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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의 품성―

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 교회임원의 자격(1장)

   2. 그리스도인의 품성(2장)

   3. 그리스도인의 사명(3장)

 

      1. 교회임원의 자격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나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10)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11)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일을 버리는 자니라(디도서 1:1-16)

어떤 혁명가는 청년시절에 "주여,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중년에 들어서는 "주여,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 내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가서는 "주여, 나 자신만이라고 변화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했다고 합니다. 만일 그가 일찍부터 자기 자신의 변화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면 그는 정말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쓰임받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한 해 우리 기독교는 사회를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켜 사회를 더욱 더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무엇보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되어 지금까지의 비난과 비판의 대상에서 일탈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인류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와 소망, 용기를 주며, 불안과 공포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안함을 주며, 슬픔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기쁨과 치유함을 주며, 거짓에 농락당한 사람에게 참 진실과 진리를 가르쳐주며, 도덕과 윤리에 실패한 사람에게 참된 삶의 기준을 깨우쳐 주는 것은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영생, 구원인 것입니다.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희생케 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이 믿음으로 인도하고자 함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 여러 성도들로 하여금 직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도들은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믿음의 길로 인도해야만 합니다. 한 개인이나 나라 백성을 징계하시거나 채찍질하시는 등 형벌을 가하는 것은 구원을 위한 사랑의 배려인 것이지 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 교회에 파송한 목적 역시 그릇된 지도자들과 각종 사이비, 이단들로 혼란스런 교회를 바로 세워 그레데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인 것입니다. 바울 당시 그레데인만큼 평판이 나쁜 민족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역사는 "그레데인은 타고난 탐욕 때문에 끊임없는 언쟁과 분쟁을 일삼고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누구라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아주 교활한 민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지도자에, 기독교 신앙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각종 이단 사설들에, 그리고 물질 탐욕에 빠져 교활하기 그지없는 거짓을 늘어놓는 민족성 때문에 그레데 교회에 필요한 것은 교회 내의 바른 질서확립과 확고부동한 바른 신앙관이었습니다. 이에 가장 적임자로 파송된 사람이 바로 디도였습니다. 디도는 강인한 정신력과 불의에 굽히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어떠한 곤란한 형편과 문제들에 대해서도 잘 처리할 수 있는 능력있는 바울의 동역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디도에게 무엇보다 먼저 교회에 바른 지도자를 세워 그들로 하여금 믿음의 본이 되게 하여 교회 질서를 확립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난동하는 여러 가지 이단 사설들을 물리치며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여 그레데 사람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그레데 교회는 도덕적으로 혼탁한 헬라 문화와 믿음과 생활을 분리시켜 가정과 교회를 파괴시키는 영지주의와 유대 율법주의의 도전으로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성도들을 돌보고 바로 지도하여 가르치는 책임을 맡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교회 지도자 장로는 특별한 자격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진리를 가르치고 권면할뿐 아니라 거짓 교훈에 대하여 진리를 변호하여 수호해야 할 책임도 있으므로 진리의 말씀을 바로 알고 확신을 가지고 교회를 진리의 터 위에 견고히 세워야 합니다. 그레데인들의 영향으로 물질과 세상 권력이나 권위를 하나님 말씀보다 더 중하게 여겨 탐심에 빠진 성도들은 가정과 교회생활을 소흘히 했고, 진리나 구원에 뜻을 두지 않고 신앙이나 교회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이렇게 혼란케 만드는 무리들을 거짓 교사들로 부르며, 이들 가운데는 생활이야 어떠하든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며 믿음과 전혀 동떨어진 생활을 일삼게 하여 쾌락에 빠져 결국 자신과 가정을 파멸케하는 영지주의자들, 예수 믿는 믿음만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며 할례와 유대율법 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십자가의 구원을 부정하는 유대주의자들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과 교훈 등이 그레데 사람들은 물론 교인들의 바른 가치관과 신앙관을 붕괴시켜 성경에도 기록된대로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는 악평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회를 바로 세워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도력을 갖춘 교회 임원(장로 등)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빛 바랜 기독교가 되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소금이 제맛을 잃어 버리워 짓밟히는 것과 같은 기독교가 되지 않기 위해 자격을 갖춘 성도와 교회 임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집사, 권사, 장로 등은 교회 안에서 맡은 직임에 따라 구분되지만 교회 밖에서는 기독교인은 누구나 교회를 대표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 여러분 모두가 당연히 자격을 갖추어가야 할 것입니다.

