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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청하라

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3. 주초를 반석 위에 놓으라

4. 옥토같은 마음이 되라

5. 알곡과 가라지 인생

6. 겨자씨 한 알 같으니

7. 감추인 보화

8. 새 것과 옛 것

9. 잃은 양을 찾으라

10.부자와 하나님 나라

11.포도원에 들어가라

12.열매맺는 백성이 되라

13.택함을 입은 자가 되라

14.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15.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

16.슬기로운 다섯 처녀

17.작은 일에 충성하라

18.선한 이웃이 되라(1)

19.선한 이웃이 되라(2)

20.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

21.말석에 앉으라

22.망대를 준공하라

23.돌아온 탕자

24.불의한 청지기

25.부자와 거지 나사로

26.선한 목자

27.토기장이의 비유

28.귀히 쓰는 그릇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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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청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5-13, 참조 : 마 7:7-11)

페이건이란 사나이가 감히 버킹엄 궁전에 침입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의 침실에 들어갔습니다. 여왕이 잠에서 깨었습니다. 사나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여왕 폐하,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탄원을 들어 주십시오" 여왕은 침착하게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앉았습니다. 호위병을 부르지 않고 침범한 사나이의 말을 듣겠다는 자세였습니다. 페이건에게는 4남매의 어린 자녀들이 있는데 아내는 가출하고 직업마저 회사의 감원 정책 때문에 나오게 되고 사회복지기관에 호소하였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자기를 정신병자로만 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나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여왕은 호위병을 불렀으며 사나이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직업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있을 수도 없는 엉뚱한 사건이었습니다. 창조자 하나님은 우리의 탄원과 호소와 간구를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마이클 페이건은 엄청난 무례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탄원의 길을 추진한 그 간절함에 여왕이 감동하여 그의 탄원을 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마치고 나니 제자 중 요한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눅가복음11:1). 이에 예수께서 기도의 모델로 가르쳐주신 기도가 곧 <주기도문>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누가복음 11:1-4)

이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내용으로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도의 방법으로 본문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하다가 배가 너무 고파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밤이 늦었지만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문을 두들겨 이미 곤하게 잠에 떨어진 친구를 깨웠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남은 밥이 없다며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밥 좀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친구라는 이유로는 네 요청을 들어줄 수는 없지만, 강청(强請)하기 때문에 일어나 네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기도의 방법에 대한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9-13절)

여기서 제시한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은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열심히 끈기를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인색하거나 무관심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고 계십니다."(시34:15)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가 무엇을 구하든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겠습니까? 기도에 있어서 성령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통달하셔서 우리가 잘못 기도한 것이나 알지 못하여 구하지 못한 것이 있을지라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바르게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시51:11) 간구했던 것입니다.

병낫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낫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것은 왜 그럴까? 생활이 좀 더 부유해지기를 위해 기도했는데 점점 더 쪼들리게 되는 것은 왜 일까? 부모 형제와 화목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눈물로 기도했건만 오히려 불화의 골이 더 깊어지는 것은 왜 그럴까? 어찌해서 저의 기도에는 응답해 주시지 않으십니까? 누구 못지 않게 눈물과 정성으로 기도했음에도 기도의 열매가 없어 기도하기를 포기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까? 기도의 목적과 기도의 자세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즐겨 쓰던 농담이 있습니다. 한 주일 학교 어린이가 산에서 곰을 만났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어 아이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 곰에게 착한 마음을 주세요" 눈을 떠보니까 곰도 마주 앉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야아! 기도가 이렇게 빨리 효과가 날줄은 몰랐어!"하고 기뻐하니까 곰이 말했습니다. "너는 무슨 기도를 했는지 몰라도 나는 식사 기도를 한거야." 레이건은 '사람의 속은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이 농담을 사용하였으나 기도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 곰처럼 식사기도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요구만을 위한 기도라면 얼마나 초라한 기도인가? 기도의 결론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히 나타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경적이어야만 합니다. 성경적이 아닌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TV프로에 나온 어떤 할머니가 60년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날마다 새벽기도했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 남편이 놀음하러 갔을 때도 놀음해서 돈 따서 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바이런 자니스(Byron Janis)는 세계적 피아니스트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교통 사고를 당해 손에 심한 신경통과 신경마비 증세가 있었습니다. 한 때는 열 손가락 중에 왼손 중지 하나만 제대로 움직였고, 새끼손가락은 완전히 마비된 적도 있었습니다. 오른쪽 손목은 40퍼센트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고통과 싸우며 어떻게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을까? 그는 <퍼레이드, Parade>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 의사도 수고하였고, 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기도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싸울 용기를 주셨습니다. 나에게 문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나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쓴잔이 오지 않게 해주소서." 하는 기도보다 "하나님 내가 쓴 잔을 마실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이같은 기도는 바로 성경적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바른 생각을 가지게 되어야 하며, 기도를 많이 할수록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기도를 깊이 할수록 남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많이 용서하며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깊이 할수록 더욱 더 생활이 깨끗하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한 마디로 기도는 하면 할수록 성경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기도를 깊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뜻이 더욱 더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표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웃 구원을 위해 선교헌금해야지, 십일조 드려야 하지, 감사헌금 바쳐야 하지, 구제헌금드려야 하지, 이것저것 다 내어주고도 못 다 준것처럼 여기며 몽땅 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십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을 보면 물질에 대한 것은 오직 일용할 양식밖에 없습니다.

<붙이는 도시락>이 멀지 않아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 국방부는 첨단 기술력을 이용해 군용식량(MRE)을 민간회사와 합작생산해 일반인에게 본격적으로 시판할 계획입니다. 이에 따라 몸에 붙이기만 하면 인체에 필요한 모든 필수 영양소를 피부를 통해 공급해주는 <패치형>식량도 개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미국방부 식량프로그램의 제럴드 다쉬 수석 연구원은 "군인들이 다음 세기에는 뭘 먹고 전투하면 효율적일지 생각하다 갑자기 니코틴 패치가 생각나 이 <붙이는 도시락> 계획을 착수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가족이 밥상 앞에서 "어서 붙여!" "마저 붙여" "더 붙여" "많이 붙여"라고 말하게 되는 날이 곧 오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라는 성구를 이렇게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붙일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주기도문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를 "우리에게 일용할 파스 한 장을 주옵시고..." 이제 앞으로 우리에게 파스 한 장이면 족한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이 기도 많이 해서 부귀영화, 고대광실을 누린다는 것은 기도와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는 내가 희생해서일지라도 남이 잘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 남이 희생되도록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요즈음 한 무당이 충무공 이순신장군 등의 묘소에 쇠말뚝, 식칼등을 박아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묘소 훼손은 충무공 묘소에만 그치지 않고 태조..태종.세종 등 조선조 왕릉 등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모든 묘소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무당의 저주기능에 따라 남을 저주함으로써 자신의 행복과 건강, 부귀와 출세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현재 활동중인 무당수는 2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가는 돈도 무려 1조4천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무당과 엄청난 돈 거래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만, 내 후손만 잘 되면 된다는 망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전진하여 모압으로 진격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모압 왕 발락은 위기를 느낀 나머지 메소포타미아의 점쟁이 발람을 초청하여 저주하여 이스라엘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발람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저주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메시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순간마다 성령이 강권적으로 그를 사로잡아 이스라엘의 번영과 축복을 기원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민수기 22,23장) 하나님은 결코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배은망덕한 인간일지라도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저주한다고 남이 저주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남을 저주해서 자기 뜻대로 될 것이라면 세상은 벌써 끝장났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제대로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웃의 축복을 위해, 아니 원수까지일지라도 그의 축복을 위해 간절히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잘 되는 것, 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것은 오직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자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잘 되신 분들이며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 받으신 분들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며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내가 다 이루었다"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주안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출세했고, 성공했고,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보증으로 주신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전도,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문을 외우는 교회에 불과합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으며 예수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교회는 열매없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 강청하여 기도하되 성경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강청하여 간구하시면 여러분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것은 오직 성령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시고 성령을 따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따라 하는 기도는 성경적입니다. 성령을 따라 기도 생활하는 사람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성령을 따라 기도 생활하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 예수 처럼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강청하는 기도 생활로 인류에게 가장 좋은 성령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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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22)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 저희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29)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눅 13:22-30, 참조 : 마 7:13,14,21-23)

예전에 이 세상에서 사치란 사치는 다 하고 많은 존경을 받던 한 여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여자가 죽어 하늘 나라에 도착했을 때 그녀에게 할당된 집으로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 한 천사가 파송되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저택을 여러 개 지나쳤으며 그 여자는 한 집 한 집 지나칠 때마다 그것이 자기에게 할당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하늘 나라의 중심 도로를 지나 교외의 변두리 지역에 이르게 되었을 때 거기에는 훨씬 적은 집들이 총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변두리에 있는 오두막집보다도 작은 집에 이르렀습니다. 안내하는 천사는 "이것이 당신의 집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자는 "무엇이라고요? 이것이 내 집이라고요? 나는 여기서 살수가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천사는 말하기를 "안됐소마는 우리는 당신이 올려보내 준 물자로서는 고작해야 이것밖에 지을 수가 없었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늘 나라가 지상에서 올려보낸 물자로 각자의 집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면 천국은 역시 부자들의 천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 하늘 나라는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표준은 세상의 표준과 다릅니다. 세상에서 먼저 된 자가 종종 하늘 나라에서는 나중 되고 세상에서 나중 된 자가 종종 하늘나라에서는 먼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랑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 잔치에 모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실 때 그토록 사랑했던 제자들 모두가 하나 같이 다 흩어지고 예수 홀로 남으셨습니다. 예수의 수제자로 일컫는 베드로마저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며 발뺌을 하고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두고 일찍이 예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과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끝까지 따라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하나 둘씩 예수곁을 떠나자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에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두고 마태복음 7장 13절-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사람이 적어도 그 문은 사는 길이고, <넓은 문>으로 가는 길은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 문은 죽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은 비록 고난과 아픔의 길이었지만 부활과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생명의 구원을 주신 길, <산 길>이었습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가로막힌 성전 휘장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인류가 사는 <좁은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가시기 원하신다면 예수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예수께 나아가는 길이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좁은 문>은 예수께서 가신 길, 곧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 동족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천사의 얼굴로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자신을 해롭게 하거나 원수에게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잘 되기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며 사는 길이 좁은 문으로 가는 생활입니다. 가시면류관을 받으시고 멸시 천대 조롱을 받으면서 급기야는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이 좁은 문으로 가는 생명의 길입니다. 원수를 사랑으로 섬기는 길이 생명에 이르는 좁은 문으로 가는 생활입니다. 역경 중에도 기뻐하며 감사하는 생활이 좁은 문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듯이 자기를 낮추어 겸손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이 바로 좁은 문으로 가는 생명의 길입니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사랑으로 섬기고, 배운 자가 못 배운 자를 사랑으로 섬기며,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사랑으로 섬기며, 건강한 자가 병든 자를 사랑으로 섬기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며 사는 길이 바로 좁은 문으로 가는 생활입니다. 예수 믿고 환상을 보았다거나 천국을 경험했다거나 하면 신령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낮고 천한 곳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에 대해서는 신령하다거나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 경험담을 그토록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얘기할 때만 예수 믿고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 같고 다른 때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보다 더 못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사람은 떡(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사람은 엄연히 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는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여러분 남편과 아내가 밥으로만 삽니까? 남편과 아내사이에 밥도 있어야만 하지만 사랑이 있어야 남편과 아내로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기도만 한다고 저절로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밥을 잘 먹고 건강해야 기도생활도 건강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밥을 먹기 위하여 일하는 것 보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욱 거룩한 일처럼 잘못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느니라"는 말씀에서 "하나님 입에서는 나오는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요 바로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이동철의 실화 소설에 보면 주위의 창녀들 때문에 교회에 지장이 있다고 경찰에 신고하여 창녀들을 쫓아 버린 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업을 못하게된 한 용기 있는(?)창녀가 술에 취해 알몸으로 교회 철문에 매어 달려 "이 개새끼들아! 우리가 너희들보고 밥 달라고 했니? 떡을 달라고 했니? 내 몸 팔아 내가 먹고사는데 너희들이 웬 상관이냐? 우리들 다 먹여 살려라!"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창녀의 처절한 몸부림은 더럽고, 창녀를 신고하여 쫓아버린 교회는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창녀를 더럽다고 그들의 밥그릇을 차버린 교회는 과연 <좁은 문>으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남의 밥그릇 차버리라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까? 이러한 교회가 장차 천국 문에서 환영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속칭 <청량리 588>, 창녀촌 마당 한복판에서 창녀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노숙자들과 결식 부랑인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 지어 대접하며 그 마당에서 예배드리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 <청량리 588>에서 예배드리는 교회는 더러운 교회요 넓은 문으로 가는 교회입니까? 창녀들 밥그릇 차버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교회입니까? 아니면 창녀촌 마당에서 밥 퍼주며 그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교회가 하나님 뜻대로 하는 교회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천국의 문전에서 거절당한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와 안면이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이 말은 예수와 친분을 구실로 구원을 보장받으려는 유대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친밀한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와 함께 식사한 적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배척하고 멀리했던 세리나 창기들과 한번도 식탁을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며 분명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와 유대인이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란 서로의 기쁨 뿐만 아니라 고통과 아픔, 배고픔을 함께 나누어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를 말합니다. 유대인이 구원을 주장하는 또 하나의 관계는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는 것입니다. 예수께 배웠다는 이유로 구원을 보장받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거절당한 이유는 "행악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여기 "행악"은 다음 성구에서 그 분명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장 21절-23절)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다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해서 그런 것이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지자 노릇한다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를 잘 알고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는 피차에 서로 아는 관계여야 합니다. 서로를 안다는 것은 참된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내 자신이 하나님께 알려지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내가 하나님을 아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실 때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신다는 데서 나의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데서 시작됩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천국 문턱에서 거절당하지 않는 하나님의 아는 자가 되어 천국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십자가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고 궁극적으로 심판과 두려움을 벗어 던지게 하고 구원의 생명에 이르게 했습니다. 여기 분명히 나타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바로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인류 사랑의 길입니다. 제아무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사랑으로 섬기는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가는 생활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리고 금식기도를 밥먹듯 한다할지라도 그리고 성경을 수도 없이 읽었다해도 사랑으로 섬기는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가는 생활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귀신을 쫓아내며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해도 사랑으로 섬기는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가는 생활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혹시 율법대로 산다고 신앙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율법은 죄를 정하여 죽이는 것이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 십자가의 길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입니다. 예수 믿고 그가 보여주신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로 생명에 이르는 <좁은 문>으로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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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초를 반석 위에 놓으라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 주여 !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15-29, 참조 : 눅 6:47-49, 13:25-27)

며칠 전 교회 근처에 살고 있는 이 모씨가 제게 전화했습니다.

"목사님,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금 저는 그간 35년 동안 사용했던 부적이며 우상숭배하던 기구들을 몽땅 들고 나와 교회 근처 공터에서 불태워버리고 전화드립니다."

그가 제게 들려 준 얘기는 이렇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행하는 축호전도를 받고 지난 주일에 우리 교회를 찾아왔는데 차마 예배드리는 시간에 출석은 하지 못하고 다만 그 예배시간에 2층 계단에 앉아있었는데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기쁨과 평안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금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 신앙생활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4살 때 어느 서커스단에 끌려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35년 동안 몸의 유연성을 위해 식초를 마셔왔는데 이제 더 이상 서커스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엉망진창이 되어 이틀에 한번씩 병원에 가서 링거주사를 맞지 아니하면 도저히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도 없고 뼈 전체에 이상에 생겨 주사액을 투입하지 않으면 걷는 것조차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손등이 90도 이상 휘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지난 35년 동안의 삶은 오직 서커스단을 위해 너무나 비참한 생활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무너져 내린 39년의 처참한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축호전도를 통해 한 인생이 예수를 영접하고 이제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지어 가는 아름답고 희망찬 삶의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함께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방법은 그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이 이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무는 그 체질과 성품에 반대되는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속에 자리잡고 있는 거짓은 그 행위를 통해서 반드시 드러나는 법입니다. 즉 아무리 말과 행동을 조심한다 할지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정체를 여실히 폭로시키고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거짓 선지자는 그의 인격, 품성으로 그 진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격과 품성 중에 최고의 인격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도 사랑의 은사입니다. 품성을 나타내는 성령의 열매 중에 최고의 열매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이타주의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이리떼와 같이 오직 자기 배를 채우겠다는 탐욕과 이기주의가 그의 본성입니다. 참된 목자는 양떼를 자기 생명보다 더 귀중하게 돌봅니다. 성령으로 예언한다면서 선지자의 대접을 요구하거나 돈과 필요한 물건을 요구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가르치는 일도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행합니다. 종교란 의식(儀式)이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종교를 의식화해서 그들의 돈벌이 내지는 권세 보존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만일 사람이 손씻는 규례를 바르게 잘 지키고, 안식일에 무화과 두개 이상의 무게가 되는 것은 운반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에 규정된 거리 이상을 걷지 아니하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고 채소밭의 소산까지도 그렇게 한다면, 그리고 부정한 음식, 예를 들어 돼지고기나 메기, 미꾸라지 등을 먹지 않는다면 그는 선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종교와 종교 의식을 쉽게 혼동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에 출석하는 것, 주일을 지키는 것, 교회에 대한 재정적인 의무를 감당하는 것, 성서를 읽는 것, 지금도 구약처럼 돼지고기 등을 먹지 않는 것 등이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모든 것을 실행한다고 해도 그는 참 종교인 참 신자가 되지 않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믿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인류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류를 섬김으로 구원코자 하시는 그의 겸손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 600여 가지를 제아무리 다 지킨다해도 예수 믿고 예수의 마음을 품어 예수의 인격, 곧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아니한다면 그는 참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 기독교인은 그 열매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지금부터는 당신은 영화관에 가지 마시오, 지금부터는 춤도 추지 마시고 노래방같은데도 출입을 금하시오, 지금 부터는 담배를 피우거나 화장을 하지 마시오, 지금부터는 연애소설이나 선데이 서울같은 것을 읽지 마시오, 팝송이나 흘러간 노래를 부르지 마시오" 라고 한다면 그런 기독교나 종교는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이러한 것들을 삼가함으로써 만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면 기독교는 실제 그 자체보다 훨씬 더 믿기 쉬운 종교가 될 것이며, 종교라기 보다는 오히려 도덕 윤리에 불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온전한 본질을 말한다면 행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섬김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소극적인 기독교인은 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현실을 도피하는 종교가 아니라 미움과 증오, 부정과 부패, 음란과 타락, 혼돈과 공허가 난무하는 세상에 더욱 더 깊숙히 들어가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예수님처럼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인류를 사랑으로 섬기는 표상입니다. 십자가는 참된 생활이며 아름다운 삶의 열매입니다. 생활과 동떨어진 종교나 교훈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거짓된 것입니다. 수도승들과 은둔자들이 저지른 오류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자로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사막이나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되며 유혹많은 세속의 생활로부터 떠나서 세속의 삶을 중단하지 아니하면 참된 크리스찬의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말하기를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고 했습니다. 유명한 영화 <사운드 어브 뮤직>에 보면, 폰 트랩 대령 가정에 한 수녀가 가정교사를 들어갔다가 아내가 없는 그 대령과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 수녀(줄리 앤드류 분)는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기로 서원했기 때문에 남녀간의 사랑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말도 없이 그 집을 뛰쳐나와 수녀원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수녀원 원장이 이를 알고 그 수녀를 불러 책망합니다. 수녀원은 세상에서 살다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를 피하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녀원에 기어 들어오는 것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많더라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펴나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랑하며 섬기는 생활입니다.

종종 오만해서 배타적인 종교집단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협소한 종파에 몰아넣고는 그 외의 세계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가르치는 무리들입니다. 자신들만이 의롭고 참되며 자신의 종교 집단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모두가 죄인이며 심판을 면할 길이 없으며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무리들은 모두가 다 한결같이 거짓된 종교입니다. 종교의 기능은 양쪽의 가운데다 장벽을 세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헐어버리는 일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인류와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는 유대인과 그들이 원수처럼 여겼던 이방인들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2:13-18)

포스틱(Fosdick)은 다음과 같은 엉터리 시 네 줄을 인용해서 배타적인 종교집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선택된 소수의 무리,

그 외 모든 인간들은 저주를 받고 있다.

천국에는 너를 위한 장소는 없다.

천국이 만원되어선 곤난하다."

종교는 사람들을 서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대립하는 클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가족으로 모아들이는 것입니다. 특정한 교회 또는 교파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하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는 분리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연합시키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모두가 다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되는 비결이 바로 예수의 마음을 지니고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입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치 않는 자들은 어리석은 건축자와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집의 기초를 모래나 흙 위에 세운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 지혜로운 사람이 집을 세울 기초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이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린도 전서 3: 10,11)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집이 무너지듯 그 신앙이 무너지고 말게 됩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 물질이나 부귀공명이 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주초,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사상에 집을 지었던 나라나 인생들이 처참하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민족주의나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 무너지지 않는 주초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시대에도 어떠한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터>는 "주께서 아시는 백성"(디모데 후서 2:19)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백성이 되기 원하신다면 그래서 인생의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인도의 썬다씽은 "인도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까? 기독교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을 모른다면 내가 살 의미가 없습니다. 내일 새벽까지 나에게 당신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나는 차라리 죽겠습니다."하고 생명을 걸고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구도자였습니다. 그러한 썬다씽에게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나타나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라고 했기 때문에 그날부터 그는 주를 위해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를 찾기 위하여,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그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모르고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모르고서 사랑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아 주시는 것입니다.

"(고전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마땅히 알아야 할 그 무엇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작 알아야 할 하나님의 사랑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사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별별 은사나 능력을 받았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두 아들이 있습니다. 맏아들은 효자요, 둘째 아들은 부모에게 불효한 이른바 방탕아입니다. 그래서 형은 언제나 그 동생을 구박하고 멸시합니다. 이유는 부모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맏아들은 자기가 부모의 뜻을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런 탕자는 없어지던가, 나가 죽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 즉 그 부모가 그 못난 자식도 똑같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아니 자기에 대해서보다도 오히려 그 동생에게 더 큰 연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는 부모를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부모를 잘 안다는 대 전제에서 자기와는 다른 그의 동생을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와 똑같은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만이 하나님의 법을 잘 알고 있고, 받은 바 은사를 통해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 사랑과 섬김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구하되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것입니다. 은사의 목적이 자기증명이나 자기 신앙의 우월성, 하나님과의 남다른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은사나 능력의 목적은 자신에게 덕을 세우며, 교회에도 덕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덕목 중에 가장 큰 덕목을 말한다면 무엇보다도 사랑과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첫째는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가정과 교회, 더 나아가 나라 민족을 하나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이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0-15)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어떠한 어려움과 환난이 있어도 말씀대로 살며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나무나 풀이나 짚"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는 믿지만 유명무실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화하지 못하는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무너지지 않은 인생의 집을 지으려면 무엇보다 그 마음이 무너지지 않아야 합니다. 사업에 실패해도, 어떠한 역경과 환난이 불어 닥친다해도 그 마음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재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기 원하신다면 예수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인류를 사랑으로 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의 조롱과 비난과 멸시 천대를 받으면서도, 아니 급기야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지라도 무너지지 않으셨습니다. 무너지지 아니하는 견고한 터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이 자신의 집을 견고하게 세울 터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무너지지 않은 견고하고 지혜로운 인생의 집을 짓고자 한다면 예수 믿으시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대로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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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옥토같은 마음이 되라

(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 13:1-9, 참조 : 막 4:1-9, 눅 8:4-8)

예수님 당시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오정>같은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여 그 귀는 듣기에 둔한"(마태복음13:14-15)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과 무관하지 않은 재미있는 <경상도 사오정> 이야기 한 토막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성경암송퀴즈대회가 열렸습니다.

사회자 : 창세기 2장 23절을 외워 봅시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봉독한 후 시킬 사람을 두리번거리며 찾았습니다.

김 집사 : (보통소리로)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사회자 : 아주 잘 외우셨습니다. 누구 또 암송하실 계십니까?

경상도 사오정 집사 : (큰 소리로) 이는 벼 중의 벼요. 쌀 중의 쌀이라.

예수께서는 본문(3-9절)의 천국에 대한 비유 말씀을 잘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18절-23절에서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그 해석에 따르면 씨는 하나님의 말씀, 밭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길가에 씨가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밭에 떨어졌으나 흙이 얇고 깊지 않아 해가 뜬 후 곧 씨가 말라 타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말씀의 뿌리가 없어 환난이나 핍박을 받게 되면 곧 믿음에서 넘어지는 사람을,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으나 가시가 씨보다 더 빨리 자라서 그 가시에 막혀 더 이상 자라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으나 세상 염려, 재리의 유혹 등에 막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결실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여 결실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옥토같은 마음 밭에 떨어져 100배, 60배, 30배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삶의 모습을 하나 소개합니다.

2월 4일 부산에서 김남 자매가 보내온 편지입니다.

『....목사님, 주안에서 평안하셨습니까? 저희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입게 하여 주시며 능력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목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부산에 사는 김남 자매입니다. 저의 아시는 분에게 선물로 받은 이동희 목사님께서 쓰신 책을 읽고 은혜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말씀 속에서 전하고자 하는 주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 일화를 통하여 가슴속 깊이 남게 하여 주시며 깨닫게 하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저는 21살 때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10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목, 팔, 다리 등 온 몸에 관절들이 굳어서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힘든 몸이지만 그래도 아직도 잃어버린 것보다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며 아름다운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기에 감사하며 팔과 손가락의 관절들이 굳었지만 아직 두 마디의 손가락 관절이 덜 굳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글씨를 쓰게 해 주심에 감사하고 또 다리를 걸을 수 없기에 세상에 나가 죄를 지을 수 없음에 감사하며 이렇듯 감사하지 못할 것 보다 감사할 조건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의 육신의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게 해 주시고 알게 해 주셔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저의 영혼을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속의 은혜를 얻게 하시니 이 세상 그 어느 것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오늘 이 하루도 아픔 속에서 걸러지는 감사와 숨결 속에 내 마음의 등불이 항상 빛나게 하여 비록 육신은 병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 같지만 내가 하나님을 소유한 것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날 저에게도 육신의 고통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을 땐 많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병으로 육신의 장애를 가져 평생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해버리려고 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어찌 나는 왜 나의 삶이 이렇게 험난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며 사람은 얼마만큼 불행해질 수 있는 것인가? 등 타인의 불행의 이야기가 나의 현실의 삶이 되었다는 사실에 절망의 늪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었던 나를 주님은 성경말씀 속에서 만나주셨습니다. 세상과 인생을 무엇을 보느냐, 또 어떻게 보느냐는 각자의 인생의 향하는 길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부터는 육신 속에 갇혀서 어둠 속을 방황하던 내 영혼이 암울했던 현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향해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모습 안에서 무언가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손가락 두 마디 관절이 덜 굳어 글씨 쓰는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노력 끝에 알아 볼 정도의 글씨로 여러 어려움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부족하지만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복음의 빛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도 병원생활을 오래 하였기에 병상에 있는 환우들에게 작은 위로와 기쁨이 되고자 주의 서신을 전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저의 부탁 한 가지 들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목사님 쓰신 책에 언제나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저서 중에 <끊을 수 없는 사랑, 로마서 설교집>과 <사랑의 향유, 요한복음설교2집>이 두 권이 없어 꼭 읽고 싶습니다. 어머니께서 연로하시고 저와 단둘이 살다보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신앙서적을 사 볼 여유가 없어 이렇게 목사님께 서신으로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월간 책자인 <숲 속의 사과나무>인지 정확한 제목은 모르지만 그 월간 책자도 꼭 매달 받아 보기를 원합니다. 목사님, 어려운 부탁인지 모르지만 저의 이 간절한 부탁을 꼭 들어주시기를 주님께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그럼 항상 평안하시며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평강교회와 목사님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늘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9.2.4. 부산에서 김남 자매』

