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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cross01b.gif  빛과생명  cross01b.gif   

 
※<빛과 생명>은 교정이 완료되었으며 2002.9.15부터 요한복음 설교 제2집<사랑의 향유>를 매주 순차적으로 2편씩 교정하여 올리고 있습니다.※

머  리  말

이 책은 나의 사랑하는 평강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매주 발간되는 설교지 <말씀의 샘>에 실렸던 것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20장 30,3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공관 복음서(마태 복음,마가 복음,누가 복음)의 주요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인 반면,요한 복음의 경우는 '영생'(Eternal Life) 즉,사람들로 하여금 "빛과 생명"이신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독수리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그것은 모든 생물들 중에서 오직 독수리만이 태양을 직시할 수 있으면서도 눈이 부시지 않는 것처럼 의의 태양이신 하나님을 바로 직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모든 신약 성서의 저자들 중에서 영원한 신비와 영원한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바로 그것에 대하여 가장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책에서 보다도 요한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더 가까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빛과 생명"이신 하나님을 직시할 수 있는 복음이 바로 요한 복음인 것입니다. 이 요한 복음서 설교 제1집 <빛과 생명>를 통해서 "빛과 생명"이 독자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994년 12월 성탄절에

                                 야음(也音) 산 기슭에서

                                                               이 동 희 목 사

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빛과 생명(1:1-18)

 2. 말씀이 육신이 되다(1:1-14)

 3. 예수는 누구인가?(1:18-28)  

 4. 하나님의 어린양(1:29-34)  

 5. 성령의 강림(1:32-34)  

 6. 참 기독교인(1:35-51)  

 7. 기쁜 삶으로의 변화(2:1-11)  

 8. 마음의 성전을 거룩케 하라(2:12-25)  

 9. 거듭나야만 한다(3:1-15)  

10. 사랑과 심판(3:16-21)  

11.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라(3:22-36)

12.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4:1-26)

13. 나의 양식은 무엇인가?(4:27-42)

14. 두 번째 표적(4:43-54)

15. 일어나 걸어라!(5:1-9)

16. 일하시는 하나님(5:10-18)  

17. 사망에서 생명으로(5:19-29)

18. 나를 믿을 수 있느냐?(5:30-47)

19. 삶을 풍요케 하시는 주님(6:1-15)

20. 삶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6:16-21)

21. 생명의 양식(6:22-40)

22. 참된 양식(6:41-59)

23.너희도 가려느냐(6:60-71)

24. 신앙과 하나님의 뜻(7:1-24)

25. 생수의 강(7:25-53)

26. 법과 사랑의 딜레마(8:1-11)

27. 진리와 자유(8:12-32)  

28. 빛과 어두움(8:33-59)  

29. 하나님이 하시는 일(9:1-12)

30. 우리도 소경인가?(9:13-41)

31. 선한 목자(10:1-18)  

32. 하나이니라(10:19-42)

33. 생명의 주(11:1-44)

34.
민족을 위하는 길(11:45-57)

 

1. 빛과 생명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어떤 청년이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습니다. 왜 자살하려고 했느냐 하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던 것이 다 실패로 돌아가서 그는 좌절에 빠졌습니다. 돈벌이를 해보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과 가족에게서 배신당한 것 같고 버림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의지하고 사랑했던 여인도 그를 떠나 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약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잃어버린 삶의 의욕을 다시 일으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서 살려냈습니다. 그는 친구를 원망하면서 "나는 티끌만큼도 삶의 의욕이 없다. 그러니까 제발 내게 죽음이라는 안식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에게는 삶의 의욕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혼탁한 죽음 속을 그대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인간의 말과 힘으로는 이렇게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을 살려 낼 길이 없다. 오직 생명의 주이신 창조주의 손길이 이 생명을 터치(touch)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그에게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말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기쁨이 없었던 사람에게 기쁨을 주시고, 죽음에 처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거부를 했지만 자꾸만 그 친구가 주장하자 마지못해서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기도했습니다. 기도하고 있는 동안 그 청년의 마음속에서는 그 동안 멈추었던 거문고의 모든 줄이 울리면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꺼져 버렸던 등불이 다시 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생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시 삶의 의욕을 찾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순간적으로 창조주의 손이 그를 터치(touch)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입니다. 어둠에 빛이 비추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20장 30,31절에 나타나 있듯이 예수 믿고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공관 복음서(마태,마가,누가)의 주요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인 반면, 요한 복음의 경우는 '영생'(Eternal Life) 즉, 사람들로 하여금 "빛과 생명"이신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이 하나님 보좌 주위에서 보았던 네 가지 생물은 각기 사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의 특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요한 계시록 4: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마가 복음은 소의 특징과 비슷하다 하여 소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소는 인간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는 동물로서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은 후에도 그의 가죽과 뼈와 살은 인간들에게 바쳐지는 최고의 희생적인 동물입니다. 이처럼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특성도 생명까지 희생하며 봉사하시는 주님으로 부각되어, 말씀보다는 행동위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였기에 그의 시각으로는 예수께서 소외된 자들, 특히 많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신 점에 감명을 받아 사랑이 넘치는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은 사자로서 비유되는데, 사자는 동물들의 왕으로서 권세를 가진 동물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에서 부각된 예수는 율법을 권위있게 해석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높은 권세를 가진 왕으로서, 메시야로서의 주님을 강조했습니다. 독수리는 요한 복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물들 중에서 오직 독수리만이 태양을 직시할 수 있으면서도 눈이 부시지 않으며, 요한이 모든 신약 성서의 저자들 중에서 영원한 신비와 영원한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바로 그것에 대하여 가장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책에서보다도 요한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더 가까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빛과 생명이신 하나님을 직시할 수 있는 복음이 바로 요한 복음인 것입니다. 이 요한 복음서를 통해서 빛과 생명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신령한 복음서인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인 20장 30,31절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서 그 중요성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20장 30,31절에는 세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표적'(sign)과 '믿음'(believe),그리고 '생명'(life) 등입니다.

첫째, 표적(sign)이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예수의 권능과 인격을 보이며 생명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 안에는 일곱개의 표적이 있습니다. 첫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표적(2:1-11)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의 첫번째 표적으로, 물이 즉각적으로 기쁨의 상징인 포도주로 변화된 질의 변화이며, 예수가 "질의 주(主)"(the master of quality)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는 물같이 아무런 맛없는 인생을 포도주 맛 같은 '기쁨'의 삶으로 변화시키는 권능, 즉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주님이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믿어 여러분의 삶이 참된 기쁨의 삶으로 변화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둘째, 예수 계신 곳에서 30km 이상 떨어진 곳에 병들어 거의 죽게된 사람을 고쳐주신 표적(4:46-54)입니다. 이는 예수가 "거리와 공간의 주(主)"(the master of distance,or space)이심을 나타냅니다. 셋째, 38년간이나 반신불수였던 난치병자를 치유하신 표적(5:1-9)입니다. 38년간이나 짊어진 난치의 고통을 치유하심으로 예수는 "시간의 주"(the master of time)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서'(here and now)그의 권능과 능력을 성령을 통하여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 믿어 그의 능력과 권능을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넷째, 오병이어의 기적, 즉 두 마리 생선과 떡 다섯 개의 어린아이 도시락 하나로 5천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표적(6:1-14)입니다. 이는 예수가 "양의 주"(the master of quantity)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믿어 부족함이 없이 모든 면에서 충족되시는 참 만족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예수께서 물위로 걸어가신 표적(6:16-21)입니다. 이는 예수가 자연을 다스리시는 "자연법의 주"(the master over natural law)되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섯째, 태어날 때부터의 소경을 고쳐주신 표적(9:1-12)입니다. 이는 예수가 인생의 타고난 불행을 행복으로 치유하시는 "운명의 주"(the master of misfortune)되심을 보여 줍니다. 불행과 저주의 인생은 예수 믿어 행복과 축복으로 변화된 인생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일곱째는 죽은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46)입니다. 이는 예수가 "생사의 주"(the master of death and life)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며 사망을 호령했던 것입니다. '사망의 주님'이신 예수를 믿어 생사를 초월한 당당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의 표적들은 인간이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개입하시어 인류를 구원하시는 요소들입니다. 삶의 벽에 부딪쳐 좌절과 어둠에 빠진 인생과 함께 하시는 예수를 통해 여러분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이 "빛과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앞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표적들은 인류로 하여금 '예수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는 인간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여부에 따라 삶의 중대한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음 수용여부는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축복과 저주 등을 가늠하는 중대하고 영원한 결단입니다. 일곱 가지의 표적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말해 예수가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전적으로 믿는 결단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 베풀어진 것들입니다.

셋째, 이렇게 표적들을 보여 예수 믿도록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 이유를 보여주시고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표적들로 예수의 본질과 인격을 경험하고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는 분명히 '빛과 생명'인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표적들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계시하고, 인류를 믿음으로 초대하여 인류로 하여금 생명의 축복을 얻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는 말씀은 예수가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빛 가운데 사는 "빛의 자식들"이 있고, 어둠에 사는 "어둠의 자식들"이 있습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에 예수 없이 사는 것은 바로 어둠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역사가 빛으로 시작된 것처럼 빛이 없이는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마치 빛을 떠나서는 어떤 생물도 생명을 지탱할 수 없는 것처럼 빛되신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도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생명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어둡고 혼돈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마음속에 밝은 빛을 지니며 그 빛을 통해 생명과 삶의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혼돈의 세상에 빛과 어둠을 나누이게 하셨습니다.(창1:1-3). 그 빛과 어둠을 나누이게 하신 말씀이 예수의 몸을 통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 순종여부가 인간의 삶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던 아담과 이브는 결국 빛가운데 거하지 못하고 어두운 동산 숲속에 숨었습니다. 그 어둠속에 사는 인류를 빛가운데로 이끌어내시어 생명을 얻게 하고자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여러분의 삶에 빛과 생명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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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말씀이 육신이 되다(1:1-14)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어떤 사람이 '강아지 팝니다'라는 광고를 내자, 어린 소년 하나가 찾아와서 값이 비싸지 않으면 한 마리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25불은 내야 하는데..."라는 주인의 말에 실망한 소년이 "2불 5센트밖에 없는데요,...하여간 강아지를 보여 주시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렴, 보여주고 말고"라고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털뭉치 공 같은 조그마한 강아지 다섯 마리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순간 소년은 강아지들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아저씨! 이중에 한 마리가 다리를 절름거린다고 들었는데 어떤 거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바로 이 강아지가 다리를 절름거리는데 완치가 안 될 것 같구나." 주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그 강아지가 바로 제가 원하는 강아지인데, 어떻게 돈을 차차 조금씩 갚기로 하고 살 수 없을까요?"하며 간청했습니다. "평생을 다리를 절어도?"라는 주인의 반문에 소년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한쪽 바지를 걷어 올리며 자기의 성치 않은 다리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잘 걷지 못하고 절름거리지요"" 그리고는 연민에 가득 찬 눈으로 그 강아지를 쳐다보며, "이 강아지에게는 많은 사랑과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저 역시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았지요. 불구의 몸으로 자라는 것이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니거든요"라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그 말을 듣고 "이 강아지를 가져가거라. 네가 이 강아지를 잘 보살펴 주리라는 것을 알고도 남겠다. 자, 돈은 필요 없으니 그냥 가져가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시는 동정이 넘치는 자비하심도 이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으로 사신 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곧 '말씀'(로고스)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유대인지만 주후 100년경에 헬라 도시 에베소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지대한 관심은 어떻게 하면 헬라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독교와 그리스도를 표현해서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증거하는데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이 환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길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유대 사상과 헬라 사상은 둘 다 '말씀'(로고스)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유대적 배경의 '말씀'(로고스)에 대한 뜻을 살펴 봅시다. 창세기 27장을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속아 '에서'대신에 '야곱'을 축복한 사건이 있습니다. 장자에게 축복했어야 하는 것인데 '야곱'에게 속아서 그만 차남에게 축복하고 말았습니다. '야곱'에게 축복했던 것을 취소하고 '에서'에게 다시 축복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축복한 말은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없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 그대로 성취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말은 반드시 그대로 실천되어져야하며 실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실수로 서원한 것일지라도 더디 하지 말고 속히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신명기 23:21-23,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하면 네게 죄라,...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은 창조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시 107: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이사야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이 형통하리라"

이처럼 구약 성서는 어느 곳에서나 이러한 강력하고도 능력에 충만하고 창조적인 '말씀'의 개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로고스 즉 '말씀'은 지혜 문학이라고 불리우는 잠언 등에서는 '삶의 지혜'와 '이성'으로 인격화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잠언3:13-26,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로고스" 즉 말씀은 '지혜'와 '이성'을 뜻합니다. '지혜'와 '이성'은 거의 같은 뜻입니다. 잠언 8:1-9:2에서 '나라는 말은 바로 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인화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혜'는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는 "말씀" 즉 '로고스'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창조적인 힘 그리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말씀'을 보기 원한다면, 그리고 삶의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이 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들 가운데로 오셨느니라."(본문 14절)

다음으로 헬라적 배경에서 "말씀"(로고스)의 개념을 살펴 봅시다. 요한은 유대적 개념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헬라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하게 전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주전 560년경에 헬라 철학자 헤라클리투스는 모든 것이 매일 매일 그리고 순간순간 변한다는 만물의 유전(流轉) 사상을 말했습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유전하는 상태의 만물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의해 질서가 잡혀있으며 통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물의 체제를 지배하는 것이 바로 '로고스'즉, '이성',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은 목적없이 움직이는 것이 없으며, 모든 생명과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도 목적과 계획, 방안과 설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 '지혜', '이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바라볼 때 그것을 올바르게 선택하고 그 진리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리고 사람에게 진리에 대한 이해력과 지식을 주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주는 것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이성'인 것입니다. 스토익(stoic)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이 별들의 궤도를 지키게 하는가? 무엇이 조수의 간만을 이루게 하는가? 무엇이 밤과 낮의 질서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가? 무엇이 철이 되어 네 계절을 돌아오게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만물은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이성'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로고스'는 이 세상에 의미를 넣어 주는 능력이요 세계를 혼돈 대신에 질서로 만드는 능력이며 세계를 완전한 질서 가운데에서 진행하게 하고 그 진행을 지속시키는 힘이다. '로고스'는 만물에 퍼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수 백년 동안 너희들은 세상을 만드신 능력이요, 세계의 질서를 보존하시는 능력이요, 사람들이 그것으로 생각하고 추리하고 인식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접촉하게 해주는 능력인 '로고스'에 대하여 생각해온 바요, 상상해 왔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이 땅에 내려오신 '로고스'이신 것이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성육신은 죄로 말미암아 혼돈하고 무질서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보좌에 계시면서 인간들에게 그 높은 곳으로 올라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높은 보좌를 내놓으시고 사랑으로 우리들에게 직접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에 간 어느 선교사가 그곳의 중과 함께 길을 가다가 실수로 개미의 집을 밟았습니다. 이것을 본 중은 많은 생명을 죽였다고 깜짝 놀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선교사는 대단히 민망하여 말하기를 "내가 밟고 싶어서 밟은 것이 아니라 발가락에 눈이 없어서 실수를 한 것이니 정말 미안하오. 어떻게 하면 개미에게 사과를 할 수 있겠소?"라고 물었더니, 윤회설을 믿고 있는 그이기에 다음과 같은 방법을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죽어서 개미가 되어야겠소." 윤회설을 믿는 우매한 입장에서는 맞는 얘기입니다. 죽어서 개미가 되어야 개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선교사는 중의 대답을 듣는 순간 정색을 하고 "그래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와 이야기할 때는 어린아이들의 언어를 써야 하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육신이 되어 인간을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내가 처한 형편, 이 현실 속에서 나를 만나 주시기 위해 나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사건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온갖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들 뉴스들 중에는 개인적 혹은 민족적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만한 초미의 관심사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시공간이 시작된 이래로 오늘 본문에서 제공되는 것처럼 엄청난 빅 뉴스는 없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지상에 오셨다는 소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 신문지상을 어지럽게 장식하고 있는 갖가지 인륜 파괴 행위들을 늘상 목격하노라면, 과연 사람이란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에 빠져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각별하신 계획과 사랑은 성육신을 통해 너무도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친히 찾아오신 사랑은 무조건이며 불변적인 은총을 확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요3:16).우리가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오히려 대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사랑의 주도권을 쥐고서 친히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인간적 한계를 그어 버린채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과 사랑을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인생을 변화시켜 영생을 가진 새로운 삶으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친히 낮고 천한 모습으로 임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하며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 깊이 영접하여 그리스도의 수준에까지 자라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빛과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육신은 또한 하나님의 겸손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의 고통스럽고 연약한 처지와 형편들을 친히 경험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동정하여 구제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렵고도 귀한 일은 고통받는 자의 처지에 직접 처해보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혹은 중병에 걸려 고통 중에 처해보지 않고 어찌 그런 아픔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죽음까지도 함께 나누시고자 종의 형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허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그리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가치를 높이며 영광과 축복의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과 생명, 그리고 사랑'이 충만하시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빛과 생명, 그리고 사랑'이 역사하는 창조적이고 능력있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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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예수는 누구인가?

"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요1: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요1: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요1: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요1: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요1: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1: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요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1:28)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예수는 누구입니까?

마리아 : "나는 그 분의 곁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눅10:39)

바리새인 : "그는 더러운 여자의 접근을 허락한 인간이오."(눅7:39)

바디매오 : "그 분은 나를 보게 했습니다. 새 날을 주셨습니다."(막10:51)

강도 : "그 분은 나의 최악의 순간에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눅23:43)

가야바 : "우리의 전통적인 종교를 파괴하는 자이다.(마26:65)

빌라도 : "정말 모를 사람이오. 난 개입하고 싶지 않소."(마27:24)

백부장 : "틀림없이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오."(마27:54)

거라사의 광인 : "그 분은 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막5:3)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 앞에 나온 나다나엘은 한 번도 자기를 본 적도 없는 예수께서 자신의 속 사람의 됨됨이를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가리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 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자기 민족의 훌륭한 영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정치적인 '메시야'(구세주)로 예수를 파악한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 산에서 한 어린아이의 점심 도시락 하나로 군중 5천명을 다 먹이고 남은 조각이 무려 열 두 바구니나 되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요6:1-15) 배고픈 유대인들은 경제적인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나라 안팎으로 경제가 어렵고 세계 정치가 혼란에 빠졌을 때 카리스마적인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19세기의 프랑스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던 '나폴레옹 전설'도 과거의 초상속에서 당대의 메시야를 찾으려했던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공화정의 비능률에 진절머리를 내며 나폴레옹 1세 시대를 그리워하던 프랑스 국민들은 마침내 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3세를 황제로 떠받들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재림'으로 기대했던 나폴레옹 3세의 등장은 프랑스의 영광을 되살리기는커녕 오히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 수도 파리가 함락되는 치욕을 안겨 주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에 지친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에게 대권을 안겨준 것 역시 시대 착오적인 '메시야 콤플렉스'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소위 '문민 시대'를 나라 안팎으로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정부보다는 국제 무대에서 당당히 '할 말을 하며' 그 위상을 높이고 있다고 합니다. 정권의 창출이 국민으로부터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민 시대의 문민 정부가 우리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가 될 수가 없으며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의 정부가 아니라면 그것은 영원할 수 없으며 당대 백성들의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의 어느 정부, 어느 나라이든 궁극적인 정부나 나라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이 세상)와 오는 시대(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메시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외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궁극적인 해결의 참된 "길과 진리"가 없습니다(요14:6). 예수는 참된 인간이시며, 동시에 참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1:1,14,). 또한 예수는 인류의 역사 이전에 이미 계신 분으로 인류 역사 시작(알파)과 마지막(오메가)을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유대인의 생각처럼 단순히 정치, 경제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그가 보여주신 여러 표적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전 인류에게 참된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주시는 메시야이십니다. 예수가 석가보다 나중에 태어나서 기독교가 불교보다 연륜이 짧은 종교가 아니라, 예수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써 창조 이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한복음1:1,3,8:58)

예수는 이같은 사실을 자신의 기도문에서도 밝혔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5)

사도 바울도 예수께서 창조주로서 역사 이전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로새서 1:15-17)

예수는 분명히 역사 이전에 계신 분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안으로 오신, 즉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 1:1의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는 곧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은 바로 예수가 참 하나님 됨,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만이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인성(참 사람되심)과 신성(참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것은 역사를 불행으로 이끄는 이단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예수의 참 인간 되심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죄 사함을 부정하는 것이 되며, 예수의 참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부활을 통한 영생의 축복을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사는 길, 역사의 키워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인가를 바로 인식하는 것이 역사를 바로 인식하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되며,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바로 깨닫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미 역사 이전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인간 되심'과 '참 하나님 되심'은 인류가 영원히 살기 위해 굳건히 지키고 간직해야 할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을 흔들어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상과 종교들이 바울 당시에 만연했었습니다. 예를 들어 헬라 철학, 헬라의 우상숭배 사상 등 각종 이단 사상, 동방의 신비주의, 금욕주의, 기타 미신적인 마술 복술 행위 등이 혼합되어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교회에 침투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음부의 권세도 교회를 이길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온 인류와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다른 허탄한 사상이나 종교 등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분명히 깨우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1:19,2:9)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안에 모든 인류와 인류 구원의 필요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배가 감추어져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참 하나님 되심과 참 인간 되심을 부정하여 교회를 붕괴시키려했던 가장 악한 사상 가운데 하나는 영지주의였습니다. 이 영지주의 사상은 인류가 사는데 예수 한 분만으로 불충분하고 좀 치밀하고 깊이가 있는 지식(gnosis)이 필요하다며 예수도 믿고 다른 종교나 사상도 받아들이라며 기독교를 다른 종교나 사상과 혼합시켜 교회를 붕괴시키려는 사상입니다. 더 나아가 이 사상은 이원론으로 교묘히 예수의 참 하나님 되심과 참 인간 되심을 부정하게 만들고자 했었습니다. 이원론이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선한 영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고 육은 악한 것이어서 어차피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육으로 아무리 악행을 해도 영이 구원받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사악한 이론입니다. 이러한 이단 사상으로 교회에 침투하여 예수 믿어 영이 구원받았으니 육체적으로 범죄해도 괜찮다며 결국 타락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교회를 파괴하고자 했던 것이 영지주의(gnosticism)였습니다. 이 영지주의 이단 사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의 참 하나님 되심과 참 인간 되심까지 부정하게 만듭니다. 이들의 이원론에 따라 육체는 더럽고 악한 것인데 예수가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오셨다면 예수는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론입니다.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더럽고 악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묘한 이론과 사상으로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부정함으로 교회를 붕괴시키고 인류 구원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원론을 가지고 예수에게서 인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예수를 인류의 구주로 하는 것을 전연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같은 이단 사상의 침투를 막기 위해 예수의 육과 혈을 가진 몸을 분명히 하며 예수가 자기 몸을 통하여 인류를 구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밝혔습니다.

(골1:20-23)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가장 이상적이며 완벽한 지도자는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뿐이십니다.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예수의 참 인간 되심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 의미를 바로 깨닫고,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아야할 것인가를 알아 삶의 가치를 창조하는 영광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참 하나님 되심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과 영원함, 그리고 역사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바로 인식하여 역사 속에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하나님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여러분에게는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예수가 여러분의 영육에 아울러 구세주(메시야)되심을 믿으시고,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영원한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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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하나님의 어린양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요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요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텍사스에 돈 많은 목장주가 세계 여행을 하며 영국의 버킹검 궁전 앞까지 왔습니다. 그는 문지기한테 1,000불짜리 지폐를 주면서 "이 정도면 들어가지?"하며 물었습니다. 문지기가 하는 말이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은 돈을 주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 초청을 받은 사람은 1불도 없어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의 초청에 응한 사람만, 즉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증거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공적이 없어도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드>라는 작품 속에 맥베드가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는데 아무리 손을 씻고 증거를 인멸해도 마음속의 살인죄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이 의사가 짐작을 하고 이 병은 자신이 고칠 병이 아니니 스스로 마음에서 고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오! 아라비아의 향수를 다 가지고도 이 손 하나 말끔히 할 수 없는가? 이것을 파내 버릴 망각제는 세상에 없는 것일까?' 하고 탄식을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맥베드의 입을 통해서 '죄를 씻을 것은 지구상에 없다. 자기 마음으로도 안 되고 무엇으로도 안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마음속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되시는 예수의 피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양심의 가책이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씻음을 받을 때 우리는 양심의 평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틴 루터가 체험한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한 때 악마가 나타나서 루터의 죄목을 썼습니다. 두루마리에 써 가지고 왔습니다. 그 때 예수의 피 묻은 손이 나타나서 그것을 지웠습니다. 루터는 잉크병을 던지면서 '예수의 피, 예수의 피'라고 외쳤습니다. 빛되신 예수 믿고 예수와 함께 하는 사람은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게 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 일서 1:7)

예수의 피만이 인간의 죄를 깨끗이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본문 29절)이라는 구절에서 '어린양'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에 사용되었던 '희생양'을 말합니다. 출애굽기 12:11 이하에 유월절에 대한 내용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요셉으로 시작된 애굽 이민은 불과 그의 가족 70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400년이 흐르는 동안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1:7)고 했습니다. 이에 애굽 왕은 두려워하여 무거운 짐을 지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해 갔습니다(출11-14). 날이 갈수록 심한 학대속에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출3:7-12)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모세를 애굽왕 바로에게 보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왕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1 이하)

그러나 강팎한 애굽의 바로왕이 그냥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줄리 없었습니다(출7:1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의 모든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 개구리가 온 지경에 가득한 재앙, 애굽에 속한 모든 생축 몰살의 재앙, 독종의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의 재앙 등등 여러 가지 재앙들을 내렸습니다. 그래도 애굽 왕 '바로'는 더욱 완악하고 강팎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최후의 재앙을 선포했습니다. 즉 장자 죽음의 재앙이었습니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출11:5-6)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재앙이 시작되는 달을 일년 중 첫 달로 삼고, 이 달 열흘에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로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서 그 재앙을 면하라고 말씀하시며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라고 하셨습니다(출12:1-11).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출12:13-14)

이 재앙은 이스라엘 사람이든 애굽 사람이든, 짐승이든 사람이든 무론하고 애굽 전역에 내리는 것으로서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없으면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애굽 사람들 중에서도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서 하나님을 섬기기 않으면서도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무사히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재앙에 견디지 못하고 그 완악하고 강팍한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신 그 과정에서 "어린양의 피"는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 것은 상징적으로 죄의 종노릇한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재앙에서 면제받을 수 있게 한 "어린 양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의 피"를 보시고 죽음의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1-14)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가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5:7에서 예수를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표현하며, 베드로 전서 1:19에서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시대에 온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아침 저녁으로 태어난지 1년되는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단에 어린양의 피가 계속해서 불타야만 그들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죄 없는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때문에 "어린양의 피"가 있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이 우리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사함을 받고자 희생시킨 "어린 양"은 "점도 없고 흠 없는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점도 없고 흠 없는" 그야말로 '죄 없는 양'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점도 흠도 없는", 죄가 하나도 없는 아주 의로운 "어린 양"이십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희생당하심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가 흘리신 "어린양의 피"가 능히 주홍 빛 같은 죄일지라도 양털같이, 흰 눈 같이 깨끗하게 씻어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모세를 향해 원망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려 수 천명씩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지도자로서 하나님께 나아가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끝에 매달고 이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대에 높이 매달린 구리뱀을 그저 단순히 쳐다보기만 하면 과거야 어떻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도 그 말을 믿지 못하고, 그냥 쳐다 보기만 하면 될 것을 순종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장대에 높이 매달린 구리뱀은 상징적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다시말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보기만 하면 산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길은 오직 예수 믿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이 구원받는 방법은 오직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밖에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이 가득한 곳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사망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5:4-8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고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만이 세상 모든 것을 이기는 권세과 권능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세상 세력들을 상징하는 여러 동물들, 즉 사자, 표범, 용, 뱀, 곰, 등 짐승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짐승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밖에는 없음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계13:1-14:5).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는 어린양의 권세에 대한 찬양의 노래들이 여러 번 나오고 있습니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요한 계시록5:12-13)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던 나라들은 애굽을 비롯하여 블레셋, 아말렉, 모압,아람, 에돔, 미디안 그리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와 바벨론 등이 그 대표적인 나라들입니다. 특히 이들 중에 이스라엘에 큰 해를 끼친 나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 그 나라들 중에 오늘날 두각을 나타낼 만한 정치, 경제적 능력을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나라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의 결과가 어떠함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계17:3,4에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이 등장하는데 이는 모든 세대에 일어날 수 있는 반기독교적인 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린양을 대적하는 반기독교적인 세력(Anti-Christ)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특히 "일곱 머리"의 일곱이란 수와 "열 뿔"의 열이란 숫자는 완전수로서 그들의 능력과 권세가 매우 강함을 암시합니다(계13:1-3). 이 대적들이 성도들에게 큰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계17:13을 보면 반기독교적 세력들이 자신들의 악한 의도를 짐승에게 부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즉 궁극적으로 악한 일을 행하는 주체가 짐승, 곧 사탄의 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그 짐승을 통해서 반기독교적 활동을 하게 될 것이며 그들은 그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대적할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다른 일에는 한 뜻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일에 있어서는 함께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원수 사이였던 빌라도와 헤롯이, 그리고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예수를 죽이는 일에 하나가 되었던 사실은 반기독교적 세력이 그들의 이해 관계를 떠나서 악한 일에 한 뜻이 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악한 권세는 일시적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지만 결국은 어린양이 이기실 것이며, 따라서 그와 함께 있던 자들,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그 이마에 씌어져 있는 자들(계14:1)",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 즉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들"(계14:4-5) 이 마침내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아갈 때 오직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이름만을 가지고 나가 승리했던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만을 가지고 나아가야만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물밀듯 밀려오는 세상 죄를 이기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되시는 예수의 피 권세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보혈이 흐르는 곳에 항상 승리가 있습니다. 죄의 권세는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를 진실로 믿으시고 그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우신 피(寶血)가 여러분의 심령에, 가정에, 그리고 이 나라에 차고 넘치게 흘러 성결의 능력과 더불어 승리의 권세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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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성령의 강림

"(요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요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에게 성령이 머무는 것을 보고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께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불"은 성령의 불, 성령의 세례를 말합니다. 곧 성령의 불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시겠다는 예수의 소원을 말합니다. 이를 요한 웨슬레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받았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 성령이 부어져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관계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세 가지 형상 즉, 하나님의 불멸성, 지력, 자유의지, 기타 여러가지 정서를 포함하는 자연적 형상과 인간외에 다른 생물을 주관하는 정치적 형상, 하나님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순결성, 진실성 등이 인각되어 있는 도덕적 형상 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나 범죄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한 인간의 죄를 십자가로 해결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 성령이 인간의 영에 거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잃어버렸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 이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밝히며 의지와 감정을 바로 잡으며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영과 육을 아울러 정결케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희열을 맛보게 하며 우리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연합을 실현시켜주며 우리로 하여금 양자로서의 확신을 가지게 하며 창조주의 모습을 본받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간성 회복은 성령이 몸과 혼, 그리고 영을 온전히 지배할 때 이루어집니다. 누가복음 12:49의 "불"은 성령의 불로서 복음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소멸시켜 정결케하는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는 곳마다 불같은 성령이 역사하여 죄가 소멸되고 거룩케 되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되기를 기원합니다. 요한 복음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이 말씀은 '성령은 곧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그의 작용에 있어서 말씀(성경)보다 휠씬 더 넓은 영역을 가집니다. 성령의 경험들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 이상의 다양한 감각적 체험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계신 성령의 내주하심은 우리 안에 있는 의식의 계층보다 더 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모든 감각들을 깨우고, 무의식적인 것과 육체 속에 꿰뚫고 들어가 심령을 변화시키며 육체를 생동케 합니다. 삶을 위한 새 에너지(energy)가 성령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현대적 병을 앓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참된 성령의 체험은 <삶에의 사랑의 회복, 생동력의 회복>을 가져다줍니다. '삶에 대한 단호한 긍정'과 '살아 있는 것에 대한 단호한 사랑'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첫 경험들인 것입니다. 성령의 경험을 통한 <삶에의 사랑>은 삶의 병들과 장애들과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며 사랑하며, 죽음에 대항하여 마침내는 죽음을 극복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성령은 예수를 슈퍼맨(Superman)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는 그의 인간적 고난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그 인간적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역동적인 사랑(요3:16)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십자가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역동적인 사랑의 삶을 살게 하는 원천이 됩니다. 유명한 현대 신학자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활동들의 리듬과, 눈들의 광채와, 포옹들과, 느낌들과, 냄새들과, 형형색색의 이 창조의 소리들을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을 내가 사랑할 때, 나는 모든 것을 껴안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피조물 속에서 나는 나의 모든 감각들을 가지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내가 만나는 모든 것 안에서 나를 기다립니다. 오랫동안 나는 당신을 내 안에서 찾았고, 내 영혼의 달팽이 집 속으로 기어 들어 갔으며, 접근할 수 없는 장갑차를 가지고 나를 방어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바깥에 계셨으며, 내 마음의 좁은 데로부터 나를 삶에 대한 사랑의 넓은 영역 속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내 밖으로 나왔으며, 나의 영혼을 나의 감각들 속에서 발견하였고, 내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찾았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삶의 경험들을 더 깊게 하였고 그것을 위축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나는 더욱 더 여기에 있고 싶습니다. 내가 보다 더 직접적이며 전체적으로 여기에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더욱 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삶의 무한한 원천을, 삶의 영원을 느낍니다." 인간의 삶에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은 곧 사랑이 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과 지혜가, 그리고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성령은 이와같이 역사하십니다.

미가서 3: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성령)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스겔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또 내 신(성령)을 네 속에 두어..."

