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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01b.gif 끊을수 없는 사랑 cross01b.gif

                            ---로마서 설교---

1장부터 7장까지는 2002.6.23.주일부터 다시 설교한 것을 올렸으며, 8장부터는 교정한 것을 다시 올렸습니다.  

                                                           --이동희 목사--

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오직 믿음(1장)

2.마음에 할례를(2장)

3.우리가 나은 것이 무엇이냐?(3장)

4.사람의 행복(4장)

5.의인의 생활(5장)

6.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라(6장)

7.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라(7장)

8.성령과 삶의 원리(8:1-11)

9.하나님의 자녀(8:12-17)

10.영광스런 소망(8:18-25)

11.선하게 하시는 능력(8:26-30)

12.끊을 수 없는 사랑(8:31-39)

13.진정한 구국 사상(9:1-5)

14.하나님의 선택(9:6-13)

15.토기장이의 비유(9:14-33)

16.구원에 이르는 길(10:1-13)

17.가장 아름다운 것(10:14-21)

18.남은 자(11:1-12)

19.구원의 비밀(11:13-36)

20.예배의 생활(12:1-2)

21.믿음의 분량(12:3-8)

22.신령한 삶의 지침(12:9-13)

23.이웃과의 바른 관계(12:14-21)

24.기독교인의 국가관(13:1-7)

25.사랑의 빚(13:8-10)

26.빛의 갑옷을 입자(13:11-14)

27.화목하는 생활(14:1-6)

28.성도의 삶의 목표(14:1-6)

29.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15:1-13)

30.하나님의 은혜로 살자(15:14-33)

31.진리를 위해 산 사람들(16:1-27)

 

1. 오직 믿음

(롬1:8-17)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세계 역사를 변화시킨 인물들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마틴 루터입니다. 그 루터를 변화시킨 것은 바로 로마서 1장 17절 말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이었습니다. 물론 로마서는 루터 이전에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클레멘트 등 초기 기독교 시대의 교부들을 비롯하여 유명한 신학자들과 여러 문서에서 무수히 인용될만큼 역대 교회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만큼 세계사 변화에 핵이 되어왔습니다. 역사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를 통해 받은 영적 변화의 사건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먼저 어거스틴(354-430)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칼타고 대학에 유학하여 수사학을 배웠지만 19세에 사생아를 낳는 등 방탕한 생활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신실한 기도와 사랑은 마침내 아들로 하여금 그릇된 종교를 버리고 회심의 불을 당기게 만들었습니다. 386년 어느 날 이방 종교와 옛 생활을 끊어버리는 결단을 하지 못한 채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이웃집에서 '집어 들고 읽어라'는 한 어린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때 그는 그 길로 즉시 성경책을 펼쳐 읽었는데 그 부분이 로마서 13:13-14,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후일 그의 저서 <참회록>에서 그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14절 마지막 부분을 읽는 순간 밝은 빛이 물밀듯 내 마음속에 말려들어 왔고 순간 모든 의혹과 근심의 그림자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의 <참회록>을 비롯한 저서들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켜 하나님 앞에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후 387년 부활절에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고 주교가 되어 34년간 헌신적 삶으로 교회사상사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앞서 말한 루터는 세계사를 변화시킨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는 <95개조 논제>를 공포하기 전 어느 날 비텐베르크에서 십자가와 교황을 상징하는 깃발을 앞세우고 면죄부를 파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여러분의 돈이 이 상자 속에 들어가 땡그랑 하고 소리를 내는 바로 그 순간, 여러분의 영혼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몇 푼 안되는 면죄부로 천당에 가는 길을 예약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딱 한 번, 지금 안 사면 후회하게 됩니다." 당시 교회는 정말 한심스러웠습니다. 교회 세습의 악습을 막아 보자며 신부 독신제도를 만들었지만 교황을 비롯하여 대부분 성직자들은 몰래 자식을 낳아 조카 등으로 위장하여 여전히 교회 세습을 일삼고 축재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주교나 수도원장같은 고위성직 자리는 엄청난 뇌물이 오가는 위치였습니다. 뇌물거래를 통해 대주교나 고위 성직자가 되면 처음 1년간의 수입을 교황에게 바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대주교는 이런 뇌물관행을 위해 자신의 교구 주민들로부터 교권을 마구 휘둘러 여러 가지 명목을 달아 헌금과 세금 등을 강탈해갔습니다. 이러한 교권의 횡포와 수탈에 주민들은 불만이 폭발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514년 마인츠 지방 대주교가 된 알브레히트는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으로부터 주민들로부터 거둬들이지 말고 스스로 만들어 오라고 지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큰 손'인 사채 고리대금업자인 푸거를 찾아가 엄청난 돈을 빌려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이러한 내막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황은 레오 10세였는데 그는 전임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가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세우려했지만 완성되지 않았던 거대한 <베드로 성당>을 하루라도 빨리 완성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위세를 부리려 안달복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리채업자 푸거가 알선되고 푸거는 사채회수를 위해 교황, 대주교와 함께 일을 꾸민 것이 바로 <면죄부>판매였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면죄부>라는 상품권을 만들어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독점판매권을 주는 대신 판매액의 절반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주교는 사채업자와 함께 <면죄부>를 팔아 판매수익의 절반을 챙기고 사채업자는 나머지 절반의 수익을 사채상환으로 회수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시인이었던 후텐은 교회의 이러한 타락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에서는 세 가지가 팔리고 있다. 그 세 가지란 예수, 성직자의 자리, 여자이다...." 루터는 당시 이러한 상황에서 1510년 말부터 1511년 1월까지 로마 여행을 하며 여러 가지로 실망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는 참회를 위해 로마의 빌라도 계단을 입을 맞추며 무릎으로 기어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선 루터가 마침내 한숨을 토할 때 그의 머리 속에 번개같이 스쳐가는 말씀이 있었으니 그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1:17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루터는 그 이후로 부패하고 타락한 카톨릭을 버리고 종교 개혁의 불을 당기게 되었습니다. 실로 루터를 거듭나게 하여 중세 암흑기의 교회와 세상을 빛가운데로 끌어낸 것은 바로 로마서의 영향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지 아니하면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파를 위해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고 전도의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바울이 쉬지않고 기도하는 것도 오직 복음 전파입니다. 바울이 항상 감사했던 것은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오로지 복음만을 위해 살면서도 모든 인류에게 복음의 빚진 자의 심정을 가졌을 만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토록 목을 매고 전파에 힘썼던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말한대로 복음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시라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것 이상 더 큰 "기쁜 소식"(복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업적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죄를 사해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사해주시는 방법이 바로 예수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의롭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는 바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불의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믿음으로 의로워질 수 있는 길,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음에도 하나님을 멀리하여 불신앙가운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믿음을 가지지 않는 불의한 자에게 나타나는 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함께 하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알 수있게 하셨음에도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치 아니하고 오히려 피조물들을 하나님보다 더 숭배하는 등 우상숭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롬1:18-25)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그리고 예수 믿음을 가지지 않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 마음에 하나님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의 사악하고 비참한 죄상을 통해 예수 믿음을 소중히 간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비참한 죄악상은 첫째 트랜스젠더(성전환자), 동성애 등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성적 타락입니다. 그리고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하는 자(비밀리에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죄악), 비방(공개적으로 타인을 비난하는 것),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영적 감각이 무디어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 배약하는 자(마음에 예수의 사랑이 없는 자),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등장하는 강도만난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지나쳐간 제사장과 레위인같은 사람) 등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사형에 해당된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롬1:26-32)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예수 믿음을 가지지 아니하면 이러한 죄악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이 사는 세상은 예수 믿음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타락시키는 곳이지 결코 여러분 믿음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협조하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예수 믿음을 지키는 사람만이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린 소년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이웃나라에서 '부세파루스'라 불리는 멋진 야생마 한 마리를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립 왕에게 선물로 보내왔습니다. 필립 왕은 기뻐하며 이 말을 타보려고 했으나 말이 너무도 거칠게 날뛰는 바람에 도저히 탈수가 없었습니다. 필립 왕 수하에 있는 많은 장수들 역시 이 말을 타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 우리나라엔 이 말을 다룰 자가 없단 말인가?" 필립 왕이 매우 실망한 듯 한탄을 하자 그 순간 이 광경을 시종 시켜보고 있던 어린 왕자 알렉산더가 말했습니다. "제가 저 말을 타보겠습니다." "말타기에 자신있는 수많은 장수들이 모두 실패했는데 이제 어린아이인 네가 어찌 탈수가 있겠느냐?"라고 말하면서도 왕은 마지못해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왕의 생각을 뒤엎고 알렉산더는 거뜬히 말을 탔습니다. 필립 왕은 신기해하며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여 그 거친 말을 능숙하게 부릴 수 있었느냐?" "저는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통하여 이 말이 그림자 노이로제가 있다는 사실과 또한 고함 소리를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먼저 태양을 향하여 그 말을 세우고 일단 승마를 한 다음에 부드럽게 속삭이는 음성으로 그 말에게 명령을 함으로써 능히 이 말을 탈 수 있었습니다." 이후 '부세파루스'는 알렉산더의 전용말로서 알렉산더가 세계를 제패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이 말은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하고 아껴준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알렉산더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그의 등을 허락하지 않는 굳은 절개를 지켰습니다. B.C. 326년에 이 말이 죽자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한 애마를 기념하기 위해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하여 그곳을 '부세파루스'라 했습니다. 이곳이 오늘날 파키스탄의 제룸이라는 도시입니다. 비록 말 못하는 한 마리 말에 불과하였지만 부세파루스는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해준 주인을 위해 대쪽같은 절개를 지켰습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우리가 우리를 가장 적절히 사용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향해 충성하지 못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 심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에 항상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는 믿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으로 세상의 죄를 물리치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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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음에 할례를...

(롬2:1-2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지난 Y 목회자 세미나에서 L 교수로부터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입니다. 《어느 교회 앞에 술집이 생겼습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은 몹시 못마땅해했습니다. 목사님의 요청으로 전교인들이 술집이 속히 망하라고 합심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과연 얼마 안 가서 술집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술집 주인은 교회에서 술집 망하라고 기도했던 것을 알고 경찰에 목사를 고발했습니다. 결국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목사에게 최후 진술을 물었습니다. "교회에서 그 술집 망하라고 기도했습니까?" 교회 목사는 "예, 기도는 했지만 교회에서 망하라 기도했다고 해서 술집이 망했겠습니까? 망할 때가 되니까 망한 것이지요." 드디어 판사가 판결을 내렸습니다. "술집 주인 믿음 있음. 교회 목사 믿음 없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금 도적질하고, 음란하고, 뇌물 먹으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대인이라고 해서 제외되고 헬라인, 즉 이방인이게만 내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가지고 있는 자나 가지고 있지 않은 자나 똑같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은 그 받은 바 율법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으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진 자, 율법을 듣는 자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참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행하는 자가 의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약1:22-24)

그러면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인에 대한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양심입니다. 즉 마음에 새겨진 양심의 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양심, 쉬네이데시스>이란 말은 신약성경에서만 32회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은 "함께 있다", "함께 본다"는 말로서 하나님이 자기 곁에 증인으로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소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통해 율법에서 요구하는 사항들을 사람의 마음에 새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양심에 따라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로써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므로 그 양심이 어두워져서 스스로 양심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어두워진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빛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양심이 온전히 회복되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양심이 어두워졌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양심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율법과 같이 하나님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도 양심이 바로 되어있다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서이든 양심에 따라서이든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 지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 예수를 붙잡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하나님의 법, 즉 율법과 양심의 법에 앞에서 핑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과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특권의식과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그토록 자랑하는 율법과 할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유대인은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 중에 있는 자에게 빛을 주는 자요, 어리석은 자를 교육하는 자요, 어린이들의 교사와 같은 자격을 가졌다"는 것입니다.(사42:6-8) 그래서 유대인은 율법을 자랑했으며 율법을 가진 민족으로 긍지를 가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긍지와 자랑가운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소경, 어두움에 있는 자, 어리석은 자, 어린아이 같은 자" 등으로 보며 자신들이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착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파다하게 소문날 정도로 이방인들과 다를 바 하나 없이 도적질하고, 간음하며, 우상의 제물을 훔치면서 단지 율법을 가진 민족이라 해서 우월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율법을 가진 민족이라는 명분이나 외형으로 심판의 기준을 삼지 않으십니다. 비록 율법 없는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면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인류는 하나님 앞에 율법을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동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선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신7:6-8)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로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더할 나위없는 영광이요, 큰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선민이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선민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으로 택함을 받았다는 특권에는 이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하는 말씀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내야만 합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외쳐대어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예수 믿는 기독교인이다."라고 하는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기독교인다운 삶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택받은 특권에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인가? 다시 말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인가? 구약 율법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가르침(토라)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기독교인으로 사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계산에 의하면, 시내 산과 모압 지역에서 주신 하나님의 토라 말씀은 모두 613개 조항의 '계명' 혹은 율법'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 613개의 계명 중에서 248개 조항은 '긍정적인 계명'(~을 하라)이고, 나머지 365개는 '금지적인 계명'(~을 하지 말라)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긍정적인 계명'의 수(248계명)는 사람의 뼈마디 수와 일치하며, 금지하는 계명의 수(365 계명)는 일 년의 날수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숫자의 일치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해 오고 있습니다. 248개의 뼈마디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은 일년 365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한결같이 613개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613개의 계명이 하필 열 가지 계명으로 요약되었을까?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성서학자 중의 한 사람인 카수토는 사람이 열 손가락으로 열 가지 계명(십계명)을 꼽으면서 언제나 기억하고 또 지키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간단한 설명처럼 생각되지만 대단히 의미있는 설명입니다. 우리는 열 손가락을 바라볼 때마다 십계명을 기억하고, 또 양손을 써서 일할 때마다 십계명을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십계명 새로 쓰기, 박준서)

십계명 율법은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지켜야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진정한 기독교인,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구분하며 자랑하는 것은 할례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민족들을 '무할례자'라 부르며 경멸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은 자신이 할례없는 이방인들 손에 죽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자결했습니다.

(대상10:4) 자기의 병기 가진 자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저 할례 없는 자가 와서 나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나 그 병기 가진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매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니

할례는 남성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내는 행위로서 히브리인들이 출생 후 8일만에 행하는 종교적 의식의 하나였습니다. 이 의식은 고대 세계에서 널리 행해지는데 바벨론인과 앗시리아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셈족 사람들과 이집트인들 가운데서도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비록 할례 의식이 여러 민족들 사이에 행해졌던 것이었다 할지라도 유대인에게 있어서 할례는 율법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할례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창17:9-14)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을 자신의 육체를 통해 나타내는 것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란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표시입니다. 이는 신약 시대의 세례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신 10:16, 30:6, 렘 4:4). 할례와 세례는 모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킬 때에만 참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에게 있어서 할례는 고귀한 언약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할례를 육체의 자랑거리로 삼았으며(갈 6:13)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할례자와 무할례자로 나눔으로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할례와 율법 준수는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입니다. 율법과 마찬가지로 할례라는 의식을 통해 인간이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2:25-2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할례를 받게 하신 것은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더 잘 알고 그것을 행하여 모범이 되고 인도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이방인과 똑같이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고 할례를 받은 특권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율법과 할례는 그 자체로 구원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을 지킬 때에만 율법과 할례가 그 효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죄가 전혀 없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얻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라는 껍데기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육체에 할례받은 민족이라는 껍데기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유대인이 아니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입니다.

두 사나이가 서로 랍비의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 랍비의 기적은 대단하다네. 일전에 지붕없는 마차를 타고 들판을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만나게 됐지 뭔가. 타고 있던 사람들이 아우성 치기 시작하니까 랍비님이 두 손을 척 펼쳤지 그랬더니 어쩌면 마차 오른쪽도 비가 좍좍, 왼쪽도 좍 좍인데 마차가 달리는 한가운데는 뽀송뽀송 말라 있는 거야." "뭐 그 정도를 가지고 감탄하나. 우리 동네의 랍비는 더 훌륭해. 금요일 오후에 기차여행을 하려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니 차가 갈 수 있어? 겨우 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니 벌써 날은 저물었지 뭔가 - 금요일 일몰에서 토요일의 일몰까지의 안식일에는 유대교에서는 여행을 금지하고 있음 - 유대인 승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 거야. 그 때 랍비가 두 손을 쭉 펼친 거야. 그러자 어쨌을 것 같애. 오른 쪽도 안식일, 왼 쪽도 안식일인데 한 가운데를 달리고 있는 기차만이 안식일이 아닌거야."

유대인은 율법을 마음 중심으로 실천하는데 실패했고, 할례는 육체의 자랑에 그치고 모든 것은 형식적인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율법을 행하는 이방인들이 할례자로 간주되고 율법을 소유하되 지키지 못한 유대인들은 무할례자와 같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졌다고, 할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무할례자,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혹 우리들은 유대인들처럼 껍데기만의 율법을 가진 자들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남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리고 목소리 높여 가르치면서도 정녕 자신은 그 가르침을 외면하고 시류를 따라 제마음대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하나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이방인들에게 욕되게 하는 일은 없었습니까? 자신은 똑바로 섰다고 생각하지만 넘어져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모양만 갖추었다고 유대인이 아니고 할례의 흔적이 있어서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에 비로소 참된 유대인이 되며 진실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단지 착실하게 매주일 예배드리는 것만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신앙생활을 나타내야만 합니다. 껍데기만 기독교인, 즉 유명무실한 기독교인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의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며 병폐입니다. 수없이 많은 교회와 신자가 있어도 오늘날 우리 사회가 부패한 채 방치되어 있다는 것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기독교인이 많다는 증거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칼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가지고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 철저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명실상부한 기독교인으로 이 땅에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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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가 나은 것이 무엇이냐?

(롬3:1-31)...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

1. 훌륭한 법을 가지고 그 법이 제대로 지켜지는 나라일수록 문명한 나라이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대부분 미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이 말하는 이방인들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라 백성이 살아야 할 법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율법으로 맡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국민적 합의나 통치자에 의해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 어느 법보다 가장 완전한 것입니다. 세상 법은 범죄를 정하고 그 죄에 따라 형벌을 정한 것이지만 율법은 하나님과 유대인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언약으로서의 율법입니다. 다시 말해 맡겨진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되시고,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율법을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는 것임을 명시한 생명의 법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하나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그 말씀대로 살아서 자신이 먼저 생명을 얻고,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킬 때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물론이고 그 어느 누구도 유대인들에게 맡겨진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인간은 죄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기보다는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다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 그들의 죄에 대한 면책 특권을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맡았다는 것이 마치 모든 죄에 대한 면책특권을 받은 것처럼 행세를 했고 죄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은 의인들이며 이방인들은 구제불능의 죄인들로 취급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세상에는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죄인과 의인이라고 하는 죄인으로 두 가지 종류의 죄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죄인이 진정한 의인이며,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는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맡은 것이 죄에 대한 면책특권을 받은 것처럼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아니하는 유대인은 진정한 의인이 아니라 심각한 죄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율법 앞에서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 모두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를 두고 오늘 성경본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다."(23절)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 죄를 나타내는 용어들을 살펴보면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첫째 단어는 불의(아디키아,adikia,iniquity)입니다. 불의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예수께서 "하나님을 두려워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을 불의한 자로 여기셨다"(눅18:6)는 것입니다. 공의에 어긋나는 행위, 속이는 저울과 불공평한 처사, 온갖 부정한 행위로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의 공평무사한 법을 도외시하는 처사를 불의의 죄악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진리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바른 교리를 부정하는 행위, 잘못된 교리를 주장하거나 동조하는 행위 등도 불의에 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죄를 나타내는 두 번째 단어는 불경건(아세베이아,asebeia,ungodliness)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과 그의 행위를 말합니다(유15). 하나님이 없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같은 불경건의 죄악은 무신론보다 더 나쁜 것으로 직, 간접으로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흉악한 죄에 속하는 것이다(딤후2:16-18). 이에 반대되는 말인, 경건(eusebeia)은 "하나님 마음에 맞게 사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맞게 산 사람이었습니다(행13:22).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생활을 했다는 것은 그도 역시 피할 수 없는 죄인이어서 수많은 죄를 지었지만 그때마다 다윗은 겸손히 무릎을 꿇고 철저히 회개하는 경건한 삶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세 번째 단어는 불법(아노미아,anomia,lawlessness)입니다. 이 말은 옳은 것을 알면서도 악을 행하는 죄의 고의성을 뜻하며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죄를 말합니다. 법과 계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아야함에도 불구하고 말씀 따로, 생활 따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이 바로 불법의 죄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불신(아피스토스,apistos,faithlessness)의 죄입니다. 다음 성구들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다."(롬14:23)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함이요"(요16:9)

불순종(파라코에,parakoe,disobedience) 역시 죄를 지적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귀를 막고 고의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참된 하나님 말씀일지라도 자기 마음에 거북하면 귀를 막아버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다음으로 파라바시스(parabasis)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금지된 영역을 침범하는 것, 월권, 월선(越線)하는 행위, 자기 분수를 지키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곱째 죄를 나타내는 단어는 파라프토마(paraptoma)입니다. 이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고 죄악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여 죄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를 지적하는 중요한 단어 하는 포로시스(porosis)입니다. 이 말은 모든 감각과 감정을 잃어버리게 되는 무감각한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절과 명예와 선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정하여 후회나 가책, 회개의 마음이 전혀 사멸된 상태를 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죄"(약2:9), "어둠을 사랑하는 죄"(요3:19), "지나치게 분노하는 죄"(엡4:26) 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죄 아래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는 본문의 말씀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윌리암 제이라는 사람은 늙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기억력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만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는 큰 죄인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구세주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의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 <뉴욕 데일리 뉴스>지에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가 실렸습니다. 한 마을에서 17세의 소년 마이크 뷰캐넌은 지붕 위에 올라가 투신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가출했고 아버지는 심한 알콜중독자였습니다. 그는 너무 많은 문제와 걱정 속에서 몇 해를 고민하다가 자살을 계획한 것입니다. 이 때 한 신사가 지붕으로 기어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소년에게 한 시간 반 동안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내게로 오너라. 네 아버지가 되어주겠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친절한 사람은 윌리암 폭스라는 신사였습니다. 그는 결국 소년의 투신자살을 막고 그의 말대로 그 소년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내게로 오라 너의 아버지가 되어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유대인들이 맡은 하나님 말씀, 율법 앞에 인간은 항상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만 합니다. 율법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율법이 거울처럼 죄를 보여 주는 것이라면 성령은 물과 같습니다. 성령은 거울에 드러난 추한 인간의 얼굴을 씻어 밝은 얼굴로 비춰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검사라면 성령은 변호사와 같습니다. 성령은 십자가 안에서 우리 죄인을 변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율법의 길이 아니요, 은총의 길입니다. 이 길은 행위의 길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길입니다. 율법은 죄를 가르쳐주고 진리의 성령은 은혜를 가르쳐 줍니다. 은혜로 감싸주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말씀은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더라도 십자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의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의인이 되는 것이고, 십자가 사랑을 믿지 못하면 죄인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면 의인이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의인이 되는 길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보다 십자가 하나님 사랑을 모르고 거절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죄는 갑절이나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범죄의 유혹을 받을 때 교도소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범행을 그만두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대부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슬픔과 아픔을 주지 않으려는 단순한 사실을 떠올리고 범행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두려움의 법칙이 아니라 사랑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지옥과 무서운 형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희생시켜가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는가를 먼저 떠올리고 십자가 예수를 마음에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의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의 법은 유대인의 율법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사랑의 법이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의 법은 공포의 법보다 항상 더 강한 것입니다.

3. 그러면 예수 믿는 너희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나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맡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예수 믿는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할뿐만 아니라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지 않는 자보다 낫기 위해서는 예수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은 예수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보다 나은 생활이 없다면 어느 때나 비판받아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은 생활이란 높은 교육을 받거나, 돈이 많거나, 세상에서 지위 명예 등 생활수준이 높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만큼 빛과 소금이 되고 있으며,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생활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기독교는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기보다는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적이 더 많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게 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습니다. 생명공학 발달이 가져온 생명복제기술,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이 가져온 문화와 생활의 변화 등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상, 예술 등 모든 분야가 인간을 급속도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네델란드 사람 거스 히딩크가 한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1년 7개월간 재임하면서 한국 축구를 월드컵 4강에 오르게 함으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등 거의 모든 부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국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은 극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모든 파벌주의를 청산했다는 것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의 모든 파벌을 과감히 청산하고 능력을 위주로 한 화합으로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구어 낸 것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면 파벌을 없애고 능력을 위주로 해야한다는 것을 우리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모르고 있었습니까? 다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파벌을 뛰어넘지 못하고 오히려 파벌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는데 급급했던 것입니다. 히딩크는 단순한 상식을 그대로 실천했던 것이고 우리네 지도자들은 지역 연고나 파벌주의 폐단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없애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을 맡았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맡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은 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모두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맡은 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은 너무나 미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불란서의 한 신학자는 기독교 문명을 갖고 있는 나라들이 빠른 속도로 세속화되어 간다고 지적하며, 사람들은 교회의 메시지에 점점 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보다 나은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고 주께서 묻고 계십니다. 본문의 질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이 질문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너를 새롭게 해 주었건만 너는 지금 어떠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우리의 믿음 없는 생활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더욱 더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기"(히4:12)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라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즈음 세상에 하나님 말씀이 점점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소멸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맡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능력이 사라지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먼저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여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의 능력을 상실해 가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즐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 유대인들에게서 자주 보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이사야30:9)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잠언 1:24)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렘13:10)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슥7:11)"

옛날 유대인들은 교훈하고 책망하는 말씀을 선포할 때는 듣기를 싫어했습니다. 등을 돌리고 귀를 막았습니다. 거짓말을 하더라도 부드러운 말을 들려 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왕국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가기 직전까지도 회개와 심판의 말씀 듣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오직 평안함에 대해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거짓 교훈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들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7-12)면서 사정없이 질타했습니다. 율법을 맡아서 가르치고 지도하는 이들이 나을 것이 하나 없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돌멩이 하나만 못하다는 책망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면 어찌 돌멩이 하나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비의 종류 중에 "칼리마"라는 것이 있는데 "죽은 잎사귀"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날개를 펴고 날 때는 찬란한 색깔이지만 날개를 오무리고 앉아 있으면 누런 색깔로 변하는 모습이 죽은 잎사귀와 아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두 종류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일은 찬란한 총천연색 신자가 되었다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죽은 잎사귀처럼 변하는 이중적 인생을 사는 신자를 말합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자와 예수를 성현이나 선생으로 고백하는 신자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이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신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낮에나 밤에나, 봄이나 겨울이나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영광된 성도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은 것을 변화된 생활로 보여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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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람의 행복

(롬4:1-25)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대해 <믿음의 장>으로 불리우는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가야 할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떠났던 것입니다. (9) 믿음으로 그는 약속받은 낯선 땅으로 가서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나그네처럼 천막 생활을 하였습니다. (10) 그것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여 세우신 견고한 하늘의 도성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그의 아내 사라도 너무 늙어 아기를 낳을 수 없었으나 믿음으로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약속하신 분이 신실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2) 이리하여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늙은 아브라함에게서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수많은 후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현대인 성경,히11:8-1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혈통과 가문이 좋다거나 마음씨가 착하고 행동거지가 바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의롭게 내세울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네 부모,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이유와 목적지를 묻지 않고 무작정 떠난 것이었습니다. 또한 낯설고 물설은 곳에 가서 나그네처럼 천막을 치고 살았지만 "이게 약속의 땅이냐?"며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세상보다 더 좋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 늙어 환갑을 훨씬 넘긴 아내가 임신하리라는 망언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전혀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었습니다. 더 나아가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죽은 자를 살리실 것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인정하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과거 행적을 들춰내어 지은 죄상들을 낱낱이 따지거나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무조건 믿고 따랐더니 의롭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 말씀을 무조건 믿고 순종함으로 과거 지은 모든 죄들을 몽땅 용서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2000년 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는 말씀을 그냥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 지은 죄가 어떠하든 묻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사, 즉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이같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게 된 것은 그가 할례를 받고 난 후가 아니라 무할례시 즉 할례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다만 그 믿음에 대한 확인절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되는 것은 할례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것이고 세례는 단지 그 의를 확인하는 의식에 해당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인정치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사람의 행복이 죄사함받는데 있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2.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근본적으로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구약 다윗의 고백을 인용해서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선결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불구나 장애자로, 또는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났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그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이를 피할 수도 없습니다. 평생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던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이 죄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죄인임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중이 자신은 평생 동안 단 하나의 생명도 해친 적이 없다고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교사가 현미경 아래에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린 후 그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현미경을 자세히 들여다 본 중은 자신이 물을 마실 때마다 수없이 많은 미생물을 삼켰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후 그는 심한 가책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양심을 달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는 현미경을 부셔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가 죄인임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죄 사함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예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욥은 자기 친구들 앞에서는 자신의 무죄와 선행을 주장했지만, 귀로만 듣던 하나님께서 그의 눈앞에 직접 나타나셨을 때는 스스로 죄인임을 한탄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고 용서하시어 의롭다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죄인임을 부정할 때는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 스스로 씻어낼 수 없습니다. 죄를 씻는 방법은 그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녹슨 가마솥에 비유하여 에스겔에게 전하셨습니다.(겔24:3-14) 녹슨 가마에 좋은 양고기 넓적다리와 어깨고기, 뼈들을 가득히 담고 물을 부어 가마솥의 뼈가 무르도록 삶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마솥의 녹이 없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무를 더 많이 하여 가마솥의 국물을 졸이고 뼈들이 모두 태워지기까지 뜨겁게 가마솥을 달궈 녹을 없애보라는 것입니다. 양고기와 뼈들이 무르기까지 가마솥을 달궈도, 가마솥을 벌겋게 달궈도 결코 녹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양고기의 넓적다리와 어깨고기, 그리고 뼈들은 이스라엘의 중상류층과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가마솥의 녹은 예루살렘의 죄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양고기를 가마솥에 넣고 삶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뼈까지 다 태워 아주 역한 냄새가 진동하고 가마솥을 녹일 정도가 되더라도 녹이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 지은 죄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마솥의 녹, 즉 예루살렘의 죄는 어떻게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 중요한 답을 주시고 있습니다.