지금 여러분은 온 몸이 다 굳어버리고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 두 마디로 쓴 김남 자매의 믿음의 글을 들었습니다. 이 분을 위해 잠시 함께 기도드립시다. 38년 동안 병든 환자도 고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김남 자매의 굳어져 가는 몸을 고쳐 주시옵소서. 그래서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게 하옵소서.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한 사실은 씨를 뿌리면 다는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거둔다는 것입니다. 씨를 뿌렸을 때 더러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주어먹어 버렸고, 더러는 돌짝 밭에 떨어져 결실치 못했으며,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져 질식해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씨뿌리는 농부가 씨뿌리는 것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좋은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자기가 뿌린 씨 모두가 다 잘 자라서 열매를 맺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농부는 비록 얼마간의 씨앗이 이래저래 없어진다 해도 얼마는 좋은 땅에 떨어져 100배, 60배, 30배의 많은 결실을 맺게 됨을 알고 파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젊어서부터 함께 교회생활하며 외롭게 늙어 가는 두 노인, 이씨와 김씨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젊은 시절 친구들은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나서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인 김씨가 먼저 죽게 되자 평소 같이 지냈던 이씨 노인은 그 장례식에 찾아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장례식에 자기만이라도 참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날 날씨는 궂고 비가 내리고 있어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관이 공동묘지에 다달았습니다. 성문 곁에 기다리고 있는 한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전쟁 때였습니다. 그는 장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우의에는 계급장이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군인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묘지까지 왔습니다. 식이 끝났을 때 그는 앞으로 걸어나와 묻지 아니한 무덤 앞서 서서 손을 번쩍 들어 일국의 대통령에게 하는 경례를 붙였습니다. 이씨 노인은 이 군인과 함께 걸어나왔습니다. 그들이 걸을 때 바람이 불어 그 장교의 우의가 벗겨지며 어깨 위에 붙은 계급장이 보였습니다. 그는 바로 별을 단 장군이었습니다. 그 군인은 노인 이씨에게 "당신은 아마 내가 여기서 하고 있는 짓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 해 전 김씨 노인은 나의 주일 학교 선생이었읍니다. 나는 그때 개망나니같은 소년으로 그를 몹시 괴롭혔읍니다. 그는 결코 나를 위해 자기가 무얼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날 나 된 것이 바로 그 늙으신 김씨 노인의 은혜입니다. 나는 일생 그의 은혜를 잊을 수 없읍니다. 그래서 오늘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사를 드리러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씨 노인은 주일학교 교사시절 자기가 뿌린 복음의 씨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매주 뿌리는 복음의 씨앗들이 어떻게 어디서 자라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복음의 씨를 뿌릴 따름인 것입니다. 더러는 길가나, 가시떨기나, 돌밭에 떨어진다 해도 실망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그 이상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뿌린 씨를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들려주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여러 가지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길바닥 같은 마음, 돌밭 같은 마음, 가시밭 같은 마음, 그리고 좋은 땅 같은 마음이 곧 그것입니다. 물론 앞서 세 가지 상태의 마음에서는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고, 오직 좋은 땅 같은 마음에서만 백 배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그렇다고 앞서 세 가지 상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상태의 미음이더라도 그것을 좋은 땅, 옥토 같은 마음이 되게 하는 데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길바닥 같이 굳어져 딱딱한 마음은 깊이 갈아 뒤엎으면 옥토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길바닥 같은 마음은 강퍅하고 완악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도무지 깨닫지 못한 마음을 가리킵니다(19절). 이런 사람은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죄가 그 사람 마음을 가리워 복음을 아무리 들려주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죄된 생활에 뻔뻔하며 전혀 생활에 변화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길바닥을 깊이 파고 뒤엎어 좋은 밭을 만들듯이, 아무리 완고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그것을 깊이 파고 뒤엎어 고르면 좋은 마음 밭이 되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좋은 밭이 없었듯이 본래부터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좋은 밭이란 다 굳은 땅을 갈아 일구어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완고한 철벽이더라도 그것을 갈아 일구면 좋은 마음 밭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을 때만 옥토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복음에 훼방자였으며, 죄인 중의 괴수였던 사울을 변화시켜 복음 전도자 바울이 되게 하셨던 예수께서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갈아엎어 옥토 같은 마음이 되게 하시는 회개의 영이 길가와 같은 마음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돌밭 같은 마음은 마음에 박힌 돌들을 다 파내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돌밭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듣고서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잠깐 견디다가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곧 넘어져 버리는 경우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도 빨리 받고 흥분도 빨리 하고 결심도 빨리 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뿌리가 없어 환난, 핍박을 당하게 되면 곧 넘어지고 마는 사람의 마음으로 극히 감정적 신앙, 기분파 신앙을 가진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감정과 기분이 좋으면 무엇이든 열심히 행하다가도 기분이 나빠지면 금새 시들해져 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금새 잘 시작했으나 성실하고 일관성있게 하지 못하여 그 신앙인격이 천박하고 경박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돌밭은 그 껍데기는 부드럽지만 그 속은 아직도 채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상태의 마음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그 속마음이 성령으로 부서지지 않고 자기 아집과 주장으로 가득찬 상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마음의 밭에는 복음의 뿌리가 깊이 내려지지 않아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돌밭처럼 거칠고 완고하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아져서 그런 방해 요소들이 제거되고 나면 결국 좋은 밭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 사랑의 길이와 높이, 깊이와 넓이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가시밭 같은 마음은 그 가시들을 제거하면 옥토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가시밭 같은 마음이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에 대한 염려와 재리에 대한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고 마는 경우라고 하였습니다(22절). 그 가시가 기운을 막았다는 말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 나가는 모든 영적 생활을 훼방하거나 혼돈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 근심과 걱정, 염려, 그리고 물질의 유혹은 이처럼 성령의 역사를 가로 막아 신앙이 성장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에서는 배고픔, 다시 말해 당장의 물질 유혹에 못이겨 장자의 명분을 손쉽게 팔아 치우고 평생 후회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물질과 출세, 여자의 유혹을 물리침으로 평생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결국 자기 가족, 자기 민족 전체를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유혹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시가 많은 땅에 뿌려진 씨가 결실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땅도 거기에서 가시덤불을 잘라내고 그 뿌리까지 뽑아낸 다음 흙을 갈아엎으면 좋은 밭이 되어 여러 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한들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성령을 통해 여러분의 심령을 주장하여 마음의 가시가 모두 제거되고 옥토 같은 마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열매가 없이는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천사의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일만 마디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깨닫는 마음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열매를 맺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제아무리 능력 있어 보여도 열매가 없으면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겸손히 복음을 영접하여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 묵은 밭을 갈아 엎고, 마음에 돌과 가시를 제거하여 좋은 마음의 밭, 옥토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의 심지가 깊고 신앙적 줏대가 있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러분의 삶에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케 하는 성령의 감화감동하심이 항상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성령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의 밭을 부드럽고 깊게 기경하도록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너희는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호세아 10:13)

이스라엘의 척박한 광야, 사막일지라도 갈릴리 호수의 물이 가 닿기만 하면 옥토로 변합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됩니다. 여러분에게 생수같은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여 옥토같은 마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100배,60배,30배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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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알곡과 가라지 인생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4-30,36-43)

천국에는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가라지는 들어갈 수 없고 알곡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좋은 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알곡들이 되시므로 장차 천국에 들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남들에게 짓밟히거나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고 살다가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이겠습니까? 도둑이나 강도짓, 사기나 부정부패해서 잘 사는 세상으로 끝이나고 내세가 없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나 확실히 천국이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하여 알곡은 천국 곳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거두어 불사르는 최후의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반드시 성공하고 출세하며 부귀를 누려야만 알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패하고 가난하며 병든 사람은 가라지라고 보아도 괜찮은 것이겠습니까? 세상에서 보는 알곡의 기준은 그럴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알곡의 기준은 <좋은 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의 아들들>이 되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실패하고 가난하고 병들었어도 <좋은 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의 아들들>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알곡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가 알기 쉽게 37절-39절에서 해석해주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마태복음 3:37-39)

여기 보면,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 곧 진리가 되시는 예수 자신을, <밭>은 <세상>을,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곧 예수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 <추수 때>는 <세상 끝>, <추수꾼>은 <천사들>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밭>과 같은데 <좋은 씨>를 받아들여 "알곡"들이 되는 사람들과 <가라지>같은 <악한 자의 아들들>이 함께 섞여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앓던 이를 뽑아내듯이 <가라지>를 다 뽑아 내버리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가라지>를 <추수 때>, 다시말해 최후의 심판 때까지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병원 입원 환자 중에는 병원비가 없어서 밤중에 몰래 도망가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병원 측에서도 도망환자를 찾아보아야 돈이 없으니 별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경제난 속에 어지간해서는 병원에 갈 수 없는 판국에 의대교수가 <양심선언>을 해서 화제입니다. "대학교수로서 애써 가르친 제자들이 도둑질하는 의사가 되는 것을 더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며 서울대 의대 김용익 교수가 <양심선언>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의약품비리로 연간 1조3천억원의 손실이 초래되고 있다며 제약업계와 병원간의 비리를 고발하고 반성하는 공개서한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의료윤리와 의료정책을 가르치는 의료관리학 전공인 김 교수는 편지에서 "의약품의 보험가격이 실거래 가격보다 최고 9배까지 높게 책정돼 있다."며 "제약협회가 의료보험약가를 직접 결정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 교수는 또 "병원에서 약을 구입할 때 기부금, 장학금, 학회참가 보조금 등 제약회사와 다양한 비밀거래들이 오간다."며 "어떤 약이 새로 병원에 들어가려면 <랜딩비>, 그 후에는 <리베이트>라고 불리는 상납이 이뤄진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의사들이 약을 선택할 때 병에 적합한 약이 아니라 이윤이 많은 약을 고르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전공의나 공중보건의 등 20대 의사들이 제약회사들의 이러한 관행에 처음에 놀라다가도 30대가 되면 필수불가결한 요령으로 보는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말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병원에 갔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터무니없는 진료비, 치료비, 약값을 지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몸이 아픈 것만해도 고통스러운 것인데 병에 적합한 약은커녕 의료비까지 바가지를 썼다고 생각하니 돈 없는 서민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수배중인 폭력배와 함께 도박하는 경찰, 나라의 세금을 도둑질하는 <세도, 稅盜>, 병환자들의 의료비 도둑질하는 <의도, 醫盜>, 경제환난의 와중에서도 외화빼돌리는 재벌, 등등 헤아리자면 우리 나라는 도둑놈이 판치는 형국이 아니라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난리 통에 여전히 고통을 당하는 계층은 힘없고 돈 없어도 정직하고 진실하며 열심히 살고자 하는 서민들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용어를 빌리자면 <가라지>같은 인간들 때문에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알곡>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 하박국 선지자의 관심은 '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가?'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강포와 간악이 난무하여 도처에 변론과 분쟁이 그치지 않는 혼란으로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이행되지 않아 의인이 악인에게 쫓겨나가게 되는 사회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 무법자와 악덕자들을 그냥 두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살려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하박국 1:2-4)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하박국 선지자는 불평하며 다시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조용히만 계십니까?"

하박국은 성질이 급해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확 뒤집어 엎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하늘에서 철퇴를 내려 악한 자들, 가라지 인간들을 콩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박국이 하나님에게 요청한 것은 가만히 계시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맑으시므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고 그냥 계시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보고만 계십니까? 악한 민족이 착한 백성을 삼키어도 조용히만 계십니까?" (하박국 1:13).

하박국의 이러한 질문에 하나님은 "비록 더디더라도 그때를 기다려라."(하박국 2:3)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하박국 2:2-3)

하나님의 이같은 답변은 불 같은 성미의 하박국 선지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박국은 지금 당장 눈 앞에서 의인이 희생당하는데 단 1초도 꾸물거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하늘 문을 열어 날벼락을 내려 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은 그야말로 만만디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것인지도 모르고 또 왜 잠잠히 계시는지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으니, 하박국의 속마음이 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라지를 불태워버리는 심판의 그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심판은 주께 맡기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대해 불평을 하자 그 불평을 들은 한 사람이 이렇게 충고해 주었다고 합니다.

"완전한 교회를 다니고 싶으시겠죠? 찾아 나서십시요. 혹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찾게 된다면 당신은 그 교회에 절대 들어가지 마십시요. 왜냐하면 당신은 불완전한 사람이고 불완전한 당신이 들어감으로 인해 그 교회가 더 이상 완전하지 못할 테니까요."

이 세상에는 완벽한 교회가 없습니다. 가라지는 이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가라지라고 판단되면 뽑아서 완전을 이루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가라지를 분명하게 가려낼 능력이 없습니다. 곧 완전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완전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행여 가라지라고 판단한 것이 잘못된 판단이면 어찌 할 것인가? 형제를 실족케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에 매어 깊은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고 성경은 말합니다.(마태복음 18:6).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밭의 주인이신 주께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추수밭의 주인이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면 주인이 그 말에 책임을 질 것입니다. 추수밭의 주인이 가라지를 염려치 않는다면 우리도 염려할 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라면 가롯 유다를 조급히 쫓아내고 싶었겠지만 주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라지라고 규정짓는 동료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을 가라지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혹 그들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우리와 행동을 같이 하지 않더라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존재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한 동료의 허물에 분내는 우리 자신도 똑같은 존재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라지라고 생각된 사람들에게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성장과 발전이 조금 더디다할지라도 가라지를 뽑아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알곡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바라보고 기다리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그 깊고 깊은 뜻을 한번쯤은 헤아리면서 기다릴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끝까지 가라지들은 때가 되면 심판의 불에 던져 넣겠노라는 말씀을 믿고 기다려줄 줄 아는 진실한 믿음의 알곡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뿌려진 <좋은 씨>가 알곡들이 되어가는 사람들의 생활은 이렇습니다. 먼저, 예수님처럼 겸손하며 항상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모두가 하나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는 인간의 가치를 하나님의 형상을 이룩하는데 두고 성령의 열매인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다섯째는 좁은 문, 좁은 길로 행하여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가라지>인생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첫째, 교만하고 거만합니다. 물질과 지식, 명예와 권력, 능력 등으로 교만해지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미움을 키워 분열과 증오, 전쟁과 파괴를 일삼아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는 사람으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부귀영화, 성공, 의식주 등의 생활에 대한 근심 걱정 염려로 일관하며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며칠 전 부산교도소에서 출감한 김 0 0 씨가 저에게 편지와 더불어 전화를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인도한 96년 9월 6일 교도소 집회에서 은혜 받은 후 <숲 속의 사과나무>를 통해 믿음이 성장하여 자신의 변화된 삶에 너무나 감사하다는 편지와 전화였습니다. 김씨는 <숲 속의 사과나무>와 우리 평강교회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며 여러분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출옥해서 그간 하나님의 은혜와 <숲 속의 사과나무>에 보답하고자 지금은 서울에서 문서선교 중인데, 저희 교회에서 발간한 설교집을 이용해서 소책자를 발간하고 문서전도하고자 하는 일에 허락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신장병으로 꺼져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신장 하나를 기증하기까지 했다는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전국39개 교도소와 종합병의원에 매주 전하는 <숲 속의 사과나무>는 이처럼 전국 곳곳에서 <좋은 씨>를 뿌리고 있으며, 가라지같은 인생들을 알곡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교도소에 있다고 해서 가라지라고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얼마든지 가라지도 알곡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요지경이라고 성급해 하거나 하나님을 향해 원망 불평할 것이 아니라 추수 할 때를 바라보면서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분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박국과 똑같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 좋은 밭에 가라지가 난 것을 보고, 그것을 뽑아 버리려고 했더니 주인은 추수 때까지 기다려보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답변은 가라지를 뽑다가 좋은 알곡도 뽑힐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종기가 아주 커질 때까지는 아프지만, 조금 더 참다가 째는 것과 같은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악에 대한 최종적인 징계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수할 그 때를 기다리면서 믿음을 가지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라지에 대한 심판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하박국에게 주어진 하나님 답변은 "그들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할지라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하박국 2:4)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믿음으로"는 "진실함으로"라고 말과 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진실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요지경 속 같고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악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은 요지부동하게 믿음에 굳게 서서 끝까지 진실하게 살아야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다지 멀지 않은 추수의 날에 <알곡>처럼 살았던 여러분의 생애가 허무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면, 의인을 찾으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믿으시고, 시대적 상황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믿음에 굳게 서서 끝까지 진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알곡이 되고자 하면 씨가 좋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알곡이 되도록 <좋은 씨>를 뿌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 깊이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 가라지와 알곡을 분별하는 추수의 때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좋은 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어 장차 천국의 축복을 누리시는 알곡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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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겨자씨 한 알 같으나

(18)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눅 13:18-21, 참조 : 마 13:31-33, 막 4:30-32)

지난주간 도착한 수 십 통의 편지 중 하나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부민병원에서 <숲속의 사과나무>라는 책자를 읽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아프셔서 기다리는 시간에 읽은 이 책으로 저는 잔잔한 감동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저는 31살된 주부입니다. 연년생을 둔 관계로 모든 일이 아이중심이라 신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더구나 아직 어린 3,4살된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후-- 내가 왜 이리 살까하고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약간의 우울증도 생깁니다. 그렇게 피곤한 일상에 소책자는 단비가 되어 제 정신에 힘을 주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글이 되기도 합니다. 목사님, 저도 매월 이 책자를 집에서 받아보고 싶습니다. 책자를 주변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작지만 향기 나는 책이라 혼자 읽기 너무 아까운 책이더군요. 저희 동네에 교회가 세 군데 있지만 나오는 책자는 없어서 저처럼 아이들에게 매인 주부가 교회 가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책자를 보내주신다면 주변 사람들과 같이 어울릴 때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는 서적이 될 것 같습니다. 두서없는 글을 써보냅니다. 저의 마음에 단비가 되는 책을 기대하면서... 목사님의 건강과 하나님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산 O규 O정 엄마 박 O O』

박 O O씨의 편지를 읽노라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있음"(마12:28)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했습니다. 그 분 안에 이미 믿음(의)이 역사하였고, 마음에 평강이 임하였고, 우울했던 삶에 기쁨(희락)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발간했다가 재정난으로 지난해 1월에 휴간한 <숲 속의 사과나무>는 겨자씨 한 알같이 작지만 지금도 전국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에 변화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누룩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삶에 단비가 되어 주기도 하고, 정신에 힘을 북돋아 주기도 하고, 마음을 다스려 평안을 찾아 주기고 하여 향기 나는 삶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1. 겨자씨는 씨 중에서 아주 작은 씨입니다. 그러나 자라게 되면 거의 4m가까이 되는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겨자씨 한 알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겨자씨 한 알은 비록 그것이 작고 하찮은 것이지만 이미 마음에 천국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작은 데서,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천국을 이루지 못하면 불행한 것입니다. 또한 누룩은 소량이라도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 것처럼 대단한 영향력,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비유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비록 작고 하찮아 보여도 엄청난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대단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은 무엇이나 크고 많은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할 수 있는 대로 더 많이, 더 큰 것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물량이나 크기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물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믿음이란 분량이 아니라 그 질로써 결정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반드시 천국에서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42) 믿음으로 베푸는 작은 사랑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어령의 책 《축소지향의 일본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마침내 자동차 왕국의 자리를 가로챈 것도 소형 자동차의 전력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도요다의 크라운이 미국에 상륙할 때의 슬로우건은 다름아닌 <작은 캐딜락>이라는 것이었다.... 독일제의 폭스바겐은 그냥 작은 차에 불과하지만 일본의 그것은 대형차를 축소한 차였기 때문에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차는 작지만 큰 차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성능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도 시계도 소형휴대품에서 일본 제품들은 거의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카메라 역시 전자장치를 붙여 몸뚱이는 작아지고 성능은 거꾸로 높아져 가고 있다. 상품만을 소형으로 축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만드는 회사 그 자체의 경영방식도 또한 '축소지향적'이다. "나는 우리 회사를 소위 대기업으로 육성하려고 하지않는다. 회사를 크게 해서 이익될 일은 하나도 없다. 스케일의 메리트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변화를 센시티브하게 받아들이려면 그 몸집이 커서는 안된다. 유연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니의 이브까씨의 말이다...여기서 나온 것이 "소규모, 소인원"주의의 소니 법칙이다. 보통 나라에서는 "힘은 언제나 거대한 것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었으나 일본에서는 "힘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부터 나온다."라는 이상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지금 일본에서는 <경제대국>이라는 말이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국(國)자 앞에 대(大)자가 붙으면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생겼었다. 2차대전 때의 일본군국주의자들의 꿈은 거함거포주의였다. 그런데 지금 <재팬 이즈 넘버 원>, <초대국일본>, 또는 <일본의 시대가 온다-- 경제대국에서 정치대국으로의 길> 등 수상한 제목의 책들이 국내외에서 빈번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도 일본인에게는 그리 반가운 일이 못된다. 무엇을 위한 대국이며 무엇을 위한 세계 제일인가. ...일본인은 큰 것을 오니(귀신, 도깨비)라고 생각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는 경제대국, 정치대국, 군사대국을 지향하는 일본에 대한 불길한 조짐을 예견하는 글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제환난을 초래케 한 주범 중 하나를 대기업들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대형교회, 초대형 교회가 되어 <큰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찾아가는 <작은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가 제아무리 대형교회가 된다할지라도 주어진 사명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하찮은 자들로 여겨지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며, 갇히고 눌린 자들을 찾아가는 <작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은 유대 고을 중 가장 작은 베들레헴, 그곳에서도 보잘것없는 말구유였습니다.(마2:6)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목적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 성령이 임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로 일컬어지는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자, 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눅4:18-19) 예수께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마25:21) 또한 예수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10) 그리고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7:20)

미국의 부흥사요, 노래선교에 이름났던 빌리 썬데이가 소년시절 교회에 등록했을 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매일 15분씩 말씀을 들으라(성경 읽기), 15분씩 하나님과 얘기하라(기도), 15분씩 하나님께 대하여 얘기하라 (전도), 15분씩 작은 희생적인 사랑의 행동을 보이라(사랑의 실천). 그러면 너는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이다."

빌리 썬데이는 이 말씀을 평생 지켰다고 합니다.(하루 60분의 헌신) 위대한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작은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고 작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겨자씨 한 알, 작은 누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겨자씨 믿음, 겨자씨 사랑이 산을 옮기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매주 행하는 축호전도와 기도회, 그리고 선교회를 통한 작은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은 지금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2. 겨자씨 한 알이 자라 가는 과정과 누룩이 어떻게 부풀어 가는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마가복음 4장 26-29절)는 말씀으로 씨가 자라나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가 흙 속에서 싹이 나고 이삭이 오르고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지만 모든 과정은 자고 깨는 사이에 조용하고 신비하게 성장합니다. 겨자씨 비유와 마찬가지로 누룩도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데 거의 보이지 않게 작용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나라가 천지를 개벽하는 모습으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천국,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습니다. 물론 장차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지극히 작고 천한 모습으로, 그리고 오직 12명의 제자만을 두고, 결국 십자가에 죽어야만 하는 그런 모습으로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당시 로마제국과 악의 세력을 단칼에 무너뜨리고 단숨에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로마 제국의 주목받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역사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경력을 거의 언급치 않았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닙니다. 세계적 관점에서 예수의 인격과 경력 그리고 그의 선교는 얼마든지 무시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한 누룩처럼 온 세상이 천국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누룩과 같이 적고 하찮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천국을 경멸하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갈릴리 목수와 12명의 제자들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때가 이르면 누룩이 가루 서말 전부를 부풀게 한 것처럼 천국이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좌절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작고 하찮아 보이는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 소리 없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이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누룩과 같습니다. 자기를 선전하고 나팔을 불지 않습니다. 겸손하고 말없이 섬기고 사랑할 때 이웃과 사회는 복음화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됩니다. 우리들은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조용하게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어린아이의 초라한 도시락인 보리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가 주님을 위하여 조용히 바쳐질 때 5천 명이 먹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요 6:5-13) 누룩의 비유에서 "여자가 누룩을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었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누룩은 가루 속에 묻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물과 기름처럼 끼리끼리만 몰려있을 것이 아니라 세상 구석구석에 묻히고 섞여 누룩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1943년 2월 3일 미국 수송선 돌체스터 호가 그린랜드 근해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미군 4백여명이 죽는 참사가 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군목 4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개신교 목사인 폭스와 폴린 유대교 랍비인 구드 그리고 카톨릭 신부 워싱톤입니다. 그들은 모두 구명재킷이 있었는데 남에게 입혀주고 끝까지 구조작업을 돕다가 배가 침몰할 때 손에 손을 잡고 기도하는 모습을 몇 명의 생환자가 목격했던 것입니다. 종교를 넘어선 그들의 희생과 기도는 미국의 자유와 정신을 상징하는 예로서 오늘날까지 기념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산하는 것은 크고 많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은밀하게 짊어졌던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하나님이 계산하는 것은 여러분의 피나는 노력으로 쌓아올린 부귀영화같은 것들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소리 없이, 그리고 남김 없이 희생하며 나누어 준 작은 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부요함 가운데 너털거리는 웃음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고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 없이 흘리는 여러분의 뜨거운 눈물방울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위한 작은 희생은 아무리 작아도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고난받는 이웃을 위해 지극히 작은 희생이라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우울하고 슬프고 외로운 것은 이웃을 위해 지극히 작은 것일지라도 희생하는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무리 작은 고통과 고난일지라도 이웃과 함께 할 때 그 순간부터 아픔과 슬픔은 사라지고 기쁨이 샘솟는 하나님 나라가 체험될 것입니다. 희생적인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고 이기적 인간은 외로워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마음은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생활로 나타납니다. 십자가 없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질뿐만 아니라 이웃과 국가를 위한 십자가를 걸머질 때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부터 이루어가게 됩니다. 지금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지금 예수 믿으시고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나라 민족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17세기 영국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심각할 정도로 부패했을 때 영국사회를 오늘날의 사회로 변화시킨 것은 옥스퍼드대학의 대학생운동, 바로 그 유명한 요한 웨슬레의 속회를 통한 복음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감리교회의 시작이었고 초만원을 이루었던 감옥마다 텅텅 비우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의 부강한 나라를 이룩하게 만드는 겨자씨, 누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기도와 전도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이 역사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의 눈에 교회와 교회에서 행하는 것들이 작고 하찮아 보여도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겨자씨 한 알 같으나 지역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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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감추인 보화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4-46)

1.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말하므로 천국을 소유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천국을 소유한 바울은 참으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엄청난 박해와 핍박을 받았으면서도 가해자들에 대해서 전혀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 대해 축복하고 그들이 잘 되기 위해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참으로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같은 삶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그가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사는 사람은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고 사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나뉘어 집니다. 마치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릇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서 "선생님,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줘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그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여 안타깝게도 예수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마19:16-22) 그 부자 청년은 이 세상에서는 온갖 보화를 가득 소유했을지 몰라도 천국의 보화는 소유하지 못한 불행한 인생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같은 사례를 두고 제자들에게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그러나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가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국회의원 중에 윌리엄 글래드스턴이라는 농담을 잘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번은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을 넘을 때 손에 들고 있던 포도송이 하나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세관원은 그에게 "과일은 못 가지고 들어간다."라고 호령했습니다.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글래드스턴은 포도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다 먹은 후에 "지금도 안 되겠소?" 하고 따지니까 세관원은 웃으며 "이젠 포도와 당신이 일체가 되었으니 입국을 허가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하늘 나라 입국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빈 항아리에 기쁨의 포도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득히 채우시면 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마음의 천국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 원하신다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일보 28일자에 사회면 톱기사는 각국 장애아 7명을 입양해서 그들을 사랑으로 고쳐주며 건강하게 키우고 있는 미국의 찰스 킹 부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바로 그 톱기사 바로 밑에는 박스기사로 버려진 아이를 업둥이로 키우다가 자폐아라고 해서 법원에 자기 자식이 아닌 것을 확인해달라는 소송을 낸 매정한 30대의 한국인 부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참으로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먼저 찰스 킹씨에 대한 기사를 살펴봅시다.

그에 대한 머리기사는 "다리아픈 아이, 말못하는 아이…사랑으로 치료해주고 싶어요"였습니다. 일곱 살 아들인 애덤 군이 모국체험하도록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을 행복해 했습니다.

<빨강 파랑의 예쁜 티타늄 다리, V자를 그리는 손가락도 남다른 애덤은 고국의 아침이 즐겁기만하다. 27일 아침 일찍 경복궁 국립박물관을 찾은 애덤킹(7)군은 벽안의 부모와 누나, 형, 동생과 어울려 4년 만에 찾은 고국의 첫 아침을 만끽했다. 서울이 어떤 곳인지, 사람들은 무얼 하는지 쉴 새 없이 물어보고 즐거워하는 걸 보니, 한국 문화를 알려주었던 것이 역시 잘한 일 같다. 아버지 찰스 로버트 킹(56·엔지니어)씨와 어머니 다나(55)는 한국서 입양한 네 자녀 데이비드(11), 레베카(8), 애덤, 피터(6) 그리고 친딸 제시카(14)와 함께 26일 밤 서울에 내렸다.... {네살 때까지 애덤을 키워준 양어머니를 어젯밤 만났습니다. 한국말을 다 잊어버린 애덤이 "아이 리멤버 유" 하고는 엉엉 울더군요. 그 분과 우리 가족 모두 너무 행복하고 고마웠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빛, 거침없는 영어로 밝기만한 애덤은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손가락이 모두 붙어있었고, 무릎 아래로는 다리도 없었다. 친부모가 포기하고 입양을 요청한 것이 마침 {장애아를 입양하고 싶다}한 킹씨 부부와 연결됐다. 킹씨 부부는 친자녀 셋과 한국 아이 넷 외에도 인도에서 한 명, 미국 내에서 둘을 더 입양, 모두 10남매를 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 모레노 밸리의 이들 집은 스무살에서 네살까지 아들 다섯 딸 다섯, 10명의 자녀로 복닥거린다. {결혼 전 아이를 둘 낳고 둘 입양하자고 약속했지요. 셋째가 두살 되던 해 데이비드를 입양했습니다.}그 뒤로는 {그냥 이렇게 됐다}고 킹씨 부부는 웃었다. 91년부터는 장애가 있는 아이들만 데려왔다. 무릎 이상인 새라, 언어 장애가 있는 피터가 이들에게는 [사랑] 그 자체다. 아이들이 수술 받을 때가 이들은 가장 힘들다. {지난 7년간 스물 한 번 수술이 있었습니다. 애덤은 내년에 손 수술을 받고 예쁜 손을 갖게 될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로 밑 박스기사의 제목은 <자폐아라고 또 버림받아서야>였습니다.

<5살때 증세 나타나...양부모, 3년치료 허사, 포기소송 버려진 아이를 호적에 올려 길러온 30대 부부가 뒤늦게 아이가 자폐아라는 사실을 발견, 자신들의 자식이 아님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냈으나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 부부가 [잘 키워달라]는 쪽지와 함께 집 앞에서 유모차에 실린 아이를 발견한 것은 지난 90년 8월. 결혼 3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던 부부는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 친아들로 출생신고했다. 92년 태어난 딸까지 포함, 단란하던 A씨 가족의 행복이 깨진 것은 95년 9월 첫 아이가 자폐증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A씨 부부는 아이를 특수학교에 보내는 등 애를 써봤지만, 아이는 말귀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증세가 심했다. A씨 부부는 결국 올 1월 친부모를 찾기 시작했고, 법원에 자식이 아님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냈다. 그러나 서울가정법원 가사16단독 김정원 판사는 27일 {입양신고를하지 않았더라도 출생신고까지 마친 만큼 실제 입양한 것과 같은 효력을 가지며 자폐증은 파양 사유도 아니다}면서 A씨 부부의 청구를 각하했다. 김 판사는 {자폐아를 기르는 부모의 고통은 이해가 가지만, 아이가 A씨 부부를 친부모로 알고 있는 만큼 계속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 밝혔다.>

세계 각국에서 장애아들만을 7명이나 데려다 키우는 챨스 킹씨 부부는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를 아는 마음에 천국을 소유한 행복한 부부인 반면에, 키우다보니 자폐아라고 해서 아이를 두 번 버림을 받게 한 한국의 A씨 부부는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를 모르는 마음에 행복을 잃어버린 부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며 이 땅에 버려진 이웃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섬기는 마음은 이미 천국을 소유한 행복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없던 부부가 가정의 행복을 위해 집 앞에 버려진 아이를 업동이로 키우다가 그 아이가 자폐증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 아이를 버리는 마음은 천국의 보화를 상실한 부자의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천국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사들일 만큼 값비싼 것입니다. 천국은 <감추인 보화>, <극히 값진 진주>와 같아서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귀중한 것입니다. .