먼저, 교회 지도자로서 장로는 특히 자신의 가족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련하여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칭찬받는 믿음의 가정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 중요성 때문에 칼타고 종교회의에서는 "감독과 장로와 집사는 그 가족 전체를 교회의 교인으로 만들기 전에는 임명되어서는 안된다"는 규정을 두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가정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의 자녀가 불신자거나 이교도이면 장로의 자격이 없습니다. 교회 임원이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신앙의 본이 되지 못한다면 그만큼 지도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장로 가족은 방탕하다거나 비난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방탕하다는 것은 생활이 무절제하며 사치와 낭비성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임원의 가정에서 사치와 낭비의 구석이 발견된다면 그만큼 그의 지도력은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임원은 그 누구보다도 절제하며 근검 절약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같은 생활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은 사치하면서 남에게 봉사한다고 하면 비난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경쟁적으로 사치스럽게 치장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교회는 그만큼 지도력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셋째, 장로는 제고집대로 하는 자여서는 안됩니다. 이런 사람은 편협적이고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비난하고 자기 방법 외에는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신앙에는 개의치 아니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신앙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같은 신앙이라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며 다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는 교회 직분에 전혀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넷째, 장로는 급히 성내는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한 마디로 성질 급한 것을 죽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질 급한 것도 문제이지만 노여움이나 분노를 마음속에 오래토록 끓이고 사는 것이 더 큰 불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교회 직분에 합당치 않습니다. 장로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고 관대하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섯째, 장로는 술을 즐기거나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성도의 몸과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거하는 성전과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몸과 마음에 술을 담거나 폭력을 휘드른다면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임원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성전처럼 거룩하게 보존하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전으로 인식되도록 해야 합니다.

여섯째, 장로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사해서 이득을 남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를 하거나 무엇을 하거나 떳떳하지 못하게 불법이나 부당거래하여 돈 벌지 말며 폭리를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를 장사 대상으로 삼는 교인들도 없지 않습니다. 교회 임원은 무엇을 하든지 그 직업이 무엇이든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교회 임원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장로는 나그네를 대접해야만 합니다. 나그네라함은 고아와 더불어 빈곤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어려운 이웃들, 고난받는 이웃들, 그들이 누구이든 항상 열린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는 생활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덟째, 장로는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사람들의 여론에 좌우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 지도자들은 국민들에 의하여 선출되므로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기 전에 백성들의 관심사와 여론을 살피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는 자신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확고한 소명과 믿음으로 그릇된 시류(時流)를 바로 지적하고 바로 이끌어갈 수 있는 사명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교회 임원은 세대를 분별하여 진리의 나팔을 불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교인들의 여론에 좌우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치되도록 해야만 합니다. 두려워할 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사람은 누구이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존중할 줄 알아야 진정한 교회 임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홉째, 장로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 예절과 문화를 존중할 줄 알며, 일상적인 도덕이나 윤리 이상의 법인 십자가의 사랑과 섬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장로는 어느 누구라도 섬길 수 있도록 하여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생명에 이를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교회 임원은 타종교인이나 무종교인들을 이방인으로 볼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임원의 자격은 기능이나 학술적 자격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과 성품으로서의 자격입니다. 예수의 인격과 성품이 곧 교회 임원이 갖추어 할 내용들입니다. 예수의 인격과 성품을 이루기 위해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밝히 깨우쳐 주시는 진리의 성령에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자신과 교회는 변화될 것이며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 백성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라 불린 간디는 인류를 파멸케 하는 것들 일곱 가지 가운데 하나는 "희생 없는 신앙"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위에 세워졌음에도,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 역시 100여년 전 수많은 선교사와 교역자들의 순교의 희생 위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모습은 "희생 없는 신앙"으로 일관하여 너무나 비대해지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희생 없는 신앙"은 곧 교회의 몰락을 예고하는 경고임을 깨달아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희생의 틀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십자가 희생이 없는 교회와 성도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명력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종교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희생적인 사랑과 섬김이 진리이며, 교회 임원과 성도가 따라야 할 길이며, 생명의 원천입니다. 참으로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지도자들과 더불어 성도들은 이 십자가의 희생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무서운 경고를 겸허하게 수용하여 희생적인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과 교회 임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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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스도인의 품성

