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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01b.gif 누구에게 좋게 하랴 cross01b.gif

                          ---갈라디아서 설교---

anii33.gif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누르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1. 누구에게 좋게 하랴!(1장)
2. 하나님을 향해 살라!(2장)
3. 오직 한 가지 약속(3장)
4. 성숙한 믿음과 자유(4장)
5.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들(5장)
6. 예수의 흔적을 가지라(6장)

  

                 1. 누구에게 좋게 하랴!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年甲者)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擇定)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쌔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갈1:1-24)

마틴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한 것은 갈라디아서였습니다. 갈라디아서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갈라디아서를 <영적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를 유대교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바로 이 갈라디아서였습니다. 흔히 '자유'하면 1941년 1월 6일 미국의 대통령 F.D. 루스벨트가 제창한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할 4가지 자유'<four freedoms>를 들 수 있습니다. '언론과 발표의 자유', '신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등입니다. 이 네 가지 자유는 나중에 국제연합의 기본 사상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4가지 자유는 참으로 수많은 피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얻어지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대로 자유란 투쟁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군사 정권 아래 '언론과 발표의 자유'가 제한된 가운데 국민이 알 권리를 상실한 채 어둠과 공포 속에 살았던 뼈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며칠 전 TV를 통해 탈북자 일가족 7명이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추방되고, 중국은 다시 북한으로 그 일가족을 강제 송환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가고자 생명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건만 유엔이 그들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 못하고, 한국 정부도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자유'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 일가족 7명은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송환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 동포들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찾아 두만강을 넘어 탈북하고 있지만 공포만 가중될 뿐.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금강산 관광선은 뱃고동을 울리며 동해항을 떠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언론과 발표의 자유', '신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이 네 가지는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할 자유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반드시 얻어야 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왜냐 하면 죄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하면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할 네 가지 자유들"을 다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죄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 영적 자유가 무엇보다 우선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하면 결코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예수 앞에 나와서 비로소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 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자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말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데 예수 외에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받는데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다른 복음이 필요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하든가,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하지 않아 부정하다는 이유로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든가, 달걀과 닭고기를 함께 먹지 말아야 한다든가, 등등의 모든 종류의 유대 종교의 규례나 의식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대 종교에서 요구하는 할례를 비롯한 모든 유대 종교 의식을 행하므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 인간의 참된 자유에 그 어떤 <다른 복음>도 필요치 않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야말로 모든 인류에게 있어 참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다른 복음을 주장하거나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유대주의자이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르치는 거짓 교사로 저주의 대상일 뿐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죄로부터의 자유>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거짓 교사는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모든 거짓 교사들의 주된 목표는 이 구원의 복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유대 종교에서 내세우는 할례나 모든 종교 의식을 가르치고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자유와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소명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입니다. 예수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이거나, 혹은 어느 누구를 죽도록 사랑하다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민주주의를 지키다가 죽은 민주 열사도 아니며, 나라 독립을 위해 비폭력 저항운동을 하다가 죽은 어떤 사상가나 운동가가 아닙니다. 오직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 인간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신 죽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목적은 단지 인간으로 하여금 죄로부터 자유를 얻어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류에게 죄로부터의 자유, 영적 자유를 얻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종교의 규례나 율법, 그리고 의식 등이 인간의 죄로부터 자유에 무용하다는 것을 내세워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기분 좋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죄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 폐지를 논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파이다고고스, 즉 몽학선생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몽학선생은 다른 말로 하면 개인교사라는 뜻입니다. 이 파이다고고스는 아이들의 감시를 위해 고용되었습니다. 6세부터 15세 정도의 아이들을 돌보는데 학교통학이나 행실을 감시하는 역할입니다. 아이들은 물론 파이다고고스를 싫어하지만 부모가 무서워 억지로 그 감시 밑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6세, 성년이 되는 날 이 파이다고고스의 감시로부터 자유를 받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이 후견인의 역할은 첫째, 임시적입니다. 16세에는 불필요해집니다. 어렸을 때만 필요합니다. 둘째, 행동을 감시하는 것 뿐입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경고하는 일을 합니다. 파이다고고스 직업은 힘센 남자 노예들이 맡았습니다. 무섭게 생겨서 아이들 보기에 위협은 되었으나 그들은 본래 무식해서 교육을 담당하거나 새 사람을 만드는 것 같은 근본적인 일은 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파이다고고스에 비유한 것은 율법이란 무서운 감시역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약속된 그 후손(그리스도)이 오실 때까지만(시한부로)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감시를 위해)덧붙여 주신 것이었습니다."(3:19) 후견인은 얼마동안 필요하지만 때가 차면 필요없습니다. 그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고 그런 뜻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자신이 선포하기를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의 말씀들을 없애려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전통적이고 철저한 율법주의자로 그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에 순종하며, 율법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단숨에 개종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사건을 통해 그는 율법의 완성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죄로부터의 자유를 맛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죄로부터 자유를 주시는 십자가 예수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전통적인 유대 종교를 전하는 사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예수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을 변화시킨 것은 어떤 인간적인 설득이나 가르침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기독교의 박해자였던 바울,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을 증오하던 바울, 그를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예수를 사랑하는 자로, 그리고 그 예수를 전하는 자로 변화시킨 것은 십자가에 예수였습니다. 참으로 바울이 죄로부터 자유를 얻어 변화되고 구원받는데 율법이 행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가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데 그 자신이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뿐이었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을 위해 율법적으로 해야 할 일이 없음을 깨닫게 하고,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기독교인들을 박해, 잔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서 만나신 것이었습니다. 