1947년 봄, 약 2000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성경사본이 사해근처 쿰란 동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보도가 타임즈지(1949.8.9)에 다음과 같이 실렸습니다.

"염소 한 마리가 와디 쿰란의 가파른 바위 언덕에서 풀을 찾다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베두인 족 목동이 길 잃은 염소를 찾다가 호기심이 가는 크고 캄캄한 동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목동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동굴 속에 던져보았습니다. 뭔가 부딪쳐서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쩌면 기대치않은 물건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싶어 돌아가 친구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용감하게 조그맣한 동굴 구멍을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희미한 햇빛에 꽤 큰 항아리들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조금전 던진 돌멩이에 깨져있었습니다. 깨진 항아리 조각들을 치우고 항아리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들을 조사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금덩어리대신에 그들이 알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었던 글씨로 덮힌 두루마리 몇 개를 끄집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는 어떤 금덩어리보다 훨씬 값지고 위대한 보물이었습니다."

그 베두인 목동은 베들레헴의 어느 한 골동품 상인에게 몇 천 원을 받고 몰래 팔아넘겼습니다. 저명한 성서고고학자에 따르면 그 두루마리야말로 현존하는 히브리 사본 중 최고본(最古本)으로 구약 사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사본을 값으로 치자면 대략 3억 5천만원 정도입니다. 사해사본 두루마리가 그렇게 엄청난 가치를 지닌 줄을 몰랐던 목동은 돈 몇 푼에 그것도 몰래 팔아 넘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목동이 자신이 발견한 두루마리의 가치를 알았더라면, 그야말로 <감추인 보화>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시쳇말로 유목민 팔자 고쳤을 것입니다. 천국은 <감추인 보화>입니다. 자기 소유를 몽땅 팔아서라도 살만한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그 가치의 귀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아는 그야말로 <감추인 보화>입니다. 여러분은 금세와 내세에 아울러 천국을 소유한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전 재산을 다 털어 넣고도 살 수 없을 만큼, 무궁하며 영원한 가치가 있는 <감추인 보화> 천국을 간단히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천국은 <감추인 보화>, <극히 값비싼 진주>를 찾듯이 구하고 찾는 자에게 천국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루드는 1905년 미국 조지아 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정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루드는 국민 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도시로 나갔습니다. 신문배달, 구두닦이, 공장 잔심부름 등등 닥치는 대로 일하기를 3년, 덕분에 집안 형편도 좀 나아지고 루드도 작은 병공장에서 정식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장 옆에서 자취를 하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의 일은 끓는 유리액을 금형에 부어넣어 병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친구도 생겼습니다. 이름은 주디였습니다. 어느 날 주디가 신문광고를 오려다 주었습니다.

"코카콜라 병 현상모집 최하 백만 달러에서 최고 천만 달러"

코카콜라는 그 무렵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새로운 음료였습니다. 그리고 회사가 내건 현상금은 루드가 평생 동안 공장에서 일한다 해도 손에 쥐기 어려운 거액이었습니다. 루드는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주디, 이건 하늘이 준 기회야. 공장을 그만두고서라도 내 손으로 꼭 이 병을 만들고 말테야!"

"루드, 그럼 안돼. 제발 부탁이야."

"6개월 후에 다시 찾아와. 어서 돌아가!"

한번 마음먹으면 끝내 이루고야마는 루드의 강한 집념을 잘 아는 주디는 말없이 돌아갔습니다. 코카콜라 회사가 제시한 조건은 퍽 까다로웠습니다. 우선 모양이 예쁠 것, 둘째 물에 젖어도 미끄러지지 않을 것, 셋째 보기보다 양이 적게 들어 갈 것. 루드는 회사측이 제시한 조건에 꼭 맞는 병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드디어 6개월째 되는 날, 주디가 찾아왔습니다.

"루드! 나야, 주디."

하지만 루드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병은 완성되기는커녕 아직 시작 단계일 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못 들은 체하다가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어 주디를 바라본 루드는 소리쳤습니다.

"잠간! 주디, 그대로 서 있어!"

"왜 그래, 루드?"

루드는 재빨리 주디의 모습을 스케치했습니다. 그때 주디는 최신 유행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엉덩이의 곡선이 아름답게 드러나는 통이 좁고 긴 주름치마가 그것이었습니다. 루드는 그 아름다운 곡선과 치마 주름에서 번개같이 스치는 영감을 얻었습니다.

"주디! 어때? 정말 예쁘지? 이제 됐어!"

이튿날 루드는 견본을 만들어 코카콜라 회사 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사장님! 이 병은 모양도 예쁘고 물에 젖어도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이 병의 권리를 채택해 주십시오"

그러나 사장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예, 참 좋은 병입니다. 그러나 가운데 볼록한 부분이 있어 양이 많이 들어갈 것이 틀림없소 유감스럽지만 이 병은 안되겠습니다."

루드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장님! 제발 한 가지만 더 보아주십시오"

"그럼 빨리 용건만 설명하시오"

"제 병과 사장님의 물컵 중 어느 것에 더 많은 물이 들어갈까요?"

루드는 사장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보이며 말했습니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당신의 병에 많이 들어가지 않겠소?"

루드는 침착하게 병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 다시 컵에 따랐습니다. 그러자 겨우 컵의 80%밖에 채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사장은 얼굴빛을 달리하며 무릎을 쳤습니다.

"루드, 내가 너무 경솔했구려. 당장 당신의 권리를 채택하겠소"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계약을 맺었습니다. 루드가 받은 돈은 6백만 달러. 그때 루드의 나이 불과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콜라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코카콜라의 트레이드 마크인 주름잡힌 여체 모양의 병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습니다. 하루아침에 백 만장자가 된 루드는 주디와 결혼하여 고향에서 유리제품 공장을 운영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감추인 보화>, <지극히 값비싼 진주>가 되는 천국의 보화를 얻으려고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는 사람마다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전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천국은 어떠한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손에 넣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와 삶의 행복이 천국을 소유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천하를 얻는다해도 예수를 믿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하를 잃는다해도 예수만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감추어진 보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의 보화가 충만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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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새 것과 옛 것

(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마13:52)

세기말을 맞아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 세상 종말에 대한 어떤 특별한 환상이나 계시를 받았다 해서 가정이나 직장을 팽개치고 산에 들어가거나 어느 특정한 장소에 모여 하루종일 찬송부르고 기도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예수 믿고 어떤 은사를 체험하게 되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직업과 일들을 모두 포기하고 소위 종교적인 일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인 체험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사로, 복음 전도자로, 예언자로 부르셨다는 소명체험으로 착각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소질이나 능력, 재능, 학문은 물론 자신의 현재 직업까지도 포기해야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노래 잘 하는 가수가 예수 믿다가 가수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목사가 된다든가, 배우나 코미디언이 예수믿다가 하던 일 그만두고 목사가 된다든가, 회사원이 직업을 포기하고 목사가 된다든가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같은 경우가 다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에서 시사하는 바는 예수 믿는다고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 능력, 지혜 등 여러가지 은사(恩賜)들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활용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 되라는 것입니다. 직업인은 자기의 직업이나 사업이 건전한 것이라면 그것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주어진 직업과 사업을 더욱 더 발전시켜 직장이나 사업장을 천국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노래를 잘 하든지, 춤을 잘 추든지, 연기를 잘 하든지, 그림을 잘 그리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과 능력, 그리고 여러 가지 은사들을 더욱 더 개발하고 발전시켜 건전하고 건강한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므로 기독교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축구 잘 한다고 기독교 축구팀 만들 생각하지 말고 축구를 더욱 더 잘 하되 기독교인답게 경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생을 공허하게 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하기 위해 오셨으며, 인생을 메마르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윤택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류에게 주어진 각종 음악이나 미술 등 모든 예술과 운동 경기 등 모든 문화를 몽땅 포기하고 오직 성경 읽고 기도나 하라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천부의 재능과 각종 은사를 주신 것은 바로 인류의 문화와 문명의 부흥과 발전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재능과 능력 등 모든 은사는 예수 믿는다고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더욱 더 개발하여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의 원형 지붕에 명작, <천지창조부터 예언자들의 시대까지>를 그렸습니다. 그린 기간은 1508년부터 1512년 까지 4년이나 걸렸습니다. 그에게는 본래 허리가 아팠고 호흡기 장애가 있어서 4년간 천장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단한 고역이었습니다. 한 제자가 그에게 "어떻게 그 몸으로 그리시려고 천장 벽화 같은 작품을 맡았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조용히 "내 작품이 아닐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일세. 돈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는데 어떻게 내 몸을 생각하겠나?"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믿음과 헌신에서 지금까지 5백년 동안 전세계 방문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위대한 예술 작품이 나온 것입니다. 만약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허리가 아픈 것이 하나님께서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하고 목사나 하라는 것으로 알고 목사가 되었다면, 그는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가 남긴 훌륭한 기독교 문화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신 것처럼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 재능의 완성을 이룩하여 천국의 기쁨을 인류에게 남긴 것입니다. 미켈란제로는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예수 당시 바리새식 서기관, 즉 모세 율법의 제자된 유대 서기관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천국의 비밀을 성령으로 깨닫고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예수의 참 제자들을 말합니다. 모세 율법의 제자된 유대 서기관은 율법을 지나치게 쪼개고 또 쪼개어 세분화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한다는 것이 도리어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작 자신들은 율법과 동떨어진 생활로 백성들의 영혼을 감동시키지도 못했고 그들을 전혀 새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옛 것"은 바로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며, "새 것"은 새 언약이시며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합니다. 이 "옛 것과 새 것"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 걸머지신 예수를 "옛 것" 즉 율법에 따라 처형한 곳이 십자가이며,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자신이 희생당하신 참 사랑, 즉 "새 것"을 보여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새 것과 옛 것"에서 새 것은 단지 새로운 것, 옛 것은 낡아빠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새 것이라 해서 옛 것보다 낫다거나, 옛 것이라 해서 새 것보다 낫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새로우면서 동시에 오래 된 것들을 뜻하는 것으로 원리는 오래되고 그 적용은 새로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뿌리는 옛 것이지만 그 꽃과 열매는 새로운 것이듯이 새 것과 옛 것은 모두 성장과 발전에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원이나 과수원에서 오래된 뿌리는 뽑아 버린다면 봄에 피는 새로운 꽃도 없고 가을의 열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만약 새로운 것이 없다면 옛 것의 생명 자체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새 순도 없고 꽃도 없고 열매도 없다면 그 나무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것과 옛 것은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라 서로 필연적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없는 옛 것은 죽은 것이며, 따라서 그런 것들은 일찍 제거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율법은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을 요구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너희들은 집주인되시는 예수님처럼 천국의 곳간에서 새로운 동시에 옛스러운 것들을 내어오는 일을 하라"는 뜻인데 이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이지 율법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법이 다스리는 것은 죄이며 법의 결과는 형벌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며 형벌이 아니라 끝없는 용서를 통한 새로운 삶인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옛 것"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옛 것"을 "새 것"으로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 "옛 것"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새 것"이 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옛 것"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으나 그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새 것", 새로운 관계를 이루게 만드는 것이 성령입니다. 여러분이 배워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생명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입니다. 성령은 바리새 서기관들이 죽인 율법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에스겔서 37장은 유명한 해골 골짜기의 해골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큰 군대를 이룩한 성령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에스겔 37:1-10)

성령이 에스겔을 데리고 에스골 골짜기로 가서 성령이 행하시는 새로운 일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넓은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희망이 끊어진 절망의 골짜기였습니다. 에스겔이 성령께서 명령하시는대로 마른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 말씀을 전했더니 그 마른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합하여 골격을 이루더니 곧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게 되어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생기는 없었습니다. 다시 성령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생기야 저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을 살아나게 하라." 그러자 생기가 그 속에 들어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에스겔의 성령 체험은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던 자들이 새로운 꿈을 꾸게 되고 무력한 뼈들이 강한 군대가 될 수 있는 새 것을 만드는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예수는 가는 곳마다 혁명을 일으켰는데 요즘 크리스챤은 가는 곳마다 커피를 마신다."고 농담한 일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커피를 즐긴다는 정도의 말이 아니라 "예수는 가는 곳마다 새 일을 일으키고 새롭게 하는 역사를 하셨는데 오늘날의 기독교인은 편히 앉아서 잡담이나 즐긴다."는 비평입니다. 성령은 새 일을 일으키는 혁명가이며 인간을 새롭게 개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나라 백성 모두가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국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여기 저기에 에스골 골짜기처럼 마른 뼈들이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에스겔 처럼 나부터 성령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날 것입니다. "옛 것"을 "새 것"으로 완성하시는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여러분의 삶이 날마다 새 것이 되기 위해 십자가 사랑 가운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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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잃은 양을 찾으라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1-7, 참조 : 마 18:12-14)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신 분명한 목적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다음 성구가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9:9-13](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께서 많은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셨을 때 이를 제일 못마땅해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죄인 중의 대표적인 세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세리는 로마 정부가 고용한 유대인으로 조국의 불행을 이용해 축재하는데 급급했던 매국노였습니다. 자기 동족들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로마 정부도 빈틈없이 속여가며 축재했고, 탈세하려는 부자들로부터 뇌물을 챙겨 막대한 재산을 긁어 모은 불결한 짐승처럼 취급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강도, 살인자와 한 종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요즈음 말로 <왕따>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세리나 죄인들을 <땅의 백성>이라 부르면서 이들과의 어떠한 교제도 금지했습니다. 이들과 돈거래를 하거나 상거래를 하거나, 손님으로 맞아들이거나, 여행에 동행하거나, 혼인시키는 행위 등 일체의 교제가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더러운 행위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엄격한 유대인이나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죄인의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말살되면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 하나를 구원하기보다는 죄인 하나 하나가 저주를 받아 멸망당할 것을 학수고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죄인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들에 대한 저주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양의 목자로 세상에 오신 예수의 관심은 의인보다 죄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병, 환자이며, 병,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바로 의사의 사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죄인들이었고 예수는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 자신은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예수가 필요치 않습니다. 스스로 선하다고 확신하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며 그 죄에서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을 찾으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도우려하기 보다는 그들과 장벽을 쌓고 접촉을 피하여 자신의 거룩함을 보존하는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전염병 환자로부터 병이 전염될까봐 진료를 거부하거나 왕진을 거부하는 의사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동정하거나, 위로하며 격려하기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선한 행동, 의로운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마치 질병을 진단하고 알아내는 데는 관심이 있으나 그것을 치료하여 도와주려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원하시는 바는 제사(예배)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 곧 긍휼(자비)입니다. 용서와 사랑이 없는 예배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죄인들을 대하실 때마다 그 죄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용서하고 그 병든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료하여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인을 붙잡아 끌고 와 예수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런 여인은 돌로 쳐죽여야 하는데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시는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돌을 들었던 어른에서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고 오직 예수와 간음했던 여인만이 남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고 묻습니다. 여인은

"주여, 없나이다"

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 죄를 정하여 죽이는 것 일뿐 그 죄를 치료하고 새로운 삶을 베풀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죄를 정죄치 않고 용서와 사랑으로 그 여인에게 생명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새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태는 <왕따>같은 세리였지만 예수를 영접하여 12제자 중 하나가 되었고 마태 복음서를 기록하는 영광스런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불같은 성미에 과격한 성격이라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요한을 선택하셔서 사랑의 사도로 변화시켜 제자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 중의 괴수였던 바울을 불러 이방인의 복음 전도자로 삼으셔서 세계 복음화에 초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결국에는 인류가 당해야 할 저주와 심판을 친히 자신이 담당하시고 인류에게는 생명과 구원을 베푸신 분이십니다. 죄인을 정죄하며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받아 마땅한 저주는 십자가에서 자신이 받으시고 그 죄인에게는 생명과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당해야 할 아픔과 고통, 내가 당해야 할 불행과 저주, 사망을 전혀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당하시므로 나는 기쁨과 행복, 생명과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길 잃은 양을 찾아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도록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3에서,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는 내 골육 친척들을 구원받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생활이 바로 예수의 마음이요 우리가 가져야 할 생활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길 잃어버린 양과 같은 죄인 하나를 구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이란 한 마디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을 말합니다. 양이 목자 곁에 있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 상태, 즉 목자가 되신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바로 죄라 하는 것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있는 상태가 바로 길 잃은 양의 모습이며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도둑질, 살인 강도, 간음 등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관심은 인간이 "길을 잃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도둑질, 간음, 살인 강도 등의 죄나 마음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나 다 같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네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느냐, 무슨 죄를 지었느냐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네가 전과 몇 범이냐? 소위 별이 몇 개냐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모두 전과자입니다. 모두가 다 흉악범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길을 잃어서 벌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오직 길을 잃은 양을 찾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을 정죄하고 세상을 정죄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의 손발이 되어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얼싸 안고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곳입니다. 교회는 길을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서 생명을 구원하는 곳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다 양 같은 존재로 말합니다. 이사야 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은 원래 본능적으로 먹이를 따라 이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면 눈앞에 풀만 뜯어 먹으며 이동하다가, 자칫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그 본능대로 먹을 것을 따라가다, 다시 말해 욕심에 이끌려 생활하다 결국 길을 잃고 사망의 골짜기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을 잃고 사망의 골짜기에 빠진 양과 같은 우리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목자되신 심정으로 사방을 찾아 헤매이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소위 "먹이를 찾기 위해" 헤매이다 길을 잃고 <앵벌이 하는 아이들>이나 <몸을 파는 십대 소녀들이나 주부들> 등이 있거든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기보다는 먼저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 안으며 상한 마음과 몸을 치료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되신 예수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으십니다. 진정으로 참 목자라면 그 목자는 자신의 양무리 중의 어떠한 양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소흘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 양이 병들었건 절름발이건 간에 모두를 정성스럽게 돌봅니다. 특히 병든 양이 있다면 그 양이 나을 수 있도록 더욱 애정과 관심을 갖고 치료할 것입니다. 이러할진대 만일 양 가운데 잃어버린 양이 있다면 그는 그 양을 찾기까지 밤새도록 온 들녘을 찾아 헤매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1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이시며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목자되신 심정으로 양같은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시며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시 23편).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며 보호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어 갈 길 몰라 헤매일 때 황량한 들녘, 깊은 계곡 그곳이 어디든지 단숨에 찾아 나서십니다. 또한 그분은 길 잃은 우리를 찾되 중도에 포기하시지 않고 끝까지 찾으십니다. 심산유곡(深山幽谷), 장강대하(長江大河) 어느 위험 속에서든지 기어코 우리를 찾아내어 다시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길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는 일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목자 되신 예수처럼 어떠한 경우에도 용서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끝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길 잃은 양을 찾아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 주시기 바랍니다.

목자는 몸소 양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한 마리의 양을 잃게 되면 목자는 적어도 끝까지 찾아가 죽은 양의 털이라도 집으로 가져와야 했습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이유는 많은 양떼들이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소유로서 공동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책임은 둘 혹은 새 사람의 목자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들 목자들은 양떼들을 무사히 이끌고 시간 맞추어 집에 돌아와야 했고, 때로는 아직 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산에 있다는 소식을 들리면 온 마을은 끝까지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멀리서 어깨에 잃어버린 양을 매고 집으로 걸어오는 목자를 보게 되면 온 마을은 기쁨과 감사의 환성을 지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목자가 되신 예수님의 마음이십니다.

그러나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길 잃은 양과 같은 세리와 죄인들을 더러운 짐승처럼 여기며 오직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로 단정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율법을 앞세워 죄인을 정죄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용서와 사랑을 모르는 짐승처럼 여기실 겁니다. 사람들은 죄인에 대한 소망을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병들고 상한 몸과 마음을 치료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축복하십니다.

고교시절 감명깊게 읽었던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소설, <빙점>이 있습니다. 아내의 부정한 행위를 용서하지 못하는 고상한 신앙을 가진 남편, 그 부정한 아내를 무섭도록 철저히 복수하고자 사랑을 가장하는 남편의 심리, 이러한 남편의 가장된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그 남편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아내, 그리고 사실은 전혀 용서받을 죄가 없으면서 모든 사람의 용서를 빌면서 죽어가는 천사같은 그들의 양녀 요오꼬의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모든 것이 있어도 용서가 없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 주는 소설입니다. 끝없는 용서는 끝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같이 강한 사랑이십니다. 십자가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을 보여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십자가를 지니고 어떠한 죄인이라도 영접하여 그들과 함께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길을 잃지 않은 양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길 잃은 양과 같은 죄인 하나라도 반드시 그를 찾아내어 구원하시고 이를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찾은 양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십니다. 팔레스타인의 양치는 목자들 사이에서는 양을 한번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다고 합니다. 잃은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그 양을 찾기까지의 고생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양 대한 원망과 책망보다는 더욱 더 깊은 사랑과 애정과 따스함으로 맞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 나라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즉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예수님만의 기쁨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 전체에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죄인된 인간들이 돌아오기를 기대하시며 천국 잔치를 배푸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믿음을 지키기 어렵고 신앙생활을 하기 힘든 세상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처처에 수많은 유혹과 어려움과 시험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양을 잡아 먹고자 하는 늑대나 이리의 위험과도 같은 위협들이 우리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우리의 목자되신 주님 마음을 가지고 길 잃고 헤매이는 이 땅의 수많은 양무리를 찾아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크신 기뻐하심을 입으시고 하늘 나라 생명 잔치가 날마다 베풀어지는 우리 교회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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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자와 하나님 나라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16-30, 참조 : 막 10:17-31, 눅 18:18-30)

천국문이 열리자 사람들의 영혼이 일렬로 하늘 재판정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장 먼저 유대 랍비(율법교사)가 나왔습니다.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율법에 아주 밝습니다. 저는 밤낮 하나님 말씀만을 팠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자 "잠깐만" 하고 기록하는 천사가 말했습니다. "먼저 우리는 조사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공부한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성경 그 자체를 위해 연구에 몰두했나요? 아니면 명예나 돈을 위해서 성경을 연구했나요?" 다음에는 세상에서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내가 세상에 살 때에는 얼마나 많은 금식을 했는지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나는 600여 가지의 종교적 의무사항을 꼼꼼히 다 지켰습니다.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목욕했고 쉬지 않고 신비주의에 몰두했습니다." 이번에도 "잠깐만" 하고 기록하는 천사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그렇게 행한 동기를 먼저 조사해 봐야 합니다." 다음에는 여관 주인이 나왔습니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저의 집 문을 항상 열어 놓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정성껏 대접해드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천사가 말했습니다. "어서 천국문을 열어라. 이 사람은 더 조사할 게 없다." 성경에 능통하다는 것만으로 하나님 나라 문이 열리는 것 아닙니다. 기도와 금식 많이 한다고 해서,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 문이 열리는 것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예수처럼 살아야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도 정통할 뿐만 아니라 돈도 많은 어느 젊은 부자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 무슨 선한 일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네가 잘 알고 있는 계명들을 지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계명들은 다 지켰는데요.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명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의무들이었습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계명들은 적어도 인간이면 마땅히 지켜야 할 사항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네가 소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네 많은 형제들이 누더기를 걸치고 굶어 죽어가는데 네 집 금고에는 엄청난 달러와 증권, 각종 금은보석들, 수많은 부동산 증서들이 가득해도, 그것도 모자라 저 멀리 스위스 은행 비밀구좌에 수억 달러 밀반출해놓고도 형제들에게 그 어느 것 하나도 내놓지 않고 사람에게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북한 동포들은 차치하고라도 경제난으로 직장 잃고 가정이 파괴되어 어린 자식들과 생이별 속에 거리에서 노숙하고 있는 이 나라 동포들이 수 십만 명인데, 네 돈이라고 해서 자식 결혼식에 70만원짜리 부침개, 400만원짜리 구절판, 수십만원을 홋가하는 이불보에 1000만원이 넘는 혼수이불, 이것 저것 해서 결혼식 비용으로 자그마치 8000만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 쓰듯 한다면 네가 과연 사람의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느냐? 너 혹시 무늬만 한국 사람 아니냐? 너 혹시 무늬만 기독교인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부자들은 배울만큼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냄새나는 돈으로 해외 나가 달러 펑펑써대며 배웠지만 그래도 서양에서 배웠으면 그들의 자본주의 배경에는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사상을 접했을텐데 이 땅에 돌아와서 하는 짓들은 공산당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을 존중하기는커녕 노동자를 노동가치로만 평가하는 모습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영생, 구원에서 멀어져 간 그 부자 청년은 사람을 사랑하기보다는 재물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사랑하는 극히 이기적인 동물이었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그 부자 청년이 떠난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였습니다. 이 말씀에 화들짝 놀란 것은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사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도대체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물질의 혜택을 입고 돈맛을 보거나 돈께나 가진 사람들은 무엇이나 돈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사는 무리들입니다. "부자는 돈만 있으면 사람에게 무슨 짓이라도 시킬 수 있으며, 무엇이나 다 값이 정해져 있어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은 물질이든 권력이든 사람까지라도 얼마든지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는 망상으로 사는 족속입니다. 재벌이나 그 아류들은 자기 회사 자금 대출 받는데 은행장은 얼마면 매수할 수 있고, 관련 고위 공무원 하나 매수하는데 얼마 들고, 해당 국회의원 하나 매수하는데 얼마가 필요한 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 직분과 직위에 따라 몇 천만 원, 몇 십억 원 등 값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재벌들은 이 나라에서 최고의 전문 법률 자문단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법망을 얼마든지 뚫고 돈을 단숨에(?) 긁어 모을 수 있습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돈 지키는 일이라면 미국 전직 장관까지도 엄청난 금액을 주고서라도 사들이는 것이 재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래서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으며, 심지어 돈만 있으면 인간의 생노병사, 희노애락까지도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다고 착각 속에 삽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과 구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인생 철부지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생(永生), 하나님 나라는 재벌 그룹 회사를 몽땅 팔아서도 살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다 털어 주고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예수를 좇을 때 영생,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부자들이여, 돈 가지고도 안 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하게 예수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부(富)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하셨습니다. 만약 사람이 욕망하는 모든 것이 이 세상에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 있다면, 결코 다른 세상,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희망을 걸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그다지 소중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 나라를 잊고 살고픈 것입니다. 하루라도 더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자 할 것입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살면 너무나 좋은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 미국 프로보틱스사가 음식을 나르고 카펫 청소를 하는 등 가사를 돕는 로봇 「사이에(Cye)」를 800달러에 팔고 있습니다. 「사이에」는 몸체 안에 PC 프로그램이 들어 있어 무선으로 명령을 내리면 시키는대로 집안일을 불평하나 하지 않고 척척 해냅니다. 바퀴에 부착된 센서기능은 이동 중에 장애물을 피해다니며 화분 하나 깨트리지 않고 가사를 담당합니다. 돈만 있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의식주 생활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1세기는 이뿐 아니라 <날아다니는 자동차, 스카이카>를 타고 최대 시속 620㎞로 9,140m 상공까지 날아 자가용을 몰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40분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자동차는 현재 4인승과 1인승 2종이 개발되었으며 직경 11m의 공간만 있으면 수직 이·착륙이 가능하고 휘발유 1ℓ당 8㎞를 주행할 수 있습니다. 이 자동차를 개발한 미국 몰러사는 미국 연방항공국(FAA)의 인증을 받아 곧 시판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자동차 한 대 값은 무려 99만5천달러(약 12억원)로 고액이지만 대량생산에 들어갈 경우 보통승용차 수준까지 낮출 수 있다고 합니다. 평균 시속 563㎞로 비행하는 이 스카이카는 교통체증이나 신호등에 구애받지 않고 속도위반 스티커를 떼일 염려도 없다면서 벌써부터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돈만 있으면 하늘을 날아 다니는 자동차, 스카이 카를 타고 자유롭게 세상 어디든지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하나님 나라가 부럽겠습니까? 어찌 자동차 뿐이겠습니까? 2002년이면 지구상 어디든지 2시간내에 주파할 수 있는 꿈의 비행기라 일컬어지는 초음속 항공기 「하이퍼소어」가 개발됩니다. 이 꿈의 비행기 하이퍼소어의 최대속도는 마하 10, 시속 1만7백32㎞의 속도로 미공군 최정예 정찰기 「블랙버드」보다 2배나 빠릅니다. 서울에서 뉴욕까지 1시간30분이면 갈 수 있고 뉴욕에서 파리까지는 4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특히 마하 2의 콩코드항공기가 100명밖에 태우지 못하는 데 비해 하이퍼소어는 500명까지 태워 경제성도 큰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하이퍼소어가 이처럼 짧은 시간안에 먼 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것은 이륙 후 로켓엔진을 이용해 대기권 밖 우주공간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우주공간에서는 공기저항이 없어 2분에 350㎞를 날아갈 수 있습니다. 목표지점에 도달한 하이퍼소어는 다시 대기권으로 진입, 착륙하게 됩니다. 참으로 돈만 있으면 이런 꿈의 항공기 하이퍼소어를 자가용 비행기로 구입하여 해외여행을 하면서 잠깐이나마 우주여행까지 할 수 있는 시대가 곧 이르게 됩니다. 그토록 가고 싶은 예루살렘 관광도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할머니 할아버지는 앞으로 틀니를 끼울 필요도 없어집니다. 영국 가이스 병원의 폴 샤프 교수가 유전자를 조작함으로 손상된 이를 원하는 대로 재생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샤프 교수는 최근 치아형태를 관장하는 유전자(Barx-1)를 밝혀내고 이를 이용해 생쥐의 어금니를 재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따라서 유전자 젤로 충치 먹은 부분을 자라게 하거나 빠진 어금니를 다시 돋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돈만 주면 얼마든지 튼튼한 이를 다시 나게 해 전혀 식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된 것입니다. 아예 사람의 머리를 통채로 이식하는 의술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돈만 있으면 세상은 너무나 좋은 것이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을 모르는데 인간의 비극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것은 잠간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자들이여, 이 세상은 제아무리 좋아보여도, 그리고 돈 가지고 별별 짓을 다 해보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부(富)는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들어 인간의 가치를 추락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흔히 아는 바대로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한번 사치에 물들면 사치에 끝을 모르고 사치하게 됩니다. 100만원짜리 오디오를 듣다가 500만원짜리 오디오를 듣게 되면 그 기막힌 음향에 반하게 됩니다. 그런데 스피커 하나만해도 1000만원이 넘고, 오디오 라인 하나만 해도 기 백만 원하는 오디오를 듣게 되면 환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귀뿐만 아닙니다. 입는 것 하나도 요즈음에는 황토옷이 몸 건강에 좋다며 값을 묻지 않고 사 입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아예 황토바닥에서 뒹굴며 살았으니까 아마 선견지명이 있었는가 봅니다. 심지어 몸의 체형을 맵씨있게 하기 위해서 속옷까지 맞춤으로 해 입는데 맞춤 속옷 한 벌에 400만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400만원씩이나 들여 폼나는 체형으로 죽으면 염라대왕이 정신 못 차린다고 합니까? 남들이 굶든 헐벗든 어디에서 자든 말든 나만 잘 먹고 나만 잘 입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극히 동물적인 이기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바로 부입니다. 결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행복을 모르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된 것임을 모르는 불행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인생의 참된 행복을 모르는 고독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운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들이 한결같이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멀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리고에서 제일가는 부자 삭개오는 예수를 자기집에 즐거운 마음으로 영접하며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일 뉘게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는 생활로 예상외로 하나님 나라의 길을 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도 쟁쟁한 유대의 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번도 써보지 아니한 값비싼 무덤을 예수의 장례를 위해 아낌없이 제공했으며, 왕의 몸값에 해당되는 값진 향료를 예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해 가져왔습니다. 부자라고해서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고 해서 누구나 죄인이란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부자의 소유는 그 부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집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하나님 없이도 생활이 편안하며, 하나님이 그다지 필요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거나 거의 없는 사람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은, 있어도 모두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것으로 알고 주인되시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람은 세상에 그 어느 곳에도, 그 어느 것도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게 됩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좋아보여도 하나님 나라와는 비교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난하게 살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에게 부족한 것이 있음을 깨닫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부족을 체험하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예수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을 위해 썩어질 것을 버릴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예수의 이름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이 세상의 있는 어떤 것이라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생과 영원한 행복을 주는 이름 예수밖에는 필요치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했던 재벌들이나 부자들의 이름은 풍수좋은 값비싼 땅에 값비싼 비석에 그 이름이 새겨질지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의 이름을 소유한 사람은 그 이름이 하나님 나라에 새겨질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던 초대교회처럼 신앙생활하므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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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포도원에 들어가라

(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3)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 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16)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권세가 있던 자들이 천국에서도 역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석, 박사했던 사람들이 천국에서도 '선비' 자리에 앉거나 화이트 칼라 행세를 하게 될 것이라면, 모르면 몰라도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천국이라면 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장차 '천국 입구에서' 벌어질 광경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13:24-30)

"주여, 문좀 열어 주소서!"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또한 주께서는 길거리에서 저희를 가르치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노라. 행악하는 자들아 떠나가라."

