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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1.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1:3-14)

여러분이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던지, 여러분의 생활환경이 어떠하든지, 여러분이 교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봉사하든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이란 누구든지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했는데 많은 참새보다 귀하여 그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된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의 뜻이 없겠습니까?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29-31)

태어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이 그 자신의 죄나 그 부모의 죄 때문에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1-3)

이렇게 기독교인은 누구라도 다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선택받은 사람을 위해서라기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보잘 것 없고 사망과 저주아래 영원히 멸망받을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그 험악한 십자가에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자신의 현재 모습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인은 자신을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십자가 예수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과 감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교회의 이름을 명예롭게 지켜나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십자가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 희생과 사랑이 아름답게 보존되고 전파되기 위해 청결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아름답게 지켜져야하며 전파되어져야 할 십자가의 예수의 희생과 사랑을 한 마디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은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처럼 복음, 십자가 예수의 피는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며, 절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을 소망스런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힘, 병든 사람을 건강한 사람으로 만드는 힘, 증오로 가득한 사람을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소망을 이루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병약함을 이기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가 용서와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의 피는 이처럼 아름답게 하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두 친구가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와는 거리가 먼, 세상 재미만을 찾아다니는 쾌락주의자들이었습니다. 대화중 한 친구가 불쑥 말했습니다. "종교 문학 작품들이 대개 고루한데, 자네의 낭만주의로 재미있는 예수전을 써 보면 어떤가?" 이 대화가 촉매가 되어 쓰여진 소설이 뉴 웰리스의 「벤허」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흥미 위주로 로맨틱한 이야기를 쓰려고 하였는데, 배경 설명을 위하여 성경을 읽고 깊이 공부하고, 성지를 순례하며 다른 작가들이 쓴 예수전을 읽는 중 크게 감화를 받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벤허」는 영화화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벤허」의 마지막 장면은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던 순간 십자가에서 한 방울씩 흐르는 예수의 피가 하나의 흐름이 되어 빗물과 함께 도랑을 채우고, 개천을 채우고, 대지를 덮는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예수의 피가 십자가에서 흘러 빗물과 함께 대지를 적시울때, 문둥병에 걸렸던 쥬다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가 씻은 듯이 고침을 받고, 쥬다 벤허를 사로잡았던 절망과 좌절이 깨끗이 사라지고, 증오로 가득한 쥬다 벤허의 마음에 용서와 사랑이 피어나고, 파멸되었던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그 순간 쥬다 벤허의 뇌리를 스쳐 가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벤허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노예로 끌려가고 있을 때, 그 무거운 쇠고랑을 차고 지쳐 끌려가고 있는 벤허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을 건내 주었던 바로 예수 그 분이었습니다. 흥미 위주로 써서 돈이나 벌어 보자고 시작했던 작가가 예수에게 사로잡혀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게 되는 신앙과 삶의 변화가 이 작품의 결론에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 십자가 예수의 피는 지금도 전 세계 대지를 흐르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 예수의 피가 지금도 교회를 통해 전 세계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여 그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예수 십자가의 피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십자가 예수를 전파하기 위해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으로 먼저 자신이 변화되고 나아가 이웃과 세상을 구원하며 변화시킬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이었습니다. 웨슬리는 런던 올더스케잇 가에 있는 작은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인도자가 낭독하는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고 있을 때, 웨슬리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며 정신적인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그 때 웨슬리는 35세였습니다. 박식했던 그는 대학에서 고전. 언어와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신앙 운동인 신성 클럽의 지도자였으며, 미국에 선교사로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침체되어 있었고, 다음에는 기쁨이 전연 없었습니다. 이 날 웨슬리가 새 사람이 된 체험은 흔히 세 개의 C자로 표현됩니다. conversion(회심), change(변화), challenge(도전)입니다. <회심>은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고, <변화>는 가치관과 인생관이 달라진 것이며, <도전>은 신앙의 행동화를 위한 강한 결심을 뜻합니다. 어느 날 웨슬리는 아침에 깊은 느낌에 잠긴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성경을 읽던 중 마가복음 12장 34절이 그의 가슴 깊숙이 파고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서기관과 대화하시다가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낍니다. 죄인을 향하여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소망과 기대를 가지시는 하나님, 씨 뿌리는 비유로 말하자면 비록 25%의 희망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나 같은 죄인일지라도 끈질기게 기대하시고 사랑하시고 가꾸어 주시고 60배 100배의 결실을 희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올더스케잇 저녁 집회에서 로마서 서문 낭독에 앞서 몇 명의 성가대가 찬송을 부를 때 웨슬리는 다시 한번 그날 새벽에 체험한 것과 같은 깊고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찬송은 시편 130편의 운율 역시인데 이 오랜 찬송가는 우리 찬송가에도 들어와 있습니다(479장). 그 후에 로마서 서문이 낭독되고 웨슬리는 가슴이 뜨거워옴을 느끼며 회심, 변화, 도전의 결심을 하게 됩니다. 웨슬리를 회심시켜 그의 삶을 변화시켰던 복음은 그로 하여금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아름다워지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그 아름다운 예수의 십자가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부흥사 체프먼 목사는 이런 통계를 발표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비슷한 병으로 고생하던 40명이 예수에게 고침을 받았는데 그 중 34명은 친구나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예수께 나아왔다고 합니다. 혼자 온 사람은 겨우 6명에 불과했습니다. 예수의 생전에도 복음 증거를 위하여 중간에서 소개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을 아름답다고 했습니다.(롬10:13-15) 복음을 전하 것은 입으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생활을 통해 증거되어질 때 더욱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확실한 것입니다.

