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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1. 선한 싸움을 싸우라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9)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 아멘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함이니라(딤전 1:1-20)"

오늘날 한국 교회의 바른 성장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물량주의와 기복사상이라면, 사도 바울 당시 교회와 복음을 위협하고 있는 이단 사상은 '물질은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는 영지주의와 '예수의 복음을 부정하는' 율법주의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이단 사상과 믿음과 양심을 저버린 사람들로 인해 교회가 혼란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생명과 영광의 복음이 흐려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항하여 교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순수한 복음이 증거되어야함을 절실히 느끼고 그릇된 교훈과 사상을 분별할 수 있는 세 가지 척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릇된 교훈의 특징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케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4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릇된 교리를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이 가르침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한 믿음 가운데로 인도하고 있는가, 믿음을 더하는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하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교리가 변론만을 일삼는가(4절) 아니면 우리를 삶의 변화시키며 모든 생활에 덕을 세우는 일로 인도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변론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사 문제, 즉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며,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바른 교훈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로, "그 교훈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하는가?"입니다. 바울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5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랑이야말로 하나님 교훈의 결론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롬 13:10).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웃을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게 한다면 바른 교훈입니다. 아무리 천사의 말처럼 들릴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리에서 우리를 이탈시킬 소지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르친다해도 결국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하고있지 않다면 단순한 율법주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원로 신학자 조찬선 목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 죄악사'를 통해 지난 2,000년간 성직자들이 저지른 죄악의 발자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그들의 그릇된 교훈들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6세기 초 면죄부 판매책임자였던 수도사 요한 텟젤이 "교회가 천국과 지옥문을 열어놓았다.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죄의 사함을 받을 것이다. 살아있는 자뿐 아니라 죽은 자나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해 이 표를 사면 그 돈이 헌금궤 속에 쩔렁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곧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다."라고 한 이 말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십자가의 은혜와 예수의 복음을 얼마나 왜곡시켜 참된 믿음과 사랑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그릇된 교훈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피를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1572년 8월 24일 밤 프랑스 파리에서 발생한 성 바르톨로 메오 축제일의 대학살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천주교도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개신교도라면 남녀노소 구별없이 모두 살해했습니다. 2개월동안 무려 7만명을 죽이면서 세느강을 피로 붉게 물들였던 것입니다. 현재 프랑스가 천주교 국가가 된 것은 이 학살사건으로 개신교도의 씨가 말랐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그는 한국 교회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199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한국 인구의 50.7%가 종교인인데 그들이 다니는 교회(4만 8천개), 성당(1,400개), 그리고 사찰 등의 수가 한국의 모든 학교 총수의 3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각계 각층의 부정부패, 사치와 향락 등 세기말적인 현상은 학교교육의 잘못이 아니라 그릇된 종교교육 탓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인데 당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된 죄수의 25%가 기독교인이었다."는 한 통계를 제시하며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가 있는가?"라며 반문하고 있습니다. 삶을 변화시켜 가정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제대로 가르쳤다면 이러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 율법주의도 일종의 그릇된 교훈으로 예수 복음을 훼방할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왜곡시키며, 초대 기독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핍박하고 순교의 많은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기 때문에 바른 교훈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율법주의는 예수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희생되심으로 인류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부정하고 오직 율법 자체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보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심각한 죄의식만이 사람을 지배하게 됩니다. 구약 율법의 일부 조항만을 적용하여 단군 상을 때려부수는 일로 기독교의 복음을 왜곡시키지말고, 율법이 원하는 바는 단군숭배는 하나님 앞에 심각한 우상숭배죄임을 깨우쳐 스스로 그 우상들을 버리고 오직 예수 앞에 나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는 그릇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는 거룩하며, 선한 것입니다(롬 7:12).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율법 앞에서 죄의 문제를 깨닫고 곧 십자가 앞으로 나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른 교훈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앞에 나오게 하여 생명을 얻으며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결한 마음과 착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에 이르게 합니다. 참되고 바른 교훈은 사람들에게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할뿐만 아니라 병들고 시들어 가는 영혼을 치유하여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교훈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사망과 독의 씨를 뿌려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선한 싸움"에 패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했던 사도 바울도 예수를 체험하기전에는 율법주의자로 교회와 성도들을 없애는데 앞장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예수 복음 전파에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훼방자'는 자기의 입으로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를 말하며, '핍박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방해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포행자'는 자신이 직접 행동함으로써 복음을 방해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훼방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핍박자'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하여, '포행자'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대적하고 방해하는 자를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 등으로 말하는 것은 그가 점점 그 죄상이 포악해져갔던 것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인 것'을 깨닫고 깨달은 만큼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크고 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를 보혈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죄의식과 참회의 고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를 만남으로 율법의 바른 역할을 깨닫게 되었고 아울러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없이는 인간이 살수 없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주께서 왜 자기와 같은 사람을 구원하셨을까 하는 문제를 묵상하면서 두 가지 결론을 내립니다. 우선은, 하나님께서 주를 믿어 영생을 얻을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게 하시려고 자기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16절). 다음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자기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17절). 이 두 가지는 예수믿는 누구나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 달 27일 오후 정부대전청사에 찾아와 '외상값'이라며 불쑥 30만원을 내놓은 사람이 있었는데 64세된 박재곤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는 "41년 전 열차에 무임승차한 적이 있는데 이제야 갚게 돼 미안합니다."며 41년전 공짜 열차를 타게 된 사연을 밝혔습니다. 박씨 할아버지는 대학생 시절인 1959년 7월 당시 경북학생산악연맹 회장으로 대구지역 고교생 100여명을 인솔해 소백산 종주대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요청으로 캠핑 일정을 하루 연장하는 바람에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귀가하기 위해 충북 단양역(현재 단성역)에 도착했을 때는 열차표를 살 돈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박씨는 하는 수 없이 단양역 직원에게 "대구에 도착한 뒤 열차 요금을 보내주겠다."고 통사정해 위기를 모면한 뒤 41년이 지나도록 요금을 보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박씨는 "그동안 열차를 탈 때마다 당시 일이 생각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곤 했다."