여기 "행악하는 자들"로 천국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난 자들은, 자신들은 이미 천국에 도달했다고 믿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등 유대의 교권주의자들로 종교로 살찌운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한꺼번에 누린 자들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 등과 같이 스스로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주님을 따른 사람들은 스스로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도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에는 복음을 위해 열심과 충성을 다 하다 순교를 당한 열 두 제자들이나, 평생 강도짓만 하다 예수 십자가 옆에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죽음 직전에 주님을 고백한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를 먼저 믿었거나 나중에 믿었거나, 그래서 일을 많이 했거나 적게 했거나 상관없이 천국은 평등하게 들어가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즈음 같이 일자리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더 힘든 세상에 아무에게나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너무나 <기쁜 소식, 복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새벽 인력 시장>에 나가 품군들과 일당 5만원에 약속을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전 9시에 또 장터에 나가보니 놀고 섰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계속해서 낮 12시에도, 오후 3시에도 여전히 놀고 섰는 사람들을 불러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게 했습니다. 이제 파장 시간 1시간 전인 오후 5시에도 나가보니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어찌하여 너희는 종일토록 놀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습니다."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도 역시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도록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오후 6시가 되어 일을 마치고 청지기를 불러 품군들에게 품삯을 나눠주되 맨 나중에 와서 겨우 1시간 일한 사람부터, 그 다음 3시간 일한 사람들, 6시간 일한 사람들, 9시간 일한 사람들, 뙤약볕에 하루 종일 땀흘려 일한 사람들 순으로 똑같이 일당 5만원씩을 주라고 지시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 주인의 이러한 처사에 일당을 놓고 원망하며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임금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노사관계나 공정한 임금을 책정하는 경제원리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원 주인이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 약정한 일당을 준데 대해서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품군들이 받는 일당 5만원은 누구에게나 하루 생활에 필요한 최저 생계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날 벌어 그날의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일한 만큼의 대가만을 받게 했다면 살아가기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포도원 주인의 처사는 일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복음>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포도원 주인이 일당을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었다는 사실이 악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선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선한 모습은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는 품군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포도원에 들어가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천국에 관한 비유의 말씀인 본문에 나타나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포도원"은 <천국> 또는 <교회>를, "품군"은 <하나님의 부름받은 성도들>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놀고 섰는 사람들을 찾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복음을 전파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나타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는 말씀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 복음 6장 29절에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곧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는 것이요,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일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할 수 있는 것은 무슨 기술 자격증이나, 학력을 갖추거나, 자랑할만한 경력이 있어야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가는데 무슨 자격요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포도원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실 때, 다시 말해 예수 믿으라 하실 때 거저 믿기만 하면 들어가는 곳입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천국(영생)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천국에서 네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러자 돈이 많은 그 청년은 근심이 되어서 예수곁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에 제자들이 심히 놀라서

"그렇다면 천국(구원)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좇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결론의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태복음 19장 17절 -30절)

이 말씀은 예수를 위해 부모나 형제 자매를 팽개치고 논밭 몽땅 다 팔아치웠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주님을 좇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데 그 대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인간이 힘쓰고 애써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불러 주시지 아니하면 포도원에 들어가 일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지극 정성, 치성(致誠)을 드려야 소원이 성취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발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많은 시간을 기도에 사용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좋을지 모르나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조건은 아닙니다."

이는 기도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까지도 인간의 노력 중의 하나로 볼 때 구원의 조건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칼 발트는

"오직 한 개의 기도만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 주님의 은혜를 믿습니다."

하는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구원(천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며 내가 노력해서 그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구원)은 일을 해서 버는 것도 아니고, 내가 노력해서 쌓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사들이는 것도 아니라 값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며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기독교는 또한 고행(苦行)이나 심신수련 등을 통해서 구원(천국)에 이르는 종교가 아닙니다. 마틴 루터는 그 어느 수도사들보다 더 많이 금식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성경을 읽고, 더 많이 금욕생활하고 남 보다 더 많이 노력하였으나 그런 생활에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죄책감은 더 심각해지고 하나님 앞에 두려운 생각만 더해갔습니다. 이런 수도생활을 7년씩이나 하다가 로마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로마에 가서 많은 성직자와 교황을 만나고 대성당들을 순례하게 되면 큰 은혜를 받고 자신의 고민과 죄책감의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로마에 가보니 교황청 권력의 부패와 교회의 물질적 부패상을 목격한 루터는 더 심각한 혼란과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성당의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그 돌계단에 입맞추고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 죄를 회개하며 자신의 고민거리를 부르짖었습니다. 몇 계단을 오르자 무릎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피가 흐르는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 성경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루터는 깨달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 돌계단을 무릎에 피를 맺히며 올라가야 하나?

내가 왜 이렇게 고행하고 고만해야 하는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이 말씀을 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루터는 이 순간이 하늘이 열려 천국에 들어가는 심정이었다고 감격어린 고백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여러분에게 천국의 문이 열립니다. 천국의 문은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으로, 힘으로 열려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천국의 문을 열려집니다.

먼저 예수 믿은 성도 여러분, 먼저 와서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땀 흘려 있했다고 해서 품삯을 놓고 불평하지마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을 거저 포도원에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하며 열심히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루 품삯에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포도원에서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해서보다 포도원 밖에서 아직도 놀고 섰는 사람들을 노동시간에 관계없이 불어들이시는 포도원 주인의 선하심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107:1)

예수 믿으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목자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있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이 세상의 죄인 하나를 찾으시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하나님은 길 잃은 한 마리의 어린 양, 일자리가 없어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놀고 섰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일자리가 필요한 품군들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찾으시는 목적은 일을 시키고 품삯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원에게 들어가 일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인류가 포도원되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예수 믿고 금세와 내세에 아울러 영원한 천국의 맛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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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열매맺는 백성이 되라

(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 (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마 21:33-46, 참조 : 막 12:1-12, 눅 20:9-19)

어떤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재배에서부터 추수 생산에 이르기까지 그에 필요한 온갖 시설들을 제대로 갖추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추수 때가 되어 소작 실과를 받기 위해 자기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소작받으러 갔던 주인의 종들을 심하게 때려 중상을 입히기도 했고, 또 하나는 돌에 맞아 중태에 이르기도 했고, 또 하나는 아예 죽여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인이 더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보내는 족족 핍박하여 죽이기를 일삼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주인의 아들에게는 감히 그렇게 하지 않고 잘 대접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집 주인의 아들을 보고 잘 되었다며 주인의 재산을 몽땅 차지하기 위해 그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고 나가 죽여버렸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포도원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 농부들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누구라도 분명히 대답할 것입니다. 그 악한 농부들을 단번에 처단하고 그 포도원은 다른 소작 농부들에게 줄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비유입니다. 이 비유 가운데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말하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리고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뜻하고, 주인이 보낸 종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낸 선지자들을 나타냅니다. 또한 집 주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성경 이사야에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5:1,2)

........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5:7)

여기 성경에서도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후손을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었을 때 모세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극상품 포도 열매를 기대하며 필요한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다 쏟으셨습니다. 여기 "좋은 포도"는 "공평과 의로움"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들포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문어발처럼 기업을 늘려 부를 독점하려는 탐욕과 술취함, 온갖 허영과 사치, 거짓과 교만, 그리고 뇌물 재판과 학대 등을 일삼았습니다.(이사야 5:8-22) 온갖 혜택에도 불구하고 들포도를 맺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것은 오직 심판과 멸망이었습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을 죽이고 심지어 주인 집 아들까지 죽여 버리고 들포도를 맺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부의 독점은 결국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착취를 일삼게 되어 사회 공동체의 파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몇 몇 재벌들이 나라의 부를 독점하도록 하는 부추기는 권력이라면 필연적으로 한국 공동체 파괴라는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권력을 장악한 자나 부를 독점하려는 자들이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기 도취에 빠져 공평과 의를 저버리고 부정부패와 사치 허영을 일삼으며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한다면 필경은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역사>중 "하늘에 귀 있다"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슬픔의 소년 단종이 영월 있을 때에 자규시(子規詩) 한 편을 읊은 것이 있다. 자기 신세도, 원통하게 죽어서 그 원혼이 두견이 되어 지금도 밤마다 피를 뱉으며 운다는 저 옛날 촉왕과 같다고 생각해서 지은 것이다.

원통한 넋 새 되어 집 잃고 나온 뒤에

외론 몸 짝 그림자 헤매느니 푸른 산속,

밤마다 밤마다 속이는 잠 잠 아니 속고,

해마다 해마다 다하는 한 다하지 않네.

소리 죽은 새벽 재에 기우는 달 희었고,

피 흐르는 봄 골짜기 지는 꽃만 붉고나.

하나님 귀먹어서 내 하소연 안 듣는데

수심 많은 사람 귀는 어이 그리 밝은고.

이것은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서 한 말이다. 죄 없는 자기는 종내 설움 속에 날을 맺게 되었는데 자기를 짓밟은 그 악인들은 날로 잘되어만 가는 것 같아서 하늘도 무심하다 원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잘못을 알았다. 열 일곱 살의 소년으로 이슬처럼 사라지는 그 눈에 하나님도 귀먹었다고 본 것은 무리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귀먹은 것은 아니었다. 천고청비(天高聽卑), 하나님은 낮은 자, 눌린 자의 하소연을 반드시 듣는다. 수난의 한국을 상징하는 이 슬픔의 소년이 견디다 못해 발하는 그 비명을 아니 들었을 리가 없다. 하나님이 귀가 먹고 그 슬픈 부르짖음을 못 듣는 것 같이 보인 것은 저 자신이 슬픔의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었다. 저 자신은 어디까지나 버리운 사람으로 오직 잠잠히 그 짐을 지고 가는 것 뿐이요, 그것을 풀고 갚아주는 날을 보는 것은 허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슬픔의 사람 중의 슬픔의 사람인 그도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믿었기 때문께 '다 이루었다'고 하였다. 단종도 가는 그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께, 하나님은 귀먹어서 원통한 하소연을 못 듣는 것같이 보였지만, 얼마가 못 되어서 그 갚음은 왔다. 성종의 태평성세에 대하여 악마 같은 비웃음을 웃는 연산의 채청사(採靑使), 채홍사(採紅使), 천과흥청(天科興淸), 지과흥청(地科興淸) 하는 미친 노름에 죄 없이 죽은 수많은 백성들, 무오사화, 갑자사화, 명종 때에 들어가서 기묘사화, 을사사화, 무슨 옥(獄), 무슨 옥으로 헤아릴 수 없이 죽은 사람 생각할 때 '내가 속히 같으리라'하는 성경의 구절을 누가 아니 생각할 수 있을까? 만일 누가 있어서, 세조 처 자신에 임하지 않고 단종 저 자신의 눈에 보이게 갚지 않았다 하여 정의의 심판을 부인하려는 이가 있다면 저는 섭리가 어떤 것임을 모르는 자요, 역사를 보는 눈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대는 정신세계의 일을 지상의 논리로 힐난하려는가? 역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개인적 시간적 상대 도덕의 표준에 비추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절대의 자리에서는 개인이 있으면서도 또 전민족 전인류가 한 사람이다....개인의 일은 개인적으로 그 책임을 묻지만, 역사적 사건의 책임은 민족적 사회적으로 묻는다. 그러므로 하늘의 갚음은 필요한 때면 그 사람에게 당장에 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몇 대 혹 몇십 대 후에 오는 수도 있다. 입으로 먹은 것의 결과는 몇 시 몇 날 후에 내장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손으로 지은 것의 값은 일생을 두고 정신상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세조의 죄의 값은 40년 후, 연산에게서 받아냈다고 해서 의심할 것이 무엇인가?"

온갖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지도자들이 '공평과 정의'라는 좋은 포도를 맺지 못하고 탐욕과 부정과 부패, 사치와 허영의 '들포도'를 맺는다면 "돌이 머리에 떨어져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역사의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탐욕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없앴지만 예수는 부활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5공, 6공 정권의 열매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니 과거 이 나라 정권들의 열매들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역사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마는 법입니다.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모든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이며,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라는 말씀은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고자 율법을 주시고 나라를 세우게 하시고 성전을 짓도록 하셨으며 각종 혜택과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탐욕에 치우쳤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산울을 두르고, 망대를 세우고 그 열매를 기다리는 것처럼"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허락하셨으며, 모든 필요한 것을 다 갖추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든 안 믿든 모든 사람에게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모습 그대로에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고 그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가난합니까? 병들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갇혔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불공평하고 악하다고 보십니까?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가난과 병고, 실패와 갇힘을 하나님의 은혜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열매를 맺는 방편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건강하십니까? 부유하십니까? 성공했습니까? 자유롭습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것들을 자신만을 누리라고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들로 좋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사지백체 멀쩡하여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탐욕에 눈이 어두워 자기 부모를 죽여 불태운 아들이 있는가 하면, 오토다케(최근 베스트셀러 '오체불만'의 저자)처럼 사지가 없이 태어났어도 당당하게 경쟁하여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며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삶에 용기와 희망을 던져 주어 삶의 좋은 열매를 맺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이 어떠하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가장 좋은 것들입니다. 그 모습 그대로 좋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어느 뜻 있는 분이 우리 사회에 대해 이렇게 분노했습니다.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없고 학생은 많으나 제자는 없고 정치가는 많으나 정치는 없고 군중은 많으나 사람은 없고 국가는 있으나 국민은 없고 집은 있으나 가정은 없고 종교는 있으나 진리는 없고 학교는 있으나 배움은 없고 신하는 많으나 충신은 없고 모임은 많으나 목적은 없고 물은 있으나 생수는 없고 의사는 많으나 인술은 없고 구제는 있으나 자선은 없다." 이에 대해 어느 목사는 우리 기독교에 대해 자신의 분노를 이렇게 나타냈습니다. "신자는 있으나 제자는 없고 예배는 있으나 은혜는 없고 설교는 있으나 변화는 없고 십자가는 있으나 십자가 정신은 없고 성직자는 많으나 사도는 없고 집사는 있으나 스데반은 없고 선교사는 있으나 선교는 없고 삯군은 많으나 목자는 없고 통곡은 많으나 회개는 없고 직분자는 많으나 전도인은 없고 세미나는 많으나 기도는 없고 믿는 자는 많으나 예수를 사랑하는 자는 없고 권리, 주장은 많으나 의무는 없고 불평은 많으나 감사는 없다." 알곡은 없고 쭉정이만 있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포도 열매를 없고 들포도 열매만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열매맺는 백성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포도 열매 중 가장 좋은 열매, 극상품 포도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 화평과 오래 참음, 겸손과 자비, 양선과 충성, 온유와 절제 등입니다. 그러나 맺어서 안 되는 열매는 들포도입니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육체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육체의 열매는 곧 "육체의 일을 말합니다. 이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삼천리 금수강산에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나라 백성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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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택함을 입은 자가 되라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14, 참조 : 눅 14:15-24)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최초로 기적을 베푸신 곳은 혼인 잔치집이었습니다. 그 혼인 잔치집에 가셔서 항아리에 담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잔치집의 기쁨을 더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라고 반문하며 신랑되신 예수께서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하며 슬퍼할 것이 아니라 신랑과 함께 기뻐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는 동안'을 가리켜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이라고 비유하셨습니다. 지금 예수 믿고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은 신랑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신랑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혼인 잔치집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 다시말해 신랑과 함께 사는 신부들이 모인 곳입니다. 과연 교회는 혼인 잔치집과 같은 곳입니다. 여러분의 교회생활이 혼인 잔치집처럼 항상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신랑 신부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혼인 잔치집의 기쁨은 천국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천국을 혼인 잔치를 비유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을 이 혼인 잔치에 초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처음에 '시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1000년쯤 다윗이 건설한 도시인데, '시온'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히브리어로 '사막'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오랫동안 바라던 수도 예루살렘을 완성하고 사막이라는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이사야 35장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이사야 35장)

이 말씀은 흔히 '사막의 노래'라고 불리우는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인간 구원의 역사를 '사막에서 물이 솟아나게 한다'는 표현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즉 환난과 죽음의 "사막에 물이 솟아나게 되니 땅이 기뻐하며 백합화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고,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어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메마른 광야 사막도 물이 솟아나 시내가 흐르게 되면 영영한 희락의 도성 '시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온'에 물이 솟아나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듯이 시온 성, 즉 이 새로운 도시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는 장소가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이 이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장차 구원받은 성도들이 들어가 영원히 사는 곳을 '시온성'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계14:1) 그리고 구약 시편에서는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시온'에서 복을 주시며, 예루살렘의 복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시128편) 오늘날 인류에게 '시온'과 같은 곳이 바로 주님께서 세우신 '시온성과 같은 교회'입니다. 메마른 광야같은 세상에서 여러분의 삶에 백합화 만발하여 웃음꽃이 피어나기 원하십니까?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생물이 살 수 있는 연못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생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부어주시는 생수는 영원히 마르지 아니합니다.

임금으로 비유된 하나님께서 그 종들을 보내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소를 잡고 살진 짐승들을 잡아 만반의 준비를 다 했으니 잔치에 오라고 거듭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가기를 싫어하며, 농사지으러 가고, 장사하러 가고, 심지어는 임금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며 죽이기까지 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화가 난 임금은 군대를 보내 이들을 모두 진멸하고 그 동네를 몽땅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종들을 시켜 사거리 길에 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게 했습니다. 과연 혼인잔치집에는 손님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흐뭇해서 잔치 자리를 둘러보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이에 임금이 사환들을 시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케 해서 바깥 어두운 곳에 내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사람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 마지막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임금의 초청으로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임금께서 내주신 예복을 입으시고 모두 택함받은 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교회에 초청되어 예복을 입고 택함을 입는 것은 삶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초청을 거절한다면 그는 인생의 행복과 즐거움을 놓치는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의 초청을 싫어하거나, 그 초청에 응하지 못하고 밭에 나가 일하거나, 장사하러 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인생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사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바쁘게 열심히 산다해도 삶의 기쁨을 상실하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여기 혼인잔치 초청에 응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초청에 응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불행은 임금이 보낸 군대에 의해 진멸 당했다는 것과, 그 살고 있는 동네는 불타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임금되시는 하나님의 초청, 다시 말해 예수 믿고 하늘 나라 잔치에 참여하라는 혼인 잔치에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이미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6-18)"

그러므로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실제 사업에 분주하여, 또는 세상 일에 몰두하다보니 혼인잔치 초청이 귀찮고 싫어져서 그 초청에 응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기쁨과 행복,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세상일이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것 같아도 그것들은 건강하고 생명이 있을 동안만 가질 수 있는 한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바쁜 사업과 일들을 묘지까지 가지고 가실 수 있습니까? 이 땅의 재벌들이라고 해서 문어발처럼 벌여놓은 그 많은 회사들중 하나라도 죽어서 무덤에까지 가지고 갔습니까? 그들 죽음 앞에 놓인 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즉 하늘 나라 혼인잔치 초청에 응하는 삶을 살았느냐? 아니면 그 초청을 거절하는 삶을 살았느냐?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여기 혼인잔치에는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구분 없이 모두 초청되었습니다. 천국 잔치에 참석하는데는, 다시 말해 예수 믿는데는 악한 자나 선한 자 구분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과거 생활을 묻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아무런 자격 조건 없이 그 잔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종교화가 러스킨 씨는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를 현대화로 표현하기 위해 모델을 찾는데 고도소, 빈민굴, 마약굴까지 헤매였으나 마음에 드는 모델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거리에서 우연히 거지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탕자의 모델로서 적임자였습니다. 낡은 옷에 더러운 얼굴, 희망없는 표정 등 가장 어울리는 탕자의 모델이었습니다. 화가는 거지에게 일당을 주고 모델이 되어 준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집에 찾아온 사람을 보고는 화가는 실망했습니다. 자기의 초상화를 그려 준다는 말에 흥분한 거지는 깨끗이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어디서 구해 왔는지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화가는 "내게 필요한 것은 거지 그대로의 당신이오"하며 거지를 쫓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죄인 그대로의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사람이 자기를 깨끗이 하고 꾸며 봐야 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돌아온 탕자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여 천국 잔치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가리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초청에 응하여 다만 예복만 입으시면 됩니다. '주는 나의 구세주이십니다.'고 입술로 예수를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시면 됩니다.

아버지 재산을 탕진한 탕자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있는 모습 그대로 얼싸안고,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온 것에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종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런데 밭에서 일하다 집에 돌아온 맏아들이 웬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가 잔치를 벌렸다는 얘기를 듣고 화가 치밀어 그 잔치를 기뻐하지 않고 잔치에 참가하는 것을 거절하고 아버지께 항의합니다. 그가 항의한 것은 자기의 공로와 자기의 선행, 그 보잘것없는 작은 자기를 내세우며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다시 말해 이미 교회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를 내세우며 이 천국 잔치에 참가를 거절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천국 잔치에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 초청에 응하신 분들은 다만 예복만 입으시면 그 초청되신 분들 중에 택함을 입은 자가 됩니다. 예복이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죄가 깨끗이 사하여졌다는 것을 마음에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천국 잔치 초청에 응하셔서, 그리고 예복을 입으셔서 여러분의 삶이 금세와 내세에 아울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이 낳은 위인 부커 워싱턴은 어려서 노예로 있을 때 낡은 오막살이의 청소를 맡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깨끗이 청소를 해도 주인은 더 잘 하라고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부커는 세 번 퇴짜를 맞은 후에 이제는 자신을 가지고 주인을 오막살이로 데려왔습니다. 주인은 들어서자마자 고함을 질렀습니다. "창문은 왜 닦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있으면서도 그 오막살이에 유리 창문이 있는 것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부커는 나면서부터 유리 창문이 있는 집에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 창문에 너무 먼지가 많이 앉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커는 부지런히 유리창을 닦았습니다. 그 순간 찬란한 석양빛이 오막살이의 어둠침침한 방안을 환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이 경험이 부커 워싱턴에게 유명한 말을 남기도록 했습니다. "창문을 닦읍시다. 창문을 닦읍시다. '미래'라고 하는 창문을 닦읍시다. 마음의 창문, 믿음의 창문 거기에 먼지가 앉으면 암담할 뿐입니다. 미래도 보이고 현재도 밝아지도록 빛을 받아들이는 창문을 닦읍시다." 여러분, 예수님은 어두운 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빛이 어두움에 비추이고 있지만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창문, 믿음의 창문을 깨끗이 닦으시고 빛이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미래가 밝아 올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여러분의 삶이 날마다 혼인잔치의 기쁨, 천국의 행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오막살이 같습니까? 마음의 창문을 여시고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시므로 어두웠던 삶이 밝아져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메마른 사막과 같습니까? 생수와 같은 예수님을 영접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에 백합화 만발하고 영영한 희락으로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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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1:23-32)

예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나 그가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그의 권세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종교 지도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 그러자 예수께서 되물었습니다. "너희가 먼저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 말은 사람들이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것이 성령에 이끌린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인간적인 충동에 따른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종교 지도자들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요한의 증언을 사실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증언한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시라는 것입니다.

