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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1.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11)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숨어있는 아담에게 "누가 너의 벗었음을 알게 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이에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아담이 솔직하게 숨은 곳에서 나와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하셨던 나무 실과를 제 불찰로 그만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세요."라고 했다면 인류의 불행은 거기서 그쳤을 것입니다. 아담은 비록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숲 속에 숨어있었지만 자신을 찾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했더라면 그는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지 아니하고 택하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이란 이처럼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바른 응답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떨기나무 불꽃가운데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 하노라 이를 위해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고자 하노라." 이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가 거절했다면 그는 한낱 미디안 광야에서 양이나 치는 양치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이 둔탁하고 능력이 모자란 모세였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므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는 지도자로 택함을 받고 쓰임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인류를 향해 문밖에 서서 부르시고 계십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3:20)

이 문은 각 사람이 자신만이 열 수 있는 마음의 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자주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성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실 때마다 반복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여기 "귀 있는 자"는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고,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 성령의 권면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말합니다. 생긴 귀라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음성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려면 그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잘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알려면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고 예수를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이 그 마음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 부르심에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를 믿어 택함을 받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아 곧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충만할 뿐만 아니라 신의 성품, 곧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나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예수를 믿고 예수와 함께 날마다 친밀히 사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나를 알고 내가 예수를 아는 관계, 내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가 내 안에 거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살 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가장 정확히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곧 그분의 인격을 품을 수 있는 길은 예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바로 바라보고, 예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희생하셨다는 <믿음>이 없이 예수 십자가를 아무리 바라보아야 그 십자가의 의미와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고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성품, 곧 신의 성품에 이르는 첫걸음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야말로 신의 성품을 이루는 첫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예수처럼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모든 일에 선을 추구하는 용기를 지니게 되는데 이를 두고 <덕>이라고 부릅니다. 참된 덕이란 생명이 희생될지라도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마음과 행위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가 아무리 마시기 힘든 고난의 쓴잔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참된 덕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덕>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것이 <지식>입니다. 여기 지식이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는 이해력과 판단력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뜻이 기록된 성경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즉 그 뜻을 확실하게 깨닫기까지 주의하여 살펴보며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만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돈을 주고 사는 지식이나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신의 성품으로서의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이러한 지식을 위해 하나님 말씀과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로 파악하고 자신을 매사에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데 이를 두고 <절제>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고서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바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 앞에 서서 그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제하지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인내>란 예수처럼 십자가의 고난이란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고난을 끝까지 참고 견디어내어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연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패배하는 것 같았으나 마침내 부활하심으로 십자가의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는 인내란 고난에 대한 쓰디 쓰고 아픈 기억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제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있다해도 인내함으로 마침내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경건>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가운데 자신의 참된 모습을 깨닫고,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 헌신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지 않으셨다면 인류 구원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경건은 그 모양만 가지고는 아무런 결과(열매)를 낳을 수 없습니다. 경건은 능력이 있어야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헌신하는 생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치는 생활로 능력있는 경건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자신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바칠 때 경건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사람은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 십자가의 희생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형제우애>는 인종을 뛰어넘어 그 어느 누구와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어느 누구와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에 있어서 최고 절정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무엇을 먹어서 하나님이 되려거나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앞에서 얘기한 하나님의 성품들을 통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어서 하나님처럼 되거나 하나님보다 높아지고자 하면 눈이 밝아져 자신의 벌거벗은 몸이 드러나 수치스럽게 되고, 그래서 결국 차마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 곧 신의 성품을 통해 하나님처럼 되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판단하고 바로 깨달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고자 하는 행복한 사람은 신의 성품을 이루어 하나님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썩어질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여러분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썩지 아니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 여러분을 부르시고 택하신 것입니다. 