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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엣 것을 찾으라---

anii33.gif  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차   례  =

1. 비밀의 영광(1장)
2.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2장)
3. 위엣 것을 찾으라1(3장)
4. 위엣 것을 찾으라2(4장)

 1. 비밀의 영광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4-29)

이 나라 민족의 고난과 함께 살다가 간 함석헌 선생이 남긴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다. 고난은 죄를 씻는다. 가성 소다가 때를 씻는 것같이 고난은 인생을 씻어 깨끗하게 한다. 불의로 인하여 상하고 더러워진 영혼은 고난의 고즙(苦汁)으로 씻어서만 회복이 될 수 있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든다. 이마 위에 깊은 주름살이 갈 때 마음속에 깊은 지혜가 생기고, 살을 뚫는 상처가 깊을 때에 혼에서 솟아오르는 향기가 높다. 생명의 깊은 뜻은 피로 쓰는 글자로만, 눈물로 그리는 그림으로만, 한숨으로 부르는 노래로만 나타낼 수 있다. 평면적·세속적 인생관을 가지는 자는 저가 고난의 잔을 마셔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개인에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 고난은 인생을 하나님께로 이끈다. 궁핍에 주려 보고야 아버지를 찾는 버린 자식같이, 인류는 고난을 통해서만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찾았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애굽의 압박과 광야의 고생 중에서 자라났다....고난을 받아야 한다. 우리 지은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재난이 올 때마다 피하기부터 하려 하고 비탄만 하지만, 그 당파심을 버리지 않는 한, 그 시기심을 버리지 않는 한, 의인 대접할 줄을 모르는 한, 환난은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법칙에 의하여 그럴 것이다. 죄가 무슨 죄냐? 나를 버린 것이 죄요, 뜻을 찾지 않은 것이 죄다. 나를 버린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뜻을 찾지 않은 것이 생명을 찾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평면적인 인생관을 고치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자아에 충실하기 위하여,....착한 것이 나약에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잃었던 용기를 다시 찾기 위하여, 약아빠짐으로 타락해 버린 지혜를 도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중간에 생긴 종살이 버릇을 없애기 위하여, 굳센 의지가 자아가 되고 고결한 혼을 다듬어 내기 위하여 불같은 고난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명을 마비시키는 숙명철학을 몰아내기 위하여 최후의 반발을 찔러 일으키는 지독한 고통이 필요하다. 장차 오는 새 역사에서 우리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위하여 고난은 절대 필요하다.....이 백성에게 참 종교를 주기 위하여 고난을 받을 필요가 있다....일어서라, 고난의 짐을 지는 자들아, 수난의 겟세마네에 밤은 깊었고, 기드론 내를 이미 건넜다. 마지막이 가까울 것이다. 2천 년 전 고난의 왕이 "오직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고난의 쓴잔을 부쩍 당겨 들이키고 십자가를 향하여 냅다 달린 것같이, 우리도 이 짐을 쾌히 지고 저 목메는 마지막 여울로 내려가자. 이때까지 우리를 비렁뱅이로 표시했던 누더기를 여기서 다 버리자.....우리의 땅을 빼앗았던 것도 다 용서하자. 이제부터 네 땅, 내 땅이 없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죽인 원수도 용서하자. 이제 네 민족, 내 민족, 네 집, 내 집이 따로 없다. 우리 어린이를 우리 손에서 빼앗을 때 이를 갈고 뼈에 새겼던 원한도 이 흐름 속에 버리고, 우리들의 처녀를 짐승 같은 놈들이 잡아가고, 우리들의 아내를 우리들의 눈앞에서 욕보일 때에 털끝까지 올랐던 분, 세포 갈피 갈피에 박혔던 독, 그것도 이 물 속에 다 던져버리자. 이 여울을 건너면 골고다가 있다. 고난의 임금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오직 이 짐만 져라. 이 지워주는 십자가만 사랑으로, 믿음으로, 소망으로 지고 건너라. 그러면 이제 우리 입에서 노래가 나올 것이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지워주는 십자가만 사랑으로, 믿음으로, 소망으로 지고" 모든 선한 일에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믿음, 소망이야말로 기독교 생활의 진수입니다. 골로새 성도가 보여준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구세주이시며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Exodus)하여 광야에 이르렀을 때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애굽기 13:21-22)고 하였습니다. 광야는 본래 길이 없는 곳이며, 길이 있다 해도 낮에는 사막의 뜨거운 태양을 견딜 수 없고, 밤에는 사막의 추위를 피할 수 없는 곳입니다. 한 마디로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곳, 단 하루도 살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없이는 살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세상을 상징하며, "구름 기둥, 불기둥"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리고 가나안 땅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세상에는 길이 많이 있다 하지만 사는 길, 생명의 길, 천국 가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십자가 죽음도 불사하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사는 법입니다. 생활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죽은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생활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이 따르는데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전혀 주목받지도 못하는 예수 믿는 믿음생활을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에 충실하다 보면 세상에서 잃는 것도 많고,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고, 남 보기에 어리석게 살기도 해야 합니다. 때로는 출세, 성공할 기회도 많고, 돈벌 기회도 많은데 그 모든 것 접어두고 왜 자기 인생을 남을 위해 바치면서 살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성도 앞에 있는 하늘에 있는 소망에 있습니다. 소망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는 길이 최고의 삶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 인류의 참된 평화, 가장 가치있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길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길은 한 마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롱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이 사람의 지혜로운 것보다 낫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소망은 이 세상을 믿는 것보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라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이며 최고의 삶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는 바벨론과 메소보다미아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이 교회에 들어온 이후부터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 사상의 영향을 받아 믿음과 사랑, 소망에 큰 타격을 입을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 교회의 형편을 듣고 바울은 편지를 통해 밀려오는 각종 이단 사상과 고난 중에도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살수 있도록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기"를 쉬지 아니하고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최대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것이라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원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기도란 자신의 생각이나 뜻, 소원을 하나님께 이루어 주시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닥칠 때 무엇보다 자신과 교회,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나 있는 곳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열심히 공부해서 신학박사가 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노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멋있게 설교할지라도 그 진리의 말씀을 생활에 옮겨 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진다 해도 그 뜻에 따라 살지 못하면 그 기도는 현실성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잘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는 내가 생각하고 정한 삶의 방식보다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고 자라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내용을 생활에 옮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삶의 상황에서도, 아무리 어렵고 힘든 경우를 당한다 해도 무너지거나 정복되지 않는 정신,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대접을 받는다 해도 현실과 사람에 대해 잘 견디고 참으며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는 정신을 가지게 합니다. 