"(29)...`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1:29-34)"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단순히 인간적인 충동에 따른 것이라 하면 백성들의 분노가 두려웠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백성들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비겁하게도 "우리는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알지 못한다는 얘기는 자신들의 책임을 저버리는 행위였습니다.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의무는 선지자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는 것이었는데 알지 못한다는 얘기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라를 전혀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증인과 증언을 통해 진실과 진리를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체면과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비겁하게 모른다고 답변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진리편에 서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두 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두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맏아들은 "네, 아버지, 가겠습니다."며 대답했지만 실제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며 거절했지만 이내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먼저, 맏아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네, 아버지, 가겠습니다."고 대답해놓고 불순종했습니다. 말만하고 행하지 않았던 영락없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지적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세는 이렇습니다.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7:21-27)

성경은 잘 아는데 자신은 전혀 성경대로 살지 않고, 백성들이 성경을 지키기 힘들만큼 세분화하여 무거운 짐이 되게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앞에 헌신과 봉사를 약속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여기 <맏아들>은 오랜 신앙 경륜을 지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잘 섬긴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물론 <아버지>는 하나님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을 뜻합니다. <두 아들>은 하나님 교회의 일군들, 오늘 교회의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아들 중 <맏아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며 책임감이 없는, 그러면서도 상석, 즉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교인들을 나타냅니다. 이런 교인들의 결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1-27)"

유대인 외경에 있는 얘기입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일군을 찾기 위해서 천사 가브리엘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세상을 두루 살피고 난후 하나님께 보고 하길, "하나님의 일군될 사람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눠지는데 첫째 부류는 사람은 아주 유능하고 지혜도 있으나 진실성이 좀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고, 둘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좀 미련하고 우둔하지만 진실하고 성실한 면이 있었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미련하고 우둔한 자를 데려오라. 내가 그에게 지혜와 재능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결국 뛰어난 재능과 능력, 지혜와 지식이 아니고 진실한 믿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이렇게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고린도 전서 15:10) 이 말은 자신이 잘 나고 똑똑하고 재능이 많고 은사가 많아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든 전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의 자세가 진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달으시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게 된 것도, 집사 권사 장로 목사된 것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만하고 행치않는 자요, 자신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워주는 사람,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자,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성경보고 기도하고 전도하라면서 자신은 전혀 하지않은 사람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며, 남에게 짐을 지워주는 자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거나 가볍게 해주어야 하며, 높은 자리보다 낮은 곳을 찾아가 낮은 곳에 처할 줄 알아야 하며, 칭찬받기를 좋아하기 보다는 남을 칭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 은사를 받은 자, 신앙이 깊은 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며 맡은 만큼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인류에게 전파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항상 "예"하시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언제든지 진실무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항상 "예"(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고린도 후서 1:18-22)

다음으로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로부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당장 "싫소이다."라고 대답했읍니다만 곧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여기 둘째 아들은 당시 멸시와 천대받는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인물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읍니다. 그러나 후에 후회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다시 돌아왔다는 말씀입니다. 나중에는 회개했다 할지라도 처음에 행한 불순종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은 죄는 어디 까지나 죄이지 죄를 회개했다고 해서 그 불순종했던 죄 자체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둘째 아들의 행위를 놓고 아비의 뜻대로 행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뒤 늦게나마 회개했다는 점에서 맏아들보다는 좀 낫다는 평가받을 정도인 것입니다. 창기와 세리들이 주님 앞에 돌아온 것은 그들이 그 전에는 그 죄를 죄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 그것을 기뻐한 것이지, 그들이 그것을 죄로 안 다음에도 그 노릇을 계속하고 그 뒤에 주님께 돌 아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말씀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일과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던 그 모습 그대로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각자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와 재능, 능력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여러분은 자신이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에서 세상에 보냄을 받았고, 그에 따른 크고 작은, 많고 적은 은사와 재능을 각각 부여받았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주어진 직분과 사명, 은사와 재능을 소중히 여겨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 "바닷가에 놓여진 조약 돌도 무의미하게 놓여진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닷가에 조약돌 하나도 놓인 위치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인생들에게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사명이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명자들입니다. 사람에 따라 의롭게 쓰임받든, 불의의 병기로 쓰임받든 인류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1:14-27)"

눈은 눈의 사명이 있고, 귀는 귀의 사명이 있으며, 발은 발의 사명, 손은 손의 사명이 있인데 모두가 다 한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체들중에는 약하게 보이는 것도 있고 천하게 보이는 것도 있겠으나 모두가 없어서는 안될 귀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는 마음과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바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너희는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각지체들입니다. 각 지체는 그 지체에게 주어진 바 사명을 다할 때 온전한 몸이 되어 질 수 있습니다. 지체는 그것이 크든 적든 다른 사람이 보기에 사소하든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다 요긴하고 존귀한 것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직분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모두가 다 존귀하고 소중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각각 다릅니다. 손은 손의 할 일을 해야 하고, 발은 발의 할 일을 해야만 합니다. 눈은 눈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입은 입이 해야 할 일을 해야만 몸은 조화를 이루어 온전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천하든 귀하든,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위해 일하며 살고 있습니까? 단순히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까?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을 하되 누구를 위한 일이냐, 자신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읍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진실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자가 사람 앞에서 진실한 것이요 가슴에 하나님이 없는 진실은 속임수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여러분 오늘 집에 돌아가시면 여러분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일로 알고 하시기 바랍니다. 가족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거나 가족들을 위해 일터에 나가 돈을 벌거나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자세로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일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해야 합니다. 회개할 것은 당장 회개하고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는 영원한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마지막 결단의 시간으로 알고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뒤 늦게나마 회개하고 포도원에 가서 일한 둘째 아들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으나 맏아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명령에 즉시 아멘하고 즉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명령하십니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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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35-48, 참조 : 마 24:45-51)

청와대 주인은 누구이겠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입니까? 미국 백악관 주인은 누구이겠습니까? 클린턴 대통령입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란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산이나 재능, 지식, 생명 등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해서 하나님께 유익함이 되어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좋은 한 예를 보겠습니다. 구약 시대에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솔로문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하여 솔로몬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면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 "종", "작은 아이"에 불과하며 자신이 다스리게 될 "큰 백성"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 하지 않고 "주의 백성"이라고 표현하므로 자신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청지기"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솔로몬의 마음과 정신에 크게 만족하신 하나님께서는 "네가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며 "하나님의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릴 지혜뿐만 아니라 구하지도 아니한 "부와 영광"을 덤으로 주셨습니다.(열왕기 상 3:4-13) 나라의 대통령은 권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청지기입니다. 재벌들은 기업을 위임받은 청지기들입니다. 학자들은 지식과 지혜를 위임받은 청지기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이 모두 제것인양 제 맘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나라와 사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뿐만 아니라 주인의 뜻도 잘 알아서 주인의 재산과 소유를 잘 관리하며 적절한 때에 주인의 노예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2,43절) 그러나 악한 청지기는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는" 종입니다. 자기 신분을 망각하고 주인의 소유를 남용하는 사람으로 모든 것을 자기 것처럼 제 맘대로 처리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 뜻대로 사는 사람이 바로 악한 청지기입니다. 그는 주인의 뜻과 명령에 따라 그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주인으로 모셔 섬겨야 합니다. 청지기 의식을 제대로 가져야 우리 사회가 당면한 모든 문제들과 위기를 극복해나갈 수 있습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자기 자신과 이웃에 대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체를 위해 진실과 최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에게는 청지기에 대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인"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재림) 때에는 모든 인간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청지기는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돌아오신다는 사실을 알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주인을 맞을 준비를 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고자 하면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언제 다시 오실까? 보다는 예수는 반드시 다시 오신다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 죽을까 보다는 나는 반드시 죽는다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언제까지나 주인 행세하는 청지기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청지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의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약속하시고 반드시 그 약속을 지켜오셨습니다. 성경 신구약에 하나님의 약속이 3만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구세주로 세상에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초림) 예수 탄생 약 사천 년전에 주님이 오신다 오신다 하시더니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아브라함 자손, 유대 지파, 다윗의 계보에서 나신다 하시더니 그대로 나셨고 처녀 잉태하신다더니 그대로 처녀 마리아 몸에서 나셨고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더니 그대로 그곳에서 나셨고 애굽으로 피난 가신다더니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는 바람에 애굽으로 피난 가셨습니다. 나사렛 사람이라 하시더니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고, 성령이 그에게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고 약속하시더니 그대로 사셨습니다. 진리가 충만하신다더니 그 입술에서 진리의 생수가 강같이 흘러 나왔고 한 식탁에서 떡 먹던 자가 발꿈치를 들어 찬다 하더니 12제자 중 한 사람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았으며, 은 30에 판다고 하더니 그대로 은 30에 팔렸고, 죄인들 틈에 죽는다고 하시더니 두 강도 틈에 못박혀 죽으셨으며, 겉옷은 나누고 속옷은 제비 뽑는다고 하더니 그대로 겉옷은 로마 병정들이 나누어 가지고 속옷은 통으로 짰기 때문에 제비 뽑아 가졌습니다. 부자 무덤에 장사한다더니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내고, 주의 거룩한 자로 썩어짐을 보지 않는다고 하더니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위로 승천하신다더니 40일 만에 5백 여 명이나 보는 데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모든 약속은 다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둘째로 주신 약속은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올라가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더니 열흘만에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사 2천년 동안 성령의 시대로 각처에 교회를 세우시며 나 같은 죄인을 회개시키시고 거듭나게 하여 하늘의 생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사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셋째로 주신 약속은 말세에 신랑되시는 주님이 공중에 오시어 신부되는 성도들을 영접하시며 세상에 대해서는 심판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사르신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신다는 약속이 신약에만도 직접 간접으로 3백여 번이나 있습니다. 과연 그는 성경대로 이 세상에 오셨고 성경대로 사시다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부활하시고 성경대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 다시 오실 때 복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면 무엇보다 먼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은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잠자는 자"라고 말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비취시리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4-21)."

새 날 새 아침을 밝히는 참 빛으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아직도 캄캄한 밤인 양 어둠 속에 잠자고 있는 여러분, 예수 믿고 빛을 받아 잠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삶의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다시 오십니다. 깨어 일어나 등불을 켜고 "허리에 띠를 띠고" 지혜롭고 진실한, 그리고 복된 청지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6:14에 보면,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진실되라는 것입니다. 표리가 부동하고 외식하고 가면을 쓴 위선자는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십니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잠언 6:16-19)"

죄가 아무리 많아도 그대로 솔직히 고백하고 예수 앞에 나오는 세리와 창기는 사랑하시지만, 거룩한 것처럼 허위허식하며 지은 죄를 감추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바리새인과 제사장, 서기관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는(시편 15:1-3)"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종말을 예언하는 마지막 성경 책 요한 계시록에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구원받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여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거짓의 아비는 사탄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마다 어둠의 자식, 사탄의 자식입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그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여러분의 삶을 준비하시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실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시므로 하나님 앞에 발견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골로새서 3:14에 보면,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띠를 매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사랑>입니다. 좀 더 구체화시키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표현은 바로 <십자가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표는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증표는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받은 증거는 사랑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신구약의 지식과 정통과 이단의 교리 지식이 풍부할지라도 사랑 없는 지식은 인간에게 독약이 될 것이요, 산을 옳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는 신앙은 미신이나 이단에 불과합니다. 이단? 무엇이 이단이고 사교입니까? 사랑 없는 신앙이 미신이자 이단이며 사교집단입니다. 또한 내게 있는 것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자선 사업을 많이 할지라도 사랑 없는 자선 사업은 위선밖에 될 수 없습니다. 내 몸을 불사르는 순교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순교자는 지옥의 밑창 귀신밖에 될 것이 없습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시기 원하시면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띠>를 띠고 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섬김의 띠를 띠고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3:4에, 예수께서 제자의 발을 씻기려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고 말씀하신 주여,

이 나라 대통령이 백성의 발을 씻겨 섬김의 본을 보이므로

예수와 상관 있는 천국의 축복을 받게 하소서.

이 나라 국회의원들이 백성의 발을 씻겨 섬김의 본을 보이므로

정결케 하는 예수의 피와 상관 있는 자게 되게 하소서.

이 나라 재벌들이 노동자의 발을 씻겨 섬김의 본을 보이므로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김없이

온 인류에 베푸신 예수를 닮게 하소서.

이 나라의 스승들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섬김의 본을 보이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십자가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소서.

이 나라 교계의 지도자들이 신도들의 발을 씻겨 섬김의 본을 보이므로

종교 개혁에 한 알의 밀알처럼 쓰임 받게 하소서.

이 나라 큰 자들이 작은 자들의 발을 씻겨 섬김의 본을 보이므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 둘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는'

십자가 달게 지고 가게 하소서.

아멘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인간을 섬기기 위해 오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종입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이처럼 섬김의 띠를 띠고 산다면 행복한 가정, 행복이 넘치는 사회가 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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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슬기로운 다섯 처녀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 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유대인의 결혼은 삼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정혼단계로 신랑, 신부의 아버지가 서로 결혼을 합의하는 것입니다. 둘째, 약혼단계로 약혼 당사자들이 신부 측 집에 모여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로 서약을 하고 신랑이 신부에게 약혼 예물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약혼 1년 후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단계인 결혼식 하루 전날 신랑이 잔치를 베풀고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결혼식 날이 되면 신랑은 자기 친구들과 함께 열을 지어 신부집으로 행진해 갑니다. 그러면 신부집에서는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의 각별한 친구 10명을 들러리로 초청해줍니다. 이들 초청받은 10명의 처녀들이 잔치를 준비하고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이 결혼식은 밤중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릴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등잔과 충분한 기름(감람유)이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바로 이와같은 유대인의 결혼 풍습을 배경으로 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10처녀가 기다리는 <신랑>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10처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성도들>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10처녀가 준비해야 했던 <기름>은 슬기로운 5처녀와 미련한 5처녀를 분별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성령(불)>을 의미합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세상에 오셨을 때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실 것입니다. 여기 등잔과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게 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누가복음 12장 35절에,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켜진 등불"은 준비의 상징입니다. 계속해서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는 충분한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를 두고 슬기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랑되시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 슬기로운 처녀는 성령충만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고 부어주시는 성령이 충만하시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 슬기로운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지혜, 슬기는 두뇌의 명석함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믿고 성령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제아무리 지능과 재능이 뛰어나고 학식이 높으며, 부귀영화를 누려본들 결국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지 못하고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하신다면 그 인생은 미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며, 가진 것 없고 누리는 것 하나 변변치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 믿고 성령충만하여 신앙생활하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여 천국 백성이 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 영원히 슬기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은 모든 것을 통달하시기 때문에, 성령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충만이야말로 사람을 가장 슬기롭게 하는 것입니다.

불의 사용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확연히 구분지은 획기적 사건입니다. 처음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불을 몹시 무서워했습니다. 화산이 폭발하거나 번개로 인해 삼림에 불이 붙는 자연현상을 보고 인간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렇지만 타죽은 짐승 고기가 훌륭한 식량이 된다는 것을 깨닫자, 불붙은 나뭇가지를 동굴로 가져와 불씨로 사용하는 지혜를 보였던 것입니다. 불은 음식을 익혀먹는 데 유용할 뿐 아니라 추위로부터 몸을 지켜주어서 좋았습니다. 사나운 맹수들이 근접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인간은 천연의 불을 이용하는 데서 한발 나아가 인공적으로 불을 피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석기가 마주칠 때 불꽃이 이는 것을 보고, 마찰에 의해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불을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은 휠씬 나은 생활을 하게끔 되었습니다. 익힌 음식은 소화가 잘 되었으므로 전보다 풍부한 영양섭취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때문에 근력뿐 아니라 두뇌발달이 촉진되어 두뇌용적이 비약적으로 커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6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월등히 진화된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과 중국 북경 부근에서 발견된 화석에 의하면, 이들의 두뇌용적은 약 1천cc 정도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2배입니다. 자바에서 발견된 것은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 북경에서 발견된 것은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라고 불리며, 직립해서 살았다 하여 호모 에렉투스라고 통칭합니다. 그후, 자바 인이나 북경인보다 더 진화된 인간이 유럽 일대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독일의 네안데르탈 지방에서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통칭되는 이 인간은 약 20만 년 전 유럽 일대에 널리 퍼져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두뇌용적은 약 1,200cc 정도입니다. 이들은 불을 쓸 줄 알았던 인간들이었습니다. 불의 사용, 그것은 산업혁명을 일으킨 증기기관처럼 인류사를 한 걸음 앞으로 성큼 내딛게 한 중대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불과 같이 인간의 영적 두뇌발달을 촉진시켜 슬기로운 삶으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신령한 문화와 문명을 이루게 합니다. 성령은 불과 같아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밤중 같은 이 세상에서 빛으로 살게 합니다. 전능의 영으로써 성령은 불과 같아서 삶에 강력한 힘(에너지)을 불어넣게 됩니다. 성령은 인간의 죄를 태워 소멸시키는 거룩한 불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죄를 불에 태워 의인이 되게 합니다. 때문에 죄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고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예수 믿고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인생을 궁극적으로 슬기롭게 하는 성령은 사람의 노력이나,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은 예수믿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죄사함을 받기 위해 번제단 위에 제물을 불태워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제물을 불태우는 불은 사람의 힘으로 만든 불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께서 붙이신 불이었습니다.

"(레9: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레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하나님께서는 이 불을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하라고 제사장에게 명령했습니다.(레위기 6장 8-13절) 이 불씨를 잘 담아 보관해 두었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각종 제사(예배)때마다 반드시 이 불,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불을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다른 불을 사용하게 되면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은 다른 불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제사드리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인해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도 했습니다(레10:1-2).

"(레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레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여기 "다른 불"은 인위적(人爲的)인 불, 마귀적인 불을 의미합니다. 인위적인 불은 인간의 죄를 태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죄를 더할 뿐입니다.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없이 인간적인 힘이나 노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는 생활, 성령이 없는 교회 봉사는 열매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시끄러운 인간의 소리만 들릴 뿐 거룩한 봉사, 지혜롭고 슬기로운 봉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성령, 에너지, 불)을 가지고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과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여러분의 신앙생활, 봉사생활이 슬기롭고 영광스럽게 되기 원한다면 성령의 불을 받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불(힘)을 받아야 주어진 사명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한 번 하나님께서 붙이신 불은 절대로 꺼쳐서는 않되며 두 번 다시 붙이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레6:12)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레6:13)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그러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그 불을 어떻게 이 시대에 받아서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이 시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불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을 통해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행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제 교회야말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불(성령)을 끄지않고 불씨를 보존하며 그 불을 지펴 인류의 죄를 태우는 성령의 불을 던지는 사명을 지닌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함이야말로 참된 교회의 시금석이며, 슬기로운 성도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꺼진 교회는 미련한 다섯 처녀요, 성령이 충만하여 항상 불을 피워 불을 밝히는 교회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인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는 이 시대 여러 교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계 2:1-3:22).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는 성령의 불로 뜨거운 교회였으나 "처음 사랑"을 버리므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는 성령의 불, 곧 사랑의 불이 꺼졌다는 증거입니다. 불이 꺼진 교회는 불을 붙이는 그 촛대마저 옮겨버리시겠다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십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성령은 사랑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습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습니까? 성령의 불이 소멸된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가 미련하게 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회개하시고 하나님께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두철미하게 지키지 못하여,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랑으로 섬기지 못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이단을 용납하므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사수의 불꽃이 꺼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를 상실하고 지켜지지 아니하는 교회는 성령의 불이 소멸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섬기지 않는 교회는 미련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도 불이 다 꺼져가는 미적지근한 교회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계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혹시 우리 교회에 불이 꺼져가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지금은 불이 켜져 있다해도 계속해서 불이 꺼지지 않을 만큼 충분한 기름, 성령충만함을 받았습니까? 성령의 불을 받아 뜨거워지는 교회,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불을 받고자하면 먼저 성령을 부어주시는 예수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7:373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렘 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예수 그리스도 믿으시고 불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심으로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성령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는 사랑의 불을 지속적으로 피울 수 있도록 성령의 기름을 충만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죄를 태우는 성령의 뜨거운 회개의 불이 충만하여 거룩한 교회, 거룩한 성도, 순결한 신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의 불을 꺼지지 않도록 성령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전도의 불을 계속적으로 지펴나갈 수 있도록 성령충만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 삶의 힘과 기쁨을 주는 찬송의 불을 항상 피울 수 있는 찬양대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감사의 불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불은 에너지(힘)입니다. 에너지(자연의 불)를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나라가 강하고 문화, 문명이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삶의 진정한 수준높은 문화와 문명은 성령의 불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참된 기독교의 문화 문명은 성령의 불로써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불이 바르게 역사(役事)하는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불이 바르게 역사하는 교회가 슬기로운 교회요, 슬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 할 준비는 오직 성령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라도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있는 슬기로운 처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실 수 있도록 성령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준비된 사람의 삶의 모습은 먼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6장 3절에,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교회봉사를 위해 택함받은 집사는 성령이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성령받았으나 칭찬받지 못하는 사람은 준비된 슬기로운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이웃들에게 칭찬받는 성도들은 성령충만한 슬기로운 처녀들과 같이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라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도행전 16장 19-34절에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역경을 당해도, 환난과 핍박을 당해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원망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찬송하며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성도입니다. 사도행전 13장 50-52절에서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생활이 어려워도, 환난을 당해도 믿음이 후퇴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찬송하며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두고 슬기로운 사람, 영적으로 깨어있어 언제라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슬기로운 처녀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스데반 처럼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증거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처럼 축복의 기도하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성도입니다. 성령충만한 성도는 자기를 해롭게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축복하고 그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며 그 이웃이 비록 원수일지라도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성령충만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성도는 오직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사는 사람, 오직 십자가 중심으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령은 자기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도록 역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남을 섬기며 사는 성도입니다. 남을 섬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몽땅 비우고 그 자리에 성령이 채워지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남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성령은 교만한 사람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충만할수록 사람을 더욱 더 온유 겸손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을 섬기게 합니다. 성령은 권세나 부리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들을 섬기도록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슬기로운 처녀는 성령충만하여 남을 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는 슬기로운 처녀와 같은 교회입니다.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며, 사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생활이야말로 성령충만 생활이며, 이 시대에 깨어있는 슬기로운 처녀같은 성도요 언제라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기름을 충만하게 준비한 깨어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므로 언제라도 다시 오실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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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작은 일에 충성하라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5:14-30, 참조 : 눅 19:11-27)

어떤 돈 많은 사람이 여러분에게 3억이나 6억, 또는 15억원을 주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돈 많은 주인이 멀리 타국으로 갈 일이 있어서 종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그 재능에따라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또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나머지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여기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인데,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요즈음 우리 나라 형편대로 노동자 하루 일당을 5만원으로 계산한다면 한 달란트인 6천 데나리온은 3억 원입니다. 두 달란트는 6억 원, 5달란트는 무려 15억 원이나 되는 돈입니다. 15억 원을 받은 종은 곧 바로 가서 열심히 장사하여 물경 15억 원이나 남겼습니다. 그리고 6억 원을 받은 종도 마찬가지로 장사해서 6억 원을 더 남겼습니다. 3억 원을 받은 종은 그 돈을 고스란히 항아리에 담아 땅 속에 묻어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종들을 불러서 맡긴 돈에 대해 결산보고를 받았습니다. 15억 원을 맡은 종은 열심히 장사해서 15억 원으로 15억 원을 벌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때 주인이 그 종을 칭찬하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6억 원을 맡은 종도 6억 원을 벌었다고 결산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도 똑같은 칭찬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3억 원을 맡은 종이 보고하기를, "주인님, 당신은 좀 딱딱하신 분으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알고 무서워서 당신이 주신 3억 원을 땅에다 숨겨 두었습니다. 여기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주인은 이 종에게 말했습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느냐, 그렇다면 너는 차라리 그 3억 원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라도 맡겨서 그 이자라도 받아왔어야 했을 것이다. 저 놈한테서 3억 원을 빼앗아 15억 원을 벌어온 종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마저 뻬앗을 것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여기 비유 말씀가운데 <주인>은 <하나님>을, <종들>은 교회의 <성도들>이나 일 맡은 <임원들>을, 더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말하고, 맡겨진 <달란트>는 그들에게 주어진 물질이나 재능, 능력,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모든 것>을 말합니다.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각기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 맡겨진 <달란트>가 많든 적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5달란트 맡은 자나 2달란트 맡은 자에게 주어진 칭찬이 똑같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은 15억 원을 맡은 자에게도, "작은 일에 충성했다." 6억 원을 맡은 자에게 "작은 일에 충성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한 달란트 뿐만 아니라 다섯 달란트 역시 '작은 일'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아무리 크고 위대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초라해 보일 뿐입니다. 우리 나라 외환보유고와 맞먹는 400억 달러 가까운 재산을 가진 세계 제일의 부자 빌 게이츠나 거리에서 붕어빵틀 놓고 붕어빵 팔아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 <작은 일>에 불과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이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맡은 사람은 어찌 보면 주인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사소한 일이라도 하지 않거나 미루는 일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일해야만 합니다.

옛날 어떤 여행객이 일본에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상감 세공(in-laidwood-work)의 전문가가 있었는데 특별히 식탁의 상감 세공을 전문으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여행가는 일본인 장인의 가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사고싶은 식탁을 거기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장인은 그 식탁을 팔기를 거절했습니다. 여행가는 돈을 더 많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본인 장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돈 문제가 아닙니다. 이 식탁에는 결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식탁을 팔수 없습니다."

그 여행가는 고집을 부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결점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도 결점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요. 있는 그대로 이 식탁을 사고 싶습니다. 아무리 많은 대가를 요구하더라도 그 값을 치르고 사고 싶습니다."

그 일본인 장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안 됩니다. 이 식탁을 팔지 않을 것입니다. 불완전한 물건을 우리 공방에서 출고시킬 수는 없습니다."

일본인 장인에게 그 식탁을 팔도록 도저히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양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현재의 상황의 비극들 중의 한 가지는 장인정신에서 긍지(pride)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봉사할 때도 장인정신을 가지고 임해야 할 것입니다. 안내봉사를 하든, 애찬봉사를 하든, 전도를 하든, 그 무엇을 맡아서 하든 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최고를 지향하는 마음과 정신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 일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정도로 충성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항상 맨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 일이 나를 만족시킬만큼 최선을 다했느냐?"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고용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다윗에 관한 위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삼하 24:18-25). 예언자 갓은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다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다윗이 그 타작마당을 사기 위하여 그 곳에 갔을 때에 아라우나는 다윗을 사랑하여 땅과 제물용 동물을 돈을 받지 않고 공짜로 주겠다고 다윗에게 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라우나의 제의를 사양하였습니다. 다윗은 대가를 완전히 치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단지 종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경건한 설교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경쟁 세계에서 고용인에게 임금을 속여 적게 지불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양심적인 고용주나 기업체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경쟁 사회 속에서 비양심적으로 부정직하게 일하는 고용인들도 역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종교와 경제는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와 경제는 모두 우리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했을 때에만 우리의 일은 하나님께 바치기에 적합한 제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의 이 칭찬 가운데서 종들이 주인이 보든 안 보든 하루 하루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과, 그것이 주인의 마음을 흡족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전직(轉職) 자문업체인 <챌린저, 그레이 앤드 크리스마스>는 구직 희망자들이 갖추어야 할 6가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인화(人和)능력이 있는가? 퇴직 - 신규채용이 활발해지면서 다양한 구성원을 조직원리로 다시 묶어낼 수 있는 조정자의 역할이 증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학력보다 기술이다. 컴퓨터 등 첨단기술 소지자라면 고졸자가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3) 풍부한 경력을 갖췄는가? 명예퇴직자의 경험과 지식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 외국어에 능통한가? 세계화의 진전으로 특정 지역과 언어에 대한 전문가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5) 성실한가? 능력도 있고 열심히 일하는 직원을 해고할 고용자는 없습니다.

6) 부전공이 있는가? 조직 통폐합이 활발해지면서 어느 부서로 옮겨도 적응을 잘하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팔방미인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두고 이 시대에 우리 교회에 요구되는 교회 봉사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첫째, 인화의 능력, 다시 말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교회 봉사에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학력보다 기술이 우선하는 것처럼 교회 봉사는 학력보다 재능을 살리는 봉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 익숙하다보면 때로 우리는 누구누구는 방언에 능하다던데, 혹은 교사 일 혹은 치유에 능하다던데 하며 부러움을 갖게 되기도 하며 나도 한번 해보았으면 하고 실제로 덤벼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과연 그러한 은사를 주님께서 내게 주셨는지, 그리고 내가 그 은사를 행할 때 주님과 타인들에게 유익이 될는지를 먼저 헤아려보아야 할 것입니다.

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쿠터를 탄 어느 어린이가 나무에 정면으로 머리부터 부딪히는 현장을 유명한 뇌수술 전문의가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어린이의 뇌에 심각한 상처가 있을 것을 예견하고 사람들에게 엠블런스를 불러 달라고 청했습니다. 겨우 병원에 도착해 침대에 누이고 막 응급 처치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어느 소년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아이는 제 친구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보이 스카웃 단원이므로 응급 처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아이에게 제가 응급 처치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그 소년은 자신의 무모한 행위가 어쩌면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에서 자기보다 더 신실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 있는데도 그 일을 굳이 자기가 맡아서 하겠다는 사람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믿음의 분량을 올바로 평가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교만해지는 것을 막고 주님의 교회 안에서 더욱 성장해가며 교회 공동체에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성도들이 지닌 은사나 능력을 부러워하기보다는 그들의 자랑스런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들의 성장을 위해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셨으나 무엇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사모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경으로 한 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가 무엇인지 나타내 보여주실 것을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셋째, 풍부한 경력을 갖추었느냐는 것인데, 이는 신앙의 여러 가지 연단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봉사할 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외국어에 능통해서 세계화를 추진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이는 교회의 세계 복음화 사업에 대한 비전과 그 비전을 달성할 수 있는 하나님 말씀에 정통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성실해야 합니다. 여섯째, 부전공이 있느냐는 것인데, 이는 교회의 어느 일을 맡겨도 원망 불평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하는 장인정신을 가지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지를 방문한 에반스 박사는 수술실에 들어서자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에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사는 조금도 힘들거나 귀 찮은 기색이 없이 수술을 계속 해나갔습니다. 약 6시간 정도의 수술 끝에 그 의사 선교사가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수술이 이제 끝났다고 에반스 박사에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선교사 사무실로 돌아오는 중 에반스 박사가 그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미국에서 그러한 수술을 받으려면 돈을 얼마나 지불해야 하나요?"

"아마 500불 정도는 들겠지요"

"이건 궁금해서 묻는 것인타 이곳에서는 그러한 수술비로 얼마나 받습니까?"

선교사는 사무실 안 자기 책상 위에 있는 더러운 동전 한 닢을 주워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요, 이러한 동전 한 닢이라도 좋습니다. 오늘 수술을 받은 환자가 바로 이 동전을 들고 와서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선생님, 이 돈을 받고 수술해 주실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지요. 그때 나는 환자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의사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항상 이러한 수술을 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사하게 되는 것은 수술하는 몇 시간 동안 나의 손은 환자들을 어루만지시는 예수님의 손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성도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지체의 일부가 되어 대가를 바라지 말고, 그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그분의 사랑의 향기를 퍼뜨리게 될 것이며,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는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모두가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들입니다. 작은 일에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더 많은 일을 맡는 영광과 천국의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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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선한 이웃이 되라(1)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25-37)

간교하기 그지없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고자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고 되물었습니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며 율법의 핵심을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며 자신의 질문에 대해 스스로 대답을 찾게 하셨습니다. 율법에 대해서만은 자신만만했던 그 율법사는 잘난척하며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고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율법사의 교묘하고 간교한 의중을 꿰뚫어보셨지만 그를 비난하지 않고 진지하게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이웃에 대한 정의(正意)를 스스로 깨닫고 답변하게 하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사는 율법의 핵심이 되는 "이웃 사랑"(레위기 19:18)에 "이웃"이란 과연 누구인가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를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내린 결론은 "이웃은 오직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진 내 동족, 유대인뿐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임신한 이방 여인이 길을 가다가 출산하기 위해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여인을 도와주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이방 임신부가 산통 끝에 산모나 아이가 죽을지라도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 여인의 출산을 돕게 되면 또 다른 이방인 하나를 세상에 출생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씽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 때 그는 엄격한 시크교도인 가족들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집안에서 지체가 높은 그의 훌륭한 삼촌이 그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고 부탁을 하는데도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집에서 쫓겨나 어머니가 싸준 독약이 든 도시락을 먹고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인간들이 세운 종교적 전통, 즉 교리나 율법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가족이 신봉하는 시크교의 율법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낳은 자식이라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 안에 하나님이 제대로 숨을 쉬고 계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종교의 노예가 되어서는 인간다운 사고와 행동과 정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당시의 유대 종교의 노예가 되어 있던 사람들을 그 멍에에서 해방시켜려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독점하고 제멋대로 해석하여 유대인들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독점한 율법의 종교를 튼튼하게 보강시켜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메었던 무거운 율법의 멍에를 벗겨 평안함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다시 만들어 이 새로운 종교에 사람들을 다시 메이게 하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본훼퍼의 말대로 "예수는 인간을 새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신 것은 율법의 핵심이 되는 "이웃 사랑"을 통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세우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류를 구하여 자유와 평안을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 사랑"이란 인간의 선한 행위로 "영생", 다시 말해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구원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사가 구원얻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라며 어떤 행위를 물었기 때문에 행위의 길로써 대답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라"고 하셨을 때 율법사는 자신의 전적 무능함을 절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사는 인간의 어떤 선한 행위로도 결코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잘난척했던 것입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이웃에게 은혜를 베푸는 위치에 있는 자라도 된 것처럼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분명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 떤다"고 했습니다. 이는 귀신들이 사랑은 못해도 하나님에 대해 누구 못지 않게 잘 알고 두려워 떤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행함이 없는 귀신들의 믿음이 헛된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요일 4:20)라는 말씀처럼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참 신앙은 이론만이 아니라 말씀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과 통찰력이 있다할지라도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하면 그의 지식이나 삶까지도 헛것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약4:16-17)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서 "선한 이웃",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의 비유 중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당해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당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피해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 이유는 율법에 있었습니다.

