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목사

 

교회소개
담임목사
선교활동
게시판
방명록
홈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cross01b.gif  빌립보서 설교 cross01b.gif

                 --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anii33.gif  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증인이 되는 사람(1장)
2.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2장)
3. 푯대를 향하여(3장)
4. 항상 기뻐하라(4장)

 1. 하나님이 증인이 되는 사람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뇨 ?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인터넷 비즈니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터넷 도메인입니다. 그 도메인 중에 <닷컴, . com>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닷컴, . com>은 인터넷 기업의 간판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터넷 기업'을 '닷컴 기업'이라고도 합니다. 미국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음으로써 미국이 사상 최장기간 경제 호황을 누리게 하고 있는 것은 인터넷이라고 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인터넷 기업, 즉 닷컴기업이 미국경제의 호황을 가져온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소위 '닷컴 붐'으로 지난 한 해 동안 전세계에서 백만장자 1백만 명이 새로 탄생했, 재산이 3천만 달러를 넘는 '슈퍼 부자'들도 5만 5천 4백 명으로 전년도보다 8,500명이 늘었다고 합니다. 백만장자의 급증, 무엇보다 '슈퍼 부자'의 확대에는 닷컴주(株)의 상장붐이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됐습니다. 이에 편승해 한국이 <닷컴 도메인>을 싹쓸이해서 미국을 제외하고 세계 제 1위의 닷컴 보유국이 되었습니다. 국제 도메인(.com, .net 등) 등록 기관인 미국 네트워크 솔루션(NSI)사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 1월 중 닷컴 도메인 등록 순위에서 미국을 제외하고 1위를 차지했습니다. 1998년 28위에 불과했던 한국이 2위에서 10위권에 있는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홍콩, 독일, 네덜란드, 호주 등을 제치고 1위에 오른 것입니다. 한국인 특유의 기질, 즉 돈이 된다 하면 뭐든지 싹쓸이 하는 그 특유의 '싹쓸이 기질'을 발휘한 것입니다. 저마다 필요가 있어서 도메인을 등록했다고 여겨지지만 다른 나라라고 우리만큼 필요가 없어서 등록 건수에서 뒤졌다고는 보여지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돈이 될 것처럼 생각되면 마구 달려드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투기 성향을 보여 준다는 뜻에서 '봉이 컴선달'이라는 자조적인 얘기까지 나오는 판입니다. 어찌 되었든 인터넷 기업에 있어서 도메인 <닷컴>은 기업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지난 5월 8일자 경향신문은 국내 인터넷 도메인 등록대행 및 컨설팅업체인 도메인샵이 단돈 56달러(6만원 정도)에 수억 원대의 가치가 추정되는 도메인 주소를 확보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회사는 최근 세계적인 통신장비업체인 스웨덴의 에릭슨사가 보유하고 있던 인터넷 도메인 'www.imt2000.com'을 에릭슨이 연간 유지비를 지불하지 않아 소유권을 상실한 틈을 타 등록했던 것입니다. 도메인 소유권을 확보하려면 네트워크 솔루션사나 도메인 뱅크사 등 도메인 등록업체에 2년간 유지비 56달러를 내고 소유권을 확보하면 됩니다. 2년 후부터는 다시 매년 일정한 유지비를 내야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www.imt2000.com'은 차세대 이동통신(IMT-2000)의 국제적인 명칭으로 도메인 전문가들로부터 최소 수 억 원의 가치를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회사의 권사장은 "에릭슨사의 실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연히 유지비 연체 사실을 알고 미국의 도메인 뱅크사에 등록해 소유권을 확보했다."고 말했습니다. 차세대 이동통신(IMT-2000)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관련 도메인, 'imt2000korea.net', 'imt2000asia.net', 'imt2000world.net' 등 3가지가 각각 1억 원 정도에 매물로 나왔습니다. <닷컴>이든 <닷넷>이든 인터넷 기업에 있어 기업의 간판격인 인터넷 도메인은 이처럼 그 가치가 엄청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름의 <닷컴, .com>이나 닷넷, .net>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을 잘 유지하지 못거나 그 이름으로 이익을 남기지 못하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팥죽 한 그릇에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고 평생 후회스런 삶을 살았던 에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서는 들에 사냥 나갔다가 배가 몹시 고파 심히 곤비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마침 야곱이 팥죽을 쑤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노리고 있던 야곱은 형 에서에게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고 제의했습니다. 에서는 배고파 죽겠는데 이까짓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면서 야곱에게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었습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이 여김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 곧 장자라고 하는 무형의 가치를 소흘히 했던 것입니다. 결국 에서는 장자에게 주어지는 모든 축복을 야곱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죽을 때가 다 되어 장자에 내리는 축복을 기도를 받게 될 때 형 에서로 변장하여 아버지로부터 장자가 받을 모든 축복 기도를 몽땅 받았던 것입니다. 때마침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 이삭에게 가져가 "아버지여, 일어나서 맏아들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라고 말했지만 "너 오기 전에 사냥한 고기를 가져온 자는 누구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면서 이삭은 장자 에서에게 "너에게 빌 축복이 없다."고 했습니다.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 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라고 통사정했지만, 아버지 이삭은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너의 주소(도메인)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창세기 25:27-34, 27:30-40)"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 말은 동생의 종이 되어 섬기며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 곧 그 이름을 경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맡기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을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여 그 이름을 더럽히는 사람은 그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나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하며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되는 축복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아름답고 보배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누구 누구라고 하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이름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마귀 사탄에게 팔렸던 죄인의 이름(도메인)을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의 피값을 주고 산 이름(도메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다거나,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이름을 경홀히 여긴다거나 하면 결국 에서와 같은 결과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거룩하고 복된 이름에 합당한 생활들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항상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의 전체 중심은 4장 4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기도의 기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기 위해 기도하는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기도는 이웃을 위한 기도입니다. 