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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렇게 기도하라(1)

2. 이렇게 기도하라(2)

3. 이렇게 기도하라(3)

4. 강청하라

5. 제자들을 위한 기도

6. 성도들을 위한 기도

7. 기도와 사랑

8. 기도와 구제

9. 불로 응답되는 성도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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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1)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5-15, 참조 : 눅 11:2-4)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으로 기도가 없으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생활이 없으면 참된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는 자는 위대하고 선행보다도 존귀하다. 자기 집에서 기도하는 자는 그 집을 강철보다 강한 담으로 두름과 같다." 그러나 기도생활이 올바르지 못하면 위험한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각각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데 대부분 형식화, 관습화된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과 비슷한 경향의 모하멧 교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원수를 찔러 죽이려 뒤쫓아가고 있는 한 모하멧 신자가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그 자리에서 딱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두루마리 기도서를 꺼내 펴놓고 무릎을 정중히 꿇고 일사천리로 기도문을 읽어버리고 곧 벌떡 일어나 다시 원수를 추격했던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을 기억하여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지만 마음에 전혀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 생각은 없으면서 입술로만 중얼거린다면 극히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위험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믿는다는 사람들의 잘못된 기도생활을 가르치시면서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받아서는 안될 잘못된 기도는 먼저, 외식(外飾)하는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위선적으로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는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하나님께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꾸며서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유창한 웅변조로 열변을 토하면서, 때로는 포효하는 사자처럼 하나님을 향해 호령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인들을 호령하는 것인지 분별이 가지 않는 기도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대단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대단히 헌신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들으라고 웅변을 토하거나 호령하거나 설교하는 듯한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위선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오늘 대표기도는 나 들으라고 한 기도구나." 라고 판단된다면 이미 그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정직하고 진실한 기도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옆구리 찌르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기도가 아무리 유창하고 화려하고 논리 정연하다할지라도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참된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일어나 은밀한 중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긴 밤에 드리는 기도의 내용은 "오 나의 주님!" 이 한 마디였고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기도 내용은 없었고 눈물을 흘리며 "오 나의 주님!"만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실한 기도에는 많은 말이 필요없습니다. 진실한 기도에는 소리가 클 필요가 없습니다. 진실한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마디일지라도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원하시고 들으십니다. 미국에 어느 교회가 이웃 사람에 의해 고발되었습니다. 예배드릴 때 너무 시끄러워 이웃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방 판사는 50달러의 벌금과 즉시 창문, 벽 등 교회당 전체에 방음장치를 하도록 명령을 내리며 담임목사에게 말했습니다. "방음장치를 해도 기도 소리가 하나님께 들리겠죠?" 기도는 진실에 그 생명이 있습니다. 진실은 소리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통 사고시에 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단 한 마디의 기도를 드린다해도 마음을 드리는 진실하고 정직한 기도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혼란에 빠져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는 이유는 진실 부재에 있습니다. 나라 전체가 위아래 할 것 없이 서로가 속고 속이는데 능숙하여 오히려 거짓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사람'의 큰 소리에는 끄떡도 아니하시고 낮은 곳에서 은밀한 중에 자기 가슴을 치며 자신의 진실을 털어놓은 낮은 자의 기도에 감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자신과 더불어 이 나라 민족을 불쌍히 여겨 달라며 자기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길게 기도해야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며, 기도가 응답받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성가실정도로 귀찮게 해야 응답을 받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몇 날 몇 일이고 밤을 새워가며 철야기도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성경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도서 5:2) 족보에도 없는 '0 0 0 0을 위한 100일 새벽기도회'를 해야 능력있는 목사, 능력있는 교회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0날을 새벽부터 하루 종일 교회 기도실에 자리 깔고 앉아있다 해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주문(呪文)에 불과합니다. 주일학교 유치부 교실에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공부를 끝내고 마치는 기도를 하기 위해 모여 앉았을 때였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려는데 한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습니다. "아가, 왜 울지? 기도는 하나님께 얘기하는 거란다. 울지 말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얘기하렴, 착하지?" "아니예요. 선생님, 그게 아니예요. 지금 기도하려니까 생각이 났는데요. 어젯밤 우리 아빠를 위해 기도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미키 마우스'만화 영화를 보느라고 잊어 버렸지 뭐예요. 우리 아빠가 아프거든요. 하나님이, 내가 기도를 안해서 우리 아빠의 병을 낫게 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선생님?" 아이의 말에 선생님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가, 울지 말고 내 말을 들어 보렴. 하나님은 네 마음을 모두 아신단다. 네가 기도하지 않아도 네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셔. 그리고 아빠를 걱정하는 네 마음을 예쁘게 보신단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도 이 아이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이 아프다거나 일이 잘 안되면 자신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성경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옹졸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면 주고 구하지 않으면 주지 않는 그런 분이 아니신 것입니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실 만큼 적극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행하지 않아서 그에 대한 벌로써 하나님께서 일이 안되게 하신다거나 우리가 무언가 잘 한 것이 있어서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일이 잘 되게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하시는 하나님이 결코 아니십니다. 기도는 치성(致誠)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인격적인 대화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머리털까지도 헤아려 세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 깊은 것까지일지라도 살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또아리틀고 길게 앉아 길게 늘어 놓치 마시고 여러분의 진실한 삶을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3. 또한 기도는 어느 특정한 장소, 성전이나 기도원, 수도원 등에서 해야만 한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고, 기도의 효과가 더 큰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느 기도원이 용하고, 어느 교회가 용하고, 어느 목사가 용하다는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은 용하신 분이 아닙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어느 특정한 장소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무소부재(無所不在), 다시 말해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정에도, 청량리 굴다리 밑에도, 노숙자들의 거처에도, 여러분의 일터에도 계시는 분이십니다. 간혹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숫자나 그 회수로 한 개인의 신앙과 교회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권사나 장로이면서 새벽기도회에 한번 나오지 않는다면 무슨 권사고 무슨 장로야,... 그런 교회가 어떻게 부흥될 수 있겠어?..."하는 식의 발상은 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새벽에 반드시 교회에 나와 기도회에 참여해야 하는 <새벽 기도회>보다는 장소가 어디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는 새벽기도가 더욱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장소야 교회이든 골방이든 산이든 여러분의 일터이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마음과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거나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어느 특정한 교회나 기도원 수도원 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이 무슨 효험이 있는 것처럼 성전을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길게 '기도'를 늘어놓았지만 예수님는 그 바리새인의 '기도'를 의롭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늘을 감히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는 죄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며 평안히 집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포로 생활 중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습니다. 다니엘은 참으로 나라 민족의 해방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기도하실 때 은밀중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여러분이 구하기 전에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진솔한 마음을 먼저 드리시므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여러분이 되시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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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2)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9-15, 참조 : 눅 11:2-4)

1.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주기도문>이라고 합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생활이 필수적입니다. 이 주기도문은 크게 두 가지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부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절)는 무엇보다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만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위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도드리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 어떤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을 <아버지>로 삼고 삽니다. <돈>을 보고 아버지 해보십시오. 돈이 '오냐 무엇을 도와줄까? 돈 더 줄까? 돈이면 다 되지? 권력도 사고 지식도 사고 사람도 사고 뭐 못 사는 것이 없지?' <권력>을 아버지라 불러보십시오. '암, 권력 하나면 돈은 물론 못하는 것이 없지!' 혹 어떤 사람들은 우상을 <아버지>로 섬기며 살기도 합니다. 돈이나 권력, 우상 등이 진정 참된 아버지 구실을 하고 있습니까? 돈이나 권력, 우상 등은 인격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인간보다 못한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의 아버지나 물질이나 권력, 그 어떤 존재도 그 사람의 금세와 내세를 끝까지 함께 하며 책임질 수 없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러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이를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로마서 8:14-16)

올바른 기도생활을 통해 기도에 응답을 받고자 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인간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였을 경우,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집니다. 세상에 살 동안 때로 아픔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아버지>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것들을 견디고 감당하기가 쉬워지는 것입니다. 주어진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것들은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 주어진 시련과 고통은 자신을 더욱 더 성숙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채찍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로마서 8: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참 아들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주어진 삶에 만족하시며, 주어진 고난과 징계가 어떠하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7,8)

