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목사

 

교회소개
담임목사
선교활동
게시판
방명록
홈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1.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1-25)

요즈음 성행하는 <노래방>에는 노래 <도우미>없이는 영업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노래방의 노래 도우미들이 대부분 2,30대 젊은 주부들이며 50대 주부들까지도 있다고 합니다. 취재 기자가 청바지 차림의 어느 젊은 주부에게 아이들과 남편은 어떻게 하고 이 초저녁에 노래방에 나왔느냐고 묻자 "아이와 남편을 일찍 재워놓고 나왔다."고 서슴없이 대답하는 것을 TV보도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노래와 춤은 물론 온 몸을 가지고 노래방을 찾은 아저씨들을 즐겁게(?)하는 모습이 비춰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달에 버는 돈이 평균 3,4백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어지간한 남편 월급보다 훨씬 많은 금액입니다. 처음에는 노래 도우미로 시작하지만 한 두 번 나가다보면 대부분 가정 주부 탈선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가정파탄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쾌락과 물질에 빠져 도덕과 윤리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사랑마저 거추장스럽게 여겨 가정을 너무나 쉽게 팽개치고 맙니다. 울산광역시에만 이혼율이 50%가 넘어섰다고 합니다. 10쌍이 결혼하면 5쌍이 이혼한다는 것인데 그 이혼 사유가 대부분 부정(不貞)과 경제적 이유라고 합니다. 고아원마다 생고아들, 즉 부모가 멀쩡히 살아있는 고아들이 차고 넘치는데 대부분 가정 파탄을 당해 버려진 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처럼 타락하고 더러워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기독교가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며, 오히려 오늘날 교회들이 빛과 맛을 잃어 조롱을 받으며 버리움을 당해 짓밟히고 있는 실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처럼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는 생활, 그리고 "거짓이 없이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는 생활로 자신의 영혼을 깨끗이 하여 "믿음의 결국 곧 구원"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베드로 전후 서신이 기록될 당시는 네로 황제의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네로는 AD 64년에 로마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가시키고 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와 바울도 순교당했으며 네로의 공식적인 기독교 박해는 점차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어갔습니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소아시아 이곳 저곳에 흩어지게 되었으나 박해로 인한 고난과 환난은 계속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엄청난 박해로 인한 고난과 시련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는 것을 믿고 끝까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제아무리 어렵고 힘든 고난과 시련이 따른다해도 이 고난과 시련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러한 고난과 시련을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것"으로 알고 오히려 기뻐함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난과 시련이란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요, 필연적인 연단의 과정임을 깨닫고 그 고난과 시련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달아 더욱 더 말씀에 순종하며 더욱 더 뜨겁게 서로 사랑하여 성숙한 신앙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고난과 환난을 당할 때 불평하거나 침체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고난을 이긴 자에게 주어질 영광스런 상급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소망 중에 기꺼이 고난과 환난을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순교자 브래드포드는 화형장에 나가면서 "마음이 기뻐서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십자가 화형을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썩어질 세상과 비겁하게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할 때 얻어지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산 소망으로 간직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 중에 썩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생도 때가 되면 점점 병들고 쇠약해지며 결국 썩어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은 세월이 흐르면 모두가 쇠하여지고 낡아지고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즐기던 문화와 문명도, 한 시대를 지배했던 사상이나 이념들도, 심지어 인간의 모든 종류의 사랑도 세월이 지나면 낡아지고 더러워지고 쇠하여져 결국 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과연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하신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거룩한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사랑은 많은 상처를 남기고 아픔을 주지만 십자가의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이 없으며 상처받은 인간의 고통과 고난을 치유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거룩한 자로 부르시어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피차 뜨겁게 형제를 사랑하는 생활이 가장 거룩한 생활입니다. 그같은 거룩한 생활이 하나님 말씀을 이루는 온전한 생활입니다. 거짓이 없는 거룩한 사랑이야말로 인류의 소망이며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산 소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돈맛이 제아무리 달콤해도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국 교회는 놀라운 경제성장과 더불어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교회생활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성장과 물질이 그 중심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거룩하고 뜨거운 사랑보다는 성장과 물질에 치우쳐가고 있습니다. 이어령씨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그 이후>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일본은 언제나 상품만을 팔았지 사랑을 판 적이 없다. 구미 문화의 강점은 침략성도 있으나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봉사하는 사랑도 있다는 점이다. 마리아 테레사 수녀, 슈바이쳐 등 사랑을 팔고 문화를 팔았다. 일본의 테레사, 일본의 슈바이처는 하나 둘 예외적으로 있긴 하지만 문화나 사랑을 파는 사람은 없다. 일본의 지금의 무역마찰은 결코 단기적으로는 해결되는 않는다. 그러니 일본에서는 앞으로 탄생되는 아이들에게 바른 해결법을 지금부터 가르쳐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랑을 베풀 줄 모르고 물질에만 치우치는 인생은 경제 동물(Economic animal)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남미나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산간벽지 오지, 교육과 의료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 곳에 온갖 질병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한민족들이거나 서양 기독교인들이지 일본 사람들은 눈 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 물건이나 팔아먹을 데가 아니면 아예 찾아가지를 않습니다. 이어령씨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우려 섞인 글로 일본인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일본에서 『일본 침몰』이라는 저서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일본인 각자의 번영은 세계의 번영과 연관이 없다. 일본인만의 번영을 생각했으니까, 멸망할 때도 일본인만의 멸망을 생각한다. 정말로 일본 열도가 망할 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일본 사람을 살려 줄 것인가 어떤가 약간 불안하다.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SF 소설 등이 잘 팔리는 것은 한국인이 망한다는 얘기보다 인류가 멸망한다는 얘기 쪽이다. 아무리 한국인이 애를 써도 이상한 우주 괴물이 나타나서 지구가 파괴된다는 발상이지 그 속에서 한국인만 번영한다는 것 따위는 생각지 않는다. 일본은 확실히 경제 대국이고 훌륭한 번영을 이룩하고 있지만, 세계 전체가 멸망할 때 일본만 번영한다는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침몰하는 배 안에서 포커 하여 돈을 땄다고 해도 정말 기쁠까. 지금 인류라는 커다란 배가 폭풍우를 만나 조금씩 침몰해 가고 있다. 사람들은 마스트나 스크루를 걱정하지만 포커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다. 일본인은 포커만 생각하니까 크게 돈을 딴다. 침몰선 안의 포커 승리자를 진짜 승리자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의 무역 마찰도, 일본이나 구미의 번영뿐만 아니라 온 세계 인류를 어떻게 부흥시킬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일본의 디지탈 시계와 자동차는 아직은 팔린다. 그러나 세계의 경기가 더 나빠지면, 까놓고 말해서 일본의 수출 상품의 90퍼센트는 없어도 된다. 시계가 없어도 태양으로 알 수 있고. 워그맨이나 테이프 레코더가 없어도 살수는 있다.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의식주의 필수품이다. 배가 침몰할 때 제일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은 일본 상품이다. 인베이더게임도, 차도, 카메라도 필요 없다.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허기를 메워 주는 오렌지며 식료품이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캠코더, 카메라, 워크맨 등 전자제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류는 인종을 뛰어넘어 지구촌에 함께 사는 마음으로 피차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갈 때 그 존재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일본은 인류 공존공영을 위한 사랑은커녕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라는 막강한 경제력으로 국제적인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있는 추한 모습까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같은 그들의 모습은 엊그제 일이 아닙니다. 일본인 문화 자체가 왜곡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예를 계속해서 들어보겠습니다.