병든 자들을 위한 기도, 갇힌 자들을 위한 기도, 소외된 자들을 위한 기도는 아름답고 향기나는 기도들입니다. 목회자를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는 무력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자로 하여금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엄청난 대우가 아니라 성도들의 희생적인 기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무능하다고 생각되면 그에 대해 비판과 불만을 터트리기 전에 그를 위해 더욱 힘써 기도하신다면 훨씬 더 능력있는 목회자로 변화될 것입니다. 목회자가 지금보다 더 능력있고 효과적인 목회를 하기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지혜를 주시고 새로운 능력으로 옷 입혀 주실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를 위한 여러분의 기도가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 하는 어떠한 봉사보다도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부흥하며 성장하는 교회들을 보면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보다 기도회에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는 기쁨을 맛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기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집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았을 때 그 기쁨이 더 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에게 복음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 듣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 인줄 아시고 복음 전하는 기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기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가 죠지 마테존 목사는 맹인이었습니다. 그는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기도가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받은 가시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였음을 용서하소서. 수백 번 장미 때문에 감사하였으나 가시의 은혜를 잊었나이다. 십자가의 가시를 거쳐 하늘에 올라가신 주님, 나는 나의 가시를 통하여 하늘에 올라갈 수 있음을 잊었나이다. 나에게 주신 눈물이 무지개가 됨을 깨달아 감사하옵나이다. 나에게 주신 아픔이 천성길이 됨을 깨달아 감사하옵나이다. 장미밭에 살지 않고 가시밭에 살게 됨을 감사하옵나이다."
그리스도인으로 그 이름에 합당한 두 번째 생활은 희생입니다. 드오리아의 소설 중에 영화로 유명해진 "하이눈"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보안관은 마을의 법질서를 사수하려 합니다. 악당들과의 대결을 앞두고 보안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간청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총 잘 쏘는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은 <이 일이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명도 나서지를 않아 결국 보안관 혼자서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일이 나의 일이다.>고 믿는 사람이 온 동네에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의 이름"을 불러 주셨다는 것은 <내가 이 일을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거룩한 이름을 주신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태어났고, 그리스도를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 희생하며 살게 될 때 비로소 가치있는 존귀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사로 유명한 허드슨 테일러 목사의 경험담입니다. 그가 중국에 있을 때 한 청년 신사가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세례받고 기독교인으로서 정식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하며 신앙 연조가 몇 해가 되어야 합니까?" 테일러 목사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촛불은 언제 빛을 내지요?" 청년은 "그야 물론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테일러 목사는 청년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어느 수준에 오른다든가 몇 해 동안 교회 생활을 했다든가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심지에 불이 붙는 순간 빛을 발하듯이 연조가 없어도 하나님이 나를 불러 필요한 인간으로 사용하려고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면 그 순간 이미 빛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벌써 훌륭한 기독교인이 된 것이지요." 양초는 자신을 태워 희생하는 순간부터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어두운 세상을 생명의 빛으로 밝히셨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무엇으로 세상을 밝게 하겠습니까? 희생이 없이는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없습니다. 세상은 성도 여러분의 희생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그 이름에 합당한 세 번째 생활은 협력입니다. 무엇보다 복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협력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기도와 물질로, 온 몸으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한 봉사에 협력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복음 전파를 위해 고난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배도 자동차의 엔진도 전진과 후진이 있으나 비행기의 엔진은 후진이 없습니다. 뒤로 달리면 파멸뿐입니다. 공중에 나는 독수리가 뒤로 나는 것을 보셨습니까? 성도는 독수리와 같이 가장 높이, 가장 멀리, 가장 빨리 날 수 있어합니다. 신앙생활은 독수리와 같은 것이며 오직 전진만이 있는 엔진과 같습니다. 천성을 향하여 전진하지 않는 신앙은 파탄밖에 없습니다. 고인 물은 썩는 것처럼 성장하지 못하는 믿음은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에디슨은 너무 공부를 못해서 선생님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자퇴를 권했습니다. 처칠은 소학교 졸업까지 학습 지진아의 특수반에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너무 성적이 나빠 모두가 그를 정신박약아로 알았습니다. 세계를 변화시킨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그들이 무서운 노력을 통해 쉬임 없이 계속 성장 발전했다는 점입니다. 성장은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란 성장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현재의 영적 수준에 만족하지 말고 날마다 성장하는 신앙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윌리엄 힌슨리라는 맹수 훈련 전문가는 사자나 호랑이를 훈련시킬 때 훈련사가 왜 작은 의자(등받침이 없는 의자)를 들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의자의 다리쪽을 사자 얼굴 앞에 들이대면 사자는 의자의 다리 네 개에게 동시에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경을 한꺼번에 여러 곳에 집중하려고 하면 일종의 신경 마취작용이 생겨서 길들여진다고 합니다. 여러 군데에 동시에 신경을 쓰는 것은 신경작용이 분화되기 때문에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세상 이것 저것에 관심을 두고 살게 되면 신앙이 무력해지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한 가지 푯대를 세우고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에게 삶의 초점을 맞추고 전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집중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진보하도록 오직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늘 나라 성도로써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어주시는 거룩하고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1-11)