(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4)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5)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7)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9)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10)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디도서 2:1-15)

얼마 전 미국의 여론 조사기관에서 <어떤 사람이 성숙한 인격을 지닌 멋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번 자신이 몇 개나 해당되는가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가정에서는 상냥한 사람. 둘째, 사업장에서는 정직한 사람. 셋째, 사회나 직장에서는 친절하고 공손한 사람. 넷째, 일에 있어서는 공정한 사람. 다섯째, 불행한 사람을 동정하는 사람. 여섯째, 약자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일곱째, 강자에게 신뢰를 보내는 사람. 여덟째, 악한 자에게 저항하는 사람. 아홉째, 행운을 맞는 사람에게 축하하는 사람. 열째, 참회하는 자를 용서하는 사람. 열 한 번째,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연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등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이 정도는 모두 해당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성숙한 인격을 지닌 멋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 연령과 신분에 따라 기독교인이 세상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늙은 남자>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윗사람이 부정한 일을 하면 아랫사람도 따라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에서도 노인들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작금 우리 사회의 노인들의 모습을 잘 지적하고 있는『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노광애 지음)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노인들을 인생의 '연장자'나, 사회나 가정에서의 '원로'나, 오랜 세월 세상을 살면서 터득했을 '지혜의 보고'로서나,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이만한 기틀을 마련한 '공로자'로서 인정해 주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기심에서 나온 노인 경시 내지는 노인들 기피증 현상까지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인들의 부양을 전적으로 사회 복지 쪽으로만 미루려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추스르고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 추하게 늙지 않는 비결 세 가지를 말합니다. 그 하나는 순간의 편리와 작은 이익에 초연하라는 것입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속에서 흔히 보는 광경을 두고 어느 여고생이 신문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이른바 사오정 농담이라는 것입니다. "버스 안에 자리가 딱 하나 있어서 그 유명한 미국 농구선수인 마이클 조던과 샤킬 오닐이 내기를 했습니다. 승리한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정답은 우리 나라 아줌마." 라고 합니다. 얼마나 신랄한 비판입니까? 아줌마나, 서 있을 수 있는 노인은 좀 서 있기도 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입니다. 버스를 타기 위하여 오랜 시간 묵묵히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제치고 새치기하는 사람은 대부분 노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맨 앞으로 나아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극히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자리 양보를 강요하시는 분들도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라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말없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맨 앞에 세워 주기도 하고 자리 양보도 하긴 합니다. 하지만, 긴 시간 차를 기다리며 서 있던 젊은이들이 속으로는 어떤 생각들을 했겠습니까? 그런 노인들을 사회의 연장자로 존경해 주고 싶었겠습니까? 미국에서 보니까 노인들이나 어린아이나 장애자라고 해서 질서를 어기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름지기 제 대접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애들 보고도 제 사랑 제가 지닌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접이고 존경이고 간에 요구하고 강요해서 받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거침없이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도 되는 사람이 노인입니까? 