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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만한 믿음이 있느냐?

2.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3. 네 믿음이 크도다

4. 신앙과 현실

5. 나를 믿을 수 있느냐?

6. 신앙과 하나님의 뜻

7.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8. 믿음으로 가는 길

9. 믿음의 법

10.이신득의

11.믿는 자의 조상

12.아브라함의 믿음

13.믿음의 생활

14.믿음의 분량

15.부활 신앙

16.성숙한 믿음과 자유

17.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라

18.진보하는 신앙

19.믿음이란?(1)

20.믿음이란?(2)

21.믿음의 시련

22.참된 믿음

23.믿음을 지키라

24.예수 믿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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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만한 믿음이 있느냐?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 8:5-13, 참조 : 눅7:1-10, 요 4:43-54)

어거스틴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선생님 어떻게 해야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대답하기를 "겸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제자들은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두 번째 비결과 세 번째 비결을 물었고 그때마다 어거스틴의 대답은 한결같이 겸손을 말하였습니다. 믿음 중에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믿음은 사랑을 겸한 겸손한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의 형체로 오셨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보여주신 가장 모범적인 신앙의 형태는 사랑을 겸한 겸손한 믿음인 것입니다. 교회가 대형화, 비대화되는 가운데 교회 본연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겸손입니다. 교회가 작든 크든 끝까지 간직해야 할 모습은 사랑을 겸한 겸손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은사중심의 교회, 은사중심의 믿음생활은 대부분 그 열매가 전무합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그 신앙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겸한 겸손한 믿음의 교회는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이원규 교수의 갤럽조사에 따른 종교분석에 의하면, 한국의 종교가 이 땅에서 계속 실망을 주다보니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도 거세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종교에 관한 무관심이 9.1%(1984년)이던 것이 26.4%(1997년)로 껑충 뛰었고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은 9.6%(1984년)이던 것이 22.7%(1997년)로 종교에 등 돌리는 국민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를 가진다면 개신교로 개종하겠다는 사람은 21.4%(불교의 41.8% 카톨릭의 36.7% 보다 훨씬 낮다.)로 개신교의 전망은 심히 어둡기만 하다고 말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대체 무엇 때문일까? 한 마디로 교회가 좋은 열매를 보여 주지 못해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도할수록 더욱 더 겸손하여 사랑으로 섬기는 일이 깊어지고 넓어져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알수록 더욱 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져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처럼 십자가를 지고 참된 사랑으로 이웃을 섬겨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간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량적으로 대형화, 비대화되면서 그것이 한국 교회의 성공사례인양 행세하면서 예수의 참 모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인공인 로마의 백부장(1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로마군대의 중견 지휘관)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신 백부장은 사랑을 겸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하인(노예)이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백부장은 자신의 종이 병든 것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여 고쳐주고자 했습니다. 이같은 마음 씀씀이는 당시에 주인이 노예에게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의 노예는 사람 축에 들지도 못했습니다. 노예들의 생노병사 희노애락 등은 주인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예는 살아 있는 도구에 불과했고 물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법적 권리라고는 하나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 주인은 자기가 좋은대로 노예를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든지 학대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저술가 바로(Varro)는 농업에 대해서 쓰되 농기구를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언어를 가진 도구, 언어가 없는 도구, 소리 없는 도구 등인데 <언어를 가진 도구>란 노예를 의미하며, <언어가 없는 도구>란 가축을 말하며 <소리 없는 도구>란 운반수레들을 말합니다. 노예와 짐승 혹은 마차와의 유일한 차이란 노예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낡아서 못쓰는 농기구는 내다 버리는 것처럼 늙고 병든 노예는 주인의 뜻대로 얼마든지 내다 버려 죽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 병든 노예를 불쌍히 여겨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이 백부장은 특별한 인격자였음이 분명합니다. 평소에 노예들을 인격적으로 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감동했던 것은 바로 이 부분, 즉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던 하찮은 노예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중풍병에 걸려 쓸모도 없는 노예를 얼마든지 내다 버리든가 아니면 죽여도 그만인데 그를 소중한 한 생명으로 여겨 사랑으로 섬긴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큰 사람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찮은 사람에 대해 사랑을 베푸는 사람 곁에 예수는 항상 계십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머리털까지 다 세실 정도로 그 사랑이 지극하십니다. 예수께서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태복음18:10-14)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의 이 백부장은 소자 중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랑을 겸한 믿음을 가진 진정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이 백부장은 신앙에서도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자기 종이 낫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직접 그 집에서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며 그의 거침없는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신앙을 기뻐하시고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어 유대인이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 백부장처럼 아무리 이방인일지라도 예수의 말씀 한 마디를 믿고 사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천국가는데 필요한 것이 국적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기가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름 하나로 하나님의 특별한 가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라는 족보만으로도 구원을 얻어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바는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특수한 민족이나 특별한 계층만의 소유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민족에 관계없이 마음속에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3:16) 백부장은 유대인이라 아니라 유대인이 멸시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바로 이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이 자기의 종을 그처럼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것을 보고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는 다른 어떤 것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께서 자기 종에게 "일어나라"고 다만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시기를, 중풍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자기 종에게 가시지 않으시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다만 말씀 한마디만 해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백부장은 주의 말씀을 의심치 않고 믿었고 그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권세있는 명령을 발하실 때 종의 질병이 그 한 마디의 명령으로 곧 떠나가고 말 것을 확실히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백부장은 눈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시는 주님을 전인격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믿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귀하고 숭고한 형태의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마라하는 제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말에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후 8일이 지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20:24-29) 어떤 신체적 접촉을 한다거나 환상을 보는 따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 증거에 의지하지 않은 믿음이야말로 복된 믿음, 칭찬받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려 하지도 않았고, 예수의 몸이 닿은 손수건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의 말씀 한 마디면 충분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러한 백부장의 태도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우주의 통치자, 천지 만물의 주관자로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당시의 많은 군중들이 예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던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그 무엇을 보여 달라는 그 요청 또한 오늘날 우리들의 요청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감각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요한복음1:1)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인격적인 믿음입니다. 말씀 한 마디에 생사를 걸고 사는 사람이 흔하지 않습니다. 과거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간주 단호히 생명을 걸고 거절하다 순교당한 주기철 목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한 마디를 그대로 실천하여 자기 아들을 무참히 죽인 공산당원을 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 등이 바로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말씀 한 마디를 그대로 생활에 옮기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 2:26). 과연 본문의 백부장은 '살아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철두철미한 계급 사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구태의연한 권위 의식에 물들지 않고 종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랑의 인격을 소유한 보기 드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그 종을 사랑하고 아꼈으니 종의 병을 낫게만 할 수 있다면 어떤 수고라도 기꺼이 감수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신의 성품, 곧 사랑과 온유, 친절과 겸손을 구체적으로 생활 속에서 나타내는 살아있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믿노라 하면서 이러한 실천적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 가운데 그와 같은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믿음이요 헛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확증할 수 있는 길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의 참된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믿음의 삶은 이렇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4-21)

여러분에게 여기 이 백부장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사랑을 겸한 겸손한 믿음, 살아있는 믿음'으로 예수께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노라"는 칭찬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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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눅 8:22-25, 참조 : 마 8:23-27, 막 4:35-41)

<가족>이라는 제목의 어느 삽화에 실린 글입니다.

"한 사람의 한숨에

다같이 흔들리고

한 사람의 눈물에

다같이 젓는 것이 가족이다.

한 사람의 콧노래에

다같이 즐거워하고

한 사람의 희망에

다같이 가슴 부푸는 게 가족이다."

다음 글은 가족 한 사람으로 인해 가정이라는 작은 배가 난파당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날 밤 우리 세 모녀는 떨고 있었습니다. 저는 계속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었지요 '제발, 제발...오늘만이라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갔으면...' 드디어 초인종 소리가 울렸습니다. 남편은 역시나 술에 만취한 채 들어왔고, 그 때부터 우리 세 모녀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물건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우리의 각본대로 일은 벌어졌고, 저는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119에 신고한 뒤, 남편을 병원에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격리 수용이라는 단어 때문에 남편은 주위 사람들의 입원 제의를 거부해 왔던 것이지요. 신고를 받고 달려온 119 대원들은 발버둥치는 남편을 끌고 갔습니다. "여보, 용서하세요." 사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 우리 세 모녀는 교회 바닥에 꿇어앉아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주님, 오늘도 아이들 아빠가 약속을 어기고 술에 만취 또 때린다면 이제는 그를 위해서라도 병원으로 보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멀쩡한 정신으로 들어온다면, 주님이 그 방법을 원하고 계시지 않는다 생각하고, 다른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주님.' 결국 남편은 정신병동과도 같은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이젠 밤마다 그로 인해 두려워 떨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면회 때, 남편은 내 얼굴 보기를 거부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이 방법밖에는 당신과 우리들을 살릴 방도가 없었어요." 남편은 참기 힘든, 특히 술을 먹으면 안 되는 병원생활 속에서 저를 무척 원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우리 세 모녀에게 잘못을 저지른 건 인정하면서도 가장인 자기를 격리 수용한데 대한 분노가 더 컸던 모양입니다. 그는 저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발버둥치며 병원으로 끌려가던 그 때의 일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합의이혼' 까지 가야만 했지요. 결혼생활 18년째였습니다. "엄마, 잘 생각하셨어요. 저희는 엄마 이해해요. 우리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저희도 다 컸잖아요." "얘들아..." 아이들과 또 부둥켜안고 마냥 울었습니다. 정말 이렇게까지는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정을 파괴해버린 그 '술'이란 게 너무 미웠습니다. 술만 취해있지 않으면 그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이혼을 하고 우리 세 모녀는 방을 얻어 나왔습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고, 다행히 남편은 통원치료만 할 정도로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미안하오. 다 내 잘못이오. 건강한 모습이 되면 아이들과 당신 앞에 다시 나타나리다. 그 때는 날 다시 받아 주구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각자 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립니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라도 우리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우리 네 식구가 모이기만 하면 피아노 앞에 서서 멋진 화음을 연출했던 그 시절...오늘도 우리 세 모녀는 기도를 마친 후에 그 노래를 불러보곤 한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낮은 울타리6월호에서)

사람이 태어나서 한 평생을 살아갈 때 삶의 크고 작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 풍랑을 만나서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무사히 극복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난파당하여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내용은 풍랑을 만난 사람들에게 그 풍랑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서 갈릴리 바다 중간쯤 이르렀을 무렵이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거센 풍랑이 일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광풍으로 돌변하면서 마치 천지를 삼킬 듯한 무서운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배는 당장 박살날 것만 같았고, 제자들은 물벼락을 맞으면서 실신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잠들어 계셨고, 제자들이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자 태연히 일어나서 '잔잔하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그토록 무섭던 바다의 광풍을 아주 고요하게 만드셨습니다. 광란하는 폭풍과 파도, 그리고 깨어져 갈듯이 요동하는 작은 배 등, 그것은 분명히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는 가장 극한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 중에서도 예수께서는 작은 배의 고물에서 조용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목숨들이 경각에 달려 있는 그런 급박한 시간에 어떻게 그처럼 조용히 잠들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제자들이 황급하여 제발 살려 달라고 소리쳐 일깨우자, 그분은 조용히 일어나서 곧 잔잔하라 하시면서 저토록 광란하는 바람과 파도를 아주 평온하게 잠재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지니신 평화였습니다. 여러분 삶에 풍랑이 일고 있습니까? 예수 믿으시고 예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고물에서 조용히 주무시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풍랑이 들이치자 제자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습니다. 할 수없이 그들은 고물에서 예수님을 찾아 낸 다음 흔들어 깨우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는 구원을 호소하는 것이라기보다 그냥 체념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함께 계시다는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삶의 평강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을 때, 갈릴리 호수에서 수 십 년 동안 고기잡이하며 살았던 제자들은 당시 호수를 배로 건너가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니 거절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도 그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에 크고 작은 풍랑, 광풍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걱정하실 것 하나 없습니다.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재난이 없이 모든 일이 다 잘 되어 갈 때에는 마치 한 척의 돛배가 순풍을 타고서 잔잔한 물결 위로 미끄러져 나아가듯 행복을 노래하다가도, 자기 삶의 현장에 예기치 않았던 재난이 떨어지면, 마치 돌풍을 만난 돛배처럼 저 행복의 노래는 속절없이 깨어져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폭풍이 일지 않는 바다가 어디 있고, 사철 잔잔키만 하는 호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참된 평안은 환경이나 다른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전해지는 평안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광풍노도 가운데서도 평안히 잠드셨던 예수님의 평안이 바로 그런 평안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하늘의 평화, 곧 근원적이고도 원천적인 평화는 바깥 환경을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여러분의 깊은 내면을 통하여 항상 내려질 것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리하면 주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명령하십니다. "고요하라, 잔잔하라." 이 한마디 말씀에 그처럼 무섭던 광풍노도가 꿈처럼 사라지고 배 안에 평안이 찾아 들었습니다. 그 한 마디는 분명히 하늘의 음성이었고. 그 음성이 무서운 바람과 파도를 평정시켰습니다. 그런 평화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고.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평안을 소원하시는 여러분,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 부닥치는 환경에서 눈을 돌려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를 믿고 하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진정한 평안이 깃들게 될 것입니다.

장로교 선교사인 벤자민 웨어(Benjamin Weir) 목사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국제 테러단에 납치되어 16개월 동안 세상과 격리된 감금 생활을 하고, 살아 나온 뒤에 자기의 경험을 써서『갇힌 인질, 풀린 인질(Hostage Bound, Hostage Free)』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고문당하고, 소식이 끊기며, 세뇌당하는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는 중 위로가 있다면 새벽에 변소에 가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창문 밖을 내다보고 싶어 변기 위에 발을 딛고 올라섰습니다. 그 곳은 높은 곳이어서 마침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고 숲과 산의 능선과 찬란한 구름들, 새벽을 맞는 대자연, 벡카 골짜기와 멀리 눈에 덮인 높은 산맥이 보였습니다. 웨어 목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창조자의 이 장엄한 선물은 하루종일 나의 기억 속에서 하늘의 음성이 되었습니다. 그 음성이 나에게 살아야 한다는 희망과 살아서 무엇인가 창조자를 위하여 그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분명 한 생명의 의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역시 변소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던 웨어 목사를 발견한 테러단은 그것마저 못하도록 변소를 옮겼으나, 그는 이젠 눈으로 보지 않아도 기억 속에 남은 그 장엄한 감격과 하늘의 음성을 언제나 보고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웨어 목사는 천상의 음성을 대자연을 통해 화장실에서 들었지만, 하늘의 음성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며 하늘의 음성에 접하고 힘과 용기를 얻는 이도 많고 예배 찬송에서, 혹은 성가대의 찬양에서 하늘의 음성을 접하고 감격과 희망을 갖는 이도 많습니다. 예수 믿고 예수의 말씀 가운데 삶의 참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인생의 폭풍이 잔잔해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함께 하시면 가장 무서운 폭풍도 잔잔케 됩니다. 예수가 계시는 곳에는 어떤 폭풍이 불어 닥쳐도 평화가 있습니다. 차고 쌀쌀한 슬픈 바람이 불어닥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참된 평화와 위로가 있습니다. 격정의 열풍이 불어와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평화와 안전이 있습니다. 의심의 폭풍이 신앙의 토대를 흔들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굳건한 안정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요동시키는 모든 폭풍 속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계시는 곳은 어디나, 어떠한 광풍노도일지라도 잔잔하게 되어집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있느냐?"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예수를 굳게 믿으시고 광풍노도가 이는 바다같은 인생항해에 평강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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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네 믿음이 크도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5:21-28)

만약 오래 동안 병들어 고생하는 딸을 둔 여러분에게 "너 같은 사람을 위해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 아니야, 사람이 어디 사람같아야지, 개보다 못한 주제에 무슨 예수를 믿는다고?"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래도 예수 믿고 우리 평강교회에 나오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디 종교가 기독교뿐이냐? 어디 교회가 평강교회 하나 뿐이냐? 그 보다 능력많고 용한 종교도 많고 교회도 쌔고 쌨다."며 발길을 돌려 버리겠습니까?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였습니다. 어떤 이방 사람,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께 소리질러 간청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7절). 그러나 예수는 들은 채 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줄기차게 귀찮을 정도로 따라오며 제발 도와 달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보다 못한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저 여자를 어떻게 해서 돌려보내시지요?" 그러자 예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냉정하게 그 간절한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습니다. 아마 동족이 아니어 안 된다는 말에 암담했을 것입니다. 병 좀 고쳐 주는데 무슨 인종을 차별하느냐 따지며 대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귀신들린 딸이 너무나 불쌍할 뿐만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 발 앞에 바짝 엎드려 다시금 간청했습니다. "주여, 제발 저를 도와주소서." 라며 비명에 가까운 절규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께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들의 떡을 어떻게 개한테 던져 준단 말이냐?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26절). 한 마디로 개같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딸 좀 고쳐보겠다고 참으로 참기 어려운 너무나 치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참담해졌을 것입니다. 흉악히 귀신들린 딸만 아니었다면, 네 눈에는 개밖에 안 보이냐? 살다 보니 재수 옴 붙었다며 침이 탁 ?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같은 예수의 말씀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나 체면도 불사한 채 기막힌 말로 간청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실로 그녀는 "주여, 당신의 말씀은 백 번 지당하십니다. 제가 개가 된다한들 어떻겠습니까? 제 딸만 고쳐주신다면 한이 없습니다. 제 딸을 살려낼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는 없습니다."며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매달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 말에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흉악히 귀신들렸던 가나안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개같은 취급을 받으면서도 예수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개같은 취급을 받을지라도 예수를 믿고 따를 만한 가치가, 아니 그보다 더 엄청난 보화가 그에게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그렇게 취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시험해 보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을 모두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시고 계십니다. 물론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권좌에서 쫓아내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뜯으며 무려 7년을 지내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칭찬하신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은 무엇보다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요즈음 여인들 가운데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도 먹여 살리기 힘들거나 정신과 지체에 장애가 있으면 거침없이 내다 버리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되는데, 이 가나안 여인은 그보다 더 심한 흉악히 귀신들린 딸이라도 너무나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이 여자는 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 여자의 심장에는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자식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예수의 무정한 침묵에도, 그보다 더한 멸시 천대를 받아도, 더 나아가 개같은 취급을 받아도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자존심과 체면을 몽땅 버리고 예수 앞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 그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사랑에서 비롯된 믿음이야말로 큰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이 하게 하고 더 강하게 역사하는 것은 없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자식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오직 예수에게만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뉴욕의 유명한 설교가인 노만 빈센트 필 목사가 후두염에 걸렸습니다. 의사를 찾아갔더니 "혹시 걱정되는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계속적인 걱정은 설교 때문입니다. 주일 설교 수요예배 설교, 초청 설교 등 무슨 내용을 준비할지 1년 내내 걱정이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이때 의사가 목사에게 설교했습니다. "당신의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착하시오.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까?(Don`t focus on your problems but on God)" 이 의사의 말 "당신의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착하시오" 는 나중에 필 목사의 설교가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오직 사랑하는 딸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에게만 집중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자식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먼저 예수에게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부모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먼저 예수에게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까? 먼저 예수에게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를 당한다 해도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개같은 취급을 받아도 절대로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개 취급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굽히지 않는 믿음을 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손해볼지도 모른다거나 막연하게 기도하면 어떤 좋은 일이 생길거라는 생각으로 기도하지 마시고 전심전력을 다해서 기도하고 매달리는 믿음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가면 혹시나 귀신들린 딸이 고침받을지 모른다는 만일의 도움을 기대한 것이 아니고 오직 희망은 예수밖에 없다는 절대절명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어떠한 경우를 당하고, 어떠한 말을 듣는다 해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인내를 가지고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꿀벌이 1파운드의 꿀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5만6천 송이의 꽃을 방문해야 합니다. 가령 클로버 꽃인 경우 한 송이 안에 60개의 튜브가 있으므로 벌은 336만 번의 작업을 거쳐 1파운드의 꿀을 얻습니다. 우리는 그 꿀벌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1파운드(약 450g)의 꿀을 얻기 위해 <5만6천 송이의 꽃>을 방문하는 꿀벌의 인내와 집중력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가이 보여준 것은 기도와 믿음이 의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뜨거운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영혼을 쏟아 붓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와 같은 치욕적이고 인격에 치명적인 말을 들었다 해도, 아니 그같은 냉대와 홀대를 받았다 해도, 그런 말과 대접에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흔히 교회 내에서 교우들간에 시험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가 상대방의 말 때문에 일어납니다. 험담이나 약점을 들어 얘기하거나, 멸시하는 말, 비인격적인 말을 듣게 되면 상당히 충격을 받고 교회를 떠나겠다니 신앙생활을 그만두겠다며 협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됩니다. 금년 한 해 동안 교회 생활하는 중 교우들로부터 소위 <개 같은 취급>을 받는다 해도 예수 앞에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마시고 가나안 여자처럼 불굴의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야 마는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라고 해서 여러분의 마음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던지는 돌에 넘어지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돌을 주워 기초가 튼튼한 인생의 집을 지으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번 옆 사람에게 "얼마든지 돌을 던져 보라"고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돌을 던질 때마다 그 분에게 "돌을 던져 주어 감사하며 영광입니다."라며 감사드리며 기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돌을 던지셔도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던진 벽돌에 걸려 넘어가도 그 벽돌을 주어 기초돌로 삼고 집을 짓기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데이빗 브린클린) 자식에 뜨거운 사랑으로 그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큰 믿음으로 소원이 성취된 가나안 여인처럼, 여러분도 예수의 뜨거운 사랑의 심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여러분의 소원이 주안에서 성취되시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심장에 뜨거운 사랑이 있는 사람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같은 멸시천대를 받아도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않는 밝은 마음으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며 주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는 여러분이 한해를 살면서 어떠한 경우를 당한다 해도 항상 밝고 소망이 넘치는 마음으로 신앙 생활하기를 원하십니다. 가나안 여인은 비록 집에는 흉악히 귀신들린 딸로 인해 어두움으로 가득차 있을지라도 예수를 만나고 나서 어두움을 밝게 비칠 수 있는 소망과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명랑한 신앙, 그 눈에는 언제나 소망의 빛이 가득찬 신앙, 어떠한 어두운 말을 들어도, 어떠한 힘들고 어려운 경우를 당해도 어두워지거나 절망하지 않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여자같은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그러한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예수의 태도와 말씀이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예수께서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크게 만들고자 그처럼 큰 시련을 주셨던 것입니다. 요컨대, 담금질 없는 제련은 없는 법입니다. 시련이 클수록 큰 믿음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서 여러분의 믿음을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어떠한 시련과 시험이 닥친다 해도 도리어 여러분의 믿음이 큰 믿음으로 자라 예수의 칭찬과 인정을 받으시고, 여러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시는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의 명절 중에 <하누카>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전 165년에 유다 마카바이오스가 로마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재건한 일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예루살렘을 탈환했다고 하지만 수만 명이 피를 쏟은 처참한 전쟁이었습니다. 폐허를 헤치고 예루살렘 성전에 오랜만에 들거간 유대인들은 메노라(menorah -- 일곱 개의 촛불을 밝히는 큰 촛대)에 불을 밝힙니다. 그러나 초는 구할 수 없고 누가 올리브유를 구해 왔습니다. 그나마 하루 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올리브유를 구하고 기름을 짜는 시설을 갖추어 제품이 나오기 시작하려면 최소한 8일은 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메노라에 불을 밝히는 것이 곧 하나님이 그 성전에 내려오시는 것을 의미하므로 하루도 지체할 수 없어 우선 오늘 기름을 쓰고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자는 믿음으로 성전의 불을 밝혔습니다. 놀라운 것은 기름이 8일 동안 마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8일간 하누카를 지키며 하누카 명절을 일명 "빛의 명절"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하루의 기름을 쏟을 때, 남은 7일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소원을 위해 남아 있는 하루 분의 기름을 다 쏟아 부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생애 내내 빛의 명절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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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앙과 현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14)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 `주여 !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1-20, 참조 : 막 9:2-13, 눅 9:28-36)