며 "단양∼대구간 현재의 비둘기호 열차요금으로 환산해 1인당 2900원으로 계산했다."고 말했습니다. 철도청장은 이를 반기며 "많은 사람들이 학생 시절 완행열차를 공짜로 타 본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며 "<잊혀진 빚>을 뒤늦게나마 갚는 <양심>이 살아 있다니 세상은 참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 인도의 성인 마하트마 간디는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챤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던 영국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보다 더 나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전파라는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안전 장치와 같은 것입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품격들입니다. 우리의 양심 안에 거리낌이 있을 때마다 우리의 믿음은 새어나가 버리게 됩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 가운데 어느 하나가 강해지면 다른 하나도 강해지며, 어느 하나에 대해서 실패하면 이것은 곧 다른 하나의 실패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선한 양심을 버린 사람들은 그 결과로 그들의 믿음이 파선되어 버리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19절). 왜냐하면 믿음이 진리에 대한 믿음,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믿음이라면 선한 양심은 그 진리가 적용되는 삶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내용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 전투와 같은 것인데 믿음과 선한 양심을 함께 갖춘 품성이 되지 못하고서는 결코 그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비양심적인 생활을 하면서 예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오히려 그 생명과 영광의 복음을 가로막게 되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더럽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 더더욱 진리가 되는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서 진리를 사수하고자 하는 믿음을 가지고 선한 양심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예수의 좋은 군사"(딤후2:3)로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의 좋은 군사"란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고 진리를 사수할 때 붙여지는 이름입니다. 두로(Tyre)의 막시머스(Maximas)가 "하나님은 장군이시고 인생은 전쟁이며 인간은 그 병사이다."고 말한 것처럼 실로 우리의 인생살이는 전쟁터에서의 삶과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육을 입은 인간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 같은 세상살이의 싸움에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이 세상살이의 싸움이 아니라,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한 "선한 싸움"입니다. "선한 싸움"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사단의 세력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싸움입니다. 전쟁에서 패하면 멸망하는 것과 같이, 성도들도 복음 전파에서 패하면 사단의 세력에 의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을 위한 선한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켜만 합니다. 믿노라 하면서 양심을 저버리고 산다면 아무리 복음을 전할지라도 "선한 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은 세상의 죄악과 과감히 싸울 수 없으나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일당백의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믿음이 파선하지 않도록 착한 양심을 지키며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선한 싸움"은 복음을 위한 싸움이요, 십자가 터 위에 세워진 교회와 진리를 위한 싸움이요, 사람구원을 위한 싸움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시키는 일만큼 더 고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바울처럼 남을 위한 선한 싸움에 동참하여,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믿음에서 나는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가운데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권능으로 역사하여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며 구원하는 여러분의 선한 싸움에 많은 열매를 맺으시기 기원합니다. <2000년 9월 3일. 이동희 목사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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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거룩한 손을 들라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딤전 2:1-11)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벤처기업의 메카인 테헤란 밸리에서 모 컨설팅주식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기동(과천교회 안수 집사)씨는 <고구마 전도법>으로 교계에 전도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고구마 전도법>에서 말하는 '고구마'란 전도 대상자를 비유적으로 지칭하는 말로 '생고구마'는 복음을 강력히 거부하는 사람, '익은 고구마'는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고구마 전도법>이란 전도자가 전도 대상자를 계속 '젓가락으로 찌르는'(교회출석을 권유하는) 가운데 익었다 싶을 때는 결정적인 '젓가락 찌르기 한판'으로 교회로 인도하는 전도법을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누구나 전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을 믿고 그냥 세상 속에서 고구마를 젓가락으로 찔러보듯 "예수 믿으라"고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젓가락을 들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익은 고구마를 젓가락으로 찔러 찾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만 많고 실천 행동이 미흡한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쐐기를 박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고구마 전도법>은 행동은 없고 머리와 입만 있는 '내가복음' 성도, 열매없는 성도, 전도는 원이로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성도들에게는 큰 감동과 결단을 가지게 합니다. <고구마 전도법>의 골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믿으십니까?",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예수 믿으니까 너~무 좋아요", "당신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며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전도 간증가운데 '작두도사' 전도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퇴근 시마다 작두도사 집에 찾아가 그의 <고구마 전도법>대로 전도하여 결국 전도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작두도사의 형님이 대전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인데 점쟁이 하는 동생을 위해 5년동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 기도에 다만 쓰임 받았을 뿐이었으며, 자신이 퇴근길에 작두도사 집에 가게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그 점쟁이의 형님의 기도에 응답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성도가 누구에게 전도하든 그 전도에는 성도들의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1.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항상 열려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2:4) 예수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사람을 찾으려 하지 않으면 참된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전도해야만 합니다. 교회에 맡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한 기도와 전도의 대상은 낮은 자만이 아니라 높은 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높은 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복음은 선한 사람만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선한 자를 포함한 모든 악한 자를 위해 복음은 전파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선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과 악한 자까지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 믿는 사람만이 아니라 예수 믿지않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기도는 예수 믿는 사람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오히려 예수 믿지 않거나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참으로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원수나 적이라고 부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기도에서 벗어나거나 기도에서 제외되어서는 바른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지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도록 예정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성도는 아무리 극심한 박해가운데 있다하더라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에게는 어느 누구도 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박해하는 황제일지라도 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무엇보다 먼저 세속 정부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 로마 네로 황제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점점 극심해져 갔습니다. 더욱이 네로의 방탕함은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을 야기시켜 기독교인들에게 터무니 없는 누명을 뒤집어 씌워 그 순교자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고 살기가 무척이나 힘들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에게 적대적인 환경속에 성도들은 무엇보다 세속 정부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로 하여금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딤전2:1-3)