예수 믿는 여러분은 사생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참 아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 보스턴에 살던 유명한 여류시인 실비아 플래스가 30세의 젊은 나이로 런던 여행 중에 자살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시집은 죽기 일주일 전 런던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는데 제목이 <아버지, Daddy>였습니다. 실비아는 엄마없이 보스턴 대학 교수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녀는 3세부터 라틴어를 배울 정도로 천재였는데 아버지마저 11세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녀는 몹시 허탈해졌습니다. 그 후 그녀는 시인이 되고 결혼하여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편이었으나 이것이 그녀의 마음의 진공상태를 메우지는 못했습니다. 실비아가 자신의 진공상태를 메우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육신의 아버지로만 생각한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그녀는 인생을 충만하게 해줄 수 있는 존재가 하늘 아버지임을 모르고 죽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설사 오래 동안 여러분과 함께 살게 되더라도 늙어 가는 육신의 아버지가 여러분의 삶에 허전함을 메워 주거나, 여러분을 보호하고 사랑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거꾸로 여러분이 그 육신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보호하고 사랑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육의 아버지를 책임져야만 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영광과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끝까지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며 함께 하실 것입니다. 미국 어느 범죄 소년들을 지도하는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다가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럼 뭐라고 부르면 좋겠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순경님이 적당합니다."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묻자 동네 사람들과 아버지까지 자기를 나쁜 놈으로만 취급할 때 오히려 순경 한 사람이 자기를 이해하고 편들어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얘기가 나온 김에 다른 소년들의 의견도 발표하게 했더니 <하늘에 계신 우리 외할머니>, <하늘에 계신 우리 축구 코치>, <우리 반 친구 톰> 등 의견이 쏟아졌는데 모두 자기를 정말 위해 준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을 내세웠습니다. 이 목사님은 "범죄 소년들에게 아버지의 인상은 사랑과 이해를 주는 자보다 간섭하고 막아서는 폭군의 인상이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정상적인 관계는 이해와 사랑과 보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가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은 그만큼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깊이 이해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2) 고 말씀하시었습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주기도문의 핵심은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기도의 주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기도에 대한 교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이 예수 믿고 하나님께서 다스리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하나님 나라는 결코 어떤 땅이나 영토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마음과 심령, 그리고 인간의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 하나님의 지배를 말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어떤 일로 친구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마침 그때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는 여러 번 시도했으나 예수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림이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림 제작을 중단하고 며칠 동안 명상에 잠겼다가 실패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재주 있는 손을 가졌다고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가졌다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을 때 나는 예술가도 될 수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될 수 없다." 다 빈치는 즉시 친구를 만나 화해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전에 얽혔던 분한 생각을 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 뒤 며칠이 지나 다시 작업실에 들어가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얼굴을 아주 만족스럽게 화폭 위에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찾는 것이 성한 눈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뜻합니다. 내 성격이나 내 욕심이 다스리는 세계가 아닙니다. 걱정과 불안과 나의 좁은 생각을 몽땅 묶어 하나님이 관리하시도록 맡기는 믿음의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정치적인 왕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랑의 왕국인 것입니다. 마드리드(Madrid)에서 1958년에 개최된 세계 마라톤 대회에서 감격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결승점을 불과 1마일 앞두고 1등으로 달리고 있던 선수의 다리에 심한 쥐가 일어났습니다. 2등으로 달리다가 이것을 본 선수는 1등으로 달리던 선수를 부축하여 일으켜 함께 천천히 달렸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둘 다 등수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기장에 입장하여 마지막으로 운동장을 돌 때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1 등을 하느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믿고 지금 여기서 그 사랑과 축복, 행복을 부분적으로 맛볼 수 있는 것이며, 장차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완전한 사랑과 행복을 누리게 될 미래 영역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영광스러우며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믿고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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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9-15, 참조 : 눅 11:2-4)

최효섭 목사는 기독교인의 그릇된 기도생활을 다음과 같이 꼬집었습니다.

『<하늘에 계신>하면서 땅에 붙은 것만 좇아다니고 있으니...

<우리>하면서 나밖에 모르니...

<아버지>하고 하나님을 부르면서 아버지의 말은 듣지 않으니...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하면서 욕돌릴 행실만 하고 다니니...

<나라가 임하옵시며>하면서 돈 주머니가 임했으면 하는 생각만 하고 있으니...

<뜻이 이루어지이다>하면서 사실은 내 뜻과 내 욕심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으니...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면서 사실 마음 속으로는 "양식은 몇 년 먹을 것을 이미 해결했으니 기왕 주시려면 복권이 맞게 해주시든지 최소한 집 한 채는 주옵시고"라고 기도하고 있으니...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뻔뻔스러워 옆 사람에게는 안 들릴 만큼 어물어물 입술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처지이면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하면서 유혹을 이길 노력을 안 할 뿐더러 재미있는 유혹이 없나 하고 찾아 다니는 주제에...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하며 그래도 구원받기를 구하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하는 말은 말짱 헛소리이고 영광도 나에게, 힘도 나에게, 모두가 다 나에게 초점을 맞추어 주기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주기도문을 끝낼 때 <아멘>하는데 하나님께 아멘하는 것인지 나 자신에게 아멘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주기도문을 자주 드리지만, 깊이 생각하고 드릴 기도이다. 주문처럼 외울 기도가 아니라 행동과 밀착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기도이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번째 부분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의 필요와 소원을 기도하는데 그 내용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여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으로, 주어진 현재 삶에 일용할 양식으로 족한 줄 알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풍부에도 궁핍에도 족한 줄 아는 삶의 태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는 우리 과거의 삶을 하나님께 고백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과거의 삶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을 때만 삶의 가치가 있으며 현재와 미래에 생명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앞으로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으로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며 사는 기도생활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 삶을 위한 기도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밖에 없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교부였던 클레멘트는 "재물은 구두와 같다."고 했습니다. 구두는 무작정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발에 맞아야 편하고 좋은 구두입니다. 마찬가지로 재물을 많이 가졌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분수에 맞아야 합니다. 사치스럽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각자의 분수에 맞는 생활수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흔히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저에게 풍성한 물질을 축복하사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넉넉하게 쓰임받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그다지 합당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현재 물질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쓰임받는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으면 적은대로, 약하면 약한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쓰임받고자 할 때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낼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먹을 양식을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주셨습니다.

"(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출16:4,5)

그런데 그 양식을 거둘 때에 1인당 한 오멜씩, 다시 말해 하루에 필요한 양식만을 거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여 일용할 양식 외에 다음 날 먹을 양식까지 거두어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양식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16:15-20)

중요한 사실은 제육일, 다시 말해 안식일 전날에는 각 사람마다 갑절의 양식인 두 호멜씩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에는 일용할 양식을 하늘에서 내리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안식일 전날에 이틀 분의 양식을 거두었지만 그 양식을 벌레가 먹거나 냄새가 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칠일, 곧 안식일에는 일용할 양식을 거두러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백성중 더러는 안식일에 양식을 거두러 나가 보았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22) 제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두목이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 (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25) 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26)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들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30)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출16:22-30)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다음날까지 남겨 놓은 자의 만나를 썩게하신 것은 첫째, 내일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살라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지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나>를 하루 세끼 먹을 일용할 양식만을 거두라는 것은 소유욕,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물질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재물의 노예가 되어 그 인생이 추하고 비참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물질축복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물질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버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욕심을 죄의 근본으로 정하고 그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죄는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많이 하면 할수록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이 되어야 하며, 기도 많이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올바른 기도응답이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면 할수록 가난뱅이가 되어야 바른 기도생활, 바른 신앙생활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어야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되어 하늘나라에서 부유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은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시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함께 나누심으로 하늘나라에 부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할 중요한 기도는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형제를 용서해야만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분명한 교훈이 마태복음 18:21-35에 있습니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중심으로, 다시 말해 마음 중심으로 형제를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1700년전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크리소스톰이 목회하던 교회 신자들은 주기도문을 외우다가 바로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긍휼하심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마음 중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고 하나님 앞에 뻔뻔스럽게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없이 이 기도하는 사람은 시편 109편 7절에 있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 시편 109편 7절에 나오는 저주는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형제의 죄를 용서하되 아무런 찌꺼기 하나 없이 깨끗이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는 용서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용서하고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이 미친 개를 땅에 묻을 때 꼬리만 땅위러 기념탑처럼 남겨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미친개를 끌어다가 산채로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위험한 개를 묻을 바에는 완전히 묻어야지 꼬리만 땅위에 남겨 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의 죄도 용서하려면 깨끗이 묻어버리듯 용서해야지 일부분을 남겨놓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의 피는 제아무리 흉악한 죄일지라도 흰눈같이 희게 하시며, 그 지은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게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덮어두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지워버려 영원히 기억조차 되지 않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해야할 것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게 자신의 연약함을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사단의 시험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믿기 때문에 사단의 시험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시지만 십자가에 죽는 그 순간까지 사단의 시험은 계속되었습니다. 기도많이 한다고 사단이 시험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성경 많이 본다고 사단의 시험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고 사단이 시험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죽을 때까지 해야만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단의 시험이 많은 곳이며, 우리는 그 시험에 넘어져 악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연약한 인생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시험을 이길만한 힘과 지혜가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결코 사단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이렇게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와 같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람기도 유전자 처리로 없앨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미국 에모리대 연구팀은 한 마리의 암쥐에 충실한 프레리 들쥐 유전자를 혼교하는 숫쥐에게 투여한 결과 숫쥐가 한 마리의 암쥐만을 찾는 성향으로 변했다고 영국 과학잡지 네이처 최신호에서 밝혔습니다. 에모리대 연구팀은 인간 외의 다른 영장류를 상대로 유사한 실험을 최근 실시했으며 곧 인간 실험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영국 BBC 방송이 18일 보도했습니다. 프레리 들쥐의 유전자를 받은 숫쥐들은 때때로 다른 암쥐와 교미하기는 했지만 결국 한 마리 암쥐만을 찾는 성향으로 변했다고 연구팀은 강조했습니다. 연구팀은 유전자 하나로 바람기와 같은 복잡한 성향을 바꾸는 것이 가능함을 입증한 실험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유전자를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성향의 배우자나 자식을 만드는 일도 가능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남편이나 아내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다른 여자나 남자를 보고서도 전혀 시험들게 되거나 악에 빠지지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주기도문 가운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부분을 빼버려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자신이 원하는대로 만들어 시험받을 일이 전혀 없으며 악에 빠질 가능성도 전혀 없게 된다면, 결국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며 인간의 존재가치는 상실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시험을 받되 그 시험을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과 지혜, 말씀으로 이기며 악에 빠지지 않게 되었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 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지켰을 때 인간의 가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생활을 통해 마음과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지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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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청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5-13, 참조 : 마 7:7-11)