(겔24:13)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정하여지지 아니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룰지라

예루살렘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풀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죄를 없이하고자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지은 죄악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해도 그 죄를 없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이 끊임없이 불타는 심판을 받는 이유는 그 심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분노가 풀어져야만 정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서야 죄에 대한 분노가 그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예수를 믿고 마음에 받아들여야만 하나님의 분노가 풀어지고 죄사함을 얻어 구원에 이르는 행복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행복하시기를 바랍니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그치고 사랑과 용서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고 의롭게 여기실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바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여김 받는데 있습니다.

3.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적에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축복의 말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수룬이여 하나님같은 자 없도다.....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신33:26-29) 예수 믿어 구원얻은 성도 여러분,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 앞에는 낙관적인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수많은 전쟁과 어려움을 겪어야만 합니다. 또한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어려운 상황들이 그들 앞에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400여년의 종살이 생활, 출애굽해서 40여년의 광야생활을 겪은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조건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복 받은 행복자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이나 바벨론처럼 제아무리 빼어난 문화와 문명을 구가하고 있다해도 하나님의 구원받지 못한 나라 백성은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약속 받은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행복한 나라 백성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상징적으로 구원받았다는 것,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행복의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산다해도 하나님의 구원받지 못한 인생이라면 영원한 미래가 약속되지 못한 불행한 인생입니다. 천하만국을 차지했다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얻지 못하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세상살이가 고난과 역경 뿐이라 해도 하나님 나라를 약속 받은 사람은 그 누구도 뺏을 수 없는 행복을 얻은 복된 사람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본 행복한 사람이 되는 조건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여수룬"(신33:26)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의로운 백성"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스라엘에 대한 별칭입니다. 이사야서에도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44:1-2)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여수룬", 즉 "의로운 백성"이라 부르며 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잘나서거나 숫자가 많고 강해서가 아니라 가장 연약하지만 그들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7:7-8)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러면 모세가 거느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랑받을만한 자격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목이 곧고 패역한 족속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의로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비뚤어져서 원망과 불순종으로 일관해왔습니다. 그럼에도 그 백성들에게 "의로운 백성", 곧 "여수룬"이라고 모세는 부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이방사람들이나 다름없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실 때는 특별한 사랑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을만한 구석이 하나없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인정치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보시고 "의로운 백성", 곧 죄 없는 의인으로 불러 주신 것에 대하여 성도들은 행복함을 느껴야 할 줄 믿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의 행복은 재물이 넉넉함에 있는 것 아닙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우리에 소가 없으며 외양간에 양이 없고 밭에 소출이 없어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성도입니다. 여러분들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행복하신 분들입니다. 여러분같이 하나님의 구원 얻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참으로 여호와의 구원을 여러분 같이 얻은 백성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격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무한한 행복감에 젖어 보셨습니까? 그러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의 금은보화나, 부유함이나 권력이나 쾌락으로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죄입니다. 인간이 죄 때문에 영원히 죽고 망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하겠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에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죄값을 치루지 아니하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빚진 자가 그 빚을 갚지 못하면 얼마나 괴롭고 두려우며, 도망가거나 죽고 싶은가를 빚진 자의 심정이 되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6천만원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자살한 가장의 안타까운 사건이 얼마 전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 6천만원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입니다. 누가 그 사람 빚을 갚아주었더라면, 아니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기만 했어도 그토록 비극적인 사건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간의 죄의 빚은 영원토록 갚을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값이 얼마나 중한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예수 믿음으로 우리같이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인생의 행복입니까? 신앙의 위기는 어디에서 옵니까? 구원받은 감격을 잃어버린 때부터입니다. 부부간의 위기가 언제 찾아옵니까? 사랑이 식어질 때부터 인 것입니다. 어느 날 스펄젼 목사님께서 울고 계셨습니다. 그 아내가 묻기를 "목사님, 왜 울고 있어요?" 그는 대답하기를 "오늘은 말이야 내가 십자가를 생각해 봐도 감동이 없어 그래서 내가 울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생각해 봐도 감동이 없는 분들이 아직도 계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예수 십자가에 쏟아지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죄에 대해 쏟아지는 하나님의 분노를 영원히 스스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머무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겨자씨같이 작아 보여도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약속 받는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음을 끝까지 거룩하게 지켜 하나님의 선하심과 참된 행복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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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의인의 생활

(롬5:1-2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흔히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을 부모의 가슴에 묻었다고 말합니다. 다음 시는 어린 아기를 잃고 떠나간 아이를 가슴 아파하며 그리워하는 부정(父情)을, 아이 없이 밥상에 놓인 은수저와 부는 바람, 그림자 등으로 표현한 김광균의 시 <은수저>입니다.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가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죽음은 순서 없이 누구에게나 오는 것입니다. 다음은 과학, 화학, 물리, 천문학, 의학 등 분야에서 권위있는 대학 교수들이 모여 과학과 의학 등이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가에 대해 나눈 대담 내용입니다.(월간 조선)

《생명과학에서 인간은 그 삶의 시작부터, 죽음을 안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선 생명의 출발점이 되는 하나의 난자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감수 분열에 의하여 난모 세포에서 네 개의 딸세포가 생기는데 그 중 세 개는 죽어야만 합니다. 정자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후 개체로서 발생해 가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세포가 죽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손가락은 손가락 사이의 세포가 적절하게 죽음으로써 형태가 만들어집니다. 다양한 기관이나 장기의 형성에서도 세포가 죽는 것이 꼭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발생을 끝낸 다음에도 노화된 세포나 바이러스, 화학 물질 등에 의하여 이상이 발생한 세포 등은 스스로 죽음으로써 제거되어 갑니다. 이러한 재생계 세포의 죽음은 '아포토시스'라 불리며,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능동적인 것입니다. 한편 신경 세포나 심근 세포처럼 몇십 년이나 계속 사는 비재생계 세포에도 죽음이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죽음은 언제나 유전자 존속의 뿌리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의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발표되는 등 유전학 분야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지만 인간은 미생물(바이러스)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의학자는 단정지어 말하고 있습니다. 질병은 유전적 소인도 작용하지만 환경적 요인도 상당히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특성을 유전자 차원서 알게 됐다고 모든 질병이 없어질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한 시기에 문제가 됐던 질병이 해결되면 이상하게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오는 게 그 동안의 통례였습니다. 그래서 미생물학자들은 인간과 미생물간의 전쟁에서 인간이 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항생제는 탁월한 효과를 가졌지만 미생물도 이런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변신해 왔습니다. 환경에 적응해 생존하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 아닙니다....그런 점에서 보면 21세기에도 질병이 없는 세계를 이루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암에 대한 연구도 상당히 진행됐으나 이번 세기말까지 모두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무병장수는 인간의 꿈이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무병장수는 불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아무런 병이 없는 세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한두 개의 병을 운명처럼 지니고 살다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과학과 의학의 한계를 시인하며 인간은 죽음을 그 어떤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이 생명체를 창조할 수는 없고, 항성간 여행도, 무병장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1995년 기준 한국에서, 시간당 73.7명이 태어나고 28.5명이 사망하며, 매일 6백80 여명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제1사망원인은 뇌혈관 질환(뇌출혈, 뇌졸중, 뇌경색 등)으로 1998년의 경우 인구 10만명당 74명이 이 병으로 숨졌습니다. 특히 10∼30대 한국인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망 원인은 각종 교통관련 사고와 자살입니다. 한국 남자가 교통관련 사고로 사망하는 수치는 인구 10만명당 38.5명꼴로 OECD 회원국 중 2위를 차지하며, 한국 여자는 10만명당 12.9명으로 OECD 회원국가 중 1위입니다. 1년간 한국인들은 정원 3백78명이 탑승한 보잉 747기 30대가 추락해 사망하는 만큼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1997년 한 해 동안 교통사고 피해액을 돈으로 환산하면 11조원으로 국민 총생산(GNP)의 2.7% 규모입니다. 1998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연간 2만2천8명의 한국인이 음주로 사망합니다. 이중 80.9%(남자 73 .5%, 여자 26.5%)가 음주관련 질병으로 사망하고, 16%는 음주관련 사고와 자살로, 3.0%는 음주운전으로 사망합니다. 연간 술을 마시고 추락해서 사망하는 한국인이 8백40여명입니다. 6백74명은 물에 빠져 죽고, 3백82명은 술에 취한 채 화재를 피하지 못해 죽었습니다. 3백79명은 술에 취한 채 살해당하고, 1천3백55명은 음주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국인 성인 사망자 중 11%가 직접 흡연에 의해 사망합니다. 전 세계에서는 10초당 1명씩 흡연으로 사망하고, 전체 사망원인의 21%로 추정됩니다. 중국에서는 매일 2천여명이 흡연으로 인해 사망합니다.

과연 세상은 사망(죽음)이 왕노릇하는 곳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여 사랑과 생명을 경험하며,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며 죄의 권능을 물리치고 죽음을 극복한 사람이 바울 사도였습니다.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도 바울은 어떠한 환난을 당해도 비겁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고난 당하는 것이 장차 누릴 영광을 이루게 하는 영원한 축복의 재료가 됨을 확신하고 오히려 기뻐하고 기뻐하며(고후4:16,17) 끊을 수 없는 사랑과 생명을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이 시대에 자신의 죽음의 경험을 통해 승화된 사랑과 생명의 삶을 보여준 인물이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를 지냈던 헨리 나우웬은 어느 추운 겨울날 앞을 못 보고 말도 못하며 걸을 수도 없는데다 기형 정도가 아주 심한 지체 장애아, 중국 아이 씨후를 돌보아주기 위해 장애아 시설, '코너 하우스'를 향해 급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지나가는 차량에 손짓해 편승을 요청해보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나우웬은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화장실 가는 일, 목욕하는 일, 머리 손질, 음식 먹는 일, 옷을 입는 일 등 모두를 자신에게 맡기고 오매불망 자신만을 기다리는 장애아 씨후를 생각하니까 편승을 거절했던 사람들에 대해 마음 한 구석에서 점점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속으로부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솟구쳐 올라오기까지 했습니다. 그 순간 뭔가가 와서 탁 치는가 싶더니 자신이 차에 치여 길바닥에 나가떨어진 것을 느꼈습니다. 지나가는 차량의 백미러에 치인 것이었습니다. 급히 응급실에 실려갔지만 비장에서 출혈이 계속되어 비장을 절단해야했고 계속되는 출혈로 피가 무려 2/3가 빠져나가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죽음의 목전에서 깨달은 것은 "나를 삶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분노라는 사실이었습니다...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준 사람들은 나의 죽음을 무척 슬퍼하며 나의 사랑과 정신을 함께 기리며 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과 나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을 남겨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강렬한 삶에 대한 욕망이 생기면서 나에게 화가 나 있는 사람들과 내가 분노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침대 맡에 불러모아 놓고 꼭 끌어안아 주면서 용서를 구하고 나도 그들을 용서한다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내가 죽음을 통해 배운 사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음으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식으로 죽느냐 하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분노와 쓴 뿌리 속에서 죽어 간다면 나는 내 뒤에 남게 될 가족들과 친구들을 혼란과 죄책감과 부끄러움과 연약함 속에 처하게 만들 것입니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음을 느끼던 그 순간 불현듯 내 뒤에 남게 될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는 얼마나 깊은 영향을 줄 수 있을지 깨달았습니다. 죽음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죄책감으로 묶어 놓을 수도 있고, 자유로이 감사할 수 있는 상태에 놓아 둘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바로 하나는 생명을 주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죽는 것이라는 점입니다.....내가 그 죽어 가는 시간 동안 내 마음에 가장 강력하게 파고든 느낌은 나의 죽음을 애도하게 될 사람들에 대한 나의 책임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애도는 기쁨의 애도일까? 죄책감의 애도일까? 깊은 감사의 애도일까? 가책과 후회의 애도일까? 그들이 갖게 될 느낌은 버림받았다는 느낌일까? 아니면 자유로운 느낌일까? 사람들 중에는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도 있고, 나한테서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인생이란 하나의 긴 준비의 여정, 즉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죽을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여정입니다....그 여정의 길목들을 지나는 동안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찾아옵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은 권세인가? 섬김인가? 내가 바라는 것은 명예를 높이는 것인가? 이름도 빛도 없이 숨어 봉사하는 것인가? 나는 소위 출세를 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소리없이 단지 소명에 충실하려 하는 것인가? 이런 물음들은 계속 우리를 찾아와 쉽지 않은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인생이란 자아에 대해서 죽어 가는 기나긴 여정이라 말할 수 있으며, 그 여정을 통하며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 안에서 살아가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줄 능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아주 잠깐이지만, 인생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내가 분명히 보았던 것은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있던 그 순간뿐이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죽여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죽음 앞에 맞부딪혔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터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부르셔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이 되라는, 지금껏 내 인생의 가장 깊은 소명이 무엇이었는지를 한 순간에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제부터는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마취에서 깨어나 내가 지금 하나님의 집에 와 있지 않고 아직도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즉각적으로 내가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사랑에 주리고 목말라 있으면서도 결코 그것을 줄 수 없는 세상에서 그 사랑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모두를 품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을 알게 하라고 보냄을 받았던 것입니다."》(거울 너머의 세계, 헨리 나우웬)

나우웬은 죽음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소명으로 확신하고, 사랑과 생명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생명을 위해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에 생명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시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인류의 죽음을 사랑과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죽음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으로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내어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유전인자가 믿는 성도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 십자가의 의로운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해도 사랑과 생명이 지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사망을 극복케 하는 의로운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 십자가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의롭게 되어 더 이상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는 사망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인류는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어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 믿음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생명의 유전인자가 변형되지 않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환난을 당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인내의 믿음을 가지고,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인류를 위한 사랑과 생명의 프로그램입니다. 이제부터 누구를 위한 죽음으로 사시겠습니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다가 죽은 사람을 의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사랑과 생명을 바치는 사람을 의롭다고 합니다. 예수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십자가 죽음의 삶으로 사랑과 생명을 증거하는 의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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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라

(롬6:1-23)....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위해 다시 사셨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내가 예수와 합하여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의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침례)식에서 물에 잠기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인하여 예수와 함께 자신을 물속에 장사지내는 것을, 물에서 나오는 것은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 옛 사람 <이동희>는 물속에 장사되었고, 새 사람 <이동희>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옛 사람 <이동희>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새 사람 <이동희>가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옛 사람, 죄인 <이동희>는 세상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새 사람 <이동희>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살아났습니다. 죄에 종노릇하던 죄인 <이동희>는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탄이 소유를 주장할 수 없는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예수 믿는 여러분을 예수 십자가의 피값주고 산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르틴 루터에게 엘리자베드라는 가정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내심 불만이 생겨 어느 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갔습니다. 그후 그녀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그만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루터가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그가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 옆에 앉자 엘리자베드는 "나는 내 영혼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말았어요. 그리고 나쁜 짓들을 수없이 저질렀어요. 나를 가장 괴롭히는 문제는 내가 고의적으로 내 연약한 영혼을 악마에게 주었던 거예요. 이런 죄인이 주님의 긍휼을 어떻게 더 바랄 수 있겠어요?"라며 절망했습니다. 이에 루터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우리 집에 사는데 내 아이를 낯선 사람에게 값을 받고 넘겨주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내 아이를 팔아 넘긴 그 행동이 합법적이며 법적 구속력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오! 아니예요! 나는 그럴 권리가 조금도 없어요!" 루터는 인정어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습니다. "맞아요. 당신은 내 아이를 팔 권리가 없듯이 당신의 영혼을 교활한 악마에게 넘겨줄 권리도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영혼을 만드셨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방황할 때 그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으므로 당신의 영혼은 이미 모든 능력과 자격을 갖추신 그분의 것이랍니다. 당신은 당신의 것이 아닌 것을 포기하거나 팔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만일 당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버린다면, 그 매매 행위는 불법이며, 전적으로 무효입니다. 그러니 지금 곧 주님께 당신의 상한 심령과 은밀한 죄를 고백하고 그분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다시금 그분의 소유로 되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엘리자베드는 그 말에 순종하고 그 동안의 방탕한 삶을 회개했으며, 이후 내세의 소망을 갖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소유, 의의 종이 되었다고 해서 전혀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물리치기도 합니다. 의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연약한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범했다고 해서 그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이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옛날에 어떤 왕자가 태어나자마자 실종되어 세상에서 거지가 되어 거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그가 왕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그는 다시 왕궁에 가서 왕자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신분은 거지에서 왕자로 분명히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궁중에서 왕자로서 살아가려면 많은 것을 새로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과거 거지근성이 나오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왕자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위엄있게 식사해야 하는데, 어떤 때는 거지처럼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왕자입니다. 만약에 그가 한 번 실수를 했다고 해서 '나는 왕자가 아니냐 나는 거지야' 하면서 거지로 돌아간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는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고자 결단하고, 다시 왕자답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는 언젠가는 품위 있고 명실상부한 왕자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때때로 죄에 빠질 때가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산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하여 죄에 넘어질 때 좌절하거나 자신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믿음으로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하지만 그것은 소유권 이전만 된 것이고 연약한 육신은 그대로여서 죄를 향하는 죄의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때 옛 본성을 깨끗이 없애고 새로운 본성을 주신 것이 아니고 옛 본성 위에 새 본성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는 이 두 가지 본성이 사람을 곤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 믿는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롬7:18-25)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나 죄성이 남아 있어 죄의 유혹이 있고 죄를 향한 마음이 여전하다해서 낙심할 것 없습니다. 뿌리 짤린 나무처럼 그 죄성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미워하는 마음, 탐내는 마음, 음란한 생각 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일시적일 뿐입니다. 새 본성의 뿌리가 나도록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게 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좇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면 자연히 옛 본성은 소멸되고 거룩한 새 본성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를 위해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산다고 했습니다.

크리스챤 센츄리 지의 편집장 마티 목사가 젊어서 주일 학교 교사로 지낼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3학년 반을 맡게 되었을 때 그 반에는 스티븐이라는 학습지진아가 있었습니다. 부활 주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그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상자 속에 하나씩 넣어 가지고 오라"는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부활 주일날 아이들은 모두 상자를 하나씩 가지고 왔습니다. 돌아가면서 차례로 상자를 열어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상자 뚜껑이 하나씩 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한 아이의 상자에는 꽃이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의 상자 속에서는 나비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 아이는 파란 나뭇잎을 꺼냈습니다. 스티븐의 차례가 왔습니다. 스티븐도 자기의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속은 비어 있었습니다. 마틴 선생님은 당황했습니다. 지능이 모자라는 스티븐에게 남들과 같은 숙제를 냄으로써 망신을 당하게 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당황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스티븐은 싱글벙글 웃으며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선생님,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다고 하셨죠? 이 상자는 예수님의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이 상자에서 다시 살아나셨어요" 마틴씨는 스티븐을 껴안고 "맞았다. 네 숙제물이 가장 좋다"고 외쳤습니다. 마틴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정말 놀랬다. 학습지진아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부활이 빈 곳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깨달아야 할 진리다."라고 종교지에 자기의 감격을 썼던 것입니다. 부활 이전에는 죽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야만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 본성을 십자가에 날마다 못박는 생활이 있어야 새 본성, 하나님의 성품으로 의의 병기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깨끗함을 입어 거룩한 그릇이 되었으면 깨끗하게 쓰임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 바울 사도는 손발이 쇠사슬에 묶인 채 죄인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그립바는 왕으로서 위풍당당하게 성중의 천부장과 귀인들 중앙에서 화려한 보좌에 영광스럽게 앉았고, 바울은 오랜 감옥생활로 낡은 옷을 입고 몹시 수척한 얼굴에다 손과 발이 결박되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그립바는 영광스러웠고 바울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천 년이 지난 오늘 아그립바의 영광은 썩어버렸지만 바울의 영광은 점점 빛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바울을 기억하는 사람은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그립바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버렸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천한 인생이 주님의 손에 잡혀 그리스도의 도구로, 의의 병기로 쓰여지는 동안 그의 영광은 빛났습니다. 예수 복음을 전하는 의의 병기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바울 사도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딤후4:1-5)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인의 직무를 다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예수 복음 전하는 의의 병기로 자신을 온전히 드려 바울 사도처럼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 뿐만 아니라 나무와 질그릇도 있는데 그 가운데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습니다. 아무리 금으로 만들어진 그릇이라도 깨끗하지 못하면 천하게 쓰이는 것이고, 비록 나무나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일지라도 깨끗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릇의 종류가 어떠하든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는 것입니다."(딤후2:20-21) 예수 십자가의 피로 여러분을 깨끗한 그릇이 되게 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신 일에 쓰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씻은 그릇일지라도 쓰임받지 아니하면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인이 그릇을 깨끗하게 씻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깨끗하게 되는 것이 그릇을 씻는 목적의 전부이겠습니까? 그릇을 깨끗이 씻을 때에는 그 그릇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은 것은 여러분을 구원받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이 여러분을 구원한 목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또 다른 생명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복음 전파를 위한 의의 병기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합니다.

어느 신학교수의 설명처럼 우리의 구원은 구명조끼를 입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구명 조끼를 입혀주신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바다에 빠져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명조끼만 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구명 보트도 함께 주셨습니다. 이 보트를 잘 관리해서 다른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귀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가 구명 조끼를 입었으니까 나는 괜찮다 생각하고는 구명 보트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그 구명보트가 펑크가 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겨우 자기 목숨 하나만 건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낳는 삶, 의의 열매맺는 삶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나 하나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나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다시 말해 의의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해야만 합니다.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은 의의 열매를 통해 나타나야만 합니다.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죄가 자신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16절)"는 말씀을 명심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의의 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죄에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되고 맙니다. 죄란 한 마디로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주인 되는 것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사탄을 섬기는 사탄교회가 있는데 우리에게 성경이 있듯 사탄교를 믿는 사람들도 <사탄경>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사탄경의 핵심이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주인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하고 기분좋게 들리는 말일 것입니다. "내가 우주의 주인이다.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다. 하고 싶은대로 해라. 간음하고 싶으냐? 마음대로 해라. 마약을 먹고싶으냐? 마음대로 해라. 내가 법이다." 그러나 사탄의 이 달콤한 꾀임 속에는 사람을 파멸에 빠뜨리는 계략이 숨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탄이 사람을 섬기는 듯합니다. 사람의 종이 되어서 사람을 만족케 하고 사람에게 유익과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버리고 파멸에 빠뜨리는 것이 사탄의 책략입니다.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 뜻대로 살면 그 열매가 영생과 의의 면류관이지만, 자신을 죄가 주관하게 하여 불의의 병기가 되어 사탄의 뜻대로 살게 되면 그 열매는 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의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의의 종,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영생과 의의 면류관을 누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 사탄이 여러분의 왕노릇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하고 시험할 수는 있을지라도 욥에 대한 하나님 말씀처럼 그 생명은 가져갈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할 무렵 기도하고 성경 연구할 때마다 사탄이 와서 참소했습니다. "너는 이런 이런 죄를 짖지 않았느냐. 너 같은 죄인이 무슨 종교개혁을 한다고! 집어치워! 너는 죄인이야! 너는 이 일을 할 자격이 없어!" 그 때 마틴 루터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내 모든 죄를 깨끗이 씻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이제 의인이 되었다. 나는 부족하고 허물 많지만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시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같이 예수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탄의 조롱을 물리치고 거침없이 종교개혁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그처럼 여러분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성향이 아직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여러분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더 이상 죄의 도구가 아니고 의의 도구, 의의 병기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린 몸이다>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의의 병기인가? 기도도 변변치 못하고, 전도도 시원찮고, 은사도, 능력도 없는데 어떻게 의의 병기로 쓰임 받겠는가?" 이런 생각은 하나님 앞에 의의 병기로 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이 유혹이며 조롱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고 믿을 것은 여러분은 예수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했기 때문에 의의 병기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의인되신 여러분,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영생에 이르며 풍성한 의의 열매를 맺어 의의 면류관을 누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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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라

(롬7:1-25)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구약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비유하고, 신약성경은 예수 믿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 믿기 전의 모습을 이러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의 중요한 초점은 남편이 사망했을 경우입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아내가 그 남편에 매인 바 되어 남편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사망했을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죽은 남편은 더 이상 아내를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에 해당되지만, 남편 사망시에는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고 다른 남자에게 가든 안가든 자유인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 성도는 <죄>가 그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인 <죄>를 섬기며, <죄>와 함께 살며 많은 <죄>를 낳고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가 죽었습니다(롬6:1-6). 전 남편인 <죄>가 죽었으니 더 이상 아내인 성도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죄가 더 이상 성도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믿음으로 새 남편으로 예수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섬기며 예수의 뜻에 따라 예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직 신랑이신 예수만을 생각하고 과거 남편이었던 <죄>에 대해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인은 율법이 그의 남편이었습니다. 율법으로 언약하여 결혼했고 그 율법에 매여서 살아야 했습니다. 율법아래 살면서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법, 곧 율법 앞에 드러나는 아내의 모습은 죄뿐이었습니다. 남편의 법 앞에 아내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남편으로 하여 섬기며 살았던 아내는 결국 사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인 율법의 요구사항을 아내가 모두 충족시킬 수가 없었고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죽었고 예수 믿는 성도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옛 남편인 율법에 매인 것이 아니고 새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매인 바 된 것입니다. 아내가 결혼법에 매이듯 우리는 과거 죄와 사망의 법, 율법에 매여 있었으며 이 결혼의 소산은 죽음에 이르는 열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명이신 예수와 결혼함으로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의의 열매, 영생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전 남편 죄와 율법을 섬기며 살았을 때는 죄를 낳고 거둔 것은 사망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하여 예수를 남편으로 섬기며 예수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에는 사랑과 기쁨, 평강과 생명 등을 누리며 그 열매들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열매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 때에만 맺을 수 있습니다.(요15:1-8,엡2:10,골3:17). 이제 새로운 남편에게 결혼했으면 당연히 그 행동과 사상도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 결혼해서 죄인으로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해서는 의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랑되신 예수는 신부로 하여금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과거 육체의 소욕을 좇아 죄를 섬겼던 마음과 행동을 몽땅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성령의 열매들을 맺음으로 삶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한 미국인 선교사가 선교를 하다가 식인종에게 붙잡혔습니다. 이윽고 오랏줄에 묶여 추장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선교사는 추장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 추장은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유학 왔던 대학 동창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자네는 미국 대학에서 그렇게 많이 배웠어도 변한 것이 없었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추장은 "아니,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도 변했네. 과거에는 손가락으로 사람 고기를 집어먹었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포크를 사용하지!" 그 추장은 식사하는 방법만 달라진 것이지 여전히 먹어서는 안될 사람 고기를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급 문화와 문명을 배웠으면 그 수준에 맞게 삶의 내용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알고 있으면 '영의 새로운 것'으로 몸과 마음 그리고 생활이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하여야 합니다.(롬12:1-2). 그래야 창조의 영이신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로 날마다 새로운 신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살아갈 때 유혹이 없다거나 서로 갈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리차드 버드 제독이 탐험대를 이끌고 남극에 도착하여 6개월을 지냈습니다. 사방이 온통 얼음뿐인 고독한 생활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버드 제독은 대원인 잭 오브라이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문명과 동떨어져 있는데, 자네는 문명 생활에서 무엇을 가장 그리워하는가?" 잭은 서슴없이 말했습니다. "유혹입니다!" 인간은 유혹을 부정적으로 말하지만 속으로는 유혹을 기다리고 있다는 인간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와 율법을 남편으로 섬기며 살다가, 그 남편이 죽고 새 남편 예수를 만나 예수와 함께 살게 될 때 역시 유혹과 갈등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한 것은 인간의 내면에 선악이 공존하여 겪게 되는 곤혹한 모습을 토로한 것입니다.