위의 말씀들을 보면 성령은 무엇보다도 선지자들을 이끌어주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때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일을 행하십니다. 첫째로, 성령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진리를 가져다주십니다. 둘째로, 성령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보게 되었을 때 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셋째로, 성령은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주십니다. 이와같은 성령의 경험들은 대개 잠시 머물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신, 예수께서 경험한 성령은 순간적인 영감이 아니라 내주(內住)하십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임하신 방법과는 아주 다른 독특한 방법으로, 그리고 독자적으로 영구히 정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를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본문33절). <세례(baptism)>라는 말은 '물에 담그다', 혹은 '물에 잠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가 성령에 깊이 잠겨 삶이 거기에 스며들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몰입되고 우리의 마음과, 생활과, 존재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충만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들에게 가져다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사람들에게 묻어 있는 불결한 것들을 씻어서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옛 사람은 물 속에 장사지내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종전과 다른 새로운 삶으로 나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례는 성령의 세례입니다. 우리가 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첫째, 우리의 인생이 계발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신의 의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빛의 일부가 우리에게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삶이 강하게 됩니다. 능력없는 지식은 마음만 괴롭히고 좌절 의식만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들에게 올바른 것을 아는 지식만 줄 뿐 아니라 올바른 것을 행할 힘과 능력까지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인생에 대처하여 이기고 나갈 수 있는 적응력을 주십니다. 셋째로, 우리의 삶이 정화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베푸는 세례는 불 세례입니다(마3:11,눅3:16). 여러 가지 악한 쓰레기나 저급한 혼합물이 정결하게 되고 불태워 없애 버린 후에야 비로소 인간은 정결하고 순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삶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과 자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삶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삶의 기쁨만 아니라 삶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예수 믿는다는 것을 매일 세례받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삶을 향한 사랑의 역동성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세례가 여러분에게 항상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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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참 기독교인

"(요1: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요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요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요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요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요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요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요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요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요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빌립은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와 보라"(Come and See!,본문46절)라는 말로 간단히 말했습니다. 이는 자신감 넘치는 전도 자세입니다. 요한 복음 4:29에서도 예수를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아를 만난 기쁨을 못이겨 동네에 들어가서 "와 보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를 알고자 하면,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인간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여러 말 할 것 없이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는 것 이상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길게 설명할 것이 없이 와서 보면 내가 알았듯이 너도 진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말은 설명이 필요없지만 거짓말일수록 설명이 화려하고 길게 늘어지게 마련입니다. 본문의 "와 보라"는 말은 예수께로 가자는 뜻입니다. 교회에 가 보자, 가보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오는 것이 신앙이고 열심히 교회에 나오다 보면 말씀을 깨닫고 삶의 지혜와 능력과 권능,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예수를 먼저 알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먼저 나오고 보면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것이 병을 고치는 길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것이 축복받는 길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예수를 만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만이 인간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를 만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를 많이 만날수록 신령해집니다. 예수를 많이 만날수록 능력이 생깁니다. 예수를 많이 만날수록 지혜가 충만해집니다. 예수를 많이 만날수록 권능이 생깁니다. 예수를 많이 만날수록 삶의 승리 비결을 알게 됩니다. 예수를 많이 만날수록 감사와 기쁨, 희락과 행복이 넘치게 됩니다. "와 보라"는 말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날 수 있겠느냐?"면서 일단 의심하고 거절하였지만 결국 행동으로 옮겨 예수께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참 이스라엘이라는 칭찬과 인정, 그리고 참 예수의 제자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에게로 나오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언약)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성취를 소망하는 사람으로서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 마음을 의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마음이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마5:8). 바로 마음이 진실한, 청결한 나다나엘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보게 된 것입니다.

시편32: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모두 아십니다. 나다나엘이 예수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그가 무화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유대 사고 방식에 있어서 무화과 나무와 포도 나무는 언제나 평화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왕상4:25,미4:4). 무화과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 그 무성한 가지 아래 앉아 명상(기도)하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바로 의심할 바 없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자, 메시아를 고대하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예수가 자기 심중의 깊은 곳을 통찰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스스로 말했습니다."나의 꿈을 이해하는 분이 여기 있구나! 나의 기도를 아시는 분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나의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갈망 즉, 내가 결코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던 갈망을 통찰하고 계시는 분이 여기 있구나! 말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의 탄식을 풀어줄 수 있는 분이 여기 있구나! 이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 분임이 틀림없다." 나다나엘은 자기의 심중을 통찰하시고 이해하시고 만족시켜 주시는 분에게 영원히 사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인간의 마음 뿐만 아니라 육신의 생활까지도 꿰뚫는 통찰력 즉,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한 가지 놓쳐서는 않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다나엘이 말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나겠느냐?"는 것입니다. '나사렛'이란 명칭은 '거룩'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미는 아이러니칼하게도 그곳 주민들의 생활 수준과 그곳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나사렛은 자연환경에서 볼 때, 지리적으로 갈릴리 지역으로 예루살렘 북쪽91km, 갈릴리 호수 남쪽 24km, 해발 433m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마을은 예수 당시 작고 보잘 것 없는 고립된 마을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무식하고 성질이 괴팍하며 다른 도시의 문화적인 주민들과는 비교가 안 되었기 때문에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풍속도 추잡하고 저속한 것들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나사렛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는 이곳에서 생활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공생애 기간에 이곳에서 이적을 행하셨고, 천국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마13:54). 그렇지만 예수는 나사렛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습니다(마13:55-56). 그래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마13:57)....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그러면 나사렛 마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한 마디로 그 교훈은 외형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너희가 만일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13).

오늘날 우리에게도 소위 달동네가 있는데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수준과 인격이 낮다하여 그들을 무시하는 실수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도 하나님의 경건한 자들이 성장하고 있으며, 그곳은 곧 하나님이 도움이 필요한 곳이며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참 기독교인은 무엇보다 진실한 사람입니다. 진실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예수를 만나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어 인간의 진실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진실한 삶으로 세상을 이기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 기독교인은 열심있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교회에 열심히 다녀 보십시오, 그리하면 인간과 세상의 구세주, 메시아를 만나게 됩니다. 참 기독교인은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마음이 깨끗해지는 거룩한 역사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참 기독교인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때 누구든지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대합니다. 예수를 만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 기독교인이 되어 축복과 영광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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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기쁜 삶으로의 변화

"(요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요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요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2: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요2: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요2: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요2: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요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요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요2: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기쁨이야말로 종교생활의 핵심이요 신앙의 본질이며 다른 모든 종교적인 덕목보다 위대한 것이다."(A.J.헤셀). 기쁨이 없는 인생은 기름이 없는 램프와 같습니다. <막스 러너>라고 하는 사람은 한번은 텔레비젼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행동의 제재를 받지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충격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는 사실이다."이 말의 뜻은 우리가 자유를 보장받을 때 과연 기쁨도 함께 보장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한마디로 표현해서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진실한 기쁨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 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 복음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이러한 말씀들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인생의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표적(2:1-11) 기사입니다. 이는 예수의 첫번째 표적으로, 물이 즉각적으로 기쁨의 상징인 포도주로 변화된 질의 변화이며, 예수께서 "질의 주"(the master of quality)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는 무맛의 물같은 인생을 포도주 맛 같은 '기쁨'의 삶으로 변화시키는 권능,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오실 때는 언제든지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과 같은 새로운 질적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예수없는 인생은 무미건조하고 진부하며, 그가 무엇을 가졌든, 어느 위치에 있든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여러분의 삶이 참된 기쁨의 삶으로 변화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기까지는 믿음과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너무나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시중드는 사람들에게로 가서 예수께서 시키는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가 무엇인가 옳게 일을 처리하시리라는 것을 아주 확신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가 가는 길을 알지 못하는 암담한 시간도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부닥쳐오는 사건들의 이유와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와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서도 신뢰하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 가운데 온전한 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부자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는 하인들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몹시 부리는 구두쇠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하인들은 늘 불평하며 지내는데, 드디어 할아버지의 회갑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만은 좀 편히 쉬면서 잘 먹을 수 있겠구나 하고 하인들은 좋아하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집안에 있는 모든 하인들을 불러 놓고 볏단을 주면서 새끼줄을 꼬라고 명령했습니다. 새끼줄을 꼬되 가능하면 가늘고도 길게, 그리고 단단하게 꼬라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인들은 즐거운 잔치날까지 귀찮은 일을 시키는 주인을 원망하며 거저 되는 대로 굵게 성의 없이 꼬았습니다. 전혀 꼬지 않은 사람도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만은 시키는대로 순종해서 가늘고도 단단하게 길게 꼬았습니다. 저녁에 구두쇠 주인이 나타나더니 난데없이 엽전이 가득 쌓인 광문을 활짝 열고서는 "그 동안 나를 위해서 너희들 수고 많이 했다. 자기들이 꼬은 새끼줄에 엽전을 가능한 만큼 많이 끼워서 각자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라."고 깜짝 놀랄 말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자, 어찌 되었겠습니까? 전혀 꼬지 않은 사람은 물론, 굵게 적당히 새끼줄을 꼬은 사람들은 기가 막혔지만, 주인의 말에 순종하여 가늘고 길게 꼬은 사람은 엽전을 한 다발 끼워서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순종하고 나면 나중에 그 뜻을 알게 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닥치는 어떤 사건이나 시련에 대해서 미리 알려고 조급해 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므로 믿고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마리아는 예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하인들에게 말하기를,"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일단 순종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먼저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데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표적(Sign)이나 기적은 이처럼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직접 하늘을 여시고 오천 명을 먹이실 떡이나 만나를 내리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을 통하여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요구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예수께 바쳐질 때, 이것을 통하여 축사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앉아서 공짜로 기적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누구의 희생을 통해서, 때로는 누군가의 귀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물고기와 보리떡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물론 그것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기적을 행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실 때,"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호령하시자마자 즉시 지진이 일어나며, 나사로가 무덤 앞에 막힌 큰돌을 박차고 나왔으면 더 멋있고 놀라운 이적으로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기는 일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돌을 옮기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시체가 사흘이나 지났으므로 사람들은 의심도 가졌었고 또한 좀더 빨리 주님이 오시지 않았음에 대해 불평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단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돌이 옮겨져야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기적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도 전에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대로 순종하라는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는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의미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삶의 신성한 축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인생의 모든 기쁨을 신성하게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그의 방법대로 추구하지 않으면 인생의 즐거움이란 결코 현실적이거나 지속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이 결코 베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 풍성하게 예비하신 것을 누리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바로 죄의 존재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은 오직 의로우신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신성한 인간의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예수를 여러분의 삶의 주빈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질적인 변화, 풍성한 삶의 거룩하고 영원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시고 그 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날마다 표적(Sign)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할 인간이 그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기쁨을 상실하였다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참 기쁨의 자리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참 기쁨을 누리시기를 원하십니까? 혹 참 기쁨을 찾기 위하여 이 세상의 것에 연연해 하며 동분서주하지는 않습니까? 진정으로 참 기쁨을 누리기 원하신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참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께서 당신의 삶 속에 항상 기쁨이 넘치게 하시며 아울러 이 세상 마지막 날 당신을 어여쁜 신부로 맞이하여 완전한 기쁨이 넘치는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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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음의 성전을 거룩케 하라

"(요2: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요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2: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2: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요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2: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성전은 거룩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니 그 곳에서는 장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지 어떤 이유로서도 장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성전은 크게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지성소, 성소, 그리고 성전 뜰입니다. 성전 뜰은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그리고 이스라엘인의 뜰로 구분됩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장사하는 모습은 이방인의 뜰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은 어느 곳이나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했으나 성전 당국자들과 유대 상인들이 이방인의 뜰을 어느 누구도 기도할 수 없는 소란하고 뒤죽박죽이 된 곳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소들의 울음소리, 양들의 울음소리, 비둘기가 구구거리는 소리, 행상인들이 물건 사라고 외치는 소리, 동전 바꾸는 쩔거덩거리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등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서 이방인 뜰을 아무도 예배 드릴 수 없는 장소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고 예배드려야 할 곳을 도저히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없는 곳으로 만든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교회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이웃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 즉, 속물 근성, 배타성, 냉담, 불친절과 닫힌 마음, 오만하고 까다로운 단체로 만드는 태도 등은 없습니까?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이웃들이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어렵게 하거나 할 수 없게 하는 자들을 향하여 진노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돈은 로마의 화폐인 '달란트'였습니다. 그런데 예배드릴 때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세겔'로 바꾸어서 헌금해야만 했습니다. 환전은 본래 시장에서 이루어졌으나 성도들의 편리를 도모하다보니 성전 뜰에까지 돈장사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인 소나 양, 비둘기 등도 각 가정에서 가장 좋고 흠이 없는 것으로 정하게 잡아 바쳐야 했으나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하다가 보니 마침내 성전 뜰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다시말해 장사의 시작은 예배를 돕자는 뜻에서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아무 생각없이 무비판적으로 성행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예배 의식을 통해 회개하고 새로워지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보다는 오히려 의식자체에 빠져 결국 형식과 의식에 치우친 신앙의 껍데기만 남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이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는 제사장들의 행태가 큰 문제였습니다. 제사장은 성도들이 가져오는 제물들을 검사하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아무리 깨끗한 제물일지라도 제사장이 불합격 판정을 내리면 몇 번이라도 다시 바꾸어서 가져와야만 했습니다. 돈을 벌기위해서는 얼마든지 흠을 잡아서 불합격 판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장사꾼들이 성전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서도 제사장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제사장의 권력은 더욱 커져만 갔던 것입니다. 성전 마당에서 구입한 제물이 아니면 모두 불합격으로 판정하여서 장사꾼들과 서로 이득을 탐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정경유착의 부조리가 판을 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채찍을 들어 장사판을 둘러엎고 장사치들을 몰아 내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타락한 그들일지라도 일말의 양심은 살아 있어서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진노하시는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궁여지책으로 한 말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2:18)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당신은 그 행동으로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주장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의 주장을 증명해 줄 어떤 이적을 우리들에게 보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은 헤롯 성전으로서 무려 46년 동안 걸려서 지은 건물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는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의 뜻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되 그리심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니며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요4:21-23).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자기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입니다.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므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 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마가복음14:58)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 이전의 모든 성전 의식은 완전히 폐하여지고 예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제도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전 구약시대의 모든 동물 희생의 제사와 번잡한 의식을 없애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즉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예수의 말씀은 성전 제사 제도를 이용해서 돈벌이에 혈안이 되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성전 제사 제도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제물이나 눈에 보이는 성전이나 그 어떤 제사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사함을 이룩하신 예수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없다면 성전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으시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과 인격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의식에 우친 성전과 장사하는 성전, 형식적이고 외식적이고 교만하며 탐욕하는 마음의 성전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남김없이 헐어버려야만 합니다. 헐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헐어버리고 맙니다. 당시 헤롯 성전에 대한 책망을 듣고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후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깨끗이 헐어버렸습니다. 나의 인격과 마음의 죄악들을 헐어내야만 합니다.

알퐁스 도데의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라는 단편 소설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가난을 미덕으로 삼았던 수도원으로 심지어 종을 살 돈이 없어 기도 시간을 알리는데 나무로 된 딱다기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 수도원이 떼돈을 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불로장생주'라는 술 덕분이었습니다. 불로장생주는 고셰라는 수도사가 여러가지 약초를 제조해서 만든 훌륭한 약주였습니다. 그 술이 날개 돋친 듯 팔리게 되자 수도원은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모든 건물이 깨끗이 단장되고 신부들도 비싼 옷으로 바꾸어 입었습니다. 고셰는 그 공적으로 인해 어느덧 신부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사가 진행될 때 술에 만취된 고셰가 성당에 뛰어들어 괴상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는 손수 만든 술을 시음하다가 술 중독자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후부터 고셰는 성당에 나오지 못하고 주조장 안에서 혼자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고셰는 자신의 영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장을 찾아가 술 제조를 그만두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장을 비롯한 신부들은 이건 바로 하나님을 위한 선한 사업이므로 이를 그만둔다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고셰를 윽박질렀습니다. 따라서 순진한 고셰는 할 수 없이 계속 술을 만들었습니다. 그 수도원은 술로 인해 매우 바빠졌습니다. 심지어는 신부나 수도사 전체가 술병을 포장하고 상표를 붙이고 또한 그것을 운반하느라고 미사를 거를 때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안에는 아주 작은 소리지만 고셰 신부의 술주정하는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점차로 더욱 자주 들려 왔습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돈에 구애받지않는 생활을 하고자 열심히 돈을 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십니까? 돈을 벌수록 돈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고셰신부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처음에는 가장 순수한 동기에서 술을 제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의 맛을 안 다음부터는 가난했던 시절 순수했던 기도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배 등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오로지 술을 팔아 돈을 벌기에만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즉 수도원이 본래의 의도와 목적을 벗어나서 부의 축적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보여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이 장사의 소굴로 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본래 목적대로 거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혹시 교회 자체의 부에 혈안이 되어 장사의 소굴로 변해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교회를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친히 채찍을 들어 장사꾼들을 추방하고 만민이 기도하는 거룩한 성전으로 정화시키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입니다(고후6:16). 여러분은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거하실 그 성전을 알콜로 찌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사리 사욕에 얽매여 신앙과 사랑과 도덕성을 져버린 채 장사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히브리서12:14에서,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성전을 거룩케 하시는 예수 십자가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며 경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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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거듭나야만 한다


 
"(요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요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요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3: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수 있나이까 (요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요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요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국의 초대 교회 시절에 많은 역할을 담당했던 유명한 김익두 목사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 김익두는 장안에 난폭하기로 소문난 깡패였습니다. 그가 나타나는 곳에는 늘 시비와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를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뱀을 피하듯 슬슬 피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김익두에게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완악했던 사울이 하루 아침에 주님의 은혜로 사도 바울로 변모한 것과 같이 어느 날 우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접한 후 김익두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를 눈물로써 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김익두의 이러한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김익두만 나타나면 모두 피해버렸습니다. 김익두는 자신의 변화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과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간구하던 중 마을에 부고장을 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그 흉악한 김익두가 죽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쫙 퍼졌고 사람들은 이를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김익두가 나타났습니다. 표지가 까만 책 하나를 들고서...., 그 때서야 사람들은 김익두가 변화된 것을 알아챘습니다. 늘 찡그리고 다녔던 그의 표정은 온화한 미소를 띤 모습으로 바뀌었으며, 입만 열면 튀어 나왔던 욕설은 다정다감한 음성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런 모습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한 사람이 김익두를 시험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김익두가 잘 다니는 골목에 몰래 숨어서 김익두가 지나가길 기다렸습니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익두가 나타나자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구정물통을 그에게 뒤집어 씌었습니다. 김익두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피고 있던 그에게 물을 털면서 김익두는 말했습니다. "옛날의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오. 만일 그가 살았다면 당신은 성하지 못했을 것이요. 하지만 지금의 김익두는 옛날과는 다른 새로 태어난 사람이라오." 지금 우리 사회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요청되고 있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소위 "국제화(Glovalization)"로 변화되지 않으면 국제 경쟁력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도 변화되고 사회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만이 발전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변화를 무서워하거나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이웃과 사회에 공헌을 할 수도 없습니다. 가치와 의미있는 인생은 반드시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성경에, "보라 옛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등 수 많은 곳에서 새로워져야 하며, 새로 낳아야 하며, 새로운 인간성을 입어야 한다는 "변화"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듭나야만 한다."는 말은 변화의 본질을 나타내주는 것으로서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본문5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한 마디로 무가치한 인생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영생','구원' 등은 다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곧 영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말의 원어, "겐네데 아노덴(gennethe anothen)"은 "위로부터 출생한다(born from above)."는 뜻입니다. 즉 생명의 근원은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으나 '생명의 영'이 불어 넣어짐으로(창2:7)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영" 즉 성령을 받아야 생명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며 생명이신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 예수의 삶을 사는 참 믿음의 소유자가 진정한 의미의 위로부터 나온 생명, 영생을 '지금 여기서'누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 생명을 소유하게 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타락하여 생명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거듭나는 방법'을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본문5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은 일반적으로 '세례'를 말합니다. 이 물에 의한 출생은 단순한 자연적 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깨끗하고 순결케 하는 말씀으로 말미암은 출생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이 문제를 두고 "너희가 거듭난 것이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은 말씀으로 된 것."(벧전1:23) 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엡5:26,약1:18). 또한 이렇게 말씀으로 거듭나게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흑암과 혼돈 가운데 빛을 창조하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과 성령은 지금도 죄와 죽음의 흑암가운데 혼돈된 삶을 사는 인생들을 재창조하고 생명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나라와 민족의 생명은 경제나 정치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사상과 제도를 가지고 부강한 나라일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나라는 영적 생명이 없는 죄인들의 나라일 뿐입니다. 예수없는 나라 민족은 죽은 민족이요 죽은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부요하지않은 경제는 아무리 많아도 가난한 경제일 뿐입니다. 예수 진리가 없는 정치, 제도는 아무리 개선해볼지라도 변화의 생명력이 없습니다. 예수 진리가 없는 사랑은 거짓에 불과한 것이어서 변화의 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생명력있는 변화를 원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성령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이 나라와 민족의 진정한 변화, 생명력있는 변화는 어떤 정권이나, 제도 개혁이나, 국제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지닌 "성도", 예수믿는 성도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나라의 생명인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한 사람의 의인, 곧 한 사람의 성도가 없어서 멸망당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대학 교수였으며 전도 여행까지한 쟁쟁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도 없고 확신도 없는 미지근한 신앙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런던의 올더스 게이트(Aldersgate) 거리에 있는 한 교회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마침 그 교회 지도자는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서문에는 로마서의 중심 사상인 인간은 자기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서 새 사람이 될 수 있고 구원함에 이를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였으나 피부로 느껴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 날 그 작은 집회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껴 감동이 되고 가슴이 뜨거워 오는 성령의 경험을 한 것입니다. 웨슬레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활기가 붙고 용기가 나고 확신이 생겨 부패한 영국과 유럽 사회의 변혁에 나섰던 것이며 신앙운동으로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와 성공을 보여준 첫 인물이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나라, 민족의 진정한 변화의 역사는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의 거듭나는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존 뉴톤(John Newton)은 깡패대장으로 200명 정도의 부하까지 거느리고 있었으며 동시에 알콜 중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노예 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한번은 런던에 정박 중 시내 한 작은 감리교회에서 경영하는 전도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본다는 것보다는 한참 취한 김에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장난삼아 들어가 본 것이었습니다. 한 구석에 앉아 있는 뉴톤은 예배가 진행되는 중 특히 어느 젊은 설교자가 열심히 설교하는 것을 들으며 차차 그 얼굴은 변하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도도하던 그의 고개는 깊숙히 숙여지고 드디어는 그토록 억세고 돈으로 세상을 살듯이 고개가 높던 뉴톤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날 그가 들은 설교는 단순히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탕자의 이야기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깨닫고 자기의 과거를 철저히 회개하며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기를 결심하는 중생,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 날의 체험을 기억하여 후에 그는 유명한 찬송가 작가가 되어 많은 찬송을 작사하는 중 우리가 가진 찬송가 405장도 짓게 되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예수를 진실로 자신의 삶 속에 믿으시고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는 생활을 통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 가운데 참된 생명과 광명의 생명력있는 변화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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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사랑과 심판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요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3: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본 성구는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웁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요절로서 복음의 진수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 성구는 또한 하나님은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참조 : 본문의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kosmos>'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성구는 "모든 사람의 성구"라고 불리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은 "세상"입니다. 그것은 단지 한 민족,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스럽거나 그렇지 않거나, 자기밖에 사랑을 모르는 자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자나, 아예 사랑을 도외시하는 자나 하나님은 그 누구도 가리지 아니하시고 사랑의 뜨거운 가슴으로 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마치 사랑할 사람이라고는 단지 한 사람뿐인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종교 정치의 지도자들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삼엄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따졌습니다. "네가 누구냐? 도대체 누가 너에게 권위를 주어 이런 일들을 하느냐?"(마태 복음21:23) 예수는 비유 하나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농사에 필요한 모든 시설과 준비를 다 갖추어놓고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고 멀리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추수 때가 되어 주인은 소작을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소작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심하게 때리고 돌로 치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주인은 참고 더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변함없이 주인이 보낸 그 많은 종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또 참았습니다. 주인이 힘이 없거나 법적 근거가 없어서 참은 것은 아닙니다. 농부들의 회개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최후의 방법으로 외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악한 소작 농부들은 "후계자를 없애면 완전히 농장을 삼킬 수 있다."는 엉뚱한 계산으로 그의 외아들도 살해해 버리고 맙니다. 결국 주인은 자신의 뜻을 저버리고 주인의 외아들까지 죽여버린 소작 농부들을 모두 다 진멸하고 다른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어 버립니다(마21:33-41). 이 비유는 한 마디로 외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면서 보여준 하나님의 인내의 사랑과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거절한 농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첫번째 문제는 인간의 완고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의 고집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 비유 끝에 제사장 등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리라."고 선언(마21:43)했고 "세리와 창녀들은 너희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다."라는 충격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잘 알고 사랑한다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를 거절했고 세리와 창녀들은 그 예수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마21:31-3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항과 도전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는 <왕자의 혼인잔치>비유(마22:1-14)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떤 임금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초청받았던 사람들은 임금의 초청을 우습게 여기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외면해버리거나 심지어는 임금이 보낸 종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임금의 초대를 대수롭지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들은 장사하러가고 어떤 사람들은 임금의 종을 붙잡아 때려 주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마태 복음22:5)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아픔인 것입니다. 어느 미술 전람회에 구경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전람실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귀중한 걸작품들, 흠잡을 데가 전혀 없는 천재성이 발휘된 작품들, 가히 영원한 미를 간직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최고의 명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작품들을 돌아본 그 관객이 수행했던 작가에게 "참 좋습니다만 당신의 이 낡은 그림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는 것 같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수행했던 작가는 조용히 "선생님, 이 그림들은 이미 심판할 필요가 없으며 심판받는 것은 오히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인 것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걸작품들을 구경했던 관객의 형편없는 무식함만 드러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완벽에 가까운 최고의 걸작품을 감상하고 감탄과 경의를 금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좁은 식견으로 걸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에게도 매한가지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인류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며 가장 완전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같은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의 영혼이 놀라움과 십자가 사랑의 아름다움에 감동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의 도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십자가를 보고도 전혀 그 아름다운 사랑에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사랑에 감동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이, 그 십자가 사랑에 무관심하거나 거절하는 자에게는 죄가 그냥 머물러 있어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 사랑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되므로 그에게 바로 정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사랑을 거절하므로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을 사랑하실 뿐입니다. 사람 자신이 스스로 정죄한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사랑에 대한 인간의 수용 여부에 따라 구원과 심판이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예수는 구세주이며, 그 사랑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심판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 사건을 자신에 대한 놀랍고 아름다운 하나님 사랑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을 때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21:4-9의 말씀이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민21:4)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민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민21: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민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민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우리는 여기에 나타난 사건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여러 해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고생을 했습니다. 그들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는 길이면 만사형통할 것인데, 왜 이토록 힘들고 어려운가 하면서 여러 가지로 불평했습니다. 첫째는 길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약속의 가나안 땅에 바로 질러갈 수 있는 길을 두고 돌고 돌아서 40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먹는 것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건만, 왜 이것만 먹어야 하느냐고 먹을 것이 신통치 않음을 불평했습니다. 셋째는 시간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긴 세월을 방황하게 되니 초조하고 원망스러워 왜 이렇게도 오랫동안 고생하게 만드시는가 하고 불평했습니다. 이 불평들이 쌓고 쌓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마침내 모세를 죽이겠다고 야단할 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불평하는 자들마다 물어 죽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은 이러한 불행한 사건의 원인이 바로 자신의 원망과 불평에 있음을 깨닫고 모세를 찾아와서 잘못되었으니 하나님께 기도해서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온유한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살 수 있는 방법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끝에 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뱀을 쳐다보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냥 용서하시고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쳐다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쳐다보는 자는 살 것이라"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쳐다본 사람은 살아났고 그 말씀을 믿지 못하여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그대로 죽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한 번 쳐다보기라도 했으면 살 수 있는 일을 고집스럽게도 쳐다보지 않고 죽어간 미련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이 곧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요한 복음 3:14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지금 나의 죄 때문이라고 믿고 십자가를 쳐다보면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리뱀을 쳐다보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건을 자신과 직접 관련된 사건으로 받아들여 십자가를 쳐다보고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본문16절)

십자가에 매달린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4:8에,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하나님의 사랑이 내 자신의 허다한 죄를 가리운 것입니다. 예수는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보면 심판이 물러가고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천하보다 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을 때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밖에 있는 사람은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사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것이 영생이며 천국이며 구체적인 구원받은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본문17-18절)

어느 교수 한 분은 "시편 139편을 읽고 가슴이 뭉클하지 않은 사람은 정말 하나님과 멀리 살고있는 사람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보고서도 날마다 감격적인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만큼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은 동산 그늘에 숨은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더 이상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숨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말라버릴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내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심판하기 위해 찾으신 것이 아니라 여전한 사랑으로 그를 살리기 위해 찾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셨을 때 그냥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앞에 나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할 일은 그 놀라우신 사랑 앞에 자신을 털어놓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복이 되며, 믿지 못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사랑 자체가 저주가 되고 부끄러움이 되고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빛과 사랑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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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이러한 기쁨이 충만하라

"(요3:22)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3: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3: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요3: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요3: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요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요3: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요3: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요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요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쁨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5:10-1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기쁨이 충만하기 위해 예수의 사랑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면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살전 5:16-1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며 충만한 기쁨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농아학교를 가보니까 농아들이 즐겁고 명랑하게 뛰놀고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청각장애를 가졌으면서도 너무나 즐겁게 뛰노는 것이 이상해서 그 사람은 칠판에다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왜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데, 여러분은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그 중에 나이 어린 소녀 하나가 나오더니 "이렇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대답을 쓰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선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본문을 통해 신랑되신 예수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기쁨이 충만하노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더 나아가 세례 요한은 자신의 기쁨의 본질이 "예수는 흥하고 자신은 쇠하는데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한 것입니다. 예수가 잘 되는 것은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잘 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온 인류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삶이 세상에 가장 잘 되는 인생이며, 예수를 가장 흥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가 잘 되는 것을 삶의 가장 큰 기쁨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은 실패하거나 쇠하거나 심지어는 망할지라도 오직 예수만 잘되면 그것으로 기쁨이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도 유대 땅으로 가셔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세례 요한보다도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더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또한 요한의 제자와 예수의 제자사이에 변론있었는데(본문 25,26절) 아마도 그 내용은 "이제 너희 선생, 요한의 시대는 끝났고 지금은 예수의 시대가 되어서 요한의 제자들 다수가 예수를 따르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 수는 점점 쇠하여지고, 예수의 제자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세례 요한의 대답은 분명하고 유쾌하였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본문 29절) 이 시대 역사의 주인공은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자신은 그의 들러리에 불과한 친구로서 "그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예수를 함께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이 완성되어 다 끝났을 때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기쁨이요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자기는 쇠하여야 되겠다는 것은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자기 사명을 다 하는데서 오는 충만한 기쁨이었습니다. 유명한 교향악 지휘자인 토스카니니는 대원들에게 폭군적인 지휘자였습니다. 그는 베토벤 해석의 권위자입니다. 한번은 제 9 교향곡을 연주하였습니다. 연주가 끝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을 때, 단원중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속삭였습니다. "오늘은 정말 훌륭한 연주를 하였다고 생각하는데 오늘도 저 영감이 우리를 칭찬하지 않고 우리를 또 나무랜다면 내가 밀어서 쓰러뜨리겠다."며 내기를 걸었습니다. 토스카니니가 그 날 대원들에게 한 말은 아주 유명해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 토스카니니가 누구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여러분도 아무 것도 아니다. 베토벤이 최고다." 이쯤 되어야 베토벤의 권위자가 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작품이 있었기에 연주가는 그 작품을 훌륭하게 연주하므로 훌륭한 지휘자로 찬사를 받게된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인생관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작곡자이며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인생관을 가질 때 훌륭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세례 요한의 삶은 먼저 자신의 위치를 아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수많은 제자들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입고 있었고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한 종파의 지도자로서의 권세와 명망을 휘날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에 관해 의구심을 나타내는 제자들의 시기섞인 말을 일축하고 오직 예수만이 흥해야 한다는 감격적인 증거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먼저 예수와 자신을 비교할 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구세주이시며, 자신은 그 예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기 어려운 미천한 존재임을 자각한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는 것에 대해 의구심과 시기가 가득한 눈빛을 보냈던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인간은 예수를 바로 알 때만이 비로소 존재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을 바로 자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인물가운데 요나단과 다윗은 여인의 사랑보다 승한 뜨거운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인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한 나머지 온갖 수단방법을 다해 다윗을 살해하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서 이미 떠났고 친구 다윗과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살해 위기를 만날 때마다 다윗을 도와 그의 생명을 구합니다.(삼상19:1-7) 훗날 다윗은 이러한 요나단의 깊은 우정에 대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삼하1:26). 요나단은 왕자의 신분에 있으면서 정적이라고 하면 정적일수도 있는 다윗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음을 알고 다윗을 오히려 섬김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겸손히 지킬 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입으로는 떠들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로채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앞세워 잇속을 채우는 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종, 청지기의 위치에 있습니다. 돈이 많다고 청지기의 위치를 망각하지 맙시다. 지식이 많다고 청지기의 위치를 망각하지 맙시다. 권세가 높다고 청지기의 위치를 망각하지 맙시다. 명예가 높다고 청지기의 위치를 망각하지 맙시다. 범사에 주인(주님)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인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신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인되시는 예수의 음성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충만하고,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충만한 기쁨으로 삼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세례 요한은 사심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 3:4)