바울 그 자신을 변화시킨 것은 십자가 예수의 피였습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에 남기신 것은 그가 죽으신 십자가 피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바울이 변화되고 죄에서 사함을 받았던 것은 율법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피였습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피는 바울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딤전 2:6)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 복음의 전부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1:23)고 했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골2:2)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다."(갈6:14)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혜로운 말로 설교하거나 전도하지도 않았습니다.(고전1:17) 한국 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십자가 예수의 피입니다. 한국 교회가 자랑해야 할 것이 있다면 교세나 교회의 크기가 아니라 십자가 예수입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십자가 예수의 흔적일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고도의 성장 가운데서도 온갖 부정 부패의 자리에 빠지지 않아 욕을 먹고 있는 것은 십자가 예수의 피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하는 예수의 피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피만이 더러운 인간의 죄를 정결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십자가 예수만으로 충분히 인간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여 참 자유와 구원을 얻게 합니다. 십자가 예수만으로 충분히 자신과 가정, 그리고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이 변화되기 원하신다면, 십자가의 예수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교육 등은 그 어느 때보다 개혁과 변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소위 <젊은 피>, <참신한 인물>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직 십자가 예수만을 자랑하고, 십자가 예수만을 알기로 작정하고, 십자가 예수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한 정치인, 죄로부터 자유로운 경제인, 죄로부터 자유한 교육자, 죄로부터 자유한 종교인, 그리고 죄로부터 자유한 가정들이 이 땅에 필요합니다. '포동포동 살찐 예수'가 아니라 인류의 죄를 깨끗케 하기 위해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몽땅 다 쏟으신 '십자가 예수'가 이 나라 백성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가 충만한 교회와 성도, 이 나라 백성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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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하나님을 향하여 살라
        
(1)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面責)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1-21)

세례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는가?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가? 세례받지 않아도 누구라도 예수를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속죄함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요한계시록 21:27) 우리가 구원받는데 그 어떤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구속(救贖)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감리교 교단에서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거나 그에 대한 태도를 불분명하게 내버려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전한 복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것입니다. 감리교단 종교강령에 <세례는 공인하는 표와 그리스도인을 세례받지 아니한 사람과 분별하게 하는 표적이 될뿐더러 중생 곧 신생의 표가 되는 것이요...>라고 되어있습니다. 세례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표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것이지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선택받은 다음, 하나님의 선민으로써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이지 할례가 우선하거나 선택의 조건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무너뜨리려 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거짓 형제들로 부르며, 이들이 더 이상 교회를 혼란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루살렘 모(母) 교회에 올라갔습니다. 이때 이방인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디도를 데리고 갔습니다. 디도는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하는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디도가 예루살렘 모교회에 갔을 때도 사도들은 디도에게 할례받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모교회와 사도들은 전통적인 유대 율법에 따라 반드시 할례를 받지 않아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히 했습니다. 이로써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했던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거짓 기독교인임을 확실히 했고 사도 바울이 전했던 은혜의 복음이 진리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17년 동안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독립해서 전파해 온 하나님 은혜의 복음이 예루살렘 모교회 지도자들과 사도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은 진리, 구원의 도리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례를 폐지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할례를 고집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원한다면 할례를 받아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할례 자체가 구원에 조건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 전통에 따라 할례를 고집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베드로나, 이방인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바울이나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례든 무할례든 예수 믿는데 거리낌이 없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민족이라고해서 우월감을 가지고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거나 더럽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은 세례받았다고 해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거나 그들을 더럽다고 생각해서 멀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더럽게 생각하고, 할례받지 않은 사람과 식사를 같이 하는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것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허물고,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장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할례자이든 무할례자인든 인간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차별이 없습니다. 교회는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안디옥에 갔을 때, 그곳에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해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행동은 위선적이고 은혜의 복음에 대해 담대하지 못한 비겁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못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베드로의 이 같은 행동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해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장단에 맞춰 놀아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베드로는 성만찬에조차도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유대인 이방인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하나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성례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이 같은 위선적인 행동을 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더욱 더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이방 기독교인들을 돕고 있던 목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위선적인 행동은 결국 교회 분열에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있던 안디옥 교회가 교회지도자들이 은혜의 복음에 확고히 서지 못하고 율법에 놀아난 결과 교회분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나 바나바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쟁쟁한 지도자들이 모두 율법주의자들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말해 하나님을 향해 살지 못하므로 유대 율법주의의 위선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를 목격한 사도 바울은 어김없이 이들을 향해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았다."(14절)며 책망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나 바나바는 분명히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진리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얼마든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리라고 알고 믿었던 것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거나 베드로의 자리를 탐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수호하고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과감히 베드로의 위선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폭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기독교 구원의 핵심 진리가 파괴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율법 앞에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의롭게 되는 길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이 죄인임을 선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율법에 돌아갈 수 없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율법 박사 바울은 율법에 따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데 앞장 서 왔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가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제 바울을 지배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된 것입니다. 