역경과 고난에도, 환난과 재난에도,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미움을 받아도, 사람들에게 어떠한 절망감을 받을지라도, 아니 예수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 해도 끝까지 견디고 참을 수 있는  힘이 예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늘의 소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역경과 고난에도, 환난과 재난에도,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미움을 받아도, 사람들에게 어떠한 절망감을 받을지라도, 아니 예수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 해도 끝까지 견디고 참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것을 기뻐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람은 무엇이나 잘 되어 나갈 때 기뻐하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떠한 그늘과 어둠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을 때 성도는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도,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도 견디고 참아 믿음과 사랑, 소망을 잃지 않고, 어떠한 형편도, 어떠한 사람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의 생활로 그늘진 곳에 빛이 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파울 슈나이더(PauI Schneider,1897-7939)는 기도하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지 일년 뒤인 1934년 훈스뤼크(Hunsriick) 지역 딕컨쉬드(Dickenschied)에 새로 부임한 교회에서 처음으로 국가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파울 슈나이더 목사가 히틀러 동맹의 한 소년의 장례식을 집례하게 되었는데 장례식 설교가 끝난 다음 그 지역의 대표자가 소년의 무덤 옆으로 와서 "이제 이 소년은 홀스트 베썰(Horst Weasel) 지역의 하늘나라 히틀러 특공대에 속하게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때 파울 슈나이더 목사는 이렇게 반박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장례식입니다. 하늘에는 히틀러 특공대가 없습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파울 슈나이더는 설교를 통해 히틀러를 지지하는 "민족사회주의적 독일 그리스도인들"(Deutschen Christen)을 배격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마침내 "민족사회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선동자"라는 죄명으로 지역과 교회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 가을 그는 추수감사절 예배를 집례하기 위하여 그의 부인과 함께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설교자로서의 소명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독일 국가의 추방명령보다 하나님의 이 명령에 더 복종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결국 그는 체포되었고 코블렌츠(Koblenz)의 비밀경찰에 이송되었으며 추방명령을 끝까지 부인한 결과 부헌발트(Buchenwald)의 강제 수용소에 넘겨졌습니다. 그는 히틀러 정권을 인정하기만 하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목사로써 하나님의 사명을 배반하는 일이었기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1938년 4월 부헌발트 수용소의 모든 포로들은 매일 아침 나치스 휘장에 경례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파울 슈나이더는 이 경례를 "우상숭배"라고 거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잔인한 고문을 받았고 수용소와 죽음의 감방인 토치카에 갇혀야 했습니다. 그는 감방 창문에서 수용소 연병장에 있는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생존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는 비밀경찰 살해자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씩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고발하였습니다. 이 고발의 소리는 점점 더 짧아졌습니다. 감방 수위들이 그를 짓밟고 입을 다물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3개월 동안 그는 끝없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 당시 부헌발트에 감금되었던 포로들의 보고에 의하면 결국 파울 슈나이더는 피를 흘리는 한 조각 고기가 되었습니다. 1939년 7월 14일 그는 강심제 주사로 살해되었습니다. 파울 슈나이더는 견고한 신앙, 그리고 확고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용소에서 고난받는 형제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견고한 믿음과 확고한 소망, 그리고 뜨거운 사랑의 원천은 그의 기도에서 나왔으며, 복음 증거를 위한 하나님의 소명, 딕컨쉬드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확신을 버리기보다 차라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는 고문의 고통 속에서 이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짓밟혀 죽어갔지만 그늘진 수용소에 빛으로 살았습니다. 파울 슈나이더 목사는 수용소에서 짓밟혀 죽어가는 고난 속에서 감춰진 십자가의 영광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고난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고난받는 메시야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교회가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핍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핍박받는 민중 속에서 함께 그 고난에 동참함으로 비로소 복음화되어가는 자신을 확신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야가 세상에 오셨건만 그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게 되었던 것은 고난받는 메시야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고난에 감춰진 비밀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앞장서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권세로 세상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해주시는 메시야를 기대했었지 십자가에 고난받는 메시야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적 권능과 권세가 아니라 십자가였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공의를 보여주시고, 화평의 제물이 되어 인류를 구원하시며, 인류를 하나되게 하는 평화의 도구가 되신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이 예수 십자가의 피로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화해의 공동체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등 모든 관계의 화해를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교회는 당연히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화목하게 하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합니다."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해 필요한 것이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교회는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 나가야만 합니다. 한국 교회는 지난 날 부정한 정권 아래 고난받는 민중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보다는 번영과 부에 편승하므로 십자가 고난을 외면하였던 부끄러운 역사를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 일제 치하에서 고난받는 나라 민족을 위해 십자가의 남은 고난을 채워 복음화되었던 모습을 다시 한번 회복하는 한국 교회가 되어가야 할 것입니다. 대 교회를 중심으로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는 교회세습문제와 성직매매, 그리고 교권장악을 위한 부정선거 등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박으며 십자가의 고난에 감춰진 비밀의 영광을 왜곡시키지 말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한국교회가 되기 위해 고난에 감춰진 영광을 바라보며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하며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밀의 영광>은 이 땅에 진정한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해 교회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데 있습니다. <비밀의 영광>을 위해 무엇보다 먼저 교회가 십자가의 고난으로 복음화되기를 기원합니다.