세례 요한의 때묻지 않은 거룩한 생활을 바탕으로 거침없고 신랄하게 쏟아내는 메시지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부정부패에 식상했던 민중들에게는 너무나 신선하고 매력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인기는 민중들 가운데 날로 높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이 기회에 한번 크게 성공하여 명예와 권세를 누려보자는 야망을 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애초에 세상적 야망이나 사심은 조금도 갖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단지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대답했습니다(요1:19-23). 사실 요한이 세상적인 야심을 가졌더라면 애당초부터 제사장의 가문이라는 좋은 배경을 버리고 광야로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눅1:5). 그리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헤롯의 비리를 공박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기쁨이 충만했고,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로서 족했던 것입니다. 그는 인기에 영합하여 세상적인 야망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심없는 생활로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바로 알고 바로 감당해 나갔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심없는 자세와 생활, 그리고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바로 아는데서 자신의 제자들의 불순한 생각이나 야망을 차단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마16:21-23)을 가르쳤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며 만류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면서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세상적인 야망을 품었던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 믿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세상적인 사심이나 야망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예수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예수를 흥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는 생활을 충만한 기쁨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잠시 뿐이지만 예수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흥하게 하는데서 주어지는 충만한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말합니다(본문 31-36절). 예수 그리스도는 땅에서 난 자가 아니요 하늘로서 오신 분으로, 하나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신 분이며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을 믿어야만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참된 기쁨과 희락은 하늘에서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한없이 주셔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십자가 질지라도 성령은 여러분을 기쁨이 충만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에게는 참 기쁨이 충만합니다. 예수는 그 충만한 기쁨을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나눠주십니다. 예수를 바로 알고 믿을 때 진정한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시고 예수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 의미와 존재 목적을 바로 깨달으며, 자신의 삶을 통하여 오직 예수만 흥하도록 하는 생활로 인생의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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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요4: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요4: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요4: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요4: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요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요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요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요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요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4: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요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4: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요4: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1967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는 세계에서 4,000 여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모여 '정신 치료에 있어서의 인간의 가치'라는 주제로 세계 정신과 의사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에서 3명의 강사가 차례로 주제 발표를 했습니다. 첫번째 강사는 롬(H.P.Rome)박사로, 그는 인간이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길은 인간의 마음 속에 '믿음'이 있을 때라고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믿음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 강사는 잰즈(H.W.Janz)박사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가치를 '소망'속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 '소망'이 있을 때 인간으로서의 긍지와 삶의 보람과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세번째 강사인 시친(C.A.Sejuin)박사는, 인간은 누구나 상처받은 마음을 갖고 살고 있다고 하면서, 그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인간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며, 좌절과 회의의 구렁텅이에서 탈출할 수 있는 끝없는 능력을 공급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주제 발표를 한 이들은 신학자도 종교학자도 아닌 정신과 의사들입니다. 그들이 찾은 인간 가치의 회복의 길이 믿음, 소망,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인간 회복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의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심각한 심령의 갈증을 겪고 있는 파괴된 인간성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나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일시에 그 갈한 것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사랑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여인에게 참 생명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목마른 인생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 4:13-1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 7:37-39)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6-7)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는 곧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를 믿는 자면 누구든지 값없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는 영'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그러므로 예수 없는 인생은 사실 죽은 인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천국문에 다다랐을 때 베드로가 우리를 맞으러 나와서 우리에게 종이와 연필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자, 열 개의 문제를 내겠다. 만약 그 중에 일곱 개 이상을 맞추면 그 사람은 천국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네 개에서 일곱 개 사이를 맞추면 연옥에서 기다려 주어야겠다. 만약 세 개 이하로 맞춘다면 미안하지만 즉시 지옥행이다." "자, 준비는 되었겠지? 일 번 문제, 당신은 어떤 세례가 옳다고 믿는가? 침례(浸禮)인가? 재계(齋戒)인가? 아니면 관수(灌水)인가? 또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성자의 이름만으로 받는 것이 옳은가? 침례는 세 번 물에 잠기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거룩한 깃발 밑으로 통과하는 것이 옳은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줄로 이으면 된다."이제 큰일났습니다! 옆 사람의 것을 컨닝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양쪽을 살펴보니 한쪽에는 구세군 출신이 앉아 있고, 한쪽에는 영국 국교회 출신이 앉아 있는데, 당신은 침례교도거든요. 그러니 컨닝을 해봤자지요. 세 사람 모두의 답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매사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례를 어떤 방식으로 베풀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와 계신 예수이십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교리시험 따위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칠판과 종이, 연필을 가지고 기다리고 서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대신 베드로는 청진기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리 시험을 치르기 위해 책을 잔뜩 짊어지고 천국문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베드로 선생님, 시험을 보려고 하는데 책상이 어디 있나요?" 하지만 베드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청진기를 들이댑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좋아, 통과! 천국에 들어가도 돼." "저, 베드로선생님, 감사합니다만 그러면 시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됐어, 심장이 뛰는 걸 보니 살아 있군, 그거면 됐어." 구원이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진 것을 아노라."(요한1서 3:14)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지 "올바른 교리가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생명입니다!. 예수가 사랑입니다!. 예수가 없는 곳에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가 없는 곳에 사랑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각양 각색 크고 작은 갈증을 지니고 삽니다. 특히 생존 경쟁이 치열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의 현실적 부귀를 비교하여 상대적 목마름에 시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갈증은 바로 영혼의 갈증이라 하겠습니다. 수백 세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지상의 갖가지 쾌락의 잔들을 홀짝거려 오면서 그것들에게서 궁극적인 즐거움을 발견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악의 즐거움은 잠깐 동안"(시 90:5, 벧전 1:24)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시90: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그렇습니다. 세상에 속한 즐거움의 꽃들은 오늘 피었다가 내일 시들어 죽을 것들입니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성과를 이룩하여 부와 명성과 권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이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는 마치 망망 대해에서 표류하는 자들이 주위에 그렇게도 많은 바닷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바닷물을 마신다면, 오히려 갈증은 더해지고 종국에 가서는 목이 타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참된 만족은 없을까요? 사람이 영원히 세상을 헤매며 신기루를 쫓다가 실망만을 계속 되씹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참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생명의 물을 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시며, 그 분이 주는 물을 마신다면 다시는 목마름이 없을 것입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성령을 베풀어주십니다. 중국의 진시왕은 불사약을 구하려고 천진난만한 동남동녀 500명을 영주 삼신산으로 보냈습니다. 불교에서 정신 수양을 통하여 인생사에서 오는 108번뇌를 물리치고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려 한 것도 영생의 욕구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영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 은혜는 믿음으로써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께서 자신을 밝히 드러내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영생의 생수를 마실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어느 한 민족이나 일단의 사람들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요3:16). 예수는 이러한 그의 사랑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과 천대를 받아야 했던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친히 생수를 주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은 모든 죄인들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수"를 값없이 나누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수천만금의 재산이 있어도, 달나라를 가는 지식이 있어도,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를 가졌다해도, 절세 미인이라할지라도, 제아무리 많은 선행을 쌓았다해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국, 생명, 구원, 사랑을 값으로 환산하여 파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을 거저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리스도와 그 분이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에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명수"를 마시게 되며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죄의 생활에서 돌아서는 순간, 그 모든 마음을 예수께 드리는 순간,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생명수이신 예수께서 주시는 '사랑의 생수'를 받아 마셔야 합니다. 한 번도 만난적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든 과거를 다 아시는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도 다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으로부터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여인에게 깊은 사랑을 베푸셨던 예수는 지금 이 시간에도 회개하는 모든 자들을 당신의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아울러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주님밖에는 살 소망이 없음을 알고 자신의 죄인됨을 솔직히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타임지에는 한 기업가의 인생이 한 페이지 전체에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틀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라는 사람으로서 타임지는 그를 '우리 시대의 마지막 재계 거물들 가운데 하나'로 평하고 있었습니다. 오나시스는 겨우 17세의 나이에 고국 그리이스를 떠나 한 몫 잡아보려고 3등 선실에 몸을 싣고 아르헨티나로 갔습니다. 단돈 100달러로 시작한 것이 4년 후 그가 21세가 되었을 때에는 백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그는 냉정하고 단호한 사업꾼으로 평판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와 그 부가 가져다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타임지 기자는 오나시스의 말을 직접 인용하였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 돈밖에 더 있습니까? 지금은 돈 있는 사람들이 왕족이고 귀족이라구요." 그러나 아들 알렉산더가 비행기 사고로 죽는 일이 발생하자 오나시스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그의 한 측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폭삭 늙어버렸어요, 갑자기 노인이 되버렸다구요." 프랭크 브래이드(Frank Brady)는 자신의 책 <오나시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그 역시 죽었다." 오나시스는 계속 신경장애로 고생하다가 2년 후 딸 크리스티나 혼자서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그에겐 부는 있었지만 사랑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갈증을 영원히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더러워진 인간의 사랑을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깨어진 인간의 사랑을 재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으시고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신 행복하신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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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나의 양식은 무엇인가?  

 "(요4: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니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요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4: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4: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요4: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5)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4: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4: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요4: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요4: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요4: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요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마4:4)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합니까? 사람에게 있어서 먹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먹지 못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먹을 양식을 구해 가지고 와서 예수께 드리면서 "선생님, 시장하신데 진지를 드십시오."(본문31절)하고 말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본문32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영적인 뜻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우리가 양식을 구하러간 그 동안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습니까?"(본문33절)라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본문34절)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삶의 "양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 뜻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방탕하고 타락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대화를 통해서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두고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본문32절)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께 있어서는 하루 세끼 식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필수적인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위대한 요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예수는 과거나 미래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는 자기가 원하는 바는 결코 행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원하신 바를 행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바로 예수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요한 복음에서는 무려 44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명령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보냄 받은대로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환경이 어디든지, 만나야 할 대상이 누구이든지, 전해야 할 내용이 무엇이든지 순종하면서 가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나처럼 불순종한 예언자도 있고 시드기야처럼 거짓 영에 사로잡힌 예언자도 있지만(대하18장), 무명 예언자로부터 대 예언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보내심에 철저히 순종한 예언자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자아인식'이 확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는 것을 "소명"(calling)이라 하고, 하나님에 의해 보냄 받는 것을 "사명"(mission)이라 합니다. 자기를 참으로 인식한 '하나님의 사람'은 '소명의식'과 '사명의식'이 뚜렷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사야가 그 전형적인 인물입니다(사6:1-8,60:1-3).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늘 아버지에 의해 세상으로 보내심 받은 자임을 늘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요7:28-29)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때 그는 최초의 사도로 이 땅에 오셨으며, 보내심 받은 자로서 자기를 보내신 천부의 뜻을 부지런히 펼쳐 보이면서 살아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보냄 받은 자, 곧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야 할 생의 전형은 바로 주님 자신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은 자이며, 동시에 사람들을 위해 보냄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으로 부름을 받은 자이며, 동시에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을 살아감에 있어 우선적인 것이 바로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자임을 깨닫는 철저한 '자아인식'입니다. 한 나라의 대사가 그를 파견한 최고 통치자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듯이 주님에 의해 세상 깊숙이 보냄 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보내신 그 주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 보냄 받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아인식'만으로는 부족한 것입니다. 정확한 '상황인식'이 뒤따라야만 합니다. 누가복음 10:3에,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보냄받은 환경이 "이리 떼 속의 양"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상황인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가운데 처한 환경은 일면에서 보아 최악입니다. 탐욕스런 이리떼들 속에 순진무후한 양떼로 있는 것이요, 강자들 틈바구니에 약자로 끼어 있는 것이요, 박해자들이 날뛰는 중에 순교자로 엎드린 것이요, 다수자들 속에 소수자로 눌려 있는 삶의 정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라도 탐욕스런 강자의 주 공격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양은 이리와 동화될 수 없습니다. 양과 이리는 존재가 다릅니다.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위치란 마치 모두가 한 모양인데 비해 다른 것으로 굳게 버티는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함'인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물위에 뜬 기름처럼, 닭무리 속의 학처럼, 이리 가운데의 양처럼 결코 조화될 수도, 일치될 수도 없는 위치인 것입니다(고후6:14-16).'대나무는 꺾이어도 그 색을 변치 않으며, 구슬은 깨어져도 그 빛을 잃지 않음'같이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극한적 삶의 정황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본색, 그 근본되는 빛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해야 하는 '목표인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5-6에,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잃은 버린 양"에게로 보냄 받았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목표인식'인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시74:1) "잃어버린 자"(렘50:6)를 찾음같이(겔34:16) 그리스도인은 "빚진 자"(롬1:14)의 자세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다"(고전9:16)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잃은 양", 사마리아의 한 여인을 찾아 물을 구하며 대화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수행해 나가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은 전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는 소위 '내용인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전해야 할 내용은 바로 '복음'그 자체입니다. 예수가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요(고후1:10), 믿지않는 자에게는 심판(요1:18)인 것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시고 명하신 바를 바로 깨닫는 것이 '내용인식'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하나님의 사람'은 세움받은대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자리에 세워 주셨든지 세워 주신 자리에서 할 일을 다 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세움을 받은 자리에서 벗어나 분수에 지나도록 행한 사람들도 있으며(민16:1-11), 아예 일하지 않은 사람도 있으나(마25:24-30)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충성껏 일한 하나님의 일군들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살고, 하나님의 일에 죽는 '하나님의 일의 사람'입니다. 요한 복음 8:29-30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고 했습니다. 자신을 어떠한 자리에 세워 주셨는가를 깨닫는 것을 '사명인식'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보냄 받은 자임을 깨닫는 것이 '자아인식'이요, 자신이 보냄 받은 곳의 환경이 "이리떼 속의 양"임을 깨닫는 것이 '상황인식'이고, 자신이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냄 받았음"을 깨닫는 것이 '목표인식'이며, 자신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바를 깨닫는 것이 '내용인식'이라면, 자신을 어떠한 자리에 세워 주셨음을 깨닫는 것은 '사명인식'인 것입니다. 이 '사명인식'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부적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냄 받은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정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욥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23:12)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하며 묵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요한 복음6:27-29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상에서의 지위나 부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므로 그 뜻을 성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평화를 향한 오직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과 이 나라에, 그리고 세계에 참 평화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행복과 축복을 향한 오직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반대하고 인간적인 무지에 제한되어 있을 때 행복과 축복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행복과 축복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신28:1-14). 능력을 향한 오직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멋대로 행동하게 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힘 외에는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파멸은 불가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 능력 안에서 행하게 되고 따라서 승리가 확실케 되는 것입니다. 능력있는 삶을 원하십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순종은 한 순간에 펄럭이면서 타오르다가 금새 꺼져버리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질이며, 존재이며, 원천이며, 핵이며, 힘이며 움직이는 그의 생명의 능력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복잡하고 험난한 인생살이에 지쳐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포기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루하루 연명하며 보다 안락한 내일을 위해 재물을 모으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삶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삶은 될지언정 참다운 삶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도 그냥 자의대로가 아니라 영원한 하늘 나라와 숭고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고귀한 존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롬14:8)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성취하는 일을 위해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사명자의 삶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는 여러분에게 평화와 축복과 능력의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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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두번째 표적

"(요4: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요4: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요4: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요4: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요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요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요4: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요4: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요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요4: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요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미국의 어느 시골 마을 뒷산에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이란 전설의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래에 이 마을 출신 가운데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온화하고 인자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란 내용이었습니다. 그 동네에는 '어네스트'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큰 바위 얼굴의 전설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큰 바위를 바라보며 그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정에 큰 감명을 받고는 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어네스트는 신학대학을 가게 되었으며 이를 마친 후에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그곳의 설교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큰 바위 얼굴처럼 늘 따스하고 덕스러운 표정으로 마을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마을 출신으로 억만장자가 된 '게더 고울드(Gather Gold)'라는 사람이 황금 마차를 타고 왔습니다. 온 마을이 떠들썩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의 얼굴이 저 큰 바위 얼굴과 닮았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마차에서 내려서는 그의 번들거리고 거만한 얼굴을 보고는 모두들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은 야심많은 정치인이 고향 마을을 찾아 왔습니다. 그에게 큰 바위 얼굴을 기대했으나 그의 야심에 번뜩이는 칼날같은 눈을 보고는 또다시 마을 사람들은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 후로도 이 마을 출신인 전쟁 영웅, 시인 등이 이 마을을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인자한 덕이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듯한 얼굴을 갖고 있지는 못하였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어네스트도 머리가 희끗희끗해질 정도로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저녁 노을이 아름답게 물든 어느 날 저녁 무렵 어네스트는 그 마을 뒷산 큰 바위 얼굴을 뒷 배경으로 한 채 설교를 했습니다. 주름이 깊게 패인 그의 얼굴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덕과 선행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순간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네스트야말로 큰 바위 얼굴이다."

때로 사람들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참다운 면모를 알지 못합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듯이 말입니다(본문 44절). 유대 지방에서 나날이 배척과 핍박의 기운이 더해 가자 예수는 아직 하실 일이 많았으므로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환향하셨습니다. 즉 유대 지방, 특히 예루살렘에서는 예수의 인기와 명성이 점점 치솟아 유대교 지도자들과 충돌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무모한 충돌을 피하시기 위해 높임을 받지 못하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들을 소문으로 듣고 예수를 영접하기는 하였으나(본문 45절), 다른 유대인처럼 차츰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눅4:16-30).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는 당신의 공생애 처음부터 배척하는 무리들을 직면하여야 했고, 이로 인해 야기되는 숨가뿐 상황 속에서도 양 무리를 돌보셔야만 했습니다. 그 자신은 어느 곳에서도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눅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하든, 거절하고 배척하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자신의 성공과 실패, 생명이 그리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을 '성공'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 희노애락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면 성공이요, 생명이요, 기쁨과 즐거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고 있다면 성공한 사람이고 세상의 것 다 가지고 세상의 자리 다 차지했어도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삶에서 멀어져 있다면 그는 인생의 실패자인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그곳의 사람들이 환영하든 말든 갈릴리로 가셨던 것입니다. 갈릴리는 예수께서 첫번째 표적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가나라고 하는 동네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도보로 약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가버나움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거기에 헤롯왕의 신하의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 신하는 예수께서 그곳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는,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구나!"(본문 48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급한 신하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본문 49절) 라며 거듭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는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본문 50절)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신하는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본문 51절)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하는 종들에게 자기의 아들이 열기가 떨어져 고침받게 된 시간을 묻고 나서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하신 시간과 맞춰보니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비로소 자기와 온 집안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입니다.

요한 복음 20:30-31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첫 번째 표적으로 물이 즉각적으로 포도주가 된 것은 예수께서 '질의 주'<the master of quality)이심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우리 삶의 질을 기쁨(포도주의 상징)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예수의 두 번째 표적, 즉 가나에서 20마일 이상 떨어진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직접 그곳까지 가서 안수 기도하지 아니하고도 말씀만으로 고치신 표적은 예수께서 '거리와 공간의 주<the master of distance,or space)'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는 시, 공, 거리를 초월해서 모든 환경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신하는 예수께서 직접 가버나움에 가셔서 죽어가고 있는 자기 아들의 아픈 곳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해야만 나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대부분 이와같은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잘못된것은 아닙니다. 기도할 때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높은 차원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없던 빛이 생겨 밝아졌도다는 창조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여야 무엇이 이루어지는 줄로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표적을 보지 않고서도, 기적을 체험하지 않고서도 말씀 그대로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요한 복음 20:29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1-4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아니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믿은 것은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세계적인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George Mueller)는 마음 속에 어떤 것을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면 그는 우선 성경을 펴서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 본 후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기도할 때마다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성경을 펴놓고 그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발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걱정할 것 하나 없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특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6-27에,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완전히 성령에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표적은 아버지의 믿음으로 그 아들이 고침을 받았다는데 큰 뜻이 있기도 합니다. 즉 자기 아들을 위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대신 기도한 것이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아들이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믿음으로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와 나라, 그리고 민족을 위해 기도합시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 모든 족속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표적을 보고 믿든, 보지 않고 믿든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구세주(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소원이십니다. 예수 없는 삶은 잔치집에 포도주 떨어진 것과 같고, 예수 없는 삶은 죽어가고 있는 아들을 둔 신하의 초상집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 생활을 통해 성공과 승리, 그리고 영광된 삶을 영위하는 가장 행복한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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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어나 걸어라!

"(요5:1) 그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요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요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요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요5: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요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삶의 질고를 지고 괴로워하며 영적 무기력의 늪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영혼들에게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걸어라!" 38년 된 병자처럼 행여나 누군가가 구원의 손길을 뻗어줄까 고대하며 오늘도 지친 몸을 베데스다(자비의 집, 불쌍한 사람을 돕는 집, house of mercy) 연못가에 누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본문 6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pool)의 주변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양문은 예루살렘의 여러 개의 성문 중에 동북편에 위치한 문으로 양의 시장이 근처에 있다고 해서 양문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하나님께 제사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이 이 양문 근처에서 양을 사가지고 끌고 들어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스데반 문이라고도 불리웁니다(느 3:1, 3, 12:39). 이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는데 못의 길이가 17미터가 되는 아주 큰 못입니다. 지금도 가면 연못 옆에 기념 예배당을 세워놓은 베데스다 연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못에 세상의 별별 환자들이 다 모여 왔습니다. 결국은 난치병으로 인생의 종말을 보는 듯한 비참한 광경이 그곳에 전개되어 있습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 등과 같은 무기력한 병자들, 아무런 힘도 없었고 인생의 소망도 없었으며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갖가지 참을 수 없는 질병과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소위 "자비의 집" 또는 "은혜의 집"이라고 불리우는 베데스다는 오늘날 '교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교회 내의 어떤 사람들은 삶을 유지할 만한 여력도 없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비젼도 갖지 못한 채 삶의 길에서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실패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은혜의 집'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비참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비참한 병자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있는 한 모든 인간은 38년 된 병자와 같이 영적으로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병자는 육적으로 자신의 몸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심한 불구자인 동시에 치유받고자 하는 열망조차도 없었던 영적 중상자였습니다. 환경에 얽매여 절망가운데서 불평밖에 나올 것이 없었던 그는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된 인간의 실상(본문 14절,엡2:1)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허우대가 좋고 화려함과 온갖 치장 속에 건강하게 살아가는 듯한 인간들의 모습을 오늘날 도처에서 볼 수 있지만 이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영적으로 얼마나 무기력하며 죄의 껍질로 얼마나 단단히 무장하고 있는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만이 비참하고 슬픈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비극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죽음에 이르는 병은 키에르케골(S.Kierkegaard)이 말한 것처럼 심령이 날로 부패해 가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적 무능력으로 인해 아득한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병자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사 초자연적인 권능의 말씀,"일어나 걸어라!"는 말씀을 주심으로써 희망과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38년 동안 병든 자나, 사도행전 3:1-10절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에게 주어진 말씀은 공히 "일어나 걸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마치 이들과 같이 모두 걷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1.지성을 가지고 그것을 자랑하며 그 지성으로 자신은 직립 인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성은 만능이 아닙니다(Kant). 하나님을 떠난 지성은 무기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지성은 세상의 흐름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참된 그리고 힘있는 지성이 있습니다. 잘못되어 가는 세상의 역사를 바로 잡는 지성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것입니다.

2.감성을 자랑하는 사람들로 이들은 시를 읊고, 애가를 부르며 예술을 이끌어 가는 무리들로 자신들이야말로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루에 열 두번도 더 변하는 것이 인정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감정은 속이고 배반하고 미워하고 토라지기가 일쑤입니다.

3.어떤 사람들은 의지를 자랑합니다. 물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의지에 비하여 강철 의지가 있습니다. 또 오뚜기같은 의지도 있고, 젊은 독수리같은 의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작심삼일입니다. 그 의지는 강철도 못되고, 무쇠도 못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의지를 신화화하는 인생은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인간의 지정의는 하나님 말씀에 지배되어질 때 바른 지성과 감성, 바른 의지로 작용하여 인생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 인생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걸어라!"

인생의 생명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에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생명은 오직 예수에게 있는 것입니다.

민족의 생명은 이 땅의 지성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민족의 생명은 이 땅의 예술인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민족의 생명은 이 땅의 집념과 의지를 지닌 정치인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민족의 생명은 이 땅의 경제인, 금과 은에게 있지 않습니다.

예수만이 이 땅의 지성인을 바로 세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만이 이 땅의 예술과 경제, 그리고 정치를 바로 세울 수가 있습니다.

"일어나 걸어라!"는 예수의 말씀만이 사회와 정치, 경제와 종교를 바로 세울 수가 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복음성가 183장)

사막을 파면 오아시스가 생깁니다. 또 가시밭을 열면 신작로가 생깁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 분의 말씀을 듣게 되면 진정한 구국사상과 애국 정신이 생깁니다. 예수를 믿고 그 분의 말씀을 듣게 되면 수 십년된 고질병과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고 그 분의 말씀을 듣게 되면 이 땅에 수 십년된 고질병과 앉은뱅이같은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됩니다. 오늘날 악이 없는 언어가 없습니다. 또 부정이 섞이지 않은 교육, 정치, 경제, 사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만신창이입니다. 한 마디로 창기와 같은 문명입니다. 그야말로 슬픈 정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애1:1) 하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통분을 되씹게 하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실로 앉은뱅이 민족, 38년 된 병자의 민족을 통탄합니다. 오! 앉은뱅이 민족아!, 오! 38년 된 병자같은 민족아!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예수께서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유대인의 의무로 되어 있는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장막절 등이 있습니다. 이 절기들에는 예루살렘 주위 약 32킬로미터 이내에 사는 모든 성인 남자 유대인들은 법적으로 참석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언제나 이 큰 절기들을 지키시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민족의 관습과 풍습을 무시하지 않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자기 민족도 없고 조상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른다고 팽개쳐버리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조상들이 섬기던 제사를 지내야 된다거나 혹은 잘못된 길을 가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민족을 더욱 사랑해야 되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친척들에게 좋은 습관을 보여줘야 되고 예수 믿는 신자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더욱 소중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민족과 나라가 사는 바른 길을 깨닫게 되고, 진정으로 민족과 나라가 사는 절기를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1.이 땅에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진리를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있습니다. 영적 소경들입니다.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그래서 벌거벗은 수치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계3:14-22). 이들에게 예수님은 권고하십니다. "내게서(예수에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8)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의 안약을 사서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땅에 성령의 불을 던져 이 민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보게 합시다.

2.이 땅에 '절뚝발이' 같이 바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른 행위를 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르게 걷지 못하고 자꾸만 옆으로 걷습니다. 게와 같이 스스로 바로 걷지도 못하면서 남들더러 바로 걸으라고 말합니다. 바르게 사는 법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 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3.이 땅에 '혈기마른 자들이' 있습니다. 혈기마른 사람은 한 마디로 무능한 사람을 말합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능력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십시오.

4.이 땅에 '38년 된 병자'들이 있습니다. 이 병자는 자신도, 타인도, 그 누구도 인생의 소망이 없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인간 중에 가장 약한 사람,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을 향하여 관심을 나타내시었습니다. 예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유대의 지도자들이나 돈 많고 권세 많은 사람이 아니고 그 숱한 병자 가운데서도 가장 불가능하고 비참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병자와 같은 심정으로 "나는 스스로 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게 될 때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병든 자요 영적으로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언제나 친구없는 자의 친구가 되셨고 아무런 도움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조력자가 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동하는 물을 기다리는 것을 쓸데없는 미신이라고 이론을 전개하여 이 사람을 성가시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의 유일한 소망은 그를 도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그렇게나 오랜 세월을 기다려 온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사람을 예수는 가능한 존재로 변화시키십니다. 예수께서 먼저 찾으십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너희가 참으로 변화되기를 원하는가?"라고 질문하십니다. 만일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의 현재 상태를 만족해 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변화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낫고자 하는 소원이 절대 필요합니다. 소원은 신앙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신앙의 진정한 소원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소망을 삼아야지 호흡이 끊어질 인생을 의지하고 거기에다 소망을 두면 모두가 다 헛수고요 거두는 것은 허무 그 자체입니다(시편146:3,5). 오늘 우리는 소원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욕심으로 쓰려고,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함입니다(약4:2).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원은 민족이 사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뿐입니다. 야곱과 같은 간절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야곱은 자기가 사모하는 라헬을 아내로 삼기 위해서 장인될 사람의 요청에 따라 7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되 7년을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장가 들기 위해서도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원은 얼마나 간절해야 하겠습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주님의 물음에 간절한 소원으로 자신과 나라 민족을 위해 기도합시다. "참으로 네가 변화되기를 원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자신과 이 나라 민족이 변화되기를 간절히 소원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 "일어나 걸어라!"는 말씀에 38년 된 병자처럼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는가에 따라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게 될 때 기적이 일어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와 간구에 응답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너와 네 민족이 낫고자 하느냐?"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일어나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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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일하시는 하나님

 "(요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요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요5: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요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요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요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요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요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기독교 문명의 씨앗은 주후 6,7세기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에 기인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성 베네딕트 수도원은 그 때까지만 해도 일정한 수도 장소가 없이 여기 저기 걸식을 하면서 다니던 수도사들을 모아 가지고 정착시켰습니다. 한 수도원에 그들을 정착시켜서 그들에게 기도를 연습시키고 학문을 닦게 하고 그리고 농토에 나가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학문을 연마시킴으로써 종교가 미신화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많은 종교의 결함은 미신화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종교를 미신화되는 데서 탈피시킬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끊임없이 공부를 하게 하면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노동을 시킴으로써 종교를 생활화했습니다. 종교의 결함은 무엇입니까?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고 실제로는 행하지 않는 위선에 있습니다. 이와같은 종교의 위선을 개선해서 종교의 생활화를 기하려면 기도하는 사람에게 노동을 시켜야 합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을 진리에 복종시키려면 기도를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학문의 기술화를 촉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기도를 시키면 자신들의 직업을 천한 직업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노동의 신성화를 기할 수 있습니다. 노동하는 사람에게 공부를 계속시키면 그 노동이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생산성을 제공하는 위대한 노동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구제불능의 난치병 환자를 고쳐주신 날이 바로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유대인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전혀 소망이 없는 병자를 고쳐서 건강하게 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드려 마땅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소위 당시 정통(?) 유대인들은 그 일 전부를 냉정하고 험악한 눈초리로 대했습니다. 고침받은 사람이 자기 침상을 메고 길로 걸어 나갔습니다. 이를 보던 정통(?) 유대인들은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다."면서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이 고침받은 사람은 "나를 고쳐 주신 분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고 답변했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그가 누가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고침받은 사람은 모른다고 했으나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시 예수를 만나게 되고 나서,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예수이신 것을 알고는 자기 변명을 위해서 그 정통(?) 유대인들을 일부러 찾아가서 안식일에 자기를 고쳐 준 사람이 예수인 것을 고발했습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서 정통(?) 유대인들은 예수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5: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정통(?)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의 말씀에 더욱 분노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유는 "예수가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기 때문이었습니다."(본문18절) 이스라엘은 안식일에 대한 것을 규례화해서 구체적으로 39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된다고 하는 법칙을 만들었습니다. 이 유형들 중의 하나가 짐을 운반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특히 다음 성경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렘17:19) 여호와께서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되.....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렘17: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청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아니하면 (렘17:25)....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 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느13:15)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게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느13:16)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에게 예루살렘에서도 팔기로 (느13:17) 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느13:18) 너희 열조가 이같이 행하지 아니 하였느냐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하고 (느13:19)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내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 오지 못하게 하매."