<레위기 2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

<민수기 19:11-13>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 그는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있음이니라"

시체를 만진 제사장은 부정하여 칠일 동안 정결의식을 행하여 정결케 되지 아니하면 성전에 나가 거룩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전 예배 의식을 위해 죽어 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쳤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에 대한 "이웃 사랑"보다는 종교 의식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은 정확했으나 행함이 없는 죽은 지식에 불과 했습니다. 율법을 세우고 유대 종교를 세우는데는 일조 했으나 사랑으로 생명을 구원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사랑의 요구보다는 그 고통을 외면하며 종교와 율법의 요구를 우선하는 죽은 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한번은 동학의 교조인 최수운 선생에게 한 중이 유교과 불교, 선(仙) 등 세 종교 중에는 어느 것이 비교적 이치가 깊고 광대무량한가고 물었습니다.

"높고 낮은 것이 없지요. 비해서 말한다면 죽은 사람에 대해서야 적고 큰 것을 비교할 수 있겠소? 살아 있을 때에야 사자의 힘이 강하고 개가 약하다고 할 수 있으나 죽고 난 후에야 사자의 죽음이 개의 죽음보다 무섭다고 할 수 있을 게 무엇이겠소? 진리라는 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혼을 넣어줄 수 없게 되고 그 시대의 정신을 살릴 수 없게 되면 죽은 송장과 별 다름이 있겠소?" 최수운의 이러한 대답에 중은 할 말을 잃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대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지 못하는 기독교는 죽은 송장을 놓고 종교의 우월성을 논하는 것처럼 의미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최선을 다해 생명을 구한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고 멸시하는 인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가 유대인이든 자기 동족이든 가리지 않고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내는데 아낌없이 최선을 다 했습니다.어떤 민족, 어떤 사람이고 간에 도움이 필요 중에 있는 사람은 그 모두가 우리의 이웃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한(좋은) 이웃"이란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시에는 언제라도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아낌없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미국 백인들은 집을 살 때도 백인들만 사는 좋은 동네, 좋은 이웃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네가 좋은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교회를 찾아 갈 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교인이 되어 좋은 교회, 좋은 기독교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교인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좋은 교인은 무엇보다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전 모 방송에서 고셔병을 앓고 있는 세 살 박이 주혜가 고통가운데 죽어 가는 모습을 방송했습니다. 프랑스 의사의 이름에서 유래된 고셔병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38명의 환자가 발견된 희귀병입니다. 증상으로는 비장과 간이 비대해지고 뼈가 자주 부러지며, 성장이 지연될 뿐만 아니라 악성빈혈에 신경계 이상 증세까지 보이는 치명적인 병으로, 이 병에 걸리면 뼈가 녹아드는 극도의 통증을 느끼면서 서서히 죽어 가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런데 비싼 치료비를 마련할 수 없는 주혜 부모의 얘기가 방송된 뒤 수많은 성금과 격려의 전화가 쏟아졌고 주혜에겐 치료의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방송 11개월 후 방송 기자가 다시 찾아가 만난 주혜는 병원치료를 받지 못한 채 너무나 처참한 모습이 되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신앙의 힘으로 완치하겠다는 부모의 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에 '좋은 이웃의 사랑'으로 얼마든지 죽어 가는 어린 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을 고집하는 부모의 무모함 때문에 한 생명이 꺼져 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는 것이 될지 몰라도 좋은 이웃, 좋은 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자신의 믿음으로 자식을 구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식의 생명을 담보 삼아 자기 믿음을 보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들 부모는 왜곡된 신앙으로 누구보다 가까운 이웃인 자기 자식에게 좋은 이웃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에 '강도 만나 고통가운데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부산에 이유정(여, 6세) 어린이는 속옷도 입지 않고 바지와 겉옷만 입고 누워 있는 채로 이웃 주민의 신고로 별견되었습니다. 어린 유정이는 주로 몽둥이, 혁대로 맞아 양쪽 눈이 심하게 부어 거의 감겨져 있었고 양쪽 팔과 다리는 피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마도 몽둥이로 심하게 맞아 두개골이 금이 가 물렁물렁할 정도였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렇게 된 지 벌써 1주일이나 되었는데 주민들은 유정이가 이렇게 심하게 학대받고 있는지 조차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학대는 유정이의 어머니가 4년 전 가출하고 아버지가 실직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를 자극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가출은 유정이로 하여금 말을 잃게 했습니다. 유정이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여 급히 입원시켰고 신경외과치료를 거쳐 소아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당분간 아버지와 격리시켜 보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IMF(아이엠에프)사태 이후 가정이 파괴되며 거리에 내몰린 어린 아이들, 14만 명이 넘는 결식 아동들, 유정이와 같이 학대받고 있는 수 만 명의 아동들, 치매에 걸렸다고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은 수많은 노인들, 이들 모두가 우리가 찾아가 사랑으로 돌보아주어야 할 이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이들'을 찾아가 십자가 희생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좋은 이웃, 선한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왕따"는 어른들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청소년 사이에는 보편적으로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은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에게 말도 하지 말고 모른 척하자'는 뜻입니다.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는 "왕따 현상"이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3일 아침, 제주도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호출기에 반장인 현 양의 목소리가 녹음되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현 양은 그날 아침,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습니다. 현 양이 남긴 유서에는 자신을 따돌린 친구들에 대한 원망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70명이고 6학년 전체가 14명인 작은 분교로 자살한 현 양은 6학년 여학생이 6명 사이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아서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친구들로부터 "왕따"가 된 아이들은 차라리 몇 대 맞는 것이 훨씬 맘이 편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학교에서 "왕따"가 되어 전학이나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 아이, 대인 공포증과 피해의 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왕따"인 아이들이 학년 이 바뀌거나 기회가 생기면 그 친구를 "왕따"로 만들어 보복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따돌리고 괴롭힘으로써 즐거움을 찾는 아이들. 이것이 바로 아이들의 미래를 다듬어 주는 학교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생각하면 부모와 선생님이 함께 관심을 가지고 적극 나서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학원에서 강도 만난 자는 "왕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왕따"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 주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을 힘입어 생명을 얻은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의 '강도 만난 자들'을 찾아가 '좋은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만약 교회가 지역사회에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이웃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가시고, 좋은 교회가 되어 고통받는 사람과 사회에 사랑과 생명을 불어넣는 시대의 소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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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선한 이웃이 되라(2)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하시니라(눅 10:25-37)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율법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그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율법교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되물었습니다. "네가 알고 가르치고 있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그러자 이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웃>을 말할 때 자기 동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자기들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자기들과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자기들과 같은 성경을 가진 사람들만을 <내 이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좁은 소견에는 아무리 이웃해서 산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이 같지 아니하면 <내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에 예수 믿지 아니하는 임신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임신한 여인이 해산이 임박해서 극심한 출산의 고통으로 극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런 때일지라도 그 예수믿지 아니하는 임산부를 도와주면 율법을 어기는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임산부를 도와주게 되면 예수 믿지 아니하는 이방인을 하나 더 세상에 출생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는 율법교사가 이 지경이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내 이웃>이 다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율법교사를 깨우치고자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위험한 길을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습니다. 마침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하는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강도떼를 만나 피를 흘리며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람을 피하여 급히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 사람도 그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가 타고 가던 짐승에 태워 가까운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음 날 그는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잘 치료해주시지요. 치료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제사장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레위 사람도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며 그들과 같은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상종하지도 않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의 <선한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고 해서 영생을 얻어 천당가는게 아닙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 사람이라고 해서 영생을 얻어 천당가는게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만난 사람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주지 아니하면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제사장이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게 되면 부정(不淨)하여 일주일동안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며, 직무를 수행할 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민19:11)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리니 (민19:12) 그는 제 삼 일과 제 칠 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제 삼 일과 제 칠 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민19:13)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강도만난 사람을 돌보아주다가 그 사람이 죽어버리게 되면 시체를 만진 결과가 되어 7일동안 부정하게 되므로 제사장은 성전에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제사장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제사, 의식(儀式)을 더 중요시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아픔과 고통보다는 예배드리는 것이 더 우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주일날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에 오시다가 뺑소니차에 치여 길바닥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이 제사장처럼 구약성경 말씀대로 그 사람을 버려두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구약의 하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약은 예수님에 대한 그림자, 상징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산다면 사지백체(四肢百體)가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유부남(有婦男)이 지나가는 예쁜 여자를 보고 참 예쁘다 하면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으로 죄가 되지 않지만, 만약 저 예쁜 여자하고 한번 잠을 자봤으면 하는 생각을 품었다면 그것은 간음죄에 해당합니다. 두 눈이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 죄를 범하게 되었기 때문에 두 눈을 빼어 내버리고 장님으로 천국 가는게 낫다는 것입니다.

"(마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아마도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산다고 하면 사지백체가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죽은 시체를 만지게 되면 7일동안 부정하다는 말씀을 문자대로 해석해서 살지 말고 상징적, 영적으로 해석해서 살아야 합니다. 시체가 부정한 이유는, 시체 곧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빚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부정하다는 것으로 죄의 심각한 영향력과 결과를 깊이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나 이제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의식적(儀式的)인 부정(不淨)은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일날 교회에 오시다가 뺑소니 차에 치여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려 온갖 애를 다 쓰다가 설사 그 사람이 죽었다해도 결코 부정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했는데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게다가 부랑인(浮浪人)이어서 치료비도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헌금까지 몽땅 털어 대주었다면, 그 날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하더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죽은 시체를 만져 부정한 자는 성전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은 죄를 범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시체를 만져 부정한 자는 3일째 잿물로 씻어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의 성전이 되시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깨끗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7일째 되는 날에도 다시 잿물로 씻어야 부정한 것이 완전히 깨끗해져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예수 믿고 회개하면 누구든지 구원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처럼 주일날 뺑소니차에 치여 죽어가는 사람을 버려두고 지나쳤다면 그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지나치게 잘 믿어 자신은 구약의 말씀까지 지킨다는 구실로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는 <선한 이웃>이 되지 못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정통파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남을 돕는 일보다도 교회에 더 큰 관심을 표시하고, <선한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소위 주의 종에게 물질을 바치면 주의 종의 축복을 받는다해서 <선한 이웃>이 되어 주기 보다는 자신의 축복을 위해 주의 종에게 물질을 아낌없이 바치는 무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고자 주의 종에게 물질바치는 사람은 사기 당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축복을 받고자 하시면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가난하고, 힘없고, 갇히고, 병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곧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 즉 영생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25: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다음으로, 레위 사람도 <선한 이웃>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레위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남을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미국 뉴욕 어느 아파트 단지 한 복판에서 젊은 여인 하나가 괴한에게 칼에 찔리는 것을 아파트 창문에서 세 집이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괴한의 칼에 마구 찔려 살려달라고 부르짖는데도 어떻게 손을 써 보려고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구경만했지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발 벗고 나서서 괴한으로부터 그 여인을 구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최후에 우리들을 심판하는 것은 우리가 교리나 율법 등을 잘 지켰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생활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위해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 살았느냐, 아니면 남을 위해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닙니다. 아니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포기하고 남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뺑소니 차에 치여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교통법규를 뒤적이거나, 교리나 율법을 따지거나, 그 사람의 신앙 유무를 따지거나, 종교가 무엇이냐를 따지게 되면 <선한 이웃>이 되지 못하고 영생에 이르지 못합니다. 아파하고 고통당하고 죽어 가고 있는 <강도만난 자>가 누구이든, 그 과실이 누구에게 있든 사마리아 사람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털어서 자비를 베푸는 <선한 이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민족이든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 모두가 다 우리의 이웃입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누가 우리의 이웃이냐?"고 교회에 나와서 묻지 말고 세상에 가서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보이거든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의 이웃임을 알고, 그 사람을 하나님처럼 섬기시고 자비를 베푸는 <선한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장차 심판을 이기고 자랑스러운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자비, 긍휼을 베푸는 <선한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약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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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3-21)

1. 구약성서에 재산분배법에 대한 이런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 받는 자와 미움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미움 받는 자가 먼저 아들을 낳아 그녀의 소생이 장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재산을 그 아들들에게 상속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사랑 받는 자의 아들인 차남을 장자 삼아서 안되고 반드시 그 미움 받는 자의 아들을 참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며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1장 15절-17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 유산 상속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한 사람은 바로 이 구약 율법에 기록된 재산 분배법에 불만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움받는 자가 낳은 아들이 형이어서 그가 두 몫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가 낳은 아들이지만 차남이어서 한 몫밖에 받지 못한 것이 못내 불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로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그 사람에게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바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셔서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보실 때, 그 사람이 마음에 탐심을 버리지 아니하면 결국 파멸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하는 사람이나 탐색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골 3:5, 고전 6:9,10) 죄에는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는데 용서받지 못하고 죽을 죄는 다음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즉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호색 등입니다.(초오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에서) 여기서 보면 탐심은 기본적으로 용서받기 어려운 죽을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언에도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언 1:19)고 말하고 있습니다. 탐심의 결과 파멸에 이른 경우를 우리 주변에 실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문학을 통해 그 단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메리카의 비극,An American Tragedy>(드라이저,Theodone Dreiser)의 주인공은 가난한 여전도사의 아들 클라이드 그리피스(Clyde Griffths)입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가난한 가정의 종교적인 환경에 반발을 느꼈고, 정신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더 욕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약방의 점원 생활로부터 출발해서 호텔의 보이로 전환됨에 따라 그의 순진했던 마음은 점차 사라지고 온전히 세속적 욕망 속에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22세의 나이로 시카고에 진출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셔츠회사를 경영하는 숙부의 인정을 받아 얼마 뒤에는 과장으로 승진합니다.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그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직공 로베르타(Roberta)와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이 무렵부터 클라이드는 이 지역의 상류사회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서 갑부의 딸 손드라(Sondra)와 새로운 교제를 하게 됩니다. 한편 로베르타는 클라이드의 자식을 임신하여 정식결혼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출세와 성공의 꿈에 눈이 먼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나 자식 또는 도덕성 따위가 문제되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베르타는 그의 입신출세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요 그의 진로의 무거운 짐이 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베르타를 죽여 없애기로 결심하고 산 속의 호수로 그녀를 유인하여 뱃놀이를 하다가 사고를 가장 보트를 뒤엎어 그녀를 물 속에 빠뜨립니다. 구해달라고 애걸하는 그녀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못들은 척 호숫가로 헤엄쳐 나오고 맙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깨끗이 끝난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곧 경찰에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전기의자에서 22년의 짧은 생을 끝맺고 맙니다. 전통적 종교와 사회에 반항한 한 젊은이가 성공의 꿈이라는 욕망 때문에 비극적인 자멸을 초래하는 과정을 그린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믿음이나 도덕의 힘을 인정하지 않았던 주인공 클라이드는 성공 또는 출세만 할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을 딴 사람에게 주더라도 그것은 전혀 문제되질 않았던 것입니다. 갑부의 딸 손드라와 알게 되면서 입신출세의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다음과 같은 자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 미모! 그녀가 살고 있는 부와 사회적 지위의 그 세계!....나와 같은 가난한 청년이 그러한 지체높은 자와 접촉하는 것이 악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출세의 꿈과 성공의 야망 앞에 사랑과 도덕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지만 결국은 그로 인해 살인과 자멸을 초래한 것입니다. 이런 비극적 현상은 19세기 이후 아메리카의 청년들 사회에서 수없이 일어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풍조와 구조로 틀이 잡혀가고 있는 사회도 문제지만, 정신적 도덕적 목적과 창조적 명성을 내동댕이치고 물질적 욕구와 쾌락과 출세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우리 개체들도 문제입니다. 이런 욕심은 희생과 파멸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줄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람의 생사회복은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람은 그 존재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소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 소유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존재 가치가 평가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구하며 자기 중심, 자기 사랑에 치우쳐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맙니다.

2. 이어서 예수께서는 사람의 행복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음을 깨우치기 위해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어느 부자가 곡간에 쌓아둘 곳이 없을 만큼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큰 곡간을 짓고 쌓아 두어 평생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리라고 마음 먹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경고하셨습니다. 비유 끝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기적인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욕심(탐욕)은 자기만을 이롭게 하고자 힘쓰는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 욕심(탐욕)을 억제하지 못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탐욕은 삶의 방향이 자신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썩어질 것으로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 믿게 되면 삶의 방향이 자신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의 삶은 빛 가운데 밝아지며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자신의 아픔과 고통, 자신의 괴로움과 슬픔, 자신의 불행한 처지만을 생각한다면 그는 어두움과 낙망, 우울증에 빠진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삶의 방향을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되면 이기적이 되며 몸과 마음, 영혼 마저 병든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 믿게 되면 자신을 생각지 않고 시야를 넓혀 하늘을 바라보며 이웃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이 예수 믿게 되면 자신의 무겁고 어려운 짐보다 인류의 무거운 짐을 대신 걸머지신 예수님과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무거운 짐을 운반할 때에 그 무거운 짐을 긴 막대 한쪽 끝에 매달고 그리고 막대기 다른 쪽 끝에는 그 짐과 비슷한 무게의 돌을 매달아 어깨에 매어 운반한다고 합니다. 양쪽 끝에 비슷한 무게의 짐이 있으면 한쪽에만 무거운 짐이 있을 때보다는 균형이 잘 잡혀 덜 무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여러분, 다른 사람의 짐을 져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무겁고 힘든 짐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이 가볍고 쉽게, 그리고 평안하게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무거운 짐들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이웃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는 생활입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의 삶이 한층 기쁘고 소망이 넘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부요한 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이 예수 믿게 될 때에 그의 삶은 위로 향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살게 됩니다. 그는 모든 일을 영원의 시각에서 봅니다. 즉 그는 사물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봅니다. 예수 믿게 되면 항상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어려운 일들이 쉬워지고 무거운 일들이 가볍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 믿게 되면 이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삶의 방향이 변화되었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은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삶의 방향을 낮은 곳에 처해 있는 이웃에게 바꿔 하늘 나라에 부요한 사람을 하나 소개합니다.(경향신문 2월 0일자)

100억 원대의 부동산 갑부의 막내아들로 곱게 자라 명문대를 졸업한 20대 젊은이, 김영진씨는 그의 장래가 보장된 사람으로 얼마든지 인생을 평안히 즐기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낮은 곳」으로 향했습니다. 지난해 8월 고려대 불문과를 졸업한 그가 부랑인과 장애인을 돌보는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며 가출해서 무작정 충북 음성 꽃동네에 들어갔습니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마흔이 넘어서 본「늦둥이」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너무나 귀한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69)는『차라리 꽃동네에 돈을 기부하고 남들처럼 살라』며『그 일을 하면 다신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꿈을 접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고통받는 이웃>들의 곁에서 평생을 살겠습니다. 나의 길을 가렵니다."며 올 3월 개교예정인 충북 음성 꽃동네 현도 사회복지대 (총장 오웅진 신부)에 입학했으며 학교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지만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꽃동네 인곡 자애병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신부전증으로 시력을 잃은 채 버려진 50대 아주머니, 폐결핵을 앓는 40대 아저씨, 중풍으로 말조차 못하는 할머니... 하루 10시간씩 환자들의 대소변 받아내기, 식사 수발, 목욕시키기.... 몸은 파김치가 됐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가벼웠습니다. 김씨는 대학 입학 직후인 91년 우연히 가입한 자원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소외된 이웃」에 눈을 뜨게 됐다며 이렇게 말합니다.『알코을 중독자인 아버지와 집나간 어머니 때문에 중2때부터 고학을 시작한 대학 친구, 자취할 돈조차 없어 친구 집을 전전하는 같은 과 동기, 고아원에 버려져「엄마」만찾는 네살배기를 보며 갈 길이 어렴풋이 보이더군요. 사실 그 전에는 봉사가 뭔지도 몰랐습니다』그의 손길이 닿고 그와 눈을 맞추던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며 보여준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는 갈수록 그의 갈 길을 뚜렷하게 비춰주었습니다. 김씨는 그들에 대해『내 삶의 스승』이라고 말하며,『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준 그들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한 자는 본문 성경의 부자처럼 삶의 목표와 방향이 오직 자신에게 집중되어 탐욕에 빠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에서 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찮게 보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일지라도 그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그가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영접하고, 그가 헐벗었을 때에 좋은 옷을 입혀 주고, 그가 병들었을 때와 갇혔을 때 평안하고 친절하게 돌보아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행한 것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의 삶의 모습이며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입니다. 주일성수생활, 십일조 생활, 절기 준수 등을 철저히 잘 지키는 사람을 두고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의인이라고 하지 않고 그 마음과 생활이 낮은 곳으로 향하여 사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스페인 격언에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래 전에 우리 나라 장례식 풍습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시체에 수의를 입히고 그 수의에 주머니 하나를 달아 주고서 그 주머니 속에는 시체의 손발톱을 깎아 담고 저승 가는 노자 돈으로 쓰라고 십 원 짜리 몇 개를 담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저승 가는데 노자 돈이 필요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땅 한 평, 기도원 하나, 은행통장 하나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땀방울 하나, 피 한방울 남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인류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눅 12:34)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작은 자 하나를 가장 큰 보물로 삼으시고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이 그 낮은 곳으로 향하므로 장차 하늘 나라에 부요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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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말석에 앉으라!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0:25-37)

1775년 가을이었습니다. 볼티모어 호텔에 허름한 농부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호텔 주인은 이런 사람을 받으면 호텔의 품위가 떨어질 것 같아서 방이 없다고 했습니다. 남자는 말없이 쫓겨나 더 작은 여관에 투숙했습니다. 볼티모어 시내에 곧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토머스 제퍼슨 부통령이 갑자기 볼티모어를 방문하여 어느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당황한 것은 호텔 주인이었습니다. 자기가 거절한 손님이 부통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부통령에게 지배인을 보내 사과하고 가장 좋은 방이 준비되었으니 불편한 여관에 있지 말고 오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제퍼슨 부통령은 "여기도 훌륭합니다. 허름한 농부를 거절하는 집이라면 부통령도 거절당해 마땅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1세기에는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너무나 초라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학문도 집안 배경도 없는 목수의 아들이 그나마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저항없이 죽었으니 그를 믿는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미련하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 초라함, 그 약함, 그 땀과 눈물과 피, 홍포에 쌓인 패배자 같은 그 예수가 곧 자기를 비우신 하나님, 낮은 데로 내려오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낮은 데로 내려오셨을 뿐만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지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기 위해 사람의 노예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빌2:9) ...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1950년대 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던 라인흘드 니버 교수는 인간의 타락은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권력의 교만이요, 그 다음은 지식의 교만이요, 그리고 덕망의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권력을 잡기까지는 가장 약한 위치에서 자신의 당선을 호소하며 매달리다가도 일단 권력의 정상을 정복하고 나면 자신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마침내 그것은 살아 있는 우상이 되어 자신을 그 자리에 치켜세운 사람들 앞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는 "사다리 꼭대기에 다 올라간 사람은 아래만 내려다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내려다본다는 말입니다. 절대화된 권력은 모든 영광은 자신에게 돌리고, 모든 과오와 책임은 수하 사람에게 추궁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는 절대 무오의 하나님 처럼 처신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권력이 절대화되면 될수록 더욱 신경질적이 되고 오만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민심을 외면하거나 민심과 동떨어진 판단과 행정을 자행하게 됩니다. 배운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학설이나 지식에 대해 절대적 확신을 가진 나머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지식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 살아 있는 지식이 되고 보다 진리에 가까운 지식이 될 수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식으로 인류에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지식의 노예가 되거나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오만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덕이 높은 사람들은 분명히 고매하고 존경할 만한 인격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만사를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볼 줄 알지만 자기 자신의 장단점은 예외로 여기거나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교만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게 하기 때문에 언제 폭발할는지 알 수 없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명 비평가들 중에는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과도한 성장에 있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도한 성장은 질의 저하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은 마침내 껍데기만 치장하고 속이 빈 인간과 사회를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이 저주에 합당한 결말을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소돔 성 멸망의 이유를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 행하였음이라."(겔 16:49-50) 즉 경제적인 풍요와 환경의 태평함이 그들을 교만하게 하였고, (곧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하였고) 이 교만 때문에 불의 심판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상좌에 앉지 않고 말석에 앉는 영적인 겸손을 가졌다면 멸망을 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나라 백성이 영광에 이르고자 한다면 지도자들은 물론 국민 모두가 말석에 앉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최상류 계층인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눅 14:1)에 초대받았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종교 생활면에서도 가장 바르게 산다고 공인된 바리새인 최고 지도자가 초청한 모임이었습니다.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도착하는 손님들이 자리를 잡는데 저마다 상좌를 택하는 장면을 보고 예수께서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4: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눅14: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눅14: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이 말씀의 핵심은 "말석에 앉으라."는 것으로 주어진 결론은 "(눅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석에 앉은 자'는 남보다 못하고 열세에 있는 자들입니다. 권력이나 경제 능력이 열세인 자, 지식이 열세인 자, 덕망도 열세인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라새인들은 "(마23: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마23:7)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이들을 두고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오늘 본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께서는 열세한 사람, 남보다 못한 사람, 낮은데 처한 사람들을 돕고 격려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비방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눅5:31)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눅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비방을 일축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석에 앉은 자 편에 서 있음을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병든 자들과 불구자와 죄인들과 창녀와 가난한 자들, 곧 남보다 못하고 불행한 조건에 있는 자들의 친구가 되시고 도와주고 격려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부족할 때, 죄를 지었을 때, 능력이 없을 때, 병들었을 때, 노쇠하여 지쳤을 때, 차별을 받고 핍박을 받을 때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한다."는 말씀도 같은 진리입니다. 야곱은 에서에 비해 못한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 회개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된 줄로 아는 자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말석에 앉는 겸손한 정신적 자세를 가질 때 변화가 있습니다. 예수의 8복을 한 마디로 종합하면 "말석에 앉은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이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8복에 나오는 마음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애통하는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은 실로 말석에 앉은 자들을 가리키는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마지막 심판하실 때, 그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양과 염소를 분별하실 때 양을 그 영광의 오른편에 두실 것입니다. "(마25:34) 그 때에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며 축복하셨습니다. 여기 "오른편에 있는 양들"을 축복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자 이번에는 그 "오른편의 양들"을 성경은 "의인들"로 호칭하며 그들이 의아해 하는 반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의인들"의 이같은 반문에 예수께서 "(마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곧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되며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등을 말합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율법과 계명,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자가 "의인"입니까? 주일성수, 십일조생활하며 예배를 잘 드리면 "의인"이라고 했습니까? "의인"은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며,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며, 헐벗은 자에게 옷 입히며,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아 준 낮고 천한데 거한 사람들이 바로 "의인들"입니다. 링컨의 일화 한 토막입니다. 옛날 백악관 곁에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가끔 울타리까지 나와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구경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몇 명의 아이들이 한 소년을 놀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몹시 허름한 차림이었는데 아빠는 전쟁에서 전사하고, 엄마는 청소부였습니다. 구두를 닦아 반질반질하게 해서 신고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으나 구두가 너무나 낡아 닦을 수도 없어 놀림감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겨우 아홉 살 난 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존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존의 새 옷과 새 구두, 여동생의 새 옷과 새 구두, 그리고 많은 식료품과 석탄을 링컨 대통령이 보냈던 것입니다. 존은 새 구두를 신고 자랑스럽게 등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학생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대통령이 존의 교실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 구절 하나를 소개하겠다면서 칠판에 다음의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말석에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허리가 낮은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두고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차별없는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나 그의 시선은 낮은데 처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석차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권력의 자리에 있었으나 권위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못하고 나라 살림을 거덜낸 김영삼 대통령을 높은 자라고 국민들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습니까? 최고 지성의 자리, 서울대학교에 재직하며 교수임용비리로 호화주택에 살며 미화 5만불, 일본돈 60만엔, 황금 원앙새 한 쌍, 한화 1억여원을 거머쥔 어느 치과대학 교수를 높은 자로 사랑하고 존경합니까? 자기 회사 사원들을 머슴으로 취급하며 부정대출로 나라의 경제를 멍들게 한 한보 그룹 회장을 높은 자로 사랑하고 존경합니까? 이들은 지금 국민들 발바닥 밑에 깔려 있습니다. 세상에서 권력이나 명예, 지성이나 경제 능력이 높은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높인다고 높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혜자는 말합니다.