줄 서기에서 양보를 강요하는 노인을 두고 하는 얘기입니다. 폐를 끼치고도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게 노인이겠습니까? 이는 고상하고 존경스런 노인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돈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노인들은 큰돈은 고사하고라도 잔돈푼에 왜 그리 연연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공짜로 생기는 돈을 너무 좋아하는 모습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늙어서 남에게 베풀기는커녕 무엇이든 그러모으려고만 하는 노인을 두고 폴 투르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착에서 포기에 이르지 못한 악착스런 노인의 탐욕과 인생의 상실감 앞에서 일어나는 경련적인 반응" 이라고 했습니다. 60이 넘은 우리네는 복닥거리는 백화점 세일에도 사양을 해야 한다고 어느 방송인은 얘기했습니다. 노인들이 공짜를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소노 아야코도 그의<기계록>에서 가혹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회가 주는 것이라도 무엇이든 얻자는 것은 아무리 고령이라도 거지 근성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지불할 능력과 자력이 있으면 '자신의 존엄'을 위하여 '공짜'의 특권을 사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부자 동네로 꼽히는 압구정 1동의 경우를 보면 그 동네에 사는 65세 이상 노인 1,000여 명 가운데서 980여 명이 교통 수당을 받는다고 합니다. 20여 명만이 사양을 한 셈입니다. 동 관계자는 교통 수당을 받는 노인 중 99%가 윤택한 생활자라고 했습니다. "꼭 필요하지 않은 노인에게까지 수당을 지급해야 하는가?"(서울대 최성재)하는 반론이 나올 만합니다. 아무리 늙었더라도 남의 호의에 감사하고 미안해하고 아낌없이 감사의 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노인의 존엄을 지킴으로써 상대방(젊은 세대)으로부터도 인격적인 대우와 존경을 받게 되고, 자연스럽게 진정한 교류도 따라올 것입니다. 노인의 무례와 탐욕은 젊은이들이 노인을 경원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입술로만 하는 사양하지 말고 솔직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며느리가 저녁을 다 먹은 연후였습니다. 그 때, 외출했던 시어머니가 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시어머니에게 "저녁을 어떻게 하셨어요?"라고 여쭈었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응, 아무개 집에서 먹고 왔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시어머니가 친구분과 나누는 얘기를 며느리가 우연찮게 듣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 얘기를 듣고 놀라고 기분도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 시어머니가 그 친구분과 나눈 얘기인즉 "아, 글쎄, 내가 미안해서 한번 사양을 했기로서니, 때는 이 때다 싶게 저녁을 안 주는 통에 배가 고파서 잠이 다 안 옵디다."라고 것이었습니다. 어느 시아버지는 "자식을 시험하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다리를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며느리가 찾아 뵙겠다고 했더니 시어머니는 "얘야, 별일 아니다. 바쁜데 올 것까지 없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 놓고는 애들이 안 와본다고 끙끙대더라는 것입니다. 일껏 오지 말래 놓고 안 온다고 끙끙대는 것은 뭐냐면서 시아버지가 한 말입니다. 늙어서는 이것저것 재보는 수고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저 솔직하게 배고플 때에 "배고프다", 돈이 필요할 때에 "돈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직한 것이 최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정직 이상의 호소력 있는 말과 행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윗물인 노세대가 솔직한 풍토를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랫물인 자손들이 솔직해질 것 아닌가. 노소가 함께 정직하면, 거기에는 의심이나 시험 그리고 오해 같은 것은 없어지련만. 돈이 없는데 마침 노인이 용돈을 요구해 오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사실 그대로 지금은 돈이 없다고 자식들이 말합니다. 이 대답을 들은 노인은 실제로 애들이 지금은 돈이 없구나라고 단순히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행여 둔해진 머리로 어줍잖게 추리를 해서 "있으면서도 안 주는 구나."라는 추측 같은 것은 금물입니다. 단언컨대 늙어서 하는 어림짐작은 몽땅 틀리게 마련입니다.》