《말을 사용하는데도 그 본래의 의미를 바꿔 버리거나 정반대되는 의미를 갖다 붙이기도 한다. 노망 든 늙은이를 '황홀한 사람(恍惚の人)'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좁은 아파트 방을 '맨션(邸宅)'이라고 이름짓기도 한다. 전쟁에 졌으면서도 패전(敗戰)이란 말 대신에 '종전(終戰)'이라고 말하고, 역(驛)의 시계가 고장이 나면 고장이라고 써 붙이지 않고 '고치는 중'이라고 하는 것이 일본의 레토릭(修辭法)이다. 세계 어디에서고 점포문을 닫았으면 'Closed'라고 하는데 일본만은 언제나 '준비중'이라고 한다.......한국(중국)에서는 제 아무리 절대 권력을 자랑하는 제왕이라 할지라도 사관(史官)이 기록하는 춘추(春秋)는 개찬은커녕 읽어보는 것마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니혼쇼키(日本書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율령 국가(律令國家)를 만들기 위해 공공연한 역사 조작이 이루어져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이러한 허구의 세계가 실생활을 압도하고 있다. 허구가 지배하고 있는 일본적인 레토릭에 관해 좀더 쉬운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유명한 검객 아라키 마타우에몬의 복수담에 열쇠가게 앞 네거리의 결투가 있다. 이 때 아라키 마타우에몬이 실제로 베어 죽인 적은 두 명이라고 하지만, 전승(傳承)에 의하면 36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실상은 백 명이든 천 명이든 어느 나라에서나 영웅담에는 과장이 따르게 마련이니까 구태여 따지고 들것까지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35명도 37명도 아닌 36명이라는 숫자상의 조작이다. 참으로 그럴 듯하여 사실과 전승을 분간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허구를 사실처럼 꾸며대는 레토릭의 솜씨에 의해 일본 문화에서는 허구와 사실을 분간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무장(武將)들은 전과(戰果)를 입증하기 위해 조선 왕조 백성들의 귀(코)를 베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몇십만 개라는 귀의 숫자를 볼 때는 굉장한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악전 고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귀들은 어디서 난 것일까? 그것은 비전투원인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귀까지 베어서 둘러맞춘 것이다....이러한 모순은 '혼네(本音:속셈.진실)와 '다테마에(建前:명분.명색)'를 편의에 따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일본 사회에서는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 같다....거짓을 진짜인 것처럼 꾸며대는 재능은 하기야 옛날 이야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종이에 인쇄한 무늬목을 합판 위에 발라서 진짜 나무인 것처럼 속이고, 플라스틱으로 통나무 모조품을 만드는 재주에 있어서는 일본인을 앞설 민족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축소지향의 일본인 그 이후. 이어령 저)

돈맛이 제아무리 좋아도 거짓이 없는 참 사랑을 모르고 역사와 하나님 앞에 진실되지 못하며 회개할 줄 모르는 나라 백성은 소망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계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가장 많은 선교비를 들이면서도 복음화가 가장 힘들고 낙후된 곳이 일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미래를 짐작할 만한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거룩한 사랑을 모릅니다. 사탄의 목적은 나라와 백성을 더럽혀 망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이며 진실무망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이 없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과 물질이 여러분의 인생을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 말씀에 순종할 때만 여러분의 영혼이 깨끗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피차 서로 뜨겁게 사랑할 때 자신의 영혼이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산에 들어가 명상이나 기도 등 수도생활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정결하게 할지언정 이웃까지 맑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 중에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할 때 자신과 더불어 이웃의 영혼까지도 깨끗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설사 경제 대국이 되었다 해도 그 영혼이 깨끗하지 못하면 그 나라 백성은 소망이 없습니다. 경제난으로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이 있다해도 끝까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피차 서로 뜨겁게 사랑하므로 영혼이 깨끗한 성도가 되어 믿음의 결국 곧 구원에 이르시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라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1-25)

요즈음 민심과 세태를 읽을 수 있는 사이버 세계에 떠도는 유머 하나를 소개합니다. <장래의 정치가>라고 하는 제목이 붙은 것입니다.

어느 부부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돌을 맞이하였습니다. 남편은 아들이 장차 어떤 인물이 될지 몹시 궁금하여 돌상에 돈과 성경책 그리고 소주 한병을 올려놓았습니다.

"여보, 이게 다 뭐예요?"

아내가 묻자 남편은 이렇게 설명했죠.

"응, 돈을 집으면 사업가가 될 것이고, 성경을 집으면 목사가 될 거야. 하지만 술을 집으면 술꾼이 되겠지."

드디어 아들을 돌상 앞에 앉힌 부부는 떨리는 심정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아들은 돌상 위를 훑어보다 먼저 돈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 다음 다른 손으로 성경을 집어들어 겨드랑이에 끼더니 이내 소주병을 움켜잡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남편이 한숨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후­, 저 녀석은 정치가가 될 것 같애."

