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목사

 

교회소개
담임목사
선교활동
게시판
방명록
홈


 

             anib05.gif 담임목사주일설교   anib05.gif 기도문  anib05.gif 담임목사저서
 


                   
cross01b.gif  교 회  cross01b.gif

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 교회와 세상(1)

2. 교회와 세상(2)

3. 교회 태동

4. 성령받은 교회의 모습

5. 사랑의 공동체

6. 최초의 이방 교회

7. 교회의 힘

8. 선교하는 교회

9. 하나님의 성전

10.교회의 덕과 질서

11.자랑스런 교회 모습

12.교회의 질서

13.교회 임원의 자격

14.에베소 교회

15.서머나 교회

16.버가모 교회

17.두아디라 교회

18.사데 교회

19.빌라델비아 교회

20.라오디게아 교회

21.교회의 고난

22.성전의 성결보존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 교회와 세상(1)

"(요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요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한 복음 15장 1절-8절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참 포도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농부는 하나님을, 그리고 포도나무 가지는 "너희" 곧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음같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합되어질 때 인생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열매 중에 가장 큰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머리로, 그리고 우리는 그의 여러 지체들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몸과 지체의 연합이 사랑의 영, 곧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처럼 성령으로 이루어진 교회의 특성은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특성은 하나되게 하는 것(To be One)입니다. 사랑의 산술은 1+1=1입니다. 1+1+1......+1=1 즉 아무리 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 전도하러 갔습니다. 한 가정에 가니 3형제가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까닭을 묻자 큰 형이 설명하기를 "아버지가 말 17필을 유산 으로 주시면서 장남은 1/2, 차남은 1/3, 삼남은 1/9을 가지라고 유언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따르자니 장남인 저는 8과 1/2필이요, 차남은 5와 2/3필이요, 삼남은 1과 8/9필이 되어 말을 산 채로 나누어야겠는데 아무도 양보하질 않아서 서로 양보하라고 싸우는 중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렇습니까? 그러면 내가 타고 온 말을 여기에 보태드릴테니 산 채로 나누도록 하십시오."하고 자기가 타고 온 말을 제공하였습니다. 18필이 되니 나누기가 쉬웠습니다. 그리하여 장남은 9필, 차남은 6필, 삼남은 2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말을 합하니 교묘하게도 17필이 되었고, 선교사가 제공한 1필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17필로 싸우면서 나누려던 때보다 장남은 1/2필, 차남은 1/3필, 삼남은 1/9필을 더 가졌는데도 1필이 그대로 남았으니 도무지 이상했습니다. 이 때 선교사는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드린 한 필은 사랑의 한 필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원만하게 잘 해결될 뿐만 아니라 더욱 풍부해집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정의(定意)되나 세상은 미움으로 정의됩니다. 세상의 특성을 다음 성구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일3: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요일3: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일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일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우리가 사는 세계를 둘로 나눈다면 빛과 어두움, 사랑과 미움, 교회와 세상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과 빛이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 아니면 예수를 거부하는 자, 빛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 아니면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사랑하는 자 등 두 가지로 분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받아들인 자는 이미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한 자입니다. 세상이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실체(實體)를 말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로마의 행정 장관은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죄를 범했는가 하는 것을 재판 기준으로 삼지않았습니다. 단지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것만으로 죽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범죄 행위를 했든 그것은 문제시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문제시 삼고 적대시 했던 것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사실은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그와 같이 마찬가지일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아시고 다가오는 시대에 그의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에 대하여 사전에 경고하셨습니다.

"(막13: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막13:13)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초대교회 당시 로마 제국은 거대했습니다. 유프라테스로부터 영국에까지, 그리고 독일에서 북아프리카까지 뻗쳐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민족과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잡다한 집단을 하나로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통일적인 사상과 힘을 찾아내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통일적인 힘을 황제 숭배 가운데서 찾아 냈었습니다. 다수의 민중들은 로마의 정신(精神)인 로마라고 하는 여신(女神)이 황제 속에 성육(成肉)하고 상징화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로마를 위해서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를 구현(具現)했습니다. 로마에 종속되어 있는 민족들은 이러한 로마에 대하여 원망은 커녕 오히려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로마는 정의(正義)를 가져 왔고 변덕스러운 왕들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는 평화와 번영을 가져 왔습니다. 로마 제국 당시 육지나 바다에는 도적들이 없었습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는 온 세계에 걸쳐 뻗어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에서도 가이사(Caesar) 즉 황제가 로마를 구현한 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가져 온 축복(정치적인 평화와 번영)을 마음으로부터 감사하여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황제들은 이러한 숭배를 저지하고 반대했습니다. 즉 그들은 인간이며 신들처럼 숭상받을 것이 못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것을 이용할 적절한 것을 찾아 냈습니다. 바로 황제 숭배에서 통일의 원리를 찾은 것입니다. 이리하여 제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은 황제를 신성(神性)시 하여 일년에 한 번씩 황제 숭배 신전에 가서 "가이사(Caesar,당시 황제)는 주(主)이시다."라고 충성을 표시해야만 로마의 일원(一員)이 되게끔 했습니다. 이것이 로마 제국의 통일의 원리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구도 황제를 주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라고 믿으면서 로마의 황제 숭배 제도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정부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외에는 임금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핍박을 당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첫째로(예수 그리스도 중심주의)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핍박은 항상 그렇게 예수 중심주의, 하나님 중심주의(God-Centric)로 사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황제 숭배를 통한 정치적인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는 상징적으로 오늘날 교회의 적대 세력, 즉 세상을 말합니다. 궁극적으로 로마는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핍박을 받았던 교회는 날로 그 세력을 더해 갑니다. 오늘날 세계가 구현코자 하는 평화는 모두 정치적인 평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권력지향적인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참된 평화는 오직 "오는 세상", 즉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천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정의되고 로마, 즉 세상은 전쟁과 분열, 미움으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 12:32, 에베소서 1:21, 마가 복음 10:29,30 등을 보면 세상을 "이 세상(금세)" 과 "오는 세상(내세)" 둘로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세상"은 종말을 고하고 "오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엡 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막 1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두 세상의 특성을 보면,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시대이며, "오는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 시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갈 1:4)

이 세상을 "악한 세대", 죄와 불의의 세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필요한 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 즉 사탄을 따라가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까지의 말씀에 "육체의 일"들은 모두 "이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불가피한 세상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마태 복음 13:7, 22의 비유 말씀을 보면 "이 세상"의 특징은 부귀, 번영, 성공, 권세, 생활에 대한 염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치 못하게 각종 염려들로 가로 막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이 세상"은 복음에 대해 적대적이어서 예수님을 기꺼이 따르는데 댓가를 치르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천국 복음"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여기 "이 세상 신"은 사탄을 가리킵니다.사탄은 이 세상에서 상당한 정도의 권세를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 섭리가운데 허용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운 통치의 수단으로서 사탄에게 이세상에 영향력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1-2, 갈라디아서 5:19-21 등에 나타난 일들은 바로 사탄에게서 비롯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고린도후서 4:4에 보면 악의 뿌리는 불신과 어두움,그리고 혼미 등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류의 악행들은 불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롬 1:18참조).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어두움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스스로 독립을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혼미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눈이 먼 상태를 말합니다. 사탄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빛과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특징은 바로 불신과 어두움 그리고 혼미함 등 입니다.

천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그리고 사탄이 "이 세상 신"으로 불리우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을 포기하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공격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만국의 왕"(계15:3)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계17:14)이십니다.

이 세상은 악합니다. 그리고 천국은 "오는 세상"에 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운데 "오는 세상"의 "영생"을 지금 여기서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마태 복음 19:16-30 을 보면 "영생"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구원"이 다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생, 하나님 나라, 구원은 모두 천국에 속한 것입니다.부자 청년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를 좇으면 "오는 세상"에 속한 영생을 지금 여기서 부분적이지만 소유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물에 대한 염려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가로 막았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2-50 을 보면 "혈과 육"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신령한 몸" 즉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고 나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 재림시에 있을 첫째 부활에 참여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13:49-50)

의인과 악인을 갈라 내는 분리와 심판으로 세상은 종말을 고하고 천국의 아들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알곡과 가라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여 사탄이 "이 세대의 신"으로 보이지만 예수 재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사탄을 파멸시키고 의가 모든 악을 대신하게 될 것입니이다.

그러므로 죄와 불신, 죽음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악한 "이 세상"과 생명과 축복의 "오는 세상"과는 동일한 수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계19:11-16)후 천국(계21:1 이하)이전에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천년이라는 간격(계20:1-6)이 있습니다. 이를 흔히 천년 통치 기간이라 부릅니다. 이 천년 통치 기간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기간일 것입니다(고전5:24-28).

구약의 예언자들은(암5:18-27, 9:11이하, 욜1:1-20, 30-32) 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시대를 보지 못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이 감추어진 교회 시대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천국이 시작되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메시야의 재림으로 "이 세상"은 심판받아 멸망하고 천국이 막 바로 도래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린도 전서 15:20-28에서 천국은 종말론적인 두 단계를 통해 성취됨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은 죽은 자의 부활과 사탄의 멸망으로 시작됩니다. 요한 계시록 20장을 보면 죽은 자의 부활에 두 단계가 있고 사탄의 멸망에도 두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년 통치는 첫째 부활로 시작되어 둘째 부활로 끝이 납니다(계20:4-5, 12-13). 천년 통치 시작과 더불어 사탄은 결박되어 천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 집니다(계20:2,3). 그리고 천년 통치 말에 "반드시 잠간 놓이게 됩니다."(계20:7-10)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 하나는 천년 통치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천국의 실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탄은 이 기간 동안 결박되어 있으나 그 후에 잠간 다시 놓이게 되어 여전히 중생치 못한 죄의 경향성이 남아 있는 심령들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사망과 음부(무덤)'가 천년 통치말에 최후의 심판때까지는 파괴되지 않습니다(계20:14).

중요한 결론은 "이 세상"에서 천국의 축복들을 완전히 경험치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천국은 "오는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이 악한 시대가 계속되는 한 천국의 축복들을 완전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떠나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결코 천국을 건설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는 것입니다. 사탄과 악의 세력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권능으로서만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멘, 주 예수여,속히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므로 성경은 마치고 있습니다.

천국은 세상 가운데 교회를 통해 역사하며 악의 세력과 불가피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악한 영에 대한 싸움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이 악한 세상이 계속되는 한 교회 생활에는 필연적으로 갈등의 소지가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자손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복음 5:13-16)이기 때문에 인간 역사에 영향력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빛이 비추이는 한 밝아지는 것은 자명하며, 소금이 그 짠 맛으로 역할을 다 하는 한 그 만큼 부패하지 않고 보존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명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천국의 선물인 영생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들어가도록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나타나는 모든 형태의 악과 사탄의 세력을 대항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 기구인 것입니다.이러한 내용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교회로서의 우리의 특성을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들은 천국과 사탄과의 사이에 갈등의 초점 대상입니다. 이것은 필수적으로 영적 영역에서의 갈등입니다. 그러나 이 사탄의 영적 세력과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의 행위와의 관계 영역에서 스스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의 빛과 여명의 그 날이 세상에 충만하기까지 드러난 어두움의 세력을 대항하여 싸워 승리해야만 합니다. 사랑이 미움을 이기듯이 참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시는 교회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 교회와 세상(2)

"(요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요15: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요15: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요15: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우리 한국의 전통신앙은 다신교이기 때문에 온갖 잡신들을 다 불러 모아 그 소원을 빌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신명(神明)들을 부르는데만 해도 그저 숨이 가뿔 정도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속칭 1만 8천 신명의 역학과 함수에 맥락되어 그 신명의 성미와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했습니다. 집을 수리하고 개축하고 이사하려 해도 없는 곳 없이 도사린 이 많은 신명의 안테나에 저촉되지 않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신명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동안에 이사도 하고 집도 수리하는 민속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신들의 법정 휴가가 매년 대한(大寒)후 5일째부터 입춘전 사흘까지의 이렛동안으로 이 달 말까지가 이에 해당됩니다. 구정마다 이 신명들은 주신(主神)인 옥황상제(玉皇上帝)에게 소환되어 신관 구관이 바뀌는 인사발령을 받기에 자리를 비우게 됩니다. 육지에서는 조왕신만이 소환된다던데 제주도에서는 신구간(新舊間)이라 하여 1만 8천 신들이 모두 자리를 비웁니다. 그래서 이 휴가동안에 이사를 하고자 하는 가정이 2만여 세대나 되어 지금 이삿짐 센터가 때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신정, 구정 연휴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설악산 등 휴양지로 가족들과 함께 떠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휴양지 콘도미니엄이나 호텔 등에서는 몇 십만원 짜리 제사상을 차려 놓고 합동으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귀신들이 제사상 받아 먹으려고 모두 휴양지로 떠났기 때문에 은혜받기에 얼마나 조용하고 좋습니까?

신구간에 되는 이 기간, 귀신들이 법정휴가를 받아 인사발령을 받기 위해 소환된 이 기간 동안 여러분들은 성령 충만을 위한 영적 집회를 갖게되니 이 얼마나 기회가 좋습니까?

1. 성경은 두 세계를 보여 줍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세계입니다. 이 두 세계는 동시에 같이 존재합니다. 소경의 눈에 빛나는 태양과 흰 구름이 안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 눈에 안보인다고 초자연적인 세계, 즉 영적 세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소경은 앞에 자기를 죽일 자가 서 있어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 소경인 인간은 현존하는 영의 세계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인간의 눈에는 영적인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만을 위해서 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부요하다 하여도 영적인 세상에서는 말할 수 없이 가난하고 병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세상 사람의 눈에는 의로운 한 젊은이의 죽음에 불과하나 그것은 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영의 세계에서는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계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해도 영적 세계는 실재하여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변화산에서 그리스도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만나는 장면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자연적인 세계와 초자연적인 세계, 육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장면이 사라졌다고 해서 영적인 세계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영의 세계는 여전히 존재 하고 있습니다.

"(마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마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마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마17: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마17: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마17: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창세기 32:1도 마찬가지의 예입니다.

"(창3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창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의 무리들과 함께 진행하는 하나님의 군대들을 말합니다. 열왕기하 6:16도 그렇습니다.

"(왕하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왕하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

적군에 둘러싸여 멸망이 임박한 것처럼 보였을 때 이스라엘인들은 절망했지만 엘리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기도해서 사람들이 함께 있는 초자연의 세계를 보게 했을 때 그들은 적군의 수 보다 더 많은 하늘의 군대의 위용을 보고 담대해졌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다고 해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바르게 살아간다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 볼 때는 역사에 기록된 유명한 왕이라 해도 성경에는 단 한 줄 "저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였더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흥하고 번영하고 부귀공명을 누렸다 해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저 악하기만 한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과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지식과 세상의 역사 외에는 제공되지 않으니 별 수 없으나 믿는 사람들에게는 본받을 만한 다른 역사와 삶의 방법이 성경을 통해서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의 삶이 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성공한 사람이었습니까? 저는 자신의 인간적인 자랑할 거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분토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자처하여 가난과 궁핍과 자지 못함과 억울함과 오해와 핍박과 위험 속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완전히 망한 대표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준으로 보면 이처럼 위대한 삶이 어디 더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 의해 생명을 얻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으며 그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훌륭하게 확장되어 나갔습니까? 이러한 삶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세상의 것들을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가 어디인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능력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지만 대체로 세상 사람들에게 바로 인식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는 기준이 있고 삶의 힘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위대한 삶 역시 세상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 무엇이든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다윗의 정치는 백성을 위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 가장 백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바로 이것이 다윗을 위대한 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많은 왕들은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산당을 그대로 두고 우상 섬기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 결과 국가도 망하고 자신도 망했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 그 원죄로 말미암아 육체적 방종이 빠지고 쾌락을 쫓는 육욕적인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으로써만 그 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세상 나라는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그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세상 좋은 것들은 고통을 겸해서 줍니다. 뿐만 아니라 소송과 전쟁과 다툼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로부터 얻어지는 승리는 짧은 것일 뿐 아니라 서로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죄인들이라고 해도 얼마나 세상의 평화를 추구하면서 세상의 덕을 사모하면서 싸웁니까? 세상의 기준으로도 극도로 악한 자들과 피나게 싸우면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2. 아담(사람이란 의미)은 양쪽 나라 모두의 조상이 되었고 다시 가인(소유란 의미)은 세상 나라, 그리고 죽은 아벨(슬픔의 의미)대신에 셋(부활이란 의미)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가인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만 장차 사라질 나라요 셋의 나라는 장차 올 영원한 나라였습니다. 영원한 의의 나라는 셋의 후손 아브라함,아브라함의 후손 다윗, 다윗의 계보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 이 두 나라는 두 종류의 사랑의 원리로 운영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서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구분되는 것입니다. 두 나라는 두 종류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자신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한마디로 전자는 자신의 영광을, 후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합니다. 한 쪽은 인간에서 영광을 찾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가장 큰 영광이 양심의 증인인 하나님 자신입니다.세상 나라가 교만에 의해서 이끌리어진다면 하나님 나라는 그 왕인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지극한 겸손으로 사는 곳입니다. 세상 나라 사람들은 육신을 위해 삽니다. 그들은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교만하게 되어 자신의 지혜를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는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현대에 사는 세상 나라 백성들 역시 하나님 대신에 썩어질 영광과 재물을 추구하는 점에서 같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여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경배합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기껏해야 도덕을 가장 훌륭한 덕으로 말합니다. 정의라든가 충성이라든가 우정 따위도 아름다운 도덕의 한 부분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덕이라든가 선에 대한 차원이 다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영원한 삶이요 제일 나쁜 것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앞의 것을 얻고 뒤의 것을 피하자면 옳바르게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우리의 선이 없기에 선을 행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서 선을 행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고통을 안겨주는 곳이며 어느 곳에도 평화가 없는 곳입니다. 이 세상 나라 사람들은 이생에서의 유익을 위한 평화를 추구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그러한 평화를 육체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영원한 평화를 얻는 데 사용합니다. 믿지 않는 세상 나라 사람들은 세상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모든 덕을 사용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유익들이 증진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들은 세상 나라의 질서와 안정에도 힘을 쓰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하늘의 평화를 향해 육신이 순례하기에 편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분명히 지적합니다.참된 종교가 없는 곳에는 참된 덕이 없다고 말입니다. 세상에는 참된 정의와 덕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과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복된 삶을 주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로 경배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배우는 것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교만과 무익한 덕만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최후의 심판까지 유지될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는 다시 오십니다. 모든 역사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무서운 눈에서 피할 자 없습니다. 그의 앞에서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무서운 날이 지금 당장이라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박해하고 핍박하기도 하나 교회는 세상의 역사를 사랑으로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결국은 종말이지만 교회의 결국은 구원과 생명입니다.

3-1. 어거스틴(Augustinus)은 그의 저서 <신의 도성>(De Civitate Dei)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두 도성을 보라,신의 도성과 악마의 도성....그들 중 하나는 세상에 복종하기를 원하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기를 원한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세계 역사는 신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인간은 어느 하나에 반드시 소속되는데 ---의 갈등 가운데 있습니다. 두 도성을 구분하는 기준 즉 소속원이 되는 선택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 차이입니다. 신의 도성이란 "하나님 사랑"(amor Dei)을 근거로 이룩된 사회이며 지상의 도성이란 "자기 사랑"(amor sui)를 근거로 이룩된 사회입니다. 전자를 사랑(caritas)으로, 후자를 탐욕(cupitas)으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탐욕(cupitas)이란 목적(frui)할 것을 수단(uti)으로 하고, 수단으로 할 것을 목적하는 '사랑의 왜곡'을 말합니다. 사랑을 목적으로 돈을 수단삼아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돈을 수단삼아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 돈을 목적으로 사랑하며, 돈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수단삼는 삶의 왜곡된 모습들이 이 시대의 모습들입니다.

"(딤후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러므로 "각 개인인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어떤 종류에 속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3-2. 루터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철저히 구분지었습니다(마22:21). 세속권력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와(롬13:1), 하나님 말씀에 복종해야 할 책임(행5:29)을 철저히 구분지었습니다. 정치와 종교,하나님 나라와 세상 왕국을 구분지었습니다. 교회는 사랑과 용서로 다스려져야 하고, 세속국가는 칼과 정의의 힘으로 다스려져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율법의 정의가 필요합니다(딤전1:9). 좋은 나무는 저절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마7:18). 따라서 기독교인은 두 왕국에 모두 속한 자입니다. 세속권세에도 복종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권세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까닭에 그리스도의 왕국의 시민으로써 산상수훈대로 살아야 하고, 세상왕국의 시민으로써 세속 법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질서를 파괴하고 무정부 상태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세속왕국도 사탄의 도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뜻을 실현하는 도구입니다(롬13:1-7). 곧, 악한 자를 칼과 정의로 다스려 창조 질서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왼손 왕국(left hand kingdom)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지는, 사랑의 뜻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오른손 왕국(right hand kingdom)입니다.

3-3. 칼빈은 아무리 세속왕국의 법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뜻과 법에 어긋날 때는 복종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계속 왕권을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뜻과 법에 거슬리는 통치자에게 복종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인은 고귀한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몸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니엘이 왕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끝까지 기도한 것처럼(단6:22), 여로보암왕이 황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을 때 선지자 호세아가 혹독하게 꾸짖었던 것처럼(호5:11), 예레미야와 사무엘이 각각 느브갓네살왕과 사울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선지자적 사명감으로 왕에게 항거하고 불의한 권세에 불복종해야 하는 사명을 교회는 지니고 있습니다.

4. 니므롯이 세운 도성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바벨이고, 다른 하나는 니느웨였습니다. 바벨탑은 홍수 심판을 막기 위한 인간들의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회개함으로 용서함 받기보다는, 반대로 성과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인간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저항의 동기에서 세워졌습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인간 최후의 방어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결을 선언한 인간의 항거였습니다. 하나님과 힘을 견주어 보려는 인간의 오만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역시 니므롯이 세웠다는 니느웨성은 이스라엘을 괴롭혀 온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니느웨는 침략과 피로 먹고 사는 세속도시였습니다. 왕이든 백성이든 하나님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니느웨성은 오랫동안 사회악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니느웨는 무력으로 지탱하는 피의 도성이었습니다. 이처럼 바벨과 니느웨는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히 세속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도성의 운명이 둘로 갈렸습니다. 세속도시였던 바벨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인간과 인간의 언어의 단절,즉 인간성의 철저한 파괴와 흩어짐의 비극적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바벨 못지않게 세속도시였던 니느웨는 갑자기 나타난 요나의 선포 "회개하라,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지리라."라는 경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칼로 요나 하나쯤 치고, 침묵할 수도 있었던 세속도시 니느웨는 오히려 백성과 왕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금식하며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온 도시가 회개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가 바뀌었습니다. 세속도시 니느웨가 구원받은 거룩한 도성으로 바뀌었습니다.

뉴욕의 어느 호텔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러나 구조 능력에 한계가 있어 투숙객을 전부 구조할 수가 없었습니다. 몇사람은 뛰어내려야만 했습니다. 호텔 지배인이 제일 먼저 미국 손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투표로 선정되었습니다."고. 그 말을 듣자 미국 손님은 두 말 없이 뛰어내렸습니다. 지배인은 그 다음 독일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두 번째가 되니까 규칙에 따라 뛰어내려야 한다."고. 세번째로 프랑스인에게는 "안됐지만 손님께서는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 뛰어내리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프랑스인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라고 외치며 창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자 아랍인이 "알라 신의 뜻을 따라"라며 뒤를 따랐습니다. 또 다른 손님에게 지배인은 "손님 모두가 뛰어 내렸으니까 손님께서도 뒤를 따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아, 그래요."라며 일본인 손님이 거침없이 뛰어내렸습니다. 일본인의 집단지향성(集團指向性)을 꼬집는 이 농담은 분명 일본이 만들어낸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 고베의 지진에서 일본인이 보여준 집단성과 질서의식은 세계의 감탄을 사고 있습니다.

일본이 고베 지진의 대참사를 당했으면서도 외국의 원조를 사양한 것은 경제대국으로 남을 도우면 도왔지 원조를 받지는 않는다는 일본의 자만심때문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피해국으로서 상대국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은 상식밖의 처사이기도 하며 개발도상국을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거만하기짝이 없는 오만 불손한 태도이기도 한 것입니다.언제부터 일본이 경제 대국이었습니까? 미국의 원조없이, 한국 동란의 반사이익(反射利益) 없이 그들이 2차대전의 폐허 속에서 스스로 일어났습니까? 그들의 첨단 과학이 스스로 얻어진 것들입니까? 모방의 천국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일본이 이미 선진국의 첨단 과학을 모방하는 데서 일구어진 것들입니다. 소비자 없이 생산자가 있을 수 없듯이 세계인 없이 오늘의 일본인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공동체 의식, 집단의식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인과 함께 하는 공동체의식,집단의식, 질서의식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경제 동물이라는 오명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2차대전과 같은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되지않은 그들의 집단의식은 얼마든지 앞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무기로 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질서의식은 이 세상에서 생존키 위한 삶의 수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궁극적인 생명의 길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믿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골든 글로브 상을 휩쓸었던 영화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는 미국의 현대사를 조명한 것입니다. 다른 영화들처럼 확실한 이념적, 도덕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어떤 강력한 이념 또는 도덕관,신념으로 무장한 투사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평균적인 지능지수도 갖고 있지 못한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남이 자기를 놀리고 핍박해도 그들이 왜 그러는지도 모를 뿐더러 '복수'를 하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합니다. 무슨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의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행동합니다. 이러한 그는 미식 축구의 영웅이 되고 탁구를 잘 쳐서 중국과의 핑퐁외교에 일조를 하고 흑인인권운동, 월남전, 정치인 암살, 위터게이트, 참전 상이군인들의 애환 등 미국 현대사의 가장 혼란하고 아픈 현장을 모두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또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삶을 통해 미국사회에 아동학대, 히피문화, 마약문제, 그리고 에이즈문제까지도 모두 겪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주위에서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들, 현장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관,이념도 없습니다. 그가 이 과정에서 받게 되는 수 많은 훈장, 상, 재산, 그리고 명망을 그 자신은 전혀 이해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에게 아무런 가치관도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이 무수한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인 문제들을 오직 한 여인에 대한 변하지 않는 사랑과 친구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헤쳐 나아갑니다. 즉 그는 아무리 '모자라는 사람'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랑과 신의로 모든 상황에 대처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영화가 그처럼 많은 관객을 감동시킨 이유는 결국 역사와 화해하는 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역사의 아픈 문제들을 가장 '현명'하게 헤쳐나온 사람이 바로 주인공과 같이 모자란다고 생각할 정도로 '단순'하고 '순진'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가장 현명하게 사는 방법, 가장 올바르게 사는 방법은 거창한 이념적, 도덕적 구호도 아니요,가치체계도 아닌 가장 평이한 것,남을 변치 않고 사랑하고 신의를 지켜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남는 것 역시 바로 이런 평범한 가치들이라는 것입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단순한 진리를 바탕으로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고 배반하는 여인을 끝까지 사랑하고 그가 상처 투성이로 돌아오면 언제나 받아줍니다. 그리고 그 여인과의 사랑의 결과로 탄생한 아들에게 역시 자기의 단순한 가치관을 전달해 줍니다. 물론 그 자식은 주인공처럼 바보스럽지는 않습니다. 그 고통의 과정이 보다 나은 미래를 낳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함께 걸어온 우리의 역사를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그 아픔까지 사랑'할 줄 아는 것이 곧 역사와의 화해일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남는 것,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가장 소박한 것들, 변하지 않는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과 신의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으며 그것이 곧 역사와의 화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계속되는 역사와의 화해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환란과 재난의 소용돌이치는 역사와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므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역사의 환란과 재난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회개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교회는 회개시켜 겸손하게 만들며 온유하게 변화시키는 곳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을 교만하게, 강팍하게 만드는 곳입니다. 물질로, 권력으로, 지식으로, 명예로 사람을 교만과 거만케 만드는 것이 세상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곳이지만 세상은 미움을 키워 분열과 증오, 전쟁과 파괴로 말미암아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곳입니다. 세상은 물질과 권력, 그리고 명예, 지식 등의 미끼로 인간의 가치를 추락시키며 결국에는 사망을 가져다 줍니다. 세상은 넓은 문, 넓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회개로, 사랑으로 인간의 가치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데까지 높이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합니다. 교회는 생명에 이르는 좁은 문,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말고 교회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므로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의 사명은 교회를 핍박하고 죽이려고하는 것이나 교회의 사명은 세상을 사랑으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낮은 산골에서 개척하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네살된 딸과 아직 돌도 안된 아들이 있었습니다.남편은 일주일 한 번씩 장을 보러 읍내에 가야 했는데 너무 멀다 보니 하룻밤을 묶고 돌와오곤 했습니다. 남편이 없는 동안에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꼬박 이틀을 지내야 했지만 별로 무서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을 보러 나가는 남편은 밀린 일거리가 많아서 이틀 정도 더 걸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을 보낸 아내는 장작을 마련하기 위하여 뒤뜰로 나갔습니다.그리고 장작더미를 향하여 손을 내미는 순간 그 속에 움추리고 있던 독사가 순식간에 그녀의 다리를 물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옆에 있는 도끼를 들어 독사를 내리 찍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몸에는 강한 독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돌아오려면 2,3일이나 있어야 했고, 주위에 가까운 이웃도 없었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죽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은 물론이지만 어린 자식들마저도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녀는 독이 더 퍼지기 전에 아이들을 위해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먹을 것을 준비해서 손닿는 곳에 놓고 아궁이에 장작을 모아놓고 어린 딸에게 불이 꺼지지 않게 계속 나무를 넣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는 "얘야, 이제 엄마는 곧 깊은 잠을 자게 된단다. 너는 동생을 잘 돌봐주어야 해. 우유도 먹여야 하고....엄마가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무서워하지마...동생을 잘 돌보고 있으면 곧 아빠가 오실거야"라고 딸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한 낮의 뜨거운 햇살과 아궁이의 불길,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녀를 위하여 애쓰는 그녀의 온 몸에서는 땀이 물 흐르듯 흘렀습니다. 그러나 줄줄이 흘러내린 땀이 그녀의 몸 속의 독을 제거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된 줄은 자신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계속 불을 지폈고 구수한 냄새와 함께 밥이 다 되었습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녀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비로소 깜짝 놀랐습니다. 뜨거운 사랑의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세상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사명이 있습니다.그러므로 교회는 영원합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더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3. 교회 태동(胎動)

"(행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행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행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1: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행1: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행1:17)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행1: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행1: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행1: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행1: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행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1:23)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행1: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행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행1: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교회, 즉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는 말씀이 성취되는 교회의 태동은 평범한 개인 집의 다락방에 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그 곳은 잘 알려지지않은 곳이었으며 120명이 머물기에는 아주 협소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주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였던 곳입니다. 교회 역사상 복음의 큰 운동들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모인 그 가운데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200년 전 이야기입니다. 영국에서 몹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플래처 크리스챤(Fletcher Christian)이라는 지도자를 단장으로 하여 바운티(Bounty)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남태평양 피트컨(Pitcairn)섬에 가서 상당한 수의 인디언들을 설득하여 작은 공동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9년 뒤 집단 사회는 실패하였습니다. 보통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 작은 사회에서도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열두 건의 살인, 폭력, 성도덕의 문란, 알콜중독자 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건의 자살 사건이 있었는데 그 장본인은 지도자인 플래쳐 크리스챤이었습니다. 바운티 집단 사회의 지도자 중의 하나인 존 아담스(John Adams)씨는 어느 날 창고를 정리하며 영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성경 한 권을 발견하였습니다. 9년 동안 아무도 읽지않은 책이었습니다. 아담스 씨는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두 달 동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구세주 예수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존 아담스는 배에 타지 않고 한 권의 성경을 들고 피트컨 섬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니콜슨이 쓴 존 아담스의 실화 전기(傳記) <피트컨 사람들>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피트컨 섬 사람들은 문명한 영국인들의 영향으로 불과 9년 사이에 술주정뱅이들이 되고, 폭행자와 성적인 문란자들이 되었었다. 그러나 존 아담스가 발견한 책 한 권은 아담스 자신뿐만 아니라 섬 전체가 소생하는 새 계기가 되었다."