신의 성품을 이루어 신의 성품에 이르게 될 때 여러분은 언제든지 신앙생활에 실족하지 아니하고 넉넉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가에서 고기 잡는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같은 예수의 부르심에 이들 형제는 그 자리에서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아갔습니다. 다른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 모두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렇게 응답하므로 그들은 곧 예수의 제자들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돈 많은 청년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예수께 찾아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켜라" "예, 제가 다 지켰는데요." "그래, 그러면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집에 가서 네 소유를 몽땅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 그러자 그 부자 청년은 이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고 그만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 택하심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일본군 퇴역 소위 오노다 히로오는 일본의 패전이후 1974년까지 무려 29년 동안 필리핀 마닐라 근처 작은 섬 루뱅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그의 나이 당시 52세였습니다. 그는 1944년 12월 자신의 말대로 이미 패색이 짙은 전쟁에 살아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라며 루뱅섬으로 파견되었습니다. 250여명의 오합지졸에 불과한 풋내기 부대 지휘관으로 부임하자마자 곧 미군의 공격으로 200여명이 죽고 43명이 남았습니다. 이때부터 전쟁이라기보다는 살기 위해 생쥐처럼 숨어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10월에 "45년 8월 15일에 전쟁이 끝났으니 일본군은 투항하라"는 전단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노다는 이를 미군의 속임수로 생각하고 투항을 거절했습니다. 그해 12월에도 같은 내용의 전단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때 43명중 대부분이 패전 사실을 받아들이고 투항하여 일본으로 돌아갔고 오노다를 비롯한 4명만이 투항을 거절했습니다. 1946년 4월에는 이미 투항했던 부하들이 섬 전체를 다니며 "오노다, 어디있나? 나와라. 전쟁이 끝났다. 어서 나와라 하루라도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자" 라고 부르며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오노다는 이것도 미군의 흉계로 믿고 거절했습니다. 이번에는 오노다의 가족이 가족사진과 가족들이 보낸 편지 전단을 뿌리면서 돌아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오노다는 이것도 가족들이 살기 위해 당국에 협조하는 것으로 알고 거부했습니다. 오노다는 이러한 도피행각을 벌이면서 루뱅 섬 원주민들을 수없이 죽이며 심지어는 원주민 가옥 전체를 불질러 몽땅 태우는가하면 원주민들을 토막 살해하기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노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털끔만치도 반성은커녕 뻔뻔스럽게도 하는 말이 "그들이 거기 있는게 불행이었다."고 말합니다. 1950년 이후 해마다 각계 각층에서 찾아가 "일본으로 돌아갑시다. 내 목소리가 들립니까?"라고 부르면서 찾았습니다. 심지어 필리핀 주재 일본 대사관 이름으로 편지함을 설치하여 고국에서 온 편지들과 신문 등을 넣어두어 보게 했지만 함정으로 알고 접근마저 거부했습니다. 1965년에는 마을 원주민으로부터 라디오를 약탈하여 직접 패전을 비롯한 모든 뉴스를 들었음에도 돌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 가족들과 고등학교 동창생들까지 동원되어 오노다 구출대책본부를 설치하고 학교 교가를 울먹이면서 부르며 "오노다, 일본에서 형님, 누나가 오셨습니다.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 주십시오"했지만 끝내 거절했습니다. 그후 16개월 동안 종적을 감춘 뒤 어처구니없게도 옛 상관이 전해준 '패전했으니 귀국하라'는 특별명령서를 받고서야 투항했습니다. 그가 29년 동안 루뱅 섬 원주민을 학살한 것이나 피해를 준 것에 따르게 되면 당연히 전범처리하여 교수형이나 총살형에 처해져야 함에도 마르코스 정부는 막강한 일본의 경제력 앞에 오노다에게 아무런 죄도 묻지 않고 사면석방하고 말았습니다. 루뱅섬의 피해 원주민들은 지금도 이를 두고 증오심을 삭이고 있습니다. 만약 오노다 히로오가 처음부터 패전에 대한 소식을 듣고 투항했더라면 더 이상의 원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30년 청춘 인생을 그토록 패잔병의 미치광이같은 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본의 일부 우익단체에서는 그를 영웅시까지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하고 있지만 그는 누가 봐도 그는 조그만 섬에서 생쥐같이 살았던 불행한 인생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선 여러분을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은 예수 부활로 이미 패배했으니 하나님 품으로 돌아 오라. 예수 십자가의 희생으로 여러분의 죄가 모두 용서되었으니 예수 앞에 나와 새로운 인생을 사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 믿을 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믿음과 덕, 지식과 절제, 인내와 경건, 형제우애와 사랑 등의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될 때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므로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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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복음과 문화

(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2:1-14)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지성과 이성, 그리고 감성을 지닌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은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그 인간의 문화와 문명 역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는 타락한 인류의 문화와 문명의 결말이 어떤 것인가를 교훈해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하나님보다 높아지고자 바벨탑을 쌓으며 하늘을 향하여 화살을 쏘아대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문화, 문명은 결국 붕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화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인간이 그 문화의 중심이 될 때는 반드시 몰락하고 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고 있다해도 그 중심이 하나님이 되지 못하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질 때 그 문화와 문명은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를 흔히 <문화의 세기>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시대는 문화가 정치나 경제를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그의 책 <무덤파기 작전>에서 사탄이 이 시대 사람들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작전을 대중문화를 통한 방법으로 바꿨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과거에는 무신론이나 회의론 등의 사상이나 이념 이론 등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신문, TV, 방송, 영화, 인터넷 등 대중매체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탄도 재빨리 대중 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 사냥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21세기를 타락시키는 사탄의 전략은 문화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타락한 문화를 통해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전략입니다. 참으로 이 시대의 문화를 타락 문화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타락 문화의 특징은 <거짓>과 <탐욕>, 그리고 <음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경고하고 있는 바도 이 세대의 타락 문화입니다.