페이건이란 사나이가 감히 버킹엄 궁전에 침입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의 침실에 들어갔습니다. 여왕이 잠에서 깨었습니다. 사나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여왕 폐하,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탄원을 들어 주십시오" 여왕은 침착하게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앉았습니다. 호위병을 부르지 않고 침범한 사나이의 말을 듣겠다는 자세였습니다. 페이건에게는 4남매의 어린 자녀들이 있는데 아내는 가출하고 직업마저 회사의 감원 정책 때문에 나오게 되고 사회복지기관에 호소하였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자기를 정신병자로만 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나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여왕은 호위병을 불렀으며 사나이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직업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있을 수도 없는 엉뚱한 사건이었습니다. 창조자 하나님은 우리의 탄원과 호소와 간구를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마이클 페이건은 엄청난 무례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탄원의 길을 추진한 그 간절함에 여왕이 감동하여 그의 탄원을 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마치고 나니 제자 중 요한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눅가복음11:1). 이에 예수께서 기도의 모델로 가르쳐주신 기도가 곧 <주기도문>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누가복음 11:1-4)

이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내용으로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도의 방법으로 본문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하다가 배가 너무 고파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밤이 늦었지만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문을 두들겨 이미 곤하게 잠에 떨어진 친구를 깨웠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남은 밥이 없다며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밥 좀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친구라는 이유로는 네 요청을 들어줄 수는 없지만, 강청(强請)하기 때문에 일어나 네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기도의 방법에 대한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9-13절)

여기서 제시한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은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열심히 끈기를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인색하거나 무관심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고 계십니다."(시34:15)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가 무엇을 구하든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겠습니까? 기도에 있어서 성령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통달하셔서 우리가 잘못 기도한 것이나 알지 못하여 구하지 못한 것이 있을지라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바르게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시51:11) 간구했던 것입니다.

병낫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낫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것은 왜 그럴까? 생활이 좀 더 부유해지기를 위해 기도했는데 점점 더 쪼들리게 되는 것은 왜 일까? 부모 형제와 화목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눈물로 기도했건만 오히려 불화의 골이 더 깊어지는 것은 왜 그럴까? 어찌해서 저의 기도에는 응답해 주시지 않으십니까? 누구 못지 않게 눈물과 정성으로 기도했음에도 기도의 열매가 없어 기도하기를 포기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까? 기도의 목적과 기도의 자세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즐겨 쓰던 농담이 있습니다. 한 주일 학교 어린이가 산에서 곰을 만났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어 아이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 곰에게 착한 마음을 주세요" 눈을 떠보니까 곰도 마주 앉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야아! 기도가 이렇게 빨리 효과가 날줄은 몰랐어!"하고 기뻐하니까 곰이 말했습니다. "너는 무슨 기도를 했는지 몰라도 나는 식사 기도를 한거야." 레이건은 '사람의 속은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이 농담을 사용하였으나 기도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 곰처럼 식사기도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요구만을 위한 기도라면 얼마나 초라한 기도인가? 기도의 결론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히 나타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경적이어야만 합니다. 성경적이 아닌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TV프로에 나온 어떤 할머니가 60년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날마다 새벽기도했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 남편이 놀음하러 갔을 때도 놀음해서 돈 따서 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바이런 자니스(Byron Janis)는 세계적 피아니스트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교통 사고를 당해 손에 심한 신경통과 신경마비 증세가 있었습니다. 한 때는 열 손가락 중에 왼손 중지 하나만 제대로 움직였고, 새끼손가락은 완전히 마비된 적도 있었습니다. 오른쪽 손목은 40퍼센트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고통과 싸우며 어떻게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을까? 그는 <퍼레이드, Parade>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 의사도 수고하였고, 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기도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싸울 용기를 주셨습니다. 나에게 문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나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쓴잔이 오지 않게 해주소서." 하는 기도보다 "하나님 내가 쓴 잔을 마실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이같은 기도는 바로 성경적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바른 생각을 가지게 되어야 하며, 기도를 많이 할수록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기도를 깊이 할수록 남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많이 용서하며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깊이 할수록 더욱 더 생활이 깨끗하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한 마디로 기도는 하면 할수록 성경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기도를 깊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뜻이 더욱 더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표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웃 구원을 위해 선교헌금해야지, 십일조 드려야 하지, 감사헌금 바쳐야 하지, 구제헌금드려야 하지, 이것저것 다 내어주고도 못 다 준것처럼 여기며 몽땅 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십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을 보면 물질에 대한 것은 오직 일용할 양식밖에 없습니다.

<붙이는 도시락>이 멀지 않아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 국방부는 첨단 기술력을 이용해 군용식량(MRE)을 민간회사와 합작생산해 일반인에게 본격적으로 시판할 계획입니다. 이에 따라 몸에 붙이기만 하면 인체에 필요한 모든 필수 영양소를 피부를 통해 공급해주는 <패치형>식량도 개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미국방부 식량프로그램의 제럴드 다쉬 수석 연구원은 "군인들이 다음 세기에는 뭘 먹고 전투하면 효율적일지 생각하다 갑자기 니코틴 패치가 생각나 이 <붙이는 도시락> 계획을 착수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가족이 밥상 앞에서 "어서 붙여!" "마저 붙여" "더 붙여" "많이 붙여"라고 말하게 되는 날이 곧 오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라는 성구를 이렇게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붙일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주기도문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를 "우리에게 일용할 파스 한 장을 주옵시고..." 이제 앞으로 우리에게 파스 한 장이면 족한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이 기도 많이 해서 부귀영화, 고대광실을 누린다는 것은 기도와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는 내가 희생해서일지라도 남이 잘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 남이 희생되도록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요즈음 한 무당이 충무공 이순신장군 등의 묘소에 쇠말뚝, 식칼등을 박아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묘소 훼손은 충무공 묘소에만 그치지 않고 태조..태종.세종 등 조선조 왕릉 등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모든 묘소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무당의 저주기능에 따라 남을 저주함으로써 자신의 행복과 건강, 부귀와 출세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현재 활동중인 무당수는 2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가는 돈도 무려 1조4천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무당과 엄청난 돈 거래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만, 내 후손만 잘 되면 된다는 망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전진하여 모압으로 진격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모압 왕 발락은 위기를 느낀 나머지 메소포타미아의 점쟁이 발람을 초청하여 저주하여 이스라엘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발람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저주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메시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순간마다 성령이 강권적으로 그를 사로잡아 이스라엘의 번영과 축복을 기원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민수기 22,23장) 하나님은 결코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배은망덕한 인간일지라도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저주한다고 남이 저주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남을 저주해서 자기 뜻대로 될 것이라면 세상은 벌써 끝장났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제대로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웃의 축복을 위해, 아니 원수까지일지라도 그의 축복을 위해 간절히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잘 되는 것, 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것은 오직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자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잘 되신 분들이며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 받으신 분들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며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내가 다 이루었다"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주안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출세했고, 성공했고,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보증으로 주신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전도,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문을 외우는 교회에 불과합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으며 예수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교회는 열매없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 강청하여 기도하되 성경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강청하여 간구하시면 여러분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것은 오직 성령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시고 성령을 따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따라 하는 기도는 성경적입니다. 성령을 따라 기도 생활하는 사람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성령을 따라 기도 생활하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 예수 처럼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강청하는 기도 생활로 인류에게 가장 좋은 성령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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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제자들을 위한 기도

"(요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17: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요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요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17: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요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 (요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요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17: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의 보존과 일치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위하여 기도하신 제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요? 본문 8절 말씀을 통해 그 제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요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첫째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을 보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사람을 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하나님 자신의 자기 폭로(self-disclosure)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요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고 믿었다는 것으로,곧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코자하시는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구세주이심을 믿었다는 뜻입니다.예수님을 자신과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 즉, 메시야(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어 하늘과 땅을 매고 푸는 천국 열쇠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본문 6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말씀에 곧 순종하는 사람이 제자인 것입니다. 순종함이 없이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스승의 모든 가치관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스승의 교훈과 말씀이 자신의 삶에 그대로 반영되는 사람이 제자인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주권이 오직 예수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살아도 죽어도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었던 것처럼 죽기까지 그 분의 교훈과 말씀에 순종하므로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축복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보호(보존)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요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17: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환란과 재난이 많은 세상에서 성도들은 언제나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영혼이 얼마든지 잘못될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육신까지도 보존하여 주십니다.