이는 우리 시대의 정치인들을 풍자한 정치유머이지만 그 유머 속에서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의 아름답지 못한 단면을 보는 듯해서 별로 유쾌하지 않습니다. 갓난아이들이 모유를 먹고 몸의 발육 상태는 아주 좋은데 정신 발육상태가 좋지 않아 정신 장애를 가졌다거나 발육이 기형적이라면 부모의 마음은 괴롭기가 그지없을 것입니다. 태어난 아이가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이 균형있고 바르게 성장할 때 바람직한 것처럼 예수 믿는 성도와 교회도 몸만 커진다거나 아니면 머리만 큰 기형이라든가 하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몸의 발육 상태를 성장이라고 하고 마음과 정신의 발육상태를 성숙이라고 한다면, 요즈음 한국 교회를 두고 흔히 성장 상태는 좋은데 성숙되지 못했다는, 아름답지 못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없습니다. 이 "신령한 젖"을 예수께서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요한복음6:47-58)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찢기시고 희생하신 자신의 몸을 "참된 양식"이라 하셨고, 그 십자가에 희생하시면서 흘리신 피를 "참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참된 양식이 되는 예수의 살을 먹고 참된 음료가 되는 예수의 피를 마시는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 안에게 거(居)하는 생활"이며, 예수 안에 거하는 생활은 곧 예수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와 교회가 성숙되지 못한 것은 예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든 돈만 많이 벌고, 과정이야 어떻든 성공하고 출세하면 축복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돈을 벌거나 못 벌거나,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을 하든 못하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와 성도가 성숙되지 못한 모습,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에 따른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물질, 명예, 권세 다 잃어도 예수 안에 사는 생활, 즉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 축복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몽땅 누린다해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축복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생활, 곧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 없이는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성숙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열매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세상을 다 잃는다해도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행복한 인생이 되도록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에서 "모퉁이의 머릿돌"(마21:42), "생명수의 반석"(고전10:4), "산 돌"(벧전2:4), "부딪치는 돌"(벧전2:8) 등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온갖 멸시 천대를 받고 끝내는 배척을 받아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여, 겉으로는 건축자가 쓸모 없다고 생각하여 버린 '죽은 돌'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버린바 된 돌이 하나님의 집, 교회를 세우는데 가장 중요한 머릿돌이 되어 인류를 구원하는 "산 돌"(living stone)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인생을 반석 위에 지어 무너지지 아니하는 집과 같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부딪치는 돌", "거치는 돌"이 되어 넘어지고 부서지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반석에서 솟구치는 생명수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믿음으로 예수가 여러분 인생의 "머릿돌"이 되어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아니하는 인생의 집을 짓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열매를 맺어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생은 무너지지 않아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무너지는 인생들을 수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인생의 머릿돌로 삼지 아니하는 인생은 심판날에 그 무너짐이 심할 것입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세상이 변해도, 무너지지 아니하는 여러분의 아름다운 인생이 되도록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건축자의 버린 돌로 무너지지 아니하는 인생의 집을 지으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도가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며 살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나그네와 행인처럼 사는 것"이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육체의 정욕을 죽이고 날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고향으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고향을 찾아가는 어느 한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그는 먼 타국에서 외롭고 고생스런 생활을 하다가 동향 친구를 만나 고향 얘기를 나누다가 그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마침내 고독하고 힘든 지긋지긋한 타향살이에 종지부를 찍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버스를 타기도 하고 기차로 달리기도 하며, 때로는 배를 타고 강과 바다를 건너기도 하며 고향으로 달려갑니다. 가는 도중에 친구가 생기기도 하고, 예쁜 아가씨도 만나기도 하며,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돈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죽고 못사는 친구와 이별이 못내 아쉽기도 하고, 아름다운 산수갑산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예쁜 아가씨와 정착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많은 돈으로 인생을 즐기고 싶기도 하지만 나그네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버리고 고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나그네의 목적지는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고향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지만, 세상 친구나 예쁜 아가씨와 이루는 즐거움이나 기쁨, 세상 물질이나 산천경개가 주는 기쁨 등은 잠시 잠간 뿐이요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이 영원한 고향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데 대부분 마치 고향으로 착각하고 세상에 정착하여 세상이 전부인양 탐욕스럽게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을 소유하고 누리려 합니다. 고향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지만 이 세상에는 영원한 죽음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에서 높은 도덕이나 윤리, 충성이나 정의, 자선 등을 가장 아름다운 덕성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지라도 영원하지 아니하면 들에 핀 꽃 한 송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제일 좋은 것은 영원한 삶이요 제일 나쁜 것은 영원한 죽음이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 죽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듯 이 세상은 한 마디로 생노병사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이 교차됩니다. 성장하면서도 눈물과 웃음이 엇갈리는 세상입니다. 사랑이 영원하고 아름답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한 순간의 불행이 되기도 하고 추한 모습으로 끝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참되고 영원한 사랑이 무엇인지 겨우 깨닫고 나니 어느덧 인생의 황혼을 맞게 됩니다. 앞으로 50년 후 세계인구는 100억명이 넘을 것인데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핵폭탄을 떨어뜨려 매일 9만명씩을 죽인다해도 같은날 23만여명의 신생아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인구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영국 의학 잡지 "The Lacet") 그렇게 되면 개발도상국들의 생활수준은 계속 악화될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 혼란은 보다 심각해질 것이며, 비인간적인 사회 분위기와 범죄 그리고 폭력이 난무할 것이라고 통계학자 비르그는 전망하고 있습니다. 과연 세계화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헷갈립니다. 법정 판결도 변호사의 능력에 따라, 뻗치는 권력의 손길, 경제력에 따라 사건의 진위가 바뀌는 세상입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 되고 실패한 쿠데타는 역적이 되는 세상, 어제의 도덕과 윤리가 오늘에는 비도덕과 비윤리가 되는 세상입니다. 세상 나라 어느 곳에도 영원한 사랑과 평화는 없습니다. 세상 나라 어느 곳에도 영원한 도덕과 윤리는 없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도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과 덕, 그리고 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나라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나라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영원한 고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여러분에게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지나가는 행인처럼 살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나그네와 행인같은 우리 인생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사랑과 덕을 증거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세상 나라에 대해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고향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사는 세상 나라이지만 그 나라의 권력과 권세, 그리고 나라의 모든 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기독교 초기인 로마 당시 로마에는 로마 시민보다 노예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초기 교회 안에도 노예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노예들이 합심하여 얼마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습니다. 노예제도는 교회가 가르치는 평등사상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의 권력과 모든 제도에 순복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순종하듯이 제도에 따라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독립운동을 선동하시거나 로마 제국의 붕괴를 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는 동족의 고소에 따라 로마 법정에 끌려가셨지만 빌라도가 밝힌 것처럼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예수는 부당한 법 집행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힘이 없어서, 권세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과연 예수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23절) 그는 자신이 온갖 멸시 천대를 다 받으며 채찍질 당하고 가시면류관 씌우고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의 길이 곧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셨기에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이 모든 일들을 부탁하셨던 것입니다."(23절) 그러므로 세상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는 생활"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습니까? 오직 선을 행했는데도 고난을 받게 될 때 예수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19절) 바로 이 같은 생활이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의 고난의 십자가는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불의한 세상에 대해 참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많은 세상에 눈감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원객(怨客)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로마는 망했습니다. 진리와 공의는 역사 속에 살아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가 다시 사신 것은 여전히 세상 나라 백성에 대한 그의 왕권은 계속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님이십니다. 나라와 그 모든 제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은 세상의 왕위에 만왕의 왕이 계시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공의와 정의가 구현되도록 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법과 권위가 제아무리 강하고 철권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과 법, 즉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결코 복종할 수 없습니다. 부모일지라도 주안에서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주안에서, 하나님 말씀 안에서 권력과 제도에 복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 고난에 순종함을 보여주셨지만, 이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세상 권력이 하나님의 뜻과 정의에서 벗어날 경우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정치적 입지가 탄탄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지위와 생명을 걸고 지엄한 왕의 명령에 불복종했습니다. 왕이 내린 조서는 "삼십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었습니다.(단6:7-9) 그리고 아무라도 이 조서를 바꾸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분명히 이 조서의 내용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단6:10) 우상 숭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여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다니엘을 제거하려했지만 결국에는 그 불의한 세력들이 사자들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은 지금도 이 시대에 살아 역사를 주관하고 있음을 나라의 지도자들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그 주어진 능력과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에 빠졌을 때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무려 7년 동안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어" 지내었습니다.(다니엘 4:31-33)그러므로 제아무리 막강한 왕권이라 할지라도 겸손히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위한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서 벗어난 것은 그 어떤 위협과 고난이 따른다해도 복종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지만 여러분 앞에는 영원하고 공의로운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법과 정의보다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정의를 앞세워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나그네길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어떠한 고난과 죽음이 뒤따른다해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아름다운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3. 오직 구원을 위하여