              <2000년 6월 11일. 이동희 목사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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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리스도안에 뿌리를 박으라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로새서 2:1-7)

요즈음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직장이나 학원가를 중심으로 선풍을 일으키는 김정일 버전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집안에 은둔하지 아니하시고 예배당에 나오셔서 반갑습네다. 보고싶었습니다. 오늘 아침 식반찬은 어떠랬시요?" 그런데 이같이 유행처럼 번지는 북한식 어투나 인사를 나누다가 "왜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하느냐?"며 싸우고 다투어 경찰에 불구속 입건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화해 분위기도 좋지만 상황 분별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문화일보 15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고 대다수 국민들이 공감하는 글이라고 느껴졌습니다.
《6.25전쟁 발발 50주년을 맞았지만 전쟁의 쓰라린 기억은 남북한 사회에 <레드콤플렉스>와 <미국콤플렉스>라는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50대 이상의 기성세대에 있어 6.25전쟁은 몸서리치는 공포였기에 그 후유증은 또한 한국 사회를 왜곡시키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존재해 왔습니다. 남과 북의 정치권력은 이러한 콤플렉스를 체제유지와 정적축출에 이용했고 국민을 동원하는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한반도의 현대사는 두개의 콤플렉스 속에 갇혀 왜곡되고 굴절됐으며 수많은 인물들이 콤플렉스의 희생물로 사라졌습니다. 이제 콤플렉스의 실체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들을 취해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남한에서의 <레드콤플렉스>에 대한 실체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94년 7월18일 전국 4년제 대학총장들의 모임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서 당시 서강대 박홍(朴弘)총장은 '학생운동권은 주사파가 지도하고, 그 뒤에는 사노맹이, 그 뒤에는 사로청이,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박총장은 또 '공산당에 입당한 학생도 200∼300명에 이른다. 북한에 초청돼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한국에 돌아와 교수가 됐다.'는 잇딴 발언으로 우리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박총장의 발언을 계기로 이른바 주사파 색출을 위한 신공안 정국이 시작됐습니다. 교육부는 운동권 자금원을 차단하기 위해 교내 수익사업을 금지한다는 발표문을 냈고 경찰은 '김일성주의 청년동맹'조직을 발견했다며 대대적인 시국사범 체포에 나섰습니다. 남한 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레드콤플렉스>를 단적으로 실증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은 어떤 이유에서든 용서될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박총장의 발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확대해석된 것입니다. 전북대 강준만(康俊晩.44·신문방송)교수는 "<레드콤플렉스>는 공산주주의 위협에 대한 과장되고 왜곡된 공포심과 그 공포심을 근거로 한 무자비한 인권탄압을 정당화하거나 용인하는 사회적 심리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한국의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정권이 레드콤플렉스를 체제안정과 정적탄압에 이용했거나 이로 인해 왜곡된 사건이나 인물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분단조국의 현실과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민주·통일운동의 불을 지핀 거목으로 평가받는 문익환(文益煥)목사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유신철폐운동과 통일운동을 펼치며 89년 3월 북한을 방문했던 그는 늘 '빨갱이 목사'라는 꼬리를 달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을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한국외국어대 이장희(50·법학)교수는 지난 98년 1월 "나는야 통일 1세대"라는 초등학생용 통일교재를 집필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검찰에 붙잡혔습니다. 통일원 정책자문위원이자 평화통일자문위원이었던 이교수가 쓴 이 교재는 통일원이 펼친 통일캠페인에도 활용됐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여기에도 '빨간딱지'를 붙였고 한국 사회는 그를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한양대 리영희(李泳禧.71·언론대학원)대우교수는 국민의 의식속에서 레드콤플렉스를 해체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온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지난 64년 신문기자 시절 '북한 유엔동시가입안 검토중'이라는 기사를 써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그는 74년 7월 '전환시대의 논리'와 그 이후 발간한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의 저서를 통해 반공이데올로기를 해체시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한 대가로 9번 연행되고 5번 구속되고 3번 재판을 받아 1000일을 넘는 감옥생활을 겪어야 했습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역시 야당시절 독재정권을 상대로 민주화투쟁을 벌일때 마다 늘 <레드컴플렉스>의 희생양이 됐고 선거때마다 색깔논쟁에 휘말렸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고려대 유호열(柳浩烈·북한학과)교수는 "기성세대가 전쟁의 경험으로 <레드콤플렉스>에 사로잡혔다면 이후의 세대는 철저한 반공교육을 토대로 콤플렉스를 키워왔다."며 "대부분 초등학교에서 배운 늑대나 이리로 형상화된 북한 공산당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관념은 어떤 이유로든 '빨갱이'를 용서하지 않는 가치관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북한에서의 <미국콤플렉스>를 살펴보겠습니다. "미국의 침략적 대 조선 정책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악랄해지고 있으며 미국은 어리석은 조선침략 전쟁기도를 버리고 남조선에서 미군을 지체없이 철수해야 한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달 1일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가 발표한 보고서에 대한 논평을 내면서 또다시 남한에서의 미군철수를 요구했습니다. 노동신문은 지난달 12일에도 '제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면 살고 굴복하면 죽는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타국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최대의 적은 제국주의자들이며, 제국주의는 자주성을 옹호하는 세계 인민의 공동의 적으로서 적들과 맞서 싸우자면 견결한 계급의식, 반제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은 북한의 신문뿐만 아니라 방송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북한 중앙방송은 지난 3일 한·미 합동조사단의 매향리 사격장 폭격사건 조사발표와 관련, "이는 저들(미국)의 범죄행위를 가리기 위한 파렴치한 현실기만으로 공정한 사회여론에 대한 도전이며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일"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북한은 분단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주민들에게 미국에 대한 경각심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언론은 물론 각종 주민토론회를 통해 미국을 비판하고 팀스피리트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각지에서 궐기운동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반미의식은 소설, 시, 음악 등 문학작품과 예술에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레드콤플렉스>가 '빨갱이'라는 단어로 대표된다면 북한에서 <미제콤플렉스>는 '승냥이'라는 괴물로 형상화 되어있습니다. 