율법에 대해 죽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시 산 것입니다. 그는 과거 율법을 향하여 살았지만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결코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의가 행위를 통하여 온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 되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두 기둥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헛되지 아니할 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의롭게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자신을 채찍질 했으며, 피흘리는 손과 무릎으로 수많은 거친 바위와 예배당 계단을 기어올라갔습니다. 그는 죄책감을 벗어버리기 위해 수만은 세월을 보내며 공적을 쌓기 위해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는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들고 창피한 짓이라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마틴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러자 율법의 벽들이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를 지배했던 율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 의가 그 자신을 변화시켰고, 그를 의롭게 하셨던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셔서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왔던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앞에 나와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여 의인들이 되시고 세상을 의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곧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헛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주장하고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에게 신구약을 통해서 거듭 거듭 하시는 말씀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구하시는 것은 사랑이지 율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법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많은 율법을 만들어 지키면서 스스로 의롭게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롭게 되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은 십자가 사랑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19세기 실화 <코끼리 인간>(Elephant Man)은 소설로도 나오고 영화화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셉 메리크(Joseph Merrick)이고 영국 런던에 살았습니다. 그는 신경질환으로 몸이 괴물처럼 변하였습니다. 얼굴은 부풀고 비틀어지고 피부는 코끼리 가죽처럼 거칠게 터졌습니다. 아이들이나 심장이 약한 사람들이 갑자기 그를 보면 기절하였기 때문에, 그는 외출도 못하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서커스단에서 그를 내세워 구경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요셉 메리크는 인간 이하의 인간, 동물 취급받는 구경거리, 사람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코끼리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아름다운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당시 영국에서 세익스피어 연극의 주연 배우로 정상을 달리던 매지 켄달(Madge Kendall) 양이었습니다. 어느 날 메리크는 켄달 양으로부터 우편물을 받았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제2막 대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기막힌 사랑의 속삭임이 나와 있었습니다. 켄달 양은 편지에 자신이「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는데 동봉한 대본을 철저히 읽고 오라는 사연을 적어 보냈던 것입니다. 요셉 메리크에게는 큰 꿈이 생겼습니다. 자기를 사람으로 대접해 주는 미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자기와는 너무나 먼 이야기지만 밤을 세워가며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와 그 기분까지를 완전히 소화하며 열심히 읽고 줄줄 다 외웠습니다. 공연하는 날이 되어 코끼리 인간은 얼굴을 싸매고 극장에 가서 구석 자리에 앉았습니다. 매지 캔달 양의 아름다운 모습이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달콤한 러브 신이 나오는 제2막의 막이 올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매지 켄달 양이 무대를 떠나 관중석으로 내려왔습니다. 관중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그녀는 곧장 코끼리 인간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속삭였습니다. "메리크 씨 대본을 읽으셨죠? 당신은 로미오입니다." 그는 당황했습니다. "아니오, 아니오, 나는 로미오가 아니오." "아닙니다. 당신은 로미오입니다." 켄달 양은 그의 코끼리 가죽 같은 거친 뺨에 키스하였습니다. 그 순간 메리크는 얼굴을 가렸던 수건을 벗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신들린 사람처럼 전력을 다하여 로미오역을 연기하였습니다. 코끼리 인간의 생태와 생활을 일일이 추적하며 기록하고 있던 의사 프레드릭 트레비스(Frederick Treves) 씨는 "이 날부터 요셉 메리크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고, 인간이 되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 저 높은 무대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관중석으로 내려오시는 분이십니다. 나 같은 죄인을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사랑의 속삭임을 들려 주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일어나라. 수건을 벗어라. 너는 귀중한 나의 벗이다. 너의 가치를 발하라. 나의 속삭임에 반응하여 너도 사랑의 언어로 나에게 말해다오." 이렇듯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자가 의롭게 될 것이며, 자신과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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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오직 한 가지 약속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 듣고 믿음으로냐 ?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 과연 헛되냐 ?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 듣고 믿음에서냐 ?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니라 (15) 형제들아 !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夢學)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1-29)

살기 좋은 나라는 서로 약속을 잘 지키는 사회입니다. 사람이 서로 약속을 정한 후에는 피차에 그 약속을 저버리거나 변경하지 말고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문학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어느 마을을 지날 때, 엄마 손을 잡고 길을 가고 있던 꼬마 소녀가 그의 허리에 차고 있던 가방을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백합꽃수가 예쁘게 놓아진 빨간 가방이 꼬마 소녀의 눈에 띄었던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그냥 지나쳐 몇 걸음 가다가 이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꼬마에게 말했습니다. "꼬마야, 내일까지 기다려주겠니, 내일이면 아저씨는 이 가방이 없어도 된단다. 하지만 지금은 안돼. 내일이면 틀림없이 갖다 줄테니까 울음을 그치렴." 꼬마 소녀는 아저씨의 상냥한 말을 듣고 안심이 되었는지 울음을 그치며 귀엽게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그 가방은 친지의 유품으로서 톨스토이에게는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가방 속에는 읽어야 할 책들과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튿날 꼬마 소녀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어제 저녁에 갑자기 죽어 방금 장례를 끝내고 난 상태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소녀가 잠들어 있는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방을 무덤 앞에 놓았습니다. "이젠 소용없으니까 그냥 가져 가셔요." 꼬마의 어머니는 미안한 듯 말했습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아닙니다. 꼬마는 죽었지만 내 마음속의 약속은 아직 살아있습니다."하고 무덤 앞에서 엄숙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어머니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고였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라 그가 약속한 것은 변개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약속하신 것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히브리서 6:15-18)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자에는 세상 끝날까지 성령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은 결단코 영생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받지 아니하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약속하신 성령이 항상 함께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에 대한 <보증>이십니다. 예수 믿는 누구에게나 영생, 구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십니다. 혹시 여러분은 성령을 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고, 어떤 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일부 그릇된 집단에서는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인 방언을 받기 위해 이상한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은사(恩賜)란 값없이 주는 선물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기 위해 어떠한 훈련이나 연습도 받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유명한 카톨릭 신학자 스티어 박사가 기독교 신학자 칼 바르트와 기도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칼 바르트 박사가 "당신이 많은 시간을 기도에 사용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해 좋을지 모르나 구원에 이르는 조건은 아닙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자칫 기도에 대한 과소평가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칼 바르트의 의도는 기도까지도 인간의 노력 중의 하나로 볼 때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바르트는 오직 한마디의 기도만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은혜를 믿습니다."