1. 오늘 본문을 유명한 화가 라파엘의 그림을 통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변화산상에서 기도하시다가 얼굴이 변화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그림 상단에 위치해 있고, 그 아래 잠에서 막 깨어난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있으며, 그림 하단 산 아래에는 귀신 들린 아이와 그 아버지, 그리고 군중들과 제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3단계로 구분하여 본문의 광경을 그린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산 밑에서는 고통과 절망이 꿈틀대며 신음하고 있고 혼란과 위기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산상에서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다가 깨어나서는 황흘하고 눈부신 주의 광채를 보고 마냥 좋아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그 광채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세 제자가 잊고 있는 산 아래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죄 속에 빠져 헤메이는 그들을 위해 몸소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모세, 엘리야와 함께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 심중을 모르는 세 제자는 그저 광채에 눈이 팔려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산상의 기쁨과 변화, 즐거움이 좋을 뿐 아니라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주께서 세 제자를 산상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 제자를 산상으로 데려가셨던 그 주님이, 그들이 그곳에 있기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산 밑으로 데리고 가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산상의 그 빛난 광채 속에서 주께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내뱉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말이 혹 오늘날의 교회가 하고 있는 말이 아닌지, 혹 여러분이 늘 하는 말은 아닌지? 제자들의 어리석음은 라파엘 시대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단과 싸우거나 불신자에게 멸시받기 보다는 교회 안에서만 찬송하며 성도와 교제를 나누며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산 아래로 내려오신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당신들을 산상으로 부르셔서 영광과 즐거움, 변화를 보여 주셨다면, 이제 그 주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심정으로 죄 속에 있는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간질에 걸려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발광하며 고통당하는 사람과 그런 아들을 둔 부모의 참담한 현실, 그리고 이들을 고쳐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던 제자들의 낭패스런 모습,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 낙심과 연민에 가득한 군중들의 모습, 이 모든 현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서 암담한 현실 속에 고통당하며 절망하고 있는 이들을 끌어안고 빛과 생명과 소망이 되신 예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산 밑으로 내려 가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대에 생명줄을 던져야 합니다. 기독교는 산 위에서 신비나 이상만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현실을 구원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예수께서 죄 많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포로된 자, 억눌린 자 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은 현실과 동 떨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을 뜨거운 사랑으로 끌어 안는 것입니다.

2. 며칠전 한국 경제의 실패를 책임지고 물러선 강경식 부총리에 대한 어느 신문 기자의 평입니다. <시장경제에 실패한 시장경제론자. 이상 좇다 현실에 발목잡힌 이상주의자>. 그가 신봉했던 시장경제 이론은 우리 경제가 궁극적으로 가야할 이상적인 이론이었지만 우리의 경제 현실이 그 이상을 따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추구한 이론과 정책들은 금융개혁추진, 금융실명제보완, 벤처기업육성, 지방경제 활성화, 긴축예산의 편성 등 경제 체질을 바꾸기 위한 시도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의 잇단 부도로 얼룩진 우리 경제현실에 그 이상론이 뿌리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 속에 그는 현실 경제의 실패를 책임지고 대선을 한달 남겨놓은 시점에서 중도하차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문민정부는 개혁에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 경제도 부도내고 말았습니다.

어느 일간지 만화에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초기에 <임기중 한 푼도 안 받겠다.>고 공표하자 백성들은 <글쎄...>하면서 두고 보자는 태도였습니다. 그후 임기 3개월을 남겨 둔 김영삼 대통령의 모습은 IMF(국제통화기금)에 깡통차고 두 손을 싹싹 비비며 <한 푼만 도와줍쇼>라고 구걸하는 거지 모습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칼국수 먹더니 이제 수제비도 못 먹고 깡통 찬 거지가 다 되었습니다. OECD가입, 선진국 운운 하며 교만을 떨며 기고만장하더니 급기야는 소처럼 풀 뜯어먹는 신세가 되어버린 느브갓네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구촌의 세계화 물결을 타고 조만간 선진국 대열에 앞장 설 것처럼 떠들어 댓지만 모두가 다 허구였습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세계화의 덫>(독일 슈피겔지 기자 마르틴.슈만 공저)이 세계 29개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으며 독일에서만 3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합니다. 저자는 지구촌의 세계화 물결 속에서 오는 미래상을 "20대 80의 사회"라고 정의합니다. 21세기는 지구촌 전체에서 일할 수 있는 인구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회에서 배척된 80%의 사람들은 20%가 던져주는 약간의 오락물과 먹거리에 만족하며 조용히 살아갈이라고 그들은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상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저자가 분석한 <세계화 지구촌>의 모습은 곳곳에서 벌써부터 그 전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독일의 실업자는 6백만명을 상회했습니다. 이는 48년 서독 건국이래 가장 많은 실업자수입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안에 제조업에서만 1백5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화는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일자리를 급격하게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낸다는 세계화 지상론자들 외침은 설득력을 잃은지 오래됐다는 주장입니다. 또 세계화는 세계를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로 양분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은 심각한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고 13억명은 하루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세계적 갑부 358명의 재산을 전부 합치면 25억명의 재산과 맞먹습니다. 주(州) 자체만으로 세계 7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미국 캘리포니아는 감옥 유지를 위해 쏟아붓는 돈이 주 전체 교육예산을 압도합니다.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최근 선정한 미국 400대 부자 랭킹에 따르면 10억달러 이상을 보유한 재산가(빌리어네어)는 지난해 135명에서 올해 170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1위-빌 게이츠, 2위-워런 버핏, 3위-플 앨런, 4위-로래리 엘리슨, 5위-고든 무어, 6위-스티븐 볼머, 7위-존 클러지, 8위-로니 퍼럴먼, 9위-짐 월튼, 10위-헬렌 월튼, 24위-루퍼트 머독, 26위-커코리언, 28위-테드 터너, 33위-로스 페로) 포브스가 부자 그룹을 선정하기 시작한 지난 82년에는 13명만이 이 '빌리어네어' 클럽에 속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지난 94년부터 올해까지 4년 연속 1위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인물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빌 게이츠(41). 빌 게이츠의 재산은 올해 무려 두 배 이상 증가, 398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같은 재산규모는 그가 올 한 해 동안 일주일에 4억달러 꼴로 벌어 들였음을 의미합니다.

400대 부자에 오른 화제의 인물로는 또 최근 동남아 통화위기를 배후 조정했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투자가 조지 소로스(27위), 90년대 들어 미 대통령 선거에 연거푸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실패한 텍사스의 거부 로스(33위) 등이 있습니다..... 400대 부자들은 백인들의 독무대가 되고 있는 가운데 흑인으로는 여성 방송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가 유일하게 349위에 기록됐다. 반면 아시아와 남미 계통의 재산가는 400위 안에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400대 부자 중에서 27, 33위가 동남아 통화위기를 배후 조정했다고 한다면, 이미 "20대 80의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빌 게이츠 한 사람의 재산만으로도 한국 경제를 살렸다 죽였다 할 수 있는 지구촌 현실 앞에 아연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하루를 연명하는 13억명의 지구촌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일주일에 무려 4억달러를 벌어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13,14세에 몸을 팔아 연명해가는 아이들, 거리에 버려져 구걸하며 겨우 겨우 살아가는 아이들이 무려 1억명이 된다고 합니다. 선진 강대국들이 끌고가는 세계화는 "20대 80의 사회"라는 가난과 질병으로 억눌려 고통받는 사람들만 늘려가는 허구에 불과합니다. 세계화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화는 살인적인 생존경쟁 속에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허구일뿐입니다. 세계화는 세계를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로 양분하는 인류의 덫일 뿐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를 강한 자로 만들고, 가난한 자를 부유한 자로 만들며,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만들며, 다수의 패배자들을 승리자로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의 복음화입니다.

3.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이 시대를 가리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질책하며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신앙은 산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산 아래로 내려와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골짜기는 메우고 높은 산은 깎아내려 평지로 만드는것입니다. "20대 80의 사회" 골짜기와 산을 평지화시키되 하향평준화가 아니라 상향평준화 하는 것이 신앙이요 세계 복음화입니다.

해같이 빛나는 모습으로 변형된 모습의 예수님께서 모세,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장면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크나큰 존경과 신망을 받는 인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초점은 그들의 위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증거하는 그들의 역할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보다도, 엘리야의 능력보다도 십자가의 예수만이 산 아래의 현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산 위에 계속 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엉겁결에 예수를 모세와 엘리야에 버금가는 인물로 파악하였을 뿐 모든 구약의 율법과 예언의 성취이신(5: 17, 18; 눅 24:44) 주님의 유일무이한 신분에 대한 무지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그러한 제안은 온갖 질고에 시달리는 무리들이 기다리는 산 아래의 목마른 부르짖음을 도외시한 도피적 태도를 반영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향해 내딛는 주님의 거룩한 고난의 걸음을 막아 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눈은 저 변 화산상의 영광은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보게 하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 소망에로 향하게 합니다(요일 3: 1-3). 하지만 눈을 산 아래 곧, 세상에로 돌려보면, 이 땅에는 온갖 죄악과 질병, 부조리와 모순이 판을 치고 있으며 고통의 절규가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의 사명이 저 억눌리고 빛을 잃은 무리들 속에 들어가 그들로 더불어 함께 살며 그들로 저 산 위의 영광에로 눈을 돌리게 하는 일임은 자명해집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초점은 무엇보다 믿음의 문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변화산의 경험은 분명 신비로운 일입니다. 기독교는 분명 신비와 기적의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신비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신비의 경험이 없이는 메마른 뼈와 같습니다. 그러나 자칫 산 위에 있는 사람은 산밑의 이성과 지성을 죄악시하기 쉽습니다. 산밑에 있는 사람은 산 위의 신비를 광신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이성을 무시한 신비는 공중에 떠있는 것이요 신비를 무시한 이성은 앞이 탁 막힌 소경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 생활에는 학자의 혀와 선지자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변화산의 경험은 우리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하고 매일의 복음 전도 및 봉사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들은 산 위에서 산 위로 떠다닙니다. 이 산 저 산을 떠들지만 현실은 비참합니다 현실을 무시하면 기독교는 뜬구름처럼 되고 맙니다. 또한 현실에 집착하면 꿈이 없는 막힌 자가 됩니다. 기독교는 이상과 현실을 좁히는 종교요, 이상을 현실화하는 종교입니다. 신앙이란 지각이나 이성을 잃은 흥분이 아닙니다.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어나는 것이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에 흥분하여 예수의 참다운 모습을 놓쳤습니다. 예수가 지향하는 참다운 신앙에서 벗어났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장막 셋을 집시다." "여기가 좋사오니"는 예수가 가르친 신앙이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 다시말해 율법과 예언과 새로운 계명을 내가 독점하고 세속사회와 격리된 천국을 만드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는 반기독교 사상이며 신앙과 현실이 조화되지 못한 잘못된 신앙입니다. 베드로의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세 사람의 모습은 구름 속에 가리우고 그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절) 흥분하지 말고 똑똑하게 정신차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경청하며 그에 순종하라는 충고였습니다. 신앙이란 산 위에 장막치고 예수를 독점하여 "여기가 좋사오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여 예수를 따라 오히려 산에서 내려와 세속사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속사회에 들어갈지라도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오히려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영육간에 구원시키라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영광스런 모습의 예수님의 시선은 산 아래 고통받는 사람들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그 영광 중에 고통받은 이들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가슴에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변화산 이전의 제자들의 심정은 아직까지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멸시천대를 당하시고 죄인과 같은 대접을 받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되리라고 하는 예수님의 집념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들 앞에는 암담한 수모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산의 전 분위기는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났고 그의 옷은 빛과 같이 번쩍이고 찬란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까?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 영광 중에 나타나서 하신 말씀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영광 중에 계셨습니다. 하늘 높은 보좌에 계신 영광의 주이십니다. 그가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죄는 없으셨지요. 그의 진정한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고난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오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영광이 없는 고난은 무익한 것이요 고난이 없는 영광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영광의 주 예수는 오늘도 고난의 현장에 방문하십니다. 소외된 이들 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셨고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더 이상 영광 중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고난의 현장으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부활을 기대하지 맙시다. 그리고 영광이 없는 고난과 희생을 강요하지 맙시다. 우리에게도 산 위와 산밑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산 위의 신비와 이상과 영광은 단순하고 그곳에 머무르고 싶게 합니다. 그러나 산밑은 매우 복잡하고 큰 고통의 외침이 있습니다. 간질병자의 좌절되는 노력, 뿜어 오르는 거품, 시든 육신이 울부짖습니다. 이 땅에 필요한 것은 모세의 율법도 엘리야의 능력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인류가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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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5: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요5: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요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요5: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5: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요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요5: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5: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5: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요5: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5: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팔복(八福)을 말씀하셨습니다.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팔복에 한 개의 축복을 더 약속하였습니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믿음'과 '축복'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입니다.'축복'의 헬라어는 '마카리오스(makarios)'인데 이는 '행복하다'는 뜻입니다.이 단어는 내세적(來世的)인 용어가 아니라 지금 현세(現世)에서의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예수를 믿는 사람은 오는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믿음'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아 행복하고 축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미국의 코메디언이며 영화 제작자인 우디 알렌(Woody Allen)은 "하나님이 내 이름으로 스위스 은행에 백만 달러를 예금해주시면 믿기가 쉬워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이러한 믿음은 그 뿌리가 약해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7개의 표적(sign)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이같은 표적을 행하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 사마리아 여인(요4:4-38)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습니다.그리고 그녀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듣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많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4:39-45).왕의 신하도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음으로 병들어 죽게된 아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요4:46-52).이들은 모두 유대인과 비교하면 이방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들,그것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커녕 믿기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5:1-47).예수님의 고향 갈릴리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요6:1-15).

구약 성경의 '욥'은 하나님이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가실 때 의심과 고민도 했지만 더 확실한 믿음을 굳혔습니다.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빼앗아가려 하실 때 그 순종과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이 믿음이라면 빼앗겨도 그 믿음은 변치 않는 것입니다.

방송인 데이빗 브린클리(David Brinkley)씨는 "믿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던진 벽돌에 걸려 넘어가도 그 벽돌을 주워 기초돌을 삼고 집을 짓기 시작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이스 북부 산악지대에 가면 큰 수도원 20개가 관광지가 되어 있습니다.모두 1천년 전에 건축된 것으로 그 당시 기독교는 열렬한 기도운동이 일어났고 양적인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예수 잘 믿는다는 교인들은 모두 직업이나 가정 등 사회적 책임을 이탈하고 산에 들어가 금식철야기도회를 가졌고 대규모의 수도원도 모두 높은 산 꼭대기에 지어 하나님과 가깝게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도사의 시대는 기백년도 가지 않아 쇠진하고 오늘날 그 웅장한 기도원들은 옛 건축양식을 보는 관광지에 불과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열렬한 기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높은 산의 기도원이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여하한 노력으로도 하나님께 이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방법입니다.

익살맞은 K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어떤 청년이 와서 토론을 하자고 덤볐다고 합니다.

"목사님, 기독교는 불필요합니다.2천 년 동안이나 전도했다지만 이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나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K목사님이 답변했습니다.

"물은 이 지구상에 수십만 년 동안 있는데 당신의 와이샤쓰 깃에 때가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이오?"

물이 있어도 빨지 않으면 때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이 이론에 머물러 있는 한 나에게 도움이 안됩니다.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그래서 믿음을 갖는 것은 어렵습니다.

옛 소련의 우주항공사 티토브(Titov)가 우주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나는 하나님을 찾았지만 우주에는 하나님이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우주여행을 하고 귀환한 미국 항공사 맥디비트(McDivitt)는 "하나님의 모양을 볼 수는 없었다.그러나 천체의 신비 속에서 나는 창조자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함을 믿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우주를 보아도 육안으로 보는 자와 영(靈)의 눈을 뜨고 보는 자는 차이가 나는 법입니다.

믿음은 영의 눈을 뜬 자만이 가지게 됩니다.성경은 육신의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닙니다.영의 눈으로 믿음을 가지고 읽을 때만 성경이 됩니다.하나님은 인간의 논리나 과학의 방법으로 증명되는 존재가 아닙니다.증명의 대상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실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떳떳하게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수 많은 모래를 삼켜야 영롱한 진주가 탄생하며 여러 번의 정련 과정을 거쳐야 번쩍이는 순금이 나오듯,숱한 우여 곡절을 거친 연단된 믿음의 소유자가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이루는 데 장애물들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악한 마음,탐욕,방탕,시기심,무절제,성급함 등과 같은 죄악들이 있습니다.그러나 현대 사회에 있어서 구조적이라 할 수 있는 더 커다란 믿음의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 중심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우리는 사람을 더 많이 바라보면 볼 수록,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덜 생각하며 덜 중하게 여기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치명적이고 위험한 장애물은 무엇보다도 첫째,인본주의(人本主義)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흔히 현대 문화를 이룬 업적을 찬양하고 획기적으로 발달한 과학기술문명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뿐만아니라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가 각 분야에 걸쳐 확대됨으로써 인간 개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풍부한 물질 문명의 혜택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이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고 또 모든 면에서 세련되고 우아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우리들은 더욱 교양있고 예절이 있으며 남에 대한 동정심이 많아졌고 감수성도 예민해졌다고 생각합니다.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구시대의 진부한 생각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모든 면에서 우리들은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남에게 친절히 대하려고 합니다.우리들은 서로 싸우는 것을 싫어하며 상대방에게 고통과 고민거리를 주기 싫어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상호 협동하는 것을 존중하며 무뚝뚝하고 노골적인 행동이나 말을 싫어합니다.우리는 명예를 추구하고 신사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며 그와같은 사람을 존경하고 또 자신이 기꺼이 그러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명예로운 시민,자부심과 긍지를 지닌 국민임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문화와 사회에서 통용되고 존중되는 생활과 사고방식에 신경을 쓰는 한, 그밖의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해져 가게 됩니다.혹시 우리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이나 위신 등이 실상 우리의 신앙이나 영적 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우리 자신만을, 즉 인간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풍조에 적지않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자신도 모르게 그와 같은 인본주의 물결에 쉽사리 쓸려가고 동화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인본주의의 본질을 말한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며(마6:5),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어서(마6:2) 겉은 깨끗하고 고상해 보이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것이며(마23:25),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것입니다.

다음, 믿음의 장애물로는 세속화주의(世俗化主義)가 있습니다.

현대와 같이 결혼의 신성함이나 정조의 고귀한 가치가 무시되는 시대는 없었던것 같습니다.겸손의 덕과 청렴의 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무엇인가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 또 이것을 유모어 있게 잘 할 때 이런 사람은 많은 대중들의 인기를 얻으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가장 무서운 우상은 절대적인 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 혹은 세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를 일반화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이 그토록 경시되고 독선적인 풍자나 은유를 위하여 인용되며,하나님의 이름을 그토록 방약 무인(傍若無人)하게 들먹거리며,주일성수가 그토록 뻔뻔스럽게 와해된 시대가 언제 있었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이 심각하게 무시당하고 있으며 유구한 역사를 가지는 기독교의 고상한 원리들이 이렇게 경멸시된 때는 일찌기 없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더욱 더 자신만을 존중하며 하나님을 경시하고 있으니,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도리어 자신을 합리화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하며 거룩한 것을 세속화시키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속화주의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사47:10-11)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47: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사47:11)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신을 그렇게 많이 섬겼던 바벨론 사람들은 바로 그와같은 세속화주의 내지 상대주의적인 삶을 추구했던 바, 그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사47:8,10) 라는 식으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화주의 결말은 파멸이요 재앙뿐임을 하나님의 경고를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사47:11).

세번째 믿음의 장애물은 외면적인 정신 자세입니다.현대인의 생활과 사고의 습성 중 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일들을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쉽게 넘어가는 것이며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마음 깊이 숙고하기 보다는 쉽게 생각하고 쉽게 살아가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때때로 우리의 삶 속에 필요하며 우리의 상황이 그러한 태도를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이 외면적인 태도가 우리의 생활 전반에 작용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단지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며,순간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쾌락 가운데 던지고 싶어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상 강조되는 교훈을 지겹게 여기고 매번 반복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며 좀 더 참신하고 획기적인 것은 없을까 하고 물어보지 않습니까? 신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철새처럼 일정한 절기가 되면 하나님의 집에 겨우 찾아오다가 곧 사라지고,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을 찾아 이곳 저곳 옮겨다니나 어느 한 곳에서 만족할 줄 모르고 습관처럼 계속 하나님의 집을 찾아 헤맵니다.

우리들은 처음에 주님을 만나서 느낀 첫사랑을 잊어버린 채 이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발견해 보려 하고 손쉽게 무엇인가를 얻어 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찾지 아니하고 노력이나 수고 없이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에만 만족하려는 것은 외면적인 신앙 자세이며,이는 곧 믿음의 치명적인 적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인본주의와 세속화주의와 외면적인 정신자세의 공통점은 진실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생각할수록,경건한 것보다 세상 것들을 사랑할수록, 그리고 내면적인 것보다 표면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속에는 진실성이 없게 마련입니다.