평안남도 신천에 위치한 '신천박물관'은 대표적인 반미의 성지로 꼽힙니다. 6.25때 미국이 저지른 주민학살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 곳은 주민들의 반미의식 고취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한문제 전문가 이항구(66·통일연구회 회장)씨는 "북한에서는 주적이 미제에 맞춰져 있고 사회의 모든 기능이 이를 축출하기 위해 집약돼 있다."며 "북한정권은 계속해서 주적을 각인시킴으로써 주민들을 동원하고 체제를 안정시켜왔다."고 말했습니다. 민간통일운동 단체인 '좋은 벗들'이 올 1∼5월 남한 성인 500명과 중국에 거주하는 탈북주민 106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결과를 보면 북한주민들의 반미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사결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해 남한 주민들은 '경제교류'(34.6%)와 '평화협정 체결'(29.2%)을 꼽은 반면 북한 주민들은 전체 응답자의 대부분이 '미군철수'(66.1%)라고 응답했습니다. 북한 정치권력 역시 정권유지와 견제를 위해 미제콤플렉스를 이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씨는 "김일성은 박헌영을 비롯, 정적들을 미제국주의자의 앞잡이로 몰아 축출했다."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미제콤플렉스를 더욱 강화시켰고 역사는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러면 남북의 콤플렉스 극복방안은 없겠습니까? 민간교류 활성화로 '막연한 무섬증' 없애야한다고 말합니다. 전문가들은 분단현실과 미군주둔이 콤플렉스의 원인이며 강화시켜 온 요인인 만큼 이에 대한 해결 없이는 근본적인 극복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한에서의 <레드콤플렉스>는 최근 교육내용 등을 통해 상당히 완화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통일연구원 이우영(李宇榮.41)박사는 "그동안 반공교육을 담당해 온 교과서의 내용은 북한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며 "이제는 보안법 철폐등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단계적으로 개선시켜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콤플렉스가 교류가 차단된 단절로 인해 실재를 보지 못하고 허상 속에서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데서 기인한 만큼 교류확대도 이러한 콤플렉스를 걷어내는데 일조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리영희교수는 "남북은 지난 50년 동안 서로 마음의 벽을 쌓고 살아왔다."며 "이제는 서로를 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동포로 껴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서로 마음의 벽을 쌓고 <레드 콤플렉스>, <미국콤플렉스>에 시달려왔던 이 나라 민족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았던 인간의 교만이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에덴에서 추방을 가져왔습니다. 그 인간의 교만 죄는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며 한 몸을 이루었던 남편과 아내 사이에 보이지않는 마음의 벽을 세웠고 자연과의 분열을 초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죄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단절, 분단을 가져왔습니다. 동서, 남북, 좌우의 분열이라는 상극적 대립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좌나 우, 남이나 북을 막론하고 분열된 인간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십자가 사건은 분열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적대관계 즉 원수된 것을 소멸하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둘로 하나를 만드시는 진정한 화평을 이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화해를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적대관계의 종결, 곧 모든 관계의 화해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이처럼 좌우, 남북의 분열된 세계로 하여금 화해를 이루어 하나 되게 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토양 속에 탄생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는 성도들은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므로 좌우, 동서, 남북의 분열을 치유하는 화해 공동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는 우익에, 하나는 좌익에 앉게 해 달라며 하나님 나라를 세상적 통치의 좌우 헤게모니로 착각했던 예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께서 질문합니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이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0-28) 교회가 좌우, 동서, 남북의 분열을 치유하는 화해 공동체가 되기 위해 십자가의 쓴잔을 마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남한과 북한의 정상회담을 통한 남북 화해는 발전된 남한 경제를 발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막강한 경제력이 좌우, 남북의 정치와 사상 이념의 벽을 넘어 화해의 물꼬를 트고 있다고 이구동성입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도 돈이 있어야 "햇볕"이 되지 돈이 없으면 먹장 구름에 불과할 것입니다. 남한의 경제력이 그간 남한이 극복하지 못한 <레드콤플렉스>를, 북한이 극복하지 못했던 <미국콤플렉스>를 극복케 하는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국군 최고 통수권자가 우리 군의 주적(主敵)인 인민군을 사열하고 인민군 간부들과 식사를 하며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내무반에서 TV생중계를 통해 목격한 장병들은 상당한 혼란을 느꼈을 것이라며 군에서는 <대북 정서 바꾸기>에 고민스럽다고 합니다. 벌써부터 북한과 김정일에 대해 80% 이상이 긍정적으로 바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남북 화해라는 큰 틀 속에 이같은 콤플렉스나 사상적 이념적 혼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지난 50년간의 분열과 분단의 아픔과 상처가 금새 아물어지는 듯 합니다. 가히 경제력이 정치 사상 이념을 압도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 골리앗같은 경제력앞에 교회는 겨자씨같이 느껴집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처럼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경제의 이념과 사상이 동서남북, 좌우의 벽을 근본적으로 허물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20%의 가진 자들이 던져 주는 빵만으로 80%의 못 가진 자들과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서로 마음의 벽을 허물고 사랑과 섬김으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높은 자와 낮은 자가 하나 되는 평화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서남북, 좌우의 분열과 분단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는 예수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경제를 발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적인 사랑과 섬김을 통한 영구적인 화해와 평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십자가의 희생적인 사랑과 섬김을 통한 화해 공동체입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그릇되고 거짓된 철학과 사상, 그리고 교훈과 지혜는 혼란과 분열을 야기시키는 것으로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전통이나 철학, 사상이나 도덕 등은 인간을 구원할 지혜와 지식이 아니라 진리를 노략질하는 교묘한 속임수에 불과한 것으로 인간을 결코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의 십자가만이 인간을 구원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여러 가지 경제 정치의 사상과 이념 등은 한시적인 화해와 평화를 가져다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인류에게 영원한 화해와 평화를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칼 맑스,  레닌 등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과 이념에 지난 70년 동안 지구의 절반 가까이 되는 나라 민족이 엄청난 고난과 비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본주의라는 정치 경제의 사상과 이념 아래 경쟁과 가난에 내몰려 희생당하고 고통당한 사람들이 세계인구의 80%나 됩니다.