옛날 선교사들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특히 불교 국가에서 활동하는 선교들의 고생이 가장 심했습니다. 미얀마에서 선교한 아도니람 저드슨 목사는 예수를 전했다는 이유만으로 17개월간 투옥되었습니다. 그것도 발목에 무거운 쇠고랑이 채워져 습기 많은 토굴에 갇혀 있었습니다. 석방된 후 그는 다시 전도를 시작했는데 많은 불교도들이 그의 복음전파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저드슨 선교사의 설교 때문이 아니라 발목에 새겨진 쇠고랑의 자국 때문이었습니다. 진리 때문이 아니면 그런 고통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복음 전파의 확실한 열매를 위해 여러분의 삶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흔적없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이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복음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여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 감옥에 갇힌 바울을 저버리고 도망한 부겔로와 허모게네라는 바울의 친구들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분명 복음을 전하다가 된 것이지만, 유대인들은 사회를 교란하는 정치범으로 바울을 로마당국에 고발했던 것입니다. 사실상 복음을 전하는 것을 유대 종교법에 위반한다는 내용으로 고발해보았자 소송이 되지않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정치범으로 투옥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정치범과 친구라고 하는 것, 더군다나 그 정치범이 갇혀있는 감옥을 면회간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에게 무엇보다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했건만 정작 복음의 친구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친구를 버렸고 복음까지도 버리고 도망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네시보로라는 한 친구만은 정치범으로 수용된 바울을 부지런히 면회하고 그를 돕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은 바울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했지만 오네시보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그 일을 부끄러워하거나 그로 인해 당하게 될 피해와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복음 전파의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한 모습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처럼 멀리 나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 복음 전파를 위해 부지런히 돕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프리카 랑바레네의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경영하는 병원에서 보조 간호사로 궂은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잚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리안 프레밍거입니다. 그녀는 1913년 헝가리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돈 많고, 타고 난 미모를 갖추었으며 악기 연주 등 못하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녀는 비엔나에서 무대 배우로 있을 때 의사와 결혼했고, 미국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영화 감독 오토 프레밍거와 재혼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치와 방탕 때문에 이 두 번의 결혼을 모두 실패했습니다. 1948년 그녀가 파리에 살고 있을 때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잠깐 돌아와 어느 시골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를 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하여 작은 시골 교회를 찾아가서 슈바이처의 오르간 연주를 듣고 마리안은 자신의 허망한 생활을 뉘우치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랑바레네 병원의 간호사로 자원하여 부식하고 가난한 흑인 병자들을 위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빨래나 부엌 일은 손도 대지 않던 귀족의 딸이 늙어 몸이 움직이지 않을때까지 20여 년 동안 이 병원에서 일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나를 파멸에서 건져 주셨으니 나도 그 사랑의 복음을 환자에게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단순한 믿음, 선교 정신으로 평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은퇴한 마리안 프레밍거는 뉴욕에서 살다가 1970년에 사망하였는데 당시 <뉴욕 타임스>는 이런 기사를 실었다고 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이 세상 사람을 들로 나둘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돕는 자요(helper), 다른 한 종류는 돕지 않는 자(nonhelper)입니다. 마리안 프레밍거는 생애의 전반은 돕지 않는 자에게 속했다가 그 후반은 돕는 자에 속해 영광된 크리스찬으로 개선하였습니다." 죄인된 우리를 예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어떠한 고난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십자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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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7)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8)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여 함이로다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13)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군사(軍士), 운동 경기자, 농부의 비유를 통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0-17)는 말로 완전무장한 군사에 비유하여 그리스도인의 영적무장을 권면하기도 했고,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제공한 아킵보와 빌립보 교회의 사자(使者)였던 에바브로디도를 가리켜 "우리와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전우로 부르고 있습니다.(빌레몬서 2) 이처럼 바울은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속에서 군대생활과 같은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되기 위해서는 일반 군인들처럼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좋은 군사는 군대 일에만 전념해야만 합니다. 군인으로 소집된 자가 군대생활에 집중하지 않고 군대 밖의 일에 관심을 가진다면 좋은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염두에 둔 로마의 군대법에도 "군대에 종사하는 있는 자는 민간적인 일에 취업하는 것을 금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군인은 군인이외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군인은 어디까지나 군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예수의 군사로 비유한다고 해서 기독교인은 세상 일이나 사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일에 종사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생활을 보여주어야 예수의 좋은 군사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좋은 군사가 되는 길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군대생활의 기초는 상관의 명령에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좋은 군사는 어떠한 명령에도 본능적으로 복종하도록 훈련된 군사입니다. 본능과도 같이 신속하게 복종하는 정신이 그 군사의 생명을 구하는 때가 있으며 동시에 다른 군사들의 생명도 구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명령불복종은 군대에서 곧 죽음을 뜻합니다. 명령에 대한 이유를 묻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휘관은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현재의 전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든, 패색이 짙어 보이든, 아니면 유리하게 보일지라도 두려워하거나 근심걱정하지 말고 우리의 지휘관이 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좌우로 치우침이 없이 즉각적으로 복종할 때 좋은 군사가 되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수1:6-9) 현재의 전황을 들어 명령을 이해할 수 없다든가, 그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군인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말씀에 복종하는 것만이 승리하는 좋은 예수의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명령으로 믿고 그대로 복종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다 이해하고서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복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고 인생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군사는 희생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고십이라는 군목은 1차대전 당시 전투와 피와 전상(戰傷)과 전사(戰死)라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그 군목은 최전선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있는 스코틀랜드 병사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것이 너희를 위해서 찢기운 나의 몸이니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가슴을 부딪쳐왔습니다. 군인생활의 본질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군인이 전시에 이렇게 나라와 백성을 위해 값진 희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곧 훈련입니다. 