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오는 사람들을 자녀로 영접하신다는 증거로, 그리고 영생(구원)에 대한 보증으로써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보증>이란 <약혼반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을 서로 사랑으로 결혼을 약속한 사이로 여기시고 그 약혼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13,14)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약혼반지를 가지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혼반지를 손에 낀 사람은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순결한 사랑의 약속을 지켜야만 합니다. 신부의 생명은 순결한 사랑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성령은 신부가 순결한 사랑을 지키며 살았다는 것을 보증할 만큼 그 신부의 삶의 원천과 삶의 법으로 역사(役事)합니다. 참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에게나 거저 주시는 약혼 반지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성령을 받기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지키려고 부단히 얘를 썼습니다. 약속의 보증으로 주시는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필요치 않습니다. 어떤 선한 일을 한다고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성령을 받고 나니 그 성령께서 선한 일을 하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삶의 목표로 삼는 율법은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새 약속(新約)은 <네가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았으니 이제 예수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 주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대로(19절)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아니하고 더 범법하고 죄를 짓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주어진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는커녕 율법을 교만과 인종차별의 근거로 삼고 구원의 보증물로 삼았습니다. 율법은 영생, 구원, 하나님 나라의 보증이 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는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세기 12:1-3)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였는데 노인들은 자기 땅이나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한 법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알지 못하는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창 15:6) 그후 <14년 후에야> 하나님과의 약속의 징표로써 할례(할례는 율법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를 행했습니다.(창15:1-6, 17:24-26) 아브라함은 할례로써 몸에 약속의 흔적을 남겼지만 이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세기 17:10-11)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지 어떤 의식이나 할례 등의 징표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율법은 아브라함보다 수세기 후에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율법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율법에 순종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를 의롭게 여기신 것입니다. 거듭 밝히지만,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또한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전에 이미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었습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율법에 정한 어떤 의식을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나 율법에 정한 어떤 의식은 이 땅에 있는 동안 유대인이라고 하는 신분에 대한 징표에 불과한 것이지만 <의롭다함을 받는 것>(구원)은 하늘나라의 신분에 대한 징표인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는 아무 것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의 구원이 믿음으로써 주어진 것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본보기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위해 유대인이 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족속이 구원받기 위해 네 모습처럼(할례나 율법의식)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2:3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만이 구원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곧 율법을 다 지키며 살려고 하는 사람은 저주아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율법 앞에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앞에 모든 사람은 저주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몰랐던 것은 바로 이점에서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한가지 중요한 핵심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가 저주받은 것은 인류의 죄를 그가 자신의 몸에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죄의 저주, 율법의 저주아래 있지 아니하고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의 죄의 저주를 벗겨주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모든 시대 사람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십자가 전의 사람들과 십자가 후에 사람들 모두의 죄를 속죄한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피는 모든 시대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어느 시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가 십자가에 흘리신 피가 그를 의롭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속 "내가 무엇 무엇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너는 무엇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약속, 곧 "내가 무엇 무엇을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제 이 사실을 단지 믿고 받아드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믿고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의 의무, 행위, 책임, 순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곧 행위이며 여기에는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의롭게 되어 구원 얻는 것은 오직 하나의 약속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약속은 <누구든지 예수를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하나님의 약속 앞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에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위한 약속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브라질의 아마존 강은 세계 최대의 하구를 가졌습니다. 7만 평방 킬로나 되기 때문에 양쪽 언덕이 안보여 처음에 가는 사람은 강에 들어 선 것이 아니라 아직 바다 한복판에 있는 줄 착각을 일으킵니다. 대서양에서 폭풍 때문에 오래 표류한 배 한 척이 식수를 구하기 위하여 겨우 이 하구에 도착했습니다. 해도상으로는 분명히 아마존 하구에 도착했을 때가 되었는데 여전히 언덕이 안보였습니다. 마침 다른 배 한 척이 내려보고 있었으므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식수를 구하고 있는데 아마존 강은 어느 쪽이오?" 저쪽에서 고함소리가 돌아 왔습니다. "당신들은 이미 맑은 물 한복판에 있소. 물통을 내려 뜨기만 하시오!" 우는 이미 은혜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이미 성취되어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는 맑은 물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물통을 내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이미 넘치도록 나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생수와 같은 성령의 은혜는 물통을 내리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질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약속, 생명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심으로 영생, 구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보증받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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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성숙한 믿음과 자유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 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 (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4:1-31)

초등학교 앞 가게에는 아이들한테 유익한 것도 많이 있지만 먹어서는 안되는 불량 식품을 팔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아이들한테 사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일러둡니다. 아이들은 식품이나 장난감 등의 유해 여부를 잘 모르게 때문에 일일이 지적해서 말해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라서 성인이 되면 초등학생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진위 여부와 유해 여부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조목조목 지적해서 가르침을 내리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 성경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는 자>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율법은 한 마디로 초등 학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삽니다. "애야, 돼지고기나 오징어, 문어, 갈치 같은 것은 부정 식품이니까 먹지 말라. 부정 식품을 골라내는 법은 이렇단다. 짐승 중에 굽이 갈라지고 쪽발이어야 하며 동시에 새김질하는 것이어야 한단다. 이중에 하나라도 갖추지 못한 것은 부정 식품이란다. 그리고 강이나 바다 등 물에 있는 것들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바로 부정 식품이란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뭘 해야지? 그래 구구단 외우고, 숙제 빠트리지 말고 반드시 해 와야지? 절대로 텔레비젼을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밖에 나가 군것질해서는 안 된다."(레위기 11장)