엊그제 시민의 힘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 것으로 보도된 유고 대통령 밀로셰비치는 코소보 전쟁주도하여 인종청소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 한 사람 지도자로 말미암아 유고의 국민경제 파탄에 이르게 되었고 전 세계의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도 걸프전쟁을 일으켜 결국 서방국가의 경제재제로 지금까지 국민경제 파탄에 이르게 되어 아직까지도 이라크 백성들이 아주 피폐한 경제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서방국가에 대한 증오심만 증폭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들을 보면 과연 통치자들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들을 괴롭히고 불안하게 하는 통치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원로목사의 칼럼에 다음과 같은 기도에 얽힌 얘기가 있습니다. ≪교회당 건너편에 술집이 생겼습니다. 취객들의 고함소리 싸우는 소리 온갖 추태.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다른데로 옮겨가라고 한다고 옮겨갈리도 없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기도를 어떻게 했느냐하면 "하나님, 술집이 화재가 나서 타 없어지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온 교인이 합심해서 통성으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일인가? 진짜로 술집에 화재가 나서 집이 다 타버렸습니다. 교회가 기도해서 술집에 화재가 났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술집주인이 화가 나서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목사가 경찰서에 소환되었습니다. "목사님 교회가 기도했기 때문에 화재가 났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거요?" 이러한 경찰의 질문에 목사의 답변은 "생각해 보세요. 기도한다고 불이 나겠는지요?"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망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는 왜 했던가? 그리고 남의 집에 불이 나도록 기도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번 미국에 갔을 때 들었던 얘기입니다. 미국의 대부분 한인교회는 미국인 교회당 건물을 빌려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인교회에서 자기들이 빌려서 예배드리는 그 미국교회 예배당이 자기들에게 넘어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자기들의 힘으로는 땅을 새로 사서 예배당을 짓기에는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까 그 미국교회가 하루 빨리 망해서 예배당 건물을 자기들한테 헐값으로 넘어오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어느 교회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정당한 기도라면 그 미국교회에 감사드리며 자신들로 인해 더욱 더 부흥하고 성장하도록 간구와 기도를 해야하며, 자신들도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처소를 주십사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사람, 누구든지 살리고자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여 성도와 백성들이 평안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2.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분노와 다툼이 없이 화목을 이룬 연후에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과 인간사이에 평화, 화목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기도와 예배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 번 참으면 살인도 면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분냄이 없어야 한다는 말에는 용서와 인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에는 인내와 용서가 중요한 것입니다. 남을 용서할 줄 모르고 늘 마음에 미움이 차있으면 온전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전에 남을 끝없이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거룩한 손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어 하나님께서 들으시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끝없는 용서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여러분이 그같은 하나님의 한없는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후 100년경에 만들어진 초대 교회 예배 지침서에는 "이웃과 다툼 중에 있는 자들은 서로가 화해하기까지 교회에 나와서는 안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그같은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원한과 비통 등은 기도의 통로를 틀어막는 커다란 장벽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장벽을 허물어트리는 무기인 끝없는 용서와 인내를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미국의 어느 교인은 자신보다 10년 연상의 남자와 처녀 결혼하게 되었는데 결혼하고 자식을 셋이나 낳고 보니 전처 자식들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남편이 미워지고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에 도저히 더 이상 같이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더욱 더 미운 것은 자신을 속여서 결혼했다해도 지금까지 그 속인 사실에 대해 한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 싸움할 때마다 그 문제를 드러내놓고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서로 한방씩 주고받은 주먹다짐이 고소 고발되어 수천만의 벌금형을 당하게 되었고, 가정은 파국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자신을 속인 남편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속였습니까? 우리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모든 죄를 깨끗이 십자가 예수의 피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어찌 우리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한을 품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마음에 한을 품은 자의 손을 어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겠습니까?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네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예수의 거룩한 피가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분노와 다툼과 한을 품고 용서하지 않는 것은 거룩한 손이 아니라 피묻은 손입니다. 이웃을 끝없이 용서하지 못하는 피묻은 손이 아니라 그 더러운 피를 깨끗이 씻어내는 예수의 거룩한 피 묻은 손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라의 그릇된 지도자들로 인하여 참을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했다해도 마음에 분노와 한을 품기보다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인내와 용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거룩한 손을 하나님 앞에 들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도와 교회는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질서로 단장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여자들이 내면의 아룸다움보다는 외적인 화려함에 더 치중하며 예배에 참석할 때마저도 하나님 앞에 드러날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고 오히려 남들에게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머리를 화려하게 손질한다든지 보석으로 치장하는 일 등 화려하고 사치한 것들에 눈이 어두워 있는 여인들을 향하여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단장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담한 옷'이란 적절하고 분수에 맞는 옷, 그렇다고 너무 초라하지 않은 수수한 옷을 가리킨다. 그리고 '염치'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 앞에 항상 겸손한 태도를 가리키며, '정절'이란 모든 불순한 욕정과 욕심을 버리고 항상 깨끗하고 순수함을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선행'이란 기독교 여성이 지닐 수 있는 최대의 장식품으로서 공동체 전체를 유쾌하게 하며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행동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단장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길 줄 아는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서인 잠언을 이렇게 말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마지막으로 성도와 교회에서 지켜져야 할 중요한 것은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를 받았다해도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복음이 전파됨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설립되자, 여자들도 남자들과 동등한 자리에 앉아서 진리의 교훈을 배울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따라 각종 행사와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고전 11:1-6). 그러나 이러한 여자들의 급격한 활동은 엄격한 가부장제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사거나 심지어 교회 내 질서를 혼잡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당시 교회 여성들에게 일절 순종함으로 질서를 지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절 순종하라는 말이 남녀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아름다운 질서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팎에서 남녀의 지위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명확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말씀에서 보듯이 기독교에 있어서 남녀의 지위나 명예나 특권이나 또는 기능의 차이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는 저마다 창조의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남자는 남자로 지으셨고, 여자는 여자로 지으셨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해도 창조의 질서마저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 여성들도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능력과 은사를 적당하게 조화함으로 가정과 교회의 질서를 이루며, 그리고 사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한 기독교 여성이 자신에게 특별한 성령의 은사가 주어졌다는 이유로 교회활동이나 사회활동에만 전념하고 가정생활을 등한히 한다면 그것은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아름다운 성도와 교회의 모습으로 단장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일절 순종하며,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남녀차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질서 속에 남녀가 평등을 이루어 하나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없는 용서와 인내를 가지고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아름다운 창조의 질서 속에 가정과 교회, 사회에 덕을 세우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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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름다운 지위

(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16)