구약 성경 느헤미야 8장을 보면, 학사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회복시키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하시여 재건해 가시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느8:1)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느8:2)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느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느8:4)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 그 우편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 좌편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느8:5)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느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말라 ......"

죠지 뮬러 목사는 영국에서 3천명 이상의 고아를 돌 본 사람으로 '사랑의 아버지'란 칭호를 받은 분입니다.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하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평생에 성서를 100회 통독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싫증이 난 일은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웠고 읽을 때마다 힘을 얻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54년 간의 경험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처음 3년 간 성경을 안 읽었습니다. 그 때 나는 신자로서의 기쁨도 사명도 느끼지 못한 죽은 크리스챤이었습니다. 나는 그 2-3년 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생활의 활력은 날마다 성경을 읽느냐 안 읽느냐 하는 문제와 정비례합니다. 성경읽기를 일과로 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은혜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는 여러분들에게 오순절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시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시19: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시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19:11)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최초의 교회 창립을 위한 멤버(회원수)는 120명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수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 강력한 영적 군사는 아니었습니다. 현재의 기독교인 수에 비하면 극히 보잘것 없는 소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이라는 위대한 위업을 수행해나가는데 있어 바로 이들을 사용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약점이 많은 무리들이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들을 사용하시고자 할 때는 그 약점은 얼마든지 보충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최초의 교회는 남녀로 구성되었습니다. 다시말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아무 차별이 없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구약의 교회에서는 남자와 여자간에 뚜렷한 구별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한 개인으로서는 위치를 얻지 못했고, 단지 그 여자가 속한 가정의 남자에 의해 교회에 속했으며 남자가 그 여자를 대표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자도 개인의 능력에 따라 지위를 차지하고 그의 남자 동료와 상응하는 권리와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남녀 누구나 하나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능력은 합심하는 곳에서 더욱 많아지는 법입니다.

최초의 교회 창립멤버는 유명한자들과 무명한 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기독교회는 결코 어느 한 계급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 지혜있는 자와 지혜없는 자, 귀족과 평민 등 모두가 공동의 신앙고백과 주님께 대한 공동의 예배와 공동의 봉사에서 함께 만나고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통일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구성원은 모두 한 마음을 이루었습니다. 거기에는 불화의 정신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통일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통일성을 몸(육신)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또한 위의 말씀을 보면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는 과정이 바로 성령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연합, 통일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합, 통일의 요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엡4:3)...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를 그 몸으로서 세례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내주하시므로 하나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실로 통일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위대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행위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고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되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랑으로 여길 만한 것도, 뽐낼 만한 것도, 또 어떤 사람을 지배할 만한 것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약교회에는 계급조직이 없습니다. 다양한 은사들과 다양한 직분이 있을 뿐이지 계급조직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상층계급이나 하층계급은 없습니다.

"(고전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 말씀은 분열을 멈추고 하나됨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 안에는 "한 새 사람, 새 몸, 새로운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지위에 구별이 없으며 민족성, 인종, 계급, 성(性)이라는 모든 장벽이 제거되고 "한 새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 모두가 하나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요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은 하나되는 방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뉴저지 주에 있는 드루대학(감리교계통대학)에 몹시 가난한 필리핀 학생 한 명이 유학해 왔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첫 주일날 아침 기숙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 밖에는 의젓한 중노인이 우산 두 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궂은 날이었습니다.

"학생, 나는 이 학교 교수 중의 한 사람이오. 이 마을에 아주 설교가 좋은 교회가 있는데 나와 함께 가보지 않겠소?"

하며 우산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이 교수의 권고 때문에 마지못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마침내 학부 4년 동안 계속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그는 사명감까지 생겼고 결국 같은 학교의 신학부까지 3년 더 다니고 졸업하게 되었으며 필리핀에 돌아가 목회를 하다가 감독에 피선되었습니다. 그는 감독 취임식에서 '두 개의 우산'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습니다.

크리스챤은 이 대학 교수처럼 두 개의 우산을 가져야 합니다. 한 개는 자기의 이름으로 쓰는 것이고, 다른 한 개는 예수의 이름으로 쓰는 우산입니다. 비오는 날에 한 교수가 우산을 들고 외국에서 온 초라한 학생의 기숙사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이름이 뒷받침하고 힘을 주지 않았으면 전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교수의 겸손과 사랑이 그 둘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했습니다. 그 교수의 겸손과 사랑이 가난한 필리핀 학생을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였습니다.

사랑과 겸손은 하나되게 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지하 묘지에서 만날 때 다음과 같은 예화를 즐겨 들었다고 합니다. 한 총각이 처녀를 미칠 듯이 사랑하였습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밤늦게 연인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처녀에게 날 좀 방안에 들여보내 달라고 청했습니다. 처녀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요"(It is I)

그러나 방 안에서 처녀가 대답하였습니다.

"이 방안은 너무 좁아요. 한 사람 밖에는 들어 올 수가 없답니다. 가세요!"

그는 슬픔을 잊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는 처녀가 왜 자기를 거절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처녀도 자기를 사랑하는 게 분명한데도. 몇 년을 떠돌아 다니다가 마침내 한가지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날 밤 늦게 그는 다시 처녀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요?"

하고 안에서 처녀가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입니다."(It is you)

그러자 문이 열리고 연인이 뛰쳐나와 그를 껴안았습니다.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천국은 이 우주에서 가장 좁은 곳입니다. 그 곳에는 다만 한 분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분과 하나가 된 사람들만이 그 곳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불사조와 거북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수(數)가 암살당했습니다."

사랑은 복수(複數)와 공존(共存)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영혼과 마음이 하나입니다. 솔로몬왕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6:8)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아6:9) 나의 비둘기,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나..."

그리스도의 마음, 즉 겸손과 사랑을 품어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이 충만하게 부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요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여러분이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바로 사랑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전도 방법은 커다란 부흥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놀라도록 많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합이 우리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된 교회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는 하나입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는 전도합니다. 하나된 교회는 전도합니다.

어떤 교인 하나가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는 전도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늘 별로 효과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로마서 5장 8절에서 크게 와 닿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후부터 이 교인은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이 전에는,

"저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사람이 지나가는군"

하고 생각했는데 그후에는,

"저기 하나님께서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사람이 지나가는군"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는 눈이 달라지자 전도도 잘 되었다고 합니다.

"(살전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최초의 교회창립 멤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남자 지도자로서 사도가 있었습니다. 첫째, 그 중에서도 뛰어난 세 명이 있었는데 베드로.요한.야고보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으로서 행동의 사도입니다(요 18:10). 요한은 주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의 사도입니다(요일 3:18, 4:7). 야고보는 요한의 형으로서 순교를 당했는데 아마도 용감하고 열정이 특출했던 것 같습니다(눅 9:54). 둘째 계층으로 5명의 사도가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맨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쫓았던 자 중의 하나이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입니다(요 1:40). 빌립은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만난 자로서(요 1:43) 영적 열망을 표시한 인물입니다(요 14:8). 도마는 디두모라고도 불리우며 의심과 의혹의 사람입니다(요 20:25). 또한 한 때는 우울증의 기미도 있었으나(요 11:16) 열정적인 헌신을 한 자였습니다(요 20:28). 또 바돌로매라고도 불리우는 나다나엘은 간사한 것이 없는 정직한 사람입니다(요 1:47). 마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리스도를 쫓았으며(마 9:9)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 부류로서 세 명의 사도가 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인데 가끔 작은 야고보라고 불리웠습니다(막 15:40). 비록 작은 야고보란 이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지만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열심당원이라 하는 시몬은 가나안인 시몬이라고도 불리우는데(마 10:4) 그는 열심으로 유명한 것 같습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다대오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아마 따뜻한 성품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는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상의 11사도 외에 우리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지도자로서의 위치와 평판을 얻었습니다(행 15:13, 갈 1:19). 여성지도자들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살로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수산나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최초의 교회가 태동하기 위해서 그들의 하는 일은 예수께서 약속한 것을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겔36: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겔36:38) 제사드릴 양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떼 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일지라도 그것이 이루어 지기를 구하여야(기도) 되는 것입니다.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기도가 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교회의 출발과 교회의 힘, 능력은 바로 기도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와 일은 병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 가운데 기도는 많이 열심히 하는데 봉사하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칫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영적 우월감에 빠지게 되어 교회의 조화를 파괴하고 교회의 연합을 깨트리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미신화(迷信化)를 초래하게 됩니다. 반면에 봉사는 열심히 하는데 기도를 등한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봉사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영적 힘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봉사의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게 됩니다. 봉사(일)의 신성화(神性化)를 막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마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즉 그들은 비어있는 사도의 자리를 채우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12라는 수는 예수께서 뽑으신 제자들의 수입니다. 교회를 출발함에 앞서 가롯 유다가 없어진 공석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12지파가 있었듯이 새 이스라엘인 교회에도 12사도로 출발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깔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기록자인 누가 자신이 그 12명의 중요성을 예수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눅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눅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눅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이 말씀은 새 이스라엘의 출발자인 열두 제자가 옛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교체는 베드로의 연설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자리에는 120명이 모였습니다. 예수가 활동할 때는 수 만명이 그 주변에 있었으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 제자가 되려는 자는 전부가 120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수는 창조적 소수로서 폭발력을 가진 복음의 씨였습니다.

베드로의 연설은 시편을 인용하여 메시아에 대한 배신자가 있을 것은 이미 예언되어 있었음을 증언한 것이었습니다. 시편 69편과 109편을 인용하였는데 이미 시편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베드로의 연설 의도가 잘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시편 69편과 109편은 모두가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두 편의 공통점은 고난받는 자와 그 배신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이 시편을 읽을 때 <고난받는 자>는 이스라엘이며 배신자는 여호와의 언약을 이탈하는 자로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난받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 곧 참 이스라엘로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가롯 유다는 단순히 개인적 배반이 아니라 참 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대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두 줄기를 대립시켜 말했습니다. 참 이스라엘과 박해자의 줄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이스라엘이었고 그의 선택과 훈련을 받은 12제자가 참 이스라엘의 계보를 이어받았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적그리스도 편에 옮겼습니다. 이것은 영구히 공석으로 둘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열둘, 곧 참 이스라엘의 참다운 12지파를 채워야 한다고 본 것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12사도의 뒤를 이어 그 10배가 되는 120명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제자화됩니다.

마가복음 3:14-15에는 예수께서 제자를 택하신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3:14)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3: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첫째로, 제자는 예수와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쉬울 때뿐이 아니라 고난받을 때에도 예수와 함께 하는 자입니다. 예수와 함께한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벧전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진정한 기독교인은 매일 매일 예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저 유명한 J.K.제롬이 한 늙은 구두 수선공이 지독히도 추운 겨울 날 자기 점포문을 열어놓은 것을 보고 올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왜 그러느냐고 묻자,

"혹시 주님이 지나가시게 되면 들어오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금 여기 계시다면 우리의 생활이 어떨까?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자기 딸과 한바탕 싸우고 나서 화해하고 난 후 그 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집에 늘 계셨으면 좋겠어."

참된 제자는 자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유다의 보충으로 두 명의 후보가 뽑혔는데(요셉과 맛디아) 이들은 모두 두 개의 조건에 맞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으로써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행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제자의 필수조건이 예수를 증거하는 전도에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제자의 내용은 귀신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을 하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 악령과 싸운다는 것은 에베소서 2:1-8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2:1)....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악령은 한 마디로 "불순종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순종하지 말라고 강하게 시험하고 유혹하는 세력입니다. 이것을 "(엡2:3)...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도록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이탈시키는 세력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악령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악령을 쫓아 해방시키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엡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우리를 죽음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은혜의 풍성함을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것이 바로 제자의 사명인 것입니다.

흔히 살아 있는 교회와 죽어가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힘을 합하여 이룩하는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개인의 목적을 교회를 통하여 채우고 만족하려 하면 그때부터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죽어가는 교회로 전락하게 됩니다.

30년을 목회하면서 신앙잡지 <Pulpit>까지 발행한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가 "살아있는 교회와 죽어가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 등 공간의 문제가 늘 있습니다. 죽어 가는 교회는 공간의 염려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합니다. 죽어 가는 교회는 늘 똑 같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소년 소녀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습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꾼이 부족합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씁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의 이름 알기가 어려워 애먹습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사업이 활발합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주는 자(giver)로 차 있고,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tipper)로 차 있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믿음 위에 운행되고,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 위에 운행됩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고, 죽어가는 교회는 쉬고 편안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활발히 전도하고, 죽어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가 석회화합니다."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로, 그리하여 살아 있는 교회로, 죽어 가는 이 세대를 구원할 수 있는 교회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4. 성령받은 교회의 모습

"(행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요즈음 교회 내에서 성령을 받았다는 분들로 인해 목회자들이 가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변해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여 목회자들을 우습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여러 모로 교회를 어지럽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은 교회 생활보다는 기도원을 즐겨 찾으면서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여 많은 성도들을 미혹케 합니다. 이러한 일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 경험이 있는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 성령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부작용이 두려워 성령운동 자체를 반대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곧 그 공동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생물에게는 먹고 먹히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생물의 세계에서 생존 투쟁이 벌어집니다. 그토록 뜨거웠던 초대 교회도 모든 것이 원만했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에도 항상 문제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받은 초대 교회의 모습, 즉 성령 받은 제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초대 교회의 첫번째 모습은 열심히 배우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행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사도들을 통한 설교와 성경강해 등 예수께 대하여, 그리고 구약과 그리스도와의 연결에 대하여 그들은 열심히 배웠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열심히 성경공부하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의 선교중에 가르침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초대 교회에서는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모여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오늘날 교회 교육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쉐마"(신명기 6:4-9)를 보면 우리의 교회 교육이 쉬지 않고 끊이지 말아야 하는 것임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신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地上) 사역(使役)은 가르침과 복음전파와 병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르치는 일은 예수님의 생애에 가장 강조된 사역이었습니다. 교육은 예수님의 최대의 사업이며 최대의 관심사였기에 먼저 제자들을 선택하셨고 계속 주위에 몰려 온 군중에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예수님을 랍비, 즉 선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막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요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님 자신도 그 표현이 옳다고 하셨고 자신의 메시야적 사명을 성취하시려 할 때 가르치는 교육적인 기능을 통해 수행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요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예수님의 최후적인 분부를 할 때에도,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 하심으로 오늘날 교회의 교육적 사명을 밝히셨습니다. 때문에 성령받은 초대 교회에서도 가르치는 일을 교회의 중심사건으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교육의 주체는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과 함께 하는 교육일때에만 신앙을 바르게 교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많이 읽고 가르쳐도 생활을 향상시키거나 성화(聖化)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계시되고 받아들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육의 내용이 되는 성경과 성령의 관계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히 4:12, 벧전 1:23).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생명을 낳지는 않습니다. 말씀은 성령의 역사적(役事的) 능력이 수반될 때만 효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이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서 말씀과 동시에 역사해서 신앙을 창조해 내고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도록 하지 않는 한 효력을 발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성경이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지만" (히 4:12) 성령의 사역이 없으면 그것은 효력 있게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말씀을 적용하는 한도 내에서 성경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말씀의 내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마음과 머리에 성령께서 말씀을 적용하시는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명칭이 52가지가 있는데 이 중에 성령의 교육 사역에 관한 것이 적어도 7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의 영",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과 여호와 경외의 신", "진리의 영", "보혜사", "지혜와 계시의 영" 등입니다.

"(출28:3)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 내게 제사장직분을 행하게 하라."

성령은 제사장의 옷을 짓는 제단사들에게 신령한 지혜의 근원이 되셔서 그들로 하여금 맡은 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사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위대한 지상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지혜와 총명의 신"이신 하나님의 영(성령)을 덧입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모략이란 좋은 충고를 줄 수 있는 능력을 암시하고, 재능이란 그 모략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암시합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에게 "모략과 재능의 신"을 역사하시므로 그로 하여금 지상에서의 교육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성령의 여러 명칭중 맨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최종적인 결과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결실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요한 복음에서만 세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의 영"이란 진리의 근원으로서의 성령을 말하며, 진리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믿는 자들의 생활에 진리를 적용시키실 수 있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보여 주고, 장차 다가올 일들을 가르쳐주며, 모든 것을 가르치며, 과거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신자들 속에 내주하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선고하며, 그리스도 부재시에 제자들을 위로하여 그리스도의 역사를 계속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 보내실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지혜와 계시의 영"은 신자들이 성령을 통해서 영적인 일들을 이해하며 하나님에 관한 "충만한 지식"을 얻도록 역사(役事)하는 것입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고전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슥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인간들은 무엇이나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이끌려 갑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새로운 소명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은 마음을 접촉하시면서 동시에 그 마음을 가르치십니다. 인간의 마음은 성령의 조명하에 들어가는 즉시 변화됩니다.

미국의 베이비 부머들(Baby boomer, 1950년대에 아기를 많이 낳았는데 그 때 태어난 사람들, 현재 30대)이 교회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썰물처럼 교회에서 빠져 나갔던 사람들이 어째서 밀물처럼 다시 교회로 모여들고 있을까? 여러 가지 연구가 있지만 캘리포니아대학 종교학 교수 루프(Wade Roof) 박사는 특히 "베이비 부머와 종교"에 관한 연구를 하였기 때문에 참고할 만합니다. 루프 교수는 종교로 돌아온 1천 8백만 베이비 부머들의 3분의 2가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라고 지적합니다. 단적으로 아이들에게 종교 교육이 절실히 필요해졌기 때문에 그 부모들도 아이들을 따라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루프 교수의 발표는 최근 뉴저지의 일간신문<레코드, Records>지의 조사에 의해 더 확실한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레코드, Records>지는 북부 뉴저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미국인의 종교 실태"를 조사하였는데 많은 아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갑자기 주일 학교 프로그램이 재미있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젊은 부모들이 극성스럽게 아이들을 교회에 나가도록 장려하고 데리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통계로 나온 숫자는 놀랄만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가는 부모가 48%, 한 달에 한 두번이 20%, 전혀 데리고 가지 않는 부모는 16%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응답이 54%, 약간 중요하다는 응답이 33%, 중요성이 없다는 응답은 겨우 3%뿐이었습니다.

그럼 왜 이토록 미국의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종교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시카고대학의 종교 심리학 교수 브라우닝(Donald Browning) 박사의 조사 발표가 적절한 대답입니다.

"지금 미국의 가정들은 적대시할 만큼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의 위협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파도처럼 덮치는 이 악한 문화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이 부모들의 현실입니다. 부모들은 이 악한 문화와 대항해서 함께 싸울 동지를 찾고 있습니다. 마약과 자유 분방한 섹스와 폭력 등 이 거대한 악에서 학교가 아이들을 보호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부모들이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된 곳이 교회입니다."

<레코드, Records>지가 발견한 것은 부모들의 기대는 교리를 배우게 하는데 있지 않고 도덕과 가치관을 배우게 하려는 데 교회를 찾는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황금률(Golden Rule), 즉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의 교훈 한 마디라도 배우게 해야겠다고 부모들이 주장하는 것은 학교에서는 이미 그런 교육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1780년 7월 영국에 신앙이 독실한 한 평신도 레이크스(Robert Raikes) 씨는 수심에 찬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을의 장래와 영국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범죄가 늘어가고 불결한 거리와 주택에서는 무서운 질병이 끊일 새 없어, 해마다 수백 명의 어린이들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도소 개혁 운동에 나서기도 하였으나, 출소자들이 대부분 한 달도 못 되어 다시 붙잡혀 오는 것을 보고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어린아이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교육받지 않으면 소망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어린아이들은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아이들도 주간에는 노동에 시달렸으며, 주일이 되면 싸우고 방황하며 도박 구경을 다녔습니다. 그 몸과 옷 차림새는 너무 지저분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부모들도 그들은 잘 돌보지 않았고 사회에서도 방치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한 번은 거리에서 이런 사회에 대한 걱정을, 열을 올려 가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불쑥 야유삼아 뇌까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신이 해보구려!(You can try!)"

그 순간 레이크스의 머릿 속에 빛이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 말이 우연한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레이크스는 자기 집을 개방하여 주일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네 명의 교사를 구하여 주머니돈을 털어 교통비를 지출했습니다. 가르치는 내용은 읽기와 쓰기, 산수와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세수하고 오는 아이만 들어오게 했고, 돈이 없어 누더기 셔츠를 입을 수밖에 없는 아이에게는 새 셔츠를 사주었습니다. 매주일 아침 8시부터 저녁 예배 시간까지 점심 시간을 빼놓고는 종일 가르쳤습니다.

레이크스의 별명은 "야생 거위(wild goose)"였습니다. 야생 거위처럼 더럽고 마구 날뛰는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크스의 주일학교 운동은 선풍적인 호응을 받아 30년 뒤에는 3천 주일 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주일 학교 운동은 그 후 5년이 지나자 미국 전역에서도 맹렬하게 전개 되었습니다. 실상 미국 학교 교육 제도의 전신(前身)은 주일 학교입니다. 2백년이 지난 오늘 미국만 해도 주일 학교의 수는 168,925학교이고, 등록된 학생수는 3천 4백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레이크스가 사망한 후 그의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적은 돈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마을의 모든 아이들에게 1실링씩과 케이크 한 개씩 사주십시오."

레이크스가 평생의 목표로 삼은 성경 말씀은 디모데전서 4:6이었습니다.

"(딤전4: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정신을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가르치는 일이라고 확신했으며, 동시에 그것이 마을과 국가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믿고 자기의 평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나라 민족을 바로 세우는 길은 성령받은 교회가 교육의 사명을 바로 감당할 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받은 교회의 모습은 무엇보다 교육의 주체가 되시는 성령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인 것입니다. 교육의 달을 맞아 교회의 참 모습을 성령을 통해 발견하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가는 교회가 되어질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5. 사랑의 공동체

"(행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행5: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행5: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행5: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행5: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행5: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곁에 장사하니 (행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초대교회는 탄생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서 순전하고 참된 사랑의 공동체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랑은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기꺼이 함께 나눌 정도였습니다.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위의 성구들을 통해 보면 유무상통하는 일과 물욕이 없어지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소유를 내놓고 이기심과 소유욕에서 벗어난 성도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사람으로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이 사람은 상당히 부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헌금하므로 초대교회에서 아주 긴요하게 쓰임받았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요셉의 별명이 바나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권위자"(勸尉者)란 뜻입니다. 다시말해 요셉은 초대교회에서 상당한 칭송과 영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자극하여 자신들도 돈을 갖다 내는 방법으로 영광과 칭송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 팔아 일부만을 내놓은 채 전체를 내놓은 양 교회를 속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순수한 교회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나눔의 공동체)에 먹칠을 한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초대교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탄생과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성령을 훼방한 죄로, 또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만홀(漫忽)이 여긴 죄로 회개의 은총도 받지 못한 채 중징계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행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아나니와 삽비라는 하나님 앞에서의 칭찬이 아니고 사람 앞에서의 칭찬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을 쏟아냈고 진심을 쏟아냈더라면 이렇게 속일 수 없습니다.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속이고 사람 앞에 받는 박수를 얻어내기 위하여 돈을 동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은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돈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 헌금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눅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18: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기도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응답되지 못하였고,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한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눅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엡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엡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엡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탐심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다시말해 자신의 욕심,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일 많이 등장하는 우상이 바알 신입니다. 바알, 아세라, 몰록, 밀곰 등 여러 우상 중에 바알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바알이 생산의 신, 풍요의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들의 방법으로 요구하는 대상이 우상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권세, 명예 등 입신양명과 세상에서의 쾌락 등 등 전부를 돈으로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물질만능인 것입니다. 돈으로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매수되지 않고 구원을 얻는 방법을 돈의 액수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넘어가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헌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엄청난 저주를 받아 즉사했던 것은 바로 우상숭배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민11: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민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민11: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탐욕을 품게 되므로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생기다 보니 자연히 우상 숭배의 애굽이 생각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탐심은 영원한 축복의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하고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하여 우상숭배로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것은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의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 아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친 물건 중에서 은과 외투와 금을 얼마간 취했습니다. 아간의 이 행위는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온 가족이 모두 멸절되는 심판을 자초했습니다.(수7:1-26)

"(왕하5: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 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 (왕하5:21) 나아만의 뒤를 쫓아 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왕하5:22)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왕하5:23)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왕하5:24) 언덕에 이르러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저희를 보내어 가게 한 후 (왕하5:25)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왕하5:26)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왕하5: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탐심에 눈이 어두워 그의 스승 엘리사를 속이고 거짓말을 했던 게하시가 결국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죽임을 당한 이유를 알아보면 참으로 치사하고 더러운 내막이 있습니다. 죤 부스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형과의 많은 컴플렉스를 느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형은 아주 똑똑했고 나중에 그는 아주 훌륭한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부모한테 야단만 맞으며 "나같이 못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의 마음 깊은 속에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몰두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유명하게 되기 위해서는 유명한 사람을 죽이면 나도 유명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링컨을 향해 총을 당긴 것이었습니다. 한 시대가 낳은 위인을 죽였던 죄가 바로 탐심의 범죄였던 것입니다.

풍요로운 물질과 안락한 생활을 누릴수록 참과 거짓에 대한 구별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치관이 전도(顚倒)되기 때문이며, 인간의 죄가 더욱 더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지 중에 거짓을 말하게 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출세와 성공과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하나의 수단으로서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것은 너무도 일상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 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거짓은 인간의 온갖 범죄에 작용하며 거기에 사단의 세력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거짓을 행하는 자마다 또한 거짓의 악습에 빠질 위험이 다분한 것입니다. 거짓은 인간의 품성을 해치는 도덕적 해악 요소일 뿐만 아니라 인간 전체를 파멸시킬 수 있는 영적 악의 세력이 속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을 행하며 악한 행동을 일삼는 자들에게 성경은 결정적이고 단호한 종말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에 속한 자들은 모두 불못에 던지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5:6)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잠19:5)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

거짓은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의도에서 한 말뿐만 아니라 가식과 위선에 찬 행동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우상숭배와 그릇된 가르침도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사59: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롬3: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더 나아가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잘못 하는 것도 역시 거짓이라고 합니다.