오늘 성경이 노인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은 첫째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2/3를 보낸 노인은 생활전체에서 다양한 경험과 실패와 성공을 거듭해온 원로인만큼 물질 생활이나 언어에 있어서나 절제하여 노인의 품위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노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노욕이나 자녀들로부터 "일절만 하세요"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말을 아껴 말의 권위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노인은 생의 종막에 다가오고 있다는 허탈감에서 자칫 언행심사를 되는대로 방치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살만큼 살았으니 못 할 말없다는 듯이 말을 늘어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이제는 늙도록 자식들한테 할만큼 했으니 누릴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여 노욕을 부리며 끝까지 근검절약하며 절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늙어갈수록 절제생활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노인의 품위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경건하라는 것입니다. 경건하다는 말은 항상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생활하는 것을 뜻합니다. 노인이 되면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 자신이 인생의 최고봉인 것처럼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 눈치, 하나님 눈치 볼 것 없이 거만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멀지 않아 인간 사회를 떠나서 하나님의 사회,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을 명심하여 더욱 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근신이라함은 신중하며 사려 깊은 태도를 말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변덕이 죽 끓듯하거나 경거망동하거나 사려분별을 못하는 것만큼 가치없어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장구한 세월과 인생의 풍부한 경험을 통해 신앙생활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면 더욱 더 온전하고 강인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노령이 되면 매우 편협적이 되어 자신의 습관이나 삶의 방식을 고집하게 되어 무의식중에 새로운 사상이나 방법, 혹은 젊은 사람들의 견해 등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인이 되더라도 편협에 사로잡히지 말고 오히려 남의 의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주고 남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더욱 더 따뜻하게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나이 든 여성들은 행실을 정결하게 하며, 다른 사람을 험담하지 말아야 하며, 술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나이든 남자보다 여성들에게 더 많은 덕행을 요구하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역할과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서양 속담에 큰 사람은 사상을 얘기하고 보통 사람은 사건을 얘기하고 소인배는 사람과 사람의 일을 얘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 든 여성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거침없이 남의 얘기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이 들면 여성들이 누가 자신을 나무랄 사람이 없다는 듯이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알만큼 속속들이 알아서 그런지, 남편이 늙어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남편에게 복종하거나 섬기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선을 가르칠 수 있고, 바른 것을 교훈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끝까지 훼방을 받지 않도록 끝까지 경건하며 근신하며 절제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본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시퍼런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늙어 시어머니로부터 푸대접을 받은 것을 보며 자기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당신도 늙어서 푸대접받지 않고 대접받으려면 더 늙기 전에 내한테 잘 해!" 이런 모습은 젊은 자녀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아닙니다. 젊어서 남편으로부터 온갖 구박과 학대를 받고 푸대접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을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부가 늙었다고 남편이 아내되고 아내가 남편되는 것 아닙니다. 평생동안 섬기기만 하고 살았던 것이 그렇게도 억울하십니까? 평생동안 돈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그냥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살았던 것이 억울합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가정에서부터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상 그 이름을 남긴 위인들이 그렇게 많은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가정에서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아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언도 "현숙한 여인을 얻는 자는 진주를 얻는 것보다 낫다."(잠언 31:10)고 했습니다. 예배드린다는 이유로, 전도하고 봉사한다는 이유로, 기도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이유로 남편이나 아내가 자신의 할 일을 소흘히 하거나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해도 된다는 구실을 준 적이 없습니다. 가정에서나 이웃들에게, 그리고 젊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절제하며 근신하며 인내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의 본을 보여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젊은이는 노인들을 존경과 사랑으로 섬기며, 노인들도 절제와 근신함으로 젊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음은 마지막으로 종들이 갖춰야 할 품성들입니다. 오늘날에는 노예제도가 없기 때문에 이는 사용자와 고용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프란시스는 젊은 수도사 하나에게 "마을로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설교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마을로 내려간 프란시스는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빵을 구걸하기도 하며, 동네 어린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행했던 수도사가 프란시스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우리는 언제 설교합니까?" 그러자 프란시스는 웃으면서 "설교를 해? 우리가 행하는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설교인게야."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쟁이는 말만 잘한다는 얘기를 들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나 타종교인들에게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 나도록 하는 길은, 예수께서 보여주신대로, 즉 그는 선생이셨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몸소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로 예수처럼 사는 것입니다. 재능과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회사 돈이나 떼어먹는 사람은 결국 그 회사를 망하게 하는 인물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비록 능력과 재능은 좀 부족할지라도 정직하며 맡은 일에 충성하며 모든 사람과 일을 섬기는 자세로 일하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그 회사를 빛나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빛나게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품성인 절제와 근신과 경건, 그리고 사랑과 믿음과 인내로, 십자가 주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섬기는 생활로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으며 오히려 빛이 나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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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스도인의 사명