"(잠25:6)...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미국의 역대 대통령 부인들 중에 국민의 존경을 가장 많이 받았던 사람은 제4대 대통령 매디슨의 부인 돌리 매디슨(Dolly Madison)이었습니다. 한 번은 신문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매디슨 부인은 가식이 아니라 정말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습니다. 사랑이나 존경을 받으려고 해본 일도 없습니다. 단지 젊어서부터 혼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교훈을 따라 되도록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해 보려고 힘쓰는 것뿐입니다." 이 평범한 대답 속에 사실은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비결, 다시말해 높아지는 비결이 들어 있습니다. 높은 자나 낮은 자, 큰 자나 작은 자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할 만한 대상을 고르지 않는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왜 높이 존경을 받고 있습니까? 철학, 신학, 음악, 의학 등의 네 부분의 박사 학위를 가졌기 때문입니까? 박사 학위를 네 개나 가진 사람이 아프리카 원시림에서 흑인들 속에 묻혀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꼭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이때 슈바이처는 "나를 동정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라고 했습니다.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수 십 만의 지극히 작은 자들의 생명을 위해 예수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인을 감동시킨 `코리아 마마' 김연응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 실려 있습니다. <적당히 거적을 둘러 만든 움막들이 산재해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사우스 센트럴. 미국에서도 대표적인 홈리스(노숙자) 밀집촌이다. 이곳에 사는 '코리아 마마' 글로리아 김(한국이름 김연응·57)선교사에게 지난 19일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2개월전 김씨의 교회에 화재가 났을때 불을 꺼준 로스앤젤레스 소방관들이었다. 소방관들은 김씨에게 1천달러 짜리 수표를 전달했다. 가난하고 위험한 동네에서 11년째 자선 사업을 벌이고 있는 '코리아 마마'가 화재로 집을 잃었다는 사연에 한 독지가가 보내온 선물이었다. 소방대장 스티븐 루다는 김씨에게 수표를 건네면서 "그가 아주 유명한 작가라는 것 외에는 말할 수 없다."며 웃었다. 김씨는 "너무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20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는 하얀 머리에 작은 몸집의 김 선교사가 소방관들에 둘러싸여 활짝 웃는 사진이 실렸다. 지난해 12월 26일 오전 발생한 원인 모를 화재로 김 선교사에게는 교회이면서 동시에 집이고 사무실이던 건물이 모조리 타 버렸다. 소중한 사진 몇장 외에는 세간살이까지 모조리 불길에 잃은 김 선교사는 "홈리스(노숙자)들을 위한 간이 휴게소가 없어졌다."며 안타까워 했다. 김 선교사는 매일 새벽 4시면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간다. 자원 봉사자 몇몇과 샌드위치와 따뜻한 수프 2백인분을 준비한다. 마련한 음식을 차에 싣고 나서면 거리에서 밤을 보낸 노숙자들이 '코리아 마마'를 부르며 김 선교사 일행을 맞이한다. 김 선교사가 돌보는 부랑자 식구들은 백인과 흑인, 히스패닉 등 피부색을 초월해 있다. 국제결혼에 실패했거나 해외입양후 불행해진 한국출신 동포들도 여럿 있다. 김 선교사는 지난 76년 홀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직업은 간호사였다. 너도나도 독일이나 미국으로 떠나던 시절이었다. 몇년 후엔 어머니(지난 90년 작고)까지 모셔갔다. 김씨는 "너무너무 외로워서 남을 돕게 됐다."고 말한다. 두 모녀가 함께 살면서 어머니 앞으로 나오는 연금을 꼬박꼬박 모았고 그 돈이 모이면서 자선사업을 시작했다. 이번에 불에 탄 시온복음선교교회는 허름한 창고를 개조한 것이었다. 당초 목표로 삼았던 노숙자 보호소를 시작하려면 30만달러가 필요하다. 샤워장까지 딸린 편안한 휴식장소를 노숙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김씨의 꿈이다. 사연이 알려지면서 성금도 2만달러 가량 모였다. 화재 이후 웨스트 136번가의 더욱 작은 교회로 거처를 옮긴 김씨는 현재 부랑자 2명과 함께 생활하며 힘찬 새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부랑자, 노숙자,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 해외입양에 적응하지 못하고 버림받은 사람들, 그들이 백인이든 흑인이든 인종을 차별하지 않고 11년 동안을 한결같이 따뜻한 스프와 샌드위치로 대접하며 잠잘 곳을 마련해 준 '코리아 마마'의 손발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코리아 마마'를 낮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코리아 마마'는 남을 섬기는 종이 되어 높이 사랑과 존경받는 그리스도의 작은 지체인 것입니다. 내가 약할 때, 죄인일 때, 말석에 앉았을 때가 큰 은혜받을 기회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잃은 양을 찾으러 왔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셨습니다. 울타리 속에 있는 안전한 양, 배부른 양이 아닙니다. 길 잃고 헤매는 양, 문제가 있는 양, 위험에 노출된 양, 혼자 길 잃고 외롭게 된 양, 지쳐서 우는 양, 이들 말석에 처진 양들에게 기쁜 소식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이 땅에 종의 형체를 입고 오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는 그의 지체들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곳은 골고다 십자가였지 로마 원로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권력을 지향하면 결국 땅에 떨어져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일용할 양식이나 구하라고 했지 은행으로 증권가로 달려가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이 남기신 것은 땅 한 평, 금붙이 하나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물질 지향적이 된다면 결국 버림받고 말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곳, 만나신 사람들은 로마의 상류사회나 이스라엘의 상류계층이 아니었고 병들고 가난하며 버림받은 소외계층의 낮은 데 거하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야할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낮은 곳입니다. 교회가 찾아가야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앉아야 할 곳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석입니다. 교회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말석에 앉아야만 주어진 사명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평강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항상 말석에 앉아 겸손히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되어 사랑과 존경받는 교회, 높이 들림받는 교회, 주님의 영광스런 오른편에 이르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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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망대를 준공하라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5-33)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께서 로마 제국을 둘러 엎고 영광스럽게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러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들의 잘못된 생각을 익히 잘 알고 계신 예수께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 자기의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할 각오와 십자가의 고난도 마다하지 아니하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드는 엄청난 대가와 비용을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농부가 농사기구와 곡식을 보관하고 도둑으로부터 자기 재산을 지킬 수 있는 망대가 필요했습니다. 이 농부는 망대를 세움으로 얻어지는 여러 가지 유익함만을 생각하고 망대 건축에 드는 재료와 비용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공사를 시작해서 기초 공사를 마치었습니다. 그런데 망대의 골조가 올라가기도 전에 공사비가 다 떨어져서 공사 자체를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짓다만 망대는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돈만 날리고 동네에서도 신망을 잃고 말았습니다. 비웃음거리만 되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예수를 믿는데 철저하게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다가 도중에 그만두게 되면 짓다만 망대처럼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비웃음거리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문제가 참으로 중대한 것이어서 또 다른 비슷한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군사 1만을 거느린 어떤 임금이 2만 군사를 거느린 이웃 나라와 전쟁이 하게 되었습니다. 현명한 임금이라면 과연 1만의 군사로 2만의 군사와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를 먼저 심사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 서게 되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신속히 사신을 보내 평화협상을 벌이든지 아니면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항복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이와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가가 되지 못하리라."

1. 예수 믿는 여러분, 이왕 믿으려면 철저히 믿으시고 참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이렇게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여기 검(칼,劍)은 분명 폭력의 도구입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것이 물질이나 인간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고통과 아픔을 주는 검이 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는 고통과 아픔을 각오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믿는데는 애정의 단절이라는 대가도 치룰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삶에 있어 가족간의 애정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보다도 가정을 창조하신 분이며 가정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결코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사랑으로 이룩한 부부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관계가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결국 예수 믿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관계, 가족 관계가 깨어진다 하더라도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가, 가족 관계가 인간의 생명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또한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가족관계, 남편과 아내, 부모 자식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지 천국에서는 가족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관계보다 우선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는 영원한 것이고 인간관계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영원을 위해서는 일시적인 것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 청년들은 결혼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는 것이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해 보다 더 현명한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후에 하나님이냐, 가족이냐를 선택해야하는 값비싼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경우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이왕에 예수 믿기로 작정했으면 전심전력을 다 하여 믿으라는 것입니다. 신학자 마틴 마티는 116년 된 성야고보 교회가 86년 교인수 불과 3명에 이르자 교회문을 닫는 마지막 예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박장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고 밤을 새워가며 온 정신과 있는 돈을 다 털어놓듯이 사람들이 자신의 귀중한 영혼과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정성을 기울인다면 이 교회는 문을 닫을 것이 아니라 차고 넘쳤을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철저히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다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질병, 사업의 문제, 남편 아내의 문제, 자녀 문제 등 이런 것이 십자가인가? 이러한 것들은 십자가가 아니라 "짐"들입니다. 때때로 짐은 벗어 던져 버릴 수 있으나 십자가는 짐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을 부인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의 것(my-self things)을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my-self)을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것을 부인하는 것(self-denial)은 자기 중심적인 것이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denial of self)은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죽음 외에는 다른 뜻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형의 도구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육체적인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 피흘릴 각오를 가지고 이 악한 시대에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예수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헌신, 일사각오의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남김없는 철저한 복종을 뜻합니다. 자신의 생명, 의지, 욕망, 꿈, 소망 등 모든 것을 주님께 두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살아 통치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으로서 근본적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가 있다면 이제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생명은 나의 모든 것과 더불어 모두 주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내가 나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까지는 예수께서 나의 삶에 통치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통치자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자신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냐 입니다.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수 있습니다. 값비싼 삶은 값비싼 희생을 요구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값비싼 삶은 영원한 삶입니다. 영원한 죽음에 처한 인간을 영원한 삶으로 이끌기 위해 그래서 하나님은 값비싼 희생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결코 값싼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값비싼 희생의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값없이 받는 값비싼 은혜요, 대가없이 받은 고가(高價)의 선물이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따라가는 참 제자가 되시어 여러분의 삶이 가장 값있게 변화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해서 모두가 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예수와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어도 참된 제자,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린 참된 제자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어느 사람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대단한 결심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9:58)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 믿는다고 방 한 칸, 쥐꼬리만한 권세 하나 보장해주기는커녕 있는 것 마저 몽땅 포기해야 되는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따를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부자 청년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의 중심을 보시고 중대한 결단에 방해가 되는 모든 소유물을 처분하고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이 가지고 있는 부(富)를 문제삼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있어 '장벽'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그 장벽이 돈, 명예, 가족, 지식 등 무엇이든지간에 예수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과감히 벗어던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이 가난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거짓된 안전'에서 구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사람들은 부의 축적이 생명을 안전 보장하고 근심 걱정을 없애주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축적된 부를 잃을까 하는 염려만 더 할 뿐입니다. 가난 그 자체가 덕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예수를 따라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가난도 불사하라는 것입니다. 부가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데 있어 장애물이 된다면 그 부는 악한 것입니다. 그 부자 청년은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소유를 다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된 사람의 아름다운 축복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의 만족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에 있지 않고 바로 주님께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축복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같은 경험들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앞선 그 부자 청년의 삶은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국에 대한 아는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그의 삶은 소유한 돈으로 살 수 있었던 '먹고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제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었고 또 만족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삼는 것은 부가 아니라 그 부에 대한 '사랑'입니다.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사람의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면 모든 것이 더하여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소유보다 존재를 더욱 더 귀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이왕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으면, 이왕에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눅9:62)고 했습니다. 결단을 내리려거든 지금 여기서 철저히 계산하고 단호하게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눅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보면, 예수 믿는데 주저하거나 뒤돌아보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습니다. 단호하고, 돌이킬 수 없는, 그리고 명확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혹한을 피해 남쪽으로 떠나려고 준비하는 오리떼들은 늦은 가을 밤에 모든 준비를 갖추고 파티를 마련했습니다. 큰 농장에 모여 곡식을 잔뜩 주워 배불리 먹으며 내일부터 펼쳐질 고통의 장도를 위해 힘을 축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출발의 순간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때 큰 오리 한 마리가 주저하며 말했습니다.

"이 곡식 알들은 참 먹기가 좋으니 나는 좀 더 남아 이것을 충분히 먹고 떠나기로 했어."

다른 동료들이 떠나고 난 뒤 맛있는 곡식을 마음껏 먹은 그 오리는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다가 며칠이 지났습니다. 오리는 매일 습관처럼 "내일 나는 남쪽을 향해 날아야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행은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세찬 겨울 바람이 천지를 뒤덮고 더 이상 거기에 머무를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오리는 그제서야 비로소 날개를 펴고 농장 마당을 가로질러 날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리는 날 수가 없었습니다. 살이 너무 쪄서 하늘로 날아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결단의 순간을 상실한 오리는 남쪽으로 향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입니다. 후회하는 오리에게 매서운 북풍만이 불어닥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농장 주인의 밥상에 오리요리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기를, 철저히 믿기를 주저하거나 하루 하루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없는 인생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 시대에 백성들에게 질책하여 부르짖습니다.

"(왕상18:21)...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여호수아가 여러분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2차대전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군들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포로들이 계곡의 큰 다리를 건설하는데 투입되었습니다. 포로 중 가장 높은 계급을 가진 니콜슨 대령이 부하들에게 모든 정성과 기술을 다하여 멋진 다리를 만들자고 독려했습니다. 그것은 성취의 기쁨을 포로들에게 가지게 함으로써 포로생활의 좌절감을 극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다리가 완성된 후 니콜순은 몹시 놀랐습니다. 동맹군인 미군이 이 다리폭파를 위한 특공대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포로 생활 중에 하나의 성취감을 만족시키는 작품으로 다리 건설을 가볍게 생각했고, 실의와 좌절감을 임시로 극복하는 방법으로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적군 일본의 군사 목적을 성공시키는 이적행위를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포로들에게 성취감을 안겨주었던 <콰이강의 다리>는 무참하게 폭파되고 맙니다. 니콜슨 대령은 뒤늦게나마 깨닫고 절규합니다. "내가 뭘 했지?" 일순간에 무너져내린 콰이강의 다리의 처참한 모습에 군의관이 비틀거리며 "미친 짓이야, 미친 짓이야"를 외치며 영화 <콰이강의 다리>는 막을 내립니다.

일생일대의 최선을 다해, 그리고 포로들의 생명을 희생해 가며 완공한 <콰이강의 다리>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다리를 완공했던 니콜슨 대령처럼 "내가 뭘 했지?"라며 후회막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일생을 통해 이루어놓은 일들이 <콰이강의 다리>처럼 일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마는 어리석은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선택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예수 믿고 예수의 참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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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돌아온 탕자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11-32)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부흥사인 이성봉 목사의 설교집에서 읽은 내용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떤 부자가 상처(喪妻)를 했는데 새 장가를 들어 젊은 색시를 데려 왔습니다. 여자가 시집 온 날부터 남편의 속을 많이 썩이는데, 밥을 하라면 죽을 쑤고 죽을 쑤라면 밥을 하고 가라면 오고 오라 하면 가고 앉으라면 서고 서라면 앉는 것입니다. 아마 나이가 어려서 그렇겠지 하고 모든 것을 참았더니 나이가 들고나니 꼴에 외간 남자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간부(姦夫)를 두고는 볼사납게 굴기 시작합니다. 여러 번 권면을 하나 조금도 회개하는 빛이 없고 오히려 이혼을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허락하지 않으니까 하루는 간부와 공모를 하고 남편의 밥에다 독약을 넣어 처치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남편이 하루는 밥을 먹다가 토하고 구사 일생하였습니다. 여자를 불러 책망을 하니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반항을 합니다. 할 수 없어 간부를 책망하고 어서 내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가서 잘 살라고 놓아주었습니다. 간부는 손에 손을 잡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가서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악으로 맺어진 사랑은 오래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나이는 그 여자를 술집 유곽에다 팔아먹었습니다. 그 여자는 불의의 씨를 배고 만삭이 되어서 술 단지를 부둥켜안고 오고 가는 뭇 사람에게 술을 팔고 육체를 팔아 비참한 고통의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본남편이 일본을 갔다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오랜만에 그 여자를 보고 너무 반갑고 감격하여 달려가서 "너 이거 웬일이냐?" 하고 손목을 확 잡으니 그 여자는 깜짝 놀래어 가만히 있다가 눈을 흘기며 "무얼 하러 왔소?"하며 퉁명스럽게 내뱉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를 보러 왔다." "이것을 보면 뭘 해요?" "너 내 품 떠나더니 잘 되었구나." "잘됐건 못됐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대관절 얼마에나 팔려 왔노?" "물어 보구려," "여보, 주인! 이 여자 얼마에 사 왔소?" "돈 많이 주었지요" "여보시오 이 여자 도로 물러 주시오. 이 여자는 내 아내요" 하고 많은 배상금을 치르고 찾아내었습니다. 그 여자 말하기를 "저는 데려다 무엇해요?" 했지만 "어서 가자.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아닌가?" 하고 데리고 한국에 건너 와서 그 간부(姦夫)의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그 남편은 그 아이를 제 아이보다 더 사랑하고 귀여워하며 그 더러운 여자를 전보다 더욱 사랑하여 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누구요? 이 여자는 바로 나를 비롯하여 모든 인생의 모습을 나타냅니다.》세상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여자의 삶은 불행 그 자체였으나 남편의 지극한 사랑으로 집에 돌아와 참된 행복을 찾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 역시 아버지 집을 떠난 자의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탕자의 비유만큼 널리 알려져 기독교의 진리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집 나간 탕자가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복음이요 신앙이요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집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또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맞아주는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눈물겨운 사랑의 모습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탕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 그 길이와 높이를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부모의 집에 거할 때가 가장 행복한 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로 우리가 부모님 품안에 있을 때는 그 편안함과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품을 떠나봐야 그 사랑을 알게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어떤 부모라도 자식이 고생하기를 바라는 분은 한 분도 안 계실겁니다. 부모님들께서는 그 자식들을 품안에 누이시고 곱게 길러 평안과 행복 속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 멀리 가서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은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이렇게 시골에서 썩을 수는 없습니다. 내 분깃을 가지고 도시에 가서 출세해 보겠습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을 주십시오."

세상에 대해 익히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로서 둘째 아들의 요구에 선뜻 응할 수 없었습니다. 출세는커녕 재산탕진에 생명까지도 위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득하며 말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깃을 받아 집을 나가겠다는 이 아들은 분명 문제아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재산이 축나는 것보다 그 아들이 철없이 집 나가겠다고 고집 피우는 것이 더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얼마 전 우리가 사는 울산에서 장애자 아들이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할 앞날이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농약을 야쿠르트에 타 먹여 독살한 비정한 아버지가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괴로움도 스스로 지고 싶어 것이 참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설령 가슴을 에이는 고통이 오더라도 그런 고통도 기꺼이 당하고 싶어하는 것이 참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자식이 병들었다 하여, 자식이 잘못되었다 해서 내다버릴 그런 아버지는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참된 아버지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의 아버지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습이 장애자이든, 가난하고 병들었든, 배운 것이 있든 없든, 전과가 있든 없든 그것들을 결코 가리지 않고 여러분의 모든 고통을 십자가 고통에 감추시며 여러분을 사랑의 뜨거운 가슴에 품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주자 그 길로 먼 나라로 훌쩍 떠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온갖 허랑방탕에 그 재산을 다 허비하고 아사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후 아버지의 관심은 오직 어서 빨리 아들이 돌아오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들이 방탕한 생활이나 재산탕진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살아서만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빨리 알거지가 되어서라도, 그놈이 왕창 망해서라도, 아니 성한 몸이 아닐지라도 살아서만 돌아오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동구밖에 나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자식에 대한 애끓는 사랑 때문에 도리어 자식이 낭패를 당하고서라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이러한 마음이야말로 죄인된 우리들이 어서 빨리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심정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의 존재유무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토론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한 중년 남자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는 없습니다. 누구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내가 5분내로 증명해 보이겠소"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계속 말했습니다.

"혹시 여기에 날카로운 칼이 없을까요?"

누군가가 그에게 칼을 건네주자 그는 더욱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이 칼로 나를 5분내로 죽이시오. 만일 5분내에 나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오."

1분, 2분,...5분,...그로부터 5분이 지났지만 그에게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거나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살아 있다면 또한 기독교인들의 표현대로 전지전능하다면 나와 같은 사람을 그대로 놔둘리가 있겠습니까?"

모임이 끝나자 그 종년 남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모임에 참석했던 할머니 한 분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한 행동을 잘 보았네. 그런데 자네에게도 자녀가 있나?"

"물론 있지요."

"그러자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그에게 할머니는 아까 그가 들었던 칼을 쥐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만일 자네의 자녀 중에 한 명이 이 칼을 들고 '나를 죽여주세요'한다면 자네는 죽일 수 있겠나?"

"할머니는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어떻게 내가 내 아이를 죽일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할머니는 그의 손을 잡고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것 보게,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라네. 어찌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찔러 죽이겠나?"

하나님은 죄를 지은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마침내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거지 중 상거지 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땅에 꿇어앉아 후회막급한 눈물만 흘릴 따름입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소서"(21절). 아버지는 잘못을 뉘우치며 돌아온 아들을 향해 "무슨 말이냐?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이로다."며 매우 기뻐하였습니다(24절). 아버지는 아들을 품꾼으로 대하기는커녕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온 동네 잔치를 벌여 아들의 돌아옴을 모두 다 함께 기뻐했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분명 탕자였지만 '탕자'를 문제삼지 아니하시고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위로와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똑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로 돌아오는 죄인의 과거 행악은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다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무한히 용서하실 뿐입니다. 간음하던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혀 왔으나 그녀가 눈물로 회개하였을 때 주님은 더 이상 그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요 8:11).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어서 돌아만 오라'고 외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떠나 죄악의 세상에 방황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믿으시고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 풍성한 복과 은혜를 누리길 원하십니다. 아버지 집을 나간 자식이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고 돌아오기만 하면 무조건 용서하며 잔치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먼저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 같은 아버지의 가슴으로 집을 나간 아들과 같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네델란드의 목회자 야게르가 쓴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월요일 아담과 하와처럼 선악과를 따먹고,

화요일 가인처럼 자기 동생을 죽이고,

수요일 야곱처럼 눈 먼 아버지를 속이고,

목요일 다윗처럼 남의 아내를 빼앗고,

금요일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토요일 바울처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주일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으면,

너희 죄가 용서함을 받겠느냐?

물론 받는다.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린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 내게로 오너라,

너희 죄는 모두 용서함 받았다.

일어나라!

그리고 걸어가라!'』

제아무리 죄와 허물로 얼룩지고 뒤범벅된 사람일지라도, 그 죄의 빛이 아무리 흉악하여 주홍빛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한이 없는 그 크신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을 눈과 같이 희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탕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과 축복의 잔치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리시는 아버지처럼 뜨겁게 열린 가슴으로 '돌아오는 탕자'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나간 아들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습니다. 어서 돌아만 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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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불의한 청지기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13)

어떤 부자가 자기 집을 관리하기 위해 청지기를 두었습니다. 청지기는 집주인의 식사 시중에서부터 그 집의 모든 종들에 대한 관리 감독, 모든 재물 관리 등의 업무를 관장했습니다.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청지기는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 일했던 요셉이었습니다. 보디발은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요셉에게 위임하여 주관하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보디발의 가정은 범사에 형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습니다.(창세기 39:1-6) 그런데 오늘 본문의 부자는 자기 집 청지기가 재산을 유용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허비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회계 감사를 실시했습니다. 소문대로 거품이 많았고 재정적자가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주인은 불가피하게 청지기에 대해 해고를 통보했습니다. 일자리를 잃게 된 청지기는 나이 늙고 힘이 없어 당장 할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에 나가 빌어먹을 것을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 집에서 쫓겨나 앞으로 살아갈 대책을 세운 것이 사문서 위조였습니다. 황급히 자기 집주인의 채무자들을 불렀습니다. 1천 만원 차용증서는 5백 만원으로, 2천 만원 차용증서는 1천 5백 만원으로 각각 바꿔 주었습니다. 청지기가 이렇게 집주인의 채무자들에게 선심을 쓴 이유는 자신이 해고된 후에 채무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문서 위조마저 들통이 나서 주인에게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청지기는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집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불의한 일에 대해 고소고발은커녕 칭찬이라니 참으로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집주인이 칭찬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자기 집 재산을 사문서 위조라는 부정한 방법으로 축내었지만 그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 앞으로 살아갈 궁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칭찬받은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청지기의 불가피한 사기행각을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청지기가 칭찬 받은 지혜는 아주 약삭빠르고 타산적이지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청지기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분명히 야고보서 3:17에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청지기는 구약의 요셉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대의 아들들"로 일컬어지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소위 어둠의 자식들로 이들은 하나님을 떠난 문화, 문명을 이루고 즐기며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에 의해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매사에 빈틈없고 약삭빨라서 자신에게 이익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소위 재테크(財 Tech)에 있어서 때때로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 재산을 늘려 가는 데 능수 능란합니다. 심지어는 교묘한 방법과 정통한 지식을 다 동원하며, 법망을 피하거나 사회적 규례와 제도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축재합니다. 그래서 "이 세대의 아들들"은 옳든 그르든 간에 고도의 지혜를 이용하여 현세에 누릴 수 있는 최대의 물질 문명을 향유하고 있으며 이러한 물질 문화에서 얻는 온갖 사치와 화려함과 부귀 영화를 즐기며 살아갑니다. "빛의 아들들"로 일컬어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사는 내용은 그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합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그렇게 사는 이유는 그들의 삶의 터전은 오직 현 세상에 제한되어 있을 뿐이고 내세에 대한 소망이나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이 세대'에서만 자신들의 꿈과 행복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세대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소망할 수 없는 절망의 무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들의 삶은 궁극적 의미에서 바라볼 때 허망한 것이지만, 그들의 현세적인 삶에만 국한시켜 볼 때는 그들 나름대로의 적절한 삶의 스타일과 지혜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반면 "빛의 아들들"인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비록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빛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세상에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세상 사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둡다고 할지라도 밝고 빛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흑암에서 방황하는 '이 세대의 아들들'과 이웃하여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 세대 안에 보내신 생명의 빛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요한 복음 3장 19절이하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예수 믿어 생명의 빛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빛의 아들들"은 그 미래의 천국을 밝히 볼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이 세대에만 집착해서 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는커녕 정직하고 진실하며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살고자 할 때 오히려 가난과 곤고함과 수많은 어려움이 있다할 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영원한 빛을 간직하고 미래의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輕)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 후서 4:16-18)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을 목적으로 삼고 살고 있기 때문에 천국을 목표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빛의 아들들" 보다 훨씬 약삭빠르고 영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빛의 아들들"된 사람들도 이렇게 살라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주신 것은 이 세상 사람(이 세대의 아들들)이 이 세상을 목표로 지혜롭게 사는 것처럼,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천국을 목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다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누구나 청지기와 같습니다. 인간은 그 모든 소유나 재능, 그리고 지혜와 능력, 건강 등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살지만 사실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생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해도, 또 아무리 많은 재산과 튼튼한 건강을 소유하고 있다해도 하나님께서 '오늘밤 여러분의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여러분이 예비한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습니까?'(누가복음 12:16-21)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소유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것일 뿐입니다.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밤 청지기된 여러분의 인생을 정리 해고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의한 청지기처럼 여러분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시기 바랍니다."(9절) 여기 예수께서 "불의한 재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재물 자체를 불의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그 재물을 불의하다 한 것은 주인의 뜻대로 그 재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의 뜻과 욕심에 따라 그 재물을 사용했으므로 그 재물은 불의한 재물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지지 아니하는 삶은 불의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건강, 지식, 재물, 심지어 여러분들에게 있는 모든 지혜와 기능, 가정, 생명,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용하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만약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하고 계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미래를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경제 위기는 잘도 대처하여 살면서 자신의 인생의 영원한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온갖 수단방법을 다해 축재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결코 인정하거나 칭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칭찬은 언제나 "빛의 아들들"에게 주어집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타락해져 간다해도 그 마음에 빛으로 선악을 분별하며,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여 항상 정직과 진실되게 살아 미래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몸과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는 봉사와 삶은 불행하며 어리석을 뿐입니다. 구약성경 학개 1:6에서 보면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 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없이 우리가 아무리 봉사하고, 천국의 소망이 없이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많이 뿌릴지라도 열매는 하나도 없고, 아무리 먹어도 배가 안 부르고, 아무리 마셔도 흡족하지 않고, 옷을 입어도 따뜻하지 아니 하며, 삯을 아무리 많이 받는 것 같으나 구멍 뚫린 전대같이 다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없는 봉사 생활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것으로, 다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가 하나님이 없이 행한 이 모든 일은 헛되고 헛된 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신 재물과 건강과 지혜와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천국을 위하여 사용할 때에 거기에 참된 삶의 지혜와 영원한 가치가 있으며 고귀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비웃은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누가복음 16:14)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사랑하는 자라 했습니다. 그들은 축재를 생의 고귀한 덕성으로 생각해서 돈을 가진 사람, 재물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 천대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멸시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심지어 물질을 받지 못한 사람은 불의한 자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천국은 의례히 들어갈 것으로 믿으면서도 세상, 재물을 사랑하는 두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들 바리새인들은 '위선자'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영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겠읍니까? 날마다 하루에 3번씩 기도했고, 때를 따라 금식을 하는 경건생활을 최고로 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축재를 위해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켜버리는" 가증되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라며 선언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하게 기도하고 부지런히 성경도 읽고 연구하며 열심히 봉사하는 것 같지만 그들 마음은 이미 콩 밭에 있었던 것입니다. 소망을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두지 않고 일시적인 세상과 재물에 두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두 마음을 품고 두 주인을 섬겼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3절) 여러분 인생의 주인은 세상이나 재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되십니다. 세상이나 재물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세상과 재물이 주는 기쁨은 잠시뿐이나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은 영원합니다. 세상과 재물이 인간에 주는 것은 기쁨과 유익함보다 오히려 근심과 걱정, 불안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세상과 재물은 때로 여러분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합니다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생명과 빛, 소망과 기쁨,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누구를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겠습니까? 구약 성서의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의 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히브리서 11:24-26) 결국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았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장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등불은 결국 꺼지고 말것이기 때문입니다.(잠언24장) "이 세대의 아들들"은 두 주인을 섬기며 살 수 있으나 "빛의 아들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주인으로 섬기며 충성을 다합니다.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마음이 둘로 나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3절) 세상과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어리석고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겨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얻는 지혜롭고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잠언 22:4)

여러분,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야 할 일을 망각한 채 하루하루 허송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의한 청지기도 자기의 현실 문제를 파악하여 자기의 다가올 미래를 대처하였듯이 예수 믿고 "빛의 아들들"이 되셔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재물과 재능과 건강, 여러분의 생업을 하나님의 뜻대로 활용하는 "빛의 아들들"이 되셔서 영원히 행복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시고 세상의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시므로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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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부자와 거지 나사로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19-31)

1. 저는 언제 보고 또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신데렐라', '콩쥐 팥쥐', '춘향전' 등입니다. 그 중에 춘향전은 판소리로 듣거나 영화로 보아도 언제나 긴장감을 느끼며 감격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도해서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어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변사또 일행을 잡아들이는 장면입니다. 특히 춘향가 중에 어사되어 남원 변사또가 벌인 잔치에 나타난 이몽룡이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골(毛骨)이 송연(?然)하게 한 시를 읊을 때면 긴장감이 감도는 역전극이 예상되어 흥미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 흥미진진한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

<아름다운 술항아리에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반가효만성고(玉盤佳肴萬姓膏)

<고운 접시에 맛 있는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요>

촉루낙시민루락(燭淚落時民淚落)

<촛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

<흥겨운 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성이 높다>

백성들의 혈세로 온갖 사치와 음란을 일삼아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한 변 사또의 행각에 백성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떨어지며 피골이 상접하여 몰골이 말이 아니며 원성이 드높다는 암행어사의 통쾌한 고발입니다. 곧 이어 암행어사 출도 하여 목숨걸고 끝까지 절개를 지킨 춘향은 극적으로 구출되어 어사 부인되고 변 사또 일행은 한양으로 압송되고 맙니다. 인생에 역전 드라마가 펼쳐지지 않는다면 삶에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부자가 지옥 불에 들어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에 영원한 고통을 당하고, 거지는 천국에 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이 역전극이야말로 고달픈 이 세상의 삶에 소망과 희열을 느끼게 합니다. 기독교는 인생으로 하여금 역전(逆轉) 드라마를 연출케 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사람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여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세상의 천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있는 사람들을 폐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 전서 1:26-28) 십자가에 맥없이 죽어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은데 사흘만에 다시 살아 사망 권세를 깨뜨린 것이 기독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역전된 삶의 모습을 통쾌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어떤 부자가 있는데 한 벌에 1천만 원이 훨씬 넘는 호화스런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즐기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가 죽어 들어간 곳은 물 한 모금 없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고통 당하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라 하는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그 부잣집에서 구걸하며 병든 몸을 이끌고 고생스런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천사에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 즉 천국에서 아주 행복하게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끊임없이 태워지는 고통 중에 있는 부자가 눈을 들어 멀리 보니 생전에 안면이 있는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어 아브라함을 불러서 간청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대답합니다. 고통 중에 부자는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면서 지금 생존해 있는 형제들에게라도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네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으니 듣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고통 중에 부자는 어려운 부탁을 합니다. "어지간해서는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만일 죽었던 사람, 나사로를 부활시켜 내 형제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음 전하는 사람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복음을 받아드리지 아니할 것이다."며 거절합니다.