감리교 신문 <기독교 타임지>에 실린 글입니다. 《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면 비젼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했다. 비전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니까 꿈이라 하자. 그러면서 늘 무슨 장관이나 훌륭하다는 미국 사람들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렇게 되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란다. 가난하고 평범하게 살면 안 되는 것처럼 이 설교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장관 되고 대통령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바르게 살면 되지. 사람들이 교회와 예수님을 바로 알았으면 좋겠다. 참 삶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 글을 쓴 아이는 밀양 어느 초등학교 6학년 아동인데 이 글로 인해 교회의 전도사님께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교회에 안 나갈 수도 없는데 바로 그 전도사님이 그 아이가 나가는 학교의 선생님이기 때문이죠. 머잖아 한번 이 어린이에게 위문이라도 가야겠습니다.》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성공, 출세 지향적인 설교에 식상한 어린아이의 정곡을 찌르는 기독교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상도 사는 어느 가난한 과부가 시골 교회에 다니는데 그 교회에서 새벽마다 종을 치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 과부는 일년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수십년을 한결같이 종을 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가난한 과부의 아들 딸들이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의사, 검사, 판사, 교수 등이 다 되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고등학교 학생은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더니 일류 대학에 진학하여 지금은 대학교 총장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무수하게 들으며 어린 시절을 지내 왔습니다. 기독교는 신령하게 생긴 고목나무 앞에 조석으로 지성을 드려 소원성취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무엇 무엇을 했더니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소위 지성이면 감천이라 식의 인과응보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저 예수믿게 하시더니 값없이 구원하시더라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믿었더니 진리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어 기쁠 때나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나 항상 나와 함께 하시어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사람의 소원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원을 품게 하시며 그 소원을 이루게 하시는 종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잘 가르쳐 로마의 장군이나 국회의원격인 원로원 의원으로 진출시키거나 식민지 관료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나 의회기관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말씀은 베드로가 네가 장차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요21:19)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루지 못한 굴지의 재벌이 되거나 세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가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높은 곳을 향하셨다면 굳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그것들을 친히 담당하시고자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신 것은 영적인 능력으로 그 자신 세력을 키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에게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눅4:18-19) 그 예수께서 세상에서 한 자리 꿈꾸며 자리 다툼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하신 말씀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왔노라 너희가 높고자 하면 그러면 섬기는 자가 되라 무릇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예수의 마음은 세상에서 성공과 출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있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물질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정신 문병은 점점 퇴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 경제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국민경제가 풍요로워지며 아울러 한국 교회도 대단한 경제력을 갖게 된 반면, 기독교 정신이 현격하게 퇴보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처음 기독교가 이 땅에 상륙했을 당시 기독교 정신은 모든 미신을 타파하며 민족의 정신을 이끌어 가는 민족과 나라의 정신적 영적 지주 역할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는 참된 예수의 모습을 상실하고,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부정 부패한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버리워 짓밟힌다 했는데 지금 기독교가 그렇습니다. 군부 30년도 모자라 문민의 정부, 그리고 국민의 정부라고 하는 지금도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하고 권력의 주변에서 맴돌고 아부아첨을 일삼고 있습니다. 요즈음 기독교가 새 천년을 말하며 대단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지만 예수의 마음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20년 전 광주 5.18 사건은 당시 권력에 눈이 멀었던 사람들에게는 한낱 폭도들과 간첩들에 의해 저질러진 반란 사건이었으나, 진실과 정의의 편에 서 있던 사람들의 눈에는 이 땅에 인권과 민주를 지키기 위한 <민주 항쟁> 사건이었습니다. 탱크와 헬기 등 중무장한 공수 특전부대를 풀어 정의를 부르짖는 힘없는 양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함으로 사태를 진압하고 광주를 점령한 군부는 광주 근처 어느 시골 국민학교 교정에 학생들을 모아 놓고 목사 둘을 앞세워 일장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광주가 폭도들과 간첩들에 의해 반란 사건이 발생했는데 우리 국군이 용감하게 광주를 탈환했으니 다같이 만세를 합창하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철없는 목사들이 만세삼창을 하는 동안 광주를 무참하게 짓밟은 탱크를 향해 일사각오로 진실과 정의를 위해 일명 <죽음의 행진>을 감행했던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지난 날 우리 기독교는 예수의 마음보다는 권력자의 마음에 들고자 했던 그 부끄럽고 추하고 비굴했던 모습을 깊이 회개하고 예수의 마음을 품고 저 낮은 곳을 향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고통스런 5.18의 역사를 외면하고 그 사건의 희생자들과 그들이 입은 상처를 외면하면서 십 수년을 부끄럽게 지내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 갇히고 절망하는 사람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상처받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계십니다. 예수는 상처받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권력의 주변에서 만세삼창이나 하는 무리들 편에 서지 않습니다.