유대 율법이 가진 특징은 식물을 가려먹는 것(레위기 11장)과 날, 절기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날>은 매주의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달>은 유대인들이 지켜 내려온 월삭(매달 초하루)을 말합니다. 또 <절기>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 같은 커다란 행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해>란 안식년, 그리고 일곱 번째 안식년이 되는 희년을 말합니다. 이런 제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안식을 예표하는 것들입니다. 날(안식일)이 모여 달(월삭)이 되고 달이 모여 해(절기)가 되며 해가 모여 안식년, 희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정신과 희년의 정신은 다 같은 것입니다. 희년에는 무조건 노예들을 해방시켜주고 모든 부채를 몽땅 탕감 해주어 원래 분배받았던 대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희년 제도를 두신 목적은 바로 자유와 분배의 평등을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곤하셔서 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탐욕을 버리고 모두가 다 함께 사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출애굽기 23장 12절은 "너는 육일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네 욕심을 채우기 위해 네 집의 종들이나 날품파는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부려먹지 말고 숨 좀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6일 동안 일했다고 6일 품삯만 주지 말고 7일 품삯을 주어 함께 안식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뜻은 함께 사는 법을 배워 자유와 분배의 평등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정신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종교의 틀 속에 집어넣어 자신의 축복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안식일을 잘 지켜야 복 받는다는 원리로 살다가 자기 배만 채우는데 급급하다가 결국 바벨론에 침략을 당해 하루 아침에 포로가 되어 안식일조차 지키지 못하는 불쌍한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에스겔 5:6-7) 왜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지요. 규례대로 지켰습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안식일에 담긴 하나님의 뜻대로 지키며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일 성수를 축복의 수단으로 가르친다면 주일 성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참 뜻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자유와 분배의 평등의 정신을 가지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주일 성수 그 자체만을 고집한다면 결국 <율법 아래 사는 자들>, <세상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 합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 잘 비벼 먹었습니다. 이를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짓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너희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성전에 가고 있는데 그 성전보다 더 큰이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내가 곧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여전히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한 바리새인들을 깨우치고자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2:1-8) 그리고 회당에 가셨습니다. 마침 그곳에 손이 말라 지체가 뒤틀린 장애자가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병 환자를 고쳐 주는 행위는 율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손 마른 장애자를 깨끗이 고쳐 주셨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율법에 정통하다는 바리새인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예수의 행위를 비난하고 시비를 걸어 죽일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12:9-15) 율법으로 밥먹고 사는 바리새인들은 종교를 구성하는 율법의 틀속에서 손 마른 장애자를 보고 그 율법에 매여 율법에 종노릇했을뿐, 손 마른 장애자의 아픔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안식일이라는 제도 속에서 사람의 생명의 소중함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제사(안식일)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자에 대한 자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말라비틀어진 바리새인들의 종교나 교회를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인간을 살리고자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들에게 종교를 주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들이 생명을 얻어 더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식물이나 날, 절기 등의 율법 아래 두어 그것을 종교화하는 것은 신앙을 형식화시키는 것에 불과 한 것이지 결코 사람의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지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율법 아래> 두고자 하는 것은 초등학생을 부모나 선생님의 권위 아래 두어 가르치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모나 선생님의 권위와 그들이 초등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여러 가지 생활 규범으로는 궁극적으로 초등학생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초등학생들을 어떤 권위나 규범으로 다스리기보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규범대로 살아야 하는 참 뜻을 바로 깨닫고 자율적으로 규범을 지킬 수 있도록 한다면 보다 더 효과적이고 성숙한 방법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어 주시는 성령이 바로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 성숙한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비행기 탑승할 때 소지할 수 가방의 부피, 크기, 무게를 제한하듯이 안식일에 들고 갈 수 있는 무게를 엄격히 지키고, 또 2km 이상 걸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 보행 거리 제한 규정을 철저히 지킨다고 해서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 아닙니다. 율법에 정한 정( )한 음식, 곧 굽이 갈라지고 족발이며 새김질하는 것,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는 것만 가려먹는다고 해서 사람이 성숙해지고 변화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배타적이고 위선적이며 이방인들보다 더 탐욕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야말로 주일 성수하고 음식에 대한 구약의 율법들을 지키며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요구하시는 참 뜻을 외면하고 성숙되지 못한 믿음 생활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를 말합니다.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브리서 13:9)
사람 마음이 아름다워지고 변화되는 것은 뭘 먹고 무슨 날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살아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되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주일날에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율법 아래> 매여 살지 아니하고, 바른 율법 정신을 가지고 사람을 위해 주일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고 사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율법 아래> 성숙되지 못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가리켜 <종의 믿음>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케 하시는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참 뜻을 깨닫고 그 성령을 생명의 법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을 <아들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구약 창세기 12장 이하에 보면, 하나님 말씀을 믿어 의롭게 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게 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가 넘어 그 아내 사라는 도저히 생산이 불가능한 노(老)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인지라 기다려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결국 사라는 아마 자기 젊은 몸종 하갈을 통해 자식을 낳으라는 것으로 생각해서 남편의 침소에 하갈을 들여보내고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사라가 잉태하여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자라면서 애굽 여인 몸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희롱하곤 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내의 말에 깊이 근심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근심하지 말고 사라의 말대로 하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갈과 그 아들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 두 아들은 영적 진리의 두 가지 유형이 되어 오늘 본문 말씀을 잘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아들로서, 자연적 탄생만을 경험하고 위로부터 거듭남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상징입니다.(요 3:1-8) 그는 종으로서 태어났고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연을 거스려 태어났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 오는 모든 이들을 상징합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역사로 태어났습니다. 이는 예수처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성령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 기적을 이루어 그를 낳게 했다는 뜻입니다. 종의 아들 이스마엘은 율법, 믿음의 아들 이삭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종의 믿음>을 가진 자를 <율법 아래 있다>고 하며, <아들의 믿음>을 가진 사람을 <성령으로 사는 산다>고 합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목사가 되었던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를 졸업할 무렵 매우 보수적인 신앙으로 행위가 단정하며 선행을 많이 베풀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교도소 전도, 빈민가의 어린이들 구제, 문맹퇴치 등으로 신앙생활에 자신의 온 힘을 다했습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서 지키고 그것도 모자라 주일을 또한 지켰습니다. 그는 규칙적으로 성찬을 행하고 자선을 베풀고 성경을 탐구하고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 행위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들을 신뢰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웨슬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선행으로 가득찼던 자신의 옥스퍼드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당시 <아들의 믿음>이 아닌 <종의 믿음>을 가졌을 뿐이었다." 존 웨슬리는 예수 믿고 성령을 체험하고서야 비로서 성령의 자유케 하심을 따라 <아들의 믿음>, 곧 성숙한 믿음과 자유를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율법 아래 살지 말고 <아들의 믿음>으로 자유롭고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4-6)