정치 경제의 사상과 이념 아래 지금까지 고통을 안고 사는 <장학봉옹의 인생유전>이라는 글을 최근 어느 일간지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카레이스키(고려인)들은 민족사의 한 면을 채운 또 다른 비운의 주인공들입니다. 북한군 대좌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시 장학봉(81)씨는 대학졸업후 소련군 통역원으로 해방과 함께 북한 땅을 밟았을 때 해방된 조국을 소련보다 더 나은 이상국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로 피가 끓었다. "당시에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북조선 정권이 안정되길 바라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처음 전쟁이 일어날 때도 '이것은 남조선을 해방하는 정의의 전쟁이다.'이라고 생각했었니까요." 군사 분야는 물론 공산당 내 주요 직책을 도맡은 이들의 활약은 놀라웠습니다. 북한 정권은 빠르게 안정돼 갔습니다. 북한사회가 안정되면서 장학봉씨 등 카레이스키 참전자들은 타슈켄트시에 머물던 가족들도 하나 둘씩 북한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사회주의 이상국가인 조국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이 1950년 6월 한국전쟁 때까지만 해도 그런 꿈은 깨지지 않았습니다. 장씨는 당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지도원으로 전쟁에 참가 했습니다. 오랜 준비 끝에 전쟁을 시작한 북한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6월 25일 새벽 5시 38선을 넘은 장씨는 전쟁이 일어난지도 모른 채 부대원의 식사준비를 위해 쌀을 씻고 있던 국군 취사병을 포로로 붙잡았다고 술회했습니다. 하지만 그해 8월 남진이 좌절되면서 장학봉씨 등 카레이스키 참전자들에게도 불행의 먹구름이 몰려들었습니다. 전투가 장기화되고 치열해지면서 전쟁도 점차 장학봉씨가 생각하던 정의와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전쟁의 장기화에 대한 불안감으로 장씨와 동료들은 가족들을 중국을 거쳐 연해주로 피신시켰습니다. 장학봉씨의 위대한 조국건설에 대한 회의도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낙동강 전투 때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숨졌습니다. 강이 핏물처럼 흘렀지요. 과연 전쟁밖에는 남조선 해방의 길은 없는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은 53년 7월 장학봉씨가 인민군 정치사관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중 끝이 났습니다. 종전이 되자 북한은 56년부터 북한인민군내 사상검토를 통한 숙청작업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남로당측 인사들이 대상이 됐고 장학봉씨의 오랜 동료들이 점차 좌천되기 시작했습니다. 장씨의 회의도 더욱 깊어졌고 숙청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습니다. 숙청 대상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장씨는 58년 결국 다시 소련을 택했고 탈북 행렬이 줄을 이었습니다. 함께 우즈베키스탄을 떠났던 42명의 동료가 장학봉씨와 함께 소련 망명의 길을 선택했지만 결국 탈북에 실패한 20여명은 그 뒤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타슈켄트시에서 장씨는 이후 20년간 피혁공장 공장장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를 비롯한 참전 동료들은 서로 자주 만났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떠나온 조국 북한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습니다. 카레이스키 제1세대가 꿈꾸던 조국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90년 장학봉씨는 한국 초청으로 처음 남한을 방문했습니다. 88올림픽 이후 조금씩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장씨는 한국의 발전에 크게 놀랐습니다. "남한의 발전이 참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과거와 같은 쓸모없는 대립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는 신념과 이념 때문에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불행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독일의 통일에 물꼬를 텃다고 평가되는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이나, 한반도 통일의 길을 열게 했다고 인정받고 있는 "햇볕정책"이나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세계화, 개방화 등의 여러 가지 경제 정치의 사상과 이념들은 모두가 다 한시적으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궁극적으로 인류를 구원할 진리가 아닙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정치 경제의 사상과 이념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한참이나 밀려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일개 종교의 사건이며, 수많은 종파들이 주장하는 진리 중 하나 일뿐이라며 세상을 지배하는 정치 경제의 사상과 이념들에 밀려나 있습니다. 소위 십자가로 나타나는 기독교 사상만으로는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생각과 사상들이 진리를 약탈하는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그의 희생으로 모든 법과 사상과 이념 등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 십자가만으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법과 사상 이념을 극복하는 지혜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 정책의 도움 받을 필요 없이 부족함이 없는 인류 구원의 지혜와 지식, 능력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종교나 정치 경제의 모든 이념과 사상으로 고통받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는 세상에 오셨고, 그 구원의 길을 십자가를 통해 열어 놓으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겨자같이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열등의식, Inferior Complex>을 벗어버리고, 세상을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뿌리를 깊이 박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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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위엣 것을 찾으라1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로새서 3:1-11)

예수 믿는 사람이란 "예수께서 제가 지은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저를 살리셨습니다."는 신앙고백으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예수의 거룩한 희생과 사랑을 생각하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기록된대로 말하면 "땅에 있는 지체에 해당되는 음란과 부정,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그리고 분냄과 악의와 훼방과 입에 담기에 부끄러운 말 등"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사랑과 긍휼과 자비, 겸손과 인내와 감사와 평강 등"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이타주의적(利他主義的)이며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거듭 태어나는 삶을 사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중심(ego-centric)의 생활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self-denial), 하나님 중심(God-centric)의 이타주의(利他主義)적으로 사는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이에 대표적인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백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나는 망해도 당신의 성공으로 만족합니다.' '당신이 산다면 나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희생해서 당신이 잘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나는 죽고 너를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자유경쟁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일등하고 성공하며 너를 이기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너를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순위 매기기입니다.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사람 순위, 혹은 제일 돈 많은 순위, 기업의 규모가 큰 순위, 야구에서 홈런 순위, 축구에서는 골 득점 순위, 골프에서는 상금 순위, 연예계는 인기 순위, 등 심지어 교회도 교인과 헌금 등의 순위를 매기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서열 매기는 풍토가 경쟁사회의 특징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를 놓고 경쟁과 비교의 대상으로 여겨 등수를 매기는 것은 서글프고 잘못된 것입니다. 이웃 사랑에 등수 매기는 것이나 자선사업 기부금 기부 순위를 매기는 것이나 자원 봉사 순위 매기기 등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에 대한 순위를 매기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과 봉사 등은 작거나 크거나, 많거나 적거나 모두가 다 아름다운 것이며 귀하고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을 희생했느냐입니다." 