감리교 신학대학 총동문회에서 오늘의 한국 기독교를 염려하면서 <오늘의 감리교회 현실에 대한 감리교 신학대학교 총동문회의 입장>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 첫째는 교회(감독)선거에 있어 부정 타락 선거를 타파하라는 것이며, 둘째는 성직 매매와 다름없는 교회 세습은 강력하게 규탄되고 규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거룩한 교회를 세습하는 것은 교회를 사적인 소유로 인식하는 것으로 반 성서적인 행위입니다. 나아가 교회의 세습은 대다수 목회자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뿐 아니라 교회와 교역자의 위신을 심각하게 추락시키는 반 교회적인 행위입니다. 또한 교회의 세습은 중세교회를 크게 타락시켰던 성직매매와 다름이 없는 행위로 교회는 성직매매를 이단으로 처벌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퍼져가고 있는 교회의 세습은 필연적으로 감리교회의 타락과 파멸을 부추길 악마적인 관행이기에 거룩한 교회를 보존하기 위하여 강력하게 규탄되고 철저히 규제되어야 하며 나아가 감리교회는 속히 교회세습금지를 입법화해야 합니다.>는 것입니다. 이러다가는 중세 암흑기의 교회처럼 교회 세습과 성직매매를 막기 위해 성직자 결혼금지법을 제정할 형편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교회 세습이 오늘날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덩치가 커서 가장 사랑하는 자기 자식에게 대물림해주어야 교회가 안전해지고 노후가 걱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대물림하신 것은 덩치 큰 교회가 아니라 덩치 큰 십자가였습니다. 교회 세습이나 성직매매는 예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의 마음은 십자가이며 낮은 곳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란 덩치 큰 교회를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자기 희생을 통한 섬김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치료받지 못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그리고 값없이 사랑의 인술을 펴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돈 몇 푼 더받겠다고 머리띠 두르고 환자들이야 불편하든 말든 휴진과 폐업을 일삼는 의사들, 월급쟁이들보다 더 적은 세금을 내는 의사들도 있습니다. 누가 더 존경받겠습니까? 누가 더 높임을 받겠습니까? 예수께서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4:7-11)"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기 전에는 세상에 말석에 앉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 앞에 나아와 예수의 겸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 곧 십자가에 죽으심"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의미하며, 여기 '본체'는 단순한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을 비롯한 정체(identity) 전부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정체를 지니신 분이셨지만 죄의 종이 된 인간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이 말은 왕의 왕이신 분이 스스로 가장 천한 노예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역사에서 왕들이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왕복을 벗어버리고 평민의 옷으로 위장해서 감찰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그가 직접 평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노예와 같이 되셔서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지위에 계속 계실 수 있으신 분이 죄의 노예 상태에서 신음하는 자들과 고통을 같이 나누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지극히 낮추셨습니다. 낮추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본받아야 하는 성도는 마땅히 예수님의 겸손을 따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처럼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종의 형체를 입고 자기를 낮추었을 때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마음을 가졌을 때 비로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권력에 굴종하는 비굴함이 아니라, 진리에 복종하는 겸손함이며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동안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환난과 곤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인내함으로써 예수님의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우리는 끝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겸손함과 하나님의 뜻, 곧 진리에 복종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던" 예수처럼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3. 푯대를 향하여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립보서 3:7-16)

가정해서는 안 되는 얘기지만 일제로부터 해방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옛 만주땅이나 북한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던 갑부나, 아니면 엄청난 대지와 농장을 소유한 대지주로 수많은 종들을 거느리며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일제치하에서도 여전히 양반행세를 하며 온갖 특혜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 전에는 평생토록 아니 대대로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할 마당쇠들이 8.15 해방으로 졸지에 세도가가 되거나, 뜻하지 않은 횡재로 부자가 되어 양반행세하며 거드름 피우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씨 조선만 망하지 않았더라면 가문에 영의정 좌의정 가릴 것 없이 명문대가를 이루며 조상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을 그들이 옛 명문대가를 자랑하며, 지금도 자손들 혼사에 가문과 학벌 등을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족보를 따져 보면 과거에 상놈 노비 출신인 주제에 8.15 해방을 만나 졸지에 재벌이 된 졸부들이 지금은 왕족행세를 하며 소위 왕족(?)간에 혈연관계를 이루는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과거가 어떻했든, 현재가 어떻했든 무엇이든 자랑하는 것은 모두 미래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지향적인 것입니다. 족보 가문이나 학벌 문벌 등 이 생의 자랑은 모두가 허탄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생의 것들을 자랑하는 것을 악한 것이라 말합니다. 지혜자는 잠언에서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라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찌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 외에는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외에는 모두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임금님을 했든, 정승을 했든, 지금 25억짜리 아파트에 황금송아지를 가지고 있든 그 사람의 미래(열매, 결과)가 좋지 않으면 모두가 허사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미래가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고, 염라대왕의 친구가 된다면 그 인생은 영원히 불쌍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과거나 현재를 자랑하지 않고 미래를 자랑하며 소망합니다. 기독교인의 미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 등 물질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25억짜리 아파트나 달동네 등의 공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젊은이 늙은이 등 시간의 구애받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은 지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 오히려 예수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머리 둘 곳조차 없어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을 자랑스럽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세상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들이 많았으나 그 모든 것들을 오히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며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족보 가문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엘리트(elite)에 속하는 베냐민족 출신이었습니다. 