"(요일2: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성경이 이처럼 거짓에 대해 정의(定意)를 내리는 것은 그 모든 거짓된 언행들이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모든 인간은 죄의 세력 아래 있으며 거짓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께 범죄하였으나 자신들의 지은 죄를 은폐하려고 동산 나무에 숨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죄과를 변명하였거니와 이들의 행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거짓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실로 인간의 모든 범죄 행동 구석구석에는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고 있으며 이런 행동은 인간을 극심한 파멸의 구렁으로 몰아감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은 또한 간교합니다. 거짓은 겉으로 듣거나 보기엔 거의 진실인 것 같습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나(창 3:1-6) 가인이 아우 아벨을 살해하고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하나님께 거짓말하였을 때나 요셉을 구덩이에 가두어 놓은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안부를 묻는 야곱에게 요셉의 채색 옷을 보이며 대답한 거짓말은 한결같이 거짓을 행하는 자들의 간교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창37: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창37:32) 그 채색 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은 이처럼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참된 교회를 해치며 하나님과의 관계성까지 파괴하는 해악한 것임을 볼 때 성도는 마땅히 거짓된 행위를 경계하며 자신이 거짓으로부터 구함받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탐심과 거짓은 초대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어느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하루에 3만 마디의 말을 하면서 산다."고 했습니다. 그 3만 마디 중에서 우리가 진실이 담긴 말을 하는 것은 얼마나 되며, 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요?

사랑의 공동체에는 탐심과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옛날 어느 형제가 아주 우애깊게 살았습니다. 하루는 그들이 함께 길을 걷다가 동생이 우연히 금덩이 두개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우선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지만 막상 형에게 한 덩이를 주고난 아우의 마음은 편치않았습니다.

"이 길을 나 혼자 갔더라면 내가 둘 다 가질 수 있었는데, 내가 주웠으니까 형님에게는 안 주어도 되는건데"

형제는 저마다 딴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길을 가면서도 마음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저 녀석이 필경 자기는 큰 것을 갖고 내개는 작은 것을 주었으렸다. 내 눈에 먼저 띄지 않고 하필 녀석이 주울게 뭐람. 내가 먼저 봤더라면 둘 다 내 것인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이나 동생 모두가

"내가 왜 이런 마음을 먹지. 이러다간 천벌을 받지."

하면서 뒤숭숭해지는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침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이때 동생이 갑자기 강물을 향해 금덩이를 힘껏 던져버렸습니다. 형이 깜짝 놀라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형님을 우애하고 존경했는데 저 금덩이를 나눠 가진 순간부터 별 불경스런 생각이 다 떠오르니 필경 저 물건이 상서롭지 못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까 마음이 심란하던 형도

"그래, 네 말이 맞다."

하면서 자기 손에 들었던 금덩이도 함께 물 속에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탐욕과 거짓 대신에 사랑과 진실함으로 충만하여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가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세상에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6. 최초의 이방 교회

"(행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행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행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행11: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11: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행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행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행11: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은 부유하고 웅장한 도시였습니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 가는 세계에서 세 번째가는 큰 도시로서 아시아의 심장부로 일컬어졌습니다. 로마의 총독과 공관이 있었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안디옥은 헬라 문명화된 도시였으며, 지중해에서 24km 떨어진 오론헤스강 하구 근처에 있었고, 아름다운 국제도시였으나 호화로운 생활과 부도덕의 대명사이기도 했습니다. 안디옥은 마차경기로 유명했고 문자 그대로 밤낮 계속되는 향락 추구자로 생각되는 사람들로 유명했습니다. 안디옥은 미친 듯이 뛰는 스포츠와 사형, 도박, 나이트클럽 등으로 가득찬 도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유혹적이고 저속한 이방 종교가 성행하기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도시에는 대프니이(Daphne)신 숭배로 유명한데 그 신전은 8km밖 월계수 숲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대프니이는 아폴로 신이 사랑하게 된 처녀였습니다. 아폴로는 그녀를 쫓아다녔지만 대프니이는 꼬임에 빠지지 않으려고 월계수로 변해버렸습니다. 대프니이 사원의 여승들은 종교적 창녀였으며 밤이면 이 월계수 숲 속에서 여승과 예배자들 간에 사랑의 행각이 다시 재연됩니다. "대프니이 윤리"란 단어는 해이하고 음탕한 생활을 뜻하는 말로 다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믿어지기 어렵지만 세계의 종교가 되려는 위대한 첫 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이런 도시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대도시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안디옥은 오히려 로마나 알렉산드리아보다도 로마 세계의 중심지로서 훨씬 더 긴요한 곳이었으며, 율법적인 히브리 사상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도시로서 복음 전파를 위한 전략적인 요충지로 가장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회피했을 뿐만 아니라 죄악시했을 정도였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난 사건을 두고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이 비난한 사실입니다.

"(행11: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행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행11:3)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사상으로부터 보다 더 자유로운 헬라파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방 선교의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복음의 세계화는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로 시작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반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 세계와 이방 세계의 가교를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받아들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고넬료였습니다. 교회가 고넬료를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극적이었지만 이방인들을 받아들인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의 세계화를 이룩하는 세 번째 단계는 이 안디옥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유대인들에게도 반 유대인에게도 가지 않았고, 또는 기독교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이방인들의 접근을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의식적으로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의 초청을 기다린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최초로 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적지않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이방 교회 안디옥 교회가 설립되었고 이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사명이 주어진 바울의 선교진출의 근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은 수세기를 지내 오면서 변화를 겪고, 도시는 타락 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 새 운동이 일어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헬라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안디옥은 장차 이웃 지역과 나아가서는 전세계를 향한 선교의 전초 기지로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집단적으로 복음을 영접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교회로서는 미증유(未曾有)의 대사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을 통해서 이방인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유대인의 우선적인 구원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즉 이방인의 구원은 모든 유대인의 구원이 완결된 후에 발생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디옥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확인할 필요를 느꼈고, 이 임무를 위해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파송한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율법으로 하나님을 삼고 율법의 규례로 얽매인 엄격하고 마음이 좁은 사람을 보낼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들은 당시 교회에서 가장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 바나바를 보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미 모든 사람이 바울을 의심하였을 때 그의 곁에 서서 그의 보증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행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바나바는 가난한 형제들에게 그의 아낌없는 마음을 보여 그의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입증했습니다.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오늘 본문에서 바나바는 사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성경의 묘사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하나님의 바나바에 대한 칭찬은 <재능있는 바나바>나 <천재 바나바>가 아니고 "착한 사람 바나바"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을 착하다고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롬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3: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롬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3: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착한 사람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인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건 사람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이처럼 착한 사람의 두 번째 표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나바는 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청지기 같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순절 직후에 교회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로 넘쳤습니다. 아무도 바나바에게 강요하지 않았건만 그는 조용히 자기 땅을 팔아서 그 모든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쓰도록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착한 사람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나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셨음을 알고 있었으며, 가치있는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또한 바나바는 친구같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웠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뒤에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만나려고 애를 썼지만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하며 피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교회의 큰 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바울을 변호하면서 바울이 참으로 회심했다는 사실과 신자들이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여야 함을 교회에 잘 설명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나바의 착함과 헌신적인 삶 때문에 수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행해지고 있는 전도와 이방인, 헬라파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함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행11: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그러나 누군가가 이 일에 책임질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 일에 적임자는 두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유대적 전통에서 자라난 유대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이방인들을 동등한 입장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안디옥을 기독교의 중심지로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용기가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그 위에 교회에 대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격을 막아낼만큼 능변가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적임자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9년간 바울의 소식을 전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아는 소식은 그가 가이사랴를 통해 다소로 도피한 것입니다.

"(행9: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의심없이 바울은 9년이란 세월을 자기 고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가 맡아야 할 사명, 즉 이방인에 복음 전도의 사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바울을 최초의 이방인 교회 책임자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바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바울과 협동으로 목회한 결과 안디옥 교회는 영적, 물적 큰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비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행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는 안디옥 사람들이 교회를 더 이상 유대주의의 한 종파와 일부로 인식하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로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나 '성도들'이라고 불렀고, 유대인들은 주로 '나사렛 이단', '도를 좇는 자' 등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는 안디옥의 기독교 신자들에게서 유래되었으며, 이것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열심히 그리스도를 사랑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얻게 된 별명,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전 세계가 알게 될 이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살아 계신 분으로 말미암아 멸시될 이름을 모든 사람이 놀랄 용기와 사랑의 이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선지자 아가보가 큰 기근을 예언했을 때,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이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곧 사도들의 지시를 좇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 마음에 있는 새 생명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유대의 형제들을 사랑으로 돌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구제 사역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보내기 위해 자신들을 가르쳤던 두 선생님들에게 그 임무를 위탁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점을 계시하는 멋지고 은혜로운 행위입니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언에 복종하여 앞으로 있을 큰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당할 유대의 형제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교회의 일치를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교회의 한 부분이 고통을 당하는데 다른 한편이 가만히 있다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안디옥 교회의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들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성 크리스토퍼라는 성자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오펠로는 시리아에 사는 힘센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세계에서 제일 강한 사람의 신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리아 왕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왕은 노래 가사 가운데 악마라는 말이 나오자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궁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 악마를 찾아가서 그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나쁜 짓을 하며 금은보화를 훔쳤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악마와 함께 교회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악마가 교회 지붕의 십자가를 보고 몹시 무서워하며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닌가! 악마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십자가는 자기가 제일 무서워하는 예수의 상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펠로는 악마로부터 빠져나와 예수의 부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오펠로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나룻터의 사공이 되어 예수를 기다렸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직 예수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사흘 동안 장대같은 소낙비가 퍼부어 홍수가 졌습니다. 오펠로는 물이 불어서 나룻배를 띄우기가 위험해지자 일단 휴업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오펠로가 머무는 거처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습니다. 한 소년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위독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당장 나루를 건너가야 한다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펠로는 소년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강을 건너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물결이 너무 거세기 때문에 배로는 어려워 소년을 업고 강을 건너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소년은 더욱 무거워만 갔습니다.

그래서 오펠로는

"너는 무엇을 먹고 자랐기에 이렇게 무겁냐?"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 때 그의 등뒤에서는 어른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만나려고 하던 예수다."

이 전설이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권력(왕)의 신하나 재물(악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바른 주인인 예수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섬긴다고하는 것은 곧 한 이름없는 아이를 위해 위험을 무릎쓰는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여 유대의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낸 것 또한 주님을 섬기는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죄악이 가득한 곳에서도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진주가 진흙 속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하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죄악된 세상에서 그 진가(眞價)를 더욱 발휘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죄 많은 곳 은혜가 더욱 넘치는 교회, 형제 사랑으로 뜨거운 교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말씀이 충만한 생명수 넘치는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안디옥 교회처럼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前哨基地)가 되는 우리 평강 교회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7. 교회의 힘

"(행12: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행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행12: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행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행12: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애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행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행12: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 대 (행12: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행12: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행12: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줄 알겠노라하여 (행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행12: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행12:14)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밖에 섰더라 하니 (행12: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행12: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행12: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행12:18)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행12: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행12: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행12: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행12: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행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행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행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이 장은 야고보는 죽고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헤롯은 승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헤롯은 죽고 베드로는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승리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처럼 절대적인 인간의 계획들을 뒤엎으시고 그 대신에 그 분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킵니다. 폭군들은 잠시 교회를 억압하고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면서 자랑하고 뽐내도록 허용될 수는 있지만, 그들은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에 가서 그들의 제국은 무너지고 그들의 교만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과 지옥의 권세라 해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잡으려고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이 온다는 것을 알고 요새로 들어갔다가 전열을 정비한 다음에 그들과 맞서 싸우려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이미 르바임 골짜기에 도착하여 그곳을 장악하고 그곳을 약탈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나가서 불레셋 사람들과 싸울까요? 주께서 저들은 내 손에 넘겨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좋다, 나가서 싸우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겠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에 다윗은 나가서 그들과 싸워 그들을 격퇴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쳐서 흩어버리듯이 내 앞에서 대적을 쳐서 흩어버리셨다!"

그리고 그곳을 바알브라심 즉 "돌파하시는 주"라고 불렀습니다.

"(삼하5:17)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해처로 나가니라 (삼하5:18) 블레셋 사람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삼하5:19)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삼하5:20)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

오늘 본문은 교회의 확장과 복음 전파에 대한 헤롯의 박해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철통같은 감옥에 갇혔으나 교회가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므로 주의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로 세상 권력을 "돌파하는" 교회의 힘과 복음의 능력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예수님이 탄생하였을 때 동방 박사들의 말을 듣고 나서 어린 아이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잔인한 왕의 손자입니다. 그 할아버지는 결혼을 10번이나 할 만큼 음란하고 악한 왕이었는데, 그의 아들들인 빌립, 안디바, 아겔로 등의 왕들도 모두 악한 통치자들이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그의 어머니가 저 위대한 마카비 가문 후예인 미리암네였습니다. 그는 갈릴리와 유대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조심스럽게 율법과 모든 유대 율례를 지킴으로써 부지런히 유대 사람들의 좋은 기풍을 기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통 유대주의자들 간에 더욱 더 큰 인기를 얻기 위해서 그는 기독교회와 그 지도자들에게 모종의 조치를 하기로 결심한 것이 확실합니다. 헤롯 아그립바가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이유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기쁘게 해주어서 그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대중 인기를 얻으려는 헤롯의 이런 음모에 희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였으며 예수님께서 특별히 가까이 하셨던 세 사람, 곧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의 투옥도 동일한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체포 자체도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그의 의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야고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즐거워하며 헤롯 왕을 칭송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들한테서 더 큰 인기를 얻고자 베드로를 야고보처럼 죽이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베드로가 교회의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며 베드로의 죽음은 모든 유대인들을 대단히 기쁘게 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이처럼 세상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죄와 타협하며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는 일이 흔한 것입니다.

보통은 죄수가 한 명의 군인에게 쇠사슬로 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간주되지만, 특별한 예방책으로서 베드로에게는 양옆에 군인들이 있고 그의 두 손목은 모두 수갑에 채워졌으며, 한편 감옥 바깥에는 다른 두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구조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철통같은 경호를 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야고보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베드로는 공포에 떨기는커녕 전혀 불안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 반대로 금새 잠이 들었습니다. 후에 바울은 빌립보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행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크리소스톰은 이를 다음과 같이 주석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찬송가를 부르며, 한편 여기에서 베드로가 잠이 든 것은 아름다운 장면이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기도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쉬지않고 기도했습니다. 그야말로 교회가 위기를 만났을 때 그들은 철야기도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여전히 우리의 책임이며 우리의 힘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가운데에서도 어떠한 연합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지모(智謀)나 기술이나 재치가 아니라 기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자주 전쟁을 할 때의 일입니다. 한 번은 시리아 왕이 부하들과 의논하여 진 칠 곳을 미리 정해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사가 미리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시리아 군이 진 칠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계획은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도 이러한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에 몹시 당황한 시리아 왕은 지휘관들을 불러모으고 "반역자가 누구냐?" 라며 노발대발하였습니다. 그 때 지휘관 하나가 "왕이시여, 우리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는데 그는 왕이 침실에서 은밀하게 말하는 것까지 모두 이스라엘 왕에게 일러 바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엘리사가 있는 도단에 말과 전차와 많은 병력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밤에 도착하여 그 성을 포위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엘리사의 사환이 일찍 일어나 나가 보니 많은 시리아 군인들이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사환은 엘리사에게 달려가 "아 아 주인님, 이제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라고 외쳤습니다.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와 함께한 군대가 그들의 군대보다 더 많다." 라고 하고서 "여호와여, 이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에 사환이 보니 불말과 불수레가 온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시리아 군이 공격해오자 엘리사는 "여호와여, 저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그들에게 "너희가 길을 잘못 들었다. 내가 너희를 안내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 데려가 주겠다" 라고 하며 그들을 사마리아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자 엘리사는 "여호와여, 이 사람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시리아 군을 보고 엘리사에게 "내가 이들을 죽일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엘리사는 "그건 안됩니다. 칼과 활로 생포한 전쟁 포로도 아닌데 어떻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음식을 주어 먹고 마시게 한 다음 돌려 보내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왕이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그들은 실컷 먹고 마신 후에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로 얼마 동안 시리아 군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않았습니다(왕하 6:8-23)

"(롬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12:21)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이 세상의 도전에 대한 교회의 대응방법인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을지라도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사랑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책임입니다.

오직 기도하는 교회만이 이러한 세력에 맞설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간절히 그리고 약간은 의심하면서 기도했지만 그들의 간절하고 계속적인 기도의 힘은 헤롯보다 강했고 지옥보다고 강했습니다.

그 결과 주의 천사가 감옥에 들어와 베드로 옆에 섰습니다. 감옥은 광채가 조요했지만 베드로는 계속 잠을 잤습니다. 베드로를 깨우려고 천사가 그의 옆구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빨리 일어나라" 고 말하자 쇠사슬이 베드로의 손에서 벗어졌습니다. "옷을 입고, 신을 신고, 그리고 겉옷을 입고 나를 따라오라"는 천사의 말대로 따라가다가 이것이 환상인가 했는데 첫째 둘째 파수를 지나 육중한 철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 육중한 철문이 오토매틱으로(자동으로, 저절로, <헬> automatos, Automatic) 열렸습니다. 천사와 베드로가 그 <자동문>을 나오자 천사는 사라지고 베드로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어 교인들이 기도하던 집으로 갔습니다. 베드로가 문을 두드리자 어린 하녀 로데가 베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너무 기뻐서 문여는 것을 잊어버리고 안으로 급히 들어가 소리쳤습니다. "베드로님이 문밖에 계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네가 미쳤구나!"(마이네, maine) 라고 하나 하녀는 참말이라고 하자 천사라고 우기며 하녀를 따라 문으로 갔습니다. 베드로가 그곳에서 계속 문을 두드리자 그들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랐습니다.

놀란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헤롯은 속이 뒤집히고 화가 나서 간수들을 사형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헤롯은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기를 위해서 자기 영혼을 팔아 먹은 자였습니다. 큰 명절 기간 중에 그는 가이사랴에 있었습니다. 그의 보좌는 백성들 위에 높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는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은으로 만든 옷을 입고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연설을 하자 백성들은 외치기를 "이것은 신(하나님)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고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자기의 것으로)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인 척하면서.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고통으로 몸을 구부렸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5일 동안 극심한 통증으로 고통을 겪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벌레가 먹어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야고보 사도를 죽였고, 베드로를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고, 까닭없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고, 죄없는 병사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하나님께서 보낸 벌레들이 헤롯 왕의 뱃속으로 들어가 그를 죽도록 만들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이 뿌린 것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은 벌레에게 먹힐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벌레들은 그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을 먹을 것입니다.

헤롯은 벌레에게 먹혔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헤롯을 부러워했습니다. 그의 권세를 부러워했고, 그의 인기를 부러워했고, 그의 부유함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인생의 종말을 보라. 그는 벌레에게 먹혀서 땅바닥에 거꾸러져 누웠습니다. 대중적인 인기를 부러워하지 말고, 많은 재산을 소유한 세상적인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하여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세상 권력의 위력이 아무리 무섭다고 할지라고 궁극적으로 불의한 세력은 무너지고 정의가 승리를 거두게 마련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는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요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요 하나님이 곧 정의입니다.

"(민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시요 세상 권력까지도 좌우하는 분이시기에 교만한 인간들과 독재 권력가들이 아무리 횡포를 부린다 하더라도 회개치 않는다면 결국은 다 망하게 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아합의 권력을 등에 업고 교만히 행했던 이세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실이나 자신을 신격화한 헤롯이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충이 먹어 죽은 사실은 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세상 권력자들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이 곧 정의라고 믿고 그 힘을 미친 듯이 남용하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있지만 우리는 그러한 힘보다 더 크고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은 30개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고, 데마가 세상을 따르기 위해 바울을 등진 것처럼, 오늘날 권력을 잡기 위해 혹은 재력을 거머쥐기 위해 자기의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시2: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시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시2: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시2: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시2: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시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그리스도의 군사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를 통해서 주어진 그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힘이 되는 기도의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8. 선교하는 교회

"(행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예루살렘 교회 이외에 이방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를 위한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구성 명단을 보면 그 적합성과 복음의 세계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 유대인이고, 루기오는 북아프리카 구레네 사람이고, 시므온은 유대인이나 그의 다른 이름 니게르는 로마 이름이고 이는 그가 로마인들 사이에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마나엔은 귀족으로서 왕실에 관계가 깊은 사람이었을 것이고 바울 자신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 유대인이며 교육받은 랍비였습니다. 이렇듯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신분과 출신으로 구성된 교회였지만,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열심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성의 공존으로 말미암아 이방인 선교를 진행하는데 적합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참으로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하나가 된 교회였습니다. 그들 안에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있었고, 잘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함께 있었으며, 천인 출신과 귀족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 안에는 본토 사람들과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있었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었으며 보수적인 사람과 진보적인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인종이나 빈부나 신분이나 출신이나 사고방식이나 그 밖의 어떤 인간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피차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 안디옥 교회는 일치된 모습으로 세계 선교라는 아름답고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항상 자기들이 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이 그들에게 원하시는 일, 즉 하나님의 뜻을 가장 먼저 앞세웠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간의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요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17: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요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는 그의 각 지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온전히 성장할 수 있으며 또 세상은 교회가 하나가 된 모습을 보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질환자들이 2, 300백 명이 모여 있는 어느 요양원에 그 많은 정신질환자를 지키는 것은 작은 작대기 하나 들고 서 있는 사람 한 명뿐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놀란 방문객이

"이 많은 사람을 그 작대기 하나만 들고 지키다니 ..... 위험하지 않습니까? 겁나지 않아요? 여럿이 한꺼번에 덤비면 어쩔려고..."

하며 걱정하자 빙그레 웃으면서 지키던 사람이 하는 말이

"미친 사람들은 단합이 절대로 안 됩니다. 다들 각자 뛰놀죠. 그저 한 사람씩만 다루면 되니까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요."

하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교회, 그리고 나라가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신질환자들은 연합할 줄을 모릅니다.

미국 남부 멤피스에 가면, 이혼녀들만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는 이혼한 사람들만이 다닐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계층의 부류들만이 모이는 교회는 바람직한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어울리고 남녀가 차별이 없으며, 지식인과 비지식인도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도 거리낌이 없이 더불어 함께 봉사하고 지방색이 없는 교회가 참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선교하는 교회로서 안디옥 교회는 예배를 바르게 잘 드리는 교회였습니다.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라는 본문에서 안디옥 교회의 활동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기 "섬기다"(minister) 라는 단어는 "의식"(儀式, liturgy)이라는 의미와 "봉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점차 정규적인 예배 형식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천사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히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섬기는 것은 예배와 관계가 있습니다. 천사들은 섬기는 영들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에게 제물을 드리는 영들입니다. 주를 섬기는 것은 그를 경배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들은 일이 전부가 아니며 오히려 경배가 더 중요하고도 우선적인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배드리는 일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성령께서 시키시는 일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위한 조직이며, 교인들은 주님을 섬깁니다. 이렇게 예배하며 섬길 때 그들은 봉사의 일을 위하여 보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와 일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배드리지 않고 일만 하려 한다면 우리는 비참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일은 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려 한다면 우리는 의식주의자(儀式主義者)들이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배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이 구절은 당시 교회가 특별한 영적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다른 모든 활동을 끊고 오직 주를 섬기는 일에만 전념하였던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이런 교회에게 말씀하시며, 그 때 교회는 그의 음성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주를 섬기는 일", 예배를 잘 드림으로해서 안디옥 교회는 세계 최초의 선교사,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셋째, 안디옥 교회는 기도의 정신으로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선교의 필요한 요건은 기도의 정신인 것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기 전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임하셔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는 일꾼으로 선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치열한 영적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흑암에서 광명으로, 그리고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할 때 이미 보이지 않는 사단적 힘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교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엡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엡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기도가 없이는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하는 일, 그 자체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기도와 금식까지라도 하지 않고서, 어떻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기적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겸손하게 우리의 전적인 연약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그의 성령의 능력을 부음받기 위해서 간구하지않는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사단의 왕국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안디옥 교회는 금식 기도하는 정신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선교하는 강한 교회가 된 것이었습니다.

넷째, 본문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를 보면,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여 역사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가장 강한 선교의 힘은 항상 "(고전2:4)....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선교의 사명이 성취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성령은 선교의 거룩한 주체입니다. 우리가 아닌 성령이 세상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선교하는 성령의 역사없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는 결코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하나님의 성령은 본질적으로 증거의 영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선교에 대한 명령에 순종하자면, 그의 성령의 능력이 없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을 통해서 말해지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컵에 하나 가득히 어떤 액체를 채워가지고 가는데 내가 당신에게 부딪쳤다면, 뭐가 쏟아지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 컵에 담겨 있던 것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우리를 거리에서, 상점에서,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또는 병원에서 날마다 부딪칠 때에 무엇이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쏟아져 나올 것인가? 분명히 우리 마음 속에 담겨 있던 그것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까지 기다리도록 명령을 받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였던 것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신앙에 대한 이론에 설복되어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유는 성경 내용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교인들의 불친절과 누추한 모습(ugliness)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첫번째 열매인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실로 성령의 능력은 선교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하여 (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덧입히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시험받으러 가실 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께 순종하여 그 6주간에 걸친 혹독한 시험을 대항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돌아오시어", 곧 놀라운 그의 사역에 착수하셨습니다.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눅4:14)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행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다음과 같은 선교의 역사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행5: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행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마지막으로,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한 교회였습니다. 강한 교회를 세우는 최선의 길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계선교의 꿈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쇠퇴해서 사라질 것입니다.

"(행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라는 본문 가운데 "이에"(then)라는 말은 곧 '성령께서 말씀하신 후' 라는 뜻과 '교회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즉, 성령의 명령에 따라)'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선교사를 한 명 뽑아야 했습니다. 한 사람이 전화를 해서 지원했는데 새벽 3시에 면접을 보자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새벽 3시에 선교 위원장 집으로 시간을 맞추어 갔습니다. 그리고 썰렁한 마루에서 장장 5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아침 8시가 되자 한 사람이 나오더니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시험을 치릅시다." 하면서 질문 몇 가지를 던졌습니다. 그는 "글 쓸 줄 아십니까? 'baker'(빵 굽는 사람) 라고 써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시키는 대로 "baker" 라고 썼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계산할 줄 아십니까? 2+2 가 얼마입니까?" 였습니다. 그는 "4입니다." 라고 대답했고 시험은 끝났습니다. 다음 날 선교 위원회에서 소집이 있었고, 그 때 시험을 주관했던 위원장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정말 좋은 선교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는가 시험하려고 새벽 3시에 오라 했더니 그 때 왔습니다. 둘째로, 정확한 사람인가 알아봤더니 정확히 새벽 3시에 제 집 앞에 왔습니다. 셋째, 인내가 있는 사람인가 했는데 아침에 5시간을 기다리고도 불평 한 마디들을 수 없었고, 넷째, 성품을 시험했는데 역시 늦게 나타난 나에게 얼굴 하나 붉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겸손한 사람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저는 5살 난 아이도 알 수 있는 질문을 했는데 성심껏 대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선교사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사람은 지식이 풍부한 사람도, 가진 것이 많은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일이 귀하기 때문에 어떠한 일에도 순종할 줄 하는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에 순종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따로 세워 안수했고,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에 순종하여 세계 최초의 선교사로 보냄을 받아 제1차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 세워진 우리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예배를 정성껏, 열심히, 일치 단결하여 바르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의 능력이 충만하시므로 선교의 능력이 되시는 성령이 충만하시고, 순종을 통하여 선교의 사명을 완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9. 하나님의 성전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3: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전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고전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3: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전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3: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3: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고전3: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고전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1. 고린도 교회가 겪은 커다란 어려움은 내부의 당파 싸움이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지도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복음 23:10).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주인이 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은사나 능력을 따라 사역자들에게 지나치게 치중하거나 심지어 숭배하기까지 하면 교회는 교회 본연의 모습을 상실하고 분열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분은, 그리고 경배드려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십니다. 사역자들에게 나타나는 은사나 능력은 아무리 크다해도 그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들입니다. 사역자들은 교회를 위해 쓰임받는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사역자들에게 치중하거나 그들을 신성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악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지나치게 치중했던 바울이나 아볼로는 "심고 물 주는" 일에 쓰임받은 종에 불과한 것이지, 그들이 식물을 "자라나게 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심었다"는 것은 복음을 전도하여 믿게 했다는 것이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다"는 것은 믿는 자들을 성경으로 가르쳐 주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며 인간은 단지 그 일에 쓰임 받는 종에 불과합니다. 또한 씨를 심는 일과 물주는 일은 서로 배타적이고 경쟁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씨를 심은 수고, 아볼로는 물주는 수고에 대한 그 만큼의 삯을 받는 것으로 족한 것이며 교회와 선교의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바울은 일을 시작하는 데 적합했고, 아볼로는 일을 성장시키는 데 적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사역의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는 그들 홀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밭에서 어떤 사람은 씨를 뿌리고, 또 어떤 사람은 물을 주지만 그 누구 한 사람도 자기가 자라게 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성장시키는 능력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인간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씨를 뿌리는 자나 물을 주는 자는 동등한 지위에 있는 것이지 한 편이 다른 한 편보다 상위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나 제사장, 사도, 복음전도자, 교사 등에 위 아래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들 모두가 한 주인-- 하나님 --을 위해 함께 일하는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와 사랑의 메시지를 온 인류에게 전하기 위한 도구로써 인간을 사용하시긴 하겠지만 사람들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거나 영적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창조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만이 이것을 재창조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역자들의 모든 사역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며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전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자랑할 것이 아니고 주만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중심이 되어 파당을 형성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교역자는 사람들의 인기나 칭찬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하늘의 상급을 목적으로 주님의 일을 성취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열매를 얻기 위해서 일하시는 밭입니다. 이런 교회에 일개 지도자의 사상 체계가 교회의 중심을 이룬다면 당연히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은 영적 분별력을 가지지 못한 교인들을 어린 아이, 육에 속한 자, 젖을 먹어야 할 자, 즉 영적 미숙아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적인 미숙아는 '사람을 따라 행하고' 시기하며 다투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실 시기와 분쟁은 유치한 사회에서 하는 것이고 영화(靈化)된 높은 수준의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웃음거리밖에 안됩니다. '사람을 따라 행한다.'는 말은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세상적인 가치기준에 따라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미숙아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심오한 영적 진리를 잘 깨닫지 못하는 '초신자'를 말하기도 합니다. "젖"은 모든 기본 교리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히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히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그리고 "밥"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어 행하시는 대제사장의 역사에 관한 교리들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히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히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와 이웃과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웃들과 불화하며, 싸움을 잘 하며, 말이 많고, 양보할 줄 모르고, 늘 말썽을 일으킨다면 그러한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거나 중직을 맡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육에 속한 자요, 영적 미숙아에 불과한 사람이지 하나님의 사람은 아닙니다. 반대로 이웃들과 사랑으로 화목하며 지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과 거리가 먼 사람은 하나님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며, 이웃과 단절된 사람은 하나님과도 단절된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이들은 키가 자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은혜와 지식에 있어서 성장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에 대한 경쟁과 싸움은 육적인 증거입니다. 참다운 신앙은 화평하게 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시기와 다툼이 어찌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보통 사람들의 수준보다 높게 살아야 할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 같게 살며 행동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러기들이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장면은 아름다운 경치 이상의 교훈을 던져 줍니다. 비행기와 망원경으로 기러기를 추적한 조류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기러기는 혼자 나는 것보다 떼를 지어 날 때 71%나 더 오래 날 수 있습니다. 이는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힘이 강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모이면 분파가 생겨 힘이 약해진다는 한국인은 기러기에게 배울 바가 많은 것입니다. 혼자 하고 혼자 이름을 내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함께 하고 함께 빛을 발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둘째, 기러기는 왜 V자 대형으로 나는가? 이것은 천부의 지혜로, 공기대(Swath of air)가 형성되어 뒤따르는 기러기들이 날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서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뒤에 있는 동료들을 조금이라도 편히 날게 하기 위하여 V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앞에서 나는 인도자격인 기러기가 가장 빨리 지치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기러기들은 가끔 위치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이만큼의 협조 정신과 남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사람에게 있습니까? 셋째, 기러기들은 날면서 계속 운다고 합니다. 이것은 힘들어 지르는 비명이 아닙니다. 기러기의 울음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위치를 알림으로써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를 격려하는 나팔 소리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힘겹게 먼길을 날면서도 가족과 동료를 격려하는 기러기의 울음소리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넷째, 만일 기러기 한 마리가 아프거나 부상으로 함께 여행을 계속하기 못하게 될 경우 반드시 서너 마리의 동료가 이 낙오자와 더불어 머문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신입니다. 기러기의 사회는 경쟁사회가 아닙니다. 동료의 불행을 함께 짊어지는 사회입니다. 요즘 사람 같으면 겉으로는 위로하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경쟁자의 낙오를 기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러기는 불행을 당한 동료를 따라 낯선 땅에 머물며 그가 회복되기까지 기다려 준다는 것입니다.