(1) 아내 된 자들아 !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7) 남편된 자들아 !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12)

초대 교회 당시 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무시되고 한 인격체로서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에 나오는 여성들은 대부분 이교도 남편과 결혼한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아내와 신앙문제로 인하여 가정이 파탄되는 경우가 허다했었습니다. 이교도 남편들은 아내가 믿는 기독교를 미신이라고 몰아부쳐 멸시하기 일쑤였고 특히 이교도 지도자들은 아내가 남편의 종교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신앙적 갈등이 컸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사랑으로 섬기는 순종을 권면한 것입니다. 부모일지라도 주안에서, 즉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종하듯이, 그리고 국가의 권력일지라도 해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종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단지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 믿지 않는 자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오직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믿음과 바르고 깨끗한 생활, 그리고 온유하고 정숙한 아름다움을 보여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남편을 구원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류를 향하신 유일한 소원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입니다.(딤전2:4)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하나님은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부부란 본래 한 몸이 둘로 나누어졌고, 다시 둘이 한 몸을 이룬 것입니다(창 2:22-24). 그래서 부부를 가리켜 동심일체라 부릅니다. 그리고 부부동심일체란 부부가 서로 평등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부가 일심 동체의 평등관계지만 서로의 성격과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이 다르므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가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인 유교에서는 "부부유별"이라 해서 부부는 상호보완적이되 각자의 일이 완전히 분리되어야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지만 사실 "부부유별", 혹은 "남여유별"은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으로서 남자는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근원이며 여자는 그에 종속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남자는 안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밖의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길을 걸을 때도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으로 다니게 했습니다. 특히 여성에게는 어려서부터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가르쳤습니다. 이는 여자가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조선시대 전체여성의 숙명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유교지배아래 조선시대의 결혼은 오늘날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위로는 조상을 받들고 아래로는 후사를 잇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유교윤리가 조선 전 사회에 확산되어감에 따라 남존여비, 출가외인 사상은 더욱 더 강고해지고 여성들의 지위는 점점 낮아지기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모든 것이 남성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개화기를 맞아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기독교 평등사상이 이 땅에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평등사상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그러나 이러한 평등은 서로가 책임과 의무를 다 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아내에게 주어진 것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종은 과거 유교 윤리에 입각한 여필 종부식의 맹목적이고 주관없는 복종이 아니라, 주를 위한, 그리고 영혼 구원을 위한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힘과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인간을 섬기신 예수처럼 사랑으로 섬기는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남편이 예수 믿지 않을 경우 그 남편에게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심어 구원하기 위해 더욱 더 사랑으로 섬기는 순종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1절). 그러면 아내의 온유하고 사랑스런 마음에 감화되어 그 남편은 반드시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요즈음 아내들이 몸매를 가꾸기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거나 값비싼 보정 속옷으로 치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온유하고 아름다우며 안정된 심령으로 단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보다 마음속을 보신다는 것을 기억하고(삼상16:7) 주어진 외모를 뜯어 고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주어진 외모는 건강하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고 마음은 정결하게 가꾸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은 무엇으로 정결케 될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렘2:22) 인간은 그 더러운 마음을 잿물로 씻어도, 수다한 비누를 사용해도 깨끗이 씻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흑인 소녀가 자기도 백인 소녀처럼 하얀 피부를 가질 수 없을까해서 냇가에 가서 열심히 비누칠도 해보고 수세미로 밀어보기도 하지만 검은 피부가 하얗게 되질 않습니다. 심지어는 모래로 문질러 보기도 하며 거친 자갈로 피가 흐르기까지 긁어보았지만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스스로 그 더러운 죄를 깨끗이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어린 양되시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만 인간은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예수를 바라보며 자신을 더럽히는 모든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예수처럼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 자식에 대한 욕심, 남편에 대한 욕심 등등이 마음을 더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자신을 비우고 사랑으로 섬기는 순종을 통해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은 그 영혼을 구원하며, 예수 믿는 가정에는 아름다운 덕을 세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남편이 아내에게 가져야할 자세는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는 것"입니다.(7절) 여기 "지식을 따라"는 과거 유교적 결혼관계나 세상적인 제도에 따르지 말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제도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조차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음양법칙에 따라 남녀를 구분하고 종속관계로 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심지어는 "북어와 여편네는 삼일에 한번씩 두둘겨 패야 한다."는 말을 장가가는 신랑에게 가르치기까지 했었습니다. 이같은 전통적 습관이 남아있어서 지금까지도 가정폭력이 그치질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10분마다 한명의 여성이 매를 맞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는 가정폭력을 가정 구성원 사이의 신체적, 정신적 또는 재산상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로 정의하고 있는데 모두가 다 이혼사유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 폭력의 유형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신체적 학대인데 이는 원하지 않는 신체적인 접촉이나 두려움과 육체적 상해의 원인이 되는 행동, 자유를 억압하는 행동 등을 말합니다. 둘째 유형은 언어와 정서적인 학대인데 상대방을 불편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언어사용, 비난과 협박, 대화를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것, 심판적이며 무엇을 하라고 강제적이고 위협적인 말과 제스쳐, 외부와의 접촉을 못하도록 고립시키는 것, 자녀들을 이용하여 모욕적인 의사를 전달하는 것, 애완동물이나 가정집기 등을 부수는 행위 등을 말합니다. 셋째 유형은 상대방의 동의없이 성적인 접촉을 강요하는 행위입니다. 넷째 유형은 영적 학대로 종교적 신념에 반하거나 종교적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다섯째 유형은 경제적 학대인데 이는 모든 경제권을 손에 넣고 아내와 자녀를 통제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정당한 생활비를 지급하지 않으면서 아내와 자녀가 경제적 권한을 간청할 때 계략적으로 경제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같은 가정폭력은 남존여비라는 전통적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가정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 "지식"이란 결혼 당사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통찰력을 뜻합니다.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했는데 어찌 하나님의 가장 존귀한 남녀가 만나 함께 동거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없겠습니까? 결혼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은 영원합니다. 여러분이 결혼하기 전부터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결혼생활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기도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이 기도생활이 막히지 않도록 연약한 여성의 체질을 바로 이해하고 귀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아내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함께 나눌 동반자임을 알고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남자 여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결혼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불완전했던 성(性)을 초월한 세계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또한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말씀에서 동거라는 말은 사랑도 없는 동거나 불편한 관계의 동거가 아닙니다. 동거를 하되 육욕이나 정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책무를 인식하고 아내와 함께 동거해야 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툴스토이는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고 육체적 관계만 한다면 자기 아내라 할지라도 간통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아내와 동거하므로 아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미인이 못생긴 남자와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추남과 행복하게 삶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남편은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절대 없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백 마디의 '사랑한다'는 말보다 이같이 마음을 편케 하여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며, 이것이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는 참된 사랑입니다.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다', '하룻밤 자고 나면 다 해결된다', '싸울수록 정이 든다' 등 우리는 부부싸움을 낭만적이고 달콤한 말로 정의해 왔다. 그러나 전쟁상황이 크고 심각할 수록, 패배한 쪽은 모든 걸 빼앗기고 굴욕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데.... 부부싸움도 결국 다른 싸움의 실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혼법률전문가 양정자 박사는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다'라는 신화는 끝났다고 말하며 어차피 해야만 하는 부부싸움이 약이 될 것인지, 독이 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한다. 당신이 더 나은 부부관계, 더 화목한 가정을 원한다면 냉정한 가슴과 치밀한 전략으로 부부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 양정자 박사님의 <부부싸움, 하면 이겨야 한다>(다섯수레 출판) 중에서 이런 부부가 싸운다.