진실성이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속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인간의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

세속적인 영광에 구애받지말고 오로지 진실된 마음으로써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네번째 믿음의 적은 후기 근대주의,즉 포스트모던이즘(Post-Modernism)입니다.후기근대주의(Post-Modernism)는 현대주의(Modernism)도 거부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지금까지 내려온 기독교 진리 자체도 거부하는 사상입니다.

"현대 계몽주의,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현대주의를 과감히 거부해야하며 현대주의의 발전체재와 전통주의 절대가치와 절대 이데올로기 등을 완전히 배격하는 사상입니다.이제 더 이상 절대가치,절대 진리,절대 전통,절대 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후기 근대주의(Post-Modernism)자들은 가장 중요한 교리인 십자가의 피의 구속을 부인하면서 "예수님의 피나 짐승의 피나 같은 것이지" 무슨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예수님의 신성(神性)도 부인하면서 술주정뱅이 취급까지 하고 부활의 역사성도 부인합니다.

"부활은 하나의 예시행위다"라고 하고"기독교 신앙은 생물학적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서의 예수 부활이요,그것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임마누엘에 있다."고 하면서 교활하게도 의미상의 부활론을 말하고,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믿지 못하며,동정녀 탄생,대속의 죽음,구원론,부활론,재림론을 정면으로 도전하여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다섯번째 믿음의 적은 종교 다원주의입니다.이 신학사상은 1960년 부터 미국에 소수민족이 많이 이민해 오면서 그들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들어가 문제들이 야기되면서 생겨난 사상입니다.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모든 종교는 공존해야 된다고 하는데서 시작된 것인데 발전하다보니까 "특정 종교만이 절대 진리,절대 구원을 주장하는 시기는 지나갔고 종교는 궁극적으로 단순히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구원,같은 진리에 도달한다."라고 논리를 전개하기 까지에 이른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유일성도 부인하고 십자가의 피의 구속도 부인하며 부활도 부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마리아가 낳은 예수가 종국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며 모든 종교에 다 그리스도가 있고,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입니다.

자유주의 신학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는 이단 신학사상으로 오늘날 여권 신장을 들고 일어나는 소위 여성신학이 있습니다.

미국 연합감리회에서 행했던 수양회에서 어느 여자 목사가 여성신학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기도할 때도 "Dear Mother"로 불렀다고 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바꾸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쏘피아 하나님(sophia God)"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하워드(Harward)신학교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아주 행복한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도 착하고 부인도 얌전했는데, 그 얌전한 여자가,여성신학을 배우기 시작하더니 얼굴 모습이 사나와지고 눈빛이 달라지더니 남편을 사랑의 대상인 배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감정을 품고, 공격의 대상, 복수의 대상으로 삼더니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성신학의 권위자 메리 데일리(Morrydaly)는 말하기를 "적 그리스도(Anti-Christ)가 오기전까지는 여성이 해방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미국 연합감리교회가 1965년까지는 1,200만까지 교인수가 증가되었으나 그 이후 1990년도 까지 400만명 이상이나 교인수가 감소되었고,매일 350명짜리 교회 하나씩 문을 닫고 있는 형편입니다.1993년 8월의 어느 호 뉴스위크지는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고국인 영국에서도 감리교회가 1930년에는 14,000교회였는데 지금은 8,000교회가 없어지고,6,000교회만 남았는데 그나마도 계속 문을 닫고 없어지고 있는 형편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런던에 있는 모 전통있는 큰 교회가 술집으로 팔려서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라고 기록했습니다.그외에도 가구전시장,누드 그리는 화방 등으로 팔리거나 전세를 놓고 있는 형편입니다.영국의 모신학교는 목사 지원자가 없어서 재정도 모자라니까 회교에서 1년에 100만불씩 받아 운영하면서 회교의 통제를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최근의 한국 교회도 7,80년대의 교인 증가추세가 90년대에 들어와서 감소추세로 돌아서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이유는 모든 성경의 권위 자체를 부인하고,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됨을 부인하고,십자가의 피의 구속의 부활을 믿지않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때문인 것입니다.

이같은 자유주의 신학과 사상이 성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식어지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의 어느 심리학자가 많은 임상 케이스를 기록한 가운데 30여세가 되도록 사람을 전혀 믿을 수 없고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고아 출신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의심을 가지고 대합니다.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한 번도 없습니다.세상에서 너무나 심한 천대와 학대와 사기를 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그 부인의 고민은 자기가 사랑한다는 진정을 남편이 믿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3,4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자기의 진실과 사랑을 그의 마음 속에 깨우쳐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자기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선 사람을 믿지 아니하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하나님을 아는 것은 둘에다 둘을 더하면 넷이라는 자명의 진리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무한하시고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하여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그것을 진실이라고 받아 들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인 인식인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 즉 구세주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없어지는 곳에 악마주의가 발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그가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지 않은 유대인들은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엄청난 파멸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영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사람과 세상의 영광을 바라기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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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앙과 하나님의 뜻

"(요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7: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요7: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요7: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요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7: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요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요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7: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요7: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요7: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요7: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요7: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요7: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요7: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요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요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요7: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요7: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요7: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요7:23)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요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미국의 유명한 상원의원이요 현명한 정치가인 다니엘 웹스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그의 신앙심은 온 의회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을 정도였습니다.즉 그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고 상부의 명령이 있을지라도 주일날엔 반드시 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시내에는 크고 으리으리한 교회가 많이 있었으며 그곳에 가면 정계나 경제계 등에서 활약하는 유명 인사들과 접촉할 기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골의 조그마한 교회를 다닙니다.차를 타고 두 세 시간 거리에 있는 그곳을 한 주일도 거르지않고 가족과 함께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웹스터에게 물었습니다.

"다니엘 웹스터씨,당신은 왜 이곳 워싱턴의 저 쟁쟁한 목사들의 설교를 듣지않고 가난한 시골 교회 목사 설교를 들으러 가십니까?"

"아,그건 다름이 아니라 여기 워싱턴에서는 저들이 명망있는 개인 다니엘 웹스터를 보고 설교를 합니다.그러나 보십시오.이 시골 교회 목사는 죄인인 다니엘 웹스터를 보고 설교를 합니다."라고 그는 설명을 했습니다.

"(요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인물됨이나,그 사람의 지위나,그 사람의 지식의 과다나,그 사람의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그 사람의 선행,공로 등의 외모를 보시고 판단치 않으시고 그 마음에 예수 믿는 신앙 여부를 보시고 심판하십니다.

예언자 사무엘이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먼저 있던 제사장 엘리는 이미 98세로 은퇴하고 시력을 잃어 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불행히도 이 두 젊은 영도자는 드물게 보는 악당으로서 종교와 정치적 권력을 악용하여 재산을 긁어 모았고 식은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하여 국민을 속였으며 여인들을 성전에 끌어들여 간음하는 등 악행은 날로 심해 갔습니다.이러한 지도자의 영향은 그대로 국민에게 퍼져 민족의 장래는 암담할 뿐이었습니다.이런 시기에 불레셋 민족과 전쟁이 터졌습니다.불레셋은 북유럽에서 이주해 온 민족으로 그 이름을 따서 지금까지 이 지역을 팔레스틴이라고 부를 정도로 강력한 민족이었습니다.이 블레셋과의 첫번째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크게 무너져 무려 4,000명의 전사자를 냈습니다.큰 쇽크였습니다.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한 민족의 아픔이었습니다.장로들 즉 각료들이 모여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삼상4:3)....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대단히 좋은 질문입니다."전투에 결함이 있었을까?""군비(軍備)가 부족했을까?"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패하게 하셨을까?"하는 질문은 '나'와 '하나님의 믿음(信仰)의 관계'에서만 나올 수 있는 질문입니다.

나의 생활 전반에 걸쳐 종종 이 질문을 하고 해답을 얻어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것입니다."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 직업을 주셨을까?" "왜 나에게 실패의 쓴 잔을 마시게 하셨을까?"

나의 생활,나의 인생,내가 당하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찾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새 출발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함으로 자손만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모세는 본래 자기가 이스라엘 노예의 자식이었으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애굽의 왕실에서 성장하고 고등교육을 받게 된 것이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임을 알고 민족 해방 전선에 용감히 나선 것이었습니다.바울은 밤낮 서너가지 병에 시달리는 허약한 몸이었으나 이 육체의 가시가 자기의 교만을 부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하게 하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하고 세계로 뻗어가는 복음의 초대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인물들의 공통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질병에 시달릴 때나,감옥에 갇힐 때나,아기를 낳았을 때나,일이 잘 될 때나,실패했을 때나,전쟁을 겪을 때나,재난을 당했을 때나,기쁜 일이 생겼을 때나,슬픈 일을 만났을 때 넓은 안목으로 그것이 주는 의미를 찾아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사건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알려준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패하게 하셨을까?"하는 신앙적인 좋은 질문을 가졌던 그들의 해답은 참으로 실망을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 (삼상4:3)...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언약궤라는 것은 모세의 십계명판이 들어있는 낡은 궤짝입니다.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여행할 때 선두에 놓았었고 요단강을 건널 때나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도 언약궤를 앞세웠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믿어 온 것입니다.지금 <실로>라는 마을에 내버려둬 까맣게 잊고 있던 언약궤를 가져 오자는 아이디어는 하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빛나는 과거>에 의지하는 심리적인 처사였습니다.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제멋대로 사는 그들이 나팔을 불며 실로에서 행진해 옵니다.물론 최고 영도자인 홉니와 비느하스 형제가 자신의 추잡함과 배신과 모독은 의젓하게 숨기고 언약궤 앞에 서서 의기양양하게 행진하고 있습니다.이러한 모순과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 기독교인의 생활에는 없습니까?언약궤만 짊어져다가 동네 복판에 놓으면 하나님이 복을 내려 적군을 전멸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창조자시요 살아계신 하나님과 신뢰의 관계를 맺는 신앙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우상숭배인 것입니다.드디어 언약궤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그들은 그 낡은 궤짝이 당장 큰 기적을 일으킬 것을 공상하며 신이 나서 함성을 지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이상한 함성을 들은 블레셋 군대는 즉시 대공격을 감행하여 둘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3만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한 것입니다.겸하여 요술 상자처럼 생각하던 언약궤까지 약탈되고 말았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채찍질도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패배와 실패와 고통의 경험을 주어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이러한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맺은 사람은 그러한 역사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무기력하게 원수의 손에 넘어가 고통과 죽임을 당한 십자가가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그 비극 속에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가 숨어 있는 것을 우리 개인의 생활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신앙의 진리인 것입니다.

"(히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 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있는 깊은 뜻을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옳아야 합니다.내가 지금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의 하는 처사가 다 옳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나는 건강해야 될 사람인데 왜 병들게 하십니까 하며 반항을 하면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으로 상대방이 100% 다 옳은 것입니다.그러므로 내게 다소 불만이 있고 아픔이 있어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입니다.만약 나의 의견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굽혀 보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믿음과는 정반대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7: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요7: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요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초막절은 유대인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로서 12살 이상의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큰 명절입니다.예수님의 형제들은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와 권능을 시골에서 묻혀 있게 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깜짝 놀라도록 기적을 보여 주자는 것이었습니다.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어가시는 기적,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능력 등 예수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능력과 권능으로 옛날 솔로몬,다윗,모세 등과 같이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줄 것을 기대하고 믿었던 것입니다.그런데 요한은 이들에 대하여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말함으로서 그들이 분명히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의 능력과 권능을 나타내기를 거절하고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뜻과 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그래서 요한은 그들이 예수를 믿지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입니다.그러면 예수님의 마음(하나님의 뜻)에 품은 뜻은 무엇입니까?예수님은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요한이 지적하는 믿음은 십자가 중심의 신앙입니다.십자가를 제쳐놓고는 바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나의 안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권능을 믿는 것은 마귀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마귀에게도 그런 신앙은 있습니다.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신앙은 십자가를 믿고,십자가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한 마디로 하면 "믿음이란 고난의 메시야(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No Cross, No Glory).'

"(눅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눅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눅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함께 하는 데 진정한 신앙과 그에 대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십자가 앞에 자기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예수와 함께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밀알 하나가 썩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과 같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아 죽고 썩어야만 합니다.그렇게 할 때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요7: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주님의 때를 말씀하셨습니다.십자가를 져야할 때가 있습니다.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있습니다.

"(전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3:7)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십자가를 져야 할 바로 그 때,즉 주님의 때에 나도 함께 가야 합니다.하나님의 원하시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때와 장소가 주님의 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내 마음대로 때를 정하고 환경을 정리해서는 안됩니다.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시간 그 길에 나도 있어야 합니다.이것이 예수믿는 길입니다.

흔히 기도의 응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하나는 "좋다,그대로 하라."는 응답이고,둘째는 "아니다",그리고 셋째는 "기다려라"는 응답입니다.기다리라고 하시면 얼마든지 기다려야 합니다.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응답이 있음을 알고,십자가 안에서도 응답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모든 것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내게로 향하신 모든 응답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만 합니다.또한 성결한 생활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실로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기엔 너무나 위대하고 광대한 것이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감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28: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일찌기 예수님께서도 "(마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어떤 의미에서 실수 투성이인 인간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한다면 이보다 더 행복된 삶은 없을 것입니다.왜냐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이루어나갈 때 이 땅에서 온전한 평화를 얻으며 하나님의 약속한 기업을 유업으로 상속받게 되는 영원한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意志)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질상 이기주의적이며 자기 중심주의적인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지적하셨듯이 "자기 영광만 구합니다."

"(요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인간의 탁월한 교육이나 지성은 나름대로 훌륭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이기적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심지어 하나님의 율법에 정통해 있었던 유대교 지도자들 까지도 예수를 죽이려고 온갖 시도를 다하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순종하고 있다고 착각하였습니다.인간의 의지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담의 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인간의 타락한 의지(意志)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다만 순종함으로서만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참 기쁨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설교가인 로버트슨(F.W.Robertson)은 "순종은 영적 지식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점점 더 하나님을 거역해가는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바른 신앙을 갖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요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행하려 하면',즉 순종하면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서 노력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하나님께 복종시킬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은 영적 분별력의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인간 자신의 의지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완고한 마음을 갖고 주님께 순종하려 하지 않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가르치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이 시대에 나와 내 가정과 그리고 이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으로 시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바른 신앙을 가지시며,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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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요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요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요12: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요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요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요12: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요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요12: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요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요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 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12: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작가인 제임스 미케너(James Michener)는 미국 상원의 <과학, 기술, 우주 개발 분과위원회>에서 행한 명연설에서(1979.2.1) 신대륙을 발견하고 세계로 뻗어 나가던 15세기의 유럽 국가들을 세 종류로 분류하였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새로운 가능성을 내다보지 못하고 바다 건너편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눈을 뜨긴 했지만 결심을 하고 모험을 시작할 때까지는 무척 느리고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보이지 않는 새 세계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과감하게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진국이 되고 부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도 15세기 유럽처럼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을 때까지 배를 바다에 띄워보지도 못하고 육지에 앉아서 바다 저편에 대하여 생각만하다가마는 신자입니다. 보는 것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중세기의 독일, 이탈리아 형입니다. 둘째는, 영국, 프랑스형으로 결심이 느립니다.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지만 바다를 향하여 배를 띄우기까지는 남의 경험 등을 오래 분석해 보고 어느 만큼 증거가 보여야 결심을 내려 봅니다. 세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중세기로 말하면 포르투갈, 스페인형입니다. 300여 년전 미대륙을 발견하기 까지는 미국은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콜럼브스가 신대륙을 향하여 배를 띄울 때는 정말 엉성한 지식과 불충분한 지식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콜럼브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30년 전에 포르투갈의 황태자 헨리가 죽었는데 그는 죽는 순간까지 바다 건너에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역설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황태자의 예언을 미친 과학자의 잠꼬대로 여겨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콜럼브스는 믿었습니다.그는 신념을 가지고 배를 띄웠으며 1492년 아름다운 새 세계를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을 가질 때 처음에는 보이지 않고 막연하게 마음 속으로 바라기만 하던 것이 보이는 실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발명왕이 된 토마스 에디슨은 성적이 나쁘고 엉뚱한 질문만 하여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못 보는 것을 내 아들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안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하여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가지고 출발한 아브라함의 행위를 성경은 믿음이라고 규정하고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떤 점을 보시고 기뻐하실까요? 성경은 그 해답을 믿음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믿음으로써만 의롭다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죄인된 우리를 의로운 자 곧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였다는 구원의 칭호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만족은 오직 인간의 믿음입니다. 인간의 삶의 정황이 어떠하다할지라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굳게 서서 찬양과 감사가 넘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은 엄청난 가정의 재난과 환란,그리고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믿음을 지닌 하나님의 인정받는 의로운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이스 북부 산악지대에 가면 큰 수도원 20개가 관광지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모두 1천년 전에 건축된 것으로 그 당시 기독교(희랍 정교회)는 열렬한 기도운동이 일어났고 양적인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교인들은 모두 직업이나 가정 등 사회적 책임을 이탈하고 산에 들어가 금식철야기도회를 가졌고 대규모의 수도원도 모두 높은 산 꼭대기에 지어 하나님과 가깝게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도사의 시대는 기백년도 가지않아 쇠잔하고 오늘날 그 웅장한 기도원들은 옛 건축양식을 보는 관광지에 불과합니다.

열렬한 기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산의 기도원이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여하한 노력으로도 하나님께 이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요20:27)...너희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그리고 이 믿음을 위해 많은 표적을 직접 나타내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본문 37절의 말씀처럼 그렇게 많은 표적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믿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기적(요2:1-11),직접 가지않고 말씀만으로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 기적(요4:46-54), 38년간이나 반신불수였던 난치병자를 고쳐주신 기적(요5:1-9), 오병이어(五餠二魚)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의 부스러기를 남긴 기적(요6:1-14), 물위로 걸어가신 기적(6:16-21), 태어날 때 부터 소경된자의 눈을 뜨게 한 기적(요9:1-12),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요11:1-46) 등 인간이 도시 어떻게 극복할 수 없는 한계정황이면서 인간사항(人間事況,the factors for life)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을 직접 목격했으면서도 믿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표적이 부족해서 믿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방법으로도 믿음을 가지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9월 28일 발트해에서 스웨덴 여객선 에스토니아호가 시속 90km의 강풍과 6m의 높은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5분만에 완전 침몰되었습니다. 약 1500여 명의 승객중 대부분이 스웨덴 사람들로 그 중 약 1000여 명이 사망한,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사고였습니다. 제가 선교 업무차 유럽과 이스라엘을 여행 중에 접한 보도에 따르면, 구소련 붕괴 후 독립한 에스토니아의 악화된 경제력을 틈타 돈 많은 스웨덴 사람들이 자국과 에스토니아를 왕래하는 여객선을 이용하면 모든 물건이 면세가 될 뿐만 아니라 값싸게 에스토니아 여인들과 즐길 수 있기에 소위 기생관광을 하다가 이러한 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익일 헤럴드 트리뷴지는 다음 기사를 놓치지 않고 싣고 있었습니다. 생존자 중에 독특한 19명의 젊은 복음 주의자들(evangelist)이 모두 살아남았는데 이들은 모두 성경 공부 여행(Bible Study Tour)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스웨덴의 세속적인 목회자들(secular ministers)과 심리학자들이 방송에 나와 하는 일이라고는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정신적인 충격을 치료하는 구구한 얘기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경제력의 축복을 오히려 방탕과 타락으로 일삼는 국민들에 대한 경고 한 마디가 없었습니다. 재난과 환란 중에도 의인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역사(役事)를 보고서도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엉뚱한데서 그 사고 원인을 찾으려는 안타까운 모습이 오늘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표적이 부족하거나 말씀이 부족해서 믿지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눈이 멀고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해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구소련의 우주항공사 티토브(Titov)가 우주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나는 하나님을 보려고 찾았지만 우주에는 하나님이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 온 미국 항공사 맥디비트(McDivitt)는 "하나님의 모양은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천체의 신비 속에서 나는 창조자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함을 믿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우주를 보아도 육안으로 보는 자와 영의 눈을 뜨고 보는 자는 이처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믿음은 영의 눈을 뜬 자만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K목사님에게 와서 토론을 하자고 덤볐다고 합니다. "목사님, 기독교는 불필요합니다. 2천년 동안이나 전도했지만 이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나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K목사가 답변했습니다. "물은 이 지구상에 수십만 년 동안 있는데 당신의 와이셔쓰 깃에 때가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이오?" 물이 있어도 빨지 않으면 때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이 이론에 머물러 있는 한 나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고 생각하는 이들 유식한 불신 유대인들에게 "그렇지않다.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먼저 신앙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라. 그러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73: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인간은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유태교는 여전히 지금도 예수님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를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기 폭로(自己 暴露,Self-discloser)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시고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종교로도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마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 시대에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기록된 말씀', 성경을 통해서 만날 수 있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그 분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마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말씀을 듣고서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길 가와 같이 마음이 닳고 닳아서 말씀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밭처럼 마음이 황폐해졌기 때문입니다. 가시떨기 밭처럼 세상의 염려와 물질(재리)의 유혹으로 말씀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닳고 닳은 묵은 땅은 갈아 엎어야 성령의 단비가 내려 참된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됩니다.

"(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10:13) 너희는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은 회개하므로 닳고 닳은 마음을 갈아 엎어 부드럽게 하고, 회개하므로 마음의 돌뿌리들을 뽑아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회개할 때 성령의 단비, 의롭게 하는 단비가 내려 마음이 부드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또한 가시떨기도 성령의 불로 태워야만 좋은 밭이 됩니다. 물과 불로 임하시는 성령이 회개를 통하여 충만하시므로 말씀가운데 예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을 가지려면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해야만 합니다.

"(요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면 자아(自我)가 죽어야만 합니다.

자기 교만, 자기 자랑, 자기 욕망, 자기 생각, 자기 주관, 자기 사랑 등이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어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고 참다운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은 신앙생활에 갈등이 많고 시끄럽고 복잡합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은 교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은 원망과 불평이 많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은 비겁해지기 쉽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에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에는 참다운 봉사와 헌신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봉사와 헌신에는 인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믿음으로는 영안(靈眼)이 열리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시므로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시는 승리의 생활을 기원합니다.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일5: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요일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일5: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일5: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요일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요일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일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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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믿음으로 가는 길

"(요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칼 바르트는 "하나님은 알 수 있는 분이지 볼 수는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입니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고전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13) 그런즉 믿음,소망,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말씀에서 '본다'는 말과 '안다'는 말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지만 궁극적인 천국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온전하게 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보고 싶다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알자는 것이지 보자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영원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영생에 대한 소유와 모든 것을 아는 것, 그리고 능력과 권능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말씀 속에서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길 즉,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육신으로 만날 수 없는 예수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방법을 이렇게 말합니다.