3.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고국에 돌아와 무너진 신앙 공동체를 재건하는데 있어서 제일 핵심적인 일은 성전 건축이었습니다. 작업 중에 현지의 토착민들이 방해하고 습격해 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아직 정착되지 않은 이주민으로서 큰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한편 유목 민족으로서 천막생활에 익숙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건축다운 건축은 성전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성전을 건축하는데서 중요한 신앙 훈련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의 무리들을 통해 이룰 지상 과제를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교회 즉 하나님의 집은 "반석"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워질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반석"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는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터 위에 세우는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려 그 값으로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계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시편 118:22 말씀을 인용하시어 자신이 교회의 머릿돌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시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마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뿐만 아니라 바울은 에베소서 5:23과 골로새서 1:18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마치 건축자들이 금, 은, 보석 또는 나무나 풀, 짚으로 집터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 금, 은, 보석 등은 성도들의 순전한 행실을, 나무, 풀, 짚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유명무실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삶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금, 은, 보석 등은 십자가의 도와 같은 순결한 복음의 진리를 의미하며, 나무, 풀 짚은 이 같은 복음의 기본 진리는 도외시한 채 말의 지혜로만 증거되는 어리석은 주장, 궤변 등의 거짓된 교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심판하시는 최후 심판 그 날에 금, 은, 보석으로 집을 지은 건축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을, 모든 공력이 불타버릴 것으로 집을 지은 건축자들에게는 부끄러운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불이 금을 찌꺼기로부터 구별하고 타버리는 물질과 타지 않는 금속을 구별하는 것과 같이 사람과 사람 그리고 일과 일을 구별하는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불란서 혁명 때에 사람들이 극도로 악하여 하나님을 모욕하는 뜻으로 노텔담 예배당 제단에 기생을 세워 놓고 그를 예배했습니다. 그 때에 그 인도자들이 벼락맞아 죽었습니다. 그것은 우연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심판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것입니다. 그 날에 모든 신자들의 공력이 밝혀지고 말 것입니다.

4.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란 하나님의 성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교회는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계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기 위해 준비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오리겐이 말했지만 교회와 그 사귐 속에 불화와 분쟁과 분열을 끌어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중의 의미로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시기와 다툼을 지니고 있다면 성령의 활동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미움이 교회 안에 들어오자마자 사랑은 거기서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기 속에서는 진리가 결코 바르게 들려질 수도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미움과 싸움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셔도 안으로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표시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사귐을 파괴하는 자는 교회를 파괴하는 자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와 같은 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 즉 교회를 파괴하는 근본 원인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 원인은 이 세상의 지혜를 숭배하는데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세상의 지혜는 이러한 것입니다.

"(욥5:13)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므로."

"(시94:11)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인간적인 지성의 자랑 때문에 그들은 설교하는 방법, 예를 들면 수사법이라든가 설득력의 유무라든가 변론의 정묘성 같은 것을 판단, 평가, 비판하는 데만 열중하였지 선교의 내용 같은 것은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적 교만은 언제나 논쟁적이어서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경청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게 됩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고 끝까지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겸손하게 상대방에게 배울 생각은 아니하고 언제나 자기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고는 가만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지적으로 교만한 자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입니다. 자기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 자는 모두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어리석은 자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자기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롭고 선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낮추어야 합니다. 현명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하고 자신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경쟁시켜서는 안됩니다.

5.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될 때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현재에 안전하고 영원히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나 아볼로, 그리고 게바는 모두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교회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 게바는 다 너희 것입니다. 모두 다 너희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 가는 벽돌 한 장 한 장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함으로 하나님의 건축하심에 일조할 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도 그들의 자리에서 견고히 자라가도록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코리 텐 붐 여사의 부친이자 시계 제조업자였던 캐스퍼씨에 대한 일화입니다.

어느 날 캐스퍼씨의 가족들은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누군가 와서 그 금액에 해당하는 시계를 사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어느 손님이 찾아와서 비싼 고급 시계를 하나 구입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얼마 전 자기가 이웃의 그리스도인 시계점에서 비싼 시계를 하나 구입했는데 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며 투덜거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캐스퍼씨는 그 시계를 한 번 보여달라고 하여 내부를 검사해 보았습니다. 살펴보니 조금만 수리하면 되는 것이어서 그는 그 자리에서 수리를 해주며 그 시계는 정말로 좋은 고급시계이며 이웃의 시계 점포 주인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손님은 그 시계를 받아들고는 미안하다며 자기가 산 시계를 반납했고 캐스퍼씨는 돈을 도로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죽 지켜본 코리가 손님이 나간 후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시계를 돌려주셨어요? 은행에 갚을 돈 때문에 오늘 기도까지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돈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내려주신 돈이 아닌 것 같구나."

며칠 후 다른 손님이 와서 이전보다 더욱 비싼 최고급 시계를 사가서 은행에 돈을 다 갚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캐스퍼씨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지킴은 물론 다른 그리스도인의 명예도 지켜준 것입니다. 우리는 지어져 가는 성전의 작은 일부분으로서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봉사함으로 성전 전체를 짓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함을 안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거룩하고 하나되게 하시며, 지혜롭게 성장하게 하시는 성령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시므로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0. 교회의 덕과 질서

"(고전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고전14: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고전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14: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고전14: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고전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전14: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고전14: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고전14: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고전14: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고전14: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고전14: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고전14: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고전14: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고전14: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고전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인도의 썬다씽은 "인도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까? 기독교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을 모른다면 내가 살 의미가 없습니다. 내일 새벽까지 나에게 당신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나는 차라리 죽겠습니다."하고 생명을 걸고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구도자였습니다. 그러한 썬다씽에게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나타나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라고 했기 때문에 그날부터 그는 주를 위해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를 찾기 위하여,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그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모르고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모르고서 사랑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고전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마땅히 알아야 할 그 무엇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작 알아야 할 하나님의 사랑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전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사를 받았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두 아들이 있습니다. 맏아들은 효자요, 둘째 아들은 부모에게 불효한 이른바 방탕아입니다. 그래서 형은 언제나 그 동생을 구박하고 멸시합니다. 이유는 부모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맏아들은 자기가 부모의 뜻을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런 탕자는 없어지던가, 나가 죽어야 한다고 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 즉 그 부모가 그 못난 자식도 똑같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아니 자기보다도 오히려 그 동생에게 더 큰 연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는 부모를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부모를 잘 안다는 대 전제에서 자기와는 다른 그의 동생을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와 똑같은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만이 하나님의 법을 잘 알고 있고, 받은 바 은사를 통해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 사랑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구하되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것입니다. 은사의 목적은 자기증명이나 자기 신앙의 우월성, 하나님과의 남다른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은사의 목적은 자신에게 덕을 세우며, 교회에도 덕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은사의 공통적인 목적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덕목 중에 가장 큰 덕목을 말한다면 무엇보다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 중에 첫째는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서는 통역하지 않으면 예언하는 자만 못한 것입니다. 나팔은 확실하게 불지 않으면 전쟁에 대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통역 없이 하는 방언은 가치 없는 것입니다. 은사의 지배원리는 사랑입니다. 은사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은사를 가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따라 은사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자기 중심적이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형제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영적 은사를 사용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신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은사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했던 것이 아닙니다. 참 사랑은 가정을 하나되게 하며 가정의 진정한 질서를 세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은사도 사랑을 따라 구하고 활용되어진다면 은사는 교회를 화평가운데 하나되게 하며 아름다운 조화의 질서를 가진 향기로운 교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자인 무디가 한번은 예배를 인도하면서 어떤 남자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기도할 기회를 얻은 그 남자는 너무나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무디는 그 기도가 예배에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 분위기를 망치고 말았다고 판단하여, "우리의 형제가 기도를 마칠 때까지 다같이 찬양합시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기도를 중단시켰습니다. 공예배의 인도를 맡은 사람은 분별력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질서 있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공예배는 적당한 방식, 즉 아름다움, 질서, 영적 동기와 내용이 있는 가운데서 드려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무시하고서는 결코 교회의 덕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를 억제하고자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가 목적하는 바는 오직 하나, 교회의 덕과 질서를 세우는 것이며 이를 위해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는 사랑을 베풀기 위해 주어진 것뿐이기 때문에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받은 은사는 자기를 위한,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보다 크신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랑의 동기로 사용되어질 때 교회의 덕과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교회에 질서가 없으면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합니다. 화평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이기주의는 남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덕과 질서를 파괴시키는 악입니다. 교회의 덕과 질서를 위해서 본문에서 내린 결론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여기 "적당히"라는 말은 원칙대로 하지 말고 대충대충 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문자 그대로 타당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극단으로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은사에 치우치거나, 은사를 받았다고 그것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우월감에 빠져 교회 분열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들에 대하여 절제하고 너무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고 적당히 질서대로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 봉사는 적당히 하고 질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을 내되 지나치게 인간적인 열심은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열심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철야하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봉사하는 사람이 오히려 교회의 가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질서라는 것은 순서를 알아야 되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자제할 줄 아는 열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나친 열심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교회 봉사를 한다고 해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물론 하나님의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합니다. 희생 없는 봉사는 교회 봉사가 될 수 없습니다. 시간과 물질과 몸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적당히 해야 하고 질서대로 해야 합니다. 혼자서 교회 일 다 한다고 집안 일 내팽개쳐 버리고 교회에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당 안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하나님이요, 직장의 하나님이요, 국가의 하나님이요, 온 세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정에서는 훌륭한 남편과 아내가 되어야 하고 훌륭한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가정을 위해서 교회 봉사를 다 그만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가정을 희생하고 직장도 희생해야 하고 어느 정도는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하여 가정과 직장을 무시해 버리는 열심은 결단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훌륭한 자식을 키워야 합니다. 가정을 내팽개쳐서 자녀들이 정상적으로 자랄 수 없다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 교회 봉사를 한다고 열심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조금씩 나누어 봉사를 해야지 한 사람이 지나치게 교회를 위해 희생하게 될 때 가정에 끼치는 영향이 심각할 수가 있습니다. 또 교회 봉사한다고 지나치게 하여 자기 건강을 해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다고 해서 봉사를 하다가 몸이 아파서 죽는 것을 순교자적인 것인 양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도록"이라는 말은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전적 헌신을 말합니다. 몸에 병이 날 정도로 교회에서 철야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지혜 없이 교회 일하다가 죽는 것이 충성이 아닙니다. 절제하고 적당히 하나님 말씀대로 균형을 취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게 일할 수가 있습니다.

"(빌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다른 사람의 일도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교회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각각의 지체는 지체대로 중요한 것입니다. 흔히 집사가 열심히 일하면 장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치 눈이 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일하여 발이 눈이 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는 사람마다 각기 받은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직분이 다양한 것입니다. 집사인 사람이 열심히 봉사한다고 해서 다 장로 권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세상 방식을 그대로 교회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장로는 권사 위에 있고, 권사는 집사 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는 계급이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됩니다. 직분에 따라 은사에 따라 계급이 형성된다면 이미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주어진 직분과 그에 따른 은사는 교회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 계급을 형성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장로가 되어야 신앙생활에 성공한다는 사고 방식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너는 언제부터 신앙생활을 했는데 여태껏 그 흔한 집사도 못되고, 집사를 몇 년째 했는데 아직도 권사도 못되고, 장로도 못되느냐고 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장로가 할 일 따로 있고, 권사가 할 일 따로 있고 집사가 할 일 따로 있습니다. 그 직분에 따라 주어진 은사와 달란트가 많고 적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맡은 바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얼마나 열매를 맺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즈음 회사는 '능력위주'로 사원들을 뽑고 진급시킵니다. 능력이 없으면 자연히 명퇴 당하거나 조퇴 당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능력 위주의 사회가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감싸주고 돌봐주며,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봐주어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에는 "(고전1:26)...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합니다....(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 곳입니다..." 이는 "(고전1:29)...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롬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롬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롬15: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바로 이것이 교회 건덕(健德)생활인 것입니다. 교회는 능력위주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봉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인 수를 늘리는 것, 헌금액수를 늘리는 것, 훌륭한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고 그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사랑의 향기를 풍기는 교회로 만드는 것이 교회 봉사를 올바로 하는 것입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덕이라는 것은 건물을 세우듯이 덕으로 교회를 세운다는 말입니다. 은사는 교회 건덕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사와 직분을 통한 교회 봉사가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 되지 못한다면 향기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가 사랑이 없으면 악마가 되고, 사람에게서 사랑을 제하면 짐승으로 되지만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제하여 보아라. 거기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제아무리 다양한 은사를 받았다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시끄러운 "꽹과리가 되고", 신앙생활에 거둘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며", 자신과 더불어 남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때는 빈손으로 오시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쥐고 오십니다.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께 사랑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의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하므로 교회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며, 온전한 사랑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어느 부인이 한 손에는 불을 들고 한 손엔 물을 가지고 지금 곧 루이스 성으로 떠나려는 찰라 아이봐라는 청년이 나타나 그 목적을 물은 즉 부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 불로 천국을 사르고, 이 물로는 지옥의 불을 끄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천국에만 들어가겠다는 욕심이 없어질 것이며, 지옥에도 떨어질 공포심이 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도록 하렵니다." 하더라는 말이었습니다. 천국을 부러워할 마음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공포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이 차있으면 그는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진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제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요한일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에 요한이라는 이름이 흔합니다. 영국식, 미국식으로는 존(John)이고 독일어로는 요한이고, 불어로 하면 장이고 이태리어로 하면 주앙이고 스페인으로 하면 후안이고 러시아로 하면 이반인데 이것들이 다 요한입니다. 이처럼 요한을 좋아하고 높게 평가합니다. 요한 복음을 기록했고 요한 복음 자체가 생명과 진리와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요한이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있는데 실제로 복음서를 보면 요한은 대단히 성미가 급하고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레의 아들, 천둥 같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마을을 지나가려 하는데 못 지나가게 하자 '주님, 하늘로 좇아 불을 내려서 저 마을을 태워버릴까요?' 이렇게 제안했던 사람이 바로 요한입니다. 그 요한이 나중에 바뀌어서 어느 사도보다도 생명과 진리와 빛과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더 많이 언급하고, 권면하고 요한 1,2,3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랑을 논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로 변한 것입니다. 사랑을 따라 은사를 구하시고 활용하시므로 사랑의 실존으로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에 여러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사가 사랑과 더불어 역사함으로 교회에 덕과 질서를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1. 자랑스런 교회 모습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 어졌음이라)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 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1:1-12)

성직 매매, 교회 세습, 면죄부 판매 등 교회의 타락으로 암흑기 시대로 불리우는 중세에 스스로 정통(catholic)이라고 자처 했던 교회에 그 타락상을 항의(protest) 고발함으로(비텐베르크 성문에 붙힌 마틴 루터의 95개조 항의문)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던 점을 염두에 두고 부끄러운 한국 교회 치부를 드러냄으로 자랑스런 교회 모습을 찾고자 드리는 말씀입니다. 교인수 수만명에서 수십만명을 자랑하는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대부분 교회 세습이라는 중세 시대의 병폐를 답습하고 있어 세인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중 감리교회에서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모 교회에서 내년에 은퇴하는 담임목사 후임에 아들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대해 비판여론이 비등해지자 그 교회 어느 장로가 <기독교 타임즈>에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반론 내용은 그 교회 위상이 세계적이어서 세계적인 지도자들과 어깨를 맞대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걸맞는 학위(박사)를 소지하여야 하며, 아울러 영어 동시 통역이 가능해야 하며, 광대한 그 교회 조직을 이끌 수 있는 탁월한 행정력을 갖추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그 교회를 잘 알고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담임목사의 아들이 교회를 맡아야 교회가 안정되기 때문에 가장 적임자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그 교회의 주장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를 따라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는 실력과 능력있는 사람만이 살아 남을 수 있고, 무능하고 실력이 없는 사람은 자연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같은 것을 <IMF>와 <세계화>를 통해 뻐아프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무능하고 실력이 없어 도태된 80%의 사람들은 실력과 능력으로 경제를 장악한 20%의 사람들이 던져주는 빵부스러기를 받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앞서 교회 세습을 목전에 두고 있는 교회도 학벌이 시원치않아 겨우 신학교나 졸업하고 일상영어회화도 변변치 못하고 시골 농어촌 개척교회만 돌아다녀 특별한 교회행정경험도 전무한 목사, 실력과 능력과 학벌이 없는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과 섬김으로 지배되어져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 조직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십자가 희생 위에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아무리 교인들이 많아져 소위 교세가 확장된다해도 끝까지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실력있고 능력있는 사람만 불러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에서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시어서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만드시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치고 어디 변변한 사람 하나 있었는가?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 전서 1:26-29)

교회는 사람의 실력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담임목사가 아니라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안에서는 적어도 능한 자가 무능한 자를 사랑으로 섬기며, 문벌좋은 자가 문벌이 없는 자를 더욱 존경하며, 지혜로운 자가 미련한 자를 섬기며,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며, 세상의 존귀한 자가 천한 자를 섬기며,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교회 담임자도 학벌이나 문벌, 실력이나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모두가 다 서로 이처럼 사랑으로 섬기는 가운데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크다고 해서 어찌할 수 없이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원리를 따른다면 이미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자선, 복지 단체나 이익집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라에서는 법으로일지라도 공공단체나 기업체에 장애인들을 의무적으로 고용하도록 하고 있는데 시각장애인 교회, 청각장애인 교회, 등 장애인 교회를 각각 따로 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위 대형교회에서 이들 장애인 목회자들을 수용하여 장애인들을 사랑으로 섬길 수는 없는 것이겠습니까? 교회는 크든 작든 예수 십자가 위에 세워져 그 십자가의 정신인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교회 안팎에서 막강한 교세를 내세워 지배하려는 자세는 예수 십자가의 삶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배구조를 과감히 개혁하고 일체 섬김의 구조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교회는 "믿음이 더욱 자라는 교회", "서로 사랑함이 풍성한 교회", "환난 중에 인내하는 교회" 등입니다. 믿음이 더욱 자란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더 예수를 닮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교회는 서로를 섬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별 족장으로 정탐군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40일동안 정탐을 마치고 모세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27)...`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28)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민13:27-29)

이같은 보고에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두려워하며 절망감에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정탐에 동행했던 갈렙이 일어나 백성을 안돈시키며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며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정탐군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31)...`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1-33)"

한 마디로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며 그들 앞에 우리 자신은 <메뚜기>같은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볼 때 <메뚜기>같았을 것이라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존심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과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메뚜기>같이 보잘 것 없고 하찮아 보일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실 때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있는 자들, 강한 것들,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자" 했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비록 <메뚜기>같아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지극히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 여러분은 자신들을 <메뚜기>로 보지 말고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오히려 "세상의 강한 것들과 있는 것들과 지혜있다고 하는 것들을 우리의 <밥>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 그들은 우리 밥이라 !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 그들을 두려워 말라 !'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민 14:7-10)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메뚜기>같이 여기며 두려워하며 좌절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2)고 말씀하시므로 하나님 백성으로 자신을 <메뚜기>로 여기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악평하므로 하나님을 멸시하며 믿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탐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40년간 패역한 죄를 지고 광야에서 유리 방황하다가 소멸되어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반면 가나안 땅의 모든 족속들을 "<우리의 밥>으로 여기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믿음으로 백성을 격려했던 여호수와 갈렙만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는 그토록 하나님의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직접 체험했으면서도 믿음이 날로 자라기는커녕 "하나님의 주신 약속의 땅을 악평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신을 세상에 비교하여 <메뚜기>로 여기는 등 전혀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소멸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여러분이 겨자씨같이 비록 작고 하찮아 보여도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임을 잊지 마시고 어떠한 환경과 형편에서도 날로 믿음이 자라가는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성도과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믿음이 자라 예수를 닮아 더욱 더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자랑스런 교회는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 있는 교회"인데 "서로 사랑함의 풍성함"의 열매는 십자가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충만하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그 풍성한 사랑을 확증하시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희생과 사랑, 그리고 섬김의 표상입니다. 자신을 닮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구원하심이 십자가요, 사랑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섬기고자 하심이 십자가요, 인간을 섬김으로 구원하시고자 하심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선생으로 제자를 섬김과 의인으로서 죄인을 섬김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담임목사가 아무리 실력이 없고 보잘 것 없어도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교인들 중 아무리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그 하는 일이 천하여도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지혜있는 자들이 미련한 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이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한 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약하고 무능하고 병들고 미련한 자들을 도태시키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곳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대형 교회>는 담임목사로 장애인 목사나 실력과 학벌이 없는 목사가 청빙되어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하여 서로 하나되어 서로를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때 진정한 대형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아무리 교세가 강해져도 세력화되어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아무리 교인수가 많아지고 헌금액수가 불어나도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예수의 모습을 잃어서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실력과 능력과 학벌 등을 고루 갖춘 목사가 농어촌 시골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겠습니까? 알버트 슈바이쳐 박사는 신학박사 외에 서너가지의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어디 대형교회에서 목회하고자 하면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 오지로 달려가 병든 흑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대형 교회라서 십자가는 높이 세워져 가도 정작 십자가의 정신과 십자가의 삶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 위에 세워진 것이지 교회 위에 십자가가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과 섬김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교회가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인들이 무슨 철만 되면 큰 절간이나 높은 성당, 대형 교회 앞에 득실거리는 것은 종교가 세력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종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사랑으로 백성을 섬기고 있다면 그러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교회가 되어 정치인들이 어느 때고 가장 작은 교회에 찾아와 예수의 겸손을 배우고 나라 백성을 위한 희생과 사랑의 십자가를 하나씩 지고 나가는 그러한 교회가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랑스런 교회의 모습은 "핍박과 환난중에 인내하는 교회"입니다. 여기 <환난>이라함은 시련을 받아 고통당하는 것을 뜻하고 <핍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하며 그러한 연단된 믿음을 정금같이 여기십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당하는 핍박과 환난의 고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같은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소망 중에 인내하였던 것입니다. 주어지는 고난을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을 깨닫고 그것들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이겨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애매한 고난을 당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만이 하나님의 상급과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 동아일보 기사에서 한국인 두 사람이 필리핀을 사업차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서는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는데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여섯 명의 필리핀청년들에게 몰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필리핀 공항경찰에 신고를 해서 여섯 명이 체포되어 경찰에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6명은 한결 같이 우리가 한국에서 이제 일하고 막 돌아오는 길인데 그 동안 한국에서 당했던 수모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진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진술을 듣다 못한 경찰이 화가 나서 한국인 사업가 두 사람에게 재차 폭행을 가했다는 것입니다. 필리핀 주재 한국대사관에 신고를 하고 필리핀 정부당국에 항의도 했지만 일도 처리하지 못한 채 강제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 동아일보의 큰 기사입니다. 그 기사 맨 마지막에는 오로지 단하나 한국인 이유 때문이라고 적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네팔을 여행하던 대학교수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몰매를 맞았다거나,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는 '한국놈 개새끼'라는 제목의 책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법무부 공식통계에 따르면 외국인 노동자수는 36만5천명입니다. 이들 대부분이 밤낮없이 뼈빠지게 죽도록 일을 해주었는데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으며,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다 잘려 나간 손가락만 수십가마니는 될 것이라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의 집에서 일주일에 평균 3,4명씩 장례를 치루는데 대부분 임금체불과 상해로 인한 비관으로 자살하는 경우라는 것입니다.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라지고 팔뚝이 잘라지는 고통은 생활의 불편에서 끝나지 않고 평생 범죄자나 전과자로 오인 받고 평생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슬람권 국가인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지금도 코란 율법에 따라서 범죄형량에 따라 손가락이나 팔뚝을 잘라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받게 하는 자는 환난으로 갚으시는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의 눈물을 씻어줄지언정 이웃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자의 환난과 고난을 함께 나누어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서 받는 고통은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의 상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복음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랑과 영광이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천문학자 아이엔 쉘톤은 생물계만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계도 때가 되면 죽는다는 것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가 발견했었던 '수퍼노바'라는 별이 죽을 때 태양의 1억배 정도의 빛을 한꺼번에 발산하면서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신비스러운 것은 별들이 빛과 열을 발산하면서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 해체 또는 자기 폭발 등의 고통스런 죽음으로 또 다른 새로운 별이 창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별이 죽는 그 마지막 순간에 분출하는 자기 폭발과 자기 해체의 죽음은 새로운 에너지 입자를 거대하게 생산해 내는데 바로 그 입자들이 새로운 별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온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었고 그 빛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곧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40년이라는 길고 긴 광야의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고 연단하시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8.15광복이 아무런 고난없이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국 땅 해란강, 일송정, 청산리, 상해, 하와이 등지에서 피맺힌 눈물로 독립과 해방을 노래하며 피를 토했던 안중근, 윤봉길, 이준 등 이름도 빛도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순국 선열들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이 땅 구석 구석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피를 뿌린 수많은 순교자들의 그 고난과 죽음, 그리고 나라 민족의 고난을 대신 걸머지고 정신대로 끌려갔었던 우리의 선조 할머니들의 한 서린 울부짖음과 탄광촌으로 끌려가 돌아올 수 없는 해골이 되었던 수많은 젊은 가장(家長)들이 불렀던 고난의 '신고산타령' 등 이 모든 것들이 나라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거쳐야 했던 고난의 발자취였던 것입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과 생명의 영광을 바라보셨던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3-24)

그러므로 고난과 희생, 죽음을 새로운 창조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인내하는 교회와 성도야말로 장차 하나님의 자랑과 영광이 될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8:18) 하나님의 자녀로서 날로 믿음이 자라가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며, 핍박과 환난 중에도 인내하므로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2. 교회의 질서

(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2)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3)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13)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15)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19)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 하게 하라 (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25)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딤전 5:1-25)