1. 어느 한쪽의 희생을 요구하는 부부

2. 서로를 구속하는 부부

3. 적이 될 수는 있지만 원수가 된다면 차라리 그 전에 헤어지는 편이 낫다.

4. 스승과 제자관계의 부부

5. 심문관과 죄수관계의 부부

6. 십자가를 지우는 관계의 부부

지금, 당신의 부부관계는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해당되는 유형이 어떤 것인지 판단해 보고, 바라는 부부관계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면 당신의 부부관계도 좋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보면 부부가 평등한 관계가 되지 못할 때 부부싸움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 여자가 다 하나이며 동등한 인격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인격적인 언행으로 피차 마음이 상하고 대립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동등함을 부인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권력에 대해 시민으로써 복종하는 것이나, 고용주에 대해 피고용자가 복종하는 것이나, 남편에 대해 아내가 순종하는 것 등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 말씀 안에서 순복하라는 것이며 또한 국가나 고용주, 가정의 남편 등은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로 알아 소중히 여기며 관용으로 보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 땅의 성도는 국가에 대해서는 한 시민이요, 고용주에 대해서는 피고용자로써, 가정에서는 각각 남편과 아내로써 가정이나 사회 직장 등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주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체휼하는 생활은 이웃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기쁨을 모두 함께 하는 생활, 심지어 이웃의 고난까지도 동참할 수 있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러한 생활에 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뒤따른다해도 그것이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기쁨과 소망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복하시므로 남편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되시며, 예수 믿는 가정에서는 더 경건하고 정결함으로 단장하여 노아의 방주와 같은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가정의 남편들은 자신의 결혼과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신앙생활이 단절되지 않도록 더욱 더 아내를 소중히 여기며 마음이 편안하도록 하여 이웃의 영혼까지도 구원하는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4.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까?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1)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화석"(化石,가세끼)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50대의 주인공은 자수성가하여 엄청난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럽 여행 중에 수행 비서에게 걸려온 주치의사의 전화를 우연히 도청하게 되었는데 자기가 말기 암에 걸려 잘해야 앞으로 1년 정도밖에 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절망과 좌절, 자포자기와 허무 속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삽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은 파리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 그에게 다소나마 평온을 찾게 해주었습니다. 죽음을 1년 앞두고 비로소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헛 살아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없이 살면서 일구어놓은 일들이 사실은 별 것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하여 그토록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그 보다 더 귀하고 의미있는 일들을 놓치고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자기를 키워 준 계모를 찾아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만나 나란히 하룻밤을 지새며 형제의 우애를 되새겨보기도 합니다. 수십 년만에 전쟁터에서 사귄 옛 친구도 방문하여 옛날을 회상하기도 합니다. 그의 귀에는 죽은 아내가 들려주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는 구약성서 전도서 1장의 말씀이 생생하게 울려옵니다. 지금까지의 노력과 분투와 분주함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두 딸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별 수 없는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제서야 그는 인생은 그 이상이며 사랑의 폭은 넓은 것이고 창조자가 준 시간은 귀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몇 달을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에 잠긴 채 이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것은 만든 이야기라기보다 대부분의 인간들의 실패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주인공에게 결정타를 가한 말기 암이라는 큰 가시는 그의 생명을 50대에서 끝나게 했으나,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고 짧은 시간이라도 참 삶을 살게 한 고마운 가시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육체의 남은 때가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 남은 때를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사실 말기 암환자에게 내려진 의사의 사형선고 이전에 이미 모든 인간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단지 의학적 판단에 따라 의사가 사형집행일을 예상할 뿐이지 이미 모든 인류에게는 사형이 선고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보다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흔히 듣던 말대로 내일 세상 종말이 온다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습니까? 아니면 아름다웠던 추억의 흔적들을 찾아 마지막 여행을 떠나시겠습니까? 아니면 재산을 정리하여 그간 눈과 마음이 원했던 것들을 원 없이 즐기고 누려보시겠습니까? "유종의 미"란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육체의 남은 때가 얼마가 되든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고 권좌에 올라 마치 제 세상 만난 듯이 군림하다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사람들을 수 없이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나라 역대 대통령들 대부분이 그러했습니다. 국부(國父)라고까지 불리웠던 초대 대통령은 망명지에서 죽었고, 장기 군사독재정권으로 인권을 유린했던 대통령은 결국 믿었던 부하의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고, 5.18광주 민주 항쟁을 광주 시민대학살로 틀어막았던 5,6공의 신군부 정권은 절간을 전전긍긍하다 결국 교도소행으로 결론지었고, 3당통합과 5,6공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정권을 장악한 <문민정부>는 그 교도소문을 활짝 열어 당선사례(?)하고 나라경제를 파탄으로 매듭지었습니다. 