베냐민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귀족 제도 중에 최고 귀족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베냐민은 야곱이 사랑한 처 라헬의 아들이고, 12족장 중에 그 만이 약속의 땅에서 출생하였고(창 35:17-18), 이스라엘 최초의 왕인 사울이 베냐민 족속의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삼상 9:1-2). 바울이 본명을 사울이라 한 것은 사울왕에게 관계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귀환했을 때 나라 민족을 재건하는데 핵심역할을 한 것은 베냐민과 유다지파였습니다.(에 4:1). 에스더서에는 민족 대학살의 위기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부림 절기가 있는데, 이 절기의 중심 인물은 모르드개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르드개가 바로 베냐민 지파의 출신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자기가 베냐민 지파라 한 것은 단순한 이스라엘인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최고 귀족에 속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당대 최고의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율법 박사이며, 식민지 백성으로 감히 얻기 힘든 당대 최고의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에서 자랑할만한 가문, 혈통, 그리고 문벌과 학벌 등 이 모든 것들을 오히려 해로 여기며 배설물처럼 버렸노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로는 결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정한 할례를 자랑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증표였습니다. 할례를 통해서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할례받은 사람만이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할례당이라며 율법을 자랑하며 행악하는 자들의 자랑이 헛된 것임을 경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이는 율법에 따라 육체에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예수믿고 회개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면 그 할례는 무의미한 것으로 할례를 받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육체에 할례를 받았지라도  마음은 죄악으로 가득하면서 여전히 회개할 줄 모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할례받지 아니한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 <할례받지 아니한 마음>이 겸손하여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생각하여 회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행하는 것입니다.
"(40) 그들이 자기 죄와 그 열조의 죄와 및 그들이 나를 거스린 허물을 자복하고 또 자기들이 나를 대항하였으므로 (41)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그 대적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42)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레26:40-42)"
"너회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하지 말라"(신 10: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도 마음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37:6)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한 귀는 할례받지 아니한 귀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욕으로 여기며 즐겨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11)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렘 6:10-11)"
이처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할례는 단순히 육체에 행하는 할례(circumcision)가 아니라 몸과 마음, 생각 등의 할례입니다. 단순히 육체의 할례만으로 하나님 백성이라면서 회개할 줄 모르고 변화받지 못하는 사람을 손할례당이라고 부르며 이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진정한 할례는 몸과 마음, 생각의 할례, 다시 말해 몸과 마음과 생각의 성화(聖化)를 말합니다. 할례받은 증거의 진정한 의미는 예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지속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입니다. 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靈)으로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영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神靈)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정한 예배의식법에 따라 철저하고 정확하게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율법에 정한 예배의식법에 따라 철저하고 정확하게 예배드릴지라도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율법과 거리가 먼 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엄숙하고 경건하며 의식법에 완전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해도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을 수가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주일 성수를 하면서도, 십일조 생활을 하면서도,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마음에 미움과 악의와 교만과 너그럽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변화되지 못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참된 할례를 받은 진실한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외형이나 관례에 의하지 않고 마음으로 헌신과 성실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의 예배는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겸손히 예수 앞에 나와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으로 변화받아 기꺼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할례(율법)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었으나 그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긴요하며 기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 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삶의 최고 가치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義)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율법)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이같은 의미를 마음 중심에 두고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율법에 정통한 자로 율법이 정한 모든 것을 낱낱이 지킴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곧 의를 얻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나는 철저한 율법 준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내 자신 삶의 만족를 얻고자 했으며 나의 마음과 영혼이 열망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과 방법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마음에는 참된 만족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갈등만 증폭될 뿐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할례나  율법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다메섹 도상에서 내가 그렇게도 핍박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였습니다. 나는 내 노력과 선행, 율법에 대한 지식, 율법에 따른 모든 공적 등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구하여도 결코 발견하지 못했던 교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의는 사람의 노력이나 힘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적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내 경험으로 말하건데 유대인들의 방법은 잘못 되었고 무익한 것입니다. 