1. 사람을 경고하거나 견책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것이어서 그것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보다 연장자에 대해서는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시의 적절한 경고나 견책으로 상대방을 불행과 파선에서 구원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처럼 유익하고 보람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나 견책이 상대방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거나, 원한의 감정을 사게 한다거나, 노여움이나 비난과 증오를 느끼게 해서는 효과는커녕 사태를 더 악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에 대해서는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애정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만약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귀찮은 존재로 여긴다면 그 가정이나 사회는 불행을 겪게 될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노인을 존경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예의 범절입니다.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늙게 마련이고 따라서 그 외양이 누추해지고 기력이 쇠해지게 마련이지만, 오래 된 나무의 뿌리가 심대한 것처럼 수많은 삶의 수레바퀴를 경험한 노인에게는 감히 젊은이가 흉내내지 못할 위엄과 인생의 교훈들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잠 16:31) 하였고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잠 20:29)고 하였습니다. 노인들은 젊은이 보다 멀고 험한 인생길을 달려오신 분들로 그만큼 인생의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계신 것을 알고 그에 합당한 존경과 애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노인의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젊은이의 힘과 정열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피차에 보다 더 유익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나는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젊은이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구든지 한 형제 자매로 알아 형이나 아우를 대하는 것처럼 관용과 함께 하는 정신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성(異性)에 대해서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과 정신으로 대하며 권고해야 합니다. 이어서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해야합니다. 교회는 어떤 이유로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구실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며,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이 든 황새가 나를 수 없게 되면 그들의 보금자리에 남겨져서 젊은 황새들에 의해 부양된다고 합니다. 그 젊은 황새들은 전심전력을 다해 나이 든 부모 황새의 먹이를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을 키울 때 자신들은 굶을지라도 자식들을 먹였던 것을 잊지 말고 이제 나이 든 부모에 대해 자신들은 굶어도 부모가 굶는 일이 없도록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의 보호와 수고와 희생가운에 성장하게 된 것을 기억하고 부모가 노쇠하고 병약하여 힘이 없을 때 그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히 자식들의 의무인 것을 깨닫고 노인들을 부양하는 것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양할만한 자녀손들이 있는 과부들에 대해서는 교회로 하여금 짐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양받을 만한 자녀와 가정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에 초대 교회는 <과부 등록부>라는 것을 두었습니다. 이 <과부 등록부>에 등록되어 교회로부터 부양과 존경을 받을 참과부는 나이 60세 이상의 연로한 사람으로 남편과 사별하고 그의 과거 결혼 생활이 깨끗하며 자녀를 하나님 말씀으로 잘 양육하며 가난하고 환난에 처한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겼던 선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부들을 교회가 부양하되 그들로 하여금 병든 사람들을 심방하여 위로하고 격려하며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 아픔을 함께 나누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일에 봉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 과부가 결혼생활이 깨끗지 못하였다거나, 선한 행실로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하였다거나, 자식들을 신앙적으로 잘 양육하지 못하였다거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환난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 항상 열린 마음과 열린 가정으로 그들을 사랑으로 섬겼다는 증거가 없다면 교회에 덕을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교회의 신용을 타락시키는 결과만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겼다는 선한 증거가 있는 참과부야말로 교회로부터 부양과 존경을 받으며 계속해서 남은 여생을 예전처럼 봉사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과부는 교회에서 부양하기를 거절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뜻하지 않은 남편의 죽음으로 과부가 되어 그 순간에는 신앙적인 충격으로 일생을 과부로 지낼 것을 결심하거나 맹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일찍이 과부가 되었을지라도 생계를 유지하는데 다양한 직종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독신녀나 젊은 과부가 정직하고 깨끗한 방법으로 생활비를 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되면 결국 살기 위해서 거의 매춘행위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어서 과부가 되거든 재혼을 서둘든지 아니면 교회 봉사에 철저하게 자기 생애를 바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여성들은 누구나 특별하게 할 일들이 없었기 때문에 또한 자연히 이집 저집 다니면서 남의 좋지 못한 소문을 퍼뜨리거나 남의 험담이나 늘어놓거나 남의 일에 참견하기 쉬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 사도 바울은 젊은 여성들은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고 가정을 섬기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과부와 여성들에 대해 초대 교회 사도 교헌(敎憲)에 다음과 같은 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부는 온순하고 얌전하고 부드럽고 성실하고 성내지 아니하고 수다스럽지 아니하고 소란스럽지 아니하고 말을 더디하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아니하고 남의 허물을 찾지 아니하고 일구이언하지 아니하며 참견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게 해야 한다. 옳지 아니한 일을 보거나 들을 때에는 보지 못한 듯하고 듣지 못한 듯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부들은 놀러 다니는 사람들로 인식되어서는 안되고 자기 생활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제단>이라고 느끼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말을 조심하지 않아서 일을 그르치거나 심지어 패가 망신하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뿐인가. 정치가들의 한마디 말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뒤바뀌는 경우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렇게 말이라는 것은 한 인간을, 한 나라를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죽음까지도 결정짓는 것이 입에서 나오는 말인 것입니다. 조류의 왕자 독수리는 날아가는 왜가리새 잡아먹기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합니다. 왜 독수리들이 왜가리새들을 잡아먹기를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가리새들은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있을 때에 내는 소리처럼 "꼬꼬꼬"라는 소리를 즐겨 내는데, 특별히 날아갈 때에는 그 소리를 더 많이 내는 까닭에, 독수리는 날아가는 왜가리새의 그 소리를 듣고 잡아채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험이 많고 늙은 왜가리새는 독수리에게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경험이 많은 왜가리새들은 멀리 날아갈 일이 있으면 입에 꽉 들어가는 돌을 하나 집어서 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가리새가 날아갈 때에도 입에 꼭 물은 돌 때문에 "꼬꼬꼬"소리를 내지 않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독수리에게 들키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왜가리새는 입을 조심한 탓에 죽음까지도 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진정 성도들이 주님께서 주신 입을 잘 사용하여 평화의 말, 사랑의 말만을 전한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영생을 얻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2. 다음으로 교회는 장로에 대해 합당한 예우를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4:9-11에서 이스라엘의 70인 장로들은 "하나님조차 손을 대지 아니하셨다."고 할 만큼 존귀한 자들로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직분과 권위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마땅히 존경할 자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교회에는 두 종류의 장로가 있어 왔습니다. 즉 교회의 일, 즉 교회 조직과 행정, 관리 등을 책임지고 감독하며 다스리는 '치리 장로'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는 '교역 장로'가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장로'라 부르고 후자를 '목사'라 부릅니다. 이처럼 장로와 목사는 본래 한 뿌리였으며, 양자간에는 어떠한 신분적 우열이 없고 다만 그 사역하는 역할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와 목사는 동등한 존경과 대접을 받아야 하며, 성도들 또한 그와 같이 예우하여야 마땅합니다. 교회 성도들은 치리 장로든 교역하는 장로든 그들의 맡은 역할이 소중함을 알아 존경해야 합니다. 그들의 다스림과 섬김을 통해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하고 교회가 그 기능과 사명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존경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장로들, 즉 목사를 더욱 존경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의 중대함과 소중함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하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치리 장로는 물론이고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를 더욱 존경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스림과 가르침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돕고 다스리는 은사를 교회에 주셨습니다(고전 12:25). 만일 영적으로 잘 무장된 훌륭한 지도자가 교회의 여러 일들을 감독하지 않는다면 질서와 화평 대신 혼란과 불화만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직은 교회에서 필요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침 없는 다스림은 거의 아무 것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장하기 때문입니다(엡 4:11 이하). 그러므로 장로들은 본래 목사와 한 뿌리였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고, 목사의 말씀 사역을 중히 여겨 목사를 받들고 협력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야 하겠습니다. 장로들이 교회에서 이같이 겸손히 교회 섬김의 본을 보일 때, 그 권위의 존엄성이 높아지며, 성도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잠언 29:23에서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애를 얻으리라"고 하였으며,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마 23:12)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 성도는 이러한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의 생활에 책임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성경은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25:4)고 했습니다. 이는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다른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으로 해결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전도를 위하여 70제자를 파송하면서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레 19:13,눅 10:7)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교역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인 복음 전극의 사명과 성도의 영적 성장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가 오로지 영혼 구원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재정적 후원을 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요,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일을 단지 책임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옛날 찬란한 위용과 영화를 자랑했던 솔로몬 성전에서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이 그 성전을 굳게 받쳐 주었듯이(왕상 7:21), 우리의 교회에서도 한 뿌리인 장로와 목사 두 기둥이 교회를 받쳐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기둥이 건실하고 성도들의 존경과 보살핌을 받아야 교회가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로와 목사는 그 직분의 존엄성을 깨달아야 하며, 성도들은 장로와 목사를 존경하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3.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마지막으로 "경솔하게 아무에게나 안수하지 말라."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 쉽게 교회의 직분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앞서 디모데 전서3장에서도 능력이나 은사가 있다고 해서 "입교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쉽게 교회직분에 임명하지 말라고 권고하며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직분을 쉽게 맡았지만 그로 인해 교만해지거나 그로 인해 평판이 나빠진다든가 하는 경우에는 그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만 불명예스러운 것뿐 아니라 교회에도 불명예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교회 울타리 안으로 돌아오는 자에게 안수하는 일이 하나의 습관이 었습니다. 즉 "죄인이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보이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동안 그에게 안수하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죄를 뉘우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확실하게 보지 않고 경솔하고 쉽게 다시 교회 직분을 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교회에 돌아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자신의 참회가 참된 것이라는 것과 그에 합당한 삶의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우리 교회에서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교회를 떠난 지 오래되신 어느 집사부부가 다시 우리 교회에 입교했었습니다. 다시 입교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교회법을 무시하고 자신을 권사로 세우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고 다시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경원한다든가 의심과 불신하는 태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쉽게 안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그러한 사람이 속죄하고 재기하는 것을 돕는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의 성도의 교제는 어디까지나 거룩한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교회 직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친교라는 것은 죄를 뉘우치고 예수 앞에 돌아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속죄하고 새 사람을 입도록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아름다운 질서 속에 성장과 복음전파를 위해 직분이 주어지는 것이지 교인을 위해 직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질서를 세워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 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젊은이는 노인들을 애정과 존경으로 공경하며, 참과부를 부양하고 존경하는 구제의 질서를 세우고, 성도들 서로가 존경하기를 먼저 하되 장로들을 배나 더 존경하므로 섬기며, 교회 직분자들을 세우는데도 바르고 합당한 질서를 세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능히 감당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3. 교회임원의 자격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나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10)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11)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일을 버리는 자니라(디도서 1:1-16)

어떤 혁명가는 청년시절에 "주여,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중년에 들어서는 "주여,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 내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가서는 "주여, 나 자신만이라고 변화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했다고 합니다. 만일 그가 일찍부터 자기 자신의 변화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면 그는 정말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쓰임받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한 해 우리 기독교는 사회를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켜 사회를 더욱 더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무엇보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되어 지금까지의 비난과 비판의 대상에서 일탈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인류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와 소망, 용기를 주며, 불안과 공포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안함을 주며, 슬픔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기쁨과 치유함을 주며, 거짓에 농락당한 사람에게 참 진실과 진리를 가르쳐주며, 도덕과 윤리에 실패한 사람에게 참된 삶의 기준을 깨우쳐 주는 것은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영생, 구원인 것입니다.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희생케 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이 믿음으로 인도하고자 함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 여러 성도들로 하여금 직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도들은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믿음의 길로 인도해야만 합니다. 한 개인이나 나라 백성을 징계하시거나 채찍질하시는 등 형벌을 가하는 것은 구원을 위한 사랑의 배려인 것이지 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 교회에 파송한 목적 역시 그릇된 지도자들과 각종 사이비, 이단들로 혼란스런 교회를 바로 세워 그레데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인 것입니다. 바울 당시 그레데인만큼 평판이 나쁜 민족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역사는 "그레데인은 타고난 탐욕 때문에 끊임없는 언쟁과 분쟁을 일삼고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누구라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아주 교활한 민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지도자에, 기독교 신앙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각종 이단 사설들에, 그리고 물질 탐욕에 빠져 교활하기 그지없는 거짓을 늘어놓는 민족성 때문에 그레데 교회에 필요한 것은 교회 내의 바른 질서확립과 확고부동한 바른 신앙관이었습니다. 이에 가장 적임자로 파송된 사람이 바로 디도였습니다. 디도는 강인한 정신력과 불의에 굽히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어떠한 곤란한 형편과 문제들에 대해서도 잘 처리할 수 있는 능력있는 바울의 동역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디도에게 무엇보다 먼저 교회에 바른 지도자를 세워 그들로 하여금 믿음의 본이 되게 하여 교회 질서를 확립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난동하는 여러 가지 이단 사설들을 물리치며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여 그레데 사람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그레데 교회는 도덕적으로 혼탁한 헬라 문화와 믿음과 생활을 분리시켜 가정과 교회를 파괴시키는 영지주의와 유대 율법주의의 도전으로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성도들을 돌보고 바로 지도하여 가르치는 책임을 맡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교회 지도자 장로는 특별한 자격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진리를 가르치고 권면할뿐 아니라 거짓 교훈에 대하여 진리를 변호하여 수호해야 할 책임도 있으므로 진리의 말씀을 바로 알고 확신을 가지고 교회를 진리의 터 위에 견고히 세워야 합니다. 그레데인들의 영향으로 물질과 세상 권력이나 권위를 하나님 말씀보다 더 중하게 여겨 탐심에 빠진 성도들은 가정과 교회생활을 소흘히 했고, 진리나 구원에 뜻을 두지 않고 신앙이나 교회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이렇게 혼란케 만드는 무리들을 거짓 교사들로 부르며, 이들 가운데는 생활이야 어떠하든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며 믿음과 전혀 동떨어진 생활을 일삼게 하여 쾌락에 빠져 결국 자신과 가정을 파멸케하는 영지주의자들, 예수 믿는 믿음만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며 할례와 유대율법 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십자가의 구원을 부정하는 유대주의자들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과 교훈 등이 그레데 사람들은 물론 교인들의 바른 가치관과 신앙관을 붕괴시켜 성경에도 기록된대로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는 악평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회를 바로 세워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도력을 갖춘 교회 임원(장로 등)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빛 바랜 기독교가 되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소금이 제맛을 잃어 버리워 짓밟히는 것과 같은 기독교가 되지 않기 위해 자격을 갖춘 성도와 교회 임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집사, 권사, 장로 등은 교회 안에서 맡은 직임에 따라 구분되지만 교회 밖에서는 기독교인은 누구나 교회를 대표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 여러분 모두가 당연히 자격을 갖추어가야 할 것입니다.

먼저, 교회 지도자로서 장로는 특히 자신의 가족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련하여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칭찬받는 믿음의 가정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 중요성 때문에 칼타고 종교회의에서는 "감독과 장로와 집사는 그 가족 전체를 교회의 교인으로 만들기 전에는 임명되어서는 안된다"는 규정을 두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가정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의 자녀가 불신자거나 이교도이면 장로의 자격이 없습니다. 교회 임원이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신앙의 본이 되지 못한다면 그만큼 지도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장로 가족은 방탕하다거나 비난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방탕하다는 것은 생활이 무절제하며 사치와 낭비성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임원의 가정에서 사치와 낭비의 구석이 발견된다면 그만큼 그의 지도력은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임원은 그 누구보다도 절제하며 근검 절약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같은 생활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은 사치하면서 남에게 봉사한다고 하면 비난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경쟁적으로 사치스럽게 치장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교회는 그만큼 지도력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셋째, 장로는 제고집대로 하는 자여서는 안됩니다. 이런 사람은 편협적이고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비난하고 자기 방법 외에는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신앙에는 개의치 아니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신앙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같은 신앙이라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며 다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는 교회 직분에 전혀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넷째, 장로는 급히 성내는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한 마디로 성질 급한 것을 죽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질 급한 것도 문제이지만 노여움이나 분노를 마음속에 오래토록 끓이고 사는 것이 더 큰 불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교회 직분에 합당치 않습니다. 장로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고 관대하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섯째, 장로는 술을 즐기거나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성도의 몸과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거하는 성전과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몸과 마음에 술을 담거나 폭력을 휘드른다면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임원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성전처럼 거룩하게 보존하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전으로 인식되도록 해야 합니다.

여섯째, 장로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사해서 이득을 남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를 하거나 무엇을 하거나 떳떳하지 못하게 불법이나 부당거래하여 돈 벌지 말며 폭리를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를 장사 대상으로 삼는 교인들도 없지 않습니다. 교회 임원은 무엇을 하든지 그 직업이 무엇이든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교회 임원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장로는 나그네를 대접해야만 합니다. 나그네라함은 고아와 더불어 빈곤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어려운 이웃들, 고난받는 이웃들, 그들이 누구이든 항상 열린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는 생활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덟째, 장로는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사람들의 여론에 좌우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 지도자들은 국민들에 의하여 선출되므로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기 전에 백성들의 관심사와 여론을 살피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는 자신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확고한 소명과 믿음으로 그릇된 시류(時流)를 바로 지적하고 바로 이끌어갈 수 있는 사명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교회 임원은 세대를 분별하여 진리의 나팔을 불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교인들의 여론에 좌우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치되도록 해야만 합니다. 두려워할 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사람은 누구이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존중할 줄 알아야 진정한 교회 임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홉째, 장로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 예절과 문화를 존중할 줄 알며, 일상적인 도덕이나 윤리 이상의 법인 십자가의 사랑과 섬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장로는 어느 누구라도 섬길 수 있도록 하여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생명에 이를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교회 임원은 타종교인이나 무종교인들을 이방인으로 볼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임원의 자격은 기능이나 학술적 자격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과 성품으로서의 자격입니다. 예수의 인격과 성품이 곧 교회 임원이 갖추어 할 내용들입니다. 예수의 인격과 성품을 이루기 위해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밝히 깨우쳐 주시는 진리의 성령에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자신과 교회는 변화될 것이며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 백성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라 불린 간디는 인류를 파멸케 하는 것들 일곱 가지 가운데 하나는 "희생 없는 신앙"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위에 세워졌음에도,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 역시 100여년 전 수많은 선교사와 교역자들의 순교의 희생 위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모습은 "희생 없는 신앙"으로 일관하여 너무나 비대해지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희생 없는 신앙"은 곧 교회의 몰락을 예고하는 경고임을 깨달아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희생의 틀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십자가 희생이 없는 교회와 성도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명력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종교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희생적인 사랑과 섬김이 진리이며, 교회 임원과 성도가 따라야 할 길이며, 생명의 원천입니다. 참으로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지도자들과 더불어 성도들은 이 십자가의 희생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무서운 경고를 겸허하게 수용하여 희생적인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과 교회 임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4. 처음 사랑을 가지라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1-7)

1. 요한 계시록의 수신자인 일곱 교회는 역사를 통하여 앞으로 교회가 당면하게 될 전형적인 상황들을 대비하기 위해 특별히 선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는 당대의 교회들이었지만 또한 오늘날 우리 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보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보낸 계시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에베소의 시대적 정황을 파악해야만 합니다.

에베소는 로마로 가는 대로였으며, 아시아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아시아의 관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끊임없이 각 나라 사람과 각종 상품들이 흘러 오고 흘러 나가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아시아 최고의 부유한 도시가 되었으며, 각 나라의 문화와 문명, 각종 이교 사상과 신비주의 종교가 성행하는 "세계 최고의 허영의 시장"이라 불리웠던 곳입니다. 특히 에베소는 세계 7대 불가사의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아데미(다이아나)신전이 있는데 이 신전은 파르테논 신전보다 무려 4배가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아데미 신전에는 수천명의 남녀 사제들이 종사했었고, 다산을 기원하는 제사의식으로 여사제들은 매음행위를 하여 신성한 창부(娼婦)노릇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도피중인 범인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에베소는 또한 미신이 만연한 곳으로 이름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에베소 문서>라고 불리우는 부적은 만병통치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아이를 갖게 하고, 운동선수에게는 승리를, 여행자에게는 행운과 안전을, 사업가에는 성공을 보장했기 때문에 이것을 사기위해 세계 각지에서 에베소에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에베소는 각 나라의 범죄자들이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 몰려들었고, 각종 미신과 우상숭배에 따른 성적 타락과 부도덕이 넘실대는 곳이었습니다. 정신적, 영적, 도덕적 타락의 온상이며 모든 종교를 용납하여 종교박물관을 방불케하는 에베소에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에베소에 생명을 구원하는 거룩한 교회를 세운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하게 여겨질정도로 복음 전파에 불리한 조건들만 눈에 띄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에베소의 이 모든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하고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를 두고 P.C. 트렌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는 이보다더 좋은 땅은 다른 아무 곳에도 없다. 또한 여기처럼 깊은 뿌리를 내려서 믿음과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땅을 다른 데서 볼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처럼 기독교 신앙의 승리를 보여준 곳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에 교회를 개척하여 인근 지방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까지 간접적으로 전도하는 등 자신의 선교 절정기를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어 제3의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 이후에는 디모데가 이 교회를 관할하는 최초의 감독이 되었고 후에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이곳에 모셔 생활하다가 이곳에서 장사지냈다 합니다. 그만큼 이곳은 분명히 기독교를 대적하는 문화와 문명, 그 어떤 영적 세력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곳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복음 전도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다고 해도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 한 반드시 승리하여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2.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그 "그 행위와 수고"에 대해 칭찬받은 교회입니다. 여기 "수고"는 헬라어로 "고포스"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땀을 흘리기까지 일한다", "심신이 기진 맥진할 정도로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몸을 지나치게 아끼고 땀을 흘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칭찬받는 성도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심신이 기진 맥진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교회에 봉사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여 행위가 참으로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의 "인내" 또한 칭찬받은 신앙의 내용이었습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휴포모네"인데 고난, 환난, 손실을 씩씩하게 용기를 갖고 대항하여 그것을 은혜와 영광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환난은 인간 생활에 색채를 가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휴포모네" 즉 인내를 가지고 사는 기독교인은 그 당하는 환난과 고난을 인하여 예수 십자가를 통해 입혀주신 세마포 흰색이 더럽혀져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환난과 고난과 역경이 많다해도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회색분자가 되거나 아예 까만색으로 변질되어서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풀무에 단련할수록 정금이 되어 나오듯이 환난과 고난을 당할수록 더욱 더 순백의 광채를 발할 수 있어야 참된 교회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칭찬받은 것 가운데 또 하나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니골라 당'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로서 배교했던 니골라를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당시 만연했던 영지주의의 산물로 율법의 시대가 지났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으며, 육신은 악하고 구원받는 것은 영이기 때문에 육신으로 무슨 악한 짓을 범해도 영혼구원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치므로 극히 반도덕적, 비윤리적 생활을 했던 무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삼아 양심에 아무런 가책을 느낄 것 없이 죄악을 조장하는 이단 사상으로 교회를 파괴하려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니골라 당의 창시자 니콜라우스란 이름은 '백성'을 뜻하는 헬라어 '라오스'와 '삼키다', '없애다', '정복하다'는 뜻의 헬라어 '니카오'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해 "백성을 삼키는 자들"이란 뜻의 '니골라 당'의 실체가, 잘못되고 부도덕한 이단 사상의 가르침으로 백성을 삼키는 반기독교 집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계시록 2장 14절의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과 같은 무리들입니다. "발람"은 "삼키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발라'와 "백성"을 뜻하는 히브리어 '암'의 합성어로, "백성을 삼킨다"는 니골라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발람은 니골라의 다른 이름일뿐 아니라 구약에 실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직접 저주하지 않았지만 미디안 여인들을 미끼로 놓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음행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함으로 간접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망하게 만든 자였습니다.(민22-25장) 발람은 신약의 니골라였고 니골라는 구약의 발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이나 니골라의 교훈은 한 가지 이단에 대한 두 가지 이름이라할 수 있습니다. 발람의 시대에 일어났던 것이 요한의 시대에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이 오늘날에도 꼭같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밖에 있는 불신 무리들보다 교회를 더 어지럽히는 악한 자들로서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세력이었습니다. 교회안에 죄악을 끌어들이거나 교인들의 죄악을 눈감아 주거나 변명하거나 아예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방치하는 것은 건전하고 건강한 성도의 교제를 파괴하는 니골라 당의 무리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죄악을 무조건 용납하는 곳이 아니라 지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하여 교회의 성결을 보존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회개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3. 에베소 교회는 무역의 중심지에 위치하다보니 교회안에 뜨내기 신자들이 들끓었던 것입니다. 이들 뜨내기들이 교회의 자선과 사랑을 이용하여 교회마다 돌아다니며 성도들을 이용하여 돈을 모아 이들 중 일부는 상당한 재산을 긁어모아 호의호식하며 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무리들을 철저히 분별하여 교회 안에서 성도간의 교제를 금지시키거나 아예 교회 입교를 거절하거나 아니면 그 정도가 심하면 교회에서 아주 추방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입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뜨내기들을 분별하여 색출하고 각종 날뛰는 이단자들을 발본색원하다보니 사랑의 불이 식어진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잘못된 사람들을 일소하려던 열심, 교회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열심히 자칫 비판적인 신앙으로 기울었고 그러다 보니 사랑의 교제가 식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악을 용납하지 않고 교리를 수호하고 교회 정통 신앙을 지키려다 사랑이 식어지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정통주의는 생명력이 없는 껍데기만 남은 정통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단을 근절시켜려던 노력이 까다롭고 엄격한 정통주의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종적으로 수직적인 신앙은 좋았으나 횡적으로 수평적인 신앙을 등한시하므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차가운 이성은 차가운 가슴을 만들게 되기 쉬운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세워진 지 40여년이 지나자 성도들은 차츰 복음의 열정을 잃어 버렸습니다. 본문에 지적된 바와 같이 사실 에베소 교회는 진리에 대한 열심에 있어서 첫 사랑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바른 신앙이 있을지라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이 식어지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는 치명적인 결점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교회의 촛대를 옮기시고 말았습니다. 촛대가 옮겨졌다는 것은 더 이상 교회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만이 생명을 낳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내가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땀을 흘리며 심신이 기진맥진할정도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모든 환난과 고난을 용감히 견뎌내고, 어디 하나 나무랄데없이 정통신앙을 지키려 했었으나 그만 사랑이 식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의 촛대를 붙잡고 계신 예수께서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처음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세가지 단계가 있음을 본문을 통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책망만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곧 이어 그들에게 문제 해결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첫단계는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즉 신앙 생활 초기에 가졌던 뜨거운 사랑을 다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즉 현재 신앙생활의 모습이 처음에 가졌던 적극적이고 열성적이며 헌신적인 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돌이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신앙생활이 처음보다 진보하고 성숙한 모습이 없다면 이미 마음의 촛대가 불이 꺼져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집을 뛰쳐나간 탕자가 먼 나라에 가서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갑자기 아버지 집에서 누렸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잘못의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그것을 슬퍼하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결단을 말합니다. 탕자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충심으로 그것을 슬퍼하며 아버지께 가겠다는 결단이 곧 회개입니다. 회개하는데 가장 어려운 일은 죄와 허물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즉각적이고 단번에 이루어져야 하는 결단입니다. 탕자가 회개한 후에 곧 바로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던 것처럼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한 열매가 없으면 가라지 인생에 불과합니다. 변화된 행동과 삶을 통해 자신의 회개가 참된 것임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역사속에 우리 평강교회가 에베소 교회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며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면에서 아주 작은 일이지만 엊그제 교회에 보내온 한 통의 편지는 우리 교회가 처음 사랑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었습니다. 바로 0 0 자매로부터 보내온 편지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동희 목사님, 평안 하셨습니까! 부산에 0 0 자매입니다.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로 이렇게 컴퓨터 e-메일로도 안부를 전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한해를 고이 접어 주님께 드리며 한해의 끝이라는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부끄러움과 아쉬움만 남는 것 같습니다. 이 한해도 주님 앞에 드린 것은 너무나 부족한데 받은 은혜는 너무 많아 주님께 책망이나 받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굳은 팔을 오른손으로만 계속 쓰다 보니 예전부터 어깨에 통증이 있어 조금은 힘들었는데 갈수록 심해져 그나마 이 모습 안에서 병상에 있는 환우들께 편지 보내는 이 작은 일도 못하면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무슨 말을 할까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는데 어느 날 책을 보니 '음성인식' 소프트 프로그램이 있어 키보드를 치지 않고도 음성으로 워드 같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뻤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무언가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또 남에게 기쁨을 주고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나의 삶에 큰 기쁨이었기에 그 소망이 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른 것을 제쳐놓고 그 프로그램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노트북 용량이 모자라 실행이 안되어 혹시 업그레이드시키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불가능하면 그 용량에 맞는 중고 컴퓨터라도 알아 볼까 싶어 0 0 0집사님께 컴퓨터 구입한데 연락처를 물어 본다는 것이 이렇게 새 컴퓨터를 받게 되어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께 폐를 끼쳐 너무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얼마 전 목사님의 추수 감사절 설교 말씀 중에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바이올리니스트 펄먼의 이야기에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아 제 자신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펄먼이 "때로는 모든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도 제게 남은 것만으로 연주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께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라는 그 말에 나 또한 통증이 조금 덜한 왼손으로 할 수 있는데 까지 하지 못하고 나에게 처한 상황만 보고 남아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주님 앞에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목사님, 도심 속 콘크리트 벽 사이에 그 틈새를 뚫고 피어나는 작은 풀잎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연약해 보이는 풀잎이라도 하나님께서 다 뜻과 의미가 있어 존재케 한다는 생각에 연약하고 볼품없는 나의 삶일지라도 내게 주어진 삶의 몫에 감사하며 때로는 불편한 나의 육신 때문에 기대만큼 채워지지 않고 또 남들보다 빨리 달리지 못한 나의 삶일지라도 결코 초조해 하거나 내 발걸음을 아쉬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있는 그대로 주님께 드리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목사님, '음성인식'프로그램은 책을 보고 익히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분 집사님께서 오셔서 컴퓨터 놓을 책상을 조립하고 또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시고 하는 모습에서 울컥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 주신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께 어떠한 말보다 깊은 기도로써 감사함을 전합니다. 다가오는 거룩하고 복된 성탄절에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가정 위에 충만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샬롬! -부산에서 0 0자매- 》