"(골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연합하여"란 헬라어는 "숨비바조(?????????,sumbibazo)"로서 "짜여진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색깔의 털실로 스웨터가 짜져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주듯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도 사랑으로 연합할 때 아름다워진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의 짜짐, 사랑의 연결 속에서 예수를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도 마찬가지로 말합니다.

"(요일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길 즉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헨리 누엔(Henri Nouwen)박사가 교수직을 사임하고 매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정신박약자 시설인 데이브레이크(Daybreak) 학원의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신학자가 하버드 교수의 많은 보수와 명예를 버리고 정신박약자들의 용변 지도와 행동 교정과 식사. 세수. 옷 입히는 훈련 같은 구질구질하고 고생스러운 일에 작은 보수를 받고 종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신학자가 학생들을 가르쳐 훌륭한 목사와 학자들을 길러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왜 하버드를 떠나 정신박약자 시설에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누엔 박사는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란 책입니다. 여기에서 누엔 박사는 "예수를 정말 아는 길이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나아가서는 "예수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길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의 결론은 예수를 아는 길은 <내리막길을 살아봐야 한다.>(downward mobility)는 것입니다. 예수가 보였던 종의 모습에서, 곧 내리막길에서만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엔 박사 자신은 그 동안 올라가는 길만 추구해 왔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천재신동이라 추앙되었고, 하버드 대학의 교수까지 이르는 정상에 올랐으며, 20여 권의 저서는 모두가 베스트 셀러이고, 그의 얼굴은 한 번만이라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전세계에 깔려 있습니다. 누엔은 말합니다.

"나는 그 동안 작은 성공의 외로운 꼭대기를 향하여, 작은 인기, 작은 권력의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만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어느 날 아담(정신박약자 중 한 청년)군 곁에 앉았을 때 이런 인간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예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안 보인다. 내리막길에서만이 진정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오늘 우리들은 높고 큰데서 예수를 만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진급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성공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시험에 합격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출세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건강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가정은 가난한 목수 직업의 아버지 요셉과 농부의 딸 어머니 마리아의 가정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문명에서 소외된 작은 목동의 마을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나시고자 하면 높아지고 커지려고 하지말고 낮아지고 작아져야만 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게 될 때 예수님을 볼 수 있으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높고 큰데에 계시지 않고 낮은데 작은 모습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랑은 겸손으로 성취됩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높은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낮은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표적을 베푸신 곳들은 모두가 다 낮은 곳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만나서 새 생명을 베푸셨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낮고 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태어날부터 소경된 사람,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된 불구자,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 세리 마태, 아니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가 다 가난한 어부 출신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사회에서 가장 높은데 있었던 바리새인, 서기관들, 제사장들은 오히려 예수를 만났지만 그리고 많은 표적과 말씀을 들었지만 지위와 명예, 부귀 영화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듣지못하고 사랑의 표현을 보지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알고 있고 연구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사랑을 모르고 행하지 못하므로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지 못한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표적들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못한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표적,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표적, 태어날 때 부터 소경된 사람들 눈뜨게하신 표적,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등 등을 보여주셨건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고 빌립이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요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답답한 심정으로 말씀하십니다.

"(요14:9)....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그토록 많은 표적과 권능있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보고 들었으면서도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그 여러 표적들과 말씀들만 보고 들었을 뿐 그것들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많은 표적들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사람의 생명인데 그 생명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적들을 나타내 보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표적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볼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표적 중에 표적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시기 원하십니까?

낮고 천한 인간이 되신 예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보시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십시오.

서부 영화에 <쉐인>(Shane)이 있습니다. 작가가 주인공 쉐인을 통하여 그리스도상을 부각하려고 시도한 작품입니다. 한적한 광야에 외딴 집 한 채가 있습니다. 어린 아들 하나를 둔 부부, 그들은 착하고 힘없는 개척민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조와 마리온(Joe and Marion)이라고 붙인 것도 요셉과 마리아(Joseph and Mary)의 은유라고 합니다. 이들을 무례한 총잡이들이 괴롭힙니다. 이 집에 홀연히 나타나는 신비한 인물이 바로 쉐인입니다. 그는 얼마동안 이 집에 유하면서 그들은 격려하며 희망을 잃지 않게 하고, 어린 소년에게 참다운 용기와 사랑을 가르치고 자기의 목숨을 걸고 악한들로부터 이 착한 가정을 보호합니다. 일이 해결되어 다시 평화롭게 되자 이 신비한 나그네는 정처없이 지평선을 향해 떠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쉐인이 구름을 타고 올라가듯 광야의 먼지 속으로 사라질 무렵 소년은 그의 구세주와 같은 거룩함을 알며, 그를 따라가고 싶지만 광야에 머물러 자기도 쉐인과 같은 사랑과 정의의 사람이 되고자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랑입니까? 지저분한 얘기에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고 도움이 필요한 구석에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높고 큰데 계시지 않습니다. 낮고 작은 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환란 중에서도, 실패와 낭패 중에서도, 가난과 병고 중에서도, 고독과 아픔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시고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의 길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높고 크신 사람들은 마음을 낮추시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사랑을 베푸심으로 하나님을 보시고 믿음의 능력과 권능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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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믿음의 법

"(롬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3: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롬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나님께 가는 방법,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시다'(마16:16)는 고백의 믿음만으로 가능한것이다.

때문에 인간의 선행이나 공적,능력 등 그 어떤것도 자랑의 가치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는 그의 백성'이 되는데 있다.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인간의 믿음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나라에서 기억되는 영원한 가치와 자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지아니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에 믿음을 떠난 인간의 행위는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영복(永福)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와 행위를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로 만들어주는 '믿음의 선물'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할 뿐이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찌니라"(고후10:17).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한다고 말하고 있다(빌1:20).

인간은 모두 죄인이요 아무도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는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에 되돌려 놓을 수 없으며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빚진 자이다.그렇게 때문에 자기의 공로에 대한 자기 만족과 자랑의 모든 근거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믿음의 주이신(히12:2) 예수님만을 자랑과 긍지와 영광으로 삼자!

오직 믿음의 법으로서만이 자랑할 데가 있는 것이다(27절).유대인이 자랑하는 율법은 예수님의 십자가앞에까지 우리를 이끌어가는 몽학선생이다.율법이 자랑의 근거가 될 수 없다.율법은 유대인의 자랑이 될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자랑이 된다.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이 각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라"(신6:4).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그에게로 가는 길은 이방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동일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와 그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유대인은 선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왔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하나님께 봉사하려고 노력했다.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율법을 어김으로써 다가올 형벌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율법과 할례와 아브라함의 혈통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어선 것이다.

다시말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물론 사람은 선하려고,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해야 하나 그것은 하나님의 형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힘이 다 하도록 사람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그가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서여야 한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거절하는,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않는 죄는 갑절이나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그릇된 짓을 하도록 유혹을 받게 될 때 법률이 무서워서,벌금내든지 형무소에 가게 되는 것을 크게 걱정해서 범행하지는 않는다.그를 옳은 길에 있게 하는 것은 만일 그가 인생의 파멸을 가져왔을 때 그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는 단순한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릇되지 않게 하는 것은 두려움의 법칙이 아니라 사랑의 법칙이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믿음의 법을 통해 사랑의 법을 지니게 되므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에 대한 공포심은 제거되었으나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대로 행동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우리는 이제 사랑의 법으로 영원히 선행을 하도록 선고되었으므로 절대로 우리가 좋아하는대로 또 다시 행할 수는 없다.

사랑의 포로가 되는데 영원한 우리의 기쁨과 행복이 있다.사랑의 법은 공포의 법보다 항상 더 강한 것이다. <P.S.>

1.믿음은 위치를 바꾼다.

1).죄의 종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2).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3).사망에서 생명으로,

2.믿음은 품위를 달리해준다.

1).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2).왕자와 공주

3.믿음은 역사의 객체(客體)에서 주체(主體)로 바꾼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축이다.-

4.믿음은 삶의 중심을 바뀐다.

1).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Ego-centric---God-centric),

2).썩어질 것이 영광스러운것으로,

5.믿음은 가치 기준을 바뀐다.

-모세가 바로의 궁전을 버리다.-

6.믿음은 삶의 자세를 바꾼다.

1).부정적 자세가 적극적,긍정적으로,

2).멸망과 파괴의 하나님이 아니라 완성과 축복의 하

나님,

7.믿음은 사랑의 대상(성격)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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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신득의(以信得義)

"(롬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롬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롬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신득의'란 믿음으로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이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얻을 수 있다.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의가 되시는 예수를 믿어야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구원은 죄로 인한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22:1-15에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혼인 잔치 비유 말씀이 있다.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었다.종들을 보내 초청한 사람들을 오라고 했으나 오기를 싫어했다.임금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냈으나 초청받은 사람 모두가 돌아보지도않고 일부는 자기 일에만 몰두했고 일부는 오히려 임금의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잡아죽이기까지 했다.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랐다. 그리고 다시 종들을 보내어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고 했다.그래서 혼인자리에 가득하게 되었고 임금은 손님을 보러 들어가니 예복을 입지않은 한 사람을 발견하고 내붸으라고 명령했다.옛날에는 지금처럼 옷이 많지않았다고 한다.그래서 잔치를 할 때 사람이 모이면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람들의 옷이 남루했기 때문에 주인이 예복을 만들어 보내 손님들로 하여금 그 예복을 입고 참여하게 했던것이다.

이 비유에서 임금이 예복을 입지않은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었으나 그가 유구무언(有口無言)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임금이 화가나 그 사람의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져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게 한 것은 임금이 마련해준 예복을 입지 않은 까닭이다.

구원이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 혼인 잔치에 신부로서 참석해야 한다.`사거리 길'에서 무슨 짓을 했던 임금되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복,즉 깨끗한 옷,의의 옷을 입기만 하면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이 의의 옷을 입는것,예복을 입는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아무리 선한 자일지라도(마22:10)이 예복을 입어야만 혼인 자리에 참여할 수 있다.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씻은 세마포 흰 옷,의의옷을 입은 예수님의 신부들이다.이 에복을 더럽혀서는 안된다.공중 혼인 자리에 이르기까지 성결 보존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신부된것을 보증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시다.성령은 혼인을 약속하시는 약혼 반지와 갇은 것이다.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예복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 약혼 반지까지 거저 끼워주시고 공중 혼인 잔치에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로 신부 단장하여 참석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의를 얻게 된다.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게 된다.(본문3절,창15:6).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된다.아브라함은 가장 뛰어난 신앙의 사람이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한달에 하나씩해서 모두 12개의 우상을 섬기고 있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그 우상을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어느 날 아브라함이 집에 남아서 점포를 돌보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우상을 사려고 왔었다.아브라함이 손님의 나이를 물으니 50이나 60 등이라고 대답했었다.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러한 나이가 되서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을 섬기다니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고 말했다.70이나된 원기 왕성한 노인이 우상을 사러왔다.아브라함은 그 노인의 나이를 묻고는 "당신보다 더 젊은 하나님을 섬기다니 얼마나 바보같은 일이요"라고 했다.어떤 여자가 신들에게 드리기 위해 먹을 것을 가지고 가게로 왔다.아브라함은 우상을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몽둥이로 때려부시고 한 개 남은 우상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몽둥이를 들려 주었다.아버지인 데라가 돌아와서 아브라함을 책망하니까 아브라함은 "아버지여 어떤 여자가 신들에게 드린다고 먹을 것을 가져 왔는데 모든 신들이 제가끔 탐내서 그중 제일 강한 신이 자기 혼자 먹으려고 나머지 신들의 머리를 때려 떨어뜨렸습니다"고 말했다.데라는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것들인데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하니까 아브라함은 "지금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모험을 예비하는 신앙이었다(히11:8).크리스챤으로 살기 위해서는 모험을 무릅쓰는 용기기 필요하다.모험이 없는 신앙은 믿음이라 할 수 없다.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느 때,어느 곳으로 부르시든지 순종했다.아브라함은 인내심이 강한 신앙을 가졌다.

신앙의 사람이란 끊임없이 신앙의 불을 밝게 켜고 암담한 날에도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고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에도 계속해서 기다리는 사람인 것이다(히11:9).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저편을 바라보는 신앙을 지녔다(히11:10).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환상을 본다.최후의 날의 환상은 아브라함에게 도중의 곤란과 실망을 극복하는 힘을 주었던 것이다.그는 마음의 만족을 이 땅위의 것에서 찾지 아니하고 영혼의 고향에 도달하는 날만을 오로지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인생의 황야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기다리고 싶은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주시며 그 환상을 받은 사람은 도중의 노고나 곤란에도 참고 견디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뿐만 아니라 승리와 축복을 얻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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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믿는 자의 조상

"(롬4: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4: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롬4: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롬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롬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4: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자들의 조상이 아니라 그는 그가 한 것처럼 꼭 같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조상이다.아브라함은 모든 세대에서 그와 같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느 사람들의 조상이다.

이것은 진정한 유대인은 인종적(人種的)인 유대인이 아니고,육체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진정한 유대인은 인종이 무엇이든간에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는 할례받은 사람도 아니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아니라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 자"와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이라고 했다(롬4:6,7).

사람의 행복이 부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죄의 문제에 있다는 것이다. KAL 기 폭파범 김현희가 책을 펴내 돈방석에 앉았다 할지라도 2백여명의 생명을 앗아간 죄를 용서받지 못했다면 불행한 여자이다.그러나 그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으로 "사하심"과 "가리우심",그리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을 받았다면 그 사람을 "의로 여기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매우 크고 놀라운 언약을 하셨다.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고 지상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룰 것이고 지상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창12:2-3).

이 엄청난 축복(행복)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보여준 믿음,신뢰,신임 그리고 순종때문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이다.이 약속(언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축복(행복)을 받게 된다는 약속이다.예수를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여기신다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복은 예수를 믿는데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은총이란 하나님의 선물로서 노력해서 얻거나 받을 자격이 있어 얻은 것이 아닌 그 무엇이다.진리는 인간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노력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자기의 행복을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담당시키심으로 인간 행복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믿음이란 하나님은 진정으로 그러하시다는 확실성이다.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믿음으로 믿는 자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축복(행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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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아브라함의 믿음

"(롬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4: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4: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4: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게 하시고 존재하지도 아니하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그 말씀대로 믿으려고 하는 자발적인 믿음을 가졌다.

아브라함은 자기 나이 1백세나 되어 몸이 죽은 것 같고 자기 아내 사라의 태(胎)도 죽은 것 같은 것을 알고도 전혀 믿음이 약하여지지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않으며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본문19,20절)했다.

한마디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바로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의로 여기셨던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이 우리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는 한 우리는 비관론자가 될 수 밖에 없다.그러나 중대한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이시라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낙관론자가 된다.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수의 부활에 적용시키고 있다.아브라함은 죽음에서 생명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었다.바울이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한 것은 예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인정받게 하기 위함이다(24절).아브라함의 믿음의 경험은 신약시대이후 기독교인들의 경험과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신약은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재림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죽은 몸을 소생시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그때나 지금이나 신앙은 이념(理念)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응답이다.아브라함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음으로 응답했듯이 오늘날 인류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신 하나님의 권능을 믿어야 살 것이다.

예수 부활의 신앙이 바로 아브라함의 신앙과 같은 것이다.예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었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칭의(稱義)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모든 자들의 모형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다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가 있는 것이다.

믿음이 주는 모든 가능성의 축복을!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의롭다하심으로 하나님과의 생동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삶의 무궁한 창조력과 생산성을 얻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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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믿음의 생활

"(롬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롬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로마서 6:1-11에서 "생명과의 연합"이라는 믿음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경험에 대해 말씀을 드렸다.신비적인 경험 다음에는 실질적인 믿음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그가 아무리 놀라운 신비스런 경험을 했더라도 그것을 즐기라는 것이 아니다.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성화(聖化)의 생활을 해야 한다.

기독교는 종교적 감정을 즐기는 감상적인 종교가 아니다.감정은 행위로 변화되어야 한다.변화산에서의 신비스러운 체험가운데 그곳에 "초막 셋을"짓고, "주여,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17:1-8)가 기독교의 전부가 아니다.

기독교는 비밀 장소의 경험만이 될 수 없다.기독교는 시장안에서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생활 현장에서 믿음을 나타내어야 한다.말틴 루터는 "믿음이란 구체적인 생활속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구체적인 믿음의 생활은 무엇인가? 본문 12절을 보면 죄가 다시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죄가 우리를 주관치못하고 예수만이 오직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여전히 죄는 연약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고 이것 역시 현실인 것이다.사망의 진노가 구속받은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면서 타락한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그렇기에 더 이상 죄의 유혹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부끄럽지 않도록 "성결 보존"의 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분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기전에" 즉각 회개하므로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는 것이다.

마귀는 교만을 통해서 역사한다.타락은 인간의 교만에서 비롯 된 것이다(창3:5).마귀는 교만에 빠진 타락한 천사였다(겔28:12-19)."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

하나님의 축복의 물은 아래로 흐르므로 그 물을 마시기 원하는 자는 허리를 굽혀야만 한다(A.C.Dixon).

다음으로,13절에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다."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고후5:17)로서,새 생명을 소유한 신분으로서 자기의 지체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6:15),성령이 거하는 전이며(고전6:19),값으로 산 것(고전6:20)이 되었기 때문이다.성도는 죄와 투쟁하여 승리하기 위해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활이 되어질 때 의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이다.의의 병기로서 성도가 갖추어야 할 것들은 엡6:10-20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것이다.곧 말씀 충만,성령 충만,사랑 충만,은사 충만하여 믿음의 생활에 승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

마지막으로,성도는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인간을 죄악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은혜아래 있다고 했다. 데니(Deney)말처럼 "이것은 속박이 아니라 죄로부터 자유케하는 격려이다.성자를 만드는 것은 시내산(율법)이 아니라 갈보리 산(십자가 은혜)이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엄격한 재판관으로 생각하지않고 사람의 영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본다.온 세상에 사랑과 같은 격려는 없다.

기독교인의 격려는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하실까하는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한 격려에서 오는 것이다.

또한 은혜아래 있다는 말은 자유를 의미한다.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란 순종의 자유,섬김의 자유,헌신의 자유를 말한다.사랑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다.믿음의 생활은 진정한 자유의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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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믿음의 분량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롬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롬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로마서 12장 1,2절은 기독교 윤리의 대원칙으로서 '예배의 생활'을 말씀한것이고,본문에서는 삶의 구체적인 한 영역인 교회에 대한 성도의 자세와 그 섬기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다.즉,교회내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성도의 자세는 어떻해야 하는가? 를 교훈하고 있다.

바울은 봉사 활동의 기준으로서 "믿음의 분량"을 제시하고 있다.바울이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즐겨 사용하는 개념중의 하나는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고전12:12-27).

우리 몸의 지체는 서로 다투지도 않고,시기하지도 않으며,제각기의 중요성에 대하여 시비를 하지도 않는다.몸의 각 지체는 그 기능이 제아무리 뛰어 났거나 혹은 그 기능이 제아무리 눈에 안 보일 정도로 낮은 것일지라도 자기의 기능을 다 하는 것이다.교회는 바로 그와 같아야 한다.

"어느 날 손과 발이 싸우고 있었다.발이 먼저 불평을 털어 놓았다.나는 밤낮 꼬랑내나는 구두 속에 들어가 심방이나 다니고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것은 한번 못 만지고 살다니.그 때 손이 대답했다.그러나 너는 언제 내 손을 씻어 주었니? 그래도 나는 너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지 않니? 그러자 발이 말했다.그래도 너는 높은 데 붙어 있지 않니? 나는 그게 부럽단다.그 때 손이 대답했다.높은 데 있으면 뭘 하니? 무거운 것은 나혼자 들고 다니는데."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바는 성도는 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각 제체는 지워진 임무가 있다.그리고 각 지체가 각자의 임무를 다 함으로 협조를 할 때에만 교회 전체가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다 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임무를 올바로 다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의 "믿음의 분량"을 알아야 한다.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알 때만이 올바른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다.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바로 인식하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을 스스로 과대 평가하거나 과소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자신을 과대 평가한다는 것은 교만함을,자신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비겁함을 말한다.

교만과 비겁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인 독소요 걸림돌이 된다.교만과 비겁은 성도 개인의 신앙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성장에도 암적인 존재가 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큰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이다.이 공동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외에 여러가지 봉사 활동을 필요로 한다.교회와 봉사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성격 속에서 그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즉 예수님은 남을 섬기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봉사하는 가운데 그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다.봉사 활동은 성도들 상호간에 믿음에 유익을 주고 그리스도안에서의 교제를 형성함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다.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봉사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앙을 성장하게 하시며 더욱 귀한 은혜와 은사를 부여해 주신다.

이 봉사 활동에 근본적인 자세로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섬김의 도'를 가르치시고 또 몸소 겸비의 본을 보여 주셨다(막9:35,요13:4,5).하나님께 헌신하는 성도들이 영적 교만이나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 성장에까지도 악영향을 끼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받으실 때 분량에 관계없이 받으셨지만(요3:34) 성도들은 분량에 따라 받는다(엡4:7).분량에 관계없이 무한한 은사를 지니셨던 그리스도께서도 겸비하고 온유하셨는데 모자라서 안타까와하는 우리가 교만하고 우쭐댈것인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실제보다 과대 평가해주기를 기대하지도 말아야 한다.이것을 프로이드의 용어로 말하면, 초 자아(超 自我,super ego)와 참 자아(true ego)로써 이 두 자아(ego) 사이에 갭이 많으면 많을수록 갈등이 많은 것이다.

자기를 평가함에 있어서 정직하게 그대로 자기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누구보다도 자신을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데칼트는 말하길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가장 냉철하게 객관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고 했다.그 이상도 그 이하도 말고 항상 믿음의 분량대로 신실하게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자신을 아는 데는 우선 내게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즉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라인홀드 니버는 "하나님이여,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고,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라는 훌륭한 기도를 했다.