1. 신학자 헬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교회 직제(職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교회 직제는 민주정치에 속한 것도 아니고, 독재정치에 속한 것도 아니고, 과두정치에 속한 것도 아니고, 오직 귀족정치에 속한다. 교직자들은 금전이나 물질로써 귀족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은사에 있어서 귀족이다." 교회 직제에 목사나 장로, 권사, 집사 등이 소위 교회 정치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 직분들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여러 직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로 하나님의 은사, 즉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맡은 바 직분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지체이기에 가히 귀족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죄의 종노릇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상승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믿으면 하나님 앞에 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목사를 맡았든 장로를 맡았든, 권사나 집사를 맡았든 모두가 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집에 일맡은 아름다운 직분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장로제도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광야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에 모세는 수많은 백성에 대한 책임이 너무 막중하고 그 업무량은 너무 과중해서 혼자서는 도저히 그 짐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호소를 들으시고 모세의 협조자로 장로 70명을 세우도록 명령하시고 또 그들의 직무를 원만히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각자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셨습니다.(민수기 11:10-26) 이것이 유대교 장로의 시작이며 후에 나타나는 유대 최고의회기관인 산헤드린 정원 71명이 된 것입니다. 장로란 말은 '노숙하다'는 뜻으로 치리자의 경험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그만큼 장로는 유대 사회에서 노숙한 치리자로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장로>를 신약성서에서 때때로 <감독>으로 번역하여 쓰고 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장로>나 <감독>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장로는 교회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인물을 개인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감독은 그 장로의 직제와 의무를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장로는 그 사람의 사람됨됨이를 나타내고 감독은 그 사람의 직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시대 후에 점차 감독직을 장로직에서 구분하여 장로직보다 높이 생각하는 잘못된 경향이 생겼습니다. 3세기에 이르러서는 감독직이 발달하여 점점 권세를 가지게 되었고, '감독있는 교회가 참 교회'라고 하는 그릇된 사상까지 생겼습니다. 더 나아가 큰 도시 감독은 지방교회를 관할하는 권세까지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로마에 있는 감독이 모든 다른 도시들의 교회들과 지방 교회들을 독재하는 자리에까지 막강한 권세를 가지게 되어 결국 교황주의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감독을 장로 이상으로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감독이나 장로는 같은 직분인데 그 명칭만 다르게 불리우는 것뿐입니다. 장로, 즉 교회 지도자는 교회를 가르치며 치리하되 권세를 가지고 지배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종으로써 겸손하게 봉사해야합니다.(고후 4:5) 그러므로 목사직이나 장로직에 대한 이러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그 직분을 권세있는 자리로 착각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잘못된 교회 정치가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본문은 감독직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뜻은 감독(장로)라는 지위를 탐할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에 유익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을 사모하는 자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한국 교단의 총회장, 감독 등을 선출하는 선거철을 맞아 세속정치 못지 않은 불법타락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그 직분에 대한 명예욕과 교권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소위 교회 정치를 통하지 않고 각 교단의 지도자가 된 목사를 찾아보기 힘들정도입니다. 아다나시우스같은 위인(偉人)도 감독으로 피택되었을 때 도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실은 웅변가이며 신학자요 목회자였지만 감독되기를 원치 않다가 후에 마지 못하여 그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레고리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감독직에 장립되었고, 에브라임은 감독 임명을 받았을 때 그것을 피하기 위해 미친 사람의 모양을 했다고 했습니다. 장로(감독)은 어디까지나 섬기는 자리이지 권세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장로라는 직분이 일부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장로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오해입니다. 하나님과 교회 앞에 책임을 지는 면에서는 교회의 어느 직분이나 다 주인이지만, 교회의 총책임자요 대표는 목사입니다. 또한 장로도 목사와 같이 안수를 받았으므로 목사와 동등하다는 오해입니다. 안수는 구약시대에 왕과 선지자, 제사장 이 세가지 직분에게 주어졌습니다. 다같이 안수를 받았다해도 그 역할이 달랐습니다. 왕이라도 제사장이 될 수 없고, 또 제사장이라도 왕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왕과 제사장, 선지자가 다같이 안수(기름부음)을 받았을지라도 각자 그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나라를 통치하며 나라를 대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왕이지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장로는 교회를 대표하는 교역자가 아니라 목사의 가르침을 받는 평신도이며 목자가 아니라 양무리의 대표로써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로직은 교회 평신도의 가장 높은 권세있는 자리로 알기보다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직분이라는 자세를 가지고 자세(藉勢)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역자를 견제하는 직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돕는 직분인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장로(감독)은 피택될 때 오늘 본문과 같은 요건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첫째, 장로는 사회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으며 결백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합니다. 장로는 그의 일상생활이나 자신의 사업이나 직장에서 인정받고 존경받고 있지 못한다면 그가 가정과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과 자신의 신앙에 배반되는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장로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한다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장로는 교회 안팎에서 존경과 인정, 칭찬을 받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둘째, 장로는 한 여인만을 아내로 삼고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장로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자신의 집을 다스릴 수 없는 사람이 교회 성도들을 통솔하는 일을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을 그리스도의 가정으로 만들 수 없는 사람에게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쳐 인도할 수 없는 사람에게 교회라는 가족을 가르쳐 인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장로라고 해서 교회 일을 돌본다는 이유로 자신의 가정이나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교회의 명예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덕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 장로는 감정과 욕망을 이성과 신앙으로 잘 통제하여 항상 마음을 안정되고 건전하게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한 마디로 말하면 항상 그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넷째, 장로는 교회 지도자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이웃과 하나님의 종을 영접할 수 있는 열려진 마음과 열려진 가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가장 훌륭하고 효과적인 교회 지도자는 말하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존재로써 예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 장로는 구타는 물론 고함을 지른다든가 집적거린다든가 화를 잘 낸다든가 성미 사나운 말버릇이나 행동을 한다든가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누구와도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평화로운 성격을 지녀야합니다. 장로는 물질에 있어서도 금전욕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교회와 이웃들을 위해 하는 일에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 다음으로 교회에서 가장 많은 직분인 집사에 대해서 "이와같이 집사들도(8절)..."라면서 그 자격요건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8절)라는 말은 마찬가지로란 뜻입니다. 즉 집사들도 장로와 마찬가지로 그 직분을 맡을 만한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본래 집사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재정을 맡았었습니다.(행 6:2,3) 그런데 중세에 타락한 교회에서 감독이 독재하는 풍토가 이루어져 집사는 감독의 종과 같이 변질되었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도 집사는 목사나 장로에게 예속된 것처럼 지나치게 복종을 강요당하는 풍토가 없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사란 말은 섬기는 자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라는 직분이지 장로나 목사를 섬기라고 주어진 직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1) 집사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즉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2) 집사는 새로 입교한 자가 아닌 믿음의 연륜이 있는 신앙의 성숙한 자여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시험에 들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3) 집사는 모든 일에 충성되이 봉사해야 하며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열심히 배워 가르치기를 잘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4) 집사는 술에 인박이지 않는 자,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 구타하지 않는 자, 믿지않는 자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는 자여야 합니다.

5) 집사는 일구이언하지 아니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중상모략하지 아니하며 절제있고 단정하여 근신하며 아담한 행동을 하는 자여야 합니다.

