠레로 망명의 길을 떠났으나 말년의 가혹한 시련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15개월 만에 암으로 객지에서 죽었습니다.
  호네커와 비교할 때 김일성은 절묘한 시기에 죽음으로써 남한은 물론 미국.일본 등 세계도처에 미묘한 충격과 파장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바로 그의 죽음을 못내 아쉬워하는, 당혹스럽지만 부정할 수 없는 국민정서입니다. 그의 죽음이 처음 보도됐을 때 박수치는 국민은 매우 적었습니다. 오히려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이에 차질이 생긴 것을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마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 금방이라도 통일이 이루어질 것처럼 기대했던 것입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즉각적이고 공식적인 애도와 조의 표명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김일성의 공적이 어떠하건 간에 호네커와 비교할 때 그의 과오가 더 크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일으킨 죄악은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의 돌연한 죽음이 불러온 국민정서 흐름과 이 역사적 진실 사이에 미묘한 불협화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문화국민의 전통에 따라 아무리 원수라 하더라도 망자(亡者) 앞에서는 명복을 비는 예(禮)의 문화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무리들, 조의를 표한다고 역사적 진실에 눈을 감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므로 남북관계의 개선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다 하기 위해서 조문사절을 보내야 한다는 무리들, 메카시즘(극단적 반공주의) 선풍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무리들 등으로 사회는 균열되고 미묘한 불협화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도 인간적인 유화정책을 사용했던 다윗은 크게 낭패를 당하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망명길에 오를 때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역적(逆賊)의 무리 가운데 가담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반역의 무리들을 평정하고 환궁하게 될 때 다윗은 국민적 대화합이라는 차원에서 유다 지파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유다 지파를 회유하기 위해서 반역군 평정에 크게 공헌한 요압 군장(軍長)을 해임하고 반역군의 장수인 아마사를 임명했던 것입니다.

  "(삼하19:13)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남다른 공헌을 세운 요압의 공로를 무시하고 반역의 최일선에 섰던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았던 것은 다윗의 결정적인 실수였으며, 이 실수는 훗날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하고 맙니다(삼하 20:9,10). 지나치게 인간을 의식하거나 자기 감정에 사로잡히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실수하기 쉬운 것입니다. 환부(患部)를 칼로 째고 고름을 짜 내는 것과 같은 선행조처가 없이 무조건적으로 공동체 화합을 부르짖는 것 만큼이나 위험스러 일은 없는 것입니다. 민족 통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 상황이 아무리 변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한국전쟁(6.25)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이 위기의식를 초래한다는 것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한국전쟁의 인명피해는 남한에서는 사망 638,160명, 부상. 납치. 실종된 사람이 1,499,065명에 이릅니다. 북한측에서는 사망 884,279명, 부상. 실종된 사람이 3,328,763명에 이르고 있습니다(이 수치 속에는 민간인, 군인, 유엔군, 중공군이 모두 포함되며, 북한의 실종자 가운데는 월남민이 포함됨). 또한 한국전쟁을 통해 엄청난 재산손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발발 후 1952년 3월까지 입은 재산 피해에 대한 국방부의 통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반기업체 시설피해 6,874억 원, 일반기업체 건물피해 1조 1,310억 원, 일반주택 피해 3조 5,290억 원, 토목시설 피해 3,269억 원 등만 합쳐도 5조 6,743억 원이 됩니다.
 전쟁의 결과 많은 피난민이 생겨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이 618,721명, 남한내에서의 피난민이 1,714,192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산가족이 1,000만 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은 가족의 붕괴와 전쟁고아 및 전쟁미망인의 출현을 초래하였으며 인구이동은 안정된 지역공동체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족이나 지역공동체와 같은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것과 아울러 산업시설과 재산의 파괴로 인한 극심한 빈곤은 당연히 삶의 위기감을 조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6.25전후 기독교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8.15해방의 감격도 오래지않아 사상때문에 동족상잔의 피흘리는 6.25가 발발했습니다. 스탈린의 소련팽창주의 정책에 일치되어 대 일본전쟁참가는 이미 2월 얄타협정에서 한국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한반도를 분할하고 있었습니다. 원자폭탄 투하와 함께 대일선전으로 참전한 소련은 총 한 방쏘지않고 한.소국경인 두만강을 건너와 8월 24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여 사령부를 설치하는 신속성을 보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북위 38도선까지 내려와 남북을 분할하는 일에 서슴없는 행동으로 백성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예루살렘인 평양에서는 해방으로 형무소에서 출소한 출옥성도들이 한국교회 재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투옥된 목사들은 일제신사참배에 참여했던 한국교회의 정화를 위해 회개와 자숙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북한 사회에서는 일제 시대에서부터 교회 지도자들이 사회지도층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9월 신의주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목사 윤하영, 한경직 등이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함으로 해방 후 최초의 정당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뒤이어 평양의 김화식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기독교유당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심각한 불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도시마다 해방을 맞이 군중대회가 기독교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본 소련과 공산당은 북한내의 기독교 영향력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관계된 용암포사건과 신의주학생사건은 소련과 공산당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해방 후 처음맞는 3.1절은 한국교회에게는 남다른 감회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33인의 민족대표가운데 16인이 교회지도자였음을 긍지로 여기고 있는 한국교회는 거교회적으로 기념행사를 갖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묵과할 수 없는 소련당국과 공산당은 급조한 북조선인민위원회로 3.1절 행사를 주도케하여 교회중심 기념행사를 저지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는 평양, 신의주, 원산 등지의 북한 교회는 3.1절 기념행사를 예배와 함께 진행함으로 공산당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조직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수행되어갔습니다. 반공적인 교회활동을 간과할 수 없었던 공산당은 각종행사를 주일에 실시하여 교인들의 주일예배출석을 방해하였고, 정치강연을 교회당에서 강요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북한총선거일을 주일인 1946년 11월 3일로 공고하여 계획적으로 주일성수를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북한 교회는 "주일선거 반대결의문"을 발표하여 교회의 생명인 주일 성수를 지켜냄으로 종교탄압에 대한 교회의 의지를 천명하였습니다.
  신앙수호를 위한 교회의지를 쉽게 꺾을 수 없음을 안 공산당은 목사였던 강량욱을 앞세워 기독교도 연맹을 만들고 교역자들을 회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감언이설과 위협으로 목사들을 가입시켜 기독교도연맹은 김일성 지지와 주일선거 자진참여 등을 결의하여 기독교를 무력화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북한 교회는 선거에 불참함으로 교회의 참 모습을 보여주며 지켜나갔습니다.
  기독교도연맹은 기독교도연맹총회로 이름을 바꾸어 세력을 강화시켜 끝까지 가입하지 않고 버티는 교역자들을 파면, 제명하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공산당은 그들을 교회에서 추방과 투옥으로 괴롭혔으며 그들이 사역하였던 교회당은 정치학습장으로 강제징발하였습니다.
  갈수록 거세어지는 탄압을 견딜 수 없었던 많은 교역자들과 신도들은 월남하거나 기회를 놓친 이들은 6.25후퇴때까지 지하교회로 숨어들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교회만이 살아남을 수 있지만 아직도 전 지역 공산당의 손이 미치지 못한 때이기에 신자들의 보살핌 속에서 목회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일제에서 해방된 후 남한이 좌우익사상의 혼란과 서구문물 유입으로인한 가치관의 혼란 등을 겪고 있을 동안 북한은 토지개혁과 사상정리를 마치고 "남조선해방"이란 기치아래 강력한 군대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침에 앞서 그 때까지 남아있던 교회지도자들을 총검거하였으며 대부분의 교회를 폐쇄하였습니다.
  오랜 준비와 훈련으로 강화된 공산군은 소련군 탱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8월 15일까지 한반도 적화통일이라는 목표아래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끝없는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하루아침에 돌변하였습니다. 승승장구하던 공산군은 9.28수복 후 허리가 잘린채 패퇴를 거듭하였습니다.
  후퇴하던 그들은 교회지도자들과 신도들을 강제로 끌고 가다가 곳곳에서 생매장, 총살, 타살, 자살 등으로 집단살해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신도밀도가 가장 높은 평북, 용천, 의주 등은 연합군이 진주하지 못하여 어느 곳보다 많은 신자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통일을 눈 앞에 두고 기뻐하고 있을 때 중공군의 참전은 민족에게 또 한번 뼈아픈 비극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혹독한 추위로 후퇴하던 군대들을 따라 남하하는 피난민들 속에 신자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4후퇴 때 피난의 기회를 놓친 신자들은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은 북한내 교회당을 거의 불태워 교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북한에서 순교한 이들을 우리들은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나 그들 순교자의 피는 깊은 광맥처럼 북한 교회에 흐르고 있어 반드시 되살아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남한교회는 북한교회에서 출옥성도들의 교회재건운동처럼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총독의 종교정책에 의해 조직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간부였던 지도자들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교권을 귀고 있었기에 교회정화를 위한 회개운동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일제 때 통합된 교단지도자들로서 교단 존속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각 교단들은 교단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남북대회는 무산되고 교단별로 교회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북한교회와같이 회개운동도 없었고, 해방후 정치세력에 의한 핍박도 없는 가운데 재건되었습니다.
  북한교회와는 달리 남한교회는 교권장악에 힘썼던 소수의 교권주의자들로 시달리고 있었고 월남한 목회자와 관계, 신학교문제 등으로 어수선했습니다. 1948년 10월 여수, 순천에서 일어난 반란은 남한에서의 교회수난의 시초였습니다. 호남지역에서도 교세가 강했던 이 지역에서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출옥성도인 손양원목사 아들 동인, 동신 형제의 순교와 아버지 손목사의 원수사랑의 실천, 그리고 6.25때 손양원 목사의 순교 일화는 한국교회 순교사의 꽃이기도 합니다.
  파죽지세로 몰아닥친 공산군의 침략으로 공산당의 탄압을 경험해보지 못한 남한 교역자들은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3개월 동안의 공산치하에서 다행히도 견디어왔던 교역자들은 후퇴하는 공산군에게 더 많은 희생을 당했던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당한 영.호남지역의 공산군들은 10월 중순 수복될 때까지 우익인사, 교회지도자과 신자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였습니다. 특히 전남의 도서지역에서의 집단학살은 인간임을 거부하는 악독함이었습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던 교회지도자들의 고생은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후퇴하던 공산군은 목사와 우익인사들을 색출하여 북으로 끌고갔습니다. 허약하거나 병들고 지친 사람들은 가다가 아무곳에서나 집단생매장, 총살, 찔러죽이는 등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순교, 납치 등의 인명손실뿐 아니라 교회당의 소실, 파괴 등도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으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동족간의 전쟁을 치른지 45년이 지났습니다. 빈번한 남북한의 접촉과 대화로 한반도의 통일이 성큼 다가선듯한 착각으로 지난 날의 비극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소흘히 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의 책임자는 분명하게 밝혀져야되고 신앙의 자유와  종교를 말살하려고 수 많은 목사, 전도사, 장로와 일반신자들의 생명을 빼았었던 공산정권의 죄악은 남김없이 기록되어져야 합니다.
  삼천리 화려한 금수강산 방방곡곡에 흘려졌던 순교의 피는 오늘도 쉬지 않은 채 한국교회를 지켜보고 있음을 믿음의 후손된 우리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옷깃을 여며야 할 것입니다.
  3.1운동 이후 공산주의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종교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이고,
  둘째, 그 당시 기독교회에 많이 등장한 내세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신앙운동에 대한 불만이었고,
  셋째, 사회문제나 민족문제에 대한 두 진영 사이의 노선 차이 등이 그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첫째, 무신론적이고 유물사관적인 공산주의 이념,
  둘째,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공산주의 사회건설 방법 등을 이유로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태도를 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방후 북한에서는 기독교와 공산정권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한국전쟁 결과 기독교회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매우 심한 박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북한교회에서 순교하거나 실종된 성직자 혹은 교회지도자의 명단이 밝혀진 경우만 해도 162명에 이르며, 남한교회의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의 수도 15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948개 처소의 교회당이나 기독교 기관건물이 전소되거나(243처소) 반소되는(705처소)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북한정권이 취한 정책을 보면, "반동적 장로, 목사들은 땅을 안 가졌던 자가 거의 없고 놀고 먹지 않는 자가 없는" 부르주아계급으로 규정하였으며, 따라서 '악질적. 반동적' 종교인들은 처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미제국주의자들과 연계'되었다는 누명을 씌워 체포하고 학살하는 정책을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탄압단계는 전쟁 때문에 더욱 가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종교인들이 공산정권에 가장 세찬 반대운동을 했고 유엔군의 북진을 가장 환영하고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하철의 책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에 보면 다음의 글이 있습니다.
  "지난 3년간의 조선전쟁과 오늘 남조선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미제가 감행한 무고한 인민에 대한 학살, 약탈, 방화 등 비인간적이고 야수적인 만행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약탈에 이용되는 종교의 추악하고 반동적인 본질을 말하여 주고 남음이 있다."
  기독교국가의 군대인 미군에 의해 혹독한 피해를 당했던 북한당국자들은 미국과 기독교를 동일시하여 그와같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북한교회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도자와 신도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었고, 전쟁을 통해 강화된 북한당국의 경직된 태도에서 나온 종교탄압정책에 눌려 거의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변화된 국제적 환경 속에서 북한당국은 필요에 의해 1988년 10월 평양 봉수동교회가 세워질 때까지 교회는 존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북한 기독교의 실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1946년 11월 28일 창립된 북조선 기독교도연맹이 모체로서, 1960년에 잠적했다가 1974년 다시 등장했습니다. 현재 위원장은 강영섭이고 서기장은 고기준이었으나, 고기준은 최근에 사망했습니다.
  1993년 말 현재 2개의 교회와 500여 개의 가정교회가 있으며, 20여 명의 목사와 130여 명의 전도사(책임지도원)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신도 수는 약 1만 명 정도입니다. 정식 교회당으로는 1988년 건립된 봉수교회와 1990년에 건립된 칠골교회가 있습니다.
  평양시 만경대 구역 건국동(옛 봉수동)에 있는 봉수교회의 신도 수는 300여 명인데 여성이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칠골교회(평양시 만경대 구역 칠골동)는 1992년 증축하여 규모를 늘렸으며, 김일성의 생모인 강반석의 이름을 따 반석교회로 불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예배의식은 남한과 같습니다. 정면에 십자가가 걸려 있고, 기도를 드리며, 성가대도 운영하고 가끔 특별 찬송도 부릅니다. 성경은 1990년에 만들어진 신구약 합본(1만부 발행)을, 찬송가의 경우도 그 해 4월에 만든 찬송가(401곡 수록)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헌금시 "잠자리 채" 헌금함을 사용하고 있어 남한교회의 과거를 회상케 합니다.
  세계 선교문화원장 임성기 목사에 의하면 세 종류의 교회가 북한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공식적인 교회로서, 정부에 의해서 일정하게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 교회에는 교인들이 번갈아 가면서 참석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1년에 한 번씩 교회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교회는 가정교회입니다. 북한 당국은 외국 사람들과 세계의 여론을 의식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가정교회를 허락했습니다. 지금은 약 500-1000개에 이르는 가정교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기도회와 성경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교회는 지하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철저히 비밀리에 활동하기 때문에 결코 그 정체가 아무에게도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교인 한 사람을 만들려면 매우 신중을 기해 전도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가정에서 쌀이 떨어지면(어느 가정이나 정부에서 주는 배급쌀이 정한 기한까지 가지 못하고 떨어집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쌀을 보내 줍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몇 차례 쌀을 받아 먹은 후, 지하교회는 "쪽복음" 성경을 쌀과 함께 넣어서 보냅니다. 이 전도 방법에 의해 믿음을 갖게 되면 지하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게 됩니다.
  세례는 예배에 몇 차례 참석한 후, 지하 교인들이 안전원을 가장하여 그들을 데려다가 위협과 협박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무사히 통과된 사람들이 세례를 받게 됩니다.
  북한 정권이 종교를 용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습니다. 북한의 종교단체들이나 종교인들의 활동을 보면, 주로 북한의 정책이나 입장을 지지하고 대남 비방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그치고 있으며, 순수한 종교 활동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시인 키플링(R. Kipling 1865--1936)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 동(東)은 동(東), 서(西)는 서(西), 이 둘은 결코 만나지 않으리라. 땅과 하늘이 신의 위대한 심판석상에 설 때까지." 키플링이 동은 동, 서는 서, 결코 만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분단된 한민족은 남(南)은 남(南), 북(北)은 북(北), 결코 만나 통일을 이룰 수 없는 것인가.
  1995년은 우리 민족이 잔혹한 일본제국주의의 36년 간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50주년을 맞게 되는 해입니다. 동시에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 뿐 아니라 6월은 같은 민족으로서 동족에게 총뿌리를 겨누고 죽인 6.25전쟁 4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역사의 주체가 되는 교회의 탄생을 가져 온 성령강림절이 있기도 뜻 깊은 달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통일의 주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진정한 나라 민족의 통일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교회 탄생을 가져왔으며 교회는 그 통일 과업을 수행하는 역사의 유일한 기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통일성 또는 합일성)과 다른 영(靈)들의 어지럽게 함을 대조시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4: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인간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열 사람은 함께 아수라장을 벌이고 말 테지만,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열 사람은 함께 하나를 이룰 것입니다.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려 흩어졌던 형제들이 한 마음 한 뜻, 참된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분쟁과 다툼과 불일치가 있는 곳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은 인간을 높이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진정한 통일은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강림으로 탄생한 교회를 통해서 인류는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통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인 것입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골로새서의 중심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3:3,1:19,2:9,1:14). 에베소서의 중심 사상은 그러한 사상을 발전시킨것이다. 교회를 통한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되어질 때 나라 민족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전체 사상은 제 1장에 나오는 두 개의 구절에서 요약되고 있고 있습니다(1:9-10).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핵심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을 하나로 모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부조화와 분리와 분열이 가장 불행한 사실이며, 여기서 나와 너(ich und du)그리고 나와 그것(ich und es)과의 분리,  분열, 부조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분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에베소서의 중심 사상은 자연계의 분리와 인간의 분리와 시간의 분리와 영원의 분리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든 분리는 다만 모든 인간과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될 때만이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의 근원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입니다. 당시 로마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묶이는 것을 바라보고, 세상 모든 것이 로마 보다 완벽한 충만성을 가진 그리스도 안에 집중되여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상징과 비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통일의 개념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먼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손, 발 등 도구와 지체가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화해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세째, 통일의 주체가 되는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통일된다는 사실을 전파해야 합니다.  
  "인생의 모든 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그리스도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 교회는 전 세계적이며 전 우주적인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라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교회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E.F.Scott)."