군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어 하나는 "훈련에서 흘린 땀 한 방울은 전시에 피 한 방울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그의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군인의 생활은 평탄한 생활이 아니라 고난의 생활입니다.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고 혹독한 훈련을 겪어야 하며, 전쟁이 일어나면 생명을 내놓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안일에 빠진 군대는 백전백패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배의 훈련, 전도훈련, 봉사의 훈련, 기도의 훈련 등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법대로 경기하는 경기자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기 "경기하는 자"(헬라어 '아들레인 노미모스, athlein nomimos)는 아마츄어 선수가 아니라 직업 선수 곧 <프로 선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는 기독교인은 프로선수가 경기에 사활을 걸고 경기에 집중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집중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엄격하고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헐값으로 트레이드되거나 퇴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프로 야구의 대기록을 세우고 있는 장종훈 선수나 박경완 선수는 모두가 알다시피 어느 구단에서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2군 소속 연습생 선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남모르는 피나는 연습과 훈련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경기 후 지친 몸으로 다른 선수들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그들은 밤이 새도록 쉴새없이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들은 프로 야구 최고의 선수가 되었습니다. 연봉 1천 만원도 되지 않았던 연습생 선수가 연봉 수 억원 대의 대선수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연습과 훈련을 기피하면 좋은 프로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도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고,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때고 있고, 봉사하거나 예배드리고 싶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같은 영적 훈련생활을 게을리 하거나 기피한다면 좋은 성적을 거두어 면류관을 쓸 수 없습니다. 프로선수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란 훈련 중에 있는 사람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영혼을 순수하고 강하게 만들어 면류관을 얻고자 하면 앞에서 말한 좋은 군사와 마찬가지로 예배와 기도, 하나님 말씀과 전도, 그리고 봉사 등 신앙생활의 강한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처럼 운동 경기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전력 투구하는 자세가 필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경기의 규칙을 지키는 일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유명한 선수라 할지라도, 경기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없으며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운동 경기의 꽃이라고 하는 올림픽 경기에서 적지 않은 메달리스트들이 규칙 위반이나 금지 약물 복용 등으로 영예스러운 올림픽 메달을 박탈당하였음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하는데 있어 선지자 노릇하여 남에게 예언해준다거나 방언으로 기도해준다거나 신유의 능력으로 치유해준다거나 그외 많은 권능을 행한다거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대로 사는 것, 즉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제아무리 은사와 능력과 권능을 나타내는 생활을 한다해도 불법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결국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무너짐이 심한 심판날에 견디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마 7:22-29)그러므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해야 면류관을 얻듯이 아무리 생활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므로 영광과 승리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수고하는 농부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농부가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 수확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의 몸이요 성도는 그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리는 좋은 농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농부의 특색은 때를 따라 열심히 일하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봄이 되어 열심히 씨를 뿌렸다고 해서 가을 추수 때가 되기도 전에 그 열매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씨를 뿌리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로 열심히 주님과 복음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녀를 가르치는 부모나 어린이를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그 결과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그 열매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도둑의 심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심히 가르치지 않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수고함이 많을수록 기대되는 열매도 풍성하며 기쁨도 큰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씨를 뿌리되 눈물을 홀리며 뿌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며,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기(시 126:5,6)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이같이 눈물을 홀리며 생명의 복음을 뿌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분명 기쁨으로 그 단을 풍성히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을 참는 군사와 규칙을 지키는 경기자와 수고하는 농부의 역할이 있습니다. 이같은 참된 성도의 모습을 본받아 더욱 신앙 생활에 정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는 최후에 승리자가 되어야 하며, 좋은 경기자는 면류관을 얻어야 하며, 좋은 농부는 반드시 좋은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이러한 좋은 군사, 좋은 경기자, 좋은 농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강해지는 방법은 육체적인 연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서 강해지는 것입니다. 몸이 연약하거나 장애를 가졌거나 병들었다해도 누구든지 강해지는 비결은 예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휘트브레드 문학상을 수상한 크리스토퍼 놀란은 세 살때 뇌성마비가 되어 오직 눈으로만 의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는 말도 못했으며 듣지도 못했으며 손을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마에 작은 막대기를 붙이고 키를 찍어누르는 방법으로 타자를 쳤습니다. 타자지 한 쪽을 찍는데 열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말대로 쓸모없는 육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위대한 시인이요, 소설가가 되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나를 내 모습 그대로 받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웃들이 그를 뇌성마비 장애자를 거부하지않고 그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지않고 거부하는 것은 사람을 슬픔과 좌절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은 희망의 출발이며 의욕과 노력의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연약한 모습 그대로, 병든 모습 그대로, 어리석은 모습 그대로, 아니 죄인된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받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내 모습 그대로를 기쁨으로 영접해주시고 나 같은 인간, 나 같은 죄인을 통해서도 무엇인가를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때 인간은 강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적인 힘이나 능력이나 지식 등으로 강해질 수 있지만 그와 같은 것들은 극히 일부분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모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을 구원한 십자가의 은혜로 살기 때문에 병들거나 고난과 환난을 당할지라도, 아니 심지어 죽음을 당한다해도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강한 모습으로, 그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름받은 성도 여러분, 능력이나 지식이나 은사로 강해지기 보다는 예수의 십자가 은혜로 강한 군사, 강한 경기자, 강한 농부들이 되어 좋은 군사, 승리하는 경기자, 훌륭한 농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예수의 좋은 군사, 면류관을 쓰는 신앙의 경기자, 먼저 곡식을 받는 수고하는 농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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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귀히 쓰는 그릇이 되라