예수 믿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율법에 매여 사는 종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명분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종의 믿음>을 살 것이 아니라 <아들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종의 아들 이스마엘을 쫓겨나 아브라함의 기업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직 약속의 아들 이삭만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기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부어 주시는 성령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으시는 복된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성숙함을 말합니다. 열매가 없이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2,23)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복음 15:8)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 성숙한 믿음과 진리안에 참 자유를 누리며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넉넉히 하나님 나라를 기업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의 믿음>을 가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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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들

(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 (7)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 (8)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13) 형제들아 !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5:1-26)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살고자 하면, 미국에서 제정한 모든 법을 다 지키며 살아야지 자기 기호대로 미국법을 지키며 살 수는 없습니다. 미국에서 운전하는 것이 쉽고 편하다고 미국 교통법규  하나만 지키고 다른 법은 지키지 않는다면 미국 시민으로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 아래> 살고자 하면 지키기 쉬운 율법의 일부분만을 지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약 630여 가지나 되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지 할례나 식물 규정이나 안식일 규정 중 어느 일부만 지키며 <율법 아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이 미국에 가서 살면 미국법에 따라 살고 한국의 모든 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는 것처럼, <율법 아래>에 살고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들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오직 그들은 의문(儀文)에 기록된 책, 율법을 바탕으로 신앙생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어떠한 율법의 제재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담배꽁초나 휴지를 함부로 버리면 벌금 $500이나 되는 무겁고 엄격한 법을 적용해서 거리가 깨끗해지는 싱가폴같은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그러한 법이 전혀 없어도 자기 사는 동네를 사랑하고 이웃과 환경을 사랑해서 스스로 깨끗하게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사회가 수준 높은 아름다운 사회인가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율법 아래> 사는 것으로는 감히 하나님의 인격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만 인간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신앙의 본질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기독교인의 믿음은 결코 책, 율법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율법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이지 율법에 있지 않습니다. 율법의 어떠한 행위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필생의 꿈을 지니고 있던 미술가가 있었읍니다. 그의 꿈은 여러 인물로 이루어진 대작을 조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어떤 부유한 기증자로부터 그와 같은 주문을 받았습니다. 이 조각품은 그 미술가에게 영광과 명성을 가져다줄 장소인 한 이름높은 박물관에 놓이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일하고 또 일했습니다. 몇 년에 걸쳐 그는 자신의 대작을 붙들고서 땀을 흘렸습니다. 마침내 그것은 완성되었고 그에게 세상의 갈채를 받게 해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무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니다. 그것을 조각했던 자기 방에서 밖으로 갖고 나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가 작업했던 그 거대한 건물을 무너뜨리는 댓가를 치루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수고한 모든 것은 그가 일했던 방안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늘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의 경우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갈채를 받기 위해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땅이라고 불리우는 방안에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 앞에 그것을 가져가지 못할 것이고, 어떤 갈채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행위를 통해서 쌓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땅과 더불어 사라질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참으로  바울이 말한 대로 율법의 시대가 끝났고 은혜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율법의 제한이 철폐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행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가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분명히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나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의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을 가지고 전도지를 작성한다면 무슨 내용을 쓰시겠습니까? 한 마디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4절) 율법 시대를 지배했던 것은 율법이었지만, 은혜의 시대를 지배하는 사랑의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도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더럽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나 그 자유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유인 것입니다. 제멋대로 하는 방종, 얼마든지 죄를 범할 자유가 아니라, 죄를 범하지 아니할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더러운 죄에서 깨끗이 씻김을 받았으면 이웃에게 죄를 범하거나 이웃을 더럽히는 자유가 아니라 그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자기 몸처럼 깨끗하게 지켜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자유케 하시는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거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직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아야만 합니다.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사는 것은 세속적인 사랑을 빙자하여 음행을 일삼는 음행과 호색, 곧 성적인 부도덕,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인생을 더럽히는 온갖 더러운 행위, 하나님 보다 물질을 더 좋아하는 각종 우상숭배, 믿음을 혼란시키는 요술이나 마술같은 술수, 이웃을 미워하는 마음, 그리고 분쟁과 시기(이웃의 소유에 대한 욕심과 분에 넘치는 소유욕), 분냄과 당짓는 것(이웃에 대한 희생봉사의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랑의 마음 바탕), 분리함(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떨어져 날뛰는 사회)과 이단(이단적인 분열 - 다른 사람의 견해를 미워하고,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여전히 친구가 되지 못하는 분열), 투기(이웃의 행복을 비판하고 빼앗고자 하는 행위)와 술취함, 방탕함 등입니다. 이러한 육체의 소욕들이 이웃과의 관계를 마비시키며, 나아가 하나님에 나아가는 길에 아름답지 못한 더러운 장애물이 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이웃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더 부자유스럽게 하는 방종에 불과 합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서로 종노릇하는 것, 다시 말해 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서로 섬김으로써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겉으로 나타내는 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이 사랑과 섬김을 가능하게 하는 연결띠가 성령입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이웃(남편, 아내)을 사랑으로 섬기게 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섬김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 사랑하게 되면 육체 소욕에 따른 불건전한 사랑으로부터 자신과 이웃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16,17절)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체의 소욕을 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율법 아래>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18절)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육체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율법이 육체의 욕망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육체를 휘저어서 죄를 들추어낼 뿐입니다. 