6공 정권 및 문민정권과 20억원 플러스 알파의 뒷거래를 한 것으로 알려진 <국민의 정부> 역시 유종의 미를 거두기에는 이미 물 건너간 것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국립묘지나 국군묘지에 묻혔다고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에 가질 수 있는 사람만이 인생의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이나 재력으로 인생의 추한 모습을 미화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였으나 결국 스승을 팔아먹은 가롯 유다, 기독교를 박해했던 네로, 유대인 대학살의 주범인 히틀러 등 역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 사사였던 삼손이나 초대교회 순교자 스데반 등은 죽을 때 처참하게 죽음을 맞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남은 육체에 고난과 죽음을 채워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의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는 이들 삼손이나 스데반처럼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마지막을 장식하신 분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죄로 인하여 당하는 인간의 고난과 죽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온갖 육체의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당해야 할 모든 육체의 고난을 자신의 남은 육체에 채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를 고난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말씀은 주님의 이같은 고난을 기억하고 마음판에 새겨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때 주어지는 어떠한 고난일지라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자고 이래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서 형통하거나 살아남은 사람이나 나라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세상을 사람들의 뜻에 맡겼다면 세상은 벌써 끝장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선하신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지 않도록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둠, 곧 사탄의 세력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예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사탄의 방해를 받아 고난이 뒤따르기 마련인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욕대로 살게 하거나 음란과 방탕, 쾌락과 우상숭배 등에 빠지도록 합니다. 다시 말해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육체의 고난이 뒤따른다해도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정금같은 신앙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자 함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고통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고통이란 수를 놓은 천을 보는 것 같다. 천의 뒷면을 보면 많은 색깔의 실이 무질서하게 얽혀있어 보기에 나쁘다. 고통을 다만 괴로움이나 부조리로 보는 것은 뒷면만 보기 때문이다. 천의 앞면을 본다면 혼란하던 실들의 형태와 색채가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혼잡을 뚫고 아름다운 미래를 본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는 사람,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현재의 고통이나 부조리나 어려운 여건만 보지 않고 그 뒷면에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신 아름다운 내일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고난과 고통이 있다해도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인도의 창조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이 처음에 남자를 만들고 두 번째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창조신은 여자를 연못 속에 피어 있는 연꽃을 가지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여자가 창조신 앞에 섰을 때 신은 이 소녀에게 집을 지어 줄 주택지를 의논하였습니다. 먼저 신은 소녀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네가 본래 연못 속에 살았으니 저 연못 속에다가 용궁을 하나 지어 주면 어떻겠느냐?" 소녀는 연못 속을 들여다보더니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신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연못 속에는 귀신이 살고 무서운 물뱀들이 있으니 나는 저런 음침한 곳에 살 수 없습니다."(인도 신화에 귀신은 연못 속에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둘째로 신은 주택지로서 넓은 광야를 가리켰습니다. "그렇다면 저렇게 밝고 넓은 들에서 네가 살면 어떻겠느냐?" 소녀는 다시 거절하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본래 연꽃이므로 몸이 연약합니다. 광야에는 몹시 바람이 불어서 나 같은 여자는 살수가 없습니다."창조신은 세 번째로 추천하기를 "바람이 싫다고 하면 아주 아늑한 저 동굴 속에다 집을 짓고 살면 어떻겠느냐?" 하고 제안하였습니다. 소녀는 다시 거절을 합니다. "나는 본래 밝은 데서 살던 연꽃이므로 저렇게 어두운 굴에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신이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마침 아침 햇살을 등에 받고 숲 속으로부터 신이 먼저 창조한 남자 시인인 와르미키라고 하는 사람이 밴조를 치면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신은 무릎을 치면서 "내가 어째서 이런 생각을 아직 못 했을까? 소녀여! 저 남자의 가슴속에 들어가 살면 어떻겠느냐?" 하고 새로운 제안을 하였습니다. 소녀는 걸어가서 남자의 가슴속을 들여다보더니 으악 소리를 지르며 어느 때보다도 겁에 질린 얼굴로 신에게 도망쳐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신이시여, 저렇게 무서운 곳에 어떻게 들어가 살라고 하십니까? 남자의 가슴속에는 연못과 같은 음침함도 있고 광야와 같은 모진 사람도 있고 동굴 속과 같은 어두움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악조건이 몽땅 모여 있는 곳에서 살수가 없습니다." 이 때에 창조신이 소녀에게 조용히 말을 했습니다. "그러한 태도를 가지면 이 세상에서 살수가 없고 너는 곧 자살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말고 일단 남자의 가슴속에 들어가거라. 만일 그 가슴속에 음침한 연못이 있으면 너는 그 속에서 한 알의 진주가 되어라. 만일 그 가슴속에 광야와 같은 거친 바람이 있으면 너는 거기에 피어나는 한 송이 백합화가 되어라. 만일 남자의 가슴속에 동굴과 같은 흑암이 있으면 너는 작은 태양이 되어서 그 흑암을 내쫓으라." 이러한 교훈을 듣고 소녀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남자의 가슴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께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이 악하고 더럽다고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선한 행실과 정결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부정부패로 썩을대로 썩었다고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부패한 세상에 소금처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비방과 미움이 가득하다고 증오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더욱 더 열심히 사랑하므로 허다한 죄와 허물을 덮어주며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기도하지 말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 오히려 욕을 먹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고 심지어 고난까지 당한다해도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심을 믿고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한 생활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드러내며 자기를 자랑하지만 그런 것에 유혹되지 말고, 말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여야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바리새인들은 예수 살해를 음모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그 사건을 제도권에 끌어들여 예수 살해 음모를 구체화시켰습니다. 가롯 유다는 어차피 죽게 될 예수를 은 30을 받고 거래했습니다. 예수 살해 선동에 휩쓸린 군중들의 함성과 여론에 밀린 로마 권력은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고 권좌를 지켰습니다. 모두들 자기들 뜻대로 착착 진행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돌무덤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 부활로 그들의 뜻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뜻대로 사는 일들에는 열매가 없으나 오직 하나님 뜻대로 사는 일에만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함께 드리는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 살해를 음모했던 바리새인들

그 살해를 구체화했던 대제사장들

예수 죽음에 무기력했던 제자들

어차피 죽을 예수를 거래했던 가롯 유다

예수 살해 선동에 휩쓸린 군중들

예수 살해에 병기로 쓰인 로마 권력

그렇게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셔서

저마다 자신의 뜻을 이루었으나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저들의 뜻은

모두 열매를 맺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갔고

하나님의 뜻은

열매를 맺어

인류를 구원하나이다.

구원의 하나님 아버지,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의 뜻대로 살게 하소서.