"(잠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시91:7)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어떤 군인이 전장(戰場)에서 총에 맞아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중에 그가 정신을 차리고 총알 맞은 데를 다시 보니, 자기 품 안에 품었던 성경을 뚫고 들어가다가 시 91:7의 말씀에서 멎은 것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환란과 고난, 재난이 많은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보존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의 어려운 일이나 곤란한 일 등을 회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대항하여 정면으로 맞서서 극복하여 승리하도록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인생으로부터 물러서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을 인생 여로(旅路)에 대하여 보다 잘 갖추어 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삶의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모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길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분명히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기독교인으로서 끝까지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기독교인은 세상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않됩니다. 기독교인은 언제나 세상을 이기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3:13)....(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수하는 사람만이 생명을 얻으며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신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28: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28: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28:7)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편한 생활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라.

자기 힘에 맞는 일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자기 일에 맞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라.

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믿는 바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라.

오래 살기를 기도하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전력을 다하고 최선을 다 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

진열대에 장식되는 밀알이 되도록 기도하지 말고

땅 속에 묻히는 밀알이 되도록 기도하라."

둘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17:11)...거룩하신 아버지여...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평소 제자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면서 그들의 분열상을 친히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20: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상을 구원해야 할 사명을 위해 부름받은 제자들이 세상적인 세력 다툼을 벌이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속성(屬性)상 각개전투식의 개개인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협조와 화평 그리고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 역시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되어져야 할 이유는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한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4:6)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위의 말씀들을 살펴 보면 예수,즉 진리를 떠나서 하나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 안에서의 일치를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서로 잘 단합하여 교회를 이룬다 하여도 거기 진리가 없으며,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음의 말씀을 보면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 말씀은 참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진리를 지키지 않는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딤전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교회는 진리 안에서 자라고 온전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예수님의 이러한 제자들의 일치를 위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사는 분열과 반목의 역사로 점철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 일치를 위한 소위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s)이 이러한 성경적인 원리에 충실하지 못하고 혼합주의적(syncretistic)인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일치와 통일에 대한 노력은 정당하다고 보나 그 일치와 통일의 근거인 '진리'에서 일탈했기 까닭입니다. 그러므로해서 결국에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s)은 교회사에 또 하나의 분열의 역사를 덧붙인 격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로 뭉쳐진 형제들의 무리가 아닌 집회에서 복음이 참되게 전파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분쟁하고 있는 교회로 말미암아 세상이 복음화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을 아버지 뜻에 복종시킴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데는 겸손과 복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빌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어떤 임금이 있었는데 눈이 하나 없었습니다. 한 화가를 데려다가 그리라고 했습니다. 눈 없는 채로 그렸습니다. 그래서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두 번째로 온 화가가 둘 다 온전하게 그렸습니다. 또 사형이었습니다. 이유는 아첨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화가가 왔습니다. 합격이었습니다. 눈이 있는 쪽 옆 얼굴을 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내 친구가 애꾸라면 나는 그의 없는 쪽 얼굴은 말고 있는 쪽 옆 얼굴을 보리라. 그 자세를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모두 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싸움으로밖에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겸손과 복종으로 교회와 가정을 하나되게 하시는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셋째, 예수님은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17: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기도는 제자들의 육신의 건강이나 장수, 출세, 성공을 위하여 기도하시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범죄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주님을 위해서는 감옥에 갇히우는 것도 두려워하지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않고, 죄만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정녕 두려워해야할 것은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왜냐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굴을 따다가 큰 굴 한 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껍질을 까 보았더니 속에는 고기가 한 마리 있을 뿐 굴 알맹이는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굴이 오래 전에 작은 고기를 껍질 속에 넣고 다물어 버렸으므로 그 고기가 그 속에서 굴을 먹고 살게 되자, 굴은 죽고 고기는 자랐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 죄를 마음 속에 용납해 두면 결국 자기는 죽고 죄만 자라는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에 참으로 우리가 기도할 제목은 바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해지기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다, 성별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을 성별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결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役事)입니다. 사람의 몸은 물체이기 때문에 물로 씻을 수 있으나 영혼은 물체가 아니고 영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진리로야만 정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사람은 그 영육이 아울러 성별되어질 때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요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시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21세기를 앞두고 그 경축준비위원회가 열렸습니다. 거기서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긴 직업을 표창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변호사가 자기네 직업이 가장 역사가 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증거로 이브한테 한 뱀의 속삭임이 변호사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이를 반박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빼내어 이브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의학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기술자가 나타나서 반박하기를 아담과 이브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광명이 있으라>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이미 그때부터 전기기술자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정치인이 벌떡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성서에도 첫머리에 카오스(혼돈)가 있었나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정치가 없이 어떻게 그런 혼란이 생겨날 수 있었겠느냐.> 정치인은 두 사람만 있으면 여(與)와 야(野)로 갈라섭니다. 그리고 한 쪽이 물을 휘저으면 또 다른 한 쪽이 물을 맑게 한다면서 다시 한번 휘저어 나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계를 비롯하여 법조계, 학계, 경제계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부패되고 혼탁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 민족을 정화시키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밖에는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화(聖化)의 역사(役事)를 하십니다.

"(고전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병들은 인간과 사회를 성화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북부 이탈리아에 특수한 습관을 가진 정신질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걸레로 무엇을 닦기를 좋아합니다. 마루를 닦으면 생산적이지만 자주 진흙바닥을 열심히 문지릅니다. 진흙은 닦아도 또 진흙입니다. 인간이 더럽고 병든 심장을 소위 도덕이나 소양으로 닦으려 하지만 어리석은 노력입니다. 새 마음을 받는 길 밖에 없습니다.

카멜레온이라는 희안한 도마뱀이 있습니다. 이 동물은 주변환경에 따라 피부의 색깔을 바꿉니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도록 누런 바위틈에서는 누런 색으로, 초록색 덤불 속에서는 초록색 피부로 바꿉니다. 사람도 그때 그때 자기를 숨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검고 병든 심장, 마음의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라고 불리우는 인간의 병든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으시고 그 분의 교훈과 말씀대로 사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성별된 생활의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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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도들을 위한 기도

"(요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17: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요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어느 외국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토요일 저녁에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데, 유치원 다니는 아들 녀석이 같이 놀아 달라고 자꾸 떼를 쓰고 설교 원고는 더디고 하여 헌 잡지 속에 있는 세계지도 한 장을 뜯어내서는 여러 겹으로 찢어 아이에게 내밀었습니다. 세계지도를 맞추어 가져오면 네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마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희색이 되어 설교 준비를 하는데, 10분도 안되어 녀석이 노크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화를 내면서 어째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아빠, 전 세계지도는 뭐가 뭔지 몰라요. 그런데 세계지도 뒤엔 사람 그림이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 그림을 맞춘 다음 뒤집으니까 세계지도가 되더라구요."

목사님은 준비하던 설교 원고를 당장에 찢어버리고 자신이 영혼의 소리를 설교하지 않았나를 반성하며 아이와 실컷 놀았다고 합니다. 이튿날 주일 설교는 빈손이었지만 그의 일생에서 가장 훌륭한 설교였고 그로부터 그는 세계적인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Knowledge of Jesus Christ)입니다. 세계의 모든 복잡한 문제들을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만을 안다면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풀려지는 것입니다.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먼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느냐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또한 하나님을 힘입어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같은 기독교 신앙을 다음의 성구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호6: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제사지내는 것만으로 그 분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쳐주었다고 해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을 하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고 그를 잘 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아무리 종교적인 행위를 많이 하고 큰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면 그의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귀며 사랑과 신비의 깊은 교제 속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은 누가 옳고 그르냐, 누가 선하고 악하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오직 하나님만이 옳으시고,하나님만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 선하시고 절대 의로우신 하나님만을 아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의롭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선하고 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다음의 비유 말씀을 통해 그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20: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마20: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마20:3)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마20: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마20: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마20:6)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마20: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마20: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마20:9)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마20: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마20: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마20: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20: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마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루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디며 땀을 흘린 사람이 주인의 처사, 즉 겨우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임금을 자신보다 먼저 받은 것이 불공평한 처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 정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비유는 천국의 비유입니다. 천국은 곧 "집 주인"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 집 주인은 하나님을 말합니다. 집 주인의 뜻이 곧 천국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집 주인의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실업자들이었습니다. 집 주인이 불러도 그만 안 불러도 그만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집 주인의 행한 처사에 하등의 하자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을 불러준 주인과 임금 분배를 통한 주인의 뜻을 알려고 하지않고 오직 물질(경제)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그들은 한 낱 노동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주인의 처사를 통해 주인의 뜻을 알고 주인을 바로 알았다면 그들은 참으로 천국 백성으로, 그 주인에 속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되는 것(To be one)과 아는 것(Knowledge of Jesus Christ)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역사의 목적은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되어지는 것입니다.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역사의 궁극적 목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역사의 피할 수 없는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입니다. "인간이 쓴 가장 신성한 작품", "기독교 구원의 위대한 광상곡(a great rhapsody of the christian salvation and church)" 등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서신서인 에베소서는 죄로 인한 만물의 부조화와 분열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만 궁극적으로 해결되고 회복되고 통일된다는 대화합의 진리를 명쾌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부조화와 분리와 분열이 가장 불행한 사실이며, 여기서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과의 분리, 분열, 부조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연계의 분리와 인간의 분리와 시간의 분리와 영원의 분리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분리 등 모든 분리는 다만 인간과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되어질 때만이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그리스도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 교회는 전 세계적이며 전 우주적인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라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교회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라고 스코트(E.F.Scott)는 말했습니다.