모든 육체의 욕망으로 자유케 하는 것은 오직 성령뿐입니다. 육체는 죄를 향한 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을 정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자유에 이르는 길은 오직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자유로운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랑으로 섬기는데 기독교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천로역정 >에 보면 한 남자가 <해석자>의 집에 들어가서 모든 것이 먼지로 뒤덮여 있는 넓은 방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소녀가 비를 갖고 들어와 청소를 시작합니다. 곧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속이 메스꺼움을 느끼고 기침을 합니다. 누군가 그 방에 들어와서 사방에 물을 뿌리자 비로소 그들을 기침을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해석자>는 이 이야기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큰 거실은 복음의 달콤한 은혜로 결코 성화된 적이 없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먼지는 그 사람을 더럽혀 온 원리와 내적인 타락입니다. 청소를 시작한 소녀는 율법입니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먼지를 일으키는 것, 즉 죄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 뿌려진 물은 죄를 진압하고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복음이었습니다. 율법은 육체의 소욕에 따른 죄의 모습을 드러낼 뿐이지 그 죄를 진압하고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여기 죄를 상징하는 먼지를 진압하고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물로 상징되는 성령뿐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의 사람들을 아름답게 하는 열매들을 풍성히 맺게 합니다. 열매를 계속해서 맺히는 것처럼 성령은 예수의 사람들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계속해서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그 첫 번째 열매는 <사랑>입니다. 여기 <사랑>은 속으로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일지라도 오히려 그 사람이 더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에 소원대로 성취되기를 위해 진심으로 섬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예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예수처럼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침을 밷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옆구리에 창으로 찌르고 결국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했던 그들이 잘 되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으로 섬기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같은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마음에 부은바 되시기를 기원합니다."(롬 5:5)
<희락>은 이웃과의 경쟁하거나 대항해서 이겼을 때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여기 희락은 이 세상에서 값싼 승리나 성공, 실패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패나 환란, 재난 등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들을 하실 수 있게 하는데서 오는 기쁨인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여" 복음 전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희락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화평>은 평화로운 상황 속에 누리는 평화가 아니라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마음에 가지는 평화를 말합니다. 실패나 환란, 재난 등의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마음에 평온함과 안온함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를 드릴 때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스데반은 거짓증인들을 내세워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하는 무리들 앞에서 "지혜와 성령으로 예수를 증거할 때 그 무리들이 다 주목하여 스데반을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험악하고 살벌한 순교의 길목에서도 스데반이 보여준 천사의 얼굴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마음의 화평입니다.
<오래 참음>, 우리로 하여금 오래 참을 수 있게 하시는 것은 오직 성령의 힘입니다.(골1:11) 하나님은 우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까지 오래 참으십니다.(로마서 2:4)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에 오래 참으셔서 우리를 진노하사 쓸어버리지 않으십니다.(로마서 9:22)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바울)에 대히 일체 오래 참으심으로 그를 구원하심으로 장차 바울이 전도하는데 본이 되게 하셨습니다.(딤전 1:16) 하나님은 노아시대에 무려 인류 구원을 위해 120년 동안이나 오래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참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인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히 10:36)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름다운 인내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자비>는 남에게 베푸는 친절을 말합니다. 노여운 말 한 마디가 한 친절한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부지중에 나온 실언이 앞날을 캄캄하게 만들고, 찌르는 가시를 평생에 남기게 됩니다. 그러나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슬펐던 마음에 광명을 주고 동정의 말 한 마디가 한 영혼을 살려 놓고 기쁨의 말 한 마디가 앞길을 밝게 만드는 것입니다. 친절없는 침묵이 많은 마음들에게 아픈 성처를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친절한 말 한 마디로 많은 아픈 마음이 풀어질 수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는 것입니다."(잠언 15:1). 가장 자비하신 하나님처럼 살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이 항상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양선>은 의(義)와 선(善)을 겸하여 지닌 것을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자기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집세를 내지 않는 과부를 쫓아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라는 기준에 따르면 집세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추방하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그 과부를 대신하여 집세를 내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면서 동시에 선하십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양선은 십자가에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회는 정의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선이 함께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만 내세우셨다면, 여기 살아남았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걸머지게 하시고 우리에게 선을 베푸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이 강산에 불어 양선의 열매 가득한 나라 백성되기를 기원합니다.
<충성>, 이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의 부탁을 듣고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바는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이라도 내놓는 것을 말합니다.
<온유>, 이는 원수에 대해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인격으로 이기는 덕을 말합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끝까지 복수하지 않는 덕이 있었습니다. 중세에 성자로 일컬어지는 보나벤추라는 그의 눈이 비둘기 눈 같은 온유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선생은 "보나벤추라를 보면 아담이 범죄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려는 자들에 대해 저주를 퍼붓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기도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 이는 예수가 모든 온유의 근본이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절제>, 이는 자기 자신이 죄를 짓지 못하게 자기를 제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으로 흔히 극기라고 말하기도 하며, 자기의 욕망과 향락적인 사랑을 극복한 정신을 말합니다. 고린도 전서 9:27에 보면 사도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코 사랑으로 남을 섬기는 자유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금지할 법이 없는 자유의 열매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억제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예수와 함께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롭게 예수와 더불어 다시 태어남으로, 옛 자아의 악한 일들을 버리고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어야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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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예수의 흔적을 가지라