타락 문화의 첫 번째 특징은 <거짓>입니다. 그런데 성경 요한복음 8:44은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 부르면서 타락 문화의 배후가 사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서울 신대 강사 이성준 전도사는 "차세대 문화를 향한 사탄의 21세기 전략"이란 글에서 이 시대 타락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 뱀 마귀는 태초에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거짓의 영은 지금 다양한 문화 속에 침투하여 이 세대를, 특히 자라나는 차세대를 집중 공격하고 있습니다. 뿔 달린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광명의 천사처럼 위장하고 나타나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요즘 광고 문화를 살펴봅시다. 광고의 목적은 그 제품 내용을 널리 알려 구매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고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온통 환상과 거짓말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어느 회사의 휴대폰 하나만 가지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부추기는 요란한 광고물, 어느 냉장고 하나 가지고 있으면 여자로 태어난 것이 그지없이 행복하다고 느끼게 만느는 광고, 어느 증권회사에 돈을 맡기면 돈은 돈대로 불어나고 자신은 인생을 안심하고 마음껏 즐길 수 있다고 선전하는 광고, 어느 생명보험회사에 가입하게 되면 이제는 불행 끝, 행복 시작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광고, 어느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제아무리 큰 위기와 불행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요란을 떠는 광고물로 가득합니다. 어떤 물건을 소유함으로 한없이 행복해 하는 모델의 모습 등 '물건의 소유'와 '행복'을 동일시하는 광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달리 말하면 '더 많은 돈, 더 많은 소유가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자본주의 성공 이데올로기의 광고적 변형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부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광고를 보면서 가치관이 아직 확립되지 못한 청소년들이 소유와 행복, 부와 성공을 동일시하게 된다면 이미 사탄의 전략은 성공한 것입니다. 물질과 소유의 노예로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컴퓨터는 현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문화와 문명의 이기가 되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엄청난 정보의 세계는 삶의 환경조차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이제는 핸드폰 같은 무선 통신망과 인터넷을 연결시키며 많은 정보통신업체들이 컴퓨토피아(computopia)가 도래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터넷의 엄청난 정보가 나에게 준 유익은 무엇입니까? 핸드폰을 가짐으로써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더 진실해지고 긴밀해졌습니까? 컴퓨터가 있음으로 시간을 더 잘 활용하게 되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첨단의 매체를 갖춤으로 인해 더 행복해졌습니까? 아니면, 바닷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있듯이 더 갈급해지기만 하고 있습니까? 이렇듯이 대중매체를 통한 사탄의 전략은 진리를 가리우는 '허위의 전략, 거짓의 전략'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듯이 태초에 하와에게 '너희 눈이 밝아지리라'고 거짓을 말하던 사탄은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차세대에게 이제는 '문화를 통해서' 자꾸 거짓 것을 믿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은 소유를 추구하는 '돈의 노예'가 되게 만들고, 외적 조건을 갖추기 위해 무리한 성형과 목숨을 건 다이어트도 하게 만듭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거짓 정보'를 찾아 인터넷 거리를 헤매다 인터넷 홍등가의 유혹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성결교회 교단지 <활천> 2001년 2월호)

예수께 찾아와 부귀영화 성공 등을 보장하며 유혹하고 시험했던 사탄이 지금도 맹렬히 활약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것처럼 영원한 진리가 되는 하나님 말씀으로 이러한 사탄의 전략을 분별하고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사탄을 뱀 또는 독사, 용 등으로 간단하게 번역되어 있으나 영어성경이나 다른 나라 말 성경에는 독사의 증류에도 살모사나 독사, 코카트라이스 독사 혹은 바시리스크 독사 둥 여러 가지 종류로 구분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바시리스크 독사나 북미의 코카트라스 독사의 독액이나 독기는 너무 강하여 그들의 입김이나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합니다. 어떤 독사는 공기까지 감염시켜서 짐승이나 사람을 살상하고 초목을 마르게 하며 그 독사가 지나간 곳은 풀이 타 버리고 그 독사가 숨어 있는 굴 위를 나르는 새도 죽어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미의 부쉬마스터라는 독사는 맹독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하고 공격적이며 해독제가 전혀 없는 뱀으로서 그 뱀에 쏘이면 피가 썩어 20분내로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뱀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뱀이 지나가면 무지개 색깔이 선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색깔에 홀려 방심하는 사람은 그 뱀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사탄은 결코 두 뿔이 달린 무서운 도깨비의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모습으로, 문화의 탈을 쓰고 나타나 인간을 매혹시키고 유혹해서 포로로 만든 후 그의 죄의 독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화장품 광고에 섬짓할 정도로 예쁜 여자(?)