통일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시대의 통일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통일의 주체가 되는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해야만 합니다. 역사의 완성은 통일의 주체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역사의 완성과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교회는 전파해야 합니다.

"(사11: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사11: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사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11: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는 말씀은 바로 역사의 완성과 통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처녀들은 맞선을 보아 시집가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맞선이란 청춘남녀가 만나 서로를 저울질하면서 서로를 잘 알고 나서 배우자를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처녀들은 한 명의 총각을 앞에 놓고 선택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맞선을 봐서 시집을 못가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처녀들 대꾸가 이랬다는 것입니다.

"총각 네 명을 데려다주면 그 가운데 한 명을 찍겠습니다."

이쯤이면 눈치 빠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사지선다형 공부를 한 탓에 맞선을 봐서 시집갈 순 없고 적어도 네 명의 총각을 데려다주면 그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우리 교육현실에 대한 뼈아픈 풍자인 것입니다. 결혼은 적어도 상대방을 어느 정도는 바로 알고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하나되는 것은 인격적인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일치는 사랑과 복종의 일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과 복종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일치는 인간의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 가운데 사람들이 서로 결합하게 되는 그러한 일치를 말합니다. 참된 지식은 서로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참된 지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의 몸된 교회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교회에서의 봉사생활, 성경공부, 기도생활 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 생활 즉, 말씀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삶의 표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해도 끝까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다해도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시119: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시119:74)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 (시119: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시119:76)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시119:77)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나로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고난이 있어도 예수를 아는 데에 축복과 영광, 그리고 은혜와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과 하나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말씀과 하나되어질 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가정이 하나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하나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라가 하나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광된 통일의 모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러분들을 위한 기도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통해 이루어지시므로 은혜와 영광, 그리고 진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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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도와 사랑

"(행4: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행4: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행4: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행4: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행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행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행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인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에 붙잡혀 가서 온갖 위협과 공갈 협박을 당하고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돌아와서 그 당한 일들을 모두 낱낱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사건의 경위를 다 듣고 난 후 교회는 틀림없이 임할 핍박과 박해를 예상하고 함께 모여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높여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여기 초대교회 기도의 특징을 통해 기도의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행4: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이어서 인간의 반항이 무용함을 선언하므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자로서의 존재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2: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시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시2: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시2: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이 두 가지의 기도 내용을 보면 세상의 역사가 모두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역사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을 고백한 것입니다.

"(행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행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행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위의 기도를 보면, 사도들이 처한 험악한 주변 환경을 제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적대시하는 저들을 물리쳐 달라거나 그들의 세력을 무력화시켜달라는 것이 아니라, 또 단순히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대적할 것임을 이미 다 알고 계시며, 사도들도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또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역사의 주관자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되고 신실한 자로 하여금,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하여금 한 나라의 역사를 주관하게 하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은 늘 십자가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일을 시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권세를 잡고, 지식을 잡고, 물질을 잡아서 하나님 나라를 펼치리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방법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 역사는 더 혼탁해지고 강포한 것과 불의한 것들이 권세를 잡고 흔들어 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하므로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갈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요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를 잡으려 온 사람들을 물리칠 수 있는 하늘의 권세가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기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악의 세력이 없었더라면, 복음의 적대 세력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일이 더욱 더 성공했을텐데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닥치는 모든 환란과 고통과 난관을 꼭 없애야 한다든가 반대세력을 꼭 꺾어야 된다든가 그 세력을 이길 힘이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그 난관을 없애는 것으로 능력을 등장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합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합1:3)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합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놀란 것은 하나님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시오 천하의 대주재인신데 세상에는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에게 피해를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이 더 잘 살고 강포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압제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가 깨달은 것은 이런것이었습니다.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신자의 삶은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것이라거나 포도나무에 열매가 있는 것이라거나 감람나무에 소출이 많은 것이나 밭에 식물이 있는 것이나 우리와 외양간에 양과 소가 많은 것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존재로서 이미 충분하고 이미 너무나 소중하고 그것으로써 더 이상 다른 것은 쳐다볼 수 없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저 원수들이 저러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도 예전에 저러했을 때 예수를 보내신 것같이 저들이 원수짓하는 데 나를 하나님을 아는 자로 여기 못박아 놓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은 일이 있다면 이 공갈과 협박과 생명의 위협과 육체의 고난으로 인하여 내가 선 이 자리를 내가 알고 있는 이 생명의 진리를 내가 입다물고 주저앉지 않게 담대케 하옵소서입니다.

감리교 김종우 감독은 풍채가 당당하였습니다. 전도인 시절 하루는 많은 노동꾼들이 휴식하는 자리에서 쪽복음서를 나누어 주며 전도하려 했습니다. 허리를 공손히 숙이며 전도했으나 사람들은 냉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반복해서 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하다가 방법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큰 소리로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버르장머리없는 놈들! 예이 듣거라! 너희 지금부터 한 놈씩 냉큼 나와 이걸 받아 가거라. 안 받아 가는 놈은 능지처참하리라."

그야말로 불같은 호령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아직 양반의 불호령에 평민들은 쥐구멍을 찾는 것이 몸에 밴 때였습니다. 그들은 곧 태도가 돌변하여 재빨리 한 사람씩 나와 전도지를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일제히 허리를 숙이고 무슨 말이 떨어질까 싶어 하명을 기다렸습니다. 순간 김 목사는 위엄있는 목청으로 기독교의 도리를 전했습니다. 노동꾼들은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고 적지않은 결신자들이 생겼습니다.

성경은 앞으로 가면 갈수록 환란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협박만 당하고 놓여났지만 다음엔 채찍 맞고 놓여나고 그 다음에는 감옥에 갇히고 드디어는 죽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에 대해 하등의 불평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일들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의 기도가 있다면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함 때문에 하나님의 목표와 목적하심을 놓고 눈 앞에 있는 위험과 협박에 타협해서 하나님의 뜻에서 일탈(逸脫)하지 않게 하옵소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그것만이 그들의 기도인 것이었습니다.

"(행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행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우리의 삶과 현실이 어떤 위협과 환란과 고통 중에 있다할지라도 오직 주 예수의 이름만 나타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는 것과 우리가 기도하여 축복을 얻어내는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므로 우리의 삶과 죽음에 우리의 존재와 행함에 오직 주께서만이 증명되시옵소서. 그것이 증명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순교를 당해도 좋고 핍박을 받아도 좋고 오해를 받아도 좋고 멸시천대 괄시를 받아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존재를 이 무궁하신 지혜와 뜻 가운데 지키고 계시고 인도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당하는 일을 인하여 영원한 것을 팔아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아무것도 안 갖고 있고 늘 지는 것 같지만 내가 하나님 편을 들고 있고 세상에 지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충분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서쪽 열도의 뉴 헤브라이드스에 있는 한 묘에는 <1848년 그가 이 섬에 왔을 때는 크리스챤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1872년 그가 이곳을 떠날 때는 이교도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라고 씌어져 있는데 이는 평생을 이 섬에서 구령(救靈)사업으로 헌신한 선교사 게디 박사(Dr. Geddie) 묘의 비문입니다. 게디 박사는 이 섬사람들을 위하여 도착한 그날로부터 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처음 도착했을 때에 그 섬의 난폭한 살인자 카피오(Kapio)는 기도하는 게디 박사를 죽이려고 곤봉을 높이 쳐들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를 치지 못하도록 무엇이 뒤에서 잡고 있는 것 같아서 깜짝 놀라 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후에 그가 크리스챤이 된 후 "누가 분명히 그의 무릎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마트면 위대한 주의 종을 죽일 뻔하였다."라고 하며 "만약 그가 살해되었다면 우리 섬은 저주의 섬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무릎의 능력'으로 온 섬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 개인의 영혼도 이 '무릎의 능력'으로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32절이하를 봅시다.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 말씀은 기도가 가장 중요하였고 말씀의 증거도 특히 중요하였지만 그러나 가장 귀중한 것은 형제에의 사랑과 자비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곳에 관하여 전해져 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 터는 두 형제가 소유하고 있는 밀밭이었는데 형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아우에게는 아직 가족이 없었습니다. 밭에서 밀을 추수한 형제는 각기 자기의 몫을 따로 쌓아 두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형이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여보, 동생이 하루종일 곡식단을 나르고 뜨거운 볕에 견뎌내느라 몹시 힘들었을 것이요. 동생 몰래 나가서 우리 곡식단을 동생의 곡식단에 옮겨 놓아야겠소."라고 하고는 밤중에 나갔습니다. 동생도 집에 와서 생각하기를 "나의 형님은 가족이 있고 내게는 가족이 없으니 형님 몰래 나의 곡식단들을 형님의 곡식단에 옮겨 놓고 와야겠구나."라며 나가서 자기의 곡식단을 옮기고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각각 자기 밭에 나가보니 이상하게도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그날 밤도 나가서 부지런히 옮겨 놓았으나 다음 날에 보면 곡식단은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형제는 밤중에 나가서 몸을 숨기고 지켜 보았습니다. 한동안 망을 보았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다시 동생은 형의 곡식단으로, 형은 동생의 곡식단으로 각자의 곡식단을 옮기다가 그만 마주쳐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비밀을 알게 된 형제는 곡식단을 내던지고 와락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토록 사랑의 눈물이 떨어진 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날로 확장되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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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도와 구제