"세계 최대의 허영의 시장"으로 군림하던 당대 아시아 최대의 항구 도시였던 에베소는 지금은 배가 닿을 수 없는 모래 해안선과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황무지와 폐허로 버려진 오늘의 에베소가 처음 사랑을 찾아가지 못하므로 "촛대를 옮기리라"는 예언의 성취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죄악된 세상을 이기는 길은 회개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촛대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길은 회개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했습니다. "생명 나무"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같이 에덴동산 한 복판에 있던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뱀으로 가장한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는 줄로 알아 그만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결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이들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여 화염검을 두어 그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기는 자에게는 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첫 번째 아담이 잃어버렸던 것을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으로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창세기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창조를, 요한계시록은 그 처음 땅과 하늘이 모두 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에덴 동산에 침투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범죄한 인간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형벌과 죽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에는 인간을 유혹했던 마귀와 죄와 사망의 영원한 멸망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창세기는 인간의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은 사망과 사단에 대한 정복과 회개와 사랑으로 세상과 죄악을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이켜보며 회개하는 성숙한 믿음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날로 더해가는 사랑이 충만한 성도와 교회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이 천사와 같은 여인을 잃게 되면 나는 미치광이가 되거나 일티시강에 투신하는 것,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네." 이것은 1856년 3월 26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친구 브란겔리를 통해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첫 사랑의 여인,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이 여인은 하급관리 이사예프의 아내로 일고여덟살된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폐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황제 타도 모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4년간 징역을 마치고 출옥하여 키르기스평원 부근의 자그마한 마을 세미팔라틴스크에서 군복무 중 이사예프 가족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사예프의 아내 마리아는 다정다감하고 정열적인 스물여섯살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죄수 신분으로 군복무중인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깊은 동정과 연민의 정을 보내었습니다. 4년간이 감옥생활에서 막 벗어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마리아가 보여준 따뜻한 친절은 그를 첫 사랑의 정열로 이끌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1년후 이사예프는 600km나 떨어진 곳으로 전근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넘볼 수 없는 첫사랑이었지만 이별해야한다는 사실에 비탄에 빠져 몸부림을 치다시피했습니다. 첫 사랑 마리아와 헤어져 있는 동안 수많은 편지들을 주고 받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위의 편지밖에 없습니다. 이사예프가 이사간지 몇 달만에 술로 인한 병으로 죽어버리고 마리아는 어린 아들과 남편이 남긴 빚덩어리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소식을 알게 된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불행한 천사 마리아를 구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심하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마리아를 돕고 정식으로 청혼하게 됩니다. 아이가 딸리고 폐병을 앓고 있으며 빚더미에 앉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사랑의 열정에 마리아는 결혼을 승낙하게 됩니다. 결혼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근무지로 돌아오는 도중 심한 간질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간질환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 날 처음 알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권이 되어 아내 마리아와 함께 페테르브르크로 돌아왔지만 마리아의 폐병은 더욱 악화되었고 경제사정도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블라디미르, 모스크바로 옮겨가며 치료와 요양을 하다가 1864년 4월 서른 여섯 살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그런데 마리가아가 모스크바에서 요양생활을 할 무렵 도스토예프스키는 수슬로바라는 스물한 살의 젊은 여성과 밀애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여인과 재혼한 후에도 마리아의 아들을 끝까지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마리아에 대한 첫 사랑은 이미 그 열정이 식어진지 오랬지만 자신의 의무만은 다했다는 변명일 것입니다.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등 대작들을 발표한 러시아의 대작가였지만 첫 사랑을 저버린 그였기에 뒷맛이 씁쓸하고 개운치않은 느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대부분 첫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지만 그 첫 사랑에 대한 추억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첫 사랑은 그저 추억으로만 간직되어져야만 하지, 첫 사랑을 찾으려해서는 피차가 망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을 첫 사랑으로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첫 사랑에서 멀어졌다면 회개하고 첫 사랑을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낙원을 이루며 사시기 바랍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5. 실상은 부요한 자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2:8-11)

심판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만을 받은 교회는 일곱개 교회 가운데 빌라델비아와 서머나 교회 뿐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악질적인 핍박과 로마 제국이 황제를 신격화하며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환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믿음의 정절을 지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칭찬받은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서머나의 형편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서머나는 '아시아의 꽃, 아시아의 면류관'이라고 불리울만큼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습니다. 현재 인구 20만을 갖고 있는 터키의 이즈미르(Izmir)가 곧 옛 서머나입니다. '서머나'라는 이름은 일상적인 향료인 '미르'(myrrh)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미르'는 천막에 쓰이기도 하고 시체 방부제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가혹한 핍박과 환난, 궁핍을 겪으면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맡겨진 복음전도에 충성을 다한 신실한 증인으로서 살아간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항기나는 향료, '미르'라는 것을 암시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서머나는 로마의 키케로가 "우리의 자랑 신실하고 가장 오래된 우방"이라고 평가할만큼 아시아의 어느 도시보다도 로마에 대해 눈에 띌 정도로 충성을 다하고 로마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신의를 지켜온 도시였습니다. 로마가 원정 전선에서 불리하게 몰려 로마군인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서머나 사람들은 자신의 옷을 벗어 전선에서 고생하는 로마 군인들에게 보내 줄 만큼 로마에 대한 대단한 경외심과 신의를 가졌었습니다. 그 결과 주전 195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로마신과 로마 여신을 위한 신전을 짓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서머나의 로마에 대한 충절은 고대 세계에서 유명했던 것입니다. 서머나는 문화와 지식, 예술이 뛰어난 도시, 아시아의 면류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유명한 운동경기가 매년 열릴만한 거대한 운동장, 웅장한 공공 도서관, 오데이온이라 불리우는 아시아에서 제일 큰 음악당 등을 갖춘도시로 당대 최고의 이교 문화와 문명, 장엄하기까지한 이교의 신전들이 즐비한 도시였습니다. 서머나 시민들은 이러한 서머나를 세계 최고의 도시로 자랑하며 서머나 시민이라는 자존심, 프라이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서머나에 상당한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을 본문 9절을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도시 미화와 발전을 위해 1만 데나리온(1데나리온은 일반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는 거액을 헌납할 만큼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머나 권력자들과 밀착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 도시의 유력인사도 상당히 많았었습니다. 오늘날도 세계 주요 국가의 정치 경제 등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무리들은 어김없이 유대인들인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는 말로 고발하며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핍박하는데 앞장서서 로마 당국을 충동질하고 정치 경제적으로 압제를 가하여 기독교인들을 환난과 궁핍으로 몰아갔던 장본인들이 바로 이들 서머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를 박해한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복음 전파로 유대교에 입교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 유대 회당으로 가지 않고 예수 믿고 교회로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정경유착을 통해 이룩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로마 당국을 충동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하여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는데 앞장섰고 기독교인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도시 유력자들을 선동하므로 기독교인들을 정치 경제적으로 압박하고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이교 세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구실로 삼아 핍박을 가했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나의 몸이요, 이것은 나의 피"라는 성만찬 말씀을 왜곡하여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식인종이라는 소문을 퍼트려 기독교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둘째로, 기독교인들이 예배 후에 공동 식사를 합니다. 대부분 교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그중에 조금 넉넉한 몇몇 교인들이 예배 후에 굶주린 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위해 음식을 마련해 왔습니다. 이같은 공동식사는 오늘날도 대부분 교회에서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랑의 애찬(愛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애찬(愛餐)"이라는 말을 무슨 성적 잔치를 벌이는 것처럼 떠벌려 부도덕하고 정욕적이며 방탕한 모임이라고 규정하고 박해의 구실로 삼았습니다. 셋째로, 가족 중 누가 신자가 되면 나머지 안 믿는 가족과 분리되는 것으로 곡해하여 기독교인들은 가정을 파피하고 가족 관계를 악화시킨다고 비난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 기독교인들은 가정 파괴를 선동하는 무리들로 몰아부쳐 핍박을 가했던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태복음10:34-37)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검을 던지러 왔노라>는 말씀은 가정을 파괴하고 세상을 죽이기 위한 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죄로 병든 세상을 수술하여 살리기 위해 <검을 던지러 왔노라>는 뜻입니다. <검을 던져야> 할 곳이 어디 이 사회뿐이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검을 던져야>할 것을 말합니다. 어미가 모르는 아비의 죄, 아비가 모르는 어미의 죄, 어미가 모르는 딸의 죄, 딸이 모르는 어미의 죄, 며느리가 모르는 시어미의 죄, 시어미가 모르는 며느리의 죄, 이 죄악들이 예수께서 던지시는 검으로 수술되지 않으면 몽땅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악으로 서로 원수가 되기 전에 예수의 검으로 수술되지 않으면 피차에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우리네 가정이 검을 던지지 아니하면 안될 만큼 심각하게 죄로 병들어 가고 있음은 누구나 다 하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들 가정은 대부분 온갖 방탕과 음란, 사치와 허영, 탐욕과 정욕, 그리고 각종 우상숭배로 심각하게 병들어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머나 당시에도 그 형편이 마찬가지였음에도 회개하기는커녕 주어진 말씀에 말꼬리잡아 박해의 빌미로 삼았던 것입니다. 넷째로, 당시 이교들과 이방인들은 기독교를 무신론자라고 비난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처럼 신상도 없이 예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기독교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므로 정치적으로 불충성하는 잠재적 혁명가로 그냥 내버려두면 아주 위험한 집단이라며 몰아세웠던 것입니다. 여섯째로, 기독교인들은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베드로후서3:10-13)는 말씀에서 보듯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여 방화자로 몰아쳐 화재만 발생하면 기독교인들을 의심하고 기독교인 소행으로 소문을 퍼트려 핍박을 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사단의 회"라고 규정한 유대인들의 악랄한 박해 선동과 그 선동에 놀아난 로마 당국의 핍박, 그리고 이교도들의 터무니 없는 왜곡에 따른 온갖 박해 구실로 인해 로마 권력의 칼날 앞에 서머나 교회는 엄청난 환난을 당했고, 그 권력에 빌붙어 먹고 사는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의 끈질긴 박해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재산이 몰수되거나 강탈당했고 생계마저 어려운 궁핍에 허덕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머나 교회가 겪고 있는 "환난과 궁핍"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시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시므로 핍박자들의 허상과 핍박받은 성도들의 실상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핍박받는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그 자체였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핍박으로 인해 "환난과 궁핍"한 가운데 살았다는 것은 어떠한 핍박과 박해에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켰으며 그 신앙생활이 깨끗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인물이 서머나 교회 감독인 폴리캅이었습니다. 그는 "환난과 고난을 받으나 두려워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을 다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된", 기독교 순교사의 교과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주후 155년 2월 23일 토요일에 순교당했습니다. 그 때는 운동경기로 인파가 들끓고 있었습니다. 군중은 모두가 흥분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신론자들을 없애라! 폴리캅을 찾아라!"고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물론 그는 피신할 수 있었지만 이미 자기 머리밑의 베개가 불타는 환상을 꿈에 보았고 그 꿈 후에 그의 제자들에게 "나는 산 채로 불에 타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보아 자신의 순교를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은신처는 고문에 못이겨 자백한 한 어린 노예에 의해 밝혀졌고 당국은 폴리캅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폴리캅은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에게 음식을 주고 원하는대로 다 주라며 선대할 것을 말하고, 그 동안 자기는 마지막 한 시간의 기도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체포 책임자까지도 폴리캅이 죽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만큼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그리스도의 향기였습니다. 그래서 시내로 들어가는 도상에서 폴리캅에게 "가이사가 주시요!라고 딱 한번만 말하고 그에게 제물을 드리고 죽음을 면한다고 해서 나쁠 것이 무엇입니까?"라며 사는 길을 택하라고 간곡히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주님이시라는 확고한 신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가 원형극장안에 들어섰을 때 하늘에서 "폴리캅아, 굳세어라. 그리고 남자답게 싸워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지방 총독은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주하고 가이사에게 제사를 드리든가 안 그러면 죽음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폴리캅은 정중히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했습니다. "86년 간 나는 그리스도를 섬겨왔는데 그 동안 단 한번도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부인하거나 섭섭하게 하지 않았으니 내 어찌 나를 구속해주신 내 왕, 내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며 욕하겠소?" 그러자 총독이 그를 불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폴리캅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잠시 타다가 곧 꺼져 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나, 이는 당신이 다가올 심판날과 영원한 형벌에 악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불을 알지 못함이요. 무엇 때문에 지체하는 겁니까? 자 어서 와서 하고 싶은대로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폴리캅은 박해자들까지도 폴리캅의 인물이 아까워 살기를 간청했으나 그 마음이 변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군중들은 목공소와 목욕탕에서, 태워죽일 나무를 가지고 떼거리로 몰려 들었습니다. 이러한 일에 그 누구보다 앞장 섰던 무리들은 예수께서 "사단의 회"라고 불렀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핍박자들이 그를 화형대에 묶으려 들자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라. 불을 견디어내게 힘을 주신 그 분이 나에게 이 불길 속에서도 너희들이 못으로 꼼짝 못하게 박아놓은 것이 없을지라도 나로 하여금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게 하여 주실 것이요"라며 묶을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폴리캅을 느슨하게 묶은 채로 불을 질렀습니다. 그 때에 폴리캅은 다음과 같은 그 유명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이 시간에 영과 육이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기 위하여 순교자의 반열과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리고 오늘 주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통해 모범을 보이시고 이미 저를 위해 하늘 길을 예비하심을 찬양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나이다....아멘.》

이상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다음과 같은 있음직한 순교사화도 있습니다. 뜨거운 불길이 폴리캅을 덮쳤지만 그 불길로는 폴리캅을 죽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형 집행관이 칼로 찔러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형 집행관이 폴리캅에 칼을 찌르자 그 불길속에서 비둘기 하나가 나왔고 이어서 피가 어찌나 많이 나왔든지 불이 다 꺼지고 모든 관중이 놀라면서,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저렇게 다르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폴리캅은 서마나에서 순교당했습니다. 그의 순교는 믿음의 정절을 끝까지 지킨 순교요 오직 예수께 대해 죽도록 충성한 순교였습니다. 서마나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그 모든 환난과 궁핍을 극복하고 믿음을 지키고 칭찬만을 받은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동족의 핍박과 로마 제국의 박해가 제아무리 극심하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사랑을 저버리지않고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갔던 순교자들이야말로 참 생명의 길을 선택한 자들인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를 돌아보며 여러분은 지난 한 해 동안 믿음의 정절을 지켜왔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죽도록 충성을 다해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2002년 새해를 맞이하기 전 우리는 다시금 마음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머나 교회가 당한 극심한 고통과 환난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친히 그것들을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8절) 이로 말미암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부분은 없습니다. 도리어 성경은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핍박을 받으며 "환난과 궁핍"을 당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것, 믿음의 정절을 지킨다고 하는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충성을 다 한다는 것에는 환난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고, 예수 처럼 살며, 예수를 따라 가는 것은 '베드로처럼 <배와 그물과 부친까지도 모두 버려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예수를 따라 가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고자 했던 무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하셨습니다. 예수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이 없어 보이지만,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었고 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라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지만", 그가 채찍에 맞으며 가시 면류관과 창에 찔리고 상하며 십자가에 고난받아 죽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죄악에서 구원함을 받아 평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으로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기 위해서요, 그가 약하게 되심은 우리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요, 그가 징계를 받아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게 되심은 세상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서머나의 유대인들처럼 권력에 빌붙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여 온갖 특혜와 부귀영화를 누린다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실상 사단의 졸개들이며 모든 것을 태워버릴 영원한 불못 구덩이에 들어갈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처럼 가난한 자들을 부요케 하고, 병든 자들을 강건하게 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며, 갇힌 자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고 병든 자들과 그 아픔을 함께 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갇힌 자들처럼 사는 사람은 "실상은 부요한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영광스런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예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며, 세상을 다 잃는다해도 예수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라는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칭찬하신 것은 아시아의 면류관이라 일컫는 서머나 도시, 최고의 문화와 문명 시설들을 자랑하며 인간을 신격화하여 황제숭배에 앞장 서는 그 서머나 도시가 아니라, 그러한 도시 속에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어떠한 핍박과 환난, 궁핍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충성을 다한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서머나 시민됨에 자긍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예수 믿고 하늘 나라 시민됨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몇 천억짜리 월드컵 축구 경기장을 10개나 가지고 있고, 설사 세계 최고의 문화와 문명을 자랑하는 도시나 나라에 산다고 해도 그것을 긍지로 여길 것이 아니라, 비록 그런 도시에서 믿음의 정절을 지키고 오직 예수께 죽도록 충성을 다하는 신앙생활 때문에 세상에서 "환난과 궁핍"을 당한다해도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실상은 부요한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6.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으라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2:12-17)

어떤 청년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주례자 앞에서 신부입장을 기다리고 있던 신랑이 신부입장 결혼 행진곡이 한창 울려 나오는데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내 식장이 소란해졌고 주례 목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축하객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30분이 족히 지나서야 신랑이 헐떡거리며 돌아왔는데 얼굴과 예복이 온통 물에 젖었고 게다가 검뎅이 칠로 뒤범벅이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주례를 계속해 주시지요?" 그 청년은 죄송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주례목사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신랑은 어디를 갔다왔습니까?" "목사님, 저는 소방수입니다. 신부의 결혼행진곡이 막 울려 퍼지려는 순간 화재 싸이렌이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서 불을 끄고 지금 달려오는 길입니다." 신랑의 이 말에 남은 축하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정말로 책임감이 강한 충실한 소방수라며 칭찬해 마지 않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되려면 자신에게 맡겨주신 위치를 충실히 지키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는 예수의 충성된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칭찬받은 것은 신앙생활이 극히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아 믿음을 저버리지않고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있던 버가모(pergamos)는 20만권 이상의 양피 두루마리 도서를 간직한 정도로 세계적인 큰 도서관이 있는 유명한 문화중심도시이며, 로마 총독이 주재하는 권력과 정치의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황제숭배의 본거지이며 제우스, 아테네,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우스 등의 이교 신전이 즐비했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치료와 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에는 뱀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했었는데 이는 뱀을 숭배하면 각종 질병이 낫는다는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뱀은 사단의 상징이기 때문에 본문에서 이곳을 '사단의 위가 있는 데'(13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버가모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이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버가모는 사단의 지배력이 가장 강한 곳이며 그만큼 사단의 권위가 최고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버가모 교회 교인들은 싫든 좋든 기독교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했고, 그렇다고 해서 그 도시를 벗어나 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는 사는 곳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다해도 그곳이 예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 파송받은 곳이라는 믿음과 사상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는 현실도피가 아니라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거나 그 환경에 좌우되는 생활이 아니라 죄악의 환경을 극복하고 변화시켜나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인 것입니다. 간혹 지금 사는 곳보다 신앙생활이 쉬운 곳, 그리고 전도가 훨씬 용이한 곳에서 생활하면 신앙생활도 복음 전도도 월등히 나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않습니다. 어떤 예수 믿는 청년이 모 회사에 다니는데 그 회사 분위기가 신앙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않고 회사원들에게 복음 전도도 쉽지 않는 곳이어서 이곳보다 규모는 작아도 기독교인 사장에 대부분 사원들이 기독교인들인 작은 회사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자신의 모든 생활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하시는 기독교인의 삶은 이 청년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환경과 직장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가 힘들고 어렵다고 그곳을 벗어나 도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러한 환경과 직장일수록 더욱 더 그곳에 머물면서 그곳 환경과 직장을 복음으로 정복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여 살라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희생을 각오하고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고 그곳을 복음으로 정복해야하는 사명을 지닌 것입니다. 기독교가 초대교회부터 신앙생활과 복음 전도의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도피해버렸다면 지금의 기독교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버가모는 황제숭배와 각종 이교숭배, 우상숭배 등 사단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가모 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며 충성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았다"는 말은 어떤 이교세력과 우상숭배세력의 도전과 핍박에도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고 예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이름을 끝까지 증거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순교자 안디바는 터툴리안의 말에 의하면 놋쇠 가마에 서서히 구어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예수를 증거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 사실을 알고 그에게 "충성된 증인"이란 예수 자신의 칭호을 주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 이름을 굳게 잡았을 뿐만 아니라 맡은 일에도 충성을 다했던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널리 알려진 존 와나메이카는 세계 주일학교 운동에 크게 기여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백악관에서는 신망이 두터운 그에게 장관이 되어 주기를 간청했으나 그는 정부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관이 되면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며 사양했습니다. 그는 "내가 장관이 됨으로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고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만약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에는 내 고향 필라델피아로 가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면 장관이 되어도 좋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그래도 좋다고 승낙하여 그는 장관이 되었습니다. 장관 직책이란 놓쳐도 되지만 주일학교 교사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직책은 결코 놓쳐서는 안될 너무나 소중한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미국의 장래를 위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중요시했던 미국의 주일학교가 있었기에 오늘의 미국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어떤 유혹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맡은 일에 충성된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충성된 증인이 되어 예수의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무리들 때문에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간단히 말하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과 유별나게 살지 말고 조상적부터 지켜져 온 관습이나 도덕, 풍습이나 윤리를 따른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을 올린다고 그게 뭐 잘못된 것이냐는 것입니다.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을 올림으로 자손들이 잘 되기를 빌며 자손들로 하여금 불효를 막고 부모를 잘 섬길 수 있도록 하며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자는 것인데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언뜻 들어보면 참으로 좋은 취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상숭배를 통해 후손들이 잘 되기를 비는 것 자체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자손들로부터 숭배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후손들의 안위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에 들어갔거나 아니면 지옥에 떨어졌기 때문에 제사상 받아 먹으러 올 수도 없고 자손들의 안위를 지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상을 차려놓으면 조상의 혼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이 얼싸 좋다하고 찾아와 숭배를 받기 때문에 결국 귀신 숭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상을 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우애하고 부모에게 공경하는 것도 주 안에서, 즉 하나님 말씀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이 세상 풍습이나 관습,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거나 격리되어 살라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경멸하거나 증오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도덕이나 윤리 등 세상 사람들이 사는 표준보다 더 나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일껏 제사상 차려 놓고 귀신들을 불러들여 부모공경, 형제우애 운운하므로 윤리 도덕을 귀신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말고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므로 윤리 도덕을 하나님 수준으로 끌어 올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세상 수준으로 끌어내려 세상 풍습과 관습을 따르게 하지 말고, 세상의 수준을 금세와 내세에 확실한 약속있는 기독교 수준으로 끌어 올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은 한 마디로 세상에 적당히 타협해서 쉽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버가모 교회 안에 일부 성도들에게 "회개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검은 심판의 칼인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검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6:17)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삶에 잘못과 죄악을 깨우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삶을 판단할 수 있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신앙생활 내용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 수준에 살고 있다면 과감하게 살던 방식을 말씀의 칼로 절단하여 버리고 회개하여 새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않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므로 예수 이름을 더럽히면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검은 심판의 칼이 되어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아 신앙의 성결을 지키며 주어진 직분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족제비과의 어민(ermine)이란 동물은 그 털이 순백이어서 비싼 털옷의 장식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어민은 자기의 털을 깨끗이 간수하는 것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깁니다. 이 본능을 이용하여 사냥꾼들은 어민이 사는 곳의 출입구에 더러운 물질을 발라 놓습니다. 어민은 오물이 없는 다른 쪽 입구에는 사나운 사냥개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털을 깨끗이 간수하기 위해 깨끗한 입구로 나온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몸을 더럽히느니 죽음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세상과 타협하여 예수 이름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예수 이름을 굳게 잡고 죽음을 택하는 순교자의 성결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죽기까지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충성된 증인으로 산 성도에게 예수께서는 "감추인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리라"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감추인 만나"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할 때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때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감추인 만나"는 먹어서 죽지않고 영생하는 거룩한 생명의 양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는 초대교회 당시 연회 잔치 초대권으로 <텟세라>라 불리우는 흰 돌을 주는 풍습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 텟세라, 즉 흰 돌을 가진 사람만이 그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흰돌을 주시겠다는 것은 장차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할 권리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시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받은 자의 이름을 새기는 것으로 이제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사도 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고백한 것처럼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를 맛본 자외에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의 보증으로 주신 성령체험을 통해 여러분의 이름이 흰 돌 위에 기록된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불레셋 장수 골리앗이 칼과 창과 단창으로 이스라엘의 군대를 치러 나올 때 이에 맞선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 곧 적장 골리앗이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치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간단히 쓰러트리고 승리했습니다. 과연 다윗의 말대로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며 그 이름, 오직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세상 끝날까지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모든 것을 놓친다해도 예수 이름만은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세상을 다 얻어도 예수 이름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리친 이후 다윗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다 겪으면서 한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놓쳐본 적이 없습니다. 인류가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아야 할 이유는 "예수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4:12)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고 했습니다. 세상이 골리앗처럼 우리 앞에 서있을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으시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7. 음행하지 마라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18-29)

1. 두아디라는 소아시아 일곱 도시 중 가장 작고 이름없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직조업과 염직업 등이 성행하는 상공업중심 도시로 각종 조합(guild)이 발달했었습니다. 직공들이나 상인들이 결속해서 만들어진 조합은 막강한 단결권 행사로 상권을 장악했고 그 영향력은 종교까지도 좌지우지할 정도였습니다. 어떤 시민이든 그 조합에 가입하지 않고서는 상업과 공업에 종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었습니다. 당시 조합원들은 단합된 모습으로 이교 신전에 모여 소위 회식(공동식사)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식에 나오는 음식들이 모두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회식은 과음과 풍기 문란의 기회가 되어 대부분 조합원들간에 성적 타락을 조장했습니다. 당시 이렇게 막강한 조합세력은 교회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므로 미약한 교회는 이 조합과 충돌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 신자들 역시 두아디라에 살면서 그 지방 조합의 세력을 벗어나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시 조합 세력의 관례를 따르지 않게 되면 그는 사회에서 고립되고, 조합원의 귄리와 이익까지 배당받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다른 도시들처럼 황제숭배가 강요되지도 않았고 아폴로 신전외에는 다른 이교신전이 없었으나 그대신 조합 세력이 막강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있는 두아디라 교회를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은 불꽃같고 그 발은 빛난 주석과 같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두아디아 교회의 죄악상을 꿰뚫어 보시는 모습과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어김없이 짓밟으시는 준엄한 심판의 발을 표현한 것입니다. 황제숭배나 이방종교의 핍박이 없었음에도 교회 내부에 침투한 죄악을 좌시하지 않으시고 회개치않으면 이를 반드시 철저히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보신 것은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이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이란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인내로써 섬긴 것들"을 말합니다. 여기 사랑을 믿음보다 앞세운 것은 두아디라 교회의 포용주의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사랑을 위주로 할 때 교회는 비진리까지 포용하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 곧 진리에 대한 믿음을 근본으로 해서 사랑이 그 포용력을 가질 때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여 포용할 수 있는 것인데 두아디라 교회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이란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신본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라야 참된 것입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을 앞세우다 믿음을 소흘히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두아디라 교회는 진리의 터전위에 확고하게 서지 못한 상태에서 포용주의의 사랑만을 위주로 활동을 하다가 그만 비진리 곧, 이세벨같은 이단까지도 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 것보다 나중 행위가 더 많았다'는 칭찬을 받아 에베소 교회와는 대조적으로 처음 사람보다 나중 사랑이 더 열렬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지나친 포용주의의 결과 정통교리를 상실한 사랑이 되고 말았습니다.

분재(盆栽)라는 것이 있습니다. 큰 나무를 작게 하여 화분에 가꾸는 기술을 말합니다. 미국 사람은 이것을 '난쟁이 나무', dwarf tree라고 부릅니다. 느티나무처럼 엄청나게 커지는 나무도 30∼45cm 정도 크기의 난쟁이로 만듭니다. 그 방법은 간단한데 곧은 뿌리, 즉 주근(主根)을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나무는 작은 표면의 잔뿌리 즉 세근(細根)으로 연명해야 하기 때문에 그 결과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란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근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주근이 되는 믿음이 확고한 진리의 터 위에 세워지지 않고 아무리 많은 사랑의 봉사를 했을지라도 그것들은 세근에 지나지 않아 진정한 영적 성장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3. 두아디라 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확고하게 세워진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고 말았습니다. 이세벨은 그녀의 사상과 활동성격이 구약의 실제인물 이세벨과 같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구약의 이세벨처럼 악명 높은 여자는 드물것입니다. 이세벨은 시돈 왕 에드 바알의 딸로서, 이스라엘 왕 아합의 왕비가 된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가 시돈에서 시집올 때 자신의 나라 신, 바알을 가지고 들어와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바알을 숭배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알종교의 부도덕한 생활을 퍼뜨리고, 바알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까지 따라 들어오게 하여 그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바알은 농업 신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남녀사제들끼리 혼음을 행했고,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기도 하고, 제사의식으로 춤을 추며 몸을 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바알 숭배는 자연히 이스라엘의 도덕을 타락시키고 종교를 더럽혔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에 바알 숭배의식을 혼합하여 종교의식을 갖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응하지 않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죽였고 자기 식탁에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같이 하는 등 각종 특혜를 베풀었습니다. 이세벨은 이런 바알 종교의 대표적 악질에 속하는 여인으로 <음행과 술수>의 대명사로 불리웠던 여자였습니다. 이세벨은 분명 이스라엘 종교를 타락시킨 부도덕한 음녀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은 교회를 타락시킨 음녀의 세력을 합니다. 이세벨같은 여선지자의 음행과 술수에 넘어가 상당수 교인들이 행음과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세벨은 에베소교회와 버가모 교회를 미혹했던 또 하나의 발람이었고 니골라였습니다. 계시록 2장에 있는 "악한 자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 "니골라당",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이세벨" 등은 모두가 영지주의 이단사설로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려는 한 통속의 음녀 세력입니다.