가 나와 침을 꿀꺽 삼키며 남자 목소리로 "새빨간 거짓말"하는데 남성의 목울대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성전환 수술로 여자가 되어 유명해진 모델 하리수였습니다. 성 전환 수술한 사람을 트랜스젠더라고 하는데 하리수는 어느 스포츠 신문이 표현한대로 "168cm, 48㎏, 35-24-35의 늘씬한 몸매, 거기에다 긴 생머리와 꼬리 긴 눈웃음 때문에 약간은 남아 있을 법한 어색한 남성 이미지를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성전환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transgender)는 태어날 때 몸은 분명히 남성인데 몸매나 정신, 행동이 여성스러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로스 드레서' 즉 여성의 옷이나 심지어는 여성의 속옷까지도 입기를 즐기거나 여성보다 더 여성스럽게 보이기 위해 화장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자신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그 정체성이 혼란스럽고 갈등이 심각해서 현대 의학기술로 성전환수술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리수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혼란과 괴리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여성에서 찾기로 결심하고 일본에서 성전환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잘 나가는 값비싼 모델로, 가수로, 영화배우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 세대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性) 문화의 선두주자로까지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性)은 문화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은 그 생사화복이 자신의 의지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사람도 없고 스스로 자신의 죽음의 시기를 결정할 권한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자로 태어나거나 여자로 태어나거나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역이며 권한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각기 창조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성을 두고 제멋대로 바꾼다고 하는 것은 창조 때부터 남자와 여자라는 본래의 성을 함께 부여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부정하는 엄청난 죄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술이라는 명목으로 간통이나 간음이 합리화될 수 없는 것처럼, 성문화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성을 제 맘대로 바꾸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되거나 미화되거나 면죄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트랜스젠더들이 경험하는 성적 혼돈이나 갈등 등의 아픔은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부정하는 성전환술이나 성문화의 미명 아래 해결할 것이 아니라,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의 창조질서를 보존하며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그 마음과 생각을 치유하는데서 해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사는 것은 거짓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꾸미는 성문화 역시 그 문화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인간이 그 중심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죄악의 문화로 타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문화의 결말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타락 문화의 두 번째 특징은 탐욕입니다. 9월 1일자 경향신문에 <누가 산골소녀 영자를 울리는가, 영혼까지 상품화하는 천민자본주의적 행태>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한 부녀가 순진무구의 자연에 묻혀 살다가 어느 날 인간에 들켰다. 그 보도가 나간 후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졌다. 강원도 삼척의 오지에서 문명을 거부하고 살던 이영자양 부녀는 <호기심의 상품화>, <사생활에 대한 보호의식이 희박한 전근대성>, <사람은 문명의 옷을 입어야 비로소 인간이다.>라고 믿는 편견에 철저히 유린당했다. '돈이 되겠다. 얘기가 되겠다'고 판단되자 이 무욕의 공간에 사기꾼, 깡패, 협잡꾼, 한탕을 노리는 업자들이 흡사 파리떼처럼 몰려들었다....이들에 의해 이 부녀가 세상에 버려지는 과정을 살펴보자. ▶2000년 8월, 아버지와 단둘이 전기도 전화도 없는 산골에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전파를 타고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이야기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 격려와 성원이 쏟아졌다. 산골집엔 컴퓨터와 전화가 놓인다. ▶부녀가 광고에 출연한다. ▶2001년 2월, 영자가 없는 사이에 아버지가 살해된다. 살인범은 광고출연 등으로 집에 돈이 많을 것 같아 살해했다고 한다. ▶2001년 6월, 영자는 세상이 너무 무섭다는 말을 남기고 속세를 떠나 불가에 귀의한다. ▶2001년 7월, 영자와 아버지가 썼다는 <영자야, 산으로 돌아가자>는 유고집이 나와 다시 세상 사람들을 울렸다. ▶20001년 8월, 그 시집마저도 가짜라고 밝혀진다. 영자 부녀는 그 삶이 노출된 지 꼭 1년만에 모든 것을 잃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뼛속까지 파먹는 하이에나식 이윤창출 관행에 아름다운 이야기는 사라졌다. 한 문화평론가는 "다들 돈에 미치게 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므로 그냥 씁쓸할 뿐 딱히 대책이 있겠느냐"며 참담한 반응을 보였다. 영자 부녀가 살던 집에 우리는 팻말 하나쯤 세워야 한다. '우리의 탐욕이, 살아있음이 부끄러운 땅-영자가 살던 집'이라고.》