"(행10: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행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10:3)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행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행10: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행10:6)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행10: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행10:8)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로마 황제 시저의 이름을 가진 도시로 꽤 주목을 받던 가이사랴에 이태리에서 파견되어 주둔하고 있던 고넬료라는 군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유대인이 아니었고 할례나 세례를 받은 적이 없는 순전한 이방인이었지만, 그는 온 집안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외국 땅인 이스라엘의 가이사랴에 주둔하여 살면서 경건하고 도덕적이며 애국적인 유대인들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을 믿으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고넬료는 여러 면에서 훌륭한 이방인이요 종교인이었습니다. 즉 우상숭배가 일반적인 로마 군대에 속해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할 뿐 아니라 그의 집안 식구들과 심지어 종들까지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을 보면 그의 지도력이 뛰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틈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의 음성듣기를 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예배하였고, 하나님과 유대교의 종교적인 것들을 좋아하여 유대인들에게 이미 알려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직위나 경제적인 안정 또는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진정으로 바른 기도를 하는 사람은 악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넬료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둘째, 구제하는데 열심히 있는 사람이었으며 셋째, 고넬료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움을 섬겼던 히브리 여인들은 왕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적 증가를 막기 위한 가혹한 노동 착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번창하자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더욱 악랄한 학대 정책을 폄으로써 자신의 마성(魔性)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즉 중노동을 통한 출산의 억제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로는 산파를 통한 이스라엘 신생(新生) 남아(男兒)의 살해를 꾀하게 됩니다.

"(출1: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1: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출1:13)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하여 (출1:14)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출1:15) 애굽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출1:16)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남의 나라에서 노예로 사는 처지에 국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일개 산파의 신분으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애굽왕이 직접 불러 명을 내린 십브라라는 산파와 부아라는 산파는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그대로 살려 두었습니다. 그들이 왕의 명령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출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애굽왕 바로는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바로 앞에서 그들의 목숨은 풀 한 포기의 가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들에게 바로가 주는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이 참으로 두려운 분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여인, 그들이 바로 히브리 여인들이었으며, 십브라였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전해야 할 영원한 복음은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 둘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셋째,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계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계14: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노발 대발한 애굽왕이 두 산파를 소환하여 문초하게 됩니다.

"(출1:18) 애굽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이에 대한 산파의 대답은 정말 지혜롭고 담대하기 까지 했습니다.

"(출1: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 이런 지혜로운 대답이 나온다는 것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들의 심중과 지혜로움을 보시고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출1: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출1:21)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야고보는 이렇게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우리 교회는 가난한 이웃을 위한 사회 봉사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나라 민족을 위해 기도만하고 나 혼자 말씀대로 살면 그만이며 성도들끼리만 사랑을 주고 받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경건의 생활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옛날에 아주 지혜롭고 나이 많은 한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대를 이을 후손이 하나도 없었던 그는 자신의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을 뽑기 위해 전국에 후보자를 모으는 방을 붙였습니다. 곧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왕이 있는 궁전으로 몰려들었고 왕은 그 중에서 최종적으로 세 명의 훌륭한 청년들을 뽑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길다스, 씨릭, 오스프리스로서 모두 지혜롭고 준수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왕은 이제 마지막 시험을 통해 이들 셋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선택하려 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왕의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왕은 세 사람을 한 자리에 모아 놓더니 한 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가 들어있는 책이다. 이제 내가 이 책 중 한 구절을 읽어 줄테니 너희들은 일주일 동안 그 말대로 살아가도록 하여라. 제일 잘 수행한 사람이 나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왕이 읽은 구절은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곧 세 사람은 왕에게서 물러나 각자의 길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그들은 다시 왕 앞으로 나아오게 되었고 왕에게 일주일 동안 자신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차레로 보고하였습니다. 먼저 길다스가 피곤한 모습으로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저는 왕의 명을 받은 즉시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밤낮없이 계속 기도했지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는 함께 있었던 수도사에게 물어보시면 잘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길다스에게 다시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수고했구나. 그렇다면 너의 그 기도로 좀더 행복해진 사람이 있느냐?"

길다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곧 두 번째로 씨릭이 쉰 목소리로 왕께 보고했습니다.

"왕이시여! 저는 일주일 동안 교회에 가서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제 목소리 좀 들어 보십시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던지 목이 다 쉬었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왕은 씨릭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너는 네 기도로 인해 이 나라가 좀더 행복해졌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씨릭 역시 이 물음에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스프리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예전에 생활하던 대로 살았답니다. 저는 할 일이 많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집도 지어 주어야 했고 마을에 다리도 놓아야 했고 아픈 친구의 집도 돌봐야 했고....., 그렇지만 저는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했답니다. 제 마음 속에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럽더니 많은 사람들이 왕 앞으로 몰려와 오스프리스에게 받은 도움과 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왕은 비로소 얼굴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왕관을 오스프리스에게 씌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기도의 생활이 있어야 필요한 것입니다.

구제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우선적인 의무였는데, 다만 그들은 조금 구제하고 많이 떠벌인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고넬료는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헌금하는 자세를 세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하곤 합니다.

첫째는 부싯돌형입니다. 이런 유형의 교인들은 때려야 헌금을 합니다. 생활이 평탄하면 안일해지고 모든 것이 자신의 업적인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부싯돌처럼 쳐야 부스러기가 생기고 불꽃이 생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스폰지형이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교인들은 짜내야만 헌금할 돈이 생깁니다. 모든 물질이 생기면 마치 스폰지처럼 흡수만 하니 안 짜낼 수 없는 것입니다. 짜기만 하면 많이 내놓기는 하지만 자신해서 내놓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꿀벌형이 있습니다. 여기저기를 다니며 힘들게 꿀을 모아 벌집 속을 가득 채우고 아주 달고 유익한 물질을 만들어 놓습니다. 힘들게 모아서 아주 유익하게 만드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풍요를 안 주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꿀벌처럼 주어지는 물질의 갑절을 내놓을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경건은 기도, 구제와 함께 병행되는 것입니다.

"(사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사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두 번째로 고넬료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는다는 것은 기도 생활에 장애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현재 아현중앙감리교회 장로님이시며, 연세대학교 총장이신 송자박사는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송자 총장은 지금 대전 맹아학교 교장으로 있는 맹인 동생으로부터 교회를 알게 되었고 기독교 집안인 큰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됨으로 열심히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부터 3학년 때까지 새벽기도를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다섯 명이 있었는데 똘똘 뭉쳐서 서로 깨워주면서 다녔습니다. 그 때 기독교 대학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연세대학교를 거쳐 총장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렘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 하늘을 자물쇠로 잠그고 그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왕상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약5:18) 디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게 될 때, 즉 하나님이 특별히 행하라고 명령하지지 않았을지라도 그 분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게 될 때 기도는 상달되는 것입니다.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기도의 응답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기적인 목적을 갖고 하는 기도입니다.

"(약4: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약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악한 동기를 가지고 정욕과 탐욕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바른 목적과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목적은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기도의 진정한 목적은 나 자신의 유익이나 이기적인 욕망이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너무도 열심히 그리고 희생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의 동기와 목적은 성경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이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그는 예수님만 안 믿었지 모든 면에서 너무도 훌륭하고 좋은 분이예요. 아마 그런 분이 예수님만 믿으면 저는 너무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 거에요."

남편이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선하며 완전한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를 순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 앞에서 사악하고 완고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남편을 선하다고 말하는 여성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만, 또 사랑해야 하지만 그를 선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단지 남편이 구원받고 영원한 지옥에서 탈출하는 그 기쁨을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남편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 응답의 장애물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 하더라도 마음 속에 품은 죄악이 있으면 하나님은 절대로 기도의 응답을 하시지 않고 또 하실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생활 가운데 어떤 죄악이 있는가를, 혹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어떤 무엇이 있는가를 보여 달라고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후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속히 들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도응답의 장애물은 마음 속의 우상입니다.