(1)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12)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 (13)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디도서 3:1-15)

역사신학자 김기홍 교수는 그의 저서 <역사와 신앙>에서 한국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 신자의 수가 전체 인구의 25%라고 합니다. 이 정도의 숫자라면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상당한 수준의 변화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나라가 기독교 신자 90%의 기독교 국가가 된다할지라도 지금보다 더 나은 정치 경제 사회 등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로마 제국 당시에는 기독교인들이 수가 7%에 불과했는데도 세상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겉모습은 기독교인데 생각은 비기독교인들과 하나도 다름이 없는 교인들 심지어는 목사나 장로들. 이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산다고 하지만 매 순간의 삶은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일 자체가 자신의 세상적인 욕심을 충족시키는 방편일 뿐입니다. 거지왕자라는 동화에서 왕자는 거지의 모습이라도 왕자였지만 거지는 왕자의 모습을 해도 여전히 머리 속이 거지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다른 점은 외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체(正體)에 대한 이해입니다. 거지가 왕자의 옷을 입고서도 거지의 행동을 하는 것은 거지의 사고(思考)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늘 왕자의 모습을 한 거지들이 얼마나 교회 내에 차고 넘치는지....》

예수 믿고 구원받아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 권세와 물질과 명예 등을 따라다니며 구걸하는 기독교인의 추한 모습을 지적한 글입니다. 한국 교회 대부분이 영혼 구원,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교회 몸집 불리기에만 관심을 가졌지 일반적인 사회의 악이나 불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첫째 목표는 물론 영혼구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가 있기까지 영혼구원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랑이 자신을 태워 사회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었고, 영혼을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랑이 자신을 녹여 사회 부패한 곳에 소금이 되었던 것입니다. 김교수는 그 예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중세가 시작될 때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온 세계가 북방에서 밀려 내려온 야만인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기독교인들이 발벗고 나서서 고아와 과부와 불구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전화(戰禍)가 뭉개고 지나간 들판에다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로마는 망했어도 기독교세력은 오히려 확장되고 모든 유럽 사람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은 다시 복음화되어 갔습니다. 이것이 교회와 신자들이 제대로 일하고 있을 때의 모습입니다. 또 한 가지 가까운 예로 19세기 미국이 어떻게 해서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로 변해갔는가? 부흥회가 끝나면 교인들은 모두 다 사회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빛으로 소금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자선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절제회, 금주회, 교도소 전도회, 성경발간협회, 고아원, 양로원이 셀 수 없이 많이 만들어졌고 수 없이 많은 기독교 학교들도 신자들의 기부로 세워졌습니다. 기업가들은 스스로 노동 조건을 개선하였습니다. 각종 선교회도 이 때 만들어져 우리 나라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때의 미국을 가리켜 역사가들은 "자선제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자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사회와 이웃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고 믿고들 있었습니다.》(역사와 신앙, 김기홍 저)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우리 기독교인이 형제 사랑을 위해 사회와 이웃에 대한 책임을 다하다 보면 사회의 구조적인 악과 불의의 권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형제 사랑을 위해 불의의 세력에 대해 폭력을 사용해도 괜찮은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은 폭력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성경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원수를 갚지 말고 사랑하라, 그리고 생명을 바쳐서 소금과 빛의 직분을 수행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19,20)