이처럼 인간의 탐심은 자신과 이웃을 황폐화시킬 뿐만 아니라 탐심, 탐욕은 우상숭배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올 뿐인 것입니다. 형제간에 재산 분배를 놓고 불만이 있던 어떤 사람이 예수께 찾아와 자신에게 더 많은 분배가 되도록 해달라고 청탁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거짓 교사들이 교인들을 가르치는 목적은 자신의 뱃속을 채우고자 하는 탐심이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인류 구원의 복음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증거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복음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데 이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성도들을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교회 세습문제로 그렇지 않아도 한국 기독교가 호된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연예인을 닮아가는 목사들>로 인해 기독교가 비아냥거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문화연구소장> 이의용씨는 하나님의 이름과 거룩한 교회를 더럽히는 일부 목사들의 작태를 이렇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른바 "조명빛을 좋아하고 팬클럽을 몰고 다니는 목사 연예인"들은 '인기'를 얻기 위해, 소위 '뜨기' 위해 연예인에 못지 않은 노력을 기울인다면서 이들이 인기 연예인을 닮은 점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조명 받는 걸 좋아합니다. 조명을 받아야 몸값이 오르기 때문입니다. 교계 신문사나 방송사에 가보면, 자기 이름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내온 보도자료가 수북합니다. 미디어에 자기 이름과 사진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 로비도 하고 압력도 동원합니다. 단순히 목회 사역 내용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발광(發光)을 하는 것이다. 언론의 생리를 잘 터득하고 언론을 적절히 이용해야 뜰 수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과장이나 왜곡은 당연시합니다. 이런 이들이 시무하는 교회의 주보나 회보를 보면 온통 담임목사 발광 지면으로 전락해 있습니다. 요즘엔 공중파가 공략의 대상입니다. 공중파에 떠야 진정한 '공중권세'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정 팬을 몰고 다닌다고 합니다. 인기 연예인들에게 팬클럽이 있듯이, 인기 목사들에게도 팬클럽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인기인을 따라다니며 바람몰이를 해줍니다. 목사가 다른 집회에 가면 거기에 따라가서 '아멘 부대'가 되어주고, 목사가 교회를 옮기면 집단으로 따라 가기도 합니다. 도대체 누구의 팬인가? 셋째, 외모에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머리에 물을 들이고 패션에 신경을 쓰며 분장을 합니다. 강대상을 무대로 여깁니다. 그날의 외모가 교인들에게 화제가 되도록 연출을 유도합니다. 넷째,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만나기 어렵고,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직접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삶의 내용도 베일에 가려지게 됩니다. 다섯째, 연예인이 음반을 내듯, 자신의 알리기 위해 책을 내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목사는 일년에도 몇 권의 저서를 펴내는데 그 많은 설교를 준비하면서 언제 저술활동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과연 직접 쓰기나 하는지. 교계의 유명한 출판사에는 출간을 의뢰하는 원고가 쇄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원고 중 출판할만한 가치가 있는 건 별로 없다고 합니다. 결국 본인이 수천 권, 수만 권의 판매를 책임지기로 하고 출판을 하는데, 이런 경우 집필은 출판사가 대신 해준다고 합니다. 책 구입은 그 교회 교인들의 몫이 되고. 책을 내면 저절로 홍보가 되고, 수익도 생깁니다. 홍보가 돼야 여기저기 집회에 인기강사로 불려 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보다 강사료나 인세 수입이 많은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어떤 인기강사는 강의를 갈 때 저서를 싸들고 가서 반강매를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미디어가 다양해지고 첨단화해지면서 개인의 행복과 성공을 다른 사람이 결정해줄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미디어에 부각되어 유명인이 되고 출세를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려져야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목사의 사역도 '떠야' 활발해지고,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인기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에게는 돈, 명예, 권세를 멀리 하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그걸 탐하고, 인격 수양은 뒷전으로 하고 어떻게든 뜨려고만 하는 일부 목사들의 행태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일단 뜨기만 하면 그들을 담임목사나 강사로 초빙하려 하고, 그런 이들의 책만을 사서 보려고 하는 교회와 교인들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유명하지 않지만 훌륭한 목사들이 훨씬 더 많지 않은가. 그럼에도 '유명한 목사가 유능하다'고 보는 잘못된 풍조 때문에, 오늘도 기를 쓰고 인기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되신 것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므로, 우리를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고후 4:5) 목사가 할 일은 자기가 뜨기 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높이 띄우는 일입니다.》(뉴스앤조이 .2001.8.29.)