스티븐슨의 유명한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가 있습니다. 지킬 박사는 자기 자신을 이중 인간으로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그는 낮에는 의젓하고 존경받는 문화인, 신사 지킬 박사가 되고 밤에는 야수적인 악마 하이드가 됩니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 다시 지킬 박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그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온몸이 지킬 박사로 돌아갔는데 한 쪽 손만이 하이드의 손으로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한 손은 곱고 전문적인 기술로 연마되어 남을 돕는 지킬 박사의 아름다운 손이요, 다른 한 손은 흉측하고 잔인하고 짐승처럼 털이 난 하이드의 악한 손으로 영원히 남게 된 것입니다. 지킬 박사는 독백합니다. "처음에는 지킬의 선한 요소를 제거하는 작업이 어려워 나의 모든 연구를 거기에 쏟았다. 그러나 이 노력이 차차 이루어져 악한 하이드의 요소가 점령해 들어오면서부터 본래의 나는 점점 사라지고 악한 하이드와 손을 잡게 되었다. 아차, 이거 안되겠다. 본래의 나 지킬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벌써 나는 나의 좋은 부분 절반을 유지할 수 있는 기능을 잃고 있다." 이 소설은 인간의 이중성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선한 지킬 박사>와 <악한 하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인간이 불행 속에 빠지는 중요한 원인은 <지킬의 요소>와 <하이드의 요소>를 적당히 섞으려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스티븐슨의 이 소설이 지적하듯 한 사람 속에 지킬과 하이드, 즉 선과 악이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적당히 공존시키려고 하면 차차 하이드의 요기가 지킬을 제압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치 않고 원치 않는 악은 행하게 된다."는 바울의 자기 한탄은 지킬과 하이드가 공존하는 이상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곤혹스런 참담한 모습을 고백한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모든 사람 안에는 두 본성, 두 충동, 두 경향이 있으며, 하나님이 인간 속에는 선한 충동과 악한 충동이 있게 지으셨다(Yester hatob,Yester hara)"고 확신했습니다. 여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는 바울의 고백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이 두 본성 사이에서 갈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걸 행하지 않고 육신을 쫓는 영혼의 갈등, 마음에 확신은 하지만 아직 거듭나지 않은 영혼 속에 있는 갈등, 거듭나서 성화되었지만 아직도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영혼 속에 있는 갈등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무엇이 옳은가를 알 수 있으나 그대로 행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알되 그것을 행하지 않게끔 자제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말합니다. 영으로는 새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와 살고 있지만 죄에 약한 육의 몸을 지니고 살고 있기 때문에 오는 갈등입니다. 전 남편인 율법은 죄를 발견하고 죄를 확신시킬 수는 있으나 그것을 정복하고 굴복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영적이지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죄의 더러움을 지적하면서도 씻어 없애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만들며(마11:28) 죄의 짐은 무겁게 하지만 그 짐을 털어버리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새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거듭나고 성화되었다고 해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죄없이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아 있는 죄의 성향을 날마다 십자가에 죽이는 생활이 성화입니다. 내주하는 죄의 잔재야말로 은혜로운 영혼의 고통스런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율법은 선악을 구분할 뿐 선한 일을 하도록 할 능력이 없으며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할 능력이 없습니다. 죄는 행동에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내주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전신에 퍼진 암처럼 치료 불능한 것입니다. 암덩어리는 제거되었지만 남아있는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잔재하고 있는 죄성을 없애기 위해 빛이 되는 하나님 말씀과 성령으로 계속적인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정치적 해방이나 경제적 해방이 아니고 죄로부터의 해방을 말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말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나타난 죄를 수술해서는 안되고 근본적으로 '내주하는 죄'를 치유해야 합니다. 이 치유의 유일한 방법이 바로 십자가 예수의 피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고 십자가의 피가 자기 몸에 흐르게 될 때 온전히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본문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면서 인간의 처절한 갈등과 절규를 감사로 매듭짓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그리스도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고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죄에 대한 승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율법의 완성도 율법의 마침이 되는(롬10:4) 그리스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그 누구도 죄와 사탄과 죽음과 싸워서 이긴 사람은 없습니다. 딱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죄를 이긴 자가 없으며 이길 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죄와 사탄과 죽음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예수와 연합하게 되면 생명의 영, 성령이 함께 하게 됩니다. 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 믿고 선함을 내가 원한다고 해서 내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육신 속에는 선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자신에 대한 모든 기대를 다 버려야 됩니다. 오직 주님만, 오직 성령의 힘과 능력을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대로 예수와 하나되는 생활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나, 자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예수만이 살아있을 때 유혹을 물리치고 갈등을 극복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연못에 개구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연못에 한번은 황새가 날아왔습니다. 아름다운 자태로 스윽 공중을 날다가 연못에 사뿐히 내려오는데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말 잘하는 개구리가 그 황새를 찾아가서 "황새님, 황새님, 당신의 자태는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한참 황새가 넋을 잃을 정도로 극찬을 해주고 나서 "그런데요. 한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저도 황새님처럼 공중을 한번 날아봤으면 좋겠는데 제 소원 좀 들어주세요" 그러자 황새가 "넌 날개도 없는데 어떻게 공중을 날 수가 있겠냐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개구리는 포기하지 않고 "아닙니다. 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막대기를 두 발로 꽉 잡고 있고 제가 그 막대기를 입으로 꽉 물고 있으면 당신이 공중을 훨훨 날아오를 때 저도 공중을 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황새가 가만 생각해보니까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번 해보자"면서 황새가 막대기를 잡았습니다. 개구리가 그 막대기 가운데를 꽉 물었습니다. 그리고 황새가 공중을 날아오르자 개구리도 같이 공중을 순식간에 날아오를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신이 났습니다. 온 세상이 다 눈 아래로 내려다 보였습니다. 그러자 연못에 있는 개구리들이 모두 개굴개굴 다 한마디씩 했습니다. "우와 굉장하다 저 개구리 누구야 굉장히 좋겠네" 그때 또 한쪽에서 말합니다. "야, 기가 막힌 아아디어다. 도무지 저게 누구 아이디어일까?" 그때 막대기를 물고있던 개구리가 자랑스럽게 바로 "나야"하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순간 개구리는 물었던 막대기를 놓치고 아래로 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바로 '나'라고 하는 자아가 살아있을 때입니다. 거의 틀림없이 바로 "나야"라고 하는 순간에 신앙에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한번 의롭게 살아봐야지. 내가 한번 깨끗하게 살아봐야지. 내 힘으로 한번 이루어 봐야지.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예수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해서 선해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선함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내가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승리에 내가 연합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나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고 강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유혹과 갈등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문호 로버트 스티븐슨의 여행담에 스페인에서 만난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청년은 스페인을 여행하다가 오래된 한 성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그 후손이 이 옛 성을 지키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에는 큰 초상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옛 성주의 아내였다고 합니다. 그 청년은 초상화의 여인이 얼마나 인상적인지 밥 먹고 그 초상화를 들여다보았고, 침상에 누워도 그 얼굴이 아른거려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하루만 묵고 떠나려던 것이 나흘이 되었습니다. 그는 초상화의 여인에게 매혹되어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닷새째 되는 날 그 집 딸이 도시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청년은 이 소녀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초상화의 여인이 못생겨 보이고 어쩌면 저런 여자를 나흘씩이나 보고 있었나를 생각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쳤다고 합니다. 무엇에든 빠지면 빠질 만한 힘이 거기에 있고 긴 사연과 과정이 있습니다. 의지력이나 교육을 말하지만, 유혹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페인 옛 성의 소녀가 상징하듯 새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강하게 붙잡힌 바 된 삶을 살아야만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 위험과 칼이라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모든 일에 우리로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끊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붙잡힌 바 되어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므로 모든 유혹과 갈등을 극복하고 신앙생활에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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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성령과 삶의 원리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게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유대인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린(Victor Franklin)은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모든 삶은 제각기 의미가 있다. 인간은 어떠한 죽음의 상황속에서도 덧없이 죽어갈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은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그 가운데는 창조자의 뜻이 있다. 그 창조자의 뜻을 발견하고 살아갈 때 인생의 의미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의미를 바르게 발견하게 될 때 신앙생활및 사회생활, 그리고 가정생활 등을 바르고 건강하게 할 수가 있다. "제가 무엇이관대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겠습니까?"(출3:11) 이 말씀은 모세의 자기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같이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인간의 자기 인식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고 그의 미래를 위한 사명을 맡길 때에 일어난다.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 말을 잘 못합니다."(렘1:6) 이는 하나님께서 예례미야에게 예언자의 사명을 맡기실 때, 예례미야가 가진 자기 인식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찾아 왔을 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자기 인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눅5:8). 이처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고자 할 때 인간은 그가 어떤 존재로 되어야 하는가를 경험하는 동시에 자기 힘으로써는 그가 되어야 할 바의 존재로 될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하나님을 성전에서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사6:5). 헤겔은 "정신만이 인간의 참된 본질이며 정신의 참된 형태는 사유하는 정신 이론적이며 사변적인 정신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에 불과 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속에서 존재 가치를 찾을 수는 없다. 갈대를 나부끼게 하는 바람이 상징하는 성령안에서 인간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해하는 인간은 다음과 같다.

(1). 자연적인 존재이다. 자연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신체적이고 감상적인 존재이다.

(2). 생산하는 존재 내지는 노동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연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하고 생산하는 존재이다.

(3). 철저히 사회적인 존재이다. 사회로부터 추상화된 개인은 없다는 것이다.

(4).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경제적인 존재이다.

(5). 인간은 역사의 목표인 공산주의 사회를 향한 도상의 존재이다. 그에게는 이 세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없다.

기독교 인간학은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식의 원천과 규범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영원한 지식을 전달하여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회개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요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가를 밝혀준다. 회개가 필요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로부터 그 인식이 밝혀진다. 왜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 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인간학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데서 시작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이다. 이는 우리의 삶의 시작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지만, 삶의 종국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임을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있게된 독자적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사귐속에서 감사하며 살아야 할 존재이며,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존재이며 이러한 삶의 모습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나님앞에 책임적인 존재인 것이다. 우선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할 책임이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 소명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어야 할 책임적인 존재이다. 아울러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앞에 사회적인 책임이 있다.

본문은 삶의 두 원칙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죄많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 지배되는 삶이 있다. 자신의 욕망이 자신의 유일한 법이며 따라서 그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행하는 삶이다. 욕정이든 교만이든 야심이든 그의 특징은,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성이 추구하는 일에 열중하는 것이다. 생명이되 시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의 결국이 사망인 것이다. 죄는 인간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의 분리에 있는 것이다. 육체를 좇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본능에 따라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생각의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 있으며 자연히 자기 중심적(ego-centric)인 사람이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위해서 하는 사람이다. 또한 자기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자연히 자존심에 매여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과 자존심과 교만 등에 매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설사 듣는다 해도 마귀의 음성이나 자기의 음성을 듣게 된다. 칼빈은 말하기를 "교만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당나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육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려 구제 불능한 존재이므로, 결과는 영적인 사망뿐인 것이다.

다음으로 영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삶이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배되는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 하나님 집중적 삶으로 생명과 평안으로 가는 길에서 사는 생활이다. 세상과는 비록 멀어질지라도 날마다 하늘에 가까워지는 삶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생활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영성을 지닌 사람이다. 성령이 그의 삶을 주관하는 사람이다. 그의 생각이 그리스도로 가득한 삶, 하나님의 일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을 위해 사는 삶, 비록 육에 관련된 사회 생활에 임하지만 영이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희락과 평안과 생명이 있다. 고통중에도, 핍박중에도, 환란중에도, 심지어 죽음의 상황속에서도 기쁨과 감사가 있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는 삶은 십자가 후에 부활 승리가 있고 영원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성령으로 행하고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다. 인간의 의미와 삶의 의미를 예수 십자가에서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 생명과 평안이 이르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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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하나님의 자녀

(롬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칼빈(Calvin)은 "하나님을 아는 일은 곧 인간을 아는 일이다."고 말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될 때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과학은 인간이 어떻게(how) 생겼는가를 말할 수는 있으나 무엇을(what)을 위하여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뉴욕 대학 교수 '봐이다' 박사는 인간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환산한 바 있다. "사람의 몸에는 다량의 석회질과 염분이 있다. 또 장난감 대포 한 번 쏠 만큼의 포타슘, 약 한 봉지 가량의 마그네슘, 성냥 3천개 가량의 인이 있다. 그리고 커다란 못 한 개 가량의 철분, 한 컵 정도의 설탕, 비누 다섯 장 정도의 지방이 들어 있다. 따라서 무게 약 18관 되는 인간의 가치는 98센트(약800원)가 된다." 성경 창세기 1, 2장을 보면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지만 인간은 보잘 것 없는 한 줌의 흙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고 했다. 인간 타락 이전에는 사람을 "생령"이라고 했다. 성령이 인간과 함께 하므로 인간은 존재 의미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하여 성령이 사람을 떠나므로(창6:1-8)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스스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죄로 타락한 인간은 죄의 문제를 해결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인간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그 존재 목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과학, 천문학, 철학, 문학, 예술 등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편리한 것들이지만 인간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밝혀주지는 못한다. 모든 것을 알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몰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고 있으면 그는 생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며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실존의 변화이다. 유명한 신학자 하르낙(A.Harnark)은 "예수 믿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 생각하고 이웃을 형제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이는 세가지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아 의식을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그리고 이웃은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 자매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기독교인의 윤리관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냐?"고 하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너희는.....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고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양자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히브리 법이나 구약 전통에는 뚜렷한 양자법이 없기 때문에 로마의 양자법을 이해하므로 본문의 뜻을 바로 깨달을 수 있다. 로마법에 아버지는 가족에 대한 절대적인 처분과 지배권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히 다른 가족으로의 입양을 매우 힘들고 까다로운 절차를 만들었다. 바울의 생각에 있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입양의 결과이다. 로마의 양자 법에 입양 결과는, 첫째 그가 가졌던 옛 가정의 모든 권리를 상실하고 그의 새 가족의 완전히 합법적인 아들의 모든 권리를 얻게 된다. 둘째 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된다. 그후에 진짜 혈연의 다른 아들들이 태어난다해도 그의 권리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양도할 수 없이 그들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된다. 셋째 법률상으로 양자의 모든 옛 생활은 완전히 씻어진다. 예컨데 법적으로 그의 모든 부채는 취소되고 그 부채는 전혀 없었던 것 같이 깨끗이 씻어졌다. 넷째 양자는 새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이제 새 의무에 매이게 된다. 이 입양의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에 죄의 절대적인 소유하에 있었고 우리 죄 많은 인간 본성의 절대적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당신의 절대적인 소유로 만드셨다. 옛 생활은 이제는 우리 위에 아무런 권한이 없고 하나님이 절대권을 갖고 계신다. 과거는 다 취소되었다. 과거의 부채는 다 청산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생을 시작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의 상속자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상속한 것, 또 상속하는 것은 우리도 상속한다. 만약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했다면 우리도 그 고난을 상속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생명과 영광으로 부활하셨다면 우리도 그 생명과 영광을 얻게 된다(롬8:16). 예수 믿는 사람은 이제 그 받는 영광과 고난의 의미가 세상 사람과 다르다. 불신자의 영광은 자기의 영광이며 고난은 자기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지만, 신자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는 신자의 고난은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성숙이며 하늘의 상급이 된다(마5:11-12).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받을만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고 받을 만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으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놀라우신 사랑과 자비로 길 잃고, 무기력하고 가난에 시달리고 빚진 죄인을 취하여 자기의 자녀로 입양하셨다. 그리하여 그 빚은 다 청산되었고 힘들여 벌지 않은 사랑과 영광을 상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롬8:17)고 했다. 성령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령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확증하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과 영광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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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영광스런 소망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9) 피조물의 고대 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한국 동란을 취재해서 미국에서 퓰리처 상을 받은 바 있는 라이트 허긴스 기자가 압록강변에서 겪은 이야기다. 영하 42도의 추운 날씨에 포탄맞은 군용 트럭옆에 기대서서 깡통 통조림을 먹고 있는 해병대 용사들, 참호용 칼로 통조림 콩을 찍어 먹고 있는 그들의 옷은 대나무처럼 얼어 붙어서 빳빳해지고, 얼굴과 수염은 흙으로 범벅이었다. 이렇듯 참담한 모습을 목격한 허긴스 기자는 생각하기를, 세계에서 제일 잘 산다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어쩌다가 이 전쟁에 불려와서 이 모양이 되었는가! 너무나 괴로워 신음하다가 병사들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내가 만일 당신들이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당신들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겠는가?" 그들은 한참 생각했다가 이구동성으로 "우리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려 줄 수 있는 복음이 무엇일까? "내일"을 주는 것이다. 내일이 있을 때 인간은 어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되며 살아야 할 이유와 가치를 갖는다.

사람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인류 역사에 소망은 참으로 있는 것인가? 역사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한 때 진보주의 철학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역사를 상승하는 직선으로 표시하여 원시적이고 미개한 인간의 역사가 점진적으로 높은 수준의 문명과 문화로 발전해간다고 보았다. 언젠가는 모든 악과 전쟁과 가난과 갈등이 사라져 버린 완전한 사회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어났던 사건들은 이러한 견해를 산산히 부수어 버렸다. 또 다른 견해는 역사를 나선형의 도형으로 보는 것이다. 즉 발전과 퇴보를 거듭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발전해간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앞선 진보주의 견해를 수정한 것에 불과하며 역사속에 빗나간 견해임이 들어났다. 극도의 비관적인 견해가 있다. 마치 술취한 파리가 발에 잉크를 적시고 백지 위를 비틀거려 생기는 자국처럼 역사는 그 방향도 없고 그 목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의 가장 유명한 신약성경 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은 "오늘날 우리는 역사의 종국과 그 의미를 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역사에 있어서의 의미 문제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고 말했다. 슈펭글러(Spengler)는 진보란 불가능하며 역사는 운명적으로 불가피하게 퇴보하고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토인비(Toynbee)는 많은 연구 업적을 발표했는데 그는 인류의 문명사에서 역사의 의미와 유형, 그 주기를 찾아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한편 니이버(Niebuhr)와 러스트(Rust), 피퍼(Piper)와 같은 학자들은 성경적인 계시 진리 가운데서 역사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고자 시도했다.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속에 기록되어지고 해석되어진 대로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동가운데서 발견되어질 것이 확실한 것이다. 역사의 키(Key)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비관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과 공의를 믿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하신 인간과 인간 역사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신의 목적을 나타내시고 계시다고 믿는다. 성경 전체의 중심 주제는 역사가운데서의 하나님의 구속 활동이다. 인간과 역사의 소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가질 수 없다. 어거스틴은 "사람이 세운 이 세상 나라는 무너진다. 무너지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로마서 13장 12절에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는 의미 심장한 말씀이 있다. 신앙적인 염세주의와 신앙적인 낙천주의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멸망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어거스틴이 무너져가는 로마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어 가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빛이 오면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역사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도 바로 이 그리스도 중심의 역사관으로 관철되어 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탄식하는 자연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맞게 되는 역사의 지평선 저 너머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동물과 식물도 함께 저주를 받아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고 있다. 함께 영광을 누려야 될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피조물이 다 이제 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2)" 이렇게 인간과 더불어 만물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구원은 영과 몸의 구원을 가리키는데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 영의 구원을 받았으나 아직 몸의 구원은 이르지 않았다."영광스런 몸"의 구원을 탄식하는 가운데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영광스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마라나다"(주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현재의 아픔과 고통을 인내하면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이러한 영광스러운 소망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될 때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죄의 유혹과 가난과 질병과 죽음까지도 이겨 낼 수가 있다. 성령은 우리의 이런 소망을 확증시켜 주신다. 인류의 소망은, 역사의 소망은 바로 예수다. 예수에게서 인류는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스런 소망은 예수를 믿는데서 이루어진다. 믿음이 곧 소망이며 힘이며 세상을 이겨나가는 능력과 지혜가 되는 것이다. 인류의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에 대한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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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선하게 하시는 능력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어느 어촌의 조그마한 배들이 고기잡이를 떠났다. 이 어촌에는 고기잡는 일 외에 다른 직업이 없었다. 그런데 고기잡이 나간 배들이 돌아와야 할 시간에 돌아오질 못했다. 풍랑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온 동네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바닷가에 나가서 남편 혹은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파도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때에 설상가상으로 어느 집에서 어린아이가 집을 보다가 촛불을 넘어뜨려 불이 났다. 동네 사람들은 합심해서 이 불을 끄느라고 남편, 아버지를 기다리는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물동이를 다 동원해 정신없이 몇 시간을 싸우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는 중에 배가 돌아 왔다. 무사히 풍랑을 이기며 돌아 온 것이다. 아침이 밝아왔고 어젯밤의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불끄는데 누가 가장 애썼고, 풍랑은 또 어떠했느냐, 얼마나 서로가 힘이 들었느냐 하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어느 어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웬 불인지는 몰랐으며 어쨋던 불이 보여서 그것을 바라보고 목표를 정해서 결국 집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집에 불이 나지 않았으면 우리 배는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 두 손을 모았다고 한다. 고기잡이를 나간 배들이 풍랑을 만난데다가 어촌에 불까지 났으니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 마을에 불행이 닥친 것 같았으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당하는 고난과 실패, 환난, 병고, 아픔, 슬픔, 그리고 죽음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모든 원인이 인간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선으로 인도하신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대대에 미치리라(시100:5)는 믿음을 가지고 원망, 불평이 전혀 없이 시종일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생활이 삶의 지혜인 것이다. 이러한 삶을 가지기 위해서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이다(본문 27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기에" 성령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우리는 미래를 내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시간도 앞을 내다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인지 해로울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믿고 감사하며 성령에 의존하여 기도할 뿐이다. 둘째, 우리는 어떤 주어진 상황하에서도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것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자기를 해칠 수밖에 없는 것을 달라고 하는 어린아이의 입이 될 때가 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보다는 그 아이에게 무엇이 좋은가를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든지 그 아이가 원치 아니하는 일을 하게끔 설득시켜야하는 부모의 입장이 될 때가 가끔 있다. 우리는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간절한 "탄식"뿐이다. 성령은 그것을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전해드리는 것이다. 결국 완전한 기도는 단순히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러나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기도하는 자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세상 역사는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 죄와 사망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를 통해 나타나셨다.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반드시 구원하신다. 예수 믿는 사람은 현재 실패했든 성공했든, 건강하든 질병에 걸렸든, 역경에 처했든 순경에 처했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어진 모든 상황을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고 믿어야 한다.

한 청년이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대학의 신학 과정을 마친 후 선교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 청년은 너무 기뻐서 당장 옷과 구두를 준비하려고 시장에 나갔다. 그런데 그만 자동차 사고를 당해 부득이 한쪽 다리를 자르게 되었다. 의족을 하게 된 그는 크게 낙망하여 "하나님, 제가 선교사로 나간다는데 어찌하여 다리를 자르시는 겁니까?"라고 울부짖으며 괴로워했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낙심해 있던 그는 어느 날 아프리카로 갈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설마 나같은 사람도 받아주겠는가'하는 마음으로 신청을 하였으나 합격하여 마침내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떠나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그는 식인종들을 만나게 되어 죽음의 직전에 이르렀다. 식인종들이 빙 둘러싸고는 이 백인을 잡아먹겠다며 축제를 벌인다. 그 때에 이 선교사는 의족인 자기의 한쪽 다리를 뚝 떼어서 저들에게 던졌다. 고무다리를 받아든 식인종들은 이것을 먹어보더니 질겁을 했다. "이것은 신이다!"라고 하면서 이 선교사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을 쉽게 전도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선교사는 그 때에 가서야 자기의 다리 하나가 잘린 이유를 깨달았고 한다. 우리는 가끔 어리석은 원망을 많이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단지 어리석고 미련하여 그 얄팍한 부분적인 지식으로 스스로 판단하며 스스로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요셉은 어린 나이에 형들에 의해 이방나라에 노예로 팔려갔으나 그는 항상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간직하고 하나님께서 또한 그와 함께 하시므로(창39장) 마침내 형통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나를 부르셨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져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나아가 나를 사랑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그 모든 일들을 감사하며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유명한 찰스 스펄젼 목사님이 어느 날 농촌을 방문하는 중에 어떤 농장 건물 꼭대기에 세워놓은 바람개비를 보았다.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그 뱅뱅 돌아가는 바람개비의 꼬리에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써붙여 놓았다. 그것을 보고 목사님은 좀 못마땅하다 싶어 거기 있는 한 농부를 보고 "형제여, 하나님의 사랑이 이 바람개비처럼 변덕이 많다는 말이오? 이찌하여 바람개비에다 저런 소리를 써붙여 놓았소?"하고 물어보았고 한다. 그랬더니 농부가 대답했다. "그게 아닙니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든지 다 하나님의 사랑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바람이야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든 바람을 따라 바람개비는 돌아가게 되어 있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부느냐는 상관이 없다. 그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내 자세만 바로 하면 모든 것이 사랑이기에 이렇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써붙였노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형편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얼굴과 얼굴로 대하는 정면의 방향으로 내 자세만 바로 정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이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목적은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함이다(본문 30절). 예수믿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삶의 좋은 일만이 아니라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처럼 고난의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부활 승천의 영광과 영화가 있었던 것처럼 삶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섭리에 순응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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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끊을 수 없는 사랑

(롬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젊은 선교사 죠지 애틀리는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손에 있는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대로 쏘면 저들을 죽이고 자기는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로 방아쇠 한번 잡아당기면 끝날 일인데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 이 마을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는 영영 끝이 나고 말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인 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가 믿으려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그대로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찢기며 비참하게 죽었다. 죽은 다음에 보니 그에게는 그런 놀라운 총이 있었고 탄환도 열 발이나 남아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원주민들은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데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다. 확실히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 주실 만큼 충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보증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격렬했던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샌디에이고의 외곽지대에 있는 화려한 어느 저택에 전화벨이 울렸다. 집주인되는 부인이 전화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이러하다. "엄마, 저예요. 제가 죽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아들의 음성이었다. 어머니는 한시바삐 그 아들이 보고 싶어 볼멘소리를 한다. "당장에 달려오지 않고 전화는 무슨 전화냐?" 그러자 아들은 자못 심각하게 말했다. "이제 가겠습니다. 그런데 불쌍한 내 친구와 함께 갈까 합니다. 이 친구는 함께 싸우던 전우인데 지금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으며, 다리 하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는 친구라서 저와 같이 있으려고 데려왔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며칠동안만 같이 있으려므나."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아니예요. 오랫동안 입니다." 어머니는 다시 이야기했다. "그러면 한 일년 함께 있으려므나. 처음에는 그럭저럭 함께 지낼 수 있겠지만 세월이 가면 무거운 짐이 되어 괴로울 것이다." "아니예요. 일생동안 같이 살 겁니다." 이것이 아들의 대답이었다. "너, 전쟁에 나가더니 감상주의자가 되었구나. 그런 사람을 길게 사랑하기 쉬운 줄 아느냐?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아도 얼마간 지내보면 싫증이 나고, 그리고 나중에는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이 말에 "그럴까요?" 하고 아들은 수화기를 놓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군 본부로부터 발송된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다. 전보의 내용은 청천벽력이었다. "당신의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투신 자살했습니다. 시체를 찾아가십시오." 어머니는 허겁지겁 달려가 시체를 확인해봤다. 시체는 틀림없는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고, 다리 하나가 없었다. 이토록 불구자가 된 나를 어머니가 어떻게 사랑해줄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확인해보았건만 결국은 짐이 될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했던 것이다. 그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만 것이다.

누가 아들을 죽인 것인가? 그는 사랑 하나를 확인하고 싶었던 던 것이다.'그렇더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아도 장차는 짐이 될 것이라고 하니 무슨 용기로 살 수가 있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확증된다면 현재 나에게 주어진 상황과 그 모든 것이 어떠하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본문31절)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중에도 사단은 성도들을 공격할 틈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단의 대적 행위앞에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사단이 성도에 대해 대적하는 행위는 첫째, 송사하는 행위(33절), 둘째, 정죄하는 행위(34절), 셋째,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는 행위(35절) 등이다. 욥의 경우에도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송사하고 정죄한 후(욥1:9-11,2:4,5) 욥에게 갖가지 환난을 가함으로서 욥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며 인정하시며 사랑하시는 한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대적할 수가 없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송사하리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사단의 대적 행위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당하게 되는 어려움들이 일곱가지로 열거되고 있다(35절). 바울이 생전에 체험하게 되었던 것들이다. 그 종류와 의미는 다음과 같다. 환난(모든 종류의 고통이나 손실), 곤고(내면적으로 당하는 곤경, 불안, 걱정 등), 핍박(부당하게 폭력으로 고통받는 상태), 기근(굶주림과 가난), 적신(헐벗음과 수치), 위험(사람과 자연으로부터 당하는 예기치 못한 피해), 칼(세상 사람들의 무력), 등이다. 이러한 사단의 대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튼튼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사랑의 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으면 이 모든 것들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스런 영화에 참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요 축복인 것이다. 사랑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마귀는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우리를 괴롭힐 수는 있으나 정죄하고 심판할 권세가 없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정죄와 심판하지 않으시며 사랑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는가?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사50:8)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사50:9)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비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된다. 이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떤 세력도, 어떤 극한 상황도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선언이 본문 37절 말씀이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줄을 끊으려는 세력들이 38,39절에 열거되고 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망(육체로 사망케하는 세력)과 생명"은 존재에의 극한 상황을, "천사들(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과 권세자들(성도들을 대적하는 악령과 세력들)"은 피조된 영적 존재들의 극한 상태들을, "현재 일(현재 역사하고 있는 모든 세력)과 장래 일(미래에 역사할 모든 세력들)"은 시간적인 극한 상황을, "능력(천사, 권세자들과 같은 영적 존재)"은 영적인 적들을, "높음(지상, 하늘 위에 있는 모든 세력)과 깊음(지하, 물속에 있는 모든 세력)"은 공간의 극한 상황을, "아무 피조물"은 피조 세계 전체 상황 등을 뜻한다.