예수 당시 랍비들은 안식일에는 옷에 바늘을 하나 달고 가도 그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엄숙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니 병고침을 받은 사람이 자기 침상을 메고 가는 것은 랍비적 율법을 정면으로 범하고 있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율법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고의로 안식일에 공중 앞에서 자기 집으로 무엇을 들고 가는 자는 돌로 쳐 죽일지니라."그래서 그 38년 된 병자였던 사람은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위기 상황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침상을 메고 걸어 가라"고 말씀하신 분을 예수님이라고 답변했던 것입니다. 필로(Philo)는 "하나님은 결코 쉬시지 않으신다. 타는 것이 불의 성질이고, 찬 것이 눈의 성질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소임은 일하시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일하고 계십니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해는 빛을 발하며 강은 흐르고 있다. 출생과 사망의 행진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안식일에도 계속되고 있나니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러하니라."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 7일에 안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일에서 쉬셨고, 심판과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같은 더 높은 일은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가 안식하신 것은 오직 '창조'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은 안식일에도 일하고 계신다. 그래서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식', 곧 '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정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에는 정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역사가 더 강하게, 더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안식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긍휼의 역사에는 정지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의 구원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영육간에 세상적으로 시들어진 심령을 안식일로 인해 영적으로 힘을 얻는 소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수 주일, 즉 안식일 지킨다는 말은 세상에서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불우한 이웃들을 돌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이루며, 나아가서는 영혼을 소생케 하는 것입니다. 안식을 지킨다는 말은 행동의 제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힘을 얻는 회복을 말하며, 이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높은 차원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소위 당시 정통(?) 유대인들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의 말씀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제정하신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율법에 정통한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정작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이신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마1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바로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를 몰랐던 것입니다. 이같은 사건이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12:9)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마12:10)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12: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마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마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마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의 말씀 속에는 너희들이 지키는 안식일은 위선적이요 형식적이지만 내가 지킨 안식일은 참 안식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말 안식일을 안식일답게 지키시는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께 적반하장격으로 예수를 죽이고자하며 자기들이 가장 안식을 잘 지키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스토코우스키(Leopold Stokowski)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웃지못할 사고가 일어났었습니다. 어느 날 베토벤의 오버튜어(Overture)를 연주하게 되었는데 이 곡은 트럼펫 하나가 연주 도중 무대가 아니라 관중석 뒤에서 쏠로(solo)가 나오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스토코우스키는 신나게 지휘봉을 휘두르고 관현악은 우렁찬 화음을 진동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곡을 장식하는 트럼펫 독주의 순간이 되었을 때 지휘봉이 관객석 뒤의 트럼펫 쪽을 지적했지만 거기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를 않았습니다. 지휘자의 얼굴은 새빨개졌습니다. 그러나 트럼펫을 맡았던 사람은 엉뚱한 봉변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전에 연락되지 않아 아무 것도 모르는 수위 아저씨가 트럼펫 연주자의 팔을 뒤로 비틀어 꼼짝못하게 하고 의기 양양하게 호령하고 있었습니다. "미친녀석 같은이, 네가 스토코우스키씨의 연주를 망치려고? 어림도 없지, 이런데서 나팔을 불도록 내가 내버려 둘 줄 알아? " 이렇게 해서 그 날의 음악회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엉뚱한 대답을 동문서답이라고 합니다. 이 수위 아저씨의 행동이나 생각과 베토벤의 오버튜어와는 동문서답이었습니다. 수위 아저씨는 제나름대로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을 위하여 건설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겠지만 사실을 음악 전체를 죽이는 파괴적인 동문서답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법, 은혜의 법이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해서 자유롭게 승리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법이 형식적인 법을 이기고, 내용의 법이 외형의 법을 이기고, 은혜의 법이 위선적인 법을 초월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계율을 초월하여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서 법을 지키는 은혜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법을 초월한 높은 사랑의 차원에서 사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법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끊임없는 논쟁을 벌이는 자들이 되지 말고 법의 정신을 바로 알고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안식(주일)을 지키되 율법을 따라 억지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고 성령님이 임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약속하신 날이므로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주일에는 예배드리는 일과 받은 바 은혜를 나가서 전하는 일, 받은 바 은혜를 나눠주는 봉사의 일을 부지런히 행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원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는 날로 주일을 지키기보다는 율법적으로 끌려 다닐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을 돌리고 영광을 돌리고 은혜를 기다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이 좋은 축복의 날에 우리는 일이 바쁘다고 혹은 몸이 피곤하다고, 괴롭다고, 비가 온다고, 눈이 온다고 핑계로 교회에 안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복 주시는 날에 그 복을 받을 만한 마음으로 주일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을 성수합시다. 주일에는 자신을 위한 오락을 삼가고, 병들고 갇히고 소외된 어려운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로 기쁨을 함께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사58:14)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즐거움과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일성수에 동참하여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지금 여기서' 미리 맛보며 참 평안을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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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사망에서 생명으로

  "(요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다음 이야기는 확실한 증언에 따른 것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1979년 8월. 그 때 캄보디아와 라오스 난민들이 대거 몰리는 태국 국경은 아직 정식으로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두 달 뒤인 그 해 10월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열리게 됩니다. 그 때, 드물게는 3년간의 정글 속 도피행, 짧아야 반년에서 1년 몇 개월에 걸쳐 고생 고생 끝에 용케 국경지대까지 이른 사람들은 때마침 한창 장마철이어서 곳곳에서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 속을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여기 저기 황토색의 벌건 흙탕물 속에는 굶어죽은 시체들, 썩은 시체들이 널려져 둥둥 떠다녔고, 구렁이와 갖가지 독충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열려있지 않은 태국측 국경에서는 이들을 향해 쉼 없이 총을 쏘아댔습니다. 폴포트 게릴라들도 뒤쫓아오며 총을 난사했습니다. 이렇게 앞에서 가로막고 뒤에서도 쫓아와 총화 속에 갇힌 난민 한 사람은, 그때 물웅덩이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미 몇 발의 총알을 몸에 맞은 그는 마지막 안간힘을 써 총 맞아 뚫려있는 가슴속에다 한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내장을 뜯어내어 그 지경이 되기까지도 자신의 몸뚱이로 감싸고 있던 너무 오랫동안 굶어 앙상한 뼈 뿐인 어린 자식에게 '이걸 먹어라. 먹고 기운 차려서 이곳을 벗어나거라'하며 건네 주었습니다. 아이가 피로 엉겨있는 그 내장을 받아드는 동안에 벌써 아범은 기진 맥진 물 속으로 가라앉아 갔습니다. 아직 철부지 어린애였지만 그 아이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바램까지를 이해했습니다. 이제 공포나 슬픔같은 것에서도 훨씬 넘어선 허탈지경 속의 그 아이는 내장을 움켜잡고 피를 빨아 핥았습니다. 몇 달만에야 입안에 제대로 닿은 비릿한 먹이였습니다. 이 일은 뒤에 카오이단 난민촌이라고 불린 지점 근처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총에 맞아 '사망'에 이르게 된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자식의 '생명'을 위해 바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희생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사망에서 생명으로"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사는 세상은 사망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연속 사극에 나오는 이조 500년의 역대 임금들을 보면, 각양 좋은 보약을 다 먹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죽어 버렸고, 피바람을 일으키며 정권을 탈취했지만, 전광석화와 같이 지나가 버리고 지금은 무덤에 비석 몇 개만 남았습니다. 모든 육체는 이와 같이 곧 시들고 말라지는 풀과 같은 인생입니다. 또한 흙에서 돋아난 풀은 밟혀도 죽고 토끼나 병아리 같은 짐승이 뜯어먹어도 죽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육체는 '티코' 같은 차에 치어도 죽고, 병이 나서도 죽고, 물에 빠져서도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면도하다가 코털하나 뽑았는데, 파상풍으로 그 이튿날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이렇게 약한 존재인데 몇 천년이나 살 것처럼, 욕심을 내고, 육신의 생활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인간이 60층, 100층 고층 빌딩을 짓고, 달나라에 가고, 세계를 정복한다고 해도 풀과 같이 낮고 볼품없는 존재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보면 고층 빌딩도 성냥곽을 세워놓은 것 같고, 벤스, 케딜락 고급 승용차도 개미 기어다니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을 한다 해도 장관을 한다 해도 천상의 성도가 내려다 볼 때는 도토리 키재기 하는 것 같은 것입니다. 개가 교통사고로 죽으면 보신탕 해 먹으려고 끌어가는 사람이 있지만, 사람이 죽으면 가까이 가기도 싫어합니다. 이와같이 흙에서 난 인간이 풀과 같고, 그 영화도 풀의 꽃과 같이 짧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혼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들의 풀과 같이 사망에 이르게 되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어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에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입술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영접하여 믿으면 사망의 세력이 떠나고 영원한 생명이 그의 생애를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게 되므로 삶의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이 지배하는 삶이 되어 모든 삶의 영역이 창조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기를 영접하는 것은 생명이고, 자기를 배척하는 것은 곧 사망이라고 아주 간단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생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의미로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참된 의미에서 생명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존재(exit)는 하고 있지만, 살고(live) 있지는 않습니다. 브라우닝(Browning)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두 연인의 만남을 다음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는 사랑하는 자가 할 수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돌연히 생명이 눈을 떴다'고". 어떤 현대 소설가는 한 등장 인물로 하여금 상대방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대의 눈빛 속에서 인생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결코 인생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라고.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이미 그 마음에 생명이 약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를 영접하고 사랑하게 되면 삶의 질과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박해자였던 사울이 사도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세리 마태,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어부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창녀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사랑은 듣는 마음이요, 믿는 마음입니다. 흔히 세상에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첫째가 듣는 것이며, 둘째가 믿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의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부모들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식들의 말을 믿어 주지 않습니다. 아흔 아홉 번을 속았더라도 마지막 한 번에 다시 기대를 갖고 믿어 주어야 합니다. 속지 않아야 똑똑한 어머니인양 착각하기도 하지만, 어머니만은 끝까지 아들을 믿어 줘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며 믿는 것은 곧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말씀을 들음으로 그 말씀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고 믿음으로 그 믿는 내용이 나를 다스리게 되어 순종하게 하며, 순종하게 한 성령이 곧 나의 인격의 주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가리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 없는 두려운 관계로써, 느낌이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생각이 없어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집의 노예, 거짓의 노예, 사탄의 노예가 되어서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변명만 하게 됩니다. 죄를 짓고도 교만하며 당당하여 회개할 마음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사실 변명하는 마음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 때부터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변명을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돌리느라고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죽은 것입니다. 그 이후 인간에게 사망의 세력이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회개가 없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죄를 지었느냐 아니냐 보다는 예수 믿고 회개가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죽었느냐 살았느냐 하는 문제는 의인이냐 악인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냐 겸손하냐, 회개하느냐 안 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헨리 누엔 박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이자 교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명문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매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정신 박약자 수용소인 데이 레이크 학원의 직원으로 자청해 가서 봉사했습니다. 명문 하버드 대학의 교수라는 명예와 많은 보수를 사양하고 정신 박약자들에게 용변보는 법을 가르치고, 식사와 세수를 돕고 옷을 갈아 입히는 일을 하며 지냈던 것입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궁금해할 때, 그는 '예수 이름으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요지는 '예수를 진정으로 알려면 내리막길을 체험해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고 몸소 행했던 복음의 교훈은 내리막길에서만 체험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서 신동이란 별명을 들었던 사람이고, 하버드 대학교수가 된 후 책도 20여권을 집필했으며, 그 책 모두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누구나 그의 얼굴을 한번 보기를 원할 만큼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창 인기와 명성이 치솟던 그때 그가 느낀 것은, 더욱 거만해지고 교만해져 가는 자신의 타락한 몰골이었습니다.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로만 전진하다 보니 예수는 안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기어이 높은 곳에 올라야만 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아직도 바라던 것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이젠 눈을 낮은 곳으로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그 동안 간과해왔던 전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것입니다. 겸손한 가운데 예수를 영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심정, 즉 완악하고 교만하고 변명하여 하나님과의 진노의 관계에서, 회개하고 돌아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영생의 관계로 바꾸어 놓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제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곧 이 때라는 것은 예수께서 오셨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말씀이 전파되고 성령이 감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감화 감동을 주실 바로 이 때 지금, 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들리지 않는다면 죽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서운 심판은 말씀이 들리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며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이 여러분들에 충만하시고, 그래서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랑의 음성으로 들려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역사상에 많은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1492년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은 큰 사건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페인이 세계를 지배할 만큼 대국이었으므로 스페인의 동전 위에 영어로 번역하면 "저 너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라는 말이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당시 알고 있는 우주라고 하는 것은 지중해 끝이 우주의 끝이고 지브랄타를 땅 끝으로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마치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 이후에 스페인 사람들이 놀래서 앞에 있는 단어 'No'를 지워버렸습니다. 그래서 "저 너머에는 다른 것이 더 많이 있다."라는 뜻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말이 후일에 스페인 왕가의 가훈이 되어 오랜 동안 사용되었습니다. "저 너머에는 또 다른 큰 많은 것이 있다. 그러니 왕들아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교만하지 말고 조심해서 하라."는 뜻으로 후손들에게 교훈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죽음 저 너머의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의 말씀을 지금 들으시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에 그물과 배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던 베드로처럼, 인생의 참 길이 되시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결단과 생활로 사망의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고 빛과 생명이 넘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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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네가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5: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요5: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요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요5: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5: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요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요5: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5: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5: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요5: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5: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팔복에 한 개의 축복을 더 약속하셨습니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믿음'과 '축복'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입니다. '축복'의 헬라어는 '마카리오스(makarios)'인데 이는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내세적인 용어가 아니라 지금 현세에서의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오는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믿음'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아 행복하고 축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미국의 코미디언이며 영화 제작자인 우디 알렌(Woody Allen)은 "하나님이 내 이름으로 스위스 은행에 백만 달러를 예금해주시면 믿기가 쉬워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 뿌리가 약해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7개의 표적(sign)이 나오는데 예수께서 이같은 표적을 행하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를 만나 대화를 나눈 사마리아 여인(요4:4-38)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예수께 대한 증언을 듣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많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요4:39-45). 왕의 신하도 예수의 말씀만을 믿음으로 병들어 죽게된 아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요4:46-52). 이들은 모두 유대인과 비교하면 이방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들, 그것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기는커녕 믿기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5:1-47). 예수의 고향 갈릴리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요6:1-15). 구약 성경의 '욥'은 하나님이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가실 때 의심과 고민도 했지만 더 확실한 믿음을 굳혔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빼앗아가려 하실 때 그 순종과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이 믿음이라면 빼앗겨도 그 믿음은 변치 않는 것입니다. 방송인 데이빗 브린클리(David Brinkley)씨는 "믿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던진 벽돌에 걸려 넘어가도 그 벽돌을 주워 기초돌을 삼고 집을 짓기 시작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 북부 산악지대에 가면 큰 수도원 20개가 관광지가 되어 있습니다. 모두 1천년 전에 건축된 것으로 그 당시 기독교는 열렬한 기도운동이 일어났고 양적인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교인들은 모두 직업이나 가정 등 사회적 책임을 이탈하고 산에 들어가 금식철야기도회를 가졌고 대규모의 수도원도 모두 높은 산꼭대기에 지어 하나님과 가깝게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도사의 시대는 기 백년도 가지 않아 쇠진하고 오늘날 그 웅장한 기도원들은 옛 건축양식을 보는 관광지에 불과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열렬한 기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산의 기도원이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여하한 노력으로도 하나님께 이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방법입니다. 익살맞은 K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어떤 청년이 와서 토론을 하자고 덤볐다고 합니다. "목사님, 기독교는 불필요합니다. 2천 년 동안이나 전도했다지만 이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나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K목사님이 답변했습니다. "물은 이 지구상에 수십만 년 동안 있는데 당신의 와이샤츠 깃에 때가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이오?" 물이 있어도 빨지 않으면 때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이 이론에 머물러 있는 한 나에게 도움이 안됩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는 것은 어렵습니다. 옛 소련의 우주항공사 티토브(Titov)가 우주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나는 하나님을 찾았지만 우주에는 하나님이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우주여행을 하고 귀환한 미국 항공사 맥디비트(McDivitt)는 "하나님의 모양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천체의 신비 속에서 나는 창조자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함을 믿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우주를 보아도 육안으로 보는 자와 영의 눈을 뜨고 보는 자는 차이가 나는 법입니다. 믿음은 영의 눈을 뜬 자만이 가지게 됩니다. 성경은 육신의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닙니다. 영의 눈으로 믿음을 가지고 읽을 때만 성경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논리나 과학의 방법으로 증명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증명의 대상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실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떳떳하게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모래를 삼켜야 영롱한 진주가 탄생하며 여러 번의 정련 과정을 거쳐야 번쩍이는 순금이 나오듯, 숱한 우여곡절을 거친 연단된 믿음의 소유자가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이루는 데 장애물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악한 마음, 탐욕, 방탕, 시기심, 무절제, 성급함 등과 같은 죄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있어서 구조적이라 할 수 있는 더 커다란 믿음의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 중심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더 많이 바라보면 볼수록,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덜 생각하며 덜 중하게 여기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치명적이고 위험한 장애물은 무엇보다도 첫째, 인본주의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흔히 현대 문화를 이룬 업적을 찬양하고 획기적으로 발달한 과학기술문명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가 각 분야에 걸쳐 확대됨으로써 인간 개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풍부한 물질 문명의 혜택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이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고 또 모든 면에서 세련되고 우아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우리들은 더욱 교양있고 예절이 있으며 남에 대한 동정심이 많아졌고 감수성도 예민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구시대의 진부한 생각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들은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남에게 친절히 대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서로 싸우는 것을 싫어하며 상대방에게 고통과 고민거리를 주기 싫어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상호 협동하는 것을 존중하며 무뚝뚝하고 노골적인 행동이나 말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명예를 추구하고 신사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며 그와같은 사람을 존경하고 또 자신이 기꺼이 그러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명예로운 시민, 자부심과 긍지를 지닌 국민임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문화와 사회에서 통용되고 존중되는 생활과 사고방식에 신경을 쓰는 한, 그 밖의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해져 가게 됩니다. 혹시 우리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이나 위신 등이 실상 우리의 신앙이나 영적 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우리 자신만을, 즉 인간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풍조에 적지않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자신도 모르게 그와 같은 인본주의 물결에 쉽사리 쓸려가고 동화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인본주의의 본질을 말한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며(마6:5),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어서(마6:2) 겉은 깨끗하고 고상해 보이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것이며(마23:25),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것입니다. 다음, 믿음의 장애물로는 세속화주의가 있습니다. 현대와 같이 결혼의 신성함이나 정조의 고귀한 가치가 무시되는 시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겸손의 덕과 청렴의 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 또 이것을 유모어 있게 잘 할 때 이런 사람은 많은 대중들의 인기를 얻으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가장 무서운 우상은 절대적인 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 혹은 세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를 일반화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토록 경시되고 독선적인 풍자나 은유를 위하여 인용되며, 하나님의 이름을 그토록 방약무인하게 들먹거리며, 주일성수가 그토록 뻔뻔스럽게 와해된 시대가 언제 있었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이 심각하게 무시당하고 있으며 유구한 역사를 가지는 기독교의 고상한 원리들이 이렇게 경멸시 된 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더욱 더 자신만을 존중하며 하나님을 경시하고 있으니, 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도리어 자신을 합리화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하며 거룩한 것을 세속화시키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속화주의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사47:10-11)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47: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사47:11)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신을 그렇게 많이 섬겼던 바벨론 사람들은 바로 그와같은 세속화주의 내지 상대주의적인 삶을 추구했던 바, 그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사47:8,10) 라는 식으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화주의 결말은 파멸이요 재앙뿐임을 하나님의 경고를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사47:11). 세번째 믿음의 장애물은 외면적인 정신 자세입니다. 현대인의 생활과 사고의 습성 중 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일들을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쉽게 넘어가는 것이며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마음 깊이 숙고하기 보다는 쉽게 생각하고 쉽게 살아가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때때로 우리의 삶 속에 필요하며 우리의 상황이 그러한 태도를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외면적인 태도가 우리의 생활 전반에 작용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지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며, 순간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쾌락 가운데 던지고 싶어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상 강조되는 교훈을 지겹게 여기고 매번 반복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며 좀 더 참신하고 획기적인 것은 없을까 하고 물어보지 않습니까? 신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철새처럼 일정한 절기가 되면 하나님의 집에 겨우 찾아오다가 곧 사라지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을 찾아 이곳 저곳 옮겨다니나 어느 한 곳에서 만족할 줄 모르고 습관처럼 계속 하나님의 집을 찾아 헤맵니다. 우리들은 처음에 주님을 만나서 느낀 첫사랑을 잊어버린 채 이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발견해 보려 하고 손쉽게 무엇인가를 얻어 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찾지 아니하고 노력이나 수고 없이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에만 만족하려는 것은 외면적인 신앙 자세이며, 이는 곧 믿음의 치명적인 적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인본주의와 세속화주의와 외면적인 정신자세의 공통점은 진실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생각할수록, 경건한 것보다 세상 것들을 사랑할수록, 그리고 내면적인 것보다 표면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속에는 진실성이 없게 마련입니다. 진실성이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속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인간의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

세속적인 영광에 구애받지 말고 오로지 진실된 마음으로써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네번째 믿음의 적은 후기 근대주의, 즉 포스트모던이즘(Post-Modernism)입니다. 후기근대주의(Post-Modernism)는 현대주의(Modernism)도 거부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지금까지 내려온 기독교 진리 자체도 거부하는 사상입니다. "현대 계몽주의,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현대주의를 과감히 거부해야하며 현대주의의 발전체재와 전통주의 절대가치와 절대 이데올로기 등을 완전히 배격하는 사상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절대가치, 절대 진리, 절대 전통, 절대 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후기 근대주의(Post-Modernism)자들은 가장 중요한 교리인 십자가의 피의 구속을 부인하면서 "예수의 피나 짐승의 피나 같은 것이지" 무슨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예수의 신성도 부인하면서 술주정뱅이 취급까지 하고 부활의 역사성도 부인합니다. "부활은 하나의 예시행위다"라고 하고"기독교 신앙은 생물학적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서의 예수 부활이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임마누엘에 있다."고 하면서 교활하게도 의미상의 부활론을 말하고,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믿지 못하며,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구원론, 부활론, 재림론을 정면으로 도전하여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다섯번째 믿음의 적은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이 신학사상은 1960년부터 미국에 소수민족이 많이 이민해 오면서 그들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들어가 문제들이 야기되면서 생겨난 사상입니다.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모든 종교는 공존해야 된다고 하는데서 시작된 것인데 발전하다보니까 "특정 종교만이 절대 진리, 절대 구원을 주장하는 시기는 지나갔고 종교는 궁극적으로 단순히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구원, 같은 진리에 도달한다."라고 논리를 전개하기 까지에 이른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예수의 신성과 유일성도 부인하고 십자가의 피의 구속도 부인하며 부활도 부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마리아가 낳은 예수가 종국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며 모든 종교에 다 그리스도가 있고,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입니다. 자유주의 신학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는 이단 신학사상으로 오늘날 여권 신장을 들고 일어나는 소위 여성신학이 있습니다. 미국 연합감리회에서 행했던 수양회에서 어느 여자 목사가 여성신학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기도할 때도 "Dear Mother"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바꾸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쏘피아 하나님(sophia God)"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하워드(Harward)신학교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아주 행복한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도 착하고 부인도 얌전했는데, 그 얌전한 여자가, 여성신학을 배우기 시작하더니 얼굴 모습이 사나와지고 눈빛이 달라지더니 남편을 사랑의 대상인 배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감정을 품고, 공격의 대상, 복수의 대상으로 삼더니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성신학의 권위자 메리 데일리(Morrydaly)는 말하기를 "적 그리스도(Anti-Christ)가 오기전까지는 여성이 해방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미국 연합감리교회가 1965년까지는 1,200만까지 교인수가 증가되었으나 그 이후 1990년도 까지 400만명 이상이나 교인수가 감소되었고, 매일 350명짜리 교회 하나씩 문을 닫고 있는 형편입니다.1993년 8월의 어느 호 뉴스위크지는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고국인 영국에서도 감리교회가 1930년에는 14,000교회였는데 지금은 8,000교회가 없어지고,6,000교회만 남았는데 그나마도 계속 문을 닫고 없어지고 있는 형편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런던에 있는 모 전통있는 큰 교회가 술집으로 팔려서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외에도 가구전시장, 누드 그리는 화방 등으로 팔리거나 전세를 놓고 있는 형편입니다. 영국의 모 신학교는 목사 지원자가 없어서 재정도 모자라니까 회교에서 1년에 100만불씩 받아 운영하면서 회교의 통제를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최근의 한국 교회도 7,80년대의 교인 증가추세가 90년대에 들어와서 감소추세로 돌아서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이유는 모든 성경의 권위 자체를 부인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됨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피의 구속의 부활을 믿지않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때문인 것입니다. 이같은 자유주의 신학과 사상이 성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식어지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의 어느 심리학자가 많은 임상 케이스를 기록한 가운데 30여세가 되도록 사람을 전혀 믿을 수 없고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고아 출신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의심을 가지고 대합니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너무나 심한 천대와 학대와 사기를 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그 부인의 고민은 자기가 사랑한다는 진정을 남편이 믿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3,4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자기의 진실과 사랑을 그의 마음속에 깨우쳐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자기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선 사람을 믿지 아니하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둘에다 둘을 더하면 넷이라는 자명의 진리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무한하시고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하여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인 인식인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 즉 구세주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없어지는 곳에 악마주의가 발전하게 됩니다.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그가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지 않은 유대인들은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잡아죽이는 엄청난 파멸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영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사람과 세상의 영광을 바라기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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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삶을 풍요케 하시는 주님

"(요6: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요6: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요6: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요6: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요6: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요6: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요6: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요6: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 오되 (요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요6: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요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요6: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요6: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요6: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의 점심 도시락 한 개를 가지고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예수의 기적은 예수께서 양의 주(The Master of quantity)가 되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성령은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성령은 힘과 능력, 그리고 권능이 충만합니다. 성령은 지혜와 지식이 충만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육간에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모든 것을 풍요롭고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엡1: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할"만큼 지혜가 충만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실"만큼 힘과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을" 가장 귀하고 위대한 것들로 만드실 만큼 권능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멸시받는 것들을"을 택하사 가장 존귀한 것들로 만드실만큼 권세가 충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택하사" 가장 부요한 것들로 만드실 만큼 모든 것의 모든(All in all)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 천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부요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스스로 미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전지(全知,omni science)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스스로 슬프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기쁨이 충만하고 그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스스로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시고 악을 선케 하시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삶의 기갈을 당해 목마르십니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가 되시는 예수 믿으시고 여러분의 삶에 생수의 강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신 교회의 이중표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훌륭하신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이 목사님은 한국 땅에 태어난 훌륭한 인물들을 연구하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한국 땅에 태어난 훌륭한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큰 강물을 먹으며 자라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낙동강 물을 먹든지, 대동강 물이나 두만강 물을 먹든지, 압록강 물을 먹든지,...어쨌든 큰 강물을 먹었던 것입니다. 한경직, 김창인, 박조준, 김선도, 곽선희 목사님은 대동강 물줄기를 마시며 자랐습니다. 김재준, 강원용, 목사님은 두만강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이종성, 이상근 목사님은 낙동강 물을 마셨습니다. '아하, 그러면 나는 무슨 강물을 마셨나, 나는 만경강 물을 마셨다. 그러니 짧은 강물을 마신 이 종자는 큰 인물이 되기는 영 글렀다. 짧은 강물을 마셔서 그런지 키도 작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고민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하나님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주여, 한국 땅을 주름잡는 인물들은 다 긴 강물을 마시고 자랐는데 저는 만경강 물을 마시며 자라도록 하셨으니 슬프도소이다, 주여, 이대로 두시려나이까?' 성령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감동하시기를 '종아, 낙심하지 마라. 대동강 물줄기가 길다 한들 얼마나 길겠으며 낙동강이 길다 한들 얼마나 길겠느냐? 진짜 긴 강수, 성령의 강수를 마셔라. 길이를 잴 수 없는 무한한 하늘의 강수를 마셔라. 그 강수가 그대 가슴에 흘러 들어갈 때 하늘도 땅도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국경을 넘고 ,세계를 넘어 큰 인물이 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이 말씀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한 많은 호남땅 갈릴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까 할 때 '성령의 강수를 마신 예수의 혼을 담아 너도 살아라.'라는 감동을 받아 여기까지 뛰고 달려왔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 성령의 강수가 흘러 넘치게 될 때 여러분의 현재 위치와 존재를 뛰어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존귀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뛰어난 지혜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가장 부요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시고 성령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은 강물마다 심하게 오염되어서 그런지 목사가 죽어 장사지내는데 절간의 중이 와서 조사를 하는 경우도 있고, 기독교와 불교, 천주교 희랍 정교 그리고 회교까지도 혼합하여 서로 강단을 주고받으며 세계 종교 단일화를 위해 날고 뛰는 그야말로 오염도가 치사량을 훨씬 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성령과 말씀'으로 영육간에 성결 보존하여 어떠한 '세상의 강물과 공기'에도 오염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병이어,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밖에 없습니까? 주님께 바치십시오. 그리고 오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풍성한 축복을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형편없습니까? 있는 그대로 주님께 바치십시오. 여호와께서 새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지혜와 재능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기십니까? 주님께 바치십시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뱀같은 지혜를 얻으십시오.

"(사40: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사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사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사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 믿으시고 여러분의 영육간의 삶이 풍성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누리고 있는 문화와 문명이 풍요로워도 사랑에 기갈을 느끼고 있습니까? 예수 믿으시고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시고 삶의 참된 희락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엡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엡3: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인간은 '밤이 맞도록 수고를 다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다'는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십시오.'

"(눅5: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같은 축복은 자신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이 넘치도록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눅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5:3)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5: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미국 텍사스에 유명한 셀 포드라는 목사는 "성경 말씀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물질을 관리하며 살아갈 때 축복이 되느냐 하는 말씀이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예수 믿는 사람은 그저 가난하게 사는 것이 잘 믿는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렵게 살고 가난하게 살아서 남에게 누를 끼치고 남에게 원조를 받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풍성한 물질의 축복을 받아서 가난한 사람과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가는 곳마다 농사를 지으면 백배나 잘되어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기까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도 객지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객지 생활을 시작하는 길에 하나님께 십일조 생활할 것을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야곱의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교회 생활의 규례가 되어 지켜지고 성도들이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축복된 생활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고후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기쁨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것을 드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물질 때문에 걱정하지 아니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가진 것을 무엇이든지, 물질이든 봉사이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온전한 마음으로 드리십시오. 그리고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의 어떤 왕이 궁전에서 나가다가 한 거지를 만났습니다. 손을 내밀고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왕이 거지에게 하는 말, "네가 나에게 무엇을 주면 나도 너에게 주겠다."거지가 뭐 있겠습니까? 옆집에서 강냉이 한 홉을 얻었는데 그 강냉이 주머니를 열고 "저는 이것밖에 없습니다."하며 강냉이 다섯 알을 내밀었습니다. 왕이 그것을 척 받더니 웃으면서 하인에게 "얘! 금주머니에서 이 강냉이 알만한 금덩이 다섯 개만 꺼내서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것을 대신 너에게 주니 받아라."물론 거지가 감사히 받았지요. 그러나 속으로 탄식하면서 갔다고 합니다. 왜? "내가 그 강냉이 주머니를 다 그대로 드렸으면 금주머니째 내가 다 받았을 텐데"하는 탄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처럼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믿음을 과감히 버리시고 가지고 있는 "오병이어" 전부를 주님께 드리시고 '너와 나' 모두가 함께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적은 예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축사',즉 감사기도를 드리심으로서 일어났습니다. 주께서는 지금 '보잘 것 없는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지만 벌써 저 멀리 오천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은 것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이 오병이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축사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현재의 위치와 상황, 그리고 형편 처지가 어떠할지라도 미래를 바라보고 미리 감사할 수 있는 깊은 믿음으로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기도하는 방법을 설명하시면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감사기도를 해야 들으신다고 하셨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어느 부인은 자기도 남편 문제로 감사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하고 한 숨을 쉬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남편은 매일같이 술이 만취되어 늦게 귀가하는 술고래였습니다. 그 날도 다른 날과 같이 술로써 인사불성이 되어 겨우 집에까지 도착해 문앞에서 쓰러진 남편을 힘들게 끌어다가 겨우 눕혔더니 세상 모르게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니 자기 신세가 처량하고 화도 나서 기구한 팔자타령을 하며 "하나님, 나는 왜 이런 남자에게 시집을 와서 고생을 합니까?" 하고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울면서 절반은 신세타령하고 절반은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감사기도하라는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한참 동안 감사할 조건을 생각하다가, 감사할 것이 없어서 그저 감사하다고 기도했답니다. 바로 그 때 성령의 감동으로 감사할 일이 생각났습니다.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을 생각하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앞으로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감사하고, 저토록 취했어도 집을 찾아올 수 있음에 감사하고, 토요일은 더욱 술을 많이 마셔 주일날에 집을 잘 봐주어서 교회나오는데 불편하지 않아 좋고, 계속 해서 감사해야 할 일들이 자꾸 생각나서 정말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남편은 갈증이 나서 잠을 깨고 보니 부인이 웃으며 기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남편은 무엇이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물었더니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렇다고 감사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나도 예수 믿어 줄께" 하며 선뜻 교회에 나갈 것을 약속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그 동안 왜 몰랐겠습니까? 또한 자기 아내의 소원이 무엇인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이 부인이 간증하기를 10년 동안 그렇게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 번의 감사기도로써 이루어졌다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어느 때 들으실 것 같습니까? 오천 명을 앞에 놓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하는 이런 감사기도에 기적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금년은 '감사하는 해'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정황이 어떠하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지금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영육간에 삶이 풍요로와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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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삶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