일부이겠지만 이처럼 '교회세습', '연예인을 닮아가는 목사' 등 일부 목사들의 탐심과 탐욕이 한국 교회를 황폐화시켜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복음 증거를 더욱 더 어렵게 만들뿐만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겨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여기며,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교역자와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도다." 예수께서 언제 기도원이나 수도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물려주셨습니까? 그 제자들이 언제 대형화된 교회를 세우거나 후손들에게 대물림했습니까? 교역자와 성도는 "나는 죽고 오직 내게 살아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타락 문화의 세 번째 특징은 <음란>입니다.

20세기 세계 최고의 섹스 심벌이라고 불리우는 마릴린 먼로가 1962년 36세의 나이로 죽은지 39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세계 각지에서 매년 추모 행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의 뭇남성들이 '우리는 아직도 그녀의 향기를 기억한다.'면서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1주일에 2, 300 명이 할리우드 근처에 있는 그녀의 묘를 방문한다고 합니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며 야구계 거물이었던 죠 디마죠도 매주 세 번씩 빨간 장미 여섯 송이를 그의 묘지에 보내고 한 달에 한번씩 그녀의 묘를 방문하여 15~ 30분을 조용히 그녀의 묘곁에 있다가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들은 섹스의 심벌, 상징이된 이 방탕의 여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합니다. 이 성의 우상이요 세기의 음녀는 미(美)의 여왕이 된 후 한번도 조용히 살지 못했고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자살한 시체로 발견된 그의 죽은 손가락은 마지막 전화를 돌리고 있었고 옆에는 50알의 수면제가 들어 있던 빈 병만이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음녀는 수백만의 남성들을 유혹하였으나 결코 만족을 몰랐고 뭇 남성들의 육욕에 탐닉하였으나 가장 비참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음녀에게 유혹되었던 자들이 아직도 그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나라 광고에 어느 여가수를 마릴린 먼로처럼 분장을 시켜 지하철 통풍구에서 분출되는 바람에 치마가 훌러덩 치올라가는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을 상품화하여 성을 매매하므로 세상을 타락시키는 음란 문화입니다. 광란적으로 음탕한 여자일지라도 최고로 섹시하면 흠모와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문화야말로 음란 문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여자가 죽었어도 추모하는 세태야말로 음란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성을 상품화하고 성을 매매하며 타락한 성문화에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도록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신세대들의 인기 댄스 가수 "신화"의 누드화보집이 아주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전진과 에릭이라는 이 두 남자 가수의 올누드 엉덩이를 보며 하는 말이 "신비감이 그대로 간직된채 아주 멋지다."는 반응입니다. 젊은 남자의 엉덩짝을 보며 신비감을 느낄 정도라면 그 타락과 음란의 증상이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성경 잠언에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잠언7:1-5)고 했습니다. 이 악하고 음란한 문화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길은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뿐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고 했습니다. 소돔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음란이 판을 치고 있는 이 시대 구원함을 받고자 하면, 시대의 음란함을 인하여 심령이 상하여 마음에 고통을 겪었던 의로운 롯을 본받아 의롭고 경건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삶과 말씀을 문화화시켜야 하는 것이지 이 시대의 문화를 기독교화시켜서는 안됩니다. 이 시대의 문화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문화로 전락하는 기독교는 복음 증거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문화가 아닙니다. 복음은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어떤 문화로도 포장되어서는 안되고 복음은 있는 그대로 타락한 문화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어떤 문화이든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으면 타락하기 십상인 죄의 문화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든지, 춤을 추든지, 그림을 그리든지, 인터넷을 하든지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으면 바벨탑의 운명이 되고 말 것입니다. 거짓과 탐욕, 음란으로 특징지워지는 문화는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없는 짐승"같은 짐승의 문화이며,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과 같은 개, 돼지 문화에 불과합니다. 타락한 죄의 문화를 하나님 말씀, 복음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기독교는 그 문화의 종이 되고 맙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19절) 여러분의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중심이 되어 기독교가 문화의 중심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문화는 그 시대에 따라 변하며 소멸되지만 복음은 영원토록 변치 아니하는 진리,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으로 이 시대의 문화를 분별하며 타락한 문화를 극복하여 노아 시대의 노아처럼, 소돔 고모라 시대의 롯처럼 구원함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문화보다 복음이 중심이 되는 삶으로 문화를 변화시키는 능력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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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하나님의 날을 사모하라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향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성경에는 인류 구원을 위한 두 줄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붉은 줄이고 다른 하나는 황금줄입니다. 붉은 줄은 예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을 말하고, 황금줄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사건, 즉 예수의 재림을 말합니다. 인간은 이 두 줄을 부여 잡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언약(言約)의 책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메시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메시아의 재림을 약속하는 책입니다. 구약에서 1845구절, 신약에서 318구절이 이 메시아의 재림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매 30절마다 한번씩 예수의 재림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메시아의 고난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다시 오실 것을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성경대로 세상에 오시고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사신 예수께서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십니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겠습니까?"(민23:19)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가리켜 오늘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이 <하나님의 날>을 세상에서는 지구의 종말이라고 부릅니다. 이 날을 인류 최후 심판 날이라고 흔히 부릅니다. 