특히 두아디라의 음녀 이세벨은 조합의 막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두아디라 교인들을 협박하다시피하며 기독교인이라해서 조합에 가입하지않으므로 스스로 자기 사업을 망칠 필요가 무엇이며, "우상은 너희 기독교의 말대로 아무것도 아닌데" 우상의 제물을 먹는 회식에 불참하므로 따돌림당할 필요가 무엇이냐고 유혹했습니다. 이세벨은 세상과의 타협을 최상의 처세술과 미덕으로 가르치며, 그렇게 하면 교인들도 많아질 것이고, 돈 많이 벌어 교회 일도 많이 하면 누이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냐며 적극 조합에 가입하여 조합원들과 행동을 같이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교회는 겉으로 볼 때 교인들이 차고 넘치며 교회재정이 막강해져 교회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이세벨같은 음녀의 세력이 조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더럽혀 결국 교회를 파멸케 하려는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는 여기에 그치지않고 음행 등 온갖 죄악을 선동했습니다. 사람이란 무슨 죄이든 다 지어 보아야 하며, 죄를 경험해 보지 않고 깨끗한 영혼을 지닌 사람보다는 온갖 죄를 다 짓고도 그 영혼이 깨끗한 사람이 더욱 온전한 사람이라며 우상숭배와 음행을 선동했던 것입니다. 쾌락에 철저히 자신의 몸을 맡기면서도 그 영과 혼은 쾌락에 물들지 않는 사람, "사단의 깊은 것"까지도 체험해 본 사람이, 고도의 종교적 성숙한 인간이 될 수있다라고 가르치며 한번쯤 철저하게 쾌락과 타락에 빠져보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두아디라 교회는 이단에 물든 정도가 버가모 교회보다도 훨씬 심했습니다. 버가모 교회엔 소수가 그 교훈을 따르고 있었으나 두아디라 교회는 이미 전 교회적으로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에 넘어갔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단에 넘어간 무리들이 소수였으나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의 교훈에 물들지 않은 자들이 소수에 불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두아디라 교회가 번성하는 것 같았으나 실제로 번창한 것은 음녀 이세벨을 따르는 무리들만이 번창한 것이고,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믿음을 더럽히지 않은 성도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세벨은 교회보다 자기 사업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 말씀보다 사업적 성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 것을 두아디라 교회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교회가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업이 번창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세상의 경제적 도움이나, 세상의 교훈이나 사상 등을 받아드리거나 지원을 받아드리게 되면 이미 그 교회는 음행하는 것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설사 교회가 부흥되고 성장하며 번성한다해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음녀 이세벨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음녀 이세벨의 목적은 교회로 하여금 간부(姦婦)가 되게 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상부상조하는 기관이 아니라 세상을 예수 이름으로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4. 이세벨의 교훈에 물들어간 것을 행음과 간음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신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긴다."(출34:15)라고, 신약시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을 대적하는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마12:39) 그러므로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럽히는 것으로 행음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세상과 벗하는 사람들을 "간음하는 여자들"로 표현하며, 세상과 벗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원수됨을 알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밝히는 세상은 "큰 성 바벨론, 귀신의 처소,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계17,18장)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바는 교회를 세상과 마찬가지로 더럽히는 것이지 교회가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원하는 바는 교회가 자기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이 원하는 바는 이기적인 사랑이지 십자가의 희생적이며 거룩한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은 십자가의 거룩한 사랑을 싫어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바는 자기가 주인 노릇하는 것이지 예수가 주인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여 하나님의 백성됨을 싫어합니다. 세상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 앞에 자기 뜻과 생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아를 아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며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은 교회에 그냥 다니면서 세상이 원하는대로, 세상 사람 사는 방식대로 살면 돈도 제법 벌 수 있고, 출세도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교회에 많은 봉사도 할 수 있어 피차에 좋지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교훈에 따르면, 이방 종교를 포용력을 가지고 교회가 수용함으로 이방인들을 훨씬 더 쉽게 교회로 이끌수 있을 것이고, 교회에 대한 핍박이나 환난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초대교회 전체가 이런 이세벨의 교훈을 받아들였다면 기독교는 당시 너저분한 종교로 끝장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그 생명력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 것은 예수 외에는 구원받을 다른 길이 없다는 것, 예수 외에는 다른 진리가 없다는 것, 예수외에는 생명이 없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인생이 가야할 길이요, 살아야 할 진리요, 예수만이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외에는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리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이제 여러분은 하나만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세상 신을 섬기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과 사랑을 보여주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들이 다 우상숭배에 빠진다해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며 분명한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수24:14,15)

모든 교회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중심과 사상까지도 훤히 들여다 보시고 계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이세벨의 교훈을 용납하지 아니하며 믿음을 굳게 잡은 성도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 권세를 주어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2:8,9을 인용한 것인데, 철장 권세로 질그릇을 깨뜨린다고 해서 열방들을 때려부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통치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리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깨끗하게 지킨 자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약속은 새벽별을 주리라는 것입니다. 새벽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 끝날까지, 아니 영원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될 것이며, 예수께서 결코 그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입니다. "질그릇을 깨뜨리는 철장권세", 즉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권세"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은 것은 오직 세상으로 더불어 음행하지 않으며 하나님 뜻대로 사는 성도들에게 주어는 축복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새벽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의 신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신랑되시는 예수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음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할 수 있는대로 교회와 세상을 더럽혀 멸망케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더럽혀진 세상 인생들을 십자가의 피로 깨끗이 씻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 세상에 오셨고 그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되시는 성도로서 음행하였거든 회개하시고 마음과 뜻을 다해 오직 예수만을 사랑하는 정결하고 거룩한 주님의 신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은 어떠한 세상과의 타협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과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켜며 사는 성도가 되어 "질그릇을 깨뜨리는 철장권세와 새벽별"을 받으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8. 깨어 있으라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1-6)

마틴 루터는 어느 날 희한한 꿈을 꾸었습니다. 이 꿈은 종교 개혁의 불을 당기려는 그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사탄이 기독교인 전멸 작전을 펴고 부하들로부터 작전 보고를 받는 내용의 꿈이었습니다. 사탄의 부하 하나가 이렇게 보고합니다. "수령님, 저는 사막을 걸어가는 예수쟁이들에게 굶주린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 앞에서도 평화스럽게 기도를 하더군요" 다른 부하가 또 보고합니다. "저는 바다를 항해하는 예수꾼들에게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암초에 걸려 배가 파선당해 죽어가면서도 찬송을 부르더군요" 그러자 또 다른 부하 하나가 아주 특이한 보고를 합니다. "저는 어느 한 교회를 찾아가 10일 동안 모든 일이 잘 되고 평안하게 만들어 주었더니 그들의 육과 영이 완전히 썩어버렸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촛대로 상징되는 일곱 교회와 일곱 별로 상징되는 일곱 교회 사자들을 붙드시고 인류 구원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시지만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 교회에 붙은 생명의 불을 끄고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생명의 불이 꺼진 유명무실한 교회가 되게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주요 방법이 교회로 하여금 무사안일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가 있었던 사데는 부강함과 지형적 난공불락의 성벽을 자랑하며 무사안일에 빠져 결국 두 번씩이나 함락을 당하고 로마제국의 경제적 지원으로 어느 정도 도시 모습을 찾았지만 이미 퇴폐하고 죽은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데는 BC 700년경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루디아 왕은 찬란함과 모든 위엄과 거의 무한한 부요함속에서 나라를 통치했었고 헬라 사람이 두려워할 정도로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고도 450m에 위치한 사데는 지형적인 난공불락의 성을 자랑했고, 크뢰수스 왕이 통치할 때는 역대 왕중에서 가장 국력과 문물의 황금시대를 구가했었습니다. 그 때는 부요함과 화려함, 웅장함과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사데는 페르샤와의 전쟁을 시작으로 종말을 당하게 됩니다. 페르샤 왕 싸이러스가 사데 성을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데 왕 크뢰수스와 사데 사람들은 난공불락의 성벽을 믿고 적군의 포위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싸이러스는 14일간의 포위 끝에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누구든지 난공불락의 사데 성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에게는 특별상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히에로에데스라는 군인이 성벽의 발포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사데 병사 하나가 실수해서 철모를 성벽밑으로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찾으려고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히에로에데스는 성벽에 오르는 작은 틈바구니를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페르샤 군사들이 그 바위 틈바구니로 기어올라 성벽 발포대까지 올라갔지만 보초병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데 성 사람들은 발포대는 보초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모두 철수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데 성은 이렇게 지형적 이점만을 믿고 무사안일에 빠져있다가 결국 무기력하게 함락되고 퇴폐의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 200년이 지나서 사데는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하에 희랍 문화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사데 지역은 안디오쿠스가 통치했는데, 그의 라이벌 아케우스가 이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다 난공불락의 사데 성으로 피신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안디오쿠스는 1년간이나 사데 성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라고라스라는 한 군인이 과거 페르샤 군사 히에로에데스가 발견했던 그 성벽 틈바구니를 또 찾아냈던 것입니다. 곧 이어 밤을 이용해 특공대원들이 성벽 틈바구니로 침투했고, 사데 사람들은 과거의 교훈을 까맣게 잊고 보초 하나 세우지않고 모두 깊이 잠들어 있다가 또다시 함락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이 후 로마가 사데 성을 지배하며 로마황제 티베리우스는 관대하게도 5년간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었고, 사데의 재건을 위하여 1천만 세스터스(40만 파운드)라는 당시 로마 당국의 막대한 경제적 지원으로 사데는 쉽사리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무사안일에 빠져 두 번씩이나 함락을 당한 결과 패배의식에 빠진 사데 성 사람들은 이미 생명과 생기를 잃고 도시는 죽은 도시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도시 환경에서 사데 교회 교인들도 그 생명력과 능력을 상실했고, 외부의 경제적 지원으로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데 교회 역시 사데 성만큼이나 지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되고 넉넉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곳은 니골라당과 같은 이단 사설 등의 위협도, 황제숭배의 박해도 없는 그야말로 신앙의 무풍지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환경에서 교회는 부흥하고 성숙되어가기 보다는 이방의 세속문명에 도취되어 영적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핍박과 이단의 공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도전이 없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단의 무리 니골라당으로 인해 애를 먹은 에베소 교회, 박해로 인해 순교당한 서머나 교회,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로 인해 어지럽던 버가모 교회, 음녀 이세벨에 미혹되어 괴로움을 당한 두아디라 교회는 그래도 죽었다는 책망을 듣지는 않았습니다. 사자는 죽은 고기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마귀는 죽은 교회엔 흥미가 없습니다. 박해는 언제나 생명력 있는 교회를 노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교회, 그것은 이미 마귀에게도 흥미가 없는 교회요, 박해할 가치가 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신앙의 고민이 있는 것은 그래도 신앙이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사데 교회는 이런 어려움이 없었고, 이런 신앙의 호조건들이 사데 교회를 죽어 버리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어 버린 교회에는 외적인 박해도, 내적 이단사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사데 교회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2절) 사데 교회는 믿음의 흰 옷이 더럽혀진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사데 교회는 잠자는 교회였습니다. 이 세가지 모습은 죽은 교회의 표징입니다. 사데 교회는 그 규모나 조직이나 재정 등에서 다른 교회에 뒤질 것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어느 작가의 글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상당한 한 독일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인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튿날 네 시간 이상 걸려 도착한 병원 문 앞에는 '경상자의 문'과 '중상자의 문'이라는 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는 '경상자의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긴 복도를 한참 걸어가자 두 개의 문이 나타났는데 한 문은 '장교의 문' 이었고, 다른 문은 '사병의 문' 이었습니다. 그는 '사병의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역시 한참을 걸어가니 또 두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당원의 문'과 '비당원의 문'이었습니다. 그가 아무 의심없이 '비당원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곳은 허허벌판 거리였습니다. 그가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께서 치료를 잘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어머니. 사실 치료는 받지 못하고 크게 구성된 조직만 보고 왔을 뿐입니다." 현대 교회는 대형화되어가면서 조직이 필요하고 그 조직과 인사에 대한 관리를 위해 현대 경영기법 등을 도입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인들도 그에 따라 분주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조직력이나 현대의 뛰어난 경영기법으로 교회 활동을 극대화시키고 그 활동의 효율성을 제고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령과 말씀으로 지배되지 않으면 이미 그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겉모양은 교회지만 실제 교회주식회사와 다를 바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교회 역시 영적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듯이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없으면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성령이 떠난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사데 교회는 조직은 있었지만 영적으로 죽은 교회로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정작 부상당한 병사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하고 조속한 치료임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자들의 권리에 의해 꾸며진 절차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을 위의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은 조직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조직은 성령에 따라 활동해야만 합니다. 성령은 조직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죽은 영을 살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목적하는 것은 사람이지 조직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지 교회의 조직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거대한 교단의 교권주의와 그의 조직들은 오히려 성령의 불을 끄다시피하여 복음의 암흑시대를 가져왔을 뿐 낮은 자, 낮은 곳을 향한 예수의 손과 발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령은 교회의 성공과 성도들의 출세를 위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지향하는 곳은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되며 갇힌 곳입니다. 교회가 크고 커진다고해서 성령이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 주어진 물질과 좋은 환경에 만족하며 안주하지 말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낮은 곳을 향해, 낮은 자들을 찾아가야만 합니다. 성령은 높은 곳, 높은 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 낮은 자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죠지 맥크레오드는 그의 저서『오직 남은 한 길』에서 과거 제정 러시아가 망할 때 정교회 지도자들은 최신 성의를 어떤 모양으로 하느냐, 옷단을 붉은 색 으로 하느냐 황금색으로 하느냐 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무려 10주야나 격론을 벌였으나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6명의 볼세비키 운동가들은 지하실에서 러시아 혁명을 음모하고 있었습니다. 그 볼세비키주의자들은 인민을 경제적 곤궁에서 건지는 길은 오직 혁명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혁명으로 러시아를 장악한 후 당시 러시아를 주름잡던 기독교 지도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처형했습니다. 러시아 교회 지도자들이 성령과 말씀에서 떠나 생명과 빛을 잃은 형식과 의식에만 치중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교권주의자들을 가차없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떠난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땅만 버리도록 그대로 두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사랑으로 낮은 자들을 섬겨야 할 교회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며 갇힌 자들을 외면하고 호의호식하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며 그러한 교회는 존재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왕궁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며 왕이나 교권주의자들, 소위 높으신 분들과 어울리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같은 모습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어진 물질과 환경에 만족하여 현실에 안주하지말고 여러분에 주어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며 낮은 곳을 찾아가는 살아있는 성도, 살아있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데 성이 천혜의 난공불락이라는 성벽을 믿고 보초도 세우지않고 깊은 잠에 빠져 적의 침투에 비상 나팔도 불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사데 교회 역시 시대의 파숫군이 되어 나팔을 불지 못하는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데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일곱 별을 잡으신 분, 곧 교회를 완전하게 소유하신 교회의 주인되시는 예수께서 보실 때 사데 교회는 분명 죽은 교회였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란 그 지역사회와 나라에 양심이어야 하고, 그 양심의 소리를 발하게 될 때 자연히 그 소리를 잠잠하게 하려는 세력의 도전을 받기 마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한다면 화가 있도다."(눅6:26)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 시대의 파숫군이 되어 시대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부르짖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당연히 미움을 받기 마련이고, 그러한 세상에서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경고의 나팔을 제대로 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시대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그에 따른 분명한 하나님의 소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언제나 반대에 부딪쳤었고 많은 핍박을 받게 마련이었습니다. 세상은 어둠이고 교회는 항상 빛을 비추어야 하는 데, 어둠은 본래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한 나머지 세상이 그 교회에 무엇인가 비난하고 공격할 것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인 것입니다. 반대와 공격을 야기시키지 못할 정도로 소극적이고 현실주의적이며 무사안일주의의 교회는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이미 죽은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시대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그 시대의 파숫군으로서 나팔을 제때에 불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칼에 죽임을 당하면 그 피값을 파숫군에게 돌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를 전하고 있습니다.(겔33:2-4)

예수 그리스도의 불꽃같은 눈으로 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의 죄악상을 꿰뚫어보고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고, 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성공과 출세를 부추기는 설교, 그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거나 만족시키는 설교 등은 교회와 교인들을 더럽히는 것으로 시대의 파숫군이 되지 못하는 죽은 교회요,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사56:10-12)

이 시대에 부정부패와 타락, 음란과 사치 향락의 죄를 지적하여 경고하며 회개를 부르짖을 때, 회개를 통해 자신을 항상 성결케 하고 진리와 정의편에 서서 사는 살아있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므로 살아있고 깨어있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 믿고 예수의 인격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 잔치에는 어린양되시는 예수의 피로 깨끗한 사람, 곧 흰 옷입은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불꽃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때 자신에게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다면서 예수의 이름을 더럽히며 예수 닮은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까? 회개하라는 말씀이 듣기 거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불이 꺼진 교회는 잠자는 교회요 죽은 교회입니다. 사랑의 불, 전도의 불, 봉사의 불, 회개의 불이 켜져있습니까? 성령은 사랑과 전도와 봉사, 그리고 회개에 불을 붙이며 역사하십니다. 깨어있는 성도는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여 경계하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민첩하게 움직이며, 그리고 항상 두 손 들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기도하는 손이 내려갔을 때 이스라엘은 적군 아멜렉에게 패배했고, 그 손이 올라가 있을 때 승리했습니다. 죄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에덴 동산에 찾아와 인간을 죄에 빠지게 했고 그 결과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대해 경계를 풀지않고 항상 깨어있는 신앙생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함께 하시는 낮은 곳을 찾아가는 낮은 자와 함께 하는 생활, 하나님 말씀 앞에 날마다 회개하는 생활로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흐리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조3:위험, 위기=성장의 기회>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인 제임스 애그리는 자기의 경험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우화를 소개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독수리 새끼를 사로잡아 자기 집 닭장에 넣어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는 성장하면서도 날개를 펴서 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집에 한 조류 연구가가 들렀는데 날지 않는 독수리를 보고 "그럴 수가 없다. 분명히 독수리라면 날아 오를 것이다."라고 말하며 실험에 나섰습니다. 이 사람은 독수리를 그 집 지붕에 올려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여전히 날지 않고 비틀거리며 걸어서 지붕에서 내려오려 는 것이었습니다. 조류 연구가는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이 독수리를 데리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독수리가 걸어서 내려오기 어려운 높은 바위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독수리는 거기에 앉아 자기의 눈 아래 보이는 넓은 천지를 여러 번 둘러보더니 무슨 결심이나 하듯 그 큰 날개를 활짝 펴고 날기 시작했으며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먼 지평선을 향하여 사라졌다고 합니다. 독수리의 날개짓은 높은 바위 위에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독수리가 독수리 될 수 있는 위치는 닭장이 아니라 산꼭대기 높은 바위 끝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험하고도 높은 바위 위에 올려 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위는 실상 새 출발의 장소이며 행복을 탄생시키는 진통의 장소인 것입니다.

<참조4:고통,고난=가치재고의 기회>

바이올린 소리는 나무의 질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소리는 고산 지대의 나무로 만든 바이올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 해발 1만2천 피트인 로키 산맥 꼭대기에서 바이올린 목재를 얻는다고 합니다. 거기는 1년 내내 바람이 심하여 가자들이 한 방향으로 자랄 정도입니다. 고산 지대의 나무는 키도 클 수 없습니다. 바람 때문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추위와 바람에 오래 단련된 나무가 좋은 소리를 내어 고가의 바이올린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나무들은 고통 속에서, 바람 속에서 없드려 견디며 대자연의 섭리에 순종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지혜를 익힌 것입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19.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7-13)

빌라델비아는 버가모 왕조의 아탈루스 2세(B.C.159-138)가 자기 형제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건립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까지 "형제 사랑"을 의미하는 '빌라델비아'로 명명된 것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작은 아덴'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문화의 꽃을 피웠던 곳이며, 포도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이곳은 서북 아시아와 동방을 연결시켜주는 주요 도로가 나 있었으며, 특히 로마로부터 드로아, 버가모, 사데를 지나오는 1세기 당시의 최고 교통 요지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이 도시는 상공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키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또한 지형상 '지진이 가득한 도시'로 불려질만큼 지진이 흔한 지역이었습니다. 실제 A.D.17년에 이 지방을 중심하여 발생했던 지진은 인근 10여 개의 도시를 강타하여 전지역을 폐허로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이처럼 당시 높은 문화와 상당한 수준의 부요한 도시였습니다만, 정작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러한 문화적 혜택과 상업적 부요함을 누리기에는 너무나 빈곤한 교회였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신 말씀에서 볼 수있습니다. 여기 "적은 능력"에 해당되는 헬라어 <미크란 에케이스 뒤나민, micran ekeis dunamin>은 "능력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은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경제적 능력 등이 변변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단 공무원 신분가진 교인 하나 없었고, 밥먹고 살만한 동네 구멍가게 하나 가진 교인 하나 없었고, 반듯한 자기 집 하나 가진 교인 하나 없었고, 그렇다고 공부깨나 한 교인 하나 없었던 교회였습니다. 한 마디로 현대판 <달동네 교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0일 금식기도한 사람도, 유창한 방언하는 사람도, 그저 손만 얹어놓고 기도해도 질병이 낫는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쪽집게처럼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전혀 없는 영적 능력면에서도 빈곤한 교회였습니다. 교세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하나 없는 그야말로 "적은 능력"의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만을 받았습니다. 비록 사는 곳은 달동네 같고 능력도 달동네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 말씀만큼은 철저히 지켰고, 가진 것 없다고해서 비굴하게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생활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칭찬은 바로 이러한 교회에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난꾸러기 원숭이, 멍청이 당나귀, 겁쟁이 염소, 그리고 미련퉁이 곰이 사중주 연주회를 계획했습니다. 훌륭한 악보와 콘트라베이스, 비올라, 바이올린 두 대 등 값비싸고 쟁쟁한 악기들을 준비하여 보리수 나무 아래 풀밭에 모여 앉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연주 솜씨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악기 활을 움직여 일제히 연주를 시작했으나 박자도 틀리고 소리도 제멋대로였습니다. 그 때 원숭이가 말했습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요. 이래서야 어떻게 음악이라 하겠어요. 우리들의 앉은 자리가 틀렸어요 자 콘트라베이스인 곰님, 당신은 비올라와 마주앉고, 제 1바이올린인 나는 제2바이올린과 마주 앉아야 돼요. 이렇게 앉아 연주해야 숲의 나무들이 춤을 출 정도로 신명나는 음악이 될 거예요." 그래서 그들 네 명은 각각 위치를 바꿔 지정된 위치에 앉아 다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중주 역시 그 전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당나귀가 말했습니다. "잠깐 기다려요. 자, 내가 그 비결을 찾아냈어요. 우리가 일렬로 나란히 앉아서 연주하면 아마 훨씬 나을 거예요." 그래서 당나귀 말대로 사중주단은 일렬로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연주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넷이 서로 다투어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왜 연주가 잘 되지 않는지 그것이 누구 때문이며 어떤 위치로 앉아야 하는 것인지를 놓고 침을 튀기며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런 소란중에 때마침 음악의 거장 휘파람새가 날아왔습니다. 휘파람새를 본 그들 넷은 자신들의 의문을 풀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부디 우리 부탁을 좀 들어주세요. 우리에게는 좋은 악보도 있고 값비싸고 쟁쟁한 악기도 있는데 왜 연주가 안 되는지 답답해요. 휘파람새님, 우리가 어떻게 앉아야 연주가 잘 될 수 있을까요? 제발 좀 가르쳐 주세요." 휘파람새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음악가가 되는데 필요한 것은 어떻게 어디에 앉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악기를 연주하는 능력과 그리고 음악을 가려서 들을 줄 아는 예민한 귀가 있어야 되지요. 악기를 다룰 줄 모르는 당신들이 어떻게 앉는다 해도 당신들이 연주는 결코 나아질 수 없는 거예요."