  1989년 냉전 시대의 대표적 상징을 뜻하던 베를린 장벽이 헐리고 이듬해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었습니다.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되고 1991년 8월 28일 '현존 사회주의'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이 붕괴되었습니다. 1917년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 이래 74년 간이나 통치하여 온 소련 공산당이 그의 붉은 깃발을 내리고 종언을 고하였습니다.
  그 후 세계 질서는 재편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대결인 동서의 대결에서 경제적 문제인 남북의 대결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경제 문제도 블럭화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민족과 인종을 앞세운 민족주의 고양과 인종에 의한 지역 분쟁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적 이기주의를 꾀하고 있습니다.
  세계에는 사회주의를 체제를 이념으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중국, 베트남, 쿠바, 북한이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한반도에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는 지구상 분당의 마지막 국가로 남아 탈냉전 시대에 냉전 지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분단된 국가는 4개국입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1949년 10월 1일 중국이 중공과 대만으로, 1954년 7월 21일 베트남이 월맹과 월남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이들 분단 국가들은 차례로 통일을 실현하였습니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은 적화 통일되었고, 1990년 10월3일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통일'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대만의 분단 문제는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분단국 문제로 취급되지 않고 있습니다.왜냐면 1971년 유엔에서 대만이 추방된 후 세계의 여러 국가는 중공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대만은 중국 내 영토의 일부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분단 국가는 '우리 한반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의 주범이 김일성이었다는 사실은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년 6월 러시아 정부가 제공한 구소련 6.25관계 문서와 그 전후부터 최근까지 러시아에서 발견된 새 자료들은 김일성이 북한 정권 수립 직후부터 남침을 계획하고 스탈린과 모택동을 끈질지게 설득하여 무력남침을 감행한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끝났으나 전쟁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데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공산당의 몰락과 냉전종식에도 불구하고 6.25는 민족해방전쟁으로서 북침이냐, 남침이냐를 가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이른바 신수정주의학파의 주장이 여전히 소모적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의 장을 만들고 있는 한 6.25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혹 전쟁 미체험 세대들에게 위험하고 낭만적인 6.25전쟁관을 전파시키는 이론이 된다면 비극은 더욱 증폭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탈냉전 이후 세계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유일의 폐쇄사회인 북한은 6.25 그 날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상은 철저히 통제되고 주민들은 고립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억압과 동원체제에서 조금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금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쌀을 무상으로 제공받고 있으면서도 정전협정 파기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쟁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모두 풀고 하시(何時)라도 전쟁재발 명분을 얻어 가지고 전쟁을 재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들이 먼저 중립국 감시단과 중국 감독관을 무조건 일방적으로 철수시킨 것은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년 1개월 간의 6.25(1950.6.25--1953.7.27) 6.25라는 전쟁(한국전쟁)은 약 450만 명의 인명 피해와 산업시설의 43% 파괴, 주택 33% 완전 파괴 등의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남북한의 극심한 냉전적 대결 구도 속에서 서로 이질화된 삶의 양식과 가치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념 지향적인 가치관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집단주의적이고 조직 지향적인 가치관이 만연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유교 문화와 가치관이 온존하고 있습니다. 강한 통치 방식인 중앙집권력은 김일성 개인 숭배를 가져왔고, 김일성을 '어버이'로 호칭하는 '국가가족주의' 내지 '가족주의적 국가'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체 사상의 유일 사상적 가치관과 시혜적 가치관이 국가에서 배급하는 배급제 방식 때문에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런가하면 남한에서는 가치관이 전도(顚倒)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즉 본래적 가치가 도구적 가치로, 수단적 도구적 가치가 본래적 가치로 뒤바뀌는 사회를 말합니다. 돈이나 권력 등 외면적 가치를 중시하고, 인격. 학문. 사랑. 평화 등 내면적 가치를 경시하는 풍조입니다. 금전과 권력 지향적이며 관능적, 감각적 쾌락의 추구,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적인 경향, 연고주의 내지 정실주의, 외관을 중시하는 경향, 노동 천시, 인명 경시, 주체성이 빈곤한 순응주의, 정신적 빈곤에서 오는 반지성주의, 사고력의 열악성에서 오는 인정 편중 경향성 등입니다.
  남한에서는 천민 자본주의로 물질화된 물질 위주의 가치관이 지양되고 정신적 가치가 중시되는 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경우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완전히 통일이 되었지만 1등 국민(서독)과 2등 국민(동독) 사이에 마음의 장벽과 사회적 장벽은 아직도 높이 쌓여 있고, 과거에는 1민족 2국가였지만 이제는 1국가 2사회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라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운동은 다음과 같은 유형들이 있었습니다.  
  민족운동의 방법적인 유형을 분류하면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내 목숨을 걸고 원수의 목숨을 강요하는 피의 항쟁입니다. 갑신정변의 쿠데타, 갑오 동학란의 민중봉기나 을미의 의병, 을사의 시위연대 항쟁이나 병오. 정미의 의병, 1920년대의 만주 방면에서의 독립군 전투, 1940년대의 광복군의 대일참전 같은 무력항쟁이 그 한 갈래요, 광복회.의열단.파괴단 같은 폭격 암살단과 무수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의사. 열사에게서 보는 폭력항쟁이 다른 한 갈래며, 을사보호조약, 또는 경술국치 직후의 수 많은 순국에서 보는 자결이 또 한 갈래가 됩니다.
  둘째, 민족의 요구를 절규하며, 국제여론에 호소 청원하는 조직적 시위의 항쟁입니다. 3.1만세. 6.10만세. 학생만세 같은 비폭력 시위운동이 그 한 갈래요, 헤이그평화회의. 파리강화회의. 국제연맹 등에 대표를 보내고 스톡홀름의 만국사회당대회. 뉴욕의 25약소국회의.모스크바의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등에 대표를 보내어, 한국 독립문제의 후원을 호소하는 등의 외교항쟁이 다른 한 갈래며, 독립협회. 독립청년단. 대한외교청년단. 애국부인회나 흑우회. 공산당. 신간회. 근우회 등 무수한 비밀결사, 또한 합법적 조직운동의 항쟁이 그 또 다른 한 갈래입니다.
  셋째, 민중을 계발하고, 민의를 대변하며, 민족의 요구와 이념을 구현하는 문화항쟁입니다.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와 개벽. 조선지광 등 신문. 잡지의 언론항쟁이 그 한 갈래요, 문학.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의 예술운동과 사학. 어학. 민속학 등 국학연구운동과 각종 체육경기운동. 종교운동. 여성운동. 소년운동. 형평운동. 물산장려운동. 협동조합운동 등 사회운동으로 표현된 문화항쟁이 그 다른 한 갈래이며, 미션계의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뒤를 이어 서우학회. 기호흥학회. 호남학회. 관동학회 등이 일어나, 사립학교 설립운동과 민립대학운동 등으로 나타난 교육항쟁이 그 또 하나의 갈래였습니다.
  이제 참된 민족 구국 운동은 요한 웨슬레를 통하여 보여 주듯이 성령운동을 통한 인간성 회복과 교회의 갱신과 회복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인간성 회복과 교회 갱신과 회복을 위한 성령의 역사가 이 나라 민족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을 통한 나라 민족의 진정한 통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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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혁자(改革者)의 삶


"(대하34:1)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 일년을 치리하며 (대하34: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대하34:3) 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지 팔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십 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하여 그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매 (대하34:4) 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였으며 왕이 또 그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대하34:5) 제사장들의 뼈를 단 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였으며 (대하34:6) 또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여 (대하34:7) 단들을 훼파하며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대하34:8) 요시야가 위에 있은지 십 팔년에 그 땅과 전을 정결케 하기를 마치고 그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려하여 아살랴의 아들 사반과 부윤 마아세야와 서기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를 보낸지라 (대하34:9) 저희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나아가 전에 하나님의 전에 연보한 돈을 저에게 붙이니 이 돈은 문을 지키는 레위 사람이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온 유다와 베냐민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서 거둔 것이라 (대하34:10) 그 돈을 여호와의 전 역사를 감독하는 자의 손에 붙이니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그 전을 수리하게 하되 (대하34:11) 곧 목수와 건축하는 자에게 붙여 다듬은 돌과 연접하는 나무를 사며 유다 왕들이 헐어버린 전들을 위하여 들보를 만들게 하매 (대하34:12) 그 사람들이 진실히 그 일을 하니라 그 감독은 레위 사람 곧 므라리 자손 중 야핫과 오바댜요 그핫 자손 중 스가랴와 무술람이라 다 그 일을 주장하고 또 음악에 익숙한 레위 사람이 함께 하였으며 (대하34:13) 저희가 또 담부하는 자를 관할하며 범백 공장을 동독하고 어떤 레위 사람은 서기와 관리와 문지기가 되었더라 (대하34:14)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대하34:15) 서기관 사반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 (대하34:16) 사반이 책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복명하여 가로되 왕께서 종들에게 명하신 것을 종들이 다 준행하였나이다 (대하34:17) 또 여호와의 전에 있던 돈을 쏟아서 감독자와 공장의 손에 붙였나이다 하고 (대하34:18) 서기관 사반이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대하34:19)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대하34:20) 왕이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의 아들 압돈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신 아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대하34:21)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대하34:22) 이에 힐기야와 왕의 보낸 사람들이 여선지자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하스라의 손자 독핫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 저희가 그에게 이 뜻으로 고하매 (대하34:23) 훌다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으로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고하기를 (대하34:24)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 앞에서 읽은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하리니 (대하34:25)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노를 이 곳에 쏟으매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대하34:26)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대하34:27) 내가 이곳과 그 거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대하34:28)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대하34:29) 왕이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대하34:30)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노소하고 다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연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대하34:31)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대하34:32)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로 다 이에 참가하게 하매 예루살렘 거민이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의 언약을 좇으니라 (대하34:33)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을 다 제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신정부(新政府)가 들어서 신한국(新韓國) 개혁(改革) 정책(政策)을 펴나가고 있습니다.국민들의 많은 지지(支持)를 받고 있습니다.군부(軍部) 통치(統治) 30년 동안 만연(蔓延)된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고 각계 각층(各界 各層)의 부조리를 개혁해 나가는 신정부에 대해서 세계가 또한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 정책이 세계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할지라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합의한 목적을 가지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유다의 3대 성군(聖君) 중 마지막 왕인 요시야의 통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히스기야 왕 이후 므낫세(B.C.697-642)와 아몬(B.C.642-640)왕의 악정(惡政)으로 인해 유다는 이미 멸망의 지름길을 달려가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유대 제16대 왕으로 즉위한 요시야가 선왕(先王) 아몬 때 다시 숭배되었던 우상들을 파괴하고 종교 개혁을 일으켜 하나님의 절기들을 다시 준수케 하고 파멸로 치닫는 유다 왕국의 운명을 잠시 멈추어 서게 했습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 운동은 히스기야 왕 때보다 더 광범위하고 확실하게, 그리고 부분적,지엽적(枝葉的)이 아니라 전국적인 성결 운동(聖潔運動)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내용은 개혁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나라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개혁자의 삶을 살게 될 때 역사의 단절(斷折)을 막고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 역사(歷史)의 계승자가 되어 역사의 주체(主體)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요시야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본문2절)고 했습니다(honest to God).
  시인 윤동주는 자기의 시(詩) 속에 " 하늘을 향하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라고 기록했습니다.이처럼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은 바로 정직한 마음입니다.
  사람의 인격의 가치를 측정하는 최상의 것은 정직입니다.
  1977년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어떤 부자 한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가던 중 20달러짜리 지폐를 25만 달러 어치나 길거리에 내던졌다고 합니다.이 돈들은 바람에 날려 이 구석 저 구석으로 흩어져 갔습니다.그 이튿날 경찰에 돈을 주웠다는 신고 액수가 무려 24만 2천 달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이는 25만 달러의 96.8%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미국이 국제 사회에 있어서나 국내의 도덕적 문제 있어서 많은 모순과 갈등을 겪고 있지만,아직도 모든 사람이 정을 붙이며 생명을 맡기고 살기에 가장 이상적인 나라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이런 정직성 때문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정직해서는 곤란하다는 말들을 합니다.그리고 얼마전 어느 여론 조사의 결과를 보면 우리 나라의 정치가들이 제일 정직하지못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사회에 불신 풍조가 만연한 것은 바로 정치 지도자들의 정직하지못한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이든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또 어떤 분야 종사하든 모두가 정직할 때 그 사회는 가장 안전한 살기 좋은 사회인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세상에서의 일반적인 윤리 의식(倫理 意識) 정도에서가 아니라,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실로 이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의 정직이 아니라 하나님 눈으로 볼 때의 정직이었습니다.그래서 그의 정직은 완전 무결(完全 無缺)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직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정직해야만 합니다.

  시편119:137,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정직하시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손의 행사가 다 정직하시고 판단도 정직하게 내리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이 나라의 사법부의 모든 판단이 정직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을 정직한 존재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전도서7: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참으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만듭니다.

  시편11: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정직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시편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에게 흑암 중에서도 빛이 일어나게 만드십니다.
  
  시편112:4,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정직하게 살기 때문에 고통과 아픔이 있다할지라도 끝까지 정직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광명한 때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자의 삶은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둘째로,개혁자 요시야는 어떤 일에서나 좌우로 치우치는 일이 없었습니다(본문2절).참으로 '거문고 줄을 너무 늦추면 소리가 나지않고 너무 조이면 끊어지고 만다'는 격언이 있습니다.좌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나라의 지도자가 교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 명령대로 행하면 그 왕위(王位)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7:18-20,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지도자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호수아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우리는 누구나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고루 주시는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마5:45-48)
  셋째로,개혁자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 단호한 결단을 통해 나라의 운명를 일신(一新)하였습니다.
  요시야는 먼저 성전을 성결케하는 일을 통하여 신앙 생활에 활기를 얻을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으로 축복의 통로와 같은 것입니다.외형적인 성전 복구 수리를 통하여 백성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外飾的)인 신앙을 새롭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항상 성결케 보존코자 하는 사람은 그 신앙이 날로 새로와지는 것입니다.또한 성령의 전(殿)이되는  자기 몸을 날마다 성결케함으로 자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고전3:16,17).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가까이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더욱 더 성결해지는 것입니다.더 나아가 성결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성결할 때 거룩한 하나님의 영,성령은 역사(役事)하십니다.신한국 개혁 정책이 하나님께 합의한 개혁 운동이 되어 나라가 새롭게 되기위해서는 먼저 성결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가야 합니다.성결운동은 오직 성령의 역사(役事)를 통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소멸시키는 성령의 불을 이 땅위의 모든 심령들에게 던집시다.죄악이 일소되지않은 개혁 운동은 악령(惡靈)만 역사(役事)할 뿐입니다.
  민족의 신앙을 새롭게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성전을 새롭게 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이 나라 민족의 진정한 개혁,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개혁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민족 성전>(民族 聖殿)을 세웁시다.이 민족 성전이 세워지도록 먼저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일본의 성서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나라가 부강하려면 경제가 부흥하여야 하고,경제가 부흥하려면 정치가 민주적으로 발전되어야 하고,정치가 발전되려면 사회가 안정되어야 하고,사회가 안정되려면 도덕 수준이 높아야 하고,도덕 수준이 높아지려면 올바른 종교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회복시켜주는 종교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시야는 더 나아가 철저하게 우상을 제거함으로 그 땅을 정결케 하였습니다(본문3-8절).하나님의 성전,교회가 성결해져야 함은 물론 땅이 성결해져야만 합니다.그래서 요시야 왕은 우상을 제하되 그것들을 찍고 가루로 만들어 무덤에 뿌리는 등 철저하게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요시야는 선왕(先王) 므낫세가 그 우상들을 파괴하지 않고 그냥 내어버리기만 하여 그 아들 아몬이 다시 그 버린 우상을 가져와 섬겼던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 그 우상들을 찍어 가루로 만들어 날려 버렸던 것입니다(역대하33:22).
  이처럼 우리도 옛 삶을 청산하되 죄지은 손을 잘라내듯 하고,죄지은 눈을 빼어버리듯 하는(마18:8,9)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삶이 가능하고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요시야 왕같이 우상의 단(壇)과 우상 숭배를 철저히 분쇄(粉碎)시킬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지도자와 함께 하십니다.
  멸망의 가증스런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손과 발을 잘라내고,그 눈을 빼어버리듯하는 완전 타파할 때 이 땅이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북한 땅이 거룩한 하나님의 땅이 되기 위해,우상의 단(壇)들과 우상의 문화,그리고 우상 숭배의 세력들이 민족 문화를 빙자하여 악성 암세포(惡性 癌細胞)처럼 번지고 있는 이 남한 땅이 성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하나님 말씀에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며,백성들 앞에 강하고 담대한 요시야와 여호수아같은 지도자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요시야는 이같은 종교 개혁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성전을 수리하는 중에 발견하고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사실을 깨닫는데서 비롯되었습니다.요시야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박한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여선지자 <훌다>에게 질문했습니다(본문22-28절).비록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여선지자 <훌다>의 예언을 들은 요시야 왕은 옷을 찢고 통고하며 회개하였고 그 결과 자신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본문 27,28절).그리고 자신의 통치 재임 기간 동안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유보되었던 것입니다.
  여선지자 <훌다>는하나님의 뜻을 묻는 요시야 왕의 사자(使者)들에게 조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엄청난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사실 그러한 심판이 직접적으로 요시야 왕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율법의 말씀을 완곡하게 전할 수도 있었고,또 회개하여 그 심판을 면하라고 충고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선지자 <훌다>는 냉엄하게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했던 것입니다.그녀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돌이킬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격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씀의 선포는 권력이나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공명 정대하게 전해야 하는 선지자적 사명에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참선지자된 오늘날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 뿐만 아니라 말씀을 거역할 때 내려지는 저주와 심판 또한 주저함 없이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성경 연구에 몰두했던 학파나 교파는 신앙적으로 큰 부흥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 좋은 예로 루터의 성경 연구 결과는 역사에 길이 빛날 종교 개혁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17,18세기에 크게 부흥하였던 경건주의 운동도 성경연구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17,18세기 부패한 영국 사회를 피흘리지 아니하고 개혁한 원동력은 요한 웨슬레의 속회(신성구락부)를 통한 성경 연구에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요시야 왕도 율법책의 내용을 듣고 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개혁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연구는 복음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 주고,인간의 삶과  나라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줍니다.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케하여 사회적 국가적인 죄들에 대해 참다운 개혁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성경을 통해서 삶을 변화시키고,성경을 토대로 하여 경건 훈련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개혁 운동의 지표요 추진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연구되어지고 읽혀지게 될 때 진정한 회개를 이루고, 옷을 찢고 마음을 찢는 회개 운동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 합의한,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개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 3:15-17에서 말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하나는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다른 하나는 인간으로 하여금 의롭게 살아가도록 완성시키는 능력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확증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르게 살아 갈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영접하는 지도자들은 나라와 민족을 바르게 영도할 능력과 권능과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가정과 사회를 개혁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 그 사회의 도덕이 향상됩니다.이렇게 성경은 국가 사회 도덕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국왕 윌리엄 4세가 죽던 날 밤,궁중에서는 한 처녀가 여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그녀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입니다.그녀는 64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영국의 번영은 이 빅토리아 여왕 때 성취된 것입니다.영국의 국기인 유니온 잭 아래 해가 지지 않던 때도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었습니다.일찌기 인류 역사상 빅토리아 여왕만큼 위대한 왕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로 무릎을 꿇고 성경을 폈습니다.잠시도 자신의 품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던 성경을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내가 여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치를 하게 해주십시오."
  빅토리아 여왕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해결했고 기도로 정치를 했습니다.하루는 인도의 왕자 한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을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정치를 잘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을 펴들고 힘 주어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 뿐입니다."
 