"(요6: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요6: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요6: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요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요6: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요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는 여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기적은 진짜로 있었던 것이 아니란 말이예요. 예를 들어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가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너갔을 때 바다의 깊이가 6인치밖에 안 되는 갈대밭을 건너간 것이지 어떤 기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거든요."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뒤에 앉은 학생 한 명이, "기적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좀 기분이 좋지않은 선생님은, "무슨 기적이란 말이예요?"라고 묻자 학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오던 애굽의 큰 군대를 모두 홍해 바다물에 빠져 죽게 했는데 6인치 깊이의 물에다 애굽의 그 많은 군대를 다 빠뜨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 진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물위로 걸어가신 표적으로서, 자연의 법칙을 자신이 뜻대로 얼마든지 주관할 수 있는 '자연법의 주'(the master over natural law)가 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자연을 다스려 물위로 걸어가시는 표적을 보이신 목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신앙 가운데 빠져 생명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삶의 풍랑을 겪게 되지만 예수를 배에 영접하게 되면 인생의 진정한 목적지에 안전히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일엽편주를 타고 언제 끝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넓은 바다를 쉬임없이 항해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 세상은 바다며 인간은 항해자이며 인생은 항해입니다. 항해를 하다보면 뜻하지 않는 시기에, 예기치 않는 장소에서 이유도 알 수 없는 폭풍과 거센 파도에 휩쓸려 고생할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석양이 물드는 잔잔한 저녁 바다, 혹은 힘차게 태양이 솟구쳐 올라오는 고요한 아침 바다는 참으로 멋있습니다만 별안간, 그것도 한밤중에 몰아닥치는 폭풍과 파도는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개인생활이나 가정생활 혹은 신앙생활에서 순풍의 돛을 달고 평탄하게 달릴 때도 있지만 때로는 예기치 않게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풍랑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풍랑 만난 이야기가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구약에 나오는 요나가 만난 풍랑입니다. 이 풍랑은 내 자신의 잘못과 죄로 인하여 만나는 풍랑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과 정반대되는 곳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요나서 1:11-15).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죄악의 길로 가는 인생에게 거센 풍랑이 일어납니다. 둘째, 사도행전 27장에 나오는 풍랑으로서 사도 바울이 탔던 배가 풍랑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이 풍랑은 하나님 보다 인간의 경험을, 진리의 말씀보다 재물을 더 의지할 때 찾아오는 풍랑입니다. 하나님의 종 바울은 계시를 통하여 항해 도중 큰 고난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항해를 지연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는 항해를 늦추게 될 경우 입게 될 경제적 손실을 염려한 결과 자신들의 경험과 실력을 믿고 항해를 강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대로 그들은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 많은 재산의 손실을 입고 생명의 위험까지 겪게 됩니다. 셋째,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것으로서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갈릴리 바다에서 만난 풍랑입니다. 이 풍랑은 인간의 잘못과 아무 관계가 없는 풍랑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당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풍랑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리하여 바다생활에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점점 거칠어져 가는 거센 풍랑을 어찌할 수 없어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험한 세상 속을 살아가면서 삶의 전문가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부들도 큰 풍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듯이 아무리 풍부한 경험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어도 아무리 높은 권세와 넘치는 재물이 있어도 어찌할 수 없는 격렬한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배에서 주무시던 예수를 깨우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에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의 말씀대로 풍랑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만유의 주이신 예수는 모든 인생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값으로 오는 풍랑이든 세상을 의지하다 만난 풍랑이든 어떤 풍랑도 예수는 잔잔케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생의 거센 풍랑이 여러분을 위협할 때 예수를 찾으시고 그 분을 인생의 배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나신 후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신 반면 제자들을 미리 가버나움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항해하는 중 큰바람이 불어 풍랑을 만나 제자들이 큰 역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을 피하여 산에 가셔서 먼저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께서는 바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시도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시고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광풍노도에 시달리던 그 자초지종을 예수의 사랑의 눈초리는 떠나지 않으시고 항상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물위로 걸어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시련에 부딪칠 때도 예수께서는 지켜보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풍랑속에 있든 예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너무 편안하게만 해주시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가 싸워서 우리 자신의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운동경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녀를 자랑스럽게 보시며, 도중에 넘어져 경기를 포기하거나 좌절하며 슬퍼하는 것을 보면 가슴아파하는 부모와 같습니다. 인생은 우리들 위에 내려 비치는 예수의 사랑의 눈빛으로 말미암아 활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안전하게 항구에 이르도록 돕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떠나 보내고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말하자면 우리를 관람석이나 울타리 밖에서 그저 보고 계시는 예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힘이 모자라고 우리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때에 예수께서는 사랑의 눈빛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지에 무사히 이르도록 위로와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시거나 스스로 견디어 보라며 팔짱끼고 계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예수께서는 광풍을 만나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직접 찾아와 물결을 잔잔케 하시며, 평온한 가운데 기쁨으로 소원의 항구에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시107:28-30)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예수께서 어찌 제자들을 잊으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어찌 제자들에게 무관심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광풍으로 고난당하는 인생들을 찾아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 인생의 고난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어디서나 언제나 여러분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칠흑같이 깜깜한 바다의 풍랑 속에서도, 결코 시선을 놓치지 아니하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우리의 생각도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슬픔도 모두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다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으며, 그들은 바다에서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마음은 그들을 걱정하고 계셨으며, 그래서 마침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틀림없이 우리에게 베푸시려고 사랑으로 우리를 살피시는 가운데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요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이 본문에서 분명히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그와같이 예수를 보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눈으로 예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눈으로 예수를 볼 수 없지만, 봄으로 행치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합니다. 삶의 풍랑이 어떠하든지 간에, 파도가 얼마나 높든지 간에, 소동이 얼마나 심하든지 간에, 예수를 신뢰하고, 예수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앞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께서 파도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실 때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과 우리 자신의 환경에 얽매여 있어서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실 때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의 정황과 다를 바 전혀 없습니다. 한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 민족이 경제, 정치, 사회적인 광풍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풍랑이든, 풍랑의 크기가 어떠하든 풍랑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정치, 경제와 사회 등 나라 민족이 사는 길은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신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요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다시 말해서 예수를 배에 영접하자 제자들은 가려던 항구에 속히 안전하게 도달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현대가 당면한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열쇠가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를 배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가 없었을 때에는 위험했으나 일단 그를 배 안에 영접하자 풍랑이 잔잔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 '배'는 작게는 '나 자신'을 뜻하며, 크게는 '가정' '교회'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문제나, 가정의 문제나, 교회의 문제나, 국가의 문제는 오직 예수를 영접할 때만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고 했습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하기까지는 언제 어떤 풍랑에 밀리고 요동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다와 바람을 창조하시고 자연법의 주가 되시는 주님을 모시면 목적한 항구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풍랑을 잔잔케 하실 뿐만 아니라 삶의 참된 목적지까지 우리를 평안하게 이르게 하시는 예수를 진실로 진실로 영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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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생명의 양식

"(요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요6: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요6: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요6: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요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6: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6: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어느 임금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임금은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적임자인지를 분별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세 아들을 불러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구해오는 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세 왕자는 가장 귀한 것을 얻기 위하여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웃에 있는 큰 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기 때문에 그 나라는 망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큰 왕자는 보물을 하나 구해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나뭇잎을 부치면 그 나뭇잎이 군인이 되는 신기한 부채였습니다. 큰 왕자는 그 부채로 많은 군사를 만들어 이웃 군대를 손쉽게 물리쳤습니다. 온 백성들은 신기한 부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환호했습니다. 왕위는 당연히 큰 왕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구가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식량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양식이 떨어져 굶주린 백성들은 금세라도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습니다. 그때 둘째 왕자가 귀한 보물 하나를 구해 가지고 왔습니다. 그 보물은 돌리기만 하면 하염없이 쌀이 쏟아져 나오는 멧돌이었습니다. 그 나라는 둘째 왕자가 가지고 온 멧돌로 많은 쌀을 만들어 식량난을 깨끗이 해결했습니다. 백성들은 멧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왕위 계승은 당연히 둘째 왕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라 안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식량난이 해결되니까 백성들은 게을러지고 방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남아도는 쌀로 술을 만들어 먹고는 취하여 서로 싸우고 음란과 향락을 일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가 혼란하고 생지옥같이 되었습니다. 그때 세째 왕자가 한 권의 책을 구해 가지고 왔습니다. 그 책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해야 되는지에 대하여 지혜를 주는 진리의 책이었습니다. 왕자는 그 책에 기록된 진리를 모든 백성들에게 보급하였습니다. 진리를 통하여 깨달은 백성들은 점차 바른 생활로 돌아왔고 근면하게 일하여 나라는 다시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왕은 세째 왕자야말로 자신의 뒤를 이을 훌륭한 왕자라고 생각하고 그를 왕으로 계승시켰습니다. 이 이야기는 군사력이나 양식(경제력)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은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좋은 비유입니다. 고대는 현인을 원했고, 중세는 성자를 갈망했으나, 현재는 오직 부자(경제지상주의)만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지를 더 흠모하는 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지성인들 중에는 깨끗한 양심보다는 한 장의 지폐를 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찌기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현대인은 소유하고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배금주의 사상에 흠뻑 젖은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황금을 올려놓고, 메시야 대신에 기계를, 영혼의 구원 대신 성(性,sex)을 대체시킴으로써 스스로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를 만들고 있습니다. 현대는 풍요 속에서 방탕과 타락으로 인하여 혼란과 공포의 시대가 되어버리고 있습니다. 인간 생활에 물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서야 물질도 힘도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시19:7) 여호와의 율법(말씀)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말씀)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시19:8) 여호와의 교훈(말씀)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말씀)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시19: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말씀)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시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19:11)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현대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입니다. 진리가 실종되니까 과학문명의 발달과 물질의 풍요도 인간을 행복하게 못하는 것입니다.

"(사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배고픔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음식이 만족시킬 수 있는 물질적인 배고픔과 물질적인 음식만으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영적인 배고픔이 있습니다. 주후 60년 이후의 로마 사회의 사치는 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공작새의 골과 나이팅게일의 혓바닥 요리로 잔치를 베풀던 때가 바로 그 때였으며 계속해 나오는 더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구토제를 마신다든가 하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도 또 수천 파운드의 비용이 드는 식사는 보통으로 되어 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된 여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란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어떤 깊은 불만족과 주림에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어떤 새로운 스릴과 새로운 맛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엄청나게 부유하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굶주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굶주림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이 인간의 모든 굶주림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명에 대한 굶주림이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을 줄 수 있으며 그 생명을 더욱 더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랑에 대한 굶주림이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와 죽음을 극복하는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끝날 줄 모르는 갈망과 인간의 심정과 영혼에 있어 안정할 수 없는 굶주림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요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6: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새로운 관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가 없이 또는 그를 떠나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과의 그러한 새로운 관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존재는 될지언정 생명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요1:4) 그(하나님,예수 그리스도,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인간은 생명의 떡(양식)이신 예수를 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그의 살을 먹는다는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먹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몸은 떡(양식)으로 살며, 영은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이란 사랑이며,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랑하는 사랑의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속성은 사랑이고 그 본질적인 덕도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생의 알파(alpha,시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으면 인생도 없고 사랑이 있어야 인생도 있습니다. 인생이 <살았다>는 말은 곧 <사랑한다>는 말과 통합니다. 독일말을 보면 사랑과 산다는 말의 어원이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사랑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의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시고 영원히 배고프지 않은 생명의 양식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모든 인류가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임금에게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딸은 불치의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유명하다는 의원에게는 모두 보여봤지만 한결같이 절망적인 반응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땅 어디엔가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자기 딸의 병을 고쳐 낫게 한 사람에게는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고 자신의 대를 이어 임금으로 삼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전국에 붙이도록 했습니다. 그때 마침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각자 진기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세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법의 망원경을 가지고 있던 맏형이 자신의 망원경으로 그 포고령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주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맏형은 나머지 두 형제와 의논하여 공주의 병을 낫게 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세 형제 중 둘째는 마법의 양탄자를 가지고 있었고 막내는 마법의 사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내가 가지고 있는 마법의 사과는 어떤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이 사과를 먹으면 병이 낫게 되는 사과였습니다. 세 형제는 공주를 구하기 위해서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공주가 있는 왕궁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왕궁에 도착하자 곧바로 공주에게 사과를 먹였습니다. 그러자 공주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죽을 병에 걸렸던 공주의 병이 낫게 되자 모두가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임금은 큰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임금은 연회장에서 공주의 남편감이요 자신의 후계자가 될 사람을 발표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왜냐면 세 형제가 서로 자신이 공주를 구했으니 자신이야말로 공주의 신랑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맏형은 "내가 망원경으로 보지 못했더라면 이런 사실조차 알 수 없었을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으며 둘째는 "마법의 양탄자가 없었더라면 도저히 이렇게 먼데까지 올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체되어 공주의 생명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하고 자신의 입장을 말했으며 셋째는 "만일 사과가 없었다면 병을 고칠 수가 없었을 것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가 공주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나라 임금은 매우 지혜로운 판단으로 자신의 후계자요 공주의 남편감이 될 사람을 세째로 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맏형과 둘째는 아직도 망원경과 양탄자를 가지고 있지만 셋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과를 공주가 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공주를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주었던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무엇을 해줄 때에는 모든 것을 거기에 거는 자가 가장 존귀하다."는 명언이 있습니다. 희생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생명이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의 양식은 '사랑'입니다. 인간의 생명의 양식은 '진리'입니다. 인간의 생명의 양식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으시고 마음으로 영접하시므로 영원히 썩지 아니할 생명의 양식으로 영육간의 모든 생활에 참 만족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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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참된 양식

"(요6: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요6: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요6: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6: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6: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6: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6: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6: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6: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6: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모습은 마치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평화를 구하나 참 평화가 없습니다. 안전를 구하나 참 안전이 없습니다. 사랑을 구하나 참 사랑이 없습니다. 만족을 구하나 참 만족이 없습니다. 행복을 구하나 참 행복이 없습니다. 결과는 원망과 불평, 불만이 계속되는 삶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여유가 있고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도 좌절과 실의와 허무감, 그리고 불만족 가운데 사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참된 의미와 희망과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참된 삶의 양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거나, 듣지 아니하거나 하는데서 오는 영적 기갈 때문입니다.

"(암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8: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암8: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인간의 참된 양식은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의 떡, 참된 양식인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생한다는 것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얻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흘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 죄를 속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같은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일에 보다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오직 영에 대해 관심이 많고, 육에 속한 사람은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부부라 할지라도 속해 있는 부분이 다르면 몇 십년을 살았어도 타인입니다.

영에 속했느냐 육에 속했느냐의 구별은, 보는 것과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에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 둘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가령 무엇을 깨닫는다고 할 때, 이 깨달음도 그가 가진 관심에 기준해서 깨닫게 되며 무엇을 보아도 관심대로 보여집니다. 같은 것을 놓고 보더라도 육에 속한 사람은 돈으로 보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진리로 보여집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 완전하게 알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이 가는 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남편이 은근히 옆집에 사는 부인을 좋아해서 그 집 음식이면 무엇이든 다 좋아 보이고 맛있다고 해서 부인이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꾀를 내어 그 부인은 옆집에서 김치를 얻어 밥상에 올려놓고 김치 맛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남편은 "이걸 김치라고 만들었느냐"고 짜증을 내며 맛이 없다고 투정을 했습니다. 다음 날은 자기 집 김치를 내놓으며 옆집에서 가져왔다고 했더니, 남편은 맛을 보자마자 "이것이 바로 김치다"라고 아주 만족해 했습니다. 입맛까지도 마음가는 대로 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관심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면 서로 막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 관계가 서로 단절되어 통할 수 없는 것처럼 답답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내 살을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어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며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은 서로의 관심이 다르기 때문에 피차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 그들의 관심이 전혀 다른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히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할 때 인간은 사랑으로서 응답해야 대화의 기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대화와 사랑의 관계는 마치 피와 몸과의 관계에 비길 수 있습니다. 혈액 순환이 정지되면 몸은 죽게 마련입니다. 대화가 끊기는 때에 사랑은 죽고 반감과 증오가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대화는 죽음의 관계에서 소생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화의 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대화를 들으시고, 우리의 찬송과 기도, 그리고 사랑의 봉사와 헌신으로 그 대화에 응답하시므로 대화의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카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동생에 관한 일을 물으시려고 그를 불렀을 때, 모든 시대를 통해 계속 메아리치고 있는 저 비극적인 대답을 합니다.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된 비극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인범 가인을 부르시는 참 뜻을 모르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묵살하는 인간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예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의 이름으로 죄인된 인간들을 사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마틴 부버는 대화를 "상대방의 처지를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바로 예수의 처지를 말씀과 성령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한 말씀과 성령이 역사할 때 삶의 기적은 체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부어 살아나게 하여 큰 군대가 되게 하셨습니다.

"(겔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어느 조각 작품에 어머니의 유방은 풍만하여 젖이 철철 넘쳐 흐르고 있는데 그 어머니 품안에 안겨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유난히도 바짝 말라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니 어머니는 애써 젖을 먹이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데 어린아이는 도무지 먹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머니의 젖이 풍부해도 그것을 거절하고 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고자 충만한 말씀과 성령으로 사람들에게 참된 양식을 공급하시고자해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1841년 미국기선이 빙산에 충돌했습니다. 구명 보오트 한 척에 기어오른 사람이 너무 많아 홈즈 선장은 그중 일부를 파도 속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는 살인죄 판결을 받았으나 타일러 대통령의 특사령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때의 논쟁에서 <구명보오트 윤리>(Lifeboat Ethics)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일부의 생존을 위하여 일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논리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논리를 배격합니다. 사람이 5천명이고 떡이 다섯 개일 때 강하고 우수한 인간 다섯 명을 먼저 먹여 살리자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빌립의 타산적이고 계산적인 믿음입니다. 다 살릴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의 계산이고 강자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다섯 명만이 아니라 5천명을 다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의 떡이 남는 풍성하고 참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양과 질의 주님이 되십니다. 생명의 양식, 참된 인생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생명력을 불어넣으시는 성령이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의 삶이 보다 더 풍요롭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국의 현대시인 풀레쳐(Giles Fletcher)의 노래를 들어봅시다.

방황하는 자여, 잘못된 길로 가는 자여

참길은 예수이시다.

헐벗은 자여 부끄러운 자여

참옷은 예수이시다.

굶주린 자여 허덕이는 자여

참떡은 예수이시다.

짐진 자여 눌린 자여

참자유는 예수이시다.

그대 약한가 쓰러지는가

예수는 강하다.

그는 죽음을 깨는 생명이 되시고

그는 아픔을 낫게하는 의사가 되시고

맹인에게는 광명이 되신다

예수를 먹으라 예수를 마시라

그는 생명,영생의 떡이시니.

<"Excellency of Christ"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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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너희도 가려느냐?

"(요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6: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요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6: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요6: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하루 종일 논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어오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이젠 저녁이 다 되었어.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이 말을 들은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습니다. "메뚝아, 내일이 뭐니? 어떻게 내일 또 놀자고 하니?" 메뚜기는 잠시 후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모든 동물이 다 잠을 자게 되는데 잠자는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뚜기를 보고 날씨가 무더워서 정신이 나갔나 보다고 놀렸습니다. 그후 메뚜기는 개구리와 온 여름을 함께 놀고 지냈습니다. 가을이 오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뚝아, 내년에 다시 만나서 놀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냐고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개구리는 흰눈이 천지를 뒤덮고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모든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서 오래오래 겨울잠을 자고 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때가 내년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구리를 보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놀려댔습니다. 하루살이나 메뚜기는 '내일' 혹은 '내년'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일'이나 '내년'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이나 '내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나 '내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세나 하나님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하나님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예수께서 자신이 인류를 위한 "참된 양식"이며,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때 제자들은 이 예수의 가르치심을 듣고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여기 "어렵도다"는 말의 헬라어는 스클레로스(skleros)인데 이 말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과 관용하기가 어렵다는 것(hard to tolerate)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유한자인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결코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미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가 될 수 없을 것이며 단순히 일종의 특출한 인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요8: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예수님을 알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됩니다. 예수를 아는 것은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Personal Relationship).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는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가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인격신이십니다. 예수는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하십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인간은 유한 존재일지라도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무한 세계와 무한하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그의 보내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도 가려느냐?"는 예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많은 기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습니다(요2:23).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난처할 정도였습니다(요4:1-3). 그러나 지금에 와서 사태는 일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람들은 그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예수께 등을 돌리고 더 이상 함께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때 모여들었으나 지금은 변절하여 다 물러가 버렸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가 져야만 하는 십자가의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에 맞게 예수를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만사가 잘 되어 갈 때의 추종자들뿐이었습니다. 군대의 시련은 그 군대가 힘을 잃었을 때 어떻게 싸우느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떠나버린 자들은 예수의 생애가 상승하고 있는 한에서만 충성하다가 처음으로 십자가 죽음의 그늘이 내려 덮이자 그를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 뒤의 부활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루살이 같이 '오늘'에 살았지 '내일'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메뚜기같이 '금년'에만 살았지 '내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 마리의 송충이가 땅을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머리 위를 찬란한 나비가 날고 있었습니다. 한 송충이가 중얼거렸습니다. "여보게, 우리 팔자도 사납지. 같은 생물인데 저 나비에 비하면 우리 꼴은 뭔가" 다른 송충이가 말했습니다. "쳐다봐선 뭣해. 나무잎이나 실컷 갉아 먹자구." 이 송충이들은 장차 자기들이 나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내일을 본다는 점입니다. 박물관에서 어떤 거장에 의해 제조되었다는 바이올린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나무였을 때 나는 말없이 자라났다. 그러나 나는 죽은 뒤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묵묵히 십자가를 진 예수가 부활로서 평화의 대 교향곡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과 흡사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그를 따름에 있어 언제나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그러나 십자가 후에 부활과 영광이 있음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부활 승천의 영광을 바라보고 생명이신 예수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치밀하고 견고한 관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과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밀접한 관계(connection)를 유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일랜드의 밸파스트에서 주민 2,000세대 전원을 상대로 종교 조사를 최근에 실시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전통적 장로교 동네입니다. 60%가 다음과 같은 비슷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전에는 교회에 나갔었으나 현재는 예수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된다."(We are Presbyterians, but disconnected) 냉장고는 음식을 싱싱하게 저장할 수도 있지만 전기줄만 절단되면 음식을 부패시킬 수도 있습니다. 참된 생명이신 예수와 관계가 끊어진 사람의 상태는 어떠하겠습니까? 벨파스트의 종교 조사 분석은 예수와 끊어져 있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부류 속에 종합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쉽게 크리스챤의 이름을 유지하려는 사람들, 쉽게 예수 믿으려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예수와 끊어지고 맙니다. 둘째, 전통적이며 조직된 교회를 무시하는 사람들,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잘 믿는 것 같이 생각하나 전통적인 교회에서 이탈하는 사람은 결국에 가서는 예수와는 끊어지게 됩니다. 셋째, 세속적 요구, 혹은 주변 일의 압력에 굴복한 사람들, 물질적인 욕구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회적 압력에 타협하고 마는 사람은 결국 예수와는 끊어지고 맙니다. 넷째로, 기독교 가정이나 기독교 학교같은 분위기 속에서 자라나면서 기독교에 만성이 된 사람 가운데 뒤에 가서는 예수와 끊어지게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다른 무엇보다도 나와 예수의 확고한 연결(connection)이 기초를 이루어야 합니다. 인간은 왜 예수와 관계(connection)를 가져야만 합니까? 예수는 그리스도 즉 메시야,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코넥션(connection,예수를 믿음)은 바른 신앙을 가지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성경은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를 주정꾼으로, 모세의 교만을, 다윗의 자기자랑을, 삼손이 여자에게 약한 것을, 엘리야의 겁 많음을, 야고보와 요한의 이기주의를, 베드로의 일관성 없음을, 바울의 참을성 없음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비록 예수가 시험을 받기도 하고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세상 재판을 받은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그의 죄에 대하여는 한 마디의 지적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곁에서 십자가를 지고 그 최후를 목격한 사형수는 "이 사람에게 잘못된 점이 없다."(눅23:41)고 증언하였으며, 십자가를 지키던 로마군 장교 한 사람은 "이 사람은 무죄다."(눅23:47)고 고백하였고, 마가복음 기자는 "대제사장과 온 의회가 예수를 죽일 조건을 찾았지만 한 가지도 찾지 못했다."(막14:55)고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는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배신자 유다까지도 "그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 내가 죄인이로다."(마27:3)고 고백하고 자살하였습니다. 예수는 인간의 역사로부터 배출된 위인이나 성자가 아닙니다. 예수는 오히려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즉 삼위일체의 신으로 증거하는 기사가 신약에만도 22회나 증언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코넥션(connection,예수를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함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떠난 서글픈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하는 비장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요6: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영원한 생명이 예수에게 있기 때문에 예수 코넥션(connection,예수를 믿음)은 불가결의 생애라고 하는 것이 베드로의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는 생명보험에 가입함으로써 안도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 생명보험은 죽은 다음에 유가족들이 받는 것이므로 생명 보험이 아니라 사망보험이라고 붙여야 옳습니다. 진짜 생명 보험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보험료는 무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보험료는 날마다 지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문호 빅톨 유고는 70세 생일에 쓴 메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머리엔 겨울이 왔으나(백발이 되었다는 뜻) 내 가슴엔 영원한 봄을 느낀다. 마지막 시간이 가까울수록 저 우렁찬 영원이라고 하는 제목의 교향곡을 나는 듣는다." 이 노인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은 늙어가지만 그의 정신은 영원한 봄에 살고 있었으며, 그의 영적 귀에는 영원이라고 불리우는 아름답고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코넥션 속에 기쁨으로 머무는 이유는 첫째, 예수만이 예배의 대상,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류의 소망은 오직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룩하신 역사를 보아 그가 이끄는 천국건설의 대열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영원한 참된 생명이 예수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할지라도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심지가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통한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최후의 만찬'의 그림을 그린 한 미술가가 경험한 무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그림으로서 그것을 그리는 데는 많은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모습의 모델을 찾아다니다가 뛰어난 아름다움과 순결의 용모를 지닌 한 젊은이를 발견하고 그를 예수로 그렸습니다. 그림이 조금씩 채워져감에 따라 제자들이 차례로 그려졌습니다. 드디어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가롯 유다의 얼굴 모습을 가진 모델이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도시의 빈민들의 소굴과 사악한 무리들이 사는 방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드디어 그는 너무나 타락하고 사악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가히 유다의 모델로 그릴만한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다 끝난 후에 그 사람은 미술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전에 나를 그린 적이 있습니다." 그 미술가는 대답했습니다." 천만에 그럴리 없는데." 그 사람은 다시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지난번에 당신은 나를 그렸습니다. 당신은 나를 그리스도로 그렸지요."라고 했습니다. 세월이 무서운 타락을 초래했습니다. 이상에는 언제나 무서운 위험이 존재해 있습니다. 세월은 잔인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세월은 우리의 이상과 정열과 꿈과 충성심을 모두 빼앗아 갈 수가 있습니다. 세월은 점점 축소될 뿐 성장해 가지 못하는 인생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세월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시들어갈 뿐 성장되지 못하는 심정을 줄 수 있습니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세월이 아무리 여러분을 속인다 할지라도 예수와 끊을 수 없는 코넥션(connection)을 가지시므로 진선미의 아름다운 생애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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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신앙과 하나님의 뜻

"(요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7: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요7: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요7: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요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7: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요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요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7: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요7: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요7: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요7: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요7: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요7: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요7: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요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요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요7: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요7: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요7: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요7:23)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요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미국의 유명한 상원의원이요 현명한 정치가인 다니엘 웹스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심은 온 의회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을 정도였습니다. 즉 그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고 상부의 명령이 있을지라도 주일날엔 반드시 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시내에는 크고 으리으리한 교회가 많이 있었으며 그곳에 가면 정계나 경제계 등에서 활약하는 유명 인사들과 접촉할 기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골의 조그마한 교회를 다닙니다. 차를 타고 두 세 시간 거리에 있는 그곳을 한 주일도 거르지 않고 가족과 함께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웹스터에게 물었습니다. "다니엘 웹스터씨, 당신은 왜 이곳 워싱턴의 저 쟁쟁한 목사들의 설교를 듣지 않고 가난한 시골 교회 목사 설교를 들으러 가십니까?" "아, 그건 다름이 아니라 여기 워싱턴에서는 저들이 명망 있는 개인 다니엘 웹스터를 보고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 시골 교회 목사는 죄인인 다니엘 웹스터를 보고 설교를 합니다."라고 그는 설명을 했습니다.

"(요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인물됨이나, 그 사람의 지위나, 그 사람의 지식의 과다나, 그 사람의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 그 사람의 선행, 공로 등의 외모를 보시고 판단치 않으시고 그 마음에 예수 믿는 신앙 여부를 보시고 심판하십니다.

예언자 사무엘이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먼저 있던 제사장 엘리는 이미 98세로 은퇴하고 시력을 잃어 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불행히도 이 두 젊은 영도자는 드물게 보는 악당으로서 종교와 정치적 권력을 악용하여 재산을 긁어모았고 식은 밥먹듯이 거짓말을 하여 국민을 속였으며 여인들을 성전에 끌어들여 간음하는 등 악행은 날로 심해 갔습니다. 이러한 지도자의 영향은 그대로 국민에게 퍼져 민족의 장래는 암담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블레셋 민족과 전쟁이 터졌습니다. 블레셋은 북유럽에서 이주해 온 민족으로 그 이름을 따서 지금까지 이 지역을 팔레스틴이라고 부를 정도로 강력한 민족이었습니다. 이 블레셋과의 첫 번째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크게 무너져 무려 4,000명의 전사자를 냈습니다. 큰 쇽크였습니다.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한 민족의 아픔이었습니다. 장로들 즉 각료들이 모여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삼상4:3)....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대단히 좋은 질문입니다. "전투에 결함이 있었을까?" "군비가 부족했을까?"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패하게 하셨을까?"하는 질문은 '나'와 '하나님의 믿음의 관계'에서만 나올 수 있는 질문입니다. 나의 생활 전반에 걸쳐 종종 이 질문을 하고 해답을 얻어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 직업을 주셨을까?" "왜 나에게 실패의 쓴잔을 마시게 하셨을까?" 나의 생활, 나의 인생, 내가 당하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찾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새 출발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함으로 자손만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본래 자기가 이스라엘 노예의 자식이었으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애굽의 왕실에서 성장하고 고등교육을 받게 된 것이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임을 알고 민족 해방 전선에 용감히 나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밤낮 서너 가지 병에 시달리는 허약한 몸이었으나 이 육체의 가시가 자기의 교만을 부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하게 하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하여 세계로 뻗어 가는 복음의 초대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인물들의 공통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질병에 시달릴 때나, 감옥에 갇힐 때나, 아기를 낳았을 때나, 일이 잘 될 때나, 실패했을 때나, 전쟁을 겪을 때나, 재난을 당했을 때나, 기쁜 일이 생겼을 때나, 슬픈 일을 만났을 때 넓은 안목으로 그것이 주는 의미를 찾아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사건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알려준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패하게 하셨을까?"하는 신앙적인 좋은 질문을 가졌던 그들의 해답은 참으로 실망을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상4:3)...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언약궤라는 것은 모세의 십계명판이 들어있는 낡은 궤짝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여행할 때 선두에 두었었고 요단강을 건널 때나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도 언약궤를 앞세웠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믿어 온 것입니다. 지금 <실로>라는 마을에 내버려둬 까맣게 잊고 있던 언약궤를 가져오자는 아이디어는 하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빛나는 과거>에 의지하는 심리적인 처사였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제멋대로 사는 그들이 나팔을 불며 실로에서 행진해 옵니다. 물론 최고 영도자인 홉니와 비느하스 형제가 자신의 추잡함과 배신과 모독은 의젓하게 숨기고 언약궤 앞에 서서 의기양양하게 행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 기독교인의 생활에는 없습니까? 언약궤만 짊어져다가 동네 복판에 놓으면 하나님이 복을 내려 적군을 전멸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창조자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과 신뢰의 관계를 맺는 신앙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드디어 언약궤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그 낡은 궤짝이 당장 큰 기적을 일으킬 것을 공상하며 신이 나서 함성을 지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이상한 함성을 들은 블레셋 군대는 즉시 대공격을 감행하여 둘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3만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한 것입니다. 겸하여 요술 상자처럼 생각하던 언약궤까지 약탈되고 말았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채찍질도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패배와 실패와 고통의 경험을 주어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맺은 사람은 그러한 역사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무기력하게 원수의 손에 넘어가 고통과 죽임을 당한 십자가가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그 비극 속에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가 숨어 있는 것을 우리 개인의 생활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신앙의 진리인 것입니다.

"(히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 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뜻을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옳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의 하시는 처사가 다 옳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나는 건강해야 될 사람인데 왜 병들게 하십니까 하며 반항을 하면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으로 상대방이 100% 다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다소 불만이 있고 아픔이 있어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의견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굽혀 보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믿음과는 정반대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7: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요7: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요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초막절은 유대인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로서 12살 이상의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큰 명절입니다. 예수의 형제들은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의 능력과 지혜와 권능을 시골에서 묻혀 있게 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깜짝 놀라도록 기적을 보여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의 오병이어의 기적, 물위를 걸어가시는 기적,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능력 등 예수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능력과 권능으로 옛날 솔로몬, 다윗, 모세 등과 같이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줄 것을 기대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들에 대하여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말함으로서 그들이 분명히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저들의 요구대로 예수의 능력과 권능을 나타내기를 거절하고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의 뜻과 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마음(하나님의 뜻)에 품은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지적하는 믿음은 십자가 중심의 신앙입니다. 십자가를 제쳐놓고는 바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안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권능을 믿는 것은 마귀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에게도 그런 신앙은 있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신앙은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한 마디로 하면 "믿음이란 고난의 메시야(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눅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눅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눅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의 고난의 길을 함께 하는 데 진정한 신앙과 그에 대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십자가 앞에 자기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밀알 하나가 썩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과 같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아 죽고 썩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요7: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져야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있습니다.

"(전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3: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십자가를 져야 할 바로 그 때, 즉 주님의 때에 나도 함께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가 주님의 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때를 정하고 환경을 정리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시간 그 길에 나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길입니다. 흔히 기도의 응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좋다, 그대로 하라."는 응답이고, 둘째는 "아니다", 그리고 셋째는 "기다려라"는 응답입니다. 기다리라고 하시면 얼마든지 기다려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응답이 있음을 알고, 십자가 안에서도 응답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내게로 향하신 모든 응답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만 합니다. 또한 성결한 생활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실로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기엔 너무나 위대하고 광대한 것이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감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28: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일찍이 예수께서도 "(마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실수 투성이인 인간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한다면 이보다 더 행복된 삶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이루어나갈 때 이 땅에서 온전한 평화를 얻으며 하나님의 약속한 기업을 유업으로 상속받게 되는 영원한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질상 이기주의적이며 자기 중심주의적인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예수께서 본문에서 지적하셨듯이 "자기 영광만 구합니다."