(14)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라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14-26)

"귀히 쓰는 그릇이 되라"했는데 그러면 귀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생명입니다. 선진국에서는 불치의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비록 치료비가 제아무리 많이 든다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우선 살려놓는데 치중하는 반면 후진국에서는 불치의 병에 걸려 가망이 없어 보이거나 치료비가 엄청나게 들어갈 것 같으면 일찌감치 치료를 포기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치료도 받아보지 않고 죽음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을 때 살려내고자 행하신 것이 바로 예수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실만큼 존귀한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십자가의 피로 인간의 죄 값을 치루고 이 땅에 세우신 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쓰임 받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42)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고 하셨는데 이는 바로 누구든지 교회 안에서 믿음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푼 사람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만큼 귀한 일에 쓰임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귀한 일들이 많습니다. 일류 학교를 졸업하고 나라의 높은 지위에 쓰임 받는 것도 귀하고, 의술을 배우고 익혀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고쳐주는 것도 귀하고, 첨단 기술을 개발하여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도 귀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것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그 사람이 장차 하늘 나라에서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는 일들"에 쓰임 받는 것이 소망스러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희생하신 예수의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며, 장차 하늘 나라에서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 지혜롭고 복된 일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일을 행하고 좋은 상을 받았다해도 영원히 사는 하늘 나라에서 기억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예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는 귀한 그릇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의 제자가운데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가 있었던 것처럼 바울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진리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후메내오와 빌레도같은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수 믿는다고 그들을 다 아신다고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예수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여 예언해주고 치유의 은사를 받아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 귀신들을 쫓아내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준다 해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예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최고 일류 학교를 나와 학벌과 문벌이 좋으며 실력과 능력이 제아무리 뛰어나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같이 보여도 불법하는 사람은 그릇이 더럽기 때문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러운 꽃병에 아름다운 꽃을 장식하지 않습니다. 더러운 그릇에 맛있는 음식을 담아 먹지 않습니다. 더러운 그릇에 생수를 담아 마시지 않습니다. 설사 그 그릇들이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졌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비록 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그릇이나,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일지라도 깨끗하면 그 집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큰집에는 여러 가지 재질의 그릇들이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도 여러 가지 재질로 만들어진 그릇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그릇, 은그릇이라고 해서 귀하게 쓰이거나,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이라고 해서 천하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재질로 되어진 그릇이라도 깨끗하기만 하면 귀하게 쓰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그릇이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그릇이 더러워서 천하게 쓰이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각계 각층에서 소위 높은 자리에 쓰임 받는 것이 귀하게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쓰여질 때 귀한 그릇인 것입니다. 성경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 상 16:7)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태복음 23:25-28)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속 사람이 깨끗함을 입어 사회와 교회에서 귀하게 쓰임 받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타고난 검은 피부를 물과 잿물로도 희게 할 수 없듯이 인간의 죄는 그 어떤 종교나 수양으로도 깨끗이 씻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만이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1-14)

우리가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면 먼저 자신의 죄를 주님께 고백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아무리 더럽고 천한 그릇도 주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귀하게 쓰이는 깨끗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와 삭개오는 더러운 이를 탐하는 세리였습니다. 베드로는 보잘 것 없는 어부에 불과 했습니다. 바울은 학벌과 문벌 좋은 금그릇과 같은 사람이었으나 예수를 핍박하는 잔학하고 더러운 그릇이었습니다. 어거스틴도 말할 수 없는 불량배요 방탕아였습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 초기의 김익두(훗날에 목사가 됨)는 양반집 외동아들로 태어났지만 노름과 방탕으로 하루아침에 거지신세가 되어 안악지방에 소문난 난폭한 깡패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예수를 믿고 죄에서 깨끗함을 받아 인류를 구원하는 복음 전도하는 귀한 일에 쓰임받았습니다. 하지만 귀히 쓰임을 받는 그릇이라도 불결해지면 버림을 받게 됩니다. 가롯 유다는 처음에는 금 그릇으로 귀히 쓰임을 받았으나, 후에는 돈에 마음이 더러워져 은 30에 주님을 팔아 넘기고 끝내는 목을 맨 채 비극적인 종말을 고했습니다. 무릇 그릇이란 주인이 언제든지 무엇에나 편하게 쓸 수 있는 그릇이어야 하지 쓰기에 불편하면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교회의 그릇인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쓰시기에 편하게 예비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귀한 그릇이 되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되도록 예수 믿고 예수의 십자가 피로 항상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지위가 높다고 해서, 많이 배웠다고 해서, 예쁘고 건강하다고 해서 귀하게 쓰이는 그릇으로 예비되는 것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인되시는 하나님 앞에 가장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큰 집에는 여러 가지 재질로 만들어진 다양한 그릇들이 있습니다. 귀한 금속 제품도 있고 천한 금속 제품도 있으며 비천하게 쓰이는 것도 있으며 귀하게 쓰이는 것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치입니다. 세계에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씨뿌리는 자의 비유, 마13장>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길 가와 같은 마음"도 있고, "돌밭과 같은 마음"도 있고, "가시떨기같은 마음"도 있고,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등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쓰이는 그릇도 귀하게 쓰이는 것, 천히 쓰이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깨끗해야 귀하게 쓰인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을 항상 깨끗하게 준비한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은 주인되시는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십자가의 피로 깨끗함을 받았다고 해서 어떤 특별한 명예나 특권이나 또는 높은 지위나 많은 재물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으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특권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성도는 자기 혼자서만 쓰임 받기보다는 항상 다른 성도들과 함께 쓰임 받기를 원하며 모든 봉사의 자리에 서로 함께 하고자 합니다. 또한 봉사를 다 한 후에 칭찬이나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그저 무익한 종에 불과하며 다만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 17:7-10)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불법하는 자는 버림을 받습니다. 예수 믿고 십자가의 피로 죄에서 깨끗함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귀하게 쓰임 받아 장차 소망이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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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원에 이르는 지혜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 들이라 (9)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17)