본문에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즉 마땅히 생각할 만큼만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다(본문 3절).사람이 어떤 재능을 가졌든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이 은사를 '카리스마타'(charismata)라고 한다.'카리스마'는 인간이 노력으로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그 무엇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평생동안 말하는 것을 연습할 수 있으나,그래도 청중이나 군중을 감동시키는 그 마력을 얻지 못하지만,다른 사람은 강단에 올라 가기만 하면 청중은 그의 손아귀에 있게 된다.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사인 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무슨 은사가 있든지 사람은 그것을 사용해야만 한다.사용하는 동기는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그에게 지워진 의무인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특권이다.받은 바 달란트가 많든 적든가 하는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해 사용해야한다는 것이다.사용하지않고 땅에 묻어두면 책망을 받게 된다(마25:14-30).

받은 바 은사를 사용하되,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인간의 몸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지체들이 수 없이 많지만 그 지체들은 한 몸에 속한다.그리고 각 지체들이 자기 고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때 그 몸은 건강한 삶을 유지하게 된다.이것이 바로 몸된 교회의 통일성이다.

성도는 한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이로부터 성도는 자기 중심의 생활 자세를 지양하고 교회 전체의 유익과 덕을 위한다는 공동체적인 선을 지향해야 한다.

이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은사의 종류를 보자.

6절에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하라고 말씀하고 있다.예언이라고 하면 흔히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다.예언의 가장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 하고,사람의 뜻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기도라고 한다.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자를 예언자라고 하고 사람의 뜻을 하나님께 말하는 자를 제사장이라고 한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되 믿음의 분수대로 전하라는 것이다.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하면서 자기 말을 자기 감정대로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저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다음으로,"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7절)" 즉 봉사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다.바울이 섬기는 일,봉사를 예언 다음으로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봉사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사람이 한 번도 공중앞에 나서서 그리스도를 선포할 특권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으나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자기 동료에게 봉사를 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또한 봉사는 어디까지난 봉사로 끝나야 한다.남이 알아주기를 원하거나, 칭찬을 바라거나,심지어 봉사의 댓가를 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봉사가 아니다.봉사는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않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에 있는 은사는 "가르치는"은사이다.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선포되는 것만 아니라 설명되어져야 하기도 한다.오늘날 교회의 큰 실수는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설명하지는 않고 계속해서 크리스챤이 되라고만 하는 것이라고 윌리암 바클레이는 지적하고 있다.가르침의 배경이 없는 권고나 초청은 허무한 것이다."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라는 말씀의 뜻은 그 가르치는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 하라는 말씀이다.

다음,"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즉, 권고하는 은사가 있다.가르치는 일에 정교한 사람들이,권위하는 일에 있어서는 냉담하고 미숙한 경우가 많고,그 반대도 마찬가지다.전자는 보다 더 예리한 머리를,후자는 보다 더 따듯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

권위하는 자는 어디까지나 상대방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가 되어야지 책망하거나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음,"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해야 한다.구제의 직분을 맡은 자는 그 일을 "후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해야 한다.사람을 차별해서 구제하거나 자기 자신의 엉뚱한 목적을 가지고 구제해서는 안된다.오직 하나님을 영회롭게 하고 그에게 유익을 끼쳐드리는 이외의 목적을 두지 말고 모든 정성과 성실을 다 해야 할 뿐이다.가진 자는 주되 풍성하고 후하게 주라(고후8:2,9:13).하나님은 즐거이 후하게 주는 자를 사랑하신다.

다음,"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한다.이 말씀은 교회안에 뭐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해서 잘못하는 자들을 바로잡고 넘어진 자들을 훈계하고 계도하며 교회를 순결하게 지키는 일에 있어서 정성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했다.자비를 베푸는데서 즐거움을 찾으라는 말씀이다.자비를 베푸는 일을 맡은 자들의 즐거운 표정이야 말로 수혜자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아닐 수 없다.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즐거운 표정과 친절한 말씨로 잽싸게 행동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병들고 상처 입은 자들,일반적으로 불행한 자들을 상대로 일을 하는 자들은 인내할 뿐만 아니라 즐거워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이 일이 더욱 즐겁고 부담없게 해주며,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록 해야 한다.

진정한 용서는 언제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지 결코 우월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초대 교회에 하나님께서 집중적으로 은사를 부어주신 것은 복음을 확산시키며 도처마다 교회를 설립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기인한다(행1:8).그러기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복음을 증거하며 역사하는 곳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무수한 회심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행2:41,5:12,8:5,6,16:33,34,28:23,24).

오늘날에도 성령의 은사를 받은자들이 방언과 신유,그밖의 다른 여러가지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그러나 초대 교회시대보다 훨씬 복음이 널리 전파된 오늘날에 있어서는 말씀을 중심으로 한 가르치는 직분과 봉사하는 직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하면서 그와같은 은사보다도 더욱 중요한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그것은 곧 성령의 열매로서 맺어지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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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부활 신앙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고전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15: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15:27)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고전15: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고전15: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전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전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전15: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15: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전15: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고전15: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고전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전15: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15: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1. 뉴욕에서 신문에 보도된 재미있는 토픽 한 토막입니다. 뉴욕 써니사이드에 있는 한 공장에서 사장이 자기 얼굴을 닮은 고무 인형을 매달아 놓고 "누구든지 화가 나면 이 인형을 두들겨 패라."고 써 붙였습니다. 직공들이 그 인형을 하도 많이 두들겨서 일 주일에 한 번씩 새 것으로 갈아 놓아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작업능률이 올라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누군가 맞아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먼저 눈 위를 밟고 지나가야 길이 생기는 법입니다. 누군가 십자가를 져야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만 달면 모든 쥐는 안심하고 살 수 있다."라는 이론은 누구나 압니다. 문제는 이론이 아니라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다느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없이는 인간에게 참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다음 성구에 있습니다.

"(레23: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레23: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곡물의 첫 이삭 한 단" 즉 첫 열매를 하나님께 먼저 바치라는 것입니다. 바쳐진 "곡물의 첫 이삭 한 단", 즉 보릿단을 연한 방망이로 보리 알이 상하지 않도록 떨어서 껍질은 바람에 날려보내고, 알맹이는 방아에 찧어서 그 가루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첫 열매였습니다. 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기 전에는 햇보리를 상점에서 사고 팔지 못했으며, 햇보리에서 나온 가루로 떡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 열매는 앞으로 거두어들일 추수의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앞으로 있을 모든 신자들의 부활의 표시였습니다. 첫 열매를 정식으로 하나님께 바치기 전에는 햇보리를 먹을 수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생명의 새 추수는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후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우리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음에서 다시 살 것을 믿습니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에서 일어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인 것입니다. 부활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할 때 쉽게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성경 말씀에 뿌리를 깊게 내린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살기도 하고 성경대로 죽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카톨릭 안동교구 정호경 신부가 불교의 대표적 경전, 반야심경을 번역 출판했습니다. (책명, 가자! 가자! 함께 가자!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정신부는 <반야심경과의 만남을 소중한 인연으로 삼고 있다.>며 <좀더 사람다워지고 함께 하나가 되려 하는 것에 종교간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말했습니다(경향신문. 1997.6.6일자). 기독교는 착하게 살거나 사람이 사람다워지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는 것이 "(고전15:19) 만일.....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그 믿음이 유익 되지 못한 것은 그 들은바 말씀이 믿음과 화합하여 순종치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약속 받았을지라도 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한 사람은 한 사람도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히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히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히4:4)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히4: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히4: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히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히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히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히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기독교는 하나님 말씀, 명령에 대한 순종의 싸움인 것이지 착해지려는 싸움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진리 사수(眞理死守)의 생활입니다. 부활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은사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부활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느 교회보다 은사와 지식이 앞섰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활 신앙을 저버리므로 분파가 생기고 부활 신앙까지도 부인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고전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고전1: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고전1: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린도 교회의 특징은 지식과 지혜와 은사가 넉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사를 장차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신앙 생활로 나타나지 못하고, 현세에서 자기들을 증명하는 우월하고 형통한 보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자주 충돌하는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가장 신령한 자이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자이어야 하는데 왜 늘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늘 실패하고 어려움 속에 있느냐며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가 생긴 것도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예수 믿고 고난받으며 만물의 찌끼처럼 대우받는 것은 신령하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의 종으로 의심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는 일마다 앞길에 대로가 열려 승승장구 성공하고 출세하여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어야 신령한 것이며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것은 무엇입니까?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고전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고전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어 "부요하고 왕노릇하고 강하고 지혜롭고 존귀하게" 되는 것이 신령한 신앙생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사용하시는 방법이고 세상에서 걷게 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겠습니까? 우리의 영원한 상급과 지위는 결국 내세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훈련되고 만들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령하며 믿음이 좋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판단, 올바른 믿음을 가진다면 병에 걸리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바울은 배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부활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목표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환란과 고난을 피하지 않기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날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신자란 누구입니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할지라도 복음 증거 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이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진정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난과 환란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후11: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고후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고후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고후11: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조지 워싱턴 장군이 1776년 겨울 펜실베이니아 주의 포지 계곡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그 겨울은 몹시 추웠으며 식량은 떨어지고, 옷과 신발이 해어졌으며,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군인들이 쓰러지는 비참한 겨울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웃 동네 사람들은 워싱턴 장군의 군대에 대하여 몹시 불친절했습니다. 이 때 워싱턴 장군은 군병들에게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여름철 군인과 햇빛 날 때의 애국자는 아무 일도 못한다. 장차 민족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고통의 날을 이겨내는 사람들이다."'여름철 군인' 즉 추위도 없고 괴로움도 없는 좋은 계절에 사는 편안한 군인, 그리고 '햇빛 날 때의 애국자' 즉 세상이 편하고 별 위험이 없을 때에 애국을 부르짖는 애국자는 인류의 역사를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고통이 있을 때, 그리고 십자가를 져야 할 때, 욕을 먹고 비난을 받고 희생의 피를 흘려야 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고 갈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승리와 영광은 십자가로 얻는 것입니다.

"(골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3.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은 '여름철의 군인'이나 '햇빛 날 때의 애국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의 삶은 한 마디로 부도덕함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까지도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부활의 진리를 부정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생명이 전부이며,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내일은 죽을 터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고 즐겁게 놀자"고 말할 것입니다.

"(사56:12)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이는 어리석은 부자의 생활과도 같은 것입니다.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내세의 생각을 버리면 현세의 가치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현세의 삶은 보다 위대한 내세의 생명을 위한 훈련이요, 준비라는 생각을 버린다면 지조도 도의심도 해이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수를 바라고 선을 행하거나 지조를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현세의 존재만을 믿는 사람은 현세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활이 없다는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상종하면 어쩔 수 없이 생명을 더럽히는 악 영향에 물들게 마련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부활 신앙 없이는 새로운 삶이 없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앙 위인은 가가와 도요히꼬입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맥아더 장군이 군정관으로 일본에 상륙하기 전 미주리 전함으로 가가와를 초청하여 자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만큼 가가와는 세계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보면 무척 단조롭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믿게 된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21세 때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색과 고민에 잠겼는데, 갑자기 그의 머리에 들어온 빛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종말의 상징이 아니라 새 출발의 표라는 진리였습니다. 이튿날 새벽, 청년 가가와는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빈민굴로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깨달은 진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한 번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자기는 죽고 사선(死線)에서 재출발하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그 후의 생명은 덤으로 사는 것이므로 아까울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박애정신과 희생은 사선을 넘어 재출발한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4.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위해 있는 것이며, 그의 부활은 장차 있을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과 나의 부활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과의 관계 속에서 신앙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고전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예수의 부활이 있어야만 우리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과 영생을 누리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가 사망"하는 그 날에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을 기다리는 삶이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체를 닮아서 변하는 자리까지 가야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뿐만 아니라 육신에 이르기까지 거룩함과 생명과 진리로 충만해져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완성인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장차 누리게 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로드 아일랜드주의 창건자인 로저 윌리암스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곁에 있던 사과나무의 뿌리가 관속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과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윌리암스의 몸을 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썩어서 흩어진 몸이 어떻게 다시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추론(推論)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자여!" 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은 육체가 재구성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부활 때에 하나님께서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모아 우리의 이전의 몸으로 돌이킨다고 말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몸은 욕된 것으로 묻히나 장차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영광된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땅에 묻히는 몸은 연약하나 부활 때의 변화된 몸은 강합니다. 예수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적 환경에 적합한 신령한 몸, 영광스러운 몸으로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사람 죽이는 것을 이 한 마리 죽이는 것쯤으로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애인의 권면으로 경찰에 자수한 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를 읽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기사에는 이미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한 사람의 인간이 한 걸음 한 걸음 갱생의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단순한 살인자였든지 혹은 사회 혁명가였든지는 상관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인간의 삶이란 한 인간을 한 걸음 한 걸음 갱생의 길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100년 전 부활주일에 헨리 아펜젤러 목사가 이 땅에 왔습니다. 그는 상륙하자마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 드렸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여기 도착했습니다. 이날 죽음의 철장을 꺾으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쇠사슬을 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광명과 자유를 얻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부활절 아침에 이 땅을 찾아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어둡고 괴로웠던 식민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나라는 어떻습니까? 부정과 부패, 허영과 사치, 향락과 음란, 우상숭배와 각종 미신 등으로 가득차 어둡고 혼란스러우며 죄악으로 관영한 땅이 아닙니까? 이 땅에 한 걸음 한 걸음 갱생의 길, 소생의 빛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부활 신앙으로 재무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실주의적 기복신앙을 벗어 던지고 자신과 나라 민족을 새롭게 하는 부활 신앙으로 재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비록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진리 사수하며, 성결 보존하며, 신의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사는 사명자입니다. 십자가를 진다할지라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성경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죽인 로마 제국은 온갖 권위와 횡포로 박해와 핍박을 서슴지 않았지만 300년이 지난 뒤 로마의 황제는 스스로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차와 대포를 가진 로마가 빈주먹으로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만을 가르치며 전하던 사람들 앞에, 그 힘없고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의 아이러니, 복음의 승리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까? 교회의 역사는 감히 증거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라고. 영광의 그날, 부활의 그 날, 그 기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그 날, 홀연히 신령하며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을 바라보며 산 소망이 충만한 부활 신앙으로 이 땅의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나라 민족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이 땅에 부활의 복음,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자신과 더불어 나라 민족이 다시 태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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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성숙한 믿음과 자유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 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라디아서 4:1-11)

초등학교 앞 가게에는 아이들한테 유익한 것도 많이 있지만 먹어서는 안되는 불량 식품을 팔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아이들한테 사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일러둡니다. 아이들은 식품이나 장난감 등의 유해 여부를 잘 모르게 때문에 일일이 지적해서 말해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라서 성인이 되면 초등학생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진위 여부와 유해 여부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조목조목 지적해서 가르침을 내리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 성경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는 자>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율법은 한 마디로 초등 학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삽니다. "애야, 돼지고기나 오징어, 문어, 갈치 같은 것은 부정 식품이니까 먹지 말라. 부정 식품을 골라내는 법은 이렇단다. 짐승 중에 굽이 갈라지고 쪽발이어야 하며 동시에 새김질하는 것이어야 한단다. 이중에 하나라도 갖추지 못한 것은 부정 식품이란다. 그리고 강이나 바다 등 물에 있는 것들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바로 부정 식품이란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뭘 해야지? 그래 구구단 외우고, 숙제 빠트리지 말고 반드시 해 와야지? 절대로 텔레비젼을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밖에 나가 군것질해서는 안 된다."(레위기 11장)

유대 율법이 가진 특징은 식물을 가려먹는 것(레위기 11장)과 날, 절기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날>은 매주의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달>은 유대인들이 지켜 내려온 월삭(매달 초하루)을 말합니다. 또 <절기>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 같은 커다란 행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해>란 안식년, 그리고 일곱 번째 안식년이 되는 희년을 말합니다. 이런 제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안식을 예표하는 것들입니다. 날(안식일)이 모여 달(월삭)이 되고 달이 모여 해(절기)가 되며 해가 모여 안식년, 희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정신과 희년의 정신은 다 같은 것입니다. 희년에는 무조건 노예들을 해방시켜주고 모든 부채를 몽땅 탕감 해주어 원래 분배받았던 대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희년 제도를 두신 목적은 바로 자유와 분배의 평등을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곤하셔서 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탐욕을 버리고 모두가 다 함께 사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출애굽기 23장 12절은 "너는 육일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네 욕심을 채우기 위해 네 집의 종들이나 날품파는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부려먹지 말고 숨 좀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6일 동안 일했다고 6일 품삯만 주지 말고 7일 품삯을 주어 함께 안식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뜻은 함께 사는 법을 배워 자유와 분배의 평등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정신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종교의 틀 속에 집어넣어 자신의 축복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안식일을 잘 지켜야 복 받는다는 원리로 살다가 자기 배만 채우는데 급급하다가 결국 바벨론에 침략을 당해 하루 아침에 포로가 되어 안식일조차 지키지 못하는 불쌍한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에스겔 5:6-7) 왜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지요. 규례대로 지켰습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안식일에 담긴 하나님의 뜻대로 지키며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일 성수를 축복의 수단으로 가르친다면 주일 성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참 뜻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자유와 분배의 평등의 정신을 가지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주일 성수 그 자체만을 고집한다면 결국 <율법 아래 사는 자들>, <세상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 합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 잘 비벼 먹었습니다. 이를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짓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너희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성전에 가고 있는데 그 성전보다 더 큰이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내가 곧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여전히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한 바리새인들을 깨우치고자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2:1-8) 그리고 회당에 가셨습니다. 마침 그곳에 손이 말라 지체가 뒤틀린 장애자가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병 환자를 고쳐 주는 행위는 율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손 마른 장애자를 깨끗이 고쳐 주셨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율법에 정통하다는 바리새인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예수의 행위를 비난하고 시비를 걸어 죽일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12:9-15) 율법으로 밥먹고 사는 바리새인들은 종교를 구성하는 율법의 틀속에서 손 마른 장애자를 보고 그 율법에 매여 율법에 종노릇했을뿐, 손 마른 장애자의 아픔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안식일이라는 제도 속에서 사람의 생명의 소중함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제사(안식일)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자에 대한 자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말라비틀어진 바리새인들의 종교나 교회를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인간을 살리고자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들에게 종교를 주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들이 생명을 얻어 더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식물이나 날, 절기 등의 율법 아래 두어 그것을 종교화하는 것은 신앙을 형식화시키는 것에 불과 한 것이지 결코 사람의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지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율법 아래> 두고자 하는 것은 초등학생을 부모나 선생님의 권위 아래 두어 가르치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모나 선생님의 권위와 그들이 초등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여러 가지 생활 규범으로는 궁극적으로 초등학생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초등학생들을 어떤 권위나 규범으로 다스리기보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규범대로 살아야 하는 참 뜻을 바로 깨닫고 자율적으로 규범을 지킬 수 있도록 한다면 보다 더 효과적이고 성숙한 방법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어 주시는 성령이 바로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 성숙한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비행기 탑승할 때 소지할 수 가방의 부피, 크기, 무게를 제한하듯이 안식일에 들고 갈 수 있는 무게를 엄격히 지키고, 또 2km 이상 걸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 보행 거리 제한 규정을 철저히 지킨다고 해서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 아닙니다. 율법에 정한 정(煖)한 음식, 곧 굽이 갈라지고 족발이며 새김질하는 것,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는 것만 가려먹는다고 해서 사람이 성숙해지고 변화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배타적이고 위선적이며 이방인들보다 더 탐욕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야말로 주일 성수하고 음식에 대한 구약의 율법들을 지키며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요구하시는 참 뜻을 외면하고 성숙되지 못한 믿음 생활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를 말합니다.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브리서 13:9)

사람 마음이 아름다워지고 변화되는 것은 뭘 먹고 무슨 날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살아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되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주일날에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율법 아래> 매여 살지 아니하고, 바른 율법 정신을 가지고 사람을 위해 주일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고 사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율법 아래> 성숙되지 못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가리켜 <종의 믿음>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케 하시는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참 뜻을 깨닫고 그 성령을 생명의 법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을 <아들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구약 창세기 12장 이하에 보면, 하나님 말씀을 믿어 의롭게 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게 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가 넘어 그 아내 사라는 도저히 생산이 불가능한 노(老)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인지라 기다려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결국 사라는 아마 자기 젊은 몸종 하갈을 통해 자식을 낳으라는 것으로 생각해서 남편의 침소에 하갈을 들여보내고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사라가 잉태하여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자라면서 애굽 여인 몸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희롱하곤 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내의 말에 깊이 근심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근심하지 말고 사라의 말대로 하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갈과 그 아들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 두 아들은 영적 진리의 두 가지 유형이 되어 오늘 본문 말씀을 잘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아들로서, 자연적 탄생만을 경험하고 위로부터 거듭남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상징입니다.(요 3:1-8) 그는 종으로서 태어났고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연을 거스려 태어났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 오는 모든 이들을 상징합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역사로 태어났습니다. 이는 예수처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성령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 기적을 이루어 그를 낳게 했다는 뜻입니다. 종의 아들 이스마엘은 율법, 믿음의 아들 이삭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종의 믿음>을 가진 자를 <율법 아래 있다>고 하며, <아들의 믿음>을 가진 사람을 <성령으로 사는 산다>고 합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목사가 되었던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를 졸업할 무렵 매우 보수적인 신앙으로 행위가 단정하며 선행을 많이 베풀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교도소 전도, 빈민가의 어린이들 구제, 문맹퇴치 등으로 신앙생활에 자신의 온 힘을 다했습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서 지키고 그것도 모자라 주일을 또한 지켰습니다. 그는 규칙적으로 성찬을 행하고 자선을 베풀고 성경을 탐구하고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 행위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들을 신뢰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웨슬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선행으로 가득찼던 자신의 옥스퍼드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당시 <아들의 믿음>이 아닌 <종의 믿음>을 가졌을 뿐이었다." 존 웨슬리는 예수 믿고 성령을 체험하고서야 비로서 성령의 자유케 하심을 따라 <아들의 믿음>, 곧 성숙한 믿음과 자유를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율법 아래 살지 말고 <아들의 믿음>으로 자유롭고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4-6)

예수 믿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율법에 매여 사는 종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명분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종의 믿음>을 살 것이 아니라 <아들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종의 아들 이스마엘을 쫓겨나 아브라함의 기업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직 약속의 아들 이삭만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기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부어 주시는 성령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으시는 복된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성숙함을 말합니다. 열매가 없이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2,23)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복음 15:8)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 성숙한 믿음과 진리안에 참 자유를 누리며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넉넉히 하나님 나라를 기업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의 믿음>을 가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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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라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 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데살로가전서 1:1-10)

요즈음 남자들이 수다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수다스런 남자들의 토크쇼인 <이홍렬쇼>의 "유부클럽"을 보면 유부남 4명이 모여서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등 예전 남자들이라면 쉽게 꺼내기 어려운 민망스럽고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모조리 들춰내 수다를 떠는 모습이 여성들의 수다 수준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TV에서 환영받고 사랑받는 남성 수다쟁이들 가운데 그 대표는 <순풍산부인과>의 박영규라고 합니다. 그는 식탁에서든 침대위에서든 쉴새없이 아내와 떠드는 것이 그의 취미입니다. 이들 '수다맨'에게서 남성의 권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즈음 TV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그동안 브라운관을 주름잡던 남성중심적인 인물보다는 좀더 여성들의 구미에 맞는 남성, 여성들의 심리에 가까운 남성, 최소한 여성들의 대화를 이해해 줄 것 같은 남성들을 앞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TV광고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가수 조성모가 두 손을 모아 쥔 수줍은 여고생 자세로 재킷사진을 찍은 광고가 부담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남성상은 한마디로 '수다맨'이라고 결혼정보업체의 설문조사결과는 밝히고 있습니다.