사랑은 이 모든 것들을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세상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나를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마귀는 패배한 것이다. 한 수도사가 리비아의 어느 사막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수도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경건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사막에서 금식을 하며 극기와 고행으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마귀가 다가와서 이 수도사를 시험한다. 육체적인 욕망을 비롯하여, 물질로, 의심으로, 공포로, 아무튼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시험을 해 보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마귀는 고민에 빠졌다. 그 때에 지나가던 친구 마귀가 "내가 한번 해볼게" 하더니 그 수도사에게 다가가서 "당신의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답니다."라고 했다. 그 말에 수도사의 낯빛이 대번에 변하더라는 것이다. 잘 이겨나가다가 끝내는 질투에서 넘어지고 만 것이다. 이는 특별히 믿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이다. 선하게, 의롭게, 깨끗하게, 진실하게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는 질투에서 넘어지고 만다. 마귀의 최고의 수단이 질투이다. 기도로써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변화되지 않는다. 기도로써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변화되지 않는다. 사단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십자가의 사랑이다. 기도의 능력은 알면서도 사랑의 능력을 모른다면 그 기도는 주문에 불과 한 것이다. 원수를 이기는 비결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매를 맞아도 핍박을 받아도 모든 일에 실패를 해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기만 하면 성공자요 승리자요 행복한 자이다. 어려움과 사단의 대적이 강할 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감사하며 찬양하자! 생활속에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이 사랑을 노래하며 세상을 이기는 사랑의 실존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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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진정한 구국 사상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9: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9: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롬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일본의 내촌감삼은 "내게는 두 개의 제이(J)자가 있다. 하나는 Japan(일본)이요 다른 하나는 Jesus(예수)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도 두 개의 씨(C)자가 있어야 겠다. 하나는 Coree(불어로 Korea란 뜻)요 다른 하나는 Christ(그리스도)이다. 잔악한 일제의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애국 지사들이 죽어 갔다. 안중근, 윤동주, 유관순 등과 같은 이들의 민족을 향한 열정과 투쟁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의 조국은 없었을 것이다. 해방이 되었지만 나라가 반으로 동강이 나서 반은 소련이 그 나머지 반은 미국이 강점하고있던 시기에 자주 노선을 역설하면서 통일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시던 민족의 지도자 김구 선생이 있었다. 그는 김일성이 소련에 붙어 의지하고, 이승만은 미국을 등에 업고 민족의 진정한 통일과 장래보다는 정권에 눈이 어두워 있을 때, 민족의 앞날을 위해 전전긍긍하다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이들 애국지사들은 모두가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의 애국심이 당시의 학교와 교회에서 받은 성경 교육에 기인한 사실들임을 생각할 때 이들에게 미친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역사를 보게 된다. 나라를 성경으로 통치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64년 재위 동안 대영제국을 건설했다. 애국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에 대하여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민족을 위해 늘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본문1,2절). 그가 비록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이기는 하지만 인류의 참된 살 길인 복음이 그 누구에게보다도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전파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딤전 5:8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다. 본문 3절의 "친척"은 동족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 민족만 사랑하지말고 다른 민족을 또한 귀하게 볼 것을 요구하신다. 요나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 니느웨, 유대인을 가장 괴롭힌, 유대인이 가장 증오하는 니느웨에 가서 그 민족이 살 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신본주의(神本主義)에 입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혈통만을 사랑하는 동족애는 교만의 죄를 범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자기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본문 4,5절) 바울이 이스라엘 동포를 사랑한 이유는 그 민족이 일찍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 제일주의, 신본주의에 따른 애국 사상이었지 민족 지상주의사상이 아니었다. 민족과 국가는 다 귀중한 것이다.그러나 하나님보다 먼저 민족 지상주의를 부르짖은 자와 부르짖는 민족의 마지막은 다 같은 운명에 빠진다. 이태리의 뭇솔리니는 일찌기 일어나서 이태리 청년들에게 하는 말이 이태리 사람들이 제일 먼저 구할 것은 옛날 한 번 없어진 로마 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것이라고 했다. 국가가 지상이라고 하며 이태리인들은 먼저 국가를 구하자고 외쳤다. 많은 이태리 청년들이 그 부름을 따라서 갔다. 그러나 그 다음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하나님 나라보다 먼저 국가를 찾으면 이와 같이 동일한 운명에 빠지게 된다. 신명기 9:26-28의 말씀을 보더라도 모세는 민족을 위하여 민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민족을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신9:26-28) 여호와께 간구하여 가로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한 번은 미국 대사를 만나서 하는 말이, "당신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이 북미에 왔다가 하나님도 찾았을 뿐아니라 금도 찾고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계속해서 그는, "그러나 우리 아르헨티나의 경우 우리 조상의 대부분이 금을 찾아 돈을 모으기 위해서 아르헨티나에 이주해 왔는데 지금 보니 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민족 국가가 잘 사는 길은 어떤 정치제도나 경제 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도나 구조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변화가 더욱 더 중요한 민족 국가 번영을 가져 오는 것이다. 세계 모든 민족이 살 길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 세계 만민을 사랑하는 길은 예수 복음을 전하는 길밖에는 없다. 민족을 사랑하는 진정한 방법은 복음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바울이 크게 근심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지않는 것이었다. 바울은 자기 동족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찢어진 가슴의 날카로운 슬픔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배척하는 죄를 미워한 것이지 자기 동족을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 죄를 미워한 것이지 죄인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유대인을 노함으로 채찍맞을 백성으로 본 것이 아니라 갈망하는 사랑으로 동정해야 할 백성으로 본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 형제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저주(아나테마,anathema)라도 달게 받겠다는 것이다. 바울의 생애중에 가장 귀한 것은 아무 것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롬8:31-39).그러나 만약 그것이 자기 골육 지친을 구원하는데 어떤 도움이 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아나테마,anathema)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바울은 잠시도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유대인의 지위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본문4-5절에 유대인들이 지닌 특권을 여러가지로 열거하고 있다. 첫째,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이라는 말씀에서 이스라엘이란 이름 자체가 복이다(창32:28)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왕자'라는 복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신14:1,32:6,출4:22,호11:1 참조). 보어햄(Boreham)이란 소년이 어디에선가 그가 소년 시절에 어떻게 아는 친구의 집을 방문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는 들어가서는 안될 방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그가 그 방 건너편에 앉아 있었는데 그 때 그 방문이 열리며 그 안에 자기 나이의 한 소년을 보았다. 그러나 그 소년은 무서운 백치 상태에 있었다. 그는 그 소년의 어머니가 그 소년 곁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는 틀림없이 어린 보어햄이 건장하고 온전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아들을 보고 비교함으로써 그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그는 그 어머니가 그 백치 소년의 곁에 무릎을 꿇고 고통스럽게 대성 통곡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를 먹이고 입히고 사랑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이렇게도 몰라주는구나."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셨을 말씀일 것이다. 이 경우에는 다만 더 심한 것뿐이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의 예수 배척은 고의적이고 의식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마21:33-46 참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왕자란 특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예수를 모르고 배척하는 자기 동족에 대해 가슴을 앓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영광"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보러 내려오실 때 내려 온 하나님의 웅장한 빛을 말한다.(출16:10).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하나님을 배척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여러가지 이적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지만 오히려 예수를 배척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세상 길을 택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마21:39-41). 셋째, "언약"은 이스라엘은 언약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그 첫번째 언약은 홍수 후에 노아와 맺어진 것이다. 그 언약의 표징은 하늘에 있는 무지개로써 다시는 이 땅에 홍수가 나지 아니한다는 약속인 것이다. 두번째 언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이다. 그 표는 할례였다. 세번째 언약은 시내산에서 한 민족과 맺은 언약으로써 십계명, 율법이었다. 네번째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이다(고전11:23-26).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반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셨고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축복의 관계들을 거절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접근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의지의 무서운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넷째, "율법을 세우신 것과"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했다는 말한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고 변명할 수가 없다. 율법을 통해 삶의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 만약 그들이 범죄했으면 그들은 모르고서가 아니라 알고서 범죄한 것이었다. 알고서 지은 죄는 모든 죄악 중 가장 큰 죄악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모독죄이다. 다섯째, "예배"는 성막 혹은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길로써 예수를 보내주셨건만(요4:20-26) 그들은 거절했던 것이다. 여섯째, "언약"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 이스라엘은 그 민족의 운명을 모른다고 절대로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안에 그들을 위해 쌓아 둔 임무와 특권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그들이 크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신28:1-14). 그러나 크게되고 머리가 되는 기준이 되는 말씀이신 예수를 거절했던 것이다. 일곱째,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은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 즉 아브라함(4:1-3), 이삭(7절), 야곱(13절), 다윗(1:3,4:6-8) 등이 그들의 조상이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실 때 유대인의 혈통을 택하셨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를 그들은 배척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절당하신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들 뒤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찢어진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처럼 많은 특권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주역이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함이었다. 민족을 사랑하는 길은 바울이 그토록 갈망했던 민족 복음화를 통해 세계 구원의 주역이되는 것이다. 진정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면 바울이 가진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희생과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슴에 안고 이 땅에 예수를 줄기차게 전해야 할 것이다. 분단된 조국을 통일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저 북녘 땅에 복음화가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뜻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역사의 완성은 이 천국 복음을 통한 세계 복음화로 성취된다. 이 나라를 복음화하여 세계 복음화의 주역이 되게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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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하나님의 선택.

(롬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롬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롬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만약 유대인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좌절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일까? 결코 그렇치않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좌절과 실패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6절)라고 바울은 말한다. 사실상 초기(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전) 기독교는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 모두가 예수를 배척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선택의 과정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유대만이 아니었다. 마태 복음 1장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인 계보를 살펴봐도 '라합', '룻' 등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집행해 나가신 민족의 계보는 절대로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섭리가운데는 순전한 아브라함의 혈통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이 계속되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선택된 신분은 결코 혈통적인 이유나 인간의 장점이나 노력으로 획득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다수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현실,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현실에 큰 비애를 느낀 것이다. 이방인의 다수가 구원에 참여하고, 유대인 다수가 구원(예수)을 거부하는 현실이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사는 날 동안 끊이지 않는 슬픔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자신의 동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파문,Anathema)를 받아도 원하는 바라(9:3)고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다. 그 결심이 실제 이스라엘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만큼 바울의 아픔은 더욱 더 큰 것이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 예수를 영접할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의 선택받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뿐이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의 두 가지 유형을 설명하고 있다(7-13절). 아브라함은 두 아들이 있었다. 하나는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요 다른 하나는 그의 처 사라의 아들 이삭이다. 이스마엘과 이삭 두 사람은 틀림없이 다 아브라함의 혈육의 후예들이다. 육체적으로 그들은 둘 다 그의 아들이다. 이스마엘은 안간적인 생각과 판단에서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태어났고, 이삭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불가능한 나이였지만 약속대로 사라의 몸에서 출생되었다. 이삭이 나서 자랄 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날이 왔다. 사라는 언잖게 생각하고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아 이삭 혼자서 상속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기를 아주 꺼렸으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이는 그의 자손이 그의 이름을 유지할 것이 이삭안에서였기 때문이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창21:12) 이스마엘은 율법주의와 자기 노력을 상징하고 이삭은 믿음을 상징한다. 이스마엘은 자연을 따라 났고 이삭은 자연을 거스려 태어났다. 이 두 아들은 영적 진리의 두 가지 유형이 되고 있다. 이스마엘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아들로써, 자연적 탄생만을 경험하고 위로부터의 거듭남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상징이다(요3:1-8).그는 종으로서 태어났고 율법에 매여 사는 사람들의 상징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삭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이들을 상징한다. 이삭은 영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리스도처럼 영으로써 잉태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성령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 기적을 이루어 그를 낳게 했다는 뜻이다(갈4:21-31). 이스마엘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방법과 욕망으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삭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아들을 낳는다는 것조차 불가능한 때에 낳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아들이었다(창18:10-44). 진정한 후계권이 주어진 것은 약속의 아들에게서 였다. 바로 여기에 모든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이 다 유대인, 즉 하나님의 선택된 자로 인정될 수 없다는 증거가 있는 것이다. 유대인이 약속의 자녀인 이삭과 같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선택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1-13)

다른 한 가지 예를 보자(10-13절).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그의 태속에는 두 민족의 조상이 될 두 아이가 있다. 그런데 때가 이르면 형이 아우를 섬기고 그에게 종이 되리라는 것이다(창25:23). 이리하여 쌍동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다. 그리고 사실은 에서가 형이었으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에게 떨어졌고 그 야곱의 계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 이 이야기의 결론을 맺기 위해 말라기1:2-3의 말씀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이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의지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성장해가면서 에서는 장자권을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게 된다. 창세기 25:34에 이같은 에서의 태도를,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라고 표현했다. 에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복의 근원인 장자권을 경시함으로써 스스로 자유 의지를 발동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했다. 반면 야곱은 비록 인간적인 비열함이 있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의 복을 사모한 열심이 이같은 계교를 꾸미게 되었다. 이는 야곱의 근본적인 신앙의 행위를 말해 주는 것이다. 야곱은 자유 의지를 발휘하여 구원의 적합자로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옵1:18) 이 말씀과 말1:2-4을 보면 야곱이 구원을 받아 약속의 자녀가 되고, 에서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에는 하나님의 주권의 작용이자 인간의 자유 의지의 충분한 발휘라고 할 수 있다.

"(말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말1: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말1: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페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로마서 9:22,23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그릇에는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긍휼의 그릇에게는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신다고 하셨다.

"(롬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서에게 충분한 회개의 기회를 주셨음과 야곱에게는 더 큰 은혜를 주셨음을 암시해 준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진노를 받은 에서는 스스로의 자유 의지를 하나님께 대적하는데 사용함으로써 구원에서 제외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것 배후에는 하나님의 행위가 있다. 심지어는 독단적이고 우연하게 보이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목적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던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부르시고 선택하셨다. 내가 죄인이었을 때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 내 뜻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먼저 있었다. 내 행위가 있기 전에 하나님의 행위가 먼저 주도적으로 역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먼저 주어졌다. 내가 먼저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믿도록 내게 역사하셔서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믿음도 하나님의 은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갖추어서 아들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된 후에 하나님의 아들답게 성장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장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장은 성령의 열매들로써 나타난다(갈5:16-24).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시고 선택하시는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선택은 선하시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사랑의 예수를 예비하셨다(창1:15). 내 존재 이전에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신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서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진실로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 선택의 사랑을 느끼고 그 오묘한 하나님의 경륜과 비밀에 깊은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엡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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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토기장이의 비유

(롬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9: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한 사람은 택하시고 다른 사람은 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놓고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본문14절)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느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 불의한 행위를 범하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일제 말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모든 젊은 사람들이 일본을 위해 학도병에 잡혀 나가는데, 일본에서 공부하던 어느 부자집 아들이 몰래 도망하여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동네 사람들은 이 아들이 돌아왔다고 축하하며 복 많은 아들이라고 부러워하니 그 아버지는 두고 봐야 안다고 말했다. 얼마 후에 난데없이 주인없는 말 한 필이 그 동네에 들어왔다. 그런데 말을 탈 줄 아는 사람은 부자집 아들밖에 없어서 주인 없는 말은 결국 그 아들이 타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아들도 돌아오고 말 한 필까지 생겼으니 정말 복이 많다고 부러워들 하니, 이번에도 그 아버지는 두고 봐야 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들이 말을 타다가 낙마를 해서 팔이 부러졌다. 다시 동네 사람들은 말하기를, 괜히 말이 들어와서 귀한 아들의 팔을 부러뜨렸다고 참 안되었다고 동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아버지는 두고 봐야 안다고 했다. 정말 얼마 후에 팔이 부러진 것으로 큰 화를 면할 일이 생겼다. 정부가 젊은 청년들을 일본 군인으로 붙잡아 가는데, 이 아들은 팔 때문에 제외된 것이다. 사실, 어느 길이 행복하고 ,누가 더 불행한지는 아무도 모르며 두고봐야 한다. 정말 우리들의 행, 불행은 그리스도의 날, 즉 역사 최후의 날에 가서야 말 할 수 있다. 세상에서 아무리 호화롭고 영광스럽게 살았다 하더라도 그가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이라면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누가복음16:19-31에 나오는 나사로는 세상에서 비록 거지였지만 죽어 낙원에 들어가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반면 그 부자는 세상에서는 가장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살았던 것 같으나 결국은 지옥에 들어가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지금의 눈에 보이는 상황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그가 아무리 세상 부귀 영화 권세 명예를 다 누리고 있다 하더라도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사람은 행복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항상 은혜인 것이다. 출애굽기 9장 26절에 등장하는 모세는 유대인이었고 바로는 이방인이었다. 둘 다 죄인들이었다. 사실 둘 다 살인자들이었으며 하나님의 경이와 기적을 보았다. 그러나 모세는 구원을 받았고 바로는 버림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일으켜서 당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셨다(본문17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다. 바로는 통치자였으며, 모세는 노예였다. 그러나 자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동정을 받은 것은 모세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에 있어서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그 분의 선하신 의지와 목적에 따라서 행하신다. 따라서 선택은 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의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으며 애굽을 정죄하셨는데 이것은 주님의 절대 주권적인 목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비를 베푸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선하시기 때문이다. 바로의 '강퍅함'에 대하여 출애굽기 7-14장에서 최소한 15회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시며, 그 능력을 드러내시므로 바로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오히려 바로는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완악하고 강퍅하게 하였다. 잘못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에게 있었다. 얼음을 녹이는 그 태양이 또한 진흙을 굳게 한다. 하나님은 바로를 다루심에 있어 불의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믿을 많은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는 왜 그처럼 많은 슬픔과 비극이 있습니까? 부자들은 뇌물로써 석방이 되고 죄없는 사람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제발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지 말아요!"라고 했다. 이같은 고민을 예레미야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 바벨론은 왜 강해지며, 또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 나라는 전쟁을 모르는데, 하나님을 믿는 이 백성은 왜 포로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죄가 있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느브갓네살보다야 좀 낫지 않느냐 하는 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데 백성들은 회개를 하지않고,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애굽으로 내려 간다. 이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 어찌해서 이런 일이 있으며 이 백성이 이렇게도 완악합니까? 어찌하여 악이 승리를 하게 하십니까?"하고 묻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대답으로 토기장이의 집에 가 보라고 말씀하신다(렘18:1-6). 토기장이의 집에 가서 보니 토기장이는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며, 큰 것, 작은 것을 제멋대로 빚고 있었다. 이것을 구경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예레미야에게 들려 온다. "보라,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어서 제멋대로 그릇을 만드는데, 내가 이 백성의 역사를 주관하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목적이 있음을 예레미야에게 일러 주시며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온전하신 그 뜻에 대해서 겸손한 자세로 인정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이 은총의 역사에 대해서 항의 내지는 불평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를 위배했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 "네 생각에 이 사람이 복 받았다, 저주 받았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그렇게 간단하게 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깊은 곳에서 만난다. 그러므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복받았다', '저주받았다','행복하다','불행하다'라고 해석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해가 되는 일은 이해가 되는대로 감사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안 되는 대로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의로우시고 선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도예가가 자기의 작품을 만들 때는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어떤 작품을 만들 것인가를 먼저 선택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도예가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그 도예가가 어떤 작품을 만들지라도 그는 최선을 다하여 깊은 애착과 사랑을 가지고 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삶과 진실된 사상을 담은 자기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든간에 그 선택은 깊은 사랑과 하나님의 뜻이 담겨진 선택인 것이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은혜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이 선택은 인간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인간의 지위나 물질, 학식, 교양의 있고 없음 등의 인간적인 모든 조건이 하나님의 선택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인간의 문명과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 가고 있어도 인간은 스스로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 인류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한 가난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학교에 갈 만큼 넉넉하지도 못했고, 어느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할 만한 기술도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사진술을 배워 사진 기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진술을 엮어놓은 책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은 서점의 착오로 사진술에 대한 책은 오지 않고 발성법에 대한 책이 왔다. 이 소년은 너무 가난하여 그 책을 돌려보낼 만한 우송료도 없었거니와 반송하는 방법도 몰랐다. 소년의 실망은 너무 컸다. 이 소년은 하나님께 기도했다. 실망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리고 할 수 없이 발성법에 대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이 소년은 그 책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가 된 찰리 맥카시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은혜는 오늘 이 세대에 이방인에게나 이스라엘 사람에게나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호1:10) 라고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은혜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 구원의 선택이 이루어진다.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주춧돌이 되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어 심판의 도구가 된다(본문30-33절). 죄인인 인간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껴안고자 친히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다하고, 오직 자신들의 율법 준수와 민족적인 특권의 의무에 젖어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생명을 주시는 산 돌,예수 그리스도가 오히려 거치는 돌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에서 "돌"과 "반석"은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돌과 반석에 부딪치고 거치게 되면 죽고 무너지게 되지만, 그 위에 세우면 튼튼하게 세워질 수 있다.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돌에 부딪혀서 망했지만 이방 사람들은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반석'위에 집을 지었다. 이것이 교회인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무 의와 공로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얻은 구원이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며,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그 은혜에 우리의 삶 전체를 맡기며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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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구원에 이르는 길

"(롬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롬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롬10:7)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롬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은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다(1절).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열심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잘못된 방식의 신앙(3,4절)에 대해 비난을 하면서도 바울의 변함없는 욕망은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것이었다. 자기는 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리고 잘못되어도(롬9:1-3) 그들 유대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영혼의 구원을 진심으로 소원하며 기원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자기는 잘못된다 하더라도 남이 축복받고 형통하게 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예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벧후3:9). 기도의 정수는 마음의 소원이다. 그리고 이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가 뒤따라야 한다. 바라고 소원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못된 원수라도 선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도 우리에게는 일종의 축복이다. 사랑은 남을 최상으로 여기며 그들의 말과 행동을 높이 평가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최고로 잘 되기를 기도하는 '열심'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 바른 '열심'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그릇된 열심을 가지고 예수를 영접지 아니했다. 헨리 포드가 설립한 자동차 공장에는 큰 발전기 한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발전기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켰다. 이 분야의 기술자들이 총동원되어 고장난 발전기를 고쳐보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장난 부분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계가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제품 생산이 모두 올 스톱되자 포드는 발을 동동 구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제품의 납품일이 불과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전기가 고장난 지 삼일째 되는 날, 당시 전기 분야에 있어 최고의 기술자로 알려져 있던 촬리 스타인메츠가 이 공장에 불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스타인메츠가 어떻게 그 기계를 고치는지 보기 위해 발전기 주위에 몰려 들었다. 스타인메츠는 발전기 앞에 서더니 준비해온 망치로 여러 군데를 두드렸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사람들에게 발전기를 작동시켜 보라고 하였다. 신기하게도 발전기는 '윙!'하는 소리를 내며 이전과 같이 작동되었다. 며칠이 지난 후 헨리 포드는 촬리 스타인메츠로부터 수리비 청구서를 받았다. 그런데 청구 금액이 무려 일만불이나 되었다. 이에 깜짝 놀란 포드는 <촬리 스타인메츠씨, 당신이 잠시 동안 발전기를 두드리며 일한 것에 비해서 요구한 수리비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이유서를 동봉하여 그 청구서를 반송했다. 스타인메츠로부터 다시 답신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구 금액 명세를 자세히 적었다. <발전기를 두드리며 일한 노임 10불, 어디를 두드려야 할지를 알아낸 기술 값 9,990불, 합계 10,000불> 이에 포드는 꼼짝없이 만 불을 지불했다. 당신은 영원한 삶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디를 두드리고 있는가? 돈, 권력, 지식, 명예, ....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다. 즉 예수가 메시야(구세주)이신 것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다. 예수를 아는 것이 참된 지식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알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므로 영생(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예수를 알지 못하는 지식은 의미가 없다. 영생(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천하를 다 아는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를 모르면 그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를 메시야(구세주)로 믿을 때 얻는 것이다(본문4-6절).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를 인정받을 수 없고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예수께서 율법을 폐지하셨다는 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십자가를 통해 열어 놓으셨다는 뜻이다. 인간이 의로 인정받는 조건으로서의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해 끝이 난 것이다(엡2:15).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본문4절) 라고 말한 것이다. 율법이 지배하는 유대인들의 낡은 시대는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의도하는 목표를 완전히 성취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율법의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다(레19:18,신6:5,마22:37-39).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바로 사랑 그 자체였으니 그를 믿는 자마다 이미 율법을 지킨 것과 같이 되어 의를 얻게 된다.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의 죽음이 율법을 이룩하신 것이다. 옛 시대는 예수의 죽으심으로 끝났고 예수의 부활은 새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새 시대의 출현과 함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 구별없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의를 입는 역사의 시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예수를 영접하므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새 생명을 잉태하여야 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는 무지한 자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하는 사랑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라도 의롭지 못한 사랑이다. 의로운 사랑이라야만 영원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 '밑빠진 독에 물붓기' 라는 말이 있다. 이는 헛된 열심,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부질없는 노력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들이 살아갈 때 방향이 잘못된 열심을 가질 때가 종종 있다. 아무리 열심히 열정을 쏟는다해도 그 열정이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인 것이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내가 너를 사랑할 때'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의 봉사나 헌신, 그리고 전도(선교)가 마치 의를 쌓는 일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종종 있다. 우리는 항상 의로움의 근거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야 할 임무를 가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모두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호의를 살려고 할 필요가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레위기 18:5에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했다. 율법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면 그것을 통하여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인간의 불완전성은 절대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신명기 30:11-13에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주라 시인하며,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해야 한다. 당시 주(主,큐리오스,kurios) 라는 말은 로마 황제나 신에 대한 존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라 말하는 것은 예수를 황제처럼 모시겠다는 말이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자기 생애에 있어서 가장 높은 자리를 예수에게 드리는 것이고, 절대 복종과 경건한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오직 유일한 분으로 모시겠다는 뜻이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명예와 행복과 바꿀 수 없네"(찬송가102장)

다음으로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어야 한다. 예수가 과거에 사셨다는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예수에 대해서 아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생명을 얻는 의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만을 알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승리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를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만 한다. 예수께서 "너희들이 사람 앞에서 나를 안다고 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안다고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한 고백은 곧 부동산, 명예, 지위, 자유, 생명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모든 것을 몰수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야 28:16에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가운데 인간의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된다. 예수는 '나의 구세주'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삶을 살자! 우리의 사는 길, 구원받는 길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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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가장 아름다운 것

"(롬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10: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롬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롬10: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롬10: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우리 감리교 교리적 선언 첫째는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시오,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다. 아름다운 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무가치한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돌아 올 수 있는 길을 놓으셨다. 예수의 십자가 없이는, 미의 근원이시며 최고의 아름다움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예수만이 잃어버린 인간의 가치를 회복시킬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가치 창조를 할 수 없다. 인간의 참 가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가장 아름다운 예술과 문학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빌3:7-9).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요일4:16).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통한 사랑으로 구제해야 그리스도인이다. 정직하고 진실해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본분이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마7:22)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들에 대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고 했다(마7:23). 예수가 빠진 사랑은 인본주의(Humanism)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은 신본주의(神本主義)이다. 인본주의는 자기 중심적(Ego-centric)이다. 신본주의는 하나님 중심적(God-centric)이다. 하나님의 섭리 즉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대로 사는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다. 그래서 예수의 삶은 아름답다. 예수의 탄생이 아름답다. 예수의 죽으심이 아름답다. 예수의 부활이 아름답다.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것 이상 더 큰 아름다움이 있겠는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치와 아름다움도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삶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처럼 사는 것이 아름답다. 예수님의 삶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삶을 생명으로 넘치게 하는 힘있는 아름다움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최고의 아름다움이 지닌 가장 독특한 특성은 그것이 어느 한 곳에 머무르거나 한 개인이 독점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이 아름다움은 생명으로 충만한 아름다움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누구에게나 미치는, 누구나 자기의 것으로 하고 나눌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믿기만 하면 누구나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을 전하는 자 또한 아름답다.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의 아름다움을 확산시키는 일을 맡은 자, 즉 복음 전파자들을 향하여 아름다운 발이라고 했다(10:15). 이사야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전하라"고 했다.(사40:9).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통하여 그의 뜻하신 바대로의 지고(至高)의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다니엘서 12장 3절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다. 칸트의 유명한 말대로 하늘에는 별이 있고 인간의 가슴속에는 양심이 있다. 별은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현상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했다(계22:16). 가장 빛나는 아름다운 별은 복음이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다니엘서 12:3 의 "옳은 데"는 오직 예수밖에 없다. 오직 예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되시며 의인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을 죄 가운데서 돌이켜서 의가운데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들은 하늘의 아름다운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다. 참으로 복음이 되시는 예수를 전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저희가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10:14-15) 이에 대해 바울의 답변은 이사야 52장 7절,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이다.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는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다(10:17). 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예수님이시다(요1:14).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를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씨뿌리는 자 없이 종자가 땅에 들어갈 수 없고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기에 누군가가 뿌려야 한다. 옥토도 중요하지만 씨를 뿌리는 자가 있어야 한다. 그 씨가 어디에 떨어지든지, 길가에든지 돌밭에든지 가시떨기에든지 좋은 땅에든지 뿌려야만 한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만 한다(막16:15). '온 천하 만민'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를 담고 있다. 그 나라의 문화를 잘 이해할 때 복음은 효과적으로 전파된다. 또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수는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사도 바울은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헬라인처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이방인처럼 행했다. 병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병든 자가 필요하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자가, 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부자가 필요하다. 지식인들을 위해서는 지식인이, 권세있는 자를 위해서는 권세있는 자가, 실패한 사람을 위해서는 실패한 경험있는 자가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동병상련이란 말이 있다. 같은 병의 환자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뜻이다. 고린도 후서 1:4-12에, '우리 믿는 사람이 고난당한 것은 고난 중에 받는 위로로써 고난받는 자를 위로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건강하고 항상 만사형통하기만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소식',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때로 고난과 환난, 병고와 실패 등이 선교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한 자신의 아픔과 실패를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깨닫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사람이다(마5:11-12). 나의 고난과 환난, 그리고 병고와 실패 등을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그 모습으로 그 모습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예수를 증거 하는 삶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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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남은 자