성도 여러분, 육체의 남은 때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육체의 남은 때에 아무리 고난과 역경이 따른다해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시므로 인생의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5. 서로 겸손하라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11)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벧전5:1-11)

오늘날 각계 각층에 여러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력 또한 각양각색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참된 지도력은 겸손과 섬김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먼저 교회 지도자들인 장로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 <장로>란 인품과 용기가 있고 권세있는 집안의 일원을 가리키는 말로 구약시대에는 제사장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에서 신앙공동체 안에서 유능하고 노련한 지도자를 뜻했습니다. 그래서 친족과 지파, 지역사회에서 권위를 행사했고 전쟁터에서는 지휘자요 소송사건에서는 재판관이요 행정과 정치에서는 지혜로 충고하는 자요 참된 증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장로는 공동체를 대표하고 관리하는 그 사회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이 장로가 신약시대에 와서는 지혜와 경험을 겸비한 연장자나 원로라는 뜻 외에 특별한 책임과 의무가 뒤따르는 직분이나 지위를 가진 영적 지도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장로나 감독은 그 자격과 맡은 직책은 서로 비슷하지만, 장로란 직능보다는 신분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명칭이고 감독은 성도의 교육을 담당하고 교훈과 권면을 베푸는 직능을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베드로는 교회 장로를 <양 무리의 목자>라고 부르면서 바른 지도자의 모습을 갖추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처럼 양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 양들을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인도하여 영적 양식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양을 지키고 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과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는 억지로 하지 말고 순종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양들로 불리우는 교인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는 것입니다. 지배자가 되어 세도를 부리거나 다스리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이지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통치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 그리고 복종과 섬김에서 나오는 것이지 군림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어제 저녁에 이웃에 사는 어느 분께서 우리 교회에 전화하셨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것저것을 물으시더니 목사님이시냐 면서 교회도 커 보이는데 어떻게 목사님이 직접 전화를 다 받으시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겉모습만 커 보이지 실은 작은 교회입니다.'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떻게 목사가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없을 만큼 크고 높아졌는가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저희 교회 근처로 이사와 우리 교회에 처음 나온 교인 하나가 예배 후 점심 애찬 시간에 담임목사가 직접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아 평신도들과 함께 섞여 식사하는 것을 보고 놀란 눈으로 의아스럽게 쳐다보더니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전에 다녔던 교회에서는 목사님과 장로님들께서는 따로 마련된 좋은 자리에서 기다리시면 봉사자가 일반 평신도들과 다른 좋은 음식을 대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몇 번 우리 교회에 나오더니 생리에 맞지 않는다며 결국 다른 교회로 가버렸습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 감히 그 앞에 거역할 수 없는 카리스마에 신앙의 효험이 있는 것처럼 길들여진 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평신도가 쉽게 접근할 수없고 만날 수 없을 만큼 되어야 권위있고 실력과 능력있는 목사라는 충고(?)로 받아들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기야 한국의 대형교회 담임목사 한번 만나려면 여간 쉽지가 않다는 항간의 소문, 대통령 아들 한번 만나려면 수 억원이 든다는 항간의 소문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데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거느리고 있는 집단이 대형화되거나 세력화되면 자연히 권위가 붙게 되고 그런 권위를 가지게 되면 자칫 굴종을 바라는 교만한 마음을 갖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 그렇다할지라도 교회의 권위, 교회 지도자의 권위는 예수 십자가에서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시는 것은 사랑과 희생, 그리고 복종과 섬김입니다.