의학도가 졸업을 하고 의사가 되기 전에 오늘날도 히포크라테스의 서약을 합니다. 그 서약 가운데 환자의 집에서 들은 것이나 환자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이나 들은 것이라든가 그런 것을 길거리에서 들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는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일지라도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그에 대해 공개되어서는 안될 것들이 알려지게 되면 자칫 구제하는 일들이 수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만 가져올 것입니다. 목회 서신이 유독 그녀들에게 남의 소문을 금지시키고 있는 것은 여성들을 모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시 여성들이 처해있는 환경이나 그 성격상 남자들보다도 남의 소문을 말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성들의 활동영역이 아주 제한되어 있어서 자연히 개인적인 대인 관계에 대해서 말할 위험이 많아졌고 거기에 중상에 가득 찬 소문이 꼬리를 물었던 것입니다. 남녀 누구를 막론하고 고자질이나 소문을 퍼트리는 것은 무섭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마지막으로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집>의 집이라 했습니다. 집이라는 말은 바로 가족, 가정을 뜻하는 것으로 교회 성도들은 서로 가족애를 가진 형제 자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으로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 했는데 이 말은 교회는 진리가 되는 복음을 전파는 신앙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명확하게 드러내야 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입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나 어디서나 아무 때나 잘 볼 수 있도록 복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교회가 이적과 기적을 행하지 못해도 진리를 전파하는데 성공하면 그 사명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은사를 받아 이적과 기적을 행한다해도 진리를 전하지 못하거나 안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사명을 저버린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그리스도께 대하여 말한 것은 모두가 다 참이라고 한 것과 같이(요한복음 10:41) 교회가 언제나 그리스도께 대하여 참 말, 즉 진리를 증거하면 교회의 사명을 다 한 것입니다. 교회는 기적의 동산, 능력의 동산이 아니라 진리의 기둥과 터이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기적 등 능력을 나타내어 교세가 강해지면 그 세를 과시하는 세력단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거단체이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교회의 기둥들로 여겨졌다고 합니다(갈2:9). 기둥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들로 말미암아 주님의 몸된 교회가 처음으로 새워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게바는 베드로를 가리킵니다. 즉 베드로는 주님을 영접하고 변화된 뒤 '반석'을 의미하는 '게바'로 바뀌었습니다(요 1:42). 이와 같이 우리도 교회의 기둥이 되려면 주님을 만나 거듭나야만 합니다. 거듭나서 변화되지 않고는 결코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진흙이지만(사 64:8),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오면 우리도 반석같이 되어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12에서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이기는 자들이 곧 교회의 기둥이 되며, 새 예루살렘에서 교회의 기둥이 완성됨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을 배반치 않는 사람, 곧 진리를 사수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결코 진리가 되시는 주님을 배반치 아니하고 끝까지 신앙의 삶을 경주하여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이자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우리 성도가 교회의 기둥이 될 때, 어떠한 사단의 세력들도 진리의 터인 교회를 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믿음 위에 굳게 서서 교회의 기둥이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끝까지 이기는 자들이 되어 마지막 때에 새 예루살렘에서도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진리의 터라고 했는데 그 터가 든든해지는 것은 교회 교인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비록 교인수가 얼마 되지 않더라고 합심하여 하나가 되어질 때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 터가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진리의 터가 든든하다는 것은 진실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이든 교회이든 무엇보다 그 진실성을 보시고 사용하십니다. 교회가 많은 시련과 연단을 겪으면서 든든해지는 것을 보시려고 하나님은 오래 동안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믿고 진실되고 하나되어 하나님의 집에 아름다운 기둥들이 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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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보하는 신앙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16)

에베소 교회에 침투한 이단 사상은 영지주의(靈知主義)였습니다. 영지주의란 육체(물질)는 사악한 것이어서 육체와 관계되는 모든 것은 다 악이며 육체적인 본능이나 기능도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먹는 식물(食物)도 물질일 뿐만 아니라 육체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악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영지주의는 결혼도 육체의 본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결혼 자체도 악하다고 주장합니다. 결혼을 부정하는 독신주의, 금욕주의는 바로 여기서 생겨난 것입니다. 육체는 물론 육체의 본능과 기능 자체가 다 악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억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보다 더 엄격하고, 하나님보다 더 선하고 더 거룩해지려고 하던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면서 결국 신앙을 미혹하고 신앙의 진보를 가로막는 자들이었습니다. 독신주의나 금욕주의가 경건의 표상이 아닙니다. 결혼하지 않고 산다고 해서 다 깨끗하고 경건한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천주교의 신부가 결혼하지 않게 된 것은 중세에 교회세습이라는 기독교의 악습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자식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신부는 장가가지 못하게 하자는 데서 비롯된 것이지 스스로 경건해져서 결혼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만드신 제도가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독신주의나 금욕주의를 내세워 결혼을 부정하거나 악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창조섭리를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육식을 금하고 채식만 한다고 해서 경건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경건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다 선한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금욕이나 금식 등을 통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일부 종파에서 금욕과 금식 등의 생활로 사람들로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기독교 신앙을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금욕주의나 금식 등으로 거룩해지려고 결혼이나 식물을 폐하려하는 영지주의 사상이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어긋나는 것을 다음과 같은 창세기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9:3)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할 것은 금욕주의나 금식주의가 신앙의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미혹케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다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 선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지며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다함께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입니다. 이러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기 위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미혹당하지 않고 진보하기 위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말씀에서 경건은 헬라어로 "유세베이아(????????)"인데 '유'(??)는 '좋다'는 뜻이고, '셉'(???)은 '놀란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워하는 놀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죄를 피해서 그리스도 안에 숨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깜짝 깜짝 놀래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죄를 피해 죄를 물리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숨게 되므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을 연습한다는 것은 경건하게 살기까지 연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가이사랴의 이탈리아 군대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라고 했습니다.(행10:2)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와 구제활동에 힘쓸 때, 즉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일에 힘쓸 때 경건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경건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생활에 힘쓸 때 경건을 이루어가게 됩니다.(히5:13,14) 그리고 복음을 위해,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게 될 때 경건을 이루어가게 됩니다.(롬5:3,4)

기독교인은 운동선수가 신체를 단련하듯이 마음의 경건을 위해 단련해야 합니다. "육체의 연습"이 약간의 유익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육체라는 한 부분에 대한 발달을 위한 연습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결과는 아주 짧은 기간 계속되는데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라는 것은 곧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경건하게 단련하는 것은 몸과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에 이르기까지 전인적인 발달과 성숙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 결과는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기독교인은 체육 경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기자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목표는 올림픽 금메달이 아니라 마음을 경건하게 단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경건한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 첫째 사랑을 연습해야 합니다. 사랑이란 원래 마음과 관계되는 일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마음에서 울어나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힘든 여자나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을 단련해야만 합니다. 대개 남자들은 결혼하게 되면 아내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저절로 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평생동안 서로 사랑하기를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단지 마음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의지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사랑이 가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의지를 가지고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단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 또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의지가 성경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익혀 여러분의 마음과 의지가 예수님의 마음과 의지로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로 충성하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원래 믿음과 충성은 같은 말입니다. 예수 믿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예수님의 충성을 배우고 익혀나가야 합니다. 