"(롬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롬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롬11: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롬11: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롬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11:6)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롬11: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롬11:8)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롬11: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롬11: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롬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11: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창세기 6장 5절 이하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은혜를 입은' 노아와 그 가족은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생물들도 암수 일곱 쌍씩 "그 씨를 유전케 하기 위하여"(창7:1-3) 방주에 들어가 함께 구원함을 받았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제사를 드렸으나 그의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 대신에 다른 씨 '셋'을 주셨다(창4:25).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의인의 계보를 이어가기 위하여 그 시대마다 '남은 자'를 두셨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은혜를 입은' '남은 자'를 두셨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되 의인을 통하여 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하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다(창18:22-33). 이 세대가 아직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 믿는 의인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의인의 족속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의존하고 율법의 완성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롬11:1).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로써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예로써 엘리야의 경우를 들고 있다.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는 한 때 크게 낙담하고 있었다(왕상19:10-14).그는 바알의 선지자를 모두 잡아 죽였지만 이세벨이 여기서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다 죽였다. 이제 엘리야 혼자서 도망을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호소한다. "하나님, 이제 그만 살겠습니다. 내 영혼을 거두어 주십시오. 다 죽고 나만 살았습니다." 갈멜산에서 불이 내려오는 하나님의 확실한 증거를 보고도 아합왕은 악해지고 백성들은 배반하고 선지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이제 나 하나 남았는데 내 생명까지 죽이려고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 나를 데려가 달라는 엘리야의 간구의 내용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7천이나 남아 있다."고 하시며 일할 사람을 보여 주셨다. "네가 그렇게 물러나고 싶으면 농사꾼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라." 하나님께 충성할 자는 자기 하나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그 엘리야의 충성 말고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이스라엘 중에 7천명이 남아 있다고 말이다. 어떤 대학자가 말했듯이 "아무 교회나 민족이 몽땅 구원받지 못했다." 선민 사상은 이런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개별적인 관계이다.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다 해야 하고 스스로 복종해야 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하나님은 단체적으로 부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각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하나님만의 비밀 통로가 있다." 사람은 그가 어떤 민족의 일원이나 가족의 일원이 되었거나 혹은 자기 조상으로부터 의와 구원은 상속받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개별적이고 자기 자신의 결단을 내림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선민으로써 한꺼번에 인정된 것은 전체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들의 마음을 바친 각 개인,하나님께 순복한 사람, 그리고 소위 '남은 자들'이다. '남은 자'들이란 그 민족 중에서 하나님께 성별하고 충성하는 자들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유대 민족이 버림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참 유대인은 그 민족 전체가 아니라 그 민족 중에 충성된 '남은 자'들이다. 세상이 패역하고 죄악이 가득하여 역사가 암담한 가운데 구원의 소망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7천인',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할'남은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5).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교적 역사를 위하여 남겨 두셨고, 그의 의의 계시를 위하여 남겨 두셨다. 그의 은혜로 남겨 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하여 절대로 실망하지 않고 엘리야에게 주어졌던 그 역사를 말하면서 자기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남겨 둔 자가 있고 지금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본문 7절 하반절에 은혜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11:7). 그들은 선민 사상 속에서 안전하고 자기 만족에 빠지고 안일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 선민 사상 자체가 그들을 파멸케 한 요인이 된 것이다. 예수를 영접하기를 완악하게 거부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그 은혜의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복음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 복음은 그것을 환영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로 간 것이다. 이스라엘의 거절이 세상을 살찌게 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모든 것 뒤에 있는 꿈을 말하고 있다. 만약 이스라엘의 거절이 이방인에게 문을 열어 주어 세상을 살찌게 했다면 하나님의 섭리가 모두 이루어지고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함께 들어오는 날에 있어서 그 부요함은 얼마나 풍성하겠는가? 그래서 결국 비극 다음에는 소망이 오게 마련이다. 마음에 못이 있는 민족인 이스라엘은 무감각해졌고 이방인은 믿음과 신뢰로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왔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의 못에까지도 용해제와 같이 작용하게 되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모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결국 아무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것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혈육을 따라 한 나라와 관계를 맺으시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개인적인 구원 신앙에 근거하여 세워진 거룩한 나라인 교회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계신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세상 역사를 이끌고 계신다. 교회는 이 시대에 '남은 자들'이다. 이 남은 자들의 시작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롬11:5)들로 이들 모두가 유대인이었다. 이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영접한 성도들이었기에 교회에 들어 온 것이었다. 은혜의 예수를 영접치 아니한 그 나머지 사람들의 완악함은 단지 부분적이요 일시적이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지속될 것이다(롬11:25). 우리들이 '은혜를 입어 남은 자'가 된 것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즉 '모든 민족에, 온 세상에,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이다(딤전2:4). 주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이 시대의 의인으로, '남은 자'로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의 섭리를 감사하며 "천국 복음 증거"(마24:14)에 열심과 충성을 다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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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구원의 비밀

"(롬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롬11: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롬11: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롬11: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롬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롬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롬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롬11: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롬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롬11: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롬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롬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롬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11: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11:28)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롬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11: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롬11: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롬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바울은 분명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임을 밝히고 있지만 여전히 자기 동족 구원에 대한 근심과 끊이지 않는 열정을 지니고 있다(13절).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이유는 자기가 전하는 복음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면,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받게 될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자기 동족 구원을 위해서 더욱 더 열심히 이방인들에게 예수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잘 되어야 자기 동족들이 예수 믿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잘 되기를 누구보다 더 원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잘 되고 축복 받기를 진실로 원하는 사람이 참된 기독교인이다. 다른 사람이 잘 될 때 자신도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잘 될 때 나의 모든 것이 잘 된다.'나와 너의 관계'가 잘 될 때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이다.'너의 축복'속에 '나의 축복'이 있는 것이다.'나'는 잘 안되어도 '너'가 잘 된다면 나는 행복해야 한다. 자연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이 잘 될 때 '내'가 잘 되는 것이다. 나라가 잘 될 때 백성이 잘 되는 것이다(딤전2:1-2).세계가 잘 되어야 자기 민족이 잘 된다. 바울은 이러한 면에서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도의 사명에 전심 전력을 다 했다(딤후4:5-8).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을 다 하는 것이 모두가 축복받는 길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불신자들이 볼 때 '아무쪼록 시기'나도록 잘 믿어야 한다. 이방인들로 하여금 예수믿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독교가 실생활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갖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은 '행동하는 기독교'를 보여 주는 것이다. 빌립이 예수의 제자가 된 후에 나다나엘에게 전도했다.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예수께서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라고 말씀하셨다. 세계적인 화가 '도레'가 남유럽을 여행하던 중 그만 여권을 잃어 버렸다. 국경선에 이르렀을 때 정부 관리 하나가 그를 불러 세웠다. 그 때 '도레'가 관리에게 말하기를 "여권을 잃어버렸네, 나는 당신도 잘 아는 화가 '도레'니까 통과시켜 주게"라고 했다. 그러자 관리가 즉시 대답했다. "선생님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저명 인사라고 소개합니다만 결코 우리가 통과를 허용치 않습니다." '도레'가 간곡히 부탁하면 할수록 그 관리는 점점 더 완강해질 뿐이었다. 마침내 관리가 말을 했다. "좋소, 당신이 정말 '도레'라면 이 연필로 나를 위해 그림 하나 그려보시오" '도레'는 연필을 집어들고 한 동안 저 멀리 있는 웅장한 산들과 평화로운 계곡을 바라보고 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관리가 외쳤다. "가셔도 좋습니다. 이젠 당신이 정말 '도레'인줄 확실히 알았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도 이처럼 그릴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들도 이처럼 자신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행동이나 태도, 말씨 등 생활로 나타내야 한다.

다음으로,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이 절대로 영원히 하나님의 버림받을 수 없다는 것을 다음의 두 가지 예를 들어 증명해 보이고 있다. 첫째, 민수기 15:19-20의 예이다. 모든 음식은 성별 되어져야 한다. 성별되기 위해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바쳐져야만 한다. 그래서 모든 음식은 먹기 전에 하나님께 바쳐졌다. 가루반죽을 할 때 그 첫 부분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렇게 하면 반죽 덩어리 전부가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한 입,한 입 먹을 때마다 따로 따로 하나님께 바쳐야 할 필요가 없다. 첫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전부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식사를 준비할 때 맨 먼저 첫 숟가락으로 성미를 떼서 하나님께 바치므로 성도들이 먹는 모든 음식이 성별되는 것도 같은 믿음의 원리다. 소득의 수입가운데서 먼저 십일조를 떼서 하나님께 바치므로 그 나머지 물질 생활을 성별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거룩한 성도가 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면 거룩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완전 거룩하시며 모든 것을 거룩케 하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 족장은 하나님께 바쳐진 한 줌의 가루 반죽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반죽 덩어리가 전부를 거룩케 한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거룩한 성소에 어린 나무 한 그루를 심게 되면 그 나무는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된다. 그 후에 그 나무에서 나오는 모든 가지와 열매들은 모두 하나님께 거룩한 것이다. 매 가지마다 하나님께 바칠 필요가 없다. 다만 어린 나무를 드림으로써 나무 전부가 거룩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 민족 유대인을 거룩하게 하므로서 전 민족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본래 그들 스스로 그렇게 성별된 자들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바쳐진 성별된 조상으로부터 귀중한 신앙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까지는 과거의 영적인 자본에 의존해 살고 있다. 우리는 아무도 스스로 된 자가 아니다. 다음의 비유를 살펴보자, 곧 감람나무의 비유이다. 성경 예레미야11:16,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호세아 14:6,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에서 '감람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방인을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에 접붙임을 받은 돌 감람나무의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방인들은 사막과 광야에 널려 있는 야생 감람나무였으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가운데 참 감람나무의 줄기에 접붙여져서 그 부요함과 비옥함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교라는 것이 먼저 있지 않았다면 오늘의 기독교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에 그 뿌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유대교를 기독교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 외에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유대교에 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복음을 통해서 유대교를 구원시키는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바울은 이방인이 유대인을 경멸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참 감람나무 가지 일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치 아니하므로 잘리어졌으면 하물며 단지 접붙임을 받은 가지들이 그 뿌리를 경멸한다면 그 보다 더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나지 않겠는가 말이다(11:19-20). 실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11:22).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항상 거하여야 한다."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8,9)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롬11:22)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질 수 있다면 그 참 감람나무 자체의 가지가 다시 접붙임을 받는 것이야 얼마나 더 가능하겠는가?(본문11:23,24) 바울은 바로 이렇게 유대인들이 돌아 올 날을 학수고대 소망하고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옛 것과 새 것과의 관계이다. 자기가 올라온 데까지 올려다 준 사다리를 차버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자신을 나무 줄기에서 스스로 잘라버리는 가지는 미련한 가지이다. 새 신앙이 옛 것에서부터 자란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 유대교는 기독교가 자라난 뿌리이다(11:18).완성은 오직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와 하나가 될 때, 원 줄기에 접붙임을 받지 못한 가지가 하나도 없을 때에만 올 것이다(11:25).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기독교인은 자만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사랑에 항상 감사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신앙의 열매와 복음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할 것이다. 열매를 맺지아니하는 나무 가지마다 찍히어 불에 던져 넣어지느니라고 했다(요15:1-6). 이방인의 수가 다 차기까지 복음 전도의 열매를 풍성히 맺자!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신비스러운 비밀을 우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한다!(11:25). 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 과학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인류를 구원해 가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신비스러운 비밀보다 더 한 것은 없는 것이다. 박쥐는 캄캄한 동굴 속을 날 때 빛이 전혀 없어도 잘 난다. 박쥐 눈에 반창고를 붙여도 마찬가지로 잘 난다. 그러면 박쥐는 무엇으로 보는가? 날개 죽지 가운데 갈고리가 있는데 그곳에 반창고를 붙이면 눈을 뜨고서도 여기저기 부딪히며 날지 못한다. 즉, 날개 죽지에서 전파를 보내서 돌아오는 파장으로 장애물이 있다 없다를 계산하여 날으는 것이다. 순간적인 박쥐의 계산은 컴퓨터를 능가한다. 이 박쥐를 보고서 사람들이 미사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무한한 세계를 인간들이 조금씩 깨달아 가는 것뿐이다. 사실 과학이 굉장한 것을 발견했다고 떠들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마치, 어린아이가 모래성을 쌓아놓고 자랑하는 정도로 지극히 미미한 것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은 신비의 베일을 벗긴다고 크게들 흥분하지만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그 뜻보다 더 신비로운 역사는 없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비밀을 말하고 있다. "너희가 이 비밀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11:25)."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11:33-34). 구약의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요셉은 형들로 인하여 17년동안이나 어려운 고생을 했지만, 그러나 형들을 만났을 때, 무엇이라 위로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동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먼저 나를 애굽으로 보내셨고, 그리고 총리대신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님들은 나를 팔았다고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했다. 좀 힘들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먼저 나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그 당시는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셉이 자기 형제들의 배척을 받았으나 요셉으로 인해 이방인 애굽이 축복을 받고 나중에는 결국 자기 부모 형제들 가족들이 구원함을 받았다. 요셉은 예수 복음을 모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리고 복음을 영접치 아니했지만 이방인들은 복음을 영접하여 저들이 시기 나도록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있다. 이제 요셉이 결국 자기 가족들을 구원한 것처럼 유대인들이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에게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았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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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예배의 생활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기독교 교리로써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를 말씀한 것이며,12장부터는 기독교 실천 교리로써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말씀한 것이다. 기독교 실천 생활의 첫째는 바로 '예배'이다. 예배는 설교, 기도, 찬송, 헌금만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의 믿음, 소망, 사랑, 봉사의 행동도 예배가 된다. 영어로 예배를 "Service'나 "Worship"이라고 한다. 이 두 단어는 다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행하므로 세상을 향해 섬기는 일은 일종의 예배가 되기 때문이다. 성찬의식을 뜻하는 '미사'(Mass) 라고 하는 말은 예배의 제일 마지막에 하는 말,"Ite Misa est"에서 온 말이다. 이것을 해석하면 "여기에서 예배는 이것으로 마친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가서 행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도 예배라고 하는 용어는 사회적 봉사의 행위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 많다. 예로써 로마서 15장 27절에,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으며, 사도행전 13장 2절, "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 말씀에서 "일"로 번역된 단어는 본래 '예배'라는 말이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당 안의 예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삶으로 나타내야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본회퍼는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의미는 불행과 가난으로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 속에, 믿음, 소망, 사랑, 이해, 용서, 자비를 위하여 "행동하는 자"이고 "실천하는 자"이다. 어느 책에서 그리스도인의 종류 중에 "광주리 교인"을 소개하고 있다. 광주리가 물 속에 있을 때는 그 속에 물이 가득 차지마는 광주리를 물 속에서 올리면 광주리 속의 물은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새어 버린다. 이같이 우리 교인들도 교회 안에 있을 때, 특히 예배 볼 때에는 신앙이 가장 많아 보이지만, 세상 속으로 나아가면 신앙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신앙과 생활, 예배와 생활은 이질이 아니고 동질이다. 교회에서의 예배는 경건되게, 엄숙하게 잘 드리나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로 끝나 버리고 세상에서의 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예배를 드린다면 진정한 예배의 생활이라 할 수 없다. 본문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너희의 생이 곧 제물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말씀이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매일 매일의 삶을 드리는 것이다. 진정한 예배는 교회당 안에서 행하는 어떤 행사가 아니라 온 세상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고, 모든 일상 행동을 한 예배 행위로 보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나는 교회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간다."그러나 또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나는 회사에, 공장에, 학교에, 사무실에, 논밭에, 가정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간다."라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므로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전부가 예배하는 의식으로 살아가야 한다.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아브라함은 마음의 제단을 어디든지 가지고 갔다."옛날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그 가족과 더불어 이동할 때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했었다(창12:7,창33:18,35:1-8,수24).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찾으셨다(창12:7).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그 나타나신 곳에서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presence)의 원리를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으시는 자에게 오시고 예배드리는 자 마음속에서, 그 자리에 임재해 계시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현장이 예배의 장소가 되어 우리의 생활 속에 항상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깨끗해야만 한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제물은 반드시 점도, 흠도 없는 아주 깨끗하고 완전해야만 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 어떤 종류의 제물이냐?, 어떤 종류의 그릇이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끗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는 없다(히9:11-14).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가 우리를 거룩하게 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희생할 때 깨끗해질 수 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무엇이든지 거룩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이 있으시다. 우리가 재주는 없어도 주님을 위하여 몸으로 희생하는 생활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귀히 쓰신다.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감사함으로 생활 전부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 온전한 예배 생활이다. 산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은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제물이다. 생활을 바치고, 생명을 바치고, 힘과 마음 그리고 정성을 바치는 생활이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변화를 받아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이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본 받아서는 안 되고 우리는 세상에서 변화되어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먼저 변화를 받아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이렇다."너의 생활을 이 세상의 온갖 유행에 맞추려고 하지 말아라. 주위의 색깔을 따라 변하는 도마뱀 카멜레온과 같이 되지 말아라. 세상과 함께 행하지 말아라. 세상이 네가 무엇이 될는가를 결정짓게 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려면 우리는 변화를 거쳐야만 하는데 그것은 외적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인격의 변화 즉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본질의 변화를 말한다. 이 변화는 가장 비열한 인간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말한다. 성령과 말씀의 지배를 받게 될 때 내적인 변화, 본질적인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 때 자기 중심의 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새롭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생에 들어오면 그는 새 사람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리스도안에 거하면, 그리스도를 자기 생에 받아들이면 그의 존재의 중심이 다르다. 그의 생의 추진 원동력이 다르다. 그의 마음이 다르다. 이 이유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생의 중심이 되면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그것은 생의 매 순간 순간과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생의 중심이 될 때만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다. 예배의 생활화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나 사회 환경의 변화가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세상을 바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변화되지 못한, 육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려하면 그 변화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변화가 백성들과 민족을 살리는 참 변화가 되려면 오직 예수로부터 변화가 시작되어야한다. 예수 안에서 철저히 자기 변화를 경험한 후에 세계 변혁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므로 삶의 변화, 생활의 변화, 가정과 사회의 참된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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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믿음의 분량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롬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롬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로마서 12장 1,2절은 기독교 윤리의 대원칙으로서 '예배의 생활'을 말씀한 것이고, 본문에서는 삶의 구체적인 한 영역인 교회에 대한 성도의 자세와 그 섬기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다. 즉, 교회 내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성도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를 교훈하고 있다. 바울은 봉사 활동의 기준으로서 "믿음의 분량"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이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즐겨 사용하는 개념중의 하나는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고전12:12-27). 우리 몸의 지체는 서로 다투지도 않고, 시기하지도 않으며, 제각기의 중요성에 대하여 시비하지도 않는다. 몸의 각 지체는 그 기능이 제아무리 뛰어 났거나 혹은 그 기능이 제아무리 눈에 안 보일 정도로 낮은 것일지라도 자기의 기능을 다 하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그와 같아야 한다. "어느 날 손과 발이 싸우고 있었다. 발이 먼저 불평을 털어놓았다. 나는 밤낮 꼬랑내 나는 구두 속에 들어가 심방이나 다니고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것은 한번 못 만지고 살다니. 그 때 손이 대답했다. 그러나 너는 언제 내 손을 씻어 주었니? 그래도 나는 너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지 않니? 그러자 발이 말했다. 그래도 너는 높은 데 붙어 있지 않니? 나는 그게 부럽단다. 그 때 손이 대답했다. 높은 데 있으면 뭘 하니? 무거운 것은 나 혼자 들고 다니는데."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바는 성도는 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각 지체는 지워진 임무가 있다. 그리고 각 지체가 각자의 임무를 다 함으로 협조할 때에만 교회 전체가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다 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임무를 올바로 다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의 "믿음의 분량"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알 때만이 올바른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바로 인식하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을 스스로 과대 평가하거나 과소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자신을 과대 평가한다는 것은 교만함을, 자신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비겁함을 말한다. 교만과 비겁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인 독소요 걸림돌이 된다. 교만과 비겁은 성도 개인의 신앙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성장에도 암적인 존재가 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큰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 외에 여러 가지 봉사 활동을 필요로 한다. 교회와 봉사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성격 속에서 그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예수는 남을 섬기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봉사하는 가운데 그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다. 봉사 활동은 성도들 상호간에 믿음에 유익을 주고 그리스도안에서의 교제를 형성함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봉사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앙을 성장하게 하시며 더욱 귀한 은혜와 은사를 부여해 주신다. 이 봉사 활동에 근본적인 자세로서 예수께서는 바로 '섬김의 도'를 가르치시고 또 몸소 겸비의 본을 보여 주셨다(막9:35,요13:4,5).하나님께 헌신하는 성도들이 영적 교만이나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 성장에까지도 악영향을 끼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받으실 때 분량에 관계없이 받으셨지만(요3:34) 성도들은 분량에 따라 받는다(엡4:7).분량에 관계없이 무한한 은사를 지니셨던 그리스도께서도 겸비하고 온유하셨는데 모자라서 안타까워하는 우리가 교만하고 우쭐댈 것인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실제보다 과대 평가해주기를 기대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것을 프로이드의 용어로 말하면, 초자아(超 自我,super ego)와 참 자아(true ego)로써 이 두 자아(ego) 사이에 갭이 많으면 많을수록 갈등이 많은 것이다. 자기를 평가함에 있어서 정직하게 그대로 자기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데칼트는 말하길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가장 냉철하게 객관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고 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말고 항상 믿음의 분량대로 신실하게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자신을 아는 데는 우선 내게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즉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하나님이여, 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고,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라는 훌륭한 기도를 했다. 본문에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즉 마땅히 생각할 만큼만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다(본문 3절).사람이 어떤 재능을 가졌든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은사를 '카리스마타'(charismata)라고 한다. '카리스마'는 인간이 노력으로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그 무엇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평생동안 말하는 것을 연습하지 않았어도 강단에 올라가기만 하면 청중이나 군중을 감동시켜 그들을 장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사인 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무슨 은사가 있든지 사람은 그것을 사용해야만 한다. 사용하는 동기는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그에게 지워진 의무인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특권이다. 받은 바 달란트가 많든 적던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해 사용해야한다는 것이다. 사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두면 책망을 받게 된다(마25:14-30).

받은 바 은사를 사용하되,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인간의 몸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지체들이 수 없이 많지만 그 지체들은 한 몸에 속한다. 그리고 각 지체들이 자기 고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때 그 몸은 건강한 삶을 유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몸된 교회의 통일성이다. 성도는 한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 이로부터 성도는 자기 중심의 생활 자세를 지양하고 교회 전체의 유익과 덕을 위한다는 공동체적인 선을 지향해야 한다. 이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은사의 종류를 보자. 6절에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언이라고 하면 흔히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예언의 가장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 하고, 사람의 뜻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기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자를 예언자라고 하고 사람의 뜻을 하나님께 말하는 자를 제사장이라고 한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되 믿음의 분수대로 전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하면서 자기 말을 자기 감정대로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저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다음으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7절)" 즉 봉사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섬기는 일, 봉사를 예언 다음으로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봉사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한 번도 공중 앞에 나서서 그리스도를 선포할 특권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으나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자기 동료에게 봉사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또한 봉사는 어디까지나 봉사로 끝나야 한다.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거나, 칭찬을 바라거나, 심지어 봉사의 대가를 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봉사가 아니다. 봉사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에 있는 은사는 "가르치는"은사이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선포되는 것만 아니라 설명되어져야 하기도 한다. 오늘날 교회의 큰 실수는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설명하지는 않고 계속해서 크리스천이 되라고만 하는 것이라고 윌리암 바클레이는 지적하고 있다. 가르침의 배경이 없는 권고나 초청은 허무한 것이다.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라는 말씀의 뜻은 그 가르치는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 하라는 말씀이다. 다음,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즉, 권고하는 은사가 있다. 가르치는 일에 정교한 사람들이, 권위 하는 일에 있어서는 냉담하고 미숙한 경우가 많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보다 더 예리한 머리를, 후자는 보다 더 따듯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 권위 하는 자는 어디까지나 상대방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가 되어야지 책망하거나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음,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해야 한다. 구제의 직분을 맡은 자는 그 일을 "후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해야 한다. 사람을 차별해서 구제하거나 자기 자신의 엉뚱한 목적을 가지고 구제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에게 유익을 끼쳐드리는 이외의 목적을 두지 말고 모든 정성과 성실을 다 해야 할뿐이다. 가진 자는 주되 풍성하고 후하게 주라(고후8:2,9:13).하나님은 즐거이 후하게 주는 자를 사랑하신다. 다음,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한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 뭐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해서 잘못하는 자들을 바로잡고 넘어진 자들을 훈계하고 계도하며 교회를 순결하게 지키는 일에 있어서 정성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했다. 자비를 베푸는데서 즐거움을 찾으라는 말씀이다. 자비를 베푸는 일을 맡은 자들의 즐거운 표정이야말로 수혜자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즐거운 표정과 친절한 말씨로 잽싸게 행동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병들고 상처 입은 자들, 일반적으로 불행한 자들을 상대로 일을 하는 자들은 인내할 뿐만 아니라 즐거워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이 일이 더욱 즐겁고 부담 없게 해주며,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록 해야 한다. 진정한 용서는 언제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지 결코 우월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초대 교회에 하나님께서 집중적으로 은사를 부어주신 것은 복음을 확산시키며 도처마다 교회를 설립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기인한다(행1:8).그러기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복음을 증거하며 역사하는 곳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무수한 회심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행2:41,5:12,8:5,6,16:33,34,28:23,24). 오늘날에도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방언과 신유, 그 밖의 다른 여러 가지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초대 교회시대보다 훨씬 복음이 널리 전파된 오늘날에 있어서는 말씀을 중심으로 한 가르치는 직분과 봉사하는 직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하면서 그와 같은 은사보다도 더욱 중요한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그것은 곧 성령의 열매로서 맺어지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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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신령한 삶의 지침

"(롬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롬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롬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본문은 교회 안의 형제는 물론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요청되는 삶의 원리들을 열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성도들의 교회 안팎에서의 신령한 삶의 원리는 한 마디로 '사랑'이다. 본문은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실천해 나감에 있어서 필요한 구체적인 삶의 자세를 12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신령한 삶의 원리로서 '사랑'은 단순한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는 신적인 사랑(아가페)이다. 이 '아가페'(사랑)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요일4:10) 하나님의 무조건적이요 절대적인 사랑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을 때 마음이 녹아져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여기서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은사 위에 사랑의 은사가 우선함을 고전 12,13장에서 밝혔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봉사와 구제 행위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 유익이 없고 덕을 세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의 증표가 없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했다고 할 수 없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으며 사랑에는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9절, 요일4:8).부부간의 사랑에도, 친구간의 사랑에도, 부모 자녀간의 사랑에도, 청춘 남녀간의 사랑에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는 이 아가페 사랑의 증표를 가지게 될 때 참되고 건강한 사랑이 이루워질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사랑'은 여러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라는 말은 성도의 삶에 적용되는 사랑의 역동적 속성을 뜻한다. 같은 구절 "열심을 품고"라는 말은 사랑의 진취성을, 12절의 "환난 중에 참으며"는 사랑의 낙천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사랑의 속성들은 성도가 신앙 생활함에 있어서 궁극적 승리의 삶을 가능케 하는 불가결한 요소들이다.