오늘 성경 본문에서 말세는 고통하는 때가 될 것이라 했는데 과연 오늘 우리 시대는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을 오늘 성경 본문은 여러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원인은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라는 것입니다. 얼음판에서 놀던 아이 하나가 얇은 얼음장을 딛다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곁에 있던 소년이 얼른 가서 그를 건져 주었습니다. 물에 빠졌던 아이의 엄마가 와서 칭찬했습니다. "너는 정말 용감한 소년이구나. 얼음물에 뛰어들어 내 아들을 건져주다니... " 그러자 그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가 내 스케이트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웃기는 이야기로만 들을 것이 아닙니다. 양심적으로 따져볼 때 우리가 하는 소위 선행이라는 것까지도 결국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함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온갖 사치와 허영, 방탕은 바로 이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개인적인 이기주의만이 아닙니다. 소위 집단이기주의가 나라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 의약분업에 반대했던 약사와 의사들의 파업 행위에 대해 국민들 80%가 집단이기주의라며 분노했었습니다. 그 의사들의 파업으로 수많은 병환들이 극심한 고통을 당했었습니다. 물론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집단으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다하겠으나 대부분 오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집단행동은 집단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한 이기주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되리라."(요12:25) 기독교의 본질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자기 본위, 자기 중심의 생활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고통의 두 번째 원인은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사무치도록 경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돈으로 권력을 사고, 돈으로 각종 명예와 자리를 사들이고,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공문서를 위조하여 명문대학에 자녀를 입학시킬 수도 있으며, 돈이 있으면 남들 다 가는 군대도 보내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관리들은 나라 돈 가지고 얼마든지 은행이나 기업들을 합체, 해체 등 자유자재입니다. 교회까지도 황금만능주의가 침투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의 제자가운데 돈을 좋아했던 가롯 유다가 있었지만, 로마 교황 노켄티어스도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기구들이 즐비한 성당 안을 즐겁게 감상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말했습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하는 시대는 지나갔구만."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즉각 대꾸했습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는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정한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은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의 기적을 베푼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당시는 은과 금은 없었을지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지만 지금은 예수의 이름은 온데 간데 없고 교회 안에 온통 은과 금으로 가득하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이와 같은 암울한 모습을 오늘 한국 교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기에 어느 일간 신문은 다음과 같은 충정 어린 글을 싣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를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로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너무 살이 쪘다. 작금에 불거진 불미스런 일들, 이는 한국교회의 성인병이다. 큰 교회 목사가 세습을 획책하고, 사이비 목사가 종말론을 팔아먹고, 교회가 공금을 횡령하고, 신도 머릿수를 세어 교회를 사고 팔고, 갖은 핑계로 헌금만을 강요한다. 그리고 곳곳에서 신도들을 협박하여 면죄부를 파는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어제도 거액의 세금을 포탈한 목사가 구속됐다. 왜 이런 행위가 반복되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엎드려 간구하기엔 배가 너무 나왔다. 맑은 새벽기도를 드리기엔 물신(物神)의 유혹이 너무 달콤하고 탐욕이 아른거린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병폐를 유경재 서울 안동교회 목사는 정확히 꿰뚫고 있다. 꾸짖음 또한 통렬하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가볍게 떠도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이 땅의 사고방식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성장 논리를 따라 교회성장을 서둘렀기 때문에 오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정치논리를 따라 교회정치를 하기 때문에 총회장 선거에 돈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업의 논리를 따라 교회를 운영하기 때문에 세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이 이 땅의 욕심을 그대로 가지고 복을 받겠다고 덤벼들기 때문에 하늘을 빙자한 엉터리 목사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민주화운동으로 숱한 사람이 죽거나 다쳤을 때 교회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 많은 헌금 중에 궁핍한 이웃과 상처받은 영혼을 보듬는 데 교회는 과연 얼마를 썼는가. 목사직이 어쩌다 고소득이 보장된 특수직업에 포함되었는가. 교회가 언제부터 가진 자의 복을 빌어주는 기득권층의 공간이 되었단 말인가. 물질이 풍족하면 아래를 굽어 살피지 못한다. 부자가 어찌 가난한 사람을 섬기겠는가. 한국교회는 예수가 왜 가난하고 겸손하게 세상에 내려오셨는가를 깨쳐야 한다. 섬기지 않으면 섬김을 받을 수 없다. 교회가 낮은 곳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저 으리으리한 하느님의 집은 믿음이 빠져나가 텅비게 될 것이다. 믿음이 빠져나간 저 유럽의 우람한 교회를 보라. 신도는 없이 관광객만 찾아오는 '유령의 집'을 보라. 한국의 거대한 교회들도 그 믿음이 변질되면 뉴욕시내의 어느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디스코테크로 변해버릴지 모른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한국교회가 곁눈질을 하게된 것엔 믿는 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신도들도 목사의 말에 무조건 아멘을 외치지 말아야 한다. 목사의 기도와 설교가 '말씀'으로 다가올 때, 울림으로 다가올 때만이 아멘을 외쳐야 한다. 무조건의 기복신앙이 결국 이 땅의 교회가 물질을 좇는 빌미를 제공했다. 교회가 크고 그 불빛이 너무 강렬하면 반대편의 어둠 또한 길고 깊다. 사랑은 결코 강렬하지 않다. 이웃을 보듬고 상처난 영혼을 어루만지는 성탄, 부디 낮은 곳으로 내려오라, 한국 교회여, 예수가 그랫듯이.》(경향신문 12/19)