"(요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인간의 탁월한 교육이나 지성은 나름대로 훌륭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이기적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에 정통해 있었던 유대교 지도자들까지도 예수를 죽이려고 온갖 시도를 다하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순종하고 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담의 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인간의 타락한 의지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다만 순종함으로서만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참 기쁨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설교가인 로버트슨(F.W.Robertson)은 "순종은 영적 지식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점점 더 하나님을 거역해 가는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바른 신앙을 갖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요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행하려 하면', 즉 순종하면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서 노력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하나님께 복종시킬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은 영적 분별력의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자신의 의지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갖고 주님께 순종하려 하지 않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가르치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나와 내 가정과 그리고 이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으로 시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바른 신앙을 가지시며,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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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생수의 강

"(요7:25)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요7: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요7: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요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7: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7: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요7: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요7: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요7: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터인가 (요7: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요7: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7: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요7: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요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요7:43)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요7: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요7:45)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요7: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요7: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요7: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요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요7: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요7: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요7: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요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음악가 모짜르트가 한 번은 어느 도시를 지나가다가 어느 집 문 앞에 걸린 한 간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짜르트 연구소"라는 눈을 정지 시킬만한 간판이었습니다. 누가 자기를 연구하기 위해서 연구소를 내었구나 생각하고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거기에 많은 음악 교수들이 모여 세미나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짜르트의 곡목을 나열 해놓고 누가 연구 발표를 합니다. "이 곡은 작곡할 당시 모짜르트가 어느 여인을 사랑하다가 실연을 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고 비통한 마음으로 쓴 곡입니다." 모짜르트가 뒤에서 가만히 듣고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가 손을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모짜르트는 그런 일이 없었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 곡의 내용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그랬더니 적어도 대 음악가, 대 교수가 음악을 해설하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근거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느냐는 눈치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중요하지 않은 몇 가지 지식으로 예수를 아는 척했습니다만 사실은 정말 알아야 할 사실을 몰랐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가면서 여러 교수들과 함께 성경과 신앙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교육심리학을 전공하신 교수는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성경과 신앙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경제학 교수는 경제학 분야에서 성경과 신앙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정치학 교수는 정치학의 눈으로 성경과 신앙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사회학 교수는 사회학의 관점에서 성경과 신앙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건축학 교수는 건축학의 안목에서 성경과 신앙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을 위해서 제가 한 기도는 사도 바울의 눈의 비늘을 벗겨서 바로 예수를 볼 수 있게 하셨듯이 저들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 주옵소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영원한 영적 세계,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만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하고 연구해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과 유대인들은 계속 서로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오순절 성령 강림한 다음에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할 때 마음의 문이 열려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도 보면 루디아는 사도 바울을 만나 잠깐 이야기했는데 당장 성령께서 마음 문을 여시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행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당장 자기 집을 열어놓고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3년씩이나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아직도 마음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역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들에 진리의 영,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어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신령한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수의 강이신 성령이 충만하시어 생명의 말씀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유대인의 3대 명절중의 하나인 초막절(또는 장막절)입니다.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절기의 중요성과 그 절기를 지키는 의식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3대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이 초막절에는 예루살렘에서 32km 이내에 사는 유대인 성년 남자는 의무적으로 참석해야만 합니다. 이 절기에는 그 기간(7일간)이 끝날 때까지 자기 집을 떠나 작은 초막에서 지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절기 동안에는 어느 곳이나 초막들이 들어섰습니다. 즉 평평한 지붕 위에, 가도(街道)에, 시가지 광장에, 정원에, 바로 성전 뜰 안까지도 세워졌습니다.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로 세워서는 안되었습니다. 초막의 벽들은 가지들과 잎으로 되어 있고 그것은 외기(外氣)는 막을 수 있을 정도였고, 햇빛은 막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지붕도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붕은 있어야 하지만 넓게 성기어 있어 밤에는 지붕으로 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게 하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집없이 나그네 되어 머리 위에 지붕없는 초막에서 지내던 때를 잊지 아니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레23:40)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레23:41) 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 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레23:42)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레23: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절기에는 종려나무의 가지들을 묶어 기쁨의 상징인 룰라브(lulab)라는 축제의 장식물을 만들어 매일 할렐(Hallel,시113-118편)을 부르는 동안 휴대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시편 118편 1절의 초두인 "여호와께 감사하라"라는 구절을 낭독할 때마다 이를 높이 흔들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을 표시하였습니다. 이외에도 행해지는 세 가지 공통 의식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매일 아침에 드려지는 헌수식(獻水式)이 있습니다. 초막절 기간 동안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마다 줄을 지어 성전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 행진하였으며 그 못에서 성전 제단에 부을 물을 길었습니다. 물은 장엄한 의식 속에서 길어졌는데, 성문에서는 나팔을 불었으며 순례자들은 할렐을 찬송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제단에 올라가 2개의 은그릇에 물과 포도주를 담았습니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갈증에 시달릴 때 호렙산 바위에서 맑은 샘물을 솟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상기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출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둘째로, 밤에 거행되는 촛불 축제입니다. 제사장들은 초막절 기간 내내 매일 저녁마다 일곱 갈래로 뻗은 4개의 커다란 촛대에 불을 붙여 성전의 전 지역을 밝게 비추었는데, 이는 광야에서 방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밤중에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고 이를 즐거워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때 순례자들은 피리 곡조에 맞춰 횃불춤을 추었고 노래를 불렀으며 이 의식은 거의 밤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셋째로, 예루살렘 성전 동쪽 문에서 거행되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의식입니다. 초막절 기간 동안 제사장들은 새벽마다 성전의 동쪽 문으로 가서 해가 뜨는 순간에 성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서쪽을 향해 서서 다음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성구를 낭송하였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을 경배하였지만 우리의 얼굴은 주께로 향하고 있습니다."(겔8:16)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이란 오랜 기간을 보내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를 수없이 맛보았음에도 이를 잊고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을 숭배하고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였던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많고 허물 많은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을 약속한 땅으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놀랍고 인간이 측량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처럼 그들 조상이 과거에 범한 영적 우매함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겠다는 비장한 결단의 시간을 이 초막절 기간의 새벽을 깨워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지난날의 생애 가운데서 확인되고 체험된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뇌리 속에 항상 간직하고 또한 그 은혜를 때마다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물을 통하여 인간에게 은혜와 축복도 주시지만, 인간이 거역할 때에는 물을 통하여 심판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물이 심판의 의미보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표현된 곳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사라에게 쫓겨나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물이 없어 죽게 된 그들에게 샘물을 주셔서 구원하였습니다.

"(창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창21:15)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창21:16)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창21:17)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창21: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창21: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없이 사흘길을 걷다가 '마라'의 쓴물을 만나게 되었을 때 모세로 하여금 나무를 물에 던지게 하여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출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15: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또한 호렙산 반석에서 샘물을 솟게 하사 광야에서의 고통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출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예수의 음성이 울린 것은 아마도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했던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육신의 갈증을 해소하는 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고 있다. 만일 너희가 너희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기를 원한다면 나에게로 오라."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므로 주께서 주시는 물이 예수 믿는 누구든지 받을 성령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 앞에 나와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은 주시는 축복은 이렇습니다.

"(사58: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은" 성령의 강수가 인간의 몸과 마음, 영혼에 흐르게 될 때 마른땅이 소성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약동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인생의 참된 만족과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에게 오라, 그리고 나를 영접하고 나를 믿으라, 그러면 나는 너희 속에다 나의 영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리라. 그 새로운 생명은 너희에게 청결함과 만족함을 주고, 모든 좌절감과 만족할 줄 모르는 주림을 없이 하며, 너희가 항상 구하여도 얻어 보지 못한 그 새로운 생명을 주리라.'는 말씀입니다. 물이란 것은 그것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 없이는 사람이 살수도 없고 감히 죽음을 무릅쓸 수도 없습니다.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정결케 하고 강하게 하는 성령의 은사가 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생수의 강, 성령의 능력이 충만히 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세계에서 원자력이란 언제나 존재해 있었습니다. 인간은 원자력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항상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야 인간은 이미 존재해 있던 원자력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그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참으로 알지 못하다가 오순절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홍수가 강같이 쏟아진 것은 오순절 이후였습니다. 그래서 "갈보리 없이는 오순절이 있을 수 없다."라는 훌륭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알았을 때 비로소 참다운 성령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을 때 비로소 성령의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과 넘치는 만족, 그리고 폭발적인 삶의 능력을 베푸시는 '생수의 강'이 예수 믿는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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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법과 사랑의 딜레마

"(요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요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요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요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요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미국의 흔한 농담입니다. "2+2의 답이 뭐냐? 고 물었을 때, 수학 이론가는 "3과 5 사이 어디쯤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 대답할 것이고, 계리사는 " 4 입니다."하고 대뜸 대답할 것이고, 변호사는 문을 닫고 아무도 엿듣는이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 " 답을 어떻게 만들어 드릴까요?"하고 말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법과 그 실천은 거리가 먼 것을 풍자한 것입니다. 예수는 율법보다 인간을 더 중요시하셨고 그에 반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보다 율법을 더 우선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는 인간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임을 선언하셨습니다.

"(막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본문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의 죄를 사하신 이야기는 예수께서 세상을 율법에 따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사랑으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처럼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 오셨으며(마5:17),율법을 완성하는 근본 정신은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바리새인의 소위 준법생활에 대한 예수의 공격은 "(마23: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눅11:42)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는 것 등이었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법정신의 초석임을 밝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인 예수를 어떻게 해서든지 체포할 충분한 증거를 얻고자 올무를 놓았습니다. 그들의 올무는 다름아닌 정치적, 종교적 함정이 깔린 간교한 음모에서 비롯된 바, 예수를 율법의 파괴자요, 하나님의 왕권을 침해하는 죄인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음모가 구체화된 것이 바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께 끌고 온 일입니다. 유대 율법의 집성인 미슈나(Mishnah)는 간음에 대한 형벌을 교살로 정하고 그 교살의 방법까지도 규정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분뇨 속에서 무릎까지 흠뻑 둘러싸고 두 장의 수건을 가지고 각각 부드러운 수건은 위로, 거친 것은 밑으로 해서 그 남자의 목에 두른다(형벌은 하나님의 형벌인 고로 흔적이 남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 다음에 두 사람의 사나이가 각각 반대 방향으로 그 남자가 죽을 때까지 잡아 다니게 된다." 간음한 죄는 가장 더러운 죄라 하여 아주 더럽게 죽였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성경에 기록된 간음한 죄에 대한 벌은 온 동네 사람들이 동구밖에 나가서 돌을 던져 죽이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돌무더기 속에 집어넣는 참혹한 극형으로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동네 사람 전체가 참가하는 처형 방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마을에서는 다시 그와 같은 죄가 없도록, 즉 악을 완전히 제거하자는 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3대 범죄는 첫째가 우상숭배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가장 처음 나오는 계명이 우상숭배를 절대 금하라는 것입니다.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우상숭배로 인해 따르는 모든 행위가 더럽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에는 항상 음란한 행위가 뒤따랐던 것입니다. 둘째는 살인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존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권을 침해하거나 인간의 생명을 침해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세째는 간음죄입니다. 이 세 가지 범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절대로 없도록 하자는 것을 하나님의 법 정신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간음이란 남녀 간의 불법 성교를 뜻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주변 이방인들의 우상숭배하는 국가들은 다산 종교에 의해 성적 방종을 널리 허용했으며 심지어 제사 의식을 통하여 이를 장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하여 간음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간음죄의 행위를 더욱 확대시켜 마음으로 범하는 음욕까지도 간음죄로 정죄하셨습니다.

"(마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같은 개념은 다시금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도 적용되는데, 곧 하나님을 숭배하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 간음인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렘3: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예수께서는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혼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다시 말해 남편이나 아내가 간음했을 때만이 이혼이 가능한 데 이는 간음한 사람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마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처럼 간음은 중범죄로서 율법을 적용시키면 이 간음한 여인을 처형하는데는 사실상 예수님의 동의는 필요없는 것이었습니다.

"(신22:21) 처녀를 그 아비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 아비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신22:22)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신22: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신22: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자만을 예수께로 끌고 왔습니다. 그들이 노리는 함정은 예수가 여인을 용서하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율법의 권위와 가치를 무시하게 되거나, 여인에게 죽음을 선고함으로서 자신의 사랑의 메시지를 포기하게 만드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원칙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음으로 예수가 만약 사형을 선고하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총독의 권한 침해라는 구실로 그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모든 죄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힘쓰신 예수님이시지만, 유대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고 갖은 음모와 계책을 감행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눈은 어두움에 가리워져 있었으므로 진리에 대한 무지한 영적 소경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법대로 하자면 간음한 여인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하며, 또한 사형을 선고하게 되면 로마법을 침해하게 되어 고발당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그 여인을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하면 유대의 율법을 위배하는 것이며 예수의 사랑의 정신은 무력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법과 사랑의 딜레마(dilemma)'에 몰아넣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딜레마를 두 차레에 걸친 초월적인 지혜의 행위와 말씀으로 간단하게 해결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판결은 죄없는 자가 돌로 쳐죽이라는 법의 집행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증인이 먼저 죄인에게 손을 대어 그를 죽게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13:9) 너는 용서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신13:10)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한 자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

"(신17:7)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법에 따라 처형을 하되 처형하는 자 스스로가 죄없는 자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는 일 없이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그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돌을 던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 정신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돌을 던져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는 심판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돌을 던지므로 나로 하여금 그와 같은 범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계입니다. 한 사형수가 단두대로 끌려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 대신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형을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단두대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단두대에 올라가려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에서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사형당하기 전에 할 말이 있으니 잠깐만이라도 임금님을 뵙게 해 줄 수 없겠소?"이제 곧 죽을 사람의 마지막 소원인지라 알현이 허락되었습니다. 임금님 앞에 선 그 죄수는 다짜고짜 품에서 금덩어리 하나를 꺼내 그 앞으로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 금덩이는 보통 금덩이가 아니라 죄없는 사람이 심으면 싹이 나서 나중에는 금덩어리 열매가 열리는 진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죄인이므로 심어도 소용이 없고, 또 이제 곧 죽어야 하니까 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죄 없으신 임금님께 바치고 세상을 떠나려 하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하게 금덩이를 받아들은 임금이 생각했습니다. '나도 죄가 있으니 심어도 싹이 안 나올거야, 또 만일 심었다가 싹이 나오지 않는 날에는 백성들에게 임금님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것이 아닌가?' 임금은 얼른 금덩이를 옆자리의 대신에게 넘겨주며 심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가 싶더니 옆에 있는 다른 대신에게 또 다시 얼른 넘겨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금덩이는 자꾸만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밀려갔습니다. 결국엔 누구 하나 심으려는 자 없이 핑계만이 무성해졌습니다. 이 광경을 본 죄수는 "이 중에도 죄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죽이려 하십니까?"하면서 자신의 무죄함을 거듭 호소했습니다. 그의 호소에 임금 이하 모든 대신들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결국 이 죽을 죄인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흩어졌습니다.

"(요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이 때,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8:10)...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간음한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돌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를 정죄치 않으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같은 예수의 행위는 자신을 죄인으로 동일시(Identification) 한 것입니다. 나는 의롭다고 의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을 사랑하셨으므로 스스로 죄인의 위치에 앉으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같이 낮아져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감상적이거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사랑하려면 나도 죄인과 동일시 되어야 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에게 이어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는 전제하에 사죄를 선언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임을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마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러나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은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죄의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간음한 여인을 죽음의 깊은 어두움 가운데서 예수 앞에 이르게 하였으나, 율법의 완성이시며 사랑의 실체이시고 세상의 빛이신 예수는 그 여인에게 새로운 생명과 빛으로 축복하셨습니다. 여인의 간음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그 죄값을 자신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치루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 새로운 삶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법과 사랑의 딜레마를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시며 의롭게 하시는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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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진리와 자유

"(요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3)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요8: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요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요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요8: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요8: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요8: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요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8: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요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요8: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요8: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요8: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8: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요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본문 12절에서 예수는 자신이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자신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화초가 태양 빛을 전혀 받지 아니하고는 꽃을 피울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들의 생명도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시는 빛으로 비취일 때까지는 아름다운 향기나는 꽃을 피울 수 없는 것입니다. 사울(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비취는 체험을 통해 복음의 향기와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삶을 살았습니다(행9:3).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쳐 예수께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빛이신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지 아니하는 불순종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안개 낀 날, 죠지 뮬러(George Muller)가 배를 타고 가는데 정시각에 도착할 것 같지 않아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에 선장은 염려하며 말하기를, "당신은 이 안개를 봅니까?"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안개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안개는 사라지고 배는 정시각에 도착되었다고 합니다. 루터(Luther)가 하나님을 보았을 때 로마 천주교가 떨었습니다.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하나님을 보았을 때 미국에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요한 낙스(John Knox)가 하나님을 보았을 때 스코틀랜드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존 웨슬레(John Wesley)가 하나님을 보았을 때 영국이 부흥하였고 세계가 그의 교구가 되었습니다. 누가 이 생명의 빛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생명의 빛을 받아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다 영적으로 어두워서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만이 생명의 빛을 받아 하나님을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 참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국기의 날"(Flag Day)이 있습니다. 6월 14일입니다. 1777년 6월 14일 존 아담스 대통령이 필라델피아에서 모인 의회에서 성조기가 국기로서 의결됨을 선언하였습니다. 성조기는 세 개의 색깔을 썼습니다. 줄무늬는 빨강과 흰 색,별들은 푸른 바탕에 흰 별입니다. 모양보다는 색깔에 의미를 두었다고 합니다. 흰색은 정결, 빨강은 용기, 파랑은 정의입니다. 이 세 개의 덕목으로 표시된 미국의 건국정신은 모두 자유와 연결됩니다. 정의는 자유의 기초이며, 용기는 자유 성취의 방법입니다. 정결은 청교도 미국 개척민의 생활신조로서 기독교적 영향인데 죄와 악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합니다. 결국 성조기는 자유의 깃발이라고 할 수 있으며 미국이란 여러 이민들이 모여 자유라는 공동목표를 함께 이룩하고 함께 지키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성조기에는 한 마디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정결'과 '정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용기'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요8: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과연 미국은 진리가 자유케 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란 스스로 싸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 예수는 위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요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다시 말해 참 자유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노력하고 투쟁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자유란 먼저 진리가 되시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세상에는 자칭 예수의 제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라는 고백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느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여기 '거한다'는 말은 집안에 거하는 것처럼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 말씀 안에서 안식을 취하고, 말씀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말씀에서 힘을 얻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진리로서 받아들일 때, 생명의 말씀으로 믿을 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첫째, 예수의 말씀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 때까지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예수의 제자됨은 예수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셋째, 진리의 말씀을 끊임없이 통찰하는 생활이 제자됨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예수의 말씀을 단 한 번 듣는다든가 읽는 것으로서 그 완전한 뜻을 알고 있다든가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직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일에 대해서 그 뜻이 자기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배우고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넷째, 예수의 제자됨은 그 분의 말씀을 끊임없이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행동할 수 있게끔 배우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면 진리를 바로 알게 됩니다.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어질 때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며, 삶의 올바른 목표와 가치관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를 통해 얻어지는 진리는 분별의 지혜와 능력이 있어서 선악을 바로 분별하며 무엇이 참으로 중요하며 무엇이 중요하지 아니한가를 판별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자유함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진리가 가져다주는 자유는, 첫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입니다. 워싱톤에 가면 링컨이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속에 손때에 이겨져 눌린 손가락 자욱이 있습니다. 여러 번 같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생긴 자국입니다. 그곳은 시편 34편 4절입니다.

"(시34:4)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링컨이 남북전쟁과 그의 평생에 걸친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대답해 주신다는 확신과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음이 눌린 자국까지 나도록 되풀이 되풀이 읽은 시편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진리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모든 두려움과 심리적인 갈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청년의 수가 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남편을 일선에 내보내고, 염려와 불안과 근심가운데 빠져 심장병으로 죽은 미국 시민들이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총탄이 사람을 꿰뚫어 죽인 수 보다 불안과 공포가 죽인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시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둘째, 진리는 자아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현대를 가리켜 위기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 위기는 무엇보다도 자아를 상실하고 자기 소외의 틈바구니 속에서 점점 인간이 비인간화되어 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정신적인 질서가 파괴되고 인간의 존엄성과 품성과 모든 권위를 상실한 채, 문명과 역사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한 나그네와 같은 나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위기입니다. 어느 철학자는 말하기를 "오늘 현대인에게는 두 가지 병이 있는데 하나는 자아를 잃어버린 병이요, 또 다른 하나는 자아를 잃어버리고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병이다."라고 했습니다. 의과대학에 자기를 팔아 넘긴 어떤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이 젊은이는 의과대학의 생리학 교실에 가서 자기가 죽으면 생리학의 표본으로 자기를 이용토록 팔아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다 탕진한 다음에, 이번에는 해부학 교실에 가서 심장, 간장, 위장 등 자기의 모든 기관을 시험물로 사용토록 팔았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는데 햇빛에 자기 그림자가 비쳐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청년은 그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이제 다 팔아버렸는데 너는 도대체 누구의 그림자냐?"고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젊은이는 "이중 매매죄"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재판장의 형이 언도되자 그는 "재판장님, 이 형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다 팔아버렸기 때문에 나는 내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최대의 곤란과 최대의 적은 바로 자기의 자아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로 많은 사람들이 절망가운데서 외치고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내가 애써 보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보내신 성령으로써만 자신의 자아를 참된 자아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셋째, 진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까?' 등 남을 의식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목소리보다도 이웃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면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 안에 거하게 되면 남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면 그것으로 족하게 됩니다. 진리가 임하게 되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보다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에 집착하게 됩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넷째, 진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현대인의 병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의식이 둔감하거나 결여되었다는 것입니다. 19세기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가리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병을 치유하지 않고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저명한 인사 12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꼭 같은 전보의 내용을, 주소, 성명을 밝히지 아니하고 받는 사람에게만 전보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모든 것이 드러났다. 빨리 도망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12사람은 각각 "모든 것이 드러나 버렸다. 빨리 도망가라."는, 누가 보낸지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 내용만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12사람의 집을 방문해 보았더니 다 도망가 버리고 없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보냈는지 모르지만 전보를 받고 보니깐 무엇인가가 걸리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 그것이 드러났다는 말이구나, 빨리 도망가라고 했으니 얼른 도망가야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요일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진리가 임하게 되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회개의 영이 임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였습니다 자기 서재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종이에 가득 쓴 것을 루터에게 보여 줍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 본 루터는 기가 질렸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맥이 탁 풀렸습니다. 자기가 오래 전에 지은 죄를 낱낱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리기까지 했던 죄를 다 적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마귀는 그 뒷면을 또 보여 줍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요사이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귀는 비웃는 얼굴로 루터를 향해서 "이 기록이 모두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루터는 "그렇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마귀는 루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런 더러운 녀석이 무슨 종교를 개혁해? 너나 좀 바로 살아! 너 이 죄값을 어떻게 할래?" 이 때 루터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힘없이 앉아있는데 뒤에서 분명히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있었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를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루터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새 힘을 얻어 크게 외치며 책상에 놓여 있던 잉크병을 들어 벽에 던졌습니다.

"(롬8:1)...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 때 마귀는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진리가 임하게 되면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망을 가져오는 죄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남아프리카 강가의 갈밭에 오리들이 많이 노는데, 그 지방 아이들이 오리를 많이 잡는다고 합니다. 그 잡는 방법은, 호박 속을 파내버리고 강 상류에서 떠내려보낸다고 합니다. 그 호박이 떠내려올 때 오리들은 처음에 이상히 여겨 멀리하다가 얼마 후에는 그 위에 올라앉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저희 머리를 호박(그 속을 파내고 내다볼 구멍을 냄) 속에 넣고, 강물 속에 몸을 잠그고 내려간다고 합니다. 그 때에 오리들이 와서 그 호박 위에 앉으면, 아이들은 재빨리 그것을 잡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죄악은 영악하게 사람을 점점 유혹하다가 나중에는 사망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성령이 생활을 지배하게 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죄와 그 죄가 가져오는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가지게 됩니다.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심한 불안을 느끼고 속박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칼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 환경은 외부적으로는 안락과 편리함 그 자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너무나 부패해 있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죄악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일컫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러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허물과 죄에 얽매여 사탄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노예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아무런 자격도 권한도 없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그 분의 능력을,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권능을 힘입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겉으로는 현대 과학 문명으로 인간의 삶이 자유한 것 같으나 내면적으로는 더욱 더 진리(예수 그리스도)와 멀어져가고 있으며 아울러 참 자유를 상실한 채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여 참 자유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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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빛과 어두움

"(요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요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요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요8: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요8: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 (요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8: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요8: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요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요8: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요8: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요8: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요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요8: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8: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요8: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요8: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8: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본문을 유념하여 보면 대조적인 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유'와 '종','진리와 거짓'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비와 음모, 살인 책동에도 끝까지 '빛'에 거하시는 '진리와 자유'의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하며", "진리"를 죽이려는 어두운 모습의 '죄'와 '율법'의 '종', 유대인들을 대조하여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흥사가 지방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대접을 잘 하면서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기 전에 먼저 제 말을 듣고 설교를 하셔야 합니다. 먼저 주초 문제는 공격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는 군인 가족이 많고 또 이 고장이 담배 생산지여서 온 교인이 담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또 수석 장로님이 양조장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축첩 문제는 거론하지 마십시오. 이혼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잘못 말씀하면 쫓겨나니까 그저 은혜 많이 받으라고 하고 복 많이 받으라고 하는 설교를 하십시오." 예수께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거침없이 책망하십니다.

"말만 많고 행함이 없는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아브라함처럼 대접하기는커녕 오히려 죽이려 하는도다. 너희는 내가 말하는 진리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니 마귀의 자식이요, 살인한 자요, 거짓말쟁이로다. 귀신들린 것은 바로 너희들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도무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로다!."(39-47절)

예수는 이 세상에 오셔서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보다 더 훌륭하게 가르치시는 예수를 존경하고 그 분을 따를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뚜렷한 주관도 없이 그저 덤덤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면서 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호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잘못을 보고도 지적하지 않고 적당히 넘기는 사람을 덕있는 사람이라 하고 존경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성도는 호인이 아니라 불의를 향해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의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위기를 무릅쓰고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마귀의 자식이라고 소리치면서 바른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살아야지 절대로 호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의 정치학 교수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조선일보,1994.7.24.時論).

"한국 사회는 주사파(主思派) 때문에 오래 전부터 진통을 겪어 왔고, 특히 대학사회의 무질서와 혼란은 80년대나 90년대나 풀림이 없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혼란스러움에 관한 한 우리 대학들은 모두 획일화 되어있다. 어디든 대학이라는 이름만 붙은 곳이면 으레 해괴한 구호들이 난무해 있다. 뭐든 규탄하고 뭐든 부정하고 뭐든 매도하는 방(榜)들이 구내 요소 요소에 붙지 않은 곳이 없다. 무당 굿하는 데서나 볼 수 있는 울긋불긋한 천들의 플래카드, 지식인 티라고는 어느 한 군데도 찾아 볼 수 없는 이상한 몸가짐이며 목소리들-- 그것이 예나 이제나 조금도 변화없이 횡행하는 곳이 한국의 대학이다......(중략)...지적으로 황폐하고 정신적으로 왜곡된 이들을 어떻게 대학이라는 이름의 광장에서 활보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대학은 지(知)를 창조하는 곳이고 정신을 세우는 곳이다. 그런데 정반대로 지(知)를 후퇴시키고 정신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대학을 주름잡고 대학을 사유물화하도록 우리는 방치해두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 대다수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우리 대다수 교수들이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를 보인데서 연유한다. 심지어 침묵하지 않는 지식인, 관여의 의지를 보인 교수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들은 그들대로 분열하고, 그들대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제 지식인은 지식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지식인 본연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지식인은 본연은 시(是)를 시(是)로, 비(非)를 비(非)로 가리는 정신이다....(중략)...어째서 선생이 학생을 꾸짖고 학생에게 벌을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어째서 지식인이 잘못을 규탄하는데 인색하고 주저하는가. 설혹 두렵고 주저스러워도 어느 한 지식인의 용기있는 목소리를 따라가는 용기쯤은 가져야 한다." 그는 또한 지식인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어느 나라든 지식인은 분열돼 있고, 어느 나라에서든 지식인은 용기가 적다. 지(知)는 각기 추구하는 것이어서 추구하는 사람 저마다 같은 소리를 내기는 어렵다. 지(知)는 또한 용(勇)과 분리돼 있는 것이어서 용기를 가진 지식인은 어느 사회나 많지 않다. 지(知)의 분열과 지(知)의 무용은 지식인의 속성이다."

대학에서 말하는 지식은 인간의 생활을 위한 지식에 불과한 것이지 생을 걸만한 영원한 지식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력이 없는 지식은 무력한 것입니다. 진리는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합니다. 진리는 빛이기 때문에 빛이 비추이는 곳에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식인, 지성인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zia)는 빛과 진리,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계층입니다. 예수 믿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를 사수하며 믿음의 용기를 가지시는 여러분들이 진정한 의미의 이 나라의 지성인요, 지식인들입니다. 헤롯 대왕의 부정과 부패, 음란을 신랄히 비판하며 책망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세례 요한, 그는 비록 참수형을 당했으나 예수께서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인권이 유린당하는 나라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미국에 진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비를 바르게 분별하는 사명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지성, 피와 땀으로 고투를 이겨내는 지성, 그리고 거짓과 속임과 혼탕물이 아닌 순수한 지성, 역사가 토인비(Toynbee)의 말을 빌리면 "기독교의 공기를 호흡하는 지성"이 이 시대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아부하는 지성, 어리뻥뻥한 양비론(兩非論)의 지성이 아닌 정의 앞에 순교를 각오하면서 의를 사모하는 지성,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빌3:8) 지성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현대의 과학주의적 지성들은 시편 23편을 다음과 같이 변조시키고 있습니다.

"과학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문명의 요람에 눕게 하시며

눈부신 네온 가(街)가로 인도하시도다.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기계가 나와 함께 있음이라.

물질의 지팡이와 쾌락의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도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 문명은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화 시켰습니다. 참으로 오늘의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한 기계의 노예와 혼을 잃은 기능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영혼이 쉴만한 푸른 초장을 잃은 지는 오래입니다. 과학 문명이 이 시대의 빛이 아니라 인간성과 그 영혼에 어두움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지성들은 인간의 목마름은 잘 지적하고 있지만 생수를 주지 못하고 있으며, <갈보리산>에 오르기는 했지만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국민학교에서 있었던 일인데, <동물의 생태> 시간에 책상 위에 고양이 한 마리를 놓고, "암컷이냐? 수컷이냐? "고 여선생님이 물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선생님! 투표해 보면 압니다."고 대답했다는 풍자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50%+1명=진리>가 되는 숫자의 비극이 있습니다. 또 이것이 민주주의의 산술이요, 민중의 소리인 동시에 신의 음성입니다. 따라서 현대의 지성들이 마치 성경의 빌라도 경우처럼, 머릿수를 헤아림으로서 진리를 판가름 하다가 <참 진리>를 교수대에 세워버리는 오류를 버릇삼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바>를 놓아주고 <메시야>이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큰 소리>에 자라목이 되어버린 현대지성의 시대입니다. 세상의 소금(마5:13)이 되는 지성, 세상의 빛(마5:14)이 되는 지성, 진리 앞에서는 아부를 모르고,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빌4:18) 같은 지성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정의와 진리에 헐벗고 굶주린 이 백성들에 대하여 어떤 사명감을 뼈저리게 자각하며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8:5), 그러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으로 삼는 지성이 이 나라 민족의 새 시대를 창조하는 참된 지성인 것입니다.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의 지성이 참으로 아쉬운 시대입니다. 한번도 꺼져본 일이 없는 빛, 유일한 빛, 곧 생명의 빛(요8:12)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 나라 민족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시온의 아침을 여는 지성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마10:26)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고, 그 진실을 왜곡한 악한 세력의 음모가 반드시 백일하에 드러날 터이기 때문에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시비를 가려냅니다. 그는 분명히 그러한 때를 약속하셨습니다. 만약 그러한 때가 없다면 목을 걸고라도 진실과 참을 추구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이란 실은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가장 불쌍하고 가장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알곡과 가라지를, 쓸 것과 못 쓸 것을 가리듯 진실과 거짓을 밝힐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므로 마치 모순과 어두움이 영원히 지속되기나 할 듯이 그렇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헨리 왕이 임석한 자리에서 파티머 감독이 설교하려고 단 위에 섰을 때 어떤 감독 하나가 "헨리 왕이 임석했으니 주의하시오" 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러나 또 그는 동시에 "파티머야, 만왕의 왕이 여기 계시니 주의하라!"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더 이상 헨리 왕의 비위를 맞추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비겁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리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즉 의인의 계보를 통해 세상 역사를 창조해 가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시대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사람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혹독하게 질책합니다. 마귀는 본질적으로 살인자입니다. 악의 특질은 파괴하는 일에 있습니다. 진리를 미워하고 진리를 파괴하려는 것이 마귀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마귀는 또한 거짓을 사랑합니다. 허위적인 언사, 거짓된 사상, 진리를 왜곡하는 것, 그리고 거짓말 등은 그 모두가 마귀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미워하고 증오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들을 줄 모르는데서 비롯됩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고발한 것은 그들의 생각이 언제나 선을 파괴하고 거짓된 것을 옹호하려고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리를 파괴하려고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마귀의 역사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치는 음악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색맹인 사람은 그림을 감상할 수가 없습니다. 리듬 감각이 없는 사람은 발레나 댄스에 흥겨울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매우 놀라운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두 가지의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그 영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영은 인간이 진리와 마주칠 때 그것을 인식하고 이해하겠끔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인간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리와 마주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수가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또한 그것은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에 따른다고 하면 영은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비록 진리가 그의 목전에 충분히 제시된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볼 수도 인식할 수도 없으며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할 수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너희는 제멋대로의 길을 갔다. 너희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따랐다. 너희들은 자기들 나름의 하나님을 만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들 마음속에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너희가 나를 인식할 수 없는 것도 그리고 나의 말을 듣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 위기를 폭로한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의 저서, "빛의 자식과 어두움의 자식"(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에서 '어두움의 자식'은 모든 일과 행동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꾸며 나가는 모든 사람, 남을 사기하고 협작하는 일은 물론이지만 남을 도와주는 척하면서도 그것은 결국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머리와 지혜를 쓰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은 마귀라는 세력으로 상징된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은 빛과 생명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빛에 속한 사람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두움에 속한 사람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거짓보다 진리가 더 강합니다. 예수의 부활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었습니다. 빛과 진리를 사랑하는 이 시대의 참된 지성인들이 되시므로 민족사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역사의 주체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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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하나님의 하시는 일

"(요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9:8)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요9:9)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요9:10)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요9: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요9:12)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민비(명성황후)시해 사건(을미사건,1895)을 계기로하여 우리나라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고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정국이 소란해졌습니다. 이틈을 타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친러파인 이범진 등과 공모하여 국가의 상징인 왕을 남의 나라 공사관 밀실에 유폐시켰습니다(아관파천). 이리하여 하루아침에 정치는 친러파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일본의 침략 세력은 일단 견제되었지만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 지하실에서 눈치만 보고 있는 동안에 각종 이권을 챙겨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경인철도 부설권은 미국인 모어스에게, 경의선은 프랑스 사람 그릴르에게 넘겨주고, 함경도 광업권은 러시아 사람 니스첸스키에게, 압록강 유역의 벌채권은 역시 러시아 사람 푸리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 평북 운산 금광은 미국 사람에게, 강원도 금성군 당현의 금광권은 독일 사람에게 넘겨주는 등 이권에 관여하여 막대한 소개료를 착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12년만에 귀국하여 독립협회(1896)를 창립하였습니다. 이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비롯하여 윤치호, 이상재, 남궁 억 등 근대사상과 주체적 개혁 사상을 지닌 진보적 지식인들이 그 지도부를 형성하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과 수구적 지배층의 압제에 불만을 가진 도시 시민층이 주요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국권과 민권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황국 협회를 이용한 무력 탄압과 병력을 동원한 민중 활동 봉쇄로 말미암아 이 독립 협회는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아관파천 1년 만인(375일) 1897년 2월에 고종은 내외의 여론과 독립협회의 자주적 제국 건설 열망에 힘입어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에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친 다음 왕을 황제라 칭하여 자주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고 10월12일 정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한 제국>은 근대화 시책에 실패하고 진보적 정치 개혁 운동을 탄압하여 국민적 결속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외국의 침략을 적극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자체의 힘이 없었으므로 결국 일제에 강점당하는 비운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남진 정책과 대륙 진출을 꾀하고 있는 일본과의 한국에서의 충돌은 아관파천을 계기로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한국을 39도선을 경계로 하여 서로 분활점령하자는 이권쟁탈에 타협이 결렬되자 마침내 광무8년(1904) 2월 6일 일본은 러시아에 최후 통첩을 보내고 10일의 선전 포고에 앞서 8일 인천 근방에서 러시아 군함을 공격함으로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일.러전쟁). 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일본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러시아인들이 공사와 함께 도망하고 13일에는 일본군 5만명이 서울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1904년 2월 23일 한국과 일본은 전문 6조로 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습니다. 이 조약의 내용은 "일본이 한국의 독립과 영토의 보증, 시설의 개선에 대한 권고 등을 비롯하여, 일본군에 적극 협력하고 전략상 필요한 지점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체결된 것이었습니다.8월 23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이 맺어져 이로서 한국 정부의 재무.외무.문교 등의 주요 부문에 일본이 적극 간섭할 것을 승인하게되므로 사실상 일본의 고문통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일본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고 러시아 내부에서는 혁명(불세비키 공산당 혁명)이 일어나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굳어졌습니다. 그리하여 8월 10일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의 중재로 포츠머츠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일.러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 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미국 영국으로부터 한국에서의 정치.군사.경제상의 특수이익을 보장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할 수 있는 확고부동한 발판을 마련하고 만주를 침략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습니다. 러시아.미국.영국 등 강대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받은 일본은 친일단체, 일진회를 조직 포섭하여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 을사조약에 조인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다섯명의 대신이 조약체결에 찬성함으로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1905.11.17). 이들 다섯 명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합니다. 을사조약의 내용은

1.일본 외무성이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및 사무를 통리 지휘한다.