이제 12가지 삶의 지침들을 살펴보자. 첫째, "사랑에 거짓이 없나니" 이 말씀은 사랑을 진실히 하자는 것이다. 입발림이나 형식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요일3:18) 꾸밈없이 순수한 마음의 발로에서, 자기 자신을 개입시키지 말고 사랑하자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심판 때에 우리에게 묻는 말씀은,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라기 보다 남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느냐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남들을 사랑했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진실히 남을 사랑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남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들을 위하여 다른 선을 행하는 것보다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남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가장 큰사랑이라는 의미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다. 전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악을 사랑하거나 죄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명분을 걸고서도 합리화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을 가장한 불법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간통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소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아름다움으로 가장하여 판을 치는 음란한 시대이다. 칼라일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필요한 것은 무한한 성결의 아름다움과 무한한 죄의 저주를 깨닫는 것이다. 열정이 없는 덕은 안전하지가 못한 것이다. 불명예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명예를 열렬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선으로의 길이다. 많은 사람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결과'를 미워한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악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악의 동기적인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랑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선에 속한 것이다. 결과가 아무리 아름답고 좋아 보여도 그 동기가 악이라면 그 악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악한 것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만 한다. 셋째,10절에,"형제를 사랑하여 우애하고" 라고 했다. 친구 사랑을 헬라어로 필리아(philia), 핏줄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간의 가족 사랑을 스톨게(storge)라고 한다. 그런데 본문의 형제 사랑은 헬라어 필로스톨고스(philostorgos)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말해 형제 사랑은 친구 사랑이되 피로 맺어진 형제적인 친구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피차가 낯선 사람이 아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 형제요 자매이다. 이유는 우리는 한 아버지 곧 하나님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가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십자가의 사랑으로 맺어진 사랑을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나눠야 한다. 넷째, 10절 하반 절에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고 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말썽의 반 이상은 각종 권리와 특권, 지위와 명예에 관계되어 있다고 한다. 빌립보서 2:3에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전13:5). 진정한 사랑에는 존경이 따르게 마련이다. 존경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장점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존경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겸손한 자가 먼저 상대방을 존경하는 것이다. 다섯째,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고 했다.역동적인 사랑의 삶을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한다. 이 말씀은 마땅히 할 일을 미루지 말라는 뜻이 있다. 매일 매일의 책임과 의무를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또한 이 말씀은 계속적으로 일하라는 의미가 있다. 딤후4:2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다.전도자의 할 일은 말씀 연구와 기도와 전도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이 일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일들이다. 아프리카의 타기(Tagi)라는 성도는 쉬지 않고 일하는 전도자였는데 그의 표준은 하루라도 그리스도를 증거함이 없이 그저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No day without a personal testimony for Christ). 그는 어떤 날 병으로 누워 있어서 전도를 못하게 되었다. 그 때 그는 주님께 그것을 걱정하여 기도했다. 마침 비가 오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의 집에 들어와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그들에게 전도했다고 한다. 여섯째,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영을 뜨겁게 해야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사람이다(계3:15-16).기독교인은 철두철미하게 진지해야 한다. 열심히 있으나 무식한 열심은 금물이다. 로마서 10:2에 말하기를,"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진정한 열심은 영(靈)의 비등(沸騰,boiling) 곧 심령에서 끓는다는 뜻이다. 성도는 심령이 냉랭하면 안된다. 성도에게는 성령의 감화 때문에 끓는 듯한 영열(靈熱)이 있어야만 그를 접촉하는 자들이 은혜를 받는다. 미국의 피츠버그에 살던 화이트사이드(Whiteside)는 기도를 많이 한 결과 영열이 높아져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아지고 온 세상 사람들을 그 마음에 두고 생각하며 위하여 근심하는 생활을 가졌다고 한다. 영적으로 뜨거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화평을 느낀다고 한다. 주님을 위한 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아는 마음이 불타는 것이다. 또한 불타는 심정으로 주님의 일을 한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하고도 기억조차 못한다(마25:37-39).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 일곱째, "주를 섬기라"고 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섬기라는 것이다. 주님이란 헬라어 단어는 큐리오스(kurios)이고, 시간, 기회를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카이로스(kairos)이다. 이 두 단어 약자가 똑같이' Krs' 이다. 인생에게 많은 기회와 때가 주어지지만 무엇보다 주님을 섬기는 때와 기회를 놓치는 것은 영원을 놓치는 것이다. 여덟째,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했다. 기독교인은 본질적으로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주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절망적인 기독교인 같은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온 인류의 소망인 천국을 이 땅에 가져 오셨다. 부활하신 예수가 심령 속에 있는 한 삶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즐거워할 수 있다. 주어진 인생을 주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삶의 지혜인 것이다. 아홉째, "환난 중에 참어라"고 했다. 우리는 환난을 승리의 인내로 맞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한 용기 있는 사람에게 "고통은 인생의 전부를 물 드리지요 그렇지요?"라고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색깔이 있는 것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환난을 통한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있다. 옛날에 느브갓네살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타는 풀무 속에 던져 넣었을 때 그들이 상하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그들이 세 사람을 불 속에 던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보라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단3:24-25)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어떤 일이라도 대할 수 있다. 환난 중에 겪는 경험으로 지극히 큰 영광을 이루게 된다. 열 번째, "기도에 항상 힘써라"고 했다. 사람이 기도하기를 그치면 그는 자신으로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박탈당하는 것이 된다.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고집한다면 생의 파멸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앞길이 평탄하기만을 구할 것이 아니라 무슨 어려움이 오든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해야 한다. "힘써라"는 말은 계속하라는 말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열 한 번째,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쓸것을 공급하는 것은 물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다. 마태복음 10:42에 말하기를,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여기 "소자 중 하나"는 물론 주님을 믿는 성도이다. 성도를 대접한 상이 그렇게 큰 것이다. 마태복음 10:41에 말하기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다. 사렙다 과부는 흉년 때에 남은 것이라고는 자기 가족이 한 번만 먹을 수 있는 양식을 가지고 먼저 엘리야를 대접하였기 때문에 축복을 받아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되었으며,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이적의 은혜도 받았다. 성도들을 대접하는 것은 이렇게 귀한 것이며 복된 것이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는 바울을 대접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고 말하기를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강권했다(행16:15). 갈라디아서6:6-10에 말하기를,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그러므로 우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손 대접하기를 힘써라"고 했다. "손" 즉 나그네는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특별히 불쌍히 여기신다. 이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신자라야 진정한 경건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약1:27). 특히 타국에서 온 손님들을 귀히 여기고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출23:9). 천막 문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과(창18:1) 소돔성 어귀에 앉아 있던 롯은(창19:1) 여행자를 기다려 접대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천사를 대접했었다(히13:2). 대접을 잘 하면 영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의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한다는 말씀처럼 그 덕이 자손에게 이어진다. "평생토록 흩으러 주어도 모자람이 없고 펑생토록 모아도 다 새어 버린다." 아끼고 인색하면 누구의 것이 될는지 아무도 모른다. 너희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다. 전도서11:1에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했다. 이기적인 가정은 결코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다. 기독교는 펴진 손과, 열린 마음, 그리고 열린 문의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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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웃과의 바른 관계

"(롬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롬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성도의 이웃과의 바른 관계는 '이웃 사랑'이다. 십자가의 수직선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수평선이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듯이 수직선 즉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로 한다고 해서 바른 신앙 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대강령이며, 율법의 완성인 것처럼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바른 관계가 정립될 때 완성되는 것이다. 인간 사회는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으로 가득 차 있게 마련이다. 이는 자기 본위로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 생활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반목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성도는 자칫 이성과 감정을 잃고 믿음의 덕을 다치기 쉽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선이 인간의 악을 이기심으로 그 능력과 사랑을 입증하였듯이 이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느끼는 갈등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사회악을 선으로써 이겨내야 할 것이다. 이 갈등 구조의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 곧 믿음에 근거한 "네 원수를 사랑하며....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마5:43-44)하는 것이다. 원수를 이기는 길은 원수를 자기 친구로 삼는 것이다. 리챠드 범브란트 목사가 수십 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루마니아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감옥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감옥 속으로 던져졌는데, 어두운 감방 속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곧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챘다. 그는 바로 자기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며 기독교를 포기하라고 강요하던 비밀 경찰 대위였다. 그가 왜 감옥에 들어왔는지 궁금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얼마 전, 열 두 살 된 소년이 자기를 면회 왔다고 하여 사무실로 들여보내라 했다. 주눅들고 수줍어하는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오는 소년의 품에는 아름다운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 있었다. 소년은 곧 입을 열었다. "대위님, 우리 엄마와 아빠를 체포해 가신 분이 당신이지요. 오늘은 우리 엄마의 생일이에요. 나는 엄마의 생일 때마다 예쁜 꽃다발을 사서 선물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어요. 그런데 금년에는 부모님이 어디론가 체포되어 가셨기 때문에 이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꽃을 선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언제나 내게 가르쳐 주셨지요. 원수도 사랑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말이에요. 내게는 지금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대신 이 꽃으로 대위님 아기들의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가지고 왔어요. 이 꽃을 대위님 부인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겠어요?" 대위는 말없이 그 소년의 꽃다발을 받았다. 그리고는 소년을 끌어안고 눈물로 사과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마음에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가 왔고 남은 생을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결심하여 이렇게 끌려왔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네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마18:35) "제물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올 때에 누가 너를 원망하는 것이 생각나면 제물을 두고 가서 화해하고 오라"(마5:23-24)고 말씀하셨다. 이는 이웃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와 직결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8-20)

사람과 불화하면 하나님과도 불화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나와의 바른 신앙은 이웃과의 바른 생활 속에서 증명되어지는 것이다. 먼저,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본문14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핍박은 예수 믿기 때문에 받는 미움을 뜻한다. 예수 믿고 바르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데 따르는 미움과 어려움을 의미한다. 자기가 잘못해서 받는 미움과 어려움은 핍박이 아니다. 핍박을 받는 자는 행복하고 핍박하는 자는 불행한 자이다. 마태복음5:11에 말하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했다. 베드로전서4:14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핍박을 받는 자들은 복이 많으니 남들을 축복할 만 한 것이다. 반면에, 핍박하는 자들은 불쌍한 자들이므로 핍박받는 자가 그들을 축복해야 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16:2에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했다. 이것을 보면, 핍박하는 자들은 불의를 행하면서도 의를 행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어두워져서 보지 못하는 소경이다. 그들은 육신적인 소경보다 더한 소경이다. 이유는 그들이 어두워서 진리를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는 까닭이다. 그들은 소경이면서도 자신들이 소경인 줄도 모르는 소경들이다. 데살로니가 후서1:6에 말하기를,"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라고 하였다. 그들의 장래는 캄캄하여 불행한 것뿐이다. 로마의 맥시미너스 황제가 기독교인들 몇 천명의 눈을 뽑은 죄로 그와 그의 백성들이 이상한 안질로 죽게 되었고, 유구노파 신도들을 학살하기 위하여 많은 피를 흘린 프랑스 찰스 9세는, 마침내 온 몸에서 피가 땀 흐르듯이 흘러 죽게 되었다.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참으로 불행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핍박받는 자가 박해자를 깊이 생각하여 보면, 축복할 마음이 생길 뿐이다. 세상에는 순교자들이 여러 세대에 보여준 엄숙한 용서보다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케 한 더 큰 위력이 없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쳐서 죽이는 그들의 용서를 빌며 죽어갔다(행7:60).그를 죽인 사람들 중에 사울이라 하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후에 바울이 되어 이방인의 사도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바울을 그리스도께로 돌려놓은 것 중의 하나가 이 스데반의 죽음의 장면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기독교회가 바울을 갖게 된 것은 스데반의 기도 덕분이다." 마태복음 10:12,13에도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고 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남에게 복을 빌면 그 사람이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면 그 빈 복을 받을 것이지만 복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그 빈 복이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말씀이다. 반대로 말하면, 남을 저주해서 그 사람이 저주받을만한 사람이면 저주를 받겠지만, 그가 저주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저주가 저주를 빈 사람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남을 위해 복을 빌면서 살아갈 때 자신을 복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평강"이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은 "샬롬" 즉 '우리 모두에게 평강을,..'이라는 복을 비는 인사 말이다.우리 평강 교회는 모든 인류에게 평강의 복을 전하고 기원하는 교회이다. 우리의 모든 이웃에게 평강의 복을 비는 평강 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15절)고 말씀했다. 눈물의 결속은 모든 결속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퍽 쉽다.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보다 즐거워하다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기에는 기독교인의 높은 기질을 더 필요로 한다. 그리고 재난에 빠져 있는 사람을 보고 울지 않을 정도로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즐거워하다 것은 시기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칭찬 받고 있는 그 사람과 함께 기쁨을 느끼기까지 하게 한다는 것은 아주 고상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 타인의 성공을 축하한다는 것은 그의 슬픔과 손실을 동정하는 것보다 참으로 더 어렵다. 특히 성공이 우리의 실망과 관련이 있는 경우에는 말이다. 타인의 성공을 우리 자신의 것 같이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아가 죽었을 때만 가능하다." 진정한 이웃과의 바른 관계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연결되어 상대방의 입장에 동참하고 공감하는 관계이다. 다음으로, 16절에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했다.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씀은 같은 사상을 가지라는 뜻이다. 한 교회 안에서 누구든지 예수만을 사모하고 그만 믿고 영화롭게 하려고 하면, 서로 생각이 같아지기를 계획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다 함께 예수를 중심 하면서도 일치하지 못하는 원인 한 가지는,취미가 서로 다른 관계이다. 우리는 주안에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 따라서 우리의 취미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취미 없는 일이라도 남들이 취미 있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죄되지 않는 한 협력해야 되며 융통성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씀은 높은 지위를 탐하여 덤비는 그릇된 생활 태도를 버리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남들을 무시하는 심리로 행동할 때에는 남들과 연합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높은 지위가 실상 수고하며 섬기는 자리인 것이다. 그것을 이 세상의 영광의 자리로 잘못 알고 탐하는 자들이 있다면 교회의 연합은 어려운 것이다. 그런 자들이 교회의 직분을 맡으면, 돼지가 진주를 물어뜯는 것과 같이, 그 직분에 훼방을 돌리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일체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지혜있는 체"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믿는 불신앙의 악한 사상이다. 복음을 믿는 자들은 마땅히 어린아이와 같은 성품을 가져야 한다. 곧, 어린아이가 자기의 무엇을 믿지 않고 오직 그 부모를 믿고 사는 것처럼 하나님만을 믿어야 한다. 다음으로,17-21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라도 오래 참으시고 악인에게도 비를 주시며 빛을 주신다. 원수를 갚아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선을 도모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원수를 갚지 않는 것이 악을 예방하는 귀중한 방편이 될 수도 있으며 원수를 갚지 않음으로서 그 원수를 자신의 친구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보복하는 행동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에 보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메튜 헨리(Matthew Henry)는 "원수의 모욕을 유순으로 받으면, 마치 던져진 돌이 솜 무더기에 떨어짐과 같이 된다"고 말했다. 원수갚는 것보다는 오히려 친절함으로 대하는 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방법이다. 원수갚는 것은 그의 영을 파탄케 할 수 있으나 친절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부커 워싱톤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사람이라도 결코 내가 그를 증오함으로 내 자신을 더 천하게 만들지 않으리라." 원수를 물리치는 단 한 가지 참 방법은 그를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악인에게서 해를 받을 때에 도리어 자기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다윗은 시므이가 돌을 던지며 저주할 때에 말하기를,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라고 하였다(삼하16:5-12). 그는 자기를 죽이려고 여러 번 음모하였던 사울을 살려 주었다. 그는 후에 사울의 손자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자기 집에서 먹여 주었다. 참으로 악으로 악을 갚지 아니하고 선을 도모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잠언 25:21-22에 말하기를,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여호와께서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했다. 또 누가복음 6:35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씀했다. 우리는 원수와 화평하기를 힘써야 한다. 진리를 버리면서까지 화목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진리 문제나 성결의 문제 이외의 육체적인 문제에 있어서 신자는 얼마든지 모든 사람과 화목해야 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잠언25:26에,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고 하였다.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하나님의 원수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하셨다. 화평을 위해서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할 수 있거든 화평"하라는 말은 어떤 손해나 희생도 할 수 있는 한에서는 다 지불하고 화평하라는 말씀이다. 여러분에게 누구와도 진리 안에서 화평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의 마음이 항상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20절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했다. 잠언 24:17에서도 "네 원수가 넘어질 때 즐거워하지 말며"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도 죄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다(겔 18:23,32). 원수가 망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 원수가 회개하기를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으리라"는 말씀의 뜻은 전통적으로 상대방에게 큰 부끄러움을 준다는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원수를 진실로 사랑하면 그 원수가 고개를 들 수 없도록 큰 부끄러움을 주는 것이 되어 원수를 갚는 일이 되는 것이다. 악을 악으로 다스리면 더 큰 악을 초래하게 된다. 악을 이기는 방법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다. 원수를 이기는 확실한 방법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과의 바른 관계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서만 성취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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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기독교인의 국가관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롬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13: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롬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롬13: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롬13: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롬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기독교인은 두 가지의 통치 영역에 살고 있다. 하나는 영적 통치로서 하나님의 통치이며, 다른 하나는 외부적 행동을 관할하는 육적 통치로서 곧 국가의 통치이다. 본문은 기독교인이 사회 생활함에 있어서 취해야 할 국가관을 말씀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세상 국가 권력과 사회 속에서 영육간에 성결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국가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순결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하는 시민이기 때문에 재림의 날을 대망하며 "고요하고 단정한 중에 평안한 생활을 하려"(딤전2:2)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확고한 종말론적인 신앙 때문에 바른 국가관을 가지므로서 성도들은 신앙의 성결을 보존해야 한다. 옛 교회에서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로써 정치를 포섭하려했으나 결국 교회가 세속화되고 말았다. 중세에는 교권이 국권까지 좌우하려고 하는 혼동에 빠져 결국 둘 다 부패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본문 1절은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독일 국민들에게 나치 정권의 살인마적 행위에 가담하는 구실을 주었고, 일제 시대에는 신사참배가 국민 모두의 당연한 의무라는 변명의 구실을 준 구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가운데 올바른 국가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본문은 분명히 국가 권력에 대한 복종을 가르치고 있다.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같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디모데 전서 2:1-2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또 디도서 3:1에서는 목회자에게 주는 충고로써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라"고 말씀했다. 베드로 전서 2:13-17에서는,"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원리는 어디까지나 신본주의 윤리에 따른다. 곧, 국가 권력에 대한 순종의 이유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이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1절) 그렇게 때문에 본문 1절 상반절에 "굴복하라"는 말씀은 무조건적 복종이나 절대적 복종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건적이며 상대적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아무리 위에 있는 권세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가 될 때에는 거기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행전5:29절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분명히 말씀했다. 요한 계시록 13장에 나타나는 적 그리스도적인 독재 정부에는 굴복할 수 없는 것이다. 나치 독일이나 일제 군국주의자들이나 북괴 김일성은 바로 적 그리스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거기에 절대 굴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정부 형태라면 비록 그들이 소위 민주적이 아닐지라도 굴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최고의 정부 형태로 생각하나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임을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주권 재민)하나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 미국의 상하 양원제는 사사시대의 형태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민주주의 정부의 권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위배하는 것이라면 굴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양심을 거스리는 불의한 권력자들이나 그 권력자들의 시책에 대해서 무조건적이요 맹목적으로 복종해서는 안된다. 이런 경우에 성도들은 마땅히 자신의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결단을 내려야 한다(왕상 18:1-46,단 3:13-18).즉 우상 숭배와 같이 극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통치자들의 불의한 행위를 묵인하고 그대로 굴종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거스려 하나님을 배반하는 어리석은 행위이다(잠 15:9,10, 딤후 3:7,8). 다니엘처럼 하나님께 뜻을 정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단 1:8).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권력 행사를 허락하셨지만 권력을 남용하는 죄까지 허용하신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한 시민으로써 통치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아울러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설령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통치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기독교인이 취해야 할 자세로써 폭력적인 투쟁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박해를 가하는 사악한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마5:44). 바울 당시 팔레스틴 특히 갈릴리 지역은 계속적으로 폭동이 들끓고 있었다. 열심당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님밖에는 왕이 없다고 믿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조공을 바쳐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그들 자신을 돕기 위한 폭력 행위를 시작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돕지 않으시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직업적으로 살인과 암살을 서약했다. 그들의 목적은 여하한 정부의 존재도 불가능케 하는 것이다. 소위 광신적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폭력적인 유대주의로부터 기독교를 완전히 분리시키고 올바른 국가관속에 선량한 시민 생활을 목적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 국가를 폭군에게서 건져내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했다. 국가 권력이 불의를 행할 때 성도는 야합하거나 굴종할 것이 아니라 적법한 절차를 거쳐 공의의 회복에 앞장서서 불의의 세력을 개혁하여야 한다(칼빈).정당한 정의와 권위에 대한 순응이 성도의 덕목이듯이 불의에 대한 비판과 개혁 또한 성도의 의무인 것이다. 교회와 성도의 본질적인 사명은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행1:8).따라서 한 인간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성도는 개인적으로 사회 참여를 할 수 있으나 이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각기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인 견해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인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교회의 이름을 걸고 단체적으로 사회 참여를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사명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므로 변화 많은 세상에 의해 영향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향해 거룩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이롭게 하고 더욱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를 견고히 세우는 심부름꾼으로서의 국가 권위(정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도의 의무를 등한시해서는 안된다.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기울어 가는 그의 조국을 위하여 극한적인 위기 상황에 처해서도 눈물로써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렘 20:7-18). 반면에 통치자들은 자신이 가진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시 2:10,11)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야 한다(겔 45:9). 바울이 본장에서 천명하고 있는 국가관은 예수께서 주신 사명, 곧 복음의 선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마 28:19,20). 바울은 어떤 정부 또는 권세 아래 있는 성도는 교회의 질서 못지 않게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면 본질적으로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 질서 보존 속에서 성도의 보존과 복음이 전진적으로 선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악을 억제하고 선을 증진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의 빈곤이나 무질서를 퇴치시키는 일 등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잠16:12,29:4).교회가 내적인 일을 한다면 국가는 외적인 일을 한다. 국가란 본래 서로 법령을 준수함으로써 어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결속하고 서약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국가가 없이는 그리고 이 법률과 이 법률을 준수하겠다는 상호 약속 없이는 악하고 이기적인 강자만이 최고가 될 것이다. 약한 자들은 발붙일 데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정글의 법칙에 따라 지배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국가에 자기의 안전을 빚지고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국가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누리고 국가에 대한 의무는 지키지 않으려 한다면 옳지 못한 것이다. 국민이 국가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 납세의 의무를 다 해야 하며,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병역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중에 전시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 적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십계명 중에 제6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위반하지 말라는 것으로 개인적으로 살인을 금한 것이다. 법적 재판에 의한 사형을 금한 것은 아니다(출21:14-17). 기독교인이 전쟁이 나가는 것은 기쁜 일은 아니지만 전쟁에 나가는 것이 죄라고는 할 수 없다(어거스틴).기독교인으로서 전쟁 때에 개인의 생명을 아껴 어디까지든지 기피할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 무책임할 뿐 아니라 인류의 불행에 대하여 수수 방관하는 불의한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혹 불행하게 침략주의 국가의 국민이 되어 어떤 침략 전쟁에 군인으로 강제적 징발을 당 할 때, 그는 그의 양심의 자유로 할 것이로되 혹시 거기에 응하지 않을 경우도 있을 것이며, 그런 경우에도 그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국가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강도 행위를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자"로써 국가는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본문4절). 기독교인들은 권세 잡은 자를 존경하되 하나님을 위하여 할 것이며, 다스리는 자가 백성을 양선 하게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울의 권세를 존중히 여긴 다윗은 끝까지 형통하였으나, 다윗의 세력을 반대한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전쟁하다가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려 그 원수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삼하 18:9-15).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높일 자를 높이기도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한다(롬 13:7,벧전 2:13-18). 하나님의 도구로써 국가 권력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양심에 따라 순종하여야 하며 또한 우리의 신앙 생활의 성결 보존을 위해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기 위해 우리는 나라와 민족, 그리고 위정자들을 위해 사명적으로 열심히 기도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이 나라 민족을 통해 궁극적인 천국 복음(마 24:14)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한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사명자의 기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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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사랑의 빚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롬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본문은 성도가 사회와의 관계, 즉 이웃에 대한 성도의 의무를 말씀하고 있다. 이웃에 대한 성도의 의무는 한 마디로 '사랑'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레위기 19:18에서 명하신 바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강령으로 말씀하신 바이다(마 22:37-40).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 최고의 요구로써 사랑이 강조된 것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그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성도들에게 베풀어졌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벧전 2:24).즉 성도들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에 빚진 자들"이다. 그 사랑의 빚은 그 본연의 성질상 다 갚을 수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마 7:12). 유대인들에게는 614개조문의 율법이 있다. 이 중에 365개항은 '...하라'는 긍정적 형태이고 나머지 248개항은 '...하지 말라'는 부정적 형태로 되어 있다. 이 율법 전체의 내용을 종합 요약한 것이 바로 십계명이며 이 율법의 조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및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규정으로써 인간에게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경고해 주는 소극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율법에 비해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사랑은 소극적으로 '하지 말라','하라'는 규범을 넘어 적극적으로 남을 향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열어 보이고 내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개별적 윤리, 법 조항을 넘어 그 윤리와 법의 강령을 완성하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율법의 완성자로써 사랑 그 자체이시다(마 5:17-19).그러므로 온전히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전 13:1-13).성도들은 이와 같이 포괄적이요 적극적인 '사랑'을 삶의 가장 귀중한 원리로 삼아야 한다. 사랑의 대상을 추상화시키지 말고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모든 사람을',자기 마음에 들든 아니 듣든 그가 어떤 성품의 소유자이든 아니면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 있든 일단 나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나의 이웃'으로 여겨야 한다(눅 10:37). 인간은 본래부터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추구한다. 사람을 보통'인간(人間)'이라고 한다."사이"에서 사는 존재,"타자와 타자 사이"에서 사는 존재가 곧 사람이란 뜻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해서 두 사람이 같이 살도록 했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잘 규명해주는 말이다. 성도들은 신앙 공동체의 삶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그의 제자들을 양떼와 포도나무 가지에 비유해서 가르쳤다. 예수 자신을 양떼를 치는 목자와 포도나무에 비교했다. 예수 당시에 목축업자들은 한 마리의 양을 먹이지 않았다. 언제든지 한 무리, 한 떼로서의 양을 길렀다. 양들은 언제든지 떼를 지어서 다녔다(요 10:1-18,21:15-17).하나의 공동생활을 했다. 그 무리에서 떨어지면 길을 잃어버린 양이 되고 만다(눅 15:3-7).반드시 다른 양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의 생활 양식의 특징은 이처럼 목자이신 주님과 영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동시에 이웃과의 관계를 가지는 데 있다. 시편 133편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는 구절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주체가 되시는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연합하여 뜻을 합해서 공동 생활을 한다면 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일인가라는 뜻이다. '성도'는 독특한 관계 속에서 삶의 양식을 가지고 산다.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수평적으로 인간(이웃)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다음과 같은 성구에서 보여 주는 인생관을 가지고 수직적인 삶을 산다.

빌립보서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고린도 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생사를 걸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자신이 이 지상의 어느 곳에서 살든지 자신이 사는 그 곳에서 자신의 이웃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다. 즉 '사람끼리' 구체적인 삶의 장소에서 구체적인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끌려 들어가게 되었으나 거기서도 하나님께 찬미한 결과 지진이 일어나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나오게 되자 오히려 간수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건은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바로 내가 사는 '이 자리에서'구체적인 생활을 통해서 돌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신앙 생활은 구체적이요 실제적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사회 지향적이고 타인 지향적이다.

요한 일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신앙의 훈련 장소로 주셨다. 칼빈의 말을 빌린다면 신앙의 학교로 우리에게 주셨다. 이러한 성도의 생활양식을 수평적인 삶이라고 한다. 가장 아름다운 신앙 생활,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산 속에 들어가서 이 속세와는 관계를 끊고 한평생을 기도와 묵상의 생활을 하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것은 오히려 매우 이기적이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단성적(單性的)으로 만들지 않았다. 두 사람을 만들어서 같이 살게 했다. 그러므로 같이 살아야 한다. 공동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혼자서 조용한 가운데 신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 생활을 함으로써 신의 뜻에 어긋나는 생활을 피할 것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나의 상대자와 내 이웃과 아름다운 공동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추구하는 데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공동체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 이러한 말이 있다. "천당은 혼자 가는 곳이 아니라 반드시 누구와 같이 가는 곳이다." 이 말의 뜻은 반드시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천당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했다. 오리겐(Origen)은 말하기를 사랑의 빚은 영구히 우리와 함께 남아 있고 절대로 우릴 떠나지 아니하며 이것은 우리가 매일 주고 영원히 받는 것이다."라고 했다. 본문의 사랑의 빚 외의 빚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지세(ground tax,국민이 자기 땅의 소출중 곡식의 십분의 일과 포도주와 실과의 오분의 일로 현금이나 물품으로 지불해야 하는 세), 소득세(income tax,국민 각자의 소득의 백분의 일), 인두세(poll tax,14세로부터 65세까지의 모든 사람이 내는 것) 등의 조공과, 수출입 관세, 대로 사용세, 교량세, 시장세, 입항세, 동물 소유세, 차량 운행세 등의 지방세가 있었다. 바울의 주장은 이 조공과 세들을 그것이 아무리 괴로울지라도 기독교인은 국가와 지방 관서에 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부채는 물론이고 이같은 여러 가지 세금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빚을 다 갚거나 지지 아니하고 살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누구나 반드시 져야 하고 반드시 갚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절대로 지지 않고 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것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남을 도울지언정 남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로서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사랑은 받을 줄을 알아야 베풀 줄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줄 알아야 이웃에 대해 그 사랑을 베풀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사랑의 빚을 지고 그리고 그 빚을 갚아가면서 살라"는 것이다. 사랑을 주고받게 될 때 인간 관계는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고 하는 것이다. 만일 사랑의 빚을 갚는 자세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는 간음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면 그의 인격을 존중하게 되고 그의 순결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일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두 사람이 그들의 육적인 열정이 그들을 지배하게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그들이 서로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너무 적게 사랑해서이다. 참 사랑에는 곧 존경이 있고 사람이 죄짓지 않게 하는 자제가 있는 법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비천한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성결하게 보존할 뿐만 아니라 남의 성결 또한 보존코자 하는 속성을 지녔다. 또 사랑의 빚을 갚는다면 살인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절대로 무엇을 파괴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건설하려고 한다. 미움은 분열시키고 파괴시키나 사랑은 연합하게 하고 건설하게 한다. 사랑은 절대로 미워할 수 없다. 사랑은 언제나 유순하다. 사랑은 자기 원수를 죽임으로 없이하려 하지 않고 언제나 그를 자기 친구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사랑의 빚을 갚는다면 그는 절대로 도적질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사랑은 언제나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관심이 깊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사랑의 빚을 갚는다면 그는 절대로 탐내지 않을 것이다. 탐심은 금지된 것과 욕심내서는 안될 것에 대한 과도하고 자제하지 못하는 욕망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 욕심이 사라질 때까지 마음을 깨끗이 씻어 준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다."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하고는 네 하고 싶은 대로하라."사랑하는 자에게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의 삶을 자유롭게 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지배하고 그 사랑의 힘이 이웃과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면 다른 모든 법이 불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사랑을 떠나서는 인간의 실존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랑이 지배되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너와 나의 삶'에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되는 사랑의 실존이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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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빛의 갑옷을 입자