율법보다 아니 율법을 제대로 아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서는 율법을 바르게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할례와 율법의 참 뜻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완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경험하므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율법에서 놓임받고 자신을 의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붙잡힌 바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붙잡혔때는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데 앞장섰으나 예수에게 붙잡힌바 되어서는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는 율법을 통해 삶의 목적과 비전을 가지지 못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과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비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로마의 시민권과 율법박사, 그리고 문벌과 족보 가문이 커 보였지만 이제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데 있어 해(害)로 여겨져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귀하고 보배로운 것이며 하나님 나라 시민권이 가장 소중하며 가장 커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율법에 매였던 자신의 지난 날 과거에 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지난날의 자신의 삶은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자랑했던 율법으로 교회를 핍박했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서는 수치스럽고 엄청난 죄만 지었을 뿐 자랑할 만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것 외에는 자랑할 만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바 될 때만이 참된 삶의 가치와 목적, 그리고 삶의 비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고백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본문 12,13절) 바울은 자신을 사랑과 은혜로 붙드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깨닫고 그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삶의 푯대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두고 앞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으로든 목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의 꿈입니다. 예수믿고 그 꿈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 붙잡힌 바 되어 자신을 붙잡아 준 그 목적과 계획을 붙잡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애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에 자랑할만한 것이 있든 없든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뜻을 깨닫고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인류의 궁극적인 꿈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러분의 시민권은 하늘 나라에 있습니다. 현재에 만족하고 현재에 안주하지 마시고 하나님 나라를 목적삼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는 식민 도시였습니다. 로마는 전략상 군대의 중심지가 되는 곳에 식민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 주민들은 대개의 경우 21년 간 군대 생활을 하고 보상으로 로마 시민권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식민 도시의 큰 특징은 어느 지역이든 로마의 문화와 문명이 그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식민지 사람들은 어디든지 로마 옷을 입었고, 로마인 행정관의 통치 아래 라틴어를 말하고 로마의 법을 따라야 했습니다. 아무리 땅 끝에 있어도 이들 식민지는 변함없이 로마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로마의 식민 도시가 로마의 모든 지배를 받는 것처럼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 시민임을 결코 잊지마시고 그에 합당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인은 그가 어디에 살든지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살아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그리고 섬김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섬김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푯대를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삶의 푯대를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사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생애가 되시기 바랍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4. 항상 기뻐하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립보서 4:4-14)

1. 기독교인의 기쁨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기쁨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두 사람이 장소가 어디든 항상 함께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인이 결코 기쁨을 잃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과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2. 관용이란?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두 학생이 있습니다. 교사가 이 학생의 시험답안을 채점합니다. 공정하게 채점한 결과 한 학생은 80점, 다른 학생은 50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80점을 얻은 학생은 공부하기에 집안 환경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조용하고 쾌적한 자기만의 공부방이 있고, 꼭 필요한 참고서적들이 모두 충족되었고, 돈이 많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쪽집게 과외공부도 할 수 있었고, 잘 사는 집안이어서 아무 근심 걱정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50점을 받은 학생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공부방은커녕 새벽에는 신문을 돌려야 했고 야간에는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서 경비근무를 서야했으며 병이 들어도 제대로 치료하나 받지 못했습니다. 이 학생의 모든 환경은 공부하기에 너무나 불리했습니다. 공정하게 말한다면 이 학생은 50점받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관용>이란 이 학생의 답안을 50점 이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관용이란 규칙이라든지 법칙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용은 법 이상의 것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한 가지 더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께선 법 이상을 것을 행하셨습니다. 법을 적용한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형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법 이상의 일을 우리를 위해 행하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바리새인이 끌고 예수 앞에 왔습니다. 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이라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 둘씩 들었던 돌을 던지고 흩어졌습니다. 예수와 그 여인만 남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로 갔습니까? 간음한 여인에게 관용을 베푸셨지만 그래서 죽음을 면했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그 공의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에게는 관용을 베푸시고 적용해야 할 법에 따른 형벌은 자신이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50점밖에 받지 못한 학생은 학칙에 따라 공정하게 성적을 받았을지라도 그 학생이 처한 좋지 못한 환경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이 학생에게 점수를 주셨다면 100점을 주셨을 것입니다. 