"(겔14:1)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겔14: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14: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여기 우상이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어떤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독교인이 무엇을 하나님 앞에 둘 때 바로 그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자기 아내나 남편, 자녀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은 우상이며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남편이나 아내, 자녀를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나 아내, 자녀를 하나님 앞에 놓는다면 그 위치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네 번째 기도응답의 장애물은 용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 아내들이 너무나 간절히 남편과 자녀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자기에게 잘못한 남편이나 자녀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원망과 혐의를 가지고 있으며 한을 품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기도응답의 장애물은 주는데 인색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고 뒤를 막아버리면 하나님도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으시고 귀를 막아 버린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는 데에 아주 인색하고 움켜쥐려고 하는 사람은 능력있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잠21:13)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것만큼 하나님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색한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받을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의 사역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바울을 도왔기 때문에 하나님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만큼 갚아 주셨던 것입니다.

"(빌4: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빌4: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빌4: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빌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게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참으로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은 정말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들입니다.

영국 브리스톨의 죠지 뮬러는 지난 세대에 가장 위대한 기도의 사람 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72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의 돈을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았습니다. 그는 약 60년 동안 영국의 고아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을 여러 가지로 지원했으며, 때로는 한꺼번에 2000명이 넘는 고아들을 수용하여 하루 세 끼를 충분히 먹이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놀라운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필요한 돈과 또 그가 관계하고 있는 다른 일에 필요한 모든 돈을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았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 그 일들을 위해 모금이나 헌금이나 기부금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계속해서 그 돈은 들어 왔습니다. 어떤 때는 돈이 끊어진 상태가 되어 마지막을 기다리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틀림없이 돈은 들어 왔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100파운드를 구하면 하나님은 100파운드를 주십니다. 그러면 100파운드를 고아들과 혹은 다른 사역에 그대로 다 써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720만 달러를 응답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 써버렸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응답받은 돈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않고 움켜 쥐고 있으면 하나님도 더 이상 주는 것을 중지하시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기도응답의 장애물은 부부관계의 불화입니다.

"(벧전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여기서 남편이 아내를 잘못 대하고 아내가 남편을 잘못 대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불화가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남편이나 아내 그 어느 편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넬료는 구제하는데 열심을 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하는 방법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하여 (마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인간도 마땅히 이웃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 구체적인 표현이 구제인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이고 또 칭찬을 받기 위해 구제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그것은 가난한 사람을 이용해 자기 영광을 얻으려는 악한 행위입니다. 예수께서는 잘못된 구제가 많이 있음을 아시고 참된 구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구제의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신14:28)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 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신14: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 하시느니라."

"(잠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잠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에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에 감동을 받고 신앙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삶의 분량대로 구제의 손을 내밀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새로나 백화점 건물이 우뚝 올라간 상동교회의 시작은 거지들의 교회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교회 교인은 대부분이 가난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할 것입니다. 겨울 동안에도 이러한 목적으로 모금한 결과 30원이 걷혔습니다. 또한 우리 교인들 가운데 극빈자들이 죽는 경우 그 장례비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그 목적으로 쓸 돈 10-12원이 비축되어 있습니다."

상동교회 설립자 스크랜톤의 휴가시에 잠시 교회를 맡아 보았던 스웨어러의 보고 내용입니다. 이처럼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교회가 그 시절 상동교회의 모습입니다. 스크랜톤도 자신의 교회를 "부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반대로 가난하고 나이 많은 이들이 상당히 많은데 지난 겨울 그들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업무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농가에 한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습니다. 욕심이 많은 농부의 아내는 밭에 토마토, 오이, 가지 등 많은 열매가 열렸으나 다 썩어가는 마늘 줄기를 하나 뽑아 주었습니다. 거지는 그것으로 요기를 채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농부의 아내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천사에게 자신은 자선 사업을 많이 했으니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그녀가 생전에 거지에게 주었던 마늘 줄기를 가지고 오더니 이것을 붙잡고 천국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천사가 마늘 줄기의 한쪽 끝을 잡고 농부의 아내가 한쪽 끝을 잡고 천국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썩은 줄기가 갑자기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농부의 아내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할 때는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보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1: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금년 성탄절에는 하나님 앞에 경건한 신앙생활인 기도와 구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시고, 범사에 윤택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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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불로 응답되는 성도의 기도

(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6)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10) 세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11)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12) 네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 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계8:1-13)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에 가인은 뻔뻔하게도 모른체 하며,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며 오히려 반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의인이 흘린 피의 호소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심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의인의 피를 덮어 놓은 가인에게 이렇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7-12)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무고하게 흘린 피로 인하여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하는 의인의 핏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그 호소에 응답하시는 정의로우시고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단 한 사람의 핏소리일지라도 결코 소흘히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어찌 한 사람의 억울한 핏소리라도 놓치시겠습니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이방원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다 철퇴에 맞고 선죽교에서 흘린 정몽주의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친일파 경찰 끄나풀에게 고문당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무고한 백성들의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당하여 사할린 등지로 끌려가 탄광에서 억울하게 죽음당한 징용 조선인들의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친일파 지식인들의 선동에 어쩔 수 없이 학병과 정신대에 끌려가 희생당한 조선 남녀 청년들이 흘린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조선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다 이름도 빛도 없이 청산에 묻힌 독립군들의 흘린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군부 독재 30년간 자유와 민주를 위해 부르짖다 대공분실, 남산 등지로 아니 군대까지 끌려가 물고문 등 온갖 고문을 견디다 못해 피를 토하고 죽어간 민주 열사들의 흘린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저 남아공화국 흑인들이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다 백인 경찰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터지고 사냥개에 물려 흘린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세르비아의 탄압을 받아오던 크로아티아가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을 등에 업고 세르비아계 1백여만명을 학살한 <피의 보복>을 어찌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겠습니까? 동티모르의 1975년 12월과 1976년 1월은 <학살의 계절>로 불리는데 이 두달 동안 동티모르인 6만명이 학살되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3살 이상의 티모르인과 중국인은 모두 살해되었습니다. 이들이 흘린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아프리카 등에서 소위 인종 청소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내란으로 무고한 종족들이 흘린 피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600만 유대인들의 핏소리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9.11 미국 세계무역센타 테러 사건으로 숨진 3천여명이 흘린 피가 어찌 하늘에 호소하지 않겠습니까?........참으로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하늘에 부르짖는 핏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피의 역사라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피의 역사라함은 바로 죄의 역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억울하게 흘린 핏소리를 다 들으시고 드러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소위 가진 자들이 덮어놓은 핏자국들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더럽고 추악한 승자가 기록한 거짓된 세상 역사는 그 진실을 몽땅 밝히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사26:21)

오늘 본문에서 시작되는 일곱 나팔의 재앙은 땅에서부터 호소하는 핏소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 "큰 환난 가운데서도 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성도들의 신원하는 기도", 주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의 기도, 의인들의 기도가 심판의 불로 응답되어 지구에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금향로의 향연과 함께 하나님 앞에 올라가지만 그 기도가 응답되어 이 땅에 내려올 때는 재앙들로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는 근거가 됨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은 것은 반드시 응답되어 그 사람들을 징계하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고 권면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오히려 잘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자신의 대적들로 인해 고난당하는 가운데서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109:4)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원수들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롬12:19). 그러므로 성도는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직접 보복하거나 저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데반처럼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 그들이 잘 되기 위해 기도할 뿐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가르치신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금력 등 눈에 보이는 어떠한 힘보다 성도들의 기도가 더 강하고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재앙들도 앞선 계시록 6장에서 볼 수 있듯이 피흘리기까지 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교당한 성도들의 핏소리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계6:10)

성도들의 기도응답으로 울리는 일곱 천사의 일곱 나팔은 세상의 종말과 심판을 경고하는 나팔입니다.(고전15:51-52,살전4:16). 역사의 종말에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임박한 것을 알리는 경고 나팔입니다. 이 나팔이 울리면서 일곱 재앙이 시작되는데 그 재앙의 범위는 지구의 3분의 1만을 해치고, 3분의 2를 남겨두라는 부분적인 재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곱 나팔 재앙은 마지막 재앙이 아닙니다. 이는 재앙의 목적이 형벌과 심판이 아니라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경고의 나팔로 주어진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불신자와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대적하는 자들,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한 자들, 무고히 힘없는 사람들을 피를 흘리게 한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여전히 회개일 기회를 주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악에 물든 사람들은 엄청난 재앙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아니 그 재앙을 직접 당하면서도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지며 살인과 음행과 도적질이 그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완악하고 강퍅한 모습을 계시록 9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은,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계9:20-21)

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재앙으로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면서도, 실제 하늘에서 집채만한 우박이 내려 사람들이 박터져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계16:9,11,21)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이런 재앙에서 피할 곳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믿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자들은 구원함을 받을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목이 곧은 사람들은 일곱 재앙으로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경고의 나팔로 시작되는 재앙들의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재앙들의 특성은 한 마디로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인한 재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재앙인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진다."는 것은 핵시설 폭발 사건이나 핵무기 폭발로 인한 방사성 낙진 혹은 전쟁 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두번째 재앙인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는 것"은 화산 폭발같은 것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를, 셋째 재앙인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는 수질오염 등의 환경오염과 공해 등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는 슬픔과 비참한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같이 여기 나타나는 재앙들은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오염, 그리고 공해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땅'에 재앙을 내리신다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나 환경오염도는 일일이 그 통계지수를 밝히지 않아도 누구나 다 짐작하고 느끼고 있는 정도로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난 5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쥐가 까치의 공격을 받고 "걸음아 쥐생원 살려라!"면서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는 보기드문 모습이 문화일보 화보에 실렸습니다. 잡식성 조류인 까치가 독수리 등 맹금류의 사냥감인 쥐를 잡아먹을 듯 뒤쫓는 경우는 보기드문 경우입니다. 이같은 생태계 하극상은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지만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는다든가, 환경호르몬으로 동식물계에 성이 파괴되는 현상 등 여러 하극상들이 자주 보도되어왔습니다.