"(롬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롬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롬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한 아이가 부모를 따라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구경갔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없었는데 두 시간 중 두세 번만은 순간적으로 흥미가 있었다. 그것은 뒤에 선 두 악사가 거대한 심벌(Cymbal)을 울릴 때였다. 몹시 심벌에 흥미가 생긴 소년은 음악회 후에 무대 뒤로 가서 심벌을 다룬 악사를 만나 물었다. "그것은 배우기가 힘들어요?" "힘들지 않다. 다만 심벌을 울리는 시간이 중요해. 반초만 늦어도 안되고 빨라도 안된다. 꼭 그 순간에 울려야 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야." 이 이야기는 시간의 중요성보다 시기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이다. 본문 11절에서,"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했다. 죄의 잠에서, 육의 안일한 잠에서, 게으름과 태만에서, 영적 사망의 잠에서 깨어날 때가 가까웠다는 말씀이다.'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뜻은 곧 네 영혼과 내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라, 죄를 조심하고 선한 일을 하도록 힘쓰며 언제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두고 볼 때 지금이 몇 시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실패자가 될 것이다. 역사의 흐름에서 지금이 어느 시점에 놓여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지혜있는 생애를 보낼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은 깨어서 역사의 시간을 보고 온 세상에 시기를 알리는 파수꾼이다. 혁명 이전의 제정 러시아 교회는 부패하였다. 농민들은 굶주렸는데 교회는 귀족들과 함께 살이 쪄서 민중들의 필요에 호응하지 못하였다. 교회의 수적인, 양적인 풍요함이 영원히 갈 것 같았으나 하루아침에 무너져 불타고 깨지고 죽어가지 않았던가! 그들은 그 때가 몇 시인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도 똑같은 배경이다. 온 백성이 굶주렸는데 루이 16세와 그를 추종하는 소수의 부패 세력만이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들의 욕심과 타락은 피바다 속에 흘러 내려갔다. 그들은 그 때가 몇 시인지를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역사의 교훈을 받고 눈을 떠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떤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그리고 진리가 찬란히 빛나고 있는 시대인가? 오히려 '황금의 송아지'가 신이 되고(황금만능주의),'바로의 힘'이 믿음직스럽고(권력지상주의),'요부 이세벨'을 따라 그 숱한 잡신들, 무기와 달라($,弗)와 섹스(SEX,性)를 찾아 헤매는 휘청거리는 역사가 아닌가? 민족의 사명자들은 이 나라 민족의 역사적인 시간이 몇 시라고 경고의 나팔을 불 수 있어야 한다. 밤이 깊어지면 낮이 가까워지는 법이다. 죄악이 극도에 이르는 때는, 하나님의 심판적 간섭이 임한다. 옛날에 죄악이 온 땅에 관영한 뒤에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왔고, 사사 시대의 암흑이 있은 후 다윗 시대의 광명이 왔다. 다시, 말라기 선지 이후 400년간 선지자의 음성이 끊어지고 암흑시대를 이루었으나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광명이 유대를 위시하여 세계에 비췬 것이다. 그리고 제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교회는 교권주의의 흑암 속에 빠졌으나 16세기에 종교 개혁의 대광명이 세계에 비췬 것이다. 그처럼 주님의 재림 직전에도 이 세상에 죄악의 밤은 깊어질 것이다(본문12절). 성도는 내세에 대한 소망을 확고히 하고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면 성도의 본향은 썩어질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기 때문이다(히 11:13,벧전 2:11). 그러므로 성도는 주의 재림의 날을 맞는 마음으로 삶의 순간순간에 빛의 역할을 감당해나가야 할 것이다. 성도는 신앙이 성숙되면 될수록 그의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빛을 그의 생활에서 더욱 밝게 비추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70세로 보고 이것을 하루의 활동시간인 아침 7시부터 밤 11시 사이에 맞추어 계산해보자. 11세의 어린이는 오전 9시15분에 해당된다.20세의 청년은 오전 11시30분까지 왔다. 아침은 바야흐로 지나가고 힘겨운 오후의 일을 눈앞에 두고 있다. 만일 30세라면 오후 1시 30분에 해당된다. 오후의 뜨거운 햇볕과 싸워야 할 때인 것이다. 즐거운 노래와 악몽사이를 왕래하는 그네에 올라 탄 시기이다. 나이 40세라면 약 오후 4시가 되었다. 하루 일을 얼마간은 이미 과거에 속하게 되었으나 아직도 날이 저물 시간은 길다.50세이라면 오후 6시 30분에 해당된다. 저녁 식사시간이다. 후회 없는 석양을 맞도록 일을 마무리지어야 할 시기이다.60세라면 저녁 8시 45분이다. 해가 진다. 하루의 생활을 정리하고 휴식할 시간이다.70세이라면 이제 11시가 거의 되었다. 실패도 성공도 슬픔도 기쁨도 이제는 막을 내리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당신의 인생은 지금 몇 시인가? 자신의 인생의 시기를 바로 깨닫고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되었던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본문13절). 시간의 가치는 삶의 질에 있는 것이지 양에 있지 않다. 얼마동안 살았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시간은 70이냐, 80이냐 하는 길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번 산다'(You live one life)는 시간의 뭉치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서는 "하나님께 있어서는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빛의 갑옷을 입고 살게 되면 하루를 살지라도 천년 같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빛의 갑옷을 입기 위해서는 벗기를 잘해야 한다. 아직도 입고 있는 영적 잠옷을 벗어버려야 한다. 곧 "어두움의 일을 벗어야 한다"(본문12절).네게 붙어있는 형식, 위선, 습관적 종교 등 옛 누더기, 무화과 잎사귀를 되도록 많이 완전히 벗어버릴 때 빛의 갑옷을 바로 입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요1:1-9).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생활이 곧 어두움의 생활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생활 곧 어두움의 죄된 생활상 여섯 가지가 본문13,14절의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 호색, 쟁투, 시기 "등이다. 육신의 일을 도모했던 어거스틴이 바로 이 성구 말씀을 통해 회개하고 기독교 역사에 찬란한 빛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의 '참회록'에서 그 이야기를 한다. 그가 정원에서 거닐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그가 선한 생활을 하려던 계획의 실패로 절망 중에 있었다. 그는 비참하게 부르짖고 있었다. "얼마나 더 오래? 얼마나? 내일, 그리고 또 내일? 왜 지금은 안 될까? 왜 이 시각에 내 타락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나?"그가 갑자기 " 들어 읽어라, 들어 읽어라" 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까지는 그가 이같이 말하고 생각하고 슬피 울고 있었다. 그 소리는 어린아이의 목소리 같았다. 그는 이런 말이 나오는 아이들의 장난을 생각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 짜보았으나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바울 서신 한 권을 두고 왔기 때문에 자기 친구 알리피우스(Alypius)가 앉아 있던 자리로 급히 되돌아갔다."나는 그 책을 날세게 집어 내 눈이 닿은 첫 구절을 조용히 읽었다.'방탕이나 술 취함과 부도덕과, 파렴치와 쟁투와 반목 속에 행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이 옷 입듯 입을 것이요, 네 첫째 생각이 그리스도 없는 인간 본능의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생활을 중지하라.' 나는 더 읽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문장의 끝과 함께 내 마음속에 보증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듯이 모든 의심의 그늘이 흔들리었다. 나는 내 손가락을 그 페이지에 넣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고요한 얼굴로 알리피우스에게 향하여 말했다"(C.H.D odd의 번역)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어거스틴에게 말했다. 우리는 "방탕과 술주정"을 금해야 한다.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과식 과음을 금해야 한다. 방탕과 술주정으로 마음을 어둡게 해서는 안된다(눅 21:34). 잠언 23:19-30에,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 분쟁이...원망이 뉘게 있느뇨 ...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고 했다. 참으로 술취함은 만가지 악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주색잡기는 만가지 악의 근본'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술에 취해서 살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을 때 어느 한 가지도 잘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술에 잠긴 자들에게 분쟁이 있고 까닭 없는 상처가 있으며(29절) 그들의 눈에는 이상한 여인들이 보일 것이다(33절). 다음으로, 음란과 호색하지 말라"고 했다.제7계명에서 금하는 육신의 정욕 곧 어둠의 일은 하나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음란한 생각과 애정, 음란한 표정, 말, 책, 노래, 몸짓, 춤 곧 불결하게 만드는 이 모든 것은 여기서 금하는 호색에 속한다. 정숙과 검소라는 순결하고 신성한 법을 어기는 것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끝으로,"쟁투와 시기하지 말라"고 했다. 쟁투와 시기 역시 흑암의 일이다. 스스로 쟁투하고 시기하는 것은 겸손하고 평화로운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두움의 일이다. 인디언의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해'가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이 '해'를 데리고 아주 캄캄한 굴로 갔다. 그러나 그 굴에 '해'가 들어서자마자 '어두움'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역시 '해'에게 흑암을 보여 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우화가 말하려는 것은 흑암을 해결하는 길은 어두워진 원인을 분석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사랑과 희생의 빛 자체가 되신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이사야 42:5-9에서, "내가 너를 세워 이방의 빛이 되게 하겠다" 고 했다.'이방'이란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 '세계의 빛'이 되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어두움의 세상가운데 등대와 같은 길잡이가 되라는 말씀이다. 50년 전 뉴욕의 이야기이다. 한 처녀가 등대지기에게 시집왔다. 총각의 이름은 제이콥 워커(Jacob Walker)였다. 이 두 젊은이는 등대 하나만 있는 외딴 섬 로빈스 리프(Robins Reef)에 살아야만 했다. 신부는 이런 데서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1개월간이나 짐을 풀지 않았으나 혼자 떠날 수도 없어 그럭저럭 정착하였다. 그러나 3년 뒤에 남편 제이콥은 폐렴이 되어 스태튼 아이랜드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기 전에 제이콥이 남긴 마지막 말은 "등대에 마음을 써달라(Mind the light)"는 것이었다. 남편의 시체를 등대에서 보이는 언덕 위에 묻고 아직도 20대인 워커 부인은 등대를 지키기 시작했다. 수백 번 섬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복바쳐 오르는 고생과 고독의 연속이었으나 만 70세까지 41년간을 이 여성은 혼자서 등대를 지켰던 것이다. 마음이 변하려는 때마다 언덕 위에서 "등대에 마음을 쓰라"는 남편의 음성이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고 한다. 제이콥 워커와 같은 말을 바울이 본문에서 말했다.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롬13:12). 이 말은 기독교인의 무장을 가리킨다. 흑암의 세력이 강하게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기독교인은 빛의 갑옷을 입고 빛을 발함으로서 역사의 방향을 알려줘야 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어두움을 만드는 인간이다. 그 사람 때문에 사회의 한 모퉁이,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 혹은 한 나라와 세계에 문제가 생기고 싸움이 생기고 불행이 생기는 어두움의 이유가 되는 인간이다. 둘째는 어두움 속에 묻혀 사는 사람이다. 자기가 어둠을 만들지는 않지만 어두운 상태가 편리하기 때문에 처세와 재미와 자기 보호를 위해 어두움을 묵인하거나 어두움에 협조하는 인간이다. 간접적으로 어두움을 만드는 인간이다. 셋째 부류는 빛 속에 안주하는 사람이다. 남의 수고, 남의 땀, 남들이 만들어 놓은 평화와 좋은 제도와 안전 장치를 이용하고 즐기면서 사는 인간이다. 나쁜 일도 하지 않지만 좋은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둠을 만들거나 어두움에 협조하지도 않으나 자기 자신이 빛을 발하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넷째는 빛이 되는 사람이 있다. 등대를 지키고 어두운 바다에 방향을 알려주는 사람이다. 역사의 밤은 점점 더 깊어가고 있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새 아침이 더욱 더 가까워 오고 있다. 칠흑 바다같이 어두운 세상에 등대와 같이 한 줄기 빛을 비춰 항해하는 인생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천국의 항구에 인도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역사적인 사명인 것이다. 로젠달박사(Norman Rosenthal-미 국립정신 건강 연구소)는 '어두움'에 해당되는 우울증에 대한 기발한 치료법을 개발했다. 전등을 평소의 10배 정도로 밝게 해서 하루 다섯 시간씩 그 불빛 아래에 있게 하면 우울증을 해소하는 효과를 낸다. 이것은 단순히 낮을 연장시키는 방법이다. 겨울에 봄을 느끼게 하는 치료법이다. 밝음이 곧 치료제이다. 사랑하는 자는 밝아진다. 침울하고 음산한 사람은 사랑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분이 날 때 더 어두워지고, 질투할 때 점점 더 어두워지고, 미워할 때 아주 어두워진다. 밤을 사는 사람과 낮을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차이는 결국 사랑에 있다. 누가복음 7:36-50에 보면,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인이 와서 예수의 발을 눈물로 적시우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엄청난 가치의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에 부은 일이 있었다. 이 여인을 향하여 예수께서 "저의 사랑이 많음이라"고 말씀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과 제자들의 마음은 그 여인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난을 일삼았다. 이들의 마음은 어두움이다. 예수께서 문제삼은 것은 이들의 어두운 마음이었다. 사랑은 밝음이다. 사랑은 태양이다. 제자들의 비난 속에는 질투가 있다. 행동은 없으면서 부정적으로 평가만 했다. 어두운 마음은 어둡게만 본다. 병든 마음이기 때문이다. 시몬은 비평했고 여자는 행동했다. 시몬은 예수께 식사대접을 하였으나 여자는 진실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시몬은 자랑스러운 바리새인이었으나 어둡게 살고 어둡게 생각했다. 여자는 사회에서 떳떳하지 못한 어두운 과거를 가졌으나 이제 예수를 만나 밝은 생각으로 용서를 빌었다. 밝은 내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서양 유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담이 아름다운 동산과 아름다운 아내를 보고 즐겁게 노래한다. 하와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아담이 잠든 사이에 아담의 갈비뼈를 세어 본다. 혹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더 빼내 여자를 또 하나 만든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갔기 때문이다. 이 재담은 밝게 사는 사랑의 인생과 어둡게 사는 질투의 인생을 그려 낸 것이다. 예수는 시몬에게 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500데나리온 빚진 자와 50데나리온 빚진 자가 모두 탕감 받았을 경우 누구의 사랑이 더 크겠느냐 하는 비유이다(눅 7:40-43).물론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이 감사도 크고 사랑도 크다. 용서받은 사람, 용서할 줄 아는 사람, 감사하는 사람, 사랑을 주고받을 줄 아는 사람은 밝음이다. 그는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 자신과 가정, 그리고 이웃과 사회를 밝게 하는 용서와 감사와 사랑의 빛, 빛의 갑옷을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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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화목하는 생활

"(롬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롬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롬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롬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롬14:5)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롬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 성도들에게 세상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 화목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뜻이다.

고린도 후서 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자기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마태 복음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어느 동네에 두 집이 이웃에 살고 있었다. 한 집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일곱 식구의 대가족이었고, 한 집은 젊은 부부만 사는 단란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가족을 이룬 가정은 항상 조용하며 화목하여 웃음꽃이 피었는데, 부부만 사는 가정은 항상 시끄럽고 부부싸움이 잦았다. 그래서 두 부부는 이웃집의 화목한 모습을 보고 크나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우리는 둘만 사는 데도 매일 싸워야 하고 이웃집은 여럿이 함께 모여 사는 데도 저토록 화목한 것일까? 그래서 젊은 부부는 어느 날 선물을 사들고 이웃집을 찾아갔다. "댁은 많은 식구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명랑하고 화목하게 지내고 계시는데 무슨 비결이 있으면 가르쳐주십시오"그러자 일곱 식구 집의 어른이 대답했다. "댁은 잘난 사람들만 모여 살기 때문에 그렇고 우리 집은 모두가 못난 사람들만 모여 살고 있으니 조용할 수밖에 없어요"이 말을 들은 젊은 부부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을 본 일곱 식구의 어른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우리 집에서는 누가 컵을 깨뜨렸을 때 깨뜨린 사람이 제 잘못이라고 사과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아니야 내 잘못이야 내가 컵을 그곳에 놓지 않았어야 했는데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이 저마다 제 잘못이라고 구실을 달아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합니다".이 말을 듣고 있던 젊은 부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거참 진리가 가까운데 있었군요, 우리 집은 그 반대였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면 저마다 제 잘못은 없고 상대방만 탓했습니다. 왜 조심성이 없냐느니 왜 그런 곳에 두었냐느니, 왜 나만 야단치냐느니 하면서 서로 소리를 질렀으니까요"라며 참으로 좋은 교훈을 얻었다면서 돌아갔다.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면 가정은 저절로 화목해진다는 이야기이다. 행복이란 화목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과 화목한데서 비롯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나, 언제나 항상 행복한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화목 제물이 되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을 위한 불변의 진리가 여기에 있다. 먼저 예수 믿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본문은 교회 내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와 "강한 자"들 사이에서 서로 판단하는 일로 화목하지 못하고 분열된 모습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두되는 가장 큰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신앙 문제의 견해 차이로 인해 서로 판단하는 일과 그로 인한 내적인 분열이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내란이나 가족 싸움이 종종 일어났으며(삿 20:29-48, 왕상12:16-24, 왕하 10:1-24), 신약 시대 바울이 세운 대부분의 교회도 분열을 일으켰다. 즉 고린도 교인들은 우상 제물을 먹느냐, 못 먹느냐로 논란이 있었고, 교회 지도자들로 인해 분열을 일으켰으며, 서로 고소까지 했다(고전 1:10-13, 6:1-8, 10:14-33, 11:17-22). 갈라디아 교인들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서로 다투었다(갈 1:6,7:5,15). 빌립보 교회에서는 두 여인이 서로 반목한 결과 교회가 분열되었다(빌 4:1-3). 본문의 로마 교회 성도들 역시 절기 문제와 음식 문제로 인해 서로 판단하며 분열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1절에, "믿음이 연약한 자"는 유대교 출신의 기독교인들로 구원받은 후에도 레위기 11장에 기록된 음식에 관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이교도의 우상 제물에 대하여 신앙적 거리낌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이들을 "받아드리되 비판하지 말아야 할" 믿음이 강한 자는 주로 이방 출신들로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게 된다는 확신에서 레위기 11장의 음식에 관한 규정은 신앙 생활에 조금도 중요치 않으므로 무엇이나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이들이 서로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깨달은 대로 행했더라면 문제는 없었을 것이지만 이들은 서로 자신들처럼 행하지 않는 자들을 "믿음이 없는 자"라고 판단하고 비방하면서 자신들의 신앙 행위가 서로 옳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그들 중 믿음이 강한 자들은 구약 율법이 금하는 고기를 먹으면서 모든 음식을 자유롭게 먹지 못하는 자들을 업신여겼고 반면에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채소만 먹으면서 고기를 먹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했다. 유대교 출신의 기독교인을 비판하는 근거는 이렇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구약 시대의 모든 의식법을 완성한 것으로 이제 하나님께서 모든 음식을 깨끗케 하셨으므로 음식에 관한 구약의 모든 규정들이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행 10:12-16, 고전 8:8).음식 자체는 이제 속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한 자'들은 고기든 채소든 무엇이든지 먹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채소만 먹는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다(1-3절).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본장을 통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불명료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권고를 제시함과 동시에 견해를 달리하는 기독교인들이 서로 화합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을 이루도록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 바울의 개인적인 견해는, 무엇을 먹으며 언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지에 관한 율법적 사항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성숙지 못한 '연약한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바울이,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며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3,4)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어느 쪽도 편들지 아니했다(3절). 바울은 연약한 자들의 자기 제한(먹거나 안 먹거나 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지닌 신앙의 분량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12:3). 이러한 문제는 교리화하기 어려운 문제이고 더군다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지엽적인 문제로 인해 성도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아니했다(19절).바울은 개인 위주가 아니라 교회의 일치와 덕을 위주로 하여 성도들의 화목을 도모하는 조화(Harmony)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래드 교수(G.E.Ladd)는 이같은 바울의 해결 방식을 "자유와 사랑간의 긴장"이라고 표현했다. 모든 성도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생에 대해서 변명해야 할 상대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귀중한 것이며 인간의 명령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주장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으나 사랑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나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약한 형제에 대하여 사랑의 책임이 있다. 그는 자신이 그 형제를 지키는 자임을 잘 깨달아야 한다. 강한 사람은 마땅히 연약한 사람을 보살펴야 한다(15:1,2).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누리되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항상 기억해야 하며 성도의 자유는 사랑과 덕을 세우는 원리에 의해 제한받을 수 있는 것이다(19절).바울은 이 원리에 의해 로마 교회의 교인들에게 권고한다. "고기를 먹거나 포도주를 마시거나 너희 형제를 실족케 하는 그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13-21절). 뿐만 아니라 이 원리를 자신에게도 적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구체적 삶의 행위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난해해진다. 주어진 환경에서 특정한 행위가 그리스도인 자신에게 허용되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다음 세 가지 질문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경은 나에게 이 행위를 금하는가? 만일 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행위를 금하는 절대적인 명령을 하였다면 그 행위를 하는 것은 명백히 죄가 된다. 둘째, 비록 그것이 본질적으로 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가 행함으로 시험에 빠지거나 혹은 죄를 지을 수도 있는가? 마태복음 5:29,30을 보면 예수는 그리스도인이 죄의 유혹에 처할 경우에 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이 성경구절의 참된 뜻은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질 위험이 있는 제반 기회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만일 네 오른 눈이 실족하게 하거든"이라는 조건절을 유의해야 한다. 이 조건 절은 어떤 사람에게는 큰 시험이 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겐 전혀 시험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예컨대, 두 그리스도인이 외국인이 초대하는 만찬에 참여했는데 식사 전에 포도주 대접을 받았다고 하자. 한 사람은 포도주 한 잔을 두고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 둘 다 '아니오'로 통과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첫 번째 질문을 '아니오'로 통과했으나 두 번째 질문은 '예"로 걸려들었다. 그는 술 한 잔을 마시기만 하면 술이 술을 부르고 그로 인해 죄를 지은 과거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포도주 앞에서도 두 사람의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은 다를 수 있다. 셋째, 내가 이 행위를 하는 것이 약한 형제를 자극하여 그를 실족하게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성경에서 금한 범죄 행위와 그 안에 죄는 없으나 죄를 범하게 하는 행위를 피할 의무가 있을 뿐 아니라 약한 형제를 자극해서 그가 실족 당하는 것을 피할 의무가 있다(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14:1에서 15:13까지와 고린도 전서 8,9,10,11장에서 강조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해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해야 한다. 본문 3절에서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다"고 했다. 믿음이 약한 자나 강한 자나 모두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신 자를 우리가 서로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 뜻에 순종치 않는 것이다. 본문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만 인간을 판단하심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인이시다(5-9절).그리스도만이 거듭난 우리 각자의 양심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향하신 그 분의 판단만이 전적으로 유효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귀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또한 보존되어야 한다. 6절-9절을 보면 연약한 자든 강한 자든 그들의 행위는 주님을 위하는 동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특별한 날이 있거나 다 똑 같은 날이거나 그들은 모두 주를 위하여 살고 있다. 옥합을 깨는 여인의 중심을 받으셨던 예수께서 그들의 계산대로 여인을 판단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지 않으셨던가(막14:3-9)?. 지금도 주께서는 방법의 시시비비보다는 믿음과 중심을 직접 받으신다. 우리는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심판대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10-12절).자기 성찰은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며 타인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죄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그러므로 나 중심의 생활(Ego-centric)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God-centric)의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특별히 교회 생활에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고 오직 자신을 살펴 장래의 심판대에서 그리스도를 부끄럽지 않게 영접할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옛 말에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나치게 비판적이면 친구가 없다" 고 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수고하고 있는 사사 입다를 비난하면서 입다를 중심한 길르앗 사람들을 또한 '도망자'라고 모욕했다. 입다의 신분을 염두에 두고 멸시했던 것이다. 사사기 11:1-3에 보면 입다의 신분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사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런데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다. 이 기생의 아들 입다를 본처의 아들들이 자라매 집에서 쫓아내었다. 그래서 입다는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살게 되었다.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입다와 자신들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에 대해 격분한 길르앗 군대들은 요단강 나루턱을 점령하고 그곳을 지나가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잡아 죽였다. 길르앗 군대를 두려워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들의 신분을 숨기고 에브라임이 아닌척했다. 그래서 그들의 발음을 들어보고 에브라임 사람을 식별했던 것이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십볼렛"이라는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고 했던 것이다(삿12:6).이로 인해 결국 그들은 부끄러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 속담에 "남잡이가 제잡이"라는 말과 같이 남을 모함하고 멸시하고 깔보다가 스스로 화를 초래하며 부끄러운 죽음을 당한 것이 에브라임 사람들의 결과요 미련한 노릇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헐뜯어 말하기를 좋아하는 심리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남을 비방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아름다워질 때가지 혹은 아름답게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마음가짐으로 상대방을 내가 아름답게 보려고 애쓰고 상대방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과 조화(harmony),화목을 이룰까 하고 내가 먼저 힘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불명예스럽게도 세계 삼대 악처전에 들어간 사람이다. 한 번은 소크라테스가 친구의 방문을 받고 있는 도중 무슨 일이었는지 그의 아내가 몹시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다가 나중에는 물통을 남편의 머리 위에 들어부었다. 흥분한 친구에게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말했다."천둥이 친 다음에는 소나기가 내리는 법이라네. 그렇지만 소나기 뒤에는 곧 개일 것이니 너무 걱정 말게" 소크라테스는 부인의 성격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부부의 하모니(조화)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나의 남편 나의 아내와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먼저 힘쓰고, 부모 형제 나의 가정 나의 교회 전체가 아름답게 조형된 한 폭의 아름다운 미술품이 되기 위하여 내가 애쓰고 친구와 이웃과 성도 사이에 훌륭한 조화를 만들기 위하여 내가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적극적인 화목의 창조자(Peace-Maker)가 될 때, 그 아름다움이 그 행복과 축복으로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주는 하나님의 조화로 꾸며진 예술품이다. 거기에는 질서가 있고 균형이 있고 조화가 있다. 그것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교향곡(Symphony)이다. 그 균형을 깨뜨리는 것은 죄이다. 그 조화를 파괴하는 것은 악이다. 화목을 깨뜨리는 것은 마귀의 역사이다. 지금은 은막에서 사라졌지만 이탈리아의 배우 소피아 로렌은 대단한 미인으로 정평을 받은 여성이다. 그러나 사진을 바짝 당겨 부분 부분을 따로 보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 있다. 눈은 깜짝 놀라 쓰러질 직전 같고 중앙에 버티고 있는 코는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아도 바위의 견고함 이외는 별로 보탤 말이 없다. 얼굴의 절반 밑은 전부가 입이 아닌가 하고 착각이 가는 정도의 대문만한 입이다. 그런 상황이 배치의 묘에 따라 절세의 미인이 된다. 사람도 그렇다. 작은 자리든 큰 자리든 자기에게 맞는 자리에 앉아야 전체가 아름다워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각 지체들이다. 로마서12:5,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몸의 각 지체는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한 몸을 이루고 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화목한 생활을 위해 각자 주어진 믿음의 분량을 지키며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여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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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성도의 삶의 목표

(롬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롬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롬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롬14: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롬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롬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롬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롬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14: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롬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롬14: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롬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롬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롬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성도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값을 주고 하나님께서 사신 바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 전서 6:19-20)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본문 8절).

이제 우리의 삶의 분기점을 가져 온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생사의 궁극적인 표준이 된다. 성도의 삶은 죽음도 자신에 의하여 주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예속된다.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본문 7절).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는 하나님의 법과 반대되고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현세의 연락과 육체적인 즐거움을 위해서 사는 "옛 사람"(롬 6:6,엡 4:22-24)을 말한다. 이 "옛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은 사사기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행위에 대해 자기를 판단기준으로 삼는 사람이다. 아무리 끔찍한 범행에 대해서 자백하는 표정이나 추호의 부끄러움이나, 후회, 혹은 슬픈 기색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행위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논리 가운데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권위도 인정치 않는다. 자신의 생활 가운데 어떠한 "왕"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들의 소견대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로마서 1:28-32 은 그러한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이는 삶 가운데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표준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사람이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어느 정신 병원에서 한 정신과 의사가 환자들과 상담하면서 일어났던 일이다. 이 의사가 한번은 어느 환자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격리실 안으로 뛰어들어가 찾아보니 그 안에서 다른 환자들과 어울려 있으면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더라는 것이다. "왜 네 이름을 부르는데도 대답을 하지 않느냐?" 고 꾸짖으니 ,대꾸하는 말이 엉뚱하게도, "이제부터는 나를 나폴레옹 장군이라고 부르라" 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사가 "누가 네 이름을 그렇게 바꿔 부르라고 하더냐?" 고 물으니, 그 환자의 대답이 "지난밤에 하나님이 나를 나폴레옹이라고 부르시더라" 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누워있던 다른 정신병 환자가 벌떡 일어나면서 "내가 언제 너를 나폴레옹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느냐?"고 소리를 지르더라는 것이다. 그는 바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자기 중심의 사람은 삶의 목표가 '썩어 질 몸'(고전15:42-49 참조)이지만,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이며 삶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인 사람은 자기 중심(Ego-centric)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God-centric)이 되어 '타자를 위한 존재의 삶'(Being for the Other)을 살게 된다. 인도의 썬다싱의 간증을 보면 아주 감명 깊은 내용의 글이 있다. 어느 날 그가 눈 덮힌 히말라야 산을 넘는데 가다가 보니 한 사람이 추위를 못이겨 쓰러져 있었다. 마침 또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 함께 부축해 가자고 했더니 자기도 힘들어 죽겠다면서 그냥 지나쳐 버렸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사력을 다하여 그 사람을 업고 산을 넘기 시작하였다. 한참 가는데 어떤 사람이 죽어 있는 듯하여 살펴보니 아까 혼자 살겠다고 먼저 간 사람이었다. 그러나 썬다싱과 등에 업힌 사람은 서로의 체온 때문에 온기를 유지하면서 함께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10:39)고 했다. '타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할 성도가 "형제를 판단"하거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망케 하는"(본문15절)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짓밟는 행위이다. 루터(M.Luther)는 "어떤 것이 정당한 믿음의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당신의 형제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당신은 잔인한 살인자와 같다. 뿐만 아니라 내 형제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멸하는 것이 되기에 그것은 온갖 종류의 잔인성을 능가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연약한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도 죽었기 때문이다"(고전8:11) 라고 말했다. 교회 안에 있는 한 형제는 그가 아무리 연약한 자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여 구원한 형제임을 생각하여 사랑으로 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강한 자"가 약한 형제를 근심케 하거나 상처를 안겨 준다면 그것은 실로 무서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죄악이 된다. 강한 자들은 자유를 구가하기보다는 사랑의 원리를 따라 형제를 생각하며 행동하여야 한다. 믿음이 강한 형제의 독선과 실수는 믿음이 연약한 상태에 있는 형제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따라서 강한 자는 자기의 행동이 정당하다해도 형제를 위하여 절제하는 것이 성도의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건덕 생활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신의 신앙 양심보다 타인의 신앙 양심을 더 존중하는 가운데 사용되어야 한다(고전6:12). 성도는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성도는 항상 사랑의 법에 지배되어야 한다(롬15:2,3)."완전한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지 않는 아내가 가장 완전한 아내다" 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부담스러운 일은 없다. 이것은 상대방을 괴롭히는 일이다. 완전한 것을 요구하는 자신은 더 형편없는 자이다. 그러나 덕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초월한다. 덕은 내 자신에 대해서는 완전하려 하지만 남에게는 관용을 베푼다. 남에게는 바늘 끝처럼 예민하면서 자기에 대해서는 바다처럼 넓다면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철저히 완벽을 요구하면서 남에게는 바다처럼 넓은 아량을 베푸는 자가 덕 있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냉엄하리만큼 객관적인 비판의 자세를 가지고 남을 대해서는 가장 주관적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덕이 있어야 한다. 믿는 사람들에게 똑똑하다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니다. 똑똑하다는 교인보다는 진실하고 좀 어수룩한 교인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부르스(F.F.Bruce) 교수는 신앙 생활 특히 교회 생활에는 지식이 전부가 아니며 늘 사랑의 요구를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만을 최대한도로 고집할 때 교회는 쉽게 분열될 위험에 처하게 되지만, 자신의 자유를 사랑의 원칙에서 스스로 제한할 때 교회는 진정한 본질을 회복하게 된다. 고린도 전서 8:1에, "...지식은 교만 하나 사랑은 일으켜 세운다"고 했다. 지식과 사랑은 함께 역사 해야 한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의 지식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상처 입힐 것이다. 지식은 사랑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지식에 사랑이 함께 역사할 때 믿음이 연약한 형제는 강하게 자라갈 것이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연약한 자에게 사랑으로 아름다운 영향을 주고받아야 한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연약한 자의 신앙이 성장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참을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이 참 성도의 모습이며 교회를 세우는 건덕 생활이다. 성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 자신의 신앙 형태, 자신의 신앙 체험 등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본문19-23절). 각자의 믿음을 자기 믿음과 동등하게 존중해 주는 사랑을 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록 자신은 좀 답답하고 덜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개개인의 적극적인 사랑 속에서 신앙 공동체 전체의 성숙이 촉진되는 것이다. 교회라고 하는 신앙 공동체 전체가 성숙해질 때 자신도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형제가 성장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성장을 가져올 수 없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나 연약한 사람이나 모두 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성장해야 한다(엡4:13-16). 강한 성도는 사랑 안에서 성장해야 하며 연약한 성도는 지식 가운데서 성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연약한 양심을 가지고 성숙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

교회의 활동을 젖먹이 그리스도인들 수준에 맞춘다면 보다 성숙한 성도들의 봉사와 전도 사역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젖먹이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성숙도 방해하는 것이다. 연약한 사람들은 강한 자에게서 배워야 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사랑하므로 성장해야 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의 양심은 지식으로 강해지는 것이다."모든 음식은 다 정하다"(본문 14,20절)는 진리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 진리는 사랑의 분위기에서 전달되어야 하며 그래야 미숙한 그리스도인은 성숙하여서, 강한 양심을 개발할 수 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화평과 성숙을 가져올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본장에서 교회를 이 시대에 있는 하나님 나라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특정한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다.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본문17절). "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 생활에 이루어질 때를 말한다.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빌4:7). 그리고 "희락"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을 말한다.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본문 18절).