이 말은 미국 태권도 시드니 올림픽대표선발전에서 부상당한 친구에게 올림픽 출전권을 양보해 미전역을 감동시켰던 재미교포 에스더 김(21세)이 한 말입니다. 기자가 에스더 김에게 물었습니다. "친구인 케이 포에게 올림픽출전권을 양보한 이유는?" "당시 포는 부상을 당해 경기를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싸우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10년후 그 때를 돌아보더라고 당시 결정이 옳았다고 믿을 것입니다. 저는 미국내 일부 언론에서 '경기력이 떨어져 기권했을 수도 있다.'는 왜곡보도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습니다....태권도 정신은 꾸준히 자신을 연마하는 희생정신입니다. 이길 때도 배우고 질 때도 배우는 것입니다." 에스더 김은 태권도 올림픽 출전권 획득을 위한 1등보다는 태권도의 정신을 더욱 귀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요즈음 의약분업에 반발하여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의사폐업으로 국내외에 빈축을 사고 있는 의사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들이 선서했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관계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나는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그들이 "자유의사로서 명예를 걸고 엄격히 선언하고 서약한" 의사 정신은 어디로 갔습니까? 의사폐업 파업에 동참하기 위해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에게 폐업 전에 수술을 요구하여 결국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이가 죽고 만 사건, 응급환자가 이 병원 저 병원 전전 긍긍하다 결국 숨을 거둔 사건 등이 속출하는데도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는 의사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생명은 의사들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이라면 적어도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환자들의 생명이 부르짖는 고통의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는 신학박사로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첫 목회지인 덱스터 침례교회 목사로 부임했습니다. 마침 그 때에 몽고메리의 버스 승차거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버스에 백인석 흑인석을 갈라 놓는 것에 대한 반대운동입니다. 킹 목사에게도 "당신이 이런 운동을 계속하면 죽인다"는 협박전화가 매일 한번씩 걸려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킹 목사의 가슴에 울려온 음성은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느냐?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이 불가능하겠느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날부터 킹 목사는 민권운동에 나섰으며 오랜 꿈인 교수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결국 그는 총에 맞아 짧은 생애를 마쳤으나 전 세계에 영구한 빛을 남긴 거인이 되었습니다. 킹 목사는 출세 성공 명예 등 세상에 대한 생각을 접고 위에 계신 하나님의 뜻에 따랐던 것입니다.
지난 15일자 경향신문에 흥미로운 기사 제목을 보았습니다. <황제> 빌게이츠 VS <성자> 스톨먼 정보의 상품화.공유화 "서울大會戰"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정보기술(IT)업계 거물들중 극히 대조적인 두 사람인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회장과 리눅스 운영체계를 개발한 리처드 스톨먼이 나란히 서울에 모습을 나타났기 때문에 붙여진 타이틀이었습니다. 게이츠는 1955년생이고 스톨먼은 1953년생.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연령대이고 하버드대 동문입니다. 게이츠는 소프트웨어로 대표되는 지적재산권을 상품화해 전세계적으로 독점적 시장을 구축하여 '소프트웨어업계 황제'로 군림하고 있고, 반면 스톨먼은 85년 자유소프트웨어재단(FSF)을 설립해 소프트웨어의 완전무료 이용을 기치로 내걸고 'GNU프로젝트'를 추진, 공개운영체계인 'GNU 리눅스'를 개발하여 전세계 리눅스 마니아들로부터 리눅스 세계의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특히 게이츠로 상징되는 지적재산권(Copyright)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누구든지 프로그램을 마음대로 복사해 나눠 줄 수 있고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는 '카피레프트(Copyleft)'의 원조로도 유명하여 '리눅스의 성자'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카피레프트 정신에 관한 한 일체의 타협을 거절하고 99.9%가 아니라 100% 무상 소프트웨어가 돼야 한다는 리눅스의 자유정신에 따라 무료 소프트웨어 운동을 펼치면서 <성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이츠는 황제답게 값비싼 신라호텔 한 층을 모두를 이용한 반면 스톨먼은 8평 남짓한 원룸에서 '홈스테이'를 즐겼습니다. 언론과 사람들의 시선은 초호화 호텔에 머물고 있는 <황제>의 모습보다 8평 원룸에서 민박하는 <성자>에게 쏠렸습니다. 정보의 상품화를 통해 귀신같이 돈 잘 버는 <황제>보다는 정보의 공유화라는 카피레프트의 정신을 통해 모든 인류가 다 함께 유익할 수 있는 길을 택한 <성자>를 발견하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스톨먼은 리눅스를 가지고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지만 모든 이들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먼저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최소한의 필요한 만큼만 벌고 나머지는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스톨먼은 지난 16년동안 정보의 상품화를 통해 얼마든지 <황제>가 될 수 있는 길과 일체의 타협을 거절하고 정보의 공유화라는 카피레프트의 정신과 철학으로 일관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똑같이 방한한 빌 게이츠에 대해서는 한 마디 칭찬도 없었으나 스톨먼의 정보에 대한 카피레프트 정신과 공유화를 부르짖는 그의 철학에 대해서는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은 주연 '레오나르도 드까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레'의 사랑 이야기를 더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 당할 때 구명정을 타고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승선 규정에 따라 값비싼 1등석 승객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돈이 많아 1등석을 타고 배가 파선되었을 때 구명정까지 타고 생명을 건질 수는 있었지만, 그 와중에 자신이 배에 남고 3등석 승객을 대신 구명정에 태워 남의 생명을 건지고 희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생존자 통계기록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탑승 승객중 생존비율은 1등석 승객이 60%, 2등석이 44%, 3등석이 25%, 승무원이 24%였습니다. 1등석의 특권을 포기하고 2,3등석 승객들의 생명을 건진 사람들의 남긴 이야기가 더욱 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인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사랑한 이야기는 거룩하고 영원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한다면 남을 위한 희생과 사랑에 많은 미련이 남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지 않고,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가 영원한 것으로 믿고 삶의 기준을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고 십자가 없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사랑에 자신을 던지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예수 십자가에서 찾고 사는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 바탕이 되어질 때 숭고하고 아름다우며 영원한 것입니다. 선과 악은 예수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참과 거짓 역시 예수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혜와 어리석음도 예수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도 예수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그 가치가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문학과 예술을 하든, 또는 어떤 운동이나 의술을 베풀든, 무엇을 하든 예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바탕으로 할 때 그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는 것이며 영원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오직 유일한 빛으로 삼아 세상을 비추며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삶의 의미와 보람으로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 십자가를 자신의 삶의 내용과 방편으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관심을 이 세상에 두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나님 나라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그 분의 생각과 마음이 완벽하게 담긴 십자가를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여 분별하고 판단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순종과 겸손을 삶의 바른 가치 기준으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 부귀영화의 가치를 십자가에 비추어 평가합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와 출세를 십자가의 빛에 비추어 평가합니다. 