모든 군수품이 모자람 없이 보급되고 최신형 무기를 갖추고 평안할 때 훌륭한 군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몸이 파김치가 될 만큼 지치고 배가 등가죽에 붙을 만큼 허기지고 써울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며 전세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기대이상으로 잘 싸워 승리하는 군인이라면 가장 가치있고 훌륭한 군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건강치도 못하고 가정형편도 몹시 어렵고 집안에 어두운 일들이 줄을 잇는 도저히 신앙생활조차 하기 어려운 가운데서 신앙을 지키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잘 감당하는 성도라면 예수님의 충성을 가장 많이 닮은 경건한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와 환경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간직하고 충성하여 경건한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셋째는 성결해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성결의 표준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시지만 죄인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다 받으실 때에 그들을 저주하거나 그 마음에 분과 한을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잘 되기 위해 참으로 좋으신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과 영혼을 더럽히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통해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갖추어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지않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했는데 여기 연소함이란 유치하여 쉽게 혈기를 내며 사랑을 행하지 못하기 쉽고, 경력(경험)이 부족하여 일을 일관성있게 처리하지 못하므로 신뢰성이 적고, 정욕에 이끌리기 쉬워 성결을 상실하기 쉬운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하도록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말과 행실 즉 언행이 일치하는 생활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보여주신 것처럼 이웃을 위한 희생과 이웃의 죄에 대한 끝없는 용서를 베푸는 십자가 사랑의 본을 보여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바로 믿음의 열매가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누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전혀 사랑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귀신들의 믿음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2:19) 정결이란 예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성도의 생활태도입니다.(요일3:3)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날마다 회개하는 생활로 자신을 거룩하게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거룩한 생활이 있어야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마5:8)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신앙이 진보하여 경건에 이르게 될 때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본이 된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진보하여 성숙한 사람에게서만 기대되는 것입니다. 흔히 듣는 말 중 한번 실수는 병가 상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두 번 늘 실수만 거듭한다면 한평생이 경건에 이르지 못하고 연습생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인생은 결코 연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생활이 진보하여 성숙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연습만 되풀이된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매가 없이는 넉넉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에게만 열매가 가능한 것입니다.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1-7)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신앙이 진보하고 경건한 삶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며 전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하시며 기도생활에 충실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척박한 세상에서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기도생활없이는 경건의 능력있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인터넷, 즉 사이버 공간을 통해 각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버 공간에 교회를 욕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소위 앤티 크리스챤 사이트(Anti-Christian site)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네띠앙, 다음, 라이코스 같은 대형 사이트의 카페라는 공간에 기독교를 비방하며 욕하는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실린 글들은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이 없으면 기독교를 크게 오해하거나 기독교에 대해 실망하여 회의에 빠지게할만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앤티 크리스챤 사이트는 <수호천사>같은 음란물 사이트를 차단하는 프로그램이 없어 청소년들과 일반 사람들에게 바른 기독교를 변호할 수도 없이 기독교가 상당히 부정적 이미지로 부각되어 복음 전파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앤티 크리스챤 사이트가 등장하게 된 데에는 사회 각계 각층에 지도자들로 활약하고 있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불법과 부정부패 등 각종 타락한 모습, 즉 "믿음의 본이 되지 못하는 생활", 경건에 이르지 못한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요즈음 항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 세습이나, 일부 교회의 투명하지 못한 재정으로 교회마저 부의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들이 비방거리가 되어 앤티 크리스챤 사이트에 불을 당기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번 미국에 갔을 때 어느 일식집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일식집 주인은 5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감리교단의 어느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선교활동에 앞장서 적극 동참하고 봉사했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이제 감리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말하길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자신이 그 교회에 다닐 때 분명히 담임목사가 공개석상에서 절대로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교회가 버젓이 담임목사직을 아들에게 세습했기 때문에 그런 목사가 지도자로 있는 교단에 다니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앤티 크리스챤 사이트를 차단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는 성숙하고 경건한 생활"인 것입니다. 오직 말과 행실이 일치하며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생활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말과 삶을 통해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2000년 10월 22일 이동희 목사 주일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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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회의 질서

(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2)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3)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13)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15)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19)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 하게 하라 (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25)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딤전 5:1-25)

1. 사람을 경고하거나 견책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것이어서 그것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보다 연장자에 대해서는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시의 적절한 경고나 견책으로 상대방을 불행과 파선에서 구원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처럼 유익하고 보람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나 견책이 상대방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거나, 원한의 감정을 사게 한다거나, 노여움이나 비난과 증오를 느끼게 해서는 효과는커녕 사태를 더 악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에 대해서는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애정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만약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귀찮은 존재로 여긴다면 그 가정이나 사회는 불행을 겪게 될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노인을 존경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예의 범절입니다.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늙게 마련이고 따라서 그 외양이 누추해지고 기력이 쇠해지게 마련이지만, 오래 된 나무의 뿌리가 심대한 것처럼 수많은 삶의 수레바퀴를 경험한 노인에게는 감히 젊은이가 흉내내지 못할 위엄과 인생의 교훈들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잠 16:31) 하였고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잠 20:29)고 하였습니다. 노인들은 젊은이 보다 멀고 험한 인생길을 달려오신 분들로 그만큼 인생의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계신 것을 알고 그에 합당한 존경과 애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노인의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젊은이의 힘과 정열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피차에 보다 더 유익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나는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젊은이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구든지 한 형제 자매로 알아 형이나 아우를 대하는 것처럼 관용과 함께 하는 정신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성(異性)에 대해서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과 정신으로 대하며 권고해야 합니다. 이어서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해야합니다. 교회는 어떤 이유로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구실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며,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이 든 황새가 나를 수 없게 되면 그들의 보금자리에 남겨져서 젊은 황새들에 의해 부양된다고 합니다. 그 젊은 황새들은 전심전력을 다해 나이 든 부모 황새의 먹이를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을 키울 때 자신들은 굶을지라도 자식들을 먹였던 것을 잊지 말고 이제 나이 든 부모에 대해 자신들은 굶어도 부모가 굶는 일이 없도록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의 보호와 수고와 희생가운에 성장하게 된 것을 기억하고 부모가 노쇠하고 병약하여 힘이 없을 때 그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히 자식들의 의무인 것을 깨닫고 노인들을 부양하는 것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양할만한 자녀손들이 있는 과부들에 대해서는 교회로 하여금 짐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양받을 만한 자녀와 가정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에 초대 교회는 <과부 등록부>라는 것을 두었습니다. 