  오늘날 영국에는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사회주의자들의 소란이 끊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영국 사회가 공산화되지 않는 이유는 영국인들은 성경을 읽는 국민이기 때문입니다.성경은 사람과 가정,그리고 사회와 국가를 건강하게 지켜주는 힘과 능력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나라의 지도자들이 정직하도록 기도하는 개혁적인 삶을 삽시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좌우로치우치지 아니하고 그 말씀 그대로 행하고 나라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돌아오도록 기도하는 개혁적인 삶을 삽시다.
  우리가 먼저 물질과 지식과 명예,그리고 권세의 우상을 깨끗이 청산하고 마음을 찢는 회개를 통하여 개혁적인 삶을 삽시다.
  그리고 성결의 능력을 받아 개혁의 운동을 성결의 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갑시다.삼천리 강산이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 되도록 사람의 우상과 각종 우상의 단(壇),우상 숭배의 세력의 타파(打破)와 분쇄(粉碎)를 위한 강하고 담대한 지도자를 강청하는 민족 기도를 합시다.
  이 나라 민족의 우상 숭배의 죄를 불태우는 성령의 불을 민족의 심령마다에 던집시다.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이제 죄인과 죄악의 나라는 심판하고, 믿음을 지키고 나라와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를짖는 의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가정과 나라 민족을 위한 개혁자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권능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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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우상숭배 정권의 불행


"(왕상12:21)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 팔만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왕상12:22)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왕상12:23) 솔로몬의 아들 유다 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온 족속과 또 그 남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왕상12:24)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저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좇아 돌아갔더라 (왕상12: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왕상12:26)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왕상12: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왕상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왕상12: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왕상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왕상12:31)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왕상12:32)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왕상12:33)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과 멸망의 원인은 거슬러 올라가 솔로몬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일찌기 다윗과 더불어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삼하12:24)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삼하12:25)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그는 하나님의 도성(都城) 예루살렘에서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는데 이때가 역사상 최대의 황금기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솔로몬 개인의 인생 말년은 타락과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타락의 원인은 첫째, 지적 자만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의 지혜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고 문학과 시가(詩歌), 자연과학 분야등에서도 발군의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그는 잠언 삼천과 노래 일천 다섯을 지었고 심지어 하찮은 초목과 물고기에 관하여서도 다 논(論)할 정도였습니다.

  "(왕상4:32)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왕상4:33)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그러나 솔로몬은 자신의 뛰어난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망각하였을 때 그 지혜는 도리어 솔로몬을 타락과 실족케 하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만 것입니다. 둘째, 많은 처첩을 거느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칠백 명의 후비(后妃)와 삼백 명의 빈장(嬪 )을 거느렸습니다.

  "(왕상11:3)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정사(政事)를 수행하며 백성들을 돌아보는 데 전념하여야 할 제왕(帝王)이 주색(酒色)에 빠져 스스로를 망치고 한걸음 나아가 백성들을 도탄(塗炭)에 빠지게 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우상숭배를 허용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해마다 세 번씩 하나님 앞에 공적(公的) 제단을 쌓았었습니다.

  "(왕상9:25)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위에 해마다 세번씩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단에 분향하니라 이에 전 역사가 마치니라."

  그러나 그는 왕실 내의 우상숭배를 허용함으로써 점차 그 예배의 순정성(純正性)을 잃어 갔읍니다.

  "(왕상11:4)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왕상11: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왕상11: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같이 좇지 아니하고 (왕상11: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왕상11:8)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다윗 왕의 위대한 점은 그가 비록 여러 아내와 후궁을 거느리긴 했지만 그들로 인해 우상숭배 죄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방인 아내들이 각기 자기 나라의 우상을 왕실 내에 들여오는 것을 금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이교(異敎)신전을 세워 준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세번째 나타나셔서 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왕상11:9)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두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왕상11:10)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왕상11:11)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왕상11:12)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왕상11:13)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이리하여 마침내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하여 다시 합쳐지는 일없이 제각기 굴곡을 겪다가 몰락해가는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남 유다는 르호보암이 각각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축복의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왕상11:38)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왕상11:39)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지라."

  그 조상 다윗처럼 여호와께 순종하면 그의 왕조가 지속되고 번영을 이룰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거나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서기 하기 보다는 멀어지게 만든 우상숭배 정책의 심각한 많은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이 나라로써 존속하는 동안 그 나라에 쓴 열매를 맺게한 씨, 곧 우상숭배의 씨를 파종한 것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된 여로보암은 남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갖고 있는 신앙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두려워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정치적으로는 분리되었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이 전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갖는 영향력이 지속되는 한 여로보암은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던 것입니다.

  "(왕상12: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왕상12:26)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왕상12: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과 북부 백성 사이의 단절을 꾀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금송아지 형상을 벧엘과 단에 세우고 산당을 장려한 것이었습니다.

  "(왕상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왕상12: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왕상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왕상12:31)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왕상12:32)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왕상12:33)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정권을 유지하게 위해서라면 율법을 어겨서라도 우상숭배 정책을 써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여로보암의 정책은 분명히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왕상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더 나아가 32절을 보면,

  "(왕상12:32)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왕상12:33)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솔로몬 성전의 절기는 7월 15일(유대력)이었습니다.

  "(왕상8:2)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칠월 절기에 솔로몬왕에게 모이고."  

 이 칠월 절기는 장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로서 한 해의 추수를 기념하는 축제의 절기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이 절기의 날짜를 8월 15일로 잡은 것은 자의(恣意)대로 한 것이 아니고 북쪽 전통의 복원(復元)이었습니다. 즉 북쪽은 원래 남쪽에 비해 수확이 한달 가량 늦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진정한 목적은 절기의 자연성을 회복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백성들이 7월 장막절에 예수살렘을 방문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여로보암은 이로써 체제경쟁에 있어 나름의 종교적 정통성을 구색(具色)갖추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기를 7월로 통일되게 지키도록 한 율법과 상반되는 것입니다.

  "(레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따라서 여로보암의 이 종교 정책은 죄악된 행동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정권은 한 마디로 우상숭배 정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문민정부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우상숭배 정책은 솔로몬의 종교 혼합정책(왕상 11:1-8)으로 타격을 받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한층 더 곪게 한 것이었기에 그 죄악은 더욱 더 큰 것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이 종교정책의 결과로 이스라엘의 신앙은 가나안 우상 종교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금송아지 형상과 산당은 이방 종교와 쉽사리 결합될 수 있는 요소를 애초부터 지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약 60 년 뒤에 엘리야는 북왕국에 만연(蔓延)한 이방 종교와 치열한 투쟁을 벌여야 했던 것입니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왕상19: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이처럼 여로보암의 우상숭배 정책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 꿰어진 하나의 저주요 주박(呪縛)이 되고 맙니다.
  여로보암의 죄악은 여기서 그치지않고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상12:31)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일찍이 여로보암은 레위 자손의 제사장들을 파면시킨 장본이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위 자손의 제사장들이 모두 유다로 이주해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 제사장들을 하나님의 지시한대로 레위 자손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보통 백성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새 제사장들은 여로보암이 백성을 위해 편리한 곳에 건축한 여러 산당들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러한 편리주의에 편승하여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마음껏 숭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성전예배의 중요성을 상실하여 점차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하11:14) 레위 사람이 그 향리와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 아들들이 저희를 폐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민족에 대해 그들이 섬기는 일본 신사(神社)에 대해 일제히 참배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특히 조선의 기독교인들 모두에 대해 신사참배를 요구했고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온갖 유혹과 탄압정책을 펴며 그들의 우상에 대해 참배할 것을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믿음의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결단코 이를 거부하였음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의 무력을 동원하여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도처에서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64세이던 해 1938년 어느 날, 종로 경찰서 소속 고등계 형사 한 명이 숭동교회 사택으로 그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김목사님은 왜 동방배례가 우상숭배라고 설교하십니까?"
  "동쪽의 일본신사를 향해 절하는 것이 어찌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시요?"
  "그렇지 않소이다. 국민된 의례를 따라 동쪽을 향해 머리를 숙이라는 것이지 우상을 경배하라는 것이 아니외다."
  "어찌됐든, 우리 예수교 신자들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절하지 않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일이 올시다."
  "상부의 지시로 전하는 것이니 아무튼 황국신민의 도리로 신사에 참배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교 신자들은 다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뿐입니다. 이를 어기면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외다."
  "나로서는 상부의 명령을 어길 수 없는 일입니다. 훌륭하신 목사님께서 괜시리 고집을 피우시다가 봉변을 당하실까 염려가 되어 하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벌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릴 수는 없소이다."
  고등계 형사의 회유와 협박에도 김익두 목사는 이미 각오가 되어있음인지 매우 분명한 어조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일본형사는 더 이상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음인지 매우 불쾌한 기색을 띠고 본서로 되돌아 가버렸습니다.
 그가 되돌아간 다음 주일에도 김익두 목사는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결코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수일이 지난후, 종로경찰서의 고등계 형사가 다시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서장님이 한번 뵙자고 하시는데 바쁘시더라도 함께 가셨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김익두 목사는 마음 속으로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생각하고 가족들에게 간략한 부탁의 말을 남기도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종로경찰서는 일제시대 때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악명 높은 곳입니다. 안명근 사건 때 105인의 우국지사들을 참혹하게 고문했던 곳이며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들에게 이루 말할 수없는 고통을 주어 원한의 대상이 된 경찰서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연행되어온 김익두 목사는 무쇠도 녹아 나간다는 악명 높은 고문실에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었습니다. 잔인한 고문과 악형으로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육신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는 결코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일경들의 고문 방법은 매우 잔인하고 가혹했습니다.
  목검(木劒)을 가지고 그의 몸을 사정없이 치기도 하고 목검이 부러지면 쇠몽둥이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온몸이 피로 물들고 시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고통을 못이겨 수차례나 혼절(昏絶)했는데 그럴 때마다 일경들은 바켓츠에다 찬물을 가득 담아와서 그의 얼굴에 퍼부어 정신이 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이 들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고통 때문에 실언할까 두렵사오니 종의 입술을 지켜주소서."
  그는 자신의 육체가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육체의 고통을 못이겨 일본제국주의자들 앞에 신앙의 절개를 굽혀 하나님께 범죄할까 그것을 염려했습니다.
  일경들의 잔인한 고문은 거의 매일같이 계속되었습니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 참나무를 끼워 손가락이 으스러지도록 비틀기도 하고, 대나무를 뾰쬭하게 깎아 만든 표창으로 그의 손톱 사이에 끼우고 사정없이 찌르기도 했습니다. 어느 때는 물에 고추가루를 태워 강제로 코에 붓기도 하고, 어느 때는 넓적한 널판지에 그를 눕히고 얼굴에 보자기를 씌운 후 그 위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면 코에 물이 들어가 금방 숨이 막힐듯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이런 혹독한 고문으로 몇번씩이나 까무러치고 실신해 버렸고 그의 전신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살은 찢어지고 온몸을 시퍼렇게 멍이 들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되어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의 육신은 모진 고문으로 말미암아 시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일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복음의 일선에서 헌신한 그에게 이러한 육체의 고난은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시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지금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는 믿음과 소망으로 이 모든 고난을 감내했습니다.      "이제, 신사참배를 할 수 있겠소?"
  종로경찰서장은 한달 가까이 가혹한 고문을 계속했음으로 천하의 김익두 목사도 별수없이 굴복하리라 믿고 득의만만한 얼굴로 이죽거렸습니다.
  "절대로 못하오. 절대로."
  김익두 목사는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지독한 독종이다!"
  마침내 서장은 그가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도저히 육체적인 고통만으로는 그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목사가 아니외다!. 그러므로 당신은 결코 숭동교회에서 설교를 해서는 안되오!"
  "설교권을 누가 주었는데 당신이 하라, 하지마라 하는게요?"
  "듣기 싫소! 이미 숭동교회에도 그렇게 통고했으니 속히 서울을 떠나시오."
  "목사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당신이 무엇인데 나보고 그만 두라는 게요?"
  김익두 목사는 굽히지 않고 끝까지 항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엄청난 무력 앞에서 더 이상 그의 말은 아무런 효력도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김익두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강요에 의해 목사직을 빼앗기고 숭동교회의 담임목사직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일이  지난 후 종로경찰서로부터 김익두 목사를 데려가라는 통보가 가족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부인과 성도들이 종로경찰서로 숨가쁘게 달려가 김익두 목사의 신병을 인수하고 보니 이미 그의 몸은 죽은 시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가슴에 귀를 대고 숨소리를 들어보았으나 겨우 희미한 호흡을 하고 있을 뿐이었고 맥박마저 고르지 않았습니다.
  김익두 목사를 실은 달구지가 숭동교회 정문으로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많은 성도들이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슬픔과 분노를 못이겨 눈물을 흘렸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의 옷을 벗기고 보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이 온몸이 피멍이 들어 시퍼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의사의 지시를 따라 안정을 시키기 위해 따뜻한 방에 눕히고 정성껏 치료를 했습니다. 5일이 지나서야 겨우 의식을 회복했고 13일째 되어서야 겨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못했습니다.
  1938년 12월 28일. 일제의 강제 파직으로 목사직을 박탈 당한 김익두 목사와 그의 가족들은 정든 숭동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일경들의 감시와 압력으로 더 이상 숭동교회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몸도 회복되지 아니한 불편한 몸을 수레에 싣고 마치 귀양가는 사람처럼 외로운 길을 떠나 머나먼 황해도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엄동의 12월 말에 머나먼 길을 떠나 황해도 은율군 직전리 어촌 마을의 소박한 초가집에 짐을 풀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이곳 뒷동산 후미진 곳에 큰 바위를 기도처로 삼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이 바위에서 1945년 조국 광복의 날까지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하루 세번씩 기도를 했는데 새벽, 낮, 밤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에 광명한 빛을 보내주소서. 언제까지나 이 어두움의 세월을 보내야 하옵니까! 일본제국주의를 무너뜨려 주시고 이 나라 이 민족에게 광복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옵소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그의 기도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7년 동안을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도하였는지 때로는 비를 맞으면서도 기도를 계속하여 옷이 흠뻑 젖는 것 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떠한 생명의 위협이 있어도 끝까지 우상숭배(신사참배)하지 않은 이 땅의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 민족에 밝은 빛, 조국 광복의 기쁨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제물을 먹지 않기로 자기의 마음을 확정하여 우상의 제물로부터 성결을 보존했던 다니엘과 그이 세 친구들은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몽조(夢兆)와 이상(異像)을 깨달을 수 있는 신령한 지식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단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우상숭배의 바벨론의 술객들과 박수무당들은 결국 몽땅 죽임을 당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단2:12)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무당)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  

  우상숭배는 곧 사망인 것인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입니다. 이들이  죽음을 당하게 된 이유는 우상숭배로 인하여 밝은 빛을 보지 못하여 몽조와 이상을 해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단2:1)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지 이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단2:2) 왕이 그 꿈을 자기에게 고하게 하려고 명하여 박수와 술객과 점장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매 그들이 들어와서 왕의 앞에 선지라 (단2: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이처럼 우상숭배하게 되면 자신과 더불어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멸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과 가정, 그리고 나라 민족이 살기 위해서는 가정에 만연한 우상과 옛 구습(추석, 구정 등 유교에서 비롯된 이방인의 절기)을 과감히 수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영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것까지라도 가정과 나라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수술해버릴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추석(한가위, 중추절, 가위. 음력 8월 15일)에는 추석빔을 입고 햅쌀로 술과 송편을 빚고 햇과일을 마련하여 가묘(家廟)에 모신 조상신(祖上神) 앞에 차례(茶禮)를 지내며, 조상의 산소에 성묘(聖廟)를 행합니다. 이는 분명히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출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출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우상숭배 정책의 여로보암 정권과 그 가족들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어치워버리는, 그야말로 그 정권과 가문을 말갛게 쓸어버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왕상14:7) 가서 여로보암에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너를 백성 중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고 (왕상14:8)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왕상14:9)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왕상14:10)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을 쓸어 버림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왕상14:11)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하셨나니."