세상에서의 사랑도 십자가의 사랑에 비추어 평가합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언뜻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는 듯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고 그 청년은 그 계명들을 다 지키었다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예수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마태복음 19:16-22) 사실 이 부자 청년은 생각하고 추구했던 것은 예수께서 생각하셨던 것처럼 위엣 것이 아니라 땅에 있는 재물과 명예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이 위엣 것을 찾는 생활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 위엣 것을 찾는 생활입니다. 몸은 비록 이 땅에 있을지라도 여러분의 거룩하고 아름다우며 영광스러운 삶을 위해 위엣 것을 찾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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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위엣 것을 찾으라(2)

(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5)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 (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로새서 4:1-6)

"상전들"이란 한 마디로 '힘을 가진 자들'을 말합니다. 돈의 힘, 권력의 힘, 지식의 힘 등, 힘을 가진 사람들이 상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힘있는 사람들이 법을 만들어 힘없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시대같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법이란 힘있는 사람들에게는 힘을 잃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힘을 발휘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사상 초유의 의료계 불법 집단 폐업에 대해 검(劍)을 가진 검(檢)의 좌고우면하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 청와대 눈치를 살피다가, 또는 강경 폐업의사들 신경다칠까 염려하다가 역시 강자에게는 솜방망이 약자엔 쇠뭉둥이를 휘둘러대는 비굴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의사들의 불법 집단 폐업 현장에서는 경찰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었지만, 롯데호텔 1,122명 노조원 파업 진압하는데는 새벽 미명에 34개 중대 3,000여명의 경찰 특공대를 투입해 섬광탄, 연막탄 등을 발사하고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며 농성장에 진입하여 단숨에 진압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볼모로 진행된 의료계 집단폐업과 비교했을 때 외국인이 대부분인 400여명의 투숙객들이 더 급박하고 걱정스러웠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 노동계와 노조측은 "경찰은 대테러전문요원을 동원해 임신부가 포함된 농성조합원들을 무차별 폭행했다."며 "민주노총의 자체 해산 중재노력도 무시한 과잉진압"이라고 반발했습니다. 한 노조원은 "우리가 의사들이라면 과연 경찰이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 진압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노조원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국가권력에 어느 국민이 신뢰를 갖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노동계 대표는 "이번 강제진압은 의료계 폐업으로 실추된 공권력의 위신을 힘없는 노동자들을 제물로 삼아 회복하려는 책략"이라고 비난하면서 "모든 조직력을 동원해 대정부 투쟁에 돌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형평성과 공정성을 상실한 이 땅의 <상전들>에게 외칩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돈의 힘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 아닙니다. 권력의 힘으로 세상이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지식의 힘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 아닙니다.
세 사람이 강을 건너려고 나룻터로 나왔습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금방이라도 비바람이 몰아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강나루에 막 도착한 이 세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금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고 간청하는 바람에 늙은 뱃사공은 하는 수 없이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부자티가 나는 한 사람이 뱃사공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모아둔 재산이라도 좀 있소?" 뱃사공은 대답했습니다. "매일 먹을 끼니밖에는 모아둔 것이 별로 없소." 질문했던 사람은 뱃사공을 쳐다보며 "허, 대부분의 생을 헛살았군요." 하더니만 한참 동안이나 자기의 재산을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학자다운 기풍이 있는 사람이 뱃사공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장은 사서오경에 대해서 좀 아시오?" 뱃사공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평생 노만 저었기 때문에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허, 노인장은 반평생을 잃었군요."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장황하게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고귀하게 생긴 세 번째 사람이 또 물었습니다. " 노인장, 집안에 벼슬하는 사람이라도 있소?" 뱃사공은 몹시 짜증스럽다는 듯이 아무말 없이 고개만 옆으로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노인장의 삶은 매우 불행하군요"하며 혀를 찼습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는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고 세찬 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타고 있던 나룻배가 뒤집어졌습니다. 배에 탔던 세 사람이 허우적거리며 사람 살리라고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뱃사공은 그들을 쳐다보며 "여보시오, 당신들은 헤엄도 못치오? 참 딱하기도 하셔라. 그렇다면 당신들은 생의 전부를 잃었군요." 하였습니다. 물에 빠져 위험에 처해 있을 때는 재물이나 지식이나 권세보다는 헤엄이 더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 삶을 마치고 내세에 갈 때는 무엇보다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재물이나 지식이나 권세는 인간의 삶을 유익하게도 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재물이나 지식이나 권세는 잠시 편리할지 모르나 때로는 스스로 얽어매는 올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 힘으로 지배되고 있지만 그 힘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눈에 보이는 힘이 아니라 보이지않는 사랑의 힘으로 지배하시며 그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인간의 영혼이 구원받는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일에 대한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있다는 말합니다. 기도 없는 영혼은 그리스도 없는 영혼이고, 그리스도 없는 영혼은 멸망한 영혼과 다를 바 없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거듭난 마음이고 하나님과 화목한 마음이고 신령한 마음이고 진리의 광명을 받은 마음이고 생명 있는 마음이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기도할 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 마음에서부터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는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드린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즉각 내리지 않고 오래 기다리게 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오랫동안 하게 하여 무엇보다도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과 오랫동안 교제함으로 성화되게 하시려는 까닭임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기도가 향기와 같은 것은 바로 기도를 통해 우리의 성품이 향기나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기도 중 가장 향기나는 기도는 자신을 위한 것보다 남을 위한 기도입니다. 