형제 사랑을 구실로 폭력이 합리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의 권력은 정의와 자유, 질서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으나 사랑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기독교는 폭력을 결코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폭력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국가의 근본적 존재이유는 질서와 정의를 확립하는데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국가의 존재와 권력을 하나님이 부여해주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롬 13:1-7) 그러나 국가는 이러한 근본적인 존재목적을 부인하고 죄를 범하는 제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일부의 권력자들이 질서와 정의를 확립한다는 구실로 많은 불의와 부정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국가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어느 나라도 하나님의 본래 목적을 수행한 나라는 없습니다. 모든 나라가 자고(自高)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영웅과 황제를 숭배했으며 위대한 지도자를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불의와 부정 부패를 일삼는 세속 권세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현코자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부정부패와 불의가 날뛰고 있어 고통받는 형제들이 수 없이 많은데도 불의한 세속 국가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세속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롬 13:1) 이 말씀은 세속 권위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세속의 권위 즉 국가를 세우신 목적은 그 권력을 유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하는데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통치자는 그 자신이 하나님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며, 모든 악을 방지하여 인간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며, 선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국가의 통치자를 "하나님의 사자(使者)"라고 호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속의 권위는 본래 하나님의 것이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권세는 자기와 자기 가족의 소유물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같이 권력의 세습이나, 대형교회도 무슨 권세라고 담임자 세습하는 것 등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소유를 찬탈하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특정한 가문이 권력을 세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세속의 권위가 하나님에게 속하며 어떤 인간이나 가문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구약성서 사무엘 상 16:13-14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이 더 이상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고 교만해졌을 때 하나님의 영은 사울을 버리고 다윗에게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는 악신(惡神)이 들어갔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바벨론 제국의 느브갓네살 왕이 나라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교만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 느부갓네살 왕아 들어라 네 왕조는 끝장이 났다. 너는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단4:31-33)

이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짐과 동시에 느부갓네살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 역사를 통해 어느 특정한 가문이나 혈통이 통치권의 소유자가 되는 왕정제도나 권력의 세습제가 통치권의 남용과 부패를 초래하여 국가를 몰락케 한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통치권도 마찬가지입니다. 몇몇 장로들이나 어떤 은사나 능력 등으로 카리스마적인 권위로 교회의 권력을 장악하거나 소유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국가의 권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백성의 삶과 자유와 평화를 보호해야 하며 힘 있는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에 대하여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해야만 합니다. 동시에 공동의 행복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형벌하고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이와같은 사항들을 국가가 지켜나갈 때 성도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롬 13:1-7)

오늘 본문도 이같은 맥락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1,2)