이 <과부 등록부>에 등록되어 교회로부터 부양과 존경을 받을 참과부는 나이 60세 이상의 연로한 사람으로 남편과 사별하고 그의 과거 결혼 생활이 깨끗하며 자녀를 하나님 말씀으로 잘 양육하며 가난하고 환난에 처한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겼던 선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부들을 교회가 부양하되 그들로 하여금 병든 사람들을 심방하여 위로하고 격려하며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 아픔을 함께 나누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일에 봉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 과부가 결혼생활이 깨끗지 못하였다거나, 선한 행실로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하였다거나, 자식들을 신앙적으로 잘 양육하지 못하였다거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환난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 항상 열린 마음과 열린 가정으로 그들을 사랑으로 섬겼다는 증거가 없다면 교회에 덕을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교회의 신용을 타락시키는 결과만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겼다는 선한 증거가 있는 참과부야말로 교회로부터 부양과 존경을 받으며 계속해서 남은 여생을 예전처럼 봉사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과부는 교회에서 부양하기를 거절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뜻하지 않은 남편의 죽음으로 과부가 되어 그 순간에는 신앙적인 충격으로 일생을 과부로 지낼 것을 결심하거나 맹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일찍이 과부가 되었을지라도 생계를 유지하는데 다양한 직종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독신녀나 젊은 과부가 정직하고 깨끗한 방법으로 생활비를 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되면 결국 살기 위해서 거의 매춘행위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어서 과부가 되거든 재혼을 서둘든지 아니면 교회 봉사에 철저하게 자기 생애를 바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여성들은 누구나 특별하게 할 일들이 없었기 때문에 또한 자연히 이집 저집 다니면서 남의 좋지 못한 소문을 퍼뜨리거나 남의 험담이나 늘어놓거나 남의 일에 참견하기 쉬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 사도 바울은 젊은 여성들은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고 가정을 섬기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과부와 여성들에 대해 초대 교회 사도 교헌(敎憲)에 다음과 같은 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부는 온순하고 얌전하고 부드럽고 성실하고 성내지 아니하고 수다스럽지 아니하고 소란스럽지 아니하고 말을 더디하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아니하고 남의 허물을 찾지 아니하고 일구이언하지 아니하며 참견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게 해야 한다. 옳지 아니한 일을 보거나 들을 때에는 보지 못한 듯하고 듣지 못한 듯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부들은 놀러 다니는 사람들로 인식되어서는 안되고 자기 생활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제단>이라고 느끼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말을 조심하지 않아서 일을 그르치거나 심지어 패가 망신하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뿐인가. 정치가들의 한마디 말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뒤바뀌는 경우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렇게 말이라는 것은 한 인간을, 한 나라를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죽음까지도 결정짓는 것이 입에서 나오는 말인 것입니다. 조류의 왕자 독수리는 날아가는 왜가리새 잡아먹기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합니다. 왜 독수리들이 왜가리새들을 잡아먹기를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가리새들은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있을 때에 내는 소리처럼 "꼬꼬꼬"라는 소리를 즐겨 내는데, 특별히 날아갈 때에는 그 소리를 더 많이 내는 까닭에, 독수리는 날아가는 왜가리새의 그 소리를 듣고 잡아채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험이 많고 늙은 왜가리새는 독수리에게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경험이 많은 왜가리새들은 멀리 날아갈 일이 있으면 입에 꽉 들어가는 돌을 하나 집어서 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가리새가 날아갈 때에도 입에 꼭 물은 돌 때문에 "꼬꼬꼬"소리를 내지 않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독수리에게 들키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왜가리새는 입을 조심한 탓에 죽음까지도 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진정 성도들이 주님께서 주신 입을 잘 사용하여 평화의 말, 사랑의 말만을 전한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영생을 얻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2. 다음으로 교회는 장로에 대해 합당한 예우를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4:9-11에서 이스라엘의 70인 장로들은 "하나님조차 손을 대지 아니하셨다."고 할 만큼 존귀한 자들로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직분과 권위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마땅히 존경할 자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교회에는 두 종류의 장로가 있어 왔습니다. 즉 교회의 일, 즉 교회 조직과 행정, 관리 등을 책임지고 감독하며 다스리는 '치리 장로'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는 '교역 장로'가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장로'라 부르고 후자를 '목사'라 부릅니다. 이처럼 장로와 목사는 본래 한 뿌리였으며, 양자간에는 어떠한 신분적 우열이 없고 다만 그 사역하는 역할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와 목사는 동등한 존경과 대접을 받아야 하며, 성도들 또한 그와 같이 예우하여야 마땅합니다. 교회 성도들은 치리 장로든 교역하는 장로든 그들의 맡은 역할이 소중함을 알아 존경해야 합니다. 그들의 다스림과 섬김을 통해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하고 교회가 그 기능과 사명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존경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장로들, 즉 목사를 더욱 존경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의 중대함과 소중함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하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치리 장로는 물론이고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를 더욱 존경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스림과 가르침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돕고 다스리는 은사를 교회에 주셨습니다(고전 12:25). 만일 영적으로 잘 무장된 훌륭한 지도자가 교회의 여러 일들을 감독하지 않는다면 질서와 화평 대신 혼란과 불화만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직은 교회에서 필요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침 없는 다스림은 거의 아무 것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장하기 때문입니다(엡 4:11 이하). 그러므로 장로들은 본래 목사와 한 뿌리였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고, 목사의 말씀 사역을 중히 여겨 목사를 받들고 협력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야 하겠습니다. 장로들이 교회에서 이같이 겸손히 교회 섬김의 본을 보일 때, 그 권위의 존엄성이 높아지며, 성도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잠언 29:23에서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애를 얻으리라"고 하였으며,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마 23:12)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 성도는 이러한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의 생활에 책임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성경은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25:4)고 했습니다. 이는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다른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으로 해결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전도를 위하여 70제자를 파송하면서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레 19:13,눅 10:7)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교역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인 복음 전극의 사명과 성도의 영적 성장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가 오로지 영혼 구원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재정적 후원을 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요,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일을 단지 책임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옛날 찬란한 위용과 영화를 자랑했던 솔로몬 성전에서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이 그 성전을 굳게 받쳐 주었듯이(왕상 7:21), 우리의 교회에서도 한 뿌리인 장로와 목사 두 기둥이 교회를 받쳐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기둥이 건실하고 성도들의 존경과 보살핌을 받아야 교회가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로와 목사는 그 직분의 존엄성을 깨달아야 하며, 성도들은 장로와 목사를 존경하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3.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마지막으로 "경솔하게 아무에게나 안수하지 말라."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 쉽게 교회의 직분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앞서 디모데 전서3장에서도 능력이나 은사가 있다고 해서 "입교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쉽게 교회직분에 임명하지 말라고 권고하며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직분을 쉽게 맡았지만 그로 인해 교만해지거나 그로 인해 평판이 나빠진다든가 하는 경우에는 그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만 불명예스러운 것뿐 아니라 교회에도 불명예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교회 울타리 안으로 돌아오는 자에게 안수하는 일이 하나의 습관이 었습니다. 즉 "죄인이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보이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동안 그에게 안수하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죄를 뉘우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확실하게 보지 않고 경솔하고 쉽게 다시 교회 직분을 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교회에 돌아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자신의 참회가 참된 것이라는 것과 그에 합당한 삶의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우리 교회에서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교회를 떠난 지 오래되신 어느 집사부부가 다시 우리 교회에 입교했었습니다. 다시 입교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교회법을 무시하고 자신을 권사로 세우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고 다시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경원한다든가 의심과 불신하는 태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쉽게 안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그러한 사람이 속죄하고 재기하는 것을 돕는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의 성도의 교제는 어디까지나 거룩한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교회 직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친교라는 것은 죄를 뉘우치고 예수 앞에 돌아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속죄하고 새 사람을 입도록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아름다운 질서 속에 성장과 복음전파를 위해 직분이 주어지는 것이지 교인을 위해 직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질서를 세워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 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젊은이는 노인들을 애정과 존경으로 공경하며, 참과부를 부양하고 존경하는 구제의 질서를 세우고, 성도들 서로가 존경하기를 먼저 하되 장로들을 배나 더 존경하므로 섬기며, 교회 직분자들을 세우는데도 바르고 합당한 질서를 세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능히 감당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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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너 하나님의 사람아!

