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목사

 

교회소개
담임목사
선교활동
게시판
방명록
홈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cross01b.gif  빌레몬서 설교 cross01b.gif

                   --사랑과 용서--

                     사랑과 용서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13)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게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15)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 오, 형제여 !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빌레몬서 1:1-21)

빌레몬서에는 기독교 신앙의 중대한 교리나 이단에 대한 심각한 반박이 없으나 그 이상의 것인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가 감동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한 가족 앞에 보낸 유일한 편지입니다. 편지 수신인에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 그리고 "네 집에 있는 교회"가 언급되고 있는데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이고,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이며, "네 집에 있는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 있는 종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빌레몬은 자기 자신의 가족들과 종들을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키워 한 집안을 작은 교회가 되도록 한 본받을만한 기독교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편지 내용은 빌레몬의 종 가운데 탈주한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는데, 바울이 이 노예를 로마에서 만나 예수 믿게 해서 전에는 아주 쓸모없는 노예였지만 이제는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에 아주 유익한 일군이 되었으므로 노예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낼지라도 처형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오네시모가 탈주할 당시 돈을 훔쳐 나왔다면 바울 자신이 모두 변상해 줄 터이니 처형하지 말고 형제를 대하듯이 받아달라는 간곡한 청원이었습니다. 당시 노예가 도망하다 붙잡히게 되면 "도망자"를 뜻하는 "Fugitive"의 첫 글자인 "F" 자를 빨갛게 달인 인두로 이마에 낙인을 찍어 어디를 가도 금새 드러나게 해서 두 번 다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또는 도망하다 붙잡힌 노예가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십자가에 못박아 온갖 고통을 당하다가 죽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도망자 노예에 대한 형벌내용을 잘 알고 있던 바울이 도망자 오네시모를 노예주인인 빌레몬에 돌려보낸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도망자 오네시모를 예수 믿게 해서 자신의 "아들"처럼 되었고, 바울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될 아주 유익한 심복이 되었다해도, 그리고 노예주인 빌레몬이 기독교인이라 해도 당시 노예를 처형하는 법에 따르게 되면 오네시모가 처벌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사실상 바울이 오네시모를 보내지 않고 빌레몬에게 편지만을 띄워 억지로 일지라도 승낙을 받아 곁에 두고 봉사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인이 아무리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흔쾌히 승낙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과거를 적당히 뭉개버리고 잊고 싶은 과거에서 도피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잘못을 철저히 시인하고 회개 청산하므로 사랑과 용서를 통해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당시 노예제도가 불의한 것이었다 해도 주인의 물건까지 챙겨 가지고 도망했던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안다해도 주인에게 반드시 돌아가 자신이 행한 바에 따라 주인이 죽이든 살리든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죄에 대한 책임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십자가에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 죽음으로 죄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예수의 십자가 사랑과 용서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그는 과거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 주인인 빌레몬에게로 돌아갑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요청한대로 형제를 영접하듯이 도망자 오네시모를 영접하기 전까지는 그는 도망자의 딱지를 벗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관습상 노예를, 더군다나 도망한 노예를 한 형제로 간주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빌레몬은 십자가의 사랑과 믿음으로 오네시모를 형제처럼, 사도 바울을 영접하듯이 받아들였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은 실수나 과오, 죄를 범한 사람을 언제든지 다시금 영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시대에 부잣집이나 세도가의 집들만을 골라 도둑질하여 속칭 "대도"(大盜), 심지어는 "의적(義賊)"이라고까지 불리웠던 조세형이 있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여러사람들의 도움으로 98년 11월 출소했습니다. 대도였지만 개과천선한 그를 많은 사람들이 환영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대도가 영웅시되는 사회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범죄예방활동에 협조하거나 선교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조세형은 자신의 인생 절반인 27년간의 감옥생활을 통해서도 그 도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외국인은 털지 말라는 자신의 도둑 계명(?)을 파기하면서까지 얼마 전 일본에 건너가 남의 집을 털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를 두고 일간신문들은 조세형이 도벽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좀도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이른바 좀도둑 "소도(小盜)"가 되어 버린 조세형이 다시 회개하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치루고 다시 돌아온다면 얼마든지 형제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과오를 범한 사람이나 탈선한 사람들을 너무나 지나치게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러한 사람을 두 번 다시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믿고 있으면서도 우리들 자신이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점은 실패의 밑바닥에 있는 바로 우리들을 믿어 주신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한 번 과오를 범하게 되면 옳은 길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은 죄를 회개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사랑으로 영접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인 것입니다. 비록 속는 줄 알면서일지라도 용서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데는 그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젊은 암사슴이 불행히도 자신의 귀여운 새끼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아직 젖이 불어서 유방이 여전히 탱탱할 때 숲 속에서 호랑이 새끼 두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암사슴은 불어서 새끼들에게 쏟지 못한 사랑과 정을 그 호랑이 새끼들에게 마음껏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어미 잃은 새끼 호랑이들에게 젖을 먹여 엄마의 몫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런 암사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노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지금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 걸세. 사랑과 정을 쏟는 데도 상대를 가려야 하네. 어쩌면 그 호랑이들이 자네를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러니 괜히 자신의 젖을 낭비하지 말게나." 이 말을 듣고 암사슴은 차근차근 대답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나는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또 생각하고 싶지도 않구요. 지금 나에게는 단지 엄마로서의 감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만일 내가 이 호랑이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지 않는다면 내 젖이 나를 몹시도 괴롭힐 거라구요."