  우리 다 함께 이렇게 기도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 강산에 민족적 우상숭배와 구습을 좇는 범죄를 회개시켜 주시고 복 받게 하소서."

  우상숭배하는 이방인의 규례를 쓰레기 버리듯이 청산하시고 오직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믿으시고 섬기시므로 자손 천대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는 행복한 여러분의 가정과 이 나라 민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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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너희는 거룩하라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레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어느 소녀가 산상수훈을 읽는 것을 보고 어른이 묻기를,
"너는 이 복 있는 자 가운데서 어느 구절을 택하겠느냐?" 그 소녀는 서슴지 않고
"저는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다는 곳을 택하겠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은 즉
"예, 이것만을 가지면 다른 복도 다 가질 줄 믿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기독교인은 메마른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회개하는 깨끗한 눈물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회개하는 깨끗한 눈물 속에 이 땅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사회는 모두가 다 더러워졌습니다. 돈이 정치를 더럽혔습니다. 권력이 기업을 더럽혔습니다. 음란물들이 청소년과 사회를 더렵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양심과 진리의 최후 보루인 종교계까지도 돈과 권력으로 더렵혀진지 오래입니다. 지금 야당에선 지난 대선자금을 밝히라고 여당을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만약 밝히지 아니하면 차기 정권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단죄하여 형무소에 보내겠다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사상 초유로 전직 대통령과 '소통령'(아들 김현철)이 함께 구속되는 이 나라 역사의 오점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청와대를 비롯하여 말단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구석에 쓸만한 그릇이 없습니다. 모두 다 더럽혀진 그릇들로 가득합니다. 그릇이 크든 작든, 그릇이 금그릇이든 나무그릇이든 깨끗한 그릇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라가 잘 되려면 깨끗한 그릇이 많아야 합니다. 돈 많은 나라가 강한 나라가 아니라 깨끗한 나라가 강한 나라입니다. 돈 많은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 깨끗한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불법과 부정 부패가 만연한 나라는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합니다.

"(딤후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이 나라의 밝은 내일을 위해 무엇보다 성결(거룩)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유대인 자녀 교육의 목적은 한마디로 성결 교육입니다.(바클레이) 또한 유대주의의 기본은 성결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나라 관리들이 부정부패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여 광야로 이끌어 낸 후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과 분리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레19:2)....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성도가 구원받으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가정과 나라가 구원함을 얻으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이요 속성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거룩해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어떠한 것으로도 씻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금을 연단하는 풀무의 그 뜨거운 불로써도 태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표백하는 잿물로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말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말3: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인간의 죄에 대한 유일한 청결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성령입니다.

"(히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요일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시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시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써 인간은 성결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하고 사람의 죄를 없이 하는 묘약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멕베드>라는 작품 속에 멕베드가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는데 아무리 손을 씻고 증거를 인멸해도 마음 속의 살인 죄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사의 도움을 청했더니 이 의사가 짐작을 하고 이 병은 자신이 고칠 병이 아니니 스스로 마음에서 고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오! 아라비아의 향수를 다 가지고도 이 손 하나 말끔히 할 수 없는가? 이것을 파내 버릴 망각제는 세상에 없는 것일까?' 하고 탄식합니다. 세익스피어는 멕베드의 입을 통해서 '죄를 씻을 것은 지구상에 없다. 자기 마음으로도 안 되고 무엇으로도 안 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를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역사합니다. 십자가의 피를 통해 거룩해지고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결의 영입니다.(롬 1:4)
성경은 예수 믿는 것을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결혼식과 결혼 생활은 명백한 다른 것입니다. 결혼식은 "단 일회"의 사건입니다. 결혼식을 거행한 때와 장소가 분명합니다. 결혼식은 반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단 일회"의 사건은 아닙니다. 이것은 영속되는 관계입니다. 결혼식은 예식을 마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 있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결혼식은 교회나 예식장에서 치루어집니다. 결혼 생활은 날마다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생활의 범위는 남녀가 교제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장소 즉 회사, 학교, 시장, 상점 등 무릇 사람들이 모이는 일반 사회 생활까지 확대해 나갑니다. 실패하고 마는 가정은 결혼식 때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고 결혼 생활의 과정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시련은 화려한 결혼식 때에 오는 것이 아니고, 로맨스가 지나가고 숨은 허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결혼 생활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식 없이 결혼 생활에 들어갈 수 없는 것 같이 계속적인 성결 생활도 그것을 시작하는 은혜의 경험없이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결혼식이 건전한 결혼 생활을 동반하지 못한다면 별로 가치있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은혜의 경험도 그것이 보다 깊고 또 풍성한 관계의 개시가 아니라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결혼식, 성결 보존은 결혼 생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행15: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히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히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웨슬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의 최대 목적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에 있다. 즉 처음 조상이 지은 죄로 완전히 잃어버렸던 의와 참된 거룩함(성결)을 되찾는데 있다. 만일 어느 종교나 이 큰 목적에 응하지 못한다면.......이것은 한갖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멸망의 길로 인도할 뿐이다."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참된 성결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성결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극적 성결은 옛 생활과의 단절이요, 죄에서 용서받음이며, 죄의 뿌리, 세력에서 해방됨을 뜻합니다. 적극적 성결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기에 충분한 능력을 받게 됩니다. 곧 사랑의 완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적극적 성결을 온전히 이루어 "사랑 안에서 완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서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인 성결을 얻도록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성결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며 그 표현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성결케 하기 위한 하나님 사랑의 최고 표현입니다.
무디는 "하나님의 본성을 성서적으로 드러냄에 있어서 성결은 출발점이요, 사랑은 최고봉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여인이, 엄격하고 잔소리 많고 사랑 없는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 남편은 그녀의 삶을 언제나 불행하게 했습니다. 아침마다 남편은 그녀에게 그날에 해야할 일의 할당표를 주고 저녁 때가 되면 올바로 실행됐느냐의 여부를 점검하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준수해야 할 가훈 열 가지를 써서 붙일 정도였습니다. 그녀가 남편을 향해서 가졌던 약간의 사랑도 얼마가지 않아서 산산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그 남편은 죽고 그 과부는 남편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훌륭한 기독교인 신사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제 2의 남편은 동정심이 많고 친절하며 첫째 번 남편이 못 가졌던 것을 모두 갖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그 가정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부인은 큰 책상서랍을 정리하다가 첫째 남편의 유물인 가훈 열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호기심을 갖고 그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놀라운 일은 자기가 그 모든 요구를 새 남편에게 지키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의무감 때문이 아니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자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도록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최근 미국 텍사스주 경찰국에서 <나쁜 자녀로 키우는 10가지 계명> 이란 이색적인 자료를 발표해 세인(世人)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이가 갖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어라.(그러면 아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될 수 있다고 오만해질 것이다.)
2) 아이가 나쁜 말을 할 때는 그냥 웃고 넘겨라.(그러면 자기가 재치있는 줄 알고 더욱 나쁜 말과 생각을 할 것이다.)
3) 그 어떠한 형태의 교훈적인 훈련과 교육도 시키지 말아라.(커가는 과정에서 자기 마음대로 알아서 생각할 것이다.)
4) 잘못된 품성은 책망하지 말고 그냥 두어라.(이 다음에 사회가 책망할 것이다.)
5) 아이가 어질러 놓은 침대, 옷, 신발 등은 모두 정돈해 주어라.(자기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해 버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6) 텔레비젼이나 비디오를 마음대로 볼 수 있게 해 주어라.(곧 아이의 마음은 쓰레기통이 될 것이다.)
7) 아이들 앞에서 부부나 가족들이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어라.(그러면 이 다음에 가정이 깨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8) 달라는 대로 용돈을 얼마든지 주어라.(타락의 길을 쉽게 터득할 것이다.)
9) 먹고 싶다는 것은 다 먹이고 마시고 싶다는 것도 다 마시게 하고 좋다는 것은 다 해 주어라.(어떠한 거절이라도 한번만 당하면 곧 낭패에 빠지는 사람이 될 것이다.)
10) 아이가 대립되는 자세나 마음을 가질 때는 언제나 아이편이 되어 주어라.(건전한 사회가 모두 그 아이의 적이 될 것이다.)
신구약 성경 전체는 거룩하고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계시인 것입니다. 거룩과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본질인 것입니다. 거룩과 사랑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죄인에게는 대속(代贖)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예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거룩은 죄인을 부르신 목적이요, 사랑은 죄인을 거룩케 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구원의 정점인 거룩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성결의 본질이 사랑이면서, 성결한 신앙과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비결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유혹을 이기는 힘이 되고 타락을 방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승리의 비결이 바로 성결 곧 사랑입니다.
또 하나의 거룩해지는 비결은 진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이 진리가 죄인을 성결케 하는 수단입니다.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라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거룩함과 진리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거룩함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의 근본으로서 그들 속성들과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치 빛의 일곱가지 색깔이 모이면 흰색이듯이 거룩은 모든 속성의 총합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치고 사는 것이 거룩해지는 비결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닮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닮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라, 곧 율법을 주신 이유도 그들의 성결 교육을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대인 랍비들은 "(신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는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말씀들을 너희 마음에 넣으라. 그리하면 너는 거룩한 자를 깨닫게 되고 그의 축복을 받게 되고 그의 길을 고수할 수 있다."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민 15:40)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어려운 환난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4: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잠4:13)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고 당부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붙어 있을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말씀과 기도로 양육받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안디옥 교인들에게 "(행11:23)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4:14에서 "진리를 굳게 잡으라." 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께 붙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 말씀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에 붙어 있다는 것은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알고 지켜 행하는(순종) 것입니다.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영혼이 거룩해지며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자녀에게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교육시켜야 합니다.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시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닮는 교육이 될 수 없습니다. 거룩에 이르는 성결 교육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교육을 말합니다.
마틴 부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악마는 사람들이 탈무드를 공부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 왜냐하면 그 방면의 학위를 따는 것은 그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고 명성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성서를 펴들고 있으면 방해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성서를 공부하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싹트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유명한 교육학자 페스탈로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육의 정신은 첫째,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셋째, 그 하나님께 늘 감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바로 성서입니다. 사람은 기적을 통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육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딤후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의 자녀와 가정이 거룩해지는 길, 교회와 나라가 깨끗해지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보내신 성령과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이 사는 길, 거룩해지는 길은 이 땅에 예수, 예수의 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이 사는 길, 거룩해지는 길은 이 땅에 성령과 말씀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을 통해 이 나라 민족이 성화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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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후7: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고후7:3)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고후7:4)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유난히도 많은 사건.사고로 얼룩진 95년이었지만 특히 올해는 전세계적으로 정치인.경제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던 한해였습니다.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지(誌) 최근호는 <뇌물 수수, 마약밀매 등 정치인 및 재계 인사들의 범죄행위가 올해만큼 빈번하고 규모가 컸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면서 95년을 빛낸 대(大) 사기꾼 8걸(傑)>을 선정, 발표했습니다. <세계최고 대도(大盜)>의 불명예를 안은 인물은 나이지리아의 독재자인 사니 아바차 장군. 그는 외국으로부터 정유를 수입하면서 장부상으로 시장가격보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구입하는 것처럼 해놓고 차액을 챙기는 수법으로 무려 40억마르크(약 2조원)를 꿀꺽한 뒤 스위스 레바논 등지의 은행계좌에 예치해 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노태우 전두환씨 등 전직 두 대통령은 재임중 각각 4천 7백50억원과 2천 8백억원을 챙겨 나란히 2위와 3위를 차지했습니다. 우리 한국이 얼마만큼 부패했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러워진 탐욕의 결과 눈이 멀어 부정부패와 악행을 서슴지않음으로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정까지 파멸시켜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사례를 역력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자산이란 사람이 대부의 벼슬에 있었습니다. 그는 관리가 뇌물을 받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한 번은 손님이 찾아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야기 끝에 손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일전에 보낸 생선을 받지 않으신 것을 보니 생선을 싫어하시는군요?"
  그러자 그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생선을 아주 좋아합니다."
  손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왜 돌려 보내셨습니까?"
  이 말을 듣고 그는 매우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서 보냈습니다.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요. 만약 내가 그 생선을 그냥 먹었다면 상에 올라오는 다른 생선들도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벼슬을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손님은 깜짝 놀라며 그에게 물었습니다.
  "생선 한 마리가 뇌물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남에게 받은 물건은 뇌물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훗날 내가 대부라는 벼슬을 버리고 국록을 먹지 않는다면 선생이 보내주신 생선을 기쁘게 먹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됩니다."
  손님은 크게 감명을 받고 자신의 집을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에 우리 사회에도 이런 벼슬아치들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딤후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교회나 나라에서 귀하게 쓰이는 그릇은 그릇의 크기나 재질(材質)에 관계없이 깨끗해야만 된다는 분명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학벌 좋고, 실력과 능력을 갖추었다해도 깨끗하지 못하면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깨끗한 삶과 깨끗한 사회'가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를 맞아 다시 한 번 우리 교회의 신앙생활 구호 가운데 "성결 보존"을 살펴 봄으로 한 해를 성결의 삶으로 결산하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레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수7: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主)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성결과 성화, 거룩은 다 같은 말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인데 아담은 범죄하므로 하나님을 보지못하고 동산 숲속에 숨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벧전 1: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해질 수 있는 제사 제도(祭祀 制度)를 세우셨는데 그 핵심은 "피(血)"에 있습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贖)하느니라".

  속죄 제사(贖罪祭祀)를 통해 이스라엘을 성결케 하시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임재(臨在)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보혈(寶血)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음을 예표(豫表)한 것입니다(히8:5,9:1-14).
  어느 촌에서 전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한 선교사가 며칠간 묵었던 신도의 집에 쓰다 남은 세탁비누를 주고 갔습니다. 그런데 비누를 처음 본 그 집주인은 떡인줄 알고 식구들과 누어 먹었으나 통 맛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불쾌하게 여겨져 주인은 선교사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해가 지나서 선교사가 다시 오자 주인은 비누 먹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선교사는 웃으면서 "그것은 더러워진 옷을 깨끗이 세탁하여 입으라고 드린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주인이 "그것으로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면 희어지는가요?"라고 묻자, 선교사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주인은 대단히 기쁜 표정으로 춤을 추었습니다. 이번에는 선교사가 주인에게 "왜 그렇게 기뻐하시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기를 "그 비누를 우리 집 식구가 다 먹었으니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졌을 것이 아닙니까?" 나는 정말로 기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죄는 물가지고 비누가지고 씻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써만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36:25-26에서 성령에 의한 성결함을 예언했습니다.

 "(겔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베드로는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이 깨끗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이 시대에 우리는 예수의 피로, 말씀으로, 성령으로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성결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요17:15).

  "(요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성결은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살전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가진 자는 성결해야하며(고후7:1)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고대(苦待)하는 자는 성결해야 합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딛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딛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일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성결은 받아야 할 은혜로서 예수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생활되어져야 할 방식으로 빛되시는 예수와 사귐을 통해 얻어지는 성결 생활(요일 1:7)이 성결 보존입니다.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 웨슬레는 "가장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를 자기의 선지자로서 <세상의 빛> 으로서 여전히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순간 순간의 빛만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물러가시면, 모든 것은 흑암이다. 하나님은 성결에 대한 저축을 주시기 않는다. 사람들이 순간 순간 공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불결(不潔)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성결 보존은 신의 성품을 산출(産出)케하는 성령의 역사(役事)인 것입니다 !