그 날을 지구의 종말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세상과 죄인들을 심판하시어 노아에 방주에 들지 아니한 모든 생물들을 모두 멸망시켰지만 땅과 하늘이 없어진 것이 아니었고, 소돔 고모라 당시에도 죄악이 머리끝까지 가득한 소돔 고모라라는 특정한 지역만을 몽땅 심판한 것이지 천지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땅과 하늘이 바로 노아 당시의 하늘과 땅에서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날>에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하늘과 땅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녹아져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지구의 종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을 최후 심판의 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날에 모든 인류를 알곡과 가라지를 골라내듯이,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심판하셔서 알곡은 천국 곳간에 가라지는 지옥불에 던지고, 양은 영생의 자리인 하나님의 오른편에, 염소는 멸망의 자리인 왼편에 두는 심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최후 심판으로 세상의 진위가 분명하게 드러나며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역사의 굴곡과 왜곡 속에 소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의를 당한 채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이 공의로운 최후의 심판이 없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의미한 것에 불과할 것이며, 모든 인류의 소망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최후의 심판으로 부르며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노아 시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인류를 유혹하고 시험하여 죄악에 빠지게 했던 사탄과 사탄이 가져다주는 죄와 사망이 다시는 없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 날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를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20:14)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그러면 <하나님의 날>,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올 것인가? 다시 오실 예수께서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 4:14)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인 천국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면 세상은 끝이 되리라는 뜻입니다. 천국 복음이란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심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가든가 아니면 지옥에 가든가 둘 중에 하나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어야만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땅 끝까지 증거되면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것입니다. 교회 성도들이 그토록 수많은 순교의 피를 흘려가며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했던 이유는 바로 이 하나님의 날을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하는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지구 종말의 징조는 무엇이냐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예수를 자처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수없이 생길 것이고, 난리와 전쟁, 기근과 지진 등이 일어나겠으며 불법이 무성하여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렇지만 이것들은 재난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지 종말은 아니니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마 24:4-12) 날이 갈수록 죄악이 무성하며 불법이 성행하며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회 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은 그의 책 <노동의 종말>에서,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소위 테크노피아, 또는 컴퓨토피아를 꿈꾸고 있지만 이러한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고용 기회를 상실하게 되고, 실업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빈부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더 심화되어 대부분 나라들을 불법문화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1%의 실업 상승이 6.7%의 살인 및 3.4%의 폭력범죄, 그리고 2.4%의 재산 범죄 증가를 야기시키고 있으며,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와의 간격이 확대되면, 2.05%의 폭력범죄, 4.21%의 살인, 1.79%의 강도, 3.1%의 강폭력, 1.95%의 절도 및 2.21%의 자동차 절도 범죄가 증가했는데 이 결과 미국전체에서 한 해 동안 전년대비 약 6만명의 교도소 수감자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실업율 증가, 빈부간 극심한 격차는 불법 문화로 얼룩진 사회와 국가를 만들어 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러한 불법 문화가 지구 종말의 징조이든 아니든,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8절) 여러 가지 소위 말세의 징조라 볼 수 있는 현상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음에도 지구의 종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 같이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지구의 종말보다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구원받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언제 종말이 되느냐보다는 언제 종말이 임할지라도 넉넉히 구원받을 수 있는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3절)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그의 신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금식기도를 잘 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질문했습니다. "우리는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9:14,15)고 대답하셨습니다. 신랑되시는 예수와 함께 있을 때에는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혼인잔치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열 명의 처녀가 밤중에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등을 가졌으나 기름을 가지지 아니했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준비했습니다. 모두가 자는 깊은 밤에 신랑이 왔으니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열 명의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신랑을 맞으러 나갔으나 등은 가졌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그제서야 기름을 사러갔고, 기름을 준비해두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불을 밝혀 신랑을 맞이하여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집의 문은 닫혔습니다. 얼마 후 늦게나마 기름을 사러갔던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돌아와 닫힌 문을 열어 달라했지만 들리는 소리는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1-13) 슬기로운 신부는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 등과 기름을 준비하는 신부"라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혼인 잔치로 비유하며 신부가 준비해야 할 것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계19:6-9)