금년에도 변함없이 청량리 굴다리 밑에서 배고픈 사람들과 함께 눈비를 맞아가며 성탄예배를 드린 최일도 목사도 한국 교회를 염려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올렸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어느 대학 교수가 자기과의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돌린 일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와 함께 연상되는 모든 것을 떠오르는 대로 써 보라고 했습니다. 40여명의 학생들이 저마다 떠오르는 낱말들을 다양하게 써냈습니다. 선물, 휴가, 칠면조, 흰 눈, 썰매, 캐럴, 애인, 호텔… 등등. 이 다양한 것 중에 예수라고 쓴 학생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요즘은 이렇게 예수 없는 성탄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엄 박사는 임종할 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멀지않아 정말 예수 없는 설교를 하는 성직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지금인 것 같습니다.》

예수 없는 구원과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가 여기저기서 횡행하고있습니다. 일류 호텔 경비아저씨보다 더 화려한 복장을 한 수위 아저씨가 출입문을 통제하는 대형교회의 호화성전 안에나, 기업논리에 따라 교회도 사유화하여 담임목사가 주인 행세하여 아들에게 세습하겠다는 예배당 안에 어찌 예수가 감히 들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는 정녕 예수의 이름은 없고 다만 살찐 교회와 교인, 그리고 담임목사와 그 아들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국 교회와 성도 여러분은 교회도 돈이 있어야 남을 돕고 사랑을 베풀수 있다는 망상을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나타나는 고통의 원인은 자긍(自矜)과 교만, 그리고 자고(自高)하는데 있습니다. 자긍은 실제보다 부유한 것처럼 꾸미고 실제보다 용기있고 지혜있는 체하고 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하는 사람,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라면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도 얼마든지 남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허풍쟁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교만과 자고는 자기 이외의 사람에 대해서 멸시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권력과 영달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터무니없이 자랑하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에게서 감사라고 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부모나 이웃에 대해 감사는커녕 오히려 중상모략을 서슴지 않게 됩니다. 더 나아가 사납기 그지없으며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을 만큼 절제되지 않는 마음에서 고통이 시작됩니다. 그 다음으로 이 시대가 고통당하는 이유는 경건을 상실한데 있습니다. 본문에서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4,5절). 이는 말세에 경건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존경과 하나님을 깨끗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열심, 그리고 죽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생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경건은 온전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고 유지되며,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생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못한 사람들을 물로 심판하셨고,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먹고 마시며 음행과 쾌락만을 추구하던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셨으며, 소돔 고모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던 롯의 아내를 소금기둥이 되게 하여 후대의 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의롭게 살았던 노아, 그리고 롯과 그의 딸들은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 2:5-8)

예수 당시나 지금 우리 현실은 소돔 고모라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황금 만능주의와 더불어 음란 퇴폐 향락 문화가 번창하는 쾌락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으며, 이 같은 시류는 교회에까지 흘러 들어와서 성도의 경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두려움으로 섬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맡세의 이같은 현상들에 현혹되지 맡고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5절)고 단호하게 명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서'(5절)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앞에 돌아오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성경 위에 한국 교회와 한국을 세우는 길만이 나라 백성이 사는 길입니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감동'이란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넣음'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의 영감(靈感)'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 곧 하나님의 인격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할 수 있으며, 자신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모든 인류가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삶 속에 모든 인생이 가야할 길이 있으며, 예수의 삶 속에 모든 인류가 따라야 할 진리가 있으며, 예수의 삶 속에 모든 인류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그 분의 말씀을 존중하며 모든 삶에 권위로 받아들였을 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교회나 성직자 자신을 높이거나 할 때에 교회는 타락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빛을 잃고 고통을 당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 시대에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넣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인격이 숨쉬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올 때만 사람과 교회, 사회와 나라가 새로워질 수 있으며, 거듭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교회, 그리고 나라 백성이 구원받는 길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새롭게 되며 영생을 얻게 됩니다(요 3:16). 성경은 바로 사람과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본문 15절에서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경은 인류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책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나라 백성을 성경 위에 세워 나라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성경은 진정한 교육과 선행의 표준이 됩니다. 칼 힐티는 교육이란 첫째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에 대한 사랑을 갖게 하는 것이며 둘째 정의에 대한 용기를 지니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정의에 대한 용기가 없는 교육은 사회와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며 그러한 민족과 국가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사랑과 진리와 정의의 승리를 자신의 십자가에서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그 분의 말씀대로 생활하시는 성도가 되시어 여러분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와 나라를 참된 사랑과 진리, 정의의 터 위에 세우시기를 기원합니다.