3.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부자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지옥불에 들어가 영원히 꺼지지않는 불꽃에 태워지는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까? 부자가 거지를 발길질하며 썩 꺼지라며 학대했습니까? 먹을 것을 구걸할 때 문전박대(門前薄待)하며 매질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거지 나사로에게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정죄를 당한 것은 굶주리고 헐벗으며 병든 거지 나사로에게 얼마든지 자기가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라도 주어서 생명을 연명하게 하고 병으로 죽어가는 몸을 조금이라도 돌볼 수 있었는데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외면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수 천만 원을 홋가하는 사치스런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잔치를 벌이면서도 고통받는 이웃을 전혀 외면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시대에는 나이프나 포크, 내프킨이 없었습니다. 음식은 손으로 먹었는데 아주 부유한 집에서는 두껍게 썬 빵덩어리에다 손을 닦았으며 그 후 그 빵은 내어 버렸습니다. 나사로가 목이 타게 바라고 있던 것이 바로 부자가 더러운 손 닦고 난 부스러기 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자는 혼자서만 온갖 사치와 허영에 인생을 허비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웃들은 그의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부자가 저 세상에서 고통을 받은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부를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하였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부 자체는 악이 아니요 인간이 피해야 할 죄도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부를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데에만 사용할 때 그에겐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이니 다른 생에서 쓰라린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부자를 지옥에 들어가게 한 것은 그가 강도짓이나 도둑질해서가 아닙니다. 그를 지옥으로 떨어지게 한 것은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의 죄는 이 세상의 고통과 궁핍을 방관한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들어 죽어 가는 거지를 보고서 마음 속 깊이 불쌍히 여기며 그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웃의 굶주림과 고통을 보고도 그것을 위하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고통지수(실업율에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더한데서 실질 GDP를 뺀 것)는 OECD가입 24개국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고통지수가 높을수록 국민들의 체감하는 삶의 고통과 불행이 가중되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고통지수가 아주 높다는 것은 국민 대다수가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기 보다는 고통 속에서 마지못해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중산층이 사라지고 못 가진 자가 극히 소수의 가진 자(권력, 금력)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는 말입니다. 우리 나라 실업자들 가운데 20.3%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22%는 사회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사회적 불안요인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1917년 10월 제정 러시아를 무너지게 한 볼쉐비키 당원은 4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몰락을 가져오게 한 공산당이 등장하게 된 것은 귀족들과 가진 자들이 행복을 독차지하고 농노들, 못 가진 자 등을 모른 체한 결과였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산 역사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춥고 배고픈 이웃을 못 본 체하는 사랑의 냉각현상이 그대로 계속된다면 언제 어느 순간에 무슨 불상사가 발생할지 모르는 불안지수가 높아질 것이 뻔합니다.

4.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부 다카쓰키시의 에무라 시장이 지난 10일 사퇴를 발표했습니다. 임기 1년을 남긴 시점이었고, 오는 4월30일 시청을 떠납니다. 사퇴 이유는 <병든 집사람을 돌보기 위해서>라고 일본 시사주간지 아에라는 보도했습니다. 한 살 연상인 부인 도미코씨는 94년 왼쪽 다리가 불편해졌고, 지난 해 봄부터는 대소변도 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됐습니다. 파킨슨씨병, 치매 증상도 나타났습니다. 에무라 시장은 바쁜 공무와 부인 간호를 병행했습니다.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기저귀를 갈아줬고, 대변은 며느리와 함께 처리했습니다. 변비 때는 40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밥을 따스하게 데워 부인에게 먹였습니다. 여기에 대략 2시간이 걸립니다. 점심때도 자전거로 돌아옵니다. 밤에 만찬 등이 있으면 집 부근에 사는 큰 딸에게 부탁합니다. 만찬이 있던 어느 날 밤 9시쯤 돌아와 보니 부인이 자고 있었습니다.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평화로운 부인 얼굴을 보고 깨우질 못했습니다. 결국 다음날 새벽 2시 부인의 신음에 잠을 깨 기저귀를 갈아줬습니다. 지역 기반이 더없이 탄탄한 에무라 시장은 지난 80년 오사카부 수도부 기술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했고, 84년 4월 주위의 권유에 떼밀려 출마,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 인물이었습니다. 15년간 시장직을 통해 육상경기장, 도서관, 문화회관, 평생 학습관 등을 잇따라 건설했습니다. 하수도 보급률은 그의 취임전 17%에서 76%로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첫 당선 뒤 치러진 3번 선거 결과는 압승이었고, 5기 당선도 확실했습니다. 그런 에무라 시장은 어느 날 관용차 타고 입원한 부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시장이 한가하구먼』이란 비판이 귀에 들렸습니다. 그래서 부인을 찾아갈 때의 교통수단은 즉각 자전거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시청-집-병원을 오가는 사이 『이러다간 공무에 지장이 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부인간호와 공무 병행이 한계에 다다랐을때, 시장은「남편」이 됐고 부인을 선택했습니다. 사퇴발표 뒤 부인에게 한 말은 『시장이란 정말 매력없는 자리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카쓰키시 주부들은 『내가 시장부인이라면 참 행복할 것』이란 반응을 보였다고 아에라는 보도했습니다. 에무라 시장은 사퇴선언을 계기로 기자들이 몰려오자 훈계했습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촌스럽게, 또 세상 변한 줄 모르고 소동들 떨지 말라.』(조선일보, 2월25일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 곧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하나를 돌보지 아니한 사람은 영벌에, 돌본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태복음 25:45-46)

5. 나사로는 전형적인 거지로 온 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이 살이 문드러져 고름이 흐르는 나창병에 걸려 그 병 때문에 제대로 얻어 먹지도 못한데다 동네 개들이 덤벼들어 살점을 뜯어 먹는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 땅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저 세상에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가 이처럼 구원을 받은 것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천대받던 소외 계층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 '나사로'의 뜻인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사실이 암시하듯이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가난 그 자체가 죄는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권장할 만한 것도 아니며 구원의 보상을 얻는 근거도 될 수 없습니다. 가난함이란 말은 절대적인 빈곤 상태로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의 슬픔과 고통을, 그리고 소외당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늘만을 쳐다보고 하나님만을 의존해서 사는 사람을 "가난한 자"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사는 사람이 복이 있는데 천국은 바로 이런 사람의 것입니다. 나사로 자기 이름대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날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화되는 시점에서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의 사정을 생각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을 품음으로써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져 가고 있습니다. 부자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 무관심하여 그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므로 결국 정죄를 당하여 물 한 모금 구걸 할 수 없는 영원한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비록 세상에서 거지에 병든 몸을 이끌고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아 천국을 소유한 영원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내세의 소망이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성도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시들어 없어질 들의 꽃과 같으나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이 성도에게 있을 것이니 이는 약속된 백성이 영원한 기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롬 8:18-21) 이 기업을 상속받을 자는 이 세상에서 부하든 부하지 않든 궁극적인 소망을 하늘에 두고 있으므로 진정한 부를 마음에 품은 자의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채프만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떤 거지가 노신사를 향해 "10센트만 동냥해 주십시오."하고 손을 내밀고 구걸했답니다.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던 거지는 그 신사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노신사가 바로 자기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너무 놀라 뒷걸음질치는 모습을 보며 그제야 노신사도 아들의 얼굴을 알아차렸습니다. "너 여기에서 뭘 하고 있니? 내가 너를 18년 동안 찾아다니고 있는데 10센트? 내가 가진 것이 다 네 것인데 10센트를 구걸하다니. 아무 말 말고 당장 나하고 가자." 그렇습니다. 부자 아버지를 모시고 있던 거지에게 10센트 동냥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은 세상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로, "징계를 받아 죽은 자 같으나 살고 죽임을 당하지 아니 한 자"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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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선한 목자

"(요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요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요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요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10: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10: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구약성서에서는 흔히 하나님은 목자로,백성은 그의 양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그 예로 다음과 같은 성구들이 있습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77:20) 주의 백성을 무리양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시79:13)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시80:1)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

"(시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신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그것을 구하는 목자이십니다.예수님은 영혼의 목자이시며,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벧전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히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교회 '복음 성가' 115장,"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듯"을 불러 봅시다.

"1.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듯

나의 주님 이 죄인을 찾으셨도다.

<후렴>양을 위해 생명바친 목자의 심정

그 사랑을 잠시라도 잊지 말지라

2.험산준령 헤매이는 어린양찾아

나의 주님 산가시에 찔리셨도다.

3.양 아흔 아홉마리 그 보다 더욱

길 잃은 한 마리 양 사랑했도다.

4.목자는 어린양의 그 소리 알고

참다운 목자 음성 양이 알도다.

5.어린 목자 내 주 예수 이 몸 붙드사

푸른 초장 물가으로 인도합소서."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생명을 바칩니다.다윗은 선한 목자였습니다.

"(삼상17: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삼상17: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삼상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그러나 악하고 거짓된 목자는 소명으로서가 아니라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 양치는 일에 종사합니다.목자의 긍지나 책임감이 전혀 없습니다.또한 흩어진 양들을 한 군데로 모으려고 하지 아니합니다.

"(슥11:16)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슥11:17) 화 있을찐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없어진 양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목자,흩어진 양들을 찾지아니하는 목자,상한 양을 고치지 아니하는 목자,병약한 양을 먹이지 아니하는 목자,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에게 화가 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이 시대의 목자이며 교인들은 그 양떼인 것입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목자로서 하나님의 양떼들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최후의 명령을 사명으로 부여받은 것입니다.지도자의 사명 감당의 요건이 바로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지도자의 사명 감당의 요건은 바로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지도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는 일이며 그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행하여야 합니다.금전에 집착한다든가,지위를 이용해서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벧전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목사라는 어휘는(엡4:11) 그 자체가 목자를 나타내는 라틴어인 것입니다.보수만을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금전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사랑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이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의 일을 생각합니다.예수님은 선한 목자였으며 그는 자기의 양을 깊이 사랑하셨고 그 양의 안전을 위하여 위험을 무릎쓰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주신 것입니다.

한편 양떼는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그 양떼들은 두 가지 위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첫째,외부로부터는 이리와 강도와 약탈자들의 습격을 당하기 쉽습니다.둘째,내부로부터는 언제나 양떼들은 거짓 목자로 말미암아 시달림을 받기 일쑤입니다.거짓된 지도자 즉, 소명을 출세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봉사의 수단으로는 생각하지 아니하는 목자로 인하여 비극을 초래하는 일도 적지 아니합니다. 둘째의 위험이 훨씬 나쁜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목자가 성실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하면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강력한 방어가 되겠지만 목자가 불성실하고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적은 외부로부터 쉽사리 침입하여 양떼들을 파괴해 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교회의 본질적인 것 중에서도 첫째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있는 지도자입니다.

세계 역사를 살펴 보면 알렉산더나 나폴레옹 같은 영웅들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전쟁터로 데려가 그 곳에서 피를 뿌리게 했습니다.또한 일본 천황이나 히틀러 처럼 잘못된 지도자들을 만나 나라가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 패망한 경우도 허다합니다.그런가 하면 온갖 사상의 창시자들이 잡다한 사상들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사상의 노예로 만들어 인생을 망치고 나라와 국가를 멍들게 하기도 했습니다.구소련은 70년 공산당 사상(Marxism)의 지배로 말미암아 사회,경제,정치 등이 피폐(疲弊)해졌으며 그 혼란에서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쿠바의 카스트로 공산주의 정권 아래 지금 수 많은 난민들이 자유를 찾아 생명을 걸고 탈출하고 있습니다.김일성 주체사상의 노예가 된 북한 동포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김일성 주체사상을 <북한의 구약>으로,김정일 교시를 <북한의 신약>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본격적인 <신약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북한도 그 종말이 멀지않았습니다.시대적으로 종언(終焉)을 고(告)한 공산주의 사상과 김일성 주체 사상의 노예가 된 이 땅의 일부 학생,정치인,경제인,종교인,지식인 등이 귀신들린 온 돼지떼처럼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로 들어가고 있습니다(마8:28-32).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선정을 베푼 왕보다도 악정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한 왕들이 더 많았습니다.그리고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참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고난당했던 사례도 많았습니다.이처럼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또한 사상적으로 잘못된 지도자들에 의해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거나 사망의 길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구약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은 선한 목자로서 자신이 택한 사람들을 끝까지 보호하시며 그 사람들의 궁핍함을 채워주셨습니다.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님은 자신을 직접 선한 목자로서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먼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갑니다.그렇지않고 문을 부수거나 문을 뛰어넘어 들어가는 자는 양들을 죽이거나 훔치는 자들입니다.'양의 우리에 문'은 '진리의 문'을 말합니다.참 지도자는 진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그 이외의 방법을 취하는 자들은 모두 양들을 약탈하는 자들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참된 지도자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알아야만 합니다.이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예수님은 친히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 중 가장 먼저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까?다른 신들은 결코 진리의 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진리의 문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그래서 다윗은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진리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않는 모든 지도자들은 거짓된 목자들입니다.그들은 양을 죽이거나 훔치는 자들일 뿐입니다.어떤 지도자 속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그 지도자는 선한 목자이며 또한 양들에게 생명을 전달하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또한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다음으로, 선한 목자는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자입니다.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참 목자이신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겔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여기 다윗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왜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목자들의 음성을 알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선지자인 양 자신의 사상을 자신있게 가르쳤습니다.수 많은 이단 사상들도 자기들이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체 했으며 지금도 그러합니다.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께 공격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으나 여호와 하나님 종교를 빌미로 백성들을 사망의 길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그들은 귀가 있어도 진리의 문이시며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그들은 눈이 있어도 진리의 문이시며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아 보지못했습니다.그렇게 때문에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먼저 목자장이신 예수님(벧전5:4)의 음성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양들이 자기의 음성을 알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그렇지 못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같이 벼랑에 떨어져 죽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는 것은 목자에 대한 존경과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목자의 음성만 들으면 안심이 되는 것처럼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아 듣고,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입니다.다정한 목자의 음성만 있으면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문제가 되지않습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바로 이 말씀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세번째로,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냅니다.

"(요10:3)....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목자와 양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말합니다.목자가 양을 대할 때 양이 많다고 해서 한 마리쯤은 하고 소흘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돌보는 것입니다.

옛날에 가난한 집에서 부자집에 양자를 보내려고 여러 자식 중에 누구를 보낼까 생각하는데 큰 아이는 커서 안되고 작은 아이는 작아서 안되고 약하면 약해서 안되고 건강한 아이는 건강해서 안되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그만 두었다는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자식이 많다고 해서 어느 자식 하나라도 소흘할 수는 없습니다.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하나님은 개별적으로 나를 사랑하십니다.예수님께서도 양 아흔 아홉마리가 있어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반드시 찾으시겠다는 참 사랑의 말씀을 하셨습니다.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부르고 계십니다.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부르시는 대상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여기 '우리'(fold)는 유대인이며,'다른 양'은 이방인 중에서 불러내실 신자라면,이방인도 한 우리에 들어올 존재입니다.즉 자신의 목숨을 버려 생명을 주시려고 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인,즉 전 세계 인류라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의 목자가 아니라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또한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양의 한 우리 속에 있다고 한 무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즉,목자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고 순종할 때 '한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한 목자'의 '한 무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선한 목자의 양이 되어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그를 따르리니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시23:6)

인생의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시고 순종하시므로 '부족함이 없는' 영육간의 축복하심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심'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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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토기장이의 비유

"(롬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9: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20:1-16, "....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하나님이 한 사람은 택하시고 다른 사람은 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놓고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본문14절)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느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 불의한 행위를 범하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일제 말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모든 젊은 사람들이 일본을 위해 학도병에 잡혀 나가는데, 일본에서 공부하던 어느 부자집 아들이 몰래 도망하여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동네 사람들은 이 아들이 돌아왔다고 축하하며 복 많은 아들이라고 부러워하니 그 아버지는 두고 봐야 안다고 말했다.

얼마 후에 난데없이 주인없는 말 한 필이 그 동네에 들어왔다.그런데 말을 탈 줄 아는 사람은 부자집 아들밖에 없어서 주인 없는 말은 결국 그 아들이 타게 되었다.동네 사람들은 아들도 돌아오고 말 한 필까지 생겼으니 정말 복이 많다고 부러워들 하니,이번에도 그 아버지는 두고 봐야 안다고 말했다.

그런데,어느 날 그 아들이 말을 타다가 낙마를 해서 팔이 부러졌다.다시 동네 사람들은 말하기를,괜히 말이 들어와서 귀한 아들의 팔을 부러뜨렸다고 참 안되었다고 동정했다.그러나,여전히 그 아버지는 두고 봐야 안다고 했다.

정말 얼마 후에 팔이 부러진 것으로 큰 화를 면할 일이 생겼다.정부가 젊은 청년들을 일본 군인으로 붙잡아 가는데,이 아들은 팔 때문에 제외된 것이다. 사실,어느 길이 행복하고 ,누가 더 불행한지는 아무도 모르며 두고봐야 한다.

정말 우리들의 행,불행은 그리스도의 날에 가서야 말 할 수 있다.세상에서 아무리 호화롭고 영광스럽게 살았다 하더라도 그가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이라면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누가복음16:19-31을 보자,나사로는 세상에서 비록 거지였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반면에 그 부자는 세상에서는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았던 것 같으나 결국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지금의 눈에 보이는 상황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그가 아무리 세상 부귀 영화 권세 명예를 다 누리고 있다 하더라도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사람은 행복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항상 은혜인 것이다.

출애굽기 9장 26절을 보자,모세는 유대인이었고 바로는 이방인이었다.그러나 둘 다 죄인들이었다.사실 둘 다 살인자들이었으며 하나님의 경이와 기적을 보았다.그러나 모세는 구원을 받았고 바로는 버림을 받았다.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일으켜서 당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셨다(본문17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다.바로는 통치자였으며,모세는 노예였다.그러나 자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동정을 받은 것은 모세였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에 있어서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그리고 그 분의 선하신 의지와 목적에 따라서 행하신다.따라서 선택은 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의지에 관한 것이다.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으며 애굽을 정죄하셨는데 이것은 주님의 절대 주권적인 목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비를 베푸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선하시기 때문이다.

바로의 '강퍅함'에 대하여 출애굽기 7-14장에서 최소한 15회 언급되고 있다.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시며,그 능력을 드러내시므로 바로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오히려 바로는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완악하고 강퍅하게 하였다.

잘못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에게 있다. 얼음을 녹이는 그 태양이 또한 진흙을 굳게 한다.하나님은 바로를 다루심에 있어 불의하시지 않으셨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믿을,많은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이 세상에는 왜 그처럼 많은 슬픔과 비극이 있습니까? 부자들은 뇌물로써 석방이 되고 죄없는 사람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제발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지 말아요! "라고 했다.이같은 고민을 예레미야가 가지고 있었다.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 바벨론은 왜 강해지며,또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 나라는 전쟁을 모르는데,하나님을 믿는 이 백성은 왜 포로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죄가 있었다.그러나 믿지 않는 느브갓네살보다야 좀 낫지 않느냐 하는 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데 백성들은 회개를 하지않고,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애굽으로 내려 간다. 이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어찌해서 이런 일이 있으며 이 백성이 이렇게도 완악합니까? 어찌하여 악이 승리를 하게 하십니까?"하고 묻게 된다.하나님께서는 그 대답으로 토기장이의 집에 가 보라고 말씀하신다(렘18:1-6).

토기장이의 집에 가서 보니 토기장이는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며,큰 것,작은 것을 멋대로 빚고 있었다.

이것을 구경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예레미야에게 들려 온다.

"보라,토기장이가 진흙을 빚어서 제멋대로 그릇을 만드는데,내가 이 백성의 역사를 주관하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설명하는 말씀이다.하나님의 온전하신 목적이 있음을 예레미야에게 일러 주시며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온전하신 그 뜻에 대해서 겸손한 자세로 인정을 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이 은총의 역사에 대해서 항의 내지는 불평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결코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를 위배했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 " 네 생각에 이 사람이 복 받았다,저주 받았다,행복하다, 불행하다 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저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그렇게 간단하게 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깊은 곳에서 만난다.그러므로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복받았다', '저주받았다','행복하다','불행하다'라고 해석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된다.이해가 되는 일은 이해가 되는 대로 감사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안 되는 대로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의로우시고 선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도예가가 자기의 작품을 만들 때는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어떤 작품을 만들 것인가를 먼저 선택한다.그것은 전적으로 도예가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그리고 그 도예가가 어떤 작품을 만들지라도 그는 최선을 다하여 깊은 애착과 사랑을 가지고 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삶과 진실된 사상을 담은 자기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도 마찬가지이다.하나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든간에 그 선택은 깊은 사랑과 하나님의 뜻이 담겨진 선택인 것이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은혜로써만 가능한 일이다.하나님의 이 선택은 인간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인간의 지위나 물질,학식,교양의 있고 없음 등의 인간적인 모든 조건이 하나님의 선택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인간의 문명과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 가고 있어도 인간은 스스로 운명을 좌지 우지 할 수 없다.인류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한 가난한 소년이 있었다.그는 학교에 갈 만큼 넉넉하지도 못했고,어느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할 만한 기술도 없었다.그러다가 하루는 사진술을 배워 사진 기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사진술을 엮어놓은 책을 주문했다.그러나 그 편지를 받은 서점의 착오로 사진술에 대한 책은 오지 않고 발성법에 대한 책이 왔다.이 소년은 너무 가난하여 그 책을 돌려 보낼 만한 우송료도 없었거니와 반송하는 방법도 몰랐다.소년의 실망은 너무 컸다.

이 소년은 하나님께 기도했다.실망을 하나님께 맡겼다.그리고 할 수 없이 발성법에 대한 책을 보기 시작했다.이 소년은 그 책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가 된 찰리 맥카시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은혜는 오늘 이 새대에 이방인에게나 이스라엘 사람에게나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호1:10) 라고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은혜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 구원의 선택이 이루어진다.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주춧돌이 되지만,믿지 않는 자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어 심판의 도구가 된다(본문30-33절).

죄인인 인간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껴안고자 친히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다하고,오직 자신들의 율법 준수와 민족적인 특권의 의무에 젖어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생명을 주시는 산 돌,예수 그리스도가 오히려 거치는 돌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에서 "돌"과 "반석"은 그리스도와 교회와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이 돌과 반석에 부딪치고 거치게 되면 죽고 무너지게 되지만,그 위에 세우면 튼튼하게 세워질 수 있다.복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돌에 부짖쳐서 망했지만 이방 사람들은 믿음으로 복을 받아 들이고 그 '반석'위에 집을 지었다.이것이 교회인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우리에게는 아무 의와 공로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얻은 구원이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며,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그 은혜에 우리의 삶 전체를 맡기며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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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귀히 쓰는 그릇이 되라

(14)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라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14-26)

"귀히 쓰는 그릇이 되라"했는데 그러면 귀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생명입니다. 선진국에서는 불치의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비록 치료비가 제아무리 많이 든다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우선 살려놓는데 치중하는 반면 후진국에서는 불치의 병에 걸려 가망이 없어 보이거나 치료비가 엄청나게 들어갈 것 같으면 일찌감치 치료를 포기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치료도 받아보지 않고 죽음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을 때 살려내고자 행하신 것이 바로 예수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실만큼 존귀한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십자가의 피로 인간의 죄 값을 치루고 이 땅에 세우신 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쓰임 받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42)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고 하셨는데 이는 바로 누구든지 교회 안에서 믿음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푼 사람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만큼 귀한 일에 쓰임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귀한 일들이 많습니다. 일류 학교를 졸업하고 나라의 높은 지위에 쓰임 받는 것도 귀하고, 의술을 배우고 익혀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고쳐주는 것도 귀하고, 첨단 기술을 개발하여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도 귀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것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그 사람이 장차 하늘 나라에서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는 일들"에 쓰임 받는 것이 소망스러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희생하신 예수의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며, 장차 하늘 나라에서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 지혜롭고 복된 일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일을 행하고 좋은 상을 받았다해도 영원히 사는 하늘 나라에서 기억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예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는 귀한 그릇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의 제자가운데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가 있었던 것처럼 바울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진리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후메내오와 빌레도같은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수 믿는다고 그들을 다 아신다고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예수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여 예언해주고 치유의 은사를 받아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 귀신들을 쫓아내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준다 해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예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최고 일류 학교를 나와 학벌과 문벌이 좋으며 실력과 능력이 제아무리 뛰어나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같이 보여도 불법하는 사람은 그릇이 더럽기 때문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러운 꽃병에 아름다운 꽃을 장식하지 않습니다. 더러운 그릇에 맛있는 음식을 담아 먹지 않습니다. 더러운 그릇에 생수를 담아 마시지 않습니다. 설사 그 그릇들이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졌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비록 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그릇이나,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일지라도 깨끗하면 그 집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큰집에는 여러 가지 재질의 그릇들이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도 여러 가지 재질로 만들어진 그릇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그릇, 은그릇이라고 해서 귀하게 쓰이거나,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이라고 해서 천하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재질로 되어진 그릇이라도 깨끗하기만 하면 귀하게 쓰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그릇이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그릇이 더러워서 천하게 쓰이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각계 각층에서 소위 높은 자리에 쓰임 받는 것이 귀하게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쓰여질 때 귀한 그릇인 것입니다. 성경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 상 16:7)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태복음 23:25-28)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속 사람이 깨끗함을 입어 사회와 교회에서 귀하게 쓰임 받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타고난 검은 피부를 물과 잿물로도 희게 할 수 없듯이 인간의 죄는 그 어떤 종교나 수양으로도 깨끗이 씻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만이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1-14)

우리가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면 먼저 자신의 죄를 주님께 고백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아무리 더럽고 천한 그릇도 주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귀하게 쓰이는 깨끗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와 삭개오는 더러운 이를 탐하는 세리였습니다. 베드로는 보잘 것 없는 어부에 불과 했습니다. 바울은 학벌과 문벌 좋은 금그릇과 같은 사람이었으나 예수를 핍박하는 잔학하고 더러운 그릇이었습니다. 어거스틴도 말할 수 없는 불량배요 방탕아였습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 초기의 김익두(훗날에 목사가 됨)는 양반집 외동아들로 태어났지만 노름과 방탕으로 하루아침에 거지신세가 되어 안악지방에 소문난 난폭한 깡패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예수를 믿고 죄에서 깨끗함을 받아 인류를 구원하는 복음 전도하는 귀한 일에 쓰임받았습니다. 하지만 귀히 쓰임을 받는 그릇이라도 불결해지면 버림을 받게 됩니다. 가롯 유다는 처음에는 금 그릇으로 귀히 쓰임을 받았으나, 후에는 돈에 마음이 더러워져 은 30에 주님을 팔아 넘기고 끝내는 목을 맨 채 비극적인 종말을 고했습니다. 무릇 그릇이란 주인이 언제든지 무엇에나 편하게 쓸 수 있는 그릇이어야 하지 쓰기에 불편하면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교회의 그릇인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쓰시기에 편하게 예비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귀한 그릇이 되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되도록 예수 믿고 예수의 십자가 피로 항상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지위가 높다고 해서, 많이 배웠다고 해서, 예쁘고 건강하다고 해서 귀하게 쓰이는 그릇으로 예비되는 것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인되시는 하나님 앞에 가장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큰 집에는 여러 가지 재질로 만들어진 다양한 그릇들이 있습니다. 귀한 금속 제품도 있고 천한 금속 제품도 있으며 비천하게 쓰이는 것도 있으며 귀하게 쓰이는 것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치입니다. 세계에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씨뿌리는 자의 비유, 마13장>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길 가와 같은 마음"도 있고, "돌밭과 같은 마음"도 있고, "가시떨기같은 마음"도 있고,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등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쓰이는 그릇도 귀하게 쓰이는 것, 천히 쓰이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깨끗해야 귀하게 쓰인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을 항상 깨끗하게 준비한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은 주인되시는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십자가의 피로 깨끗함을 받았다고 해서 어떤 특별한 명예나 특권이나 또는 높은 지위나 많은 재물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으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특권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성도는 자기 혼자서만 쓰임 받기보다는 항상 다른 성도들과 함께 쓰임 받기를 원하며 모든 봉사의 자리에 서로 함께 하고자 합니다. 또한 봉사를 다 한 후에 칭찬이나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그저 무익한 종에 불과하며 다만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 17:7-10)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불법하는 자는 버림을 받습니다. 예수 믿고 십자가의 피로 죄에서 깨끗함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귀하게 쓰임 받아 장차 소망이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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