이렇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의 신부로 비유하면서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등과 기름을 준비하여 깨어서 신랑을 간절히 사모하여 기다리는 신부가 슬기로운 신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혼인을 기약한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손꼽아 혼인날을 준비하고 기다리지 아니한다면, 그 신부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거나 신랑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신랑을 사랑하며 혼인날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면 신부는 무엇보다 "깨끗한 세마포"를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만 할 것입니다. "깨끗한 세마포"는 신부의 순결을 뜻합니다. 신랑 신부의 혼인 조건은 서로간에 순결에 있습니다. 신랑되시는 예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지 십자가에 흘린 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신랑되시는 예수께서 신부가 입게 될 세마포를 십자가의 피로 준비하신 것입니다. 신랑이 마련해준 세마포를 입은 신부는 더욱 더 신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모하며 등과 기름을 준비하여 그 날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신랑과 혼인하는 그 날을 생각하기만 하면 신부는 두근거리며 뜨거워지는 가슴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신랑되시는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데 여러분 가슴이 뜨겁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슴이 두근거리며 뜨겁지 않다면 사랑이 식어지고 있거나 깨어있지 아니한 신부라 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오는 날이 아득하기만 하고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에 미혹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하루 종일 논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어오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이젠 저녁이 다 되었어.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이 말을 들은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습니다. "메뚝아, 내일이 뭐니 어떻게 내일 또 놀자고 하니?"메뚜기는 잠시 후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모든 동물이 다 잠을 자게 되는데 잠자는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뚜기를 보고 날씨가 무더워서 정신이 나갔나보다고 놀렸습니다. 그후 메뚜기는 개구리와 온 여름을 함께 놀고 지냈습니다. 가을이 오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뚝아, 내년에 다시 만나서 놀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냐고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개구리는 흰눈이 천지를 뒤덮고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모든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서 오래오래 겨울잠을 자고 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때가 내년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구리를 보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놀려댔습니다. 하루살이나 메뚜기는 내일 혹은 내년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일이나 내년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이나 내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나 내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세나 하나님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하나님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가오는 내세에 불안해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으니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거하게 하리라."(요 14:1-3)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세상 사람들은 세상 정욕에 빠져 지구의 종말, 하나님의 날이 임박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거나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노아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소돔 고모라 성에 살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심판 날을 믿지 않았다가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남편을 따라 그 성에서 나와 구원받는가 했는데 소돔 고모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결국 불순종하더니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날이 임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던 아니 믿던 그 날은 분명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구의 종말 전에 죽을지라도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날에 구원의 조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구원받을 조건은 노아 시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그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멸망키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캐나다에 있는 록키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디바이드 크릭(Divide Creek)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나누는 내' 라는 뜻입니다. 록키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이 물줄기는 크고 둥근 돌에 부딪쳐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갈라지는 물은 킥킹 호수로 흘러 태평양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은 마우 강으로 흘러 사스카취완 강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위니펙 호수로 흘러 들어가 넬슨 강과 허드슨 만을 거쳐 마지막으로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맨 처음에 나누일 때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엄청난 차이로 벌어집니다. 물이 일단 바다로 들어간 후에는 아무리 방향을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우리 인간에게도 돌아올 수 없는 바다로 흘러가는 분기점이 있습니다. 직업을 선택하거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이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갈 것이냐 왼쪽으로 갈 것이냐?"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에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어느 길을 택하느냐, 무엇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모든 선택이 다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앙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주님은 우리를 영생의 나라로 불러들이실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나라 밖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지구의 종말, 하나님의 날이 임하게 될 때,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때, 어디에 있어야 이 최후의 심판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주셨으니 누구든지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3:16) 바로 "이 약속대로 예수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벧후3:13) 그러므로 예수 믿는 믿음을 선택하느냐 선택하지 않느냐에 따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사택 전화 수리하러 왔던 전화국 직원에게 예수 믿고 우리 교회에 나오시라 권면했습니다. 그 직원은 전에 교회에 나간 적이 있는데 교회가 자신의 생리에 안 맞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문제는 생리에 맞고 안 맞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이 사느냐 죽느냐가 달린 중대한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사시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날마다 회개하는 생활로 하나님의 날이 임할 때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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