죠지 뮬러 목사는 영국에서 3천명 이상의 고아를 돌본 사람으로 "고아의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은 분입니다.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평생에 성경을 100회 통독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싫증이 난 일은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웠고 읽을 때마다 힘을 얻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54년 간의 경험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처음 3년간 성경을 안 읽었습니다. 그 때 나는 신자로서의 기쁨도 사명도 느끼지 못한 죽은 크리스챤이었습니다. 나는 2,3년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생활의 활력은 날마다 성경을 읽느냐 안 읽느냐 하는 문제와 정비례합니다. 성경읽기를 일상 일과로 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은혜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예수 앞에 돌아와 하나님 말씀대로 생활하시므로 자신과 이 나라 백성을 구원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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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울의 고별사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1-8)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유태인이 병이 깊어져 운명의 시간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걱정에 싸인 식구들이 이를 지켜보았습니다. "여보, 당신 어디있소?" 환자의 말에 가족들은 마지막 유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예, 나 여기 있어요." 환자는 식구들을 돌아가며 찾았습니다. "딸애는 어디 있느냐?" "예, 아빠, 여기 있잖아요. 아버지 손을 잡고 있는게 아버지 딸이예요."그러자 환자는 안간힘을 쓰고 일어나 앉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면 가게는 누가 보고 있단 말이냐?"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면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세계적인 부자 록펠러는 어려서 얼마나 가난했던지 학교는커녕 먹고살기도 힘들어서 새벽에는 신문팔이, 낮에는 공장에서 직공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공하기까지는 그의 어머니가 남겨준 10가지 유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 10가지 유언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둘째,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셋째, 오른쪽 주머니에는 항상 십일조를 준비해 두라. 넷째, 원수를 만들지 말라. 다섯째, 예배를 드릴 때 항상 앞자리에 앉아서 드려라. 여섯째, 항상 아침에는 그 날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일곱째,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를 드려라. 여덟째,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아홉째, 주일날 예배는 꼭 본 교회에서 드려라. 열째, 아침에는 제일 먼저 성경을 읽어라.

한 가난뱅이 소년을 세계적인 부호가 되게 하여 하나님의 선교에 크게 쓰임 받게 한 것은 그 어머니의 10가지 유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마지막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것으로 인류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장엄하기까지 한 사도 바울의 생애 마지막 고별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고별사는 디모데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성도 여러분에게도 당부하는 바울의 유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의 유언은 한 마디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때가 좋든지 나쁘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 전파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자 성도 여러분의 지상 최대의 사명입니다. 주께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롬1:1)고 고백하며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노니 너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한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사는 길은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교회는 이 복음 전파를 위해 세워졌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복음 전파를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앞에 설 때를 생각하여 "말씀(진리)이 되시는 예수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때가 좋든지 나쁘든지 열심히 그리고 신속하게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펄전 목사는 전도하는 방법에 있어서 아주 특별났습니다. 하루는 스펄전 목사가 길을 가다가 빈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지나가는 그 마차 뒤에 살짝 뛰어올랐습니다. 이상한 소리에 깜짝 놀란 마부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왠 모르는 사람이 태연하게 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부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목사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오? 누군데 남의 마차에 허락도 없이 이렇게 몰래 타는 거요? 빨리 내려요!" 마부의 화내는 말에도 불구하고 스펄전 목사는 태연한 말투로 입을 열었습니다. "뭐 그리 너무 화내지는 마시오. 이것이 모두 당신을 위한 일이니까." "나를 위한 일이라고?" "그렇다오. 당신에게 아주 급하게 전할 소식이 있어서 탔소."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에게 전할 소식이라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급하게 전하라고 하셨소. 당신이 지금이라도 당장 회개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지옥으로 보내겠다는거요." 마부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큰소리로 너틸웃음을 웃어댔습니다. "그것 참! 살다보니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내가 눈이나 깜짝할 줄 알아요? 어서 내려요!" "하지만 나는 당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내리지 않을 생각이오." "무슨 허락?"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오겠다는 허락 말이오." 마부는 귀찮은 생각에 그만 소리쳤습니다. "교회 나가겠소!" 그런데 이 마부는 일단 한 번 약속한 일은 꼭 지키는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주일에 마부는 교회에 나갔고, 목사는 마부를 데리고 강단에 올라가서 의자에 앉혔습니다. 예배를 바치고 교회를 나서는 마부에게 스펄전 목사는 물었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 소감이 어떻습니까?" "별로 관심 없어서 잘 모르겠소. 이제 약속을 지켰으나 다음 주일에는 나오지 않을 예정이오." 즉시 마부는 떠나버렸습니다. 몇 주일이 지난 어느 날 목사는 길에서 마부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를 발견한 마부는 열심히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달아나는 마부를 뒤쫓아가서 말했습니다. "그간에 안녕하셨습니까?" "그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당신이 교회에 나와서 구원받을 때까지 당신을 좇아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금 마부는 다음 주일에 교회에 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 후 마부는 매주일 교회에 나오는 착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 전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때가 좋든지 나쁘든지 열심히 그리고 신속하게 전파해야" 하며, "범사에 오래 참음으로" 즉 인내를 가지고 지혜롭게 해야 그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 전파야말로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지만, 그 자신이 복음을 대적하는 불신 세력의 수 없는 도전을 받았기 때문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왕국의 총리가 되었을 때, 그를 대적하는 세력들이 한 법령을 만들어 공포했습니다. 누구든지 바벨론의 신 외에 다른 신을 경배하면 사자굴에 던져 죽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법령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고 했습니다. 대적자들이 이를 발견하고 왕 앞에 고발하여 사자굴속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여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않게 하였습니다.(단6:19-28) 결국 왕은 다니엘을 참소했던 대적자들을 대신 사자굴속에 던져넣게 했는데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들이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습니다.