"(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하려 함이라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19)

로마 제국 당시 인구의 절반이 넘는 약 6천만 명이 노예였습니다. 특히 로마 시에는 자유 시민 수 보다 노예들이 4배나 많았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전쟁포로이거나 부채를 갚지 못하여 노예로 전락한 자들이었고 이들 노예인 부모들에게서 태어나 노예가 된 사람들도 상당수였습니다. 로마의 모든 일은 대부분 이 노예들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요리, 이발, 자녀교육, 의료행위까지도 노예들에게 맡겨졌습니다. 따라서 노예문제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사회문제로 등장했고 결국은 로마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노예문제는 당시 교회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쳐서 교회 안에 상당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사실상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영적으로 평등합니다. 로마 당시도 사회적으로 열등한 노예들이 예수 믿고 교회 안에 들어와 이러한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가지고 그들의 주인이나 상전들과 영적 동등성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노예들 가운데는 교회의 장로가 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속없고 건방진 노예들은 자기 주인이나 상전이 같은 교인이었을 경우 그리스도 안에서 너나 나나 다 평등하다는 구실로 맡은 일을 태만히 하거나 어떤 특혜를 누리려는 되지 못한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나 상전이 기독교인으로서 자신들에게 베푸는 호의를 오히려 당연한 자기들의 권리로 여겼던 것입니다. 심지어 주인이나 상전에게 저지른 자신의 실수나 범죄행위에 대해서까지도 면제받으려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지 않는 주인이나 상전을 지옥에 떨어질 사람으로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교만한 자세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무질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들 노예들에게 다음과 같은 기독교의 원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하려 함이라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딤전 6:1-2)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도록 범사에 자기 상전들에게 마땅히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상전이라고 무례하고 경솔하게 굴지 말고 어느 누구보다 더 성실하고 정직하며 맡은 일에 충성을 다 하는 것이 결국 예수 믿는 종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거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에 어긋난 사회제도를 개선하고자 하는 것보다 우선 사람을 변화시키며 사람과 사회를 구원하는 복음을 전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지향하는 변화는 사회제도나 그 사회의 구조적인 악이 아니라 인간성의 변화입니다. 사람을 변화시켜 새롭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의 제반 제도나 구조의 개혁을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있는 인간 자체의 구원을 목적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들은 자기 상전들이 예수 믿든 안 믿든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며,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어 죄인들을 섬기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빌 2:6-8)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그 신분이 무엇이든 예수처럼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떤 신분이든, 그리고 영적으로 어떤 신분이든 예수의 마음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가리켜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불렀을 때, 그 의미는 디모데로 하여금 자신이 어떠한 존재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마땅한 것인가를 깨우치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웠던 사람은 구약시대 모세와 사무엘, 다윗과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능력을 대리한 영예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 <하나님의 사람>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모든 성도,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모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착념하고 변론과 언쟁을 일삼는 거짓된 교사들을 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처럼 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으시며, 예배와 기도, 전도와 봉사 등의 경건 생활에 힘쓰며 사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경건 생활에 큰 이익이 되기 위해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거나 돈을 사랑하거나 하지 마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아는 지족하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미혹을 받아 시험과 올무에 빠져 마침내는 침륜과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거짓교사들, 불의한 탐욕에 빠져 신앙을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삼는 거짓교사들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설교하는 목사일지라도 소명이나 사명의식 없이 목회를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생존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거짓교사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처럼 이웃을 섬기며 살지 아니하고 은사나 능력 등을 빙자하여 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복음을 왜곡시키는 거짓교사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미끼로 장사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거짓교사들입니다. 예수 믿는다 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을 훼방하는 거짓교사들입니다. 이러한 거짓교사들과는 변론할 필요도 없이 아예 상종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되시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착념하여 거짓교사들을 분별하여 그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11절)의 생활에 전심전력하시기 바랍니다. <의>는 공의를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세상일을 더 우선시 하는 것이나, 물에 빠진 이웃을 외면하는 행위 등은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하는 경외심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관계로 맺어주는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철저히 그 분을 신뢰하며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신 일 중 가장 위대한 것인 십자가 사건을 말합니다. 인간이 본 받아야 할 신앙생활의 핵심은 바로 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인내>는 불행과 고난, 환난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온유>는 예수의 마음과 성품을 닮아 가는 것으로 항상 여유 있는 마음으로 이웃을 위로하고 평안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믿음과 십자가의 사랑과 백절불굴의 인내와 온유의 전신 갑주를 입고 십자가의 의를 좇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억지나 부득이 함으로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러면서도 결사적 자세로 추구하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세상적인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더 나아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12절) 실로 인간의 삶 그 자체는 싸움의 연속이되, 세상 사람들은 혈과 육의 싸움을 하며 <하나님의 사람>은 영적 선한 싸움을 경주합니다(엡 6:12). 그러면 영적 선한 싸움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첫째,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으며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처럼,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둘째, 마귀입니다.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인류를 타락시킨 이래 아직도 타락시킬 대상들을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찾고 있습니다(벧전 5:8). 이러한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뿐입니다. 셋째, 죄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기 위하여는 반드시 죄와 싸워 이겨야 하겠습니다. 죄를 이기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흘리신 피가 자신의 죄를 씻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피만이 인간의 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특권적 신분을 각성시키고, 거룩한 사명을 일깨워 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한 증거를 보여주기 원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음의 귀를 기울여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들으시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취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부하려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선한 일을 행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이 잘 나고 똑똑해서, 자신의 힘과 지혜, 능력으로 된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들을 높이며 교만해지기 십상입니다. 이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을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8:18),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부하게 하시었다."(잠 10:22) 이와 같이 재물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우리는 재물의 주인이 아니요, 다만 그 재물을 잠시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7절)는 말씀은 바로 재물이란 세상에 있을 동안만 잠시 맡아서 관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맡겨진 재물에 감사하며, 재물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하게 사용하여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재물이란 정함이 없는 것이어서 오늘 없다가도 내일 있을 수 있고, 오늘 있다가도 내일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고 해서 비관할 필요도 없고, 부자라 해서 기뻐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이 많든 적든 그 뜻과 소망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3-21)

"부하려는 마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온갖 부정부패와 불의, 착취와 약탈 등이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는데서 저질러지는 것입니다. 돈 자체가 불의한 것도 아니며 그것 자체가 구원이나 행복과 축복의 척도가 될 수도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돈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 되게 하여 돈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나머지 시험과 올무에 빠져 사람과 인간관계를 재물 축적의 수단과 기회로 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 파멸에 이르게 만듭니다. 돈을 사랑하여 부하려 하는 마음은 사람을 이기적이며 경쟁적으로 만듭니다. 작금 우리 사회는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만큼 부패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나라의 부패지수가 곤두박질하여 최하위권(48위)을 맴돌고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터져 나오는 사건들을 보면 모두가 다 돈독(毒)에 연루된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패한 나라 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이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시라. 이것이 장래에 여러분을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딤전 6:17-19)

유대의 어느 유명한 랍비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연인 즉, 맡은 재산을 상속받은 매우 친절하고, 착하고, 관대한 모노바즈(Monobaz)란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해 기근이 닥치자 그는 그 모든 재산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때 그의 형제들이 와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을 왜 다 허비하느냐?"고 힐책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 조상은 보화를 땅 밑에 쌓았으나 나는 땅 위에 쌓았으며, 내 조상은 이 세상을 위해 재산을 쌓았으나 나는 내세를 위해 쌓았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노바즈와 같은 사람이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사람,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함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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