좋은 악기에 좋은 환경이 주어졌다고 좋은 음악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빨래판, 양동이, 칼 도마, 플라스틱 쓰레기통 등 흔히 악기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도 <난타>라는 신명나는 음악을 만들어 세계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물건이라도 그것을 가지고 아름다운 소리, 신명나는 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과 그런 음악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름하여 <달동네 교회>일지라도, 그래서 가진 것은 볼품 없어도 세상을 분별할 수 있는 눈과 귀, 거룩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 말씀에 대해 예민하게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와 그것을 지킬 줄 아는 믿음, 그리고 예수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렇게 2000년이 지나도록 칭찬받는 모범적인 교회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적은 능력"의 교회라고 해서 시련이나 핍박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나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못지않은 여러 가지 시험과 핍박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러한 시험과 핍박 중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켰고, 예수의 이름을 한번도 배반치 아니했습니다. 예수께서 칭찬하신 것은 교세가 크거나 능력이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신 것은 적은 능력일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는 깨끗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고 신앙생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인 교회로써 예수 외에는 어떤 이름도 갖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교회 안팎에서 예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높이는 것은 예수의 이름을 배반하는 타락한 증거입니다. 목회자가 대단한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거나, 탁월한 지도력을 가졌다거나, 뛰어난 설교 능력을 가졌다해서 그 목회자를 높이는 것은 아주 위험한 타락과 배반의 징조인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목사나 장로, 권사 집사 등 교인들은 모두가 다 그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손재주 발재주, 말재주가 좀 있다해서 그것들이 손이나 발 입에서 나오는 것들입니까? 모두가 다 머리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손과 발 입에 재능이 아무리 뛰어난다해도 칭찬과 영광을 받아야 하는 것은 머리인 것입니다. 능력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며 철저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와 성도가 칭찬받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타난 능력과 세상에서 받는 영광으로 하늘 나라 문이 열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늘 문은 비록 달동네 같은 교회일지라도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는 거룩한 교회에 항상 열려 있는 것입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단순히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드리고 속회예배 등을 착실히 지켰다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종의 모습으로, 가진 것 없어도 아낌없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아름다운 궁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궁전은 많은 사람들이 평생에 한번이라도 들어가 봤으면 하는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 궁전은 선한 일을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궁전 문지기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데 그 문지기는 선한 일을 한 자에게 열쇠를 주었고, 그것을 받아야만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소녀가 이 궁전에 꼭 들어가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름다운 옷과 보석을 걸치고 궁전 앞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소녀에게 열쇠를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문지기는 말했습니다. "아가씨, 예쁜 옷을 입고 하루종일 문 앞을 서성거린다고 열쇠를 줄 수는 없습니다. 매일 한번씩이라도 남을 돕는 이에게 이 열쇠를 줄 수 있답니다."그 소녀는 당장 돌아가 남을 도와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늙은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는 선행을 할 수 있음을 기뻐하며 가진 돈을 전부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궁전 문지기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열쇠는 얻지 못했습니다. 거절당한 소녀는 실망해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또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할머니로부터 짐을 모두 빼앗다시피하여 날라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문지기에게 다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열쇠의 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막 숲을 지날 때였습니다. 숲속에서 가냘픈 신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른 달려가보니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덫에 걸려 피를 흘리며 발버둥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불쌍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다 잊어 버린 채 그 강한 스프링 덫을 있는 힘을 다해 풀고서 토끼를 살려냈습니다. 그 바람에 소녀의 손과 발은 찢어지고 피가 흘렀습니다. 치마를 찢어 토끼의 상처를 싸매주고 집에 데려와 먹이를 주었습니다. 이때 궁전 문지기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궁전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소녀는 놀라서 말했습니다. "저는 열쇠를 얻으려고 토끼를 살려준 것은 아니었어요." 문지기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이 궁전의 열쇠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남을 돕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 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빌라델비아 도시의 높은 문화와 부요한 생활수준과는 거리가 멀었어도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비록 가진 것이 없었어도 오직 예수 처럼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닫을 사람이 없는 <열린 문>이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 최고의 문화와 생활을 누린다해도 하늘 문이 닫혀있는 사람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사는 수준이 달동네일지라도 누구도 닫을 사람이 없는 하늘 문이 열려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이 땅에 가진 것 없고, 가진 재능 없으며, 가진 건강 없을지라도 예수 믿고 예수처럼 사는 사람에게 그 누구도 닫을 사람이 없는 하늘 문은 항상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 좀 가지고 있다고, 능력과 재능 좀 있다고, 건강 좀 있다고 해서 제멋대로 살거나 흙탕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그 누구도 열 수 없는 닫힌 문만이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참으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열린 문'을 가졌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교회, 적은 능력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은혜를 구하며 어떠한 시련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교회만이 <열린 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은 예수 믿고 예수처럼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빌라델비아 교인처럼 사는 교인이라면 언제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인정을 받을만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해 예수께서는 '장차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을 받지 않고 생명의 부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말합니다. 또한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아무라도 '그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면류관을 빼앗기게 되고 그 면류관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에서>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지위를 <야곱>에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순종이 제사보다 낳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제멋대로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다가 결국 왕의 면류관을 <다윗>에게 뻬앗기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가롯 <유다>는 돈에 눈이 멀어 스승인 예수를 팔아 넘기므로 거룩하고 복된 사도의 반열을 <맛디아>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배고파도, 아무리 돈이 좋아보여도 철저히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처럼 사시므로 영광스런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할 것'이라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지진같은 재난과 환난이 일어난다해도 교회가 무너지지않도록 튼튼하게 받혀 주는 기둥같이 쓰임받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등은 그 온갖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도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튼튼하게 지켜나간 성전의 기둥과 같이 쓰임받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는 성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성전의 기둥과 같이 존귀하게 쓰임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기둥에는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지킨 성도의 이름을 함께 새겨놓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살게 하신다는 영광과 축복의 약속입니다. "능히 닫을 사람이 없는 열린 문"이 주어지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 위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시고 결코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바이올린 소리는 나무의 질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소리는 고산 지대의 나무로 만든 바이올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 해발 1만2천 피트인 로키 산맥 꼭대기에서 바이올린 목재를 얻는다고 합니다. 거기는 1년 내내 바람이 심하여 가지들이 한 방향으로 자랄 정도입니다. 고산 지대의 나무는 키도 클 수 없습니다. 바람 때문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추위와 바람에 오래 단련된 나무가 좋은 소리를 내어 고가의 바이올린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나무들은 고통 속에서, 바람 속에서 없드려 견디며 대자연의 섭리에 순종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지혜를 익힌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데, 예수 마음으로 예수 처럼 사는데는 많은 시련과 환난의 바람이 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고산지대의 나무처럼 그 성장이 더디고 클 수가 없을 경우도 있습니다. 능력이 많다고 인생의 가치가 주어지는 것 아닙니다. 크게 성공했다고 인생의 가치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도 교세가 크다고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래서 교회가 아무리 작아 보여도 하나님 말씀을 겸손과 인내로 지켰을 때 하늘에 열린 문을 가진 가장 복되고 칭찬듣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칭찬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0. 풍요 속에 빈곤한 교회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3:14-22)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라고는 한 마디도 듣지 못하고 책망만을 잔뜩 받은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제일 먼저 책망받은 내용은 차지도 더웁지도 않고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차다는 것은 얼음이 얼 정도의 냉기를 말하고, 더웁다는 것은 물이 끓을 정도로 뜨겁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왕 예수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든가 그렇지않으면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하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적극적이지 못하고 매우 우유부단하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아합왕 시대에 왕비 이세벨로 인해 나라가 온통 우상숭배로 물들어갈 때 당시 선지자 엘리야가 참다 못해 어느 신이 참 신인지 증거하기 위해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라"면서 불로써 대결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이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모두 갈멜산에 불러 모았습니다. 이 때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그 태도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0,21) 시대가 아무리 음녀 이세벨 시대라해도 하나님을 믿을 것 같으면 그 태도를 분명히 하여 우상숭배를 과감히 타파해버리든가, 아니면 이세벨이 그토록 두려우면 아예 하나님을 버리고 음녀를 좇아 바알을 숭배하든가 양단간에 결단을 확실하게 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신앙을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대답을 유보했습니다. 이는 기회를 엿보다 바알 숭배하는 이세벨 세력이 유리하면 바알쪽으로 붙고, 수세에 몰리고 있지만 불의 대결을 통해 엘리야가 득세하게 되면 하나님 쪽으로 붙어보겠다는 기회주의자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겠느냐'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중간하고 우유부단한 믿음, 미지근한 신앙은 토해버리십니다.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희생할만큼 인간을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동시에 독생자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며 애절하게 하나님을 부르셨지만 냉혹하게 외면하실만큼 죄를 반드시 철저하게 형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 여러분도 차든지 더웁든지 신앙의 태도와 삶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축구의 황제라는 펠레 선수는 은퇴할 때 10만 관중 앞에서 "나는 축구를 시작한 날부터 축구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축구는 나의 심장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펠레는 과연 누구 못지않게 축구를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축구에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했던 축구선수였습니다. 그 결과 축구 황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으로 거룩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여러분께서 하나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어찌 미지근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뜨거운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책망받은 내용은 책망이라기보다 차라리 수치스럽다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물질적으로는 빈곤했을지라도 "실상은 부요한 자"라는 최대의 칭찬을 받은 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풍요로웠지만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었고 벌거벗은" 수치스런 모습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단의 공격이나 황제숭배 강요로 인한 핍박 등은 없었으나 소위 금권, 경제력 앞에 무릎을 꿇는 수치스런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진리를 배반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은행과 재정의 중심지로 당시 지상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A.D.61년 대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었었는데 로마 당국의 경제 지원을 일체 거절하고 순전히 자신들의 재력으로만 도시를 재건할 정도로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이처럼 부요한 도시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도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은 엄밀하게 따지면 <나는 부요하여 하나님의 도움이 전혀 필요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극빈에 허덕이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와도 영적으로는 빈곤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 얻어도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며, 세상을 다 잃어도 하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다 얻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난달 28일 경제대국 일본에서 2살짜리 여자 어린아이가 굶주린 끝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아이의 엄마는 미혼모로 직장을 잃은 채 딸과 함께 난방이 끊긴 아파트에서 열흘동안 굶었다고 경찰에서 밝혔습니다. 풍요로움 속에서도 끼니를 제때 잇지 못하는 결식아동이 올해 들어 17만명을 넘어섰다며 이들을 돕자는 광고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 등의 저자인 제레미 리프킨이 1993년에 '쇠고기 문화'에 던지는 경고장으로 쓴 <육식의 종말>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전세계에 소는 93년 추정치로 약 12억 8천만마리인데 이 소떼가 전세계 토지의 24%를 점유하고 있고, 전세계 곡물 생산량의 3분의 1을,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를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10억명의 인류가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때에, 소위 <가진 자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가들이 먹어치우기 위해 키우는 소를 비롯한 가축들을 사육하기 위해 전세계 곡물의 3분의 1, 즉 6억톤을 사료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매년 가축에게 먹이는 6억톤의 곡식을 부의 재분배를 통해 인간이 직접 먹는다면 10억명의 기아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0억명의 사람들은 넘치는 지방을 주체못해 다이어트에 열을 올리고 또 다른 10억은 기아에 허덕이며 뼈가 앙상해져 가고 있습니다. 수십억의 인간들이 곡식이 부족해 기아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선진국 미국인, 유럽인, 일본인들은 쇠고기 탐식으로 '풍요의 질병', 즉 심장발작, 암, 당뇨병 등에 걸려 아사자들보다 더 많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고깃덩이 탐닉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입니다. <가진 자들>은 배가 터지거나 배부른 병으로 죽어가고 있고, 이들 <가진 자들>에게 자신들의 토지를 소떼 사육장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힘없는 개발도상국가 백성들은 배를 곯고 있는 것입니다. 소떼들은 배가 터지는 데, 인간들은 배를 곯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신들의 토지를 소떼 사육장으로 빼앗긴 가난한 개발도상국들과 소떼들을 먹어치우는 부유한 국가들 사이에서는 정치적 적대감마저 싹뜨고 있습니다. 육식문화는 여기서 그치지않고 지구환경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습니다. 중남미의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열대 우림, 오스트레일리아 반건조지대 등이 소 방목용 목초지로 개간되면서 열대우림은 파괴되고 지구 사막화는 더욱 가속화됐습니다. 사하라 이남과 미국, 호주 남부 목장지대는 소 방목으로 이미 사막화가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사육장에서 흘러 나오는 축산폐기물의 양을 살펴보면, '소 1만마리를 사육하고 있는 비육장에서 배출되는 유기폐기물은 11만 인구의 도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양과 맞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축산 폐기물은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소가 내뿜는 메탄은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곡물 재배에 사용되는 1에이커(1224평) 토지는 육류 생산에 사용되는 1에이커 토지보다 5배 많은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시금치를 심으면 26배나 많은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저자는 이러한 통계를 제시하며 가진 자들의 육식문화를 조금 더 개선하고 부의 재분배를 이룩하면 굶주리고 있는 10억의 인류가 함께 공존할 수 있음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지금 지구는 풍요 속의 빈곤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0억의 지구인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주셨지만 <가진자들>의 독점으로 풍요 속에 빈곤층이 더욱 확산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지금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가진 자들>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없는 자들>은 더욱 빈곤해지는 소위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선진국가들은 경제적으로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지만, 굶주리고 있는 후진국가들과 가진 것을 함께 하지 못하고 독점하는 정신적, 영적 빈곤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방을 주체할 수 없을만큼 너무 먹어서 개기름이 질질한 10억의 <가진 자들>의 희희낙낙거리는 소리와 소떼들에게 초지마저 빼앗기고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10억의 <못 가진 자들>의 신음소리를 어찌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겠습니까? 쇠고기 잔뜩 먹고 사는 사람이나 평생 풀이나 뜯다시피 살았던 사람이나 죽는 것은 매 일반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시겠습니까? 서머나 교회처럼 적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는 생활로 하나님 나라에 부요한 자가 되시렵니까? 아니면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가련하고 곤고하며 눈멀고 벌거벗은 가난한 자가 되시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불로 연단한 금(벧전1:7)을 사서 부요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의 세친구처럼 비록 풀무속에 던짐을 받을지라도 세상 부귀영화의 길을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믿음생활을 지킬 때 불로 연단한 금같은 믿음을 가진 자로 진정한 영적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경제적 풍요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며 갇힌 자들과 함께 나누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누더기 하나 걸치지 못한 벌거숭이로 보이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양모 제조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양모가 대량생산되어 질 좋고 값싼 의류가 유명했습니다. 양모로 만들어진 질좋은 옷들을 값싸게 즐기다보니 하나님 보시기에 벌거벗은 것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은 영적으로 벌거벗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값비싸고 사치스런 옷을 입었다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시는 흰 옷을 입지 못한 사람은 벌거벗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세상의 어떤 옷으로도 더러운 죄를 덮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예수 십자가 피로 죄씻음을 받아 의의 깨끗한 옷, 흰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의 옷을 입으라는 것은 예수 믿고 예수의 인격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인격은 부의 독점이 아니라 남김없이 베푸는 삶입니다. 부의 독점은 고인 물처럼 썩어서 악취를 풍기는 것입니다. 경제적 풍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눈까지 멀게 만들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안과약과 귓병 치료약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습니다. 눈과 귀병에 관한한 세계적 수준의 고약으로 고치지 못할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의학 기술을 지나치게 믿는 나머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눈멀고 귀먹은 것 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대 영적 눈이 멀게 되면 하나님의 세계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악된 현실을 바로 깨닫게 하시며 또한 죄로 어두어진 우리의 눈을 여실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빈곤한 사람은 진정 보아야 할 참된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소경들입니다. 예수께서는 탐욕으로 가득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소경이라고 했습니다.(마23:26)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경제적 풍요 앞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전체적으로 부요해지다보니 자연히 한국 교회도 따라서 그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경제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경제적 풍요 속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지 아니한다면 교회는 풍요 속에 빈곤한 교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퐁요 속에 세상 죄악과 빈곤의 참상을 불꽃같은 눈으로 주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끓고 있는 물주전자를 무관심하게 쳐다본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와트는 거기서 짐을 끌고 가는 증기 기관차를 보았습니다. 번개를 보고 무서워한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그 속에서 어둠을 밝힐 전기를 보았습니다. 어느 날 조각가 로댕이 한 바위 앞에 섰습니다. 좋은 화강암이었습니다. 로댕에게 그 바위는 인생을 깊이 생각하며 고민하는 한 젊은이로 보였습니다. 얼마 후 이 바위는 인류의 마음을 울리는 명작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쥐를 보면 누구나 징그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디즈니는 같은 쥐를 보면서도 평화와 박애와 자유 사상을 대표할 애교있는 미키 마우스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보지만 '무엇을 보느냐'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향하여 이민선을 탔습니다. 2개월에 걸친 죽음의 항해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그들은 모진 바람 속에서 자유를 보았고 사나운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아메리카 벌판에 도착한 그들이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며 첫 겨울을 넘기는 동안 절반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어붙은 뉴잉글랜드 벌판에서 행복한 새 세계를 보았고 죽음 속에서 아메리카의 미래를 보았던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에 눈이 멀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풍요 속에 빈곤층은 세계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이들을 사랑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외면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눈멀고 가련한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 속에서도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생활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금같은 믿음을 가진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본의 기독교 아동 문학가로 노베찌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너의 둥지는 너무 낮았었다"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뜰에 있는 나무에 새가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새의 작업을 재미있게 구경하던 그는 갑자기 "둥지의 위치가 너무 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의 습격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낮은 위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새에게 충고할 방법도 없고 거의 완성한 둥지를 헐어버릴 수도 없어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얼마 후 이 둥지에 새끼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미 새가 먹이를 구해다가 먹여 주는 즐겁고 행복한 광경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예감했던 비극이 발생하였습니다. 새끼들은 고양이에게 희생되었고 먹이를 가지고 돌아온 어미 새는 새끼를 찾을 길이 없어 오랫동안 그 둥지에서 슬픈 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이 체험이 노베찌 시인으로 하여금 "너의 둥지는 너무 낮았었다"라는 시를 낳게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둥지도 너무 낮은 것이 아닐까? 노아는 대홍수의 환난과 고통속에서도 높은 곳에 신앙의 고향을 두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세상 한 복판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높은 산 위에 세워졌습니다. "저 높은 곳"에 믿음과 소망을 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의 둥지를 하늘 나라에 두지않고 세상과 세상 물질에 두었기 때문에 노아의 방주같은 교회가 되지 못하고 토하여 내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둥지, 터전을 저 높은 곳 하나님 나라에 두든지, 아니면 막강한 경제력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사냥하는 위험한 세상에 두든가 태도를 분명히 하시고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미지근하면 주께서 토하여 내치십니다. 두 마음을 품었었다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를 영접하여 회개하시고 예수의 흰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신령한 교제의 생활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하늘 나라에 부요한 자가 되며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1. 교회의 고난

(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 그 손에 펴 u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3)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5)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7)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계10:1-11)

본 10장은 일곱째 재앙에 앞서 교회가 받을 고난을 담고 있는 <작은 책>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천사의 말대로 그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말합니다. <작은 책>을 먹어버리니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된" 이유는 교회가 받을 고난과 환난을 전해야만 하는 괴로운 책임, 고통스러운 사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인사말처럼 "부자 되세요"하면 듣는 사람이 기 분 좋을 것입니다. '나라 경제가 이제 완전히 회복세를 보이고 경제가 급성장하여 실업률도 줄어들 것입니다.' 면서 이제 '평안입니다. 부자 되세요' 하면 전하는 사람도 기분 좋고 듣는 사람도 기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치와 향락, 음란과 우상숭배, 부정부패와 불의의 죄를 회개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멸망당할 것입니다.'라고 외친다면 대부분 사람들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거나 코웃음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를 분명히 했습니다. 역사의 주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아니하든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9,10) 구약의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 당시 요시아 왕은 부정부패와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근절하고자 했지만 수구세력에 밀려 개혁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부정부패와 탐욕, 음란과 우상숭배 등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거짓 선지자들의 '평안이다, 평안이다'하는 유혹에 넘어가 회개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채찍을 들으셨습니다. 바벨론 국가를 들어 이스라엘을 치시기로 한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바벨론을 그 채찍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벨론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징계, 채찍을 달게 받으라는 것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징계, 채찍을 달게 받으라, 그렇지 않으면 그나마 생명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은 괴롭고 쓴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징계를 거역하여 바벨론에 항거하거나 이웃 다른 강대국 애굽으로 도피하여 잘 살겠다고 하면 결단코 칼과 기근과 염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당할 것이며 다시는 이스라엘 땅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식물의 핍절도 당치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 하면 잘못 되리라 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의 노와 분을 예루살렘 거민에게 부은 것 같이 너희가 애굽에 이른 때에 나의 분을 너희에게 부으리니 너희가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치욕거리가 될 것이라 너희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도다"(렘42:14-18)

나라가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국난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끝까지 투쟁하라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이 아니라, 침략국가에 항복하는 길만이 사는 길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는 예레미야에게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지도층이나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이들의 거짓 평안에 속아 살고 있는 백성들로부터 매국노로 몰려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괴롭고 위험스럽지만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나라 백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의 채찍 바벨론에 항복하여 징계를 달게 받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칼에 죽을 것이고 칼에서 살아 남는다해도 기근에 죽을 것이고, 기근에 살아 남을지라도 염병에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왕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렘38:17-18)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했던 예레미야는 매국노로 몰려 진흙 구덩에 갇히게 되었고, 시드기야 왕은 우유부단한 가운데 수구세력에 밀려 결국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채찍을 거역하다 나라는 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시드기야 왕은 자기 보는 앞에서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의 두 눈은 칼로 뽑히고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렘52:8-34,렘38:2-6)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으로 인한 상처는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지만 그 징계와 채찍을 피하거나 대항하여 죄악을 더하면 죽음을 초래한다는 뼈아픈 역사적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히틀러 소년대 출신 젊은이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내 나이 여섯 살이었습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독일 국민들이 그랬듯이 어린 나도 히틀러 숭배자였습니다. 물론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도 히틀러를 비판하는 소리를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십대 소년이 되자 나는 히틀러 소년대에 가입해서 충성을 다했고, 제3제국이 멸망하기 1년 전부터 자진해서 비행기 공장에 가서 일할 정도로 열심을 다해 나치 정권에 충성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1년여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히틀러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돌아간 어느 화창한 주일, 내가 평소 존경하는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만행을! 그리고 그가 이렇게 망하리라는 것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요 심판입니다." 나는 그날 예배가 끝날 무렵, 참기 어려운 분노와 환멸감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자마자, 현관에 서서 환하게 웃으며 교우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목사님에게 달려가 소리치며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그래 그게 지금 어쨌단 말입니까? 난 그 때 몰랐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 젊은 청춘을 다 바쳐 히틀러에게 충성했고, 역사의 심판을 받은 부끄러운 나치 정권에 내 젊은 청춘을 허비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지도자는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들의 사는 길, 생명의 길을 말해주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할 것이라 해서 그 시대에 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아니한다면 그 피 값을 고스란히 스스로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56:10-12)

히틀러가 역사의 심판을 받아 망할 나치 정권의 괴수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다물고 있음으로 해서 한 젊은이의 인생을 그르치게 되었다면 그 목사는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요 탐욕에 빠진 몰각한 목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시대의 파숫군이 되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죄악에서 떠나 생명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 피값을 반드시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인자야 !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3:17-21)

참된 지도자, 하나님의 종은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해서 사람들에게 사는 길을 제시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 마지막 말씀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전해주는 말씀이 자신에게 좋든 싫든, 자신의 비위에 맞든 맞지 아니하든 그 주어진 말씀대로 살아야만 생명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듣기 좋은 부분만 가려서 하나님 말씀을 취하고 듣기 거북하고 그 말씀대로 살자니 괴롭고 어려운 것이 많아서 뱉어 버린다면 시드기야 왕 같이 피차에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칼빈은 1527년경 하루는 파리에서 어느 곳을 지나다가 신부들과 병사들과 시민들이 모여 신교도, 즉 기독교인 한 사람을 불 태워 죽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화형 당하고 있는 기독교인이 너무나 평안하고 기쁘게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뜨거운 불에 타 죽으면서 어떻게 평안하고 기쁜 모습이 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텐데, 저렇게 끔찍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담대하고 평화스러울 수 있을까? 그렇다 내 친척 올리베탕의 충고대로 성경을 살펴보자. 그래서 나도 믿음의 새로운 길을 찾아보자."하면서 성경을 펴 보기 시작했습니다. 칼빈은 성경을 읽는 중 너무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자신의 죄에 대해 두려움과 죄책감에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죄의 무게를 감당키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읽기를 그만두려다가 힘들지만 계속해서 읽어나갈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마음에 평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긴 했어도 마음에 아직 걱정과 두려움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몸담았던 로마 천주교를 떠나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로마 천주교를 떠나 신교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하늘같은 교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참혹한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다시 성경에 돌아가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진리가 없는 곳에는 교회가 없다. 로마 천주교에는 거짓과 우상적 의식만 남아 있을 뿐 교회의 기초가 되는 진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죽음을 무릅쓰고 천주교에서 뛰쳐나와 종교개혁에 선봉에 나섰습니다. 칼빈은 임종시에 다음 성구를 외우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칼빈처럼 성경을 보고 죄책감을 가지지 못한다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시체가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법입니다. 성경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성경 읽기가 괴롭고 쓸지라도 십자가 예수의 은혜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는 길만이 새롭게 사는 길입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이 비록 십자가의 쓴잔이 될지라도 그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지 못한다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이 시대를 위해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지 아니하면 참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이미 진리의 기둥과 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수구세력들의 탐욕을 채우는 장터로 변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 성전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는 길임을 아시면서도 그 길만이 인류가 사는 길이기에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교단들은 교권을 장악한 수구세력들의 탐욕의 잔치 마당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상이 둘러엎어져야만 기독교가 새롭게 거듭나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될 수 있습니다. 부정부패와 탐욕의 정치판이 둘러엎어져야만 나라 민족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사는 길을 열어놓으시기 위해 십자가의 쓴잔을 스스로 취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에 묻습니다. '너희도 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십자가의 길이 비록 쓰다할지라도 그 길이 성경대로 사는 것이요 그 길이 인류가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앞에 어떠한 고난과 환난이 임한다할지라도 성경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이 세상에서 돈 버는 선택의 폭이 좁고 그 기간이 길고, 출세, 성공의 지름길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손해만 본다해도 그 길만이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가, 얼마나 출세하고 성공했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과연 성경대로 살았는지 그 여부를 보시고 알곡과 가라지로 분별하시는 것입니다. 불같이 임하는 교회의 고난이 장차 임할 것인데 그 때에 그 불에 타 없어지지 아니하고 알곡으로 남는 성도가 되기 위해 성경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2-15)

불같은 시련과 고난이 임할지라도 불에 타지 아니하는 정금같은 믿음으로 생명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

22. 성전의 성결보존

"(요2: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요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2: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2: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요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2: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입니다.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성전은 거룩해야만 합니다.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니 그 곳에서는 장사가 한창이었습니다.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지 어떤 이유로서도 장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성전은 크게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지성소,성소,그리고 성전 뜰입니다.성전 뜰은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그리고 이스라엘인의 뜰로 구분됩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장사하는 모습은 이방인의 뜰에서 있었던 것입니다.성전은 어느 곳이나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했으나 성전 당국자들과 유대 상인들이 이방인의 뜰을 어느 누구도 기도할 수 없는 소란하고 뒤죽박죽이 된 곳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소들의 울음소리,양들의 울음소리,비둘기가 구구거리는 소리,행상인들이 물건 사라고 외치는 소리,동전 바꾸는 쩔거덩거리는 소리,흥정하는 소리 등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서 이방인 뜰을 아무도 예배 드릴 수 없는 장소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현존하심에서 쫓겨나고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교회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이웃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 즉,속물 근성,배타성,냉담,불친절과 닫힌 마음,오만하고 까다로운 단체로 만드는 태도 등은 없습니까?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이웃들이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어렵게 하거나 할 수 없게 하는 자들을 향하여 진노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돈은 로마의 화폐인 '달란트'였습니다.그런데 예배드릴 때는 히브리 사람들이 사용하는 '세겔'로 바꾸어서 헌금해야만 했습니다.환전(換錢)은 본래 시장에서 이루어졌으나 성도들의 편리를 도모하다보니 성전 뜰에까지 돈장사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인 소나 양,비둘기 등도 각 가정에서 가장 좋고 흠이 없는 것으로 정하게 잡아 바쳐야 했으나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하다가 보니 마침내 성전 뜰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다시말해 장사의 시작은 예배를 돕자는 뜻에서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아무 생각없이 무비판적으로 성행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예배 의식을 통한 회개와 갱신,그리고 말씀에 대한 순종의 생활보다는 오히려 의식(儀式) 자체에 빠져 결국 형식과 의식에 치우친 신앙의 껍데기만 남게 된 것입니다.나아가 이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는 제사장들의 행태가 큰 문제였습니다.

제사장은 성도들이 가져오는 제물들을 검사하는 특권을 가졌습니다.아무리 깨끗한 제물일지라도 제사장이 불합격 판정을 내리면 몇번이라도 다시 바꾸어서 가져와야만 했습니다.돈을 벌기위해서는 얼마든지 흠을 잡아서 불합격 판정을 내렸던 것입니다.장사꾼들이 성전에서 장사를 하기위해서도 제사장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제사장의 권력은 더욱 커져만 갔던 것입니다.성전 마당에서 구입한 제물이 아니면 모두 불합격으로 판정하여서 장사꾼들과 서로 이득을 탐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정경유착(政經癒着)의 부조리가 판을 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채찍을 들고 양이나 소를 내어 쫓고 돈을 쏟으며 상인들을 몰아 내셨던 것입니다.아무리 타락한 그들일지라도 일말(一抹)의 양심은 살아 있어서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진노하시는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한 말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2:18)라는 것이었습니다.이 말은 "당신은 그 행동으로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주장했다.그러니 이제 당신의 주장을 증명해 줄 어떤 이적을 우리들에게 보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은 헤롯 성전으로서 무려 46년 동안 걸려서 지은 건물이었습니다.이렇게 큰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그들이 알 리가 없었습니다.예수님의 말씀하신 '성전'의 뜻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되 그리심산에서도 아니고,예루살렘에서도 아니며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4:21-2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자기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입니다.'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예수님이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므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 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마가복음14:58에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예수께서 실제 의미하신 것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인간이 만들고 조작한 모든 것에 종언(終焉)을 고하고 그 대신 영적 예배를 대치한다는 것입니다.또한 모든 동물 희생의 제사와 번잡한 의식에 마지막을 고하고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과의 직결로써 이것을 대신하려고 한 것도 분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직결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교한 성전이나 인간의 손에 의해서 드려진 분향이나 희생의 의식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위협적인 말씀은, "너희 성전 예배,너희 정교한 예식,그리고 아낌없이 바치는 너희 동물 희생은 끝났다.왜냐하면 내가 왔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이것이었습니다.즉 "나는 너희에게 모든 인간적인 교묘함과 인간적인 의식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겠다.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이 성전을 파괴하고 전 세계를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의 임재(臨在)를 알 수 있는 성전으로 세우기 위해 왔다." 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제물이나 눈에 보이는 성전이나 그 어떤 제사 의식(儀式)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에 있는 것입니다.십자가의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役事)가 없다면 성전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고 엄히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시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과 인격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의식(儀式)에 치우친 성전과 장사하는 성전,형식적이고 외식적(外飾的)이고 교만하며 탐욕하는 마음의 성전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남김없이 헐어버려야만 합니다.헐지않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헐어버리고 맙니다.당시 헤롯 성전에 대한 책망을 듣고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후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깨끗이 헐어버렸습니다.나의 인격과 마음의 죄악들을 헐어내야만 합니다.

알퐁스 도데의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라는 단편 소설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가난을 미덕으로 삼았던 수도원으로 심지어 종을 살 돈이 없어 기도 시간을 알리는데 나무로 된 딱다기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 수도원이 떼돈을 벌게 됩니다.그것은 바로 불로장생주'라는 술 덕분이었습니다.불로장생주는 고셰라는 수도사가 여러가지 약초를 제조해서 만든 훌륭한 약주였습니다. 그 술이 날개 돋친 듯 팔리게 되자 수도원은 생기를 되찾았습니다.모든 건물이 깨끗이 단장되고 신부들도 비싼 옷으로 바꾸어 입었습니다.고셰는 그 공적으로 인해 어느덧 신부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사가 진행될 때 술에 만취된 고셰가 성당에 뛰어들어 괴상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그는 손수 만든 술을 시음하다가 술 중독자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후부터 고셰는 성당에 나오지 못하고 주조장 안에서 혼자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고셰는 자신의 영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그래서 원장을 찾아가 술 제조를 그만두겠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원장을 비롯한 신부들은 이건 바로 하나님을 위한 선한 사업이므로 이를 그만둔다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고셰를 윽박질렀습니다.따라서 순진한 고셰는 할 수 없이 계속 술을 만들었습니다.

그 수도원은 술로 인해 매우 바빠졌습니다.심지어는 신부나 수도사 전체가 술병을 포장하고 상표를 붙이고 또한 그것을 운반하느라고 미사를 거를 때까지 있었습니다.그리고 예배당 안에는 아주 작은 소리지만 고셰 신부의 술주정하는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점차로 더욱 자주 들려 왔습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따라서 돈에 구애받지않는 생활을 하고자 열심히 돈을 법니다.그러나 여러분은 아십니까? 돈을 벌수록 돈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고셰신부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처음에는 가장 순수한 동기에서 술을 제조하였습니다.그러나 돈의 맛을 안 다음부터는 가난했던 시절 순수했던 기도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예배 등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오로지 술을 팔아 돈을 벌기에만 급급하였던 것입니다.즉 수도원이 본래의 의도와 목적을 벗어나서 부(富)의 축적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보여지고 있는 모습입니다.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이 장사의 소굴로 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본래 목적대로 선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혹시 교회 자체의 부에 혈안이 되어 장사의 소굴로 변해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교회를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친히 채찍을 만드사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실 것입니다.  

arrow43_L.gif 차례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