정부가 발표한 2000년도 대기오염과 사망 통계에 따르면, 미세먼지와 오존 등 각종 대기오염물질로 인한 급·만성 사망자는 전국 7대 도시에서 연간 2만8천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한계레신문)

세계경제포럼(WEF)은 지난 2일 한국의 환경지속지수(ESI)가 전세계 142개 국가 중 최하위권인 136위(35.1점)에 그쳐, 한국의 환경이 전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것으로 보고했습니다. ESI(Environmental Sustainability Index)는 돌이킬 수 없는 환경 파괴를 하지 않으면서 경제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 객관적인 능력을 의미하며, 물과 공기의 오염에 대한 대응 방법과 정부의 부패 정도 등 68가지 변수들을 고려한 것입니다. ESI에서 한국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국가들은 북한(31.8점)을 포함, 6개국에 불과했고 상위권은 핀란드 다음으로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차례로 2·3위를 차지, 북유럽이 단연 앞섰습니다. 국제지구과학정보센터는 "이번 조사에서 환경의 건강도는 경제발전 정도와는 상관관계가 적지만, 정부의 부패 정도와는 밀접한 관계가 발견됐다."면서 "정부가 부패한 국가일수록 환경에 관심을 갖는 정도가 낮았다."고 밝혔습니다. <생태계 파괴>나 <환경오염>은 나라 백성이 부정부패하고 사치와 향락, 음란 등이 심할수록 환경지속지수(ESI)가 아주 열악하다는 것입니다. 국민소득(GNP)은 일등급 규모일지라도 부정부패가 사회 곳곳에 만연하면 환경지속지수가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은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혼란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부정부패, 사치, 향락과 음란 등으로 인한 자기 혼란과 자기 파괴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생태계 파괴는 윤리 도덕의 붕괴를 초래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태계의 파괴(위기)는 산업화나 현대의 첨단 기술이 가져온 부작용이 아니라 죄악에 병든 인간 세상에 내리시는 재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구 환경 위험을 알리는 신호들 가운데 충격적인 것은 이미 북극 빙하의 42%가 녹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월드워치연구소의 <지구환경보고서 2001>이 환경을 잊고 지내는 우리에게 협박아닌 협박, 장난 아닌 진실들을 공개했습니다.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재앙이 지구에서 '현재 진행중'이라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놓고 있습니다. 2050년이 되면 북극에서 여름에 얼음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1950년 이래로 해저조사결과 북극의 얼음 두께가 42% 정도 줄었으며, 공중관측 결과 그린란드에서 매년 51㎦(5천1백만리터)의 빙하가 녹고 있어 이 빙하가 완전히 녹아버릴 경우 해수면이 7m 정도 상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추세가 2050년까지 계속될 경우 지구의 상당 지역이 물에 잠기게 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50년 안에 북극에서 여름철 빙하를 볼 수 없게 되고 원인도 모르게 양서류가 사라지는 등 지구는 암울한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진단하며 <미래의 재앙>은 이미 시작됐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같은 재앙에 대한 경고는 세계적인 사회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대부분 모든 사람들이 이에 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조사에 따르면 매60분마다 한 종의 식물이나 동물이 멸종되고 있습니다. 열대 지방 전체 종(種)의 멸종율은 자연적인 멸종율의 만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앞으로 10년내에 우리는 지구상에 남아 있는 모든 생물체의 20%를 잃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유엔 환경위원회에 따르면 사막화는 세계의 모든 대륙에 확산되어 지구 땅 표면의 35%, 3분의 1 이상이 사막화 위협에 놓여 있습니다. 전세계 인구의 20%인 8억 5천만명의 사람들이 사막화로 인해 황폐화된 땅에서 굶주린채로 잠들고 있습니다. 1982년부터 1984년 사이의 가뭄 때 사하라 사막의 남부에서 25만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는데 그들 모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전쟁 도발, 즉 환경파괴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개발 도상 국가에 살고 있는 13억이상의 사람들은 극빈자들입니다. 이들의 평균 수명은 겨우 57세이며 10명의 아이 중에 3명이 5세가 되기 전에 죽습니다. 사망의 주원인 기본적인 보건과 위생을 위한 깨끗한 물이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지구 남반구에 살고 있는 나라들 3분의 1에 달하는 가구가 이같은 상황에 처했습니다. 미국의 인구는 전세계의 5%도 되지 않지만 지구 천연자원의 30%를 소비하며, 이들 대부분의 물자들이 개발도상국가의 환경을 파괴하면서 만들어지고 값싸게 수입되어지는 것들입니다. 지금 미국은 이들 엄청난 자원들을 소비하면서 자기 땅 안에서 쓰레기 처리능력을 넘어서 버렸습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로부터 370만톤이 넘는 쓰레기가 매년 처리 비용이 보다 싸고 환경보전의 규제가 별로 엄하지 않은 가난한 개발도상국가들로 실려나가고 있습니다....『국제환경단체들은 지난달 25일 미국이 자국에서 폐기된 컴퓨터, 화학약품 및 중금속을 함유한 전자제품 폐기물 쓰레기들을 자국에서는 유해하다는 이유로 매립과 소각을 금지하면서도, 환경규제가 약하고 처리기술과 자본이 없는 중국·인도·파키스탄 등 아시아의 가난한 국가에 유해폐기물을 수출하므로 강대국 미국은 아시아 가난한 나라들을 향한 <환경 테러>를 일삼고 있으며, 전세계 <환경오염의 축>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난번 유해물질에 오염된 세계무역센터 고철, 9.11테러 사건으로 3천여명의 희생자들의 피로 얼룩진 고철더미를 아무런 사전조처없이 아시아 국가에 수출한 사건으로 '추악한 거래'를 일삼고 있다는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이상은 한계레신문에서 발췌)

삼림 벌채, 토양 침하, 유독성 폐기물, 살충제 사용의 증가 그리고 다른 많은 환경 위협이 하나밖에 없는 제한된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으로 인한 온실 효과와 오존의 고갈은 지구 어디에서도 피할 길이 없는 무소부재한 존재로 이미 지구 앞날에 강력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구 재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두 가지 가공할 환경 문제는 마침내 전지구가 '뿌리째 흔들리게 될' 때까지 퍼져 내려갈 것입니다.(생명권 정치학, 제레미 리프킨저, 대화출판사)》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는 환경오염이나 자연 세계의 파괴의 범위를 넘어서서 삶의 전 체계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결같이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류가 봉착한 문제는 단순히 생태계의 오염이나 생태계의 위기의 범위를 넘어서서 인류가 살아 남느냐 아니면 몰락하느냐의 문제 곧 생존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오염이나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리시는 심판에 대한 경고 나팔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길만이 나라 백성이 재앙과 심판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첨단 기술이나 노력 등으로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을 막고 환경을 재생한다해도 궁극적으로 내리는 하나님의 재앙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재앙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 앞에 나와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들 재앙이 내리는 목적은 바로 회개하고 하나님앞에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재앙이 내리는 형태를 영적으로 해석하든 문자적으로 해석하든 확실한 것은 이 모두가 인류의 죄에 대해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들 재앙으로 인류의 3분의 1이 죽고, 그 소유의 3분의 1이 일시에 초토화되지만 3분의 2를 남겨 두신다는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의 구원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이 목적이 아니라 재앙을 통한 인류 구원에 목적을 두고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 광야에서 물이 써서 마실 물이 없으므로 죽게 되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쓴물에 나무가지를 던지니 그 물이 달게 되어 백성들이 마시고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마라의 쓴물에 던져진 나무는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이든 실제이든 쓴물을 마시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마시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앞서간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보좌 앞에 상달되고 그 기도들이 이 땅에 심판을 위한 경고의 나팔로 재앙들이 임하고 있습니다. 마라의 쓴물을 영원한 생명수로 바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류가 사는 길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사시므로 어떠한 재앙들과 심판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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