  오늘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주고 있는 성결에 대한 교훈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신5: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받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그 자손이 영원히 복을 받게 됩니다.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성결보존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모든 이상(異像)과 몽조(夢兆)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유명한 술객과 박사들이 풀지 못한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몽할 수 있었습니다.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단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단2:30)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 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하려 하심이니이다...(단2:36)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단2: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단4:19)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얼마 동안 놀라 벙벙하며 마음이 번민하여 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을 인하여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단4: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단4: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단4:26)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단4:27)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다니엘이 죽음의 사자굴 속에서도 조금도 상함이 없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6:16) 이에 왕이 명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단6:19)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단6:20)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단6:21)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단6: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단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너무도 생생하고 실감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섬기게 될 것입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사탄이나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없게 되어 바로 섬길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사람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므로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은 자신의 삶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육과 영에서 온갖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우리 신체를 바로 사용하지 않으면 몸은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육체를 더럽히는 15가지 죄악을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몸을 더럽히게 되면 정신이 더러워지고 부패되어서 결국 하나님과의 친교가 단절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더럽히는 죄악들을 제거시켜서 우리 자신을 깨끗이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몸을 더럽히는 것은 음란, 탐색, 기타 정욕에 속하는 것으로 결국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모독하는 죄인 것입니다.   
  그리고 영의 더러워짐은 이교도 사상으로 불건전한 정신이 믿는 자의 영을 더럽힘을 말합니다. 간혹 이교도의 사상에서 기독교 사상과 유사한 점들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중심적 내용이 이교적 색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을 살리지 못하고 도리어 영을 죽이는 간교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교도의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여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후 6:14-16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기독교인의 성결과 이방인의 불결이 함께 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세속화를 경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계1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14: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계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자가 없더라 (계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계14: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여기 "여자로 인하여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는 바로 세속화되지 아니하고 성결보존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알퐁스 도테의 <불로장생주>는 이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재정이 바닥났습니다. 가난을 미덕으로 삼았던 수도원이었지만 수도원의 뾰쪽탑이 허물어져가고 있었고 수도원 주위에는 잡초가 무성하였으며 유리창은 깨지고 문틀들도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지경에서 신부들은 종을 살 돈이 없이 기도시간을 알리는데 은행나무로 딱가리를 쳐서 알려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 수도원은 <불로장생주>라는 술로 떼돈을 벌어 들이게 됩니다. 불로장생주란 고셰라는 수도사가 여러 가지 약초를 끓이고 증류해서 만든 훌륭한 술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셰라는 수도사는 위인이 바보같아서 수도원의 젖소 두 마리를 먹이는 소지기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열렬한 신앙인이었고 모든 규율을 지키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천성이 착한 그는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는 수도원을 위해 크게 공헌하고자 어렸을 때, 자기를 길러준 아주머니가 주조할 때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기억하여 6개월의 고생 끝에 신비의 술, 불로장생주를 제조하는데 성공합니다.
  그 술이 날개 돋친 듯 팔리자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활기를 되찾게 됩니다. 모든 성문이 새로 단장되고 건물이 보수되고 신부들도 비싼 옷으로 바꾸었습니다. 수도사 고셰는 점점 신부들의 신임을 받게 되고 낡은 예배당 안에 차린 주조장에서 오직 불로장생주 제조에 전념하게 됩니다. 30명의 수도사들은 날마다 산과 들로 약초를 찾아 헤매고 다녔습니다. 고셰는 그 빛나는 공적에 의해 어느덧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미사가 진행될 때 두건을 비뚤어지게 쓰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자기 좌석도 못찾을 정도를 취한 고셰가 성당에 뛰어들어 난데없이 괴상한 노래를 불러댑니다.
  "끌어내라. 귀신들렸구나! "
  당황한 신부들은 소리칩니다. 그는 손수 만든 술을 시음하다가 이젠 중독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후부터 고셰는 성당에 나오지 않고 주조장 안에서 혼자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고민하던 고셰는 원장을 찾아가 술제조는 그만두고 전처럼 젖소를 먹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장은 자비로운 성 어거스틴이 죄를 용서해줄테니 안심하고 술만 만들라고 하며, 재정담당 신부는 이렇게 부자가 되어가는데 우리를 망쳐놓은 셈이냐고 순진한 고셰를 욱박지릅니다. 불로장생주는 미친 듯이 팔려 나갔습니다.
  신부나 수도사 전체가 술병을 포장하고 상표를 붙이고 짐을 운반하느라고 미사를 거를 때마저 있었습니다. 매일 저녁 미사가 끝나면 사제는 "우리 수도원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희생하고 있는 가련한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를 위해 기도했으나 그 시간에 술제조하는 낡은 예배당 안에서는 어김없이 고셰 신부의 술주정하는 노래와 이따금 고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신부들은 그때마다 이렇게 염려스럽게 말했습니다.
  "이를 어쩌나! 교구의 신도들이 알면 큰일인데."
  우리는 여기서 수도원이 본래의 의도와 목적에서 탈선하여 부의 축적에 혈안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저주받을 타락입니다. 기업이 그 도덕성과 기업윤리를 그 화려한 간판 밑에 묻어버리고 사리사욕 추구에 혈안이 되고 권력가와 자본가들이 엄청난 재산을 도피시키는 것은 타락을 넘어 마성(魔性)을 드러내는 주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거머쥔 권력 밑에서 한 순박한 인간이 퍼렇게 멍들어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종교라는 권력의 메카니즘에 의해 부름받은 수도사가 부를 해산(解産)하는 기계로 화하고 결국은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를 위한 종교이며, 누구를 위한 권력인데 귀한 영혼이 주정꾼으로 변신되어가는가 말입니다.
  다음으로 그러한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너는 수도원을 위하는 일을 하므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달래면서 그래도 민심이 두려워 "교구 신도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큰일이야." 하면서 이 비밀은 알려져서는 안된다고 서로 뻔뻔스러운 얼굴들로 부끄러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밀은 없는 법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날 것이고 숨기운 것이 알려지지 않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당리당략이나 정략을 떠나 깨끗한 삶과 깨끗한 사회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깨끗한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깨끗한 정부가 강한 정부입니다.
  깨끗한 사회가 강한 사회입니다.
  깨끗한 교회가 강한 교회입니다.
  깨끗한 가정이 강한 가정입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언 22:1)

  다윗은 도덕적, 영적 실패 후에 "(시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나라 백성들에게 정직한 영을 주시어 나라 민족이 새롭게 되어지기를 기원합시다. 먼저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축복받는 천국 시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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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사라지지 아니하는 불꽃


"(출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3: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출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출3: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출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3: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출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3: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 1940년대 본격화된 공출은 곡물유출보다 더욱 가혹하여 삼림과 지하자원, 식량인 쌀, 심지어는 교회와 절에 매달린 종이나 집안의 솥과 숟가락.젓가락까지 약탈해 간 무자비한 강도행위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생필품마저 빼앗겨야 했던 조선의 민중들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고,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찧어 먹어야 했습니다. 일제는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젊은 조선의 남자들을 강제징용하여 전쟁의 도구로 삼거나 탄광 노동자로 삼았으며, 여성들도 예외없이 근로정신대라고 해서 여러 공사장에 강제동원했습니다. 더구나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젊은 처녀는 물론 아이를 밴 유부녀들마저 일본군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선으로 끌고 간 사실입니다. 이렇게 물자와 사람마저 빼앗기고 고통받던 조선 민중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민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지원병 보낸 어머니 가슴만 쥐얻뜯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양곡배급 적어서 콩깨묵만 먹고 사누나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정신대 보낸 어머니 딸이 가엾어 울고요
어라어랑 어허야
풀만 씹는 어미소 배가 고파서 우누나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금붙이 쇠붙이 밥그릇마저 모조리 긁어 갔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이름 석자 잃고서 족보만 들고 우누나.

1939년에 시작한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모두 700만명에 이릅니다. 일본 정부는 전쟁이 끝난 바로 뒤에 강제동원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소각해버렸고 우리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누가 언제 어디로 어떻게 끌려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그리고 이들의 피해보상은 고사하고 원통하게 죽은 시신조차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한채 52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살해되었는가? 한 예로 일본 홋카이도에서 강제동원되어 죽은 조선인 노동자의 숫자는 홋카이도 철도에 깔린 굉목보다 더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꽉짜여진 군대식 생활과 가혹한 노동, 견딜 수 없는 민족차별과 쉴 새 없는 폭력,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갔습니다. 이에 견디다 못한 조선인들은 파업이나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붙잡히면 오로지 고문과 죽음 뿐이었습니다. 붙잡혀 고문 끝에 살해당한 조선인들은 절벽 아래로 내던져지거나 작업장 근처에 집단으로 가매장되고 말았습니다. 그 시신도 무덤도 꽃도 십자가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홋카이도에서 죽어간 조선인 숫자는 약 30만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그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이제는 세월의 흐름에 묻힌 차디찬 백골이 되어 저녁에는 새소리로 흐느끼고 새벽에는 백골위로 맺히는 이슬을 눈물로 흘리며 저 머나먼 이역의 하늘을 원통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 인간으로서는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야수같은 삶을 강요당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끌려가 힘겨운 삶을 살다가 어느 날 한 줌의 재로 사라져 버린 조선인 원폭피해자들의 신음소리.
동토의 땅 사할린에 강제동원되었다가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지 52년이 되었어도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 만리 머나먼 땅에 묶여버린 사할린 한인 동포들.
일본 사회의 냉대와 법적 차별 속에 외국인 아닌 외국인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재일동포들.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려나갔다가 부상당채 고통받는 조선인 출신 상이군인들과 억울하게 전범으로 몰려 오욕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이른바 조선인 출신 BC급 전범들의 통곡.
일본 열도의 탄광촌과 지하 군수공장에서 혹은 남태평양의 전선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채 백골로 남아 오늘도 고향의 땅에 묻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45만 강제동원 희생자들.
이 엄청난 민족 비극의 역사가 우리 교과서에조차 제대로 실리지 않은 채 광복 52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내팽개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뒤안길에서 광복 52년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우리는 망각 속에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일제의 강제동원에 앞장선 자들은 일본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지도층 인사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몇 가지만 예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시인 노천명은 일본 제국주의가 싱가폴을 점령하자 이를 찬미하는 시를 <매일신보>1942년 2월 19일자에 발표했습니다. 또한 시인 서정주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가미가제 특공대로 죽어간 마쓰이 히데오라는 조선인 비행사를 찬양했습니다. 특히 한국 여성박사 1호인 김활란 박사(창씨 개명:야마기 카스란)는 징병제도를 감격적 언어로 찬양고무했습니다. <징병제도와 반도여성의 각오>라는 글로 <신세대>1942년 12월호에 실린 내용의 일부를 보면,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최대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김활란은 해방 이후에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유엔총회 한국대표, 막사이사이상 수상, 대한민국 일등 수교훈장 수상 등 한국 여성계의 거물로 활약했습니다. 해방되었을 때 이들 친일파였던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일제시대의 관료, 군, 장교, 악질 경찰, 판검사 등은 마땅히 민족 정기를 지킨다는 뜻에서라도 법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친일파들이 여전히 사회 지도층으로 활약하므로 일제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광복 52주년을 맞아 아직도 나라 민족의 아픔과 고통의 역사가 청산되지 아니한 채, 경제는 날이 갈수록 일본에 종속화되어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고,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의 자국득실 계산 놀음에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아직도 부정 부패가 여전하며, 문화적으로는 이미 일본과 미국 문화에 잠식되어 청소년, 어른 가릴 것 없이 정신적 황폐화를 이룬지 벌써 오래입니다. 종교는 아직도 교단 확장 놀음에 정치와 결탁하여 종교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시대의 파숫군 역할을 상실하고 제 갈길을 잃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 가운데 과연 이 나라 민족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불꽃은 사라지고 있는 것인가?

2..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복음의 불, 구원의 불을 가슴에 담고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그 후 약 20여년이 지난 1904년 무렵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미국의 에모리대학의 총장 캔들러는 당시 한국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제 땅 위의 희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안팎에서 완전히 절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기를 두고 추구한 일본의 야망이 성취되고 한국은 그 마지막 독립의 희망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라 민족 전체가 정신적, 도덕적, 사회적으로 구원받고 해방을 얻어야 한다는 사상은 전통 사회가 무너져가고 외세의 침입이 노골화되는 구한말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 사회의 구조의 억압과 외세의 침입에 대한 강한 반발의식이 구약적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결합되면서 한국 교회는 강렬한 민족해방의 환상과 영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국명이 로마철자로 Chosen이라고 표기되는 우연적인 현상을 놓고서도 그 뜻이 영어로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에 한국민은 유대민족과 같이 선택된 백성이라고 주장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한민족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단지파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인들은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 갈 때 민족의 구원을 위한 구국기도회가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노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1905년 추수감사절 다음날부터 일주일간 나라를 위한 기도회가 전국적으로 열렸으며, 을사보호조약이 그 해 11월에 발표되자 가장 앞장서 망국을 통곡하며 하나님께 절실히 기도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전덕기, 정순만의 인도로 상동교회에서 수천명이 연일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 당시 일본 기록에 의하면 전국 교회들은 서로 밀접한 연락을 취하면서 구국기도회를 기졌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의식과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원해 주시고 해방시켜 달라는 기도 속에서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 구원사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기도만 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 민족의 구원을 위해 개화운동, 애국 계몽운동 등에 활발히 참여했으며 이러한 전통은 일제하 한국교회 민족 운동으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이 땅에 전해진 복음의 불은 나라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구국 기도의 불과 구국 운동의 불길로 사라지지 아니하고 계속 지금까지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은 한국민을 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습니다.
전영택은 "예수 교회가 사명을 다하여 조선 사람, 조선 사회를 구하지 못한다면 불교, 유교, 천주고, 보천교 등 모든 다른 종교가 있는데 따로히 조선 안에 존립해 있을 가치가 어디 있으며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민족의 구원이 기독교회의 존재 의의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박희도의 설교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우리 조선 사람은 어떠합니까? 우리 조선서도 같은 것(아침이 언제 오느냐?)으로 조선 민족이 묻기를 쉬지 아니합니다. .... 조선의 그리스도 교회는 조선 민족에게 아침이 온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만일 아침이 온다 하지 못하게 되면 그리스도교의 존재는 없어지겠습니까?" 조선 민족이 쉬지 않고 묻는 물음은 "아침이 언제 오는가?" 곧 민족 구원의 날, 민족 해방의 날이 언제 오는가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사명이라는 인식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남만지역에서 항일 운동을 지도하면서 목회활동에 종사하다가 1935년 순교한 한경희 목사는 다니엘서를 가지고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국가가 패망할지라도 그 민족의 정신만 완전하면 회복할 날이 있을 것을 믿었다. 다니엘은 비록 바벨론 문학을 배워 삼조 대신이 되었으나 민족 정신과 종교 정신이 조금도 변치 아니하였다. 유대인들이 다니엘의 정신에 감화하여 70년만에 해방되었다."
주기철 목사의 "모세의 120년"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민족애와 애굽탈출 사건을 소개하면서 한국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구원에의 열망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늦은 비 휘 뿌리는 빗방울은 나일강에서 울부짖는 내 동포의 눈물이 아닐런가? 소슬한 가을 바람이여, 그 소리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내 동포의 한숨이 아닐런가?......눈을 감으며 애굽이요, 꿈을 꾸면 가나안 복지! 이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이 아닌가?.... 애굽 사람의 장자가 몰살하는 무서운 밤, 통곡의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유월절이오 해방이라, 이백만의 묶인 쇠줄이 하루 아침에 끊어지니 사백년간 종의 멍에 이제 벗고 자유로다. 꿈이런가 생시런가, 하나님의 권능일세.......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서고 믿지 않는 애굽인은 홍해에 몰살이다. 할렐루야 찬송하세."
다음과 같은 성구를 해석하는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를 해석할 때, "일국민(一國民) 혹 일민족(一民族)이 타국민 혹 타 민족을 학대함이 절대적 불가함을 전함이로다." 로 해석함으로 불의한 국가와 제도의 종말, 일제의 종말을 예수의 재림을 통해 예언하면서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해석되었습니다.
모세는 광야 깊숙한 곳,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먼 곳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호렙 산에 올랐을 때 가시덤불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추하고 험악하게 생겼습니다. 그것은 말라비틀어졌고 가지에는 가시가 가득했습니다. 모세는 그 모습을 보고 슬픈 마음이 들어 생각했습니다.
"오 내 백성 이스라엘이여! 너는 광야에 있는 이 가시덤불과도 같구나! 너는 아주 비천하며 너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너를 피하는구나!"
그가 이렇게 자기 민족의 고통을 슬프게 생각하며 넋을 잃고 있을 때 갑자기 가시 덤불이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아주 놀라 소리쳤습니다.
"나는 이 가시덤불을 내 민족 이스라엘에 비유하였다. 그런데 아! 거기서 불이 나와 덤불을 삼키는구나! 오 나의 주 하나님, 제 백성이 없어져야 합니까?"
그런데 모세가 보니 가시덤불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는 않는 것을 보고 근심이 사라지고 놀라운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때 그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가시덤불이 불길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유대민족도 계속 도리라. 그에 대항하여 밝혀진 모든 증오의 불길은 꺼질 것이며 어떠한 악과 불행도 그것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떨기 나무에 불이 붙으면서 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떨기 나무는 아름답고 고상한 나무들과 달라서 죄 많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불이 붙었다는 것은 그 백성이 애굽에서 수난당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불이 사라지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 백성이 고난 중에서도 망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라지지 아니하는 떨기 나무 불꽃"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재건, 그리고 성장과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의 사라지지않는 불은 어느 누구도, 어느 나라도 거역할 수 없는 선민 이스라엘 나라 민족 구원의 불이며, 건설과 발전 부흥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강력하게 나타난 소망의 불이었습니다.