국가의 권력은 인류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자유를 위한 사명이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된 인류와 세계를 구원하는 길은 세상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세속 권세에 구원의 사명이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길은 오직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는 죄인된 인간과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좋아지는 것 같아도 날로 죄악이 더욱 더 교활하게 깊어지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와 세상 사람들이 다 잘되는 것 같아도 그들 앞에 주어진 것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심판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세상과 세상 권세에 집착하기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역사 속에 존재하는 모든 정부들이 죄악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부는 소수 지배계급들의 정치적 도구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지배계급이 유력층이든가, 어떤 정당이든가, 또는 군과 산업계의 복합체이든가 간에 정부가 그 소수인들의 도구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주권재민이란 허울 속에 복잡하고 교활한 정치인들의 권모술수에 소수의 무리들이 교묘하게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권력유지나 권력의 승계를 위해, 그리고 권력을 이용한 이권확보를 위해 민주주의나 국민의 이름을 앞세워 억압하거나 탄압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아주 노골적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정치권력에 나타나는 인간본성의 죄성이 그냥 남아있는 한 완전한 정부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정치악과 사회악을 방관하고 있을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가 힘있게 또 꾸준히 추진하여야 할 일은 사회 전 분야에 걸친 변화와 개혁입니다. 어떤 지도자의 통치이념이나 사상 등을 통한 인위적 변화와 개혁이 아니라, 옛날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보여주었던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영적 변화와 개혁을 추구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회가 죄로 물들어 있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개혁을 이루어 가야만 합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당시 사회를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정확히 해석하고,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따라 변화와 개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억눌린 자를 위하여 그들은 힘을 가진 자들을 꾸짖고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돕기"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했습니다.(이사야서 1:17). 그들은 "가난한 자의 얼굴을 갈아먹은" 부유한 자들을 그냥 놔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오늘날의 좌파 지도자들이 하는 것과 같이 군주에 대한 정치적 반란을 선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국민의 불순종을 묵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왕들의 불의와 불법에 경고하고 백성들의 죄를 꾸짖음으로써 영적 변화와 개혁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사회 변화와 개혁의 주체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생명을 내걸고 담대하게 전파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아합 왕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에게 충고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국민들의 지지와 인기를 등에 업고 이미 국민의 지지를 상실한 아합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거나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있는 엘리야는 분명히 불의한 정권과 사회의 부조리를 근절하는데 폭력이나 국민 대중의 힘을 빌리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폭력이란 변함없이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산 속에 은신하고 광야를 방황하면서도 그는 지배계층에 대한 끊임없는 영적 개혁을 부르짖으며 사명을 다했습니다. 예수께서도 당시 만연하던 부조리와 지배 계층의 위선적인 생활방식을 회칠한 무덤 과 같다며 신랄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태복음 23:27) 반면에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보시고 그는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8:1) 이러한 예수를 수많은 무리가 그를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민 대중을 통한 반란이나 개혁을 시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목적한 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세상 나라 권세가 목적이었다면 얼마든지 하늘의 권능과 권세를 단숨에 세상 권세를 뒤엎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택한 길은 폭력을 동원한 쿠데타나 다수 국민 대중의 힘을 이용한 반란이 아니라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허무하기까지 해 보이는 그 험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당시 지배계층은 기득권을 지키고, 권력층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그리고 예수는 그 권력의 힘 앞에 무력한 것 같이 보였지만, 바로 그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예수께서 로마제국을 정복했고 사탄의 사망권세마저 정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들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형제와 이웃들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말과 혀로만 아니라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지배계층의 불의와 부정, 그들이 죄악상을 고발해야 하며, 그들의 불의와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백성들의 아픔에 사랑으로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공의와 사랑으로 세워진 교회는 마땅히 세속 권력의 불의와 사회악을 감시하는 정의의 파수꾼이어야 하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함께 하는 사랑의 화신이어야만 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두고 모든 죄를 고발하며 그들이 사는 길을 제시하고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갇힌 자, 억눌린 자,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의 희생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사회를 어지럽히며 혼란에 빠지게 하며 가정들을 파괴하는 각종 이단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것마저 국가의 권력에 기대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 없습니다. 물론 이단의 무리들이 공법을 범하여 사회질서를 혼란시키며 가정 등을 파괴시킨다면 정해진 법에 따라 질서와 공공의 안녕을 위해 국가의 권력은 정당하게 사용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들에게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10절)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단이라함은 절대로 자기 자신만이 옳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르다고 단정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사상이나 신앙, 자신들이 신봉하는 진리를 모든 사상과 신앙과 진리의 시금석과 표준으로 삼는 사람들이 바로 이단아들입니다. 이들이 꾀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상과 신앙을 절대화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가정이나 사회에서 이탈시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어떠한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되게 하며 결합시키는 것이지 결코 분열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울타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이 남용되거나 악용되어 울타리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그에 복종할 가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의와 죄악을 고발하여 변화와 개혁을 부르짖으며, 교회는 인간의 생명과 그 존엄성이 보호받지 못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 권력이나 물질, 또는 사회단체나 군중의 힘을 빌려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인류를 구원하고자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선택하신 십자가의 길을 자신의 의지나 힘으로 가로막으려했던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태복음16:23)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교회에 들려주신 것은 십자가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며 인류를 구원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공의와 사랑이 충만한 교회와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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