2.차후로는 한국정부가 일본정부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국제적 조약이나 약속도 할 수 없다.

3.한국 황제 밑에 1명의 통감을 두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무를 관리한다. 등이었습니다.

이로써 대한 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잃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사의 치욕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가장 앞장서 망국을 통곡한 것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절실히 기도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전덕기와 정도만의 인도로 상동교회에서 수천 명이 모여 며칠간이나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 당시의 일본 기록에 의하면 전국 교회들은 서로 밀접한 연락을 취하면서 구국기도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을사조약 이후 기독교인들의 애국운동은 기도에서 점차 행동적인 항일 운동으로 방향이 바뀌어져 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무력으로 일제에 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덕기목사는 상동교회 내에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군사훈련을 시키며 구국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상항에서 저격 살해한 장인환, 이완용을 살해하려한 이재명 등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항일 독립운동에 매우 비우호적이었으며 게일목사같은 사람은 "사이비 애국의 미친 듯한 광란이 휩쓸어 자결, 신체절단, 허황한 맹서, 게릴라 의거, 냉혹 무정의 저항이 들끓고 있다." 며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한국 교회를 극도로 모욕하고 비난하는 발언을 일삼았습니다. 존스같은 선교사는 "한국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잘 정리된 법의식과 합법적으로 확립된 권위에의 존경이다."라고 했으며, 고종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헐버트 조차도 한국인의 민족적 이념은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정의를 내리고 "순수한 기독교국이 됨으로서 압제에 대해 도덕적으로 항거하여 인종(忍從)하며 생활의 청결로 뭉칠 것"을 역설하고 모든 압제의 세력은 꾹 참고 고요한 힘에 의해서 정복된다고 설교하였습니다. 국권의 상실에 목메어 울분에 불타는 한국 교회에 대해서 사랑과 인종을 설교한 것이 미국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에 일부 기독청년들은 미국 선교사들이 거만하고 독선에 차 있는데 반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도산 안창호도 선교사들이 한국인을 마치 노예처럼 대한다고 선교사들을 구타한 적도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이 1907년 대부흥 운동을 시도하게 된 것은 한국 교회를 비정치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부흥운동은 얼마가지 않아서 시들어지고 말았습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시작된 의병들의 활동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강력한 항일투쟁의식으로 전국적인 의병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초대 통감 이토가 융희 3년(1909)에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은 더욱 강력한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고 한국 정부는 황제가 친히 통감관저에 나가 통감에게 조의를 표했으며, 3일 동안 노래와 춤을 금한다는 명령과 3일간 철시하라는 조치까지 내렸습니다. 이는 이토를 조상하는 뜻이 아니라 뒤에 닥칠 보복이 두려워 취한 조치였습니다. 그해 12월 4일 이토의 장례가 일본에서 거행되자 한국정부에서는 조문사절을 파견했으나 이들 조문사절은 일본일들의 보복이 두려워 외부 출입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 한국전쟁의 원흉 김일성의 사망을 놓고 조문 시비를 벌이고 있는 정객들과 일부 모리배들의 모습과 유사한 것입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이완용과 한국 강점의 조약을 맺고 그 다음날 외국에 통고하였으나 국내의 눈치를 살피다가 무장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8월 29일에 정식으로 발표하였습니다(한일합방조약). 이 조약은 전문 8개조로 되어 있는데 한국에 대한 일체 통치권을 일본에 영원히 양도할 것과 한국의 황제및 황족과 정부 요인에게는 상당한 대우와 세비를 지급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로써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이래, 27대 519년만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됨과 동시에 일제는 서울 남산에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그들의 헌병 경찰권을 통하여 헌병경찰통치를 실시하였습니다.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계몽운동, 의병투쟁 등 각종 민족운동을 일으켰으나 결국 일제에 강점당하고 무수한 민족지도자들이 체포, 투옥, 고문당하였고 민족의 생존권마저 철저히 침해당하였습니다. 이같은 민족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각 방면을 통해서 다양하게 국내외에서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무장독립투쟁, 민족실력양성운동, 신문화 창달운동, 외교활동 등 여러가지 방략을 세워 줄기차게 불법적인 일제침략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이러한 민족적 대항이 마침내 3.1운동을 가능케 하였던 것입니다. 이의 최대 성과가 이동녕, 김구 등이 주동이 되어 중국에서 수립 선포된 대한 민국 임시정부(1919-1945)였습니다. 일본에 대한 민족적 대항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만주(동삼성)와 연해주에서의 독립 전쟁, 민족협동전선운동, 항일무력투쟁 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의 탄압은 더욱 잔악해졌으나 우리 민족은 강인하게 저항했습니다. 결국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민족의 광복이 이루어졌습니다. 3.1운동은 국내 뿐 아니라 만주 하와이 등지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23,098명이며 일본 군경에게 피살당한 사람은 7,509명, 부상자는 15,961명, 체포된 사람은 46,948명, 헐리고 불탄 가옥은 715호,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였습니다. 이러한 3.1운동은 일본군의 무력 앞에 눌리어 금방 독립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자주의식과 독립의식을 세계 만방에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고 국내적으로는 민족의 결속을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1운동은 근대 한국 민족운동으로서 2천 5백만 전민족이 궐기한 문자 그대로 거시적 운동이었으며 이 운동에 조직적인 면에서나 의식면에서 주도적 구실을 한 것은 단연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전국에 교회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1운동 후 일본의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는 대표, 핵심 기관이 필요하다고 느낀 애국지사들은 각처에서 상해로 모여들어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합의하여, 프랑스 조계(租界) 보창로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김신부로 22호(현재 서금 2로 22호 갑)에서 먼저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였습니다. 1920년대에는 학생 운동의 시대라 할만큼 조직적인 학생들의 민족운동이 창궐하였습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전세계에 경제공황이 닥치자 일본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 군부는 국내적 불만을 몰아내기 위해 1931년9월 만주철도 폭파사건의 조작극을 연출하여, 이를 구실삼아 만주 일대를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32년 일본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내세워 만주국이란 허수아비 정권을 세우고 앞으로 침략정책의 발판이 될 병참기지로 만들려 했습니다. 이에 국제연맹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난하고 조사단을 파견하고 협상하려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하고 국제연맹에서 탈퇴해 버렸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의 대륙 침략정책은 노골화되어갔습니다.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을 일으켜 상해를 점령하였습니다. 다음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북경 근처 노구교에서 중국군을 습격하여 중.일전쟁을 도발하였습니다. 중일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제는 염치없게도 전시 동원체제의 실시로 우리나라 장정들에게도 지원병 징병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벌이고 있으면서도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마침내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하와이의 미국 해군기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일본은 하와이를 공격하면서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각 전선에서 공격을 감행하여 홍콩을 함락하고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점령하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싱가포르를 함락시키는 등 전쟁은 완전히 전세계적으로 확대되어갔습니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의 탄압은 한층 더 심해졌습니다. 경제적, 사상적 탄압정책은 일본에 대한 민족의 원한을 더욱 부채질하였습니다. 민족말살정책의 실현을 위해 우리말, 우리 역사 교육을 금지시키고, 민족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을 폐간시키는 한편 신사참배, 궁성요배, 창씨개명 등을 강제로 실시하였습니다. 부족한 인적, 물적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지원병.징병.징용.학병.근로보국대.여자정신대 등의 강제적 징발과 식량.유기(鍮器) 등을 공출이란 명목으로 강제 징발하였습니다. 미국과의 싸움은 다음해 6월로 들어서자 일본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결정적인 치명타를 입은 일본은 만회할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1943년에 이르러 일본과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11월 2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영국.중국의 세 거두가 모여 카이로 회담을 열었습니다. 여기서 중국의 장개석이 처음으로 일본 패망 후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의제를 제기하여 문서로 보장되었습니다. 1945년 4월에 독일의 히틀러가 패배하여 수도 베를린이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5월에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니 유럽 천지를 휩쓸던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일본이 홀로 고군분투를 해야 했습니다. 8월 6일에는 일본 히로시마에, 그리고 3일 후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8일에는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동삼성)와 북한 일대를 공격 점령하였습니다. 마침내 8월15일 정오 일본왕 히로히토는 떨리는 목소리로 전쟁에 진 것을 공포하며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 총독부도 해체됨과 동시에 조선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우리나라는 35년간의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광복이 되었습니다. 해방 3년 이후 남과 북에는 전혀 다른 체제의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8.15 광복에 대하여 역사인식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남한에서는 8.15 해방의 주체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으로,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국가인 적위군(소련 군대)의 힘과 자본주의 국가인 영.미의 힘으로 해방되었다."고 하여 남북이 그 해방 주체를 미국과 소련으로 각기 달리 보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해방 초기까지는 일제의 식민지배의 속박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풀어준 주체가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외세의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1949년 9월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설립한 후 북한에서는 8.15를 '전적으로 외세에 의한 해방'이라고 보았던 입장에서 이를 '소련의 결정적인 역할'로 수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영.미를 비롯한 연합군으로서의 외세의 개념을 소련으로 국한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을 강조하면서 8.15해방의 주체가 전적으로 외세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내재적인 투쟁력에 기인했음을 강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1960-70년대에 들어와 큰 변화를 보이면서 해방의 주체를 소련군이 아니라 '조선 혁명군'이었다고 하며 소련군의 역할을 축소시키더니 결국에는 해방의 주체를 소련군에서 '조선혁명군'으로 치환해버렸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의도는 말할 것도 없이 1960년대 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이른바 '김일성 주체사상'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것입니다. 김일성 우상화의 작업의 일환으로 역사의 사실조차도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고 변조시킬 수 있는 것이 김일성 주체사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북한을 이어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아침마다 대문 앞에 배달된 우유를 마시며 자라났지만 우리 식민지 시대의 아이들은 아침마다 신사(神社) 앞에서 <황국 신민의 선서>를 외치며, 그리고 <천황>이 살고 있다는 동쪽을 향해 허리를 굽혀 큰 절을 하는 <규죠요하이>를 하며 자랐습니다. 동요를 부를 아이들에게 군가를 가르쳤으며 왕자의 옷을 입고 싶은 아이들에게 전투모와 군복과 각반(케이터)을 두르는 법을 가르쳤습니다.....사람은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가 있고, 어떤 사상이든 신봉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판단력과 의지와 그리고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않은 아이들에게 의식화(세뇌)작업을 하는 것은 반인도적인 범죄 행위입니다. 천황을 김일성으로, 국방색을 붉은 색으로, 벚꽃을 김정일화(花)로, 그리고 놀이를 미제(美帝)를 부수는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 바로 50년전 식민지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북녘의 우리 아이들이 되는 것입니다."(조선일보 1994.8.16."또 하나의 <식민시대>- 북한"에서) 우리의 선배 '식민지의 아들들'은 일제의 의식화 작업을 받고 자라났으며, 아침마다 대문이나 아파트 현관에서 우유나 요구르트를 받아 마시며 자라난 '신세대'그룹의 아이들은 북한에서 쏘아대는 고주파 전파를 타고 배달되는 김일성 교시를 받아 마시면서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의식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같은 6.25 세대들은 아침마다 "새벽 종이 울렸네"라는 건설의 역군 노래를 들으면서, <국민 교육 헌장>을 암송하고, 목총가지고 교련을 받으며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정부 주도의 의식화(새 마을 운동 의식화) 작업 속에 자라났습니다. 식민 시대의 아이들이나, 6.25 세대의 아이들이나, 신세대 그룹의 아이들 모두가 다 그 시대의 '사상의 노예'가 되어 자라왔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과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의식화 작업입니다. 100여년 전 이 땅에 전파된 예수가 이 민족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듯이 예수 신앙의 의식화만이 바른 역사 의식 확립으로 민족사의 새 장을 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킨, 그 민족의 해방사건이자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적 사건이었듯이 기독교인은 8.15해방을 민족해방의 사건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으로 인식해왔습니다. 해방을 가리켜 흔히 '도둑같이 왔다.', '하늘이 준 떡이었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같은 인식의 일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조건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 과거 기독교인의 8.15해방에 대한 대체적인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 민족의 8.15해방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두고 제자들이 예수께 질문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한 사람의 소경된 사건을 두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의식은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찾으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과거의 한 사건을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만 알고 현재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수집된 지식일 뿐이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일을 알 수 없게 됩니다.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그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는 한 인간의 소경된 사건이 어찌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가 없겠습니까? 더 나가 한 나라의 사건 속에 어찌 하나님의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뜻과 목적이 없겠습니까? 이 달은 8.15 광복 제49주년을 맞이하는 광복의 달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1995년을 '통일 희년'(희년은 안식년이 7회 반복된 그 이듬해 곧 50년째 되는 해의 속죄일에 시작되어 그 다음 해 속죄일까지 만 1년 동안 지키는 규례로서, 이때 ㉠ 이스라엘 백성 중 종되었던 자들이 해방되어 자기 가족에게 돌아갔습니다. ㉡ 채무자의 빚이 모두 탕감되었습니다. ㉢ 타인에게 팔렸던 토지나 가옥 등이 본래 주인에게로 되돌려졌습니다. 이는 레위기 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는 의미는 첫째, 땅은 온전히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또는 영구히 소유하거나 처분할 수 없으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대여해주신 땅에서 잠시 살다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희년은 하나님의 긍휼과 정의의 정신이 극명하게 나타난 것으로 타인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없이 모든 사람이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한 삶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임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셋째, 희년의 주제는 '안식'과 '자유의 선포'인데 이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자유와 기쁨,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으로 정하고 대중의 참여를 통한 민족의 평화 통일, 북한의 해방과 자유를 염원하며 여러가지 행사를 벌이고 있습니다.(남북 통일을 위한 인간 띠잇기 등) 이 8.15 해방을 일반 역사가가 국제 정치의 역학 관계, 군사적인 관계 등을 통해서 그 인과 관계를 분석하여 해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님의 존재의 장소요,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인간을 만나시며,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면서도 역사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여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일)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8.15 해방을 "하늘이 준 떡"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8.15 해방은 인간들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도 일본 천황의 항복을 받는 자리에서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사건)가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사건)."라고 말했습니다. 세계 여성사나 인류역사에 있어서 전례를 볼 수 없는, 독일 나치의 잔학상보다 질적으로 더 잔학한 반인간적인 종군 위안부의 만행이 일제에 의해서 저질러졌습니다. 국민학교의 어린 여학생까지 동원되고, 군경들이 총칼로 위협하여 10여세의 순진한 어린 딸들이 부모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끌려갔으며, 우물가에서, 길가에서 납치당하거나 가난으로 인해 팔려가기도 했음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동원된 어린 여성들은 그 수가 10만에서 20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일본은 한반도와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 대만, 필리핀, 미얀마, 싱가포르, 남태평양 섬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진주하고 점령한 지역마다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으며, 공출된 어린 여성들은 성적 노예로서 수송배치 당하였습니다. 이들의 어린 몸뚱이는 일본군의 "공중변소"로서 취급당하고 집단 강간당하였습니다. 총 칼에 찢기고 죽고 구두발에 짓밟히며 병든 몸으로 죽어갔습니다. 패전 후 겨우 살아남아서 귀국할 수 있었던 소수 피해자들은 부모형제와 이웃친지들 앞에 죽을 죄인으로 쓰라린 몸과 마음을 감추며 살아왔습니다. 이같은 민족사의 엄청난 비극 속에 어찌 하나님의 크신 뜻이 없겠습니까?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일명 '리틀보이'라는 원자 폭탄을 투하하여 2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몰살시킴으로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인간을 한꺼번에 죽인 사건으로 전쟁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 중 강제로 징용.징병.정신대로 일본에 끌려간 우리 동포 5만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피해자 2만 명이 일본에 남고 2만 3000명이 귀국했으나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은 약 1만 여명이라고 원폭피해자협회는 밝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적어도 570만 명의 한국인이 대동아 전쟁 수행을 위해 투입되었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군인 20만 명, 군속 18만 명, 해외파견 노무자 72만 명, 국내 노무자 460만 명 등입니다. 이는 당시 한국 총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1910년 '한일합방' 이래 35년 간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한 식민지 수탈정책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끌려갔거나 혹은 농토를 빼앗기고 생활고로 인하여 부득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소외와 차별이라는 피지배 생활을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같은 민족사의 엄청난 비극 속에 어찌 하나님의 크신 뜻이 없겠습니까? 일제 36년의 식민지 통치 기간 중 그들의 기만적 탄압정책와 함께 자행된 학살, 파괴, 방화 등 만행의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관련되어 당한 대표적인 사례 몇가지만 들더라도 평남 강서 사천의 학살사건(3월3일), 정주의 학살 방화 사건(3월4일-4월2일),서울의 기독교인 십자가 학살사건(3월9일), 의주의 교회당 방화, 파괴 사건(3월 하순경), 천안 병천의 학살 사건(4월1일), 수원 제암리교회 방화.학살 사건(4월15일) 등이 있습니다. 강서의 학살 사건은 3월2일과 3일에 사천교회 교인들과 원장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43명이 즉사하고 20여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서울의 십자가 학살 사건도 외신 보도되었던 유명한 사건으로 3월 9일 서울에서 다수의 기독교인들을 체포해 이들을 교회로 끌고가 십자가에 묶고는 '너희들은 기독교인들이니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소원일거다.'하면서 총검으로 찔러 죽인 사건입니다. 수원 제암리 교회 방화, 학살 사건은 일본군이 마을의 기독교 신자 30여 명을 교회에 불러 모은 다음 교회문을 폐쇄한 후 불을 지르고 사격을 가해 29명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일본군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 마을 민가 31호까지 방화한 사실이 외신에 보도되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한 교회는 3.1운동 참여로 인한 교역자들의 피체, 투옥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3,500여 명의 교역자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이같은 민족사의 엄청난 비극 속에 어찌 하나님의 크신 뜻이 없겠습니까? 하나님은 식민지 통치 36년 간 견딜 수 없는 고난의 역사를 겪어 온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사 '8.15 해방의 떡'을 주셨건만 우리는 그 떡을 가지고 오히려 무엇을 했던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자랑할 것보다도 회개할 것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당시 이건 목사는 한국교회에 다음과 같이 겸손히 회개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오! 우리들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써야겠다. 그 시기에 처하였던 조선교회는 두렵건데 사탄의 연희장(演戱場)이 되고 말았다....우리는 마귀에게 밟힌 무리이며, 사탄의 권세 아래 휘둘렸던 무리이다." 김유연 목사는 일제시대의 조선교회의 모습을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모습에 비유하면서 "조선의 교회여! 계명성을 듣는가? 저 힘차게 들려오는 계명성을! 우리는 몽둥이와 칼이 무서워서 예수를 멀리서 따르는 자들이 아니었으며, 악당과 동좌(同座)하였던 자들이 아니며, 예수를 몇 번이나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고. 다만 베드로의 통회가 있을찌어다." 8.15 해방 후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해방을 이 땅에 기독교에 입각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1945년 11월18일 정동교회에서 열린 전선(全鮮)기독교대회에서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새 국가의 기독교적 성격을 강하게 외쳤습니다. 김구는 새 나라의 방향은 나라를 세우는 건국과 교회를 세우는 건교(建敎)에 있다고 역설하며, "즉 건국과 건교를 동시에 함이다....경찰서 열을 세우지 말고, 교회 하나를 세우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이승만은 "이제 우리는 신국가 건설을 할터인데 '기초없는 집을 세우지 말자.'곧 만세반석되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 고 역설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규식도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가 서로 서로 붙잡고 나가자"며 신앙을 중심으로 단합을 호소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해방되었을 때 한민족의 지도자들은 새 나라의 종교적인 기초는 기독교가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946년 4월16일 해방 이듬 해에 김구는 "나를 위하여 여러 교회들이 기도하여 준다니 참 감사한 일이다"며 "여러분이 눈물을 흘리면 나는 피를 흘리니 이 눈물과 피로 우리들이 갈망하는 조선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보자"고 외쳤습니다. 또한 김규식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 마음에는 다만 삼위 하나님만 계시게 하고, 오직 그만 경배하자. 우리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깨끗한 그릇, 곧 새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 하나님께 구하자. 무엇을 구할까? 곧 우리의 자유와 행복을 구하자. 그리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자. 만일 우리가 이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충성하다 죽는 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리라." 엄항섭도 "곧 그리스도의 정신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 아! 눈물! 값있는 눈물! 우리 3천만은 서로 이 사랑의 눈물을 흘려 우리들의 죄를 씻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지도자들은 사분오열 분열되었고, 교계 역시 마찬가지로 신사참배여부를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면서 수십 개의 교파로 찢겨져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자유는 지나쳐 방종에 치우쳐 사치와 음란과 허영으로 가득해져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 민족을 불쌍히 여기사 주신 "8.15 해방의 떡"을 가지고 오히려 싸움질을 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어찌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 속에 서로 물고 뜯을 때,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셔서 그들을 채찍하시며 징계하시며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6.25 한국 전쟁은 하나님께서 주신 "떡"을 감사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이 나라 민족에 대한 징계와 심판의 사건입니다. 민족사의 비극 중의 비극인 6.25 한국 전쟁, "전투로 인한 인명 피해가 15만, 행방불명 20만, 부상자가 25만에 달했고, 공산군에 납치된 수가 10만 이상, 그리고 전재민 수는 수 백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측되며, 공산군이 받은 피해는 실로 그 몇 배나 될 것이다."(이기백)라는 한국 전쟁, 여기 이같은 민족사의 엄청난 비극 속에 어찌 하나님의 크신 뜻이 없겠습니까? 어느 신앙인은 6.25의 잿더미 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민족 회개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드렸습니다. "내가 불탄 성읍을 향해 우는 것이 아니라 이 백성의 죄악을 통곡하옵고, 무너진 예배당을 곡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통곡하나이다. 죄악의 1951년은 우리의 피로 씻어 보내고 주님 장중에 기록된 1952년을 또한 눈물로 맞이 하나이다....그러나 당신의 진노가 풀리기까지 우리는 당신의 채찍 아래 공손히 엎드리나이다. 번화한 거리에서 범한 죄를 폐허에 엎드려 회개하옵고, 벽돌 예배당에서 지은 죄를 재 위에 앉아 회개하나이다. 죄악의 황금거리보다 당신의 공의가 기록된 폐허가 정결하도소이다."

태어날부터 소경된 것은 그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 소경의 고난을 과거의 어떤 이유에 근거한 숙명론적인 해석을 내린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하는 사명적인 입장에서 해석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견지보다도 하나님의 견지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견지에서 인간의 고난을 보셨습니다. 과거의 어떤 원인을 찾는 운명적인 견지에서보다도 현재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사명적 견지에서 인간의 고난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사명인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신의 고난이든 남의 고난이든, 아니 이 나라 민족의 고난이든 사명적인 견지에서 고난을 당하고 그 중에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나타내신 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책임을 다할 때 자신과 교회, 나라 민족이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의 역사적 사건들을 성서적 시각에서, 그리고 사명적 견지에서 해석하여 나라 민족의 앞길을 열어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에 어떤 돈 많은 부인이 딸 삼형제가 있었는데 이 딸 삼형제를 데리고 여름에 구라파와 성지를 구경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배가 가다가 파선을 당해서 많은 사람이 대서양에 빠져 생명을 희생당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배로 얼마를 구원하느라고 했지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마지막에 보니까 이 부인은 구원을 받았는데 딸들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이 처음에는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자기 부모가 없어서 바로 자라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내 딸을 잃었다고 그저 있을 수 있나 대신 다른 사람의 딸들과 아들을 기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지에 가서,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던 예루살렘에 가서, <아메리칸 캐론>이란 유명한 고아원과 탁아소를 세웠습니다. 자기 사재 전부를 다 드렸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을 위로해 주고 봉사한 것입니다.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자신과 나라 민족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찾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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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우리도 소경인가?  

 "(요9:13)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요9: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요9: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요9:16)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요9:17)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요9:18)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요9:19)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요9: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요9: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요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요9: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요9:24)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요9: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요9:26)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요9: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요9:28)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요9: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요9: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요9: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요9: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요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9: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요9: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요9: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요9: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9: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절하는지라 (요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 시대의 작가로 알려지고 있는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노상의 한 나무 그늘 아래서 한 떼의 무리가 매우 진지한 얼굴들을 하고서 무언가에 대해 시끄럽게 다투고 있었다. 그 발단은 여태 도시 밖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앉은뱅이 소년 하나가 해는 도시의 지붕에서 뜬다고 잘라 말한 데 있었다. 그러자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산골 출신의 대장장이가 해는 산이나 골짜기에서 떠오른다고 말하였고, 한때 해적선 노예였던 염(殮)장이는 해가 동쪽 바다에서 떠오른다고 우겨 말다툼은 차츰 커지게 되었다. 나중에는 해가 뜨는 곳뿐만 아니라 그 크기며 빛깔, 모양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색의 주장으로 그 나무 그늘은 자못 시장판을 방불케 했다. 그러던 중 그때 것 말없이 듣고만 있던 장님 하나가 불쑥 끼여들며 외쳤다. "해는 없소.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해는 모두가 거짓이오." 사람들은 그 엉뚱한 말에 모두 어리벙벙하여 잠시 다툼을 멈추고 그를 주시하였다. 무식해 보이는 무리들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어딘가 만만찮은 배움의 기풍이 어려 있었다. 그런 무리들을 무시하듯 장님은 단정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한평생 해를 연구해 온 사람이오. 해에 관해서라면 당신들보다는 내가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더욱 많이, 확실히 알려고 너무 자주 그리고 오래 해를 쳐다보다가 뜨거운 햇살에 두 눈만 잃고 말았소. 그런데 두 눈을 잃자, 난 사물의 겉모습은 우리들의 온전치 못한 감각이 그때그때 받아들인 일시적이고 자의적인 느낌뿐이라는 걸 깨달았소. 정녕 해가 있다면 그것은 그 이름이 가진 어떤 추상일 뿐이오." "그럼, 사물의 겉모습이란 결국 뭐란 말이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겨우 그 장님의 말을 알아들은 사내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이름에 걸쳐 둔 넝마 같은 것이오" 장님은 예까지 들어가며 더욱 단정적인 어투로 자신의 주장을 펴나갔다. "만약 위대한 이성이 불완전하고 변덕스러운 오관(五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모든 존재는 이름만이 확실할 뿐 추상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될 것이오." 그러나 그 순간도 해는 분명한 실체로서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여전히 밝게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거기에 있던 무리들은 대개 무식하여 그 장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모순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저건 도대체 무엇이오? 선생은 눈만 먼게 아니구랴!" 누군가가 손을 들어 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빈정대자, 이어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봇물 터지듯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솟구쳐 올랐다.》

분명히 '예수'라는 해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해의 실체를 부정하려는 바리새인이야말로 영적 소경이 아닌가! 소경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육적인 소경, 문맹, 영적인 소경(영맹,靈盲) 등입니다. 그 중에서도 영적인 소경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육적인 소경이나 문맹은 자신이 소경이나 문맹인 사실을 알고 있으나 영적인 소경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모르고, 또한 자신이 눈먼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 되어 40여 년 동안을 살아온 불쌍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사람을 축하하며 잔치를 벌려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장님이 눈뜬 사실을 놓고 시비를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장님이 눈을 뜨게 된 것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에 되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연구한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요리하여 마음대로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접시에 기름을 따른다던가 그것을 등잔 옆에 놓는다던가 그 속에 심지 끝을 넣는다던가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안식일에 등불이나 기름 그리고 심지를 절약하기 위해서 등잔불을 끄는 자가 있으면 그자는 책벌해야 한다.", "안식일에는 못을 박은 신을 신고 외출해서는 안된다."(못의 무게는 짐에 해당되며 짐을 운반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다.), "손톱을 깎는다던가 머리나 수염을 깎아서도 안 된다." 이와 같은 율법에서 본다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서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은 분명히 일하는 것이 되며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에는 안식일에 치유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의료적인 시술은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만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환자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을 정도로 행하여야 하며 낫는 방향으로 시술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치통이 있는 자는 이사이에 초(硝)를 빨아 넣어서는 안됩니다. 골절한 수족을 잇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수족이 탈골되었을 때에는 그 위에 냉수를 부어서는 안 된다." 냉수는 그 회복을 돕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는 생명의 위험이 없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을 낫게 하신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정신을 모르고 그 형식에만 치우쳐 율법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막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하나님께서 안식일 제도를 주신 것은 사람을 위하여,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갈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려하는 작태를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막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3: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막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막3: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막3: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모든 계명은 사랑으로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주일날 교회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 내게 안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으로 주일을 지켜야 하는데, "주일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나, 바빠 죽겠는데"하며 안 지키자니 꺼림칙해서 마지못해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법은 무엇이든지 사랑의 표시이므로 감사하는 자세로 지켜야 됩니다. 요즘, 선불 십일조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천만 원을 벌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미리 백만 원을 꾸어다가 선불로 바치는 것입니다. 나중에 천만 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원망, 불평하며 하나님과 교회를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으로 아주 좋지 못한 마음입니다. 동기가 순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동기가 순수하고 올바르지 못하면 그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바는 마음속에서부터 의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들처럼 겉만 의로운 채 해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5: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마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영적으로 소경된 사람들의 병폐는 자신이 멀쩡하며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신병자들이 자신을 정신병자로 생각하지 않듯이 불신자들 중 대다수는 자신이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심지어 성도들의 신앙적인 생활을 비웃으며 훼방하기까지 합니다. 헬라 사람들의 재미있는 설화가 있습니다. 어느 깜깜한 밤에 장님이 등불을 들고 길을 갑니다. 자기는 장님이라 등불이 필요 없지만, 가다가 다른 사람하고 부딪히면 괴로우니 등불을 켜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불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여기 불이 간다라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를 원해서 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그만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장님은 자신 있게 한 마디 합니다. "이 사람아, 눈이 없나? 이 등불이 보이지도 않소?"이쪽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이 등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라도 불은 꺼진지 오래 됐소"라고 말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꺼진 등불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합니까? 등불이 꺼졌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이 장님입니다. 세상의 것을 다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만 알면 그 사람은 모두를 다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다 알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심판밖에 받을 것이 없습니다. 세상 지식은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영의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만이 영의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세상 지식으로는 자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만 자신과 세상을 이기고 심판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최소한도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 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다고 했고, 가졌다고 했고, 유식하다고 한 것에 대해 이제 예수께서 심판하려 오셨습니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것을 깨닫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요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반문하던 바리새인들에게 현재 그들이 죄인임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조금 안다고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알고 있어도 예수를 만나야만 영적인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24장 13절-35절에 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옆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동행하셨으나 "(눅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눅24:27)....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 그후 눈이 밝아져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대통령의 어머니가 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 펜실바니아에서 가장 큰 토지를 소유하는 것보다도, 그리고 이 세계 전체의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도 더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인간이 되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영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직책도 바로 할 수 있다는 훌륭한 대답이었습니다.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느낌"은 은혜의 체험을 나타냅니다. "처음 사랑"을 되찾는 감격의 순간을 말합니다(계2:4-5). 이는 회개의 체험을 말합니다. 회개가 있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도를 해도 회개가 없었던 것입니다.