3.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구원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기도와 탄원은 이러했습니다.
"우리가 고요히 이 백성의 생명을 생각하면 남 유달리 병많고 죄많고 가난하여 생명의 주접이든 것같은 이 백성입니다.....새로운 혁명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이 백성의 생명은 다시 설 수 없사외다. 영원하신 대 주재여 이 백성을 기억하사 이 백성중 어미된자, 자식된 자, 가르치는 자, 배우는 자 고루고루 그 생명의 새로지음을 받게 하소서. 껍질이 아닌 속 생명이 새로 지음을 받게 하소서."
또한 황재삼은 "주여 저희에게는 은과 금은 없습니다만 주님의 이름을 받았사오니 이 불쌍한 민족에게 주님의 귀하신 구원의 이름을 바로 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구원자가 되신다고 믿었습니다. 차재명은 참신앙은 자기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족까지도 구원하기 때문에 나라의 보배라고 했습니다.
김석현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슬픔과 괴롬 가운데 있는 동족에게 평안을 주고 구원을 주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신생명의 사설 기자는 "조선 4,000년 역사의 뒤끝인 오늘날 우리 민족은 늙고 병들고  썩어서 그 생명이 위험하여 조국을 붙들고 울며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민족의 유일한 빛이오 살 길은 오직 예수와 십자가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김교신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신앙이 민족구원의 핵심이라 된다는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은 성서와 조선.....사랑하는 자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 두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근를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
우리는 오직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과학조선....농업조선..... 성업조선......공산조선 등이 다 그 진심성의로만 나올진대 해로울 것도 없겠지만 이러한 구형적 조선 밑에 영구한 기반을 넣어야 할 것이니 그 지하의 기초공사가 곧 성서적 진리를 이 백성에게 소유시키는 일이다. 넓게, 깊게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위에 세우라. 그러므로 조선을 성서위에!"
김교신은 이 나라 민족을 뜨거운 말씀의 불꽃 위에 세우는 것만이 나라 민족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영구히 새롭게 변화시키며 부흥케 할 수 있다는 신앙으로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신앙인들의 고백들을 통해 보면 당대 민족적 상황은 구원받아야 할 상황으로 이해하므로써 우리 민족을 지배하는 일제에 대한 저항과 부정의 의식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가슴 속에 붙었던 이 사라지지 아니하는 불꽃은 나라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불꽃으로 역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나라 초대교회 신앙인들에게 붙었던 복음의 불길은 그 어느 누구도 꺼뜨릴 수 없었던 구국의 불길로, 나라 사랑의 불꽃으로 꺼질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신 사명은 불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불을 받아 이웃과 세계에 불을 지르는 생활을 말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설교를 귀로 들어 머리라는 창고에 저장하지 마시오. 나는 예수의 불을 토합니다. 그 불의 열기를 몸으로 받아 들이십시오." 요한 웨슬레의 가슴 속에 붙었던 복음의 불길이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고, 나라를 구원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란 물로 씻음을 받고 성령이란 불로 나 자신을 불태우며 이 불을 인류 사회에 전달하는 생활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을 나르는 수레입니다. 욕정의 불을 나를 수도 있고 신념의 불을 나를 수도 있습니다. 미움의 불을 나를 수도 있고, 사랑의 불을 나를 수도 있습니다. 수레의 가치는 그 속에 담겨진 불의 종류로서 결정됩니다. 성령의 불을 담은, 성령의 불을 나르는 불수레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나라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성령의 불을 던지는 성령의 불수레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도탄에 빠져 국난에 처한 나라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구국의 불이 충만한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1947년 2월에 사해 서쪽 여리고 남방 14km 지점에 있는 쿰란 마을에서 보물이 발견되었습니다. 한 소년이 잃어버린 산양을 찾기 위하여 절벽에 위치한 자연동굴에 들어갔습니다. 무서우니까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년은 이 굴에서 십여 개의 옹기 단지 곧 큼직한 질그릇들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양피지에 글이 쓰여진 두루마리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사해문서>(The Dead Sea Scrolls)의 첫 발견이었습니다. 사해문서는 기원전 2세기 경에 복사된 성경사본으로서 이사야서, 시편 등이 들어 있는 획기적인 성경연구사료입니다. 그후 고고학자들은 이 근방의 자연동굴 2백개 이상을 파헤쳤으며, 그 중 11개의 동굴에서 옛 성경사본들을 발견한 것입니다. 모두가 높이 65cm 정도의 질그릇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처음 발견한 목동 소년은 고물상에게 두루말이 한 개당 20파운드씩 받고 횡재한 줄 알았는데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가 고물상으로부터 한 개 25만 달러씩 주고 사들인 보물이었습니다. 가장 값싼 토기 속에 보물이 들어있을 때, 이 질그릇은 엄청난 빛과 값어치를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을 질그릇, 곧 깨어지기 쉽고, 약하고, 가치없는 존재로 비유하고,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깃들일 때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보물이 질그릇 속에 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능력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습니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 같은 내가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서 성령으로 역사할 때 가치있는 인생, 보배로운 질그릇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라 민족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4. 우리 감리교회에 어윤희 라는 여자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일찍이 일제 식민지 통치시대인 15세때에 출가를 하여서 이듬해인 16세에 그만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여생을 하나님과 조국을 위하여  바치리라고 결심을 하고 황해도 개성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던중 1919년 기미년 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어윤희 여사는 개성에서 한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한  손에는 독립선언서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힘껏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일본 헌병에게 체포를 당하여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에서 재판관이 그에게 묻기를 "너 누구의 명령을 따라서 이와 같은 짖을 하였느냐? 배후의  조종자를 대라" 고 할 때에 어윤희  여사는 대답하기를 "네놈들이 세계4대강국의 하나라고 자부를 하면서 여지껏 그것도 모르느냐? 한 고을에 새벽닭이 울때에 누가 시켜서 우느냐? 울때가 되니까 우는 것이다. 내가 조선의 딸로서 일 할 때가 되어서 일하는  것인데 누가 시켜서  하겠느냐?" 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재판관이 옆에 있는  간수에게 "저 여자의  옷을 발가벗겨라" 고 고함을  치니 간수들이 우루루 달려들어서 나이 30도 안된 여인을 수 많은 방청객들이 있는데서 옷을 벗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이 때 어윤희 여사는 "에이! 이 더러운 야만종 같은 놈들아 내몸에 손을 대지 마라 내손으로 벗으마!" 하고 그 관중앞에서 스스로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재판관 앞에 똑바로 서서  "자! 보아라, 네 어미도 나와 똑 같고 네 계집도 나와  닮았을 것이다.이 야만종 같은  놈들아!" 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재판관은 고개를 돌리며 빨리  치우라고 소리를 치고 5년의 징역형을 언도하였습니다. 그 후 어윤희 여사는 류관순과 함께 감옥살이를 하다가 류관순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어여사는  석방이 되어서 평생을 고아를  키워가며 감리교회의 장로님으로 봉사하시다가 1961년 11월 18일 오후 3시 30분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에 갔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소중하게  간직하던 상자를 열어보니 유언장이 나왔는데 그중에 장례감사헌금으로 2만원을 담은  봉투가 있고 또 한 봉투에는 장례비용으로 4만원을 넣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수의도 모두 장만해  놓고 만약에 돈이 모자라면 이 반지를 팔아서  쓰라고 금반지 한 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례는 화장을 하여서 한강물에 뿌려 달라고 하고 배삯까지 따로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재산은 한푼도 없었다고 합니다. 유관순, 어윤희 장로에게 임했던 사라지지 않는 불은 나라 민족을 사랑하는 성령의 불꽃이었습니다. 그 불길이 전국에 번져 이 나라 민족의 해방과 구원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임했던 사라지지 아니하는 가시떨기나무 불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었습니다. 그 불꽃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의 고통과 부르짖음을 보고 들으시고 건져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3: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출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하나님의 이 사랑의 불꽃이 모세에게 붙었고, 이 불로 말미암아 홍해가 갈라지고 애굽에서 해방되어 430년 노예생활의 고통과 아픔에서 구원함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에이트컨 목사는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의 입술에 당신의 불을 붙여 주셔서 당신의 음성을 전달하게 하소서. 나의 마음에 당신의 불을 붙여 주셔서 당신의 뜻을 깊이 생각하게 하소서. 나의 심장에 당신의 불을 붙여 주셔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나라 민족을 구원하는 십자가 한국 제단의 불은 하나님께서 직접 붙여주신 거룩한 불입니다. 이 불은 절대로 꺼칠 수가 없습니다. 한번 하나님께서 붙이신 불은 절대로 꺼쳐서는 않되며 두 번 다시 붙이시지 않으십니다.
  
  "(레9: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레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레6:12)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레6:13)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이는 항상 인간의 죄가 사(赦)하여지는 제물(祭物)이 태워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다. 예수 그리스도의 죄인들을 위한 구속사역이 중단되지 아니하고 영속(永續)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제단의 불은 바로 성령의 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를 예언하였습니다.

  "(행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성령 세례를 불 세례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는 이 시대 교회들의 표상들입니다(계2:1-3:22).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는 성령의 불로 뜨거운 교회였으나 "처음 사랑"을 버리므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는 성령의 불, 곧 사랑의 불이 꺼졌다는 증거입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과 진리의 불이 식어져 이단을 용납하므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도 불이 다 꺼져가는 교회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계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한국 교회도 90년대부터 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령의 불을 받아 뜨거워지는 교회가 되게 히시기 바랍니다. 이 불을 받고자하면 먼저 성령으로 불세례를 주시는 예수를 가까이 하고 불꽃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렘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이그나티우스는 "십자가를 연료로 하고 있으면 사랑의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왜 사랑의 불이 일지 않거나 쉽게 꺼지는 것인가? 그것은 연료를 잘못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결심, 인간의 맹세, 인간적인 열심과 노력, 물질 등은 사랑의 연료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곧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해주셨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에너지로 할 때 비로소 사랑의 불이 계속 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연료로 하는 전도의 불이 인간을 구원하며,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연료로 하는 봉사의 불이 교회를 변화시키며, 사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연료로 하는 사랑의 불이 인간을 변화시키며, 인간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 핼록(G.B. Hallock) 목사의 목격담입니다. 그가 서인도 제도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기선 갑판에서 한 아이가 개를 데리고 놀고 있었습니다. 공을 던지면 개가 그 공을 물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공을 잘못 던져 바다로 굴러 떨어졌고 개도 공을 따라 파도로 뛰어든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얼른 선장에게 달려가 배를 돌이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커다란 배의 스케줄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제서야 선장도 할 수 없이 배를 돌이켰다고 합니다. 희생의 크기에 따라 변화의 규모도 달라집니다. 작은 보트라면 개 한 마리를 위해서도 진로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기선의 진로 변경은 한 인간의 생명이 달려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열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땅으로 오셔서 십자가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이 세상을 녹이는 사랑의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 민족의 죄를 태우는 회개의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섬기시는 제단 안에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의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 민족을 변화시키는 전도의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 백성에게 삶의 힘과 기쁨을 주는 찬송의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감사의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5. 불은 에너지(힘)입니다. 에너지(자연의 불)를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나라가 강하고 문화, 문명이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삶의 진정한 수준높은 문화와 문명은 성령의 불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참된 기독교의 문화 문명은 성령의 불로써 이루어집다. 성령의 불이 바르게 역사(役事)하는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입니다.
멸망받을 죄인들을 위해 끊임없는 사랑과 구원의 불이 항상 지펴진 십자가 제단에 감사함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호렙산 떨기나무의 사라지지 않은 불은 능력의 불이었습니다. 애굽에서 400여년 동안 노예생활하며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세는 극구 사양했습니다. 이유는

"(출3: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이는 다시말해 자기는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출4:1)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자신의 영도력의 부족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출4:10)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언변도 재주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한마디로 자기는 무능하며 너무 부족한 것이 많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노발대발하십니다.

"(출4: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노발대발하시는 것은 그가 능력없다고 고백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으시기를,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지팡이입니다."
"그것을 땅에 던지라."
그러자 그 마른 지팡이가 살아있는 뱀으로 변했습니다. 이같은 역사는 능력이 모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마른 막대기 지팡이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홍해를 갈랐고, 바위를 쳤을 때 바위에서 생수가 터져나왔습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이 능력을 믿는 사람이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며 나라 민족을 구원하는 민족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은 소명과 방향지시의 불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사라지지 아니하는 불꽃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 내 백성을 구하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이제 모세의 갈길이 정해졌습니다. 그의 삶의 방향이 구국의 길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성경에는 세 군데서 태워지지 아니하는 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나타난 불기둥은 무엇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향해 전진하라는 목적지를 지시하는 불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불붙는 풀무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그 불은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머리털 하나 태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을 복음화시키는 사명을 지시하는 사명지시의 불이었습니다.

"(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단3: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단3: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오순절 다락방에 내린 성령의 불길은 무엇을 태워없애는 불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는 전도 사명의 불길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임했던 사라지지 아니하는 불꽃은 모세의 삶의 방향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나라 민족을 구원하라는 사명 감당의 능력의 불이었습니다. 한국에서 27년간 일했던 일본 상사임원 모모세 다다시는 최근 그의 저서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없는 18가지 이유>에서 기술력의 차이보다 또 다른 차이로 "경영자와 대통령과 경제담당부서 책임자들의 지도력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옳은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가장 절실한 것은 모세와 같은 지도자, 모세와 같이 '사라지지 아니하는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라 민족 구원의 소명과 사랑의 불꽃을 가슴에 담은 지도자가 나타나야만 합니다. 쿠룩만 교수는 한국의 경제성장은 땀(perspiration)에 의존했지 영감창조성(inspiration)에는 의존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광복절 날 눈에 보이는 휘날리는 태극기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의 제 2지배(경제지배)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도 성령의 불같은 맹렬한 역사가 각계 각층에 일어나 영육간에 나라 민족을 부흥케 해야 할 것입니다.
광복 52주년을 맞아 국난에 처한 이 나라 민족을 구원하며 재건하기 위해, 진정 나라 민족을 사랑하는 사랑의 불, 능력의 불, 소명의 불이 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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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우리의 소원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9:2) (1절에 포함되어 있음)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9: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롬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일제 시대의 뛰어난 기독교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인 김교신은 인간 개인의 삶이나 민족과 인류의 역사적 삶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움직인다는 섭리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민족의 흥망성쇠는 다른 무엇이 아닌 한 민족의 신앙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김교신은 구약 성서를 해석하면서 느헤미야가 가진 망국민의 애국심을 논의한 후 그가 예루살렘성의 황폐화 소식을 듣고 동포들의 무능을 탓하거나, 이웃의 적대국들을 원망하며, 어떤 정치적인 책략을 짜기 전에 먼저 회개하였음을 강조했습니다. 즉 "나라의 흥망성쇠가 그 나라의 병거(兵車)의 수의 다소와 외교 책략의 우열에 있지 아니함을 알기 때문에 저는 근본 문제에 착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애국은 진정한 애국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국가나 민족 문제의 근본은 정치경제적인 어떤 요소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사회와 국가의 융성은 모두 건전한 도덕 생활의 기초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건실한 도덕만 확립되면 난마와 같은 민족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도덕이란 한 두 가지 행위의 과오 실책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근본 방침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태도, 곧 신앙이 도덕입니다. <.......>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것이 도덕의 총화요, 갱생 융성의 원동력"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정도로 신앙과 민족애가 결합된 투철한 의식을 지닌 김교신은 그의 <성서 조선의 해(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 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으나 인력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혹자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혹자는 문학을 주며, 혹자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근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 <.......> 과학 지식의 토대 위에 새 조선을 건설하려는 과학 조선의 운동이 시대에 적절하지 않음이요, 그 인구의 팔 할 이상을 차지한 농민으로 하여금 덴마아크식 농업 조선을 중흥하려는 기도가 시의에 부합함이 아니며, 기타 신흥 도시를 위주한 상공(商工) 조선이나 사조에 파도치는 공산(共産) 조선 등이 다 그 진심 성의로만 나온 것일진대 해로울 것도 없겠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들은 모두 풀의 꽃과 같고 아침 이슬과 같아서 오늘 있었으나 내일에는 그 자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모래 위의 건축이라 풍우를 당하여 파괴됨이 심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형적(具形的) 조선 밑에 영구한 기반을 넣어야 할 것이니 그 지하의 기초공사가 곧 성서적 진리를 이 백성에게 소유시키는 일이다. 넓게 깊게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라. 그러므로 조선을 성서 위에."  

일본의 내촌감삼은 "내게는 두 개의 제이(J)자가 있다. 하나는 Japan(일본)이요 다른 하나는 Jesus(예수)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내촌은 일본의 참 애국자인데 그 애국의 근원이 다름아닌 불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라고 했습니다. 그런점에서 우리에게도 두 개의 씨(C)자가 있어야 겠습니다. 하나는 Coree(불어로 Korea란 뜻)요 다른 하나는 Christ(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민족을 위해 늘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않는 고통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본문1,2절). 그가 비록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이기는 하지만 인류의 참된 살 길인 복음이 그 누구에게보다도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전파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딤전 5:8에 말하기를,"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3절의 "친척"은 동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 민족만 사랑하지말고 다른 민족을 또한 귀하게 볼 것을 요구하십니다.
요나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 니느웨, 유대인을 가장 괴롭힌, 유대인이 가장 증오하는 니느웨에 가서 그 민족이 살 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신본주의(神本主義)에 입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혈통만을 사랑하는 동족애는 교만의 죄를 범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자기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본문 4,5절)
바울이 이스라엘 동포를 사랑한 이유는 그 민족이 일찌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 제일주의, 신본주의에 따른 애국 사상이었지 민족 지상주의(民族 至上主義)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민족과 국가는 다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먼저 민족 지상주의를 부르짖은 자와 부르짖는 민족의 마지막은 다 같은 운명에 빠집니다.
이태리의 뭇솔리니는 일찌기 일어나서 이태리 청년들에게 하는 말이 이태리 사람들이 제일 먼저 구할 것은 옛날 한 번 없어진 로마 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가가 지상이라고 하며 이태리인들은 먼저 국가를 구하자고 외쳤습니다.
많은 이태리 청년들이 그 부름을 따라서 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먼저 국가를 찾으면 이와 같이 동일한 운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9:26-28 의 말씀을 보더라도 모세는 민족을 위하여 민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민족을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한 번은 미국 대사를 만나서 하는 말이, "당신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이 북미에 왔다가 하나님도 찾았을 뿐아니라 금도 찾고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그러나 우리 아르헨티나의 경우 우리 조상의 대부분이 금을 찾아 돈을 모으기 위해서 아르헨티나에 이주해 왔는데 지금 보니 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찾지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민족 국가가 잘 사는 길은 어떤 정치제도나 경제 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것이 아닙니다. 제도나 구조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변화가 더욱 더 중요한 민족 국가 번영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민족이 살 길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만민을 사랑하는 길은 예수 복음을 전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진정한 민족을 사랑하는 방법은 복음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크게 근심한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지않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찢어진 가슴의 날카로운 슬픔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척하는 죄를 미워한 것이지 자기 동족을 미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미워한 것이지 죄인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노함으로 채찍맞을 백성으로 본 것이 아니라 갈망하는 사랑으로 동정해야 할 백성으로 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제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저주(아나테마,anathema)라도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애중에 가장 귀한 것은 아무것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롬8:31-39). 그러나 만약 그것이 자기 골육 지친을 구원하는데 어떤 도움이 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아나테마, anathema)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잠시도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유대인의 지위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문4-5절에 유대인들이 지닌 특권을 여러가지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 이스라엘이란 이름 자체가 복입니다(창32:28). 이 말은 '하나님의 왕자'라는 복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신14:1,32:6,출4:22,호11:1 참조).
보어햄(Boreham)이란 소년이 어디에선가 그가 소년 시절에 어떻게 아는 친구의 집을 방문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들어가서는 안될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그 방 건너 편에 앉아 있었는데 그 때 그 방문이 열리며 그 안에 자기 나이의 한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무서운 백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 소년의 어머니가 그 소년 곁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틀림없이 어린 보어햄이 건장하고 온전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아들을 보고는 비교를 함으로써 그 가슴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는 그 어머니가 그 백치 소년의 곁에 무릎을 꿇고 고통스럽게 대성 통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너를 먹이고 입히고 사랑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이렇게도 몰라 주는구나."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셨을 말씀일 것입니다.ㅍ이 경우에는 다만 더 심한 것 뿐입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의 예수 배척은 고의적이고 의식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마21:33-46 참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왕자란 특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예수를 모르고 배척하는 자기 동족에 대해 가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영광"-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보러 내려 오실 때 내려 온 하나님의 웅장한 빛을 말합니다.(출16:10,24:16,17,29:43,33:18-22).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하나님을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여러가지 이적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지만 오히려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세상 길을 택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마21:39-41).
셋째, "언약"-이스라엘은 언약을 소유했습니다. 그 첫번째 언약은 홍수 후에 노아와 맺어진 것입니다. 그 언약의 표징으로 하늘에 있는 무지개로써 다시는 이 땅에 홍수가 나지 아니한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두번째 언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입니다. 그 표는 할례였다. 세번째 언약은 시내산에서 한 민족과 맺은 언약으로써 그 근거는 율법이었습니다. 네번째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입니다(고전11:23-26).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반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셨고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축복의 관계들을 거절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접근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의지의 무서운 책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넷째, "율법을 세우신것과"-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고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 삶의 모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범죄했으면 그들은 모르고서가 아니라 알고서 범죄한 것이었습니다. 알고서 지은 죄는 모든 죄악 중 가장 큰 죄악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죄입니다.
다섯째, "예배"- 성막 혹은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길로써 예수를 보내주셨건만(요4:20-26) 그들은 거절했던 것입니다.
여섯째, "언약" - 이스라엘은 그 민족의 운명을 모른다고 절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안에 그들을 위해 쌓아 둔 임무와 특권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그들이 크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신28:1-14). 그러나 크게 되고 머리가 되는 기준이 되는 말씀이신 예수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일곱째,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 유대인들은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 즉 아브라함(4:1-3), 이삭(7절), 야곱(13절), 다윗(1:3,4:6-8) 등이 그들의 조상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실 때 유대인의 혈통을 택하셨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를 그들은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절당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뒤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찢어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처럼 많은 특권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救贖歷史)의 주역이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길은 바울이 그토록 갈망했던 민족 복음화를 통해 세계 구원의 주역이되는 것입니다.
  진정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면 바울이 가진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희생과 그치지않는 고통을 가슴에 안고 이 땅에 예수를 줄기차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분단된 조국을 통일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저 북녁 땅에 복음화가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뜻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역사의 완성은 이 천국 복음을 통한 세계 복음화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복음화하여 세계 복음화의 주역이 되게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소원은 민족 복음화를 통한 세계 복음화입니다.