(1) 형제들아 !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18) 형제들아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 아멘(갈6:1-18)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1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예수 믿는다고 구박받고, 매맞으며, 호적에서 삭제되어 집안에서 추방당하기도 하며, 온갖 핍박과 박해를 받고 순교까지 당한 <예수의 흔적>이 이 나라 민족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의 흔적>이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를 새롭게 변화시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가시와 창에 찔리심으로 입은 상처가 우리의 병든 것을 고쳐 주신 것처럼 이 나라 민족의 병든 것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의 모습에는 <예수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기독교인이 되므로 자신과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 민족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 <율법 아래 있는 자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육체를 따라 난 계집 종의 자녀>, <초등 학문 아래 있는 자들>, <몽학 선생 아래 있는 자들>, <할례자>,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사는 자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 등은 모두 한 마디로 "예수의 흔적"이 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의 흔적>이 없는 자들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성령을 거스려 육체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눠짐으로 그리스도의 법인 사랑을 성취"하기 보다는 자신의 행위와 할례를 자랑하며 오히려 남에게 짐을 지우는 사람 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만을 자랑하는 사람, 자유케 하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신령한 사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사는 사람, 예수의 이름과 복음을 위해 살다가 핍박과 환난을 받아 몸과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교회 안에 누가 범죄한 일이 드러나면,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사람을 바로 잡고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팎에 누가 실수하거나 죄를 범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와 같았을 것이다."고 생각하는 사람,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남이 빠지는 죄는 나도 빠질 수 있고 친구가 어제 간음죄를 범했다면 오늘 같은 죄를 나도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인간의 연약함을 충분히 인정하고 늘 자신을 살피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팎에 어떤 사람이 실수하거나 죄를 범한 것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징계보다는 그 실수와 범죄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온유와 사랑으로 치료하는 일을 우선하는 사람이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입니다. 만일 범죄한 형제에 대하여 법과 규례를 따져 연약한 신자를 실족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부지중에 살인한 자를 위하여 도피성을 마련하여 그의 피살당함을 모면케 하였지 그를 잡아다가 고발하고 형벌에 내주지 않았습니다.(민 35:9-34). 우리는 형제를 정죄하는 대신 온유와 사랑으로 선도하여 그 영혼의 상처를 싸매주고 위로해 주므로 <예수의 흔적>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영국의 순교자 브래드포드는 자기 집 앞으로 지나가는 사형 죄수를 볼 때마다 "저기 브래드포드가 지나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여 스스로 속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되지 못한 자'로 여기며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셨던 것입니다."(고전1:27-29)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과 비교해서 나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랑거리 또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세상의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예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진 <예수의 흔적>에 쓰인 '흔적'이란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타'인데 이는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이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국'을 남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외로운 산꼭대기에 앉아 있었을 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온 지평선을 덮는 듯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을 때 측은함과 비탄의 칼이 그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 환상은 서서히 사라지고 프란시스는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을 때! 그의 손에는 못 자국이 새겨졌으며, 일생동안 그 자국을 그는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그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일생 동안 마음에 지니고 살아야 할 자국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자국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써의 성령의 능력이나 은사나 지식으로 권위를 내세우려 하지않고 오직 예수를 위해 고난받은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핍박과 환난을 받아서 생긴 육체의 상처를 말합니다.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 복음 전파 때문에 몸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습니다. 굶기도 숱하게 했으며, 감옥 드나들기를 제 집 처럼 했고, 불면증에 시달렸고, 로마 사람에게 매도 수 없이 맞았고, 유대인들에게는 사십에 하나 감한 39대의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은 태장으로 맞고 한번은 돌로 맞기까지 했습니다. 마지막 순교할 때도 벌겨벗겨 맞고 목이 잘려 참수당했습니다. 참으로 바울이 예수의 이름과 복음을 위하여 받은 상처는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육체의 고난을 받아 큰 상처를 받고서도 바울은 이 몸에 남은 흔적들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인(印)친 흔적으로 믿고 감사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할례의 흔적을 자랑하였지만 바울은 그의 몸에 받은 <예수의 흔적>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와 복음을 전파하다가 받은 상처는 몸에 남은 흔적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마음의 상처 또한 매우 큰 것이었습니다.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3-28)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 육체의 고통도 크셨지만 마음의 고통은 더욱 크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유의 탄생에서부터 십자가상에 이르기까지 받으신 희롱과 조소, 멸시 천대였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참을 수 있으나 마음과 정신적 고통은 더욱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예수께서 동족들로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온갖 멸시 천대 조롱과 채찍과 창을 받으셨던 것처럼 바울 사도 역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참기 어려운 몸과 마음 정신에 고통과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가 입은 몸의 상처들을 생각한다면 마음에 입은 상처의 흔적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마음에 입은 상처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우가 약해지면 내 마음이 같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우가 죄에 빠지면 내 마음이 타지 않겠읍니까?" 어머니가 자녀를 해산하는 고통도 크지만 그들을 기르는 고통은 더욱 큰 것과 같이 교회를 세우는 고통도 크지만 교인들을 돌보아 기르는 고통은 더욱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은 대소사를 막론하고 <예수님의 흔적>이 생길 정도까지 마음에 고통과 상처를 받아야만 비로소 교회 일이 무엇인지, 교회 일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바로 깨닫고 교회 나가네 들어가네 하지 않고, 교회 성장과 성숙에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 바울이 동족들로부터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처럼 여러분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도 같은 교우들로부터 받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예수와 복음, 그리고 교회 때문에 받은 마음의 상처를 <예수의 흔적>으로 가진 사람이 많을수록 그 교회는 성령의 열매가 많을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은 수 많은 고난과 핍박,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어도 마음과 생각이 어두워져 낙심하거나 좌절하며 후퇴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빛되신 예수와의 사귐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어두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온갖 협박과 음모를 받으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시면서도,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옆구리가 창에 찔리시면서도, 아니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도 자신을 후회하거나 마음이 어두워져 낙심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이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엄청난 핍박을 받아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마음과 생각이 어두워져 낙심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두움이 전혀 없으신, 빛이 되시는 예수와 사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몸과 마음에 어떠한 상처를 입어도 마음과 생각이 어두워지지 않고 오히려 그럴수록 빛을 발하여 주위를 더욱 더 밝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에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예수께 소유된 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흔적>을 가진 성도를 결코 잊으시거나 버리시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며 지켜 주십니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사 43:1-3)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디로 가든지, 죽든지 살든지 자신은 주님의 것으로 살았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살고자 하신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아픔과 고통, 희생을 통해 사랑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가시와 창에 찔리심으로 입은 상처가 우리의 병든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자신과 가정, 교회와 나라 민족의 병든 것이 고침을 받고자 한다면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하는 소리를 듣는다 해도 예수와 복음, 그리고 교회를 위해 몸과 마음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흔적>이 없는 사람은 예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흔적 없이 부활이 없는 것처럼 예수의 흔적이 없이는 다시 태어나는 새 생명의 부활이 없는 것입니다. 도마처럼 예수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져 보는 것으로 그치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몸과 마음에 직접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예수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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