어느 과묵한 남편과 사는 여성이 경험으로 쓴 <수다 떠는 남자가 좋은 7가지 이유>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경상도 남자'와 십년쯤 살다보면 말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알게 된다. 회자되는 농담 중에 경상도 남자가 집에 와서 한다는 세 마디가 있지 않은가. "아는 자나?" "밥 도." "자자." 정말이다. 실제로 그런 남자와 살아봐서 아는데, 그건 농담이 아니고 사실 생활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두 마디 정도 더하는 날도 있다. "관리비 냈나?"와 "피곤하다."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별 수 없는 일이지만 결혼을 앞두고 남자가 말을 잘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묵언을 맹세한 수도승이 아닌 다음에야 입 다물고 살아야 하는 고통 또한 예사롭게 넘길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수다스러운 남자가 좋다. 첫 번째 이유, 함께 영화 보기가 즐겁다. 슬픈 멜로영화를 보고 나와서 "꼭 여자가 죽어야만 했을까?" 눈물을 찍어 가며 동의를 구하는데, "감독 맘이지, 뭐." '그래 감독 마음이지. 여자가 죽건 남자가 죽건, 혹은 둘 다 살건 감독 마음이다. 그러면 영화는 왜 보니?' 감동은 천리만리 날아가고 쇠심줄 신경을 가진 남자에 대한 짜증만 남는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과묵한 남자랑 영화 보기가 싫어진다. 하지만 수다스러운 남자와는 얘기가 다르다. 다른 상황까지 설정해 맘껏 떠들어 대며 수편의 영화를 찍어댈 수가 있으니까. 두 번째 이유, 밥 먹기도 즐겁다. 식탁에서의 화기애애한 대화는 건강에도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은 밥 먹을 때 마치 제상을 앞둔 사람들 같다. 사실 내 남편도 그렇다. 적막 속에서 밥을 먹다가 고요히 일어나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반면 수다스러운 나는 애 얘기나 친구, 혹은 그날 있었던 일들을 주절거린다. 그것도 일이년이지. 혼자 쇼하는 것 같아서 싫다. 역시 수다 잘 떠는 남자와 밥 먹어야 밥맛도 좋다. 세 번째 이유, 산책하기도 좋다. 정말 두말할 것도 없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청춘 남녀라면 모를까, 산책이랍시고 아무리 꽃길을 걸으면 뭐해? 속으로야 어떨지 몰라도 라일락인지 철쭉인지 초월한 표정을 띠고 담배나 물고 있는 남자랑 무슨 산책? 친구 중에 서울에 살다가 일산으로 이사간 이가 있다. 이 친구는 서울과 달리 일산에는 공원도 많고 공기도 맑으니 매일 저녁 산책을 해야겠다며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사한 뒤 산책은 잘 하냐고 물었더니 웬걸, 집에서 TV나 보고 있는 게 나을걸 괜히 산책 나섰다가 대판 싸우고 들어 온 게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투덜대는 것이다. 역시 산책도 아무랑 하는 게 아니다. 네 번째 이유, 수다스러운 남자와 하는 여행은 즐겁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함께 나누어야 제 맛이다. 뭘 봐도 감흥이 없는 사람과 어디를 가야 즐거울까? 뭘 입고 가면 뽐날까? 가서 뭘 먹으면 행복할까? 종알거리는 남자와의 여행은 출발 전부터 기쁨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결혼 십주년 기념으로 벼르고 별러 외국 여행을 갔다온 한 친구의 푸념을 빌려보면 다음과 같다. "둘만 있으니까 할말도 하나 없고. 심심해서 혼났어." .....》

'수다'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쓸데없이 말 수가 많음'을 뜻합니다. 수다스럽다는 말이 많고 수선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교문화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남자가 말이 많으면 쓰나.' '말 많은 남자는 가벼운 남자.' 등 수다에 대한 부정적으로 사용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한동안 멋진 남자는 과묵한 남자였습니다. 말이 적은 남자는 의리있고 믿음직한 남자의 상징으로도 통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과묵한 남자를 본보기로 삼아온 30∼40대 말수 적었던 중년의 남자들도 예전과 달리 수다스러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학자 김혜련 박사(42·이화여대 기호학연구소 연구원)는 "수다에는 쓸데없는 지껄임이라는 부정적인 뜻도 있지만 풍부한 감정교류란 긍정적인 면도 있다."면서 "남성들이 수다스러워지고 있는 것은 부정·긍정적 차원을 떠나 양성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서울시립대 이병혁 교수는 "남성들이 수다를 즐기는 속도와 가부장적 질서가 해체되는 속도가 비례할 것"이라면서 수다스러움을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해체와 연관시켜 설명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말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으니라."(잠언10:19)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야고보서 3:2-6)

예수께서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태복음5: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에 있어 진실하며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뜻입니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맞는 것입니다. 남성들이 수다스러워지고 있는 것이 부정·긍정적 차원을 떠나 양성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현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해도 본 받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인기나 재미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 모두가 본 받아야 할 삶을 세 가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본받을 만한 이들의 생활은 각처에 그 아름답고 향기로운 소문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엄청난 박해와 그 박해를 더욱 힘들게 하는 사이비 종말론의 유혹이 있었지만 믿음을 지키며 서로 기쁨을 나누며 지속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므로 이들이 아름답고 향기나는 신앙생활로 믿는 자의 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로 교회 규모나 시설 등 교세 확장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더욱 더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는 신앙생활의 첩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의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지난 날 섬겼던 우상을 버리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데서 시작됩니다. 믿음의 역사란 이제 예수 믿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을 했으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지난날의 모든 생활을 회개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결코 산 믿음이 될 수 없고 죽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을 가졌노라면서 '주여, 주여'를 부르짖는다고 다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이 있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할지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불법을 행하면 하나님 앞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결국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는 인생은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게 될 때 그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태복음 7:21-27)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백부장은 예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아니한 믿음의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통스러워한다고 예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며 주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역사를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이같은 믿음을 이스라엘 백성 중 아무에게서도 만나보지 못했노라 칭찬하시며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한 마디가 떨어지자 그 시각으로 백부장의 하인은 중풍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태복음 8:5-13)

백부장처럼 예수의 말씀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여 칭찬받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역사를 생활속에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배에 타고 있었지만 배가 풍랑을 만나 위태로워지자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며 예수 믿는 믿음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면서 믿음이 적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태복음 8:23-27)

살다보면 여러 가지 인생의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어떠한 풍랑과 격랑을 만난다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믿고 하늘의 평강이 여러분 마음에 충만하시므로 믿음의 역사를 보여주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본이 되는 두 번째 생활은 사랑의 수고였습니다. 사랑의 수고란 사랑을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나가 교회 성도들은 험악한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데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는 신앙생활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데는 쓰고 남은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시간과 물질과 몸을 희생할 때 사랑의 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없는 자를 구제하는데 먹고 남는 것으로 하지 말고 하루 세끼 먹을 것 두끼만 먹고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소외되고 갇힌 자를 위로하는데 남는 시간에 하지 말고 자신을 위한 시간을 희생하므로 하라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데 시간과 물질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돌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 내어 주는 것이 사랑의 수고입니다.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라는 책에 보면 "고통이 없는 사랑에는 삶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당연히 고통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희생과 수고가 따르지 않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가올 십자가의 쓴 잔을 눈 앞에 놓고 고민하고 슬퍼하셨지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신 주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의 형장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남기지 아니하고 아낌없이 쏟아 부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5-8)

하나님의 사랑이 거룩한 것은 누구나 사랑할 만한 의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희생하신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하기 힘든 죄인들을 위해, 다시 말해 사랑할 가치가 없는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다는데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의 수고를 그대로 실천에 옮겨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성령의 기쁨으로 사랑의 수고를 보여주었습니다. 어느 시골 농가에 농부 딸이 드레스에 수를 놓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다 그 집에 하루 밤 묵게 된 길손이 이를 보고 물었습니다. "얘야, 그 끝없이 계속되는 힘든 수놓는 일에 싫증나고 피곤치도 않니?" 그러자 농부의 딸은 "아니요, 이것은 내가 장차 입을 드레스인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여러분을 신랑되시는 예수의 신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십니까? 기쁨과 소망으로 사랑의 수고를 하나님과 이웃에게 베푸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수고에는 언제나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이 있기 때문에 그 수고하는 일에 힘든 것보다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세 번째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입니다. 세상에서 복된 사람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입니다. 세상이나 인생은 안개와 같은 것이며 그 호흡이 끊어지면 결국 흙으로 돌아가 소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146:1-5)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소망을 둔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진정한 소망은 예수의 재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인류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동안 여러 가지 인간의 기술과 지식과 힘으로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늙고 병들고 아프거나 쇠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있는 자 없는 자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의사도 약사도 은행도 노조도 필요 없고 바보 온달이나 평강공주가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참으로 예수의 재림은 인류 최대의 소망이며 그만큼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에게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주의 재림을 깨끗함으로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재림을 맞이한다해도 깨끗지 못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무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린도 후서 7:1)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합니다."(데살로니가 전서 3:13)

알렉산더 대왕이 출정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구들에게 그의 전 소유를 분배하였습니다. 그 때 누군가 "그러면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안 가지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대왕은 말하기를 "오, 나는 나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한 모든 것을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재림을 소망하며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 깊어 가는 역사의 밤은 이미 밤이 아니고 새벽을 향한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밤이 지나면 반드시 새벽이 옵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좋았더라고 할 수 있도록 소망의 인내를 가지시고 깨끗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영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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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진보하는 신앙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16)

에베소 교회에 침투한 이단 사상은 영지주의(靈知主義)였습니다. 영지주의란 육체(물질)는 사악한 것이어서 육체와 관계되는 모든 것은 다 악이며 육체적인 본능이나 기능도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먹는 식물(食物)도 물질일 뿐만 아니라 육체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악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영지주의는 결혼도 육체의 본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결혼 자체도 악하다고 주장합니다. 결혼을 부정하는 독신주의, 금욕주의는 바로 여기서 생겨난 것입니다. 육체는 물론 육체의 본능과 기능 자체가 다 악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억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보다 더 엄격하고, 하나님보다 더 선하고 더 거룩해지려고 하던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면서 결국 신앙을 미혹하고 신앙의 진보를 가로막는 자들이었습니다. 독신주의나 금욕주의가 경건의 표상이 아닙니다. 결혼하지 않고 산다고 해서 다 깨끗하고 경건한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천주교의 신부가 결혼하지 않게 된 것은 중세에 교회세습이라는 기독교의 악습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자식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신부는 장가가지 못하게 하자는 데서 비롯된 것이지 스스로 경건해져서 결혼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만드신 제도가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독신주의나 금욕주의를 내세워 결혼을 부정하거나 악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창조섭리를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육식을 금하고 채식만 한다고 해서 경건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경건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다 선한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금욕이나 금식 등을 통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일부 종파에서 금욕과 금식 등의 생활로 사람들로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기독교 신앙을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금욕주의나 금식 등으로 거룩해지려고 결혼이나 식물을 폐하려하는 영지주의 사상이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어긋나는 것을 다음과 같은 창세기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9:3)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할 것은 금욕주의나 금식주의가 신앙의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미혹케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다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 선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지며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다함께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입니다. 이러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기 위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미혹당하지 않고 진보하기 위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말씀에서 경건은 헬라어로 "유세베이아(????????)"인데 '유'(??)는 '좋다'는 뜻이고, '셉'(???)은 '놀란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워하는 놀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죄를 피해서 그리스도 안에 숨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깜짝 깜짝 놀래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죄를 피해 죄를 물리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숨게 되므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을 연습한다는 것은 경건하게 살기까지 연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가이사랴의 이탈리아 군대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라고 했습니다.(행10:2)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와 구제활동에 힘쓸 때, 즉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일에 힘쓸 때 경건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경건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생활에 힘쓸 때 경건을 이루어가게 됩니다.(히5:13,14) 그리고 복음을 위해,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게 될 때 경건을 이루어가게 됩니다.(롬5:3,4)

기독교인은 운동선수가 신체를 단련하듯이 마음의 경건을 위해 단련해야 합니다. "육체의 연습"이 약간의 유익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육체라는 한 부분에 대한 발달을 위한 연습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결과는 아주 짧은 기간 계속되는데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라는 것은 곧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경건하게 단련하는 것은 몸과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에 이르기까지 전인적인 발달과 성숙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 결과는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기독교인은 체육 경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기자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목표는 올림픽 금메달이 아니라 마음을 경건하게 단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경건한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 첫째 사랑을 연습해야 합니다. 사랑이란 원래 마음과 관계되는 일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마음에서 울어나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힘든 여자나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을 단련해야만 합니다. 대개 남자들은 결혼하게 되면 아내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저절로 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평생동안 서로 사랑하기를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단지 마음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의지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사랑이 가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의지를 가지고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단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 또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의지가 성경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익혀 여러분의 마음과 의지가 예수님의 마음과 의지로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로 충성하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원래 믿음과 충성은 같은 말입니다. 예수 믿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예수님의 충성을 배우고 익혀나가야 합니다. 모든 군수품이 모자람 없이 보급되고 최신형 무기를 갖추고 평안할 때 훌륭한 군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몸이 파김치가 될 만큼 지치고 배가 등가죽에 붙을 만큼 허기지고 써울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며 전세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기대이상으로 잘 싸워 승리하는 군인이라면 가장 가치있고 훌륭한 군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건강치도 못하고 가정형편도 몹시 어렵고 집안에 어두운 일들이 줄을 잇는 도저히 신앙생활조차 하기 어려운 가운데서 신앙을 지키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잘 감당하는 성도라면 예수님의 충성을 가장 많이 닮은 경건한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와 환경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간직하고 충성하여 경건한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셋째는 성결해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성결의 표준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시지만 죄인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다 받으실 때에 그들을 저주하거나 그 마음에 분과 한을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잘 되기 위해 참으로 좋으신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과 영혼을 더럽히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통해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갖추어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지않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했는데 여기 연소함이란 유치하여 쉽게 혈기를 내며 사랑을 행하지 못하기 쉽고, 경력(경험)이 부족하여 일을 일관성있게 처리하지 못하므로 신뢰성이 적고, 정욕에 이끌리기 쉬워 성결을 상실하기 쉬운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하도록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말과 행실 즉 언행이 일치하는 생활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보여주신 것처럼 이웃을 위한 희생과 이웃의 죄에 대한 끝없는 용서를 베푸는 십자가 사랑의 본을 보여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바로 믿음의 열매가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누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전혀 사랑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귀신들의 믿음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2:19) 정결이란 예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성도의 생활태도입니다.(요일3:3)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날마다 회개하는 생활로 자신을 거룩하게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거룩한 생활이 있어야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마5:8)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신앙이 진보하여 경건에 이르게 될 때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본이 된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진보하여 성숙한 사람에게서만 기대되는 것입니다. 흔히 듣는 말 중 한번 실수는 병가 상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두 번 늘 실수만 거듭한다면 한평생이 경건에 이르지 못하고 연습생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인생은 결코 연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생활이 진보하여 성숙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연습만 되풀이된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매가 없이는 넉넉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에게만 열매가 가능한 것입니다.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1-7)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신앙이 진보하고 경건한 삶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며 전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하시며 기도생활에 충실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척박한 세상에서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기도생활없이는 경건의 능력있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인터넷, 즉 사이버 공간을 통해 각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버 공간에 교회를 욕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소위 앤티 크리스챤 사이트(Anti-Christian site)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네띠앙, 다음, 라이코스 같은 대형 사이트의 카페라는 공간에 기독교를 비방하며 욕하는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실린 글들은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이 없으면 기독교를 크게 오해하거나 기독교에 대해 실망하여 회의에 빠지게할만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앤티 크리스챤 사이트는 <수호천사>같은 음란물 사이트를 차단하는 프로그램이 없어 청소년들과 일반 사람들에게 바른 기독교를 변호할 수도 없이 기독교가 상당히 부정적 이미지로 부각되어 복음 전파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앤티 크리스챤 사이트가 등장하게 된 데에는 사회 각계 각층에 지도자들로 활약하고 있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불법과 부정부패 등 각종 타락한 모습, 즉 "믿음의 본이 되지 못하는 생활", 경건에 이르지 못한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요즈음 항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 세습이나, 일부 교회의 투명하지 못한 재정으로 교회마저 부의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들이 비방거리가 되어 앤티 크리스챤 사이트에 불을 당기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번 미국에 갔을 때 어느 일식집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일식집 주인은 5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감리교단의 어느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선교활동에 앞장서 적극 동참하고 봉사했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이제 감리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말하길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자신이 그 교회에 다닐 때 분명히 담임목사가 공개석상에서 절대로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교회가 버젓이 담임목사직을 아들에게 세습했기 때문에 그런 목사가 지도자로 있는 교단에 다니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앤티 크리스챤 사이트를 차단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는 성숙하고 경건한 생활"인 것입니다. 오직 말과 행실이 일치하며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생활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말과 삶을 통해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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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믿음이란?(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16)

믿음(신앙)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헤민'(h˝min, ?????)이라는 동사입니다. 기도 마지막에 말하는 '아멘'은 이 동사의 어근에서 나온 것입니다. '헤민'(아멘)은 '어떤 일이 확실하다고 여긴다', '신뢰하다', '약속한 바를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서에서 믿음이란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말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항상 그 앞에서 '아멘'으로 화답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로 인해 멸망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며 부활하시므로 온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희생하셨지만 그 십자가의 사건은 전적으로 나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그 십자가 사건으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인정할 때 '나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자기를 위한 사건으로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키며, 자신의 삶과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누가 "주 예수를 믿으세요"하면 "아멘"으로 화답하는 삶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최초로 선포하신 말씀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었으니 하나님 나라에 뜻을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 비유의 말씀들 모두가 "천국 복음", 즉 하나님 나라 복음이었습니다.(마태복음 5,6,7장)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체험하며 장차 그리스도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바로 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생각하고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다고 했습니다.(히브리서 11:9-16) 예수 믿는 사람은 삶의 목표를 세상에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윌리엄 헌슨이라는 맹수 훈련 전문가는 사자나 호랑이를 훈련시킬 때 훈련사가 왜 작은 의자(등받침이 없는)를 들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의자의 다리쪽을 사자 얼굴 앞에 들이대면 사자는 의자의 네 다리에 동시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이렇게 신경을 한꺼번에 여러 곳에 쓰면 일종의 신경 마취 작용을 하게 되어 쉽게 길들여진다고 합니다. 여러 군데에 동시에 신경을 쓰면 신경 작용의 분화로 무력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세상에 길들여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생활의 중요한 원칙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것으로 미혹케 하는 '마취국'(痲醉國)과 같은 것입니다. 흔히 현대 사회를 3S로 표현합니다. 즉 섹스(SEX,성), 스포츠(SPORTS, 운동), 스크린(SCREEN, 영화)을 말합니다. 이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도록 하는 마취제와 같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야고보4:4)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산 자처럼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갈6:14)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인 것을 믿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고린도 후서 4:18)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이 믿음입니다.(마6:33)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마가복음1:15)라는 말씀의 시제(時制)는 현재 진행형(THE KINGDOM OF GOD IS COMING NOW), 곧 지금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하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고 저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마음에서부터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바로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믿음을 가지면 시각장애자의 눈을 뜨게 하여 볼 수 있게 하기도 하고, 청각장애자의 귀를 열어 듣게 하기고 하며,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셨던 것처럼 한강을 물위로 걸어 건너갈 수 있기도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눈을 뜨게 하고 귀가 열리게 하고 한강 물위를 걸어 도강한다해도 하나님 말씀이 그 마음에서부터 이루어지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서부터 체험하고 사는 것입니다. 죽을병에 걸려 고통 당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 것"(요한계시록 21:4)을 믿고 소망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라(데살로니가 전서5:16-17)시는 말씀대로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이 곧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는 생활,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는 생활, 누가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는 생활,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그가 잘 되기 위해 기도하는 생활 등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나는 잘못되어도 너는 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 나는 낮아져도 너는 높아져야겠다는 마음, 나는 망해도 너는 흥해야 되리라는 마음, 나는 죽어도 너는 살아야겠다는 마음, 이것이 세례 요한의 마음이요 예수의 마음이요 예수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이같은 십자가 예수의 마음과 삶이 곧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나라가 분명히 있음을 믿고 그 나라에 뜻을 두며 하나님의 뜻, 말씀이 이 땅 내 마음에서부터 이루어지도록 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되어야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4-17)

믿음은 고난받고 있는 이웃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아파하는 자와 그 아픔을 함께 하며, 배고픈 자와 배고픔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했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병든 자들과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믿음은 참으로 기독교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으로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데서 벗어나 고난받는 이웃을 자신으로 알고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더 이상 자기 사랑에 매이지 않고 이웃 사랑에 매이게 되어 고난받고 있는 이웃과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으십니까? 하나님 말씀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예수는 가장 낮은 곳에 계십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병들고 소외되고 고난받는 이웃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사랑은 그 누구와도 하나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받는 이웃들과 사랑으로 한 몸인 것을 느끼고 이웃들과 모든 것, 기쁨과 슬픔, 아픔과 괴로움 등 모든 것을 함께 나누게 될 때 참된 믿음을 증명하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일화입니다.