1895년에 일어난 민비 살해 사건(을미사변)의 발단은 이렇습니다.(프레데릭 맥켄지가 쓴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미우라 코로오는 직업 청부 깡패 둘을 은밀히 불러 거사를 설명했습니다. 이번 거사를 위하여 벌써 군과 경찰도 동원 계획을 세운 터였습니다. 두 깡패 아다찌 겐조와 구리토모 시게아리카는 불량배 24명을 모아 행동대를 조직했습니다. 살해 특공대였습니다. 미우라 코로오는 약 한 달전에 조선의 공사로 부임한 자며 구리토모 시게아리카는 황성신문사 주필이었습니다. 일등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가 코로오 공사와 대원군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에서 기울어가는 일본의 영향력를 회복하려는 코로오와 민비를 꺾고 집권하려는 대원군이 손을 잡았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3시쯤 대원군의 집이 있던 시골, 오늘의 마포 공덕동에서 대원군과 일본인들이 출발했습니다. 행동대는 그날 새벽에 쉽게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본군이 궁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일본 정규군은 궁을 차단하여 지켰습니다. 살해조 깡패들이 왕의 침소가 있는 곳의 담을 넘었습니다. 곧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약간의 조선인 수비대는 사살됨으로써 곧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깡패들 일부는 고종의 침소로 들이닥쳐 고종을 위협했습니다. 민비와 이혼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민비 살해조는 왕비의 침소로 뛰어들었습니다. 깡패들은 도망치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두들겨 패면서 왕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르겠다고 말하며 애원하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옆방으로 가던 살해조는 방 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살해조 조장인 일본군 고문 오카모도 류노스케가 그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제끼면서 왕비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이를 부인하면서 몸을 홱 뿌리치며 비명을 지르며 낭하로 도망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세자가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는 모후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살해조가 민비를 덮쳤습니다. 여러 명이 쓰러진 작은 여인을 난자했습니다. 칼에 피가 튀었습니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살해조는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왕비를 이불에 둘둘 말아 멀지 않은 정원 마당으로 옮겨 던졌습니다. 그 위에 석유를 붓고 준비한 나무를 주위에 쌓았습니다. 타오르는 불에 계속 석유를 부어댔습니다.
"모든 것이 다 타고, 그리고는 몇 조각의 뼈만 남았다."
기울어 가는 나라, 그 슬픈 나라의 '국모'는 이렇게 죽었습니다.
민비가 살해되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고종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밖에 기독교인 누구 없느냐!"
기독교는 그 때 그 가련한 왕이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위기의 때에 왕은 기독교가 필요했습니다.
고종의 외침은 1800년대의 마지막 15년 동안에 한국 사람이 기독교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당시에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 앞잡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 나라는 기독교를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벌써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침략국이 일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통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교회로 들어왔는데, 그 까닭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도 기독교를 '어렵고 위험한 때에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로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삼류 정치, 정권의 비호 아래 커왔고 아직도 정치와 밀착해 있는 경제, 경제 규모가 커지기는 했어도 아직 그렇게까지 흥청망청 쓸 때가 아닌데도 돈을 물쓰듯하는 부자들, 이것을 부추기는 소비지향적 문화와 향락주의, 그리고 이런 가운데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의 절망감, 여러 종교들이 나름대로 진리를 외치기는 하지만 그렇게 큰 영향은 없는 듯한 상황, 아니 진리를 말한다고 하는 종교들도 '성장 경쟁식 사고'를 더 부추기고 있는 상황.... 이런 전반적인 문제점은 결코 우리들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윤리 도덕적 타락과 가치관이 뒤집힌 상황을 교회가 과연 해결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니 교회는 도덕 윤리적으로 바르다고 볼 수 있는가? 경제의 부조리를 보면서, 그래도 예수 믿는 경제인들이 부정 부패에서 깨끗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그 지긋지긋한 도당 정치 현상을 보면서, 그래도 기독교인 정치가들이 바른 정치 철학과 믿는 사람다운 정치 도의를 지녔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과연 이 사회가 교회를 필요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교회는 타락과 부패와 혼돈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해왔습니다. 복음이 들어간 곳에는 또 언제나 윤리 도덕의 차원이 높아졌습니다. 바른 가치관과 건전한 문화와 문명의 꽃이 피었습니다.
시대가 어두워지고 도덕 가치가 땅에 떨어질 때, 사람들의 눈에 먼저 띄는 것은 교회가 지닌 높은 도덕 윤리적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그 사회를 구원할 희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교회 자신이 타락할 때 이런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주어진 사명을 망각하고 사명을 다하지 못했을 때 회개하고 갱신하므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밖에 누구 사명자 없느냐?"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복음으로 민족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복음으로 전 세계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이 사는 길, 세계가 구원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교회는 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 속에 그 존재 의미가 있으며, 이 사회의 필요한 존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나라 민족, 사회가 제 2의 광복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주님과 우리 교회의 소원은 이 땅을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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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국가와 민족이 사는 길
---지도자들의 범죄 때문에 백성들에게 고통이 온다. ---


"(삼하24:10)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삼하24: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삼하24: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24: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 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삼하24:14)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삼하24: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 (삼하24: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삼하24: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삼하24:18)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소서 하매 (삼하24:19) 다윗이 여호와의 명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삼하24:20)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삼하24:21)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삼하24:22)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삼하24:23)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삼하24: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삼하24: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1. 본문은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두 번째 큰 범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즉위 초기에 보잘 것 없는 군사력으로 주변의 크고 작은 모든 나라들을 점령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승리이시며 나의 방패이시며 나의 요새시며 나의 등불이라고 겸손해 했습니다. 그러던 다윗이 본문에서 보면 정반대로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힘을 더욱 의지하는 교만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개 목동을 일약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높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세상에 있는 자신의 권세와 새력을 확인하고자 인구조사를 실시했던 것입니다. 인구조사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적 눈으로 볼 때 잘 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그 어느 죄보다 큰 죄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왕이 되었던 다윗이 이제 세상 권력을 의존하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는 큰 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뒤 늦게 마음에 자책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 가지 재앙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첫째 재앙은 7년 기근이고, 둘째 재앙은 석 달 동안 다윗이 대적에게 쫓겨 다니는 생활이며, 셋째 재앙은 나라 전체에 3일 동안 온역(질병)이 휩쓰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각각 기근의 환난, 전쟁의 환난, 병의 환난을 말합니다. 다윗이 선택한 환난은 병의 환난이었습니다. 결국 이 병의 환난으로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돌아 3일 동안에 무려 7만명이나 죽음을 당했습니다. 나라 지도자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7만 명의 백성들이 병의 환난 가운데 죽어 갔습니다.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계속해서 수도 예루살렘을 치려하자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환난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삼하24:17)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다윗의 회개를 들으시고 선지자 갓을 통하여 명령하십니다.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재앙을 완전히 그치게 하는 방안으로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입니다. 나라 민족에 내린 재앙을 그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제사를 드리고자 했을 때 타작 마당 주인인 아라우나는 거저 왕에게 드리려고 했으나 다윗은 이렇게 말하며 거저 받기를 거절합니다.

"(삼하24:23)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삼하24: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결국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그 타작 마당을 타당한 값을 치루고 그곳에서 회개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그치게 하는 제사의 장소로 지시하신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은 이후에 솔로몬의 성전 터가 되었습니다.

"(대하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이스라엘 민족의 환난을 그치게 한 이 장소는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진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인류에게 내린 환난과 재앙을 그치게 하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전 인류에게 내려진 죽음의 재앙을 멈추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 남북한을 비롯하여 전 세계는 7대 환난과 재앙가운데 있습니다. 이름하여 천재 지변의 환난, 전쟁의 환난, 병의 환난, 정치의 환난, 경제의 환난, 죄악의 환난, 심령 번민의 환난 등에 세계 거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도자 다윗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난과 재앙 가운에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자신의 범죄를 곧 바로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게 되면 얼마든지 이 땅에 내린 환난과 재앙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이 땅에 임하고 있는 재앙과 환난을 멈추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엄청난 환난 가운데 처해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상 최대의 풍년을 눈 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 먼저 우리 나라의 지난 한 해 동안의 교통사고의 통계를 살펴보면 우리 나라가 환난 가운데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도시 교통연구소>에서 밝힌 통계 결과는 우리 나라 교통 사고가 "웬만한 전쟁보다 피해 크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교통사고로 1만명 이상이 죽고 30만명이 넘게 다친다. 지난 10년 동안 3백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좀 더 풀어서 보면 지난 10년 동안 서 너집에 한 집은 교통사고를 경험했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는 흔히 전쟁이 일어나면 망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 승패를 떠나서 일단 전쟁을 치르게 되면 인적 피해도 크고 물적 피해도 커서 국력이 쇠잔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화된 얘기다. 그렇다면 웬만한 전쟁보다 피해가 크다는 교통사고에 대해서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큰 손실을 주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교통사고로 날려버리는 돈은 6조6천억원에 이르며 이 같은 규모는 매일 1백 80억원이 교통사고비용으로 날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바꿀 수 없듯이 사망자의 손실비용도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사고를 당한 가족의 슬픔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뿐더러 부상당한 사람의 좌절감도 계량화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계량화할 수 없는 부분의 피해는 더 크고 깊기 때문에 돈으로 환산할 수없다.... 1년동안의 교통사고로 인한 재산피해액 6조8천억원. 이 돈은 우리나라 GNP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매일 1백80억원씩 증발되는 재산피해액은 종업원 1백여명의 건실한 중소기업이 1년동안 꾸준히 벌어들이는 매출액과 맞먹는 돈이다. ....자동차사고에 의한 사망자수가 지난해 1만3백23명을 기록, 하루 평균 28명이 교통사고로 귀중한 생명을 잃는 것으로 집계됐다..... 최근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자동차·철도·선박·항공 등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총발생건수는 25만9백42건, 이중 자동차사고가 24만8천8백65건으로  99.1%를 차지했으며, 사망자도 총 1만8백95명중 자동차에 의한 사망이 99%인 1만3백23명에 달했다. 총사망자중 자동차사고 사망률이 차지하는 비율은 6.7%,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요사망 원인중 1위인 암사망률 21.3%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수치다....하루 28명에 이르는 교통사고 사망자는‘교통대란’이라는 전투현장에서 1개 소대급 인원들이 매일 희생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망자뿐  아니라 자동차사고에 의해 장애자가 된 피해자들의 후유증은 더 심각하다. 한국지체장애인협회가 최근 교통사고에 의한 후유장애인 5백1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46.1%가 심각한 생계문제에 시달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들 중 1년 이내에 사고전의 직장이나 직업으로 돌아간 사람은  24% 뿐이었으며, 사고를 당한지 5년이 넘도록 실직상태인 피해자가 48.9%나 됐다.  사고충격으로  우울증  등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교통장애인도 58.4%에 달했으며 이들 중 74.2%가 소외감과 사회적 편견·냉대를 견디지 못해 자살을 고려하거나 시도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경제적 손실이 사망에 의한 손실 못지 않게 크고 심각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 어린이교통안전연구소가  초등학교 1~3학년생 8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어린이 50.4%가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당할 뻔한 경험이 있고 68.8%는 교통사고를 당할까봐 늘 불안하다고 밝혀 우리사회에서 교통사고는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질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참조: <민족사의 비극 중의 비극인 6.25 한국 전쟁의 인명피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투로 인한 인명 피해가 15만, 행방불명 20만, 부상자가 25만에 달했고, 공산군에 납치된 수가 10만 이상, 그리고 전재민 수는 수 백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측되며, 공산군이 받은 피해는 실로 그 몇 배나 될 것이다."(이기백의 '한국전쟁')>
교통사고로 인한 백성들이 당하는 심령 고통의 환난은 측량할 수 없다. 우리 나라의 교통 사고가 이 정도면, 사망률로 보면 전쟁의 환난에 못지 않고, 경제적 손실로 보면 경제의 환난에 틀림없으며, 사고 당사자 및 그 가족들이 당하는 정신적 심적 고통으로 말하면 심령 번민의 환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우리의 동포들인 북한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김정일 한 사람으로 인하여 북한 땅에 겪고 있는 환난과 재앙은 이렇습니다.