(26)...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27)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단6:26-28)

다니엘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바벨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어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토록 만들며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하여 여러분을 위하여 예비된 영광과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후서 2장에서 복음 전파를 위한 성도의 삶을 마라톤 경기자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올림픽의 하이라이트인 42.195km의 마라톤 경기에서 하이라이트는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 있어도 중도에 포기함이 없이 끝까지 완주하는데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출생으로부터 죽을 때까지 마냥 뛰어가야 하는 마라톤과 같습니다. 즉 죽음이 우리 인생이란 경주의 골인점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 죽음이란 천국을 향한 첫 관문인 바, 성도의 골인점은 죽음이 아닌 천국입니다. 즉 성도는 천국이란 골인점을 향하여 복음 전파의 코스를 달려가야만 합니다. 이 복음 전파의 코스에는 사단의 도전 등 장애물들이 많아서 완주하기가 너무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쓰러져 죽을지언정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은 그간 복음전파에 협조했었던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복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난 사실이었습니다. 데마는 단순히 복음과 바울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고 세상에 속한 자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천국을 향한 신앙생활의 경주를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바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 전파의 달려 갈 길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바울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16절) 그러나 그레스게, 달마디아로 간 디도, 에베소로 간 두기고는 세상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하여 바울이 이미 개척해 두었던 선교지로 떠났으니 이들은 끝까지 그리스도께 충성한 주의 종들이었습니다. 복음 전파의 경주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이야말로 달려갈 길을 영광스럽게 마친 사람으로 주님께서도 찬란히 빛나는 의의 면류관을 그에게 씌워 주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바로 복음 사역을 위해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친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숭고한 사실입니까? 비록 우리는 순교는 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여 주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 의의 면류관은 마라톤 경기와는 달리 일등이든 이등이든 상관없이 복음 전파란 코스를 완주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사단의 끊임없는 도전과 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 겪으면서 악한 세력들과의 선한 싸움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은 실로 어렵고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믿음을 버리고 실족하거나 완전히 파멸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완전히 파열되어 사탄의 밥이 되었고, 베드로도 한때 주님을 부인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영접한 이후로 결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주님께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어떠한 핍박, 위협, 환난, 고난, 훼방에도 믿음을 굳게 지켰으며, 죽음에 직면해서는 그 믿음이 더욱 빛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이 바로 우리가 죽는 날이라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싸웠노라,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노라, 믿음을 지켰노라'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떠날 날이 가까이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욱 믿음을 굳게 지켜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윗도 임종시 솔로몬에게 두 가지 유언을 남겼습니다.(왕상 2:1-12, 13-46)

첫째는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며, 왕의 지위를 잃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 (4)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왕상 2:1-4)

둘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다윗이 죽기 전에 대적자들을 숙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숙청 대상으로 반역자인 요압과 아도니야를 처형합니다. 그리고 피의 보응으로 아비아달을 제사장직에서 파면하고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를 처형합니다. 이렇게 다윗을 대적했던 정적들을 모두 처형하거나 파면을 시켰습니다. 이러한 솔로몬의 숙청은 단순한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신정왕국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시킨 것이었습니다.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였기 때문에 다윗을 대적한 것이 곧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대적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왕상 2:13-46)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대로 행하여 신정국가로서의 왕권을 확립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하거나 보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알지 못하고 저지른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구원은 눈에 보이는 힘이나 권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희생, 그리고 용서와 사랑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역 초기부터 유대인들, 특히 아시아에서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다가 결국은 투옥되어 고난을 받게 되었습니다(행 21:27-36).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기 동족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롬9:1-3) 그리고 오늘 본문16절에서도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이 다 나를 버렸으니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순교하기 직전까지도 그를 대적하는 구리 장씩 알렉산더라는 인물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을 뿐 아니라 바울과 그의 일행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다가 배교한 자이며(딤전 1:20), 바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를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에게 해를 입게 된다면 개인적인 손해뿐 아니라 복음 전체의 손실을 가져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대적자를 저주하거나 보복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그 보복을 전적으로 주께 맡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실 때에 복음의 대적자가 행한 일을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신 32:35; 고후 11:15). 따라서 전도자들은 대적자의 핍박과 궤계를 지혜롭게 피해가며 오로지 복음 전하는 일에만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2000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심판주가 되시는 주님은 사람들이 생각지 않을 때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비난과 조롱과 멸시를 받는다해도 오직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서 "잘 했다!"는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복음 전파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때가 좋든지 때가 나쁘든지 복음 전파에 항상 힘쓰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어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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