뉴욕 역대 시장 중 가장 뛰어난 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씨였습니다. 그가 뉴욕 시의 즉결 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훔치던 노인이 기소되어 법정에 끌려왔습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10달러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냈습니다. "그 10달러를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나는 그 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죄에 대한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그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 씨에게 내주며 말했습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분들도 나처럼 너무 잘 먹은 데 대한 벌금을 내시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달러를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믿음의 사람은 고통을 당하는 이웃들에 대하여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15:12) 그리스도가 명령하는 사랑은 단순히 사랑의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상처받은 영혼들을 싸매 주며,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벌거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이하여, 자기를 높이지 말고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이 사랑하기를 포기한 사람일지라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용서하고 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참으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단순히 죽은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이웃들에게 베풀어 사랑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맛보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버리워 짓밟히는 것처럼 사랑이 없는 믿음은 맛을 잃은 소금처럼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행위 없는 믿음은 열매 없는 믿음이요, 열매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가운데에서 활동하지 않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사랑의 행위 자체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연민에서 베푸는 사랑이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에서 비롯된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은 한계가 있으며 사람을 구원하는 힘이 없습니다. 산 믿음이 되어 사람을 변화시키며 구원하는 사랑은 예수 십자가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그 대상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그 사랑의 끝이 않습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죄인을 변화시키며 구원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다해도 예수 믿는 믿음으로 행할 때에 하나님 나라에 상급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베풀기 위해 예수처럼 자신을 낮추어 이웃들과 함께 하는 생활로 여러분의 참된 믿음을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이 가난할 수 있어야 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그 아픔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며, 낮은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웃의 아픔과 가난과 병듦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 5:6).

예수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순종의 생활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하나님 나라에 삶의 뜻과 목적을 두고 세상에 대해서는 나그네처럼 사는 믿음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자신의 믿음이 참된 것임을 사랑으로 증거하는 믿음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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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믿음이란?(2)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브리서 11:17-38)

믿음이란 '예수 십자가의 사건'을 '나를 위한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났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죽었고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즉 자연인 '이동희'는 십자가에 죽었고, '그리스도인 이동희'로 다시 태어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자연인 이동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을, '그리스도인 이동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뜻합니다. 이는 예수 믿기 전에는 자신이나 세상에 있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 경험 등이 자신의 삶을 주도했지만, 예수 믿고 난 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삶을 말합니다. 이제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나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게 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마6:24)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라 시인하며 살아갈 때 믿음생활이라 합니다.(빌2:11) 그러므로 믿음의 핵심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 고백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갈 2:20)을 뜻합니다. 참으로 믿음이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며,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을 위해서 살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를 위해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비록 힘들고 가시밭같은 고난이 따른다해도 예수께 속한 삶을 사는 이유는 세상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세상(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더 큰 재물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자신의 성읍이 제아무리 견고하다해도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면 멸망당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탐군을 영접하여 하나님께 속하게 됨으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같은 인생일지라도 그 질그릇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릇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금으로 만든 그릇이라도 된장을 담아두면 된장 그릇입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든 질그릇이라도 그 속에 보화를 담아두면 보물단지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젊은 오르가니스트 론 세버린이 술집 앞을 지나다가 그 앞에 수북히 쌓여있는 빈 맥주깡통을 보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는 곧 주인을 만나 그 빈깡통들을 공짜로 치워드리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주인은 감사하다며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세버린은 당시 캘리포니아 롱 비치 주립대학 학생으로 다우니 교회의 올갠 반주자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빈 맥주깡통을 가뜩 실어온 그는 깡통의 위아래 부분을 모조리 따내고 깨끗이 소독을 한 다음 긴 파이프가 되게 납땜을 했습니다. 어떤 것은 길게, 또 어떤 것은 짧게 만들고, 파이프의 주둥이 부분을 만들어 달았습니다. 그 파이프의 길이를 달리하여 플룻과 비올라 소리를 나게 하는데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리이드 음을 내는데는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3년이나 걸려 결국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인류를 타락시키는 맥주가 담겼던 빈 맥주깡통이 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상한 악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빈깡통이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같은 상자라도 보석을 넣으면 보석상자가 되고 술을 담으면 술통이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예수 믿고 예수를 영접하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그는 썩어질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어 영원한 최고의 가치있는 인생, 하나님 앞에 보배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는 이같은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믿음의 선배들은 악형을 받을지라도 구차히 면하고 하지 않았고, 희롱과 채찍질뿐만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힐지라도 시험에 넘어지지 않았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로 죽음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을지라도 끝까지 예수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을 세상에 감당치 못한 것은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오직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에 대한 소유권이 자신에게서 예수에게로 이전된 것입니다. 세상말로 하면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친 삶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부터는 자기 자신의 주가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 외에는 그 어떤 것들도, 다른 어떤 신들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그 분의 말씀에만 '아멘'(순종)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와 그 분의 말씀에 '아멘'하는 믿음은 그 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자 에밀 부르너는 하나님 말씀을 "주인의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묻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과 목적을 알지 못하고 또 그 아는 일에 소흘히 한다면 예수를 주님으로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항상 그 분께서 보내신 성령을 통해 그 분의 말씀을 듣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항상 예수의 말씀을 듣는 생활이 이루어질 때 예수님의 인격을 체험할 수 있으며, 예수의 인격을 만나게 될 때 성도는 예수의모습, 인격을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의 말씀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며 그 분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갈 때 예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란 신비체험이나 무아지경의 황홀경을 맛보는 것이 그 주목적이 아닙니다. 또한 믿음생활이란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축복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고자 했던 무리들이 사회적인 출세나 물질적인 축복을 기대했을 때 예수는 머리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머리둘 곳조차 없으신 예수를 따랐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아무리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부르고 기도드린다 해도 예수를 주로 모시고 예수의 닮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라 볼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으로 세례받고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 목사도 될 수 있지만 그가 예수를 닮은 모습을 이웃들에게 보여주지 못한다면 바른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와 그 분의 말씀에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맡기고 오직 그 분만을 주님으로 섬기며 살아갈 때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태복음 7:15-24)

믿음생활의 진실여부는 그 열매로써 알 수 있습니다. 열매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할 때 맺어지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부르며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다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다시 말해 좋은 열매를 맺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 생활에 열매가 없는 것은 불법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알곡들만 들어가는 곳이지 가라지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베드로 후서 1:8-11)

지난 1일 북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남미 도미니카 공화국 위조 여권을 가지고 일본에 불법 입국하려다 체포되었습니다. 북한은 일본과 국교를 수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 사람이 일본에 입국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비록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일의 장남이라도 외교관계가 없으면 입국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미 대부분 국가들이 일본과 비자면제협정을 맺어 일본 입국 비자를 따로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남미 도미니카 공화국의 여권을 위조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김정남은 불법 입국하려다 체포되어 "내가 김정일 아들이다."고 말했지만 일본 디즈니랜드 관광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국제적인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중국으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아예 여러분에게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자유롭게 하나님 나라에 입국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하면서도 믿음생활의 열매가 없으면 위조여권으로 불법 입국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 시민권자인지 여부는 그 열매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예수 닮은 모습을 가리켜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입니까?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성령의 열매들 맺으시기 바랍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라디아서 5:22-24)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예수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인생은 아무 열매도 거둘 수 없습니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4-8)

예수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생활, 즉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로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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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믿음의 시련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말라 (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야고보서 1:1-18)

"믿음의 시련"이란 예수 믿기 때문에 받게되는 시련을 말합니다. 로마제국 당시에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너무나 혹독했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것은 스스로 힘들게 살 것을, 아니 죽을 것을 결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시련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 "여기라"는 말의 헬라어(헤게사스데) 의미는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여러 가지 시련을 기쁘게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고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자녀들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련 역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속에 주어지는 가장 좋은 것으로 평가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시련을 금보다 더 귀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벧전1:7)

그리고 극심한 고난을 겪고 있는 욥은 이렇게 그 믿음의 시련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그리고 욥 등이 엄청난 환난과 고난 등 믿음의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믿음의 시련으로 인하여 장차 누리게 될 칭찬과 존귀, 그리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믿음의 시련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며",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있으므로 나라가 강해지고 산업이 발전하고 지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비법이 있는데 그것은 전쟁이 있어야 민족이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소련에서 살다온 사람은 공산당이고, 미국에서 살다온 사람은 민주주의이며 얼굴도 가지각색입니다. 그래서 평안하기만 하면 그들은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부득불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전쟁의 긴장관계에 있을 때 그들은 의견이 서로 다르다 하여도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싸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은 축복이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시련을 당하게 될 때 인내하며 이처럼 "온전히 기뻐하라"는 목적은 여러분 성도의 성숙한 신앙생활을 위해서입니다.(4절) 시련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인내를 통해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성도가 되도록 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련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으로 성숙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실 때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잘못 기도한다고 해서 꾸짖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시련이 주어지는 의미와 목적을 잘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꾸짖으시지 않으십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음직한 미국의 유명한 영화 <록키>가 있습니다. 헤비급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의 상대자로 록키가 선택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록키가 이길 것으로 믿지 않습니다. 록키 자신도 패배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상대가 되어 링에 올라갈 것을 수락한 이상 그는 15회전을 끝까지 링 위에 머물기 위한 목표를 세웁니다. 그는 "끝까지 버티자"(Go the distance)를 거듭 다짐하며 싸웁니다. 결국 끝까지 버틴 록키가 승리했습니다. 끝까지 싸우는 자체가 인생 승리라는 것입니다. 경주자의 승리도 끝까지 달려 완주하는데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끝은 칭찬과 존귀와 영광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며 끝까지 인내하므로 영광스런 결말을 볼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지라도 세상의 물질적 축복을 위해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부라고 하는 것은 풀의 꽃과 같아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꽃은 떨어지고 풀은 말라 시들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인생은 영원히 살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잠시 있다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살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인생으로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 부귀영화에 연연하여 그것에 매달리거나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 물질에 대한 욕심에 붙들리게 되면 신앙생활을 바르게 끝까지 할 수 없게 됩니다.

어느 마을에서 한 도둑이 붙잡혔습니다. 밤 11시 반 어떤 사나이가 큼직한 보따리를 양 손에 들고 가는 것을 경찰이 수상히 여기고 "여보시오."하고 소리쳤더니 그만 도둑은 곧장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도망하는 도둑은 스피드가 떨어지고 그 자리에 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벨트없는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가게에서 훔친 동전들을 두 주머니에 너무 많이 넣어 바지가 흘러내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오래 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욕심이 스피드를 가해 주는 것 같아도 결과적으로는 달려가는 길을 멈춰 서게 만들게 된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이 도둑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10원 짜리 50여 개, 50원 짜리 70여 개, 100원 짜리 40여 개 등이었습니다. 모두 합쳐보아야 몇 푼 안 되는 것을 욕심스럽게 주머니에 넣고 뛰어봤자 얼마 못 가 잡히고 만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시험은 결국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 본문에 사용된 "시험"은 "유혹"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을 때 하나님 보다 높아진다는 욕심, 하나님보다 지혜롭게 된다는 욕심에 미혹되어 그만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사망에 이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받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처럼 살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며 능력을 시험받으실 때나,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지극히 높은 권세에 대한 시험을 받으실 때나 모두 하나님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예수를 여러분의 재산을 늘려주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경영의 귀재(CEO)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인간에게 내린 저주를 자신에게 돌려 십자가에 죽으시고 인류에게는 생명과 축복을 안겨주셨습니다.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고 조롱하여 저주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대로 하면 됩니다. 시험을 이긴다 할 때 "이긴다"는 뜻은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매를 맞고도 사랑하면 이긴 것입니다. 때리고도 미워하면 지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도 감사하면 이긴 것입니다. 핍박을 받고도 '영광입니다' 하면 이긴 것입니다.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승리할 수 있도록 어떠한 경우를 당한다해도 인내하며 상대방을 위해 기도할지언정 혈기부리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혈기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분을 낼지라도 죄를 짓지 않도록 하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엡4:26)

중세기의 우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수도사 한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친구 어머니의 병문안을 가는 길이었습니다. 먼 길을 걷자니 점점 피곤해졌습니다. 정오가 되자 햇볕이 뜨거워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장기가 돌았습니다. 도시락을 싸 놓고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화가 났고 먼길을 떠나온 것에 대하여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피곤한 발로 홧김에 길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걷어차게 되었습니다. 발가락이 몹시도 아팠습니다. 그는 길에 앉아 중얼거렸습니다. "도대체 이 돌멩이가 하필 왜 여기에 있어서 나를 괴롭힐까?" 그러자 돌멩이는 갑자기 배로 커졌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려고 누가 갖다 놓았을 거야." 하고 생각하자 돌멩이는 다시 배로 켜져 큰 바위가 되었습니다. 그는 "흐음, 이런 바위를 갖다 놓고 나를 괴롭힐 만한 녀석은 바로 그 놈밖에 없어." 하고 이제는 구체적으로 주변에서 자기와 사이가 나쁜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바위는 몇 배로 더 커져 아예 길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한 소녀가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수도사에게 물었습니다. "수도사님, 어디가 편찮으세요? 길바닥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혼자 하고 계셔요?" 수도사는 지금까지 생긴 이상한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소녀는 두리번거리더니 "그런 산더미 만한 바위는 보이지 않는데요. 여기에 단지 주먹만한 돌멩이가 하나 있을 뿐인 걸요."하며 돌멩이를 가볍게 집어 길옆으로 옮겨 놓고 인사를 한 뒤 제 길을 가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분노가 미움으로 변하여 결국 그 미움을 증오를 낳게 되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마5:21-26)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자라면 살인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미움과 분노는 그 결과가 드러나지 아니한 살인미수죄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유혹이 있을 때 불평 불만을 터뜨리며 성내기보다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구약시대 아람 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수소문 끝에 이스라엘 나라에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내졌습니다. 나아만 군대장관은 군사를 이끌고 온갖 예물을 챙겨 엘리사를 찾았으나 엘리사로부터 문전박대를 받다시피했습니다. 멀리서 찾아온 아람국의 국방장관을 극진히 영접하지 않고 종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리하면 나으리라"는 전갈뿐이었습니다. 일국의 국방장관이 엘리사의 이러한 대접을 받다보니 화가 치밀어 그냥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참모들이 일어나 말렸습니다. 아쉬운 것은 국방장관 자신이니까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밑져야 본전아니겠냐며 요단강에 들어가 그가 시킨대로 일곱 번 씻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관은 아쉬운대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씻었고 그 결과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왕하5장) 만약 나아만 장관이 자신이 문전박대 당한 일에 대하여 화가 치민대로 본국으로 돌아갔다면 그는 일생동안 문둥병자로 살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입장에서 함부로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 말고 설사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화를 내거나 분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예배는 당신이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간 다음부터 시작됩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이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일상생활에 적용하는가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영국의 엄격한 청교도이자 혁명가인 크롬웰이 어느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금으로 만든 열 두 사도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곳 사제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이것들을 녹여 선한 일을 하는 데 사용하십시요."라고 크롬웰이 말했습니다. 교회 안에 멋지게 장식해 놓은 사도들의 조각상들처럼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고이 생각속에서만 간직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전한 이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겉치레가 될 뿐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믿음생활에는 여러 가지 시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때마다 가장 먼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뜻을 찾는 지혜를 가지고 인내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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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참된 믿음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 (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 (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4) 내 형제들아 !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1-26)

여기 자신이 업신여기고 있던 거미로부터 목숨을 구한 한 예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윗 왕은 추녀 끝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저놈은 어디나 가리지 않고 거미줄을 치는 더럽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벌레야. 생긴 것도 아주 징그럽구나." 그 후 다윗 왕은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싸움은 이스라엘군에게 불리하게 되어 다윗 왕은 적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은 여기저기 숨을 만한 곳을 찾았으나 헛수고 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사람 한 명이 기어들어 갈 만한 바위굴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실 그 굴이 그다지 안전해 보이진 않았으나 바로 얼마 뒤에서 적병이 추격해오고 있었기에 다윗은 앞뒤 가릴 새 없이 그 바위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적병들이 달려오는 발소리와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윗 왕은 숨을 죽이고 다가오는 적병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바위굴 입구로 내려와서 가로 세로 거미줄을 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얼마 뒤에는 굴 입구가 거미줄로 막혀버렸습니다. 굴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굴속에 숨었을지도 모르겠군." "아니지 이 거미줄을 보게나. 이 속에 사람이 들어갔다면 거미줄이 이렇게 고스란히 있겠는가." "정말 그렇군." 적병들은 이렇게 말하며 굴을 지나쳐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거미줄 때문에 다윗 왕은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모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 거미와 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일개 미물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교회 안팎에서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거나 힘없고 가난하다고 해서 멸시하거나 압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이나 외모가 아니라 우리 속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군대 백부장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많은 백성을 구제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환상 중에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하나님 사자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그 시각 베드로가 기도하러 가는 중 비몽사몽간에 역시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율법에 먹어서는 안되는 부정한 생물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습니다. 베드로가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더러운 것들을 먹을 수 없습니다."고 하자 또 다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씩이나 있었는데도 베드로는 그 환상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베드로를 초청했을 때 성령께서 그들이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그 초청에 응하라고 지시합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 고넬료 집에 가보니 이방인 고넬료가 일가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모아 놓고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자신이 보았던 환상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네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그리고 계속해서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며 고백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0장)

그러므로 재산이나 학식의 정도나, 인종과 상관없이 누구나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고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위대함이나 부요함을 치켜세우는 행위는 극히 위험한 것으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부요함>보다 <영적인 부요함>를 더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위대함>보다 <영적인 위대함>를 더 크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보다 세상이 어리석게 보는 <십자가의 지혜>를 더 큰 지혜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없고 배운 것이 없을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부요한 자, 큰 자로 여기시며, 세상에서 아무리 부요하고 지체가 높고 배운 것이 많다해도 하나님을 등지고 살게 되면 가장 어리석고 더러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여 가난한 자를 멸시하거나 압제하거나 더 나아가 억울하게 재판을 받게 하면 살인죄와 다를 바 없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의 판단은 피상적이어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게 됩니다. 마치 아름다운 꽃을 좋아하듯이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행위입니다. 행여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이 사랑하고 섬겨야 할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참된 믿음은 행함이 뒤따르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인이 나날이 줄어들어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갱들은 나날이 늘어만 가는 것이 아닌가! 목사님은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좋은 일을 한다는 교회의 교인들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못된 짓 하는 갱들은 늘어만 가니....말세지 말세!" 그 목사님은 갱 두목을 찾아가서 거룩한 목소리로 물어보았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당신네 같은 갱들은 나날이 늘어나니 그 이유는 뭡니까?" 갱 두목은 태연하게 한 마디 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우리가 당신네들보다 훨씬 더 사랑하니까 그렇지요!"》 (기독교세계6월호)

요즈음 한국 영화 <친구>가 개봉 두 달만에 관객 동원수 700만을 넘어서 소위 <친구>신드롬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영화 화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욕설과 음담패설과 섹스와 여성학대의 연속이고 조직 폭력배들의 잔인하고 섬찍한 폭력과 살인 일색이라고 합니다. 초.중.고등학교 친구로 자라온 친구들이 졸업 후 부산 거리를 주름잡는 조직 폭력배가 되어 온갖 폭력과 마약 등에 휩싸이게 되는데 조직 계파를 달리하는 친구를 청부살해하게 됩니다. 법정에 선 그는 죄를 부하에게 덮어 씌우고 법을 피할 수도 있었으나 '친구의 의리'를 져버릴 수 없어 살인을 자백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수 십년 전 부산에 실제 있었던 폭력배들의 살인극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조직 폭력배들의 폭력, 살인, 타락상이 이렇게 많은 관객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을까?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나이들의 우정과 의리'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네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정이나 사랑, 그리고 의리가 바깥 세상보다 더 많고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까? 조금만 자기 배짱에 맞지 않으면 우정이나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사랑 타령하며 교회와 신앙을 등지는 인물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우정이나 사랑, 그리고 의리가 세상의 조직폭력배들보다 그 질이 떨어져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조폭>들은 우정이나 의리를 지키는데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합니다. 단순히 친구니까 우정과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지키는데 복잡한 생각이나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사랑 하나를 설명하는데도 이것저것 복잡하고 그것을 행하는데도 절차가 여간 많은 게 아닙니다. 사실상 진리는 간단하고 단순한 것입니다. 괜히 율법사나 목사, 신학자들이 밥 먹고 살기 위해 복잡다단하게 만든 것뿐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사랑하며 살겠다는 것인데 그 사랑을 베푸는데 이론도 많고 따지는 것도 많고 이유나 핑계, 변명도 너절너절하게 늘어 놓는게 십상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조폭>이나 갱들의 그 못된 짓만 빼면, 교회나 목사님들은 그 단순한 우정과 의리, 그리고 사랑을 한 수 배워야 할 형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모든 진리는 간단하고 단순한 것입니다. 조금 배웠다고 해서 그 진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복잡하게 만들어 가는 것은 유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행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음모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들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마23:1-5) 오른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하면 돌려대시고, 누가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하며 겉옷까지도 벗어주고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라도 동행하고 원수도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면 그만이지 복잡하게 생각하고 복잡하게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진리를 복잡하게 생각하고 복잡하게 만들어 가면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것을 행하라." 행함이 없는 믿음생활은 귀신들이 조롱할 것입니다.