"양주 한 병 값이면 북한동포 1만5천명이 한 끼니 먹습니다. 북한주민들은 하루에 식량을 1백~2백g  배급받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식량기구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에 6백~8백g의 식량은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국제시세로 옥수수 1톤이 1백50~1백70달러입니다. 16만원이 안 되는 돈이죠. 옥수수 1톤을 현재 배급량인 2백g씩 배급하면 5 천명이 먹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하룻밤 술집에서 마셔버리는 양주 한 병 값이면 북한 사람 1만 5천명이 한 끼니를 먹는다는 얘기입니다...."
어찌됐든 북한은 <지도자> 한 사람의 정치 왜곡으로 인해 80%, 1천 7백만의 인민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기근의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살아 생전에 북한 전국토에 김일성 동상을 무려 2만 9천개나 세워 하나님 보다 김일성을 우상으로 모셨으니 어찌 한발과 수해 등 천재지변의 환난을 통한 기근의 환난이 임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미국의 월간 라이프 지는 최근 특집호에서 지난 1천년을 만들어낸 1백대 사건과 1백인의 인물을 선정, 지난 1천년을 회고했습니다. 그 지난 1천년을 만든 20대 사건 가운데 9위가 히틀러의 출현과 유대인 대학살 사건이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지난 1천년간 출현한 세계 최대의 괴물로 꼽혔습니다. 지난 1933년 권력을 장악한 그의 광기는 1천7백만 군인과 6천만 민간인, 그리고 6백만 유대인, 도합 8천 3백만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광기로 말미암아 1억 가까운 백성들이 당한 지상 최대의 전쟁과 죽음의 환난이었습니다.
"기아를 무기로 사용…공산주의 이름으로 인류 1억명 죽었다"
<파리=김광일기자>  1917년 레닌이 러시아를 장악한 이후 오늘날까지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살륙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집대성한 책이 나왔다. 볼셰비키 혁명  80주년을 하루 앞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발매된 <공산주의 흑서>라는 이 책은 프랑스 역사학자 11명이 공동 집필했다. 8백44쪽에 달하는 이 책은 거의 1세기 동안에 걸친 공산주의 살륙의 실증적 대차대조표. 백서 혹은 청서 등과 대비, 그 참혹한 역사를 상징할 수 있도록 <흑서>라는 이름도 붙였다. 단순히 추상적 개념과 주장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예증, 사진, 자료 등이 곁들여 있는 고발장이다. <흑서>는 레닌 이후 오늘까지 지구상에서 공산주의 때문에 희생된 사람을 1억명 가량으로 계산하고 있다. 그것은  {레닌에서 김정일까지} 이어지고있는 범죄,  공포, 압제의 기록이다. 스탈린은 물론,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마오쩌둥(모택동), 베트남의 호치민(호지명),  캄보디아의 폴 포트 등은 모두 <지상 낙원>을 약속했고, 이를 <지옥>으로 실현했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소장이며 <흑서>의 대표 저자인 스테판 쿠루투아 교수는 서문을 썼다. {우리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공허하게 하늘에 떠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국가의 한 시대에 실재하면서 유명 지도자들이 구체화했던 공산주의인 것이다.}. 저자들은 공산 독재자가 반대파를  분쇄하기 위해 기아를  무기로 사용했다고 분석했다. 이것은 체계적이고 고의적이었다. 레닌이 처음이었고, 스탈린이 본받았으며, 나중에 에티오피아,  모잠비크 등이 이를 원용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레닌이 저지른 집단 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인질과 수감자 수만 명을 재판없이 총살했고, 1922년 기근으로  5백만명이 목숨을 잃도록 했다}는 것이다. 또 {1918∼1922년 사이 농민 반란, 노동자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만이 학살당했으며} 그 배후에 레닌이 있다고 <흑서>를 말하고 있다. 이후 스탈린이 자행한 무자비한 숙청,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 및 집단이주들이 기술되고 있으며, 제린스키가 처음 만든 정치경찰이 그후 KGB로 발전하면서 어떻게 탄압기구로 기능했는지도 밝혀지고 있다. 이름만으로 공포감을  주었던 이아고다, 이조프, 베리아 등은 정치 경찰의 총수였다. 이 책은 또 공산주의가 반파쇼 투쟁과 저항운동을 정권 장악의  방편으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다. 애국심을 빙자한 이면에 집권 야욕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서문과 5부로 나뉘어 있다. 중국은 제4부 1장, 북한, 베트남, 라오스는 2장, 캄보디아는 3장에 기술돼 있다. 르 피가로지는 5일 한 면 전체를 할애, 이 책을 소개했다. 시사주간 렉스프레스는 6∼12일자 14개 면에 <공산주의 범죄에  대한 최초 결산서>라는 특집을 펼쳤다. 라디오 <프랑스  엥테르>는 6일, TV <프랑스2>는 7일 각각 이 책에 관한 특집 방송을 진행했다.<공산주의 흑서(leLivreNoirdu Communisme)-범죄,공포,압제>, 스테판쿠르투아 외 10인 공저, 로베르 라퐁사 출간, 8백44쪽, 1백89 프랑. 발행일 : 97년 11월 07일

<공산주의 흑서> "북한정권 50년간 300만 희생"
<파리=김광일기자>  레닌 이후 한세기에 걸친 공산주의 역사를 프랑스 11명의 역사학자가 실증적으로 기록한 <공산주의 흑서> 제4부 2장 북한편은 53년 이후 북한 땅에서 기근과 병 때문에 숨진 사람을 50만명으로 추산했다. 북한편을  집필한 사람은 공산주의 전문 학술지(불어) <사회사 평론>의 피에르 리굴로 편집국장. 리굴로 국장은 {오늘날 2천3백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북한 땅에서 지난  50년 동안 공산 체제로 인해 희생된 사람(기근으로 인한  아사자 제외)은 대략 3백만명 이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당 숙청으로 숨진 사람이 10만,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이  1백50만, 공산주의자들이 의도하고 조직하고 촉발한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이 1백30만명}이라고 말했다. 그뒤 {정규적이고 살상적인 군작전}으로 숨지는 사람을 계속 보태야 한다고 리굴로 국장은 덧붙였다. 그는 근년에 빚어진 북한의 식량난에 주목, {양식 부족으로 인해 직,간접으로 희생된 사람은 수십만에 달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는 {그러나 모든 수단을 동원, 상황을 실제보다 암울하게 만들고 있는  북한정부의 노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것은 1921년 소비에트  정권이 기근  구조위원회를 조직, 부르주아 세계의 선의에 도움을 호소했던 과거를 본뜬 것}이라고 분석했다. 발행일 : 97년 11월 07일

4. 그러면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외국 사람들이 본 한국 경제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 지에 실린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 재벌들은 국가를 가난으로부터 건져내고 아시아 발전의 모델이 됐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잘못되고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8일 '비틀거리는 거인들'이란 제목으로 한국재벌들의 고민과 문제를 다룬 기사를 게재했다. '올해는 한국기업인들에게 무시무시한 해다. 6개 재벌이 지난 9개월 동안 파산을 했고, 쌍방울이 법원에다 보호신청을 했으며, 기아는 더이 상 오래갈것 같지 않다. 6개 다른 재벌들이 위험 리스트에 올라있다.30 대 재벌중 13곳이 지난해 손해보았다. 그 때문에 수 천개 부품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있고, 현재 추세로는 4천개 중견 또는 대기업들이 연말까지 파산할 것이다. 이것은 지난해보다 2배나 많다. 우울한 기운은 널리 퍼져있다. 경제 성장은 느리고, 원화가치는 하락하며, 주식시장은 5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튼튼해 보이던 한국 경제발전의 모델이 흔들리고 있다. 한국은 과거의 가난에서 벗어나 세계 11대 시장경제를 갖고있는데, 대부분 삼성-현대-LG-대우 등 4대 재벌의 기여 덕분이다. 서구에선 재벌들이 자동차-전자-조선업종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 내에선 농업부터 신문사 운영까지 모두 하고 있다. 4대 재벌들은 한국 전체 매출의 47%, 수출의 절반을 떠맡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한국을 부러움과 존경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그런 열정은 식고 있다. 한국사람들은 "오늘날 유일하게 번영하는 '재벌'은 서울지방법원뿐"이라고 비꼰다. 서울지방법원은 관리중인 60개 기업들의 자산인 2백70억달러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재벌들은 현재의 고통이 경기 사이클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하며, 곧 끝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걱정스럽게도 그들이 겪는 고통은 영원해 보인다. 재벌들은 빚더미속을 헤엄치고 있다. 1백 70개 이상의 기업들이 자기 자본의 5백%가 넘는 빚을 지고 있으며, 3백대 기업들도 평균치 4백%를 기록중이다. 이것은 미국 대기업들의 평균치보다 3배나 높다. 외화부채도 지난 2년간 2배로 늘어났다. 성장하는 경제라면 그런 대출은 문제가 없다. 문제는 한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급속히 쇠퇴하는데 있다. 한국 제조업의 임금은 이제 영국보다 30%가 더 높아졌다. 서울은 세계에서 3번째로 살기 비싼 도시가 됐다. 무력을 사용하는 노동조합과 해고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법률로 인해 종신고용의 전통은 지켜지고 있다. 재벌들은 지난 10년간 17%의 매출증가율을 기록했지만, 간접 관리인력들은 이보다 더많은 19%나 늘려왔다. 재벌들은 리스트럭처링(구조재 조정)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엄격한 노동법과 금융규제들이 그것을 막고 있다. 정부관리들은 재벌들이 과대하게 팽창해왔으며 전문경영인들을 적극 채용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한다. 은행들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정부압력에 의해 매우 위험해보이는 대출을 해주곤 한다. 지금까지 개혁은 거의 없었다. 지난해 정부가 최후의 수단으로 해고를 할수 있는 법개정을 추진했다가 대대적인 폭동에 직면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재벌 계열사들이 각각의 경영실적을 속이고 서로 돕기위해 자금을 지원하는 일을 막으려고 추진중이다. 더욱 급진적인 것은 금융 규제다. 그러나 바보같이 돈 빌려준 은행을 파산시키는 일은 적어도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98년초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재벌들도 자신들을 채근하고 있다. "변하라, 변하라, 변하라." 전경련의 한국경제연구원은 벽에 이같이 새겼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변화'는 자신들이 아니라 정부정책이다. 재벌 자신들은 자신들의 사업에 별로 잘못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LG는 대담한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기껏 자리에서 물러난 인력들을 퇴직시키거나 다른 유망산업으로 이전시키는 정도였다. LG관계자는 "우리 회장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면서 "우리는 수익을 올리기 위해 노동력을 자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재벌은 단일가족, 보통 설립자나 그의 아들에 의해 운영된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초창기엔 한 사람이 모든 결정을 신속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재벌은 너무 커졌다. 그리고 아들과 손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재벌 계열사들은 갈수록 힘을 잃어가고 있다. 주주들의 불평이 도움이 되겠지만, 유순한 한국의 주주들은 그들의 투표권을 거의 행사하지 않는다. 세법은 기업들의 인수합병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인수같은 것도 엄격히 금지돼 있다. 한 서구 기업컨설턴트들은 아직 절박감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재벌의 철학은 가족을 위한 부를 창출하는데 있으며, 그들은 이번 분기나 다음 분기의 실적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게 그의 말이다.
이같은 영국 경제지의 한국경제에 대한 분석에 동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 경제가 지금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생산 증가율 보다는 소비증가율이 훨씬 높다는 데 있습니다. 관세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 해 모피의류. 화장품. 위스키. 승용차 등 주요 고급 사치성 소비재의 수입이 2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최근 당국이 집계한 20대 주요 사치성 소비재의 수입(통관기준)은 지난 해 20억 9천 4백만 달러를 기록, 전년의 14억 1천 1백만 달러에 비해 무려 48.4% 증가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양주 한 품목만해도 연간 3,4억 달러를 고스란히 해외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국가 경쟁력의 지표가 되는 외환보유고는 형편이 떨어지고 재경원이 공식집계한 총외채와 순외채는 각각 약 1천억 달러와 2백 50억 달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소비행태는 건전치 못할 뿐만 아니라 한계소비성향이 100.2를 기록하므로 소비증가가 소득증가보다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 여대생들의 옷 신발 가방  장신구 화장품 등 평균적인 몸 치장비는 미국의 3~4배, 일본의 2~3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봉급생활자 등 일 반 서민들의 경우 매달 카드빚으로 카드빚을 갚는 "외상 인생"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외상 구입의 주요 수단인 신용카드의 연체금액이 지난  3월말 현재 1조 원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30대 재벌 그룹이 보유한 자산 총액은 우리 나라 한해 예산의 5배에 육박하는 무려 287조원에 달하는 데, 이중 자기돈은 20%에 불과하고 나머지 8활은 모두 빚이라고 합니다.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들은 결국 거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80%가 거품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맹이는 없고 빈껍데기 뿐입니다.
우리 나라 경제위기는 이와같은 소위 '거품 경제'에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품'이란 겉보기에는 많아 보이고 부풀어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곧 꺼져 버리는 것입니다. '거품'은 자기가 가진 실제 보다 자신을 크게 보이게 만들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고 곧 꺼지면서 자기의 보잘 것 없는 실체를 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거품'은 경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품경제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거품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거품은 정치 경제에만 있지 아니하고 한국 교회에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인 수가 남한 인구의 1/4에 이른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빛과 소금'이 1/4이나 되지만 우리 사회는 오히려 부정 부패와 사치와 허영, 그리고 음란과 타락으로 더욱 어두워지고 있으며, 죄악으로 썩는 냄새가 가득합니다. 240여 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약 100여명이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데 국회의원들 중에 기업들로부터 비자금 받지 아니한 의원이 얼마나 됩니까? 이 나라의 법을 세우는 의원들이 얼마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사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사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사1: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무수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할지라도, 제아무리 '많이 기도한다' 할지라도, 각종 절기를 모두 다 지킨다 할지라도 악행과 악업을 버리고 손을 깨끗이 하며 공의와 자비, 선행을 베풀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 수천 수만의 제물보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주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미가 6:8)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는 거품 제사, 신앙은 거품 신앙에 불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거품 의식으로 가득찬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시고 저들의 그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행실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이 자기를 선생이라고 불러 주기를 즐긴다" 저들의 이런 행위는 모두 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들이 진정 율법을 사랑하고 그 율법대로 행하려면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말만 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화려한 쭉정이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저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시고 저들의 여지없이 공격하시어 저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들어 내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경제 정치 사회의 거품을 걷우어내기 전에 먼저 우리 신앙의 거품을 걷어내야 합니다. 나라 민족을 위해 누구를 막론하고 거품들을 걷어내야합니다. 다시말해 국가 민족이 살 길을 얻기 위해서 나라의 모든 지도자들과 더불어 백성들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복음 전파 100년의 역사로 말미암아 5천년역사의 때묻은 가난의 질곡을 벗어나 누리게 된 국가 민족의 번영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것입니다. 이번 전국 27개 도시를 순회하며 긴급 환난 경고집회가 국가 민족에 내려지고 있는 각종 환난을 멈추게 하는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거의 2천년만에 한반도에 도착하여 복음전파 100년만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하루 아침에 물거품으로 날려 보내지 않으려면 나라 민족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회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에스겔 22:30-31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시대에 하나님은 대한민국의 무너져 가는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멸망당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찾으시고 계십니다. 이번 집회에 참석하시어 긴급히 나라 민족의 죄악을 자신의 죄처럼 여기고 회개하시는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5. 마지막으로, 대선을 앞두고 대선 주자들의 탐욕적인 권력 쟁취로 인한 이 땅에 정치적 환난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소위 '성공한 목사'까지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창당을 서두르고 엄청난 헌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목사는 오직 복음을 전하며 생명을 걸고 진리를 사수하라고 주어진 직분이지 정치나 하라고 안수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사명의 목표는 성공(success)가 아니라 신실한 증인(gaithful witness)이 되는 것이요, 능력, 권력(power)가 아니라 선포(proclamation)요, 기술(technique)이 아니라 진리(Truth)요, 방법(method)이 아니라 메시지(message)인 것입니다.
앞에서 잠깐 소개했던 라이프지 선정, 지난 1천년을 만든 20대 사건 가운데 제 1위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이었습니다. 예수탄생 이후 두 번째 맞는 천년의 최대 사건은 1455년 독일 대장장이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성경을 인쇄한 사건이었습니다. 귀족과 성직자의 전유물이던 성경은 그의 인쇄기를 통해 일반에 퍼져나갔고, 이후 르네상스와, 문예부흥과 16세기 종교개혁, 18세기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다시말해 그간 1천년이 넘게 귀족들과 성직자의 손에 갇혀있었던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이 금속활자 발명으로 말미암아 일반 평민들게 확산되므로 세계 문화 문명사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암흑기의 중세 교회를 개혁하고 혁명하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확산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18세기 산업혁명을 가져와 세계 인류의 삶의 패턴을 새롭게 변화시켰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하나님 말씀, 복음 전파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과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지 세상 정치 권력이나 물질 장악, 성공 등을 퉁해 세상을 점령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교회의 가장 강력한 행동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핍박을 초래할지라도 진리를 사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지 이익단체나 세상 권세에 대한 압력단체가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는 타 종교와 종교단체를 형성하여 정부와 사회에 대하여 한 목소리를 내자는 압력단체를 결성하고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가 결성한 십자가군은 약 200년에 걸쳐 8번이나 형성되었지만 여지없이 실패하여 멸망당하고 교회의 위신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군이 실패한 자리에 지금 이방 종교 터키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교회가 받은 권력(능력)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전파의 능력(권력)입니다. 복음 전파의 영적인 능력은 세상에서 말하는 권세나 권력과는 무관한 권력, 능력을 말합니다. 마태 복음 28장 18절에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복음 전파를 위한 영적인 권세를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나 예수님께 던진 제자들의 질문은 "(행1:6)....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였습니다. 제자들은 회복된 나라에서 얼마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그런 나라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왕국을 회복하여 권위와 지위를 가지고 로마인들에게 권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줄 수 있는 때가 지금입니까?" 그러나 그런 나라에 관한 것은 알 바가 아니고 대신에 그는 능력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전파의 영적인 능력이었습니다.

"(행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대통령이 되면 얼마나 교세가 크게 확장되며 나라가 잘 되겠느냐며 엉뚱한 망상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소위 "우리 종교"를 가진 신자가 정권을 잡았으니 이 판에 선교도 하고 교세를 확장할 뿐만 아니라 우리 종교를 크게 떨치는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록 있음직한 일이긴 해도 종교다운 발상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종교를 종교가 되지 않게 해버리기 때문에 현실적인 효용의 측면에서 보아도 결코 득이 되는 일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정치인이 자기네 신자라고 희희락락한다거나 어떤 정치인이 자기네 신자도 아닌데 자기네 종교를 찾아왔다고 해서 즐거워한다거나, 고위층 인사나 국회의원 등 권력층이 자기네 교회에 많다고 긍지를 가지거나, 자기네 종교 신자인 정치인이 다른 종교에 찾아가 축복을 받으러 왔다고 해서 토라진다거나 하는 것은 한결같이 종교가 참으로 비굴할 정도로 정치 세력 앞에서 맥을 못 추는 추잡한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아직도 이 땅에 근절되지 못하고 있는 정경유착의 부패고리 못지않은 정.종유착(政.宗癒着)의 부패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부패한 정치 세력에 대해 크게 비판적이어야지, 그 힘의 그늘에서 어떻게 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라면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정치 집단일뿐입니다. 인류의 종교 역사는 종교가 그 시대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했을 때는 그 존재 의미가 확연했지만, 세력과 돈 주머니를 잔뜩 거머 쥐고 이른바 그 영화로움을 누리게 되면 이미 그 존재 의미가 탈색되고, 마침내 얼마 가지 못해서 사실상 소멸될 수밖에 없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랑곳없이 오늘의 종교들은 그 아픔과 고난의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면서도 권력과 금력의 그늘 아래서 오히려 영화로움을 누리려는 듯한 종교 타락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혹자는 나라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정부를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이 방법이 한 국가와 백성의 도덕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지름길같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순진무구하고도 위험천만한 승리지상주의의 발로(發露)입니다. 기독교인들을 고위 공직에 세우면 모든 사회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주제넘은 생각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으며 진실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일찌감치 로마 원로원을 점령했을 것입니다.
권력이란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는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주장은 선지자의 몫이지 정치지도자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자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떠들어 대는 소리는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지 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