바울이 무리없이 편한한 마음으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에 대한 선처를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은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빌레몬은 그 사랑과 믿음이 인정받고 칭찬받는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바울의 형편상 도망한 노예를 비호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더군다나 동역자 에바브라가 로마에 와서 보니 바울 곁에 심복으로 봉사하고 있는 오네시모를 발견하고 그가 바로 골로새에서 보았던 노예임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네시모에 대한 전모가 밝혀졌고 이미 기독교인이 된 오네시모는 생명을 걸고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를 낱낱이 고백하고, 기독교인 양심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바울의 뜻에 따라 주인에게 돌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약 50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순교자 중 하나인 이그나티우스가 처형당하기 위해 안디옥 교회로부터 로마로 연행되었습니다. 그 도중에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 앞으로 편지를 띄웠었는데 그 편지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의 첫장에 놀라울만한 그들의 감독에 대한 높은 평가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훌륭한 감독의 이름은 다름 아닌 바로 에베소 감독인 오네시모였던 것입니다. 한낱 도망자에 불과 했던 오네시모가 로마에서 바울의 전도로 바울과 빌레몬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고 에베소의 그 명망높고 훌륭한 오네시모 감독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사적인 바울의 편지가 성경에 남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노예라고 하는 부끄러운 과거의 신분에다, 도망한 노예로 십자가에 못박혀 혹독하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수치스런 도망자였지만 바울의 전도로 그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훌륭한 감독이 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 처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노예들을 바라보며 불의한 노예제도를 공격하거나 노예해방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노예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변화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쓸모없는 무익한 노예였지만, 이제는 없어서 안될 아주 유익한 형제로 변화된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한 것입니다. 전에는 주인의 물건에 불과했던 노예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사실을 배우게 한 것입니다. 전에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도망자 노예였지만 이제는 사랑받는 형제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모든 불의한 제도나 구조 등을 무색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같은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가 베풀어져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교육학에서 유명한 '하아로우의 실험'은 온유한 마음이 이끌어내는 밝은 인간상을 제시해 줍니다. 이 실험은 심리학자인 하아로우 교수가 원숭이들을 상대로 한 것입니다. 젖을 먹는 두 마리 아기 원숭이들 앞에 철사로 만든 엄마 원숭이와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를 세워놓고 그 모조 원숭이들의 가슴에 젖꼭지가 달린 우유병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아기 원숭이들이 빨아먹을 수 있도록 젖꼭지를 내놓았습니다. 첫날에는 두 마리의 아기 원숭이들이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병을 모두 빨아 마셨습니다. 그러나 둘째 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원숭이 인형에게는 다가가지도 않고 부드러운 헝겊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가서 우유를 마셨고, 셋째 날에는 두 마리의 아기 원숭이들이 앞을 다퉈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에게 달려들어 우유를 빨고, 엄마 원숭이의 몸을 만지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실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좋아하고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자신만의 개성이 있으면서도 유독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부드러운 헝겊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처럼 부드러움과 온유함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기준에만 맞춰서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날카롭고 매정한 사람에게서 누가 사랑을 느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종종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까이에서 말을 붙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차갑고 딱딱한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우리의 하나님은 온유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것을 사랑의 부드러움으로 감쌀 수 있는 온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빌레몬은 그 사랑과 믿음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따뜻한 사랑과 믿음이 도망자 오네시모를 감싸안음으로 오네시모로 하여금 복음의 빛이 되게 한 것이었습니다.

햇볕이 따스한 창가에 인형 세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는 진흙으로, 또 하나는 유리로, 나머지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한곳에 있었지만 햇빛을 받아들이는 모양은 서로 달랐습니다. 진흙 인형은 햇살을 받아 그대로 간직했습니다. 유리 인형은 햇살을 받은 만큼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인형은 받은 빛을 수천, 수만으로 확산하여 주위를 온통 반짝거리게 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이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받은 만큼은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다이아몬드 인형처럼 크게 부풀려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유리 인형만큼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흙 인형처럼 받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이아몬드 빛같은 사랑의 빛을 받았던 사도 바울이 그 빛을 오네시모에게 비추어 오네시모로 하여금 에베소 지방에 찬란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게 했던 것입니다.

어느 나라 재상이 팔레스틴을 여행하다가 복음을 듣고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귀국 후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여러 사람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그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이 소식을 듣고는 재상을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라면 말 한 마디만으로도 모든 인생을 구원할 수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친히 사람의 몸을 입었는가?" 재상은 하루만 말미를 달라고 청했고 의기양양한 왕은 흔쾌 히 허락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재상은 곧장 재주가 빼어난 목수를 불러 왕의 외아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목각 인형을 만들게 하고 인형에 아름다운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왕자의 유모에게 그 인형을 안고 부두에 세운 다리 위에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재상과 함께 배에 앉아 있던 왕이 유모를 보고는 왕자가 유모 품에 안긴 줄 알고 팔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유모는 실수인 척하면서 일부러 인형을 물 속에 떨어뜨렸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물로 뛰어내리려고 했습니다. 재상은 만류했습니다. "폐하! 친히 내려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하지만 왕은 "안 된다. 안 돼. 내가 구하러 가겠다. 다른 사람은 마음이 안 놓여! 난 저 아이의 아버지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제야 재상은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왕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류를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어찌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를 받아들여야만 죽음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왕은 감동을 받고 하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지 않고 친히 사람이 되어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유일한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끝까지 달려가 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여 세상을 밝게 변화시키며 구원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