"(눅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18: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회개할 때 눈이 밝아집니다.

회개할 때 진리의 영,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회개할 때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회개할 때 광명한 빛이 임하게 됩니다.

회개할 때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게 됩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의 역사(役事),기적을 바르게 해석합니다.

회개할 때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대들보를 뽑아내고 이웃을 사랑으로 보게 됩니다. 눈도 귀도 입까지 막힌 헬렌 켈러는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눈뜬 소경이나 귀를 가진 귀머거리가 많은 것 같다.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보지도 못하고 감격할 줄도 모를까?"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를 마음 속 깊이 영접하시고 영의 눈이 활짝 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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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선한 목자

"(요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요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요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요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10: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10: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구약성서에서는 흔히 하나님은 목자로, 백성은 그의 양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예로 다음과 같은 성구들이 있습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신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예수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생명을 던지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는 영혼의 목자이시며, 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벧전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히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교회 복음 성가 중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듯>을 불러 봅시다.

"1.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듯

나의 주님 이 죄인을 찾으셨도다.

<후렴>양을 위해 생명바친 목자의 심정

그 사랑을 잠시라도 잊지 말지라

2.험산준령 헤매이는 어린양찾아

나의 주님 산가시에 찔리셨도다.

3.양 아흔 아홉마리 그 보다 더욱

길 잃은 한 마리 양 사랑했도다.

4.목자는 어린양의 그 소리 알고

참다운 목자 음성 양이 알도다.

5.어린 목자 내 주 예수 이 몸 붙드사

푸른 초장 물가으로 인도합소서."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생명을 바칩니다. 다윗은 선한 목자와 같은 나라의 지도자였습니다.

"(삼상17: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삼상17: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삼상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 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그러나 악하고 거짓된 목자는 양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의 생명을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는 일에 급급합니다. 악한 목자는 소명으로서가 아니라 돈을 버는 수단, 축재의 수단으로서 양치는 일에 종사합니다. 목자의 긍지나 책임감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흩어진 양들을 한 군데로 모으려고 하지 아니합니다.

"(슥11:16)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슥11:17) 화 있을찐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없어진 양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목자, 흩어진 양들을 찾지 아니하는 목자, 상한 양을 고치지 아니하는 목자, 병약한 양을 먹이지 아니하는 목자,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에게 화가 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목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나라 백성을 통치하는 왕, 시대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 그리고 나라 백성의 죄악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제사장 등이 이스라엘의 목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 민족의 지도자들은 당대 백성들의 목자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 역시 이 시대의 목자이며 교인들은 그 양떼인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병들고 힘없고 소외된, 그리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목자로서 하나님의 양떼들을 먹이라는 사명으로 부여받았습니다. 그가 주어진 목자의 사명을 감당키 위해 요구되는 것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사랑하는 목자, 지도자가 선한 목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사랑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요21:15)..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또한 지도자로 목자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는 일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금전에 집착한다든가, 지위를 이용해서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벧전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보수나 대가를 바라고 양을 치는 목자는 참된 지도자가 아닙니다. 오직 양을 사랑하기 위해 일하는 목자가 참된 지도자입니다. 참된 목자는 보수나 대가보다는 먼저 양을 생각하고 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선한 목자였으며 그는 자기의 양을 깊이 사랑하셨고 그 양의 안전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양떼는 선한 목자가 지키지 아니하면 항상 이리나 늑대 등의 약탈자들에게 습격을 받게 됩니다. 더군다나 양을 치는 목자가 거짓 목자일 경우는 이리나 늑대 등의 공격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당하게 됩니다. 교회는 물론이고 나라 백성의 지도자가 거짓 목자일 경우에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알렉산더나 나폴레옹 같은 영웅들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전쟁터로 데려가 그 곳에서 피를 뿌리게 했습니다. 또한 일본 천황이나 히틀러처럼 잘못된 지도자들을 만나 나라가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 패망한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런가 하면 온갖 사상의 창시자들이 잡다한 사상들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사상의 노예로 만들어 인생을 망치고 나라와 국가를 멍들게 하기도 했습니다. 구소련은 70년 공산당 사상(Marxism)의 지배로 말미암아 사회, 경제, 정치 등이 피폐해졌으며 그 혼란에서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쿠바의 카스트로 공산주의 정권 아래 지금 수많은 난민들이 자유를 찾아 생명을 걸고 탈출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주체사상의 노예가 된 북한 동포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북한의 구약>으로, 김정일 교시를 <북한의 신약>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본격적인 <신약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북한도 그 종말이 멀지않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종언을 고한 공산주의 사상과 김일성 주체 사상의 노예가 된 이 땅의 일부 학생, 정치인, 경제인, 종교인, 지식인 등이 귀신들린 돼지떼처럼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로 들어가고 있습니다(마8:28-32).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선정을 베푼 왕보다도 악정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한 왕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참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고난당했던 사례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또한 사상적으로 잘못된 지도자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거나 사망의 길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구약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은 선한 목자로서 자신이 택한 사람들을 끝까지 보호하시며 그 사람들의 궁핍함을 채워주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먼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렇지 않고 문을 부수거나 문을 뛰어넘어 들어가는 자는 양들을 죽이거나 훔치는 자들입니다. '양의 우리에 문'은 '진리의 문'을 말합니다. 참 지도자는 진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 이외의 방법을 취하는 자들은 모두 양들을 약탈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지도자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이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친히 "(요14:6)...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 중 가장 먼저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른 신들은 결코 진리의 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진리의 문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의 문이신 예수를 통하지 않는 모든 지도자들은 거짓된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양을 죽이거나 훔치는 자들일 뿐입니다. 어떤 지도자 마음과 사상 속에 예수가 살아계시면 그 지도자는 선한 목자이며 또한 양들에게 생명을 전달하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또한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다음으로, 선한 목자는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참 목자이신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겔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여기 다윗은 선한 목자 예수의 모형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목자들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선지자인 양 자신의 사상을 자신있게 가르쳤습니다. 수많은 이단 사상들도 자기들이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체 했으며 지금도 그러합니다.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께 공격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으나 여호와 하나님 종교를 빌미로 백성들을 사망의 길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귀가 있어도 진리의 문이시며 참 목자이신 예수의 말씀(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진리의 문이시며 참 목자이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먼저 목자장이신 예수(벧전 5:4)의 음성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양들이 자기의 음성을 알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같이 벼랑에 떨어져 죽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는 것은 목자에 대한 존경과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만 들으면 안심이 되는 것처럼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아듣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입니다. 다정한 목자의 음성만 있으면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바로 이 말씀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세 번째로,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냅니다.

"(요10:3)....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목자와 양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목자가 양을 대할 때 양이 많다고 해서 한 마리쯤은 하고 소흘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돌보는 것입니다. 옛날에 가난한 집에서 부자집에 양자를 보내려고 여러 자식 중에 누구를 보낼까 생각하는데 큰 아이는 커서 안되고 작은 아이는 작아서 안되고 약하면 약해서 안되고 건강한 아이는 건강해서 안되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그만 두었다는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식이 많다고 해서 어느 자식 하나라도 소흘히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예수께서도 양 아흔 아홉마리가 있어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반드시 찾으시겠다는 참 사랑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부르시는 대상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여기 '우리'(fold)는 유대인이며, '다른 양'은 이방인 중에서 불러내실 신자라면, 이방인도 한 우리에 들어올 존재입니다. 즉 자신의 목숨을 버려 생명을 주시려고 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인, 즉 전 세계 인류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만의 목자가 아니라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또한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양의 한 우리 속에 있다고 한 무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의 음성을 듣고' 즉, 목자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고 순종할 때 '한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한 목자'의 '한 무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선한 목자의 양이 되어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그를 따르리니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시23:6) 인생의 선한 목자되신 예수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시고 순종하시므로 '부족함이 없는' 영육간의 축복하심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심'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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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하나이니라

"(요10:19)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요10: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요10:21)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요10: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요10: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요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요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10: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요10: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요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10: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요10: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요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요10:39)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요10:40)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요10: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요10: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영국 더블린의 홀튼씨 부부에게 샴 쌍둥이(Siamese twins,몸은 하나에 머리는 둘, 팔은 넷, 다리는 둘, 내장은 모두 각기 가지고 있으나 간과 골반은 하나인 기형아), '아일리쉬'와 '캐티'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1992년, 그들이 세 살 반되었을 때, 분리 수술하다가 캐티는 사망하고 아일리쉬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소아과 전문의사들과 여러 전문의사들이 1년 동안 연구 조사한 결과 분리 수술하여 둘 다 살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술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수술 후 혼자만 살아남은 왼쪽의 '아일리쉬'는 옆에 늘 함께 얼굴을 맞대고 있었던 '캐티'가 보이지 않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 부모, 홀튼씨 부부는 아이들이 서로 성격이 다르지만 서로 사랑한다면 구태여 분리할 필요가 없다는 또 다른 의사의 말에 분리 수술을 망설였었습니다. 분리 수술을 하다가 둘 다 생명을 잃게 되든가 아니면 그 중에 어느 하나만 살게 된다면 그 충격을 감당할 길이 없었기에 차라리 서로 함께 사랑하며 '한 몸'에 하나가 되어 둘 다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둘이 되어 각기 생각과 느낌이 다르고, 팔이 네개가 있으나 둘은 뒤로 붙어 사용할 수가 없고 각기 옆에 붙은 팔로 서로 협조하여 왼쪽의 '아일리쉬' 팔로는 병을 잡으면 오른쪽의 '캐티' 팔로는 병마개를 열어서 병 음료를 마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골반에 두 다리도 서로 협조해야만 겨우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서로 '하나'가 된다면 분리 수술을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The One)이십니다. 예수도 한 분이십니다.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믿음도, 세례도, 소망도 모두 하나입니다.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4:6)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예수께서 당신과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하나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요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바는 예수와 그 아버지가 하나이신 것같이 성도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생활 목표는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서로 하나가 되는 비결은 '사랑'과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 즉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순종함으로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과 순종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요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기독교인들은 서로가 사랑하므로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이신 것입니다. 사랑의 증거는 순종이며 순종의 증거 또한 사랑입니다. 일치(하나가 되는 것)의 연분(緣分)은 사랑입니다. 예수와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왜냐면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예수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일치는 완전한 사랑의 일치이며, 그 결과는 완전한 순종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신과 같이 우리가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모든 차이점을 극복하고 하나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지금까지 학계에서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조개삿갓(굴등)의 엄청난 접착력입니다. 바위나 배 밑창에 붙어사는데 바위 자체를 깰 수는 있어도 거기에 붙은 조개삿갓을 뗄 수는 없습니다. 조개삿갓이 이렇게 강하게 붙은 원인의 하나로서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은 오랫동안 파도와 싸운 결과라는 것입니다. 파도의 힘은 시속 3백마일의 바람 속에 서있는 것과 비슷한 엄청난 저항입니다. 이런 파도 속에서 오랜 세월을 견디는 동안 조개삿갓은 바위와 한 몸처럼 밀착하여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으로 우리는 혈연보다 더 강한 유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이는 듯한 역경이나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랑에 금이 가고 급기야는 깨어지고 떨어져 나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은 멸시 조롱을 당해도, 가시면류관이 씌워져 피가 흘러도,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져나가도, 옆구리가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흘려도, 그럴수록 더욱 더 인간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께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사랑만이 인간을 변화시켜 서로 하나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외형적인 여건들을 극복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기 흉한 네 종류의 인간"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잠30:11)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잠30:12)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잠30:13)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잠30:14)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사랑이란 여기 네 종류의 인간과 반대되는 생활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입니다. 나이를 먹고 체력이 쇠퇴하고 경제력이 없어진 늙은 부모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자를 하나님은 가장 보기 흉한 인간으로 꼽는 것입니다. 부모를 "축복한다"는 말의 뜻은 모든 정성을 기울여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 보시기에 흉한 인간은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입니다. 자신의 부족과 실수는 보지 않고 남의 실수와 허물만 하나님의 위치에서 판단하는 사람, 자기는 옳다고 늘 생각하는 사람, 반성과 회개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장 싫어하신 사람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며 회개치 않는 신앙 생활 태도를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에 젖은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반성하고 회개할지언정 자기의 옳고 잘남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셋째는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입니다. "눈이 심히 높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래를 볼 줄 모르고 언제나 욕심과 경쟁과 질투의 눈으로 사는 인간을 말합니다. 아주 추한 인간상입니다. 그 눈꺼풀이 위로만 보도록 고정된 인간은 아래를 못 보기 때문에 그 마음에는 불평과 심술이 있고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나 인자가 없습니다. 그 입술에는 자랑과 시기만 있고 위로와 격려의 말은 없습니다. 넷째는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입니다. 장도 같은 앞니와 군도같은 어금니로 약자를 갉아먹는다는 약육강식, 강자의 심리를 가지고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3대 악이라고 일컫는 계급차별주의(classism), 성차별주의(sexism), 인종차별주의(racism)도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에는 모든 차별이 없습니다. 상대의 경제, 정치, 교육, 가문, 인종 등의 조건을 전제로 한 사랑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강자의 약자 착취나 억압은 허용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마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붙들어 주고 일으켜 주고 살려내는 사랑입니다. 여기 가장 흉한 모습의 네 종류의 인간상은 한 마디로 서로 하나되게 하는 사랑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틴(W.B.J.Martin)은 미국의 아프리카 선교사였습니다. 한번은 미국에서 아주 젊은 선교사가 현지에 부임하여 첫 설교를 하였습니다. 무척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용어들을 써가며 30분 정도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말틴 목사가 통역을 맡았었는데 그 통역의 내용은 3분도 안되는 짧은 것이었습니다. 설교를 한 젊은 목사가 의아하게 생각하여 "나는 30분간 설교하였는데 목사님께서 3분 동안 어떻게 통역을 하셨습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말틴목사가 원주민에게 통역한 말은 요컨데 "나는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말틴선교사는 젊은 목사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교사의 성공은 현주민과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위하여는 긴 설명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한 마디면 충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10: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은 알았으되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흔히 "빛의 절기(festival of Hanukkah,feast of Lights)"라고 불리워지는 수전절 기간이었습니다. 수전절의 기원은 유대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큰 시련의 시기인 동시에 영웅적인 자질을 마련하고 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시리아에는 주전 175-164년까지 사이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헬라 문화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헬라적인 것이라면 무엇이고 그것에 열중했었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철저히 배격하고 헬라의 사고 방식과 헬라의 신들을 팔레스틴에 도입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우선 그는 사상을 서서히 침투시킴으로서 평화리에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었습니다. 주전 170년에 결국 큰 사건이 발발했습니다. 그 해에 안티오커스는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8만명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성전의 엄청난 보물들과 성전기구들이 도난당했습니다. 유대 율법을 따라 할례를 행하는 것을 죄로 간주하여 할례를 행한 어머니는 그 목에 그 아이를 매어단채로 십자가형에 처해 버렸습니다. 성전 뜰은 모독되고 성전의 방들은 매춘굴로 변해 버렸습니다. 성전의 지성소를 우상의 제단, 제우스의 제단으로 바꾸고 그 제단에 돼지를 바치고 제사를 드림으로 철저히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이에 유다 마카비와 그 형제들이 분연히 일어나서 자유를 찾고 나라를 해방하기 위하여 싸웠습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므로(주전 164년) 성전은 성별되고 정화되었습니다. 수전절은 바로 이 성전을 성별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절기에는 성전 안에는 큰 촛대가 드리워졌습니다. 유대인은 각 가정마다 이 촛대를 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절기를 "빛의 절기"라고 부릅니다. 이 촛대의 빛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자유의 빛이 이스라엘로 되돌아 왔다는 것을 축하한 최초의 축제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참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유를 획득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내에 모든 등이 켜질 무렵에 "나는 세상의 빛이라. 오직 나만이 사람들을 비취어서 하나님의 지식과 그 임재를 밝히 보이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이 되시는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일과 기적, 그리고 역사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인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가 되게 하시는 사랑과 순종의 본질과 주체가 되시는 예수를 돌로 치려했던 것입니다. 사랑을 돌로 치려는 가장 흉한 모습의 어두운 인간상입니다. 사랑과 순종은 하나되게 합니다. 둘은 부자유한 것입니다. 하나가 될 때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시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이루시게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을 하나되게 하십니다. 이웃들과 하나되게 하십니다. 하나되는 통일의 주체는 예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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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생명의 주  

"(요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요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요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요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요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11: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요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요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요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요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요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요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요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요11: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요11: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요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요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요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11:37) 그 중 어떤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요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요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요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는 사랑하시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며칠이 지나서야 가시게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벌써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인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우셨습니다. 그토록 나사로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누군가를 위하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유대인의 지혜>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몸 하나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이 아이를 두 사람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아니면 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머리가 두 개이니까 두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몸이 하나이니까 한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유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두개의 머리 중 한 머리에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부어 보아라. 만일 양쪽이 다 뜨겁다고 놀라서 울면 바로 한 사람이다. 그러나 한 쪽은 뜨겁다고 우는 반면에 다른 한 쪽은 아무렇지도 않게 히죽히죽 웃는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다.' 유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이웃이 슬픈 일에 처해있을 때 그 아픔을 같이 느낄 수 있다면 유대인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다면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지고 가장 깊고 거룩한 데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11:33)예수께서 그이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덤에 가셔서 몸이 썩어서 냄새가 나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을 맞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비통한 상황, 썩어서 냄새가 나는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인간 마르다와 마리아의 통곡, 이것이 인간의 상황이고, 다시 산 사랑하는 나사로와의 만남, 이것이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아들딸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부모, 사랑하는 부모를 잃은 자식,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아내,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편,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사람, 이들의 희망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서로 다시 만나는 일, 그리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 종교,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이태리의 시성(詩聖) 단테(Dante)는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영원을 모르는 생명은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의 가치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생명은 지구보다 무겁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결코 금전으로는 따질 수가 없습니다. 몇해 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45세의 한 남자가 미항공기 추락사고로 그의 아내는 사망하고 자신은 중상으로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법원의 배상금 판결은 약 70억원을 원고에게 지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값도 이쯤되면 상당한 것입니다. 복지 국가일수록 그 생명의 값은 더 높다고 합니다. 스웨덴은 29억원, 화란은 1억 8천만원, 프랑스는 1억 5천만원, 서독은 9천 7백만원, 그리고 일본은 대개 1억원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겨우 2백만원 정도에서 타협을 보는 예가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결국 가난한 나라의 생명은 그 값도 헐값인 셈입니다. 요즘 내전과 가뭄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르완다>의 경우 하루 1,2백원 정도이면 하루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물리적인 원리만으로는 풀 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응당 생명의 원리로 풀어야 합니다. 생명의 가치는 곧 인간의 가치요, 인간의 존재 근거는 바로 생명입니다. 인간이 있다는 말은 곧 생명이 있다는 말이요, 인간이 없다는 말은 곧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딜타이(Dilthey)는 "생명은 생명으로 이해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생명>이십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기독교에는 인간의 궁극적인 상황인 <죽음>을 <생명>으로 극복하게 하는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사망,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영원하고 궁극적인 관심과 과제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죽음의 의미를 오스카 쿨만은 그의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이란 글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을 비교함으로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이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영혼의 해방'으로서 아름다운 죽음이다. 거기에는 죽음의 공포란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를 육체에서 자유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삶은 영혼의 죽음이 되고, 죽음은 더 높은 삶으로의 비약이다.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요, 육신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죽지않고 파멸되지 않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사는 한 우리의 영혼을 자유하지 못하게 하고, 이 영혼은 영원한 본질과 합해서 살 수 없게 하는 외적 의복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은 육체 속에 갇혀 있으나 영혼은 영원한 세계 속에 갇혀 있다. 실로 죽음은 영혼의 해방자이다. 죽음은 쇠사슬을 풀어 준다. 죽음은 영혼을 육의 감옥에서 풀어서 그의 영원한 집으로 되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죽던 날 제자들에게 향한 그의 가르침에서 그는 이 영혼 불멸의 교리를 단순히 가르친 것만이 아니라 이 교리를 몸소 살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축복의 기회요, 자유의 축제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이다. 거기에는 죽음의 공포란 없다. 죽음은 위대한 친구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영혼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그렇지 않다. 예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다르다. 공관 복음서(마태,마가,누가 복음)가 일치하게 보도하는 바에 의하면 겟세마네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예수는 <심히 놀라며 슬퍼하기 시작했고>(막14:33), <내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됐다.>(막14:34)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예수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예수에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해방이 아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5:7)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죽음에 직면하여 우시고 부르짖었다. 그는 <(막14:36)...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였다. 침착하고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와 우시고 부르짖으시는 예수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죽음의 광경도 처절했다. 소크라테스는 장엄하고 냉정한 가운데 독배를 들었고,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부르짖으며, 큰 소리를 지르고 운명하셨다(막15:37). 예수에게 죽음은 친구가 아니었다. 죽음은 무서운 공포이며, 죽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무서운 <원수>로 나타난다."

성경은 삶과 죽음 사이의 한 비극적인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타락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이브의 타락 사건으로 인간은 죄와 죽음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리고 인간은 율법을 통해서 인간 속에 잠자고 있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롬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롬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인간의 삶은 다만 '죽음을 향한 존재'(Zum-Tode-Sein)만이 아니라 죄의 삶이고 죄의 삶은 율법 앞에서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고전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죽음은 이 죄의 지배 아래서 일어나기 때문에 모든 공포와 심판과 저주가 따르게 됩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원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변치 않고 그 사랑은 그 누구도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그러나 죄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리고 죄의 권세는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죽음은 하나님의 대적이며 원수이기 때문에 이 죽음은 우리를 참 삶이며 모든 삶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서로 떼어놓습니다. 죽음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원수)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 있어서 죽음은 결코 아름다운 것, 해방, 축제가 될 수 없습니다. 죄가 결코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고 보다 더 죽음 앞에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 죄의 값입니다. 죄의 대가는 심판과 죽음, 저주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죽음은 저주입니다. 죽음은 죄가 제거되는 한에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의 값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 죄를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죽음 그 자체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육으로부터의 영의 해방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서만, 예수만이 자신의 구세주(그리스도, 메시야)이심을 믿는 믿음으로서만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그의 독생자 예수를 죽음으로 내어 주신 하나님의 인간 사랑, '아가페'입니다(요3;16).예수의 죽음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서 죄인이 되셨고, 죄인으로서 죄인의 선고를 받으신 것입니다(고후5:21). 그는 실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롬5:6) 모든 인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 죽음이 예수에게 내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새로운 존재로 탄생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인간은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의 죽음에서 죄의 결과인 심판으로서의 인간의 죽음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죽음,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었습니다. 이제 그는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신앙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에게는 '부활'이 약속되고, 그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는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약속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죽으면 또한 그와 같이 살 것입니다.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리스도는 곧 부활이며 생명 그 자체입니다.

"(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의 이같은 질문에 "(요11:27)...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고 신앙고백하시는 여러분들에게 인생 승리의 영광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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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민족을 위하는 길

"(요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요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요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요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요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요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요11:52)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요11:53)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요11: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리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요11: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요11:56) 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요11: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윌터 롤리(S.W.Raleigh:1552~1618)는 아메리카에서 영국으로 담배를 도입한 군인이자 시인이며 탐험가입니다. 그는 담배와 마찬가지로 감자도 그의 집 정원에서 처음으로 재배했습니다. 여러 번의 시행 착오 끝에 감자 재배에 성공하자 그는 제일 좋은 종자를 골라서 왕실에 상납했습니다. 당시 왕위에 있던 엘리자베드 1세 여왕은 롤리를 매우 총애했던 터라 기뻐하며 이를 왕실 정원에서 재배케 했습니다. 얼마 후 감자에서 파란 싹이 나고 잎이 올라왔습니다. 요리사는 그 파란 잎을 따서 샐러드를 만들어 왕의 식탁에 올렸습니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이것이 그토록 맛이 좋다던 감자란 말이오? 그 색깔의 푸르름이 짐의 입맛을 한결 돋우는구려"하고는 그 샐러드를 집어먹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왕의 표정은 순식간에 찌푸려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맛이 이상할 뿐더러 그 싹에는 독성까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왕은 그토록 자신의 총애를 받던 롤리가 돌이켜 자기를 독살시키려 한 것으로 오해, 분노하여 롤리를 처형하도록 명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체포당한 롤리는 왕 앞에 끌려 나왔습니다. "폐하! 무슨 영문으로 소인이 체포를 당했는지 모르겠나이다." "네 놈이 나를 독살하려고 해 놓고도 죄를 모른단 말이냐?" 왕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내 너를 총애해 주었건만 너는 감자라는 식물을 나에게 먹여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는가? 여봐라! 감자를 이리 가져오너라! 이놈이 끝까지 자기 죄를 부정하려 드는구나." 잠시 후 감자하고 가져 온 그 싹을 보고 모든 상황을 파악하게 된 롤리는 "전하, 이는 감자가 아니라 감자의 싹이옵니다. 감자는 잎을 드시는 것이 아니라 뿌리의 둥글둥글한 것을 드시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함으로서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은 예수의 표적이 정치적 행동의 구심점이 될 것으로 생각했고 종내는 예수를 죽이게 됩니다. 그들 역시 예수의 증거를 두고 그 알맹이인 하나님 나라는 보지 못하고 엉뚱한 잎만 먹고는 날뛴 격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사건을 보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 않았습니다. 400여년 동안 나라 잃고 여기 저기 흩어져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학수고대하던 메시야가 바로 그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예수가 아닌가 했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냈다면 얼마든지 '죽은 나라 민족'도 살려 낼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추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예수를 그대로 방치해 이 사건을 비화로 해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게 되면, 우리 나라의 과거 3.1운동이 확산되자 일제가 강압적인 헌병통치로 나라와 민족을 말살시키려했던 것 같이 로마 당국이 이스라엘 민족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이 아닌가 해서 산헤드린이 열리고 그 대책을 숙의하게 되었습니다. 산헤드린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양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전혀 정치적인 당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율법의 모든 세칙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사소한 일에까지 마음을 쓸 만큼 율법 준수를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 한 누가 정권을 장악하든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사두개파들은 극히 정치적인 당파였습니다. 사두개는 부유하고 귀족적인 당파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로마 정부에 협력적인 당파였습니다. 자기들의 부귀와 안일과 권력자로서의 지위를 향수하고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로마에 협력하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모두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에서 지배적인 지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히 그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발언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그 모두가 사두개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들의 무리들로 조직된 종교 단체이면서도 정치적인 관심이 대단한 사람들로 세속적이고 타협적인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정치와 잘 타협하여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두개인들이 목표로 삼고 있던 유일한 것은 자기들의 정치적, 사회적 권력과 명망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려했던 것은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일으키는 소요사태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에 대해서 관대한 정책을 펴나갔으나 시민 폭동에 대해서는 항상 확고하고도 무자비한 방법으로 시민 폭동을 진압했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주도하여 소요사태가 발생한다면 로마당국의 폭압은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도 없이 사두개파는 부귀와 권력, 그리고 영광을 누리고 있던 그 권위있는 지위에서 추방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제사장들의 무리이면서 아직까지도 예수가 옳으냐 아니냐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혀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이것이 나의 안일과 권위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하는 것에만 촉각을 곤두세웠을 뿐이었습니다. 오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모든 정책을 세우고 추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우선 순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이 마치 나라 민족을 위한 것인 양 서슴없이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요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더군다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 의회에서 서로 권력 다툼을 일삼는 무리들로, 바리새인들은 육체의 부활과 천사를 믿는데 비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난 사건은 바로 바리새파의 교리가 옳고 사두개파의 교리는 틀렸다는 중대한 증거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이 사건을 빌미로 국민 대중의 지지 기반을 더 한층 확고히 하여 사두개파의 기세를 꺾고 의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고, 사두개파는 그 사건을 빌미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척 하면서 정치적 문제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마디 합니다.

"(요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요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은 소위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여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죽이자는 말입니다. 대제사장으로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정치적 수완을 부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죽여서 나라가 조용하고 자신의 권력이 유지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적은 수의 희생으로 많은 이익을 보자는 공리주의 발상입니다. 이같은 공리주의는 분명히 죄악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당한 것은 한 사람의 의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다수가 원하는 바일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그것을 추종해서는 안됩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소수의 의견이 분명히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부결되면 그 옳은 것이 폐기되고 그릇된 것이 옳은 것이 되고 마는 우매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하나님은 다수를 싫어하십니다. 진리는 다수결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한 사람이 주장해도 어디까지나 진리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나라 민족을 위하는 길로 공리주의를 택하여 의인을 죽이자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이 사는 길은 그 나라에 의인이 많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잠28:2)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잠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간디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한 마디의 거짓말을 해서 평생 원하는 이 나라가 독립된다 해도 나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거짓말 위에 세워지는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니까." 그가 평생을 나라 독립을 위해 바친 몸이지만 자기 한 마디의 거짓으로 나라가 독립된다 해도 거짓말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서 의냐 불의냐를 묻지 않고 나라가 안정 속에 무사할 것이라면 얼마든지 불의를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우리 나라에 남북 통일 문제가 가장 큰 이슈(issue)입니다. 남북이 통일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우상숭배하는 타종교와 손을 맞잡을 수도 있고, 얼마든지 공산주의와 타협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통일만 된다면 그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결과가 좋다면 그 과정이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고 방식은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결과야 어떻든 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무참하게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제사장 무리들이 나라 민족의 안정을 위한다는 구실로 예수를 죽이고자 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당리당략을 위한 술책으로 결국 이스라엘 나라는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자기 나라를 구하고자 취했던 바로 그 수단이 나라 민족을 멸망케 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잡아죽이는데 합작한 로마와 이스라엘은 결국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은 예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살리는 길입니다.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 믿는 의인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정치가가 없어 망한 나라가 없습니다. 대기업이 없어 망한 나라가 없습니다. 학교 교육이 없어 망한 나라가 없습니다. 오직 의인이 없어 나라와 민족이 망했다는 것이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역사의 산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 역사의 관심을 핵무기나 어떤 정부, 정책에 두지 않습니다. 오직 의인의 존재 여부에 두고 있습니다.

"(시33: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 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시33:9)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시33: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시33:11)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33: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33: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시33:14)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시33:15)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시33: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33:17)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33:18)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시33:19)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시33: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시33:21)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시33:22)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마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전체를 위해서는 사람 하나쯤 희생시키는 것을 파리 죽이는 것보다 더 쉽게 하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옮겨서 풀이하는 현대인에게 다수가 선이고 소수가 악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에 반기를 들고 계십니다.

"(마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아흔 아홉의 중요한 것은 그 구성분자인 하나 하나가 값어치가 있기 때문이지 99이라는 많은 숫자 때문에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께서 만일 오늘 이 땅에 오신다면 이렇게 외치실 겁니다. "어린 딸 한 명의 인격을 존중하십시오. 어린이 하나도 집안 체면이나 가문의 명예나 부모의 얼굴을 세우는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라의 번영을 위한다는 구실로 작은 한 개인이나 힘없는 민중이 희생되어서는 안됩니다." "대자본 축적을 위하여 작은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악마적인 경제론을 철회하십시오. 대자본이 흘리는 공해로 한 인간도 생명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비겁한 99명보다 바른 말 할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이 천국 건설에 더 필요합니다." "모두가 손을 드니 나도 손을 드는 눈치꾼 숫자의 노예보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는 인간을 나는 기다립니다." "소수의 신체 장애자, 적은 수의 정신 박약자들도 하나의 인간으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똑똑하고 건장한 자들만의 주님은 아닙니다." 나라 민족이 잘 되는 길은 의인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이 잘 되고자 하면 교단의 정치가 사라져야만 합니다. 예수교 장로회가 통합, 합동으로 싸움이 있으면서 3.15부정과 4.19혁명의 진통이 있었습니다. 예수교 장로회가 주류, 비주류 싸움으로 교회가 각목으로 수라장이 되더니 10.26사태가 휘몰아쳤습니다. 교회가 이처럼 만민의 기도하는 집,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지 못하고 강도의 소굴이 되어갈 때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왔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먼저 교회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교회가 나라 민족의 파숫군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때 삼킴을 받지 아니 합니다.

"(사56:9)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사56:10)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사56: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사56:12)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길은 예수가 살고 내가 죽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먼저 죽어야 나라 민족이 삽니다.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그의 취임식 때, "(잠14:34)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는 성구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다고 합니다. 나라 민족이 잘 되는 길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미국 역사에서 새 나라 헌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헌법 제정 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소집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한가지로 의견일치를 못보고 서로 분열하여 퇴장하려고 할 때에 벤자민 프랭크린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잠깐만 기다립시오. 이 나라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가운데 탄생한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두 기도의 응답을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무릎을 꿇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이 어려운 궁지와 문제에 해답을 주시기를 기다립시다." 그러자, 그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고, 드디어 불후의 문서인 미합중국 헌법을 제정하였던 것입니다. 기도로 세운 헌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기도로 세운 나라는 번영합니다. 미국 의사당에는 기도실이 있다고 합니다.

"(렘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헬라의 철인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등불을 켜고 아테네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조국의 위기를 막아 낼 인물을 찾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이 요구되는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길은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발견되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나라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를 죽이는 길이 아니라 내가 죽고 예수를 살리는 길뿐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정황이 어떠할지라도 진리를 사수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 민족의 의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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