특히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기도야말로 가장 거룩하고 향기나는 기도인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외에는 세상을 구원하실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에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땅에 복음전파 외에 달리 세상을 구원할 다른 방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복음전파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예수 믿고 하늘나라에 기록되었다면, 복음전파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영원히 남을 이름을 가진 사람들, 두기고, 오네시모,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에바르라, 누가, 데마, 눔바 등 이들이 모두 복음 전파를 위해 함께 동역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교회에서 사랑받는 형제들이요 이웃들과 동역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었으며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함께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주 어느 신학자가 "교회 신자 대부분의 기도 제목이 사업번창, 건강, 가정화목 등 개인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무속의 기복성과 뭐가 다르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껍데기만 십자가 달고 교회 간판 달았지 무당집과 다를 바 없는 교회가 많다는 지적입니다. 교회는 무병장수, 부귀영화, 출세 성공 번창을 위해 100일 기도하여 용한 응답을 받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십자가 사랑과 희생을 베푸는 곳입니다. 교회는 자기가 잘되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곳이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십자가에 못박아 희생하고 남을 살리는 곳입니다. 교회는 한마디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받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까? 복음 전파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함께 고난받으며 사랑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께서 그랫듯이 교회는 이 땅에 힘없는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낮고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갇힌 사람들을 위로하고, 환경이 어려워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들어가는 하늘나라는 그 길바닥이 유리같은 정금으로 포장되어있으며 문마다 각종 보석과 진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생명수 강이 흘러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달마다 열매를 맺어 만물을 소성케 합니다. 하늘나라에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합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하늘나라는 예수믿고 죄사함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하늘나라에 기록되는 이름은 돈 많은 사람들도, 권세있는 사람들도, 지식이 많은 사람들도, 이른바 힘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원히 사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수원 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인 김장환 목사는 해외 선교방송인 극동방송 사장이며, 전세계 1억 6천만 침례교인들을 대표하는 세계 침례교(BWA) 총회장으로 서구 종교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독교 지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5천만 미 침례교인들로부터는 영혼을 깨우는 신앙의 아버지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그의 이름은 빌리 김(Billy Kim)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16세 소년이었던 김장환은 전쟁으로 학교를 잃고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는 가족들을 위해 미군부대 막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우스 보이'(house boy)였습니다. 이때 붙여진 이름이 바로 빌리(Billy)였습니다. 하우스 보이 빌리를 불쌍히 보고 이 아이 하나라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미국에 데려가 공부시킨 사람이 카알 파워스라는 미군이었습니다. 카알은 전쟁의 위험가운데서도 빌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귀국을 8개월씩이나 연기해가며 빌리의 입국수속을 끝내고 빌리를 데려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카알은 자신이 부자라서 빌리를 미국에 데려가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리 김이 카알의 초청으로 미국에 들어가 살게 된 곳은 버지니아 북부 외딴 산골 탄광촌인 댄트라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전기나 전화도 없고 수돗물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카알 집안 역시 탄광촌의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카알의 부모나 그의 형제들은 가족처럼 동생처럼 여기며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카알 형제들은 빌리를 공부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나오는 장학금을 아끼고 지방 신문을 통해 모금 운동을 벌이며, 심지어는 거리 공연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리 김을 그 유명한 밥 존스 대학에 입학시켰고 빌리 김의 학업 뒷바라지를 하느라 카알은 혼기까지 놓치고 지금까지 독신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카알의 이러한 아무런 대가 없이 베푸는 그의 헌신적인 사랑 나눔과 희생에 청년 김장환은 감동을 받고 자신도 평생 카알과 같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풀고 희생하며 살기 위해 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전 김장환 목사는 수십년동안 살아왔던 집을 팔아 중앙기독초등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는 모든 학급에 몇 명의 장애아동들이 함께 공부하는 통합교육을 실시합니다. 처음에는 학부모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지금은 서로 이 학교에 자신의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줄을 선다고 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들이 이 학교에 들어와 장애아동들과 함께 지내며 남을 이해할 줄 아는 아이로 변화되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과 건강치 못한 사람이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힘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이 함께 사는 법을 배워가기 때문입니다. 김장환 목사는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은 학교안에 지어진 작은 숙소에서 생활하면서 카알을 통해 받았던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몸소 실천하고 있습니다. 빌리 김을 구한 카알 파워스는 지금도 자신의 봉급을 털어 학업을 잇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며 그들에게 꿈을 키워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 한 사람의 사랑과 희생으로 구한 김장환 목사를 통해 수많은 잠자는 영혼, 죽어가는 영혼들이 구원함을 받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해 함께 고난받으며 사랑과 희생을 베푸는 사랑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희생을 통해 위로가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에 기록되는 영광스러운 이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부산에 살고 있는 김남 자매한테서 어제 전화가 왔습니다. 김남 자매는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전신의 뼈가 굳어져 마비된채로 10년 동안 침대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곤 볼펜을 깍지 끼울 손가락 두 마디밖에 없습니다. 그 두 마디 손가락으로 일주일 한번 병원 환자들에게 하나님 사랑의 편지를 쓸 힘밖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들은 병환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김남 자매가 동사무소에서 받는 생활구호금으로 자신의 생활도 어려운데 복음 전파를 위해 선교비 2만원을 송금해왔습니다. 저는 김남 자매의 전화에 참으로 바울이 받은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 하나가 자신의 도시락을 예수께 드려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일으켰던 것처럼 김남 자매가 드린 선교비는 단돈 2만원에 불과하지만 수 천명의 영혼을 먹이고 살리는데 거룩한 제물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일에 의롭고 공평한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인류 구원에 유일한 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사랑하시고 그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받으며 피차에 위로가 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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