주후 4세기경 콘스탄틴 황제의 모친 헬레나 여사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유대땅 베들레헴에 탄생교회를 세웠습니다. 돌로 단단히 지은 이 예배당의 내부는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수놓은 성화가 있고 강단 밑에는 바로 예수께서 탄생하신 곳이라고 대리석에 별표를 그려 표시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교회가 들어가는 문은 하나밖에 없으며 그나마 매우 작고 낮아서 들어가는 사람이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위해 이 교회에 들르는 사람들은 이토록 불편하게 만들어진 문을 보며 그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안내자는 설명하기를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곳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겸손해야 합니다. 그 겸손을 강조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문을 작고 낮게 만든 것입니다. 누구나 이 교회에 들어가려면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려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만 들어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겸손의 표상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겸손한 자만이 들어가는 곳이요 무릎으로 기어서 올라가는 곳이며 기도와 겸손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입니다. 마음이 겸손하며 낮으면 낮을수록 거기에는 많은 것이 담기는 법입니다. 진정한 교회 지도력은 낮추어진 그릇에 담긴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려면 예수께서 보여주신 겸손을 배워가야 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에게 하늘과 땅을 만드는 법을 배우라, 기적을 행하는 법을 배우라, 병든 자를 고치는 법을 배우라, 악마를 물리치는 법을 배우라. 죽은 자를 살려내는 법을 배우라 하는 등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오직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한국 교회의 병폐 중에 하나는 병 고치는 신유의 은사나 예언하는 은사 등을 나타내거나 아니면 교회가 대형화되어 어느 정도 세력화되면 대단한 권세를 지닌 것처럼 그에 따르고 행세하는 것입니다. 각종 은사는 일시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는 것이지만 겸손은 은사의 유무에 상관없이, 교회의 지위, 직분이나 크기에 관계없이 누구를 막론하고 일평생 동안 배워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겸손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어느 교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겸손을 보려하지 말고 자기의 잘못만을 살펴라. 그러면 겸손은 저절로 배워지게 될 것이다." 여기 자기의 잘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알아야 합니다. 1,2세기 교부시대의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뿌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예식 절차가 있었습니다. "사람아, 너는 한 줌 먼지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먼지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이를 잠시도 잊지 말고 기억하라." 창조주 하나님 앞에 인간은 한 줌의 먼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잘것없는 하찮은 존재임을 항상 기억하여 겸손함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겸손을 배우도록 몸소 그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2-15)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제로 형제의 발바닥 밑에 몸을 굽혀야만 그때 비로소 겸손한 마음이 진실답게 우러나게 된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만, 겸손이 더욱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겸손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질 때 겸손의 참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행동과 마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실제로 남 앞에 자기 몸을 낮추어 굽히게 되면 마음속에서도 그만큼 겸손이 우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옷차림새에 따라 마음 자세도 달라지기도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분에 넘치는 화려한 옷을 차려 입게 되면 그만큼 마음이 들떠서 허영심과 자존심을 부채질하여 쉽게 교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절대로 분수에 지나친 값비싼 옷을 차려 입는 일이 없어야 하고 도리어 남의 눈에 돋보이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검소한 옷을 차려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검소한 차림새로 검소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며 실제 겸손한 행동으로 자기를 낮추어 허리를 굽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겸손이 우러나오도록 하여 겸손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겸손을 배우다."는 말씀을 하시고 나서 곧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30). 또 사도 요한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마찬가지로 겸손은 실천을 통해서만 얻어지고 그리고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단한 실습과 훈련을 통하여 겸손이 몸과 마음에 베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의 실천은 비단 나 어린 사람이나 초보자나 지위가 낮은 사람만이 아니라 교회 장로를 비롯하여 그 신앙연륜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지속적으로 한 평생 배워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인간의 약점은 많이 배울수록, 많이 가질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경험과 연륜이 깊을수록 교만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좀처럼 자기를 낮추어 남을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먼저 그 예수의 마음을 배우고 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 말씀에서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교회 지도력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귀결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겸손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겉모습이 인간이시지만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와 지위를 모두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겸손함을 배우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지위와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그래도 옛날에 부장이었는데, 아니 사장, 교수였는데, 전직 국회의원이었는데 하는 생각들을 몽땅 버려야 합니다. 내가 지금 그래도 목사, 장로인데, 아니 사장, 교수, 국장인데 어떻게 내가 감히 쓰레기를 치우고 걸레질을 하며 청소나 할 수 있겠는가, 아니 내가 이렇게 지체 높으신 분의 지엄하신 부인 마마인데 어떻게 설거지나 할 수 있겠는가, 대개 이런 식으로 섬기는 일 따위는 애초부터 회피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존귀한 하나님의 지위를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섬기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던 예수를 생각한다면 보잘것없는 세상의 지위와 자존심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군대장관으로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수소문 끝에 이스라엘 나라에서 붙잡혀온 작은 계집종으로부터 이스라엘 나라에 엘리사라고 하는 선지자에게 가면 문둥병을 고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엄청난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를 우여곡절 끝에 찾아갔지만 엘리사는 그 크고 존귀한 장군을 맞이하러 문밖에 나와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종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는 말만 전했습니다. 이에 나아만 장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이웃나라 국방장관이 여기까지 예를 갖추어 찾아왔으면 냉큼 쫓아 나와 크게 영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무당 푸닥거리하듯이 손을 흔들어서라도 문둥병을 고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아니냐, 내 나라에 다메섹강이 이 요단강보다 더 깨끗하지 않더냐, 어디 요단강같은 강이 없어서 찾아온 줄 아느냐?" 그러면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신하들을 호령하여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이 만류하며 이르기를, "장관 각하,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밑져야 본전인데 엘리사의 말대로 한번 요단강에 가서 씻어나 보시지요." 일국의 국방장관으로 자존심 상하지만 아쉬운 놈이 물 떠러 간다고 눈 딱 감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고 나니 그야말로 씻은 듯이 나아 어린아이 살결같이 되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지위와 자존심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영영 문둥병자로 인생을 마쳐야 했을 것입니다.(열왕기 하 5장) 전직이 무엇이었든, 현직이 무엇이든 그 얼마 안 되는 지위와 몇 푼 안 되는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의 겸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체면손상을 불사하고 노예처럼 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말을 고상한 신학적 용어로 <성육신>이라고 하지만 이는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엄청나게 치욕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를 가졌던 분으로서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천사보다도 훨씬 더 낮은 데로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히2:9). 여러분이 만약 자고 났더니 하루아침에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되었다면 그 모습을 견디어 낼 수 있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시고 광대하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은 체면이든 수치이든 그 어떤 멸시 천대를 다 받는다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사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살기 위해서는 별 짓을 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왕의 끝없는 추격을 받아 생명의 위험을 느낀 다윗은 할 수 없이 이웃나라 가드로 도피했습니다. 그러나 가드왕은 이미 이스라엘의 다윗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바로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는 사울보다 다윗이 훨씬 뛰어난 장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빼어난 장수가 제발로 굴러 들어왔으니 어찌 가만 두겠습니까? 이를 눈치챈 다윗은 갑자기 행동을 바꿔 침을 질질 흘리며 대문짝에 어그적거리며 마치 미친사람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자 가드 왕 아기스가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저 다윗이 미치지 아니했느냐? 이 나라에 미치광이가 없어서 저런 놈을 데려왔느냐? 당장 내쫓으라" 그래서 결국 그곳을 나와 생명을 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삼상21장) 만약 다윗이 도망자의 신분을 망각하고 찬란했던 지난날의 경력에 연연하여 체면치레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을 기뻐할 때 모든 체면을 다 버리고 춤을 추며 하나님 앞에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다윗성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나팔을 불며 즐거워하며 춤을 출 때, 마치 방탕한 자가 자신의 몸을 드러내어 춤을 추듯이 엉덩이가 드러나도록 신명나게 즐거워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왕이라 해서 점잖 떨며 체면치레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같은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춤추는 모습을 천박하게 생각했던 아내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과연 하나님 앞에서 모든 체면을 버리고 자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낮추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했던 다윗은 하나님께서 크게 높이셨고, 다윗에게 왕으로서 체통도 없이 그게 무슨 짓이냐고 핀잔을 퍼부었던 그 아내 미갈, 사울의 딸은 불행하게도 죽을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해 오히려 천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삼하6장) 그러므로 어떠한 수치를 당해도, 체면손상을 불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섬기는 모습으로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종의 형체를 지녔다."는, 즉 노예처럼 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당시 노예가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를 익히 잘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노예는 자기 주장이나 의견이 없습니다. 오직 있다면 주인의 명령과 주인의 뜻만 있을 뿐입니다. 또한 노예에게는 지위는 물론 그저 노예일 뿐이지 아무런 지위나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 노예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주인의 명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그에 따른 책임만이 있을 뿐입니다. 노예가 주인의 뜻대로 잘 했다고 해서 노예에 대한 주인의 칭찬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종의 자세는 이렇습니다. 어느 집에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는데 그 종이 자기 할 일을 다 마치고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그 주인이 '자, 수고했다. 내가 준비한 저녁식사를 함께 먹자'하겠습니까? 도리어 주인은 '자 빨리 저녁 준비해라 그리고 식사 중 옆에 서서 시중들거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킨대로 다 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수고했다며 '사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종, 노예는 주인의 이러한 명령을 다 행한 후에도 오직 할 말이 있다면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내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누가복음17:7-10)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최후로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동안 참으로 수고했다면서 그만 십자가를 물리고 예수에게 사례하셨습니까? 노예에게는 오직 죽기까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할 따름인 것입니다. 참된 겸손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아무리 험하고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그리고 가장 치욕스러운 것이어도 죽기까지 복종할 때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참된 겸손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만 품게 된다면 사실 제아무리 험악하고 고통스럽다고 해도 얼마든지 그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순종은 죽기까지 하는 순종이어야 참된 순종이며 참된 겸손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종이 자신의 귀를 뚫어 주인에게 영원히 순종하겠다는 표시를 했듯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귀를 뚫을 것이 아니라 주님께 영원히 순종하겠다는 표시로 귀를 뚫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같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의 겸손함을 배우기 위해 십자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훌륭한 예술품이라고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그 그림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자 그 그림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로 인해 늘 붐비고 있었습니다. 어떤 유명한 화가도 그 초상화를 보기 위해 코펜하겐까지 왔습니다. 그는 그 그림을 면밀히 조사해 보았으나 그림의 기법이나 색채감이 별로 특별하지 않아 실망하였습니다. 그가 함께 온 친구에게 그의 소감을 이야기하자 친구는 "여보게, 그것은 자네가 잘못 본 걸세. 그 그림은 마주 서서 보는 것이 아닐세. 어떻게 우리가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얼굴을 마주 보겠나? 무릎을 꿇고 앉아서 다시 보게. 그러면 그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알게 될 걸세."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화가는 다시 들어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끓고 그 그림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와 사랑의 모습이 그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감동된 화가는 언제까지나 무릎을 꿇고 그 그림을 황홀한 모습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신앙생활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겸손의 표본이신 주님을 낮아지지 않은 세상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어찌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이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의 겸손을 배우기 위해 먼저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를 바라보는 생활로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장차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