시험점수는 50점이나 예수께서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친히 담당하셔서 나머지 50점을 그 학생이 보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항상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예수 앞에 잡혀 왔을 때 예수는 율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그 여인은 그에 따라 돌로 맞게 했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자신에게 율법을 적용하시고 그 여인에게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실수와 허물, 그리고 모든 죄에 대하여 예수께서 자신에게는 법을 적용하시고 여러분에게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세상살이 점수가 겨우 20점도 안 된다 해도, 세상에서는 비록 그렇게 밖에 채점한다 해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20점밖에 얻을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환경과 연약한 모습을 익히 아시고 모자라는 점수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십자가에 지시고 여러분에게는 관용을 베푸사 80점을 채워 100점 만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3. 기도할 때 항상 감사함으로 해야 할 이유, 다시 말해 항상 기뻐함으로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만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것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인간의 참된 만족은 물질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요즈음 상류층을 저처하는 일부 계층에서 도시락 하나에 100만원 짜리를 잡수시고, 한 잔에 300만원 하는 양주를 마시고, 수 백만 원을 홋가하는 핸드백을 들고 다녀야 귀족행세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모방해서 따라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면 그보다 더 비싼 도시락과 술과 옷으로 치장하여 감히 따라 할 수 없을만큼 돈에 구애받지 않아야 만족해 하며 귀족축에 든다고 합니다. 이를 놓고 어느 심리학자는 그러한 사람들은 귀족이 아니라 멸종되어도 괜찮을 희귀족이라고 평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다른 말로 바꾸면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족보있는 개는 출산때부터 다르다고 합니다. 족보있는 개는 태어날 때 잘못해서 죽을까봐 제왕절개수술해서 태어나서 날때부터 상류층 대접을 받고 양육됩니다. 주인의 극진한 사랑가운데 한봉지에 만원하는 개비스켓 등의 한달 간식비로 10만원, 개발톱 손질에 2,3만원, 개털 미용값으로 6만원 그렇게 호화스럽게 살다가 죽으면 개 주인은 개 장의사를 불러 장례식을 거행하는데 죽은 개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드리고, 6만원짜리 개 수의입히고, 35만원짜리 개관(犬棺)에 입관식하고 마지막 키스를 한 다음, 사람도 죽어서 타보지 못하는 리무진 승용차에 운구되어 장례식을 치루고, 사람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개 납골당에 안치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장례비만 무려 160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개 주인이 납골당에서 마지막 개한테 하는 말이 다음에 만나서 행복하게 살자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나도 저런 개 팔자나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텔레비젼 방송을 보고 어느 네티즌이 <멍멍멍....>이라는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멍멍 개 소리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개 팔자가 좋아보이고 행복해보이는 것은 행복의 기준이 물질이나 주변 환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개는 노아 홍수 직후부터 사실 식용(食用)이었습니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창9:3)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결법이 주어진 다음부터는 부정(不淨)식물로 규정되었습니다.(레위기 11장)영혼없는 동물을 지나치게 인격화하는 행위는 없는 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어찌보면 인격모독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지구 도처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염두에 둔다면 감히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믿는 여러분은 개 한 마리 기를지라도 성경에 나와 있듯이 "무엇에든지 사랑할만 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 하며 무엇에든지 덕을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참된 만족은 물질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요즈음 상류층을 저처하는 일부 계층에서 도시락 하나에 100만원 짜리를 잡수시고, 한 잔에 300만원(1병에 1억원) 하는 양주를 마시고, 수 백만 원을 홋가하는 핸드백을 들고 다녀야 귀족행세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모방해서 따라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면 그보다 더 비싼 도시락과 술과 옷으로 치장하여 감히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돈에 구애받지 않아야 만족해 하며 귀족축에 든다고 합니다. 이를 놓고 어느 심리학자는 그러한 사람들은 귀족이 아니라 멸종되어도 괜찮을 희귀족이라고 평가합니다. 족보있는 개 키워야 상류층이고 귀족이며 누렁이 막 키우면 천민이 아니라 돈이나 권력으로 자기 만족을 채우고 행복해하며 귀족행세하는 무리들이 천민인 것입니다.
피얼 목사가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게 산다는 인도의 발리 섬을 찾아가 발리 섬 사람들을 만나보았습니다. 그가 발견한 발리 섬 사람들의 행복은 다섯 가지였습니다. <첫째, 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단순하게 삽니다. 셋째, 우리는 서로 좋아합니다. 넷째, 우리는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 다섯째, 우리는 아름다운 섬에 살고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 행복의 조건은 모두가 단순하고 평범한 것들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그렇게 살 수 있는 여건들입니다. 단지 인간은 만족이 있어도 만족할 줄 모르고 은혜가 넘쳐도 기적을 기다리며 아름다움을 곁에 두고도 욕심을 부리며 넘쳐흐르는 사랑 속에서도 질투와 증오심으로 살며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발리섬을 주셨는데도 엉뚱한 보물섬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만족과 행복은 하나님의 뜻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인간의 참된 만족과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의 만족과 행복을 원한다면 먼저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곧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7-8)고 했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자신을 종처럼 낮추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기며 복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다 이루었다!"고 외친 예수의 만족은 하나님께 향한 복종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 하이더씨는 영국 켐브릿지 대학 의학부를 55년에 졸업한 뒤에도 15년간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는 대학시절에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일"을 자기의 생애에 주어진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선교사 지망을 하였는데 선교지에서 1년을 있어 보니 하나님의 뜻을 보다 더 성취하는데 외과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죤스 홉킨스 대학에서 외과를 5년간 전공했습니다. 그런데 환자를 대하면 대할수록 몸도 문제지만 정신과 영혼의 문제를 함께 다루어야 정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해 훌러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수입면에서는 어리석은 인생여로였지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좀더 효과적으로 받들겠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런 과정을 밟게 했다. 하나님의 뜻이란 옛날 두루마리 성경을 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음성은 내 생애를 통하여 조금씩 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음성을 들을 때 순종하는 것뿐이다." 돈이나 권력 등 세상에 있는 것을 추구해서 그것을 획득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이며 그래야 귀족이며 상류층이 아닙니다. 