웨일즈 아버판(Aber fan)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석탄 산사태가 나서 초등학교를 덮쳤는데 그 초등학교 교실 안에는 254명의 어린이들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산사태가 나자 검은 석탄 빙하가 되어 버린 초등학교를 찾아온 학부모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구조작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교회 목사도 나와서 불철주야 발굴작업을 돕고 있었습니다. 석탄더미라 끝없이 파도 내려오고 또 내려와서 금요일부터 파들어 갔는데 주일이 되어도 석탄더미는 그대로였습니다. 구조자들은 행여 비가 오거나 천둥이라도 치면 구조의 가망이 없다고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주일 아침 예배시간이 되어 구조자들이 "목사님, 예배시간이 되었습니다. 가 보셔야지요."라고 하자 그는 머리를 저으며 "오늘 나의 설교는 여기에서 나의 손과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라고 하며 삽질을 쉬지 않았습니다. 모든 구조자들은 그의 뜨거운 사랑과 헌신적인 손을 바라다보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능력을 느꼈고 모두 힘을 얻어 구조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목사의 입과 신자들의 귀만이 천국 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열 마디의 말보다 실천의 본을 보여주는 것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스스로 주를 영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본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행함을 통하여 주의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배나무 묘목을 사다가 그의 밭에 심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결실할 때가 되어 가서 보니 사과가 열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는 사과나무겠습니까? 아니면 배나무이겠습니까? 혹시 그 나무가 원래는 배나무인데 그가 잘못 가꾸어서 사과나무가 된 것은 아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과가 열렸다면 그것은 사과나무입니다. 단지 그가 처음부터 배나무라고 착각한 것뿐입니다. 사과나무는 당연히 사과를 맺고, 배나무는 당연히 배를 맺어야 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그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그 믿음의 열매가 없다면 그는 믿음이 없거나 아니면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의 열매는 행함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참된 믿음생활로 하나님의 <친구>라 칭함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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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믿음을 지키라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5)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12)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다서 1:1-23)

본서의 저자는 예수의 형제인 유다(마13:55, 막6:3)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예수의 형제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자신이 비록 예수의 형제일지라도 예수가 자신의 형제일수만은 없었고 언제까지나 분명 자신의 주님이시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또한 유다는 "야고보의 형제"라 했는데 이는 자신보다 야고보가 그 지명도 높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이름 대신에 "야고보의 형제"로 불리워지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유다 자신이 처해있는 위치와 지위에 기꺼이 만족하는 사람이었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벗어난 행동을 하지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지킬 줄 아는 겸손한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성경 <유다서>는 "교회를 일깨우는 불의 십자가"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는 유다서를 기록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믿음을 지키기 어려울만큼 각종 이단 사상과 불신앙, 그리고 음란과 타락 등으로 교회를 혼란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가 갈라져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던 기적과 은혜를 체험했고, 하늘에서 일용할 양식 만나가 내리는 표적을 날마다 체험했으며, 바위가 터져 생수가 나오는 이적을 경험했으면서도 눈 앞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그만 믿음을 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땅에 신장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처럼 보이는 아낙자손들을 보자 그만 위축되어 스스로가 보잘것없는 메뚜기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같은 믿음이 없었던 정탐군의 보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며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 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차라리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민14:1-3)

그러나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자신의 옷을 찢으며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이렇게 믿음을 가지라고 일깨웠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4-9)

그렇지만 온 회중은 오히려 여호수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대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0-12)

이러한 하나님의 책망과 더불어 축복과 안전보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돈, 경제의 힘은 참으로 아낙자손처럼 거대하고 막강해보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다고, 경제력이 빈약하다고 자신을 메뚜기처럼 여기며 스스로를 작게 여길 것이 아니라 만유(萬有)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아버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권력, 그 또한 세상에서 전능한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쥐꼬리만한 권력도 없다고 한탄하거나 비겁해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듯이 세상 권력은 기껏해야 10년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 왕을 세우시기도 하고 폐하시기도 하시는 권세의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썩어질 세상을 멸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약속받았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예나 지금이나 이 귀한 믿음과 은혜를 왜곡시켜 타락과 방탕, 음란을 조장하며 부추기는 궤변들이 기독교 안팎 주변에 들끓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논리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핑계로 믿음을 유린하고 율법을 무시하는 소위 무법주의자들이 활개를 치며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이러한 무법주의자들의 궤변이 터무니없음을 규명하기 위해 그들과 나눈 대화를 자신의 신앙일지에 이렇게 남겨놓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법의 지배 하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사는 당신은 이 세상 만물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읍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것이므로 모든 만물이 다 나의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에서든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도록 허용되어 있읍니까? 가령 어느 상점에 가서 주인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의 승낙도 없이 말입니다."

"내가 원한다면 그럴 수도 있읍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나의 것이니까요. 단 나는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는 것 뿐 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 모든 여자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습니까?"

"네 만일 그들이 허락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죄악이 아닙니까?"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물론 죄악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죄악이 아닙니다."

그럴듯한 논리지만 참으로 터무니없는 궤변으로 믿음을 빙자하여 윤리와 도덕을 파괴하는 무법주의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고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다보면, 믿음을 방패삼아 추호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방탕과 타락, 음란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교회를 혼란시켜 믿음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게다가 영지주의마저 가세하여 더욱 성도들과 교회를 혼란시켜 믿음을 지키지 못하게 미혹했습니다. 영지주의란 육체(물질)는 악하고 영혼만이 선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것은 선한 영혼만이 구원받고 육체는 아무래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의 본능에 따라 어떠한 범죄를 저질러도 무방하다고 가르치며 육체를 더럽히도록 유혹합니다. 또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므로 무슨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주장하며 범죄하고서도 양심의 가책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죄를 얼마든지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성도들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도록 몸과 마음과 영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모세에 시체에 관한 것도 그렇습니다.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두고 미가엘과 언쟁을 합니다. 마귀는 모세의 시체는 육체이기 때문에 악한 것이고 악한 것은 모두 다 자기 것이기 때문에 모세의 시체 역시 자기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에 살인자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살인자라면 당연히 모세는 악한 마귀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시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럴듯한 논리입니까? 결국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부인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모세를 세운 하나님을 부인하도록 하자는 아주 영특하고 간교한 논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만들고 결국은 믿음을 지키지 못하게 하여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3.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남"으로 하늘에서 추방당한 타락한 천사들이 세상에 내려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성도들을 더럽히는 수단은 음란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음란의 대명사로 불리웠던 소돔과 고모라, 죄악으로 악명이 높은 이 도시들은 하나님의 유황불 심판으로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도 친히 인용하신 바 있는 소돔의 죄악은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구역질 나는 사건'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그 사건의 진상은 이렇습니다. 두 천사가 손님으로 롯을 찾아 왔습니다. 두 천사는 롯의 강청에 못이겨 롯의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소돔 주민들은 롯의 집을 포위하고 롯의 손님들과 성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당시 소돔 사람들은 동성애적 성관계, 수간(獸姦,동물들과의 성관계) 등 이상(異常)적인 성행위로 광란적인 음란에 빠져있었습니다. 이같은 광란적인 성행위를 <소도미, ,sodomy>라 하고, 그런 사람을 <소도마이트, sodomite>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가공할만한 성적 죄악에 대한 명칭이 모두 <소돔, sodom>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소돔과 고모라 지역 지하 지층에는 가스와 기름 등이 저장되어 있어 자체의 압력이나 지진에 의해 갑자기 가스층이 폭발하게 되면 동시에 기름덩어리가 공중 높이 올라갔다가 가스불길과 더불어 불비가 되어 땅에 떨어질 수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스불길과 함께 기름덩어리가 불에 타면서 땅에 떨어지면 도저히 진화할 수 없고 물위에 떨어져도 계속 타오른다고 합니다. 이는 앞으로도 음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육체의 본능만을 알고 이성없는 짐승처럼 본능에 자기 자신을 내 맡기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주어지는 것은 유황불같은 하나님의 심판밖에 기다릴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음란한 세대에 대하여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음란은 이 시대에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며 가진 믿음도 끝까지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패역한 죄악입니다.

4.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게 하는 세력은 또 있습니다. 탐욕으로 가득하여 사람들을 죄악에 빠뜨린 발람,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모세에게 대들었던 패역한 고라의 무리들을 들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와 형태로든 교회안에 파벌을 형성하는 무리들은 경계해야 할 고라와 같은 무리들입니다. 발람은 거짓 목자나 거짓 성도들로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 즉 교회를 돌보는 일보다 자신을 더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에스겔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겔 34:8-10)

교회와 교인들을 이용하여 출세하거나 이득을 얻으려는 자들은 거짓 목사이거나 거짓 성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세력화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고 명예를 누리거나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교회에서 추방하려는 무리들은 "자기 몸만 기르는 거짓된 목자"요 수많은 배들을 침몰시킨 숨겨진 암초와 같은 존재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지금 이 시대에도 비일비재합니다. 교회나 교인들은 무슨 명목으로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인들은 그 몸의 지체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 즉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모인 곳을 말합니다. 교회는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교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몸만 기르는" 행위, 즉 교회와 교인을 자신의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는 예수 팔아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과 같은 것이며 복음을 미끼로 장사하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인들 중에 장사하는 사람들은 물건을 팔 때, 교회 장로니 권사니 집사라는 말을 하지 말고 그냥 정직하고 진실되게 적당하고 타당한 이윤만을 붙여서 장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교회 장로 권사인데 남는게 하나 없이 본전으로 드린다고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저 사람 일하는 것을 보니 예수 믿는 사람이구만!, 저 사람 장사하는 것 보니 교회 다니는구만!" 이렇게 그 하는 일과 장사를 통해 예수 믿음을 증거해야 제대로 된 교회 장로고 권사 집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무슨 교회 장로이고, 권사 집사인데 내가 이 물건 팔면서 거짓말하겠느냐?"고 하면서 장사하는 행위는 교회와 직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으로 이른바 헛맹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3-37)

장사의 목적은 이윤을 남기는 것입니다. 교회 장로 권사라고 해서 장사하는 사람이 이윤을 남기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윤을 붙이지 않고 장사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고, 터무니 없이 이익을 붙이거나 저울을 속이는 것은 부당한 범죄행위입니다. 또한 이익금을 모두 선교하는데 사용한다면서 물건팔아 먹는 행위도 모두 사기극이라해도 틀림없습니다. 자신이 팔고 있는 물건이 정당하고 좋은 것이라면 정당한 이윤을 붙여서 정직하고 진실되게 물건을 팔면 되는 것이지, 교회 장로니 권사니 하면서 장사하는 행위는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미끼로 속임수쓰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혼란시켜 믿음을 파괴하는 암초같은 존재들입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각종 이단과 방탕, 탐욕과 음란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여러분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돈과 권력의 힘이 아무리 크고 많아도 메뚜기처럼 작아보여야 하고 하나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장 크게 보여야 합니다. 엊그제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요즘 책방에 가면 제일 많이 쏟아져나오는 책들은 단연 "돈"입니다. 다시말해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을까?" 등을 다룬 수많은 경제, 경영, 처세술 등이 출판계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히트 하자 "돈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 등의 책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빠를 팝니다."라는 엽기적(?) 제목의 마케팅 서적까지 나오기에 이르렀습니다. <돈의 감성지수>라는 책에 보면 돈은 "성적 능력"이요 "힘"이기도 하다는 한 여성의 고백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할과 몇차례 데이트를 했죠. 심심하고 지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하루는 이번이 마지막 데이트라는 생각으로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어요. 엄청나게 큰 책상 뒤에 앉은 할이 '직원들 봉급 수표에 사인할 동안만 기다려주세'라고 하더군요. 그가 수표에 사인하는 것을 보는데 갑작스럽게 에로틱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요. 내가 전에 본 어떤 모습보다 더 잘생겨 보이고 섹시해 보이는 거예요. 한달 후 나는 할과 결혼했어요" ....뿐만 아닙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폴 프리시와 앤 프리시가 남성 증권투자자 및 증권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주가가 오르면 이들의 성욕구가 강해졌고, 시장이 추락하면 성문제 발생비율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돈은 그 힘이 성문제까지 영향을 끼칠만큼 대단한 힘을 가지고 이 시대의 신으로까지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극소수 부자를 제외한 대부분이 그 엄청난 부유함으로 우울해질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주보 <함께 드리는 기도>에 대구에 사는 0 0 0 집사님의 편지를 싣고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즈음같이 어려운 경제 상황속에서 이리 저리 붸겨다니며 포장마차 장사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아 개척교회를 섬기는 일이 현대자동차에서 자동차 만들어 파는 것보다 비교할 수없이 커보였기 때문입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믿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성도가 되시어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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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예수 믿으시오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4)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9)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11)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12)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월,일,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16)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17)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18)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19)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은,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계9:1-21)

본 장은 '황충의 재앙', 그리고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에서 나와 <전갈같은 황충이 권세>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는 사탄을 말하고, <무저갱>은 사탄이 갇혀 있었던 곳을 말하며, <전갈 같은 권세>라 함은 무서운 독을 지닌 전갈에 쏘이면 치명적인 해를 입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이같은 전갈의 권세를 받은 황충이 떼로 몰려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고 싶을 정도의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황충은 메뚜기 일종입니다. 펄벅은 그의 책 <대지>에서 중국 땅을 초토화시킨 메뚜기떼의 공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느 날 남쪽 하늘에 작은 먹구름이 나타나더니 삽시간에 부채꼴로 퍼져 온 하늘을 뒤덮었다. 밤처럼 캄캄해지고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굉음만 같았다. 이 메뚜기떼가 내려앉기만 하면 푸르던 천지가 삽시간에 누런 황무지로 돌변해버린다. 부인들은 손을 높이 쳐들고 신명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고, 사나이들은 밭에 불을 지르고 장대를 휘둘러 메뚜기떼와 싸웠다.> 성경 출애굽기(10:13-15)는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하나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시고 그 바람을 타고 메뚜기떼가 온 애굽땅을 뒤덮어 하늘이 어둡게 되었고 채소, 나무 열매 등을 모두 먹어치워 애굽에는 푸른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같이 바람, 계절풍을 타고 날아들어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식물을 거덜 내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기 때문에 이 메뚜기떼들을 공포의 이빨을 가진 <바람의 이빨,Teeth of the Wind>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계절풍을 따라 10억 마리에서 심지어 100억 마리까지 떼를 지어 하루 동안 시속 16km의 속도로 300km까지 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합니다.(곤충의 행성, 하워드 에번스,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 동물학과 교수 저) 이 사막메뚜기들이 한번 무리를 이루면, 아프리카는 물론 인도까지 지구의 20%를 휩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거의 65개 나라가 이들로부터 침략을 받으며, 세계 인구의 10%가 직접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1928년에 몰아닥친 메뚜기떼를 몰아내는 데는 10년이 넘어 걸렸습니다. 1958년에 이디오피아를 뒤덮었던 <바람의 이빨>은, 100만 명이 1년 동안 먹을 16만 7천 톤의 곡식을 갉아먹었습니다. 소말리아를 뒤덮었던 400억 마리의 메뚜기떼는 하루에 8만톤을 먹어치울 수 있는 숫자였습니다. 1㎡에 300~1000마리, 한 발짝 디디면 24마리꼴로 밟히는 밀집농도로 모든 작물들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이 메뚜기 재앙을 황충의 재앙, 즉 황재라 부르며 수재, 한재와 더불어 3대 천재(天災)로 여겨왔습니다. 일찍이 메뚜기떼와 전쟁을 시작한 나라는 중국과 페루입니다. 작년 6월말 중국은 20년 만에 찾아든 극심한 가뭄과 더불어 구름처럼 몰려든 메뚜기떼의 공격으로 무려 366만여 헥타르의 농경지가 초토화되는 크나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환경 보호론자들은 중국의 산업발달로 인해 발생되는 환경오염과 산림 황폐화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이는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같은 달, 남미 페루일대에서도 1억 5천만 마리로 추정되는 메뚜기떼가 페루 농경지를 습격해 1만 7천여 에이커에 해당되는 지역이 황폐화되었습니다. 페루 북쪽의 안데스 지역에 30억 이상의 메뚜기떼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들 메뚜기떼는 현지 통계에 따르면 한해에 1만5천 헥타르의 자연 식물, 숲, 농작물을 먹어치운다는 것입니다. 이 지역 메뚜기떼 급증의 주원인은 해수면 온도상승으로 나타나는 '엘니뇨현상'인 것으로 학자들이 밝히고 있지만 이 역시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같은 황충, 즉 메뚜기떼가 모두 전갈같은 독침을 쏘면서 대들면 지구 3분의 1 인구가 순식간에 죽고 싶을 정도의 괴로움과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황충의 재앙을 당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고 싶지만 죽음이 저희를 피한다고 했습니다. 지옥이 다른 게 아닙니다. 뜨거운 불로 심판을 받아 죽고 싶어도 죽지 않고 꺼지지 않는 불길로 그 고통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한 부자가 세상에서 오늘날로 말하면 350만원짜리 유모차에 애키우고, 2천만원 홋가하는 양주를 홀짝홀짝 들이마시고, 잦은 해외 골프여행에 외화를 물쓰듯하고, 기 백만 원하는 맞춤 속옷에 수천 만원에 이르는 최고 브랜드 명품들로 온갖 치장을 다하고, 궁전 같은 저택에, 서민들 아파트 열 채 값도 더 되는 승용차에 온갖 사치와 호화스럽게 살다가 죽어 음부 곧 지옥에 들어가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살아 있을 때 예수 믿을 기회가 많았음에도 예수는 미련한 놈이나 믿는 것이라며 예수 영접하기를 거절했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라 하는 한 거지가 그 부자 집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워 먹고살려니까 동네 개들이 몰려와 병들어 헌데를 킮는 바람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다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 부자는 생전에 무슨 위인 전집 같은 자서전을 수없이 뿌리고, 자신을 기념하는 호화찬란한 문화 전당도 세우고,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최고 훈장과 상패, 명예박사 학위를 몇 개씩이나 받고 죽어 풍수 좋은 명당에 호화 분묘를 하고 장사되었고, 이것들을 몽땅 가지고 지옥에 갔는데 그 풀무 같은 불구덩이 다 타버리고 꺼지지 않는 뜨거운 불로 말할 수 없는 고통만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 하나가 아브라함의 품안에서 위로함을 받으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세상에서 자기 집 대문에 누워 빌어먹던 거지 나사로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부르며 세상에서 자기에게 빌어먹던 정을 생각해서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만 찍어 타들어 가는 혀를 좀 서늘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부자 너는 세상에서 혼자서 누릴 것 다 누렸으니 그것으로 족하고,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 온갖 고난을 당했으니 여기 하늘 나라에서 위로를 받는 것이니라'고 말하며 '이뿐 아니라 너 있는 곳과 이곳 사이에는 누구라도 능히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 있어 이곳에서 그곳으로 갈 수도 없고 그곳에서 이곳으로 올 수도 없어 물 한 방울 건넬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세상에서 예수 믿음 없이 자기 배만 위해 살았던 것이 뒤늦게나마 후회가 되어 아직 세상에서 자기처럼 살고 있는 자기 형제 다섯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제발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 하면 '금새 회개하고 예수 믿어 지옥에 들어오지 않게 될 것이라'며 신신당부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대답은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에 그토록 예수 믿으라고 했어도 믿지 않은 사람은 설사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복음을 전할지라도 예수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눅 16:19-31)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기적을 보아도 그때뿐이고 곧 잊어버리고 마는 것을 우리는 성경과 세상사를 통해서 많이 보아 왔습니다. 애굽에서 무려 10가지 기적들을 보고, 홍해가 쩍 갈라져 육지처럼 난 길을 직접 걸어서 바다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 산에 가있는 동안 그새를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것을 보면 기적을 보면 '와!' 하고 그때뿐이지 쉽게 믿음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울산 앞 바다가 쩍 하고 갈라져 일본까지 자동차로 월드컵 축구 구경하러 왔다갔다할 수 있다면 믿겠습니까? 발전노조가 파업하고 있는데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나타나 이 문제를 거뜬히 해결해준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같은 기적들을 보고 예수 믿을 사람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구경꾼들만 잔뜩 모여들고, 멀지않아 이들을 상대로 돈 벌기 위해 유흥업소, 카지노, 관광호텔 등으로 유흥가 환락가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죄악에 물들어 그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지면, 황충의 재앙으로 엄청난 괴로움과 고통을 당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가 되어도, 아니 세상 사람 3분의 1이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으로 죽어 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당하면서도 회개는커녕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게다가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말처럼 기고만장하여 온갖 우상숭배를 더하며 온갖 죄악을 더 행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믿음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은,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21절)

다음으로 여섯째 재앙은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으로 사람 3분의 1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입니다. 불과 유황은 죄악으로 가득찬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하나님의 심판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이 "불과 연기와 유황"이 말들의 입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말은 전쟁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전쟁으로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상 지금까지 전쟁으로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한 전쟁은 없었습니다. 세 명 가족 중 한 명, 한 가정에 한 명씩 전쟁으로 죽임을 당한다는 참혹한 전쟁의 재앙이 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불과 연기와 유황"은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될 뿐만 아니라 피바다가 되는 참상으로 이 재앙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충의 재앙"이나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은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印)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골라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에서 <인,印>이란 소유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을 맞았다는 것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소유,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인이 인격을 상징하는 "이마"에 있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로 그 인격과 성품이 예수를 닮은 모습(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 받은 흔적(표시)을 가지고 산다는 것, 구약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내린 장자의 재앙을 피할 수 있게 했던 <어린양의 피>의 흔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꿔 말하면 "황충의 재앙"이나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은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없는, 즉 회개하지 아니하고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만 골라서 내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재앙들의 목적은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그의 심판으로 고통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서 가운데서 재앙을 내리되 먼저는 <자연계의 재앙>들을 통해 깨닫도록 하시고, 그래도 깨닫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런 <황충의 재앙>을 내려 더욱 더 강하게 회개를 권면하고, 그렇게 해도 끝까지 이를 악물고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회개치 아니하는 자들을 위해 세계 인구 3분의 1이 죽임을 당하는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으로 강권하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끝내 거부하고 대적하며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마침내 사탄과 더불어 영원한 지옥에 처하는 최후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가 이러한 재앙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아무라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때까지 오래 참으시는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예수 믿든 안 믿든 누구라도 어린양의 피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회개하는 생활로 항상 성별된 삶을 살지 아니하면 재앙으로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5)"

하나님은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 곧 십자가의 피를 부정하는 것이며, 성령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으로 그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히10:26-31)며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내릴 참혹한 재앙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회개를 미루는 사람은 그 영혼이 사탄에게 저당 잡혀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T.Manton) 지금 여기서 회개하고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 믿고 사는 여러분은 어린양의 피의 흔적을 가지고 항상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생활로 흰옷을 더럽히지 아니하는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처럼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라고 고백하면서 죄가 항상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 십자가 은혜로 죄를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130:3)라고 했습니다. 어린양되시는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 심판을 피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참혹한 재앙들을 받지 않도록 성도는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죄를 물리치고 살아야만 합니다."(히12:4) 욥과 같이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찌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우상숭배를 강요받고 거절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으리라는 느브갓네살 왕의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의 명령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하나님께서 세상 권력의 손에서 자신들을 건져주시지 아니해서 극렬히 타는 풀무 불 속에 던져질지라도 우상숭배하는 죄를 범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리라는 것입니다.(단3:13-18)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결국 왕의 명령을 거절하고 풀무 불 속에 던져짐을 받았는데 느브갓네살 왕이 "그 풀무 속을 보니까 이들이 신들의 아들처럼 보이는 분과 함께 불 가운데서 춤을 추며 다니는 것을 보고 기절초풍하여 불구덩이 가까이 가서 이들을 불러내기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이리로 나오라'고 합니다. 이에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불 가운데서 나왔는데 왕과 더불어 모든 신하들이 함께 보고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그리고 왕은 토로하기를 "자신의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단3:27,28)고 했습니다. 과연 이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의 인>맞은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 맞은 사람들만이 모든 재앙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어린양의 피로 하나님의 인 맞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므로 모든 재앙에서 구원함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흐려지지 않도록 예수 마음과 예수의 인격과 성품을 갖추며 십자가의 은혜로 죄악을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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