성도들은 당연히 교회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기쁨을 늘 추구해야 한다. 이 때에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며, 그것이 곧 천국 건설이다. 교회에서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바른 교리의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형제들이 아니라 그 지식과 함께 교회의 평화를 원하고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충심으로 바라고 그것을 위해 기쁨으로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즉 자기의 이익보다는 교회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먼저 교회와 성도의 성장과 영광을 성도의 삶의 목표로 삼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신과 교회가 되어질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우리 평강 교회 성도 여러분에게 있을찌어다" 아멘(엡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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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

"(롬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롬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롬15: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15: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롬15: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15: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15: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롬15: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15:10)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롬15: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롬15:12)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소요리문답 제1문).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군 천사들이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라고 했다. 이처럼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도, 예수님의 탄생하신 목적도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고린도 전서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베드로 전서 2:11에,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고 했다. 이 말씀들은 비단 먹고 마시는 일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모든 것을 형통하도록 인도해 주신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먼저,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시편29:2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고 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예배를 받으시기를 즐겨하신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축복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다. 다음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다 선하시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로병사, 희로애락에도 불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요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을 살펴보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첫째 방법은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요한 복음17:20-26,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예수 믿는 성도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단결하지 못하고 뜻이 일치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한 말을 보자, "우리는 한 골육이라 너나 ...서로 다투게 말자"(창13:8) 아브라함은 그와 롯이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을 이웃에게 보이기를 원하였다. 고린도 전서10:32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 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을 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세상에서는 비정한 약육강식의 논리만 통용될 뿐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눌림에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다. 그러나 성도의 공동체,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강자가 약자의 짐을 대신 져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을 성취하여 하나가 되는 길이다(갈6:2).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우리에게는 언제나 진실로 하나가 되도록 애써야 할 신성한 의무가 부여되어 있다. 덕이라는 말은 인간과의 윤리적인 관계에 보다 더 비중을 둔 것으로 성도가 자신보다 이웃을 기쁘게 하되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함을 뜻한다. 인생의 행복이나 기쁨은 자신의 행복 추구나 자신의 기쁨 추구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남을 행복하게 해 주고 남을 기쁘게 해줄 때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12:12-13,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당시 분열되고 갈라진 고린도 교회를 두고 에베소에서 바울이 직접 써서 보낸 서신이다. 인간의 머리, 몸 그리고 몸에 붙은 지체를 두고 비유로 그리스도와 교회와 교인들의 신비적인 연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교회를 포함한 전세계와 전 인류가 하나가 되는 신비적인 연합의 길을 보여 주고 있다.'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해서 발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귀가 몸의 한 부분이 아닌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원인은 '나는 네가 아니니까? 나는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데 있다.아볼로파,게바파,바울파,예수파로 갈려있던 고린도 교회들! 말씀도 잘 전하고, 기적도 많이 베풀었다. 가르치기도 잘 하고,병도 잘 고치고, 또 이상한 언어(방언)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교회를 몸으로 하여 이루는 '너'와의 신비적인 연합은 거부했다.'나'와 '내파'만의 이익 추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교회의 전체성도 볼 수 없었다. 신앙도 축복도, 천당도 '나' 하나만을 위하여 비는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리 없으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존재할 리 없다.'나'에게 필요한 것만을 추구하기 위해 온 것뿐이기에 '나'와 그리스도,'나와 너'의 만남이 있을 리 없다.

고린도 전서 12:22-23을 보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나'외에 '너'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너'를 긍정하는 순간, 절대화되었던 나! 나의 신앙! 나의 지식! 나의 재산! 나의 모든 것은 상대화되기 시작한다. 상대화된다는 것은 '내' 속에 다른 '너'가 들어 올 수 있다는 말이다.'나'와 '너'라는 지체를 하나로 묶는 것은 "몸"을 통해서이다."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몸"은 만날 수 없었던 '나와 너'를 하나로 묶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다(고전 12:13).위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의 감격 없이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다."몸"이란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다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 그 자체, 여기서 나와 너는 비로소 우리라는 한 몸으로 연합하게 된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바로 나와 너를 사랑으로 화해하고 또 만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교회가 있기에 깨어진 남편과 아내가 '우리'로 연합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있기에 정부와 국민 사이가 우리에로 동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있기에 민족과 민족 사이에 새로운 '우리'가 탄생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예수의 몸이기 때문에 가정과 민족, 그리고 나라가 하나되는 원리가 교회에 있는 것이다. 교회는 세계 통일의 주체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통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만물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이다.

에베소서1:8-9,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부조화와 분리와 분열이 가장 불행한 사실이며, 여기서 나와나(ich und du) 그리고 나와 그것(ich und es)과의 분리, 분열, 부조화를 초래하게 된다. 분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위에 에베소서의 말씀은 자연계의 분리와 인간의 분리와 시간의 분리와 영원의 분리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든 분리는 다만 모든 인간과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될 때만이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비유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이다. 당시 로마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묶이는 것을 바라보고, 세상 모든 것이 로마 보다 완벽한 충만성을 가진 그리스도안에 집중 되여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상징과 비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통일의 개념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기능은 무엇인가? 먼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손, 발 등 도구와 지체가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화해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셋째, 통일의 주체가 되는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통일된다는 사실을 전파해야 한다."인생의 모든 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그리스도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교회는 전 세계적이며 전 우주적인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라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교회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E.F.Scott)".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대단히 배타적이었다. 그들은 선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로 사람들을 양분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창조한 것은 지옥의 땔감으로 쓰려고 만들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을 순수한 유대인의 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서로 만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종적 담을 예수는 헐어 버리셨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악의 담뿐만 아니라 인종적, 계급적 담을 헐어 버리신 것이다(엡2:11-22).따라서 오늘날의 지방색은 반기독교적 죄악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동과 서가 없으며 있어서도 안되며 그 어떤 담도 있을 수 없다. 향토애는 참으로 귀한 것이다. 그러나 고향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적대시한다면 그는 교회의 직위가 무엇이든지 간에 아직 중생하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11-22).

주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하여 이웃을 기쁘게 할지언정 남을 비방해서는 안 된다. 어느 목사님 사모님은 평소 내성적이고 말씀이 없으셔서 심방을 가도 늘 한쪽에 조용히 앉았다 일어서곤 하셨다. 그런데 어는 날,"사모님, 가만히 있지 마시고 무엇이든 칭찬을 해 주세요"라고 한 집사님이 권고하셨다. 그 후로는 방문하는 집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아낌없이 칭찬을 하셨다. 하루는 어느 가난한 성도 집에 심방을 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딱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곱게 수놓아진 책상보였다. 사모님은 이내,"이 책상보가 참 예뻐요, 솜씨가 있으신가봐요"하면서 한참을 칭찬해 주었다.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그 집에서 선물이 왔는데 펴보니 다름 아닌 책상보가 곱게 들어 있었다. 사모님은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다음 날 말이 돌기 시작하였다. 사모가 어떻게나 탐심이 많은지 심방 갔다가 좋은 것이 있으면 빼앗아와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사모님은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아 그전보다도 더 말이 없어지고 노이로제 증세까지 나타내게 되었다.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내뱉은 한 마디의 말이 한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고야 말았다. 비방은 이렇듯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더욱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간의 비방은 하나님의 가슴까지도 찢어놓고야마는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남의 말을 하지 말고 자신이 비방을 받을 때는 참아야 한다."남의 말을 하려면 삼대문(三大門)을 통과한 후에 하라"고 하는 격언이 있다. 그것은,

(1).그 말이 참인가 아닌가 하는 문,

(2).그 말을 하면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문,

(3).그 말을 함이 친절한 일인가 아닌가 하는 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방을 받으면서 참으시고 남을 비방하지 않으셨다. 우리 죄인들이 비방을 받는 것은 죄인으로서 받는 비방이니 마땅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죄인들에게는 비방이 유익한 것이다. 이유는 죄인이 받는 비방을 인하여 회개할 때는 큰 유익을 받기 때문이다. 의인이 비방을 잘 받으면 하늘의 상이 있고, 죄인이 비방을 잘 받으면 회개를 이루어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릴 기회가 된다. 둘째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인내와 안위의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소망의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져야 한다(본문5-13절).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5절)던 것을 본 받아 남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야만 한다. 결코 내 능력,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고 인내의 힘을 얻어서 소망과 안위를 받고 말씀의 힘으로 덕을 세우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덧입게 될 때 남을 기쁘게 하되 선과 덕을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접한 것처럼 영접한다면 우리가 영접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면 용서 못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남을 용서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그 깊이와 충만함을 아직도 깨닫지 못했거나 진실된 회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용서와 사랑은 한 인간의 인격에서 나오는 덕행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은 덕이다. T.S.엘리옷은 현대인을 가리켜 '텅 빈 사람이요 충만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있어야 할 믿음, 소망, 사랑은 텅 비었고, 없어야 할 미움, 질투, 시기, 죄악은 충만하다는 말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셔야 기쁨을 서로 나누고 누리며, 평강을 주셔야 평강을 서로 나누고 누릴 수가 있으며 성령으로 충만케 해야만 소망 안에서 살 수 있다. 이 소망이 있고서야 덕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소망은 덕을 이루는 근본적인 활력소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말씀과 은혜로,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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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하나님의 은혜로 살자

"(롬15: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롬15: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롬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롬15: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롬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롬15: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롬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롬15:21)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5: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번 막혔더니 (롬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롬15: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롬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롬15: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롬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롬15: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롬15:29)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줄을 아노라 (롬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롬15: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롬15: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롬15: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모든 사람은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천지 만물이 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서신을 보면 '은혜'라는 말로 시작하여 '은혜'라는 말로 마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 성구들이다. 롬 1:7,16:24, 고전 1:2,3, 16;23, 고후 1:1,2, 13:13, 갈 1:1,2,3, 6:18, 엡 1:1,2, 6:24, 빌 1:1,2, 4:23, 골 1:1,2, 4:18, 살전 1:1, 5:28, 살후 1:1,2, 3:18, 빌 1-3,25). 그야말로 "바울이 쓴 모든 편지는 은혜의 건반을 두드리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사람들의 귀에 울리는 은혜의 메아리 소리를 남겨 놓으면서 끝내고 있다"(윌리암 바클레이). 바울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에 의한 것이지 다른 아무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어느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다."(고전15:10)

이 말씀을 갈라디아서2:20 과 같이 살펴보자,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 앞의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의 속에 있었다. 그러나 뒤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에 계셨다. 다시 말해 바울은 은혜와 그리스도를 같은 것으로 말한 것이다. 둘 다 같은 의미이다. 은혜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은혜인 것이다. 바울의 삶의 원리는 그리스도이시며, 은혜인 것이다. 문학가'오스카 와일드'의 우화적 단편이 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과거에 은혜를 입혀준 몇 종류의 사람을 그 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엮어본 것이다. 처음 예수는 한 주정꾼을 만난다. 그는 거의 폐인과 같이 된 젊은이었다. 예수께서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하고 물었더니 주정꾼은 이렇게 대답한다."당신이 내가 절름발이었을 때 나를 일으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다닌들 무엇을 먹고살라는 말이요. 그 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한 직업 하나도 없었오." 그 다음 예수는 한 여자가 창녀가 되어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 받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예수는 여자에게 말한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오?" 창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 준 것 같았으나 창녀에게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이오.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했오." 그 후 예수는 한 불량자가 정신없이 이웃을 매질을 하고 있는 장면에 부딪힌다. 예수는 그에게 묻는다. "여보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소?" 불량자는 예수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었소.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거요? 보이는 것이 모두 신경을 돋구고 귀찮고 화나는 세상이 아니오? 결국 나는 화풀이도 하고, 마구 치고 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였소." 이 단편은 은혜를 은혜로서 살려 빛을 내지 못한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는 참으로 거대한 것이다. 창녀에게서 구원되거나 소경이 눈을 뜨는 이상의 큰 은혜를 우리는 입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감사를 모른다. 감사란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바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이 되는 새로운 생활로 자기를 전환시킬 때 감사의 의미가 비로소 살아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5:10을 읽어보자,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느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한 때의 핍박자였던 그가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자신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갈라디아서 1:15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리고 고린도 후서 1:1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뜻"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시간 이전부터 있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영원하며 그리고 풍성하며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활 속에서 발견하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때, 바른 인생관, 바른 사명관, 바른 가치관으로 자신과 더 나아가 가정과 민족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에 걸친 광야 방랑생활 끝에 약속의 땅 팔레스틴에 정착하게 되는데 정착과정에서 최대의 장벽은 블레셋민족이었다. 이미 그 땅에 살고 있었던 블레셋민족은 억세고 강한 군대 조직을 가진 사람들로서 성경에 나타난 역사를 보면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이 세 종류의 어려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있는 어려움 즉 현대의 블레셋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블레셋은 기습의 명수들이었다. 낮밤을 가리지 않은 블레셋의 기습 공격에 이스라엘은 참으로 큰 고통을 연달아 겪었다. 우리들에게도 질병과 뜻하지 않은 사고와 재화의 기습은 거의 죽는 날까지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둘째로,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압력을 계속 가하였다. 그래서 전쟁시가 아니라도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의 압력을 느끼며 계속 불안과 공포속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에게도 고독의 압력, 계속 나에게 붙어 다니는 걱정거리, 직장의 압력, 학업의 압력, 숙환의 압력, 가정생활에서 받는 여러 종류의 압력 속에서 살아가며 이런 정신적 압력은 많은 질환과 정신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셋째로, 블레셋은 거의 해결할 수 없는 강자였다. 즉 절망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철저히 패전하여 3만명이 전사하고 여호와의 법궤를 탈취 당한 처참한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거의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절망적인 사태에 부딪치는 때가 종종 있다. 사무엘 선지자는 온 민족을 미스바에 소집하여 대회개 운동을 개최하였다. 그들이 회개한 내용은 지금까지 도와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 속에 살며 자기가 좋아하는 우상을 만들게 된 죄악에 대하여 심각하게 회개하자는 내용이었다. 미스바 회개 운동이 있은 뒤에 이스라엘은 블레셋 군대와 싸워 기적적인 대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특히 그들의 신앙적 역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들은 전승비를 세웠는데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뜻은 "도우심의 돌"이란 것이다. 전승비 제막식에서 사무엘은 오직 한마디의 연설을 하였다."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와 주셨습니다."즉, 한마디로 "에벤에셀"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순간까지 도와주셨다는 은혜의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삼상7장).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바울은 자신을 모든 일의 조직 속에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는 하나의 도구로 보았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무엇을 했는가를 이야기했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가 나를 사용하여 그것을 하셨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흔히 감사하지 않는 두 가지 이유는 자기의 힘으로 무엇을 했다는 생각과,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나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고린도 전서 4:7의 고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바울은 타인의 잠재된 선, 지식, 가능성을 발견하고 계발하며 격려한다(본문14절).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든지 가능성 있는 위대한 존재로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바울은 온유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담대하며, 자기 맡은 직분에 대한 존귀함을 알아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사명감으로 일한다(본문17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삶의 목적에 있어서도 위대하다(본문16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행동에 있어서도 위대하다(본문18-21절).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두려움을 제거하고 기쁨과 평안으로 충만하게 하기 때문에 모든 슬픔과 좌절을 극복하고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한다.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신학자이며 미국의 유수한 사상가)씨가 프린스톤 신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딸에게 청혼하는 청년이 나타났다. 그의 딸은 성격이 몹시 날카롭고 괴벽스러워 혼처가 있을지 걱정하던 상황이었는데 딸에 비해 청년은 너무나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양심에 걸려 거절했다. "자네가 내 딸을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결혼은 생각치말게." "제가 따님을 사랑하는데도 안됩니까?" "글쎄 내 딸을 사랑하지 말라니까." "따님도 저를 사랑하는걸요." "내 딸과 자네는 자격이 잘 맞지 않아." "무슨 자격입니까? 따님은 크리스챤인데 그 이상의 자격이 어디 있습니까?" "젊은이 고집부리지 말게, 누구와도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일쎄, 그럼 자네가 하나님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도 내려지고 그 사람의 여하한 조건도 극복할 수 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충분히 용서하시고 충분히 구원하실 수 있는 한량없는 은혜이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성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환난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는 것은 나에게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품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 평화를 갖는 것은 내가 구축한 안정장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켜 주기 때문이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내가 쌓아 올린 노력과 선행의 탑을 보고 주시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십자가의 공로 때문이다. 은혜의 주님이신 예수를 마음 속 깊이 영접하여 하나님 은혜의 힘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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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진리를 위해 산 사람들

"(롬1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롬16:2)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롬16: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롬16: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롬16:5)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롬16: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롬16: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라 (롬16:8)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롬16: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롬16: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롬16:1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롬16: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롬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롬16: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롬16:1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롬16: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롬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롬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롬16:19)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롬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롬16:21)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롬16:22)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롬16:23)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롬16:24) (없 음) (롬16: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롬16: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롬16: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세상 역사에는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화, 체육 등 분야별로 유명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눈에는 농어촌의 교역자나 장로및 집사의 이름은 뜨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시는 눈은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에 나타난 사람들은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무명의 사람들이었다. 세상의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은 다 빼고 이들의 이름만이 영원한 성경 속에 기록된 것은 그들이 모두 '진리'를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세상 역사의 사건과 인물들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기록될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왜냐? 세상 역사는 썩어질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행한 것은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마태복음25:40을 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진리"란 무엇인가? 요한 복음14:6을 보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는 도덕이나 윤리에 불과한 것으로 "진리의 영"이 없는 전혀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생명력이 없는 진리는 착하게 살게 하는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궁극적인 구원(생명)에는 이르게 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만이 "진리"이며 누구든지 "진리"를 가르치고 전할 수 있으나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요1:7)이며,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보내신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함께 해야만 "진리"는 살아있는 말씀,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를 살리는 생명으로 역사한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착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죽음에서 벗어나 사랑하며 영원히 사는 길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요14:6). 이 "진리"(생명)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 선택과 결단에 따라 자신의 삶이 영원히 기록되는 영생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맥도날드(햄버거 연쇄점)의 창설자인 크록크(Ray Kroc)씨는 크리스챤 센츄리지(81년9월12일)에 회개의 글을 실었다. 그는 3대 신조를 가졌다고 한다. 첫째,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 둘째, 가족을 위하여 일한다. 셋째, 맥도날드 회사를 위하여 일한다. 그러나 이 순서는 집과 교회에 나가 앉았을 때의 선택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지내는 사무실에 나가서는 순서가 반대로 흐르고 있음을 고백하고 회개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첫째가 맥도날드를 위하여이고, 둘째가 가족이고, 셋째 자리에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을 놓고 있는 것이 자기의 실제 선택이라는 고백이다. 자신과 자신의 일이 영원히 남는 가치를 창조하기 위하여서는 영원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결단과 선택을 가져야 한다.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최후의 유언을 남긴다(여호수아24장).그는 후배들에게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하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선택에 맡기면서 자기자신의 결정만을 말한다. "나와 나의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그는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자기의 여생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여호수아의 결단에 각 지파의 영도자들은 크게 감동을 받고 모든 우상을 제거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그들의 생애를 바칠 것을 맹세한다. 사도 바울은 만세 전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예정되었으며 그를 위해 태어났음을 항상 인식하고 있다(롬 1:1,엡 1:1-14).그래서 그는 복음의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데서 자기 존재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빌1:20-30).

드오리아(D'Auria)의 소설에 영화로 유명해진 "하이눈"(High Noon-백주의 결투)이 있다. 주인공인 보안관은 마을의 법질서를 사수하려 한다. 악당들과의 대결을 앞두고 보안관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간청하며 이렇게 말한다. "총 잘 쏘는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은 '이 일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한 명도 나서지를 않아 결국 보안관 혼자서 결투를 벌리게 된다.'이 일이 나의 일이다'고 믿는 사람은 온 동네에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다는 로마서1장1절의 말은 '내가 이 일을 위하여 태어났다'는 확신을 뜻한다. 그 때 비로소 나의 가치 있는 존재 기능이 발휘되는 것이다. 이사야는 소명을 자각하면서 "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사49:5) 고 외친다. 귀중한 생명으로서의 자기의 가치를 존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살게 될 때 생기는 것이다. 복음을 위해 사는 사도 바울을 여러 가지 방면에서 돕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며, 영원한 진리를 위한 삶이 되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진리를 위해 산 사람들의 면모를 살펴보자. 먼저, 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로 소개되고 있는 '뵈뵈'가 있다. 다원화된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복음 전도 후원자가 필요한 것이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배후에는 세 사람의 신학자가 그를 돕고 있다. 조직 신학자, 성서 신학자, 사회학자 등 세 학자들이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크게 일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뵈뵈는 여집사로 남을 많이 도와주었다. 편벽되이 한 두 사람만 도와 준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을 도와주었다. 뵈뵈는 남을 도와주는 일에 피곤해지지도 않고, 도리어 그것을 즐기는 아름다운 덕이 있었다. 뵈뵈가 경제적인 바울의 후원자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효과적으로 바울을 도왔던 보호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뵈뵈를 추천하면서 그에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필요한대로 도우라고 한다. 다시 말해 경제적으로 소용되는 바를 무엇이든지 도우라는 말이다. 그만큼 바울이 확실히 추천하고 믿을만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다. 뵈뵈를 돕는 것이 바로 바울 자신을 돕는 것이 되고, 결국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로마 교인들에게 생소한 뵈뵈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영접하고 그를 도우면 그것이 곧, 바울을 돕는 것이 되고, 또 교회를 돕는 일이 되는 것이다. 잠언11:25,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두 번째로,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있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본문3,4절). 신약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보다 더 빛나는 부부는 없다. 이들은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고린도에 정착했다. 바울과 똑같은 천막 제조업자로서 바울을 만나 이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들 부부는 바울의 전도 여행을 따라 에베소 등 어디든지 따라 다녔으며, 보내는 곳이 어디든지 서슴지 않고 이사를 했다. 평생을 복음을 중심으로 이사를 했다. 복음이 전해져야 할 곳이면 바로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자기의 집을 열어서 교회로 제공했다. 바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독립된 교회 건물보다는 성도들의 가정집을 정규적인 회합의 장소로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즉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한 도시에 몇 개의 가정 교회들이 모여 하나의 지역 교회를 형성했는데 마가의 다락방(행 1:13),빌립보에 있는 루디아의 집(행 16:40),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의 집(몬 1:2),라오디게아에 있는 눔바의 집(골 4:15) 등이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가정 교회들이다. 본문의 "저희 교회"는 바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교회로서 이들 부부의 집에서 모였던 가정 교회(House Church)를 말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전형적인 가정 교회는 오늘날에도 존속하는데 가정집에서 모이는 개척 교회나 한 지역에 사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되는 속회 예배(구역 예배) 등이 그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가정집에 모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서로의 신앙을 돈독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을 본 받아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를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사랑과 인정이 고갈되어 가는 이 시대에 가정 예배를 통해 서로의 문제를 위해 기도해주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돕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승리의 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자기의 집을 이처럼 가정 교회(House Church)로서 복음을 위해 개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 가정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내 집이라는 의식이 없어지고 그리스도께서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내놓겠다는 열린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내 집이 교회의 집이요 교인들의 집이요 하나님의 집이다는 신앙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영원한 진리를 위한 터전이 된다. 자기 집보다 교회를 더 크게 여기는 사람이라야 그 가정이 교회가 되며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주저하지 않고 아까운 것이 없게 된다. 무엇이든지 복음을 위해서라면, 진리를 위해서라면 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가정 교회의 주인이다. 현대 교회 성장학에서 교회 성장이 좌우되는 것은 바로 이 가정 교회를 어떻게 잘 운영하느냐 달려 있다고 한다. 속회 예배같은 가정 단위의 모임이 활발해야 교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내놓은 가정 교회는 교회의 중요한 모체가 되었다. 이들 부부는 전도자로서,평신도로서,직업인으로서,그리고 바울을 돕는 봉사자로서 복음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고 살았다. 이러한 복음을 위한 협조자를 가진 바울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바울이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도들은 각자 자신의 받은 바 은사대로, 재능대로, 믿음의 분량대로, 그리고 각자의 소질에 따라 힘껏 봉사해서 교역자를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위한 삶이며, 진리를 위해 사는 것이 된다.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바울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들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복음, 즉 진리를 위해 수고와 생명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의 의미와 그 평가 기준은 진리를 위해 얼마나 수고했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평가는 사람이 얼마나 유식했느냐, 부자냐, 높으냐, 미인이냐 등이 아니라, 진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의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어떻게 희생하며 살았느냐이다. 본문 12절에 보면 드루배나와 두루보사는 수고했다고 말했고, 버시는 많이 수고했다고 말하고 있다. 수고를 하되 정성스럽게 수고해야 그리고 이왕이면 많이 수고해야 많은 칭찬을 받게 된다. 하나님 앞에 가서 자랑할 것은 복음을 위해 고생한 것밖에 없게 될 때 많은 칭찬이 있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13절에,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고 했다. 루포는 누구인가? 마가복음15:21을 보면 구레네 시몬을 소개하는 글이 나오는데 거기에 루포의 이름이 나온다. 시몬의 아들로 루포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학자들은 루포가 바로 시몬의 아들이 확실하다고 한다. 구레네는 유대인으로서 아프리카에 살다가 유월절이 되어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는 그 행렬과 만나게 된다. 연유야 어찌되었든 구레네는 힘겹게 지고 가시는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도록 로마 병정들의 강요받게 되었다. 성경에는 분명히 구레네가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예수의 모습과 그 십자가의 장엄한 죽음 앞에서 깊은 충격과 감명을 받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 후로 예수를 믿게 되고, 어찌해서 내가 그 십자가를 대신 졌을까 하고 평생을 자랑하며 감격하고 눈물로 감사하며 부부가 함께 전도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억지로 졌어도 십자가는 정말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한 일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헌금하고 봉사할 때 무리가 조금 있었고 억지가 있었어도 뒤에 가서 생각하면 아주 잘했다고 후회함이 없는 것이다. 반드시 자원해서 좋은 마음으로만 해야 좋은 것은 아니다. 좋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다가 언제 일하겠는가? 억지로라도 시작하고 보면 시몬 구레네처럼 평생을 두고 기뻐할 일도 생기는 것이다. 마치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좋은 마음으로 하고 싶어서만 공부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 꼭 해야만 하기에 억지로 참아가며 공부하고 있다. 그러나, 하고 나면 참 잘한 것으로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좋은 마음으로 기쁘게 나올 수만은 없다. 때로는 고집으로 나오고, 때로는 억지로 나왔다가 졸기만 하고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억지로 나오다 보면, 억지로라도 봉사하다보면 후회하기보다는 참 잘했다는 생각과 아름다운 결과를 남기기도 하는 것이다. 억지로 일지라도 교회에 나와 신앙 생활하는 것이 결국 선하며 영원히 아름다운 일이 된다. 본문에서는 억지로 십자가를 진 시몬의 부인 즉, 루포의 어머니와 루포를 문안하며 특히 택하심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전 시간을 바쳐서 봉사하는 하나님의 일군을 뜻한다. 일평생을 바쳐서 오로지 복음만을 위해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르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말하면서 파울은 "르포의 어머니가 바로 내 어머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파울의 육체적인 어머니는 아니지만 사상과 신앙에 있어서 바울과 전적으로 동참하고 모든 복음 사역을 돕고 후계자로서 하나님의 사업을 지켜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바울의 영적 부모요 자매 형제이며 친척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로부터 친어머니 이상으로 위로와 따뜻한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본문에는 이들과 더불어 모두 26명의 복음을 위해 바울을 협조한, 진리를 위해 산 사람들이 있다. 이 명록에는 로마인도 있고 노예도 있고 노예의 소유주도 있으며, 헬라인, 남자, 여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바울은 그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주안에서(8,12,13절),그리스도 안에서(3,7,9,10) 하나된 형제로서 따뜻한 사랑을 표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과 장점을 들어 안부를 전하고 있다. 실로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이다. 거기에는 이미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으며, 주인도 없고 노예도 없으며, 모두가 다 주안에서 새로 태어난 한 형제요 자매이다. 바로 여기에 종래의 세계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나고 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을 초월하며, 신분의 높고 낮음을 초월하고, 성별의 주종을 초월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한 몸이라 일컬어지며, 한 마음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위해 사는 자가 되어 이 땅 위에 천국을 이룩하며 영원히 영광스러운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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