삶의 목적과 뜻이 하늘에 있어야 참된 행복을 얻게 되며 진정한 의미의 상류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고 권고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 믿고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사는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이 행복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수태고지를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누가복음 1:38-55) 이처럼 주의 음성에 순종할 때 인간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마리아는 하인에게 예수께서 무엇이든 시키는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하인들은 예수께 말씀하신대로 빈 항아리를 가져다 물을 가득채웠습니다. 그러자 그 항아리에 채워진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처음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로 인하여 혼인잔치집의 기쁨은 이전보다 더 했습니다.(요한복음 2:1-11)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삶에 기쁨을 더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야말로 맹물같은 삶에 포도주같은 변화의 기쁨이 예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처럼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며 사는데 참된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의 관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두 학생이 있습니다. 교사가 이 학생의 시험답안을 채점합니다. 공정하게 채점한 결과 한 학생은 80점, 다른 학생은 50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80점을 얻은 학생은 공부하기에 집안 환경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조용하고 쾌적한 자기만의 공부방이 있고, 꼭 필요한 참고서적들이 모두 충족되었고, 돈이 많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쪽집게 과외공부도 할 수 있었고, 잘 사는 집안이어서 아무 근심 걱정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50점을 받은 학생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공부방은커녕 새벽에는 신문을 돌려야 했고 야간에는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서 경비근무를 서야했으며 병이 들어도 제대로 치료하나 받지 못했습니다. 이 학생의 모든 환경은 공부하기에 너무나 불리했습니다. 공정하게 말한다면 이 학생은 50점받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관용>이란 이 학생의 답안을 50점 이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관용이란 규칙이라든지 법칙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용은 법 이상의 것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한 가지 더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께선 법 이상을 것을 행하셨습니다. 법을 적용한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형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법 이상의 일을 우리를 위해 행하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바리새인이 끌고 예수 앞에 왔습니다. 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이라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 둘씩 들었던 돌을 던지고 흩어졌습니다. 예수와 그 여인만 남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로 갔습니까? 간음한 여인에게 관용을 베푸셨지만 그래서 죽음을 면했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그 공의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에게는 관용을 베푸시고 적용해야 할 법에 따른 형벌은 자신이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50점밖에 받지 못한 학생은 학칙에 따라 공정하게 성적을 받았을지라도 그 학생이 처한 좋지 못한 환경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이 학생에게 점수를 주셨다면 100점을 주셨을 것입니다. 시험점수는 50점이나 예수께서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친히 담당하셔서 나머지 50점을 그 학생이 보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항상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예수 앞에 잡혀 왔을 때 예수는 율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그 여인은 그에 따라 돌로 맞게 했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자신에게 율법을 적용하시고 그 여인에게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실수와 허물, 그리고 모든 죄에 대하여 예수께서 자신에게는 법을 적용하시고 여러분에게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세상살이 점수가 겨우 20점도 안 된다 해도, 세상에서는 비록 그렇게 밖에 채점한다 해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20점밖에 얻을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환경과 연약한 모습을 익히 아시고 모자라는 점수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십자가에 지시고 여러분에게는 관용을 베푸사 80점을 채워 100점 만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빵점짜리 인생이라도 주안에만 있으면 100점짜리 인생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관용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마음으로 항상 기뻐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인간의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어떠한 삶의 환경속에서도 항상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두 사람이 장소가 어디든 항상 함께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인이 결코 기쁨을 잃지 않는 이유이며, 행복한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과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예수께서는 여러분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외로울 때나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슬픔, 실패와 괴로움과 함께 하며, 그 모든 일들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만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것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철학교수로 있는 클레풀(John Claypool) 박사의 간증입니다. 그가 대학생 때 철학도이니만치 이론이 강하고 아는 것이 많고 내노라 하는 수재였습니다. 어느날 친구집에 가서 친구의 여동생을 보았습니다. 19세의 소녀는 모든 것이 완벽한데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출생시부터 기형아였습니다. 소녀는 특히 아름다움에 대한 정서가 발달하여 음악, 미술, 문학 등을 좋아했습니다. 그 집을 떠날 무렵 그간 참고 있던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당신의 처지라면 도저히 못살 것 같은데 무엇이 당신을 미소짓게 하고, 신나게 하고 명랑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누구나 못 가진 것이 있죠. 나의 경우는 팔과 다리를 못 가졌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요. 맛을 볼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세계 명작을 읽을 수 있고, 친구들과 가족의 사랑이 있고, 무엇보다도 나는 예수님을 알게 되어 천국이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만큼 보물들을 가졌는데 왜 내가 슬퍼해야 합니까?" 클레풀 교수는 그날 하루의 체험이 철학과 2년의 공부보다 더 귀중한 진리를 배웠다고 술회하였습니다. 그 소녀는 예수를 통하여 마음에 천국을 소유하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그 소녀에게는 감추인 보화였던 것입니다.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을 때 그 기쁨과 행복은 더 한층 큰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감추인 보화가 되시는 예수를 통해 항상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